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선납식 ⑦ 【論】 3결(結) 나아가 98수면(隨眠)은 몇 가지가 견고(見苦)에서 끊어지는 것이며 몇 가지가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인가?2)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 문[前門]에서 비록 이미 단번에 끊는다는 사문[頓斷沙門]의 뜻을 막았다 하더라도 단번에 현관[頓現觀]3)한다는 이의 뜻을 아직 막지 못했고 또한 점차로 현관[漸現觀]한다는 뜻을 아직 드러내지도 못했으므로 이제 단번에 현관한다는 것을 막고 점차로 현관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앞 문에서 이미 단번에 현관한다는 이의 뜻을 막고 또한 이미 점차로 현관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거칠게 드러내면서도 명료하게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제 거칠게 드러내면서도 명료하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제 5부(部)의 번뇌와 5대치(對治)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5부의 번뇌라 함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과 나아가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을 말하며, 5부의 대치라 함은 고인(苦忍)ㆍ고지(苦智)는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의 대치요 나아가 도인(道忍)ㆍ도지(道智)는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의 대치이며,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와 세속지(世俗智)는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의 대치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論】 3결에서 유신견(有身見)의 결(結)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신견은 오직 견고에서만 끊어지는 것인가? 【답】 이 견해는 오직 괴로운 곳[苦處]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이니 괴로움임을 관찰할 때에 이 견해는 곧 끊어진다. 또 이 견해는 오직 과보의 곳[果處]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과보임을 관찰할 때에 이 견해는 곧 끊어진다. 또 유신견의 결은 뒤바뀐 자성이다.4) 온갖 뒤바뀐 것은 모두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므로 뒤바뀜을 끊는 때에 이 견해도 끊어지는 것이니 대치(對治)가 같기 때문이다.
또 이 번뇌는 거친 것이어서 처음 무간도(無間道)의 고법(苦法)ㆍ유인(類忍)이 앞에 나타날 때에 곧 영원히 끊어진다. 만일 번뇌가 미세한 것5)이면 뒤의 무간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앞에 나타날 때라야 비로소 모두 다 끊을 수 있다. 마치 때[垢]에 전 옷이 아니라면 세탁하는 즉시 깨끗해지지만 때에 전 옷이라면 잿물 등으로 공을 들여 씻은 뒤에야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또한 기름이 깊이 스며들지 않은 그릇[瓦器]은 물에 헹구기만 해도 깨끗해지지만 깊이 스며든 것이면 끓는 물에 삶거나 혹은 불에 쪼인 뒤에야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묘음(妙音) 존자도 “이 견해는 거칠기 때문에 처음 무간도가 앞에 나타날 때에 곧 영원히 끊어진다. 옷과 그릇에 관한 두 비유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 견해의 뿌리는 깊이 경계의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깊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품은 연약하고 하열하여 처음 무간도의 고법ㆍ유인이 앞에 나타날 때에 곧 영원히 끊어진다. 만일 번뇌의 뿌리가 경계의 땅에 깊이 들어갔으면 뒤의 무간도의 금강유정이 앞에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모두 다 끊어진다. 비유하면 나무뿌리가 땅에 깊이 박히지 않았으면 작은 바람이 불기만 해도 꺾이고 넘어지지만, 뿌리가 깊이 박혀 들어갔으면 큰 바람이 불어야 꺾이고 넘어지는 것과 같다. 세우(世友) 존자는 “이 유신견은 5온(蘊)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5취온(取蘊)을 사실대로 관하여 볼 때 이 견해는 곧 끊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 유신견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네 가지 생각[四想]이 끊어지는 때에 이 견해는 곧 끊어진다. 대덕(大德)은 “이 유신견은 몸이 있다는 것[有身]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유신견이라 한다. 만일 몸이 있다는 것에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관하면 이 견해는 곧 끊어지기 때문에 유신견의 결은 오직 견고(見苦)에서만 끊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계금취(戒禁取)의 결(結)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혹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문】무엇 때문에 계금취는 견집(見集)ㆍ견멸(見滅)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답】 외도(外道)는 오직 고(苦)와 도(道)에서만 이 계금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외도도 집(集)은 때가 낀 더러운 곳[垢穢處]과 같다고 여기며, 또한 멸(滅)은 씻고 목욕하는 곳과 같다고 여긴다. 그들은 집이란 때가 낀 더러운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바라고 구하지 않으며, 멸이란 씻고 목욕하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망령되이 바라고 구하게 된다. 망령되이 바라고 구하기 때문에 온갖 이익 없는 고행(苦行)을 일으키고 여여(如如)하게 이익 없는 고행을 일으키면서 이러저러한 번뇌의 때[垢]를 더하여 몸과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열반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마치 어떤 사람이 몸의 때를 벗기고자 하면서 더러운 물에서 목욕하고 여여하게 목욕하여 이러저러한 때를 한층 더 몸에 묻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계금취는 오직 2부(部)에만 통할 뿐이다. 또 이 계금취는 오직 고ㆍ도의 두 곳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고의 곳[苦處]에서 전개되는 것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요, 도의 곳[道處]에서 전개되는 것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또 이 계금취는 오직 더러움과 깨끗함의 두 곳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더러운 곳에서 전개되는 것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요, 깨끗한 곳에서 전개되는 것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또 이 계금취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내도(內道)와 외도(外道)에서 일으키는 차별이다. 내도에서 일으키는 것6)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며 외도에서 일으키는 것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또 이 계금취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인이 아닌 것[非因]을 인(因)이라 헤아리는 것7)과 도가 아닌 것[非道]을 도(道)라 헤아리는 것이다.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헤아리는 것은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요,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헤아리는 것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論】 3불선근(不善根)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과 나아가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5부(部)에는 모두 탐(貪)ㆍ진(瞋)ㆍ치(癡)가 있기 때문이다.
【論】 3불선근처럼 3루(漏)와 4폭류와 4액에서 견(見)을 제외한 나머지 폭류와 액ㆍ4취의 욕취(欲取)와 아어취(我語取)ㆍ4신계의 탐욕과 진에의 신계ㆍ5개의 악작(惡作)과 의(疑)를 제외한 나머지 개(蓋)ㆍ5결의 탐ㆍ진ㆍ만(慢)의 결ㆍ5순하분결의 탐욕과 진에의 결ㆍ6애신(愛身)의 뜻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ㆍ7수면(隨眠)의 견(見)과 의(疑)를 제외한 나머지 수면ㆍ9결의 애(愛)와 에(恚)와 만(慢)과 무명(無明)의 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체(體)의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비록 통틀어 말할 때8)는 이것은 모두 5부(部)에 통한다고 했지만 따로따로 분별한다면 1부도 있고 2부도 있으며 4부도 있고 5부도 있다.
