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9_0294_c_01L오사비바사론(五事毘婆沙論)
029_0294_c_01L五事毘婆沙論卷上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1)
029_0294_c_02L大唐三藏聖教序

태종문황제제(太宗文皇帝製)
029_0294_c_03L太宗文皇帝製



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029_0294_c_04L蓋聞二儀有像顯覆載以含生四時無形潛寒暑以化物是以窺天鑑地庸愚皆識其端明陰洞陽賢哲罕窮其數然而天地包乎陰陽而易識者以其有像也陰陽處乎天地而難窮以其無形也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029_0294_c_11L況乎佛道崇虛乘幽控寂弘濟萬品典御十方擧威靈而無上抑神力而無下大之則彌於宇宙細之則攝於毫氂無滅無生歷千劫而不古若隱若顯運百福而長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29_0294_c_16L今妙道凝玄遵之莫知其際法流湛寂挹之莫測其源故知蠢蠢凡愚區區庸鄙投其旨趣能無疑惑者哉然則大教之興基乎西土騰漢庭而皎夢照東域而流慈
029_0295_a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029_0294_c_20L昔者分形分迹之時言未馳而成化當常現常之世民仰德而知遵及乎晦影歸眞遷儀越世金容掩色不鏡三千之光麗象開圖空端四八之相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029_0295_a_02L於是微言廣被拯含類於三塗遺訓遐宣導群於十地然而眞教難仰莫能一其旨歸曲學易遵邪正於焉紛糾所以空有之論或習俗而是非大小之乘乍沿時而隆替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029_0295_a_07L有玄奘法師者法門之領䄂也幼懷貞敏早悟三空之心長契神情先包四忍之行松風水月未足比其淸華仙露明珠詎能方其朗潤故以智通無累神測未形超六塵而迥出隻千古而無對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029_0295_a_12L凝心內境悲正法之陵遲拪慮玄門慨深文之訛謬思欲分條析理廣彼前聞截僞續眞開茲後學是以翹心淨土往遊西域乘危遠邁杖策孤征積雪晨飛途閒失地驚砂夕起空外迷天萬里山川撥煙霞而進影百重寒暑躡霜雨而前蹤誠重勞輕求深願達周遊西宇十有七年
029_0295_b_01L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029_0295_a_20L窮歷道邦詢求正教雙林八水味道飡風鹿苑鷲峯瞻奇仰異承至言於先聖受眞教於上賢探賾妙門精窮奧業一乘五律之道馳驟於心田八藏三篋之文波濤於口海爰自所歷之國摠將三藏要文凡六百五十七部譯布中夏宣揚勝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029_0295_b_04L引慈雲於西極注法雨於東垂聖缺而復全蒼生罪而還福濕火宅之乾焰#共拔迷途朗愛水之昏波臻彼岸是知惡因業墜善以緣昇墜之端惟人所託譬夫桂生高嶺雲露方得泫其花蓮出淥波飛塵不能污其葉非蓮性自潔而桂質本貞良由所附者高則微物不能累所憑者淨則濁類不能沾夫以卉木無知資善而成善況乎人倫有識不緣慶而求慶方冀茲經流施將日月而無窮斯福遐敷與乾坤而永大



황태자신술성기(皇太子臣述聖記)8)
029_0295_b_15L大唐皇帝述 聖記在春宮曰製
029_0295_c_01L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029_0295_b_16L夫顯揚正教非智無以廣其文崇微言非賢莫能定其旨蓋眞如聖教諸法之玄宗衆經之軌躅也綜括宏遠奧旨遐深極空有之精微體生滅之機要詞茂道曠尋之者不究其源文顯義幽履之者莫測其際故聖慈所被業無善而不臻妙化所敷緣無惡而不翦開法網之綱紀弘六度之正教拯群有之塗炭啓三藏之秘扃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029_0295_c_03L是以名無翼而長飛道無根而永固道名流慶歷遂古而鎭常赴感應身經塵劫而不朽晨鍾夕梵交二音於鷲峯慧日法流轉雙輪於鹿苑排空寶蓋接翔雲而共飛莊野春林與天花而合彩伏惟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029_0295_c_08L皇帝陛下上玄資福垂拱而治八德被黔黎斂衽而朝萬國恩加朽石室歸貝葉之文澤及昆蟲金流梵說之偈遂使阿耨達水通神甸之八川耆闍崛山接嵩華之翠嶺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029_0295_c_13L以法性凝寂靡歸心而不通智地奧感懇誠而遂顯豈謂重昏之夜燭慧炬之光火宅之朝降法雨之澤是百川異流同會於海萬區分義成乎實豈與湯武挍其優劣堯舜比其聖德者哉
029_0296_a_01L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029_0295_c_19L玄奘法師者夙懷聰立志夷簡神淸齠齔之年體拔浮華之世凝情定室匿迹幽巖拪息三禪巡遊十地超六塵之境獨步迦維會一乘之旨隨機化物以中華之無質尋印度之眞文遠涉恒河終期滿字頻登雪嶺更獲半珠問道往還十有七載備通釋典利物爲心以貞觀十九年二月六日奉勅於弘福寺翻譯聖教要文凡六百五十七部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029_0296_a_06L引大海之法流洗塵勞而不竭傳智燈之長焰皎幽闇而恒明自非久植勝緣何以顯揚斯旨所謂法相常住齊三光之明我皇福臻同二儀之固伏見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029_0296_a_10L御製衆經論序照古騰今理含金石之聲文抱風雲之潤治輒以輕塵足嶽墜露添流略擧大綱以爲斯記


오사비바사론(五事毘婆沙論) 상권
029_0296_a_13L五事毘婆沙論卷上


법구(法救) 지음
현장(玄奘) 한역
029_0296_a_14L尊者法救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 분별색품(分別色品) ①
029_0296_a_16L分別色品第 一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게 경례합니다.
