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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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권


오백 아라한(阿羅漢) 지음
현장(玄奘)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아비달마발지대비바사론서(阿毘達磨發智大毘婆娑論序)

【문】누가 이 논(論)1)을 지었는가?
【답】불세존(佛世尊)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法性)은 심히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이 아니면 누가 끝까지[究竟] 평등하게 깨달아서[等覺] 열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가 묻고 누가 대답했는가?
어떤 이는 “사리자(舍利子) 존자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5백 아라한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모든 천신(天神)들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다른 논사(論師)는 “세존께서 변화로 만들어낸 비구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으레 알아야 하는 법성을 모든 세간에 반드시 열어 보이셔야 하는데 묻는 이가 없으면 그때 세존께서는 변화로 비구를 만드시되 생김새가 단정하여 여러 대중들이 보기 좋아하며, 수염과 머리를 깎아 없애고, 승가지(僧伽胝)2)를 입혀 그로 하여금 묻게 하고 세존께서는 대답하시기 때문이니, 마치 『의품경(義品經)』의 인연을 물은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논은 무엇 때문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3) 존자가 지었다고 전해오는가?
【답】그 존자가 기억하여 연설해서 널리 유포했기 때문에 이 논의 지은이의 이름을 그에게 돌렸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또 어떤 이는 “이 논은 바로 저 가다연니자 존자가 지었다”고 말한다.
【문】어찌 앞에서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를 지닌 이가 아니시면 누가 끝까지 평등하게 깨달아서 열어 보이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존자가 이 논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답】그 존자도 미묘하고 매우 깊으며 날래고 날카로우며 교묘한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있어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잘 알고, 글의 뜻과 전제(前際)ㆍ후제(後際)를 통달했으며, 삼장(三藏)을 잘 이해하고 삼계(三界)의 오염[染]을 여의었으며, 3명(明)을 성취했고, 6신통(神通)과 8해탈(解脫)을 갖추었으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고 묘원지(妙願智)를 얻었으며, 일찍이 과거 5백의 부처님 처소에서 범행(梵行)을 쌓고 닦으면서 ‘나는 미래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비달마(阿毘達磨)를 지으리라’고 큰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제자들 중에는 으레 모두 두 분의 큰 논사[二大論師]가 있어 정법(正法)을 맡아 지니니,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라면 사리자 존자와 같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라면 가다연니자 존자와 같다. 그러므로 저 존자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법에 이익될 것을 관찰하여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는 어떤 것인가?
【답】세존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 곳곳의 방읍(方邑)에서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갖가지 논의 길[論道]로써 아비달마를 분별하고 연설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나 세간에 계실 때에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이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경을 모아 편찬하여 따로따로 부류(部類)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다연니자 존자는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역시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편찬하여 『발지론(發智論)』을 지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논의 길 가운데서 장문(章門)4)을 세워 간략한 게송을 제시하고 따로따로 납식(納息)을 짓고 통틀어 온(蘊)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른바 갖가지 이상(異相)의 논의 길을 모아 잡온(雜蘊)을 만들었고, 결(結)의 논의 길을 모아 결온(結蘊)을 만들었으며, 지(智)의 논의 길을 모아 지온(智蘊)을 만들었고, 업(業)의 논의 길을 모아 업온(業蘊)을 만들었으며, 대종(大種)의 논의 길을 모아 대종온(大種蘊)을 만들었고, 근(根)의 논의 길을 모아 근온(根蘊)을 만들었으며, 정(定)의 논의 길을 모아 정온(定蘊)을 만들었고, 견(見)의 논의 길을 모아 견온(見蘊)을 만든 것이다.
모든 오타남송(鄔拖南頌)5)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불세존께서 곳곳의 방읍에서 갖가지 유정들을 위하여 형편에 맞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대덕(大德) 법구(法救)가 차츰차츰 들었던 것을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하여 품명(品名)을 붙였으니, 무상(無常)에 대한 게송을 모아 「무상품(無常品)」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아가 범지(梵志)에 대한 게송을 모아 「범지품(梵志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아비달마는 본시 부처님의 말씀인데 역시 존자가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이거나 제자의 말에 관계없이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세존께서는 모두 비구들이 받아 지니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저 존자는 하나하나 들었던 것을 때로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관찰하여 그것을 모아 편찬하여 정법이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게 하려고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또 모든 부처님은 세간에 나오시면 모두 삼장(三藏)6)을 말씀하시니, 소달람(素怛纜)7)과 비나야(毘那耶)8)와 아비달마(阿毘達磨)이다.
이와 같은 삼장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지혜의 바다[一智海]에서 생겼기 때문이요, 하나의 깨달음의 연못[一覺池]을 따라 나왔기 때문이며, 평등한 힘[等力]과 두려움 없음[無畏]에 섭수되기 때문이요, 동일한 대비(大悲)에서 똑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또한 차별이 있다. 우선 이름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소달람이라 하고, 이것은 비나야라 하며, 이것은 아비달마라 한다. 또 의지하는 곳[依處]이 서로 다르다. 만일 증상의 마음[增上心]에 의지하여 논한 길[論道]이면 소달람이요, 만일 증상의 계율[增上戒]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며, 만일 증상의 지혜[增上慧]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라고 말한다.
【문】모든 것 가운데서는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소달람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고,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삼장에는 당연히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답】더욱 뛰어나다는 설[增勝說]에 의거한 것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고, 비나야 가운데서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는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다.
어떤 이는 “소달람 가운데서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곳에 따라 역시 차별이 있다.
또 드러내는 것[所顯]에서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차례[次第]를 드러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마땅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 품(品) 다음에 곧장 저 품을 말씀하셨을까?’라고 차례를 구해야 한다. 만일 비나야라면 연기(緣起)를 드러내니, 비나야 가운데서는 마땅히 ‘세존께서 어떤 연기법을 의지해서 저와 같은 학처(學處)를 세우셨는가?’라고 연기를 구해야 한다. 만일 아비달마라면 성품과 모양[性相]을 드러내니, 아비달마 중에서는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과 모양을 구해야만 하고 저 차례와 연기를 구하여 혹은 앞인지 혹은 뒤인지 혹은 연기가 없는지 모두 과실은 없는지 구해서는 안 된다.
또 등류(等流)9)에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힘[力]의 등류요, 비나야는 대비(大悲)의 등류이며, 아비달마는 무외(無畏)의 등류이다.
또 말씀한 것[所說]에도 차별이 있다. 갖가지를 뒤섞어 말씀하신 것은 소달람이요, 모든 학처를 말씀하신 것은 비나야이며,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한 것은 아비달마이다.
또 하는 일[所爲]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면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선근을 심은 이면 상속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상속한 뒤에 성숙한 이면 바른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또 분위(分位)에도 차별이 있다. 업을 시작한 자리[始業位]에 의거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익숙히 익힌 자리[已串習位]에 의거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뛰어나게 작의하는 자리[超作意位]에 의거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또 나아감[進趣]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바른 법[正法]에 들지 못했으면 바른 법에 들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바른 법에 들었으면 학처(學處)를 받아 지니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이미 학처를 받아 지녔으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통달하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장에는 역시 차별이 있다.
