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1028_b_01L해탈도론 제4권
028_1028_b_01L解脫道論卷第四


아라한 우파저사양나라 말로 대광 지음
양 부남삼장 승가바라 한역
이태승 번역
028_1028_b_02L 阿羅漢優波底沙梁言大光造
梁扶南三藏僧伽婆羅譯


8. 행문품(行門品)
028_1028_b_04L行門品第八之一

【문】무엇이 지일체입(地一切入)이며, 무엇을 닦음[修]으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味]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功德)인가? 일체입이란 무슨 뜻인가? 또 몇 종의 지(地)가 있으며, 어떤 흙에서 상을 취하는가? 무엇이 만다라를 만드는 법인가? 무엇이 수지법(修地法)인가?
028_1028_b_05L云何地一切入何脩何相何味處何功德一切入者何義幾種地地取相云何作曼陁羅法何脩地法
【답】지(地)를 의지해 이 마음에 상(相)이 생기는 것을 지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이 산란됨이 없이 머무는 것을 수(修)라 한다. 지상(地想)에 잘 낙착(樂著)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고, 버리지 않는 것을 맛[味]이라 하고, 의식[意]에 다른 생각[異念]이 없는 것을 처(處)라 한다.
028_1028_b_08L 是心依地相生此謂地一切入心不亂住是爲脩善樂著地想爲相捨爲味意無異念爲處
무엇이 공덕인가. 열두 가지 공덕이 있어 지일체입으로부터 그 상(相)이 쉽게 얻어진다. 일체시ㆍ일체행에서 마음의 움직임[行]에 장애가 없고, 뜻대로 하는 신통으로 땅위를 걷듯 물위를 걷고 허공을 노닐며, 갖가지 색변ㆍ초념숙명변 및 천이계변(天耳界辯)을 얻어 따라서 훌륭한 세계로 가고 감로를 변(邊)으로 한다.
028_1028_b_11L何功德者有十二功德從地一切入是相易得於一切時於一切行心行無碍如意神通履水遊空如地受種種色辯念宿命辯及天耳界辯隨行善趣甘露爲邊
【문】일체입이란 무슨 뜻인가?
一切入何義
【답】두루 보편한 것[周普]을 일체입이라 한다. 부처님이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
028_1028_b_16L謂周普一切入如佛說偈言

만약 사람이 부처님의 덕을 생각하면
기쁨이 생겨 온 몸에 충만하고
지일체입을 관하면
염부제를 가득 채우나니
이 관은 흙을 인연해 생기며
마음의 기쁨 또한 그와 같다.
028_1028_b_17L若人念佛德
生喜充遍身
觀地一切入
周滿閻浮提
此觀緣地生
心喜亦如是

이와 같은 관을 닦으면 만다라가 일체입에 변재하는 것을 보게 된다.
028_1028_b_19L脩如是觀見曼陁羅遍一切入
【문】지에는 몇 종류가 있는가? 어떤 지에서 상을 취해야 수행할 수 있는가?
028_1028_b_20L幾種何地取相可脩
【답】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상지(自相地)요, 둘째는 조작지(造作地)이다.
028_1028_b_21L地有二種自相地二造作地
028_1028_c_02L딱딱함[堅]이 자상지계(自相地界)가 되니, 이것을 자상지라 한다. 만약 손으로 직접 파거나 남을 시켜 파게 해서 만든 것이라면 이것을 작지(作地)라 한다.
028_1028_b_22L堅爲自相地界是謂自相地若手自掘若敎人掘造作所成是謂作地
(지는) 네 가지 색을 이루니, 소위 백색ㆍ흑색ㆍ적색 및 여명색(如明色)1)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자상지를 의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백색ㆍ흑색ㆍ적색은 제외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만약 자상지를 관하면 이것으로부터는 피분상(彼分相)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백색ㆍ흑색ㆍ적색을 취하면 색일체입을 닦는 것이 된다. 무엇 때문인가. 자상지를 관찰하더라도 백색ㆍ흑색ㆍ적색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수행대상을 손으로) 만들었건 만들지 않았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하며, 새벽빛과 같은 상[如明相]이 나타나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한다.
028_1028_c_03L成四種色謂白赤及如明色於是坐禪人於自相地不應作應除白何以故若觀自相地從此不起彼分相若取白赤色脩色一切入何以故觀自相地離白黑赤若作不作當取其相如明相現當取其相
【문】무엇을 만들지 않은 지[不作地]라 하는가?
云何名不作地
【답】곳곳이 평탄하고, 풀이나 돌이 없고, 각종 그루터기도 없는 것이다. 그런 눈의 경계에서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을 지상(地想)이라 하고, 이것을 만들지 않은 지라 한다.
028_1028_c_09L處處平坦離於草莽無諸株杌於其眼境當令起心是名地想是謂不作地
만약 오랫동안 좌선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건 좋아하지 않는 것이건 곧 거기에 있는 지(地)의 상(相)을 보고, 불퇴에 머무른다. 처음 배우는 초선의 사람은 지의 상을 만들어 취하고 만다라를 만들며, 만들지 않은 지는 관하지 않는다.
028_1028_c_11L舊坐禪隨樂不樂卽見彼分地相於不退新學初禪取作地相作曼陁不觀非作地
【문】어떻게 만다라를 만드는가?
云何作曼陁羅
【답】만약 좌선인이 땅에 만다라를 만들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적적한지 살펴야 한다. 절의 방사나 석실에서 지내거나 혹은 나무아래에 머물러야지 햇빛이 들지 않아 캄캄한 곳이나 비인(非人)이 다니는 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곳에서 사방으로 1심(尋)만큼 물을 뿌려 청결히 하고, 그 땅을 말려 쓸어야 한다. 그곳에서 새벽빛과 같은 상이 나타날 때 흙의 색깔을 지성(地性)과 서로 발기시키고, 적당한 양을 잘 헤아려 위의를 공경히 하고는 기물(器物)을 가져다 흙을 물에 개어 풀이나 나무토막을 집어내고, 분뇨나 씨앗을 제거하고, 천을 이용해 앙금을 거른다. 그리고는 정결한 땅에 앉을 자리를 깔고, 빛을 차단하고, 선좌(禪座)를 놓는다.
028_1028_c_14L若坐禪人欲於地作曼陁羅初從當觀寂寂或於寺舍或在石室或在樹不住幽闇無日光處非人行路如是處皆遠一尋洒掃淸潔當令地掃於處所如明相現時土色使與地性得相發起籌量調適威儀恭敬取於器物以水和土刪去草杌卻除糞取其衣帊濟漉泥滓於淨潔地障蔽坐處遮斷光明安置禪窟
028_1029_a_02L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자[規]로 원을 만들고, 원 안에는 평평하게 하여 어떠한 흔적도 없게 한다. 그런 뒤에 진흙을 땅에 발라 나머지 색과 섞이지 않게 하고, 다른 색과 섞이지 않게 하여 땅을 편안케 한다. 아직 마르지 않았으면 잘 덮어 보호하고, 만약 말랐으면 다른 색으로 그 밖을 두른다. 혹은 미사(米篩) 크기로, 혹은 소뢰(搔牢) 크기로, 혹은 원(圓)ㆍ방(方)ㆍ삼각ㆍ사각으로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028_1028_c_23L不近不遠以規作圓圓內平滿無有痕迹後以泥泥地不雜餘色以別色不雜於地應安乃至未燥當覆守護若至燥時以異色界其外或如米篩大如搔牢大或圓或方或三角四角當分別
우리 스승의 말씀에 따르면 가장 뛰어난 것은 원이고, 만다라2)를 만듦에 있어서도 천[衣]이나, 판(板)이나 벽(壁)에 모두 만다라를 만들지만 땅[地]에 만든 것이 가장 뛰어나다. 이와 같은 것이 선사(先師)가 설한 바이다.
028_1029_a_06L本師所說最勝圓作曼陁羅若於衣若於板若於壁處皆作曼陁於地最勝如是先師所說
【문】무엇이 수지법(修地法)인가?
028_1029_a_08L云何修地法
【답】만약 좌선인이 지일체입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고, 또 출리(出離)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028_1029_a_09L若坐禪人欲脩地一切入從初當觀欲過患復應觀出離功德
【문】왜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는가?
028_1029_a_10L何故應觀欲過患
【답】욕이란 기미(氣味)가 적은 까닭에 우고(憂苦)가 많으니, 이곳에는 과환이 많다. 욕이란 뼈다귀의 비유와 같나니 기미가 적기 때문이고, 욕이란 고깃덩어리의 비유와 같나니 많은 것이 들러붙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을 거슬러 횃불을 잡는 비유와 같나니 따라서 태우기 때문이고, 욕이란 염(炎)과 탄(炭)의 비유와 같나니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욕이란 꿈의 비유와 같나니 갑작스레 없어지기 때문이고, 욕이란 빌린 물건의 비유와 같나니 그 힘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028_1029_a_11L欲者少氣味故多憂苦於是處多過患欲者如骨喩少氣味欲者如肉揣喩以多屬故欲者如逆風把火喩隨燒故欲者如炎炭喩大小故欲者如夢喩倏忽無欲者如借物喩勢不得久故
욕이란 나무 과일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에 의해 꺾기기 때문이고, 욕이란 칼의 비유와 같나니 자르기 때문이다. 욕이란 창의 비유와 같나니 찌르기 때문이고, 욕이란 독사 머리의 비유와 같나니 가히 두렵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에 날리는 솜털의 비유와 같나니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욕이란 환상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어둠이니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욕이란 장애이니 모든 선법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욕이란 어리석음이니 올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028_1029_a_16L欲者如樹果喩爲人所折故欲者如刀喩斬斫故欲者如槊喩以爲槊故欲者如毒蛇頭喩可怖畏故欲者如風吹緜喩不可守護故欲者如幻喩惑癡人故欲者是暗無所見故欲者是障碍路礙諸善法故欲者是癡失正念故
028_1029_b_02L 욕이란 열과 같나니 문드러지기 때문이며, 욕이란 형틀이니 묶어놓기 때문이며, 욕이란 도둑이니 공덕의 물건을 훔치기 때문이고, 욕이란 원한이 있는 집이니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괴로움이니 모든 과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욕의 과환을 관한 뒤에 마땅히 출리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처음 선을 닦고 처음 출가하고부터 모든 선(善)을 닦는 것을 출리라 한다.
028_1029_a_22L欲者如熟以爛故欲者是械相駐縛欲者是盜功德物故欲者是怨家起鬪爭故欲者是苦造諸過患故是已觀欲過患應觀出離功德名出離者謂初禪從初出家脩諸善是名出離
【문】무엇이 출리의 공덕인가?
