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7_0651_c_01L아비달마구사론 제27권
027_0651_c_01L阿毘達磨俱舍論卷第二十七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651_c_02L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7.분별지품②
027_0651_c_04L分別智品第七之二

이와 같이 온갖 지(智)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지’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먼저 부처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처음으로 성불(成佛)하여 진지를 획득하는 단계에서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닦는데, 여기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1)
무엇을 열여덟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1_c_05L如是已辯諸智差別智所成德今當顯於中先辯佛不共德且初成佛盡智位修不共佛法有十八種何謂十頌曰

열여덟 가지의 불공법이란
부처의 10력(力) 등을 말한다.
027_0651_c_09L十八不共法
謂佛十力等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念住)와 대비(大悲), 이와 같은 공덕을 모두 합하여 18불공법이라고 이름한다. 즉 이것은 오로지 모든 부처님께서 진지를 일으킬 때 닦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성자는 닦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027_0651_c_10L論曰佛十力四無畏三念住及大悲如是合名爲十八不共法唯於諸佛盡智時修餘聖所無故名不共

바야흐로 부처님의 10력(力, bala)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1_c_13L佛十力相別云何頌曰

10력 중 처(處)ㆍ비처(非處)는 10지(智)이고
‘업’은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여덟 가지 ‘지’이다.
027_0651_c_14L力處非處十
業八除滅道

정려와 근(根)과 승해와 계(界)는 아홉 가지 ‘지’이고
변취(遍趣)는 아홉 가지 혹은 10지이며
숙주와 사생(死生)은 세속지이며
누진(漏盡)은 여섯 가지 혹은 10지이다.
027_0651_c_15L定根解界九
遍趣九或十
宿住死生俗
盡六或十智

숙주와 사생의 지력(智力)은 정려지에
그 밖의 지력은 모든 지(地)에 의지하는데
섬부주 남성의 불신(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경계에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에 [‘힘’이라 하였다].
027_0651_c_16L宿住死生智
依靜慮餘通
贍部男佛身
於境無礙故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은 이와 같다.
첫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으로, 이것은 다 같이 여래의 10지(智)를 본질[性]로 한다.2)
027_0651_c_18L論曰佛十力者一處非處智力具以如來十智爲性
둘째는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으로, 이것은 여덟 가지의 지를 자성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그것이다.3)
027_0651_c_20L二業異熟智力八智爲性謂除滅道
027_0652_a_02L셋째는 정려ㆍ해탈ㆍ등지ㆍ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이며, 넷째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며, 다섯째는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며, 여섯째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 힘은 모두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한다.4)
027_0651_c_21L三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四根上下智力五種種勝解智力六種種界智力如是四力皆九智性謂除滅智
일곱째는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니,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의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단지 온갖 능취(能趣)의 도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를 본질로 하며,5) 만약 이와 아울러 소취(所趣)의 과(果)도 역시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10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6)
027_0652_a_03L七遍趣行智力聲顯此義有二途若謂但緣能趣爲境九智除滅若謂亦緣所趣爲境十智爲性
여덟째는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이며, 아홉째는 사생지력(死生智力)으로, 이와 같은 두 가지 힘은 모두 세속지를 본질로 한다.7)
027_0652_a_06L八宿住隨念智力九死生智如是二力皆俗智性
열째는 누진지력(漏盡智力)으로,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역시 그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단지 누진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지와 고ㆍ집지와 타심지를 제외한 여섯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며,8) 만약 이와 아울러 누진의 소의신 중에 획득된 공덕(즉 누진의 방편)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10지를 자성으로 삼는다.9)
027_0652_a_07L十漏盡智力或聲亦顯義有二途若謂但緣漏盡爲境六智除道他心若謂漏盡身中所得十智爲性
10력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의 차별은 어떠한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힘(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4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그 밖의 여덟 가지 힘은 모두 열한 가지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여기서 열한 가지 지라고 함은 욕계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과, 그리고 4무색정을 말한다.
027_0652_a_10L已辯自性依地別者第八第九依四靜慮餘八通依十一地起四靜慮未至中閒幷四無色名十一地
10력의 소의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신(所依身)의 차별은 어떠한가?
10력은 모두 남섬부주에서 태어난 남성의 불신(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027_0652_a_13L已辯依地依身別者皆依贍部男子佛身
10력의 소의신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와 같은 10지를] 어떠한 이유에서 ‘힘[力]’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일체의 앎의 대상[所知境]에 대해 지(智)가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였다.10)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10력은 오로지 불신(佛身)에 의지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오로지 부처님만이 이미 모든 번뇌와 그 습기(習氣, 습관적 습성)를 제거하였고, 일체의 경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로 능히 알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는 이와는 다르기 때문에 ‘힘’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사리자(舍利子)는 득도하기를 희구하는 이를 저버렸으며,11)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의 전제와 후제의 생의 많고 적음에 대해 능히 관찰하여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 따위가 그러한 것이다.12)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 지니신, 두루 알아야 할 것에 대한 마음의 힘[心力]은 가이없는 것[無邊]이다.
027_0652_a_14L已辯依身何故名力以於一切所知境中智無礙轉故名爲力由此十力唯依佛身唯佛已除諸惑習氣於一切境隨欲能知餘此相違故不名力如舍利子捨求度人不能觀知鷹所逐鴿前後二際生多少等如是諸佛遍於所知心力無邊

그렇다면 색신의 힘[身力]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云何身力頌曰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거나
혹은 마디마디가 모두 그러하니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가 열 배씩 증가한 힘으로
이는 촉처(觸處)를 본질로 한다.
027_0652_a_21L身那羅延力
或節節皆然
象等七十增
此觸處爲性
027_0652_b_02L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의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다.13)
그러나 유여사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색신의 사지와 마디마디에는 모두 나라연의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으며, 대덕 법구(法救)는 “모든 여래의 색신의 힘은 가이없으니, 마치 마음의 힘과도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색신은 마땅히 가이없는 마음의 힘을 능히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027_0652_a_23L論曰佛生身力等那羅延有餘師言佛身支節一一皆具那羅延力大德法救說諸如來身力無邊猶如心力異此者則諸佛身應不能持無邊心
즉 대각(大覺, 즉 불타)과 독각과 전륜왕의 사지와 마디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은, 그 순서대로 마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려 얽혀 있는 것[蟠結]과 흡사하고, 서로 연이어 물고 있는 것과 흡사하며,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서로 견주어 보면, 그 힘에 수승함과 저열함이 있는 것이다.
027_0652_b_05L大覺獨覺及轉輪王支節相連其次第似龍蟠結連鎖相鉤故三相望力有勝劣
그렇다면 나라연의 힘은 그 양이 어느 정도인가?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의 힘을 각기 열 배씩 증가시킨 것으로, 이를테면 보통의 코끼리인 범상(凡象)과 향상(香象)과 마하낙건나(摩訶諾健那)와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와 벌랑가(伐浪伽)와 차노라(遮怒羅)와 나라연이 그것이니, 뒤의 것일수록 그 힘은 앞의 것보다 열 배씩 증가하는 것이다.14)
027_0652_b_07L那羅延力其量云何十倍增象等七力謂凡象香象摩訶諾健那鉢羅塞建提伐浪伽遮怒羅那羅延後後力增前前十倍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앞의 여섯 가지는 열 배씩 증가하지만, 그것은 나라연의 반신(半身)의 힘에 필적할 뿐이며, 이러한 힘의 천 배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을 성취한다”고 하였다.15)
이러한 여러 설 중에서 오로지 그 양이 많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027_0652_b_10L有說六十十倍增敵那羅延半身之力此力一倍成那羅延於所說中唯多應理
그리고 이와 같은 색신의 힘은 촉처(觸處)를 본질[性]로 하니, 이를테면 소조촉(所造觸) 중의 대종(大種)의 차별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소조촉(所造觸)으로, 일곱 가지를 떠나 그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16)
027_0652_b_13L如是身力觸處爲性謂所觸中大種差別有說是造觸離七外別有

부처님게서 지니신 4무외(無畏, vaiśāradya)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2_b_14L佛四無畏相別云何頌曰

네 가지 무외는 그 순서대로
첫 번째와 제10ㆍ제2ㆍ제7의 힘이다.
027_0652_b_15L四無畏如次
初十二七力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4무외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17) 즉 첫째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로서 10지(智)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첫 번째 힘(처비처지력)과 같다.18) 둘째는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로서 여섯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열 번째 힘(누진지력)과 같다.19) 셋째는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로서 여덟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두 번째 힘(업이숙지력)과 같다.20) 넷째는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로서, 아홉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일곱 번째 힘(변취행지력)과 같다.21)
027_0652_b_16L論曰佛四無畏如經廣說一正等覺無畏十智爲性猶如初力二漏永盡無畏六十智性如第十力三說障法無畏八智爲性如第二力四說出道無畏九十智性如第七力
어떻게 지(智)에 대해 ‘무외(無畏)’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같은 ‘무외’라는 말은 두려워함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지(智)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외라고 하는 말은 온갖 ‘지’ 그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무외는 바로 ‘지’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그 자체가 바로 ‘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논주 세친의 평석)
027_0652_b_21L如何於智立無畏名此無畏名目無怯懼由有智故不怯懼他故無畏名目諸智體理實無畏是智所成不應說言體卽是智

부처님께서 지니신 3념주(念住, smṛtyupasthāna)의 상의 차별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佛三念住相別云何頌曰
027_0652_c_02L
3념주의 본질은 염(念)과 혜(慧)로서,
따르고 어기고 둘 모두를 소연으로 한다.
027_0652_c_02L三念住念慧
緣順違俱境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가 지닌 3념주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受持)하여 행하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쁨을 낳지 않으며, 사기(捨棄)하고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첫 번째 염주라고 한다.
027_0652_c_03L論曰佛三念住如經廣說諸弟子衆一向恭敬能正受行如來緣之不生歡喜捨而安住正念正知是謂如來第一念住
또한 모든 제자들이 오로지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근심을 낳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두 번째 염주라고 한다.
027_0652_c_07L諸弟子衆唯不恭敬不正受行如來緣之不生憂慼捨而安住正念正知是謂如來第二念住
또한 모든 제자들 중의 어떤 부류는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며, 어떤 부류는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세 번째 염주라고 한다.22)
이러한 3념주는 모두 염(念)과 혜(慧)를 본질로 한다.23)
027_0652_c_09L弟子衆一類恭敬能正受行一類不敬不正受行如來緣之不生歡慼而安住正念正知是謂如來第三念住此三皆用念慧爲體
위대한 모든 성문들도 세 가지 경계에 대해 기쁨과 근심과 양자 모두를 떠났는데, 어떻게 이것(부처의 떠남)만을 일컬어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027_0652_c_13L諸大聲聞亦於弟子順違俱境離歡慼俱此何名爲不共佛法
오로지 부처님만이 이것에 대한 습기(習氣)를 아울러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24) 혹은 모든 제자들은 여래를 따르거나 그에게 소속되어 있기에 그를 따르고[順, 공경하고 수지하여 행하는 것] 어기고[違, 공경하지도 않고 수지하여 행하지도 않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행할 경우에는 마땅히 깊이 기뻐하고 근심해야 할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능히 그것을 일으키지 않으니, 참으로 희유하고도 기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은 [여래의 제자로서] 성문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 어기고, 두 가지 모두를 행할 때 기쁨과 근심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기특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로지 부처의 그것만을 ‘불공’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027_0652_c_15L唯佛於此幷習斷故或諸弟子隨屬如來有順違俱應甚歡慼佛能不起可謂希奇非屬諸聲聞不起非奇特故唯在佛得不共

모든 부처님께서 지니신 대비(大悲)에는 어떠한 상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諸佛大悲云何相別頌曰

대비는 오로지 세속지로서
자량과 행상과 경계와
평등과 상품(上品)으로 인해 ‘대’이며
여덟 가지 이유로 인해 ‘비’와는 다르다.
027_0652_c_19L大悲唯俗智
資糧行相境
平等上品故
異悲由八因

