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납식⑩ 어떤 다른 논사는 “색법(色法)에 비록 동류인(同類因)이 있으나 이 몸에 있고 다른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비슷하면 인(因)이 되고 비슷하지 않으면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謁羅藍位)1)는 이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位)를 위해서 연(緣)은 되지만 인(因)은 아니며, 나아가 이 몸의 노위(老位)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해서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위와 위[位位]의 안의 처음의 색[初色]에는 원인이 없고 나중의 색[後色]에는 결과가 없게 된다.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 있고 다른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된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 몸의 알부담위(頞部曇位)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니며, 나아가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앞의 모든 위(位)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갈라람위에서 처음의 색에는 원인이 없고 노위에서 나중의 색에는 결과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하면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으면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과 다른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으며, 이 몸의 노위는 이 몸과 다른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되지만 앞의 위[前位]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이 몸의 알부담위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알부담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은 아니며,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앞의 모든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되지만 이 몸의 앞의 위[前位]를 위하여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이 몸의 알부담위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이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은 아니다. 나아가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이 몸의 앞의 모든 위를 위하여 연은 되나 인은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다른 몸의 10위(位)의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몸의 10위와 이 몸의 10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 몸의 10위의 하나하나는 모두 이 몸의 10위와 다른 몸의 10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니, 나중 위[後位]에 이미 생긴 법은 앞의 위[前位]에 생기지 않은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바깥 부분[外分]의 모든 색을 서로 바라보면서 동류인이 되는 것도 이런 도리대로 말해야 한다. 또 선(善)의 5온(蘊)2)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고 오염된[汚染] 5온도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며 무부무기(無覆無記)의 5온도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는 것이니 성품의 종류가 똑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色蘊)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무부무기의 색온은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못하니 세력이 하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색온은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나니 뛰어난 법은 하열한 법의 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고 무부무기의 색온도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나니 세용(勢用)도 하열하고 종류도 각각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부무기의 4온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무부무기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숙생(異熟生)이요, 둘째는 위의로(威儀路)며, 셋째는 공교처(工巧處)요, 넷째는 통과품(通果品)이다. 차례대로 4ㆍ3ㆍ2ㆍ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네 가지는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는 것이니 동일한 계박(繫縛)이요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행선(加行善)은 서로가 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앞의 설명[前說]을 옳다고 하겠다. 오염된 법[汚染法]에는 9품(品)이 있다. 하하(下下)ㆍ하중(下中)ㆍ하상(下上)ㆍ중하(中下)ㆍ중중(中中)ㆍ중상(中上)ㆍ상하(上下)ㆍ상중(上中)ㆍ상상(上上)이다. 이 9품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것에 9품이 있는가?
답 대치(對治)에 9품이 있기 때문에 오염된 법에도 9품이 있다. 하하의 도(道)를 닦아서 상상의 번뇌를 대치하며 나아가 상상의 도를 닦아서 하하의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다. 또 현행(現行) 때문에 역시 9품이 있다. 모든 번뇌가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 그것은 하하품이기도 하고 혹은 그것이 상상품이기도 하다. 모든 불선(不善)도 이숙(異熟)을 말미암아 9품이 있는 까닭으로 9품을 건립한다. 선법(善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득선(生得善)이요, 둘째는 가행선(加行善)이다. 생득선은 생득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가행선은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만 생득선을 위하여 동류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 선법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동일한 계박이면서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가행(加行)을 닦으면서 하열한 법에 물러나지 말라. 이 때문에 앞의 설명[前說]은 도리로 보아 옳다 하겠다. 어떤 이는 “선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선(加行善)이요, 둘째는 이염선(離染善)이며, 셋째는 생득선(生得善)이다. 여기에서 생득선은 세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염선은 두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생득선은 동류인이 아니니 이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가행선은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그 밖의 나머지 두 가지는 동류인이 아니니 이것은 다 같이 하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생득선의 법에는 다시 9품(品)이 있으니 하하(下下)에서 상상(上上)까지이다. 이 9품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문】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9품이 있는가? 【답】현행(現行)에 9품이 있기 때문이며 또 이숙(異熟)에도 9품이 있기 때문이다. 이염선과 가행선에도 다 같이 9품이 있으니 하하에서 상상까지이다. 이 가운데서 하하는 9품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하중은 8품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나아가 상상은 오직 상상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等]과 더 뛰어난 것[勝]을 위하여 인이 될 뿐이며 하열한 법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가행선의 법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소성(聞所成)이요, 둘째는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는 수소성(修所成)이다. 