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가 비록 온갖 품류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3계(界) 5부(部)로 설정되며, 온갖 번뇌의 끊어짐[斷]도 역시 계박되는 소연의 경계[所繫事]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수승한 상태[勝位]에 근거하여 아홉 종류의 변지(遍知)로 건립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지만 [번뇌의] ‘끊어짐’은 반드시 도(道)의 힘에 의해 획득된다. 이러한 [‘끊어짐’의] 근거가 된다는 도의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에서 이미 번뇌의 끊어짐은 견제(見諦)와 수도에 의한다고 설하였거니와 견도는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것이고 수도는 9품을 닦는 것이다.1) 已說煩惱斷 由見諦修故 見道見聖諦 修道修九品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께서는 오로지 번뇌에 두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으니, 견소단(見所斷)과 수소단(修所斷)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론(諸論) 중에서는 두 가지를 다시 다섯 가지 즉 5부의 소단(所斷,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소단과 수소단)으로 전개시키고 있는데,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2) 그러나 [여기서는] 경에서와 마찬가지로 간략히 오로지 두 가지로 포섭하였을 뿐이니, 그것은 다만 견도와 수도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견도란 이를테면 4성제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수도란 이를테면 9품(상상품 내지 하하품)의 차별을 닦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견도가 오로지 무루라면, 수도는 두 가지(무루와 유루)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한 바에 준하여 볼 때 이미 나타낸 셈이다.3)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제(諦)는 네 가지로서, 그 명칭은 이미 설한대로 고ㆍ집ㆍ멸ㆍ도이며 그 자체의 본질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그 순서는 현관(現觀)에 따른 것이다. 諦四名已說 謂苦集滅道 彼自體亦然 次第隨現觀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는 경 중에서 “‘제(satya)’ 즉 진리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고(苦, duḥkha)이며, 두 번째는 집(集, samudaya)이며, 세 번째는 멸(滅, nirodha)이며, 네 번째는 도(道, mārga)”라고 설하였는데, 이 논(즉 『현종론』) 중에서도 역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4) 이를테면 온갖 성도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으로서 결과적 존재[果性]가 되는 쪽[邊]을 모두 고제(苦諦)라고 이름하였으며, 원인적 존재[因性]가 되는 쪽을 모두 집제(集諦)라고 이름하였다. 즉 법[物] 자체로서는 비록 어떠한 차이가 없을지라도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헤아려도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그것(성도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에 근거하여 현관위(現觀位)를 건립하는 중에 인(忍)ㆍ지(智) 등의 행상이 차별되기 때문으로,5) 4정단(正斷)의 출리심(出離尋)의 경우와도 같다.6) 그리고 택멸무위를 일컬어 멸제(滅諦)라고 하였으며, 학ㆍ무학의 법을 모두 도제(道諦)라고 이름하였다. 원인이 앞에 오고 결과가 뒤에 오는 것으로, 이치상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필시 그러해야 한다. 이에 따라 결정코 마땅히 성제의 명칭을 열거하면서 고제는 집제 뒤에 와야 하고, 도제는 멸제 앞에 와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여기서는 결과를 먼저 설하고, 원인을 뒤에 설한 것인가? 현관(現觀)하는 단계의 순서에 따라 설한 것이다. 즉 행자(行者)가 현관하는 단계에 따라 먼저 관찰한 것을 앞에 설하였고, 뒤에 관찰한 것을 뒤에 설한 것이다. 그렇지만 혹 어떤 법은 생겨나는 순서에 따라 설하기도 하는데, 염주(念住) 등과 같은 법이 그러하다.7) 혹은 다시 어떤 법은 편의에 따른 순서로 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정승(正勝) 등과 같은 법이 그러하다.8) 어떠한 이유에서 현관(現觀)하는 순서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인가? 가행위(加行位, 견도의 준비단계) 중에서 이와 같이 관찰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가행위 중에서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지극히 핍박하고 괴롭히는 어떤 법이 있다고 한다면, 가행을 닦는 단계에서는 이치상 먼저 [그러한 법을] 관찰해야 하며, 다음으로 그것의 원인을 추구하고, 그 다음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며, 마지막으로 마땅히 그것으로부터 해탈하는 방편을 추구해야 하니, 비유하자면 양의(良醫)는 먼저 병자가 괴로워하는 병의 상태를 관찰하고, 다음으로 그 원인을 찾으며, 다음으로 병의 쾌유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좋은 약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의왕(醫王)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 덕을 갖추고서 능히 독화살을 뽑는 자이니, 첫째는 병의 상태를 잘 알며, 둘째는 병의 원인을 잘 알며, 셋째는 병의 치유를 잘 알며, 넷째 좋은 약을 잘 안다. 여래도 역시 그러하니, 위대한 의왕이 되어 고ㆍ집ㆍ멸ㆍ도를 참답게 안다.”9) 따라서 가행위에서는 이와 같은 순서에 의거하여 [4제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관위(現觀位) 중에서 관찰하는 순서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은 가행의 힘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앞에서 외운 글을 마음으로 외우는 것과 같다.10) 그래서 성제의 명칭을 현관의 순서에 따라 열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관(現觀, abhisamaya)’이란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11) 현전에서 평등하게 깨닫는 것[現等覺, abhisaṃbodha]’이기 때문에 ‘현관’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올바른 깨달음[正覺, saṃbodha]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오로지 무루로서, 이러한 깨달음은 참되고 청정[眞淨]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제(聖諦, arya-satya)라는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성자들의 진리[諦]이기 때문에 ‘성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즉 오로지 성자들만이 이러한 4제에 대해 능히 성행(聖行)과 성지(聖智)로써 참답게 관찰[實觀]할 수 있는 것으로, 이생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제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12)
2) 특히 고제(苦諦)에 대하여
오로지 수(受)의 일부만이 바로 괴로움 자체(自體)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괴로움이 아니다.13) 그런데 어떻게 온갖 유루의 행(行)을 모두 고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 괴로움과 부합하기에 ‘고’이니 상응하는 바대로 [이와 부합하는] 일체의 마음에 드는 것이나 들지 않는 것이나 그 밖의 유루행법이 그러한 것이다. 苦由三苦合 如所應一切 可意非可意 餘有漏行法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으니, 첫째는 고고성(苦苦性)이며, 둘째는 행고성(行苦性)이며, 셋째는 괴고성(壞苦性)이다.14) 즉 모든 유루행법은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이 같은 세 가지 종류의 괴로움과 부합하기 때문에 모두 다 고제(苦諦)라고 하여도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온갖 유루행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것[可意]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非可意]과 그 밖의 것(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낙수(樂受)와 그것의 자구(資具)가 되는 [유루행법을] 말하니, 그 밖의 다른 두 종류도 그러하다.15)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유루행법은 괴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苦)’라고 일컬은 것이니, 염오를 떠나지 않은 자는 그것(마음에 드는 것)이 허물어질 때 필시 우수(憂愁) 등을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온갖 낙수가 생겨날 때에는 즐거움이며, 지속할 때에도 즐거움이지만, 허물어질 때에는 괴로움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6) 그리고 낙수에 수순하는(수반되는) 제행도 낙수의 경우와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온갖 유루행법은 고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고수(苦受) 자체와 고수에 수순하는 법이 현전하면 필시 몸과 마음을 능히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도 계경 중에서 “온갖 고수는 생겨날 때도 괴로움이며, 지속할 때에도 괴로움이지만, 허물어질 때에는 즐거움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7) 그리고 고수에 수순하는 제행도 고수의 경우와 같다. 이러한 것(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유루행법은 행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인연(因緣)에 의해 지어진 것은 모두 비상(非常) 즉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루법으로서 비상(非常)한 것이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없다. 따라서 유루법은 모두 괴로운 것[苦性]이다. 어찌 일체의 유루행법도 이(非常)에 근거하여 모두 다 행고성이 될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마땅히 비고락수(非苦樂受, 즉 捨受)와 그 자량이 되는 것만을 행고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이 같은 이치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서는 공통되지 않은 사실[不共]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18) 이를테면 처음과 뒤의 괴로움(즉 고고성과 괴고성)은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오로지 ‘마음에 드는 법[可意法]’과 ‘마음에 들지 않는 법[非可意法]’에 존재할 뿐이며, 그 밖의 유루법은 오로지 행고성일 뿐으로, 공통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결정코 마땅히 “세 가지 수(受)를 본질로 한다”고 판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니, 세 가지 ‘수’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가지 ‘수’와 수순(隨順)하는 법(상응 구유법)도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도는 무루이기 때문에 [세 가지] 괴로움에 포섭되지 않는다.19) 2. 2제설(諦說)
1) 총설
이상에서 분별한 4성제 중에서 몇 가지가 세속제(世俗諦)이며, 몇 가지가 승의제(勝義諦)인가? 그리고 이와 같은 2제(諦)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의 지각은 그것이 파괴되면 바로 없어지며 혜(慧)에 의해 다른 것으로 분석되어도 역시 그러한 항아리나 물과 같은 것이 세속제라면 이와는 다른 것을 승의제라고 이름한다. 彼覺破便無 慧析餘亦爾 如甁水世俗 異此名勝義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화합물(和合物)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두 종류의 성류(性類)로 차별되니, 첫째는 [다른] 사물에 의해 파괴되어 세분될 수 있는 것이며, 둘째는 혜(慧) 즉 관념에 의해 그 밖의 다른 존재로 분석되어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색(色)으로서 모든 화합된 적취물은 파괴되어 세분되면 그것에 대한 지각이 바로 없어지는데, 이를 세속제라고 이름하니, 항아리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20) 즉 항아리 등이 깨어져 조각 등이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항아리 등의 지각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화합된 적취물의 경우, 비록 파괴되어 다수가 될지라도 그것에 대한 지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물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21) 그렇지만 그것이 만약 뛰어난 ‘혜’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법으로 분석되어 제거되면, 그것에 대한 지각은 바야흐로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그것 역시 세속제이다. 즉 물 등이 ‘혜’에 의해 색(色) 등으로 분석되어 제거될 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물 등의 지각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존재[物]가 아직 파괴되거나 분석되지 않았을 때에는 세속관념[世想]에 의해 설정된 명칭으로 시설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시적으로 시설된 존재[施設有]이기 때문에 ‘세속’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러한 세속의 이치에 근거하여 ‘[여기에] 항아리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 경우, 그것이 진실로서 거짓이 아니라면, 이를 ‘세속제’라고 이름하니, 세속의 이치대로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는 다른 존재[物]라고 한다면, 이를 승의제라고 이름한다. 즉 그러한 존재에 대한 지각은 그것이 파괴되더라도 없어지지 않으며, 아울러 ‘혜’에 의해 그 밖의 다른 존재로 분석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각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일컬어 승의제라고 하니, 색(色) 등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예컨대 색 등의 존재는 부서져 세분되고 점점 더 [작게] 부서지고 쪼개져 마침내 극미(極微)에 이를지라도, 혹은 뛰어난 ‘혜’에 의해 미(味) 등으로 분석되어 제거될지라도 그 같은 색 등에 대한 지각은 본래대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22) 색법뿐만 아니라 수(受) 등도 역시 그러하다.23) ‘수’ 등은 세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수고 세분하여 극미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혜’로써 분석하여 찰나에 이르게 할 수는 있으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상(想) 등의 법으로 분석하여 제거하는 것도 가능한데,24) [그때에도] 그 같은 ‘수’ 등에 대한 지각은 본래대로 항상 존재한다. 즉 이러한 법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眞實有]이기 때문에 ‘승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든 때에 그 자체로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의의 이치에 근거하여 ‘색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 경우, 그것이 진실로서 거짓이 아니라면, 이를 ‘승의제’라고 이름하니, 승의의 이치대로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4성제는 모두 승의제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것이 [16행상으로] 세분되어 분별될 때조차도 그것에 대한 지각은 사기(捨棄)되지 않기 때문이다.”25)
