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획득과 성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내적인 것[內, ādhyātmika]이고, 몇 가지가 외적인 것[外, bāhya]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것은 12가지로서 안계 등이며 색계 등의 6가지를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6근과 6식의 12가지를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며, 외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색 등의 6경을 말한다. 여기서 ‘내적인 것’이란 자아의 근거[我依]가 되는 것을 말하고, ‘외적인 것’이란 그 밖의 것을 말한다. 자아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 청정한 계(戒)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청정한 계의 근거로서만 존재할 뿐이다.2)
(1) ‘내적인 것’에 대한 세친의 해석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아집(我執)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일시 마음을 설하여 자아라고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능히 잘 조복함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로다.
세존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를 ‘마음을 조복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마땅히 마음을 잘 조복해야 할 것이니 마음을 조복해야 능히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단지 마음을 일시 가설하여 자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 등은 이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친근(親近)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은 이것의 소연(所緣)이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소원(疏遠)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식은 마땅히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서 안 될 것이니, 아직 의계(意界)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은 마음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3) 의계의 단계에 이를 때에도 6식계의 상(相)을 상실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의계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의계의 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의계는 오로지 과거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고, 6식은 오로지 현재세와 미래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18계는 모두 3세와 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종(自宗)에 위배되고 말 것이다.4) 또한 만약 미래와 현재의 6식에 의계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설혹 과거세의 의계의 단계 중에 이를지라도 역시 마땅히 설정될 수 없을 것이니, [제법의] 상은 3세에 걸쳐 바뀌거나 변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5)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이제 바야흐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함께 생겨나고 함께 머물며, 함께 소멸하는, 나아가 동일한 결과를 낳는 등의 심(心)과 심소(心所) 가운데 심만을 ‘내적인 것’이라 설하고, 심소를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6) 어찌 심소도 가아(假我)로서의 마음에 의지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이같이 능히 의지하는 존재[能依性, 즉 심ㆍ심소]는 그러한 소의(안 등의 5근)와 지극히 친근하기 때문에 마땅히 다 같이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안근 등은 안식 등에 항상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心]이 심소에 대해 소의가 되는 일은 없다.7) 따라서 오로지 심소만을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혹은 여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 가아로서의 마음에 소의가 되는 것은 ‘내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능히 의지하는 것은 ‘내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말에는 깊은 이치가 없다. 또한 [그럴 경우] ‘마음의 일부가 바로 아집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일체 마음의 근거를 모두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마땅히 ‘아집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일시 마음을 설하여 자아라 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럴 경우] 일부의 마음이 탐(貪) 등의 근거가 되므로 일체의 마음이 모두 염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일부의 마음이 심(尋)ㆍ사(伺)의 근거가 되므로 일체의 마음은 마땅히 유심유사(有尋有伺)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마음은 아집의 근거가 되므로 일체 마음을 가설하여 자아라고 한다는 사실)이 어찌 그러할 것인가?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차별할 만한 어떠한 근거[因緣]도 획득할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어찌 심소 등도 아집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유신견(有身見)은 5취온을 반연(攀緣)하여 경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8)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석은 이치상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에서] 마음만을 자아로 설하고 있는 것인가? 항상 자신의 경계 대상에 대해 자재(自在)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아란 이를테면 자신의 경계 대상에 대해 항상 자재하게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도 자신의 경계에 대해 일찍이 작용하지 않는 때가 없었기 때문에 일체의 마음을 모두 자아라 이름한 것이다.9) 그러나 온갖 심소 역시 자아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의(意, 마음의 이명)를 상수(上首)로 삼기 때문이며, 경에서 ‘홀로 작용[獨行]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심소)은 요컨대 마음에 의지할 때 능히 경계 대상에 대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심소를 역시 조복(調伏)하였을지라도 다만 수승한 것에 대해서만 조복시켰다고 설하는 것처럼, 마음을 자아라고 설한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여 오로지 [수승한] 마음만을 자아라고 설하고 심소는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법이 이같이 자아와 유사한 마음에 대해 불공(不共)의 이익이 되는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내적인 것’이라고 하며, 이와 반대되는 그 밖의 법을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가 ‘내적인 것’이 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10) 또한 모든 심소는 비록 마음과 함께 생겨나고 머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은 마음에 대향하기에 유독 그것만을 ‘내적인 것’이라 이름하였고, 심소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즉 동류(同類)의 마음과 이류(異類)의 마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소의[所依性]가 되어 그 모두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라 하지만], 온갖 이류의 심소법은 그 같은 마음에 대해 반드시 능히 의지하는 성질[能依性]을 버리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선심은 선심ㆍ염오심ㆍ무기심에 대해 소의가 되어 그 모두를 버리지 않으며, 염오심과 무기심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선의 심소는 그러한 염오심이나 무기심에 대해 ‘능히 의지하는 성질’을 버리며, 염오나 무기의 심소도 그 밖의 다른 마음에 대해 역시 그러하다.11) 따라서 마음은 마음에 대해 소의성이 될 뿐더러 서로간에 어떠한 간격(簡隔)도 없어 ‘내적인 것’이라 이름할 수 있지만, 심소는 마음에 대해 능히 의지하는 존재[能依性]로서 서로간에 간격이 있어 ‘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모든 심소는 동류의 마음에 대해 ‘능히 의지하는 것’이 될지라도 혹 어떤 때에는 많기도 하고 혹 어떤 때에는 적기도 하지만, 마음이 소의가 된다고 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12)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내적인 것’이라는 명칭은 마음에만 적용되고 심소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지법(大地法)도 마땅히 ‘내적인 것’이라는 명칭을 얻어야 할 것이다.13)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심소법의 무리는 산괴(散壞)하기 때문으로, 마치 이생(異生) 중의 불타법자(不墮法者)와도 같다. 그런데 다시 유여사(有餘師)는 어원[訓詞]적인 이치에 근거하여 ‘내적인 것(ādhyātmika)’이라는 말을 이같이 해석하였다. “자아는 그것에 대해 뛰어난 작용을 가지니, 그래서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서] 자아란 자체(自體)로서, 그 밖의 다른 법에 대해 뛰어난 작용을 갖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 대덕 구마라다(鳩摩邏多)와 같은 이는 이와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14)
만약 손톱이나 손가락, 혀끝에 각기 별도의 뛰어난 작용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버무리고 감촉하고 맛보는 작용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리라.