【문】무엇 때문에 존자는 이 논을 지었는가?
【답】다른 이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다. 저 존자는 ‘어떻게 하면 모든 유정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해 뒤바뀜 없이 받아 지니면서 정진하고 사유(思惟)하고 헤아리고 관찰하여 한량없는 번뇌와 나쁜 행이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곧장 매우 깊은 법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게 할까?’라고 생각하여 이 논을 지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어둡고 캄캄한 곳에 크고 밝은 등불을 켜 놓아 눈 있는 이들이 갖가지 색깔을 보게 하는 것처럼, 존자도 그러하여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이 논을 지어서 지혜 있는 이들이 깊은 법성(法性)에 들 수 있게 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分敎)를 열어 보이고 연설하신 것과 같으니, 첫째는 계경(契經)10)이요, 둘째는 응송(應頌)이며, 셋째는 기별(記別)이요, 넷째는 풍송(諷頌)이며, 다섯째는 자설(自說)이요, 여섯째는 연기(緣起)이며, 일곱째는 비유(譬喩)요, 여덟째는 본사(本事)이며, 아홉째는 본생(本生)이요, 열째는 방광(方廣)이며, 열한째는 희법(希法)이요, 열두째는 논의(論議)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에게 비록 인(因)의 힘은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깨달음을 일으킬 자도 끝내 뛰어난 곳을 향해 나아가는 행을 닦을 수 없으니 반드시 연의 힘을 만나야 수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못 가운데에 비록 갖가지 온발라(蘊鉢羅)11) 등 여러 묘한 연꽃이 있으나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지 않으면 꽃이 피어서 갖가지 향기를 내지 못하니 반드시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어야 종류에 따라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것과 같다.
또 어둠 속에 갖가지 물건이 있으나 등불이 비춰줌이 없으면 끝내 볼 수 없으니 반드시 등불의 비춤을 빌려야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비록 인(因)의 힘이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처럼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어두운 방 안에
갖가지 물건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어둠에 가려져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네.

이처럼 지혜가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법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은 마침내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네.

비유하면 눈 있는 이가
등불로 인하여 여러 빛깔을 보는 것처럼
지혜로운 이도 많이 들음에 의하여야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네.

많이 들음[多聞]은 법을 알 수 있게 하고
많이 들음은 불선(不善)을 여의게 하며
많이 들음은 무의(無義)를 버리게 하고
많이 들음은 열반을 얻게 한다네.

또 경에서 “두 가지 인연(因緣)이 있어야 바른 견해[正見]을 내게 되니, 첫째는 밖으로 다른 이의 법음(法音)을 듣는 것이고 둘째는 안으로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如理作意]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서 “네 가지 법의 사람[四法人]이 있어서 많이 짓게 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착한 벗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이요, 넷째는 법에 따라 법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경에서 “만일 나의 제자가 한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바른 법을 들으면 5개(蓋)를 끊게 되고 7각분(覺分)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존자도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
또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등불이 어둠을 깨뜨리는 광명을 내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고 지혜의 광명을 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무아(無我)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비유하면 거울의 표면을 잘 닦아 빛나게 하면 갖가지 색상(色像)이 모두 그 안에 나타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분별하여 무아의 형상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견고한 배나 뗏목을 탄 백천의 중생들이 그것에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강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수없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유정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계경 등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다. 마치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모든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여러 빛깔을 볼 수 있고 미혹함이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아비달마로써 계경을 비추면 미혹함이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선(善) 등의 모든 법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보물을 감별하는 사람이 금강 등의 보물을 잘 관찰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선 등의 모든 법을 잘 분별하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아비달마의 대논사(大論師)들이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마치 묘고산(妙高山)12)이 금륜(金輪) 위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온갖 사나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아비달마의 대논사도 이와 같아서 청정한 시라(尸羅)13)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모든 나쁜 소견을 지닌 이의 업신여김과 헐뜯음과 삿된 이론으로써는 꺾거나 조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존자는 세 가지의 인연으로 이 논을 지었으니, 첫째는 지혜를 더욱 늘려 주기 위해서요, 둘째는 깨달음의 뜻[覺意]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나[我]를 헤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지혜를 더욱 늘려 준다 함은 안팎의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서 지혜를 더욱 늘리게 하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깨달음의 뜻을 연다 함은 모든 유정은 무명에 휩싸여 마치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이 변행(遍行)인가, 어느 것이 변행이 아닌가[非遍行], 어느 것이 자기 경계의 연[自界緣]인가, 어느 것이 다른 경계의 연[他界緣]인가, 어느 것이 유루의 연[有漏緣]인가, 어느 것이 무루의 연[無漏緣]인가, 어느 것이 유위의 연[有爲緣]인가, 어느 것이 무위의 연[無爲緣]인가, 어떤 것이 섭수[攝]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상응(相應)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인(因)인가, 어떤 것이 연(緣)인가, 누가 성취하고 누가 성취하지 못하는가, 어느 것이 순전구(順前句)인가, 어느 것이 순후구(順後句)인가, 어느 것이 4구(句)인가, 어느 것이 여시구(如是句)인가, 어느 것이 불여시구(不如是句)인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알아야 할 경계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에게 깨달음의 뜻을 열어주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나를 헤아리지 않게 한다 함은 존자가 지은 아비달마는 보특가라14)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항상 모든 행(行)은 공(空)하고 나[我]가 없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문】아비달마의 자성(自性)은 어떤 것인가?
【답】무루(無漏)의 혜근(慧根)으로써 자성을 삼으니, 1계(界)ㆍ1처(處)ㆍ1온(蘊)에 속한다.15) 1계란 법계(法界)를 말하고, 1처란 법처(法處)를 말하며, 1온이란 행온(行蘊)을 말한다.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ㆍ2처ㆍ5온에 속한다. 3계란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를 말하고 2처란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를 말하며 5온이란 색온(色蘊)에서 식온(識蘊)까지를 말한다.