2) 세속과 승의의 관계
모든 세속제는 승의의 이치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제’는 오로지 한 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며,26)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제’는 마땅히 두 가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결정코 “존재한다”고 판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니, 존자 세우(世友)는 “전도됨이 없이 그 의미[義]를 드러내는 말[名]이 바로 세속제라면, 이러한 말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가 바로 승의제이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27) 그리고 ‘말’은 바로 실유의 존재[實物]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28) [그럴 경우] ‘제’는 마땅히 오로지 한 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이치상으로는 실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승의의 공(空)을 ‘제’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29)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2제를 설정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승의제 중의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의해 세속제로 설정한 것일 뿐, 그 자체의 차이로 말미암아 세속제로 설정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설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말[名]은 바로 언의(言依)로서, 세속의 정의(情意)에 따라 유포된 것이기 때문이다.30)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모든 세속제도 필시 승의제이다”라고. 그러나 승의제이면서 세속제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단지 말[名]을 제외한 그 밖의 [이러한 말에 의해 지시되는] 실유의 의미대상[義]이 바로 그것이다. 즉 승의에 근거하는 실유의 의미대상 중의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따라 세속제라고 이름하였으며,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따라 승의제라고 이름하였다. 이를테면 간택 분별함[簡別]이 없이 전체적인 상[總相]으로 파악되는 하나의 화합상[一合相]에 관한 이치를 세속제라고 이름하였으며,31) 간택 분별하여 개별적인 상[別相]으로 파악되는 어떤 종류[類]나 존재[物]를 승의제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마치 동일한 체성의 유루법 중에서 결과로 파악되는 것을 일컬어 고제(苦諦)라 하고, 원인으로 파악되는 것을 일컬어 집제(集諦)라고 한 것과 같다.32) 혹은 동일한 체성의 심ㆍ심소법이 다 같이 6인(因)과 4연(緣)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33) 이와 같은 이치로 볼 때, 대선존(大仙尊, 불타를 말함)께서 설한 ‘제’에는 어떠한 어긋남도 그릇됨도 없으니, [세존께서] “한 가지의 진리[一諦]만이 있을 뿐 더 이상 두 번째 진리는 없다”거나 “오로지 한 가지 도[一道]만이 있을 뿐으로, 더 이상 [능히 청정을 획득하는] 그 밖의 다른 도는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34)
3. 4제의 총체적 본질
이러한 4성제의 총체적 본질[總體]은 무엇인가? 일체의 유위와 아울러 온갖 택멸이니, 이는 바로 번뇌와 성도(聖道)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염오와 청정의 인과로서 차별되기 때문이다.35) 그리고 허공과 비택멸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정견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에 역시 ‘제(즉 승의제)’에 포섭되지만,36) [그것은] 번뇌와 성도의 경계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역시 염오와 청정의 인과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역시 좋아함[欣]과 싫어함[厭]에 의해 행해지는 경계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아 알지라도 성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제에는 포섭되지 않는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허공과 비택멸)을 반연하여서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 같은 두 가지 법은 바로 무루이기 때문이며, 능히 유루법을 어기거나 해손[違害]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애탐은 다만 유루법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으로, 무루법을 좋아하는 것은 온갖 유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애탐’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며, ‘선법에 대한 욕구[善法欲]’라고 말할 뿐이다. 만약 경계대상으로서 지극히 수순(隨順)함으로써 애탐을 낳는 것이라면, 이러한 경계대상은 두루 번뇌의 소연이 된다. 그리고 애탐의 소연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멸(滅)과 그것의 멸도(滅道)를 바라지 않으며, [도리어] 의심하고 비방한다. 그러나 허공과 비택멸의 경우, 이와는 다르기 때문에 결정코 번뇌의 경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이 두 가지의 경우에도, 비유사(譬喩師) 등은 그것을 반연하였지만, 역시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을 뿐더러 의심하고 비방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37) 그러니 어찌 그것을 반연하여서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반연하여 낳은 무지(無智)의 의심과 견(見)이 고멸(苦滅)과 고멸도(苦滅道)의 증득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니, [두 가지 무위를 반연하여 번뇌를 낳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고[제] 등을 반연하여 염오성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예컨대 아라한에게도 역시 도로(道路, marga, 즉 성도) 등에 대한 무지의 의심과 비방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찌 그것을 염오의 번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는 모두 불염오성으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그것을 반연하는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비유사는] 허공과 비택멸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같은 말[名]을 비방하였을 뿐으로, 그러한 [법] 자체를 반연한 것이 아니다.38) 즉 [그들에 의하면,] 이러한 두 가지 법은 오로지 선법으로, 세속지의 경계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럴 경우] 고제 등의 경우도 어찌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앞에서 설한 것에 과실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Ⅲ. 가행위(加行位)
1. 서언(緖言)
여기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성제에 대한 진실된 관찰[眞見]을 추구하는 자는 처음에 어떠한 행을 닦아야 하는가? 성제의 관찰을 추구하는 이가 초업지(初業地, 초입자의 단계)에서 익혀야 할 행의(行儀)는 지극히 번잡하고 광대한데, [이에 대해] 두루 알고자 하는 자라면 마땅히 여러 성자들이 편집한 관행(觀行)에 관한 여러 논서 중에서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요점만을 간추려 말하면 [이러하다]. 처음으로 수행하려는 자는 마땅히 해탈에 대한 깊은 의요(意樂)를 갖추고서 열반의 덕을 관찰하여 생사의 허물을 등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방편으로써 선우(善友)와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니, 선우는 능히 온갖 행(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청문(聽聞) 등의 힘을 갖춘 이를 ‘선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능히 사물[物, 듣는 이]의 근기를 품평하여 상응하는 바에 따라 수여하기 때문에 [계경 중에서] “선우에 가까이 하는 것을 ‘완전한 범행(梵行)’이라 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39)
2. 계(戒)의 안주와 문(聞)ㆍ사(思)ㆍ수(修)의 3혜(慧)
행자(行者)가 이미 능히 정법을 설해 줄 선우에게 섭지(攝持)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마땅히 어떠한 행을 닦아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이는 마땅히 계(戒)에 머물면서 문(聞)ㆍ사(思)ㆍ수(修)로써 성취되는 바를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말과, 말과 뜻과, 뜻이 그것의 경계이다. 將趣見諦道 應住戒勤修 聞思修所成 謂名俱義境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見諦, 즉 見道]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설하기를, “시라에 안주함으로써 능히 두 가지 법(止와 觀)을 부지런히 수습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청정한 계에 안주하고 나서 다시 여러 유가사(瑜伽師)와 자주 가까이하여 유가사의 교수(敎授)와 훈계에 따라 정근해야 한다. 즉 진리를 관찰하는 도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청문하고 나서는 들었던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할 때, 스승의 교수와 훈계에 의해 생겨난 혜(慧)가 증가하게 되고, 점차로 뛰어나게 되며, 점차로 밝아져 마침내 완전히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여기서 기뻐 만족하는 마음[喜足心]을 낳아서는 안 된다. 다시 법의 뜻에 대해 스스로 전념하여 사택(思擇)할 때 이러 이러한 결정적인 혜[決定慧]가 생겨나며, 스스로의 사택을 원인으로 하여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게 되면, 온갖 번뇌 등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라는 두 가지의 대치(對治) 수(修)를 부지런히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러한 뜻을 간략히 포섭하면 [이러하다]. 즉 수행자는 계(戒)에 머물면서 [문소성혜를] 부지런히 닦을 때, 문소성혜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혜(慧)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세 가지 ‘혜’는 이를테면 순서대로 말[名]과, 말과 뜻[義] 두 가지 모두와, 뜻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이러한 세 가지 ‘혜’가 원만하게 성취되었을 때에는 모두 오로지 뜻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때 세 가지 ‘혜’의 차별상을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바야흐로 가행위(처음으로 닦는 준비단계)에 근거하여 “문(聞)ㆍ사(思)ㆍ수혜(修慧)는 [각기] 말과, 말과 뜻 두 가지 모두와, 뜻을 반연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여 논설하리라. 오로지 ‘말[名, 단어]’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문소성혜도 다만 ‘말’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40) 즉 스승이 설한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에 따라 [그것의] 뜻을 차별하는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경우, 이러한 ‘혜’를 일컬어 문소성혜(聞所成慧)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문소성혜에] 드는 방편에 근거하여 [문혜는] 다만 ‘말[名]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41) 문혜(聞慧)가 성취되고 나면 [말과는] 다른 별도의 뜻을 알기 위해 더욱 정근하여 스스로 살펴 사택(思擇)해야 하는데, 사택에 오류나 과실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시 스승이 가르친 명ㆍ구ㆍ문신을 기억[念]하고, 이에 따라 그 후 그 뜻을 차별하는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일컬어 사소성혜(思所成慧)라고 하였다. 즉 이는 가행 시(時) 뜻을 사택하는 힘에 의해 ‘말’을 인기하여 기억하기 때문에 ‘[말과 뜻의] 두 가지 경계를 모두 반연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사혜(思慧)가 성취되고 나면, 등인(等引)이 현전하여 말[名言]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뜻의 차별을 증득하게 되는데,42) 이러한 결정적인 ‘혜’를 일컬어 수소성혜(修所成慧)라고 하였다. 그래서 비바사(毘婆沙)에서는 세 가지 ‘혜’의 [차별]상에 대해, 이를테면 “만약 어떤 ‘혜’가 가행을 닦을 때 말[名]을 반연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뜻에 대한 이해[義解]를 인생(引生)하였을 경우, 이것(말)에 의해 인기된 ‘혜’를 문소성이라 이름하였고, 만약 가행을 닦을 때 뜻[義]을 사택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말에 대한 이해[名解]를 인기하여 기억[念]하고, 이에 따라 그 후 결정적인 ‘혜’를 낳았을 경우, 이를 사소성이라 이름하였으며, 만약 말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뜻만을 관찰하여 내증(內證)의 ‘혜’를 일으켰을 경우, 이를 수소성이라 이름하였다”고 분별하였던 것이다.43)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혜’를 ‘소성(所成)’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청문(聽聞)과 사택(思擇)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지만, 세 번째 수혜를 ‘소성’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수(修, 즉 등지)를 자성으로 삼는다는 뜻이니, 마치 “생명과 그릇은 음식과 보배에 의해 성취되는 것[所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44)
3. 신기청정(身器淸淨)
1) 총설
그렇다면 온갖 유정으로서 수(修, 수소성혜의 ‘수’로서 等持)에 대해 부지런히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어떻게 신기(身器, 수행의 바탕이 되는 몸과 마음)를 청정히 하여야 ‘수’를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과 마음의 원리(遠離)를 갖추고 만족하지 않음과 대욕(大欲)이 없어야 하는데 이는 이미 획득한 것과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희구함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具身心遠離 無不足大欲 謂已得未得 多求名所無
그 대치와 상위하는 것이고, 3계와 무루에 통하며, 무탐의 성질이다. 4성종(聖種) 역시 그러하여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희족(喜足)이다. 治相違界三 無漏無貪性 四聖種亦爾 前三唯喜足
즉 세 가지는 생의 자구(資具)이고, 후자는 업으로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니 아소(我所)와 아(我)의 개별적인 욕탐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三生具後業 爲治四愛生 我所我事欲 暫息永除故
논하여 말하겠다. 신기(身器)가 청정하게 되는 것은 대략 세 가지 원인에 의해서이다. 무엇을 세 가지 원인이라 한 것인가? 첫째는 신심(身心)을 원리(遠離)하는 것이며, 둘째는 희족(喜足)하고 소욕(少欲)하는 것이며, 셋째는 4성종(聖種)에 머무는 것이다.