색ㆍ향ㆍ미ㆍ촉의 온갖 색취(色聚) 중에 오로지 신근(身根)만이 뛰어난 작용을 갖으며, 이와 마찬가지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안근이나 마음 역시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 뛰어난 작용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12계가 모두 ‘내적인 것’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수(受) 등 그 자체로서 차별되는 법 역시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런즉 제법은 모두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2) 내ㆍ외에 관한 상좌설 비판 상좌(上座)가 주장하는 바는 ‘일체법은 모두 법처에 포섭된다’는 것인데, 그의 종의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어떻게 설정하는 것인가? 그는 다른 이처럼 설한다. 다른 이가 설한 것과 같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6식에 대해 소의가 되는 것을 ‘내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6식에 대해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을 ‘외적인 것’으로 설정하였다.15) 대저 소의라고 함은 오로지 유정수(有情數)와 친근한 불공(不共)의 색 따위로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색 따위는 비록 유정수와 친근한 불공의 색으로서 안(眼) 등과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해 색 등은 ‘안’ 등과 마찬가지로 유정수와 친근한 불공의 색이지만) 소의가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으로 설정하였을 뿐 ‘내적인 것’으로는 설정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 등은 비록 법처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수(受) 등과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해 안 등은 ‘수’ 등과 마찬가지로 법처에 포섭되지만) 바로 소의가 되기 때문에 ‘내적인 것’으로 설정하였을 뿐 ‘외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16) 그 밖의 법처는 오로지 ‘외적인 것’이라 이름할 뿐이다. 또한 안 등은 모두 이분(二分)과 통할지라도 내외의 성질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17)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이에 대해 집착하여 이를테면 “안 등이 식(識)의 소의로서 작용할 때에는 ‘내적인 존재’로 설정하지만, 만약 의식의 소연의 경계(즉 법경)가 될 때는 ‘외적인 존재’로 설정한다”는 식으로 논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이를테면 의근은 내처(內處)에 포섭되지만 의식의 소연이 될 때는 또한 외처(外處)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가] 설한 여러 형태의 언사는 모두 자기 마음대로 설한 것으로, 능히 그 허물을 막을 수 없다. 추리하여 헤아려 본 것[比度] 같지만 참된 가르침의 이치는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계경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라! 법처란 외처로서, 이는 바로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無見) 무대(無對)이다”고 하였다.18) 바야흐로 이 경을 통해 볼 때 일체법은 모두 법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니, 이 경 중에서는 11처가 법처에 포섭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로지 그가 주장한 별도의 법들을 법처라고도 이름하지 않았으니, 이 경 중에서는 [법처를] 의처(意處)처럼 무색(無色, 비물질)이라고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상좌)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수ㆍ상ㆍ사온(思蘊)을 별도의 법처라 이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무색을 만약 이 경 중에서 설한 그러한 별도의 법(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무견무대의 법)에 근거하여 법처라고 설한다면, [경에서는] 마땅히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무견무대 역시 무색이라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19)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이 경 중에서는 [법처를] 다시 안처 등과 다르다고 널리 부정[遮遣]하면서 ‘바로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면서 아울러 무견무대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색은 오로지 유견(有見) 유대(有對)일 뿐이며 그 밖의 다른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리고 바로 별도의 법처를 널리 설하고자 하였다면, 다만 마땅히 ‘법처란 외처로서, 의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면서 역시 무색이다’고 설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별도의 법처란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서, 무견무대이다’는 사실이 이미 성립되었다. 혹은 [수ㆍ상ㆍ사온이 별도의 법처라면] 마땅히 “[법처란] 무견무대로서 의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면서 또한 역시 무색이다”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경)서는 ‘무색’이라는 말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안처 등이 법처에 포섭되는 것임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법처에 포섭되는 색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무표색이니, 업(業)의 구사(俱舍) 중에서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20) 어떻게 다른 이로 하여금 안처 등이 비록 의식의 경계(즉 법경)가 될지라도 오로지 내처(內處)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 경 중에서 총수(總數)에 포섭된다는 사실과 [개별적인] 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법처를 나타내었던 것이다.21) 이를테면 불세존께서는 미래세 나의 생처(處生)에 석자(釋子)라고 칭하는 이가 있어 ‘일체법은 모두 법처이다’고 주장할 것을 관찰하고서, 그것을 막기 위해 ‘법처는 오로지 이러한 일체법이 아니다’는 사실을 분명[顯了]하게 설하여 말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법처의 상을 분별하면서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설하였던 것이다. 즉 안(眼) 등에는 여기저기에 포섭된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안처 등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할 수 없는 것이며,22) ‘의식이 능히 일체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일체법은 모두 법처에 포함된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와 같이 [일체법은 모두 법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 상좌(上座)는 다시 안 등은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결정코 불확정적인 사실[不成]이라 해야 할 것이니, 일찍이 그러한 안 등에 대해 어떠한 곳에서도 “만약 안 등이 식(識)의 소의로서 작용할 때 ‘내적 존재’로 설정하지만, 만약 의식의 소연의 경계가 될 때는 ‘외적 존재’로 설정한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용한 의근에 대해서도 논파하였으니, 안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그렇게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스스로 ‘논란을 잘 해석하는 스승[善釋難師]’이라 이름하면서 동유(同喩)의 법을 설정할 줄 몰랐던 것인가?23) 사정이 이미 이와 같다고 한다면, 어찌 멀리 의근을 들어 말할 것인가? 안근이 내적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을 성립시키기 위해 단지 가까이 있는 이근(耳根)을 들어 동법(同法)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이근이 내적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가까이 있는 안근을 들어 동법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저 상좌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안 등이 내적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한다는 주장은 결정코 마땅히 이루어질 수 있으니, 세존께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존재하는 모든 안(眼)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나, 혹은 미래의 것이나, 혹은 현재의 것이나, 혹은 내적인 것이나, 혹은 외적인 것이나……(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의(意)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이 같은 경설에 따라 안 등이 내적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커다란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니, 계경에서 “내적 소의신(所依身)에 대해 순신관(循身觀)으로 머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24) 또한 경에서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나, 혹은 미래의 것이나, 혹은 현재의 것이나, 혹은 내적인 것이나, 혹은 외적인 것이나……(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25) 그러나 색 등에는 ‘내적 존재’가 없으니, 경에서는 마땅히 ‘존재하는 모든’이라는 말을 설하지 말았어야 하였다. 수ㆍ상ㆍ행 중에 어찌 ‘내적 존재’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앞에서 스스로 “6식에 대해 소의가 되는 것을 ‘내적인 것’으로 설정한다”고 말하였다.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였으니, 색 등이나 수 등은 식(識)의 소의가 아니므로 오로지 마땅히 ‘외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야 함에도 경에서는 어찌하여 ‘내적인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곧 색ㆍ수 등에 대해 [경에서] 비록 ‘내적인 것’이라는 말로 설하였을지라도 내처(內處)가 아니라 오로지 외처(外處)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에서] 안 등에 대해 ‘외적인 것’이라는 말을 설하였을지라도 법처가 아니라 오로지 내처(즉 안처 등)에 포섭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뜻에서 경에서는 그같이 말한 것인가? 이 경의 취지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상좌)가 앞서 말한 바는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이제 내가 이 경의 취지에 대해 해석해 보리라. 예컨대 6식의 소의가 되는 그러한 안(眼) 등을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 이름하고, 소연이 되는 색 등을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 이름한다고 말하면 피차에 다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식의 의지(意止)가 되는 안근으로서 이미 생겨난 것과 지금 생겨나는 것과 앞으로 생겨날 것(즉 동분의 안)을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 이름하였다면, 이와 반대되는 것(즉 피동분의 안)을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 이름하였다. 나아가 의근에 있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만약 색 등의 경계로서 식의 소의(근)와 동일한 몸에 생겨난 것이면 이를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 이름하였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26) 이와 같이 처(處)에 근거하고 소의신에 근거하여 내외(內外)를 설정하는 것은 성교(聖敎)에 어긋나지 않으며, 법상(法相)에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좌가 주장한 ‘안 등은 내적 외적 존재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은 결정코 불확정적인 것[不成]이다. 단지 불확정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개별적인 특성[相]마저 뒤섞여 버리고 말았다. 즉 ‘안 등으로서 식(識)의 소의와 소연이 되는 것을 내적 외적 존재라고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특성이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식이 그것의 소의가 되는 의근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일어났을 때, (즉 의식이 전찰나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났을 때) 이러한 의근은 [내외 중] 어느 그룹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내적인 것’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의식의 소연이기 때문이며, 마땅히 ‘외적인 것’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의식의 소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적 외적인 것’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니, 경에서 설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이와 같은 의근에 대해 혹은 내적인 것이라거나, 혹은 외적인 것이라거나, 혹은 내외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설한 일이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 내외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아니하였던가? 이는 소의신에 근거하여 내외라고 설한 것이니,27) 만약 이러한 해석과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수(受) 등의 경우에도 ‘내적 존재’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마음의 경우도 3관(觀)을 갖추지 못하고 오로지 외적 마음에 대해서만 순심관(循心觀)으로 머물러야 할 것이니, [‘내적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28) 이에 대해 그(상좌)는 “마음이 의식의 소연이 될 때, 그것을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 이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도 바로 ‘내적인 것’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니, 마음은 항상 의식에 대해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안 등이 의식의 소연이 될 때에도 역시 오로지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러한 안 등도 어느 때 자신에 의해 낳아진 의식에 대해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9) 이렇듯 상좌는 내외의 갈래를 설정함에 있어 계경의 뜻을 위배하였고, 불확정적인 사실을 설하였으며, [존재의 개별적인 특성을] 뒤섞어 버렸다. 