이제 저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아비달마[對法]의 바다에 대하여
작으나마 바른 뜻을 살피보고자 합니다.
029_0296_a_17L敬禮佛法僧
我今隨自力
欲於對法海
探少貞實義

제자 등을 가엽게 여겨서
마땅히 해석하여 지혜가 생기게 하고
『오사론(五事論)』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켜
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029_0296_a_19L哀慜弟子等
當釋能生慧
滅愚五事論
令彼覺開發

세우(世友)1) 존자께서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사론』을 지으셨고, 이제 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029_0296_a_20L尊者世友爲益有情製『五事論』我今當釋
029_0296_b_01L【문】왜 이 『오사론』을 해석하고자 하는가?
【답】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낸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낼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해와 달이 비록 밝게 빛나지만 구름 등으로 가리워졌을 때는 밝게 비추지 못하고, 그 가린 것이 제거되면 밝게 비추게 되는 것과 같다. 본 논서의 문장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이미 간략하게 갖가지 수승한 뜻을 밝혔으나 이를 넓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광명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광명이 드러나게 하고자 하여 나는 마땅히 해석을 한다.
029_0296_a_22L何用釋此『五事論』耶爲欲開發深隱義故若未開發此深隱義如有伏藏未開發時世閒無能歡喜受用若爲開發此深隱義如有伏藏已開發時世閒便能歡喜受用又如日月雖具威光雲等翳時不得顯照若除彼翳顯照事成本論文詞應知亦爾雖已略辯種種勝義若不廣釋便不光顯爲令光顯故我當釋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원인을 알았다. 존자는 어떠한 연유로 이 논설을 지었는가?
【답】제자들이 자세히 들어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간략한 것에 의지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 존자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간략한 문장에 의지하여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명료한 깨달음은 금강산과 같아서 모든 사악한 견해[惡見]의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명료하지 않은 깨달음은 갈대꽃 같아서 사악한 견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려 공중으로 휙 돌아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견고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029_0296_b_07L知須釋『五事論』因尊者何緣製造斯有弟子等怖廣聞持欲令依略覺自共相謂彼尊者常作是思云何當令諸弟子等於一切法自相共相依止略文起明了覺以明了覺喩金剛山諸惡見風不能傾動不明了覺如蘆葦花爲惡見風之所飄鼓旋還飄颺猶豫空中如是欲令諸弟子等起堅固覺故作斯論
【문】무엇을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이라고 하는가?
【답】딱딱함[堅]ㆍ습기[濕]ㆍ따뜻함[暖] 등이 모든 법의 자상이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 등이 모든 법의 공상이다. 세간에 비록 모든 법의 자상에 대해서는 능히 아는 자가 있을 수 있지만, 공상에 대해서는 모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제자들이 법의 두 가지 모습에 대해서 여실하게 알게 하고자 이 논서를 지었다.
029_0296_b_16L何謂諸法自相共相堅濕暖等是諸法自相常苦等是諸法共相世閒雖於諸法自相有能知者然於共相皆不能知如是欲令諸弟子輩於二相法能如實知故造斯論
029_0296_c_01L【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연유를 알았다. 이것을 어찌하여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논서 가운데서 다섯 가지 일[五事]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논서를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 데,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의 뜻은 차이가 없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
일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일[自性事), 둘째는 소연의 일[所緣事], 셋째는 묶임의 일[繫縛事], 넷째는 원인이 되는 일[所因事], 다섯째는 거두어들임의 일[攝受事]이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자성의 일만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296_b_21L已知須造『五事論』此復爲何名「五事論」由此論中分別五事是故此論得五事名依處能生事義無異阿毘達磨諸大論師咸作是言事有五種自性事緣事繫縛事所因事攝受事當知此中唯自性事
【문】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다섯 가지 법을 말하는가?
【답】그것의 일과 법의 뜻이 또한 차이가 없다.
029_0296_c_04L若爾何故說有五法事之與法義亦無異
【문】무슨 까닭에 이 논은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을 다루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이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줄어든다거나 늘어난다고 하면 다 힐난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이 논서는 간략하게 모든 법의 체(體)와 종류, 차별을 드러내어 모든 법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거두어들이고자 오직 다섯 가지만을 말한다.
만약 이 다섯 가지를 통틀어 한 가지 법의 이름으로 세운다면, 비록 이 간략하게 말한 것 속에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일 수는 있지만, 심(心) 등의 다섯 가지 법의 체와 종류, 차별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유루(行漏)와 무루(無漏) 등을 말하여 두 가지로 하고, 유학(宜學)ㆍ무학(無學)ㆍ비유학무학(非有學無學) 등을 말하여 세 가지로 하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이 삼계(界)에 묶이지 않는 것 등을 말하여 네 가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9_0296_c_05L故此論唯辯五法有作是說此責非若減若增俱有難故有說此論略顯諸法體類差別不相雜亂攝一切故唯說五若摠於五立一法名是略說攝諸法盡而不能顯心等五法體類差別不相雜亂若說有漏漏等二有學無學非二等三不繫等四應知亦爾
029_0297_a_01L【문】어찌 이름을 열거하지 않고 다섯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겠는가? 무슨 까닭에 논의 맨 앞에 다섯이란 숫자를 세웠는가?
【답】마치 실로 꽃들을 연결한 것은 쉽게 지니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여러 가지 꽃들을 연결하여 쉽게 지닐 수 있어 몸과 머리를 장엄하는 것처럼, 숫자라는 실로 뜻이라는 꽃을 연결하여 쉽게 지니고 있다가 마음의 지혜를 장엄하는 것도 그와 같다. 혹은 먼저 숫자를 세우고 뒤에 그 이름을 열거한다. 이것을 지은 이가 뒤의 의식(儀式)을 따랐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소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설해진 것[所說]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契經)에서 “그대들은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묘한 법을 말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공덕(功德)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필추(苾芻)2)들이여, 법은 바른 견해[正見]이고, 삿된 견해는 법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무아(無我)를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무아를 법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법이란 지닐 수도 있고, 기를 수[長養]도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지닐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기를 수가 있다.
