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부처라 함은, 자연인(自然人)으로서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온갖 법의 모양[自相]의 차별을 아는 이로써, 온갖 착하지 못함을 여의고 온갖 착함을 쌓아 항상 구하면서 모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부처라 한다. 교화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을 법이라 하고, 이 법을 수행하는 이를 승가[僧]라 한다. 이와 같은 삼보(寶)에 대하여 예배드려야 할 이유를 나는 지금 설명하려 한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를 구비하셨기 때문에 세간의 하늘과 사람에게 공경을 받는다.
【문】그 밖의 성인(聖人)들에게도 역시 이 다섯 가지 공덕은 있다. 부처와는 무엇이 다른가.
028_0738_a_09L問曰:諸餘聖人亦復有此五品功德,與佛何異?
【답】부처님의 다섯 가지 법은 구족하고 청정하시다. 왜냐하면, 몸 등의 모든 업(業)은 그릇됨이 없으므로 계행(戒行)이 구족하시다. 또 부처님은 오히려 그릇 금계(禁戒)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거든, 하물며 일부러 범하겠는가. 또 오랫동안 자비(慈悲)를 쌓았으므로 모진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이 나면서부터 자비를 익혔다면 악행을 일으키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심과 같다.
부처님은 오랫동안 착한 성품을 쌓았기 때문에 스스로 지킨 것이오, 명성을 두려워해서 금계를 가지신 것이 아니다. 또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오랫동안 계행을 닦아서 3독(毒)의 뿌리를 뽑은지라 영원히 남은 습기(習氣)가 없으시니, 이러한 일들의 인연 때문에 계율이 구족하다. 선정(禪定)이 구족하다. 부처님은 이 선정을 의지하여서 일체지를 얻으셨으며, 이 때문에 선정이 구족하심을 알게 된다. 마치 등잔에 기름이 많고 심지가 크기 때문에 광명도 큰 것과 같다. 또 부처님의 선정은 견고해서 마치 칠로 나무를 칠한 것과 같거니와 다른 사람의 선정은 꽃 위에 뿌린 물이 오래 머무르지 못한 것과 같다.
028_0738_b_02L또 여래의 선정은 항상 깊이 닦아 익힌 것이라 마치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아니하는 것과 같으며, 부처님은 선정에 들되 마음과 힘을 쓰지 아니한다. 또, 마치 사람이 자기의 가정에서는 자유롭게 말을 하고 뜻대로 편안하여서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이 선정에 머무시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삼매(三昧)중에 계신다고 말한다.
또 선정을 무너뜨리는 큰 기쁨[大喜] 등의 법을 부처님은 다 잘 끊으셨다. 또 선정의 과보로서 자유로운 신통을 얻는 것이 가장 으뜸이므로 여의통(如意通)을 부려서 잠깐 사이에 십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마음대로 통과하면서 온갖 하실 일을 뜻대로 성취하시며, 모든 변화(變化)하는 법에도 자유롭고 걸림이 없어서 마음이 온갖 법에 두루하거니와 그 밖의 중생으로서는 따를만한 이가 없다.
【문】즐겁지 아니한 것에서는 평등한 생각을 낼 수 있되 어떻게 그 중에서 즐거운 생각을 낼 수 있는가.
028_0738_b_13L問曰:於不樂中可生捨想,云何於中能生樂想?
【답】마음을 잘 닦으셨으므로 나쁜 소리 등의 즐겁지 않은 것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 밖에 하늘눈[天眼]과 하늘귀[天耳]와 남의 속아는 지혜[他心智]와 전생의 일을 아는 신통[宿命通]에도 걸림이 없음은 역시 선정의 힘 때문이며, 신통에 걸림이 없음은 역시 선정의 힘 때문이며, 신통에 걸림이 없음은 모든 선정에 통달하고 밝게 알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중생으로서는 그 이름마저 듣지 못하나 오직 여래만이 들고 나기에 걸림이 없다. 또 부처님의 선정은 힘[力]이라 말하며 열 가지 힘[十力] 중에서 설명함과 같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선정이 구족하다.
028_0738_c_02L지혜가 구족하다. 두 가지 무명이 있으니, 첫째 선정을 장애함이요, 둘째 번뇌를 일으킴이다. 여래는 두 가지를 다 끊으셨고 서로 어김을 끊었기 때문에 지혜가 구족하다. 또 자연한 법을 얻었으므로 남에게서 듣지 않으며, 말씀을 잘하고 이치를 잘 알아서 변재가 끝이 없고, 지혜가 그지없다. 또 다른 중생으로서는 구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술을 오직 부처님만은 모두 알아서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지혜가 구족하다.
해탈(解脫)이 구족하다. 두 가지 무명에서 마음이 다 해탈하여 남은 버릇이 없고 영구히 물러나지 아니하시니 이런 일들을 해탈이 구족하다 한다. 해탈지견(解脫知見)이 구족하다. 온갖 번뇌를 끊는 도 가운데서 생각생각마다 다 아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손에 도끼를 쥐고 나무를 자를 적에 그 곁에 있는 슬기로운 사람은 그 나무덩치가 조금씩 끊어져 가는 것을 앎과 같이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번뇌를 끊는 지혜가 생각생각마다 다하여짐을 다 분별해서 아신다.
또 중생이 깊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아서 그에 맞도록 설법하시어 해탈을 얻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온갖 해탈의 도중에서 알고 보심이 구족하다. 또 부처님 세존은 때를 알아서 설법하시나니 마치 침부로 범지(鈂扶盧梵志)와 같다. 또 여래는 모든 법의 차별을 잘 알므로 당연히 그 사람을 위해서는 그에 해당한 설법을 하시나니 마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차익(車匿)을 위해서는 당연히 이유무경(離有無經)을 설법해야 한다”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여래는 해탈을 잘 아신다.
028_0739_a_02L또 어떤 중생은 업보가 장애가 되어서 해탈을 얻지 못하면 부처님은 그것을 끊게 한 연후에야 설법하신다. 또 어떤 중생은 때를 기다리다가 번뇌가 끊어졌으니 부부경(夫婦經)에서의 말씀과 같다. 또 어떤 중생은 사람을 기다리다가 번뇌가 끊어졌으니 마치 사리불(舍利弗)이 아열기(阿說嗜)를 기다림과 같고, 또 어떤 중생은 처(處)를 기다리다가 번뇌가 끊어졌으니 마치 불가사왕(弗迦沙王)과 같으며, 또 어떤 중생은 동반자를 기다리다가 번뇌가 끊어졌으니 소를 치는 난타(難陀)가 아유타(阿由陀) 마을의 사람을 기다림과 같고, 또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참 몸[眞身]을 기다리고 또는 변화한 몸[化身]을 기다리다가 번뇌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부처님은 모두 따로따로 알아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어 해탈을 얻게 한다.
또 부처님은 여러 가지로 좋은 법을 말씀하고 온갖 해탈을 장애하는 법을 부수기 때문에 해탈의 지견이 구족하다고 한다. 또 부처님은 법을 잘 아시므로 이치에 틀리거나 과보가 없는 일은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또 부처님은 순서있게 해탈의 도를 말씀하시므로 마치 산수(算數)에 나타남과 같아서 이해하기가 쉽다. 또 부처님은 중생이 전생부터 심어온 선근(善根)의 차서를 알아서 설법하시며, 또 부처님은 직접 해탈을 얻어서 남에게 설법하는 것이요 남에게서 듣지 아니하신다.
또 부처님의 법은 여러 가지 기능을 구비한다. 마치 모든 약이 구비되어야 병을 낫게 하듯이 불법도 그와 같다. 여러 가지 대치하는 방편으로 모든 번뇌를 제거함은 마치 아홉 가지 생각[想] 등으로 크고 작은 온갖 번뇌가 도리어 해치지 못하도록 함과 같다. 그러므로 충분히 모든 번뇌를 끊는다. 또 더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되 혹은 부드러운 말씀으로 혹은 괴로운 말씀으로 하며, 혹은 부드러운 말씀과 괴로운 말씀을 겸하여 하기도 하시니, 이것이 여래께서 해탈지견이 구족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열 가지 힘(十力)을 성취하셨으므로 지혜가 구족하다. 가고 오는 인연을 들어서 열 가지 힘을 설명하리라.
028_0739_a_22L復次,佛十力成就故智慧具足。以往反因緣故說十力。
028_0739_b_02L처음에는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분명히 아는 힘[處非處力]이니, 이것은 인과(因果)에 대해 결정하는 지혜이다. 그러한 원인으로부터는 이와 같은 결과를 내고 저와 같은 결과를 내지 않는다고 아는 것으로서 착하지 못한 짓을 저지르면 반드시 괴로운 과보를 받고 즐거운 과보를 받지 아니함과 같다. 옳은 곳에는 옳은 일이 있고 그른 곳에는 옳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첫째의 힘은 여러 가지 힘 가운데서 근본이다.
【문】세간에서도 원인과 결과의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앎은 마치 보리에서는 보리가 나오고 벼 따위가 나오지 아니함과 같다.
028_0739_b_05L問曰:世閒亦知因果是處非處,如從麥生麥、不生稻等。
【답】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분명히 아는 힘은 여러 업(業)의 법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 힘을 으뜸이며 매우 깊은 힘이라 하고, 여러 하늘과 세간 사람으로서는 따르지 못할 바다. 또 생성하는 법의 원인[因]의 순서와 반연[緣]의 과정을 꿰뚫어 아신다. 그러므로 힘을 미묘(微妙)하다 한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업(業)과 여러 가지 느낌(受)의 법을 알고 곳을 알고 일을 알고 원인을 알고 과보를 아시나니, 그러므로 이 지혜를 힘이라 한다.
