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수밀(婆須蜜) 보살대사(菩薩大士)는 다음에 미륵(彌勒)의 뒤를 이어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이름은 사자여래(師子如來)이시다. 석가문(釋迦文)을 따라 내려와 비제국(鞞提國)에 태어나서 대바라문(大婆羅門) 범마유(梵摩渝)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의 이름은 울다라(欝多羅)였다.
아버지가 명(命)하여 부처님을 뵙도록 하자 찾아가 네 달 동안 모시면서 부처님의 상표(相表)와 위변(威變)과 용지(容止)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뵈었던 바를 말하였다. 아버지가 부처님 곁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자마자 출가하여 배우면서 이름을 바수밀이라고 고쳤다.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하신 뒤에는 주투국(周妬國) 반내원(槃奈園)에 유행(遊行)하면서 교화하였고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었으며, 분일(奔逸)하면서 번뇌를 끊고 이 경(經)을 찬집(饌集)하였다. 따로 7품(品)을 1건도(揵度)로 삼아, 모두 12건도로 찬집하였으며, 마지막 4품의 1건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게송을 훈석(訓釋)한 것이다. 무릇 11품 14건도이다.
028_0572_b_02L바수밀보살께서는 이 경을 찬집한 뒤에 3매정(昧定)에 들어 손가락을 튕기는 잠깐 사이에 정신이 도술천(兜術天)에 올라가니, 미투로(彌妬路)와 미투로도리(彌妬路刀利) 그리고 승가라찰(乘伽羅刹)도 그 천궁(天宮)으로 찾아갔다. 이 두세 군자(君子)들은 모두가 다음의 보처(補處)가 되실 분들이니, 미투로도리는 광염여래(光炎如來)이시고 승가라찰은 유인불(柔仁佛)이시다.
여기에 네 분 대사[四大士]들은 한 집[一堂]에 모여 중생을 대할 적마다 권지(權智)를 널리 선양하면서도 현성(賢聖)들은 말없이 묵묵히 계시고 양양(洋洋)하여 가득할 따름이었으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028_0572_b_03L茲四大士集乎一堂,對揚權智,賢聖默然,洋洋盈耳不亦樂乎。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이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서기 384)에 이 경 한 부를 가지고 장안(長安)으로 왔다. 무위태수(武衛太守) 조정(趙政)은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선비였으므로 이 경을 구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다.
불념(佛念)은 전(傳)을 번역하였고, 발징(跋澄)과 난타(難陀)와 제바(禘婆) 세 사람은 호문(胡文)을 맡았으며, 혜숭(慧嵩)은 필수(筆受)하였다. 3월 5일에 시작하여 7월 13일이 되어서야 끝마쳤으니, 호본(胡本)은 12천 수로(首盧)였다. 나와 법화(法和)가 서로 교정하면서 수식하였고 무위(武衛)는 다소 윤색(潤色)하였다.
이 경은 3승(乘)을 설하여 9품(品)이 되었고, 잘 지니고 수행하여 정관(正觀)으로 다스렸으니 열여섯 가지를 가장 잘 갖추었다. 그리고 늘 윗 사람의 운치를 찾으면서도 의미를 잊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여러 길 되는 문을 엿보다가 너무 늦어 그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부(富)를 다 알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어떤 이는 “색상을 껴잡아 매어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온갖 덮임[蓋]과 색상까지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망가지고 없어진 색상이라고 한 그것도 역시 과거와 미래에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색상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볼 수도 있고 상대도 있는 것[可見有對]과 볼 수 없고 상대만 있는 것[不可見有對]과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不可見無對]이다”라고 말했다.
【문】그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거기에서는 온갖 물질을 상대로 한 저 온갖 것은 네 요소이고,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028_0573_a_04L問:取要言之,彼則不說緣諸所有色。彼一切是四大、四大所造。
【답】그것은 요점을 들어 말한 것이 못 된다. 또 말하기를 “인연이 변경됨으로써 온갖 고통스러운 음(陰)이 생긴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대는 어떠한 색상을 묻는가? 만일 푸른 것이라고 하면 푸른 그것이 색상이 되고, 누런 것이라고 하면 곧 누런 그것이 색상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가 “상대가 있는 물질[有對色] 모양은 바로 빛깔이니 색상이 되며, 상대가 있는 모양[有對相] 그것은 마치 화살이나 회초리를 잡는 것과 같나니 그것은 빛깔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028_0573_a_14L或作是說:有對色相,是色爲色相,有對相者,猶如捻箭筈,是謂有色。
곡식의 종자를 땅에 심어두고 수시로 적당한 수분을 공급하면 거기에는 곧 및깔이 생겨나게 되는 것과 같나니 무엇을 색상이 아니라 말하는가?
028_0573_a_16L如種穀子在地,隨時漑灌彼便有色。云何非色相?
【답】위에서 말한 내용과 정반대이다. 담마다라(曇摩多羅)존자는 “온갖 물건으로서 상대가 없는 것은 빛깔이 아니니 그것을 색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가 없는 물건은 그것 또한 나지 않나니 그를 상대가 없다[無對]고 말한다. 마치 상대 없는 것은 그 상대의 자취인 것과 같아서 그는 곧 상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색상이 아니다.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에는 어떠한 다름이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다름이 없나니 온갖 네 요소가 바로 만들어진 물질이다”라고 말했다.
【문】세존께서 “온갖 빛깔이 있는 저 온갖 것들은 곧 네 요소이니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경에 어김[違]이 있다.
028_0573_a_23L問:如世尊言,諸所有色,彼一切是四大、四大所造耶。於此經有違。
028_0573_b_02L【답】만들어진 소리가 다시 딴 감관[根]에서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여섯 갱락(更樂)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탐내고 있으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참는 수행이 그에서 생긴다. 그 낙이 생긴 이후로부터 그 중간에 이르기까지 여섯 갱락 밖에 다시 일곱 갱락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만든 자도 없다.
