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302_a_01L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 서문
028_0302_a_01L阿毘曇心論經序


지금 아비담심(阿毘曇心:大法心)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문】해석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옛날 논사(論師)들이 이미 ‘아비담심’을 해석하여 제자들에게 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꼭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답】그렇지 않다. 꼭 해석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전 논사들이 비록 ‘아비담심’을 해석하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 넓고 간략하여 저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헷갈리고 번거로워서 애를 써 봐도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나는 지금 넓고 간략함을 떠나서 오직 수다라(修多羅)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꼭 해석해야만 한다.
028_0302_a_02L今欲解釋阿毘曇心利益弟子故不須解釋所以者何古昔論師已釋阿毘曇心利益弟子故不須釋不然應須解釋所以者何古昔論師雖釋阿毘曇心太廣太略彼未學者迷惑煩勞無由能取我今離於廣但光顯修多羅自性是故須釋
【문】무엇 때문에 ‘아비담심’을 해석하면 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답】그 가운데는 이미 전도(顚倒)되지 아니한 법상(法相)을 설법하고 있으므로 전도되지 아니한 법의 모습을 풀이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허물과 악(惡)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공덕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가장 용맹하고 최상의 진리를 지닌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028_0302_a_09L何故釋阿毘曇心利益弟子耶彼中已說不顚倒法相釋不顚倒法相令彼覺悟眞實是故離諸過惡生諸功德得勇猛第一義利
【문】만약 그와 같다면, 그 뜻에 따라 해석하시는 것입니까?
【답】내가 마땅히 해석하겠다. 다만 여러 스님들이 논(論)을 만들면서 길(吉)한 것을 첫 번째로 논하였는데 모든 길한 것 가운데 가장 길한 것은 삼보(三寶)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삼보 가운데 일부분의 공덕을 밝히고자 하여, 이 논(論)의 첫머리에 우선 이 게송(偈頌)을 설명한 것이다.
028_0302_a_13L問曰如是者隨意解釋答曰我當解釋諸師造論以吉爲初一切吉中三寶最勝是故本師爲顯三寶少分功德於論初先說此偈


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 제1권
028_0302_a_17L阿毘曇心論經卷第一


법승(法勝) 지음
우바선다(優波扇多) 해석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 한역
028_0302_a_18L法勝論 大德優波扇多釋
高齊天竺三藏那連提耶舍譯 六卷成部


1. 계품(界品)
028_0302_a_20L界品第一

먼저 가장 뛰어난 뜨거운 번뇌에서 벗어나
풍부한 이익 주는 말씀에 머리 땅에 닿게 절하옵니다.
그 말씀들은 서로 응하여
아라한이 보는 실상(實相)들과 동등합니다.
028_0302_a_21L前頂禮最勝
離熱饒益言
彼言說相應
羅漢見實等
028_0302_b_02L
이 게송에서 ‘전(前)’이라 한 것은 먼저[先]라는 뜻이다. ‘정례(頂禮)’라고 한 것은 청정한 믿음으로 몸을 굽혀 절하는 것을 말한다.
‘최승(最勝)’이라 한 것은 세존께서는 응공자(應供者), 즉 아라한ㆍ보살들이 공양을 드리는 분이며 또한 모든 법 가운데 뛰어난 까닭에 ‘최승’이라 표현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모든 법, 모든 종류에서 자유자재한 경지를 얻으신 까닭에 ‘최승’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028_0302_b_02L前者先也頂禮者淨信曲躬禮也勝者世尊爲應供者之所供養又於一切法中勝故名最勝復次世尊於一切法於一切種而得自在故名最
‘이열(離熱)’이라고 한 것은 불타는 세계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즉 번뇌의 뜨거운 기운은 능히 몸과 마음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번뇌에서 벗어나신 까닭에 ‘이열’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스스로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이 성취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게송을 지은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이익되게 함이 만족된 경지임을 밝힌 것이다. 다음 ‘요익(饒益)’이라고 말한 것은 이익이 많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능히 모든 중생들에게 풍요한 이익이 될 수 있다. 또한 풍요한 이익이라 하는 것은 안온(安穩) 즉 평온무사한 것을 말한다. 평온하고 무사하다는 것과 풍요한 이익이라는 것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되게 하시는 것이 만족함을 밝힌 말이다.
이 한 구절은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자신에게도 이익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되게 하시는 공덕이 만족되었음을 대략 설명한 구절이다. 저 두 가지 부처님의 공덕은 다 같이 구경(究竟)의 경지에서 지으신 공덕이다. 그런 까닭에 공양에 응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인 것이다.
028_0302_b_07L離熱者離燒義也謂煩惱熱能燒身心世尊離彼故名離熱此是自己智斷成就彼師如是說者彰於如來自利滿足次說饒益言者世尊言說能饒益一切衆生饒益者謂安隱也安隱饒益一義異名此彰世尊利他滿足此略說天人師自利利他功德滿足彼二種世尊等作究竟是故應供中勝
‘그 말씀은 상응한다[彼言說相應]’라고 한 것은 도리의 내용이 뚜렷이 나타난 것이 이와 같은 공덕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인간 세계의 스승의 말씀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에 절하고 공경하는 것은 곧 법보(法寶)에 절하고 공경하는 일이다.
다음 ‘아라한이 보는 실상과 같다[羅漢見實等]’라고 한 것은, 마땅히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 아수라의 세계의 공양을 받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아라한이라 부른다. 이 아라한이란 무학(無學) 즉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다음 ‘실상(實相)’이라 말한 것은 사성제(四聖諦)를 말한 것이다. 더 배울 것이 있는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갖는 견해를 그는 실상을 봄[見實]이라 표현한 것이며, 이것은 오직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의 경우를 말한 것이나 이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나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 평등한 최상의 경지에 이른 스님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절하고 공경하는 것이란 승보(僧寶)에 절하고 공경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028_0302_b_15L彼言說相應者謂道理義示相應如是功德相應天人師語敬此者名禮法寶羅漢見實等者受天阿修羅等供養故名阿羅漢此說無學實者謂四聖諦以學見者彼名見實此唯說學此學無學等謂第一義僧禮敬此者名禮僧寶
【문】무엇 때문에 절하고 공경하는가?
028_0302_b_21L何故禮敬

【답】
부처님께서 각혜(覺慧)의 눈을 열어
만약 모든 법문의 수많은 것을 안다면
또한 그들을 위하여 뚜렷이 나타내신다.
나는 지금 그 가운데 일부분을 말하고 있다.
028_0302_b_22L答曰
佛開覺慧眼
若知諸法衆
亦爲他顯現
我今說少分
028_0302_c_02L
이 게송에서 ‘불(佛)’이라 한 것은 모든 법을 알고 모든 종류를 아는 까닭에 부처님이라고 한 것이다. ‘각혜의 눈을 열었다’고 한 것은 무애지(無礙智), 즉 막힘없는 지혜의 눈이라는 뜻이다.
‘약(若)’이라 한 것은 같다는 뜻이니 부처님이 설법하신것과 같고 부처님이 밝히신 내용과 같고 부처님이 베푸시고 부처님이 풀이하신 법과 같다는 것이다.
‘지(知)’라고 한 것은 해득한다는 뜻이며 ‘법(法)’이라는 것은 간직한다는 뜻이니, 자성(自性)을 간직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인연을 짓는 까닭에 이것을 법이라 표현한 것이다.
법에는 쌓이고 모이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법중(法衆)’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 법중이란 말과 ‘군취(群聚)’, 즉 무리 지어 모여든다는 말과는 같은 내용으로서 표현이 다를 뿐이다.
028_0302_b_24L佛者知一切法知一切種故名爲佛開覺慧眼者謂無㝵智眼義也若者若佛所說所顯所宣所釋法也知者解也法者持也持於自性爲他作緣故名爲法法有積聚故名法衆法衆群聚一義異名
다음 ‘역시 그들을 위하여 뚜렷이 나타내신다’라고 한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면 세간을 이롭게 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뚜렷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혹 깨달아 안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승섭바림경(昇攝波林經)’의 설법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지금 일부분을 말한다[我今說少分]’라고 한 것은 ‘저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서 나는 지금 다만 일부분의 법 모습만을 말하는 것이며 어찌 이와 같은 내용을 모두 다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뜻을 말한 것이다.
028_0302_c_07L亦爲他顯現者自覺知己利世閒故爲他顯示或有覺知不爲他說如『昇攝波林經』說我今說少分者於彼佛說法中我今但說少分法相豈能盡說如是義已
【문】어떤 법문이 부처님이 설법하신 법문이며 논하고자 하시는 법문인가?
【답】이른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ㆍ유번뇌(有煩惱)와 무번뇌ㆍ수(受)와 음(陰)ㆍ유쟁(有諍)과 무쟁(無諍)ㆍ색(色)과 무색(無色) 등을 내 이제 설명하려 한다.
028_0302_c_11L問曰法是佛所說而欲說耶答曰所謂有漏無漏有煩惱無煩惱受蔭有諍無色無色等我今當說

모든 유루(有漏)의 행(行)은
아(我)ㆍ낙(樂)ㆍ상(常)ㆍ정(淨)에서 벗어난 것
이것을 아덕(我德) 등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유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세.
028_0302_c_14L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
此受於我等
不見有漏故