3세(世)의 곳과 일과 원인과 과보를 아시므로 매우 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말하되 “과거와 미래에도 없는 법이다”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힘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요, 또 법이 과거와 미래 세상에 있고 현재 모양은 없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또한 현재에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착함과 착하지 못함이다. 혹 착한 업을 짓고도 현재에 고통을 받는 이가 있음은 마치 계행을 지님으로 하여 모든 괴롬을 겪음과 같다. 혹 죄 되는 업을 짓고도 현재에 즐거움을 받는 이가 있음은 계행을 깨뜨리고 자유롭게 지냄과 같다. 혹 의심을 내면서 미래의 세상도 현재와 같으리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러므로 여래는 업에 따라서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받는 법은 네 가지이다. 현재는 괴롭다가 뒤에 즐거운 것과 현재는 즐겁다가 뒤에 괴로운 것이 있으며 현재도 즐겁고 뒤에도 즐거운 것과 현재도 괴롭고 뒤에도 괴로운 것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러한 곳과 일과 원인과 과보를 다 환히 아신다. 곳이라 함은 받는 이를 말하고 일이라 함은 보시하는 물품을 말하며 원인이라 함은 보시하는 이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경전 중에서 “먼저 마음이 깨끗하고 보시할 때의 마음이 깨끗하며 보시한 뒤에 후회가 없으면 이러한 업은 결과를 얻나니, 이것을 과보라 한다”고 하셨음과 같다.
028_0739_c_02L오직 부처님만이 이 업의 분량과 혹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아니함과 현재에 받을 과보와 내생에 받을 과보와 그 다음 생에 받을 것을 아시어 모자랄 것 없이 다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028_0739_c_02L唯佛能知是業多少,若定不定、現報生報及後報等悉知無餘,故名爲力。
부처님은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와 삼마발제(三摩跋提)에 대하여 때 묻음을 알고 머무름을 알고 더함을 알고 깨끗함을 아신다. 이 이치 중에서 선정이라 함은 네 가지 선과 네 가지 무형세계의 선정[定]을 말한 것이니 곧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업이 된다. 해탈이라 함은 여덟 가지 해탈이니 능히 이 업을 다한다. 이 선정과 무형세계 선정과 팔해탈을 삼매라 하며, 이 삼매의 작용(用)이 앞에 나타나게 됨을 삼마발제라 한다.
삼마발제는 네 가지로 분별한다. 때 묻음을 따름[隨垢]과 머무름을 따름[隨住]과 더함을 따름[隨增]과 깨끗함을 따름[隨淨] 등이다. 때 묻음을 알면 때 묻음을 따르는 선정이고 머무름을 알면 머무름을 따르는 선정이며 더함을 알면 더함을 따르는 선정이고 깨끗함을 알면 통달을 따르는 선정[隨達定]이다. 통달에 따르는 선정은 난위(煖位)와 정위(頂位)와 인위(忍位) 등의 네 가지 법이다. 부처님은 이들에 대하여도 모자랄 것 없이 다 아시나니, 그러므로 힘이라 한다.
부처님은 중생이 여러 근기에 영리하고 우둔함을 환히 아신다. 믿음 등의 근기가 수승하면 영리하다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과 같으며 우둔하다 함은 미치지 못한다[不及]는 것으로서 마치 뱀잡이와 같다. 중간의 근기가 없음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리한 근기는 끝이 있어서 마치 모든 부처와 같고 우둔함 역시 끝이 있어서 마치 뱀잡이와 같다 하거니와 중간은 끝이 없기 때문에 중간 근기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또 좋아하는 바에 따라 근기에 차별이 있고, 믿음의 근본을 좋아하기 때문에 믿음이라 한다. 다분히 지혜 있는 사람은 모든 근기가 수승하나 좋아함을 따르기 때문에 화가리(和伽利)라 하며, 신근(信根)이 수승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근기를 빠짐없이 다 아시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028_0740_a_02L부처님은 중생이 저마다 좋아함이 있음을 다 아신다. 좋아하는 것을 욕망이라 한다. 사람이 식초(酢)를 좋아하면 식초를 욕망한다 함과 같다. 부처님은 좋아함을 따라 낱낱이 분별하여 아시나니 이른바 이 중생은 다섯 가지 욕락을 좋아하고 저 중생은 도 닦기를 좋아한다는 따위이다. 그렇게 아신 다음에 정도를 맞추어서 설법하시기 때문에 널리 온갖 중생을 제도하신다.
부처님은 세간의 한량없는 중생의 성품을 아신다. 중생은 오랫동안 좋아하는 것에 습관이 되면 나중에는 성품으로 변한다. 조달(調達)의 무리는 세세생생에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악한 마음이 차차 깊어져서 어느새 성품으로 되어버렸다고 함과 같다. 착한 성품도 역시 그러하다. 어떤 중생은 성품에서부터 욕심을 일으키고 어떤 중생은 현재를 반연하여 욕심을 일으킨다. 여래는 그들의 좋아함과 성품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힘이라 한다.
부처님은 온갖 중생이 도착할 곳의 길을 아신다. 이 길로 가면 지옥에 가 나고 내지 천상에 날 것을 아시며, 이 길로 가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아신다. 이러한 업은 다 각자의 근기와 욕망과 성품으로부터 생긴다. 셈이 있는 업(有漏業)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갈래 중에 나고, 샘이 없는 업(無漏業)이기 때문에 열반에 도달할 것을 아신다.
먼저는 오직 길만을 말하고 지금은 길의 결과를 말하며, 또 먼저는 모양의 모든 것[總相]을 설명하고 지금은 분별하여 설명하면서,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지옥에 가고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열반에 이르며, 지옥에 가는 자에게도 차별이 있어서 이러한 업은 당연히 활지옥(活地獄)에 떨어지고 저러한 업을 지으면 흑승지옥(黑繩地獄)에 떨어져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곱 번째의 힘 중에서 세밀한 업을 아셨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는 분별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힘이라 한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전생의 업과(業果)를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전생을 아는 지혜의 힘(宿命智力)이라 한다. 또 부처님은 중생이 과거에 행해 온 길을 아시며, 그에 다 아신 다음에 그에 따라서 설법하셨으므로 전생에 대하여 아는 지혜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또 부처님은 과거에 태어난 곳이 혹은 형상이 있는 곳이었거나 혹은 형상이 없는 곳이었던가를 기억하며, 자신의 것도 스스로 알고 또한 중생의 것도 아시나니 그러므로 힘이라 한다.
028_0740_b_02L부처님의 천안지(天眼智)는 미래 세상의 세 가지 세계가 서로 이어갈 것을 보고 세 가지 업과 네 가지 받는 법을 알며, 또는 수기(授記)하는 말씀도 하여 뚫어지게 아시는 일이 걸림이 없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샘이 다한 힘(漏盡力)으로는 서로 이어가지 않는 법을 아신다. 중생은 목숨이 끝나면 혹은 계속되기도 하고 혹은 계속되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힘은 모두가 온갖 중생이 이를 처소의 길[一切衆生至處道]을 아는 힘이 되며 통틀어서 열반의 길[涅槃道]이라 말한다.
이제 이 힘 가운데 널리 분별하여 부처님의 인(因)의 때 묻고 깨끗함을 말하기 때문에 열 가지 힘이 있다. 아홉 가지 힘을 얻으셨기 때문에 지혜가 성취되고, 열째 번의 힘을 얻으셨기 때문에 지혜가 성취되고, 열째 번의 힘을 얻으셨기 때문에 번뇌의 끊음을 성취한다. 지혜의 이룸과 번뇌의 끊음이 구족하기 때문에 세존이라 하고 하늘과 사람이 공경하는 바이다.
또 부처님은 네 가지 두려움 없음[無所畏]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배 드려야 한다. 네 가지 두려움이 없다[無畏]함은 여래는 온갖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와 온갖 번뇌가 없음[一切漏盡]을 얻어서, 도를 장애[障道]하는 것과 고통을 끊는[盡苦] 길을 연설하셨다. 이 네 가지 법 중에서 “만일 누가 와서 법답게 문의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두려워할 것이 없노라” 하셨다.
첫 번째의 두려움이 없음은 온갖 것을 아는 지혜로서 역시 아홉 가지 힘에 해당하고, 두 번째를 이름하여 끊음이라 하나니 곧 열 번째의 힘에 해당하며 지혜와 끊음이 구족하기 때문에 여래는 스스로 자신의 공덕이 구비하고 나중의 두 가지 두려움 없음은 남으로 하여금 구비하게 한다. 부처님이 말씀한 장애라 함은 사실 법을 장애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착하지 못함이거나 혹은 착함에 샘이 있거나[有漏] 하여 해탈을 장애하기 때문에 장애의 법이라 하며, 이 장애를 여의게 되기 때문에 벗어나는 도[出道]라 말한다.
【문】그대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힘이 곧 두려움 없는 것이라 하면 힘과 두려움 없음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0740_b_19L問曰:如汝此中所說諸力卽是無畏,今力與無畏有何差別?
