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6_0332_c_01L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8) 사납식 ③
【論】마치 계경에서 “만일 욕심(欲尋)과 에심(恚尋)과 해심(害尋)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다음처럼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삼보리(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적에 혹은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일으켰었다.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하지 않으면서 ≺만일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계경에서는 비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금 말해야 되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貪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몸이 피로하다[身勞] 하는 등은 욕심의 등류과(等流果)를 나타내는 것이니 탐(貪)ㆍ진(瞋)ㆍ치(癡) 등은 몰아쳐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피로하게 하는 것이 마치 훨훨 타는 불과 같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태우고 뜨겁게 하며 그을리게 하는 것이다.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받는다는 등은 욕심의 이숙과를 나타내는 것이니 장차 악취(惡趣) 등의 사랑스런 것이 아닌 과[非愛果]를 받기 때문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纏)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남편이 그것을 보고서 마음에 성을 내고[瞋] 분을 내고[忿] 한을 맺고[結恨]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함은 역시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것은 오직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는 허물은 가벼운 것이요 그의 남편에게도 아직은 실제로 욕(辱)이나 해는 끼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겁탈하면 그의 남편이 안 뒤에는 그의 아내에게나 그 사람에 대하여 때리고 포박하며 목숨을 빼앗거나 혹은 재보(財寶)를 빼앗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문】그의 남편이 다른 이를 해치면 역시 고통의 과보를 받을 것이므로 세 사람이 다 해가 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와 남의 두 군데라고만 말하는가?
【답】그 사람은 현세(現世)에서는 죄벌도 받지 않고 도리어 남들의 칭찬을 받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며 또 남편도 다른 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라 한다.

【論】어떻게 에심(恚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瞋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어떻게 에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따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다른 이의 목숨을 끊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둘 다 같이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도둑의 목숨 등을 끊으면 현재에 책망이나 벌도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어떻게 에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해치며 또한 다시 다른 이에게 그의 목숨도 끊어짐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문】해치는 이를 살해하는 것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세 사람을 해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 사람만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다른 이를 살해하는 이를 죽이는 것은 세상이 다 같이 칭찬하게 되고 현재에 죄고를 받는 것도 없기 말하지 않는다.
또 그도 다른 이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論】어떻게 해심(害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害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아니고, 기쁜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아닌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어떻게 해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며 포박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과 남을 다 함께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나쁜 사람을 때리고 포박하는 것은 세상이 다 함께 칭찬하고 현재에 고통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어떻게 해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며 또한 다른 이에게 맞고 포박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답은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욕심(欲尋)은 욕계 5부(部)의 6식신(識身)과 함께하는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고 에심(恚尋)도 5부의 6식신과 함께하는 진(瞋)과 상응하는 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해심(害尋)은 어떤 사람이 “곧 진(瞋)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으니 해치는 것은 곧 성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에심과 해심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진(瞋)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을 때리고 포박하려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恚)라 하고 뒤의 것을 해(害)라고 한다.
또 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땅히 성을 내어야 할 데에 내는 것이요, 둘째는 성을 내지 않아야 할 데에 내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라 하고 뒤의 것을 해라고 한다. 그 두 가지와 상응하는 심(尋)을 에심ㆍ해심이라 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어떤 이는 “해심은 무명(無明)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해는 곧 무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어떤 인연 때문에 어리석음[癡]이 더하는가? 해계(害界)ㆍ해상(害想)ㆍ해심(害尋)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아서이다”라고 말한다.
【評】“따로 심소(心所)가 있으면서 해(害)라 하는 것이요, 진에도 아니고 무명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다. 자성(自性)은 진에로 이끈 것이요 진에의 등류(等流)이며 진에에 따라 뒤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번뇌의 때[煩惱垢]라고 한다.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며 의식(意識)과 상응하며 이것과 상응하는 심은 해심의 자성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착하지 않기 때문에 악심(惡尋)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선심(善尋)이 있다. 첫째는 출리심(出離尋)이요, 둘째는 무에심(無恚尋)이며, 셋째는 무해심(無害尋)이다.
【문】이 세 가지 선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세 가지 악심은 하나하나 따로 일어나고 자성도 각각 다르며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세 가지 선심은 따로 자성도 없고 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세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자성에는 차별이 없어도 뜻에는 차이가 있으니 세 가지 악심의 가까운 대치[近對治]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심은 욕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출리심이라 하고 에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에심이라 하며 해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해심이라 한다. 계경에서 “내가 아직 삼보리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에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放逸)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보살이 그때에 만일 방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히려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세우 존자는 “보살은 비록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선(善)을 힘써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속히 그것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일으켰다 해도 이내 싫어하여 버리고 뱉어버렸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잠깐 동안 일으켰다 하여도 곧 그것의 대치(對治)를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으킨 뒤에는 곧 인(因)을 끊고 의지[依]를 결(缺)하면서 경계의 허물을 분명하게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번뇌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첫째는 인(因)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경계(境界)의 힘이며, 셋째는 가행(加行)의 힘이다. 보살은 이 세 가지 나쁜 심[不善尋]을 일으켰으면서도 다만 인의 힘만을 말미암고 다른 두 가지를 조복하는 것이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은 비록 일으켰다 하더라도 빨리 조복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쇠[鐵] 위에 떨어뜨린 것과 같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일으킨 뒤에는 속히 버리는 것이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했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보살은 어느 곳에서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협 존자는 “인(因)의 힘을 말미암아 처소마다 일으키는 것이므로 수고로이 일으키는 곳이 정해진 것이라고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소경이 넘어지고 어리석은 이가 헷갈리는 것과 같아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거늘 어찌 처소가 정해져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보살은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성(城)을 넘어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無上覺]을 구하실 때에 스승과 벗을 찾아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렀다. 아침나절에 성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백천의 중생들이 에워싸고 우러러보며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마음에 만족할 줄 몰랐다. 보살은 그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욕심(欲尋)을 일으켰으나 대중들이 에워싸서 걸식에 방해가 되어 굶주림의 불에 시달렸으므로 다시 에심(恚尋)을 일으킨 것이며 진심(瞋心)이 잠깐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났으므로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중한 참괴(慚愧)의 마음을 내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보살이 겁비라성(劫比羅城)을 버리고 고요한 숲에 의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실 때에 부왕은 즉시 석씨 종족 다섯 사람을 보내면서 따라다니며 모시게 했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이는 낙행(樂行)이라야 청정함[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처음에 보살이 고행(苦行)을 닦는 것을 보고 그때에 곧 버리고 떠났으며 다시 어떤 이는 고행이라야 청정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뒤에 보살이 고행을 버리는 것을 보고 그 때에도 역시 하직하고 떠났었다.
이때에 난타(難陀)와 난타발라(難陀跋羅)라는 두 범지 여인[梵志女]이 우유죽을 바쳐 올릴 때에 시자(侍者)가 없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머물러 시중을 들다가 여인의 부드러운 손으로 보살을 어루만졌다. 보살은 거기서 욕심(欲尋)을 일으켜 ‘먼저 나의 좌우(左右)가 나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여인이 나를 가까이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드디어 좌우에 대하여 에심(恚尋)을 일으켰으며 진심이 점차로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나자 곧 스스로 깨달으면서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보살이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을 때에 부왕 정반(淨飯)은 그를 위하여 5백의 옥녀(玉女)들에게 장가들어 비빈(妃嬪)을 삼게 하고서 보살을 즐기도록 하며 출가하지 못하게 했었으나 보살은 그것을 버리고 출가하였으므로 여러 왕(王)들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찾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정반왕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이 출가하여 마음이 몹시 괴롭소이다. 그 비빈들을 보는 때만이라도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들을 놓아주어 나라에 돌려보낼 수는 없소.’
