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7_0680_a_01L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
027_0680_a_01L大唐三藏聖教序
어제(御製)
027_0680_a_02L御製
“대개 들으니 천지(天地)에는 법도가 있어서,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줌으로써 생(生)을 낳고, 4계절은 형체가 없으나 춥고 더운 날씨에 잠기게 함으로써 만물을 화육(化育)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을 살피고 땅을 거울로 삼으면 용렬하고 어리석은 무리도 모두 그 단서를 알게 될 것이지만, 음(陰)을 밝히고 양(陽)을 살피면 현철(賢哲)도 셀 수 없이 많이 나올 것이다.
027_0680_a_03L蓋聞二儀有像顯覆載以含生四時無形潛寒暑以化物是以窺天鑑地庸愚皆識其端明陰洞陽賢哲罕窮其數
그러나 천지(天地)가 음양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알기 쉬운 것은 형상이 있기 때문이며, 음양이 천지에 처해 있으나 알기 어려운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이 밝게 드러나서 징험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미혹(迷惑)되지는 않고, 형상이 없어 보지 못하게 되면 지혜로운 자라도 오히려 미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27_0680_a_07L然而天地苞乎陰陽而易識者以其有像也陰陽處乎天地而難窮以其無形也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
하물며 불도는 빈[虛] 것을 숭앙하여, 유현(幽玄)하고 적멸(寂滅)한 것으로 널리 만물을 제도하고 시방(十方)을 전어(典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위엄 있는 신령[威靈]을 받들면서도 위[上]가 없고 신통한 힘[神力]으로 누르면서도 아래[下]가 없으니, 이를 크게 하면 우주에 가득 차고 작게 하면 털끝에도 용납된다. 그렇게 멸함도 없고 생함도 없어서 천겁(千劫)을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숨은 듯 나타난 듯도 하면서 백복(百福)을 실어 나른 지 지금까지 오래이다.
027_0680_a_10L況乎佛道崇虛乘幽控寂弘濟萬品典御十方擧威靈而無上抑神力而無下大之則彌於宇宙細之則攝於毫釐無滅無生歷千劫而不古若隱若顯運百福而長今
오묘한 법도[妙道]는 그윽하고 깊어서 그것을 따르려고 해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불법의 유전[法流]은 고요하고 깊어서 그것을 찾고자 하나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어리석고 용렬한 중생이라도 그 취지(趣旨)를 알기만 하면 능히 의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027_0680_a_15L妙道凝玄遵之莫知其際法流湛寂挹之莫測其源故知蠢蠢凡愚區區庸鄙投其旨趣能無疑惑者哉
그렇다면 큰 가르침[大敎]은 서방(西方)에서 터를 닦아 일어난 것으로, 한나라 조정[漢庭]으로 옮겨 와서 꿈126)을 밝히고 동쪽 땅을 비추어서 자비를 전하게 된 것이다. 옛적에 형상[形]이 나뉘고 종적[跡]이 나눠질 때, 언어는 달랐어도 교화는 이루어졌고 범상(凡常)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덕을 숭앙하여 따를 줄을 알았다.
027_0680_a_18L然則大教之興基乎西土騰漢庭而皎夢照東域而流慈昔者分形分迹之時言未馳而成化當常現常之世民仰德而知遵
027_0680_b_02L그러나 그림자를 감추어 진(眞)으로 돌아가고 위의(威儀)가 바뀌어[遷化]127) 세상을 초월함에 미쳐서, 금용(金容)은 색을 감추어 삼천(三千)세계에 광명을 비추지 않고 아름다운 존상[麗像]은 그림으로 공연히 32상(相)만을 만들어 냈다.
이때에 은미한 말씀[微言]이 널리 퍼져 3도(途)128)에서 유정을 제도하고 남기신 가르침[遺訓]을 멀리 펴서 군생(群生)을 10지(地)129)로 인도하였다.
027_0680_a_21L及乎晦影歸眞遷儀越世金容掩色不鏡三千之光麗象開圖空端四八之相於是微言廣被拯含類於三途遺訓遐宣導群生於十地
그러나 참된 가르침[眞敎]은 우러르기 어려운 법이라 그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왜곡된 교학에 쉽게 따라서 사(邪)와 정(正)은 여기에서 얽혀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비었다느니[空] 있다느니[有]130) 하는 논란을 습관과 풍속에 따라 시비를 따지기도 하고, 대승과 소승도 잠깐씩 때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였다.
027_0680_b_05L然而眞教難仰莫能一其旨歸曲學易遵邪正於焉紛糾所以空有之論或習俗而是非大小之乘乍沿時而隆替
여기 이 현장 법사라는 사람은 법문(法門)의 영수(領袖)로서, 어려서부터 절개가 굳고 영민하여 일찍 3공(空)131)의 마음을 깨달았고 자라서는 신령스런 마음[神情]에 계합하여 먼저 4인(忍)132)의 행을 닦았다. 소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이나 물에 비친 달빛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에는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신선이 먹는다는 이슬이나 밝게 빛나는 구슬인들 어찌 그의 밝고 윤택함을 따를 수 있겠는가.
027_0680_b_08L有玄奘法師者法門之領袖也幼懷貞敏早悟三空之心長契神情先苞四忍之行松風水月未足比其淸華仙露明珠詎能方其朗潤
그러므로 통달한 지혜는 얽매임이 없고 신령한 헤아림[神測]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6진(塵)133)을 초월하여 멀리 나가서 홀로 천고(千古)를 마주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음을 내경(內境)134)에 모아서 정법(正法)이 사라짐을 슬퍼하였고, 생각을 현문(玄門)135)에 두어 글에 오류가 있는 것을 깊이 개탄하였다. 또 생각은 항상 사물의 조리(條理)를 분석하여 이전에 들었던 견문[前聞]을 넓히고, 거짓을 버리고 참됨을 이어서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였다.
027_0680_b_12L故以智通無累神測未形超六塵而迥出隻千古而無對凝心內境悲正法之陵遲拪慮玄門慨深文之訛謬思欲分條析理廣彼前聞截僞續眞開茲後學
그리하여 마음이 정토(淨土)로 날아가 서역(西域)에 유학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말을 채찍질하며 홀로 갔던 것이다. 쌓였던 눈이 날리는 새벽에는 눈 때문에 길을 잃고, 어지러운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저녁에는 쓸데없이 하늘 밖에서 헤매었다.
만 리 밖 낯선 산천을 지나 구름 안개를 헤치고 그림자를 내몰아 나아갔고,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정성은 무겁게 여기고 수고는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심오한 법(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면서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정교(正敎)를 구하였다.
027_0680_b_16L是以翹心淨土往遊西域乘危遠邁杖策孤征積雪晨飛途閒失地驚砂夕起空外迷天萬里山川撥煙霞而進影百重寒暑躡霜雨而前蹤誠重勞輕求深願達周遊西宇十有七年窮歷道邦詢求正教
쌍림(雙林)136)과 팔수(八水)137)에서 도풍(道風)을 음미하였으며, 녹원(鹿苑)과 취봉(鷲峰)에서 기이한 성적을 우러러보았다.
선성(先聖)에게서 지극한 말씀[至言]을 이어받았고 상현(上賢)에게서 진교(眞敎)를 전해 받아서 묘문(妙門)을 탐색하여 오업(奧業)을 자세히 궁구(窮究)하였다.
1승(乘) 5율(律)의 도로 마음 밭[心田]을 달리게 하고, 8장(藏)138) 3협(篋)139)의 글로 말씀의 바다[口海]에 파도를 일게 하였다.
027_0680_b_21L雙林八水味道飡風鹿苑鷲峯瞻仰異承至言於先聖受眞教於上探賾妙門精窮奧業一乘五律之道馳驟於心田八藏三篋之文波濤於口海
027_0680_c_02L그리하여 지나며 방문하는 나라들에서 삼장(三藏)의 요체가 되는 문장 657부를 가져왔다.
이것을 번역하여 중국[中夏] 땅에 펼쳐서 수승한 업적[勝業]을 선양하고, 자애의 구름[慈雲]을 서쪽에서 이끌어 와서 불법의 비[法雨]를 동쪽에 내리게 했다.
성스러운 가르침[聖敎] 가운데 빠져 있었던 것을 다시 온전하게 채워 넣어서 창생(蒼生)의 죄를 복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027_0680_c_02L爰自所歷之國摠將三藏要凡六百五十七部譯布中夏宣揚勝業引慈雲於西極注法雨於東陲聖教缺而復全蒼生罪而還福
불타고 있는 집[火宅]140)의 메마른 불길을 촉촉하게 적셔서 함께 미혹된 길을 벗어나게 했으며, 애욕의 물에 이는 어두운 파도를 잠재워서 함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악은 업(業)으로 인하여 추락하고 선은 연(緣)으로 인해서 올라가니, 오르고 추락하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에게 달린 것임을 알겠다.
027_0680_c_05L濕火宅之乾焰共拔迷徒朗愛水之昏波同臻彼岸是知惡因業墜善以緣昇昇墜之端惟人所託
이것은 대개 계수나무가 높은 언덕 위에서 나서 구름과 이슬을 만나 그 꽃을 피우는 것이나, 연꽃이 푸른 물결 속에서 나왔기에 날라 다니는 티끌도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성질이 본래부터 곧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고결하므로 미천한 물질들이 더럽히지 못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깨끗하면 탁류(濁類)가 더럽힐 수가 없는 법이다.
027_0680_c_08L譬夫桂生高嶺雲露方得泫其花蓮出淥波飛塵不能污其葉非蓮性自潔而桂質本貞良由所附者高則微物不能累所憑者淨則濁類不能霑
생각해 보면 지(知)가 없는 저 풀이나 나무도 선(善)의 도움을 받으면 선을 이룰 수 있는데, 하물며 식(識)이 있는 인륜(人倫)으로서 경(慶)에 인연하여 경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이제 이 경전이 널리 유통되도록 보시하여 해와 달과 함께 다함이 없게 하고, 이 복덕을 멀리까지 펼치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히 커지기를 바란다.”
027_0680_c_12L夫以卉木無知猶資善而成善況乎人倫有識不緣慶而求慶方冀茲經流施將日月而無窮斯福遐敷與乾坤而永大
황태자신술성기(皇太子臣述聖記)8)
027_0680_c_15L皇太子臣治述 聖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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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027_0680_c_16L夫顯揚正教非智無以廣其文崇闡微言非賢莫能定其旨蓋眞如聖教諸法之玄宗衆經之軌躅也綜括宏遠奧旨遐深極空有之精微體生滅之機要詞茂道曠尋之者不究其文顯義幽履之者莫測其際故知聖慈所被業無善而不臻妙化所敷緣無惡而不翦開法網之綱紀弘六度之正教拯群有之塗炭啓三藏之秘扃是以名無翼而長飛道無根而永固道名流慶歷遂古而鎭常赴感應身經塵劫而不朽晨鍾夕梵交二音於鷲峯慧日法流轉雙輪於鹿苑排空寶蓋接翔雲而共飛莊野春林與天花而合彩伏惟皇帝陛下 上玄資福垂拱而治八荒德被黔黎斂衽而朝萬國恩加朽骨石室歸貝葉之文澤及昆蟲金匱流梵說之偈遂使阿耨達水通神甸之八川耆闍崛山接嵩華之翠嶺竊以法性凝寂靡歸心而不通智地玄奧感懇誠而遂顯豈謂重昏之夜燭慧炬之光火宅之朝降法雨之澤於是百川異流同會於海萬區分義摠成乎實豈與湯武挍其優劣堯舜比其聖德者哉玄奘法師者夙懷聰令志夷簡神淸齠齔之年體拔浮華之世凝情定室匿迹幽巖拪息三禪巡遊十地超六塵之境獨步迦維會一乘之旨隨機化物以中華之無質印度之眞文遠涉恒河終期滿字登雪嶺更獲半珠問道往還十有七備通釋典利物爲心以貞觀十九年二月六日勅於弘福寺翻譯聖教要文凡六百五十七部引大海之法流洗塵勞而不竭傳智燈之長焰皎幽闇而恒明自非久殖勝緣何以顯揚斯旨所謂法相常住齊三光之明我皇福臻同二儀之固伏見御製衆經論序照古騰今理含金石之聲文抱風雲之潤治輒以輕塵足墜露添流略擧大綱以爲斯記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1권
027_0681_b_13L阿毘達磨順正理論卷第一


존자 중현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681_b_14L尊者衆賢造
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변본사품(辯本事品) ①
027_0681_b_16L辯本事品第一之一
027_0681_c_02L
서 설

1. 서분(序分)-귀경게

일체종(一切種)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신 모든 이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如理師]께 공경 예배하고서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종의(宗義)를 계승하여 논(論)을 짓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받들어 모셔야 할 분께 먼저 귀의하고 공경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경주(經主,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말함)도, 온 세상이 모두 그릇된 스승의 이론(異論)에 현혹되어 있지만 자신의 스승만은 일체의 모든 어둠에서 영원히 떠나셨기에 설하신 말씀이 허망하지 않으며, 위대한 스승[大師]으로서 존귀하고도 뛰어난 불공(不共)의 공덕을 성취하시었으며,1) 이를 인연으로 하여 크고도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게 하신다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 분이 설하신 말씀을 올바로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먼저 불(佛) 박가범(薄伽梵, 즉 세존)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원만한 공덕에 대해 찬탄 예배함으로써 뛰어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곧 세존께서는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이라는 두 가지 공덕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자리의 공덕이 원만하였으며, 은덕(恩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타의 공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2)
어째서 그러하였던 것인가?
‘일체종(一切種)의 어둠’을 모두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지덕이 원만하였으며, ‘온갖 경계의 어둠’도 역시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단덕이 원만하였다.3) 또한 올바른 가르침의 손길을 뻗쳐 중생을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은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의 경우, 비록 온갖 어둠은 깨트렸을지라도 아직 일체종의 어둠을 능히 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지는 못하였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무지(染汚無知와 不染汚無知)의 차별을 알지 못하고 지혜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요(意樂) 수면(隨眠)의 지혜 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참답게 유정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4) 이같이 [성문과 독각은] 자리이타의 공덕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거룩한 공덕(즉 단덕)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참다운] 스승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불세존만이 두 가지 공덕이 원만하여 전도됨이 없이 일체의 유정을 구제하므로 희기(希奇)하고도 광대한 명칭을 성취하니, 그 지위가 지극히 존귀하므로 그 분만을 ‘위대한 스승[大師]’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같이 위대한 스승의 공덕에 대해 찬양 예배하고서 설하고자 하는 『대법장론(對法藏論)』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5)
027_0681_b_17L諸一切種諸冥滅 拔衆生出生死埿敬禮如是如理師 對法藏論我當說論曰諸欲造論必有宗承於所奉尊理先歸敬所以經主觀諸世閒皆爲邪師異論所惑自師永離一切諸冥立教不虛處大師位成就尊勝不共功德爲緣引發殷淨信心欲正流通彼所立教故先讚禮佛薄伽梵自利利他圓滿功德用摽嘉瑞許發論端此中世尊智斷二德皆具足故自利圓滿恩德備故利他圓滿所以者何一切種冥皆永滅故智德圓滿諸境界冥亦永滅故斷德圓滿授正教拔衆生出生死泥故恩德圓滿聲聞獨覺雖破諸冥而猶未能滅一切種不成就一切種智未得所有無知差別不行智故意樂隨眠智等闕故不能如理濟拔有情自利利他德未滿故雖有聖德而不名師唯佛世尊二德圓滿無倒濟拔一切有情成就希奇廣大名稱位居尊極獨號大師故先讚禮大師功德以開所說對法藏論
027_0682_a_02L
2.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의 본질