오로지 우리 아비달마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이 주장한 것만이 경에 부합하고 [주장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어떠한 뒤섞임의 과실도 없는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동분(同分, sabhāga)이고, 몇 가지가 피동분(彼同分, tat-sabhāg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다’고 함은, 어떠한 법계도 오로지 동분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먼저 경(境)의 동분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경이 식에 대해 결정적으로 소연이 된다면 바야흐로 법계도 그러한 의식에 대해 결정코 소연이 되니, 이는 바로 불공법(不共法)이기 때문이다. 곧 식은 그러한 경계에 근거하여 이미 생겨났거나(과거) 생겨나거나(현재) 생겨날(미래) 법이 되는데, 이러한 [3세의] 식의 소연이 되는 경계를 설하여 동분이라고 이름한다. 이렇듯 의식은 능히 일체의 경계를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3세의 경계와 아울러 3세에 제약되지 않는 법[非世법, 즉 무위법] 중의 어떠한 법계라도 과거[已]ㆍ현재[正]ㆍ미래[當]에 걸쳐 그것에 대한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두 찰나의 의식은 능히 일체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30) 이에 따라 법계를 항상 동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17계는 모두 동분이 되기도 하고, 피동분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피동분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동분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안(眼) 등을 설하여 동분 혹은 피동분이라 할 것인가? 바야흐로 동분의 안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색계에 대해 이미(과거) 보았거나 지금(현재) 보고 있거나 당래(미래)에 볼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피동분의 안계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니, 이와 반대되는 것과 불생법(不生法)이 그것이다.31) 그러나 서방(西方, 간다라)의 여러 논사들은 다섯 종류의 피동분의 안계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불생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것이 바로 그것으로, 유식속(有識屬)과 무식속(無識屬)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2) 안계와 마찬가지로 이ㆍ비ㆍ설ㆍ신계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경계대상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동분이라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계의 동분에도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소연에 대해 이미 요별하였거나 지금 요별하고 있거나 당래에 요별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피동분의 의계에는 오로지 한 가지 종류만이 있을 따름이니, 불생법이 바로 그것이다.33) 색계의 동분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눈에 보여진 것으로서 이미 보여졌거나 지금 보여지고 있거나 당래에 보여지고서 소멸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동분의 색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이것과 반대되는 것과 불생법이 그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마땅히 각기 자신의 근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동분이라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 등의 6식은 생겨난 것과 생겨나지 않은 것에 근거하여 두 가지 분(동분과 피동분)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의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만약 안계가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동분이 되면,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동분이 된다. 반대로 이것이 만약 어떤 한 대상에 대해 피동분이 되면,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피동분이 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의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색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즉 [어떤 하나의 색은 그것을] 보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동분이 되지만, 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피동분이 되는 것이다. 혹 어떤 색이 묘고산(妙高山, 수미산)과 같은 산중에 있을 경우, 그것은 모두 일체 유정에 대해 피동분이 된다. 설혹 천안을 갖은 자라 할지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역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혹 어떤 색은 오로지 한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되니, 예컨대 사사롭고 은밀한 것에 대해 홀로 이미 보았거나 지금 보고 있거나 당래 볼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혹 어떤 색은 백천의 유정에 대해 동분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니, 이를테면 달이나 춤이나 씨름 등의 색을 함께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안계의 동분과 피동분이 색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설하는 것인가? 많은 유정들은 다 같이 하나의 색을 함께 볼 수 있지만, 한 유정의 눈을 가지고서 두 유정이 보는 일은 없다. 성(聲)의 경우도 색계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것들은 바로 공동의 대상[共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는 내계(內界)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공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34) 그럼에도 세간에서는 가설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향을 냄새 맡고, 다 같이 이러한 미를 맛보며, 다 같이 이러한 촉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은 무엇인가? ‘분(分, bhāga)’이란 교섭(交涉)을 말한다. 즉 [근ㆍ경ㆍ식이] 다 같이 이러한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이라고 이름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교섭이라 한 것인가? 근ㆍ경ㆍ식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교섭하는 것을 말하니, 바로 전전(展轉)하며 서로 수순(隨順)한다는 뜻이다. 혹은 또한 ‘분’이란 바로 자신의 작용을 서로간에 교섭하는 것을 말하니, 그래서 앞서 “만약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면, 이를 동분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혹은 또한 ‘분’이란 바로 생겨난 촉[所生觸]을 말한다.35) 즉 [촉은] 근ㆍ경ㆍ식에 근거하고 그것이 교섭하여 낳아지기 때문에, 다 같이[同] 이 같은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고 이름하였다. 곧 동분이란 다 같이 작용을 갖으며, 다 같이 촉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이름하니, 동분은 아니지만 그러한[彼]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한 것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이것(피동분)과 그것(동분)은 동일하게 보는 것[同見]이며, 동등한 상[等相]이며, 동일한 처(處)이며, 동일한 계(界)이며, 서로의 근거[因]가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相屬]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낳기[相引] 때문에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인가?36)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고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 가지 색계와 5식계를 말하며, ‘오로지 수소단이다’고 함은 이러한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도(修道)에 의해 끊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뒤의 세 가지 계’란 의계ㆍ법계 그리고 의식계를 말하니, 여섯의 세 가지(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와 통한다’고 함은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각기 세 종류(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 모두와 통한다는 말이다. 이 중에 여든여덟 가지 수면(隨眠)과, 그것과 상응하는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得)이나 혹은 그것의 생(生) 따위와 같은 온갖 구유(俱有)하는 법은 모두 견소단이고,37) 그 밖의 나머지 유루법은 모두 수소단이며, 일체의 무루법은 모두 비소단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초의 성도(聖道, 즉 苦法智忍)의 찰나가 일어날 때, 일체의 모든 이생성(異生性)을 영원히 성취하지 않음[不成就]을 획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생성 역시 견소단으로, 경에서도 ‘예류과(預流果)는 불타법(不墮法)을 획득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때는 능히 악취를 초래할 만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업을 영원히 끊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타법’이라 일컬은 것이다. 또한 [경에서] ‘나는 이미 나락가(那落迦, 지옥)를 다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하였다’고 함은 ‘끊었다’는 뜻이다. 즉 아라한은 스스로 기별(記別)하기를, ‘나는 이미 생을 다하였다’고 말한 것과 같다.38) 그렇기 때문에 악취를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 등의 염오법 역시 견소단이라 해야 하니, 이러한 법은 모두 견도(見道)와 지극히 상위하기 때문이다.”39) 바로 이 같은 설을 부정하기 위해 [본송에서] 다시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즉 이생성은 불염오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것이 만약 염오성이라고 한다면 욕계의 이생으로서 욕탐을 떠났으면 마땅히 이생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생성의 ‘성취’와 ‘획득’은 태어난 몸[生身]에 근거하고 소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다른 계(界)나 지(地)에 태어나면 다른 계나 지의 온갖 이생성을 성취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것(이생성)이 만약 선이라면 선근을 끊은 자는 마땅히 이생이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이생성은] 불염오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불염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견소단이 아니다. 만약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인소단(忍所斷)이라 해야 할 것이다.40) 그러나 만약 인소단이라면 ‘인’(고법지인)이 바로 일어날 때 마땅히 성취해야 하며, 그럴 경우 성자도 역시 이생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불염법도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니, 그것을 근거로 하는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을 때 비로소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非六生]도 역시 견소단이 아니다. 여기서 제6처란 의처(意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와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안(眼) 등의 5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니, 바로 5식 등을 말한다. 즉 색 등의 경계에 근거[攀緣]한 식은 외문(外門, 외적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닌 것이다. 또한 모든 색법은, 그것이 염오이든 불염오이든 역시 견소단이 아니다. 예컨대 불염오법은 그것을 근거로 하는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을 때 비로소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어졌다[斷]’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이박단(離縛斷)이고, 둘째는 이경단(離境斷)이다. 이박단이란 계경에서 “내적인 안결(眼結)이 없는 것에 대해 나에게 내적인 안결이 없음을 참답게 안다”고 말한 바와 같다.41) 이경단이란 역시 계경에서 “너희들 필추(苾芻)들이여, 만약 능히 안근에 대한 욕탐을 끊었다면, 이것을 일컬어 ‘안근의 획득[得]이 영원히 끊어졌다’고 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42) 그런데 아비달마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은 그러한 순서에 의거하여 두 종류의 끊어짐을 설정하였으니, 첫째가 자성단(自性斷)이고, 둘째가 소연단(所緣斷)이다. 즉 어떤 법이 결(結)과 [그것이 낳은] 동일한 결과 등에 대치(對治)를 낳았을 경우, 그것의 끊어짐을 획득하는 것을 ‘자성단’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그 같은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소연이 된 것에 대해서도 바로 이계(離繫)를 획득하지만 반드시 그에 대한 불성취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 것을 ‘소연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유루의 색, 혹은 불염오인 유루의 무색과,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得)과 생(生) 등 일체의 모든 법상에 견소단과 수소단의 온갖 결(結)이 계박되어 있을 경우, 이와 같은 온갖 결이 점차로 끊어질 때, 다시 말해 각각(즉 상ㆍ중ㆍ하)의 품류와 각기 개별적인 법체상에 이계득(離繫得)이 생기할 때, 그러한 온갖 결(結)과 그것이 낳은 동일한 결과 등이 모두 ‘이미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유루의 색, 혹은 불염오인 유루의 무색과, 거기에 수반되는 온갖 ‘득’과 ‘생’ 등의 제법상에 온갖 이계득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끊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법은 오로지 그것이 속한 지(地)의 최후 무간도(無間道)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이다.43) 그러나 모든 견도(見道:즉 고법지인에서 도류지인에 이르는 15찰나)는 능히 그것이 속한 지에서 [점진적인] 순서에 따라 이염(離染)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러한 색 등의 법을 능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44)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이는 온갖 악취로 떨어지는 여러 조건[衆緣]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이미 그것으로의 불생은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근거하여 번뇌가 멸진(滅盡)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끊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서 불생 혹은 불성취를 이미 획득하였다면, 이것과 ‘이미 끊었다’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끊었다[斷]’는 것은 대치도에 의거하여 이계(離繫)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지 불생 혹은 불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야흐로 불생이 아니기 때문에 ‘끊었다’고도 말하는 것이니, [양자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혹 어떤 법은 이미 끊어졌으면서 오히려 생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그의 소의신 중의 이숙과 등이 바로 그러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다. 