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네 가지의 염주[四念住]가 있으니, 신념주(身念住)ㆍ수념주(受念住)ㆍ심념주(心念住)ㆍ법념주(法念住)이다.218)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한 뜻은 이미 이해했을 것이므로 자세히 분별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니, 계경219)에서 “네 가지의 염주가 있으니, 신념주와 나아가 법념주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비록 이렇게 말씀했다 하더라도 “만일 신념주를 닦는 이면 그는 수념주도 닦는가?……(이하는 생략함)……”를 분별하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았으면 이제 모두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세 가지의 염주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념주(自性念住)이고, 둘째는 상잡념주(相雜念住)이며, 셋째는 소연념주(所緣念住)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어느 곳에서 자성념주를 말씀하셨는가? 【답】 계경220)에서 “한 갈래의 도(道)가 있어서 유정을 청정하게 하고 걱정 근심을 초월하게 하니, 네 가지의 염주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에 대해서의 순신관(循身觀) 염주요, 나아가 법에 대해서의 순법관(循法觀) 염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다시 어느 곳에서 상잡념주를 말씀하셨는가? 【답】 계경221)에서 “만일 어떤 이가 ‘선의 법 무더기[善法聚]라 함은 곧 네 가지의 염주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이 바른 설명이 된다. 왜냐하면 순박하고 갖추었고 원만한 선의 법 무더기는 오직 네 가지의 염주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에 대해서의 순신관……(이하는 생략함)……”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다시 어느 곳에서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는가? 【답】 계경에서 “만일 어떤 이가 ‘온갖 법이 곧 네 가지의 염주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이 바른 설명이 된다. 왜냐하면 온갖 법을 완전히 갖추어 섭수(攝受)하는 것은 오직 네 가지의 염주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에 대해서의 순신관 염주이고……(이하는 생략함)……”라고 하신 것과 같다. 여기에서 세 경(經)의 표구(標句)는 그 차례대로 따로따로 자성ㆍ상잡ㆍ소연의 염주를 말했으면서도 해석한 주절에서는 모두 자성념주(自性念住)를 말하고 있으니, 순관(順觀)이라는 말은 다 같이 혜(慧)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표구 중에서는 혹은 자성념주를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상잡념주를 말씀하기도 하며 혹은 소연념주를 말씀하기도 하시면서 해석한 구절 중에서는 오직 자성념주만을 말씀하셨는가? 【답】 승의(勝義)의 염주를 잃거나 파괴함이 없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염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승의이고, 둘째는 세속(世俗)이다. 자성염주는 승의요, 그 밖의 나머지는 세속이다. 승의의 염주는 온갖 때에 잃거나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해석한 구절 중에서 모두 자성념주를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자성념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을 염주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세 가지의 염주는 다 같이 혜(慧)를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혜의 성품[慧性]이 구유법(俱有法)에 서로가 섞이고[相雜] 돕는 반려가 됨으로 말미암아 할 일[所作]이 능히 있는 것을 곧 상잡념주라 하고, 소연(所緣)의 힘으로 말미암아 두루 따라서 관찰하는 것을 곧 소연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계경 가운데서 이 세 가지의 염주를 말씀했기 때문에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사도 곳곳에서 세 가지의 염주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어떤 것이 신념주(身念住)인가? 몸을 반연하는 혜(慧)이다. 나아가 어떤 것이 법념주(法念住)인가? 법을 반연하는 혜이다”222)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자성념주를 말하는 곳이라 한다. 이것은 곧 계경에서 “한 갈래[一趣]의 도(道)가 있어서……(이하는 생략함)……”라고 말씀한 곳이다. “어떤 것이 신념주인가? 몸의 증상의 도[增上道]가 내는 유루와 무루의 선(善)이다. 나아가 어떤 것이 법념주인가? 법의 증상의 도가 내는 유루와 무루의 선이다”223)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상잡념주를 말하는 곳이라 한다. 이것은 곧 계경에서 “선의 법 무더기[善法聚]라 함은 곧 네 가지 염주이니……(이하는 생략함)……”라고 말씀한 곳이다. “어떤 것이 신념주인가? 열 가지 색처(色處)와 법처소섭의 색[法處所攝色]이다.224) 어떤 것이 수념주(受念住)인가? 여섯 가지 수신[六受身]225)이다. 어떤 것이 심념주(心念住)인가? 여섯 가지 식신(識身)이다. 어떤 것이 법념주인가? 수온(受蘊)에 포섭되지 않은 색이 아닌[非色] 법처(法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소연념주를 말하는 곳이라 한다. 이것은 곧 계경에서 “온갖 법이란 곧 네 가지 염주이다”라고 말씀한 곳이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에서 말한 것과 계경은 상응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역시 세 가지의 염주에 의거하여 논한다. 【문】 세존께서는 어떠한 유정들을 위하여 자성념주를 말씀하셨고, 나아가 어떠한 유정들을 위하여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는가? 【답】 곧 세 가지 어리석은 유정들을 위하여 세 가지의 염주를 말씀하셨다. 자성념주에 어리석은 이면 자성념주를 말씀하셨고, 또한 소연념주에 어리석은 이면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다. 또 유정의 행(行)에는 차별이 있다. 처음 업을 행하는[初業] 등이니, 처음 업을 행하는 이면 소연념주를 말씀하셨고, 이미 익히 행한[已習行] 이면 상잡념주를 말씀하셨으며, 이미 뛰어나게 뜻을 지은[已超作意] 이면 자성념주를 말씀하셨다. 또 유정의 요욕(樂欲)에는 차별이 있다. 자세한 것[廣]과 간략한 것[略]의 것과 그 중간의 것[中]이다. 간략한 것을 좋아하는 이면 자성념주를 말씀하셨고, 중간의 것을 좋아하는 이면 상잡념주를 말씀하셨으며, 자세한 것을 좋아하는 이면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다. 또 유정에게는 근성의 차별이 있다. 영리한 것과 그 중간의 것과 둔한 것이다. 근성이 영리한 이면 자성념주를 말씀하셨고, 근성이 중간인 이면 상잡념주를 말씀하셨으며, 근성이 둔한 이면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다. 또 유정의 지(智)에는 차별이 있다. 개발생지(開發生智)와 분별생지(分別生智)와 인도생지(引導生智)이다. 