2) 신심원리(身心遠離)
만약 ‘수’를 신속하게 성취하고자 한다면, 요컨대 먼저 정근하여 신기(身器)를 청정하게 해야 하는데, 신기의 청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신심(身心)의 원리(遠離)를 수습해야 한다. 여기서 ‘신(身)의 원리’란 나쁜 친구[惡朋]를 멀리하는 것을 말하며, ‘심(心)의 원리’란 악심(惡尋)을 떠나는 것을 말하는데,45) 몸과 마음이 나쁜 친구와 악심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신기가 청정해져 마음이 선정을 보다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3) 희족(喜足)과 소욕(少欲)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무엇에 의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의복 등에 대해 희족(喜足)하고 소욕(少欲)함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이니, 여기서 ‘희족’이라 함은 기쁘게 만족하지 않음[不喜足]이 없는 것을 말하며, ‘소욕’이라 함은 대욕(大欲, 큰 욕망)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생을 자조(資助)하는 도구들을 많이 추구하는 자는 낮에는 나쁜 패거리들과 가까이하고, 밤에는 나쁜 생각[尋思]들을 일으키니, 이로 말미암아 마음은 선정을 획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것’의 두 가지 종류(기쁘게 만족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대욕이 없는 것)의 차별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이미 획득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에 대해 이보다 갑절로 미묘하고 갑절로 많은 의복 등을 획득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경우, 여기서는 갑절로 뛰어난 것을 [자신에게] 맞는 것[等]이라고 나타내어 더욱 기뻐하며 욕망[欣欲]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만약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에 대해서는 그것의 획득을 희구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대욕’이라고 하였다. 즉 소유한 온갖 물건에 대해 만족한다면 능히 괴로움을 다스릴 수 있지만, 만약 더욱 많은 것을 추구한다면 선품(善品)을 어기게 되는 것으로, 이러한 내용[義]은 바로 계경에서 “획득된 것에 수순(隨順)하여 몸이 안락한 자는 마음이 쉽게 안정되며, 아울러 능히 법을 설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이가 괴로움을 물리치기 위해 물건을 희구하는 것은 바로 조도(助道)로서 과실이 되지 않는다”고 설한 바와 같다.46) 따라서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 만한 인연(다시 말해 괴로움을 대치하기에 충분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을 이미 획득하였음에도 다시금 [보다] 미묘하고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전혀 획득한 일이 없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양[過量]을 희구하는 것을 일컬어 ‘대욕’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두 가지의 차별상이다. 나아가 ‘희족(喜足, 기쁘게 만족하는 것)’과 소욕(少欲)은 능히 이(不喜足과 大欲)를 대치하기 때문에 이와는 서로 반대된다. [그러한 두 종류의] 상의 차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 이것이 바로 ‘희족’의 상이며, 대욕을 능히 대치하고, 대욕과 서로 반대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욕’의 상이다. 다시 말해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 만한 물건을 이미 획득하였을 경우, 더 이상 희구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희족(喜足)’이라고 하였으며,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 만한 물건을 아직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 지나치게 많은 양을 희구하지 않는 것을 ‘소욕(少欲)’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희족과 소욕은 3계 모두에 계속(繫屬)되지만, 역시 또한 3계를 초월하여 무루에 포섭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욕계계인 선심과 상응하는 희족과 소욕은 바로 욕계계이며, [상] 2계와 무루에 포섭되는 것도 이 같은 예에 준하여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치되는 것의 두 종류(불희족과 대욕)는 오로지 욕계계이다. 색ㆍ무색계에도 그것(불희족과 대욕)을 능히 대치하는 희족과 소욕이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현견하건대 어떤 이가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그로부터 색ㆍ무색계의 등인(等引)을 일으킬 때, 대치되는 두 종류(불희족과 대욕)의 현행이 멀어지기 때문이며, 능히 대치하는 두 종류(희족과 소욕)의 현행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희족과 소욕의 차별상[別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두 종류에 공통하는 상[通相]은 말하자면 무탐(無貪)이니, 두 가지는 다 같이 능히 탐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치되는 것(불희족과 대욕)에 공통하는 상은 말하자면 욕탐(欲貪)이다.
4) 4성종(聖種)
성종(聖種)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 즉 희족과 소욕]’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역시 3계와 무루에 통하며,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무색계 중에는 비록 원한의 경계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무진(無瞋)의 선근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색계 중에는 비록 의복 등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무탐의 선근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거기서는 몸에 대해 탐하지 않듯이, 자구(資具)에 대해서도 역시 탐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에도 4성종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47) 수욕(受欲)의 성자는 성종에 대해 아세야(阿世耶, 意樂)를 가질지라도 가행으로서 [닦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는 모든 성자들의 종자가 되기 때문에 ‘성종’이라 이름한 것으로, 성자들은 모두 이 네 가지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전전(展轉) 계승하며 그 순서가 단절되지 않은 것이니, 전자가 후자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이다. 즉 모든 성자들의 법신(法身)은 다 의복에 대해 희족을 낳는 등의 힘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서, 이는 바로 성자의 족성(族姓)이기 [때문에] ‘성종’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네 성종 가운데 앞의 세 가지의 본질은 오로지 희족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미 획득된 의복(衣服)과 음식(飮食)과 와구(臥具)에 대해 모두 희족을 낳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 희족이 바로 세 가지 성종이다. 즉 무탐(無貪) 선근에는 다수의 품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인 탐을 대치하는 것이면, 이것을 앞의 세 성종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성종은 말하자면 요단수(樂斷修)이다. [여기서] ‘단’은 이계를 말하고, ‘수’는 성도를 말하며, ‘요’는 이를테면 그것(이계와 성도)에 대해 마음속 깊이 흔모(欣慕)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과 ‘수’를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요단수’라고 이름하였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바로 멸(滅)과 도(道)를 흔모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혹은 ‘단’의 ‘수’[斷之修]를 즐기는 것을 ‘요단수’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멸(이계)의 도(성도)를 흔모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번뇌[惑]의 멸을 증득하기 위해 [성]도를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히 대치하는 도[能治]를 지님에 따라 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역시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성종은 진(瞋) 등도 역시 능히 대치하는 것이니, 역시 또한 무진(無瞋) 등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앞의 세 성종을 자량으로 삼기 때문에, 앞의 세 성종은 오로지 무탐의 성질이기 때문에, 이 역시 자체적으로 능히 탐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난 사실에 따라 한쪽(즉 무탐)으로 치우쳐 설한 것이다.48)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희족(喜足)만을 성종으로 삼고, 소욕(少欲)은 성종으로 삼지 않은 것인가? 소욕자(少欲者)의 경우, 의복 등의 물건에 대해 희구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요(意樂, 즉 阿世耶, 뭔가를 희구하려는 마음)의 성질이 하열(下劣)한 자는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경계대상에 대해 감히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지만, 설혹 이미 많은 것을 획득하였더라도 쉼 없이 추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현]견하건대, 희족자(喜足者)의 경우 아무리 적은 것이더라도 이미 획득한 것이 있으면 더 이상 희구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다시금 많은 것을 획득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희족만을 성종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고행자(苦行者)의 욕탐을 억지하기 위하여 소욕을 성종으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 같은 외도의 마음에는 뛰어난 욕탐[勝欲]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저열한 욕탐이 훈습되어 상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획득된 것에 수순하여 기뻐하는 마음[歡喜心]을 낳아 더 이상 흔구하지 않는 것을 ‘희족’이라 하였는데, ‘욕락을 즐기는 것’을 끊는 것으로는 이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욕계의 유정은 대개 욕락을 즐기는데, 이같이 욕락을 즐기는 마음은 출가의 마음[出家心]에 위배되는 것으로, 번뇌를 떠나려고 할 때 마음을 어둡고 무디게 하여 능히 범행(梵行)과 정려(靜慮)가 현전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가장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희족은 [이 같은 욕락을 즐기려는 마음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희족만을 성종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즉 아직 획득하지 않은 많은 의복 등에 대해 희구(즉 大欲)할 때에도 마음에 환희가 생겨나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적은 의복 등을 희구(즉 少欲)할 때 환희가 생겨날 것인가? 그러므로 소욕은 능히 ‘욕락을 즐기는 것’을 대치하는 것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종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의복 등을 반연하여 생겨난 희족을 어떻게 무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이와 같은 희족을 무루라고 하였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성종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 한 것인가? 그것(즉 희족)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도는 그것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같이] 말하게 되었던 것으로, 그래서 “성종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만 말하였지 “의복 등을 반연하여 존재하는 희족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욕이 무루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증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도는 그것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같이] 말하게 되었던 것으로, [무루의] 성도가 의복 등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4성종을 설하였던 것인가? 모든 제자는 세속에서의 생의 자구[生具, 즉 의복과 음식과 와구 등]와 세속의 사업(事業)을 버리고 부처에 귀의하여 출가하였으므로, 그들을 위해 부처의 성법(聖法)과 비나야(毘奈耶) 중에도 능히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생의 자구와 사업이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다.49) 즉 유정으로서 생사의 집을 싫어하여 버리고서 출가하여 해탈을 추구하는 이는, 어떠한 생의 자구를 지닐지라도 획득된 의복 등에 대해 깊이 기쁘게 만족해야 하며, 어떠한 사업을 조작하더라도 깊이 단수(斷修,번뇌의 ‘단’과 성도, 혹은 번뇌를 끊기 위한 성도)를 즐겨야 하니, 그렇지 않다면 능히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성종에]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다고 하여 더 설하지도 않고 덜 설하지도 않은 것인가? 이를 닦을 때 성자의 생인(生因)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즉 성자의 생인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과실을 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공덕을 섭지(攝持)하는 것으로, 차례대로 앞의 세 성종과 네 번째 성종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종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다고 하여 더 설하지도 않고 덜 설하지도 않은 것이다. 혹 [그렇다고 한다면] 문ㆍ사ㆍ수소성의 온갖 선도 모두 다 성종이 되어야 할 것이니, 해탈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종은]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해 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것을 간략히 네 종류로 설한 것으로, 계경에서는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필추들은 잘 들어라. ‘애’는 의복을 원인으로 하여 마땅히 생겨나야 할 때에 생겨나고, 마땅히 머물러야 할 때에 머무르며, 마땅히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식과 와구(臥具)와 유(有)ㆍ무유(無有)를 원인으로 하는 ‘애’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니,50)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애’를 대치하기 위해 오로지 네 가지의 성종만을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약(藥)에 대한 희족은 어째서 성종이 되지 않은 것인가?51) 그것에 대해서는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성종은 ‘애’가 생겨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인데, 계경에서는 오로지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만 설하였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에 대해서는 성종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약은 앞의 세 가지 중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즉 약은 의복 중에 포섭되기도 하며, 음식 중에 포섭되기도 하며, 와구 중에 포섭되기도 한다. 그래서 약에 대한 희족은 별도의 성종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만약 이(생의 자구)에 대해 교만[憍] 등의 과실을 인기하는 경우,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 성종을 설정한 것이지만, 약에 대해서는 교만 등의 과실을 인기하여 낳는 일이 없다. 그래서 성종에는 약에 대한 희족이 없는 것이다. 혹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희족을 성종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약은] 저 존자 박구라(縛矩羅) 등에게는 수용되지 않았으니, 일찍이 병에 걸렸음에도 약을 수용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52) 혹은 모든 때에 항상 수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희족을 성종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약은 모든 때에 항상 수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의방론(醫方論)』에서도 역시 약에 대한 희족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으며, 비나야(毘奈耶) 중에서도 바야흐로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지만, 의복 등에 대한 희족의 성종은 오로지 내법(內法)에서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록 약에 대한 희족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성종으로 건립하지 않는 것은, 온갖 약은 능히 범행에 수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세간을 현견하건대, 즐거이 계(戒)를 배우는 자에게 있어 약에 대한 희족은 범행을 장애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53) 혹은 부처님께서는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에 대한 욕탐[欲]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네 가지 성종을 설하였다. 즉 아소에 대한 욕탐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성종을 설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아(我)에 대한 욕탐을 영원히 소멸하여 제거하기 위해 네 번째 성종을 설하였던 것이다. 즉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욕탐[欲]’이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말하자면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세존께서는 앞의 세 성종을 설하였으니, 의복 등에서 생겨난 희족과 그것의 증상에 의해 인기된 성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아(我)에 대한 집착을 영원히 소멸하여 제거하기 위해 세존께서는 네 번째 성종을 설하였으니, 요단수와 그것의 증상에 의해 인기된 성도를 모두 [네 번째] 성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54)
