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648_a_01L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7권
028_0648_a_01L尊婆須蜜菩薩所集論卷第七


존바수밀(尊婆須蜜) 지음
승가발징(僧伽跋澄) 등 한역
변각성 번역
028_0648_a_02L尊婆須蜜造
符秦罽賓三藏僧伽跋澄等 譯


8. 결사건도(結使揵度)
028_0648_a_04L結使揵度第八

뒤바뀜을 따른다고 말하는가, 뒤바뀜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혹 뒤바뀜을 따르기도 하고 혹 뒤바뀜을 따르지 않기도 하나니 네가지 뒤바뀜[四顚倒]은 뒤바뀜을 따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욕심ㆍ거만ㆍ성냄ㆍ삿된 소견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028_0648_a_05L垢穢當言隨顚倒當言不隨顚倒作是說或隨顚倒或不隨顚倒四顚倒當言隨顚倒欲慢瞋恚邪見當言不隨顚倒
【문】어떻게 실답지 않게 물드는가? 또한 실답게 저것을 관찰하여 곧 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그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는다.
【답】쌓아 모인 것에 대해서 곧 그것이 제 모양[自相]이 아니라고 안다. 만일 제 모양을 관찰하여 알면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뜻이 있게 되나니 제 모양에 대해서 뜻이 회전하지 않음이 없다.
028_0648_a_09L云何不如實染耶亦說如實觀彼便知是故不與相應答曰聚便可知亦非自相若觀自相知者皆有厭患意無有自相意不迴轉
【문】쌓아 모인 것대로 알 수가 있나니 그 쌓은 모임에는 곧 욕심이 있다. 저 뒤바뀜 관찰하기를 제 모양 관찰함과 같이 하더라도 곧 물들고 집착하여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제 모양에 대해 뜻이 회전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이는 “뒤바뀜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028_0648_a_12L如集聚可知是集聚則有欲也觀彼顚倒如自相觀便染著無有不染著無有自相意不迴轉或作是說當言隨顚倒與癡相應
【문】어리석음이 어리석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그 어리석음이 뒤바뀜을 따른다는 것인가?
어떤 이는 “뒤바뀜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뒤바뀜이 만일 뒤바뀜을 따른다면 그것은 곧 영영 없어지지 않나니 뒤바뀜으로써 도로 뒤바뀜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48_a_16L愚癡不與愚癡相應欲使愚癡隨顚倒耶或作是說當言不隨顚倒顚倒設當隨顚倒者彼則不斷滅非以顚倒還滅顚倒
【문】착함[善]과 무기(無記)인 마음과 마음의 법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나니 그것은 없앨 수가 있다. 더러운 때도 역시 그와 같은가?
028_0648_a_19L如善無記心心法不隨顚倒彼亦可垢亦如是
【답】착함과 무기인 마음과 마음의 법은 도로 계속하여 전과 같이 되나 결박만은 영영 없애버릴 수 있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뒤바뀜이라고 말해야 한다.
028_0648_a_21L答曰善無記心心法還續如故結可使永無是故彼當言顚
028_0648_b_02L또 뒤바뀜을 따르지 않고 삿된 뜻과 사(使)와 서로 상응한다. 그와 더불어 서로 순응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고 그것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 하면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은 바로 뒤바뀜이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어서 그를 능히 없앨 리가 없고 실지 ‘나’의 몸이라고 한 소견을 돌이키는 이가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뜻은 깨끗한 모양이라서 깨끗하지 못한 것을 돌이킨다”고 말했다.
028_0648_b_02L復次當言不隨顚倒與邪志與使相應不與相順生不成就彼不淨成以何等故謂身見是顚倒不淨無能有害者無有實我身見迴轉或作是說意有淨相不淨迴轉
【답】깨끗한 모양이 있지 않다. 거기에는 혹 깨끗함이 있기도 하고, 혹 깨끗하지 못한 것이 있기도 하다.
028_0648_b_06L答曰無有淨相彼或有淨或不淨
【문】만일 깨끗함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뒤바뀜이 있다. 그것을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하며, 혹은 항상함이라고 말하나니 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028_0648_b_07L若有淨彼有顚倒彼或曰有常或曰常欲使無常相不成就耶
【답】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되지 않는다. 설령 항상하여 항상함이 없는 모양이 성립되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마땅히 그런 모양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양이 아니므로 항상함이 없는 모양이 아니니 그러므로 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소견이 뒤바뀐 것은 어리석음과 상응하고 깨끗함이 아니나 뒤바뀜이 아닌 것은 지혜와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했다.
028_0648_b_09L答曰無常相不成就設常無常相不成就者彼亦當有相然非相是故無常相不成就或作是見顚倒與愚癡相應不淨非顚倒與智相應
【문】어리석음은 어리석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나니 어리석음을 뒤바뀜이 아니라고 하려는 것인가? 지혜는 지혜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나니 지혜를 뒤바뀜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바로 더러운 때이니 때는 뒤바뀜과 함께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뒤바뀜이고 깨끗함이 아니다. 지혜의 힘으로 인해서 지혜와 지혜 아닌 것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깨끗함이 아니고 뒤바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48_b_13L愚癡不與愚癡相應使愚癡非顚倒耶智不與智相應使智顚倒耶或作是說身見是垢與顚倒相隨是故身見顚倒不淨智之功智不智不隨顚倒是故不淨非顚倒
【문】더러운 때와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 법[心法]은 더러운 때에 집착함이 아니다. 그것을 뒤바뀜이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가? 지혜와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법은 지혜가 아니다. 그것이 뒤바뀜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가?
028_0648_b_18L垢相應心心法然非垢著欲使彼隨顚倒耶智相應心心法然非智欲使彼隨顚倒耶
또 그 종류와 같이 깨끗하지 않는 모양이 함께 물들거나 집착하고 모든 가리움[陰]의 제 모양으로 하여금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있게 하지 않는다. 가리움은 내가 없는 것이 성립되는 것처럼, 그 종류와 같이 깨끗함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뒤바뀜이고 깨끗함 아닌 것이 아니다. 모든 소견[見]은 62견(見)을 포섭하나니 62견이 모든 소견을 포섭함이 된다.
028_0648_b_20L復次如其種不淨相共染著不可使諸陰自相有所染著如陰無我成就如其種類淨成就也是故身見顚倒然非不淨一切諸見攝六十二見爲六十二見攝一切諸見
028_0648_c_02L어떤 이는 “온갖 모든 소견이 62견을 포섭하나니 62견이 소견을 포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소견이 62견을 포섭하고 62견이 또한 온갖 소견을 포섭한다”고 말했다.
028_0648_c_02L或作是說一切諸見攝六十二見爲六十二見攝一切諸見或作是說一切諸見攝六十二見十二見亦攝一切諸見
【문】살비(薩毘)범지가 말한 바와 같이 셋과 나아가 36으로서 가지가지로 다르다고 하니, 어찌하여 그것은 모든 소견이 아닌가?
028_0648_c_05L如所說薩毘梵志三乃至三十六種種異云何彼非諸見耶
【답】그 일은 그와 같으니 둘과 또한 60이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모든 소견은 62견을 포섭하고 62견은 모든 소견을 포섭하지 않는다. 무엇을 포섭하지 않느냐 하면 저 열반이 열반과 함께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다섯 가지 삿된 소견[五邪見]에 이르러도 한 가지 삿된 소견도 없다”고 말했다.
028_0648_c_07L答曰此事如是二及六十亦復如是或作是說一切諸見攝六十二見非六十二見攝一切諸見不攝何等彼涅槃言無涅槃俱生者至五邪見無一邪見
또 62견에서 생긴 소견을 마땅히 포섭하는 바라고 말해야 한다.
살비(薩毘)가 말한 바와 같으니, “세 가지에서 육십 가지까지 이르나니 사문은 지혜에 의하고 지혜상(相)에 의하며 글자에 의하여 생각함에 모든 때[垢]가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028_0648_c_11L復次六十二見所生見當言所攝也如薩毘所說三乃至六十沙門依智依智慧相依字想諸垢盡
어떤 것을 예순세 가지 소견이라고 하는가?
028_0648_c_14L云何六十三見
어떤 이는 “예순세 가지 소견은 있지 않고 이 두 소견만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열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삿된 소견이니 그를 예순세 가지 소견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도(道)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곧 삿된 소견이니 그를 예순세 가지 삿된 소견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또 소견을 곧 예순세 가지 삿된 소견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다섯 가지 소견은 몸에 대해 망설이는 소견ㆍ삿된 소견ㆍ소견의 착각ㆍ계율에 대한 착각, 원인 없이 내는 소견이다.
028_0648_c_15L或作是說無有六十三見有此二見或作是說言無涅槃者是邪見是謂六十三見或作是說言無道者是邪見是謂六十三見復次所見是謂六十三見如是五邪見豫見邪見見盜戒盜無因所生見
어떤 소견에 포섭되어 죽을 때까지도 그 소견을 버리지 않으니, 어떤 소견에 포섭이 된 것인가?
어떤 이는 “원인 없이 내는 소견에서는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삿된 소견은 집제(集諦)에서 끊는 바가 된다. 다시 죽을 때까지도 버리지 않는 소견에서는 짓는 것이 없는 것을 짓는 것이 있다고 말하나니 그는 계율에 대한 착각인지라 고제(苦諦)에서 끊어야 한다.
028_0648_c_20L何等見所攝至死不捨見爲何等見所攝或作是說無因所生見言有所是邪見習諦所斷復有至死不捨無作言有作此是戒盜苦諦所斷
028_0649_a_02L또 원인 없이 나는 소견은 없다는 소견과 있다는 소견에 포섭되며 죽을 때가지도 버리지 않는 소견은 있다는 소견에 포섭된다고 말해야 하는가?
무슨 까닭으로 견사(見使)가 이미 없어지면 마음과 상응하는 사(使)가 다시 나게 되는가? 그러한 인연이 있지 않은가?
어떤 이는 “인연이란 결사(結使)가 곧 없어지는 인연이니 없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남아 있고 없어지면 다시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48_c_24L復次無因所生見無有見有見所攝至死不捨見者當言有見所攝何等見使已盡心相應使更生耶無有因緣或作是說因緣者結使便因緣未盡有餘盡不復生
【문】그와 같은 진리[諦]와 무루연(無漏緣)은 결사가 없어짐이 있는 것이요, 없어지지 않는 것은 연이 다하는 인연인가?
【답】연이 이미 다하여 남아 있지 않으면 그를 사라짐이라고 말한다.
028_0649_a_06L如是諦無漏緣結使有盡不盡者緣盡因答曰緣已盡無餘是謂滅也
그 연은 모든 사(使)와 같지 아니하여 사가 다하지 않더라도 연은 곧 다하니 그러므로 연이 아니며 그러므로 결사가 곧 없어진다.
어떤 이는 “항상 상응하여 상응하지 않는 때가 없다”고 말했다.