욕루(欲漏) 등 중에 유신견ㆍ변집견ㆍ악작ㆍ질(嫉)ㆍ간(慳)ㆍ분(忿)ㆍ부(覆)는 오직 1부이고, 계금취는 오직 2부이며, 사견과 견취와 의는 오직 4부이며, 탐ㆍ진ㆍ만 등은 5부에 통하기 때문이다.
【論】 악작개(惡作蓋)는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지(智)로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論】 악작개처럼 5결(結)의 질(嫉)과 간(慳)의 결ㆍ5순상분결(順上分結)과 6애신(愛身)의 앞의 5애신ㆍ9결(結)의 질과 간의 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똑같은 일[事]에 의거하여 전개되고 품류(品類)가 같기 때문이다.
【論】 98수면(隨眠) 중의 28수면은 견고(見苦)에서 끊어지는 것이다.9)
고의 곳[苦處]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論】 19수면은 견집(見集)에서 끊어지는 것이다.10)
집의 곳[集處]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論】 19수면은 견멸(見滅)에서 끊어지는 것이다.11)
멸의 곳[滅處]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論】 22수면은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다.12)
도의 곳[道處]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論】 10수면은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13)
일[事]에 의거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문】여기에서 어느 것을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어느 것을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는가? 【답】 만일 대치(對治)가 결정되고14) 대치의 소연(所緣)이 결정된 것이면15) 견고와 나아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만일 대치가 결정되지 않고 대치의 소연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만일 처소(處所)가 결정되고 대치의 소연이 결정된 것이면 견고와 나아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만일 처소가 결정되지 않고 대치의 소연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한다. 만일 고인(苦忍)과 고지(苦智)로 대치를 삼은 것이면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만일 도인(道忍)과 도지(道智)로 대치를 삼은 것이면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만일 고ㆍ집ㆍ멸ㆍ도의 지(智)와 세속지(世俗智)로 대치를 삼은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만일 고법유인(苦法類忍)으로 끊는 것이면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만일 도법유인(道法類忍)으로 끊는 것이면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며, 만일 네 가지의 법지(法智)ㆍ유지(類智)와 세속지로 끊는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만일 고제(苦諦)를 관하면서 끊는 것이면 견고에서 끊어지는 것이라 하고 나아가 도제(道諦)를 관하면서 끊는 것이면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만일 고제를 관하거나 나아가 도제를 관하기도 하며 혹 그 밖의 일[事]을 관하면서 끊는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論】 3결과 나아가 98수면은 몇 가지가 견(見)이고, 몇 가지가 견이 아닌가?16)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온갖 번뇌는 모두 견의 성품이다. 왜냐하면 행상(行相)이 사납고 날카로운 것[猛利]을 견이라 하는데 온갖 번뇌는 저마다 제 업[自業]에 있어서 행상이 사납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유신견(有身見)은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변집견(邊執見)은 아주 없다[斷]는 것을 집착하고 항상 있다[常]는 것을 집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사견(邪見)은 없다[無]는 것을 집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롭다. 견취(見取)는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집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계금취(戒禁取)는 청정하게 한다는 것을 집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의(疑)는 망설이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탐(貪)은 염착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진(瞋)은 증오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만(慢)은 높은 체하면서 뽐내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무명(無明)은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운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번뇌는 견의 성품이다”라고 집착한다. 또 어떤 이는 “온갖 번뇌는 모두 견의 성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는 것을 견이라 하는데 온갖 번뇌는 자기의 소연(所緣)에 대하여 모두 환히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견의 성품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뜻을 중지시키고 모든 번뇌에는 견의 성품이 있는 것도 있고 견의 성품이 아닌 것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3결(結)에서 두 가지는 견이고 한 가지는 견이 아니다.
두 가지는 견이라 함은 유신견과 계금취17)를 말하고 한 가지는 견이 아니라 함은 의(疑)를 말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설명은 본론(本論)과 같으며 견(見)의 뜻에 관한 자세한 해석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으니 5견(見)의 처소이다.
【論】 3결과 나아가 98수면은 몇 가지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몇 가지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몇 가지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18)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욕계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尋)ㆍ사(伺)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집착하는가 하면 계경에 의거하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마음의 거친 성품을 심이라 하고 마음의 미세한 성품을 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 거칠고 미세한 성품은 욕계로부터 유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삼계(三界)에는 모두 심ㆍ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대덕은 “대법(對法)의 논사들의 주장은 바른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거칠고 미세한 성품은 삼계에 모두 있으며 계경에서는 ‘이것이 곧 심ㆍ사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심ㆍ사는 오직 욕계와 범세(梵世)의 2지(地)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대법자(對法者)의 주장은 도리가 아니며 그릇된 주장을 그릇되게 받아 지니는 이라 할 것이요, 바른 주장을 잘 받아 지니는 이라고는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논사들은 “우리들의 주장과 받아 지니는 내용은 선(善)이요 악(惡)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칠고 미세한 것을 시설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는 ‘전(纏)은 거칠고 수면(隨眠)은 미세하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심ㆍ사는 거친 것도 아니요 미세한 것도 아니니, 이 두 가지는 전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기 때문이다. 혹 어떤 곳에서는 ‘색온(色蘊)은 거칠고 4온(蘊)은 미세하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심ㆍ사는 미세한 것이요 거친 것이 아니니 행온(行蘊)에 속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곳에서는 ‘욕계는 거칠고 초정려는 미세하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심ㆍ사는 모두가 거칠고 미세한 것에 다 통하는 것이니 2지(地)에는 모두 심과 사가 있기 때문이다. 혹 어떤 곳에서는 ‘초정려는 거칠고 제2 정려는 미세하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심ㆍ사는 거친 것이요 미세한 것이 아니니 초정려의 위에는 심ㆍ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거칠고 미세한 것을 시설하면 여러 품류가 있으므로 반드시 ‘거친 성품을 심이라 하고 미세한 성품을 사라 한다’라고 고집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심ㆍ사 두 가지는 삼계에 모두 있다’라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계경에서 ‘심ㆍ사는 마음의 거칠고 미세한 성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래[下] 2지(地)의 마음을 요동케 하는 거칠고 미세한 성품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제2 정려와 나아가 유정의 마음은 요동하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심ㆍ사가 없다”라고 한다. 또 저 대덕은 이미 2정(定) 이상의 유심유사를 말한 뒤에 어떻게 심ㆍ사 등의 3지(地)의 차이를 건립하는가? 