4. 5정심관(停心觀)
1) 총설
이와 같이 장차 성제(聖諦)의 관찰로 나아가려는 자가 마땅히 닦아야 할 행(즉 三慧)과, 행을 닦고 나서 신기(身器)의 청정한 대치를 신속하게 성취하기 위해 닦아야 하는 이와 같은 성도의 자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수’(수소성혜의 수로서 등지)에 올바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어떠한 방편[門]에 의해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55)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에 들어가는 요긴한 방편에는 부정관과 지식념의 두 가지가 있으니 탐과 심(尋)이 두드러진 자가 순서대로 마땅히 닦아야 하는 것이다. 入修要二門 不淨觀息念 貪尋增上者 如次第應修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정류가 닦아야 하는 행(行)에는 여러 많은 차별이 있기 때문에 ‘수’에 들어가는 방편에도 역시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대개 두 가지 방편에 의해 들어갈 수 있으니,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며, 둘째는 지식념(持息念)이다. 그래서 [본송에서는] 오로지 이 두 가지만을 일컬어 ‘요긴한 방편[要門]’이라고 말한 것이다.56) 모든 유정은 다 이 두 가지 방편에 의해 ‘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순서대로 탐(貪)과 심(尋)이 두드러진 자의 방편으로, 이를테면 ‘탐’이 두드러진 자는 첫 번째 방편(부정관)에 의해 들어가고, ‘심’이 두드러진 자는 지식념에 의해 들어가니, 이는 마치 한 가지가 아닌 병을 한 가지 약으로 능히 제거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치유하는 방편[近治門]에 근거하여 설해 볼 것 같으면, 부정관은 능히 ‘탐’이라는 병을 치유할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병은 치유할 수 없으며, 지식념이 ‘심’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식념이 ‘심’의 산란을 능히 억지할 수 있는 것은, 무차별의 미세한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며, [그것의] 소연이 자상속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며, 부정관처럼 다수의 외적인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7)
2) 부정관(不淨觀)
2-1) 부정관과 네 가지 탐(貪)
이상에서 ‘탐(貪)’과 ‘심(尋)’이 두드러진 자가 수(修)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의 두 가지 방편(즉 부정관과 지식념)을 순서대로 닦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체적으로 논설하였다. 여기서 먼저 부정관(不淨觀)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관법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탐’을 모두 대치하기 위한 것으로 먼저 골쇄(骨鎖)를 관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면 널리 바다에 이르고 다시 줄여 관찰하는 것을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爲通治四貪 且辯觀骨鎖 廣至海復略 名初習業位
발의 뼈를 제거하고 머리의 반쪽에 이르는 것을 일컬어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라고 하며 마음을 미간에 묶어 두는 것을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除足至頭半 名爲已熟修 繫心在眉間 名超作意位
논하여 말하겠다. 부정관을 닦는 것은 바로 탐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탐은 대략 네 종류로 차별되니, 첫째는 현색탐(顯色貪)이며, 둘째는 형색탐(形色貪)이며, 셋째는 묘촉탐(妙觸貪)이며, 넷째는 공봉탐(供奉貪)이다.58)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탐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사택(思擇)에 근거해야 하는데, 첫째는 내부의 시신[內屍, 자신의 죽은 몸]을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외부의 시신[外屍, 다른 이의 죽은 몸]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근자(利根者)라면 먼저 전자에 근거하여 [관찰하고], 둔근자(鈍根者)라면 먼저 후자에 근거하여 [관찰해야] 한다. 즉 이근자는 먼저 내부의 몸[內身, 자신의 죽은 몸]에 대해, 피부를 변제(邊際)로 하여 발로부터 위로, 정수리로부터 아래로 두루 관찰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싫어하고 근심[厭患]하게 해야 한다. 둔근자는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번뇌가 맹리(猛利)하면 제압하기 어려우며, 외연(外緣)의 힘을 빌려야 비로소 능히 조복하여 대치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외부의 시신을 명료히 관찰하여 점차 자신의 마음의 번뇌를 제압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가 처음으로 외부의 시신을 관찰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자비심[慈心]을 일으켜 [뭇 짐승들에게] 몸을 베푸는 처소[施身處]로 가서 외부의 시신의 상을 관찰해야 하거늘, 하물며 내부의 몸에 대해 [관찰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외부의 시신)의 상이 이미 그러하였다면, 이것(내부의 몸)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관의 원만한 성취를 신속하게 획득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여덟 가지 상(想)을 닦아 네 가지 탐을 조복하고 대치해야 한다. 즉 현색탐을 조복하고 대치하기 위해서는 청어상(靑瘀想)과 이적상(異赤想)을 닦아야 하며, 형색탐을 조복하고 대치하기 위해서는 피식상(被食想)과 분리상(分離想)을 닦아야 하며, 묘촉탐을 조복하고 대치하기 위해서는 파괴상(破壞想)과 해골상(骸骨想)을 닦아야 하며, 봉공탐을 조복하고 대치하기 위해서는 방창상(膖脹想)과 농란상(膿欄想)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59) 그러나 골쇄(骨鎖, 백골이 서로 엉켜 있는 모양)를 반연하여 부정관을 닦을 경우, 이와 같은 네 가지 탐을 능히 모두 대치할 수 있다고 인정하니, 하나의 골쇄 중에서 네 가지 탐의 경계를 모두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60) 2-2) 골쇄관(骨鎖觀)의 단계
여기서 바야흐로 골쇄관을 닦는 것에 대해 분별해 보리라. 그런데 온갖 선근을 인기하여 낳을 때, 보특가라가 닦는 행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첫 번째는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初習業位]’이며, 두 번째는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已熟修位]’이며, 세 번째는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超作意位]’이다. 먼저 관행자(觀行者)가 이와 같은 부정관을 닦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자신의 몸 [한] 부분에 묶어 두어야 하는데, 혹은 발가락에, 혹은 미간에, 혹은 콧등에, 혹은 [그 밖의]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마음을 집중[專注]하여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등지(等持)가 견고하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태에] 들어가는 이로부터 이미 거친[已去] 이를 일컬어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맨 처음으로 마음을 [몸의 한 부분에] 묶어 두는 것[繫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발가락 등의 처소를 최소[下]한 동전의 크기만 한 백골로 가상(假想)하여 능히 관찰하게 되면, 승해의 힘에 의해 그것을 점차로 넓히고 점차로 증대시켜 마침내 전신의 골쇄를 함께 관찰하게 된다. 즉 이러한 단계에서 모든 유가사(瑜伽師)들은 ‘피부와 살은 물러지고 떨어져 나가 점차 뼈만이 앙상하게 되는 것’을 가상으로 사유하는데, 처음에 관찰할 때에는 뼈의 크기가 동전만 하였지만 이때는 마침내 온 몸을 모두 백골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유가사)는 이러한 단계에서 다수의 상(想)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기서 ‘상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소연(所緣)을 버리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이] 자꾸자꾸 일어남으로써 또 다른 승해의 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관행(觀行)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을 경우, 작의는 다만 ‘상’의 힘[想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만, 관행이 이미 성취되었다면 바로 ‘혜’의 힘[慧力]에 의해 일어나는데, 이러한 단계에서는 관행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였다”고 설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작의’는 일체의 심ㆍ심소법을 모두 나타내는 말로서, 그것은 모두 ‘상’의 힘이 상속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온 몸을 [골쇄로] 관찰하고 나면, 다시 방편으로 외부의 백골(즉 다른 이의 골쇄)을 반연하는 부정관에 들어간다. 즉 승해를 점차로 증대시키기 위해 외부의 골쇄로서 자기 몸 주변에 있는 것을 관찰하며, 점차로 하나의 자리[床], 하나의 방, 하나의 절[寺], 하나의 원림[園], 하나의 마을[邑], 하나의 지역[界],61) 하나의 국토, 나아가 대지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찰하여 그 사이가 골쇄로 가득 차 있다고 사유한다. 그리고 다시 승해를 점차로 증대시키기 위해 널리 관찰한 것을 점차로 줄여 관찰하여 마침내 오로지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한다. 이렇게 점차로 줄여 나간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라고 말한다. 또한 줄여 관찰하는 승해[의 힘]을 점차로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골쇄 중에서 다시 발의 뼈를 제거한 나머지의 뼈를 사유하여 거기에 마음을 묶어 두고, 나아가 점차로 머리의 반쪽 뼈를 제거한 나머지 반쪽 뼈를 사유하여 거기에 마음을 묶어 둔다. 이렇게 점차로 줄여 나간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라고 말한다. 또한 줄여 관찰하는 승해[의 힘]이 자재(自在)하게 하기 위해 반쪽의 머리뼈마저 제거하고, 마음을 미간에 묶어 두고 오로지 하나의 소연에 집중하여 고요히 머물게 한다. 이같이 지극히 줄여진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 부정관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으로, 행해야 할 모든 것을 다 끝마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관의 여러 단계 중에는] 소연(所緣)과 자재(自在)가 혹은 큰 것도 있고, 혹은 작은 것도 있는데, 마땅히 4구(句)로 지어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62) 그리고 [이러한 부정관은] 하고자 하였던 바에 따라 관찰하여 번뇌를 조복시키는 [관법이기] 때문에 전도(顚倒)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다.63)
2-3) 부정관의 제문분별(諸門分別)
이러한 부정관의 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근거하는 지(地)는 몇 가지인가? 어떠한 경계를 반연하며, 어떠한 처소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 행상은 어떠하며, 어떠한 시간[世]을 반연하는 것인가? 무루라고 해야 할 것인가, 유루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욕(離欲)에 의해 획득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탐의 성질로, 열 가지 지(地)에 근거하며 욕계 색경(色境)을 반연하고, 인취에서 생겨나며 부정(不淨)의 행상으로, 자세(自世)를 반연하며 유루이며, 두 가지 득(得) 모두와 통한다. 無貪性十地 緣欲色人生 不淨自世緣 有漏通二得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물은 바에 따라 지금 순서대로 대답하리라. 이를테면 이러한 부정관은 무탐(無貪)을 본질[性]로 하니, 어기고 거역하려는 작의[違逆作意]를 원인으로 하여 인기되기 [때문이다]. 즉 싫어하고[厭], 미워하고[惡], 버리고[棄], 배반[背]하려는 것은 탐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를 부정관이라고 이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정관이라고 이름한 이상 그것은 바로 혜(慧)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탐 자체는 ‘관(觀)’이 아니라] ‘관’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부정관은 능히 탐을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에 마땅히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탐은 청정상(淸淨相)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관’의 힘에 의해 제거되기 때문에, 무탐을 ‘관’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모든 부정관은 다 무탐이지만, 모든 무탐이 다 부정관은 아니니, 오로지 능히 현색(顯色) 등의 탐을 조복하고 대치하는 것만을 일컬어 바야흐로 이러한 부정관의 본질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자성에 근거하거나, 혹은 아울러 수행(隨行)에 근거하여 말하면, 그것들은 모두 4온과 5온을 본질로 한다.64) [부정관은] 열 가지 지(地) 모두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네 정려와 네 근분정(近分定)과 중간정과 욕계가 바로 그것이다.65) 즉 이것은 오로지 이러한 지에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관은 오로지 욕계의 색처(色處)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욕계의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 이러한 부정관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이근(耳根) 율의(律儀)에 의해 방호(防護)된 자라야 부정관에 머물 수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것인가? 