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뀜을 따른다고 말하는가, 뒤바뀜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혹 뒤바뀜을 따르기도 하고 혹 뒤바뀜을 따르지 않기도 하나니 네가지 뒤바뀜[四顚倒]은 뒤바뀜을 따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욕심ㆍ거만ㆍ성냄ㆍ삿된 소견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어떻게 실답지 않게 물드는가? 또한 실답게 저것을 관찰하여 곧 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그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는다. 【답】쌓아 모인 것에 대해서 곧 그것이 제 모양[自相]이 아니라고 안다. 만일 제 모양을 관찰하여 알면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뜻이 있게 되나니 제 모양에 대해서 뜻이 회전하지 않음이 없다.
【문】쌓아 모인 것대로 알 수가 있나니 그 쌓은 모임에는 곧 욕심이 있다. 저 뒤바뀜 관찰하기를 제 모양 관찰함과 같이 하더라도 곧 물들고 집착하여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제 모양에 대해 뜻이 회전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이는 “뒤바뀜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문】착함[善]과 무기(無記)인 마음과 마음의 법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나니 그것은 없앨 수가 있다. 더러운 때도 역시 그와 같은가?
028_0648_a_19L問:如善無記心心法不隨顚倒,彼亦可滅,垢亦如是。
【답】착함과 무기인 마음과 마음의 법은 도로 계속하여 전과 같이 되나 결박만은 영영 없애버릴 수 있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뒤바뀜이라고 말해야 한다.
028_0648_a_21L答曰:善無記心心法還續如故,結可使永無,是故彼當言顚倒。
028_0648_b_02L또 뒤바뀜을 따르지 않고 삿된 뜻과 사(使)와 서로 상응한다. 그와 더불어 서로 순응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고 그것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 하면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은 바로 뒤바뀜이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어서 그를 능히 없앨 리가 없고 실지 ‘나’의 몸이라고 한 소견을 돌이키는 이가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뜻은 깨끗한 모양이라서 깨끗하지 못한 것을 돌이킨다”고 말했다.
【답】깨끗한 모양이 있지 않다. 거기에는 혹 깨끗함이 있기도 하고, 혹 깨끗하지 못한 것이 있기도 하다.
028_0648_b_06L答曰:無有淨相,彼或有淨或不淨。
【문】만일 깨끗함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뒤바뀜이 있다. 그것을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하며, 혹은 항상함이라고 말하나니 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028_0648_b_07L問:若有淨彼有顚倒,彼或曰有常或曰常。欲使無常相不成就耶?
【답】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되지 않는다. 설령 항상하여 항상함이 없는 모양이 성립되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마땅히 그런 모양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양이 아니므로 항상함이 없는 모양이 아니니 그러므로 항상함이 없는 모양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소견이 뒤바뀐 것은 어리석음과 상응하고 깨끗함이 아니나 뒤바뀜이 아닌 것은 지혜와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했다.
【문】어리석음은 어리석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나니 어리석음을 뒤바뀜이 아니라고 하려는 것인가? 지혜는 지혜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나니 지혜를 뒤바뀜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바로 더러운 때이니 때는 뒤바뀜과 함께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뒤바뀜이고 깨끗함이 아니다. 지혜의 힘으로 인해서 지혜와 지혜 아닌 것은 뒤바뀜을 따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깨끗함이 아니고 뒤바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 종류와 같이 깨끗하지 않는 모양이 함께 물들거나 집착하고 모든 가리움[陰]의 제 모양으로 하여금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있게 하지 않는다. 가리움은 내가 없는 것이 성립되는 것처럼, 그 종류와 같이 깨끗함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은 뒤바뀜이고 깨끗함 아닌 것이 아니다. 모든 소견[見]은 62견(見)을 포섭하나니 62견이 모든 소견을 포섭함이 된다.
【문】살비(薩毘)범지가 말한 바와 같이 셋과 나아가 36으로서 가지가지로 다르다고 하니, 어찌하여 그것은 모든 소견이 아닌가?
028_0648_c_05L問:如所說薩毘梵志,三乃至三十六種種異,云何彼非諸見耶?
【답】그 일은 그와 같으니 둘과 또한 60이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모든 소견은 62견을 포섭하고 62견은 모든 소견을 포섭하지 않는다. 무엇을 포섭하지 않느냐 하면 저 열반이 열반과 함께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다섯 가지 삿된 소견[五邪見]에 이르러도 한 가지 삿된 소견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예순세 가지 소견은 있지 않고 이 두 소견만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열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삿된 소견이니 그를 예순세 가지 소견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도(道)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곧 삿된 소견이니 그를 예순세 가지 삿된 소견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또 소견을 곧 예순세 가지 삿된 소견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다섯 가지 소견은 몸에 대해 망설이는 소견ㆍ삿된 소견ㆍ소견의 착각ㆍ계율에 대한 착각, 원인 없이 내는 소견이다.