029_0296_c_13L豈不列名卽知有五何故論首先標五數縷繫花易受持故謂如以縷連繫衆易可受持莊嚴身首如是數縷連繫義花易可受持莊嚴心慧或先標數後列其名是製作者舊儀式故知法聲義有多種謂或有處所說名如契經說汝應諦聽吾當爲汝宣說妙法或復有處功德名法如契經苾芻當知法謂正見邪見非法復有處無我名法如契經說諸法無我當知此中無我名法法謂能持或能長養能持於自長養望他
【문】무슨 까닭에 이 논 가운데서 먼저 색법(色法)을 다루는가?
【답】모든 법 가운데 색이 가장 거칠기[麤] 때문이다. 이는 모든 식의 소연(所緣)인 대상이기 때문이고,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에 들어간다’는 것은 두 개의 감로문이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親)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3)이다.
부정관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들어진 색[所造色]을 관(觀)하고, 지식념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드는[能造] 바람[風]을 관한다.
029_0297_a_02L何故此中先辯色法一切法中色最麤故是一切識所緣境故與入佛法爲要門故謂入佛法者有二甘露門不淨觀持息念依不淨觀入佛法者觀所造色依持息念入佛法者觀能造風
【문】무슨 뜻에 의지하여 그것을 색이라 하는가?
【답】차츰 쌓이고, 차츰 깨어지고, 종자를 심어 자라게 하고, 원수와 친한 이를 만나게 하여 능히 깨어지게 하고, 능히 이루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색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변하고 무너지기[變壞]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다. ‘변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곧 괴롭고 무너질 만하다는 뜻이다. 어떤 설명에서는 “변하고 장애[變礙]가 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029_0297_a_08L依何義故說之爲漸次積集漸次散壞種植生長會遇怨親能壞能成皆是色義佛說變壞故名爲色變壞卽是可惱壞義有說變礙故名爲色
【문】과거ㆍ미래의 극미(極微)와 무표색(無表色)은 모두 변하지도 않고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색이라고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답】그들도 역시 색이다. 색의 모습[色相]을 갖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색은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이미 변하고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미래의 모든 색도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앞으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기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눈은 보지 않지만,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볼 수 있기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그 모습을 갖기 때문이다. 이도 역시 그와 같다.
하나하나의 극미는 비록 변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지만, 모이게 되면 변하고 장애가 되는 뜻이 이루어진다. 모든 무표색도 비록 변하고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의지하는 바에 따르므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다. ‘의지하는 바’란 무엇인가? 4대종(大種)을 말한다. 저들이 변하고 장애가 되므로 무표색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혹은 많은 부분을 따르므로 단식(段食)이라고도 하며, 혹은 마음 안에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전의 업[先業]을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029_0297_a_12L過去未來極微無表皆無變礙應不名色彼亦是色得色相故過去諸色雖無變礙而曾變礙故立色名未來諸色雖無變礙而當變礙故立色名如過未眼雖不能見而曾當見故立眼名得彼相故此亦應爾一一極微雖無變礙而可積集變礙義成諸無表色雖無變礙隨所依故得變礙名所依者何謂四大種由彼變礙無表名色如樹動時影亦隨動或隨多分如名段食或表內心故名爲色或表先業故立色名
029_0297_b_01L색이란 무엇인가?
【문】존자는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런 말을 하는가?
【답】앞에서 간략하게 말한 것을 이제 넓게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혹은 볼 수 있고 유대인 색[可見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 없고 유대인 색[不迦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도 없고 무대인 색[不迦見無對色]이다. 모두 거두어들여서 ‘모든 존재하는 색[諸所行色]’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란, 이 모든 색에 색이 거두어들여져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029_0297_b_01L色云何者尊者何故復說此前所略說今欲廣辯若有見有對色若無見有對色若無見無對色摠攝名爲諸所有色言一切者謂此諸色攝色無餘
4대종(大種)을 말해 보자.
【문】무슨 까닭에 대종이 네 가지뿐인가?
【답】협존자(脇尊者)4)가 말한다.
“이러한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만약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면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법상(法相)과 어긋나지 않게 네 가지를 말함이 과실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한다.
“외도(外道)가 대종에 다섯 가지가 있다5)고 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오직 네 가지만을 말하였다. 그들은 허공도 역시 대종이라고 집착한다.”
029_0297_b_05L四大種者何故大種唯有四耶脅尊者曰此責非理減若增俱有疑故不違法相說四無有作是說爲遮外道大種有五唯說四彼執虛空亦是大種
【문】어찌하여 허공은 대종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답】허공은 대종의 모습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허공은 크지만 종(種)이 아니다. 상주하는 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덕 묘음(妙音)6) 존자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허공과 대종은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허공이 비록 크다고 하지만 본체는 종이 아니다. 또한 모든 대종이 몸을 이룰 수 있다면 많은 부분이 유정의 업의 이숙(異熟)에 포섭되지만, 허공은 그 업의 이숙의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허공은 결코 대종이 아니다.
029_0297_b_09L何故虛空不名大種虛空無有大種相謂大虛空是大非種以常住法無造作故大德妙音亦作是說虛空大種其相各異虛空雖大而體非種諸大種若能成身多是有情業異熟虛空無彼業異熟相是故虛空定非大種
【문】말한 대종의 뜻은 무엇인가?
【답】종이면서 또한 커다란 것을 대종이라고 한다. 마치 세간에서 대지를 대왕(大王)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029_0297_b_16L所說大種其義云何種亦大故名大種如世閒說大地大
【문】이 말한 것 가운데서 종이란 무슨 뜻인가?
