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7_0470_c_01L아비달마구사론 제3권
027_0470_c_01L阿毘達磨俱舍論卷第三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470_c_02L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2. 분별근품(分別根品) ①
027_0470_c_04L分別根品第二之一

이와 같이 계(界)에 근거하여 이미 온갖 근(根)에 대해서도 열거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근’이란 무슨 뜻인가?1)
가장 수승[最勝]한 자재(自在)이며, 빛나고 현저[光顯]하기 때문에 ‘근’이라 이름한 것이니,2) 이에 따라 근은 증상력(增上力:탁월하고 뛰어난 힘)의 뜻이라는 것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력의 뜻은 무엇을 무엇과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0_c_05L如是因界已列諸根卽於此中根是何義最勝自在光顯名根由此摠成根增上義此增上義誰望於誰頌曰

전설에 따르면 5근은 네 가지 일에 대해
네 가지의 근은 두 가지에 대해
다섯 가지와 여덟 가지의 근은 염오와 청정 중에
각기 별도의 증상력이 있다.
027_0470_c_08L傳說五於四
四根於二種
五八染淨中
各別爲增上

논하여 말하겠다. 안(眼) 등의 5근은 각기 네 가지 일에 대해 능히 증상의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莊嚴身]이며, 둘째는 소의신을 이끌고 기르는 일[導養身]이며, 셋째는 의식 등을 낳는 일[生識等]이며, 그리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은 일[不共事]이다.
027_0470_c_10L論曰眼等五根各於四事能爲增上一莊嚴身二導養身三生識等四不共事
바야흐로 안근과 이근이 소의신을 장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눈이 멀거나 귀가 먹게 되면 몸이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소의신을 이끌고 기른다고 함은, 이를테면 보고 들음으로 인해 험난한 곳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 등을 낳는다고 함은, 이를테면 이러한 두 가지 식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곧 심소)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되지 않은 일이란, 말하자면 능히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027_0470_c_13L且眼耳根莊嚴身者謂若盲聾身醜陋故導養身者謂因見聞避險難故生識等者謂發二識及相應故不共事者謂能見色聞聲別故
비ㆍ설ㆍ신의 세 가지 근이 소의신을 장엄한다고 함은 안ㆍ이 두 근의 경우에서 설한 바와 같다. 소의신을 이끌고 기른다고 함은, 이를테면 단식(段食:4식의 하나로, 분할되어 섭취되는 에너지, 곧 음식물)을 능히 수용하기 때문이다. 의식 등을 낳는다고 함은, 이를테면 이러한 세 가지 식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되지 않은 일이란, 말하자면 향ㆍ미ㆍ촉을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027_0470_c_16L鼻舌身根莊嚴身者如眼耳說導養身者謂於段食能受用故生識等者謂發三識及相應故不共事者謂嗅嘗覺香味觸故
027_0471_a_02L여근ㆍ남근ㆍ명근ㆍ의근은 각기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바야흐로 여근과 남근의 두 가지 증상이란, 첫째는 유정의 다름[有情異:구역어는 衆生差別]이고, 둘째는 분별의 다름[分別異:구역어는 相貌差別]이다. 유정의 다름이란, [태초의 유정은 그 유형이 모두 같았지만] 이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제 유정으로 하여금 여자와 남자의 유형에 차별이 있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분별의 다름이란, 이러한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형상과 말소리 유방 등의 차별이 있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027_0470_c_20L意各於二事能爲增上且女男根二增上者一有情異二分別異有情異者由此二根令諸有情女男類別分別異者由此二根形相言音乳房等別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여근ㆍ남근)은 염오함과 청정함 두 가지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하든지[本性] 후천적으로 손괴(損壞)되었든지 간에 선체(扇搋)와 반택(半擇)과 이형인(二形人)에게는 불율의(不律儀:즉 惡戒를 말함)나 무간업(無間業)이나 선근을 끊는 온갖 잡염법(雜染法)이 없으며, 역시 또한 율의(律儀)도 득과(得果)도 이염(離染)의 온갖 청정법(淸淨法)도 없기 때문이다.3)
027_0471_a_03L有說此於染淨增上故言於二所以者何本性損壞扇搋半擇及二形人無不律儀無間斷善諸雜染法亦無律儀得果離染諸淸淨法
명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중동분(衆同分)을 능히 상속하게 하고, 아울러 능히 유지하게 하기 때문이다.4)
027_0471_a_07L命根二者謂於衆同分能續及能持
의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능히 후유(後有)를 상속하고, 또한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하기[自在隨行] 때문이다. 여기서 ‘능히 후유를 상속한다’고 함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그 때 건달박(健達縛)에게 2심(心) 중의 하나가 현전하였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애(愛)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 에(恚)와 함께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5) 그리고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한다’고 함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027_0471_a_08L意根二者謂能續後有及自在隨行能續後有者如契經言時健達縛於二心內隨一現前謂或愛俱或恚俱等自在隨行者如契經言

마음이 능히 세간을 이끌며
마음이 능히 세간을 두루 섭수하니
이와 같은 마음의 일법(一法)에
모든 것은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하는 것이로다.
027_0471_a_11L心能導世閒
心能遍攝受
如是心一法
皆自在隨行

낙(樂) 등의 5수근(受根)과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염오함과 청정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상력이 있다.6) 이를테면 낙 등의 다섯 가지가 염오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 탐 등의 수면(隨眠)이 수증(隨增)하기 때문이다.7)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이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온갖 청정법이 그것에 따라 증장하기 때문이다.
027_0471_a_13L樂等五受信等八根於染淨中如次增上樂等五受染增上者貪等隨眠所隨增故信等八根淨增上者諸淸淨法隨生長故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기도 하였다. “낙 등은 청정함에 대해서도 역시 증상력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낙(樂)으로 인해 마음은 정(定)에 들게 되고8)
고(苦)는 신(信)의 소의(所依)가 되며9)
여섯 가지 출리(出離)의 소의가 희(喜)와 우(憂)와 사(捨)이다.”10)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는 이상과 같다.”11)
027_0471_a_17L有餘師說樂等於淨亦爲增上如契經說樂故心定苦爲信依亦出離依喜及憂毘婆沙師傳說如此
그런데 다시 어떤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능히 소의신을 이끌고 기르는 것[導養身]은 안근 등의 작용이 아니라 바로 식(識)의 증상력이다. 즉 식이 요별하여 비로소 험난한 곳을 피하고 단식을 수용하기 때문에, 색을 보는 등의 작용 역시 식의 그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되지 않은 일[不共事, 보는 등의 각기 개별적인 작용]을 안근 등에 적용시켜 별도의 증상의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안근 등은 [개별적 작용을 갖는] 근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12)
027_0471_a_20L有餘師說能導養身非眼等用是識增上識了方能避於險難受段食故見色等用亦非異識故不共事於眼等根不可立爲別增上用故非由此眼等成根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근의 증상력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若爾云何頌曰
027_0471_b_02L
자신의 대상과 모든 대상을 요별하는데
증상력이 있어 6근을 설정한 것이며
신근에 따라 두 가지의 근을 설정함은
여성ㆍ남성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027_0471_a_24L了自境增上
摠立於六根
從身立二根
女男性增上

동분(同分)을 지속시키고, 잡염과
청정에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명근과 5수근과 신(信) 등을 세워
‘근’이라고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027_0471_b_03L於同住雜染
淸淨增上故
應知命五受
信等立爲根

미지당지근과 이지근과
구지근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그 다음다음의 도와
열반을 획득하는 등의 증상력이기 때문이다.
027_0471_b_04L未當知已知
具知根亦爾
於得後後道
涅槃等增上

논하여 말하겠다. ‘자신의 대상을 요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6식신을 말하니, 안 등의 5근은 각기 개별적인 [자신의] 경계를 능히 요별하는 [5]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으며, 제6 의근은 일체의 경계를 능히 요별하는 의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등의 6근을 각각 설정하여 ‘근’으로 삼은 것이다.
027_0471_b_05L論曰了自境者謂六識身眼等五根於能了別各別境識有增上用第六意根於能了別一切境識有增上用故眼等六各立爲根
색(色) 등도 역시 능히 요별하는 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음에도 어찌 마땅히 ‘근’으로 삼지 않는 것인가?13)
027_0471_b_09L豈不色等於能了識亦有增上應立爲根
경(境)은 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없다. 대저 증상의 작용이란 이를테면 가장 수승[最勝]한 자재(自在)를 말하니, 안근은 색을 요별하는 식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증상력’이라 이름한 것이다. 즉 여러 색을 요별하는 데 공통의 원인[通因]이 되기 때문에, 또한 식은 안근에 따라 밝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그러나 색은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 상위하기 때문이다.14) 내지는 의근과 법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027_0471_b_10L境於識中無增上用夫增上用謂勝自在眼於所發了色識中最勝自在故名增上於了衆色爲通因故識隨眼根有明昧故色則不然二相違故乃至意根於法亦爾
‘신근에 따라 다시 여근과 남근을 설정한다’고 함은, 여자와 남자의 성(性)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여근과 남근 자체는 신근을 떠나지 않으며, 신체의 일부분에 대해 이러한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그 순서대로 여자와 남자의 신체 중에서 이러한 여근과 남근이 증상의 작용을 갖게 되는데, 이 곳은 다른 곳의 신근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신근과는 별도로 두 근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027_0471_b_15L從身復立女男根者女男性中有增上故女男根體不離身根身一分中立此名故如其次第女男性中此女男根有增上用此處少異餘處身根故從身根別立爲二
이를테면 여자로서의 몸의 형태, 음성, 행위나 태도[作業], 뜻이나 즐기는 것[志樂]의 차별을 일컬어 여성이라 하며, 남자로서의 몸의 형태, 음성, 행위나 태도, 뜻이나 즐기는 것의 차별을 일컬어 남성이라 하는데, 이러한 두 성의 차별은 여근과 남근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여근과 남근은 두 성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설한 것이다.
027_0471_b_19L女身形類音聲作業志樂差別名爲女性男身形類音聲作業志樂不同名爲男性二性差別由女男根故說女男根於二性增上
027_0471_c_02L명근은 중동분(衆同分)이 지속하는 것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낙(樂) 등의 5수근은 잡염법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계경에서 “낙수(樂受)에서는 탐이 수증(隨增)하고, 고수(苦受)에서는 진(瞋)이 수증하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에서는 무명이 수증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027_0471_b_23L於衆同分住中命根有增上用於雜染中樂等五受有增上用所以者何由契經說於樂受貪隨增於苦受瞋隨增於不苦不樂受無明隨增
신(信) 등의 5근은 청정법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5근의 세력에 의해 제 번뇌를 조복(調伏)하고, 성도(聖道)를 인기(引起)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송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낙 등의 5수근과 신 등의 5근] 하나하나는 각기 능히 근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권하는 말이다.
027_0471_c_04L於淸淨中信等五根有增上用所以者何由此勢力伏諸煩惱引聖道故言應知者勸許一一各能爲根.
3무루근(未知當知根ㆍ已知根ㆍ具知根)은 그 다음 다음의 도와 열반 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여기서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유형별로 그 하나하나는 각기 능히 근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도를 획득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고, 이지근은 구지근의 도를 획득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며, 구지근은 열반을 획득하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다. 즉 이 때까지 마음은 아직 해탈하지 않았고, 반열반(般涅槃)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15)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갈래[異門]의 해석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027_0471_c_07L三無漏根於得後後道涅槃等有增上用言亦爾者類顯一一各能爲根謂未知當知根於得已知根道有增上用已知根於得具知根道有增上用具知根於得涅槃有增上非心未解脫能般涅槃故等言爲顯復有異門
무엇을 일컬어 다른 갈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미지당지근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멸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고, 이지근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멸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며, 구지근은 현법락주(現法樂住)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으니, 이것에 의해 능히 해탈의 희락(喜樂)을 영수(領受)할 수 있기 때문이다.16)
027_0471_c_13L云何異門謂見所斷煩惱滅中未知當知根有增上用於修所斷煩惱滅中已知根有增上用現法樂住中具知根有增上用由此能領受解脫喜樂故

만약 증상력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명(無明) 등의 존재도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무명 등의 원인은 행(行) 등의 결과에 대해 각각 개별적인 증상의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17) 또한 말하는 입[語具] 등도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입과 손과 발과 대(大)ㆍ소변처(小便處)는 그 순서대로 말하고 잡고 가고 배설하고 즐기는 일에 대해 증상의 작용 있기 때문이다.18)
027_0471_c_17L若增上故立爲根者無明等性應立爲根無明等因於行等果各各別有增上用故又語具等應立爲根語具手足大小便處於語執行棄樂事中如其次第有增上故
이와 같은 따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근으로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특상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1_c_22L如是等事不應立根由所許根有如是相頌曰

마음의 소의가 되고, 이것의 차별이 되며
이것의 지속[住]이 되며, 이것의 잡염(雜染)이 되며
이것의 자량이 되며, 이것의 청정이 되니
이러한 근거[量]에 따라 ‘근’을 설정한 것이다.
027_0471_c_23L心所依此別
住此雜染
此資糧此淨
由此量立根
027_0472_a_02L
논하여 말하겠다. ‘마음의 소의’란 안(眼) 등의 6근으로서, 이러한 내(內) 6처는 바로 유정신(有情身)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 6처, 즉 유정신의 상의 차별은 여ㆍ남 두 가지 근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 명근에 의해 이러한 내 6처의 유정신은 일기(一期) 동안 지속한다. 또한 이러한 내 6처의 유정신이 잡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5수근에 의해서이고, 이러한 유정신이 청정한 자량이 되는 것은 신(信) 등의 5근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유정신이 청정함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뒤의 세 가지 [무루]근에 의해이니, 이로서 근을 설정하는 일은 모두 끝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여기에다 다시 무명 따위나 말하는 입 따위를 설정하여 근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19) 그것들은 이러한 사실 중에 증상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27_0472_a_02L論曰心所依者眼等六根此內六處是有情本此相差別由女男根復由命根此一期住此成雜染由五受根此淨資糧由信等五此成淸淨由後三根由此立根事皆究竟是故不應許無明等及語具等亦立爲根彼無此中增上用故
그런데 다시 어떤 유여사는 근의 특상에 대해 이와는 다르게 설하고 있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復有餘師別說根相頌曰