어떤 이는 “사대의 모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온갖 가늘고 윤활한 것으로만 된 것이 아니니, 네 요소의 모양이 동일하지 않고 축축함과 딴딴한 모양도 또한 같지 않으며, 굵고, 가늘고, 가볍고, 무겁고, 차갑고, 굶주리고, 목마름 따위가 같지 않다. 저 가늘고 윤활한 것이 굵은 땅에서 생긴 것인데, 가벼운 것은 불과 바람으로 만들어졌고, 무거운 것은 땅에서 생긴 것이며, 차가운 것은 물에서 만들어졌고, 굶주림과 목마름은 불과 바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028_0574_a_02L【문】땅의 견고한 것보다 더한 것은 있지 않나니 가늘고 윤활하고 굵은 것은 바로 땅의 처소이니, 이것을 증가함이 있다고 말한다. 땅의 평탄하고 바른 것과 같기 때문에 가늘고 윤활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땅의 평탄치 못한 것과 같으면 굳고 굵은 것이라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굵음과 가늘고 윤활한 것이 없다. 설령 굵고 가늘고 윤활한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온갖 것이 항상하면 될 수 있는 사실이나 푸른 빛깔을 언제나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그가 성립되지 못한다.
저것에 혹 가벼울 원인이 있다가도 저것이 다시 무거워질 수 있나니, 그러므로 가벼움과 무거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차가워졌다면 어떻게 푸른 연꽃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사대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니, 그러므로 차가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불이 성하면 굶주리고 바람은 목마름의 근본이 된다. 어떤 이는 “온갖 신식(身識)이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대라고 말해야 하나니, 사대를 떠나지 않고 신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대가 더욱 증가함을 제각기 말한다”고 말한다.
【문】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은 많고 마음 법[心法]의 모양은 무지인데, 어찌하여 미사색(彌沙塞)1)에서는 “아직 무명(無明)을 깨닫지 못하여 무명을 수행하니,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무명이라고 이른다. 마치 소금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고 했는가?
【문】만일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이 밝음을 일으키면 곧 무명이 있는 것이 마치 저 그릇에 소금이 없으면 저 그릇에는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 만일 밝음이 있지 않으면 저 무명은 공연히 무명만 있을 뿐이다. 만일 밝은 물건이 곧 무명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행(行)의 인연이 있는가?
어떤 이는 “5개(蓋)가 곧 무명이다”고 말했으며, 세존께서도 역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명에 덮인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028_0574_a_20L或作是說:五蓋是無明。世尊亦說,世閒愚人無明所覆。
028_0574_b_02L【문】결(結)은 중요한 자리가 없는가? 어떤 이는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 곧 무명이다”고 말했다. 세존께서 또한 “비구가 부정을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아니한 애욕의 번뇌[欲漏]가 곧 생기게 되고, 이미 생긴 애욕의 번뇌는 갑절이나 더 많아지며,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또 “무명습(無明習)은 곧 유루습(有漏習)이니, 그러므로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은 곧 무명이라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문】부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곧 무명인가? 그것도 부정을 생각한 것에 관련되므로 역시 무명이다. 또 세존께서 “그와 같이 비구가 부정(不淨)을 생각하므로 그 무명(無明)에 관련되어 그 무명이 애(愛)에 관련되나니, 그러므로 그런 부정을 생각함이 없어도 곧 무명이다”고 말씀하셨다.
【문】만일 무명이 무명에 관련되면 그 뜻은 어떠한 어긋남이 있는가? 무명이 어리석음에 관련된다고 말함과 같은가? 어떤 이는 “네 가지 전도(顚倒)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028_0574_b_08L問:若無明緣無明,意有何違?如所說無明緣癡。或作是說:四顚倒是無明。
【문】괴롭다고 보는 것으로 전도를 끊나니, 그러므로 그가 무명이다. 괴로움을 보고 소견의 결[見結]과 무명의 결[無明結]을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중요한 자리가 있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온갖 결이 곧 무명이요, 지혜로움은 곧 밝음[明]이다. 온갖 결 때문에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온갖 결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답】만일 열 가지 현색(現色)이 있으면 중요한 자리에 드나니, 그와 같이 사(使)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어떤 이는 “진실로 무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삿됨이 무명을 낸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무명이라는 명칭은 무지(無智)와 의혹과 삿됨[邪]을 따르는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에는 여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어리석음ㆍ순종ㆍ삿됨ㆍ의혹ㆍ희망ㆍ중요함이 없는 것을 얻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이란, 거룩한 진리[聖諦]에 대하여 행하려 들지 않는 무지(無智)이니, 삿됨을 따르는 그것을 곧 무지라 말한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조작으로 중생이 있나니, 그것은 아소(我所)의 무명이요, 내가 조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 중생의 어리석음이 무명의 모양이다. 어찌하여 무명의 인연이 있는가?
028_0574_b_21L如上所說。復作是說:於此衆生愚癡無明相。云何無明有緣?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시 나라는 물건이 있음과 무명이 있음과 무명의 네 가지 전도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028_0574_b_23L如上所說。復次有我物有無明。無明、四顚倒有何差別?
028_0574_c_02L어떤 이는 “소견이 곧 전도이니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하며,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 있다고 하며,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며, 무아(無我)인 것을 내가 있다고 하여 그와 상응하는 것과 그 밖의 결사(結使)와 상응하는 무지(無智)가 있는 그것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도(無道)한 것을 무명(無明)이라 이르고, 사도(邪道)인 것을 전도(顚倒)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요함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 이르고, 중요함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결사(結使)가 곧 무명이요, 무명에서도 아주 작은 것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다시 온갖 결(結)은 곧 전도이고, 전도 중에서 아주 작은 것은 또한 무명이다.
【문】나에게 두 가지로 일어나는 것 등이 생기고 이리저리 서로 생기는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그 중에 다르지 않는가? 어떤 이는 “말하고 나서 마땅히 다시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028_0575_b_08L問:我有二起,等生、展轉相生,是故於中不異。或作是說:說已當復說。
【문】유위상과 무위상이 하염이 있는 것인가?
028_0575_b_10L問:有爲相、無爲相,當有爲耶?
