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비담심(阿毘曇心:大法心)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문】해석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옛날 논사(論師)들이 이미 ‘아비담심’을 해석하여 제자들에게 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꼭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답】그렇지 않다. 꼭 해석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전 논사들이 비록 ‘아비담심’을 해석하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 넓고 간략하여 저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헷갈리고 번거로워서 애를 써 봐도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나는 지금 넓고 간략함을 떠나서 오직 수다라(修多羅)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꼭 해석해야만 한다.
【문】무엇 때문에 ‘아비담심’을 해석하면 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답】그 가운데는 이미 전도(顚倒)되지 아니한 법상(法相)을 설법하고 있으므로 전도되지 아니한 법의 모습을 풀이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허물과 악(惡)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공덕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가장 용맹하고 최상의 진리를 지닌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문】만약 그와 같다면, 그 뜻에 따라 해석하시는 것입니까? 【답】내가 마땅히 해석하겠다. 다만 여러 스님들이 논(論)을 만들면서 길(吉)한 것을 첫 번째로 논하였는데 모든 길한 것 가운데 가장 길한 것은 삼보(三寶)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삼보 가운데 일부분의 공덕을 밝히고자 하여, 이 논(論)의 첫머리에 우선 이 게송(偈頌)을 설명한 것이다.
먼저 가장 뛰어난 뜨거운 번뇌에서 벗어나 풍부한 이익 주는 말씀에 머리 땅에 닿게 절하옵니다. 그 말씀들은 서로 응하여 아라한이 보는 실상(實相)들과 동등합니다.
028_0302_a_21L前頂禮最勝, 離熱饒益言, 彼言說相應,
羅漢見實等。
028_0302_b_02L
이 게송에서 ‘전(前)’이라 한 것은 먼저[先]라는 뜻이다. ‘정례(頂禮)’라고 한 것은 청정한 믿음으로 몸을 굽혀 절하는 것을 말한다. ‘최승(最勝)’이라 한 것은 세존께서는 응공자(應供者), 즉 아라한ㆍ보살들이 공양을 드리는 분이며 또한 모든 법 가운데 뛰어난 까닭에 ‘최승’이라 표현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모든 법, 모든 종류에서 자유자재한 경지를 얻으신 까닭에 ‘최승’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열(離熱)’이라고 한 것은 불타는 세계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즉 번뇌의 뜨거운 기운은 능히 몸과 마음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번뇌에서 벗어나신 까닭에 ‘이열’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스스로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이 성취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게송을 지은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이익되게 함이 만족된 경지임을 밝힌 것이다. 다음 ‘요익(饒益)’이라고 말한 것은 이익이 많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능히 모든 중생들에게 풍요한 이익이 될 수 있다. 또한 풍요한 이익이라 하는 것은 안온(安穩) 즉 평온무사한 것을 말한다. 평온하고 무사하다는 것과 풍요한 이익이라는 것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되게 하시는 것이 만족함을 밝힌 말이다. 이 한 구절은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자신에게도 이익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되게 하시는 공덕이 만족되었음을 대략 설명한 구절이다. 저 두 가지 부처님의 공덕은 다 같이 구경(究竟)의 경지에서 지으신 공덕이다. 그런 까닭에 공양에 응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인 것이다.
‘그 말씀은 상응한다[彼言說相應]’라고 한 것은 도리의 내용이 뚜렷이 나타난 것이 이와 같은 공덕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인간 세계의 스승의 말씀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에 절하고 공경하는 것은 곧 법보(法寶)에 절하고 공경하는 일이다. 다음 ‘아라한이 보는 실상과 같다[羅漢見實等]’라고 한 것은, 마땅히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 아수라의 세계의 공양을 받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아라한이라 부른다. 이 아라한이란 무학(無學) 즉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다음 ‘실상(實相)’이라 말한 것은 사성제(四聖諦)를 말한 것이다. 더 배울 것이 있는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갖는 견해를 그는 실상을 봄[見實]이라 표현한 것이며, 이것은 오직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의 경우를 말한 것이나 이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나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 평등한 최상의 경지에 이른 스님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절하고 공경하는 것이란 승보(僧寶)에 절하고 공경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답】 부처님께서 각혜(覺慧)의 눈을 열어 만약 모든 법문의 수많은 것을 안다면 또한 그들을 위하여 뚜렷이 나타내신다. 나는 지금 그 가운데 일부분을 말하고 있다.
028_0302_b_22L答曰:
佛開覺慧眼, 若知諸法衆, 亦爲他顯現,
我今說少分。
028_0302_c_02L 이 게송에서 ‘불(佛)’이라 한 것은 모든 법을 알고 모든 종류를 아는 까닭에 부처님이라고 한 것이다. ‘각혜의 눈을 열었다’고 한 것은 무애지(無礙智), 즉 막힘없는 지혜의 눈이라는 뜻이다. ‘약(若)’이라 한 것은 같다는 뜻이니 부처님이 설법하신것과 같고 부처님이 밝히신 내용과 같고 부처님이 베푸시고 부처님이 풀이하신 법과 같다는 것이다. ‘지(知)’라고 한 것은 해득한다는 뜻이며 ‘법(法)’이라는 것은 간직한다는 뜻이니, 자성(自性)을 간직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인연을 짓는 까닭에 이것을 법이라 표현한 것이다. 법에는 쌓이고 모이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법중(法衆)’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 법중이란 말과 ‘군취(群聚)’, 즉 무리 지어 모여든다는 말과는 같은 내용으로서 표현이 다를 뿐이다.
다음 ‘역시 그들을 위하여 뚜렷이 나타내신다’라고 한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면 세간을 이롭게 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뚜렷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혹 깨달아 안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승섭바림경(昇攝波林經)’의 설법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지금 일부분을 말한다[我今說少分]’라고 한 것은 ‘저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서 나는 지금 다만 일부분의 법 모습만을 말하는 것이며 어찌 이와 같은 내용을 모두 다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뜻을 말한 것이다.
모든 유루(有漏)의 행(行)은 아(我)ㆍ낙(樂)ㆍ상(常)ㆍ정(淨)에서 벗어난 것 이것을 아덕(我德) 등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유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세.
028_0302_c_14L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 此受於我等,
不見有漏故。
이 게송에서 ‘모든 번뇌의 침입이 있는 행위는 아ㆍ락ㆍ상ㆍ정의 네 가지 공덕에서 벗어난 것이다[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의 침입이 있는 행위는 아덕(我德:自在我)에서 벗어나고 낙덕(樂德)에서 벗어나고 상덕(常德)에서 벗어나고 정덕(淨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들 세간 가운데서는 실상을 관찰할 수 없고 무명(無明)이 덮여져서 지혜를 어둡게 하여 이 상ㆍ락ㆍ아ㆍ정의 네 가지 법문에서 사실을 거꾸로 보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사전도(四顚倒), 즉 네 가지의 거꾸로 된 망상(妄想)이라 부르는 것이다.
【문】무슨 인연 때문에 유루(有漏)의 행이 아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됩니까? 【답】자재아(自在我), 즉 어떤 속박도 자유도 없기 때문이며 또 그런 행위는 인연에 속하는 행위인 까닭에 이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기는 행위이며 나의 자성(自性:타고난 고유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자재아(自在我)’라고 헤아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에 예속되지 아니한 존재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나’라는 존재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나의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고 아자재(我自在)의 인(因)이 없는 까닭에 모든 행위가 아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028_0303_a_02L【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낙덕(樂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핍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행위는 고통이며 자성(自性)도 또한 고통의 인연이다. 그런 까닭에 핍박을 당한다. 이 핍박당하는 것을 고통이라 말하며 그런 까닭에 이것은 낙덕(樂德), 즉 즐거움에서 벗어난 것이다. 【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상덕(常德)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모든 행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것을 보니, 영구불변한 것을 보는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상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된다.
【문】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이 정덕(淨德)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답】오염된 일이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일은 번뇌 경계 속의 일이며 이것은 더럽고 오염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정덕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이와 같이 모든 행이 아덕(我德) 등 사덕(四德)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왜 세간 사람들은 이것을 아덕 등 사덕이라고 취하게 됩니까? 【답】이것을 아덕(我德) 등 사덕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유루(有漏)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모든 행을 실상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간 사람들은 실상을 관찰할 수 없어서 그것을 아덕 등으로 알고 있다.