문소성의 선(善)3)은 세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사소성의 선은 오직 사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문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열하기 때문이며 수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세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선은 오직 수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면서 문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열하기 때문이요, 사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 또한 하열하기 때문이며 세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선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난(緩)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범(世第一法)이다. 차례대로 4ㆍ3ㆍ2ㆍ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는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욕계의 통과심(通果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초정려의 과(果)에서 제4 정려의 과까지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차례대로 4ㆍ3ㆍ2ㆍ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어떤 이는 “이 네 가지가 서로 인이 되는 것이 아니니 정려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네 가지는 차츰차츰 인이 된다. 동일한 계박이면서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처음 설명[初說]이 옳다고 하겠다. 동일한 자리[地]이기 때문이요 가행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초정려 등의 모든 통과심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초정려에는 모든 식신(識身)이 있고 변화심(變化心)이 있는데 서로가 인이 되는가? 【답】모든 식신은 변화심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변화심은 식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앞의 모든 뜻에 의거하여 마땅히 문답(問答)을 만들어야 한다. 【문】혹시 앞에 생긴 법[前生法]이 뒤에 생긴 법[後生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세계[界]가 같지 않은 것이다. 【문】혹시 같은 세계에서 앞에 생긴 법이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자리[地]가 같지 않은 것이다. 【문】혹시 같은 자리에서 앞에 생긴 법이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유루(有漏)는 무루(無漏)에 대해서요, 무루는 유루에 대해서다. 【문】혹시 유루의 앞에 생긴 법이 유루의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부(部)가 같지 않거나 혹은 성품이 같지 않거나 혹은 뛰어난 것이 하열한 것에 대해서이니 앞에 생긴 무루가 뒤에 생긴 무루에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뛰어나고 하열한 것에 대한 관계이다. 【문】모든 동류인이 만일 과를 주는[與果] 것이면 역시 과를 취하는[取果] 것인가? 【답】만일 과를 주는 것이면 반드시 과도 취하는 것이다. 만일 과를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과를 주겠는가? 어떤 것은 과를 취해도 과를 주지 않는 것이 있다. 아라한의 최후의 모든 온(蘊)이니 이것은 총체적인 설명[總說]이다. 만일 따로따로 설명[別說]하면 선(善)과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에 의거하여 많은 4구(句)가 있다. 【문】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마다 역시 과를 주는가? 【답】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선근을 끊을[斷善根] 때의 최후에 버리게 되는 득(得)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근이 계속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선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선근을 끊지 않는 그 밖의 지위[位]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것에서 제외한 것들이다. 【문】불선의 동류인은 만일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최후에 버리게 되는 득(得)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욕염을 여읜 데서부터 물러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불선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그 밖의 지위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유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비상비비상처의 염(染)을 여읠 때에 최후에 버리게 된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읜 데서부터 물러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유부무기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아직 비상비비상처의 여의지 못한 때의 그 밖의 지위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무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과를 줄 때 반드시 과를 취하지만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기도 한다. 아라한의 최후의 모든 온이다.4) 이미 성취(成就)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였으므로 이제는 현행(現行)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또 이미 상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차별을 분별했으므로 이제는 상응하는 법[相應法]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문】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5) 선한 마음의 무간(無間)에 불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불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선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間]하는 선의 마음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선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問斷)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불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불선의 마음의 무간에 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불선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던 불선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불선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유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유부무기의 마음의 무간(無間)에 선이나 불선이나 무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이나 불선이나 무부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유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던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유부무기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무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답】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무부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선이나 염오[染汚]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이나 염오의 무간에 무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는 무부무기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무부무기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이미 상속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였으므로 이제는 찰나(刹那)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1찰나의 마음의 뒤에는 20찰나의 마음이 있으면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가운데서는 4구를 만들 수 있다. 