어떤 이는 “이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유위법(有爲法)일 뿐이니, 또한 마땅히 그 밖에 그를 유위법 모양으로 보지 아니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생기고 멸함과 항상 머무름은 변역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면 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땅히 항상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 항상함이 없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무슨 이유인가? 모든 법의 행(行)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가 무상함이고, 저 법의 행(行)이 성립되니, 그러므로 무상한 축에 들지 않으며, 모든 법에 묶이고 집착하니 그러므로 항상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항상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575_c_02L어떤 이는 “그 다름이 없으니 입이 곧 입의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028_0575_c_02L或作是說:無有異,口者卽口行也。
【문】만일에 입이 곧 입의 행위라고 한다면 몸도 몸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만일 입과 입의 행위가 다름이 없다면 몸과 몸의 행위도 또한 다름이 없을 것이니, 그 내용이 어떠한가? 조금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은 혹시 몸의 행위인가 싶다. 어떤 이는 “문자(文字)로 설명한 것이거나 문자에 실린 것은 곧 입의 행위[口行]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에게 기쁨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거나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그를 입의 행위라고 말해야 하는가?
028_0575_c_11L他有喜、有樂、有愁憂,當言是口行耶?
【답】입의 말이 그로 하여금 기쁨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게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다른 뜻으로 본다면 뜻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곧 기쁜 모양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입으로 말한 바가 있거나, 입에서 생각하는 행위가 입에서부터 나온 것은 모두가 다 입의 행위다”라고 말했다.
【문】저 글자 수는 또한 뜻이 되는 것과 같이 자연(自然)인 물건과 바람이 불어서 방울이 울리는 것도 입의 행위가 아닌가? 본시 3매(昧)에 들었는가? 어떤 이는 “입으로 온갖 행위를 한 것이요, 글자 수가 또한 행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담마다라존자는 “두 소리가 차별이 있지 않으나 두 사실은 서로 행함이 다르다. 생각으로 선(善)인 글자 수를 아는 것은 단연코 입이요, 깊은 내용을 부연하는 것도 역시 입이요, 또한 입의 행위이며, 두 소리가 함께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다[존 담마다라가 삼매에 들어 그 내용을 알았다].
【문】글자 수도 역시 몸의 행위를 쌓는다고 하겠다. 존자께서는 “이 두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나니, 그를 보지 않고 제 모양을 보지 않고 또한 그 공을 드린 보람이나 효과를 보지 아니해야 한다. 입과 뜻이 함께 일어나매 미묘한 지시를 함이 없으나 그 과보를 받는 것은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만일 마음이 그러하다면 곧 생각과 느낌의 다름이 있지 않을 것이니, 마음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생각과 기억이 작위하는 바를 인식이 스스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028_0576_b_07L問:設心當爾者,則無有異,想痛心有何差別。或作是說:想憶所作識能自識。
【문】저 생각은 어떤 것을 기억하게 되는가? 만일 그전 것을 기억한다면 그러기에 생각이 스스로 기억하여 생각할 것이요, 만일 그 외의 것을 기억한다면 거기에는 곧 하나의 인연이 있는가? 어떤 이는 “기억이라고 한 것은 곧 생각이요, 그 제 모양은 곧 인식이다”라고 말했다.
【문】한 법이 두 명자(名字)와 제 모양[自相]을 갖추었는가? 만일 한 법이 두 명자를 갖추고 있다면 저 명자도 역시 다르고 제 모양도 역시 다를 것이요, 만일 명자가 서로 같지 않다면 생각은 또한 스스로 제 모양이 있고 인식은 명자를 기억할 것인가? 어떤 이는 “밖의 기억이 생각이 되고 제 모먕이 인식이 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본래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분별을 제 생각이라고 말하나니, 제 생각으로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은 그가 지은 것만이 아니다. 뜻[意]을 바깥이라 말한다”고 말하였다. 나아가서는 눈으로 느끼는 것과 생각과 마음과 인식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마땅히 이 일곱 방편으로써 설명해야겠다. 존자께서는 “눈으로 빛깔을 반연하여 눈의 인식과 제 모양으로 느끼는 인식을 내는데, 인식이 이 모든 법에 흘러 달리면서 재차 그러한 차등을 일으킨다. 뜻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인식과 다른 것, 인식과 공통되는 것, 그와 함께 얻는 고락(苦樂) 그것이다. 온갖 생각을 조작하고 본래 짓는 바를 따르는데, 그도 역시 생각과 마음에서 행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
028_0576_c_02L이 마음, 이 법을 하나인 모양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약간의 모양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한 모양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인식이 푸른 것을 반연할 적에는 뜻도 역시 그러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하나의 인연이 하나의 인연과 상응하는 법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이 한량없는 모양은 미묘함과 미묘함 아닌 느낌인데 그를 생각으로 지은 바라고 말하며, 제 인식[自識]이 지은 바며 제 인식의 제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028_0576_c_07L或作是說:此無量相。妙非妙痛,名爲想所作,自識所作自識自相。
【문】하나의 인연도 있지 않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한량없는 모양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의 모양이라면 법이 곧 무너짐이 있을 것이요, 법이 어지러워짐이 있을 것이니, 여기에 일정한 자리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모든 법에 제 모양 있는 것이 마치 이 유위법(有爲法)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할 수 없고, 무위법을 또한 유위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세존께서 세상에 나오신 것은 무엇을 하시려고 한 것인가?
비유컨대 도사(導師)가 도 아닌 것을 도(道)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도사만이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등불을 밝히는 이가 낮은 데를 높다고 말할 수 없으며 높은 데를 낮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높고 낮음을 비출 뿐인 것과 같다. 비유컨대 의사가 단 것을 쓰다고 말할 수 없으며 쓴 것을 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달고 쓴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인 것과 같아서, 위에 말함도 역시 그와 같다.
다시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시기 때문에 이 법의 뜻[義]을 말씀하신 것이니 마치 이 유위법이 3세(世)에서 각각 제 모양이 있어서 외상(外相)을 알도록 하게 함과 같다.
028_0576_c_22L復次世尊爲衆生故說此法義,猶如此有爲法於三世各有自相得知外相。
028_0577_a_02L무슨 이유 때문에 혹 일어나기도 하고 혹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어떤 이는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있다”고 말했다.