이 게송에서 ‘모든 번뇌의 침입이 있는 행위는 아ㆍ락ㆍ상ㆍ정의 네 가지 공덕에서 벗어난 것이다[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의 침입이 있는 행위는 아덕(我德:自在我)에서 벗어나고 낙덕(樂德)에서 벗어나고 상덕(常德)에서 벗어나고 정덕(淨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들 세간 가운데서는 실상을 관찰할 수 없고 무명(無明)이 덮여져서 지혜를 어둡게 하여 이 상ㆍ락ㆍ아ㆍ정의 네 가지 법문에서 사실을 거꾸로 보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사전도(四顚倒), 즉 네 가지의 거꾸로 된 망상(妄想)이라 부르는 것이다.
028_0302_c_16L一切有漏行離我樂常淨者諸有漏離我離樂離常離淨彼中世閒不能觀察無明覆障闇智於此四門顚倒而見故名顚倒
【문】무슨 인연 때문에 유루(有漏)의 행이 아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됩니까?
【답】자재아(自在我), 즉 어떤 속박도 자유도 없기 때문이며 또 그런 행위는 인연에 속하는 행위인 까닭에 이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기는 행위이며 나의 자성(自性:타고난 고유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자재아(自在我)’라고 헤아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에 예속되지 아니한 존재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나’라는 존재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나의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고 아자재(我自在)의 인(因)이 없는 까닭에 모든 행위가 아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028_0302_c_20L問曰何因故知諸有漏行離於我耶答曰我事無故屬因緣故行名爲他非我自性計我者說我不屬他除此更無是故我性不可得無我因故諸行離我
028_0303_a_02L【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낙덕(樂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핍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행위는 고통이며 자성(自性)도 또한 고통의 인연이다. 그런 까닭에 핍박을 당한다. 이 핍박당하는 것을 고통이라 말하며 그런 까닭에 이것은 낙덕(樂德), 즉 즐거움에서 벗어난 것이다.
【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상덕(常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모든 행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것을 보니, 영구불변한 것을 보는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상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된다.
028_0302_c_24L問曰因故知諸行離樂答曰作逼迫故有漏行是苦自性亦是苦緣是故逼逼迫名苦是故離樂問曰何因故知諸行離常答曰以生滅故現見諸行生而卽滅無見常者是故離常
【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정덕(淨德)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답】오염된 일이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일은 번뇌 경계 속의 일이며 이것은 더럽고 오염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정덕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이와 같이 모든 행이 아덕(我德) 등 사덕(四德)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왜 세간 사람들은 이것을 아덕 등 사덕이라고 취하게 됩니까?
【답】이것을 아덕(我德) 등 사덕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유루(有漏)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행을 실상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간 사람들은 실상을 관찰할 수 없어서 그것을 아덕 등으로 알고 있다.
028_0303_a_06L何因故知諸有漏行離於淨耶污染事故諸有漏事煩惱境界淨污染是故離淨問曰如是諸行離於我等世閒何故取我等耶答曰受於我等不見有漏故諸有漏行不如實見世閒不能觀察作我等解
마치 원수진 사람이 악한 욕망을 숨겨 놓고 거짓 아름다운 말을 하며 집안을 노닐고 다니면서 사실은 친한 벗이 아닌데도 친한 벗인 것처럼 알게 하는 것과 같다.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아만(我慢)이 마음을 덮고 있는 까닭에 자재아(自在我)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현재 나타나는 행위 등으로 업을 짓고 그것 때문에 헷갈려서 아자재(我自在)가 없는 일 가운데서 아자재라고 보고 그 견해로 덮어씨워진 고통스러운 일을 상대적으로 다스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일상생활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에서 그것이 낙(樂)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고통과 수음(受陰) 가운데서 그것을 즐거움[樂]이라고 알고 있다. 엇비슷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서 무상(無常)한 일을 덮게 되고 저 현실로 보이는 색(色)이 엇비슷하게 이어지는 것을 보고 숙세(宿世)의 일을 기억하며 경론을 읽고 외우게 된다. 그런 까닭에 무상한 행 가운데 있으면서 그것이 상(常), 즉 영구불변이라고 알게 된다
028_0303_a_12L如怨家匿藏惡欲詐出美言遊行家實非親友作親友解我我所覆故不見無我是故現見行等作業以迷惑故無我事中而見於我對治覆苦事故於行住等想謂爲樂故於苦受陰中而作樂解相似相續覆無常事彼現見色相似相續記憶宿事誦持經論故於無常行中而作常解
또한 피부가 몸 안의 모든 더러운 일을 덮고 있는 까닭에 그들은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치아 등에서 잠깐동안 청정한 것을 보고는 더러운 가운데 존재하면서 그것이 청정하다는 알음알이를 짓게 된다.
이런 사람은 비록 똥오줌을 보고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거기에서 헷갈린 생각이 생겨 ‘이것은 비록 더럽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아마도 청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더러운 들개[野干]가 긴숙가(緊叔迦) 꽃을 보는 것과 같다.
028_0303_a_20L皮色覆於不淨事故彼於髮毛爪齒處等少時見淨於不淨中而作淨解雖見屎尿雖復不淨猶生迷惑此雖不淨餘者應淨猶如野干看緊叔迦華
028_0303_b_02L【문】무엇 때문에 이 논의 첫머리에 먼저 전도(顚倒)부터 말했는가?
【답】전도가 아닌 법의 모양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전도에 대한 것을 말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써 안온히 쉽게 알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의 첫머리에 먼저 전도에 대한 것부터 말한 것이다.
【문】다만 이 아덕(我德) 등 사덕(四德)에서 벗어나는 일만 있는 것입니까? 모든 유루(有漏)의 법문에는 또 다른 일도 있는 것입니까?
【답】또 다른 일도 있다.
028_0303_a_24L何故論初先說顚倒答曰爲知不顚倒法相故我先已說欲令弟子解眞實故以不顚倒心安隱易解是故論初先說顚倒問曰爲當但有此離我等諸有漏法更有餘耶答曰更有

만약 번뇌 생기는 곳에 처하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라고 하시네.
그 누(漏)라는 표현 때문에
지혜있는 사람은 번뇌라 말하네.
028_0303_b_06L若處生煩惱
是聖說有漏
以彼漏名故
慧者說煩惱

이 게송에서 ‘만약 번뇌가 생기는 곳에 있으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有漏)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이건 모여 있는 곳이건 인연 지은 곳이건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건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사람이건 살아 있는 몸으로 보는 등등의 번뇌를 법문에서는 유루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문】왜 그렇습니까?
【답】그의 ‘누(漏)’, 즉 ‘샌다’는 표현 때문에 지혜있는 사람은 그것을 번뇌라 말한다. 번뇌의 실체를 관찰하여 ‘누’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법문은 번뇌에서 생기는 법문이며 누(漏)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유루(有漏)’라고 표현한 것이다. 가령 공포심이 있는 길이나 독이 든 음식 등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하여야 한다. 만약 어떤 일이 누(漏)에 속한다면 이 누에 포함되는 것은 그것을 유루라 부른다. 여기서 무루(無漏)에 연유해서 생기는 번뇌를 말할 경우 그것은 무루의 법이 번뇌에 예속되어 번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무루의 법은 오직 인연으로 번뇌가 생긴다.
028_0303_b_08L若處生煩惱是聖說有漏者若依若緣若衆生數非衆生數生身見等煩惱是法說有漏問曰何故答曰以彼漏名故慧者說煩惱觀察煩惱爲作漏名故以彼法生於煩惱依漏起故名爲有漏如有怖道有毒食等應如是說若事屬漏爲漏所攝彼名有漏此說無漏緣生煩惱非無漏法屬於煩惱爲煩惱攝無漏法但緣生煩惱
【문】루(漏)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답】유정천(有頂天:欲界의 最上部)에서부터 아래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육입(六入:六根ㆍ六境의 感受作用)이라는 부스럼이 스며든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누(漏)라고 표현하였고 이는 마치 신체에 부스럼이 스며드는 것과 같다. 또한 생사의 윤회에 계속 남아 머물게 되는 까닭에 누라고 표현한 것이다.
【문】이것에 관하여 또 다른 표현도 있습니까?
【답】또 다른 표현도 있다.
028_0303_b_18L問曰漏義云何答曰從有頂下至無閒獄於其中閒六入瘡漏是故名漏猶如瘡漏又留住生死故名爲問曰此更有名耶答曰更有

또한 유번뇌(有煩惱)라 부르며
취음(取蔭)ㆍ유쟁(有諍)이라고도 부른다.
번뇌를 취하고 말다툼이 생기는 까닭에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말한다.
028_0303_b_21L亦名有煩惱
取蔭及有諍
煩取諍生故
知彼自性說
028_0303_c_02L
이 게송에서 ‘유번뇌라고도 하고 취음ㆍ유쟁이라고도 한다’고 한 것은 곧 유루의 법을 말한 것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유번뇌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취음(取蔭)이라 부르기도 하고 유쟁(有諍)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뜻이다.
【문】왜 그것을 여러 가지 명칭으로 표현합니까?
【답】번뇌를 취하면 다툼이 생기기 때문에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말한 것이다.
모든 번뇌와 취하는 욕망과 말다툼의 모순 등은 모두가 유루의 또 다른 호칭이며 번뇌를 따라 그것이 생기고 거기에서 또 다른 번뇌가 생기는 까닭에 이를 유번뇌(有煩惱)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엇을 취하려는 욕망에서도 그것이 생기며 거기에서 또 다른 취하려는 욕망이 생기는 까닭에 이를 유취(有取)라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말다툼의 여지가 있는 모순에서도 그것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모순이 생기는 까닭에 이것을 유쟁(有諍)이라 표현한 것이다.
028_0303_b_23L亦名有煩惱取蔭及有諍者是有漏亦名有煩惱亦名取蔭亦名有諍問曰何故彼諸名說答曰煩取諍生故知彼自性說諸煩惱諍等漏之異名從煩惱生彼亦生煩惱故名有煩惱如是從取生彼亦生取故名有從諍生彼亦生諍故名有諍
【문】여기서 ‘음(蔭:五蘊)’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취음(取蔭)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은 곧 취음이 아닌 또 다른 오음(五陰)이 있는 것입니까?
【답】만약 오음을 취할 경우 그것이 곧 음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취음이 아닌 것도 존재할 수 있다.
【문】어떤 것이 ‘음’입니까?
028_0303_c_07L問曰是蔭世尊所說爲取蔭卽是蔭爲離取蔭別有蔭耶答曰若取蔭者彼卽是蔭或有蔭而非取蔭問曰何者是耶

【답】
만약 행(行)이 번뇌를 벗어나면
이는 무루(無漏)의 음이다.
또 그 이전에도 취음이 있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말씀하신 음이니라.
028_0303_c_10L答曰
若行離煩惱
此是無漏蔭
及前有取蔭
是蔭聖所說

여기서 ‘만약 행이 번뇌를 벗어나면 이것이 곧 무루의 음’이라 한 것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즉 두 가지의 음(蔭)이 있으니, 무루의 음과 유루의 음이 그것이다. 만약 행(行)이 신견(身見) 등의 번뇌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을 무루라 부르며 이 음은 취음(取蔭)이 아니다.
‘또한 전에 존재하던 취음은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음이다’라고 한 것은 만약 이 무루의 음과 앞에서 말한 취음을 합쳐서 음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곧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028_0303_c_13L若行離煩惱此是無漏蔭者此蔭更有餘說有二種蔭無漏有漏若行離身見等煩惱是名無漏是蔭非取蔭及前有取蔭是蔭聖所說者若此無漏蔭及前所說取蔭合說爲蔭謂色等五蔭
028_0304_a_02L【문】음이란 뜻은 무엇입니까?
【답】모여든다[聚]는 뜻이 곧 음의 뜻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음이란 다만 가명(假名)일 따름이며 실제의 일은 없습니까? 비단 한 물건이 아니라서 모여든다[聚]는 호칭이 생긴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 물건이 섞여서 합쳐지는 까닭에 취(聚)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까?
【답】비단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일도 있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곧 상대적인 형상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음에는 형상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의 모습[礙相]과 같다’고 한 것은 곧 색음(色蔭) 등 오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는 일과 경계 등에 포함되는 지혜와 인식작용 등의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성제(四聖諦)가 존재하는 까닭에 음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일이 있으며 비단 가명(假名)만은 아니다.
【문】음은 십이입(十二入)과 십팔계(十八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028_0303_c_19L問曰蔭義云何答曰聚義是蔭義問曰若如是者蔭但假名無有實事非但一物得有聚名和合故名答曰非但有相亦有實事有此事便有彼相故蔭有相如佛所說㝵相是色蔭等是故有事界等所攝智識使等境界如四聖諦故蔭有事但假名問曰入等有何差別

【답】
열 가지를 색음(色蔭)이라 말하며
또한 무교색(無敎色)1)이라 부른다.
이 색음을 분별한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이다.
028_0304_a_03L答曰
十種謂色入
亦名無教色
是分別色蔭
世尊之所說