어떤 소견에 포섭되어 죽을 때까지도 그 소견을 버리지 않으니, 어떤 소견에 포섭이 된 것인가? 어떤 이는 “원인 없이 내는 소견에서는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삿된 소견은 집제(集諦)에서 끊는 바가 된다. 다시 죽을 때까지도 버리지 않는 소견에서는 짓는 것이 없는 것을 짓는 것이 있다고 말하나니 그는 계율에 대한 착각인지라 고제(苦諦)에서 끊어야 한다.
028_0649_a_02L또 원인 없이 나는 소견은 없다는 소견과 있다는 소견에 포섭되며 죽을 때가지도 버리지 않는 소견은 있다는 소견에 포섭된다고 말해야 하는가? 무슨 까닭으로 견사(見使)가 이미 없어지면 마음과 상응하는 사(使)가 다시 나게 되는가? 그러한 인연이 있지 않은가? 어떤 이는 “인연이란 결사(結使)가 곧 없어지는 인연이니 없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남아 있고 없어지면 다시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만일 유루(有漏)에 인연하여 모든 결(結)이 없어지면 자주자주 일어났던 저 연(緣)은 다시 생기지 않고 사라지거나 생기지도 않나니 무루심(無漏心)을 곧 저 연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결사가 이리저리 결사를 낸 것인가? 어떤 이는 “저 상응함에는 생기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사라지기도 하나, 그 연과 같지 아니하여, 이미 다하여 각기 흩어지면 한 곳이 아니고 저 마음에 사(使)가 있더라도 그 연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028_0649_b_02L어떤 이는 “모든 상응함인 사가 마음과 더불어 함께 머물러 그 연과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 상응함인 사가 이미 없어진다”고 하니 저 마음에 사가 있으매 그 연과 같지 않음은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모든 상응함인 사가 마음에 물들어 집착하면 그 연과 같지 않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모든 상응함인 사를 이미 다하면 저 마음에 사가 있더라도 그 연(緣)과 같지 않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상응함인 사(使)란 저 마음이 물들고 더럽혀 그 연과 같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응함인 사를 이미 없앤다”고 말했다. 저 마음에 사가 있으면 그 연과 같이 아니함은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설령 저 연과 같다면 저 마음에 사가 있고 또한 무루심(無漏心)이 사에 끌릴 때에는 거기에 곧 사가 있게 됨을 본다. 또 모든 상응함인 사를 저 마음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없어졌거나 없어지지 않았거나 세력이 있는 왕에게는 모든 욕구가 저절로 이루어짐과 같다.
【문】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 어찌하여 딴 세계와 상관이 없는가? 설령 욕계에서 딴 세계의 것을 지었다면 유루계(有漏界)에서 저절로 있는 세계[有界]를 지은 것이라고 여기려는 것인가? 삿된 소견 때문에 저 세계가 또한 사에서 사를 받은 것인가? 어떤 이는 “저 세계는 거만이 적어서 차츰 떠나버리나니 그러므로 저 세계는 사에서 부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어찌하여 저가 있는데 이런 설법이 없는가? 【답】있다. 저가 만일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고 좋은 이익이 없다.
028_0649_b_19L問:云何彼有無此說法耶?答曰:有。彼若以此說使說者,此非其義無長益。
【문】괴로움이 없으니 그 또한 생각함이 있거나 말한 바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알고서 없다고 말하나니 만일 알고서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의 지혜[苦智]가 아니겠는가? 어찌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알지 못하거나 아는 것이 없다면 어찌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두 그러한 사실이 없다.
028_0649_c_02L【문】알고서 없다고 말하거나 알지 못하고서 없다고 말한다. 만일 아는 것이 없거나 알고서 없다고 말한다면 알지 못하고서 어찌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없다. 또 연(緣)의 사에서 사를 당하는 바이다. 왜냐 하면 저것은 사에게 사를 받은 바가 아니다. 또 저 소견과 한계는 일정한 자리가 없고 온갖 괴로움이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나니 욕계로 하여금 그 순서를 뛰어넘게 하려고 저 다하지 않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후에 욕계와 상응한다.