‘대법(對法)’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행(行)을 대법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능히 이를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혜(慧)’란 택법(擇法)의 뜻이며, ‘정(淨)’이란 무루(無漏)의 뜻이다. 곧 온갖 누(漏)는 번뇌[垢]를 말하니, 택법으로서 번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혜’, 즉 청정한 지혜라고 이름한 것이다.6)
‘이러한 무루의 지혜를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근거에서 알 수 있는 것인가?
불세존께서 천제석(天帝釋) 등에게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나에게는 매우 심오한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論)와 비나야(毘那耶, vinaya, 律)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청하여 물어라”고 설한 바와 같다.7) 이는 즉 성도(聖道)라든지 이러한 성도에 의해 증득되는 과보에 관해 천제석이 묻고 싶은 대로 청하여 물으라는 말이다. 벌차(伐蹉, Vatsa) 종족들에 대해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던 말씀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무루의 지혜만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것에 의해 제법(諸法, 모든 존재)의 실상을 현관(現觀)하는 경우 다시는 미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제법실상에 대한] 현관이 오직 ‘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그러한즉 대법은 오로지 ‘혜’만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오로지 ‘혜’에 의해서만 현관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이와 아울러 이에 수반되는 행(行), 즉 수행(隨行)에 의해 현관된다.8)
무엇을 수행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隨轉色]과 수(受)ㆍ상(想) 등의 온갖 심소법(心所法)과 생(生) 등과 심(心)을 말하니,9) 이를 모두 청정한 지혜에 수반되는 행, 즉 수행(隨行)이라고 한다.
무루의 5온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면,10) 어째서 ‘수’ 등의 수행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혜’는 견현관(見現觀) 등의 세 가지 현관 모두에 대해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生) 등과 색(色, 즉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률의)은 사현관(事現觀)의 공능은 있을지라도 그 밖의 현관에 대해서는 공능이 없으며, 수(受) 등은 다만 연현관(緣現觀)과 사현관 두 가지에 통할 뿐이다.11) 즉 ‘수’ 등은 각기 영납(領納, 지각) 등의 작용을 가질 뿐이지만, ‘혜’와 같은 법은 능히 관(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 등은 맹인과도 같아 능히 4성제를 간택 분별할 수 없는데, 어찌 대법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고(苦) 등의 실상을 바로 깨닫는 데에는 견현관이 가장 뛰어나니,12) 모든 진리(즉 4제)를 간택 판단할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등은 비록 이러한 청정한 ‘혜’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일지라도 ‘혜’의 힘(즉 판단력)에 의해 유지되어 진리의 대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현관 중의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루의 혜근(慧根)을 성취하는 것, 이것을 설하여 승의(勝義)의 아비달마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세속의 아비달마)에 근거하여 이를 ‘승의’라고 설한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능히 이것을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慧)와 논(論)이 [세속의 아비달마]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것’이란 획득해야 할 무루의 혜근을 말하며, ‘능히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란 세간의 뛰어난 지혜인 수혜(修慧)ㆍ사혜(思慧)ㆍ문혜(聞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한다.13) 이와 같은 ‘혜’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의 법을 떠나서는 무루혜근을 능히 증득할 수 없다. 이는 바로 그 같은 무루혜근을 능히 획득하는 뛰어난 방편이 되기 때문에 무루혜와 마찬가지로 대법(對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자비의 방편도 역시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능히 [무루혜근을] 획득하게 하는 논’이란 바로 근본 아비달마를 말한다.14) 이는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資糧, 자재와 식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대법(對法)이라 이름하니, 이를테면 업의 이숙(異熟)과 같은 번뇌[漏]의 자량도 역시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15)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온갖 혜’라는 말에는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生得慧]도 포함된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가 없다면 능히 대법의 가르침을 외워 전하는 자도 없을 것을 것이니,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가 있어야 계경 등의 법도 능히 올바로 외워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아비달마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27_0681_c_17L對法者何頌曰淨慧隨行名對法及能得此諸慧論論曰慧者擇法義淨者無漏義諸漏名垢擇法離垢故名淨慧何緣得知此無漏慧名爲對法以佛世尊恣天帝等所請問故如契經言我有甚深阿毘達磨及毘柰耶恣汝請問此以聖道及聖道果恣天帝釋隨意請問筏蹉類請問亦爾復以何緣唯無漏慧名爲對法由此現觀諸法相已不重迷故豈不現觀非唯慧能是則法應非唯慧實非唯謂及隨行何隨行謂慧隨轉色受想等諸心法生等及心此則摠說淨慧隨行無漏五薀名爲對法何故不說受等行名爲對法慧於見等三現觀中皆有能故生等及色有事非餘受等通緣事現觀受等各有領納等用如能見應名對法受等如盲豈名對法不能簡別四聖諦故以於現覺苦相中其見現觀最爲殊勝於諸中簡擇轉故受等雖與淨慧俱行而力持趣彼彼境故現觀中非爲最勝是故成就無漏慧根說爲勝義達磨爲有世俗阿毘達磨觀彼此爲勝義耶有謂能得此諸慧論此謂所得無漏慧根能得諸慧謂彼閒殊勝修慧思慧聞慧及彼隨行非如是慧及隨行無漏慧根可能得彼是能得此方便故同無漏慧受對法名如慈方便亦名慈等能得諸論謂彼根本阿毘達磨是無漏慧勝資糧故亦名對法如業異熟漏等資糧亦名業等前諸慧言亦說生得生得慧無能誦持對法教者唯生得能正誦持契經等法故彼亦名阿毘達磨

3. 대법장(對法藏, 아비달마코샤)의 의미

그렇다면 이 논(즉 『구사론』)도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이 되는 것인데, 어찌 역시 대법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대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16)
『구사론』의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는 의주석(依主釋)과 다재석(多財釋)으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장(藏, kośa, 俱舍)’이란 핵심[堅實]을 말하니, 마치 수장(樹藏) 즉 ‘나무의 속 줄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대법론 중의 온갖 핵심적인 뜻이 모두 여기에 포섭되어 들어있어 이것(『구사론』)이 그러한 대법의 장(藏)이 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는 바로 ‘대법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혹은 ‘장’이란 근거[所依]의 뜻이니, 마치 도장(刀藏) 즉 ‘칼의 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그러한 대법이 이 논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니, 거기서의 내용과 말을 인용하여 이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논은 그 같은 대법을 장(藏)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는 바로 ‘대법을 근거로 삼았다’는 뜻이다.17)
027_0682_b_07L豈不此論是無漏慧勝資糧亦名對法何故乃名對法俱舍頌曰攝彼勝義依彼故此立對法俱舍名論曰此就依主及多財釋藏謂堅實猶如樹藏對法論中諸堅實義皆入此攝是彼藏故名對法藏卽是對法之堅實義藏或所依猶如刀藏謂彼對法是此所依引彼義言造此論故此論以彼對法爲藏名對法藏卽是對法爲所依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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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비달마의 목적과 설자(說者)

그렇다면 이 논(『구사론』)의 근거가 되는 아비달마는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게 된 것이며, 또한 누가 가장 먼저 설한 것인가?
마땅히 대법을 설한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굳이 아비달마를 설한 이에 대해 헤아려 보고자 한다면, 이것과 앞의 물음(아비달마를 설한 이유)에 대해 이제 마땅히 함께 대답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번뇌를 능히 소멸할 만한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말미암아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傳)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택법(擇法, 법의 간택 분별)을 떠나서는 세간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온갖 번뇌[諸惑]를 능히 소멸할 만한 그 어떤 뛰어난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약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거나 알지 못하는 법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괴로움을 바로 멸진(滅盡)하였다’고 끝내 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직 온갖 번뇌를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존재(有, 욕유ㆍ색유ㆍ무색유)의 바다에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한다. 곧 [아비달마를 설한 것은]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을 닦고 익히어 온갖 번뇌를 소멸하게 하기 위함이니, 이로 인해 부처님께서 대법을 설하였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만약 대법을 설하지 않았더라면 사리자(舍利子) 등의 여러 위대한 성문(聲聞)들 역시 제법의 실상에 대해 참답게 사택(思擇)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의 근거가 되는 근본 아비달마는 결정코 부처님께서 설한 불설(佛說)이다.

(1) 아비달마의 설자에 관한 세친의 불신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전(傳)한다’ 하고 말하여 ‘아비달마는 바로 불설(佛說)이다’는 사실에 대해 불신(不信)을 나타내고 있다.18)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 [아비달마가 불설임을] 믿지 않은 것인가?
그는 ‘존자(尊者)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이 지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에,19) [부처님께서] 대법에 의지하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세존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그대들은 지금부터 마땅히 경(經)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아 그것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여러 부파의 대법은 그 종의가 다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모두 옳지 않으니, [아비달마는] 여러 위대한 성문들께서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따라 결집(結集)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는 바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로서 역시 불설(佛說)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능히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인과를 두루 아는 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21)
예컨대 온갖 계경(契經)의 경우에 있어서도 만약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이지만 [그것에 대해] 불설이라 말하지 않았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계경을 버려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의지하라’는 말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비나야장(毘奈耶藏, 즉 율장)도 마땅히 불설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열반을 앞두고서 거기에 ‘의지하라’고 권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2) 만약 필추(苾芻, 비구의 구역)들에게 또한 역시 ‘『별해탈경(別解脫經)』에 의지하라’고 권유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광(廣)비나야는 불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결정적인 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23) 만약 비나야는 바로 『계경본(戒經本, 즉 별해탈경)』을 널리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한다면, 아비달마는 계경(契經)을 널리 해석한 것인데 어째서 이것만을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 아니라고 편협하게 의심하는 것인가?
또한 [앞에서] 혜온(慧蘊)과 이에 수반되는 행(行, 즉 隨行), 그리고 뛰어난 자량(세간 4혜와 세속의 아비달마)을 일컬어 대법(對法)이라고 하였으며, 4의(依) 중에서도 ‘지혜[智]에 의지하라’고 설하였지 ‘말에 의지하라’고는 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즉 불타 말씀)에 의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은] 불성(不成)의 허물을 범하는 것이다.24) 또한 거기(4의)서는 오로지 경(經)에 대해서만 결정적으로 의지할 바가 아니라고 설하고 있을 뿐 아비달마와 비나야에 의지함에 있어 그 같은 차별이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아비달마는 바로 경의 차별(해석 분별)이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서 ‘아비달마에 의지하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응송(應頌) 등에도 역시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니, 세존께서는 오로지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권고하였기 때문이다.25)
또한 지금 여기서 ‘의지하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가? 만약 지식의 근거[量]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일찍이 네 가지 지식의 근거(즉 4依)를 설하였으면서 지금 여기서는 단지 경만을 지식의 근거로 설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경우 앞에서의 ‘의지하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한 가지에 대한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이니, 법 등의 세 가지는 경에 포함되기 때문이다.26) 혹은 거기(4依)서 이미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경의 차별(즉 法)에 의지하라’고 권유하였으면서 지금 다시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고] 설하였다면, 이는 쓸데없는 중설(重說)의 허물[唐損過]을 범하는 것이다.27) 따라서 지금 여기서의 ‘의지하라’는 말은 [지식의 근거, 즉 ‘양’과는]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세존께서는] “그대의 마음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속해 있었다. 이는 곧 보특가라(補特伽羅, 인격)에 의지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열반에 든 이후]부터 별도의 의지할 바가 없으니, 마땅히 경에 의지하여 망실(忘失)됨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경’이라고 하는 말은 일체의 여래의 성교(聖敎)를 총괄하여 설한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응송 등의 가르침에도 마땅히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별해탈(別解脫, 즉 戒經)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은 계(戒)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같은 계경(戒經)은 뜻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경하고 설한 바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즉 중계(重戒)를 범하는 자는 번뇌를 다스리고 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에 거듭하여 그것에 의지하기를 권유하여 계를 굳건히 지키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하라’는 말은 오로지 지식의 근거[量]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난(阿難)에게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은 바로 아비달마에 의지하기를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아비달마는 바로 경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경량(經量)이라 일컬은 것으로,28) 이는 바로 온갖 경의 결정적인 뜻이다. 즉 아비달마는 능히 온갖 경을 결택(決擇)하고, 경의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를 판별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는 일체 성교(聖敎)에 어긋남이 없는 이치의 말씀을 모두 포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에 부합하는 것은 요의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불요의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요의란 진리 법성(法性)에 어긋나는 것이니, 올바른 이치[正理]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마땅히 [불타의] 의도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앞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고 설한 것처럼 지금 여기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을 오로지 지식의 근거[量]인 경에 의지하라는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경주 세친은] “여러 부파의 아비달마는 그 종의가 다르기 때문에 불설(佛說)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경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부파에서 전하는 경 가운데에도 문장의 의미상의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종의가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어떤 부파에서는 『칠유경(七有經)』을 외워 전하고 있으며, 그들의 대법(對法) 중에서는 중유(中有)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29)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부파에서는] 점진적인 현관(現觀)을 주장하지만,30) 『찬학근본이문경(讚學根本異門經)』 등의 경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외워 전하지 않으며, 『무장유경(撫掌喩經)』 등과 같은 다수의 계경은 그 밖의 다른 부파에서 일찍이 외워 전한 일이 없었던 경이다.
나아가 비록 여러 경을 여러 부파에서 함께 외워 전하고 있을지라도 단어나 문장상의 차별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경에서는 “아씨다(阿氏多)여, 그대는 마땅히 내세에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고 설하고 있으며,31) 또한 [어떤 경에서는] 비흑비백(非黑非白)이라 설하고, [어떤 경에서는] 비흑비백의 이숙업(異熟業)이라고 설하는 등 여러 부파에 있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단어나 문장이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종의가 다르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는 결정코 바로 불설이니, 부처님께서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는 “노인이 출가하여 삼장을 수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잡장(雜藏)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니, 그것(즉 잡장)은 바로 경의 차별이기 때문이며, 일찍이 그것만을 별도로 수지(受持)하였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32) 오로지 소달람(素怛纜, sūtra, 즉 經)과 비나야(毘奈耶, vinaya, 즉 律)와 마달리가(摩怛理迦, mātṛka, 論)를 수지하였다고 설한 곳은 있어도 잡장을 수지하였다고 말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역시 또한 잡장이 바로 마달리가라고도 할 수 없으니, [마달리가는 잡장과는 다른] 별도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대한 존자 가섭파(迦葉波)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33)
“마달리가라는 말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이를테면 4념주(念住) 내지 8지성도(支聖道),34) 4정행(正行)ㆍ4법적(法迹),35) 4무애해(無礙解),36) 공공(空空)ㆍ무원무원(無願無願)ㆍ무상무상(無相無相),37) 여러 현관변(現觀邊)의 온갖 세속지(世俗智),38) 잡수정려(雜修靜慮),39) 무쟁(無諍)과 원지(願智),40) 변제정(邊際定),41) 지(智)와 지(止)ㆍ관(觀) 등의 법,42) 그리고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ㆍ『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 따위와 같은 것을 모두 통틀어 마달리가라고 한다.”43)
즉 잡장 중에는 이러한 온갖 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잡장이 바로 세 번째 장(藏, 즉 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아비달마와 아비비나야(阿毘毘奈耶)에 대해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비달마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비비나야장(阿毘毘奈耶藏)을 마땅히 네 번째 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비나야장(즉 율장)이 바로 아비비나야라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장 뛰어난 시라(尸羅, śila, 戒)와 상응하는 논의로서, 바로 직접적으로 비나야에 대향(對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비비나야’라고 이름하였다. [마찬가지로] 매우 심오한 온갖 존재의 본성과 양상[諸法性相]과 상응하는 논의로서, 바로 직접적으로 존재[法]의 본성과 양상에 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온갖 계경을 일컬어 달마(達磨,dharma, 즉 법)라고 하니, 논(論)은 바로 능히 직접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결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하였다. [마찬가지로] 별해탈본(別解脫本)을 일컬어 비나야율(毘奈耶律)이라고 하니, 오로지 그것이 성립하게 된 연기(緣起)를 널리 분별한 것을 ‘아비비나야’라고 이름하였다.44)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의심과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한 것처럼 부처님의 성교는 3온(蘊:戒ㆍ定ㆍ慧蘊)으로 정리될 수 있으므로 비나야장과 아비달마도 결정코 지식의 근거[量]에 포함되어야 한다.45) 『정법멸경(正法滅經)』에서도 역시 이같이 설하고 있다.

아비달마와 비나야와
아급마(阿笈摩) 중의 중요한 글의 뜻으로서
여러 제자들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니
듣고서 가벼이 여길까 염려하여서라네.46)

또한 ‘이러한 법’, ‘이러한 비나야’라고 설할 때, ‘이러한 [법]’이란 위대한 스승[大師]의 교법, 즉 대법(對法)을 말한다. 지금 바로 경을 살펴보더라도 접두사[前句]가 있는 경우도 있고, 혹 어떤 때는 거기서 접두사를 빼고서 설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정등각(正等覺)을 혹 어떤 때에는 단지 ‘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증상시라(增上尸羅, 뛰어난 戒)를 다만 ‘시라’로 설하기도 하며, 온갖 욕탐 등을 다만 ‘탐’ 등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법’이란 바로 대법(즉 아비달마)임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도 어떤 경우에 역시 아비달마를 법이라는 말로써 방편적으로 설한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만약 어떤 이가 계경에 따라 설하였다면 비나야는 법의 본성[法性]에 어긋나지 않음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 같은 이치와 가르침에 따라 아비달마는 진실로 바로 불설(佛說)임을 믿고 알아야 할 것이니, 정법을 비방하는 죄는 깊어 가히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애호(愛護)하는 이라면 말의 악행을 익혀 대법(對法)을 비방하여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상 [아비달마가 불설이라는] 부수적인 논의[傍論]를 마친다.
027_0682_b_16L此論所依阿毘達磨何因故說誰復先說雖不應問說對法人佛教依法不依人故而欲必以人爲量者此及前問今當摠荅頌曰若離擇法定無餘 能滅諸惑勝方便由惑世閒漂有海 因此傳佛說對法論曰由離擇法無勝方便能滅世閒引苦諸惑故世尊言若於一法未達未知我終不說能正盡苦世閒未滅諸煩惱故於三有海生死輪迴爲令世閒修習擇法滅諸煩惱故言因此佛說對法佛若不說舍利子等諸大聲聞亦無有能於諸法相如理簡擇是故此論所依根本阿毘達磨定是佛說經主稱傳顯已不信阿毘達磨是佛所說何緣不信傳聞尊者迦多衍尼子等造故不說對法爲所依故如世尊告阿難陁言汝等從今當依經量諸部對法義宗異故此皆不然諸大聲聞隨佛聖教而結集故阿毘達磨是佛所許亦名佛說能順遍知雜染淸淨因果智故如諸契經若佛所許不名佛說便應棄捨無量契經若不說依非佛語者毘柰耶藏應非佛說臨涅槃時不勸依故若言亦勸苾芻當依別解脫經無斯過者是則應許廣毘柰耶非佛所說便非定量若毘柰耶卽是廣釋戒經本故是佛說者阿毘達磨廣釋契經何故偏疑非佛所說又卽慧薀及與隨行幷勝資糧名爲對法四依中說智是所依不說依言有不成過又彼唯說經非定依而竟不言阿毘達磨及毘奈耶依有差別又定應許阿毘達磨是經差別故成所依或應頌等亦非所依世尊唯勸依經量故又今言依欲顯何義若顯量義理未必然如何世尊先說四量而今但說經爲量耶或應先時依唯說一以法等三經所攝故或卽於彼已遮依人亦卽勸依經之差別而今復說有唐捐過故今言依應顯別義汝昔來心屬於我是則依仗補特伽羅自今以往無別所依應唯仗經勿令忘失又今言經摠說一切如來聖教若不爾者應頌等教應非所依而復勸依別解脫者爲令於戒起尊重心以彼戒經不應求義唯當恭敬如說而行毀重戒者不可修治故重勸依令堅持戒是故言依非唯量義又勸阿難依經量者正爲勸依阿毘達磨是經之量故名經量卽是衆經所有定義阿毘達磨能決衆經經了義不了義故阿毘達磨名能摠攝不違一切聖教理言故此理名了義經與此理違名不了義不了義者恐違法性依正理教應求洪天手意旨若異此者如先但說依了義經今亦應爾唯勸依經不應言量所言諸部阿毘達磨義宗異故非佛說者經亦應爾諸部經中現見文義有差別故由經有別宗義不同謂有諸部誦七有經彼對法中建立中有如是建立漸現觀等讚學根本異門等經說一切有部中不誦撫掌喩等衆多契經於餘部中曾所未誦雖有衆經諸部誦然其名句互有差別謂有經說汝阿氏多於當來世成等正覺非黑非白非黑非白異熟業等無量名句諸部不同是故不應由義宗異阿毘達磨便非佛說阿毘達磨定是佛說由佛攝受三藏教故如世尊說老耄出家持吾三藏甚爲難得若謂此言依雜藏說理必不然以彼卽是差別故曾無處說別持彼故唯有處說持素怛纜及毘柰耶摩怛理迦而無別處言持雜藏亦不可說雜藏卽是摩怛理迦由別釋故如大尊者迦葉波言摩怛理迦名目何等謂念住廣說乃至八支聖道四正行四法迹四無礙解空空無願無願無相無相諸現觀邊諸世俗智雜修靜慮無諍願智邊際定智止觀等法及集異門法薀施設如是等類一切摠謂摩怛理迦非雜藏中此等諸法具足可得故說雜藏卽是第三非爲善說又契經說於阿毘達磨阿毘毘柰耶應勤修學故知佛說阿毘達磨若爾阿毘毘柰耶藏應爲第四不爾由許毘柰耶藏卽是阿毘毘柰耶故所有最勝增上尸羅相應論道以能現對毘柰耶故名阿毘毘柰耶所有甚深諸性相相應論道以能現對法性相故名阿毘達磨或諸契經名爲達論能現前決擇其義名阿毘達磨別脫本名毘柰耶律唯現前廣辯緣起名阿毘毘柰耶是故所言不成疑難又佛聖教三薀所收猶如契經毘柰耶藏阿毘達磨定應量攝正法滅經亦作是說阿毘達磨毘柰耶 阿笈摩中要文義當有不傳諸弟子 恐聞齊己有輕又說此法此毘柰耶此大師教法卽對法現見經中有前句事或時彼事離前句說如正等覺或但言覺增上尸羅唯說尸羅諸欲貪等但說貪等故知此法卽是對法世尊有處亦以法聲方便說有阿毘達磨謂若有說隨順契經顯毘柰耶不違法性應隨此等理教信知阿毘達磨眞是佛說謗正法罪深爲可怖勿自愛人習語惡行訕謗對法言非佛說傍論已了

Ⅰ. 제법분별(1)―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1. 총설

앞서 말하였듯이 부처님께서는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擇法)을 닦고 익히게 하기 위해 아비달마를 설하였다.
세간 사람들이 간택 분별해야 할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있으니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에는
누(漏)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나므로
그래서 유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와
아울러 세 가지의 무위
이를테면 허공과 두 가지 멸(滅)이니
이 중의 허공은 장애를 갖지 않는 것이다.

