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716_a_01L삼법도론(三法度論) 상권(上卷)
028_0716_a_01L三法度論卷上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한역
김 병욱 번역
028_0716_a_02L東晉罽賓三藏瞿曇僧伽提婆譯


1. 덕품(德品) ①
028_0716_a_03L德品第一

고(苦)를 생함이 헤아릴 수 없지만
선적(善寂:열반)의 취(趣)에서는 편안한 것을 그는 알도다.
중생을 자비롭게 여기시기에
영겁(永劫)토록 윤회하시네.
028_0716_a_04L知生苦無量
善寂趣彼安
用悲衆生故
輪轉於多劫

자신의 오묘한 착함을 버리시고
모두를 위해 법을 말씀하시네.
넓은 지혜로 모든 취(趣)를 없애시니
최고의 깨달음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028_0716_a_06L捨己之妙善
爲一切說法
普智滅諸趣
稽首禮最覺

이 3법문(三法門)을 여시니
공덕이 돌아가는 곳이로다.
저 중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시어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하도다.
028_0716_a_07L開此三法門
功德之所歸
安快彼衆生
離於一切苦

먼저 선서(善逝)와
법(法)과 가장 뛰어난 대중에게 예배하오니
지금 설하시는 진제(眞諦)의 법은
삼삼품(三三品)이 그 뜻과 같아라.
028_0716_a_08L前禮於善逝
法及無上衆
今說眞諦法
三三如其義

말하기를 “지금 3법(法)에 대해 말하겠다”고 하였다.
028_0716_a_10L說曰今說三法
【문】존자가 3법을 말한다고 했는데, 3법은 어떤 뜻입니까?
028_0716_a_11L尊云說三法三法何義
【답】이 경(經)은 법을 말미암는 까닭에 다만 세 가지를 서로 이어서 글을 지었으니, 3법이란 가상(假想)이다.
028_0716_a_12L此經因法故唯三相續撰法者是假想
【문】무슨 까닭에 3법을 간추렸습니까?
何故三法撰
【답】이 불경(佛經)은 헤아릴 수 없는 상(想)에 의지하니 중생은 악한 세상에 무너지고, 목숨은 먹는 것으로써 보존된다. 그 진(眞)을 구하고자 하니 그를 위해서 상을 열기 때문이며, 잘 간직하기 때문에 이 3법을 가려내었다. 모든 세간도 진상(眞想)과 가상(假想)에 의지하니 그러므로 상을 열었고, 그래서 3법을 가려낸 것이다.
028_0716_a_13L此佛經依無量想衆生爲惡世所壞命以食存欲求其眞爲彼開想故及善持此三法撰一切世間亦依眞想及假想是以開想故三法撰
【문】3법을 가려낸 것을 이미 말했는데, 3법은 다만 원(願)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028_0716_a_17L已答三法撰三法唯願說
【답】덕(德)과 악(惡)이 깨달음에 의지한다면 착하고 뛰어난 법문이고, 만약 깨달음과 덕과 악이 깨달음에 의지한다면 착하고 뛰어난 법문이다. 이 3법은 경의 근본인 삼삼품(三三品)이니 품마다 각기 3진도(眞度)를 말했다.
028_0716_a_18L依覺善勝法門若覺德覺則善勝法門此三法經本三三品說品各三眞度
【문】삼품은 말할 수 있지만, 다만 말에 허물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착하고 뛰어난 것을 앞에서 착하고 뛰어나다고 말했고, 착하고 뛰어난 것을 말한 뒤에 덕과 악이 각(覺)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028_0716_a_20L說三品但於說有咎所以者何善勝應前說是善勝說善勝已然後說依當覺
028_0716_b_02L【답】즐거움이 향하는 곳을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세간의 즐거움은 착하고 뛰어난 것을 향하고, 나아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그 즐거움을 향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먹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있다.
028_0716_b_02L樂所向者則不應說此一切世間樂向善勝乃至昆虫亦樂向樂所以者何爲食故有所求
착하고 뛰어난 것이란 즐겁고, 묘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니, 이와 같이 뜻을 견주어 착하고 뛰어나다고 말한다. 세간이란 즐거움이 많으며 즐거움을 향하지만 즐거움의 인(因)을 등진다. 즐거움이란 대열반이고, 병 없음은 즐거움이 많음이나 향하는 것이 다만 이 인을 등질뿐이다.
만약 이미 즐겁다면 향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비유하면 인취(人趣)의 도(道)와 같아서 만약 이미 도를 안다면 도를 말하지 않으니 그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028_0716_b_04L勝者樂妙愛如是比義說善勝世間者多樂向樂而背樂因樂者大涅槃及無病是多樂向但背是因若已樂向不應爲說譬人趣道若已知道則不語道彼亦如是是故無咎
【문】어째서 이 덕과 악이 깨달음에 의지하면 곧 착하고 뛰어남이 있게 됩니까? 금을 보면 부(富)를 얻고, 약을 보면 병이 없어집니까? 그러므로 덕과 악은 깨달음에 의지한다고 해서 착하고 뛰어난 것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028_0716_b_09L云何此德依覺便有善勝頗有見金得見藥病無耶是故不可德依覺而有善勝
【답】비록 이러한 말이 있지만 뜻은 그렇지 않다. 등(燈)의 비유를 취하겠다. 예컨대 등에 불을 켜면 곧 어둠이 없어지고 등에 불을 켠 후에 어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가 생기면 곧 착하고 뛰어난 지혜의 깨달음이 있게 되니, 이것이 한 가지 뜻이다.
028_0716_b_12L雖有此言是義不然當取如燈如然燈卽時壞闇非然燈已後壞闇如是智生卽有善勝智覺是一義
【문】덕은 어떤 것을 이름 지은 것입니까? 중생의 수(數)입니까? 색과 맛과 향기에 견줍니까? 거두는 것입니까? 다투어서 조복하는 것입니까?
028_0716_b_15L德名何等爲衆生數爲色味香比爲攝爲諍伏耶
【답】나는 즐겁지 않고자 하여 스스로 생각해서 경을 지었다. 이 중에서 덕이란 복(福)과 근(根)과 악하지 않음[無惡]이다. 복과 근과 악하지 않음, 이 세 가지가 덕의 상(想)이다. 백정법(白淨法)과 법의 과(果)를 나는 덕의 상이라 하니, 이 모든 것이 이 세 가지에 거두어진다. 지금 계속해서 드러내 보이겠다.
028_0716_b_16L我欲不樂自想作經而此中德者無惡無惡者此三是德想白淨法及法果我以爲德想是一切此三中欇今當相續顯示
【문】복(福)과 근(根)과 악하지 않음을 이미 말했는데, 어떤 것이 복입니까?
028_0716_b_20L已說福無惡何等爲
【답】복이란 보시와 계와 닦음[修]이니, 자주자주 착하고 뛰어난 것에 처하는 것을 복이라 한다. 또한 사람의 악을 드러내어 없애는 것을 복이라 한다. 이 세 가지가 보시와 계와 닦음이니 말한 것과 같다.
복이란 자주자주 사람을 착한 곳으로 인도하고 또한 악을 드러내어 없애도록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복이라 한다.
028_0716_b_21L福者施數數處善勝謂之亦揚去人惡謂之福是三種施如所說福者數數 將人善處 亦揚去惡故謂爲福
028_0716_c_02L【문】복이 보시와 계와 닦음이라고 이미 말했는데, 어떤 것들이 보시입니까?
028_0716_c_02L已說福何等爲施
【답】자기와 남을 위해서 거두기 때문에 재산을 버릴 때 생각과 원(願)과 가르침이 없는 것이 함께 하면, 이것이 세 종류의 보시이다.
028_0716_c_03L爲已他攝故捨財時俱思願及無教是三種施
【문】이것은 어떠합니까?
此云何
【답】보시란 법(法)과 무외(無畏)와 재(財)이니 법시(法施)와 무외시(無畏施)와 재시(財施), 이 세 가지를 보시라고 말한다.
법시(法施)란 경을 세간에 나오게 함을 말한다.
028_0716_c_05L施者法無畏無畏施財施是三說施法施者經出於世間
무외시(無畏施)란 여덟 종류로서 3귀의(歸依)를 으뜸으로 한다. 예컨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위해서 두려움 없음을 보시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한(恨)을 맺지 않아 악이 없는 것이 법이고, 무리[衆]도 이와 같다.
028_0716_c_07L無畏施者八種三歸爲如世尊說歸佛爲無量衆生施無不結恨無惡法衆亦如是
【문】예컨대 3귀의도 살생인데, 어째서 보시에서 무외시(無畏施)를 으뜸으로 합니까?
028_0716_c_09L如三歸亦殺生云何施爲無畏首
【답】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중생은 다만 이와 같은 사견(邪見)을 어리석음으로 하여 살생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도적질하며 여러 악을 짓지만 이 3귀의를 한 사람은 짓지 않으니, 이미 바른 견해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약 3귀의를 하였지만 바른 견해가 없다면 3귀의를 한 것이 아니다.
028_0716_c_10L不說一切衆生但如此邪見爲癡殺生盜他作衆惡是三歸者所不作已得正見故若三歸無正見者則非三歸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에게 보시하지만 두려움 없음을 으뜸으로 삼는 데는 허물이 없다. 재시란 음식을 으뜸으로 삼으니, 다른 사람을 거두기 위해서 보시한다. 공양 등에서는 향과 꽃을 으뜸으로 삼으니 스스로 위하기 때문이고, 혹 다시 둘 다 갖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와 남에게 모두 덕이 되기 때문에 큰 과(果)를 얻는 것이다. 이 중에서 보시의 깨끗함은 널리 분별해야 한다. 다음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8_0716_c_13L是故施無量衆生無畏爲首無咎財施者飮食爲首攝他故施供養等以香華爲首自爲故或復俱故是己他俱故得大果此中施淨應廣分別所說

