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9_0162_c_01L

사리불아비담론 제16권
029_0162_c_01L舍利弗阿毘曇論卷第十六


담마야사
담마굴다 등 한역
029_0162_c_02L姚秦罽賓三藏曇摩耶舍共曇摩崛多等譯


10) 도품 ②
029_0162_c_03L非問分道品第十之二
다시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이란 비구가 심(尋)과 사(伺)를 멸하고 안으로 깨끗한 한 마음이 되어 심도 없고 사도 없으며 정(定)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의 행을 성취한 것이다. 따라서 이 비구에게는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으니,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안의 깨끗함과 기쁨과 즐거움과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2_c_04L復次無覺無觀定如比丘滅覺觀淨信一心無覺無觀定生喜樂成就二禪行此比丘故有內淨信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淨信一心是名第二禪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심도 있고 사도 있고 기쁨도 있는 공미정(共味定)을 얻는다. 이 비구는 심과 사는 거칠고, 무심무사정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심과 사는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심과 사가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2_c_10L復次比丘得有覺有觀有喜共味定如比丘觀覺觀麤無覺無觀定寂靜勝比丘觀覺觀麤已覺觀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內淨一心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內淨信一心是名第二禪無覺無觀定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와 기쁨을 지닌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심과 사가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다.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2_c_16L如比丘若行若受教若法相若方便若專心若思惟若觸有覺有觀有喜共味定如比丘行乃至觸親近多修學修學已心向寂靜尊上寂靜傾向寂靜傾向寂靜已覺觀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內淨信一心若入此定者四支正得緣得內淨信一心名第二禪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심과 사는 없고 기쁨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이란 거칠고 기쁨의 마음에는 오히려 슬픔이 있으니 기쁨 없는 즐거움이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이란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 기쁨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초선에 들어서 얻은 사(捨)의 마음은 제3선의 정에 들어서 얻은 사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들의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2선과 제3선의 사이에서 제2선으로부터 제3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029_0163_a_02L復次比丘得無覺無觀有喜共味定比丘觀喜麤喜心猶有悲無喜樂寂靜勝比丘觀喜麤已喜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內淨信無喜樂一心此入初禪捨心不及入第三禪定捨心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內淨信無喜樂一心是名禪閒無覺無觀定第二第三禪閒從二禪趣三禪
다시 비구가 심과 사는 없고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捨)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도 아니고 선들의 사이도 아닌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a_10L次比丘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比丘觀無喜樂麤無喜樂心猶有作不苦不樂捨寂靜勝比丘觀無喜樂麤已無喜樂寂靜正寂靜滅沒除沒除已故有內淨信不苦不樂捨若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內淨不苦不樂捨一心是名非禪非禪閒無覺無觀定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많이 닦고 배우면 마음이 적정함을 향한다. 마음이 적정함을 향한 뒤에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인다. 적정함을 존중하고 높인 뒤에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이러한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도 아니고 선들의 사이도 아닌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a_18L如比丘若行若受教若法相若方便若專心若思惟若觸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如比丘行乃至觸親近多修學多修學已心向寂靜心向寂靜尊上寂靜尊上寂靜傾向寂靜傾向寂靜已喜樂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內淨不苦不樂捨一心是名非禪非禪閒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기쁨을 떠나 사(捨)를 행하고 염과 정지(正智)를 갖추어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여러 성인이 ‘사와 염을 갖추어 즐겁게 행한다’라고 요해한 것과 같은 제3선의 행을 성취한다. 따라서 이 비구에게는 공미정(共味定)의 사(捨)와 염과 정지와 기쁨 없는 즐거움과 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다섯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공미(共味)1)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3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b_03L復次比丘離喜捨行念正智身受樂如諸聖人解捨念樂成就三禪行比丘故有共味定念正智無喜樂一心若入此定者五支正得緣得共味念正智無喜一心是名第三禪無覺無觀定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을 갖춘 즐거움이 있는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우고, 또한 많이 닦고 배운 뒤에는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그리고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공미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다섯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공미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3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b_08L比丘若行若受教若法相若方便專心若思惟若觸得無覺無觀有喜樂共味定如比丘行乃至觸親近多修多修學已心向寂靜尊上寂靜向寂靜傾向寂靜已喜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共味念正無喜樂一心若入此定者得五支正得緣得共味念正智無喜樂是名第三禪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심도 없고 사도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捨)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뒤에 사(捨)와 염과 정지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멸하여도 제4선에 든 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다.이를 이름하여 선들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하니, 제3선에서 제4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029_0163_b_17L復次比丘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如比丘觀無喜樂麤無喜樂心猶有作不苦不樂捨寂靜勝比丘觀無喜樂麤已無喜樂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捨念正智一心此人出息入息滅不及入第四禪者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不苦不樂念正智是名禪閒無覺無觀定第三第四禪閒從三禪趣第四禪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尋)과 사(伺)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우고, 많이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뒤에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멸하여도 제4선에 든 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들의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하니, 제3선과 제4선의 사이에서 제3선으로부터 제4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029_0163_c_03L如比丘若行若受教若法相若方便若專心若思若觸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比丘行乃至觸親近多修學多修學已心向寂靜尊上寂靜傾向寂靜向寂靜已無喜樂寂靜正寂靜滅沒滅沒除已有不苦不樂念正智一心此人出息入息滅不及入第四禪者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不苦不樂念正智一心是名禪閒無覺無觀定第三第四禪閒從第三禪趣第四禪
다시 비구가 괴로움을 끊고 즐거움을 끊고 이미 멸한 우(憂)와 희(喜)와 불고불락의 사와 염을 갖추어 청정한 제4선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기쁨을 갖춘 불고불락의 사와 염과 청정함과 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와 염과 청정함과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수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c_14L復次比丘斷苦斷樂滅憂喜不苦不樂捨念淨成就四禪如比丘有喜不苦不樂念淨一心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不苦不樂念淨一心是名第四禪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심도 없고 사도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불고불락의 사(捨)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든 사람은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3_c_19L復次比丘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比丘觀無喜樂麤無喜樂心猶有作不苦不樂捨寂靜勝比丘觀無喜樂麤已無喜樂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故有不苦不樂念淨一心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不苦不樂念淨一心是名第四禪無覺無觀定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많이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은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여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그리고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되어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4_a_03L如比丘若行若受若法相若方便若專心若思惟得無覺無觀無喜樂共味定如比丘行乃至觸親近多修學多修學已心向寂靜尊上寂靜傾向寂靜傾向寂靜已無喜樂寂靜正寂靜滅沒除滅沒除已有不苦不樂念淨一心若入此定者得四支正得緣得不苦不樂念淨一心是名第四禪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모든 색상(色想)을 떠나고 성냄의 상을 멸하고 그 외 여러 가지 상도 사유하지 않아, 허공은 끝이 없다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공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든 자는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공무변처의 상(想)과 불고불락의 사(捨)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공무변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4_a_12L復次比丘離一切色想滅瞋恚想不思惟若干想成就無邊空處如比丘有空處想不苦不樂捨若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處想不苦不樂一心是名空處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모든 공무변처의 상을 떠나 식별은 끝이 없다고 하는 식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식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식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식무변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4_a_17L復次比丘離一切空處想成就無邊識處行如比丘有識處想不苦不樂捨一心若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識處想不苦不樂是名識處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모든 식무변처의 상을 떠나 무소유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무소유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곧 무소유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무소유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4_a_21L復次比丘離一切識處想成就無所有處行比丘有無所有處想不苦不樂若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所有處想不苦不樂捨一心是名不用處無覺無觀定
다시 비구가 모든 무소유처를 떠나 비상비비상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비상비비상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비상비비상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비상비비상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029_0164_b_03L復次比丘離一切不用處成就非想非非想處行如比丘有非想非非想處想不苦不樂捨一心若入此定者得三支正得緣得想非非想處想不苦不樂一心名非想非非想處無覺無觀定
무엇을 공정(空定)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법 또는 일부의 법에 대해 공(空)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름하여 공정이라고 한다.