【문】유루법도 또한 비방을 떠났나니 그러므로 유루(有漏)도 또한 사에게 사를 받는 바가 된다.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비방으로 말한 바는 또한 본질과 다르지 않으면서 그러한 비방이 있는 것이다. 또 만일 사에 반연하더라도 부림에게 사를 당하지 않으며, 음(陰)으로 지니어 그 안에 들어가더라도 그는 태어날 곳이 없다고 본다. 이미 태어나는 바가 없는데 어찌하여 열반으로부터 사를 받는 바가 없으며, 열반안에서는 성내는 것이 없는가? 어떤 이는 “그는 성내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028_0650_a_02L【문】유루법은 온갖 수효 내에서 곧 이름이 생기는 일이 있는가? 또 짓는 것이 없는 모양에는 빨리 성냄이 일어난다. 그러나 열반은 짓는 것 없는 일이니 그러므로 열반에는 성내는 것이 없다. 만일 “내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한다면, 열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욕계 안에 환희락천(歡喜樂天)이 있다”고 경에서 널리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찌하여 목숨이 마치면 다시 몸을 받아서 곧 스스로 “내가 본시 환희락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여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본래 환희락천이었다”고 하는가? 어떤 이는 “거기에서 물러나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그는 욕계에서 나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문】욕계에 태어나 숙명(宿命)을 알고서, “나는 누구의 몸이었다”라고 하여 나라는 생각을 그와 같이 일으키는데, 그를 물러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또 온갖 이름 물질[名色]과 상응하는 결사는 욕계의 인연이다. 그는 곧 잘 기억함 있으나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여 태어날 때에 벌써 서원(誓願)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나라는 소견의 생각으로 그는 아주 없다고 보지 아니하며,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옛 부터 범부로서 본래 환희락천 사람이었다”고 한다.
무슨 까닭으로 범부 사람들이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관찰하지 아니하여 욕계와 상응하는 몸이라고 보는 소견[身見]과 망설이는 소견들을 아주 없음[斷滅]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깨끗하지 않다는 관념으로 탐욕을 없애고 현재 하나의 괴로움을 뽑아버리며 또한 사유하여 끊는다”고 말했다.
028_0650_b_02L【문】4제(諦)로 끊는 것은 사유가 아닌가? 이 두 가지 끊는 바가 하나의 종류인가? 4제로 끊는 바가 없어졌어도 사유로 끊는 것만은 없어지지 않고 버려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가지가지 결이 이미 다하기도 하고 영원히 다하기도 하고 차츰차츰 다하기도 하는데, 저 몸이라는 소견[身見]은 이미 다하나 아주 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만일 차츰차츰 결이 다한다면 다시는 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 가지 몸이라고 하는 소견[三種身見]이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소견을 맺어 생기게 한다. 사를 다하여 몸이라고 하는 소견을 없애는 방법에는 곧 비추는 바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로관(惡露觀)을 한다 해도 그 몸이라고 하는 견사는 곧 나게 된다.
【문】어떻게 그 우열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저 결이 증가할 때에도 나쁜 갈래에는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0_b_17L問:云何得知有優劣?或作是說:彼結長益時不生惡趣。
【문】그는 반드시 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나쁜 갈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가? 어떤 이는 “착하지 않음에는 과보가 있으나 결에는 과보가 없나니 그러므로 그것이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0_b_19L問:彼未必不善,乃至入惡趣。或作是說:不善有報,結無有報,是故此無記。
028_0650_c_02L【문】그가 몸 받는 때를 본다면 어찌하여 과보가 없다 말하는가? 또 설령 그가 그러한 뒤바뀐 소견을 갖더라도 그것이 있을 곳이 없다. 어찌하여 착함 아닌 것이 없느냐 하면 그가 곧 그러한 소견이 있더라도 과보가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착함이 아니다. 어찌하여 때[垢]가 있으면 좋지 못한 과보를 받는가? 그러므로 무기(無記)라고 말한 사실은 옳지 못하다. 세존께서 또한 “그와 같은 비구는 어리석은 것이니 곧 착함 아닌 뿌리[不善根]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무기라고 말한다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사(使)를 무기라 말하고 착함 아닌 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그것은 몸과 입으로 짓는 짓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가 몸을 받을 적에 우열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는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는 과보가 있지 않다”고 말하니 이것들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모든 욕망에 집착한 이는 그것이 착함이 아닌 것인가? 그는 뜻이 있어도 나쁜 과보를 받지 않으며, 뒤바뀜을 받지 않으며, 회전하지 않으며, 편안하지 않다. 그는 또한 그러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떠나게 된다. 만일 결(結)이 착함 아닌 것이 아니라면 어찌 지금에 착함이 아닌가? 결 또한 행(行)으로 말미암아 증가한다. 그러므로 무기라고 말하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또 마음으로 비방하지 않을 것이니, 삿된 소견을 가지고 비방한 것이다. 첫걸음이 괴로움[苦諦]의 자리에서 시작하나니 괴로움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없애는 진리[盡諦]도 없으며 없애는 도(道)도 없다. 각기 자신들이 괴로움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 것이니 거기에는 얻을 만한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028_0651_a_02L무슨 까닭으로 때[垢]가 없는 사람이 드디어 나아가 결을 끊는데 욕계와 상응하는 결사(結使)와 생각으로 끊을 바[思惟所斷:思惑]를 먼저 없앤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게 되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성현의 도를 차츰차츰 내는 길이니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ㆍ무색계의 일을 끝낸다”고 말했다.