여러 왕들은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분해하고 성을 내면서 다 함께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정벌하였으므로 부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어 보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너 때문에 이런 원수들을 맞이하고 있다.’어떤 이는 천신(天神)이 와서 보살에게 말해 주었다고도 말한다.
보살은 이 말을 듣고서 부왕에 대하여 먼저 욕심을 일으켰고 5백의 왕들에게는 에심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에는 그 군사들에게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보살이 출가하여 고행을 닦을 때에 옛날에 받았던 5욕(欲)의 즐거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욕심을 일으켰고 뒤에 천수(天授)가 자기 궁실(宮室)을 문란하게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에심을 일으켰으며 거기에 관계한 이들에 대하여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6년 동안 고행을 닦을 때에 악마가 따라다니며 헤살을 부리면서 때로는 사랑할 만한 색상(色像)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욕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워할 만한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에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업신여기면서 조롱하는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해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잠깐 만에 뉘우치고 깊이 참괴를 일으켰었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보살은 먼저 욕계의 문(聞)ㆍ사(思)로 인해 생긴 두 가지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조복하였고 이 지혜를 사랑한 까닭에 욕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이것은 번뇌이어서 악만을 더한다’라고 깨달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에심을 일으켰고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해심을 일으켰으나 그 뒤에 깨달아 알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이 옛날 보리수 아래 있을 때에 초저녁에 악마의 딸이 와서 아양을 부리며 어지럽혔었다. 그때에 보살은 잠시 동안 욕심을 일으켰었고 한밤중에 악마 군사들이 모두 와서 보살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잠시 동안 에심을 일으켰으며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곧 자정(慈定)에 들어가 악마의 병사들을 꺾어 물리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보살은 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을 일으킨 뒤에 곧 스스로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해치고 다른 이를 해치며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어떻게 보살이 일으킨 욕심ㆍ에심ㆍ해심이 세 군데를 해친다[三害]고 하는 것인가?
【답】비록 해치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그 모양[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악심은 반드시 세 군데를 해치는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自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他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俱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自相續)에 대하여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주기[與果]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모든 시주(施主)로 하여금 비록 4사(事)를 베풀게 한다 하더라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에 대하여 자성의 우치[自性愚]와 소연의 우치[所緣愚]를 내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시주로 하여금 보시를 하게 하여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타상속(他相續)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성현의 즐거움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여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세우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이계과(離繫果)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이계과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 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로 하여금 빨리 증득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빨리 이익을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뜨겁고 괴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할 이의 이익을 잃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쾌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천신(天神)이 책망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나는 처음 성불(成佛)하여 두 가지 심[二尋]을 많이 일으켰으니 안온심(安穩尋)과 원리심(遠離尋)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문】이 두 가지 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안온심은 출리심으로써 자성을 삼고 원리심은 무에(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욕심(欲尋)을 대치(對治)하고 원리심은 에심(恚尋)ㆍ해심(害尋)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무탐(無貪)의 선근과 상응하고 원리심은 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과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을 대치하고 원리심은 진(瞋)ㆍ치(癡)와 상응하는 심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자(慈)ㆍ비(悲)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희(喜)ㆍ사(捨)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고지(苦智)ㆍ집지(集智)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멸지(滅智)ㆍ도지(道智)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공(空)과 고(苦)ㆍ집(集)의 무원(無願) 삼마지(三摩地)2)와 함께하고 원리심은 무상(無相)과 도(道)의 무원 삼마지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유전(流轉)의 허물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을 안온심이라 하고, 환멸(還滅)의 공덕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환멸의 공덕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유전의 허물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意]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그지없는 연민(憐愍)의 의요(意樂)로 일으키는 것을 안온심이라 하고, 그지없는 조선(調善)의 의요로 일으키는 것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무엇 때문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이 두 가지 심(尋)을 일으키셨는가?
【답】이 두 가지 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앞에 나타나는 행(行)이고 청정한 도[淨道]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궁중에 계실 때 받았던 욕락(欲樂)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고 고행을 닦을 때 이익 없던 고통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안온심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자신의 덕[自德]을 경하하기 위하여 안온심을 많이 일으키셨고 다른 이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다.

【論】지혜[智]가 많은가, 경계[境]가 많은가?3)……(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없는 것[無]을 반연하는 지혜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만일 요술로 된 일[幻事]이나 건달바성[建達縛城]이나 횃불을 돌려 생기는 불바퀴[旋火輪]나 녹애(鹿愛:아지랑이) 등을 반연한다면 그 지혜는 모두가 없는 경계[無境]를 반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있는 경계[有境]를 반연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혜가 경계를 반연하지 않은 것이 있고 경계가 지혜의 연(緣)이 아닌 것도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경계를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온갖 경계는 모두가 지혜의 소연(所緣)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외도(外道)는 뒤바뀜[顚倒]이 있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는 서로 틀리다는 것을 드러내며 내도(內道)는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서로 수순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의 경계[一境] 위에는 많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경계가 많고 지혜는 많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지혜가 많은가 경계가 많은가?
【답】경계가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도 경계이기 때문이다.

지혜4)는 오직 1계(界)ㆍ1처(處)와 1온(蘊)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경계는 18계ㆍ12처ㆍ5온에 속한다.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하하품(下下品)의 한 찰나의 수(受)는 욕계의 10지(智)로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아홉 가지의 부동분계(不同分界)의 변행수면(遍行隨眠)과 상응하는 품류의 지혜와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마치 욕계의 10지로 아는 것처럼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비상비비상처는 16지(智)로 아는 것이니 열한 가지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지혜와 수도에 끊을 탐(貪)ㆍ만(慢)ㆍ무명(無明)과 상응하는 지혜와 무부무기와 선의 세속지이다. 이처럼 통틀어 96의 지혜에 무루지(無漏智)를 합하면 97의 지혜가 있어 그 하나의 수(受)를 아는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수와 그 밖의 다른 법에서도 이런 도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지혜는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그의 그런 설명은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의 상응법(相應法)ㆍ구유법(俱有法) 등과 지혜의 자성은 모두가 경계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혜가 경계가 아니라 해도 그 경계는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지혜도 경계이거늘 경계가 많지 않겠는가?
【문】만일 지혜도 경계라면 지혜와 경계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능히 아는 것[能知]은 지혜이고, 알 대상[所知]은 경계이다.
또 지혜는 오직 비색(非色)ㆍ무견(無見)ㆍ무대(無對)ㆍ유위(有爲)ㆍ상응(相應)ㆍ유소의(有所依)ㆍ유소연(有所緣)ㆍ유행상(有行相)이지만 경계는 색(色)과 비색ㆍ유견(有見)과 무견ㆍ유대(有對)와 무대ㆍ유위와 무위(無爲)ㆍ상응과 불상응(不相應)ㆍ유소의와 무소의(無所依)ㆍ유소연과 무소연(無所緣)ㆍ유행상과 무행상(無行相)에 다 통한다.