云何出離功德
【답】번뇌에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 적적한 즐거움에 자재하게 머물고, 고를 견뎌내고 즐거움에 머물면서 잃지 않으며, 여러 가지 일을 널리 구제하여 대과지(大果地)를 얻고, 공양을 받아 2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지혜이고, 이것은 일체선처(一切善處)이니, 이를 삼계를 초월한 것이라 한다.
028_1029_b_05L無蓋心自在住寂寂樂堪忍苦樂住不忘失濟衆事得大果地堪受供養二處饒是大智慧是一切善處名超三界
또 출리라 하는 것은 그 음욕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蓋)가 적적한 것이며, 이것은 허물이 없는 즐거움이며, 이 처(處)는 최승의 지(地)이며, 이 도(道)로 최승을 얻게 된다. 이것은 마음의 때를 청정케 하며, 이 공덕은 수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즐거움은 안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028_1029_b_08L復次名出離者彼出離婬欲是寂寂諸蓋是樂無垢是處最勝地是道爲得最勝是淸淨心垢此是功德脩行所造是樂內所脩行
욕은 거칠고, 출리는 수승하고 오묘하다. 욕은 번뇌가 있고, 출리는 번뇌가 없다. 욕은 하(下)이고, 출리는 상(上)이다. 욕은 진에가 있고, 출리는 진에가 없다. 욕은 과보가 좋지 않지만 출리는 그 과보가 좋다. 욕은 두려움이 있지만 출리는 두려움이 없다.
028_1029_b_12L欲是麤出是勝欲者有煩惱出離者是無煩惱者是下出離者是上欲者有嗔恚離者無嗔恚欲者非可愛果出離者是可愛果欲者有怖畏出離者無怖
이와 같이 음욕의 과환을 관하고 출리의 공덕을 관한 뒤, 출리에 의지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일으키고, 공경을 일으킨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관하고, 절량식에 의지하고, 의발을 안치하고, 몸에는 게으름이 없고 마음에는 태만이 없게 하여 잠시 행각한다. 잠시 행각한 뒤에는 앉아서 손과 발을 씻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염하고, 법을 염하고, 승을 염한다. 선행을 닦아 염한 뒤에는 환의하도록 이렇게 말해야 한다.
028_1029_b_17L如是已觀婬欲過患及觀出離功依出離生欲樂心生信生恭敬可作非可作依節量食安置衣鉢不懈惓心無怠惰當小行腳小行腳已坐洗手足應念佛菩提念法念僧善行念已當令歡喜
“나는 능히 이와 같이 구족을 얻었다. 만약 내가 출리를 얻지 못하면 또 오랫동안 편히 정진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해야 한다.”
028_1029_b_22L我能如此得具若我不得出離復不久安精進故應作勇猛
028_1029_c_02L만다라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멍에[軛]나 심(尋)의 길이만큼 떨어져 좌구를 안치해야 하고, 만다라를 마주해 결가부좌를 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안에서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는 잠시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며, 모든 마음을 거두어 일심을 이룬다. 그리고 약간 어렴풋하게 눈을 떠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028_1029_b_24L去曼陁羅不遠不近軛如尋遠應安坐具對曼陁羅結跏趺坐令身平正內心起念閉眼少時除身心亂攝一切心成一心小開眼髣髴令觀曼陁羅
그 좌선인은 현재 만다라형(曼陀羅形)을 관하는데 3행 즉 등관(等觀)으로써, 방편으로써, 이난(離亂)으로써 상을 취해야 한다.
028_1029_c_05L彼坐禪人現觀曼陁羅形以三行取相以等觀以方便以離亂
【문】무엇이 등관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云何以等觀
【답】좌선인은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할 때, 크게 뜬 눈도 아니고 꼭 감은 눈도 아닌 상태로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눈을 크게 뜨면 그 눈이 피로를 느껴 만다라의 자성ㆍ현견의 자성ㆍ피분상(彼分想)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눈을 꼭 감고 만다라를 보면 암혹을 이루고 그 상도 보지 못하게 되어 곧 게으름이 생긴다.
028_1029_c_07L坐禪人現觀曼陁羅非大開眼非大閉眼如是當觀何以故若大開眼其眼成惓陁羅自性現見自性彼分想不起最閉眼見曼陁羅成闇亦不見彼相便生懈怠
이런 까닭에 크게 뜨거나 꼭 감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기울여 만다라에 머물러야 한다. 마음이 머무는 까닭에 마땅히 사람이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얼굴을 보듯 해야 한다. 거울을 의지해 얼굴을 보면 얼굴 모습이 거울로부터 생기듯, 그 좌선인이 만다라를 관해 그 정상(定相)을 보면 (정상이) 만다라를 의지해 생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등관으로써 관해 상을 취해야 하니, 마음을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등관으로써 상을 취하는 것이다.
028_1029_c_12L是故應離大開眼大閉眼唯專心住曼陁羅爲心住故當觀如人映鏡見其面像依鏡見面面從鏡彼坐禪人觀曼陁羅見其定相依曼陁羅起是故當觀等觀取相爲心住故如是以等觀取相
【문】무엇이 방편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028_1029_c_17L云何以方便
【답】소위 네 가지 작의방편(作意方便)이 있다.
謂四作意方便
첫째는 내격(內隔), 둘째는 만방(滿方), 셋째는 전(轉), 넷째는 편만(遍滿)이다.
028_1029_c_18L一謂內隔二滿三轉四遍滿
이때 보이던 상이 밖으로 흩어져 간격이 없으면, 이럴 때는 간격 안으로 들어오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상이 작게 보이거나 만다라의 반만 보이면, 이럴 때는 만다라가 온전하도록 한 다음에 사방에 가득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마음이 산란하거나 마음이 게을러지면, 이럴 때는 도공의 물레처럼 일과를 정해 채찍질해야 한다. 이때 마음이 머묾을 얻으면, 이럴 때는 보이는 만다라가 두루 가득해 이지러짐이 없게 하고 마땅히 사(捨)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방편으로써 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028_1029_c_19L是時見相出散無隔是時當作內隔作意是時見小相見半曼陁羅是時作令滿曼陁羅已方滿令作意是時心散亂及心懈懶是時應當策課如陶家輪是時若心得是時令見曼陁羅遍滿無虧當觀如是以方便可知
【문】무엇이 이난(離亂)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云何以離亂
028_1030_a_02L【답】이난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요, 둘째는 너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이요, 셋째는 최고요, 넷째는 최하이다.
028_1030_a_02L離亂有四種一最速作精進二最遲作精進三最高四最下
【문】무엇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인가?
028_1030_a_04L云何速作精進
【답】급하게 마음을 쓰고, 시절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앉아 저녁에 그만두는 등, 몸을 피로하게 하는 것을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30_a_05L謂急疾作意不待時節早坐晩罷乃至身疲是謂速作
【문】무엇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인가?
028_1030_a_06L云何遲作精進
【답】작의방편을 벗어나 만다라를 보고는 있지만 공경하는 마음을 쓰지 않고, 자주 일어나고, 자주 조는 것이다. 만약 급하게 정진하면 곧 몸이 나태해지고 마음이 퇴보하며, 마음이 외연을 만나면 각종 유희를 일으킨다. 만약 더디게 정진하면 몸과 마음이 나태하고 게을러져 각종 수면을 일으킨다.
028_1030_a_07L謂離作意方便雖見曼陁不恭敬作意數起數眠若速作精則成身懶心退心出外緣起諸調若遲作精進身心成懶懈怠起諸睡眠
최고란 그 마음이 퇴보하고 갖가지 산란심을 일으켜 행처에 대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의 웃고 장난치는 언어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이로 인해 욕심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만약 모든 상이 변화하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해 욕심이 높아지게 된다.
028_1030_a_11L最高者其心退起諸調亂於所行處成不樂若不樂於初戲笑言語由欲心成高復次若得諸相行由喜樂欲心成高
최하란 물러남과 유희를 인연한 까닭에 업처에 대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의 행처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자기가 한 것에 대해 성을 내게 되고, 그 성냄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또한 오랫동안 각관에 싫증을 내어 승(勝)으로부터 그 마음이 퇴락하면 근심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028_1030_a_14L最下者退調緣故於業處成不樂若不樂於初行處所作嗔處由嗔恚心成下復次久惓覺觀從勝退落其心由憂受心成下
이 좌선인은 만약 마음이 급히 서둘러 유희하는 곳에 퇴락한 경우에는 염근(念根)과 정근(定根)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유희를 버리게 하고, 만약 마음이 지어나가다 게으른 곳에 빠진 경우에는 염근과 정진근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그 게으름을 버리게 하며, 만약 교만한 사람이 탐욕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現知)를 이루어 욕심을 버리게 하고, 낙심한 사람이 성냄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를 이루어 성냄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이 4처에서 청정심을 이루고, 전일(專一)한 마음을 이룬다. 이것은 3행으로 인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면 뜻에 따라 만다라형을 보게 된다는 것을 밝혔다. 만약 전일한 마음이면 상(想)이 일어나게 된다.
028_1030_a_17L是坐禪人若心速作退墮調處以念根定根攝伏令捨調若心進作退墮懶處以念精進根攝伏令捨懈懶若高心者退墮欲處成現知令捨欲若下心者退墮於嗔恚成現知令捨嗔恚於此四處成淸淨心成專一心此明因三行定心成隨意得見曼陁羅形若專一心想成
상(相)이라 하는 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소위 취상(取相)과 피분상(被分相)이다.
028_1030_b_02L起名相者有二種謂取相彼分
028_1030_b_02L무엇을 취상이라 하는가. 만약 좌선인이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한다면 만다라로부터 상(想)이 생긴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때는 멀게, 어떤 때는 가깝게, 어떤 때는 왼쪽에, 어떤 때는 오른쪽에, 어떤 때는 크게, 어떤 때는 작게, 어떤 때는 추하게, 어떤 때는 멋있게, 어떤 때는 많게, 어떤 때는 적게 보인다. 눈으로 만다라를 관하지 않고 작의방편으로 취하면 상이 일어나니, 이것을 취상이라 한다.