그는 “욕계와 초정려의 온갖 선(善)과 염(染)과 무부무기(無覆無記)와 정려중간(靜慮中間) 나아가 유정(有頂)의 염오의 마음 등을 유심유사지(有尋唯伺地)라 하고, 정려중간의 선과 무부무기의 마음 등을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라고 하며, 제2 정려와 나아가 유정의 선과 무부무기의 마음 등을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렇다면 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계경에서는 “심ㆍ사가 고요해져서 심도 없고 사도 없으면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제2 정려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른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경은 선과 무부무기에 의거한 것이요, 염(染)에 의거하여 심ㆍ사의 고요한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어떤 인연이 있기에 제2정(定)에 들면 선과 무부무기만으로 심ㆍ사가 고요해지고 염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차라리 염오의 심ㆍ사가 고요해지고 선과 무부무기는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모든 염오의 법은 염(染)을 여읠 때에 버리지만 선과 무기의 법은 계(界)ㆍ지(地)를 초월할 때에야 비로소 모두 다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유자는 어리석고 몹시 어두우며 부지런히 가행(加行)하지 않은 결과로 심ㆍ사는 삼계에 모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심과 사는 아래 2지(地)에는 있지만 위의 7지(地)에는 없으니 이것이 바른 주장이다. 이와 같이 다른 종(宗)에서 주장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3결은 세 가지이다. 혹은 유심유사이기도 하고 혹은 무심유사이기도 하며 혹은 무심무사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심유사인가? 욕계와 초정려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심유사인가? 정려중간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심무사인가? 위의 3정려(靜慮)와 4무색(無色)에 있는 것이다. 그 밖의 자세한 설명은 본론(本論)과 같다. 【문】여기에서 어느 것을 유심유사라 하고, 어느 것을 무심유사라 하며, 어느 것을 무심무사라 하는가? 【답】 만일 심ㆍ사와 함께하고 심ㆍ사와 상응하며 심ㆍ사와 함께 일어나고 심ㆍ사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면 유심유사라 한다. 만일 심과는 함께하지 않으면서 오직 사와 함께할 뿐이고 심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오직 사와 상응할 뿐이며 심과는 함께 일어나지 않으면서 오직 사와 함께 일어날 뿐이고 심은 이미 고요해지고 오직 사에 의해서 전개되는 것이면 무심유사라 한다. 만일 심ㆍ사와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심ㆍ사와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심ㆍ사와 함께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심ㆍ사에 의해 전개되는 것도 아니면 무심무사라 한다. 또 만일 갖가지 심구(尋求)와 갖가지 사찰(伺察)이 있는 것이면 유심유사라 하고, 갖가지 심구는 없고 갖가지 사찰만 있는 것이면 무심유사라 하며, 갖가지의 심구도 갖가지의 사찰도 없는 것이면 무심무사라 한다. 또 만일 자주 심구하고 자주 사찰하는 것이 있으면 유심유사라 하고, 자주 심구하는 것은 없으면서 자주 사찰하는 것만 있으면 무심유사라고 하며, 자주 심구하는 것도 자주 사찰하는 것도 없으면 무심무사라 한다.
【論】 3결과 나아가 98수면은 몇 가지가 낙근(樂根)과 상응하고, 몇 가지가 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과 상응하는가?19)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점차로 생기는 것이요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하는데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대덕(大德)은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차례로 생기는 것이요 한꺼번에 생긴다는 뜻은 없다. 마치 좁은 길을 지나가는 많은 장사꾼들과 같으니 한 사람씩 차례로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도 없는데 하물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겠는가? 모든 유위의 법도 그와 같아서 하나하나는 스스로 생기는 모양[自生相]으로부터 생기고 다른 것과 화합하여 생기는 것20)이요 이치로 보아 모두가 함께 생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달마의 논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유위의 법은 다른 것과 화합하여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니 하나하나는 스스로 생기는 모양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유위법은 하나로 화합하여 생긴다21)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가 여의지 않은 것은 일시에 생기기 때문이니 생기는 모양에 의거하여 유위법은 다른 것과 화합하여 생긴다고 하지만 만일 찰나(刹那)에 의거한다면 유위법은 하나로 화합하여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니 서로가 여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집착한다.
“힘이 있고 힘이 없다는 뜻이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 뜻이라 한다. 만일 이 법이 그것의 힘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면 이 법은 그것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만일 법이 그것의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지 않는다면 비록 때를 같이하여 생긴다 하더라도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 마치 그 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이 마음은 그 마음과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심소(心所)가 생기기 때문에 심소는 마음과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심소의 힘으로 말미암아 심소가 생기기 때문에 심소는 심소와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고 심소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생기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심소와 상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이들의 뜻을 차단하고 마음은 심소와 상응하고 심소도 심소와 상응하며 심소도 마음과 상응하나 마음만은 마음과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그것은 한 몸에 두 마음이 한꺼번에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법은 저마다 제 성품[自性]과는 상응하지만 다른 성품[他性]과는 상응하지 않는다”라고 집착한다. 그는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어서 법과 법이 지극히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제 성품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오직 제 성품과 상응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오직 다른 성품과 상응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상응이라는 이름과 뜻은 다른 체[異體]와 서로 바라보면서 건립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음과 심소가 연속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동일한 소의(所依)요 동일한 소연(所緣)22) 등으로 서로 버리지 않는 것을 상응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법은 제 성품과 상응한다는 뜻은 없으며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은 제 성품을 기다리지 않고 생기기 때문이요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은 지극히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모든 법은 뒤섞이지 않고 상응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다만 수(受)와 상응하는 것만을 묻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사람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논을 짓는 이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논을 짓는 것이니, 법상(法相)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또 수(受)와 수는 행상(行相)이 저마다 따로따로요, 성취(成就)에는 어긋나지 않으면서 현행(現行)에는 어긋나기 때문에 이것만을 묻는다. 성취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함은 하나의 몸은 5수근(受根)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며, 현행에는 어긋난다고 함은 반드시 두 가지 수[二受]가 한꺼번에 현행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 수는 근(根)에 따라 바뀌고 변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하나의 수의 체(體)에서 5근(根)을 세우지만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수만을 묻는다. 또 수는 12연기(緣起)의 바퀴 안에 있어서 바퀴통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묻는다. 또 온갖 법은 모두 수에 돌아가 닿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묻는다. 또 수를 제외하면 어느 근(根)과 상응하는 것을 묻겠는가? 만일 명근(命根) 등의 8근(根)23)과 상응하는 것을 묻는다면 이치가 아닌 것이니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신근(信根) 등의 5근과 3무루근(無漏根)과 상응하는 것을 묻는다면 역시 이치가 아닌 것이니 이것은 선(善)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밖의 염(染)과 상(想)ㆍ사(思) 등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을 물어도 이치가 아닌 것이니, 근(根)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혹 어떤 것은 바로 번뇌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만일 염(念)ㆍ정(定)과 혜(慧)와 상응하는 것을 물어도 이치가 아닌 것이니 번뇌와 상응하는 것에는 근(根)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혹 어떤 것은 바로 번뇌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만일 의근(意根)을 물어도 이치가 아닌 것이니 마음에 의거하여 상응하는 법을 건립하기 때문이요 또 마음의 상응과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수에는 근의 모양이 있으나 번뇌의 체로서 번뇌를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을 묻는다.