028_0577_a_02L以何等故?或起或不起。此之謂也。或作是說:相有若干。
【문】저 모양은 본래 머무름이 없나니, 그러므로 저 서로 생김이 있는가?
028_0577_a_03L問:彼相本無住,是故彼有相生。
【답】본래 있는 그 모양은 생기지 않았다.
答曰:本有此相未生。
【문】만일 본래 모양이 있더라도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없는가?
028_0577_a_04L問:設本有相,相無若干。
【답】저 심지 않고도 저절로 생기는 모양과 같아서 곧 더러운 모양에 각각 다름이 생겨서 같은 모양[同相]과 더불어 각각 생기지 아니하지 않나니 그를 약간의 모양이라고 말했다.
028_0577_a_05L答曰:如彼不種自生相者,則穢相各各異生,不與同相各未生,是謂相若干。
【문】만일 저 모양이 이미 생기거나 만일 생기지 못했다면 그러기에 저것이 각각 증감이 있나니, 그러므로 저것이 본래 없으면서 생김이 있는 것이다.
028_0577_a_07L問:設彼相已生、若未生者,是故彼各有增減,是故彼本無有而有生。
【답】여래께서 말씀하신 “모양에는 약간의 것이 없다”고 함과 같나니, 거기에는 곧 더러운 모양이 생기어 다름이 있고 혹 생기지 않더라도 이 생기는 것 때문에 다름이 있다. 비유컨대, 푸른 것이 다르고 무상함과 괴로움이 달라 각각 동일함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이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사실에 약간의 것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도 역시 본래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인연이 혹 생기기도 하고 혹 생기지 않기도 한다”고 말했다.
만일 저 현재가 옮기면 곧 과거가 있을 것이며, 만일 과거가 없으면 곧 항상 있는 과거가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당신이 현재에 과거를 아나니, 곧 과거가 있다. 만일 현재에 과거를 알고 과거 있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이, 당신이 과거에 과거가 있다고 아는 것이 없으면 곧 과거가 없을 것이다.
【답】만일 지금 생기지 않는다면 또한 생기지 않고 함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항상함인 제 모양이 상응하는 그것은 또한 당연히 없고, 혹 생기기도 하며 혹 생기지 않기도 하나니, 그를 “만일 무상하다면 저것 또한 생기지 않고 지금에 또한 상응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028_0577_c_02L어떤 이는 “유위법의 모양은 약간의 것이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약간의 종류를 만들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인연이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세(世)의 처소가 있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위법은 가지가지로 다르지만 무위법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유위법의 짓는 모양은 인연이나, 곧 인연이 서로 생긴다”고 말했다.
028_0578_b_02L어떤 법으로부터 나오는가? 그 차례가 적은 것은 많은 것을 내고, 많은 것은 적은 것을 낸다”고 말했다.
028_0578_b_02L從何法出?何以故?次第少者生多、多者生少。
차제연의 모양은 어떠한가?
次第緣相云何?
어떤 이는 “보시 행하기를 기피하는 바가 곧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마음을 비추는 것이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차례로 심성(心性)이 회전하는 것이 차제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차제인 심성이 대개 차제연의 모양이니, 차제연은 당연히 일정한 것이라 말하고, 당연히 일정함 아닌 것이라 말하며,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답】아라한은 최후 마음과 차제연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당연히 항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028_0578_b_10L答曰:阿羅漢非有後心次第緣。或作是說:當言非常定。
【문】곧 차제연이 없는가?
028_0578_b_11L問:則無次第緣。
【답】마치 인연이 항상 일정함이 있지 않음과 같아서 반드시 인연이 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존자께서는 “현재의 차제연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그는 마땅히 항상 일정하다고 말할 것이며, 현재 모양에 차제연이 스스로 항상함이 있는 것을 관찰해서는 당연히 이과(已果)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천상에 태어난 후에야 능히 알아 익히고 행하며 범하지 아니한 후에야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했다.
028_0578_c_14L或作是說:生天上然後能知,習行不犯然後生天上。
【문】어떻게 익히고 행하여 범하지 아니하며 자주자주 범하지 아니하며 능히 마음을 알아 범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마음을 수행하여 그런 후에 천상에 태어나는가?
028_0578_c_16L問:云何習行不犯?爲數數不犯,能知心不犯,從彼修行心,然後得生天上?
어떤 이는 “알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는 슬기로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에 교의(敎義)가 있나니 그에 머물러 함께 상응해야 하거늘, 하물며 교의가 없는 것이겠는가? 저 경에 의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저 슬기로운 법과 같다”고 말했다. 가르침 없는 몸과 몸의 느낌이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가르침 없음은 몸의 묶임이요, 몸의 느낌은 마음의 묶임이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알게 한다면 청국이 인연이 있을 것이요, 만일 그가 청국을 알면 곧 앎이 있을 것이며, 만일 청(靑)에 국(國)의 인연될 만한 것이 있다면 인연과 제 모양에 곧 두 앎이 있을 것이다. 만일 앎과 그 밖의 알음이 청국에 인연하게 된다면 그 밖의 청국을 포섭할 것이요 만일 앎이 청국을 인연하게 된다면 그 또한 감히 청국이 앎을 포섭하여 인연이 되게 하지를 못할 것인가?
어떤 이는 “만일 미래의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인연을 만드는 인연이라면, 그것은 곧 인연이니 마땅히 잘 생각해 보라. 그 마음과 마음 법의 제 모양이 인연을 만들더라도 그는 인연이 있는 줄을 모른다. 왜냐 하면 미래의 인연이 인연 있는 것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그는 통증의 제 모양이고 인연을 만드는 것이 그 인연을 만든 것이 아니다. 통증은 아무런 처소도 없는데 통증의 제 모양이 생겨서 그 실지의 머리와 배에 통증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인가?
