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엇이 지일체입(地一切入)이며, 무엇을 닦음[修]으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味]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功德)인가? 일체입이란 무슨 뜻인가? 또 몇 종의 지(地)가 있으며, 어떤 흙에서 상을 취하는가? 무엇이 만다라를 만드는 법인가? 무엇이 수지법(修地法)인가?
【답】지(地)를 의지해 이 마음에 상(相)이 생기는 것을 지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이 산란됨이 없이 머무는 것을 수(修)라 한다. 지상(地想)에 잘 낙착(樂著)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고, 버리지 않는 것을 맛[味]이라 하고, 의식[意]에 다른 생각[異念]이 없는 것을 처(處)라 한다.
무엇이 공덕인가. 열두 가지 공덕이 있어 지일체입으로부터 그 상(相)이 쉽게 얻어진다. 일체시ㆍ일체행에서 마음의 움직임[行]에 장애가 없고, 뜻대로 하는 신통으로 땅위를 걷듯 물위를 걷고 허공을 노닐며, 갖가지 색변ㆍ초념숙명변 및 천이계변(天耳界辯)을 얻어 따라서 훌륭한 세계로 가고 감로를 변(邊)으로 한다.
028_1028_c_02L딱딱함[堅]이 자상지계(自相地界)가 되니, 이것을 자상지라 한다. 만약 손으로 직접 파거나 남을 시켜 파게 해서 만든 것이라면 이것을 작지(作地)라 한다.
028_1028_b_22L堅爲自相地界,是謂自相地。若手自掘、若敎人掘,造作所成,是謂作地。
(지는) 네 가지 색을 이루니, 소위 백색ㆍ흑색ㆍ적색 및 여명색(如明色)1)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자상지를 의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백색ㆍ흑색ㆍ적색은 제외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만약 자상지를 관하면 이것으로부터는 피분상(彼分相)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백색ㆍ흑색ㆍ적색을 취하면 색일체입을 닦는 것이 된다. 무엇 때문인가. 자상지를 관찰하더라도 백색ㆍ흑색ㆍ적색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수행대상을 손으로) 만들었건 만들지 않았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하며, 새벽빛과 같은 상[如明相]이 나타나면 마땅히 그 상을 취해야 한다.
【답】만약 좌선인이 땅에 만다라를 만들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적적한지 살펴야 한다. 절의 방사나 석실에서 지내거나 혹은 나무아래에 머물러야지 햇빛이 들지 않아 캄캄한 곳이나 비인(非人)이 다니는 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곳에서 사방으로 1심(尋)만큼 물을 뿌려 청결히 하고, 그 땅을 말려 쓸어야 한다. 그곳에서 새벽빛과 같은 상이 나타날 때 흙의 색깔을 지성(地性)과 서로 발기시키고, 적당한 양을 잘 헤아려 위의를 공경히 하고는 기물(器物)을 가져다 흙을 물에 개어 풀이나 나무토막을 집어내고, 분뇨나 씨앗을 제거하고, 천을 이용해 앙금을 거른다. 그리고는 정결한 땅에 앉을 자리를 깔고, 빛을 차단하고, 선좌(禪座)를 놓는다.
028_1029_a_02L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자[規]로 원을 만들고, 원 안에는 평평하게 하여 어떠한 흔적도 없게 한다. 그런 뒤에 진흙을 땅에 발라 나머지 색과 섞이지 않게 하고, 다른 색과 섞이지 않게 하여 땅을 편안케 한다. 아직 마르지 않았으면 잘 덮어 보호하고, 만약 말랐으면 다른 색으로 그 밖을 두른다. 혹은 미사(米篩) 크기로, 혹은 소뢰(搔牢) 크기로, 혹은 원(圓)ㆍ방(方)ㆍ삼각ㆍ사각으로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답】만약 좌선인이 지일체입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마땅히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고, 또 출리(出離)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028_1029_a_09L答:若坐禪人欲脩地一切入,從初當觀欲過患,復應觀出離功德。
【문】왜 욕의 과환을 관해야 하는가?
028_1029_a_10L問:何故應觀欲過患?
【답】욕이란 기미(氣味)가 적은 까닭에 우고(憂苦)가 많으니, 이곳에는 과환이 많다. 욕이란 뼈다귀의 비유와 같나니 기미가 적기 때문이고, 욕이란 고깃덩어리의 비유와 같나니 많은 것이 들러붙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을 거슬러 횃불을 잡는 비유와 같나니 따라서 태우기 때문이고, 욕이란 염(炎)과 탄(炭)의 비유와 같나니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욕이란 꿈의 비유와 같나니 갑작스레 없어지기 때문이고, 욕이란 빌린 물건의 비유와 같나니 그 힘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욕이란 나무 과일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에 의해 꺾기기 때문이고, 욕이란 칼의 비유와 같나니 자르기 때문이다. 욕이란 창의 비유와 같나니 찌르기 때문이고, 욕이란 독사 머리의 비유와 같나니 가히 두렵기 때문이다. 욕이란 바람에 날리는 솜털의 비유와 같나니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욕이란 환상의 비유와 같나니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어둠이니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욕이란 장애이니 모든 선법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욕이란 어리석음이니 올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028_1029_b_02L 욕이란 열과 같나니 문드러지기 때문이며, 욕이란 형틀이니 묶어놓기 때문이며, 욕이란 도둑이니 공덕의 물건을 훔치기 때문이고, 욕이란 원한이 있는 집이니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욕이란 괴로움이니 모든 과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욕의 과환을 관한 뒤에 마땅히 출리의 공덕을 관해야 한다. 처음 선을 닦고 처음 출가하고부터 모든 선(善)을 닦는 것을 출리라 한다.
【답】번뇌에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 적적한 즐거움에 자재하게 머물고, 고를 견뎌내고 즐거움에 머물면서 잃지 않으며, 여러 가지 일을 널리 구제하여 대과지(大果地)를 얻고, 공양을 받아 2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지혜이고, 이것은 일체선처(一切善處)이니, 이를 삼계를 초월한 것이라 한다.