【문】성현의 도로 하여금 나게 하여 먼저 욕계의 일을 끝마치고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끝내려는 것인가?
028_0651_a_03L問:欲使賢聖道生,先辨欲界事、後色界、後無色?
어떤 이는 “욕계의 결사는 거칠고 색계와 상응하는 결사는 미세하나니 그러므로 먼저 욕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고 뒤에 색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고 그 다음에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을 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계와 상응하는 것은 가깝고 색계와 상응하는 것은 멀며, 무색계와 상응하는 것은 더욱 멀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상대가 있는 자리에서는 곧 앞의 결이 먼저 없어지나니 욕계와 상응하는 것이 먼저 앞에 있고 뒤에 색계와 무색계가 상응한다. 그러므로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먼저 없어지고 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뒤에 없어지며 또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뒤에 없어진다고 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저 도가 차츰 증가하매 상대함이 있는 것이 곧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있다. 무슨 까닭으로 생각으로 끊을 결[思惟所斷結]이 차츰차츰 끊어지지 않느냐 하면 마땅히 이러한 관찰을 할 것이니 색계와 무색계를 지혜로 관찰할 줄을 알지 못하면 거기에는 더욱 자라나는 길과 또한 차츰 지니거나 믿고 받드는 법이 없으리니 알거나 잘 알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괴로움을 방편으로 관찰하는 것이 없다.
무슨 까닭으로 욕계와 상응하는 행(行)과 괴로움 등을 생각하는 것으로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을 얻게 되고 색과 상응하는 것이거나 무색계와 상응하는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성현의 도를 차츰차츰 내는 길이니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그와 동일하게 끝낸다”고 말했다.
028_0651_b_02L【문】그가 생각하는 도가 나도록 하는데 먼저 욕계의 일을 끝내고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의 일을 끝내는 등,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괴로움과 거친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속박된다는 것도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권장하고 가르치는 방편만은 나이 많은 이거나 그것을 비록 거역하는 사람이라도 하는 일과 온갖 지어감에 대해서 모두 버려서 괴로움의 근본을 이미 없앤다.
또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여 속박되거나 집착하는 것을 마땅히 욕심이 없어졌다고 말해야겠다. 괴로움의 행(行)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을 생각하려고 함은 마치 자기의 밭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밭에 묶은 풀을 제거함과 같나니, 그것을 보건대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만일 다하는 법인[盡法忍]을 얻을 적에는 욕계와 상응하는 진제(盡諦)와 도제(道諦)와 생각으로 끊을 결[思惟所斷結]이 없어지리니, 그 때에는 지혜로 돌아가고 몸은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몸은 증득함을 받고 지혜로 돌아가지 않는다. 욕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지혜로 돌아가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진제(盡諦:滅諦)와 도제(道諦)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거나 생각함[思惑]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또한 지혜로 돌아가지 않고 또한 몸소 증득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1_c_02L어떤 이는 “진법인(盡法忍)이 일어날 때에 욕계와 상응하는 결과 도제(道諦)와 상응하는 것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지혜로 돌아가고 몸은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몸은 증득함을 받고 지혜에 돌아가지 않는다. 욕계와 상응하는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와 사라짐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그 때에는 지혜에 돌아가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는다.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는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에서 끊을 결이 없어지면 또한 지혜에 돌아가지 않고 몸도 또한 증득함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진리를 본 사람이 세속 사람과 같나니 소견과 상응하는 느낌이 애결과 상응하고, 전결과 상응하지 않나니 견결이 저 견결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쌓임의 지혜[習智:集智]가 이미 생기면 무색계의 애욕이 없어진다. 세속 등의 소견과 상응하는 느낌은 애결과 상응하고 견결과 상응하지 않는다.