다시 공정에는 여섯 가지의 공이 있다.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029_0164_b_08L何謂空定如比丘一切法若一處法思惟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我所亦空如是不放逸觀得定心住正住是名空定復次空定六空內空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
무엇을 내공(內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안[內]의 법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공(空)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내공이라고 한다.
029_0164_b_13L謂內空如比丘一切內法若一處內思惟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我所亦空常空不變易空是不放逸觀得定心住正住是名內
무엇을 외공(外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밖의 법 또는 일부의 밖의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외공이라고 한다.
029_0164_b_18L何謂外空如比丘一切外法若一處外法思惟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我所亦空如是不放逸得定心住正住是名外空
어떤 것이 내외공(內外空)인가.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법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내외공이라고 한다.
029_0164_b_21L云何內外如比丘一切內外法若一處內外法思惟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我空我所亦空如是不放逸觀得定心住正住是名內外空
무엇을 공공(空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공정(空定)의 행을 성취한다. 이 비구가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공공이라고 한다.
029_0164_c_02L何謂空空如比丘成就空定行比丘思惟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我所亦空常空不變易空如是不放逸觀得空定心住正住是名空空
무엇을 대공(大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대공이라고 한다.
029_0164_c_06L何謂大空如比丘一切法思惟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我所亦空如是不放逸觀定心住正住是名大空
무엇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일컫는가. 제일이란 말하자면 열반이다. 비구가 열반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제일의공이라고 한다.
029_0164_c_09L何謂第一義第一謂涅槃如比丘思惟涅槃空知空解空受空以何義空以我空所亦空常空不變易空如是不放逸得定心住正住是名第一義空是六空是名空定
무엇을 무상정(無相定)이라고 일컫는가. 공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 중에서 성스러운 열반을 경계로 삼는 것이니, 이를 무상정이라고 한다.
다시 무상정이란, 행(行)은 상(相)이고 열반은 무상(無相)이다. 행에는 세 가지 상이 있다. 생기[生]와 머묾[住]과 소멸[滅]이다. 열반은 세 가지 상이 없으니, 불생(不生)ㆍ부주(不住)ㆍ불멸이다. 이처럼 행은 상이 있고, 열반은 상이 없다. 열반은 곧 적멸함이고 집이고 구원이고 등불이고 의지처이고 끝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고 귀착점이고 그을림과 뜨거움이 없는 것이고 근심과 고뇌가 없는 것이고, 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나머지 여러 행이 없는 것이다. 이 열반을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이름하여 무상정이라고 한다.
029_0164_c_14L何謂無相定除空若餘定以聖涅槃爲境界是名無相定復次無相定行有相涅槃無相行有三相涅槃無三相不生不住不滅如是行有相涅槃無相槃是寂滅是舍宅是救護是燈明依止是不終沒是歸趣是無燋熱無憂惱是無憂悲苦惱及餘諸行惟涅槃得定心住正住是名無相定
무엇을 무원정(無願定)이라고 일컫는가. 공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으로서 성스러우며 유위인 것을 경계로 삼는 것이니, 이를 무원정이라고 한다.
다시 무원정이란, 원(願)에 두 종류가 있으니 갈애의 집착과 견해의 집착이다. 비구가 행(行)이란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의 집착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뭇 괴로움이라고 사유하여 공(空)이며 무아임은 사유하지 않고도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르니, 비구는 갈애를 단절하고 견해를 단절한다. 이 정은 능히 갈애와 견해를 단절하니, 이를 이름하여 무원정이라고 한다.
029_0164_c_22L何謂無願定除空定若餘定以聖有爲爲境界是名無願定復次無願定願有二種愛著見著比丘思惟行苦依緣壞法不定不足衆苦不思惟空無我得定心住正比丘愛斷見斷此定能斷愛見名無願定
무엇을 사념처(四念處)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또한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또한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느낌[受]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사념처라고 한다.
029_0165_a_06L何謂四念處如比丘內身觀身行勤念正智調悕望世憂外身觀身行勤念正智調悕望世憂內外身觀身行勤念正智調悕望世憂法亦如是是名四念處
무엇을 사정단(四正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을 생하지 않게 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악한 법으로서 이미 생긴 것은 단절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ㅎ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선한 법으로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은 생하게 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선한 법으로서 이미 생긴 것은 머물게 하고 갖추어지게 하고 닦고 잊지 않게 하고 확대하고 증장(增長)시키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정단이라고 한다.
029_0165_a_10L何謂四正斷如比丘惡不善法未生欲令不生欲自勉勝進攝心正斷惡法已生欲令斷起欲自勉勝進攝心正斷善法未生欲令生起欲自勉勝進攝心正善法已生欲令住具足修不忘廣大增長起欲自勉勝進攝心正斷是名四正斷
무엇을 사신족(四神足)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의욕의 정에 의해 단절의 수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다. 그리고 정진의 정ㆍ마음의 정ㆍ염(念)의 정과 혜(慧)의 정에 의해 단절의 수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다. 이를 이름하여 사신족이라고 한다.