또 출리라 하는 것은 그 음욕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蓋)가 적적한 것이며, 이것은 허물이 없는 즐거움이며, 이 처(處)는 최승의 지(地)이며, 이 도(道)로 최승을 얻게 된다. 이것은 마음의 때를 청정케 하며, 이 공덕은 수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즐거움은 안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음욕의 과환을 관하고 출리의 공덕을 관한 뒤, 출리에 의지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일으키고, 공경을 일으킨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관하고, 절량식에 의지하고, 의발을 안치하고, 몸에는 게으름이 없고 마음에는 태만이 없게 하여 잠시 행각한다. 잠시 행각한 뒤에는 앉아서 손과 발을 씻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염하고, 법을 염하고, 승을 염한다. 선행을 닦아 염한 뒤에는 환의하도록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능히 이와 같이 구족을 얻었다. 만약 내가 출리를 얻지 못하면 또 오랫동안 편히 정진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해야 한다.”
028_1029_b_22L我能如此得具足。若我不得出離,復不久安精進,是故應作勇猛。
028_1029_c_02L만다라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멍에[軛]나 심(尋)의 길이만큼 떨어져 좌구를 안치해야 하고, 만다라를 마주해 결가부좌를 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안에서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는 잠시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며, 모든 마음을 거두어 일심을 이룬다. 그리고 약간 어렴풋하게 눈을 떠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그 좌선인은 현재 만다라형(曼陀羅形)을 관하는데 3행 즉 등관(等觀)으로써, 방편으로써, 이난(離亂)으로써 상을 취해야 한다.
028_1029_c_05L彼坐禪人現觀曼陁羅形,以三行取相:以等觀、以方便、以離亂。
【문】무엇이 등관으로써 취하는 것인가?
問:云何以等觀?
【답】좌선인은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할 때, 크게 뜬 눈도 아니고 꼭 감은 눈도 아닌 상태로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눈을 크게 뜨면 그 눈이 피로를 느껴 만다라의 자성ㆍ현견의 자성ㆍ피분상(彼分想)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눈을 꼭 감고 만다라를 보면 암혹을 이루고 그 상도 보지 못하게 되어 곧 게으름이 생긴다.
이런 까닭에 크게 뜨거나 꼭 감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기울여 만다라에 머물러야 한다. 마음이 머무는 까닭에 마땅히 사람이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얼굴을 보듯 해야 한다. 거울을 의지해 얼굴을 보면 얼굴 모습이 거울로부터 생기듯, 그 좌선인이 만다라를 관해 그 정상(定相)을 보면 (정상이) 만다라를 의지해 생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등관으로써 관해 상을 취해야 하니, 마음을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등관으로써 상을 취하는 것이다.
이때 보이던 상이 밖으로 흩어져 간격이 없으면, 이럴 때는 간격 안으로 들어오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상이 작게 보이거나 만다라의 반만 보이면, 이럴 때는 만다라가 온전하도록 한 다음에 사방에 가득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때 마음이 산란하거나 마음이 게을러지면, 이럴 때는 도공의 물레처럼 일과를 정해 채찍질해야 한다. 이때 마음이 머묾을 얻으면, 이럴 때는 보이는 만다라가 두루 가득해 이지러짐이 없게 하고 마땅히 사(捨)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방편으로써 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028_1030_a_02L【답】이난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요, 둘째는 너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이요, 셋째는 최고요, 넷째는 최하이다.
028_1030_a_02L答:離亂有四種,一最速作精進、二最遲作精進、三最高、四最下。
【문】무엇이 급하게 정진하는 것인가?
028_1030_a_04L問:云何速作精進?
【답】급하게 마음을 쓰고, 시절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앉아 저녁에 그만두는 등, 몸을 피로하게 하는 것을 급하게 정진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30_a_05L答:謂急疾作意不待時節,早坐晩罷乃至身疲,是謂速作。
【문】무엇이 더디게 정진하는 것인가?
028_1030_a_06L問:云何遲作精進?
【답】작의방편을 벗어나 만다라를 보고는 있지만 공경하는 마음을 쓰지 않고, 자주 일어나고, 자주 조는 것이다. 만약 급하게 정진하면 곧 몸이 나태해지고 마음이 퇴보하며, 마음이 외연을 만나면 각종 유희를 일으킨다. 만약 더디게 정진하면 몸과 마음이 나태하고 게을러져 각종 수면을 일으킨다.
최하란 물러남과 유희를 인연한 까닭에 업처에 대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의 행처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자기가 한 것에 대해 성을 내게 되고, 그 성냄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또한 오랫동안 각관에 싫증을 내어 승(勝)으로부터 그 마음이 퇴락하면 근심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낮아지게 된다.
이 좌선인은 만약 마음이 급히 서둘러 유희하는 곳에 퇴락한 경우에는 염근(念根)과 정근(定根)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유희를 버리게 하고, 만약 마음이 지어나가다 게으른 곳에 빠진 경우에는 염근과 정진근으로써 거두고 제압해 그 게으름을 버리게 하며, 만약 교만한 사람이 탐욕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現知)를 이루어 욕심을 버리게 하고, 낙심한 사람이 성냄에 빠진 경우에는 현지를 이루어 성냄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이 4처에서 청정심을 이루고, 전일(專一)한 마음을 이룬다. 이것은 3행으로 인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면 뜻에 따라 만다라형을 보게 된다는 것을 밝혔다. 만약 전일한 마음이면 상(想)이 일어나게 된다.