개발생지이면 자성념주를 말씀하셨고, 분별생지이면 상잡념주를 말씀하셨으며, 인도생지이면 소연념주를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교화할 유정을 위하여 부처님은 세 가지의 염주를 말씀하셨다. 【문】 이 세 가지의 염주는 어느 것이 번뇌를 끊는가?226) 【답】 오직 상잡념주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끊지 못한다. 【문】 무엇 때문에 자성념주는 번뇌를 끊지 못하는가? 【답】 만일 돕는 반려[助伴]를 여의게 되면 오직 혜(慧)만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소연념주는 번뇌를 끊지 못하는가? 【답】 그의 작의(作意)는 널리 흩어지기 때문이다. 오직 소연을 한데 모으는[總略] 작의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상잡념주는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답】 두 가지의 연을 갖추기 때문이니, 돕는 반려를 섭수(攝受)하는 까닭과 소연(所緣)을 한데 모으는 작의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염주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어야 한다. 【답】 그것은 상잡념주를 이끌어 내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끊는[斷]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잠시 동안 끊는[暫斷] 것이요, 둘째는 온전히 끊는[究竟斷] 것이다. 나머지 다른 염주를 닦으면 잠시 동안은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상잡념주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다. 문소성과 사소성과 수소성의 차별이다. 【문】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번뇌를 끊는가? 【답】 수소성이 번뇌를 끊는 것이고 다른 나머지는 끊지 못한다. 【문】 무엇 때문에 문소성은 번뇌를 끊지 못하는가? 【답】 이것은 반드시 이름[名]에 의거하여서야 뜻[義]에 대하여 구르게 된다. 오직 이름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뜻에 대하여 구르는 도(道)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사소성은 번뇌를 끊지 못하는가? 【답】 이 작의(作意)는 부정지(不定地)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오직 정지(定地)에 포섭된 도(道)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수소성은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답】 두 가지의 연(緣)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뜻에 대하여 구르는 까닭과 정지(定地)에 포섭되는 까닭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두 가지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어야 한다. 【답】 그것은 수소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문소성은 사소성을 이끌어 내고 사소성은 수소성을 이끌어 내며 수소성은 번뇌를 끊게 되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끊는[斷]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이하는 생략함)……”라고 한다. 수소성(修所成)의 염주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이다. 【문】 이 네 가지 중의 어느 것이 번뇌를 끊게 되는가? 【답】 법념주(法念住)가 번뇌를 끊게 되는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끊지 못한다. 【문】 무엇 때문에 앞의 세 가지의 염주는 번뇌를 끊지 못하는가? 【답】 그것은 자상의 작의[自相作意]에 포섭되기 때문이니, 오직 공상의 작의[共相作意]에 포섭되는 도(道)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것은 하나하나의 온(蘊)을 저마다 따로따로 반연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통틀어서 4온(蘊)ㆍ5온이나 혹은 이온(離蘊)을 반연하는 도(道)가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의 세 가지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어야 한다. 【답】 법념주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신념주는 수념주를 이끌어 내고 수념주는 심념주를 이끌어 내며 심념주는 법념주를 이끌어 내고 법념주는 번뇌를 끊게 되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반드시 먼저 모든 온을 분별하고 그 뒤에야 비로소 통틀어 반연하면서 번뇌를 끊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끊는[斷]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한다. 법념주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227) 첫째는 잡연(雜緣)이요, 둘째는 부잡연(不雜緣)이다. 만일 상온(想蘊)과 행온(行蘊)과 무위(無爲)를 반연하면 부잡연이라 하며, 만일 5온에 대하여 혹은 2ㆍ2를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3ㆍ3을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4ㆍ4를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5온을 통틀어 반연하기도 하면서 무위를 반연하면 잡연이라고 한다. 【문】 이 가운데서 어떠한 법념주가 번뇌를 끊는가? 【답】 두 가지가 다 같이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만일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도제(道諦)를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도(道)이면 잡연법념주(雜緣法念住)이며, 만일 멸제(滅諦)를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도이면 부잡연법념주(不雜緣法念住)이다. 이 가운데서는 혹은 통틀어 한 가지의 염주를 말하기도 한다. 대지법(大地法)의 혜(慧)이고, 혜근(慧根)이며, 혜력(慧力)이요, 정견(正見)이며, 택법각지(擇法覺支)이다. 혹은 두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유루와 무루이고, 속박과 해탈이며, 계박[繫]과 불계(不繫)이다. 혹은 세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연품(軟品)ㆍ중품(中品)ㆍ상품(上品)이며, 혹은 문소성ㆍ사소성ㆍ수소성이다. 혹은 네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이다. 혹은 다섯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3계계(界繫)와 학(學)ㆍ무학(無學)이다. 혹은 여섯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유루와 무루에 각각 연품ㆍ중품ㆍ상품이 있다. 혹은 여덟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각각에 유루와 무루가 있다. 혹은 아홉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연연(軟軟) 내지 상상(上上)이다. 혹은 열두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각각에 연품ㆍ중품ㆍ상품이 있다.