계경에서 “이 야차천[藥叉天]은 오랜 세월 동안에 그 마음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나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계경에서 “이 벌차씨(筏蹉氏)16)와 선현(先賢) 외도와 범수(梵壽) 바라문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그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 없고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부처님께서 서이가(西儞迦)17)에게 “나에게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는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가 아니다.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며, 너의 천박한 지혜로써는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오랜 세월 동안에 달리 보았고 달리 참았고 달리 바랐고 달리 즐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공과 무아와 여실한 깨달음[如實覺]이다. 왜냐하면 저 외도는 항상 망령되이 나를 헤아렸으므로 공과 무아의 성품은 그가 미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께서 오타이(鄔陀夷)18)에게 “너는 어리석은 범부요 소경이어서 지혜의 눈이 없거늘 어떻게 상좌 비구와 함께 매우 깊은 아비달마를 논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멸정의 물러남[滅定退]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모든 연기(緣起)이니라.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연성(緣性)과 연기이다. 이것은 매우 깊어서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만이 비로소 알 수가 있다.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의지[一切依]를 모두 영원히 버리고 여의며 애욕이 다하고 물들지 않으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다. 이것은 가장 깊으며 매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저 적멸(寂減)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남음이 있는 법[有餘法]은 서로 비슷하여[相似] 매우 깊은 것이로되 나는 그 가운데서 스스로가 깨달아서 바르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모든 견해의 갈래[見趣]와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법[一切法]은 매우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온갖 법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비록 이들 경에서 따로따로의 뜻[意趣]에 따라 갖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나 아비달마의 으뜸가는 이치[勝義]의 자성은 오직 무루의 혜근일 뿐이다.
곧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니,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4성제(聖諦)를 따로따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니,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관(持息念觀) 등이다. 모든 온(蘊)을 따로따로[別] 또는 한꺼번에[總] 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일으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건립하며 실물(實物)의 어리석음과 소연(所緣)의 어리석음을 해치고 모든 법에 대하여 더하거나 덜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수승하게 생(生)ㆍ처(處)ㆍ득(得)ㆍ혜(慧)를 일으키고 삼장(三藏)ㆍ12분교(分敎)를 받고 지니고 헤아리고 관찰하면서 잘못 굴리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와 같은 자량(資糧)을 말미암아 무루의 혜근을 껴잡고 지니어 한층 더 밝고 왕성함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문】만일 아비달마가 무루의 혜근만을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면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다시 아비달마라고 하는가?
【답】아비달마가 밑바탕[具]이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부른다. 경의 곳곳에서 저 여러 가지 바탕에 대하여 그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과 같다. 이것도 이와 같아서 즐겁게 하는 바탕[樂具]에 대하여 즐겁다[樂]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가타(伽陀)의 말과 같다.

구걸한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옷은 얻는 대로 입으면 즐거우며
산과 숲을 거닐면 즐겁고
바위굴에 숨어 살면 즐겁네.

음식이나 의복 등의 바탕[體]은 실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즐거움이란 모든 즐거운 느낌[樂受]이다. 어떤 이는 “또한 가쁜함[輕安]도 즐겁다”라고 말했으나 의복과 음식 등은 즐겁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가타에서도 역시 즐겁다고 말한 것이다.
또 더럽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때[垢]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타의 말과 같다.

여인은 범행(梵行)의 때이니
여인은 중생을 손상하고 해치네.
고행으로 범행을 깨끗이 할 뿐
물로 씻을 수는 없는 것이네.

여인은 실로 더러운 때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더러운 때는 탐냄[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이다. 그런데도 가타에서 여인을 더러운 때라 말함은 이것이 더럽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새는 바탕에 대하여 샌다[漏]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7루(漏)19)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고 불에 타는 것이며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감관[根] 등은 실로 새는 것이 아니나 이는 새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샌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새는 것은 셋일 뿐이니,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또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수면(隨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빛깔[色]은 수면이요ㆍ수증(隨增)이요ㆍ수사(隨死)이다. 만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하면 따라다니며 죽게(隨死) 하는 것이고, 만일 따라다니며 죽게 하면 따라다니며 취하게[隨取] 하는 것이며, 만일 따라다니며 취하게 하면 따라다니며 속박되게[隨縛]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빛깔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수면은 일곱 가지20)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경에서 빛깔이 수면이라 말함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맛의 바탕에 대하여 맛[味]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눈[眼]의 맛은 묘한 빛깔[色]이며 빛깔은 악마의 갈고리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눈은 실로 맛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맛이란 삶에 대한 애착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눈의 맛은 빛깔이라 말함은 이것이 맛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욕심의 바탕에 대하여 욕심[欲]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욕심이란 무엇인가? 5묘욕(妙欲)21)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또 게송의 말씀과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은
사랑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며
뜻에 맞는 것이어서 욕심을 끌어당겨
마음을 물들이고 집착하게 한다.

빛깔 등은 욕심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욕심은 저 애욕[愛]이다. 그런데도 경의 게송에서 빛깔 등을 욕심이라 함은 욕심을 내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물러나게 되는 바탕에 대하여 물러난다[退]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다섯 가지 인연 때문에 시해탈(時解脫)의 아라한이 물러나게 되니, 첫째는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고, 둘째는 희론(戱論)을 즐기는 것이며, 셋째는 다툼[諍訟]에 어울리는 것이고, 넷째는 멀리 다니기[遠行]를 좋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오래도록 병을 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은 물러나게 하는 자체는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물러난다 함은 온갖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법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이 물러나게 한다 함은 물러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업을 짓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업(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세 가지 뜻[意]이 있기 때문에 나쁜 업을 생각한다. 만일 지으면 더욱 자라게 하고 좋지 않은[非愛] 이숙(異熟)을 받게 되니, 탐욕과 진에(瞋恚)와 사견(邪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욕 등은 실로 의업(意業)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의업은 뜻과 함께 조작[思]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의업이라 함은 불선의 의업을 짓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이숙인(異熟因)의 바탕에 대하여 이숙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저 무멸(無滅) 존자22)가 “나는 한 끼 밥의 이숙인을 말미암아 일곱 번 천상(天上)에 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맨 마지막 몸[最後身]으로는 모든 번뇌[漏]를 다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한 끼의 밥이 이숙인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이숙인은 모든 불선(不善)과 선(善)과 유루(有漏)의 법이다. 그런데도 저 존자가 한 끼 밥을 이숙인이라 말씀한 것은 그것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경의 여기저기에서 여러 이름으로 여러 바탕을 말씀한 것처럼 이 논도 그러하여 이것이 아비달마의 바탕이기 때문에 또한 아비달마라 한 것이다.
이와 같아서 으뜸가는 이치[勝義]에서 아비달마의 성품은 무루의 혜근일 뿐이어서 1계ㆍ1처ㆍ1온에 속하며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ㆍ2처ㆍ5온에 속한다.
그 밖의 자량(資糧) 등은 모두가 세속의 아비달마이다. 이것을 아비달마의 성품이라 한다. 자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나와 물건[物]의 자체와 상분(相分)과 본성(本性)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자성을 해설하였으므로 무슨 뜻에서 아비달마23)라고 이름하는지 그 까닭을 이제 해설하겠다. 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이 말하였다.
