통합대장경

025_0952_c_01L
아비담비바사론 제54권
025_0952_c_01L阿毘曇毘婆沙論卷第五十四
025_0952_c_02L

가전연자 지음
오백나한 풀이
부타발마ㆍ 도태 등 한역
박진효 번역
025_0952_c_02L迦旃延子造 五百羅漢釋
北涼天竺沙門浮陁跋摩共道泰等 譯


2) 타심지품 ⑥
025_0952_c_04L智揵度他心智品第二之六
025_0953_a_02L불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중생이 그대가 설하는 것을 믿고 즐거워하면, 그대들은 자비롭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저들을 위하여 4불괴정(不壞淨)을 설해 주어 편안하게 머물면서 이 법을 수행하도록 해야 하느니라.’ 자세한 것은 계경(契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경을 설하였는가?
【답】청을 받았을 때 응하는 법의 인연을 설법하는 사람들에게 설해 주기 위해서이다.
설법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설해 주어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설해 주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겁내며 약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대들은 가볍게 설해서는 안 되나니, 만약 어떤 중생이 그대가 설하는 것을 믿고 즐거워하면 이에 설해줄 수 있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또 은혜에 보답하는 법을 설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백 년 동안 한쪽 어깨에는 아버지를 싣고 한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싣고 곳곳을 돌아다닌다 해도, 오히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니라.’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부모가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경우에 믿도록 하고, 계(戒)가 없는 경우에 선계(善戒)를 말해주며, 아끼고 인색한 경우에 보시하도록 하고, 지혜의 가르침이 없는 경우에 지혜를 닦도록 해야만 비로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하느니라.’”
【문】모든 불법(佛法) 가운데 있는 선법(善法)을 모두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유독 4불괴정만 설하는가?
【답】바사(波奢)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성도를 불괴정이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의 성도는 어떤 경우에는 상응법이고, 어떤 경우에는 공유법(共有法)이다.
가령 믿음[信]을 설한 경우에는 상응법인 성도를 설한 것이고, 계를 설한 경우에는 공유법인 성도를 설한 것이다.”
또 여기에서는 처음 법에 들어가는 초문(初門)의 간략한 요점을 설한 것이다.
일체의 불법에 갖추고 있는 선법은 어떤 경우에는 색이고, 어떤 경우에는 비색이다.
가령 계를 설한 경우에는 색성(色性)의 선법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믿음을 설한 경우에는 비색성의 선법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령 색법ㆍ비색법의 경우와 같이 상응ㆍ불상응과 유의(有依)ㆍ무의(無依)와 유행(有行)ㆍ무행(無行)과 유세용(有勢用)ㆍ무세용(無勢用)과 유연(有緣)ㆍ무연(無緣)의 경우에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또 불법에 갖추고 있는 선법은 어떤 경우에는 근성이고, 어떤 경우에는 비근성이다. 가령 믿음을 설한 경우에는 이미 근성의 선법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계를 설한 경우에는 비근성의 선법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4불괴정을 의지하기 때문에 4사문과(沙門果)를 시설한다.
또 4불괴정에 두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불괴상(不壞相)이고, 둘째는 시정상(是淨相)이다.
불괴상이란 무루신(無漏信)은 믿음 아닌 것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고, 무루계(無漏戒)는 계 아닌 것[非戒]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심수법(心數法) 중에서 시정상이고, 계는 4대법(大法) 가운데서 시정상이다.
또 악도와 빈궁의 두려움과 공포를 중지시키는 방편을 내보이기 위해서이다. 계는 악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중지시킬 수 있고, 믿음은 빈궁의 두려움과 공포를 중지시킬 수 있다. 무루의 믿음과 계는 비록 장애는 없으나 유루의 믿음과 계를 의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외도를 의지해서 교화를 받는 사람을 인도하여 불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비구들이 외도에 의지해서 교화를 받고 있는 친족과 권속이 있는 경우, 친애하기 때문에 불법을 찬탄하고 외도법을 비방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성냄의 마음을 일으켜서 불법과 점차 멀어지게 하고 만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힘[力]과 무외(無畏)가 없기 때문에 중생의 모든 근(根)과 심행(心行)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를 위해서 4불괴정을 설해 주라.
만약 4불괴정을 얻으면 마음이 움직이거나 요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4대(大)는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4불괴정을 얻으면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문】일체법이 다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유독 4대만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고 설하는가?
【답】네 가지 법으로 네 가지 법을 밝히기 때문이다.
또 수행자가 먼저 4대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관한 후에 일체법이 달라지거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또 외도는 4대를 영원한 것이라고 헤아리는데, 부처님께서는 4대는 영원한 법이 아니라고 설하신다.
“가령 4대에 대하여 외도는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고 설하는데, 이 영원한 법은 변하거나 달라질 수 있지만, 가령 나의 제자가 4불괴정을 얻은 경우에 변하거나 달라진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4대는 능히 생사의 법을 유지시키고 점점 더 증장시킨다.
불경에서 “믿음은 큰 코끼리의 손이다”고 설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믿음을 큰 코끼리의 손이라고 설하셨는가?
【답】취하는 것[所取]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코끼리에게 손이 있으면 그것이 중생에 속하건 중생에 속하지 않건 물건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성제자(聖弟子)에게 손이 있으면 선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불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가령 성제자가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성취하여 이 법에 대부분 머물 때, 이때에 먼저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성취한 모든 천(天)이 마음에 크게 환희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성취하여 대부분 머물렀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 태어난 것처럼, 성제자들도 역시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성취하였으니 몸이 무너지고 명이 다하면 이곳에 태어나 우리와 같은 곳에 있게 되리라.’
