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355_a_01L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제1권
028_0355_a_01L阿毘曇心論卷第一


법승(法勝) 지음
승가제바(僧伽提婆)ㆍ혜원(惠遠) 공역
김 재천 번역
028_0355_a_02L尊者法勝造
晉太元元年僧伽提婆共惠遠於廬山譯


1. 계품(界品)
028_0355_a_04L界品第一

먼저 가장 뛰어나시며 번뇌를 여의신
자애로운 얼굴에 예를 올리고
또한 경순(敬順)하는 여러 가르침과
집착 없는 응진승(應眞僧)1)에게 예를 올린다.
028_0355_a_05L前頂禮最勝
離惱慈哀顏
亦敬順教衆
無著應眞僧

해설하기를, 법상(法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째서 법상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항상 정해진 모습을 항상 일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선정과 지혜[定智]에 선정과 지혜의 모습이 있으면 곧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법상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028_0355_a_07L 說曰法相應當知何故應知法相者 常定知常定相彼曰定智有定智相 則爲決定以是故說法相應當知
【문】세간도 역시 법상을 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딱딱한 모습은 땅이요, 축축한 모습은 물이요, 뜨거운 모습은 불이요, 움직이는 모습은 바람이요, 걸림이 없는 모습은 허공이요, 물질이 아닌 모습[非色相]은 앎[識]이라고 알고 있다. 이처럼 일체를 아는 것이지 다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미 아는데 다시 알아야 한다고 하면 이는 곧 끝이 없으며, 끝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법상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인가?
028_0355_a_10L 世閒亦知法相此極愚亦知堅相地 濕相水熱相火動相風無㝵相空色相識如是一切不應已知復知已知復知此則無窮無窮者此事不 云何說法相應當知
028_0355_b_02L【답】세간은 법상을 알지 못한다. 만약 세간이 법상을 안다면 모든 세간도 당연히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정되어 있지 않다. 법상은 항상 일정하여 법상을 알면서도 결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결정되지 않은 것도 마땅히 결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은 법상을 알지 못한다.
또 딱딱한 모습인 땅은 항상하지 않은 모습이요 괴로운 모습이며 내가 아닌 모습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딱딱한 모습이란 마땅히 항상함이 있는 모습이요 즐거운 모습이요 내가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딱딱한 모습은 곧 덧없음[無常]의 모습이요 괴로움의 모습이요 무아(無我)의 모습이다. 만약 세간이 땅에 대하여 딱딱한 모습임을 안다면 무상의 모습과 괴로움의 모습과 무아의 모습도 마땅히 알아야 하겠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간은 땅의 딱딱한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028_0355_a_15L世閒不知 法相若世閒知法相一切世閒亦應 決定而不決定法相者常定不可說 知法相而不決定若然者不決定亦 應決定但不爾是以世閒不知法相 復次堅相地無常相苦相非我相不爾者堅相應有常相樂相有我相 而不爾是故堅相卽無常相苦相我相若世閒於地知堅相者無常相 苦相無我相亦應知而不知是故世 閒不知地堅相
【문】앞에서 법상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이 법이란 무엇인가?

【답】만약 모든 법상을 알면
바른 깨달음으로 지혜의 눈을 열고
또한 다른 이를 위해 드러내나니
이것을 지금 나는 설명하겠다.
028_0355_b_04L前說法相應當知 此法云何 若知諸法相
正覺開慧眼
亦爲他顯現
是今我當說

【문】부처님께서는 무슨 법을 아셨는가?

【답】상(常)ㆍ아(我)ㆍ낙(樂)ㆍ정(淨)이 있으니,
모든 유루(有漏)의 행을 여읜다.

모든 유루행은 모양을 바꾸어 생겨나고 자재하지 못하기에 나를 여읜 것이고, 부서지고 무너지므로 즐거움을 여읜 것이며, 지혜 있는 이[慧]가 싫어하기에 깨끗함을 여읜 것이다.
028_0355_b_07L 佛知何法 有常我樂淨
離諸有漏行
諸有漏行轉相生故離常不自在故 離我壞敗故離樂慧所惡故離淨
【문】만약 상ㆍ아ㆍ낙ㆍ정이 있어 모든 유루법을 여읜다면, 어째서 중생은 그 사이에서 상ㆍ아ㆍ낙ㆍ정이 있다고 느끼는가?

【답】항상함[常]에 계착함을 첫째로 하여
유루 속에서 망령되이 보는 것이다.

중생은 유루법에 대해 모습을 알지 못하고 상ㆍ아ㆍ낙ㆍ정이 있다고 느낀다. 마치 사람이 밤길을 가다가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도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과 같으니, 그 역시 이와 같다.
028_0355_b_11L 若有常我樂淨離諸有漏法者云何 衆生於中受有常我樂淨 計常而爲首
妄見有漏中
衆生於有漏法不知相已便受有常 我樂淨如人夜行有見起賊相彼亦 如是
【문】무엇이 유루법인가?

【답】만약 모든 번뇌를 일으키면
이것을 성인께서는 유루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법에 있어서 신견(身見) 등의 여러 번뇌, 즉 「사품(使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일으킨다면 이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028_0355_b_17L云何是有漏法 若生諸煩惱
是聖說有漏
若於法生身見等諸煩惱如使品說 是法說有漏
【문】어째서인가?

【답】이른바 번뇌와 누(漏)는
지혜의 임시의 이름이다.

번뇌를 누라고 한다. 모든 입(入)2)으로부터 새어 나가기 때문이요 마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가기 때문이며, 생사에 머물기 때문이요 마치 비인(非人)이 지니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유루라고 한다.
028_0355_b_20L何故 所謂煩惱漏
慧者之假名
煩惱者說漏漏諸入故心漏連注故 留住生死故如非人所持故是故說 有漏
028_0355_c_02L【문】이것에 대하여 달리 이름이 있는가?

【답】이를 일컬어 수음(受陰)이라고도 하고
또한 번뇌ㆍ쟁(諍)이라고도 하며
이 법을 성음(盛陰)이라고도 하고
노(勞) 또는 쟁이라고도 한다.
【문】어째서인가?

【답】번뇌[煩]ㆍ수(受)ㆍ쟁(諍)이 일어나기 때문이니,
그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55_b_24L此更有名耶 是名爲受陰
亦復煩惱諍
是法說盛陰
說勞說諍何故 煩受諍起故
是彼應當知

신견(身見) 등의 모든 번뇌는 중생을 괴롭히므로 번뇌라고 말하고, 번뇌로써 몸[身]을 받으므로 수라고 말하고, 분노하는 마음이므로 쟁이라고 말한다. 신견 등을 따라 모든 유루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괴로움을 일으키므로 노(勞)라고 하고, 느낌을 일으키므로 수라고 하며, 다툼을 일으키므로 쟁이라고 한다.
이미 성음(盛陰)을 설명했으니 이제는 음상(陰相)을 설명하겠다.
028_0355_c_04L 身見等諸煩惱勞於衆生故說煩惱 惱受身故說受忿怒心故說諍從身 見等生諸有漏法是生勞故說勞受故說受生諍故說諍已說盛陰相今當說

번뇌를 멀리 여읜 것과
무루(無漏)와 모든 유위(有爲)와
일체의 뒤섞인 수음(受陰)이
바로 성인이 설하신 음이다.

말하자면 법으로서 신견 등의 모든 번뇌를 여읜 것과 또한 모든 누를 해탈한 것과 유위는 원인에 따라 생기므로 이 일체와 그리고 앞에서 설한 성음을 통틀어서 음이라고 한다. 이것이 5음(陰)인 색(色)ㆍ통(通)각(覺)이라 불러 야 한다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028_0355_c_09L 若遠離煩惱
無漏諸有爲
一切雜受陰
是陰聖所說
謂法離身見等諸煩惱亦解脫諸漏 有爲從因生故是一切及前說盛陰 此摠說陰是五陰◀應云覺也▶
【문】색음이란 무엇인가?

【답】열 가지를 색입(色入)3)이라 하고
또한 무교(無敎)4)의 가색(假色)이기도 하다.
이렇게 색음을 분별하는 것이
모니(牟尼, muni)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열 가지를 색입이라고 한다’고 함은 안(眼)ㆍ색(色)ㆍ이(耳)ㆍ성(聲)ㆍ비(鼻)ㆍ향(香)ㆍ설(舌)ㆍ미(味)ㆍ신(身)ㆍ세활(細滑)5)을 말한다.
‘또한 무교의 가색이기도 하다’고 함은 「업품」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색이 바로 색음이다. 색음을 분별할 때에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55_c_14L 色陰云何 十種謂色入
亦無教假色
是分別色陰
牟尼之所說
十種謂色入者眼色耳聲鼻香舌味 身細滑亦無教假色者如業品說色是色陰分別色陰時是世尊說

식음(識陰)이라 함은
곧 의입(意入)을 말하니,
18계(界) 중에서는
다시 일곱 가지를 말한다.

말하자면 식음은 곧 의입이다. 또 계6) 중에서는 일곱 가지를 분별하니, 안식과 이ㆍ비ㆍ설ㆍ신ㆍ의식 및 의(意)이다.
028_0355_c_20L 所名曰識陰
此卽是意入
於十八界中
亦復說七種
謂識陰卽是意入亦界中七種分別 眼識耳鼻舌身意識及意
028_0356_a_02L
나머지는 세 가지 음(陰)이 있고
무교(無敎)와 세 가지 무위가 있으니,
이를 소위 법입(法入)이라고 하고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한다.
028_0355_c_24L餘則有三陰
無教三無爲
謂是說法入
亦復是法界

‘나머지는 세 가지 음이 있다’고 함은 통음(痛陰)7)과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이다.
‘무교와 세 가지 무위가 있다’고 함에서 [세 가지 무위란] 허공과 수연멸(數緣滅)과 비수연멸(非數緣滅)8)을 말한다.
이를 통틀어 법입이라고 하고, 또한 법계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이 법을 일컬어 음(陰)ㆍ계(界)ㆍ입(入)이라고 한다. 다만 음은 오로지 유위이고, 계와 입은 유위와 무위가 있다.
028_0356_a_03L 餘則有三陰者痛陰想陰行陰無教 三無爲者虛空數緣滅亦非數緣滅 此摠說法入亦復是法界如是此法 說陰界入但陰一向有爲界及入有 爲無爲
이미 음ㆍ계ㆍ입을 설명했으니, 이제 하나하나 그 모습을 설명하겠다.