“모든 법의 모양[法相]에 대하여 잘 결택(決擇)하고 극히 잘 결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의 성품[法性]에 대하여 잘 깨달아 살피고 잘 통달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현관(現觀)으로 증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법 성품은 매우 깊은데도 그 근원의 밑까지 다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성스러운 혜안(慧眼)은 이를 말미암아 청정해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깊숙이 숨은 법 성품을 잘 드러내 일으키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하며 알아야 할 법 성품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깊숙이 숨어 있으므로 이것을 여의고는 드러내거나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말한 법 성품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만일 아비달마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지극히 잘 익히고 있다면 아무리 법답게 어려운 것을 물어도 법 성품에서는 반드시 조그마한 어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온갖 외도와 다른 이론[他論]을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큰 논사에게는 삿된 무리[邪徒]와 이학(異學)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우(世友) 존자24)는 “언제나 계경 가운데서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12연기(緣起)의 법 성품에 대하여 잘 깨달아 알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4성제(聖諦)의 법을 잘 현관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8성도법(聖道法)을 잘 말하고 닦아 익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한량없는 문(門)으로써 자주자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25)은 “잡염(雜染)ㆍ청정(淸淨)ㆍ계박(繫縛)ㆍ해탈(解脫)ㆍ유전(流轉)ㆍ환멸(還滅)의 법에 대하여 명신(名身)ㆍ문신(文身)ㆍ구신(句身)의 차례로 결집(結集)하여 순서를 정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협 존자(脇尊者)는 “이것은 마지막의 지혜[究意慧]요, 이것은 결단의 지혜[決斷慧]이며, 이것은 으뜸가는 이치의 지혜[勝義慧]요, 이것은 잘못되지 않은 지혜[不謬慧]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해탈을 구하는 이가 바른 행을 닦을 때에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 이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괴로움[苦]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因]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滅]이요, 이것은 사라짐으로 나아가는 길[道]이며, 이것은 가행도(加行道)요, 이것은 무간도(無間道)며, 이것은 해탈도(解脫道)요, 이것은 도를 향한[向道] 것이며, 이것은 과를 얻는[得果]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법밀부(法密部)의 학설에 “이 법은 증상(增上)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어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慧]는 세간에서 높아서
나아갈 방향[趣向]을 결택하며
바르고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노사(老死)가 다하고 남음이 없네.

화지부(化地部)의 학설에 “지혜는 법을 비춰주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계경에서 “온갖 비춤[照] 가운데서 내가 지혜의 비춤[慧照]을 말한 것이 가장 으뜸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유자(譬喩者)26)의 학설에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이 맨 위이며, 이 법은 그것에 버금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다.
성론자(聲論者)는 “아(阿)는 버린다[除棄]는 말이고 비(毘)는 결택(決擇)한다는 말이니, 이 법은 버리고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무엇을 버리게 되는가?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다. 무엇을 결택하게 되는가? 온(蘊)ㆍ계(界)ㆍ처(處)ㆍ연기(緣起)ㆍ제(諦)ㆍ식(食)ㆍ사문과(沙門果)ㆍ보리분(菩提分) 등이다”라고 말했다.
불호(佛護) 존자는 “아비(阿毘)는 도와주는 말[助言]이어서 눈앞에 나타나 있는 뜻을 드러나게 한다. 이 법은 온갖 착한 법, 즉 모든 각분(覺分)을 이끌어서 모두 눈앞에 나타나 있게 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아비(阿毘)란 도와주는 말이어서 증상(增上)의 뜻을 드러낸다. 마치 증상의 만[增上慢]을 아비만(阿毘慢)이라 하고, 증상의 각[增上覺]을 아비각(阿毘覺)이라 하며, 증상의 노[增上老]를 아비노(阿毘老)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증상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노수(老受) 존자는 “아비는 도와주는 말로 공경하는 뜻을 드러낸다. 마치 공경하면서 머리 조아리는 것을 아비계수(阿毘稽首)라 하고, 공경히 공양하는 것을 아비공양(阿毘供養)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높고 중하며 공경할 만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무엇 때문에 이 논을 발지(發智)라고 하는가?
【답】모든 승의(勝義)의 지혜[智]는 모두가 이로부터 일어나며[發] 이것이 첫 기초[基]가 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이 논은 마땅히 지혜의 안족처(安足處)라 하여야 한다. 모든 으뜸가는 지혜는 이것이 근본이 되고 이것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지혜의 안족처라 한다.
또 모든 용감하고 씩씩한 지혜는 여기에서 으뜸가게 일으킬 수 있으며 용감한 지혜의 연(緣)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모든 지혜의 저 언덕[彼岸]은 이것에 의지하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발지라 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개발(開發)하는 것은 이 논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는 모두가 이 발지의 묘한 문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문】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勝利]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답】해탈을 수순(隨順)해서 얽매임을 끊어 없애고, 공ㆍ무아를 따라서 나[我]와 내 것[我所]을 등지며, 무아의 도리를 드러내어 삭취취(數取趣)를 차단하고, 각의(覺意)를 열어 혼미(昏迷)를 쉬며, 어리석음을 보내어 지혜를 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결정(決定)해주며, 잡염(雜染)을 등져 청정한 곳으로 향하고, 유전(流轉)을 꾸짖어서 환멸(還滅)을 찬탄하며, 생사를 버려 열반을 얻고, 온갖 외도의 삿된 이론을 꺾어 부수어 온갖 불법의 바른 이론을 성립시킨다. 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은 그 모양이 이와 같다.