색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색이 있고 두 번째는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것이 아닌 색이 있다.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색이라 하는 것은 열 가지 색이 눈에 들어오고 나아가 몸으로 감촉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것이 아닌 색이라 하는 것은 무교색(無敎色)이라 부르며 이는 법(法)에 들어가 거기에 포함되는 색이니 거기에 관해서는 업품(業品)에서 마땅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들 모든 색음(色蔭)은 서로 상대방의 색음작용 속에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색음 때문에 이것이 저것과 접촉하게 되고 저것이 이것과 접촉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색이라 부르는 것이며 이것으로 저것을 괴롭히고 저것으로 이것을 괴롭힌다는 것이 곧 이러한 뜻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령 손 등이 어떤 물건에 닿으면 부딪치는 까닭에 이를 색이라 표현한다.
028_0304_a_06L色有二種一者微塵積聚色二者非微塵積聚色微塵積聚色者謂十色眼乃至觸非微塵積聚色者名無教色法入所攝彼業品當說此等一切是色蔭相入色蔭數佛說爲色蔭以此觸彼以彼觸此是故名色以此惱彼以彼惱此義也如佛所說如手等觸觸故名色
【문】만약 그렇다면 무교색(無敎色)을 제외한 저 열 가지 색이라 하는 것은 색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손 등이 부딪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이유는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 생각에 만약 ‘의지한 것은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색도 역시 감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에 허물이 없다라고 한다면 수(受) 등도 역시 색 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대의 생각에 만약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사대(四大)는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감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마땅히 말하겠다. 현재 눈으로 보고 필요로 하여 공업(功業)에 얽힌 일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진흙으로 소상(塑像)을 만들거나 만약 이와 같다면 느낌[受]으로 생기는 마음의 작용도 역시 마땅히 색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대의 주장에는 잘못이 있다. 그러한 것들도 역시 눈 등 모든 기관(器官)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도 역시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에 색이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028_0304_a_14L問曰若如是者除無教色彼非是色何以故非手等可觸以無對故汝意若謂以所依者是可觸故彼亦是可觸故無過者受等亦應是色汝意若謂彼所依四大是可觸故彼亦是可觸者我當說言現見所須作功業事作畫作泥若如是者受等心數亦應是色故汝有過彼等亦依眼等諸根彼亦應是可觸
028_0304_b_02L【답】비단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 뿐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 아닌, 가령 눈이나 귀 등 육근(六根)에 의지하여 생기는 색의 경우 진주(眞珠)의 광채가 진주에 근거하듯 그러한 색이 생길 때는 눈이나 귀 등이 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눈 등 육근도 그것이 감촉하는 것이기는 하나 감촉은 아니다. 또한 색을 만드는 것은 사대(四大)에 근거하니 이는 광채가 구슬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까닭에 사대는 감촉하는 것이므로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색도 감촉하는 것에 속한다.
028_0304_a_22L答曰非但生心心數因非心心數依眼等如光依珠彼生時眼等作因如是眼等是觸彼非觸也復次造色依大如光依珠是故大是觸故彼亦是觸
【문】비록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대의 모습은 오히려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과거와 미래의 미세한 먼지로 이루어진 색이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답】모습은 무너뜨릴 수 없다. 과거의 색과 감촉은 이미 소멸하였고 미래의 색도 역시 이와 같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미세한 먼지도 역시 감촉할 수 있는 색이지만 그것이 미세하기 때문에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색은 모두 감촉할 수 있는 것이다.
028_0304_b_03L問曰雖如是說汝相猶自不成何以除過去未來微塵色故答曰相不可壞過去色觸已滅未來色亦如是相生如是微塵亦是可觸以微細故不可得知是故一切諸色皆是可觸

이름하여 식음(識蔭)이라 하는 것은
이는 의입(意入)을 말한 것일세.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도
역시 칠계(七界)라 말한다네.
028_0304_b_08L所名爲識蔭
是說爲意入
於十八界中
亦說爲七界

식음이라 하는 것은 육식(六識)을 지닌 몸을 말한다. 이것은 십이입(十二入) 가운데 의입(意入)을 말하며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는 따로 나누어 일곱 가지의 심계(心界)로 나누고 있다.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식계(舌識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식계(意識界)ㆍ의계(意界) 등 일곱 가지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식(識)이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연유한 곳을 아는 까닭에 식이라 이름지었으며 능히 인연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028_0304_b_10L識蔭者謂六識身是十二入中說爲意入於十八界中分別爲七心界識界耳識界鼻識界舌識界身識界意識界意界等識者能知於緣故名爲識識者能取緣義也

이 밖에 세 가지 음(蔭)이 있으니
무교(無敎)의 세 가지 무위(無爲)이다.
이를 법입(法入)이라 말하는데
그것도 역시 법계에 속한다네.
028_0304_b_15L餘則有三蔭
無教三無爲
是說爲法入
彼亦是法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느낌[受], 즉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 등 모든 법문을 통틀어 하나로 하여 법입으로 삼는 것이며 십팔계 가운데서는 한 법계(法界)에 속한다. 저쪽에서 입(入)이라 한 뜻은 큰 문(門)이란 뜻을 담고 있으나, 여기서 입이라 하는 뜻은 창문[窓]의 내용을 담고 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곧 “바라문이여, 눈을 문으로 삼아 나아가 색까지도 보느니라”라고 하였다.
‘입(入)’이란 글자의 뜻은 곧 옮긴다[輸]는 뜻이니, 능히 마음과 마음으로 작용하는 법을 불어나고 자라나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계(界)’의 뜻은 성품[性]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주사계(朱砂界)ㆍ웅황계(雄黃界)라 할 경우 여기서의 계(界)의 뜻은 그 경계가 지닌 본질을 말한다. 계(界)라는 글자의 뜻은 능히 스스로의 모습을 간직하여 다른 것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계(界)라고 이름한 것이다.
028_0304_b_17L如前所說受等諸法摠爲一法入八界中爲一法界彼入義者門義入義如窗牖如佛所說婆羅門眼爲門乃至見色入字義者是輸義也增長心心數法以是義故名之爲入界義者性義是界義如朱砂界雄黃界等界字義者能持自相與他作緣是故名界
028_0304_c_02L이 계에 속하는 일이 열일곱 가지가 있으며 혹 경우에 따라서는 열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왜냐 하면, 육식(六識)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또 다른 의계(意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십칠계(十七界)가 곧 육식의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차례차례로 옮겨 가면서 서로 이어져서 의계(意界)가 되는 것이니, 비유하면 아비와 아들과의 관계와 같다. 아비가 있을 때는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만 세대가 바뀌면 서로 이어져서 차례로 아들이 아비가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의계를 제외하고 다시 다른 육식계(六識界)는 없다. 그런 까닭에 열두 가지의 근거와 거기에 의지하는 것에 인연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십팔계(十八界)가 존재하게 된다. 그 계(界)와 입(入) 등의 일에 모든 법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음(蔭)이라 하는 것은 오직 유위(有爲)의 존재인 것이다.
028_0304_c_02L是界事有十七或復十二何以故除六識界更無意界是故十七卽六識身展轉相續名爲意界父子名子展轉相續次第名父如是除意界外無別六識界是故十二;依及依者緣差別故故有十八彼界事等攝一切法故彼蔭一向但是有
【문】음(蔭) 가운데는 왜 무위(無爲)가 포함되지 아니하는가?
【답】음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음의 모습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공통적인 모습과 개별적인 모습이다. 공통적인 모습이라 하는 것은 모인다는 뜻이니 이것은 음의 내용이며 또한 무상(無常) 등의 내용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모습이라 하는 것은 색ㆍ장애물 등이 그것이다. 이 두 종류의 모습은 무위(無爲)에는 없다. 그런 까닭에 무위는 오음에 속하지 아니한다. 그밖에 또 무슨 내용이 있는가? 즉 전도(顚倒)와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무위’는 전도된 일이 아니며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도 아니다. 전도된 일이 있는 까닭에 취ㆍ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 때문에 무루음(無漏蔭)을 말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오음에는 무위가 포함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오음ㆍ십이입ㆍ십팔계의 범위는 가장 넓다. 그런 까닭에 이 십팔계에 세워지는 갖가지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028_0304_c_09L問曰蔭中何故不攝無爲答曰蔭相故二種蔭相共相別相共相者聚義是蔭義及無常等別相者色㝵是二種相無爲中無是故不攝無餘更有何義謂非顚倒事及斷方便無爲非顚倒事及斷顚倒方便倒事故說取蔭爲斷顚倒方便故說無漏蔭是故蔭中不攝無爲如是說入境界最廣故建立於界欲說種種義故如是說

십팔계 가운데 하나는 볼 수 있고
십계는 상대가 있다고 말하나
팔계는 무기(無記:非善非惡)라고 말하고
나머지는 선(善)이거나 혹은 선이 아니다.
028_0304_c_18L界中一可見
十界說有對
八界是無記
餘則善不善
028_0305_a_02L
‘십팔계 중에 하나는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당장 한 경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색계(色界)가 그것이다. 왜 그런가? 색계는 눈으로 인식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쪽도 보여줄 수 있고 저쪽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인 것이다. 나머지 십칠계는 결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십계는 상대가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십팔계 가운데 다섯 가지의 몸 내부의 경계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다섯 가지 경계와 또 다섯 가지 외부의 경계 즉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 다섯 가지 경계 등을 합하여 열 가지 경계에는 서로 상대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028_0304_c_20L界中一可見者十八界中當知一界可見所謂色界何以故是眼識境界是故可見復次可示此示彼是故可見餘十七種定不可見十界說有對者十八界中五內界謂眼五外界謂色是等十界說有對
여기에는 세 종류의 상대성이 있다. 즉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상대가 있게 되고 경계에 상대가 있고 인연에 상대가 있는 것이다.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상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손에 오른손, 왼손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 경계에 상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육근(六根)과 육진(六塵) 즉 여섯 가지 육근의 대상경계가 상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다음 인연에 상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법문에서 의식(意識)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장애물이 되는데 상대가 있다’는 점만 취하여 설명한다면 열 가지 경계가 다시 서로 바뀌어 가며 다른 경계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저 모든 열 가지의 경계는 다시 서로 바뀌어 가며 상대를 이루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그 경계는 불어나고 자라나지 아니할 것임은 구마라다(鳩摩羅多) 스님이 설명한 것과 같다. 가령 어떤 마음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이 다른 마음에게도 장애물이 되는 것이니, 이 마음에 상대가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과 어긋날 경우에는 상대성은 없다.
028_0305_a_04L三種有對所謂障㝵有對界有對緣有對障㝵有對者如手左右手相對境界有對者謂根與境界相對緣有對者意識於一切法此中唯取障㝵有對更相障㝵故名有對彼一切十種界更互相對若不爾者彼不增長如上座鳩摩羅多說若心欲起時爲他所障㝵當知是有對違是無對
나머지 여덟 가지 경계는 결정코 상대성이 없다.
‘여덟 가지 경계는 곧 무기(無記)이다’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팔계는 선(善)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임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이른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냄새ㆍ맛ㆍ촉감 등 여덟 가지 경계가 여기에 속하는데 거기에는 사랑이 없고 기록할 만한 사랑의 결과도 없기 때문에 ‘무기’라 한 것이다.
‘나머지는 선이거나 또는 선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나머지 열 가지 경계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인 경우와 또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색과 소리의 경계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업(業)이 지어진다.
이 업은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선한 마음이나 악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업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경계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이다.
028_0305_a_12L餘八界定無對八界是無記者十八界中當知八界是無記謂眼彼無愛不愛果可記是故無記餘則善不善者十界說無記不善謂色聲界意作是善不善何以故從善不善心起故餘者是無記
028_0305_b_02L 즉 안식(眼識) 등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는 곧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며 무기인 경우도 있으니, 이 마음과 서로 호응하는 법계도 선ㆍ악ㆍ무기요, 또한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도 곧 선ㆍ악ㆍ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자성(自性)과 상응하는 경계도 역시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며 무기인 경우도 있다.
그 자성이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즉 뉘우치고 부끄러워하고 탐내지 아니하는 등 세 가지 선한 근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 자성과 서로 호응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더불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과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이 선하지 아니하다[不善]라고 하는 것은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고 탐내는 마음 등 세 가지 선하지 못한 뿌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과 상응하는 악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과 더불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일과 서로 어긋날 경우 그것은 무기(無記)에 속한다. 상응하지 아니하는 법계에 관해서는 잡품(雜品)에서 마땅히 설명하겠다.
028_0305_a_18L眼識等七心界不善無記心相應法界是善不善無記心數法界是自性相應善不善無記彼自性善者謂慚不貪等三善根相應善者與彼受等心數相應自性不善者謂無慚無愧貪等三不善根相應不善者與彼受等心數相與二相違是無記不相應法界品當說
무위법계(無爲法界)에서는 한 가지는 선에 속하고 두 가지는 무기에 속한다.
즉 ‘작용하는 인연’2)은 선에 속하고 허공 등과 같이 간택력으로 열반에 든 것이 아닌 것3)은 무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 선에 포함되는 사랑의 결과는 안온(安穩)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선(善)이라 표현한다. 이 선에 포함되는 것은 사제(四諦) 가운데서 도제(道諦)와 고제ㆍ집제의 일부분을 말한다. 즉 사랑의 과보라 하는 것은 고제와 집제의 일부분이며 ‘안온하다’라고 하는 것은 멸제(滅諦)에 해당한다.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경우에는 이를 선하지 못한 것이라 부르며 저 고제와 집제의 일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무기(無記)라 부른다. 기록할 만한 선과 악이 없기 때문에 무기라 부르며 기록할 만한 결과가 없기 때문에 역시 무기라 부르는 것이다.
028_0305_b_03L無爲中一善二無記數緣是虛空非數滅是無記於中善攝愛果安隱故名爲善善攝者謂道諦苦集諦少分愛果者謂苦集諦少分隱者謂滅諦相違名不善彼苦集諦少分除此名無記無善不善可記名無記;無果可記亦名無記

