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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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7권


중현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역주


8. 변지품 ③

2. 부처와 성자에 공통되는 공덕

1) 총론

여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다른 이와 공통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시 그 밖의 다른 불법이 있어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니
이를테면 무쟁과 원지와
무애해 등의 공덕이 바로 그것이다.
復有餘佛法 共餘聖異生
謂無諍願智 無礙解等德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에게는 다시 그 밖의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쟁(無諍)과 원지(願智)와 [4]무애해(無礙解)와 [6]통(通)과 [4]정려와 [4]무색정과 [8]등지(等至)와 [3]등지(等持)와 [4]무량(無量)과 [8]해탈과 [8]승처(勝處)와 [10]변처(遍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는 것으로, 이를테면 앞의 세 갈래는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이며, 6통과 4정려 등은 이생과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다. 비록 부처님의 색신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공덕은 그 행상이 청정 수승하고 자재하여 성문 등이 갖는 공덕과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공통되는 공덕[共德]’이라고 말한 것이다.

2) 무쟁(無諍)

먼저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앞의 세 가지 공덕 가운데 ‘무쟁(araṇā)’이란 어떠한 법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쟁은 세속지로서
뒤의 정려에 의지하여 부동법(不動法)이
세 주(洲)에서 일으키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욕계의 유사혹(有事惑)을 반연한다.
無諍世俗智 後靜慮不動
三洲緣未生 欲界有事惑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아라한은, 옛날 수많은 생에 걸쳐 여러 잡다한 종류의 몸을 받아 자신과 다른 이의 혹(惑)을 일으켰고, 이러한 상속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과보[非愛果]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서 바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번뇌가 존재하는 몸이었을 때에는 그것을 반연하여 혹(惑)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였지만, 하물며 이제 번뇌를 떠나고 뛰어난 공덕을 갖춘 몸을 [반연하여] 그러할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상(相)의 지(智)를 낳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방편(번뇌를 떠나고 뛰어난 공덕을 갖춘 몸)에 의해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반연하여서는 더 이상 탐(貪)ㆍ진(瞋) 등을 낳지 않게 하리라.”
이러한 지는 [10지 가운데] 다만 세속지를 자성으로 할 뿐이니, 다른 이의 미래 수소단의 혹을 반연하기 때문으로, 무루지에 의해서는 이러한 행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무쟁의 본질이 바로 이러한 [세속]지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무쟁의 등지(等持)를 수습(修習)하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설과 상위하지 않으니, 하나의 상응품(相應品)에는 다수의 공덕이 있지만 [경에서는] 그 중 한 가지만을 설하였기 때문으로, 마치 하나의 산(山) 중에 여러 가지의 사물이 존재할지라도 그 중의 한 종류만을 언급하여 산의 명칭으로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치상으로도 무쟁은 마땅히 이러한 [세속]지에 포섭되어야 하니, 타상속에 당래 혹이 생겨나는 것을 수호하려면 먼저 교묘한 방편[巧便]을 지어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다툼[諍]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는데, 온쟁(蘊諍)과 언쟁(言諍)과 번뇌쟁(煩惱諍)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쟁이란 죽음을 말하고, 언쟁이란 싸우는 것[鬪]을 말하며, 번뇌쟁이란 백팔 번뇌를 말한다. 곧 이러한 지(“이제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반연하여서는 더 이상 탐ㆍ진 등의 번뇌를 낳지 않게 하리라”는 세속지)의 힘에 의해 능히 번뇌쟁을 종식시키기 때문에 ‘무쟁’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는 다만 제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괴로움(즉 苦通行)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제4정려는 낙통행(樂通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1)
또한 부동법(不動法)의 응과(應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으며, 그 밖의 성자는 일으킬 수 없다. 그 밖의 성자는 자신이 일으키는 번뇌도 능히 막을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이의 몸에 생겨나는 번뇌를 능히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것은 오로지 세 주(洲)의 인취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 북구로주나 그 밖의 다른 취(趣)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그곳의 유정은] 성질이 맹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욕계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사혹(有事惑)을 반연하니,2) 다른 이의 번뇌가 자신을 반연하여서는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온갖 무사혹(無事惑)을 막거나 방지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내적으로 일어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 경계대상을 총체적으로 반연[總緣]하기 때문이다.3)

3) 원지(願智)

무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원지(願智, pariṇidhijñāna)란 어떠한 법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원지란 일체의 법을 능히 두루 반연하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願智能遍緣 餘如無諍說

논하여 말하겠다.
[원지란] 먼저 원(願)하고 나서 미묘한 지(智)를 일으키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알기 때문에 ‘원지’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지의 자성과 소의지와 종성과 소의신은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소연만이 다를 뿐으로, 이러한 지는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4)
어떻게 원지가 미래도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인가?
과거ㆍ현재를 자세히 살펴보면, 미래도 추리[比]하여 알 수 있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농사가 잘되고 잘되지 않음을 관찰하면, 그 밭이 옥토이고 박토임을 추리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원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인가?5)
[‘추리지’라고 한다면] 유학이나 이생도 역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추리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알려지는 것[所知]은 결정코 불확정적인 것[不定]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설(傳說)에 의하면, 모든 위대한 성문들도 미래의 일을 기별(記別)하는데 불확정적인 경우가 있는데, 원지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 같은 잘못된 앎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세속지로 관찰하여 기별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의 기별에 불확정의 과실[不定失]은 없으니, 다만 처음의 사실[始]만을 관찰하고 끝[終]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예컨대 일찍이 내린 빗방울이 땅에 닿기 전에 라호라(羅怙羅)가 그것을 받아 버렸다거나,6) 먼저 잉태된 아이는 실로 사내아이였지만 그가 후에 형태를 바꾸어 계집아이가 되었다거나, 왕사성(王舍城)의 아귀가 첫 번째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그 후 광엄성(廣嚴城, 바이샬리)의 온갖 아귀에게 패하여 항복하였다―인간들이 서로 싸우려고 하여 아귀들이 먼저 싸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혹은 실로 원지로도 바야흐로 미래를 관찰할 수 있지만, 가행 시에 먼저 추리지[比智]를 일으켜 과거세와 현재세를 관찰하고, 이에 준하여 미래세를 헤아리는 것[度]으로, 원지의 ‘생’이 인기될 때 비로소 능히 진실로 [미래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색계도 능히 알 수 있다. 즉 일찍이 그것의 인행(因行, 즉 무색정)과 등류과(等流果)를 관찰하여 추리지가 생겨날 때, 진실의 원지를 인기하는 것이다. 혹은 욕계와 색계에서 죽고 태어날 때의 마음을 관찰하여 어디서부터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추리[比度]하여 알고 나서 원지를 인기하여 낳을 때 비로소 능히 진실로 [무색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추리지로 안다고 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원지는] 추리지와 소연이 필시 동일한 것임을 증지(證知)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추리하여 알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능히 [소연이 동일한 것임을] 증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경우 원지에 대해 [그것의] 힘은 능히 삼계와 3세를 두루 반연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불시해탈의 모든 아라한이 그 같은 [원지의] 경계대상에 대해 바로 알고자 할 때에는 먼저 ‘나는 그것을 알기 원한다’고 하는 요기(要期)를 지으며, 그 후 가행으로써 변제정(邊際定)인 제4정려에 들고, 이로부터 무간에 이전의 원력대로 정지(正智)를 인기하여 [알고자] 요기하였던 경계대상에 대해 모두 다 참답게 알게 된다. 여기서 ‘변제정’이라고 하는 말은 뒤에서 마땅히 해석하는 바와 같다.7)
이러한 원지의 힘은 과거세에 대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숙주지(宿住智)와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원지가 자상과 공상을 모두 아는 것이라면, 온갖 숙주지는 공상만을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공상을 아는 [원지와 숙주지] 중에도 역시 차별이 있으니, 원지는 분명하게 알지만[明了] 숙주지는 그렇지 않다.
나아가 현재[의 마음 등]을 소연으로 하는 [원지와] 이에 대한 타심지의 차별상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8)

4) 4무애해(無礙解)

4-1) 총설: 자성과 소연

원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애해(無礙解, pratisaṃvid)란 어떠한 법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애해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이 그것으로
명(名)과 뜻[義]과 언사와, 설(說)과 도(道)로서
물러남이 없는 지(智)를 본질로 한다.
無礙解有四 謂法義詞辯
名義言說道 無退智爲性

‘법’과 ‘사’는 오로지 세속지로서
다섯 지(地)와 두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의’는 10지(智)와 6지를, ‘변’은 9지로서
모두 다 일체의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法詞唯俗智 五二地爲依
義十六辯九 皆依一切地
획득할 때는 반드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但得必具四 餘如無諍說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무애해를 모두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무애해(法無礙解)이며, 둘째는 의무애해(義無礙解)이며, 셋째는 사무애해(詞無礙解)이며, 넷째는 변무애해(辯無礙解)이다.
이러한 네 가지 무애해를 전체적으로 설하면, 그 순서대로 명(名)과 뜻[義]과 언사[言] 그리고 설(說)하는 것과 도(道)를 반연하며, 퇴전(退轉)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智)를 자성으로 한다.9)
이를테면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능전(能詮)의 법인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을 반연한 것을 첫 번째 무애해(법무애해)로 설정하였다.10)
여기서 소전(所詮)의 뜻(즉 말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설하여 ‘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법의 자성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表召]이라는 뜻이다.
소전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설하여 ‘구’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법의 [동작ㆍ성질ㆍ시제 등의] 차별을 분별하여 알게 하는 것[辯了]이라는 뜻이다.
뜻(의미)과는 관계하지 않는 말[不待義聲]로서, [그 자체] 단독으로 지각[覺]이 생겨나는데 근거[依託]가 되는 것을 설하여 ‘문’이라고 하는데, 가(迦, ka)ㆍ차(遮, ca)ㆍ타(吒, ta)ㆍ다(多, ta)ㆍ파(波, pa)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치상 ‘뜻과 관계하지 않는 말’을 지각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하며, 이러한 지각에도 마땅히 소연의 경계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이러한 소연의 경계를 설하여 ‘문’이라고 한 것이다. ‘문’이란 말하자면 뜻과는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으며, 다만 ‘명’이나 ‘구’와 함께 하여 [그것의] 뜻을 드러내는 근거가 될 뿐이다.
즉 이 세 가지는 능히 온갖 소전(所詮)의 뜻(즉 말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을 지니며, 아울러 이해를 낳는 표준[軌生解]이 되기 때문에 ‘법’이라 이름하였다.11)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자성을 [총체적으로] 설하여 ‘신(身)’이라 하였는데, 자성 자체와 ‘신’은 명칭상의 차별이기 때문이다.12) 즉 [명ㆍ구ㆍ문의] 세 가지와 말의 뜻[聲義]은 지극히 서로 인접하고 뒤섞인 채로 경계대상이 되어 지각을 낳기에 [각각의] 개별적인 상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신’이라는 말을 설하여 [세 가지가]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함을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이다.(이상 法無礙解에 대한 해명)
만약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일체의 법에 존재하는 뛰어난 뜻[勝義]을 반연한 것이라면, 이를 두 번째 무애해(의무애해)로 설정하였다.13)
여기서 ‘뜻’이란 바로 제법의 자상과 공상을 말하는 것으로, 비록 명신(名身) 등도 역시 이러한 ‘뜻’에 포섭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뜻이 아니니, 다수의 개념[想]을 갖기 때문이다.14) 즉 [그것에는] 진실된 뜻[如義]도 있고, 진실 되지 않은 뜻도 있으며, 뜻을 갖는 것[有義]도 있고, 뜻을 갖지 않는 것도 있으며, 가법(假法)에 근거하여 일어난 것도 있고, 실법(實法)에 근거하여 일어난 것도 있지만, 이를 무간에 [함께] 요별한다. 혹은 그 후에 헤아려진 온갖 뜻을 일컬어 ‘뛰어난 뜻’이라고 하였다.
즉 의무애해의 소연의 경계는 말[語]이나 명(名)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이것의 소연을 ‘뛰어난 뜻’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다만, 말에 의해 ‘명’을 일으키고, 명에 의해 드러난 뜻[所顯義]을 취하지만, 취한 것이 모두 그러한 것(뛰어난 뜻)은 아니며,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작용하게 된 것[所行]을 설하여 ‘[뛰어난] 뜻’이라고 한 것이다.(이상 義無礙解에 대한 해명)
만약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모든 지방의 세속과 성자의 언사(言詞)를 반연한 것이라면, 이를 세 번째 무애해(사무애해)로 설정하였다. 이는 곧 모든 지방에서 사용하는 세간의 문법[語典]과 말들의 여러 차별을 능히 요지(了知)하는 것이다.(이상 詞無礙解에 대한 해명)
만약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정리(正理)에 부합하게 막힘이 없이 설(說)하는 것을 반연한 것이거나, 아울러 자재(自在)의 정(定)과 혜(慧)의 두 가지 도를 반연한 것이라면, 이를 네 번째 무애해(변무애해)로 설정하였다. 즉 글의 뜻[文義]을 능히 잘 선양하는 막힘이 없는 언사(言詞, 즉 웅변)를 일컬어 ‘변무애해’라고 하였으며, 아울러 이미 획득한 온갖 공덕으로서 가행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현전하는 자재의 공덕(즉 定과 慧)도 역시 ‘변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이 같은 [자재의 공덕은] 능히 [웅]변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웅]변과 그것의 원인(즉 정ㆍ혜)을 아는 지혜이기에 ‘변무애해’라고 이름한 것이다.
즉 바로 앞에서 설한 ‘능히 잘 선양하는 [언사]’란 듣는 이[物]의 근기에 잘 부합할 뿐더러 ‘뛰어난 뜻’에도 어긋나지 않는 언설로서, 이를 일컬어 ‘정리에 부합하게 설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바로 앞에서 설한 ‘막힘이 없는 언사’란 장소와 시간 유정 등에 상관없이(다시 말해 어떠한 장소, 어떠한 시간, 어떠한 유정에 대해서도) 분별과 분석이 자재한 것으로, 이를 일컬어 ‘막힘이 없이 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미 획득한 공덕으로서 가행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현전하는 공덕’을 일컬어 ‘자재의 정과 혜의 두 가지 도’라고 하였다.(이상 辯無礙解에 대한 해명)