028_0579_b_11L問:彼痛自相而造緣不作緣。痛無處所,痛自相生,現其實頭腹有痛。
어떤 이는 “얻음이 만일 얻지 못함에 해당한다고 하면 곧 둘이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며 마음과 마음이 각각 인연을 짓고서 마음이 스스로 인연을 짓나니, 그러므로 자연히 그것이 미묘함 아님을 모르나니 그러기에 이미 얻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얻음이 만일 얻지 못함에 해당한다고 하면 마음이 마음에 반연함이 끝날 수 없고 곧 인연이 있나니, 그는 미묘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미 얻어진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아픈 모양을 얻는 것과 그 마음의 무슨 차별이 있으랴. 이는 의식(意識)의 경지이고 그 가운데로부터 인식이 얻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인식으로 느끼는 제 모양을 얻지 못하면 그를 구경(究竟)이라 말했다. 그 중에 딴 의식이 들어감이 있으면 그는 곧 무너짐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못 미쳐 마음에 공포를 내는데 미래의 생각도 역시 그러하네. 통증과 그리고 타인의 마음이며 마음이 아픈 이것 저것에 반연하네.
028_0579_b_21L不還心恐怖, 未來想亦爾, 痛及他人心,
心緣痛此彼。
마음과 마음 법에 돌아서는 것과 마음과 마음 인연을 마련하는 그 둘은 함께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여 스스로 모양을 짓는다. 어떤 이는 “청국(靑國)을 아는 것과 같게 되어 일시에 인연을 짓는다”고 말했다.
028_0579_b_23L還心心法,設心心緣,此二俱前後而自作相。或作是說:得如覺靑國一時作緣。
028_0579_c_02L【문】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만일 인연을 짓게 된다고 하면 곧 둘의 스스로 앎이 있게 되는가?
028_0579_c_03L問:此非譬喩。設當作緣者,則有二自覺。
어떤 이는 “될 수 없나니 만일 인연을 짓는다면 청(靑)이 앎[覺]과 더불어 평등하여 다름이 없을 것이며 앎도 역시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옳겠는가? 그러므로 되지 않고 그것이 같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될 수가 없나니, 왜냐 하면 이것이 전환함으로써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전환함이 아니고 두 번 전환함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될 수가 있다”고 말했다.
028_0580_a_02L어떤 이는 “물질의 제 모양이 모든 눈의 인식을 받아들인 것이요, 물질인 자연이 아니며 눈의 감관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028_0580_a_02L或作是說:色自相攝受諸眼識,非色自然非眼根,是故彼不知。
볼 수 있음은 가까이 앉은 때문이니 나는 저 네 요소에 의지했다. 눈을 가리면 무너짐 있나니 대상은 모두가 물질의 모습[色相]이라네.
028_0580_a_03L可見以近坐, 我依彼四大, 掩眼而有壞,
境界是色相。
귀의 감관을 볼 수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고, 코의 감관을 볼 수 있음은 가까이 앉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혀의 감관과 몸의 감관은 볼 수가 있다. 그것이 네 요소인데 내가 만든 것이다. 마땅히 “그와 같은 5근(根)의 물질인 온갖 것을 네 요소가 만든 것이다”라는 이러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모양이나 모습이 없음이 마치 눈의 인식과 같다. 그리고 온갖 물질은 모든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인데 약간의 모양과 약간의 모습이 있다.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또한 다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처소가 수승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처소인 눈의 감관과 더 나아가 몸의 감관[身髮]까지도 그렇다 그러므로 가지가지 감관의 처소가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그러기에 가지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문】딴 곳에는 하나의 모습이 있기도 하고 혹은 다시 둘이 있기도 하는데 저 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약간의 모양이 있고 약간의 모습이 있게 하며, 모든 처소는 다 몸 감관[身根]인데 몸 감관으로 하여금 약간의 모양과 약간의 모습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네 요소로 만든 물질인 환희하는 감관[歡喜根]과 그 밖의 네 요소가 환희하는 눈 감관과 그 밖의 몸 감관까지가 그 중에 갖가지 모양이 있다”고 말했다.
【문】그 밖의 네 요소에는 환희하는 하나의 눈, 혹은 그 밖의 두 눈이 있기도 하는데, 눈이 보는 처소로 하여금 갖가지 모양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내가 네 요소인 눈과 그 밖의 네 요소인 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그 밖의 몸의 감관까지를 그 중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와 같다.
028_0580_b_02L【문】그 밖의 네 요소인 하나의 눈에 혹 그 외 둘이 있기도 하는데, 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가지가지 모습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지어감[行]의 때[垢]로 만든 감관이며, 인연이 지어감의 때로 눈의 감관을 얻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몸의 감관까지도 그러하여 그 중에는 가지가지 모양과 가지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와 같다.
【답】그 밖에 지어감의 때로 인하여 한 눈의 감관을 이루고 혹은 다시 두 눈의 감관을 이루는데, 눈의 감관으로 하여금 가지가지 모양을 만들려 하는가? 어떤 이는 “4대(大) 안에 상응행(相應行)으로서 가지가지 모양이 있게 된 것은 그가 가지가지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답】눈은 그 모습[貌]이니 어떤 이는 “검은 동자는 눈이 비추는 것이며, 작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028_0580_b_24L答曰:眼是其貌。或作是說:黑瞳子是眼所照者作者。
028_0580_c_02L【문】어떻게 검은 동자가 곧 눈이라고 아는가?
028_0580_c_02L問:云何得知黑瞳子是眼?
【답】검은 동자가 그 근본이다.
028_0580_c_03L答曰:黑瞳子是本。
【문】검은 동자는 그 근본이 아닌가?
問:黑瞳子非其本。
【답】그 외의 사실에는 해당되는 바가 없으므로 그것을 눈이라고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저것 또한 다르나니, 그러므로 저 사실에는 해당되는 바가 없다. 저것을 눈이 아니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네 요소로 만들어진 물질인 눈 감관은 환희이니, 그로 인하여 눈의 인식 대상이 있다. 그것을 지도와 교계(敎戒)라고 이르나니, 그것을 저것이 만들었다 말한다”고 했다.
【문】네 요소의 모양이 스스로 무너지매 그를 네 요소의 모양이 스스로 무너짐이라고 이르며, 눈 감관 모양이 무너지지 않고 하나의 모양이 눈의 인식에 의하여 온갖 일을 만든다. 묻노니, 만일 네 요소의 제 모양이 한 모양인 눈 감관을 무너뜨리더라도 그와 같은 아상(我相)과 눈 감관은 무너지지 않고 한 모양인 눈의 인식이 서로 의지하여 이루는가? 어떤 이는 “빛깔ㆍ냄새ㆍ맛ㆍ섬세하고 매끄러움[細滑:觸] 그것에 관련되어 눈 감관과 눈 인식이 증가하게 되면서 온갖 사실을 만든다”고 말했다.