또 지는 오직 3세(世)와 세 가지 진리[三諦]에 포섭될 뿐이지만 경계는 3세와 비세(非世)에 다 통하고 네 가지 진리[四諦]에 포섭된다. 이런 것 등을 경계와 지혜의 차별이라 한다.

【論】지혜[智]가 많은가, 식(識)이 많은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식과 지혜의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상응하는 것이니 인(忍)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시키고 온갖 지혜는 식과 상응하나 온갖 식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무루의 인[無漏忍]은 지혜의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지혜는 무루일 뿐이요 식은 유루일 뿐이니 서로가 상응하지 않는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다 통하며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지혜가 곧 식이나 분위(分位)가 차별되기 때문에 지혜와 식은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체(體)와 용(用)이 각각 다르므로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지혜가 많은가 식이 많은가?
【답】식이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지혜는 모두 식과 상응하지만 모든 식은 모두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인(忍)과 상응한 식은 지혜와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모든 무루의 인은 무엇 때문에 지혜가 아닌가?
【답】보아야 할 대상인 경계에 대하여 아직은 거듭 관(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날부터 4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무루의 진실한 지혜로써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본다 하더라도 아직 거듭 관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지혜라 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같은 종류의 지혜가 경계에 대하여 거듭 관해야 비로소 지혜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유정(有情)도 온갖 법에 대하여 끝없는 옛날부터 유루의 지혜로써는 자주자주 그것을 관하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유루의 지혜는 모두가 지혜에 포섭된다.
또 인(忍)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미루어 헤아리며 인가(忍可)하면서도 아직 마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또 인은 끊을 대상인 의심[疑]과 함께하게 되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설령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의 종류이다. 유루의 무간도(無間道)는 진실한 대치(對治)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의심과 함께하게 된다 하더라도 지혜이나 무루의 인은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식5)은 7계(界)ㆍ1처(處)ㆍ1온(蘊)에 속하지만 지혜는 오직 1계ㆍ1처와 1온의 일부분에 속할 뿐이니 이 때문에 지혜가 적다.
【論】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6)……(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부처님의 생신(生身)은 무루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실 때에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말미암아 여래의 생신도 무루인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유루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부처님의 생신이 무루라면 부처님의 몸에 대하여 무비(無比) 여인7)은 사랑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지만(指鬘)은 성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며, 오사(傲士)는 만(慢)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오로빈라(隖盧頻螺)는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이미 반연하여 사랑ㆍ진심ㆍ만심ㆍ우치를 일으켰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무루가 아니다.
【문】만일 그렇다면 그 부(部)에서 인용한 계경의 뜻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답】그것은 법신(法身)에 의거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신다”고 말한 것은 생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간에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법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또 수순하지 않는 것에 의거하여 “더럽히지 못한다[不染]”고 말한 것이다. 세간의 8법(法)8)은 세간에 수순하고 모든 유정들도 그것을 순수하기 때문에 더럽힌다[染汚]고 말하지만 세간의 8법은 여래에게 수순하지만 부처님은 그것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또 여래의 생신은 비록 유루라 하더라도 8법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문】이(利) 등 8법은 여래에게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초월한다 하는가? 이(利)는 용장자(勇長者)를 가엾이 여기신 까닭에 하루 동안에 그에게 3억이나 되는 살림과 옷을 받으신 것이요, 쇠(衰)는 저 대바라문촌(大婆羅門村)에 들어가 걸식하셨으나 얻지 못하고 빈 바리로 돌아오신 것이며, 훼(毁)는 전차바라문녀(戰遮婆羅門女)와 손타리(孫陀利)가 부처님을 비방하는 소리가 열여섯 큰 나라에 두루 퍼진 것이요, 예(譽)는 여래께서 탄생하실 때의 소리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사무치고 성불하실 때의 소리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렀으며 법륜(法輪)을 굴릴 때의 소리는 범세(梵世)까지 이른 것이다.
칭(稱)은 발라타사(跋羅墮闍) 범지가 5백의 게송으로써 앞에 나타나 부처님을 찬탄하고, 논력 외도(論力外道)와 오파리(塢波離) 등의 모든 대논사(大論師)가 백천의 게송으로써 우러러보면서 부처님을 찬탄하며, 구수(具壽) 아난이 합장하고 부처님의 모든 희유한 법을 찬탄하고, 사리자 존자는 공경하면서 부처님의 모든 위없는 법을 찬탄한 이와 같은 온갖 것이다.
기(譏)는 발라사타 범지가 먼저 5백의 게송으로 앞에 나타나 부처님께 욕설을 한 것이며, 고(苦)는 여래께서 때로는 등이 아프시고 조약돌이나 독가시에 발가락을 상하는 등의 것이요, 낙(樂)은 여래께서의 가뿐하신 쾌락과 생사하는 동안에 가장 뛰어나게 느낀 즐거움도 있으셨거늘 어찌하여 세존은 세간의 8법을 초월하셨다고 하는가?
【답】여래께서는 비록 이(利)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해도 높은 기쁨이나 사랑을 내지 않으시며 여래께서는 비록 쇠(衰)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하더라도 낮은 근심이나 성을 내시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일컫는 것이요 무루라 하여 더럽히지 않는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마치 묘고산(妙高山)이 금륜(金輪)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팔방에서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도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여 청정한 시라(尸羅)에 머물러 계시므로 세간의 8법으로는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른 종(宗)의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
【답】유루의 행이 많으며 무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루의 행은 10처(處)와 2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루의 행은 오직 2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9)

어떤 이는 “무루의 행이 많고 유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욕계계(欲界繫)의 하하품(下下品)에 속한 한 찰나 동안의 색(色)은 반드시 네 가지 무루의 지혜의 연(緣)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첫째는 고법지인(苦法知忍)이요, 둘째는 고법지(苦法智)이며, 셋째는 집법지인(集法智忍)이요, 넷째는 집법지(集法智)이다. 그 밖의 다른 색과 그 밖의 다른 법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무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무루의 행이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루의 행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의 무루행은 네 가지 유루의 연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는 사견(邪見)이요, 둘째는 의(疑)요, 셋째는 무명(無明)이요, 넷째는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그 밖의 무루의 행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유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유루의 행은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유루ㆍ무루의 행은 비록 모두가 그지없다 해도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우선 처(處)가 속한 곳을 기준으로 하여 유루가 많고 무루의 행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또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의 다소를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뜻에서 보아서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
【문】유위의 법이 많은가, 무위의 법이 많은가?
【답】유위의 법이 많고 무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위의 법은 11처(處)와 1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위의 법은 오직 1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評】“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루의 법에 그 만큼의 체(體)가 있음에 따라 택멸무위(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며 무루의 도(道)에 그 만큼의 체가 있음에 따라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이 밖에도 유루법의 체의 양(量)이 많고 적음에 따라 모든 비택멸과 허공무위(虛空無爲)가 있기 때문에 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앞의 문[前門]에 준하면서 우선 처(處)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무위는 그 수(數)가 적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論】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行圓滿] 하는가?10)……(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시라(尸羅)가 원만하고 등지(等持)가 원만하며 반야(般若)가 원만하고 행(行)이 원만하며 수호[護]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는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행이나 수호가 원만한 것인가에 대한 뜻은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 하는가?