028_1030_b_02L무엇을 취상이라 하는가. 만약 좌선인이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현재에서 만다라를 관한다면 만다라로부터 상(想)이 생긴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때는 멀게, 어떤 때는 가깝게, 어떤 때는 왼쪽에, 어떤 때는 오른쪽에, 어떤 때는 크게, 어떤 때는 작게, 어떤 때는 추하게, 어떤 때는 멋있게, 어떤 때는 많게, 어떤 때는 적게 보인다. 눈으로 만다라를 관하지 않고 작의방편으로 취하면 상이 일어나니, 이것을 취상이라 한다.
그로부터 여러 차례 자의하기 때문에 피분상이 일어난다. 피분상이라 하는 것은 작의할 때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나는 것이지, 만다라를 보고난 후에 생긴 마음 속 생각이 아니다. 그저 마음을 쓰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앞에서 관한 바와 같이 나타나고, 만약 멀다고 작의하면 곧 멀리 보이고, 만약 가깝다거나 왼쪽ㆍ오른쪽ㆍ전ㆍ후ㆍ내ㆍ외ㆍ상ㆍ하라고 작의해도 또한 마찬가지로 마음을 따라 곧 나타난다. 이것을 피분상이라 한다.
상(相)이란 무슨 뜻인가. 인(因)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그 모든 악과 불선법에는 상의 일어남이 있다”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것이 인연의 뜻이다. 또 말하자면 지(智)의 뜻이 상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상(想)을 지어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지의 뜻이라 한다. 또 상(像)의 뜻이 상의 뜻이니, 스스로 그 얼굴의 영상을 보고 형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피분(彼分)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때 상을 얻은 좌선인은 그 스승의 처소에서 공경심을 일으켜 승상(勝相)을 취해 마땅히 수호하여야 한다. 만약 수호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린다.
028_1030_b_18L爾時得相,坐禪人於其師所起恭敬心。取於勝相應當守護,若不守護是則當失。
【문】무엇이 마땅히 지키는 것인가?
問:云何應守護?
【답】세 종류의 행으로 마땅히 상을 지켜야 하나니, 이와 같이 악을 떠남으로써, 선(善)을 수행함으로써, 항상 닦음으로써 수호해야 한다.
028_1030_b_20L答:以三種行應守護相,如是以離惡故、以脩行善故、以常作故。
028_1030_c_02L무엇이 불선(不善)을 떠나는 것인가. 작무(作務)를 즐기고, 갖가지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잠을 즐기고, 모임을 즐기고, 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를 절제하지 않고, 초야와 후야에 일어나 선을 닦지 않고, 배운 것을 공경하지 않고, 악한 친구가 많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닦는 것은 마땅히 떠나야 한다. 좋지 않은 시절에 먹고, 자고, 누워서는 안 되나니, 그것들을 대치하는 그런 선을 항상 닦아야 한다.
【답】그 좌선인은 이런 상을 잘 취해 보배를 생각하듯이 항상 그 공덕을 관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행하고, 항상 닦고, 많이 닦고, 낮이건 밤이건 많이 수행하고, 기대건 눕건 마음으로 기꺼이 반연하고, 처처에 마음을 놓아 상을 취하고, 이미 취했으면 취하고 나서는 일으키며, 일으키고 나서는 그에 따라 관하고, 관하고 나서는 닦고, 닦음에 있어 때때로 만다라를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항상 닦음으로써 상을 보면, 그는 이와 같이 현재에서 상을 수호하고 혹 자재함을 얻기도 한다. 만약 상이 마음을 따르면 선(禪)의 외행(外行)을 얻고, 만약 외행이 마음을 따르면 그로부터 안(安)을 얻는다.
【답】이 일[事]은 마음으로부터 작의하며, 산란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개(蓋)를 조복한다. 단지 아직 각(覺)ㆍ관(觀)ㆍ희(喜)ㆍ락(樂)ㆍ일심(一心) 및 신(信) 등의 5근을 수행하지 않아 비록 정력(定力)을 얻었어도 생각이 오히려 일어난다. 이것의 선의 외행이다. 안(安)이란 이 외행으로부터 이러한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수행력을 얻으면 이 각과 신 등의 법이 일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나니, 이것을 안이라 한다.
이 5개를 조복하는 까닭에 안을 이루고, 선의 외행으로 수승한 정[勝定]을 얻는다. 만약 수승한 정을 얻는다면 이것을 안이라 한다. 만약 몸과 마음에 아직 적적함을 얻지 못했다면 외정(外定)에서 마음은 움직이나니, 마치 파도에 떠있는 배와 같다. 만약 몸과 마음에 이미 적적함을 얻었다면 안정된 곳에 처하여 움직이지 않나니, 마치 배가 바람이 없는 물 위에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근(根)에 힘이 없는 까닭에 하는 일[事]에서 외선행(外禪行)이 오래 머물지 못하나니,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028_1031_a_02L모든 근에 힘이 있는 까닭에 일에 안정되게 오랫동안 머무나니, 마치 힘이 있는 사람과 같다. 수행이 자재하지 않은 까닭에 선의 외행이 불화합을 이루나니, 마치 사람이 경을 외우는 것을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수행이 자재한 까닭에 안정되게 화합을 이루나니, 마치 사람이 항상 경을 외우면 잊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개(蓋)를 잘 조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맹인과 같아 선의 외행에서 눈이 멀게 되니, 이와 같은 것들은 청정하지 못한 가르침이다. 만약 개를 잘 조복하면 눈이 멀지 않게 되고 안정(安定)을 이루게 되니, 이와 같은 것들은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상의 자재로부터 시작하여 성제(性除)에 이르기까지를 외행(外行)이라 하고, 성제가 무간(無間)한 것 이것을 안(安)이라 한다.