028_1030_b_03L云何名取相若坐禪人以不散心現觀曼陁羅從曼陁羅起想如於虛空所見或時遠或時近或時左或時或時大或時小或時醜或時好時多或時少不以眼觀曼陁羅以作意方便取相起是名取相
그로부터 여러 차례 자의하기 때문에 피분상이 일어난다. 피분상이라 하는 것은 작의할 때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나는 것이지, 만다라를 보고난 후에 생긴 마음 속 생각이 아니다. 그저 마음을 쓰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앞에서 관한 바와 같이 나타나고, 만약 멀다고 작의하면 곧 멀리 보이고, 만약 가깝다거나 왼쪽ㆍ오른쪽ㆍ전ㆍ후ㆍ내ㆍ외ㆍ상ㆍ하라고 작의해도 또한 마찬가지로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난다. 이것을 피분상이라 한다.
028_1030_b_08L從彼作多彼分相起名彼分相者若作意時隨心卽現非見曼陁羅後生心念作心閉眼如先所觀若遠作意亦卽遠見若近左右前後內外上下亦復如是隨心卽現此謂彼分相
상(相)이란 무슨 뜻인가. 인(因)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그 모든 악과 불선법에는 상의 일어남이 있다”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것이 인연의 뜻이다. 또 말하자면 지(智)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상(想)을 지어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지의 뜻이라 한다. 또 상(像)의 뜻이 상의 뜻이니, 스스로 그 얼굴의 영상을 보고 형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피분(彼分)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028_1030_b_13L相者何義謂因義相義如佛敎比丘彼諸惡不善法有相起是因緣義復說智義如佛說以作想當捨是謂智義說像義相義如自見面像想像彼分無異義
그때 상을 얻은 좌선인은 그 스승의 처소에서 공경심을 일으켜 승상(勝相)을 취해 마땅히 수호하여야 한다. 만약 수호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린다.
028_1030_b_18L爾時得相坐禪人於其師所起恭敬心取於勝相應當守護若不守護是則當失
【문】무엇이 마땅히 지키는 것인가?
云何應守護
【답】세 종류의 행으로 마땅히 상을 지켜야 하나니, 이와 같이 악을 떠남으로써, 선(善)을 수행함으로써, 항상 닦음으로써 수호해야 한다.
028_1030_b_20L三種行應守護相如是以離惡故脩行善故以常作故
028_1030_c_02L무엇이 불선(不善)을 떠나는 것인가. 작무(作務)를 즐기고, 갖가지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잠을 즐기고, 모임을 즐기고, 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를 절제하지 않고, 초야와 후야에 일어나 선을 닦지 않고, 배운 것을 공경하지 않고, 악한 친구가 많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닦는 것은 마땅히 떠나야 한다. 좋지 않은 시절에 먹고, 자고, 누워서는 안 되나니, 그것들을 대치하는 그런 선을 항상 닦아야 한다.
028_1030_b_22L云何離不善於作務樂種種語戲樂睡眠樂聚會樂狎俗不守護諸根不節於食初夜後夜不起禪習不敬所學多惡親友脩不行處應離不好時節食臥坐彼對治是善應常作
【문】무엇이 항상 닦는 것인가?
云何以常作
【답】그 좌선인은 이런 상을 잘 취해 보배를 생각하듯이 항상 그 공덕을 관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행하고, 항상 닦고, 많이 닦고, 낮이건 밤이건 많이 수행하고, 기대건 눕건 마음으로 기꺼이 반연하고, 처처에 마음을 놓아 상을 취하고, 이미 취했으면 취하고 나서는 일으키며, 일으키고 나서는 그에 따라 관하고, 관하고 나서는 닦고, 닦음에 있어 때때로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항상 닦음으로써 상을 보면, 그는 이와 같이 현재에서 상을 수호하고 혹 자재함을 얻기도 한다. 만약 상이 마음을 따르면 선(禪)의 외행(外行)을 얻고, 만약 외행이 마음을 따르면 그로부터 안(安)을 얻는다.
028_1030_c_04L彼坐禪人善取此相常觀其功德如珍寶想常歡喜行常脩多修或晝夜多脩行或倚坐臥心樂攀緣處處放心取相已取取已令起起已觀隨觀已脩脩有時時觀曼陁羅如是以常作見相彼如是現守護相或得自在若相隨心得禪外行若外行從心是得安
【문】무엇이 선의 외행인가?
云何禪外行
【답】이 일[事]은 마음으로부터 작의하며, 산란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개(蓋)를 조복한다. 단지 아직 각(覺)ㆍ관(觀)ㆍ희(喜)ㆍ락(樂)ㆍ일심(一心) 및 신(信) 등의 5근을 수행하지 않아 비록 정력(定力)을 얻었어도 생각이 오히려 일어난다. 이것의 선의 외행이다. 안(安)이란 이 외행으로부터 이러한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수행력을 얻으면 이 각과 신 등의 법이 일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나니, 이것을 안이라 한다.
028_1030_c_12L此事從心作意不亂以伏諸蓋但未脩行覺一心及信等五根雖得定力念念猶起是禪外行安者從此外行是法由心得脩行力是覺信等法於事不動是名爲安
【문】외행과 안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1030_c_17L外行及安有何差別
【답】만약 5개를 조복한다면 이것이 그 외행이다.
028_1030_c_18L若伏五蓋是其外行以伏此五故成安
이 5개를 조복하는 까닭에 안을 이루고, 선의 외행으로 수승한 정[勝定]을 얻는다. 만약 수승한 정을 얻는다면 이것을 안이라 한다. 만약 몸과 마음에 아직 적적함을 얻지 못했다면 외정(外定)에서 마음은 움직이나니, 마치 파도에 떠있는 배와 같다. 만약 몸과 마음에 이미 적적함을 얻었다면 안정된 곳에 처하여 움직이지 않나니, 마치 배가 바람이 없는 물 위에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근(根)에 힘이 없는 까닭에 하는 일[事]에서 외선행(外禪行)이 오래 머물지 못하나니,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028_1030_c_19L以禪外行得勝定若得勝定是名爲安若於身心未得寂寂外定心動如船在浪若於身心已得寂寂處安不動如船無風在水諸根無力故於所爲事外禪行不久住小童子
028_1031_a_02L모든 근에 힘이 있는 까닭에 일에 안정되게 오랫동안 머무나니, 마치 힘이 있는 사람과 같다. 수행이 자재하지 않은 까닭에 선의 외행이 불화합을 이루나니, 마치 사람이 경을 외우는 것을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수행이 자재한 까닭에 안정되게 화합을 이루나니, 마치 사람이 항상 경을 외우면 잊지 않는 것과 같다.
028_1030_c_24L諸根有力故於事安靜久住如有力人脩不自在故禪外行成不和合如人誦經久廢則忘以脩自在故成安和合如人誦經恒習不忘
만약 개(蓋)를 잘 조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맹인과 같아 선의 외행에서 눈이 멀게 되니, 이와 같은 것들은 청정하지 못한 가르침이다. 만약 개를 잘 조복하면 눈이 멀지 않게 되고 안정(安定)을 이루게 되니, 이와 같은 것들은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상의 자재로부터 시작하여 성제(性除)에 이르기까지를 외행(外行)이라 하고, 성제가 무간(無間)한 것 이것을 안(安)이라 한다.
028_1031_a_04L不善伏蓋猶如盲人於禪外行成盲如是等不淸淨敎若善伏蓋成不盲於成安定如是等淸淨敎從相自在所初乃至性除名爲外行性除無閒是名爲安
【문】외행이란 무슨 뜻인가?
外行者何義
【답】선(禪)에 가까운 까닭에 이것을 외행이라 한다. 마치 길이 마을에 가까우면 이를 마을길이라 하는 것처럼 뜻은 같지만 이름이 다르다. 안이란 무슨 뜻인가. 안이란 화합의 뜻으로 만다라에 이르는 것과 같다. 출리선(出離禪)은 안과 다른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외행에 머물러 마땅히 일체입을 증장시켜야 하고, 혹은 안정(安定)에서 혹은 초선에서 마땅히 증장시켜야 한다.
028_1031_a_09L禪近故是名外行如路近村是謂村路義一名異安者何義安爲和合義如到曼陁羅出離禪安無異義於是坐禪人住於外行應令增長一切入或於安定或於初禪當令增長
【문】마땅히 증장시켜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028_1031_a_14L云何應令增長
【답】한 뼘 손가락 네 마디 크기인 최초의 상(相)으로부터 마땅히 점차 증장시켜야 한다.
028_1031_a_15L謂從初相如手四指節當令漸增
이와 같이 작의하고, 이와 같이 자재를 얻어 이와 같이 차례대로 바퀴[輪] 만하게, 일산[蓋] 만하게, 나무 그림자 만하게, 복전(福田) 만하게, 이웃집 만하게, 마을 만하게, 곽(郭) 만하게, 성(城) 만하게, 이와 같이 차례대로 점차 증장시켜 이 대지에 변재하게 한다. 높고 낮은 강과 산, 나 나무와 가시덤불, 평평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모든 것, 이와 같은 일체를 작의하지 않고, 나아가 큰 바다 만하게 지상(地想)을 작의하고, 나아가 증장할 때 마음의 소행은 최승의 정을 이룬다.
028_1031_a_16L如是作意如是得自在如是次如輪如蓋如樹影如福田如鄰如如郭如城如是次第漸令漸長遍此大地若江山高下樹木棘刺諸不平正如是一切不作意乃至大海作意地想乃至增長時心所行成最勝
만약 좌선인이 선의 외행은 얻었지만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면, 이 좌선인은 두 가지 행으로써 마땅히 안정의 방편을 일으켜야 한다. 첫째는 인연으로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수지(受持)로 일으키는 것이다.
028_1031_a_22L若坐禪人得禪外行不能得安定此坐禪人以二行應令起安定方便一以因二以受持
028_1031_b_02L인연에 따라 10행으로써 안정의 방편을 일으켜야 한다. 첫째는 그 처(處)의 명정(明淨)을 관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근에 대한 관을 널리 일으키는 것이고, 셋째는 상(相)을 완전히 아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제어해 잘 조절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게으름을 조복시키는 것이며, 여섯째는 마음에 미착(味著)이 없는 것이며, 일곱째는 마음이 환희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마음이 안정되어 사(捨)를 이루는 것이며, 아홉째는 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을 떠나 정을 배운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열째는 안정에 낙착(樂著)하는 것이다.
028_1031_a_24L以十行從因緣起安定方便一令觀處明淨二遍起觀諸根三曉了於相四制心令調五折伏懈怠心無味著七心歡喜八心定成捨離不學定人親近學定人十樂著安
【문】어떻게 명정처관(明淨處觀)을 짓는가?
云何作明淨處觀
【답】세 가지 행으로써 분명처(分明處)를 지을 수 있다. 말하자면 능히 알맞은 식사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며, 시절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며, 위의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다.