【論】 3결(結)의 유신견과 계금취의 결은 고근(苦根)과 우근(憂根)을 제외한 3근과 상응한다.
【문】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고근을 제외하는가? 【답】 고근은 5식(識)에 있는 것인데 이 두 가지 결은 의지(意地)에 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문】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우근을 제외하는가? 【답】 우(憂)는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결은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통틀어 말하면 이 두 가지는 3근과 상응하지만 따로따로 분별하자면 만일 욕계와 초(初)ㆍ2정려(靜慮)에 있는 것이면 희근(喜根)과 사근(捨根)과 상응하고, 제3 정려에 있는 것이면 낙근(樂根)과 사근과 상응하며, 제4 정려와 무색계에 있는 것이면 오직 사근과 상응할 뿐이다. 이 때문에 통틀어 3근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論】 의결(疑結)은 고근을 제외한 4근과 상응한다.
【문】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고근을 제외하는가? 【답】 고근은 5식에 있는 것인데 의(疑)는 의지에 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통틀어 말하면 의결은 4근과 상응하지만 따로따로 분별하자면 만일 욕계에 있는 것이면 우근과 사근과 상응하고, 초ㆍ2정려에 있는 것이면 희근과 사근과 상응하며, 제3 정려에 있는 것이면 낙근과 사근과 상응하고, 제4 정려와 무색계에 있는 것이면 오직 사근과 상응할 뿐이다. 이 때문에 통틀어 4근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의결은 만일 욕계에 있는 것이면 희근과 상응하지 않고 만일 초ㆍ2정려에 있는 것이면 희근과 상응하는가? 【답】 기뻐하는 것과 근심하는 것의 행상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계의 의결은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희근은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이므로 행상이 이미 다른지라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 초ㆍ2정려의 의결은 희근과 함께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게 된다. 같다는 뜻[等義]은 상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욕계의 희근은 거친 것인데 의결은 미세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문】무엇 때문에 욕계의 희근은 거친 것인가? 【답】 욕계의 유정은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도 일으키기 때문이요, 욕계의 일에 있어서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욕계의 유정은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도 일으키는 것인가? 욕계 유정의 본래 성품은 괴로운 것24)인데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을 더하기 때문에 마땅히 싫증을 내며 여의어야 하는데도 더욱 뛰놀며 기뻐하니 어찌 이것이 거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것이 욕계의 일에 있어서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도 일으키는 것인가? 만일 다른 이가 넘어지고 헷갈리는 것을 보면 사랑하며 가엾이 여겨야 하는데도 더욱 기뻐하며 웃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거친 것이 아니겠는가. 욕계의 의결은 깊이 생각하기[深思] 때문에 미세한 것인데 거칠고 미세함이 이미 다르므로 상응한다는 뜻이 없으며 초ㆍ2정려의 의결과 희근은 다 같이 미세하기 때문에 상응하게 된다.
또 욕계의 의결은 두텁고 묵직한 것인데 희근은 가볍고 성미가 조급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으며 초ㆍ2정려의 두 가지는 다 같이 두텁고 묵직하기 때문에 상응하게 된다. 또 욕계의 의결은 안의 문[內門]에서 전개되고 욕계의 희근은 바깥 문[外門]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으며25) 초ㆍ2정려는 다 같이 안의 문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게 된다. 또 욕계의 의결은 주인과 같고 희근은 손님과 같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으며 초ㆍ2정려의 두 가지는 모두 주인과 같기 때문에 상응하게 된다. 또 욕계의 의결은 비록 희수(喜受)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수(憂受)와는 상응하며, 초ㆍ2정려의 의결은 만일 희수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수(受)는 없게 되니 기쁨[喜]은 그 지(地)의 제 성품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만일 의심의 무더기에 전혀 느낌이 없다면 상의(相依)와 상응하는 법[相應法]에 어긋나니26) 이런 허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의결은 초ㆍ2정려의 희근과 상응한다.
【論】 3불선근(不善根)에서 탐불선근(貪不善根)은 고근과 우근을 제외한 3근과 상응한다.
고근과 우근은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탐불선근은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論】 진불선근(瞋不善根)은 낙근과 희근을 제외한 3근과 상응한다.
낙근과 희근은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진불선근은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論】 치불선근(癡不善根)과 욕루(欲漏)와 무명루(無明漏)는 5근과 상응한다.
그것은 모두가 6식신(識身)에 통하며 기뻐하고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論】 유루(有漏)는 고근과 우근을 제외한 3근과 상응한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우근과 고근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인(因)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근온(根蘊)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사견(邪見)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본론(本論)과 같다.27) 사견은 고근을 제외한 4근과 상응한다 함은 고근은 5식에 있는 것인데 사견은 의지에 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통틀어 말하면 사견은 4근과 상응하지만 따로따로 분별하자면 만일 욕계에 있는 것이면 낙근과 고근을 제외한 3근과 상응하고, 초ㆍ2정려에 있는 것이면 희근과 사근과 상응하며, 제3 정려에 있는 것이면 낙근과 사근과 상응하고, 제4 정려와 무색계에 있는 것이면 오직 사근과 상응할 뿐이다. 【문】욕계의 사견 가운데 어느 것이 희근과 상응하고 어느 것이 우근과 상응하는가?