028_0740_c_02L【답】지혜를 힘이라 하고, 이 힘으로써 감수(堪受)하기 때문에 감수하는 바가 있어도 두려움 없음이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끄러워(慚愧)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감수하는 바가 많지마는 여래의 감수함은 지혜로부터 생긴다. 또 지혜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므로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비록 지혜가 있어도 오히려 비겁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또 지혜를 힘이라 말하며 능히 설명할 수 있는 그 지혜를 두려워할 것 없음이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안다 하더라도 설명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능히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을 두려움 없음이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알기는 하면서도 남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지혜가 한량없기 때문에 힘이라 하고 변재가 한량없기 때문에 두려움 없다는 것이다. 또 말씀에 이치가 있기 때문에 힘이라 하고, 말씀하는 것이 자유롭기 때문에 두려움 없다는 것이다. 또 인(因)을 힘이라 하고, 과(果)를 두려움 없음이라 한다. 지혜 가운데서 두려움 없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사람은 날 적부터 겁이 많고 연약하다가도 뒤에 조그마한 지혜를 얻으면 곧 두려움이 없어진다. 항차 세존은 오랜 전생으로부터 그 마음이 광대(廣大)하시고 그 위에 일체지를 얻으셨거늘 두려움이 있겠는가.
또 누구나 사람이 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인데, 부처님은 어느 한 사람에게 대하여도 이기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바가 없다. 또 논사(論師)라면 언사(言辭)도 좋아야 하고, 취지[義趣]도 좋아야만 두려울 것이 없는 법인데, 부처님이 곧 그 어른이시다. 온갖 것을 아는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말씀의 취지가 좋고 걸림없는 변재(辯才)를 얻으셨기 때문에 언사에 능하시다. 또 누구든지 모든 일에 대하여 힘이 부족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법인데 여래는 일체지를 얻으셨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하여 힘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온갖 경서와 온갖 논의(論議)에 모두 다 통달하여 명확하게 문답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028_0741_a_02L혹은 집안이나 혹은 성품 혹은 몸(色), 혹은 계(戒)와 다문지(多聞智) 등에 모자람이 있기 때문에 조롱하는 말을 듣지만 여래는 이런 일에 대하여 도무지 모자라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또 법다운 논리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 바로 그 어른이시다. 아수라바라문(阿叔羅婆羅門)이 세존께 여쭈었다. “법다운 논리는 이기기 어렵고, 무너뜨리기 어렵나이다. 도에 순종하는 논리[順道論者]와 생각하는 논사[思量論者]와 인을 세우는 논리[有因論者]도 다 그러하나이다” 함과 같다.
또 사람이 네 가지 논법(論法)을 성취하면 역시 이기기 어렵고 무너뜨리기 어렵다. 첫째는 바른 주견[正執]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인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因非因)를 느껴야 하고, 셋째는 비유를 잘 알아야 하고, 넷째는 구비하셨으므로 모든 하늘과 인간으로서 이길 만한 이가 없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또 훌륭한 스승에게 묻지 않고 논의(論議)하면 실패당하기가 쉽다. 여래는 오랜 옛적부터 정광여래(錠光如來) 등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논의하는 방법을 닦아 익혔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가 없다.
또 부처님은 두 가지 바른 이치를 말씀하셨다. 이른바 세속의 진리(世諦)와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諦)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범부는 지혜가 없으므로 함께 다투지도 못한다. 또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말다툼을 하지 아니하나니, 세상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도 역시 있다고 말씀하고 세간에서 없다고 말하면 부처님도 역시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말다툼이 없고, 말다툼이 없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도 없다.
또 논의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한 논의요, 둘째는 아첨하는 논의이다. 여러 외도들은 아첨하는 논의가 많되 부처님은 진실한 논의가 되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다. 또 불법 중에는 행이 바르고 깨끗하기 때문에 논의하는 것도 깨끗하며, 행이 청정한 것을 고통 끊는 원인이라 한다. 모든 외도의 논의에는 비슷(相似)한 인은 있으나 바른 인(正因)이 없으므로 이길 수가 없다. 또 부처님의 경전은 청정하여 말씀하신 이치가 실지의 모양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외도의 그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법은 다만 남의 말에만 따르는 것이 아니요, 다 마음에서 스스로 안다. 경전의 말씀과 같다. 즉 부처님이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만 나의 말만 믿지 말고 마땅히 스스로가 알고 보아서 자신이 증득하여 실천하여라”고 하셨다. 또 “모든 아첨하지 않는 자들이여, 너희는 오너라. 만일 내가 새벽에 너희를 위하여 법을 일러주면 저녁 무렵에 도를 얻도록 할 것이오, 저녁에 법을 일러주면 새벽에 도를 얻도록 하리라”고 하셨다.
028_0741_b_02L또 다시 만일 누구라도 법에 깨닫지 못한 데가 있거든 얼른 그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말을 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나 부처님은 통달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또 여래는 모든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를 얻어서 온갖 법에 통달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 또 작은 지혜로는 큰 사람의 아는 것을 알지 못하나 큰 것으로는 작은 것을 안다. 부처님은 중생 중에서 가장 거룩하시므로 넉넉히 작은 논의도 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
또 모든 외도의 논의는 자기의 소견을 의지해서 일으키나 부처님은 그러한 소견이 모든 인연으로부터 생겼음을 알고 쌓임(集)을 알고 사라짐(滅)을 알고 맛(味)을 알고 허물(過)을 알고 벗어날(出) 줄을 아신다. 모든 외도들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온갖 법을 아시기 때문에 능히 모든 논리를 무너뜨릴지언정 모든 논리에 패배를 당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러한 일들을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畏]의 차별되는 이치라 한다.
【문】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한 가지도 두려워할 일이 없으시다면, 무엇 때문에 네 가지 두려움 없는 것만을 말하는가.
028_0741_b_13L問曰:佛於諸法悉無所畏,何故但說四無畏耶?
【답】네 가지를 말하면 온갖 두려움 없음을 다 말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에 두 가지 두려움 없음은 스스로의 지혜와 번뇌 끊음을 말한 것이요 뒤에 두 가지 두려움 없음은 남을 위하여 도를 장애하는 법을 말하고 괴로움이 다하는 도법을 말한 것으로서 역시 지혜와 번뇌 끊음이라 하리니 스승과 제자가 다 같이 지혜와 번뇌 끊음을 구비하였으므로 통틀어 온갖 두려움 없음을 설명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답】부처님의 말씀한 바는 혹은 일체지인이 아닌 듯한 일도 있다. 마치 부처님이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말씀하시는 그런 일들과 같다. 또 경전의 말씀과 같다. 즉 도시거나 읍이거나 부락에 당도하여 그 성명을 물으면 부처님은 “나는 일체지인이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이런 경전을 듣는 사람이 “부처님은 일체지인이 아니다”라고 의심한다.
028_0741_c_02L또 부처님의 말씀에는 탐착이 있는 듯도 하다. 경전의 말씀과 같다. 즉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잘 오너라, 비구야. 너는 네 몸에 큰 이익을 얻기 위하여 나의 법에 순종하면, 나는 기쁘게 여기리라” 하셨고, 진심을 내는 듯한 말씀도 있었으니 “조달(調達)아, 너는 죽은 사람이다. 침이나 먹을 사람이로구나” 하심과 같다. 또 난체[慢]한 듯한 말씀도 계셨으니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 중의 사자[人中師子]이다.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였으므로 대중 가운데서 사자의 부르짖음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또 고집[見]하는 듯한 말씀도 계셨으니, “나의 법을 잘 간직하되, 기름 발우[油鉢] 받들듯 하라”고 하셨다. 또 조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대중을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揵連)에게도 허락한 일이 없거든, 더군다나 너에게 허락하겠느냐”고 하셨다. 지식이 적은 사람이 이런 말들을 들으면 이내 “여래는 모든 번뇌가 아직도 다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또 부처님이 “모든 욕심은 도를 장애하는 법이다”라고 설명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욕망을 받으면서도 또한 도를 얻는 이가 있고, 또 비니(毘尼) 중에서 말씀한 차법(遮法)을 어떤 사람은 깨뜨리면서도 도를 얻게 되므로 지혜가 적은 사람은 “부처님은 장애되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의심한다. 어떤 사람이 도를 닦으면서도 번뇌가 있으면 지혜가 적은 사람은 의심을 내되 “성인의 도를 닦아도 번뇌를 끊지 못한다. 이미 번뇌를 끊지 못하거니, 어떻게 고통을 여윌 수 있겠는가”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네 가지 법에서 두려움 없음을 말씀하셨다.
【답】부처님은 세속에 따라서 말씀하셨다. 세간에서도 알면서 묻는 이가 있으면 그를 허물하지 않는다.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간에 계시므로 세속에 따라 물으신다. 또 세간에서도 마음에는 탐착이 없으면서 말로는 탐착이 있는 듯이 말하는 이가 있다. 그와 같은 일들은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그런 말씀을 나타내신다. 만일 누가 “욕심은 장애되는 법이 아니다”라 하면, 부처님은 “욕심은 실로 장애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욕심이 마음에 있으면 도를 닦지 못한다. 요컨대 먼저 욕심을 제거한 연후에야 도를 얻게 된다.”
028_0742_a_02L만일 비록 차법을 범하여도 도를 얻는다 하면 진실한 차법(實遮法)을 범하면 반드시 도를 얻을 수 없으며, 만일 실죄(實罪)가 아니면 중대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도리어 허락하셨으니 차법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만일 도를 닦아도 역시 번뇌가 있다 하면 성인의 도[聖道]는 능히 온갖 번뇌를 부수는 것인데 아직 구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 부수지 못한 것이니, 마치 타락(酥)의 성품은 능히 열병을 낫게 하지만 적게 먹었기 때문에 병이 다 낫지 않는 것과 같다. 도를 닦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허물될 것이 없다. 여래는 네 가지 두려울 것 없음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예배드려야 한다.