논하여 말하겠다. 여래의 대비(大悲)는 세속지를 본질로 하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공유(共有)의 법인 비(悲)와 마찬가지로 능히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의 행상(즉 苦苦ㆍ行苦ㆍ壞苦)도 능히 지을 수 없을 것이다.25)
027_0652_c_21L論曰如來大悲俗智爲性若異此者則不能緣一切有情亦不能作三苦行相如共有悲
027_0653_a_02L이러한 ‘대비’라고 하는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인가?
다섯 가지 뜻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첫째는 자량(資糧)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크나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힘은 능히 세 가지 괴로움의 경계에 대해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연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모두 3계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넷째는 평등(平等)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일체의 유정에 대해 평등한 이익과 안락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품(上品)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최상품으로서, 다른 어떠한 비(悲)도 능히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027_0652_c_24L此大悲名依何義立依五義故此立大名一由資糧故大謂大福德智慧資糧所成辦故二由行相故大謂此力能於三苦境作行相故三由所緣故大謂此摠以三界有情爲所緣故四由平等故大謂此等於一切有情作利樂故五由上品故大謂最上品更無餘悲能齊此故
즉 이러한 대비와 ‘비’가 다른 것은 여덟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자성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무치(無癡)와 무진(無瞋)으로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26) 둘째는 행상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세 가지의 고(苦)와 한 가지의 고를 대상으로 하여 행상을 짓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7) 셋째는 소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3계와 1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8) 넷째는 소의지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제4정려와 그 밖의 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9)
027_0653_a_08L此與悲異由八種因一由自性無癡無瞋自性異故二由行相三苦一苦行相異故三由所緣三界一界所緣異故四由依地第四靜慮通餘異故
다섯째는 소의신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오로지 부처의 몸과 부처 이외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30) 여섯째는 증득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유정지와 욕계를 떠나 증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31) 일곱째는 구제(救濟)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사업의 성취와 희망으로서의 구제가 다르기 때문이다.32) 여덟째는 애민(哀愍)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불평등과 평등으로서 애민이 다르기 때문이다.33)
027_0653_a_12L五由依身唯佛通餘身有異故六由證得離有頂欲證得異故七由救濟事成希望救濟異故八由哀愍平等不等哀愍異故

부처님의 공덕이 그 밖의 다른 유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모든 부처님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그들의 법은 모두 동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3_a_16L已辯佛德異餘有情諸佛相望法皆等不頌曰

자량과 법신과 이타에 의거할 경우
모든 부처님의 법은 서로 유사하지만
수명ㆍ종성ㆍ족성ㆍ크기 등에 있어서는
모든 부처님의 법에 차별이 있다.
027_0653_a_17L由資糧法身
利他佛相似
壽種姓量等
諸佛有差別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諸佛]은 다 동등하다. 즉 첫째로는 자량으로 말미암아 동등하니,34) 그것을 원만히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동등하니,35) 그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이타(利他)로 말미암아 동등하니, 그것이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027_0653_a_19L論曰由三事故諸佛皆等一由資糧等圓滿故二由法身等成辦故三由利他等究竟故
027_0653_b_02L모든 부처님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수명과 종성과 족성과 신체의 크기 등의 차이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수명의 차이란 부처님의 수명에 길고 짧음이 있는 것(백 세에서 2만 세)을 말하며,36) 종성의 차이란 부처님이 찰제리(刹帝利, 크샤트리야를 말함)와 바라문(婆羅門)의 종성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족성의 차이란 부처님의 족성이 교답마(喬答摩, Gautama)나 가섭파(迦葉波, Kāśyapa) 등인 것을 말하며, 크기의 차이란 부처님의 색신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머문 지가 오래되고 얼마 되지 않은 등의 차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에게 이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출현할 때 교화될 유정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027_0653_a_22L由壽種姓身量等殊佛相望容有差別壽異謂佛壽有短種異謂佛生剎帝利婆羅門種姓異謂佛姓喬答摩迦葉波等量異謂佛身有小大等言顯諸佛法住久近等如是有異由出世時所化有情機宜別故
나아가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여래의 세 가지 종류의 원덕(圓德)을 사유하여 깊이 애호하고 공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세 가지 원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인원덕(因圓德)이며, 둘째는 과원덕(果圓德)이며, 셋째는 은원덕(恩圓德)이다.
027_0653_b_05L諸有智者思惟如來三種圓德深生愛敬其三者何一因圓德二果圓德三恩圓德
처음의 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무여수(無餘修)이니, 복덕과 지혜 두 종류의 자량을 남김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시수(長時修)이니, 3대겁(大劫)의 아승기야(阿僧企耶, 혹은 3아승기겁)를 거치면서 게으름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간수(無間修)이니, 정근함이 용맹하여 찰나찰나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존중수(尊重修)이니, 배워야 할 법을 공경하여 [신명을] 돌보거나 아끼는 일이 없었으며, 태만함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027_0653_b_07L初因圓德復有四種一無餘修福德智慧二種資糧修無遺故二長時修經三大劫阿僧企耶修無倦故三無間修精勤勇猛剎那剎那修無廢故四尊重修恭敬所學無所顧惜修無慢故
다음으로 과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지원덕(智圓德)이며, 둘째는 단원덕(斷圓德)이며, 셋째는 위세원덕(威勢圓德)이며, 넷째는 색신원덕(色身圓德)이다.
027_0653_b_12L次果圓德亦有四種一智圓德二斷圓德三威勢圓四色身圓德
지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무사지(無師智)이며, 둘째는 일체지(一切智)이며, 셋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며, 넷째는 무공용지(無功用智)이다.37)
027_0653_b_14L智圓德有四種師智一切智一切種智無功用智
단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번뇌단(一切煩惱斷)이며, 둘째는 일체정장단(一切定障斷)이며, 셋째는 필경단(畢竟斷)이며, 넷째는 병습단(幷習斷)이다.38)
027_0653_b_16L斷圓德有四種一切煩惱斷一切定障斷畢竟斷幷習斷
위세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외적 경계를 화생(化生)하고 변화시키며, 오래 머물게[住持] 하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둘째는 수명의 양을 혹은 줄이고 혹은 늘이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셋째는 허공이나 장애가 있는 곳이나 지극히 먼 곳을 신속히 가며, 작은 것과 큰 것이 서로에게 들어가게 하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넷째는 세간의 여러 가지 사물의 본성으로 하여금 법이(法爾)로서 일어나게 하여 이전보다 뛰어나게 하는 희유하고도 기특한 위세이다. 위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화하기 어려운 이를 반드시 능히 교화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려운 질문에 답변하여 반드시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며, 셋째는 교법을 세워 반드시 출리(出離)하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악한 무리들을 반드시 능히 조복시키는 것이다.
027_0653_b_17L威勢圓德有四種一於外境化變住持自在威勢二於壽量若促若延自在威勢三於空障極遠速行小大相入自在威勢四令世間種種本性法爾轉勝希奇威勢威勢圓德復有四種一難化必能化二答難必決疑三立教必出離四惡黨必能伏
027_0653_c_02L색신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로는 온갖 상(相)을 갖춘 것이며, 둘째로는 수호(隨好)를 갖춘 것이며, 셋째로는 큰 힘[大力]을 갖춘 것이며,39) 넷째로는 안으로는 신체의 골격이 견고하여 금강석보다 뛰어나며, 밖으로는 신비한 광명을 발하니, 그 밝기가 백천 개의 태양보다 더하다.
027_0653_b_24L色身圓德有四種一具衆相二具隨好具大力四內身骨堅越金剛外發神光踰百千日
마지막으로 은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3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와 생사를 영원히 해탈하게 하거나, 혹은 능히 선취(인ㆍ천취)와 3승(성문ㆍ연각ㆍ불)으로 안치(安置)하는 것을 말한다.
027_0653_c_04L後恩圓德亦有四種令永解脫三惡趣生死或能安置善趣三乘
여래의 원덕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이상과 같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으로 분석할 경우 가이없는 무변(無邊)의 원덕이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불세존만이 능히 아시고, 능히 설하실 수 있다. 요컨대 목숨[命行]을 연장하여 수많은 대겁의 아승기야를 거쳐야만 비로소 그것을 다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불세존의 색신이 수승하고도 기특한 무변의 인원덕(因圓德)과 과원덕(果圓德)과 은원덕(恩圓德)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마치 크나큰 보배의 산[大寶山]과 같음을 나타낸다.
027_0653_c_06L摠說如來圓德如是若別分析則有無邊唯佛世尊能知能說留命行經多大劫阿僧企耶說乃可如是則顯佛世尊身具有無邊殊勝奇特因果恩德如大寶山
따라서 어리석은 모든 범부들은 그 자신이 여러 덕을 결여하였기에 비록 이와 같은 부처가 지닌 공덕의 산과 그가 설한 법을 들었을지라도 능히 믿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을 듣고서 믿고 존중하는 마음을 낳으며, 그것은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되니, 그는 이 같은 한 찰나의 믿고 존중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가이없는 부정(不定)의 악업을 전멸(轉滅)하고, 수승한 인(人)ㆍ천(天)의 열반을 섭수하게 된다.
027_0653_c_10L有諸愚夫自乏衆德雖聞如是佛功德山及所說法不能信重諸有智者聞說如斯生信重心徹於骨髓彼由一念極信重心轉滅無邊不定惡業攝受殊勝人天涅槃
그래서 경에서는 “여래는 세간에 출현하시자마자 모든 지자(智者)들의 무상(無上)의 복전(福田)이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의지하여서만 헛되지 않고, 참으로 애호할 만하며, 수승하고, 신속하며, 궁극적인 구경의 과보를 인기하여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도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027_0653_c_15L故說如來出現於世爲諸智者無上福田依之引生不空可愛殊勝速疾究竟果故如薄伽梵自說頌言

만약 부처라는 복전(福田)에
조그마한 선이라도 능히 심는다면
처음에는 뛰어난 선취를 획득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열반을 획득하게 되리라.40)
027_0653_c_18L若於佛福田
能殖少分善
初獲勝善趣
後必得涅槃

여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다른 이와 공통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3_c_20L已說如來不共功德共功德今當辯頌曰

다시 그 밖의 다른 불법이 있어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니
이를테면 무쟁과 원지와
무애해 등의 공덕이 바로 그것이다.
027_0653_c_22L復有餘佛法
共餘聖異生
謂無諍願智
無礙解等德
027_0654_a_02L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에게는 다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어 그 밖의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니, 이를테면 무쟁(無諍)과 원지(願智)와 무애해(無礙解)와 6통(通)과 4정려와 4무색정과 8등지(等至)와 3등지(等持)와 4무량(無量)과 8해탈과 8승처(勝處)와 10변처(遍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이며, 6통과 4정려 등은 이생과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다.
027_0653_c_24L論曰世尊復有無量功德與餘聖者及異生共謂無諍願智無礙解無色等至等持無量解脫勝處遍處隨其所應謂前三門唯共餘聖靜慮等亦共異生

앞의 세 가지 공덕 가운데 먼저 ‘무쟁(araṇā)’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4_a_06L前三門中且辯無頌曰

무쟁은 세속지로서
뒤의 정려에 의지하여 부동(不動)이
세 주(洲)에서 일으키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욕계의 유사혹(有事惑)을 소연으로 한다.
027_0654_a_07L無諍世俗智
後靜慮不動
三洲緣未生
欲界有事惑

논하여 말하겠다. 무쟁이란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아라한은 유정의 괴로움이 번뇌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고서 자기의 몸이 복전 중에 뛰어난 것임을 스스로 아는데, 다른 이의 번뇌가 다시 자기를 인연으로 하여 생겨날까 두려워하여 고의로 이와 같은 형태의 지(智)를 낳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에 의해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자기의 몸을 인연으로 하여서는 더 이상 탐(貪)ㆍ진(瞋) 등을 낳지 않게 하리라.’ 즉 이러한 행(行)은 모든 유정류의 번뇌의 다툼[諍]을 능히 종식시키기 때문에 ‘무쟁’이라 이름한 것이다.41)
027_0654_a_09L論曰言無諍者謂阿羅漢觀有情苦由煩惱生自知己身福田中勝恐他煩惱復緣己生故思引發如是相智此方便令他有情不緣己身生貪瞋此行能息諸有情類煩惱諍故得無諍名
이러한 행은 다만 세속지를 자성으로 할 뿐이다.42)
제4정려를 그것의 소의지로 삼으니, 낙통행(樂通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43)
027_0654_a_15L此行但以俗智爲性第四靜慮爲其所依樂通行中最爲勝故
또한 부동(不動)의 응과(應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으며, 그 밖의 성자는 일으킬 수 없다. 즉 그 밖의 성자는 자신이 일으키는 번뇌도 능히 방지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의 몸에 생겨나는 번뇌를 능히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027_0654_a_16L動應果能起非餘餘尚不能自防起況能止息他身煩惱
또한 이것은 오로지 세 주(洲)의 인취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이다.
또한 욕계의 미래 유사혹(有事惑)을 소연으로 하니,44) 다른 이의 번뇌가 자기를 인연으로 하여서는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온갖 무사혹(無事惑)을 막거나 방지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내적으로 일어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든 경계를 소연[總緣]으로 하기 때문이다.45)
027_0654_a_18L此唯依止三洲人身緣欲未來有事煩惱勿他煩惱緣己生故諸無事惑不可遮防起隨應摠緣境故