이 같은 말은 색탐에 의해 굴복[摧伏]된 모든 이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들은 필시 소리 등을 반연하여 [생겨난] 탐에 의해서도 굴복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을 반연하여 [생겨난] 탐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자라면, 필시 마땅히 먼저 이근율의에 머물러야 하며, 이에 따라 비로소 능히 부정관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부정]관은 오로지 의식(意識)에 근거한 것으로(다시 말해 법처를 반연하는 것으로), 능히 어기고 거역하려는[違逆] 그 밖의 다른 행상을 인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근율의에 머무는 자라면, 그는 필시 마땅히 먼저 부정관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관의 힘은 능히 욕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색처를 두루 반연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존자 아니율타(阿泥律陀, Aniruddha:無滅이라고도 하며, 10대제자 중의 일인으로 天眼第一)는 능히 하늘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지 않았으며, 사리자(舍利子: 10대제자 중의 일인으로, 지혜제일) 등도 부처의 색신(色身)을 역시 능히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지 않았거늘, 어떻게 이러한 부정관이 욕계의 색처를 두루 반연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무멸(無滅)이 뛰어난 것은 능히 하늘의 색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며, 부처님께서도 역시 부처의 미묘한 색신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이러한 부정관은 결정코 능히 욕계의 색처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부정관은] 뜻[義]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名]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미 드러난 셈이며, 3성(性) 모두를 반연한다는 사실도 역시 이미 성취된 셈이다.66)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初習業者, 즉 초입자]’는 오로지 인취(人趣)에 근거하여 능히 이러한 부정관을 낳을 뿐이지만, 북구로주에서는 낳을 수 없다.67) 그리고 천취 중에도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먼저 이곳(인취)에서 일으킨 후 그곳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역시 그것의 현전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관의 행상(行相)은 오로지 부정(不淨)한 것으로만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바로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청정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행상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라고 하였다.68) 그리고 이것은 신념주(身念住)에 포섭되는 것으로, 가행이지 근본업도가 아니다. 비록 희(喜)ㆍ낙(樂)ㆍ사(捨)의 세 근(根)과 상응하는 것일지라도 구행(俱行)하는 것을 싫어하니, 마치 고(苦)ㆍ집(集)의 인(忍)과 지(智)가 그러한 것과 같다.69) [이러한 부정관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 중] 어떠한 시간에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시간대의 경계대상만을 반연한다. 그러나 만약 불생법(不生法)이라면 3세 모두를 반연한다.70) 이러한 부정관의 행상은 무상 등의 16행상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71) [이러한 부정관은] 가행득(加行得)과 이염득(離染得) 모두에 통하는 것으로, 이러저러한 지(地)의 염오를 떠나 이러저러한 선정을 획득할 때에도 역시 그러한 지의 부정관을 획득하며, 이염을 획득하고 난 후에도 역시 가행에 의해 현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염오를 떠나지 못한 자라면 오로지 가행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72) 그리고 이 중에서 일체의 모든 성자와 최후유(最後有)의 이생은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부정관이나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을 모두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이생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만을 획득한다.73) 3) 지식념(持息念)
3-1) 총설
부정관의 상(相)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지식념(持息念)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식념은 혜(慧)로서, 5지(地)에 의지하며 바람을 반연하고, 욕계 신(身)에서 일어나며 두 가지로 획득되고, 진실로서 외도에게는 없으며 여섯 가지의 원인이 있으니, 수(數) 등이 그것이다. 息念慧五地 緣風依欲身 二得實外無 有六謂數等
논하여 말하겠다. ‘지식념’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계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아나아파나념(阿那阿波那念)을 말한다.74) 여기서 ‘아나(ā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숨을 지녀[持息] 들이쉰다는 말로서, 이는 바로 바깥의 바람[外風]을 끌어당겨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파나(apāna)’란 이를테면 숨을 지녀 내쉰다는 말로서, 이는 바로 안의 바람[內風]을 끌어당겨 몸 밖으로 나가게 한다는 뜻이니, 계경에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숨을 지녀 들이쉰다’고 함은 바깥의 기운[外氣]을 들이마셔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며, ‘숨을 지녀 내쉰다’고 함은 안의 바람[內風]을 내몰아 몸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곧 혜(慧)가 염(念)의 힘에 의해 이것(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기 때문에 ‘아나아파나념’이라고 이름한 것이다.75)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아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능히 ‘지니고 온다[持來]’는 뜻이며, ‘아파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능히 ‘지니고 나간다[持出]’는 뜻이니, 이러한 말의 의미는 숨을 들이쉬고[入息] 숨을 내쉬는 것[出息]에 능히 ‘지닌다’는 뜻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혜’가 염(念)에 의해 이를 관찰하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념’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몸에 소속되는 바람에 대해 분별해 보면, 대략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입식풍(入息風)이며, 둘째는 출식풍(出息風)이며, 셋째는 발어풍(發語風)이며, 넷째는 제기풍(除棄風)이며, 다섯째는 수전풍(隨轉風)이며, 여섯째는 동신풍(動身風)이다. 이를테면 모든 유정은 태(胎) 중에 있을 때나 알의 상태로 있을 때, 먼저 배꼽에서 업에 의해 생겨난 바람이 일어나, 마치 연 뿌리나 줄기처럼 몸에 구멍을 뚫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바람이 최초로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에 편승하여 입이나 코로도 그 밖의 또 다른 바람이 계속하여 들어오게 되는데, 이 같은 최초의 바람과 그 후의 바람을 일컬어 ‘입식풍’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식풍이 몸 안에 이르게 되면, 계속적으로 나가는 바람도 있으니, 이를 ‘출식풍’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금을 단련하는 장인이 풍로의 공기자루 주둥이를 열면 저절로 바람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바람의 성질은 원래 그러하여 구멍이나 틈만 있으면 반드시 따라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들어가고 나서 그것을 누르면 그 바람이 다시 돌아 나오니, 입식과 출식의 순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치상 실로 이같이 바람이 들어간 일이 없었다면 나오는 바람도 없을 것으로, 다만 이와 같이 되풀이하면서 능히 소의신을 감손하고 증익하는 [것만이 공기자루의 경우와 다를 뿐이다]. 즉 [이같이] 상속하는 과정[道]을 일시 입식과 출식, 즉 들숨과 날숨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입식으로 바뀐 상태에서는 능히 몸속의 부패하고 더러운 온갖 악취(惡臭)를 물리치고 화계(火界)를 증장시켜 몸이 가볍게 하고 들뜨게[輕擧] 하지만, 출식으로 바뀔 때에는 능히 무더움[鬱蒸]을 제거하고 화계를 감손시켜 몸을 가라앉게 하고 무겁게[沈重] 하는 것이다. ‘발어풍’이란, 이를테면 먼저 욕망하고, 계속하여 말을 인기하여 발동시키려는 마음이 일어나 증성함으로써 생겨나게 된 어떤 별도의 바람을 말한다. 즉 이것이 배꼽으로부터 유전(流轉)하여 목구멍과 부딪쳐 이숙생(異熟生)이나 소장양(所長養)의 대종을 칠 때, 등류성인 풍(風)의 대종이 생겨나 이빨ㆍ 입술ㆍ혀ㆍ잇몸을 두들기거나 움직이는 [등의] 차별을 인기하는데, 이러한 세력에 의해 미래 명(名)ㆍ구(句)ㆍ문(文)을 드러낼 조색의 자성을 인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입안에 있을 때는 말[語] 또는 [어]업(業)이라고 이름하지만, 밖으로 유출되었을 때에는 다만 말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마음이 대종을 낳는다고 하는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로서, 이를테면 탐ㆍ진ㆍ치의 마음이 일어난 자를 보면 얼굴이 번지르르하거나 마르는 등 일상과는 달리 어지러운 색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전(傳)하여 듣기에, “진에의 독을 품은 자에게는 얼굴에 불꽃이 생겨난다”고 하였으니, 인자한 마음이 없으면 탐욕에 의해 인기된 불이 생겨나 몸 등을 태우기 때문이다. ‘제기풍’이란, 이를테면 편안한 길[便路]을 따라 갈 때 능히 두 가지의 더러움[穢]을 제거하는 어떤 별도의 바람을 말한다. 즉 더러움이 내부에서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고수(苦受)가 생겨나고, 고수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제거하고 버리려는 욕망[除棄欲]을 낳게 되며, 제거하고 버리려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바람을 일으키려는 마음[起風心]을 인기하니, 이러한 마음이 바람을 일으켜 [그 같은 더러움을] 제거하고 버리는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바람의 힘은 몸을 안온하게 한다. ‘수전풍’이란, 이를테면 신체와 [4]지의 온갖 모공(毛孔)에 따라[隨] 두루 일어나는[轉] 어떤 별도의 바람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수전풍’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업력에 의해 일어난 바람으로, 몸의 구멍이나 틈을 따라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구멍이나 틈에 의지하여 머무는 부패하고 더러운 온갖 악취를 능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신풍’이란, 이를테면 능히 몸을 격동(擊動)시켜 표업을 인기하는 어떤 별도의 바람을 말한다. 이것은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마음은] 온갖 신체 [4]지에 두루 편재하여 능히 그것을 격동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바람의 뜻을 나타내었고, 이에 편승하여 여섯 가지 바람에 대해서도 분별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바로 두 가지의 식풍(息風, 입ㆍ출식풍)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니, 여기서의 의도는 지식념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2) 지식념의 제문분별(諸門分別)
이러한 지식념의 자성은 바로 혜(慧)로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니, 계경에서 ‘깨달아 알았다[了知]’는 말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품류의 [관법은] ‘염(念)’이 수승하기 때문에 ‘[지식]념’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들숨[入息]과 날숨[出息]의 양을 기억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즉 숨을 반연하는 정혜(定慧)의 획득과 성취는 ‘염’의 공능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염’이라고 설한 것이다. 아울러 이것의 수행(隨行, 상응 구유법)의 자성에 대해서도 마땅히 앞에서 분별한 방편(즉 부정관)에 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76)(이상 지식념의 체성 분별) 이러한 지식념의 소의는 오로지 5지(地)에 통할 뿐으로, 이를테면 욕계와 정려중간과 초ㆍ제2ㆍ제3정려의 근분지(近分地)가 바로 그것이다.77) 이에 따라 이것은 다만 사근(捨根)과 상응할 뿐이니, 심(尋)을 대치하기 위해 이러한 [지식]념을 닦기 때문이다. 즉 고ㆍ락 등의 수(受)는 능히 그것과 친근한 ‘심’ 등을 인기하여 낳기 때문으로, ‘심’을 대치하는 것은 요컨대 저절로 일어나는 수[任運受, 즉 사수]가 현전하는 상태에서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래 세 가지 근본정려라고 할지라도 올바로 선정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역시 사수(捨受)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이러한 지식념이 여덟 지(地, 앞서 언급한 5지와 세 근본정)에 근거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제4정려 이상이 지식념의 소의지가 되지 않는 것은] 위의 선정이 현전할 경우, 숨은 곧 바로 없어지기 때문이다.(이상 지식념의 所依地 분별) 이러한 지식념은 다만 식풍(息風, 입식풍과 출식풍, 즉 들숨과 날숨)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 앞서 언급한 여섯 가지 바람을 모두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식념은 처음에는 욕계의 몸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오로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취와 천취의 몸에 [근거하여] 존재할 뿐이다. 또한 이것은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염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니,78) 이는 아직 염오를 떠나지 않은 자의 선정으로, 가행에 의해 현전하기 때문이며, 이염득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식념은] 모두 바로 근분지(近分地)에 포섭되는 것으로, 근본정려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설하였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지식념은 오로지 뛰어난 가행으로 인기되기 때문에, 이염에 의해 획득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오로지 진실한 작의[眞實作意]와 상응할 뿐이지만, 어떤 이는 “역시 승해작의와도 통한다”고 설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정법(正法)을 지닌 유정이라야 비로소 능히 수습할 수 있는 것으로, 외도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니, 설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며, 그들은 능히 미세한 법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과 지극히 상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외도)은 자아(즉 숨쉬는 자)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식념은 여섯 가지의 원인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그 상이 원만하게 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수(數)이며, 둘째는 수(隨)이며, 셋째는 지(止)이며, 넷째는 관(觀)이며, 다섯째는 전(轉)이며, 여섯째는 정(淨)이다. ‘수(數, ganaṇā)’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집중[繫]하여 들숨과 날숨을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는데, 마음이 경계(즉 입ㆍ출식)에 너무 메이거나[聚] 흩어지는 것[散]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과실이 있을 수 있으니, 첫째는 수를 덜 헤아리는 과실[數減失]이며, 둘째는 수를 더 헤아리는 과실[數增失]이며, 셋째는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과실[雜亂失]이 바로 그것이다.79) 다시 세 가지 과실이 있을 수 있으니, 첫째는 너무 느리게 [헤아리는] 과실[太緩失]이며, 둘째는 너무 빠르게 [헤아리는] 과실[太急失]이며, 셋째는 [헤아리는 것이] 산란되는 과실[散亂失]이다.80) 만약 열까지 헤아리는 중간에 마음이 산란해진 자라면, 마땅히 다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차례로 그것을 헤아리고, [헤아리기를] 마치면 다시 시작하여, 마침내 선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숨을 헤아릴 때에는 마땅히 들숨부터 먼저 헤아려야 할 것이니, 처음 태어난 상태[初生位]에서는 먼저 들숨을 쉬고, 나아가 죽을 때에는 최후로 날숨을 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죽고 태어나는 상태를 각찰(覺察)하기 때문에, 점차 ‘무상(無常)하다’는 생각[想, 즉 다음에 설할 총상념주의 하나]을 능히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수(隨, anugam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에 따라[隨]가면서 들숨과 날숨이 짧은지, 긴지, 어느 정도 멀리 이르는지, 또한 다시 되돌아와 [어느 정도까지 이르는지] 생각[念]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들숨의 경우, 온몸에 두루 미치는지, 일부분에 미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즉 그 숨을 따라 들어가 목구멍ㆍ심장ㆍ배꼽ㆍ엉덩이ㆍ넓적다리ㆍ무릎ㆍ 종아리ㆍ복숭아 뼈ㆍ발가락에 이르기까지 항상 따라 쫓으며[隨逐]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이러한 들숨은 발바닥으로부터 나와 금륜(金輪) 아래로 뚫고 나가 풍륜(風輪)에 이르렀다가 다시 되돌아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날숨의 경우에도 그것이 몸을 떠나 1책(磔)에 이르는지, 1심(尋)에 이르는지 생각해야 한다.81) 즉 그것이 이르는 곳까지 항상 따라 쫓으며 생각[念]해야 하는 것이다. ‘지(止, sthā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생각[念]을 집중하여 오로지 코끝에 두고, 혹은 미간에 두고, 나아가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곳에 두고, 그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安止] 채로 마치 구슬을 꿴 실을 관찰하듯이, 숨이 몸에 머물러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숨이 몸을] 차갑게 하는지, 따뜻하게 하는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관(觀, upalakṣaṇ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息風]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숨과 함께 존재하는 대종과 조색(造色), 그리고 이러한 색에 근거하여 머무는 심과 심소를 관찰하는 것이니, 다 같이 5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전(轉, vivartan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을 반연하는 지각[覺]을 이후에 생겨나는 뛰어난 선근(善根) 중으로 이전(移轉)하여 안치하는 것을 말하니, [여기서 뛰어난 선근이란] 말하자면 염주(念住)를 시작으로 하여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는 [수행도를] 말한다. ‘정(淨, pariśuddhi)’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세제일법)로부터 승진하여 견도(見道) 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82)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숨을 반연하는 지각을] 염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로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이전 안치하는 것을] 일컬어 ‘전’이라 하고, 진지(盡智, 3계 9지의 번뇌를 모두 끊었음을 아는 智) 등에 [드는 것을] 바야흐로 ‘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3-3) 숨의 제문분별(諸門分別)