다시 다르게 열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계경228)에서 “안의 몸[內身]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고, 바깥 몸[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며, 안팎의 몸[內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는 것이다. 몸의 세 가지처럼 나아가 법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혹은 열여덟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유루와 무루 각각에 연연품(軟軟品) 내지 상상품(上上品)이 있다. 혹은 스물네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연품ㆍ중품ㆍ상품의 각각에 유루와 무루가 있다. 혹은 서른여섯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각각에 연연품 내지 상상품이 있다. 이와 달리 서른여섯 가지로 말하는 이가 있다. 계경에서 “안의 몸에 대하여 싫증내는 생각[厭逆想]에 머무르고 안의 몸에 대하여 싫증내지 않는 생각[不厭逆想]에 머무르며 안의 몸에 대하여 둘 다 여의고 버리면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머무르는 것이다. 안의 몸처럼 바깥 몸과 안팎의 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몸에 대해서 아홉 가지가 있는 것처럼 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혹은 일흔두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신념주의 유루와 무루 각각에 연연품 내지 상상품이 있다. 신념주에 열여덟 가지가 있는 것처럼 법념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상속과 찰나에 결부시켜 분별한다면 한량없는[無量] 염주가 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한 가지 등보다는 광대하게 네 가지의 염주를 말씀하셨고 한량없는 것보다는 간략하게 네 가지의 염주를 말씀하셨는가?229)
【답】 네 가지의 뒤바뀜[四顚倒]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다. 깨끗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뒤바뀜을 대치하기 위하여 신념주(身念住)를 말씀하셨고, 괴로운 것에 대하여 즐겁다고 생각하는 뒤바뀜을 대치하기 위하여 수념주(受念住)를 말씀하셨으며, 무상한 것에 대하여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뒤바뀜을 대치하기 위하여 심념주(心念住)를 말씀하셨고, 아가 없는[無我] 것에 대하여 아라고 생각하는[我想] 뒤바뀜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념주(法念住)를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네 가지의 식(食)230)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단식(段食)을 대치하기 위하여 신념주를 말씀하셨고, 촉식(觸食)을 대치하기 위하여 수념주를 말씀하셨으며, 식식(識食)을 대치하기 위하여 심념주를 말씀하셨고, 의사식(意思食)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념주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떤 이는 “네 가지의 식주(識住)231)를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색근행식주(色近行識住)를 대치하기 위하여 신념주를 말씀하셨고, 수근행식주(受近行識住)를 대치하기 위하여 수념주를 말씀하셨으며, 거기에 머무르는 식(識)을 대치하기 위하여 심념주를 말씀하셨고, 상근행식주(想近行識住)와 행근행식주(行近行識住)를 대치하기 위하여 법념주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떤 이는 “5온(蘊)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색온(色蘊)을 대치하기 위하여 신념주를 말씀하셨고, 수온(受蘊)을 대치하기 위하여 수념주를 말씀하셨으며, 식온(識薀)을 대치하기 위하여 심념주를 말씀하셨고, 상온(想蘊)ㆍ행온(行蘊)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념주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떤 이는 “네 가지의 닦지 않은 것[不修]232)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몸을 닦지 않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신념주를 말씀하셨고, 계율을 닦지 않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수념주를 말씀하셨으며, 마음을 닦지 않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심념주를 말씀하셨고, 지혜를 닦지 않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념주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떤 이는 “네 가지의 수행과 동일한 법이기 때문에 네 가지의 염주를 말씀하셨다. 몸을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법이기 때문에 신념주를 말씀하셨고, 계율을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법이기 때문에 수념주를 말씀하셨으며, 마음을 닦는 것과 동일한 법이기 때문에 심념주를 말씀하셨고, 지혜를 닦는 것과 동일한 법이기 때문에 법념주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문】 염주(念住)는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가? 염(念)으로써 삼는가, 혜(慧)로써 삼는가? 만일 염으로써 삼는다 하면 이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몸에 대해서 순신관이고……(이하는 생략함)……”라고 한 것과 같다. 만일 혜로써 삼는다면 무엇 때문에 염주라고 하는가? 또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어떤 곳에 대하여 염근(念根)을 관찰해야 하는가? 네 가지의 염주에 대해서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혜를 자성이라고 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염주라고 하는가? 【답】 염(念)이 이것에서 머무르고[住] 평등하게 머무르며[等住] 저마다 머무르기[各住]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 마치 코끼리나 말 등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코끼리나 말 등이 머무른다[住]고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그와 같다. 어떤 이는 “이것은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소연(所緣)에 대하여 차별을 일으켜 넓디넓게 작용하면서도 잃거나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유가사(瑜伽師)는 소연을 자세히 기억하고 소연의 경계를 잊어버린 뒤에도 다시 기억해 내기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수행하는 이가 소연 가운데서 먼저 염(念)으로써 편안히 머무르고 그러한 뒤에 관찰하며, 다시 소연에 대하여 먼저 통달한 뒤에 염으로서 편안히 머무르고 수호하기 때문에 마치 문지기와 같은 것이므로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수행하는 이가 소연의 경계에 대하여 먼저 염으로서 거두어 지니고[攝持] 그 뒤에 혜(慧)로서 관찰하며 그러면서 번뇌를 끊는다. 