【답】선(禪)에 가까운 까닭에 이것을 외행이라 한다. 마치 길이 마을에 가까우면 이를 마을길이라 하는 것처럼 뜻은 같지만 이름이 다르다. 안이란 무슨 뜻인가. 안이란 화합의 뜻으로 만다라에 이르는 것과 같다. 출리선(出離禪)은 안과 다른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외행에 머물러 마땅히 일체입을 증장시켜야 하고, 혹은 안정(安定)에서 혹은 초선에서 마땅히 증장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작의하고, 이와 같이 자재를 얻어 이와 같이 차례대로 바퀴[輪] 만하게, 일산[蓋] 만하게, 나무 그림자 만하게, 복전(福田) 만하게, 이웃집 만하게, 마을 만하게, 곽(郭) 만하게, 성(城) 만하게, 이와 같이 차례대로 점차 증장시켜 이 대지에 변재하게 한다. 높고 낮은 강과 산, 나 나무와 가시덤불, 평평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모든 것, 이와 같은 일체를 작의하지 않고, 나아가 큰 바다 만하게 지상(地想)을 작의하고, 나아가 증장할 때 마음의 소행은 최승의 정을 이룬다.
028_1031_b_02L인연에 따라 10행으로써 안정의 방편을 일으켜야 한다. 첫째는 그 처(處)의 명정(明淨)을 관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근에 대한 관을 널리 일으키는 것이고, 셋째는 상(相)을 완전히 아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제어해 잘 조절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게으름을 조복시키는 것이며, 여섯째는 마음에 미착(味著)이 없는 것이며, 일곱째는 마음이 환희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마음이 안정되어 사(捨)를 이루는 것이며, 아홉째는 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을 떠나 정을 배운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열째는 안정에 낙착(樂著)하는 것이다.
【답】세 가지 행으로써 분명처(分明處)를 지을 수 있다. 말하자면 능히 알맞은 식사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며, 시절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며, 위의의 즐거움을 닦는 것이다.
028_1031_b_06L答:以三種行得作分明處,謂能脩調適食樂、修時節樂、脩威儀樂。
모든 근에 대한 관을 널리 일으킨다는 것은 신(信) 등의 5근을 소멸하지 않게 하고 게으름을 떨지 않아 날쌘 말이 끄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028_1031_b_08L遍起諸根觀者,謂信等五根不令消滅、無作懈怠、如快馬乘車。
상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작의한 상(想)을 잘 잡아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것이다. 교사(巧師)가 먹줄을 평등하게 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는 것처럼 작의를 잘 이해하여 급함도 떠나고 아님도 떠나는 것이다.
028_1031_b_10L曉了於相者,善捉意想不急不寬,如巧師繩墨平等無偏,善解作意急離不離。
마음을 제어해 잘 조절하는 것에는 두 종류의 행이 있어 두 종류의 행으로써 마음의 조절을 이룬다. 즉 첫째는 정진을 많이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과도한 경우에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028_1031_b_12L制心令調者,有二種行,以二種行成心調:一多起精進、二心過度處成心調。
혹 음처(婬處)나 갖가지 상(相)이 있는 곳에 머물 때에는 어지러운 생각을 증장시켜 마음의 조절을 이루고, 좌선인이 정진을 많이 일으키는 것이 과도한 경우에도 마음의 조절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행으로써 마땅히 마음을 제어해 조복하고 정진이 일어나게 하면서 늘 중도(中道)로 조절해야 한다. 만약 음처나 갖가지 상이 있는 곳에 갔을 때에는 더욱더 마음의 조절에 힘써 두 가지 행으로써 절복시키고, 갖가지 고통 및 나쁜 과보를 관하고 찾아보아야 한다.
028_1031_c_02L게으른 마음을 제어해 조복시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행으로써 게으른 마음이 된다. 수승한 정[勝定]을 얻지 못하고 마음을 무미건조하게 하기 때문에 게을러지고, 게으름이 많으면 곧 잠자고 싶어진다. 이 좌선인이 만약 수승한 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미착(味著)이 없는 까닭에 게을러졌다면 두 가지 행으로써 마땅히 끊어 없애야 하니, 즉 공덕을 관함으로써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게으르고, 잠자고 싶고, 나태한 마음이 있으면 네 가지의 행으로써 조복할 수 있다. 만약 음식을 지나치게 먹고 게으른 생각을 가진다면, 4위의로 바꾸어 행하고, 스스로 광명상(光明相)을 작의하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물러 마음을 환희케 해야 한다.
낙착(樂著)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3행으로써 무미건조하게 되니, 방편이 적은 까닭에, 지혜가 둔한 까닭에, 적적의 즐거움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의 마음이 만약 무미건조하다면 두 종류의 행으로써 환희를 얻게 한다. 첫째는 공포로 얻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환희로 얻게 하는 것이다. 만약 생ㆍ노ㆍ사 및 4악취를 관해 모든 두려움을 보면 마음에 근심과 고뇌가 생기고, 만약 불ㆍ법ㆍ승ㆍ계ㆍ보시ㆍ하늘을 염하여 6행공덕의 보면 마음에 환희가 생긴다.
마음이 안정되어 사(捨)를 이룬다는 것은 두 가지 행으로써 선의 외지정(外地定)을 이루고, 모든 개(蓋)를 끊음으로써 마음이 정을 이루는 것이다. 혹은 얻은 지(地)에서 선지(禪支)를 일으킴으로써 마음의 정을 이룬다. 이 좌선인이 마음이 안정되고도 두 가지 행이 있다면 버려야 마땅하니,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중도의 방편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떠나야 한다. 안정이건 외행정이건 위의정이건 그 사람에게 이런 것이 없고, 닦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면 공양하거나 그에게서 닦아서는 안 된다. 정을 배운 사람이란 다음과 같다. 만약 안정이 있고, 외행정이 있고, 위의정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따라서 닦고 배워야 하며, 또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028_1032_a_02L【답】그 좌선인이 연기를 잘 이해하고 적적처에 들어가 그 이해한 상을 닦는 정에서 그 마음에 따라 자재하면 그 욕락을 생기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한다. 이로부터 몸과 뜻이 감임(堪任)하며 용(用)이 있음으로써 수지를 얻게 하고, 이로부터 환희가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적당하고 안락한 몸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광명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고, 이로부터 상처를 불쌍히 여김이 생겨 마음이 수지를 얻는다.