우선 선의 동류인의 제1구(句)는 상수(上首) 찰나의 선심(善心)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첫 찰나의 선심의 찰나를 제외한 그 뒤의 19찰나의 선심이다. 제2구는 뒤의 19찰나의 선심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는 상수의 선심이다. 제3구는 곧 상수의 선심이 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첫 찰나의 선심이다. 제4구는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선의 동류인의 4구처럼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의 동류인에 머무는 것에 따른 4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혹시 한 찰나 동안에 동류인을 얻으나 그의 인(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그의 인을 얻으나 동류인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얻고 그의 인도 얻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얻지 못하고 그의 인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위의 사문과(沙門果)에서 물러나 예류과(預流果)에 머무를 때에 이런 4구가 있다. 동류인을 얻으나 그의 인을 얻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첫 찰나의 도류지(道類智)를 얻으나 그의 인을 얻지 못한 것이니 견도(見道)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을 얻으나 동류인을 얻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예류과를 얻으나 과거의 예류의 승과도(勝果道)는 얻지 못한 것이니 예류의 승과도는 예류과로써 인을 삼아 위의 사문과를 위하여 동류인을 짓기 때문이다. 동류인도 얻고 그의 인도 얻는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첫 찰나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찰나에 상속하는 예류과를 얻은 것이다. 동류인도 얻지 못하고 그의 인도 얻지 못한다 함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혹시 한 찰나 동안에 동류인을 아나 그의 소연(所緣)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그의 소연을 아나 동류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알고 그의 소연도 아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알지 못하고 그의 소연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있다. 견도의 도법지(道法智)에 머무를 때에 이런 4구가 있다. 동류인을 아나 그의 소연을 알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고(苦)ㆍ집(集)ㆍ멸(減)을 반연하는 삼법지품(三法智品)을 아는 것이다. 그의 소연을 아나 그의 동류인을 알지 못한다 함은 미래의 사법지품을 아는 것이다. 동류인도 알고 그의 소연도 안다 함은 과거의 도법인품(道法忍品)을 아는 것이다. 동류인도 알지 못하고 그의 소연도 알지 못한다 함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들이다. 【문】동류인의 힘[力]에는 더하거나[增] 덜함[減]이 있는가? 【답】있다. 만일 오래도록 닦아 익히면 인의 힘이 곧 더하는 것이요, 만일 오래도록 닦아 익히지 않으면 혹은 손해(損害)를 만날 때에 인의 힘은 곧 줄어진다. 우선 불선(不善) 가운데서 인의 힘이 더한 것은 마치 구수(具壽) 미지가(迷祗迦)가 일찍이 숲 속에 있으면서 정려를 닦아 익힐 때에 한 나무 아래에 앉았더니 욕심(欲尋)이 나타나 일어나므로 마음에 싫증을 내면서 곧 그곳을 버리고 다른 나무 아래에 가 앉았더니 에심(恚尋)이 다시 일어나므로 마음에 싫증을 내면서 다시 그곳을 버리고 다시 다른 나무 아래에 가 앉았더니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났다고 한 것과 같다. 그 구수는 일찍이 이 땅에서 큰 나라의 왕이었을 적에 이곳에서 5락(樂)을 스스로 즐기며 모든 욕락(欲樂)을 받았던 곳이라 이제 그곳에 앉자마자 욕심을 일으킨 것이요, 또 이곳에서 중생들의 머리ㆍ귀ㆍ손ㆍ발을 베고 잘랐으므로 이제 그곳에 이르자마자 에심을 일으킨 것이며, 또 이곳에서 중생들을 마구 부리면서 모든 일을 시켰고 속박하고 매를 쳤었음으로 이제 그곳에 이르자마자 해심을 일으킨 것이다. 아난(阿難) 존자가 성(城)에 들어가 걸식할 적에 마등가(厚登伽) 여인이 보고 벌써 탐(貪)을 내면서 따라다니며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이 여인은 과거 오백생(五百生) 동안에 아난의 아내로 있었기 때문이니 이제 잠시 보고서도 욕심(欲尋)을 일으켜 쫓아다니며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과거의 인의 힘의 증상(增上)을 말미암아서요, 혹은 현제 익힌 모든 번뇌의 인의 힘의 증상으로 같은 종류나 다른 종류가 차츰차츰 서로 생기는 것이 있다. 불선의 법에서처럼 선ㆍ무기의 법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시발라(尸拔羅)가 오래도록 보시[施]를 익혔기 때문에 갓 태어나자마자 그의 부모에게 “지금 이 집 안에는 어떠한 재보(財寶)들이 있습니까? 저는 가져다 온갖 빈궁한 이들에게 보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이와 같은 것들의 자세한 것은 경에서의 말씀과 같다. 【문】동류인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과거ㆍ현재의 온갖 유위의 법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무엇 때문에 동류인이라 하는가? 동류(同類)란 무슨 뜻인가? 【답】종류(種類)가 같다[等]는 뜻이 동류의 뜻이요, 계지[界地]가 같다는 뜻이 동류의 뜻이며, 부류(部類)가 같다는 뜻이 동류의 뜻이다. 이 동류인을 오직 과거와 현재의 두 세상에만 통할 뿐이며 등류과(等流果)가 있다.
【論】어떤 것이 변행인(遍行因)6)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正理]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온갖 번뇌는 모두 변행(遍行)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번뇌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非遍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5부(部)의 번뇌에는 모두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오직 견고(見苦)와 견집(見執)에서 끊을 번뇌에만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견고와 견집에서 끊을 온갖 번뇌는 모두가 변행이요, 견멸(見滅)과 견도(見道)에서 끊을 온갖 번뇌는 모두가 무루의 연[無漏緣]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번뇌에도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번뇌에도 유루의 연[有漏緣]7)이 있고 무루의 연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모든 번뇌가 삼계(三界)에 통하는 것이면 모두 변행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번뇌가 삼계에 통하는 것에도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또 어떤 이는 “변행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명(無明)이요, 둘째는 유애(有愛)이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연기(緣起)의 근본을 변행이라 한다. 무명은 전제(前際)의 연기의 근본이요, 유애는 후제(後際)의 연기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것이 변행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유애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모든 번뇌로서 5부(部)에 통하는 것을 변행이라 한다. 이것은 무명과 탐(貪)ㆍ진(瞋)ㆍ만(慢)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지만 탐ㆍ진ㆍ만에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닐 뿐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다섯 가지 법은 변행이다. 무명과 애(愛)와 견(見)과 만과 심(心)이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송으로 말한다.