혹 어떤 법은 이미 끊어졌으면서 또한 역시 불생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이 그러하다. 혹 어떤 법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불생을 획득한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아직 염오를 떠나지 않은 성자의 소의신 중의 무유애(無有愛) 등 과거ㆍ미래세의 일체의 모든 불생법이 그러하며, 온갖 무위의 인(忍)을 이미 획득한 자의 사견(邪見) 등 이와 같은 일체의 법이 그러하다. 혹 어떤 법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서 역시 생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 밖의 법이 그러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다. 또한 역시 불성취가 아니기 때문에 ‘끊었다’고도 말하는 것이니, 이 역시 [양자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혹 어떤 법은 이미 끊어졌으면서도 오히려 성취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의 소의신 중의 불염오법이 그러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염오법은 그것이 이미 끊어졌으면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혹 어떤 염오법은 그것이 비록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난법(煖法)에 따라 일어난 계(戒)를 획득하여 온갖 범계(犯戒)의 악은 버렸지만 아직 끊지 못한 경우가 그러하니, 그것은 최후 무간도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신ㆍ어업의 9품(선ㆍ악ㆍ무기의 상ㆍ중ㆍ하품)이 점진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며, 그러한 온갖 염오법은 과실 또한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다. 혹 어떤 법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서 역시 성취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 밖의 법이 그러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여사(有餘師)는 [앞서와 같이] 설하였던 것이다.45) 그러나 악취 등을 초래하는 신ㆍ어의 두 업은 견소단[의 번뇌]에 의해 직접적으로 등기(等起)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 밖의 다른 품류의 번뇌가 직접적으로 일으킨 업을 바로 관찰해 보면, 다른 품류의 번뇌는 도가 생겨날 때 바야흐로 능히 영원히 끊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견소단이 아니라는] 설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품류의 번뇌(즉 견혹)가 직접적으로 일으킨 업을 관찰해 보더라도 이러한 품류의 번뇌도 도가 생겨날 때 바야흐로 능히 영원히 끊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어찌 이를 인용하지 않고 그러한 [다른] 품류로 논증하는 것인가? 만약 [신ㆍ어의 두 업이] 견소단이라면 마땅히 그것이 직접 일으킨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마땅히 그것을 결정적인 품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대저 결정적인 품류란, 변혹(遍惑)의 힘에 의해 격별(隔別)되지 않기 때문에 품류의 차별에 비록 열세 가지가 있을지라도 다섯 갈래[5門]를 설하여 결정적인 품류로 삼은 것이다. 이에 따라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니, 신ㆍ어의 두 업을 만약 이러한 품류가 직접 일으킨 것이라면 이러한 품류와 더불어 모두 끊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업은 이미 견소단의 혹에 의해 직접적으로 등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은 그릇된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견자(邪見者)가 일으키는 신업과 어업과 의업은 다 삿된 것[邪]이다”고 한 계경에서의 말과 이러한 내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경에서는 다만 ‘모든 사견자가 일으키는 세 가지 업’에 대해 말한 것일 뿐, ‘사견이 일으키는 세 가지 업’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혹은 사견으로 말미암아 수소단인 탐 등의 번뇌를 일으키고, 이를 인등기(因等起)로 삼아 이러한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수소단인 탐 등의 번뇌는 능히 직접적인 원인[近因]으로서의 찰나등기(刹那等起)가 되어 이러한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유루의 신ㆍ어의 두 업은 오로지 수소단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46) 또한 계경 중에서 “예류자(預流者)는 ‘나는 이미 나락가(那落迦) 등을 다하였다’고 말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는 그것(나락가)에 대한 비택멸을 획득하여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다하였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47)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힐난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미래법이 영원히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을 설하여 ‘다하였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불생법의 상(相)은 어떠한가? 마땅히 과거의 경우처럼 불멸법(不滅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법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생법(生法) 혹은 불생법이라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마땅히 법이 미래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연후에 이같이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다.48) 또한 [그같이 힐난하는 경우] 그는 마땅히 세존께서 설하신 바에 대해서도 힐난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과 불선법을 막아 생겨나지 않게 한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이 법이 멸하면 다른 법이 더 이상 상속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막고 멈추는 것[遮止]을 일컬어 온갖 번뇌를 끊는 것이라 한다”고도 말하였으니,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힐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법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법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상속하지 않도록 하며, 막고 멈추라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이와 반대로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영원히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다하였다’고 하였다”고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끊어졌다[斷]’는 말에 의미상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다하였다’는 말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예가 결코 동일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능히 재온(財蘊)을 끊으니, 혹은 적기도 하고, 혹은 많기도 하다”고도 말하였고, 또한 “살생 등의 일을 끊어라”고도 말하였다. 이(‘다하였다’는 말) 또한 역시 마땅히 그러할 것이니, 예를 들을 것도 없다. 또한 경에서 비록 “진리[諦]를 원만하게 관찰한 보특가라는 끝내 중생의 목숨을 끊지 않을 것이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을지라도, 이것으로도 역시 색업(色業)이 바로 견소단이라는 사실을 능히 논증할 수 없다. 즉 이 경 중에서는 아라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에서는 초학자(初學者)는 결코 무겁고도 악한 뜻[意樂]을 쫓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며, 모든 아라한은 [업을 일으키는] 그 같은 직접적인 원인(즉 수소단인 탐 등의 번뇌)을 끊고 [번뇌의] 종류를 다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경은 그(유여사)의 뜻의 증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불염오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는 이치는 매우 잘 성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 dṛṣṭ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 adṛṣṭ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의 능의(能依)인 식(識)이 아니니
전설(傳說)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가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을 말하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일체법 가운데 오로지 이 두 가지 법만이 바로 ‘견’ 그 자체이다. 즉 유색법(有色法) 중에서는 오로지 안근만이 바로 ‘견’이며,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明利]하며, 경계 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慧)가 바로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견’이 아니다. 여기서 안근의 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지만,49)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50) 어두움[闇]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을 설하여 ‘견’이라고 이름하였다. 다섯 가지 염오견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분별하게 될 것이다.51)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유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무루혜를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무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결정(決定, 혹은 決度)적인 무루혜를 말한다. 즉 ‘정견’이라고 하는 하나의 말에는 이미 이상의 세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 각기 별도의 세 가지로 나열한 까닭은 이생과 유학과 무학의 세 단계에서의 ‘견’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점진적인 수습(修習)을 통하여 낳아지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비유하자면 달빛 따위도 없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컴컴한 날 한밤중에 험난한 곳을 지나면 보이는 색상(色像)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 없듯이 다섯 가지 염오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달빛 따위가 있어 어두움이 사라진 날 한밤중에 험난한 곳을 지나면 색상이 조금은 밝고 분명하게 보이듯이 세간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구름이 상승하여 태양을 가린 날 낮에 평탄한 곳을 지나면 색상은 더욱더 밝고 분명하게 보이듯이 유학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작렬하는 햇볕이 펼쳐지고 구름이나 안개도 맑게 걷힌 날 낮에 평탄한 곳을 지나면 색상은 지극히 밝고 분명하듯이 무학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여여(如如)한 행자가 점진적으로 수습하매 혜가 생겨나 자신의 마음속의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제거해 나가는 차별도 이와 같다. 이처럼 온갖 소연(대상)에 대한 정견에 밝고 분명함이 점차로 증가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소연이 되는 경계 대상 자체에 분명함과 분명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각혜(覺慧)에 번뇌의 장애가 있고 없음에 의한 것으로, 이에 따라 소연에 분명함과 분명하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온갖 ‘견’에는 전체적으로 다섯 가지 유형이 있으니, 첫째는 무기의 종류이며, 둘째는 염오의 종류이며, 셋째는 선한 유루의 종류이며, 넷째는 유학의 종류이며, 다섯째는 무학의 종류이다. 즉 무기의 존재 중에서 안근은 바로 ‘견’이지만, 이근 등의 온갖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無覆無記) 혜 따위는 모두 ‘견’이 아니다. 염오의 존재 중에서 5견은 바로 ‘견’이지만, 그 밖의 염오혜는 모두 ‘견’이 아니다.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불공무명(不共無明:다른 불선법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겨나는 무명)ㆍ의(疑)와 함께 일어나는 혜, 그리고 그 밖의 염오법은 모두 ‘견’이 아닌 것이다. 유학의 존재 중에서는 ‘혜’이면서 ‘견’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만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 무학의 존재 중에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그 밖의 법은 ‘견’이 아니지만,52) 그 밖의 무학의 혜는 모두 ‘견’이다. 선한 유루의 존재 중에서는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혜만이 ‘견’이며, 그 밖의 것은 모두 ‘견’이 아니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혜 역시 ‘견’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5식신에 의해 낳아진 혜와 유표업(有表業)을 일으키는 혜와 목숨을 마칠 때의 혜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선한 유루의 존재 가운데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도 역시 ‘견’이 아니다.53)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온갖 혜는 모두 ‘견’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인가? 결탁(決度,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에서 설한 ‘혜’만이 이러한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는 바로 ‘견’ 그 자체인 것이다. 즉 [앞에서]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하며, 경계 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가 바로 ‘견’이며,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오로지 이러한 특성의 혜만이 결탁의 공능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혜는] 소연이 되는 대상에 대해 심려(審慮, 심사숙고)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비견(非見)으로] 부정된 혜는 소연에 대해 능히 심려하고 결탁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결탁(決度)’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경계 대상에 대해 먼저 심려(심사숙고)하고서 마침내 결택(決擇, 결정 판단)한다는 뜻이다.
