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論) 가운데서 16제(諦)1)또 대승의 보살은 처음 승지(僧祇)의 끝에 4선근의 가행을 마쳐서 분별이 일으키는 번뇌 또 대승의 보살은 처음 승지(僧祇)의 두 가지 장애를 다 끊어버리는 것을 견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의 무루지에 대해서 『구사론』에서는 8인(忍), 8지(智)의 16심(心)이 있다. ①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 욕계의 고제 아래서의 견혹(見惑)을 끊는 지혜이다. ② 고법지(苦法智)로 고혹(苦惑)을 끊는 지혜이다. ③ 집법지인(集法智忍)으로 욕계의 집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④ 집법지(集法智)로 집혹(集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⑤ 멸법지인(滅法智忍)으로 욕계의 멸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⑥ 멸법지(滅法智)로 멸혹(滅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⑦ 도법지인(道法智忍)으로 욕계의 도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⑧ 도법지(道法智)로 도혹(道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⑨ 고류지인(苦類智忍)으로 상 2계의 고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⑩ 고류지(苦類智)로 고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⑪ 집류지인(集類智忍)으로 상 2계의 집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⑫ 집류지(集類智)로 집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⑬ 멸류지인(滅類智忍)으로 상 2계의 멸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⑭ 멸류지(滅類智)로 멸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⑮ 도류지인(道類智忍)으로 상 2계의 도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도류지(道類智)로 도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인(忍)은 참고 견디어 허락한다[忍許]는 뜻으로 진리를 믿어 참고 견디어서 미혹을 일으키지 않는 경지로서 이를 단도(斷道)라고 한다. 욕계를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전에 보여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상 2계를 욕심[欲]이라고 하는 것은 욕계에서 추론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16심 가운데서 앞의 15심을 견도라고 하고, 뒤의 도류지만을 수도(修道)에 포섭한다. 를 풀이한다.
028_0555_b_04L論中解十六諦
【문】16제를 전체적으로 묻는다. 물(物)에 열여섯 가지가 있는가? 이름에 열여섯 가지가 있는가?
028_0555_b_05L十六諦摠問:爲物有十六、爲名有十六耶?
【답】비(毘)[방(防)과 이(夷)의 반절(半切)]ㆍ바(頗)[판(判)과 하(何)의 반절]ㆍ사(沙)2) 비바사란 주석(註釋)의 뜻이다. 인도의 외도 경전과 논서에서는 본문에 상세한 주해(註解)를 더하고, 이 주해에 다시 주해를 더한 것이 불교에서도 사용되었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비바사론 가운데 모든 스승인 5백 아라한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다른 뜻을 세워서 『발지론(發智論)』을 해석하였다. 이를 비바사론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모든 아라한을 지칭해서 비바사사라고 말한다. [광해(廣解)로 번역한다.]의 논사(論師)는 물(物)에 열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에 16이란 이름을 세운다고 풀이하였다. 그 본체가 실제로 있기 때문에 물이라고 부른다.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3)[탐욕을 여의고 선(善)을 닦도록 설한다고 번역한다.] 논사(論師)는 이름에 열여섯 가지가 있다고 풀이하였다. 물은 오직 일곱 가지만 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의 네 가지가 있고, 집착의 진리[集諦], 집착을 멸함의 진리[滅諦], 도에 이르는 진리[道諦]에 각각 한 가지가 있어 합쳐서 일곱 가지가 된다.
부처님께서 본래 우바제사경(優波提舍經)을 설하여 모든 뜻을 풀이하셨다.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후에 아난(阿難)과 가전연(迦旃延) 등이 예전에 들은 내용을 돌아가며 암송해 경전 가운데 뜻을 풀이하였다. 마치 모든 제자들이 논서를 지어 경전을 풀이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라고 이름한다. 비바사(毘婆沙)가 다시 우바제사 가운데서 간략한 우바제사를 만들어 내었다. 이는 이미 전해진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에 ‘경전의 비바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우선 앞의 것에 의하여 해석한다. 조건[緣]들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이고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말한다. 힘이 없으므로 스스로 일어날 수 없으니, 조건들이 쌓여야 비로소 일어난다. 마치 갓난아이나 어린아이가 일어나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붙잡거나 지탱해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조건이란 탐애(貪愛)와 업(業)이다. 반드시 이 두 가지 법을 갖추어야 5음(陰)이 비로소 발생한다.
028_0555_c_02L업(業)은 능히 과보(果報)를 발생시킨다. 비록 다시 과보를 발생시킨다고 할지라도 만약 탐애(貪愛)의 애착이 없이 마땅히 발생하는 곳이 있다면 과보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땅과 물 등이 곡식의 싹을 발생시키지만 사람의 노력이 없으면 씨앗을 땅 속에 묻어 두더라도 싹이 끝끝내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탐애 및 업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과보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탐애 및 업의 인연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과보가 발생한다. 발생한다는 것은 있다[有]는 것이다. 업의 힘이 만약 다하면 과보도 역시 사라져 없어져서 다시 없음[無]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선후(先後)가 된다. 선후는 조건에 묶이거나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건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괴롭게 핍박[逼惱]하는 성질을 괴로움[苦]이라고 이름한다. 괴롭게 핍박함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違逆逼惱]이고, 둘째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것[隨順逼惱]이다. 만약 부처님의 제자들의 경우라면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삶과 죽음 가운데서 항상 두려움이 생긴다면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이다.
경전 가운데서 비유하여 말한다. “마치 날카로운 칼과 번쩍거리는 눈으로 사람이 칼을 잡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자 한다면 생각 생각에서도 항상 커다란 두려움이 생기는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들이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 이하는 거슬림의 뜻이다.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 등은 항상 서로 괴롭게 핍박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만약 범부(凡夫)들의 경우라면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것이다. 범부는 삶과 죽음에 애착하니,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뜻이다. 마치 형과 아우의 두 사람 가운데 형은 동생을 몹시 사랑하나 동생은 형을 괴롭게 한다. 형은 비록 괴롭힘을 당하지만 자신은 그 괴롭힘을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범부도 삶과 죽음에 애착하여서 비록 괴로움을 받지만 그 괴로움에 애착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괴롭게 핍박하는 성질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나의 것[我所]’이란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범부들은 일체의 법(法)에 집착하여서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일체가 모두 ‘나의 것’이 아님을 밝혀 이러한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나[我]’란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이름한다. 범부들은 5음(陰) 등에 집착하여서 ‘나’로 여긴다. 이제 일체의 법에 ‘나’가 있지 않음을 밝혀 이러한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무아’라고 이름한다.[이 네 가지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原註)]
028_0556_a_02L다음에는 집작의 진리[集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한다. 종자의 법[種子法]으로 도리(道理)를 삼기 때문에 원인이라 이름한다. 능히 과보를 낳는 것이 종자의 법이다. 네 가지 뜻을 갖춘 것이 그 도리이다. 네 가지 뜻이란, 첫째는 종자가 깨어지면 낳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종자를 집어서 갈아서 깨트리면 모든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다. 탐애 등의 번뇌도 그 종자와 같다. 만약 도(道)로써 번뇌의 종자를 깨트리면 나머지의 조건들을 다 갖추었더라도 과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오래 묵혔기 때문에 비록 모든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생길 수 없다. 종자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탐애 등이 과보를 낳는 것도 이와 같다. 성문(聲聞)은 60대겁(大劫)을 수행하고, 독각(獨覺)은 백 대겁(大劫)을 수행하고, 부처님은 3아승기(阿僧祇)겁을 수행한다.
3승(乘)의 사람들이 아직 발심(發心)하기 전의 상태이거나 일천제(一闡提)4)의 상태에 있어서는 탐애 등의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는 업을 낳는다. 업은 과보에 감응한 것이다. 아직 과보를 받기 전이라면, 오랜 시간 동안 수행하여 공덕과 지혜가 이미 넓고 깊게 전전하여서 이전의 원인의 힘과 작용을 덮어버려서 쇠약하게 만든다.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과보를 낳을 수 없다. 『대유경(大有經)』5)에서 말한다. “아흔여덟 가지 번뇌[九十八惑]가 하나의 번뇌를 낳고, 하나의 번뇌가 아흔여덟 가지 번뇌를 낳는다. 탐욕으로 아흔여덟 가지 번뇌를 모두 낳는 것처럼 모두 탐욕을 낳을 수 있다.”
셋째는 시기를 놓치기 때문이다.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봄에 종자를 뿌리면 싹이 나오지만 겨울에 뿌리면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시기를 놓쳐도 역시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앙굴마라(鴦掘魔羅)6)가 무명으로 인하여 2천 명의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겠지만 현재의 몸으로 아라한을 이룬 것과 같다. 먼저 지은 악이 시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과보를 다시 받지 않는다.
028_0556_b_02L넷째는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비록 종자가 깨어지지도 않았고, 오래 묵지도 않았고, 시기를 놓치지도 않았더라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땅ㆍ물ㆍ사람의 노력 등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원인이 과보를 얻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비록 종자가 깨어지지도 않았고, 오래 묵지도 않았고, 시기를 놓치지도 않았더라도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보를 얻지 못한다.
만약 중생이 업을 지어 능히 과보를 이끌어 오려면 반드시 세 가지 일[三事]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는 것이며, 둘째는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선지식 등에 향하는 것이며, 셋째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일에 반대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일이 없으면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과보를 얻을 수 없다. 『추루경(醜陋經)』7)에서 말한다.
“만약 중생이 사람 가운데 태어나기를 원하더라도 업을 지으면 원인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윽고 짐승 등으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만약 악업을 짓더라도 원인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윽고 사람 가운데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마치 아라한이 비록 모든 업을 갖추고 있더라도 번뇌를 끊어 업을 다하고 번뇌가 없음을 벗하기 때문에 태어남에 이끌리지 않는다.
또한 중멸아나함(中滅阿那含)8)은 업의 작용이 이미 다 하였으나 탐욕의 애착이 아직 다 끊어지지 않아 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을 수 없어 중음(中陰) 가운데 태어난다. 또한 처음의 과보를 얻고 마침내 수도(修道)에서 없애는 바의 번뇌를 일으킨다. 번뇌는 업을 낳아 비록 업과 번뇌를 갖추었더라도 견도(見道)에서 깨트릴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다시는 새로운 업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지 않는다. 세간의 종자법도 반드시 네 가지 도리를 갖추어야 비로소 싹이 난다. 탐애 및 업을 종자법으로 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반드시 네 가지 도리를 갖추어야 비로소 과보가 생겨난다. 과보가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말한다.”
028_0556_c_02L두 가지가 현현(顯現)하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한다. 현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탐애는 업과 상응하여 과보로 태어나게 만들고,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과보도 나타나지 않고, 태어났을 때는 과보도 현현한다. 둘째, 탐애는 대상[境界]을 현현하게 한다. 대상은 모두 천하고 추악한 것이지만 탐애가 마음을 바뀌게 한다. 대상이 좋다고 말하여 대상으로 하여금 좋게 현현하게 만든다. 마치 한 명의 여인을 세 가지 식(識)이 와서 볼 때 범부가 보면 가히 사랑할 만한 대상이라고 말하고, 호랑이가 보면 가히 먹을 만한 물건이라고 보고, 성인이 보면 뼈 무더기라고 말한다.
이는 대상을 생각으로 재어서[稱] 아는 것이다. 이른바 가히 사랑할 만하다거나 가히 먹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탐애가 이 대상을 현현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탐애로 말미암아 현현하였으므로 태어나는 곳의 대상에 응해서 그 가운데서 오염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업은 과보를 낳을 수 있다. 만약 이 두 가지 현현이 없으면 과보는 생긴 수 없다. 이 두 가지 현현을 밝혀서 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하였다.
외도(外道)는 일체법이 오직 하나의 원인인 자재천(自在天)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일체의 물(物)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제 이러한 견해를 깨트리고자 여러 조건들이 모여야 비로소 과보가 생길 수 있음을 밝힌다. 비록 또한 여러 조건들이 다 모여졌더라도 과보를 일으킬 수 없다면 이는 역시 원인의 뜻이 아니다. 다 모여져서 과보를 일으킬 수 있어야 비로소 원인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현현(顯現)도 역시 모여짐의 뜻을 밝힌 것이고, 역시 과보를 일으킴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현현으로써 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하였다. 마치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진흙을 반죽하고, 새끼줄과 물 등의 갖가지 조건들을 함께 모아서 하나의 물병을 만드는 것과 같다. 능히 결과를 뽑아내어 성취할 수 있게끔 해야 조건[緣]이라고 이름한다. 원인은 곧바로 결과가 일어나도록 감응하는 것이고, 조건은 설사 어떤 기간 동안 과보를 갖추어 성취하더라도 과보가 생기도록 할 수 있다.
028_0557_a_02L다음에는 멸함의 진리[滅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하고자 한다. 5음(陰)이 다 없어져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함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과보에 근거하여 말한다. 현재의 5음이 다 없어지고, 미래의 5음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함이라고 이름한다. 지금 멸함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은 무위(無爲)를 본체로 한 것이다. 멸함의 진리[滅諦]는 스스로 무위를 본체로 함으로써 5음의 멸함을 취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음을 본체로 한다. 5음의 멸함과 생기지 않음은 삼세(三世)가 있다. 멸함의 진리의 본체가 무위이므로 삼세의 법은 아니다.
무위법(無爲法) 가운데는 5음이 없다. 5음이 이 가운데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위를 이름한다. 또한 5음이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 때 바야흐로 이 무위를 증득(證得)하기 때문이다.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위라고 이름하므로 무위를 멸(滅)한다고 한다. 세 가지 불[三火]을 멸하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세 가지 불로 삼는다. 이 세 가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첫째는 중생들의 모든 선근(善根)을 태울 수 있고, 둘째는 이 세 가지 번뇌는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 즉, 마음을 태운다는 뜻이 있다. 셋째는 삼계(三界)를 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세 가지 번뇌는 삼계 가운데 두루 퍼져 있어 6진(塵)ㆍ6근(根)ㆍ6식(識)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번뇌의 근(根)ㆍ진(塵)ㆍ식(識)은 모두 유류(有流)9)이다. 이 세 가지 번뇌로 말미암기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세 가지 번뇌는 불처럼 태울 수 있고, 근(根)ㆍ진(塵)ㆍ식(識)은 섶처럼 태워진다.
028_0557_b_02L둘째, 세 가지 괴로움[三苦]11)을 세 가지 불로 삼는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중생을 태워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게 만든다. 만약 욕계라면 세 가지 괴로움을 갖추고 있고, 색계라면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의 두 가지 괴로움을 갖추고 있고, 무색계라면 오로지 행고만 있다.