다섯 가지의 변행 법이 있어서 모든 괴로움을 널리 내나니 이를테면 무명과 애와 견과 만과 심 이 다섯 가지이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과 견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닐 뿐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등의 갖가지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어떤 것이 변행인인가? 【답】앞에서 생긴[前生]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뒤에 생긴[後生] 자기 세계[自界]의 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ㆍ수도에서 끊어야 할[修所斷] 수면과 상응하는 법[相應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고, 과거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미래와 현재의 자기 세계의 견집ㆍ견멸ㆍ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현재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미래의 자기 세계의 견집ㆍ견멸ㆍ견도ㆍ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 견고에서 끊을 것처럼 견집에서 끊을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것을 변행인이라 한다.
【문】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앞에서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라는 말에 이미 그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무슨 연유로 ‘과거’라는 자기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가? 【답】뒤의 법은 앞의 인(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어떤 이는 ‘과거의 뒤의 법도 앞의 법의 인이 되는가?’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이므로 만일 “앞에서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런 의심은 곧 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은 과거에 앞뒤의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혹은 ‘과거의 모든 법은 동시에 차츰차츰 변행인이 되는가?’라고 의심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나 만일 ‘앞에서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런 의심은 쉬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자기 부[自部]는 자기 부에 대하여 변행인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한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만일 없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부[他部]에 대해서는 있는데 자기 부에서는 없는가? 【답】역시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역시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따로의 의취(意趣)가 있어서이며 이루어지지 않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서 변행인이 있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해야 할 필요가 없고 만일 다른 부에서 변행인이 있다 하면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뒤섞임이 없는[無雜] 변행인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인이 있다. 변행인과 동류인이다. 그 뜻이 뒤섞여 어지럽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나 다른 부의 변행인은 오직 하나만이라 뜻이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또 뒤섞임이 없는 증장의 문[增長門]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서는 두 개의 문의 증장이 있다. 동류인의 문과 변행인의 문이다. 그 뜻이 뒤섞이고 어지럽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나 다른 부는 오직 변행인의 하나의 증장의 문만이라 뜻에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다.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라고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앞에 생긴 것[前生] 등은 수면만을 말하면서 뒤에 생긴 것[後生] 등은 겸하여 상응하는 법까지 말하는가? 【답】앞에서 생긴 것 등에서도 상응하는 법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상사상속(相似相續) 사문의 뜻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는 “변행의 수면은 오직 수면을 위해서만 변행인이 되고 그것의 상응하는 법은 오직 수면의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그의 뜻을 막고 변행의 수면은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그의 상응하는 법은 수면의 상응하는 법과 수면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문】변행의 수면은 모든 수면과 구유법(俱有法) 등에서도 변행인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역시 변행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가? 만일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상응법에서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구유법 등에서는 그렇지 않는가? 【답】역시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온갖 오염된 법[汚染法]을 위해서 모두가 변행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그의 상응법은 그의 수면과 동일한 소연(所緣)이요 동일한 행상(行相)이어서 극히 서로 가깝다. 이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만 생기는 것[生] 등은 그렇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자기 세계[自界]라 함은 욕계는 오직 욕계를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색계와 무색계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세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리[自利]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니 계박(繫縛)이 따로이기 때문이다. 초정려는 오직 초정려만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리 안에서는 처(處)도 따로요, 부(部)도 따로이면서 역시 차츰차츰 변행이 될 수 있음은 계박이 같기 때문이다. 또 ‘과거’ 등을 말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체(體)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요, 현재는 바로 유위(有爲)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을 말하는 것처럼 견집에서 끊을 것도 그러하니 체의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문】변행의 수면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욕계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견고에서 끊어야 할 다섯 가지 견해[五見]8)와 의(疑)와 무명(無明)과 견집에서 끊을 사견(邪見)과 견취(見趣)와 의와 무명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있어서도 각각 열한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무명이라 함은 다섯 가지 견해와 의와 상응하는 것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98수면9) 중의 33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견고ㆍ견집에서 끊어야 할 무명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서는 33은 변행이고 65는 변행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답】서방(西方) 존자가 외고 있는 책[本]에 “98의 수면 중에서 27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며 6은 분별해야 한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무명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다. 