사선(死禪)은 선품(善品)2)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29_0165_a_17L何謂四神足如比丘斷行成就修神足精進定心定念定慧定斷行成就修神足是名四神足四禪如禪品所說
무엇을 사무량(四無量)이라고 일컫는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무엇을 자(慈)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에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이미 나를 괴롭혔는데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법으로써 앙갚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5_a_20L何謂四無量謂慈如比丘思惟衆生樂知樂解樂受樂或有衆生曾侵惱比丘比丘於是衆生心障礙不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衆生已侵惱我衆生雖侵損我我法不應報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侵惱我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것은 아니나 지금 괴롭히고 있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나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 중생이 지금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이것은 나의 숙업(宿業)의 과보로서 내가 능히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5_b_06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今侵惱比丘於衆生心障礙不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衆生先未曾侵惱我今現侵惱衆生雖現侵惱我或是我宿業報非我能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侵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괴롭히려고 의욕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5_b_14L或有衆先未曾侵惱比丘今不侵惱當欲侵惱比丘於衆生心障礙不淸淨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 그 중생이 미래에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혹은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내가 만일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5_b_17L衆生先未曾侵惱我今不侵惱當欲侵惱我生雖當欲侵惱或不作或因緣不集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雖欲侵惱我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또한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괴롭히는 경우3),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5_b_23L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今不侵當不侵惱先未曾侵我愛喜適意今現侵惱我愛喜適意者比丘於衆生心障礙不淸淨不親近不解丘如是思惟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지만,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 중생이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혔다고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그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자기를 괴롭혀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5_c_05L衆生先未曾侵惱我不侵惱當不侵惱我所愛喜適意者曾侵惱衆生雖侵惱我愛喜適意者我不應侵惱彼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侵惱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5_c_12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不侵惱當不侵惱先未曾侵惱我愛喜適意者今現侵惱我愛喜適意者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도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힌다고 해도 이것은 숙업의 과보로써 내가 능히 남의 숙업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5_c_16L衆生先未曾侵今不侵當不侵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我愛喜適意者今現侵衆生雖侵我愛喜適意者或是宿業報我能遮他宿業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以侵我我若還報自損甚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도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있지만 미래에 괴롭히려 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6_a_01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先未曾侵惱今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當欲侵惱比丘於衆生心障不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괴롭히려 한다.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미래에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혹은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만일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6_a_06L衆生先未曾侵惱我今不侵惱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今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當欲侵惱衆生雖欲侵惱我愛喜適意者或不作或因緣不集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侵惱我若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또한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한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6_a_14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曾侵惱當不曾侵惱若我不愛喜適意者已曾利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不解比丘如是思惟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생이 과거에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이익되게 했다.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했다고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그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남이 나를 괴롭혀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6_a_19L衆生先未曾侵惱我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曾侵惱當不侵惱若我不愛喜適意者已曾利益若衆生雖已利益我不愛喜適意者我不應侵惱彼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我若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던 자를 이익되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6_b_05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若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益若我不愛喜適意者今利益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近不解丘如是思惟
곧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던 자를 이익되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은 사람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익되게 한다고 해도 이것은 숙업의 과보로서 내가 능히 남의 숙업의 과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029_0166_b_11L衆生先未曾侵惱我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益若我不愛喜適意者今利益衆生雖利益我不愛喜適意者或是宿業報非我能遮他宿業報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我若還報自損甚彼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6_b_18L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혹은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 한다. 이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6_b_21L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益今不利益若我不愛喜適意者當欲利益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
‘이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지만,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 한다. 이처럼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고 하는데, 이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고 하여도, 혹은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029_0166_c_04L衆生先未曾侵惱我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今不利益當欲利益若我不愛喜適意者當欲利益衆生雖欲利益我不愛喜適意者或不作或因緣不集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我若還報自損甚彼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6_c_12L比丘如是思惟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 미래에 이익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와 인연이 없어 문득 제멋대로 그 중생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 비구는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
029_0166_c_14L或有衆先未曾侵惱比丘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者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益今不利益當不利如是比丘無因緣便撗瞋衆生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近
그러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곧 ‘이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 미래에도 이익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 인연이 없어 문득 제멋대로 그 중생에게 화를 내었다. 나는 그 중생에 대해 마음에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하고 있다.
029_0166_c_21L比丘如是思衆生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愛喜適意先未曾侵惱今不侵惱當不侵惱若我不愛喜適意者先未曾利益不利益當不利益我無因緣便撗瞋衆生我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親不解
그런데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029_0167_a_04L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已損我我若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瞋惱心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하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그리고 비구는 친근한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친근한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자(慈)라고 한다.
029_0167_a_07L如比若於東方衆生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南西北方於衆生滅瞋惱心思惟欲令衆生樂知樂解樂受樂如比丘以慈心遍解一方行第二第三第四四維上下切以慈心廣大尊勝無二無量無怨無瞋恚遍解諸世閒行是名慈
무엇을 비(悲)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가, 중생이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본다. 또한 부모ㆍ형제ㆍ자매ㆍ처자ㆍ친족ㆍ권속ㆍ친구ㆍ대신, 또는 지옥 중생ㆍ아귀, 또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 또는 가난하고 천한 귀신의 괴로움을 본다. 그리하여 그 중생을 연민하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7_a_14L何謂如比丘不思惟衆生樂不知樂解樂不受樂比丘見衆生苦受苦父母若兄弟姊妹妻子親屬知識大臣地獄畜生餓鬼若人中貧賤鬼神中貧賤憐彼衆生起悲心或有衆生已侵惱比丘比丘於衆生心障㝵淸淨不親近不解比丘如是思惟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을 연민하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아가 인연이 없어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029_0167_a_21L生曾侵惱我衆生雖侵惱我我不應侵惱彼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衆生憐愍起悲心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乃至無因緣撗瞋如上所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연민하여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연민하여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비구는 슬픔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슬픔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비(悲)라고 한다.
029_0167_b_05L如比丘若於東方衆生滅瞋惱心於衆生憐愍起悲心南西北方衆生滅瞋惱心於衆生憐愍起悲心比丘以悲心遍解一方行第二第三第四維上下一切以悲心廣大尊勝無二無量無怨無恚遍解諸世閒行是名
무엇을 희(喜)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비구가 중생에 대해 연민하지도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비구가, 중생이 즐거워하고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본다. 또한 부모ㆍ형제ㆍ자매ㆍ처자ㆍ친족ㆍ권속ㆍ친구ㆍ대신, 또는 여러 천신과 여러 천신의 아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의 즐거움을 본다. 그리하여 중생에게서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029_0167_b_11L何謂喜如比丘不思惟衆生樂知樂不解樂不受樂比丘於衆生得憐愍不起悲心如比丘若見衆生快樂受樂若父母兄弟姊妹妻子親屬知識大臣若諸天若諸天子若佛若佛弟子於彼衆生得悅喜不依欲染想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중생에게서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나아가 인연이 없어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029_0167_b_17L或有衆生已曾侵惱比丘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解比丘如是思惟衆生已曾侵惱我衆生雖侵惱我我不應侵惱彼我若侵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若我還報自損甚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忍除滅瞋惱心於衆生得悅喜不依欲染想或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至無因緣撗瞋如上所說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며,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희열하는 마음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구는 기쁨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기쁨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희(喜)라고 한다.
029_0167_c_02L比丘若於東方衆生除滅瞋惱心於衆生得悅喜心不依欲染想於南西北方衆生滅瞋惱心於衆生得悅喜心不依欲染比丘以喜心遍解一方行第二第三第四四維上下一切以喜心廣大尊勝無二無量無怨無恚遍解諸世閒行是名喜
무엇을 사(捨)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아울러 연민하는 마음을 얻지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희열을 얻지 않고 욕염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 비구는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捨)를 얻는다. 사람이 두터운 숲 속에 들어가도, 이것은 발다(鉢多)나무이고 저것은 니거타(尼居陀)나무이고, 또는 비리차(毘梨叉)나무ㆍ우두피라(優頭披羅)나무ㆍ가지(家枝)나무ㆍ가비야(加毘耶)나무, 또는 비야라(毘耶羅)나무ㆍ가니가라(家尼柯羅)나무ㆍ미타(彌陀)나무ㆍ이타가(伊陀伽)나무라고 분별하지 않고, 단지 두터운 숲만을 보니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029_0167_c_09L何謂捨如比丘不思惟衆生樂不知樂不解樂不受樂不得憐愍不起悲心不得悅喜不依欲染如比丘但緣衆生故得捨如人入叢林中不分別此是鉢多樹尼居陁毘梨叉樹優頭披羅樹家枝樹毘耶樹若毘耶羅樹家尼柯羅樹陁樹伊陁伽樹但見叢林不分別諸樹
이와 같이 비구도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아울러 연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희열을 얻지 않고 욕염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捨)를 얻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029_0167_c_16L如是比丘不思惟衆生樂不知樂解樂不受樂不得憐愍不起悲心得悅喜不依欲染想但緣衆生故得或有衆生已曾侵惱比丘比丘於衆生心障㝵不淸淨不觀不解比丘如是思惟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를 얻을 뿐이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아가 인연이 없어서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029_0167_c_22L衆生已曾侵惱我衆生雖侵惱我我不應侵惱我若瞋惱衆生則爲自損他已損我若我還報自損甚於彼比丘如是思惟已於衆生堪除滅瞋惱心但緣衆生故得捨有衆生先未曾侵惱比丘乃至無因緣撗瞋如上所說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사(捨)를 얻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사를 얻는다. 그리고 비구는 평정함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서도 단지 평정함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사(捨)라고 한다. 이들을 이름하여 사무량이라고 한다.