또한 능전과 소전이 서로 부합하는 지혜를 앞의 두 가지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즉 이러한 말[名]은 이와 같은 뜻[義]을 포함한다고 [요]달(了達, 통달)한 것과, 이러한 뜻은 이와 같은 말에 존재한다(다시 말해 이와 같은 말에 의해 드러난다)고 요달한 것을 일컬어 ‘능전과 소전이 서로 부합하는 지혜’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기[時]와 조작[作] 등의 가행과 언사(言詞)에 대해 요달한 것을 세 번째 무애해라고 이름하였으며, 즐겁게 되는 언설[所樂言說]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자재(自在) 도(道)에 대해 요달한 것을 네 번째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색(色) 등의 여섯 가지 앎의 대상[所知]을 ‘의(義)’라고 하며, 이것의 선 등과 유위ㆍ무위와 색ㆍ비색(非色) 등의 차별을 ‘법(法)’이라고 하며, 이러한 두 가지(‘의’와 ‘법’)를 드러내는 언설을 ‘사(詞)’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에 대한 지혜를 바로 앞의 세 가지 무애해라고 하였으며, 세 종류를 반연한 걸림이 없는 지혜[無罣礙智]를 네 번째 변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세속과 승의의 두 가지 진리[諦]에 [요]달한 것을 앞의 두 가지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바로 수행자의 자리(自利)의 원만한 공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진리를 능히 잘 선설(宣說)하는 것을 세 번째 사무애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에 대해 선교(善巧)의 문답으로 논란하고 통석[難通]하는 것을 네 번째 변무애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바로 수행자의 이타의 원만한 공덕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우치(愚癡)와 유예(猶豫, 즉 의심)와 산란(散亂)은 바로 [진리를] 펼쳐 분별하는데 막힘이나 장애[滯礙]의 원인이 되는데, 이러한 세 가지에서 해탈함으로 말미암아 현법락주(現法樂住)를 획득하며, 아울러 이로 말미암아 이타의 행이 성취되니, 이러한 지혜를 일컬어 변무애해라고 하였다. 만약 이와 같은 선정(현법락주)을 획득하면, 능히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막힘이 없는 언사를 설할 수 있을 뿐더러 아울러 [저절로] 현전하는 자재의 공덕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명(名) 등’과 ‘뛰어난 뜻’과 ‘언사(言詞)’와 ‘막힘이 없이 설하는 것’15) 각각에 대해 선교(善巧)를 획득한 것을 순서대로 네 가지 무애해로 설정하였다. [이 중에] 앞의 세 가지 선교는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경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의]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선교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앞의 세 선교에 따라] 능히 막힘이 없이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네 가지로 나누었기 때문에 이타(利他)의 사업이 성취된 것으로, 이를테면 글[文]에 교묘하고, 뜻에 요달(了達)하였으며, 미묘하게 성운(聲韻)을 익혔고, 정(定)과 혜(慧)가 자재하기 때문에 무애해를 네 가지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무애해의 본질[體]에 대해 총체적으로 논설하면서 아울러 네 종류의 소연의 차별에 대해 밝혔다.

4-2) 4무애해의 순서

그런데 계경에서는 이러한 무애해의 수(數)와 명칭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지만, 온갖 대법(對法) 중에서는 그 상에 대해 널리 나타내고 있다. 또한 경에서는 이를 열거하면서 먼저 의무애해를 설하고 그 다음에 법무애해를 설하고 있지만, 온갖 대법 중에서는 법무애해를 먼저 설하고 그 다음에 의무애해를 설하고 있는데,16) 이는 두 가지 지혜[智]가 생겨날 때 혹 어떤 경우 뜻[義]이 말[名]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말이 뜻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경과 논에서는 서로 다르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법(法)을 들은 자는 먼저 [그것에 관한] 말[名]을 분별하며, 이미 말에 대해 올바로 알았으면 다음으로 그것의 뜻을 살핀다. 그리고 뜻을 올바로 알고 나면 다른 이를 위해 [그것을] 설하려고 하기에 다음으로 필시 마땅히 막힘없이 설하는 지혜를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순서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대법에서는] ‘말’(즉 법무애해)을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네 가지 무애해 중에서 ‘뜻’에 관한 지혜[義智, 의무애해]가 가장 뛰어나며, 그 밖의 것은 바로 보조적으로 수반[助伴]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는] ‘뜻’(즉 의무애해)을 먼저 설하게 되었다. 즉 뜻에 대해 만약 올바로 요달하였다면, 다음으로 마땅히 방편으로서 [그것을 포섭하고 있는] ‘말’을 살펴 추구해야 하며, 이미 ‘말’을 알았으면 다른 이를 위해 설하려고 하기에 다음으로 마땅히 ‘설하는 것[說]’에 대한 교묘한 방편(즉 정리에 부합하게 막힘없이 설하는 방법)의 지혜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무애해의 순서를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변무애해가 만약 ‘설하는 것’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어찌 세 번째 사무애해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세 번째 무애해는 [일체의] 훈석(訓釋, nirvacanaṁ, 어원적 설명)의 언사에 요달한 것으로, 예컨대 “변애(變礙)를 갖기 때문에 색 등이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17) 이것(변무애해)은 정리에 부합하게 막힘없이 설하는 것에 요달한 것이다.18)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사무애해가 제법의 자성을 밝힌 것이라면, 변무애해는 능히 제법의 차별을 현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법에 대해 바로 설[直說]하는 것을 일컬어 사무애해라고 하며, 이리저리 막힘이 없이 분석(分析)하는 것을 일컬어 변무애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두 종류의 [무애해를] 반연하여서는 서너 가지의 차별이 있다.


4-3) 10지와의 관계와 소의지 등의 분별

4무애해 중에서 법무애해(法無礙解)와 사무애해(詞無礙解)는 세속지를 자성으로 할 뿐 무루지를 자성으로 하지 않으니, 명신(名身) 등과 세간의 언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법무애해는 다섯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4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그 위의 지(즉 무색계)에는 명신(名身)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곳에서는 하지의 명신 등을 별도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무애해는 오로지 두 가지 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그 위의 온갖 지(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과 사(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지에는 필시 자지의 어언(語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말을 일으키는 지혜[發語智]를 일컬어 ‘무애해’라고 한 것이 아닐 뿐더러 무애해라도 선정 중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심(尋)과 사(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지 중에 [사무애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실은 없으니, 이유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한] 이유의 뜻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여기서는] 이러한 뜻으로 말하였다. 심ㆍ사의 두 법은 능히 말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상(相)이 적정(寂靜)하지 않을 뿐더러 자성도 거칠고 동요하는 것[麤動]으로, 상지에는 이러한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적정하며 미세하다. 그런데 사무애해는 외적인 언사(言詞)를 반연하는 것으로서, 역시 적정하지 않으며, 거칠고 동요하는 종류에 포섭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애해는 [제2정려 이상의] 상지 중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초정려 중에는 역시 심ㆍ사가 존재하며, 따라서 [초정려의] 선정 중에도 역시 이러한 무애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사무애해가] 다만 두 지에 근거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의무애해(義無礙解)는 10지(智)와 여섯 지를 자성으로 한다. 즉 제법을 모두 ‘뜻[義]’이라고 말할 경우 10지를 자성으로 하지만, 오로지 열반만을 ‘뜻’이라고 하는 경우 여섯 지를 자성으로 하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가 바로 그것이다.
변무애해(辯無礙解)는 이를테면 멸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자성으로 하니, [정리에 부합하게] 설(說)하는 것과 도(道, 즉 定과 慧)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의’와 ‘변’) 무애해는 일체의 모든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날 수 있으니, 욕계 내지 유정지가 바로 그것으로, 변무애해는 설하는 것과 도(道)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반연하더라도 다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지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다만 ‘설하는 것’만을 반연한 경우라면, 세 번째 무애해(사무애해)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두 지(地, 즉 욕계와 초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진지와 무생지는 무애해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니, 무애해는 바로 ‘견(見)’의 성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19) 그럴 경우 그는, “두 번째 [의무애해는] 네 가지 혹은 여덟 가지의 지를 자성으로 하며, 네 번째 [변무애해는] 오로지 일곱 가지의 지를 자성으로 한다”고 설한 것이니, 앞에서 논설한 바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20)
이러한 4무애해는 4성종(聖種)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1) 그 중의 한 종류만을 획득하더라도 필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네 가지를 모두 갖추지 않았다면 그것을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원하는 것에 따라 [네 가지가] 함께 현기(現起)하기도 하고 함께 현기하지 않기도 한다.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한 가지를 획득하더라도 필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게 된다’고 하는 이치는 없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4무애해가 생겨나는 것은 순서대로 산계(算計)와 부처님의 말씀[佛語]과 성명(聲明)과 인명(因明)에 대해 익히는 것을 이전에 가행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만약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해 아직 선교(善巧)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필시 무애해를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22)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일체의 무애해가 생겨나는 데에는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만이 능히 가행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전생에 오래 익힌 것[久習]에 근거하여 명(名) 등의 네 종류에 대한 선교를 획득하였기에 지금에 이르러 능히 그것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23)

‘무애해’라는 말은 다수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경계대상을 영납하고 깨닫는 데[領悟]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러저러한 경계대상을 결단(決斷, 결정적 판단)함에 있어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러저러한 경계대상에 대해 올바로 설하는데 장애가 없는 것을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경계대상에 대해 현전한 전도됨이 없는 지혜를 ‘무애해’라고 이름하였다”라고 설하였다.24)
[이처럼] 4무애해의 소의지ㆍ자성ㆍ소연이 무쟁의 그것과 다르지만―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종성(種性)과 소의신의 경우는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4무애해는] 부동법의 종성만이 [일으킬 수 있으며],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洲)의 인취(人趣)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이다.

5) 무쟁 등의 공덕과 변제정(邊際定)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무쟁(無諍) 등의 지혜는 [어떠한 지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섯 공덕은 변제정에 근거하여 획득되니
변제정은 여섯 가지로, 최후의 선정이며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고, 구경에 이른 것으로
부처 이외의 성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六依邊際得 邊際六後定
遍順至究竟 佛餘加行得

논하여 말하겠다.
무쟁과 원지와 4무애해의 여섯 종류는 모두 변제정(邊際定)에 근거하여 획득되니, 변제정의 힘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이다.
변제정려는 그 자체[體] 여섯 종류가 있다. 즉 앞의 여섯 가지 중에서 사무애해(詞無礙解)를 제외한 그 밖의 다섯 가지의 일부와,25) 이(사무애해)를 제외하더라도 다시 그 밖의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상품(上品)의 정려를 변제정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여섯 종류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26) 사무애해도 비록 그것(변제정)에 근거하여 획득될지라도 체성은 그러한 정려(제4정려)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니, ‘변제’라고 하는 명칭은 다만 제4정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일체 지(地)에 두루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성(增盛)하여 구경(究竟)에 이른 것이기 때문에 ‘변제’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이에 따라 [‘변제’라는 명칭은] 그 밖의 지(地)와도 역시 통하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것(제4정려)을 ‘[일체 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정려를 올바로 닦고 배울 때에는 초정려로부터 순서대로 순입(順入)하여 유정지에 이르며, 다시 유정지로부터 순서대로 역입(逆入)하여 초정려에 이르며, 초정려로부터 순서대로 순입하여 [무소유처에 이르고] 내지는 제4정려에 이르기 때문에 ‘일체 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증성하여 구경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제4정려를 수습할 때 하품으로부터 중품에 이르고, 중품으로부터 상품에 이르니, 이와 같은 세 품류를 다시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 상상품이 생겨나면, 이를 ‘구경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였으니,27) 이와 같은 정려를 ‘변제’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에도 3승(乘)의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기 자신의 그것에 대해 ‘구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변(anta)’이라는 말은 더 이상 뛰어넘을 것이 없다[無越]는 뜻을 나타내는데, 수승한 것으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koṭi)’라고 하는 말은 종류[類]의 뜻이나 궁극[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서, 4제(際)나 실제(實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28) 즉 이와 같은 [‘변’과 ‘제’라고 하는] 두 말은, 바로 이러한 정려는 가장 수승[最勝]한 종류이며, 선정 중의 가장 지극[最極]한 것으로서, 수승한 공덕은 대부분 이것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니, 낙통행(樂通行) 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무쟁지(無諍智) 등의 [여섯 공덕은] 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성자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염득(離染得)이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염오를 떠날 때]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9) 오로지 부처님만이 염오를 떠날 때에도 역시 이를 획득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모든 공덕은 처음으로 진지(盡智)를 일으킬 때 획득된다. 즉 그때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공덕을 단박에 획득하며, 그 후에는 원하는 대로 능히 인기하여 현전하는 것으로, 가행에 의해서가 아니니, 불세존께서는 일체의 법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3. 이생과도 공통되는 공덕