계 중에서 하나는 볼 수 있는 것이고
열은 곧 유대(有對)라고 하며,
무기(無記)는 여덟 가지를 말하고
나머지는 선(善)과 불선(不善)이다.
028_0356_a_08L已說陰界入一一相今當說 界中一可見
十則說有對
無記謂八種
餘則善不善

‘계 중에서 하나는 볼 수 있는 것’이란 색계를 말한다.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도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가견(可見)이다. 나머지 열일곱 가지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열은 곧 유대라고 한다’고 함은 열 가지 계(界)는 유대라는 말이다. 안ㆍ색ㆍ이ㆍ성ㆍ비ㆍ향ㆍ설ㆍ미ㆍ신ㆍ세활이다. 이것은 각각 서로 대하고 각각 서로 장애한다. 처소에 만약 하나가 있으면 곧 둘은 없으므로 유대라고 한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대(無對)라고 알아야 한다.
‘무기는 여덟 가지를 말한다’고 함은, 안ㆍ이ㆍ비ㆍ향ㆍ설ㆍ미ㆍ신ㆍ세활은 즐거운 것이라고 판별할 수 없고 또한 나쁜 과보라고 판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기(無記)9)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선과 불선이다’란 색ㆍ성ㆍ의ㆍ법과 6식(識)을 말한다. 선한 몸의 움직임[身動]은 선색(善色)이고, 악한 몸의 움직임은 불선색(不善色)이며, 나머지 색은 무기이다. 소리와 입의 움직임[聲口動]도 이와 같다. 깨끗한 마음의 7식계(識界)는 선이고, 불선한 번뇌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며, 나머지는 무기이다. 법계란 이른바10) 마음이 상응하는 것은 마음을 설명하는 것과 같으며, 상응하지 않는 것은「잡품」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56_a_10L 界中一可見者色界此可視在此在 是故可見當知十七不可見十則 說有對者十界有對眼色耳聲鼻香 舌味身細滑是各各相對各各相障 處所若有一則無二是故有對知八無對無記謂八種者 細滑此非樂報可記亦非苦 報可記故曰無記餘則善不善者 法及六識善身動是善色不善 身動是不善色餘色無記如是聲口 動淨心七識界善不善煩惱相應是 不善餘無記法界識心相應彼如心 若不相應如雜品說

유루는 열다섯 가지가 있다.
나머지는 둘이며, 셋은 셋에 있다.
욕유(欲有) 중에 넷이 있고
열하나는 두 가지 유(有)에 있다.
028_0356_a_23L 有漏有十五
餘二三三有
欲有中有四
十一在二有
028_0356_b_02L
‘유루는 열다섯 가지가 있다’고 함은, 내계(內界)의 다섯과 외계의 다섯 및 식계(識界)의 다섯을 말한다. 누(漏)가 그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둘이다’고 함은 의계와 의식계와 법계는 유루이거나 무루라는 것이다. 만약 누(漏)가 그쳐 머물면 이것이 유루이고, 달라지면 곧 무루이다.
‘셋은 셋에 있다’고 함은 의ㆍ법ㆍ식계는 세 가지 유(有), 곧 욕유ㆍ색유ㆍ무색유 중에서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욕유 중에 넷이 있다’고 함은 향ㆍ미ㆍ비식 및 설식을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욕유 중에 포섭될 뿐이다. 색ㆍ무색유에 있는 것은 아니니, 췌식(揣食)11)을 원하는 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향ㆍ미는 그 성질의 췌식이다.
‘열하나는 두 가지 유에 있다’고 함은 욕유와 색유에는 11계(界)가 있다는 것으로, 안의 다섯과 색ㆍ성ㆍ세활 및 이들을 경계로 하는 식(識)이다. 이는 무색 중에는 없으니, 색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028_0356_b_02L 有漏有十五者五內界五外界五識 漏止住故餘二者意界意識界 法界此或有漏或無漏若漏止住是 有漏異則無漏三三有者識界 是三有中可得欲有色有無色有有中有四者香味鼻識舌識是一向 欲有中攝非色無色有離欲揣食故 一切香味是性揣食十一在二有者 欲有色有十一界內五色細滑及 是境界識此非無色中以離色故

유각(有覺)과 유관(有觀)은 다섯이며
삼행(三行)은 셋이고 나머지는 없다.
유연(有緣)은 일곱이라고 알아야 하고
법입(法入)은 소소입(少所入)이다.
028_0356_b_12L 有覺有觀五
三行三餘無
有緣當知七
法入少所入

‘유각과 유관은 다섯’이라 함은 5식계(識界)는 각(覺)ㆍ관(觀)12)과 함께 하고 거칠기[麤] 때문에 각ㆍ관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삼행은 셋’이라 함은 의ㆍ법ㆍ식계의 삼행이 만약 욕계나 초선(初禪)이라면 유각ㆍ유관이고, 만약 중간선(中間禪)13)이라면 무각(無覺)ㆍ소관(小觀)이며, 그 위라면 무각ㆍ무관이라는 말이다.
‘나머지는 없다’고 함은, 나머지 계는 각과 함께 하지도 않고 또한 관과 함께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니,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연은 일곱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일곱 계는 유연이라는 것이다. 이 연(緣)이 있기 때문에 유연이라고 말한다. 마치 사람에게 자식이 있으면 이를 유자(有子)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그와 같다. 안식은 색을 연하고, 이식은 성을 연하고, 비식은 향을 연하고, 설식은 미를 연하고, 신식은 세활을 연하고, 의식은 모든 법을 연한다.
‘법입은 소소입이다’고 함은, 만약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이라면 이는 유연이고 나머지는 곧 무연이라는 것이다.
028_0356_b_14L 有覺有觀五者五識界與覺觀俱麤 故覺觀相應三行三者識界此 三行若欲界及初禪是有覺有觀中閒禪是無覺少觀是上無覺無觀 餘無者謂餘界非覺俱亦非觀俱不 相應故有緣當知七者七界有緣此緣故故曰有緣如人有子謂之有 彼亦如是眼識緣色耳識緣聲識緣香舌識緣味身識緣細滑意識 緣諸法法入少所入者若心心數法 是有緣餘則無緣
028_0356_c_02L
아홉은 불수(不受)이고 나머지는 둘이다.
위(爲)ㆍ무위가 함께하는 것은 하나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界)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56_c_02L九不受餘二
爲無爲共一
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

‘아홉은 불수’란, 수(受)는 색근에 속하는 것과 또한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 가운데서 행함이 그쳐 머물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곧 불수이니, 그 중에서 9계(界)가 불수이다. 성ㆍ심(心)ㆍ법계는 그 가운데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둘이다’고 함은, 다섯 내계(內界)가 현재이면 이것은 수이고 그 중에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물며, 과거ㆍ미래는 불수이니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색ㆍ향ㆍ미ㆍ세활이 만약 근을 떠나지 않고 또한 현재이면 이것은 수이다.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근 중에 그쳐 머무는 것과 같이 그 중에도 또한 그러하니 근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곧 불수이다.
‘위ㆍ무위에 함께하는 것은 하나이다’고 함은 하나의 법계가 유위와 무위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 세 가지14)는 유상(有常)이기 때문에 유위일 수가 없고, 나머지 법계는 무상이기 때문에 유위이다. 유위ㆍ무위를 합해서 시설(施設)하는 까닭에 이로써 위ㆍ무위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열일곱 가지의 계는 무상한 까닭에 일체가 유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유위이다.
028_0356_c_04L 九不受者受名謂若色根數亦不離 是心心數法所行於中止住故則不受於中九界不受聲心法界非 於中心心數法止住餘二者五內界 若現在是受於中心心數法止住去未來不受非彼心心數法止住色香 味細滑若不離根及現在是受如心 心數法根中止住彼中亦爾不離根 餘則不受爲無爲共一者一法界 有爲及無爲於中三種有常故不可有 餘法界無常故有爲有爲無爲合 施設故是以爲無爲共一一向是有 爲當知十七界者十七界無常故一 切有爲是故一向有爲
【문】그와 같이 법상을 분별한다면, 법을 포섭하는 것이 자성(自性)인가, 타성(他性)인가?
【답】자성이다.
【문】어째서인가?

【답】모든 법은 타성을 떠나
각자가 자기의 본성[性]에 머문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
028_0356_c_18L如是分別 法相已云何攝法爲自性爲他性 自性問何故 諸法離他性
各自住己性
故說一切法
自性定所攝
028_0357_a_02L
‘모든 법은 타성을 떠난다’고 함은,이른바 눈은 귀를 떠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도 만약 여의면 이를 포섭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타성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기의 본성에 머문다’고 함은 눈은 스스로 눈의 본성에 머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도 만약 머물러 있으면 이를 포섭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는 것을 시설하였다. 그 중에서 가견법(可見法)은 1계(界)ㆍ1음(飮)ㆍ1입(入)에 포섭된다. 일체의 법이 이와 같으니, 다시 다음에 이 뜻을 「계경품(契經品)」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028_0356_c_22L 諸法離他性者謂眼離耳如是一切 法不應說若離者是攝以故非他性 所攝各自住己性者眼自住眼性是一切法應當說若住者是攝故說 一切法自性之所攝已施設自性所 於中可見法一界一陰一入所攝 如是一切法復次此義契經品當 廣說

2. 행품(行品)
028_0357_a_07L行品第二

이미 모든 법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법생(法生)에 대해 설명하겠다.
【문】만약 모든 법이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또한 마땅히 자력(自力)으로 생기는 것인가?

【답】궁극에 이르러서는 능히 생하는 것이 없으니,
등려(等侶)15)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스스로 생겨날 수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행(行)의 본성은 열등하여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병든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것과 같다.
028_0357_a_08L已說諸法自相如法生今當說諸法自性所攝者亦當以自力故 至竟無能生
用離等侶故
一切法不能自生所以者何諸行性 劣無勢力故如羸病人不能自力起
【문】만약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일어나는가?

【답】일체는 여러 연(緣)의 힘으로
모든 법이 마침내 생겨날 수 있다.

병든 사람이 다른 이의 도움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그것도 역시 이와 같다. 마음[心]과 동반해서 생기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다면, 이 마음에는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마음에 속한 법 등의 부류 및 서로 호응하지 않는 행이다.
마음[心]이란 의(意)이고 의란 식(識)이다. 실은 같은 것인데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 마음이 혹은 의(依) 혹은 연(緣) 혹은 시간으로 해서 일어나면, 그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 등의 취와 함께 생한다.
028_0357_a_14L 若不自力起當云何起 一切衆緣力
諸法乃得生
如羸病人由他扶起彼亦如是如心 由伴生今當說若心有所起
是心必 有俱
心數法等聚
及不相應行
心者 意者識實同而異名此心若依若 緣若時起彼心共俱心數法等聚生
【문】무엇이 마음에 속한 법 등의 취인가?