마치 농부가 먼저 왼손으로써 풀 등을 거머쥐고 그 뒤에 오른손으로서 낫을 잡고는 그것을 베는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유가사가 염의 갑옷을 입고 마음의 상속(相續) 위에서 지혜의 무기를 잡고 생사(生死)의 진(陣) 안에 있으면서 번뇌의 원수에 항복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항복 받기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자성을 취했다는 허물을 막기 위하여 염주라고 한다. 만일 혜주(慧住)라 하면 자성을 취했다는 허물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오직 자성만이 능히 하는 일[所作]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염주라고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만 염주라고 하며 혜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문】 계경에서 말씀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어떤 곳에 대하여 염근(念根)을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의 염주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염근은 염주의 자리[位]에서 작용이 증상(增上)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마치 신근(信根)은 네 가지 증정(證淨)233)의 자리에서 작용이 증상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다시 “어떤 곳에 대하여 신근을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 증정에서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그와 같이 정진근(精進根)은 네 가지의 정단[四正斷]에서, 정근(定根)은 네 가지의 정려[四靜慮]에서, 혜근(慧根)은 네 가지의 성제[四聖諦]에서 관함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다시 “어떤 곳에 대하여 혜근을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의 성제에서이다”라고 하셨다. 이것도 그와 같다. 이것을 염주의 자성이라고 한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염주(念住)라고 하는가? 염주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답】 염(念)은 이것에서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저마다 머무르는 것이니, 자세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통틀어 염주라 하는 까닭을 말했으므로 하나하나의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신념주(身念住)라 하는가? 【답】 이 염주는 몸을 반연하기 때문에 신념주라 한다. 【문】 나머지 다른 염주도 몸을 반연한다. 수념주는 여섯 가지 수신[六受身]을 반연하고, 심념주는 여섯 가지 식신[六識身]을 반연하며, 법념주는 여섯 가지 상신[六想身]과 여섯 가지 사신[六思身] 등을 반연한다. 무엇 때문에 모두 신념주라 하지 않는가? 【답】 여기에서 말한 몸을 반연한다고 함은 색신(色身)을 반연한 것이며 나머지 다른 염주는 색이 아닌 몸[非色身]을 반연하기 때문에 신념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만일 현저하게 드러나면서[麤顯] 보기도 쉽고 현실에서 보이는 몸을 반연하는 것이면 신념주라 하겠지만 나머지 다른 염주는 미세하고 숨어 있으면서[微隱]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몸을 반연하기 때문에 신념주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만일 소연(所緣)의 몸이 극미(極微)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것이면 그것은 신념주라 하겠지만 나머지 다른 것의 소연의 몸은 극미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신념주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만일 몸을 반연하면서 능히 아는 것[能知]과 알 바[所知]가 동시에 생기는 것이면 신념주라 하겠지만 그 나머지 다른 것은 비록 몸을 반연한다 하더라도 능히 아는 것과 알 바가 동시에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신념주라고 하지 않는다. 비록 법념주 중에서는 동시에 생기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적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몸을 반연하기 때문에 신념주라고 하는 것과 같이 느낌[受]을 반연하기 때문에 수념주라 하고 마음[心]을 반연하기 때문에 심념주라 하며 법(法)을 반연하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 【문】 온갖 것은 모두가 법이니, 온갖 것 모두에는 오직 법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오직 한 가지만을 법념주라 하고 나머지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가? 【답】 비록 온갖 것 모두가 법이라 하더라도 다만 한 가지만을 세워 법념주라 한다. 마치 18계(界) 모두가 법이나 다만 한 가지만을 세워 법계(法界)라고 하고, 12처(處) 모두가 법이나 다만 한 가지만을 세워 법처(法處)라고 하는 것과 같다. 법계ㆍ법처처럼 이와 같이 법지(法智)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법수념(法隨念)ㆍ법증정(法證淨)ㆍ법무애해(法無礙解)ㆍ법보(法寶)ㆍ법귀(法歸)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법념주에는 한 개의 이름[名]이 있고 그 밖의 다른 염주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어서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법념주에는 공통된 이름이 있고 그 밖의 다른 염주에는 공통된 것과 공통하지 않은 이름이 있어서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생김[生]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인데 생긴 것은 그것의 소연(所緣)이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온갖 법은 이름[名]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인데 이름이 그것의 소연이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모든 유위의 모양[有爲相]은 온갖 유위의 법의 표치(標幟)인데 이 모든 모양은 그것의 소연 중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은 모든 법의 법성(法性)을 깨닫는 것인데 이 공은 그것의 소연 중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살가야견(薩迦耶見)도 모든 법의 보특가라 성품[補特伽羅性]을 깨닫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는 이름을 세우지 않는가? 