1) 6통(通)

앞에서 [논설한] 세 가지 공덕(무쟁ㆍ원지ㆍ4무애해)은 오로지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부처의] 공덕으로, 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범부와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인 신통[通]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신경(神境)과 천안ㆍ천이ㆍ타심과
숙주와 누진통이 바로 그것으로
해탈도와 혜(慧)에 포섭된다.
通六謂神境 天眼耳他心
宿住漏盡通 解脫道慧攝

네 신통은 세속지, 타심통은 다섯 지
누진통은 10력(力)의 경우와 동일하고
다섯 신통은 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자지와 하지를 경계로 삼을 뿐이다.
四俗他心五 漏盡通如力
五依四靜慮 自下地爲境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각기
2천ㆍ3천ㆍ무수한 세계에서 신통을 행하며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자는 가행에 의해
일찍이 닦은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聲聞麟喩佛 二三千無數
未曾由加行 曾修離染得

세 신통은 신념주이고, 하나는 나머지 세 염주
하나는 법념주, 뒤의 신통은 법 혹은 4념주이다.30)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이고
나머지 네 신통은 오로지 선이다.
三身一餘三 一法後法四
天眼耳無記 餘四通唯善

논하여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이며, 둘째는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이며, 셋째는 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이며, 넷째는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이며, 다섯째는 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이며, 여섯째는 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이다.31) 비록 이러한 여섯 신통 중에서 여섯 번째 신통은 오로지 성자만의 공덕이라 할지라도 앞의 다섯 가지는 이생도 역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 특징[總相]에 의거하여 이생에게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라고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신통은 해탈도(解脫道)에 포섭되며,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사문과(沙門果)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해탈도’라고 하는 말은 장애에서 벗어났다[出障]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32) 승진도(勝進道) 중에도 역시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통의 지혜[通慧]는 무간도(無間道)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단계에서는 결정코 타심지를 차단하기 때문이며(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아라한이 무간도를 버릴 때 역시 누진통도 버린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심통과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세속지에 포섭된다.
타심통은 다섯 가지 지에 포섭되니,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누진통의 경우는 [10]력(力)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에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10지에 포섭되기도 한다.33)
이에 따라 누진지증통은 일체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일체의 경계를 반연한다는 사실도 이미 밝힌 셈이다. 그리고 앞의 다섯 신통은 4정려에 근거할 뿐 무색정과 근분정과 중간정에 근거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그것은 다섯 가지 신통의 근거가 될 만한 선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려]지(支)를 포섭하는 선정이라야 다섯 신통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진통 역시 그것(무색정 등)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모든 경지에서 능히 누진(漏盡)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색(色)을 관찰하는 것을 가행으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앞의 세 가지 신통(신경ㆍ천안ㆍ천이통)의 경계는 무색정에서 능히 반연할 수 없으니,34) 이러한 세 가지 신통은 다만 개별적으로 색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심통을 닦을 때에는 색을 방편[門]으로 삼기 때문이며, 숙주통을 닦을 때에는 점차로 분위(分位)의 차별을 억념(憶念)함으로써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가행 중에 반드시 색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35) 그래서 무색정의 경지에 근거하는 경우, 이와 같은 [앞의 다섯 신통의] 공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중간정이나 다섯 근분정에서도 역시 색을 반연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마땅히 다섯 신통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으니, 앞에서 설한 이유 때문이다. 즉 [정려]지(支)를 포섭하는 선정이라야 다섯 신통의 근거가 될 수 있으니, [정려]지를 포섭하지 않는 등지(等持)라면 저열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지(止)ㆍ관(觀) 중의 어느 하나가 감소하기 때문이다.36)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누진통은 존재하는 것인가?
고(苦)ㆍ낙(樂)의 느리고 빠른 경지에서도 다 능히 번뇌[漏]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37) 그러나 다섯 신통은 수승한 공덕(즉 4정려)을 별도로 닦아야 하는 것으로, 요컨대 수승한 경지라야 비로소 능히 일으킬 수 있다.
신경통 등 앞의 세 가지 신통을 닦을 때에는 가벼움[輕]과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행으로 삼으며, 그것이 성취되고 나서는 자유자재로 원하는 바에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38)
온갖 유정으로서 타심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의 두 가지 상(相)이 전후로 변이하면서 서로에 수반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후 다시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데, 이에 따라 가행이 점차로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가행이] 성취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음과 온갖 색신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의 마음 등에 대해 능히 참답게 알 수 있게 된다.39)
온갖 유정으로서 숙주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바로 전 찰나에 멸한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점차 다시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생의 분위(分位, 즉 胎外5위와 胎內5위)에서 이전[의 상태]와 그 이전[의 상태]의 차별을 관찰하여 결생(結生)할 때의 마음에 이르고, 나아가 중유 전의 일 찰나를 능히 기억하여 알면, 이를 일컬어 자신의 숙주통의 가행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이의 숙주를 기억하기 위한 가행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이 처음으로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순서대로 알지만, 자주 익혀서 성취될 때에는 역시 또한 [순서를] 뛰어넘어서도 능히 기억할 수 있다. 또한 기억된 모든 일은 요컨대 일찍이 경험[領受]한 것으로서, 정거천(淨居天)을 기억하는 자는 옛날에 일찍이 그것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40) 또한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이곳에 태어난 자는 처음에는 다른 이의 상속에 의지하여 이러한 신통(무색계에 관한 숙주통)을 일으키며,41) 그 밖의 신통은 역시 자신의 상속에 의지하여 일으킨다.

이와 같은 [앞의] 다섯 신통의 경계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자지와 하지이다. 먼저 신경통과 같은 것은 그것이 어떤 경지에 근거하여 일어난 것이든 자지와 하지에서만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자재할 뿐 상지에서는 그렇지가 않으니,42)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네 가지 신통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상지인] 무색계의 타심(다른 이의 마음)과 숙주(과거세의 일)를 취하여 두 신통의 경계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다섯 신통은 세계를 경계대상으로 하여 작용하는데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어 온갖 성자의 그것이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위대한 성문과 인각유와 대각(大覺)이 지극하게 작의(作意)하지 않은 경우라면 순서대로 능히 1천과 2천과 3천의 온갖 세계를 경계대상으로 하여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만, 만약 지극하게 작의한 경우라면 순서대로 능히 2천과 3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세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은 다섯 신통은, 만약 수승한 힘[勢用]과 맹리함을 지녔더라도 무시(無始)이래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자라면 가행에 의해 획득하며, 만약 일찍이 [과거세에] 자주 익힌 자로서 수승한 힘을 갖지 않은 자나 [미래세에도] 그러한 [수승한 힘을 갖지 않을] 종류의 유정이라면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즉 [2승과 이생이] 만약 [지금] 일으켜 현전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가행에 의해 획득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경우 일체의 [신통은] 다 이염득으로, 가행에 의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대로 현전한다.
그리고 3승의 성자와 [최]후유(最後有)의 이생(즉 보살)은 일찍이 획득하였던 신통과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신통을 모두 획득하지만, 그 밖의 이생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였던 신통만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4념주(念住)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할 경우, 경계대상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과 체성(體性)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 두 가지에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두 가지 신통 즉 천안통과 천이통을 제외한 그 밖의 네 종류의 신통은 ‘혜’를 자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천안통과 천이통은 바로 신념주의 경계대상이 되며,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모두 법념주의 경계대상이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로 여섯 종류의 신통은 모두 ‘혜’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니, 경에서 “그것들은 모두 경계대상을 요별 통달[了達]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6통은] 모두 법념주의 경계대상이 된다.
그러나 만약 체성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할 경우, 6통 중의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신념주에 [포섭되니], 그것은 다만 색(色)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경통은 외적인 네 가지 처(색ㆍ향ㆍ미ㆍ촉처)를 반연한 것이고, 천안통은 색처(色處)를 반연한 것이며, 천이통은 성처(聲處)를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계경에서] “사생지(死生智, 즉 천안통)는, 유정류가 현신(現身) 중에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온갖 악행 등을 성취함에 따라 [당래 악취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43)
천안통이 능히 이 같은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신통의 권속으로서 성자의 몸[聖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별도의 수승한 지혜가 있어 이것이 능히 이와 같이 아는 것으로, 이러한 지혜는 바로 천안통의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과 합하여 ‘사생지’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타심지통(他心智通)은 세 가지 염주에 포섭되니, 수(受)ㆍ심(心)ㆍ법(法)이 바로 그것으로, 그것은 마음 등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숙주지통은 법념주에 포섭된다. 비록 계경에서 “일찍이 경험[領受]한 고ㆍ낙의 일 등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하였을지라도, 이는 바로 전생에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등에 의해 경험된[所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바로 잡연(雜緣)의 법념주에 포섭된다. 그리고 누진지통은 [누진지]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혹 어떤 경우에는 법념주이고, 혹 어떤 경우에는 4념주이다.44)
만약 선 등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하면 [이러하다].
유여사(有餘師)는 “6통은 모두 선이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로 천안통과 천이통은 오로지 무기성이며,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한결같이 선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는 바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이기 때문이다.”45)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6통은 모두 해탈도에 포섭되는 것으로, 안(眼)과 이(耳)의 두 식(識)이 해탈도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이같이 해석해야 한다.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 능히 자지의 뛰어난 대종을 결과로서 인기한다. 즉 이러한 ‘혜’가 현전하면, 바로 자지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를 인기하여 지금 바로 존재하게 하니, 이를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아 안식과 이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주가 말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는 신통이 아니며, 다만 신통에 의해 인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 3명(明)과 6통

예컨대 계경에서는 무학의 3명(明, vidyā)에 대해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5ㆍ제2ㆍ제6의 신통이 ‘명’이니
3제(際)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으로
뒤의 ‘명’은 진실이고 [앞의] 두 ‘명’은 가설인데
유학의 경우는 어리석음이 있어 ‘명’이 아니다.
第五二六明 治三際愚故
後眞二假說 學有闇非明

논하여 말하겠다.
3명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이며, 둘째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이며, 셋째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인데, 순서대로 무학위에 포섭되는 다섯 번째와 두 번째와 여섯 번째의 신통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는다.
즉 6통 중에서 유독 세 종류의 신통만을 ‘명’이라 이름한 것은 순서대로 3제(際, 즉 3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숙주지통은 전제(前際, 과거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사생지통(즉 천안통)은 후제(後際, 미래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며, 누진지통은 중제(中際, 현재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신통에 대해서만 유독 ‘명’이라는 말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또한 숙주통은 전제의 자신과 다른 이의 괴로운 일을 억념하는 것이고, 사생지통은 후제의 다른 이의 괴로운 일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생사의 여러 괴로움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누진통을 일으켜 열반의 즐거움을 관찰한다. 그래서 오로지 세 종류만을 ‘명’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세 신통은 순서대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과 유신견(有身見)을 능히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명’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이것은 능히 유정법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별도로 ‘명’으로 설정하였다.46)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말하였다.
“숙주통은 ‘과거는 제온(諸蘊)이 전전(展轉)하며 서로 원인이 되어 차례로 전래(傳來)한 것이니, 여기에는 어떠한 작자(作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능히 관찰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능히 공(空)의 해탈문(解脫門)을 인기할 수 있다. 사생통은 유정의 생사가 아래위로 회전하는 것이 마치 물을 대는 수차[灌輪]와 같다고 능히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3유(有)의 과보를 더 이상 희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능히 무원(無願)의 해탈문을 인기할 수 있다. 그리고 누진통은 염리(厭離)를 방편[門]으로 삼아 무상법(無相法)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의 해탈문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신통에 대해서만 유독 ‘명’이라고 명칭으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3명을 모두 ‘무학의 명’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은, 그것들은 다 같이 무학의 소의신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최후의 명(누진지증명)에 대해서만 진실(眞實)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두 가지는 [‘무학의 명’이라고] 가설(假說)한 것이니, 그 자체는 오로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후의 ‘명’에 대해서만 ‘무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니, 자성과 상속이 모두 무학이기 때문이다. 즉 앞의 두 종류를 [‘무학의 명’이라 말한 것은] 다만 상속에 의한 것일 뿐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시설족론』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등지(等持)와 상응하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혜’는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울러 무루와도 [상응하기] 때문에 성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성자의 소의신 중에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에 성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앞의 두 가지 명)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무학’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유학의 소의신 중에는 어리석음의 어두움[愚暗]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앞의 두 가지 ‘명’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록 잠시 동안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조복하고 멸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후 다시 그것에 의해 은폐되기 때문에 ‘명’이라는 말로 설정할 수 없다. 요컨대 어두움이 영원히 없어질 때 비로소 ‘명’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3시도(示導)와 6통