택멸(擇滅)은 말하자면 이계(離繫)로서
계박(繫縛)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끝내 장애되면
[택멸과는] 다른 비택멸을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법을 설함에 있어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다.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면, 도성제(道聖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 이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47)
027_0684_a_12L如上所言爲令世閒修習擇法因此佛說阿毘達磨何等名爲彼所擇法頌曰有漏無漏法 除道餘有爲 於彼漏隨增故說名有漏 無漏謂道諦 及三種無爲謂虛空二滅 此中空無礙 擇滅謂離繫隨繫事各別 畢竟㝵當生 別得非擇滅論曰說一切法略有二種一者有漏二者無漏是則摠說次當別解除道聖諦餘有爲法是名有漏
027_0684_b_02L
2. 유루법과 유루의 의미

이(유루)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5취온(取蘊)을 말하니, 색(色) 내지 식(識)이 바로 그것이다.48) 즉 “무엇을 일컬어 색취온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取]에 따라 일어나는 유루의 색을 말하며, 나아가 식취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어떠한 이유에서 취온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누(漏,즉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隨增] 때문이다.49) 즉 유신견(有身見) 등의 온갖 번뇌를 ‘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으로, 그것으로부터 항상 염오(染汚)한 마음이 누설(漏泄), 즉 새어나오기 때문이다.50) 다시 말해 ‘누’와 상응하고, ‘누’의 경계가 되며, ‘누’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본송에서] ‘누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따라 생겨나는 번뇌[隨眠]’의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 「변수면품(辯隨眠品)」 제45권 이하)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일한 세계[界], 동일한 단계[地]에 속하지 않았거나 무루를 근거로 하는 번뇌의 경계(대상)와 수면이 유루라는 사실은 이미 부정된 셈이니, 피차간에는 서로 관계하면서 따라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명칭(번뇌의 경계와 수면)을 서로 대립시켜 [유루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51)
유루와 무루는 다시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색(色)으로서 집착이라는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것을 말하니, 이는 바로 온갖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식(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무루법이다.
유루와 무루의 간략한 특징은 이와 같다. 그러나 보다 널리 분별하기 위해 [경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色)에 대해 즉각적으로 탐욕[貪]이나 혹은 미워함[瞋], 혹은 어리석음[癡],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隨煩惱)나 온갖 심소법을 낳는 것을 말한다.52)……(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53)
어떠한 뜻에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인가?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법[義]을 개별적으로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탐욕 등의 [근본]번뇌를 능히 낳는다고만 설해야 한다.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를 낳는 것’이라고 전체적으로 설하여서는 능히 개별적인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니, 일체 번뇌의 뜻을 개별적으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때에 일체의 번뇌가 모두 현행(現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라고 하여 오로지 전체적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온갖 수면(隨眠, 즉 근본 번뇌)의 행상(行相)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것이 현행하는 상태에서도 능히 알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분노(忿) 등의 행상은 거칠게 나타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수번뇌와 함께 전체적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54)
혹은 타세간(墮世間)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니, 세간에 포섭되는 것을 타세간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말하자면 세간에 처하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55) 여기서 ‘세간’이라는 말은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설정되었다.56)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세간과 세간의 집(集, 즉 인연)에 대해 널리 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간의 집을 관찰하면 세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비유(非有)라고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기도 하였다.
온갖 타세간이 모두 유루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유루법과 무루법에 대해 설하리라. 유루법이란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안(眼), 존재하는 모든 색(色), 존재하는 모든 안식(眼識), 존재하는 모든 안촉(眼觸), 존재하는 모든 안촉을 조건[緣]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낙수(樂受), 혹은 고수(苦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나아가 타세간의 의(意)와 타세간의 법(法)과 타세간의 의식(意識), 타세간의 의촉(意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을 유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무루법이란 말하자면 출세간의 ‘의’와 출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의식……(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곧 이러한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아울러 올바른 이치에 의해 유루와 무루의 법상(法相)을 성립시킨 것이지 자의에 따라 지은 것은 어떠한 법도 없다.

(1) 유루에 관한 비유사의 이설 비판
그런데 비유논사(譬喩論師)는 이치에도 어긋나고 경에도 위배된 다음과 같은 그릇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57)
“비유정수(非有情數)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을 무루법이라고 한다.”58)
그러나 이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계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 즉각적으로 탐욕[貪]이나 혹은 미워함[瞋], 혹은 어리석음[癡]을 낳는 것을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즉 비유정수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이 이미 유정의 탐욕 등을 낳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무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비(無比)나 지만(指鬘), 오로빈라가섭파(烏盧頻螺迦葉波) 등은 세존의 몸을 연(緣, 조건)으로 하여 탐(貪)ㆍ진(瞋)ㆍ치(癡) 등의 번뇌를 낳았기 때문이다.59) 즉 그들(비유논사)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에서] ‘~에 대해[於]’라는 말은 경계 대상[境]을 의미하는 제7격(格)이 아니라 바로 ‘~에 의해[依]’를 의미하는 제7격이다.60) 이를테면 ‘참깨에서 (다시 말해 참깨에 의해) 참기름이 생겨난다[油於麻]’고 하듯이 번뇌[漏]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과거ㆍ미래에 대해 현재의 탐욕 등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과거ㆍ미래에 의해 현재의 탐욕 등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결정코 옳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앞서 인용한 경에서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나 온갖 심소법을 낳는다”고 말하였는데, 수번뇌도 아니며, [수번뇌로서의] 심소도 아닌 것이 있어 이를 간택 분별하기 위해 다시 심소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다시 심소법을 말한 것은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라는 말이 바로 경계 대상을 의미하는 제7격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멸(滅)ㆍ도(道)는 바로 무지(無智)의 [원인이 아니라] 근거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이를테면 ‘무명(無明)은 고(苦) 등에 대해 무지함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여기서 ‘~에 대해’라는 말은 제7성(聲, 곧 처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에 대해’라는 말을 ‘근거’의 의미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슨 이유에서 그것이 결정코 ‘~에 의해’라고 고집하는 것인가? 따라서 ‘색 등에 대해 어리석음 등을 낳는다’고 할 때, 번뇌의 근거(즉 색 등)를 바야흐로 ‘유루’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61)
또한 [그렇다면] 일체의 소리는 모두 무루여야 할 것이니, 소리는 결코 번뇌의 소의(所依)가 아니기 때문이다.62) 그러나 소리를 결코 무루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니, 경에서 소리의 본질은 바로 잡염(雜染, 더러움)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즉 무루를 설하여 잡염이라고 함은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모든 이생(異生)의 몸 가운데 선(善)한 의식도 마땅히 무루가 되어야 할 것이니, 번뇌의 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63) 그러나 만약 번뇌의 원인[漏分]에 수반되기 때문에 [이생의 선한 의식을 유루라고] 한다면, 유학위(有學位)의 선한 의식도 모두 유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64)
또한 현색(顯色, 색채) 등으로 이루어진 똥이나 더러운 술 따위도 번뇌의 소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두를 무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을 무루법이라고 하였지만] 아라한의 몸이 바로 무루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계경에서 “존재하는 모든 괴로움은 다 번뇌[取]를 근거로 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아라한의 몸도 결정코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라한은 목숨이 다하게 되면
깊고도 큰 환희를 낳으니
그것은 독을 담는 그릇을 버리는 것과 같고
역시 또한 온갖 병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비유자(譬喩者)는 말하기를,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引起)된 6처(處)를 목숨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아라한의 몸)이 만약 무루라면 성자는 마땅히 [목숨을] 독을 담는 그릇 따위와 같다고 관찰해서는 안 될 것이니, 계경에서 “모든 아라한은 항상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꾸짖고 훼손한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곧 성자라면 마땅히 모든 무루법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꾸짖거나 훼손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의 몸은 결정코 유루이다. 계경의 말씀에 의하면, ‘무명에 덮이고 탐애(貪愛)에 묶이면 범부도 지자(智者)도 다 같이 몸을 낳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만약 ‘무명에 의해 초래된 몸이 멸하면 명(明)에 인기된 몸이 다시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지자의 경우 무명과 탐애에 의해 초래되는 몸은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명에 의해 인기된 무루의 몸을 갖는다고 하면), 이는 곧 경설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각분(覺分, 즉 菩提分法)은 마땅히 어떤 과보를 성취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아라한의 몸이 유루가 아니라면, 이는 바로 병과 같고 독과 같아 가히 싫어하여 훼손해야 할 몸이라 하면서 그것이 3유(有:욕유ㆍ색유ㆍ무색유)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비유사(譬喩師)를 제외하고서 누가 이같이 생각하겠는가?
또한 안(眼) 등의 법은 허물(번뇌)를 갖거나 허물을 떠났거나 그 자체의 양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하여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65) 또한 비유부(譬喩部)는 [그러면서] 이생의 몸 중의 안 등도 역시 온갖 번뇌의 의지처가 아니라고 하니, 그들은 5식(識)에 염오함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라한이 온갖 취온(取蘊)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 경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경에서 “그(아라한)는 자신의 5취온을 옴이나 병 따위와 같이 관찰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비유부)은 전통적으로 ‘비유정수와 같은 외적 존재는 바로 괴로움[苦]이지만 고제(苦諦)는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럴 경우 마땅히 유탐(有貪)은 탐수면이 아니며, 안(眼)은 안계(眼界)가 아니며, 수(受)는 수온(受蘊)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지만, 계경에서 말하기를 “촉(觸)과 함께 생겨나는 ‘수’를 수온이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온갖 괴로움은 모두 고제라고 해야 한다. 즉 계경에서 “온갖 괴로움[苦]에 대해, 혹은 괴로움의 원인[苦集]에 대해 미혹하여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고제와 집제에 대해 의심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상 비유부가 논의하는 종의에 지극한 이치가 결여되었음을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할 만한 지극한 가르침[至敎, 즉 聖敎]이 있다고 하였던가?
그들은 역시 있다고 말한다. 즉 계경에서 “탐ㆍ진ㆍ치를 떠나면 온갖 번뇌[漏]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여섯 가지의 마음을 가려 덮는 것[心栽覆事, 즉 6境]이 있으니, 이른바 유루(有漏)ㆍ유취(有取)의 온갖 색(色)이 마음을 가려 덮는 것이다. 성(聲) 등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그들은 ‘여기서 마음을 가려 덮는 것을 이미 유루ㆍ유취의 온갖 색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이와는 별도로 무루의 온갖 색이 존재함을 알아야 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촉(觸)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곧 그들은 의준량(義准量)에 의거하여 이같이 그릇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66) 그렇지만 성교(聖敎) 중에서는 마땅히 이러한 의준량의 이치에 근거하여 온갖 희론(戱論)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컨대 계경에서 “나는 존재하는 모든 촉(觸)에서 생겨난 수(受)--일체를 모두 다 멸하였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 경우도 역시 의준량에 근거하여 ‘촉에서 생겨나지 않은 별도의 온갖 수가 있다’고 해야 하겠지만, 마땅히 이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대가섭파(마하가섭)는 시주(施主)의 집에 대해 마음으로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 경우도 역시 의준량에 근거하여 ‘그 이외 다른 아라한들은 시주의 집에 대해 마음으로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있다’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경(앞서 비유논사가 인용한 경문)에서는 의준량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 ‘만약’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즉 거기서는 “만약 유루ㆍ유취의 온갖 색이 마음을 가리워 덮는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단지 “유루ㆍ유취의 온갖 색이 마음을 가리워 덮는다”고만 말하고 있으므로 이는 색의 허물을 나타낸 것이지 색을 [유루ㆍ무루 등으로] 간택 분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종의는 [지극한 이치가 결여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지극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역시 논증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들(譬喩部)의 상좌(上座)가 “만약 어떤 필추(苾芻, 비구)가 유루ㆍ유취라면(즉 번뇌를 갖는다면) 그는 현법(現法)에 반열반하지 못한다”는 경의 말씀을 그릇되게 인용하고,67) 또한 다음과 같은 경의 말씀을 인용하였을지라도 이는 그들의 종의에 도무지 상응하지 않는다.

진실의 범행은 온갖 번뇌[漏]를 떠나
세간에 물들지 않으니
이를테면 독각(獨覺)과 세존께서는
자재하여 온갖 번뇌[漏]를 떠나셨다네.