028_1031_b_06L以三種行得作分明處謂能脩調適食樂修時節樂脩威儀樂
모든 근에 대한 관을 널리 일으킨다는 것은 신(信) 등의 5근을 소멸하지 않게 하고 게으름을 떨지 않아 날쌘 말이 끄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028_1031_b_08L遍起諸根觀者謂信等五根不令消滅無作懈怠如快馬乘車
상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작의한 상(想)을 잘 잡아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것이다. 교사(巧師)가 먹줄을 평등하게 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는 것처럼 작의를 잘 이해하여 급함도 떠나고 아님도 떠나는 것이다.
028_1031_b_10L曉了於相者善捉意想不急不如巧師繩墨平等無偏善解作意急離不離
마음을 제어해 잘 조절하는 것에는 두 종류의 행이 있어 두 종류의 행으로써 마음의 조절을 이룬다. 즉 첫째는 정진을 많이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과도한 경우에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028_1031_b_12L制心令調者有二種行二種行成心調一多起精進二心過度處成心調
혹 음처(婬處)나 갖가지 상(相)이 있는 곳에 머물 때에는 어지러운 생각을 증장시켜 마음의 조절을 이루고, 좌선인이 정진을 많이 일으키는 것이 과도한 경우에도 마음의 조절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행으로써 마땅히 마음을 제어해 조복하고 정진이 일어나게 하면서 늘 중도(中道)로 조절해야 한다. 만약 음처나 갖가지 상이 있는 곳에 갔을 때에는 더욱더 마음의 조절에 힘써 두 가지 행으로써 절복시키고, 갖가지 고통 및 나쁜 과보를 관하고 찾아보아야 한다.
028_1031_b_14L或住婬處及種種相處增長亂意成於心調於坐禪人若多起精進過度處成心調以二行應制伏心以令精進起每中調適若往婬處及種種相增長調心以二行折伏以觀覓衆苦及惡果報
028_1031_c_02L게으른 마음을 제어해 조복시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행으로써 게으른 마음이 된다. 수승한 정[勝定]을 얻지 못하고 마음을 무미건조하게 하기 때문에 게을러지고, 게으름이 많으면 곧 잠자고 싶어진다. 이 좌선인이 만약 수승한 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미착(味著)이 없는 까닭에 게을러졌다면 두 가지 행으로써 마땅히 끊어 없애야 하니, 즉 공덕을 관함으로써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게으르고, 잠자고 싶고, 나태한 마음이 있으면 네 가지의 행으로써 조복할 수 있다. 만약 음식을 지나치게 먹고 게으른 생각을 가진다면, 4위의로 바꾸어 행하고, 스스로 광명상(光明相)을 작의하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물러 마음을 환희케 해야 한다.
028_1031_b_19L制伏懈心者以二行成懈怠心以不得勝定令心無味故成懈怠若多懈怠則欲睡眠是坐禪人若不得勝定心無味著故成懈怠以二行當折伏謂觀功德以起精若懈怠睡眠懶心以四種行能伏多食者取懈怠想轉行四威儀以自作意於光明相住於露處令心歡喜
낙착(樂著)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3행으로써 무미건조하게 되니, 방편이 적은 까닭에, 지혜가 둔한 까닭에, 적적의 즐거움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의 마음이 만약 무미건조하다면 두 종류의 행으로써 환희를 얻게 한다. 첫째는 공포로 얻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환희로 얻게 하는 것이다. 만약 생ㆍ노ㆍ사 및 4악취를 관해 모든 두려움을 보면 마음에 근심과 고뇌가 생기고, 만약 불ㆍ법ㆍ승ㆍ계ㆍ보시ㆍ하늘을 염하여 6행공덕의 보면 마음에 환희가 생긴다.
028_1031_c_03L無所復著以三行成無味少方便故以鈍慧故以不得寂寂樂故於是坐禪人心若無味以二種行令得歡喜一以恐怖二以歡喜若觀生老死及四惡趣見諸可畏心生愁惱若念佛法僧戒施天見六行功德心生歡喜
마음이 안정되어 사(捨)를 이룬다는 것은 두 가지 행으로써 선의 외지정(外地定)을 이루고, 모든 개(蓋)를 끊음으로써 마음이 정을 이루는 것이다. 혹은 얻은 지(地)에서 선지(禪支)를 일으킴으로써 마음의 정을 이룬다. 이 좌선인이 마음이 안정되고도 두 가지 행이 있다면 버려야 마땅하니,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중도의 방편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028_1031_c_09L心定成捨者以二行成於禪外地定以斷諸蓋心成定或於所得地以起禪枝故成心定是坐禪人心定有二當捨非成住故中方便調適故
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떠나야 한다. 안정이건 외행정이건 위의정이건 그 사람에게 이런 것이 없고, 닦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면 공양하거나 그에게서 닦아서는 안 된다. 정을 배운 사람이란 다음과 같다. 만약 안정이 있고, 외행정이 있고, 위의정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따라서 닦고 배워야 하며, 또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028_1031_c_13L不學定人或安定或外行定或威儀彼人無此不脩不學不應供養脩學人者若有安定有外行定及威儀應從修學亦應供養
안정에 낙착하는 것이란 이 좌선인이 저 깊은 물처럼, 저 치솟는 샘물처럼, 저 낮은 나무처럼 항상 즐거워하고 공경하며 수행하는 바가 많은 것이다. 이 10사(事)를 행한 인연으로 안정이 생긴다.
028_1031_c_17L樂著安者坐禪人如彼深源如彼奔泉如彼低樹常樂恭敬多所脩行行此十事因緣生於安定
【문】수지(受持)로써 안정의 방편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028_1031_c_20L云何以受持能生安定方便
028_1032_a_02L【답】그 좌선인이 연기를 잘 이해하고 적적처에 들어가 그 이해한 상을 닦는 정에서 그 마음에 따라 자재하면 그 욕락을 생기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한다. 이로부터 몸과 뜻이 감임(堪任)하며 용(用)이 있음으로써 수지를 얻게 하고, 이로부터 환희가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적당하고 안락한 몸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광명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상처를 불쌍히 여김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는다.
028_1031_c_21L彼坐禪人善解緣起入寂寂其所解相於所脩定隨心自在其欲樂令心得起從此身意堪任有用令得受持從生歡喜心得受持生適樂身心得受持從生光明心得受持從生悲傷心得受持
상처를 불쌍히 여기는 이것으로 마음이 고요함[靜]을 얻게 하고, 고요한 마음을 잘 취하여 마음이 수지를 얻는다. 이와 같이 잘 취하여 사심(捨心)으로 하여금 수지를 얻게 하고, 무변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을 얻어 수지를 성취한다. 해탈하는 까닭에 그것이 일법미(一法味)를 이루고, 일미(一味)로써 마음이 수지를 얻어 수행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수승함과 오묘함으로부터 마음이 증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수지에 머물러 안정의 방편을 일으키고, 이와 같이 연기를 잘 이해하고 나아가 마음을 수지하면 오래지 않아 정을 일으킨다.
028_1032_a_03L以是悲傷令心得靜善取靜心心得受持如是善取令捨心得受持從無邊煩惱得解脫成就受持以解脫故彼成一法味以一味心得受持脩行是故從此勝妙心得增長如是住受持起安定方便如是善解緣起及心受持不久起定
그런 좌선인은 욕(欲)과 불선법(不善法)을 벗어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적정처에서 심소를 성취하며, 희(喜)가 있고 낙(樂)이 있어 초선을 얻는다. 이것이 지일체입(地一切入)의 공덕이다.
028_1032_a_10L彼坐禪人離欲不善法有覺有於寂靜處心所成就有喜有樂得於初禪是地一切入功德
욕을 벗어난다[離欲]에서 벗어남[離]에 세 종류가 있으니, 즉 신리(身離)ㆍ심리(心離)ㆍ번뇌리(煩惱離)이다.
028_1032_a_12L於是離欲者離有三種謂身離心離煩惱離
【문】무엇이 신리인가?
028_1032_a_13L何身離
【답】모든 번뇌를 멀리 벗어나 나간 곳인 산이나 들판이다. 무엇이 심리인가. 청정한 마음으로 도달한 수승하고 선한 곳이다. 무엇이 번뇌리인가. 번뇌에 묶인 사람이 없고 생사의 행이 없는 곳이다.
028_1032_a_14L遠離諸惱出處山野云何心離以淸淨心到勝善處云何煩惱離無結累人無生死行處
또 벗어남에 다섯 종류가 있다. 즉 복리(伏離)ㆍ피분리(彼分離)ㆍ단리(斷離)ㆍ의리(猗離)ㆍ출리(出離)이다. 무엇이 복리인가. 즉 초선을 닦아 5개(蓋)를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피분리인가. 즉 달분정(達分定)을 닦아 모든 견해를 억누르는 것이다. 무엇이 단리인가. 즉 출세간도를 닦아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의리인가. 즉 과를 얻었을 때의 즐거움이다. 무엇이 출리인가. 즉 열반을 말한다.
028_1032_a_16L復次離有五謂伏離彼分離斷離猗離出離何伏離謂脩初禪伏於五蓋云何彼分離謂脩達分定伏於諸見云何斷謂脩出世閒道斷諸煩惱云何猗謂得果時樂云何出離謂涅槃也
028_1032_b_02L욕(欲)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욕처(欲處)요, 둘째는 욕번뇌이다. 천당 및 사람이 좋아하는 색ㆍ향ㆍ미ㆍ촉을 욕처라 한다. 이 욕처에서 욕에 물든 사유를 일으키는 것을 욕번뇌라 한다. 이 욕으로부터 마음으로써 별리(別離)하고, 억누름으로써 별리한다. 이것 원리이고, 이것이 출리이고, 이것이 해탈이고, 이것이 불상응이니, 이것이 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32_a_21L欲者有二種一者處欲二者欲煩惱天堂及人所愛色香味觸此謂欲處於此欲處起欲染思惟是謂欲煩惱從此欲以心別離以伏別離是遠離是出離是解脫是不相應是謂離欲
【문】무엇이 불선법을 벗어나는 것인가?
028_1032_b_03L云何離不善法
【답】불선의 근본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탐, 둘째는 진, 셋째는 치이다. 그것과 상응하는 수ㆍ상ㆍ행ㆍ식 및 신업ㆍ구업ㆍ의업, 이것을 불선법이라 한다.