【답】무학(無學)의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이 청정한 것[命淸淨]이다.

【문】학(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게도 율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무학만을 말하는가?
【답】나은 것[勝]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법에 있어서나 보특가라에 있어서나 간에 모두가 무학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율의가 있고 불률의(不律儀)에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 등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무학의 신업(身業)을 몸의 율의라 하고, 무학의 어업(語業)을 말의 율의라 하며, 무학의 신업ㆍ어업을 통틀어서 생활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 곧 정업(正業)과 정어(正語)와 정명(正命)이다.
계경에서는 계(戒)를 혹은 시라(尸羅)라 하기도 하고, 혹은 행(行)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발[足]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자[篋]라 하기도 한다.
시라라는 말은 맑고 시원하다[淸凉]는 뜻이니 악(惡)은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고 괴롭게 하지만 계는 편안하게 하고 쾌적하게 하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악은 악취의 뜨거운 고뇌를 불러오지만 계는 선취(善趣)를 불러오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편안히 잠잔다[安眠]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持戒] 이는 안온한 잠을 자면서 언제나 좋은 꿈을 꾸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자주자주 익힌다[數習]는 뜻이니 언제나 착한 법을 익히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정을 얻는다[得定]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 이는 정을 얻기 쉽기 때문에 시라라 한다.
또 시라라 함은 돌계단[隧蹬:石段]이라는 뜻이니 마치 게송[伽陀]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 법의 못[池]은 맑고 시원하며
시라는 그 돌계단이 되므로
성현이 목욕해도 몸이 젖지 않으며
저 언덕[彼岸]의 공덕에 이르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장엄하는 기구[嚴具]라는 뜻이니 장엄하는 기구는 유년(幼年)에게는 좋지만 장년(壯年)이나 노년(老年)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고, 장엄하는 기구는 장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노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며, 장엄하는 기구는 노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장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지만 시라가 몸을 장엄하는 것은 세 때[三時]에 언제나 좋은 것이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시라는 몸을 장엄하는 기구이어서
유년ㆍ장년ㆍ노년에게 다 함께 마땅하며
믿음[信]에 머무는 지혜[慧]를 진보(珍寶)로 여기니
그 복을 훔칠 수 있는 이는 없다.

또 시라라 함은 밝은 거울[明鏡]이라는 뜻이니 마치 거울이 맑고 깨끗하면 형상이 그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라에 머무르면 무아(無我)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섬돌[階陛]이라는 뜻이니 마치 무멸(無滅) 존자가 “나는 시라의 섬돌을 밟고 위없는 지혜의 전각에 오른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시라라 함은 증상(增上)의 뜻이니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에서 위세(威勢)가 있는 것은 모두가 사라의 힘 때문이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무겁구(無怯懼)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독룡(毒龍)이 있었는데 품성이 포악하여 많은 해독을 끼쳤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하라(毘訶羅)11)가 있었다. 자주 그 용이 괴롭혔으므로 절에 있는 5백 대아라한들이 다 같이 의논을 하고서 정(定)에 들어가 그 용을 쫓아버리려고 하여 그들의 신력(神力)을 다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었다.
마침 어떤 아라한이 외방(外方)에서부터 왔으므로 먼저 있던 그 스님들은 그에게 위의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에 그 외방에서 온 이는 용이 살고 있는 데로 가서 손가락을 튀기면서 “현면(賢面)아, 멀리 떠나가거라”고 하자 용은 그 소리를 듣고 이내 멀리 떠나가 버렸다.
아라한들은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당신은 그 용을 쫓아버렸는데 그것은 어느 정(定)의 힘이었습니까?”
그는 대중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정에 들지도 않았고 신통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라를 지킨 까닭에 이런 힘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벼운 죄를 지키는 것이 마치 중금(重禁)을 방호하듯 하기 때문에 악한 용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시라는 증상의 뜻이 있다.
또 시라라 함은 머리[頭首]라는 뜻이니 마치 머리가 있는 이는 곧 빛깔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접촉을 깨닫고 법을 아는 것처럼 시라가 있는 이는 곧 4성제(聖諦)의 빛깔을 보고 전에 없던 명신(名身) 등의 소리를 들으며 37각분(覺分)의 꽃향기를 맡고 출가하여 멀리 여의는 삼보리(三菩提)의 적정(寂靜)한 맛을 맛보며 정려(靜慮)ㆍ해탈(解脫)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의 접촉을 깨닫고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법을 알기 때문에 시라는 머리라는 뜻이다.
계경에서 “계(戒)를 행(行)이라 한다”고 한 것은 모든 세간에서 계를 행이라 하기 때문이니 모든 세간에서는 계를 지닌 이[持戒者]를 보면 “그는 행이 있다”고 말하고 파계(破戒)한 이를 보면 “그는 행이 없다”고 말한다. 또 청정한 계를 지니는 것은 뭇 행[衆行]의 근본이어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발[足]이라 한다”고 한 것은 선취(善趣)에 나아가고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마치 발이 있는 이는 험악한 데를 피하면서 안온한 데에 이르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소유한 이는 악취를 초월하고 천상이나 인간에 나기도 하며 혹은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발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상자[篋]라 한다”고 한 것은 온갖 공덕의 법을 맡아 지니기 때문이다. 계를 지닌 이는 공덕을 맡아 지니어 물러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치 상자가 보물을 지니는 것과 같다.
묘음 존자는 “계를 파괴하지 않는 것[不壞]이라 한다. 왜냐하면 발이 파괴되지 않으면 자유자재로 안온한 데로 가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갖춘 이도 그와 같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학의 몸과 말의 청정한 계를 행이 원만하다[行圓滿]고 하는 것은 행 가운데서 극치[極]이기 때문이다.

【論】어떤 것이 수호가 원만하다[護圓滿] 하는가?
【답】무학의 근의 율의[根律儀]이다.12)
여기에서 근(根)은 수호할 것[所護]인 줄 알아야 한다. 염혜(念慧)의 힘으로 말미암아 눈[眼] 등의 감관[根]을 수호하여 경계에 대하여 모든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갈고리로 코끼리를 제어하여 멋대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학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원만한 수호라고 하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세간의 모든 폭류(瀑流)를
바른 기억[正念]은 막고 수호하며
만일 마침내 끊어지게 하면
그 공(功)은 바르게 아는 것[正知]일세.

【문】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根不律儀]는 저마다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근의 율의는 정념과 정지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天]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창루(瘡漏)를 열지 않으셔야 합니다.’
비구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것을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다시 말하였다.
‘창루가 작은 것이 아닌데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비구가 대답하였다.
‘나는 정념과 정지로써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근의 율의인 줄 알 수 있다. 덮는다[覆]는 것과 수호한다[護]는 것이 율의이니 뜻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근의 불률의는 앞의 것을 뒤집어서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잊어버리는 것[失念]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이다.
【문】만일 정념과 정지가 근의 율의라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염(念)과 혜(慧)가 원만하기 때문에 근의 율의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찌 자성(自性)이 원만하기 때문에 자성이 원만하다고 말하겠는가?