028_0649_a_08L緣不同諸使未盡緣便盡是故非緣是故結使便盡也或作是說常相應無有不相應時
【문】인연이 아닌데, 다시 다음에 혹 저 인연 아닌 것이 있기도 하는가?
어떤 이는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연이다. 또 그 연은 다시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하면 다시 나지 않는다.
028_0649_a_11L非因緣復次或有彼不緣或作是說未盡彼卽是緣以此緣更不復生復次盡不復生
【문】만일 유루(有漏)에 인연하여 모든 결(結)이 없어지면 자주자주 일어났던 저 연(緣)은 다시 생기지 않고 사라지거나 생기지도 않나니 무루심(無漏心)을 곧 저 연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결사가 이리저리 결사를 낸 것인가?
어떤 이는 “저 상응함에는 생기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사라지기도 하나, 그 연과 같지 아니하여, 이미 다하여 각기 흩어지면 한 곳이 아니고 저 마음에 사(使)가 있더라도 그 연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028_0649_a_13L若緣有漏諸結使盡數數彼緣不復更生不滅亦不生欲使無漏心是彼緣耶結使轉生結使或作是說彼相應一生一住一滅不如其緣已盡各散不一處彼心有使不如其緣
【문】저 마음이 다하지 아니하면 모든 상응함인 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다하기도 하여 그 연(緣)과 같지 않은데, 그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은 곧 그 연인가? 결사는 결사의 연이 아닌가?
028_0649_a_18L心未盡諸相應使一起一住一盡不如其緣欲使不斷者是其緣耶結使非結使緣也
028_0649_b_02L어떤 이는 “모든 상응함인 사가 마음과 더불어 함께 머물러 그 연과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 상응함인 사가 이미 없어진다”고 하니 저 마음에 사가 있으매 그 연과 같지 않음은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모든 상응함인 사가 마음에 물들어 집착하면 그 연과 같지 않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모든 상응함인 사를 이미 다하면 저 마음에 사가 있더라도 그 연(緣)과 같지 않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028_0649_a_21L或作是說諸相應使與心共住不如其緣是故已盡是相應使彼心有使不如其緣此亦如上所或作是說諸相應使染著于心不如其緣是故已盡相應結使彼心有使不如其緣此亦如上所說
어떤 이는 “상응함인 사(使)란 저 마음이 물들고 더럽혀 그 연과 같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응함인 사를 이미 없앤다”고 말했다. 저 마음에 사가 있으면 그 연과 같이 아니함은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설령 저 연과 같다면 저 마음에 사가 있고 또한 무루심(無漏心)이 사에 끌릴 때에는 거기에 곧 사가 있게 됨을 본다.
또 모든 상응함인 사를 저 마음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없어졌거나 없어지지 않았거나 세력이 있는 왕에게는 모든 욕구가 저절로 이루어짐과 같다.
028_0649_b_03L或作是相應使者彼心染污不如其緣故已盡諸相應使彼心有使不如其此亦如上說復次設當如彼緣者彼心有使亦見無漏心緣使彼則有使復次諸相應使當言彼心有使也若盡若不盡如力勢王所欲自至
무슨 까닭으로 욕계(欲界)에 상응하는 삿된 소견을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이라고 말하는가? 그런데 저 세계에서 부리는 것은 아닌가?
어떤 이는 “제 세계에서 부리는 것은 딴 세계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028_0649_b_09L何等故欲界相應邪見謂色無色界然非於彼界所使或作是說自界所使不干餘界
【문】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 어찌하여 딴 세계와 상관이 없는가? 설령 욕계에서 딴 세계의 것을 지었다면 유루계(有漏界)에서 저절로 있는 세계[有界]를 지은 것이라고 여기려는 것인가? 삿된 소견 때문에 저 세계가 또한 사에서 사를 받은 것인가?
어떤 이는 “저 세계는 거만이 적어서 차츰 떠나버리나니 그러므로 저 세계는 사에서 부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49_b_12L此亦是我疑何以故不干餘界設於欲界造餘界者使有漏界造自有界邪見故彼界亦使所使或作是說彼界少慢漸去離是故彼界非使所使
【문】만일 떠나버린다면 제 세계에 있어서도 또한 떠나버릴 것이니 그러므로 저 세계가 또한 사에 사를 받는 것이 된다.
어떤 이는 “저 견해를 가지고 의심을 두지 말 것이니, 또한 저 세계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49_b_16L若去離者自界中亦當去離是故自界亦爲使所使或作是說非以彼見有所疑不緣彼界
【문】어찌하여 저가 있는데 이런 설법이 없는가?
【답】있다. 저가 만일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고 좋은 이익이 없다.
028_0649_b_19L云何彼有無此說法耶答曰彼若以此說使說者此非其義無長益
【문】괴로움이 없으니 그 또한 생각함이 있거나 말한 바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알고서 없다고 말하나니 만일 알고서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의 지혜[苦智]가 아니겠는가? 어찌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알지 못하거나 아는 것이 없다면 어찌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두 그러한 사실이 없다.
028_0649_b_21L無有苦惱彼亦不作是念有所說或作是說知而言無設當知而言無者此非苦智耶云何言無若不知無知云何言無是故盡爾所事
028_0649_c_02L【문】알고서 없다고 말하거나 알지 못하고서 없다고 말한다. 만일 아는 것이 없거나 알고서 없다고 말한다면 알지 못하고서 어찌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없다.
또 연(緣)의 사에서 사를 당하는 바이다. 왜냐 하면 저것은 사에게 사를 받은 바가 아니다.
또 저 소견과 한계는 일정한 자리가 없고 온갖 괴로움이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나니 욕계로 하여금 그 순서를 뛰어넘게 하려고 저 다하지 않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후에 욕계와 상응한다.
028_0649_c_02L知而言無不知而言無無知知而言無者若不知云何言無是故無也復次緣使所使何以故不爲使所使復次彼見界無定處切有苦而言無欲使欲界越次彼謂不盡然後與欲界相應
무슨 까닭으로 열반의 삿된 소견에 따라 열반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저 사에게 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저것에는 이러한 사가 없다”고 말했다.
028_0649_c_07L以何等故涅槃邪見言無涅槃然不於彼使所使或作是說彼不有此使
저것을 능히 비방할 이가 없는데 비방하는 것은 열반을 반연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비방하는 말은 열반과 거리가 머나니 그러므로 저것에 부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49_c_09L無能誹謗彼者欲使誹謗緣涅槃耶或作是誹謗之言去涅槃遠是故不於彼所使
【문】유루법도 또한 비방을 떠났나니 그러므로 유루(有漏)도 또한 사에게 사를 받는 바가 된다.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비방으로 말한 바는 또한 본질과 다르지 않으면서 그러한 비방이 있는 것이다.
또 만일 사에 반연하더라도 부림에게 사를 당하지 않으며, 음(陰)으로 지니어 그 안에 들어가더라도 그는 태어날 곳이 없다고 본다.
이미 태어나는 바가 없는데 어찌하여 열반으로부터 사를 받는 바가 없으며, 열반안에서는 성내는 것이 없는가?
어떤 이는 “그는 성내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49_c_12L有漏之法亦去離誹謗是故有漏亦爲使所使此亦如上所說謗所說亦如本無異有是誹謗復次若緣使不爲使所使陰持入中彼見無生處所已有所生何以不爲涅槃所使以何等故涅槃中無有瞋恚作是說此非瞋恚境界
【문】저 비방하는 경지는 비방으로 하여금 열반에 반연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유루법은 곧 성냄이 있고 열반이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열반에 반연하면 성냄이 있지 않다”고 말했다.
028_0649_c_18L彼誹謗境欲使誹謗非緣涅槃耶或作是說有漏之法便有瞋恚無是涅槃是故緣涅槃無有瞋恚
【문】유루법에는 곧 성냄이 있고 무루(無漏)는 곧 열반이니 성냄은 열반의 연(緣)이 아니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방편으로 중생을 버리게 되면 곧 성냄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열반은 중생의 교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열반에 반연하면 성냄이 있지 않다”고 말했다.
028_0649_c_21L有漏之法便有瞋恚無漏是涅槃欲使瞋恚非涅槃緣耶或作是說以方便捨衆生便有瞋恚起然涅槃非衆生之教是故緣涅槃無有瞋恚
028_0650_a_02L【문】유루법은 온갖 수효 내에서 곧 이름이 생기는 일이 있는가?
또 짓는 것이 없는 모양에는 빨리 성냄이 일어난다. 그러나 열반은 짓는 것 없는 일이니 그러므로 열반에는 성내는 것이 없다. 만일 “내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한다면, 열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028_0650_a_02L有漏之法衆數中便有名生復次無造之相速有瞋恚然涅槃無造之事是故涅槃中無有瞋恚若作是說我必墮泥犂中須涅槃
저 마음은 어떤 결(結)과 상응하는가?
어떤 이는 “성냄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028_0650_a_06L彼心與何結相應或作是說與瞋恚相應
【문】열반에 반연해도 성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저 더러움과 상응함은 무명(無明)의 수(數)에 드는 것이어서 그는 열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저 마음은 애욕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해야 한다.
028_0650_a_07L緣涅槃有瞋恚耶作是說彼染相應無明之數彼不知涅槃復次彼心當言與愛相應
또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욕계 안에 환희락천(歡喜樂天)이 있다”고 경에서 널리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찌하여 목숨이 마치면 다시 몸을 받아서 곧 스스로 “내가 본시 환희락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여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본래 환희락천이었다”고 하는가?
어떤 이는 “거기에서 물러나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그는 욕계에서 나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028_0650_a_09L又世尊言於是比丘欲界之中有歡喜樂天契經句廣說彼云何命終更受形便自憶我本爲歡喜樂天便作是念我本爲歡喜天或作是說於彼退轉復作是念彼不於欲界起吾我
【문】욕계에 태어나 숙명(宿命)을 알고서, “나는 누구의 몸이었다”라고 하여 나라는 생각을 그와 같이 일으키는데, 그를 물러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또 온갖 이름 물질[名色]과 상응하는 결사는 욕계의 인연이다. 그는 곧 잘 기억함 있으나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여 태어날 때에 벌써 서원(誓願)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나라는 소견의 생각으로 그는 아주 없다고 보지 아니하며,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옛 부터 범부로서 본래 환희락천 사람이었다”고 한다.
028_0650_a_15L生欲界中懷宿命所更我本某甲身如是起吾我想欲使彼謂退轉復次諸所有名色相應結使欲界因緣彼則有强記復作是念尋生之時審有誓願復次我見之想不觀斷滅復作是念等故凡夫本爲歡樂天
무슨 까닭으로 범부 사람들이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관찰하지 아니하여 욕계와 상응하는 몸이라고 보는 소견[身見]과 망설이는 소견들을 아주 없음[斷滅]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깨끗하지 않다는 관념으로 탐욕을 없애고 현재 하나의 괴로움을 뽑아버리며 또한 사유하여 끊는다”고 말했다.