법에 대한 불괴정을 성취하는 것과 승불괴정을 성취하는 것과 계불괴정(戒不壞淨)을 성취하는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저 모든 천(天)의 경우, 먼저 여기에 태어나서 4불괴정을 모두 성취하였다. 무엇 때문에 모든 천 중에 혹은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는 경우가 있고, 내지 어떤 경우에는 계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는 경우가 있는가?
【답】중생 중에서 어떤 경우에는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으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불법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고, 내지 계불괴정으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불법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가령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으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불법에 들어간 하늘들은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고, 나아가 계불괴정으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불법에 들어간 하늘들은 계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는 것이다.
또 모든 천 가운데는 혹 부처님을 관하기를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고, 혹 계를 관하기를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부처님을 관하기를 즐거워하는 경우에는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고, 내지 계를 관하기를 즐거워하는 경우에는 계에 대한 불괴정을 찬탄하는 것이다.
불경에서 “아사세왕은 근이 없는 믿음[無根信]을 성취하였다”고 설하였다.
【문】일체 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모두 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아사세왕의 믿음은 근이 없다고 설하는가?
【답】이 믿음은 견도근(見道根)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불괴지(不壞智)와 상응하는 믿음은 견도로 근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저 경우에는 견도근이 없기 때문에 근이 없다고 말하지만 견도와 서로 비슷한 믿음으로 근을 삼는다.
또 무루지와 무루선근이 없기 때문에 근이 없다고 하였다. 무루신(無漏信)은 무루지와 무루선근으로 근을 삼는데 저 경우 무루지도 얻지 못하고 무루선근도 얻지 못하면서 무루와 닮은 믿음을 얻었다.
또 아사세왕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덕이 있는 비구를 친근히 하여 이와 같은 믿음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가령 누각에서 보거나 코끼리ㆍ말 위에서 보거나, 불ㆍ세존을 뵙는 경우에 부처님을 향해서 몸을 땅에 던져도 몸에는 고통이 없었는데, 이것은 근이 없는 믿음의 힘이고 또한 부처님의 위신력이었다.”
이 때문에 근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이 믿음은 상사인(相似因)도 없고 저 믿음에 대해서 상사인이 되는 법도 없다. 마치 마른 나무에는 뿌리가 없는 것과 같이 저 믿음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 믿음이 있다 해도 불행한 길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전도[顚倒]에서 수다원은 몇 가지를 끊고 몇 가지를 끊지 못하는가?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가령 비바사바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열두 가지 전도가 있다. 즉 무상(無常)을 상(常)이라고 여기는 상전도(想顚倒)와 심전도(心顚倒)와 견전도가 있고, 고를 낙이라고 여기는 상전도ㆍ심전도ㆍ견전도가 있고, 무아를 아라고 여기는 상전도ㆍ심전도ㆍ견전도가 있고, 부정을 정이라고 여기는 상전도ㆍ심전도ㆍ견전도가 있다.
여덟 가지는 견도단이고, 네 가지는 수도단이다.
여덟 가지 견도단이란, 무상을 상이라고 여기는 상전도ㆍ견전도와 고를 낙이라고 여기는 상전도ㆍ견전도와 무아를 나[我]라고 여기는 상전도ㆍ견전도와 부정을 정이라고 여기는 상전도와 견전도이다.
네 가지 수도단이란, 무상을 상이라고 헤아리는 심전도와 고를 낙이라고 헤아리는 심전도와 무아를 아라고 헤아리는 심전도와 부정을 정이라고 헤아리는 심전도이다.
모든 견도단은 고비인(苦比忍)이 눈앞에 드러날 때 끝까지 끊고, 모든 수도단은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눈앞에 드러날 때 끝까지 끊는다.”
【문】무엇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말하였는가?
【답】그는 불경에 의지해서 말하였다. 불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 네 가지 전도는 상전도ㆍ심전도ㆍ견전도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는 이 경에 의지했기 때문에 열두 가지 전도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의 뜻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일로 문답을 일으켰다.
가령 “이 네 가지 전도에서 수다원은 몇 가지를 끊고 몇 가지를 끊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면 그가 열두 가지라고 한 뜻을 중지시키게 된다.
또 가령 “수다원은 모두 끊는다”고 대답하면, 그가 수도단(修道斷)이라고 주장하는 뜻을 중지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수도(修道) 중에는 수다원이 끊는 이와 같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전도에 열두 가지가 있고 또한 그것이 수도단이라고 하면 불경에서 설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불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네 가지 전도에 넘어지는 자는 모두 어리석고 소소한 범부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범부는 생사의 법을 관하면서도 마치 개의 죽음92)을 보듯이 진실[端緖]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경에서 ‘네 가지’라고 설했으면 열두 가지가 아님을 알아야 하고, “모두 어리석고 소소한 범부이다”고 설했으면 수도소단(修道所斷)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문】만약 전도에 네 가지만 있다면 비바사바제가 경에서 인용한 것과 어떻게 의미가 통하는가?
【답】상(想)과 심(心)이 전도에 가깝기 때문에 전도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문】수(受) 등의 모든 심수법(心數法)도 역시 전도법에 가깝다. 무엇 때문에 전도라고 하지 않는가?
【답】이 두 가지는 세속의 언설법이기 때문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이 사람은 마음이 전도되고 생각이 전도되었다”고 말하고, “수(受)가 전도되고 사(思)가 전도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문】전도의 체는 어떤 것인가?
【답】체성은 혜(慧)이다.
【문】만약 전도의 체성이 혜라면, 이 5견은 몇 가지가 전도된 것이고 몇 가지가 전도되지 않은 것인가?
【답】2견 반(半)이 전도된 것이고 2견 반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다.
2견 반이 전도되었다는 것은 신견(身見)과 견취(見取), 그리고 변견(邊見) 중에서 상견(常見)을 말한다.