029_0168_a_05L如比丘若於東方衆生滅瞋惱心但緣衆生故得捨南西北方衆生除滅瞋惱心但緣衆生故得捨如比丘以捨心遍解一方第二第三第四四維上下一切但以捨心廣大尊勝無二無量無怨無遍解諸世閒行是名捨是名四無量
무엇을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색상을 떠나고 성냄의 상을 멸하고 그 외 여러 상(想)을 사유하지 않아 허공은 끝이 없다고 하는 공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공무변처를 떠나 식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식무변처를 떠나 무소유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무소유처를 떠나 비상비비상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무색정이라고 한다.
029_0168_a_12L何謂四無色定如比丘離一切色想滅瞋恚想不思惟若干想成就無邊空處行離一切空處成就識處行一切識處成就不用處行離一切不用處成就非想非非想處行是名四無色定
무엇을 사향도(四向道)이라고 일컫는가.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 등이다.
029_0168_a_18L何謂四向道向苦道難行苦道速行向樂道難行向樂道速行
무엇을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이 많고 성품에 성냄이 많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많다. 이 비구는 도를 행하매 욕염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어리석음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무딘 수행자이다.
029_0168_a_19L何謂向苦道難行如比丘性多貪欲性多瞋恚性多愚癡是比丘行道欲染故數受憂苦防瞋恚故數受憂防愚癡故數受憂苦是比丘聖五根鈍行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이다.이 비구는 오근이 무딘 수행자이므로 더디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029_0168_b_01L何等五信根精進慧根比丘五根鈍行故證無閒定盡諸漏是名向苦道難行
무엇을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염(欲染)이 많고 성품에 성냄이 많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많다. 이 비구는 도(道)를 행하매 욕염(欲染)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성냄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어리석음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수행인 오근(五根)이 예리한 수행자이다.
029_0168_b_03L何謂向苦道速行如比丘性多貪欲性多瞋恚性多愚是比丘行道防欲染故數受憂苦防瞋恚故數受憂苦防愚癡故數受憂苦是比丘聖行五根利行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이 예리한 수행자이므로 빠르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029_0168_b_07L何等五信根精進慧根比丘五根利行速證無閒定盡諸漏是名向苦道速
무엇을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욕염(欲染)이 적고 성품에 성냄이 적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적다. 이 비구는 도를 행하매 욕염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성냄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어리석음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무딘 수행자이다.
029_0168_b_10L何謂向樂道難行如比丘性欲染性瞋恚少性愚癡少是比丘緣欲染少故不數受憂苦緣瞋恚少故不數受憂苦緣愚癡少故不數受憂苦是比丘聖五根鈍行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에 무딘 수행자이므로 더디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029_0168_b_14L何等五信根慧根比丘五根鈍行證無閒定盡諸漏是名向樂道難行
무엇을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이 적고 성품에 성냄이 적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적다. 이 비구는 도(道)를 행하매 욕염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성냄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어리석음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가장 예리한 수행자이다.
029_0168_b_16L何謂向樂道速行如比丘性少貪欲性少瞋性少愚癡是比丘行道緣欲染少故不數受憂苦緣瞋恚少故不數受憂緣愚癡少故不數受憂苦是比丘聖五根最利行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이 예리한 수행자이므로 빠르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사향도라 한다.
029_0168_b_21L何等五信根精進慧根比丘五根利行證無閒定盡諸漏是名向樂道速行是名四向道
무엇을 사수정(四修定)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사수정과 같다.넷이란 무엇인가. 곧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게 하는 수정(修定),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知見)을 얻게 하는 수정,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게 하는 수정, 그리고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漏盡)을 얻게 하는 수정 등이다.
029_0168_b_23L何謂四修定如世尊說四修定何等有修定親近多修學得現世樂行有修定親近多修學得知見有修定親近多修學得慧分別有修定親近多修學得漏盡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애욕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떠나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심(尋)과 사(伺)를 멸하고 안으로 깨끗한 한 마음으로 심도 없고 사도 없으며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기쁨을 떠나고 사(捨)를 행하고 염과 정지를 갖추고 몸을 즐거움을 느끼며, 여러 성인이 ‘사와 염을 갖추어 즐겁게 행한다’라고 요해하는 바와 같은 제3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고 이미 우(憂)와 희(喜)가 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사와 염을 갖추어 청정한 제4선의 행을 성취한다. 이와 같은 수정(修定)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는다.
029_0168_c_05L何謂修定親近多修學得現世樂行如比丘離欲惡不善離生喜樂成就初禪行滅覺觀淨信一心無覺無觀定生喜樂成就二禪行離喜捨行正智身受樂諸聖人解捨念樂行成就三禪行苦樂先滅憂喜不苦不樂就四禪行如是修定親近多修學得現世樂行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밝음의 생각을 잘 취하고 낮의 생각을 잘 간직하여, 이 비구는 낮에 밝음의 생각을 닦듯이 밤에도 그러하며 밤에 밝음의 생각을 닦듯이 낮에도 그러하면, 마음이 개오(開悟)되어 마음에 가리고 덮는 것이 없어지며, 마음이 닦여져 밝음만이 있다. 이러한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을 얻는다.
029_0168_c_13L何謂修定親近多修學得知見如比丘善取明想善持晝想丘如晝修明想夜亦如是如夜修明晝亦如是以心開悟不覆蓋心修有明此定親近多修學得知見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수(受)의 생기를 알고 수의 머묾을 알고 수의 소멸을 알고, 상(想)의 생기를 알고 상의 머묾을 알고 상의 소멸을 알고, 사유의 생기를 알고 사유의 머묾을 알고 사유의 소멸을 아는 것이다. 이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는다.
029_0168_c_17L謂修定親近多修學得慧分別如比知受生知受住知受滅知想生想住知想滅知覺生知覺住知覺滅此定親近多修學得慧分別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오취온의 생기와 소멸을 아는 것이니, 색을 알고 색의 집기를 알고 색의 소멸을 알고, 수ㆍ상ㆍ행ㆍ식을 알고, 식의 집기를 알고 식의 소멸을 아는 것이다. 이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을 얻는다.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모든 애욕의 생각을 단절하고 근심과 고뇌를 소멸하고 수면과 차단함과 흥분과 후회를 버리고 사(捨)와 염(念)의 청정함으로 사유를 소멸하고 사유를 알고 해탈하여 무명을 단절한다”라고 질문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사수정이라고 한다.
