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29_0295_a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029_0295_b_01L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029_0296_a_01L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게 경례합니다. 이제 저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아비달마[對法]의 바다에 대하여 작으나마 바른 뜻을 살피보고자 합니다.
029_0296_a_17L敬禮佛法僧, 我今隨自力, 欲於對法海, 探少貞實義。
제자 등을 가엽게 여겨서 마땅히 해석하여 지혜가 생기게 하고 『오사론(五事論)』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켜 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029_0296_a_19L哀慜弟子等, 當釋能生慧, 滅愚五事論, 令彼覺開發。
세우(世友)1) 존자께서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사론』을 지으셨고, 이제 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029_0296_a_20L尊者世友爲益有情製『五事論』,我今當釋。
029_0296_b_01L【문】왜 이 『오사론』을 해석하고자 하는가? 【답】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낸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낼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해와 달이 비록 밝게 빛나지만 구름 등으로 가리워졌을 때는 밝게 비추지 못하고, 그 가린 것이 제거되면 밝게 비추게 되는 것과 같다. 본 논서의 문장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이미 간략하게 갖가지 수승한 뜻을 밝혔으나 이를 넓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광명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광명이 드러나게 하고자 하여 나는 마땅히 해석을 한다.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원인을 알았다. 존자는 어떠한 연유로 이 논설을 지었는가? 【답】제자들이 자세히 들어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간략한 것에 의지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 존자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간략한 문장에 의지하여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명료한 깨달음은 금강산과 같아서 모든 사악한 견해[惡見]의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명료하지 않은 깨달음은 갈대꽃 같아서 사악한 견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려 공중으로 휙 돌아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견고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문】무엇을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이라고 하는가? 【답】딱딱함[堅]ㆍ습기[濕]ㆍ따뜻함[暖] 등이 모든 법의 자상이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 등이 모든 법의 공상이다. 세간에 비록 모든 법의 자상에 대해서는 능히 아는 자가 있을 수 있지만, 공상에 대해서는 모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제자들이 법의 두 가지 모습에 대해서 여실하게 알게 하고자 이 논서를 지었다.
029_0296_c_01L【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연유를 알았다. 이것을 어찌하여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논서 가운데서 다섯 가지 일[五事]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논서를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 데,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의 뜻은 차이가 없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 일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일[自性事), 둘째는 소연의 일[所緣事], 셋째는 묶임의 일[繫縛事], 넷째는 원인이 되는 일[所因事], 다섯째는 거두어들임의 일[攝受事]이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자성의 일만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다섯 가지 법을 말하는가? 【답】그것의 일과 법의 뜻이 또한 차이가 없다.
029_0296_c_04L問:若爾,何故說有五法?答:事之與法,義亦無異。
【문】무슨 까닭에 이 논은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을 다루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이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줄어든다거나 늘어난다고 하면 다 힐난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이 논서는 간략하게 모든 법의 체(體)와 종류, 차별을 드러내어 모든 법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거두어들이고자 오직 다섯 가지만을 말한다. 만약 이 다섯 가지를 통틀어 한 가지 법의 이름으로 세운다면, 비록 이 간략하게 말한 것 속에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일 수는 있지만, 심(心) 등의 다섯 가지 법의 체와 종류, 차별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유루(行漏)와 무루(無漏) 등을 말하여 두 가지로 하고, 유학(宜學)ㆍ무학(無學)ㆍ비유학무학(非有學無學) 등을 말하여 세 가지로 하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이 삼계(界)에 묶이지 않는 것 등을 말하여 네 가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9_0297_a_01L【문】어찌 이름을 열거하지 않고 다섯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겠는가? 무슨 까닭에 논의 맨 앞에 다섯이란 숫자를 세웠는가? 【답】마치 실로 꽃들을 연결한 것은 쉽게 지니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여러 가지 꽃들을 연결하여 쉽게 지닐 수 있어 몸과 머리를 장엄하는 것처럼, 숫자라는 실로 뜻이라는 꽃을 연결하여 쉽게 지니고 있다가 마음의 지혜를 장엄하는 것도 그와 같다. 혹은 먼저 숫자를 세우고 뒤에 그 이름을 열거한다. 이것을 지은 이가 뒤의 의식(儀式)을 따랐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소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설해진 것[所說]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契經)에서 “그대들은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묘한 법을 말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공덕(功德)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필추(苾芻)2)들이여, 법은 바른 견해[正見]이고, 삿된 견해는 법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무아(無我)를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무아를 법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법이란 지닐 수도 있고, 기를 수[長養]도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지닐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기를 수가 있다.