상처를 불쌍히 여기는 이것으로 마음이 고요함[靜]을 얻게 하고, 고요한 마음을 잘 취하여 마음이 수지를 얻는다. 이와 같이 잘 취하여 사심(捨心)으로 하여금 수지를 얻게 하고, 무변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을 얻어 수지를 성취한다. 해탈하는 까닭에 그것이 일법미(一法味)를 이루고, 일미(一味)로써 마음이 수지를 얻어 수행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수승함과 오묘함으로부터 마음이 증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수지에 머물러 안정의 방편을 일으키고, 이와 같이 연기를 잘 이해하고 나아가 마음을 수지하면 오래지 않아 정을 일으킨다.
또 벗어남에 다섯 종류가 있다. 즉 복리(伏離)ㆍ피분리(彼分離)ㆍ단리(斷離)ㆍ의리(猗離)ㆍ출리(出離)이다. 무엇이 복리인가. 즉 초선을 닦아 5개(蓋)를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피분리인가. 즉 달분정(達分定)을 닦아 모든 견해를 억누르는 것이다. 무엇이 단리인가. 즉 출세간도를 닦아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의리인가. 즉 과를 얻었을 때의 즐거움이다. 무엇이 출리인가. 즉 열반을 말한다.
028_1032_b_02L욕(欲)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욕처(欲處)요, 둘째는 욕번뇌이다. 천당 및 사람이 좋아하는 색ㆍ향ㆍ미ㆍ촉을 욕처라 한다. 이 욕처에서 욕에 물든 사유를 일으키는 것을 욕번뇌라 한다. 이 욕으로부터 마음으로써 별리(別離)하고, 억누름으로써 별리한다. 이것 원리이고, 이것이 출리이고, 이것이 해탈이고, 이것이 불상응이니, 이것이 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불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한다. 첫째는 자성(自性), 둘째는 상응(相應), 셋째는 생연성(生緣性)이다. 이 세 가지 불선의 근본, 즉 탐ㆍ진ㆍ치를 자성이라 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수ㆍ상ㆍ행ㆍ식 이것을 상응이라 한다. 그로부터 생기는 신업ㆍ구업ㆍ의업 이것을 연성이라 한다. 이 세 가지 불선법을 멀리 벗어나는 것, 이것이 출이고, 이것이 탈이고, 이것이 불상응이니, 이것이 불선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또 욕을 벗어난다는 것은 탐욕의 개(蓋)를 벗어나는 것이고, 불선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나머지 개를 벗어나는 것이다.
028_1032_b_12L復次離欲者,離貪欲蓋。離不善法者,謂離餘蓋。
【문】불선법을 벗어나라고 설하면 욕이 바로 불선으로써 이미 그 가운에 포함된다. 왜 따로 음욕을 벗어나라고 설하는가?
028_1032_b_13L問:以說離不善法,欲是不善已在其中,何故別說離婬欲?
【답】음욕은 출(出)로 대치(對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욕은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욕을 벗어난 것을 부처님께서는 “출”이라 설하셨다. 초선을 얻었더라도 욕상(欲想)과 상응하여 작의하면 이 퇴분법을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까닭에 욕으로써 번뇌와 화합한다. 욕이 만약 별리하면 일체번뇌도 또한 별리한다. 이러한 까닭에 달리 욕을 벗어나라고 설한 것이다.
028_1032_c_02L또 욕을 벗어난다는 다음과 같다. 이미 출을 얻었다면 욕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불선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성내지 않음을 얻으면 성냄을 벗어나게 되고, 명상(明相)을 얻으면 게으름과 수면을 벗어나게 되고, 어지럽지 않음을 얻으면 조희(調戱)를 벗어나게 되고, 후회하지 않음을 얻으면 후회함을 벗어나게 되고, 안정을 얻으면 의심을 벗어나게 되고, 지혜를 얻으면 무명을 벗어나게 되고, 정사유를 얻으면 사념(邪念)을 벗어나게 되고, 환희를 얻으면 즐겁지 않음을 벗어나게 되고, 마음이 즐거움을 얻으면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고, 일체선법을 얻으면 곧 일체불선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3장(藏)에서 “탐하지 않음[不貪]으로 충만한 까닭에 욕에서 벗어남을 성취한다. 성내지 않음[不瞋]ㆍ어리석지 않음[不癡]으로 충만한 까닭에 불선법에서 벗어남을 성취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또 욕에서 벗어남을 신리(身離)라고 설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을 심리(心離)라고 설한다. 욕에서 벗어남이란 욕각(欲覺)을 끊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진에해각(瞋恚害覺)을 끊는 것을 말한다. 또 욕에서 벗어남이란 욕락(欲樂)을 피하는 것을 말하고, 불선법에서 벗어남이란 몸에 집착한 게으름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또 지일체입에 들어가 지상(地相)에 의지해 간단없이 각사유(覺思惟)를 이루는 것을 각이라 하나니, 마음으로 경을 외우는 것과 같다.
028_1032_c_19L復次入地一切入,依地相無閒成覺思惟,是名爲覺,如心誦經。
【문】각(覺)은 무엇을 상(想)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는가?
問:覺者何想?何味?何起?何處?
028_1033_a_02L【답】각이란 의(猗)를 닦는 상(想)을 맛으로 삼고, 하심(下心)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일어남으로 삼고, 상(想)을 행처(行處)로 삼는다. 무엇이 관인가. 관을 닦을 때에 관이 택하는 바에 따라 마음이 수사(隨捨)에 머무는 것, 이것을 관이라 한다. 이것으로 상응하여 성취하므로 초선에 관이 있다. 또 지일체입의 정에 든 사람이 지상(地相)을 닦음에 따라 마음이 관하는 바를 모든 뜻을 관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문】관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028_1033_a_03L問:觀何相?何味?何起?何處?