열다섯 경계는 결정코 유루(有漏)의 세계이며
나머지 두 경계는 삼계(三界)의 삼유(三有)이네.
욕유(欲有) 중에 네 가지 유루의 법이 있고
열한 가지 경계에 다른 이유(二有:色有ㆍ無色有)가 있다.
028_0305_b_09L十五定有漏
餘二三三有
欲有中有四
十一在二有

이 게송에서 ‘열다섯 경계는 결정코 유루의 경계’라고 한 것은 신체 내부의 다섯 가지 경계,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그 대상이 되는 외부의 다섯 가지 경계,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다섯 가지 인식작용[五識:眼識 等]의 경계, 이 열다섯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한결같이 유루(有漏)로 향하는 경계임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두 경계’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위에서 말한 열다섯 개의 경계 이외에 세 가지 경계가 있으니, 곧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경계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으니, 즉 유루(有漏)의 경계와 무루의 경계이다.
여기서 유루의 경계라 하는 것은 생멸하는 번뇌[生漏]와 공통적인 번뇌[共漏]가 서로 호응하여 적문(迹門:한정된 因緣으로 태어난 곳)의 생활에 만족하게 되는 까닭에 이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이것과 틀리는 경우 이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직 알지 못하는 욕망이나 지식의 뿌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모든 무루(無漏)의 뿌리에는 생멸의 법과 그것을 얻는 법, 또 세간을 벗어난 해탈에서 얻는 법, 그리고 무위(無爲)의 법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이 무루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
028_0305_b_11L十五定有漏者五內界五外界五識此十五界一向有漏餘二者餘有三界意界法界意識界等彼有二種有漏無漏有漏者生漏共漏相應滿足迹處故名有漏與此相違是名無略說未知欲知根等諸無漏根俱生法及彼得出世閒解脫得及無爲是無漏;餘是有漏
028_0305_c_02L다음 ‘삼계의 삼유’라고 한 것은 곧 이 삼계(三界:欲界ㆍ色界ㆍ無色界)의 세 가지 생존 형태[三有]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경계로서 냄새와 맛과 코의 인식작용과 혀의 인식작용, 이 네 가지 등은 한결같이 욕계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친 음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초월해 있는 색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 경계에 이유(二有)가 있다’고 한 것은 다섯 가지 내부의 경계[五內界:眼ㆍ耳ㆍ鼻ㆍ舌ㆍ身]와 세 가지 외부의 경계, 즉 색ㆍ소리ㆍ감촉의 경계와 그것과 연관된 세 가지 인식작용의 경계[三識界:眼識ㆍ耳識ㆍ身識] 등 이들 열한 가지 경계는 욕계와 색계에 존재하는 경계임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무색계의 무색이 아니기 때문에 색계와 욕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욕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이는 욕계에 얽매임[欲界繫]에 속하고 색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이는 색계의 얽매임에 속하고 무색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무색계의 얽매임이 된다.
028_0305_b_19L三三有者卽此三界於三有中可得欲有中有四者味鼻識舌識界等一向欲界攝彼非色界離摶食愛故十一在二有者內界色聲觸界及緣彼三識界此等十一在欲色界非無色界無色故爲欲界使所繫是欲界繫爲色界使所繫是色界繫爲無色界使所繫是無色界繫

각지(覺支)ㆍ관지(觀支) 있는 것이 다섯 가지 경계이고
세 가지에는 셋이 있고 나머지는 없다.
인연이 있는 경계가 일곱 가지임을 알라.
또한 법계의 일부분이니라.
028_0305_c_04L有覺有觀五
三種三餘無
有緣當知七
亦法界少分

여기서 ‘각지와 관지가 있는 것이 다섯 가지 경계’라고 한 것은 오식(五識)의 경계에는 모두 한결같이 각지ㆍ관지가 있어 이것이 각관(覺觀)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 ‘세 가지에는 셋이 있고 나머지는 없다’라고 한 것은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를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구별이 있으니, 즉 욕계(欲界)의 초선(初禪)의 경계까지는 각지도 있고 관지도 있다. 초선에서 이선(二禪)에 이르는 중간선(中間禪)에서는 각지(覺支:선정을 방해하는 거친 마음의 작용)는 없으나 관지(觀支)는 남아 있고 이선(二禪) 이상 유정천(有頂天)의 선정에 이르기까지는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다.
028_0305_c_06L有覺有觀五者五識界一向有覺有與覺觀相應義故三種三者意界法界意識界彼有三種欲界初禪有覺有觀中閒禪無覺有觀第二禪上乃至有頂無覺無觀
다음 법계(法界)에 각지와 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욕계에서 청정한 세계에 미치게 되면 각관(覺觀)에 의한 마음의 작용이 제거됨을 말하는 것이다.
법계에서 각지는 없고 관지만 있다고 하는 경우는 초선(初禪)에서 이선(二禪)에 이르는 중간 선정에서 관지(觀支)에 의한 마음의 작용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또 법계에서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다고 하는 경우는 이선 이상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를 말한다.
중간선에서는 모든 가르침이 없는 경지[一切無敎] 등을 비추어 보게 되며 이는 법계ㆍ욕계ㆍ범천(梵天) 세계의 관(觀)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며 이 세 가지 경계에는 포섭되지 아니한다. 만약 이것을 꼭 설명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관지도 없고 각지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028_0305_c_11L法界有覺有觀欲界及梵世除覺觀心數;法界無覺有觀者中閒禪除觀心數;法界無覺無觀者第二禪上乃至有頂心數法界中閒禪觀一切無教等不相應法界欲界梵世觀此三中不攝若欲說者應言無觀有覺
‘나머지는 없다’라고 한 것은 나머지 열 가지 경계에는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어서 그것이 각관과 서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인연이 있는 것이 일곱 가지임을 알라. 이 또한 법계의 일부분’이라 한 것은 일곱 가지 경계인 마음의 세계와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에는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인연이 있다[有緣]고 표현한 것이며 거기에는 취할 수 있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밖에도 인연이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손이 지팡이와 인연한다’라고 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러한 표현들은 세속에서 말하는 인연에 지나지 아니한다. 알지어다! 나머지 경계에서는 결정코 인연이 없다.
028_0305_c_17L餘無者餘十界無覺無觀彼與覺觀不相應故有緣當知七亦法界少分者七心界及心數法界是有緣有此緣故名爲有緣彼有境界可取故說有緣復有餘緣如手緣杖此等世俗言說當知餘定無緣

아홉 가지 경계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머지 두 경계는
유위(有爲)며 무위(無爲)의 경계가 하나씩 있고
한결같이 유위만 있는 것은
열일곱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05_c_23L九不受餘二
有爲無爲一
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
028_0306_a_02L
‘아홉 가지 경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아홉 가지 경계에서는 결정코 느낌[受]이 없다는 뜻으로 느낌이란, 색(色)이 뿌리[根]의 작용에 있다면 그 미치는 작용도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을 쪼개고 가르고 허물고 없앨 경우 그 가운데서 받아들인 것이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까닭에 다른 영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게 된다.
저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와 소리의 경계 및 법계 등 아홉 가지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경계[不受]’라고 부른다. 그곳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이 멈추고 머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306_a_02L九不受者九界決定不受受名若色在根數及不離根若割截殘壞心心數法於中受在中住故異則不受七心界聲界法界此等九界名爲不彼非心心數法止住處故
‘나머지 둘(餘二)’이라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서 나머지 아홉 가지의 경계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즉 다섯 가지 신체 내부의 경계[五內界]가 만약 현재 존재할 경우 그것은 받아들이는 세계[受]라 표현한다. 또 혹 이 현재의 인식[識] 작용이 비록 공(空)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것을 받아들이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 및 중생들의 작용이 아닌 세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세계[不受]라 부른다.
색과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 뿌리와 떨어지지 아니하고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받아들인다[受]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가령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이 그 가운데 멈추어 머물고 있을 경우에는 역시 그것은 다른 이름 즉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세계라 부른다.
028_0306_a_07L餘二者餘九界二種五內界若在現在名受或此現在識雖空亦名有受以彼種類衆生數攝故說爲受如是過去未來及非衆生數名爲不受色香味觸與根不相離在現在者名受如根中心心數法止住彼中亦爾;餘名不受
이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가령 어떤 법이 생겨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하고 중생들의 작용과 상대가 있어 끌고 올 수도 있고 밀고 갈 수도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受]라고 표현한다. 그 생겨나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것이란 과거는 제외된 것이며, 미래 중생의 작용이란 현재에는 제외된 것이며, 중생들의 작용이 아닌 상대가 있는 경계라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생겨나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법은 제외된 경계이다. 또한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 가운데 끌어올 수도 있고 밀고 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소리의 경계는 제외한 것이다.
‘유위와 무위가 각각 하나씩이다’라고 한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작용하는 까닭에 함이 있다[爲]라 표현한다. 이는 능히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028_0306_a_13L略說若法生而未滅衆生數有對牽可推彼名爲受彼生而未滅者過去未來衆生數者除現在非衆生有對者除生未滅心心數法可牽可推者除聲界有爲無爲一者因緣和合作故名爲此能生義也
028_0306_b_02L‘작용하고 지어진다[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인이 있다’는 것은 작위(作爲)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작용이 있는[有爲] 까닭에 만들어지는 것[作]이 있다.
한 법계란 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합쳐진 세계이다. 이 가운데는 세 가지 영구불변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무위(無爲)라 한다. 즉 허공무위(虛空無爲)와 택멸무위(擇滅無爲:지혜로 번뇌를 소멸하고 無爲에 이르는 일)과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자연히 번뇌가 소멸되어 無爲에 이르는 일)의 세 가지 무위가 그것이다. 수(受) 등 세 가지 음[三陰:受ㆍ想ㆍ行]과 작위함이 없는 색을 이름하여 유위(有爲)라 한다.
‘한결같이 유위만 있는 것은 열일곱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나머지 십칠계는 그 경계가 이루어진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유위만 있다고 한 것이다.
【문】이와 같이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일을 끝냈습니다. 어떻게 이 법상이 법문에 거두어들여지는 것입니까? 자성(自性) 때문입니까, 타성(他性) 때문입니까?
028_0306_a_19L作者何有因義也有因義者有爲義也有爲故名作一法界合有爲無爲此中三種常故無爲虛空數滅非數滅受等三蔭及無作色名有爲一向是有爲當知十七界者餘十七界有因故一向是有爲問曰如是分別法相竟何攝法爲自性爲他性