여래라 함은 여실(如實)한 도를 타고 와서 정각(正覺)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말씀이면 말씀마다 다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으시되 “여래의 말씀한 바에 자못 두 가지가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여설(如說)이라 한다. 또 여래는 득도(得道)하신 밤부터 열반하신 밤까지 그 동안에 하신 말씀마다 다 진실하여 파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설이라 한다. 또 일체종지로 앞뒤의 끝을 아신 연후에야 말씀하기 때문에 말씀마다 다 진실하다.
또 모든 부처님 세존은 기억하는 힘이 견고하여 잊혀지는 일이 없으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혹시 추측으로 말하고, 경서에 따라서 말하고 혹은 현재에 있는 것도 잘 보지 못하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의 말하는 것은 맞을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다. 경전 중의 말씀에 “추측으로 아는 사람의 말은 혹 맞기도 하고 혹 틀리기도 한다”라고 함과 같다. 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현재에 아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말씀마다 누구나 무너뜨릴 수 없는지라 진실한 말씀을 하는 이[實語者]라 한다. 또 부처님의 말씀은 다 진실한 이치만을 말씀하시므로 다른 사람의 진실하거나 진실치 못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무너뜨릴 수 없다.
028_0742_b_02L또 말씀마다 때에 맞추어 말씀하셨다. 경전 중에서 말씀한 “부처님은 중생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즐겨함을 알아서 곧 도법을 말씀하신다”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여설’이라 한다. 또 말씀해 주어야 할 사람이면 곧 그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셨으니, 긴숙가경(緊叔伽經)의 말씀과 같다. 또 말슴해 주어야할 법이면 곧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간략하고 자세한 음(陰)ㆍ입(入)ㆍ문(門)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것이 진실치 않은 것이 없다.
또 두 가지 말하는 법이 있다. 첫째는 세속의 이치에 의지하는 것이요, 둘째는 으뜸가는 진리에 의지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가지 진리에 의지하여 말씀하기 때문에 말씀마다 다 진실하다. 또 부처님은 세속의 이치 그것을 으뜸가는 진리라 말씀하지도 않고 으뜸가는 진리 그것을 세속의 이치라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두 가지 말씀이 다 엇갈리지 아니한다. 또 여래는 막고[遮] 트는[開]데에 서로 엇갈리지 않는다. 하는 일에 따라서 막아야 할 일이면 그 일에 대하여 트지 않고 하는 일에 따라서 터야 할 일이면 그 일에 대하여는 막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말씀마다 서로 엇갈리지 않으셨다.
또 세 가지 말하는 법이 있다. 첫째는 고집[見]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둘째는 난체[慢]하는 데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셋째는 붙인 이름[假名]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처님은 두 가지 말은 아주 없고, 세 번째의 말에도 청정하여 물들지[染]아니 하셨다. 또 네 가지 말하는 법이 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이니 부처님은 이 네 가지에 대해서도 말씀마다 청정하여 마음에 탐착이 없다. 또 다섯 가지 말하는 법이 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와 함이 없음[無爲]과 말할 수 없음[不可說]이다. 이 다섯 가지 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두 통달하고 환히 아신 다음에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설’이라 하며, 여설이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이 법을 얻으며, 탐심과 진심과 치심 등은 그것이 거짓말의 근본인데 이 모든 번뇌를 끊으셨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또 여래는 응공의 법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번뇌를 끊는 법인데, 바른 지혜로부터 생긴다. 무상 등의 지혜로 바르게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끊어지며, 그러므로 바른 지혜를 의지하여 응공의 법이 생긴다.
028_0742_c_02L이 바른 지혜의 법은 명행(明行)으로부터 생긴다. 과거와 미래의 계속되지 않는 곳까지 잘 통달했기 때문에 바른 지혜(正智)라는 이름을 얻고,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다 실행하기 때문에 모든 지혜(明)와 행(行)이 만족(足)하다. 다른 사람들도 끝없는(無始) 생사 중에서 보시 등의 법을 시행하였으나 바른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선서(善逝)라 말하지 못한다. 부처님은 바른 도[正道]로 보시 등의 행위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선서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얻으면 여래는 자신의 공덕이 구족하여져서 바른 지혜를 얻기 때문에 세간의 온갖 마음의 생각을 알며, 생각한 바를 안 다음에는 그를 위하여 설법하시기 때문에 무상(無上)이라 한다.
조어(調御)라 함은 조복(調伏)시켜야 할 사람이면 모조리 조복시키며, 이미 조복된 사람은 영구히 타락하지 않게 하신다. 조복되는 이란 하늘과 사람이 그들이니, 그러므로 천인사(天人師)라 한다. 혹 어떤 사람이 의심을 내기를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을 교화할 수 있을까” 하기도 하므로 그 때문에 “나는 바로 천인사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라 함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법인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과 다함이 있음[有盡]과 다함이 없음[無盡]과 머트러운 것[麤]과 세밀한 것[細]이거나 간에 이 온갖 법을 도량에 앉았을 때에 무명의 졸음[睡]을 없애고 일체지를 얻어서 환하게 크게 깨쳤으므로 깨달은 이[覺者]라 부른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공덕을 구족하여 3세와 십방의 세계 중에 높기 때문에 세존이라 부른다. 부처님은 열 가지 이름을 구족하기 때문에 자신도 두루 갖추고 남도 또한 두루 갖추게 하여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028_0743_a_02L부처님의 몸과 입과 뜻의 업(業)은 단속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깨끗하지 못한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없어 남으로 하여금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또 모든 사람들은 혹은 무기(無記)가 있더라도 깨끗하지 못한 몸과 입과 뜻의 업과 같아서 슬기로운 이에게 나무람을 듣지마는 부처님은 그러한 일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의 온갖 몸과 입과 뜻의 업은 다 지혜와 바른 기억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허망한 생각(妄念)만이 있고 지혜가 적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업이 없다. 또 세간 사람은 갑자기 그릇된 말을 하는 수도 있으나 부처님은 그러한 일이 없다. 또 부처님은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를 잘 닦으며, 그러한 법들을 잘 닦기 때문에 온갖 착하지 못한 또는 착하지 못한 듯한 업은 모두 다 없어졌다.
또 세존께서는 오랜 전생부터 착한 법을 닦아 행하셨고 금생에만 닦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업의 성품은 깨끗하여 단속할 것이 없다. 또 부처님이 항상 계행을 즐기신 것은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들을 무서워해서가 아니다. 또 부처님의 온갖 몸과 입과 뜻의 업은 모두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라 착하지 못한 것이 없다. 때문에 단속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 깨끗하여 단속하지 않는 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드려야 한다. 또 부처님은 세 가지 염처[三念處]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드려야 한다.
또 모든 법이 필경에는 ≺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근심할 것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다. 또 부처님은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잘 쌓았기 때문에 착하고 착하지 못한데 대하여 마음에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이 평등하게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킨다. 또 부처님은 중생 각자의 성품을 깊이 알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듣더라도 근심하지 않으며, 성품이 그렇기 때문에 항상 평등한 마음을 갖는다. 또 부처님의 마음은 굳건하기가 마치 대지(大地)가 무거운 것을 들어낸다 하여 더 높아지지도 않고 무거운 것을 올려놓는다 하여 더 내려앉지도 아니함과 같거니와 그 밖의 범부의 그 마음은 마치 저울이 조금 더 보태면 바로 내려가고 조금 덜면 바로 올라감과 같다.
028_0743_b_02L또 부처님 세존을 대비자(大悲者)라 부른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이 다 같이 당연히 예배하고 공경하여야 한다. 또 깊은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남을 위하여 설법하시며 그 밖의 사람의 비심(悲心)은 이룩되는 바가 없되 세존의 대비심(大悲心)은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고 한다. 또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더없는 도를 이루는 것이요, 다시 다른 반연이 없다.
또 부처님은 나라는 마음이 없다. 욕심이 적고 만족을 아는 것[少欲知足]으로 가장 으뜸을 삼으며 크게 불쌍히 여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칭찬한다. 또 부처님은 성품이 부드럽고 평화롭지마는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아주 간절한 말씀을 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큰 방편을 일으키어 갖은 고통을 겪으신다. 또 부처님은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간에 머무르면서 마치 잠깐 동안도 견딜 수 없는 뜨거운 탄환[熱彈丸]과 같은 다섯 가지 쌓임의 몸을 받으셨다. 또 부처님 세존은 평등한 마음을 잘 닦으셨다. 그러나 그 평등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쓰셨으므로 존경을 받게 된다.
또 부처님은 착한 사람이라 하지만, 착한 중에도 착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큰 이익을 얻고, 남도 이롭게 하시기 때문이며, 자신이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라 한다. 또 부처님은 중생의 참 선지식[眞善知識]이다. 경전 중의 말씀에 “나는 중생의 참 선지식이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며 이익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심과 같다. 또 부처님 세존은 정진 등의 모든 공덕의 무더기이다. 마치 화리(和利)가 백가지 글귀[句]로 부처님을 칭찬함과 같다. 이러한 공덕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드려야 한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 공덕을 말씀하셨다. 증일아함경의여래품[增一阿含如來品] 중에서 스스로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 중의 사자이며, 사람 중의 꽃이며, 사람 중의 코끼리며, 사문(沙門) 중에 으뜸가는 사문이며, 바라문 중에도 역시 으뜸이며, 여러 성인 중의 왕[衆聖中王]이다. 행동에 실수가 없고, 괴롭고 즐거움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바로 내 몸이니라”고 하셨음을 알 것이다.