028_1032_b_04L謂不善根有三一貪二瞋三癡與彼相應受想行識及身口意業此謂不善法
불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한다. 첫째는 자성(自性), 둘째는 상응(相應), 셋째는 생연성(生緣性)이다. 이 세 가지 불선의 근본, 즉 탐ㆍ진ㆍ치를 자성이라 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수ㆍ상ㆍ행ㆍ식 이것을 상응이라 한다. 그로부터 생기는 신업ㆍ구업ㆍ의업 이것을 연성이라 한다. 이 세 가지 불선법을 멀리 벗어나는 것, 이것이 출이고, 이것이 탈이고, 이것이 불상응이니, 이것이 불선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32_b_06L說不善有三種一自性二相應三生緣性三不善根謂貪嗔癡是名自性與彼相應受想行識是名相應所起身口意業此謂緣性以此三不善法是爲遠離是出是脫是不相應是謂離不善法
또 욕을 벗어난다는 것은 탐욕의 개(蓋)를 벗어나는 것이고, 불선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나머지 개를 벗어나는 것이다.
028_1032_b_12L復次離欲者離貪欲蓋離不善法者謂離餘蓋
【문】불선법을 벗어나라고 설하면 욕이 바로 불선으로써 이미 그 가운에 포함된다. 왜 따로 음욕을 벗어나라고 설하는가?
028_1032_b_13L以說離不善法是不善已在其中何故別說離婬欲
【답】음욕은 출(出)로 대치(對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욕은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욕을 벗어난 것을 부처님께서는 “출”이라 설하셨다. 초선을 얻었더라도 욕상(欲想)과 상응하여 작의하면 이 퇴분법을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까닭에 욕으로써 번뇌와 화합한다. 욕이 만약 별리하면 일체번뇌도 또한 별리한다. 이러한 까닭에 달리 욕을 벗어나라고 설한 것이다.
028_1032_b_14L婬欲是出對治佛所說欲能除煩離欲者佛說爲出如得初禪欲想相應作意成起此退分法是故以欲和合煩惱欲若別離一切煩惱皆亦別離是故別說離欲
028_1032_c_02L또 욕을 벗어난다는 다음과 같다. 이미 출을 얻었다면 욕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불선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성내지 않음을 얻으면 성냄을 벗어나게 되고, 명상(明相)을 얻으면 게으름과 수면을 벗어나게 되고, 어지럽지 않음을 얻으면 조희(調戱)를 벗어나게 되고, 후회하지 않음을 얻으면 후회함을 벗어나게 되고, 안정을 얻으면 의심을 벗어나게 되고, 지혜를 얻으면 무명을 벗어나게 되고, 정사유를 얻으면 사념(邪念)을 벗어나게 되고, 환희를 얻으면 즐겁지 않음을 벗어나게 되고, 마음이 즐거움을 얻으면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고, 일체선법을 얻으면 곧 일체불선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3장(藏)에서 “탐하지 않음[不貪]으로 충만한 까닭에 욕에서 벗어남을 성취한다. 성내지 않음[不瞋]ㆍ어리석지 않음[不癡]으로 충만한 까닭에 불선법에서 벗어남을 성취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028_1032_b_19L復次離欲者得出成離欲離不善法者若得不嗔成離於嗔若得明相成離懈怠睡眠若得不亂成離調戲若得不悔成離於悔若得安定成離於疑若得智慧離無明若得正思惟成離邪念若得歡喜成離不樂若心得樂成離於苦若得一切善法則離一切不善如三藏說以不貪滿故成就離欲以不嗔不癡滿故成就離不善法
또 욕에서 벗어남을 신리(身離)라고 설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을 심리(心離)라고 설한다. 욕에서 벗어남이란 욕각(欲覺)을 끊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진에해각(瞋恚害覺)을 끊는 것을 말한다. 또 욕에서 벗어남이란 욕락(欲樂)을 피하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몸에 집착한 게으름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028_1032_c_05L復次離欲是說身離不善法者是說心離復次離欲者是說斷欲覺離不善法者說斷嗔恚害覺復次離欲者是說避欲樂離不善法者是說避著身懈怠
또 욕에서 벗어남이란 6희소(戱笑) 및 환희의 즐거움을 끊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희각(戱覺) 및 우고(憂苦) 등을 끊는 것을 말하고, 또 희소(戱笑) 및 사(捨)를 끊는 것을 말한다.
028_1032_c_09L復次離欲者是說斷於六戲笑及歡喜樂離不善法者是說斷戲覺及憂苦等亦說斷於戲笑及捨
또 욕에서 벗어남이란 현재에서 즐거움을 얻어 욕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현재에서 즐거움을 얻어 마음에 과환이 없는 것이다.
028_1032_c_12L復次離欲是現得樂出於欲樂離不善法者是現得樂心無過患
또 욕에서 벗어남이란 욕망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나머지 모든 번뇌를 뛰어넘는 것이다. 욕유(欲有)로 태어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색계에 태어나는 것, 이것을 초월이라 한다.
028_1032_c_14L復次離欲者謂超出欲流離不善法者所餘煩惱應生欲有而生色界是名超越
각ㆍ관이 있다는 것에서 무엇을 각이라 하는가. 즉 갖가지 각사유(覺思惟), 안정된 사상(思想), 마음이 각지(覺知)하지 못하는 것, 정사유에 들어가는 것, 이것을 각이라 한다. 이 각을 성취하는 까닭에 초선에 각이 있다.
028_1032_c_16L有覺觀者何爲覺謂種種覺思惟安思想心不覺智入正思惟此謂爲覺此覺成就故初禪有覺
또 지일체입에 들어가 지상(地相)에 의지해 간단없이 각사유(覺思惟)를 이루는 것을 각이라 하나니, 마음으로 경을 외우는 것과 같다.
028_1032_c_19L復次入地一切入依地相無閒成覺思惟是名爲覺如心誦
【문】각(覺)은 무엇을 상(想)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는가?
覺者何想何味何起何處
028_1033_a_02L【답】각이란 의(猗)를 닦는 상(想)을 맛으로 삼고, 하심(下心)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일어남으로 삼고, 상(想)을 행처(行處)로 삼는다.
무엇이 관인가. 관을 닦을 때에 관이 택하는 바에 따라 마음이 수사(隨捨)에 머무는 것, 이것을 관이라 한다. 이것으로 상응하여 성취하므로 초선에 관이 있다. 또 지일체입의 정에 든 사람이 지상(地相)을 닦음에 따라 마음이 관하는 바를 모든 뜻을 관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028_1032_c_21L脩猗想爲味下心作念爲起想爲行處云何爲觀於脩觀時隨觀所擇心住隨捨是謂爲觀以此相應成初禪有觀復次入地一切入定人從修地相心之所觀如觀諸義爲觀
【문】관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028_1033_a_03L何相何味何起何處
【답】관이란 선택에 따르는 것이 상이다. 마음을 부드럽게[猗] 하는 것이 맛이다. 견(見)의 각에 따르는 것이 그 처이다.
028_1033_a_04L觀者隨擇令心猗是味隨見覺是處
【문】각과 관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1033_a_05L何差別
【답】방울을 흔들었을 때와 같나니, 처음의 소리가 각이라면 뒤의 소리는 관이 된다. 또 마음의 소연(所緣)과 같나니, 처음의 것이 각이 되고 뒤의 것이 관이 된다. 또 선(禪)을 구하는 것이 각이고, 수호하는 것이 관이다. 또 기억은 각이고, 놓지 않는 것은 관이다. 또 거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각이고, 세밀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관이다.
028_1033_a_06L猶如打鈴初聲爲覺後聲爲觀復次如心所緣初爲覺後爲觀次求禪爲覺守護爲觀復次憶是覺不捨是觀復次麤心受持爲覺細心受持爲觀
어떤 처에 각이 있으면 그 처에는 관이 있지만, 어떤 처에 관이 있으면 그 처에는 각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각이 없는 경우도 하다. 삼장에서 “처음에 마음을 사(事)에 두는 것을 각이라 하고, 각을 얻었어도 정해지지 않은 것을 관이라 한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남녀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남녀가 이와 같은 색,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알아보는 것을 각이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계가 있는지 계가 없는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귀한 자인지 천한 자인지 관찰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028_1033_a_10L若處有覺是處有觀若處有觀於處或有覺或無覺如三藏所初安心於事是覺得覺未定是觀如遠見來人不識男女及識男女如是色如是形爲覺從此當觀有戒戒富貧貴賤爲觀
각은 찾아서 데려오는 것이고, 관은 지키고 유지하며 좇는 것이다. 새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열심히 날갯짓하는 것과 같은 것이 각이고, 유유히 떠도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처음 가르치는 것이 각이고, 오랫동안 가르친 것이 관이다. 각으로써 수호하고, 관으로써 찾고 가려낸다. 각으로써 사유하며, 관으로써 따라서 사유한다. 각행은 악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관행은 선(禪)을 수지하는 것이다.
028_1033_a_15L覺者求引將來觀者守持隨逐如鳥陵虛奮翅爲覺遊住爲觀初敎爲覺久敎爲觀以覺守護以觀搜擇以覺思惟以觀隨思惟行不念惡法觀行受持於禪
사람이 힘이 있어 입을 다물고 경을 외워 그에 따라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소각(所覺)을 각하고, 각하고 나서는 능히 아는 것과 같나니, 사변(辭辯) 및 요설변(樂說辯)을 관하는 것은 각이고, 의변(義辯)ㆍ법변(法邊)을 관하는 것은 관이다. 마음이 승(勝)을 이해하는 것은 각이고, 마음이 분별을 이해하는 것은 관이다. 이것이 각과 관의 차별이다.
028_1033_a_19L如人有默而誦經隨念其義是觀如覺所覺已能知觀於辭辯及樂說辯是義辯法辯是觀心解於勝是覺解分別是觀是爲覺觀差別
028_1033_b_02L적적(寂寂)으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적적이라 하는 것은, 소위 5개를 벗어난 것을 적적이라 한다. 또는 색계의 선근, 또는 초선의 외행이라고 설하고, 또는 선심(禪心)이라고 설한다. 이런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니, 지수(地水)에서 꽃이 피면 지수화라고 하는 것과 같다.
028_1033_a_23L寂寂所名寂寂者謂離五蓋是名寂寂次色界善根復說初禪外行復說禪心從此心生是謂寂寂所成如地水生花名地水花
희락이란 마음이 그때 크게 기쁘고 환희하여 환하게 웃고 마음에 청량함이 가득한 것, 이것을 희라 한다.
028_1033_b_04L喜樂者心於是時大歡喜戲笑心滿淸涼此名爲喜
【문】희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으며, 몇 종류의 희가 있는가?
028_1033_b_05L喜何何味何起何處幾種喜
【답】희는 널리 기쁨이 가득한 것을 상으로 삼고, 적절히 기뻐함을 그 맛으로 삼으며, 어지러운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 일어남이고, 용약(踊躍)하는 것이 처이다.