여기서 숨[息]의 차별상은 어떠한지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들숨과 날숨은 몸에 따르는 것으로 두 가지(身心) 차별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유정수(數)이고, 유집수(有執受)가 아니며 등류성이고, 하지(下地)의 연이 되지 않는다. 入出息隨身 依二差別轉 情數非執受 等流非下緣
논하여 말하겠다. 몸이 생겨난 지(地)에 따라 숨도 그러한 지에 포섭되니, 숨은 바로 몸의 일부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들숨과 날숨은 몸과 마음의 차별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는 “숨은 몸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역시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른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네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숨은 바야흐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상응하는 바에 따른다’는 말을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숨은 반드시 몸과 마음의 차별에 근거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네 가지 조건이란, 첫째는 들숨과 날숨의 근거가 되는 몸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모공(毛孔)이 열려야 하며, 셋째는 바람의 길[風道, 이를테면 코나 입]이 뚫려야 하며, 넷째는 들숨과 날숨과 동일한 지(地)의 거친 마음[麤心]이 현전해야 하는 것으로, 이러한 네 가지 조건 중의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될 경우 숨은 일어나지 않는다.83) 이러한 들숨과 날숨은 유정수(有情數)에 포섭되니, 감각이 없는 몸[無覺身]에는 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바로 숨이 비록 외부에서 들어 온 것이라 할지라도 내부에 계속(繫屬)된다는 뜻이다.84) 이러한 들숨과 날숨은 유집수(有執受, 감각을 갖는 것)가 아니니, 숨은 집수(執受)의 상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즉 몸 안에 비록 유집수의 바람이 존재할지라도 이러한 숨의 바람[息風]은 오로지 무집수이다.85) 이러한 들숨과 날숨의 본질은 바로 등류성(等流性)이니, 이는 바로 동류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비록 소장양(所長養)과 이숙생(異熟生)의 바람이 존재할지라도, 이러한 숨의 바람은 오로지 등류성일 뿐이다.86) 즉 몸이 증장(增長)하는 상태에서는 숨이 손감(損減)되고, 몸이 손감될 때에는 숨이 증장하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며,87) 끊어지고 나서도 그 후 다시 상속하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니, 그 밖의 다른 이숙색(異熟色)에는 이와 같은 특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들숨과 날숨은] 오로지 자지(自地)와 상지의 마음에 의해 관찰될 뿐이니, 하지의 마음에는 소연의 경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 태어나 욕계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러한 욕계의 몸과 욕계의 숨은 욕계의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그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에 의해 관찰된다. 또한 만약 욕계에 태어나 초정려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러한 욕계의 몸과 욕계의 숨은 초정려의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그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초정려의 마음)에 의해 관찰된다. 나아가 [욕계에 태어나] 제2, 제3정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도 모두 앞에서 논설한 바에 준하여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초정려에 태어나 세 지(초ㆍ제2ㆍ제3정려)의 마음을 일으키고, 제2정려에 태어나 두 지(제2ㆍ제3정려)의 마음을 일으키며, 제3정려에 태어나 자지(自地)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도 욕계에 태어나는 것에 준하여 마땅히 참답게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지에 태어나 하지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러한 상지의 몸과 상지의 숨은 하지의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그러한 [하지의] 마음에 의해 관찰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계의 숨은 네 지(자지와 아래 세 정려)의 마음에 의해 관찰되며, 초ㆍ제2ㆍ제3정려의 숨은 순서대로 세 지와 두 지와 자지의 마음에 의해 관찰된다. 즉 숨이 존재하는 지(地)는 네 곳이며, 숨이 존재하지 않는 지는 다섯 곳으로,88) 숨이 존재하는 지에 머물면서 숨이 존재하지 않는 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 숨은 필시 일어나지 않으며, 숨이 존재하지 않는 지에 머물면서 숨이 존재하는 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역시 숨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숨이 존재하는 지에 머물면서 숨이 존재하는 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들숨과 날숨이 일어난다.
3-4) 지식념의 원만한 성취
[앞에서] 분별한 지식념이 원만하게 성취된 상[成滿相]은 어떠한가?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관행자(觀行者)라면, 생각을 집중[注想]하여 숨의 미세하고 천천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이를테면 대롱[筒]의 구멍과 같은 것이 몸에 두루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들숨과 날숨의 바람이 연달아 이어지는 것이 마치 말니(末尼, mani, 寶珠)를 꿰뚫는 [실]과 같다고 여기면서, 능히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신식(身識)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땅히 지식념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증장(增長)되고 자재(自在)하며,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면, 이러한 지식념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처음의 ‘증장’이라고 하는 말은 지식념의 하ㆍ중ㆍ상품이 순서대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며, 나아가 만약 어느 때 그가 욕락(欲樂)하는 바에 따라 능히 들이마실 수 있고, 능히 내 쉴 수 있게 되었다면, 이를 ‘자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능히 몸을 섭익(攝益)하고, 탐기(耽嗜)의 근거가 되는 심(尋)을 멀리하는 것을 일컬어 ‘해야 할 일을 마쳤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설하기를, “만약 여섯 가지 상을 갖추고, 세 가지의 과실을 멀리 떠났거나,89) 혹은 만약 열여섯 종류의 수승한 행상을 모두 닦았으면, 이러한 경지를 마땅히 지식념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90) 그런데 경에서는 식념(息念)에 열일곱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들숨과 날숨을 염(念)하면서 ‘나는 이미 들숨과 날숨을 염하였다’고 아는 것과, 짧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길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숨이] 온몸에 두루 존재함을 느끼는 것[覺遍身]과, 몸의 작용을 멈추는 것[止身行]과, 기쁨을 느끼는 것[覺喜]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覺樂]과,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覺心行]과, 마음의 작용을 멈추는 것[止心行]과, 마음을 느끼는 것[覺心]과, 마음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令心歡喜]과, 마음이 포섭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令心攝持]과, 마음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令心解脫]과, 무상을 따라 관찰하는 것[隨觀無常]과, [번뇌의] 끊어짐을 따라 관찰하는 것[隨觀斷]과, 떠남을 따라 관찰하는 것[隨觀離]과, 소멸을 따라 관찰하는 것[隨觀滅], 이와 같은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스스로 아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일곱 가지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바로 전체적인 관찰[總觀]이며, 뒤의 열여섯 종류는 바로 차별적인 관찰[別觀]로서, 4념주(念住)에 근거하여 차례대로 각각의 염주에 네 갈래가 있어 열여섯 종류를 성취하게 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이 수념주(受念住)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인가? 수(受)의 결과로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여기서 설한 ‘마음의 작용[心行]’이란 사(思)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수’를 일컬어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낙수(樂受)의 맛에 탐착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러한 경계대상에 대해 ‘사’를 낳았을 경우, 그러한 조작(造作)의 마음을 일컬어 ‘마음의 작용’이라 하는데, ‘수’는 바로 ‘사’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마음의 작용’이라 하여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 혹은 다만 능히 ‘수’ 자체만을 느낄지라도 뜻에 준하여 ‘사’ 등의 생(生)ㆍ주(住)ㆍ괴상(壞相)에 대해서도 역시 순서대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마치 대해의 한 방울의 물이 짜다는 것을 알았으면 대해의 물맛도 역시 두루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오로지 ‘수를 느끼는 것[覺受]’을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覺心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 밖의] 각각의 상에 대해서도 널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으로, 경의 해석[經釋] 중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1)본송의 후반 2구는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13하; 대정장29, p.113하)에서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며, 수도는 두 종류(유루ㆍ무루) 모두와 통한다(見道唯無漏 修道通二種)”로 되어 있는 것을 개작한 것이다. 개작한 이유는, 본론 제25권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에서 “유정지(有頂地)의 견ㆍ수소단은 오로지 성자의 견도와 수도에 의해 끊어지며, 하(下) 8지에 포섭되는 수면 중 견소단의 수면은 성자는 견도로써 끊고, 범부는 수도(즉 유루 세간도)로써 끊으며, 수소단의 수면은 성자와 범부가 다 같이 수도로써 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미 견도는 오로지 성자에 근거한 것이고, 수도는 범부와 성자 모두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하였으므로 전자는 오로지 무루이고, 후자는 무루와 유루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순정리론』 제57권 참조)
2)이는 본론 제25권 ‘98수면으로의 전개’ 참조.
3)주1) 참조.
4)이를테면 본론 제1권 ‘유루의 이명(異名)’의 본송 중에서 “아울러 고(苦)ㆍ집(集)ㆍ세간(世間)”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고ㆍ집제를 설한 것이고, ‘제법분별-총설’의 본송 중에서 “택멸은 말하자면 이계(離繫)이다”,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道諦)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각기 멸제와 도제를 설한 것이다.(후술)
5)이를테면 고제로서 5취온과 집제로서 5취온은 법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이가 없을지라도, 원인이 되는 5취온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행상을 갖는 것으로 관찰(현관)되며(集法智忍과 集法智), 결과가 되는 5취온은 무상ㆍ고ㆍ무아ㆍ공(空)의 행상을 갖는 것으로 관찰(苦法智忍과 苦法智)된다.
6)4정단이란 일어난 악법을 끊고 또 끊는 단단(斷斷), 계율을 수지하여 악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율의단(律儀斷), 무루삼매 중에서 선을 지켜 악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수호단(隨護斷), 바른 도를 닦아 악법을 끊는 수단(修斷)을 말하는 것으로, 이처럼 번뇌의 ‘단’에도 네 가지가 있듯이, 유위법의 경우에도 그것을 관찰하는 관점에 따라 결과적 상태를 고제라 하고, 원인적 상태를 집제라 할 수 있다는 뜻.
7)염주란 3현위에서 5정심관 다음에 닦는 네 가지 관법으로(본론 제30권 ‘별상념주’ 참조), 몸은 4대소조이기 때문에 부정(不淨)한 것으로(身念住), 지각되어 알려진 소여의 생기는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므로 괴로운 것으로(受念住), 소의ㆍ소연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은 무상한 것으로(心念住), 그 밖의 모든 법은 실체성이 없는 것으로 억념하는 것(法念住)을 말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네 존재는 경험의 세계를 낳게 하는 구체적인 근거로서, 그 상이 거칠어 관찰하기 쉬운 순서에 따라 이 같은 순으로 설하게 되었다. 예컨대 온갖 욕탐은 몸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먼저 설한 것이며, 몸을 탐하는 것은 그 느낌을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것은 마음이 조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화되지 못한 것은 아직 번뇌(즉 법)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4정승(또는 正斷)이란 이미 생겨난 악을 끊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선을 증장시키는 것으로, 이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편의상의 순서이다. 즉 악이 선보다, 이미 생겨난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보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9)『잡아함경』 15 제389권 「양의경(良醫經)」(대정장2, p.105상).
10)여기서 ‘앞에서 외운 글’이란 가행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말하고, ‘마음으로 외우는 것’이란 현관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말한다.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14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994)에서는 “마치 땅을 관찰하고 나서 말을 쫓아 치달려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11)『구사론』(고려장27, p.614중; 대정장29, p.114상; 권오민 역, p.994)에 따라 보충하였다.
12)여기서 성행(聖行)이라 함은 4제 각각의 네 행상(16행상, 본론 제30권 ‘현관의 16심’ 참조)을 말하는 것으로, 성행과 제(諦)가 서로 대칭하기 때문에 ‘성제’이다. 또한 성지(聖智)란 정결정(正決定, 正性離生의 견도)을 획득하게 하는 고ㆍ집ㆍ멸ㆍ도지(道智).
13)고ㆍ락ㆍ불고불락의 3수(受) 중 고수(苦受)만이 괴로움 자체이며, 낙수(樂受)와 불고불락수(즉 捨受)의 경우는 그 자체 괴로움이 아니라는 뜻.