전도되지 않은 2견 반은 사견(邪見)과 계취(戒取), 그리고 변견 중에서 단견(斷見)을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2견 반은 전도된 것인데 2견 반은 전도되지 않은 것인가?
【답】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전도된 것이다. 첫째는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고, 둘째는 허망하게 취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한결같이 체성이 전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견과 변견에 포섭되는 단견은 비록 맹렬하고 날카로우며 한결같이 체성이 전도된 것이지만 허망하게 취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결같이 물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계취는 비록 맹렬하고 날카로우며 허망하게 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체성이 전도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금의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색계도(色界道)가 있어서 욕계를 떠날 수 있고, 무색계도가 있어서 색계를 떠날 수 있다.
이것이 전도의 체성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미 체성을 설하였다. 따라서 이제 전도라고 하는 까닭을 설하겠다.
【문】전도란 어떤 의미인가?
【답】취하는 것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전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전도는 한결같이 견고단(見苦斷)이다.
【문】무엇 때문에 전도는 한결같이 견고단인가?
【답】고(苦)를 의지해서 일어나고 다시 고를 보아 끊기 때문이다.
또 이 전도는 과(果)를 의지해서 일어나고 다시 과를 보아 끊기 때문이다.
또 신견(身見)은 견고단성(見苦斷性)인데 이 전도는 신견 때문에 일어난다. 이 신견이 견고단이기 때문에 전도의 경우도 역시 견고단이다.
또 고제(苦諦)는 거칠게 드러나는 법이다. 가령 거칠게 드러나는 법 가운데서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 성현에게 꾸지람을 받게 된다. 마치 사람이 낮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 남에게 꾸지람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그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나머지 3제(諦)는 미세하다. 가령 미세법 가운데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 성현이 반드시 꾸짖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사람이 밤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 반드시 남에게 꾸지람을 받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또 수행자가 고제를 보고 나서 전도심이 없는 경우는 없다.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가령 수행자가 고제를 보는 경우에 나머지 3제를 보지 않는다”고 설한다.
다른 사람이 “이 음(陰)은 영원한가[常], 단절되는가[斷]?”라고 물으면 “이것은 단절되니, 한 찰나도 머무는 것이 없다”고 답한다.
“이것은 고인가, 낙인가?”라고 물으면 “이것은 고이니, 마치 뜨거운 쇠구슬과 같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정인가, 부정인가?”라고 물으면, “이것은 부정이다. 마치 더러운 똥무더기와 같다”고 대답한다.
“유아인가, 무아인가?”라고 물으면, “무아이니. 짓는 일도 짓는 자도 없다”라고 대답한다.
【문】견신인(堅信人)과 견법인(堅法人)도 전도를 끊는데 무엇 때문에 단지 수다원만 설하는가?
【답】설해야 하는데 설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나머지 설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견신인과 견법인은 이 전도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단이다, 부단이다’ 하는 분별상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한결같이 불분별상을 설했기 때문이다.
또 의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수다원이 범부가 짓는 법을 행하여 처자와 한 곳에서 자고 손으로는 매끄러운 사람의 촉감을93)을 어루만지며, 얇은 비단[憍奢耶]94) 옷을 입고 전단향을 몸에 바르며, 또한 여러 가지 영락과 화만을 몸에 붙이고, 노비나 노복을 채찍질해 따르도록 하고, 또 손으로 중생을 때리거나 묶을 때,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일을 보고 “전도를 끊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견신인과 견법인은 유루선의 마음과 불은몰무기심도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가 없는데 하물며 염오심을 일으키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수다원과 사다함이 염애(染愛)를 일으킬 때에 낙상(樂想)과 정상(淨想)을 일으키는가, 고상(苦想)과 부정상(不淨想)을 일으키는가?
만약 낙상과 정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전도가 아니겠는가? 만약 낙상과 정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염애를 일으키는가?
【답】“낙상과 정상을 일으킨다”고 말해야 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가 아니겠는가?
【답】앞에서 “세 가지 일 때문에 전도라고 한다. 첫째는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고, 둘째는 허망하게 취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한결같이 체성이 전도된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수다원이 일으키는 염애는 맹렬하고 날카로우며 허망하게 취하는 것이기는 하나 한결같이 체성이 전도된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진리[諦]에 대해서 낙이라고 잘못 헤아리고 정(淨)이라고 잘못 헤아리며, 어떤 경우에는 경계(境界)에 대해서 낙이라고 잘못 헤아리고 정이라고 잘못 헤아린다.
제에 대해서 낙ㆍ정이라고 잘못 헤아리는 것은 수다원이 영원히 끊지만, 경계에 대해서 낙ㆍ정이라고 잘못 헤아리는 것은 수다원이 아직 끊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수다원이 염애를 일으킬 때 고라고 잘못 헤아리고 부정이라고 잘못 헤아린다”고 하였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염애를 일으키는가?
【답】무시 이래로 이 법을 학습하여 신심(身心)에 열을 내는데, 이 마음을 제어하여 조복시키기 위해서 이 염애를 일으킨다.
비유하면 마치 다음과 같다.
“자희(自喜)라는 바라문이 손가락에 더러운 똥이 묻어 대장장이를 찾아가서 불로 깨끗하게 해 주기를 구하자 그때에 대장장이가 말하였다.
‘재나 흙이나 풀로 깨끗하게 할 수 있소.’
이때 바라문이 말하였다.
‘그런 것으로는 나의 손가락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반드시 불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이때 대장장이가 쇠젓가락을 불빛이 나게 달구어 그의 손가락에 갖다 대었다. 그때 바라문이 뜨거움으로 고통스러운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곧바로 손을 털면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말았다.”