028_0652_a_02L【문】삿된 소견과 무명이 각각 다르지 않는가? 그와 같은 의혹 무명에는 이 모든 법이 각각 다르다. 또 무명이 열반을 따르는가? 또 그와 같은 다섯 가지 치성한 음(陰:五陰)을 내 것[我所]이라고 말하는 것은 두 눈을 감고서 일체 슬기롭게 본다는 것이 드문 것과 같다. 몸이 유루(有漏)에 반연하여 모든 결사를 내는 것과 같이 결박에 반연하는 대로 저 몸은 누(漏)가 있는가? 어떤 이는 “몸이 유루로서 그와 같이 결사 내는 것에 반연하면 저 몸은 유루요 사라짐과 도에 반연하면 모든 결사가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몸에서 유루가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결을 내나니 반연하여 결을 내면 저 몸은 유루로서 무루의(無漏義)을 내고, 유루의를 맺는다”고 말했다. 또 만일 몸이 그 중간에서 소견을 내지 않으면 저 몸은 유루이나 저 반연과 같이 모든 결을 내지 않는다. 그는 결을 만들 적에 몸의 처소에 물들고 집착한다.
028_0652_b_02L또 이 진리 보는 것에서 생긴 실없는 짓은 진리 보는 것으로 끊는 것이다. 저 실없는 짓을 조금 말하고 따르지 않더라도 이는 할 일을 끝내지 못한 것이요, 만일 그 경지를 벗어났더라도 그것은 생각함으로 끊을 바이며, 만일 조금 끝냄이 있더라도 핍박하거나 장애하는 짓이니 그러므로 둘 다 모두 실없는 짓이다.
어떤 이는 “범부는 실없는 짓이 많고 진리를 본 이는 그 실없는 짓이 적나니 그 둘 다 실없는 짓을 진리 보는 것으로써 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공포가 없어도 더러운 뜻이 있나니 왜냐 하면 진리를 보고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리를 보았으면 혹시 그를 따르게 되는데 저 실없는 짓은 생각함으로 끊는 바로서 무색계에서부터 종말에는 욕계에 난다. 어찌하여 욕심과 상응하는 결이 앞에 나타나느냐 하면 위의 취건도(聚揵度)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만일 ‘무색계에 태어나면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영원히 끊어지나 무색계와 상응하는 결이 아니니 그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저것을 반연하여 그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설령 태어날 때에도 중간에 태어나지 않으며 결사가 또한 앞에 나타나지 않나니 앞에 나타날 인연이 없다. 또 범부가 결이 없어지지 않음은 착하지 못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니 저 욕계와 상응하는 결을 없어진다고 말한다.
모든 결사를 뽑아버리지 아니하면 비유컨대 불꽃이 불꽃으로 인하여 밝고 그와 같은 밝음에 얽히는 것처럼 착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이는 곧 색계의 유(有)를 받게 되나니 이것 역시 위의 취건도(聚揵度)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계에서 욕계에 태어날 때에는 어찌하여 욕계와 상응하는 결이 앞에 나타나 있게 되느냐 하면 위의 취건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차츰차츰 애욕이 증가하여 세력이 있게 된다.
어떤 이는 “때와 집착을 말미암아 재변이 생기나니 그들의 중생이 욕계의 결이 있고 그들에게 재변이 일어난다. 그들에게 재변이 있는 것과 같이 결이 곧 증가된다”고 말했다. 또 중생이 착한 법을 항상 닦고 행하면 곧 다른 좋은 국토에 노닐게 되고 저 행이 증가되며, 중생이 타락하면 본래 익힌 것을 배우게 된다.
어떤 이는 “탐욕의 사는 심한 애착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성냄의 사는 애착이 아니고 물들어 집착함이 아니나 그를 사라고 한다. 애욕의 사가 심한 애착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교만의 사는 치열하고 아주 치열하매 마음이 사나워지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견사(見使)인 다섯 소견[五見]과 저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 사에 의지한 사와 망설이는 소견은 아주 없음이며 항상함이 있다고 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삿된 소견 사는 까닭 없이 지음 없다고 비방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도적임을 보는 사는 간직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장 미묘하고 가장 최상이 되나니 그를 사라고 한다. 도적을 경계하는 사는 청정한 해탈이고 최상의 으뜸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무명(無明)의 사는 지혜가 없고 어둡고 미혹함이니 그를 사라고 한다. 의혹 사에서 희망하거나 망설여 옳은가 그른가를 잘 판가름 못하는 그것을 사라고 한다. 그와 같이 사에 반연하여 사를 받으면서 일찍이 상응하는 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3_a_02L【문】무루(無漏)도 역시 사에 반연하나니 그와 같이 저 부리는 바와 부리려고 하는 저 반연도 역시 부리는 바가 되는가? 어떤 이는 “저들의 온갖 사가 있는 반연과 같이 저들의 사인 반연이 있을 때에 각기 서로 이끌어 당기나니 그것은 사에서 사를 받는 것이 된다. 그와 같이 사인 반연으로 사를 받는데 그가 물들거나 집착하게끔 하나니 그와 같은 사는 서로 응하여 부리는 바다”라고 말했다.