(1) 식견설(識見說) 비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에도 이러한 결탁의 특성이 없으니, 마땅히 ‘견’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識見家의 물음)54)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움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도 역시 ‘견’이라 이름한다’고.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눈이 온갖 색을 본다”고 하였다.(根見家, 즉 유부 毘婆沙師의 답) 만약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다른 식과] 동시에 일체의 대상을 획득하지 못하겠는가?55) 그 같은 허물은 없으니, 일부의 눈만이 능히 색을 본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동분(同分)의 안근을 말한다. 동분안(同分眼)의 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56) 즉 식에 의해 주지(住持)될 때 바야흐로 동분을 성취하는 것이지만, 일체의 근이 동시에 자신의 식에 주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안근)의 능의(能依)가 되는 식이 바로 ‘보는 것[見]’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안식이 생겨나야 비로소 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의 힘에 의해 주지될 때 [안근의] 뛰어난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이니, 마치 땔감의 힘에 의해 뛰어난 작용을 지닌 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약 색을 보는 작용이 바로 식에 의해 낳아진 법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색을 보는 작용은 눈을 떠나서도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식에 의해 장익(長益)된 구생(俱生)의 대종이 뛰어난 작용의 근을 일으키고, 이것(뛰어난 작용의 근)이 능히 온갖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능의(能依)인 식이 보는 것이다’고 설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지자(智者)가 있어 이같이 말할 것인가? “인연(因緣, 즉 소의와 소연)을 갖는 모든 것(즉 식)은 능히 요별을 낳으며, 이와 같은 요별은 바로 그것(즉 見)의 인연이 된다”고. 즉 식은 바로 ‘견’의 근거[因]일 뿐이며, 따라서 ‘견’ 자체는 아닌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안식이 ‘견’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인가?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증(理證, 이론적 근거)도 교증(敎證, 경설상의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증이 없다’고 함은, [안식은] 이식(耳識) 등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안식과 그러한 이식 등의 온갖 식에 어떠한 차별이 있기에 유독 안식만을 ‘보는 것[見]’이라고 이름하겠는가? 따라서 마땅히 식이 ‘견’의 본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소의가 되는 근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안식은] 그 밖의 식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는 마땅히 그렇지 않다. 즉 식의 차별은 소의상의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안식이라는 명칭은 다만 관념[想]상으로만 획득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식은 소의에 따라 차별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존재 본성[法性]이 바뀌어 ‘견’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마치 초목이나 소똥 쌀겨에 따라 불의 명칭은 바뀔지라도 따뜻함의 자성은 동일한 것과 같다.57) 모든 식을 서로 비교해 보면 존재 자체[性類]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음에도 ‘오로지 안식에 의해 보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해 보는 것이 아니다’고 말할 경우, 이러한 주장은 다만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 올바른 이치[正理]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안식)이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색을 소연으로 삼는 의식 역시 ‘견’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한다고 하면,58)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달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3세의 경계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혜(慧)도 ‘견’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인 것이다. [또한 식이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과거ㆍ미래의 색을 소연으로 삼는 식(의식) 역시 마땅히 ‘견’을 성취해야 할 것이며, 과거ㆍ미래의 식이 현재의 색경(色境)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할 경우 마땅히 여러 맹인들도 현재 색에 대한 ‘견’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의식은 그 자체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안식 역시 그 자체 ‘보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동일한 어떤 존재에 있어 일부가 ‘견’을 본질로 한다면 다른 일부도 ‘비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이치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동일한 어떤 존재를 놓고서 일부는 선하고 일부는 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안식과 의식)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선ㆍ불선을 견ㆍ비견의] 예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니, 존재 자체[體類]와 드러난 뜻[義類]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안식 등의 모든 식은 존재자체는 비록 동일할지라도 선(善) 등의 의미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불 자체와 드러난 뜻에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즉 경계 대상의 상을 요별하는 식(識) 자체는 [동일하지만] 거기에는 선ㆍ불선으로 일컬어지는 분명함[淨]과 분명하지 않음[不淨]의 뜻의 차별이 있다. 그렇다고 드러난 뜻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불에는 비록 맹렬히 타오르는 불도 있고 미약한 불도 있으며, 연기를 갖는 불도 있고 연기를 갖지 않는 불도 있어 그것이 상대하는 인연(즉 땔감)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며 의미상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다 같이 따뜻함을 자성으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은, 경계 대상의 상을 요별하는 존재 자체로서는 비록 동일할지라도 선 등의 의미상으로는 차별이 있다. 따라서 앞서 인용한 예증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식이 존재 자체로서는 비록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견’ 등의 의미상으로는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즉 안식과 내지 의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작용상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이치도 옳지 않으니, 현견(現見)하건대 제법은 존재 자체[體類]로서 차별되는 것이지 드러난 현상[義類]으로서 차별되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선 따위가 그러하듯이 [드러난 현상이] 식 등 일체의 법에 두루 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9) 이와 같이하여 바야흐로 안식이 ‘견’을 성취한다는 주장에 어떠한 근거[因緣]도 없음을 논설하였으니, 이로써 ‘이증(이론적 근거)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교증(敎證)이 없다’고 함은, 지교(至敎)에서 ‘안식이 본다’는 사실을 설한 일도 없으며, 듣고서 그 같은 이해를 낳을 만한 것도 설한 일이 없음을 말한다. 곧 여러 경 중에서 ‘안근과 혜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한다’는 내용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식이 바로 ‘보는 것’으로, 안근은 그렇지 않다고 설할 경우, 세간의 상식과도 어긋나게 될 것이니, 세간에서는 다만 눈이 없는 이를 맹인이라고 이름할 뿐 안식이 없는 이를 맹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즉 맹인이란 다만 안근을 성취하지 못한 이를 말하는 것일 뿐 안식의 성취ㆍ불성취와는 관계없다. 예컨대 제2정려 이상에 태어나는 경우 그에게 안식이 현전하지 않을 때라도 안근은 존재하니, 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안근을 결여한 모든 맹인들도 안식을 성취하는 경우 마땅히 맹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역시 ‘볼 수 없는 이[無見者]’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경우는] 견(見)과 식(識)이 현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성취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이를 설하여 맹인이라 한다’고 한다면, 세간에 눈을 갖은 모든 이도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역시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안식은 능히 [다른 식과] 차별되는 상[能別相]을 가지니, 다른 식과 차별되게 하는 그것을 ‘보는 것[見]’이라 이름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능히 차별되는 상(즉 소의)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안식은 다른 식과 차별되게 하는 [자신의] 차별상을 갖지 않지만, 그럴지라도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포악한 왕이 반포한 교령(敎令)과 같은 것이다.60) 어찌 혜와 마찬가지로 이(안식)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 비유하자면 모든 혜가 법의 간택[擇法]을 특성[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즉 어떤 때에는 ‘보는 것’이면서 역시 간택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택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도 경계 대상에 대한 요별을 특성으로 하는 것이지만, 어느 때에는 ‘보는 것’이면서 역시 요별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요별하는 것일 뿐이다.61) 이에 따라 그의 힐난의 말에 대해 해석해 보기로 하겠다. 만약 식이 능히 ‘보는 것’이라면, 무엇이 요별하는 것인가? [식견가는] ‘견’과 ‘식’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를 인용하는 것은 이치에 극히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혜의 경우, 능히 차별되는 상에 따라 ‘견’이라 이름한 것이니, 이것의 능히 차별되는 상은 바로 ‘능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의 경우, 능히 차별되는 상으로 말미암아 ‘견’이라 이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안근)의 능히 차별되는 상이 바로 ‘능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안식의] 능히 차별되는 상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의인 안근이 능히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 성립되니, [6]식은 다만 소의에 따라 명칭상으로만 차별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의 소의가 되는 안근을 배제하고서 능히 [다른 식과는] 차별되는 결정적인 특성에 다시금 어떤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럴 경우 [식에는] 오로지 안식만이 존재할 뿐 이식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한 “‘견’과 ‘혜’의 경우처럼 ‘견’과 ‘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양자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역시 또한 ‘식’ 자체가 바로 ‘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양자 모두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정한 ‘견’의 본질은 바로 ‘혜’이기 때문이다.62) 또한 만약 ‘견’과 ‘식’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한다면 모든 식은 마땅히 ‘보는 것’이 되어야 하며, ‘보는 것’은 마땅히 모든 식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온갖 식을 갖는] 맹인이나 잠잘 적에는 어떠한 이유에서 보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그 때 안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모든 식은] 존재 자체[體類]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과 그 밖의 다른 식의 존재 자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다른 식은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것만이 유독 ‘능히 보는 것’이라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따위의 해명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널리 비판하였었다. 혹은 또한 [식은 어느 때 ‘보는 것’이면서 역시 요별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존재가 마땅히 두 가지 본질을 지녀야 할 것이니, 하나는 ‘능히 인식(요별)하는 것’이며, 하나는 ‘능히 보는 것’이다. 만약 ‘견’을 본질로 하는 것(즉 안근)이 바로 ‘능히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의 종의는 크나큰 허물을 갖게 되는 것이다.63) 만약 “혜의 경우도 ‘능히 보는 것’이면서 ‘능히 간택하는 것’이지만 이치상 서로 어긋나지 않듯이 이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견’과 ‘혜’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찌 ‘견’과 ‘식’의 경우 또한 차별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눈을 가졌더라도 마땅히 맹인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눈을 갖지 않았으면 안식을 성취하더라도 맹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눈을 가졌으면 그 밖의 다른 식이 현전하더라도 맹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64) 이와 같은 등의 허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널리 논의하였다.65) 그렇기 때문에 안식은 ‘견’이 아님을 결정코 알아야 하는 것이다.