028_1033_b_06L喜者謂欣悅遍滿爲相歡適是味調伏亂心是起踊躍是處
희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욕(欲)으로부터 생기는 희, 신(信)으로부터 생기는 희, 불회(不侮)로부터 생기는 희, 적적으로부터 생기는 희, 정(定)으로부터 생기는 희, 보리분으로부터 생기는 희이다.
028_1033_b_08L幾種喜六種喜欲生從信生從不悔生從寂寂生從定及菩提分生喜
무엇이 욕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의 기쁨이니 이것을 욕생희(欲生喜)라 한다. 무엇이 신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믿음이 깊은 사람의 마음의 기쁨 및 도예가 등을 보고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이 불회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청정하게 계를 지키는 사람이 자주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이 적적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초선에 든 사람의 기쁨이다. 무엇이 정으로부터 생긴 희인가. 2선에 들어 기쁨을 내는 것이다. 무엇이 보리분에서 생기는 기쁨인가. 제2선에서 출세간도를 닦는 기쁨이다.
028_1033_b_10L云何從欲生貪欲染著心喜是名欲生喜云何從信生多信人心喜及見陶師等生喜云何從不悔生喜淸淨持戒人多生歡喜云何從寂寂生入初禪人喜云何從定生入二禪生喜云何菩提分生喜於第二禪脩出世閒道喜
또 희에 다섯 종류가 있다고 설하나니, 소위 소희(笑喜)ㆍ염염희(念念喜) ㆍ유희(流喜)ㆍ월희(越喜)ㆍ만희(滿喜)이다.
028_1033_b_16L復次說喜五種謂笑喜念念喜流喜越喜滿喜
028_1033_c_02L 소희란 가랑비에 몸이 젖어 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과 같고, 염염희는 생하고 멸하며 머묾이 없어 밤에 내리는 비와 같으며, 유희란 기름이 아래로 오랫동안 흘러내려도 그 몸을 완전히 뒤덮을 수는 없는 것과 같고, 월희란 일체를 두루 에워싸듯이 마음에 환희를 일으켰다가 오래지 않아 곧 잃어버리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장(伏藏)을 보는 것과 같으며, 만희란 몸에 머물러 두루 가득한 것으로 천둥이 비를 머금은 것과 같다. 여기에서 소희(小喜) 및 염염희는 믿음으로써 외행을 일으키고, 유희는 힘을 가지고 외행을 일으키며, 월희는 만다라에서 정(正)과 부정(不正)이 모두 일어나 처처에 방편이 되고, 만희는 안처(安處)에 생겨난다.
028_1033_b_17L笑喜者如細雨沾身令毛皆豎念念喜者生滅不住如夜時雨流喜者油下流久灌其身終不周遍越喜者周帀一切心生歡喜不久便失如貧人見伏藏滿喜者身住用滿如雷有雨於是小喜及念念喜以信起於外行流喜者有力起於外行越喜者於曼陁羅正與不正皆起處處方便滿喜生於安處
【문】무엇이 낙이 되는가?
云何爲樂
【답】이때 가수심(可受心)과 낙심이 서로 결합해 이루어진 것을 낙이라 한다.
028_1033_c_03L是時可受心樂心觸所成此謂爲樂
【문】낙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으며, 몇 종류의 낙이 있고, 희와 낙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028_1033_c_04L樂何何味何起何處幾種樂喜樂何差
【답】맛들임을 그 상으로 하니, 사랑스러운 경계를 반연하여 그 맛을 사랑하는 것이다. 섭수가 그 일어남이고, 그 의(猗)가 처이다. 몇 종류의 낙이 있느냐 하면, 다섯 종류가 있다. 소위 인락(因樂)ㆍ자구락(資具樂)ㆍ적적락(寂寂樂)ㆍ무번뇌락(無煩惱樂)ㆍ수락(受樂)이다.
028_1033_c_06L味爲相緣愛境是愛味攝受是其猗是處幾種樂者有五種謂因資具樂寂寂樂無煩惱樂受樂
무엇이 인락인가. 부처님께서 “계의 즐거움은 늙음을 견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인락이라 하니, 바로 낙의 공덕이다. 자구락이란 부처님께서 “부처님께서 세상의 즐거움을 일으킨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적적락이란 정(定)과 사(捨)를 일으키고, 선정을 소멸하는 것이다. 무번뇌락이란 부처님께서 “제일가는 열반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소위 즐거움을 누리는 것[受樂]이다. 이 논에서는 수락이 바로 가희 즐겨야 할 것이다.
028_1033_c_08L何名因樂如佛所說戒樂耐老此謂因樂是樂功德資具樂者如佛所說佛生世樂寂寂樂者謂生定捨及滅禪定無煩惱樂者如佛所說第一涅槃受樂所謂受樂也於此論中受樂是可樂
희와 낙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마음이 용약하는 것이 희이고, 마음이 유연한 것이 낙이다. 마음의 부드러움[猗]이 낙이고, 마음의 고요함이 희이다. 거친 것이 희이고, 미세한 것이 낙이다. 희는 행음(行陰)에 포섭되고, 낙은 수음(受陰)에 포섭된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즐거움이 있지만 즐거움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 한다.
028_1033_c_14L喜樂何差別者心踊躍是喜心柔軟是樂心猗是樂心定是喜細樂喜行陰所攝樂受陰所攝處有喜有樂是處有樂或有喜或無
처음[初]이란 두 번째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외행을 성취하여 초선에 드는데, 선지(禪支)는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이다.
028_1033_c_18L初者形第二爲名外行成就入初禪禪枝謂覺一心也
선(禪)이란 무슨 뜻인가. 소위 사물을 평등하게 사유하는 것이고, 5개(蓋)를 신속히 떨쳐 버리는 것이고, 사유하여 대치하는 것이다. 초선에 들어 정수(正受)를 얻었다는 것은 이미 얻고, 이미 접촉하고, 이미 짓고 증득하여 머무는 것이다.
028_1033_c_19L禪者何謂於事平等思惟也奮迅五蓋也思惟對治也入初禪得正受者已得已觸已作證住
또 욕과 불선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욕계지(欲界地)로부터 초선을 설해 수승한 상[勝相]을 삼고, 각관(覺觀)이 있음으로부터 제2선을 설해 수승한 상을 삼고,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희가 있고 낙이 있으니 적적으로 이루어진 희락으로부터 수승한 상을 설하는 것이다.
028_1033_c_22L復次離欲不善法者從欲界地說初禪爲勝相從有覺觀說第二禪爲勝相以寂寂所成有喜有樂從寂寂所成喜樂說爲勝相
028_1034_a_02L또 욕과 불선법을 벗어나는 것이란 소위 능히 끊고, 대치하는 것이다. 각관이 있다는 것은 소위 선(禪)의 상을 말한다. 적적으로 이루어진 희락이란 상사선(相似禪)을 말한다. 정수(正受)에 들어 머문다는 것은 초선에 들어 5분(分)을 벗어나고, 5분(分)과ㆍ3선(善)을 성취하고, 10상(想)을 구족하고, 25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福)과 선(善)으로 수승하고 오묘한 거처인 범천으로 올라가 태어난다.
028_1034_a_02L次離欲不善法者謂能斷對治有覺觀者謂說禪相寂寂所成喜樂者說相似禪正受入住者謂得初禪離於五分成就五分三善十想具足二十五功德相應以此福善上生梵天勝妙居處
5분을 벗어난다는 것은 5개를 벗어나는 것이다. 무엇이 다섯인가. 소위 탐욕(貪欲)ㆍ진에(瞋恚)ㆍ해태수면(懈怠睡眠)ㆍ조회(調悔)ㆍ의(疑)이다.
028_1034_a_08L離五分者謂離五蓋云何爲五謂貪欲瞋恚懈怠睡眠調悔
탐욕이란 5진(塵)에 대해 마음이 애염(愛染)을 일으키는 것이고, 진에란 10뇌처(惱處)를 행하는 것이며, 해태란 마음이 나태해지는 것이고, 수면이란 몸의 번민이 심하여 깊이 잠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028_1034_a_09L貪欲者謂於五塵心生愛染瞋恚者謂行十惱處懈怠者謂心懶墯睡眠謂身悶重欲得寤寐
잠[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식(食)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둘째는 시절에 따라 생기는 것이고, 셋째는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028_1034_a_12L眠有三種從食生二從時節生三從心生
만약 마음에서 생겼다면 사유로써 끊는다. 음식이나 시절로부터 생겼다면 이는 아라한의 잠이니, 마음에서 생기지 않고 덮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잠이 음식 및 시절로부터 생겼다면 정진으로써 끊을 수 있다. 아누루타기 “나는 처음 누(漏)를 다했을 때 마음이 잠들지 않음을 얻어 지금 55세가 되었다. 그 사이에 음식과 시절로 인한 누음[臥]을 끊은 지 이미 25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28_1034_a_13L若從心生以思惟斷若從飮食及時節生是羅漢眠不從心生無所蓋故若眠從食及時節生者以精進能斷如阿㝹樓馱所說我初盡漏得不從心眠于今五十五歲於其中閒斷食時節已二十五年
【문】만약 수면이 색법(色法)을 이룬다면 왜 심수번뇌(心數煩惱)가 되는가?
028_1034_a_19L若眠成色法何故爲心數煩惱
【답】색이란 한결같이 심수번뇌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이것을 알 수 있다.
028_1034_a_20L色者一向成心數煩惱如我見人飮酒及食是則可知
【문】만약 수면이 신법(身法)이고, 해태가 심수법(心數法)이라면, 왜 두 법이 합하여 하나의 개(蓋)를 이루는가?
028_1034_a_21L若眠身法懈怠心數法何故二法合成一蓋
【답】이 두 종류의 법은 사(事)가 하나이고 상(相)이 하나이니, 소위 피곤함[疲]과 게으름[懈]이 함께 하나를 이룬다.
028_1034_a_23L此二種法一事一相所謂疲懈共爲一
조(調)란 마음이 적적하지 않은 것이고, 회(悔)란 마음으로 한스러워하며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 상이 이미 같기 때문에 하나의 개를 이룬다.
028_1034_a_24L調者心不寂寂悔者心恨不定其相旣等故成一蓋
028_1034_b_02L의(疑)는 마음의 집착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네 종류의 의(疑)가 있다. 첫째는 사마타(奢摩他, Samatha)의 난(難)이며, 둘째는 비바사나(毘婆舍那, Vipassanā)의 난이며, 셋째는 그 둘 모두의 난이며, 넷째는 모든 비법(非法)에서의 난이다. 여기에서 구족하여 사마타를 얻게 되었더라도 이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몸에 대해 의심하여 ‘내가 감히 적적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적적을 얻을 수 없을까’ 하며 그것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이것을 사마타의 난이라 한다.