026_0001_a_01L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一大唐三藏聖教序大宗文皇帝製蓋聞二儀有像顯覆載以含生四時無形潛寒暑以化物是以窺天鑑地庸愚皆識其端明陰洞陽賢哲罕窮其數然而天地苞乎陰陽而易識者以其有像也陰陽處乎天地而難窮以其無形也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況乎佛道崇虛乘幽控寂弘濟萬品典御十方擧威靈而無上抑神力而無下大之則彌於宇宙細之則攝於毫氂無滅無生歷千劫而不古若隱若顯運百福而長今妙道凝玄遵之莫知其際法流湛寂挹之莫測其源故知蠢蠢凡愚區區庸鄙投其旨趣能無疑惑者哉然則大教之興基乎西土騰漢庭而皎夢照東域而流慈昔者分形分迹之時言未馳而成化當常現常之世民仰德而知遵及乎晦影歸眞遷儀越世金容掩色不鏡三千之光麗像開圖空端四八之相於是微言廣被拯含類於三途遺訓遐宣導群生於十地然而眞教難仰莫能一其旨歸曲學易遵邪正於焉紛糾所以空有之論或習俗而是非大小之乘乍沿時而隆替有玄奘法師者法門領袖也懷貞敏早悟三空之心長契神情先苞四忍之行松風水月未足比其淸華仙露明珠詎能方其朗潤故以智通無累神測未形超六塵而迥出隻千古而無對凝心內境悲正法之陵遲拪慮玄門慨深文之訛謬思欲分條析理廣彼前聞截僞續眞開茲後學是以翹心淨土往遊西域乘危遠邁杖策孤征積雪晨飛途閒失地驚砂夕起空外迷天萬里山川撥煙霞而進影百重寒暑躡霜雨而前蹤誠重勞輕求深願達周遊西宇十有七年窮歷道邦詢求正教雙林八水味道飡風鹿苑鷲峯瞻奇仰異承至言於先聖受眞教於上賢探賾妙門精窮奧業一乘五律之道馳驟於心田八藏三篋之文波濤於口海爰自所歷之國摠將三藏要文凡六百五十七部譯布中夏宣揚勝引慈雲於西極注法雨於東陲教缺而復全蒼生罪而還福濕火宅之乾焰共拔迷途朗愛水之昏波臻彼岸是知惡因業墜善以緣昇墜之端惟人所託譬夫桂生高嶺露方得泫其花蓮出淥波飛塵不能污其葉非蓮性自潔而桂質本貞由所附者高則微物不能累所憑者則濁類不能霑夫以卉木無知資善而成善況乎人倫有識不緣慶而求慶方冀茲經流施將日月而無斯福遐敷與乾坤而永大皇帝前在東宮日述 聖記夫顯揚正教非智無以廣其文崇闡微言非賢莫能定其旨蓋眞如聖教諸法之玄宗衆經之軌躅也綜括宏遠奧旨遐深極空有之精微體生滅之機要詞茂道曠尋之者不究其文顯義幽履之者莫測其際故知聖慈所被業無善而不臻妙化所敷緣無惡而不翦開法網之綱紀弘六度之正教拯群有之塗炭啓三藏之秘扃是以名無翼而長飛道無根而永固道名流慶歷遂古而鎭常赴感應身經歷劫而不朽晨鍾夕梵交二音於鷲峯慧日法流轉雙輪於鹿苑排空寶蓋接翔雲而共飛莊野春林與天花而合彩伏惟皇帝陛下上玄資福垂拱而治八荒德被黔黎斂衽而朝萬國恩加朽骨石室歸貝葉之文澤及昆蟲金匱流梵說之偈遂使阿耨達水通神甸之八川耆闍崛山接嵩華之翠嶺竊以法性凝寂靡歸心而不通智地玄奧感懇誠而遂顯豈謂重昏之夜燭慧炬之光火宅之朝降法雨之澤於是百川異流同會於海萬區分義摠成乎實豈與湯武挍其優劣堯舜比其聖德者哉玄奘法師者夙懷聰令志夷簡神淸齠齔之年體拔浮華之凝情定室匿迹幽巖拪息三禪遊十地超六塵之境獨步迦維會一乘之旨隨機化物以中華之無質印度之眞文遠涉恒河終其滿字豋雪嶺更獲半珠問道往還十有七備通釋典利物爲心以貞觀十九年二月六日勅於弘福寺翻譯聖教要文凡六百五十七部引大海之法流洗塵勞而不竭傳智燈之長焰皎幽闇而恒明自非久植勝緣何以顯楊斯旨所謂法相常住齊三光之明我皇福臻同二儀之固伏見御製衆經論序照古騰今理含金石之聲文抱風雲之潤治輒以輕塵嶽墜露添流略擧大綱以爲斯記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一五百大阿羅漢等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阿毘達磨發智大毘婆沙論序誰造此論佛世尊所以者何一切種所知法性甚深微妙非佛世尊一切智者誰能究竟等覺開示此中誰問誰荅或有說者尊者舍利子問佛世尊荅復有說者五百阿羅漢問佛世尊荅有作是說諸天神佛世尊荅有餘師說化苾芻問世尊荅所以者何諸佛法爾所知法於諸世閒定應開示然無問者世尊化作苾芻形容端正衆所樂剃除鬚髮服僧伽胝令彼請問世尊荅猶如徵問義品因緣若爾此論何故傳言尊者迦多衍尼子造由彼尊者受持演說廣令流布故此論名稱歸彼然是佛說復有說此論卽彼尊者迦多衍尼子造豈不前言以一切種所知法性甚深微妙非佛世尊一切智者誰能究竟等覺開示云何彼尊者能造此論耶以彼尊者亦有微妙甚深猛利善巧覺慧善知諸法自相共相通達文義及前後際善解三藏離三界染就三明具六神通及八解脫得無㝵獲妙願智曾於過去五百佛所修梵行發弘誓願我於未來釋迦牟尼佛般涅槃後造阿毘達磨故如是一切如來應正等覺弟子衆中爾皆有二大論師任持正法若在世如尊者舍利子若般涅槃後如尊者迦多衍尼子故彼尊者以願智力觀法所益而造此論若爾佛說阿毘達磨何者是耶世尊在世於處處方邑爲諸有情以種種論道分別演說阿毘達磨佛涅槃後或在世時諸聖弟子以妙願智隨順纂集爲部類是故尊者迦多衍尼子佛去世後亦以妙願智隨順纂集造發智謂於佛說諸論道中安立章門摽擧略頌造別納息制摠薀名謂集種種異相論道制爲雜薀集結論道制爲結薀集智論道制爲智薀集業論道制爲業薀集大種論道制爲大種薀集根論道制爲根薀集定論道制爲定薀集見論道制爲見薀猶如一切鄔拖南頌皆是佛說謂佛世尊於處處方邑爲種種有情隨宜宣說佛去世後大德法救展轉得聞隨順纂集制立品名謂集無常頌立爲無常品乃至集梵志頌立爲梵志品此亦如阿毘達磨本是佛說亦是尊者隨順纂集又若佛說若弟子說不違法世尊皆許苾芻受持故彼尊者展轉得聞或願智力觀察纂集爲令正法久住世故制造此論復次諸佛出世皆說三藏謂素怛纜毘柰耶阿毘達磨如是三藏有何差或有說者無有差別所以者何切佛教從一智海之所生故隨一覺池之所出故等力無畏所攝受故一大悲所等起故復有說者亦有差且名卽差別謂此名素怛纜此名毘柰耶此名阿毘達磨復次依處亦有差別謂若依增上心論道是素怛若依增上戒論道是毘柰耶若依增上慧論道是阿毘達磨於一切一切可得謂素怛纜中亦有依增上戒增上慧論道毘柰耶中亦有依增上心增上慧論道阿毘達磨中有依增上心增上戒論道如是三藏應無差別依增勝說謂素怛纜中依增上心論道增勝毘柰耶中依增上戒論道增勝阿毘達磨中依增上慧論道增勝有作是說素怛纜中增上心論道是素怛纜依增上戒論卽毘柰耶依增上慧論道卽阿毘達磨毘柰耶中依增上戒論道是毘柰耶依增上心論道卽素怛纜依增上慧論道卽阿毘達磨阿毘達磨