【답】 혹 어떤 이는 본래부터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지 않고 애요(愛樂)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제사지내기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뒤에 만일 삿된 견해를 지닌 외도를 만나 “베풀어 줄 것도 없고 애요할 것도 없고 제사지낼 것도 없으며 묘행(妙行)도 없고 악행도 없으며 묘행ㆍ악행을 지은 업과의 이숙도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듣고 나서 기뻐하며 ‘나는 본래부터 베풀어 주거나 제사지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몹시 잘한 일이었구나. 그것에는 과보도 없고 이숙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견은 희근과 상응한다. 혹 어떤 이는 본래부터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고 애요하는 일을 좋아하며 제사지내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뒤에 만일 삿된 견해를 지닌 외도를 만나 “베풀어 줄 것도 없고 애요할 것도 없고 제사지낼 것도 없으며 묘행도 없고 악행도 없으며 묘행과 악행을 지은 업과의 이숙도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듣고 나서 근심하며 ‘나는 본래부터 베풀어 주고 제사지내기를 좋아했는데 매우 헛된 일이었구나. 그것에는 과보도 없고 이숙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견은 우근과 상응한다. 상응의 뜻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6인(因) 중에서 이미 설명했다.
【論】 3결과 나아가 98수면은 몇 가지가 욕계계(欲界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계(色界繫)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계(無色界繫)인가?28)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욕계에 있는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의 이름과 수(數)는 색계와 무색계에도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욕계는 부정지(不定地)이므로 번뇌와 수번뇌가 많으나 색계와 무색계는 정지(定地)이므로 번뇌와
수번뇌가 적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진(瞋)의 수면이나 악작(惡作) 등29)과 같은 것은 그 세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혹 또 어떤 이는 “유루와 유폭류(有暴流)와 유액(有軛)과 아어취(我語取)는 욕계에도 있는 것이니 안[內]을 반연하여 번뇌 등이 생기고 그것의 이름이 붙여지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유루 등은 욕계에는 통하지 않으며 위의 두 세계의 번뇌[惑]이어서 정(定)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대부분 안을 반연하여 일어나고 그것의 이름이 붙여지기 때문이다. 혹 또 어떤 이는 “질(嫉)과 간(慳)의 두 가지 전(纏)은 범천세계에도 있다”라고 집착하는데 분별론자(分別論者)가 그와 같다. 【문】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집착을 하는가? 【답】 계경에 의거한 까닭이니 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범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사문 교답마(喬答摩)에게 가서 예배 공경하며 법을 들을 필요가 없다. 곧 이곳에 머무르면 그대들에게 나고 늙고 죽음을 건너 영원한 적멸(寂滅)을 증득하게 하리라.’” 그는 “범왕이 질결과 간결에 마음이 얽매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질결과 간결은 오직 욕계에만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또 어떤 이는 “범천세계에는 부(覆)의 전(纏)이 있다”라고 집착한다. 【문】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집착을 하는가? 【답】 계경에 의거한 까닭이니 계경에서 “대범천왕은 마승(馬勝) 존자의 물음을 몰랐기 때문에 범천들이 알까 두려워하여 방편으로 끌어내어서 부드러운 말씨로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범왕은 부의 전 때문에 대중이 없는 밖으로 끌어내어서 비로소 모른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부의 전(纏)은 오직 욕계에만 있으나 대범천왕은 만(慢)과 첨(諂)과 광(誑)에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에 곧 이런 말을 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3결은 세 가지이다.
욕계계이거나 색계계이거나 무색계계이다. 그 밖의 자세한 설명은 본론(本論)과 같다. 【문】무엇 때문에 욕계계와 색계계와 무색계계라 하는가? 【답】 얽매여[繫] 욕계에 있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얽매여 색계에 있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얽매여 무색계에 있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소나 말 등이 기둥이나 말뚝에 매여 있는 것을 기둥 등에 묶였다[柱等繫]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욕계의 발[足]에 얽매였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발에 얽매였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발에 얽매였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발[足]이라 함은 번뇌를 말하니 게송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께서 다니시는 곳은 끝이 없지만 발이 없으시니 무엇이 모시고 가겠는가.
마치 사람이 발이 있으면 자유자재로 팔방(八方)을 놀러 다닐 수 있지만 발이 없으면 그렇지 못한 것처럼 이와 같이 유정도 번뇌의 발이 있으면 모든 세계[界]와 갈래[趣]와 생(生)30)에 놀러 다니지만 번뇌의 발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모든 부처님은 영원히 번뇌의 발을 끊었기 때문에 세계와 갈래와 생에 다시는 유전하는 일이 없으나 정혜(定慧)로 말미암아 다니시는 곳은 끝이 없다.
또 욕계의 집[窟宅]에 들어 있기 때문이고 욕계의 아집(我執)에 집착하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집에 들어 있기 때문이고 색계의 아집에 집착하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집에 들어 있기 때문이고 무색계의 아집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집이란 탐애[愛]를 말하고 아집이란 견해[見]를 말한다. 또 욕계의 탐애에 축축이 젖으면서 아(我)ㆍ아소(我所)의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탐애에 축축이 젖으면서 아ㆍ아소의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탐애에 축축이 젖으면서 아ㆍ아소의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또 욕계의 낙욕(樂欲)에 굳게 집착되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낙욕에 굳게 집착되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낙욕에 굳게 집착되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낙은 탐애를 말하고 욕은 견해를 말한다. 또 욕계의 생사에 얽매이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생사에 얽매이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생사에 얽매이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또 욕계의 때[垢]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독해를 입고 그 때문에 더러움에 물들므로 욕계계라 한다. 색계의 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독해를 입고 그 때문에 더러움에 물들므로 색계계라 한다. 무색계의 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독해를 입고 그 때문에 더러움에 물들므로 무색계계라 한다. 온갖 번뇌를 모두 더러움이라 하되 오직 이 진(瞋)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니 그러므로 삼계에 모두 통한다. 또 욕계의 번뇌에 얽매이기 때문에 욕계계라 하고, 색계의 번뇌에 얽매이기 때문에 색계계라 하며, 무색계의 번뇌에 얽매이기 때문에 무색계계라 한다.