【답】염혜(念慧)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인의 성품[因性]이요, 둘째는 결과의 성품[果性]이다. 원인의 성품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결과의 성품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득의 선[生得善]이요, 둘째는 가행의 선[加行善]이다. 생득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가행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의 선[不定善]이요, 둘째는 정의 선[定善]이다. 부정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정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선[世間善]이요, 둘째는 출세간의 선[出世間善]이다. 세간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출세간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학(學)이요, 둘째는 무학(無學)이다. 학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무학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둔근의 종성[鈍根種性]이요, 둘째는 이근의 종성[利根種性]이다. 둔근의 종성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이근의 종성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계경과는 서로 어긋나거나 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방일하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근의 율의는 6항주법(恒住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이 대치할 것의 모든 번뇌의 업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根)에 대하여 이미 끊고[已斷] 이미 두루 아는[已遍知] 법이 성취하지 않은 성품[不成就性]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對治道]의 성취한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는 법이 성취하는 성품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의 성취하지 않은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에 대하여 이미 끊고 이미 두루 아는 때에 있게 되는 묘행(妙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할 때에 있게 되는 악행(惡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善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染汚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과 선(善)에 수순하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과 염(染)에 수순하는 무부무기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길상윤(吉祥胤)이라는 비하라(毘訶羅)가 있었다. 거기에는 두 분의 아라한이 머물고 있었는데 모두 3명(明)을 증득하고 8해탈(解脫)을 갖추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다. 그들은 설법하는 법사였고 친형제였으며 아버지 이름은 난제(難提)였고 바라문의 종성이었다. 그들은 다 같이 “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는 모두 무부무기의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의 율의와 불률의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만일 이것이 다 같이 무부무기의 심불상응행온에 속한다면 이 두 가지 자성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염오(染汚)에 수순하는 것을 불률의라 하고 청정(淸淨)에 수순하는 것을 율의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評】이 모든 설명 가운데서는 맨 처음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으니 경에서 염혜(念慧)는 근을 수호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 곧 이 염혜를 어떤 자리에서는 또한 단율의(斷律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자리[位]의 차별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세우는 것이다.
우선 유루(有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대상인 법은 미지지(未至地)로써 욕계를 여의는 유루의 9무간도(無間道) 안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제2 정려의 근분지(近分地)로써 초정려를 여의는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비상비비상처의 근분지로써 무소유처를 여의는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만일 무루(無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미지지로써 욕계를 여의는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미지(未至)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초정려에 의하여 초정려를 여의는 3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제2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3지와 제2 정려로써 제2 정려를 여의는 4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제3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4지와 제3 정려로써 제3 정려를 여의는 5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제4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과 무색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5지와 제4 정려로써 