029_0168_c_21L何謂修定親近多修學得漏盡如比丘知五受陰生滅知色知色集知色滅知受知識集知識滅此定親近多修學得漏盡如『波羅延經』所問斷一切欲想滅憂惱捨睡眠遮掉悔捨念先滅覺知覺解脫斷無明是名四修定
무엇을 사단(四斷)이라고 일컫는가. 계단(戒斷)ㆍ미호단(微護斷)ㆍ수단(修斷)ㆍ지연단(知緣斷) 등이다.
029_0169_a_05L何謂四斷戒斷微護斷修斷緣斷
무엇을 계단(戒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눈으로 색을 보되 모습을 취하지 않고 분별하되 안근을 발기(發起)시키지 않고, 항상 스스로 섭수하여 행하고 욕망과 세간의 근심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에 의지하는 것을 금한다. 이처럼 안근을 근신하고 보호하여 안근의 계율을 얻는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으로 법을 알되 모습을 취하지 않고 분별하되 의근을 일으키지 않고, 항상 스스로 섭수하여 행하고 욕망과 세간의 근심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에 의지하는 것을 금한다. 이처럼 의근을 근신하고 보호하여 의근의 계율을 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계단(戒斷)이라고 한다.
029_0169_a_06L何謂戒斷如比丘眼見色不取不分別令發眼根常自攝行莫依悕望世憂惡不善法愼護眼根得眼根戒意知法不取相分別令起意根常自攝行莫依悕望世憂惡不善法愼護意根得意根戒名戒斷
무엇을 미호단(微護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좋은 모습을 취하여 미호(微護)를 일으키는 것이니, 뼈마디이거나 곪아터짐[腫胞], 부어 오름[膖脹], 푸른 어혈[青瘀], 검붉게 멍듦[赤黑], 문드러짐[爛壞], 흩어짐 등이다. 이와 같은 좋은 모습을 관하여 미호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미호단(微護斷)이라고 한다.
029_0169_a_12L何謂微護斷如比丘取善相生微護若骨節若腫胞若胮脹若靑若赤黑若爛壞離散如是觀善相生微護是名微護斷
무엇을 수단(修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염각지(念覺支)를 닦아 탐욕을 떠남에 의지하고 더럽지 않음에 의지하고 갈애의 소멸에 의지하며, 택법각지ㆍ정진각지ㆍ희각지ㆍ경안각지ㆍ정각지 및 사각지(捨覺支)를 닦아 탐욕을 떠남에 의지하고 더럽지 않음에 의지하고 갈애의 소멸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수단(修斷)이라고 한다.
029_0169_a_15L何謂修斷如比修念正覺依離欲依無染依滅愛擇法正覺進正覺喜正覺除正覺正覺修捨正覺依離欲依無染依滅是名修斷
무엇을 지연단(知緣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이나 노지에서 사유하기를, ‘선하지 않고 악한 신행(身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고 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비구는 악한 신행은 참고 단절하며 선한 신행을 닦는다. 그리고 선하지 않고 악한 구행(口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도 있다고 사유하여, 이 비구는 악한 구행을 참고 단절하며 선한 구행을 닦는다. 그리고 선하지 않고 악한 의행(意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도 있다고 사유하여,이 비구는 악한 의행을 참고 단절하며 선한 의행을 닦는다. 이를 이름하여 지연단(知緣斷)이라고 한다.
029_0169_a_19L何謂智緣斷如比丘在樹下露處如是思惟身不善惡行今世及後世如比丘堪忍斷身惡修身善行口不善行報今世及後如比丘堪忍斷口惡行修口善行意不善行惡報今世及後世如比丘堪忍斷意不善行修意善行是名智緣斷

계단ㆍ미호단ㆍ지연단ㆍ수단은
그 자성(自性)을 여래라고 말한다.
비구가 이 법을 수행하면
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단(四斷)의 앎이라고 한다.
029_0169_b_03L戒護緣修斷
自性如來說
比丘行是法
一切苦際盡
是名四斷知

무엇을 오근(五根)이라고 일컫는가. 신근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니, 이를 이름하여 오근이라고 한다. 오력(五力)도 역시 그와 같다.
029_0169_b_05L何謂五根信根進根念根定根慧根名五根五力亦如是
무엇을 오해탈처(五解脫處)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앎으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이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누의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029_0169_b_07L何謂五解脫處謂比丘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未解脫得解脫諸漏未盡得漏盡得無上安隱得安隱
무엇을 다섯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비구를 위해 법을 말씀하시고, 또는 스승이 말하고 또는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梵行者)가 말한 것이니 여래의 말씀 또는 스승 및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의 말에 수순하여 듣고 그런 뒤에 법을 느끼고 뜻을 느낀다. 법을 느끼고 뜻을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이와 같이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 해탈처라고 한다.
029_0169_b_10L何謂五若世尊爲比丘說法若師說若慧梵淨行者隨順如來說若師若慧梵淨行者聽已受法受義受法受義已生悅悅已生喜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定心定已如實知見如比丘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心未解脫得解脫諸漏未盡得漏盡未得無上安隱得安隱是名初解脫處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어서 이전에 들었던 법 그대로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한다.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 그대로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하여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2의 해탈처라고 한다.
029_0169_b_18L復次比丘非世尊非師非慧梵淨行者說如先所聞法廣讀誦通利如比丘先所聞法廣讀誦通利受法受義比丘受法受義已生悅悅已生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定心定已如實知見比丘如是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心未解脫得解脫諸漏未盡得漏盡未得無上安隱得安隱是名第二解脫處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를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를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에 따라 의미를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말하면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029_0169_c_04L復次比丘世尊非師非慧梵淨行者說時非先所聞法廣讀誦通利時如比丘先所聞法通利廣爲他說如比丘隨彼所聞法通利廣爲他說受法受義比丘受法受義已生悅悅已生喜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定心定已如實知見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3의 해탈처라고 한다.
029_0169_c_11L比丘如是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心未解脫得解脫諸漏未盡得漏盡未得無上安隱得安隱是名第三解脫處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를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도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해야 한다.
029_0169_c_14L復次如比丘非世尊非師非慧梵淨行者說時非先所聞法廣讀誦通利時非先所聞法通利廣爲他分別時如比丘先所聞法通利自心分別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에 따라 의미를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면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4의 해탈처라고 한다.
029_0169_c_18L如比丘隨所聞法通利自心分別受法受義比丘受法受義已生悅悅已生喜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定心定已如實知見比丘如是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心未解脫得解脫諸漏未盡得漏盡未得無上安隱得安隱是名第四解脫處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정(定)의 모습을 잘 취하고 잘 사유하여 잘 해탈해야 한다. 비구가 정의 모습을 잘 취하고 잘 사유하여 잘 해탈한 뒤에는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029_0170_a_02L復次比丘非世尊非師非慧梵淨行者說時非先所聞法廣讀誦通利時非先所聞法通利廣爲他分別時非先所聞法通利自心分別如比丘善取定相善思惟善解射比丘善取定想善思惟善解射已法受義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5의 해탈처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오해탈처라고 한다.
오출리계(五出離界)는 계품(界品)4)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29_0170_a_08L受法受義已生悅悅已生喜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心定已如實知見比丘如是不放逸勤念正智寂靜行心未解脫得解諸漏未盡得漏盡未得無上安隱得安隱是名第五解脫處是名五解脫處五出界如界品說
어떤 것이 오관정(五觀定)인가. 정신경(正信經)에서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다시 더 뛰어난 것이 없는 법이 있으니, 세존께서 설법하신대로 정에 들어 관찰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정에 들어 관찰함이 있으니,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몸을 관찰하되 정수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또는 발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겉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정하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入定觀]이라고 한다.