어떤 것이 변행인가?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지 않는 무명이다. 어떤 것이 변행이 아닌가?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뜻에서는 좋다 하겠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어떤 것이 변행인가?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과 상응하는 수면이어서 곧 불공무명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 말을 뜻에서는 좋다고 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가습미라국(迦濕漏羅國)의 모든 논사는 이렇게 외고 있지 않는가? 【답】역시 이렇게 외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따로의 의취가 있어서이니 그의 대부분은 변행이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에는 열 가지 무명이 있다. 일곱 가지는 변행이니 곧 다섯 가지 견해와 의(疑)와 상응하는 것과 불공무명이요, 세 가지는 변행이 아니니 곧 탐(貪)ㆍ진(瞋)ㆍ만(慢)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견집에서 끊을 것에는 일곱 가지의 무명이 있다. 네 가지는 변행이니 곧 두 가지의 견해[二見]와 의에 상응하는 것과 그리고 불공무명이요, 세 가지는 변행이 아닌 것이니 곧 탐ㆍ진ㆍ만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또 이 나라에서 외우고 있는 33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란 것에서의 무명은 모두가 불공무명이어서 오직 변행이냐 변행이 아니냐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自力]으로 일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상응무명(相應無明)에는 73이 있다. 27의 변행과 56의 변행이 아닌 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의 힘[他力]에 따라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곧 또한 그 성품은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무엇 때문에 변행의 수면[遍行隨眠]이라 하는가? 변행이란 무슨 뜻인가? 【답】온갖 것을 반연한다[一切緣]는 뜻이 변행의 뜻이요, 반연하는 힘을 지닌다[緣力持]는 뜻이 변행의 뜻이다. 반연하는 힘을 지닌다고 함은 널리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본래의 온갖 것[一切]이 온갖 것[一切]에 온갖 것[一切]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처음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갖추어진 9품(品)을 일으킨 것을 말하고, 중간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온갖 유정들은 모두 일으키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나중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온갖 유루(有漏)의 일을 두루 반연하면서 일으켰기 때문이다. 『시설론(施設論)』에서 “어떤 이생(異生)도 오랜 세상으로부터 유루의 법에 대하여 나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내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단(斷)ㆍ상(常)을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없다고 부정하기도 하며 혹은 청정[淨]하고 해탈(解說)하며 벗어난다[出雜]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높고 뛰어나며 제일이라고 고집하기도 하며 혹은 의혹과 망설임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어리석음과 어두움과 무지(無知)를 일으키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본래의 온갖 것이 온갖 것에 온갖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또 법이 한 찰나 동안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5부(部)를 반연하고 5부의 인(因)이 되면서 5부의 법으로 하여금 소연(所緣)에 대하여 어리석게 하므로 변행이라 한다. 【문】변행의 수면은 어떻게 하여 그 무루의 연[無漏緣]의 법으로 하여금 소연에 대하여 어리석게 하는가? 【답】만일 나 등을 집착하면 법이 으레 그러하여 곧 나의 멸(滅)과 대치(對治)를 비방하면서 먼저 그 안에서 어리석어지며 그런 뒤에는 그것에 대하여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 법이 한 찰나 동안에 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5부를 반연하고 5부의 인이 되면서 5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므로 변행이라고 한다. 【문】변행 수면의 상응하는 법[相應法]과 구유의 법[俱有法]도 변행인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역시 변행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만 33만이 변행이라 하는가? 만일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상응과 구유의 법에는 변행인도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도 있다 하는가? 【답】어떤 이는 “그것은 변행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상응과 구유의 법에는 변행인도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도 있다 하는가? 【답】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에는 수면(隆眠)이 있고 수면 아닌 것이 있는 것처럼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에 변행인이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다하여 다시 허물이 있겠는가? 【評】“그것도 변행인이니 인(因)이라는 뜻이 통하기 때문이며 상응(相應)과 구유(俱有)는 동일한 과(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33만이 변행이라고 말하는가? 【답】그 말[說]은 다만 98수면 중에는 몇 가지가 변행이고 몇 가지가 변행이 아닌가의 것만을 분별하려고 할 뿐이어서 통틀어 변행인의 뜻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난 것은 아니다. 또 변행의 수면은 세 가지의 일[三事]을 갖추었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첫째는 5부(部)의 법에 대하여 두루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5부의 법에 대하여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5부의 법에 대하여 두루 인(因)이 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저 상응하는 법에서는 다만 두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이니 두루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것은 제외된다. 저 구유의 법에서는 다만 한 가지 일인 두루 인이 된다는 것만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문】변행의 수면 등의 득(得)도 변행인인가? 【답】승가벌소(僧伽筏蘇) 존자가 “만일 변행의 득이 변행이 아니라면 변행이 아닌 것의 득은 마땅히 변행이어야 하리니, 때문에 변행의 득도 변행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힐난[難]은 도리가 아니다. 물질[色]의 득이 물질이 아닌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非色]의 득이 어찌 물질이겠는가? 그러므로 ‘변행의 득은 변행인이 아니다’라는 것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 하겠다. 【문】무엇 때문에 변행의 생김[生] 등의 모든 모양은 변행인이면서 그의 득(得)은 아닌 것인가? 【답】생김 등의 모든 모양은 변행의 법과는 동일한 결과이어서 언제나 서로가 따르고 서로 여의지 않으며 앞뒤도 없으면서 극히 친근하기 때문에 또한 그것은 변행인이지만 득과 변행은 동일한 결과도 아니요 언제나 서로가 따르지도 않으며 서로가 여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앞이 되기도 하고 혹은 뒤가 되기도 하면서 극히 친근하지 않은 것은 마치 껍질이 나무에 대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그 득은 변행인이 아니다. 