세 가지 괴로움은 곧 세 가지 재앙[三災]이다. 고고(苦苦)는 불의 재앙[火災]이고, 괴고(壞苦)는 물의 재앙[水災]이고, 행고(行苦)는 바람의 재앙[風災]이다. 이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세 가지 불은 시끄럽게 움직인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세 가지 불을 멸하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광(抂)이 없기 때문에 묘함[妙]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광(抂)이란 태어남ㆍ늙음ㆍ죽음으로 세 가지 괴로움이 된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삼계 가운데 평등하게 두루 퍼져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괴로움을 세 가지 광(抂)이라고 치우쳐 말한다. 삼계는 모두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의 괴로움이 있다. 만약 욕계에서라면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늙음이 있다. 6천(天) 및 색계에는 이 늙어가는 모습은 없다. 또한 바뀌어 변함[改異]의 뜻이 있다. 마치 그림을 처음 그려놓았을 때는 색채가 분명하고 좋아할 만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색채가 흐릿하게 되는 것과 같다.
상계(上界)의 색신(色身)도 또한 이러한 뜻이 있고 이를 이름하여 늙음이라고 한다. 무색계의 마음도 역시 늙음이 있다. 과보가 장차 다한 때 마음을 바뀌고 변하게 한다. 옛날에는 선정(禪定)의 마음이 견고하였으나 장차 무색계의 시간이 끝나감에 선정의 마음이 약해져 항상 물러서고, 타락해지려고 한다. 그러므로 삼계에도 모두 늙음의 괴로움이 있다.
삼계(三界)가 모두 다 끝남이 있기 때문에 모두 죽음의 괴로움이 있다. 이를 광(抂)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범부의 성품이 항상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고 세속의 선(善)을 닦아 즐거운 과보를 얻기를 바라지만 이 세 가지 횡액과 재앙은 그 괴로움을 받도록 시키기 때문에 세 가지 괴로움을 세 가지 광[三抂]이라고 이름한다. 무위(無爲) 가운데는 이 세 가지 광(抂)이 없다. 그러므로 묘함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c_02L【답】태어남의 괴로움[生苦]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태어남이 괴로움의 근본이므로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무위는 태어남이 없는 까닭에 괴로움이 없다. 태어나고 죽는 것에는 태어남이 있는 까닭에 괴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가령 지옥이란 어떤 장소의 이름이지, 그 장소는 실로 괴로움이 아니다. 다만 그 장소에서 괴로움이 능히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지옥은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답】만약 괴로운 느낌이 생겨난다면 고고(苦苦)이고, 즐거운 느낌이 생겨난다면 괴고(壞苦)이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면 행고(行苦)이다. 욕계의 태어남은 이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고, 색계의 태어남은 두 가지 괴로움인 괴고와 행고만 있고, 무색계의 태어남은 오직 행고만 있다. 늙음의 괴로움[老苦]도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다. “만약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바꾼다면 고고이고, 만약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고,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바꾼다면 괴고이고, 만약 즐거움을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것으로 바꾼다면 행고이다. 삼계의 종류에 따르면 이 죽음의 괴로움[死苦]도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다. 그 종류의 예는 앞의 예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답】괴로움은 한량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 이 외에도 다시 모든 괴로움이 있다고 분별한다. 다만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옛날의 여덟 가지 괴로움 가운데 병의 괴로움[病苦]은 말하지 않고 일곱 가지 괴로움만을 말한 것으로 마친다. ‘그 밖의 나머지 모든 괴로움 등등’을 말한 것에서 병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은 까닭은 병의 괴로움은 욕계의 사람들 가운데에만 있고, 욕계의 천[欲界天] 가운데에는 두루 퍼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천(天) 가운데 병의 괴로움이 없는 까닭은 병이 내외(內外)의 조건들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외(外)의 조건이란 차가움과 뜨거움이 불평등하고, 음식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의 괴로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내(內)의 조건이란 혹은 움직임이 많아 4대(大)를 약하게 하고, 혹은 앉아 있음이 많아 4대를 약하게 하는 것이다. 4대가 약해지면 병이 든다.
028_0558_a_02L상계(上界)의 경우 외적으로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불평등함이 없고, 음식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함의 조건이 없다. 내적으로는 4대가 이미 강하여서 움직임과 앉아 있음의 지나침과 차이남의 조건이 없기 때문에 병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도 병의 의미를 가진다. 욕계 6천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혹은 3일 동안 먹지 않아서 7일까지 이르고자 한다. 7일이 되기 전에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4대가 약해진다. 이 또한 병의 괴로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답】5음(五陰盛苦)은 삼계에 통하고, 구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의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상계(上界)의 두 계[二界]에는 결코 없다. 각각 스스로의 과보에 머무름으로써 섞여 있음이 없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괴로움이 없다.
욕계(欲界)의 6천은 이를 갖추고 있다. 하품(下品)의 모든 천(天)은 상품(上品)의 즐거움을 원하나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즉, 구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다. 아수라(阿修羅)와 전투할 때는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고, 전투가 여의치 않아 아수라에게 붙잡혀 묶이고 깨어지면 이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다.
일체의 잃음[失]에서 해탈함을 영원히 벗어남[永離]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의 잃음이란 원인[因], 조건[緣]이 과보이다. 원인이란 번뇌이고, 조건이란 업이고, 5음(陰)을 받는 것은 과보이다. 이 세 가지가 과실(過失)의 법이다. 이 세 가지를 완전히 해탈하고, 잠시 해탈한 것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영원히 벗어남이라고 이름한다.
【답】번뇌가 종자이다. 태어남을 바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원인이라 이름한다. 만약 번뇌가 없다면 비록 업이 있더라도 바로 태어남을 이끌 수 없다. 만약 업이 없고 번뇌가 있다면 중음(中陰)으로 태어남을 얻는다. 만약 번뇌가 다하고 업이 장엄한 과보를 얻더라도 끝내 번뇌가 업을 낳기 때문에 과보를 얻는다.
다음에는 도의 진리[道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한다. 이 가운데 행동하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무릇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12)무생지는 근기가 수승한 아라한에 한해서 있는 지혜이다. 이미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을 마치면 다시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이 없는 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이 무생을 자각해서 내가 다시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를 행위의 주체[能行]라고 한다.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행위의 객체[所行]라고 한다. 고법지(苦法智)에서부터 도비지(道比智)13)까지의 열두 가지 마음[十二心]14)은 모두 번뇌를 끊는다. 이를 진지(盡智)라고 한다. 열세 번째의 마음은 무생지(無生智)이다.
028_0558_b_02L계율에는 유류(有流)15) 4류(流)란, 첫째는 견류(見流)이고, 3계의 견혹이다. 둘째는 욕류(欲流)이고, 욕계의 모든 미혹이다. 단, 견 및 무명을 제외한다. 셋째는 유류(有流)이고, 상 2계의 모든 미혹이다.(단, 견 및 무명을 제외한다. 유란 생사의 과보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3계에 통할지라도 여기서는 따로 상 3계에서 이름한다.) 넷째는 무명류(無明流)이고, 3계의 무명이다. 유정은 이 네 가지 법의 작용에 의해서, 생사에 표류해서 쉼없기 때문에 유(流)라고 말한다. 와 무류(無流)16)가 있고, 근본은 유류이다. 두 가지 지혜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의 정(定)을 이룬다. 또한 이 지혜에는 들음[聞]ㆍ사유[思]ㆍ수행[修]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수행의 지혜[修慧]에도 역시 유류와 무류가 있다. 또한 두 가지 지혜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의 정(定)을 이룬다.
진지(盡智)가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고법지(苦法智)가 현전(現前)하여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聖道]을 갖추는 것이다. 계율과 선정의 근본은 유류이다. 이제 진지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를 이룬다. 진지(盡智)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바른 견해[正見]이고, 둘째는 바른 사유[正思惟]이다. 같이 무상(無常)을 관찰하지만 거침[麤]과 미세함[細]의 차이가 있다. 바른 견해는 미세하고, 바른 사유는 거칠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생겨나게 한다.
만약 바른 견해로 진지(盡智)를 삼으면 또한 바른 견해로 무류(無流)를 이루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침내 진지는 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만약 이와 같은 뜻을 밝힌다면 한꺼번에 진지가 행한 바로 삼기 때문이다. 계율ㆍ선정ㆍ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서로 성질이 다르기[異性] 때문에 같은 시간[同時]에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만약 바른 견해로써 다시 바른 견해를 바라보고, 바른 사유로써 다시 바른 사유를 바라본다면 같은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앞의 바른 견해가 뒤의 바른 견해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바른 사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하나의 성질에 두 가지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뜻을 밝힌다면 다른 시간에 지혜를 밝혀서 진지가 행한 바로 삼는 것이고,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무생지(無生智)가 행한 바로 삼아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무생지로 행하기 때문이다. 계율ㆍ선정ㆍ지혜로 무류를 이룬다는 것은 견제(見諦)에 뒤의 열 가지 마음[後十心]이 있고, 뒤의 열 가지 마음은 과보에 속한다.
만약 수다원(須陀洹)17)의 사람이 열두 가지 마음을 내어 관찰한다면 이는 무생지(無生智)이다. 같은 시간의 계율ㆍ선정ㆍ지혜 및 다른 시간의 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는 것이다.
028_0558_b_22L若須陁洹人作十二心觀者,則是無生智使同時戒定慧及異時慧成無流。
【문】괴로움의 법을 봄은 곧 무생지(無生智)이다. 어찌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028_0558_b_24L問:苦法見卽是無生智,何不說之耶?
028_0558_c_02L【답】괴로움의 법을 봄은 형식으로 하자면 고법지(苦法智) 또한 그것이 무생지가 됨을 이름한다. 만약 고류지(苦類智)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고류지가 되어 상계의 번뇌를 끊는 본래의 작업을 하여 다시 진지(盡智)에 속한다. 이미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는 무생지이기 때문이다. 다 진지에 속한다. 오직 제13심(心)만 정해졌기 때문에 무생지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해석에서는 “계율ㆍ선정ㆍ지혜를 무류 마음의 행위의 객체로 삼고 무류를 이루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즉, 무류의 마음으로 행위의 주체[能行]를 삼고,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행위의 객체[所行]로 삼는다. 무생지가 다한 것이 마음을 돕는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앞의 해석과 뒤의 해석은 다르다. ‘이 가운데서 말한 것’이란 계율ㆍ선정ㆍ지혜 가운데 이치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같다[如]’고 이름하는 것은 만약 전체적으로 논하자면 네 가지 모습[四相]18)과 상응하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개별적으로 논하자면 단절되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닌[不斷不常] 중도(中道)의 이치와 상응하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에 따른 지혜를 얻는다. 사악한 사유로써는 그것을 깨트릴 수 없고, 그 이루어짐이 여의치 않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한다.
바른 견해가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행위[正行]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성문의 사람이 바른 스승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 바른 가르침의 소리를 따른다면 바른 들음을 낳음[生正聞]이라고 이름한다. 바른 들음은 바른 수행을 낳고, 이와 같이 순서대로 학문을 익히는 것을 작용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독각(獨覺) 및 부처님이라면 바른 사유가 바른 수행을 낳는다. 바른 가르침의 소리를 따라 바른 들음을 낳음이라고 이름하는 뜻은 없다. 이 두 종류의 수행인들은 근기가 뛰어나서 스스로 사유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문】독각 및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다 경전의 법을 들었기 때문에 사유를 낳고 지혜를 수행할 수 있다. 어떤 까닭에 바른 들음이 없이 바른 사유를 낳는가?
028_0558_c_21L問:獨覺及佛,根本悉經聞法故得生思惟修慧,何故無正聞生正思耶?
028_0559_a_02L【답】예전에 경전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논서가 곧 표준[事]이고, 이는 예전에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에 의지하고 이에 의지하여서 사유의 지혜를 낳아 바르고 올곧게 사유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진리를 얻으라.” 성문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영원히 넘어서기[過度] 때문에 벗어남[出離]이라고 이름하나니,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 해석은 삿된 사유로 말미암아 번뇌를 낳고, 번뇌는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바른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무류의 지혜를 낳는다면 지혜는 계율과 선정 등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다 바른 것이다.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은 서로 상반된다. 바른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을 넘어서고, 잠시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 해석은 번뇌는 넘어짐[倒]이고, 지혜는 넘어지지 않음[不倒]이다. 넘어짐과 넘어지지 않음은 서로 상반된다. 넘어지지 않음은 넘어짐을 영원히 넘어선 것이다. 앞의 해석은 포괄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뒤의 해석은 간략하게 해석한 것이나, 그러므로 쓰임에 차이가 있다. 앞의 해석을 따르는 학파는 또 하나의 해석으로 열여섯 가지 진리를 말[言]이라고 한다. 영원한 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무위법이 본래 있는 것이라면 태어남[生]이 영원히 없고, 머무름과 소멸[住滅]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유위법은 잠시 태어나고, 잠시 머물고, 잠시 소멸된다. 이러한 법의 성품이 그와 같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한다. 무명(無明)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란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함에 가까워 이미 자체가 괴로움이다. 하물며 진실하고 깊고 깊은 도리를 이해하지 못함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더욱이 이렇기 때문에 괴로움은 무명이 근본이다. 이 괴로움은 무명에서 연유한 것이고, 삶과 죽음의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장소가 없으면 괴로움이 없다.
중간은 보특가라[人]19)를 벗어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중간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취락(聚落)으로써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비유하셨다. 방금 앞에서 말한 중간은 취락의 중간을 말한다. 나[我], 보특가라가 이 중간에 없기 때문에 보특가라를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나, 보특가라가 벗어났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9_b_02L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 없음[無我]’이라고 함은 자유자재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자재라고 이름한다. 만약 다른 태어남ㆍ머무름ㆍ소멸에 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유자재이다. 둘째, 마음대로 짓기 때문에 자유자재라고 이름한다. 만약 불을 차갑게 하고자 하면 불은 갑자기 차갑게 되고, 물에 습기가 없게 하고자 하여 물에 습기가 없어지면, 이것이 곧 자유자재이다.
모든 유위법은 다른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태어남ㆍ머무름ㆍ소멸이 있고,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만약 신통력이 있어 전변(轉變)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선정 등의 수행을 배움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이러한 작용이 있게 된다. 이미 의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자재가 없다. 이미 자유자재함이 없기 때문에 ‘나[我]’가 없다. 훗날에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이제는 순서대로 비유를 들어서 그것을 해석하고자 한다.
현재의 업을 나누면 네 부분이 된다. 처음 부분은 선업과 악업을 지었을 때 나머지 조건들의 쌓임이 없어도 자체에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어, 과보는 목숨이 끊어지는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업은 이미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어 과보가 훗날 나타나게 할 수 있다. 현재에는 능력만 있어 훗날에 그것이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훗날에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도리(道理)에서 나오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종자에 본래 나무가 생기는 능력이 있고, 나무의 싹ㆍ줄기ㆍ가지ㆍ잎 등은 본래 미래에 있다. 이제 종자가 흙 속에 있어 땅ㆍ물 등의 외부조건이 쌓여야 비로소 싹이 나오고, 싹이 나와야 현재의 종자는 소멸한다. 업도 또한 이와 같이 본래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고, 과보는 미래에 있다. 현재의 과보는 이미 다하였다. 먼저 중음(中陰)의 태어남을 받고, 중음이 나타나자마자 업의 처음 부분은 소멸한다. 업은 중음이 나오게 하는 도리가 있다. 원인과 조건이 다 모여야 중음의 과보가 바야흐로 나타날 수 있다.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28_0559_c_02L행위가 건너가기 때문에 생처(生處)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싹이 현재 먼저 나오고 싹으로부터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아직 꽃이 피지 않는 데까지 이른다. 미래에 계속 나오므로 행위가 건너간다고 이름한다. 행위란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싹의 위치를 건너야 비로소 줄기가 나오고 싹이 곧 사라진다. 업도 또한 이와 같다. 먼저 중음의 싹이 나옴을 받고, 중음의 싹을 버려야 바른 태어남을 받고, 처음의 가라라(柯羅邏)20)로부터 제7 부분의 끝에까지 이르름을 행위가 건너감이라고 이름한다. 점점 자라나는 것을 행위라고 이름하고, 중음의 위치를 지남을 건너감이라 이름한다. 가라라(柯羅邏)가 겨우 생기면 업의 제2 부분은 곧 소멸한다.