中依增上慧論道是阿毘達磨依增上心論道卽素怛纜依增上戒論道毘柰耶故由依處亦有差別復次顯亦有差別謂素怛纜次第所顯素怛纜中應求次第何故世尊此品無閒宣說彼品若毘柰耶緣起所顯謂毘柰耶中應求緣起世尊依何緣制立彼彼學處阿毘達磨性相所謂阿毘達磨中應求諸法眞實性不應求彼次第緣起或前或後無緣起俱無過失復次等流亦有差謂素怛纜是力等流毘柰耶是大悲等流阿毘達磨是無畏等流復次所說亦有差別謂種種雜說是素怛說諸學處是毘柰耶分別諸法自相共相是阿毘達磨復次所爲亦有差別謂未種善根者令種善根故說素怛纜已種善根者令相續成熟故說毘柰耶相續已熟者令得正解脫故說阿毘達磨復次分位亦有差別謂依始業位素怛纜依已串習位說毘柰耶依超作意位說阿毘達磨復次進趣亦有差別謂未入正法入正法故說素怛纜已入正法令受持學處故說毘柰耶已受持學處通達諸法眞實相故說阿毘達磨故三藏亦有差別何故尊者造此論耶爲饒益他謂彼尊者作是思惟云何當令諸有情類於佛聖教無倒受持精進籌量觀察由此無量煩惱惡行現在前便得悟入甚深法性故造斯譬如有人爲饒益他故於黑闇處然大明燈令有目者見種種色尊者亦爾爲饒益他於佛滅後制造此論令有智者入深法性又如諸佛爲饒益他開示演說十二分教一契經應頌三記別四諷頌五自說六緣起七譬喩八本事九本生十方廣十一希法十二論議所以者何諸有情類雖有因力若無緣力而覺發者終不能修勝進之行要遇緣力乃能修行譬如池中雖有種種嗢鉢羅等衆妙蓮華若日月光不照觸者則不開發出種種香要日月光之所照觸乃得隨類開發出香又如闇中有種種物若無燈照終不可見要假燈照乃得見之有情亦爾雖有因力若無緣力廣說如前如有頌言譬如闇室中 雖有種種物 無燈闇所隱有目不能見 如是雖有智 不從他聞法是人終不能 分別善惡義 譬如有目者因燈見衆色 有智依多聞 能別善惡義多聞能知法 多聞離不善 多聞捨無義多聞得涅槃又如經說有二因緣能生正見一外聞他法音二內如理作意又契經說有四法人多有所作一親近善友從他聞法三如理作意四法隨法行復有經言若我弟子一心屬耳聽聞正法能斷五蓋及能修行七覺分滿故如諸佛爲饒益他說十二分教是彼尊者爲饒益他制造此論復次爲破無明闇故如燈破闇能發光明阿毘達磨亦復如是破無明闇發智慧明故彼尊者制造此論復次爲顯無我像故譬如鏡面極善磨瑩種種色像皆於中現阿毘達磨亦復如是分別諸法自相共相令無我像分明顯現故彼尊者制造此論復次爲度生死河故如牢舩筏百千衆生依之無畏從河此岸渡至彼岸阿毘達磨亦復如是無數諸佛及諸有情依之無畏從生死此岸至涅槃彼岸故尊者制造此論復次爲照契經等故如人執燈入諸闇室能見衆色而無迷亂如是行者以阿毘達磨照契經等義而無迷惑故彼尊者制造此論復次爲觀察善等諸法故如別寶人能善觀察金剛等寶阿毘達磨亦復如是能善分別善等諸法故彼尊者制造此論復次爲顯阿毘達磨諸大論師不傾動故如妙高山踞金輪上一切猛風搖鼓飄擊不能傾動阿毘達磨諸大論師亦復如是住淨尸羅諸惡見者輕毀邪論不能摧伏故尊者制造此論復次尊者以三因緣制造此論一爲增益智故二爲開覺意故三爲遮計我故增益智者謂於內外諸經論中令智增益無有能如阿毘達磨開覺意者謂諸有情無明所昏如睡未覺不能了知何者是遍何者非遍行何者自界緣何者他界緣何者有漏緣何者無漏緣何者有爲緣何者無爲緣云何爲攝云何相應云何因云何緣誰成就誰不成何者順前句何者順後句何者四何者如是句何者不如是句於如是等所知境中令諸有情開發覺意無有能如阿毘達磨遮計我者尊者所造阿毘達磨未曾說有補特伽羅恒顯諸行空無有我以如是等種種因緣故彼尊者制造此論阿毘達磨自性云何無漏慧根以爲自性一界一處一薀所攝一界謂法界一處者謂法處一薀者行薀若兼相應及取隨轉三界二處五薀所攝三界者謂意界法界意識二處者謂意處法處五薀者謂色薀乃至識薀如契經說此藥叉天於長夜中其心質直無有諂誑諸有所皆爲了知不爲嬈亂我以甚深阿毘達磨恣彼意問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無漏慧根又契經說此筏蹉氏及善賢外道幷梵壽婆羅門皆於長夜其性質直諂無誑諸有所問皆爲了知不爲嬈我以甚深阿毘達磨恣彼意問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無漏慧根又如佛告西你迦言我有甚深阿毘達磨難見難覺不可尋思非尋思境唯有微妙聰睿智者乃能知之非汝淺智之所能及所以者何汝於長夜異見異忍異欲異樂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空無我及如實覺所以者何以彼外道恒妄計我空無我性非彼所及又如佛告鄔陁夷言汝是愚夫盲無慧目云何乃與上座苾芻共論甚深阿毘達磨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滅定退及如實覺又如佛告阿難陁言我有甚深阿毘達磨謂諸緣起難見難覺不可尋思非尋思境唯有微妙聰睿智者乃能知之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因緣性及如實覺又契經說我有甚深阿毘達磨謂緣性緣起此處甚深難見難不可尋思非尋思境唯有微妙聰睿智者乃能知之復有甚深阿毘達謂一切依皆永捨離愛盡離染滅涅槃此最甚深難見難覺廣說如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因緣性及彼寂滅幷如實覺又如佛告阿難陁言復有甚深阿毘達磨謂有餘法相似甚深我於其中自覺正說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諸見趣及如實覺又契經說我有甚深阿毘達謂一切法甚深故難見難見故甚此中何者甚深阿毘達磨謂一切法性及如實覺雖此等經中隨別意作種種異說然阿毘達磨勝義自唯無漏慧根卽由此故發起世閒修所成慧謂煖世第一法以能別觀四聖諦故亦得名爲阿毘達磨又由此故發起殊勝思所成慧謂不淨觀持息念等以能別摠觀諸薀故亦得名爲阿毘達磨又由此故發起殊勝聞所成慧分別諸法自相共相建立諸法自相共相害實物愚及所緣愚以於諸法不增減故亦得名爲阿毘達磨又由此故發起殊勝生處得慧以於三藏十二分教能受能持思量觀察不謬轉故亦得名爲阿毘達磨復由如是資糧攝持無漏慧轉得明盛是故亦名阿毘達磨若阿毘達磨唯無漏慧根爲自性者何故此論復名阿毘達磨阿毘達磨具故亦名阿毘達磨如處處經中於彼彼具立彼彼名此亦如是謂如於樂具立以樂名如伽他說食所乞食樂 衣隨得衣樂 