【답】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 것
각기 스스로 자성(自性)에 머문다.
그런 까닭에 모든 법은
자성에 소속되는 것이니라.
028_0306_b_03L答曰
諸法離他性
各自住己性
是故一切法
自性之所攝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 것’이라고 한 것은 예를 든다면 눈은 귀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이 성(性)이건 성을 떠난 것이건 서로 상대방을 간섭한다고 한다면 이 말은 현실과 상응하지 않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성품에는 소속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만약 한 가지가 생멸할 때 다른 모든 것도 생멸한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런 까닭에 타성(他性), 즉 다른 성품에는 속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성(自性)에 머문다’고 한 것은 예를 들면 눈은 눈의 본성에 머무는 것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모든 법은 그 자성에 소속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자성은 모든 법을 포함하는 것이다.
028_0306_b_05L諸法離他性者謂眼離耳如是一切事若性離性相攝者是說不相應故非他性攝彼有何過若一生滅一切亦生滅此非道理是故他性不各自住己性者眼自住眼性如是一切法是故一切法自性之所攝者是故自性攝一切法
이 논사가 말한 것은 스스로 서로 거두어들여진다는 내용을 말한 것인데 이것도 또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즉 생겨나는 법과 그 법의 분수의 한계로 구분해서 설명해야 한다. 생겨나는 법이란 색음(色陰)은 열 가지 색입(色入) 내지는 법입(法入) 가운데 존재하는 색이 포함되고 눈의 경계[眼界]는 그 자체로 눈의 경계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분수의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한 생각에는 한 생각만이 거두어들여지는 것이지 다른 생각은 거두어들여지지 아니한다. 만약 다른 것도 포함된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령 대관(臺觀)에 기초와 계단ㆍ대들보ㆍ서까래 등이 포함된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세속에서 하는 말일 뿐이며 우리가 말하는 저 안계는 하나의 경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에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8_0306_b_12L此師所說自相攝義也此亦二種生及分齊生者陰攝十色入乃至法入中色眼界攝眼界分齊者此一念攝一念不攝餘若餘攝名者如臺觀攝基陛梁椽是世俗言說彼眼界一界一入一陰所攝當知一切法亦如是

2. 행품(行品)
028_0306_b_18L行品第二

이미 모든 법의 모습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니, 여기서는 그 생긴 법의 차별을 설명하겠다.
【문】만약 모든 법이 자성(自性)에 소속된다고 한다면 또한 마땅히 자체의 힘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까?
028_0306_b_19L已說諸法相生差別今當說問曰一切法自性攝者亦應自力能生耶

【답】
처음엔 하나도 제 힘으로 생겨날 수 없느니라.
반려자를 여의었기 때문에
모두 이쪽 저쪽의 힘이 합쳐야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있느니라.
028_0306_b_21L答曰
初無一能生
以離伴侶故
一切彼此力
諸法乃得生
028_0306_c_02L
‘처음에는 하나도 생겨날 수 없다. 반려자를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유위(有爲)의 모든 행위는 자성이 약하고 뒤떨어진다. 그런 까닭에 모든법이 자신의 힘으로 생겨날 수 없다.
【문】어떻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답】모든 법이 상대적인 피차(彼此)의 힘이 합쳐져야만 생겨날 수 있다. 유위의 모든 법은 이 힘으로부터 생겨난다. 비유하면 두 사람의 병약한 사람이 서로의 힘을 합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작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네 종류로 구분된다. 이른바 색과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 등 네 가지가 그것이다.
028_0306_b_24L初無一能生以離伴侶故者有爲諸行自性羸劣是故無法自力能生云何得生答曰一切彼此力諸法乃得生有爲諸法彼此力生如二羸人彼此力起此一切行略說四種謂色心數法心不相應行
그것이 생겨나는 과정도 역시 네 종류로 구분된다. 취(取)하는 행동이 작용하고 근거가 만들어지고 불어나고 올라가는 작용이 일어나고 동반하는 짝을 만드는 네 가지다. 그것을 취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의과(依果:依報, 주위 환경)와 보과(報果:正果, 몸)와 장부과(丈夫果:創造의 果報)의 일부분을 말한다. 근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십팔계(十八界)와 육입(六入)과 색을 만드는 사대(四大)를 말한다. 또 불어나고 올라가는 작용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한 찰나간에 생긴 일에 일체의 모든 법이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동반하는 짝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상대와 내가 짝이 되어 모든 유위(有爲)의 형상에 미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유위를 나는 마땅히 먼저 설명할 것이며,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생기는 것이 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028_0306_c_07L彼生亦有四種作取作依作增上作伴彼作取者依果報果及丈夫果少分作依諸界六入造色四大作增上者剎那生事一切諸法作伴者心數法彼此爲伴及諸有爲相如是等有我當先說共心俱生作伴

만약 마음이 생기는 곳 있으면
반드시 다른 마음과 함께 생긴다.
모든 마음과 법들이 모여들어
또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도 생긴다.
028_0306_c_13L若有心生處
必與心共生
諸心法等聚
及不相應行

여기서 ‘마음’이라 한 것은 마음과 뜻과 의식을 뜻한다. 이것은 내용은 같은데 표현을 달리한 것이다.
이 마음이 선ㆍ악 등으로 분별되고 경계로써 분별되며 종류로써 분별되며 근거로써 분별되며 무루ㆍ유루로 분별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차별이 있다.
이 마음이 어디에 근거를 한 것이거나 인연으로 생긴 것이거나 또는 찰나간에 생긴 마음이거나 그것은 반드시 결정코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과 함께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문】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06_c_15L心者義一異名是心善等分界分別種分別依分別無漏等分無量種差別是心若依若緣若剎那生決定共心心數法及心不相應行生問曰心心數法云何

【답】
상(想)과 욕망과 감촉과 지혜
염원과 사(思)와 해탈과
경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작용
삼마제(三摩提)와 수(受) 등이라.
028_0306_c_20L答曰
想欲及觸慧
念思與解脫
作意於境界
三摩提受等
028_0307_a_02L
여기서 ‘상(想)’이라 하는 것은 인연에서 능동적으로 취하는 모습을 말한다. 즉 남자와 여자에서 살결이 거칠고 미세하다거나 나무 말뚝이 길고 짧다는 등의 모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욕망[欲]’이라 하는 것은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보고 나서 즐거워하는 등의 감정을 말한다. ‘감촉[觸]’이라 하는 것은 인연에 의거하여 마음과 화합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예를 들면 햇빛과 구슬은 다른 물체이지만 화합하면 불을 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지혜[慧]’라고 하는 것은 능히 인연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면 이런 것은 색이지 맛이 아니다. 또 이것은 옳다 그르다 등을 판단하는 지혜를 말한다.
028_0306_c_22L想者於緣能取相貌謂取男女麤細木杌長短等相欲者愛樂如見己樂觸者依緣心和合如日光珠異和合生火慧者能知於緣如此是色非非是等
‘염원[念]’이라 하는 것은 한 생각을 인연에 매어 두는 것을 말하며 ‘사(思)’라고 하는 것은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이 함께 서로 배반하여 마음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해탈(解脫)’이라 하는 것은 인연 가운데서 마음이 바뀌어 가면서도 장애가 일어나지 아니하는 까닭에 ‘해탈’이라고 한다.
‘사유하는 작용[作意]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을 취함에 용감하고 씩씩함을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 쏟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삼마제(三摩提)’라고 하는 것은 인연을 취할 때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受)’라고 한 것은 즐거운 일에나 즐겁지 아니한 일에나 모두 서로 어긋나서 인연 가운데서 받아들이는 감정을 말한다.
028_0307_a_04L念者繫念於緣思者善不善俱相違心轉解脫者於緣中心轉不障㝵故作意者取緣勇健;有人言心專注義也三摩提者取緣時心不亂也受者於樂不樂俱相違緣中受也

모든 마음이 생길 때
이 생겨남에 대하여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똑같이 한 인연에서 돌고 돌며
또한 늘 서로 호응한다 하셨네.
028_0307_a_09L一切心生時
是生聖所說
同於一緣轉
亦復常相應

‘모든 마음이 생길 때 이 생겨남에 대하여 성인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상(想) 등 열 가지 법이 모든 마음과 함께 한꺼번에 생기는 까닭에 이것을 대지(大地)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이것은 큰 마음의 땅[大心地]인 까닭에 이를 대지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다음 ‘똑같이 한 인연에서 돌고 돈다’라고 한 것은 이 열 가지 법이 모든 마음과 함께 한 인연 가운데서 한꺼번에 돌고 돌며 따로 다른 인연을 맺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028_0307_a_11L一切心生時是生聖所說者是想等十法共一切心俱生故名大地;是大心地故名大地同於一緣轉者此十法共一切心俱一緣中轉不別緣也
여기에는 다섯 가지의 같은 것이 있다. 이른바 모습과 인연과 때와 근거와 일 등 다섯 가지가 그것이다. 같은 한모습, 동일한 인연, 같은 시각, 같은 근거, 같은 일로 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같다고 하는 것은 함께 서로 호응한다는 뜻이다.
‘또한 늘 서로 호응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항상 마음과 서로 호응하여 이쪽ㆍ저쪽이 한꺼번에 생겨 서로 호응하면서 인연을 취하기 때문에 이것을 서로 호응한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으로 이미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는 법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법을 설명하겠다.
028_0307_a_15L有五種同所謂相貌同一相貌一緣一時一依一事同者共相應義亦復常相應者此常與心相應彼此俱生相應取緣故名相應已說一切心中相應法非一切心中相應法今當說