【답】많이 쌓여서 장애가 되고 커져서 사건으로 판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종이라고 이름한다.
029_0297_b_18L此中所說種是何義能多積能大障礙能辦大事故名爲種
【문】이 4대종은 어떤 일을 하는가?
【답】이 4대종은 모든 만들어진 색을 만든다. 이 4대에 의지하여 쌓인 것을 색이라 한다. 커다란 장애하는 색은 모두 자라난다. 이와 같은 것을 대종의 일이라 한다.
029_0297_b_19L此四大種作何事業此四能造諸所造色謂依此四諸積集色大障礙色皆得生長如是名爲大種事業
029_0297_c_01L【문】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인[因]인가? 조건[緣]인가? 만약 이것이 원인의 뜻이라면, 4대종은 만들어진 색에 대하여 다섯 가지 원인[因]7)은 모두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만든다는 것이 원인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조건의 뜻이라면, 모든 만들어진 색의 경우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법들이 모두 증상연(增上緣)이다. 이는 오로지 4대종이 능히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원인의 뜻이다. 비록 4대종이 만들어진 색에 있어서 상응하는 등등의 다섯 가지 원인의 뜻은 없으나, 다시 따로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이 있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조건의 뜻이다. 비록 만들어진 색의 경우 그 자성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법이 증상연이지만, 4대종은 이 만들어진 색의 가까운 증상연이다. 나머지의 법들은 가깝지 않다. 마치 눈과 색이 안식(眼識)의 조건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뛰어난 조건을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029_0297_b_22L造是何義爲因爲緣若是因義此四大種於所造色五因皆無如何可言造是因義若是緣義諸所造色除自餘法皆增上緣是則不應唯四能造有作是說造是因義雖四大種於所造色無相應等五種因義而更別有生等五因卽是生養五復有說者造是緣義雖所造色除其自性餘一切法皆增上緣而四大種是所造近增上緣非所餘法如說眼色爲眼識緣彼說勝緣此亦應爾
【문】4대종이 아닌 색이 있는가? 또한 대종은 만들어진 색이 아닌가?
【답】있다. 1대종 혹은 2대종 혹은 3대종이라고 말한다. 이 1ㆍ2ㆍ3대종은 4대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대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9_0297_c_10L頗有是色非四大種亦非大種所造色耶謂一或二或三大種此一二三不名四故又諸大種非所造故
【문】어찌된 까닭에 대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답】원인인 색과 결과인 색의 모습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대종이 만들어진 것에 포섭된다면, 4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3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4대종이 능히 1대종을 만든다면, 땅[地] 등도 역시 땅 등을 또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모든 법이 응당 자성을 기다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자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조건들이 모여서 작용이 있다.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3대종이 모여서 1대종을 만든다면, 원인인 요소가 이미 없으므로 능히 만들 수가 없다. 만들어진 색과 같이 원인은 반드시 대종을 갖추어야 한다.
029_0297_c_13L故大種非所造耶因色果色相各異故或諸大種若所造攝爲四造一三造一耶若諸大種四能造一地等亦應還造地等是則諸法應待自性然一切法不待自性但藉他緣而有作用若諸大種三能造一因數旣闕應不能造如所造色因必具四
【문】이미 대종과 만들어진 색을 다 알았으나, 또한 이 두 종류의 차별된 모습도 듣고자 한다. 무엇을 대종이라고 하는가? 그 모습은 어떠한가?
【답】땅 등의 계를 대종이라 하고, 딱딱함 등의 성질을 그 모습이라고 한다.
029_0297_c_20L已摠了知大種所造復欲聞此二種別相何謂大種其相云何地等界名大種堅等性是其相
029_0298_a_01L【문】만약 딱딱한 성질 등이 이 땅 등의 모습이라면, 만들어진 모습[所相]과 만드는 모습[能相]은 어찌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가?
【답】이 둘이 하나라고 할지라도 어떤 과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바사부(毘婆沙部)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성과 나, 물건의 모습인 본성 등은 이름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모든 법은 자성을 떠나서 모습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열반(涅槃)이 적정(寂靜)을 모습으로 삼고 적정을 떠나서 따로 열반이 있지 않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그와 같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이 가운데 딱딱함의 성질은 딱딱한 부분이고, 딱딱함이란 본체는 종류를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딱딱한 성질은 땅의 경계이다. 그러나 이 딱딱한 성질의 차별은 한이 없다. 내법(內法) 가운데서는 손톱과 머리카락 등의 차이가 있고, 외법(外法) 가운데서는 구리와 주석 등의 차이가 있다. 또한 내법 가운데서도 손과 발 등의 딱딱함에 차이가 있고, 외법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딱딱한 성질의 차이는 한이 없다.
029_0297_c_23L若堅性等是地等相所相能相豈不成一許此成一亦有何過故毘婆沙作如是說自性我物相本性等名言雖殊而義無別不可說諸法離自性有相如說涅槃寂靜爲相非離寂靜別有涅槃此亦應然故無有過此中堅性卽堅分堅體約種類說堅性是地界然此堅性差別無邊謂內法中爪髮等異外法中有銅錫等殊又內法中手足等堅異外法亦爾故堅性無邊
【문】만약 딱딱한 성질이 공통된 모습[共相]에 포섭된다면, 어찌하여 땅 등의 자신만의 모습[自相]이라고 말하는가?