바라문이 손가락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단지 고통에 핍박을 받게 되어 입에 넣은 것과 같이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 무시 이래로 오랫동안 익혀온 번뇌에 절박하게 핍박을 받는 경우에 이 법을 치료하기 위해서 염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령 신체가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이 부스럼병이 생겨서 매우 고통스러워 치료하고자 하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젖은 개똥을 발라야 합니다’라고 하여 그 사람은 즉시 발랐다.
개똥이 깨끗하지 않은 것을 잘 알지만 병을 없애기 위해서 바른 것이다. 그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 가지 삼매(三昧) 중에서 수다원은 몇 가지를 과거에 성취하고, 몇 가지를 미래에 성취하고, 몇 가지를 현재에 성취하는가?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과거ㆍ미래에 ‘세간에 대한 우치[世中愚]’를 행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이 세 가지 삼매 중에서 수다원은 몇 가지를 과거에 성취하고, 몇 가지를 미래에 성취하고, 몇 가지를 현재에 성취하는가?
【답】미래는 모두 성취하고, 과거는 소멸하고 나서 버리지 않은 경우에 성취하였고, 현재는 눈앞에 드러나는 경우에 성취한다.
도비지(道比智)의 최초 찰나에는 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 한 찰나도 생멸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으키고 나서 소멸하는 것은 과(果)를 얻기 때문에 버린다. 세 가지는 미래에 성취하고, 한 가지는 현재에 성취하는데 무원삼매(無願三昧)를 말한다. 그것은 소멸하고 나서 버리지 않는다.
가령 공삼매(空三昧)를 일으켜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 한 가지는 과거에 성취하는데 무원삼매를 말하고, 세 가지는 미래에 성취하고, 한 가지는 현재에 성취하는데 공삼매를 말한다. 그것은 소멸하고 나서도 버리지 않는다.
가령 무상삼매(無相三昧)를 일으켜서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 두 가지는 과거에 성취하는데 공삼매ㆍ무원삼매를 말하고, 세 가지는 미래에 성취하고, 한 가지는 현재에 성취하는데 무상삼매를 말한다. 소멸하고 나서 버리지 않는 경우이다.
이 세 가지 삼매에서 한 가지를 눈앞에 드러나게 일으키는 경우, 세 가지는 과거ㆍ미래에 성취하고, 한 가지는 현재에 성취하는데 일어나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세 가지 삼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사건도(使揵度)의 큰 장[大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신해탈인(信解脫人)이 근을 전환하여 견도인(見到人)이 되는 경우는 인품(人品) 중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가령 도가 과거인 경우, 그 도는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猗]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수(修)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득수(得修)이고, 둘째는 행수(行修)이며, 셋째는 대치수(對治修)이고, 넷째는 제거수(除去修)이다. 유위선법(有爲善法)은 득수ㆍ행수이고, 유루법(有漏法)은 대치수(對治修)ㆍ제거수(除去修)이다.
외국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에 여섯 가지가 있다. 네 가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또 두 가지가 더 있다. 즉 계수(戒修)와 분별수(分別修)를 말한다.
계수는 근을 닦는 것이다. 가령 ‘만약 이 6근을 잘 조복하고, 잘 덮어서 감추고, 잘 수호하고, 잘 닦으면 능히 즐거움을 일으킨다’고 말한 경우와 같다.
분별수는 몸을 분별하는 것이다. 가령 ‘이 몸은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이빨 등을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경우와 같다.”
계빈 사문은 “이 두 가지 수(修)는 앞의 두 가지 수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대치수(對治修)와 제거수(除去修)를 말한다. 그러므로 수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즉 득수(得修)와 행수(行修)를 말한다.
가령 “법지(法智)를 닦는 경우에 비지(比智)도 닦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것도 또한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가령 “신을 닦고, 마음을 닦고, 계를 닦고, 혜를 닦는다”라고 설한 경우, 이것도 역시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즉 대치수와 제거수를 말한다.
가령 “어떻게 안근(眼根)을 닦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것도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가령 “세속 초선을 닦는 경우에 무루선(無漏禪)도 닦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 역시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즉 득수와 행수를 말한다.
가령 “공삼매를 닦는 경우에 무원삼매(無願三昧)도 닦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 역시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가령 “신념처를 닦는 경우에 수념처도 닦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 역시 두 가지 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가령 “무상상(無常想)을 닦는 경우에 무상상을 관하기도 하는가?”라고 설한 경우,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것은 득수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이것은 행수이다”라고 하였다.
가령 “어떤 것이 닦아야 할 법[可修法]인가? 일체의 유익한 유위법이다”라고 설한 경우, 여기에는 비록 네 가지 수의 의미가 있지만 역시 득수와 행수를 의지해서 논을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4구를 만들 수 있다. 득수와 행수이지만 대치수와 제거수가 아닌 법이 있고, 대치수ㆍ제거수이지만 득수ㆍ행수가 아닌 법이 있고, 득수ㆍ행수이기도 하고 대치수ㆍ제거수이기도 한 법이 있고, 득수ㆍ행수도 아니고 대치수ㆍ제거수도 아닌 법이 있다.
득수ㆍ행수이지만 대치수ㆍ제거수가 아닌 법은 무루유위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치수ㆍ제거수이지만 득수ㆍ행수가 아닌 법은 염오법과 불은몰무기의 유위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득수ㆍ행수이면서 또한 대치수ㆍ제거수인 것은 선한 유루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득수ㆍ행수도 아니고 또한 대치수ㆍ제거수도 아닌 법은 무위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수는 어떤 의미인가?
【답】훈습한다[勳]는 의미가 수의 의미이고, 학습한다는 의미가 수의 의미이고, 맑고 청정하다는 의미가 수의 의미이다.