가라라 등은 차례로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남이라고 이름한다. 이 생겨남은 업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장소로 삼기 때문이고, 행위가 건너감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생처(生處)라고 이름한다. 업의 제3 부분은 자체의 작용이 강하다. 만약 업의 작용이 없으면 비록 나머지 조건들이 있더라도 과보가 생김은 끝내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가 의지하기 때문에 조건[緣]이라고 이름한다. 먼저 줄기가 점점 자라 아직 꽃이 피지 않는 데까지 이른다. 꽃이 피고 나서 떨어져야 씨앗이 맺는다. 씨앗은 또한 미래의 나무를 자라게 한다. 모두 도리가 의지하는 바라고 이름한다. 꽃과 열매 등은 모두 이 위치의 종자에 의지하여 생겨난다. 꽃이 겨우 생기면 종자의 제3 부분은 곧 소멸한다. 업도 이와 같다. 처음은 가라라에서 생겨나 제7 부분에 이른다. 아직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 및 해탈을 이룰 수 없으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갖추는 데까지 이르러 제2 찰나는 이미 지나간다.
태어남과 죽음, 해탈의 원인을 지을 수 있는 이 위치는 업의 제4 부분이다. 이 제4 부분의 처음은 지나간다. 만약 괴로움과 즐거움, 선과 악이라면 모두 업의 제4 부분에 의지한다. 업의 제4 부분은 이 도리에 의지하기 때문에 조건이라고 이름한다. 업의 제4 부분이 생기고 나서 업의 제3 부분은 곧 사라진다. 업의 제4 부분은 자체의 작용이 또한 강하다. 과보가 이미 생겨났으므로 나머지 조건들의 쌓임의 뜻은 약하다. 바로 업의 작용에서 연유하였으므로 과보를 갖출 수 있다.
028_0560_a_02L만약 업의 제2 부분이 중음의 태어남을 감응한다면 원인과 조건은 모두 약하다. 탐욕의 애착을 원인으로 삼고, 업을 조건으로 삼는 이 두 가지 일들은 모두 약하다. 종자로 모두 비유할 수가 없고, 적은 일부분만을 비유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업을 지을 때 이 네 가지 위치를 감응할 수 있음을 갖추어 과보는 시절에 차이가 있다. 이 네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은 이 네 가지 위치와 대비한 것이므로 업을 나누어 네 가지 부분으로 한다.
만약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로서로 낳음[相生]을 논한다면 제1 찰나는 제2 찰나를 생기게 할 수 있고, 제2 찰나는 제3의 항린(恒隣)을 생기게 할 수 있다. 다음에는 서로 서로 낳음을 밝힌다. 제1 찰나의 태어남은 곧바로 소멸하여 제2 찰나에 이르지 못하는데 어찌 제3 찰나를 낳을 수 있겠는가?
만약 동분인(同分因)을 따라 상속함을 택하여 말한다면 제1 찰나는 동분인으로 곧 제2 찰나를 낳을 수 있다. 이후 나아가 꽃과 열매에 이르는 것은 동분인에 포섭된다. 이 업의 과보는 미래에 있다. 제1 찰나는 소멸하고 제2 찰나의 동분인은 곧 포섭된다. 제3 찰나 이후 과보는 미래에 있다. 이후는 차례로 이와 비슷하다.
028_0560_b_02L만약 제1 찰나의 종자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제2 찰나, 제3 찰나는 있을 수 없다. 차례대로 상속하기 때문이다. 처음 제1 찰나의 종자를 얻음으로써 그 생길 수 있음을 말한다. 후에 모든 과보를 동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자의 4대는 곧 네 부분이다. 하나의 과보를 같이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다. 업에는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이 있어 그 원인과 결과를 포섭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약 정량부(正量部)22)라면 색은 순간순간[念念]마다 소멸하지 않고 잠시 머문다는 뜻이 있다. 종자가 아직 싹이 나지 않았을 때는 단지 하나의 종자일 뿐이다. 만약 부분으로 나누어서 과보를 낳음[生果]을 논한다면 바로 싹과 과보를 낳는다. 만약 상속을 택한다면 줄기와 일 등이 생기는 등의 뜻이 또한 있다. 이후의 종류는 다 이와 같으나 업은 그렇지 않다. 업은 비록 스스로 소멸하나 무실법(無失法)이 현재에 있어 그 과보를 포섭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또한 이제 계율의 선함에 의거하여 말한다. 계율에는 근본이 있고, 근본에는 이전의 방편[前方便] 및 바른 방편[正方便]이 있다. 이전의 방편[前方便]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 대중을 화합하여 계율 받음을 허락한 것이다. 둘째, 바르게 구걸하는 계율이다. 셋째, 시절(時節)이다. 시절이란 요컨대 몸과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려 모든 악을 멈추는 것이다.
바른 방편[正方便]이란 스승이 그것을 말씀하여서 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23)에서 제3 갈마24)로 마치면, 곧 몸과 입의 선함을 얻는 것이다. 이 선함은 곧 계율이다. 요컨대 마음 등의 조건을 기다려서 그것을 포섭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본으로 삼아 몸과 목숨이 다하여도 소멸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나중에 상속하여 항상 흐른다. 만약 중간에 죄를 지으면 계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만약 참회를 마치면 곧 돌아와 다시 흐른다.
흐름이란 말은 근본으로부터 흘러나온 1찰나의 계율의 선함이다. 흘러나온 것이란 또한 생겨나자 곧 소멸하는 것이다. 이 찰나의 계율이 생겨남을 따르지 않고 제2 찰나의 계율을 유출한다. 근본으로부터 제2 찰나의 계율을 유출한다. 이와 같이 뒤에 생기는 것은 근본으로부터 유출될 수 있다. 만약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뜻이라면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에 묶이는 계율의 선함이 있다. 생겨나서 비록 사라질지라도 함께 따라서 얻음에 묶인다. 그 머무름은 과거에 있고, 과보의 묶임은 미래에 있다.
028_0560_c_02L만약 정량부(正量部)의 경우라면 계율의 선함은 이러한 선한 업을 낳아 무실법(無失法)과 함께 생겨난다. 이 부파는 업과 업의 주체가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본체는 생겨나자마자 바로 사라진다. 무실법은 사라지지 않고 업의 과보를 포섭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무실법(無失法)은 순간순간마다 소멸하는 법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해야 소멸하는 법이다. 이것은 잠시 머문다는 뜻이 있고, 과보가 생길 때를 기다려 그 본체가 비로소 사라진다.
만약 정해진 계율[定戒]이라면 모두 근본을 따라서 상속하여 흐른다는 뜻이 있다. 물건을 보시하면 물건을 따라서 선함이 항상 흐른다. 만약 선함의 흐름이 없으면 과보를 얻을 수 없다. 무실법과 선함이 함께 생김이 없으면 나머지의 마음에서 무류의 선함이 항상 유출한다는 뜻이 없게 된다.
【문】업과 무실법(無失法)은 함께 생겨 모두 유위법이다. 업의 본체는 무슨 까닭에 소멸하고, 무실법은 소멸하지 않는가?
028_0560_c_10L問:業與無失法俱生,同是有爲法,業體何故滅、無失法不滅耶?
【답】선함은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생기자마자 곧 소멸한다. 무실법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순간순간마다 소멸하지 않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뜻인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도 순간순간마다 소멸한다. 다만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 아니다. 종류가 자체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답】몸과 입은 업의 본체이다. 모습으로써 몸의 업[身業]으로 삼고, 언어로써 입의 업[口業]으로 삼는다. 손을 움직여 물건을 잡거나, 혹은 가지거나 집어서 앞의 사람에게 준다. 이것이 모습이다. 곧 이 모습으로써 몸의 업으로 삼는다. 소리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보시를 하는 이것이 언어로 하는 입의 업이다.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는 조건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 가지 선근(善根)이고, 둘째는 세 가지 선근으로부터 생겨난 바른 사유이고, 셋째는 바른 사유로부터 생겨난 작의(作意)이다. 말하자면 보시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전체적으로 논한다면 이 세 가지 조건이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고, 통속적으로 논하자면 바로 작의가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킨다.
028_0561_a_02L보시란 말은 세 가지 조건으로써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시의 선함이라고 이름한다. 보살은 묵묵히 생각하면서 감로의 보석들을 내려주니, 뜻의 업[意業]도 역시 보시의 업이다.
028_0560_c_24L言布施者,以三緣發身口業,故名布施善。菩薩默念而雨寶,意業亦是施業。
밭[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덕(福德)의 밭으로 부처님이나 보살 등과 같다. 둘째는 은혜로 길러준 밭으로 부모 등과 같다. 셋째는 가난하고 빈궁한 밭으로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중생 등이다. 만약 복덕의 밭에 보시하면 어리석음이 없는 선근이 많고, 만약 가난하고 빈궁한 밭에 보시하면 성냄이 없는 선근이 많다. 빈궁한 중생들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냄이 없는 선근이 많다. 동일한 시간에 세 가지 선근을 갖추어 대하는 복전에 따르기 때문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보시에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경하는 보시[恭敬施]이고, 둘째는 이익을 주는 보시[利益施]이다. 만약 공경함으로 보시할 때라면 선함이 생기고 보시를 마치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어찌된 까닭인가?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涅槃)에 드신 것과 같다.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옷과 음식 등으로써 공양을 한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옷과 음식 등으로 과거의 세존께 공양을 드린 것도 공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물건을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선함은 일을 따라서 흐를 수 없다. 둘째, 이익을 주는 보시란 앞 사람의 4대(大)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앞 사람이 이 물건을 받아 사용함으로써 4대가 더욱 자라기 때문이다.
이익을 주어서 보시하는 것은 선함이 세 가지 일을 따라서 항상 흐른다. 세 가지 일이란 첫째는 세 가지 선근이고, 둘째는 나머지 물건들이고, 셋째는 중생이다. 이 세 가지 일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갖추지 않으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나머지 물건들이 나 없어지지 않고 중생이 그것을 받아 사용하더라도 시주가 이미 죽었거나 혹은 삿된 견해를 일으켜 선근을 끊으면 선함은 다시 근본이 없어서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만약 시주가 살아 있고, 선근이 끊어지지 않고, 이를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나머지 물건들이 없다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028_0561_b_02L만약 시주가 선근을 끊지 않고 또한 죽지도 않고, 나머지 물건들이 다 없어지지도 않았으나 이를 받아 사용한 사람이 없어져 다시 이를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다면, 선함은 또한 다시 흐르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이 사용할지라도 시주의 본래 마음이 바라던 바가 아니다. 스스로 받아 사용함은 보시의 원칙에 어긋나서 선함은 끝내 자량(資糧)이 되지 않는다. 만약 단월(檀越)25)의 보시하는 마음이 넓다면 이는 따라서 사용해도 된다. 모두 선한 자량이기 때문이다.
복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주를 받을 때 반드시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만약 뜻의 작용을 따르도록 듣는다면 보시가 돌아옴에 따리 전해져서 복을 낳음이 끝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 시주의 마음과 어긋나 타인에게 시주가 돌아가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초래하고 마침내 뒤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서로 과보를 갚는다. 이는 쉽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삼가야 한다.
【답】생겨남[生]에 두 가지 종류의 원인[因]이 있다. 첫째는 먼저 생겨난 원인[先生因]이고, 둘째는 함께 생겨나는 원인[俱生因]이다.
028_0561_b_16L答:生有兩種因,一先生因、二俱生因。
먼저 생겨난 원인은 곧 세 가지 선근이고, 아직 선함을 짓지 않았으나 먼저 이 선근이 있어 앞으로 선함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생겨난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함께 생겨나는 원인이란 작의(作意)이고, 사택(思擇)함으로 선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지 사택할 때는 선함이 생겨나는 때이다. 그러므로 함께 생겨나는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1_c_02L만약 선근(善根)이 아직 끊어지지 않고 선함을 짓는 때라면 두 가지 종류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선근이 끊어지고 선함을 짓는 때라면 곧 오직 함께 생겨나는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선함이 생겨날 때라면 다시 세 가지 선근으로 돌아가 접촉하여서 선한 마음이 상응할 수 있게 한다. 선근을 끊음은 선근의 본체가 모두 다 소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삿된 견해로써 그 선근과 떨어지게 하여 선한 마음이 그것과 상응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를 끊음[斷]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무류(無流)의 도가 생긴다고 말한다면 이는 유류(有流) 선근의 본체가 곧 소멸하는 것이다. 수다원의 처음 도는 무류이다. 이전에는 무류 선근이 아직 없다. 오직 함께 생기는 것으로부터 아라한의 경지에서 물러나 번뇌를 일으킨다.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 다 없어졌으므로 역시 다만 함께 생겨나는 원인으로부터 생겨날 뿐이다.
【문】소승에서도 부처님이 음식의 시주를 받아 이 음식을 먹을 때 대변과 소변26)을 본다고 하는가?
028_0561_c_07L問:小乘佛受施食,食此食時作便利不?
【답】부처님은 대변과 소변이 없다. 부처님 턱 아래 양쪽은 목을 향하고 각각에 천 개의 근육이 있어 모든 맛있는 음식을 받는다. 음식을 먹으면 아래로 내려가 문득 피와 살로 변한다. 그러므로 대변과 소변이 없다. 전륜왕(轉輪王)의 경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대변과 소변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삼승(三乘)에게는 범부와 같이 또한 대변과 소변이 있다. 만약 6천(天)이 음식을 먹는다면 수타(須陀)27)고 이름한다. 수는 선(善)이라 번역하고, 타는 정실(貞實:진실)이라고 번역한다. 이 음식은 정갈하면서도 오묘하여 또한 대변과 소변을 만들지 않는다
함께 묶여 있음[共繫]의 뜻이 없는 것이 소멸의 뜻이다. 함께 묶여 있음이 깨끗하게 다 하였으므로 소멸이라고 이름한다. 예는 앞의 것만 드는 것으로 그치나, 뒤에도 구절(句節)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앞의 구절이 있다는 것은 천축(天竺)의 말로는 니로다(尼盧陀)28) 소멸의 뜻인 멸(滅)을 나타내는 나로다의 범어는 nirodha이다. 이다. 이것은 한 가지 명칭에 열 가지 뜻이 있다. 복(覆)도 니로다이고, 난(蘭)도 니로다이고, 멸(滅)도 니로다이다. 여기서는 멸(滅)의 뜻만 밝히고 나머지 뜻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구절에서 이것을 분별한 것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 가운데 묶임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경전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탐욕의 애착이 그대들의 눈[眼] 속에 있다. 그대들은 이것을 반드시 소멸해야 한다. 만약 탐애(貪愛)를 소멸하면 그대들의 눈도 또한 소멸된다. 눈이 색을 대함을 원인으로 하여 탐애가 생겨서 함께 식(識)을 묶어버린다. 탐애는 번뇌에 묶여 있다. 눈 및 색의 경계는 묶임이다. 만약 탐애의 묶임을 소멸하면 눈 등의 묶임도 또한 깨어져 소멸할 것이다.’”