무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원지(願智, pariṇidhijñā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4_a_21L辯無諍已次辯願頌曰

원지란 일체를 두루 소연으로 삼으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7_0654_a_22L願智能遍緣
餘如無諍說
027_0654_b_02L
논하여 말하겠다.[원지란] 먼저 원하고 나서 미묘한 지(智)를 일으키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알기 때문에 ‘원지’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지의 자성과 소의지와 종성과 소의신은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소연만이 다를 뿐으로, 이러한 지는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46)
027_0654_a_23L論曰以願爲先引妙智起如願而了故名願智此智自性地種性身與無諍同但所緣別以一切法爲所緣故
그런데 비바사(毘婆沙)의 논자들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원지는 무색계를 능히 증지(證知, 직접지각)할 수 없으니, 그것의 인행(因行, 무색계에 들어가는 원인 즉 무색정)과 그 등류의 차별을 관찰하기 때문으로, 마치 농부의 무리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47)
027_0654_b_03L毘婆沙者作如是言願智不能證知無色觀彼因行及彼等流差別故如田夫類
모든 유정(불시해탈의 아라한)이 이러한 원지를 일으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같은 경계를 알기를 바라는 진실의 원을 발하고서 바로 변제(邊際)의 제4정려에 들어 가행를 닦고, 이로부터 무간에 선정에 들었을 때의 세력의 승렬(勝劣)에 따라 이전의 원력대로 정지(正智)를 인기하여 알고자 하였던 경계에 대해 모두 참답게 알게 되는 것이다.
027_0654_b_06L諸有欲起此願智時先發誠願求知彼境便入邊際第四靜慮以爲加行從此無閒隨所入定勢力勝劣如先願力引正智起於所求境皆如實知

원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애해(無礙解, pratisaṃvid)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已辯願智無礙解者頌曰

무애해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이 그것이다.
027_0654_b_10L無礙解有四
謂法義詞辯

이는 명(名)과 뜻과 언설과 도(道)로서
물러남이 없는 지(智)를 자성으로 하는데
‘법’과 ‘사’는 오로지 세속지로
다섯 가지와 두 가지를 소의지로 한다.
027_0654_b_11L名義言說道
無退智爲性
法詞唯俗智
五二地爲依

‘의’는 10지(智)와 여섯 지이고, ‘변’은 아홉 지로
그것들은 모두 일체의 지(地)를 소의로 하는데
다만 획득하기만 하면 반드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7_0654_b_12L義十六辯九
皆依一切地
但得必具四
餘如無諍說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무애해를 모두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무애해(法無礙解)이며, 둘째는 의무애해(義無礙解)이며, 셋째는 사무애해(詞無礙解)이며, 넷째는 변무애해(辯無礙解)이다.48)
027_0654_b_14L論曰諸無礙解摠說有四一法無礙二義無礙解三詞無礙解四辯無礙解
이러한 네 가지 무애해를 전체적으로 설하면, 그 순서대로 명(名)과 뜻[義]과 언설과 도(道)를 소연으로 하며, 퇴전(退轉)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智)를 자성으로 한다.49) 이를테면 물러남이 없는 지가 능전(能詮)의 법인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을 소연으로 하는 것을 첫 번째 법무애해라고 하며,50) 소전(所詮)의 뜻을 소연으로 하는 것을 두 번째 의무애해라고 하며, 모든 지방의 언사(言詞)를 소연으로 하는 것을 세 번째 사무애해라고 하며,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막힘이 없는 설(說)을 소연으로 하며, 아울러 자재의 정(定)과 혜(慧)의 두 가지 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을 네 번째 변무애해라고 한다.51)
027_0654_b_17L此四摠說如其次第以緣名義言及說道不可退轉智爲自性謂無退智緣能詮法名句文身立爲第一緣所詮義立爲第二緣方言詞立爲第三緣應正理無滯礙說及緣自在定慧二道立爲第四
027_0654_c_02L이상은 무애해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설하면서 아울러 소연에 대해 밝힌 것이다.
이 중에서 ‘법’과 ‘사’의 두 가지 무애해는 오로지 세속지에 포섭될 뿐이니, 명신(名身) 등과 세간의 언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법무애해는 다섯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4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상지(즉 무색계)에는 ‘명’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무애해는 오로지 두 가지 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상지(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과 사(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654_b_22L此則摠說無礙解體兼顯所緣於中法詞二無礙解唯俗智攝緣名身等及世言詞事境界故法無礙解通依五地謂欲界靜慮以於上地無名等故詞無礙解唯依二地謂欲界初靜慮以於上地無尋伺故
의무애해는 10지(智)와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된다. 즉 제법을 일컬어 모두 ‘뜻[義, artha]’이라고 할 경우 의무애해는 10지에 포섭되지만, 오로지 열반 만을 ‘뜻’이라고 하는 경우 의무애해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변무애해는 이를테면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에 포섭되니, 언설과 도(道, 정ㆍ혜의 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무애해는 일체의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 내지 유정지에 의지하는 것으로, 변무애해는 언설과 도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소연으로 삼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027_0654_c_06L義無礙解十六智攝謂若諸法皆名爲義義無礙解則十智攝若唯涅槃名爲義者義無礙解則六智攝謂俗滅盡無生辯無礙解九智所攝謂唯除滅緣說道故此二通依一切地起謂依欲界乃至有頂無礙解於說道中許隨緣一皆得起
그리고 『시설족론』에서는 이 네 가지 무애해를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名)ㆍ구(句)ㆍ문(文)과, 이것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所詮)의 ‘뜻’과, 이러한 뜻의 단수[一]ㆍ양수[二]ㆍ복수[多]와 남성ㆍ여성 등의 언사의 차별과, 이러한 언사의 막힘 없는 설과 그 소의가 되는 도를 소연으로 하는 물러남이 없는 지에 대해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의 무애해라는 명칭을 건립하였다.”52) 즉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네 종류 무애해의 순서를 그같이 나타내게 된 것이다.
027_0654_c_13L『施設足論』釋此四言緣名句文所詮義卽此一二多男女等言別無滯說及所依道無退轉智如次建立法義詞辯無礙解名由此顯成四種次第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사(詞)란 이를테면 언사에 대한 일체의 훈석(訓釋, 어원적 설명, nirvacanaṃ)의 언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변애(變礙)를 지녔기 때문에 색 등이라 이름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53) 또한 변(辯)이란 이리저리 말함에 있어 어떠한 막힘이나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027_0654_c_17L有餘師說詞謂一切訓釋言如前說言有變礙故名爲色等謂展轉言無滯礙
그리고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4무애해가 생겨나는 것은 순서대로 산계(算計)와 부처님의 말씀[佛語]과 성명(聲明)과 인명(因明)에 대해 익히는 것을 선행된 가행으로 삼았기 때문이니, 만약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해 아직 선교(善巧)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필시 무애해를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4)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일체의 무애해가 생겨나는 데에는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만이 능히 가행이 될 수 있다.
027_0654_c_19L傳說此四無礙解如次串習筭計佛語聲明因明爲前加行若於四處未得善巧必不能生無礙解故理實一切無礙解生學佛語能爲加行
이와 같은 네 종류의 무애해는 그 중 어 느 한 가지만 획득하더라도 필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게 되니, 네 가지를 모두 갖추지 않고서는 그것을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4무애해의 소연과 자성과 소의지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무쟁과 이와 같은 점에서 차별되지만, 종성(種姓)과 소의신의 경우는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55)
027_0654_c_23L如是四種無礙解隨得一時必具得四非不具四可名爲得此四所緣自性依地與前無諍差別如是種性依身如無諍說
027_0655_a_02L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무쟁행(無諍行) 등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027_0655_a_02L是所說無諍行等頌曰

여섯 지(智)는 변제정에 의해 획득되니
변제정은 여섯 가지로, 최후의 정려이며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고, 구경에 이르는 것으로
부처 이외의 성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027_0655_a_04L六依邊際得
邊際六後定
遍順至究竟
佛餘加行得

논하여 말하겠다. 무쟁과 원지와 4무애해의 여섯 종류는 모두 변제정(邊際定)에 의해 획득된다.
변제정려의 본질[體]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중에서 사(詞)무애해를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변제를 더한 것이다.56) 사무애해는 비록 그것(변제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는 그 같은 정려(제4정려)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니, ‘변제’라고 하는 명칭은 다만 제4정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일체지(地)에 두루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성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변제’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57)
027_0655_a_06L論曰無諍願智四無礙解六種皆依邊際定得邊際靜慮體有六種前六除詞加餘邊際詞無礙解雖依彼得而體非彼靜慮所收邊際名但依第四靜慮故此一切地遍所隨順故至究竟故得邊際名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제4정려)을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정려를 올바로 닦고 배울 때에는 욕계의 마음으로부터 초정려에 들고 순서대로 순입(順入)하여 마침내 유정지에 이르며, 다시 유정지로부터 무소유처에 들고 순서대로 역입(逆入)하여 마침내 욕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욕계로부터 순서대로 순입하여 [무소유처에 이르고] 내지는 제4정려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027_0655_a_12L云何此名遍所隨順謂正修學此靜慮時從欲界心入初靜慮次第順入乃至有頂復從有頂入無所有次第逆入乃至欲界復從欲界次第順入展轉乃至第四靜慮名一切地遍所隨順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증성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제4정려를 수습할 때만 하품으로부터 중품에 이르고, 중품으로부터 상품에 이르니, 이와 같은 세 품류를 다시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 상상품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58)
027_0655_a_17L云何此名增至究竟謂專修習第四靜慮從下至中從中至上如是三品復各分三上品生名至究竟
[제4정려는] 바로 이와 같은 정려이기 때문에 ‘변제’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여기서 ‘변(anta)’이라는 말은 더 이상 뛰어넘을 것이 없다[無越]는 뜻을 나타내는데, 수승한 것으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koṭi)’라고 하는 말은 종류[類]의 뜻이나 궁극[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서, 4제(際)나 실제(實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59)
027_0655_a_20L如是靜慮得邊際此中邊名顯無越義勝無越此故名爲邊際言爲顯類義極義如說四際及實際言
027_0655_b_02L이상에서 설한 여섯 가지 종류의 공덕은 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성자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염득이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염오를 떠날 때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0)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염오를 떠날 때에도 역시 이를 획득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모든 공덕은 처음으로 진지를 일으킬 때 획득된다. 즉 그 때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공덕을 단박에 획득하며, 그 후에는 원하는 대로 능히 인기하여 현전시키는 것으로, 가행에 의한 것이 아니니, 불세존은 일체의 법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027_0655_a_23L除佛所餘一切聖者說六種唯加行得非離染得非皆得唯佛於此亦離染得諸佛功德初盡智時由離染故一切頓得後時隨欲能引現前不由加行以佛世尊於一切法自在轉故

앞에서 논설한 세 가지 공덕(무쟁ㆍ원지ㆍ4무애해)은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부처의 공덕으로, 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범부와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인 신통[通]에 대해서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5_b_04L已辯前三唯共餘聖德於亦共凡德且應辯通頌曰

신통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신경(神境)과 천안ㆍ천이ㆍ타심과
숙주와 누진통이 바로 그것으로
해탈도와 혜(慧)에 포섭된다.
027_0655_b_05L通六謂神境
天眼耳他心
宿住漏盡通
解脫道慧攝