【답】관이란 선택에 따르는 것이 상이다. 마음을 부드럽게[猗] 하는 것이 맛이다. 견(見)의 각에 따르는 것이 그 처이다.
028_1033_a_04L答:觀者,隨擇,是相,令心猗是味,隨見覺是處。
【문】각과 관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1033_a_05L問:覺、觀何差別?
【답】방울을 흔들었을 때와 같나니, 처음의 소리가 각이라면 뒤의 소리는 관이 된다. 또 마음의 소연(所緣)과 같나니, 처음의 것이 각이 되고 뒤의 것이 관이 된다. 또 선(禪)을 구하는 것이 각이고, 수호하는 것이 관이다. 또 기억은 각이고, 놓지 않는 것은 관이다. 또 거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각이고, 세밀한 마음으로 수지하는 것은 관이다.
어떤 처에 각이 있으면 그 처에는 관이 있지만, 어떤 처에 관이 있으면 그 처에는 각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각이 없는 경우도 하다. 삼장에서 “처음에 마음을 사(事)에 두는 것을 각이라 하고, 각을 얻었어도 정해지지 않은 것을 관이라 한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남녀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남녀가 이와 같은 색,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알아보는 것을 각이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계가 있는지 계가 없는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귀한 자인지 천한 자인지 관찰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각은 찾아서 데려오는 것이고, 관은 지키고 유지하며 좇는 것이다. 새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열심히 날갯짓하는 것과 같은 것이 각이고, 유유히 떠도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처음 가르치는 것이 각이고, 오랫동안 가르친 것이 관이다. 각으로써 수호하고, 관으로써 찾고 가려낸다. 각으로써 사유하며, 관으로써 따라서 사유한다. 각행은 악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관행은 선(禪)을 수지하는 것이다.
사람이 힘이 있어 입을 다물고 경을 외워 그에 따라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관이다. 소각(所覺)을 각하고, 각하고 나서는 능히 아는 것과 같나니, 사변(辭辯) 및 요설변(樂說辯)을 관하는 것은 각이고, 의변(義辯)ㆍ법변(法邊)을 관하는 것은 관이다. 마음이 승(勝)을 이해하는 것은 각이고, 마음이 분별을 이해하는 것은 관이다. 이것이 각과 관의 차별이다.
028_1033_b_02L적적(寂寂)으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적적이라 하는 것은, 소위 5개를 벗어난 것을 적적이라 한다. 또는 색계의 선근, 또는 초선의 외행이라고 설하고, 또는 선심(禪心)이라고 설한다. 이런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니, 지수(地水)에서 꽃이 피면 지수화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 욕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의 기쁨이니 이것을 욕생희(欲生喜)라 한다. 무엇이 신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믿음이 깊은 사람의 마음의 기쁨 및 도예가 등을 보고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이 불회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청정하게 계를 지키는 사람이 자주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이 적적으로부터 생기는 희인가. 초선에 든 사람의 기쁨이다. 무엇이 정으로부터 생긴 희인가. 2선에 들어 기쁨을 내는 것이다. 무엇이 보리분에서 생기는 기쁨인가. 제2선에서 출세간도를 닦는 기쁨이다.
또 희에 다섯 종류가 있다고 설하나니, 소위 소희(笑喜)ㆍ염염희(念念喜) ㆍ유희(流喜)ㆍ월희(越喜)ㆍ만희(滿喜)이다.
028_1033_b_16L復次說喜五種,謂笑喜、念念喜、流喜、越喜、滿喜。
028_1033_c_02L 소희란 가랑비에 몸이 젖어 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과 같고, 염염희는 생하고 멸하며 머묾이 없어 밤에 내리는 비와 같으며, 유희란 기름이 아래로 오랫동안 흘러내려도 그 몸을 완전히 뒤덮을 수는 없는 것과 같고, 월희란 일체를 두루 에워싸듯이 마음에 환희를 일으켰다가 오래지 않아 곧 잃어버리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장(伏藏)을 보는 것과 같으며, 만희란 몸에 머물러 두루 가득한 것으로 천둥이 비를 머금은 것과 같다. 여기에서 소희(小喜) 및 염염희는 믿음으로써 외행을 일으키고, 유희는 힘을 가지고 외행을 일으키며, 월희는 만다라에서 정(正)과 부정(不正)이 모두 일어나 처처에 방편이 되고, 만희는 안처(安處)에 생겨난다.
무엇이 인락인가. 부처님께서 “계의 즐거움은 늙음을 견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인락이라 하니, 바로 낙의 공덕이다. 자구락이란 부처님께서 “부처님께서 세상의 즐거움을 일으킨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적적락이란 정(定)과 사(捨)를 일으키고, 선정을 소멸하는 것이다. 무번뇌락이란 부처님께서 “제일가는 열반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소위 즐거움을 누리는 것[受樂]이다. 이 논에서는 수락이 바로 가희 즐겨야 할 것이다.
희와 낙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마음이 용약하는 것이 희이고, 마음이 유연한 것이 낙이다. 마음의 부드러움[猗]이 낙이고, 마음의 고요함이 희이다. 거친 것이 희이고, 미세한 것이 낙이다. 희는 행음(行陰)에 포섭되고, 낙은 수음(受陰)에 포섭된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즐거움이 있지만 즐거움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 한다.
028_1034_a_02L또 욕과 불선법을 벗어나는 것이란 소위 능히 끊고, 대치하는 것이다. 각관이 있다는 것은 소위 선(禪)의 상을 말한다. 적적으로 이루어진 희락이란 상사선(相似禪)을 말한다. 정수(正受)에 들어 머문다는 것은 초선에 들어 5분(分)을 벗어나고, 5분(分)과ㆍ3선(善)을 성취하고, 10상(想)을 구족하고, 25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福)과 선(善)으로 수승하고 오묘한 거처인 범천으로 올라가 태어난다.