현전수(現前修)는 행(行)으로 이름을 설한 것이고, 미래수(未來修)는 득(得)으로 이름을 설한 것이다. 현재는 눈앞에 드러나기 때문에 수(修)라고 한 것이고, 미래는 앞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수라고 한 것이다.
또 현재에는 짓는 것이 있기 때문에 수라 한 것이고, 미래는 욕(欲)을 주기 때문에 수라고 한 것이다.
또 현재는 몸 가운데 있기 때문에 수라고 한 것이고, 미래는 얻기 때문에 수라고 한 것이다.
【문】가령 도가 과거인 경우, 그 도는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95) 것인가?
【답】가령 도가 과거인 경우,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이다. 수는 두 가지 수를 말하는데 득수와 행수이다. 이미 의지했다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이지만 그 도가 과거가 아닌 것도 있는가?
【답】있다. 미래도는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이다. 부정관을 일으켜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 미래의 한량없는 찰나의 수가 있는데 제2찰나 이후부터는 모두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도라고 한다. 즉 득수를 말하는데 미래에 있기 때문에 과거라고 하지 않는다.
내지 처음에 진지를 일으켜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경우, 미래에 한량없는 진지의 찰나의 수가 있는데, 제2찰나 이후부터는 모두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도라고 한다. 즉 득수를 말한다.
【문】가령 도가 미래인 경우, 그 도는 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닌가?
【답】어떤 도는 미래에 속해 있으면서 이미 닦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쉬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있다. 나아가 자세하게 4구를 만든다.
【문】어떤 것이 미래에 속해 있으면서 그 도는 이미 닦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쉬지 않은 것도 아닌가?
【답】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모든 미래도(未來道)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어떤 것이 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니면서 그 도는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답】일찍이 얻지 못했던 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이다. 부정관을 일으키고, 나아가 진지가 눈앞에 드러나는 경우에 이 도는 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니면서 미래가 아니다. 이미 닦은 것이 아닌 것은 행수이기 때문이고, 미래가 아닌 것은 현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문】어떤 것이 미래에 속해 있는 도이면서 그 도는 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닌가?
【답】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닌 모든 미래도(未來道)이다.
부정관을 일으키고 내지 진지가 눈앞에 드러나는 경우, 미래의 한량없는 찰나의 수가 있는데 모든 미래수(未來修)에서 최초의 찰나와 함께하는 그 도는 이미 닦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득수이면서 저 도는 미래에 속해 있다.
【문】어떤 것이 미래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그 도는 이미 닦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쉬지 않은 것도 아닌가?
【답】과거도(過去道)와 일찍이 얻은 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이다.
일찍이 얻은 도란, 이미 얻은 부정관 내지 진지가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것이다.
【문】이 도는 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수이다. 무엇 때문에 이미 닦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의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가?
【답】이 문장은 “과거도가 이에 해당한다”라고 말해야 하고, “일찍이 얻은 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가령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답】이 도는 행수이므로 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는 것이지만 또한 득수이므로 이미 닦고 이미 의지한 것이다.
【문】가령 도가 현재인 경우, 그 도는 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는 것인가?
【답】가령 도가 현재인 경우, 그 도는 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 두 가지 수를 갖추는데, 득수ㆍ행수를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행수만이 있다.
【문】지금 닦고 지금 의지하는 것이면서 현재가 아닌 도도 있는가?
【답】있다. 일찍이 얻지 못했던 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인데, 미래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는다.
서로 비슷한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상사(修相似)이고, 둘째는 계상사(戒相似)이며, 셋째는 계상사(界相似)이고, 넷째는 성상사(性相似)이다.
수상사란, 여기에서 “일찍이 얻지 못한 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 미래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는다”고 설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유루도는 유루도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고, 무루도는 무루도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는다”고 하였다.
【評】 “유루도는 유루도ㆍ무루도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고, 무루도는 무루도ㆍ유루도와 서로 비슷한 것을 닦는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힘 때문이다.
세속도를 일으켜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 유루도ㆍ무루도를 닦고, 무루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에는 무루도ㆍ유루도를 닦는다.
계상사(戒相似)란, 가령 업건도(業犍度)에서 “과거계를 성취하는 경우, 미래ㆍ현재의 상사계(相似戒)도 성취하는가?”라고 설한 경우와 같다.
상사계라고 했는데, 가령 체해탈계(逮解脫戒)에는 상사체해탈계가 있고, 선계(禪戒)에는 상사선계가 있고, 무루계(無漏戒)에는 상사무루계가 있고, 유작계(有作戒)에는 상사유작계가 있고, 무작계(無作戒)에는 상사무작계가 있다.
계상사(界相似)란, 가령 근건도(根揵度)에서 “이 상사안근(相似眼根)을 성취하는 경우에, 상사신근(相似信根)도 성취하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가령 같은 하나의 계(界)에서 얻을 수 있는 법의 경우에 계상사(界相似)라고 한다. 욕계의 법은 욕계의 법과 닮았고, 색계의 법은 색계의 법과 닮았고, 무색계의 법은 무색계의 법과 닮았다.
성상사(性相似)란, 가령 비니(毘尼) 가운데서 “타바마라자(陀婆摩羅子) 존자가 왼손으로 빛을 내어 서로 닮은 비구들이 방사와 와구를 나누게 하였다”고 설한 경우와 같다.
수다라를 독송하는 서로 비슷한 사람을 한 곳에 같이 있게 하고, 비니를 암송하는 서로 비슷한 사람을 한 곳에 같이 있게 하고, 아비담을 암송하는 사람을 한 곳에 같이 있게 하고, 아련야법을 행하는 서로 비슷한 사람을 한 곳에 같이 있게 하여, 비구들이 함께 머물러 담론하고 고요히 침묵하도록 하게 한 것은 각각 서로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중생은 종류가 서로 비슷한 것끼리 서로를 따른다. 악을 행하는 이는 악을 행하는 이와 서로 따르고, 선을 행하는 이는 선을 행하는 이와 서로 따른다”고 설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네 가지 상사 중에서 수상사(修相似)를 의지해서 논을 지었다.