【답】 그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지만 이것은 진실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어떤 이는 “혜(慧)는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편히 세우며[安立] 일의 어리석음[事愚]과 소연의 어리석음[所緣愚]을 덜고 고치며 모든 법 가운데서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으면서 구르는 것인데 이 혜는 그 모든 소연 중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멸제(滅諦) 열반(涅槃)은 승의(勝義)의 법으로서 항상 머물러 있고[常] 변하지 않는 것인데 이 법은 그의 소연 중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법념주라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 염주는 많은 법을 반연하는 것이니, 색과 색이 아닌 것, 상응한 것과 상응하지 않은 것, 소의가 있는 것[有所依]과 소의가 없는 것[無所依], 행상이 있는 것[有行相]과 행상이 없는 것[無行相], 소연이 있는 것[有所緣]과 소연이 없는 것[無所緣], 경각이 있는 것[有警覺]과 경각이 없는 것[無警覺]이다. 이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신념주는 몸을 반연하면서도 몸을 반연하는 혜(慧)를 반연하지 않고, 수념주는 느낌[受]을 반연하면서도 느낌을 반연하는 혜를 반연하지 않고, 심념주는 마음[心]을 반연하면서도 마음을 반연하는 혜를 반연하지 않고, 법념주는 몸을 반연하면서 또한 몸을 반연하는 혜도 반연하며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반연하면서 또한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반연하는 혜도 반연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오직 이것만을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신념주는 몸을 반연하면서도 몸의 태어나고 늙고 무상한 것을 반연하지 않고, 수념주는 느낌을 반연하면서도 느낌의 생겨나고 늙고 무상한 것을 반연하지 않으며, 심념주는 마음을 반연하면서도 마음의 생겨나고 늙고 무상한 것을 반연하지 않고, 법념주는 몸을 반연하면서 또한 느낌과 마음과 법의 생겨나고 늙고 무상한 것을 반연하므로 이 때문에 오직 이것만을 법념주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에 한하여 유가사(瑜伽師)는 아상(我想)과 일합상(一合想)을 모두 그쳐 쉬게 되며 법상(法想)과 차별상(差別想)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법념주라고 한다. 유가사는 몸을 분석한 뒤에는 곧 느낌을 헤아리면서 아(我)로 삼고, 느낌을 분석한 뒤에는 곧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로 삼으며, 마음을 분석한 뒤에는 곧 법을 헤아리면서 아로 삼지만 법을 분석한 뒤에는 곧 온갖 것은 아가 아니어서[非我] 유정은 오직 공행의 무더기[空行聚]일 뿐임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이것에 한하여 법이라는 생각이 원만하게 되므로 법념주라고 한다.” 이미 염주 하나하나의 까닭을 말했으므로 그것의 차례를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먼저 신념주를 말씀하시고 나아가 맨 뒤에 법념주를 말씀하셨는가? 【답】 수순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다. 만일 이와 같은 차례로 나타내 보이면 문자나 언설에서 수순하게 된다. 어떤 이는 “설명[說]과 받는 것[受]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차례를 지으면 스승이 설명하는 것과 제자가 받는 일에 있어서 모두가 수순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생겨나고 일어나는[生起] 차례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차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겨나고 일어나는 차례요, 둘째는 나타내 보이는[顯示] 차례이며, 셋째는 현관(現觀)의 차례이다. 생겨나고 일어나는 차례라 함은 이 염주와 정려와 무량(無量)과 무색(無色)과 해탈과 승처(勝處)와 변처(遍處) 등과 같다. 나타내 보이는 차례라 함은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와 도지(道支) 등이며, 현관의 차례라 함은 4성제(聖諦)이다. 유가사는 먼저 신념주를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님은 앞에 말씀하셨고, 나아가 나중에 법념주를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님은 뒤에 말씀하셨다.” 【문】 논으로 인하여 논해보자. 무엇 때문에 유가사들은 먼저 신념주를 일으키고 나아가 나중에 법념주를 일으키는가? 【답】 거칠고 미세한 것[麤細]의 차례에 의하기 때문이다. 5온 중에서 색온은 가장 거칠기 때문에 먼저 관찰하여 신념주를 일으키고, 네 가지의 무색의 온 가운데서는 수온이 가장 거칠기 때문에 그 다음에 관찰하면서 수념주를 일으킨다. 【문】 수(受) 등에는 방소(方所)가 없는데 어떻게 거칠고 미세한 것을 시설할 수 있는가? 【답】 비록 방소의 거칠고 미세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행상(行相)의 거칠고 미세한 것은 있으므로 역시 시설할 수가 있다. 이 가운데서 느낌[受]의 행상이 거친 것으로는 마치 “나의 손과 발 등이 아프다”고 말하고 또 “나는 이러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온 등의 온은 비록 색(色)은 아니라 하더라도 색과 같이 거칠고 미세한 것을 시설한다. 네 가지 무색의 온 가운데서 식온(識薀)은 가장 미세한 것인데도 상온(想蘊)과 행온(行蘊)보다 먼저 관찰하여 심념주를 일으킨다. 상온ㆍ행온은 열반의 가장 미세한 법과 합하여 시설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지막에 관찰하면서 법념주를 일으킨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 수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남자는 여색(女色)을 위하고 여인은 남색(男色)을 위하여 이러한 염심(染心)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색을 관찰하면서 신념주를 일으킨다. 이 색에 염착(染着)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樂受]을 탐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느낌[受]을 관찰하면서 수념주를 일으키며, 즐거움을 내는 것은 마음에서 조복하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마음[心]을 관찰하면서 심념주를 일으킨다. 또한 마음을 조복하지 못하는 것은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에 맨 뒤에는 법을 관찰하면서 법념주를 일으킨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은 더하거나 덜함이 있고 취하거나 버림이 있으면서 서로 비슷하게 상속(相續)함을 시설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색을 관찰하면서 신념주를 일으키고, 색을 관찰할 때에는 몸의 가뿐함과 마음의 가뿐함을 일으켜 이로 말미암아 먼저 즐거운 느낌을 끌어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다음에는 느낌을 관찰하면서 수념주를 일으킨다. 