【답】상(想)과 욕(欲)과 갱락(更樂)과 혜(慧)와
염(念)과 사(思)와 해탈과
경계에 있어서의 작의(作意)와
삼마제(三摩提)와 통(痛)이다.
028_0357_a_21L 何者心數法等聚 想欲更樂慧
念思及解脫
作意於境界
三摩提與痛
028_0357_b_02L
‘상’이란 일이 일어날 때에 그 모습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요, ‘욕’이란 받아들일 연(緣)이 있을 때, 받아들이려고 욕구하는 것이다. ‘갱락(更樂)16)’이란 심(心)과 의(依)와 대상[緣]이 화합하여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요, ‘혜’란 대상에 대하여 결정하고 살피는 것이다. ‘염’이란 대상에 대하여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요, ‘사’란 공덕과 악 및 함께 다른 것을 마음에서 조작하는 것이다. ‘해탈(解脫)’이란 대상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할 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요, ‘작의’란 대상에 대하여 용맹 발동하는 것이다. ‘정(定)’이란 대상을 받아들일 때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은 것이요, ‘통(痛)17)’이란 낙(樂)과 불락(不樂) 및 이 두 가지와는 서로 다른 것[不苦不樂]으로서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028_0357_a_24L 想者事立時隨其像貌受欲者受緣 時欲受更樂者心依緣和合不相離 慧者於緣決定審諦念者於緣憶不 思者功德惡俱相違於心造作脫者於緣中受想時彼必有是作意 於緣中勇猛發動定者受緣時心 不散痛者樂不樂俱相違緣受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이 생겨남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똑같이 함께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행하고
또한 항상 서로 응한다.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이 생겨남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다’고 함은 이 열 가지 법이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함께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라고 하는 것이다.
‘똑같이 함께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행한다’고 함은 일체의 마음과 함께 동일한 연에 대해서 행하여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항상 서로 응한다’고 함은 각각 함께 갖추고 또 마음과 함께 항상 서로 응하여 함께 행한다는 것이다. 증감을 여의므로 ‘서로 응한다’고 한다.
028_0357_b_08L一切心生時
是生聖所說
同共一緣行
亦復常相應
一切心生時是生聖所說者此十法 一切心生時共生是故說名大地共一緣行者一切心共俱同一緣行 不相離亦復常相應者各各共俱及 與心俱常相應共行離增減故故曰 相應
이미 마음에 속한 법이 소위 일체의 마음속에서 통하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이제는 통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겠다.

모든 근(根)과 각(覺)과 관(觀)과
신(信)과 의(猗)와 불방일(不放逸)과
진(進)과 호(護)와 뭇 번뇌는
혹은 때로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028_0357_b_16L已說心數法謂通一切心中通今當說 諸根及覺觀
信猗不放逸
進護衆煩惱
或時不相應
028_0357_c_02L
‘모든 근’이란 선근(善根)이니, 말하자면 무탐(無貪)ㆍ무에(無恚)ㆍ무우치(無愚癡)이다. 각(覺)이란 마음에 있어서의 거친 상속(相續)이요, 관(觀)이란 마음에 있어서의 미세한 상속이다. ‘신’이란 진실한 청정을 이루는 것이요, ‘의(猗)18)’란 착한 마음일 때 몸과 마음에서 악을 여의므로 경쾌하고 즐거운 것이다. ‘불방일’이란 선을 지을 때에 방편으로서 버리지 않는 것이요, ‘진(進)’이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호(護)19)’란 일을 하는데 있어서 행하지 않는 것으로써 행하고 구하지 않는 것으로써 구하는 것이니, 스스로 조작하지 않는 것[無爲]이다. ‘뭇 번뇌’란 마치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들 법은 일체의 마음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때로 서로 응하기도 하고 혹은 때로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028_0357_b_19L 諸根者善根無貪無恚無愚癡覺者 於心麤相續觀者於心細相續信者 成實眞淨猗者善心時於身心離惡 故快樂不放逸者信善時方便不捨 進者作事專著護者作事行以不行 求以不求自守無爲衆煩惱者如使 品說此法非一切心中可得或時相 應或時不相應
【문】어째서 ‘마음에 속한 것’이라 하는가?
【답】의(意)란 그것을 심(心)이라고 부르는데, 그 권속이므로 ‘마음에 속한 것’이라 한다.
이미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의 법상(法相)에 대하여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불선(不善)의 심품(心品) 중에는
마음에 속한 것이 스물하나이다.
예오(穢汚) 가운데 둘을 뺀 것은
욕계의 비불선(非不善)이다.
028_0357_c_04L何故說心數謂之心彼眷屬故說心數已說諸心 數法相如所生今當說 不善心品中
心數二十一
穢污二損減
欲界非不善

‘불선의 심품 중에는 마음에 속한 것이 스물하나이다’고 함에서 불선이란 마음에 욕계의 모든 번뇌가 생기는 것으로, 욕계의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은 제외된다. 이는 불애(不愛)의 과(果)를 움직여 만들기 때문에 불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심품 가운데에는 스물한 가지의 마음에 속한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10대지(大地)와 각(覺)ㆍ관(觀)ㆍ두 가지 번뇌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수(睡)ㆍ조(調)ㆍ불신(不信)ㆍ방일(放逸)ㆍ해태(懈怠)이다.
‘예오(穢汚) 가운데 둘을 뺀 것은 욕계의 비불선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심품은 곧 욕계의 더러움이지만 이것은 불선은 아니라는 것이고, 신견ㆍ변견이 서로 응하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들 품 중에서는 열아홉 가지 마음에 속한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무참과 무괴를 빼면 오로지 불선이기 때문이다.
028_0357_c_08L 不善心品中心數二十一者不善名 若心生欲界諸煩惱除欲界身見是轉成不愛果故謂不善此心品 中當知有二十一心數法十大地 二煩惱無慚無愧調不信放逸 懈怠穢污二損減欲界非不善者心品是欲界穢污非是不善如身見 邊見相應心此品中當知有十九心 數法除無慚無愧一向不善故

선(善)과 불공(不共)은 스물이고
무기(無記)에는 열둘이 있다.
회(悔)와 면(眠)에서 마음은
이것을 능히 더한다.
028_0357_c_17L善不共二十
無記有十二
悔及於眠心
是能以爲增
028_0358_a_02L
‘선과 불공은 스물이다’고 함에서 ‘불공’이란 마음에 오로지 하나의 무명번뇌가 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것은 스무 가지 심수이다. 하나의 번뇌를 빼고 나머지는 앞에서와 같이 설명한다. ‘선’이란 깨끗한 마음이 능히 애과(愛果)를 움직여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마음과 함께하는 것이 스무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10대지ㆍ각ㆍ관ㆍ신ㆍ의ㆍ불방일ㆍ선근ㆍ호ㆍ참ㆍ괴이다.
‘무기에는 열둘이 있다’고 함은 더럽지 않은 심품 중에는 열두 가지 마음에 속한 법이 있다는 것이니, 즉 10대지와 각과 관이다.
‘회와 면에서 마음은 이것을 능히 더한다’고 했는데, ‘회(悔)’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한(恨)하는 것이니, 이것은 선ㆍ불선으로서 그들이 서로 응하는 심품 중에서 회를 증가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면(眠)’이란 멸심(滅心)과 오로지 합하여 자재(自在)하지 못하므로 일컬어 면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체의 다섯 품20) 가운데서 그것이 생겨나서 모두 증익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회와 면이 작용하지 않는 세 품21) 가운데서는 이 둘을 증가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57_c_19L 善不共二十者不共名謂心獨一無 明煩惱生是二十心數除一煩惱如前說善名謂淨心能轉成愛果心共俱當知有二十十大一地 不放逸善根無記有十二 不穢污心品中有十二心數法大地悔及於眠心是能以爲增 悔名事不成恨爲悔是善不善相應心品中增悔餘心數法如前說 眠名滅心一向合不自在爲眠是一 切五品中生彼盡增益餘心數法如 前說若悔眠不行三品中是增二心數法如前說
【문】이는 욕계의 심상속(心相續)을 설명한 것이다. 색계는 어떠한가?

【답】초선(初禪)은 불선(不善)을 여의고
나머지는 욕유(欲有)와 같다.
선(禪)의 중간은 각(覺)이 제외되나니
위에서의 관(觀)도 역시 그러하다.
028_0358_a_09L此欲界心相續說 色界云何 初禪離不善
餘知如欲有
禪中閒除覺
於上觀亦然

‘초선은 불선을 여의고 나머지는 욕유와 같다’고 했는데, 초선에서는 불선이 없고 그 중에는 네 가지 품이 있으니, 선(善)ㆍ더러움ㆍ불공ㆍ무기이다. 이는 욕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선은 스무 가지, 무기는 열두 가지, 더러움[穢汚]22)은 열아홉 가지이며, 이미 불선은 여의었다. 또한 무참과 무괴를 여의고 오로지 불선이기 때문에 불공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선의 중간은 각이 제외된다’고 함은 중간선(中間禪)23)에서는 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각이 제외된 것이고 나머지는 초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위에서의 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제2ㆍ제3ㆍ제4선에서는 다시 관이 없고 나아가 무색계 역시 그 안에서는 일체의 관이 제외된다는 것이다. 각은 앞에서 이미 제거된다.
028_0358_a_12L 初禪離不善餘知如欲有者初禪無 不善彼中有四品穢污不共無記 是如欲界說善中二十無記十二污十九已離不善當知亦離無慚一向不善故不共有十八禪中閒 除覺者中閒禪無覺彼一向除覺如初禪說於上觀亦然者第二第三 第四禪亦復無觀及無色界於中一 切除觀覺前已除
이미 마음에 속한 법이 동반해서 생하는 것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색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극미(極微)는 네 근(根)에 있어서
열 가지라고 알아야 하니,
신근(身根)에는 아홉이 있고
나머지에는 여덟이 있으니 소위 향이다.
028_0358_a_21L已說心數法由伴 色今當說 極微在四根
十種應當知
身根有九種
餘八種謂香
028_0358_b_02L
‘극미는 4근에 있어서 열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이른바 극미가 눈에 있어서는 곧 열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종(地種)ㆍ수종(水種)ㆍ화종(火種)ㆍ풍종(風種)ㆍ색종(色種)ㆍ향종(香種)ㆍ미종(味種)ㆍ세활종(細滑種)ㆍ안근종(眼根種)ㆍ신근종(身根種)이다. 이ㆍ비ㆍ설의 극미도 역시 이와 같다.
‘신근에는 아홉이 있다’고 함은 이른바 나머지 신근의 극미는 아홉 가지24)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하나의 근종이 있으며, 나머지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에는 여덟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나머지 근이 아닌 색 중에는 극미로서 여덟 가지25)가 있다는 것이다.
028_0358_a_24L 極微在四根十種應當知者謂極微在 眼中是知有十種地種水火風種香味細滑種眼根種身根種 舌極微亦如是身根有九種者謂餘 身根極微九種彼有一根種餘如上 餘八種者於中餘非根色中極微 有八種
【문】이러한 극미는 어느 계(界)를 말하는가?
【답】향계를 말한다. 욕계에서는 냄새가 있지만 색계에서는 냄새를 여읜다. 그들 일체는 향ㆍ미의 요소가 제외되며, 나머지 종은 욕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앞에서 이미 만약 마음이 생하면 그 중에 반드시 마음에 속한 법이 생하고 나아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도 생한다고 말했으며, 거기에서 이미 마음에 속한 법은 설명했다. [그렇다면] 심불상응행은 무엇인가?