부정관이 눈앞에 드러나도록 일으키는 경우, 미래에 한량없는 부정관의 찰나의 수(修)가 있다. 최초의 찰나와 함께하는 모든 미래수(未來修)는 지금 닦는다. 즉 득수를 말한다. 저 도는 현재가 아니고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반나(阿那般那)ㆍ염처(念處)ㆍ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과 견도ㆍ수도의 진지(盡智)가 눈앞에 드러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설한다.
【문】아라한과에서 물러나 수다원과에 머무는 경우, 수다원과는 득(得)이면서 수(修)인가?
【답】단지 득이고 수는 아니다.
【문】가령 다시 아라한과를 얻는 경우, 득이기도 하고 수이기도 한가?
【답】과거의 경우에는 득이지만 수는 아니고, 미래의 경우에는 득이면서 수이다.
【문】무엇 때문에 과거의 경우에는 득이지만 수는 아니고, 미래의 경우에는 득이면서 수인가?
【답】가령 현재인(現在因)이 있는 경우에는 득이기도 하고 수이기도 하며, 현재인이 없는 경우에는 득일 뿐 수는 아니다.
【문】수다원과의 경우에도 현재인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득이기만 하고 수는 아닌가?
【답】가령 현재인이 있으면서 나아갈 수 있는 경우에는 득이기도 하고 수이기도 하다. 수다원과에 머무는 경우에는 비록 현재인은 있지만, 이것은 물러나는 도이기 때문에 단지 득일 뿐이고 수는 아닌 것이다.
025_0952_c_05L佛經說佛告比丘若有衆生能信樂汝所說者汝等應以慈愍心爲說四不壞淨令得安住修行此法廣如契經說問曰世尊何故說此經耶答曰欲爲說法者顯示應聽法緣故說法者不知應爲誰說誰不應爲說心生怯弱佛作是說汝等不應輕有所說若有衆生能信樂汝所說者乃可爲復次欲說報恩法故佛說此經佛告比丘若人於百年中一肩負一肩負母處處遊行猶不名爲報父母恩佛告比丘若父母不信教令立信無戒爲說善戒慳悋教令布施無慧教令修慧爾乃名爲報父母恩問曰諸佛法中所有善法盡應教人何故獨說教四不壞淨耶尊者波奢說曰此中世尊說聖道名不壞淨一切聖道或是相應法或是共有法若說則說相應法聖道若說戒則說共有法聖道復次此說現初門略要入法一切佛法所有善法或是色非色若說戒當知已說色性善法說信當知已說非色性善法如色法非色法相應不相應有依無依有行無行有勢用無勢用有緣無緣當知亦如是復次所有善法或是根性非根性若說信當知已說根性善法若說戒當知已說非根性善法復次依四不壞淨故施設四沙門果復次此四不壞淨有二種相一不壞相是淨相不壞相者無漏信不爲非信所壞無漏戒不爲非戒所壞信於心數法中是淨相戒於四大法中是淨復次爲示止惡道貧窮怖畏方便戒能止惡道怖畏信能止貧窮怖無漏信戒雖無障非不因有漏信復次欲引道依外道受化者令入佛法故諸比丘或有親屬依外道受以親受故讚歎佛法毀訾外道法令他瞋恚轉遠佛法佛於是說汝等無力無畏不知衆生諸根心行汝於彼人若有憐愍心者當爲說四不壞若得四不壞淨心不移動所以者比丘當知四大可令變異若人得四不壞淨無有變異問曰一切諸法盡不變異何以獨說四大不變異耶答曰以四法明四法故復次行者先觀四大不變異相然後於一切法見不變異相復次外道計四大是常說四大非是常法假令四大如外道所說是常者是常法可令變異若我弟子成就四不壞淨有變異者無有是處復次四大能持展轉增長生死法佛經說信是大象手問曰何故佛說信是大象手答曰能有所取故如象有手能取衆生數非衆生數物如是聖弟子有信手者能取善法佛經說若聖弟子成就於佛不壞淨多住此法時是時先成就於佛不壞諸天心大歡喜作如是言如我等成就多住於佛不壞淨故來生此閒諸聖弟子亦成就於佛不壞淨身壞命終亦當生此閒與我等同處成就於法不壞淨於僧不壞淨於戒不壞亦如是問曰彼諸天先於此閒成就四不壞淨何故諸天或有讚歎於佛不壞淨者或有乃至讚歎於戒不壞淨者耶答曰衆生或有爲於佛不壞淨勤修方便入於佛法或有乃至爲於戒不壞淨勤修方便入於佛若爲於佛不壞淨諸天勤修方便入於佛法者則讚歎於佛不壞淨至爲於戒不壞淨諸天勤修方便於佛法者則讚歎於戒不壞淨復次諸天或有樂觀於佛者或有樂觀於戒者若樂觀於佛者讚歎於佛不壞乃至若樂觀於戒者讚歎於戒不壞淨佛經說阿闍世王成就無根信問曰一切有爲法皆有根何故說阿闍世王信無根耶答曰此信以無見道根如說不壞智相應信以見道爲根彼無見道根故言無根而有與見道相似信爲根復次無無漏智善根故言無根無漏信以無漏智無漏善根