【문】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칭찬하셨을까.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다.
028_0743_b_22L問曰:佛以何故自讚其身?自讚身者是愚人相。
028_0743_c_02L【답】세존은 명예와 이익을 구해서가 아니다. 다만 남을 위하여 스스로 그의 몸을 칭찬하셨을 뿐이다. 또 부처님은 나라는 마음이 없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칭찬하시므로 허물이 없다. 또, 인연 때문에 스스로 칭찬함이 조금은 있으나 부처님의 공덕의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 중에 떨어지지 않나니,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청정경(淸淨經) 중에서 사리불이 부처님 앞에 서서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함과 같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또 욕심이 적고, 만족을 아는 등의 한량없는 공덕이 다 부처님의 몸에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온갖 공덕을 다 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의 인연을 갖추었으므로 당연히 부처님께 공경하고 예배드려야 한다.
처음ㆍ중간ㆍ끝이 다 진실하다 함은 부처님의 법은 때마다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다. 소년 시절ㆍ장년 시절ㆍ노년 시절의 세 가지 시절도 다 진실하며, 들어올 때와 다닐 때와 나갈 때에도 또한 진실하다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죄악을 끊고 중간에는 복 받는 과보를 버리고 끝에 가서는 온갖 것을 다 놓아버린다. 이런 것을 세 가지 진실한 일이라 한다.
또 부처님은 세 때에 항상 바른 법(正法)을 연설하셨다. 다른 외도(外道)들이 법답지 못한 말을 섞어서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까지 항상 슬기로운 이들의 좋아하고 즐겨하는 대상이 되셨다. 또 세 때에 온갖 법문이 매우 깊어서 다른 경서가 처음에는 머트럽고 중간에는 세밀하다가 끝맺음에는 아주 조잡한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러한 인연들 때문에 세 가지가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치가 진실하다는 것은 불법의 이치에는 깊은 이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금생의 이익과 후생의 이익과, 또는 출세(出世)하는 도의 이익을 다 얻으므로 외도의 경서에서 천안(天眼)만을 더 얻고자 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말도 진실하다는 것은 지방 풍속의 말을 따라서 능히 바른 진리를 보여 주므로 말도 진실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결과는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말을 하는 데는 능히 이치를 가리어야 하나니, 이것을 말도 진실하다고 한다.
028_0744_a_02L또 불법은 말로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지방의 사투리를 따라서 도를 얻도록 하나니, 말도 진실하다고 한다. 외도의 경서에서는 말만 귀하게 여기는데 만일 말을 실수하거나 음성을 잃으면 말하는 그 사람이 죄과를 당하게 되는 일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는 참 이치[眞諦]를 잘 설명하기 때문에 이치가 진실하다 하고, 세속 이치[世諦]를 잘 설명하기 때문에 말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뛰어난 법[獨法]이라 함은 부처님은 바른 법[正法]만을 말씀하고 실없는 말씀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시며, 또 옳은 법과 그른 법을 섞어서 말씀하지 아니한다. 또 뛰어난 법이란 완전한 열반[無餘涅槃]을 위하여 말씀할 뿐이며, 또 부처님만이 설명하실 수 있기에 뛰어난 법이라 한다.
【문】성문(聲聞)에 속한 경전은 성문만이 말하고, 또 다른 경전은 천신들이 말한 것도 있다. 그대는 어찌하여 부처님 혼자만이 말씀하였다고 하는가.
028_0744_a_10L問曰:有聲聞部經但聲聞說,又有餘經諸天神說,汝何故言獨佛說耶?
【답】그 법의 근본이 다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모든 성문과 천신(天神)들은 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이다. 비니 중에서 말하기를 “불법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제자의 말이요, 변화(變化)의 말이요, 여러 천신의 말이라 한다”고 하였다. 간추려 말하자면 온갖 세간에 있는 착한 말은 다 부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법이라 한다. 구족하다 함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은 모자람이 없다. 울타가경(鬱陀伽經) 중에서 구족한 모습을 설명함과 같다.
또 부처님의 법문은 다른 경문을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화가라나경(和伽羅那經)은 다섯 가지의 경문을 의지한 연후에 만들어졌지마는 부처님의 경문은 그렇지 아니하여서 한 게송 중에 여러 가지 뜻이 다 갖추어졌다. 마치 “모든 죄악 짓지 말고/착한 일을 봉행하며/자기 뜻을 깨끗이 하면/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구족하다 한다. 청정하고 부드럽다 함은 두 가지가 깨끗하므로 청정하고 부드럽다 한다. 말이 깨끗하므로 청정하고 이치가 청정하므로 부드럽다 한다.
028_0744_b_02L또 부처님은 이치[正義] 중에서는 이치에 따르는 말을 두었고 바른 말[正語] 중에서는 말에 따르는 이치를 두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외도들이 경문에만 따라 취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불법 중에는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법도 또한 분별하여서 분명한 이치를 밝힌 경전[了義經]을 의지할 것이요 분명한 이치를 다 밝히지 아니한 경[不了義經]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깨끗한 법[淨法]이라 한다. 다만 경전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다.
또 불법에는 세 가지 법인(法印)이 있다. 일체무아(一切無我)와 유위(有爲)의 모든 법의 념념무상(念念無常)과 적멸열반[寂滅涅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법인은 모든 논사들이 무너뜨릴 수 없고 진실하기 때문에 청정하고 고르고 부드럽다 한다. 맑은 행을 따른다 함은 여덟 가지 바른 성도[八直聖道]를 맑은 행[梵行]이라 하는 것이니 범(梵)은 열반이라는 뜻이며 이 도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맑은 행이라 한다. 법보는 이러한 공덕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내 법은 능히 멸하여 능히 열반에 도달하고 능히 바른 지혜를 내고 능히 잘 거느려 인도[將導]한다” 하셨다. 능히 멸한다 함은 탐심과 진심 등의 모든 번뇌의 불을 멸하기 때문에 능히 멸한다고 한다. 마치 깨끗하지 못하다는 관[不淨觀]을 익혀서 음욕(婬欲)의 불을 끄는 것과 같고 인자한 마음을 익혀서 진심 등을 없애는 것과 같은 것이요, 외도가 단식(斷食)하는 등의 법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능히 멸한다고 한다. 능히 열반에 도달한다 함은 불법은 필경에는 반드시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요, 외도가 존재의 갈래[有分]중에 머물면서 선정 등에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028_0744_c_02L또 불법 중에서는 “함이 있는 온갖 법은 다 허물이 있고 칭찬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바라문들이 범천의 세계를 칭찬하는 따위와는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능히 열반에 도달한다고 한다.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 함은 부처님의 법이라면 모두가 열반을 목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 또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 참다운 지혜의 열매가 들어 있음은 마치 듣는 지혜로부터 생각하는 지혜를 내고 생각하는 지혜로부터 닦는 지혜를 내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고 한다. 능히 잘 거느려서 인도한다 함은, 부처님의 법은 먼저 자기가 잘 성취하고, 다음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법 가운데 머물도록 한다. 그러므로 잘 인도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부처님의 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말을 잘한다는 것[善說]이요, 둘째는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는 것[現報]이요, 셋째는 시일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無時]이요, 넷째는 잘 거느린다는 것[能將]이요, 다섯째는 직접 맛본다는 것[來嘗]이요, 여섯째는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가 안다는 것[智者自知]이다.
잘 말한다 함은, 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의 참모습 그대로를 말씀하셨다. 만일 착하지 못한 모습이면 착하지 못한 모습이라 말씀하고, 착한 모습이면 착한 모습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잘 말씀한다고 한다.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 함은 부처님의 법에는 능히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 경전에서 말씀한 “이른 아침에 교화를 받으면 저녁에 도를 얻게 하고, 저녁에 법을 말씀하면 다음 날 아침에 이익을 얻도록 한다”라고 함과 같다. 또 현세의 과보라 함은, 현재사문인과경(現在沙門因果經) 중의 말씀에서 “현재에 공경과 명예와 선정과 신통 등의 이익을 얻는다”고 말씀함과 같다.
시일을 가리지 않는다 함은, 불법은 어떤 날짜와 달과 해(歲)와 별 등의 길하고 흉한 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바로 수도(修道)할 수 있음이 있다. 아무 날ㆍ아무 달ㆍ아무 해에는 수도할 수 없다는 바라문의 법에 초봄에는 바라문이 불(火)을 받고 늦은 봄에는 찰리(刹利)가 불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과는 같지 않다. 또 혹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혹 해가 아직 돋기 전에 불에 공양하기도 하나니, 마치 다섯 가지 곡식을 맞추어서 심는 것을 보는 것 같다. 혹은 말하기를 “불법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리라” 하기도 하지마는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때를 가리지 않는다 한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시되 “불법은 수행(修行)하기가 용이 하나니, 거닐고 서고 앉고 눕거나 간에 수행을 얻지 못하는 때가 없다” 함과 같다.