【답】일체의 유위법은
생(生)ㆍ주(住)ㆍ변이(變異)ㆍ괴(壞)이다.
028_0358_b_08L此極微何界說謂香界中有香色界中離香彼一切除香 味種餘種如欲界說前已說若心 生彼中必心數法生及心不相應行 於中已說心數法心不相應行云何 一切有爲法
生住變異壞

일체의 유위법에는 각각 네 가지 상(相)이 있으니, 생ㆍ주ㆍ이ㆍ괴이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므로 ‘생’이요, 이미 일어나 스스로 일을 세우므로 ‘주’이다. 이미 머물러 세력이 쇠퇴하므로 ‘이’이고, 이미 달라져서 사라지므로 ‘괴’이다. 이러한 모습을 심불상응행이라고 한다.
028_0358_b_13L 一切有爲法各各有四相 世中起故生已起自事立故住已住 勢衰故異已異滅故壞此相說心不 相應行
【문】만약 일체의 유위법에 각각 네 가지 모습이 있다면, 이것이 모습이 되거늘 다시 모습이 있어야 하는가?
【답】이것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다. 그 모습 중에 나머지 네 가지 모습이 함께 생하니, 생은 생이 되고 주는 주가 되며, 이는 이가 되고 괴는 괴가 된다.
【문】만약 그렇다면 끝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답】전전(展轉)하여 서로 상(相)이 된다.
028_0358_b_17L若一切有爲法各有四相 是爲相復有相 是亦有四相 彼相中餘四相俱生生爲生住爲住 異爲異壞爲壞若爾者便無窮 展轉更相爲
028_0358_c_02L
이 상은 각각의 상이 된다. 생생(生生)은 각각의 상이 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주(住住)는 각각의 상이 머무는 것이고, 이이(異異)는 각각의 상이 달라지는 것이고, 괴괴(壞壞)는 각각의 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뒤의 네 가지 상은 각각 하나의 법을 행하고, 앞의 네 가지 상은 각각 여덟 법을 행한다. ‘생’이란 여덟 법을 행함이니, 앞의 셋과 뒤의 넷과 그리고 그 자신의 법이다. 나머지도 역시 이와 같다.
028_0358_b_22L 此相各各相爲如生生各各相生是住住各各相住異異各各相異壞各各相壞是以非無窮後四相各 行一法前四相各行八法生者生八 前三後四及彼法餘亦如是
이미 모든 행(行)의 동반을 설명했다. 동반을 말미암아 생하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소작(所作)과 공(共)과 자연과
보편과 상응과 보(報)
이들 여섯 가지의 인(因)이
바뀌어 유위법을 낳는다.
028_0358_c_04L已說 諸行伴如由伴生今當說 所作共自然
普遍相應報
從是六種因
轉生有爲法

일체의 인은 모두 여섯 가지 원인 중에 존재하며, 이들 인은 모든 유위법을 낳는다.
여기에서 ‘소작인(所作因)26)’이란 법이 생할 때에 장애(障礙)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 이것에 연유하므로 서로 비슷하지 않은 법을 낳으니, 마치 땅에 연유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것과 같다.
‘공인(共因)27)’이란 모든 행에 각각의 상(相)이 동반하여, 이것에 연유하므로 생기는 것으로, 마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과 심불상응행 및 극미의 요소와 같다.
‘자연인(自然因)28)’이란 그 스스로 이미 서로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선을 닦으면 선이 생하고, 불선을 닦으면 불선이 생하고, 무기를 닦으면 무기가 생하는 것과 같다. 마치 물(物)의 요소가 그 종류의 상인(相因)을 따르는 것과도 같다.
028_0358_c_07L 一切因盡在六因中此因生一切有 爲行於中所作因者生法時不障㝵 不留住由此故生不相似法如由地 萬物得生共因者諸行各各相伴此故生如心心數法心不相應行及 極微種自然因者謂彼自已相似習善生善習不善生不善習無記生 無記如物種隨類相因
‘일체변인(一切遍因)29)’이란 이른바 모든 번뇌가 변하여 상속하면서 생하는 것으로, 마치 견아(見我)로써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견에 연유하므로 아(我)에 대해 유상ㆍ무상이라고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며, 음상(陰相)을 비방하여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며, 음상에 대해 의심[猶豫]하여 상(常)ㆍ낙(樂)ㆍ정(淨) 등이 있다고 받아들인다. 모든 번뇌를 생하는 것도 이와 같다. 모든 일체변(一切遍)에 대한 설명은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상응인(相應因)30)’이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각각의 힘으로 하나의 대상(緣) 가운데서 일시에 행상(行相)하는 것이니, 떠나면 곧 생하지 않는다.
‘보인(報因)31)’이란 이른바 행(行)이 생(生) 가운데 생하여 과(果)를 변천하여 만든 것이다. 선에 애과(愛果)가 있고 불선에 불애과가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에 연유하여 생한다.
028_0358_c_15L一切遍因者 謂諸煩惱轉相續生如見我審入計 由此見故於我有常無常審入 計著謗陰相審入計著於陰相猶豫 有常樂淨等生諸煩惱如是說諸 一切遍如使品說相應因者心及心數 各各力於一緣中一時行相離則 不生報因者謂行生於生中轉成果 如善愛果不善不愛果由此故生
028_0359_a_02L이미 모든 인을 설명했으니, 이제 모든 법이 인을 따라서 그 가운데서 생하는 것임을 설명하겠다.

마음이 보(報)로 인해서 생하는 것과
마음에 속한 것과 번뇌는
다섯 가지 인으로부터
흥기한다고 알아야 한다.
028_0358_c_23L說諸因諸法隨因中生今當說 若心因報生
心數及煩惱
是從於五因
興起應當知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보로 인해서 생기는 것과 모든 번뇌는 이들 다섯 가지 인을 따라서 생긴다’고 했는데, 보인(報因)이 생기는 것은 소작인에 따라 생긴다. 그것이 생겨날 때에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비슷하지 않은 사물이 장애하지 않으므로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공인(共因)에 따라 생하니, 힘을 수반하므로 생하는 것이다. 그들 각각의 상이 동반하고 또한 심불상응행이 함께 동반한다. 그리고 자연인(自然因)을 따라 생한다. 그것은 서로 비슷하며, 앞에 생한 것은 무기법(無記法)이다. 그리고 상응인에 따라 생하니, 함께 일시에 하나의 대상 가운데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인에 따라 생한다. 그것은 선ㆍ불선이니, 말하자면 이것의 결과는 더러움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서 보인을 제외한 것이고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체변인(一切遍因)에 따라 생한다. 이것에서 연유하므로 생하는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인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59_a_03L 若心心數法因報生及諸煩惱是從 五因生報因生者從所作因生彼生 時相似不相似物不障㝵故住從共 因生伴力故生彼各各相伴及心不 相應行共伴從自然因生彼有相似 前生無記法從相應因生俱一時一 緣中行從報因生彼善不善謂此果 穢污心心數法除報因無記故是從 一切遍因生由此故生餘四因如前說

이것과 저것 불상응과
모든 나머지 상응법과
그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은
네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한다.

‘이것과 그것의 불상응’이란 색에 있어서 보(報)에 따라 생하는 것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이것은 네 가지 인에 따라 생하니, 소작인과 공인과 보인과 자연인이다.
더러움의 색과 심불상응행도 역시 네 가지 인에 따라 생하니, 소작인과 공인과 자연인과 일체변인이다.
‘모든 나머지 상응법과 그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은 네 가지 인에 따라서 생한다’고 함은 나머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 및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도 또한 네 가지 인, 곧 소작인ㆍ공인ㆍ자연인ㆍ상응인을 따라 생함을 말한다.
028_0359_a_12L是彼不相應
諸餘相應法
除其初無漏
是從四因生
是彼不相應者若色從報生及心不 相應行是從四因生所作因共因自然因穢污色及心不相應行從四因生所作因共因自然因一切 遍因諸餘相應法除其初無漏是從 四因生者餘心心數法除其初無漏 亦從四因生所作因共因自然因應因
028_0359_b_02L
나머지 불상응은
같이 생하는 것이 셋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나머지 상응으로서
처음 생기는 무루법도 [마찬가지이다].

불상응의 앞에서 설한바 나머지에서 자연인이 있는 것은 초무루를 제외한다. 이것은 세 가지 인에 따라서 생하니, 소작인과 자연인과 공인이다.
초무루의 상응도 역시 세 가지 인을 따라 생하나니, 소작인과 공인과 상응인이다. 이것들에는 앞의 자연인이 없다.
028_0359_a_22L 謂餘不相應
因生當知三
及諸餘相應
初生無漏法
謂不相應法前所說於中餘若有自 然因除初無漏是從三因生所作因 自然因共因初無漏相應亦從三因 所作因共因相應因是前無自然

그 중에서 상응하지 않는 것은
응당 두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하니,
하나의 인 가운데에서
생하는 것은 결코 없다.

‘그 중에 불상응인 것은 응당 두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한다’고 함은 「초무루품」 중에서 색과 심불상응행은 두 가지 인, 곧 소작인과 공인을 따라서 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일체의 유위를 설명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인만을 따라 생하는 것은 결코 없다.
이미 모든 인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인에 대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법상을 결정코 알고 깨달음의 힘으로 교화하여 설명하셨다.
028_0359_b_05L 於中不相應
應從二因生
若從一因中
生者必無有
於中不相應應從二因生者初無漏 品中色心不相應行從二因生所作因 共因已說一切有爲於中若從一因 生者必無有已說諸因如此因如來 定知諸法相覺力教化故說
이제부터는 연(緣)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차제(次第)와 또한 연연(緣緣)과
증상(增上)과 그리고 인(因)
법은 네 가지 연을 따라 생하나니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59_b_12L當說 次第亦緣緣
增上及與因
法從四緣生
明智之所說

‘차제연(次第緣)32)’이란 하나하나의 마음마다 생기고 상속하여 끊임이 없는 것이다. ‘연연(緣緣)33)’이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경계이다. 그것을 연하여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긴다. ‘증상연(增上緣)34)’이란 곧 소작인으로서 일체의 만물이다. 만물이 생길 때 장애를 만들지 않는다. 단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니, 이것을 증상연이라고 말한다. ‘인연’이란 공인ㆍ상응인ㆍ자연인ㆍ보인ㆍ일체변인이다.
이미 모든 연을 설명했다. 이제 모든 법이 연을 따라 생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028_0359_b_15L 次第緣者一一心生相續無閒緣緣 心心數法境界緣彼故心心數法 增上緣者是所作因一切萬物物生時不作罣㝵但自所作爲要說增上緣因緣者共因相應因自然 報因一切遍因

마음과 그리고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겨난다).
두 가지 정수(正受)35)는 세 가지에 대하여 생기고
나머지는 두 가지에 대하여 생긴다.
028_0359_b_21L已說諸緣諸法隨 緣生今當說 心及諸心數
是從四緣生
二正受從三
謂餘說於二
028_0359_c_02L
‘마음과 그리고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고 함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는 것이다. 앞에서 열고 인도하므로 생겨나니, 이것은 그 차제연(次第緣)이고 경계는 곧 연연(緣緣)이 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의 법은 증상연이다.
‘두 가지 정수는 세 가지 연을 따라 (생겨난다)’고 함은 무상정(無想定)36)ㆍ멸진정(滅盡定)37)은 세 가지 연에 대하여 생긴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정에 드는 마음은 곧 차제연이다. 그 가운데 자기 경지[地]의 전생 공덕은 그 인연이다. 그리고 나머지 함께 생하는 생ㆍ주ㆍ이ㆍ괴도 역시 그 인연이다. 그 증상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두 가지 연에 대하여 생긴다’고 함은 그것들을 여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색은 인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는 것이다.
028_0359_b_24L 心及諸心數是從四緣生者心心數 法從四緣生前開導故生是彼次第 境界是彼緣緣除其自已餘一切 諸法是彼增上緣二正受從三者想定滅盡定是從三緣生於中入定 心是彼次第緣於中自地前生功德 是彼因緣及餘俱生生住異壞亦彼 因緣彼增上緣如前說謂餘說於二 離彼餘心不相應行及色從二緣 因緣及增上緣
【문】무엇 때문에 이 모든 법은 그것을 행한다고 말하는가?