爲根彼不得無漏智亦不得無漏善而得與無漏相似信復次阿闍世王不久供養佛亦不親近諸有德比而得如是信若於樓觀象馬之上見佛世尊卽前向佛以身投地身無苦痛是無根信力亦是佛之威神故名無根信復次此信無相似因有法與彼信作相似因者如乾樹無彼信亦爾故名無根復次雖有此不免惡道故名無根信此四顚倒須陁洹幾斷幾不斷問曰何故作此論答曰如毘婆闍婆提說有十二顚倒謂無常有常想顚倒顚倒見顚倒苦有樂想顚倒心顚倒見顚倒無我我想顚倒心顚倒見顚不淨淨想顚倒心顚倒見顚倒是見道斷四是修道斷八見道斷者無常常想顚倒見顚倒苦有樂想顚見顚倒無我我想顚倒見顚倒淨淨想顚倒見顚倒四是修道斷者無常計常心顚倒苦計樂心顚倒我計我心顚倒不淨計淨心顚倒見道斷者苦比忍現在前時畢竟斷諸修道斷者金剛喩定現在前時竟斷問曰彼何故作如是說答曰依佛經佛經說佛告比丘此四顚倒想顚倒心顚倒見顚倒乃至廣說此經故說十二顚倒以二事止如是說者意而作問答若作是問此四顚須陁洹幾斷幾不斷則止彼說十二者意若作是答須陁洹盡斷則止彼說是修道斷者意所以者何修道中無如是法是須陁洹所斷若顚倒有十二種亦是修道斷者則違佛經如說佛告比丘若有四顚倒所顚倒當知皆是愚小凡夫所以者何夫觀生死法不見端緖如觀狗腸經若說四當知則無十二若說皆是愚小凡夫當知則非修道所斷問曰若顚倒但有四者毘婆闍婆提所引經云何通耶答曰親近顚倒故亦名顚倒問曰受等諸數法亦親近顚倒法何故不名顚倒耶答曰此二是世俗言說法故世俗皆作是說人心顚倒想顚倒而不說受顚倒顚倒問曰顚倒體性是何答曰體性是慧問曰若顚倒體性是慧者此五見幾是顚倒幾非顚倒答曰二見半是顚倒二見半非顚倒二見半是顚倒者謂身見見取邊見中常見二見半非顚倒者謂邪見戒取邊見中斷問曰何故二見半是顚倒二見半非顚倒耶答曰以三事故是顚倒以猛利二以妄取三以一向性顚倒邪見邊見所攝斷見雖是猛利一向性顚倒而非妄取所以者何一向壞物體故戒取雖是猛利亦是妄取非一向性顚倒所以者何有少相似有色界道能離欲界有無色界道能離色界此是顚倒體性乃至廣說已說體性所以今當說何故名顚倒顚倒是何義答曰所取顚倒故名顚倒此顚倒一向見苦斷問曰何故顚倒一向見苦斷耶答曰因苦生故還見苦復次此顚倒依果生故還見果斷復次身見是見苦斷性是顚倒以身是見苦斷故顚倒亦見苦斷復次苦諦是麤現法若於麤現法中謬誤則爲賢聖之所呵責如人晝日謬人所呵責彼亦如是餘三諦微細若於微細法中有謬誤者賢聖不必呵責如人於夜有謬誤者不必爲人之所呵責復次行者見苦已更無顚倒心無有是處以分別故而作是說假令行者見苦諦已不見餘三諦人問言此陰是常是斷答言是斷有一剎那住者爲是苦是樂耶答言是苦如熱鐵丸是淨不淨耶答言不淨糞穢聚有我無我耶答言無我無作無作者問曰堅信堅法人亦斷顚倒何故但說須陁洹耶答曰應說而不說者知此說有餘復次堅信堅法人是分別相於此顚倒或有斷者有不斷者此中一向說不分別相者復次欲令疑者得決定故須陁洹行凡夫所行法與妻子同一處宿手捫摸骨人憍奢耶衣栴檀塗身亦著種種瓔珞華鬘亦驅使奴婢僕從亦以手打搏衆生時人見此事故謂不斷顚倒令此疑得決定故而作是說堅信堅法人尚無有漏善心不隱沒無記心現在前何況染污心耶問曰須陁洹斯陁含起染愛時爲是惠之樂想淨想爲是苦想不淨想若起樂想淨想者云何不是顚倒耶若是想不淨想者云何起染愛耶答曰作是說起樂想淨想問曰若然者云何不是顚倒耶答曰先作是說以事故是顚倒一以猛利二以妄取三以一向性倒須陁洹染愛雖是猛利及以妄取而非一向性倒復次或有諦計樂計淨或有於境界計樂計淨於諦計樂計淨者須陁洹永斷於界計樂計淨者須陁洹未斷復須陁洹起染愛時計苦計不淨問曰若然者云何起染愛耶答曰從無始已來學習此法身心生熱爲制伏此心故起此染愛猶如自喜婆羅指觸糞穢詣鍜師所求以火淨之時鍜師語言可以灰土浣草而以淨之婆羅門言如是等物不能淨於我指當以火淨是時鍜師燒鉗作火色以鉗其指時婆羅門爲熱所苦逼便振其手以指著口中婆羅門審指不淨但爲苦痛所逼而著口中彼亦如是復次爲無始已來久習煩惱惠之所逼切故爲治此法起於染愛如人身體鮮白軟細而生癰瘡極用苦痛求欲治之醫語之言汝可以濕狗糞而用塗之其人卽塗審知狗糞不淨爲除病故而以塗之彼亦如是此三三昧須陁洹幾過去成就幾未成就幾現在成就問曰何故作此論答曰爲止言無過去未來行於世中愚故廣說如上此三三昧須陁洹幾過去成就幾未成就幾現在成就答曰未來悉成就過去滅已不捨則成就現在若現前則成就道比智最初剎那無過去所以者何未有一剎那生已滅生已滅者得果故捨三未來成就一現在謂無願三昧彼滅已不捨若起空三昧現在前一過去成就謂無願昧三未來一現在謂空彼滅已不若起無相三昧現在前二過去謂空無願三昧三未來一現在謂無相若滅已不捨於此三三昧若起一現前過去未來三現在一起現在前者三三昧廣如使揵度大章說信解脫轉根作見到廣說如人品中若道過去彼道已修已猗耶乃至廣說有四種一得修二行修三對治修除去修有爲善法是得修行修有漏是對治修除去修