【답】딱딱한 성질이 비록 않지만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마치 땅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장애가 됨을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색온이라고 한 것처럼, 나타난 것은 이미 하나이므로 공통된 모습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딱딱한 성질은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한다. 3대종을 관찰하면, 즉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딱딱한 성질의 종류를 관찰하면 내법, 외법 등의 한없는 차별이 있어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마치 변하고 장애가 되는 성질이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하여 포섭되는 것과 같다. 나머지 4온(蘊)을 관찰하면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색의 성질을 관찰하면 열한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어 또한 공통된 모습이 이루어진다. 또한 괴로움의 진리[苦諦]의 경우, 그 모습은 핍박인데 나머지 세 가지 진리를 관찰할 때 이것은 자신만의 모습을 이룬다. 만약 유루(有漏) 5온의 차별을 관찰하면 이 핍박은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딱딱한 성질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모습에 다 통한다.”
029_0298_a_10L若爾堅性應共相攝云何說爲地等自相堅性雖多而摠表地如多變礙摠表色蘊所表旣一故非共相有說堅性通二相攝觀三大種則成自相若觀堅類有內外等無邊差別復成共相如變礙性通二相攝觀餘四蘊則成自相若觀色性有十一種品類差別復成共相又如苦諦其相逼迫觀三諦時此成自相若觀有漏五蘊差別卽此逼迫復成共相堅性亦然故通二種
029_0298_b_01L【문】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을 세워서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는가?
【답】그9)들을 관찰하기 때문에 뒤섞임의 과실이 없다. 만약 그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운다면, 그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시 이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운다면, 이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은 그들을 관찰하여 세운 것이다.
029_0298_a_21L若如是者云何建立自共相別不相雜亂以觀待故無雜亂失謂若觀彼立爲自相未嘗觀彼立爲共相若復觀此立爲共相未嘗觀此立爲自相故自共相觀待而立
【문】이미 대종의 모습이 각각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은 무엇인가?
【답】지계(地界)는 머뭄[住]과 행동함[行]의 두 가지 종류를 지니고 있어서 추락하지 않게 한다. 수계(水界)는 어긋나는 일들을 포섭하여서 서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 화계(火界)는 익지 않은 종류의 물건들을 익게 하여서 부패하지 않게 한다. 풍계(風界)는 모든 물건들이 자라게 하고 혹은 다시 흘러가게 한다. 이를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029_0298_b_03L已知大種相各有異大種作業差別云何地界能持住行二類令不墜落水界能攝性乖違事令不離散火界能熟不熟物類令不朽敗風界能令諸物增長或復流引是謂大種各別事業
【문】지ㆍ수ㆍ화ㆍ풍은 각각 두 가지 성질이 있으니, 딱딱함 등의 성질 및 색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어찌하여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는가?
【답】하나의 법에 많은 모습이 있으면 이것은 어떤 과실이 있는가? 가령, 계경에서 “하나하나의 취온(取蘊)은 병(甁) 등과 같이 한없는 모습이 있다”고 하였다. 혹은 딱딱한 성질 등의 성질은 이 지계 등에 포섭되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그 가운데 색의 성질은 이 지계 등의 공통된 모습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둘째는 공통된 모습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도 또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029_0298_b_08L地水火風各有二謂堅等性及色性攝云何一法得有二相一法多相斯有何失如契經說一一取蘊有如病等無量種相或堅等性是地界等自相所攝其中色性是地界等共相所攝故於一法有二種相一自二共亦不違理
029_0298_c_01L【문】이와 같이 4계(界)는 서로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답】이 4계는 전개되고 전변하여서 결코 서로 떠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그런 줄을 아는가? 계경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입태경(入胎經)』에서 말하였다.
“갈뢰람(羯賴藍)10) 시기에 지계만 있고 수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건조하여 흩어져버릴 것이다. 이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수계에 능히 포섭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지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녹아버려서 흘러내릴 것이다. 이미 흘러내리지 않았으므로 지계가 있어 지탱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화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승기 차서 썩어버릴 것이다. 이미 썩지 않았으므로 화계가 능히 익게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화계만 있고 풍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자라나는 뜻이 없을 것이다. 이미 점점 자라고 있으므로, 풍계가 있어 움직이게 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298_b_14L是四界可相離不此四展轉定不相離云何知然契經說故『入胎經』說羯賴藍時若有地界無水界者其性乾燥則應分散旣不分散故知定有水界能攝若有水界無地界者其性融釋則應流泒旣不流泒故知定有地界能持若有水界無火界者其性潤濕則應朽敗旣不朽敗故知定有火界能熟若有火界無風界者其性則應無增長義旣漸增長故知定有風界動搖
【문】만약 그렇다면 경에서 말한 것과 어떻게 통하겠는가?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마땅히 알라. 이 몸 가운데서 화계가 발생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거나 혹은 죽음의 고통에 가깝게 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답】경의 말은 더욱 성장한 것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고, 더욱 성장하지 않은 것에 의한 말은 아니다. 불의 본체[火體]가 몸에 본래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029_0298_c_02L若爾經說當云何通契經說苾芻當知於此身中火界若或卽令捨命或生近死苦經依增盛不增盛說不言火體身中本無
【문】지계와 지(地)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지계는 딱딱한 성질이고, 지는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을 말한다. 지계는 만드는 주체[能造]이고, 지는 만들어진 것[所造]이다. 지계는 촉처(觸處)로 신식(身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고, 지는 색처(色處)로 안식(眼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다. 이를 지계와 지의 차별이라고 한다. 수ㆍ화도 역시 그렇고, 또한 풍과 풍계도 그렇다.
029_0298_c_05L地界與地有何差別地界堅性地謂顯形地界能造地謂所造地界觸處身識所識地謂色處眼識所識是謂地界與地差別水火亦然風風界
【문】이미 딱딱함ㆍ축축함 따뜻함ㆍ움직임의 4대종의 모습들이 전개하고 전변하여 어긋나는 것이, 마치 네 마리 독사가 하나의 몸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 저 만들어진 색의 모습을 또한 듣고자 한다. 우선 어찌하여 ‘저 만들어진 색’이라고 부르는가?