【論】 결(結)이 욕계에 떨어지면[墮] 그 결은 욕계에 있는가[在]?3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에서 떨어진다[墮]고 하는 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타(界墮)요, 둘째는 취타(趣墮)이며, 셋째는 보특가라타(補特伽羅墮)요, 넷째는 처타(處墮)이며, 다섯째는 유루타(有漏墮)요, 여섯째는 자체타(自體墮)이다. 계타라 함은 여기에서 ‘모든 결이 욕계에 떨어지면 그 결은 욕계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의 뜻은 만일 이것이 이 세계의 법이면 이 세계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니 만일 욕계의 법이면 욕계에 떨어진다고 하고, 만일 색계의 법이면 색계에 떨어진다고 하며, 만일 무색계의 법이면 무색계에 떨어진다고 한다. 취타라 함은 설법하는 이가 법 보시[法施]를 행할 때에 ‘이 법 보시로써 모든 갈래[趣]에 떨어진 유정들이 속히 생ㆍ노ㆍ병ㆍ사에서 벗어날지이다’라고 원을 세우는 것과 같다. 보특가라타라 함은 비나야(毘奈耶)에서 “어느 두 보특가라가 승수(僧數) 안에 떨어져서 승가[僧]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였다”32)라고 하는 것과 같다. 처타라 함은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어떤 것이 색온(色蘊)인가?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에 떨어진 색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유류타라 함은 『품류족론』에서 “어떤 것이 떨어지는 법인가? 유루법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체타라 함은 대종온(大種蘊)에서 “유집수(有執受)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증어(增語)로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자체(自體)에 떨어지는 법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섯 가지 떨어짐에서 여기에서는 오직 계타(界墮)에 의해서만 논을 지었다. 여기에서 있다[在]고 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재(自體在)요, 둘째는 기재(器在)이며, 셋째는 현행재(現行在)요, 넷째는 처재(處在)이다.
자체재라 함은 온갖 법이 각각 자체(自體)요 자아(自我)요 자물(自物)이요 자상(自相)이요 자분(自分)이어서 제 본래 성품에 머무른 것을 말하고, 기재라 함은 대추 따위가 그릇 속에 있고 천수(天授) 등이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현행재라 함은 어떤 법을 이 현행(現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처재라 함은 어떤 법을 이 처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네 가지 있음에 모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니 모두 갖추었기도 하고 혹 모두 갖추지 않았기도 하였으므로 그에 따라 알맞게 알아야 한다.
【論】 결이 욕계에 떨어지면 그 결은 욕계에 있는가? 【답】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결은 욕계에 떨어지나 그 결은 욕계에 있는 것이 아니니 전(纏)에 얽히어 색계에서 죽어 욕계의 중유(中有)를 일으키는 것이다.
색계에서 죽어 욕계에 나는 이는 오직 이생일 뿐이다. 그 욕계의 중유는 색계에 있을 때에 일어난 것이므로 법이 당연히 그와 같아야 한다. 사유(死有)가 소멸하는 곳에 중유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마치 종자가 소멸하는 곳에 싹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는 사유로부터 중유에 이르는 때에 욕계의 36수면(隨眠)의 어느 하나가 앞에 나타나면서 생(生)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한다.
【論】 그리고 악마가 범천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전(纏)에 얽힌 까닭에 여래를 꾸짖고 대항하는 것이다.
전에 얽힌다 함은 어떤 이는 “분(忿)의 전이다. 그는 분에 마음 얽히어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부(覆)의 전이다. 그는 부에 마음이 얽히어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질(嫉)의 전이다. 그는 질에 마음이 얽히어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간(慳)의 전이다. 그는 간에 마음이 얽히어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9전(纏)에서 어느 하나가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면(眠)이 제외된 것은 어업(語業)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마(魔)라고 하는가? 【답】 혜명(慧命)을 끊기 때문이며 혹은 언제나 방일(放逸)하여 자기 몸을 해치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악(惡)이라 하는가? 【답】 나쁜 뜻을 품고 악한 법과 악한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묘음(妙音) 존자는 “악을 발끈 일으키는 이가 죽어서 그곳에 나기 때문에 악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악마는 범천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무엇을 하는가? 【답】 부처님을 꾸짖고 대항한다. 【문】그는 어떤 힘이 있기에 범천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가? 【답】 범(梵)에 이끌리기 때문이니 마치 계경의 말씀과 같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誓多林)의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한 범천(梵天)이 범천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쁜 견해의 갈래[見趣]를 일으키어 ‘이곳은 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이다. 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으로는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다시는 없다’라고 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마치 장사(壯士)가 팔을 구부렸다 펴는 것처럼 짧은 동안에 이곳에서 사라져서 범천의 세계에 이르러서 그 범천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계셨다. 그때 그 범천은 멀리서 부처님을 뵙고 곧 여쭈었다. ‘잘 오셨습니다, 대선(大仙)이시여. 이곳은 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입니다. 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으로는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다시는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재환(災患)이 있는 욕계를 버리고 이곳으로 오셨으니 아주 잘하셨습니다. 이 세간에서 안락하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곳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곳도 아니요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도 아닌데, 그대가 언제나 한결같아서 변하거나 바뀌지도 않으며 순수하고 영원히 벗어난 곳이라 여기는 것은 무거운 무명이 그대의 마음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대는 과거의 모든 범천들 가운데 욕계에 떨어진 이는 마치 꽃과 열매가 떨어지듯 했었다는 것을 살펴야 하는데 어찌하여 망령되이 이곳을 한결같다는 등으로 헤아리는가?’ 이렇게 범천은 두 번 세 번 자신의 세계를 찬양했고 부처님께서도 두 번 세 번 그가 하는 말을 꾸짖으셨다. 마침내 그 범천은 부처님의 위광(威光)이 대적하기 어렵고 또 고요하고 욕심 여읜 자리[離欲地]에 머물렀음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 누가 부처님의 논의(論議)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범천은 악마가 여래를 항상 원수처럼 여기며 대적했다는 것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신통력을 부려 범천세계를 끌어다 변화로 욕심의 자리[欲地]를 만들어 놓고 태연히 머물러 있다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곳은 언제나 한결같아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곳은 언제나 한결같지 않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악마가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선이시여, 범천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합니다. 자꾸만 거역하지 말고 받들어 행하십시오. 만일 범천의 말을 어기고 거역하면 마치 길상천신(吉祥天神)이 어떤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 때 칼과 막대기 등으로 천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높은 곳으로부터 굴러 떨어질 때에 손발을 놓아버려 순식간에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 나무 끝에서 손발을 놓아버린 사람이 반드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범천이 하는 말을 받들어 따르십시오.’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당신께서는 어찌 저희 범천의 무리[梵衆]들이 범천을 에워싸고 그 말을 공경히 따르면서 감히 거역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범천의 왕도 아니고 범천의 무리도 아니며 그야말로 악마가 아니더냐. 부끄러움도 없이 멋대로 와서 요란하게 구는구나.’ 그제야 악마는 부처님께서 알아채고 계셨음을 깨달았다. 악마는 마음에 부끄러움과 고뇌를 품었으나 스스로 물러나지 못하자 범천(梵天)은 신통력으로 그를 제 궁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계경으로 인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떤 결은 욕계에 떨어지나 그 결은 욕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욕계에 떨어진다는 것은 계타(界墮)이고 그 밖의 다른 타(墮)가 아니며 욕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은 색계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체재(自體在)를 제외한 세 가지 있음[三在]이 있는 것이니, 자기 세계[自界]에서는 앞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2)앞 절(節)에서는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修所斷]의 의의를 밝혔으므로 이 문단에서는 다시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에서 고제(苦諦)에 미혹한 견고(見苦)에서 끊어지는 번뇌[惑]와 집제(集諦)에 미혹한 견집(見集)에서 끊어지는 번뇌와 멸제(滅諦)에 미혹한 견멸(見滅)에서 끊어지는 번뇌와 도제(道諦)에 미혹한 견도에서 끊어지는 번뇌인 네 가지로 구분하고, 다시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합하여 5부(部)로 하여 그것에 의거하여 3결(結) 나아가 98수면(隨眠)을 분류하는 것이다.