外國法師說有六種四如先說更有二修謂戒修分別修戒修者是修根如說若此六根善調伏善覆藏善守護善修者能生樂分別修者分別於身如說身謂髮毛爪齒等乃至廣說罽賓沙門作如是說此二修當知在前二修謂對治修除去修是故修有四種此中依二種修而作論謂得修行修如說若修法智亦修比智耶此亦依二修而作論如說修身修心修戒此亦依二修而作論謂對治修去修如說云何修眼根亦依此二修而作論如說若修世俗初禪亦修無漏耶此亦依二修而作論謂得修如說若修空三昧亦修無願耶依此二修而作論如說若修身念處亦修受念處耶亦依此二修而作論如說若修無常想亦觀無常想耶中或有說是得修者或有說是行修如說云何可修法一切善有爲法此中雖有四種修義亦依得修行修而作論是故得作四句有法是得修行修非對治修除去修有法是對治除去修非得修行修有法是得修行修亦是對治修除去修有法非得行修亦非對治修除去修是得修行修非對治修除去修者無漏有爲法是也是對治修除去修非得修行修者染污法不隱沒無記有爲法是也是得修行修亦是對治修除去修善有漏法是也非得修行修亦非對治修除去修者無爲法是也問曰修是何義答曰勳義是修義學習義是修義明淨義是修義現前修以行名說未來修以得名說現在以現在前故名修未來以當生故名修復次現在有所作故名修未來與欲故名復次現在在身中故名修未來以得故名修若道過去彼道已修已猗耶答曰道過去已修已猗修者謂二種修行修已猗者已過去故頗道已修已猗彼道不過去耶答曰未來道已修已猗起不淨觀現在前未來有無量剎那修從第二剎那以後盡名已修已猗道謂得修以在未來故名過去乃至起初盡智現在前未來有無量盡智剎那修從第二剎那修已後盡名已修已猗道謂得修若道未來彼道非已修非已猗耶答曰道在未來彼道非不已修非不已猗乃至廣作四句云何道在未來彼道非不已修非不已猗答曰諸未來道已修已猗如上所說云何道非已修非已猗彼道非未來耶答曰起未曾得道現在前起不淨觀乃至盡智現在前此道非已修非已猗此道非未非已修者是行修故非未來者現在故云何道在未來彼道非已修非已猗答曰諸未來道非已修非已猗者起不淨觀乃至盡智現在前來無量剎那修諸未來修與最初剎那俱者彼道非已修已猗所以者何是今修今猗謂得修而彼道在未來云何道不在未來彼道非不已修不已猗答曰過去道亦起曾得道現在前曾得道者曾得不淨觀乃至盡智起現在前問曰此道是今修今猗是行修何故說非不已修非已猗耶答曰此文應如是說過去道是也應說起曾得道現在前若作是說何意耶答曰此道雖是行修今修今亦是得修已修已猗若道現在道今修今猗耶答曰若道現在彼道今修今猗或具二修謂得修行修有唯行修者頗道今修今猗彼道非現在耶答曰起未曾得道現在前未來相似者修相似有四種一修相二戒相似三界相似四性相似相似者此中說起未曾得道現在前未來相似者修此中或有說有漏道有漏道相似修無漏道無漏相似修評曰應作是說有漏道有漏道無漏道相似修無漏道有無漏道有漏道相似所以者何以彼力故起世俗道現在前有漏無漏道修起無漏道現在前無漏有漏道修戒相似者如業揵度說若成就過去戒亦成就未來現在相似戒耶相似戒者如逮解脫有相似逮解脫戒禪戒有相似禪無漏戒有相似無漏戒有作戒相似有作戒無作戒有相似無作戒界相似者如根揵度說若成就此相似眼根亦成就此相似身根耶若法同在一界可得者名界相似欲界法與欲界法相似色界法與色界法相無色界法與無色界法相似性相似者如毘尼中說尊者陁婆摩羅子左手放光爲諸相似比丘分房舍臥相似誦修多羅者同在一處相似誦毘尼者同在一處相似誦阿毘曇同在一處相似行阿練若法者在一處欲令諸比丘同住談論靜默各相隨順故餘經亦說衆生種類相似相隨行惡者與行惡者相隨善者與行善者相隨此中於此四種相似中依修相似而作論起不淨觀現在前未來有無量不淨觀剎那修諸未來修與最初剎那俱者此是今謂得修彼道非現在在未來故那般那念處煖頂忍世第一法見道修道盡智現在前時說亦如是問曰退阿羅漢果住須陁洹果時須陁洹但是得亦是修耶答曰但是得不若還得阿羅漢果時但是得亦是修耶答曰過去者是得非修未來者是得亦修問曰何故過去者是得非未來者是得亦修耶答曰若有現在因者有得亦修若無現在因者得非修問曰須陁洹果亦有現在因何故但得非修耶答曰若有現在因能勝進者是得亦修住須陁洹果有現在因而是退道故但得非修
阿毘曇毘婆沙論卷第五十四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92)원문은 狗腸. 이본에 의거하여 狗殉으로 고쳐읽는다.
  2. 93)원문은 骨人. 이본에 의거하여 滑人으로 고쳐읽는다. 『대비바사론』 제104권에는 女人.
  3. 94)교사야(憍奢耶)는 범어 kauśeya의 음사어이다.
  4. 95)『대비바사론』에서는 ‘의(猗)’가 ‘식(息)’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