계경에서는 ‘세 종류의 시도(示導, prātihārya)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1ㆍ제4ㆍ제6 신통이 시도(示導)로서
교계시도(敎誡示導)가 가장 존귀하니
결정코 신통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第一四六導 敎誡導爲尊
定由通所成 引利樂果故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시도(示導)란 첫째는 신변시도(神變示導)이고, 둘째는 기심시도(記心示導)이며, 셋째는 교계시도(敎誡示導)이니, 그 순서대로 6통 중의 첫 번째와 네 번째와 여섯 번째 신통을 자성으로 한다.47) 오로지 이러한 세 종류의 신통만이 교화될 중생을 인도하여 처음으로 발심하게 하는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능히 [신통을] 나타내어 능히 [중생을] 인도한다는 점에서 ‘시도(示導)’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48)
이러한 세 가지 시도 가운데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니, 결정코 [여섯 번째] 신통(즉 누진통)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며, 결정코 [다른 이의] 이익과 안락[利樂, 즉 열반]의 과보를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주술 따위로도 역시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신통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가 아니다. 예컨대 건타리(健馱梨, gāndhārī, 구역 乾陀梨)라고 일컫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허공을 자유자재로 솟구쳐 오를 수 있다. 혹은 뛰어난 공덕을 갖춘 약초가 있어 이를 복용하거나 지니게 되면 자유자재로 비행할 수 있다. 또한 이찰니(伊刹尼, īkṣaṇikā, 구역 伊叉尼柯)라고 하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心念]을 알 수 있다. 혹은 관상(觀相)을 보거나 그의 말소리를 듣고서도 역시 다른 이의 마음이 생각한 바를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결정적인 [시도]’이다. 혹은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외도 역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세 번째 시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시도는 다만 다른 이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일 뿐 필경(畢竟)의 이익을 획득하거나 안락의 과보를 능히 인기할 수 없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역시 또한 결정코 다른 이로 하여금 당래의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게 하니, 능히 참다운 방편으로써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며, 그 밖의 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4) 특히 신경통(神境通)에 대하여

‘신경(神境)’이라는 두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의 본질은 말하자면 등지(等持)이고
‘경’은 ‘가는 것’과 ‘변화하는 것’ 두 가지이니
가는 것의 세 가지 중 의세(意勢)는 부처와 통하며
운신(運身)과 승해(勝解)는 그 밖의 유정과도 통한다.
神體謂等持 境二謂行化
行三意勢佛 運身勝解通

변화는 두 가지로, 욕계와 색계의 그것인데
네 가지와 두 가지 외처(外處)를 자성으로 한다.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변화이다.49)
化二謂欲色 四二外處性
此各有二種 謂似自他身

논하여 말하겠다.
‘신(神)’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뛰어난 등지(等持)에 근거한 것으로, 이 같은 뛰어난 등지에 의해 능히 신통한 변화의 사업[神變事]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신통한 과보[神果]를 ‘신’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그같이 설한] 뜻은 거친 것(변화의 사업)을 미세한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뛰어난 등지가 바로 그것(신통한 변화의 사업)의 직접적 원인[近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신통한 변화의 사업 자체는 실로 ‘신’이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앞의 각분(覺分) 중에서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50)―즉 온갖 신통한 변화의 사업을 설하여 ‘경(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여기(신통한 변화의 사업인 ‘경’)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그것이다.
‘가는 것’에는 다시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운신(運身, gamana)으로, 마치 나는 새처럼 허공을 타고 가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승해(勝解, adhimokṣa)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思惟)하면 바로 신속하게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하니, 만약 지극히 먼 색구경천에 대해서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하면 능히 바로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유 즉 ‘해(解)’로는] 본디 오거나 가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신속하게 간다는 것인가?
이것으로도 실로 역시 갈 수 있으니, 다만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解]하고 가면, 가는 것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승해(뛰어난 생각)’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혹은 세존께서 말하기를 “정려의 경계는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오로지 부처만이 능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셋째는 의세(意勢, manojava)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마음을 일으켜 그곳을 반연할 때 몸이 곧장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신통의 세력[勢]은 뜻[意]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예컨대 마음이 색구경천을 경계대상으로 취하자마자 바로 그곳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가는 것’ 가운데 의세는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며, 운신과 승해는 그 밖의 승(乘, 성문과 독각)과도 역시 통하는 것이다. 즉 우리 세존께서는 신통이 신속하여 바야흐로 먼 곳이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마음만 먹으면 곧 바로 이를 수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모든 부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마치 햇빛이 펼쳐지듯이 온(蘊)의 흐름도 역시 그러하여 능히 단박에 멀리까지 이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설하였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몰하여 그곳에 출현하는 중간이 단절되어 ‘[단박에] 간다’고 하는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부처님의 위신력은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곧 바로 이르게 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가히 측량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의세의 행(行, 즉 뜻대로 가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승해는 그 밖의 다른 성자에게도 존재하며, 운신은 아울러 이생에게도 존재한다.
‘변화하는 것’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계에서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욕계에서의 변화라면, 그것은 성처(聲處)를 제외한 외적인 네 처(색ㆍ향ㆍ미ㆍ촉처)의 변화이며, 만약 색계에서의 변화라면 오로지 색처와 촉처의 두 가지 변화만이 있을 뿐이니, 색계 중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두 세계에서의 변화에는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기 몸에 속한 변화와 다른 이의 몸에 속한 변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욕계에 있을 때의 변화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며, 색계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 여덟 가지의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51)
그리고 비록 색[계]에 태어나 머물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하였을지라도 색계에서 향처와 미처를 성취하는 과실은 없으니, 자기 몸은 오로지 두 가지 처(색처와 촉처)만을 변화 조작[化作]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네 처를 변화시키지만, 마치 옷 등을 [만들더라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52)

5)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변화의 사업

신경통이 능히 변화의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요컨대 이러한 신통의 결과[通果]인 능히 변화시키는 온갖 마음[能化心]이다.
이러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그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선정의 결과인 두 가지 내지 다섯 가지로서
소의가 되는 선정처럼 획득되는데
정정(淨定)과 자류(自類)에서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다.
能化心十四 定果二至五
如所依定得 從淨自生二

변화의 사업은 자지에 의해 일어나고
변화된 이의 말은 모두 자지와 하지에 의하며
변화된 이의 몸과 변화의 주인공은 반드시
말을 함께 하지만, 부처는 그렇지 않다.
化事由自地 語通由自下
化身與化主 語必俱非佛

먼저 원(願)을 세워 몸을 남겨 두고
그 후 다른 마음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며
죽어서도 견실(堅實)의 몸을 남기는 일이 있지만
어떤 이는 남기는 일이 없다고 설한다.
先立願留身 後起餘心語
有死留堅體 餘說無留義

초심자는 다수의 마음으로 한 가지 변화를 낳고
성만위에 이른 자는 이와 반대인데
수득(修得)의 변화심은 무기에 포섭되며
그밖에 획득된 것(生得)은 3성(性)과 통한다.
初多心一化 成滿此相違
修得無記攝 餘得通三性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모두 열네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근본 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초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는 오로지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니, 첫째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2ㆍ제3ㆍ제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는 그 순서대로 세 가지와 네 가지와 다섯 가지가 있다.53)
즉 상지는 하지에 근거하는 일이 없으니(다시 말해 상지에 포섭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하지의 정려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54)
[그리고] 상지와 하지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마음으로서 동일한 정려의 과보인 것은 소의(所依)와 작용[行]이 동등하더라도 지(地)에는 수승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으며,55) 동일한 지(地)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마음으로서 상ㆍ하 정려의 과보인 것은 지(地)는 비록 동등할지라도 소의와 작용에는 수승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다.56) [또한] 위의 정려의 과보로서 하지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아래 정려의 과보로서 상지에 계박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의] 경우, 순서대로 지(地)는 [전자가] 저열하고 [후자가] 수승하며, 소의와 작용은 [전자가] 수승하고 [후자가] 저열하다.57) (이상 初句와 제2구)

[또한] 정려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도 역시 그렇게 [획득되니], 결과(能化心)와 소의(정려)는 동시에 획득되기 때문이다. 즉 정려는 모두 세 때에 획득되는데, 이염(離染)과 수생(受生)과 가행(加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지의 염오를 떠나 상지의 정려를 획득할 때 이러한 선정에 의해 인기된 결과인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도 역시 획득하며, 상지로부터 몰하여 색계에 태어날 때와, 그리고 가행에 의해 뛰어난 공덕(정려)을 일으킬 때에는 다만 소의가 되는 정려를 새로이 획득하는 경우에만 그것에 의해 인기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역시 함께 획득한다.
[그리고] 욕계 소의신에 근거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거나 연근(練根)의 단계에서 응과(應果)를 증득할 때에는 열네 가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일시에 모두 획득하며, 나아가 소의신이 제4정려에 있으면서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에는 다섯 가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획득하게 된다.(이상 제3구)

[또한] 이러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곧장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다. 즉 이러한 마음은 청정한 선정[淨定, 즉 淨정려]과 자신과 동류[自類]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고, 무간에 능히 자신과 동류의 마음과 청정한 선정을 낳기 때문에 오로지 두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 것으로,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나거나 다른 것을 낳는 것이 아니다.58)(이상 제4구)

[또한] 오로지 자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의 변화의 사업만을 일으킬 뿐이며,59) 변화한 이[化]에 의해 발성된 말은 자지와 하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에서 변화한 이의 말은 오로지 자지의 마음에 의한 것이지만,60) 그 보다 상지에서 말을 변화시켜 일으킨 경우에는 초정려의 마음에 의한 것이니, 그러한 경지(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욕계에 태어난 이에게 제2정려 등의 변화의 사업이 일어날 때 어떻게 표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의 마음은 다른 계(界)의 몸에 의지하여 바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필시 자계의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그러한 계에 포섭되는 대종을 이끌어 내어 현전시켜 소의로 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색계 대종을 이끌어 내어 현전시켜 욕계의 몸과 은밀히 화합하여 머무는 경우, 그것에 근거하여 능히 [말을] 발하려는 그 같은 표업의 마음[表心]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여기에 선정의 경지[定地, 즉 제2정려 등]에 존재하는 표업의 마음이 산심의 경지[散地, 즉 욕계]의 몸에 근거한다는 과실은 없다. 혹은 선정에 근거하여 능히 [말을] 발하려는 표업의 마음을 일으킨 것으로, 이는 마치 선정에 근거하여 천안통과 천이통의 식(識)을 낳는 것과 같다.(이상 제5ㆍ제6구)

[또한] 만약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化主, 화작의 주체]이 몸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면, 요컨대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비로소 변화된 온갖 몸도 말하게 되니, [변화된 이의]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言音詮表]는 모두 다 [주인공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모두 다 말하며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이 침묵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역시 그러하다.62)

그러나 이는 다만 그 밖의 유정에 대해 설한 것일 뿐 부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의 온갖 선정의 힘은 가장 자재하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과 동시가 아닐 수 있으며,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즉 能詮의 의미)도 역시 다를 수 있는 것이다.(이상 제7ㆍ제8구)

만약 위의 세 정려지에서 변화된 이[所化]가 말할 때에는 초정려의 표업의 마음이 현전하여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단계에서는 이미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서 출관하여 변화된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변화된 이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63)
먼저 원력(願力)에 의해 변화된 이의 몸[所化身]을 남겨 두고, 그 후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는] 다른 마음(즉 發語心)을 일으켜 어표업을 낳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이 소의[신]을 결여하게 되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오로지 변화의 주인공[化主]의 목숨이 현재할 때만(다시 말해 생존해 있을 때만) 능히 변화된 몸을 남겨 오랫동안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마친 후에도 역시 머물게 한 이가 있다. 예컨대 존자 대가섭파(大迦葉波, Mahākāśyapa)가 골쇄(骨鎖)의 몸을 남겨 자존(慈尊, 慈氏世尊 즉 미륵불을 말함)의 세상에 이르도록 [머문]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64) 오로지 견실의 몸[堅實體, 즉 뼈]만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음광(飮光, 가섭파의 의역어)은 마땅히 살[肉] 따위도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필시 원력(변화의 원력)만으로는 능히 사후에 이르기까지 몸을 남겨둘 수 없으며, 성(聖) 대가섭파께서 골쇄의 몸을 남겨 오래도록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천신(天神)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제9송에서 제12송)

[또한]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初習業者, 초입자]는 다 [찰나에 걸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그리고 요컨대 소의[신]에 의지할 때 한 가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익혀야 힐 것을 원만히 성취한 자[習成滿者]는 한 [찰나]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그리고 소의[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여러 가지 다수의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다.(이상 제13ㆍ제14구)
[또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소성(修所成,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며, 둘째는 생득(生得, 선천적으로 태어나면서 획득된 것) 등으로서, [이에 따라] 일어나게 된 변화의 결과 역시 이러한 설명과 같다.
수소성의 변화가 포섭되는 처(處)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니,65) 능히 변화하여 유정(有情)의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획득된 변화 등의 경우, 욕계 중에서의 변화는 9처(處, 색ㆍ향ㆍ미ㆍ촉처와 5근)에 [포섭되고], 색계에서의 변화는 7처(색ㆍ촉처와 5근)에 [포섭되는데], 근(根)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9처 등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였지만, 이치상 실로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근(根)을 화작(化作)하는 일은 없다.66)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修果]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밖의 변화(생득의 능화심에 의한 변화)에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67)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의 경우, 표업을 일으키는 것은 변화의 주인공(화작의 주체)의 마음에 의해서이지만, 그 밖의 경우는 스스로(변화된 이)의 마음이 신ㆍ어표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68)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의 경우, 먹고 마신 음식이 만약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필시 변화의 주인공(화작의 주체) 몸 안에서 소화되지만, 만약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한 것이라면 쇠나 돌 따위도 삼킬 수 있는데, 혹 그러한 변화의 사업은 바로 몸 안에 머무르기도(몸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편의에 따라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밖의 변화(생득의 능화심에 의한 변화)경우, [변화된 이가] 먹고 마시는 음식은 [그의] 소의[신]에 따라 머문다.69)
나아가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와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오로지 무기성(즉 通果無記)이며, 그 밖의 마음(즉 생득의 능화심)은 3성과 통하니, 이를테면 선ㆍ악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천룡(天龍) 등이 갖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같은 것으로, 그들 역시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이상 제15송과 제16송)