혹은 유전(流轉)의 소의가 되고
아울러 그것을 낳고 지속하고 수용하므로
앞의 열네 가지를 건립하였으며
환멸(還滅)의 뒤의 것도 역시 그러하다.20)
027_0472_a_10L或流轉所依
及生住受用
建立前十四
還滅後亦然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혹은’이라는 말은, 이는 바로 다른 논사의 의견으로,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근거하여 22근을 설정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유전의 소의란 이를테면 안 등의 6근이며,21) 이러한 6근은 여근ㆍ여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6근이 지속하는 것은 명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에 의지하여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6근이 [대상을] 수용(受用)하는 것은 5수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에 의해 대상을 영납(領納)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앞의 열네 가지 근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027_0472_a_12L論曰或言顯此是餘師意約流轉還滅立二十二根流轉所依謂眼等六生由女男從彼生故住由命根仗彼住故受用由五受因彼領納故約此建立前十四根
나아가 환멸위(位) 중에서도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뜻(소의ㆍ생ㆍ지속ㆍ수용)의 유별(類別)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뒤의 여덟 가지 근을 설정하게 되었다. 즉 환멸의 소의란 이를테면 신(信) 등의 5근이며, 이러한 5근은 3무루근 중 첫 번째 즉 미지당지근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다음의 이지근에 의해 지속하는 것이며, 뒤의 구지근에 의해 수용하는 것이다.22) [따라서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환멸의 근거로서 설정된 것이다.]
곧 근의 수량은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유전ㆍ환멸의 각기 네 가지 뜻)에 의해 경에서 그 같은 순서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027_0472_a_17L還滅位中卽約此四義類別故立後八根還滅所依謂信等五於三無漏由初故生由次故住由後受用根量由此無減無增卽由此緣經立次第
여기서 마땅히 말하는 입[語具]을 말하는데 있어 근이 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말은 학(學)의 차별에 근거하여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23) 손과 발은 마땅히 잡거나 가는 일에 있어 각기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잡거나 가는 것 이외] 다른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손과 발은 처소를 달리하고 그 상을 달리하여 차별이 생겨날 때를 일컬어 잡고 가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손과 발을 떠나서도 역시 잡고 가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배로 가는 종류가 바로 그러하다.24) 그렇기 때문에 손과 발을 그 같은 작용에 대한 ‘근’으로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027_0472_a_21L不應語具於語爲根待學差別語方成故手足不應於執行事各立爲根無異性故謂卽手足異處異相差別生時名執行故又離手足亦有執行如腹行類是故手足不可於彼建立爲根
027_0472_b_02L대변을 내보는 처소도 능히 배설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응당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무거운 물건이 공중에서 두루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풍력(風力)에 이끌려 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변을 내보는 처소도 즐거움을 낳는 일을 한다고 해서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만약 여근ㆍ남근이 이러한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해야 한다면], 온갖 목구멍과 이빨과 눈꺼풀과 사지마디도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능히 삼키고, 씹고, 깜박이고, 굴신(屈伸)하는 데 힘과 작용을 지니기 때문이다. 혹은 일체의 원인은 자신이 짓는 결과에 대해 힘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그 모두를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비록 작용을 갖는다 할지라도 증상의 작용은 아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되지 않으며, 이러한 말하는 입 등도 역시 증상의 작용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027_0472_b_02L出大便處於能棄事不應立根重物於空遍墮落故又由風力引令出故出小便處於生樂事不應立根卽女男根起此樂故又諸喉齒眼瞼支節應立爲根於能呑嚼開閉屈申有力用故或一切因於自所作有力用故皆應立根彼雖有用非增上故不立根者此語具等亦非增上不應立根

이러한 22근 중 안근 내지 남근에 대해서는 앞에서와 같이 이미 논설하였다.25) 또한 명근의 본질은 바로 불상응행법이기 때문에 불상응행을 설하는 중(본론 권제5)에 저절로 널리 분별하게 되리라. 그리고 신(信) 등의 본질은 바로 심소법이기 때문에 심소법을 설하는 중(본론 권제5)에 역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낙(樂) 등의 5수근과 3무루근은 달리 분별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금 마땅히 여기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2_b_11L此中眼等乃至男根如前已說命根體是不相應故不相應中自當廣辯信等體是心所法故心所法中亦當廣辯樂等五受三無漏根更無辯處故今應釋頌曰

몸이 즐겁지 않은 것을 고근(苦根)이라 이름하고
이것의 즐거움을 낙근(樂根)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제3정려의 마음의 즐거움도 낙근이라 하는데
다른 처(處)에서는 이것을 희근(喜根)이라 이름한다.
027_0472_b_15L身不悅名苦
卽此悅名樂
及三定心悅
餘處此名喜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을 우근(憂根)이라 이름하고
그 중간을 사근(捨根)이라 하니, 두 가지는 무분별이다.
견도와 수도와 무학도에서는
아홉 가지의 근으로써 세 가지 근을 설정한다.
027_0472_b_17L心不悅名憂
中捨二無別
見修無學道
依九立三根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몸’이란 신수(身受)를 말한다. 즉 신수는 소의신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으로, 바로 5식상응의 수(受)인 것이다. 그리고 ‘즐겁지 않은 것[不悅]’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손상되거나 고뇌스러운 것[損惱]의 뜻이다. 즉 신수 안에서 능히 손상되거나 고뇌스러운 것을 일컬어 고근(苦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027_0472_b_18L論曰身謂身受依身起故卽五識相應受言不悅者是損惱義於身受內能損惱者名爲苦根
또한 본송에서 말한 ‘즐거움’이란 바로 섭수 장익[攝益]의 뜻이다. 즉 신수 안에서 능히 섭수 장익하는 것을 일컬어 낙근(樂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제3정려의 마음과 상응하는 수(受)로서, 능히 섭수 장익하는 것도 역시 낙근이라고 이름한다. 즉 제3정려 중에는 신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5식신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즐거움[心悅]’을 바로 낙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27_0472_b_21L所言悅者是攝益義卽身受內能攝益者名爲樂根及第三定心相應受能攝益者亦名樂根第三定中無有身受五識無故心悅名樂
027_0472_c_02L 그러나 제3정려를 제외한 그 아래 세 가지 지(地)에서는 이 같은 마음의 즐거움을 일컬어 희근(喜根)이라 한다. 왜냐 하면 제3정려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이야말로 안정(安靜)된 것으로 희탐(喜貪)을 떠났기 때문에 오로지 낙근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아래 세 가지 지 중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은 추동(麤動)으로 희탐을 갖기 때문에 오로지 희근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26)
027_0472_b_25L卽此心悅除第三定於下三地名爲喜根第三靜慮心悅安靜離喜貪故唯名樂根下三地中心悅麤動有喜貪故唯名喜根
그리고 의식과 상응하여 능히 손상 고뇌하는 수로서, 바로 마음이 즐겁지 않는 것을 일컬어 우근(憂根)이라고 한다.
027_0472_c_05L意識相應能損惱受是心不悅名曰憂根
나아가 [본송에서 말한] ‘중간’이란 바로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닌 것[非悅非不悅]으로, 바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말하는데, 이러한 수를 일컬어 사근(捨根)이라고 이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근은 바로 신수(身受)라고 해야 할 것인가, 심수(心受)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두 가지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두 가지 수를 하나의 근으로 합하여 설정한 것인가?
027_0472_c_06L中謂非悅非不悅卽是不苦不樂受此處中受名爲捨根如是捨根爲是身受爲是心受應言通二何因此二摠立一根
이러한 수는 몸에 있든지 마음에 있든지 다 같이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다.27) 즉 마음에 존재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대개 분별로부터 생겨나지만,28) 몸에 존재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그렇지가 않으니, 오로지 대상의 힘[境力]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 등에도 역시 이와 같은 수가 생겨나는 것이다.29)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를 근으로 설정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각기 달리하였던 것이다.30) 그러나 사(捨)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다 같이] 무분별로서, [분별이나 경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저절로[任運]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근으로 설정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수로 삼은 것이다.
027_0472_c_10L此受在身心同無分別故在心苦樂多分別生在身不然隨境力故阿羅漢等亦如是生故此立根身心各別捨無分別任運而生是故立根身心合一
또한 고수나 낙수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그것들을 손상시키기도 하고 이익되게 하기도 하는 등 그 상(相)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의 근으로 설정하는 것이지만, 사근의 경우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다 같이 무분별로서, 그것들을 손상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익되게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 상에 다름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수를] 하나의 근으로 합하여 설정하게 된 것이다.
027_0472_c_14L又苦樂受在身在心爲損爲益其相各異故別立根捨在身心同無分別非損非益其相無異故摠立根
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근이 세 가지의 도(道)에서 순서대로 3무루근을 건립하게 된다. 이를테면 견도(見道)에서는 의근 등의 아홉 가지 근에 의해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 설정되고, 수도(修道)에서는 바로 이러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이지근(已知根)이 설정되며, 무학도(無學道)에서도 역시 이러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구지근(具知根)이 설정되는 것이다.
027_0472_c_17L意樂喜捨信等五根如是九根在於三道如次建立三無漏根謂在見道依意等九立未知當知根若在修道卽依此九立已知根在無學道亦依此九立具知根
이러한 세 가지의 명칭은 어떠한 근거에서 설정된 것인가?
이를테면 견도에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행상(行相)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미지당지(未知當知)’라고 설한 것이다. 또한 수도에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이 없으며, 다만 그 밖의 나머지 수면을 끊고 제거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에서는 [이미 안 대상[已知境]을] 다시금 자꾸 자꾸 요지(了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이지(已知)’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027_0472_c_21L如是三名因何而立謂在見道有未曾知當知行轉說彼名未知當知若在修道無未曾知但爲斷除餘隨眠故卽於彼境復數了知是故說彼名爲已知
027_0473_a_02L 그리고 무학도에서는 스스로 이미 알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知)’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러한 ‘지’를 가진 것을 일컬어 ‘구지(具知)’라고 하였다. 혹은 이러한 지를 자꾸 익힘으로써 이미 그 성품을 성취한 것을 일컬어 ‘구지’하였다. 이를테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고(苦)를 두루 알았고, 더 이상 두루 알 것이 없다.……(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고 참답게 아는 것이다.31) 따라서 바로 그러한 자들이 소유하는 근을 일컬어 미지당지근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027_0472_c_25L在無學道知己已知故名爲知有此知者名爲具知或習此知已成性者名爲具知謂得盡智無生智故如實自知我遍知苦不復遍知乃至廣說彼所有根名爲未知當知根等

이와 같이 근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32)
이제 마땅히 22근에 대한 제문(諸門)의 의미와 종류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33)
이러한 22근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3_a_06L如是已釋根體不同當辯諸門義類差別此二十二根中幾有漏幾無漏頌曰

오로지 무루인 것은 뒤의 세 가지이며
유색근(有色根)과 명근과 우근과 고근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오로지 유루임을.
그 밖의 아홉 가지 근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027_0473_a_08L唯無漏後三
有色命憂苦
當知唯有漏
通二餘九根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앞에서 설한 최후 세 가지 근의 본질은 오로지 무루이다. 무루란 바로 무구(無垢)의 뜻으로,34) 구(垢)와 누(漏)는 그 명칭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하다.
027_0473_a_10L論曰次前所說最後三根體唯無漏是無垢義垢之與漏名異體同七有色根及命憂苦一向有漏
일곱 가지의 유색근(有色根)과 명근과, 그리고 우근과 고근은 한결같이 유루이다. 여기서 유색근이란 안(眼) 등의 5근과 여근ㆍ남근을 말하니, 이는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027_0473_a_13L七有色者眼等五根及女男根色薀攝故
의근과 낙근과 희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 이러한 아홉 가지 근은 모두 유루와 무루에 통한다.35)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신(信) 등의 5근도 역시 오로지 무루이니, 그래서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를 외(外) 이생품(異生品)에 머무는 이라고 설할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36) 그러나 이러한 경설(經說)은 진실된 논증이 아니니, 무루근에 의거하여 이러한 말씀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027_0473_a_14L意樂喜捨信等五根此九皆通有漏無漏有餘師說信等五根亦唯無漏故世尊說若全無此信等五根我說彼住外異生品此非誠證依無漏根說此言故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먼저 무루인 신 등 5근에 의거하여 온갖 성위(聖位)의 차별을 건립하고서 이러한 말씀을 설하였기 때문이다.37) 혹은 여러 이생(異生) 중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내(內) 이생이며, 두 번째는 외(外) 이생이다. 내 이생이란 이를테면 선근(善根)을 끊지 않은 자를 말하고, 외 이생이란 이를테면 선근이 이미 끊어진 자를 말하는데, 바로 외 이생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를 외 이생품에 머무는 이라고 설할 것이다’라고.38)
027_0473_a_19L云何知然先依無漏信等五根建立諸聖位差別已說此言故或諸異生略有二種一內二外內謂不斷善根外謂善根已斷依外異生作如是說若全無此信等五根我說彼住外異生品
027_0473_b_02L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유정은 세간에 머무는 동안 혹 어떤 이는 [신 등의 5근을] 낳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기르기도 하는 등 상ㆍ중ㆍ하 제근의 차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때는 바로 부처님께서 아직 법륜(法輪)을 굴리지 않으신 때였다.39) 그러므로 신 등의 5근은 역시 또한 유루와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027_0473_a_24L又契經說有諸有情處在世閒或生或長有上中下諸根差別是佛猶未轉法輪時故知信等亦通有漏又世尊說
“내가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집(集)이고, 이것은 바로 몰(沒)이고, 이것은 바로 미(味)이고, 이것은 바로 과환(過患)이고, 이것은 바로 출리(出離)임을 아직 참답게 알지 못하였다면, 이러한 천(天)과 인간의 세간과 마군과 범천(梵天) 따위를 아직 능히 뛰어넘지 못하였을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40)
027_0473_b_04L我若於此信等五根未如實知是集沒味過患出離未能超此天人世閒及魔梵等乃至未能證得無上正等菩提乃至廣說
즉 무루법에서는 이와 같은 품류(집ㆍ몰 따위)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
027_0473_b_07L非無漏法可作如是品類觀察故信等五根通有漏無漏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이숙(異熟)이며, 몇 가지가 이숙이 아닌 것[非異熟]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3_b_09L如是已說有漏無漏十二根中幾是異熟幾非異熟頌曰