028_0650_a_20L何等故凡夫人不於苦觀苦欲界相應身見猶豫見謂之斷滅耶或作是不淨滅貪欲現拔一苦亦用思惟
028_0650_b_02L【문】4제(諦)로 끊는 것은 사유가 아닌가? 이 두 가지 끊는 바가 하나의 종류인가? 4제로 끊는 바가 없어졌어도 사유로 끊는 것만은 없어지지 않고 버려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가지가지 결이 이미 다하기도 하고 영원히 다하기도 하고 차츰차츰 다하기도 하는데, 저 몸이라는 소견[身見]은 이미 다하나 아주 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0_a_24L四諦所斷非思惟耶此二種所斷一種乎四諦所斷以盡若思惟所斷不盡不捨或作是說種種結已盡永盡漸漸盡於彼身見已盡不究竟
【문】만일 차츰차츰 결이 다한다면 다시는 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 가지 몸이라고 하는 소견[三種身見]이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을 맺어 생기게 한다. 사를 다하여 몸이라고 하는 소견을 없애는 방법에는 곧 비추는 바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로관(惡露觀)을 한다 해도 그 몸이라고 하는 견사는 곧 나게 된다.
028_0650_b_05L若漸漸結盡者更亦當不生說有三種身見結生身見使盡身見處所之法便有所照於彼作惡露觀如是身見使便生
또 10상법(想法)을 내는 종류에서는 곧 이렇게 말하나니 그와 같이 뜻으로 끊을 바이고 중간에서 성현의 도를 가지고 결사(結使)를 능히 끊는 것이 아니다.
028_0650_b_08L復次生十想法所便作是語如是意所斷不於中閒賢聖道能斷結使
뒤바뀜과 깨끗하지 않다는 소견과
살비(薩毘)와 다섯 소견과 계율이며
두 가지와 성냄이며
지옥과 덕의 뿌리와 괴로움이다.
028_0650_b_10L顚倒不淨見
薩毘五見戒
二種及瞋恚
泥梨德本苦
무슨 까닭으로 욕계와 상응하는 몸이라고 하는 소견과 망설이는 소견[猶豫見]을 무기(無記)라 이르고 착함 아닌 것[不善:惡]이 아니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큰 몸과 입과 뜻의 행위로 능히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50_b_12L以何等故欲界相應身見猶豫見之無記然非不善耶或作是說彼非大身口意行所能造作
【문】또한 그 밖의 진리를 보는 것으로 끊을 결이 몸과 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무기라고 말하려 하는가?
어떤 이는 “저 몸에는 우열이 있다”고 말했다.
028_0650_b_15L亦有餘見諦所斷結由身口生欲使彼言無記或作是說彼身有優劣
【문】어떻게 그 우열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저 결이 증가할 때에도 나쁜 갈래에는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0_b_17L云何得知有優劣或作是說彼結長益時不生惡趣
【문】그는 반드시 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나쁜 갈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가?
어떤 이는 “착하지 않음에는 과보가 있으나 결에는 과보가 없나니 그러므로 그것이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0_b_19L彼未必不善乃至入惡趣或作是說不善有報結無有報是故此無記
028_0650_c_02L【문】그가 몸 받는 때를 본다면 어찌하여 과보가 없다 말하는가?
또 설령 그가 그러한 뒤바뀐 소견을 갖더라도 그것이 있을 곳이 없다. 어찌하여 착함 아닌 것이 없느냐 하면 그가 곧 그러한 소견이 있더라도 과보가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착함이 아니다. 어찌하여 때[垢]가 있으면 좋지 못한 과보를 받는가? 그러므로 무기(無記)라고 말한 사실은 옳지 못하다. 세존께서 또한 “그와 같은 비구는 어리석은 것이니 곧 착함 아닌 뿌리[不善根]이다”라고 말씀하셨다.
028_0650_b_21L如彼見受形時云何無有復次設彼作是顚倒見無有安處云何無有不善彼便當有彼見無有是故不善云何有垢受不善報故無記是事不然世尊亦說如是比愚癡者卽不善根
만일 무기라고 말한다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사(使)를 무기라 말하고 착함 아닌 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그것은 몸과 입으로 짓는 짓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가 몸을 받을 적에 우열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는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는 과보가 있지 않다”고 말하니 이것들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8_0650_c_03L若當言無記者此事不然以何等故色無色界相應使謂之無記然非不善或作是說非造身口行或作是說彼受形時無優劣或作是說彼不受果報或作是彼無有報此亦如上所說
또 모든 욕망에 집착한 이는 그것이 착함이 아닌 것인가? 그는 뜻이 있어도 나쁜 과보를 받지 않으며, 뒤바뀜을 받지 않으며, 회전하지 않으며, 편안하지 않다. 그는 또한 그러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떠나게 된다. 만일 결(結)이 착함 아닌 것이 아니라면 어찌 지금에 착함이 아닌가? 결 또한 행(行)으로 말미암아 증가한다. 그러므로 무기라고 말하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028_0650_c_08L復次諸欲著者彼不善耶彼則有是意不受惡報彼不受顚倒彼不迴轉彼不安彼亦不然是故當離若結非非善云何今不善耶結亦由行增是故言無記者是事不然
마음을 가지고 4성제(聖諦)를 비방하면 어찌 그 마음이 물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하나의 마음에서 능히 4제(諦)로 하여금 약간의 모양이 있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저 마음은 인연으로 모인 것이다.
028_0650_c_13L所可用心誹謗四賢聖諦者云何彼心因染義耶作是說非可以一心能使四諦有若干相復次彼心因緣集聚
【문】4제가 다르고 인연 또한 다르다면 곧 4제를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4제와 인연이 같다면 마음이 곧 4제를 반연한 것이다.
이것 역시 위에서 답한 것과 같아서 다름이 없나니 말한 바가 그 이치에 순응하지 못한다.
028_0650_c_16L若四諦因緣亦異者則不誹謗四諦也四諦因緣同心則緣四諦也此亦如上荅無異所說不順其理
또 마음으로 비방하지 않을 것이니, 삿된 소견을 가지고 비방한 것이다. 첫걸음이 괴로움[苦諦]의 자리에서 시작하나니 괴로움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없애는 진리[盡諦]도 없으며 없애는 도(道)도 없다. 각기 자신들이 괴로움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 것이니 거기에는 얻을 만한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028_0650_c_19L復次非心誹謗用邪見誹謗也一步始苦諦處非因苦諦無有盡諦盡無有道自求苦諦處所此之謂也彼無有義可從得者
028_0651_a_02L무슨 까닭으로 때[垢]가 없는 사람이 드디어 나아가 결을 끊는데 욕계와 상응하는 결사(結使)와 생각으로 끊을 바[思惟所斷:思惑]를 먼저 없앤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게 되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성현의 도를 차츰차츰 내는 길이니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ㆍ무색계의 일을 끝낸다”고 말했다.
028_0650_c_23L以何等故無垢人遂進斷欲界相應結使及思惟所斷先盡然後色無色界相應或作是說此漸生賢聖道先辨欲界事後色無色界
【문】성현의 도로 하여금 나게 하여 먼저 욕계의 일을 끝마치고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끝내려는 것인가?
028_0651_a_03L欲使賢聖道生先辨欲界事後色後無色
어떤 이는 “욕계의 결사는 거칠고 색계와 상응하는 결사는 미세하나니 그러므로 먼저 욕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고 뒤에 색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고 그 다음에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계와 상응하는 것은 가깝고 색계와 상응하는 것은 멀며, 무색계와 상응하는 것은 더욱 멀다”고 말했다.
028_0651_a_05L或作是說欲界結使麤界相應使細是故先斷欲界相應結後色界相應後無色界相應或作是欲界相應近色界相應遠無色界相應轉遠
어떤 이는 “상대가 있는 자리에서는 곧 앞의 결이 먼저 없어지나니 욕계와 상응하는 것이 먼저 앞에 있고 뒤에 색계와 무색계가 상응한다. 그러므로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먼저 없어지고 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뒤에 없어지며 또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뒤에 없어진다고 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8_0651_a_09L或作是說有對之處卽前滅結欲界相應先在前後色無色界相應也是故欲界相應結先滅後色界相應後無色界相應此亦如上所說
또 저 도가 차츰 증가하매 상대함이 있는 것이 곧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있다. 무슨 까닭으로 생각으로 끊을 결[思惟所斷結]이 차츰차츰 끊어지지 않느냐 하면 마땅히 이러한 관찰을 할 것이니 색계와 무색계를 지혜로 관찰할 줄을 알지 못하면 거기에는 더욱 자라나는 길과 또한 차츰 지니거나 믿고 받드는 법이 없으리니 알거나 잘 알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괴로움을 방편으로 관찰하는 것이 없다.
028_0651_a_12L復次彼道漸漸益有對卽滅後則有是也何以故思惟所斷結不漸漸斷當作是觀未知智觀色無色界不有長益齊限亦有展轉持信奉法以未知忍知是故彼無苦以方便觀
무슨 까닭으로 욕계와 상응하는 행(行)과 괴로움 등을 생각하는 것으로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을 얻게 되고 색과 상응하는 것이거나 무색계와 상응하는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성현의 도를 차츰차츰 내는 길이니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그와 동일하게 끝낸다”고 말했다.
028_0651_a_17L以何等故欲界相應行思惟苦等越次取證然非色界相應無色界相應或作是說此漸生賢聖道先辨欲界後色無色界同
028_0651_b_02L【문】그가 생각하는 도가 나도록 하는데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끝내는 등,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괴로움과 거친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속박된다는 것도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권장하고 가르치는 방편만은 나이 많은 이거나 그것을 비록 거역하는 사람이라도 하는 일과 온갖 지어감에 대해서 모두 버려서 괴로움의 근본을 이미 없앤다.
028_0651_a_21L彼欲思惟道生先辨欲界事後色無色界等此亦如上所說此苦麤以是縛著此亦如上所說復次此勸教方便諸耆年雖能逆是者於此造事一切諸行捐棄盡苦根本
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상응하는 행(行)을 괴로움에서 괴로움을 생각하게 되는가?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욕계와 상응하지 않고 색계와 상응하는가?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괴로움과 거친 것에 대해서는 거기에 친근하여 그것에 속박되고 집착한다
028_0651_b_03L以何等故色界相應行於苦思苦不還阿羅漢果然非欲界相色界相應此亦如上所說此苦麤親近此閒以是縛著
또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여 속박되거나 집착하는 것을 마땅히 욕심이 없어졌다고 말해야겠다. 괴로움의 행(行)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을 생각하려고 함은 마치 자기의 밭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밭에 묶은 풀을 제거함과 같나니, 그것을 보건대 역시 그와 같다.