【문】무엇 때문에 오직 견고(見苦)ㆍ견집(見集)에서 끊을 법에서만 변행의 수면이 있다고 세우면서 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서 끊을 법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은가? 【답】구(舊) 아비달마 논사가 “이것은 그 족류(族類)이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모든 법은 변행 수면의 족성(族姓)이요, 근본(根本)이며 태어난 땅이요, 집이지만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모든 법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 수면은 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모두가 동일한 뜻[意]이요, 동일한 일을 하고[所作] 있기 때문에 지극히 견고하며 견고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만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법은 동일한 뜻도 아니요,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하열하며 지극히 하열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 마치 성읍(城邑)의 사람들이 만일 동일한 뜻으로 동일한 일을 하면 성읍의 주(主)나 그 밖의 다른 원수나 적이 감히 항복시킬 수 없지만 만일 그 여러 사람들이 동일한 뜻이 되지 못하고 하는 일도 각각 다르다면 항복하게 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 아견(我見)을 멋대로 가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일 아견이 있으면 유루의 법이 상속하면서 치성하므로 변행을 세워야 한다. 견집에서 끊을 것은 비록 아견은 없다 하더라도 아견의 모든 법을 자라게 하는 것이 있으나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법 안에는 이러한 일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루의 인과(因果)의 일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다 같이 유루의 인과의 일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에 변행을 세우게 되나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소연(所緣)에 대하여 반드시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모두 유루를 반연하며 유루를 반연함에 따라 점차로 더욱 자라게 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달을 볼 적에 눈[眼根]을 더욱 더 뜨면서 보는 것과 같다. 또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수면은 혹은 유루를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무루를 반연하기도 하되 무루를 반연할 때 어떤 소연에 따라 점차로 줄어지게[損滅] 되는 것은 마치 사람이 해를 볼 적에 눈을 덜 뜨면서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는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두 가지의 수면[二種隨眠]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다 같이 두 가지 문을 말미암아 수면의 일을 짓는다. 첫째는 소연(所緣)을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상응(相應)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견멸과 견도에서 끊을 수면은 두 가지 문을 말미암아 수면의 일을 짓기도 하고 상응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변행의 수면을 건립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안에서는 결정되어 두 발[二足]을 안정하게 디디기 때문이니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부(部)에는 모두 두 가지의 도[二種道]가 있기 때문이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부(部) 안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부 안에는 유루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이 있기 때문에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온갖 수면은 모두가 이 둘[二]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면의 온갖 것은 모두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가 속한 곳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오직 여기서만이 변행의 수면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견고ㆍ견집이면 유루의 과[有漏果]의 인(因)이지만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모든 법의 근본은 연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그것에는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책망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변행 수면은 반드시 두루 반연할 수 있으나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법 안에서는 두루 반연하는 것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탐(貪)ㆍ진(瞋)ㆍ만(慢)은 변행이 아닌가? 【답】그것에는 모두 변행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변행이란 온갖 것을 반연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세 가지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이는 “이 세 가지는 자상(自相)의 번뇌에 속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공상(共相)의 번뇌에 속한 것이라야 변행을 세울 수 있다. 어떻게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자상의 번뇌에 속하는가? 탐(貪)을 일으킨 이는 혹은 저 몸에 대해서 하면 이 몸에 대해서는 하지 못하고 이 몸에 대해서 하면 저 몸에 대해서는 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모든 몸의 부분에서도 저마다 다른 것이니, 진ㆍ만을 일으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상이다. 유신견(有身見) 등은 한 찰나 동안에 통틀어 한 세계[一界]나 한 갈래[一趣]에 나는 것[生] 등에 대하여 나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내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또 나아가 어리석고 어둡고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그것은 공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주 왕성하기[識盛]가 어렵기 때문이다. 탐ㆍ진ㆍ만은 아주 왕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니 반드시 아내나 재물이나 원수나 낮은 이나 적(敵)에 의거하여야 비로소 왕성하게 되기 때문이며, 변행 수면은 아주 왕성하기 쉬워서 저절로 상속하는 것이 강물이 흐르듯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견(見)ㆍ의(疑)ㆍ무명(無明)은 네 가지 진리[四諦]를 반연하게 되어 그 안에서는 변행 수면을 세울 수 있으나 탐ㆍ진ㆍ만의 세 가지는 이러한 일이 없다. 이 때문에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탐ㆍ진ㆍ만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는 무루의 연이 아닌가? 【답】책망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요, 원만하고 해치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기 때문이요,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며, 청정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탐 등은 무루의 연이 아니다. 욕계에는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다. 아홉은 다른 세계[他界]의 반연에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세계[自界]의 반연일 뿐이니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이다. 【문】무엇 때문에 이 두 견해는 다른 세계를 반연하지 않는가? 