【문】무슨 까닭에 이 논 가운데서 먼저 색법(色法)을 다루는가? 【답】모든 법 가운데 색이 가장 거칠기[麤] 때문이다. 이는 모든 식의 소연(所緣)인 대상이기 때문이고,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에 들어간다’는 것은 두 개의 감로문이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親)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3)이다. 부정관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들어진 색[所造色]을 관(觀)하고, 지식념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드는[能造] 바람[風]을 관한다.
【문】무슨 뜻에 의지하여 그것을 색이라 하는가? 【답】차츰 쌓이고, 차츰 깨어지고, 종자를 심어 자라게 하고, 원수와 친한 이를 만나게 하여 능히 깨어지게 하고, 능히 이루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색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변하고 무너지기[變壞]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다. ‘변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곧 괴롭고 무너질 만하다는 뜻이다. 어떤 설명에서는 “변하고 장애[變礙]가 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문】과거ㆍ미래의 극미(極微)와 무표색(無表色)은 모두 변하지도 않고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색이라고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답】그들도 역시 색이다. 색의 모습[色相]을 갖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색은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이미 변하고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미래의 모든 색도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앞으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기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눈은 보지 않지만,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볼 수 있기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그 모습을 갖기 때문이다. 이도 역시 그와 같다. 하나하나의 극미는 비록 변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지만, 모이게 되면 변하고 장애가 되는 뜻이 이루어진다. 모든 무표색도 비록 변하고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의지하는 바에 따르므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다. ‘의지하는 바’란 무엇인가? 4대종(大種)을 말한다. 저들이 변하고 장애가 되므로 무표색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혹은 많은 부분을 따르므로 단식(段食)이라고도 하며, 혹은 마음 안에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전의 업[先業]을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029_0297_b_01L색이란 무엇인가? 【문】존자는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런 말을 하는가? 【답】앞에서 간략하게 말한 것을 이제 넓게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혹은 볼 수 있고 유대인 색[可見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 없고 유대인 색[不迦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도 없고 무대인 색[不迦見無對色]이다. 모두 거두어들여서 ‘모든 존재하는 색[諸所行色]’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란, 이 모든 색에 색이 거두어들여져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4대종(大種)을 말해 보자. 【문】무슨 까닭에 대종이 네 가지뿐인가? 【답】협존자(脇尊者)4)가 말한다. “이러한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만약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면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법상(法相)과 어긋나지 않게 네 가지를 말함이 과실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한다. “외도(外道)가 대종에 다섯 가지가 있다5)고 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오직 네 가지만을 말하였다. 그들은 허공도 역시 대종이라고 집착한다.”
【문】어찌하여 허공은 대종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답】허공은 대종의 모습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허공은 크지만 종(種)이 아니다. 상주하는 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덕 묘음(妙音)6) 존자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허공과 대종은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허공이 비록 크다고 하지만 본체는 종이 아니다. 또한 모든 대종이 몸을 이룰 수 있다면 많은 부분이 유정의 업의 이숙(異熟)에 포섭되지만, 허공은 그 업의 이숙의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허공은 결코 대종이 아니다.
029_0297_c_01L【문】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인[因]인가? 조건[緣]인가? 만약 이것이 원인의 뜻이라면, 4대종은 만들어진 색에 대하여 다섯 가지 원인[因]7)은 모두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만든다는 것이 원인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조건의 뜻이라면, 모든 만들어진 색의 경우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법들이 모두 증상연(增上緣)이다. 이는 오로지 4대종이 능히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원인의 뜻이다. 비록 4대종이 만들어진 색에 있어서 상응하는 등등의 다섯 가지 원인의 뜻은 없으나, 다시 따로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이 있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조건의 뜻이다. 비록 만들어진 색의 경우 그 자성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법이 증상연이지만, 4대종은 이 만들어진 색의 가까운 증상연이다. 나머지의 법들은 가깝지 않다. 마치 눈과 색이 안식(眼識)의 조건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뛰어난 조건을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문】어찌된 까닭에 대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답】원인인 색과 결과인 색의 모습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대종이 만들어진 것에 포섭된다면, 4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3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4대종이 능히 1대종을 만든다면, 땅[地] 등도 역시 땅 등을 또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모든 법이 응당 자성을 기다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자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조건들이 모여서 작용이 있다.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3대종이 모여서 1대종을 만든다면, 원인인 요소가 이미 없으므로 능히 만들 수가 없다. 만들어진 색과 같이 원인은 반드시 대종을 갖추어야 한다.