028_0651_b_06L復次作無吾我所可縛著當言盡無欲也欲使苦行不思惟更思惟餘苦耶如自捨田除他田中草穢觀彼亦如是
자못 일심(一心)에서 모든 법이 다 사라졌으나 지혜로 불타는 몸은 증득함을 받지 않는가? 혹 몸은 증득함을 받고 지혜로 돌아서지 않는가? 혹 지혜에 돌아가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는가? 혹 지혜로 돌아가지 않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지 않는가?
028_0651_b_09L頗有一心諸法滅盡還智慧然身不受證耶或身受證不還智慧耶或還智慧身亦受證耶或不還智慧身亦不受證
어떤 이는 “만일 다하는 법인[盡法忍]을 얻을 적에는 욕계와 상응하는 진제(盡諦)와 도제(道諦)와 생각으로 끊을 결[思惟所斷結]이 없어지리니, 그 때에는 지혜로 돌아가고 몸은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몸은 증득함을 받고 지혜로 돌아가지 않는다. 욕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지혜로 돌아가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진제(盡諦:滅諦)와 도제(道諦)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거나 생각함[思惑]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또한 지혜로 돌아가지 않고 또한 몸소 증득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1_b_13L或作是說若得盡法忍時欲界相應盡諦道諦思惟所斷結盡爾時還智慧然身不受證色無色界相應苦諦習諦所斷結盡爾時身受證不還智慧欲界相應苦諦習諦所斷結盡爾時還智慧身亦受證色無色相應盡諦道諦所斷結盡思惟所斷結盡亦不還智慧亦不身證
【문】만일 진법인(盡法忍)이 생기고 진제에서 끊을 결이 다하지 못하면 또한 그 종류가 아니겠는가?
【답】생기는 것은 곧 사라지고 이미 사라지면 생기지 않는다. 만일 생긴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곧 그 종류가 아니다.
028_0651_b_20L若盡法忍生盡諦所斷結未盡亦非其類答曰生者便滅已滅不生若生者不滅則非其類
【문】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은 이미 없어진다는 관찰을 해야 된다는 것인가?
028_0651_b_23L欲使便觀生盡者已盡作是觀
028_0651_c_02L어떤 이는 “진법인(盡法忍)이 일어날 때에 욕계와 상응하는 결과 도제(道諦)와 상응하는 것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지혜로 돌아가고 몸은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몸은 증득함을 받고 지혜에 돌아가지 않는다. 욕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와 사라짐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지혜에 돌아가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또한 지혜에 돌아가지 않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1_b_24L或作是說盡法忍起時欲界相應道諦相應所斷結盡還智慧身不受證色無色界相應苦諦習諦所斷結盡身受證不還智慧欲界相應苦諦習諦盡諦所斷結盡爾時還智慧身亦受證色無色相應盡諦道諦所斷結盡亦不還智慧身亦不受證
또 진법지(盡法智:火法智)를 얻을 적에 또한 그와 같아서 다름이 없나니 2분(分)이 함께 다하지 않는가?
자못 상응하는 느낌은 애결(愛結)과 상응하고, 견결(見結)과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028_0651_c_07L復次得盡法智時亦如是無異二分俱不盡頗見相應痛愛結相應非見結相應耶
어떤 이는 “혹 욕계에서 애욕이 사라지는 등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한다. 쌓임이 이미 생겼으나 진지(盡智)는 생기지 않나니 욕계와 상응하는 진제(盡諦)와 도제(道諦)에서 끊을 상ㆍ중ㆍ하의 소견과 상응하는 느낌은 아래 애결과 상응하고 진결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1_c_10L或作是說或於欲倍愛盡等越次取證習已生盡智未生欲界相應盡諦道諦所斷上中下見相應下愛結相應非見結相應
【문】세존께서 또한 “만일 비구가 탐욕을 느끼고서 없앨 적에는 탐욕도 사라지고 그 느낌도 곧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탐욕이 사라지고 느낌도 곧 사라지는가?
028_0651_c_13L世尊亦說若比丘於痛貪欲而滅盡時欲盡痛便盡也云何貪欲盡痛便盡
어떤 이는 “진리를 본 사람이 세속 사람과 같나니 소견과 상응하는 느낌이 애결과 상응하고, 전결과 상응하지 않나니 견결이 저 견결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쌓임의 지혜[習智:集智]가 이미 생기면 무색계의 애욕이 없어진다. 세속 등의 소견과 상응하는 느낌은 애결과 상응하고 견결과 상응하지 않는다.
028_0651_c_16L或作是說見諦人與世俗等見相應痛與愛結相應不與見結相應見結盡彼見結復次習智已生無色界愛盡與世俗見相應痛與愛結相應非見結相
어찌하여 열반에 반연하면서 무명(無明)으로 열반을 따르는가?
어떤 이는 “그는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음에 얽힌 바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1_c_21L云何緣涅槃無明而隨涅槃耶作是說彼無智愚癡所纏
【문】그는 “지혜 없는 것이 곧 어리석음이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어떤 이는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어서 열반을 따른다. 삿된 소견과 상응하는 무명에는 열반이 없다고 말하며, 의혹과 상응하는 무명은 망설여서 어떤 법과도 상응하는 것이 정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1_c_22L彼作是無智是愚癡耶或作是說有二種癡隨涅槃也與邪見相應無明言無涅槃疑相應無明者猶豫不定一法相應
028_0652_a_02L【문】삿된 소견과 무명이 각각 다르지 않는가? 그와 같은 의혹 무명에는 이 모든 법이 각각 다르다.
또 무명이 열반을 따르는가? 또 그와 같은 다섯 가지 치성한 음(陰:五陰)을 내 것[我所]이라고 말하는 것은 두 눈을 감고서 일체 슬기롭게 본다는 것이 드문 것과 같다. 몸이 유루(有漏)에 반연하여 모든 결사를 내는 것과 같이 결박에 반연하는 대로 저 몸은 누(漏)가 있는가?
어떤 이는 “몸이 유루로서 그와 같이 결사 내는 것에 반연하면 저 몸은 유루요 사라짐과 도에 반연하면 모든 결사가 있다”고 말했다.
028_0652_a_03L邪見無明各不異耶如是疑無明此諸法各異復次無明隨涅槃復次如是五盛陰言是我所如閉兩目一切智有目者少如身緣有漏生諸結使如所緣結彼身有漏或作是說諸身有漏如彼緣生結使彼身非有漏如緣盡緣道有諸結使
【문】또 세존께서 “이 비구가 온갖 물질과 과거ㆍ미래ㆍ현재에 탐욕이 생기면 곧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내게 되며 그 밖의 마음에 생각하는 결사까지 내게되나니 그를 일러 누(漏)가 있는 것이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경과 어긋남이 있다.
028_0652_a_09L又世尊言於是比丘諸所有色過去未來現在貪欲生便生婬怒癡其餘心所念結使是謂在漏泡此契經則有違
어떤 이는 “몸에서 유루가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결을 내나니 반연하여 결을 내면 저 몸은 유루로서 무루의(無漏義)을 내고, 유루의를 맺는다”고 말했다.
또 만일 몸이 그 중간에서 소견을 내지 않으면 저 몸은 유루이나 저 반연과 같이 모든 결을 내지 않는다. 그는 결을 만들 적에 몸의 처소에 물들고 집착한다.
028_0652_a_13L或作是說諸身有漏緣彼生諸如緣生結彼身有漏生無漏義漏義結有漏義復次若身不中閒生彼身有漏不如彼緣生諸結也造結時染著身處所
두 가지 착함 아닌 것 말함과
비방함과 버리고 떠나버림이며
아라한과 하나의 인(忍)이며
몰래 유루가 뒤에 온다.
028_0652_a_17L二種說不善
誹謗捨離去 阿羅漢一忍
冥有漏在後
무슨 까닭으로 실없는 짓은 사유로써 끊는가?
어떤 이는 “진리를 보는 것에 실없는 짓이 있나니 그러므로 생각함의 도로써 끊는다”고 말했다.
028_0652_a_19L以何等故調戲有思惟斷或作是說見諦者有調戲故曰用思惟斷
【문】진리를 본 이도 또한 무명(無明)이 있는가? 저 진리 보는 것을 생각으로써 끊는가?
어떤 이는 “둘 다 모두 실없는 짓이니 진리 보는 것으로 끊는 것도 또한 생각함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2_a_21L諦者亦有無明彼見諦思惟所斷作是說二俱調戲見諦所斷亦思惟
028_0652_b_02L또 이 진리 보는 것에서 생긴 실없는 짓은 진리 보는 것으로 끊는 것이다. 저 실없는 짓을 조금 말하고 따르지 않더라도 이는 할 일을 끝내지 못한 것이요, 만일 그 경지를 벗어났더라도 그것은 생각함으로 끊을 바이며, 만일 조금 끝냄이 있더라도 핍박하거나 장애하는 짓이니 그러므로 둘 다 모두 실없는 짓이다.
028_0652_a_23L復次此見諦所生調戲見諦所斷彼調戲少所說不順此所作不辨越境界彼思惟所斷若少有辨逼迫㝵持是故二俱調戲
어떤 이는 “범부는 실없는 짓이 많고 진리를 본 이는 그 실없는 짓이 적나니 그 둘 다 실없는 짓을 진리 보는 것으로써 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공포가 없어도 더러운 뜻이 있나니 왜냐 하면 진리를 보고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리를 보았으면 혹시 그를 따르게 되는데 저 실없는 짓은 생각함으로 끊는 바로서 무색계에서부터 종말에는 욕계에 난다.
어찌하여 욕심과 상응하는 결이 앞에 나타나느냐 하면 위의 취건도(聚揵度)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8_0652_b_04L或作是說凡夫人調戲熾盛見諦者調戲微是二俱調戲見諦所斷復次無恐懼有穢污何以故不見諦所斷若見迹者有隨從彼調戲思惟所斷從無色界終生欲界云何欲相應結而現在前如上聚揵度所說
다시 만일 ‘무색계에 태어나면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영원히 끊어지나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아니니 그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저것을 반연하여 그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설령 태어날 때에도 중간에 태어나지 않으며 결사가 또한 앞에 나타나지 않나니 앞에 나타날 인연이 없다.
또 범부가 결이 없어지지 않음은 착하지 못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니 저 욕계와 상응하는 결을 없어진다고 말한다.
028_0652_b_10L復次若作是意無色界欲界相應使永斷然非無色界相應使是欲界相應使緣彼則有是耶彼則不生欲界設生時中閒不結使亦不現在前無因緣現在前復次凡夫人無有結盡作不善行欲界相應結謂之盡也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사색을 하지 않거나 또한 방편을 만들지 않는 그것이 곧 인연을 맺는 것이며 영혼[神識]이 머무는 곳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여기에서 방편을 지으면 무색계에서 색계에 나게 될 때에 어찌하여 색계의 결사를 앞에 나타나는가?