【답】오직 그러한 경계를 반연할 힘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견해는 오직 거친 법[麤法]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두 견해는 오직 거칠게 나타나서 실제로 보이는 모든 온(蘊)에 대해서만 나와 내 것을 집착하며 단(斷)과 상(常)을 헤아리거니와 만일 욕계에 태어나면 색계와 무색계의 미세한 모든 온에 대하여는 실제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다. 【문】만일 그렇다면 색계에 나는 이는 욕계의 거칠게 나타나는 모든 온을 실제로 보면서도 어째서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가? 【답】이미 염(染)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색계에 나는 이는 욕계의 온에 대하여 이미 염을 여의었기 때문에 비록 실제로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다. 또 상지(上地)의 번뇌는 하지(下地)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하지를 반연하지 않는가? 【답】이미 그곳의 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미 하지의 염을 여읜 이라야 비로소 상지의 번뇌가 앞에 나타나는데 하지의 법에 대하여 이미 염을 여의었거늘 상지의 번뇌가 어찌 다시 그것을 반연하겠는가. 【문】어떻게 반드시 하지의 염을 여의어야 상지의 번뇌가 비로소 앞에 나타나는 줄을 아는가? 【답】『시설론(施設論)』에서 “6종의 비율의(非律儀)가 있다. 삼계계(三界繫)에 각각 두 가지씩이 있으니, 첫째는 상응하는 것[相應]이요, 둘째는 상응하지 않는 것[不相應]이다. 욕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여섯 가지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네 가지의 비율의도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욕계의 두 가지와 색계ㆍ무색계에서 각각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색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네 가지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세 가지의 비율의도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색계의 두 가지와 무색계의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무색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두 가지의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역시 앞에도 나타나는 것이니, 무색계의 두 가지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염의 법[染法]을 비율의라 한다. 이를 말미암아 반드시 하지의 염을 여읜 상지의 번뇌라야 비로소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무엇 때문에 욕계의 번뇌는 색계ㆍ무색계는 반연하게 되는데 그 두 세계의 번뇌는 욕계를 반연하지 못하는 것인가? 【답】욕계는 정계(定界)가 되지 못하고 수지(修地)도 아니며 이염지(離染地)도 아니어서 자기 세계의 수면을 조복할 수 없기 때문에 초월하여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수 없으나 색계와 무색계는 정계요 수지요 이염지이므로 자기 세계의 번뇌를 잘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초월하여 하지를 반연할 수가 있다. 마치 사람이 처첩(妻妾)을 조복하지 못하면 곧 다른 이와 함께 비법(非法)의 일을 저지를 수 있으나 만일 잘 조복하면 나아가 눈으로 뒤도 돌아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비법을 저지르겠는가?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욕계에 나는 이는 위의 두 세계의 모든 온(蘊)에 대하여 망설이면서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이 아닌가? 그것은 쌓임[集]인가? 쌓임이 아닌가? 그것은 제일인가? 제일이 아닌가? 그것은 청정한가? 청정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욕계의 번뇌는 위의 세계를 반연하게 된다. 만일 상지에 태어나면 하지의 모든 온에 대하여 이미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망설이는 일이 없는 것이니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하지를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가 욕계를 반연하게 된다면 마땅히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해야 하며 만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면 세계는 뒤섞이고 어지럽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니 거기의 번뇌는 욕계를 반연하지 않는다. 【문】욕계의 번뇌가 비록 상계(上界)를 반연한다 하더라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상계의 번뇌는 무엇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가? 【답】상계의 온(蘊)은 뛰어나므로 욕계의 번뇌가 비록 그것을 반연하며 일으킨다 하더라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욕계의 온은 하열하므로 상계의 번뇌가 만일 이것을 반연하여 일으킨다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할 것이다. 하천하고 못난 사람은 높고 훌륭한 이를 비록 실제로 보게 된다 하더라도 손해를 끼칠 수 없지만 만일 높고 뛰어난 이가 하천하고 못난 사람을 보면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색계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어서 아홉은 다른 세계의 반연에도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세계에서만이 반연할 뿐이다. 무색계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세계에만 반연하고 다른 세계에 반연함이 없음은 상계가 없기 때문이요, 하계(下界)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시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능히 반연한다[能緣]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 일으킨다[現起]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評】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상계(上界)로서 반연해야 한다는 것이 없거늘 어떻게 능히 반연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고 하겠다. 초정려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는 모두가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어서 아홉은 다른 자리[他地]의 반연에도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자리[自地]에만 반연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자리만을 반연할 뿐이니 상지가 없기 때문이요, 하지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시 다른 자리를 반연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능히 반연한다는 것은 정해 있지만 실제로 일으킨다는 것은 정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評】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상지로서 반연해야 한다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능히 반연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이 도리로 보아 옳다고 하겠다.
1)태내오위(胎內五位)가 있다. 어머니 태에 들어서부터 출생할 때까지의 266일 간을 5위(位)로 나눈 것이다. ①갈라람위(羯羅藍位, Kalalaṃ)이니 응활(凝滑)ㆍ화합(和合)이라 번역하며 태에 들어간 지 첫 7일 간이다. ②알부담위(額部曇位, Arbudaṃ)이니 포결(皰結)ㆍ포(泡)라 번역하며 둘째 7일 간이다. ③폐시위(閉尸位, Peśī)이니 육단(肉團)ㆍ혈육(血肉)이라 번역하며 셋째 7일 간이다. ④건남위(鍵南位, Ghanaḥ)이니 견육(堅肉)이라 번역하며 넷째의 7일 간이다. ⑤발라사카위(鉢羅奢佉位, Praśākhā)이니 지절(支節)이라 번역하며 다섯째의 7일부터 출생할 때까지이다. 다시 태외오위(胎外五位)가 있다. 사람의 일생을 5위로 나눈 것이다. ①영해위(嬰孩位)이니 출생에서부터 6세까지이다. ②동자위(童子位)이니 7세로부터 I5세까지이다. ③소년위(少年位)이니 16세로부터 30세까지이다. ④성년위(盛年位)이니 31세로부터 40세까지이다. ⑤노년위(老年位)이니 41세 이후를 말한다.