029_0298_a_01L【문】만약 딱딱한 성질 등이 이 땅 등의 모습이라면, 만들어진 모습[所相]과 만드는 모습[能相]은 어찌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가? 【답】이 둘이 하나라고 할지라도 어떤 과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바사부(毘婆沙部)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성과 나, 물건의 모습인 본성 등은 이름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모든 법은 자성을 떠나서 모습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열반(涅槃)이 적정(寂靜)을 모습으로 삼고 적정을 떠나서 따로 열반이 있지 않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그와 같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이 가운데 딱딱함의 성질은 딱딱한 부분이고, 딱딱함이란 본체는 종류를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딱딱한 성질은 땅의 경계이다. 그러나 이 딱딱한 성질의 차별은 한이 없다. 내법(內法) 가운데서는 손톱과 머리카락 등의 차이가 있고, 외법(外法) 가운데서는 구리와 주석 등의 차이가 있다. 또한 내법 가운데서도 손과 발 등의 딱딱함에 차이가 있고, 외법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딱딱한 성질의 차이는 한이 없다.
【문】만약 딱딱한 성질이 공통된 모습[共相]에 포섭된다면, 어찌하여 땅 등의 자신만의 모습[自相]이라고 말하는가? 【답】딱딱한 성질이 비록 않지만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마치 땅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장애가 됨을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색온이라고 한 것처럼, 나타난 것은 이미 하나이므로 공통된 모습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딱딱한 성질은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한다. 3대종을 관찰하면, 즉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딱딱한 성질의 종류를 관찰하면 내법, 외법 등의 한없는 차별이 있어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마치 변하고 장애가 되는 성질이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하여 포섭되는 것과 같다. 나머지 4온(蘊)을 관찰하면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색의 성질을 관찰하면 열한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어 또한 공통된 모습이 이루어진다. 또한 괴로움의 진리[苦諦]의 경우, 그 모습은 핍박인데 나머지 세 가지 진리를 관찰할 때 이것은 자신만의 모습을 이룬다. 만약 유루(有漏) 5온의 차별을 관찰하면 이 핍박은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딱딱한 성질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모습에 다 통한다.”
029_0298_b_01L【문】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을 세워서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는가? 【답】그9)들을 관찰하기 때문에 뒤섞임의 과실이 없다. 만약 그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운다면, 그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시 이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운다면, 이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은 그들을 관찰하여 세운 것이다.
【문】이미 대종의 모습이 각각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은 무엇인가? 【답】지계(地界)는 머뭄[住]과 행동함[行]의 두 가지 종류를 지니고 있어서 추락하지 않게 한다. 수계(水界)는 어긋나는 일들을 포섭하여서 서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 화계(火界)는 익지 않은 종류의 물건들을 익게 하여서 부패하지 않게 한다. 풍계(風界)는 모든 물건들이 자라게 하고 혹은 다시 흘러가게 한다. 이를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문】지ㆍ수ㆍ화ㆍ풍은 각각 두 가지 성질이 있으니, 딱딱함 등의 성질 및 색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어찌하여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는가? 【답】하나의 법에 많은 모습이 있으면 이것은 어떤 과실이 있는가? 가령, 계경에서 “하나하나의 취온(取蘊)은 병(甁) 등과 같이 한없는 모습이 있다”고 하였다. 혹은 딱딱한 성질 등의 성질은 이 지계 등에 포섭되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그 가운데 색의 성질은 이 지계 등의 공통된 모습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둘째는 공통된 모습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도 또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029_0298_c_01L【문】이와 같이 4계(界)는 서로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답】이 4계는 전개되고 전변하여서 결코 서로 떠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그런 줄을 아는가? 계경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입태경(入胎經)』에서 말하였다. “갈뢰람(羯賴藍)10) 시기에 지계만 있고 수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건조하여 흩어져버릴 것이다. 이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수계에 능히 포섭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지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녹아버려서 흘러내릴 것이다. 이미 흘러내리지 않았으므로 지계가 있어 지탱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화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승기 차서 썩어버릴 것이다. 이미 썩지 않았으므로 화계가 능히 익게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화계만 있고 풍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자라나는 뜻이 없을 것이다. 이미 점점 자라고 있으므로, 풍계가 있어 움직이게 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경에서 말한 것과 어떻게 통하겠는가?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마땅히 알라. 이 몸 가운데서 화계가 발생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거나 혹은 죽음의 고통에 가깝게 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답】경의 말은 더욱 성장한 것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고, 더욱 성장하지 않은 것에 의한 말은 아니다. 불의 본체[火體]가 몸에 본래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문】지계와 지(地)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지계는 딱딱한 성질이고, 지는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을 말한다. 지계는 만드는 주체[能造]이고, 지는 만들어진 것[所造]이다. 지계는 촉처(觸處)로 신식(身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고, 지는 색처(色處)로 안식(眼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다. 이를 지계와 지의 차별이라고 한다. 수ㆍ화도 역시 그렇고, 또한 풍과 풍계도 그렇다.