마치 원수진 사람이 악한 욕망을 숨겨 놓고 거짓 아름다운 말을 하며 집안을 노닐고 다니면서 사실은 친한 벗이 아닌데도 친한 벗인 것처럼 알게 하는 것과 같다.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아만(我慢)이 마음을 덮고 있는 까닭에 자재아(自在我)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현재 나타나는 행위 등으로 업을 짓고 그것 때문에 헷갈려서 아자재(我自在)가 없는 일 가운데서 아자재라고 보고 그 견해로 덮어씨워진 고통스러운 일을 상대적으로 다스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일상생활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에서 그것이 낙(樂)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고통과 수음(受陰) 가운데서 그것을 즐거움[樂]이라고 알고 있다. 엇비슷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서 무상(無常)한 일을 덮게 되고 저 현실로 보이는 색(色)이 엇비슷하게 이어지는 것을 보고 숙세(宿世)의 일을 기억하며 경론을 읽고 외우게 된다. 그런 까닭에 무상한 행 가운데 있으면서 그것이 상(常), 즉 영구불변이라고 알게 된다
또한 피부가 몸 안의 모든 더러운 일을 덮고 있는 까닭에 그들은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치아 등에서 잠깐동안 청정한 것을 보고는 더러운 가운데 존재하면서 그것이 청정하다는 알음알이를 짓게 된다. 이런 사람은 비록 똥오줌을 보고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거기에서 헷갈린 생각이 생겨 ‘이것은 비록 더럽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아마도 청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더러운 들개[野干]가 긴숙가(緊叔迦) 꽃을 보는 것과 같다.
028_0303_b_02L【문】무엇 때문에 이 논의 첫머리에 먼저 전도(顚倒)부터 말했는가?
【답】전도가 아닌 법의 모양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전도에 대한 것을 말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써 안온히 쉽게 알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의 첫머리에 먼저 전도에 대한 것부터 말한 것이다. 【문】다만 이 아덕(我德) 등 사덕(四德)에서 벗어나는 일만 있는 것입니까? 모든 유루(有漏)의 법문에는 또 다른 일도 있는 것입니까? 【답】또 다른 일도 있다.
만약 번뇌 생기는 곳에 처하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라고 하시네. 그 누(漏)라는 표현 때문에 지혜있는 사람은 번뇌라 말하네.
028_0303_b_06L若處生煩惱, 是聖說有漏, 以彼漏名故,
慧者說煩惱。
이 게송에서 ‘만약 번뇌가 생기는 곳에 있으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有漏)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이건 모여 있는 곳이건 인연 지은 곳이건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건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사람이건 살아 있는 몸으로 보는 등등의 번뇌를 법문에서는 유루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문】왜 그렇습니까? 【답】그의 ‘누(漏)’, 즉 ‘샌다’는 표현 때문에 지혜있는 사람은 그것을 번뇌라 말한다. 번뇌의 실체를 관찰하여 ‘누’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법문은 번뇌에서 생기는 법문이며 누(漏)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유루(有漏)’라고 표현한 것이다. 가령 공포심이 있는 길이나 독이 든 음식 등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하여야 한다. 만약 어떤 일이 누(漏)에 속한다면 이 누에 포함되는 것은 그것을 유루라 부른다. 여기서 무루(無漏)에 연유해서 생기는 번뇌를 말할 경우 그것은 무루의 법이 번뇌에 예속되어 번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무루의 법은 오직 인연으로 번뇌가 생긴다.
【문】루(漏)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답】유정천(有頂天:欲界의 最上部)에서부터 아래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육입(六入:六根ㆍ六境의 感受作用)이라는 부스럼이 스며든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누(漏)라고 표현하였고 이는 마치 신체에 부스럼이 스며드는 것과 같다. 또한 생사의 윤회에 계속 남아 머물게 되는 까닭에 누라고 표현한 것이다. 【문】이것에 관하여 또 다른 표현도 있습니까? 【답】또 다른 표현도 있다.
또한 유번뇌(有煩惱)라 부르며 취음(取蔭)ㆍ유쟁(有諍)이라고도 부른다. 번뇌를 취하고 말다툼이 생기는 까닭에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말한다.
028_0303_b_21L亦名有煩惱, 取蔭及有諍, 煩取諍生故,
知彼自性說。
028_0303_c_02L 이 게송에서 ‘유번뇌라고도 하고 취음ㆍ유쟁이라고도 한다’고 한 것은 곧 유루의 법을 말한 것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유번뇌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취음(取蔭)이라 부르기도 하고 유쟁(有諍)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뜻이다.
【문】왜 그것을 여러 가지 명칭으로 표현합니까? 【답】번뇌를 취하면 다툼이 생기기 때문에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말한 것이다. 모든 번뇌와 취하는 욕망과 말다툼의 모순 등은 모두가 유루의 또 다른 호칭이며 번뇌를 따라 그것이 생기고 거기에서 또 다른 번뇌가 생기는 까닭에 이를 유번뇌(有煩惱)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엇을 취하려는 욕망에서도 그것이 생기며 거기에서 또 다른 취하려는 욕망이 생기는 까닭에 이를 유취(有取)라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말다툼의 여지가 있는 모순에서도 그것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모순이 생기는 까닭에 이것을 유쟁(有諍)이라 표현한 것이다.
【문】여기서 ‘음(蔭:五蘊)’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취음(取蔭)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은 곧 취음이 아닌 또 다른 오음(五陰)이 있는 것입니까? 【답】만약 오음을 취할 경우 그것이 곧 음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취음이 아닌 것도 존재할 수 있다. 【문】어떤 것이 ‘음’입니까?
【답】 만약 행(行)이 번뇌를 벗어나면 이는 무루(無漏)의 음이다. 또 그 이전에도 취음이 있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말씀하신 음이니라.
028_0303_c_10L答曰:
若行離煩惱, 此是無漏蔭, 及前有取蔭, 是蔭聖所說。
여기서 ‘만약 행이 번뇌를 벗어나면 이것이 곧 무루의 음’이라 한 것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즉 두 가지의 음(蔭)이 있으니, 무루의 음과 유루의 음이 그것이다. 만약 행(行)이 신견(身見) 등의 번뇌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을 무루라 부르며 이 음은 취음(取蔭)이 아니다. ‘또한 전에 존재하던 취음은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음이다’라고 한 것은 만약 이 무루의 음과 앞에서 말한 취음을 합쳐서 음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곧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028_0304_a_02L【문】음이란 뜻은 무엇입니까? 【답】모여든다[聚]는 뜻이 곧 음의 뜻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음이란 다만 가명(假名)일 따름이며 실제의 일은 없습니까? 비단 한 물건이 아니라서 모여든다[聚]는 호칭이 생긴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 물건이 섞여서 합쳐지는 까닭에 취(聚)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까? 【답】비단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일도 있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곧 상대적인 형상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음에는 형상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의 모습[礙相]과 같다’고 한 것은 곧 색음(色蔭) 등 오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는 일과 경계 등에 포함되는 지혜와 인식작용 등의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성제(四聖諦)가 존재하는 까닭에 음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일이 있으며 비단 가명(假名)만은 아니다. 【문】음은 십이입(十二入)과 십팔계(十八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열 가지를 색음(色蔭)이라 말하며 또한 무교색(無敎色)1)이라 부른다. 이 색음을 분별한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이다.
028_0304_a_03L答曰:
十種謂色入, 亦名無教色, 是分別色蔭, 世尊之所說。
색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색이 있고 두 번째는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것이 아닌 색이 있다.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색이라 하는 것은 열 가지 색이 눈에 들어오고 나아가 몸으로 감촉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모인 것이 아닌 색이라 하는 것은 무교색(無敎色)이라 부르며 이는 법(法)에 들어가 거기에 포함되는 색이니 거기에 관해서는 업품(業品)에서 마땅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들 모든 색음(色蔭)은 서로 상대방의 색음작용 속에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색음 때문에 이것이 저것과 접촉하게 되고 저것이 이것과 접촉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색이라 부르는 것이며 이것으로 저것을 괴롭히고 저것으로 이것을 괴롭힌다는 것이 곧 이러한 뜻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령 손 등이 어떤 물건에 닿으면 부딪치는 까닭에 이를 색이라 표현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교색(無敎色)을 제외한 저 열 가지 색이라 하는 것은 색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손 등이 부딪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이유는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 생각에 만약 ‘의지한 것은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색도 역시 감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에 허물이 없다라고 한다면 수(受) 등도 역시 색 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대의 생각에 만약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사대(四大)는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감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마땅히 말하겠다. 현재 눈으로 보고 필요로 하여 공업(功業)에 얽힌 일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진흙으로 소상(塑像)을 만들거나 만약 이와 같다면 느낌[受]으로 생기는 마음의 작용도 역시 마땅히 색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대의 주장에는 잘못이 있다. 그러한 것들도 역시 눈 등 모든 기관(器官)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도 역시 감촉할 수 있는 것이기에 색이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028_0304_b_02L【답】비단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 뿐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 아닌, 가령 눈이나 귀 등 육근(六根)에 의지하여 생기는 색의 경우 진주(眞珠)의 광채가 진주에 근거하듯 그러한 색이 생길 때는 눈이나 귀 등이 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눈 등 육근도 그것이 감촉하는 것이기는 하나 감촉은 아니다. 또한 색을 만드는 것은 사대(四大)에 근거하니 이는 광채가 구슬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까닭에 사대는 감촉하는 것이므로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색도 감촉하는 것에 속한다.