명근은 오로지 이숙일 뿐이며
우근과 뒤의 여덟 가지는 이숙이 아니다.
유색근과 의근과 나머지 네 가지 수근은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한다.
027_0473_b_10L命唯是異熟
憂及後八非
色意餘四受
一一皆通二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명근 하나만이 결정코 이숙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諸) 아라한(阿羅漢)의 유다수행(留多壽行)의 본질도 바로 명근인가? 그렇다면 그와 같은 명근은 누구의 이숙인가?41)
027_0473_b_12L論曰唯一命根定是異熟若如是者諸阿羅漢留多壽行此卽命根如是命根誰之異熟
본론(本論;『발지론』 권제12)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무엇을 일러 필추(苾芻)의 유다수행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자재(自在)를 획득하고서, 혹은 승중(僧衆)에 대해, 혹은 개인에게 수명과 관계있는 의발(衣鉢) 등의 물건을 분수에 맞게 보시를 하고, 보시하고 나서 발원(發願)하고, 바로 제4 변제정려(邊際靜慮)에 들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능히 부(富)의 이숙을 초래하는 나의 모든 업, 그것들이 모두 전이하여 목숨[壽]의 이숙과를 초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능히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그의 업은 모두 전이하여 목숨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된다.”42)
027_0473_b_15L如本論說云何苾芻留多壽行謂阿羅漢成就神通得心自在若於僧衆若於別人以諸命緣衣鉢等物隨分布施施已發願卽入第四邊際靜慮從定起已心念口言諸我能感富異熟業願皆轉招壽異熟果時彼能感富異熟業則皆轉招壽異熟果
혹은 다시 어떤 이는 숙업(宿業)의 나머지 이숙과를 인기(引起)하여 취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즉 그는 설하기를, “전생(前生)에 일찍이 받은 업 중에 남겨진 이숙이 있으니, 지금 닦고 있는 변제정의 힘에 의해 그것을 인기하여 수용하게 된다”고 하였다.43)
027_0473_b_22L復有欲令引取宿業殘異熟果彼說:前生曾所受業有殘異熟由今所修邊際定方引取受用
027_0473_c_02L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필추의 사다수행(捨多壽行)이라고 하는가?44)
이를테면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자재를 획득하고서, 승중 등에 대해 앞에서와 같이 보시를 하고, 보시하고 나서 발원하고, 바로 제4 변제정려에 들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능히 목숨의 이숙을 초래하는 나의 모든 업, 그것들이 모두 전이하여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능히 목숨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그의 업은 모두 전이하여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027_0473_b_24L云何苾芻捨多壽行謂阿羅漢成就神通得心自在於僧衆等如前布施施已發願卽入第四邊際靜慮從定起已心念口言諸我能感壽異熟業願皆轉招富異熟果時彼能感壽異熟業則皆轉招富異熟果
그런데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는 제4 변제정의 힘을 일으켜 색계 대종(大種)을 인취(引取)하여 [욕계] 소의신 중에 현전하게 될 때 그러한 대종이 혹 어떤 경우 수행(壽行)에 따르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수행에 어긋나기도 하니,45) 이러한 인연에 의해 혹 어떤 경우 수행을 연장[留]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 수행을 단축[捨]하기도 하는 것이다.”
027_0473_c_07L尊者妙音作如是說彼起第四邊際定力引色界大種令身中現前而彼大種或順壽行或違壽行由此因緣或留壽行或捨壽行
그러나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아라한[의 유다수행]은 이러한 자재의 삼마지(三摩地), 다시 말해 언제라도 입정할 수 있는 선정의 힘에 의한 것이다. 즉 일찍이 획득한 숙업에 의해 생겨난 [현행하는] 제근(諸根) 대종의 지속력[住時勢分]을 전환시켜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래의] 선정의 힘에 의해 낳아질 제근대종의 지속력을 인기하여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근은 이숙이 아니며, 그 밖의 나머지 일체[의 명근]은 모두 바로 이숙이다.”46)
027_0473_c_11L應如是說彼阿羅漢由此自在三摩地力轉去曾得宿業所生諸根大種住時勢分引取未曾定力所起諸根大種住時勢分故此命根非是異熟所餘一切皆是異熟
논의에 의해 또 다른 논의가 생겨나는 법이니, 그렇다면 그러한 아라한은 어떠한 인연이 있어 유다수행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타인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성교(聖敎)가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신의 수행(壽行)이 장차 다할 것을 관찰하여 알 때, 혹은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목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관찰하였을 때 [바야흐로 유다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027_0473_c_15L因論生論彼阿羅漢有何因緣留多壽行謂爲利益安樂他故或爲聖教久住世故觀知自身壽行將盡觀他無此二種堪能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인연이 있어 사다수행(捨多壽行)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한 아라한이 타인에 대해 이익되게 하거나 안락하게 함이 적으면서 세상에 머문다고 스스로 관찰하였을 때, 혹은 질병 등의 괴로움이 자신을 핍박하게 될 때 [바야흐로 사다수행하게 되는 것이니],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27_0473_c_19L復何因緣捨多壽行彼阿羅漢自觀住世於他利益安樂事少或爲病等苦逼自身如有頌言

범행이 잘 성취되어 이루어졌고
성도(聖道)도 이미 잘 닦았으니
목숨이 다할 때 환희스러워 함은
마치 뭇 병들을 떨쳐 버리는 것과 같네.47)
027_0473_c_21L梵行妙成立
聖道已善修
壽盡時歡喜
猶如捨衆病
027_0474_a_02L
여기서 마땅히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처소에 의지하여 누가 능히 이와 같이 수행을 연장하기도 하고 단축하기도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세 대주(大洲)의 인간이면서 여ㆍ남의 상속(相續)을 지닌 자로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획득한 모든 아라한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48) 그의 소의신 중에는 자재정(自在定)이 존재하고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49)
027_0473_c_23L此中應知依何處所誰能如是留捨壽行謂三洲人女男相續不時解脫得邊際定諸阿羅漢由彼身中有自在定無煩惱故
경에서 설하기를 “세존께서는 다수의 명행[多命行]을 연장[留]하기도 하였고, 다수의 수행[多壽行]을 단축[捨]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50) 명(命, jīvita)과 수(壽, āyuḥ)는 무엇이 다른가?”51)
어떤 이는 말하기를, “차별이 없다”고 하였으니,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일컬어 명근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3계의 목숨[壽]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52)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지난 세(世)의 업의 과보를 일컬어 수행이라 하고, 현재 업의 과보를 일컬어 명행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명근)에 따라 중동분이 머무는 것을 일컬어 수행이라 하고, 이(보시의 업)에 따라 중동분이 잠시 동안 머무는 것을 일컬어 명행이라 한다”고 하였다.53)
027_0474_a_04L經說世尊留多命行捨多壽行命壽何別有言無別如本論言云何命根謂三界壽有餘師說先世業果名爲壽行現在業果名爲命行有說由此衆同分住名爲壽行由此暫住名爲命行
그리고 [유ㆍ사다수행의] ‘다(多)’라고 하는 말은 다찰나[多念]에 걸쳐 명행과 수행을 연장하고 단축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니, 일찰나의 명행과 수행은 연장되거나 단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4)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말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명과 수가 존재하며, 그것이 다수의 시간을 거치면서 지속한다’는 주장을 막기 위한 것이다”고 하였다.55) 혹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말은 하나의 실체[一實]로서의 명과 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수의 [유위]행 상에서 이와 같은 명과 수라고 하는 두 가지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56)
027_0474_a_09L多言爲顯留捨多念命行壽行非一剎那命行壽行有留捨故有說此言爲遮有一命壽實體經多時住有說此言爲顯無一實命壽體但於多行假立如是命壽二名若謂不然不應言行
그렇다면 세존은 어떠한 이유에서 다수의 수행(壽行)을 단축하고, 다수의 명행(命行)을 연장하였던 것인가?
죽음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수의 수행을 단축하였으며, 삶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수의 명행을 연장하였던 것이다. 즉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오로지 3개월간만을 연장하였던 것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경우 교화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이하로 감소할 경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충분[究竟]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찍이 스스로를 칭하여 말하기를, “나는 4신족(神足)을 잘 닦았기 때문에 1겁 혹은 1겁 이상이라도 머물고자 하기만 하면 마음이 바라는 대로 바로 능히 머물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였다.57)
027_0474_a_14L世尊何故捨多壽行留多命行爲顯於死得自在故捨多壽行爲顯於活得自在故留多命行唯留三月不增減者越此更無所化事故減此利生不究竟故又爲成立先自稱言我善修行四神足故欲住一劫或一劫餘如心所期則便能住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는 온(蘊)과 사(死)의 두 가지 마(魔)를 능히 조복할 수 있음을 나타내니, 세존께서는 일찍이 보리수 밑에서 이미 천마(天魔)와 번뇌마(煩惱魔)를 조복하였기 때문이다.”58)
027_0474_a_21L毘婆沙師作如是說顯今能伏薀死二魔世尊先於菩提樹下已伏天魔煩惱魔故
옆 갈래의 논의[傍論]를 이미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74_a_23L傍論已竟正論應辯
우근과, 뒤의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모두 이숙이 아니니, 바로 유기성(有記性)이기 때문이다.59)
027_0474_a_24L憂根及後信等八根皆非異熟是有記故.
027_0474_b_02L그리고 그 밖의 열한 가지 근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그 뜻에 준하여 볼 때 이미 다 설명한 셈이다. 즉 일곱 가지의 색근(안 등 5근과 여근ㆍ남근)과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 등 열두 가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곱 가지 유색근으로서, 만약 장양된 것[所長養] 즉 후천적인 식사 등에 의해 길러진 것이라면 이숙이 아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이숙이다. 의근과 네 가지 수근으로서, 만약 선한 것이거나 염오한 것, 혹은 위의로(威儀路:行ㆍ住ㆍ坐ㆍ臥 등의 행동거지)나 공교처(工巧處:공교로운 身ㆍ語業), 그리고 능히 변화[能變化]할 때의 그것이라면, 그것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이숙이 아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이숙이다.
027_0474_b_02L餘皆通二義准已成謂七色意根除憂餘四受十二一一皆通二類七有色根若所長養則非異熟餘皆異熟意及四受若善染污若威儀路及工巧處幷能變化隨其所應亦非異熟餘皆異熟
만약 우근이 이숙이 아니라고 설한다면, 다음의 경에서 설하는 바를 마땅히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3종의 업이 있으니, 순희수업(順喜受業)과 순우수업(順憂受業)과 순사수업(順捨受業)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027_0474_b_07L若說憂根非異熟者此經所說當云何通如契經言有三種業.順喜受業順憂受業順捨受業
수와 상응한다는 사실을 ‘순(順:따른다)’이라는 말로 표현하여도 여기에 아무런 과실이 없다. 말하자면 업이 우수와 상응하기 때문에 ‘순우수업’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는 낙수와 상응하는 촉을 순락수촉(順樂受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6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순희수업이나 순사수업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61) 동일한 경설(經說)이기 때문이다.
027_0474_b_10L依受相應言順無過謂業與憂相應故名順憂受業如觸與樂相應說名順樂受觸若爾順喜順捨受業亦應如是一經說故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른다 할지라도 나의 설에는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숙과 상응의 이치상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62)
그럴 경우 힐난을 피할 도리가 없으니, 그대가 이같이 경설을 회통하였을지라도 이치상 실로 어떠한 근거에서 우근은 이숙이 아닌 것인가?
027_0474_b_13L隨汝所欲於我無違異熟相應理皆無失無逃難處作此通經理實何因憂非異熟
우근은 차별을 분별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으로, 그것의 지식(止息)도 역시 그러하지만, 다시 말해 차별을 지식함으로서 그것도 지식되지만 이숙은 그렇지가 않다.63)
만약 그렇다면 희근도 마땅히 이숙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이것도 역시 분별에 의해 생겨나고, [분별이 지식되면] 아울러 지식되기 때문이다.
027_0474_b_15L以憂分別差別所生止息亦然異熟不爾若爾喜根應非異熟亦由分別生及止息故
그렇지만 만약 우근이 바로 이숙이라고 인정할 경우, 무간업(無間業)을 짓고 나서 그것으로 인해 바로 근심[憂]이 생겨나는데, 마땅히 그러한 업이 그 때 결과로서 이미 성숙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64)
027_0474_b_18L若許憂根是異熟者造無閒業已因卽生憂此業爾時應名果已熟
그렇다면 역시 마땅히 희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따지고 힐난해야 할 것이니, 만약 희근이 바로 이숙이라고 인정할 경우 뛰어난 복업(福業)을 짓고 나서 그것으로 인하여 바로 기쁨[喜]이 생겨나는데, 마땅히 그러한 업이 그 때 결과로서 이미 성숙하였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027_0474_b_19L亦應如是徵難喜根若許喜根是異熟者造勝福業已因卽生喜此業爾時應名果已熟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모두 이와 같이 주장한다. “이미 욕탐을 떠난 자에게는 우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숙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우근은] 이숙이 아닌 것이다.”65)
027_0474_b_22L毘婆沙師咸作是說已離欲者無憂根故異熟不然故非異熟
027_0474_c_02L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욕탐을 떠난 유정의 이숙의 희근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설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상(相)에 의해 그것(이숙의 희근)이 있음을 아는 것인가?66)
그것이 갖는 상에 따라 이것의 상도 역시 그러하다.(이욕자에게도 선의 희근이 있다고 하는 특징에 미루어 무기의 희근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선의 희근이 이러한 상태(욕탐을 떠난 상태)에서 있을 수 있듯이 무기의 이숙도 마땅히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태 중에서 우근은 그 어떠한 종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코 이숙이 아닌 것이다.(만약 그것이 이숙이라면 이러한 상태에서도 있어야 한다.)
027_0474_b_24L若爾應說離欲有情異熟喜根何相知有隨彼有相此相亦然謂善喜根此位容有無記異熟應類非無於此位中憂一切種無容有故定非異熟.
나아가 안 등의 여덟 가지 근으로서67) 만약 선취(善趣)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선업의 이숙이지만, 악취(惡趣)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악업의 이숙이다. 의근의 경우, 선취에 있든 악취에 있든 그것은 바로 두 가지 모두의 이숙이며,68) 희ㆍ낙ㆍ사 근은 어떠한 취에 있을지라도 바로 선업의 이숙이다. 그러나 고근의 경우 선취에 있든 악취에 있든 그것은 바로 악업의 이숙이다. 그리고 선취 중에서 [여ㆍ남의] 2형(形)을 갖은 자는 오로지 [양]근이 위치한 장소만이 불선업에 의해 초래된 것이니, [일반적으로] 선취의 색근은 선업이 인기(引起)한 것이기 때문이다.69)
027_0474_c_05L眼等八根若在善趣是善異熟若在惡趣是惡異熟意根隨在善趣惡趣是俱異熟喜樂捨根隨在何趣是善異熟苦根隨在善趣惡趣是惡異熟於善趣中有二形者唯根處所不善業招善趣色根善業引故
이와 같이 이러한 이숙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이숙과를 갖는 것[有異熟]이며, 몇 가지가 이숙과를 갖지 않는 것[無異熟]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4_c_10L如是已說是異熟等二十二根中幾有異幾無異熟頌曰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으며
앞의 여덟 가지와 뒤의 세 가지는 갖지 않는다.
의근과, 그 밖의 수근과 신(信) 등은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한다.
027_0474_c_12L憂定有異熟
前八後三無
意餘受信等
一一皆通二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唯]’와 ‘뛰어넘어[越]’라는 뜻에 근거하여 본송에서 ‘결정적으로’라는 말을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그것은 우근이 ‘오로지’ 이숙을 갖는 것이며, 아울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순서를 ‘뛰어넘어’ 설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뜻을 갖추었다고 함은, 우근은 강한 의지[强思]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무기가 아니며,70) [선정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욕계] 산지(散地)의 것이기 때문에 역시 또한 무루가 아니다는 사실을 말한다. 곧 이러한 사실(두 가지 뜻)에 의해 순서를 뛰어넘어 먼저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는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71)
027_0474_c_14L論曰如前所諍憂根當知定有異熟依唯越義頌說定聲謂顯憂根唯有異熟兼具二義故越次說具二義者憂非無記强思起故亦非無漏唯散地故由此越次先說憂根定有異熟
안근 등의 앞의 여덟 가지와 최후의 세 가지 근은 결정코 이숙과를 갖지 않으니,72) 앞의 여덟 가지는 무기이기 때문이며, 뒤의 세 가지는 무루이기 때문이다.
027_0474_c_19L眼等前八及最後三定無異熟八無記故三無漏故.
027_0475_a_02L그리고 그 밖의 근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니, 그 뜻에 준거해 볼 때 이미 설명한 셈이다. 이를테면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受根)과, ‘신(信) 등’이라고 하는 말로 등취(等取)되는 정진(즉 勤) 등의 네 가지 근 등, 이러한 열 가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다. 즉 의근과 낙근과 희근과 사근으로서, 만약 불선이나 선한 유루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기이거나 무루라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또한 고근으로서, 만약 선하거나 불선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기이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신(信) 등의 5근으로서, 만약 유루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루라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027_0474_c_21L餘皆通二義准已成謂意根餘四受信等言等取精進等四根此十一一皆通二類意樂喜捨若不善善有漏有異熟若無記無漏無異熟苦根若善不善有異熟若無記無異熟信等五根若有漏有異熟若無漏無異熟