【답】많은 법이 하나의 법을 생하고
한 법도 또한 능히 많은 법을 생한다.
연행(緣行)ㆍ소작행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많은 법이 하나의 법을 생하고, 한 법도 역시 능히 많은 법을 생한다’고 함은 어느 한 법도 자력으로 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법은 많은 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많은 법도 역시 하나의 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연행ㆍ소작행이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028_0359_c_11L以何故此諸法 謂之行 多法生一法
一亦能生多
緣行所作行
如是應當知
多法生一法一亦能生多者無有 一法能自力生但一法由多法生法亦由一法生以是故謂緣行所作 行如是應當知

3. 업품(業品)
028_0359_c_18L業品第三

이미 모든 행이 자기의 본성[性]과 모든 인연을 말미암아 생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제 여기에 인이 있으면 능히 과의 종류를 장엄하게 꾸미고, 여러 가지의 차별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설명하겠다.

업이 능히 세간을 장엄하니,
취(趣)에 나아가고 처처(處處)에 존재한다.
이로써 마땅히 업을 생각하고,
세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
028_0359_c_19L已說諸行己性及由諸因緣生今謂 此有因能嚴飾果種生種生差別可 今當說 業能莊嚴世
趣趣在處處
以是當思業
求離世解脫
028_0360_a_02L
‘업은 능히 세간을 장엄하니, 취에 나아가고 처처에 존재한다’고 함은 3세(世)에는 5취(趣)38) 가운데에서 갖가지 몸을 차별하는 꾸밈이 있으나, 이 세간을 꾸미는 일은 오직 업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마땅히 업을 생각하고, 세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
028_0359_c_24L 業能莊飾世趣趣在處處者三世於 五趣中種種身差別嚴飾是世嚴飾 事唯業是以當思業求離世解脫

신업(身業)과 구업[口]ㆍ의업[意]은
존재마다 생겨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행 생겨나서
여러 가지 몸을 장식한다.
028_0360_a_04L業及口意
有有之所造
從是生諸行
嚴飾種種身
身業及口意有有之所造者謂身口意業生生所造作從是生諸行嚴飾 種種身此業相今當略說

‘신업과 구업ㆍ의업은 존재마다 생겨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함은 신ㆍ구ㆍ의업이 생겨나고 생겨나서[生生] 조작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행 생겨나서 여러 가지 몸을 장식한다’는 이러한 업의 모습[相]을 이제 간단히 설명하겠다.

신업에는 교(敎)와 무교(無敎)가 있으니
둘이 함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구업도 역시 이와 같으나
의업은 오직 무교뿐이다.
028_0360_a_09L 身業教無教
當知二俱有
口業亦如是
意業唯無教

‘신업에는 교와 무교가 있으니, 둘이 함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신업의 본성[性]은 두 가지, 즉 유교성과 무교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유교(有敎)39)는 몸의 움직임이니, 이것은 선ㆍ불선ㆍ무기이다. 선은 선한 마음[善心]에 따라 생기고, 불선은 불선한 마음에 따라 생하며, 무기는 무기심에 따라 생한다. 무교(無敎)40)는 업을 짓는 일이 견고함으로 해서 다른 마음속으로 옮겨 이 종자가 생하는 것이다. 선한 수계인(受戒人)의 불선과 무기의 마음 중에도 그것은 오히려 서로 따르고, 악업인에게는 악계(惡戒)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구업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함은 구업의 본성도 역시 두 가지라는 것이다.
‘의업은 오직 무교뿐이다’고 함은 의업의 본성은 오로지 무교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思]이 미세하게 상속하기 때문이다.
028_0360_a_11L 身業教無教當知二俱有者身業性 二種有教性無教性於中有教者動是善不善無記善從善心生不善 從不善心生無記從無記心生無教 若作業牢固轉異心中此種子生 如善受戒人不善無記心中彼猶相 惡業人惡戒相隨口業亦如是者 口業性亦二種意業唯無教者意業 性一向無教所以者何不現故思微 相續故
【문】이들 다섯 가지 업은 몇 가지가 선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

【답】교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
의(意)의 무교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에서는 무기를 말하지 않는다.
028_0360_a_21L此五業幾善幾不善幾無 教當知三種
善不善無記
意無教亦然
餘不說無記
028_0360_b_02L
‘교는 마땅히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고 함은 신ㆍ구의 교에는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그 중에서 선의 신교(身敎)란 보시를 실천하고 계를 지니는 등의 선한 마음으로 만든 몸의 움직임이다. 불선의 신교란 살생ㆍ불여취ㆍ비범행 등 불선한 마음으로 만든 몸의 움직임이다. 무기의 신교란 무기의 마음으로 만드는 몸의 움직임으로, 마치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기술(技術)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로 하는 선이란 헛되지 않은 말ㆍ요익상응(饒益相應)의 시기에 맞추어 하는 말 등과 같이 선한 마음에 따라 생기는 구업이다. 불선이란 망언ㆍ양설ㆍ악구ㆍ기어 등과 같이 선하지 않은 마음에서 생기는 구업이며, 무기란 무기의 마음을 따라 생기는 구업이다.
‘의(意)의 무교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의업의 무교도 역시 세 가지이니, 선ㆍ불선ㆍ무기라는 것이다. 선한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곧 선이요, 불선한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불선이며, 무기의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무기이다.
‘나머지에서는 무기를 설하지 않는다’고 함에서 나머지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신무교(身無敎)와 구무교(口無敎)이다. 저 두 가지는 선과 불선이고 무기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기심이 약하므로 그것은 강력한 업을 생겨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변하여 달라진 마음 가운데 저것과 서로 비슷하고 서로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신무교와 구무교에는 무기가 없다.
028_0360_a_24L 教當知三種善不善無記者身口教 說三種不善無記於中善身教者 行施持戒等善心作身動不善身教 殺生不與取非梵行等不善心作 身動無記身教者無記心作身動威儀工巧伎術如是口動善者如不 虛言饒益相應應時言等從善心 口業不善者如妄言兩舌惡口語等從不善心生口業無記者從無 記心生口業意無教亦然者意業無 教亦三種不善無記善心相應思 是善不善心相應思是不善無記心 相應思是無記餘不說無記者餘有 身無教及口無教彼二種不善 無無記所以者何無記心羸劣彼不 能生强力業謂轉異心中彼相似相 是故身無教口無教無無記
【문】무기업은 어떠한 성품이고 어느 곳에 얽매이는가?

【답】색유(色有)의 무기는 두 가지이니
은몰(隱沒)과 불은몰(不隱沒)이다.
은몰은 색에 묶여 존재하고
나머지는 두 가지 계(界)에 존재한다.
028_0360_b_18L記業何業性何處繫 色有無記二
隱沒不隱沒
隱沒繫在色
餘在於二界
028_0360_c_02L
‘색유의 무기는 두 가지이니 은몰과 불은몰이다’고 함은 신(身)ㆍ구(口)의 업은 색의 성질이니, 업으로써 색의 성질을 삼기 때문에 두 가지 은몰과 불은몰이 된다. 은몰이란 말하자면 번뇌에 덮이고 또한 모든 번뇌를 따라 생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불은몰이다.
‘은몰은 색에 묶여 존재한다’고 함은 은몰과 같은 것은 오로지 색계만을 얽어맨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유로써 끊는 번뇌는 능히 신ㆍ구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욕계 사유단(思惟斷)의 번뇌는 오로지 불선이니, 불선 번뇌로서는 무기업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머지는 두 가지 계에 존재한다’고 함은 불은몰 무기업도 또한 욕계에 묶여 존재하고 또한 색계에 묶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업(意業)은 마음[心]을 설명한 것과 같으니, 다른 곳에서 분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028_0360_b_21L 色有無記二隱沒不隱沒者身口業 是色性以業色性故二種隱沒及不 隱沒隱沒者謂煩惱所覆亦從諸煩 惱生異者是不隱沒隱沒繫在色者 若隱沒一向繫色界所以者何思惟 斷煩惱能起身口業此欲界思惟斷 煩惱一向不善不以不善煩惱能起 無記業餘在於二界者不隱沒無記 亦繫在欲界亦繫在色界意業 如心說是餘處分別故今不說

신ㆍ구업의 무교는
선과 불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상(相)이 있으니 선(禪)과 무루(無漏)와
조어위의계(調御威儀戒)이다.
028_0360_c_08L 身口業無教
當知善不善
三相禪無漏
調御威儀戒

‘신ㆍ구업의 무교는 선과 불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업이 만약 그 중에서 색의 성품이거나 무교의 성품이라면 그것은 선과 불선이라는 것이다.
‘3상이 있으니 선과 무루와 조어위의계이다’고 함은 무교계(無敎戒)에 3상이 있으니 무루와 선생(禪生)과 조어위의라는 것이다. 무루란 계(戒)의 도(道)와 함께 갖추어 행하는 것으로, 이른바 정어ㆍ정업ㆍ정명이다. 선생이란 이른바 선과 함께 행하여 악을 여읜 것이며, 조어위의계란 욕계의 계를 말한다.
028_0360_c_10L 身口業無教當知善不善者業若色 於中若無教性是善不善三相禪 無漏調御威儀戒者無教戒有三相無漏禪生調御威儀無漏者謂戒道 共俱行正語正業正命禪生者謂禪 俱行離惡調御威儀戒者謂欲界戒

무교로서 욕계에 있는 것과
교로서 두 가지 유(有)에 의지하는 것은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나머지는 마음과 함께 한다고 설명한다.
028_0360_c_16L 無教在欲界
教依於二有
當知非心俱
謂餘心俱說