029_0170_a_14L云何五觀定如『正信經』舍利弗白佛言世尊復有無勝法如世尊說法入定觀世尊此入定觀或有沙門婆羅門勤精進勇猛正思惟多學行心如法思惟入入定已觀身從頂至足從足至頂乃至薄皮皆是不淨是名初入定觀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뼈를 관찰합니다. 곧 이 몸 안에는 뼈ㆍ치아ㆍ손발톱 등이 있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두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029_0170_a_20L復次或有沙門婆羅門勤精進勇猛正思惟多學行心如法思惟入定定已不觀皮血肉但觀人骨此身中有骨齒爪是名第二入定觀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식(識)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서 머물고 저 세상에서 머무니, 이 식은 아직 단절되지 않았고 두 세상을 떠나지도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세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029_0170_b_01L復次或有沙門婆羅門勤精進勇猛正思惟多學行心如法思惟入定入定已不觀皮血肉骨但觀人識識住此世他世識未斷不離二世是名第三入定觀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의 식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서 머무니,5) 이 식은 이 세상을 끊고 떠나나 아직 저 세상은 끊고 떠나지 못했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네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029_0170_b_06L復次或有沙門婆羅門勤進勇正思惟多學行心如法思惟入定入定已不觀皮血肉骨復觀人識不住此世不住他世識斷離此世未斷離他世是名第四入定觀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안의 피ㆍ살점ㆍ피부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의 식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 머물지 않으니, 이 식은 두 세상을 잘 끊고 떠났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다섯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029_0170_b_10L復次或有沙門婆羅門勤進勇猛正思惟多學行心如法思惟入定入定已不觀內血肉皮骨復觀人識識不住此世不住他世識善斷離二世是名第五入定
그리고 “이와 같이 더 뛰어난 것이 없는 입정(入定)의 관찰에 의해 세존께서는 잘 아시니 더 뛰어난 자가 없는 분이시며, 또한 세존께서는 잘 통달하셨으니 능히 더 지나칠 자가 없는 분이십니다. 저의 뜻으로 아는 바에 따르면, 어떤 사문ㆍ바라문도 능히 세존께서 아시는 바를 능가한다라고 일컬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라고 하면, 이들을 이름하여 다섯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029_0170_b_15L如是無勝入定觀世尊善知無勝世尊善通達無有能過者如我意所或有沙門婆羅門能稱出世尊知無有是處是名第五入定觀
무엇을 오기해탈법(五起解脫法)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다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해탈을 얻으니, 무엇을 다섯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몸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식물(食物)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모든 행(行)은 무상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세간은 즐겁지 못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몸의 죽음에 관한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능히 해탈을 얻으니, 이를 오기해탈법이라고 한다.
029_0170_b_18L何謂五起解脫法如世尊說五法親近多修學已得解脫何謂五如比丘觀身不淨想觀食不淨想觀諸行無常想觀世不樂想觀身死想如是五法近多修學能得解脫是名五起解脫法
어떤 것이 육념(六念)인가. 염불로부터 염천(念天)에 이르기까지이다. 무엇을 염불이라고 일컫는가.부처님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불이라고 한다. 무엇을 염법(念法)이라고 일컫는가. 법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염승(念僧)이라고 일컫는가. 승가를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승이라고 한다.
029_0170_b_23L云何六念念佛乃至念天何謂念佛佛爲境界念善順不逆是名念佛謂念法以法爲境界念善順不逆名念法何謂念僧以僧爲境界念善順不逆是名念僧
무엇을 염계(念戒)라고 일컫는가. 계율은 말하자면 몸과 말의 계율이다. 이 계율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계라고 한다. 무엇을 염시(念施)라고 일컫는가. 보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이다. 이 보시를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시라고 한다.
029_0170_c_05L何謂念戒戒謂身口戒以戒爲境界念善順不逆是名念戒何謂念施施有二種財施法施以施爲境界念善順不逆是名念施
무엇을 염천(念天)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의 음식을 초월한 화생(化生)의 천신이 있으니, 이 천신은 숙업(宿業)을 관찰하지 않고 숙업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러한 천신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육념이라고 한다.
029_0170_c_08L何謂念天若過摶食化生天彼天不觀宿業不分別宿業以天爲境界善順不逆是名念天是名六念
육공(六空)은 공정(空定)에서 설명한 바6)와 같고 육출리계(六出離界)는 계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무엇을 육명분법(六明分法)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여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明)을 일으키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명을 널리 확대시키게 된다. 무엇을 여섯이라고 일컫는가. 무상함의 생각ㆍ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ㆍ괴로우므로 무아라는 생각ㆍ식물(食物)은 부정하다는 생각ㆍ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는 생각ㆍ죽음의 생각 등이다.
029_0170_c_11L六空如空三昧說六出界如界品說何謂六明分法如世尊說六法親近多修生明得明分能令明廣大何謂六無常想無常苦想苦無我想食不淨一切世閒不樂想死想
무엇을 무상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서 곧 ‘색은 무상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취온의 무상함을 관찰하여 행한다.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유위법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나니, 생기와 머묾과 소멸이다.”
029_0170_c_16L何謂無常想明分法如比丘或樹下露處作是思色無常受想行識無常若如是五受陰觀無常行如世尊說有爲法三相
이와 같이 비구가 생기와 머묾과 소멸을 사유하여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그리고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의 무상함과 수ㆍ상ㆍ행ㆍ식의 무상함을 사유하고 행하는 사람에게 생각과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상함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을 일으키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이를 이름하여 무상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029_0170_c_20L如是比丘思惟生住滅調心修令柔軟柔軟已思惟色無常受想行識無常行人若想憶想是名無常想親近多修學親近多修學已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名無常想明分法
무엇을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색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이것은 괴로움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취온에서 괴로움을 관찰하여 행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색이 생기하고 머물면 곧 괴로움이 생기하니, 병이 있게 되고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이 생기하고 머물면 곧 괴로움이 생기하니, 병이 있게 되고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다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세 가지 괴로움이 있나니, 행고(行苦)와 고고(苦苦)와 변역고(變易苦)이다.”
029_0171_a_02L何謂無常苦想明分如比丘或在樹下露處如是思惟色無常若無常則是苦受想行識無常若無常則是苦如是五受陰觀苦行如世尊說若色生住卽是生苦有病有老死若受想行識生住卽是生苦有病有老死復次如世尊說三苦苦苦變易苦
무엇을 행고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行)은 자성에 있어 괴로움의 형상이고, 괴로움의 자기 모습으로서의 괴로움이다. 이를 이름하여 행고라고 한다.