이와 같이 이숙과를 갖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선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5_a_04L如是已說有異熟等二十二根中幾善幾不善幾無記頌曰

오로지 선인 것은 뒤의 여덟 가지 근뿐이며
우근은 선과 불선에 통하며
의근과 나머지 수근은 세 종류와 통하며
앞의 여덟 가지는 오로지 무기이다.
027_0475_a_05L唯善後八根
憂通善不善
意餘受三種
前八唯無記

논하여 말하겠다.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한결같이 선이다.73) 이것들의 수차(數次)는 비록 뒤에 있을지라도 앞의 내용을 이어받기 때문에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74)
우근은 오로지 선과 불선의 성질에만 통하며,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은 각각 세 종류(선ㆍ불선ㆍ무기)와 통한다. 그리고 안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오로지 무기성이다.75)
027_0475_a_07L論曰信等八根一向是善數次雖居乘前故先說憂根唯通善不善性意及餘受一一通三眼等八根唯無記性

이와 같이 선ㆍ불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5_a_11L如是已說善不善等二十二根中幾欲界繫幾色界繫幾無色界繫頌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은
차례대로 뒤의 세 가지를,
그것과 함께 여근과 남근과 우근과 고근을,
아울러 색근과 희근과 낙근을 제외한 것이다.
027_0475_a_13L欲色無色界
如次除後三
兼女男憂苦
幷除色喜樂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는 뒤의 3무루근을 제외하는 것이니, 그러한 세 가지 근은 오로지 불계(不繫)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욕계의 계(繫)에는 오로지 열아홉 가지의 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7_0475_a_15L論曰欲界除後三無漏根由彼三根唯不繫故准知欲界繫唯有十九根
색계는 앞의 욕계와 마찬가지로 3무루근을 제외하며, 남근과 여근과 우근과 고근의 네 가지도 역시 제외하니, 이에 따라 열다섯 가지의 근은 역시 색계의 계에도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여근과 남근을 제외하는 것은, 색계는 이미 음욕(婬欲)의 법을 떠났기 때문이며, 여근과 남근이 있는 신체는 누추하기 때문이다.76)
027_0475_a_17L色界如前除三無漏兼除男四根准知十五根亦通色界繫除女男者色界已離婬欲法故由女男根身醜陋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색계의 유정)을 설하여 남자라고 하는 것인가?
어디서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계경 중에서 그렇게 설하고 있다.77)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여신(女身)이 범천(梵天)이 되는 것은 도리[處]에도 맞지 않고, 가능성[容]도 없다. 그러나 남신(男身)이 범천이 되는 것은 도리에도 맞고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027_0475_a_21L若爾何故說彼爲男於何處說契經中說如契經言無處無容女身爲梵有處有容男身爲梵
027_0475_b_02L[남근과는] 별도의 남자의 상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곳에는 욕계 중에서 남자의 몸이 갖는 상이 있기 때문으로, [남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78)
그리고 그곳(색계)에 고근이 없는 것은 신체가 정묘(淨妙)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곳에는 불선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79) 또한 우근이 없는 것은 사마타(奢摩他, śamatha:止의 선정을 말함)의 상속이 윤택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곳에는 결정코 뇌해(惱害:분발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27_0475_a_23L別有男相謂欲界中男身所有無苦根者身淨妙故又彼無有不善法故無憂根者由奢摩他潤相續故又彼定無惱害事故
무색계에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3무루근과 여근ㆍ남근ㆍ우근ㆍ고근을 제외하며, 아울러 다섯 가지 색근(色根)과 희근과 낙근을 제외한다. 이에 따라 그 밖의 나머지 여덟 가지 근이 무색계의 계(繫)와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의근과 명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027_0475_b_04L無色如前除三無漏幷除五色及喜樂根准知餘八根通無色界繫謂意信等五根

이와 같이 욕계의 계(繫)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5_b_06L如是已說欲界繫等二十二根中幾見所斷幾修所斷幾非所斷頌曰

의근과 세 가지 수근은 세 가지와 통하며
우근은 견소단이자 수소단이며
아홉 가지는 오로지 수소단이며
다섯 가지는 수소단ㆍ비소단이며, 세 가지는 비소단이다.
027_0475_b_08L意三受通三
憂見修所斷
九唯修所斷
五修非三非

논하여 말하겠다. 의근과 희근ㆍ낙근ㆍ사근은 각기 세 가지와 통하니, 그것들은 모두 견ㆍ수ㆍ비소단과 통하기 때문이다.80)
우근은 오로지 견소단과 수소단과 통할 뿐이니, 무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의 색근과 명근ㆍ고근은 오로지 수소단일 뿐이니, 그것들은 염오하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며,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기 때문이며,81) 또한 그것들은 모두 유루법이기 때문이다.
027_0475_b_10L論曰捨一一通三皆通見非所斷故憂根唯通見修所斷非無漏故七色苦唯修所斷不染污故非六生故皆有漏故
신(信) 등의 5근은 혹은 수소단인 경우도 있고, 혹은 비소단인 경우도 있으니, 염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들은 모두 유루와 아울러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82)
최후의 세 가지 근은 비소단이니, 그것들은 모두 무루이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허물도 없는 법[無過法]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7_0475_b_14L信等五根或修所斷或非所斷非染污故皆通有漏及無漏故最後三根唯非所斷皆無漏故非無過法是所斷故

22근에 대한 제문(諸門)의 유형과 뜻의 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논설하였다.
어떠한 계(界)에서 몇 가지의 이숙근(異熟根)을 최초로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83)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5_b_17L已說諸門義類差別何界初得幾異熟根頌曰

욕[계]의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은
최초에 두 가지의 이숙근을 획득하고
화생(化生)은 여섯ㆍ일곱ㆍ여덟 가지를
색[계]는 여섯 가지를, 그 위에서는 오로지 명근만을 획득한다.84)
027_0475_b_18L欲胎卵濕生
初得二異熟
化生六七八
色六上唯命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태생과 난생과 습생은, 최초로 생을 받을 단계에서는 오로지 신근과 명근 두 가지 이숙근만을 획득하니, 이러한 세 가지 생에서 [그 밖의 다른] 근은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85)
그 같은 단계에서 어찌 의근과 사근의 두 근을 획득하지 않을 것인가?86)
이것들이 속생(續生)할 때에는 결정코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87)
027_0475_b_20L論曰欲胎濕生初受生位唯得身與命二異熟根由此三生根漸起故彼何不得意捨二根此續生時定染污故
027_0475_c_02L화생의 최초의 단계에는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와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 즉 무형자(無形者:남녀의 성이 없는 자)는 처음에 6근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태초[劫初]의 시절의 유정과도 같다.88)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이른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명 근이 바로 그것이다.
027_0475_b_24L化生初位得六七八謂無形者初得六根如劫初時何等爲六所謂
그러나 만약 일형자(一形者)라면 처음에 일곱 가지를 획득하니, 이를테면 온갖 천(天) 등의 유정과도 같다. 만약 이형자(二形者)라면 처음에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89)
어찌 이형(二形)으로서 화생을 받는 자가 있을 것인가?90)
악취(惡趣) 중에는 이러한 이형의 화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91)
027_0475_c_03L若一形者初得七根如諸天等若二形者初得八根豈有二形受化生者惡趣容有二形化生
욕계 중에서 최초로 획득하는 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욕계에서는 욕탐이 수승하기 때문에 [본송에서] 다만 ‘욕’이라고 말한 것이고, 색계는 형색이 수승하기 때문에 다만 ‘색’이라고 말하였으니,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적정(寂靜)의 해탈은 형색을 뛰어넘은 것으로 무색이다”고 하였던 것이다.92)
027_0475_c_05L說欲界中初得根已今次當說色無色界欲界欲勝故但言欲色界色勝故但言色契經亦言寂靜解脫過色無色
색계에서는 처음에 여섯 가지의 이숙근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욕계 화생의 무형자의 경우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본송에서] ‘그 위에서는 오로지 명근 만을 획득한다’고 함에 있어, 무색계에서는 정(定)도 수승하고 생(生)도 수승하기 때문에 ‘위[上]’라는 말을 설한 것이다.93) 즉 무색계에서 최초로 획득하는 이숙근은 오로지 명근뿐으로, 그 밖의 다른 근은 획득하지 않는다.
027_0475_c_09L色界初得六異熟根如欲化生無形者說上唯命者謂無色界定勝生勝故說上言無色界中最初所得異熟根者唯命非餘

[생을 받을 때] 최초로 획득하는 이숙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계(界)에서 죽을 때, 몇 가지의 근이 최후로 멸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5_c_12L說異熟根最初得已何界死位幾根後滅頌曰

바로 죽을 때에 멸하는 온갖 근의 수는
무색계에서는 세 가지이고, 색계에서는 여덟 가지이며
욕계에서 갑작스레 죽는 자는 열 가지ㆍ아홉 가지ㆍ여덟 가지이고
서서히 죽는 자는 네 가지인데, 선한 이에게는 다섯 가지가 더해진다.
027_0475_c_13L正死滅諸根
無色三色八
欲頓十九八
漸四善增五