028_0581_a_02L【답】눈으로 헤아릴 줄 아는 물질 이것을 느껴 아는 것이라고 하나니, 눈이 몸을 헤아리는 물질인 것과 같아서 만족함이라고 말했다. 몸의 만족함이란, 네 요소인 몸에 하나의 제 모양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만들어진 물질은 자연인데, 눈의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증감이 있는 것을 나타내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고 이른다. 저것을 계산할 적에 차츰차츰 그 성질이 자연임을 알게 된다. 그 중에 모든 받아들임[入]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다.
눈의 검은 동자를 관찰함과 환희와 각각 서로 의지함이다. 네 요소가 모두 모였는데 만듦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네.
028_0581_a_06L觀眼黑瞳子, 歡喜各相依, 四大皆集聚, 無造無狐疑。
5근(根)도 역시 그와 같고 의근(意根)도 역시 그와 같고 의근의 제 모양이 의지함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028_0581_a_08L五根亦復如是。意根自相依有何差別?
어떤 이는 “뜻[意]으로 모든 법을 아는데 이미 알고 장차 알 것을 안다. 눈 감관도 역시 그와 같고 의식(意識)이 만들어 증가하는 그것을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의식이 서로 의지하는 모양은 의근이 의식에 의지함이니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혹 나오기도 하고 혹 들어가기도 하여 다섯 식신(識身)과 의근(意根)이 식(識)에 의지하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답】어떤 이는 “여섯 식신과 의식신(意識身)이 증가하나니, 그 증가함으로부터 생기는 식(識)이기에 이를 그 사실이라 말한다”고 했다.
028_0581_a_15L或作是說:六識身意識身增上,從增上諸所生識,是謂其事。
【문】이름과 물질이 이리저리 서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다시 저 식의 제 모양과 의근(意根)이 증가하는 작용을 하나니, 이를 그 사실이라고 말했다. 저것을 계산해 볼 적에 나아가 마지막인 저 성질은 자연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중의 의식만은 무너짐이 있다. 어떤 것이 뜻[意]이 되고, 어떤 것이 의식이 되는가? 앞에서 네 가지 사실을 말했듯이 6식신(識身)과 상응하는 것은 뜻이고 증가하는 식(識)에서 생긴 슬기와 마음이 그를 반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문】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어떤 물건이 자연으로 회전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어떤 끊어지는 물건이 능히 제가 저절로 끊어지지 않으며, 창이 스스로 찌르지 못하며, 손가락과 머리가 스스로 부딪치지 못함과 같이 이도 역시 그와 같은가? 담마굴(曇摩崛)존자는 “마음과 상응하는 지혜로 알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문】만일 그렇다면 곧 두 가지 지혜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一部僧名]은 “사람이 물어볼 줄 알고 또한 지혜를 쓸 줄 안다. 설령 지혜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 그 다음에야 아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제일의(第一義)에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있지 않다. 중생을 안다고 말한 것은 역시 사만(邪慢)으로서 괴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말한다”고 했다.
【문】어리석은 사람도 지금에 또한 아는데, 다시 그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지 않는가? 어떤 이는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의한 연후에야 알게 된다”고 말했다.
028_0581_b_21L問:愚人今亦知。復不有是是苦是樂。或作是說:依身苦樂然後得知。
028_0581_c_02L【문】만일 저 느낌에 의한 것이 이미 사라지면 어떻게 이는 낙에 의한 느낌이고 이는 괴로움에 의한 느낌이라 말하는 것을 알게 되는가? 마치 저 통증을 몸이 스스로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어떻게 뜻[意]을 껴잡는가? 어떤 이는 “마음이 이미 생길 적에는 현재의 느낌만 반연한다”고 말했다.
【문】차제연(次第緣)이 사라지고 또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또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게 되겠는가? 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지하고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지 않다. 그는 뜻을 내는 중간 대상에서 의식의 대상을 내는데, 그가 인식 자리인 제 성품[自性]에 편승하여 인식 모양을 만들어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거든, 하물며 다시 중생들이 느낌에 따라 뜻이 어지러워짐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자연인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가장 제일의(第一義)라고 말하리. 뜻으로 만든 느낌 그 자체가 고락행(苦樂行)을 벌써 내나니.
028_0581_c_10L自然智慧者, 人最第一義, 志所造痛身,
已生苦樂行。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모든 받아들임[入]을 내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으로 안에 의지하여 생기고 밖에 의지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안에 의지하여 생긴다”고 말했다.
028_0581_c_12L猶如此心,心法內依、外生諸入,以何等故依內生不依外?或作是說:依內生。
【문】평등하게 걸림 없는 그 중에 그에 의하여 안에서 생기고 밖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028_0581_c_15L問:等無㝵中依彼生內,然不依外。此義云何?
【답】마치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 것과 같다.
028_0581_c_16L答曰:猶如等無㝵,是謂內、是謂外。
【문】어찌 이것이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다면, 그와 같은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것은 이미 안에서 생기는 것이고 바깥은 아닌 것인가? 어떤 이는 “안에는 미묘한 사실이 있고 밖에는 없다.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안의 제 성품이 성취된 것이요, 바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바깥에도 또한 상ㆍ중ㆍ하가 있나니, 상ㆍ중ㆍ하란 마음과 마음 법으로부터 생긴다. 다시 파리 소리가 일으키는 귀의 인식[耳識]과 다시 힘껏 치는 북소리와 다른 것이 있는가? 어떤 이는 “안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028_0582_a_08L問:次第因緣亦不牢固,欲使彼相依生?或作是說:內是增上。
【문】차제인연(次第因緣)도 또한 견고하지 못한데 그로 하여금 서로 의지하여 생기게 하는가? 어떤 이는 “안이 곧 증가한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역시 증가함이니,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중에는 안이 증가하고 바깥이 증가함이 아니다. 이 내용은 어떠한가? 온갖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각각 증가함이 있는가? 어떤 이는 “안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조작하고 바깥이 아니니 눈썹을 그리고 눈을 점안하여 빛깔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햇다.