비유하면 나무가 그 뿌리를 쓰기[用]도 하고
어떤 때는 다시 가지를 쓰기도 하며
혹 둘을 다 쓰기도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일은 세간의 상도(常道)이다.
028_0716_c_18L譬樹用其根
時復用於枝
或有二俱用
是事世之常

이와 같은 방편이 이루어지면
이 보시로 큰 과를 얻게 되네.
인연의 깨끗함을 따르니
공덕을 함께 함도 그러하도다.
028_0716_c_20L如是方便成
是施得大果
有從因緣淨
俱功德亦然

【문】어떤 것이 계(戒)입니까?
028_0716_c_21L云何戒
【답】계란 몸과 입, 이 두 가지로 다른 사람을 거두고, 괴롭히지 않고,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계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는데, 몸과 입에서 생기는 것이다.
028_0716_c_22L戒者身口二攝他不嬈饒益戒者有三相從身口生
【문】그 세 가지는 어떤 것입니까?
028_0716_c_23L此云
028_0717_a_02L【답】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攝他]과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不嬈他]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饒益]이다.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은 흉년이 들어 물자가 부족할 때 중생이 목숨을 애착하면, 그때 중생을 자기 몸같이 보아 해치지 않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재물을 잃거나 처자와 이별할 때도 이와 같이 대해 주는 것이다.
028_0716_c_24L攝他不嬈他及饒益攝他者乏時衆生愛命恕已不害離他財他妻亦如是此是攝他
이간질하는 말ㆍ욕설ㆍ거짓말ㆍ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또 일곱 가지 항목에서 다른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의지할 만한 곳이 없으면 구제해 주는 것이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이다.
028_0717_a_03L離兩舌惡口綺語是不嬈他復次七枝不逼他是不嬈他衆苦所逼無所歸依而救是攝他
다른 사람을 거두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잘 지켜서 복이 계속 생기면 이것이 널리 이롭게 함이니, 내가 지금부터 살생을 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면 요익이 늘어난다. 비유하면 사물이 나타나면 해가 자라게 하는 것과 같아서, 계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면 착함이 이어지나 수(受)는 실로 이미 없어졌으니 마치 종자에 싹의 요익(饒益)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착함을 버리지 않고 서로 이어지게 한다면, 나아가 잠을 자더라도 복을 늘린다. 이것이 요익이고, 이것을 계라 한다.
028_0717_a_06L受持此二若福相續生是饒益我從今離殺生發心卽饒益增譬如出物日有滋息受戒心生善相續受實已滅如種有萌牙饒益不捨善相續乃至眠亦增益福此是饒益是謂戒
【문】어떤 것이 닦음[修]입니까?
云何修
【답】닦음이란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이다. 이것이 선행(善行)을 닦는 것이므로 닦음이란 꽃으로 마(麻)를 훈습하는 것과 같다. 익힘[習]은 닦음이니 왕을 가까이하는 것과 같아서 비유하면 왕과 신하가 가까워야만 반드시 그 결과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익힘과 닦음이어야만 반드시 좋은 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선(禪)을 닦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러한 뜻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는 네 종류가 있다.
028_0717_a_11L修者禪無量無色此修於善行是故修如華薰習是修如習近王譬如王臣善習近必成其果如是習修必得白淨果故說修禪者是念義此四種
【문】네 가지 선(禪)은 어떤 것입니까?
此云何
【답】4선(禪)이란 욕심을 벗어남, 관(觀)을 벗어남, 기쁨[喜]을 벗어남, 괴로움과 즐거움을 벗어남이니, 이것이 4선(禪)이다.
첫 번째는 욕심과 악과 불선을 이미 벗어나 선(善)을 인연한 마음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욕심을 벗어난다고 말한다.
028_0717_a_15L禪者離欲觀喜苦樂是四禪初者已離欲惡不善法緣善繫心住謂之離
두 번째, 관(觀)을 벗어남에서 관이란 각(覺)보다는 미세한 것이니, 예를 들면 방울이 울리고 나서 남은 희미한 소리와 같다. 이 미세한 것이 두 번째 선에는 없으니 이것을 관(觀)을 벗어남이라 말한다. 욕심은 앞에서 이미 벗어났다.
028_0717_a_18L第二離觀觀者微於覺如鈴有餘聲是此中無謂之離觀欲前已離
세 번째, 기쁨을 벗어남에서 기쁨이란 마음으로 즐거워함이니 마치 바다에 파도가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이 기쁨이 세 번째 선에는 없으니 욕심과 관(觀)도 없으므로 기쁨을 벗어남이라고 말한다.
028_0717_a_19L三離喜喜者心悅如海涌波是此中無及欲觀故說離喜
네 번째, 고통과 즐거움을 벗어남에서 즐거움이란 몸과 마음이 핍박당하지 않는 것이고, 고통이란 핍박당하는 것이다. 네 번째 선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없고 욕심과 관과 기쁨이 없으므로 고통과 즐거움을 벗어남이라고 말한다. 이 네 가지를 선(禪)이라 말한다.
028_0717_a_21L第四離苦樂者身心不逼苦者逼是此中無及欲喜故說離苦樂是四說禪
【문】어떤 것이 4무량심(無量心)입니까?
028_0717_a_23L云何無量
028_0717_b_02L【답】4무량심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捨를 뜻함)이다. 이 네 가지를 가상(假想)해서 무량(無量)이라고 말하고,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이 네 가지에 연(緣)이 되므로 무량이라고 말하며, 그 공덕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무량이라고 말한다.
028_0717_a_24L無量者慈是四假想爲無量無量衆生彼緣故無量亦不可數功德故無量
자(慈)란 모든 중생의 마음씀씀이를 불쌍히 여겨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하겠다고 그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자(慈)이다.
비(悲)란 고뇌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 앞에서 걱정과 고뇌를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비이다.
희(喜)란 즐거움이 많은 중생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함이니, 이것이 희이다.
028_0717_b_03L慈者愍一切衆生心一切衆生潤在前念是慈悲者惱衆生愍傷在前離憂惱念是悲於多樂衆生繫縛悅踊是喜
호(護)란 중생을 구하지 않으면 용맹스럽지 못하니 중생의 허물을 용서함이다. 중생이 악을 지으면 이것[護]은 짓지 않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이것은 중생을 돌이켜 보기를 자기 업 같이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중생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을 호(護)라고 한다.
028_0717_b_06L護者無求不勇猛恕衆生過若衆生作惡是不作爲快是反觀衆生自業如是恕過謂之護
【문】이미 4무량심을 말했으니, 어떤 것이 4무색정(四無色定)입니까?
已說無量云何無色
【답】4무색정이란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처(處)란 이 네 가지에 의지한다.
공(空)이란 물질과 물질을 보는 허물을 제거한 것이니, 이것은 욕심을 벗어나서 한마음[一心]으로 허공[空]을 인연한다. 이 허공에 반연한 생각이 공처(空處)이다.
028_0717_b_09L無色者無所有非想非非想處者依是四種空者除色見色過是離欲一心緣空於空繫想是空處
허공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식(識)이 있으니 식을 인연한 곳에 식처(識處)가 있다. 이것도 의지처가 있는 것이니 의지처가 없어야 더 뛰어난 것이다.
028_0717_b_12L不猗於空但有識緣識便有識處亦爲依無依乃勝
아무 소유도 없으면 이것이 무소유처(無所有處)이다.
생각이 있으면 허물을 보고 생각을 없애면 두려움을 보니, 한마음인 것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이것이 무색도(無色道)이니 이것을 모든 복이라 한다.
028_0717_b_14L若無所有是謂無有處於想見過滅想見怖一心是非想非非想處是無色道是名一切福
【문】근(根)은 어떤 것입니까?
028_0717_b_16L根云何
【답】근이란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다.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 이 세 가지가 근의 모습이다.
028_0717_b_17L根者無貪無恚無愚癡不貪不瞋不癡此三根相
【문】이것은 어떤 것의 근(根)입니까?
028_0717_b_18L此是誰
【답】앞에서 말한 것(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은 덕의 근본이 아니고, 저것(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은 모든 선(善)에 나아가는 뛰어난 법의 근본이다. 그러한 뜻에 따라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것도 따라서 늘어난다. 예컨대 탐욕이 없는 것은 보시에서 늘어나고, 성냄이 없음은 계(戒)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닦음[修]에서 늘어난다.
028_0717_b_19L非是前說德本那是一切趣善勝法之本隨其義一增餘相隨如無貪於施增無恚於戒增無癡於修增
다시 탐욕이 없음은 재보시(財布施)에서 늘어나고, 성냄이 없음은 무외보시(無畏布施)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법보시(法布施)에서 늘어난다. 이것이 세 가지 보시에서 늘어남이다.
028_0717_b_21L復次無貪於財施增無恚於無畏施無愚癡於法施增是謂三種施增
다시 탐욕이 없음은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에서 늘어나고, 성냄이 없음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음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요익(饒益)에서 늘어난다. 이것이 세 가지 계(戒)에서 늘어남이다.
028_0717_b_23L復次無貪於攝他增無恚於不嬈他無愚癡於饒益增是謂三種戒增
028_0717_c_02L다시 탐욕이 없음은 선(禪)에서 늘어나고, 성냄이 없음은 4무량심(無量心)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4무색정(無色定)에서 늘어난다. 이것이 세 가지 닦음[修]에서 늘어남이다.
028_0717_c_02L復次無貪於禪增無恚於無量增愚癡於無色增是謂三修增
다시 탐욕이 없음은 악을 행하지 않음에서 늘어나고, 성내지 않음은 인욕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다문(多聞)에서 늘어난다. 역(力)에서와 같이 근도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선행(善行)의 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717_c_04L復次無貪於不惡增無恚於忍辱增無愚癡於多聞增如是於力如是當知一切善行根
탐욕이 없는 것이란 자기 소유의 여러 연장에 대해 자기를 위해 이롭게 쓰려고 하지 않고 집착하려는 뜻도 없는 것이다. 성냄이 없는 것이란 성냄을 없애는 것이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란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이라고 한다.
028_0717_c_07L無貪者於所有衆具不利不著意無恚者滅於恚無愚癡者滅於癡故曰根
【문】어떤 것이 악(惡)이 없는 것입니까?
云何無惡