논하여 말하겠다. 무색계에 있다가 장차 목숨을 마치고자 할 때에는 명근과 의근과 사근의 세 가지가 최후로 멸한다.94) 그러나 만약 색계에 있다가 장차 목숨을 마치고자 할 때라면, 앞의 세 가지 근과 안(眼) 등의 5근,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근이 최후로 멸하니, 일체의 화생(즉 색계 유정)은 제근을 갖추고서 태어나고 죽기 때문이다.
027_0475_c_15L論曰在無色界將命終時捨三於最後滅若在色界將命終時卽前三根及眼等五如是八種於最後滅一切化生必具諸根而生死故
그러나 만약 욕계에 있다가 갑작스레[頓] 목숨을 마칠 때에는 열 가지와 아홉 가지와 여덟 가지가 최후로 멸한다. 이를테면 이형자는 최후에 열 가지 근이 멸하니, 여근과 남근, 그리고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일형자일 경우 최후로 아홉 가지가 멸하니, 말하자면 여근과 남근 중 어느 한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다. 만약 무형자의 경우라면 최후로 여덟 가지가 멸하니, 말하자면 여근과 남근은 없고 오로지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설은 [욕계에서] 갑작스레 목숨을 마치는 자에 대한 것이었다.
027_0475_c_19L若在欲界頓命終時十九八根於最後滅謂二形者後滅十根卽女男根幷前八種若一形者後滅九根於女男中隨除一種若無形者後滅八根謂無女男唯有前八如是所說依頓命終
027_476_a_02L만약 천천히[漸] 목숨을 마칠 때에는 최후에 오로지 네 가지 근을 버리게 된다. 즉 욕계에 있다가 천천히 목숨을 마칠 때에는 신근과 명근과 의근과 사근이 최후에 멸하니, 이러한 네 가지 근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전후하여 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시에 멸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바는 다만 염오와 무기의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는 자의 경우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475_c_24L若漸命終後唯捨四謂在欲界漸命終時捨於最後滅此四必無前後滅義如是所說應知但依染無記心而命終者
그런데 만약 3계에 있으면서 선한 마음으로 죽을 때라면, 모든 경우에 있어 반드시 신(信) 등의 5근이 갖추어지게 된다. 따라서 앞에서 설한 일체의 상태 중에 신 등의 다섯 가지가 증가하게 되어, 이를테면 무색계에서는 증가하여 여덟 가지 근에 이를 것이며, 내지 욕계에서 천천히 목숨을 마칠 때에는 아홉 가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 중간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답게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76_a_05L若在三界善心死時信等五根必皆具有故於前說一切位中其數皆應加信等五謂於無色增至八根乃至欲界漸終至九中閒多少如理應知

근을 분별하면서, 일체의 근법(根法) 그 모두에 대해 응당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22근 중의 몇 가지 근이, 어떠한 사문과(沙門果)를 능히 증득(證得)하는 것인가?95)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6_a_09L分別根中一切根法皆應思擇二十二根幾能證得何沙門果頌曰

아홉 가지는 양 끝[邊]의 두 가지 과(果)를 획득하고
일곱ㆍ여덟ㆍ아홉 가지로는 중간의 두 가지를 획득한다.
열한 가지가 아라한과를 획득한다 함은
한 몸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한 것이다.
027_0476_a_11L九得邊二果
七八九中二
十一阿羅漢
依一容有說

논하여 말하겠다. ‘양 끝’이란 이를테면 예류과(預流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말하니, 이것은 사문과에 처음과 끝이기 때문이다. ‘중간’이란 이를테면 일래과(一來果)와 불환과(不還果)를 말하니, 이것은 처음과 끝에 비교하여 볼 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027_0476_a_13L論曰邊謂預流阿羅漢果於沙門果居初後故中謂一來及不還果此觀初後在中閒故
처음의 예류과는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미지당지근과 이지근을 아홉 가지라고 하였다. 즉 미지근은 무간도(無間道)에 존재하고, 이지근은 해탈도(解脫道)에 존재하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최초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근은 그 순서대로 이계(離繫)의 득(得)에 대해 능히 인인(引因)과 의인(依因)이 되기 때문이다.96)
027_0476_a_16L初預流果由九根得謂意及捨信等五根未知當知已知爲九未知根在無間道已知根在解脫道此二相資得最初果如其次第於離繫得能爲引因依因性故
아라한과도 역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신(信) 등의 5근과 뒤의 두 가지 무루근과, 낙근ㆍ희근ㆍ사근 중의 어느 한 가지를 아홉 가지라고 하였다.97) 즉 이지근은 무간도에 존재하고, 구지근은 해탈도에 존재하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최후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근은] 그 순서대로 이계의 득에 대해 능히 인인(引因)과 의인(依因)이 되기 때문이다.
027_0476_a_20L阿羅漢果亦九根得謂意信等五已知及喜捨中隨一爲九已知根在無間道具知根在解脫道此二相資得最後果如其次第於離繫得能爲引因依因性故
027_0476_b_02L중간의 두 가지 사문과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각기 일곱 가지ㆍ여덟 가지ㆍ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바야흐로 일래과의 차제증(次第證)으로서 세간도(世間道)에 의한 것이면, 일곱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앞의 일곱 가지 근에 이지근이 여덟 번째이다. 또한 배리욕탐(倍離欲貪), 다시 말해 욕탐을 보다 많이 떠난 초월증(超越證)은 예류과와 마찬가지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98)
027_0476_b_02L中間二果隨其所應各爲七八九根所得所以者何且一來果次第證者依世閒道由七根得謂意及捨信等五根依出世道由八根得謂卽前七根已知根第八倍離欲貪超越證者如預流果由九根得.
만약 불환과의 차제증으로서 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일곱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고,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앞의 차제증의 일래과를 획득하는 경우에서와 같다. 그리고 전리욕탐(全離欲貪), 다시 말해 욕계 9품의 수혹을 완전히 떠난 초월증은 아홉 가지의 근에 의해 획득되니, 앞의 초월증의 일래과를 획득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설하면 비록 그러할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기(전리욕탐의 초월증)에는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낙ㆍ희ㆍ사근 중 어느 한 가지를 취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일래과의 초월증은 오로지 사근 한 가지 뿐이다.99)
027_0476_b_07L若不還果次第證者依世閒道由七根得依出世道由八根得如前次第得一來果全離欲貪超越證者由九根得如前超越得一來果摠說雖然而有差別謂此依地有差別故捨中可隨取一前果超越唯一捨根
또한 차제증의 불환과로서, 만약 제9 해탈도 중에서 근본지에 들 때 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 즉 그것의 무간도는 사수(捨受)와 상응하지만, 해탈도 중에는 다시 희수가 있어 이러한 두 가지 수가 서로 도와 제3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니, 이계의 득에 대해 두 가지 원인[引因과 依因]이 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그 중의 여덟 가지 근은 앞에서와 같고, 이지근이 아홉 번째의 근이 된다. 즉 무간도와 해탈도에는 이것(이지근)이 다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027_0476_b_13L又次第證不還果者若於第九解脫道中入根本地依世閒道由八根得彼無閒道捨受相應解脫道中復有喜受此二相資得第三果於離繫得二因如前依出世道由九根得八根如前已知第九無閒解脫此俱有故
근본(根本) 아비달마에서 ‘몇 가지 근에 의해 아라한을 획득하게 되는가?’라고 묻고, ‘열한 가지 근이다’고 답하고 있지 않은가?100) 그럼에도 어찌하여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027_0476_b_19L豈不根本阿毘達磨問由幾根得阿羅漢十一根云何乃言由九根得
027_0476_c_02L실로 네 번째 사문과(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다만 아홉 가지 근에 의해서이다. 그럼에도 본론(本論, 즉 『발지론』)에서 ‘열한 가지 근이다’고 말한 것은 한 소의신 중에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서 그렇게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무학의 지위에서 빈번히 물러난 다음 희근과 낙근과 사근 중 어느 한 가지가 현전함에 따라 몇 번이고 다시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101)이에 따라 본론에서는 열한 가지의 근을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 가지의 수(受)가 일시에 구기(俱起)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결정코 아홉 가지 근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된다]고 설한 것이다.
027_0476_b_21L實得第四但由九根而本論言十一根者依一身中容有故說謂容有一補特伽羅從無學位數數退已由樂捨隨一現前數復證得阿羅漢果由斯本論說十一根然無一時三受俱起是故今說定由九根
그렇다면 불환과에 대해서는 어째서 이와 같이 [열한 가지 근에 의해서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낙근으로 불환과를 증득하면 그 이후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거기서 물러나고서 낙근에 의해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먼저 이욕하고서 초월하여 세 번째 사문과를 증득한 이(초월증의 불환과)는 다시는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이욕의 사문과는 두 가지 도(유루도ㆍ무루도)에 의해 획득되어 지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다.102)
027_0476_c_05L於不還果中何不如是說以無樂根證不還果而於後時得有退義亦無退已由樂復得非先離欲超證第三有還退義此離欲果二道所得極堅牢故

여기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근을 성취하게 될 경우, 그러한 제근 가운데 결정적으로 몇 가지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6_c_09L今應思擇成就何根彼諸根中幾定成就頌曰

명근이나 의근이나 사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세 가지를 성취한다.
만약 낙근이나 신근(身根)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네 가지를 성취한다.
027_0476_c_11L成就命意捨
各定成就三
若成就樂身
各定成就四

안 등의 근이나 희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다섯 가지를 성취하며
만약 고근을 성취하게 되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일곱 가지를 성취한다.
027_0476_c_13L成眼等及喜
各定成五根
若成就苦根
彼定成就七

만약 여근이나 남근이나 우근이나 신(信) 등의 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여덟 가지를 성취하며
그리고 두 가지 무루근은 열 한 가지를,
최초의 무루근은 열세 가지를 성취한다.
027_0476_c_14L若成女男憂
信等各成八
二無漏十一
初無漏十三

논하여 말하겠다. 명근과 의근과 사근 중의 하나를 성취하게 되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세 가지 근(즉 명근ㆍ의근ㆍ사근)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그 밖의 나머지 근도 성취하지 못한다.103)
027_0476_c_15L論曰捨中隨成就一彼定成就如是三根非此三中隨有所闕可有成就
이러한 세 가지 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정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혹은 성취하기도 하고, 혹은 성취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이 중 안ㆍ이ㆍ비ㆍ설의 네 가지 근의 경우,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만약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未得] 이미 상실한[已失] 자 또한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근(身根)은 오로지 무색계에 태어난 자의 경우만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027_0476_c_18L所餘根者除此三根餘皆不定謂或成就或不成就此中眼耳鼻舌四根生無色界定不成就若生欲界未得已失亦不成就身根唯有生無色界定不成就
여근과 남근 두 가지는 위의 두 세계(색계ㆍ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만약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이미 상실한 자 또한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
027_0476_c_22L女男二根生上二界定不成就若生欲界未得已失亦不成就
027_0477_a_02L낙근의 경우 이생(異生)으로서 제4정(定)이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104) 희근의 경우 이생으로서 제3ㆍ제4정이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고근의 경우 만약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라면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우근의 경우 일체의 욕탐을 떠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027_0476_c_24L樂根異生生第四定及無色界定不成就喜根異生生三四定及無色界定不成就苦根若生色無色界定不成就憂根一切離欲貪者定不成就
신(信) 등의 5근은 선근(善根)이 끊어진 자에게 결정코 성취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 무루근(미지당지근)은 일체의 이생과 이주과(已住果)에 이른 자에게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으며,105) 다음의 무루근(이지근)은 [수도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에] 일체의 이생과 견도와 무학위에서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으며, 구지근은 [무학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에] 일체의 이생과 유학위에서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는다.
나아가 이상의 경우 이외의 상태[非遮位], 다시 말해 성취가 부정된 경우 이외의 상태에서는 앞에서 설한 제근(명근ㆍ의근ㆍ사근을 제외한 19근)을 모두 결정코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477_a_04L信等五根善根斷者定不成就初無漏根一切異生及已住果定不成就次無漏根一切異生見道無學定不成就後無漏根一切異生及有學位定不成就於非遮位應知如前所說諸根皆定成就
만약 낙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네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이러한 낙근이 바로 그것이다.106) 그러나 만약 신근(身根)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네 가지를 결정코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이러한 신근이 바로 그것이다.107)
027_0477_a_09L若成樂根定成就四謂命捨及此樂根若成身根亦定成四謂命捨及此身根
만약 안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다섯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ㆍ신근과 안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ㆍ비ㆍ설근도 역시 다섯 가지를 성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앞의 네 가지는 안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며, 다섯 번째는 바로 자신의 근이다.
027_0477_a_11L若成眼根定成就五謂命身根眼根耳鼻舌根應知亦五前四如眼第五自根
만약 희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결정코 다섯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ㆍ낙근과 희근이 바로 그것이다.108)
027_0477_a_14L若成喜根亦定成五謂命樂根喜根
제2정려지(靜慮地)에 태어나 아직 제3정려를 획득하지 않았으면 하지(下地)를 버리고 아직 상지(上地)를 획득하지 않은 것인데, 이러한 자는 어떠한 낙근을 성취하는 것인가?109)
‘제3정려의 염오한 낙근을 성취한다’고 응당 말해야 할 것이니,110) 그 밖의 것은 아직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027_0477_a_15L第二靜慮地生未得第三靜慮捨下未得上此成何樂根當言成就第三靜慮染污樂根餘未得故
만약 고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일곱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신근ㆍ명근ㆍ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네 가지 수근(受根)이 바로 그것이다.111)
027_0477_a_17L若成苦根定成就七謂身四受除憂
만약 여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여근이다. 만약 남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남근이다. 만약 우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우근이다.
027_0477_a_19L若成女根定成就八七如苦說第八女根若成男根亦定成八七如苦說第八男根若成憂根亦定成八七如苦說第八憂根
신(信) 등의 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각기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신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027_0477_a_22L若成信等亦各成八謂命信等五根
027_0477_b_02L만약 구지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열한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과 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그리고 구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지근을 성취하게 되더라도 역시 결정코 열한 가지를 성취하니, 열 가지의 근은 앞에서와 같고, 그리고 이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미지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열세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신근ㆍ명근ㆍ의근ㆍ고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그리고 미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027_0477_a_23L若成具知根定成就十一謂命與意捨根信等五根及具知根若成已知根亦定成十一十根如上及已知根若成未知根定成就十三謂身信等五根及未知根

그렇다면 제근(諸根) 중 최소한으로 몇 가지의 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7_b_05L諸極少者成就幾根頌曰

최소한 여덟 가지이니, 무선(無善)인 자는
수근과, 신근(身根)ㆍ명근ㆍ의근을 성취하고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선근과, 명근ㆍ의근ㆍ사근을 성취한다.
027_0477_b_06L極少八無善
成受身命意
愚生無色界
成善命意捨