【답】‘저 만들어진 색’이란, 눈의 감각기관[眼根] 등을 말한다. 눈이 곧 근본[根]이므로 눈의 감각기관이라고 말한다. 마치 청련화(靑蓮華)11)와 같다. 나머지 감각기관도 이와 같다.
029_0298_c_10L已具了知堅濕暖#動四大種相展轉乖違如四毒蛇居一身篋復欲聞彼所造色相且何名爲彼所造色彼所造色謂眼根等眼卽根故說名眼根如靑蓮華餘根亦爾
【문】눈 등의 다섯 가지도 역시 계(界)와 처(處)에 포섭된다. 어찌하여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르는가?
【답】색 등의 바깥 대상[外境]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눈 등의 계와 처를 말한다면, 곧 감각기관[根]과 감각기관의 뜻[根義]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만들어진 색 가운데 안[內]을 감각기관이라고 부르고, 바깥[外]을 감각기관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029_0298_c_15L眼等五種亦界處攝何故此中獨標根稱爲欲簡別色等外境謂若說爲眼等界處則根根義差別難知是故此中獨標根稱此則顯示所造色中內者名根外名根義
【문】이 가운데서 말한 감각기관의 뜻은 무엇인가?
【답】보다 높음[增上]ㆍ가장 뛰어남[最勝]ㆍ현재 보임[現見]ㆍ광명(光明)ㆍ기쁨ㆍ묘함을 봄[觀妙] 등이 모두 감각기관의 뜻이다.
029_0298_c_20L此中所說根義云增上最勝現見光明憙觀妙等皆是根義
029_0299_a_01L【문】만약 ‘보다 높음’이라는 뜻이 감각기관의 뜻이라면, 모든 유위법은 전개하고 전변하여 보다 높고, 무위법도 역시 유위보다 높아서 모든 법이 곧 감각기관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답】수승함에 의지하여 감각기관을 세우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은 없다. 증상연에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으니, 수승한 것을 세워서 감각기관이라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298_c_22L若增上義是根義者有爲法展轉增上無爲亦是有爲增則一切法皆應是根依勝立根故無斯過謂增上緣有勝有劣當知勝者建立爲根
【문】어떤 감각기관이 무엇에 대하여 몇 가지가 보다 높은 것인가?
【답】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은 각각 네 가지 일에 있어서 보다 높다. 첫째는 장엄신(莊嚴身)이고, 둘째는 도양신(導養身)이고, 셋째는 식(識) 등이 생김이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는 일[不共事]이다.
029_0299_a_03L何根於誰有幾增五根各於四事增上莊嚴身導養身生識等不共事
먼저 눈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몸이 비록 여러 부분을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의 감각기관을 결여한다면, 눈의 감각기관이 다시 추하고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눈이 능히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볼 수 있어 모든 색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것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안식(眼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색을 보는 작용은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29_0299_a_05L先辯眼根莊嚴身者謂身雖具衆分餘若闕眼根便醜陋故導養身者眼能見安危諸色避危就安身久住生識等者謂依眼根一切眼識及相應法皆得生故不共事者謂見色用唯屬眼根二十一根無斯用故
다음에는 귀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귀머거리는 소리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귀는 능히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모든 소리의 나쁜 쪽을 피하고 좋은 쪽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이식(耳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소리를 듣는 작용은 오직 귀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29_0299_a_11L次辯耳根莊嚴身者謂耳聾者不可愛故導養身者謂耳能聞好惡聲別避惡就好身久住故生識等者謂依耳根一切耳識及相應法皆得生故不共事者謂聞聲用唯屬耳根二十一根無斯用故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눈과 귀에서 말한 것과 같다.
‘도양신’이란,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은 단식(段食)12)을 받아들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세 가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맛을 보고, 향기를 구분하고, 촉감을 느끼는 작용은 이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에 속하는 것이고, 다른 감각기관에는 없기 때문이다.
029_0299_a_17L鼻舌身根莊嚴身者如眼說導養身者謂此三根受用段食身久住故生識等者謂依三根鼻舌身識及相應法皆得生故不共事者謂嗅嘗覺香味觸用屬鼻舌身非餘根故
029_0299_b_01L【문】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떤 수승한 덕이 있으며, 무엇을 자성으로 삼고, 행위의 작용[業用]은 무엇인가?
【답】눈의 감각기관의 덕은 안식 및 그에 상응하는 법에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눈의 감각기관의 자성은 청정한 색이다. 모든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눈의 행동양식이다. 나머지 감각기관의 세 가지 일13)도 눈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또 행위의 작용이 있는 감각기관을 말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식(識)이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색은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색[淨色]이라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안식 등에게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은 동분(同分)의 감각기관을 나타내는 것이고, 청정한 색을 말하는 것은 피동분(彼同分)을 나타내는 것이다.
029_0299_a_22L如是五根有何勝德誰爲自業用云何眼根德者謂與眼識及相應法爲所依故眼根自性卽是淨色能見諸色是眼業用餘根三事類眼應知此中且說有業用根非一切根識所依故此色澄淨故名淨色或復此中與眼識等爲所依者顯同分根說淨色言顯彼同分
【문】어떤 것을 동분이라 하고, 어떤 것을 피동분이라고 하는가? 각각 기관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행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동분의 감각기관이라 하고, 행위의 작용이 없는 감각기관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마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을 동분의 눈이라고 하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
029_0299_b_06L何謂同彼同分根如是二名所目何別有業用者名同分根無業用根名彼同分如能見色名同分眼不見色者名彼同分
피동분의 눈은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이미 소멸한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현재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지금 소멸하는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미래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앞으로 소멸할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미래에 눈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 동분의 눈은 오직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미래에 결코 눈이 생기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
029_0299_b_10L彼同分眼差別有四過去彼同分眼謂不能見諸色已滅有現在彼同分眼謂不能見諸色今滅有未來彼同分眼謂不能見諸色當滅有未來定不生眼其同分眼差別唯三謂除未來定不生眼
귀의 감각기관 등의 네 가지에서도 눈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다시 다섯 가지 식[五識]은 각각 두 가지 의지하는 바가 있다. 첫째는 함께 생겨나는 것[俱時生]으로 눈 등의 다섯 가지 등이고, 둘째는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것[無間滅]이니 , 즉 의근(意根)을 말한다.