028_1034_b_02L疑者心執不一有四種疑一者奢摩他難者毘婆舍那難三者二俱難四者於諸非難於是具足爲得奢摩他或於此疑或於身疑我堪得寂寂爲不得寂寂若於彼成疑此謂奢摩他難
혹 사성제에 대하여, 혹은 삼세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이것을 비바사나의 난이라 한다. 혹 불법승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이것을 둘 모두의 난이라 한다. 혹 국성(國城)ㆍ도로나 혹은 남녀ㆍ성명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이것을 비법의 난이라 한다. 이 경에 대한 의심은 적적의 난이라 한다. 이것은 취할만한 것이다.
028_1034_b_07L於四聖諦或於三世疑此謂毘婆舍那難或於佛法僧疑此二俱難或於國城道路或於男女名姓是謂非法於此經中疑爲寂寂難是可取
개(蓋)란 무슨 뜻인가. 소위 승(乘)을 장애한다는 뜻, 덮는다는 뜻[覆義], 번뇌라는 뜻, 묶는다는 뜻[縛義]이다. 이것에는 다른 뜻이 없다.
028_1034_b_11L者何義謂障碍乘義覆義煩惱義此無異義
【문】여러 가지 미세한 결박이 있으니, 소위 부(覆)ㆍ뇌(惱) 등이다. 왜 단지 5개만을 설하는가?
028_1034_b_13L有諸細結謂覆惱等何故但說五蓋耶
【답】집집(集執)으로써 취해 다섯 가지를 이룬다. 또 음욕의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탐욕을 포섭하고, 진에의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불선법을 포섭하고, 해태ㆍ수면ㆍ조회ㆍ의에 대한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어리석은 불선법을 포섭한다. 이와 같이 5개에 대한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번뇌를 포섭하고, 이러한 상(相)으로써 5개를 이룬다. 5분을 성취한다는 것은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을 말한다.
028_1034_b_14L以集執取成五復次以婬欲執著能攝一切貪欲瞋恚執著能攝一切不善法以懈怠睡眠調悔疑執著能攝一切癡不善如是以五蓋執著能攝一切煩惱以此相故成五蓋五分成就者謂覺一心
【문】만약 초선이 5지(枝)를 성취하여 선으로 삼는다고 설한다면, 또 다시 그 지가 선(禪)이 된다고 달리 설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달리 지를 설한다면 어떠한 까닭에 초선이 5지와 상응한다고 설하는가?
028_1034_b_20L若說初禪成就五枝爲禪不應更復別說其枝爲禪若別說枝何故初禪說五枝相應
028_1034_c_02L【답】선지(禪支)에 의해 선을 이룬다. 선지를 떠나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달리 다른 선은 없다. 마치 수레의 부품 하나하나에 의지해 수레를 설하고, 그 부품을 떠나서는 수레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군인에 의지해 군대를 설하고, 군인을 떠나서는 군대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지에 의지해 선이라 하니, 그 지를 떠나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종류이기에 선이라 하고, 나눌 수 있기에 지라 한다. 사(事)를 설명해 선이라 하고, 공덕을 설명해 지라 한다. 제(制)에 의지해 설명하면 선이라 하고, 성제(性制)에 의지해 설명하면 지라 한다.
028_1034_b_22L依禪枝成禪不離禪枝有禪無別異禪如依一一車分說車離分無車如依軍分說軍非離軍分有軍如是依禪枝名禪離枝有禪以一種名禪以可分名枝說事名禪說功德名枝以說依制名以說依性制名枝
【문】염ㆍ정진 등의 법이 있는데 왜 5지만 설하는가?
028_1034_c_05L於有念精進等法何故但說五枝耶
【답】집착으로써 다섯 가지를 이룬다.
以執著成五
【문】무엇이 집상(執相)이 되는가?
028_1034_c_06L云何爲執相
【답】각은 사심(事心)을 따라 스스로 편안함을 얻고, 관은 지심(持心)을 따른다. 각관이 혼잡하지 않으면 방편을 일으키는데, 만약 방편이 구족되면 희와 낙이 생긴다. 만약 방편을 일으켜 구족하게 생기게 되면 희심(喜心)이 증장하고 낙심이 원만해진다. 이 네 가지 공덕으로 마음은 어지럽지 않음을 성취하고,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정을 얻는데 이것을 집상(執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집착은 다섯 가지를 이룬다.
028_1034_c_07L覺者隨於事心而得自安觀者隨於持心覺觀不雜於方便若方便具足喜樂生若起方便具足得生喜心增長樂心成滿此四功德心成就不亂若心不亂得是名執相如是執著成五
또 개(蓋)를 대치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가 된다. 초개(初蓋)의 대치는 초선이고, 나아가 5개의 대치는 5선이다. 각은 초선에서 승지(勝支)가 되어 각으로써 욕을 없앤다. 만약 각으로 정정(定正)에 들면 다른 지(支)도 또한 일어난다. 5지 가운데 관은 제2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희는 제3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낙은 제4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일심은 제5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승지로써 다섯 가지가 된다.
028_1034_c_12L復次蓋對治故成五初蓋對治初禪乃至五蓋對治五禪覺者初禪爲勝枝以覺除若覺入正定餘枝亦起觀者於五第二禪是初起喜者於第三禪是初起樂者於第四禪是初起一心者於第五禪是初起如是以勝枝成五
또 5개를 대치함으로써 다섯 가지가 된다. 삼장에서 “일심은 음욕을 대치하고, 환희는 진에를 대치하고, 각은 해태ㆍ수면을 대치하고, 낙은 조회(調悔)를 대치하고, 관은 의(疑)를 대치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개에 따라 대치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가 된다.
028_1034_c_18L復次以五蓋對治成五如三藏所說心是婬欲對治歡喜是嗔恚對治是懈怠眠對治樂是調悔對治觀是疑對治以蓋從對治是故成五
【문】이 좌선인은 일체지상(一切地相)을 작의하는데 어떠한 까닭에 곧 희락을 일으키는가?
028_1034_c_22L坐禪人作意於一切地相何故乃起喜樂耶
028_1035_a_02L【답】지일체입상(地一切入相)은 희락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5개의 열(熱)을 벗어나 성(性)에 따라서 수행하는 것을 인으로 삼는 까닭이다. 이것으로써 법자(法子)는 마땅히 희락을 일으켜야 한다.
028_1034_c_24L地一切入相非起喜樂因離五蓋熱隨性脩故是以法子應起喜樂
【문】만약 그렇다면 법자는 어떠한 까닭에 제4선에서 희락을 일으키지 않는가?
028_1035_a_03L又問若然法子何故不於第四禪起喜樂
【답】그 처(處)가 아닌 까닭이다. 또 제4선을 얻고 나서는 희락을 끊기 때문이다. 또 처음에 이미 희락을 일으켰더라도 방편으로써 조복하고 끊어버린다. 즉 과환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최고의 적적함을 탐착해 낙을 버린다. 이러한 까닭에 희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028_1035_a_04L非其處故又得第四禪已斷喜樂故復次初已起喜樂以方便伏斷見有過患已貪著最寂寂捨是故不起喜樂
세 종류의 선(善)이란 초선ㆍ중선ㆍ후선을 말한다. 청정한 수행이 초선이 되고, 사(捨)를 증장시킴이 중선이 되며, 환희가 후선이 된다.
028_1035_a_07L三種善者謂初後善以淸淨脩行爲初善以捨增長爲中善以歡喜爲後善
무엇이 청정한 수행인가. 소위 모든 선을 갖추는 것이다. 무엇이 사를 증장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안정(安定)을 말한다. 무엇이 환희인가. 이것은 관이다. 이와 같이 초선은 세 가지 선을 이룬다.
028_1035_a_09L云何淸淨脩謂諸善資具云何捨增長是謂安云何爲歡喜是謂爲觀如是初禪成三種善
10상을 구족한다는 것은 청정한 수행으로써 얻는 3상과 사를 증장시킴으로써 얻는 3상과 환희로써 얻는 4상이다.
028_1035_a_12L十相具足以淸淨脩行三以捨增長三相以令歡喜四相
【문】청정한 수행으로써 얻는 3상은 어떤 것인가?
028_1035_a_13L以淸淨脩行云何三相
【답】이 선의 장애 그로부터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사마타상을 얻고, 얻기 때문에 그 마음이 용솟음친다. 이것이 청정을 닦음으로써 얻는 3상이라 한다.
028_1035_a_14L是禪障碍從彼心淸淨以淸淨故心得中奢摩他相以得故於彼心跳擲此謂以修淸淨三相
【문】무엇이 사를 증장시킴으로써 얻는 3상인가?
云何以捨增長三相
【답】만약 마음이 청정하면 사를 이루고, 만약 적적을 얻으면 사를 이루고, 한결같이 머물면 사를 이루고 사가 증장한다. 이것을 3상이라 한다.
028_1035_a_17L若心淸淨成捨若得寂寂成捨一向住成捨而捨增長此謂三相
【문】무엇이 환희로써 얻는 4상인가?
028_1035_a_19L云何以令歡喜四相
【답】이 10상이 생기는 법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이 모든 근에서 일미를 이룸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정진승(淸進乘)을 따라 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능히 수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이것을 4상이라 한다. 이와 같이 초선은 10상을 구족한다.
028_1035_a_20L謂於此十相生法隨逐脩行令成歡喜於此諸根以爲一味成令歡喜隨行精進乘成令歡以能脩行成令歡喜此謂四相是初禪十相具足
028_1035_b_02L25공덕상응이란 소위 초선에서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을 구족하고, 신(信)ㆍ정진ㆍ염ㆍ정ㆍ혜를 구족하고, 초ㆍ중ㆍ후를 구족하고, 염섭(斂攝)을 구족하고, 수행을 구족하고, 적적을 구족하고, 의(依)를 구족하고, 섭수를 구족하고, 종(從)을 구족하고, 관(觀)을 구족하고, 수(修)를 구족하고, 역(力)을 구족하고, 해탈을 구족하고, 청정을 구족하고, 최승청정을 수행하여 25공덕상응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천상의 훌륭한 거처로 적적으로부터 생긴다. 말하자면 희락이 머무는 곳이고, 인간을 초월한 곳이며, 하늘이 거주하는 수승한 곳이다.