여러 가지 뿌리와 뉘우침과 부끄러워함이 있고
믿음과 참으로 아름다움과 방일하지 않음과
해치지 않음과 정진과 평정함[捨]과
뜨거운 번뇌 및 각(覺)과 관(觀)이 있다.
028_0307_a_21L諸根有慚愧
信猗不放逸
不害精進捨
或熱及覺觀
028_0307_b_02L
여기서 ‘여러 가지 뿌리’라 한 것은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는 두 가지의 착한 뿌리[善根]를 말한다. 어리석지 않은[不癡] 착한 뿌리의 바탕은 곧 지혜이며, 큰 마음의 바탕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았다.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들의 작용에 성내지 아니함을 말한다. ‘뉘우침[慚]’은 자기 몸을 존중하여 악한 일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말하며, ‘부끄러워함[愧]’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법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라 한 것은 전도되지 아니한 인과[不顚倒因果]를 말한다.
‘믿음과 아름다움’이라 한 것은 착한 마음이 악(惡)에서 벗어나서 마음 속이 느긋하고 편안하다는 표현이다.
‘방일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것은 지을 수 있고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부드럽게 조절하는 방편을 말한 것이며 또한 방편을 만드는 일을 버리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을 말한 것이며 결국 이것은 선(善)을 닦는다는 내용이다.
028_0307_a_23L諸根者不貪不瞋二善根也不癡善體卽是慧大地共故此中不說貪者於有無有不著不瞋者於衆生數不恚慚者尊重己身於惡羞恥尊重世閒法信者不顚倒因果猗者善心離惡身中怡泰不放逸者調柔方便於可作不可作捨作方便一向心此是修善義
‘해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중생들의 작용에 마음이 괴로워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며 ‘정진(精進)’이라 한 것은 허물과 악을 버리고 여의는 공덕을 닦고 익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키고 보호하며 불어나고 자라나게 채찍질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평정함[捨]’이라 한 것은 마음이 평등하여 모든 착한 마음이 한꺼번에 도리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열 가지 법문은 모든 착한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선의 대지[善大地]라고 표현한다.
‘뜨거운 번뇌’라고 한 것은 아집(我執)과 편견(偏見) 등의 번뇌를 말한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뒤의 사품(使品)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거친 작용을 ‘각(覺)’이라 하니, 이는 민첩하고 날카롭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마음의 미세한 작용을 ‘관(觀)’이라 하니, 이는 미미하고 적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028_0307_b_08L不害者於衆生數不惱心精進者捨離過惡修習功守護增長策勵心捨者心平等切善心俱順道理此十法一切善心中可得故名善大地或熱者我見等煩惱使品當說心麤名覺是捷利義心細名觀是微少義
이 법은 모든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혹 얻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얻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그것이 모이고 마음의 작용이 생기는 데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여기서 마땅히 설명하겠다.
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을 선ㆍ악 등으로 분별해 보면 다섯 종류의 덩어리[聚]가 있다. 즉 이른바 착하지 못한[不善] 법, 선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不共善] 법, 숨어 없어져서 선악을 구별 못하는[隱沒無記] 법, 숨고 사라지지 아니하면서 선도 악도 아닌 경우[不隱沒無記], 이렇게 욕계(欲界)에서는 다섯 종류의 법이 성취된다. 색계(色界)와 무색계의 경우는 착하지 아니한 법은 제외되고 네 종류의 법만 성취된다.
028_0307_b_14L此法非一切心中可得或有可得或不可得次後若聚乃至心數生我今當說此心心數法善等分別有五種聚所謂不善隱沒無記不隱沒無記欲界成就五種色無色界成就四種除不善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 속에서는
마음의 작용은 스물한 가지
세 가지 편견(偏見) 가운데 한 가지 작용이 소멸하며
욕계에서는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의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
028_0307_b_19L不善心聚中
心數二十一
三見中滅一
欲二見少三
028_0307_c_02L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 속에서 마음의 작용은 스물한 가지’에서 착하지 못한 마음이란 마음이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와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의 집단 가운데 스물한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다. 즉 십대지(十大地)와 각관(覺觀), 두 가지 번뇌와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심과 의심 및 그 가운데 하나의 무명 탐욕, 나아가 의심 등 피차가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무명(無明)이 그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작용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모든 번뇌와도 서로 호응하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일곱 가지의 번뇌가 일어나게 된다. 즉 뉘우침이 없고[無愧] 부끄러워함이 없고[無愧] 어둡고[睡]ㆍ흔들리고[掉] 믿지 아니하고[不信] 방일(放逸)하고 게으르게 되는것[懈怠]이 그것이다.
028_0307_b_21L不善心聚中心數二十一者不善心若心與無慚無愧相應此心聚中有二十一心數謂十大地及覺煩惱及彼中一無明貪乃至疑等彼此不相應無明與彼相應與一切煩惱相應故七種起煩惱無慚無愧不信放逸解怠
【문】모든 착하지 못한 마음 가운데 각각 스물한 가지 작용이 있는가?
【답】그렇지 않다. 세 가지 편견 가운데 한 가지 작용이 소멸하며 욕계에서는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 착하지 못한 마음 더미에는 사견(邪見)과 견취견(見取見)과 계취견(戒取見)의 마음과 서로 호응하는 스무 가지 마음의 법이 있다. 이 가운데 지혜는 제외된다.
028_0307_c_05L問曰一切不善心中悉有二十一耶答曰不爾三見中滅一欲二見少三不善心聚中邪見見取戒取心相應有二十法此中除慧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는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의 두 가지 편견이 서로 호응하여 열여덟 가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이 있다. 여기서 지혜가 제외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고, 이밖에 뉘우침이 없는 편견과 부끄러워함이 없는 편견도 제외된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지혜에 속하기 때문이다.
견(見)이 상응하는 취(聚) 중에는 지혜가 없다. 하나의 취 가운데 두 개의 지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은 무기(無記),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뉘우침이 없는 것과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은 오로지 착하지 못한 마음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세 가지 작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028_0307_c_09L欲二見少三者欲界身邊二見相應有十八法除慧前已除無慚無愧見是慧性故見相應聚中無慧非一聚中有二慧事身邊二見是無記無慚無愧一向不善故少三

선(善)한 마음은 스물두 가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스무 가지
무기는 열두 가지가 있고
회면(悔眠)의 일이 한꺼번에 불어나게 되느니라.
028_0307_c_14L善心二十二
不共有二十
無記有十二
悔眠俱被增

‘선한 마음이 스물두 가지’라고 한 것은 십대지(十大地)와 십선대지(十善大地) 및 각관(覺觀)을 말한다.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스무 가지’라고 한 것은 착하지 못한 마음의 집체(集體)로서 스물한 가지 가운데서 번뇌를 제외한 숫자를 말한다.
‘함께 하지 않는[不共]’이라 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무명(無明)만은 나머지 다른 번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기가 열두 가지’라고 한 것은 숨고 사라지지 아니하는 무기 가운데 열두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즉 십대지와 각관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믿음이 없다[無信]’는 것은 공덕에 속하고, ‘탐욕 따위가 없다’는 것은 허물과 악 같은 따위에 속한다. 왜 그런가? 무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은몰하지 아니한다[不隱沒]라고 하는 것은 더럽게 오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307_c_16L善心二十二者十大地十善大地及不共有二十者不善心聚二十一中除一煩惱不共者唯一無明餘使無記有十二者不隱沒無記聚中有十二心數謂十大地及覺中無信等功德無貪等過惡何以故無記故不隱沒者非是穢污
028_0308_a_02L다음 ‘회면의 일이 한꺼번에 불어나게 된다’고 한 것은 뒤쫓아가며 변하는 것을 회(悔)라고 하나니, 이 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착한 후회와 착하지 못한 후회와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후회 등 세 가지다. 그 가운데서 선(善)과 불선(不善)은 그 행동으로써 이름을 붙여 선이다 불선이다라고 부른다. 거기에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즉 어떤 때에 따라서는 착한 마음에서 착하지 아니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령 자기가 보시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혹 또 착하지 아니한 마음에서 착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자기가 악한 일을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또 혹 악한 마음에서 악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악한 일을 하고 나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적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또 착한 마음에 착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령 보시를 베푼 뒤에 후회하는 마음이 적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028_0307_c_23L悔眠俱被增者追變名悔是悔三種不善無記於中善不善行作名善不善四種差別或有善建立不善如作施等已悔或有不善建立善如作惡已或有不善建立不善如作惡已悔或有善建立善如作施等善已悔
이밖에 일상 생활 속의 몸가짐 등에서 일으키는 후회는 선ㆍ악에 속하지 아니하는 무기(無記)이다.
그런 까닭에 이 후회하는 마음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그 마음의 집단 가운데서 후회하는 마음이 불어나게 된다. 나머지 다른 마음의 작용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는 후회하는 사람이 탐욕 등을 전환시키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리석은 사람에게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착하지 아니한 후회와 서로 호응하는 마음의 집단 가운데서 오직 한 가지 무명만이 번뇌이고 다른 것은 번뇌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스물한 가지 불선(不善)한 마음의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며 착한 후회가 상응하는 집단 가운데서는 오직 후회하는 마음이 불어나는 경우가 있기에 이와 같이 스물세 종류의 마음의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은몰(隱沒)하지 아니하는 무기에 열세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으며, 이것은 세 가지 마음의 집체 속에서 돌고 돈다. 즉 선한 마음과 함께 하지 아니하며 숨고 사라지지도 아니하는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028_0308_a_07L若餘威儀等悔彼是無記是故與悔相應聚中增悔餘心數如前說中悔人非貪等使轉非無癡人生悔是故不善悔相應聚中但一無明是煩惱非餘是故有二十一種;善悔相應聚中但增於悔如是二十三種隱沒無記者十三種此於三聚中轉謂不共不隱沒無記
‘면(眠)’이라는 것은 잠자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오취(五聚:善ㆍ惡ㆍ無記ㆍ悔ㆍ眠) 가운데서 돌고 돈다. 왜 그런가? 면(眠)에도 착하지 못하고 더럽게 오염되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마음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면이 불어난 것이며, 나머지 마음의 작용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같이 선ㆍ악ㆍ무기의 세 가지 마음의 집체(集體)와 후회하고 잠자는 두 종류의 작용이 함께 그 가운데서 돌고 돌면서 두 가지 일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욕계의 심법(心法)에 대한 순서이다.
【문】색계와 무색계는 어떻게 됩니까?
028_0308_a_14L眠者寐也於一切五聚中轉何以故眠者有不善穢污無記心是故彼中增一眠心數如前說如是三聚二種悔眠俱彼中增二此是欲界心法次第色無色界云何

【답】
초선(初禪)은 악한 마음에선 벗어나지만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중간선(中間禪)에서는 각지(覺支)는 제거되지만
상지(上地) 관지(觀支)에 있어서도 그러하니라.
028_0308_a_19L答曰
初禪離不善
當知如欲界
中閒禪除覺
於上觀亦然
028_0308_b_02L
‘초선은 악한 마음에선 벗어났지만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초선의 경지에서는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나머지 네 가지 더미가 남아 있는 것은 욕계(欲界)의 경우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간선엔 각지는 제거되지만’이라고 한 것은 중간선에서는 각지 즉 거친 마음의 작용은 제거되지만 나머지는 초선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상지의 관지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이선(二禪) 이상의 경지에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는 각관(覺觀)은 제거되지만 나머지는 초선의 경지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은 동반자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색계의 경우를 지금 곧 설명하겠다.
028_0308_a_21L初禪離不善當知如欲界者初禪離不善聚離無慚無愧故餘有四聚欲界說中閒禪除覺者中閒禪除覺餘如初禪說於上觀亦然者二禪以上乃至有頂除覺觀餘如初禪說說心心數法由伴力生色法今當說

미세한 먼지 사근(四根)에 남아 있고
열 가지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신근(身根)은 아홉 가지, 나머지는 여덟 가지니
냄새 있는 땅에 있는 것을 말하네.
028_0308_b_04L微塵在四根
十種應當知
身根九外八
謂在有香地

‘미세한 먼지 사근에 남아 있고 열 가지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안근(眼根)의 미세한 먼지에 열 가지가 있으며 이것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즉 지(地)ㆍ수(水)ㆍ화(火)풍(風)과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안근과 신근(身根) 등 이 열 가지는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귀ㆍ코ㆍ혀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신근은 아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열 가지 중에서 안근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앞의 경우와 같다.
‘나머지는 여덟 가지’라고 한 것은 근(根)에 대한 법(法)이 아닌 다른 법 가운데 있는 여덟 가지의 미세한 먼지를 말한 것이며 이는 사대(四大)와 색(色) 등 사진(四塵)을 말한 것이다.
028_0308_b_06L微塵在四根十種應當知者謂眼根微塵有十種當知十種不相離義也謂地眼根身根等十種常不相離耳鼻舌亦如是根九者除眼根等餘悉同前外八者非根法中八種微塵謂四大色等四
【문】어떤 세계의 미진(微塵)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까?
【답】게송에 이른 대로 ‘냄새 있는 땅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욕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내용이니, 그 가운데는 냄새[香]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색계의 미진은 냄새에서 벗어났다. 그런 까닭에 그 세계에서는 냄새와 맛은 제거된다. 그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앞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의 작용하는 법과 또 그것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도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을 설명하셨는데, 이와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08_b_13L問曰何界微塵如是說耶答曰在有香地此是欲界中義彼有香故色界微塵離於香味是故彼中除於香味餘如前說問曰前說若心起時彼心數法及不相應行生已說心心數法不相應行云何

【답】
모든 유위(有爲)의 행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니
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어
피차가 또 서로 작위(作爲)한다.
028_0308_b_18L答曰
一切有爲行
生住及異壞
是亦有四相
彼此更相爲