【문】비록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대의 모습은 오히려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과거와 미래의 미세한 먼지로 이루어진 색이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답】모습은 무너뜨릴 수 없다. 과거의 색과 감촉은 이미 소멸하였고 미래의 색도 역시 이와 같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미세한 먼지도 역시 감촉할 수 있는 색이지만 그것이 미세하기 때문에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색은 모두 감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식음(識蔭)이라 하는 것은 이는 의입(意入)을 말한 것일세.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도 역시 칠계(七界)라 말한다네.
028_0304_b_08L所名爲識蔭, 是說爲意入, 於十八界中,
亦說爲七界。
식음이라 하는 것은 육식(六識)을 지닌 몸을 말한다. 이것은 십이입(十二入) 가운데 의입(意入)을 말하며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는 따로 나누어 일곱 가지의 심계(心界)로 나누고 있다.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식계(舌識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식계(意識界)ㆍ의계(意界) 등 일곱 가지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식(識)이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연유한 곳을 아는 까닭에 식이라 이름지었으며 능히 인연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밖에 세 가지 음(蔭)이 있으니 무교(無敎)의 세 가지 무위(無爲)이다. 이를 법입(法入)이라 말하는데 그것도 역시 법계에 속한다네.
028_0304_b_15L餘則有三蔭, 無教三無爲, 是說爲法入,
彼亦是法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느낌[受], 즉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 등 모든 법문을 통틀어 하나로 하여 법입으로 삼는 것이며 십팔계 가운데서는 한 법계(法界)에 속한다. 저쪽에서 입(入)이라 한 뜻은 큰 문(門)이란 뜻을 담고 있으나, 여기서 입이라 하는 뜻은 창문[窓]의 내용을 담고 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곧 “바라문이여, 눈을 문으로 삼아 나아가 색까지도 보느니라”라고 하였다. ‘입(入)’이란 글자의 뜻은 곧 옮긴다[輸]는 뜻이니, 능히 마음과 마음으로 작용하는 법을 불어나고 자라나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계(界)’의 뜻은 성품[性]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주사계(朱砂界)ㆍ웅황계(雄黃界)라 할 경우 여기서의 계(界)의 뜻은 그 경계가 지닌 본질을 말한다. 계(界)라는 글자의 뜻은 능히 스스로의 모습을 간직하여 다른 것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계(界)라고 이름한 것이다.
028_0304_c_02L이 계에 속하는 일이 열일곱 가지가 있으며 혹 경우에 따라서는 열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왜냐 하면, 육식(六識)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또 다른 의계(意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십칠계(十七界)가 곧 육식의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차례차례로 옮겨 가면서 서로 이어져서 의계(意界)가 되는 것이니, 비유하면 아비와 아들과의 관계와 같다. 아비가 있을 때는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만 세대가 바뀌면 서로 이어져서 차례로 아들이 아비가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의계를 제외하고 다시 다른 육식계(六識界)는 없다. 그런 까닭에 열두 가지의 근거와 거기에 의지하는 것에 인연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십팔계(十八界)가 존재하게 된다. 그 계(界)와 입(入) 등의 일에 모든 법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음(蔭)이라 하는 것은 오직 유위(有爲)의 존재인 것이다.
【문】음(蔭) 가운데는 왜 무위(無爲)가 포함되지 아니하는가? 【답】음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음의 모습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공통적인 모습과 개별적인 모습이다. 공통적인 모습이라 하는 것은 모인다는 뜻이니 이것은 음의 내용이며 또한 무상(無常) 등의 내용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모습이라 하는 것은 색ㆍ장애물 등이 그것이다. 이 두 종류의 모습은 무위(無爲)에는 없다. 그런 까닭에 무위는 오음에 속하지 아니한다. 그밖에 또 무슨 내용이 있는가? 즉 전도(顚倒)와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무위’는 전도된 일이 아니며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도 아니다. 전도된 일이 있는 까닭에 취ㆍ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전도망상을 끊는 방편 때문에 무루음(無漏蔭)을 말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오음에는 무위가 포함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오음ㆍ십이입ㆍ십팔계의 범위는 가장 넓다. 그런 까닭에 이 십팔계에 세워지는 갖가지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십팔계 가운데 하나는 볼 수 있고 십계는 상대가 있다고 말하나 팔계는 무기(無記:非善非惡)라고 말하고 나머지는 선(善)이거나 혹은 선이 아니다.
028_0304_c_18L界中一可見, 十界說有對, 八界是無記,
餘則善不善。
028_0305_a_02L ‘십팔계 중에 하나는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당장 한 경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색계(色界)가 그것이다. 왜 그런가? 색계는 눈으로 인식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쪽도 보여줄 수 있고 저쪽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인 것이다. 나머지 십칠계는 결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십계는 상대가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십팔계 가운데 다섯 가지의 몸 내부의 경계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다섯 가지 경계와 또 다섯 가지 외부의 경계 즉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 다섯 가지 경계 등을 합하여 열 가지 경계에는 서로 상대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상대성이 있다. 즉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상대가 있게 되고 경계에 상대가 있고 인연에 상대가 있는 것이다.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상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손에 오른손, 왼손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 경계에 상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육근(六根)과 육진(六塵) 즉 여섯 가지 육근의 대상경계가 상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다음 인연에 상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법문에서 의식(意識)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장애물이 되는데 상대가 있다’는 점만 취하여 설명한다면 열 가지 경계가 다시 서로 바뀌어 가며 다른 경계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저 모든 열 가지의 경계는 다시 서로 바뀌어 가며 상대를 이루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그 경계는 불어나고 자라나지 아니할 것임은 구마라다(鳩摩羅多) 스님이 설명한 것과 같다. 가령 어떤 마음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이 다른 마음에게도 장애물이 되는 것이니, 이 마음에 상대가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과 어긋날 경우에는 상대성은 없다.
나머지 여덟 가지 경계는 결정코 상대성이 없다. ‘여덟 가지 경계는 곧 무기(無記)이다’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팔계는 선(善)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임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이른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냄새ㆍ맛ㆍ촉감 등 여덟 가지 경계가 여기에 속하는데 거기에는 사랑이 없고 기록할 만한 사랑의 결과도 없기 때문에 ‘무기’라 한 것이다. ‘나머지는 선이거나 또는 선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나머지 열 가지 경계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인 경우와 또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색과 소리의 경계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업(業)이 지어진다. 이 업은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선한 마음이나 악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업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경계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이다.
028_0305_b_02L 즉 안식(眼識) 등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는 곧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며 무기인 경우도 있으니, 이 마음과 서로 호응하는 법계도 선ㆍ악ㆍ무기요, 또한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도 곧 선ㆍ악ㆍ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자성(自性)과 상응하는 경계도 역시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며 무기인 경우도 있다. 그 자성이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즉 뉘우치고 부끄러워하고 탐내지 아니하는 등 세 가지 선한 근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 자성과 서로 호응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더불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과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이 선하지 아니하다[不善]라고 하는 것은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고 탐내는 마음 등 세 가지 선하지 못한 뿌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과 상응하는 악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과 더불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일과 서로 어긋날 경우 그것은 무기(無記)에 속한다. 상응하지 아니하는 법계에 관해서는 잡품(雜品)에서 마땅히 설명하겠다.
무위법계(無爲法界)에서는 한 가지는 선에 속하고 두 가지는 무기에 속한다. 즉 ‘작용하는 인연’2)은 선에 속하고 허공 등과 같이 간택력으로 열반에 든 것이 아닌 것3)은 무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 선에 포함되는 사랑의 결과는 안온(安穩)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선(善)이라 표현한다. 이 선에 포함되는 것은 사제(四諦) 가운데서 도제(道諦)와 고제ㆍ집제의 일부분을 말한다. 즉 사랑의 과보라 하는 것은 고제와 집제의 일부분이며 ‘안온하다’라고 하는 것은 멸제(滅諦)에 해당한다.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경우에는 이를 선하지 못한 것이라 부르며 저 고제와 집제의 일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무기(無記)라 부른다. 기록할 만한 선과 악이 없기 때문에 무기라 부르며 기록할 만한 결과가 없기 때문에 역시 무기라 부르는 것이다.
열다섯 경계는 결정코 유루(有漏)의 세계이며 나머지 두 경계는 삼계(三界)의 삼유(三有)이네. 욕유(欲有) 중에 네 가지 유루의 법이 있고 열한 가지 경계에 다른 이유(二有:色有ㆍ無色有)가 있다.