오직 식의 의지라고 말하면,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이 식에 퍼지게 되고, 다만 청정한 색을 말하면 다섯 가지가 본체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청정한 색을 말함은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을 간별하는 것이고, 눈 등의 식에게서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말은 눈 등의 감각기관을 차별하여 다섯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섯 가지 식이 의지하는 바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차별하여 각각 4구(句)가 있다고 말한다. 함께 생겨나는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 제1구로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소(心所)로 제2구를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心)으로 제3구로 삼고, 앞의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법으로 제4구로 삼는다.
029_0299_b_15L耳根等四如眼應知或復五識各二所依俱時生謂眼等五無閒滅謂卽意根唯說識依濫無閒意但言淨色五體應同故淨色言簡無閒意與眼等識爲所依言顯眼等根差別有五由斯故說五識所依與等無閒緣差別各四句俱生眼等根爲第一無閒滅心所爲第二句無閒滅心爲第三句除前餘法爲第四句
029_0299_c_01L【문】무엇이 능히 색을 보는가? 눈의 감각기관이 보는가? 안식이 보는가?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보는가?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보는가?
그대가 의심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 있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이 본다면, 나머지 식이 작용할 때는 어찌 색을 볼 수 없는가? 어찌 다 함께 모든 대상들을 취하지 않는가?
만약 안식이 본다면, 모든 식은 다만 요별하는 것으로 모습을 삼고 보는 것을 모습으로 삼지 않는데, 어찌 색을 볼 수 있겠는가?14)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본다면,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는 듣는 것이어야 한다. 저것은 이미 듣는 것이 아닌데, 이를 어찌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만약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본다면, 모든 심과 심소의 화합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선한 안식은 스물두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선하지 않은 안식은 스물한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안식은 열여덟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안식은 열두 가지 심소와 상응한다. 이미 결정되어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화합이라고 하겠는가?
【답】눈의 감각기관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식과 합해진 경우이고, 나머지 경우는 아니다. 마치 안식이 색을 요별함에 의하여 눈이 바야흐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느낌[受] 등의 받아들임 등은 반드시 마음[心]에 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응당 그러하다. 이러한 이치로 나머지 식들이 작용할 때 눈은 이미 식이 없어져[空] 색을 볼 수 없다. 또한 함께 모든 대상을 취한다는 오류가 없다. 하나의 상속 가운데 두 가지 마음의 전변이 없기 때문이다.
029_0299_c_01L能見色爲眼根見爲眼識見爲與眼識相應慧見爲心心所和合見耶何所疑一切有過若眼根見餘識行時寧不見色何不俱取一切境耶眼識見諸識但以了別爲相非見爲相豈能見色若與眼識相應慧見許耳識相應慧聞彼旣非聞此云何若心心所和合能見諸心心所和合不定謂善眼識與二十二心所相不善眼識與二十一心所相應覆無記眼識與十八種心所相應覆無記眼識與十二種心所相應不決定云何和合眼根能見然與眼識合位非餘譬如眼識了別色用依眼方有又如受等領納等用必依於心此亦應爾由斯理趣餘識行時眼旣識空不能見色亦無俱取一切境失以一相續中無二心轉故
029_0300_a_01L【문】무슨 까닭에 여섯 가지 의지하는 것과 연이 되는 것을 갖추었는데, 하나의 상속 가운데 6식(識)이 함께 전변함이 없다고 하는가?
【답】등무간연(等無間緣)은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뜻이 있다. 만약 안식이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분별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알겠는가? 만약 심ㆍ심소의 화합이 능히 본다면,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행동과 작용이 같지 않아 그 가운데 화합이 본다는 뜻은 결정코 없다.
또한 마땅히 하나의 본체에 두 개의 작용이 있다면 능히 보는 주체와 받아들여지는 대상 등을 허락해야만 한다.
또한 다른 뜻이 있다. 만약 식이 본다고 하면 식은 상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보는 주체 모든 색의 장애와 부딪칠 것이다. 지혜와 화합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눈의 감각기관만을 보는 주체라고 한다.
029_0299_c_19L故具六所依所緣而一相續中無六識俱轉等無閒緣唯有一故復有餘義若眼識見誰復能識若慧見者誰復能知若心心所和合能見諸法一一業用不同於中定無和合見義應一體有二作用謂許能見及領納復有餘義若識見者識無對故應能見被障諸色慧及和合應知亦是故眼根獨名能見
【문】이미 눈의 작용이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있음을 알았다. 눈이 색을 볼 때는 한 눈으로 보는가? 두 눈으로 보는가?
【답】이는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두 눈을 뜨고 모든 색을 볼 때면 두 눈이 함께 본다.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문지를 때는 눈 앞에 두 개의 달처럼 겹쳐져서 보이게 되고, 한 눈을 가리고 한 눈을 문지를 때 이는 보는 일이 없다 이런 까닭에 어떤 때는 두 눈이 함께 본다.
또 『발지론(發智論)』에서 보는 원인을 함께 말한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있을 때에 보는 작용이 명료하고, 두 귀, 두 코도 또한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00_a_05L已知見用唯屬眼根眼見色時爲二爲一不決定若開兩眼觀諸色時則二俱以開一眼按一眼時便於現前見二月等閉一按一此事則無是故有時二眼俱見又『發智論』說俱見因雙開時見分明等兩耳兩鼻應知亦
029_0300_b_01L【문】무슨 까닭에 두 눈 두 귀ㆍ두 코는 각각 양쪽에 있는데,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하는가?