욕계의 무교는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 하면 계를 받으면 계는 비록 선심ㆍ불선심ㆍ무기심에 따라서 행한다고 해도 선ㆍ불선ㆍ무기와는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는 또한 욕계에 있고 또한 색계에도 있으나, 다만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색계의 무교와 무루는 마음과 함께 한다. 그것은 왜냐 하면 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이것은 그 밖의 마음에서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업을 분별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업을 성취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028_0360_c_18L 謂欲界無教是非心共俱所以者何 謂受戒戒雖善心不善心無記心隨 而不與善不善無記共俱教者在欲界亦在色界但非心共俱所以 者何由身故色界無教及無漏與心 共俱所以者何由心故此非餘心中 隨行已分別諸業若成就業今當說
028_0361_a_02L
무루의 계와 율의(律儀)는
견제(見諦)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선생(禪生)으로써 선(禪)을 얻으며
지계(持戒)는 욕계에 생하기 때문이다.
028_0361_a_02L 無漏戒律儀
見諦所成就
禪生若得禪
持戒生欲界

‘무루의 계와 율의는 견제로서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견제란 이른바 무루견(無漏見)으로 성제(聖諦)를 보는 것을 말하며, 처음 무루견이 생할 때에 욕계의 고제(苦諦)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은 무루계를 성취한다.
‘선생으로써 선을 얻는다’고 함은 선을 얻으면 선계(禪界)를 성취한다는 것이요, ‘지계는 욕계에 생하기 때문이다’고 함은 만약 계를 받는다면 그 때문에 욕계의 계(戒)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028_0361_a_04L 無漏戒律儀見諦所成就者見諦謂 無漏見見聖諦初生無漏見時見於 欲界苦諦是故一切聖人成就無漏 禪生若得禪者謂得禪是成就禪 持戒生欲界者若受戒者故成就 欲界戒
이미 간략하게 성취를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얻을 수 있는 것을 설명하겠다.

이른바 위의계(威儀戒)에 머물고
무교가 현재에 존재하면
항상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혹은 다시 다해도 과거이다.
028_0361_a_10L已略說成就如過去未來現 在可得今當說 謂住威儀戒
無教在於今
當知恒成就
或復盡過去

‘이른바 위의계에 머물고 무교가 현재에 존재하면 항상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만약 위의에 머물면 언제라도 무교계를 성취하며, 그것은 끝까지 여의지 않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연관된다는 것이다.
‘혹은 다시 다해도 과거이다’고 함은 혹은 성취된 과거의 무교계는 다 지난 것이라 해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른바 처음이 이미 다하면 이것은 과거를 성취하는 것이다. 과거란 그것을 임시로 부르기를 다한 것[盡]이라고 한다.
028_0361_a_13L 謂住威儀戒無教在於今當知恒成 就者若住威儀一切時成就無教戒 彼終不離至命盡所縛或復盡過 去者或成就過去無教戒若盡不失 謂初已盡是成就過去過去者假名 爲盡

만약 교를 만드는 것이 있으면
즉시 중세(中世)를 세운다.
과거를 이루는 것은
이미 다해도 버리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61_a_19L 若有作於教
卽時立中世
當知成過去
已盡而不捨

‘만약 교를 만드는 것이 있으면 즉시 중세를 세운다’고 함은 만약 신(身)ㆍ구(口)의 교를 만들면 그때 곧 현재의 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임시로 중세라고 이름한다.
‘과거를 이루는 것은 이미 다해도 버리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만약 그 교가 이미 다해도 잃지 않고 그때 곧 과거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028_0361_a_21L 若有作於教卽時立中世若作身口 爾時卽成就現在教現在者假名 中世當知成過去已盡而不捨者彼教已盡不失爾時卽成就過去
028_0361_b_02L
소위 선무교(禪無敎)를 얻으면
멸(滅)과 미지(未至)를 성취한다.
중간에 만약 정수(正受)에 들어가면
교도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8_0361_b_02L 謂得禪無教
成就滅未至
中若入正受
教亦如前說

‘소위 선무교를 얻으면 멸과 미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만약 선을 얻으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같이 계를 성취해도 역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만약 정수에 들어가면’이라고 했는데, 현재를 임시로 중간이라고 부르니, 그가 만약 입정(入定)하면 그때 현재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定]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교도 역시 전에 말한 것과 같다’고 함은 위의계에 머물러 만약 교를 만들면 그때 현재의 교를 성취하고, 만약 교를 만들지 않으면 그때 교를 성취하지 못하며, 만약 다해도 잃지 않으면 그때 과거를 성취하고, 만약 다하지 않거나 다해도 곧 잃으면 그때 성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계(禪戒)에 머물러도 이와 같다.
028_0361_b_04L謂得禪無教成就滅未 至者若得禪彼成就過去未來所以者 如彼禪成就戒亦復爾中若入正受者 現在假名中彼若入定空爾時成就現在 無教所以者何與定俱故教亦如前說 如住威儀戒若作教爾時成就現 在教若不作教爾時不成就教若盡 不失爾時成就過去若不盡設盡便 爾時不成就住禪戒亦復如是

모든 성취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도를 얻으면 미생(未生)과 같다.
중간은 도심(道心)에 있고
다해도 전세(前世)를 버리지 않는다.
028_0361_b_12L 悉成就當知
得道若未生
中閒在道心
盡不捨前世

‘모든 성취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도를 얻으면 미생도 있다’고 함은 모든 득도(得道)는 미래 무루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루심과 같이 계를 성취함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간은 도심에 있다’고 함은 이미 도(道)와 합하여 만약 정(定)에 들어가면 그때 곧 현재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다해도 전세를 버리지 않는다’고 함에서 전세라는 것은 곧 과거인데, 그는 이 무교에서 만약 다해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과보를 얻고 물러나는 자가 과거의 무교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028_0361_b_14L悉成就當知得道若未 生者一切得 成就未來無漏無教所以者何彼無漏心成就戒亦復爾中閒在道 心者已合道若入於定爾時卽成就 現在盡不捨前世者前世是過去於此無教若盡不失如得聖果及退 者成就過去無教

만약 악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지으면
계(戒)에 서서 두 가지를 성취한다.
그 번뇌에 묶여지는 바가 되나니
이미 다하면 다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61_b_21L 若作惡不善
立戒成就二
至彼纏所纏
盡已盡當知
028_0361_c_02L
‘만약 악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지으면 계에 서서 두 가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이와 같이 위의계에 머물고 혹은 선계에 머물고 혹은 무루계에 머물고 혹은 불선탁중(不善濁重)에 얽매이면 그때 불선 중에서 무교를 일으키고 곧 교와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만약 탁중에 얽매이지 아니하면 무교를 일으키지 않는다.
028_0361_b_23L 若作惡不善立戒成就二者如此住 威儀戒或住禪戒或住無漏戒或作 不善濁重纏爾時於不善中起無教 卽成就教及無教若非濁重纏不起 無教
【문】어느 때에 무교를 성취하는가?
【답】그 번뇌에 얽매이게 될 때이다. 번뇌에 얽매임에 따라 성취할 수 있다.
‘다하면 이미 다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번뇌가 만약 다하면 교와 무교도 역시 따라서 다한다는 것이다.

불위의계(不威儀戒)에 처하여
무교가 성취된 가운데에
악으로 해서 불애(不愛)의 과(果)가 있으니
또한 과거가 다하게 된다.
028_0361_c_05L幾時成就至彼纏所纏纏所纏隨可得成就盡已盡當知者 彼纏若盡教及無教亦隨盡 處不威儀戒
無教成就中
惡而不愛果
亦復過去盡

‘불위의계에 처하여 무교가 성취된 가운데에 악으로 해서 불애의 과가 있다’고 함은 만약 불위의계에 머물면 그때 불선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불선은 불애의 과라고 이름한다.
‘또한 과거가 다하게 된다’고 함은 멸하여 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028_0361_c_09L 處不威儀戒無教成就中惡而不愛 果者若住不威儀戒爾時成就不善 無教不善名不愛果亦復過去盡者 滅非不滅

유교(有敎)가 나타날 때에
그 가운데서 성취한다고 말한다.
또한 과거도 다하여
선(善)은 위의 경우와 다르다.

‘유교가 나타날 때에 그 가운데서 성취한다고 말한다. 또한 과거도 다한다’고 함은 교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선은 위에서와 다르다’고 함은 위의계에 머무는 것과 같이 불선을 설명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불위의에 머물면 선은 저 선심(善心)에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028_0361_c_13L 有教現於時
是說成就中
亦復盡過去
善於上相違
有教現於時是說成就中亦復盡過 去者教謂如前說善於上相違者住威儀戒說不善如是住不威儀善至彼善心

그 가운데 처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곧 중세(中世)를 성취한다.
또한 과거는 다하여
혹은 둘 혹은 하나라고 말한다.

‘처중’이라는 것은 위의도 아니고 또한 불위의도 아니니, 이 거중용(居中容)에 머무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 선에 머물면 선이라고 한다. 혹은 또 둘이니, 유교와 무교이다. 혹은 오로지 교요 혹은 선과 불선이며 혹은 하나이다.
028_0361_c_19L 若處中所作
卽成就中世
亦復過去盡
或二亦復一
處中者不威儀亦非不威儀住是居 中容彼如善住說善或復二有教及 無教或一向教或善不善或一
028_0362_a_02L【문】무엇이 색계의 계(戒)를 얻고, 무엇이 버리는가? 근본선(根本禪)41)이 얻는다고 하는가, 아니면 나머지 방편이라고 하는가?
【답】오로지 근본선만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색계 중의 선한 마음[善心]은
선정[定]의 위의계를 얻는다.
이것을 잃으면 그것도 잃는다.
무루에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다.
028_0361_c_24L何得色界戒云何捨爲根本禪得餘方便非一向根本禪 色界中善心
得定威儀戒
是失彼亦失
無漏有六心

‘색계 중의 선한 마음은 선정의 위의계를 얻는다’고 함은 만약 색계의 선한 마음을 얻으면 혹은 욕망을 여의거나 혹은 욕망을 여의지 않았거나 그 모두는 색계의 계를 얻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색계의 선한 마음 중에는 계(戒)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다.
028_0362_a_05L 色界中善心得定威儀戒者若得色 界善心或離欲或不離欲彼一切得 色界戒所以者何一切色界善心中 戒常共俱
【문】어떻게 하여야 잃는가?
【답】이것을 잃으면 저것도 잃는다.
【문】무루란 무엇인가?
【답】무루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다. 무루계는 무루의 여섯 가지 지(地)의 마음으로 함께 얻는다.
【문】어떻게 하여야 잃는가?
【답】이것을 잃으면 저것도 잃는다. 6지(地)는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4선(禪)이다.
【문】이 계는 어느 때에 버리는가?