【문】이미 딱딱함ㆍ축축함 따뜻함ㆍ움직임의 4대종의 모습들이 전개하고 전변하여 어긋나는 것이, 마치 네 마리 독사가 하나의 몸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 저 만들어진 색의 모습을 또한 듣고자 한다. 우선 어찌하여 ‘저 만들어진 색’이라고 부르는가? 【답】‘저 만들어진 색’이란, 눈의 감각기관[眼根] 등을 말한다. 눈이 곧 근본[根]이므로 눈의 감각기관이라고 말한다. 마치 청련화(靑蓮華)11)와 같다. 나머지 감각기관도 이와 같다.
【문】눈 등의 다섯 가지도 역시 계(界)와 처(處)에 포섭된다. 어찌하여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르는가? 【답】색 등의 바깥 대상[外境]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눈 등의 계와 처를 말한다면, 곧 감각기관[根]과 감각기관의 뜻[根義]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만들어진 색 가운데 안[內]을 감각기관이라고 부르고, 바깥[外]을 감각기관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문】이 가운데서 말한 감각기관의 뜻은 무엇인가? 【답】보다 높음[增上]ㆍ가장 뛰어남[最勝]ㆍ현재 보임[現見]ㆍ광명(光明)ㆍ기쁨ㆍ묘함을 봄[觀妙] 등이 모두 감각기관의 뜻이다.
029_0298_c_20L問:此中所說根義云何?答:增上、最勝、現見、光明、憙觀妙等皆是根義。
029_0299_a_01L【문】만약 ‘보다 높음’이라는 뜻이 감각기관의 뜻이라면, 모든 유위법은 전개하고 전변하여 보다 높고, 무위법도 역시 유위보다 높아서 모든 법이 곧 감각기관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답】수승함에 의지하여 감각기관을 세우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은 없다. 증상연에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으니, 수승한 것을 세워서 감각기관이라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눈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몸이 비록 여러 부분을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의 감각기관을 결여한다면, 눈의 감각기관이 다시 추하고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눈이 능히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볼 수 있어 모든 색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것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안식(眼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색을 보는 작용은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귀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귀머거리는 소리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귀는 능히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모든 소리의 나쁜 쪽을 피하고 좋은 쪽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이식(耳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소리를 듣는 작용은 오직 귀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눈과 귀에서 말한 것과 같다. ‘도양신’이란,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은 단식(段食)12)을 받아들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세 가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맛을 보고, 향기를 구분하고, 촉감을 느끼는 작용은 이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에 속하는 것이고, 다른 감각기관에는 없기 때문이다.