네 신통은 세속지, 타심통은 다섯 지
누진통은 10력(力)의 경우와 동일하고,
다섯 신통은 4정려에 의지하며
자지와 하지를 경계로 삼을 뿐이다.
027_0655_b_07L四俗他心五
漏盡通如力
五依四靜慮
自下地爲境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각기
2천ㆍ3천ㆍ무수한 세계에서 신통을 행하며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자는 가행에 의해
일찍이 닦은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027_0655_b_08L聲聞麟喩佛
二三千無數
未曾由加行
曾修離染得

염주의 경우, 처음 세 신통은 신(身)이고
타심통은 세 염주, 나머지는 4념주이며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이고
나머지 네 신통은 오로지 선이다.
027_0655_b_09L念住初三身
他心三餘四
天眼耳無記
餘四通唯善

논하여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이며, 둘째는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이며, 셋째는 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이며, 넷째는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이며, 다섯째는 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이며, 여섯째는 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이다.61) 비록 이러한 여섯 신통 중에서 여섯 번째 신통은 오로지 성자만의 공덕이라 할지라도 앞의 다섯 가지는 이생도 역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 특징[總相]에 의거하여 이생에게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라고 설한 것이다.
027_0655_b_11L論曰通有六種一神境智證通二天眼智證通三天耳智證通四他心智證五宿住隨念智證通六漏盡智證雖六通中第六唯聖然其前五異生亦得依摠相說亦共異生
이와 같은 여섯 신통은 해탈도에 포섭되며,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사문과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해탈도’라고 하는 말은 장애에서 벗어났다[出障]는 뜻을 나타낸다.62)
027_0655_b_16L如是六通解脫道攝慧爲自性如沙門果脫道言顯出障義
신경통 등의 네 가지 신통(타심통과 누진통을 제외한 네 가지)은 오로지 세속지에 포섭되며, 타심통은 다섯 지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누진통의 경우는 10력(力)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때에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때에는 열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한다.63)
027_0655_b_18L神境等四唯俗智他心通五智攝謂法世俗漏盡通如力說謂或六或十智
이에 따라 누진지증통은 일체지(地)에 의지하고, 일체의 경계를 소연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셈이다. 그리고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네 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027_0655_b_20L此已顯漏盡智通依一切地緣一切前之五通依四靜慮
027_0655_c_02L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무색정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앞의 세 가지 신통은 각기 개별적으로 색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며, 타심통을 닦을 때에는 색을 방편[門]으로 삼기 때문이며, 숙주통을 닦을 때에는 점차로 분위(分位)의 차별을 기억하여 생각함으로서 비로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숙주통을] 성취할 때에는 처소와 종성 등을 능히 소연으로 삼기 때문으로, [앞의 다섯 신통이] 무색정의 경지에 의지할 경우 이와 같은 능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64)
027_0655_b_22L何緣此五不依無色初三別緣色爲境故修他心通色爲門故修宿住通漸次憶念分位差別方得成故成時能緣處性等依無色地無如是能
즉 온갖 유정으로서 타심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의 두 가지 상이 전후로 변이하고 전전(展轉)하여 서로를 따르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후 다시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니, 이에 따라 가행이 점차로 성취될 수 있으며, 성취하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음과 온갖 색신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의 마음 등에 대해 능히 참답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27_0655_c_03L諸有欲修他心通者先審觀己身心二相前後變異展轉相隨後復審觀他身心相此加行漸次得成成已不觀自心諸於他心等能如實知
또한 온갖 유정으로서 숙주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바로 전찰나에 멸한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점차 다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생의 분위(分位)로서 이전(성년)과 그 이전(소년)의 차별을 관찰하여 결생(結生)할 때의 마음에 이르고, 나아가 중유 전의 1찰나를 능히 기억하여 알면, 이를 일컬어 자신의 숙주통의 가행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니, 다른 이의 숙주를 기억하기 위한 가행도 역시 그러하다.
027_0655_c_07L諸有欲修宿住通者先自審察次前滅心漸復逆觀此生分位前前差別至結生心至能憶知中有前一念名自宿住加行已成爲憶念他加行亦爾
그리고 이러한 신통이 처음으로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순서대로 알지만, 자주 익혀서 성취될 때에는 역시 능히 순서를 뛰어넘어 기억할 수 있다. 또한 기억된 모든 일은 요컨대 일찍이 영납(領納)된 것으로서, 정거천(淨居天)을 기억하는 자는 옛날에 일찍이 그것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65) 또한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이곳에 태어난 자는 처음에는 다른 이의 상속신에 의지하여 이러한 신통(무색계에 관한 숙주통)을 일으키며,66) 그 밖의 신통은 역시 자상속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것이다.
027_0655_c_11L此通初起唯次第知串習成時亦能超憶所憶事要曾領受憶淨居者昔曾聞從無色歿來生此者依他相續初起此通所餘亦依自相續起
그리고 신경통 등 앞의 세 가지 신통을 닦을 때에는 가벼움[輕]과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행으로 삼으며, 그것이 성취되고 나서는 자유자재로 응하는 바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갖 무색정은 관(觀)이 감소하고 지(止)가 증대하지만, 다섯 가지 신통은 필시 ‘지’와 ‘관’이 균등한 경지(즉 4정려)에 의지하니, [그래서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미지정 등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셈이다.67)
027_0655_c_15L修神境等前三通時思輕光聲以爲加行已自在隨所應爲故此五通不依無又諸無色觀減止增五通必依止觀均地未至等地由此已遮
이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의 경계는 오로지 자지와 하지뿐이다. 바야흐로 신경통과 같은 것은 그것이 어떤 경지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든 자지와 하지에서만 가고 변화하는 것이 자재할 뿐 상지에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네 가지 신통도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무색계의 타심과 숙주를 취하여 두 가지 신통의 경계로 삼는 일이 없는 것이다.
027_0655_c_19L如是五通境唯自下且如神境隨依何地自下地行化自在於上不然勢力劣餘四亦爾隨其所應是故無能取無色界他心宿住爲二通境
027_0656_a_02L또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작용하는 세계의 경계에 넓고 좁음이 있어 온갖 성자의 그것이 동일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위대한 성문과 인각유와 대각(大覺)이 지극하지 않게 작의할 경우 순서대로 능히 1천과 2천과 3천의 온갖 세계의 경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만, 만약 지극하게 작의할 경우 순서대로 능히 2천과 3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세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게 된다].
027_0655_c_23L卽此五通於世界境作用廣陜諸聖不同謂大聲聞麟喩大覺不極作意如次能於一二三千諸世界境起行化等自在作用若極作意如次能於二千三千無數世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신통을, 설혹 수승한 힘과 맹리함을 가졌을지라도 무시(無始) 이래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하며, 만약 일찍이 닦아 익힌 자로서 뛰어난 힘을 갖지 않은 자나 [미래세의] 그러한 종류의 유정은 이염에 의해 획득하지만, 만약 지금 일어나 현전하고 있는 자라면 모두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 일체의 신통은 모두 가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염에 의해 획득된 것으로, 원하는 대로 현전한다.
027_0656_a_06L如是五通若有殊勝勢用猛利從無始來曾未得者由加行得若曾串習無勝勢用及彼種類由離染得若起現前皆由加行佛於一切皆離染得隨欲現前不由加行
6신통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신념주이니, 그것은 다만 색처(色處)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신경통은 외적인 네 가지 처(색ㆍ향ㆍ미ㆍ촉처)를 소연으로 하고, 천안통은 색처를 소연으로 하며, 천이통은 성처(聲處)를 소연으로 하는 것이다.68)
027_0656_a_10L六中前三唯身念住但緣色故謂神境通緣四外處色香味觸天眼緣色天耳緣聲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에서 “사생지(死生智)는 유정류가 현신(現身) 중에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온갖 악행 등을 성취함에 따라 [당래 악취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고 설하였겠는가?69)
천안통이 능히 이 같은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신통의 권속으로서 성자의 몸[聖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별도의 수승한 지혜가 있어 이것이 능히 이와 같이 아는 것으로, 이러한 지혜는 바로 천안통의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과 합하여 ‘사생지’라고 하는 명칭으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027_0656_a_13L若爾何緣說死生智知有情類由現身中成身語意諸惡行等非天眼通能知此事有別勝智是通眷屬依聖身起能如是知是天眼通力所引故與通合立死生智名
나아가 타심지통은 세 가지 염주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수ㆍ심ㆍ법이 그것으로, 그것은 마음 등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숙주지통과 누진지통은 4념주에 포섭되니, 5온과 일체의 경계를 모두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70)
이러한 6신통 중에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러한 두 가지 신통의 본질은 바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027_0656_a_17L他心智通三念住攝謂受緣心等故宿住漏盡四念住攝通緣五薀一切境故六通中天眼天耳無記性攝許此二體是眼耳識相應慧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4정려에 의지한다고 설한 것인가?71)
근(根)에 따라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다. 이를테면 소의지(所依止)인 안근과 이근은 4정려의 힘에 의해 인기되어 그 지(地)에 포섭되기 때문에 4정려지에 의지하는 것이다. 즉 신통이 [그러한 지에 포섭되는] 근에 의지하기 때문에 ‘4정려에 의지한다’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는 신통인 무간도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신통인 무간도는 4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72)
027_0656_a_21L若爾寧說依四靜慮隨根說故亦無有失謂所依止眼耳二根由四靜慮力所引起彼地攝故依四地通依根故說依四或此依通無閒道說通無間道依四地故
027_0656_b_02L그리고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 신통의 성질은 모두 선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품류족론』에서 “신통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바로 선성의 혜이다”고 말한 것인가?73)
그것은 대개의 경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거나 혹은 뛰어난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74)
027_0656_b_02L餘之四通性皆是善若爾故『品類足』言通云何謂善慧彼據多分或就勝說

예컨대 계경에서는 “무학의 3명(明, vidyā)이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신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6_b_05L如契經說無學三明彼於六通以何爲性頌曰

제5ㆍ제2ㆍ제6의 신통이 ‘명’이니
3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으로
뒤의 명은 진실이고 두 가지는 가설인데
유학의 경우는 어리석음이 있어 ‘명’이 아니다.
027_0656_b_06L第五二六明
治三際愚故
後眞二假說
學有闇非明

논하여 말하겠다. 3명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이며, 둘째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이며, 셋째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인데, 순서대로 무학위에 포섭되는 다섯 번째와 두 번째와 여섯 번째의 신통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는다.
027_0656_b_08L論曰言三明者一宿住智證明二死生智證明三漏盡智證明如其次第無學位攝第五二六通爲其自性
즉 6신통 중에서 유독 세 종류의 신통만을 ‘명’이라 이름하는 것은 3제(際, 3세를 말함)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숙주지통은 전제(前際, 과거)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사생지통은 후제(後際, 미래)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며, 누진지통은 중제(中際, 현재)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것이다.
027_0656_b_11L中三種獨名明者如次對治三際愚故謂宿住智通治前際愚死生智通治後際愚漏盡智通治中際愚
그리고 이러한 3명을 모두 ‘무학의 명’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은, 그것들은 다 같이 무학의 소의신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제일 마지막 명(누진지증명)이 진실(眞實)한 것이라고 할 만하니,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두 가지 명은 그 본질이 오로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기 때문에 가설(假說)일 뿐이다.75)
027_0656_b_14L此三皆名無學明者俱在無學身中起故於中最後容有是眞通無漏故餘二假說體唯非學非無學故
나아가 유학의 소의신 중에는 어리석음[愚暗]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앞의 두 가지 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비록 잠시동안 어리석음을 조복하고 소멸하는 일이 있지라도 그 후에 다시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을 ‘명’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027_0656_b_17L有學身中有愚闇故雖有前二不立爲明雖有暫時伏滅愚闇後還被蔽故不名明

계경에서는 ‘세 종류의 시도(示導, prātihārya)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신통 중의 무엇을 본질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6_b_19L契經說有三種示導彼於六通以何爲體頌曰