(2) 근견ㆍ식견에 대한 세친의 비평 비판
그런데 다시 유여사(有餘師)는 또 다른 이치로써 안식은 결정코 ‘견’이 아님을 논증하였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은폐된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주(經主)의 뜻은 그 같은 논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송(本頌) 중에서 ‘전설(傳說)’이라는 말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66) 그리고 힐난하여 말하기를,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67)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혹 그것에 대한 안식이 생겨날 수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역시 능히 볼 수 없을 것이니, 앞서 다른 식과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68)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진술은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해서도 안될 것이니,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힐난한 뜻으로 말해 보면 이와 같다. 만약 안식에 색을 보는 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식은 무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만약 색을 요별하는 식의 작용은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생겨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안식과 유대(有對)의 안근이 동일한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69) 나아가 만약 우리의 학설 역시 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들은] 안근이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색이 안근의 경계가 된다는 이치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이유에서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인가? [식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은 바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하였다면, 이는 즉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 혹은 ‘식이 이미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이 된다. 그러니 어찌 이에 대해 전체적 입장에서 힐난하여 말하지 않겠는가? ‘[식은] 어째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또한 어떤 이가 “[견(見)의] 일체의 인연은 모두 오로지 전 찰나에 생겨나며 구기(俱起)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면, 식이 생겨나든 생겨나지 않든 능히 보지 못할 것이니,70) 그가 종의로 삼는 바에 의하면 이 역시 답이 아니다. 또한 유리나 운모(雲母) 등에 감추어진 것에 대해 안식은 역시 생겨나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안식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 사이로 광명이 차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바야흐로 안식은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도 생겨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대가 앞서 한 말에 위배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또한 세간을 현견하건대 비록 광명을 여의었더라도 안식은 일어나니, 이를테면 사람들은 능히 온갖 캄캄한 어둠의 색을 보며, 야행성의 짐승 역시 캄캄한 어둠 속에 감추어진 온갖 색을 보는 것이다.71) 곧 어둠을 보고자 하여 광명을 기다리지는 않기 때문에 [광명을 여의었더라도 안식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경계 대상이 되는 존재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광명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야행성의 짐승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감추어진 것에 대한 식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동일한 어둠의 색이 사람과 짐승에 대해 각기 그 성질이 변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온갖 취(趣, 지옥 내지 천의 6취) 중의 어떤 존재는 마땅히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야행성의 짐승은 인간과 달리 원래부터 광명이 차단된 색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모든 취는 바로 이숙과이기 때문이다. 즉 고양이나 이리, 개 등은 어둠 속에서도 염오심을 일으켜 온갖 색을 취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숙과인 안근은 취 자체에 포섭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숙과가 그러하기에[法爾] 온갖 취 중에서 혹 어떤 존재는 어둠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만약 야행성의 짐승들의 눈은 항상 광명을 띠기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 같은 사실은] 인식될 수 없기[不可得] 때문이다. 만약 [광명이] 적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멀리 있는 대상의 색에 대해서는 관조(觀照)의 작용도 없어야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안식도 마땅히 일어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진술은 참다운 답이 아니며, 오로지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논의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이 능히 본다’고 주장하는 이[眼根能見論者]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감추어진 온갖 색을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안근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으며,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안식] 역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여 말하기를, “안근이 어찌 신근(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合]할 때 비로소 그것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72)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우리가] 설한 유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3) 어째서 그러한가? 이는 오로지 ‘안근은 장애유대(障礙有對)의 법이기 때문에 오로지 직접 접촉한 경계 대상만을 취하고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은 취하지 않으며, 그래서 감추어진 온갖 색을 능히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역시 경계유대(境界有對)의 뜻에도 근거하여 설한 것이니, 만약 [안근이] 이러한 경계에 구애(拘礙)되는 경우 그것은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대해서는 설혹 장애가 없을지라도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장애가 있는 것에 대해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74) 경계 대상을 갖는 일체의 법은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식도 역시 유대라고 해야 할 것이며, 단지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마땅히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니, 경계 대상을 갖는 일체의 법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였기 때문이다.75) 이러한 예는 옳지 않으니, 뜻이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뜻을 설해 보면 이와 같다. 안근은 또한 역시 경계유대성이기 때문에, 색은 바로 장애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근의 작용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과 의식의 경우, 비록 소의와 능의로서 결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경계에 대한 작용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는 동시에 동일한 경계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76) 그렇지만 소의인 안근이 취하는 경계는 바로 능의인 안식이 취하는 경계이며, 또한 반드시 동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경계에 대해 안근의 작용이 차단되면 안식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다. 이에 따라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나 식견(識見)을 인정할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어찌 안근이 바로 경계유대가 아니라 하겠는가? 그러나 유리 등의 경계에 구애될 때에는 그것에 의해 감추어진 것에 대해서도 역시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만약 [안근이] 이러한 경계에 구애되는 경우 그것은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대해서는 설혹 장애가 없을지라도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장애가 있는 것에 대해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라고 설하는 것인가?(식견가의 힐난) 어찌 앞에서 구시(俱時, 동시)에 취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유리를 취할 때 그것에 감추어진 것은 취하지 않으며, 유리에 감추어진 것을 취할 때 유리는 취하지 않는다. 양자를 동시에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안근은 벽 등에 감추어진 색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그 사이에 광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세간을 현견하건대 비록 광명을 여읜 것일지라도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대들이 말한 것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취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적취된 모든 색은 장애성(障礙性)을 지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밝음[明]과 어둠[暗]은 [모두 장애성을 갖지만] 장애가 되는 것이 동일하지 않은 것과 같다. 예컨대 어둠과 밝음이 비록 동일한 색처일지라도 사람은 어둠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하지 못하지만 밝음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있듯이 야행성의 동물은 비록 어둠에 의해 장애된 색은 능히 취할 수 있을지라도 벽 등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리 등에 의해 장애된 온갖 색은 능히 취할 수 있을지라도 벽 등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안근은 오로지 벽 등을 볼 뿐이며, 벽 등에 의해 장애된 온갖 색은 보지 못하니, 적취된 색은 장애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치[法]는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으로, 추론하여 따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근은 장애성이 적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不合境]만을 취할지라도 그 밖의 다른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은 능히 취하지 못하며, 어떤 근은 비록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合境]만을 취할지라도 직접 접촉한 대상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77) 따라서 경주(經主)가 말한 “안근이 어찌 신근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때 비로소 그것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힐난은 마땅히 꾸짖어 말해야 한다. 만약 [어떤] 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직접 접촉하지 않은 일체의 대상을 능히 취해야 할 것이며, 만약 직접 결합한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것이라면 직접 접촉한 일체의 대상을 모두 능히 취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의 말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대로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으며,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같이 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견(識見)을 인정하는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은 주장과 논파는 이치상 지극히 잘 성취된 것이다.
1)심과 심소는 아집(ahaṃkāra)의 근거[依止]가 되기 때문에 자아[我]로 가설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러한 자아의 소의가 되는 것[親近]을 ‘내적인 것’이라 하고, 소연이 되는 것[疎遠]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후설)
2)불살생계를 지킬 경우, 그것의 주체로서 일시 가설되는 것이 ‘자아’이다.
3)즉 앞(본론 제3권, 주6)에서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을 의계라 하고, 이것만이 마음의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4)여기서 ‘자종(自宗)’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설일체유부의 종의를 말한다. ‘18계는 모두 3세와 통한다’는 사실은 『대비바사론』 제71권(대정장27, p.367중)에 ‘三世各有十八界相’에 근거한 것이다.
5)이상 ‘자아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경주(經主) 세친(世親)의 논의. 『구사론』 제2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78-79.
6)안계 등의 12계를 ‘내적인 것’이라 하고, 색 등의 6계를 ‘외적인 것’이라고 할 경우, 법계에 포섭되는 심소법도 외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7)만약 마음(6식)의 소의만을 ‘내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안근 등은 심소와 상응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소의가 되지 않으며, 마음도 심소에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 또한 ‘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힐난.
8)즉 유신견(5취온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염오혜)은 마음[識]뿐만 아니라 색ㆍ수ㆍ상ㆍ행에도 근거하기 때문이다.