나 역시 아라한 등이 유루(有漏)이고 유취(有取)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68) 안(眼) 등을 비록 유루(有漏)ㆍ순취(順取)라고 일컬을지라도 [그 자체는] 누(漏)나 취(取)가 아니다.69) 경에서도 역시 ‘아라한 등은 순취의 법이 없으며, 온갖 유루를 떠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들지 않는다[不染]’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세간의 일체의 경계에 대한 번뇌를 끊었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도 “탐 등을 물듦, 즉 염(染)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유정이 업에 따라 나아가는 일체의 세계[趣]에 대해 탐욕 등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 즉 “부처님께서 필추들에게 고하시기를, ‘아라한 등은 모든 세간에 대해 이미 이계(離繫)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할지라도 능히 항복 받아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는 말씀을 ‘세간의 모든 유루의 일들을 행함에 있어 일체의 번뇌에 속박되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 등은 모든 세간에 대해 이미 이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할지라도 능히 항복 받아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설한 이 경을 ‘아라한 등은 비록 세간에 처해 있을지라도, 또한 역시 세간을 성취할지라도 세간을 극복[對治]할 만한 힘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세간의 번뇌와 더러움을 물리쳐 항복 받았다’는 뜻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의는 도무지 [불타의] 지극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논증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훈사문(訓詞門, 어원)에 근거하여 ‘누(漏)와 함께하는 것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고 주장하였다.70)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징표[相,논거]를 설정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색 등에 대해 즉각적으로 갈애, 혹은 미움, 혹은 아만을 낳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니 어떻게 과거ㆍ미래가 현재와 함께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71)
또한 비유자(譬喩者)는 허황되게 [잡을 수 없는] 허공을 흔들고 있으니, 경에서 18계(界) 중 앞의 15계는 한결같이 유루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안(眼)과 존재하는 모든 색(色)과 존재하는 모든 안식(眼識), 나아가 신(身)과 촉(觸)과 신식(身識)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이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우리는 이 경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경을 외우지 않고서는 능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다.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경을 외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일체의 계경을 모두 지식의 결정적 근거로 삼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경부(經部)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그들은 이를테면 계경을 보고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의와 서로 다를 경우 바로 그 경을 비방하거나 부정한다.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경문(經文)을] 고쳐 다른 글을 짓고서 본래의 경문은 전승하여 외운 자의 과실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의와는 다른] 일체의 모든 경을 신수(信受)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순별처경(順別處經)』 등과 같은 경은 모두 성교(聖敎) 중에 포함되지 않으며, 이것들은 바로 대법자(對法者, 아비달마 논사를 말함)가 실로 자신의 종의를 애호하여 지어 『아급마(阿笈摩)』 속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을 등지고, [불타의] 거룩한 말씀에서 멀어진 채 수많은 이단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나(중현)는 바야흐로 이 논(『순정리론』)에서 마땅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드러낼 것이다.
027_0684_a_22L此復云何謂五取薀色乃至識如說云何名色取薀謂有漏色隨順諸取廣說乃至識亦如是何緣取薀名爲有漏以於彼中漏隨增故有身見等諸煩惱中立漏名想令染污心常漏泄故與漏相應及漏境界隨增漏故名漏隨增隨增眠義後當廣辯由此已遮不同界地及無漏緣煩惱境界隨眠有漏彼此展轉不隨增故非相對立如是二名有漏無漏復有何相如世尊言有漏法者謂所有色隨順諸取是能增益諸有取義廣說乃至識亦如是與此相違是無漏法有漏無漏略相如是爲廣分別復作是言謂於過去未來現在諸所有色生長現貪或瞋或癡或隨一一餘隨煩惱諸心所法乃至廣說復爲何義作如是說爲別分別順諸取義若爾唯應說能生長貪等煩惱或隨一一餘隨煩惱非摠相說能別了知爲令一切別知義故以非一切一切煩惱皆可現行故摠說或隨一一餘隨煩惱又諸隨眠行相微細彼現行位有不能知忿等行相麤顯易知故唯摠說餘隨煩惱或墮世閒名爲有漏世閒所攝名墮世閒謂處世閒不出爲義依苦諦體立世閒名故契經言吾當爲汝宣說世閒及世間集又作是言觀世閒集於世閒無是爲非有乃至廣說復云何知諸墮世閒皆名有漏如契經言吾當爲汝說有漏法及無漏法有漏法者謂諸所有眼諸所有色諸所有眼識諸所有眼觸諸所有眼觸爲緣內所生或樂受或苦受或不苦不樂如是乃至墮世閒意墮世閒法世閒意識墮世閒意觸廣說乃至有漏法無漏法者謂出世閒意出世閒法出世閒意識廣說乃至名無漏依此聖言及由正理有漏無漏法相成立無法自制譬喩論師違理背妄作是說非有情數離過身中所有色等名無漏法此必不然違契經如契經言謂於過去未來現在所有色生長現貪或瞋或癡乃至廣非有情數離過身中所有色等能生長有情貪等云何無漏所以者無比指鬘烏盧頻螺迦葉波等世尊身生長貪癡等漏故彼計於非境第七是依第七如油於麻漏所依故名有漏此不應理以於去說起現故未曾依去來起現在貪是故彼計決定非善又上經言隨一一餘隨煩惱諸心所法非隨煩有非心所爲簡彼故復言心所知復言心所法者爲顯於言是境第又應滅道是無智依如言無明以於苦等無智爲性此中於言第七聲若此於言非許依者因何固執彼定是依故於色等生長癡等非定漏依方名有漏又一切聲皆應無漏聲定非漏所依故不應執聲定是無經言聲體是雜染故非說無漏爲雜染是應理言又諸異生身中善識應成無漏非漏依故若言漏分隨逐故者學位諸識皆應有漏又顯色等糞穢酒等非漏依故應皆無漏又阿羅漢身是無漏不應正理故契經說諸所有苦皆取爲緣然阿羅漢身定是苦故契經言阿羅漢壽終 深生大歡喜 其猶捨毒器亦如衆病除譬喩者說先業所引六處名壽此若無漏聖不應觀如毒器等如契經言諸阿羅漢常自羞厭訶毀己身聖者不應羞厭訶毀諸無漏法故阿羅漢身定有漏由契經言無明所蔽貪愛所縛愚夫智者同感有身若謂無明所感身滅餘明所引身復續生智者應無無明貪愛所感有身便違經說又諸覺分應成有果若阿羅漢身非有者如病如毒可厭毀身而言非彼三有所攝除譬喩師誰爲此計又眼等法有過離過體相同故不應別執又譬喩部異生身中眼等亦非諸漏依止彼執五識無染污故若阿羅漢無諸取薀豈不違經如說彼觀自五取薀如癰病等又彼傳執非有情數外法是苦而非苦諦應執有貪非貪隨眠眼非眼界受非受薀如契經言觸俱生受名爲受薀故應諸苦皆是苦諦由契經言若於諸苦或於苦集迷惑猶豫是於苦諦集諦生疑如是已辯譬喩論宗闕於至理爲有至教證彼執耶彼謂亦有故契經言離貪則離諸漏又說有六心栽覆事所謂有漏有取諸色心栽覆事聲等亦爾彼謂此中心栽覆事旣說有漏有取諸色故知別有無漏諸色廣說乃至觸亦如是彼依義准妄爲是計然聖教中不應依此義准理門起諸戲論如契經說我諸所有觸所生受一切皆滅亦應義准別有諸受非觸所生而不應許又契經說大迦葉波於施主家心無繫著亦應義准餘阿羅漢於施主家心有繫著又彼經中非容義准無若聲故由彼不言謂若有漏有取諸色心栽覆事但言有漏有取諸色心栽覆事此顯色過非爲簡色是故彼宗亦無至教雖彼上座誤引經言若諸苾芻有漏有取彼於現法不般涅槃又引經言眞梵離諸漏 不染於世閒 謂獨覺世尊自在離諸漏此於彼義都不相應我亦不許阿羅漢等有漏取故眼等雖名有漏順取而非取漏經亦不言阿羅漢等無順取法離諸有漏言不染者謂於世閒一切境界煩惱斷故由契經說貪等名染於世閒所攝受事及一切趣永離貪等故名不染由此卽釋餘契經言佛告苾芻阿羅漢等於諸世閒已得離繫雖行世閒而能摧伏不爲世閒之所染污謂於世閒諸有漏事不爲一切煩惱所縛是故說言阿羅漢等於諸世閒已得離繫雖行世閒而能摧伏不爲世閒所染污者此經意說阿羅漢等雖處世閒亦復成就而於世閒得對治故摧伏世閒煩惱染污是故彼宗都無至教又彼起執依訓詞門謂與漏俱名爲有漏此釋非理立相異故如契經言謂於過去未來現在諸有色等生長現愛或恚或慢乃至廣說如何去來與現俱起又譬喩者唐攪虛空十八界中前十五界一向有漏經所說故謂契經言有漏法者諸所有眼諸所有色諸所有眼識如是乃至身觸身識諸所有顯無餘義彼言我等不誦此經不誦經能成所樂欲成所樂當勤誦又彼不以一切契經皆爲定量名經部謂見契經與自所執宗義相卽便誹撥或隨自執改作異文本經文傳誦者失或復一切皆不信如順別處等經皆言非聖教攝對法者實愛自宗制造安置阿笈摩彼由此故背無量經違越聖言興異執我此論中漸當顯示

3. 무루법과 무루의 의미


1) 무루법의 종류

유루와 유루의 근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무루(無漏)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無爲)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유루에 대해] 달리 해석하여 말하기를, “누(漏)와 동등한 종류이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이니, 유종족(有種族)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누(漏)로 인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이니, 유독식(有毒食)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혹은 어떤 이는 “누(漏)와 함께 끊어지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이니, 천제석(天帝釋)을 유달책가(有怛策迦)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곧 [천제석은] 그것과 더불어 함께 떨어지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다.72) 이처럼 [유루에 대한] 어원적 해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도성제란 유루가 아닌 (즉 무루의) 색 등 5온을 말하며, 세 가지 무위란 허공(虛空)과 두 가지의 멸(滅)을 말하니, 이른바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이 바로 그것이다. 곧 이러한 허공 등의 세 종류의 무위와 도성제를 이 같은 인연에서 무루라고 이름한 것이다. 도성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시 설한 바 있지만 뒤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73)
027_0686_b_07L已辯有漏及有漏因云何無漏謂道聖諦及三無爲有異釋言與漏等類故名有如有種族復有釋言爲漏所污故名有漏如有毒食或有釋言與漏俱斷故名有漏如天帝釋有怛策迦彼俱墮如是等類訓釋衆多與彼相名無漏法道聖諦者謂非有漏色等五薀三無爲者虛空二滅所謂擇滅及非擇滅此虛空等三種無爲及道聖諦由是因緣名爲無漏次前已說其道聖諦後當廣辯
027_0686_c_02L
2) 세 가지 무위

앞에서 간략히 설한 세 가지 무위 중에서 허공(虛空)은 다만 무애(無礙,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갖지 않은 것)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거기에 온갖 존재[諸法]가 [장애됨이 없이]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에 ‘허공’이라 이름하였다.74) 이것은 바로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니, 존재하는 모든 대종(大種, 地ㆍ水ㆍ火ㆍ風이라는 근원적 물질)과 대종으로 이루어진 색취(色聚) 등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능히 두루 가리거나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장애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역시 능히 장애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음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한 것이다.
허공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택멸(擇滅)은 이계(離繫)를 본질로 한다. 4성제 각각에 대해 개별적으로 간택(簡擇, 분별 판단)하기 때문에 ‘택’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는 바로 선한 지혜[善慧]의 차별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계의 열반(즉 滅)은 바로 이러한 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택멸’이라고 이름하였다.75)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멸(斷滅)되는 모든 법은 다 같이 동일한 택멸이다”고 하였다.76) 그러나 대법자(對法者, 아비달마의 논사)는 “[택멸은] 계박하는 것(즉 번뇌)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말한다. 만약 단멸되는 모든 법이 동일한 택멸이라면,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의 멸을 증득(證得)할 때 그 밖의 나머지 번뇌의 멸도 증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77)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증득한다고 하면, 그 밖의 다른 대치도(對治道)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약 증득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즉 단일한 택멸을 놓고서 일부만을 증득하고 나머지는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단일한 것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78)
택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미래에 생겨날 것을 영원히 장애하면 비택멸(非擇滅)을 획득한다. ‘택’은 참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하는 지혜인데, 이러한 지혜에 의하지 않고 미래법의 생기를 영원히 장애하는 어떤 법을 비택멸이라고 한다. 예컨대 안근(眼根)과 의근(意根)이 어떤 하나의 색(色)에 대해 전념할 때, 그 밖의 다른 색과 일체의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은 찰나찰나에 걸쳐 [현현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려 그것에 대한 일부의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는 비택멸을 획득하게 된다. 즉 5식신(識身)과 의식신(意識身)의 일부 등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경계 대상에 대해 끝내 생겨날 수 없으니, 그것들은 동시 존재하는 대상[俱境]을 조건으로 삼아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하는 소의(所依, 감관)와 소연(所緣, 대상)과 관계[繫屬]할 때 비로소 그 작용을 낳기 때문이다.79)
그러나 만약 어떤 법이 있어 능히 그 같은 법이 작용을 낳는 것을 장애한다면, 이 법은 지혜와는 관계없이 그 같은 법을 장애하여 미래세에 머물게 하고,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비택멸을 획득한다. 이러한 법의 실유(實有)에 대해서는 이후(본론 제50권~52권)에 마땅히 분별하게 될 것이다.
027_0686_b_18L於略所說三無爲中虛空但以無礙爲性於中法最極顯現故名虛空是則無障以爲其相所有大種及造色聚一切不能遍覆障故或非所障亦非能障故說言無障爲相已說虛空擇滅卽以離繫爲性於四聖諦各別簡擇故名爲擇卽是善慧差別爲性離繫涅槃是此果故名爲擇滅有作是言所斷法同一擇滅對法者言隨繫事若諸所斷同一擇滅證得苦法智忍所斷煩惱滅時餘煩惱滅爲證得若證得者修餘對治則爲無用不證得是則一物證少非餘與理相有分過故由是定應許離繫事繫事量不違正理已說擇滅永㝵當得非擇滅擇謂如理勤所成慧由此慧有法永㝵未來法生名非擇如眼與意專一色時於所餘色及一切聲觸等念念滅中對彼少分意處法處得非擇滅以五識身及與一分意識身等於已滅境終不能緣俱境故由彼生用繫屬同時所依緣故若法能㝵彼法生用此法離定㝵彼法令住未來永不生故非擇滅此法實有後當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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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위법과 그 이명(異名)

본문(本文)의 순서에 따라 설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 이것을 유루라고 한다’고 설하였는데, 무엇을 일컬어 유위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으로
역시 또한 세로(世路)ㆍ언의(言依)
유리(有離)ㆍ유사(有事) 등이라고도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위의 법은]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온갖 재횡(災橫)을 감추어 쌓아두었거나[隱積] 손상시켜 제압하는 것[損伏]이기 때문에 ‘온’이라고 한 것이며, 계(戒) 따위와는 다르기 때문에 ‘색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80) 즉 계 등의 5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능히 다 포섭하지 못하지만, 색 등의 5온은 유위법을 모두 포섭한다. 그래서 유위법을 색 등의 5온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위’라고 말한 것은 여러 조건[緣]이 집합[聚集]하여 그것들 공동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81)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찌 유위라고 하겠는가?
이것(미래법)은 바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역시 유위라고 이름한다. 예컨대 불에 태워질 땔감이 아직 타지 않은 상태에 있어도 이것은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82) 혹은 일찍이 생겨난 것[曾, 과거법], 앞으로 생겨날 것[當, 미래법]에 근거하여 [유위를] 설정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거문고나 비파 등을 일컬어 ‘소리를 갖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83) 또한 역시 유방이나 연화지(蓮花池)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법(즉 미래법)도 그러한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유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위법을 세존께서는 이러저러한 경 중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에 따라 세로(世路, adhvan) 등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는 다시 어떻게 말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모든 유위법을 역시 ‘세로’라고도 이름하였으니, 색 등의 5온은 생성 소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며, 미래ㆍ현재ㆍ과거(즉 世)라는 길[路] 가운데 있으면서 유전하기 때문이다.84)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법(즉 미래법)은 여러 조건[緣]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생겨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바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이름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유위법은] 무상(無常)에 의해 집어 삼켜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혹은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언의(言依, kathāvastu)’라고도 이름하였다. 여기서 ‘언’이란 말[言音]을 말한다. 혹은 능히 설하는 것[能說]으로, 바로 말의 상속(相續) 차별을 말한다. 그리고 ‘의(즉 말의 근거)’란 명사적 단어[名]와 이와 함께하는 의미[義]를 말하는 것으로,85) 5온(즉 일체의 유위제법)을 모두 포섭하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언의에는 세 가지만이 있을 뿐 네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고 설한 바와 같다.86) 이에 따라 『품류족론(品類足論)』을 잘 해석해야 할 것이니, 거기서는 ‘언의는 5온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87)
어찌 [명사적 단어가 유위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무위에 근거하여서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하지 않을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그 같은 무위의 의미는 언의로 설정되지 않는 것인가?
그것(무위)의 의미는 명사적 단어와 함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언의란 명사적 단어[名]와 함께하는 의미[義]를 말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만약 의미와 명사적 단어를 함께 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의’로 설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위의 의미는 유위인 명사적 단어와 함께 설할 수 없으며, [명사적 단어와] 함께하는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무위를] ‘언의’로 설정할 수 없으니, 타세(墮世, 유루의 이명)와 이세(離世, 무루의 이명)는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이것(5온)의 멸을 무위(택멸)라고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도 “온의 멸을 일컬어 ‘멸(즉 택멸열반)’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온의] ‘멸’은 언의가 아니다. 언의는 바로 온이다.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것을 ‘언의’라고 하니, 이를테면 근거[依]와 의미[義]와 말[語]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무위는 오로지 의미만을 갖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의미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근거’도 되지만 말이 부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혹은 [세존께서는 유위법을] ‘유리(有離, saniḥsāra)’라고도 이름하였다. 열반은 온갖 세계[趣]로 윤회하며 생사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리’라고 하니, 이는 바로 온갖 세계로 끊임없이 유전하는 것을 종식시켰다는 뜻이다.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열반을 획득하였다면 결정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즉 유위법은 바로 이러한 ‘리’를 갖기 때문에 ‘유리’라고 이름하였으니, 마치 재산을 갖은 이를 ‘유산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유위법은 출리(出離)를 갖는다. (다시 말해 출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뗏목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聖道)도 역시 마땅히 버려야 할 것으로, 계경에서도 “법조차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어찌 비법을 끊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세존께서는 유위법을] ‘유사(有事, savastuka)’라고도 이름하였다. 여기서 ‘사’란 이를테면 근거가 되는 것[所依], 혹은 머물게 되는 것[所住]을 말하니, 이는 바로 원인의 뜻이다. 즉 결과는 원인에 근거하고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으로,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결과는 원인에 머무르며 능히 원인을 가리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이 침상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원인이 결과에 의해 은폐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인 전후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세밀하고 거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곧 유위는 바로 이러한 ‘사(원인)’를 갖기 때문에 ‘유사’라고 이름하였으니, 비유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유위란 오로지 이러한 것이니, 이상과 같은 따위의 종류가 바로 유위법을 차별 짓는 여러 명칭들이다.88)
027_0686_c_20L隨順本文次第理故前說除道餘有爲法名有漏何謂有爲應當辯說頌曰又諸有爲法 謂色等五薀 亦世路言依有離有事等論曰老病死等災撗差別隱積損伏名爲薀爲別戒等故言色等戒等五薀不能具攝一切有爲色等五薀具攝有爲故此偏說言有爲者衆緣聚集共所生故未來未起何謂有爲是彼類故亦名有爲如所燒薪於未燒位是彼類故亦名爲薪或據曾當立名無失如琴瑟等名爲有聲亦如乳房蓮花池等諸不生法不越彼類名有爲此有爲法彼彼經中世尊隨義名世路等彼復云何謂諸有爲亦名世路色等五薀生滅法故未來現在過去路中而流轉故諸不生法衆緣闕故雖復不生是彼類故立名無失有說無常之所呑食故名世路或名言依言謂言音或謂能說此則語聲相續差別依謂名俱義卽具攝五薀如契經說言依有三無四無五由此善通品類足論彼說言依五薀所攝豈不亦依無爲起說何故彼義不立言依彼義與名無俱理故如說依謂名俱義若義與名可俱說者爲言依以無爲義與有爲名不可俱無俱義故不立言依墮世離世俱理故或此滅故建立無爲故契經言薀滅名滅滅非言依言依是薀有釋言若於是處三分可得立爲言謂依無爲唯義故非言依亦依而闕於語或名有離趣輪沈溺生死涅槃永捨故名爲離息諸趣恒流轉義若已至得定不還此有離故說名有離如有財者名爲有財卽是有爲有出離義一切有爲皆同舩筏是故聖道亦應捨離契經言法尚應斷何況非法或名有事謂所依或是所住卽是因義依於因從因生故如子依母或果住能覆因故如人住牀是因爲果映蔽義因果前後故及細麤性故有事故說名有事喩如前說此唯有如是等類說有爲法諸名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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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루의 이명(異名)