제1ㆍ제4ㆍ제6의 신통이 시도(示導)로서
교계시도(敎誡示導)가 가장 존귀하니
결정코 신통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027_0656_b_21L第一四六導
教誡導爲尊
定由通所成
引利樂果故
027_0656_c_02L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시도란, 첫째는 신변시도(神變示導)이고, 둘째는 기심시도(記心示導)이며, 셋째는 교계시도(敎誡示導)이니, 그 순서대로 6신통 중의 첫 번째와 네 번째와 여섯 번째 신통을 자성으로 한다.76) 즉 오로지 이러한 세 종류의 신통만이 교화될 중생을 인도하여 처음으로 발심하게 하는 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혹은 이는 능히 정법을 싫어하여 등지는 이나 처중자(處中者,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자)들을 인도하여 발심하게 하기 때문으로, 능히 [신통을] 나타내어 능히 [중생을] 인도하기 때문에 ‘시도(示導)’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77) 또한 오로지 이러한 세 가지 신통만이 부처님 법에 귀복(歸伏), 신애(信受), 수행하게 하기 때문에 ‘시도(示導)’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나머지 세 가지는 그렇지 않다.
027_0656_b_23L論曰三示導者一神變示導二記心示導三教誡示導如其次第以六通中第一四六爲其自性唯此三種引所化生令初發心最爲勝故或此能引憎背正法及處中者令發心故示能導得示導名又唯此三令於佛法如次歸伏信受修行得示導名三不爾
이러한 세 가지 시도 가운데 교계시도가 가장 존귀하니, 오로지 이것만이 결정코 신통(즉 제6 누진통)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며, 결정코 능히 다른 이의 이익과 안락[利樂, 즉 열반]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주술 따위로도 역시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신통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가 아니다. 예컨대 건타리(健馱梨, gāndhārī)라고 일컫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허공을 자유자재로 솟구쳐 오를 수 있다. 또한 이찰니(伊刹尼, īkṣanika)라고 하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027_0656_c_07L於二示導教誡最尊唯此定由通所成故定能引他利樂果故前二導呪術亦能不但由通故非決如有呪術名健馱梨持此便能騰空自在復有呪術名伊剎尼持此便能知他心念
그러나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바로 결정적인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시도는 단지 다른 이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돌리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뛰어난 과보를 인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역시 또한 결정코 다른 이로 하여금 당래의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게 하니, 능히 참다운 방편으로써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며, 그 밖의 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027_0656_c_12L教誡示導除漏盡通不能爲故是決定又前二導有但令他暫時迴心非引勝果教誡示導亦定令他引當利益及安樂果以能如實方便說故由是教誡最勝非餘

그렇다면 ‘신경(神境)’이라는 두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6_c_16L境二言爲目何義頌曰

‘신’의 본질은 말하자면 등지(等持)이고
‘경’은 ‘가는 것’과 ‘변화하는 것’ 두 가지이니
가는 것의 세 가지 중 의세(意勢)는 부처에 한정되며
운신(運身)과 승해(勝解)는 그 밖의 유정과도 통한다.
027_0656_c_17L神體謂等持
境二謂行化
行三意勢佛
運身勝解通

변화는 두 가지로, 욕계와 색계의 그것인데
네 가지와 두 가지 외처(外處)를 자성으로 한다.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변화이다.78)
027_0656_c_19L化二謂欲色
四二外處性
此各有二種
謂似自他身

논하여 말하겠다. 비바사(毘婆沙)에서 설한 이치에 의하면, ‘신(神)’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뛰어난 등지(等持)에 근거한 것으로,79) 이 같은 뛰어난 등지에 의해 능히 신통한 변화의 사업[神變事]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신통한 변화의 사업을 설하여 ‘경(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027_0656_c_20L論曰依毘婆沙所說理趣神名所目唯勝等持由此能爲神變事故諸神變事說名爲境
027_0657_a_02L여기(신통한 변화의 사업인 ‘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그것이다.
‘가는 것’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운신(運身)으로, 마치 나는 새처럼 허공을 타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승해(勝解)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하면 바로 신속하게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의세(意勢)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마음을 일으켜 그것을 소연으로 삼을 때 몸은 곧장 능히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신통의 세력[勢]은 뜻[意]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세’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027_0656_c_23L此有二種謂行及化復三種一者運身謂乘空行猶如飛二者勝解謂極遠方作近思惟便能速至三者意勢謂極遠方擧心緣時身卽能至此勢如意得意勢名
이러한 세 가지 ‘가는 것’ 가운데 의세는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한정된 것이며, 운신과 승해는 그 밖의 승(乘)과도 역시 통하는 것이다. 즉 우리 세존께서는 신통이 신속하여 먼 곳이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이르실 수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모든 부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의세의 행(行)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지만 승해는 그 밖의 뭇 성자들에게도 존재하며, 운신은 아울러 이생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027_0657_a_04L此三中意勢唯佛運身勝解亦通餘謂我世尊神通迅速隨方遠近擧心卽至由此世尊作如是說諸佛境界不可思議故意勢行唯世尊有解兼餘聖運身幷異生
‘변화하는 것’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계에서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욕계에서의 변화라면, 그것은 성처(聲處)를 제외한 외적인 네 처(색ㆍ향ㆍ미ㆍ촉 처)의 변화이며, 만약 색계에서의 변화라면 오로지 색처와 촉처의 두 가지 변화만이 있을 뿐이니, 색계 중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657_a_09L化復二種色界若欲界化外四處除聲若色界化唯二謂色以色界中無香
나아가 이러한 두 세계에서의 변화에는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기 몸에 속한 변화와 다른 이의 몸에 속한 변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욕계에 있을 때의 변화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며, 색계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 여덟 가지의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80)
027_0657_a_12L此二界化各有二種謂屬自身身別故身在欲界化有四種在色亦故摠成八
만약 색계에 태어나 머물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하였다면 어찌 향처와 미처를 성취하게 되는 과실을 범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마치 옷과 장엄구를 만들더라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계에 있으면서는 오로지 두 가지 처(색ㆍ촉처)만을 변화시킬 뿐이다”고 하였다.81)
027_0657_a_14L若生在色作欲界化何不有成香味失如衣嚴具作而不有說在色唯化二處

그렇다면 이 같은 변화의 사업을 화작(化作)하는 것이 바로 신통(즉 신경통)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신통의 과보이다.
이것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것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7_a_16L化作化事爲卽是通不不爾云何是通之果此有幾差別云何頌曰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선정의 결과인 두 가지로부터 다섯 가지까지로서
소의가 되는 선정처럼 획득되는데
정정(淨定)과 자류(自類)에서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다.
027_0657_a_18L能化心十四
定果二至五
如所依定得
從淨自生二

변화의 사업은 자지에 의해 일어나고
변화된 이의 말은 모두 자지와 하지에 의하며
변화된 이의 몸과 변화의 주인공은 반드시
말을 함께하지만, 부처는 그렇지 않다.
027_0657_a_20L化事由自地
語通由自下
化身與化主
語必俱非佛

먼저 원(願)을 세워 몸을 남겨두고
그 후 다른 마음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며
죽어서도 견실의 몸을 남기는 일이 있지만
어떤 이는 남기는 일이 없다고 설한다.
027_0657_a_21L先立願留身
後起餘心語
有死留堅體
餘說無留義

초심자는 여러 마음으로 한 가지 변화를 낳고
성만위에 이른 자는 이와는 반대인데
수득(修得)의 변화심은 무기에 포섭되며
그 밖에 획득된 것[生得]은 3성과 통한다.
027_0657_a_22L初多一心化
成滿此相違
修得無記攝
餘得通三性
027_0657_b_02L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통의 과보로서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能化心]의 힘이 능히 일체의 변화의 사업을 낳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근본 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초정려에 의해 두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첫째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다. 제2정려에 의해 세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두 종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여기에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제3정려에 의해 네 가지 변화심이, 제4정려에 의해 다섯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각각 자지와 하지에 포섭되는 그것으로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657_a_24L論曰神境通果能變化心力能化生一切化事此有十四謂依根本四靜慮生有差別故依初靜慮有二化心一欲界攝二初靜慮第二靜慮有三化心二種如前加二靜慮第三有四第四有五謂各自下如理應思
즉 신경통의 과보로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自地)와 상지(上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필시 하지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여 상지의 과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정려 등의 과보인 하지의 변화심은 초정려 등의 과보인 상지의 변화심에 비해 소의와 작용[行]으로 볼 때 역시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다.82) 즉 정려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심도 역시 그러하니, 과보(변화심)와 소의(정려)는 동시에 획득되기 때문이다.
027_0657_b_07L諸果化心依自上地必無依下下地定心不生上果勢力劣故第二定等果下地化心對初定等果上地化心由依及行亦得名勝如得靜慮化心亦然果與所依俱時得故
또한 정려로부터 그 과보인 변화심을 일으키게 되면, 이러한 마음으로부터는 필시 바로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다. 즉 청정한 선정[淨定, 즉 정정려]으로부터 첫 찰나의 변화심을 일으키면 이러한 마음의 후후찰나의 마음은 자신과 동류[自類]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이러한 마음의 전전찰나의 마음은 자신과 동류의 마음을 낳으며, 최후의 변화심은 다시 청정한 선정을 낳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심은 두 가지(정려와 전찰나의 변화심)로부터 생겨나며, 능히 두 가지 마음(동류의 마음과 청정한 선정심)을 낳는 것으로, 선정의 과보로서 무기성에 포섭되는 마음(변화심)이 다시 선정에 들지 않고서 바로 출관하는 일은 없으니, 마치 문을 통해 들어간 자는 다시 문을 통해 나오는 것과 같다.83)
027_0657_b_12L諸從靜慮起果化心此心必無直出觀義謂從淨定起初化心此後後心從自類起此前前念生自類心最後化心還生淨定故此從二能生二心非定果心無記性攝還入定有直出義如從門入還從門
또한 변화되는 모든 사업[所化事]은 자지의 변화심에 의한 것으로, 다른 지의 변화심은 그 밖의 다른 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84) 또한 변화된 이에 의해 발성된 말은 자지와 하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변화인이 말하였을 경우, 이 말은 필시 자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그보다 상지에 의해 생겨난 변화인의 말은 초정려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니, 상지(제2정려 이상의 경지)에는 스스로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5)
027_0657_b_18L諸所化事由自地心無異地化心起餘地化故化所發言通由自下欲初定化所發言此言必由自地心上化起語由初定心上地自無起表心故
또한 어떤 한 변화의 주인공[化主]이 몸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때에는, 요컨대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비로소 말하니, 변화된 이의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言音詮表]는 모두 다 주인공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027_0657_b_22L若一化主起多化身要化主語時諸化身方語言音詮表一切皆同故有伽他作如是說
027_0657_c_02L
어떤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모두 말하며
어떤 변화의 주인공이 침묵할 경우
변화된 온갖 몸도 역시 그러하다.86)
027_0657_b_24L一化主語時
諸所化皆語
一化主若默
諸所化亦然

그러나 이는 다만 그 밖의 유정에 대해 설한 것일 뿐, 부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부처의 온갖 선정의 힘은 가장 자재하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과 동시가 아닐 수 있으며,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도 역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027_0657_c_03L此但說餘佛則不爾佛諸定力最自在故與所化語容不俱時言音所詮亦容有別
말을 발하려는 마음[發語心]을 일으킬 때에는 변화심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변화된 몸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87)
먼저 원력(願力)에 의해 변화된 몸을 남겨 두고, 그 후 [변화심과는] 다른 마음(즉 發語心)을 일으켜 어표업을 낳기 때문에 비록 능히 변화하고 말을 발하려는 두 가지 마음이 구기하지 않을지라도 변화신에 의해서도 역시 말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027_0657_c_06L發語心起化心旣無應無化身化如何語由先願力留所化身後起餘心發語表業故雖化語二心不俱而依化身亦得發語
또한 오로지 변화하는 주인공의 목숨이 현재할 때만 능히 변화된 몸을 남기어 오랫동안 머물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마친 후에 이르기까지 지속하게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존자 대가섭파(大迦葉波, Mahākāśyapa)가 골쇄(骨鎖)의 몸을 남겨 두어 자존(慈尊, 慈氏世尊, 즉 미륵불을 말함)의 세상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88) 오로지 견실의 몸[堅實體, 즉 뼈]만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그래서 가섭파는 살 따위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027_0657_c_09L非唯化主命現在時能留化身令久時住亦有令住至命終後卽如尊者大迦葉波留骨瑣身至慈尊世唯堅實體可得久留故迦葉波不留肉等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필시 원력(변화의 원력)만으로는 능히 사후에 이르기까지 몸을 남겨 둘 수 없으며, 음광(飮光, 가섭파의 의역어)이 골쇄의 몸을 남기게 된 것은 여러 천신이 지켜 주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027_0657_c_13L有餘師說願力留身必無有能令至死後飮光尊者留骨瑣身由諸天神持令久住
또한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初習業者]는 다수의 변화심에 의해 비로소 능히 한 가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익힌 것이 성취되어 원만하게 된 자[習成滿者]는 한 찰나의 변화심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대로 많고 적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킨다.89)
027_0657_c_15L初習業者由多化心方能化生一所化事習成滿者由一化心隨欲化生多少化事
이와 같은 열네 가지의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은 모두 수행에 의한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修得]으로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는 바로 통과무기(通果無記)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그 밖에 태어나면서부터 획득[生得]된 능히 변화를 낳은 마음은 선과 불선과 무기성에 포섭된다. 예컨대 천룡(天龍) 등의 변화심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으로, 그들도 역시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데, 다만 열 가지 색처 중 성처(聲處)를 제외한 아홉 가지를 변화시킨다.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능히 근(根)을 변화시키는 일은 없지만, 그러나 변화되는 대상은 근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아홉 가지 색처를 변화시킨다고 말해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90)
027_0657_c_18L如是十四能變化心皆是修得無記性攝卽是通果無記攝義餘生得等能變化心通善不善無記性攝如天龍等能變化心彼亦能爲自他身化於十色處化九除聲理實無能化爲根者然所化境不離根故言化九處亦無有失