제4 정려 등을 여의는 6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의 법은 앞의 6지와 공무변처로써 공무변처를 여의는 7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7지와 식무변처로써 식무변처를 여의는 8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8지와 무소유처로써 2지(地)를 여의는 9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026_0332_c_01L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四十四 造五百大阿羅漢等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雜蘊第一中思納息第八之三如契經說若起欲尋恚尋害尋或自或害他或俱害乃至廣說何故作此論爲廣分別契經義故謂契經說佛告苾芻我未證得三菩提時或起欲尋恚尋害尋或起出離尋恚尋無害尋雖起欲尋恚尋害尋不放逸便作是念若起欲尋恚尋或自害或害他或俱害契經雖作是說而不分別其義經是此論所依根本彼不說者今應說之故作斯論云何欲尋自害如有一類起貪纏身勞心勞身燒心燒身熱心熱心焦復由此緣當受長夜非愛非喜非悅諸異熟果如是自害身勞等顯欲尋等流果癡等能驅役故令身心勞如熾火故能燒身心令熱令燋當受長夜等顯欲尋異熟果當受惡趣非愛果故云何欲尋害他如有一類起貪纏故觀視他妻彼夫見已心生瞋忿結恨愁惱如是害他觀他妻者亦招苦果名俱害何故說此唯是害他觀視過輕其夫未能現加辱害是故不說云何欲尋俱害如有一類起貪纏污奪他妻彼夫覺已遂於其妻及於其人打縛斷命或奪財寶如是俱彼夫害他亦招苦果應名三害何以稱俱彼人現世不遭罪罰被稱譽是故不說復次夫亦是他故名俱害云何恚尋自害如有一類起瞋纏故身勞心勞身燒心燒身熱心熱身焦心焦復由此緣當受長夜非愛非樂非喜非悅諸異熟果如是自害此中二果如前應知云何恚尋害他如有一類起瞋纏故斷害他如是害他斷他命者亦招苦果應名俱害何故說此唯是害他賊命等現無責罰更被稱譽是故不云何恚尋俱害如有一類起瞋纏故斷害他命亦復被他斷害其命如是俱害殺能害者亦招苦果名三害何以稱俱誅害他者世共稱譽現無罪苦是故不說復次彼亦是他故名俱害云何害尋自害有一類起害纏故身勞心勞身燒身熱心熱身焦心焦復由此緣受長夜非愛非樂非喜非悅諸異熟如是自害此中二果如前應知何害尋害他如有一類起害纏故打縛於他如是害他打縛他者招苦果應名俱害何故說此唯是害打縛惡人世同稱讚現不招苦是故不說云何害尋俱害如有一起害纏故打縛於他亦復被他之所打縛如是俱害此中問荅如前應知此三惡尋以何爲自性欲尋以欲界五部六識身俱貪相應尋爲自恚尋亦以五部六識身俱瞋相應尋爲自性害尋有說卽瞋一分相應尋爲自性害卽瞋故若爾恚尋尋有何差別瞋有二種一欲斷衆生命二欲打縛衆生前名爲恚後名爲害復次瞋有二種一於應瞋處起二於不應瞋處起前名爲恚後名爲彼二相應尋名恚尋害尋故有差有說害尋無明一分相應尋爲自害卽無明故如施設論說何緣故癡增謂於害界害想害尋若習若修若多所作彼相應尋名爲害尋評曰應作是說有別心所說名爲害非瞋非無明非隨眠自性是瞋所引是瞋等流隨瞋後起名煩惱垢唯修所斷意識相應此相應尋是害尋自性三不善故名惡尋復次有三善尋出離尋二無恚尋三無害尋此三善尋以何爲自性皆以一切善心相應尋爲自性謂三惡尋一一別起自性各異非與一切不善心俱此三善尋無別自性皆與一切善心相應若爾此三有何差別自性無別而義有異是三惡尋近對治故謂諸善尋違欲尋故名出離尋違恚尋故名無恚尋違害尋故名無害尋如契經說我未證得三菩提時雖起欲尋恚尋害尋而不放逸菩薩爾時不放逸如何猶起此三惡尋尊者世友作如是說菩薩雖起此三惡尋勤修善名不放逸復次雖起惡尋速能覺知是不善名不放逸復次卽能厭名不放逸復次便能修彼對治名不放逸復次卽能斷因缺依了知境過名不放復次三因緣故煩惱現前一由因二境界力三加行力菩薩起此三不善尋但由因力能伏餘二名不放大德說曰菩薩雖起速能伏除一渧水墮熱鐵上名不放逸脅尊者起已速捨如救頭然名不放逸菩薩何處起三惡尋脅尊者曰因力故隨處而起不勞定責如盲顚愚者昏迷隨至皆然何定處所作是說菩薩棄捨轉輪王位踰城出求無上覺尋訪師友至王舍城日初分入城乞食百千衆生圍遶仰禮拜讚歎心無厭足菩薩於彼起欲尋衆圍遶故妨廢乞食飢火所復起恚尋瞋心漸歇害尋復起臾覺察生重慚愧有餘師說菩薩棄捨劫比羅城依空閑林求無上覺王遂遣釋種五人隨逐侍衛於中執樂行得淨初見菩薩修苦行時便捨去復有執苦行得淨後見菩薩捨苦行時亦復辭去有難陁陁跋羅二梵志女因獻乳糜見無侍遂住供給女手柔軟摩觸菩薩薩於彼便起欲尋卽生念言先吾左不棄我者豈有女人得近於我於左右復起恚尋瞋心稍歇害尋復便自覺悟生大慚愧或有說者薩未出家時父王淨飯爲娉五百玉以爲妃娣娛樂菩薩不令出家薩捨之而出家已諸王遣使索女還淨飯王曰我子出家心甚憂惱其妃娣時用慰懷今者未能放其還諸王聞已各生忿恚共發兵戈相征罰父王憂怖遣告菩薩吾今坐汝致此怨讎有說天神來告菩薩薩聞已於父王所先發欲尋於五百恚尋次起於其軍衆復起害尋時覺察深生慚愧復有說者菩薩出家修苦行時憶昔所受五欲樂事於欲尋後聞天壽亂己宮室復起恚於彼媒媾復起害尋須臾覺悟大慚愧或復有說菩薩六年修苦行惡魔隨逐欲作留難或時示現可愛色像菩薩於彼發起欲尋或時現可畏色像菩薩於彼發起恚尋示現侮弄色像菩薩於彼發起害少時追悔深起慚愧尊者妙音作如是說菩薩先以欲界聞思所生二伏諸煩惱愛此慧故發起欲尋覺悟此是煩惱增惡此故發起恚漸復歇薄發起害尋於後覺知深生慚愧大德說曰菩薩昔居菩提樹初夜魔女來相媚亂爾時菩薩蹔起欲尋中夜魔軍摠來逼惱菩薩於彼蹔起恚尋漸復歇薄復起害尋臾覺察卽入慈定令魔兵衆摧敗墮落如契經說菩薩起此三惡尋已便自了知此能自害害他俱害云何菩薩所起欲尋恚尋害尋能爲三害雖無害用而依相說惡尋必有三害相故復次惡尋起時自利事遠故自害利他事遠故名害他俱利事遠名俱害復次惡尋起時自利事遠名自害利他事壞故名害他俱利事壞故名俱害復次惡尋起時自利心息故名自害利他心息故名害他俱利心息故名俱害復次惡尋起時於自相續取果與果故名自害令諸施主雖施四事而無大果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復次惡尋起時於自相續生自性愚及所緣愚故名自害令他施主施無大果故名害他卽㧾此二名爲俱害復次惡尋起時染自相續故名自害染他相續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復次惡尋起時令自相續離賢聖樂故名自害亦令他離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尊者世友說曰惡尋起時令自相續離繫果遠故名自害令所化者離繫果遠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尊者妙音說曰惡尋起時令自相續勝功德遠故名自害令所化者勝功德遠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大德說曰惡尋起時令一切智一切種智不能速證故名自害令所化者不疾得益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脅尊者曰惡尋起時身心熱惱故名自害失所化益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尊者覺天說曰惡尋起時身心不適故名自害天神訶責故名害他卽摠此二名爲俱害如契經說佛告苾芻我初成佛多起二尋謂安隱尋及遠離尋此二尋以何爲自性安隱尋以出離尋爲自性遠離尋以無恚害尋爲自性說翻此復次安隱尋對治欲尋遠離尋對治恚害尋有說翻此復次安隱尋無貪善根相應遠離尋無瞋癡善根相應有說翻此復次安隱尋對治貪相應尋遠離尋對治瞋癡相應尋有說翻此復次安隱尋慈悲相應離尋喜捨相應有說翻此復次安隱尋苦集智相應遠離尋滅道智相應有說翻此復次安隱尋空及苦集無願三摩地俱遠離尋無相及道無願三摩地俱有說翻此尊者妙音說曰見流轉過失相應尋名安隱尋見還滅功德相應尋名遠離尋尊者覺天說曰見還滅功德相應尋名安隱尋見流轉過失相應尋名遠離尋大德說曰無邊利益意相應尋名安隱尋無邊安樂意相應尋名遠離尋脅尊者曰無邊安樂意相應尋名安隱尋無邊利益意相應尋名遠離尋尊者世友說曰無邊憐慜意樂所起名安隱尋無邊調善意樂所起名遠離尋何故初成佛已多分起此二尋由此二尋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前行者及淨道故復次爲對治昔在家時受欲樂故初成佛已多起遠離爲對治修苦行時無利苦故初成佛已起安隱尋復次初成佛已慶自德故多起安隱尋欲度他故多起遠離尋智多耶境多耶乃至廣說何故作此論爲止他宗顯正義故謂或有執有緣無智