【답】두 곳의 눈 등이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이 취한 대상이 하나의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둘이 능히 의지하는 식이 하나의 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이 함께 있을 때에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비록 두 곳에 있으나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한다. 여근(女根)과 남근(男根)은 몸의 감각기관에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따로 감각기관을 세우지 않는다.
안근의 극미는 눈의 수정체에 널리 퍼져 있고 대상을 대하고 있으면서 향능화(香菱花)15)처럼 머문다.
이근의 극미는 귀의 구멍 안에 고리를 둘러싸고 있고, 화피(樺皮)16)를 말아놓은 것처럼 머문다.
비근의 극미는 코 안에 있고, 콧등 위와 얼굴 아래 마치 쌍조갑(雙爪甲)17)처럼 머문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널리 퍼져 있고, 형태는 반달과 같다. 그러나 혀 가운데에는 마치 모발처럼 설근의 극미는 한량없다.
신근의 극미는 모든 몸의 부분에 퍼져 있다.
029_0300_a_12L何緣二眼二耳二鼻雖各兩處而立一根二處眼等體類一故所取境一界攝故二能依識一識攝又二俱時能取境故雖有兩處而立一根女根男根卽身根攝是故於此不別立根眼根極微布眼精上境而住如香荽花耳根極微在耳穴旋環而住如卷樺皮鼻根極微居鼻頞內背上面下如雙爪甲舌根極微布在舌上形如半月然於舌中如毛髮量無舌根微身根極微遍諸身分
五事毘婆沙論卷上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운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를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는데, 태종이 작성한 서문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이다.
  2. 2)죄를 지은 결과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세 가지 길로, 곧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을 말한다.
  3. 3)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말한다.
  4. 4)삼해탈(三解脫), 또는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아공(我空),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俱空)을 가리키기도 하고 삼공해탈(三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愿解脫)을 가리키기도 한다.
  5. 5)여기서 인(忍)은 인가(忍可)ㆍ안인(安忍)의 뜻으로, 보살이 도리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인에는 무생법인(無生法忍)ㆍ무멸인(無滅忍)ㆍ인연인(因緣忍)ㆍ무주인(無住忍)이 있다.
  6. 6)인간의 심성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경계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7. 7)원문에는 ‘척(隻)’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맞지 않아 ‘형(夐)’으로 교정하여 번역하였다.
  8. 8)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것을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다. 황제술성기는 바로 고종이 기문을 썼다는 의미이다.
  9. 9)『유마경(維摩經)』「불국품(佛國品)」에 나오는 보옥(寶玉)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일산(日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이나 탑의 상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 사용된 덮개를 말한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10. 10)고승이 불경을 강론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11. 11)향취산(香醉山)의 남쪽,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다는 상상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연못은 둘레가 8백 리이며, 여기에 용왕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 흘러내려 섬부주(贍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12. 12)경기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지역을 말한다. 즉 나라의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3. 13)중국 고대 관중지방에 흐르는 8개의 하천을 말한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바로 이 관중지방에 있다.
  14. 14)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는 벗어난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15. 15)마음을 더럽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16. 16)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17. 1)Vasumitra를 말한다. 협존자(脇尊者). 4)번 주 참조.
  18. 2)비구로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bikṣu의 음사이다.
  19. 3)호흡을 판하는 것으로 수식관(隨息觀)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ānāpānasati이다.
  20. 4)인도 소승 유부종(有部宗) 승려로 Pārśva이다. 파율습박(波栗濕縛) 또는 파사(波舍)로 음역한다. 불멸 후 6백 년 경에 카니쉬카왕에게 권하여 카슈미르에서 5백 비구를 모아 세우(世友) 존자와 함께 제4결집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21. 5)인도철학에서 4대종에 더하여 제5원소로 허공을 말한 학파가 있는데 이를 비판한 것이다. 아래의 문답을 보라.
  22. 6)Ghoṣa의 음역이다. 비바사 4대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아비담감로미론』 3권의 저자이다.
  23. 7)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이 만들어진 색법에 대하여 원인이 되는 다섯 가지의 구별이다. 첫째는 생인(生因)으로 4대가 화합화여 색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째는 의인(依因)으로 4대가 색법에 따르는 바가 되어 그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입인(立因)으로 4대가 색법을 유지하여 현재에 존립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인(持因)으로 4대가 색법을 유지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양인(養因)으로 4대가 색법을 더 자라게 하고 발달시키는 것이다.
  24. 8)소승 유부종인 Vaibhasika학파를 말한다.
  25. 9)고려대장경에서는 이관대고(以觀待故)라고 하였으나 다른 판본에서는 이관피고(以觀彼故)라고 하였다 뒤의 경우를 따른다.
  26. 10)Kalala의 음역으로 태에 들어가 제 7일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마음의 거품처럼 끈끈하고 조금 굳어지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27. 11)인도에서 나는 연꽃의 일종으로 우담바라(優曇波羅)라고도 하며 연꽃 중에도 귀하게 여긴다.
  28. 12)산스크리트어 piṇḍa로, 밥ㆍ국수ㆍ나물ㆍ기름ㆍ간장 등과 같이 형체가 있는 음식을 말한다.
  29. 13)덕ㆍ자성ㆍ행동양식을 말한다.
  30. 14)앞에서 보는 것으로 모습을 삼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31. 15)뿌생은 『아비달마구사론』에서 미나리과의 식물인 cumin이라고 번역하였고, 앵부건(櫻部建)은 Cuminum cyminum. Ficus oppositifolia이라 하였다.
  32. 16)bhūrja,자작나무의 일종. 그 껍질은 글씨 쓰는 재료로 쓰인다.
  33. 17)śalāka(정ㆍ침ㆍ핀 등의) 작은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의미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