【문】말한 바대로 갑절이나 그리어 확대하여 보도록 하고 높은 소리로 나에게 말하되, “잘 들어라”고 하라. 어떤 이는 “안에 의지한 모든 받아들임이니 이 스님의 뜻은 ‘짓는 바가 마음과 더불어 함께 있고 식(識)은 네 요소에 의지하여 저것이 각각 수승한 모든 감관으로 충족함이 있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 성품의 의지가 미묘함이며 멀고 가까움, 취함과 버림이요, 아래에는 견고한 증가함이 없고 스님 뜻에는 식이 뒤에 있다.
028_0582_a_17L自性依微妙, 遠近及取捨, 下無牢增上,
師意識在後。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의 의지[依]와 바깥 연(緣)으로 인연에 들어 생기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으로 안에는 무너짐이 있고 밖에는 그러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이는 현재의 사실이니 마치 저 해 그림자를 보매 눈이 곧 무너짐이 있어도 해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028_0582_b_02L【문】바깥도 역시 모든 감관이 속박되는 것이 자기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어떤 이는 “안에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028_0582_b_02L問:外亦諸根縛,如自身中色香味。或作是說:內有吾我想。
【문】바깥에도 역시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 아라한은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없는데, 그로 하여금 무너지지 않게 하려 하는가? 어떤 이는 “안에 의하여 모든 받아들임[入]이 생기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가? 어떤 이는 “안에 친근함이 있게 되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문】바깥도 또한 다시 생기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어떤 이는 “제 성품이 머무는 것이요, 바깥은 그러하지 않다”고 말했다.
028_0582_b_10L問:外亦復生,如自身中色香味。或作是說:自性住者,然非外也。
【문】바깥도 역시 제 성품의 머무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존자께서는 “만일 스스로 의지한 물건이 마음과 마음 법을 전환시켜 거기에 있어서 머무른다면, 바깥과 안의 모든 받아들임인 저 모든 법이 이리저리 모든 감관의 무너짐을 내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에 모든 감관이 속박되고 조작에 의해 나라고 여김이 있다. 친근과 온갖 조작되는 바와 제 성품이 나로부터 있었네.
028_0582_b_15L現在縛諸根, 依造有吾我, 親近諸所造,
自性是我有。
사리불(舍利弗)존자는 “저 여러분의 좋은 눈이 안으로 받아들여도 무너짐이 없다. 그 빛깔이나 광명을 보더라도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눈의 인식이 없나니, 깊이 생각하는 이여,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차제연(次第緣)이 그 생각함이다”라고 말하였다.
028_0582_c_02L【답】평등함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는 “대의(大義)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028_0582_c_02L答曰:非不有等。或作是說:大義思惟。
【문】만일 대의가 없으면 어찌 식(識)이 나지 않겠는가?
028_0582_c_03L問:設無大義者,云何不生識耶?
【답】나지 않는다.
028_0582_c_04L答曰:不生。
【문】만일 채찍이나 막대로 구타하여도 그가 식을 일으키지 않는가?
問:若鞭杖捶打,彼不起識耶?
【답】대상의 힘 때문에 저 식이 곧 일어난다. 혹 일어나지 않을 적이 있나니, 무상삼매(無想三昧)나 멸진삼매(滅盡三昧)나 그 밖의 선정에 든 따위는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마음을 일으킨 자를 앞서 이미 말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에 기억한 바를 식(識)이 곧 그를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말과 생각이 그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차제에서 저 인연이 있게 되고 대의(大義)로 인해 비춰 밝힌다. 희망이 중생을 만들기도 했으며 상응함과 모든 슬기를 만들었네.
028_0582_c_15L次第有彼緣, 因大義照明, 悕望作衆生,
相應及諸智。
그것을 내어 사유(思惟)함 있는 것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차제연으로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이 내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028_0582_c_17L生彼,有思惟,有何差別?或作是說:次第緣是彼思惟,生者爲生。
【문】그는 사유를 내지 않는다. 만일 낸다면 차별이 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내지 않는다면 말한 바가 그 사유가 아니다. 저 눈의 인식이 생기게 됨이 아니니, 이는 곧 상위(相違)이다. 5사(事)도 또한 다시 그와 같은가? 어떤 이는 “저 사유에서 마음 법과 심상응행(心相應行)이 생기는데,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은 심상응행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저 마음을 내어 마음이 일어나는 법이 저 사유다”라고 말했다.
028_0583_a_02L다시 다음으로 생기는 것이란 자연으로 만들어진 법이니, 마치 불꽃과 광명이 앞뒤가 서로 인해 생기는 것과 같다. 어떻게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불꽃이 있으면 곧 광명이 있게 되고, 광명이 없으면 불꽃이 없나니, 그 중에서 불꽃이 광명으로 인해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둘 다 함께 없어진다고 할 때, 불꽃이 없어지면 광명은 없어지거나 광명은 없어져도 불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028_0583_a_11L問:二俱壞者,云何得知,炎壞則光壞,光壞炎不壞?
어떤 이는 “불꽃이 치성하면 광명이 있다는 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합해 모여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크면 광명도 크고 불꽃이 짧으면 광명도 짧다”고 말했는데 이것 역시 앞에서 이미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깨끗하지 못할 적에는 광명도 곧 깨끗하지 못하고 불꽃이 깨끗하면 광명이 또한 깨끗하다고 하는 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광명을 보는 것은 불꽃이 그 근본이 되나니, 그로 말미암아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답】광명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광명 때문에 불꽃을 찾게 되는 것이요, 불꽃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불꽃 때문에 그 광명이 있는것이 아니고 상응하여 광명이 있는 것이니, 불꽃과 광명이 가장 미묘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제각기 무너지는 모양이며 희망과 상응하는 행(行)이다. 청정한 이치를 통달한 그것과 합해 모임은 앞에서 말함과 같다.