028_0562_a_02L경전에서는 이를 비유하여 말한다. “쇠사슬로 사람을 묶어 감옥에 가둔다. 쇠사슬도 하나의 묶임이고, 감옥도 하나의 묶임이다. 만약 쇠사슬을 부수어 없애거나, 감옥을 태워 없앤다면 이 두 가지 묶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묶임이 중생을 함께 묶어두기 때문에 함께 묶음이라고 말한다. 탐애에서 해탈하기 때문에 청정[淨]이라고 말한다. 경계에서 해탈하기 때문에 다함[盡]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탐애를 멸한 것이 유여열반이다. 경계를 멸한 것이 무여열반이다. 눈이 이미 이와 같은 것처럼 귀ㆍ코 등도 모두 그와 같다.”
세 가지 유위(有爲)의 모습을 해탈했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말한다. 세 가지 유위는 자체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삼세(三世)로 세 가지 유위의 모습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태어남ㆍ늙음ㆍ소멸함으로 세 가지 유위의 모습으로 삼는 것이다. 네 가지 모습 가운데서 머무름[住]을 밝히지 않은 까닭은 유위법은 머무름이 없고, 머무름은 무위의 모습이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삿된 사유로 기인하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는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 이미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 생겨나 있기 때문에 삼세가 있다. 무위법의 경우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삼세가 없다.
유위법은 본래 이것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이 있다. 생겨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ㆍ소멸이 있다. 무위법은 본래 있기 때문에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늙음ㆍ소멸도 없다 유위법은 이 두 가지 종류를 갖추고 있다. 이 두 가지 모습이 시끄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적정하지 않다. 무위법은 이 두 가지 종류를 해탈해서 두 가지 모습29)의 시끄럽게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적정이라고 이름한다. 하나의 번뇌에 나아감에 하나의 해탈이 있으니 아흔여덟 가지 번뇌에 아흔여덟 가지 해탈이 있다.
028_0562_b_02L모든 법[諸法]은 원래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으니 곧 해탈이다. 중생이 뒤바뀐 생각[顚倒]을 내기 때문에 색 등에 대해서 탐욕과 집착을 일으킨다. 탐욕과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 번뇌로 색에 탐욕하고 집착하여 그를 다스리는 무위의 이치에 이를 수 없다. 다스리는 무위란 이 탐욕의 애착이 만약 끊어지게 된다면 곧 이 무위를 증득하기 때문에, 아흔여덟 가지 미혹에는 아흔여덟 가지 무위의 업 및 과보가 따른다. 번뇌에는 따로 무위가 없다.
진실의 선[眞實善]이기 때문에 묘함[妙]이라고 이름한다. 선(善) 자체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선[眞實善]이고, 둘째는 자성의 선[自性善]이고, 셋째는 서로 상응하여 뒤섞인 선[相雜善]이고, 넷째는 일어난 선[發起善]이다. 진실의 선[眞實善]이란 곧 열반이다. 나고 죽음[生死]은 악법이고, 열반은 악이 없다. 원인과 조건의 생겨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선이라고 이름한다.
자성의 선[自性善]이란 탐욕 없음[無貪]ㆍ성냄 없음[無瞋]ㆍ어리석음 없음[無癡]의 세 가지 선근이다. 이 세 가지 선근은 나머지 조건들을 빌리지 않고, 성품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 악을 다스린다. 열반은 이 세 가지 악이 없다. 이것은 열반과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선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자면 세 가지 약이 다른 조건들을 빌리지 않고도 성품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약이란 기름이 중풍 등의 풍병을 다스리고, 소(蘇)가 열을 다스리고, 벌꿀이 담(痰)30)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상응하여 뒤섞인 선[相雜善]이란 뜻으로 짓는 업[意業]의 선이다.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하기 때문에 믿음과 지혜 등의 선을 낳고, 믿음과 지혜 등이 생겨날 때 심법 및 심소법(心所法)31)이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하여 모두 선을 이룬다. 아직 섞이지 않았을 때 세 가지 선근은 각각 하나의 악을 다스린다. 심법 및 심소법이 세 가지 선근과 서로 섞이지 않았으면 악을 다스리는 작용이 없다. 서로 섞였을 때 비로소 모든 악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마치 갖가지 약이 서로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각각의 병만을 치료할 수 있지만, 화합하여 섞은 이후에는 다스리지 못하는 병이 없는 것과 같다.
028_0562_c_02L일어난 선[發起善]이란 몸과 입의 선이다. 몸과 입은 본래 선이 없다. 뜻으로 짓는 업의 선으로 말미암아 몸과 입의 선을 일으키기 때문에 몸과 입의 선을 낳는다. 비유하자면 물은 본래 약이 아니지만 약을 물에 타서 끓이면 약이 물에 스며들어 물도 약이 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선근은 모두 진실의 선을 따르기 때문에 선을 이룬다. 악은 거친 법[麤法]이나, 무위는 악이 없는 진실의 선이다. 그러므로 묘하게 좋은 것[妙好]이라고 이름한다.
【답】심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마치 승기부(僧祇部)32) 등에서 ‘중생 마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나 객진(客塵)에 오염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청정함은 곧 세 가지 선근이다. 중생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객진이 있으니. 이는 곧 번뇌이다. 번뇌는 곧 수면(隨眠)33) 등의 번뇌이다. 수면의 번뇌는 곧 세 가지 불선근이다.
세 가지 선근이 있기 때문에 믿음과 지혜 등을 낳고, 믿음과 지혜 등이 생겨날 때 세 가지 선근과 서로 돕기 때문에 상응(相應)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선근이 있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 등의 불선(不善)을 일으키고, 불선이 생겨날 때 세 가지 불선근과 서로 돕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3_a_02L만약 삿된 견해를 일으켜 세 가지 선근을 끊는다면 세 가지 선근은 잠시 소멸하되, 영원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 선이 생겨나면 다시 세 가지 선근과 접촉하여 생기게 한다. 만약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끊는다면 끊는다는 것은 곧 영원히 생기지 않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게 쉬게 하기 때문에 영리(永離)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다. 원수들 사이에 있을 때라면 사람이 안식을 얻을 수 없는데, 원수와 단절하여 떠날 경우, 만약 그들을 떠남이 멀지 않다면 안식에 이를지라도 가장 뛰어난 안식은 아니고, 만약 그 경계를 모두 벗어난다면 비로소 가장 뛰어난 안식이 된다.
내부의 합침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번뇌라는 원수들 사이에 있을 때라면 도무지 안식을 얻을 수 없는데, 만약 비록 또한 조금 끊더라도 그들을 끊음이 미진하다면 안식에 이를지라도 가장 뛰어난 안식은 아니고, 만약 그를 다 끊어서 영원히 번뇌를 밖으로 내쫓는다면 비로소 가장 뛰어난 안식이 된다. 아라한은 번뇌를 모두 없애서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한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안식이다. 수다원은 견제(見諦)34)의 번뇌를 모두 없애서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한다. 이것도 역시 가장 뛰어난 안식이다.
삿된 도[邪道]를 다스리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아흔여섯 명의 사문(沙門)35)들은 모두 삿된 도를 행한다. 삿된 도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도를 행하면 가더라도 도달할 곳이 없기 때문에 삿된 도라고 이름한다. 만약 계율ㆍ선정ㆍ지혜의 올곧은 도를 행한다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삿된 도를 다스리기 때문에 계율ㆍ선정ㆍ지혜를 도라고 말한다. 다시 풀이하여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마치 사람이 어느 곳에 도달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먼저 반드시 길을 찾는 것과 같다. 만약 해탈을 구한다면 먼저 반드시 출세간의 도를 찾아야 한다. 계율ㆍ선정ㆍ지혜는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다.
이치와 같지 않음[非如]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치와 같다[如]고 이름하니,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치와 같지 않은 것을 다스리는 것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이치와 같지 않은 행동을 다스리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028_0563_a_19L有兩解:一明對治非如理、二明對治非如行。
네 가지 뒤바뀐 생각[四顚倒]36)은 이치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같지 않음’이라고 한다. 항상함[常]ㆍ즐거움[樂]ㆍ나[我]ㆍ청정함[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두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ㆍ나 없음[無我]ㆍ더러움[不淨]으로써 열반 가운데 두고 이제 관찰하면 삶과 죽음은 영원하지 않음ㆍ괴로움ㆍ나 없음ㆍ더러움이고, 열반은 항상함ㆍ즐거움ㆍ나ㆍ청정함이다. 이는 곧 이치와 상응하므로 ‘같음[如]’이다.
028_0563_b_02L【문】소승에서 열반은 무엇인가? 이는 ‘나’를 얻는 것인가? 이것이 ‘나’라면 모든 법은 다 ‘나 없음’이 아니지 않는가?
028_0563_b_02L問:小乘涅槃云何得是我耶?是我則一切法不皆是無我。
【답】소승은 모든 법 가운데서 ‘나 없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나 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은 본체가 있고, 본체가 있는 것은 ‘법의 나[法我]’이다.
028_0563_b_03L答:小乘明一切法中無我,故名無我耳。涅槃有體,有體卽是法我。
같지 않게 행하는 것을 다스린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외도(外道)에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 있다. 상견(常見)이란 ‘나’가 불멸하여 미래에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함을 말한다.
028_0563_b_05L對治行不如者,外道有常見、斷見。常見者,計我不滅,於未來受報。
미래의 과보를 위하여 현재에 무릇 열한 가지 고행(苦行)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계속 앉아 있는 것이다. 항상 앉아 있고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는 크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산과 계곡의 험난한 곳을 머물지 않고 피하지 않고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셋째는 먹지 않는 것이다. 단식하여 스스로 배고프게 한다. 넷째는 오래 의지해 있는 것이다. 항상 한 곳에 서 있는다. 다섯째는 태양을 따라 머리를 들고 해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동쪽을 바라보면서 해를 따라 머리를 들고 해질 때까지 눈을 풀지 않는다.
여섯째는 다섯 곳에 뜸을 뜨는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로 머리에 뜸을 뜨고 사방에 불을 놓아 몸에 뜸을 뜬다. 일곱째는 가시 위에서 잠자는 것이다. 가시를 한 곳에 모아 두고 그 위에서 잠을 잔다. 여덟째는 바위를 던지는 것이다. 아홉째는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다. 열째는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열한째는 모든 하늘[諸天]을 공양하는 것이다. 스스로 근육을 드러내서 비파의 현처럼 근육을 퉁기고, 머리 조아려 모든 하늘에게 공양드린다.
단견(斷見)이란 몸이 소멸하면 나도 역시 소멸하고, 현재와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늘 것을 말한다. 방자만 마음으로 갖가지 죄를 짓는다. 이러한 행동은 바른 행동[正行]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같지 않은 행동[不如行]’이라고 이름한다. 이제 상견(常見)도 아니고 단견(斷見)도 아닌 견해로 관찰하고, 양쪽을 떠나서 중도(中道)로 행동하니, 열반국(涅槃國)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바른 행동’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을 나라로 부른 까닭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아주 힘센 사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아주 힘 센 사람이란 부처님 및 독각(獨覺)과 아라한이다. 열반을 증득하여 잘못이 없기 때문에 다스린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는 원수나 도적이 침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 가운데서는 영원히 번뇌를 떠났으니, 이는 침범이 없다.
028_0563_c_02L어울리지 않는 것[不稱事]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不肯去]이고, 둘째는 길을 피함[僻路]이고, 셋째는 길을 의심함[疑路]이다. 만약 내가 있다는 견해[我見]를 일으킨다면 삶과 죽음을 양 극단으로 삼아 다시는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곧 이것이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의 뜻이다. 비록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계금취견(戒禁取見)37)만을 닦는 것이 ‘길을 피함’이고 무류의 8정(定) 및 유류의 8정에서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길을 의심함’이다.
만약 무류의 지혜를 닦아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 이는 ‘길을 의심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미 ‘길을 의심함’을 제거하였으면 또한 ‘길을 피함’을 제거하는 것이고, 삶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을 제거함이다. 무류의 지혜를 닦으면 내가 있다는 견해ㆍ계금취견ㆍ의심 등의 번뇌를 제거한다. 열반에는 번뇌가 없다. 곧 이것이 열반과 어울리는 일이다. 이는 삿되지 않기 때문에 바른 행동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두려움을 다스리는 것을 벗어남[出離]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부처님께서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물으셨다. ‘어떤 사람은 ‘어떤 커다란 산이 동쪽으로부터 뻗어 나와 아래는 땅을 지나고, 위는 태양에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차례로 어떤 사람이 ‘나머지 세 방향에도 커다란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자 하는가?’
왕이 부처님께 답하였다. ‘세존(世尊)이시여, 이는 부드러운 말[愛語]로도 물리칠 수 없고, 보시(布施)로도 물리칠 수 없고, 겁주는 일로도 물리칠 수 없고, 군대로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는 네 가지 방편으로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오로지 일심(一心)으로 팔정도[八分聖道]를 닦아 벗어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가령 불이 그대의 머리에 붙고 그대의 옷을 태우고 있다면 그대는 먼저 불을 끄겠는가 아니면 먼저 8정도를 닦겠는가?’
028_0563_c_21L佛又問:如有火來爛汝頭,燒汝衣。汝爲當先須滅火、先須修八分聖道耶?
028_0564_a_02L왕이 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불이 나의 머리와 옷을 태울 때 제가 불을 끈다면 잠시의 괴로움은 면할 수 있으나 영원히 괴로움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8정도를 닦는다면 괴로움을 영원히 떠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먼저 8정도를 닦겠으며, 불 끄는 일을 먼저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방의 산은 늙음ㆍ병듬ㆍ죽음ㆍ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비유한 것이다. 늙음의 괴로움은 젊음을 깨트리고, 병듦의 괴로움은 건강을 깨뜨리고, 죽음의 괴로움은 수명(壽命)을 깨트리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은 부귀와 즐거움을 깨트린다. 앞에서부터 설명해 들어온 것이 모두 벗어남의 다른 뜻을 밝힌 것이다. 천친(天親)38)논사가 주장한 것은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 논사의 뜻과 같다.
논주(論主)가 말하였다. “내가 믿고, 이해한 바를 나는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태어남이 있고, 소멸함이 있는 것을 영원하지 않음[無常]이라고 말한다. 유위법은 태어남과 소멸함이 있기 때문에 이 영원함을 얻을 수 없다. 태어남은 곧 있음[有]이고, 소멸함은 곧 없음[無]이다. 앞에서는 있고 나중에는 없기 때문에 이는 영원하지 않음이다.”