14)고고성(duhkha duhkhatā)이란 그 자체가 괴로운 것으로서 바로 고수(苦受)를 말하고, 행고성(saṃskāra duhkhatā)이란 무상(行)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서 사수(捨受)를 말하며, 괴고성(vipariṇāma duhkhatā)이란 지금은 즐거운 것일지라도 마침내 괴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서 낙수(樂受)를 말한다.
15)즉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란 고수(苦受) 자체와 그것의 자구되는 유루행법을 말하며, ‘그 밖의 것’ 즉 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사수(捨受) 자체와 그것의 자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구(資具)’란 각각의 ‘수’와 상응하는 심ㆍ심소법과 구유(俱有)하는 ‘득’이나 생(生) 등의 4상을 말함.
16)『중아함경』 제58권 「법락비구니경(法樂比丘尼經)」(대정장1, p.789하). 여기서는 3수의 구역어인 낙각(樂覺)ㆍ고각(苦覺)ㆍ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으로 설해지고 있다.
17)상동.
18)일체의 유루행법은 모두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행고성(行苦性) 아닌 것이 없지만, 가의(可意)의 유루행법을 괴고성(壞苦性)이라 하고, 불가의(不可意)의 유루행법을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한 것은 별도의 갈래[別門]에 따른 설명이라는 뜻. 즉 고고성과 괴고성은 누구든지 직접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이지만, 행고성은 무지(無智)의 괴로움이기 때문에 무지한 자는 알 수 없으며, 다만 성자들만이 아는 괴로움이다.
19)이는 “일체의 유위행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성도[道諦] 또한 인연소작(因緣所作)의 유위법으로 무상하기 때문에 역시 행고성에 포섭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난문의 답이다. 즉 열반의 즐거움에 수순하는 것으로, 괴로움은 3계에 계속(繫屬)되지만, 성도는 무루로서 불계(不繫)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아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순정리론』 제57권을 참조할 것.
20)어떤 사물의 내용이 파괴됨으로서 그것에 대한 지각이 상실되는 법을 세속제(saṃvṛti-satya)라고 한다. 예컨대 숲[園林]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나무가 파괴되어 제거되면 숲이라는 지각도 사라진다.
21)오늘날 물이 H2O로 분해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당시로 볼 때 물은 항아리처럼 분석(分析)되는 것이 아니다. 한 동이의 물이 물방울이나 미세한 수증기로 분석될지라도 역시 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관념(즉 覺慧)으로써 분석되어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한 것이다. 즉 물을 관념적으로 더욱 분석하면 색ㆍ향ㆍ미ㆍ촉(여기에는 地의 견고성ㆍ水의 습윤성ㆍ火의 온난성ㆍ風의 운동성도 포함된다) 등의 요소로 환원되고, 거기에는 더 이상 물이라고 하는 지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물’이라고 하는 것은 색ㆍ향ㆍ미ㆍ촉의 화합물로서 일시 설정된 언설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간의 언어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당하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제이다.(후술)
22)색 등의 법은 뛰어난 ‘혜’에 의해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극미로 분석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색이기 때문에 색 등의 온은 궁극적인 승의(勝義)의 법이다.
23)수(受)ㆍ상(想) 등은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쪼개져 극미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각혜(覺慧)로써 분석하여 1찰나의 그것에 이르게 할 수는 있으며, 그렇더라도 그 같은 ‘수’ 등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24)여기서 ‘그 밖의 상(想) 등의 법’이라 함은 고ㆍ낙ㆍ불고불락의 3수나 여기에 우(憂)와 희(喜)를 더한 5수근을 말함인가? 상온(想蘊)은 아니다.
25)이 같은 세속유와 승의유, 세속제와 승의제는 유부교학의 기본이념이지만, 선대(先代) 궤범사(軌範師, 경부)에 의하면, 다만 무루정에서 획득된 지식 즉 무루관지(無漏觀智)와 출정(出定) 후에 획득된 세간정지(正智)에 의해 인식된 제법만이 승의제이다. 즉 정지에 의해 파악된 제법은 전도된 것이 아니므로 승의제이며, 비(非)정지에 의해 파악된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제이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 p.617하; 대정장29, p.116중; 권오민 역, p.1013)
26)다시 말해 세속제는 승의의 이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승의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뜻.
27)원문은 ‘世友說言, 無倒顯義名是世俗諦, 此名所顯義是勝義諦.’ 『대비바사론』 제77권(대정장27, p.400상)에서는 “능히 의미를 드러내는 말이 세속이며, 이러한 말에 의해 드러나는 법이 승의이다(能顯名是世俗, 所顯法是勝義)”라고 설하고 있다.
28)본론 제8권 ‘명ㆍ구ㆍ문 3신에 대한 세친의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29)여기서 ‘승의의 공’이란, 필경무(畢竟無, 절대적 비존재)의 뜻. 즉 ‘세속’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진리[諦]라고도 말할 수 없다.
30)원문은 ‘名是言依, 隨世俗情流布性故.’ 언의(kathāvastu)란 유위법의 다른 이름(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 참조)으로, 말 그대로 말의 근거, 즉 말에 의해 지시되는 의미대상[義]인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 따라서 세속(saṃvṛtti, 즉 말) 역시 유위법의 일부로서 승의유(paramārtha-sat)이다. 예컨대 자아(세속유, 혹은 假名)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5온이라면, ‘자아’라는 말[名] 역시 자아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중의 하나이므로 역시 승의유(즉 불상응행법 중의 하나)이며, 그래서 앞서 “승의제 중의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의해 세속제로 설정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31)예컨대 ‘수레’라는 말[名] 역시 승의유이지만, 그것은 온갖 부품의 총화(總和)로서의 대상(즉 世俗有)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제’라고 말하였다는 뜻.
32)전술한 ‘4제의 체상’ 참조.
33)“그렇지만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상응인이라고 이름하였으면, 이에 따라 구유인 등으로는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순정리론』 제58권)
34)부처님께서는 2제 혹은 3제(“일체 유정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집기(集起)한 법[集法]은 다 소멸하는 법[滅法]이다”라고 말하면, 이는 바로 진리로서 거짓이 아니니, 이를 두 번째 진리라고 이름한다. 아(我)와 아소(我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순정리론』 제58권 참조)를 설하였지만, 그것은 다 방편에 따른 것이며, 진리는 오로지 승의제인 4성제 한 가지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뜻.
35)집제와 고제는 염오의 인과(因果)이며, 도제와 멸제는 청정의 인과이다.
36)원문은 ‘亦是諦擇’으로 되어 있지만, 문맥상 혹은 『순정리론』(제58권)에 따라 ‘택’을 ‘섭(攝)’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7)즉 비유사(경부)는 허공과 비택멸을 비롯한 무위법의 실재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의 무위법을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을 뿐더러 의심과 비방의 번뇌를 낳지 않았던가? 하는 난문.
38)비유사(경부)는 허공과 비택멸을 각기 가촉성(可觸性)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자연적이고도 본래적인 생기의 비존재를 가설한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법 자체를 비방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명칭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
39)『잡아함경』 제28권 제786경(대정장2, p.200하), “純一滿淨 具梵行者, 謂善知識.” 참조.
40)보다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오로지 ‘단어[名, nāma, 名想 즉 명사적 개념]’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문소성혜도 다만 ‘단어’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次註 참조)
41)문혜(聞慧)는 청문(聽聞)의 근거가 되는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 즉 단어ㆍ문장ㆍ음소의 집합을 반연하여 생겨나지만, 여기서는 다만 첫 번째 방편에 따라 ‘명’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뜻. 그래서 본 역에서는 ‘명’을 ‘단어’라고 하지 않고 ‘말’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이지만, 주2)의 경우에는 ‘단어’라고 번역해야 문맥상의 의미가 통한다. ‘명’ 등의 3신에 대해서는 본론 제8권에서 상론하였다.
42)여기서 ‘등인(samāhitā)은 선정의 다른 명칭으로, 등지(等持, samādhi), 혹은 등지(等至, samāpatti)라고도 함.
43)『대비바사론』 제42권(대정장27, p.218상; 한글대장경119, p.397) 참조. 즉 세 가지 ‘혜’라고 하는 것은 말[名, nāma]과 뜻[義, artha]에 따른 이해 판단력의 차별로 말미암아 분류된 것으로, 문소성혜는 다만 말만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사소성혜는 말과 뜻을 대상으로 삼아 어느 때는 말을 통해 뜻을 추구하고, 혹은 뜻을 통해 말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소성혜는 오로지 뜻만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 판단력이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수영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부목(浮木)에 의지해야 하고, 일찍이 배웠더라도 익숙하지 못하면 그것을 버리기도 하고 혹은 의지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배운 이는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력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44)원문은 ‘如言命器食寶所成.’ 즉 ‘목숨은 음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 ‘그릇은 보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을 경우, 전자는 원인의 뜻이지만, 후자의 자성의 뜻이듯이(그릇의 본질이 바로 보배이다, 문소성혜와 사소성혜에서의 청문(聽聞)과 사택(思擇)은 ‘혜’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지만, 수소성혜에서의 수(修) 즉 등지는 ‘혜’의 자성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세 가지 ‘혜’에는 분명한 차별이 있다는 뜻. 이에 반해 경주 세친은 3혜는 각기 청문과 사택과 등지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소성(所成)’이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 p.618상; 대정장27, p.116하; 권오민 역,p. 1015)
45)‘심(尋)’은 부정지법의 하나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 감각적 대상을 추구하게 하는 보다 거친 의식작용, 즉 전5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참고로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18중; 대정장29, p.117상; 권오민 역, p.1017)에서는 ‘신(身)의 원리’에 대해 “[나쁜 친구들과] 서로 뒤섞여 머무는 것[相雜住]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6)이상은 대법(對法) 제사(諸師)의 설로서, 『구사론』(앞의 책)상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이미 획득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아직 획득하지 못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대욕’이라고 한다.”
47)4성종(ārya vaṃśa)이란, 의복희족성종ㆍ음식희족성종ㆍ와구(臥具)희족성종ㆍ요단수(樂斷修). 이 네 가지는 능히 모든 성자를 낳는 종자가 되기 때문에 성종(聖種)이라 이름하였다.(후술)
48)“[요단수가 무탐을 본질로 한다고 한 것은,] 능히 유탐(有貪,상 2계의 탐)과 욕탐(欲貪,욕계의 탐)을 버렸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 p.618중; 대정장29, p.117상; 권오민 역, p.1018)
49)즉 4성종 중 앞의 세 가지(의복 음식 와구에 대한 희족)는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생의 자구[助道生具]’이며, 뒤의 한 가지 즉 요단수(樂斷修)는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사업[助道事業]’이다.
50)여기서 인용한 계경은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대정장1,p.229하)으로, 의복애ㆍ음식애ㆍ와구애ㆍ무유애(無有愛, 비존재에 대한 애착)에 대해 설하고 있다.
51)약은 의복ㆍ음식ㆍ와구와 함께 ‘행(行)의 4의(依)’ 중의 하나임. 즉 출가비구들은 항상 분소의(糞掃衣)를 입으며, 걸식하고, 나무 밑이나 동굴 등에서 지내며, 부란약(腐爛藥)만을 사용해야 한다.
52)박구라(Bākula, Bakhula)에 대해서는 『중아함경』 제8권 「박구라경」(대정장1, p.475상;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①, p.187)을 참조할 것. 이에 따르면 그는 생애 80년 동안 분소의만을 입고, 걸식 등을 하였지만 건강하여 한 번도 약을 먹어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53)즉 마약과 같은 것은 범행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적은 양의 그것에 기쁘게 만족하는 것은 범행에 장애가 된다고 설한 것이다.
54)이는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18하; 대정장29, p.117중; 권오민 역, p.1019)상에서 경주 세친이 설한 “여기서 ‘아소’란 의복 따위를 말하고, ‘아’란 자신을 말하며, 그리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을 일컬어 ‘욕[탐]’이라고 하였다”는 논설의 비판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에 대한 욕탐[欲]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4성종을 설하였는데, 이에 대해 “여기서 ‘아소’란 의복 따위를 말하고, ‘아’란 자신을 말하며, 그리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을 일컬어 ‘욕[탐]’이라고 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 “[4성종은]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전구(前句, 제2구)와 동일한 뜻이 되고 만다.(『순정리론』 제59권 참조)
55)신기가 청정하게 되었으면 이제 바야흐로 견도의 본격적인 준비단계 즉 가행위에 들어갈 수 있다. 가행위에는 3현위(賢位)와 4선근(善根)의 일곱 가지 방편도가 있다. 3현위는 아직 깨달음 밖의 단계이기 때문에 성자와 구별하여 ‘현위’ 혹은 외범위(外凡位)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5정심관(停心觀)과 별상념주와 총상념주 세 가지가 있다.