028_0652_b_16L如世尊言是比丘汝等不思惟亦不作方便是結因緣神識所止處彼於此閒當作方便從無色界終生色界時云何色界結使而現在前
모든 결사를 뽑아버리지 아니하면 비유컨대 불꽃이 불꽃으로 인하여 밝고 그와 같은 밝음에 얽히는 것처럼 착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이는 곧 색계의 유(有)를 받게 되나니 이것 역시 위의 취건도(聚揵度)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계에서 욕계에 태어날 때에는 어찌하여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앞에 나타나 있게 되느냐 하면 위의 취건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차츰차츰 애욕이 증가하여 세력이 있게 된다.
028_0652_b_20L答曰不拔諸結使譬如火炎緣炎有如是明所纏不善行者便受色有此亦如上聚揵度所說色界終生欲界時云何欲界相應使而現在前如上聚揵度所說次漸漸欲愛增有力勢
028_0652_c_02L본시 저 애욕이 다함으로 인하여 이 3재변(災變)인 풍재(風災)ㆍ수재(水災)ㆍ화재(火災)가 있나니 그것은 중생의 때[垢]로 말미암아 이 3재가 생긴 것인가? 이 3재로 인하여 중생이 때가 있는가?
028_0652_c_02L因本彼欲愛盡此三災變風災水災火災此由衆生垢生此三災爲此三災衆生有垢
어떤 이는 “중생의 때와 집착을 말미암아 그 재변이 있나니 마치 중생의 죄악으로 도검겁(刀劍劫)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재변을 말미암아 중생들이 때[垢]와 집착 있는 것이 암수의 개가 교미하는 시기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028_0652_c_04L或作是說由衆生垢著有此災變如衆生罪有刀劍劫或作是說由災變故衆生有垢著猶如狗犬陰陽有
어떤 이는 “때와 집착을 말미암아 재변이 생기나니 그들의 중생이 욕계의 결이 있고 그들에게 재변이 일어난다. 그들에게 재변이 있는 것과 같이 결이 곧 증가된다”고 말했다.
또 중생이 착한 법을 항상 닦고 행하면 곧 다른 좋은 국토에 노닐게 되고 저 행이 증가되며, 중생이 타락하면 본래 익힌 것을 배우게 된다.
028_0652_c_08L或作是說由垢著故有災變生彼衆生有欲界結彼彼有災變起彼彼有災變結使使增益復次衆生善法常修習行便遊餘國土彼因行增上衆生有壞敗學本所習
어찌하여 사(使)에 반연하여 곧 사가 있게 되며 무엇을 상응하는 사라 하는가?
028_0652_c_12L云何緣使便有所使云何相應所使
어떤 이는 “탐욕의 사는 심한 애착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성냄의 사는 애착이 아니고 물들어 집착함이 아니나 그를 사라고 한다. 애욕의 사가 심한 애착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교만의 사는 치열하고 아주 치열하매 마음이 사나워지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견사(見使)인 다섯 소견[五見]과 저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 사에 의지한 사와 망설이는 소견은 아주 없음이며 항상함이 있다고 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028_0652_c_13L或作是貪欲使甚愛著是謂所使瞋恚使不愛著意不染著是謂所使有愛使甚愛著是謂所使憍慢使熾盛極熾心勇悍是謂所使見使五見於彼身見使自依所使猶豫見者斷滅有是謂所使
삿된 소견 사는 까닭 없이 지음 없다고 비방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도적임을 보는 사는 간직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장 미묘하고 가장 최상이 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도적을 경계하는 사는 청정한 해탈이고 최상의 으뜸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무명(無明)의 사는 지혜가 없고 어둡고 미혹함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의혹 사에서 희망하거나 망설여 옳은가 그른가를 잘 판가름 못하는 그것을 사라고 한다. 그와 같이 사에 반연하여 사를 받으면서 일찍이 상응하는 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2_c_19L邪見使無因誹謗無作是謂所使見盜使不可護持極微妙好最爲上是謂所使戒盜使淨解脫上出要是謂所使無明使無智盲冥愚惑是謂所使疑使悕望猶豫爲是爲非意不審實是謂所使如是緣使所使也未曾更與相應所使
028_0653_a_02L【문】무루(無漏)도 역시 사에 반연하나니 그와 같이 저 부리는 바와 부리려고 하는 저 반연도 역시 부리는 바가 되는가?
어떤 이는 “저들의 온갖 사가 있는 반연과 같이 저들의 사인 반연이 있을 때에 각기 서로 이끌어 당기나니 그것은 사에서 사를 받는 것이 된다. 그와 같이 사인 반연으로 사를 받는데 그가 물들거나 집착하게끔 하나니 그와 같은 사는 서로 응하여 부리는 바다”라고 말했다.
028_0653_a_02L無漏亦緣使如是彼所使欲使彼緣亦是所使耶或作是說如彼彼有諸使緣彼有使緣時各各相牽引爲是使所使如是如是使緣所使彼使染著是使相應所使
【문】무루사(無漏使)는 그 반연하는 대로 더욱더 증가하는 것이 있나니 무루로 사를 반연하게 한 것인가? 그 사(使)를 받는 바를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반연과 상응하여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을 사를 받는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028_0653_a_07L無漏使如其緣轉有增益欲使無漏緣是使耶緣是所使或作是說緣相應不得解脫謂所使
【문】무루연(無漏緣)도 역시 사(使)며 반연 역시 사이고, 그 밖의 반연이 사를 받게 함은 없다.
다시 비록 사에서 사를 받는 것이라 해도 회전하는 곳에는 거기에 곧 사가 있고, 만일 상응하는 사에서 사를 당하는 것이라 해도 그 밖의 것이 역시 상응한다. 또 중생의 사에서는 인연으로 사를 받게 된다.
028_0653_a_10L無漏緣亦是使緣亦是使無有餘緣所使復次雖使所使者所迴轉處彼則有使若相應使所使者餘亦相應復次衆生使因緣所使也
탐욕으로 법을 반연함에는 몇 가지 서로 사를 받는 것이 있는가?
어떤 이는 “욕계와 상응하는 온갖 유루연(有漏緣)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3_a_14L貪欲緣法爲有幾使所使或作是說欲界相應一切有漏緣也
또 삼계의 유루연이 물러날 때에는 욕계에 태어나 삼계의 결을 얻게 되는데, 그러한 것을 얻게 될 때에 삼계의 결은 유루연으로 사를 받게 하는 사이니 그 명칭과 그 뜻은 어떠한가?
028_0653_a_16L復次三界有漏緣退時生欲界得三界結得是時三界結漏緣所使使名者其義云何
어떤 이는 “차례로 부리는 사이고, 또한 사를 당하는 반연 역시 사를 받는 것이다. 사란 집착하는 뜻이고 또한 나는[生] 뜻이며, 지니는 뜻이며, 또한 부리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3_a_18L或作是次第所使使亦所使緣亦是使使爲著義亦是生義使爲持義亦是使
또 평등한 지혜[等智] 그것이 곧 저 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저 사는 유루에서 사이기 때문이다. 혹은 작용하기도 하고 혹은 작용하지 않기도 한다. 때[垢]는 어떤 내용이 되는가?
어떤 이는 “때가 사람의 몸에 붙나니 모든 애욕을 받는 것이 때의 반연이며, 괴로움도 역시 때다”라고 말했다.
028_0653_a_21L復次當說等智是彼所使以彼使若有漏所使也或用或不用垢者爲何義或作是說垢著人體受諸愛亦是垢緣苦亦是垢
028_0653_b_02L또 두 가지 때, 마음과 상응하는 때, 중생의 때 때문에 저 마음이 때묻나니 마음과 뜻에 물드는 것이 때가 옷을 더럽힘과 같다. 중생의 때는 혹 다른 것을 따르기도 하는데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다. 이러한 인연으로써 이 일을 계교할 적에는 곧 마음의 때가 생긴다. 세존께서 또한 “마음의 때에 미혹한 바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면 행동이 곧 청정해진다. 그것으로 합해져서 중생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028_0653_a_24L復次二種垢心相應垢衆生垢彼心垢著染著心意垢污衣衆生垢有或隨他如負重擔以此因緣以此事計挍彼時便有心垢生世尊亦說爲心垢所惑心淨行則淨合會成衆生
세존께서 “이 착한 뿌리다”라고 일부러 말씀하신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악의 뿌리[不善根]를 없애는 것을 착한 뿌리라고 하며, 온갖 착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착한 뿌리라고 한다.
다시 마음에서 착한 뿌리를 심어 그에 순종하여 과보를 받는 것이 곧 착한 뿌리이다.
028_0653_b_06L世尊故說此善根其義云何害不善根是謂善根義起諸善行是善根義復次於神種原順從受報是善根義
악한 뿌리란 그 내용이 어떠한가?
무기(無記)가 종자가 된다는 뜻이며, 무기가 뿌리가 된다는 뜻이며, 무기가 인연이 된다는 뜻이며, 무기가 뿌리가 된 것이다.
또 형체와 물질은 무기법으로 순종하고 받아지니나니 그를 무기라고 한다.
028_0653_b_09L不善根者義云何無記爲穀子義無記爲根義無記爲因緣義無記爲根復次形體色無記法順從受持是謂無記義
무슨 까닭으로 신견(身見)을 괴로움의 진리[苦諦]에서 끊는다고 하는가?
어떤 이는 “저 괴로움으로 인하여 그렇게 알아서 괴로움이 곧 사라지고 그것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모든 결사(結使)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028_0653_b_12L何等故身見謂之苦諦所斷耶或作是說緣彼苦如是知苦便滅已滅緣便盡諸結使盡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함은 ‘나’의 생각이고, 몸은 곧 내 것이며 신견(身見)이니 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괴로움과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견을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몸으로 보고, 몸으로 보는 그 몸은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몸을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을 없애야 되나니 마땅히 그러한 관찰을 해야 된다.
028_0653_b_15L或作是說有常想我身是我所身見作無常想苦我想已盡是故謂之苦諦所斷復次見身見身彼身受苦惱是故彼身現說苦是故滅當作是觀
실없는 짓이 다시 나지 않음과
그와 같은 세 결사[三結使]와
몸과 모든 결사이며
세 가지 뿌리도 끊음이다.
028_0653_b_19L調戲不復生
如有三結使
身及諸結使
三種根所斷
무슨 까닭으로 쌓임의 지혜가 생겨 도(道)의 소견 도적[見盜] 없애는 것을 없어짐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애초에 소견 도적이 있어서 저 소견에 얽혀 물드는데 그것이 없어질 때에는 이것도 역시 없어진다”고 말했다.
028_0653_b_21L以何等故習智生盡道見盜謂之盡或作是說始初有見盜染縛彼見彼滅盡時此亦滅也
028_0653_c_02L【문】모든 결사에서 곧 소견 도적이 있나니 그러므로 또한 생각으로 끊는 바가 된다.
어떤 이는 “괴로움의 진리를 소견 도적과 의혹에 어김이 있나니 그러므로 4제(諦)도 끊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3_b_24L結使便有見是故亦是思惟所斷或作苦諦違見盜及疑是故四諦所斷
【문】괴로움에 반연된 결은 가장 앞에 있고 최상이 되고 미묘함이 되는데 도적은 어찌하여 괴로움과 어김이 있는가?