“태어남은 무슨 까닭에 영원한 태어남이 아니고, 소멸함은 무슨 까닭에 영원한 소멸함이 아닌가? 그리고 태어남과 소멸함은 영원하지 않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028_0564_a_11L生何故非常生、滅何故非常滅,而言生滅是無常耶?
해석하여 말한다. 태어남은 소멸을 파괴하기 때문에 소멸은 영원하지 않고, 소멸함도 또한 태어남을 파괴하기 때문에 태어남도 역시 영원하지 않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5음(陰)은 괴로움의 덩어리이다. 항상 중생의 마음과 어긋나서 그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한다. 중생은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갖가지 의복과 음식으로 길러지지만 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항상 모든 괴로움을 내어 중생의 마음과 어긋난다. 옷과 음식이 증가하고 감소하는 사이에도 항상 번뇌가 생기고, 편안함 얻기를 바란다.
오래 앉아 있는 까닭으로 괴로움이 생긴다. 앉아 있는 일에 염증을 내면 반드시 돌아다닌다. 오래 돌아다니면 또 괴로움이 생긴다. 이와 같이 4위의(威儀)39) 가운데서도 항상 서로 어긋난다. 중생의 마음과 항상 어긋나는 까닭은 조건이 되는 경계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어긋나서 괴로움을 낳는다.
028_0564_b_02L본체를 떠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말한다. 일체의 모든 법들은 다 가명(假名)이다. 이름이 있고, 뜻은 있으나 본체는 없다. 화합하여 법을 낳을 수 있는 것[能生]이 원인의 뜻이다. 화합 가운데 원인의 이름을 세워서 생겨난 것[所生]이 결과의 뜻이다. 생겨난 것 가운데서 결과의 이름을 세웠으니, 원인과 결과에는 본체가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하더라도 능작(能作)과 능용(能用)이 없으니 원인과 결과가 없게 된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이름과 뜻이 있는 것이다. 능작(能作)이 없다는 것은 원인에 본체가 없으니 진실한 능작이 없다는 것이다. 능용(能用)이 없다는 것은 결과에 본체가 없으니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름과 뜻이 없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중간에 본체가 없다는 것은 본체를 떠난 바의 뜻이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 없음’이라고 말한다.
만약 ‘나’가 감각기관 및 대상과 다르게 있지만 부처님께서 소연으로 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 ‘나’는 곧 작용이 없게 된다. 또한 만약 감각기관 및 대상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다른 것이 아니다[不異]’라고 말한 뜻이 여기서 깨어진다. 만약 ‘나’가 감각기관 및 대상과 하나라고 말하면, 곧 오로지 감각기관과 대상만 있다. 어딘가에 ‘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가 ‘하나가 아니다[不一]’라고 말한 뜻이 또한 깨어진다.
028_0564_c_02L다음에는 능연의 입장에서 이를 깨트린다. ‘나’는 식과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른 것이라면, 곧 능연에 ‘나’와 식의 두 가지 종류가 있게 된다. 만약 두 가지 법이 있다면, 부처님은 어떤 까닭에 말하지 않았는가? 만약 비록 두 가지 법이 있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나’는 작용이 없게 된다. 또한 그대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뜻이 깨어진다. 만약 ‘나’는 식과 하나라고 하면, 식은 조건들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이미 유위법이고, ‘나’도 또한 당연히 유위법이어야 한다. 그대가 주장한 “‘나’는 유위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라는 말이 깨어진다. 또한 그대가 말한 ‘하나가 아니다’는 말도 깨어진다.
만약 외도의 ‘나’에 대한 견해를 깨트리면 외도는 ‘나’의 뜻을 세워서 네 가지 지식[四智]41)으로 ‘나 있음[有我]’을 증명하여 아나니, 첫째는 증지(證智)42)이고, 둘째는 추리지[比智],43) 셋째는 비지(譬智)44)고, 넷째는 성지(聲智)45)이다. 이 네 가지 지식으로 ‘나 있음’을 증명한다.
외도는 상견과 단견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만약 단견이라면 이 몸이 ‘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 소멸하면 ‘나’도 역시 소멸한다. 이미 대하고 있는 몸이 현재 몸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곧 증지(證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들이쉬는 숨, 내쉬는 숨 등 다섯 가지를 본다면 이것이 ‘나의 모습[我相]’이다. 이미 그 모습을 보았으니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들이쉬는 숨, 내쉬는 숨 등 다섯 가지를 본다면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이미 그 모습을 보았으니 ‘나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곧 추리지[比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나 있음’을 본다면 다른 사람의 몸에도 ‘나 있음’을 안다. 이것이 곧 비지(譬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스승이 ‘나’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 곧 ‘나’가 있음을 안다. 이것이 곧 성지(聲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견(常見)이라면 오직 추리지와 성지의 두 가지 지식만으로 ‘나 있음’을 증명한다.
028_0565_a_02L상견에 빠진 자들은 말한다. “인허(隣虛)46) 및 ‘나’는 볼 수 없다. 증지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상견에 빠진 자들은 또한 말한다. “‘나’를 증지로 증명한다.” 그들은 말한다. “눈[眼] 가운데 흰 부분은 달[月]이고, 흰 부분 가운데 붉은 부분은 해[日]이고, 붉은 부분 가운데 푸른 부분이 허공이다. 푸른 부분 가운데 인자(人子)가 ‘나’이다. ‘나’는 영원하다. 이는 또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증지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달은 어머니가 만들고, 해는 아버지가 만들고, 허공은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만든다. ‘나’는 원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다. 푸른 부분을 허공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그 부분이 덮여지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공이라고 증명한다.”
천친(天親)논사가 이를 차례로 깨트린다. “증지로 증명한 것은 6진(塵) 및 식의 일곱 가지 법에 지나지 않는다. 6진 및 식은 다 같이 ‘나’가 아니다. 어찌 증지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추리지[比智]로 증명한 것은 눈ㆍ색ㆍ허공ㆍ작의(作意) 등의 원인과 조건으로 안식을 낳는다. 식은 곧 밝음의 작용이다. 이미 그것에 작용이 있음을 본다. 추리지는 반드시 눈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니, ‘나’에 별도의 작용은 없다. 어떤 뜻으로 추리지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비지(譬智)란 집에 있는 소의 생김새를 보고 들판에 있는 소의 생김새와 형상이 이와 같음을 비교하고 유추하여 아는 것이다. ‘나’는 이미 증지로 중명할 수 없음을 밝혔으니 비지(譬智)로도 증명할 수 없다. 성지(聲智)란 그들이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스승이 ‘나’가 있다고 말한 것을 자신이 스승의 말씀을 믿는 까닭에 ‘나’가 있다는 입장을 세운 것이나, 이는 옳지 않다. 그대의 스승이 상견과 단견의 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있다.
발바리가(跋婆梨柯)ㆍ아뢰가야(阿賴伽也)[양(揚)과 하(荷)의 반절]ㆍ우루가(優樓迦)[각(脚)과 하(何)의 반절]47) 등의 3명의 외도는 상견을 일으켜 집작하여 ‘나’가 있다고 말하고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가리다(訶梨多)ㆍ문다(聞陀)ㆍ아수라야나(阿輪羅耶那) 등의 세 명의 외도는 단견을 일으켜 집착하여 ‘나’가 없다고 말하고 미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의 스승들이 말한 ‘있다’와 ‘없다’는 스스로 결정되지 않았다. 어찌 이들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나’를 잘못 헤아리는 자는 “‘나’는 5음(陰)의 주인이고, 홀로 5음 안에 머물고 있다. 마치 국왕이 나라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제 5음에 주인이 없음을 밝히므로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 없음[無我]’이라고 말한다.
028_0565_b_02L【문】외도는 ‘나’에 어떠한 작용이 있다고 밝혔는가? 만약 작용이 있다면 추리지로써 알 수 있다.
028_0565_b_02L問:外道明我有何用耶?若有用則可以比智知。
【답】그들이 말하는 ‘나’에는 외적인 모습이 다섯 가지가 있고, 내적인 모습이 아홉 가지가 있다. 우루가 등이 이러한 집착에 매달려 있다. 외적인 모습의 다섯 가지란 첫째는 내쉬는 숨[出息]이고, 둘째는 들이쉬는 숨[入息]이고, 셋째는 눈을 깜박거림이고, 넷째는 보는 것[視]이고, 다섯째는 수명(壽命)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 있음’을 안다.
다섯 가지 모습은 다섯 가지 작용이다. 이제 이를 깨트린다. 만약 앞의 네 가지 모습으로 ‘나 있음’을 안다면 알[卵]은 앞의 네 가지 모습이 없는데 어찌 ‘나’가 있겠는가? 그들은 변론하여 말한다. “비록 앞의 네 가지 모습은 없으나 다섯째의 모습이 있어서 ‘나 있음’을 안다.” 이를 또한 깨트린다. 수명은 반드시 몸과 서로 접해 있다. 그대는 ‘나’가 해탈을 얻을 때 ‘나’는 몸을 떠난다고 밝힌다. ‘나’가 몸을 떠날 때면 다시 수명도 없는데, 어찌하여 수명으로 ‘나 있음’을 증명하여 알 수 있겠는가?
내적인 모습이란 그 외도들이 말한다. “‘나’는 영원하다. 마음은 인허(隣虛)이고, 마음도 역시 영원하다. 법과 법 아닌 것[非法]이 따로 있다. 법은 선이고, 법 아닌 것은 악이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와 마음으로 하여금 함께 합하도록 하고, ‘나’와 마음이 함께 합해져서 아홉 가지 법을 낳는다. ‘나’와 마음으로부터 깨달음이 생긴다.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긴다.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 탐욕과 증오가 생긴다. 즐거움에서 탐욕이 생기고, 괴로움으로부터 증오가 생긴다. 탐욕과 증오로부터 공력(功力)이 생긴다. 공력을 지어 괴로움을 소멸하고 즐거움을 구하고자 한다. 공력으로부터 법과 법 아닌 것이 생긴다.”
028_0565_c_02L법과 법 아닌 것으로부터 수습(修習)이 생기고, 수습이 이미 성숙하면 그 작용은 매우 빠르다. 빠름을 수습하면 이것이 원인의 능력[因力]이다. 빠름을 수습하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빨리 기억할 수 있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따로 있어 이것과 합쳐지기 때문에 아홉 가지 법 가운데서 법과 법 아닌 것을 낳아 어떤 때는 선을 짓고, 어떤 때는 악을 짓는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따로 있으니, 무릇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불을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바람을 옆으로 진행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땅을 물속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인허(隣虛)들이 화합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나’와 마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다.
외도들은 두 가지 재앙[二災]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중간의 재앙[中間災]이고, 둘째는 불의 재앙[火災]이다. 중간의 재앙이란 무릇 삼백천 구지(拘胝)48)를 지난다. 이는 곧 삼백천 구지의 겁(劫)이다. 백천의 구지는 불의 세계이고, 백천의 구지는 물의 세계이고, 백천의 구지는 바람의 세계이다. 불의 재앙 때에 세계는 1겁이 감소하고, 1겁이 생겨난다. 물과 바람의 재앙 때에도 역시 이와 같다. 소멸할 때는 거친 대상이 소멸하고, 근본의 인허는 서로 떨어져서 머문다. 생겨날 때는 법과 법 아닌 것이 그 인허들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법과 화합하여 선이 되고, 법 아닌 것과 화합하여 악이 된다.
근본의 인허(隣虛)와 대상이 이미 화합하여 이로부터 자라나서 다시 갖가지 대상들을 낳아서 세계를 이룬다. ‘나’와 마음도 또한 외부 대상들의 뜯어짐과 화합을 따른다. 30만 구지를 지나 중간의 재앙이 끝나고 불의 재앙에 이른다. 다시 삼백49) 구지를 지나면 세계는 오로지 소멸한다. 근본의 인허와 대상은 오로지 서로 떨어져서 머문다. ‘나’와 마음도 또한 오로지 떨어져서 머물 때 ‘나’는 잠시 해탈한다. 삼백 구지를 지나 불의 재앙은 끝나고, 법과 법 아닌 것은 그들을 다시 합하게 한다.
【문】불은 무슨 까닭에 위로 올라가고, 바람은 무슨 까닭에 옆으로 가고, 땅과 물은 무슨 까닭에 아래로 가는가?
028_0565_c_20L問:火何故上?風何故傍行?地水何故下?
028_0566_a_02L【답】불은 물질을 익게 할 수가 있다. 만약 불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중생들은 음식 등의 물질을 익힐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불은 광명(光明)이 있어 지혜를 주인으로 하기 때문에 위에 있다. 자재천(自在天)의 몸은 6도(道)를 갖추고 있다. 심장[心]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인간과 천상이 되고, 심장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 배꼽까지는 아수라 및 귀신이 되고, 배꼽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 발까지는 축생 및 지옥이 된다. 인간과 천상의 광명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위에 있고, 불은 광명이 있어 지혜를 주인으로 하기 때문에 위에 있다.
만약 바람이 옆으로 불지 못하면 중생들은 오고 갈 수가 없게 된다. 가령 바다에 배가 있는데, 바람이 아래로 불거나 위로 분다면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바람이 옆으로 불기 때문에 오고 간다 땅과 물이 아래에 있지 않으면 중생들은 의지처(依支處)가 없게 된다. 땅과 물은 어두워서 미혹을 낳는다. 미혹은 지옥과 축생에 속한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다. 지옥과 축생은 어두워서 미혹이 있다. 그러므로 땅 아래에 있다. 땅과 물은 어두워서 미혹을 낳기 때문에 아래에 있다.
영원히 해탈하기를 바라므로 계율ㆍ보시ㆍ고행ㆍ선정의 네 가지 법을 닦는다. 이 네 가지 법으로부터 바른 법[正法]이 생기고, 바른 법은 도를 얻음이다. 바른 법으로부터 즐거움을 낳고, 지혜를 낳는다. 지혜와 즐거움은 천상의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지혜가 만약 뒤에 법과 법 아닌 것을 끊으면 ‘나’와 마음은 곧 영원히 떨어진다. 아홉 가지 법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으면 곧 영원한 해탈을 얻는다. 만약 아견(我見) 및 인허(隣虛)에 대한 견해를 깨트리면 이러한 집착은 저절로 깨어진다.
애착과 욕심[愛欲]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에 집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별하지 않는 애착과 욕심이다. 둘째는 미래의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있음[有]을 분별하지 않는 애착과 욕심이다. 셋째는 미래의 ‘나’에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있다고 분별하는 애착과 욕심이다. 넷째는 있음[有]을 맺어주어 서로 이어지게 하는 애착과 욕심이다. 이제 우선 차례대로 그것을 해석한다.