如譬喩者彼作是說緣幻事健達縛城及旋火輪鹿愛等皆緣無境爲遮彼執顯一切智皆緣有境或復有執有智不緣境有境非智緣爲遮彼執顯一切智皆能緣顯一切境皆智所緣復次爲顯外道有顚倒故境智相違及顯內道無顚倒故境智相順復次有說智多非以一境上有多智故今欲顯示境多非智由此因緣故作斯論智多耶境多耶境多非智所以者何智亦境故謂智唯攝一界一處一蘊少分境攝十八界十二處五蘊有作是說智多非境所以者何如非想非非想處下下品一剎那受爲欲界十智知謂九不同分界遍行隨眠相應品智及善世俗智知爲欲界十智知乃至無所有處亦爾爲非想非非想處十六智知謂十一遍行隨眠相應品智及修所斷貪無明相應智無覆無善世俗智如是摠有九十六智無漏智九十七智知彼一受餘受法如理應知是故當知智多非境說非理所以者何彼智相應俱有等法及智自性皆是境故設智非境境尚多況智亦境而境非多若智亦境境何別能知是智所知是復次智唯非色無見無對有爲有所依有所緣有行相境通色有見無見有對無對有爲無爲不相應有所依無所依有所緣所緣有行相無行相復次智唯三世三諦所攝境通三世非世四諦所攝此等名爲境與智別智多耶識多耶乃至廣說何故作此論爲止他宗顯正義故謂或有執識智二法展轉相應忍卽智故遮彼執顯一切智與識相應非一切識與智相應諸無漏忍非智性故復有執智唯無漏識唯有漏互不相爲遮彼執顯識與智俱通二種相應義有餘師執智卽是識分位差別故智與識無相應義爲遮彼執識與智體用各別有相應義由此因緣故作斯論智多耶識多耶識多非智所以者何諸智皆識相應非諸識皆智相應忍相應識非智相應故諸無漏忍何故非智於所見境未重觀故謂無始來於四聖諦未以無漏眞實慧見今雖創見而未重觀不名智要同類慧於境重觀方成智故無一有情於一切法無始時來非有漏慧數數觀之故有漏慧皆智所攝復次忍於聖諦推度忍可未究竟故非智所攝復次忍與所斷疑俱故非智所攝設不與俱而是彼類有漏無閒道非眞對治故雖疑得俱而亦是智由無漏忍非智所攝故識多復次識攝七界一處一蘊智唯一界一處一蘊少分所攝是故智少有漏行多耶無漏行多耶乃至廣說何故作此論爲止他宗顯正理謂或有執佛生身是無漏如大衆彼作是說經言如來生在世閒在世閒若行若住不爲世法之所染由此故知如來生身亦是無漏遮彼執顯佛生身定是有漏若佛生身是無漏者則於佛身無比女人不應起愛指鬘不應起瞋傲士不應起隖盧頻螺不應起癡旣緣起愛及癡故佛生身定非無漏若爾彼部所引契經當云何釋彼依法身故作是說經言如來生在世閒在世閒者依生身說若行若住不爲世法之所染污者依法身說故不相復次依不隨順故說不染謂世八法隨順世閒諸有情類亦隨順彼故說染污世閒八法隨順如來佛不順之故說不染復次如來生身雖是有而超八法故說不染利等八法如來亦有何故言超謂哀慜勇長者故一日受彼三億具衣謂入彼大娑羅村乞食不得空鉢而返戰遮婆羅門女及孫陁利謗佛聲遍十六大國謂如來生時聲徹他化自在成佛聲至色究竟天轉法輪時聲至梵世謂跋羅墮闍梵志以五百頌現前讚佛論力外道塢波離等諸大論師以百千頌瞻仰讚佛具壽阿難合掌讚佛諸希有法尊者舍利子恭敬讚佛諸無上法如是一切謂跋羅墯闍梵志先五百頌現前罵謂如來有時背痛礫石毒刺傷足指等謂如來有輕安樂及生死最勝受樂如何世尊超世八法如來雖遇利等四法而不生於高歡喜愛如來雖遇衰等四法而不生於下慼憂恚由此名超故稱不染非謂無漏立不染名如妙高山住金輪上八方猛風不能傾動諸佛亦爾住淨尸羅世閒八法不能傾動是故爲遮他宗異執顯示正理故作斯論有漏行多耶無漏行多耶有漏行多無漏行所以者何有漏行攝十處處少分無漏行唯攝二處少分故作是說無漏行多非有漏行所以者如欲界繫下下品攝一剎那色爲四種無漏慧緣一苦法智忍二苦法三集法智忍四集法智餘色餘法如理應知復有此餘諸無漏法故漏行決定爲多有餘師說有漏行多所以者何如一無漏行爲四有漏緣一邪見二疑三無明四善世俗智無漏行如理應知復有此餘諸有漏法故有漏行決定爲多評曰應作是有漏無漏行雖俱無邊而此本論師且約處攝說有漏多非無漏行復次此#本論師雖不問荅有爲無爲諸法多少而#義應有有爲法多耶無爲法多耶有爲法多非無爲法所以者何有爲法攝十一處一處少無爲法唯攝一處少分故評曰作是說無爲法多非有爲法所以者隨有漏法有爾所體擇滅無爲#數量亦爾隨無漏道有爾所體非擇滅無爲數量亦爾復有此餘隨有漏法體量多少諸非擇滅及虛空無爲故無爲法多非有爲法然准前門且依處說故說無爲其數是少云何行圓滿乃至廣說何故作此爲欲分別契經義故謂契經說佛弟子衆尸羅圓滿等持圓滿般若圓滿行圓滿護圓滿契經雖作是說而不分別其義不說云何行護圓滿經是此論所依根本彼不說者今欲說之故作斯論云何行圓滿無學身律儀語律儀命淸淨學及非學非無學亦有律儀何故此中唯說無依勝說故謂若法若補特伽羅俱無學勝是故偏說復次若有律儀非不律儀所損壞者此中說之學等不爾無學身業名身律儀無學語業名語律儀無學身語業摠名命淸淨卽是正業正語正命契經說戒或名尸羅或名爲行或名爲足或名爲篋言尸羅者是淸涼義謂惡能令身心熱惱戒能安適故曰淸涼又惡能招惡趣熱惱戒招善趣故曰淸涼又尸羅者是安眠義謂持戒者得安隱眠常得善夢故曰尸羅又尸羅者是數#習義常習善法故曰尸羅又尸羅者是得定義謂持戒者心易得定故尸羅又尸羅者是隧蹬義如伽他說佛法池淸涼 尸羅爲隧蹬 聖浴不濡身逮彼岸功德又尸羅者是嚴具義有莊嚴具於幼爲好非壯老年有莊嚴具於壯爲好非幼老年有莊嚴具於老爲好非幼壯年尸羅嚴身三時常好如伽他說尸羅嚴身具 幼壯老咸宜 住信慧爲珍福無能盜者又尸羅者是明鏡義如鏡明淨像現其中住淨尸羅無我像現又尸羅者是階陛義如尊者無滅言我蹈尸羅階升無上慧殿又尸羅者是增上義佛於三千大千世界有威勢者皆尸羅力此迦濕彌羅國中有一毒龍名無怯懼稟性暴惡多爲損害去彼不遠有毘訶羅數爲彼龍之所嬈惱寺有五百大阿羅漢共議入定欲逐彼龍盡其神力而不能遣有阿羅漢從外而來諸舊住僧爲說上事來者至龍住處彈指語言賢面遠去龍聞其聲卽便遠去諸阿羅漢怪而問言汝遣此龍是何定力彼荅衆曰我不入定亦不起通但護尸羅故有此我護輕罪如防重禁故使惡龍怖而去由此尸羅是增上義又尸羅是頭首義如有頭首卽能見色嗅香嘗味覺觸知法有尸羅者卽能見四聖諦色聞未曾有名身等聲嗅三十七覺分花香嘗出家遠離三菩提寂靜味覺靜慮解脫等持等至觸知蘊界自相共相法是故尸羅是頭首義契經說戒名爲行者以諸世閒說戒名行故諸世閒見持戒者言彼有行見破戒者言彼無行又淨持戒是衆行本能至涅槃故名爲行契經說戒名爲足者能往善趣至涅槃故如有足者能避險惡至安隱處有淨戒者能越惡趣生天人中或超生死到涅槃岸故名爲足契經說戒名爲篋者任持一切功德法故謂持戒者任持功德不令退散如篋持寶尊者妙音作如是說戒名不壞所以者何如足不壞則能自在往安隱處具淨戒者亦復如是能至涅槃此中無學身語淨戒名行圓滿行中極故云何護圓滿無學根律儀應知此中根是所護由念慧力護眼等根令於境起諸過患如鉤制象不令奔是故無學正念正知名護圓滿伽他說世閒諸瀑流 正念能防護 若令畢竟斷其功唯正知根律儀根不律儀各以何爲自性根律儀以正念正知爲自性根不律儀以失念不正知爲自性云何知經爲量故如契經說天告苾芻今不應自開瘡漏苾芻荅曰我當覆天復語言瘡漏非小以何能覆芻荅曰我當覆以正念正知天曰此爲眞覆故知此二是根律儀律儀義相似故根不律儀翻前而立故是失念及不正知若正念知是根律儀者契經所說當云何通如說念慧圓滿故根律儀圓滿豈說自性圓滿故自性圓滿耶念慧有二種一因性二果性因性者名念慧果性者名根律儀復次念慧有二種一生得善二加行善生得善者名念加行善者名根律儀復次念慧有二種一不定善二定善不定善者念慧定善者名根律儀復次念慧有二種一世閒善二出世閒善世閒善名念慧出世閒善者名根律儀念慧有二種一學二無學學者念慧無學者名根律儀復次念慧有二種一鈍根種性二利根種性鈍根種性名念慧利根種性名根律儀與契經不相違害有作是說根律儀以不放逸爲自性根不律儀以放逸爲自性有餘師說根律儀以六恒住法爲自性根不律儀以此所對治諸煩惱業爲自性或有說者根律儀以於六根已斷已遍知法不成就性彼對治道成就性爲自性根不律儀以於六根未斷未遍知法成就性及彼對治道不成就性爲自性復有說根律儀以於六根已斷已遍知時所有妙行善根生長廣大爲自性不律儀以於六根未斷未遍知時有惡行不善根生長廣大爲自性作是言根律儀以一切善法爲自性根不律儀以一切染污法爲自性有說言根律儀以一切善法及順善無覆無記法爲自性根不律儀以一切染污法及順染無覆無記法爲自此迦濕彌羅國中有毘訶羅吉祥胤二阿羅漢曾住其中俱證三具八解脫得無㝵解是說法師親兄弟父名難提婆羅門種俱作是根律儀根不律儀皆以無覆無記不相應行蘊中律儀不律儀爲自性若此俱是無覆無記心不相應行蘊攝者此二自性有何差別隨順染污者名不律儀隨順淸淨者名律是謂差別評曰此諸說中初說爲經說念慧能護根故復次卽此念慧有位亦得斷律儀名隨位差別建立多種且說有漏斷律儀者謂欲界見修所斷法以未至地能離欲界有漏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若初靜慮見修所斷法以第二靜慮近分地能離初靜慮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乃至無所有處見修所斷法以非想非非想處近分地能離無所有處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