3)현관(現觀)이란 성제현관(聖諦現觀)을 말한다. 여기에는 견현관(見現觀)ㆍ연현관(緣現觀)ㆍ사현관(事現觀)의 세 가지가 있으며 다시 견현관 중에는 돈현관설(頓現觀說)과 점현관설(漸現觀說)이 있다. 전자(前者)에 대한 주장을 칭우(稱友)에 의하면 법밀부(法密部)라 하고 『광기(光記)』에서는 이것을 대중부(大衆部)라 하는데 점현관의 주장이 유부(有部)의 입장이다.(『俱舍論』 제23권 참조)
4)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4전도(顚倒) 가운데 변견(邊見) 중에서는 상견(常見)을 취하므로 상도(常倒)가 되고, 견취(見取) 중에서는 낙ㆍ정을 취하므로 낙정도(樂淨倒)가 되며, 유신견(有身見) 중에서는 오직 아견(我見)만을 취하므로 아도(我倒)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유신견의 결[有身見結]은 뒤바뀐 자성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들 전도는 견고(見苦)에서 끊어지는 것이어서 고제(苦諦)를 반연하여 고(苦)ㆍ공(空)ㆍ비정(非淨)ㆍ비아(非我)의 행상(行相)이 있을 때에는 상ㆍ낙ㆍ아ㆍ정의 네 가지 전도는 소멸하게 된다.
5)번뇌가 미세한 것이란 유정(有頂)의 제9품(品)의 번뇌[惑]를 가리킨다. 이것은 삼계 최후의 번뇌이어서 만일 그것을 끊으면 삼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지극히 미세하다. 상상품(上上品)의 지혜가 아니면 그것을 끊을 수 없으며 곧 제9무간도(無間道)에서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일어날 때라야 비로소 영원히 끊어진다.
6)내도에서 일으키는 것[內道起者]은 삼보에 귀의하여 성도(聖道)가 소용없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으므로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계금취(戒禁取)를 일으키지 않지만 외도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견도에서 끊어지는 계금취를 일으킨다.
7)인이 아닌 것[非因]을 인이라 헤아린다 함은 대자재천(大自在天)ㆍ생주(生主) 등과 같은 세계의 원리(原理)가 아닌 것을 원리라고 세우면서 상일(常一)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물과 불에 몸을 던져 갖가지 고행을 하는 것이 천상에 태어나는 인이라고 여기는 일이다. 도가 아닌 것[非道]을 도라 헤아린다 함은 구계(狗戒)ㆍ우계(牛戒) 등을 받아 지니면서 이것이 청정하고 해탈을 얻게 한다고 고집하는 일이며, 또 외도의 지혜[外道智:수론파(數論派)ㆍ유가파(瑜伽派)와 같은 이들의 지혜]를 진실한 해탈의 도라고 고집하는 따위이다.
8)총괄적으로 말하면 5부(部)에 통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반드시 모두가 5부 전체에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욕루(欲漏)를 예를 들어 말해 보면 그 욕루는 5탐(貪)ㆍ5진(瞋)ㆍ5만(慢)ㆍ12견(見)ㆍ4의(疑)ㆍ10전(纏)의 41가지의 일을 자성(自性)으로 삼기 때문에 그 중에는 1부에 통하는 것도 있고 나아가 5부에 통하는 것도 있다. 또 같은 1부라 해도 유신견ㆍ변집견과 같은 것은 견고(見苦)에서 끊어지는 것이요, 악작(惡作)ㆍ질(嫉)ㆍ간(慳)ㆍ분(忿)ㆍ부(覆)와 같은 것은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며, 계금취(戒禁取)와 같은 견고(見苦)ㆍ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2부의 것과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의(疑)와 같은 4부의 것과 그리고 탐(貪)ㆍ진(瞋)ㆍ만(慢)과 같은 5부 전체에 통하는 것도 있다.
9)28수면이라 함은 욕계의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와 5견(見)을 합한 10수면과 위 두 세계[上二界]에서 진(瞋)을 제외한 그 나머지 각각 9씩을 합하면 28수면이 된다.
10)19수면이라 함은 삼계의 탐(貪)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의 18수면과 욕계의 진(瞋)을 합하여 19수면이 된다.
11)견집(見集)에서 끊어지는 19수면과 같다.
12)22수면이라 함은 삼계에서 각각 탐(貪)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의 21수면과 욕계의 진(瞋)을 합하여 22수면이 된다.
13)삼계에서 각각 탐(貪)ㆍ치(癡)ㆍ만(慢)의 9수면과 욕계의 진(瞋)을 합하여 10수면이 된다.
14)대치(對治)가 결정된다 함은 능대치(能對治)의 지혜[智]가 결정된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고제(苦諦) 아래의 번뇌[惑]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인지(苦忍智)에 한정시킨 경우를 가리킨다.