9)마음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됨이 없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헤아리고 인식하여 업을 일으키게 한다.
10)사실상 심소는 ‘내적인 것’이지만 경에서는 보다 수승한 마음을 자아로 가설(假說)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자아의 근거가 되는 6근ㆍ6식을 내적인 것이라 하여도, 다시 말해 심소를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뜻.
11)이를테면 선심은 염오심에 대해서도 소의가 될 수 있지만, 선의 심소의 경우 선심에는 능히 의지할지라도 염오심에는 능히 의지하지 않는다.
12)하나의 마음은 최소한 10가지 대지법에, 혹은 선심일 경우 22가지 심소(각기 10가지 대지법과 대선지법, 그리고 尋ㆍ伺)에 소의가 되므로 소의성의 마음은 단일하지만 능의성의 심소는 일정하지 않다.
13)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 등의 10가지 대지법은 선ㆍ불선ㆍ무기 등 일체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 작용(심소)이므로(본론 제10권~11권 참조) 동류와 이류의 어떠한 마음에 대해서도 능의성(能依性)이 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14)구마라다(Kumāralāta).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童受)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ㆍ제바(提婆)ㆍ용맹(龍孟, 즉 용수)과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ㆍ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15)이는 사실상 앞의 경주 세친의 설과 동일한 것으로, 『대비바사론』 제74권(한글대장경120, p.544)에서 설한 내외의 네 가지 분별 중 제1설이다.
16)안근이나 색경 등은 다 같이 유정수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개별적[不共]인 색법이지만 소의가 되고 되지 않음에 따라 내외로 설정하였듯이, ‘안’과 ‘수’ 등은 다 같이 법처에 포섭되지만 이 또한 소의가 되고 되지 않음에 따라 내외를 설정하였다는 뜻.
17)여기서 이분이란, 동분(同分)과 피동분(彼同分)으로, 전자가 자신의 작용을 이행하는 현세적(顯勢的)인 법이라면 후자는 잠세적(潛勢的)인 법이다.(본권 후술) 따라서 당연히 동분의 근은 ‘내적인 것’이고, 피동분의 근은 ‘외적인 것’이지만,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
18)『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대정장2, p.91하).
19)그러나 경에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았다.(次註 참조)
20)유부에서는, 앞의 계경에서 색에는 유견유대(有見有對)ㆍ무견유대(無見有對)ㆍ무견무대(無見無對)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나아가 “법처란 말하자면 외처(外處)로서, 이는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무대이다”는 경설을 논거로 삼아 무표색(혹은 무표업)을 주장한다. 즉 이 경 후반에서 제6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무견무대의 법을 제6 의식처럼 비물질[非色, 혹은 無色]이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무견무대색은 바로 법처에 포섭되는 색, 즉 무표색을 뜻하지 수ㆍ상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경설에 근거한 무표색의 논증에 대해서는 본론 「업품(業品)」(제35권)에서 상론되고 있다.
21)법처를 설명함에 있어 일체의 모든 법으로도, 개별적인 법으로도 나타내지 않았다는 뜻.
22)즉 앞서 상좌가 설한 “안 등이 식(識)의 소의로서 작용할 때 안처(즉 內)로 설정하지만, 만약 의식의 소연의 경계가 될 때는 법처(즉 外)로 설정한다”는 주장.
23)동유(同喩)란, 논증의 주제와 동일한 성격의 예를 말하는 것으로, 안근의 동유로 인용한 의근의 경우,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
24)순신관(循身觀, kāyānupāśin)이란, 4념처 중 신념처(身念處)로,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몸을 쫓아가며 부정(不淨)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25)『잡아함경』 제2권 제33경 등(대정장2, p.7중하).
26)이를테면 안근 등은 색법으로 안식의 경계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안식의 소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식의 소의와 같은 몸에 있는 안근(즉 내 눈)은 ‘내적인 것’이지만 몸 밖에 있는 안근(즉 남의 눈)은 ‘외적인 것’이다.
27)전주(前註) 참조.
28)여기서 ‘3관(觀)’은 4념처 중 신념처(즉 循身觀)를 제외한 수(受)ㆍ심(心)ㆍ법념처(法念處)로, 그것들을 각기 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로 관찰하는 것. 즉 이러한 3법이 관찰의 대상(소연)이 되는 한 그것은 외적 존재이며, 심념처(순심관)의 대상인 마음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9)의근(전 찰나의 식)에 의해 의식이 낳아지지만, 그것이 또한 의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혹은 안근은 안식의 소의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식의 소연도 되기 때문에, 6식의 소의가 되는 것을 ‘내적인 것’으로, 소연이 되는 것을 ‘외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경우, 잡란의 과실을 범하게 된다.
30)이 말은 『구사론』(제2권, 앞의 책, p.79)에 의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따르면 무변의 의식은, 그 자체와 그것과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된 법도 역시 제2 찰나 마음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경계 대상은 두 찰나 마음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성자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관하였을 경우, 그것은 3세 일체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것과 구기(俱起)하는 다양한 심소와, 생(生) 등의 불상응행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의식 자체를 포함한 그것들은 그 순간 동분이 되지 않지만, 다음 순간(제2 찰나) 반성력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마침내 일체의 대상은 법동분이 되는 것이다.
31)이는 곧 색을 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안근과 불생(不生)의 안근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p.80)
32)유식속불생법(구역 與識相應不生法, vijñānasamāyukta-)이란 식과 근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연이 결여되어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하며, 무식속불생법(구역 與識不相應不生法, avijñānasamāyukta-)이란 근만이 있고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한다.
33)의계, 즉 마음은 이미 생겨난 이상 어떤 대상(소연)에 대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동분이며, 따라서 필경(畢竟)불생법만이 피동분이 된다.
34)향ㆍ미ㆍ촉은 감관과 직접 접촉하여야 알려지는 것[合中知]이므로 그 당사자만 알 뿐이지만, 색과 성은 그렇지가 않기[離中知] 때문이다.
35)근ㆍ경ㆍ식 세 가지의 교섭이 원만하여 이른바 ‘동분’의 뜻을 각각 갖게 될 때 촉(觸)이 낳아지므로(三事和合觸), 그러한 촉을 ‘분’이라 이름한다는 뜻.
36)견소단과 수소단은 견도(見道:무루혜에 의한 4諦관찰)와 수도(修道:선정을 통한 반복된 관찰)로 끊어지는 법이며, 비소단은 무위택멸처럼 끊어지지 않는 법을 말한다.
37)88수면은 4제 각 행상(行相)에 미혹하여 생겨난 이지적 번뇌, 즉 미리혹(迷理惑, 혹은 見惑)으로, 본론 제46권에서 상론된다.
38)여기서 ‘기별(vyākaraṇa)'이란, 불타의 설법양식(12分敎) 중의 하나로, 본래는 문답체의 해설을 말하지만 미래세 깨달음[證果]을 예언하는 것, 즉 수기(授記)를 의미한다.
39)여기서 이생성은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자. 즉 이러한 이생성과 결정코 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의 생을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 등의 염오법은 견도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처럼 견소단이 되어야 한다는 뜻. 다시 말해 견도를 거친 예류과의 성자는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생성이나 불선의 신ㆍ어업을 견소단으로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이는, 바사(婆沙)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이지만, 『구사론기』(제2권)에 의하면 경부(經部)이다.
40)이생성은 선도 불선(염오)도 아닌 불염오무기성이기 때문에 견소단(무루혜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혹 견소단이라 할지라도 욕계 고제(苦諦)에 대한 무루혜인 고법지(苦法智)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가하는 그 전 단계(苦法智忍)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41)일반적으로 법에는 법 자체가 단진(斷盡)되어야 할 것과, 그 자체는 단진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반연(攀緣)하는 번뇌를 단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전자를 자성단(自性斷)이라 하고, 후자를 이박단(혹은 緣縛斷)이라고 한다. 안근의 경우 안근 자체를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근을 계박하는 결(結,즉 번뇌)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증을 인용한 것이다.
42)이경단이란 경계 대상 자체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한다.