6)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에 대하여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라는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색근(色根)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혜’에 근거한 말이라면, 마땅히 ‘천안’과 ‘천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색근에 근거한 것이라면, 마땅히 ‘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본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이를 일컬어 천안통과 천이통이라고 하였다―이것(즉 ‘혜’)에 의해 인생(引生)된 뛰어난 대종의 결과를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다.70)
그렇다면 그 같은 [천안과 천이의] 체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천안과 천이는 말하자면 근(根)으로서
바로 선정의 경지의 청정한 색이니
항상 동분이면서, 결함이 없어
감추어지고 작고 멀리 있는 것 등을 취한다.
天眼耳謂根 卽定地淨色
恒同分無缺 取障細遠等

논하여 말하겠다.
이것(천안과 천이)의 본질은 바로 천(天)의 안근과 이근이다. 이를테면 소리[聲]와 빛[光]을 반연하여 가행을 닦았기 때문에 4정려에 근거하여 안근과 이근의 [후]변(後邊)에서 그러한 [정려]지(地)의 미묘한 대종소조인 청정한 색[淨色]의 눈과 귀 두 근을 인기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니, 이를 천안과 천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안근과 이근을 어째서 ‘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그 자체가 바로 ‘천’이니, 선정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으로,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에 ‘천’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경에서는 “천안과 천이에는 피륙(皮肉)이나 힘줄 혈관이 없으며, 오로지 미묘한 대종소조의 청정한 색일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안과 천이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득(修得) 즉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생득(生得) 즉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하늘에 태어난 자의 그것을 말한다.71) 셋째는 유사한 천안과 천이[似天]로서, 이를테면 그 밖의 취(趣)에 태어난 자가 수승한 업 등에 의해 인생(引生)한 것으로 능히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천안과 천이와 유사한 경우를 말하니, 예컨대 장신보(藏臣寶)와 보살과 전륜왕과 온갖 용과 귀신, 그리고 중유 등의 그것이 그러하다.72)
그리고 수득 즉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생에 걸쳐 항상 동분(同分)이니,73) 현재에 이른 것은 반드시 식(識)과 함께 하며 능히 보고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소(處所, 즉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扶塵根으로서의 눈과 귀를 말함)를 필시 온전히 갖추었으며, 막히는 일도 없고 어떠한 결함도 없으니, 색계에 태어난 일체의 유정의 그것처럼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감추어진 것이나 지극히 미세하고 멀리 있는 것 등 온갖 방역(方域)의 색과 소리를 능히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와 같은 게송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육안(肉眼)에는 감추어져 있거나
작거나 멀리 있는 온갖 방역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작용이 없지만
천안으로는 남김없이 모두 볼 수 있다.


7) 5통을 획득하는 여러 방법

앞에서 [능]화심(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수득(修得, 선정에 의해 획득된 것)과 그 밖의 방식으로 획득된 것(즉 生得)의 차별이 있다고 논설하였는데, 신경지(神境智) 등의 다섯 신통의 획득에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역시 차별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선정과 생(生)과
주술과 약물과 업으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며
타심지는 선정과 생과 주술로써 성취되며
또한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한 성취가 더해진다.
神境五修生 呪藥業成故
他心修生呪 又加占相成

그 밖의 세 가지는 선정과 생과 업으로 성취되며
수득(修得)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다 3성과 통하고
인취에는 오로지 생득(生得)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옥에서는 처음 태어날 때만 [타심과 숙주를] 능히 안다.
三修生業成 除修皆三性
人唯無生得 地獄初能知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지(神境智)에는 모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득(修得) 즉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생득(生得) 즉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며, 셋째는 주술로써 성취되는 것[呪成]이며, 넷째는 약물로써 성취되는 것[藥成]이며, 다섯째는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으로서, 만타다왕(曼馱多王, Maṅdhātṛ, 구역은 頂生王, 성장하여 금륜왕이 된다고 함)이나 중유 등의 온갖 신경지는 바로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신경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논설한] 가는 것[行]의 세 가지(즉 運身ㆍ勝解ㆍ意勢)와 변화의 한 가지로서,74) 여기서 ‘변화’라고 하는 말은 예컨대 계경에서 ‘하나가 나누어져 다수가 되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타심지에는 모두 네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며,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천안ㆍ천이ㆍ숙주지)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得]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生得]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所得]’을 제외한 그 밖의 것(태어나면서 획득되는 것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다 선 등과 통하지만, 그것은 선정의 결과[定果]가 아니기 때문에 ‘신통[通]’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인취 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75) 그 밖의 것은 다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본성(本性)의 생(즉 숙세에서의 생)에 대한 기억[念]은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 중에 포함된다. 즉 사람들은 이전의 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지옥취에서 처음으로 생을 받을 때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타심지와 숙주지로써 다른 이의 마음 등과 과거의 생을 알지만, 고수(苦受)에 핍박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아는 일이 없다.
그들(지옥취)이 과거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예컨대 계경에서 “그들은 스스로 기억하기를, ‘우리는 과거 일찍이 다른 이(사문과 바라문)가 설한 온갖 탐욕의 과환(過患)을 듣고도 염리(厭離)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와 같은 극심한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바로 전의 한 생만을 능히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인취와 지옥취을 제외한] 그 밖의 취에서는 상응하는바(즉 生處得智)에 따라 항상 [다른 이의 마음 등과 과거의 생을] 알 수 있다. 즉 방생(傍生)이 과거를 아는 것은 예컨대 누성(螺聲)이라는 개 등이 그러하였으며,76) 아귀가 과거를 안다고 한 것은 예컨대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옛날 [진귀한] 많은 재물을
법답게 혹은 비법(非法)으로 모았기 때문에
다른 이는 지금 부유함의 즐거움을 받는데
나만이 홀로 가난의 괴로움을 받는구나.77)

또한 천취(天趣)가 [생처득지(生處得智)로써] 과거를 안다고 한 것은, 예컨대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서다림(逝多林)을 보시하여
대법왕의 주처(住處)로 삼게 하였는데
현성(賢聖)의 스님이 이를 수용하였으니
그래서 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로다.78)