【문】무루연(無漏緣)도 역시 사(使)며 반연 역시 사이고, 그 밖의 반연이 사를 받게 함은 없다. 다시 비록 사에서 사를 받는 것이라 해도 회전하는 곳에는 거기에 곧 사가 있고, 만일 상응하는 사에서 사를 당하는 것이라 해도 그 밖의 것이 역시 상응한다. 또 중생의 사에서는 인연으로 사를 받게 된다.
또 평등한 지혜[等智] 그것이 곧 저 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저 사는 유루에서 사이기 때문이다. 혹은 작용하기도 하고 혹은 작용하지 않기도 한다. 때[垢]는 어떤 내용이 되는가? 어떤 이는 “때가 사람의 몸에 붙나니 모든 애욕을 받는 것이 때의 반연이며, 괴로움도 역시 때다”라고 말했다.
028_0653_b_02L또 두 가지 때, 마음과 상응하는 때, 중생의 때 때문에 저 마음이 때묻나니 마음과 뜻에 물드는 것이 때가 옷을 더럽힘과 같다. 중생의 때는 혹 다른 것을 따르기도 하는데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다. 이러한 인연으로써 이 일을 계교할 적에는 곧 마음의 때가 생긴다. 세존께서 또한 “마음의 때에 미혹한 바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면 행동이 곧 청정해진다. 그것으로 합해져서 중생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함은 ‘나’의 생각이고, 몸은 곧 내 것이며 신견(身見)이니 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괴로움과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견을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몸으로 보고, 몸으로 보는 그 몸은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몸을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을 없애야 되나니 마땅히 그러한 관찰을 해야 된다.
【문】괴로움에 반연된 결은 가장 앞에 있고 최상이 되고 미묘함이 되는데 도적은 어찌하여 괴로움과 어김이 있는가? 또 어찌하여 괴로움의 결박을 벗어나는 앞이 도적이 되는가? 만일 괴로움이 앞잡이가 아니라면 소견 도적은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어야 되고, 말한 진리대로 머무를 곳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겠다.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삿된 소견이라고 말하는가?
【문】만일 저 3결이 이미 없어져서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면 그는 욕계에 태어나지 아니하므로 욕계에 때[垢]가 없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다시 삼결인 몸을 받는다면 세계로 하여금 회전 않는 것이 있게 하는가? 어떤 이는 “2결은 하분(下分)에 해당되니 탐욕과 성냄을 뜻한다. 만일 그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욕계의 몸을 받거니와 이미 없어졌으면 다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4_a_02L【문】말한 바와 같이 오상분결은 곧 그 명칭이 없는가? 어떤 이는 “2결(結)인 탐욕ㆍ성냄을 없애지 못하면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3결(結)이 없어지지 못하면 다시 욕계로 돌아오나니 그러므로 오상분결이 없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모든 결사는 욕계에서 없어지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마땅히 상분(上分)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것을 상오분결(上五分結)이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5상분결(上分結)은 색계의 애착[色愛]ㆍ무색계의 애착[無色愛]ㆍ실없음ㆍ교만ㆍ무명(無明)이다”라고 말했다.
028_0654_a_06L云何是上五分結?或作是說:五上分結,色愛、無色愛、調戲、憍慢、無明。
무슨 까닭으로 그것이 없어지지 못하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으며 3결(結)이 없어지지 못하여 그를 수행할 적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가? 위의 것을 오상분결이라고 하는가? 【답】그는 몸을 받거나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저 몸을 받지 않는다.
【문】3결(結)이 이미 없어져서 저 때가 없는 사람이 욕계의 몸을 받는다면 그를 오상분결이라고 말하는가?
028_0654_a_11L問:三結已盡,此無垢人受欲界。欲使是五上分結耶?
어떤 이는 “만일 모든 결박이 다 없어지지 못했으면 욕계를 떠났더라도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나니 그를 오상분결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둘이 오상분결이니 색계의 애착과 무색계의 애착이다. 그 중에서 수행하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색계와 무색계의 몸인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모든 결사(結使) 그것이 색계와 무색계의 결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나니 그것을 오상분결이라고 한다.
어떻게 성냄에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좋지도 못하고 위도 아닌 근심과 고뇌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근심 걱정이 차츰 떠나가서 멀어지는 상태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생 때문에 그 성냄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영원히 떠나버리기를 악초(惡草)를 제거하는 것같이 한다.