【답】위의계로써 조어(調御)하고
다섯 시기[五時]에 이것을 버려야 한다.
선정에서 생기는 무루는
두 때[二時]라는 것이 깨달으신 분의 말씀이다.
028_0362_a_09L云何失是失彼亦失 無漏云何答無漏有六心無漏戒 無漏六地心共得云何失是失 彼亦失六地者未來禪中閒禪根本 四禪此戒幾時捨 調御威儀戒
是捨於五時
禪生及無漏
二時覺所說

‘위의계로써 조어하고 다섯 시기에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함은 위의계는 다섯 가지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다섯 가지 때란 도를 파할 때, 계를 범할 때, 죽을 때, 사견(邪見)을 더할 때, 법을 다 없애 버릴 때이다.
‘선정에서 생기는 무루는 두 때라는 것은 깨달으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선계(禪戒)는 두 가지 때에 버리나니 물러날 때와 위의 경지에 태어날 때이고, 무루계도 역시 두 가지 때에 버리나니 물러날 때와 과보를 얻을 때이다.
028_0362_a_15L 調御威儀戒是捨於五時者威儀戒 五時捨罷道犯戒死時邪見增法沒 禪生及無漏二時覺所說者禪戒 二時捨退及上生無漏戒亦二時捨 退及得果
【문】나머지 업은 어떻게 하여 버려야 하는가?

【답】불선계(不善戒)에 둘이 있으니
선(善)한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더러워질 때는 오직 한 번
업이 마음[意]에 머무를 때이다.
028_0362_a_20L餘業云何捨 不善戒有二
善無色亦然
穢污說一時
若業住於意
028_0362_b_02L
‘불선계에 둘이 있다’고 함은 방편을 짓지 않을 때와 죽을 때이다.
‘선한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선한 무색계의 업도 두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선근을 끊을 때와 위에 생겨날 때이다.
‘더러워질 때는 오직 한 번 업이 마음에 머무를 때이다’고 함은 더러운 의업(意業)은 한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욕심을 여읠 때이다.
이미 모든 업의 본성과 성취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업을 세존께서 여러 가지로 분별하셨으니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028_0362_a_22L 不善戒有二者不作方便及死時無色亦然者善無色業亦二時捨根斷時及上生穢污說一時若業在 於意者穢污意業一時捨離欲時說諸業性及成就如此業世尊種種 分別今當說

만약 업이 고통스러운 결과[苦果]를 준다면
그것은 악행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 악행[意惡行]을 지어 불려 나가는 것으로는
탐과 진에와 사견이 있다.
028_0362_b_05L 若業與苦果
當知是惡行
意惡行增上
貪瞋恚邪見

‘만약 업이 고통의 과보를 준다면 이는 악행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지은 업이 선하지 못한 것을 말하나니 이것을 모두 악행이라고 말한다. 선하지 못하면 고의 과보를 받는다.
‘뜻으로 악행을 지어 불려 나가는 것으로는 탐과 진에와 사견이 있다’고 했는데, 선하지 못한 사원(思願)이 곧 뜻으로 짓는 악행이고, 또 위의 세 가지를 뜻으로 짓는 악행이라고 말하나니 탐과 진에와 사견이 그것이다.
028_0362_b_07L 若業與苦果當知是惡行者謂業是 不善盡說是惡行不善者苦果意惡 行增上貪瞋恚邪見者不善思願是 意惡行復三種說意惡行瞋恚 邪見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은 묘행(妙行)이니
가장 뛰어나신 분의 말씀이다.
그 중에 최상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10도(道)라고 한다.
028_0362_b_12L 此相違妙行
最勝之所說
若於中最上
是名爲十道
028_0362_c_02L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은 묘행이니 가장 뛰어나신 분의 말씀이다’고 했는데,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이란 모든 선업과 무탐과 무에(無恚)와 정견이다.
‘그 중에서 최상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10도라고 한다’고 함은 불선업 중에서 최상의 업이라면 이를 업도라고 설하나니, 살생ㆍ불여취(不與取)ㆍ사행(邪行)ㆍ망언(妄言)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ㆍ탐(綺語)ㆍ에(恚)ㆍ사견(邪見)이다.
그 중에서 살생은 중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중생을 버리는 마음으로 다른 목숨을 끊는 방편을 구하여 업을 이루는 것이다. 불여취(不與取)는 물건이 다른 자의 소유여서 다른 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홀연히 취하는 것이다. 사행(邪行)은 부녀자가 타인의 소유인 줄 알면서도 길에서 범하거나 또는 자신의 소유이지만 때때로 비도(非道)를 범하는 것이다. 망언(妄言)은 다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기만하여 말하는 것이다. 양설(兩舌)은 다른 이를 미워하여 친한 모양을 버린 채 하는 수단의 말이다. 악구(惡口)는 화가 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스럽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기어(綺語)는 선하지 않은 마음에서 의미 없이 하는 말이다. 탐(貪)은 욕계의 욕심이고, 에(恚)는 분노이며, 사견(邪見)이란 인과를 비방하는 것이다.
이 역시 업도(業道)이다. 나머지는 업도가 아니니, 이른바 이러한 행(行)의 수단을 구하는 것과 음주 등이다. 바르지 못한 업을 생각하고 원함은 곧 근본업이다. 이로써 그 열 가지를 도라고 한다.
028_0362_b_14L 此相違妙行最勝之所說者此相違 一切善業及無貪無恚正見若於中 最上是名爲十道者若於不善業中 若業最上者是說業道如殺生不與 邪行妄言兩舌惡口綺語於中殺生者衆生想捨衆生意他命求方便成業不與取者物他所 他想不與輒取邪行者婦女他所 犯於道若自所有時時犯非道言者異想意欺誑他說兩舌者憎他 親相離方便說惡口者以瞋於他 不愛言綺語者不善心無義言貪者 欲界欲恚者忿怒邪見者謗因果是業道餘者非業道謂此行方便求 及飮酒等不正業思願者是根本業此以彼十爲道

업은 현법(現法)의 보(報)가 되고
다음 생에서 받는 과보이다.
뒤의 과보도 또한 그러하니
나머지는 곧 부정(不定)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업이 능히 현법의 과보를 이룰 때[時]는 곧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028_0362_c_07L若業現法報
次受於生報
後報亦 復然
餘則說不定
謂業能成現法果時則不定
【문】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 가지 업인 낙보ㆍ고보ㆍ불고불락보가 있으니 그것은 무엇인가?

【답】욕계 중의 선(善)과
그리고 색계의 세 가지 경지[地]는
마땅히 낙보(樂報)가 되고
받는 것은 정(定)과 부정(不定)이 된다.

‘욕계 중의 선과 색계의 세 가지 경지는 마땅히 낙보가 된다’고 함은 욕계의 선업은 과보를 생하는 데 낙과 함께 하고, 색계의 초선ㆍ제2선ㆍ제3선도 역시 과보를 생하는 데 낙과 함께 한다. 이것을 통틀어 낙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62_c_10L如世 尊說三業樂報苦報不苦不樂報云何 若欲界中善
及色界三地
是應有 樂報
受者定不定
若欲界中善及色界三地是應有樂 報者欲界善業生報與樂俱及色界 初禪第二第三亦生報與樂俱此摠 說樂報
【문】이것도 역시 정해진 것인가?
【답】받는 것은 정해진 것도 있고 정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혹은 정해졌거나 혹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지(地) 중의 선(善)한 모든 것은 낙보를 지닌다.

불고불락을 생하는 것은
최상의 선한 경지이다.
고보(苦報)를 받는다면
이는 불선업이라고 말한다.
028_0362_c_18L此亦是定耶受者定不 若定若不定是四地中善一切有樂報 生不苦不樂
謂在於上善
若受於苦報
是說不善業
028_0363_a_02L
‘불고불락을 일으키는 것은 최상의 선한 경지이다’고 함은 제4선의 경지로서 선업과 무색 중에 있는 불고불락의 과보를 말한다. 이것은 과보를 일으키되 불고불락과 함께 하지만 그 중에서 즐거운 느낌[樂痛]은 없다.
‘고보를 받는다면 이는 불선업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불선업은 고의 과보이니 반드시 괴로운 느낌[苦痛]과 함께 한다. 과보를 받는 것은 역시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위에서와 같다.
028_0362_c_21L 生不苦不樂謂在於上善者第四禪 地善業及無色中是不苦不樂報生報與不苦不樂俱於中無樂痛受於苦報是說不善業者不善業 是苦報必與苦痛俱受報此亦定不 定如上
【문】세존께서는 네 가지 업을 말씀하시어 흑흑보ㆍ백백보ㆍ흑백흑백보ㆍ불흑불백무보(不黑不白無報)라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색계 중에 선업이 있으니
백업과 백보가 있다.
흑백은 욕계에 있으니
흑보는 부정(不淨)이라고 한다.
028_0363_a_04L世尊說四業黑黑報白白 黑白黑白報不黑不白無報此云 色中有善業
是白有白報
黑白在欲界
黑報說不淨

‘색계 중에 선업이 있으니 백업과 백보가 있다’고 함은 색계의 선업은 곧 백보이다. 오로지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불선(不善)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극묘(極妙)의 과보이니, 이를 백업이요 백보라고 한다.
‘흑백은 욕계에 있다’고 함은 욕계의 선업은 흑백업과 흑백의 과보가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는 불선에 파괴되고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흑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섞여서 애ㆍ불애(不愛)를 그 과보로 받으므로 흑백의 과보라고 말한다.
‘흑보는 부정이라고 한다’고 함은 불선을 깨끗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이를 흑이라고 한다. 악을 더하고 비천하기 때문에 이를 흑보라고 말한다.
028_0363_a_08L 色中有善業是白有白報者色界善 業是白報一向不淨故及離不善故 彼一向極妙報是謂白有白報黑白 在欲中者欲界善業黑白黑白報以者何是不善所壞羸劣故故說黑 彼雜受報愛不愛故說黑白報報說不淨者不善謂不淨是黑增惡 鄙賤故是說黑報

만약 생각해서 이를 능히 버릴 수 있으면
이것은 다하여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무애도(無礙道)에 있게 되나니
소위 이것이 네 번째 업이다.
028_0363_a_16L 若思能捨離
是盡無有餘
彼在無㝵道
謂是第四業

말하기를 도가 능히 이 세 가지 업을 멸하는 것이 무애도이다. 만약 의도가 있으면 이 의도는 곧 제4업이다. 그 중에서 네 가지 의도[思]는 사유도(思惟道)로서 두 번째의 업42)을 멸한다. 열셋에는 두 가지 도(道)가 있으니, 견제도(見諦道)의 넷과 사유도의 아홉이다. 이는 무루의 생각으로서 악을 더하지 않으므로 불흑이고, 업을 더하지 않으므로 불백이며, 끝없이 서로 다르므로 과보도 없다.
028_0363_a_18L 謂道能滅此三業是無㝵道若有思 此思是第四業於中四思思惟道滅 第二業十三有二道見諦道四思惟 道九是無漏思不增惡故不黑不五 樂故不白與無窮相違故無報
028_0363_b_02L【문】세존께서는 신ㆍ구ㆍ의의 곡(曲)ㆍ예(穢)ㆍ탁(濁)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답】곡은 아첨과 거짓에서 생기고
예는 성냄을 따라 생기며
욕심이 생하는 것을 소위 탁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028_0363_a_23L尊說身口意曲穢濁此云何 曲生於諂僞
穢從瞋恚生
欲生謂爲濁
世尊之所說

‘곡은 아첨과 거짓에서 생기고’라고 함은, 업이 거짓을 따라 생기는 것을 곡이라 하나니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움은 성냄을 따라 생긴다’고 함은, 업이 성냄을 따라 생기는 것이 더러움이니 오로지 다투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하는 것을 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다’라고 함은, 업이 욕심을 따라 생하는 것이 탁이 되나니 오로지 먼지와 때이기 때문이다.
028_0363_b_03L 曲生於諂僞者若業從僞生是曲誑故穢從瞋恚生者若業從恚生一向諍故欲生謂爲濁世尊之所 說者若業從欲生是濁一向塵垢故
【문】세존께서는 세 가지 깨끗한 신ㆍ구ㆍ의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답】청정[淨]은 일체의 묘행이요
만(滿)은 곧 몸과 입이다.
무학(無學)의 의만(意滿)을
곧 무학의 마음[心]이라 한다.