028_0745_a_02L능히 거느린다 함은 바른 행위[正行] 때문에 중생을 거느려서 해탈하는 곳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능히 거느린다는 것이다. 직접 맛본다 함은 불법은 응당 자신이 증득해야 하고 남만 따르지 아니해야 하나니, 부처님이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다만 내 말만을 믿지 말고 마땅히 스스로가 생각하면서 이 법은 행해야 하고 이 법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할 것이요, 외도가 그의 제자에게 말하기를 ‘이런 문답을 버리기를 마치 깨끗이 씻은 사람이 먼지나 흙을 좋아하지 아니함과 같이하고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내 말만을 따르라’ 함 따위와는 같지 않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직접 맛본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 안다 함은, 이 불법의 이익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곧 믿고 이해한다. 단식(斷食)이나 하는 일들은 머트럽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믿고 즐겨하는 것이요, 지혜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른 지혜는 번뇌를 부수므로 그런 법들은 슬기로운 이가 곧 이해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으로 그 몸을 채우더라도, 마음으로 정진하면 탐심과 진심에는 물들지 않나니, 이러한 일들을 지혜 있는 사람이면 당장에 안다. 마치 사람이 병이 나으면 자신이 병의 떠나갔음을 아는 것과 같고 물맛이 차가운 줄은 마시는 자신이 아는 것과 같다.
또 혹시 말보다 지나치는 법이 있다. 마치 땅의 단단한 모습과 같다. 단단하면 어느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인가. 말로 대답할 수는 없다. 대[觸]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나면서부터의 장님[生盲]에게 푸르다 누르다 붉다 희다를 말할 수 없음과 같다. 만일 사람이 불법의 맛을 알지 못하면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말해 줄 수가 없다. 적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불법은 자기가 깨쳐 알아야 되고 자기가 깨친 것을 남에게 재물을 주듯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바라연경(婆羅延經) 중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나 자신이 너의 의심을 끊을 수는 없다. 네가 능히 나의 법을 증득하면 네 의심이 스스로 끊어지리라”고 하심과 같다.
또 다시 이 법이 남의 몸에 전달될 때에도 불을 전해주는 것들을 보듯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범부의 어리석은 사람은 무명(無明)의 산에 막히고 덮혀서 이 법을 믿지 않는다. 아이라왈 사미(阿夷羅曰沙彌)로 인하여 큰 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함과 같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 안다고 말한다.
028_0745_b_02L또 불법은 몹시 깊지마는 해설하여 보이면 얕은 것이니, 거짓을 끊어 없애고 하늘과 인간에게 유포한다. 몹시 깊다(甚深)함은 불법이 몹시 깊어서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흔히 현재의 결과만 보고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재천(自在天) 등의 삿된 원인을 말하며, 열두 가지 인연이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세상 사람의 지혜는 얕으므로 불법 중에서 깊은 생각을 내지 않으면 여러 가지 인연의 법을 통달할 수 없다. 내지 작은 풀잎까지라도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면 그 모양은 차차 깊어지며, 부처님이 말씀함과 같아서 여러 가지 인연의 법은 그 일이 아주 깊으며, 애욕이 다하여 떠나 없앰과 열반의 자리도 또한 보기 어렵다.
【답】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아난은 그가 거룩한 제자로서 법 모양을 통달하였거니, 어떻게 인연의 법이 얕다 하였겠는가”고 한다. 또 만일 대강으로만 인연법을 관찰하면 그 때문에 얕다는 생각을 낸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잘 분별하여 번뇌의 업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람이 본래 배우던 일에 끝맺음을 얻게 되면 문득 얕다는 생각을 내게 된다. 마치 큰 지혜를 얻으면 첫머리 글을 도로 살피는 것과 같으리라. 혹 어떤 사람은 지혜가 성취되지 못하면 몹시 깊은 법에 대하여 곧 얕다는 생각을 내기도 한다. 또 부처님은 설법을 잘하시기 때문에 혹 어떤 사람은 도리어 얕다는 생각을 내기도 한다. 또 불법에는 모두가 ≺공≻이요, 이 ≺공≻은 몹시 깊되 부처님은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로 선시(宣示)하셨으니 뜻이 이해하기 쉬워서 어린아이라도 알게 되었음은 마치 수다야사미(須陀耶沙彌) 등의 일과 같다.
028_0745_c_02L또 부처님의 법은 견고하여 모든 언어 가운데 가장 진실하므로 바라타(婆羅陀)와 나마연경(羅摩延經)등이 말만 있고 진실한 뜻이 있지 않은 것과는 같지 아니하며 노제 범지(盧提梵志)가 “세존이시여, 모든 비구들은 이익이 되는 법과 진실한 법 가운데서 정근(精勤)하고 수학(修學)하므로 이른바 번뇌가 다 끊어졌나이다” 하고 말함과 같다. 또 부처님의 법은 온 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바라문이 “바라문의 법은 다만 자기네만 도를 얻고 다른 사람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부처님의 법은 높고 귀중하여서 모든 하늘의 임금들이 다섯 가지 욕락을 마음대로 즐기면서도 역시 다 와서 믿으며 받든다. 이러한 인연으로 당연히 법보에 예배드려야 한다.
수다라는 바로 내려 새기는 말씀이다. 기야는 글귀로 수다라를 노래하는 것이니, 혹은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제자가 말씀하기도 한다.
028_0745_c_10L修多羅者,直說語言。祇夜者,以偈頌修多羅,或佛自說、或弟子說。
【문】무슨 이유로 글귀로써 수다라를 밝히는가.
028_0745_c_12L問曰:何故以偈頌修多羅?
【답】이치를 견고하게 하려함이니, 마치 노끈으로 꽃을 꿰면 차례로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또 말씨[言辭]를 아름답게 꾸며서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하려함이니 마치 꽃을 뿌리기도 하고, 혹은 꽃다발로 단장[莊嚴]을 함과도 같다. 또 말뜻을 게송 가운데 넣으면, 간단하면서 이해하기가 쉽다. 어떤 중생은 곧게 내려 새기는 말을 좋아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게송으로 말씀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 또 먼저 바로 말씀으로 설법하신 다음에 게송으로 읊으면 뜻이 환하게 나타나서 믿음이 단단하여지게 된다. 또 말뜻을 게송 중에 넣으면 차서가 서로 어울려 붙어서 찬양하는 말을 하기가 편이하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읊으셨다.
혹은 말하기를 “불법에서는 게송을 짓지 아니해야 한다. 노래와 비슷하다”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으레 게송을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 스스로가 게송으로 모든 이치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경전에서 “세간의 온갖 아름다운 말씨는 모두 나의 법에서 나왔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게송에는 미묘한 말씀이 들어있다.
028_0746_a_02L화가라나라 함은 모든 이치를 풀이한 경전을 화가라나라 한다. 만일 경전만 있고 대답도 없고 풀이도 없는 사무애경(四無礙經) 등과 같은 것이면 수다라라 하고, 문답(問答)이 있는 경전이면 화가라나라고 한다. 마치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어두운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어두운 데서 밝은 데로 들어가며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밝은 데서 밝은 데로 들어간다”고 설명한 것이 그것이다. 어두운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간다 함은 비천한 사람이 세 가지 악한 업을 짓고 나쁜 갈래에 떨어지는 일들과 같나니, 그러한 경전들을 화가라나라 한다.
【답】어떤 경전은 이치가 깊고 중하다. 그런 경전의 뜻은 아비담(阿毘曇) 중에서 따로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풀이를 하지 아니하셨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경전은 다 풀이가 있건만 법문을 결집하는 이가 깊은 뜻이 담긴 경전을 추려서 아비담 중에 두었으니, 마치 안으로 결박되고 바깥으로 결박된 사람은 밤새도록 그것을 풀려고 하므로 이 뜻은 당연히 번뇌[結使]의 무더기 중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가타라 함은 제2부에서 기야를 해설한 것이니, 기야는 게송이라는 말이다. 게송에는 두 종류가 있다. 1은 가타라 하고 2는 노가(路伽)라 한다. 노가에서 두 가지가 있으니 1은 번뇌를 따른 것이요, 2는 번뇌를 따르지 아니한 것이다. 번뇌를 따르지 아니한 것은 기야 중에 말씀한 것인데 그것을 가타라 한다. 이 두 가지 게송을 제외한 나머지의 게송이 아닌 경을 우타나라 한다.
니타나라 함은 그 경전의 인연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성현이 말씀하신 경전의 법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다. 이 모든 경전의 인연은 수다라 중에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 있기도 하나니 그것을 니타나라 한다. 아파타나라 함은 본말(本末)의 차서에 따라 설법하신 것이 그것이니 경전에서 “지혜 있는 이의 말씀은 순서가 있고, 이치가 있고, 해설이 있어서 산란하지 않게 한다”함과 같다. 그것을 아파타나라 한다. 이제왈다가라 함은 곧 경전의 인연과 경전의 차서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경전이 과거 세상에 있는 것이면, 이제왈다가라 한다.[진(秦)의 말에는 “이 일은 과거의 그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028_0746_b_02L사타가라 함은 현재의 일을 인연하여 과거의 일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래는 미래의 일도 말씀하셨으나, 그 일은 다 과거와 현재를 인연한 것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아니하셨다. 비불략이라 함은 부처님의 자세한 설명(廣說)을 모은 경전을 비불략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모든 큰 성인은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즐겨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세간의 잡담을 싫어하고 대중을 즐겨하는 근본을 뽑았기 때문에 자세히 설법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경전 중에서 도를 얻은 어떤 이가 2개월 동안을 경과한 다음에야 한 마디의 말을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런 일을 끊기 위하여 자세히 설법하신 경전이 있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말씀한다. 마치 여래의 두 가지 설법인 1은 자세하고 2는 간략하게 말씀한 것과 같다. 자세한 것은 간략한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아부타달마라 함은 미증유경(未曾有經)을 말한다. 겁(劫)이 끝날 무렵에 큰 변동이 일어나는 일이라든지 모든 하늘의 몸과 부피라든지 대지(大地)가 진동하는 일 등을 말함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 미증유경을 말씀하신 것이니 현재에 지어 받는 업보와 모든 법의 세력은 생각하거나 의론으로 할 수 없기[不可思議] 때문이다.