028_0305_b_09L十五定有漏, 餘二三三有, 欲有中有四,
十一在二有。
이 게송에서 ‘열다섯 경계는 결정코 유루의 경계’라고 한 것은 신체 내부의 다섯 가지 경계,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그 대상이 되는 외부의 다섯 가지 경계,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다섯 가지 인식작용[五識:眼識 等]의 경계, 이 열다섯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한결같이 유루(有漏)로 향하는 경계임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두 경계’라고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 위에서 말한 열다섯 개의 경계 이외에 세 가지 경계가 있으니, 곧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경계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으니, 즉 유루(有漏)의 경계와 무루의 경계이다. 여기서 유루의 경계라 하는 것은 생멸하는 번뇌[生漏]와 공통적인 번뇌[共漏]가 서로 호응하여 적문(迹門:한정된 因緣으로 태어난 곳)의 생활에 만족하게 되는 까닭에 이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이것과 틀리는 경우 이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직 알지 못하는 욕망이나 지식의 뿌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모든 무루(無漏)의 뿌리에는 생멸의 법과 그것을 얻는 법, 또 세간을 벗어난 해탈에서 얻는 법, 그리고 무위(無爲)의 법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이 무루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
028_0305_c_02L다음 ‘삼계의 삼유’라고 한 것은 곧 이 삼계(三界:欲界ㆍ色界ㆍ無色界)의 세 가지 생존 형태[三有]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경계로서 냄새와 맛과 코의 인식작용과 혀의 인식작용, 이 네 가지 등은 한결같이 욕계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친 음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초월해 있는 색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 경계에 이유(二有)가 있다’고 한 것은 다섯 가지 내부의 경계[五內界:眼ㆍ耳ㆍ鼻ㆍ舌ㆍ身]와 세 가지 외부의 경계, 즉 색ㆍ소리ㆍ감촉의 경계와 그것과 연관된 세 가지 인식작용의 경계[三識界:眼識ㆍ耳識ㆍ身識] 등 이들 열한 가지 경계는 욕계와 색계에 존재하는 경계임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무색계의 무색이 아니기 때문에 색계와 욕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욕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이는 욕계에 얽매임[欲界繫]에 속하고 색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이는 색계의 얽매임에 속하고 무색계의 번뇌 때문에 얽매이게 되면 무색계의 얽매임이 된다.
각지(覺支)ㆍ관지(觀支) 있는 것이 다섯 가지 경계이고 세 가지에는 셋이 있고 나머지는 없다. 인연이 있는 경계가 일곱 가지임을 알라. 또한 법계의 일부분이니라.
028_0305_c_04L有覺有觀五, 三種三餘無, 有緣當知七,
亦法界少分。
여기서 ‘각지와 관지가 있는 것이 다섯 가지 경계’라고 한 것은 오식(五識)의 경계에는 모두 한결같이 각지ㆍ관지가 있어 이것이 각관(覺觀)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 ‘세 가지에는 셋이 있고 나머지는 없다’라고 한 것은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를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구별이 있으니, 즉 욕계(欲界)의 초선(初禪)의 경계까지는 각지도 있고 관지도 있다. 초선에서 이선(二禪)에 이르는 중간선(中間禪)에서는 각지(覺支:선정을 방해하는 거친 마음의 작용)는 없으나 관지(觀支)는 남아 있고 이선(二禪) 이상 유정천(有頂天)의 선정에 이르기까지는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다.
다음 법계(法界)에 각지와 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욕계에서 청정한 세계에 미치게 되면 각관(覺觀)에 의한 마음의 작용이 제거됨을 말하는 것이다. 법계에서 각지는 없고 관지만 있다고 하는 경우는 초선(初禪)에서 이선(二禪)에 이르는 중간 선정에서 관지(觀支)에 의한 마음의 작용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또 법계에서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다고 하는 경우는 이선 이상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를 말한다. 중간선에서는 모든 가르침이 없는 경지[一切無敎] 등을 비추어 보게 되며 이는 법계ㆍ욕계ㆍ범천(梵天) 세계의 관(觀)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며 이 세 가지 경계에는 포섭되지 아니한다. 만약 이것을 꼭 설명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관지도 없고 각지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는 없다’라고 한 것은 나머지 열 가지 경계에는 각지도 없고 관지도 없어서 그것이 각관과 서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인연이 있는 것이 일곱 가지임을 알라. 이 또한 법계의 일부분’이라 한 것은 일곱 가지 경계인 마음의 세계와 마음이 작용하는 법계에는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인연이 있다[有緣]고 표현한 것이며 거기에는 취할 수 있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밖에도 인연이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손이 지팡이와 인연한다’라고 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러한 표현들은 세속에서 말하는 인연에 지나지 아니한다. 알지어다! 나머지 경계에서는 결정코 인연이 없다.
아홉 가지 경계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머지 두 경계는 유위(有爲)며 무위(無爲)의 경계가 하나씩 있고 한결같이 유위만 있는 것은 열일곱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05_c_23L九不受餘二, 有爲無爲一, 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
028_0306_a_02L
‘아홉 가지 경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아홉 가지 경계에서는 결정코 느낌[受]이 없다는 뜻으로 느낌이란, 색(色)이 뿌리[根]의 작용에 있다면 그 미치는 작용도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을 쪼개고 가르고 허물고 없앨 경우 그 가운데서 받아들인 것이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까닭에 다른 영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게 된다. 저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와 소리의 경계 및 법계 등 아홉 가지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경계[不受]’라고 부른다. 그곳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이 멈추고 머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餘二)’이라 한 것은 십팔계 가운데서 나머지 아홉 가지의 경계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즉 다섯 가지 신체 내부의 경계[五內界]가 만약 현재 존재할 경우 그것은 받아들이는 세계[受]라 표현한다. 또 혹 이 현재의 인식[識] 작용이 비록 공(空)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것을 받아들이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 및 중생들의 작용이 아닌 세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세계[不受]라 부른다. 색과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 뿌리와 떨어지지 아니하고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받아들인다[受]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가령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이 그 가운데 멈추어 머물고 있을 경우에는 역시 그것은 다른 이름 즉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세계라 부른다.
이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가령 어떤 법이 생겨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하고 중생들의 작용과 상대가 있어 끌고 올 수도 있고 밀고 갈 수도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受]라고 표현한다. 그 생겨나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것이란 과거는 제외된 것이며, 미래 중생의 작용이란 현재에는 제외된 것이며, 중생들의 작용이 아닌 상대가 있는 경계라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생겨나서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법은 제외된 경계이다. 또한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 가운데 끌어올 수도 있고 밀고 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소리의 경계는 제외한 것이다. ‘유위와 무위가 각각 하나씩이다’라고 한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작용하는 까닭에 함이 있다[爲]라 표현한다. 이는 능히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028_0306_b_02L‘작용하고 지어진다[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인이 있다’는 것은 작위(作爲)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작용이 있는[有爲] 까닭에 만들어지는 것[作]이 있다. 한 법계란 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합쳐진 세계이다. 이 가운데는 세 가지 영구불변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무위(無爲)라 한다. 즉 허공무위(虛空無爲)와 택멸무위(擇滅無爲:지혜로 번뇌를 소멸하고 無爲에 이르는 일)과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자연히 번뇌가 소멸되어 無爲에 이르는 일)의 세 가지 무위가 그것이다. 수(受) 등 세 가지 음[三陰:受ㆍ想ㆍ行]과 작위함이 없는 색을 이름하여 유위(有爲)라 한다. ‘한결같이 유위만 있는 것은 열일곱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나머지 십칠계는 그 경계가 이루어진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유위만 있다고 한 것이다. 【문】이와 같이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일을 끝냈습니다. 어떻게 이 법상이 법문에 거두어들여지는 것입니까? 자성(自性) 때문입니까, 타성(他性) 때문입니까?
【답】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 것 각기 스스로 자성(自性)에 머문다. 그런 까닭에 모든 법은 자성에 소속되는 것이니라.
028_0306_b_03L答曰:
諸法離他性, 各自住己性, 是故一切法,
自性之所攝。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 것’이라고 한 것은 예를 든다면 눈은 귀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이 성(性)이건 성을 떠난 것이건 서로 상대방을 간섭한다고 한다면 이 말은 현실과 상응하지 않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성품에는 소속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만약 한 가지가 생멸할 때 다른 모든 것도 생멸한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런 까닭에 타성(他性), 즉 다른 성품에는 속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성(自性)에 머문다’고 한 것은 예를 들면 눈은 눈의 본성에 머무는 것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모든 법은 그 자성에 소속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자성은 모든 법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논사가 말한 것은 스스로 서로 거두어들여진다는 내용을 말한 것인데 이것도 또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즉 생겨나는 법과 그 법의 분수의 한계로 구분해서 설명해야 한다. 생겨나는 법이란 색음(色陰)은 열 가지 색입(色入) 내지는 법입(法入) 가운데 존재하는 색이 포함되고 눈의 경계[眼界]는 그 자체로 눈의 경계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분수의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한 생각에는 한 생각만이 거두어들여지는 것이지 다른 생각은 거두어들여지지 아니한다. 만약 다른 것도 포함된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령 대관(臺觀)에 기초와 계단ㆍ대들보ㆍ서까래 등이 포함된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세속에서 하는 말일 뿐이며 우리가 말하는 저 안계는 하나의 경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에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미 모든 법의 모습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니, 여기서는 그 생긴 법의 차별을 설명하겠다. 【문】만약 모든 법이 자성(自性)에 소속된다고 한다면 또한 마땅히 자체의 힘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까?