028_0583_b_05L各各壞敗相, 悕望相應行, 達淸淨義者,
合會如前說。
마치 6식신(識身)이 반드시 과거의 자연인(自然因)에 의지함과 같다. 뜻이 어긋나지 않고 달리 반연하지 않으매 또한 그릇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한사람이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지만 6식신은 둘이 함께 일어난다. 어떤 이는 “하나의 차제연(次第緣)에 하나의 식(識)이 머무른다”고 말했다.
【문】하나의 식과 상응함에 낱낱이 식이 서로 의지함인가? 어떤 이는 “하나는 저 생각함이니, 하나의 식이 곧 상응하여 머무른다”고 말했다.
028_0583_b_11L問:一者識相應一一識相依。或作是說:一者彼思惟一識則相應住。
【문】만일 하나의 식이 상응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식인가? 어떤 이는 “하나의 감관이 하나의 식에 의해 상응하여 머무른다는 것은 하나의 식이 상응하매 낱낱 식이 머무름이다”라고 말했다. 일체 중생들이 반드시 받을 과보를 제가 지어서 받게 되는 것처럼, 거기에는 미래와 현재에 지은 바가 있다.
무슨 까닭으로 한 사람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아 다섯 갈래[五有]는 전환되지 않는가? 어떤 이는 “한 갈래[趣]의 결사(結使)가 치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 갈래에서 온갖 과보를 받는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식(識)과 함께 상응한 연후에 낱낱 식을 일으키나니, 일으켜서 지은 과보 행위가 모두 식 종자에 응한다. 이러하므로 그것을 아나니, 만일 중생이 없으면 일찍이 있지 않은데 생겨 있는 것이 곧 열반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028_0583_c_02L어떤 이는 “그대가 그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에 대해서 줄어듦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계산할 수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생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한다. 비유컨대 큰 바닷물이 한량없으므로 천 개의 병을 가지고 가서 퍼내더라도 또한 줄어듦이 없는 것처럼, 그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은 줄어듦이 없다. 만일 세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량없이 지은 바 중생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같다. 존자께서는 “어디에나 줄어듦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사실이 어떠한가?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반드시 세(世)가 있는 것이 틀림없고 사취(邪聚)가 있는 것은 사라진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그 내용은 옳지 못하니 지금에 있고 여기는 없어짐과 같다. 이와 같은 3세(世)에서 1세 안에 미래는 줄어듦만 있고 더함이 없으며, 1세 안에 과거는 더함만 있고 줄어듦이 없다.
028_0584_a_02L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는가? 과거와 미래에 그러한 수효가 있는가?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알고 만일 계산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아는가?”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는 이미 없어지고 미래는 생기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처소가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한량이 없다”고 말했다.
세존께서는 “두 법을 비추어 밝혀야 한다. 왜냐 하면 세(世)는 처소가 없고 사실과 상응하는 인연으로 생기나니, 이미 생김과 곧 무너짐이 그 사실이다중생이 늘아나고 줄어드는 것에 대해 성인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느 누구도 계산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래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고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억제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범지(梵志)를 억제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인데 중생들은 형상을 버리지 못하고 사물을 숭상한다. 만일 적정삼매(寂靜三昧)에 들면 한량없고 가없는 복이 되나 그는 다 깨끗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지금에 제2선(禪)에 들면 그 때에는 눈으로 누런 것을 다 볼 것이니, 그러면 한동안 제 모양[自相]이 무너지는가? 어떤 이는 “깨끗함이 저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028_0584_a_15L問:如今入第二禪,是時眼盡見黃,是故一時自相壞敗?或作是說:淨是彼緣。
【문】누가 그런 삼매가 없는가?
問:誰無此三昧?
【답】생각함에 빈틈이 없을 때에 그러한 삼매가 있다.
028_0584_a_18L答曰:思惟無空缺處有是三昧。
【문】일체 삼매도 또한 빈틈이 없는데, 일체 삼매를 적정삼매로 보려고 하는가?
028_0584_a_19L問:一切三昧亦無空缺處處,欲使一切三昧作寂靜三昧耶?
【답】일체 제 모양으로 서로 느낌이 아니요, 일체 한량없는 모양을 만듦도 아니다.만일 제 모양으로 한량없는 모양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행인의 삼매[行人三昧]라고 한다.
028_0584_a_20L答曰:非一切自相相受,非一切造無量相。若自相受無量相者,彼是行人三昧。
028_0584_b_02L존자께서는 “깨끗함이 그 인연이니 그가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불타는 섶으로 인연하여 연기가 일어남과 같다. 모든 인연은 각기 서로 의지하여 깨끗함이 생기나니, 그와 같이 모든 상응함과 모든 인연이 일어나게 된다. 마땅히 이러한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다. 저 삼매를 불순하다 말해야 하고 순하다 말해야 하는데 위의 5사(事)와 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존자께서는 “마땅히 불순함이 아니고 차츰차츰 순함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하셨다. 먹는 것을 사람이라고 관찰해야 한다지만 그러나 먹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문】만일 스스로 안다면 나라는 것이 그 인연인가? 다시 저 어리석게 관찰하는 이는 이곳에서 먹고 그를 바라고 찾아 구하나니, 저 어리석게 관찰함을 마땅히 “순함이다”라고 말해야 되는지, 마땅히 불순하다고 말해야 되는지, 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맛에 순응하여 애착하는 것이 그 상대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골쇄(骨鎖)에 의하여 약간의 생각을 일으켰다면 내 몸도 골쇄로 된 것이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답】그것 역시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그 반연이니 그는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라고 말했다.
028_0584_b_17L答曰:此亦骨瑣,皮肉所纏。或作是說:自身是緣,此骨瑣皮肉所纏。
【문】저 생각은 몸이 아니다. 만일 골쇄라는 생각으로 관찰한다면 자신에 반연함이거늘, 푸른 것으로 하여금 누런 빛깔에 반연하게 하겠는가? 다시 그 내용인 생각은 저 자신에 반연했는가? 분별과 희망인 저 모양을 마땅히 순함이라 말하고 마땅히 불순함이라고 말함은 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께서는 “마땅히 순함이라고 말함은 그 상대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