029_0171_a_09L何謂行苦五受陰行自性苦形式苦自相苦是名行苦
무엇을 고고(苦苦)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은 자성에 있어 괴로움이니, 괴로움이 생기고 바로 생기고 일어나고 바로 일어나고 나타나고 바로 나타나고 성취하고 구족한 뒤에 여러 가지 병을 일으킨다. 곧 열을 원인으로 병이 생기고, 또는 담과 가슴을 원인으로, 또는 바람을 원인으로 또는 지나친 힘을 원인으로 또는 타인의 고뇌를 원인으로 또는 시절의 변화를 원인으로 또는 여러 대종의 어긋남을 원인으로, 음식의 소화 안 됨을 원인으로, 숙업의 과보를 원인으로, 여러 대종의 부조화를 원인으로 병이 생긴다. 그리고 눈병, 귀ㆍ코ㆍ혀ㆍ몸의 병이 생기고 두통과 얼굴의 통증과 입ㆍ치아ㆍ목의 통증과 가슴의 통증이 느껴지는 병이 생기고, 사신병(蛇身病)과 호흡이 곤란한 병과 기침병과 구토병이 생기고, 교병(絞病)과 몸에 열나고 배가 아픈 병이 생기고, 버짐의 막ㆍ옴ㆍ종기ㆍ미풍(微風)의 병ㆍ침음(侵婬)ㆍ종기ㆍ악창ㆍ구더기가 스는 병ㆍ백라(白癩)ㆍ간고(乾枯)ㆍ전광병이 생기고, 치질과 대하적종(㿃下赤腫)과 벌레 먹는 병이 생기니, 벼룩ㆍ이ㆍ모기ㆍ등에ㆍ개미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몸으로부터 ‘한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벌레가 없는 곳이 없다.
029_0171_a_10L何謂苦苦五受陰行自性苦生等生起等起出等出具足成就生種種病因熱生病因痰癊因風因過力因他因時變因諸大相違因食飮不因宿業報因諸大不調生病生眼耳鼻舌身病生頭痛面痛口齒咽胸痛病生蛇身病呼嗐痛謦欬病嘔吐病生絞病身熱腹痛病生癬胞疥瘙微風侵婬瘡癰蛆白癩乾枯癲狂病生痔病㿃下赤腫虫食病等螕蝨蚊蝱蟻子此身乃至一毛處無不有虫
실로 사람의 악창과 종기 위에 다시 독한 종기가 생기는 것처럼 오취온의 행이 성품에 있어 괴로움인 것도 그와 같다. 이처럼 괴로움이 생기고 바로 생기고 일어나고 바로 일어나고 나타나고 바로 나타나고 구족되고 성취되니,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 곧 열을 원인으로 병이 생기고,나아가 한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벌레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를 고고(苦苦)라고 한다.
029_0171_a_22L如人癰腫上生毒腫五受陰行性苦亦如是生等生起等起出等具足成就生種種病因熱生病乃至一毛處無不有虫是名苦苦
무엇을 변역고(變易苦)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은 구르고 변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썩고 다하고 멸하고 끝나고 없어지고 떨어져 소멸한다. 이를 이름하여 변역고라고 한다. 이처럼 비구가 저 행고와 고고와 변역고에 있어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의 괴로움을 사유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의 괴로움을 사유한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이라고 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明)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함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029_0171_b_02L何謂變易苦如五受陰行轉變衰熟壞敗盡滅終沒離滅是名變易苦如比丘於彼行苦苦苦變易苦調心修令柔柔軟已思惟色苦思惟受想行識如行人若想憶想是名無常苦想親近多修學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名無常苦想明分法
무엇을 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곧 ‘색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우므로 무아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우므로 무아이다.’
029_0171_b_09L何謂苦無我想明分法如比丘在樹下露如是思惟色無常若無常卽是苦若苦卽無我受想行識無常若無常卽是苦若苦卽是無我
이러한 생각에서 오취온의 무아임을 관찰하여 행하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색은 무아이다. 색이 자아라면 색은 응당 괴로움과 근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색은 응당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색은 자아가 아닌 까닭에 색은 괴로움과 근심을 받고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아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이 자아라면 식은 응당 괴로움과 근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식은 응당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어야 한다.”
029_0171_b_13L若於此想五受陰觀無我行如世尊說色無我若是我色應不受苦患色應得自在如是有如是非有以色非我故色受苦患色不得自在如是有如是非有受想行識無我受想行識若是我不應受苦患識應得自在如是有是非有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은 무아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아이다’라고 사유한다. 이러한 수행인에게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아의 생각이라고 하며, 이것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을 일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 이를 이름 하여 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029_0171_b_20L如比丘如是調心修令柔軟柔軟已思惟色無我受想行識無我如行人若想憶想是名苦無我想近多修學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名苦無我想明分法
무엇을 식물(食物)은 부정하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식물이란 어떤 것인가. 식물에 네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물질식[摶食]과 촉식(觸食)과 사식(思食)가 식식(識食)이다.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중생에게는 네 종류의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을 먹고 능히 중생은 머물고, 능히 온을 화합시키고, 능히 이익되는 바를 있게 한다. 넷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물질식이고, 둘째는 촉식이고, 셋째는 사식이고, 넷째는 식식이다.
029_0171_c_01L何謂食不淨想明分法何等食食有四種摶食觸食思食識食如世尊說衆生有四種食食此食能令衆生住能令陰和合能有利益何等四一謂摶食觸食思食識食
무엇을 물질식[摶食]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식에 두 종류가 있으니,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다. 무엇을 거친 것이라고 일컫는가. 천신의 깨끗한 음식과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을 제외하고, 또한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물질식이니, 이를 거친 물질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일컫는가. 천신의 깨끗한 음식과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과 또한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이니, 이를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한다.
029_0171_c_06L何等謂摶食摶食有二種何謂麤除天淨食天香食除衣服澡浴調身食若餘摶是名麤摶食何謂細摶天淨食天香食衣服澡浴調身食是名細摶
다시 거친 물질식이란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을 제외하고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을 제외한 나머지 물질식이니, 이를 거친 물질식이라고 한다. 다시 미세한 물질식이란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과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이니, 이를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촉식(觸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촉, 곧 안촉ㆍ이촉ㆍ비촉ㆍ설촉ㆍ신촉ㆍ의촉이니, 이를 촉식이라고 한다.
029_0171_c_11L復次麤摶食除天香食除衣服澡浴食若餘摶食是名麤摶食復次細摶食天香食衣服澡浴調身食是名細摶食何謂觸食六觸眼觸耳鼻舌身意觸是名觸食
무엇을 사식(思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사신(六思身), 곧 색사(色思)ㆍ성사(聲思)ㆍ향사ㆍ미사ㆍ촉사ㆍ법사(法思)이니 이를 육사신이라고 하고, 이를 이름하여 사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식(識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식신(六識身), 곧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니 이를 육식신이라고 하고, 이를 이름하여 식식이라고 한다.
물질식에 음식인 것과 음식 아닌 것이 있고, 촉식ㆍ사식ㆍ식식에도 음식인 것과 음식 아닌 것이 있다. 무엇을 물질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增長)함을 얻고 손상되거나 부서지지 않고 목숨이 줄어들지 않으면 이를 물질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한다.
029_0171_c_15L何謂思食六思身聲香味觸法思是名六思身是名思食何謂識食六識身眼識耳鼻舌身意識是名六識身是名識食摶食或是食或非食識食或是食非食何謂摶食是食若緣摶食得諸根增長不損壞不減壽是名摶食食
어떤 것이 물질식 중 음식 아닌 것인가. 물질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하지 않고 손괴되며 목숨이 줄어들면 이를 물질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촉식ㆍ사식ㆍ식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일컫는가. 식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되고손괴되지 않으며 목숨이 감소하지 않으면 이를 식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일컫는가. 식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하지 않고 손괴되며 목숨이 감소하면 이를 식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한다.