028_0654_b_02L욕심은 생각과 더불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이는 “욕심은 때묻은 것이고 생각은 때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심은 착함 아니고 생각은 착함과 무기(無記)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욕심은 존재[有]를 받게 되고 생각은 존재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삿된 해탈과 4전도(顚倒)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진리를 본 것[見道位]에서 끊을 것은 전도가 되고, 진리를 본 생각[修道位]에서 끊을 바는 삿된 해탈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능히 사람을 위하여 연설해 줌은 전도가 되고, 능히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지 못함은 삿된 해탈이 된다”고 말했다.
028_0654_c_02L어떤 이는 “실없음은 생각함[修道位]에서 끊을 바이고, 의혹은 진리를 본 것[見道位]에서 끊을 바다”라고 말했다. 또 마음이 더러워져서 뉘우치거나 원한이 있는 마음은 실없음이 되고, 마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정해지지 못함은 곧 의혹이 된다.
어떤 이는 “범부는 그 중간에서 모든 결박과 사를 끊나니 그가 물러날 때에 온갖 것이 더하는 일이 있으며, 세존의 제자도 그 중간에 사라짐 있는 이가 적고 끝가지 없애지 못했으므로 그가 물러날 때에 그 중간이나, 그가 물러날 때에 그에게 곧 더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다시 범부는 지어감[行]으로써 온갖 사(使)에 반연하여 그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리워졌으며 그는 지어감의 반연에 매인 바가 되었기 때문에 곧 더해진다. 그리고 세존의 제자는 본 것 등으로써 그의 더함은 이동할 수가 없고 평등하게 보는 것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가 잘 수호하며 그는 혹시 물러나기도 하고 지니기도 한다.
028_0655_a_02L무슨 까닭으로 색계와 무색계에 상응하는 결사를 과보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그는 몸과 입과 뜻의 지어감을 자라게 하거나 보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에게 비록 몸과 입과 뜻의 지어감이 있으나 그는 더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좋은 과보와 추한 과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기(無記)이므로 과보과 없다”고 말했다.
또 만일 결사에서 과보가 있다면 저 있는 인연에 어김이 있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만일 그가 비방을 한다면 색계와 무색계의 과보를 받지 않나니 그와 같이 있는 인연도 또한 없다. 그는 존재[有]를 받지 않나니 그러므로 결도 없고 또한 일정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버리고 떠난다.
다시 “5욕에는 애욕이 있으므로 착함이 아니지만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은 곧 착함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5욕 중에는 애욕이 있어, 존재를 받고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존재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5욕 중에는 애욕이 있어 온갖 선(善)의 생각이 있고, 물드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끊지 않는다”고 말했다.
028_0655_b_02L만일 괴로움의 진리[苦諦]에서 단견(斷見)할 도와 쌓임의 진리[習諦]에서 끊을 그 둘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서 보아 끊을 도는 괴로움의 진리에서 끊을 바라고 하며, 견도(見道)1)의 것은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바라고 한다”고 말했다.
【문】하나의 일을 만들어 생기는 곳에는 온갖 상응하는 법은 아무런 세력이 없게 되는가? 어떤 이는 “제 모양인 껴잡을 마음과 모으는 마음만이 곧 성현의 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이 또한 성현의 도이니 평등한 3매(昧)에 많은 마음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나에만 주력하는 삼매란 마음이 더하거나 줄어짐에 달라짐이 없는 삼매다”라고 말했다. 또 도의 마음이 강력하여 뜻에 나아가는 바를 마음이라고 말한 것도 있다.
028_0655_c_02L욕계와 상응하는 몸으로 여기는 소견[身見]은 망설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상응하는 무명(無明)을 제거하거나 그 밖의 법을 얻으면 사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상응하는 모든 법과 그 밖의 심소념법과 마음 해탈행(解脫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만일 뒤바뀐 것을 수다원이 이미 없앴다면 그는 곧 물들지 않을 것이다. 괴로움의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과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에는 그가 곧 물들고 있다. 또 수다원은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과 깨끗함이 있다는 생각이 이미 없어졌으며, 소견 중의 삿된 소견[邪見]은 이미 없어졌다고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덮임 중의 의결(疑結)인가?
어떤 이는 “만일 욕계와 상응한 것이면 그것은 의혹을 벗어날 것이고, 만일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한 것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3매(昧) 안에 드는 것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고, 만일 참된 결과이면 그것은 의혹 덮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온갖 실없는 짓은 의혹 덮임이 매우 많아지는 것이나, 욕계와 상응하는 것이면 의혹 덮임이 아니다.
만일 ‘나’라고 스스로 생각내는 것이면 그것은 모두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이다. 만일 몸이라고 하는 소견에는 그것이 모두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는 것인가? 어떤 이는 “온갖 법에 대해서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두는 그것은 모두가 몸이라고 하는 소견이다”라고 말했다.