여기서 설하고 있는 유위법 중에서 [유루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를 취온(取蘊)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유쟁(有諍)이라고도 설하며
아울러 고(苦)ㆍ집(集)ㆍ세간(世間)ㆍ
견처(見處)ㆍ3유(有) 등이라고도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유루라고 한다’고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어떠한 까닭에서 여기서 [유루에 대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인가?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의 개념[名想]을 차별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여, 혹은 그것의 결정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이다.
앞에서 ‘일체의 유위를 온(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89) 지금 여기서는 ‘유루를 일컬어 취온(取蘊)이라 한다’고 설하였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무루는 다만 ‘온’이라고 이름할 따름이다. 즉 온갖 번뇌[漏]에 대해 ‘취(取, upādāna)’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그것은 능히 3유(有:欲有ㆍ色有ㆍ無色有)의 생에 집착하여 취[執取]하기 때문에, 혹은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업에 집착하여 지니기[執持] 때문에 ‘취’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온은 이러한 ‘취’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혹은 능히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마치 [풀이나 겨로부터 생겨난 불을] 초강화(草糠火)라고 하는 것과 같고, [꽃과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유루법을 역시 유쟁(有諍, saraṇā)이라고도 이름한다. 말하자면 번뇌에 대해 ‘쟁(諍)’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번뇌는 선한 품성을 동요시키기 때문이며, 자신과 타인을 해치고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온은 ‘쟁’과 함께하기 때문에, 혹은 ‘쟁’은 온과 더불어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법을] ‘유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곧 온과 ‘쟁’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경우 또 다른 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유루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유루를] ‘고(苦, duḥkh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5취온은 바로 온갖 핍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그 본성이 거칠고 무거워 안온(安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경우 [유루를] ‘집(集, samudaya)’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즉 5취온)는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능히 집합하여 이루어지기[集成] 때문이다.
혹은 [유루를] ‘세간(loka)’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존재[性]는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한다”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만약 그렇다면 도제(道諦)도 마땅히 ‘세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으니, 두 번째의 허물어짐이 없기 때문이며,90) 도제의 허물어지는 성질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간의 허물어지는 성질은 결정적이다.
혹은 [유루를] ‘견처(見處, dṛṣṭisthān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살가야(薩迦耶) 등의 5견(見)이 여기에 머물면서 수면을 수증(隨增)하기 때문이다.91)
어찌 유루가 일체의 번뇌를 모두 수증시키지 않을 것인가? 온갖 ‘견’은 누(漏)와 취(取)와 쟁(諍)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이미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비록 그러한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러한 온갖 ‘견’은 유루법에 대해 일체의 모든 종류, 모든 때, 모든 특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히 집착하여 동요 없이 수면을 수증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작용이 더욱 왕성하게 증가한다. 즉 유루는 능히 이러한 온갖 ‘견’을 생장(生長)시키는 토대[處]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거듭하여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탐(貪) 등과 치(癡)와 의(疑)는 이와 같지 않다. 즉 ‘탐’ 등은 일체의 모든 종류의 유루법에 대해 집착할지라도 모든 때에 집착하지는 않으며, ‘치’는 모든 때에 집착할지라도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의’는 무차별적으로 집착할지라도 견고하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그러한 번뇌의 토대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유루를] ‘3유(有)’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루는] 존재[有]의 원인, 존재의 근거로서, 세 가지의 존재(欲有ㆍ色有ㆍ無色有)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유염(有染)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는 등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종류가 바로 뜻에 따른 유루법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027_0687_b_19L此所說有爲法中頌曰有漏名取薀 亦說爲有諍 及苦集世閒見處三有等論曰豈不前說除道聖諦餘有爲法名爲有漏何故此中復重說耶雖前已說而欲顯彼差別名想或爲顯彼名想定義故復重說前說一切有爲名今說有漏名爲取薀義准無漏但名爲薀卽諸漏中立取名想以能執取三有生故或能執持引後有業故名爲取薀從取生或能生取故名取如草糠火如花果樹卽有漏法亦名有諍謂煩惱中立諍名想觸動善品故損害自他故薀與諍俱或諍薀而得生起故名有諍此中意顯薀之與諍非隨闕一餘可得生及者餘有漏名想謂或名苦卽五取薀是諸逼迫所依處故自性麤重不安隱或名爲集卽彼種類能爲因故集成故或名世閒可毀壞故如世尊性可毀壞故名世閒若爾道諦應是世閒不爾第二毀壞無故道諦毀壞性不定故世閒毀壞性決定故名見處薩迦耶等五見住中隨增眠豈不有漏一切煩惱皆隨增耶不諸見諍攝前已說耶雖有此而彼諸見於有漏法一切種無差別堅執無動隨增眠故體用增爲顯有漏是能生長此諸見處故應重說貪等疑則不如是以彼貪等有一切種無一切時癡一切時無差別疑無差別而不堅執是故有漏不說彼處或名三有有因有依有攝故等言爲攝名有染等如是等類是有漏法隨義別名

Ⅱ. 제법분별(2) -- 5온ㆍ12처ㆍ18계


1. 색온(色蘊)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색 등의 5온을 유위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색 등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이란 오로지 5근(根)과
5경(境), 그리고 무표(無表)이다.
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색’이라 함은 색온(色蘊)을 말한다. ‘5근’이라 함은 이른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근(身根)이 바로 그것이다. ‘5경’이라 함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경(觸境)이 바로 그것이니, 안 등에 포섭되고 그것에 의해 작용되는 것[所行]을 말한다.
‘그리고 무표’라고 함은 법처(法處)에 포섭되는 색을 말한다. 나아가 ‘오로지’라고 함은 오로지 여기서 언급된 10처(處)와 1처의 일부를 일컬어 색온이라 한다는 말이다.92)
027_0688_a_08L如上所言等五薀名有爲法色薀者何頌曰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論曰色謂色薀言五根者所謂眼身根言五境者所謂色所觸境謂眼等所攝所行及無表者謂法處色唯者唯此所顯十處一處少分名爲色薀
027_0688_b_02L
1) 5근(根)

이와 같은 온갖 색의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러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5근(根)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안 등의 5근을 말하며, ‘식(識)’이란 바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식(身識)을 말한다. 그리고 ‘근거’라고 함은 안 등 5식의 소의(所依)를 말하니, 이와 같은 소의는 정색(淨色)을 본질로 한다.93) 곧 이러한 [안 등 5식의 소의가 되는] 정색을 안근 등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래서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안 등의 근은 정색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하였으며, 본론(本論)에서도94) 역시 “무엇을 일컬어 안근이라고 하는가? 안식의 소의로서, 정색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등 [여러 경론에서] 이와 같이 널리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성교(聖敎) 중에서는 근으로써 식을 분별하지 경계(즉 대상)로써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하는 말은 근(根)을 나타내는 것이지 경(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러한’이란 바로 경(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의식은 색 등을 소연(所緣)으로 하기 때문에 색 등에 대한 의식이라 이름하고, 그러한 식의 소의를 안근 등이라고 이름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니, ‘정색’이라는 말에 의해 간택 분별[簡別]되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5)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정색의] ‘색’이라는 말은 마땅히 아무런 쓸모가 없어야 할 것이니, ‘그러한 [색 등에 대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청정한 것[淨]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근(根)이라 한다’고 하여도 뜻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즉 식의 소의는 ‘청정한 것’이지 ‘색’이 아니므로 이를 분별하기 위해 마땅히 ‘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색’이라는 말은 계경에서 설한 바라고 한다면, 계경에서는 가히 그럴 수 있으니, 식의 근거를 차별하여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정색이라는] 말을 본론(本論)에서 설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역시 다 같이 함께 의심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이상과 같은 해석상의 의문과 난점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정’에] ‘색’이라는 말을 붙여 써야 할 것이니, 만약 ‘식이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재석(有財釋)으로 해석할 경우, 마땅히 청정한 믿음[淨信]을 안근 등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96) 곧 [‘정’에] ‘색’이라는 말을 붙여 쓰는 것은 이러한 해석을 고려하여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라는 말은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으며, [앞서 인용한] 본론(本論)에서 말한 바도 이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앞의 말은 이(耳) 등의 4근(이ㆍ비ㆍ설ㆍ신근)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그것들은 모두 정색을 본질로 할지라도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그러한 네 가지 근은 안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뒤의 말은 무간멸(無間滅)의 근거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그것(의근) 역시 비록 안식의 소의는 될지라도 정색을 본질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그러한 의근(意根)은 안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97)
혹은 또한 앞의 말은 동분(同分)의 안(眼)을 나타내고, 뒤의 말은 피동분(彼同分)의 안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98) 그 밖의 다른 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정색 [그 자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5근으로 분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공능(功能, 작용)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공능상에 차별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공통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소의(즉 감관)는 각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는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원인이 다를 경우 결과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되는 사실로서, 마치 거문고와 비파와 피리의 소리가 다른 것과 같다.99) 그렇지만 안(眼)ㆍ이(耳) 등의 원인이 되는 4대(大) 각각에 차별이 있으니, 원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안 등의 정색 자체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정색 자체(즉 5근)에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원인(즉 4대)상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에 결과인 정색에도 마땅히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비록 [정색이라는] 동일한 특성[相]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바로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으로, 마치 내외(內外)의 대종(大種)에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소리[聲]는, 비록 그 원인이 다를지라도 그 특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범주[處]에 포섭되는 것처럼 안 등의 5근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과실은 없다. 즉 소리는 비록 그 원인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식(識)의 경계 대상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지만, 안 등의 5근은 각기 종류가 다른 대상에 대한 인식의 소의이기 때문에, 또한 각기 개별적인 소의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온갖 근은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식(識)이나 수(受)는 비록 다 같이 요별(了別)이나 영납(領納)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특성을 지닐지라도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6식(識, 안식 내지 의식)과 3수(受, 苦ㆍ樂ㆍ不苦不樂)의 차별이 있으니, 이것(5근) 역시 이와 같다.
‘그러한 식(識)과 수(受)에 비록 6식과 3수로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특성은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는 것처럼, 안 등의 5근도 역시 마땅히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 ‘수’와 무위는 어떠한 근거에서 동일한 범주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동일한 범주에 포섭된다고 함은 자상(自相)의 동일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자상은 비록 다를지라도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00)
027_0688_a_15L如是諸色其相云何頌曰彼識依淨色 名眼等五根論曰彼謂前說眼等五根識卽眼身識依者眼等五識所依如是所依淨色爲體卽此淨色名眼等根故薄伽梵於契經中說眼等根淨色爲相本論亦說云何眼根眼識所依淨色爲性如是廣說諸聖教中以根別識不以境界故知彼言顯根非境有說彼者是境非根而無意識緣色等故名色等識彼識所依名眼等過由淨色言所簡別故若爾色言應無用彼識依淨名眼等根義已成故無識所依淨而非色爲簡彼故應用色言若謂色言是契經說契經可爾不說識依差別言故若謂此言是本論說彼亦同疑應俱思擇如是釋者爲遣疑難須置色言若識依言就有財釋則應淨信名眼等根故置色言爲簡此釋無有一法以識爲依色是淨可爲此釋是故色言甚爲有用由此卽釋本論所言又於此中前言爲簡耳等四根彼雖皆用淨色爲性而彼非爲眼識所依故彼四根非眼根攝後言爲簡無閒滅依彼雖亦爲眼識所依而彼非用淨色爲性故彼意根非眼根攝或復前言顯同分眼後言爲顯彼同分眼餘根亦爾若爾淨色相無別故應不成五不爾功能有差別故如何得知功能別者不共境識所依定故又因別故現見別因果有差別猶如琴瑟簫笛等聲耳等所因四大各有差別因差別眼等淨色體有差別體雖有別無異故其果淨色應無別者此難不雖同一相現見異故猶如內外大種差別若言如聲因雖有別而相一同一處攝眼等五根亦應爾者如是過聲雖因別而與一識爲境界一處所攝眼等五根別類境識所依性故又是別依用所顯故不應諸根同一處攝又如識雖同了別納一相由因別故而有六識三受差此亦如是如彼識雖六三異相同故一處所攝眼等亦應一處攝受與無爲何因同處故非一處攝顯自相同有自相雖異同處攝故
027_0689_a_02L
2) 5경(境)