첫 번째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재 몸 가운데 ‘나’가 있다고 집착하여 말하지만 분별하지 않는다. 하나의 음(陰)에 집착하여 ‘나’로 삼고, 나머지의 음들은 ‘나’가 아니라고 또한 분별하지 않는다. 5음(陰)은 모두 ‘나’가 아니지만 ‘나’에서 애착을 낳고, ‘나의 것[我所]’인 색깔ㆍ향기ㆍ맛ㆍ접촉 등의 대상에서는 오염된 집착의 마음을 낳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말한다. ‘나’ 및 애착은 견도(見道)에서 깨트리는 것이고, 욕심은 수도(修道)에서 깨트리는 것이다.
028_0566_b_02L두 번째 애착과 욕심이다. 상견(常見)에 빠진 경우 ‘나’는 소멸되지 않고 미래까지 도달한다고 하기 때문에 미래의 ‘나’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앞에서 해석한 것과 다르지 않다. 미래에는 ‘나’가 다시 있고, 이 다시 있는 ‘나’에서 애착을 낳고, ‘나의 것’인 6진(塵)에서는 오염된 집착의 마음을 낳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미래의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또한 분별하지 않으나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 이 분별은 미래의 ‘나’를 분별하는 것이다. 혹은 괴로움을 받고, 혹은 즐거움을 받고, 혹은 상지(上地)에 태어나고, 혹은 하지(下地)에 태어난다. 이것이 우수함과 열등함의 뜻이다. 다시 애착과 욕심이 있다.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네 번째 애착과 욕심이다. 논하는 글에서는 ‘나’가 있다고 집착하여 말하지 않으나 역시 ‘나’에 집착한 애착과 욕심이다. ‘나’에 집착함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이른바 ‘나’는 소멸되지 않고 미래까지 도달한다. 미래에 태어나는 곳에서 오염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몸을 추측하여 뒤의 몸[後身]이 맺어지기를 애착한다. 앞과 뒤의 두 곳에 목숨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맺어짐[結]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애착과 욕심이 있다.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5음이란 애착과 욕심을 근본으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집기(集起)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태어나는 곳으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셨다. 경전에서 또한 “애착과 욕심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였다. 논에서는 다시 차례대로 앞에서 말한 이름들을 열거하고, 뒤에 이내 그것을 해석하겠다.
근본 원인을 해석한다. 첫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의 최초의 근본이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종자와 열매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근본은 원인의 뜻이기에 최초라고 말한다. 인용한 경전에서 ‘애착과 욕심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함은 애착과 욕심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 근본으로써 원인의 뜻을 해석하겠다. 최초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은 먼저 현재의 ‘나’에 집착하여 애착과 욕심을 낳고, 이 애착과 욕심은 미래의 과보를 감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최초라고 말한다. 마치 어떤 종자가 곧 열매를 낳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종자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028_0566_c_02L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한다. 두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의 집기이다. 미래의 과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싹 등과 열매의 관계와 같다. 두 번째 애착과 욕심은 미래에 ‘나’와 모든 대상이 생기게 하는 조건이다. 애착과 욕심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미래의 과보를 현재에 초래하기 때문에 ‘애착과 욕심을 집기로 삼는다’고 말한다. 마치 싹에서 꽃에 이르는 과정을 바탕으로 열매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마디는 줄기ㆍ잎ㆍ꽃이고 과보는 열매이다.
나는 곳[生處]을 해석한다. 세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이 나는 곳[生處]이다. 우수하고 열등한 5음을 낳는다. 비유하자면 열매와 밭ㆍ물ㆍ땅 등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향ㆍ맛ㆍ능력ㆍ다르게 익는 것ㆍ위덕(威德)50)이 있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으로 분별하며 미래에 우수하고 열등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을 때 혹은 올라가고 혹은 내려간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우수하고 열등한 과보를 낳게 하기 때문에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나는 곳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두 번째의 비유에서 열매를 과보로 삼는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과보란 말은 열매를 택하여 과보로 삼는다. 열매가 이미 생기고 나서 밭 및 물과 토양 등이 결과의 조건이 되어 그것의 향과 맛 등을 기른다. 밭 등이 비옥한가, 척박한가 하는 등의 모든 능력과 작용이 같지 않다. 열매가 그 가운데 생기고 향ㆍ맛 등이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애착과 욕심의 분별에 따라 과보를 얻음에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
향(香)은 정량부(正量部) 및 외도(外道)의 주장에 의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기이고, 둘째는 냄새이고, 셋째는 평등함이다. 평등함이란 향기와 냄새가 없는 것이다. 나머지 부파들에 의하면 향기와 냄새의 두 가지로 그친다. 다른 나머지 향기는 없다. 향기와 냄새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줄어드는 것이다. 사향(麝香)의 경우 사람이 이것을 맡으면 코의 인허(隣虛)가 증가하고, 벌레가 이 향을 맡으면 코의 인허가 줄어든다. 똥 등의 냄새의 경우 사람이 이것을51) 맡으면 코의 인허가 줄어들고, 멧돼지나 개가 이것을 맡으면 코의 인허가 증가한다.
다르게 익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달고, 둘째는 시고, 셋째는 맵다. 이들은 세 가지 맛이 아니니 세 가지 맛으로써 이름할 뿐이다. 과일을 먹어 뱃속에 들어가면 묽게[淡] 변하는 것을 달다고 말하고, 열(熱)로 변하는 것을 시다고 말하고, 바람[風]으로 변하는 것을 맵다[剌]고 말한다. 담백한 본체는 달고, 매끄럽고, 무겁기 때문에 담백함을 달다고 이름한다. 열(熱)의 본체는 신 것으로 하여 목을 메이게 하기 때문에 열을 시다고 이름한다. 바람[風]의 본체는 몸을 수척하게 하고, 얼굴을 거칠게 할 수 있다. 매움[剌]의 본체는 살찌지 않게 하고 얼굴을 거칠게 하기 때문에 바람이 맵다고 이름한다.
사람의 몸은 세 부분이 있다. 심장에서 위로 올라간 것은 담백한 곳이고, 심장에서 배꼽에 이르기까지는 열의 곳이고, 배꼽에서 발까지는 바람의 영역이다. 이 세 부분이 서로 통하면 조절이 적당하여 병이 없고, 닫혀 있어 통하지 않으면 병이 든다. 만약 여섯 가지 맛이 변화하는 경우라면 같지 않다. 단 맛, 짠 맛의 두 가지 맛은 변해서 난 맛이 되고, 시큼한 맛은 변해서 신맛이 된다. 쓰고, 맵고, 떫은 맛은 변해서 매운 맛이 된다.
위덕(威德)이란 약과 약나무 등은 자체에 위덕이 있어 혹은 근본에서 광명을 낼 수도 있고, 혹은 귀신을 쫓아버릴 수 있고, 혹은 독을 제거할 수 있다. 마치 마가(摩伽)약이 나는 곳에서는 모든 독초가 다 독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능력과 결과가 조건에 따라 이처럼 같지 않다. 중생이 과보를 감응하는 차별을 비유로써 설명하였다.
028_0567_b_02L조건을 해석한다. 네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이 생기는 조건이다. 5음이 그 조건들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열매가 꽃이 지는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것과 같다. 네 번째 애착과 욕심으로 미래의 날 곳[生處]을 오염되게 집착하여 두 가지 있음[有]이 서로 접촉하게끔 맺어준다. 미래의 5음은 그들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열매가 얻어지는 것과 같다.
일이 끊어지는 것을 소멸이라고 이름한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일은 곧 열두 가지 조건들이 생김이다. 이들은 원인에 의거하여 일을 만든다. 원인이 끊어져 다시는 상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이라고 이름한다. 곧 첫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끊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열여섯 가지 진리에는 열여섯 가지 물(物)이 있기 때문에 멸함의 진리[滅諦] 아래에서는 네 가지가 각각 하나의 법을 본체로 삼는다.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괴로움이란 괴로운 느낌에 의거한 말이 아니다. 앞의 것으로부터 생긴 것이 결과이고, 결과는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앞에서는 원인을 끊는 것을 밝혔고 지금은 결과가 없음을 밝힌다. 만약 결과가 다시 생겨난다면 시끄럽게 움직임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데 어찌 적정이라고 말하겠는가? 아울러 결과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적정한 것이다. 이는 두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처음의 애착과 욕심으로부터 생긴다. 이는 곧 과보가 위없음[無上]이기 때문에 미묘(美妙)라고 이름한다. 가장 뛰어나고,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고, 비교할 것이 없음[無等]을 위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즉,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이기고 짐[勝負]을 분별한다. 여기서는 오로지 뛰어난 것만 있고, 열등한 것은 없음을 밝힌다. 즉, 우수함과 열등함을 제거한다.
애착과 욕심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을 영원히 떠남[永離]이라고 말한다. 만약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면 이는 영원히 떠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떠나고서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영원히 떠남이라고 말한다. 곧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있음을 맺어주어 서로 접촉하게 한다. 이것이 다시 삶과 죽음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이 맺어줌을 끊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무류(無流)의 마음[無流心]이 행하는 바이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도는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주체로 한다. 무류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이를 행(行)이라고 이름한다. 무류의 마음 자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완숙함[熟]이요, 둘째는 올곧음[直]이요, 셋째는 밝음[明]이다. 완숙하기 때문에 물러섬이 없고, 밝기 때문에 미혹함이 없고, 올곧기 때문에 이것은 참된 것이다.
028_0567_c_02L지혜를 닦아 산란하게 움직임을 떠나기 때문에 완숙하다. 완숙하기 때문에 다시 물러나지 않는다. 만약 마음이 어둡다면 대강에 미혹되지만 밝기 때문에 미혹되지 않는다. 만약 삿된 치우침이 있으면 올곧음을 얻을 수 없다. 바로 나아가 삿되지 않으면 올곧음이라고 이름한다. 올곧으면서 잡스러움이 없음을 참됨이라고 말한다. 무류의 마음에는 이미 이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생겨난 도에도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진실한 대상[境]에 통달만 것을 같음[如]이라고 말한다. 4성제(聖諦)의 진리와 진실한 대상경계가 서로 일치하는 것을 같음이라고 말한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바른 행동[正行]이라고 말한다. 가령 경전에서 “오직 이 도 이외에 다시 다른 도는 없다. 청정한 견해[淸淨見]이기 때문이고, 이보다 뛰어난 견해가 없기 때문이고, 이와 비교할 것이 없기 때문에 결정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 법보다 뛰어난 법이 하나라도 있다면 결정되지 못함이 성립한다. 만약 이 법과 비교할 만한 법이 다시 있다면 이는 결정함이 아니다. 결정되지 못하면 바른 행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논에서 경전을 인유하여 정의(定義)를 증명하기 때문에 “오직 이 도만 있고, 따로 이보다 뛰어난 법과 비교할 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법은 없다고 말한다.
견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치우친 견해[僻見]로 이는 다섯 가지 견해[五見]이다. 둘째는 바른 견해[正見]로 진지(盡智)이다. 진지는 아라한이 번뇌를 이미 다 끊어서 얻는 지혜이다. 치우친 견해를 끊어 없애서 아라한의 바른 견해를 얻기 때문에 ‘청정한 견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견도(見道)를 곡해하면 제13번째 마음[第十三心]도 바른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청정한 견해일 수가 있으므로 바른 견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만이 도이다. 이 이외에 어찌 다른 도가 있겠는가?
028_0568_a_02L‘완전히 마쳐[畢竟] 건너갔기[度] 때문에 벗어남[出離]이라 이름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멸제(滅諦)는 완전히 마침이다. 완전히 마쳐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류의 지혜로 번뇌를 끊어 제거했고, 모든 흐름[流]을 넘어서 무위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건너감이라 말한다. 무위는 이미 완전히 마침이다. 무위를 증득하여 건너감도 역시 완전히 마쳤기 때문이다. 멸제로써 완전히 마침을 건너감이라 이름하고, 완전히 마침이라 이름한다. 완전히 마쳐 건너갔기 때문에 벗어남이라 부른다.
경전에서 또한 “중생들은 네 가지 견해[四見]가 있다. 첫째는 상견(常見)이고, 둘째는 낙견(樂見)이고, 셋째는 ‘나의 것’이라는 견해[我所見]이고, 넷째는 아견(我見)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네 가지 견해를 깨트리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음ㆍ괴로움ㆍ공ㆍ무아를 말씀하셨다.
이 말을 해석한다. 이 견해들을 일으킬 때 반드시 아견이 먼저 일어난다. 아견(我見)이 일어나면 나머지 세 가지 견해도 함께 일어난다. 아견을 일으킨다는 것은 내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내가 이미 영원하면 칼로도 벨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다. 이미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곧 즐거움이다. 이것이 낙견(樂見)이다. 이미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있는 곳이 곧 나의 것[我所]이고,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견해[我所見]이다. 만약 아견을 깨트리면 나머지 세 가지 견해도 함께 깨어진다. 승거(僧佉:상키야)52), 비세사(鞞世師:와시셰시카)53) 학파 등은 아견 등의 이러한 집착을 한다.
승지, 비세사 학파 등은 또한 상견을 일으켜 말한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없다면 항상 없는 것이므로 없음은 있음을 성립하지 못한다. 있다면 항상 있는 것이므로 있음은 없음을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다 영원하다. 현재 보이는 모든 법이 생멸(生滅)이 있다는 것은 이는 전변하여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 본체는 처음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그 본체는 마침내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금이 바뀌어 가락지나 귀걸이로 되어도 금의 본체는 생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성(自性)54)이 공(空) 등의 5대(大)55)를 낳고, 5대는 다시 5근(根)을 낳는다”고 말한다.
어떤 것을 자성이 허공[空]을 낳는다고 하는가? 허공은 소리[聲]와 함께 일어난다. 허공이 근본(根本)이고, 소리는 지말(枝末)이다. 소리는 허공의 덕(德)이다. 허공은 아주 미세하여서 어떤 물건으로도 그를 깨트릴 수 없다.
028_0568_a_20L何者自性生空?空與聲俱起,空是本、聲是末。聲是空德,空最細無物能破之。
028_0568_b_02L자성이 바람[風]을 낳는다. 접촉과 함께 일어난다. 바람은 근본이고 접촉은 지말이다. 접촉은 바람의 덕이다. 바람은 거칠고, 허공은 미세하다. 허공으로써 바람을 깨트릴 수 있다. 바람은 허공과 뒤섞인다. 바람은 곧 두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접촉이고 다른 덕이 소리와 색이다.
자성이 불[火]을 낳는다. 불은 색(色)과 함께 생겨난다. 불이 근본이고, 색이 지말이다. 색은 불의 덕이다. 불은 거칠고, 바람은 미세하다. 바람으로써 불을 깨트릴 수 있다. 불은 바람에 뒤섞인다. 불은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색이고, 다른 덕이 소리와 접촉이다.
자성이 물[水]을 낳는다. 물은 맛과 함께 일어난다. 물이 근본이고, 맛이 지말이다. 맛은 바람의 덕이다. 물은 거칠고, 불은 미세하다. 불로써 물을 깨트릴 수 있다. 물은 불에 뒤섞인다. 물은 네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맛이고, 다른 덕이 소리ㆍ색ㆍ접촉이다.