또 어찌하여 괴로움의 결박을 벗어나는 앞이 도적이 되는가? 만일 괴로움이 앞잡이가 아니라면 소견 도적은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어야 되고, 말한 진리대로 머무를 곳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겠다.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삿된 소견이라고 말하는가?
028_0653_c_03L苦緣結最在前爲上爲妙盜云何與苦有差違復次云何度苦結前爲盜耶苦不能在前導者是故見盜苦諦所斷斷如所說諦無住處言是我所何等故彼謂邪見
어떤 이는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말한 것뿐이니 그러므로 삿된 소견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이 진리가 실로 도적이 된다면 다시 또 저것은 인연 공함[緣空]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내 것이 있으면 곧 이 소견이 있다.
028_0653_c_08L或作是說由此因緣故說之耳是故謂邪見或作是說若此諦實作盜復次彼非緣空復次有我所便有是見
어떤 것이 상분결(上分結)인가?
어떤 이는 “5하분결(下分結)은 탐욕ㆍ성냄ㆍ몸이라는 소견[身見]ㆍ계율에 대한 소견ㆍ의혹이니 그런 것이 없어지지 못하매 욕계의 괴로움이 있게 되며, 상계(上界)의 3결(結)이 없어지지 않으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028_0653_c_11L云何是上分或作是說五下分結者貪欲瞋恚身見戒盜此不盡有欲界苦上界三結不盡受色無色界陰
상계에서도 병고를 받는가?
【답】그 곳에서 병고를 받지 않나니 그 곳에서는 이미 없어졌다. 아나함(阿那含)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나니 그러므로 병고는 없다.
028_0653_c_14L欲使是上界病耶答曰不由此有病彼已盡阿那含受色無色界有是故無病
【문】만일 저 3결이 이미 없어져서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면 그는 욕계에 태어나지 아니하므로 욕계에 때[垢]가 없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다시 삼결인 몸을 받는다면 세계로 하여금 회전 않는 것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2결은 하분(下分)에 해당되니 탐욕과 성냄을 뜻한다. 만일 그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욕계의 몸을 받거니와 이미 없어졌으면 다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3_c_16L彼三結已盡受色無色界有是故彼不生欲界無垢人已盡復受三結有欲使界有不迴轉耶或作是說二結屬下分貪欲瞋恚也若不盡受欲界已盡不復更受
【문】일체 욕계의 결박이 없어지지 않으면 욕계의 몸을 받나니 이 욕계의 결박을 없애는 것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상분결(上分結)이다. 어떤 이는 “일체는 곧 상분결이니 그것이 만일 없어지지 않으면 욕계의 몸을 받는다”고 말했다.
028_0653_c_21L一切欲界結未受欲界有欲使是欲界結盡耶是上分結或作是說當言一切是上分若不盡受欲界有
028_0654_a_02L【문】말한 바와 같이 오상분결은 곧 그 명칭이 없는가?
어떤 이는 “2결(結)인 탐욕ㆍ성냄을 없애지 못하면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3결(結)이 없어지지 못하면 다시 욕계로 돌아오나니 그러므로 오상분결이 없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모든 결사는 욕계에서 없어지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마땅히 상분(上分)이라고 말해야 한다.
028_0653_c_24L如所說五上分結則無其名或作是說二結未盡貪欲瞋恚不出欲界三結未盡復還來欲界是故五上分結未盡復次諸結使從欲界滅不在餘處彼當言上
어떤 것을 상오분결(上五分結)이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5상분결(上分結)은 색계의 애착[色愛]ㆍ무색계의 애착[無色愛]ㆍ실없음ㆍ교만ㆍ무명(無明)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4_a_06L云何是上五分結或作是說五上分結色愛無色愛調戲憍慢無明
무슨 까닭으로 그것이 없어지지 못하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으며 3결(結)이 없어지지 못하여 그를 수행할 적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가? 위의 것을 오상분결이라고 하는가?
【답】그는 몸을 받거나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저 몸을 받지 않는다.
028_0654_a_07L何等故此未盡受色無色有三結未修行彼時受色無色有欲使上是五上分結耶荅曰彼不由受有色無色界有是故不受彼有
【문】3결(結)이 이미 없어져서 저 때가 없는 사람이 욕계의 몸을 받는다면 그를 오상분결이라고 말하는가?
028_0654_a_11L三結已盡此無垢人受欲界欲使是五上分結
어떤 이는 “만일 모든 결박이 다 없어지지 못했으면 욕계를 떠났더라도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나니 그를 오상분결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둘이 오상분결이니 색계의 애착과 무색계의 애착이다. 그 중에서 수행하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색계와 무색계의 몸인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모든 결사(結使) 그것이 색계와 무색계의 결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나니 그것을 오상분결이라고 한다.
028_0654_a_13L或作是說若諸結未盡離欲界色無色界有彼謂五上分結或作是二是五上分結色愛無色愛於中修行受色無色界有或作是說一切色無色界有一切未盡受色無色界復次諸結使可使色無色界結盡彼是五上分結
어떻게 성냄에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좋지도 못하고 위도 아닌 근심과 고뇌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근심 걱정이 차츰 떠나가서 멀어지는 상태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생 때문에 그 성냄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영원히 떠나버리기를 악초(惡草)를 제거하는 것같이 한다.
028_0654_a_19L云何緣瞋恚或作是說非妙非上愁憂苦惱或作是說愁憂漸去離遠或作是說以衆生之故有其瞋恚次永離去如去惡草
028_0654_b_02L욕심은 생각과 더불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이는 “욕심은 때묻은 것이고 생각은 때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심은 착함 아니고 생각은 착함과 무기(無記)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심은 존재[有]를 받게 되고 생각은 존재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028_0654_a_23L欲與念有何差或作是說欲是垢著念非垢著作是說欲是不善念是善無記或作是說欲受有念不受有
어떤 이는 “욕심이 생각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혹 욕심이 있고 생각이 있는 것이, 어떤 이가 욕애(欲愛)가 없어질 적에 그 스승에게 생각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다시 욕심은 방편에서 생기고 생각은 희망에서 생기나니 그러므로 욕심 역시 희망이다.
028_0654_b_03L或作是說與念當相應者或有欲有念如有人欲受盡有念於師復次欲以方便生念悕望生是故欲亦是悕望
성냄과 더러움인 그 두 가지가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성냄은 곧 결박이고 더러움이 결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54_b_06L瞋恚污此二有何差別或作是說瞋恚是穢污非結
또 성냄은 곧 착함 아니고 더러움은 곧 착함이며 무기인가?
다시 “성냄은 존재를 받고 더러움은 존재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4_b_08L復次瞋恚是不善穢污是善無記復作是語瞋恚受有穢污不受有
다시 성냄 그것이 더러움인가? 혹 더러움이기는 하나 성냄 아기도 하나니 부정관(不淨觀)을 닦을 때와 같은 내용인가?
028_0654_b_10L復作是語瞋恚彼是穢污耶或是穢污彼非瞋恚如修不淨時是其義
또 성냄은 온갖 존재를 받고 더러움은 존재를 받지 아니하며, 저 성냄에서도 또한 존재를 받지 않는가?
게으름과 수면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028_0654_b_11L復次瞋恚受諸有穢污不受有於彼瞋恚亦不受有懈怠睡眠有何差別
어떤 이는 “게으름은 몸이고 수면은 마음에 속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세속의 도리[世俗義]는 게으름이 되고, 세속을 벗어난 도리[出世俗義]는 수면이 된다”과 말했다.
또 처음이 게으름이 되고 피곤함이 수면이 된다.
028_0654_b_13L或作是說懈怠是身睡眠屬心或作是說世俗義爲懈怠出世俗義爲睡復次初爲懈怠疲倦爲睡眠
삿된 해탈과 4전도(顚倒)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진리를 본 것[見道位]에서 끊을 것은 전도가 되고, 진리를 본 생각[修道位]에서 끊을 바는 삿된 해탈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능히 사람을 위하여 연설해 줌은 전도가 되고, 능히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지 못함은 삿된 해탈이 된다”고 말했다.
028_0654_b_16L邪解四顚倒有何差別或作是說見諦所斷是爲顚倒見諦思所斷是謂邪解脫或作是說能爲人敷演是爲顚不能爲人說是爲邪解脫或作是諸顚倒者是邪解脫或是邪解脫彼非顚倒解脫結使
또 삿된 해탈을 마음의 전도라고 말해야 하는가? 또한 4전도를 떠나지 않고 의전도(意顚倒)가 있는가? 실없음과 의혹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0654_b_22L復次邪解脫者當言是心顚倒耶亦不離四顚倒有意顚倒耶調戲疑有何差別
028_0654_c_02L어떤 이는 “실없음은 생각함[修道位]에서 끊을 바이고, 의혹은 진리를 본 것[見道位]에서 끊을 바다”라고 말했다.
또 마음이 더러워져서 뉘우치거나 원한이 있는 마음은 실없음이 되고, 마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정해지지 못함은 곧 의혹이 된다.
028_0654_c_02L或作是調戲思惟所斷疑見諦所斷復次心染污有悔恨心是爲調戲心不究竟猶豫不定是謂疑也
범부는 물러날 때에 진리를 보고 생각함에서 끊을 결박이 곧 더해지는데,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의 제자는 물러날 때에 생각함에서 끊을 결(結)이 곧 더하기만 하고 진리를 본 것에서 끊을 결박이 더하지 않는가?
028_0654_c_05L以何等故夫人退時見諦思惟所斷結便有增然世尊弟子退時思惟所斷結便增益然非見諦所斷結
어떤 이는 “하나의 생각하는 도로써 범부는 모든 결박을 끊는다. 그가 생각하는 도[思惟道]에서 물러날 적에 온갖 것이 더하지만 세존의 제자는 혹 생각하는 도로써 끊고 진리를 본 것에서 끊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온갖 것이 더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028_0654_c_08L或作是說一思惟道凡夫人斷諸結彼思惟道退時一切增益然世尊弟子或以思惟道斷非見諦所斷彼一切無有增益
어떤 이는 “범부는 지혜로써 모든 결사(結使)를 끊으므로 그가 지혜에서 물러날 때에 온갖 것이 더하기에 세존의 제자도 인지(忍智)로써 모든 결박과 사를 없앤다고 말하나, 인(忍)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며 또한 크게 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4_c_11L或作是說凡夫人以智滅諸結使智退時一切增益言世尊弟子以忍智滅諸結使然不於忍退亦不大增
어떤 이는 “범부는 그 중간에서 모든 결박과 사를 끊나니 그가 물러날 때에 온갖 것이 더하는 일이 있으며, 세존의 제자도 그 중간에 사라짐 있는 이가 적고 끝가지 없애지 못했으므로 그가 물러날 때에 그 중간이나, 그가 물러날 때에 그에게 곧 더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028_0654_c_15L或作是說凡夫人於中閒滅諸結使彼退轉時一切有增益然世尊弟子於中閒少有滅盡不究竟盡彼退轉時於其中閒彼退轉時彼便有增
다시 범부는 지어감[行]으로써 온갖 사(使)에 반연하여 그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리워졌으며 그는 지어감의 반연에 매인 바가 되었기 때문에 곧 더해진다. 그리고 세존의 제자는 본 것 등으로써 그의 더함은 이동할 수가 없고 평등하게 보는 것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가 잘 수호하며 그는 혹시 물러나기도 하고 지니기도 한다.