56)즉 수소성혜의 ‘수’에 들기 위해서는 신기(身器)를 청정히 한 다음, 먼저 부정관(不淨觀)ㆍ자비관(慈悲觀)ㆍ인연관(因緣觀)ㆍ계분별관(界分別觀)ㆍ지식념(持息念,또한 數息觀)의 5정심관을 닦아야 하지만, 아비달마에서는 대개 이 중에서 정심위에 이르는 가장 요긴한 방편[要門]으로 부정관과 지식념만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5정심관’이라는 말은 아비달마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제22권, 대정장41, p.339중)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것이 완전한 형태로 설해지고 있는 것은 『유가사지론』 「성문지(聲聞地)」(한글대장경111, 유가부3, p.61~81)에서이다. 즉 부정관은 자타의 백골을 관찰하여 탐욕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고, 자비관은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부모같이 경애상(敬愛想)으로 관하여 진에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연기관은 12연기의 이치를 관하여 우치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계분별관은 자아란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의 6계가 인연에 의해 일시 화합한 것일 뿐이라고 관하여 아ㆍ아소에 대한 악견을 정지시키는 관법, 수식관은 들숨과 날숨을 헤아림으로써 산란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다.
57)이는 『구사론』(제2권2, 고려장27, p.618하~619상; 대정장29, p.117중; 권오민 역, p.1020)상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념은 다수의 외적 경계대상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심(尋)의 산란을 억지할 수 있지만, 부정관은 다수의 현(顯)ㆍ형색(形色)의 차별을 반연하여 다수의 ‘심’을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심’의 심소)을 대치하는 공능이 없다.” 즉 부정관(aśubhā-bhāvanā)이 소의신의 형색과 현색 등의 차별을 관하는 것인 반면, 지식념(anāpāna-smṛti)은 다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관법이기 때문이다.(후설)
58)현색탐(구역은 色欲)은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욕, 형색탐(또는 形貌欲)은 용모에 대한 탐욕, 묘촉탐(또는 觸欲)은 신체상의 좋은 감촉에 대한 탐욕, 공봉탐(또는 威儀欲)은 표업에 따라 일어나는 탐욕으로, 말하자면 행동거지나 신분ㆍ지위에 대한 탐욕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 탐을 대치하기 위해 시신의 내외의 부정(不淨)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이다.
59)여기서 ‘청어상’이란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적’이란 본래의 색과는 달리 불그죽죽하게 된 것을 말하며, ‘피식’이란 짐승이나 조류 혹은 구더기에게 뜯어 먹히는 것, ‘분리’란 사지의 뼈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것, ‘방창’이란 시체가 팅팅 부어 가죽자루처럼 되는 것, ‘농란’이란 고름이 흐르며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말한다.
60)원문은 ‘以一骨瑣中具離四貪境故.’이지만, ‘瑣’를 ‘鎖’로 고쳐 번역하였다.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19상; 대정장29, p.117중; 권오민 역, p.1022)에는 “골쇄 중에는 네 가지 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以骨鎖中無四貪境故)”로 되어 있다.
61)『순정리론』(제59권)에는 ‘전(田)’으로 되어 있다.
62)제1구: 어떤 부정관은 소연은 적지만 자재는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2구: 어떤 부정관은 자재는 적지만 소연은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이때 자재는 적다)에서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3구: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4구: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63)이는, “이러한 부정관의 소연 자체는 모두 뼈가 아님에도 그것을 모두 뼈라고 이해한 것이므로 승해의 작의가 아니라 ‘전도(顚倒)된 작의’라고 해야 하며, 따라서 선성(善性)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에 대한 해명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순정리론』(제59권)를 참조할 것.
64)부정관은 무탐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행온에 포섭되지만,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심ㆍ심소와 상응하기 때문에 4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이며, 색계의 경우 선정에 수반되는 무표색(즉 隨轉色)을 더하여 5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이다.
65)즉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반연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앞의 9지에서 일어난 부정관은 정심(定心)이지만, 오로지 욕계로부터 일어난 부정관만은 산심(散心)이다.
66)부정관이 욕계 색처, 즉 현색과 형색을 반연한다고 한 이상, 뜻과 말 중에서 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말[名, 불상응행법의 하나]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색처는 선ㆍ불선ㆍ무기의 3성에 포섭되기 때문에(선ㆍ불선심에 의해 등기된 신ㆍ어표업에 포섭되는 것이면 선ㆍ불선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무기임.(본론 제3권 ‘[18계의] 선 등의 3성 분별’ 참조) 3성의 색처는 모두 부정관의 소연이 될 수 있다.
67)북구로주에는 천취와 마찬가지로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부정상이 없기 때문이다.
68)여기서 ‘행상(行相)’이란 행해상모(行解相貌)의 준말로서, 지식의 형상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69)일체의 색처를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찰할 때에는 오로지 5수근(受根) 중 희근과 낙근과 사근과 상응하지만, 부정관의 성질상 구행(동시작용)하지 않는다는 뜻. ‘고(苦)ㆍ집(集)의 인(忍)과 지(智)’란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 집법지(集法智)와 집법지인(集法智忍). 양자는 비록 서로에 대한 변행인이 되지만, 구행(동시작용)하지 않는다.
70)즉 연이 결여되어 생겨나지 않은 필경불생법으로서의 부정관일 경우, 그 대상은 3세에 걸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71)“이미 오로지 승해의 작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관법은 이치상 마땅히 오로지 유루라고 해야 한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 p.619하; 대정장29, p.118상; 권오민 역, p.1025). 즉 부정관은 가상(假想)으로써 관하는 승해의 작의에 포섭되기 때문에, 여실지견하는 견제(見諦) 16행상(共相作意)과는 달리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 ‘4선근’과 제35권 ‘무루지와 16행상’에서 상론한다.
72)즉 부처님은 부정관을 가행에 의해 획득하는 일이 없으며, 독각은 하품의 가행에 의해, 성문은 중품의 가행에 의해, 이생은 상품의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대비바사론』 제40권, 대정장27, p.207중)
73)원문은 ‘此中一切聖最後有異生皆通未曾, 餘唯曾得.’ 여기서 ‘최후유의 이생’은 보살. ‘미(未)’와 ‘증(曾)’은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고,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을 말하는데, 보광은 이같이 해석하였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일찍이 획득한[曾得] 부정관은 이염득이고,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未得] 부정관은 가행득이다. 좀 더 자세히 분별하면 일찍이 획득한 것과 획득하지 못한 것은 두 종류 모두와 통하는데,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이 이염득이라 함은 하지의 염오를 떠나 상지의 부정관을 획득하는 것을 말하며,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이 가행득이라 함은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하였던 부정관을 수득(修得)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부정관이 이염득이라 함은 유정지(有頂地)의 염오를 떠날 때 획득하는 것을 말하며,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부정관이 가행득이라 함은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부정관을 수득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기』 제22권, 대정장41,p.340중) 따라서 최후유의 이생을 제외한 그 밖의 이생은 상품의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하였던 부정관을 수득(修得)할 뿐이다. 이는 『바사』(前註 참조)에서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가행득과 이염득, 증득(曾得)과 미득(未得)을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참고로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이염득(離染得)과 가행득(加行得) 모두에 통하니, 일찍이 획득하였고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만 논설하고 있다.
74)『잡아함경』 29권 제802경 제803경(대정장2, p.206상), “세존께서 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닦아야 할 것이니, 만약 비구로서 안나반나념을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는 자라면, 몸이 지식(止息)되고 마음이 지식되며, 유각유관(有覺有觀, 즉 有尋有伺)이 적멸 순일하여 분명한 상(想)이 수습됨에 만족(滿足)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75)이러한 들이쉬고 내쉬는 숨(入ㆍ出息)을 관찰하는 것은 혜(慧)이지만,(후술) 염(念) 심소의 도움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지식념’이라고 한 것이다.
76)부정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온과 5온을 본질로 한다는 뜻. 주64) 참조.
77)지식념은 이 같은 5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러한 염은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왜냐하면 욕계의 고ㆍ낙수는 尋을 인기하고, 색계의 희ㆍ낙수는 專注에 위배되지만, 이러한 지식념은 ‘심’을 대치하고 경계에 전주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욕계 고ㆍ낙수와도, 색계 희ㆍ낙수와도 상응 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근본정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제4정려 이상에는 비록 사수만이 존재할지라도 숨[息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후술)
78)그러나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 p.620상; 대정장29, p.118상; 권오민 역, p.1027)에서는 “지식념은 이염득(離染得)과 가행득(加行得) 모두에 통한다”고 하였으며, 앞서 본송(本頌)에서도 “두 가지로 획득된다(二得)”고 설하였다.
79)‘수를 덜 헤아리는 과실’이란 두 숨 등을 한 숨 등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하며, ‘수를 더 헤아리는 과실’이란 한 숨 등을 두 숨 등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과실’이란 다섯 번 들이 쉰 것을 내 쉰 것이라고 헤아리고, 다섯 번 내 쉰 것을 들이 쉰 것이라고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80)여기서 ‘너무 느리게 헤아리는 과실’이란, 헤아리는 것이 너무 완만(緩慢)하여 마음에 해태(懈怠)나 혼침과 수면[惛睡]의 전(纏, 수번뇌)이 생겨나거나, 혹은 마음이 제멋대로 외부의 경계대상으로 치닫는 것을 말한다. ‘너무 빠르게 헤아리는 과실’이란, 헤아리는 것이 지나치게 조급(躁急)하여 몸과 마음이 평등하지 않게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맥(脈)이 빨라지고, 식풍(息風)이 증대되면 병이 생겨날 수 있다. 혹은 마음이 평등하지 않게 되면 광란(狂亂)에 치닫거나 깊은 우울증[重憂]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헤아리는 것이 산란되는 과실’이란, 이를테면 마음이 산란해짐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번뇌에 조복되는 것을 말한다.(『순정리론』 제60권 참조)
81)여기서 1책(vitasti)이란 손을 폈을 때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의 길이를 말하며, 1심(vyāma, 혹은 弓)은 여덟 자 혹은 열 자의 한 길을 말한다. ‘심’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주16) 참조.
82)지식념의 근거로서 이 같은 ‘전’과 ‘정’을 설한 것은, 이것이 다음에 설할 4선근과 더불어 견도의 방편(가행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유부 교학상에서 볼 때 지식념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는 수행도가 아니다. 이에 반해 다음에 설하는 유여사의 경우, 지식념으로써 견도는 물론이고 유정지 제9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금강유정이나 그것의 해탈도인 진지(盡智)에도 이를 수 있다.
83)예컨대 무심위(無心位) 중에서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즉 네 번째 조건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네 종류의 조건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숨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이나 태(胎) 중에 머무는 갈랄람(羯剌藍) 등은 모공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바람의 길이 아직 뚫리지 않았기 때문에 숨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제4정려에 드는 경우에는 모공이 열리지 않으며, 거친 마음이 현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숨은 일어나지 않는다.
84)“숨은 유정수에 포섭되니, 유정의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有情身分故).”(『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 p.620중; 대정장29, p.118중하; 권오민 역, p.1031)
85)“숨은 유집수가 아니니, 근(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與根相離故).”(『구사론』, 앞의 책)
86)여기서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고, 소장양은 이를테면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 결과를, 이숙생이란 전생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소장양은 동신풍을, 이숙생은 수전풍을 말함인가?
87)다시 말해 몸이 건강할 때에는 숨이 줄어들고(완만해지고), 몸이 쇠퇴할 때에는 숨이 늘어나기(가빠지기) 때문에 숨은 음식에 의해 장양되는 것이 아니다.
88)즉 욕계와 초ㆍ제2ㆍ제3정려에는 숨이 존재하지만, 제4정려와 4무색정의 다섯 곳에는 숨이 존재하지 않는다.
89)여기서 여섯 가지 상이란, ‘숨의 제문분별’에서 논설한 지식념이 원만하게 되는 여섯 원인, 즉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전(轉)ㆍ정(淨). 세 가지 과실은 여섯 원인 중 첫 번째인 수(數)의 세 과실, 즉 수를 덜 헤아리는 과실[數減失]과 더 헤아리는 과실[數增失]과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과실[雜亂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