029_0299_b_01L【문】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떤 수승한 덕이 있으며, 무엇을 자성으로 삼고, 행위의 작용[業用]은 무엇인가? 【답】눈의 감각기관의 덕은 안식 및 그에 상응하는 법에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눈의 감각기관의 자성은 청정한 색이다. 모든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눈의 행동양식이다. 나머지 감각기관의 세 가지 일13)도 눈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또 행위의 작용이 있는 감각기관을 말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식(識)이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색은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색[淨色]이라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안식 등에게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은 동분(同分)의 감각기관을 나타내는 것이고, 청정한 색을 말하는 것은 피동분(彼同分)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어떤 것을 동분이라 하고, 어떤 것을 피동분이라고 하는가? 각각 기관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행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동분의 감각기관이라 하고, 행위의 작용이 없는 감각기관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마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을 동분의 눈이라고 하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
피동분의 눈은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이미 소멸한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현재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지금 소멸하는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미래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앞으로 소멸할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미래에 눈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 동분의 눈은 오직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미래에 결코 눈이 생기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
귀의 감각기관 등의 네 가지에서도 눈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다시 다섯 가지 식[五識]은 각각 두 가지 의지하는 바가 있다. 첫째는 함께 생겨나는 것[俱時生]으로 눈 등의 다섯 가지 등이고, 둘째는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것[無間滅]이니 , 즉 의근(意根)을 말한다. 오직 식의 의지라고 말하면,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이 식에 퍼지게 되고, 다만 청정한 색을 말하면 다섯 가지가 본체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청정한 색을 말함은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을 간별하는 것이고, 눈 등의 식에게서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말은 눈 등의 감각기관을 차별하여 다섯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섯 가지 식이 의지하는 바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차별하여 각각 4구(句)가 있다고 말한다. 함께 생겨나는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 제1구로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소(心所)로 제2구를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心)으로 제3구로 삼고, 앞의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법으로 제4구로 삼는다.
029_0299_c_01L【문】무엇이 능히 색을 보는가? 눈의 감각기관이 보는가? 안식이 보는가?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보는가?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보는가? 그대가 의심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 있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이 본다면, 나머지 식이 작용할 때는 어찌 색을 볼 수 없는가? 어찌 다 함께 모든 대상들을 취하지 않는가? 만약 안식이 본다면, 모든 식은 다만 요별하는 것으로 모습을 삼고 보는 것을 모습으로 삼지 않는데, 어찌 색을 볼 수 있겠는가?14)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본다면,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는 듣는 것이어야 한다. 저것은 이미 듣는 것이 아닌데, 이를 어찌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만약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본다면, 모든 심과 심소의 화합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선한 안식은 스물두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선하지 않은 안식은 스물한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안식은 열여덟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안식은 열두 가지 심소와 상응한다. 이미 결정되어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화합이라고 하겠는가? 【답】눈의 감각기관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식과 합해진 경우이고, 나머지 경우는 아니다. 마치 안식이 색을 요별함에 의하여 눈이 바야흐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느낌[受] 등의 받아들임 등은 반드시 마음[心]에 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응당 그러하다. 이러한 이치로 나머지 식들이 작용할 때 눈은 이미 식이 없어져[空] 색을 볼 수 없다. 또한 함께 모든 대상을 취한다는 오류가 없다. 하나의 상속 가운데 두 가지 마음의 전변이 없기 때문이다.
029_0300_a_01L【문】무슨 까닭에 여섯 가지 의지하는 것과 연이 되는 것을 갖추었는데, 하나의 상속 가운데 6식(識)이 함께 전변함이 없다고 하는가? 【답】등무간연(等無間緣)은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뜻이 있다. 만약 안식이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분별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알겠는가? 만약 심ㆍ심소의 화합이 능히 본다면,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행동과 작용이 같지 않아 그 가운데 화합이 본다는 뜻은 결정코 없다. 또한 마땅히 하나의 본체에 두 개의 작용이 있다면 능히 보는 주체와 받아들여지는 대상 등을 허락해야만 한다. 또한 다른 뜻이 있다. 만약 식이 본다고 하면 식은 상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보는 주체 모든 색의 장애와 부딪칠 것이다. 지혜와 화합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눈의 감각기관만을 보는 주체라고 한다.