028_0654_c_19L復次凡夫人以行緣有諸使彼盡形壽而爲覆蔽彼行緣所繫故便增然世尊弟子以見等越次取證結使盡便增益是故彼增益不可移等見想心等彼護守彼或時退持
028_0655_a_02L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무색계에 상응하는 결사를 과보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그는 몸과 입과 뜻의 지어감을 자라게 하거나 보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에게 비록 몸과 입과 뜻의 지어감이 있으나 그는 더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좋은 과보와 추한 과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기(無記)이므로 과보과 없다”고 말했다.
028_0654_c_23L以何等色無色界相應結使謂之無報耶或作是說彼不長身口意行有所補或作是說彼雖有身口意行不有增益或作是說不有好醜之報或作是說無記無有報也
또 만일 결사에서 과보가 있다면 저 있는 인연에 어김이 있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만일 그가 비방을 한다면 색계와 무색계의 과보를 받지 않나니 그와 같이 있는 인연도 또한 없다. 그는 존재[有]를 받지 않나니 그러므로 결도 없고 또한 일정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버리고 떠난다.
028_0655_a_05L復次若結使有報者云何有違如彼有緣若彼誹謗者不受色無色界報如是有緣亦復無也彼不受有是故無結亦復不定是故捨離
벗어나지 않음과 무너짐 않음이고
성냄과 애욕, 그리고 성냄이며
뛰어난 해탈과 실없는 짓이며
물러남과 과보가 없는 것들이다.
028_0655_a_09L不度不敗壞
瞋恚欲瞋恚
增上解脫戲
退轉無果報
5욕(欲)에 애욕이 있는 것과 물드는 마음이 없는 그 둘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이는 “5욕에는 애욕의 사가 있고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애욕이 있는 것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5_a_11L若五欲有欲無染污心此二有何差或作是語五欲有愛使不染污心者而不受有愛
다시 “5욕에는 애욕이 있으므로 착함이 아니지만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은 곧 착함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5욕 중에는 애욕이 있어, 존재를 받고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존재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5욕 중에는 애욕이 있어 온갖 선(善)의 생각이 있고,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끊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5_a_14L復作是語五欲之中有愛不善不染污心是善復作是語五欲之中有愛受有不染污心者而不受有復作是語五欲之中有愛有諸善想不染污心者不斷諸苦原
또 5욕 중에 애욕이 있다 함은 ‘내’가 있는 인연을 말하면 곧 기뻐서 날뛰는 것이며, 물드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제일의제(第一義諦)에서 이동하지 않나니 중생의 생각을 일으키되 평등을 얻은 지혜로써 하기에 참으로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그는 으레 있게 마련이다.
028_0655_a_18L次五欲之中有愛者言有我緣便歡喜踊躍不染污心者第一義諦不移起衆生想以得等智眞是不染污彼則當有
어찌 저 범부가 물드는 마음이 없다고 하겠는가? ‘나’로 어찌 반연하겠는가? 그것은 범부가 만든 것이 아니요, 신선들이 밖에서 교묘한 방편으로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028_0655_a_22L云何彼凡夫人謂非染污心我可所緣彼非凡夫人有所造諸神仙人於外以巧方便謂無染污
028_0655_b_02L만일 괴로움의 진리[苦諦]에서 단견(斷見)할 도와 쌓임의 진리[習諦]에서 끊을 그 둘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서 보아 끊을 도는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을 바라고 하며, 견도(見道)1)의 것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바라고 한다”고 말했다.
028_0655_b_02L若苦諦所斷見盜及習諦所斷此二有何差別或作是說苦諦所斷見盜彼則苦諦所斷見盜者彼則習諦所斷也
【문】그 두 가지가 모두 견도인데, 2제(諦)에 붙어 있는 것인가?
어떤 이는 “만일 괴로움의 진리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을 바이며, 만일 쌓임의 진리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은 쌓임의 진리에서 끊는 바이다”고 말했다.
028_0655_b_05L此二俱是見盜遍在二諦或作是說若與苦諦不相應則彼苦諦所斷也若習諦不相應彼則習諦所斷
【문】만일 괴로움의 결박이 앞에 있으면 가장 미묘하고 가장 으뜸이고 제일인 도인데 어째서 괴로움의 진리와 상응하지 않는가? 또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을 결사를 괴로움의 진리로써 뽑아버리면 곧 미묘한 생각이 있게 될 것이니 그러한 관찰을 함에 교화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028_0655_b_08L如苦結現在前最妙最上爲最第一盜云於苦諦不相應復次苦諦所斷結使以苦諦拔則有妙想作是觀與化有何差別
【답】속마음으로는 마음을 거두는 척하나 간사한 짓을 꾸미게 되고 밖으로는 마음과 동일하지 않나니 그것이 많은 교화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028_0655_b_11L答曰內心所攝心佞爲奸詐外不與心同是多化有差別
무슨 까닭으로 마음이 성현의 도가 아닌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세존께서 교화하시는 말씀이니 그를 말하면 마음이 다름 없다고 할 것이며, 그는 곧 마음이 상응함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5_b_13L以何等故心非賢聖道耶作是說是世尊教化之語說此則說心無異彼則心相應
【문】무슨 까닭으로 마음을 말할 때에 심소념법(心所念法)을 다 말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여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니 그런 가르치심이 있으므로 지혜가 있게 됨이 향가루를 만들면 향으로써 첫째를 삼는 것 같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028_0655_b_15L何以故說心之時不盡說心所念法或作是說如來教誡之語有是教誡而有智慧如擣香末以香爲首色聲香味亦復如是
【문】하나의 일을 만들어 생기는 곳에는 온갖 상응하는 법은 아무런 세력이 없게 되는가?
어떤 이는 “제 모양인 껴잡을 마음과 모으는 마음만이 곧 성현의 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이 또한 성현의 도이니 평등한 3매(昧)에 많은 마음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나에만 주력하는 삼매란 마음이 더하거나 줄어짐에 달라짐이 없는 삼매다”라고 말했다.
또 도의 마음이 강력하여 뜻에 나아가는 바를 마음이라고 말한 것도 있다.
028_0655_b_19L造一事所生之處諸相應法無有力勢或作是說自相所攝心集聚心是賢聖道是故心非賢聖道作是說心亦是賢聖道等三昧有衆多心共一緣三昧者心有增減無有異三昧也復次道心遂盛志意所造心有所說
028_0655_c_02L욕계와 상응하는 몸으로 여기는 소견[身見]은 망설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상응하는 무명(無明)을 제거하거나 그 밖의 법을 얻으면 사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상응하는 모든 법과 그 밖의 심소념법과 마음 해탈행(解脫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028_0655_c_03L欲界相應身見猶豫除彼相應無明及得餘法可說隱沒乎或作是說可得諸法相應及餘心所念法心解脫行
무슨 까닭으로 수다원(須陀洹)은 부정한 것을 깨끗이 없앤다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생각과 뒤바뀐 생각이 있는 것을 수다원은 이미 다 없앴다”고 말했다.
028_0655_c_06L以何等故須陁洹不淨謂淨滅或作是說不淨有淨想是顚倒陁洹已盡也
【문】만일 뒤바뀐 것을 수다원이 이미 없앴다면 그는 곧 물들지 않을 것이다. 괴로움의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과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에는 그가 곧 물들고 있다. 또 수다원은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과 깨끗함이 있다는 생각이 이미 없어졌으며, 소견 중의 삿된 소견[邪見]은 이미 없어졌다고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덮임 중의 의결(疑結)인가?
028_0655_c_08L若顚倒須陁洹已盡彼則不染著也苦想無我想不淨彼當染著復次然須陁洹不淨有淨想已盡也見中邪見當知已盡等蓋中疑結耶云何非蓋中疑結耶
어떤 이는 “만일 욕계와 상응한 것이면 그것은 의혹을 벗어날 것이고, 만일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한 것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3매(昧) 안에 드는 것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고, 만일 참된 결과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온갖 실없는 짓은 의혹 덮임이 매우 많아지는 것이나, 욕계와 상응하는 것이면 의혹 덮임이 아니다.
028_0655_c_12L或作是說若欲界相應彼是疑出要若色無色界相應彼非疑蓋也作是說若入三昧內者彼是疑蓋眞果者彼非疑蓋也復次一切調戲是疑蓋甚增多欲界相應非疑蓋也
만일 ‘나’라고 스스로 생각내는 것이면 그것은 모두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이다. 만일 몸이라고 하는 소견에는 그것이 모두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는 것인가?
어떤 이는 “온갖 법에 대해서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두는 그것은 모두가 몸이라고 하는 소견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5_c_17L若自計吾我者彼一切是身見設是身見彼一切自計吾我耶或作是說諸所有法自計吾我者彼一切是身見也
혹시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인 그 법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는 소견[我見]에만 스스로 의존하기도 하는가?
어떤 이는 “혹시 스스로 ‘나’라고 하는 생각을 내는 법이 있으면 몸이라는 소견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소견과 상응하는 심소념법(心所念法)에는 몸이라는 소견이 있을 것이니 그는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028_0655_c_21L頗是身見彼法非自計吾我依我見或作是說頗有法自計吾我彼不身見耶我見相應心所念法有身見彼不自計吾我耶
028_0656_a_02L‘나’라는 소견에 스스로 의존하면 “몸이라는 소견과 나라는 소견이 있다”고 한 것이 바로 그를 의미한다. 몸이라는 소견이 아니거나 ‘나’라고 하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은 위의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런 내용이 있다.
028_0655_c_24L自依我見頗有身見及自吾我見是也頗非身見亦非自計吾我除上爾所事則有
다시 저 ‘나’라고 하는 생각을 내는 법은 그것이 몸이라는 소견이 아니겠는가?
또 세존께서 “내가 지금 그들이 ‘나’라고 하는 것을 말해보겠다. 혹 몸이라는 소견은 그가 ‘나’라고 하는 소견을 내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몸이 아니라는 소견은 또한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위의 사실을 제외하고는 곧 그런 내용이 있다. 온갖 소견이 생기는 데에는 병이 없으면 스스로 즐겁다고 말한다.
028_0656_a_04L復次彼有法自計吾我彼非身見耶又世尊言我今當說彼說我當說有身見彼不自計吾我我見或非身見亦非自計吾我除上爾所事則其義也諸有見生無病自言樂
어찌하여 그런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宿命)을 알게 된 것이니 초선(初禪)ㆍ2선ㆍ3선의 경지에서는 모두 거기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는 것을 저절로 안다”고 말했다.