우파제사라 함은 마하가전연(摩訶迦栴延) 등 여러 거룩하고 지혜 있는 분들이 널리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 때문에 논경(論經)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경전에 논(論)이 있는 까닭에 뜻을 해득하기가 용이하다. 이 12부의 경전을 부처님의 법이라 한다. 법보는 이와 같은 공덕을 다 갖추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예배드려야 한다.
【문】그대는 먼저 승보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028_0746_b_20L問曰:汝先言應禮僧,何故應禮?
028_0746_c_02L【답】부처님은 여러 군데서 직접으로 승보를 칭찬하셨다. “이 승보는 계행이 청정하고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청정하다. 마땅히 청해 모셔야 하고, 마땅히 예배하고 합장하고 공경해야 한다. 더없는(無上) 복밭(福田)으로서 능히 보시하는 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품이 청정하다 함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행을 가지는데 티가 없다. 작은 허물에 이르기까지 깊이 두려움을 품는다.
또 부처님의 제자는 복 받는 과보로 인간이나 천상에 나기를 위해서도 아니요, 또한 지옥에 떨어지는 따위도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계행을 지키고 착한 법만을 즐겨하기 때문에 청정하다 한다. 또 깨끗한 계행을 가지기에 기한을 정하지 아니한다. 바라문이 6개월 동안만 계행을 가지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오랫동안을 받아지녀서 마지막[究竟]에 이를 때까지 지속한다. 그러므로 청정하다 한다.
또 깨끗한 계행을 지니면 두 치우침[邊]을 여의는 것이니, 다섯 가지 욕심의 즐거움[樂]과 몸의 괴로움[苦]을 여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좋아하는 계행이라 하고, 이 계율을 지혜 있는 이의 좋아하는 바라고 한다. 또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계행도 청정하고 또 깊은 마음으로 악업을 참은 것이며 다만 계율만 지킨 것이 아니요, 후세를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승보를 계행이 청정하다 한다.
선정이 청정하다 함은 만일 선정이면 참다운 지혜를 낸다. 그러므로 청정하다 한다. 지혜가 청정하다 함은 만일 지혜라면 번뇌를 끊는다. 그러므로 청정하다 한다. 해탈이 청정하다 함은 만일 모든 번뇌가 다할 수 있으면 막는 것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해탈이 청정하다는 것이다. 해탈의 지견이 청정하다 함은 모든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서 지혜를 얻는 것이니 “나는 생사가 끝났다”고 말한다. 번뇌가 끝나지 아니한 중에서는 나의 몸 받아날이일 다 끝났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해탈의 지견이 청정하다는 것이다. 마땅히 청해야 하고 예배해야 하고 공양해야 한다함은 이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청해 모시고 예배 공경하고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밭[福田]이라 함은 그 중에서 복을 심으면 과보를 받는 일이 한량이 없고,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끝이 나지 아니한다. 시주를 이롭게 하고 능히 시주의 공덕을 더 늘어나도록 함은 마치 여덟 가지 공덕의 밭에 5곡(穀)이 무성하여 실패하지 않도록 함과 같이 승보의 복전도 또한 그렇다. 여덟 가지 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시주의 심은 공덕을 더 늘어가도록 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수다원을 행하는데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믿음을 따르는 행[隨信行]이오, 둘째는 법을 따르는 행[隨法行”이오, 셋째는 형상 없음을 따르는 행[隨無相行]이다.
028_0747_a_07L行須陁洹有三種人:一隨信行、二隨法行、三隨無相行。
믿음의 행[信行]이라 함은 만일 사람이 아직 ≺공≻함과 나 없음[無我]의 지혜는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부처님의 법을 믿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므로 믿음의 행이라 한다. 경전 중에서 “나는 이 일을 믿기 때문에 행한다. 만일 참 지혜를 얻으면 믿음만을 따라 행하는 것만이 아니리니, 경전 중에서 ‘짓지 않는 이와 믿지 않는 것을 아는 이를 으뜸가는 사람[上人]이라 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참 지혜를 얻지 못한 때를 “믿음을 따르는 행”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경전 중에서 “만일에 사람이 법을 조그마한 지혜로 관찰하면서 알고 즐기면[忍樂] 그것을 믿음의 행이라 하며 범부의 위치를 벗어났다 할지라도 아직 수다원의 과를 얻지 못하면 그 중간에는 죽게 되지 않나니, 그 동안을 믿음의 행이라 한다” 함과 같다.
만일 믿음 등의 다섯 가지 뿌리[五根]가 없으면 그 사람은 외범부(外凡夫) 중에 머무르나 이 사람이 차차로 익혀서 난법(煖法) 등의 닦는 지혜[修慧]를 얻으면 본래 쓰던 이름 그대로 역시 믿음의 행이라 하나니, 끝내 법의 행[法行]의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은 “반드시 수다원의 과위를 얻는다”고 말해야 되고, “죽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행을 하는 이는 아직도 앞이 멀기 때문이다.
028_0747_b_02L마치 욱가 장자(郁伽長者)가 대중스님에게 공양을 올릴 적에 천신(天神)이 나타나서 “이 분은 아라한이다. 이 분은 아라한을 향하는 이다. 내지, 이 분은 수다원이요 이 분은 수다원을 향하는 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아직 열다섯 가지 마음[十五心] 중에 있으면 나투어 보일 수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수다원을 행하는 이는 가까움도 있고, 멈도 있다. 이것을 믿음의 행이라 한다.
법의 행[法行]이라 함은 이 사람은 ≺공≻하고 나 없음의 지혜를 얻고서 난위(煖位)와 꼭대기 정위(頂位)와 인위(忍位)와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법 중에 있으면서 법에 순종하는 행을 닦나니, 곧 공과 나 없음 등이다. 이것을 “법의 행”이라 한다.
028_0747_b_06L法行者,是人得空無我智,在煖頂忍第一法中隨順法行。謂空無我等是名法行。
이 두 가지 행의 사람이 진리를 보는 도[見諦道]에 들어서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보기 때문에 형상 없음의 행[無相行]이라 한다. 이 세 가지 사람을 수다원을 행하는 사람이라 한다. 세속의 도[世俗道] 중에는 번뇌 끊는 일이 없기 때문에 행(行)한다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세 가지 과(果)에 대한 일은 다음에 말하겠다.
【답】이 일은 다음에 널리 설명하려니와 몸에 대한 고집이 다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도 역시 다한다.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함은 다음의 업취(業聚) 가운데서 또한 널리 설명하겠다.
028_0747_b_17L答曰:此事後當廣說,謂身見盡故餘等亦盡。不墮惡道者,後業聚中亦當廣說。
반드시 보리(菩提)에 이른다 함은 이 사람이 법류(法流) 중에 들면서 반드시 열반에 이르는 것은 마치 항하(恒河)에 떠있는 나무토막이 여덟 가지 인연을 여의면 반드시 대해(大海)에 이르는 것과 같다. 일곱 차례의 생사로 끝낸다[極七有] 함은 이 사람이 일곱 차례를 세상에 태어나는 동안에 샘 없는 지혜가 성숙하게 됨은 마치 가라라(歌羅羅) 등이 7일 동안에 변화하여 이룩되는 것과 같다. 또 타락(酥) 등을 마시면 짧아도 7일이면 모진 병도 낫게 됨과 같다.
028_0747_c_02L또 친족(親族)이란 한계는 7대[世]까지에 그친 것과 같고, 또 칠보사(七步蛇)가 사람의 몸을 물었을 때는 사람은 네 가지 요소[四大]의 힘으로 일곱 걸음까지는 걸을 수 있으나 뱀의 독기 때문에 여덟 걸음은 걷지 못하는 것과 같다. 속임수법(欺誑)은 7대에까지 내려간다 함과 같고, 또 일곱 개의 해가 돋을 때에는 겁(劫)도 다 타버린다 함과 같다. 그와 같이 일곱 차례의 몸바꿈에서 샘 없는 지혜를 익히어 번뇌를 다 태워버리게 된다. 또 법은 일곱 차례의 생사가 있게 되나 어떤 수다원은 금생에 열반에 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2생(生)ㆍ3생에 들기도 하며 마지막이 7생까지이다. 그것을 수다원이라 한다.
사다함을 행한다 함은 사유(思惟=修道)에서 끊을 바 번뇌가 9계단이 있는데, 만일 1계단에서부터 2계단의 번뇌를 끊고, 3계단, 4계단, 5계단까지 이르면 그것을 사다함을 행한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의 “걸림없는 도[無礙道]로써 끊는다”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부처님은 경전 중에서 “한량없는 마음으로써 끊느니라” 하셨으니 부가유경(斧柯喩經) 중에서 말씀함과 같다. 또 사다함을 행하는 이는 또한 가가(家家)라고도 한다. 이 사람은 두 차례나 혹은 세 차례를 왕래하기도 하고, 혹은 현생의 몸으로 열반에 들기도 한다. 그것을 사다함을 행하는 이라 한다.