논하여 말하겠다. 이미 선근을 끊은 자를 일컬어 ‘무선(無善)’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자는 최소한 여덟 가지 근을 성취하니,112) 이를테면 5수근과 신근과 명근과 의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의] ‘수(受,vid)’ 즉 수근의 ‘수’란 이를테면 능히 받아들인다[受, vedanā]는 뜻이니, 능히 영납(領納, vedayate)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는 바로 받아들이는 존재 그 자체(受性, vedanā)이기 때문에 ‘수(vid)’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를테면 원만한 존재[圓滿性]를 일컬어 ‘원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113)
027_0477_b_08L論曰已斷善根名爲無善彼若極少成就八根謂五受根及身受謂能受能領納故或是受性故名爲受如圓滿性立圓滿名
선근을 끊은 자가 최소한으로 여덟 가지의 근을 성취하듯이,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도 역시 여덟 가지의 근을 성취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이를테면 이생(異生)을 말하니, 아직 진리[諦]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027_0477_b_12L如斷善根極少成八愚生無色亦成八根愚謂異生未見諦故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신(信) 등의 5근과, 명근ㆍ의근ㆍ사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 등의 5근은 한결같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두를 일컬어 [게송에서] ‘선근’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선근)에는 마땅히 3무루근도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서는 여덟 가지 근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며,114) 또한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에 한정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027_0477_b_14L何等爲八謂信等五捨根信等五根一向善故摠名爲善若爾應攝三無漏根不爾此中依八根故又說愚生無色界故

그렇다면 제근 중 최대한으로 몇 가지의 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7_b_17L諸極多者成就幾根頌曰