천안통과 천이통이라는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7_c_24L天眼耳言爲目何義頌曰
027_0658_a_02L
천안과 천이는 근(根)으로서
바로 선정의 경지의 청정한 색이니
항상 동분이면서 결함이 없어
감추어지고 작고 멀리 있는 것 등을 취한다.
027_0658_a_02L天眼耳謂根
卽定地淨色
恒同分無缺
取障細遠等

논하여 말하겠다. 이 말은 오로지 하늘[天]의 안근과 이근에 근거한 것으로, 바로 4정려에 의해 생겨난 정색(淨色)이다. 이를테면 빛과 소리를 인연으로 하여 가행을 닦았기 때문에 4정려에 의해 안근과 이근의 후변(後邊)에서 그러한 경지의 미묘한 대종소조인 정색의 안(眼)과 이(耳)의 두 근을 인기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니, 이를 천안통과 천이통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027_0658_a_04L論曰此言唯目天眼耳根卽四靜慮所生淨色謂緣光聲修加行故依四靜慮於眼耳邊引起彼地微妙大種所造淨色眼耳二根見色聞聲名天眼耳
이와 같은 안근과 이근을 어째서 ‘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그 자체가 바로 ‘천’이니, 선정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91)
027_0658_a_09L如是眼耳何故名天體卽是天定地攝故
그런데 천안과 천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하늘에 태어나는 자의 그것을 말한다.92) 셋째는 유사한 천안과 천이[似天]로서, 이를테면 그 밖의 취(趣)에 태어난 자가 뛰어난 업 등에 의해 인기하여 능히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천안ㆍ천이와 유사한 경우를 말하니, 예컨대 장신보(藏臣寶)와 보살과 전륜왕과 온갖 용과 귀신, 그리고 중유 등의 그것과 같다.93)
027_0658_a_10L然天眼耳種類有三一修得天卽如前說二者生得謂生天中三者似天謂生餘趣由勝業等之所引生能遠見聞似天眼耳如藏臣寶菩薩輪王諸龍鬼神及中有等
그리고 수행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생에 걸쳐 항상 동분(同分)이니,94) 현재에 이르러 반드시 식(識)과 함께하며 능히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소(扶塵根, 즉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눈과 귀를 말함)를 필시 온전히 갖추었으며, 그것은 막히지도 않았고 어떠한 결함도 없으니, 마치 색계에 태어난 일체의 유정의 그것처럼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감추어진 것이나 지극히 미세하고 먼 곳 등 온갖 곳의 색과 소리를 능히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이와 같은 게송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027_0658_a_14L修得眼耳過現當生恒是同分以至現在必與識俱能見聞故處所必具無翳無如生色界一切有情能隨所應取被障隔極細遠等諸方色聲故於此中有如是頌

육안(肉眼)에는 감추어져 있거나
작거나 멀리 있는 온갖 곳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작용이 없지만,
천안으로는 남김없이 모두 볼 수 있다.
027_0658_a_19L肉眼於諸方
被障細遠色
無能見功用
天眼見無遺

앞에서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에는 수행에 의해 획득된 것과 그 밖의 방식으로 획득된 것(즉 生得)의 차별이 있다고 논설하였는데, 신경지(神境智) 등의 다섯 가지의 획득에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역시 차별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658_a_21L前說化心修餘得異神境等五各有異耶亦有云何頌曰