자성이 땅[地]을 낳는다. 땅은 향기와 함께 일어난다. 땅이 근본이고, 향기는 지말이다. 향기는 땅의 덕이다. 땅은 거칠고, 물은 미세하다. 물로써 땅을 깨트릴 수 있다. 땅은 물에 뒤섞인다. 땅은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향기이고, 다른 덕이 소리ㆍ색ㆍ접촉ㆍ맛이다. 5대(大)가 원인이 되어 5근(根)을 낳는다. 5근은 결과이다.
허공이 귀[耳]를 낳고, 귀는 도로 허공을 취한다. 자신의 덕(德)은 다른 덕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소리만 들을 수 있고, 색 등을 보지는 못한다. 바람이 피부[皮]를 낳는다. 피부는 곧 피부와 살 등이다. 피부는 도로 바람을 취한다. 자신의 덕은 오직 접촉만을 취하고, 나머지 덕들은 취하지 못한다. 불로써는 눈[眼]을 낳고, 물로써는 혀[舌]를 낳고, 땅으로써는 코[鼻]를 낳는다. 앞의 두 가지 종류의 예로써 다른 내용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근은 이미 5대로부터 생긴다. 5근이 소멸하면 다시 5대로 돌아간다. 이근(耳根)이 소멸하면 허공으로 돌아가고, 그와 같이 비근(鼻根)이 소멸하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영원하다.
상견(常見)을 깨트린다. 아직 있지 않고 이미 있었던 것은 소멸하였으니,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음을 밝혔으므로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아직 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아직 있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본래는 없는데 지금은 있게 된다면 없는 것은 항상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이제 이미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밝힌다. 먼저 있었으나 현재 없다면 있다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답】색(色)은 불의 덕이다. 물 가운데 색이 있다는 것은 곧 불로써 물을 깨트린다는 것이다.
028_0568_c_03L答:色是火德,水中有色卽是以火破水也。
【문】어떤 것이 자성으로 그들이 다른 것들을 낳는 주체라고 말하는가?
028_0568_c_04L問:何者是自性,而說其能生耶?
【답】세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자성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인(人)56)이라 이름하고, 셋째는 변이(變異)57)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가운데 처음의 것만을 자성이라고 이름한다. 인은 단지 인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변이(變異)는 자성이라고 이름하기도 하고, 변이라고도 이름한다.
어찌된 까닭인가? 첫 번째 것은 앎[知]이 없기 때문에 인(人)이라는 명칭을 얻지 못하고, 전변이 없기 때문에 변이(變異)라고 부르지 못하고 다만 자성이라고만 말한다. 인(人)은 앎은 있으나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이라는 명칭을 얻지 못하고, 전변이 없기 때문에 변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다만 인이라고만 이름한다. 삼덕(三德)으로부터 이후는 모두 앎이 없다. 그것은 뒤에 태어남을 전해주기 때문에 성질이라고 이름하고, 다른 태어남으로부터 전변이 있기 때문에 변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법이 모두 다 영원하다. 앞의 두 가지는 영원하며 변이가 없다. 뒤의 한 가지는 영원하나 변이가 있다. 마치 금의 성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반지ㆍ귀걸이의 차이는 있는 것과 같다. 인은 곧 ‘나’이다. 자성(自性)은 장님이 갈 수는 있지만 길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인(人)은 눈은 있으나 발이 없는 사람이 볼 수는 있지만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성은 작용은 할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하고, 인은 알 수는 있으나 작용은 할 수 없다. 자성은 인과 함께 합쳐져야 변이자성(變異自性)이 생긴다.
028_0569_a_02L근본자성으로부터 삼덕자성이 생긴다. 삼덕은 인도[天竺] 말이다. 첫째는 살타(薩埵)59)라고 이름한다. 뜻을 번역하기에 적당한 말이 없다. 억지로 번역하자면 묘유(妙有)이다. 이것이 생겨날 때는 정묘(精妙)하나, 본체는 있다. 둘째는 아라사(阿羅社)60)[상(常)과 하(荷)의 반절이다]라고 이름한다. 바르게 번역하자면 진(塵)이다. 움직이지만 오염될 수 있다. 오염되기 때문에 진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다마(多摩)61)라고 이름한다. 바르게 번역하자면 어둠[闇]이다. 그 본체는 닫힘[塞]이다.
만약 뜻으로 정립한다면 첫째는 가벼움과 광명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움직임과 지탱함이라 이름하고, 셋째는 무거움과 닫힘이라 이름한다. 모든 법이 내법(內法)이나 외법(外法)이거나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먼저 외법을 논한다. 외법을 논하면서 4대를 들어 논하자면 공대(空大) 및 화대(火大)는 가벼움과 광명이고, 풍대(風大)는 움직임과 지탱함이므로 물건들을 지탱하여 떨어지지 않게 한다. 지대(地大)와 수대(水大)는 무거움과 닫힘이다. 그 본체는 무거움이며 어두워서 닫힘이다.
처음 삼덕이 생겨날 때 내법의 묘유(妙有)62)가 처음 나타나고, 외법(外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바야흐로 나타난다. 삼덕자성으로부터 대자성(大自性)이 나타난다. 대(大)란 각(覺)63)이다. 각은 모든 앎의 근원이다. 깨닫고 살펴서 아는 작용이 있다. 대자성으로부터 아집자성이 나타난다. ‘나’가 있어 다른 것과 차이가 난다고 집착하여 말한다. 만약 승거학파의 주장이라면 아집으로부터 유진(唯塵)64)자성이 생기고, 유진자성으로부터 대실(大實)자성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만약 와이세시카 학파의 주장이라면 대실자성으로부터 유진자성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028_0569_b_02L지금은 우선 앞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유진(唯塵)이란 오직 5진(塵)만 있고 나머지 법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5진으로부터 대실(大實)자성이 생긴다. 이는 곧 5대이다. ‘모든 법이 이 외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대(大)라고 이름한다. 실(實)이란 모든 법이다. 오고 가는 것은 모두 이 다섯 가지 안에 있다. 모든 법은 자체에 변이가 있다. 그 본체는 영원하여 변이가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가령 안근(眼根)이 깨어져 공대(空大)의 돌아가는 경우와 같다. 안근 자체에는 깨어짐이 있으나 공대는 깨어짐이 없다. 나아가 비근(鼻根)이 지대(地大)로 돌아감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실(實)이라고 이름한다.
대실자성으로부터 지근(知根)이 생긴다. 눈 등의 5근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근으로부터 업근(業根)이 생긴다. 업근(業根)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이고, 둘째는 손이고, 셋째는 다리이고, 넷째는 항문이고, 다섯째는 남녀의 성기(性器)이다. 입은 말할 수 있으며 말의 감각기관이고, 말이 입의 업이다. 손은 붙잡는 감각기관이고, 붙잡음이 손의 업이다. 다리가 행동의 감각기관이고, 행동이 다리의 업이다. 항문이 내보내는 감각기관으로 똥과 더러운 것을 내보낼 수 있다. 내보냄이 항문의 업이다. 남녀의 성기는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자식을 낳는 감각기관이고, 자식을 낳음이 남녀 성기의 업이다.
【문】5대를 들어서 삼덕을 논한다면 5대는 단지 대실자성에만 속할 것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삼덕에 속한다고 하는가?
028_0569_b_17L問:約五大論三德,五大只應屬大實,那忽屬三德耶?
【답】그 본체의 성품[體性]이 삼덕에 속한다. 5대 자체는 대실자성에 속한다. 마치 하나의 상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말을 조각하든가, 코끼리를 조각하든가 간에 말과 코끼리는 비록 다를지라도 본체의 성품은 상아인 것처럼 5대도 역시 그와 같다. 5대 자체는 대실자성에 속한다. 그 본체의 성품이 속하는 것을 따라 스스로 삼덕에 속한다. 앞에서 자성이 공대(空大) 등을 낳는다고 말한 것은 근본인 자성이 5대 등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028_0569_c_02L승거학파의 뜻은 원인 가운데 결과를 갖추고 있음을 밝힌다. 마치 발다라(鉢多羅)65) 나무의 종자 가운데 이미 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자성 가운데 이미 일곱 가지 변이자성(變異自性)을 갖추고 있다. 인(人)은 그들과 합쳐질 때 일곱 가지가 차례로 현현(顯現)한다.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이름할 뿐이며, 앞에는 없으나 뒤에는 있음을 태어남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문】자성은 능생(能生)이고 능변(能變)이다. 삼덕이 자성을 바라보면 생겨난 것과 변이한 것이다. 대(大)를 바라보면 능생이고 능변이다. 무슨 까닭에 자성의 능생은 생김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고, 능변은 변화라는 이름을 받을 수 없으나, 삼덕은 두 가지 이름을 모두 받는가?
028_0570_a_02L【답】능변과 능생은 모두 다 원인의 이름이고, 소생(所生)과 소변(所變)은 모두 결과의 이름이다. 곧바로 변화라고 부르고 곧바로 생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은 결과의 이름이다. 결과가 일어나면 바야흐로 이를 변화라고 하고, 이를 생김이라 할 뿐이다. 원인은 아직 변화 및 생겨남이 없다. 지금 자성을 말함에 있어 능생은 곧 능변이다. 능변은 능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변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변화란 이름을 얻지 못한다. 삼덕은 능소(能所)의 두 가지 뜻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이름을 얻는다.
【답】그것은 작용이 없어 다른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이름을 얻지 못한다.
028_0570_a_06L答:其無作用,不能變他,故不受自性名也。
낙견(樂見)에 대해서 말한다. 니건자(尼犍子)66) 등이 견해를 일으켜 말한다. “삶과 죽음이 진실로 즐거움이고, 열반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마치 사람이 손이 하나 없고, 눈이 하나 없다면 이는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것이 괴로움이라면 손이 하나 없고, 눈이 하나 없는 것이 그 자체로 괴로움인데, 이 몸이 모두 없는 것은 어찌 지극한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열반 가운데는 이미 다시 5음이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진실로 지극한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손이 하나 없고, 눈이 없는데 옆 사람이 치료하여 다시 손 하나, 눈 하나를 얻는다면 이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즐거움이라면 손 하나, 눈 하나를 얻는 것 자체가 즐거움인데 한 몸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 어찌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삶에 이미 5근을 갖추고 있으므로 몸이 있음이 진실로 지극한 즐거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승거와 비세사 학파는 또한 낙견(樂見)을 일으켜 말한다. “삶과 죽음은 진실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 인간과 천상은 진실로 즐거움이고, 지옥과 축생 등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그들은 또 원인에까지 나아가 설명한다. “원인은 이미 진실하고 선이 있고, 악이 있다. 악은 괴로움을 감응하고, 선은 즐거움을 감응한다. 원인이 진실하기 때문에 결과도 역시 진실함을 안다.”
028_0570_b_02L이 두 가지 견해를 깨트린다. 삶과 죽음은 서로 기대고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낳을 뿐이다. 어찌 된 까닭인가? 거친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미세한 것으로 괴로움을 삼는다. 아귀(餓鬼)는 지옥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다. 축생(畜生)은 아귀를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다. 아수라는 축생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간ㆍ천상ㆍ색계ㆍ무색계 가운데 서로 형상을 기대어 망령되이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극에 이르면 비상(非想)이다.
만약 열반으로써 비상(非想)의 경지를 바라보면 비상은 괴로움이고, 열반은 즐거움이다. 이미 다시 열반보다 뛰어난 경지가 없기 때문에 열반이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만약 대승(大乘)과 3승(乘)의 열반이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이를 논하지 않는다.
【문】항상 “제일 큰 죄는 지옥이고, 중간의 죄는 축생이고, 제일 아래 죄는 아귀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어찌 축생이 아귀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028_0570_b_08L問:常言上罪地獄、中罪畜生、下罪餓鬼。今那得言畜生勝餓鬼耶?
【답】만약 소승이라면 인용한 것과 같은 것이다. 대승의 이치로는 축생은 아귀보다 낫다. 아귀는 불과 함께 다니므로 더 무거운 괴로움을 받는다. 목구멍은 작고 배는 크다. 항상 배고픔과 갈증으로 근심한다. 설사 맑은 물을 만나더라도 뜨거운 불길이라고 말한다. 축생 가운데는 그와 같은 일은 없다. 그러므로 더 나음을 안다.
뒤의 견해를 깨트린다. 삶과 죽음은 유류(有流)로써 원인을 삼는다. 비록 이것이 선한 원인이라도 선도 역시 유류이다. 이미 유류이므로 진실한 것이 아니다. 마치 좋은 음식이 있더라도 그 속에 독약이 있으면 좋은 음식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선이 이미 진실하지 못한데 즐거움이 어찌 진실이겠는가?
“‘나’가 세계를 만들기 때문에 ‘나의 것’67)이다”라고 말한다. 승거와 비세사 학파는 이러한 집착을 한다. 첫째는 내작기(內作器)68)이고, 둘째는 외작기(外作器)69)이다. ‘나’는 아는 자[知者]이고, 만드는 자[作者]이고, 향수하는 자[受者]70)이다. 아는 것은 ‘나’의 법이다. 곧 아홉 가지 법 가운데서 깨달음의 법이다. 마음은 ‘나’의 내작기이고, 근(根)은 ‘나’의 외작기이다. 진(塵)은 ‘나’의 자량(資糧)이다. 지(知)에 다섯 가지가 있고, 근과 진에도 각각 다섯 가지가 있다. 마음은 단지 하나이다. 마음 및 나는 영원하다. 법이 아닌 것[非法]이 그들이 함께 합쳐지도록 한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028_0570_c_02L작기(作器)라 이름하는 이유를 말한다. 세상에서 도끼ㆍ톱 등은 목수의 공구[作器]이고, 그들이 그것을 사용하여 책상ㆍ의자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음 및 근(根)도 역시 이와 같다. ‘나’는 그들을 사용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작기(作器)라고 말한다.
외작기로써 내작기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무릇 두 가지 뜻을 증명한다. 첫째는 마음이 하나라고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많다면 무슨 까닭에 한꺼번에 다섯 가지 지(知)가 함께 생겨서 5진을 알게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단지 하나의 마음만이 있음을 안다. 마음이 눈 가운데 있으면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수는 없고, 귀에 있으면 들을 수는 있지만 색을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5근은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 둘째는 마음이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있다면 이미 항상 있는 것이다. ‘나’가 있으면 5근도 항상 있다. 무슨 까닭에 항상 지(知)가 생겨서 5진을 알지 못하는가? 마음이 근 가운데 있을 때는 바야흐로 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반드시 있음을 안다.
028_0571_a_02L‘나의 법’은 네 가지를 통틀어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마음은 지(知)가 아니고, 근과 진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나’가 없다면 어찌 지가 있겠는가? ‘나’는 아는 자이므로 ‘나’의 법이 이미 있음을 안다. ‘나의 법’은 ‘나’가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한꺼번에 5지(知)가 함께 있어야 한다. 만약 색을 알 때면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반드시 있음을 안다. 근 가운데 있기 때문에 지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지로써 마음이 하나임을 증명할 수 있다.