2)5온(蘊) 중의 색온(色蘊)에도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이 있되 무표색(無表色)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3)문ㆍ사소성(開思所成)의 선(善)은 욕계수(欲界修)이지만 수소성(修所成)의 선은 색계수(色界修)이므로 세계를 달리한다.
4)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은 착한 마음에도 나쁜 마음에도 성인의 마음에도 모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과(果)를 주면 반드시 과를 취하나 다만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의 마음에서만은 모든 온(蘊)이 소멸하기 때문에 과를 취하는 것만이 있을 뿐 과를 주는 일은 없다.
5)선심(善心)은 전위(前位)의 선심의 결과인 점에서는 취과(取果)하나 후위(後位)에 있어서 스스로가 성질을 달리하는 불선(不善)이나 무기(無記)의 마음을 내는 점에서는 여과(與果)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에 반하여 불선 또는 무기의 마음에 이어 일어나는 선심은 과거의 선심으로부터 등류(等流)인 점에서 과거의 선심의 여과이지만 과거의 선심은 과거에 이미 취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취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6)변행인(遍行因)은 오로지 번뇌의 등기(等起)관계를 밝힌 것이어서 견혹(見惑) 중 특히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하의 11종을 변행혹(遍行惑)이라 한다. 곧 욕계에 나아가서 말하면 고제를 반연하는 번뇌에 10종[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이 있고 집제를 반연하는 번뇌에 7종(탐ㆍ진ㆍ치ㆍ만ㆍ의ㆍ사견ㆍ견취견]이 있는 중에서 특히 7견(見)[고제 하의 오견과 집제 하의 2견]과 3의[고제ㆍ집제 하의 의(疑)]와 두 무명[고제ㆍ집제 하의 치(癡)]의 11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위의 두 세계[上二界]에도 있는 것이므로 삼계의 것을 합하면 33종이 된다. 이들 11종의 번뇌는 유독 자부(自部)의 번뇌만이 아니고 4제(諦)ㆍ수도(修道)의 5부(部)에도 미치어 온갖 번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을 변행이라 한다. 또 이 11종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遍執見)을 제외한 나머지 9종은 상계(上界)에도 반연하는 것이어서 9상연(上緣)의 혹(惑)이라고 일컫는다. 이 문단에서는 먼저 이 변행혹에 관한 일반적인 의의를 밝히고 있다.
7)5부(部)의 수면(隨眠)의 대부분은 유루(有漏)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나 그 중에는 무루(無漏)의 법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을 무루연(無漏緣)의 혹(惑)이라 한다. 곧 멸제(滅諦)를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邪見)ㆍ의(疑)ㆍ무명(無明)과 도제(道諦)를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ㆍ의ㆍ무명이 이 6종이다. 대개 이것들은 멸ㆍ도에 관한 미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6무루연의 혹 또는 친미(親迷)의 혹이라고도 한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비록 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서 끊을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으로 멸ㆍ도를 반연한 것이 아니면서 위의 무루연의 혹을 반연하는 것이면 이것을 유루연(有漏緣)의 혹 또는 중미(重迷)라고 한다.
8)견고(見苦)에서 끊을 다섯 가지 견해[五見]라 함은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다섯 가지 견해이다.
9)98수면(隋眠)은 98사(使)라고도 하며 삼계(三界)에 걸쳐 사제(諦)ㆍ수도(修道)의 5부(部)에 관한 번뇌의 총칭이다. 98이라 함은 온갖 번뇌의 근본인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遍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10수면을 삼계(三界) 5부(部)에 배당한 것이다. 곧 욕계의 고제(苦諦) 아래 10종과 집제(集諦)ㆍ멸제(滅諦) 아래 각기 7종[10수면에서 신견ㆍ변견ㆍ계금취견을 제함]과 도제 아래 8종[10수면에서 신견 변견을 제함]과 욕계의 수도 아래 4종[탐ㆍ진ㆍ만ㆍ의]을 합하여 욕계에 36종이 있고 색계ㆍ무색계에는 진(瞋)이 없으므로 5부에서 이를 제하면 각 31종이 있다. 그러므로 욕계 36종과 색계 31종과 무색계 31종을 합하면 98종이 된다. 이 98수면은 곧 견혹(見惑) 88종과 수혹(修惑) 10종을 합한 것이다. 이 중에서 삼계에 각각 10종의 변행(遍行)이 있으므로 변행혹(遍行惑)은 33종이며 나머지 65종은 비변행혹(非遍行惑)이라는 것이 『품류족론(品類足論)』의 설(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