혹시 몸이라고 하는 소견[身見]인 그 법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라는 소견[我見]에만 스스로 의존하기도 하는가? 어떤 이는 “혹시 스스로 ‘나’라고 하는 생각을 내는 법이 있으면 몸이라는 소견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소견과 상응하는 심소념법(心所念法)에는 몸이라는 소견이 있을 것이니 그는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다시 저 ‘나’라고 하는 생각을 내는 법은 그것이 몸이라는 소견이 아니겠는가? 또 세존께서 “내가 지금 그들이 ‘나’라고 하는 것을 말해보겠다. 혹 몸이라는 소견은 그가 ‘나’라고 하는 소견을 내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몸이 아니라는 소견은 또한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위의 사실을 제외하고는 곧 그런 내용이 있다. 온갖 소견이 생기는 데에는 병이 없으면 스스로 즐겁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그런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宿命)을 알게 된 것이니 초선(初禪)ㆍ2선ㆍ3선의 경지에서는 모두 거기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는 것을 저절로 안다”고 말했다. 또 탐냄과 질투의 소견과 몸으로 위의 방편을 관찰하면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모든 고통을 관찰하고 중간에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이런 낙이 있다. 그러나 괴로운 세계다’라고 하나니, 그러한 나쁜 갈래에서 내는 소견은 하나의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병 없이 죽어야겠다고도 한다.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게 되는가? 어떤 이는 “그것도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을 안 것이니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도 또한 숙명을 알아 여기가 괴롭다고 하여 거기에서 나는 매우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나’라고 스스로 생각을 내는 이가 좋은 방편으로써 먹을 것을 생각하듯이 그가 저지른 것을 관찰하여 하나의 괴로움만을 보기도 하고 즐거움도 또한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생긴 소견을 스스로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즐거움에는 안온하다는 생각을 두는 것은 어떠한 결(結)인가? 어떤 이는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숙명을 안 것이니 인간ㆍ천상과 욕계에서 스스로 숙명을 알되, 거기에서 고락을 스스로 알고 거기에서 곧 나에게는 이러한 고락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나’라는 생각을 하기에 그 방편을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게 된다고 관찰하여 그 중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고락이 곧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편안한 자리에서 죽는 생각을 한다.
또 ‘나’라는 생각 소견을 내어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그 고락을 받고서는 혹 즐거움이 없으면 그는 곧 그러한 생각이 있나니 그가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면 나라는 소견이 없다고 하며, 또한 죽는 생각을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이른바 ‘나’가 이미 생겼다고 함이란 4대(大)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너져서 죽음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나’라는 소견 등의 그러한 소견은 바로 어떤 소견인가? 【답】혹 어느 때에 관찰 수행하여 하늘 눈[天眼]으로써 욕계에 곧 태어나게 될 것임을 아나 그는 그러한 관찰은 하지 않고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나’가 있다고 말함이란 욕계의 고통을 끊고서 무너져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나’라는 등이 끊어진다고 하는 소견은 어떻게 생기는가? 【답】혹 어느 때에 관찰 수행하여 하늘 눈으로써 색계의 형체를 보고서 그는 그러한 관찰을 하지 아니하고,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진다’고 한다. 온갖 소견을 내어 ‘나’라고 말하나 무색계의 공한 곳에서는 내가 없어서 성립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따위는 없는데,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는가? 【답】혹 어느 때에는 지어감을 보고 색계의 형상이 있는 것을 알고, 그는 딴 갈래를 관찰하지 않는다.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소견을 내어 ‘나’라는 것은 무색계의 공한 곳에서는 없어져서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나니 그를 아견(我見) 등이 끊어짐이다”라고 말한다.
028_0656_c_02L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을 내는가? 【답】평등하게 삼매에 들어가나 태어날 바를 관찰하지 않고 그는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식처(識處)와 불용처(不用處)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하여 죽음에까지 이른다.
무슨 까닭으로 그 소견이 생기는 것이 없는가? 어떤 이는 “내가 항상 있고 청정한 결과가 있으나 또한 소견이 결과는 아니며 이 소견은 남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심소념법(心所念法)을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나니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곧 비방하여 “그는 곧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애욕에 물들고 집착하여 애욕의 생각이 많고 애착하여 여러 가지 수단이 있는 것을 애욕에 빠져든다고 한다. 많은 속박과 집착이 있어, 마음이 물들고 더럽힘을 애욕의 결박이라고 한다. 애욕의 결박이란 애욕에 약간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니, 그 생기는 바를 관찰하여 아는 것을 애욕 버림[捨欲]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