43)유부 아비달마에 따르면, 번뇌의 단(斷), 즉 번뇌의 제 심소가 마음의 상속과 구생(俱生)의 관계를 떠나는 것은 무간도에 의해, 그것의 이계(離繫)는 해탈도(무간도 최후에 낳아지는 一念의 正智)에 의해 획득된다. 참고로 양자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해 보면, 전자는 도둑을 문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문을 닫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본론 제63권 ‘忍ㆍ智의 작용과 순서’ 참조) 그런데 수소단의 번뇌는 강성한 것(상상품)으로부터 미약한 것(하하품)으로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次註 참조) 어떤 한 지의 그것은 제9 하하품의 무간도에 의해 비로소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욕계 수혹의 경우, 먼저 상상품이 무간도에 의해 끊어지고 해탈도에 의해 이계(離繫)가 획득되며, 다시 상중ㆍ상하 내지 하하품이 무간도에 의해 끊어질 때 비로소 욕계 수혹이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3계 9지에 있어 최후의 무간도는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 제9품(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며, 최후의 해탈도는 여기서 생겨난 진지(盡智)로, 이때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44)견도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에 의해 5견(見)과 의(疑)와 같은 이지적 번뇌[迷理惑 혹은 見惑]가 끊어진다. 곧 이러한 번뇌는 마치 해머를 내리치는 순간 바위가 깨어지는 것처럼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에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다. 그러나 수도는 견도를 닦은 이후 더욱 증진하여 그것을 반복적으로 익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탐(貪)ㆍ진(瞋)ㆍ만(慢)과 같은 정의적 번뇌[迷事惑, 혹은 修惑]가 끊어진다. 곧 이러한 번뇌는 연근의 심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강성한 것(상상품)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약한 것(하하품)에 이르기까지 아홉 단계[9地]에 걸쳐 점진적으로 끊어진다. 그래서 유루의 색 등은 견소단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5)즉 ‘악취를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 등의 염오법 역시 견소단이라고 해야 한다’는 앞의 주 39)의 논설.
46)인등기(hetu-samutthāna)란, 업의 원인이 되는 심ㆍ심소를 말하는 것으로, 업을 짓고자 할 때 현재의 인등기심은 미래의 업을 인기하기 때문에 ‘전인’이라고도 한다. 찰나등기(tatkṣaṇa-samutthāna)란, 업과 동시병존하면서 업의 생기에 충족조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업이 현재찰나의 원인과 불상리의 관계로서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수전인’이라고도 한다.
47)이에 반해 유여사는 여기서 ‘다하였다’고 함을 ‘끊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결과 신ㆍ어업을 견소단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본론 주) 39 참조)
48)제법의 삼세실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50권~52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49)본론 제1권(‘색온’ 중 ‘5근’) 참조.
50)여기서 관조(ālocana)란, 근이 거울과 마찬가지로 외계 대상을 비추어 받아들이는 작용을 말한다.
51)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5취온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斷ㆍ常의 두 극단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52)진지란,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번뇌를 멸진할 때 생겨나는 지(智)로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이미 집(集)을 끊었고,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고,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것을 말하며, 무생지는 부동법의 아라한이 진지와 무간에 획득하는 지로서, ‘나는 이미 고를 알아 이제 더 이상 알 것이 없으며, 나아가 나는 이미 도를 닦아 이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을 말한다. 즉 ‘견’이란, 후술하듯이 추리 판단[推度, 혹은 決度]의 작용인데, 이 같은 진지와 무생지는 추리 판단된 것이 아닌 결정적 판단[決斷]이기 때문에 다만 지(智)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 ‘인(忍)과 지(智)와 견(見)의 관계’를 참조 바람.
53)즉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에(본론 제4권 참조), 그것과 상응하는 혜에는 추탁(推度)의 공능이 없다. 그래서 ‘견’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54)이하 앞에서 논의한 견(見)의 주체를 감관, 즉 안근으로 볼 것인가, 의식, 즉 안식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了別)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전자를 근견설(根見說), 후자를 식견설(識見說)이라고 하며, 유부에서는 근견설의 입장을 취한다. 『대비바사론』 제13권(대정장27, p.61하)에서는 ‘견’의 주체에 대해 안식이 색을 본다는 법구(法救, Dharmatrāta)의 식견설, 안식과 상응하는 의식 작용으로서 이해ㆍ간택력인 혜(慧)가 본다는 묘음(妙音, Ghoṣa)의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비유자(譬喩者)의 화합견설(和合見說), 그리고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본다는 독자부(犢子部)의 일안견설(一眼見說)을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본다고 주장한다.(‘一眼見과 二眼見의 대론’은 본론 제7권에서 이루어진다.)
55)이는 식견가의 재난(再難). 만약 보는 주체가 안근이라면 다른 의식 활동에 관계없이 항상 보아야 하지만, 그럴 경우 안식과 다른 의식이 동시작용하게 되며, 이는 유부의 2식(識) 불구기설(不俱起說)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구사론』(앞의 책, p.87)에서의 반문은 이러하다.:“만약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식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마땅히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56)본권 ‘동분ㆍ피동분의 분별’ 참조. 예컨대 모든 톱이 항상 자르는 작용을 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목수와 결합하여 자기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톱만이 자르는 작용을 행하듯이, 모든 눈이 항상 보는 것은 아니며, 안식과 함께하여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는 눈(同分眼)만이 보는 작용을 행한다는 뜻.
57)땔감에 따라 불의 명칭이 바뀔지라도 불 자체는 따뜻함을 본질로 하듯이, 6식 또한 소의에 따라 그 명칭이 바뀔지라도 식 자체는 요별(了別)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안식을 ‘보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58)안식은 현재의 색을, 의식은 과거의 색을 소연으로 삼는다.
59)선이 일체의 식에 통하지 않는 것처럼 안식의 ‘견’ 또한 일체의 식에 두루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은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는 뜻.
60)이는 앞의 이증에 근거한 해석으로, 만약 경에서 안식이 다른 식과 능히 차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能別相]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차별되는 특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소의, 즉 안근에 따른 것이다) 그것의 본질이 ‘보는 것’이라고 설하였다면, 이는 어떠한 논리성도 갖지 않는 독재자의 명령과 같은 것이라는 뜻.
61)이는 식견가의 힐난과 변명이다.
62)‘견’은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즉 추탁(推度)으로, 간택(簡擇)의 ‘혜’를 본질로 한다. 그런데 앞서 식견가는 ‘식’과 ‘견’의 관계는 ‘견’과 ‘혜’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는데(주 61), 그럴 경우 ‘식’과 ‘혜’는 다 같이 ‘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므로 양자는 결국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
63)유부와 같은 범주론적 사유 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法]는 오직 한 가지 본질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보는 것’, 즉 견자(見者)가 식이라면 요별자를 반드시 따로이 설정해야만 한다. 즉 ‘견’이 마음의 감성적 작용이고 요별이 오성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의 주체 또한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부의 경우 안근의 본질은 관조[見]이고, 안식의 본질은 요별로서, 각기 개별적 존재인 것이다.
64)2식(識) 불구기(不俱起)의 원칙에 따라 그 밖의 다른 식이 현전하는 경우 안식은 현전하지 않으며, 식견설에 따르는 한 그럴 경우 이를 맹인이라 해야 한다는 뜻.
65)즉 앞서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비록 안근을 결여한 모든 맹인일지라도 안식을 성취하는 경우,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만약 비록 다시 성취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견(見)과 식(識)이 현전하지 않은 상태를 맹인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눈을 갖은 모든 이도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역시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고 논설하였다.
66)이는 근견가(根見家)의 또 다른 해석으로, 세친은 이를 전설(傳說)로 전하여 예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구사론』 제2권, 앞의 책, p.87).
67)『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68)6식은 다만 소의에 따른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요별’ 이외 별도의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고 앞에서 이미 논의하였다.
69)『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안식이 감추어진 색에 대해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안근과 동일한 경계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라면, 이는 곧 안식이 안근에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70)유부 제법분별론에 따르는 한 유위제법은 각기 개별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제법의 동시구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법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구기하지 않고 계기(繼起)한다면 각각의 작용은 찰나생멸하기 때문에 산괴(散壞)하여 하나의 인식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만다. 유부에서는 이러한 이유에서 심ㆍ심소를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면서도 그것들의 동기 구기를 주장한다.(본론 제10권 이하 참조)
71)유부에 의하는 한 어둠[暗] 역시 색법(즉 顯色)의 하나이다.
72)『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눈은 반드시 대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이중지(離中知), 즉 비지경(非至境)의 감관이기 때문에 합중지(合中知)의 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으며,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든(有對) 지니지 않든(無對) 관계없다. 따라서 눈이 벽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유대성으로 인한 불접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 수정이나 유리 운모 물 등에 의해 방해 받아도 그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근이 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대상을 볼 수 없다고 한 근견가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73)유대(有對)에는 장애유대뿐만 아니라 경계유대ㆍ소연유대 등 세 종류가 있다.(본론 제4권 참조)
74)즉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은 장애유대일 뿐만 아니라 경계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 사람이 나란히 있어도 한 사람을 볼 때 다른 한 사람은 시각의 대상이 되지 않거늘 하물며 그 사람이 다른 사람 뒤에 숨었을 경우 어찌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
75)‘안식이 본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안식은 경계유대가 되어야 하며, 비록 장애성(장애유대)을 갖지 않았을지라도 이 같은 이유에서 감추어진 색을 능히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논주의 해명은 옳지 않다는 힐난. 즉 안근은 경계유대이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안식 역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
76)안근과 안식은 소의와 능의의 관계로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대상을 취하지만, 의근과 의식의 관계 또한 비록 그러할지라도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본론 제3권 주6 참조)
77)근은 장애유대일 뿐만 아니라 경계유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비ㆍ설ㆍ신근처럼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는 것일지라도 접촉한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에 관한 문제는 본론 제7권에서 상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