안(眼) 등의 특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색(色) 등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色)에는 두 가지, 혹은 스무 가지가 있고
성(聲)에는 오로지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며
미(味)에는 여섯 가지, 향(香)에는 네 종류가
촉(觸)은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색에는 두 가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두 종류가 있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현색에는 다시 열두 종류가 있으며, 형색에는 여덟 종류가 있다. 그래서 [본송에서] ‘혹은 스무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이다.
현색의 열두 종류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연기[煙]ㆍ구름[雲]ㆍ먼지[塵]ㆍ안개[霧]ㆍ그림자[影]ㆍ빛[光]ㆍ밝음[明]ㆍ어두움[闇]을 말한다. 이러한 열두 종류 가운데 청색 등의 네 가지는 바로 현색이고, 구름 등의 여덟 가지는 바로 이것들이 차별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열두 가지 현색 중] 그 뜻이 애매한 것에 대해 마땅히 간략히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땅으로부터 물의 기운이 비등한 것을 설하여 ‘안개’라고 한다. 광명을 장애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그 가운데로 여타의 다른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그림자’라고 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어둠’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의 불꽃을 일컬어 ‘빛’이라고 하며, 달이나 별, 화약, 보주(寶珠), 번개 등의 온갖 번쩍임을 일컬어 ‘밝음’이라고 한다.
형색의 여덟 종류란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고(高)ㆍ하(下)ㆍ정(正)ㆍ부정(不正)을 말한다. 이 중에서 ‘정’이란 형태가 평등함(즉 평평함)을 말하며, 형태의 평등하지 않음을 일컬어 ‘부정’이라고 한다. 그 밖의 다른 색의 경우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더 이상 해석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에는 스물한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공(空)도 하나의 현색으로, 스물한 번째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공계(空界) 색의 차별이다.101)
현색 가운데 청ㆍ황ㆍ적ㆍ백ㆍ그림자ㆍ빛ㆍ밝음ㆍ어두움은 오로지 현색(즉 색채)으로서만 알려지고, 형색 가운데 신표업(身表業)은 오로지 형색(즉 형태)으로서만 알려질 뿐이지만,102) 그 밖의 색은 형색과 현색 모두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이에 관해] ‘하나의 실체[一事, eka dravya]에 어떻게 두 가지 본질(현색과 형색)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은 [유부의] 종의에서도 인정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103) 이에 대해서는 「변업품(辯業品)」 중에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104)
색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성처(聲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능히 부르는 말[呼召]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혹은 오로지 음향을 설하여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서(善逝, 부처님의 異名)의 성교(聖敎)에서는 모두 이렇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성(聲)이란 바로 이근(耳根)이 취하는 경계로서, 이는 바로 4대종(大種)에 의해 조작된 색의 존재[色性]이다.”
이러한 ‘성’, 즉 소리에는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집수(有執受) 혹은 무집수(無執受)의 대종에 근거하고, 아울러 유정수(有情數)와 비(非)유정수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가 되며, 여기에 가의성(可意性)과 불가의성의 차별에 따라 여덟 가지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105)
유집수의 대종이란, 말하자면 현재의 유정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장양(長養)ㆍ등류(等流)ㆍ이숙지(異熟地) 등의 대종을 말하며,106)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집수의 대종이라고 한다. 이 중 유집수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소리에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정류의 가행(加行, 노력)에 의해 생겨나는 것과 가행에 의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같은 유정류의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에도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손 등의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이며, 둘째는 어표업(語表業, 말)을 본질로 하는 소리이다. 이러한 어표업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미를 지닌 말[名]에 근거하여 일어난 소리와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지 않은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여 일어난 소리에도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기(有記)이며,107) 둘째는 무기(無記)이다.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지 않은 소리의 두 종류도 역시 그러하다. 이상이 바로 유집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일어난 소리의 차별이다.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정의 가행에 의해 일어나는 소리이며, 둘째는 온갖 사물이 요동하면서 생겨나는 소리이다. 즉 전자는 고둥이나 종 혹은 북 등의 소리를 말하며, 후자는 바람이나 숲 강물 등이 내는 소리를 말한다.
또한 유정수의 소리란 말소리, 손뼉 소리 등을 말하며, 그 밖의 소리는 바로 비유정수의 소리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소리를 듣고서 기쁨을 낳게 되는 것이 가의성의 소리(즉 듣기 좋은 소리)이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불가의성의 소리(즉 듣기 좋지 않은 소리)이다.
이상의 여덟 가지 분별 중 오직 앞의 두 가지 소리(유집수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만이 이치에 부합하니,108) 유정수와 비유정수의 소리는 바로 유집수와 무집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소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색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가의성(즉 보기 좋은 것) 등의 차별을 설할 수 있을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소리[聲處]에 대해서만 그렇게 설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색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유집수의 대종과 무집수의 대종을 근거로 하는 것이 있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이치상 실로 마땅히 그렇게 설해야 하지만, 성처의 경우 그 자성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그 같은 근거에 따라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색처 등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소리의 경우처럼 두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두 가지로 분별하는 것은] 본론(本論)에서 설하고 있는 성처의 특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같이 소리를 여덟 종류로 분별하여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찌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 모두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소리가 없다고 하겠는가? 예컨대 손과 북 등이 결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그러하지 않는가?
그와 같은 소리(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양자의 4대종은 각기 다른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4대종이 동일한 결과를 함께 획득하는 경우, [둘 중 하나는] 구유인(俱有因)이 되지 않는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109) 비록 유집수와 무집수의 두 4대종이 서로가 서로를 치고 두드렸다고 할지라도 다 같이 [자신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어 각기 별도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즉 그들의 소리는 각기 자신의 소의(所依)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 가지 소리는 생겨날 수 없다.110) 비록 유집수인 손의 대종과 무집수인 북의 대종이 서로 부딪치고, 이를 근거로 하여 두 가지의 소리가 발생할지라도 서로에 덮여 가려짐에 따라 한가지 소리(북소리)로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리의 차별상은 쉽게 알 수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성처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성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미처(味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그런데 [향처를 먼저 설하지 않고] 차례를 건너뛰어 [미처를 먼저] 설하는 것은, 그러한 대상(즉 맛과 향)에 대한 인식이 낳아지는 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미’란 말하자면 씹혀지는 것에 대해 맛본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달고[甘], 시고[酢], 짜고[鹹], 맵고[辛], 쓰고[苦], 담백함[淡]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미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향처(香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향’이란 말하자면 냄새맡아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호향(好香)ㆍ오향(惡香)ㆍ등향(等香)ㆍ부등향(不等香)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향과 부등향이라고 함은 소의신(所依身)을 이익되게 하고 감손(減損)시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미약(微弱)함과 증성(增盛)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등향과 부등향으로 분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설하기를,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호향과 오향, 그리고 평등향이 그것이다”고 하였다.111) 곧 능히 제근(諸根)의 대종을 장양(長養)하는 것을 일컬어 호향이라고 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오향이라고 하였으며, 앞의 두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평등향이라고 하였다.
혹은 온갖 복업(福業)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호향이라 하고, 온갖 죄업(罪業)의 증상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오향이라고 하였으며, 오로지 4대종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이름하여 평등향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향은 비록 증상과(增上果)일지라도 역시 차별이 있으니, 그래서 오로지 대종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평등향)도 역시 유정의 증상과에 포섭되는 것이다.112)
향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촉처(觸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촉’이란 말하자면 접촉되는 것으로,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이는 곧 열한 가지의 실체를 그것의 본질로 삼는다는 뜻이니, 말하자면 4대종과 일곱 가지의 조작된 촉[所造觸]―미끄러운 성질[滑性], 껄끄러운 성질[澁性], 무거운 성질[重性], 가벼운 성질[輕性], 그리고 차가움[冷], 허기짐[飢], 목마름[渴]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근(身根)도 접촉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것(신근)은 능히 그것(촉처)과 접촉하고, 그것도 결정코 이것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근은 오로지 능히 접촉하는 것일 뿐 접촉되는 것이 아니니, 비유하자면 안근은 오로지 보는 것이지 보여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작은 것[少法, 즉 극미]이 능히 작은 것과 접촉하는 일은 없으니, 소의(所依, 즉 신근)와 소연(所緣, 즉 촉경)이 무간(無間)에 생겨날 때, ‘촉’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하였다”고 설하였다.113) 즉 이러한 근에 근거하여 식(識)이 그 대상을 획득할 때, ‘이러한 근이 그 대상과 능히 접촉하였다’고 일시 가설하는 것으로, 이 경우 대상(촉경)은 식의 소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오로지 지(地) 등의 대종을 ‘접촉되는 것’이라고 말할 뿐 그것에 근거하는 색 등은 결정코 ‘접촉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곧 신근에 근거하는 식(즉 신식)은 그러한 대상(즉 색 등)을 조건[緣]으로 삼아서는 생기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색 등이 ‘접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꽃 등이 몸에 닿을 때 색 따위가 변괴(變壞)하는 것인가?
그것의 소의(즉 4대종)가 손상되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관찰하건대 소의(所依, 어떤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가 손상되거나 증익(增益)될 때 능의(能依, 어떤 존재에 능히 의지하는 것) 또한 손상되거나 증익되는 것으로,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다. 예컨대 어떤 지방에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면 농사도 풍요롭고 수풀도 무성하지만, [가뭄이 들어] 햇볕만 내리쬐면 이와는 반대가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소의인 대종이 손상되어 능의인 [꽃의] 색 등이 변괴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접촉에 관한] 논의는 뒤(본론 제7권 이하)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촉처의 열한 가지] 가운데 대종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 제2권)에서 널리 논설할 것이므로 지금 여기서는 미끄러움과 껄끄러움 등의 특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해석하리라.
미끄러움이 바로 이것(촉처)의 특성이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개별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개별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를 어원적으로 해석하면 서로 핍박하면서 접촉[逼觸]하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는 바로 유연하고 따뜻하여 잡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이러한 촉처는 껄끄러움의 작용을 갖기 때문에 ‘유삽(有澁)’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털을 지닌 자를 일컬어 ‘유모(有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껄끄러움 바로 이것이 특성이기 때문에 ‘껄끄러운 성질’이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힘은 ‘거칠고 바짝 마름[麤燥]’, ‘굳고 딱딱함[堅便]’의 다른 명칭이다.
능히 누르는 것[鎭壓]을 일컬어 ‘무거움’이라고 하니, 이는 다른 것을 성취하여 억누른다는 뜻이다. 즉 무거움이 바로 이것의 특성이기 때문에 ‘무거운 성질’이라고 하였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말하기를, “저울의 추를 올라가게 하기 때문에 ‘무거움’이라 일컬은 것이며, 옮기가 쉽기 때문에 ‘가벼움’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세간에서도 물체의 형태가 비록 클지라도 가벼움을 갖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벼움이 바로 이것의 특성이기 때문에 ‘가벼운 성질’이라고 말한 것이니, 『대비바사론』에서는 “저울의 머리를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가벼움’이라 이름하였다”고 설하고 있다.114)
그것에 핍박되어 따뜻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낳기 때문에 ‘차가움’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그것(촉처)을] 얼게 하여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차가움’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는 바로 그것의 손해와 이익을 신속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먹기 바라는 것을 일컬어 ‘허기짐’이라고 하였으며, 마시기를 바라는 것을 일컬어 ‘목마름’이라고 하였다.
‘바란다[欲]’는 것은 심소법(心所法)이니, 어찌 ‘촉’의 특성과 어긋나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는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촉’의 특성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이 없으니, 마치 강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고, 계단을 오르는 것을 역시 또한 즐거운 것이라고 하며, 밥을 사람의 목숨, 풀을 가축의 목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115)
그 밖의 아직 설하지 않은 어지러움[悶]ㆍ강력함[力]ㆍ연약함[劣] 등은 이(열한 가지) 중에 포함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어지러움은 미끄러움과 관계가 있으며, 강력함은 거침과 무거움에, 연약함은 유연하고 따뜻함(즉 미끄러움)이 있는 가벼운 성질 중에 포섭된다. 이렇듯 그 밖의 접촉되는 것의 여러 종류들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열한 가지 중에 포섭된다.
어떠한 인연에서 미끄러움 등의 차별이 있게 된 것인가?
[촉처의] 근거가 되는 대종이 증대하거나 미약해지는 등의 차별 때문이다. 즉 수(水)ㆍ화(火)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며, 지(地)ㆍ풍(風)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껄끄러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며, 지ㆍ수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무거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며, 화ㆍ풍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가벼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니, 그래서 죽은 이의 몸 안에는 무거운 성질이 증가하는 것이다. 또한 수ㆍ풍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차가움이 생겨난 것으로, 이에 따라 어지러움 역시 이것에 의해 생겨난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어지러움이 미끄러움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 것인가?
각각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허물도 없다. 혹은 다시 어지러움은 바로 미끄러움의 차별이지 오로지 미끄러운 성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들의 원인에도 역시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은 어떤 경우 수ㆍ풍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생겨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ㆍ화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두 말이 서로 모순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116)
그리고 ‘풍’의 요소가 증가하면 배고픔이 생겨나고, ‘화’의 요소가 증가하면 목마름이 생겨난다.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배당하여 해석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소조촉(所造觸)은 대종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존재 본성[體性]을 지니니,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117)
027_0688_c_16L辯眼等相色等今當說頌曰色二或二十 聲唯有八種 味六香四種觸十一爲性論曰言色二者是二種義謂顯與形此中顯色有十二種形色有八故或二十顯十二者謂靑黃赤白雲煙塵於十二中靑等四種是正顯色雲等八種是此差別其義隱今當略釋地水氣騰說之爲霧光明起於中餘色可見名影翻此爲日焰名光火藥寶珠電等諸焰名明形色八者謂長不正此中正者謂平等形不平等形名爲不正餘色易了故今不釋色有二十一種空一顯色第二十此卽空界色之差別於顯色中唯顯可知於形色身表業性唯形可了餘色形顯俱可了知如何一事有二體者非宗所許故無此過辯業品中當更思擇說色處當說聲處能有呼召故名爲或唯音響說之爲聲善逝聖教咸作是言聲是耳根所取境界是四大種所造色性此聲八種謂有執受無執受大種爲因及有情數非有情數差別爲四此復可意及不可意差成八執受大種謂現在世有情數長養等流異熟地等與此相違名無執受此中執受大種爲因聲有二謂有情類加行所生及餘不待加行所起其有情類加行所生復有二一者手等加行所生二者語表業爲自性此語表業復有二種謂依名及不待名依名起者復有二種者有記二者無記不待名者二種亦是有執受大種爲因聲相差別無執受大種爲因聲亦二種一者有情加行所起二者諸界擾動所生謂螺貝鍾鼓等聲後謂風河等所有情數者手等聲餘聲卽是非有情數如是諸聲聞生悅者名可意與此相違名不可意八中唯有初二應理以有情數非有情數卽有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聲所攝故色等中亦應可說可意等異何獨在色等亦應說有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理實應說然由聲處自性難知故但就因說有二種色等不爾故不說本論所攝聲相無異故不應立此八種聲豈不有聲用有執受無執受大種爲因而得生起如手等合所生聲無如是聲二具四大各別果故非二四大同得一果爲俱有成過失故雖有執受與無執受二四大種共相扣擊而俱爲因各別發彼聲各據自所依故不成三體有執受與無執受手鼓大種相擊爲發生二聲而相映奪隨取一種差別相不易可知是故聲處唯有二已說聲處當說味處越次說者彼境識生無定故味謂所噉是可嘗此有六種淡別故說味處當說香處香謂所嗅此有四好香惡香不等香有差別故不等者增益損減依身別故有說微弱增盛異故本論中說香有三種惡香及平等香若能長養諸根大名爲好香與此相違名爲惡香前二用名平等香或諸福業增上所名爲好香若諸罪業增上所生爲惡香唯四大種勢力所生名平等此雖增上果而亦有差別故唯大種勢力所生亦是有情增上果攝說香處當說觸處觸謂所觸十一爲卽十一實以爲體義謂四大種及七造觸滑性澀性重性輕性及冷若爾身根應成所觸此旣能觸彼彼定觸此故有說身根唯能觸非所衆生譬如眼根唯能見非所見復有說者無有少法能觸少法所依所緣無生時立觸名想若依此識能得彼境此於彼境假說能觸境非識依故能觸卽由此因唯說地等名爲所觸依彼色等定非所觸此中意顯依身根識不緣彼境而生起故若彼等非所觸者如何華等由身觸時色等變壞由彼所依被損壞故現見依有損益故能依損益非此相違如方所甘澤潤沃稼穡叢林鮮榮滋茂烈日所迫與此相違故知所依大種被損能依色等變壞非餘如是言後當廣辯此中大種至次當說今略釋滑澀等相滑卽是性故言性如別卽性故言別性訓釋詞者可逼觸故名爲滑卽是軟煖堪執義此有澀用故名有澀如有毛者說爲有毛澀卽是性故言澀性是力燥堅硬異名能爲鎭壓故名爲重是成辦摧伏他義重卽是性故言性毘婆沙說令稱權昇故名爲重可移轉故名爲輕現見世閒物形雖而有輕故易令遷動輕卽是性故言輕性毘婆沙說不令稱首墜故由彼所逼希煖欲生故名爲冷令凝結及易了知故名爲冷是彼損益疾可知義食欲名飢飮欲名渴不欲是心所法故違觸相耶以於因立果名故無相違失如言河樂隥亦樂食爲人命草爲畜命餘所未說悶力劣等攝在此中故不別說悶不離滑力卽澀重劣在軟煖輕性中攝如是其餘所觸種類隨其所應十一中攝何緣滑等展轉差別所依大種增微別故水火界增故生滑性地風界增故生澀性地水界增故重性火風界增故生輕性故死身內重性偏增水風界增故生於冷由是亦說此所生悶若爾云何言不離滑隨一一增此有無過或復悶者是滑差別非唯滑性應知此因亦有差別是故滑性或因水風界增故起或因水火界增故生所以二言無相違失風界增故生飢火界增故生渴餘隨所應皆當配釋如是所造離大種外別有體性後當廣辯
說一切有部順正理論卷第一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26)126)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7년(62)에 명제는 밤중에 꿈속에서 금인(金人)을 보고 사신을 천축(天竺)으로 보내 불교(佛教)를 전수 받게 하였는데, 사신들은 월씨(月氏)국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사문을 만나 중국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그것이 중국에 불교가 전한 시초라는 설이 있다.
  2. 127)127) 천화(遷化)를 줄여서 화(化)라고도 한다. 승려의 시적(示寂)을 가리키는 말로, 천이화멸(遷移化滅)의 뜻이다. 덕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이 다하여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고도 한다. 열반(涅槃)ㆍ원적(圓寂)ㆍ멸도(滅度)ㆍ순세(順世)ㆍ귀진(歸眞) 등과 같은 뜻이다. 『속고승전(續高僧傳)』 14권에는 당대(唐代) 혜지(慧持) 법사가 임종할 때에, “나는 다른 곳에 가서 교화를 하련다[吾欲往他方敎化]”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 128)128) 대승불교에서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의 세 길을 말한다.
  4. 129)129)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10지(地)라고 한다. 10지는 환희지(歡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발광지(發光地)ㆍ염혜지(焰慧地)ㆍ극난승지(極難勝地)ㆍ현전지(現前地)ㆍ원행지(遠行地)ㆍ부동지(不動地)ㆍ선혜지(善彗地)ㆍ법운지(法雲地)이다.
  5. 130)130) 공(空)과 유(有)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막는 것을 공이라 하고, 세우는 것을 유라 한다. 유무(有無)와 같은 뜻이다. 제법(諸法)이 인연(因緣) 때문에 생겨나고 존재하므로 유라고 하고, 제법이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나지만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한다.
  6. 131)131) 언공(言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3해탈(解脫)이다. 이 세 가지는 다 공(空)의 이치를 밝힌 것이므로 3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7. 132)132)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 1-4권 「인법품(忍法品)」에서 말하는 네 가지 인(忍)을 말한다. 인(忍)이란 보살이 지혜로써 참을 수 있거나[忍可] 혹은 참으면서도 편안하다는[安忍] 뜻이다. 즉 보살이 수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욕과 방해를 만나도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고, 혹은 고난을 만나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 인(忍)의 진리를 깨달으면 금계(禁戒)를 범하는 죄를 초월할 수 있다. 4인이란 무생법인(無生法忍), 무멸인(無滅忍), 인연인(因緣忍), 무주인(無住忍)을 말한다.
  8. 133)133)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6경(境)을 말한다.
  9. 134)134) 마음을 안의 경계(內境)와 밖의 경계(外境)와 구별할 때에, 내경은 곧 마음이 발생한 상분(相分)을 말하는 것이고 외경은 흔히 말하는 물질계의 경계를 말한다.
  10. 135)135) 현문은 현묘한 법문이란 뜻으로 불교를 뜻한다.
  11. 136)136) 부처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12. 137)137)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인도에는 8줄기의 큰 강이 있다고 한다. 긍하(恆河, Gaṅgā), 염마라하(閻摩羅河, Yamunā), 살라하(薩羅河, Sarabhu), 아이라발제하(阿夷羅跋提河, Aciravatī), 마하하(摩訶河, Mahī), 신두하(辛頭河, Sindhu), 박차하(博叉河, Vakṣu), 실타하(悉陀河, Śīta) 등이 그것이다. 『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 3권 「장수품(長壽品)」에 나온다.