【답】악이 없는 것이란 인욕(忍辱)하고 다문(多聞)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속수(俗數)의 임시적인 모습이다. 또 악이란 악한 일을 늘리는 것이니 악한 일을 늘리지 않는 것이 악이 없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악이 없다는 것은 오묘하고 착하다는 말이다.
028_0717_c_09L答無惡者多聞不惡無惡者是俗數假相次惡者是增惡是不增惡故曰無惡所說無惡者妙善之言
인욕(忍辱)이란 고(苦)이니 귀한 힘과 천한 힘에 대해 자제해서 화내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다. 인욕은 고통스러우니 귀한 힘이나 천한 힘에 대해 일에 따라 자제하여 화내지 않고 용서한다. 고통에 핍박당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은 감내(堪耐)한다는 의미이다. 귀한 힘에 핍박당해서는 화를 내지만 복수할 수 없다. 다만 폐악(弊惡)한 사람만이 화를 낸다. 만약 큰 힘에 핍박당하였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인욕이다. 천한 힘에 가격당하면 천한 힘에는 노여워하여 원수를 갚을 수 있다. 만약 보복하지 않으면 이것은 용서함[恕]이다.
028_0717_c_12L忍辱者苦賤力自制不怒怒忍辱爲苦貴力賤力隨其事自制不怒怒爲苦所逼制是堪耐義爲貴力所迫怒而不能但弊惡人故起怒若於大力所迫不起怒是忍辱爲賤力所加恕賤力怨家能報若不報者是恕
이와 같이 중생의 허물과 자기 행위의 허물을 감내한다는 이 뜻에 대해 설명하겠다. 고통이란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바람과 햇빛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여 피로한 것이니, 이러한 여러 고통에 의해 핍박되지만 스스로 이 고통을 자제해야 한다. 이 두 일(衆生因緣과 行인연)에서 번뇌를 일으키니 몸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무정물(無情物)에 대해서는 화를 내는 자에게는 중생인연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과 행위에 의해 몸을 핍박당하더라도 감인(堪忍)해야 한다.
028_0717_c_18L如是衆生過及行過堪耐此義今當說苦者寒熱飢渴風日勤勞爲衆苦所逼當自此苦從二事起惱於身不怒於無怒者衆生因緣說是以依二逼身當堪忍
【문】이미 인욕을 말했으니, 어떤 것이 다문(多聞)입니까?
028_0717_c_23L已說忍辱云何多聞
028_0718_a_02L【답】다문이란 경[經]과 논[阿毘曇]과 율(律)을 들음이다. 다문이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이것이 다문이고 나머지는 다문이 아니다.
028_0717_c_24L多聞者阿毘曇多聞者若能除婬怒癡是多聞餘者非多聞
다문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경과 논과 율의 다문이다. 경의 다문이란 보살이 “가르침이 그(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라면, 오염된 것이 희고 깨끗하게 드러나며 4성제를 밝혀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에서 벗어난다”고 한 것이다.
028_0718_a_03L是三種契經阿毘於中契經者薩云若說及彼所印可顯示穢污白淨明四聖諦離無量惡
논의 다문이란 경을 모두 다 분별하는 것이고, 율의 다문이란 위의(威儀)와 예절을 말하여 사람들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종류의 다문이다.
028_0718_a_06L阿毘曇者於契經所有盡分別律者說威儀禮節令淸淨是謂三種多聞
이 가운데 율의 다문은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고, 논의 다문은 성냄을 제거하는 것이다. 논이란 모든 업의 성품을 말하여 이것으로 성냄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성냄으로 인해서 계를 범함이 일어나고, 계를 범함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진다. 경의 다문은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경이란 12인연(因緣)을 말한다.
028_0718_a_08L於中律多制欲阿毘曇多制恚阿毘曇者說諸業性以此止恚因恚起犯戒因犯戒墮地獄契經多制癡契經者說十二因緣
【문】이 다문이 어째서 악을 행하지 않음입니까?
028_0718_a_11L是多聞云何不惡
【답】악을 행하지 않음이란 진정한 선지식[眞知識]과,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眞御意]과, 진실로 말미암음[眞由]이다. 진정한 선지식과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과 진실로 말미암음이 악을 행하지 않음이다. 진정한 선지식이란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는 스승과 제자와 동학(同學)이다.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선지식이다. 그러한 세 가지의 스승과 제자와 동학(同學)이다.
028_0718_a_12L不惡者眞知識御意由眞知識眞御意眞由是謂不惡眞知識能師弟子同學若慈善能者是謂眞知識彼三種師弟子同學
【문】만약 자애로운 것은 스승이고, 착한 것은 제자이며, 능력 있는 것은 동학이라면 어떻습니까? 이와 같이 말합니까?
028_0718_a_15L云何若慈是師善是弟子能是同學說如是耶
【답】그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말하는 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는 것을 진정한 선지식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가르침에 대해 스승과 제자와 동학이라고 관하라. 이 중에서 자애로움이 가장 뛰어나고 나머지 두 가지는 가지[枝]로 이루어진 것이다.
028_0718_a_17L所以者何說無差降能者謂眞知識相是說當觀師弟子同學此中慈相最勝餘二枝所
혹은 자애로운 사람이 다만 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을 알지만 능력대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부모님이 나이는 많으시나 덕이 없는 경우와 같다.
혹은 능력은 있으나 착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비록 자애롭지만 착하지 못한 까닭에 악을 가르치니 육사외도(六師外道)와 같은 무리들이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었으면 이 사람이 진정한 선지식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8_0718_a_20L或慈者但不善知事亦不能說父年老無德或有能者亦不善故有慈不善故教惡如六師等若有具足成就三相者當知是眞知識
혹은 스승의 잘못 때문에 진정한 선지식의 모습이 무너지고, 혹은 제자의 잘못 때문에, 혹은 동학의 잘못 때문에 무너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 가지를 갖춘 진정한 선지식을 구해야 할 것이다.
028_0718_a_23L或有師過故壞或弟子過或同學過是以具足成就三相眞知識當求
028_0718_b_02L【문】이것은 진정한 선지식이고, 어떤 것이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眞御意]입니까?
028_0718_b_02L是眞知識云何眞御意
【답】진실로 마음을 제어함이란 지(止)와 거(擧)와 호(護)의 상(想)의 용맹이다. 지상(止想)과 거상(擧想)과 호상(護想)은 이 가운데를 향하여 용맹함이다.
이 중에서 지상(止想)이란 마음의 방일한 뜻을 그치고 겸손하여 이 가운데에서 모습을 관하기 때문에 지라고 말한다.
028_0718_b_03L眞御意者止擧護勇猛止想擧想護想向是勇猛中止者止心逸意下此中觀相故說
거상(擧想)이란 마음이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하열한 근력을 도와 일으켜 높게 하여 이 가운데에서 모습을 관하기 때문에 거라고 말한다.
028_0718_b_05L止擧者意弱柔濡下筋力扶起令高此中觀相故說
호상(護想)이란 평등한 마음으로 그 행위에 맡기는 것이다. 예컨대 수레를 잘 모는 것과 같으니, 느린 말은 빨리 가게 하고 빠른 말은 제지하여 평등하게 가도록 하여 잘 보호한다. 호상도 이와 같아서 4무량심 가운데 불가하다는 마음을 가진 중생을 보호하니 자(慈)가 으뜸가는 호이고, 여기서는 평등한 마음이 호이다.
028_0718_b_07L擧護者以平等意任其行如善御乘遲者使速急者制之等行而護此亦如是四無量中護不可意衆生以慈爲首護此中平等意
【문】하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올려주어야 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눌러야 하며, 평등한 마음은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28_0718_b_11L云何知如下意當擧擧意當制等者護
【답】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그 때를 따르고 그 방편을 따른다는 뜻이다. 만약 높고 낮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이 아니다.
028_0718_b_12L非爲自隨所欲是眞御意是故此自隨所欲隨時隨方便義若高下者此非眞御意
【문】이것이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이면, 어떤 것이 진정한 말미암음[眞由]입니까?
028_0718_b_14L是眞御意云何眞由
【답】진정한 말미암음이란 방편의 과(果)를 갖추는 것이다. 진정한 말미암음이란 그에게 닦고 익히라고 말해주는 것이니, 이러한 진정한 말미암음은 방편의 과를 갖춘다.
028_0718_b_15L眞由者具方便果眞由向彼或說習修是眞由具方便果
【문】어떤 것을 갖춥니까?
028_0718_b_16L爲誰具
【답】앞에서 이미 매우 뛰어난 것을 말하였다.
前已說善勝
【문】갖춘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이름한 것입니까?
028_0718_b_17L具名何
【답】갖춘다는 것은 선손(善損)ㆍ근(根)ㆍ선(禪)을 가까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한 행의 근본 바탕[資]이 되므로 갖춘다고 말한다. 예컨대 행이 구족(具足)하다 할 때에 구(具)와 같다. 갖춘다는 것은 가지[枝]의 뜻이니, 이것이 세 가지 선(善)인 선손ㆍ근ㆍ선을 가까이 행하는 것을 갖춘다.
028_0718_b_18L具者善損伏根近行禪此是資於善行故曰具如行具足具具者是枝義此具三種善損伏根近行禪
【문】어떤 것이 선손(善損)입니까?
028_0718_b_20L云何善損
【답】선손은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일이 없고, 걸식하는 것이니, 무리 가운데에서 손상시키는 것을 선손이라 한다. 선손이란 청박(淸薄)의 뜻이니, 공사(工師:기술자)가 두 가지 상(像)을 만드는데, 덧붙이는[增] 것이 있고 덜어내는[損] 것이 있다.
028_0718_b_21L善損者糞掃衣無事衆聚中損謂之善損善損者是淸薄義工師作二種像有增者有損者
028_0718_c_02L 덜어내는 것이란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고, 덧붙이는 것이란 니공(泥工)과 화공(畵工)이니, 그들이 두 가지 상을 만든다. 만약 덜어내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바람과 비를 견딜 수 있다. 다른 것은 비록 보기는 좋을지라도 바람과 비를 견디지 못한다.
028_0718_b_23L損者石工木工增者泥工畫工彼成二種若從損是能耐風雨餘雖有好色不耐風雨
이와 같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이다. 출가한 사람은 집의 얽매임에서 그 마음이 해탈하였으니 이미 많은 도구를 버리고 덜어내는 것[損]으로 묘(妙)를 삼는다.
028_0718_c_03L如是二種人在家及出家出家者於家累意解脫已捨衆具損爲妙
재가의 사람은 처자와 친족으로 인해 늘리는 것[增]으로 삼아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 재가의 사람은 비록 많은 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좋게 생각하고 애착하지만, 다만 애상(愛相)ㆍ이별ㆍ근심[憂]ㆍ슬픔[悲]ㆍ투쟁 등은 비법(非法)에 무너지고, 마음에는 견딤이 없으니, 비유하면 그림 속의 모습이 바람과 비에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 출가만 같지 못하다.
예컨대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28_0718_c_05L在家者因妻子親族爲增衆事得成在家者雖有衆具爲美味但愛相別離憂悲鬪諍等爲非法雨所壞意無所耐如畫像爲風雨所壞非出如世尊說