028_0306_b_19L已說諸法相,生差別今當說。問曰:若一切法自性攝者,亦應自力能生耶?
【답】 처음엔 하나도 제 힘으로 생겨날 수 없느니라. 반려자를 여의었기 때문에 모두 이쪽 저쪽의 힘이 합쳐야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있느니라.
028_0306_b_21L答曰:
初無一能生, 以離伴侶故, 一切彼此力,
諸法乃得生。
028_0306_c_02L ‘처음에는 하나도 생겨날 수 없다. 반려자를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유위(有爲)의 모든 행위는 자성이 약하고 뒤떨어진다. 그런 까닭에 모든법이 자신의 힘으로 생겨날 수 없다. 【문】어떻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답】모든 법이 상대적인 피차(彼此)의 힘이 합쳐져야만 생겨날 수 있다. 유위의 모든 법은 이 힘으로부터 생겨난다. 비유하면 두 사람의 병약한 사람이 서로의 힘을 합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작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네 종류로 구분된다. 이른바 색과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 등 네 가지가 그것이다.
그것이 생겨나는 과정도 역시 네 종류로 구분된다. 취(取)하는 행동이 작용하고 근거가 만들어지고 불어나고 올라가는 작용이 일어나고 동반하는 짝을 만드는 네 가지다. 그것을 취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의과(依果:依報, 주위 환경)와 보과(報果:正果, 몸)와 장부과(丈夫果:創造의 果報)의 일부분을 말한다. 근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십팔계(十八界)와 육입(六入)과 색을 만드는 사대(四大)를 말한다. 또 불어나고 올라가는 작용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한 찰나간에 생긴 일에 일체의 모든 법이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동반하는 짝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상대와 내가 짝이 되어 모든 유위(有爲)의 형상에 미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유위를 나는 마땅히 먼저 설명할 것이며,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생기는 것이 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생기는 곳 있으면 반드시 다른 마음과 함께 생긴다. 모든 마음과 법들이 모여들어 또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도 생긴다.
028_0306_c_13L若有心生處, 必與心共生, 諸心法等聚,
及不相應行。
여기서 ‘마음’이라 한 것은 마음과 뜻과 의식을 뜻한다. 이것은 내용은 같은데 표현을 달리한 것이다. 이 마음이 선ㆍ악 등으로 분별되고 경계로써 분별되며 종류로써 분별되며 근거로써 분별되며 무루ㆍ유루로 분별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차별이 있다. 이 마음이 어디에 근거를 한 것이거나 인연으로 생긴 것이거나 또는 찰나간에 생긴 마음이거나 그것은 반드시 결정코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과 함께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문】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답】 상(想)과 욕망과 감촉과 지혜 염원과 사(思)와 해탈과 경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작용 삼마제(三摩提)와 수(受) 등이라.
028_0306_c_20L答曰:
想欲及觸慧, 念思與解脫, 作意於境界,
三摩提受等。
028_0307_a_02L 여기서 ‘상(想)’이라 하는 것은 인연에서 능동적으로 취하는 모습을 말한다. 즉 남자와 여자에서 살결이 거칠고 미세하다거나 나무 말뚝이 길고 짧다는 등의 모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욕망[欲]’이라 하는 것은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보고 나서 즐거워하는 등의 감정을 말한다. ‘감촉[觸]’이라 하는 것은 인연에 의거하여 마음과 화합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예를 들면 햇빛과 구슬은 다른 물체이지만 화합하면 불을 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지혜[慧]’라고 하는 것은 능히 인연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면 이런 것은 색이지 맛이 아니다. 또 이것은 옳다 그르다 등을 판단하는 지혜를 말한다.
‘염원[念]’이라 하는 것은 한 생각을 인연에 매어 두는 것을 말하며 ‘사(思)’라고 하는 것은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이 함께 서로 배반하여 마음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해탈(解脫)’이라 하는 것은 인연 가운데서 마음이 바뀌어 가면서도 장애가 일어나지 아니하는 까닭에 ‘해탈’이라고 한다. ‘사유하는 작용[作意]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을 취함에 용감하고 씩씩함을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 쏟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삼마제(三摩提)’라고 하는 것은 인연을 취할 때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受)’라고 한 것은 즐거운 일에나 즐겁지 아니한 일에나 모두 서로 어긋나서 인연 가운데서 받아들이는 감정을 말한다.
모든 마음이 생길 때 이 생겨남에 대하여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똑같이 한 인연에서 돌고 돌며 또한 늘 서로 호응한다 하셨네.
028_0307_a_09L一切心生時, 是生聖所說, 同於一緣轉,
亦復常相應。
‘모든 마음이 생길 때 이 생겨남에 대하여 성인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상(想) 등 열 가지 법이 모든 마음과 함께 한꺼번에 생기는 까닭에 이것을 대지(大地)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이것은 큰 마음의 땅[大心地]인 까닭에 이를 대지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다음 ‘똑같이 한 인연에서 돌고 돈다’라고 한 것은 이 열 가지 법이 모든 마음과 함께 한 인연 가운데서 한꺼번에 돌고 돌며 따로 다른 인연을 맺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의 같은 것이 있다. 이른바 모습과 인연과 때와 근거와 일 등 다섯 가지가 그것이다. 같은 한모습, 동일한 인연, 같은 시각, 같은 근거, 같은 일로 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같다고 하는 것은 함께 서로 호응한다는 뜻이다. ‘또한 늘 서로 호응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항상 마음과 서로 호응하여 이쪽ㆍ저쪽이 한꺼번에 생겨 서로 호응하면서 인연을 취하기 때문에 이것을 서로 호응한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으로 이미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는 법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법을 설명하겠다.
여러 가지 뿌리와 뉘우침과 부끄러워함이 있고 믿음과 참으로 아름다움과 방일하지 않음과 해치지 않음과 정진과 평정함[捨]과 뜨거운 번뇌 및 각(覺)과 관(觀)이 있다.
028_0307_a_21L諸根有慚愧, 信猗不放逸, 不害精進捨,
或熱及覺觀。
028_0307_b_02L 여기서 ‘여러 가지 뿌리’라 한 것은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는 두 가지의 착한 뿌리[善根]를 말한다. 어리석지 않은[不癡] 착한 뿌리의 바탕은 곧 지혜이며, 큰 마음의 바탕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았다.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들의 작용에 성내지 아니함을 말한다. ‘뉘우침[慚]’은 자기 몸을 존중하여 악한 일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말하며, ‘부끄러워함[愧]’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법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라 한 것은 전도되지 아니한 인과[不顚倒因果]를 말한다. ‘믿음과 아름다움’이라 한 것은 착한 마음이 악(惡)에서 벗어나서 마음 속이 느긋하고 편안하다는 표현이다. ‘방일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것은 지을 수 있고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부드럽게 조절하는 방편을 말한 것이며 또한 방편을 만드는 일을 버리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을 말한 것이며 결국 이것은 선(善)을 닦는다는 내용이다.
‘해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중생들의 작용에 마음이 괴로워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며 ‘정진(精進)’이라 한 것은 허물과 악을 버리고 여의는 공덕을 닦고 익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키고 보호하며 불어나고 자라나게 채찍질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평정함[捨]’이라 한 것은 마음이 평등하여 모든 착한 마음이 한꺼번에 도리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열 가지 법문은 모든 착한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선의 대지[善大地]라고 표현한다. ‘뜨거운 번뇌’라고 한 것은 아집(我執)과 편견(偏見) 등의 번뇌를 말한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뒤의 사품(使品)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거친 작용을 ‘각(覺)’이라 하니, 이는 민첩하고 날카롭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마음의 미세한 작용을 ‘관(觀)’이라 하니, 이는 미미하고 적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 법은 모든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혹 얻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얻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그것이 모이고 마음의 작용이 생기는 데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여기서 마땅히 설명하겠다. 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을 선ㆍ악 등으로 분별해 보면 다섯 종류의 덩어리[聚]가 있다. 즉 이른바 착하지 못한[不善] 법, 선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不共善] 법, 숨어 없어져서 선악을 구별 못하는[隱沒無記] 법, 숨고 사라지지 아니하면서 선도 악도 아닌 경우[不隱沒無記], 이렇게 욕계(欲界)에서는 다섯 종류의 법이 성취된다. 색계(色界)와 무색계의 경우는 착하지 아니한 법은 제외되고 네 종류의 법만 성취된다.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 속에서는 마음의 작용은 스물한 가지 세 가지 편견(偏見) 가운데 한 가지 작용이 소멸하며 욕계에서는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의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
028_0307_b_19L不善心聚中, 心數二十一, 三見中滅一,
欲二見少三。
028_0307_c_02L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 속에서 마음의 작용은 스물한 가지’에서 착하지 못한 마음이란 마음이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와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의 집단 가운데 스물한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다. 즉 십대지(十大地)와 각관(覺觀), 두 가지 번뇌와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심과 의심 및 그 가운데 하나의 무명 탐욕, 나아가 의심 등 피차가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무명(無明)이 그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작용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모든 번뇌와도 서로 호응하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일곱 가지의 번뇌가 일어나게 된다. 즉 뉘우침이 없고[無愧] 부끄러워함이 없고[無愧] 어둡고[睡]ㆍ흔들리고[掉] 믿지 아니하고[不信] 방일(放逸)하고 게으르게 되는것[懈怠]이 그것이다.