잠[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식(食)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둘째는 시절에 따라 생기는 것이고, 셋째는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028_1034_a_12L眠有三種:一從食生、二從時節生、三從心生。
만약 마음에서 생겼다면 사유로써 끊는다. 음식이나 시절로부터 생겼다면 이는 아라한의 잠이니, 마음에서 생기지 않고 덮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잠이 음식 및 시절로부터 생겼다면 정진으로써 끊을 수 있다. 아누루타기 “나는 처음 누(漏)를 다했을 때 마음이 잠들지 않음을 얻어 지금 55세가 되었다. 그 사이에 음식과 시절로 인한 누음[臥]을 끊은 지 이미 25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색이란 한결같이 심수번뇌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이것을 알 수 있다.
028_1034_a_20L答:色者一向成心數煩。惱如我見人飮酒及食,是則可知。
【문】만약 수면이 신법(身法)이고, 해태가 심수법(心數法)이라면, 왜 두 법이 합하여 하나의 개(蓋)를 이루는가?
028_1034_a_21L問:若眠身法、懈怠心數法,何故二法合成一蓋?
【답】이 두 종류의 법은 사(事)가 하나이고 상(相)이 하나이니, 소위 피곤함[疲]과 게으름[懈]이 함께 하나를 이룬다.
028_1034_a_23L答:此二種法,一事一相,所謂疲懈共爲一。
조(調)란 마음이 적적하지 않은 것이고, 회(悔)란 마음으로 한스러워하며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 상이 이미 같기 때문에 하나의 개를 이룬다.
028_1034_a_24L調者心不寂寂,悔者心恨不定,其相旣等故成一蓋。
028_1034_b_02L의(疑)는 마음의 집착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네 종류의 의(疑)가 있다. 첫째는 사마타(奢摩他, Samatha)의 난(難)이며, 둘째는 비바사나(毘婆舍那, Vipassanā)의 난이며, 셋째는 그 둘 모두의 난이며, 넷째는 모든 비법(非法)에서의 난이다. 여기에서 구족하여 사마타를 얻게 되었더라도 이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몸에 대해 의심하여 ‘내가 감히 적적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적적을 얻을 수 없을까’ 하며 그것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이것을 사마타의 난이라 한다.
혹 사성제에 대하여, 혹은 삼세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이것을 비바사나의 난이라 한다. 혹 불법승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이것을 둘 모두의 난이라 한다. 혹 국성(國城)ㆍ도로나 혹은 남녀ㆍ성명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이것을 비법의 난이라 한다. 이 경에 대한 의심은 적적의 난이라 한다. 이것은 취할만한 것이다.
개(蓋)란 무슨 뜻인가. 소위 승(乘)을 장애한다는 뜻, 덮는다는 뜻[覆義], 번뇌라는 뜻, 묶는다는 뜻[縛義]이다. 이것에는 다른 뜻이 없다.
028_1034_b_11L蓋者何義?謂障碍乘義。覆義、煩惱義、縛義、此無異義。
【문】여러 가지 미세한 결박이 있으니, 소위 부(覆)ㆍ뇌(惱) 등이다. 왜 단지 5개만을 설하는가?
028_1034_b_13L問:有諸細結,謂覆惱等,何故但說五蓋耶?
【답】집집(集執)으로써 취해 다섯 가지를 이룬다. 또 음욕의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탐욕을 포섭하고, 진에의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불선법을 포섭하고, 해태ㆍ수면ㆍ조회ㆍ의에 대한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어리석은 불선법을 포섭한다. 이와 같이 5개에 대한 집착으로써 능히 일체의 번뇌를 포섭하고, 이러한 상(相)으로써 5개를 이룬다. 5분을 성취한다는 것은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을 말한다.
028_1034_c_02L【답】선지(禪支)에 의해 선을 이룬다. 선지를 떠나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달리 다른 선은 없다. 마치 수레의 부품 하나하나에 의지해 수레를 설하고, 그 부품을 떠나서는 수레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군인에 의지해 군대를 설하고, 군인을 떠나서는 군대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지에 의지해 선이라 하니, 그 지를 떠나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종류이기에 선이라 하고, 나눌 수 있기에 지라 한다. 사(事)를 설명해 선이라 하고, 공덕을 설명해 지라 한다. 제(制)에 의지해 설명하면 선이라 하고, 성제(性制)에 의지해 설명하면 지라 한다.
【답】각은 사심(事心)을 따라 스스로 편안함을 얻고, 관은 지심(持心)을 따른다. 각관이 혼잡하지 않으면 방편을 일으키는데, 만약 방편이 구족되면 희와 낙이 생긴다. 만약 방편을 일으켜 구족하게 생기게 되면 희심(喜心)이 증장하고 낙심이 원만해진다. 이 네 가지 공덕으로 마음은 어지럽지 않음을 성취하고,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정을 얻는데 이것을 집상(執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집착은 다섯 가지를 이룬다.
또 개(蓋)를 대치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가 된다. 초개(初蓋)의 대치는 초선이고, 나아가 5개의 대치는 5선이다. 각은 초선에서 승지(勝支)가 되어 각으로써 욕을 없앤다. 만약 각으로 정정(定正)에 들면 다른 지(支)도 또한 일어난다. 5지 가운데 관은 제2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희는 제3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낙은 제4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일심은 제5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승지로써 다섯 가지가 된다.
【답】만약 마음이 청정하면 사를 이루고, 만약 적적을 얻으면 사를 이루고, 한결같이 머물면 사를 이루고 사가 증장한다. 이것을 3상이라 한다.
028_1035_a_17L答:若心淸淨成捨,若得寂寂成捨,一向住成捨而捨增長,此謂三相。
【문】무엇이 환희로써 얻는 4상인가?
028_1035_a_19L問:云何以令歡喜四相?