예컨대 식기조(飾棄鳥)와 푸른 올빼미의 묘한 색은
거위와 기러기가 나는 것에 끝내 이르지 못하나니
재가도 그와 같아 비구에 미치지 못하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떠나 한가히 머물며 좌선하노라.
028_0718_c_09L如飾棄鳥
靑鴟妙色
終不能及
鵝鴈飛行
在家如是
不及比丘
牟尼遠離
閑居坐禪

이것이 선손이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일 없고, 걸식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깨끗한 공덕이 열두 가지의 근본이 된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권속이니 이것은 따로 말해야 할 것이다. 세존께서는 난타(難陀)를 기쁘게 하고자 하여 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028_0718_c_12L是謂善損糞掃無事乞食此三淨功德爲十二本餘九是眷屬彼當別世尊欲令難陁歡喜故亦說此

난타야, 그대는
일 없음과 분소의(糞掃衣)를 어떻게 보는가?
이미 높은 경지를 즐거워할 줄 안다면
버리고 애욕에 물들지 말라.
028_0718_c_16L 難陀何見汝
無事糞掃衣
知已樂於高
捨離不染欲

이러한 까닭에 이 세 가지가 근본임을 알 수 있다.
028_0718_c_17L以是故知此三是本
다시 네 가지 애착으로 옷ㆍ음식ㆍ좌처(坐處)ㆍ유(有)가 생기니,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옷의 애착에 대해서 분소의를 말하고, 음식의 애착에 대해서 걸식을 말하고, 좌(坐)의 애착에 대해서 일 없음을 말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공덕을 성취한다면 방편으로 유(有)의 애착을 없애는 것이니 선손(善損)하기 때문이다.
028_0718_c_18L復次四愛生食坐處有故於中爲衣愛所持說糞掃衣爲食愛所持說乞食爲坐愛所持說無事若成就此三功德是方便滅有愛以善損故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아행(我行)과 아소작(我所作)을 헤아려 집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의ㆍ식ㆍ좌처를 탐착하므로 아소작이라는 계착(計着)이 생긴다. 이것은 세 가지 깨끗한 공덕을 멈추게 한다. 만약 한 가지 일이라도 없애려면 반드시 아(我)를 헤아리는 것을 끊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깨끗한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028_0718_c_22L復次有二種計著我行及我所作於中爲貪衣食坐處生我所作計著彼以此三淨功德若滅一事必斷計我是故說淨功
028_0719_a_02L【문】어떤 것이 분소의(糞掃衣)입니까?
云何糞掃衣
【답】분소의란 3의(衣)와 전의(栴衣)로서 자리[坐]에 따른다. 이 분소의는 세 종류이니, 3의와 전의와 수좌(隨坐)를 가득 채운다. 만약 분소의가 다만 세 종류라면 아홉 종류의 깨끗한 공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경의 내용과 어긋난다. 분소의란 것은 무덤에서나 마을의 거리에서 다 해지고 떨어진 옷을 주워서 만든 것이다.
028_0719_a_03L糞掃衣者三衣栴衣隨坐此糞掃衣三種所滿三衣栴衣隨坐若糞掃衣唯三者應有九淨功德若爾者經相違糞掃衣者塚間里巷捨弊壞衣
3의(衣)란 승가리(僧伽梨)ㆍ울다라승(鬱多羅僧)ㆍ안타라회(安陀羅會)이다. 혹 3의를 소지하고 있는 자가 좋은 옷에 애착하게 되면 괴롭게 되어 급급히 움직여 구하게 되니, 이 애착으로 말미암아 번뇌가 더 극성스럽게 된다. 만약 많이 얻지 못한다면 세 가지가 가장 묘하다.
028_0719_a_07L三衣者僧伽梨鬱多羅僧安陁羅會或有持三衣者爲愛好衣所困汲汲行求由此愛極煩勞若不得多者三當極妙
애(愛)에 두 종류가 있으니, 묘애(妙愛)와 다애(多愛)이다. 비유하면 한 명의 가장 뛰어난 여자를 구하거나, 혹은 천 명의 단정하지 못한 여자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다애(多愛)는 3의를 정한 것에 제압되지만 묘애(妙愛)를 낳는다.
028_0719_a_10L愛有二妙愛多愛譬如求一最勝女或求不端政千如是多愛三衣所制生妙
세존께서 그를 위해 말씀하시기를 “3의를 간직하는 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겁패(劫貝)와 마침내는 비단과 삼과 베와 갈포와 모시이다. 이 가운데 하나만을 써야 한다”고 하셨다. 저 사람이 보고 나서 이것은 좋다고 하면 이 좋다는 것이 번뇌를 많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전의(栴衣)를 말한다. 이와 같이 전의와 3의(衣)를 간직한다.
028_0719_a_13L世尊爲彼說持三衣有六種劫貝畢竟麻布紵布於中要用一彼見已是好是好多勞爲彼說栴衣是持栴三衣
혹 대중 가운데 있거나 집의 상좌(床座)에 있으면서 만약 다른 좋은 자리를 보고 옮겨서 나아가 앉는다면 세존께서 그를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자리에 따라 이미 앉았으니 다른 자리가 좋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옮기지 말라. 아(我)의 애착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다른 자리로 일어나는 것이 수좌(隨座)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분소의(糞掃衣)의 이치를 가득 채운다.
028_0719_a_16L或在衆中或在居家牀若見餘好座移就坐爲彼說隨座已坐不應爲好故移座以我大故起是隨座如是三滿糞掃衣
【문】일 없음[無事]이란 어떤 것입니까?
028_0719_a_19L無事云何
【답】일 없음이란 나무 아래 비바람을 맞으면서 정좌(正坐)하는 것이니, 나무 아래에 있음을 받아들이고[受], 비바람을 맞음을 받아들이고, 정좌를 받아들인다. 이 세 가지를 받아들여서 일 없음을 가득 채운다. 이 네 가지는 처소에 대해 애착하는 것을 없애준다.
028_0719_a_20L無事者樹下暴露正坐受樹受暴露受正坐受此三滿無事四除處所愛
이 가운데 정진하는 사람이 신심으로 보시하여 집을 짓고, 부드러운 것으로 큰 자리를 펴게 되면, 교화하는 사람이 탐착하게 된다. 세존이 이것을 아시고는 저런 사람을 위해 이 일을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집착하지 말고, 신도가 지어준 이 집을 버리고 일 없음을 즐겨라”고 하셨다.
028_0719_a_22L於中精進人信施作舍柔濡敷大牀座教化者貪著世尊知已爲彼說此事不應捨自家著他家當捨此舍樂無事
028_0719_b_02L저 사람이 이미 일 없음에 있는데, 다시 높고 큰 누각의 집을 짓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일 없는 가운데에 있으면서 높은 누각의 집을 애착하고 즐긴다면, 말의 승마 도구를 나귀에 씌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무 아래에서 수지(受持)해야 한다.
028_0719_b_02L彼已在無事復作高大樓閣屋此亦不應爾在無事中愛樂高閣屋如以馬乘具被驢是故樹下當受持
저 사람이 이미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추악한 작은 나무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고, 다시 보기 좋고 큰 꽃의 과일 나무를 구한다면, 세존께서는 그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비바람을 맞는 것을 받아들이라. 너의 시주(施主)가 몸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니, 다시 어째서 이것을 위해 신선의 약을 배우려 하는가? 비바람을 맞고 너는 집이 없으나 애(愛)에 핍박당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028_0719_b_05L彼已受樹下不樂弊惡小樹而復求好大華果樹世尊教彼當受持暴露汝施主長養身復何爲當學神仙樂於暴露汝無家非爲愛所逼
저 사람이 이미 비바람을 맞고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어려운 행을 이미 행하였다’ 하고는 이로 인해 바른 사유를 버리고 곧 쓰러져 누워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잔다면, 세존께서 저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이 일은 옳지 않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귀를 자르고서 머리를 꾸미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정좌를 수지해야 한다. 그리고 풀을 깔고서 결가부좌하여 세간이 진(眞)과 같으나 스스로 업을 지음을 관하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일 없음[無事]을 구족한다.
028_0719_b_09L彼已在暴露便作是念我難行已行由是捨正思惟卽便傾臥眠至日出世尊教彼此事不可如人截耳而嚴飾首是故汝當受持正坐草結跏趺坐觀世間如眞而作自業如是具足無事
【문】이것은 일 없음이고, 어떤 것이 걸식입니까?
是無事云何乞食
【답】걸식이란 한 끼를 먹고, 중간에는 미음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무덤 사이에 출가한 자에게는 두 종류의 식(食)이 있으니, 승식(僧食)과 걸식(乞食)이다.
028_0719_b_14L乞食者一食過中不飮漿塚間出家者有二種食僧食及乞食
승식(僧食)이란 항상 정진(精進)하고 집에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혹 다시 정진하는 자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바깥에 방을 짓고 음식을 먹는다.
걸식(乞食)이란 집에서 집으로 밥을 빌어서 가장 적은 양을 먹으니, 이것을 걸식이라 한다. 나머지는 사명(邪命:잘못된 방법으로 밥을 얻는 것)이다.
028_0719_b_16L僧食者精進家得具足食或復精進者爲除煩勞故於外作房作食餉乞食者家家乞至極少是名乞食餘者邪命
저 승식하는 자가 생각하기를 ‘내가 저 시주의 음식을 먹었다’ 하고 자기를 높이는 큰 아만심을 일으킨다. 세존께서 이런 사람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걸식하라” 하시었고, 저 사람이 걸식하고 나서도 자주 먹어 식사 때가 이르면 그 때문에 배움을 그만두니, 세존께서 이러한 사람을 위해 한 끼만 먹으라고 가르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28_0719_b_19L彼僧食者作是念我能致彼施主食便起貢高大慢世尊爲彼說當乞食彼乞食已數數食至時以是廢學尊教彼當一食如所說