【문】모든 착하지 못한 마음 가운데 각각 스물한 가지 작용이 있는가? 【답】그렇지 않다. 세 가지 편견 가운데 한 가지 작용이 소멸하며 욕계에서는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 착하지 못한 마음 더미에는 사견(邪見)과 견취견(見取見)과 계취견(戒取見)의 마음과 서로 호응하는 스무 가지 마음의 법이 있다. 이 가운데 지혜는 제외된다.
‘두 가지 편견과 세 가지 부분적인 작용이 있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는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의 두 가지 편견이 서로 호응하여 열여덟 가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이 있다. 여기서 지혜가 제외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고, 이밖에 뉘우침이 없는 편견과 부끄러워함이 없는 편견도 제외된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지혜에 속하기 때문이다. 견(見)이 상응하는 취(聚) 중에는 지혜가 없다. 하나의 취 가운데 두 개의 지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은 무기(無記),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뉘우침이 없는 것과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은 오로지 착하지 못한 마음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세 가지 작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선(善)한 마음은 스물두 가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스무 가지 무기는 열두 가지가 있고 회면(悔眠)의 일이 한꺼번에 불어나게 되느니라.
028_0307_c_14L善心二十二, 不共有二十, 無記有十二,
悔眠俱被增。
‘선한 마음이 스물두 가지’라고 한 것은 십대지(十大地)와 십선대지(十善大地) 및 각관(覺觀)을 말한다.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스무 가지’라고 한 것은 착하지 못한 마음의 집체(集體)로서 스물한 가지 가운데서 번뇌를 제외한 숫자를 말한다. ‘함께 하지 않는[不共]’이라 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무명(無明)만은 나머지 다른 번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기가 열두 가지’라고 한 것은 숨고 사라지지 아니하는 무기 가운데 열두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즉 십대지와 각관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믿음이 없다[無信]’는 것은 공덕에 속하고, ‘탐욕 따위가 없다’는 것은 허물과 악 같은 따위에 속한다. 왜 그런가? 무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은몰하지 아니한다[不隱沒]라고 하는 것은 더럽게 오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308_a_02L다음 ‘회면의 일이 한꺼번에 불어나게 된다’고 한 것은 뒤쫓아가며 변하는 것을 회(悔)라고 하나니, 이 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착한 후회와 착하지 못한 후회와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후회 등 세 가지다. 그 가운데서 선(善)과 불선(不善)은 그 행동으로써 이름을 붙여 선이다 불선이다라고 부른다. 거기에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즉 어떤 때에 따라서는 착한 마음에서 착하지 아니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령 자기가 보시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혹 또 착하지 아니한 마음에서 착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자기가 악한 일을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또 혹 악한 마음에서 악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악한 일을 하고 나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적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또 착한 마음에 착한 일이 세워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령 보시를 베푼 뒤에 후회하는 마음이 적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밖에 일상 생활 속의 몸가짐 등에서 일으키는 후회는 선ㆍ악에 속하지 아니하는 무기(無記)이다. 그런 까닭에 이 후회하는 마음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그 마음의 집단 가운데서 후회하는 마음이 불어나게 된다. 나머지 다른 마음의 작용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는 후회하는 사람이 탐욕 등을 전환시키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리석은 사람에게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착하지 아니한 후회와 서로 호응하는 마음의 집단 가운데서 오직 한 가지 무명만이 번뇌이고 다른 것은 번뇌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스물한 가지 불선(不善)한 마음의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며 착한 후회가 상응하는 집단 가운데서는 오직 후회하는 마음이 불어나는 경우가 있기에 이와 같이 스물세 종류의 마음의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은몰(隱沒)하지 아니하는 무기에 열세 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으며, 이것은 세 가지 마음의 집체 속에서 돌고 돈다. 즉 선한 마음과 함께 하지 아니하며 숨고 사라지지도 아니하는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면(眠)’이라는 것은 잠자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오취(五聚:善ㆍ惡ㆍ無記ㆍ悔ㆍ眠) 가운데서 돌고 돈다. 왜 그런가? 면(眠)에도 착하지 못하고 더럽게 오염되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마음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면이 불어난 것이며, 나머지 마음의 작용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같이 선ㆍ악ㆍ무기의 세 가지 마음의 집체(集體)와 후회하고 잠자는 두 종류의 작용이 함께 그 가운데서 돌고 돌면서 두 가지 일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욕계의 심법(心法)에 대한 순서이다. 【문】색계와 무색계는 어떻게 됩니까?
【답】 초선(初禪)은 악한 마음에선 벗어나지만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중간선(中間禪)에서는 각지(覺支)는 제거되지만 상지(上地) 관지(觀支)에 있어서도 그러하니라.
028_0308_a_19L答曰:
初禪離不善, 當知如欲界, 中閒禪除覺,
於上觀亦然。
028_0308_b_02L ‘초선은 악한 마음에선 벗어났지만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초선의 경지에서는 착하지 못한 마음의 더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나머지 네 가지 더미가 남아 있는 것은 욕계(欲界)의 경우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간선엔 각지는 제거되지만’이라고 한 것은 중간선에서는 각지 즉 거친 마음의 작용은 제거되지만 나머지는 초선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상지의 관지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이선(二禪) 이상의 경지에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는 각관(覺觀)은 제거되지만 나머지는 초선의 경지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은 동반자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색계의 경우를 지금 곧 설명하겠다.
미세한 먼지 사근(四根)에 남아 있고 열 가지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신근(身根)은 아홉 가지, 나머지는 여덟 가지니 냄새 있는 땅에 있는 것을 말하네.
028_0308_b_04L微塵在四根, 十種應當知, 身根九外八,
謂在有香地。
‘미세한 먼지 사근에 남아 있고 열 가지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안근(眼根)의 미세한 먼지에 열 가지가 있으며 이것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즉 지(地)ㆍ수(水)ㆍ화(火)풍(風)과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안근과 신근(身根) 등 이 열 가지는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귀ㆍ코ㆍ혀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신근은 아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열 가지 중에서 안근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앞의 경우와 같다. ‘나머지는 여덟 가지’라고 한 것은 근(根)에 대한 법(法)이 아닌 다른 법 가운데 있는 여덟 가지의 미세한 먼지를 말한 것이며 이는 사대(四大)와 색(色) 등 사진(四塵)을 말한 것이다.
【문】어떤 세계의 미진(微塵)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까? 【답】게송에 이른 대로 ‘냄새 있는 땅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욕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내용이니, 그 가운데는 냄새[香]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색계의 미진은 냄새에서 벗어났다. 그런 까닭에 그 세계에서는 냄새와 맛은 제거된다. 그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앞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의 작용하는 법과 또 그것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도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을 설명하셨는데, 이와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은 어떤 것입니까?
【답】 모든 유위(有爲)의 행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니 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어 피차가 또 서로 작위(作爲)한다.
028_0308_b_18L答曰:
一切有爲行, 生住及異壞, 是亦有四相,
彼此更相爲。
‘모든 유위의 행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모든 유위의 행에 네 가지 모습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였던 것이 생겨나는 까닭에 새로운 생명이 생겨난다라고 말하고, 이미 스스로 한 일이 성립된 까닭에 이를 머무는 곳에 머문다라고 말한다. 그후 이미 쇠하여 달라진 까닭에 이를 즉 다르게 변했다고 표현하며 이미 그 세력이 소멸된 까닭에 이를 없어졌다[壞]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만약 유위(有爲)의 법문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될 경우 이것을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心不相應行]이라 표현한다.
028_0308_c_02L내가 지금 곧 유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겠다. 이 일을 알 수 있는 까닭에 그것을 모습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생겨나고 머물고 늙고 무상한 것이니, 생겨난다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며 머문다는 것은 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말하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하게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무상하다는 것은 허물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결코 일시적으로 만들어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생기는 것을 업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나머지 다른 것은 생겨나는 일이 끝나야 업을 짓게 된다. 그런 까닭에 유위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허물어지는 일은 같은 모습이 아니다.