마음이 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다섯 개의 마음이 다 함께 근 가운데 있어 동시에 다섯 가지 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이 없다면 근이 파괴되었을 때 무슨 까닭에 지가 생기지 않는가? 만약 5진이 없다면 무엇이 아는 것[所知]임을 알겠는가? 마음이 ‘나’와 함께 합쳐진 것을 내작기라고 말하고, 근이 ‘나’와 함께 합쳐지지 않은 것을 외작기라고 말하고, 진이 앞의 대상이 되어 ‘나의 법’이 생기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의 자량’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나의 작기’와 ‘나의 자량’을 ‘나의 것’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승거학파는 ‘나’가 있음을 다섯 가지 뜻으로 증명한다. 첫째는 다 모아서 다른 이들을 위하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경서(經書)들을 모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으는 것과 같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상(床)과 의자를 모으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 때를 헤아려서 모으는 것과 같다.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모으는 것을 보았으면 곧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중생의 몸도 이와 같아 5진(塵)ㆍ4대(大)ㆍ5근(根)ㆍ5음(陰) 등을 모은다. 그 모음을 보면 반드시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이란 곧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둘째는 자성이 변이하여 삼덕(三德)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자성은 아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능히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될 수 없다. 이미 능히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되었기에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음을 안다. 다가와서 그것과 합쳐야 바야흐로 변이가 있을 수 있다. 아는 자는 바로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028_0571_b_02L셋째는 변이(變異) 가운데 각(覺)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자성은 각(覺)이 아니다. 자성이 근본이고, 변이는 지말이다. 근본에 이미 각이 없으니 지말 가운데 각이 있을 수 없다. 변이 가운데 이미 각이 있다. 그러므로 각의 본체가 따로 있음을 안다. 아직 자성과 합쳐지지 않았으므로 변이 가운데 각이 있다. 각의 본체는 곧 ‘나’이다. 이것이 곧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이 한 가지 일은 곧 ‘나’가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각으로부터 아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넷째는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이미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작용의 주체가 반드시 있음을 안다. 자성은 작용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작용의 주체이다. 이미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작용의 주제가 반드시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그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여자는 작용할 수 있는 것이고, 남자는 작용의 주체이다. 여자가 있음을 보면 바로 남자가 있음을 안다.
자성은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그것과 합쳐진다. 합쳐지기 때문에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된다. 일곱 가지 법은 ‘나’에 묶여 있다. 나중에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를 얻는다. 자성으로부터 이 묶임이 생겨서 삶과 죽음에 머물러 있게 함을 안다. 그리하여 자성 및 묶임에 혐오감을 낸다. 이미 혐오감이 생겨서 영원히 묶임으로부터 떠나게 되므로 ‘나’는 해탈을 얻는다.
그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남자가 나병(癩病)이 걸린 여자와 성교를 한다. 자주 성교를 하여서 혐오감이 없지만 나중에 밝은 광명에서 그 여자를 보면 혐오하여 떠나고자 한다. 만약 강한 성질의 여인이라면 오히려 와서 이 남자에게 나아가겠지만, 만약 부드러운 성질이라면 한 번 혐오감이 생겼으므로 다시는 오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그 때에는 오지 않지만 오히려 오려는 뜻이 있다. 자성이 한 번 혐오감이 생겼으면 영원히 ‘나’와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성질의 여인 및 이러한 부드러운 성질을 가진 자성은 하나도 없다.
028_0571_c_02L다섯째는 홀로 머무는[獨住]71) 뜻이 진실로 있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이미 자성으로부터 변이가 생겼기 때문에 묶여짐을 안다. 지혜를 닦아 얻어서 자성에 대해 혐오감을 낸다. 자성이 이미 ‘나’와 서로 떨어졌으므로 ‘나’는 홀로 머문다. ‘나’가 홀로 머물기 때문에 ‘나’는 해탈을 얻는다. 만약 ‘나’가 없다면 홀로 머무는 뜻도 없다. 홀로 머무는 뜻이 이미 진실로 있으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나중에 따로 상세하게 아집을 깨뜨릴 것이므로 번잡하게 두 번 설명하지 않겠다.
1)16행도(行道)란 뜻이다. 견도(見道)와 같다. 견도란 3도(道)의 하나로 처음에 무루지(無漏智)를 내서 진제(眞諦)의 이치를 비추어 보는 경지이다. 도란 도로의 뜻으로 학인이 나아가는 도로이다. 3현(賢)ㆍ4선근(善根)의 가행(加行)을 쌓아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무간도(無間道)에 낳는 무루의 참된 지혜이다.
2)산스크리트어 Vaibhāṣya의 음사. 방(防)과 이(夷)의 반절음을 사용하여 Vai(毘)의 음을 풀었고, 판(判)과 가(可)의 반절음을 사용하여 bhā(頗)의 음을 풀었다.
3)산스크리트어 Upadeśa의 음사. 묻고 답해서 이치를 논하는 불교문헌을 말한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나이다.
4)산스크리트어 icchantika의 음사.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중생을 말한다.
5)인도정통파 철학인 승론(勝論, Vaiṣesika)학파에서 일체법을 분별하기 위하여 세운 6구의(句義) 가운데 대유(大有)구의를 설한 경전이다.
6)산스크리트어 Aṇgulimāla의 음사. 부처님 당시에 사람을 죽여서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삿된 견해를 신봉해서 거리에서 9백99명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해서 매달고 다니다가 부처님을 만나 개과천선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7)『잡아함경』 1063번,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3권 104~106쪽 참조.
8)Anāgamin의 음사.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한역. 욕계의 번뇌를 끊어서 욕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의 성인을 말한다.
9)이는 유폭류(有瀑流)라고도 한다. 일체의 선(善)이 물결에 밀려 내려간다는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108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 것에서 색계와 무색계의 탐(貪)ㆍ만(慢)ㆍ의(疑)의 스물여덟 가지를 말한다.
10)도리를 깨달아 증득함. 성문(聲聞)의 예류과(豫流果) 이상의 보살로, 초지(初地) 이상의 성자를 말한다.
11)3고는 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괴로움인 고고(苦苦), 좋아하는 대상이 변하여 없어짐으로 받는 괴로움인 괴고(壞苦), 세상의 일이 바뀌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인 행고(行苦)가 있다.
12)『구사론』에서 말한 10지(智) 가운데 두 가지이다. 진지는 이미 모든 지(智)의 번뇌를 끊고 다하면 ‘나’가 괴로움임을 알고,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고 도를 닦아야 함을 안다. 즉, 번뇌를 끊을 때에 생기는 스스로 믿는 지혜이다.
13)도류지(道類智)의 다른 번역이다.
14)앞의 열여섯 가지 마음을 참조하라.
15)유(有)는 3계의 과보, 유(流)는 네 가지 종류의 미혹이다. 3계의 과보가 실로 있다고 한다면 유(有)라고 말하고, 네 가지 종류의 미혹이 있어서 중생을 3계의 생사의 바다에 표류하게 하므로 유(流)라고 말한다.
16)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유류(有流)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宮)본에는 유류무류(有流無流)로 되어 있다.
17)산스크리트어 Sotāpanna의 음사. 구역에서는 입류(入流), 지류(至流) 등으로 번역하고, 신역에서는 예류(預流)라고 번역한다. 성문 3과 가운데 처음의 과보이다. 3계의 견혹을 끊어서 이 과보를 얻는다.
18)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말한다.
19)산스크리트어로는 pudgala라고 한다. 인(人)이라고 한역.
20)산스크리트어 Kalala의 음사. 태에 들어가 제7일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마음의 거풀처럼 끈끈하고 조금 굳어지는 것과 같다.
21)소승부파의 하나인 Sarvāstivāda를 말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하며 줄여서 유부라고도 한다.
22)소승부파의 하나인 Sammatīya 또는 Sammitīya를 말한다. 이 학파가 주장하는 내용은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을 보라.
23)승중에게 한 번 고지하고[一白] 또는 세 번 가부를 묻는 것[三羯磨]으로 구족계를 받을 경우나 승잔죄(僧殘罪)와 같은 중죄를 참회하는 경우에 채택한다. 백사법(白四法) 또는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도 한다.
24)수계자에게 세 번에 걸쳐서 묻는 것을 말한다.
25)산스크리트어 Dānapatti에 해당하는데, 시주(施主)라고 번역한다. 줄여서 단나 또는 단월이라고 한다.
26)변리(便利)는 대ㆍ소변을 말하므로 뒤에도 모두 대변과 소변으로 번역했다.
27)산스크리트어 Sudhā의 음사. su는 ‘좋은’이란 뜻이다. sudhā는 ‘좋은 음식물’이란 뜻이다. 신들이 먹는 음식물, 신들이 마시는 술, 또는 꽃의 꿀을 말한다.
28)산스크리트어 nyagrodha의 음사. 나무의 이름. 인도에 있는 줄기에서 아래로 뿌리를 뻗어내리는 나무를 말한다.
29)원문을 보면, 앞에서는 두 가지 모습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세 가지 모습이라 하였다. 따라서 앞의 예에 따라 두 가지로 번역한다.
30)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담(淡)으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본(宮本)에는 담(痰)으로 되어 있다.
31)원문은 조심법(助心法)이라 하였으나 심소법으로 번역한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2)소승부파의 하나인 Mahāsaṃghika를 말한다. 대중부라고 번역한다.
33)소승 유부의 입장에서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고, 대승 유식의 입장에서는 번뇌장ㆍ소지장의 종자의 이름이다. 유부의 뜻은 탐욕, 성냄 등의 번뇌는 유정에 따라다녀서 떠나지 않는 것이므로 수(隨)라 하고, 번뇌의 모습이 알기 어려운 것이 마치 수면상태와 같다고 하여 면(眠)이라고 한다.
34)진리를 증득하여 깨닫는 것이다. 성문의 예류과 이상, 보살의 초지 이상의 성자이다.
35)이때의 사문이란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인도의 바라문들을 말한다. 육사외도(六師外道)에 각각 15명의 제자가 있어 90명이 되고, 그들의 스승 6명을 합쳐서 96명이 된다.
36)네 가지 전도(顚倒)된 허망한 견해이다. 전도란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 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이라 하는 것처럼 바른 이치에 상반되는 허망한 견해를 말한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현상과 이치에 뒤바뀐 견해를 갖는다. 이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사의 무상(無常)ㆍ무락(無樂)ㆍ무아(無我)ㆍ무정(無淨)에 있어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에 있어서 무상ㆍ무락ㆍ무아ㆍ무정에 집착하는 것을 2승(乘)의 네 가지 전도된 허망한 견해라고 한다.
37)인(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하는 잘못된 소견을 말한다.
38)산스크리트어는 Vasubandhu라고 하며 세친이라고도 한역한다.
39)돌아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을 말한다.
40)소승부파의 하나인 Vāsīputrīya를 말한다. 독자부(犢子部), 가주자부(可住子部)라고 한역한다.
41)이는 인도의 정통파 철학인 니야야(Nyāya)학파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42)산스크리트어로는 pratyakṣa라고 한다. 직접지각에 의해 발생하는 지식을 말한다.
43)산스크리트어로는 anumāṇa라고 한다. 추리작용에 의해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저 산에 불이 있다고 아는 것을 말한다.
44)산스크리트어로는 Upamāṇa라고 한다. 다른 것과 비교하여 알게 되는 지식을 말한다.
45)산스크리트어로는 Ṥabda라고 한다. 어떤 권위 있는 스승의 가르침에 의거한 지식을 말한다.
46)인허진(隣虛塵)을 가리킨다. 극소의 물질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신역에서는 극미(極微)로 한역하였다.
47)산스크리트어 Ulūka의 음사. 선인의 이름. 부처님이 나오기 전에 출현하여 6구의(句義)의 승론을 가르쳤다고 하는 사람이다.
48)산스크리트어 koṭi의 음사. 억(億)에 해당하는 숫자의 이름이다.
49)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삼백(三百)으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본(宮本)에는 삼백천(三百千)이라고 되어 있다.
50)고려대장경 원문에는 감덕(感德)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 3본과 궁본에 의하면 위덕(威德)으로 되어 있다. 원문에서도 이후에는 위덕으로 되어 있다.
5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인(人)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 3본과 궁본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52)인도의 정통철학파인 Saṃkhya학파의 음사이다. 수론(數論)이라고 한역.
53)인도 정통 철학파인 Vaiṣesika학파의 음사이다. 승론(勝論)이라고 한역.
54)산스크리트어로는 Prakṛti라고 한다. 물질의 근원으로서 삼덕이 균형을 이루고 아직 분화하지 않은 상태이다.
55)Pañcamahābhūta라고 한다. 5유(唯)로부터 발생하는 허공ㆍ바람ㆍ불ㆍ물ㆍ땅을 말한다.
56)산스크리트어로는 Puruṣa라고 한다. 신아(神我)라고도 한역한다. 승거학파에 있어서 정신적 원리를 나타낸다. 자성(Prakṛti)에 상대하는 것으로서 신아는 독존(獨存)하는 영체(靈體)이다.
57)산스크리트어로는 vikāra라고 한다. 전변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으로부터 5대(大)ㆍ아만(我慢)ㆍ5유(唯)ㆍ대(大, mahat)ㆍ11근(根)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58)여기서 셋은 앞에서 나온 자성ㆍ인ㆍ변이의 셋을 말한다.
59)산스크리트어 sattva의 음사.
60)산스크리트어 rajas의 음사.
61)산스크리트어 tamas의 음사.
62)위에서 나온 sattva의 한역.
63)승거 철학에서 말하는 대(mahat)ㆍ각(覺, buddhi)ㆍ심(心, citta)를 말한다. 심리기관의 맨 위에 있는 것으로 이성(理性)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 특성은 결지(決智, adhyavasāya). 즉 추리판단을 시키는 곳이다.
64)5유(唯)을 말한다. 아만으로부터 나와서 소리ㆍ접촉ㆍ색ㆍ향ㆍ맛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으로부터 5대(大)가 생긴다.
65)산스크리트어 pāṭala의 음사. 나무의 이름. 엽수(葉樹)라고 한역. 아카시아와 비슷하다. 향기가 있고 꽃은 자주색이다.
66)산스크리트어 Nirgratha의 음사. 6사외도 중의 하나. 자이나교도를 말한다.
67)승거 학파의 견해에서는 아만(我慢)이다. 아마도 아만을 아소로 번역한 듯하다.
68)산스크리트어로는 antaḥkārana라고 한다. 순연한 정신기관으로 대(大)ㆍ아만ㆍ심(manas)으로 형성된 복합체로 감각ㆍ지각ㆍ개념 작용 등 우리의 모든 심적 생활의 기반이다.
69)산스크리트어로는 bahyam karana라고 한다. 외작기는 10근(根)이고, 10근의 작용은 이미 현재의 대상을 대상으로 하지만 각각 정해진 영역이 있어 그 영역을 넘어설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손의 작용은 현재에 있는 것을 잡는 것이고, 과거ㆍ미래의 것에까지 미칠 수는 없다.
70)산스크리트어로는 bhokṛti라고 한다.
71)산스크리트어로는 kaivalya라고 한다. 독존(獨存)으로 한역. 자아가 자성(prakṛti)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혹은 육신 없는 해탈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