또한 계경에서 “하늘에 태어나는 모든 이는 처음으로 태어날 때 반드시 ‘나는 어디로부터 몰하여 지금 어떠한 처소에 태어나게 되었으며, 어떠한 업으로 인해 이 같은 세간으로 와 태어나게 된 것인가?’에 대한 세 종류의 기억을 일으켜 말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028_0272_b_01L阿毘達磨藏顯宗論卷第三十七 爵尊者衆賢造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辯智品第八之三已說如來不共功德共功德今當辯頌曰復有餘佛法 共餘聖異生 謂無諍願智無礙解等德論曰世尊復有無量功德與餘聖者及異生共謂無諍願智無礙解無色等至等持無量解脫勝處處等隨其所應謂前三門唯共餘聖靜慮等亦共異生雖佛身中一切功德行相淸淨殊勝自在與聲聞等功德有殊然依類同說名爲共共餘聖三功德中無諍云何頌曰無諍世俗智 後靜慮不動 三洲緣未生欲界有事惑論曰有阿羅漢憶昔多生受雜類身發自他惑由斯相續受非愛果便作是念有煩惱身緣之起惑尚招苦果況離煩惱具勝德身思已發生如是相智由此方便令他有情不緣己身生貪瞋等此智但以俗智爲性緣他未來修斷惑故非無漏智此行相轉無諍體是智所攝如何說習無諍等此不相違一相應品有多功德說一故如一山中有種種物隨擧一種以標山名理應無諍是智所攝他相續當來惑生巧便爲先事方成然一切諍摠有三種薀言煩惱有差別故薀諍謂死言諍謂鬪煩惱諍謂百八煩惱由此俗智力能止息煩惱諍故得無諍名此智但依第四靜違苦因故第四靜慮樂通行中爲勝故不動應果能起非餘餘尚不能自防起惑況能止息他身煩惱唯依止三洲人身非北及餘性猛利緣欲未起有事惑生勿令他惑緣我生故諸無事惑不可遮防內起隨應摠緣境故已辯無諍願智云何頌曰願智能遍緣 餘如無諍說論曰以願爲先引妙智起如願而了故名願智此智自性種姓與無諍同但所緣別以一切法爲所緣故如何願智能知未來審觀過而比知故如觀稼穡有盛有微比知其田有良有薄若爾何故立願智名有學異生亦能知故不爾所知定不定故而聞傳說諸大聲聞記未來事有不定者非起願智有此謬知餘俗智觀所記別故或彼所記無不定失觀於始不觀終故如先降雨未至地爲羅怙羅之所承棄先所懷孕其實是男彼於後時轉形成女王舍城鬼初戰得勝後爲廣嚴諸鬼摧伏欲相伐鬼先戰故或實願智方見未然加行時先起比智觀過現世度未來引願智生方能眞見卽由此能知無色謂先觀彼因行等流比智生引眞願智或觀欲色死生時比度而知所生從處引生願智方能實知或比智知亦無有失以證比智所緣必同若比不知如何能證是則願智應不可言力能遍緣三界三世不時解脫諸阿羅漢欲於彼境正了知時先作要期願我知彼後入邊際第四靜慮以爲加行從此無如先願力引正智起於所期境如實知邊際定言如後當釋此願智力能知過去與宿住智差別云何智通知自相共相諸宿住智知共知共相中亦有差別願智明了宿住不然於現所緣對他心智辯差別如理應思已辯願智無礙解云何頌曰無礙解有四 謂法義詞辯 名義言說道無退智爲性 法詞唯俗智 五二地爲依義十六辯九 皆依一切地 但得必具四餘如無諍說論曰諸無礙解摠說有四一法無礙二義無礙解三詞無礙解四辯無礙解此四摠說如其次第以緣名義言及說道不可退轉智爲自性謂無退智緣能詮法名句文身立爲第一趣所詮義說之爲名卽是表召法自性義辯所詮義說之爲句卽是辯了法差別義不待義聲獨能爲覺生所依託說之爲文卽是迦遮咤多波理應有覺不待義聲此覺不應無所緣境此所緣境說之爲文文謂不能親目於義但與名句爲詮義依三能持諸所詮義及軌生解故名爲卽三自性說之爲身自性身名差別故三與聲義極相鄰雜爲境生別相難知故說身言顯有別體無退智緣一切法所有勝義立爲第義卽諸法自相共相雖名身等亦是義攝而非勝義有多想故謂有如義有不如義有有義有無義有依假轉有依實轉了此無閒或於後時諸所度量名爲勝義爲欲顯示義無礙解所緣之境非語及名故此所緣說爲勝義謂此但取依語起名名所顯非取汎爾心之所行說名爲義無退智緣諸方域俗聖言詞立爲第卽能了知世語典語於諸方域種差別若無退智緣應正理無滯礙及緣自在定慧二道立爲第四於文義能正宣揚無滯言詞說名爲及諸所有已得功德不由加行運現前自在功能亦名爲辯此能起立以辯名了辯及因智名辯無礙卽前所說能正宣揚善應物機違勝義所有言說名應正理卽前所說無滯言詞不待處時及有情等辯析自在名無滯礙卽上所言已得功德不由加行任運現前名爲自在定慧二道又能所詮相符會智名初二無礙解謂達此名屬如是義及達此義有如是名名能所詮相符會智時作等加行言詞名第三無礙解所樂言說及自在道因名第四無礙又色等六所知謂義卽此善等有無爲非色等差別謂法卽詮此二言說謂詞三智卽前三無礙解緣三種無罣礙智名第四無礙解達世俗勝義二諦名初二無礙解卽行者自利圓德能善宣說如是二名第三無礙解於此善巧問答難名第四無礙解此卽行者利他圓有說愚癡猶豫散亂是於宣辯有滯礙因由解脫此三得現法樂住由此故利他行成此智名爲辯無礙若得如是定能宣說符會正理無滯言詞及得現前自在功德又於名等勝義言詞無滯說中各得善巧次建立四無礙解前三善巧說名爲因由境不同故有差別第四名果能說無滯又由四分利他事成謂巧於文了達於義妙閑聲韻慧自在故礙解建立有四此卽摠說無礙解體兼顯四種所緣差別契經略擧此數及名諸對法中廣顯其相又經列此先義後法諸對法中先法後義此爲顯示二智生時或義因名或名因義故經與論作差別說謂聽法者先分別名旣正知名次尋其義正知義已欲爲他說次必應求無滯說智依此次第故名在先然此四中義智最勝餘是助伴故義在先謂於義中若正了達次應方便尋究其名旣已知名欲爲他說次應於說求巧便智是故此四次第如是辯無礙解若緣說時何異第三詞無礙解第三了達訓釋言詞如有變礙故名色等此達應理無滯礙說有說詞詮諸法自性辯能顯示諸法差別有說於法直說名詞展轉無滯分扸名辯緣此二種三有別四中詞俗智爲性非無漏智緣名身等及世言詞事境界故法無礙解通依五地謂依欲界四本靜慮上地中無名身等故彼不別緣下名等故詞無礙解唯依二地謂依欲界初本靜慮上諸地中無尋伺故彼地必無自語言故此因非理所以者何非發語智名無礙解勿無礙解定中無由此不應作如是說無尋伺故上地中無無斯過失因義異故何謂因謂此意言伺二法能發語故不寂靜自性麤動上無此故寂靜微詞無礙解緣外言詞亦不寂靜動類攝是故此解上地中無初靜慮中亦有尋伺故於定內亦有此解此極成但依二地義無礙解十六智謂若諸法皆名爲義則十智性唯涅槃名爲義者則六智性謂俗無生辯無礙解九智爲性謂唯除滅緣說道故此二通依一切地起謂依欲界乃至有頂辯無礙解於說道中許隨緣一皆得起故通依諸地亦無有失然於其中但緣說者唯依二地與第三同有說無生非無礙解以無礙解是見性故彼說第二或或八第四唯七准上應知此四應知如四聖種隨得一種必具得四不具四可名爲得隨欲現起或具不有餘師言有不具得無理得一令得四有說此四無礙解生如次串習筭計佛語聲明因明爲前加行於四處未得善巧必不能生無礙解理實一切無礙解生唯學佛語能爲加行要待前生久習名等四種善巧今乃能修無礙解名釋有多義於彼彼境領悟無礙名無礙解或於彼彼境決斷無礙名無礙解或於彼彼境正說無礙名無㝵解有餘師說於境現前無顚倒智名無㝵解此四依地自性所緣與無諍別前來已辯種性依身如無諍說謂不動種性依三洲人身如是所說無諍智等頌曰六依邊際得 邊際六後定 遍順至究竟佛餘加行得論曰無諍願智四無礙解六種皆依邊際定得邊際定力所引發故邊際靜慮體有六種前六除詞餘五少分及除此外復更有餘加行所得上品靜慮名邊際定故成六種詞無礙解雖依彼得而體非彼靜慮所攝邊際名但依第四靜慮故此一切地遍所隨順增至究竟故得邊際名由此不應亦通餘地云何此名遍所隨順謂正修學此靜慮時從初靜慮次第順入乃至有頂復從有頂次第逆入至初靜慮從初靜慮次第順入展轉乃至第四靜慮名一切地遍所隨順云何此名增至究竟謂專修習第四靜慮從下至中從中至上如是三品復各分三上上品生名至究竟如是靜慮得邊際名此中三乘非無差別而各於自得究竟名此中邊名顯無越義餘無越此故名爲邊際言爲顯類義極義如說四際及實際言如是二言顯此靜慮是最勝類定中最極殊勝功德多此引生樂通行中此最勝故如是所說無諍智等除佛餘聖唯加行得非離染得非皆得故唯佛於此亦離染得諸佛功德初盡智時由離染故一切頓得後時隨欲能引現前不由加行以佛世尊於一切法自在轉故已辯前三唯共餘聖德於亦共凡且應辯通頌曰通六謂神境 天眼耳他心 宿住漏盡通解脫道慧攝 四俗他心五 漏盡通如力五依四靜慮 自下地爲境 聲聞麟喩佛二三千無數 未曾由加行 曾修離染得三身一餘三 一法後法四 天眼耳無記餘四通唯善論曰通有六種一神境智證通二天眼智證通三天耳智證通四他心智證通五宿住隨念智證通六漏盡智證通雖六通中第六唯聖然其前五異生亦得依摠相說亦共異生如是六通解脫道攝慧爲自性如沙門果解脫道言顯出障義勝進道中亦容有故如是通慧無間道無此位定遮他心智故勿阿羅漢捨無閒道卽名亦捨漏盡通故除他心漏盡餘四俗智攝他心通五智攝謂法世俗漏盡通如力說謂或六或十智此已顯漏盡智通依一切地緣一切前之五通依四靜慮不依無色中閒彼無五通所依定故要攝支定是五通依非漏盡通亦不依彼地皆能緣漏盡故不待觀色爲加行前三通境無色不能緣由此三通但別緣色故修他心通色爲門故宿住通漸次憶念分位差別方得成滿於加行中必觀色故依無色地如是能若爾中閒及五近分亦容緣應有五通不爾由前所說因故攝支定是五通依若不攝支等持劣又彼止觀隨一減故若爾何緣有漏盡通樂苦遲速地皆能盡漏故五是別修殊勝功德要殊勝地方能發修神境等前三通時思輕爲加行成已自在隨所欲爲諸有欲修他心通者先審觀己身心二相前後變異展轉相隨後復審觀他身由此加行漸次得成成已不觀自心諸色於他心等能如實知諸有欲修宿住通者先自審察次前滅心復逆觀此生分位前前差別至結生乃至能憶知中有前一念名自宿住加行已成爲憶念他加行亦爾通初起唯次第知串習成時亦能超諸所憶事要曾領受憶淨居者曾聞故從無色歿來生此者依他相續初起此通所餘亦依自相續起如是五通境唯自下且如神境隨依何地自下地化自在於上不然勢力劣餘四亦爾隨其所應是故無能取無色界他心宿住爲二通境卽此五通於世界境作用廣陜諸聖不同大聲聞麟喩大覺不極作意如次能於一三千諸世界境起行化等自在作用若極作意如次能於二千無數世界如是五通若有殊勝勢用猛利從無始來曾未得者由加行若曾串習無勝勢用及彼種類離染得若起現前皆由加行佛於一切皆離染得隨欲現前不由加行乘聖者後有異生通得曾得未曾得所餘異生唯得曾得約四念住辯六通者約境約體二義有殊有說通卽天眼耳所餘四種以慧爲性耳通是身念住境餘四皆是法念住境然實六種皆慧爲性經說能了達境故由此皆是法念住境若約體辯則六通中前三唯身但緣色故謂神境通緣外四處天眼緣色天耳緣聲若爾何緣說死生智知有情類由現身中成身意諸惡行等非天眼通能知此事有別勝智是通眷屬依聖身起能如是知是天眼通力所引故與通合立死生智名他心智通三念住攝謂受緣心等故宿住智通法念住攝雖契經說念曾領受苦樂等事是憶前生苦樂等受所領衆具卽是雜緣法念住攝漏盡如力或法或四若約善等分別六通有餘師言六皆是善而實眼耳唯無記性餘之四通一向是善經主於此作是釋言天眼耳通無記性攝是眼耳識相應慧故此釋不然六通皆是解脫道攝耳二識是解脫道理不成故應作是說四靜慮中有定相應勝無記慧能引自地勝大種果此慧現前便引自地天眼天耳令現在前爲所依根發眼耳識故眼耳二識相應慧非通但可說言是通所引如契經說無學三明彼於六通以何爲性頌曰第五二六明治三際愚故後眞二假說學有闇非明論曰有三明者一宿住智證明二死生智證明三漏盡智證明如其次第無學位攝第五六通爲其自性中三種獨名明者如次對治三際愚謂宿住智通治前際愚死生智通治後際愚漏盡智通治中際愚是故此三獨摽明號又宿住通憶念前際自他苦事死生智通觀察後際他身苦由此厭背生死衆苦起漏盡通涅槃樂故唯三種偏立爲明又此三通如次能捨常有見故立爲明此能除有有情法三種愚故偏立爲有餘師言宿住能見過去諸薀展轉相因次第傳來都無作者由此能引空解脫門死生能觀有情生死下上旋轉猶如灌輪故不希求三有果報由此能引無願解脫門厭離爲歸無相法故起漏盡無相解脫門是故三通獨摽明號此三皆名無學明者俱在無學身中起故於中最後容有是眞通無漏故餘二假說體唯非學非無學故由此最後得無學名自性相續皆無學故前之二種得無學名但由相續不由自性如施設論作如是言有等持相應無覆無記慧不由善故及無漏故得立聖名由聖身中此可得故說名爲聖此亦應爾故名無學有學身中有愚闇故有前二不立爲明雖有暫時伏滅愚後還被蔽不可立明要闇永無名明故契經中說示導有三彼於六通以何爲性頌曰第一四六導 教誡導爲尊 定由通所成引利樂果故論曰三示導者一神變示導二記心示導三教誡示導如其次第以六通中第一六爲其自性唯此三種引所化生令初發心最爲勝故能示立示導名三示導中教誡最勝定由通所成故定引利樂果故謂前二導呪等亦能不但由通故非決定如有呪術名健馱梨持此便能騰空自在或有藥草具勝功能若服若持飛行自在復有呪術名伊剎尼持此便能知他心念或由觀相聽彼言音亦能了知他心所念教誡示導除漏盡通餘不能爲故是決定或前二導外道亦能第三不然故名決定又前二導有但令他暫時迴心不能引得畢竟利益及安樂果教誡示導亦定令他引當利益及安樂果以能如實方便說故由此教誡最勝非餘神境二言爲目何義頌曰神體謂等持 境二謂行化 行三意勢佛運身勝解通 化二謂欲色 四二外處性此各有二種 謂似自他身論曰神名所目唯勝等持由此能爲神變事故而契經說神果名神意爲擧麤以顯細故又顯勝等持是彼近因故然神變事體實非神諸神變事說名爲境此有二種謂行及化行復三種一者運身謂乘空行猶如飛鳥二者勝解謂極遠方作近思惟便能速至若於極遠色究竟天作近思惟卽便能至本無來去何謂速行此實亦行但由近解行極速故得勝解名或世尊言靜慮境界不思議故唯佛能了三者意勢謂極遠方擧心緣時身卽能至此勢如意得意勢名如心取境頓至色究竟故於此三中意勢唯佛運身勝解亦通餘乘謂我世尊神通迅速隨方遠近擧心卽至由此世尊作如是說諸佛境界不可思議日舒光薀流亦爾能頓至遠故說爲若謂不然此沒彼出中閒卽斷義應無或佛威神不思議故擧心卽不可測量故意勢行唯世尊有解兼餘聖運身幷異生化復二種色界若欲界化外四處除聲若色界化唯二謂色以色界中無香此二界化各有二種謂屬自身身別故身在欲界化有四種在色亦故摠成八雖生在色作欲界化無色界成香味失化作自身唯二處有說亦化四如衣等不成非神境通能起化事要此通果諸能化心能化心有幾何相頌曰能化心十四 定果二至五 如所依定得從淨自生二 化事由自地 語通由自下化身與化主 語必俱非佛 先立願留身後起餘心語 有死留堅體 餘說無留義初多心一化 成滿此相違 修得無記攝餘得通三性論曰能變化心摠有十四謂依根本四靜慮生初靜慮生唯有二種一欲界二初靜慮第二第三第四靜慮如其次第有三無上依下下地劣上下地繫一靜慮果所依行等有勝劣一地繫上下靜慮果地雖等所依行勝劣下繫上果下果上繫次地劣勝所依行勝劣如得靜慮化心亦然果與所依俱時得故然得靜慮摠有三時離染受生加行異故謂離下染得上靜慮時亦得此定所引化心果從上地歿生色界時及由加行起勝功德但有新得所依靜慮亦兼得彼所引化心依欲界身得阿羅漢及練根位得應果時十四化心一時摠得乃至身在第四靜慮得阿羅得五化心無從化心直出觀義從淨定及自類生能無閒生自類淨故唯從二生二非餘唯自地化心起自地化事化所發語由自下心謂欲初定化唯自地心語上化起語由初定心彼地自無起表心故若生欲界第二定等化事轉時如何起表非威儀路工巧處心依異界身而可現起彼必依止自界身故此無有過引彼界攝大種現前爲所依故謂引色界大種現前與欲界身密合而住依之起彼能發表心無定地表心依散地身過或起依定能發表心如依定生天眼耳識若一化主起多化身要化主語時諸化身方語言音詮表一切皆同故有伽他作如是說一化主語時 諸所化皆語 一化主若默諸所化亦然此但說餘佛則不爾諸佛定力最自在故與所化語容不俱時言音所詮亦容有別若上三地所化語時初定表心現前發者此心起位已出化心應無化身化如何語由先願力留所化身後起餘心發語表業故無化語闕所依過非唯化主命現在時能留化身令久時住亦有令住至命終後卽如尊者大迦葉波留骨瑣身至慈尊世唯堅實體可得久留異此飮光應留肉等有餘師說願力留身必無有能令至死後聖大迦葉留骨瑣身由諸天神持令久住初習業者由多化心要附所依起一化事習成滿者由一化心能不附所依起衆多化事有二類能變化心一修所成二生得所起化果亦如彼說修所成化攝處如前不能化爲有情身故生所得等於欲界中化爲九處色界化七依不離根言化九等理實無有能化作修果無心餘化容有修果起表化主心餘容自心起身語表修果飮若爲資身必在化主身中消化爲餘事呑金石等或卽住彼化事身或隨所宜置在別處餘化飮食隨住所依修果化心唯無記性餘通三性謂善惡等如天龍等能變化心彼亦能爲自他身化天眼耳言爲目何義爲目慧體爲目色根若慧不應名天眼若色根者不應名通此前已前何所說謂說根本四靜慮中定相應勝無記慧名爲天眼及天耳此所引生勝大種果名天眼體是何頌曰天眼耳謂根 卽定地淨色 恒同分無缺取障細遠等論曰此體卽是天眼耳根謂緣聲爲加行故依四靜慮於眼耳邊引起彼地微妙大種所造淨色眼耳二根聞聲名天眼如是眼耳何故名體卽是天定地攝故極淸淨故以天名由此經言天眼耳者無有皮筋纏血塗唯妙大種所造淨色然天耳種類有三一修得天卽如前說二者生得謂生天中三者似天謂生餘趣由勝業等之所引生能遠見似天眼如藏臣寶菩薩輪王諸龍鬼神及中有等修得眼耳過恒是同分以至現在必與識俱能見聞故處所必具無醫無缺如生色界一切有情能隨所應取被障隔極細遠等諸方色聲故於此中有如是肉眼於諸方 被障細遠色 無能見功用天眼見無遺前說化心修餘得異神境等五各有異耶亦有云何頌曰神境五修生 呪藥業成故 他心修生呪又加占相成 三修生業成 除修皆三性人唯無生得 地獄初能知論曰神境智類摠有五種一修得生得三呪成四藥成五業成曼馱多王及中有等諸神境智是業成攝有餘師說神境有四卽前作三變化爲一言變化者如契經言分一爲乃至廣說他心智類摠有四種三如上加占相成餘三各三謂修除修所得皆通善等非定果故不得通名人中都無生所得者餘皆容有隨其所應本性生念業所成攝人由先業能憶過去於地獄趣初受生時唯以生得他心宿住知他心等及過去生苦受逼已更無知義彼憶過以何證知如契經言彼自憶念我等過去曾聞他說諸欲過失而不厭離於今時受斯劇苦彼唯能憶次前一生餘趣隨應恒有知義傍生知過如螺聲狗等鬼知過去如有頌言我昔集衆財以法或非法他今受富樂我獨受貧苦天知過去如有頌曰我施逝多林 蒙大法王住 賢聖僧受用故我心歡喜又契經說諸生天者初生必起三種念言我從何歿今生何處乘何業故來生此閒故知諸天能憶過去說一切有部顯宗論卷第三十七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4정려는 일반적으로 지(止)ㆍ관(觀)이 평등하여 온갖 공덕을 낳는데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낙통행’이라고 한다. 제4정려는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능히 ‘무쟁’의 소의지가 된다.(본론 제33권 ‘4통행’ 참조)
  2. 2)유사혹이란 실체[事]로서 존재하는 대상을 반연하는 수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무쟁은 다른 유정이 일으키는 탐 등의 실체적인 번뇌[自相惑]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3. 3)무사혹이란 자아 등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반연하는 견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이치에 미혹한 혹이면서 내면적 혹으로서 개별적인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나기보다는 모든 경계대상을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무쟁행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4. 4)원지는 세속지를 자성으로 하며, 제4정려에 의지하여 세 주에 머무는 부동종성의 아라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무쟁은 다른 이가 자신(아라한)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임에 반해, 원지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든 그것을 알고자 원하기만 하면 참답게 아는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에 차이가 있다.