사람은 생각이 있어야 하나니
매번 식사할 때 조금 먹고 만족할 줄 알면
이것이 박(薄)과 절(節)과 소(消)를 수용(受用)해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다.
028_0719_b_23L人當有念意 
每食自知少 
則是受用薄 
節消而保壽
028_0719_c_02L
저 사람이 한 끼를 먹고 나서도 먹을 것을 집착하여 문득 생각하기를 ‘세존께서는 다만 미음을 먹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고는 여러 종류의 미음을 구하니, 이것 때문에 배움을 그만둔다. 세존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그대는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지를 얻을 것이니 미음을 버려야 할 것이고, 갈증이 나는 사람은 물도 삼가야 할 것이니, 때가 지난 중에는 미음을 마시지 않을 것을 수지(受持)해야 한다”고 하셨다.
028_0719_c_02L彼一食已著於食便作是念世尊唯聽飮漿而求種種漿以是廢學世尊教彼汝得如是苦處當捨漿渴者亦能除當受持過中不飮漿
저 사람이 이와 같이 조금 먹고 만족한 다음에 다시 몸을 씻고 몸을 칠하는 것[塗]을 즐겨하니, 세존께서 이런 사람을 가르치시기를 “이것도 먹는 생각으로 자기를 높이 올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먹는 것에서 보강되는 것이니, 비록 아주 살쪘다 해도 무덤가에 버려야 할 것이다.
028_0719_c_06L彼如是少食知足已復樂澡浴塗身世尊教此亦是食想貢高所以者何身者從食中生雖有極肥亦當棄塚間
그러므로 그대는 무덤가를 즐겨하고 무덤가를 관찰하라. 음식으로 인해 생긴 것은 썩어 없어지고 부르트고 비계 덩어리에서 피가 나와 흘러 퍼진다. 보고 나서 이 교만함을 없애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걸식을 채울 것이니, 이것이 선손(善損)이다.
028_0719_c_09L故汝當樂塚間觀於塚間從食所有爛壞散胮脹脂血流漫見已滅此貢如是乞食滿是謂善損
【문】어떤 것이 복근(伏根)입니까?
028_0719_c_12L云何伏
【답】복근(伏根)이란 불해(不害)ㆍ수(守)ㆍ강(降)이다. 복근이란 모든 근(根)을 제압하는 것이니, 이것이 복근이다. 이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불해(不害)ㆍ수(守)ㆍ강(降)이다.
028_0719_c_13L伏根者不害伏根者制諸根是伏根是三種不害
【문】불해(不害)란 어떤 것입니까?
028_0719_c_14L不害何等
【답】앞에서 이미 근(根)을 말하였는데, 해근(害根)이란 근을 조복할 수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말이 비록 물과 곡식을 끊어 어떤 도(道)로도 조복할 수 없지만, 말이 물과 곡식으로 배불리 먹고 도(道)를 사용하면 조복되는 것과 같다.
028_0719_c_15L前已說根害根者不能調根如馬雖斷水穀無道不調飽以水穀以道則調
이와 같이 해근(害根)은 조복할 수 없지만, 모든 근을 거두면 조복된다. 만약 해근을 조복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눈먼 사람이 욕심을 떠남이다. 그러므로 해근하지 말라. 다만 근을 경계에 바르게 제어하고 바르게 사유하여 거두면 곧 수(守)를 얻는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28_0719_c_17L如是害根不調攝諸根則調若害根謂調是盲者離欲故莫害根但正御於境界正思惟攝卽得守如所說

모든 근(根)이 경계에 이르면
모든 생각을 멀리 떠나야 한다.
그렇다고 경계를 해쳐서는 안 되고
다만 그 물든 집착만을 제거할 뿐이다.
028_0719_c_20L諸根至境界 
當遠離衆想 
不可害境界 
但除其染著

강근(降根)이란 만약 아주 어여쁜 여인을 보면 문득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세 종류의 복근(伏根)이다. 근행선(近行禪)이란 인(忍)ㆍ명(名)ㆍ상(想)이다. 사유에 가까이하므로 근행선이라 말한다.
028_0719_c_22L降根者若見極妙女色便起如母想是謂三種伏根近行禪者忍名想於思惟故曰近行禪
【문】무엇을 가까이하는 것입니까?
問爲近誰
028_0720_a_02L【답】앞에 착하고 뛰어난 것을 말했다.
028_0720_a_02L前說善勝
【문】앞에서 이미 4선(禪)을 말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말합니까?
028_0720_a_03L如前已說四禪何故重
【답】앞에 말한 선(禪)은 6취(趣) 생사에서 뛰어난 것이고, 이것은 6취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이다. 다음에 진제(眞諦)를 관찰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처음 넓은 들판을 건너 여러 종류의 아주 보기 좋은 꽃 연못에 맑은 물이 가득 차 있는 것과 정원에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가 장식되어 있음을 보았다.
028_0720_a_04L前說禪是趣生死勝此趣出要此次第觀眞諦如人始度曠野種種妙好華池若干淸泉盈滿及園觀種種華樹嚴飾
보고 나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빈 들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성과 읍이 가까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행(行)하는 사람은 생사의 넓은 들판의 음(淫)ㆍ노(怒)ㆍ치(癡)ㆍ번뇌에서 진실한 선지식을 얻은 까닭에 바르게 사유한다.
028_0720_a_07L見已作是念此非空野中可得必近城邑如是行者在生死曠野婬怒癡煩勞得眞知識故正思惟
음(陰)ㆍ계(界)ㆍ입(入)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관찰할 때, 만약 즐겁고자 한다면 이것이 인(忍)이다. 바르게 사유하여 뜻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명(名)이다. 예컨대 꿈속에 어버이를 보는 것과 같고,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 같으니, 이와 같은 고관(苦觀)은 상(想)이다.
028_0720_a_10L觀陰界入無常苦空無我時若欲樂是謂忍正思惟意不動是謂名如夢中見親如鏡中像如是苦觀
이것은 세간 제일의 법이니 세존으로 인해 상(想)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행선이라고 한다. 저 사람이 순서대로 꿈을 꾸다가 깨어서 어버이를 보는 것과 같으니, 그 후에 성제관(聖諦觀)을 얻는 것도 이와 같다.
028_0720_a_13L是世間第一法由世尊想是謂近行禪彼次第如夢覺見親後得聖諦觀亦如是
「덕품(德品)」제1. ‘진도(眞度)’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028_0720_a_15L德品第一眞度說竟