029_0171_c_21L云何摶食非食若緣摶食諸根不增損壞減壽是名摶食非食何謂觸識食是食若緣識食諸根增長損壞不減壽是名識食是食何謂識食非食若緣識食諸根不增長損壞減壽是名識食非食
비구가 물질식을 받을 때는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처럼 부정하다는 생각으로 관찰하고, 촉식ㆍ사식ㆍ식식도 그러해야 한다. 이때 해탈의 생각이 있게 되고 의존심을 멸하고 욕염을 떠나는 것을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음식은 부정하다는 생각이라고 하고,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음식은 부정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029_0172_a_04L比丘受摶食食子肉觀不淨想觸思識食有解射思惟滅依離欲染如行人若想憶是名食不淨想親近多修學已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名食不淨想明分法
무엇을 모든 세간을 즐겁지 않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세간에 대해 싫어하여 떠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지옥 세간ㆍ축생 세간ㆍ아귀 세간ㆍ인간 세간ㆍ천신 세간ㆍ중생 세간, 그리고 행(行)의 세간을 싫어하여 떠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는 이 세간에 대해 취착의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견해에 집착함을 알고, 이 비구는 끊고 떠나서 이와 같은 여러 견해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라는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이름하여 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029_0172_a_09L何謂一切世閒不樂想明分法如比丘於一切世閒厭離不樂地獄世畜生世餓鬼世人世衆生世行世厭離不樂如比丘於此世閒有取心者必執所見如比丘斷離不受如是諸見如行人若想想是名一切世閒不樂想親近多修學已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名一切世閒不樂想明分法
무엇을 죽음의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곧 ‘나는 죽어야 할 법으로서 나에게는 죽음의 환난이 있다. 다른 중생도 역시 죽어야 할 법으로서 죽음의 환난이 있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천신ㆍ인간 및 모든 중생들도 생사에 오고 가니, 중생이라는 이름을 얻은 자는 모두 죽어야 할 법이고 죽음의 환난이 있다.’
029_0172_a_17L何謂死想明分法如比丘或在樹下露處如是思惟我是死法有死過患若餘衆生亦有死法有死過患若地獄餓鬼人天及一切衆生往來生死得名衆生者皆有死法有死過患
이처럼 비구는 온이 부서지고 몸이 버려지는 것을 사유하고 죽음을 기억하니, 비구가 죽음을 사유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을 지향하고 죽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죽음의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죽음의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을 육명분법이라고 일컫는다.
029_0172_a_22L丘思惟陰壞捨身憶念死比丘思惟死知死解死覺死如行人若想憶想是名死想親近多修學已生明得明得明分能令明廣大是謂死想明分法是名六明分法
무엇을 육열인법(六悅因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하고, 기뻐한 뒤에 몸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들고,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이를 이름하여 육열인법이라고 한다.
029_0172_b_04L何謂六悅因法比丘悅已生喜喜已得身除身除已受樂受樂已心定心定已如實知見是名六悅因法
무엇을 무희(舞喜)의 육각지(六覺支)라고 일컫는가. 염각지(念覺支)로부터 사각지(捨覺支)에 이르기까지를 무희의 육각지라고 한다.
무엇을 칠각지라고 일컫는가. 염각지로부터 사각지에 이르기까지이니, 이를 칠각지라고 한다.
029_0172_b_07L何謂無喜六正覺正覺乃至捨正覺是名無喜六正覺何謂七覺念正覺乃至捨正覺是名七正覺
무엇을 칠상(七想)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칠상이 있으니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에 얻는다.” 무엇을 일곱이라고 일컫는가. 부정하다는 생각ㆍ음식을 싫어하는 생각ㆍ모든 세간이 즐겁지 않다는 생각ㆍ죽음의 생각ㆍ무상의 생각ㆍ무상하므로 괴로움이라는 생각ㆍ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 등이다. 먼저 부정하다는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많이 닦고 익힌 뒤에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고 일컫는다.
029_0172_b_10L何謂七想如世尊說七想親近多修學得大功德得至甘露何謂不淨想食厭想一切世閒不樂想死想無常想無常苦想苦無我想不淨想親近多修學多修學已得大果報得大功德得至甘露
무엇을 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비구가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욕심이 물러나고 가라앉고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에 점점 제거되고 다하고, ‘그런 뒤에 등지고 버리고 싫어하게 되고 떠나게 되어 비로소 바로 머물게 된다. 마치 힘줄 또는 새의 날개 또는 두라(頭羅) 풀을 불 속에 던지면 그을리고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고 뒤에 문득 소진하게 되는 것과 같다. 비구도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욕심을 물러나게 하고 가라앉게 하고 나아가게 하지 않으면 뒤에 문득 소진되고 등지고 버려지고 싫어하게 되고 떠나게 되어 비로소 바로 머물게 된다.
029_0172_b_15L以何緣故作是說如比丘心知分別不淨想令欲心退沒不展當漸漸除盡背捨離已正住如筋如鳥羽如頭羅草投於火中燋捲不展後便消盡比丘如是心知分別不淨想令欲心退沒不展後便消盡背捨厭離已正住
그런데 비구가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도 마음에 오히려 애욕의 생각이 흐르고 새는 일이 일어나 본래와 다를 것이 없어 마음이 등지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싫어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바로 머물지 않는다면, 이 비구는 여실히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곧 ‘나는 문득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지 못한 자가 되었고나는 아직 달리 명색(名色)을 증대시키거나 이익되게 하지 못하였고 나는 아직 닦여진 과보를 얻지 못하였다’라고.
029_0172_b_21L如比丘或有心知分別不淨想心於欲想猶生津漏如本無異心不背捨不厭離不正住比丘如實自知我便爲未修不淨想我未增益異名色我未得修果報
비구가 이와 같이 바른 지혜를 갖추면 이 비구는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애욕의 생각이 마음에 흐르고 새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본래와 달라지게 되고 등지고 버리고 싫어하고 떠나고 바로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때 비구는 ‘나는 이미 부정하다는생각을 닦았고 나는 명색을 증대시키고 이익되게 하였고 나는 닦여진 과보를 얻었다’라고 여실히 바로 안다.
029_0172_c_03L如是比丘有正智如比丘心知分別不淨想於欲想心不生津漏於本有異背捨厭離正住比丘如實正我已修不淨想我有增益異名色我得修果報
이 비구는 바른 지혜를 갖추어 부정하다는 생각을 실행하니, 이 생각에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혀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 따라서 이러한 인연으로 말한 것이다. 다시 음식이 부정하다는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
029_0172_c_07L此比丘有正智行不淨想親近多修學已得大果報得大功德得至甘露以是因緣故說如食不淨想親近多修學已得大果報得大功德得至甘露
舍利弗阿毘曇論卷第十六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맛과 함께 하는 것. 여기서 맛이란 육체적인 즐거움이 아직 남아 있음을 은유한 것이다.
  2. 2)제14권 참조.
  3. 3)원문에는 ‘현재에 괴롭히는 경우’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할 경우 ‘과거에 괴롭히는 경우’로 되어야 한다.
  4. 4)제7권 참조.
  5. 5)원문은 저 세상에서 머물지 않으니[不住他世]로 되어 있으나 이는 제5의 입정관(入定觀)의 내용이므로, 저 세상에 머무니[住他世]로 해석하였다.
  6. 6)본 제16권 초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