최대한으로 열아홉 가지를 성취하니
이형(二形)은 세 가지 청정한 근이 제외되며
성자로서 아직 이욕(離欲)하지 않았으면
두 가지 청정한 근과 일형(一形)이 제외된다.
027_0477_b_18L極多成十九
二形除三淨
聖者未離欲
除二淨一形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이형자(二形者)로서 안 등의 근을 갖춘 자는 세 가지 무루근을 제외한 나머지 열아홉 가지의 근을 성취한다. [본송에서] ‘청정함’이란 곧 무루를 말하는 것으로, 두 가지의 계박를 떠났기 때문이다.115) 즉 이형자는 반드시 욕계의 이생으로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열 아홉 가지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027_0477_b_20L論曰諸二形者具眼等根除三無漏成餘十九無漏名淨離二縛故二形必是欲界異生未離欲貪故有十九
027_0477_c_02L오로지 이러한 자만이 열아홉 가지 근을 갖추게 되는 것인가? [열아홉 가지 근을 성취하는 자가] 더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유학(有學)의 성자로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이면 최대한으로 역시 열아홉 가지를 성취하니, 두 가지 무루근을 제외하며, 아울러 일형(一形)을 제외한다. 즉 만약 견도에 머무는 자라면 이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되고, 만약 수도에 머무는 자라면 미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되며, 또한 여ㆍ남의 두 근 중 어느 한 종류도 제외되니, 모든 성자는 이형(二形)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477_b_23L唯此具十九爲更有耶聖者未離欲亦具十九謂聖有學未離欲貪成就極多亦具十九除二無漏及除一形若住見道除已知根及具知根若住修道除未知根及具知根女男二根隨除一種以諸聖者無二形故
18계(界)의 근(根)과 비근(非根)의 차별을 분별하면서, 이에 편승하여 22근에 대해서도 널리 분별하여 끝마쳤다.
027_0477_c_06L因分別界根非根差別乘茲廣辯二十二根竟
說一切有部俱舍論卷第三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근의 원어 indriya는 ‘Indra에 상응하는’ 혹은 ‘~속한’이라고 하는 뜻의 형용사로서, 명사로 쓰일 경우 인드라의 힘, 인드라의 영역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하 논설처럼 근은 뛰어난 힘 즉 증상력(增上力, ādhipatya)의 뜻으로 해석된다.
  2. 2)‘가장 수승한 자재(paramaīśvarya)’는 indriya의 어근 √idi의 의역어이고, ‘빛나고 현저하다(indanti)’는 √indh(to kindle, light) 혹은 √ind의 의역어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 『순정리론』 권제9(대정장29, p.377중;한글대장경178, p.211)에서는 “此增上義, 界義顯成. 界謂伊地或忍地, 最勝自在是伊地義, 照灼明了是忍地義.”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지(伊地)’는 idi의 음사이고, 인지(忍地)는 아마도 indh 혹은 ind의 음사일 것이다. 참고로 구역에서는 “근이란 사용(事用)에 있어 증상 자재하기 때문에 최승자재(最勝自在)의 뜻이며, 또한 소의신 중 가장 밝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광식(光飾)의 뜻이다”고 하였다.(『구사석론』 권제2, 대정장29,p.173상)
  3. 3)여기서 선체(ṣuṇdha, 구역은 黃門)는 무세근(無勢根) 즉 남근이나 여근을 갖지 않은 자를 말하고, 반택(paṇḍāka, 구역은 故作黃門, 혹은 半擇迦)은 남근ㆍ여근을 갖지만 그 작용이 불완전한 성불구자를, 이형인은 양성, 즉 남근ㆍ여근을 동시에 갖은 자를 말한다. 즉 범인은 여근ㆍ남근으로 말미암아 불율의 즉 악계(惡戒)를 받아 지니기도 하고, 무간업을 짓기도 하며, 선근을 끊기도 하고, 또한 그것을 떠나 율의를 받아 지니기도 하고, 성도(聖道)에 들어 그 과보를 획득하여 성자가 되기도 하며 이욕(離欲)하기도 하지만 선체 등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여근ㆍ남근은 염오법과 청정법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는 뜻.
  4. 4)중동분(衆同分)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서, 예컨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보편성을 말한다. 곧 명근은 중유(中有)의 중동분이 사유(死有)의 중동분을 상속하게 하고, 또한 능히 이후의 중동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5. 5)『비나야잡사(毘奈耶雜事)』 권제11(대정장24,p.253하). 건달박(Gandharva, 구역은 乾闥婆)은 심향(尋香)으로 번역되는데, 욕계 중유의 이칭(異稱)이다.(본론 권제9, p.411;권제10, p.489 참조) 즉 이러한 중유의 건달박은 그가 탁태(托胎)할 부모의 비범행 정도를 보아 이러한 애(愛)ㆍ에(恚) 2심 중의 하나를 일으켜 탁태하게 된다.(본론 권제9, p.414 참조) 그럴 때 의근은 그러한 중유의 최후심에서 애 혹은 에의 심소를 일으켜 생을 상속하게 하는 점에서 증상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6. 6)낙 등의 5수근이란 낙(樂)ㆍ고(苦)ㆍ사(捨)ㆍ우(憂)ㆍ희(喜)의 다섯 가지 감각적 기능을 말하며, 신(信) 등의 8근이란 일체의 청정법을 낳는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ㆍ미지(未知)ㆍ당지(當知)ㆍ이지(已知)ㆍ구지(俱知)의 여덟 가지 근을 말한다.
  7. 7)탐수면(貪隨眠)은 희근과 낙근에 따라 증장[隨增]하고, 진(瞋)수면은 우근과 고근에 따라, 치(癡)수면은 사근에 따라 증장한다.
  8. 8)『중아함경』 권제10 『하의경(何義經)』(대정장1,p.485중)에 나온다. 즉 심신이 안락하면 마음도 삼매와 상응하여 정(定)을 획득하게 된다는 뜻.
  9. 9)『증일아함경』 권제23(대정장2,p.668중)에 나온다. ‘낙으로써 낙을 구할 수는 없고, 괴로움 이후에 도를 성취하게 된다.’ 즉 생사의 괴로움을 혐오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열반의 대락(大樂)을 욕구하고 그것으로의 신(信)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苦)는 신(信)의 소의가 된다.
  10. 10)『중아함경』 권제42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대정장1,p.692하 이하)에 나온다. 여기서 여섯 가지 출리란 색 등 6경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희ㆍ우ㆍ사를 말하는 것으로, 소연의 경계에 근거하여 여섯이라고 하였다. 즉 선심상응의 희ㆍ우ㆍ사가 색 등의 6경을 반연하여 애착을 낳지 않을 때 그것은 바로 생사 출리(出離)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11. 11)논주 세친은 ‘근’의 의의에 관한 이상의 논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만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설 즉 ‘전설(kila)’이라고 하였으며, 계속하여 이에 대한 이설(普光의 『俱舍論記』에서는 識見家등의 설, 法寶의 『俱舍論疏』에서는 曇無德 Dharmagupta, 즉 법장부의 설, 『稱友釋』에서는 경량부설로 해석됨)로서 다음의 세 게송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현은 『현종론』(권제5)에서 이를 삭제하였다.
  12. 12)이러한 주장은 대상에 대한 인식은 감관의 작용(見)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의 확인 판단[決度]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 같은 의미에서 보광(普光)은 이러한 이설의 주장자를 식견가(識見家)라고 평석하고 있는 것이다.(앞의 주 참조)
  13. 13)색 등의 6경도 식을 낳는 소연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6근을 그러한 이유에서 ‘근’으로 설정하였다면 6경 역시 근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뜻.
  14. 14)색 등의 6경도 소연으로서 작용하고 있지만, 안근 등이 다양한 색의 인식을 위한 통인(通因)이 되는데 반해 색경 등은 오로지 청색이면 청식(靑識)만을 낳게 할 뿐이며, 또한 안근 등의 승열 강약에 의해 안식에 밝고 어둠이 있지만 색경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근’으로 불리지 않는 것이다.
  15. 15)구지근에 의해 비로소 심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러한 힘에 의해 비로소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16. 16)견도위(見道位)의 무루지인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수도(修道)를 획득하거나 혹은 견소단의 번뇌를 소멸하는 일에 대해, 수도위(修道位)의 무루지인 이지근은 구지근의 무학도를 얻거나 혹은 수소단의 번뇌를 소멸하는 일에 대해, 무학위(無學位)의 무루지인 구지근은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열반을 얻는 일에 대해 각각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된 것이다.
  17. 17)이하 근의 폐립(廢立)을 논하고 있다. 먼저 무명ㆍ행ㆍ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생ㆍ노사의 12연기 지(支,본론 권제9참조) 각각은 후지(後支)를 낳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어야 하고, 그럴 경우 그것 역시 ‘근’이 되어야 한다는 뜻
  18. 18)이는 가비라(迦比羅, Kapila)를 개조로 하는 샹캬(Sāṃkhya, 數論)학파의 학설이다. 이 학파에서는 사고기관[意]과 다섯 가지 감각기관[知根]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作根] 등 열한 가지의 근(根)을 설정하였는데, 여기서 입 즉 발성기관 등은 생식기관[小便處]과 함께 다섯 가지 행동기관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파는 뒤에 다시 설한다.
  19. 19)『현종론』 권제5(한글대장경200,p.109-111)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변하고 있다. 이를테면 제 번뇌의 증상력은 바로 수(受)가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번뇌는 선품(善品)을 손상시키고, 낙과(樂果)의 일을 허물어뜨리는 열등한 하등의 법이기 때문에(‘근’이란 바로 세간의 증상법임) 근이 아니다. 그리고 샹캬학파의 5작근이 근이라고 할 경우 다음의 과실이 있다. 첫째 부정(不定)의 과실: 입의 어떠한 것을 설정하여 어근(語根)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점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 능히 말소리[言音]를 발하는 것을 일컬어 말하는 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혀[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심(尋)ㆍ사(伺) 등의 법과, 아울러 능히 어업(語業)을 낳게 하는 온갖 바람[風]도 역시 능히 말을 발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말이란, 이를테면 심ㆍ사 등이 입술ㆍ이빨ㆍ잇몸ㆍ목구멍 등의 조건에 의해 낳는 것이지 오로지 혀에 의지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입 등도 역시 능히 물건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뱀이나 물고기 등의 존재는 발에 의하지 않고서도 능히 가기 때문에, 입 등도 역시 능히 배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손이 잡는 것[執取]이라고 해서, 발이 가는 것이라고 해서, 대변처가 능히 배설하는 것이라 해서 근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 둘째 잡란의 과실: 만약 그러한 존재가 근이라면 그 작용이 뒤섞여 버리게 된다. 즉 입도 능히 붙잡을 수 있으며, 아울러 뱉아버리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손과 발에도 다 같이 붙잡고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확장의 과실: 만약 설근(舌根)과 어근(語根)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비근(鼻根)과 식근(息根)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목구멍이나 이빨, 입술, 위장 등도 삼키고, 씹고, 물고, 지니는 등의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혹은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결과를 낳는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다 같이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근은 무한정으로 설정될 수 밖에 없다.
  20. 20)이는 앞의 본품 두 번째 게송에서 네 번째 게송에 이르는 내용과 상응하는 식견가(識見家)의 이설로서, 22근을 유전(流轉:번뇌ㆍ업의 전변)과 환멸(還滅:번뇌ㆍ업의 소멸)의 근거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데, 『현종론』에서는 이를 삭제했다.
  21. 21)3계의 유전은 식을 본질로 하지만 6식은 6근을 소의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6근은 바로 유전의 소의이다.
  22. 22)신(信) 등의 5근은 일체의 선법을 낳는 근본이기 때문에 환멸의 소의로서, 견도의 미지당지근에 의해 비로소 택멸의 득이 생겨나게 되며, 수도위의 이지근에 의해 앞의 택멸의 득을 영원히 상속하고 지속하게 되며, 최후 무학위의 구지근에 의해 해탈의 희락 즉 현법낙주를 수용하게 된다.
  23. 23)이하 앞서 언급한 상캬학파의 5작근을 논파한다. 즉 말이라는 것은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구(語具) 즉 말하는 입 자체는 말에 대해 소의도 되지 않고, 그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지속 혹은 수용되는 것도 아니다.
  24. 24)근이란 여근ㆍ남근이 6근을 낳는 것처럼 그 자체 증상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샹캬철학에서 말한 잡고[執] 가는 것[行]은 손이 물건을 쥐고 발이 가는 것일 뿐, 손발이 다른 어떤 물건에 미치는 작용이 아니며, 손발 자체에 그 밖에 다른 작용이 없기 때문에, 또한 칼이 자신을 자르지 못하듯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작용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성질이 없다고 하였다. 즉 상하굴신(상을 달리하는 것)과 이곳에서 저곳에 이르는 것(처소를 달리하는 것)의 현상을 차별하여 잡고 가는 것이라 하지만, 이 자체는 손발을 떠나 별도의 다른 작용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으로도 잡을 수 있고 배처럼 배로 길 수도 있어 잡고 가는 데는 반드시 손발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발에 근의 성질은 없다는 것이다.
  25. 25)안 등 6근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에서, 여근ㆍ남근에 대해서는 본 권 초반부에서 논설하였다.
  26. 26)의식과 상응하는 마음의 즐거움[心悅, 즉 悅受]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제3정려지 중의 그것을 이름하여 낙근이라 하는데, 거기에서는 희탐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정려를 제외한 그 아래 세 가지 지, 즉 욕계, 제1ㆍ제2 정려지에서는 희탐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즐거움의 수는 희근이라고 이름한다.(『현종론』 권제5,한글대장경200,p.112-113) 여기서 마음의 희탐(喜貪, pritī-rāga)이란 ‘희’에 미착(味著)하는 것. 즉 이러한 미착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의 즐거움에 추동(麤動:마음이 거칠게 기뻐 날뛰는 것)함이 있는 것이다.
  27. 27)여기서 무분별이란 계탁분별(計度分別)이 없는 것, 즉 무의식적 상태를 말한다.
  28. 28)마음에 존재하는 괴로움이란 바로 우근을 말하며, 즐거움이란 희근을 말한다. 즉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정이나 이숙에 의해 비롯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분별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대개’라고 하였다.
  29. 29)몸에 존재하는 5식상응의 고락(苦樂)은 마음의 분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색 등의 대상의 힘에 의해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무분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학의 성자에게도 이러한 5식상응의 고락은 존재하는 것이다.
  30. 30)신수(身受)에는 고근과 낙근을, 심수(心受)에는 우근과 희근을 설정하였다는 뜻.
  31. 31)진지(盡智, kṣaya-jñāna)란 무학의 성자가 ‘나는 고를 이미 알았고, 집을 이미 끊었고, 멸을 이미 증득하였고, 도를 이미 닦았다’고 자각하는 지혜를 말하며,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란 ‘나는 이미 고를 알아 더 이상 알 것이 없으며, 집을 이미 끊어 더 이상 끊을 것이 없으며, 멸을 이미 증득하여 더 이상 증득할 것이 없으며, 도를 이미 닦아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깨달아 아는 지혜를 말한다.(본론 권제26, p.1178 참조)
  32. 32)이처럼 근의 명칭은 비록 스물두 가지이지만, 제근의 본질[體]은 다만 열일곱 가지일 뿐이다. 즉 여근과 남근의 두 가지는 신근에 포섭되며, 3무루근은 아홉 가지 근(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ㆍ신 등의 5근)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33. 33)이하 22근의 유루ㆍ무루, 이숙ㆍ비이숙, 3성(性), 3계계(界繫), 3단(斷) 등에 대해 분별한다.
  34. 34)구(垢, amala)는 번뇌의 뜻. 즉 무구란 더 이상 번뇌를 갖지 않는 상태.
  35. 35)즉 앞에서 설한 3무루근이 포섭되는 의(意) 등의 아홉 가지 근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포섭되지 않는 그 밖의 다른 의 등의 아홉 가지 근을 일러 유루라고 한다.
  36. 36)여기서 유여사는 보광에 의하면 화지부(化地部). 즉 화지부에서는 세간의 유루의 신(信) 등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신근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설한다. 대중부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세존의 설은 『잡아함경』 권제26 제653경(대정장2,p.183중)에서의 인용임.
  37. 37)즉 신 등의 5근은 유루 무루 모두와 통하지만, 그 같은 경설은 다만 무루문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온갖 성자의 지위에 대해 분별하면서 그것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이 오로지 무루라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없다는 뜻.
  38. 38)즉 이 같은 경설은 신 등 5근을 끊은 단선근자(斷善根者)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5근은 무루근이 아니라 유루근이라는 뜻.
  39. 39)『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제33(대정장3,p.806하). “부처님이 바야흐로 법을 설하려고 하실 때 불안(佛眼)을 열어 두루 세계를 관찰하시면서 그 중에 신 등 5근의 차별됨을 살펴보시었다.” 즉 부처님께서 아직 법륜을 굴리지 않았을 때 이미 세간에 무루근을 갖은 자가 있었다면, 여래의 출세는 중복되어 부질없는 일[唐捐]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신 등의 5근은 결정코 유루와도 통하는 것이다.(『순정리론』 권제9)
  40. 40)이는 『잡아함경』 권26(제651경)의 경설로, 신(信) 등의 5근은 원래 깨달음에 이르는 뛰어난 법이지만, 그것이 반대로 미혹의 원인임을 알지 못하였다면 아직 무상각(無上覺)의 불타라고 할 수 없다는 뜻. 여기서 ‘집(samudaya)’은 생사를 초래하는 원인의 뜻이며, ‘몰(cyavana)’은 침몰의 결과, ‘미(āsvāda)’는 미착(味著), 과환(ādīnava)은 번뇌업을 낳는 것, 출리(niḥsaraṇa)는 미와 과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41. 41)이 단은 22근의 이숙ㆍ비이숙 관계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방론으로, 명근의 이숙성과 유다수행(留多壽行, bahv-āyuḥ-saṃskārān-sthāpayati)에 관한 내용이다. 유다수행이란 자재를 획득한 아라한이 현재세에 목숨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명근이 오로지 과거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이숙과라고 한다면 현재의 아라한들이 연장시키는 수명, 즉 유다수행의 명근은 누구의 목숨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 『발지론』 권12(한글대장경176,p.275)의 성언을 논거로 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부에서는,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자재를 얻어 승중이나 개인에게 수명과 관계된 의발(衣鉢) 등을 보시하고, 보시한 후 발원하고, 다시 변제정(邊際定, 색계 제4선)에 들고, 출정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되, ‘이미 정력(定力)과 원력(願力)에 의해 획득된 부자의 이숙업을 수명의 이숙업으로 전환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으로, 아라한의 유다수행도 역시 과거업의 이숙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친이나 경량부는 명근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숙도 부정하고 있다.
  42. 42)이상 유다수행의 일곱 가지 승인(勝因). 첫째는 인승(人勝)으로, 성문의 극과(極果)인 아라한을 성취한 자. 둘째는 해탈승(勝)으로, 신통 즉 해탈을 성취할 때. 해탈에는 지력(智力)에 의해 번뇌장을 끊는 혜해탈(慧解脫)과 정력(定力)에 의해 정장(定障)을 끊는 구해탈(俱解脫)이 있는데, 여기서의 해탈은 구해탈. 셋째는 수습승(修習勝)으로,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입정할 수 있을 때. 넷째는 복전승(福田勝)으로, 4인 이상의 승중(즉 교단)이나 자(慈)ㆍ무쟁(無諍)ㆍ멸진(滅盡) 등의 선정이나 견ㆍ수도를 일으킨 개인에게 보시할 때. 다섯째는 시물승(施物勝)으로, 일상의 물건이 아닌 수명과 관계된 의복이나 발우와 같은 것을 보시할 때. 여섯째는 의지승(依止勝)으로, 소의지가 되는 수승한 정려, 즉 변제정(제4정려)에 들 때. 일곱째 전업승(轉業勝)으로, 정력(定力)과 원력에 의해 부의 이숙과를 낳는 업을 목숨의 이숙과로 바꿀 때. 이상의 일곱 가지 뛰어난 조건을 갖출 때 비로소 유다수행할 수 있다.
  43. 43)전생에 반만 받고 남겨진 나머지 목숨의 이숙을 지금 금생에 받는다는 뜻.