028_1035_a_24L二十五功德相應謂初禪覺一心具足慧具足後具足斂攝具脩行具足寂寂具足依具足攝受具足從具足觀具足脩具足力具足解脫具足淸淨具足最勝淸淨脩成住二十五功德相應是天勝居從寂寂生謂喜樂住超越人閒天居勝處
불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숙련된 욕사(浴師)나 욕사의 제자는 좋은 구리그릇[銅槃]에 콩가루와 쌀가루를 담아 물로 개어 환(丸)으로 만드는데, 안팎으로 고루 젖어 서로 붙어서 흩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과 마음을 적적케 하여 능히 희락을 일으키고, 두루 젖도록 부어 붙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한다”3)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처럼 적적에서 생긴 희락으로써 그 몸과 마음에 붙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한다. 숙련된 욕사와 욕사의 제자는 좌선인과 또한 마찬가지이고, 이와 같은 구리그릇[銅槃]은 일체입의 상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028_1035_b_08L如佛世尊敎諸比丘如勤浴師浴師弟子以好銅槃盛豆米屑以水和攪合而爲丸浸潤內外相著不散如是比丘身心寂寂能生喜樂灌令遍濕無所不著如以寂寂所生喜樂於其身心無不著處是勤浴師及浴師弟坐禪之人亦復如是如是銅槃一切入相如是可知
【문】일체입은 어떤 상인가?
028_1035_b_16L一切入何等相
【답】구리그릇은 목욕가루[浴屑]4)를 담는 곳으로 단단하고[堅], 미세하고[細], 빛나는 것이다[光焰]. 이처럼 일체입의 상을 잘 취하면 단단해지고, 희를 일으키면 미세해지고, 청정하기 때문에 빛나게 되니, 심법과 심수법으로 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리그릇은 일체입상과 같고, 심법과 심수법은 목욕가루와 같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28_1035_b_17L如銅槃浴屑處堅細光焰善取一切入相成堅生喜成細淸淨故光心心數法以成事故是謂銅槃等一切入相心心數法如浴屑如是可
【문】목욕가루가 심법ㆍ심수법의 성(性)과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云何浴屑等心心數法性
【답】거친 목욕가루는 이미 화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에 따라 흩날린다. 이처럼 심법과 심수법의 성은 희락을 벗어나면 거칠어지고, 정(定)을 벗어나면 화합하지 않아 5개의 바람과 함께 날아간다. 이것을 이 목욕가루가 심법과 심수법의 성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35_b_21L麤浴屑旣不和合隨風飛散如是心心數法性離喜樂成麤離定不和合與五蓋風共飛此謂是浴屑等心心數法性
028_1035_c_02L무엇이 물과 같은가. 소위 희ㆍ락ㆍ정이다. 물이 목욕가루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여 환(丸)으로 만들듯이, 이와 같이 희락은 심법과 심수법을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여 고정시킨다. 이와 같이 물은 희ㆍ락ㆍ정과 같다. 물을 섞어 서로 붙게 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각ㆍ관을 알아야 한다.
028_1035_c_02L云何水等謂喜樂定如水令浴屑濕軟爲丸如是喜樂令心心數法濕軟爲定如是水等喜樂定如欲水攪令相著如是覺觀可知
【문】무엇이 환(丸)과 같은가?
云何丸等
【답】각과 관이다. 욕사5)는 목욕가루를 구리그릇에 놓고 물을 섞어 손으로 환을 만들고, 환을 만든 뒤에는 젖은 가루들을 모두 합해 한 덩어리의 환을 만들어 흩어져 없어지지 않게 하고는 구리그릇에 놓아둔다.
028_1035_c_05L謂覺觀如欲使以浴屑置於銅槃中以水撓攪以手作丸若作丸已合諸濕屑共作於丸不令散失置銅槃中
이와 마찬가지로 좌선인은 심법과 심수법을 사(事) 중에 저장하여 능히 적적을 생기게 하고, 초선에서 희락으로 물을 삼고 각관으로 손을 삼아 섞어서 환을 만들어 능히 적적을 생기게 하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심법과 심수법을 희락과 서로 따르게 하여 하나의 환을 이루고, 선심을 산란하지 않게 하여 선사(禪事)에 놓아둔다.
028_1035_c_08L如是坐禪人心心數法貯於事中能生寂寂初禪以喜樂爲水以覺觀爲以攪作丸能生寂寂所成心心數喜樂相隨成一丸禪心不散亂於禪事
이와 같이 환은 각ㆍ관과 같다. 목욕가루가 안팎으로 고루 젖어 서로 붙어서 흩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좌선인은 초선에서 몸의 위와 아래 머리에서 발까지, 발에서 해골[髑髏]ㆍ피부ㆍ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희락이 두루 가득하게 하여, 불퇴에 머문다. 이와 같이 범천에 머물게 된다.
028_1035_c_13L如是丸等覺觀如浴屑內外遍濕相著不散如是坐禪人初禪於身上下從頭至足從足至髑髏皮髮內外喜樂遍滿住於不退如是成住梵天
【문】희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색법(色法)이 아니고 대상(對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몸에 두루 머물 수 있는가?
028_1035_c_17L名喜樂非色法無有對相以遍住於身
【답】명(名)은 색(色)에 의지하고, 색은 명색에 의지한다. 따라서 만약 명이 이미 희를 이루었다면 색도 또한 희를 이룬다. 만약 명이 이미 낙을 이루었다면 색도 또한 낙을 이룬다. 또 색은 낙으로부터 생겨 몸이 부드러움[猗]을 일으키게 하고, 모든 몸은 그 색을 이루어 의락(猗樂)한다. 이런 까닭에 무애이다.
028_1035_c_18L名者依色色依名色是故若名已成喜色亦成喜若名已成樂色亦成樂復次色從樂生令身起猗一切身成彼色猗樂是故無碍
범천에 태어나게 하는 공덕이란 다음과 같다. 초선이 이루어지는데 세 종류가 있으니, 소위 하ㆍ중ㆍ상이다.
028_1035_c_21L令生梵天功德者初禪成有三種
028_1036_a_02L만약 수승한 연[勝緣]을 관하지만 5개를 잘 없애지 못하고 여의자재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것을 하선(下禪)이라 한다. 만약 수승한 연을 관해 5개를 잘 없앴지만 여의자재에 이르지 못했다면6) 이것을 중선(中禪)이라 한다. 만약 수승한 연을 관해 5개를 잘 없애고 여의자재에 이르렀다면 이것을 상선(上禪)이라 한다.
028_1035_c_23L若觀勝緣不善除五蓋不至如意自在是謂下禪若觀勝緣善除五蓋至如意自在是謂中禪若觀勝善除五蓋至如意自在是謂上禪
여기에서 좌선인이 만약 하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범천의 종류로 태어나며 그 수명은 1겁의 3분의 1이다. 만약 중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반겁이다. 만약 상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대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1겁이다.
028_1036_a_03L於是坐禪人若脩下初禪命終生於梵天種類彼壽命一劫三分若脩中初禪命終生於梵天壽半劫若修上初禪命終生大梵天壽命一劫
이 범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이루는 데 네 종류가 있으니, 어떤 사람은 퇴분(退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주분(住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승분(勝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달분(達分)을 이룬다.
028_1036_a_07L是生梵天功德成有四種有人成退分人成住分有人成勝分有人成達分
근기가 둔한 사람은 욕에 머물러 방일하는 작의와 함께 하며 이 선(禪)을 일으키기 때문에 퇴분을 이룬다. 또 2선7)을 행하더라도 퇴분을 성취하는데 얽힘[纏]이 너무 큰 까닭에 정진을 못하게 한다. 만약 사람이 처음부터 이미 악한 각(覺)을 일으키고도 능히 없애지 못했다면 이 큰 얽힘 때문에 속히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선사업(禪事業)을 즐기고, 대화를 즐기고, 수면을 즐기면 정진에 머물지 못하는데 이런 까닭에 물러나게 된다.
028_1036_a_09L是鈍根人欲住放逸作意相隨成起此禪故成退分復次以三禪行成於退分最大纏故令不精進若人從初已起惡覺不能消除以此大纏故成速退其於樂禪事業樂話語樂睡眠不住精進是故成退
【문】누가 물러나고, 어떻게 물러나는가?
誰退何以退
【답】급질번뇌(急疾煩惱)가 있으면 퇴실이 일어난다는 설이 있고, 또 유유번뇌(悠悠煩惱)로 인해 물러난다는 설이 있고, 또 사마타를 잃으면 물러나게 된다는 설이 있고, 또 존재하는 상[有相]에 대해 오랫동안 닦지 않아 이런저런 곳에서 일으킬 수 없어서 정을 얻지 못해 퇴분을 이룬다는 설이 있다.
028_1036_a_15L有說若急疾煩惱成起退失復說悠悠煩惱故退復說若失奢摩他成退復說於有相久不脩行於彼彼處不能令起以不得定成退分
만약 근기가 둔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그 법의 염(念)을 얻어 선주분(禪住分)을 이룬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뜻에 따라 제2선을 얻고, 각이 없는 작의와 함께 하여 그 선의 승분(勝分)을 일으키게 된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뜻에 따라 비바사나를 얻고, 과환을 혐오하는 생각[厭患想]을 좇아 작의를 일으켜 뜻에 따라 번뇌에 오염됨이 없이 달분을 이룬다.
028_1036_a_19L若鈍根人住不放逸得彼法念成禪住分利根人住不放逸隨意得第二禪覺作意相隨起成彼禪勝分利根人住不放逸隨意得毘婆舍那隨逐厭患想作意成起隨意無染成禪達分
解脫道論卷第四


  1. 1)동틀 무렵의 하늘빛을 말한다.
  2. 2)만다라(曼陀羅, Mandala)는 원(圓)을 뜻한다.
  3. 3)이 비유문은 『중아함』98 등, 여러 곳에 나온다. 욕사(浴師)는 목욕시켜주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자를 뜻한다.
  4. 4)욕설(浴屑)은 앞에서 말한 콩가루와 쌀가루로 지금의 비누에 해당한다.
  5. 5)원문은 “욕사(浴使)”나 ‘욕사’(浴師)의 오자로 추측된다.
  6. 6)“여의자재에 이르지 못하면”의 원문은 “지여의자재(至如意自在)”이다. 문맥상 ‘불(不)’자가 누락된 것으로 추측되어 ‘불(不)’자를 삽입해 번역하였다.
  7. 7)원문은 “삼선(三禪)”이나 문맥상 ‘삼(三)’은 ‘이(二)’의 오자로 추측된다. ‘이(二)’자로 교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