신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닦아서, 태어나면서
주술로써, 약물로써, 업으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며
타심지는 닦아서, 태어나면서, 주술로써 성취되며,
또한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한 성취가 더해진다.
027_0658_a_23L神境五修生
呪藥業成故
他心修生呪
又加占相成
027_0658_b_02L
그 밖의 세 가지는 닦아서, 태어나면서, 업으로 성취되며
닦아서 획득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3성과 통하고
인취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 획득되는 것만이 없으며
지옥에서는 처음 태어날 때만 [타심과 숙주를] 능히 안다.
027_0658_b_02L三修生業成
除修皆三性
人唯無生得
地獄初能知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지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得]이며,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生得]이며, 셋째는 주술로써 성취되는 것[呪成]이며, 넷째는 약물로써 성취되는 것[藥成]이며, 다섯째는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으로서, 만타다왕(曼馱多王, Maṅdhātṛ, 구역은 頂生王, 성장하여 금륜왕이 된다고 함)이나 중유 등의 온갖 신경지는 바로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027_0658_b_04L論曰神境智類摠有五種一修得生得三呪成四藥成五業成曼馱多王及中有等諸神境智是業成攝
타심지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며,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027_0658_b_07L心智類摠有四種前三如上加占相成
그 밖의 세 가지(천안ㆍ천이ㆍ숙주지)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027_0658_b_08L餘三各三謂修
여기서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모두 선 등과 통하지만, 그것은 선정의 과보가 아니기 때문에 ‘신통’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또한 인취 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밖의 것은 모두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본성(本性)의 생(즉 숙세에서의 생)에 대한 기억[念]은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027_0658_b_09L除修所得皆通善等非定果故不得通名人中都無生所得者餘皆容有隨其所應本性生念業所成攝
지옥취에서 처음으로 생을 받을 때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하는 타심지와 숙주지로써 다른 이의 마음 따위와 과거의 생을 알지만, 고수(苦受)에 핍박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아는 일이 없다. 그 밖의 취에 태어나는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027_0658_b_12L於地獄趣初受生時唯以生得他心宿住知他心等及過去苦受逼已更無知義若生餘趣應當知
說一切有部俱舍論卷第二十七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18불공법(不共法)은 보살이 유정(有頂)의 제9 해탈도를 닦아 처음으로 진지를 획득하는 단계에서 닦는 공덕으로, 성문이나 연각은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이라 일컬은 것이다.
  2. 2)구역에서는 처비처중지력(處非處中智力). 이치에 맞다고 아는 것을 처지(處智)라 하고, 이치에 맞지 않다고 아는 것을 비처지(非處智)라고 한다. 즉 이러한 지는 유정과 비유정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으로, 바로 일체지(一切智, 즉 10지)를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다른 아홉 가지 지력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3. 3)구역에서는 어업급과보중지력(於業及果報中智力). 온갖 업은 반드시 온갖 종류의 이숙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능히 잘 아는 지력.
  4. 4)구역에서는 순서대로 정해탈삼마제삼마발제지력(淨解脫三摩提三摩拔提智力) ㆍ전전근지력(轉轉根智力)ㆍ종종욕지력(種種欲智力)ㆍ종종성지력(種種性智力). 즉 정려 등의 지력은 4정려ㆍ8해탈ㆍ3삼마지ㆍ8등지 등의 힘을 여실히 아는 지력. 혹은 온갖 정려 등의 자성과 명칭과 획득[得]과 방편과 섭지(攝持)와, 미(味)ㆍ정(淨)ㆍ무루정려와, 그것의 순퇴(順退)ㆍ순주(順住)ㆍ순승진(順勝進)ㆍ순결택분 등을 여실히 아는 지력.(『현종론』 권제36, 한글대장경201, p.508) 근상하지력은 유정류로 하여금 수승한 공덕에 이르게 하는 근품(根品)의 차별을 여실히 아는 지력. 여기서 근품의 차별이란 신(信)ㆍ근(勤) 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5근에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근기를 지닌 자의 지(智)의 우열을 판별하는 지혜를 근상하지력이라고 한다. 종종승해지력은 일체의 유정류가 향수하려는 희(喜)ㆍ낙(樂)의 차별을 여실히 아는 지력. 즉 승해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인가ㆍ결정)하려는 의식 작용이기 때문이다. 종종계지력은 온갖 법성의 차별[界]을 여실히 아는 지력. 즉 이상의 네 가지 지력은 모두 유위법을 소연으로 삼고 무위법을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멸지를 제외한 9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5. 5)멸지는 다만 소취(所趣)의 과(果)로서 능취(能趣)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6. 6)구역은 변행도지력(遍行道智力). 변취행지력이란 일체의 제행은 반드시 결과로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임을 여실히 아는 지력이다. 이는 바로 생사의 인과를 참답게 알며, 아울러 진지의 도[盡道]를 아는 데 걸림이 없는 지이기 때문에 ‘변취행지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7. 7)숙주수념지력(구역에서는 宿住念智力)은 자신과 타인의 과거 숙주(宿住)의 차별을 여실히 아는 지력(6통 중의 숙주통)이며, 사생지력은 유정류가 미래세에 여러 가지 존재로 속생(續生)하는 것[死生]을 여실히 아는 지력(6통 중의 천안통)으로, 이 같은 두 가지 지는 그 상(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모두 세속지를 본질로 한다.
  8. 8)‘누진’(구역에서는 流盡)은 바로 택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도지와 고ㆍ집지와 타심지와는 관계하지 않으며, 다만 세속지와 법ㆍ유지와 멸지와 진ㆍ무생지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9. 9)여기서 뒤의 세 가지 힘은 바로 세 신통(천안ㆍ숙주ㆍ누진통)으로, 여섯 신통 가운데 이 세 가지가 특히 수승하여 무학위에 있을 때에는 이를 ‘3명(明)’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며(후술), 여래의 몸에 있게 되면 역시 또한 ‘힘[力]’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통(神境通)과 천이통(天耳通)의 경우, 설혹 그것이 부처님의 몸 중에 있을지라도 역시 큰 작용은 없기 때문에 ‘힘’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가령 천안통과 같은 신통은 유정의 선악취 중의 이숙의 차별을 능히 관찰하며, 이에 따라 수승한 지를 능히 인기하여 그러한 업을 능히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요지(了知)하니,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사생지력’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경통과 천이통에는 이러한 큰 작용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두 신통을 ‘힘’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현종론』 권제36, 앞의 책, p.510)
  10. 10)이와 같은 10지(智)는 성문과 독각에게도 역시 존재하는데, 어째서 부처의 그것만을 ‘힘[力]’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처의 지혜는 일체의 앎의 대상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일어나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힘’이라 하지 않은 것이다. 즉 10지가 자타의 차별이나 장애 없이 일어날 때, 다시 말해 유정의 구제와 관계될 때만을 ‘힘’이라고 하기 때문에 유정을 능히 구제할 수 없는 성문과 독각은 비록 10지를 갖추었을지라도 그것을 ‘10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11. 11)『현우경』 권제4(대정장4, p.376)에 의하면, 시리필제(尸利必提)라고 이름하는 어떤 한 장자가 사리자에게 와서 출가하기를 희망하였지만, 사리자는 그가 너무 늙어 학문과 선정 등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받아 주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부처님에게로 가 출가하였는데, 그 때 지혜제일의 사리자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이유를 묻자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여래는 과거 수행의 공덕이 다를 뿐더러 사리자는 법에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2. 12)『대비바사론』 권제83(한글대장경121, p.184), 『대지도론』 권제11(동 101, p.333-334)에 의하면, 일찍이 부처님과 사리자가 함께 거닐고 있을 때, 매에게 쫓긴 비둘기가 사리자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다 다시 부처님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리자가 그 이유를 묻자 ‘그대는 60겁 동안 불해의(不害意)를 닦았지만 나는 3무수겁 동안 닦았으며, 그대는 해의(害意, 해꼬지하려는 마음)의 습기(習氣)가 남아 있지만 나는 이미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대는 비둘기의 전생과 후생을 관찰할 수 있을지라도 8만 대겁 이상은 능히 관찰할 수 없다’고 하였다.
  13. 13)나라연(Nārayāṇa)이란 비쉬누(Viṣṇu)의 다른 이름으로, 세계관적으로는 우주의 창조주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서는 큰 힘을 소유한 절대신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14. 14)일반 코끼리 힘의 열 배가 되는 것이 향상(또는 好象, 말하자면 전투용 코끼리)이며, 마하낙건나(Mahānagna)의 힘은 향상의 열 배이며, 발라색건제(Praskandi)의 힘은 마하낙건나의 열 배이며, 벌랑가(Varāṇga)의 힘은 발라색건제의 열 배이며, 차노라(Cāṇūra)의 힘은 벌랑가의 열 배이며, 나라연의 힘은 바로 차노라의 열 배이다. 이상은 모두 신의 이름이다.
  15. 15)원문에는 ‘한 배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을 성취한다’고 되어 있지만, 『현종론』(권제36, 앞의 책, p.514)에 따라 천 배로 정정하여 번역하였다.
  16. 16)‘촉’에는 지ㆍ수ㆍ화ㆍ풍의 능조촉(能造觸)의 대종과 매끄러움[滑性]ㆍ거칢[澁性]ㆍ무거움[重性]ㆍ가벼움[輕性]ㆍ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 등의 소조촉(所造觸)이 있는데, 세친은 능조인 대종의 특별한 힘의 차별이라고 한 반면, 어떤 이는 일곱 가지 소조촉 이외에 별도의 ‘힘’이라는 촉[力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 비바사사의 정설은 ‘색신의 힘은 능조와 소조촉 모두가 갖는 힘의 차별이다.’(『대비바사론』 권제30, 한글대장경119, p.113; 『현종론』 권제36, 동 p.515)
  17. 17)『증일아함경』 권제42 제4경(대정장1, p.776하).
  18. 18)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란 ‘나는 정등각자이다’는 대자각이 있어 다른 이의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무외는 처비처지력과 같으며, 10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19. 19)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란 ‘나는 번뇌를 영원히 끊었다’는 대자각이 있어서 다른 이가 ‘그대는 정등각자가 아니다’고 비난하여도 이치대로 해명하여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0. 20)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란 모든 제자들을 위해 염오법은 필시 능히 장애가 되는 법임을 설하여, 외도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1. 21)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란 도를 닦으면 반드시 고(苦)에서 출리함을 설하여 외도가 ‘도는 출고(出苦)의 법이 아니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게 해명하여 이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어떠한 이유에서 무외에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는 것인가 하면, 이것에 의해 부처의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원덕(圓德)이 모두 구경(究竟)에 이르렀음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무외는 자리의 원덕인 지원덕(智圓德)과 단원덕(斷圓德)을 나타내며, 세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을 막고, 올바른 도로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이타의 원덕을 나타낸다.(『현종론』 권제36, 앞의 책, p.516 참조)
  22. 22)이것을 비록 염주(smṛtyupasthāna)라고 이름하였지만, 앞(본론 권제23)에서 설한 4념주(身ㆍ受ㆍ心ㆍ法念住)와 더불어 염주에 일곱 가지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여기서 설한 3념주는, 이를테면 외법(外法)을 소연으로 하는 염주(즉 신념주)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3. 23)즉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함으로 말미암아 세 경계에 대해 기쁨이나 근심을 낳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24. 24)위대한 모든 성문들도 역시 세 가지 염주를 닦을 수 있지만, 기쁨과 근심의 습관적 습성[習氣]마저 끊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기 때문에 ‘불공법’이다.
  25. 25)공유(共有)의 ‘비’란 부처와 성문 등이 공통으로 갖는 법으로,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고, 오로지 욕계의 유정만을 대상으로 하며, 고고(苦苦)의 행상만을 짓는다.(후술)
  26. 26)‘비’는 무진을 자성으로 하지만 대비는 무치를 자성으로 한다.
  27. 27)‘비’는 욕계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고고의 행상만을 짓는 것이지만, 대비는 고(苦)ㆍ행(行)ㆍ괴(壞)의 세 가지 고의 행상을 짓는 것이다.
  28. 28)‘비’는 오로지 욕계만을 소연으로 삼지만, 대비는 3계를 소연으로 한다.
  29. 29)‘비’는 4정려 모두에 의해, 대비는 오로지 제4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30. 30)‘비’는 성문ㆍ연각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대비는 오로지 부처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31. 31)‘비’는 욕계를 떠날 때 증득되지만, 대비는 유정지를 떠날 때 증득된다.
  32. 32)‘비’는 오로지 구제에 대한 희망이 위주이지만, 대비는 실제로 구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33. 33)‘비’는 불평등하여 다만 욕계 중생의 괴로움만을 구제하지만, 대비는 평등하게 3계의 일체의 괴로움을 구제한다.
  34. 34)여기서 ‘자량’이란 대비(大悲)를 인기하는 자량으로, 3아승기겁 동안 쌓은 광대한 복덕과 지혜를 말한다.
  35. 35)여기서 법신이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ㆍ해탈지견(知見)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말한다.
  36. 36)부처의 수명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 주24) 참조.
  37. 37)‘무사지’란 34심의 단계(보리수하에서 견도 16심과 유정지의 수혹을 끊는 9무간도와 9해탈도)에서 유루ㆍ무루지를 스승 없이 증득한 것을 말하며, ‘일체지’란 일체제법의 체(體) 또는 자상을 아는 지, ‘일체종지’란 일체제법의 용(用)의 차별 또는 공상을 아는 지, ‘무공용지’란 가행을 일으키지 않고 저절로 아는 지를 말한다.
  38. 38)‘일체번뇌단’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고 택멸을 획득하는 것, ‘일체정장단’이란 선정의 장애인 불염오무지를 끊고 비택멸을 획득하는 것, ‘필경단’이란 번뇌장과 정장(定障)을 끊고 물러나지 않는 것, ‘병습단’이란 단지 번뇌만을 끊는 것이 아니라 습기도 끊어 2승과는 차별되는 것을 말한다.
  39. 39)여기서 ‘온갖 상’이란 서른두 가지 대인상(大人相)을, 수호는 여든 가지의 종호(種好)를 말하며, 큰 힘은 나라연의 힘을 말한다.
  40. 40)『증일아함경』 권제24(대정장2, p.678상).
  41. 41)일체의 다툼 즉 ‘쟁’에는 온쟁(蘊諍)과 언쟁(言諍)과 번뇌쟁의 세 종류가 있는데, 온쟁이란 죽음을 말하고, 언쟁이란 유정의 다툼[鬪]을 말하며, 번뇌쟁이란 백팔 번뇌를 말한다. 곧 아라한은 이러한 세속지의 힘으로 말미암아 번뇌쟁을 능히 멈추기 때문에 ‘무쟁’이라고 하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대비바사론』 권제179, 한글대장경125, p.85;『현종론』 권제37, 앞의 책, p.526)
  42. 42)무쟁은 다른 이의 미래 수소단의 혹을 소연으로 하기 때문으로, 무루지에 의해서는 이러한 행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43. 43)4근본정은 일반적으로 지(止)ㆍ관(觀)이 균등하여 온갖 공덕을 낳는데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낙통행’이라고 한다. 제4정려는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능히 ‘무쟁’의 소의지가 된다.(본론 권제25, P.1151 참조)
  44. 44)유사혹이란 수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무쟁은 다른 유정이 일으키는 탐 등의 실체적인 번뇌[自相惑]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45. 45)무사혹이란 견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이치에 미혹한 혹이면서 내면적 혹으로서 개별적인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보다는 모든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번뇌이기 때문에 무쟁행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유사혹과 무사혹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5 주22)를 참조할 것.
  46. 46)원지는 세속지를 자성으로 하며, 제4정려에 의지하여 세 주에 머무는 부동종성의 아라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무쟁은 다른 이가 자신(아라한)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임에 반해, 원지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든 그것을 알고자 원하기만 하면 참답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에 차이가 있다.