  5. 5)“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원지는 바로 비량지(比量智)로서 현량지(現量智)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대비바사론』 제179권,대정장27,p.897중)
  6. 6)라호라(Rāhula, 혹은 覆障, 執日). 네 아수라왕의 하나로, 제석천왕과 싸울 때 손으로 해와 달을 붙잡아 광명을 가렸다 해서 그같이 이름하였다.
  7. 7)후술하는 ‘무쟁 등의 공덕과 변제정’ 참조.
  8. 8)타심지는 하나의 법[一物], 자상의 경계대상, 타상속, 심ㆍ심소법을 반연하지만, 현재법을 반연하는 원지는 하나의 법이나 다수의 법, 자상과 공상의 경계대상, 자상속과 타상속, 5온을 반연하며, 타심지는 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원지는 오로지 제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타심지는 외법을 지닌 자나 이생 성자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원지는 오로지 무학의 성자(그 중에서도 불시해탈)와 부처에게만 존재한다. 타심지는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지만, 원지는 오로지 유루이며, 타심지는 욕ㆍ색계계와 불계(不繫)의 법을 반연하지만, 원지는 3계계와 불계의 법을 반연한다.(『대비바사론』 제179권, 대정장27,p.897중 참조)
  9. 9)‘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智)’란 한 번 획득하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부동법(不動法) 아라한에게 성취된 지를 말한다.
  10. 10)명(nāma)은 물질ㆍ소리 등과 같은 명사적 개념, 구(pada)는 ‘제행은 무상하다’와 같은 문장, 문(vyañjana)은 aㆍiㆍkaㆍkha와 같은 음소(글자).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8권 ‘명ㆍ구ㆍ문 3신(身)’에서 상론하였다.
  11. 11)법이란 능히 자상을 지녀[能持自相] 사물에 대한 이해를 낳게 하는 표준[軌生物解]이 되는 것으로, 명(名)ㆍ구(句)ㆍ문(文) 역시 이해를 낳는 표준이 되기 때문에 ‘법’이며, 이를 반연하는 부동법 종성의 지를 ‘법무애해’라고 하였다는 뜻.
  12. 12)예컨대 명신(名身)이라 함은 온갖 개념[想]을 총체적으로 설한 것[總說] 즉 집합을 말한다.(본론 제8권 주11 참조)
  13. 13)『구사론』 제27권(고려장27,p.654중; 대정장29,p.142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242)에서는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소전(所詮)의 뜻을 반연하는 것을 두 번째 [의무애해]라고 한다”고 하였다.
  14. 14)예컨대 ‘배’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물에 떠 있는 배일 수도 있고, 먹는 과일로서의 배일 수도 있으며, 신체부위로서의 배일 수도 있다는 뜻.
  15. 15)이상 ‘명(名) 등’의 네 가지는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무애해(辯無礙解)의 소연이었다.
  16. 16)여기서 대법(對法)은,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 의하면 『시설족론』(구역에서는 『分別假名論』)으로, 이같이 설하고 있다. “명(名)ㆍ구(句)ㆍ문(文)과, 이것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所詮)의 ‘뜻’과, 이러한 뜻의 단수[一]ㆍ양수[二]ㆍ복수[多]와 남성ㆍ여성[형] 등의 언사의 차별과, 이러한 언사를 막힘없이 설하는 것과 그것의 소의가 되는 도를 반연하는 물러남이 없는 지(智)를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의 무애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17. 17)색의 이 같은 어원적 해석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주52)를 참고할 것
  18. 18)사무애해가 일체 훈석(訓釋)의 언사(言詞, 어원 문법 등의 말의 이치)를 요달(통달)한 것이라면, 변무애해는 이치에 맞게 막힘이 없이 설하는 교묘한 웅변에 대해 요달한 것을 말한다. 이는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논설되고 있다.
  19. 19)진지와 무생지는 추리 판단[推度]의 의요(意樂)가 지식(止息)되었기 때문에 ‘견’이 아니다. 본론 제35권 ‘인(忍)과 지(智)와 견(見)의 관계’ 참조.
  20. 20)즉 앞에서 의무애해는 제법을 반연하는 경우 10지를, 열반을 반연하는 경우 6지를 자성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진지와 무생지를 제외할 경우 8지와 4지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 된다.
  21. 21)4성종에 대해서는 본론 제29권에서 상론하였다.
  22. 22)법무애해의 가행은 산어(算語, gaṇita, 즉 수학)나 명ㆍ구ㆍ문신을 익히는 것이며, 의무애해는 부처님 말씀[佛語, buddha vacana]을 익혀 온갖 법의(法義)를 이해하는 것을, 사무애해는 성명(śabdavidyā) 즉 문법학을 익히는 것을, 변무애해는 인명(hetuvidyā) 즉 논리학을 익히는 것을 가행으로 삼았다는 뜻. 참고로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서는 이를 전설(傳說)로 설하고 있다.
  23. 23)여기서 ‘명(名) 등의 네 종류’란, 앞서 4무애해의 소연으로 논설된 능전(能詮)의 ‘명’ 등과 소전(所詮)의 뜻과 모든 지방의 언사(言詞), 그리고 정리(正理)에 부합하게 막힘이 없이 설(說)하는 것과 도(道).
  24. 24)이는 무애해의 원어 pratisaṃvid를 어원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발랄저(鉢剌底, prati)’는 ‘현전(現前)’을, ‘삼(三, saṃ)’은 전도됨이 없음[無倒]을, ‘비타(毘陀, vid)’는 지혜[智]를 의미한다는 것이다.(『순정리론』 제76권)
  25. 25)사무애해(詞無礙解)를 제외한 그 밖의 다섯 가지는 변제정 이외 그 밖의 지(地)와도 통하기 때문에 ‘일부’라고 하였다.(『구사론소』 제27권)
  26. 26)변제정(prāntakoṭika dhyāna)이란 색계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下) 3지에서와 같은 심(尋)ㆍ사(伺)ㆍ고(苦)ㆍ낙(樂)ㆍ우(憂)ㆍ희(喜)ㆍ입식(入息)ㆍ출식(出息)의 8재환(災患)이 없고, 지(止)ㆍ관(觀)이 평등한 가장 수승한 정려이기 때문에 ‘변제정’이라고 함. ‘변제’는 무월극(無越極)의 뜻. 따라서 사무애해는 욕계와 초정려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외하고, 대신 제4정려의 최상품(상상품)을 더하여 여섯 가지가 된 것이다.(후술)
  27. 27)제4정려를 닦을 때, 처음에는 하하품의 제4정려를 일으키고, 다음으로 하중품ㆍ하상품을, 나아가 마침내 상상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상상품의 제4정려를 ‘구경’이라 이름하였다는 뜻.
  28. 28)‘4제(catuskoṭika)’란 ‘네 구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한 게송’, 또는 ‘사해(四海)로 구분되는 한 세계’의 경우처럼 종류가 서로 유사한 네 가지 단락이나 구분[分齊]을 말하며, ‘실제(bhūtakoṭi)’란 구극 또는 궁극의 이치, 즉 제법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열반을 금강실제(金剛實際)ㆍ제법실제(諸法實際)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라는 말에는 종류의 구분이나 긍극의 뜻이 있다. 곧 4정려를 ‘변제’라고 하는 말로 일컬은 것은 이것이 정려 중에 가장 뛰어난 종류(樂通行 중에 가장 뛰어난 것임)이며,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수승한 공덕은 대개 이것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29. 29)이염득은 누구라도 염오를 떠날 때 자연적으로 자재를 획득하는 것이며, 가행득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여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곧 이 같은 여섯 공덕의 경우에는 이염하더라도 바로 그것의 자재를 획득하지 못한다.
  30. 30)이는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5중; 대정장29,p.142하)에서의 본송 “염주의 경우, 처음 세 신통은 신(身)이고, 타심통은 세 염주, 나머지는 4념주이다(念住初三身 他心三餘四)”를 개작한 것이다. 즉 경주 세친은, 숙주지통과 누진지통은 5온과 일체의 경계대상을 모두 반연한 것이기 때문에 4념주에 포섭된다고 하였지만(『구사론』, 고려장27,p.656상; 대정장29,p.143중; 권오민 역,p.1251), 중현에 의하는 한 숙주지통은 전생에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등에 의해 경험된[所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잡연(雜緣)의 법념주에 포섭된다. 그리고 누진지통은 10력 중의 누진지력과 마찬가지로 혹 누진만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법주념에 포섭되고 이와 더불어 누진의 방편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4념주에 포섭된다는 것이다.(후술)
  31. 31)신경지증통(혹은 神境通)은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가기도 하고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신통력(후술). 천안지증통(혹은 天眼通)은 미래세의 일을 아는 신통력. 천이지증통(혹은 天耳通)은 지극히 먼 소리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 타심지증통(혹은 他心通)은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신통력. 숙주수념지증통(혹은 宿命通)은 과거세의 일을 아는 신통력. 누진지증통(혹은 漏盡通)은 번뇌를 다할 때 얻는 신통력이다. 참고로 ‘통(通)’이라 함은 자신의 소연에 대해 전도된이 없이 요달(了達)하는 묘용(妙用)으로서,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은 것.(『대비바사론』 제141권, 대정장27,p.727중)
  32. 32)무간도(無間道)까지는 신통을 장애 하는 불염오무지의 장애가 있지만, 그러한 장애를 끊은 상태가 해탈도이기 때문이다.
  33. 33)10력 중 누진지력이 다만 누진을 반연할 경우 도지ㆍ고지ㆍ집지ㆍ타심지를 제외한 6지를, 누진과 그것의 방편을 반연할 경우 10지를 본질로 한다.(본론 제36권 ‘10력과 그 자성’ 참조)
  34. 34)이하 앞의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신통이 무색정에 근거하여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밝힌다.
  35. 35)숙주통의 가행을 일으킬 때에는 자신의 태내(胎內) 5위와 태외(胎外) 5위(嬰孩ㆍ동자ㆍ소년ㆍ성년ㆍ노년)를 역(逆)으로 기억하여 숙주통을 일으키고, 그것이 성취되는 단계에서 이러저러한 장소나 종성 등을 반연하는데, 무색정에는 이러한 색경(色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숙주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누진통을 제외한 5통의 가행에 대해서는 후술함.
  36. 36)다섯 신통은 반드시 지ㆍ관이 평등한 경지에서만 일어나는 낙통행(樂通行)으로, 무색정은 ‘관’이 감소하고 ‘지’가 증가하며, 중간정 등은 ‘관’이 증가하고 ‘지’가 감소하는 고통행(苦通行)이기 때문에 다섯 신통의 소의지가 될 수 없다. 4정려는 18지(支)를 갖추고 있으며, 지ㆍ관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생겨난 도는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것처럼 쉽게 성취되기 때문에 낙통행이다.(본론 제33권 ‘4통행’ 참조)
  37. 37)‘고ㆍ낙의 느리고 빠른 경지’란 성도가 어렵게 일어나는 무색ㆍ미지ㆍ중간정과 쉽게 일어나는 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각각에 근거하여 둔근자가 일으키는 성도를 ‘느린 것(遲通)’이라 하고, 이근자가 일으키는 성도를 ‘빠른 것(速通)’이라 한다. 본론 제33권 ‘4통행’ 참조.
  38. 38)가벼움[輕]을 생각하는 것은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신통인 신경통의 가행이며,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은 각기 천안통과 천이통의 가행이다. 이 세 신통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한다.
  39. 39)타심통의 가행에 대해서는 본론 제35권 ‘특히 타심지에 대하여’에서 상론하였다.
  40. 40)숙주통은 일찍이 영납(지각)하였던 대상만을 기억한다. 그런데 정거천은 성자가 태어나는 하늘로서 범부가 태어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일찍이 영납한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정거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41. 41)무색계에서 몰하여 욕계나 색계에 태어난 자가 4정려에 들어 숙주통을 일으켰을 경우, 그것은 직접적으로 색경(色境)이 존재하지 않는 무색계를 반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 찰나에 멸한 다른 이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아가 그의 숙주를 기억하여 익숙하게 된 다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숙주를 기억하게 된다는 뜻.
  42. 42)‘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은 신경통의 두 사업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특히 신경통에 대하여’에서 상론함.
  43. 43)『증일아함경』 제42권(대정장2,p.776하)와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동p.187상)에서는 부처의 10력 중 제9사생지력(死生智力)을 ‘유정이 신ㆍ어ㆍ의의 악행과 선행을 성취하여 당래 악취와 선취에 태어나는 것을 천안으로써 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같이 계경에서 사생지 즉 천안통이 신ㆍ어ㆍ의의 3업을 아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만 색처만을 반연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힐난.
  44. 44)누진지력의 경우, 다만 누진(漏盡, 번뇌멸진)만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6지(智)를, 이와 더불어 누진의 방편도 반연하는 것이라면 10지를 자성으로 삼듯이(본론 제36권 ‘10력과 그 자성’ 참조), 누진지통 역시 누진만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법념주에 포섭되고 이와 더불어 누진의 방편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4념주에 포섭된다는 뜻.