經行山林樂棲隱巖窟樂飮食衣等體實非樂勝義樂者謂諸樂受或有說者亦輕安樂然衣食等是樂具故於伽他中亦說爲樂又如於垢具立以垢名如伽他說女是梵行垢 女損害衆生 苦梵行所淨非由水能洗女實非垢勝義垢者謂貪然伽他中說女爲垢是垢具故又如於漏立以漏名如說七漏是損害是燒是苦惱根等實非漏是漏具故以漏名勝義漏唯三謂欲漏有漏無明漏又如於隨眠具立隨眠名如契經說苾芻當知色是隨眠隨增隨死若隨增卽隨死若隨死卽隨取若隨取卽隨縛非隨眠勝義隨眠唯有七種然經說色是隨眠者隨眠具故又如於味具立以味名如契經說芻當知眼味妙色色是魔鉤眼實非勝義味者謂所生愛然契經說味色者是味具故又如於欲具立以欲名如契經說欲者是何謂五妙欲如頌言如是五妙欲 可愛可欣樂 可意欲所牽能令心染著色等非欲勝義欲者謂於彼愛然經頌說彼是欲者是欲具故又如於退立以退名如契經說有五因緣時解脫阿羅漢退一營事業二樂戲三和諍訟四好遠行五遇長病營事等是能退體勝義退者謂一切不善有覆無記法然契經中說營事等是能退者謂退具故又如於業具立以業名如契經說有三種意故思惡不善業若作增長感非愛異熟貪欲瞋恚邪見非貪欲等是實意業勝義意業謂意俱思然契經中名意業者謂是不善意業具故又如於異熟因具立異熟因名如彼尊者無滅所說我由一食異熟因故七生天上七生人中於最後身得盡諸漏非卽一食是異熟因勝義異熟因者謂諸不善善有漏法然彼尊者卽說一食爲異熟因是彼具故如於此等處處經中以彼彼名說彼彼具此論亦爾是阿毘達磨具故亦名阿毘達磨是勝義阿毘達磨自性唯是無漏慧一界一處一薀所攝若兼相應取隨轉三界二處五薀所攝餘資糧等皆是世俗阿毘達磨是名阿毘達磨自性如說自性我物自體相分本性知亦爾已說自性所以今當說以何義故阿毘達磨阿毘達磨諸論師言於諸法相能善決擇能極決擇故名阿毘達磨復次於諸法性能善覺察能善通達故名阿毘達磨復次能於諸法現觀作證故名阿毘達磨復次法性甚深能盡原底故名阿毘達磨復次聖慧眼由此淸淨故名阿毘達磨能善顯發幽隱法性故名阿毘達所知法性無始幽隱離此無有能顯發故復次所說法性無有乖違故名阿毘達磨若有能於阿毘達磨自共相極善串習必無有能如法問令於法性有少違故復次能伏一切外道他論故名阿毘達磨阿毘達磨諸大論師邪徒異學無能敵故者世友作如是說常能決擇契經#等中諸法性相故名阿毘達磨復次十二支緣起法性善覺了故名阿毘達磨復次以能現觀四聖諦法故阿毘達磨復次善說修習八聖道法名阿毘達磨復次能證涅槃故阿毘達磨復次能於諸法以無量門數數分別故名阿毘達磨大德說曰於雜染淸淨繫縛解脫流轉還滅法以名身句身文身次第結集安布分別故名阿毘達磨脅尊者言此是究竟慧此是決斷慧此是勝義慧此是不謬慧故名阿毘達磨尊者妙音作如是說求解脫者修正行時能爲分別所未了義謂此是苦此是苦因是苦滅此是趣滅道此是加行道是無閒道此是解脫道此是勝進道此是向道此是得果能正分別如是等義故名阿毘達磨法密部說此法增上故名阿毘達磨如有頌言慧於世閒尊 能決擇趣向 以正了知故老死盡無餘化地部說慧能照法故名阿毘達磨如契經說一切照中我說慧照最爲上首譬喩者說於諸法中涅槃最上此法次彼故名阿毘達磨聲論者言阿謂除棄毘謂決擇此法能除棄擇故名阿毘達磨何所除棄謂結縛隨眠隨煩惱纏何所決擇謂薀緣起諦食及沙門果菩提分等尊者佛護作如是說阿毘者是助言顯現前義此法能引一切善法謂諸覺分皆現在前故名阿毘達磨尊者覺天作如是說阿毘者是助言顯增上義如增上慢者名阿毘慢增上覺者阿毘覺增上老者名阿毘老此亦如此法增上故名阿毘達磨尊者老受作如是說阿毘助言顯恭敬義恭敬稽首者名阿毘稽首恭敬供養名阿毘供養此亦如是此法尊重可恭敬故名阿毘達磨何故此論名發智耶諸勝義智皆從此發爲初基故名發智復次此論應名智安足處諸勝義智此爲根本依此而是故名爲智安足處復次諸勇健此最能發發勇智緣故名發智諸智彼岸依此能到故名發智發諸法自相共相無有能如此論者復次出世智皆依此發智之妙故名發智此論勝利其相云何隨順解脫斷除繫縛順空無我違我我所顯無我理遮數取趣開覺意息昏迷遣愚生智慧斷疑網與決定背雜染淸淨訶流轉讚還滅捨生死得涅槃摧破一切外道邪論成立一切佛法正論此論勝利其相如是說一切有部發智大毘婆沙論卷第一顯慶元年七月二十七日於長安大慈恩寺翻經院三藏法師玄奘奉 詔譯弘法寺沙門嘉尚筆受大慈恩寺沙門明珠證義大慈恩寺沙門惠貴證義大慈恩寺沙門法祥證義 西明寺沙門慧景證義大慈恩寺沙門神泰證義大慈恩寺沙門普賢證義大慈恩寺沙門善樂證義大慈恩寺沙門拪玄綴文大慈恩寺沙門靜邁綴文 西明寺沙門慧立綴文 西明寺沙門玄則綴文大慈恩寺沙門義襃正字大慈恩寺沙門玄應正字西明寺沙門神察執筆大慈恩寺沙門辯通執筆同州魏伐寺沙門海藏筆受大慈恩寺沙門神昉筆受西明寺沙門嘉尚筆受大慈恩寺沙門大乘光筆受夫物情斯感資于教悟大聖貽則啓疑徒而先匠譯辰篾爾無紀爰使後學積滯疑懷今故具書以彰來信傳寫之儔與余同志庶幾彌劫永無惑焉大唐中大夫內侍護軍佛弟子觀自敬寫西域新翻經論願畢此餘生道心不退庶以流通未聞之所竊以佛日西沈正法玄謝慧流東漸像教方傳希世之符奧義宣於貝葉非常之寶至賾發於龍宮挹其沖源截暴河而遐逝遊其玄閫出朽宅而長驅玄奘法師者釋門之龍象振旦之鶖逾蔥山而勵學齎梵文而旋止靑甫就永事流通士方涯多幸預聞正法植因或爽稟質不全今罄茲寸祿繕斯奧旨片言隻字具經心目蒙口決庶無乖舛以斯福祉奉福太宗文皇帝卽御 皇帝王公卿士六姻親族凡厥黎庶及跂行喘息等熏修乘此勝基方升正覺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총서(總序)의 처음으로서 먼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연원과 그 정리자(整理者)가 누구인가 논구하는 부분이다. 대개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은 다 같이 불설(佛說)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불설아비달마론』의 전래에 관해서 아비달마 논사(論師)의 의제(議題)가 된다. 이 논이 귀결(歸結)되는 아비달마의 내용은 물론 불설이나 이 아비달마를 정리한 부처님의 제자인 논사들 중에 『발지론(發智論)』의 저자인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는 가장 우수한 정리자이며 거기에 정리된 『발지론』은 참으로 불설의 진의(眞意)를 대표한 것이라고 논단(論斷)하는 이가 많다.