‘모든 유위의 행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모든 유위의 행에 네 가지 모습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였던 것이 생겨나는 까닭에 새로운 생명이 생겨난다라고 말하고, 이미 스스로 한 일이 성립된 까닭에 이를 머무는 곳에 머문다라고 말한다. 그후 이미 쇠하여 달라진 까닭에 이를 즉 다르게 변했다고 표현하며 이미 그 세력이 소멸된 까닭에 이를 없어졌다[壞]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만약 유위(有爲)의 법문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될 경우 이것을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心不相應行]이라 표현한다.
028_0308_b_20L一切有爲行生住及異壞者一切有爲行有四種相未生生故名生生已自事立故名住住已衰變故名異異已勢滅故名壞如是說有爲法得如是相者名心不相應行
028_0308_c_02L내가 지금 곧 유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겠다.
이 일을 알 수 있는 까닭에 그것을 모습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생겨나고 머물고 늙고 무상한 것이니, 생겨난다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며 머문다는 것은 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말하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하게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무상하다는 것은 허물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결코 일시적으로 만들어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생기는 것을 업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나머지 다른 것은 생겨나는 일이 끝나야 업을 짓게 된다. 그런 까닭에 유위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허물어지는 일은 같은 모습이 아니다.
028_0308_c_02L我今當說有爲相此事可知故名相彼生無常生者有爲事生住者安立老者衰變無常者壞也彼非一時作生者以生爲業餘者生竟作業是故有爲生住異壞非是一相
【문】만약 모든 유위의 법에 네 가지 모습이 있다면 이것은 또한 유위의 법이니 여기에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까?
【답】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으니, 이것도 또한 네 가지의 모습이 있어서 그 이전의 네 가지 모습과 함께 생겨나기에 이것을 생생(生生)ㆍ주주(住住)ㆍ이이(異異)ㆍ괴괴(壞壞)라 말하는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곧 끝없이 생주이괴(生住異壞)가 되풀이되는 것입니까?
【답】저것이나 이것이나 모두 작용한다. 이 모습에는 앞의 것과 뒤의 것, 피차의 모습이 생겨나게 되며 그리하여 생생생(生生生)이 되고 또 생생생생(生生生生)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머물고 머물고 또 머물어 피차의 모습이 머물게 되고 달라지고 달라지고 또 달라져서 피차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며 허물어지고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져서 피차의 모습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무궁한 것이 아니다.
028_0308_c_07L問曰若一切有爲法有四相者此亦是有此更有餘相耶答曰是亦有四相是亦有四種相共彼生謂生生住住異異壞壞問曰若如是者便爲無窮答曰彼此更相爲此相彼此相爲生生生生生生生生如是住住住彼此相住異異異彼此相異壞壞壞彼此相壞故非無窮
이후로 다시 이 네 가지 변하는 모습이 하나의 법이 되어 생겨나고 또 생겨나며 이 생기고 또 생기는 법도 다른 법이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머물고 또 머무나니 이 머무는 법도 다른 일이 아니다. 그 나머지 변하고 소멸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모습이 각기 여덟 가지 법이 된다. 그리하여 생생(生生)도 여덟 가지 법이 되는 것이니 즉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과 뒤에 일어나는 네 가지 모습 및 그 본래 모습을 이룬 법을 합하면 여덟 가지 법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머물고 달라지고 소멸하는 경우[住異滅]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위에서 이미 함께 생기는 경우 동반자를 따르는 까닭에 생긴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지금부터는 동반자가 없어 생겨나지 아니하는 경우를 설명하겠다.
028_0308_c_15L此後四爲一法生生生生事非餘法如是住住住住事非餘法餘亦如是前四種相各爲八法生生八法謂前三相後四起相及彼所相法當知餘亦如是已說諸行共生隨伴故生無伴不生今當說

소작인과 공인과 상사인과
보편인과 상응인과 근인이 있으니
이 여섯 인으로부터
돌고 돌며 유위(有爲)의 법을 낳는다.
028_0308_c_20L所作共相似
普遍相應根
從此六種因
轉生有爲法
028_0309_a_02L
이 여섯 가지 인연이 굴러 굴러 유위의 법을 낳는 것이다.
‘소작인(所作因)’이라 하는 것은 만약 어떤 법이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대하여 장애를 주지 아니한다면 이 힘 때문에 그 법문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이 생길 때 다른 모든 법은 그 자성(自性)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귀가 생길 때도 자성이 없어지나니 이렇게 하여 자성이 아닌 것이 자성과 더불어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을 말한다.
‘공인’ 즉 함께 하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모든 행이 동반하는 것과 함께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 즉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 마음이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동, 유위(有爲)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사대(四大)의 미진(微塵)이 마음과 계율 등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028_0308_c_22L此六種因轉生有爲法所作因者法於餘法生中不作障㝵以此力故彼法得生如眼生時一切法除自性如是耳等除自性非自性與自性作共因者諸行與伴共生如心心數心不相應行有爲相如是四大微隨心戒等
‘상사인(相似因)’이란 만약 뜻이 능히 비슷한 법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착한 것을 익혔으면 착한 법을 낳게 되고 착하지 아니한 법을 익혔으면 착하지 아니한 법을 낳는 경우와 같다. 또 전생에서 익힌 것이 교묘하고 솜씨 있었으면 능히 이승에서도 교묘하고 솜씨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마치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등등의 인연을 말한다.
‘모든 곳에 두루한 인연[一切遍因]’이라 하는 것은 만일 여러 가지 번뇌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서로 이어져 다른 번뇌가 생기게 된다. 가령 자기의 편견에 집착한 사람은 그 편견의 힘 때문에 아집(我執)에서 단견(斷見)ㆍ상견(常見)에 집착하고 음상(陰相)을 비방하며 혹은 의심도 하게 된다. 그 가운데는 혹 청정한 것과 가장 뛰어난 것만을 취하여 자만심(自慢心) 등 허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역시 이와 같이 모든 곳에 두루 인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응인(相應因)’이라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법에서 나와 상대의 힘이 함께 한 시각, 한 인연 가운데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028_0309_a_06L相似因者若義能生相似法如習善生善習不善生不善習工巧能知工巧如種麥生麥如是等一切遍因者若諸煩惱必相續生執著我見者以見力故於我執著斷謗於陰相疑或取淸淨及最勝慢等過生餘亦如是一切遍應當知應因者心心數法彼此力俱一時一緣中轉
【문】만약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여 생기는 법이 한 시기에 일어난다면 함께 생기는 인연[共生因]이나 서로 호응하는 인연과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답】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상응하는 인연이며 동일한 과보를 얻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곧 함께 생기는 인연이다. 가령 지팡이를 잡고 있으면 지팡이의 업(業)이며 강물을 건너가는데 손을 잡고 끌고 가면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다음 과보의 인연[報因]이라 하는 것은 세간의 생명체 가운데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서로 이어받는 일의 과보를 생(生)이라 표현한다. 예를 들면 착한 인연은 사랑스러운 과보를 얻고 악한 인연은 미운 과보를 얻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으로 모든 인연의 법은 이미 설명하였다. 만약 법이 인연 따라 생긴다면 거기에 관해서 지금 설명하겠다.
028_0309_a_14L問曰若心心數法一時彼共生因與相應因何差別答曰不相離義是相應因同一果義是共生因如執杖杖業如渡河牽手不斷等因者謂世閒生中受生相續事果名如善愛果不善不愛果已說諸因若法從因生今當說

과보로 생긴 마음과 마음의 법과
또 다른 뒤섞인 번뇌는
모두가 다섯 가지 인연으로 생기며
함께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028_0309_a_20L報生心心法
及餘雜煩惱
悉從五因生
共生應當知
028_0309_b_02L
가령 과보로 생기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서 생기는 법문이나 더럽게 오염된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은 다섯 가지의 인연을 따라 생기게 된다. ‘과보로 생긴 마음과 마음의 법의 다섯 가지 인연’이라 하는 것은 짓는 인연[所作因]과 함께 생기는 인연[共生因]과 비슷한 인연[相似因]과 서로 호응하는 인연[相應因]과 과보로 생기는 인연[報因] 이다.
이 가운데 짓는 인연이라는 것은 그 법이 생길 때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일들이 장애가 되지 아니하는 경우를 말한다.
함께 생기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이 편과 저 편이 짝이 되어 생기는 경우를 말하며 그 생기는 법들은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과 동반하는 힘으로 생기게 된다.
비슷한 인연이라 하는 것은 혹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무기의 법이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과보의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며 일상 생활의 몸가짐과 관계되는 일은 아니다. 왜 그런가? 상대방이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지 아니한 것이 뒤지는 것과 인연을 짓기 때문이다.
028_0309_a_22L若報生心心數法及穢污心心數法等從五因生報生心心數法五因者謂所作因共生因相似因相應因所作因者彼法生時相似不相似事不作障㝵共生因者彼此伴生生等心不相應行伴力生相似因者前生無記法或作是解是報因生威儀等何以故彼勝故非勝與劣作
서로 호응하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힘이 일시에 한 인연 가운데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과보로 생기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이 혹 착하고 착하지 아니한 업을 지었을 경우 이쪽은 그 과보로 더럽게 오염되는 경우를 말한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은 과보로 생기는 인연은 없다. 왜 그런가?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은 무기가 아닌 과보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루 인연을 설명하였다. 다섯 번째는 상대방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쪽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경우를 말하였으며, 나머지 네 가지 인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09_b_08L相應因者彼此力一時一緣中轉報因者彼或善不善業此則彼果污心心數法無報因何以故隱沒非無記果報性故遍因第五由彼力故此得生餘四因如前說

이것은 저것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과
나머지 서로 호응하는 법들이다.
최초의 무루(無漏)를 제외하고
저것으로부터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네.
028_0309_b_12L是彼不相應
及餘相應法
除最初無漏
彼從四因生

‘이것은 저것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과’라고 한 것은 만일 과보로 생긴 색과 과보로 생긴 마음 같은 경우를 말한다. 이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이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네 가지 인연’이라 함은 지어지는 인연, 함께 생기는 인연, 비슷한 인연, 과보로 생기는 인연을 말한다.
더럽게 오염된 색과 더럽게 오염된 마음과 이와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行)도 역시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긴다. 즉 소작인(所作因)과 공생인(共生因)과 상사인(相似因)과 두루한 인연[遍因]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028_0309_b_14L是彼不相應者若報生色及報生心不相應行從四因生謂所作因共生相似因報因穢污色及穢污心相應行亦從四因生謂所作因共生相似因遍因
‘나머지 서로 호응하는 법이다. 최초의 무루를 제외하고 저것으로부터 네 가지 인연따라 생기네’라고 한 것은 나머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에서 최초의 무루법(無漏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역시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네 가지 인연이란 즉 소작인ㆍ공생인ㆍ상사인ㆍ상응인(相應因)을 말한다. 여기서 나머지라고 한 것은 숨겨져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 무기(無記)를 말한 것이며, 제외된다[除]라고 한 것은 보인(報因)을 말한 것이다.
028_0309_b_19L及餘相應法除最初無漏從四因生者餘心心數法除最初無漏亦從四因生謂所作因共生相似因相應因餘者謂不隱沒無除報