느낌을 관찰할 때에 승의(勝義)의 경계에 대한 요별(了別)을 끌어 일으키기 때문에 다음에는 식(識)을 관찰하면서 심념주를 일으키고, 그는 ‘만일 어떤 곳에 마음을 일으키면 또한 심소(心所)도 일으키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맨 나중에 법을 관찰하면서 법념주를 일으킨다.” 어떤 이는 “몸이 어리석으면 느낌[受]의 어리석음을 지니게 되고 나아가 마음이 어리석으면 법의 어리석음을 지니게 된다. 몸의 어리석음이 바꿔지지 않으면 느낌의 어리석음을 바꾸지 못하며, 나아가 마음의 어리석음이 바꿔지지 않으면 법의 어리석음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 가지의 염주는 이와 같이 차례대로 일어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몸의 어리석지 않음[不愚]은 느낌의 어리석지 않음을 이끌게 되고, 나아가 마음의 어리석지 않음은 법의 어리석지 않음을 이끌게 된다. 몸의 어리석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느낌의 어리석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나아가 마음의 어리석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법의 어리석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네 가지의 염주는 이와 같은 차례로 일으킨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몸의 관찰은 느낌의 관찰을 이끌고, 나아가 마음의 관찰은 법의 관찰을 이끈다. 몸의 관찰을 일으키지 않으면 느낌의 관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음)……”라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의 관찰은 느낌의 관찰에 인(因)이 되고 뿌리[根]가 되며 눈이 되고 길잡이가 되며 점차[漸]가 되고 능히 짓는[能作] 것이 되며 연생(緣生)이 되고 기집(起集)이 되며 등기(等起)가 된다. 느낌의 관찰은 마음의 관찰에, 마음의 관찰은 법의 관찰에도 그러하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어떤 이는 “몸의 관찰은 느낌의 관찰에 가행(加行)이 되고 문(門)이 되고 의지[依]가 되며, 나아가 마음의 관찰은 법의 관찰에도 그러하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몸의 관찰은 느낌의 관찰에 의지(依止)가 되고 자취[迹處]가 되며, 나아가 마음의 관찰은 법의 관찰에도 그러하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몸의 관찰은 다시 무엇을 의지와 자취로 삼는가? 【답】 먼저 얻었던 사마타(奢摩他)의 모양을 의지로 삼고 자취로 삼는다. 마치 “그는 먼저 부동(不動)의 사마타를 얻었기 때문에 몸의 부드럽고 가벼운 모양은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두루 쌓여 모였다”고 한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신념주와 나아가 법념주를 일으킨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상속(相續) 중에서 모든 곳을 분별하여 네 가지 염주를 일으킨다. 유가사는 먼저 모든 색처를 알고자하여 먼저 열 가지의 색처와 법처에 포섭된 색[法處所攝色]을 분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신념주를 일으킨다. 다음에는 곧 법처에 대하여 모든 느낌을 분별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수념주를 일으킨다. 다음에는 곧 법처에 대하여 상온ㆍ행온과 세 가지의 무위(無爲)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법념주를 일으킨다. 그는 다시 ‘이것을 제외하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곧 그 밖의 의처(意處)가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곧 의처를 분별하며 이 때문에 맨 뒤에 심념주를 일으킨다. 유가사들은 만일 자상관(自相觀)에 의하면 먼저 법념주를 일으키고 그 뒤에 심념주를 일으키지만 만일 공상관(共相觀)에 의하면 먼저 심념주를 일으키고 그 뒤에 법념주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네 가지의 염주는 이와 같은 차례로 일으킨다. 【문】 먼저 안을 반연하는 염주를 일으키는가? 먼저 밖을 반연하는 염주를 일으키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먼저 안을 반연하는 염주를 일으킨다 하면 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하는가? 계경234)에서 “새로 배우는[新學] 필추로서 청정한 시라(尸羅)를 갖추고 의요(意樂)가 원만하며 욕(欲)ㆍ염(念)ㆍ진(瞋)을 속히 끊어 없애고자 하는 이는 담박하게 거리로 나가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것의 모양으로써 혹은 푸른 어혈[靑瘀]이나 혹은 고름으로 문드러진 것이나……(이하는 생략함)……를 잘 취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만일 먼저 밖을 반연하는 염주를 일으킨다고 하면 그와 다른 경에서의 말씀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하는가? 그 경에서 “먼저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고 그 다음에는 바깥 몸에 대하여……(이하는 생략함)……”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먼저 안을 반연하는 염주를 일으킨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我)가 있기 때문에 아소(我所)가 있고, 아집(我執)이 있기 때문에 아소집(我所執)이 있으며, 아견(我見)이 있기 때문에 아소견(我所見)이 있고, 5아견이 있기 때문에 15아소견이 있으며, 아우(我愚)가 있기 때문에 아소우(我所愚)가 있고, 아애(我愛)가 있기 때문에 중구의 애[衆具愛]가 있는 것이니, 내부의 아[內我]를 키우고 기르기[長養] 위하여 바깥의 살림[資具]을 구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에서 인용한 경은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답】 그것은 염주(念住)의 가행으로서 근본 염주는 아니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아는가? 곧 그 경은 모양[相]을 잘 취하고 나서 본래 있던 것으로 빨리 돌아와 먼저 취했던 모양을 기억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만일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지만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시체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모양을 잘 취한 뒤에 본래 있던 곳으로 속히 돌아와서 발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앉아서 승해작의(勝解作意)로써 취했던 모양을 똑똑히 앞에 나타나게 한다. 이것을 염주의 가행(加行)이라고 한다. 만일 그때에 밖에서 취했던 모양을 안의 몸[內身]에다 놓아두고서 관찰하는 이면 그때 근본 염주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계경에서는 과위[果]가 뛰어난 이의 작의를 말씀한 것이고 염주의 자리[位]는 아니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아는가? 