  44. 44)사다수행(bahu-jīvita-saṃskārān-utsṛjanti)이란 앞에서 언급한 유다수행의 반대로, 이를테면 불타는 120세, 혹은 100세까지 살 것을 80세로 단축한 것을 말한다.
  45. 45)제4 변제정에 의해 인기 현전하는 색계 대종에는 욕계의 소의신을 섭익(攝益)하는 것과 손감(損減)하는 것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전자에 의해 유다수행이, 후자에 의해 사다수행이 있게 된다는 뜻.
  46. 46)여기서 지속력[住時勢分]은 과거의 업력에 의해 인기(引起)된 제근(諸根) 대종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얼마간 비행하여 지속하는 동안의 세력과 같은 것을 말한다. 법보(法寶)에 의하면 이 주장은 논주 세친의 평설(評說)이나(『구사론소』 권제3,대정장41,p.519중) 보광(普光)에 의하면 경부(經部)설로서, 논주의 뜻이 이와 가까웠기 때문에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구사론기』 권제3,대정장41,p.62하) 즉 경량부에서는 유부와 달리 명근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만 제근의 대종이 상속하여 지속할 때의 세력을 일시 명근이라고 이름할 뿐이기 때문에(본론 권제5, p.233 참조), 그것의 연장과 단축은 오로지 대종세력의 변화[轉變相續]을 통해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47. 47)『잡아함경』 권제9 제252경(대정장2,p.61상) 참조. 여기서 범행이란 지계(持戒)를 뜻하며, 성도는 무루도인 8정도를 말한다.
  48. 48)여기서 세 대주란 인취(人趣)의 4대주 중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 북구로주(北俱盧洲)를 제외한 남섬부주(南贍部洲)ㆍ동승신주(東勝身洲)ㆍ서우화주(西牛貨洲)를 말하고(본론 권제11, p.511 참조), 여ㆍ남의 상속신을 지닌 자란 선체(扇搋) 등 성불구자를 제외한 유정을 말한다. 불시해탈이란 6종 아라한 중 부동법(不動法) 아라한으로,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열반에 들 수 있는 자를 말한다.(본론 권제25, p.1125 참조)
  49. 49)자재정이 존재한다고 함은 번뇌가 없을지라도 선정에 자재롭지 못한 둔근(鈍根)의 무학(無學)과 차별 지운 말이며, 번뇌가 없다고 함은 자재정을 획득하였을지라도 번뇌가 남아 있는 이근(利根)의 유학(有學)과 차별 지운 말이다.
  50. 50)출처불명이나, 세존께서는 열반 직전 큰 병을 얻었지만 선정의 힘에 의해 수명을 3개월 더 연장하였고, 100세 혹은 120세까지 살 것을 80세로 단축하기도 하였던 사실을 말한다.
  51. 51)『대비바사론』 권제126(한글대장경123,p.15이하)에는 이에 대한 열네 가지 설이 있는데, 제1설은 양자 차별이 없다, 제2설은 다만 이름만의 차별이다, 제3설 이하는 모두 차별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52. 52)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 권제1(대정장26,p.649상).
  53. 53)여기서 잠시동안 머무는 것이란, 이를테면 불타가 80세에서 3개월간 수명을 연장시킨 것을 말한다.
  54. 54)명행(命行)이나 수행(壽行)의 ‘행(saṃskāra)’은 유위 천류(遷流)의 뜻이다. 즉 명근은 유위생멸법으로서 찰나찰나에 걸쳐 생멸변천하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다수행, 다명행이라고 함은 곧 그렇게 연장 단축되는 바가 일찰나가 아니라 다찰나이며, 그 자체 무상함을 의미한다.
  55. 55)이는 명(āyuḥ)ㆍ수(jīvita)라고 하는 단일한 실체가 있어 그것이 일정한 시간에 걸쳐 지속한다고 주장하는 정량부의 학설을 비판하고 찰나찰나에 걸쳐 각기 개별적인 명ㆍ수가 현현[行]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유부에서는 ‘명’을 제 유정의 생존을 유지 상속하게 하는 원리로서,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본론 권제5, p.232 참조)
  56. 56)이는 전통적으로 경부설로 해석된다. 즉 경량부에서는 명수가립론(命壽假立論)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명ㆍ수는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5온의 결합상에 나타나는 목숨의 현상을 그렇게 이름한 데 지나지 않는 유위생멸의 법으로, 찰나에 생멸하기 때문에 ‘행(유위행)’이라는 것이다.(본론 권제5, p.233 참조)
  57. 57)이는 바로 부처님이 선정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장아함경』 권제2 「유행경(遊行經)」에서 이 같은 내용을 아난에게 재삼 반복하고 있는데, 지금 이러한 주장은 곧 부처님이 그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3개월간 목숨을 연장하였다는 뜻이다.
  58. 58)온마(蘊魔, skandha-māra)란 5온 집적의 육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 마는 죽음을 싫어하여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며, 사마(死魔, maraṇa-māra)란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싫어하여 무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불타가 목숨을 단축[捨壽]하고 연장[留壽]한 것은 이러한 두 가지 마를 조복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세존께서는 영원히 세상에 머물기를 바라는 번뇌마(kleśa māra)와 능히 인간의 선사(善事)를 방해하여 열반에 들기를 바라는 천마(devaputra-māra, 또는 自在天魔, 욕계 제6천 즉 타화자재천을 말함)를 조복하였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다는 뜻. 4마(魔)에 대해서는 『발지론』 권제20(대정장26,p.1031중)을 참조할 것.
  59. 59)유기성(有記性)이란 무기성의 반대로, 우근은 선 또는 불선의 성질이며,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오로지 선한 성질이다. 이에 반해 이숙은 무기성이다.
  60. 60)이는 ‘순우수업(順憂受業) 등이 있다’고 하는 경설을 논거로 하여, 여기서 순우수업 즉 ‘우수에 따르는 업’이란 바로 우수로서 이숙과를 초래하는 업이므로, 우근이 반드시 이숙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난문에 대한 유부의 답이다. 즉 난문자는 ‘순(順)’을 ‘이숙과의 초래’로 해석한 데 반해 유부에서는 ‘상응’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61. 61)우수와 상응하는 업을 순우수업이라 하며 따라서 우수는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면, 희수와 사수 또한 그 같은 이치에서 이숙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희수와 사수는 이숙이다.(후술)
  62. 62)이는 유부의 답으로, 앞의 난문자가 말하는 바에 따라 이러한 희ㆍ사 두 가지 수를 이숙으로 보든, 업과 상응하는 비이숙으로 보든 차이가 없다는 뜻.
  63. 63)차별이란 여러 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不如意] 일을 말한다. 여러 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분별할 때 우(憂)가 분별된다. 따라서 뜻대로 되지 않는 욕탐ㆍ진에 등을 지식(止息)하면 분별인 우도 역시 지식된다. 그러므로 차별(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우 즉 근심이 생겨나지만 차별이 지식되면 근심도 지식되기 때문에 ‘지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숙은 결코 지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근은 이숙이 아니라는 뜻.
  64. 64)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반징(反徵)이다. 즉 만약 우근이 이숙이라면 부모를 죽이는 등의 무간업을 지을 경우 바로 근심이 생겨나는데, 그럴 경우 그 업이 이미 성숙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65. 65)욕탐을 떠난 자에게는 우근이 수전(隨轉)하지 않지만, 이숙은 그렇지가 않다. 따라서 우근은 이숙이 아니다. 즉 우근은 바로 무지의 등류과이기 때문에 욕탐을 떠난 자에게는 더 이상 수전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p.117 참조)
  66. 66)우근과 희근은 다 같이 분별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분별의 욕탐을 떠난 이에게 우근이 없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이숙의 희근도 없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비바사사는 이 같은 이숙의 희근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어떠한 이유, 특징에 의해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 하는 뜻의 외난(外難).
  67. 67)이상 우근 비이숙에 대한 문답을 마치고, 이숙인 제근이 선ㆍ악취에 있을 경우 선과 악 중 어떤 업의 결과(이숙)인가를 분별한다. 여기서 선취란 인(人)과 천(天)의 취를 말하며, 악취한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취를 말한다. 참고로 ‘취(趣)’란 유정이 윤회하여 나아가는 곳을 뜻한다. 그리고 안 등의 8근이란 안 등의 5근과 여근ㆍ남근(7유색근), 그리고 명근을 말한다.
  68. 68)즉 희ㆍ낙ㆍ사 근과 상응하는 의근이라면 악취의 그것이라도 선한 이숙(선업에 의해 초래된 결과)이며, 고근과 상응하는 의근이라면 인ㆍ천의 그것이라도 악한 이숙이다.
  69. 69)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취에서의 여ㆍ남 두 근을 포함한 색근은 물론 선업의 이숙이지만, 이형자(二形者:남녀의 성을 동시에 지닌 자)의 그것은 불선업의 이숙이라는 뜻.
  70. 70)여기서 강한 의지 즉 강사(强思, vikalpa-viśeṣa)란 강한 분별 혹은 특수한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근심은 바로 이러한 강한 분별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선 혹은 악에 국한되고, 무기와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71. 71)이 두 가지 뜻은 22근의 순서를 ‘뛰어넘어’ 우근을 먼저 설하게 된 이유라기 보다 사실상 ‘오로지 우근만이 이숙과를 갖는다’고 하는 사실의 논거로서 이해된다.
  72. 72)앞의 여덟 가지 근이란 22근 중 안 등의 5근과 여근ㆍ남근과 명근을 말하고, 최후의 세 가지 근은 미지당지근 등의 무루근을 말한다.
  73. 73)신 등의 8근이란 신(信) 등의 5근과 3무루근을 말함.
  74. 74)22근의 배열순서상 신(信) 등 5근과 3무루근은 가장 뒤에 있지만, 바로 앞절(유이숙과 무이숙)의 내용 중 신 등의 5근이 가장 마지막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근보다 먼저 설하게 되었다는 뜻.
  75. 75)안 등의 여덟 가지 근이란 안 등의 5근과 여근ㆍ남근과 명근을 말한다.
  76. 76)이에 대해 중현(衆賢)은 부처님의 경우 감추어져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p.119). 본론 권제2 주19) 참조.
  77. 77)『중아함경』 권제28 『구담미경(瞿曇彌經)』(대정장1,p.607중). “여인은 5사(事)를 행할 수 없으니, 만약 여인으로서 여래ㆍ무소착(無所著)ㆍ정등각이나 전륜왕ㆍ천제석(天帝釋)ㆍ마왕(魔王)ㆍ대범왕을 짓는다면 이러한 것은 끝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남자로서…….”
  78. 78)색계에서의 유정은 이를테면 욕계의 남성과 같은 용맹함, 이욕(離欲)의 위세나 맹렬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자로 불린다는 것이다.
  79. 79)즉 색계에는 유정의 신체가 정묘하여 촉뇌(觸惱)를 낳는 고의 근거[苦依]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불선법이 없어 고의 대상[苦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현은 고근은 바로 손상이나 해코지[損害]하였던 업의 이숙인데, 색계 중에는 손상이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p.120)
  80. 80)이러한 의(意) 등의 4근은 여든여덟 가지 견혹(見惑)과 상응할 때는 견소단이고, 81품의 수혹(修惑)과 상응할 때는 수소단이며, 무루의 법과 상응할 때는 비소단이다.
  81. 81)7색근 등이 불염오법이고 비육처생(非六處生)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 18계의 3단문(斷門)을 참조하라.
  82. 82)신 등의 5근으로서 유루인 것은 수소단이고 무루인 것은 비소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염오법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
  83. 83)이는 최초로 획득[初得]하는 이숙의 제근에 대한 분별로서, 이를 알아야만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능히 그것의 속생(續生)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84. 84)여기서 태생은 태(胎)로 태어나는 것, 난생은 알로 태어나는 것, 습생은 습기로부터 태어나는 것, 화생은 의지하는 바 없이 홀연히 생겨나는 것을 말함.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8(p.387)을 참조할 것.
  85. 85)중유(中有)로부터 생유(生有)에 이르게 되는 순간, 그 밖의 다른 제근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명근과 신근만이 획득될 뿐이다.
  86. 86)유부에 의하는 한 수생(受生)과 명종(命終)의 단계에서는 사근이 반드시 상응하고, 의근 또한 수생의 단계에서 반드시 일어나는데, 어찌하여 게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난문.
  87. 87)의근과 사근은 생유로 속생할 때 생겨나기는 하지만, 부모에 대해 품은 애(愛) 또는 에(恚)와 상응하는 염오성이기 때문에 무기의 이숙근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ㆍ락ㆍ우ㆍ희ㆍ신 등의 5근도 역시 생겨나지만 이숙생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88. 88)유부에 의하는 한 세계 태초의 유정에게는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이 같은 6근이 일시[頓]에 획득된다.
  89. 89)무형자가 초생위에서 획득하는 6근에, 일형자는 여ㆍ남의 성 중 어느 한 가지를 더한 일곱 가지를, 이형자는 이 둘을 더한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
  90. 90)화생은 4생 중 가장 수승한 생인데, 여기에 어찌 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이형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
  91. 91)화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그 모두가 수승한 것은 아니다. 지옥의 유정은 모두 화생이고 아귀 중에도 화생이 있으므로(본론 권제8, p.390) 그러한 악취 중에는 악업에 의해 초래된 이형자도 있을 수 있다는 뜻.
  92. 92)『잡아함경』 권제14 제347경(대정장2,p.97상). 여기서 이 같은 내용의 계경을 인용한 이유는, 형색을 초월[超色]한 것이 무색계이기 때문에 색계의 특징은 바로 형색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정해탈이란 8해탈 중 제8 멸진정(滅盡定)의 해탈을 말한다.
  93. 93)즉 무색계에는 형색이 존재하지 않아 방처(方處)가 없으므로 공간적 규정인 ‘위(上)’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지만, 다만 선정과 그 생이 수승하다는 점에서 ‘위’라고 하였다는 뜻.
  94. 94)무색계 이하는 신(信) 등의 5근을 제외하고서 설한 것으로(이것은 선심으로 명종할 때에만 최후로 멸하는 것임), 여기서는 다만 염오ㆍ무기심으로 죽을 때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다.(후술)
  95. 95)‘비록 사문과는 근이 아닌 것에 의해서도 역시 획득될지라도, 여기서 근에 대해 분별하고 있기 때문에 사문과와 제근의 관계를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p.123)
  96. 96)즉 미지당지근은 무간도인 제15심 도류지인(道類智忍)에 동류인이 되어 무위택멸 즉 이계득을 낳는 것[引因]이 되고, 이지근은 해탈도인 제16심 도류지에서 이계득과 함께 생겨 이계득을 지지하는 것[依因]이 되어, 서로를 도와 예류과를 낳게 된다.
  97. 97)아라한과와 아라한향은 모두 미지ㆍ중간ㆍ4근본ㆍ무색의 아래 세 가지 정(定) 등 9지(地)에 포섭되기 때문에 세 가지 수근(受根) 중의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5, 한글대장경200,p.124) 곧 아라한과는 이 9지 중 어떠한 지로도 획득할 수 있는데,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한 자는 희애(喜愛)와 상응하고, 제3정려에 의한 자는 낙애(樂愛)와, 미지정을 비롯한 그 밖의 정에 의한 자는 사수(捨受)와 상응하기 때문에 세 가지 수근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
  98. 98)다음의 불환과와 함께 일래과의 경우는 대단히 복잡한데, 거기에는 세간도(世間道:즉 有漏六行觀, 본론 권제24, p.1112 참조)와 출세간도(出世道:무루도)에 의한 차제증(次第證:순서대로 사문과를 획득하는 것)과 초월증(超越證:바로 제2과를 증득하는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3 주86)을 참조할 것.
  99. 99)즉 초월증의 불환과는 그 소의지가 미지(未至)ㆍ중간ㆍ4근본정의 6지(地)이므로 수근(受根)에 있어서도 낙ㆍ희ㆍ사 중 어느 한 가지와 상응하지만, 일래과의 초월증은 반드시 미지정에 의해 견도(見道)에 들기 때문에 오로지 ‘사’ 한 가지와 상응한다. 즉 수근과의 상응이라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100. 100)『발지론』 권제15(한글대장경176,p.339).
  101. 101)유부에서는 견도에 의한 예류과는 유신견 등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이지적 번뇌[迷理惑]의 단멸이기 때문에 물러남이 없지만, 수도에 의해 정의적 번뇌[迷事惑]의 단멸을 증득한 일래ㆍ불환ㆍ아라한 등의 과위(果位)에는 물러남이 있다.
  102. 102)즉 유루도로써 색계 제2선의 번뇌를 끊고, 제3선의 낙근을 얻어 견도에 든 초월증의 불환과는 그 힘이 강력 견고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차제증의 불환으로서 하지로 물러난 이는 욕계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무간도의 미지정에 의지하여 사수로써만 본래의 과위(果位)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낙근에 의해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103. 103)이하 22근의 상호 성취ㆍ불성취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그 관계가 매우 복잡ㆍ번쇄하다. 먼저 명근과 의근과 사근은 일체의 지(地)와 소의에 편재하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를 성취하면 반드시 자근(自根)과 더불어 다른 두 근도 함께 성취하며, 하나라도 결여되면 세 근을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信) 등의 5근은 비록 일체의 지에 두루할지라도 일체의 소의에는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104. 104)다시 말해 낙근이 획득되는 것은 욕계와 아래 세 가지 정려와 성자로서의 생에 있을 때이다. 즉 성자는 설혹 제4정려나 무색계에 태어날지라도 제3정려의 무루의 낙근을 성취하니, 이러한 무루법은 계계(界繫)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지(繫地)를 초월하더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105. 105)미지당지근은 견도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에 이생과 견도 제16심(心)에 든 자[已住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다. 즉 미지근은 견도 제15심까지이다.
  106. 106)여기에 신근(身根)을 제외하는 것은 성자가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제3정려의 무루낙근을 성취하더라도 신근은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107. 107)여기에 낙근을 제외하는 것은 범부가 제4정려에 태어날 경우, 신근은 성취하지만 거기서는 낙근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범부였던 자라면 제3선의 무루낙근은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108. 108)여기서의 희근은 욕계와 초선과 제2선의 열수(悅受)이다.
  109. 109)이는 희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낙근을 성취한다고 한 데 대한 난문이다. 즉 제2정려지에 태어난 범부는 제2선의 희근은 성취하지만 낙근은 성취할 수 없으니, 초선(下地)에서의 5식상응의 낙근은 유루법으로서 이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할 수도 없으며, 제3선(上地)은 아직 닦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낙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성취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낙근인가 하는 뜻.
  110. 110)즉 제2정려지에 태어난 범부는 아직 제3선의 번뇌를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과 상응하는 염오한 낙근을 성취하게 된다.
  111. 111)고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욕계로서, 거기에 태어난 자로서 이욕(離欲)할 경우 우근을 버리기 때문에 결정코 우근을 성취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112. 112)여기서 ‘그러한 자’란 선근이 이미 끊어진 자로서, 여기서는 점차로 목숨을 버릴 때[漸捨命]를 표준으로 삼아 논의한 것이다
  113. 113)통상적으로는 수(受)를 vedanā라고 해야하지만 본송에서는 글자의 수가 제한되기 때문에 그 원문에서 ‘vid’만을 사용한 데 대한 설명이다. 이를테면 ‘원만한 존재(saṃpadana)’의 어근만을 취하여 ‘원만(saṃpad)’이라고 할 수 있듯이 ‘수(vedanā)’ 또한 vid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114. 114)22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선근을 논할 경우 3무루근도 포함되겠지만, 여기서의 선근이란 ‘여덟 가지 근 중의 선근’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3무루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
  115. 115)여기서 두 가지 계박이란 상응박(相應縛)과 소연박(所緣縛). 상응박이란 마음이 그것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에 계박되는 것이고, 소연박이란 마음이 번뇌의 소연이 되어 계박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