15)소연(所緣)이 결정된다 함은 능대치의 지혜에 의하여 끊어질 대상이 만일 능대치의 지혜인 고인지이면 반드시 고제 아래의 번뇌로 결정되는 것을 말하며, 이와 반대로 결정되지 않은 것이란 고ㆍ집ㆍ멸ㆍ도의 지혜와 세속지가 능대치가 되는 경우이며 아울러 그 대상도 일정하지 않은 경우이다.
16)지금 여기에서 견(見)이라 일컫는 것은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의 5견(見)이다. 본 절(節)에서는 모든 번뇌 중에서 이 5견에 포섭되는 것을 견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견이 아니라고[非見] 분류하고 있다.
17)유신견(有身見)과 계금취(戒禁取)는 추리 판단하는 하나의 작용이다. 이것은 견(見)이지만 의(疑)는 이와는 반대로 망설이는 것이므로 견이 아니다.
18)심(尋)이란 마음의 거친 성품이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외부의 물건에 향하게 하는 작용을 말하고, 사(伺)라 함은 마음의 미세한 성품이어서 외부의 물건을 마음속에서 관찰하는 작용을 말한다. 본 절(節)은 모든 번뇌 중에서 어떤 것이 이 심ㆍ사와 상응하는가를 밝히려는 문단이다. 유심유사(有尋有伺)는 그 마음의 작용이 거친 욕계(欲界)와 초선(初禪)에서요, 무심유사(無尋唯伺)는 약간은 마음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정려중간(靜慮中間)이며, 무심무사(無尋無伺)는 전혀 바깥 물건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제2선(禪) 이상이다. 따라서 모든 번뇌를 여기에 끼워 넣어서 생각해 보면 쉽게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19)본 절은 유쾌하고[快] 유쾌하지 않는[不快] 등의 감정과 모든 번뇌의 상응관계를 밝히려는 문단이다. 감관적 감정[身受]의 유쾌한 것을 낙근(樂根)이라 하고, 유쾌하지 않은 것을 고근(苦根)이라 하며, 다시 지능적 감정[心受]의 유쾌한 것을 희근(喜根)이라 하고, 유쾌하지 않은 것을 우근(憂根)이라 하며, 다시 그 신수(身受)ㆍ심수(心受)를 통하여 유쾌한 것도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사근(捨根)이라 한다. 이들 5근(根)은 욕계에서는 모두 다 있고, 색계에는 고근ㆍ우근의 두 가지 근[초선(初禪)ㆍ이선(二禪)에서는 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 있다.]이 없으며, 제4선(禪) 이상에서는 오직 4근만 있을 뿐이므로 모든 번뇌와의 상응관계도 이를 미루어 알아야 된다.
20)다른 것과 화합하여 생긴다 함은 모든 유위법은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스스로 나는 것[生] 등의 4상(相)과 화합하여 일어나게 됨을 말한다.
21)하나로 화합하여 생긴다 함은 마음과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모든 마음의 무더기[心聚家]가 동일한 찰나[同一刹那]에서 생기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22)동일한 소의라 함은 소의평등(所依平等)을 말하는 것으로 심ㆍ심소(心心所)가 똑같이 동일한 근(根)에 의지하는 것이요, 동일한 소연이라고 함은 소연평등(所緣平等)을 말하는 것으로 심ㆍ심소가 동일한 대상을 향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와 행상평등(行相平等)ㆍ시평등(時平等)ㆍ사평등(事平等)의 세 가지를 합한 다섯 가지를 심ㆍ심소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조건이라 한다.
23)명근 등의 8근(根)이라 함은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 등의 5근과 남근(男根)ㆍ여근(女根)과 명근(命根)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심소(心所)가 아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24)욕계의 유정은 나는 것[生]도 괴롭고 늙는 것[老]도 괴로우며 죽는 것[死]도 괴로운 것이므로 그 본성이 괴로운 것인데 게다가 모든 번뇌와 업을 일으키면서 갖가지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25)의심[疑]은 구상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망설임이 아니요 추상적이다. 그러나 욕계의 기쁨[喜]은 외계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므로 외문전(外門轉)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응하지 않는다.
26)상의(相依)에 어긋난다 함은 초선(初禪)ㆍ2선(禪)은 희근(喜根)의 자성지(自性地)인데 희근과 상응하지 않는다 하면 그 희근이 초ㆍ2선에 없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의(疑)가 없는 것이 되므로 어느 쪽 이치에도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상응하는 법[相應法]과 어긋난다 함은 유부(有部)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에도 그 근저에서는 반드시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ㆍ욕(欲)ㆍ혜(慧)ㆍ염(念)ㆍ작의(作意)ㆍ해탈(解脫)ㆍ삼마지(三摩地)의 10대지법(大地法)이 있는 것인데 만일 수(受)가 없다면 10대지법의 심소(心所)와 상응하는 법칙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27)이 부분에 대한 『발지론』의 인용은 생략되어 있다.
28)본 절(節)은 모든 번뇌와 그 계계(界繫)와의 관계를 밝히는 문단이다. 먼저 예(例)에 의거하여 논구(論究)의 유래를 밝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번뇌의 계계를 분별하면서 나아가 욕계계(欲界繫)ㆍ색계계(色界繫)ㆍ무색계계(無色界繫)의 의의를 설명한다.
29)악작(惡作) 등이라 함은 악작ㆍ간(慳)ㆍ질(嫉)ㆍ분(忿)ㆍ부(覆) 등을 가리킨다.
30)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계와 지옥ㆍ방생ㆍ아귀ㆍ사람ㆍ하늘의 5취(趣)와 태(胎)ㆍ난(卵)ㆍ습(濕)ㆍ화(化)의 4생(生)을 가리킨다.
31)앞에서는 모든 번뇌의 계계(界繫)를 밝혔고, 본 절(節)에서는 그것에 이어서 모든 번뇌의 소속[界墮]과 그 소재[界在]를 논구하는 문단이다. 먼저 타(墮)와 재(在)의 의의를 밝히고, 그 다음에는 욕계의 결(結)에 대한 타와 재의 관계를 4구(句) 분별에 의하여 논하며 다시 색계와 무색계에 이어진다.
32)일찍이 제바(提婆)가 교단을 버리고 따로 교파를 수립하자 5백의 비구들이 그를 따르려고 했으므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장로 사리불과 목련 두 사람이 그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그런 일이 없게 한 사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