곧 그 경은 새로 배우는 필추가 배움의 뜻[學意]을 얻은 뒤에 만일 담박하게 거리로 나가고자 하면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새로 배우는 필추란 예류자(預流者)와 일래자(一來者)이다. 그러므로 그 계경에서는 과위가 뛰어난 이의 작의를 말씀하는 것이고 염주의 자리를 말씀한 것은 아닌 줄 알 수 있다” 계경235)에서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고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며……(이하는 생략함)……”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 여기서는 어느 것을 안의 몸 등이라 하고 어느 것을 바깥 몸 등이라고 하는가? 【답】 자상속(自相續)에 속한 물질[色]을 안의 몸이라 하고, 타상속(他相續)에 속한 물질과 비유정수(非有情數)의 물질을 바깥 몸이라 한다. 안의 법[內法]과 바깥 법[外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자상속에 속한 느낌[受]을 안의 느낌이라 하고 타상속에 속한 느낌을 바깥 느낌이라 한다. 안의 마음과 바깥 마음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러하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정수(有情數)의 물질을 안의 몸이라 하고 비유정수의 물질을 바깥 몸이라 한다. 안의 법과 바깥 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느낌과 마음에서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한다. 협 존자(脅尊者)는 “현재를 안[內]이라 하고 과거ㆍ미래와 무위(無爲)를 바깥[外]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현재를 안이라 하고 과거ㆍ미래와 무위를 바깥이라 하는가? 【답】 현재의 법은 대부분 유정으로 하여금 섭수하고 탐착하게 하지만 과거ㆍ미래와 무위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안의 몸의 자상관(自相觀)에 머무르는 것을 말하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바깥 몸의 자상관에 머무르는 것을 말하며,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안팎의 몸의 공상관(共相觀)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법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안의 몸의 자세한 관찰[廣觀]에 머무르는 것을 말하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바깥 몸의 자세한 관찰에 머무르는 것을 말하며,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안팎의 몸의 간략한 관찰[略觀]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법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아집(我執)을 대치(對治)하는 것을 말하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아소집(我所執)을 대치하는 것을 말하며,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아ㆍ아소의 고집[執]을 대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법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 아집과 아소집처럼 아견과 아소견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다섯 가지의 아견을 대치하는 말하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열다섯 가지 아소견을 대치하는 것을 말하며,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스무 가지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대치하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아견과 아소견처럼 아우(我愚)와 아소우(我所愚)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아애(我愛)를 대치하는 것을 말하고, 바깥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중구애(衆具愛)를 대치하는 것을 말하며, 안팎의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함은 함께 두 애를 다 대치하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어느 정도가 되면 신념주와 나아가 법념주가 원만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답】 두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원만하게 된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소연(所緣)을 분별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근(善根)이 증가한 것이다. 소연을 분별한다고 함은 찰나와 극미로써 소연을 분석하고 혹은 오직 찰나로서 소연을 분석하는 것이다. 선근이 증가한다고 함은 아래[下]에 의거하여 중간[中]을 내고 중간에 의거하여 위[上]를 낸다. 이 정도가 되어야 염주가 원만하게 된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행을 굴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원만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유가사는 먼저 몸을 분별하고 몸을 분별한 뒤에는 몸의 각혜(覺慧)를 굴리며, 다음에는 느낌을 분별하고 느낌을 분별한 뒤에는 느낌의 각혜를 굴리며, 다음에는 마음을 분별하고 마음을 분별한 뒤에는 마음의 각혜를 굴리면서 법을 분별한다. 비유하면 농부가 물을 끌어다가 밭에다 댈 때에 첫째 두둑이 다 찬 뒤에 끌어다 둘째 두둑에 대고, 둘째 두둑이 다 찬 뒤에 끌어다 셋째 두둑에 대며, 셋째 두둑이 다 찬 뒤에 끌어다 넷째 두둑에 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해(怨害)의 모양이 이루어져야 원만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원해의 모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뻐하고 좋아하지[喜樂] 않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성[瞋恚]을 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기뻐하고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만을 원해의 모양이라고 한다. 유가사(瑜伽師)는 몸을 분별한 뒤에 곧 몸에 대하서는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느낌 등은 기뻐하고 좋아하며, 느낌을 분별한 뒤에는 다시 느낌에 대해서는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등은 기뻐하거나 좋아하며, 마음을 분별한 뒤에는 다시 마음에 대해서는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법은 기뻐하고 좋아하며, 법을 분별한 뒤에는 곧 온갖 경계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에 염주(念住)가 원만하게 된 줄 알아야 한다.”