【문】이미 눈의 작용이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있음을 알았다. 눈이 색을 볼 때는 한 눈으로 보는가? 두 눈으로 보는가? 【답】이는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두 눈을 뜨고 모든 색을 볼 때면 두 눈이 함께 본다.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문지를 때는 눈 앞에 두 개의 달처럼 겹쳐져서 보이게 되고, 한 눈을 가리고 한 눈을 문지를 때 이는 보는 일이 없다 이런 까닭에 어떤 때는 두 눈이 함께 본다. 또 『발지론(發智論)』에서 보는 원인을 함께 말한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있을 때에 보는 작용이 명료하고, 두 귀, 두 코도 또한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00_b_01L【문】무슨 까닭에 두 눈 두 귀ㆍ두 코는 각각 양쪽에 있는데,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하는가? 【답】두 곳의 눈 등이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이 취한 대상이 하나의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둘이 능히 의지하는 식이 하나의 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이 함께 있을 때에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비록 두 곳에 있으나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한다. 여근(女根)과 남근(男根)은 몸의 감각기관에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따로 감각기관을 세우지 않는다. 안근의 극미는 눈의 수정체에 널리 퍼져 있고 대상을 대하고 있으면서 향능화(香菱花)15)처럼 머문다. 이근의 극미는 귀의 구멍 안에 고리를 둘러싸고 있고, 화피(樺皮)16)를 말아놓은 것처럼 머문다. 비근의 극미는 코 안에 있고, 콧등 위와 얼굴 아래 마치 쌍조갑(雙爪甲)17)처럼 머문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널리 퍼져 있고, 형태는 반달과 같다. 그러나 혀 가운데에는 마치 모발처럼 설근의 극미는 한량없다. 신근의 극미는 모든 몸의 부분에 퍼져 있다.
1)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운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를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는데, 태종이 작성한 서문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이다.
2)죄를 지은 결과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세 가지 길로, 곧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을 말한다.
3)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말한다.
4)삼해탈(三解脫), 또는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아공(我空),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俱空)을 가리키기도 하고 삼공해탈(三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愿解脫)을 가리키기도 한다.
5)여기서 인(忍)은 인가(忍可)ㆍ안인(安忍)의 뜻으로, 보살이 도리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인에는 무생법인(無生法忍)ㆍ무멸인(無滅忍)ㆍ인연인(因緣忍)ㆍ무주인(無住忍)이 있다.
6)인간의 심성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경계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7)원문에는 ‘척(隻)’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맞지 않아 ‘형(夐)’으로 교정하여 번역하였다.
8)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것을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다. 황제술성기는 바로 고종이 기문을 썼다는 의미이다.
9)『유마경(維摩經)』「불국품(佛國品)」에 나오는 보옥(寶玉)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일산(日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이나 탑의 상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 사용된 덮개를 말한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10)고승이 불경을 강론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11)향취산(香醉山)의 남쪽,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다는 상상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연못은 둘레가 8백 리이며, 여기에 용왕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 흘러내려 섬부주(贍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12)경기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지역을 말한다. 즉 나라의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3)중국 고대 관중지방에 흐르는 8개의 하천을 말한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바로 이 관중지방에 있다.
14)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는 벗어난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15)마음을 더럽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16)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1)Vasumitra를 말한다. 협존자(脇尊者). 4)번 주 참조.
2)비구로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bikṣu의 음사이다.
3)호흡을 판하는 것으로 수식관(隨息觀)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ānāpānasati이다.
4)인도 소승 유부종(有部宗) 승려로 Pārśva이다. 파율습박(波栗濕縛) 또는 파사(波舍)로 음역한다. 불멸 후 6백 년 경에 카니쉬카왕에게 권하여 카슈미르에서 5백 비구를 모아 세우(世友) 존자와 함께 제4결집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5)인도철학에서 4대종에 더하여 제5원소로 허공을 말한 학파가 있는데 이를 비판한 것이다. 아래의 문답을 보라.
6)Ghoṣa의 음역이다. 비바사 4대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아비담감로미론』 3권의 저자이다.
7)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이 만들어진 색법에 대하여 원인이 되는 다섯 가지의 구별이다. 첫째는 생인(生因)으로 4대가 화합화여 색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째는 의인(依因)으로 4대가 색법에 따르는 바가 되어 그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입인(立因)으로 4대가 색법을 유지하여 현재에 존립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인(持因)으로 4대가 색법을 유지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양인(養因)으로 4대가 색법을 더 자라게 하고 발달시키는 것이다.
8)소승 유부종인 Vaibhasika학파를 말한다.
9)고려대장경에서는 이관대고(以觀待故)라고 하였으나 다른 판본에서는 이관피고(以觀彼故)라고 하였다 뒤의 경우를 따른다.
10)Kalala의 음역으로 태에 들어가 제 7일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마음의 거품처럼 끈끈하고 조금 굳어지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11)인도에서 나는 연꽃의 일종으로 우담바라(優曇波羅)라고도 하며 연꽃 중에도 귀하게 여긴다.
12)산스크리트어 piṇḍa로, 밥ㆍ국수ㆍ나물ㆍ기름ㆍ간장 등과 같이 형체가 있는 음식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