1. 덕품(德品) ②

【문】어떤 것을 방편(方便)이라 합니까?
028_0720_a_16L云何名方便
【답】방편이란 계(戒)ㆍ상지(上止)ㆍ지(智)이다. 방편이란 도(道)이니, 이것이 선(善)에 나아가서 이기므로[勝] 방편이라 한다. 이것이 세 종류의 계ㆍ상지ㆍ지이다.
028_0720_a_17L方便者戒上止智方便者是道是趣善勝故說方便是三種戒上止智
계(戒)를 거듭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非爲重說戒耶
【답】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착하고 뛰어난 것[善勝]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생(受生)이고, 둘째는 출요(出要)이다. 앞의 계는 수생(受生)이고, 여기서의 출요의 계의 뜻이란 습의(習義)이다.
028_0720_a_19L前已說善勝有二種一受生二出要前戒受生此出要戒義者是習義
【문】이것(출요의 계)은 어떤 것입니까?
028_0720_a_21L此云何
【답】계란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이다. 정어ㆍ정업ㆍ정명 이 세 가지를 계라고 한다. 정어란 이간질하는 말ㆍ욕설ㆍ거짓말ㆍ꾸미는 말을 벗어나는 것이다. 정업이란 살(殺)ㆍ도(盜)ㆍ음(淫)을 벗어나는 것이다.
028_0720_a_22L戒者正語正語正業正命是三種名戒正語者離兩舌妄言綺語正業者離殺
028_0720_b_02L 정명(正命)이란 비구의 승식(僧食)ㆍ걸식ㆍ의(衣)ㆍ약(藥)ㆍ구(具)이니 이것이 정명이고, 나머지는 사명(邪命)이다. 우바새는 다섯 가지 업인 칼ㆍ독ㆍ술ㆍ고기ㆍ중생을 파는 것을 떠나니 이것이 정명이다.
028_0720_a_24L正命比丘僧食乞食衣藥具是正命邪命優婆塞離五業衆生是謂正命
【문】어떤 것이 상지(上止)입니까?
云何上止
【답】상지란 진(進)ㆍ염(念)ㆍ정(定)이다. 상지란 가득 채우고 갖추고, 다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없앤다. 이것이 상지이다. 저것을 향하여 머무르므로 상지라 하니, 이것이 세 종류의 진(進)ㆍ염(念)ㆍ정(定)이다.
028_0720_b_04L上止者上止者滿具復次滅婬癡謂之上止向彼住故說上止是三種進
이 중에 진(進)이란 역(力)이니 만약 진을 말한다면 이미 역(力)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지을 수 있으므로 진이라고 말하니, 진이란 행(行)이다. 이것이 착하고 뛰어난 것[善勝]에 밀고 나아갈 수 있으므로 진이라 말한다.
028_0720_b_07L於中進者力若說進當知已說復次能作故說進進者行此能進至善勝故說進
【문】이것[進]은 어떤 것입니까?
此云何
【답】진이란 믿고[信] 부지런하고[勤] 버리지 않는 것[不捨]으로서 이 세 가지를 진이라고 임시로 부른다. 어째서입니까? 신은 모든 선행(善行)을 늘리고, 모든 선법(善法)의 앞에 있으니 모든 법에서 가장 제일이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28_0720_b_09L進者不捨不捨是三假名進所以者何信增一切善行在一切善法前於一切法最第一如所說

사(士)는 신행(信行)이 있어
성인에게 칭찬받는다.
무위(無爲)를 즐기는 자
모든 얽매임에서 풀려나리라.
028_0720_b_12L士有信行
爲聖所譽
樂無爲者
一切縛解