만약 나머지는 상응하지 않는다면
알지어다. 비슷한 것은 세 가지 인연과
모든 나머지 상응하는 것과
최초의 무루법일세.
028_0309_b_23L若餘不相應
相似當知三
及諸餘相應
最初無漏法
028_0309_c_02L
‘만약 나머지 상응하지 않는다면 알지어다. 비슷한 것은 세 가지 인연과’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과 그 나머지 상대인 다른 명칭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상대라 함은 선(善)하고 은몰(隱沒)하지 아니한 무기를 말한다. 단, 보인(報因)은 제외된다. 만약 그것에 비슷한 인연이 성취된다면 최초의 무루법을 제외하고 세 가지 인연 따라 생기게 된다. 세 가지 인연이란 소작인ㆍ공생인ㆍ상사인을 말한다.
‘모든 나머지 상응하는 것과 최초의 무루법’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처음 생길 때는 무루법과 상응하는 법도 역시 세 가지 인연 따라 생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소작인과 공생인과 상응인이 그것이다. 그것에는 상사인은 없다. 앞서서 생긴 무루법이기 때문에 비슷한 인연은 없다.
028_0309_c_02L若餘不相應相似當知三者前所說心不相應及餘彼餘名餘彼謂善不隱沒無記除報若彼相似因成就初無漏從三因生謂所作因共生因相似因及諸餘相應最初無漏法者彼初生無漏相應亦從三因生謂所作因共生因相應因彼無相似前生無漏故無相似因

그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
이것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
만약 한 인연따라 생긴다면
반드시 정녕 이 일은 없으리라.
028_0309_c_10L彼中不相應
是從二因生
若從一因生
必定無此事

‘그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 이것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한 것은 그것이 처음 생길 때 무루(無漏)의 더미 가운데서 색과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두 가지 인연이란 소작인(所作因)과 공생인(共生因)을 말한다.
이미 모든 유위의 법을 설명했거니와 만약 모든 유위의 법이 한 가지 인연만을 따라 생긴다고 한다면 반드시 결정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은 반드시 결정적으로 지어지는 인연과 함께 생겨나는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이며, 나머지 다른 인연은 일정하지 않은 인연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법이건 한 인연으로 생기는 일은 없다.
이미 인(因)의 차별을 설명하였거니와 부처님은 이와 같은 인(因)4)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신 까닭에 연(緣)5)을 설법하신 것이며 나도 여기에 관하여 설명하겠다.
028_0309_c_12L彼中不相應是從二因生者彼初生無漏聚中色及心不相應行從二因謂所作因共生因已說一切有爲若從一因生必定無此事者一切法必定從所作因共生因生餘因不是故無法從一因生已說因差別世尊以如是因爲化衆生故說緣今當說

차제연과 소연연과
증상연과 인연이 있으니
법은 네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028_0309_c_20L次第亦緣緣
增上及與因
法從四緣生
世尊之所說
028_0310_a_02L
이와 같이 네 가지 인연에서 모든 유위의 법이 생겨난다. ‘차제연(次第緣)’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하나하나 생기면서 차례대로 이어져 모습이 만들어지고 방편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소연연’이라고 한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이 경계에 부딪히면 방편을 끌어당겨 매달려서 그것과 연유하는 까닭에 법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이라는 것은 법이 생길 때 장애를 만들지 아니하는 것이니, 마치 임금이 자유자재한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앞에서 설명한 지어지는 인연[所作因]을 말한다.
‘인연(因緣)’이라는 것은 이 소작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의 인연이니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인연이다.
028_0309_c_22L如是四緣生一切有爲法彼次第緣者心一一生次第相續作容受方便緣緣者心心數法境界攀挽方便彼故能生增上緣者法生時不作障如王自在卽是前說所作因因緣者除所作因其餘五因彼是因緣
【문】인(因)과 연(緣)은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답】어떤 사람은 차별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인은 종자(種子)와 같은 법이며, 연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방편이니, 마치 땅과 거름 같은 것을 연이라고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으로 이미 연에 대하여 분별하였으니, 또 여기에서는 법이 연을 따라 생기는 경우를 곧 설명하겠다.
028_0310_a_05L因之與緣有何差別答曰或有說者無有差別我說因者如種子法者彼持方便如地糞等已分別緣法隨緣生今當說

마음과 모든 마음의 법
이것은 네 가지 연(緣)을 따라 생긴다.
두 가지 정수(正受)는 세 가지 인연따라 생기고
나머지 법은 두 연에서 설명하게 된다.
028_0310_a_09L心及諸心法
是從四緣生
二正受從三
餘法說於二

‘마음과 모든 마음의 법, 이것은 네 가지 연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한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이 네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말한다.
앞에 받아들인 이 법은 차례로 일어나는 연이며 경계는 곧 인연의 인연[緣緣]이며 자성(自性)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은 곧 증상연(增上緣)이며 함께 생기는 인(因)과 자분(自分)의 인, 상응하는 인은 곧 인연에 속한다. 때에 따라서는 혹 두루한 인연[遍因]과, 과보로 생긴 인[報因]도 여기에 속한다.
028_0310_a_11L心及諸心法是從四緣生者心心數法從四緣生前容受此法是次第緣境界是緣緣除自性餘一切法是增上緣共生因自分因相應因是因緣或時有遍因報因
‘두 가지 정수(正受)는 세 가지 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은 미리 생각한 일이 없이 바르게 받아들이는 법[無想正受]과 모든 번뇌가 다 소멸된 마음에서 바르게 받아들이는 법[滅盡正受]은 세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말한다. 저 두 가지 입정심(入定心)은 곧 차제연이니, 저 전생의 정수념(正受念)과 정수심(正受心)이다.
십팔계 경지의 착한 자분(自分)의 인연을 상사인(相似因)이라 부르며 함께 생기는 생주이괴(生住異壞)를 공생인(共生因)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두 인연은 이것이 저것과 인연하는 증상연(增上緣)임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 법은 두 가지 연에서 설명한다’라고 한 것은 그 나머지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과 색(色)은 두 가지 연을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두 인연이란 인연과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028_0310_a_16L二正受從三者想正受滅盡正受從三緣生彼二入定心是次第緣彼前生正受念及正受心界地善自分名相似因共生生住異壞名共生因如此二因是彼因增上緣如前說餘法說於二者心不相應行及色從二緣生謂因緣增上緣
【문】이 법은 무슨 까닭으로 행(行)이라고 합니까?
問曰此法何故名行

【답】
많은 법이 한 법을 낳고
한 법도 또한 많은 법을 낳는다.
연과 행으로 지어지는 까닭에
행이라 부름을 알아야 한다.
028_0310_a_23L答曰
多法生一法
是亦能生多
緣行所作故
名行應當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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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법이 한 법을 낳고 이 또한 많은 법을 낳는다’고 한 것은 한 법이 많은 법의 힘 때문에 생기며, 이 한 법도 또한 많은 법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저것과 이것의 두 힘으로 생긴다.
‘연과 행으로 지어지는 까닭에 행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연이기도 하고 또한 행이기도 한 까닭에 연행(緣行)이라고 표현한 것이며, 연과 행으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연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소작(所作)이라 한 것은 또한 능작(能作:주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한 것이며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인연과 행인 까닭에 이것을 행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 행은 다른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행인 동시에 자체의 힘으로 다른 행을 만들 수도 있는 까닭에 이것을 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028_0310_b_02L多法生一法是亦能生多者一法以多法力故生是亦能生多法如是一切彼此力緣行所作故名行應當知此亦是緣亦是行故名緣行緣行所作故名緣行所作此亦能作緣行是故名行如是說者此行爲他所作亦能作他是故名行
阿毘曇心論經卷第一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비차제연6)이라는 것은 자기 경지에서 자기 경지를 전생(轉生)하는 것이다. 곧 모든 번뇌들은 자기경지의 번뇌에서 차제연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그 하나하나의 순서마다 모든 높은 경지가 생기기도 하고 또한 낮은 경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할 일이다.
범천(梵天)에서 목숨이 끝나서 차례로 욕계의 모든 세계에 태어난다면 그는 더럽고 오염된 마음의 목숨이 끝난 것이니 이곳 욕계에 태어나도 외길로 그 더럽고 오염된 마음이 이와 같이 모든 땅에서 이어받게 된다.
이미 설명한데로 모든 번뇌 스스로의 모습이 이와같다. 이와같은 번뇌를 부처님께서 교화 때문에 여러가지로 설법하셨으니 지금 그것을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문】부처님께서는 일곱 가지 번뇌를 말씀하셨는데 욕망ㆍ사랑ㆍ노여움ㆍ소유에 대한 애착심ㆍ오만한 편견ㆍ의심ㆍ무명 등 일곱 가지가 그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답】욕계의 다섯 가지 욕망 이를 욕망과 사랑의 번뇌라 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위에서와 같으니 소유에 대한 애착심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욕계의 다섯 가지 욕망 이를 욕망과 사랑의 번뇌라 한다’고 한 것은 편견으로 생기는 고통[見苦]과 숙세에서 남아온 번뇌의[習] 멸(滅)제ㆍ도제ㆍ번뇌를 끊고자 깊이 생각하는 일[思惟斷] 등 다섯 가지 욕망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위와 같으니 소유에 대한 애착심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한 것은 색계의 애착이 다섯 가지 있으며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노여움은 곧 노여움이 번뇌며
다섯 가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교만한 마음과 무명(無明)등
열다섯 가지 번뇌가 삼계에 있네.

‘노여움[恚]’이라 한 것은 곧 “노여움의 번뇌”를 말한 것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성내고 노여워하는 일도 역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가 있다.
‘교만함과 무명 등 열다섯 가지 번뇌가 삼계에 있네’라고 한 것은 교만심이 욕계의 다섯 종류 색계의 다섯 종류 무색계의 다섯 종류가 있다는 것이며 무명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편견의 번뇌 서른 여섯은
삼계에 두루있다 말하네.
의심의 번뇌 열두 가지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네.

‘편견의 번뇌 서른 여섯은 삼계에 두루있다 말하네’라고 한 것은 욕계에서 일으키는 편견(偏見)이 열두 가지며 그 가운데 다섯 가지는 고제를 보아서 끊어야하는 것이고, 두 가지는 집제를 보아서 끊어야하는 것이고, 두 가지는 멸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도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의심의 번뇌 열두 가지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네’라고 한 것은 욕계에 네 가지 의심의 번뇌가 있으니 즉 고제와 집제와 멸제와 도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또한 그러하다. 이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라고 한 것은 이 번뇌를 ‘액ㆍ수ㆍ유ㆍ누(扼ㆍ受ㆍ流ㆍ漏)라 말한다.
【문】어떤 이유로 그렇게 설명합니까?

【답】액박(扼縛)과 수(受)와 유(流)
모든 번뇌 끝없이 스며든다네
모든 속박과 영향과 흐름의 번뇌
이것을 누(漏)라고 말한다네.

모든 중생들을 얽어매는 까닭에 이를 액(扼)이라 말하며 이것은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고통의 흐름을 받아드린다[受流]고 말한다. 이것이 모든 중생들에게 내려가는 까닭에 이것을 유루(流漏) 라고 말하며, 모든 번뇌가 끝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이것을 누(漏)라고 말한다.
위에서 이미 번뇌의 갖가지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상응하는 근(根)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1. 1)신역(新譯)에서는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이라고 함.
  2. 2)‘작용하는 인연’에서 원문의 수연(數緣)은 수멸(數滅)의 오식으로 보임. 이는 이것과 대비되는 비수멸(非數滅)을 보아도 알 수 있음. 수멸(數滅)을 신역에서는 택멸(擇滅)이라고 번역함.
  3. 3)원문의 비수멸(非數滅)을 신역에서는 비택멸이라고 함.
  4. 4)이전까지의 인연은 인(因, hetu)의 역어(譯語)이다.
  5. 5)이것부터 이후의 인연은 연(緣, pratyaya)의 역어이다.
  6. 6)여기에서 부터 1권말까지는 고려대장경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원(元)본에 수록되었던 것을 신수대장경에서 1권 말미에 수록해놓은 것인데 역자가 번역하였기에 참고삼아 수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