217)본장의 내용을 『발지론(發智論)』의 송문(頌文)에 의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염주유육문(念住有六門)/여실지유팔(如實知有八)/탐진치증감(貪瞋癡增減)/사수열반심(死受涅槃心)/제자선열반(弟子先涅槃)/불열반출정(佛涅槃出定)/사유삼유행(四有三有行)/차장원구설(此章願具說)” 이 가운데서 ‘염주유육문(念住有六門)’이라 함은 첫째는 4념주상수론(念住相修論)과, 둘째는 4념주의 자성(自性)과, 셋째는 지(地)와, 넷째는 상응(相應)과, 다섯째는 행상(行相)과, 여섯째는 소연(所緣)의 분별을 말한다. 『대비바사론』은 이 여섯 개의 문(門)에 대하여 논술하기에 앞서 그 준비로서 염주(念住)에 관한 여러 가지 논구(論究)를 두 권에 걸쳐서 시도하고 있다. ‘여실지유팔(如實知有八)’이라 함은 첫째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사수(捨受)의 3수(受)를 느낄 때에 나는 느낀다고 사실대로 아는 지(智)는 어떠한 지인가를 논하는 것처럼 둘째 심수(心受)와 신수(身受), 셋째 유미수(有味受)와 무미수(無味受), 넷째 탐기의수(耽嗜依受)와 출리의수(出離依受), 다섯째 유탐심(有貪心) 내지 해탈심(解脫心), 여섯째 5개(蓋), 일곱째 6결(結), 여덟째 7각지(覺支) 등 일곱 가지의 경우에 대해서도 첫째의 경우와 같이 저마다를 사실대로 아는 지는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논한다. ‘탐진치증감(貪瞋癡增減)’이라 함은 탐ㆍ진ㆍ치가 더하기도 하고 혹은 덜하기도 하는 것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等隨觀] 것을 말한다. ‘사수(死受)’라 함은 사변제수(死邊際受)에 관한 논구를 가리킨다. ‘열반심(涅槃心)’이라 함은 아라한의 반열반의 마음이 무부무기라는 것을 논한다. ‘제자선열반(弟子先涅槃)’이라 함은 쌍현(雙賢) 제자와 최후의 제자가 부처님보다 먼저 반열반하는 이유에 관하여 논한다. ‘불열반출정(佛涅槃出定)’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정(定)에 들어 계시면서는 결코 반열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 ‘4유(有)’라 함은 본유(本有)ㆍ중유(中有)ㆍ생유(生有)ㆍ사유(死有)에 관한 논구이다. ‘3유행(有行)’이라 함은 욕(欲)ㆍ색(色)ㆍ무색(無色)과 5행(行) 즉 5온(蘊)과의 관계를 논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218)본절은 4념주(念住)를 설명하는 경문을, 4념주의 체(體)의 차별에 의하여 자성념주(自性念住)ㆍ상잡념주(相雜念住)ㆍ소연념주(所緣念住)의 세 가지 염주로 나누고 그 하나하나를 경문을 예로 들어서 보이며, 다시 그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論)에 있어서 4념주의 세 가지 정의(定義)와 일치하는가를 밝히며, 마지막으로 세 가지의 염주는 어떠한 유정(有情)을 위하여 설명하는가를 논구하는 문단이다. 자성념주는 혜(慧)를 체(體)로 삼고, 상잡념주는 혜와 그 밖의 구유(俱有)로써 체를 삼으며, 소연념주는 혜의 소연의 법으로써 체를 삼는다.
219)여기서 계경은 『잡아함』 제24권 제606경을 가리킨다.
220)여기서 계경은 『잡아함』 제24권 제607경을 가리킨다.
221)여기서 계경은 『잡아함』 제24권 제611경을 가리킨다.
222)여기서 4념주(念住)의 정의(定義)는 『집이문족론』 제6권에서 4념주의 정의 세 가지를 드는 것 중에서 세 번째에 상당한 것이다.
223)여기서 4념주의 정의는 전주(前註)의 『집이문족론』에서 정의하는 세 가지 중에서 두 번째에 상당한다.
224)여기서 4념주의 정의는 역시 『집이문족론』에서 정의하는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에 상당한다.
225)6수신(受身)이라 함은 안촉소생의 수[眼觸所生受]와 의촉소생의 수[意觸所生受]를 말한다.
226)본절은 염주(念住)의 종류에 첫째는 자성(自性)ㆍ상잡(相雜)ㆍ소연(所緣)의 3념주와, 둘째는 상잡념주 중에서 문(聞)ㆍ사(思)ㆍ수소성(修所成)의 3념주와, 셋째는 수소념주 중에서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4념주와, 넷째는 법념주(法念住) 중에서 잡연(雜緣)ㆍ부잡연(不雜緣)의 2념주가 있다는 것을 보이고, 그 다음에는 이들 염주 중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어떠한 염주인가를 밝히며, 마지막으로는 염주의 수(數)에 대하여 논구하는 문단이다.
227)잡연법념주(雜緣法念住)와 부잡연법념주(不雜緣法念住)이다.
228)계경이라 함은 『장아함』 제8권 「중집경(衆集經)」을 가리킨다. 또 『잡아함』 제24권 제610경을 참고할 것.
229)본절은 전절의 마지막에서 논술한 것과 같이 염주(念住)는 수없이 있지만 특히 4념주에 한(限)한 이유를 먼저 밝히고, 다음에는 염주의 자성(自性)과 염주의 의의(意義)와 4념주 각자의 정의로서 특히 법념주(法念住)라고 하는 까닭과 4념주의 차례와 내외(內外) 염주가 생기는 선후(先後)와 안의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과 밖의 신ㆍ수ㆍ심ㆍ법의 구별과 내신(內身)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고 또한 내외신(內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는 차별과 4념주의 원만한 조건 등에 관한 갖가지를 논구한 문단이다.
230)4식(食)에 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29권을 참조할 것.
231)4식주(識住)의 설명에 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37권을 참조할 것.
232)네 가지의 수(受)ㆍ불수(不修)에 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23권을 참조할 것.
233)네 가지의 증정(證淨)이라 함은 불ㆍ법ㆍ승ㆍ계(戒)ㆍ증정을 말한다. 앞의 세 가지는 신(信)을 자성으로 하고, 네 번째는 계(戒)를 자성으로 한다. 자세한 것은 『대비바사론』 제103권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