若說無漏斷律儀者謂欲界見修所斷法以未至地能離欲界無漏諸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若初靜慮見修所斷法以依未至靜慮中閒及初靜慮能離初靜慮三地無漏諸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第二靜慮見修所斷法以前三地及第二靜慮能離第二靜慮四地無漏諸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第三靜慮見修所斷法以前四地及第三靜慮能離第三靜慮五地無漏諸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第四靜慮見修所斷法及無色界見所斷法以前五地及第四靜慮能離第四靜慮等六地無漏諸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空無邊處修所斷法以前六地及空無邊處能離空無邊處七地無漏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識無邊處修所斷法以前七地及識無邊能離識無邊處八地無漏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無所有處及非想非非想處修所斷法以前八地及無所有處能離二地九地無漏九無閒道中念慧二法爲斷律儀說一切有部發智大毘婆沙論卷第四十四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경에서는 갖가지 심(尋)을 설명하고 있다. 3악심(惡尋)으로는 욕심ㆍ에심ㆍ해심을 들고 3선심(善尋)으로는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든다. 이 문단에서는 이 모든 심의 상(相)과 자성(自性)을 밝히며 겸하여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보살이었을 적에 3악심을 일으켰고 어떻게 하여 그것을 정복했는가? 그리고 성도(成道) 초에 일으킨 안온심(安隱尋)과 원리심(遠離心)이란 어떤 것인가를 논구한다.
  2. 2)고ㆍ집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고와 집에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삼매(三昧)를 말하며 도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도(道)도 마치 배나 뗏목과 같아서 결국에는 버려야 할 것이므로 여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삼매를 말한다.
  3. 3)지(智)는 인식 판단하는 작용이요, 경(境)은 그 대상이며, 식(識)은 지를 유지하는 주인이다. 여기서는 첫째로 지와 경에 있어서 그 범위는 어느 것이 더 넓은가를 논하고, 둘째로 지와 식에 관해서도 동일한 문제를 논구하려 한다. 갖가지 의론이 있지만 결론은 지보다 경이 더 넓고 지보다 식이 더 넓다고 하는 데에 있다.
  4. 4)지(智)는 혜(慧)의 심소(心所)이므로 18계에서 보면 법계(法界)요, 12처에서 보면 법처(法處)이며, 5온에서 보면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5. 5)식은 18계에서는 6식(識)과 의근(意根)의 7계요 12처에서는 의처(意處)이며 5온에서는 식온(識蘊)이다. 지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법계(法界)와 법처(法處)와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6. 6)온갖 법을 분류하여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하며 다시 이 유위법은 유루의 행과 무루의 행으로 분류하게 된다. 여기서는 위의 분류를 예상하면서 첫째는 유루와 무루의 두 행 중에서 그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고, 둘째는 유위와 무위의 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는 문단이다. 결론은 무루의 행보다 유루의 행이 더 많고 무위의 법보다 유위의 법이 더 많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명한 불신유루설(佛身有漏說)을 언급한다.
  7. 7)무비 여인은 부처님께 연모의 정을 일으켰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으며, 오로빈라가섭은 부처님을 옳게 인식하지 못했고, 오사는 부처님을 경멸했다는 것이 여러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뒤에 부처님께 귀의했지만 어쨌든 한 때나마 부처님의 몸을 반연하여 번뇌의 허물을 더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몸에 관하는 한 유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8. 8)8법이란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기(譏)ㆍ고(苦)ㆍ락(樂)을 말한다.
  9. 9)5근처(近處)와 5경소(境所)는 모두가 유루요,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의 대부분도 유루이다. 이에 반하여 무루는 성자(聖者)의 의처ㆍ법처의 일부를 점할 뿐이다.
  10. 10)여기서는 경에 있는 다섯 가지 원만[五圓滿:戒ㆍ定ㆍ慧ㆍ行ㆍ獲의 원만] 중에서 특히 행원만에 관하여 밝히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행원만이란 아라한의 율의(律儀:戒)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행이란 나타낼[所詮] 계율의 이명(異名)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계(戒), 즉 시라(尸羅)의 의의를 예의 속설(俗說) 자원론(資源論)에 의거하여 갖가지로 해석함으로써 시라에 포함된 내용이나 공덕을 높이 선양하려는 것이 이 문단의 주된 내용이다.
  11. 11)비하라는 사원(寺院)이라는 뜻이다.
  12. 12)다섯 가지 원만 중에서 특히 호원만(護圓滿)의 의의와 자성(自性)을 밝히는 문단이다. 호원만이란 5근(根)을 막고 수호하는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다는 뜻이어서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아라한의 근의 율의가 그것이다. 근의 율의의 자성에 관해서는 갖가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그것을 정념(正念)이요 정지(正知)라고 하는 것이 바사(婆沙)에서의 정의의 설[正義說]이다. 여기서는 그 일을 논구하고 특히 정념과 정지와 그것의 반대인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를 갖가지로 나누어서 논구하며 겸하여 이 정념과 정지가 단율의(斷律儀)가 되는 경우에 나아가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