  2. 2)범어 saṁghāṭī의 음역어이다. 세 개의 승려 옷 중에 대의(大衣)이고, 승가리(僧伽梨) 또는 가사(袈裟)라고도 한다.
  3. 3)범어 Kātyāyanīputra의 음역어이다. 가전연자(迦栴延子) 또는 가전연니자(迦氈延尼子)라고도 한다.
  4. 4)여기서는 발지 본론(發智本論)의 조직(組織)을 밝힌 것으로서 『발지론』은 통틀어 8온(蘊)으로 성립되고 각 온은 다시 여러 납식(納息:varga 品)으로 나누어져 있다. 온은 편(篇)에 해당하고 납식은 장(章)에 해당한다. 8온이라 함은, 첫째는 잡온(雜蘊:8納息이 있다)이요, 둘째는 결온(結蘊:4納息이 있다)이며, 셋째는 지온(智蘊:5納息이 있다)이요, 넷째는 업온(業蘊:5納息이 있다)이며, 다섯째는 대종온(大種蘊:4納息이 있다)이요, 여섯째는 근온(根蘊:7納息이 있다)이며, 일곱째는 정온(定蘊:5納息이 있다)이요, 여덟째는 견온(見蘊:6納息이 있다)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은 실로 이 8편 44품(品)에 걸쳐서 이를 글자에 따라 해석하고 그 사이에 갖가지 의론(議論)을 곁들인 것이므로 적어도 이 8온의 순서를 늘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본론의 진전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리라 믿는다.
  5. 5)범어 udāna의 음역어이다. 섭송(攝頌)이라 한역하는데, 경ㆍ율ㆍ논을 말한 후 또는 말하는 데 있어서 뜻 또는 제목을 하나로 정리하여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6. 6)경ㆍ율ㆍ논의 내용을 밝혀서 삼자(三者)의 관계를 논하고 특히 아비달마 논장(論藏)이 뛰어난 까닭을 밝히려 하는 문단(文段)이다.
  7. 7)범어 sūtra의 음역어로써 경(經)을 말한다.
  8. 8)범어 vinaya의 음역어로써 율(律)을 말한다.
  9. 9)인(因)으로부터 과(果)를 유출할 때에 원인과 결과[因果]가 서로 닮은 것을 말한다.
  10. 10)경문(經文)은 사람들의 소질에 들어맞고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계경(契經)이라 한역한다.
  11. 11)범어 utpala의 음역어로써 청연화(靑蓮花)를 말한다.
  12. 12)묘고산왕(妙高山王)이라고도 하는데, 수미산(須彌山:Sumeru)을 말한다.
  13. 13)범어 śila의 음역어로써 계(戒)를 말한다.
  14. 14)범어 pudgala의 음역어이고 실체로써 상정된 아(我)를 말한다.
  15. 15)아비달마는 이런 형식 위에서 된 것이므로 삼장 성전(聖典)의 일종이지만 그 임무로 하는 요점[要]은 진지(眞智)의 개발(開發)에 있다. 따라서 아바달마의 내용은 진지[淨慧]에 있으므로 무루(無漏)의 진지를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이 『대비바사론』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지 즉 무루의 혜근(慧根)을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의 분류에서 보면 5온 중에서는 행온(行蘊)의 일부분이고 12처에서는 법처(法處)의 일부분이며 18계의 설(說)에서 보면 법계(法界)의 일부분이 점(占)하고 있다. 여기서 1계ㆍ1처ㆍ1온이 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지칭한다.
  16. 16)범어 Vatsagotra의 음역어이다.
  17. 17)범어 Śreṇika의 음역어이다.
  18. 18)범어 Udayī의 음역어이다.
  19. 19)견루(見漏)ㆍ수루(修漏)ㆍ근루(根漏)ㆍ악루(惡漏)ㆍ친근루(親近漏)ㆍ수루(受漏)ㆍ염루(念漏)이다.
  20. 20)수면(隨眠)은 번뇌가 표면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잠재적인 상태를 말한다. 7수면은 욕탐(欲貪)ㆍ유탐(有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의(疑)이다.
  21. 21)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5경을 말한다.
  22. 22)무멸(無滅) 존자는 구역(舊譯)에 아니로두(阿泥盧頭)라고 하는 분이며 부처님 제자 Aniruddha를 한역(漢譯)으로 음사한 것이다.
  23. 23)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rma)는 아비(abhi)라 하는 접두사(接頭辭)와 달마(dharma)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성어(成語)로 불교 특유의 술어(述語)이다. 구역에서는 무비법(無比法)이라 하고 신역(新譯)에서는 대법(對法)이라 한다. 다 같이 진실을 말하나 그 글자 뜻은 갖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아비달마의 논사들 사이에는 갖가지 이론(異論)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서는 그 일을 밝히려 하는 문단이다.
  24. 24)대비바사론 중에 갖가지 문제를 논구(論究)하면서 이름으로 직접 불리는 논사가 적지 않으니 역자가 헤아려 본 숫자만 해도 약 20여 인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협(脅, Pārśva)과 세우(世友, Vasumitra)와 각천(覺天, Buddhadeva)과 법구(法救, Dharmatrāta)와 묘음(妙音, Ghoṣa)이며 특히 이 네 사람은 유부(有部)의 사대 논사라고 한다. 다만 이 분들이 『비바사론』을 편집한 장소에 실제로 입회했는지의 여부는 많은 의문이 있다.
  25. 25)대덕(大德, Bhadanta)는 번역하면 존자(尊者)라는 뜻이다. 『비바사론』 중에서는 자주자주 이 사람의 의견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가는 확연하지 않다. 구역(舊譯)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는 바단다(婆檀多, Bhadanta)라고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이 불타제바(佛陀提婆) 곧 각천(覺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덕이 각천 존자의 이명(異名)인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하나의 과제이다.
  26. 26)경부(經部)의 일파(一派)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