  13. 138)138) 부처님께서 설한 성교(聖敎)를 8종으로 나누는데, 그 8종은 태화장(胎化藏)ㆍ중음장(中陰藏)ㆍ마하연방등장(摩訶衍方等藏)ㆍ계율장(戒律藏)ㆍ십주보살장(十住菩薩藏)ㆍ잡장(雜藏)ㆍ금강장(金剛藏)ㆍ불장(佛藏) 등이다. 혹은 대승과 소승에 각기 경ㆍ률ㆍ론ㆍ잡(經ㆍ律ㆍ論ㆍ雜) 등 4장이 있으므로 합하면 8장이 된다고도 한다.
  14. 139)139) 삼장(三藏)과 같다. 범어 비다가(比多迦, Pitaka)로, 장(藏), 혹은 협(篋)으로 번역한다. 경ㆍ률ㆍ론의 세 가지라고도 하고, 성연보(聲緣菩)의 세 가지라고도 한다.
  15. 140)140) 불가에서는 번뇌에 시달리는 이 속계(俗界)를 불타는 집, 즉 화택(火宅)으로 비유한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편안치 못한 이 삼계, 불타는 집과 같도다.[三界無安 猶如火宅]”라고 하였다.
  16. 8)8) 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것을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다. 황제술성기는 바로 고종이 기문을 썼다는 의미이다.
  17. 9)9) 『유마경(維摩經)』「불국품(佛國品)」에 나오는 보옥(寶玉)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일산(日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이나 탑의 상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 사용된 덮개를 말한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18. 10)10) 고승이 불경을 강론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19. 11)11) 향취산(香醉山)의 남쪽,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다는 상상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연못은 둘레가 8백 리이며, 여기에 용왕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 흘러내려 섬부주(贍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20. 12)12) 경기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지역을 말한다. 즉 나라의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21. 13)13) 중국 고대 관중지방에 흐르는 8개의 하천을 말한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바로 이 관중지방에 있다.
  22. 14)14) 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는 벗어난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23. 15)15) 마음을 더럽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24. 16)16)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25. 1)불공(不共)의 공덕이란, 성문ㆍ독각 등 다른 뭇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불타만이 지닌 공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念住)와 대비(大悲) 등 18가지가 있다. 본론 제75권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26. 2)지덕(智德)은 일체법을 두루 비추어 아는 지혜의 공덕, 단덕(斷德)은 그것에 의해 일체의 번뇌를 단멸한 공덕, 은덕(恩德)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비의 공덕. 본론 제75권에는 인원덕(因圓德)ㆍ과원덕(果圓德)ㆍ은원덕(恩圓德)의 3덕이 설해지고 있는데, 지덕과 단덕은 과원덕의 하나이다.
  27. 3)‘일체종의 어둠’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온갖 경계의 어둠’은 염오무지(染汚無知)를 말한다. 여기서 염오무지(kliṣṭa-ajñāna)란, 법의 실상을 능히 알지 못하여 망견(妄見)을 일으켜 생사 윤회하게 하는 번뇌성의 무지(즉 煩惱障)를 말하는 것이라면, 불염오무지는 비번뇌성의 무지(즉 解脫障)를 말한다. 곧 성문 독각은, 염오무지는 끊었지만 불염오무지는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덕만을 갖추었을 뿐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덕은 갖추지 못하였다.(후술) 따라서 지덕과 단덕, 나아가 은덕을 갖춘 이는 오로지 불세존뿐이다.
  28. 4)의요(āśaya, 보통은 阿世耶로 한역)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 수면(anuśaya)은 번뇌의 이명(異名). 즉 의요수면의 지혜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유위의 지혜를 말한다.
  29. 5)『대법장론』은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śa-śāstra)』의 의역어(意譯語). 곧 『순정리론』은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정의(正義) 즉 정리(正理)를 밝히는 논이기 때문에 『구사론』의 체제와 내용에 따르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30. 6)택법(dharmavicaya)이란 법(존재)을 간택(簡擇, 분별 판단)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 판단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혜(jññna)이다. 이러한 판단력에는 다시 번뇌[漏]를 수반하는 유루혜와 더 이상 어떠한 번뇌도 수반하지 않는 무루혜가 있는데, 무루혜는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정혜(淨慧), 즉 청정한 지혜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지(佛智)로서, 이것이 바로 대법, 즉 아비달마의 본질이다.
  31. 7)『장아함경』 제10권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
  32. 8)현관(abhīsamaya)이란 진리대상(즉 4諦)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 판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현관의 본질은 ‘혜’이지만, 이는 지각[受]이나 표상[想] 등 여타의 의식 작용[心所] 내지 생성[生] 등의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힘[不相應行法] 따위와 동시에 생겨난다. 따라서 무루혜에 수반되는 상응ㆍ불상응의 행법(이를 隨行이라 함) 또한 아비달마의 부수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온갖 존재[諸法]의 종류와 동시 구기(俱起)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데, 본론 제10권~18권에 걸쳐 논의되고 있다.
  33. 9)‘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은 무표색으로, 여기서는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률의(道生律儀, 혹은 無漏律儀, 혹은 道共戒,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힘)를 말한다. 행(samskṛta)이란 유위세간을 조작하게 하는 힘으로, 여기에는 마음[心]과 관계하는 상응행법(즉 심소법)과 관계하지 않는 불상응행법(‘생’ 등 14가지)이 있다.
  34. 10)무루의 5온이란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온으로, 여기서는 무루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한다.
  35. 11)현관에는 견현관(見現觀)ㆍ연현관(緣現觀)ㆍ사현관(事現觀) 세 가지가 있다. 견현관(darśanābhīsamaya)이란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4성제를 관찰하는 것이고, 연현관(ālamvanābhīsamaya)은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며, 사현관(kṛyābhīsamaya)은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심ㆍ심소와 도생률의(道生律儀)와 생(生) 등의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事業]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루혜는 세 현관 모두에 대해, 이에 수반되는 심과 심소법은 ‘연’과 ‘사’ 두 현관에 대해, ‘생’ 등의 불상응행법은 다만 사현관에 대해서만 공능을 갖는다. 3현관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36. 12)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고제(苦諦)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4상 등 이른바 4제(諦) 16행상(行相)에 대한 현관(즉각적인 통찰)에 의해 열반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이러한 통찰의 주체는 ‘혜’이며, 그 밖의 수행법(隨行法)은 통찰의 근거[緣]나 부수적인 작용[事]만을 수행한다. 곧 아비달마의 본질은 바로 그 같은 무루혜이며, 이는 승의(勝義)의 아비달마로서, 불타의 진지(眞智)이다.(후술) 4제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에서 상론된다.
  37. 13)아비달마는 무루혜를 본질로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타 진지(眞智)이기 때문에 이생 범부로서는 이를 획득하기 위해 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간의 지혜에는 스승이나 친구의 말을 듣고서 획득하는 지혜[聞慧, 즉 聞所成慧],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획득하는 지혜[思慧, 즉 思所成慧], 다시 선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힘으로써 체득하는 지혜[修慧, 즉 修所成慧]가 있으며,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타고난 지혜[生得慧] 등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선천적 혹은 후천적 실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협의의 아비달마,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아비달마 논서이다.(후술)
  38. 14)‘근본 아비달마(혹은 本論)’란 유부 아비달마의 기초가 되는 『품류족론(品類足論)』ㆍ『식신족론(識身足論)』ㆍ『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ㆍ『계신족론(界身足論)』ㆍ『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6족론과 『발지론(發智論)』, 그리고 이에 대한 광박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말한다.
  39. 15)‘업의 이숙’이란 선업 또는 악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또 다른 번뇌의 근거(자량)가 되지만, 역시 ‘업’으로 불리듯이, 혹은 “음식이나 의복은 그 자체 즐거움[樂受]은 아니지만 즐거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고 하듯이, 혹은 여인은 그 자체 더러움(즉 탐ㆍ진 등의 번뇌)은 아니지만 더러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고 하듯이 아비달마 제론(諸論) 역시 무루혜(즉 승의의 아비달마)의 조건 혹은 방편이 되는 혜(慧)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한다”고 하였다.(『대비바사론』 제1권, 한글대장경118, p.29-31)
  40. 16)세간의 세 가지 지혜와 생득혜(生得慧), 그리고 온갖 논(論)이 승의 아비달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對法]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세친(世親)의 『구사론』 역시 아비달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대해 중현은 세친의 게송을 빌려 『구사론』은 아비달마가 아니라 아비달마를 간추린 것(정요), 아비달마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41. 17)‘아비달마(對法)코샤(藏)’라는 말을, 두 개의 명사로 구성된 복합어의 경우 뒤의 명사는 반드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는 격한정복합어[依主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포섭한 핵심(藏)’의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의 정요[堅實]를 간추린 것일 뿐이다. 혹은 앞의 명사는 형용사적인 수식어라는 소유복합어[有財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근거로 한 것’이라는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에 근거한 이차적인 논일 뿐이다. 즉 『구사론』은 근본 아비달마(주14 참조)의 요점을 정리한 것, 혹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비달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었다.
  42. 18)『구사론』 제1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5-6. 경주(sūtrakāra)는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말한다. 즉 세친은 『구사론』의 본송(本頌)이나 장행의 주석 상에서는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전설(傳說, kila)에 의하면’, ‘~하였다고 전한다’ 혹은 ‘~라고 인정한다’거나 혹은 ‘허락[許]한다’는 등의 말은 모두 세친 자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카슈미르의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정설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이다. 세친이 어째서 중현에 의해 ‘경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다[經量]’는 경량부의 사유에 근거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본론상에서 세친이 ‘경주’로 불린 것은 168회이며, 그가 경량부의 설을 최선설(最善說)이라고 함으로써 비판된 것은 36회이다.
  43. 19)가다연니자(Kātyāyanīputra)는 불멸(佛滅) 30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한 대논사로서, 『발지론』 20권을 지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학을 확립함으로써 이 부파의 비조가 되었다.
  44. 20)현존 『구사론』상에서는 이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제10권(앞의 책, p.471)에서 “우리(경부)는 계경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을 뿐 본론(本論)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그것을 파괴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그래서 세존께서도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45. 21)잡염과 청정의 인과란 고ㆍ집과 멸ㆍ도의 4제를 말한다. 곧 아비달마에서의 존재의 실상(法相)은 4제이며(『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4), 특히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이후의 아비달마 제론은 이러한 4제를 논의의 체제로 삼고 있다.
  46. 22)불타는, 열반을 앞두고 아난이 “우리는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여래는 교단의 통솔자가 아니며, 교단 또한 나(인격)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오로지 그대 자신과 ‘법에 의지하라’”고 말하였다. 이는 이후 스승의 인격[人, pudgala]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法, dharma]에 의지할 것이며, 밖으로 드러난 말[語, vyañjana]이 아니라 뜻[義, artha]에,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不了義, neyārtha)가 아니라 요의(nītārtha)에, 그리고 일상의 상대적 인식[識, vijñāna]이 아니라 절대적인 통찰 직관지[智, jñāna]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依)로 정리된다.(후술)
  47. 23)『별해탈경(別解脫經)』이란 별해탈률의(혹은 별해탈계, 혹은 波羅提木叉), 즉 계율의 조문을 모은 계본(戒本, 혹은 學處. 이를 經이라 하기도 한다)을 말한다. 이에 대해 ‘광비나야’란 계본이 성립하게 된 인연 등을 해설한 「경분별(經分別)」과 출가 교단의 운영 규칙인 「건도부(犍度部, khandhaka)」, 그리고 부록인 「부수(付隨)」로 이루어진 광률(廣律)을 말한다. 즉 불타법문(즉 經)에 대한 해석인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계본에 대한 해석인 「경분별」의 광률 또한 불설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48. 24)불성(不成, asiddha)의 허물이란 미확정의 오류. 즉 ‘경에 의지하라’는 불타의 말씀을 논거로 하여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은 경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명제의 불확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불성의 허물[不成過], 즉 미확정의 오류에 대해서는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대정장32, p.2하) 참조.
  49. 25)아비달마는 계경(契經, sūtra)을 널리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불설이다. 즉 불타가 아난타에게 ‘경에 의지하라’고 할 때의 ‘경’의 뜻은 넓은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경을 협의의 경, 즉 12분교(分敎) 중의 계경으로만 해석하여 오로지 그것에 의지해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응송(혹은 重頌, geya, 설해진 계경의 내용을 운문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 등도 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
  50. 26)‘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當依經量)’에서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지식의 근거[量]’라고 한다면 요의경(了義經)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법(法)ㆍ의(義)ㆍ지(智)라는 세 가지 의지해야 할 바를 더 설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뜻이다.
  51. 27)4의(依)에서 이미 ‘스승의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법(경의 차별)에 의지하라’고 하였으면서 지금 다시 ‘경에 의지하라’고 하면, 그것은 의미 없는 동어반복의 오류[唐損過]를 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52. 28)‘당의경량(當依經量)’에서 ‘경량’을 세친은 경이 지식의 근거라는 의미로, 중현은 각기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시설된 여러 경을 해석하는 근거, 즉 아비달마로 이해하였다.
  53. 29)『칠유경』을 전승하고, 중유를 주장하는 부파는 바로 설일체유부로서, 이에 대해서는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74)을 참조할 것.
  54. 30)점진적 현관, 즉 점현관(漸現觀) 역시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4제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을 16찰나에 걸쳐 점진적으로 행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대중부에서는 단박에 관찰하는 돈현관(頓現觀)을 주장한다.
  55. 31)이에 반해 『중아함경』 제13권 제66경 「설본경(說本經)」에서는 아씨다(Ajita, 혹은 阿逸多)에게 미래세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에서는 아씨다를 미륵과 혼동하여 그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었다고 설하고 있는 등 각기 전승한 경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인용한 경은 불명(不明).
  56. 32)잡장은 경ㆍ율ㆍ논 이외의 문헌으로, 대중부에서는 3장과 더불어 잡장ㆍ범주장(梵呪藏) 등의 5장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이처럼 잡장을 경의 또 다른 형태(차별)로 이해하여 3장만을 인정할 뿐이다.
  57. 33)가섭파(Kāśyapa)는 불타의 10대 제자 중 일인으로, 불타 입멸 후 제1결집을 주도하였다. 보통은 마하가섭(摩訶迦葉)으로 불린다.
  58. 34)4념주 내지 8지성도(혹은 8正道)란 4념주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의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한다.
  59. 35)4정행은 4제에 통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고지통행(苦遲通行)ㆍ고속통행(苦速通行)ㆍ낙지통행(樂遲通行)ㆍ낙속통행(樂速通行)의 4통행(通行)을 말하며(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함), 4법적은 법의 근본이 되는 무탐법적(無貪法迹)ㆍ무진법적(無瞋法迹)ㆍ정념법적(正念法迹)ㆍ정정법적(正定法迹)을 말한다.
  60. 36)4무애해는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 온갖 경계 대상을 지각하고 깨닫고 설하는 등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없는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무애해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
  61. 37)공공ㆍ무원무원ㆍ무상무상은 3중(重) 삼마지(三摩地, 또는 等持)로서, 공삼마지를 공(空)으로, 비상(非常)의 무원삼마지를 무원(無願)으로, 정(靜)의 무상삼마지를 무상으로 관하는 삼마지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한다.
  62. 38)현관변의 세속지란 4제 각각을 즉각적으로 통찰할 때 함께 닦게 되는 세속지를 말하는 것으로, 유부에 의하면 견도 16찰나 중 상(上) 2계의 고(苦)ㆍ집(集)ㆍ멸제(滅諦)를 관찰하는 세 가지 유지(類智:이는 法智에 대해 後邊이며, 그래서 ‘현관변’이라고 한 것임)에서는 미래의 세속지를 함께 닦아 획득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에서 상론한다.
  63. 39)무루와 유루의 정려를 번갈아 가며 닦는 것을 ‘잡수’라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욕계의 번뇌를 떠난 불환(不還)과 아라한만이 닦는 선정이다. 즉 그들은 지금 바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정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려를 잡수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한다.
  64. 40)무쟁과 원지는 4무애해와 더불어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 무쟁은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탐(貪)ㆍ진(瞋) 등의 번뇌를 낳지 않게 되는 것을, 원지는 원하는 대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5권에서 상론한다.
  65. 41)변제정은 궁극의 선정(변제 prāntakoṭika는 無越極의 뜻), 즉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무쟁과 원지 등의 공덕이 획득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
  66. 42)‘지(智)’에는 10지가 있으며(본론 제73권), 지(止, śamatha)ㆍ관(觀, vipaśya- nā)은 선정과 지혜의 뜻이다.
  67. 43)『집이문족론』ㆍ『법온족론』ㆍ『시설족론』은 설일체유부에서 근본 아비달마로 간주하는 6족론의 하나로서, 순서대로 사리불, 목건련, 가다연니자가 지었다고 전한다.
  68. 44)이를 광률(廣律)이라 한다. 주 23) 참조.
  69. 45)『대비바사론』 제1권(한글대장경118, p.22)에 의하면, 비나야는 증상계(增上戒)에 근거한 논의이며, 수트라 즉 경은 증상심(增上心)에, 아비달마는 증상혜(增上慧)에 근거한 논의이다.
  70. 46)아급마(Āgama, 阿含)는 ‘전승’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소승경전의 총명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아비달마 비나야와 더불어 수트라, 즉 경(經)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71. 47)온갖 존재[諸法]가 인연 화합하여 드러난 무상의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이때 온갖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유위(samskṛta)란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조작되지 않은 세계, 혹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로운 유위세간의 원동력이 되는 무지와 탐욕 등의 번뇌가 소멸된 세계를 무위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무위법이라고 한다.(후술) 유위법은 다시 번뇌가 수반되는 유루법(有漏法)과 수반되지 않는 무루법(無漏法)으로 나뉜다. 이상의 유위ㆍ무위, 유루ㆍ무루를 아비달마교학의 기본구도인 4성제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72. 48)5취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 번뇌에 따라 생겨난 유루의 5온으로, ‘취(upādāna)’는 번뇌 취착(取著)의 뜻. 또한 반대로 이 같은 5온을 근거로 하여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유루이다.(후설) 5온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3권에 걸쳐 자세하게 해설한다.
  73. 49)‘누(漏,ā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6根)으로부터 누설된 것, 즉 번뇌를 말한다. 즉 번뇌(누)가 따라 생겨나고, 또한 번뇌에 따라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그러나 청정한 법(滅諦와 道諦)을 대상[緣]으로 하여 번뇌가 생겨나는 일은 있어도 그것에 따라 생겨나지는 않기 때문에 청정한 법은 유루가 아니라 무루이다. 여기서 ‘따라 생겨난다’는 말을 전통적으로 ‘수증(隨增, 隨順增益의 준말)’이라고 하는데, 유부 번뇌론상에 중요한 술어이다. 번뇌의 수증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49권에서 상론한다.
  74. 50)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kleśa)란 그 자체 개별적으로 실재하면서 마음을 오염시키는 의식 작용을 총칭한 말로서,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전(纏)ㆍ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ㆍ신계(身繫)ㆍ개(蓋)ㆍ수번뇌(隨煩惱) 등의 각각의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다. 유부에서는 이 가운데 ‘수면’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번뇌론을 전개시키는데, ‘5취온은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그릇된 지식 작용’인 유신견(satkāyadṛṣṭi, 또는 薩迦耶見)은 10가지 수면 중의 첫 번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75. 51)이를테면 욕계에서는 색계의 5취온이나 혹은 무루법을 대상으로 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일은 있어도, 그 같은 법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일이 없다. 즉 세계를 달리하는 법이나 무루법에 따라서는 번뇌가 수증(隨增)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유루라고도 하지 않는다.
  76. 52)수번뇌(upakleśa)란, 탐ㆍ진ㆍ치 등의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 여기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ㆍ질(嫉)ㆍ간(慳)의 10전(纏)과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번뇌구(煩惱垢)가 있다.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한다.
  77. 53)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수ㆍ상ㆍ행ㆍ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
  78. 54)분노는 근본번뇌(유부에서는 이를 隨眠이라고 함)인 미워함[瞋]에서 일어나는 수번뇌(10纏의 하나임)이다.
  79. 55)이에 반해 출세간(出世間), 즉 세간에서 벗어난 것을 무루라고 한다. 곧 세간은 탐욕 등의 번뇌의 산실이며, 그로 인해 생사윤회하기 때문이다.