  45. 45)『구사론』 제27권(고려장2,p.656상; 대정장29,p143중; 권오민 역,p.1252).
  46. 46)여기서 ‘유정법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어리석음’은 분명하지 않다. 『대비바사론』 제102권(대정장27,p.530상)에 의하면, 3명은 순서대로 전제의 무지와 후제의 무지와 열반의 무지를 제거하는 것, 또는 온(蘊)의 어리석음과 유정(有情)의 어리석음과 법(法)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이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로 3명은 순서대로 전제(前際)의 법을 통달 요해하는 것ㆍ후제(後際)의 법을 통달 요해하는 것ㆍ열반성(涅槃性)을 통달 요해하는 것, 또는 전제의 유전법(流轉法)을 아는 것ㆍ후제의 유전법을 아는 것ㆍ환멸법(還滅法)을 아는 것이라는 이설도 언급되고 있다.
  47. 47)신변시도는 신경통(神境通)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신이한 변화[神變]를 나타내는 것. 기심시도는 타심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것.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출리(出離)의 교법을 세워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다.
  48. 48)이를테면 교화할 유정을 이끌어 발심하게 하기 위해 첫째 신통한 변화[神變]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며, 둘째 상대방의 마음을 통찰하여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셋째 누진이라고 하는 출리의 도를 세워 처중(處中)의 유정으로 하여금 발심하게 한다.
  49. 49)원문은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유사함[似]이다’이지만, 장행의 해석에 따라 ‘사(似)’를 ‘화(化)’로 고쳐 번역한다.
  50. 50)본론 제34권 주7) 참조. 즉 선정은 능히 변화하는 마음 등을 일으켜 신통한 경계[神]를 조작하는 근거[足]가 되기 때문에 ‘신족(神足)’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51. 51)욕계신(身)의 경우, 욕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색계신(身)의 경우, 색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와 욕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52. 52)색계에 태어나 색계에 존재하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할 때에는 향(香)ㆍ미(味)와 더불어 외적인 네 처를 변화시켜야 하지만, 색계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여기서 유설(有說)은 『구사론』(고려장27,p.657상; 대정장29,p.144상; 권오민 역,p.1257)의 정설이며, 반대로 다만 색ㆍ촉의 2처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부의 정설은 『구사론』상에서 유설로 언급되고 있다.
  53. 53)즉 제2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능화심(能化心)에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과 초정려와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며, 나아가 제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능화심에는 여기에 제3정려와 제4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더한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이다.
  54. 54)원문은 ‘無上依下, 下地劣故’ “[신경통의] 온갖 과보로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自地)와 상지(上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필시 하지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여 상지의 과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상중; 권오민 역,p.1259)
  55. 55)원문은 ‘上下地繫, 一靜慮果, 所依行等, 地有勝劣’ 예컨대 다 같이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能化心, 즉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초정려에 포섭되는 능화심은 비록 소의와 변화의 작용이 동일할지라도 후자가 전자에 비해 상지의 능화심이라는 뜻.
  56. 56)원문은 ‘一地繫, 上下靜慮果, 地雖等, 所依行勝劣’ 예컨대 다 같이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이라 하더라도 제2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은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보다 소의지와 작용[行]이 수승하다는 뜻. 왜냐하면 제2정려의 과보인 능화심은 제2정려까지 이를 수 있지만, 초정려의 과보인 능화심은 오로지 초정려에서 그치고 제2정려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57. 57)원문은 ‘下繫上果下果上繫, 如次地劣勝, 所依行勝劣’ 예컨대 제3정려에 의해 생겨난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과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초정려에 포섭되는 능화심의 경우, 현행하는 경지(地)는 비록 후자가 수승하지만, 소의와 작용은 전자가 수승하다는 뜻.
  58. 58)즉 정려로부터 능화심(能化心)이 낳아지면 이로부터 제2ㆍ제3찰나의 동류의 마음(能化心)이 낳아져 상속하며, 나아가 마침내 최후의 능화심으로부터 다시 청정한 정려의 마음이 낳아지고 이로부터 출관한다. 따라서 능화심은 정려와 전 찰나의 능화심으로부터 생겨나며, 무간에 다시 후 찰나의 능화심과 정려심을 낳고 비로소 출관하게 되는 것으로,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중; 권오민 역,p.1260)에서는 “마치 문을 통해 들어간 자는 다시 문을 통해 나오는 것처럼 정려의 과보로서 생겨난 능화심에서 출관하는 경우 반드시 다시 선정에 들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59. 59)예컨대 욕계에서의 경계대상(색ㆍ향ㆍ미ㆍ촉)의 변화는 욕계의 능화심에 의해 일어난다.
  60. 60)원문은 ‘謂欲初定化唯自地心語’이지만,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중)의 논설 ‘謂欲初定化所發言, 此言必由自地心起’에 따라 이같이 번역하였다.
  61. 61)예컨대 욕계나 초정려의 능화심이 욕계나 초정려의 유정을 화작할 때, 그러한 화작된 이가 일으키는 말은 욕계나 초정려의 발어심(發語心)에 의해 일어나며(자지), 제2정려 이상의 능화심이 화작한 이가 발하는 말은 초정려 등의 발어심에 의해 일어난다(하지). 왜냐하면 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ㆍ사(伺)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발어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2. 62)『장아함경』 제5권 「사니사경(闍尼沙經)」(대정장1,p.36상). 참고로 이 경에서는 ‘一化身語 餘化亦語. 一化身黙 餘化亦黙’으로 되어 있다. 즉 범동자가 33신으로 나투어 33천에게 자신도 4신족을 닦았기에 이같이 무수한 형태로 변화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33천은 “범동자의 하나의 변화신이 말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말하고, 하나의 변화신이 침묵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침묵한다”고 생각하였다.
  63. 63)“말을 발하려는 마음[發語心]을 일으킬 때에는 [능(能)]화심(化心)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변화된 몸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구사론』 제27권, 고려장27,p.657하; 대정장29,p.144중; 권오민 역,p.1261). 유부에 의하면 두 마음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4정려에 의해 일어난 ‘능화심’은 ‘말을 발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더 이상 변화된 이의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
  64. 64)『증일아함경』 제44권(대정장2,p.789상)에 의하면, 가섭은 계두산(鷄頭山)에서 골쇄의 몸을 변화시켜 죽은 후에도 반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의 세상이 출현하기를 기다렸다. 『불본행집경』 제47권 「대가섭인연품」(대정장3,p.870상중) 참조.
  65. 65)수소성의 변화는 색계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에 향처와 미처를 제외한 색처와 촉처에 포섭된다.(전술한 ‘신경통에 대하여’ 참조)
  66. 66)앞에서 언급하였듯이, 5근과 4경의 9처를 화작하였을지라도 실제로 근을 화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변화된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는 근과 불가분[不離]의 관계이기 때문에 ‘근을 화작한다’고 말하여도 과실이 없다는 뜻.
  67. 67)원문은 ‘修果無心餘化容有.’ 수소성의 능화심(能化心)에 의해 변화된 유정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밖의 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에게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인가?
  68. 68)수소성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의 표업(말이나 행동)은 화작의 주체(즉 그러한 변화를 낳은 이)의 마음에 의해 일어나지만, 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의 표업은 바로 변화된 이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는 뜻. 이 경우 화작의 주체가 그러한 변화된 유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 의해 해코지를 당할 수 있다.
  69. 69)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이 먹고 마신 음식은 그러한 변화를 초래한 이(즉 화작의 주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된 유정의 몸에서 소화된다는 뜻.
  70. 70)본권 ‘6통’ 말미에서 경주(經主) 세친의 설(주45)을 비판하면서 언급하였다.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 능히 자지의 뛰어난 대종을 결과로서 인기한다. 즉 이러한 ‘혜’가 현전하면, 바로 자지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를 인기하여 지금 바로 존재하게 하니, 이를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아 안식과 이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71. 71)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근본 4정려를 닦아 그 힘에 의해 획득된 것을 말하며(前項에서 논설한 ‘수소성의 능화심’ 참조), 태어나면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부동업(不動業)을 닦아 색계천에 태어나 획득된 것을 말한다.
  72. 72)장신보 즉 ‘주장신(主藏臣, grihapati)이라는 보배’는 전륜왕이 갖는 7보(寶) 중의 하나로, 인취에 있으면서 뛰어난 업력으로 인해 먼 곳의 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칭우(稱友)에 의하면, 곳간을 지키는 자.(본론 제17권 주44 참조)
  73. 73)천안은 색을 보기 위한 목적에서 화작된 것이므로 언제든 반드시 식(識)과 함께 하여 동분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동분’이란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일반성 내지 보편성으로서의 동분(불상응행법의 하나)이 아니라, 근(根)ㆍ경(境)ㆍ식(識)이 다 같이[同] 자신의 작용[分]을 갖고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를 말한다.(본론 제6권 ‘同分ㆍ彼同分 분별’ 참조)
  74. 74)‘가는 것의 세 가지’에 대해서는 전술한 ‘특히 신경통에 대하여’에서 논설하였다.
  75. 75)『대비바사론』 제101권(대정장27,p.521중)에 의하면, 인취는 생처득지(生處得智)를 지닐 만한 바탕[田]이나 그릇[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인취가 갖는 뛰어난 도상지(覩相智, 즉 視覺智)와 문어지(聞語智, 즉 聽覺智) 등에 의해 그것이 은폐 손상[覆損]되었기 때문이며, 타심지와 원지(願智) 등에 의해 가려지고 덮여[映蔽] 버렸기 때문이다. 동 제12권(동,p.60하)에도 동일한 기사가 인용되고 있다.
  76. 76)『대비바사론』 제101권(대정장27,p.521하~522상)에 의하면, “옛날 도제나(刀提那)라는 이름의 범지였던 나음(那音)이라는 개가 과거생의 일을 기억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그로 하여금 평상에 올라 밥을 먹고 [감추어둔] 보물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의 말대로 하였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중아함경』 제44권 「앵무경(鸚鵡經)」(대정장1,p.703하 이하)에 나온다. 부처님께서 밥을 빌기 위해 도제(都提)의 아들(Todeyya putta) 앵무마납(鸚鵡摩納)의 집에 들르자 평상 위에서 밥을 먹던 개(白拘)가 짖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전(전생)에는 잘 따르더니 이제는 짖는구나”하고 꾸짖자 그 개는 평상에서 내려와 시름에 잠겨 누워 있었다. 그 후 앵무마납이 이를 따지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가자 그 개는 전생에 마납의 아비로서,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 개에게 다시 평상에 올라 밥을 먹고 전생에 그가 감추어둔 보물창고를 보여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77. 77)이 게송은 『대비바사론』 제12권(대정장27,p.60상); 동 제101권(동,p.522상)에도 인용되고 있다.
  78. 78)이 게송은 『대비바사론』 제12권(대정장27,p.60하); 동 제101권(동,p.522상)에도 인용되고 있다. 서다림(Jetavana)은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음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