‘청정은 일체의 묘행이다’라고 함은 묘한 행이 있으면 이는 일체가 깨끗하니 번뇌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떠났기 때문이다.
028_0363_b_07L 如世尊說三淨此云何 淨一切妙行
滿者是身口
謂無學意滿
卽是無學心
淨一切妙行者若有妙行是一切淨 離煩惱不淨故
【문】만이란 무엇인가?
【답】‘만은 곧 몸과 입이다.’ 무학의 마음[意] 가운데 몸과 입의 묘한 행이니, 이를 만이라고 하나니 선하여 일체의 거리끼는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무학의 의만을 곧 무학의 마음이라 한다’고 함은 무학의 의만이 곧 무학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학의 마음은 이미 문니(文尼, muni)의 모습[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028_0363_b_12L滿云何滿者 是身口無學意中身口妙行是謂滿 善除一切罣㝵故謂無學意滿卽是 無學心者若無學意滿是無學心以者何無學心者已逮得文尼相故
이미 모든 업의 가명(假名)을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과보를 설명하겠다.

선한 업과 악불선의 업은
함께 두 가지 과보가 있다.
선한 업은 혹은 세 가지 과를 이루나니
하나의 과보는 나머지를 말한다.
028_0363_b_16L 已說諸業假名果今當說 善惡不善業
是俱有二果
善或成三果
一果謂餘說
028_0363_c_02L
‘선한 업과 악불선의 업은 함께 두 가지 과보가 있다’고 함은, 선업은 두 가지 과보를 이루나니 소의과(所依果)와 보과(報果)이고, 무루업도 두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해탈과이고, 불선업도 두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보과(報果)이다.
‘선한 업은 혹은 세 가지 과보를 이룬다’고 함은 말하자면 선한 유루업이 능히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세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보과와 해탈과이다.
‘하나의 과보는 나머지를 말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나머지인 무기업은 하나의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이고 다른 것은 없다.
028_0363_b_19L 善惡不善業是俱有二果者善業 成二果所依果及報果無漏業亦有二 所依果及解脫果不善業亦有二 所依果及報果善或成三果者善有漏業能除諸煩惱是三果所依 報果及解脫果一果謂餘說者餘無記業是一果所依果無餘
【문】색상(色相)이 신업과 구업이라면, 어째서 사대가 업을 짓는가?
【답】
자신의 경지에 대(大)가 있으니
신업ㆍ구업에 의지하는 것이다.
무루는 그 힘에 따라 얻으니
그것을 일컬어 과(果)라고 한다.

‘자신의 경지에 대가 있으니 신업ㆍ구업에 의지하는 것이다’고 함은 욕계의 모든 업은 곧 욕계의 대(大)43)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계의 업도 이와 같다.
028_0363_c_03L色相是身口業是業何四大造 自地若有大
依於身口業
無漏隨力得
是彼謂之果
自地若有大依於身口業者若欲界 諸業是依於欲界大此所造故色界 業亦如是
【문】무루의 모든 업은 무엇인가?
【답】‘무루는 그 힘에 따라 얻으니 그것을 일컬어 과라고 한다’고 함은 무루의 색은 만약 4대(大)에 의해 얻으면 곧 그 지(地)에 의하고, 만약 욕계에 머물러 도를 얻으면 그 신업ㆍ구업은 욕계의 4대가 만드는 것이니, 일체의 지(地)도 이와 같다. 말하자면 힘으로 색계의 욕(欲)과 무색계의 것을 제거하여, 그것이 만약 목숨이 끝나면 무색계 중에 생하고, 만약 얻지 못하고 신업ㆍ구업을 얻으면 이 신업ㆍ구업은 곧 그 지(地)의 4대가 만드는 것이 된다.
【문】세존께서는 세 가지 장애[障]를 말씀하셨으니, 업장과 번뇌장과 보장(報障)이다.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답】무간무구업(無間無救業)과
널리 능히 번뇌를 생하는 것과
악도(惡道)에 악보(惡報)를 받는 것은
장애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들 세 가지 법의 장애는 반드시 성스러운 법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장애라고 말한다.
028_0363_c_09L無漏諸業云何無漏 隨力得是彼謂之果者無漏色若依 四大得卽依彼地若住欲界得道身口業欲界四大造如是一切地謂力 除色界欲及無色界彼若命終生無 色中若未得而得身口業是身口業 卽彼地四大造如世尊說三障煩惱障報障是相云何 無閒無救業
廣能生煩惱
惡道受惡業
障㝵亦應知
此三法障㝵者必不受聖法是故說 障㝵
028_0364_a_02L【문】이들 업에서 어떤 것이 최대의 악인가?

【답】만약 업이 승단을 파괴하면
이것을 극악이라고 말한다.

업이 승단을 파괴하면 이러한 업이 가장 악하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아비대지옥에서 겁이 지나도록 머물게 된다.
【문】어떤 것을 최대의 묘라고 하는가?

【답】제1유(第一有)44) 중의 사(思)이니
그것이 최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유(有)에서는 제일이다. 그 경지에 포섭되는 사(思)는 크게 묘한 것이자 지극히 큰 과보로서, 그것은 8만 겁 수명의 과보이다.
028_0363_c_20L此業何等最大惡 若業壞僧者
是說爲極惡
謂業壞僧是業最惡是阿鼻大地獄 住劫何者最大妙 第一有中思
當知彼最大
非想非非想處於有第一彼地攝思 是大妙極大果彼八萬劫壽報
阿毘曇心論卷第一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아라한(阿羅漢, Arhat)을 말한다.
  2. 2)범어로는 praveśa 혹은 āyatana. 감관으로서의 근(根, indrya)을 말한다.
  3. 3)범어로는 rūpa-āyatana. ‘물질의 영역’을 의미한다.
  4. 4)범어로는 avijñāpti. 무표(無表)라고도 한다.
  5. 5)감관에 의한 접촉을 의미한다.
  6. 6)곧, 18계를 말한다.
  7. 7)수음(受陰)이라고도 한다.
  8. 8)범어로는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이라도 한다.
  9. 9)범어로는 avyākṛta. 아직 선(善)이나 악(惡)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10. 10)원문의 식(識)을 위(謂)로 고쳐 읽는다.
  11. 11)범어로는 kavaḍi(혹은 kavalī)-kārāhāra. 단식(段食)이라고도 한다.
  12. 12)범어로는 각각 Vitarka, Vicāra. 각과 관은 선정 중에 나타나는 일종의 사유작용으로 선정이 깊어감과 더불어 소멸된다. 각은 어떤 대상이 문득 떠오르고 다시 이를 분별하는 일종의 ‘거친 사유’이며, 관은 이 각이 점점 미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13. 13)초선과 제2선 사이에 있는 선정을 말한다.
  14. 14)허공ㆍ수연멸ㆍ비수연멸의 셋을 말한다.
  15. 15)범어로는 sahāya, 같은 부류를 말한다.
  16. 16)감관[入]이 대상을 접하는 것을 가리킨다.
  17. 17)감수작용[受, vedanā]을 말한다.
  18. 18)범어로는 praśrabdhi. 경안(輕安)이라고도 한다.
  19. 19)범어로는 upekṣa. 사(捨)라고도 한다.
  20. 20)불선ㆍ신견 등의 불선이 아닌 더러움ㆍ선ㆍ불공무명ㆍ무기의 다섯을 말한다.
  21. 21)선ㆍ불선ㆍ무기의 셋을 말한다.
  22. 22)탐ㆍ만ㆍ의(疑)의 셋을 말한다.
  23. 23)초선의 유각유관과 제2선의 무각무관 사이에 있는 무각유관의 경지를 말한다.
  24. 24)지ㆍ수ㆍ화ㆍ풍ㆍ색ㆍ향ㆍ미ㆍ촉ㆍ신근종의 아홉을 말한다.
  25. 25)지ㆍ수ㆍ화ㆍ풍ㆍ색ㆍ향ㆍ미ㆍ촉의 여덟을 말한다.
  26. 26)범어로는 kāraṇa-hetu. 능작인(能作因)이라고도 한다.
  27. 27)범어로는 sahabhū-hetu. 구유인(俱有因)이라고도 한다.
  28. 28)범어로는 sabhāga-hetu. 동류인(同類因)이라고도 한다.
  29. 29)범어로는 sarvatraga-hetu. 변행인(遍行因)이라고도 한다.
  30. 30)범어로는 saṃprayukta-hetu. 양자가 서로 조력하는 관계에 있어서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그 결과가 되는 것을 사용과(士用果)라고 한다.
  31. 31)범어로는 vipāka-hetu. 이숙인(異熟因)이라고도 한다.
  32. 32)범어로는 samanantarana-pratyaya.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된다고 간주되는 연을 말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33. 33)범어로는 ālambana-pratyaya. 가깝거나 먼 대상이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소연연(所緣緣)이라고도 한다.
  34. 34)범어로는 adhipati-pratyaya. 일체의 간접적인 연을 말한다.
  35. 35)범어로는 samādhi 혹은 samāpatti. 삼매(三昧)를 말한다.
  36. 36)범어로는 asaṃjñi-samāpatti. 일체의 심작용이 모두 그치는 선정의 경지를 말한다.
  37. 37)범어로는 nirodha-samāpatti. 6식의 심작용이 그친 경지를 말한다.
  38. 38)범어로는 pañca-gati. 하늘ㆍ인간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다섯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 아수라를 더해 6취라고 한다.
  39. 39)범어로는 vijñāpti.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40. 40)범어로는 avijñāpti. 행위로 드러나지 않고 습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무표(無表)라고도 한다.
  41. 41)4선(禪)을 가리킨다.
  42. 42)백백보업(白白報業)을 가리킨다.
  43. 43)지ㆍ수ㆍ화ㆍ풍의 4대(大, catur-mahābhūta)를 말한다.
  44. 44)범어로는 bhava-agra. 유정(有頂)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