【문】만약 모든 유위의 법에 네 가지 모습이 있다면 이것은 또한 유위의 법이니 여기에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까? 【답】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으니, 이것도 또한 네 가지의 모습이 있어서 그 이전의 네 가지 모습과 함께 생겨나기에 이것을 생생(生生)ㆍ주주(住住)ㆍ이이(異異)ㆍ괴괴(壞壞)라 말하는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곧 끝없이 생주이괴(生住異壞)가 되풀이되는 것입니까? 【답】저것이나 이것이나 모두 작용한다. 이 모습에는 앞의 것과 뒤의 것, 피차의 모습이 생겨나게 되며 그리하여 생생생(生生生)이 되고 또 생생생생(生生生生)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머물고 머물고 또 머물어 피차의 모습이 머물게 되고 달라지고 달라지고 또 달라져서 피차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며 허물어지고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져서 피차의 모습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무궁한 것이 아니다.
이후로 다시 이 네 가지 변하는 모습이 하나의 법이 되어 생겨나고 또 생겨나며 이 생기고 또 생기는 법도 다른 법이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머물고 또 머무나니 이 머무는 법도 다른 일이 아니다. 그 나머지 변하고 소멸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모습이 각기 여덟 가지 법이 된다. 그리하여 생생(生生)도 여덟 가지 법이 되는 것이니 즉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과 뒤에 일어나는 네 가지 모습 및 그 본래 모습을 이룬 법을 합하면 여덟 가지 법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머물고 달라지고 소멸하는 경우[住異滅]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위에서 이미 함께 생기는 경우 동반자를 따르는 까닭에 생긴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지금부터는 동반자가 없어 생겨나지 아니하는 경우를 설명하겠다.
소작인과 공인과 상사인과 보편인과 상응인과 근인이 있으니 이 여섯 인으로부터 돌고 돌며 유위(有爲)의 법을 낳는다.
028_0308_c_20L所作共相似, 普遍相應根, 從此六種因,
轉生有爲法。
028_0309_a_02L 이 여섯 가지 인연이 굴러 굴러 유위의 법을 낳는 것이다. ‘소작인(所作因)’이라 하는 것은 만약 어떤 법이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대하여 장애를 주지 아니한다면 이 힘 때문에 그 법문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이 생길 때 다른 모든 법은 그 자성(自性)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귀가 생길 때도 자성이 없어지나니 이렇게 하여 자성이 아닌 것이 자성과 더불어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을 말한다. ‘공인’ 즉 함께 하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모든 행이 동반하는 것과 함께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 즉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는 법, 마음이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동, 유위(有爲)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사대(四大)의 미진(微塵)이 마음과 계율 등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상사인(相似因)’이란 만약 뜻이 능히 비슷한 법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착한 것을 익혔으면 착한 법을 낳게 되고 착하지 아니한 법을 익혔으면 착하지 아니한 법을 낳는 경우와 같다. 또 전생에서 익힌 것이 교묘하고 솜씨 있었으면 능히 이승에서도 교묘하고 솜씨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마치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등등의 인연을 말한다. ‘모든 곳에 두루한 인연[一切遍因]’이라 하는 것은 만일 여러 가지 번뇌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서로 이어져 다른 번뇌가 생기게 된다. 가령 자기의 편견에 집착한 사람은 그 편견의 힘 때문에 아집(我執)에서 단견(斷見)ㆍ상견(常見)에 집착하고 음상(陰相)을 비방하며 혹은 의심도 하게 된다. 그 가운데는 혹 청정한 것과 가장 뛰어난 것만을 취하여 자만심(自慢心) 등 허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역시 이와 같이 모든 곳에 두루 인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응인(相應因)’이라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법에서 나와 상대의 힘이 함께 한 시각, 한 인연 가운데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문】만약 마음과 마음이 작용하여 생기는 법이 한 시기에 일어난다면 함께 생기는 인연[共生因]이나 서로 호응하는 인연과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답】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상응하는 인연이며 동일한 과보를 얻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곧 함께 생기는 인연이다. 가령 지팡이를 잡고 있으면 지팡이의 업(業)이며 강물을 건너가는데 손을 잡고 끌고 가면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다음 과보의 인연[報因]이라 하는 것은 세간의 생명체 가운데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서로 이어받는 일의 과보를 생(生)이라 표현한다. 예를 들면 착한 인연은 사랑스러운 과보를 얻고 악한 인연은 미운 과보를 얻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으로 모든 인연의 법은 이미 설명하였다. 만약 법이 인연 따라 생긴다면 거기에 관해서 지금 설명하겠다.
과보로 생긴 마음과 마음의 법과 또 다른 뒤섞인 번뇌는 모두가 다섯 가지 인연으로 생기며 함께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028_0309_a_20L報生心心法, 及餘雜煩惱, 悉從五因生,
共生應當知。
028_0309_b_02L 가령 과보로 생기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서 생기는 법문이나 더럽게 오염된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은 다섯 가지의 인연을 따라 생기게 된다. ‘과보로 생긴 마음과 마음의 법의 다섯 가지 인연’이라 하는 것은 짓는 인연[所作因]과 함께 생기는 인연[共生因]과 비슷한 인연[相似因]과 서로 호응하는 인연[相應因]과 과보로 생기는 인연[報因] 이다.
이 가운데 짓는 인연이라는 것은 그 법이 생길 때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일들이 장애가 되지 아니하는 경우를 말한다. 함께 생기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이 편과 저 편이 짝이 되어 생기는 경우를 말하며 그 생기는 법들은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과 동반하는 힘으로 생기게 된다. 비슷한 인연이라 하는 것은 혹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무기의 법이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과보의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며 일상 생활의 몸가짐과 관계되는 일은 아니다. 왜 그런가? 상대방이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지 아니한 것이 뒤지는 것과 인연을 짓기 때문이다.
서로 호응하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힘이 일시에 한 인연 가운데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과보로 생기는 인연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이 혹 착하고 착하지 아니한 업을 지었을 경우 이쪽은 그 과보로 더럽게 오염되는 경우를 말한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은 과보로 생기는 인연은 없다. 왜 그런가?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은 무기가 아닌 과보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루 인연을 설명하였다. 다섯 번째는 상대방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쪽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경우를 말하였으며, 나머지 네 가지 인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은 저것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과 나머지 서로 호응하는 법들이다. 최초의 무루(無漏)를 제외하고 저것으로부터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네.
028_0309_b_12L是彼不相應, 及餘相應法, 除最初無漏,
彼從四因生。
‘이것은 저것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과’라고 한 것은 만일 과보로 생긴 색과 과보로 생긴 마음 같은 경우를 말한다. 이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이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네 가지 인연’이라 함은 지어지는 인연, 함께 생기는 인연, 비슷한 인연, 과보로 생기는 인연을 말한다. 더럽게 오염된 색과 더럽게 오염된 마음과 이와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행(行)도 역시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긴다. 즉 소작인(所作因)과 공생인(共生因)과 상사인(相似因)과 두루한 인연[遍因]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나머지 서로 호응하는 법이다. 최초의 무루를 제외하고 저것으로부터 네 가지 인연따라 생기네’라고 한 것은 나머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에서 최초의 무루법(無漏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역시 네 가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네 가지 인연이란 즉 소작인ㆍ공생인ㆍ상사인ㆍ상응인(相應因)을 말한다. 여기서 나머지라고 한 것은 숨겨져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 무기(無記)를 말한 것이며, 제외된다[除]라고 한 것은 보인(報因)을 말한 것이다.
만약 나머지는 상응하지 않는다면 알지어다. 비슷한 것은 세 가지 인연과 모든 나머지 상응하는 것과 최초의 무루법일세.
028_0309_b_23L若餘不相應, 相似當知三, 及諸餘相應,
最初無漏法。
028_0309_c_02L
‘만약 나머지 상응하지 않는다면 알지어다. 비슷한 것은 세 가지 인연과’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行)과 그 나머지 상대인 다른 명칭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상대라 함은 선(善)하고 은몰(隱沒)하지 아니한 무기를 말한다. 단, 보인(報因)은 제외된다. 만약 그것에 비슷한 인연이 성취된다면 최초의 무루법을 제외하고 세 가지 인연 따라 생기게 된다. 세 가지 인연이란 소작인ㆍ공생인ㆍ상사인을 말한다. ‘모든 나머지 상응하는 것과 최초의 무루법’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처음 생길 때는 무루법과 상응하는 법도 역시 세 가지 인연 따라 생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소작인과 공생인과 상응인이 그것이다. 그것에는 상사인은 없다. 앞서서 생긴 무루법이기 때문에 비슷한 인연은 없다.
그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 이것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 만약 한 인연따라 생긴다면 반드시 정녕 이 일은 없으리라.