  47. 47)즉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의하면 마치 농부가 씨앗의 상태를 통해 싹의 상태를(혹은 그 반대로) 추리하여 알듯이 미래나 무색계의 법 또한 과거ㆍ현재나 무색계에 들어가는 원인인 무색정과 그것의 등류과인 적정(寂靜)을 통해 추리하여 아는 것[比知]이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대비바사론』 권제179, 한글대장경125, p.77)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럴 경우 원지는 직접 지각[現量智]이 아니라 추리지[比量智]가 될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원지는 원인을 관찰하지 않고서 결과를 아는 것이며, 결과를 관찰하지 않고서 원인을 아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론에서의 논설은 바로 이에 근거하여 비바사 논자의 주장을 이설(異說)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세존께서는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제법을 두루 아시니, 이것은 추리지도 아니고 점상(占相)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본론 권제7, p.331)
  48. 48)무애해라는 말은 여러 가지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경계를 영납하고 깨닫는 데 있어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러저러한 경계를 결단(決斷)함에 있어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한다. 혹은 그러그러한 경계에 대해 올바로 설하는 데 장애가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유여사는 경계에 대해 전도됨이 없는 지혜가 현전하는 것을 ‘무애해’라고 하였다.(『현종론』 권제37, 앞의 책, p.534-535)
  49. 49)‘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란 한 번 획득하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부동(不動) 아라한의 무루지를 말한다.
  50. 50)명(nāma)ㆍ구(pada)ㆍ문(vyañjana)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5(p.257 이하)를 참고할 것.
  51. 51)문의(文義)를 능히 올바로 선양하는 막힘이 없는 언사를 ‘변무애해’라고 하며, 아울러 존재하는 온갖 공덕으로서 이미 획득한 공덕과, 가행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현전하는 자재의 공덕(즉 定과 慧)도 역시 ‘변무애해’라고 이름한다. 즉 이 같은 자재의 공덕은 능히 웅변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변’과 그것의 원인(즉 정ㆍ혜)을 아는 지혜를 변무애해라고 이름한 것이다.(앞의 책, p.531)
  52. 52)구역에서는 『분별가명론(分別假名論)』. 현존의 『시설족론』에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이를 인용한 이유는 4무애해가 일어나는 순서를 밝히기 위한 것으로, 먼저 단어ㆍ음소ㆍ문장을 소연으로 하여 법무애해를 일으키고, 다음으로 그 뜻을 소연으로 하여 의무애해를, 그것의 수(數)ㆍ성(姓)ㆍ시제 등을 소연으로 하여 사무애해를, 막힘이 없는 언설과 그 근거가 되는 정(定)ㆍ혜(慧)의 도를 소연으로 하여 변무애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53. 53)색의 이 같은 어원적 해석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 주50)을 참고할 것.
  54. 54)법무애해의 가행은 산어(算語, gaṇita, 즉 수학)나 명ㆍ구ㆍ문신을 익히는 것이며, 의무애해는 부처님 말씀[佛語, buddha vacana]을 익혀 온갖 법의(法義)를 이해하는 것을, 사무애해는 성명(śabdavidyā) 즉 문법학을 익히는 것을, 변무애해는 인명(hetuvidya) 즉 논리학을 익히는 것을 가행으로 삼는다는 뜻. 이를 전하여 설[傳說]하는 것으로 말한 것은 논주의 불신을 나타낸다.
  55. 55)즉 4무애해는 부동(不動)의 종성만이 일으키며,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洲)의 인취에 의지하여서만 일어날 수 있다.
  56. 56)변제정(prāntakoṭika dhyāna)이란 색계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 3지에서와 같은 심(尋)ㆍ사(伺)ㆍ고(苦)ㆍ낙(樂)ㆍ우(憂)ㆍ희(喜)ㆍ입식ㆍ출식의 8재환(災患)이 없고, 지(止)ㆍ관(觀)이 균등하여 가장 수승한 정려이기 때문에 ‘변제정’이라고 한다. ‘변제’는 무월극(無越極)의 뜻. 따라서 사무애해는 욕계와 초정려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외하고, 대신 유다수행(留多壽行) 등 제4정려의 최상품을 더하여 여섯 가지가 된 것이다.(후술)
  57. 57)즉 제4정려는 욕계로부터 유정지에 이르기까지 11지를 원인으로 하여 인기되며, 아울러 이것은 증성하여 구경에 이르기 때문에 ‘변제정’이다.
  58. 58)제4정려를 닦을 때, 처음에는 하하품의 제4정려를 일으키고, 다음으로 하중품ㆍ하상품을, 나아가 마침내 상상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상상품의 제4정려를 ‘구경’이라 이름하였다는 뜻. 물론 3승(乘)에 따라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기 그 자체로서 ‘구경’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59. 59)4제(catuskoṭika)란 ‘네 구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한 게송’, 또는 ‘사해(四海)로 구분되는 한 세계’의 경우처럼 종류가 서로 유사한 네 가지 단락이나 구분[分齊]을 말하며, 실제(bhūtakoi)란 구극 또는 궁극의 이치, 즉 제법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열반을 금강실제(金剛實際)ㆍ제법실제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라는 말에는 종류의 구분이나 긍극의 뜻이 있다. 곧 4정려를 ‘변제’라고 하는 말로 일컬은 것은 이것이 정려 중에 가장 뛰어난 종류(樂通行 중에 가장 뛰어난 것임)이며,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수승한 공덕은 대개 이것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60. 60)이염득은 누구라도 염오를 떠날 때 자연적으로 자재를 획득하는 것이며, 가행득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여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곧 이 같은 여섯 공덕의 경우에는 이염하더라도 바로 그것의 자재를 획득하지 않는다.
  61. 61)신경지증통(혹은 神境通)은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가기도 하고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신통력(후술). 천안지증통(혹은 天眼通)은 지극히 먼 곳이나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신통력. 천이지증통(혹은 天耳通)은 지극히 먼 소리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 타심지증통(혹은 他心通)은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신통력. 숙주수념지증통(혹은 宿命通)은 과거세의 일을 아는 신통력. 누진지증통(혹은 漏盡通)은 번뇌를 다할 때 얻는 신통력이다.
  62. 62)무간도까지는 신통을 장애하는 불염오무지의 장애가 있지만, 그러한 장애를 끊은 상태가 해탈도이기 때문이다.
  63. 63)10력 중 누진지력이 다만 누진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경우 도지ㆍ고지ㆍ집지ㆍ타심지를 제외한 6지를, 누진과 그것의 방편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경우 10지를 본질로 한다.(전술)
  64. 64)숙주통의 가행을 일으킬 때에는 자신의 태외(胎外) 5위(嬰孩ㆍ동자ㆍ소년ㆍ성년ㆍ노년)를 기억하여 숙주통을 일으키고, 그것이 성취되는 단계에서는 이러저러한 장소나 종성 등을 소연으로 하지만, 무색정에는 이러한 색경(色境)을 소연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의지하여 숙주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65. 65)숙주통은 일찍이 영납(지각)하였던 대상만을 기억한다. 그런데 정거천은 성자가 태어나는 하늘로서 범부가 태어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일찍이 영납된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정거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66. 66)무색계에서 몰하여 욕계에 태어난 자가 4정려에 들어 숙주통을 일으켰을 경우, 무색정을 소연으로 하여 이를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에 먼저 전찰나에 멸한 다른 이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아가 그의 숙주를 기억하여 익숙하게 된 다음에 자신의 숙주를 기억하게 된다.
  67. 67)다섯 신통은 반드시 지ㆍ관이 평등한 경지에서만 일어나는 낙통행(樂通行)이기 때문에 4정려에 의지하여서만 일어날 수 있다. 즉 무색정은 ‘관’이 감소하고 ‘지’가 증가하지만, 미지정과 중간정 등은 반대로 ‘관’이 증가하고 ‘지’가 감소하는 고통행(苦通行)이기 때문에 다섯 신통의 소의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68. 68)그러나 이는 신통 자체에 근거한 해명이고, 그것을 염주의 경계로 삼을 경우 그것들은 모두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법념주에 포섭된다.(『현종론』 권제37, 앞의 책, p.542)
  69. 69)『증일아함경』 권제42(대정장2, p.776하)와 『잡아함경』 권제26 제684경(동p.187상)에서는 부처의 10력 중 제9 사생지력(死生智力)을 ‘유정이 신ㆍ어ㆍ의의 악행과 선행을 성취하여 당래 악취와 선취에 태어나는 것을 천안으로써 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같이 계경에서 사생지, 즉 천안통이 신ㆍ어ㆍ의의 3업을 아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색만을 소연으로 삼지 않지 않는가 하는 힐난.
  70. 70)이에 반해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숙주통을 법념주에 포섭시킨다.(『대비바사론』 권제141, 한글대장경123, p.368) 즉 숙주통은 단순히 과거세의 일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고ㆍ낙 등의 수(受)에 의해 영납된 온갖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잡연(雜緣)인 법념주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진통은 10력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는 법념주이고, 혹 어떤 경우에는 4념주이다. 그래서 중현은 본단에서의 본송을 “세 신통(신경ㆍ천안ㆍ천이통)은 신념주이고, 하나(타심통)는 나머지 세 염주이며, 하나(숙주통)는 법념주이고, 뒤의 신통(누진통)은 법념주 혹은 4념주이다”로 고쳐 짓고 있다.(三身一餘三 一法後法四)(『현종론』 권제37, 앞의 책, p.538)
  71. 71)즉 천안과 천이통의 본질이 안식과 이식상응의 혜라고 한다면, 제2정려 이상에는 안식도 이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4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힐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중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있어, 자지의 뛰어난 대종의 과(果)를 능히 인기한다. 이러한 혜가 현전하면, 바로 자지의 천안통과 천이통을 인기하여 현재전하게 하니, 이를 소의 근(根)으로 삼아 안식과 이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안과 이의 두 식과 상응하는 혜는 신통이 아니며, 단지 신통을 인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앞의 책, p.543)
  72. 72)이는, 6신통은 모두 해탈도에 포섭된다는 앞에서의 논설(婆沙正義)과 어긋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중현은 6신통은 모두 해탈도에 포섭되는 것이며, 그렇더라도 안(眼)과 이(耳)의 두 식이 바로 해탈도라고 하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였다.(앞의 책) 즉 신통이란 하나를 나누어 여러 가지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데, 그럴 경우 어떻게 무간도의 한 찰나에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대비바사론』 권제141, 한글대장경123, p.370)
  73. 73)『품류족론』 권제6(한글대장경117, p.123).
  74. 74)천안ㆍ천이통이 무기라고 한다면 『품류족론』에서 6통은 선성의 혜를 본질로 한다는 논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대개의 경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6통은 무기인 해탈도에 포섭된다고 하였는데, 그 밖의 네 신통을 선성이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뛰어난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
  75. 75)세 번째 누진명은 6통과 10지를 본질로 하여 무루와 통하기 때문에 진실로 무학법이다. 그러나 유루인 비학비무학을 본질로 하는 앞의 두 가지 명은 다만 무학의 마음 중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무학법이라고 일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진명만이 자성과 상속이 모두 무학이기 때문에 진실의 무학명이며, 앞의 두 가지 명은 다만 그 상속이 무학일 뿐이지 자성은 무학이 아니다.
  76. 76)신변시도는 신경통(神境通)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신이한 변화[神變]를 나타내는 것. 기심시도는 타심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것.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출리(出離)의 교법을 세워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다.
  77. 77)교화될 중생을 이끌어 발심하게 하기 위해 첫째 신통한 변화[神變]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며, 둘째 상대방의 마음을 통찰하여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셋째 누진이라고 하는 출리의 도를 세워 처중(處中)의 유정으로 하여금 발심하게 한다.
  78. 78)원문은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유사함[似]이다’지만, 장행의 해석에 따라 ‘사(似)’를 ‘화(化)’로 고쳐 번역한다.
  79. 79)『대비바사론』 권제141(한글대장경123, p.356). 본론 권제25(p.1155) 참조.
  80. 80)욕계신(身)의 경우, 욕계에서의 변화 두 가지―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색계에서의 변화 두 가지―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색계신(身)의 경우, 색계에서의 변화 두 가지―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욕계에서의 변화 두 가지―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81. 81)색계에 태어나 색계에 존재하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할 때에는 향ㆍ미와 더불어 외적인 네 처를 변화시켜야 하지만, 색계에는 향ㆍ미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이에 대한 논주 세친의 설은 4처를 변화시킬 수 있지만 향ㆍ미처를 성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유부의 정설(본론에서의 이설)은 다만 색ㆍ촉의 2처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82. 82)이를테면 초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변화심 중에서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은 욕계에 포섭되는 것에 대해 상지의 변화심이다. 그리고 다 같이 욕계에 포섭되는 변화심이라 하더라도 제2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은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보다 소의지와 작용[行]이 수승하다. 즉 제2정려의 과보인 능히 변화하는 마음은 제2정려까지 이를 수 있지만, 초정려의 과보인 변화심은 오로지 초정려에서 그치고 제2정려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83. 83)즉 정려로부터 변화심이 낳아지면 이로부터 제2ㆍ제3찰나의 동류의 마음이 낳아져 상속하며, 나아가 마침내 최후의 변화심으로부터 다시 청정한 정려의 마음이 낳아지고 이로부터 출관한다. 따라서 변화심은 정려와 전찰나의 변화심으로부터 생겨나며, 무간에 다시 후찰나의 변화심과 정려심을 낳는 것이다.
  84. 84)예를 들면 욕계에 드러나는 변화의 경계(색ㆍ향ㆍ미ㆍ촉)는 욕계의 변화심에 의한 것이다.
  85. 85)예컨대 욕계나 초정려의 변화심이 욕계나 초정려의 유정을 화작할 때, 그러한 화작된 이가 일으키는 말은 욕계나 초정려의 발어심(發語心)에 의해 일어나며(자지), 제2정려 이상의 변화심이 화작한 이가 발하는 말은 초정려 등의 발어심에 의해 일어난다(하지). 왜냐 하면 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ㆍ사(伺)가 없으며, 따라서 발어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6. 86)이는 『장아함경』 권제5 「사니사경(闍尼沙經)」(대정장1, p.36상). 범동자가 33신으로 나투어 33천에게 자신도 4신족을 닦았기에 이같이 무수한 형태로 변화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33천은 ‘범동자의 하나의 변화신이 말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말하고, 한 변화신이 침묵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침묵한다’고 생각하였다.
  87. 87)설일체유부에 의하면 두 마음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4정려에 의해 일어난 ‘능히 변화하는 마음’은 ‘말을 발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에는 더 이상 변화된 이의 몸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
  88. 88)『증일아함경』 권제44(대정장2, p.789상)에 의하면, 가섭은 계두산(鷄頭山)에서 골쇄의 몸을 변화시켜 죽은 후에도 반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의 세상이 출현하기를 기다렸다. 『불본행집경』 권제47 「대가섭인연품」(대정장3, p.870상중) 참조.
  89. 89)초습업자(初習業者)는 소의신에 의지하여 변화의 사업을 일으키지만 성만위에 이른 자는 소의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변화의 사업을 일으킨다.
  90. 90)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욕계에서는 성처(聲處)를 제외한 외적인 4처(색ㆍ향ㆍ미ㆍ촉처)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욕계의 천룡 등도 그러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5색근을 포함하여 9처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변화된 4처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여도 과실이 없다는 것이다.
  91. 91)천안과 천이는 욕계의 그것처럼 피륙(皮肉)이나 힘줄ㆍ혈관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묘한 대종소조의 지극히 청정한 색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진 것이다.
  92. 92)수행하여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ㆍ천이는 근본 4정려를 닦아 그 힘에 의해 획득된 것을 말하며, 태어나면서 획득된 천안ㆍ천이는 부동업을 닦아 색계천에 태어나 획득된 것을 말한다.
  93. 93)장신보란 전륜왕이 갖는 7보(寶) 중의 하나로, 인취에 있으면서 뛰어난 업력으로 인해 먼 곳의 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94. 94)천안은 색을 보기 위한 목적에서 화작된 것이므로 언제든 반드시 식(識)과 함께하여 동분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동분’이란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일반성 내지 보편성으로서의 동분(불상응행법의 하나)이 아니라, 근(根)ㆍ경(境)ㆍ식(識)이 다 같이[同] 자신의 작용[分]을 갖고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를 말한다.(본론 권제2, p.7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