【답】이 10상이 생기는 법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이 모든 근에서 일미를 이룸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정진승(淸進乘)을 따라 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능히 수행함으로써 환희를 성취하는 것, 이것을 4상이라 한다. 이와 같이 초선은 10상을 구족한다.
불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숙련된 욕사(浴師)나 욕사의 제자는 좋은 구리그릇[銅槃]에 콩가루와 쌀가루를 담아 물로 개어 환(丸)으로 만드는데, 안팎으로 고루 젖어 서로 붙어서 흩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과 마음을 적적케 하여 능히 희락을 일으키고, 두루 젖도록 부어 붙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한다”3)라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처럼 적적에서 생긴 희락으로써 그 몸과 마음에 붙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한다. 숙련된 욕사와 욕사의 제자는 좌선인과 또한 마찬가지이고, 이와 같은 구리그릇[銅槃]은 일체입의 상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답】구리그릇은 목욕가루[浴屑]4)를 담는 곳으로 단단하고[堅], 미세하고[細], 빛나는 것이다[光焰]. 이처럼 일체입의 상을 잘 취하면 단단해지고, 희를 일으키면 미세해지고, 청정하기 때문에 빛나게 되니, 심법과 심수법으로 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리그릇은 일체입상과 같고, 심법과 심수법은 목욕가루와 같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28_1035_c_02L무엇이 물과 같은가. 소위 희ㆍ락ㆍ정이다. 물이 목욕가루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여 환(丸)으로 만들듯이, 이와 같이 희락은 심법과 심수법을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여 고정시킨다. 이와 같이 물은 희ㆍ락ㆍ정과 같다. 물을 섞어 서로 붙게 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각ㆍ관을 알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좌선인은 심법과 심수법을 사(事) 중에 저장하여 능히 적적을 생기게 하고, 초선에서 희락으로 물을 삼고 각관으로 손을 삼아 섞어서 환을 만들어 능히 적적을 생기게 하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심법과 심수법을 희락과 서로 따르게 하여 하나의 환을 이루고, 선심을 산란하지 않게 하여 선사(禪事)에 놓아둔다.
이와 같이 환은 각ㆍ관과 같다. 목욕가루가 안팎으로 고루 젖어 서로 붙어서 흩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좌선인은 초선에서 몸의 위와 아래 머리에서 발까지, 발에서 해골[髑髏]ㆍ피부ㆍ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희락이 두루 가득하게 하여, 불퇴에 머문다. 이와 같이 범천에 머물게 된다.
【문】희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색법(色法)이 아니고 대상(對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몸에 두루 머물 수 있는가?
028_1035_c_17L問:名喜樂,非色法、無有對相,何以遍住於身?
【답】명(名)은 색(色)에 의지하고, 색은 명색에 의지한다. 따라서 만약 명이 이미 희를 이루었다면 색도 또한 희를 이룬다. 만약 명이 이미 낙을 이루었다면 색도 또한 낙을 이룬다. 또 색은 낙으로부터 생겨 몸이 부드러움[猗]을 일으키게 하고, 모든 몸은 그 색을 이루어 의락(猗樂)한다. 이런 까닭에 무애이다.
범천에 태어나게 하는 공덕이란 다음과 같다. 초선이 이루어지는데 세 종류가 있으니, 소위 하ㆍ중ㆍ상이다.
028_1035_c_21L令生梵天功德者,初禪成有三種,謂下、中、上。
028_1036_a_02L만약 수승한 연[勝緣]을 관하지만 5개를 잘 없애지 못하고 여의자재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것을 하선(下禪)이라 한다. 만약 수승한 연을 관해 5개를 잘 없앴지만 여의자재에 이르지 못했다면6) 이것을 중선(中禪)이라 한다. 만약 수승한 연을 관해 5개를 잘 없애고 여의자재에 이르렀다면 이것을 상선(上禪)이라 한다.
여기에서 좌선인이 만약 하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범천의 종류로 태어나며 그 수명은 1겁의 3분의 1이다. 만약 중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반겁이다. 만약 상품의 초선을 닦았다면, 목숨을 마쳤을 때 대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1겁이다.
이 범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이루는 데 네 종류가 있으니, 어떤 사람은 퇴분(退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주분(住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승분(勝分)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달분(達分)을 이룬다.
028_1036_a_07L是生梵天功德成有四種,有人成退分,有人成住分、有人成勝分、有人成達分。
근기가 둔한 사람은 욕에 머물러 방일하는 작의와 함께 하며 이 선(禪)을 일으키기 때문에 퇴분을 이룬다. 또 2선7)을 행하더라도 퇴분을 성취하는데 얽힘[纏]이 너무 큰 까닭에 정진을 못하게 한다. 만약 사람이 처음부터 이미 악한 각(覺)을 일으키고도 능히 없애지 못했다면 이 큰 얽힘 때문에 속히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선사업(禪事業)을 즐기고, 대화를 즐기고, 수면을 즐기면 정진에 머물지 못하는데 이런 까닭에 물러나게 된다.
【답】급질번뇌(急疾煩惱)가 있으면 퇴실이 일어난다는 설이 있고, 또 유유번뇌(悠悠煩惱)로 인해 물러난다는 설이 있고, 또 사마타를 잃으면 물러나게 된다는 설이 있고, 또 존재하는 상[有相]에 대해 오랫동안 닦지 않아 이런저런 곳에서 일으킬 수 없어서 정을 얻지 못해 퇴분을 이룬다는 설이 있다.
만약 근기가 둔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그 법의 염(念)을 얻어 선주분(禪住分)을 이룬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뜻에 따라 제2선을 얻고, 각이 없는 작의와 함께 하여 그 선의 승분(勝分)을 일으키게 된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이 불방일에 머무르면 뜻에 따라 비바사나를 얻고, 과환을 혐오하는 생각[厭患想]을 좇아 작의를 일으켜 뜻에 따라 번뇌에 오염됨이 없이 달분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