  80. 56)고제(苦諦)란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의 4상(相)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4상이야말로 현실 세간의 참다운 실상이기 때문에 ‘고제’이다. 본론 제61권 참조. 참고로 ‘세간’도, ‘고’도 모두 유루의 이명(異名)이다.(후술)
  81. 57)비유논사(Dārṣṭāntika, 또는 譬喩者, 譬喩師)란 세간적 사실인 비유[現喩, dṛṣtānta]로써 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경량부(經量部)의 선구로 알려지고 있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90여 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으며, 본론에서도 『구사론』의 작자인 경주(經主) 세친과 경량사(經部師)인 상좌(上座) 스리라타(Śrīlāta)와 더불어 중요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삼자는 다 같이 경량부와 관계하는 이들로서, 세부적인 사상적 차이는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82. 58)비유정수란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이란 성자의 소의신(所依身)을 말한다.
  83. 59)무비(Anupamā)는 비할 바 없는 절세미인으로 본명은 마간디야(Māgandiyā). 우전왕(優塡王)의 비(妃). 지만(Aṇgulimālya, 央掘摩羅)은 그릇된 스승을 만나 천 명을 죽여야 해탈한다는 말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부처님에 의해 구제되었다. 오로빈라가섭파(Uruvela Kāśyapa)는 원래 불을 섬기는 외도로 500명의 제자를 이끌고 불타에게 귀의하였다. 이들은 불타에게 귀의하기 전에 각기 순서대로 불타에 대해 애탐과 진에와 우치의 번뇌를 낳았다.
  84. 60)‘~에[於] 대해’라는 말은 제7 처격(處格)이지만 사실상 원인 이유를 나타내는 제4 구격(具格)으로 사용되어 ‘~에 의해’를 의미한다는 뜻. 즉 비유논사는 ‘~에 대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을 ‘~에 의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85. 61)유루란, ‘번뇌[漏]에 따라 생겨나는 것’, 혹은 ‘그것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것’, 즉 번뇌가 수증(隨增)하는 법을 말하지 번뇌의 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멸(滅, 열반)이나 성도(聖道)는 번뇌의 근거나 조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에 따라 (혹은 그것에 의해) 번뇌가 생겨나지는 않는 것이다. 주 49) 참조.
  86. 62)앞서 비유논사는 비유정수, 즉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무루라고 하였고, 또한 번뇌의 소의를 유루라고 하였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의 근거가 유루는 아니기 때문이다.
  87. 63)이생(pṛthagjana, 또는 凡夫)은 무루의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유정으로, 5취 등 각기 다른 생(生)을 받기 때문에 이생이라 하였다.
  88. 64)유학위란 견도(見道)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 전까지 단계의 성자를 말한다. 유부교학에 따르면, 마음은 항상 대상에 수반되는 것(識有必境)이기 때문에 대상을 번뇌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생의 선한 의식뿐 아니라 성자위의 선한 의식도 유루가 되어야 한다는 뜻.
  89. 65)주 69) 참조.
  90. 66)의준량(arthāpatti)이란, 지금 알려진 사태에 근거하여 다른 어떤 사실을 내함적(內含的)으로 이해하는 인식 방법으로, ‘요청’, ‘가정’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데바닷타는 뚱뚱하지만 낮에는 식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찰될 경우, 밤 동안의 식사를 요청 가정하지 않고서는 뚱뚱하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도 경에서 유루의 색이 설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무루의 색을 요청 가정하였다는 뜻. 불교에서는 이를 인식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91. 67)여기서 상좌(Sthavira)란 경부사(經部師) 스리라타(Śrīlāta, 室利羅多). 후대의 주석가들은 한결같이 스리라타를 본론의 상좌(上座)로 평석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사론기(俱舍論記)』 제9권(대정장41, p.168상), ‘此是經部中室利羅多解. 此名執勝. 正理呼爲上座. 그는 세친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인물로, 『경부비바사론(經部毘婆沙論)』를 지었다고 전하며, 본론 제25권에서는 세친과 사제지간으로 언급하고 있다.
  92. 68)즉 아라한 등의 성자가 번뇌[漏]를 갖지 않는다는 경설(經說)로써 무루의 색 등을 논증할 수 없다는 뜻.
  93. 69)순취(upādānīya)란 취착을 일으키는 것으로, 취(取)와 순취의 관계는 누(漏)와 유루의 관계와 같다. 즉 안근 등은 그 자체 취착이나 번뇌가 아니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번뇌(取ㆍ漏)가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또한 번뇌를 근거로 하여 그것이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수증(隨增)하기 때문에 유루ㆍ순취(혹은 有取)라고 한다는 뜻. 이에 대해 비유사(경부)는 ‘번뇌에 의해 생겨나는 것’ 또는 ‘번뇌를 낳는 것’을 유루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유부에서는 실유(實有)의 번뇌가 안근 등을 근거로 하여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라고 한 반면, 비유사는 안근 등은 번뇌를 낳기 때문에 유루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안근 자체는 유루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논쟁은 궁극적으로 제법의 실유론(實有論)과 가유론(假有論)에 의한 것으로, 이 같은 입장에서 비유사는 다만 번뇌불생(煩惱不生)을 택멸열반으로 이해한 데 반해 유부에서는 번뇌영단(煩惱永斷)으로 이해하였다.
  94. 70)유루(sāsrava)는 sa와 āsrava의 합성어로서, 이때 sa는 saha, 즉 함께하다[俱]는 뜻이기 때문에 유루를 ‘누와 함께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95. 71)즉 미래의 어떤 사실에 대해 현재 갈망할 때, 미래의 어떤 사실은 현재의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번뇌를 낳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sa-āsrava의 sa는 구기(俱起)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96. 72)이상은 유루(sa-āsrava)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으로, 첫 번째는 접두어 sa를 ‘같은 종족(sakula)’에서처럼 ‘동등한 종류(sadisa)’라는 뜻으로, 두 번째는 유독식(saviṣa bhojana, 독이 섞인 음식)의 경우처럼 ‘더럽혀졌다’는 뜻으로, 세 번째는 유달책가(satakṣaka)의 경우처럼 ‘함께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달책가는 용왕의 이름이지만, 천제석이 그것과 함께 떨어진다는 것은 의미 불명.
  97. 73)앞서 아비달마의 작자에 대해 논설하면서 4념주 내지 8지성도 등을 언급하였다.(p.9) 이에 대해서는 본론 「변현성품(辯賢聖品)」(제71권)에서 구체적으로 상론한다.
  98. 74)허공(ākāśa)이란, 말하자면 절대공간으로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존재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시간(kāla 혹은 adhvan, 世路)은 유위제법의 변화 상태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공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지니지 않아[無礙]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물질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다.
  99. 75)『구사론』 제1권(앞의 책, p.8)에 의하면, 소에 멍에를 멘 수레[牛所駕車]를 줄여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간택력(지혜의 힘, 즉 판단력)에 의해 획득된 멸(즉 열반)[擇力所得滅]을 줄여 ‘택멸’이라 이름하였다.
  100. 76)상식적으로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번뇌는 각기 개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택멸(즉 열반)에도 그만큼의 수가 있어야 하지만(그래서 일체의 번뇌가 모두 끊어진 것을 완전한 열반, 즉 般涅槃이라 함), 택멸에는 동류(同類)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단멸되는 모든 법은 단일한 하나의 택멸이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101. 77)고법지인이란, 견도(見道) 16찰나 중 첫 번째 찰나로, 4제 중 고제(苦諦)의 진리성(非常ㆍ苦ㆍ空ㆍ非我)을 인가하는 단계의 수행도. 이것에 의해 고제의 진리성을 확증하는 고법지(苦法智)가 획득되며, 이에 따라 욕계 고제에 미혹하여 생겨난 번뇌가 끊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한다.
  102. 78)만약 무위택멸의 열반이 단일하다면, 그것은 무루혜의 첫 번째 단계인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증득될 것이므로 그 후 또 다른 실천도를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나아가 고법지인에 의해 그 일부만을 증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단일한 무위택멸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103. 79)이를테면 꽃을 보고 있을 때 작용하는 것은 눈과 의근(意根)이며, 그 순간 그 밖의 색이나 소리 등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전5식(識)과 꽃에 대한 의식을 제외한 그 밖의 의식과 이에 따른 의식 작용[心所, 이는 法處에 포섭됨]은 현현(顯現)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한다. 즉 택멸무위가 무루혜의 간택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비택멸무위는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를 말한다.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과거ㆍ현재ㆍ미래 3세에 걸쳐 실재하며, 미래법은 일정한 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생기 현현(현재)하지만,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영원히 미래에 머물게 된다.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혹은 필경불생법(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104. 80)‘계 따위’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의 무루의 5온을 말한다.
  105. 81)유위(samskṛta)란 함께 조작된 것[共所作]이란 뜻으로, 다수의 존재[諸法]가 원인과 조건[因緣]으로써 화합하여 생겨난 것을 말하며, 이 때의 각각의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예컨대 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온도, 수분, 광선 등이 동시에 함께 작용해야 한다.
  106. 82)땔감은 불에 타지 않는 한 땔감이 아니지만, 태워질 가능성이 있고, 언젠가는 탈 것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하듯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법 역시 언젠가는 여러 인연에 의해 조작되어 생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할 수 있다는 뜻.
  107. 83)거문고나 비파는 제 소리를 내어야 거문고이고 비파이지만, 이미 소리를 내었던 것이나 앞으로 소리를 낼 그것도 역시 거문고나 비파라고 한다. 예컨대 ‘거문고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할 때, 거문고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08. 84)세로(adhvan)란 과정(過程)의 뜻이다. 즉 모든 유위법은 3세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으로, 이미 생겨나 소멸한 것을 과거법, 지금 생겨나 있는 것을 현재법,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법이라고 한다. 유부교학상에 있어 시간(kā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른바 ‘법’이 아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을 근거로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실재적 시간을 의미하는 kāla(時)라는 말을 피하고, 변천 변이의 뜻인 adhvan(世,혹은 世路)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유위법은 무상 변천하여 시간[世]의 근거[路]가 되기 때문에 ‘세로’라고 한 것으로, 시간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109. 85)명(名,nāma)은 책상ㆍ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말의 근거는 이 같은 단어 그 자체(전통술어로 能詮의 名)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所詮의 法)이다. 즉 일체의 유위법은 언어적인 의미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언의’이다. 말소리와 단어[名]ㆍ문장[句]ㆍ음소[文]와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에서 상론한다.
  110. 86)여기서 세 가지란, 말의 근거가 되는 단어[名]와 문장[句]과 단어를 구성하는 음소[文]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를 참조 바람.
  111. 87)『품류족론(品類足論)』 제9권(대정장26, p.728상), ‘言依事十八界ㆍ十二處ㆍ五蘊攝.’ 즉 ‘언의(言依)가 유루의 이명으로, 5온을 포섭한다’고 할 경우, ‘언의는 18계ㆍ12처에도 포섭된다’고 설한 『품류족론』에 위배된다. 이에 따르면, 5온은 오로지 유위이지만, 18계 등은 무위도 포함하므로 ‘언의’는 유위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택멸(열반) 역시 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말의 대상으로서 드러난 택멸은 다만 유위일 뿐이며, 무위택멸은 불가설이다. 곧 언의는 오로지 유위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품류족론』을 잘 해석해야 한다’고 설한 것이다.
  112. 88)세친은 이상의 내용을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12) 왜냐하면 이상의 논의도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과거ㆍ미래법조차도 실재한다는 제법의 3세실유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113. 89)바로 앞의 본송에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이다(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고 규정하였다.
  114. 90)피안에 이르면 뗏목도 버려야 하듯이 열반에 이르면 무루의 성도도 버려야 하지만, 일단 버리고 나면 다시는 버려야 할 것이 없지만, 유루의 법은 그렇지 않다.
  115. 91)5견이란, 살가야견(薩迦耶見 혹은 有身見, satkāya-dṛṣṭi)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로, 유루법은 이러한 번뇌가 생기하는 주처(住處), 즉 토대가 되기 때문에 견처이다. 5견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116. 92)10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 1처의 일부는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 무표색(혹은 무표업)은 신체적 형태(즉 身業)와 말소리(즉 語業)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 세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와 제18권에서 상론한다.
  117. 93)정색(rūpa prasāda)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118. 94)이하 ‘본론’은 본 『현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근본이 되는 논(즉 6족론과 『발지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119. 95)이는 세친의 주장으로, 그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4)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색 등의 5경을 말하며, ‘식’이란 바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즉 ‘그러한 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5가지 종류의 정색(淨色)을 그 순서대로 바로 안 등의 5근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그는 『품류족론』에 따른 앞의 유부의 정설을 이설(異說)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120. 96)‘식이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재석, 즉 앞의 명사를 형용사적인 수식어로 해석할 경우, ‘식의 근거[識依, vijñānāśraya]’라는 말이 되며,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vijñānāśraya prasāda)’은 바로 믿음[信, 이는 大善地法의 하나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임]이기 때문에 5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이라고 하는 말에는 반드시 ‘색’이라는 말을 붙여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한 색(vijñānāśraya rūpaprasāda)’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121. 97)앞의 본송, 즉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彼識依淨色)’ 중에서 ‘근거가 되는’이라는 말[‘依’]을 중심으로 하여 앞의 말인 ‘그러한 식’은 안식 내지 신식의 근거가 되는 안근과 그 밖의 4근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이고, 뒤의 말인 ‘정색’은 무간멸하는 의근과 안근 등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이라는 뜻. 여기서 무간멸이란 전 찰나와 후 찰나 사이에 1찰나의 간격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근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이라는 본송에서의 말은 앞의 5근의 차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안 등의 5근과 의근의 차별도 나타내고 있다는 뜻.
  122. 98)동분(sabhāga)이란, 근(根)ㆍ경(境)ㆍ식(識)이 화합[交涉]하여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존재. 이에 반해 피동분(tat-sabhāga)은 아직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가능태로서의 존재. 이를테면 어떤 색과 그에 따른 안식과 관계하는 찰나의 안(眼)이 동분의 안이라면, 색을 보지 않고 소멸한(혹은 소멸할) 눈은 피동분의 눈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권에서 상론함) 곧 ‘그러한 식’은 현재 작용하고 있는 안근에 근거한 말이며, ‘정색’은 작용하고 있지 않는 안근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뜻.
  123. 99)즉 거문고와 비파(원인)에 의해 낳아진 소리(결과)가 각기 다르듯이, 정색 역시 원인(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근으로 낳아지게 된다는 뜻.
  124. 100)‘수’와 무위는 다 같이 법처(法處)에 포섭되지만, 자상이 동일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안근 내지 신근 역시 비록 자상은 다르지만 다 같이 ‘정색’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뜻.
  125. 101)무한의 허공이 무위법이라면, 공계는 방안 콧구멍과 같은 공간을 말한다. 이는 곧 12현색 중 밝음과 어둠[明暗]을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부에서는 별도의 색경(色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공계의 색을 안아가색(隣阿伽色)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말미에서 상론한다.
  126. 102)신표업이란 수족(手足)의 굴신(屈伸) 등 몸으로 짓는 업[身業]으로, 이것의 본질은 바로 신체적 형태, 즉 형색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3권~34권에서 상론한다.
  127. 103)이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6)에서의 힐난으로, 법보(法寶)의 『구사론소』제1권 여(餘)(대정장41, p.478중)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문(難問). 여기서 실체[事, dravya]는 극미(極微, paramāṇu, 5근 5경 등의 물질을 분할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를 말한다. 식유필경(識有必境)의 전제에서 출발한 유부는 존재론적 의미[有境義, the sense of to exist]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有智義, the sense of to know]에서 현색과 형색은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은 현색과 형색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신표업의 본질은 오로지 형색이지 현색이 아니다. 이를테면 ‘흰 손이 때리고 검은 발이 찬다’고 할지라도 그 때 손의 현색(즉 흰색)은 신업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경량부의 힐난은 유부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현색만이 실재할 뿐 형색은 그것에 의해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가설일 뿐이며, 신표업이란 다만 의지[思]가 신체를 통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본론 제34권 참조)
  128. 104)본론 제34권 ‘경주의 형색(형색) 가유론 비판’ 참조
  129. 105)여기서 유집수 대종(大種)이란 감각이 있는 유정의 지ㆍ수ㆍ화ㆍ풍 4대종을 말하며, 무집수 대종이란 감각이 없는 무정물의 4대종을 말한다. 그리고 유정수(『구사론』에서는 有情名)의 소리란 의미를 지닌 언어적인 소리를, 가의성의 소리는 듣기에 즐거운 소리이다. 따라서 성처의 8종이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노랫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장단에 맞춘 손뼉 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 소리)가 있으며,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변화인의 부드러운 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변화인의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악기 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천둥소리)가 있다.
  130. 106)여기서 장양(완전한 명칭은 所長養)은 음식 등에 의해 길러진 후천적인 대종을, 이숙(완전한 명칭은 異熟生)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인 대종을 말하며,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로서의 대종을 말한다. 참고로 소리는 이숙생이 아니다. 소리가 만약 이숙생이라면 현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권를 참조할 것.
  131. 107)여기서 ‘유기’란 무기(無記)의 반대로, 선악을 분명하게 기표할 수 있는 소리를 말한다.
  132. 108)『구사론』상에서는 앞서와 같이 소리[聲處]를 여덟 가지로 분별하지만, 중현은 다만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등 두 가지로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유정수 등과 가의성 등에 의한 분별은 문제가 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리는 여덟 가지 이상으로 분별될 수 있어 그 자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후술)
  133. 109)구유인이란 결과와 동시에 존재하는 원인으로,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어떤 하나의 소리가 산출되었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는 구유인이 아니게 된다. 예컨대 손바닥(유집수 대종)으로 북(무집수 대종)을 쳤을 경우, 이때 소리의 원인은 손바닥인가, 북인가? 이 경우 사실상 각기 자신의 소리를 내지만 북의 소리만 들리는 것은 손바닥의 소리가 북의 소리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후술)
  134. 110)여기서 세 가지 소리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그리고 양자 모두에 근거한 소리를 말한다.
  135. 111)『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136. 112)증상과란 능작인(결과의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인 원인)의 결과로서, ‘증상(adhipati)’이란 ‘뛰어난 힘’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곧 평등향은 선악의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4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자체 제근을 증장시키고 감손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에 호향 등처럼 증상과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유부의 인과관계(6因ㆍ4緣ㆍ5果)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20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137. 113)무간(無間,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이다. 유부에 의하면 물질(색법)의 극소인 극미가 다른 극미와 결합하기 위해 접촉한다면 그것은 면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극미가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인 무간을 일시 가설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극미로 이루어진 신근과 촉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다만 서로 지극히 가까이하는 경우[隣近], 그것을 일시 ‘접촉되는 것’과 ‘능히 접촉하는 것’으로 가설할 뿐이다. 물질적 존재(5근과 5경)의 접촉과 불접촉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론 제7권~8권에 걸쳐 상론된다.
  138. 114)『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8)에서는 칭량(稱量)할 수 있는 것을 ‘무거움’이라 하였고, 그 반대를 ‘가벼움’이라 하였다.
  139. 115)강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그것을 이용해 여행하면 능히 즐거움을 낳기 때문에 강을 즐거움이라 할 수 있으며, 밥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지만 능히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이라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는 곧 원인(강, 허기짐)을 결과(즐거운 것, 먹기를 바라는 것)로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예증이다.
  140. 116)여기서 두 말이란, 어지러움은 미끄러움(수ㆍ화의 증대)과 관계가 있다는 말과 수ㆍ풍(차가움)의 요소가 증대하여 생겨난다는 두 말.
  141. 117)본론 제4권~5권에 걸쳐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大種性)이라는 상좌(上座)의 설’을 비판하면서 소조촉에 대해 상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