사다함이라 함은 한 차례만 인간에 와서 바로 열반에 들어간다. 이 사람은 사유에서 끊을 바 번뇌가 얇아지고 이 얇은 가운데 머물면 사다함(果)이라 한다. 이 사다함은 만엘 제7 계단과 제8 계단의 번뇌를 끊으면, 그 사람을 다 아나함을 행하는 사람이라 한다. 제8계단을 끊은 이를 일종(一種)이라 한다. 아나함을 행하는 이로서 금생에 바로 열반에 들기도 하나니, 욕심 세계의 아홉 가지 번뇌를 다 여의기 때문에 아나함이라 한다.
이 아나함은 여덟 가지 차별이 있으니, 이른바 중음(中陰)에서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생유(生有)에서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불행(不行)에서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행(行)에서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위로 아가니다(阿迦尼吒)에 이르러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무형 세계[無色處]에 이르러서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세상을 바꾸어서[轉世] 열반하는 이도 있으며, 현재의 몸[現身]으로 열반하는 이도 있다. 상과 중과 하의 근기를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현생(現生)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는데, 나면서 바로 열반하는 이와 수행을 하다가 열반하는 이와 수행을 하지 않고 열반하는 이가 있다. 나면서 바로 열반한다 함은 날 때에 깊이 존재[有]하기를 싫어하여 바로 열반에 든다. 그것을 나면서 열반한다는 것이니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모든 샘 없는 도가 자연히 나타나서 애써 수행을 하지 않고 열반에 든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고 열반한다는 것이니, 근기가 중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깊이 몸 받기를 두려워하여 부지런히 도를 수행하다가 열반에 든다. 그것을 수행하다가 열반한다고 하는 것이니, 근기가 우둔하기 때문이다.
초선천(初禪天)에서부터 광과천(廣果天)에 이르면 이것을 결정(決定)이라 한다. 광과천에서 마친 다음 만일 정거천(淨居天)에 나면 이 사람은 다시 무형 세계에는 가지 않나니, 지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형 세계에 들면 이 사람은 마침내 정거천에는 나지 않나니, 선정을 즐겨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다 함은 만일 전생에 수다원과와 사다함과를 얻었다가 뒤로 몸을 바꾸어서 아나함의 과를 얻으면, 그 사람은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에 들지 않는다. 현생에 열반하는 이는 제1의 영리한 근기로서 바로 현재의 몸으로 열반에 들게 된다.
다시 두 가지 사람이 있다. 하나는 믿음의 해탈이라 하고, 둘째는 보아 얻음[見得]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은 근기의 차별 때문이다. 만일 우둔한 근기의 학인(學人)이 사유의 도에 있으면 믿음의 해탈이라 하고 영리하면 보아 얻음이라 한다. 만일 아나함이 여덟 가지 해탈을 갖추면 그것을 몸의 깨침[身證]이라 하나니, 이들을 다 아라한을 행하는 이라 한다. 번뇌 끊는 일이 똑같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번뇌를 다 끊어 없애면 아라한(阿羅漢)이라 부른다.
028_0748_b_02L아라한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잃어버리는 모습[退相]과 지키는 모습(守相)과 죽는 모습(死相)과 나아가는 모습(可進相)과 멈추는 모습(住相)과 무너뜨리지 못하는 모습(不壞相)과 지혜로 해탈하는 모습(慧解脫)과 함께 해탈하는 모습(俱解脫)과 잃어버리지 않는 모습(不退相)이다. 이 모든 아라한은 믿음의 뿌리들을 얻는 데로부터 차별이 있다.
가장 둔근의 사람을 잃어버리는 모습이라 하고 삼매를 잃으며 삼매를 잃기 때문에 샘 없는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 지키는 모습이라 함은 근기가 조금 낫기 때문에 만일 삼매를 지키면 잃지 않거니와 지키지 아니하면 잃나니, 앞의 잃어버리는 모습은 아무리 수호해도 잃어버린다. 죽는 모습이라 함은 근기가 또 조금 나아서 모든 세상을 몹시 싫어하며 이 사람은 삼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샘 없는 지혜가 앞에 나타나기 어렵다. 설사 얻더라도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죽음을 찾는 것이다.
멈추는 모습이라 함은 혹시 삼매를 얻더라도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아니함을 멈추는 모습이라 한다. 앞의 세 종류는 잃어지는 삼매 중에 속하되 멈추는 모습은 멈추는 부분의 삼매에 속한다. 나아가는 모습이라 함은 만일 삼매를 얻으면 차차 깊어져서 원만해지는 것이니 이 사람은 증가하는 부분의 삼매에 속한다. 무너뜨리지 못하는 모습이라 함은 삼매를 얻은 다음에는 어떠한 인연으로도 능히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 사람은 통달하는 부분의 삼매에 멈추나니 지혜가 가장 영리하기 때문에 삼매에서 들고 멈추고 일어나는 모양을 잘 붙잡는다. 그러므로 무너뜨릴 수 없으니, 생각을 끊는 선정[滅盡定]을 의지한 때문이다.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이 선정을 얻지 못한 이를 혜해탈(慧解脫)이라 하고, 이 선정을 얻은 이를 구해탈(俱解脫)이라 한다. 잃어지지 않는 모습이라 함은 얻어진 공덕을 모두 잃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부처님은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나의 제자가 나를 평상으로써 듣더라도 내가 먼저 얻은 것은 모두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하심과 같다.
【답】탐심과 진심 등의 모든 번뇌를 다 끊었기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마치 가라지[稊]와 피[稗]를 없애버리지 아니하면 좋은 곡식의 움을 해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욕심없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크게 이로운 과보를 얻는다. 또 이 사람은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왜냐하면 상(相)에 비었기 때문에 모든 탐욕과 진심 따위의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다.
또 여덟 가지 공덕의 밭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또 일곱 가지 선정의 밑받침[定具]으로 잘 마음을 껴잡았기 때문이며, 또 일곱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없으며, 또 계행 등의 일곱 가지 깨끗한 법을 구비하였기 때문이며, 또 욕심을 줄이고 넉넉한 줄을 아는 등의 여덟 가지 공덕 때문이며, 또 열반의 저 언덕을 건너고 또 건너기를 애써 구하기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다만 발심(發心)하여 착한 법을 행하려고만 해도 오히려 이익이 많거든 더군다나 수행하는 일이겠느냐”라고 하셨다. 이 모든 성현은 항상 착한 법을 행하기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어느 시주의 집에서 어느 계행을 지닌 비구가 공양을 받은 다음에 한량없는 선정[無量定]에 들면 그 시주의 집은 한량없는 복을 얻으며 대중 가운데서 한량없는 삼매[無量三昧]와 형상 없는 삼매[無相三昧]와 흔들리지 않는 삼매[無動三昧]에 들면 그 시주로 하여금 한량없는 과보를 얻게 한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또 대중의 처소에 시주하면 아홉 가지 인연을 갖추기 때문에 큰 과보를 얻는다. 또 대중에 보시하면 받는 이가 깨끗하기 때문에 보시하는 것도 반드시 깨끗하다.
028_0749_a_04L又施衆僧具九因緣故獲大果。又施衆僧,以受者淨故施必淸淨。
또 보시하는 데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청정한 마음이 적고 보시하는 물품도 적으면서 파계(破戒)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이가 있고, 청정한 마음은 적으면서 보시하는 물품은 많은 것을 파계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이가 있고 청정한 마음도 적고 보시하는 물품도 적으면서 지계(持戒)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이가 있고, 청정한 마음은 적으나 보시하는 물품은 많은 것을 지계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이가 있고, 청정한 마음이 많으면서 네 가지의 물품을 보시하는 것도 역시 그렇게 대중 가운데 보시하면 반드시 두 가지거나 세 가지는 성취하리라. 모든 착한 사람은 다 대중 스님을 의지하여 공덕을 많이 쌓은 연후에 뜻에 따라 보리(菩提)에 회향(回向)한다.
또 보시를 받은 스님네와 보시한 물품도 모두가 해탈의 과보를 얻게 되어 나고 죽는 속에서 끝내 다할 수가 없으리라. 또 보시를 받은 스님네는 다 마음을 엄숙히 하며, 또 만일 한 사람에게만 신심을 내는 깨끗한 마음은 때로는 혹 무너질 수 있으나 대중 스님네에게 가지는 깨끗한 신심은 끝까지 무너지지 아니한다. 또 한 사람에게만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면 혹 넓지 못할 수 있으나, 대중 스님네를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면 인연이 한량없기 때문에 마음이 넓고 커진다. 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시하되 스님네에게도 보시하면, 그 마음이 크기 때문에 과보도 크다. 이러한 인연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성현님네를 복전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028_0749_b_02L다시 모든 경문에서 길상(吉祥)으로써 처음 배우는 이를 위하면 수명이 만세나 더하고 명예가 널리 퍼지리니 그것은 경문을 지은 사람이 바라는 마음이다. 아아(阿啊) 등의 글자를 경서의 첫머리에 놓는 것 같은 일은 그것이 상서로운 모양이 아니다.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리라. 만일 제일 으뜸가는 상서로운 이를 구하려면 삼보가 그의 대상이므로 당연히 귀의(歸依)해야 한다. 길상게(吉祥偈)에서 말함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