또 탐냄과 질투의 소견과 몸으로 위의 방편을 관찰하면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모든 고통을 관찰하고 중간에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이런 낙이 있다. 그러나 괴로운 세계다’라고 하나니, 그러한 나쁜 갈래에서 내는 소견은 하나의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병 없이 죽어야겠다고도 한다.
028_0656_a_08L云何生此見或作是說以三昧力自識宿命初第二第三禪地皆悉識知於此閒故使爾耳知有樂復次貪嫉見身觀上方便有寒熱觀諸苦言於中便作是念我有是樂然苦趣其惡道諸所生見偏有一苦無病當死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게 되는가?
어떤 이는 “그것도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을 안 것이니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도 또한 숙명을 알아 여기가 괴롭다고 하여 거기에서 나는 매우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는 이가 좋은 방편으로써 먹을 것을 생각하듯이 그가 저지른 것을 관찰하여 하나의 괴로움만을 보기도 하고 즐거움도 또한 괴로움이라고 한다.
028_0656_a_14L云何生此見或作是說此是三昧力自識宿墮惡道中亦自識宿命於此閒憂於中便作是念我已甚苦復次自計吾我以善方便觀其所造作如食偏見一苦樂亦是苦
모든 생긴 소견을 스스로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즐거움에는 안온하다는 생각을 두는 것은 어떠한 결(結)인가?
어떤 이는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을 안 것이니 인간ㆍ천상과 욕계에서 스스로 숙명을 알되, 거기에서 고락을 스스로 알고 거기에서 곧 나에게는 이러한 고락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나’라는 생각을 하기에 그 방편을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게 된다고 관찰하여 그 중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고락이 곧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편안한 자리에서 죽는 생각을 한다.
028_0656_a_19L諸所生見自計苦樂有安隱想此是何結或作是三昧力自識宿命人天之中及欲界自識宿命於此閒自識苦樂於中便作是念我有是苦樂復次自計吾觀其方便受其苦樂於中便作是
028_0656_b_02L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이 편안한 자리라고 계교하여 온갖 소견을 내어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는가?
028_0656_b_02L苦樂是我所安隱處起死想諸所生見自計不苦不樂安隱處所作如是想云何生此見
어떤 이는 “그것은 삼매로써 자신의 숙명을 안 것이니, 4선(禪)의 경지에서는 저절로 모두를 안다. 거기에서 그 고락을 받고서는 그가 곧 괴로움과 즐거움의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028_0656_b_04L或作是說此是三昧自識宿命四禪地自悉了知於此閒受其苦樂彼便作是念無苦樂想
또 ‘나’라는 생각 소견을 내어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그 고락을 받고서는 혹 즐거움이 없으면 그는 곧 그러한 생각이 있나니 그가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면 나라는 소견이 없다고 하며, 또한 죽는 생각을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이른바 ‘나’가 이미 생겼다고 함이란 4대(大)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너져서 죽음에 이른다고 말했다.
028_0656_b_06L復次作我想見墮惡趣受苦樂或時無樂彼則有是想也彼復作是念苦無樂無我見亦作死想諸所生見所謂我色起者四大所造壞敗至死
그와 같은 ‘나’라는 소견 등의 그러한 소견은 바로 어떤 소견인가?
【답】혹 어느 때에 관찰 수행하여 하늘 눈[天眼]으로써 욕계에 곧 태어나게 될 것임을 아나 그는 그러한 관찰은 하지 않고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나’가 있다고 말함이란 욕계의 고통을 끊고서 무너져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028_0656_b_10L如是我見趣彼等見此是何見答曰或有時見行以天眼知欲界便有生彼不作是觀便作是念不墮惡趣所生見言有我者斷欲界痛壞敗至
그와 같이 ‘나’라는 등이 끊어진다고 하는 소견은 어떻게 생기는가?
【답】혹 어느 때에 관찰 수행하여 하늘 눈으로써 색계의 형체를 보고서 그는 그러한 관찰을 하지 아니하고,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진다’고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나’라고 말하나 무색계의 공한 곳에서는 내가 없어서 성립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6_b_15L如是我者等斷絕此是何見生或有時見行以天眼見色界形不作是觀復作是念墮惡趣中諸所生見言我無色空處斷絕壞敗不成至死不捨如是等斷絕
그와 같은 따위는 없는데,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는가?
【답】혹 어느 때에는 지어감을 보고 색계의 형상이 있는 것을 알고, 그는 딴 갈래를 관찰하지 않는다.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소견을 내어 ‘나’라는 것은 무색계의 공한 곳에서는 없어져서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나니 그를 아견(我見) 등이 끊어짐이다”라고 말한다.
028_0656_b_19L云何生此見答曰或有時見行知有色界形彼不觀餘軌復作是念墮惡趣中諸所生見所謂我者無色空處壞敗不成死不捨是謂等我見斷絕
028_0656_c_02L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는가?
【답】평등하게 삼매에 들어가나 태어날 바를 관찰하지 않고 그는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식처(識處)와 불용처(不用處)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하여 죽음에까지 이른다.
028_0656_b_23L云何生此答曰等入三昧不觀所生彼作念已斷壞也識處不用處有想無想處亦復如是如所說命異身異乃至死
무슨 까닭으로 그 소견이 생기는 것이 없는가?
어떤 이는 “내가 항상 있고 청정한 결과가 있으나 또한 소견이 결과는 아니며 이 소견은 남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심소념법(心所念法)을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나니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곧 비방하여 “그는 곧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028_0656_c_03L以何等故彼無見生或作是說自計我常住有淨果實亦不見果此無見復次心所念法言有常因彼因緣便誹謗言彼則生無
진여 자체에 현재의 무명(無明)이 있어서 저 진여 자체에 현재의 무명과 상응하는 것이 진여 자체가 현재의 애욕으로 더불어 상응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진여 자체에 현재의 애사(愛使)와 상응함이 있어서 저 자체에 현재의 무명사(無明使)와 상응함이 있다”고 말했다.
028_0656_c_07L如體中有現在無明使相應於彼體現在無明使相若體中與現在愛使相應或作是如體中有現在愛使相應於彼體中有現在無明使相應也
혹 그 자체는 현재의 무명 사와 상응하고 현재의 애사(愛使)와 상응하지 않기도 하며 그 밖의 결(結)이 앞에 나타나 있다.
또 2결이 동시에 앞에 나타나 있지 않는다. 왜냐 하면 생각함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결박이 동시에 둘이 함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028_0656_c_11L頗體中與現在無明使相應彼不與現在愛使相應也及有餘結而現在前復次二結俱不有一時而現在前何以故思惟諸結使不一時二俱生也
그 생각함의 비유에는 네 가지 뒤바뀜이 있는데, 진리[諦]를 반연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진리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5음(陰)의 뒤바뀜이 그 인연이고, 5음에는 항상 ‘내’가 없는 것이 없다. 만일 그를 반연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옳지 못하다.
028_0656_c_15L是思惟譬喩有四顚倒當言緣諦當言不緣諦五陰顚倒是其緣陰中無有常無我設當緣彼者此事不然
【답】무상한 음이라면 항상함이 있는 것에 반연한다. 만일 진리를 반연하지 않는다면 곧 뒤바뀜이어서 무상함이 항상함일 것이요 뒤바뀜이 없다면 무상함이 아니다.
또 진리에는 뒤바뀜이 있지 않고 또한 진리를 반연하지 않으며 저 또한 형상과 온갖 인연이 있지 않다.
028_0656_c_18L答曰常陰者而緣有常設當不緣諦者是顚倒無常有常謂顚倒無者非無常復次義無有顚倒亦不緣諦彼亦不有相諸所因緣
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상응하는 사(使)와 공처(空處)와 상응하는 사를 식처(識處)와 상응한다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6_c_23L以何等故色界相應使空處相應謂識處相應耶或作是彼不可知
028_0657_a_02L【문】온갖 결박은 알 수가 있다. 또 세존께서 “그것에 비구가 집착함이 있느냐, 나와 그도 또한 집착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삼매는 무상하나니 그와 상응하는 결박을 무상함과 상응함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028_0657_a_02L一切結使可知又世尊言於是比丘有著耶我及彼亦著或作是說三昧無常彼相應結使之無常相應
【문】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 된다. 왜냐 하면 저 삼매를 무상함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답】그것은 이미 휴식한 것이다.
028_0657_a_05L此亦是我疑何以故彼三昧謂之無常答曰此已休息
【문】위의 삼매가 이미 휴식한 것이면 그것을 또한 무상함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저 경지는 항상함이 있으나 그와 상응하는 결박은 무상함이라 말한다”고 하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028_0657_a_06L上三昧已休欲使彼亦是無常耶作是說彼地有常然相應結使謂之無常此亦如上所說
또 세존께서 “애욕에 맛을 붙이고 더럽게 드러나고 온갖 결박에 빠져들어 또한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떤 것을 애욕에 맛을 붙인다고 하며 어떤 것을 빠져든다고 하며, 어떤 것을 결박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버림이라고 하는가?
028_0657_a_09L又世尊言味欲穢露犯諸結使亦不捨離云何味欲云何有犯云何穢露云何有結云何爲捨
【답】애욕에 물들고 집착하여 애욕이라는 생각ㆍ의식하는 생각ㆍ좋아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애욕에 맛을 붙임이라고 한다. 애욕에 물들고 집착하여 애욕의 생각이 있거나 고락의 생각이 있는 것을 더럽게 드러남이라고 한다
028_0657_a_12L答曰於欲染著起欲想意想是謂味欲於欲染著起欲想是謂味欲於欲染著起欲想有苦樂想謂穢露
애욕에 물들고 집착하여 애욕의 생각이 많고 애착하여 여러 가지 수단이 있는 것을 애욕에 빠져든다고 한다. 많은 속박과 집착이 있어, 마음이 물들고 더럽힘을 애욕의 결박이라고 한다. 애욕의 결박이란 애욕에 약간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니, 그 생기는 바를 관찰하여 아는 것을 애욕 버림[捨欲]이라고 말한다.
028_0657_a_15L於欲染著欲想多習愛著衆多方便是謂犯欲有衆多縛著染污是謂欲結使欲結使者欲有若干想觀知所生是謂捨欲也
뜻과 도와 삿됨과 간사함과 거짓이며
청정함과 ‘나’와 괴로움과 즐거움과
그리고 그 자체와 뒤바뀜이며
결(結)과 탐욕과 거만함 따위이다.
028_0657_a_18L意盜邪奸僞
淸淨我苦樂
及體顚倒者
結使貪欲慢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8 결사건도를 마친다.
028_0657_a_20L尊婆須蜜菩薩所集結使揵度第八竟
尊婆須蜜論卷第七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도(盜)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에 의해 도(道)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