여기에 세 종류의 신(信)이 있다.
028_0720_b_14L是三種信
【문】어떤 것이 세 종류의 신입니까?
云何三種
【답】신이란 정(淨)ㆍ욕(欲)ㆍ해(解)이니, 이것이 신의 정ㆍ욕ㆍ해이다. 이 중에서 정이란 탁(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탁이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니, 성냄ㆍ거만함ㆍ무참무괴(無慙無愧)를 이것에 견줄 수 있다. 비유하면 코끼리와 물소 등이 물속에서 어지러이 날뛰고 있는 것을 탁이라 하고, 가만히 있으면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이 싫어하는 성냄ㆍ거만함ㆍ무참무괴로 뜻[意]을 어지럽히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을 탁이라고 하며, 이것이 없으면 정이라고 한다.
028_0720_b_15L信者是信於中淨者除濁故人所惡恚貢高無慚無愧比譬如象水牛等混亂泉水是說濁停住便澄淸如是人惡恚貢高無慚無愧比亂意謂之濁無是謂之淨
욕이란 뛰어난 것을 애착하고 즐기는 것이니, 비유하면 사람이 병에 시달리면 좋은 음식도 원하지 않다가 병이 낫고 나서는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악(惡)에 시달려 법을 듣고자 함을 즐겨하지 않다가 선지식을 얻고 나서는 법을 즐기며 문득 생각하기를, ‘이 법이 가장 미묘하다’ 하는 것과 같으니, 다시 이것을 욕이라 한다.
028_0720_b_20L欲者愛樂於勝如人爲病所困不欲好食病差已而欲得是人爲惡所困不樂欲聞得善知識已樂於法便作是念法極微妙更復說是名爲欲
028_0720_c_02L해(解)란 집지(執持)이니, 비유하면 사람이 독사에게 물리면 사(師)가 독에 대해 주문을 외울 때, 그 사람의 뜻도 지극한 데 이르러 생각하기를, ‘실로 주문을 말한 것과 같이 이로부터 반드시 나을 것이다’ 하고 마음이 풀려 약을 구하는 것과 같다.
028_0720_b_24L解者執譬如人爲毒蛇所螫師呪毒時彼意至到便作是念實如說呪從此必已意解便求藥
이와 같이 사람이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뱀에 물리면, 세존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법을 설하시니, 그 사람이 만약 마음이 풀리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이 마음속에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다. 나머지는 제거하지 않아도 풀린다.
028_0720_c_04L如是人爲婬怒癡蛇所螫世尊爲彼慈心說法彼若意解者無異彼心得除婬怒癡餘者不是解
【문】이것은 신(信)이고, 어떤 것이 근(勤)입니까?
是信云何勤
【답】근이란 기(起)ㆍ습(習)ㆍ전(專)이니, 기ㆍ습ㆍ전, 이 세 종류를 근(勤)이라 한다.
기란 처음 선(善)을 짓는 것이니,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울 때, 많은 화구(火具)를 만드는 것과 같다.
습(習)이란 자주자주 짓는 것이다.
전(專)이란 꽉 잡아서 버리지 않고[不捨] 흩뜨리지 않아[不散] 뜻이 한결같은 반연[緣]을 이루는 것이다. 비유하면 머리가 불타는 것을 끄려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세 종류를 근(勤)이라 한다.
028_0720_c_07L勤者專此三種謂之勤起者始造如鑽火時造衆火具習者數數作專者著不捨不散意成一緣如救頭然是三種謂勤
【문】어째서 버리지 않습니까?
問曰何不捨
【답】불사(不捨)란 부지(不止)하고, 불염(不厭)하며, 불리(不離)하는 것이다. 부지ㆍ불염ㆍ불리, 이 세 가지를 불사라고 한다. 부지(不止)란 언제나 멀리 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지극히 정진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이 불염(不厭)이다.
028_0720_c_11L捨者不止不厭不離不止不厭不離此三謂不捨不止者一切時不遠極精進不廢是不厭
내가 한결같이 부지런히 수행하였지만 오랫동안 번뇌에 시달렸으니 혹 과(果)가 있건 없건 간에 버려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이 때문에 버리지 않고 정진한다면, 이것을 불사(不捨)라 한다. 이 세 가지 일로 반드시 과(果)를 얻을 것이다. 비유하면 행인이 도달할 곳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028_0720_c_14L我一向勤久時煩勞或有果或無捨置何用若以此不捨精進是謂不捨此三事必獲得如行人愛樂所至方
【문】이미 진(進)을 말했으니, 어떤 것이 염(念)입니까?
028_0720_c_17L已說進何念
【답】염이란 신(身)ㆍ통(痛)ㆍ심(心)ㆍ법(法)에 대해 안팎 모두에서 잊지 않는 것이다. 안팎 모두에서 잊지 않는 것, 이 세 종류의 염에서 자기가 안이 되고, 나머지는 바깥이다. 두 가지 것(안과 밖)이 안팎 모두[俱]이다.
028_0720_c_18L念者內外俱不忘內外俱不忘是三種念爲自己內者外二事爲俱
다시 안[內]이란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바깥[外]이란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구(俱)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세 번뇌는 안에 있고 바깥에 있고 둘 다 있기도 하다. 안에 있다는 것은 욕(欲)이요, 밖에 있다는 것은 성냄이니, 성냄이란 다른 사람에게 성내는 것이지 자기에게 성내는 것은 아니다.
028_0720_c_20L復次內者受陰外者他受及不受俱復次三煩惱在內在外俱在內者欲在外者恚恚者爲他非自瞋
만약 생각하기를 ‘욕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어째서인가? 안[內]이란 물듦이고 바깥[外]은 다른 사람인데, 욕(欲)이 생김은 안에서 집착하기 때문이다.
028_0720_c_23L若作是念欲亦爲他不應爾所以者何內者染外爲他生以內著故
028_0721_a_02L 예컨대 경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여인을 보는 것이 안에서 근(根)과 어리석음[癡]이 함께 움직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 세 번뇌를 없애면 이것이 세 종류의 염이니 저 신(身)에 세 가지가 있듯이 통(痛)ㆍ심(心)ㆍ법(法)도 세 가지가 있어 모두 열두 종류의 염이 있다.
028_0721_a_02L如經所說人見女如內根癡俱行若滅此三煩惱是三種念彼身三痛心法三是十二種念
【문】이미 염(念)을 말했으니, 어떤 것이 정(定)입니까?
028_0721_a_04L說念云何定
【답】정(定)이란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想)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세 종류의 정인데, 사(事)가 공하므로 공이라고 말한다.
028_0721_a_05L定者空無願無想無願無想是三種定事空故曰空
【문】공(空)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공촌(空村)과 공사(空舍) 등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이 이 공에 견줄 수 있으니, 어떤 것이 공입니까?
028_0721_a_06L多有空空村空舍如是比此中說何等空
【답】공이란 아행(我行)과 아작(我作)을 둘 다 보지 않는 것이다. 아행과 아작을 둘 다 보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한다.
028_0721_a_08L空者我行我作俱不見行我作俱不見者是謂空
【문】어떻게 아행과 아작을 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컨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때 수람(隨藍) 범지였다”고 하셨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내가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 하셨습니다.
028_0721_a_09L何得不見我行我作如世尊說我爾時名隨藍梵志復如所說比丘我手著虛空
【답】이와 같은 것은 아행이 아니다. 아작은 가호(假號)이니, 다만 5음(陰) 가운데에서 아(我)를 헤아리는 것이 아행이다. 세존께서는 이것[我行]을 행하지 않으셨다. 만약 경계에 대해 아를 헤아리고 집착하여 허락한다면, 이것이 아작이다. 세존께서는 이것[我作]이 없다.
028_0721_a_11L非如是我行我作是假號但於五陰中計我是我行世尊不行此若於境界計著我許是名我作是世尊亦
예컨대 『성법인경(聖法印經』)에 말하기를 “공이란 세간의 공(空)을 관찰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저것(앞에 든 예)과 견주면 아(我)와 아소유(我所有)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허물이 없다. 이것이 공이다.
028_0721_a_15L如『聖法印經』說空者觀世間空是比彼亦我我所有俱得成以故無是謂空
【문】어떤 것이 무원(無願)입니까?
云何無願
【답】무원이란 과거ㆍ현재ㆍ미래에서 세우기[立]를 즐기지 않는 것이다. 무원이란 불립(不立)의 뜻이니, 이것은 세 가지 가운데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유위(有爲)이다.
028_0721_a_17L無願者去未來現在不樂立無願者不立義是入此三中過去未來現在是一切有爲
예컨대 『설처경(說處經)』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생각하기를, ‘아(我)와 열반은 이 세 가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옳지 않다. 어째서입니까? 한 가지에 두 뜻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이란 세간을 벗어나 한결같이 연(緣)이 없는 것이니, 저 가운데 의아(意我)가 없는 것이다. 3세를 벗어나고 다시 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세 가지 가운데 세우기[立]를 즐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원이다.
028_0721_a_20L如『說處經』所說彼若作是意及涅槃彼不攝是三此不應爾所以者何一無二義故涅槃者離世一向無緣彼中無意我者離三世更無不可說是以三中不樂立是謂無願
【문】무상(無想)은 어떤 것입니까?
028_0721_a_24L無想云何
028_0721_b_02L【답】무상이란 사(事)ㆍ작(作)ㆍ구(俱)의 상(想)이다. 사ㆍ작ㆍ구의 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벗어남이 무상이다. 예컨대 경에서 “모든[一切] 유위(有爲)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위에서 말한 일체(一切)란 사와 작이니, 지을 만한 것이 사이고, 지을 수 있는 것이 작이다.
028_0721_b_02L無想者俱想離俱想離是無想如所說離一切有爲一切者事及作可作是事能造是作
예컨대 무명(無明)의 복(福)으로 말미암음이니, 무명의 복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行)을 짓는다. 저것(行)이 상속을 인연해서 식(識)이 생긴 것이 사(事)이다. 무명과 행이 작이니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유위이다. 만약 저것(事와 作)을 벗어나면 무상(無想)이라고 말한다.
028_0721_b_05L如由無明福無福不動作行緣相續有生識是事無明及行是作如是一切有爲若離彼是說無想
예컨대 다시 『성법인경(聖法印經)』에서 “무상(無想)이란 그 색(色)과 상(相)을 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체(一切)를 저 경에서 말하였다.
028_0721_b_07L次如『聖法印經』所說無想者不見其色相如是一切彼中亦說
이 세 가지 사(事)ㆍ작(作)ㆍ구(俱)를 벗어난다. 저 일체가 세 가지 뜻인데, 다만 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컨대 “강에 물이 없어 물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한 가지 뜻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ㆍ무원ㆍ무상도 이와 같으니, 이것이 정(定)이다.
028_0721_b_09L此三事作俱離彼一切是三義但說異如言無水不見水是一義而說異無願無想亦如是是謂定
【문】어떤 것이 지(智)입니까?
云何智
【답】지란 무학(無學)의 경지에서 행할 것을 보고 닦는 것이니, 지는 각(覺)이다. 이것이 3지(地)인 견지(見地)ㆍ수지(修地)ㆍ무학지(無學地)이다. 이 가운데에서 보기 때문에 견(見)이라 한다.
028_0721_b_12L無學地所行智者是覺是三地見地修地無學地此中見故曰見
【문】어떤 것으로 어떤 것을 보는 것입니까?
028_0721_b_14L何等見何等
【답】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니 성지(聖地)ㆍ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의 지(枝)와 실답게 닦는 것이 습(習)의 뜻이다. 예컨대 순수한 재로 옷을 빨 때, 비록 때를 제거해서 희고 깨끗하더라도 오히려 재의 기운이 남아 있으니, 그런 다음에 만나화(蔓那華) 등의 모든 향기로운 꽃으로 훈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견지(見地)이다.
028_0721_b_15L見未曾見聖地根道枝及實修者習義如以淳灰浣雖去垢白淨猶有灰氣然後須蔓那華等諸香華薰如是見地
청정한 의(意)의 선(禪)과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정(定)으로 모든 번뇌를 끊어서 지극히 훈습하는 것이니, 이것이 수지(修地)이다.
무학지(無學地)란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다해서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무학지이다.
028_0721_b_18L淸淨意禪無量諸定斷除諸結盡極勳是謂無學地者癡盡無餘是謂無