028_0309_c_10L彼中不相應, 是從二因生, 若從一因生,
必定無此事。
‘그 가운데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 이것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한 것은 그것이 처음 생길 때 무루(無漏)의 더미 가운데서 색과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은 두 가지 인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두 가지 인연이란 소작인(所作因)과 공생인(共生因)을 말한다. 이미 모든 유위의 법을 설명했거니와 만약 모든 유위의 법이 한 가지 인연만을 따라 생긴다고 한다면 반드시 결정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은 반드시 결정적으로 지어지는 인연과 함께 생겨나는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이며, 나머지 다른 인연은 일정하지 않은 인연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법이건 한 인연으로 생기는 일은 없다. 이미 인(因)의 차별을 설명하였거니와 부처님은 이와 같은 인(因)4)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신 까닭에 연(緣)5)을 설법하신 것이며 나도 여기에 관하여 설명하겠다.
차제연과 소연연과 증상연과 인연이 있으니 법은 네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028_0309_c_20L次第亦緣緣, 增上及與因, 法從四緣生,
世尊之所說。
028_0310_a_02L 이와 같이 네 가지 인연에서 모든 유위의 법이 생겨난다. ‘차제연(次第緣)’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하나하나 생기면서 차례대로 이어져 모습이 만들어지고 방편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소연연’이라고 한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이 경계에 부딪히면 방편을 끌어당겨 매달려서 그것과 연유하는 까닭에 법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이라는 것은 법이 생길 때 장애를 만들지 아니하는 것이니, 마치 임금이 자유자재한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앞에서 설명한 지어지는 인연[所作因]을 말한다. ‘인연(因緣)’이라는 것은 이 소작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의 인연이니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인연이다.
【문】인(因)과 연(緣)은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답】어떤 사람은 차별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인은 종자(種子)와 같은 법이며, 연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방편이니, 마치 땅과 거름 같은 것을 연이라고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으로 이미 연에 대하여 분별하였으니, 또 여기에서는 법이 연을 따라 생기는 경우를 곧 설명하겠다.
마음과 모든 마음의 법 이것은 네 가지 연(緣)을 따라 생긴다. 두 가지 정수(正受)는 세 가지 인연따라 생기고 나머지 법은 두 연에서 설명하게 된다.
028_0310_a_09L心及諸心法, 是從四緣生, 二正受從三,
餘法說於二。
‘마음과 모든 마음의 법, 이것은 네 가지 연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한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법이 네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말한다. 앞에 받아들인 이 법은 차례로 일어나는 연이며 경계는 곧 인연의 인연[緣緣]이며 자성(自性)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은 곧 증상연(增上緣)이며 함께 생기는 인(因)과 자분(自分)의 인, 상응하는 인은 곧 인연에 속한다. 때에 따라서는 혹 두루한 인연[遍因]과, 과보로 생긴 인[報因]도 여기에 속한다.
‘두 가지 정수(正受)는 세 가지 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은 미리 생각한 일이 없이 바르게 받아들이는 법[無想正受]과 모든 번뇌가 다 소멸된 마음에서 바르게 받아들이는 법[滅盡正受]은 세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말한다. 저 두 가지 입정심(入定心)은 곧 차제연이니, 저 전생의 정수념(正受念)과 정수심(正受心)이다. 십팔계 경지의 착한 자분(自分)의 인연을 상사인(相似因)이라 부르며 함께 생기는 생주이괴(生住異壞)를 공생인(共生因)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두 인연은 이것이 저것과 인연하는 증상연(增上緣)임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 법은 두 가지 연에서 설명한다’라고 한 것은 그 나머지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행과 색(色)은 두 가지 연을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두 인연이란 인연과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답】 많은 법이 한 법을 낳고 한 법도 또한 많은 법을 낳는다. 연과 행으로 지어지는 까닭에 행이라 부름을 알아야 한다.
028_0310_a_23L答曰:
多法生一法, 是亦能生多, 緣行所作故,
名行應當知。
028_0310_b_02L
‘많은 법이 한 법을 낳고 이 또한 많은 법을 낳는다’고 한 것은 한 법이 많은 법의 힘 때문에 생기며, 이 한 법도 또한 많은 법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저것과 이것의 두 힘으로 생긴다. ‘연과 행으로 지어지는 까닭에 행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연이기도 하고 또한 행이기도 한 까닭에 연행(緣行)이라고 표현한 것이며, 연과 행으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연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소작(所作)이라 한 것은 또한 능작(能作:주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한 것이며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인연과 행인 까닭에 이것을 행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 행은 다른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행인 동시에 자체의 힘으로 다른 행을 만들 수도 있는 까닭에 이것을 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비차제연6)이라는 것은 자기 경지에서 자기 경지를 전생(轉生)하는 것이다. 곧 모든 번뇌들은 자기경지의 번뇌에서 차제연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그 하나하나의 순서마다 모든 높은 경지가 생기기도 하고 또한 낮은 경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할 일이다. 범천(梵天)에서 목숨이 끝나서 차례로 욕계의 모든 세계에 태어난다면 그는 더럽고 오염된 마음의 목숨이 끝난 것이니 이곳 욕계에 태어나도 외길로 그 더럽고 오염된 마음이 이와 같이 모든 땅에서 이어받게 된다. 이미 설명한데로 모든 번뇌 스스로의 모습이 이와같다. 이와같은 번뇌를 부처님께서 교화 때문에 여러가지로 설법하셨으니 지금 그것을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문】부처님께서는 일곱 가지 번뇌를 말씀하셨는데 욕망ㆍ사랑ㆍ노여움ㆍ소유에 대한 애착심ㆍ오만한 편견ㆍ의심ㆍ무명 등 일곱 가지가 그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답】욕계의 다섯 가지 욕망 이를 욕망과 사랑의 번뇌라 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위에서와 같으니 소유에 대한 애착심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욕계의 다섯 가지 욕망 이를 욕망과 사랑의 번뇌라 한다’고 한 것은 편견으로 생기는 고통[見苦]과 숙세에서 남아온 번뇌의[習] 멸(滅)제ㆍ도제ㆍ번뇌를 끊고자 깊이 생각하는 일[思惟斷] 등 다섯 가지 욕망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위와 같으니 소유에 대한 애착심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한 것은 색계의 애착이 다섯 가지 있으며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노여움은 곧 노여움이 번뇌며 다섯 가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교만한 마음과 무명(無明)등 열다섯 가지 번뇌가 삼계에 있네.
‘노여움[恚]’이라 한 것은 곧 “노여움의 번뇌”를 말한 것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성내고 노여워하는 일도 역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가 있다. ‘교만함과 무명 등 열다섯 가지 번뇌가 삼계에 있네’라고 한 것은 교만심이 욕계의 다섯 종류 색계의 다섯 종류 무색계의 다섯 종류가 있다는 것이며 무명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편견의 번뇌 서른 여섯은 삼계에 두루있다 말하네. 의심의 번뇌 열두 가지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네.
‘편견의 번뇌 서른 여섯은 삼계에 두루있다 말하네’라고 한 것은 욕계에서 일으키는 편견(偏見)이 열두 가지며 그 가운데 다섯 가지는 고제를 보아서 끊어야하는 것이고, 두 가지는 집제를 보아서 끊어야하는 것이고, 두 가지는 멸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도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의심의 번뇌 열두 가지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네’라고 한 것은 욕계에 네 가지 의심의 번뇌가 있으니 즉 고제와 집제와 멸제와 도제를 보아서 끊어야 하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또한 그러하다. 이 가운데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라고 한 것은 이 번뇌를 ‘액ㆍ수ㆍ유ㆍ누(扼ㆍ受ㆍ流ㆍ漏)라 말한다. 【문】어떤 이유로 그렇게 설명합니까?
【답】액박(扼縛)과 수(受)와 유(流) 모든 번뇌 끝없이 스며든다네 모든 속박과 영향과 흐름의 번뇌 이것을 누(漏)라고 말한다네.
모든 중생들을 얽어매는 까닭에 이를 액(扼)이라 말하며 이것은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고통의 흐름을 받아드린다[受流]고 말한다. 이것이 모든 중생들에게 내려가는 까닭에 이것을 유루(流漏) 라고 말하며, 모든 번뇌가 끝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이것을 누(漏)라고 말한다. 위에서 이미 번뇌의 갖가지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상응하는 근(根)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1)신역(新譯)에서는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이라고 함.
2)‘작용하는 인연’에서 원문의 수연(數緣)은 수멸(數滅)의 오식으로 보임. 이는 이것과 대비되는 비수멸(非數滅)을 보아도 알 수 있음. 수멸(數滅)을 신역에서는 택멸(擇滅)이라고 번역함.
3)원문의 비수멸(非數滅)을 신역에서는 비택멸이라고 함.
4)이전까지의 인연은 인(因, hetu)의 역어(譯語)이다.
5)이것부터 이후의 인연은 연(緣, pratyaya)의 역어이다.
6)여기에서 부터 1권말까지는 고려대장경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원(元)본에 수록되었던 것을 신수대장경에서 1권 말미에 수록해놓은 것인데 역자가 번역하였기에 참고삼아 수록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