【문】견지(見地)의 지는 어떤 것입니까?
何等於見地智
【답】견지(見地)란 법(法)과 관(觀)과 미지(未知)의 지이니, 법지(法智)ㆍ관지(觀智)ㆍ미지지(未知智), 이것이 견지의 지이다.
028_0721_b_21L見地者未知智法智觀智未知智此是見地智
이 중에 법지(法智)란 지혜를 드러낸다는 뜻이니,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종기가 이미 곪은 것을 알고 예리한 칼로 종기를 자르고, 그 다음에 관통하는 도(道)를 가르쳐 주어 혈맥을 상하지 않게 하고, 그 다음에 종기를 자르는 것과 같다.
028_0721_b_22L於中法智者是現智義譬如良醫知癰已熟以利刀破癰然後以指貫通道令不傷脈而後破癰
028_0721_c_02L 저 수행인도 이와 같아서 욕계의 고통을 바르게 사유하고 관찰할 때, 견고(見苦)로 끊을 번뇌를 끊는다.
028_0721_c_02L彼修行人亦如正思惟觀欲界苦時斷見苦所斷煩惱
그 다음에 두 번째의 지혜가 생겨난다. 욕계의 고(苦)와 무상(無常)과 같이 색계와 무색계도 이와 같아서 이로부터 지혜에 이르러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를 끊는다. 이것이 고를 보는 3지(智)이다.
028_0721_c_04L然後生第二智如欲界苦無常色無色界亦如是從此比智斷色色界煩惱是謂見苦三智
욕계의 애착은 고의 원인이고, 이 법지(法智)는 관지(觀智)이니,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미지지(未知智)이다. 이것이 습(習)을 보는 3지이다. 욕계가 없어짐이 법지이고, 이것이 곧 관지이며,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미지지이다. 이것을 견이 다하는 3지라고 한다.
028_0721_c_06L欲界愛苦是法智卽是觀智如是色無色界未知是見習三智欲界滅止是法智卽是觀如是色無色界未知智是謂見盡三智
이 도(道)로 욕계의 고를 없애는 것이 법지이고, 그대로 관지이니,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미지지이다. 이것이 견도(見道)의 3지이다. 이 열두 가지 지혜는 견지(見地)가 넓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8_0721_c_09L此道滅欲界苦是法智卽是觀智是色無色界未知智是謂見道三智十二智見地廣當知
【문】어떤 것이 수지(修地)입니까?
云何修地
【답】수지란 상(相)과 행(行)과 종(種)의 지(知)이다. 상지(相知)ㆍ행지(行知)ㆍ종지(種知), 이 세 가지가 수지(修地)이다.
028_0721_c_12L修地者種知相知行知種知三修地
【문】어떤 것이 상지입니까?
云何相
【답】상지란 기(起)ㆍ주(住)ㆍ괴(壞)이니, 기란 생하는 것이고, 주란 이루는 것이며, 괴란 무너지는 것이다.
028_0721_c_14L相者者生住者成壞者敗
【문】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중생과 열반에 대해 의심이 있으니 중생과 열반도 이 상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약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주장이니 무상(無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 경에 잘못이 있습니다. 기ㆍ주ㆍ괴가 유위(有爲)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했어야 합니다.
028_0721_c_15L漫說於衆生涅槃有疑衆生及涅槃亦有此相有者爲大過卽有無常若不者此經有過應當說起住壞是有爲相
【답】중생이란 상지에 대해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 만약 다르다면 항상할 것이고, 만약 같다면 무상할 것이다. 이 두 허물을 말할 수 없다. 열반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따지건대 상지란 오로지 유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8_0721_c_18L生者於相是餘不可說若異卽有常若是卽無常是二過不可說涅槃亦如是是故分別當知相者一向有爲
【문】지금 공덕(功德)을 말하는데, 어째서 이 상지가 공덕입니까?
今說功德云何此相是功德
【답】지금 말하는 지혜가 만약 이 세 가지 중의 지혜라면 이것은 공덕이지 상지가 아니다.
028_0721_c_22L今說智若此三中智是功德非相
【문】어떤 것이 행지입니까?
028_0721_c_23L云何行
028_0722_a_02L【답】행지란 무상(無常)ㆍ고(苦)ㆍ비아(非我)의 견해이니, 행지란 모두 지혜인 것이요, 이것이 행지의 뜻이다. 이 상지는 행지를 말미암는 것이니, 이것이 행지의 뜻이다. 5음(陰)은 무상하니 만약 무상하다면 고(苦)요, 만약 고라면 자재하지 못하니 그러므로 비아이다.
028_0721_c_24L行者無常非我見行者盡智是行義此相由是行知是行義陰無常若無常者是苦若苦者是不自在故非我
무상한 것은 오래 머물지 못하니 예컨대 물의 거품과 같고, 고통스러운 것은 핍박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화살이 몸에 꽂혀 있는 것과 같으며, 비아인 것은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예컨대 영락을 빌린 것과 같다. 이것이 행지이다.
028_0722_a_04L無常者不久住故如水苦者逼迫故如箭在體非我者不自在故如借瓔珞是謂行
【문】어떤 것이 종지(種知)입니까?
云何種
【답】종지란 미(味)ㆍ환(患)ㆍ이(離)이다. 종지란 이것이 미이다, 이것이 환이다, 이것이 이라는 것이다.
028_0722_a_06L種者種者是味是患是離
【문】이것이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028_0722_a_07L是誰
【답】이것은 유위(有爲)이다. 이 가운데에서 미는 묘(妙)한 것이고, 환은 추악한 것이며, 이는 모두 쉬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천(天)과 인(人)의 즐거움은 미이고, 3악도(惡道)의 고통은 환이며, 죄와 복을 떠남이 이이다.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면 정견(正見)의 공덕이니 그러므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종지(種知)이고, 이것이 수지(修地)의 지혜이다.
028_0722_a_08L是有爲於中味者是妙者是惡離者俱息於中天人樂是味三惡道苦是患離罪福是離若如是正見功德故故卽得解脫是謂種此是修地智
【문】어떤 것이 무학지(無學地)의 지(智)입니까?
云何無學地智
【답】무학지의 지란 달(達)과 통(通)과 변(辯)의 지(智)이다. 달지(達智)ㆍ통지(通智)ㆍ유변지(有辯智), 이 세 가지가 무학지의 지이다.
028_0722_a_12L無學地者辯智達智通智有辯智三無學地智
【문】어떤 것이 달지(達智)입니까?
云何達智
【답】달지란 숙명(宿命)과 생사(生死)와 누진(漏盡)의 지(智)이다. 숙명지(宿命智)ㆍ생사지(生死智)ㆍ누진지(漏盡智)가 달지이다. 통달할 수 있으므로 달지라고 하니, 달(達)은 지(知)의 뜻이다.
028_0722_a_14L達者宿生死漏盡智宿命智生死智漏盡智是謂達能達故曰達達是知義
이 가운데 숙명지는 과거에 지은 행을 기억하는 것이고, 생사지는 업과(業果)를 얻는 것을 아는 것이며, 누진지는 뒤에 설명하겠다.
028_0722_a_16L中宿命智憶過去所作行生死智知得業果漏盡智後當說
다시 번뇌에 세 종류가 있으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처(處)이다. 과거란 열여덟 견(見)이고, 미래는 마흔네 가지 견이며, 현재의 처는 신견(身見)이다.
028_0722_a_18L復次煩惱有三種過去未來現在處過去者十八未來四十四見現在處身見
이것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만약 숙명지를 얻는다면 과거를 비방하지 않을 것이고, 생사지를 얻는다면 미래에 대해 어리석지 않을 것이며, 누진지를 얻는다면 현재의 처(處)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028_0722_a_20L由此故生故分別過去未來於中若得宿命智者不謗過去得生死智者不癡於未來得漏盡智者不著現在處
【문】어떤 것이 누진지(漏盡智)입니까?
028_0722_a_23L云何漏盡智
028_0722_b_02L【답】누진지란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ㆍ원지(願智)이다. 나는 번뇌가 다해서 관찰함이 이와 같다고 하면 이것이 진지(盡智)이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이 무생지(無生智)이다.
028_0722_a_24L漏盡智者無生我煩惱盡觀如是是盡智不復生者是無生智
비유하면 의사가 뱀에 물린 것을 치료할 때, 증상을 알고 난 다음 독을 제거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첫 번째 지혜[盡智]이고, 앞의 기운에 쏘이지 않으니 이것이 두 번째 지혜[無生智]이다.
무생지(無生智)도 이와 같다.
028_0722_b_03L譬如師治蛇所螫知已除毒是一智不爲前氣所熏是第二無生智亦如是
원지(願智)란 만약 성문이 숙명지(宿命智)로 자기의 생이 계속 이어 왔음을 알더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원지는 원(願)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이것이 원지이다.
028_0722_b_05L願智者若聲聞以宿命智自憶生相續非餘是願智願故亦知他是謂願智
【문】어떤 것이 통(通)입니까?
云何通
【답】통이란 여의족(如意足)ㆍ천이(天耳)ㆍ타심지(他心智)이다. 여의족ㆍ천이ㆍ타심지, 이 세 가지가 통이다. 여의족은 뒤에 말하겠다.
028_0722_b_07L通者如意足天耳他心智如意足他心智此三是通如意足者後當
천이(天耳)란 선정의 힘 때문에 한 연(緣)에 거처하여 4대(大)의 깨끗함을 늘리는 것이니, 이와 같이 천인(天人)이 악취(惡趣)에 이르러 소리를 듣는 것도 그 힘에 따른 것이다. 비유하면 눈으로 가까운 것을 보거나 먼 것을 보거나 간에 그 눈의 힘에 따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 선정의 힘에 따라 천이를 얻는다.
028_0722_b_10L天耳者以定力故處一緣中增長四大淨此天人至惡趣聞聲隨其力如眼或見近或見遠隨其眼力如是隨其定力得天耳
타심지란 중생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간에 그의 마음속 생각이 이러이러하다고 아는 것이다.
028_0722_b_13L他心智者如見衆生若聞聲知彼心念如是如是
【문】어떤 것이 여의족입니까?
028_0722_b_14L云何如意足
【답】여의족이란 유공(遊空)과 변화(變化)와 성자재(聖自在)이다. 여의족이란 뜻대로 얻기 때문에 여의라고 하니, 여의는 자재의 뜻이다. 유공자재(遊空自在)ㆍ변화자재(變化自在)ㆍ성자재(聖自在), 이것이 세 종류의 여의족이다.
028_0722_b_15L如意足者遊空聖自在如意足者得如意故說如如意是自在義遊空自在變化自聖自在是謂三種如意足
유공자재란 물과 허공을 밟고 땅을 뚫고 들어가고 돌담을 통과하며 해와 달을 잡으니 이것이 유공자재이다.
변화자재란 사람ㆍ코끼리ㆍ말ㆍ마차가 나타나는 것이니 산림과 성곽도 모두 변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
028_0722_b_18L遊空自在者履水蹈虛能徹入地石壁皆過捫摸日月是謂遊空自在變化自在現人象馬車山林城郭皆能化
성자재란 장수하도록 변화할 수 있고, 물을 변화시켜 연유[酥]로 만들고 흙을 변화시켜 금은(金銀)으로 만드니 이와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이 여의족이니 성인(聖人)이 길이 길러야 할 것이다. 여의족ㆍ천이ㆍ타심지, 이것들은 통(通)인데, 숙명지(宿命智)와 생사지(生死智)까지 포함하면 범부의 다섯 가지 통이 된다.
028_0722_b_22L聖自在者能化壽化水爲酥化土石爲金銀如是比是謂如意足聖所增長養如意足天耳他心智是謂通宿命智生死智是凡夫五通
028_0722_c_02L【문】어떤 것이 변(辯)입니까?
028_0722_c_02L云何
【답】변이란 법(法)ㆍ의(義)ㆍ사(辭)ㆍ응(應)이니, 법을 잘 알아야 하고, 의를 잘 알아야 하며, 사를 잘 알아야 하고, 응을 잘 알아야 한다. 이 네 가지가 변이다.
028_0722_c_03L辯者善知法善知善知辭善知應此四是辯
법을 아는 것은 명(名)ㆍ구(句)ㆍ미(味)를 아는 것이고, 의를 아는 것은 저것의 성품의 참다움을 아는 것이니, 예컨대 불은 저 뜨거운 것을 부르는 이름이며, 이 의는 이 가운데에서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028_0722_c_04L知法者知名知義者卽知彼性實如火是名彼熱是義於中不癡
사를 아는 것이란 이러한 글로 꾸미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서대로 해서 응(應)을 아는 것은 구(句)를 말하고 글로 꾸미는 것에 전도되지 않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변이다.
이것도 역시 지지(地智)를 배우는 것에서 이미 자세히 말했다.
028_0722_c_06L知辭者文飾如是次第知應者不顚倒說句文飾亦不差錯是謂辯此亦於學地智已廣說
【문】계(戒)와 정(定)과 같이 무학지(無學地)를 배우는 가운데 계와 정을 얻을 수 있거늘, 어째서 세 종류로 말하지 않습니까?
028_0722_c_09L如戒及定學無學地中亦可得戒定何以不三種說
【답】무계(無戒)ㆍ계(戒)ㆍ차별(差別)은 배워서 살생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무학(無學)을 지극히 보호하지만 이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불살생을 배우면 그대로 무학이니, 왜냐하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종류(無戒ㆍ戒ㆍ差別)를 말하지 않는다.
028_0722_c_10L無戒戒差別非爲學離殺生衆生極護學不如是若學不殺生卽是無學是無差降故不說三種
「덕품(德品)」 제2 ‘진도(眞度)’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028_0722_c_13L德品第二眞度說竟
三法度論卷上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