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무기(無記)3)의 마음이 되었다면, 그는 어떤 업으로 왕생(往生)하는 것입니까?
029_0470_b_03L歸命一切智!我從此語。如是。是人臨 欲死時,成無記心,其以何業往生
【답】업(業)이 있는 기(記)의 마음은 미혹한 업으로 악도(惡道)에 나게 되고, 미혹이 없는 기(記)의 마음은 착한 업으로 선도(善道)에 나게 된다. 근본 성품인 기(記)의 마음은 이러한 이유로 행(行)을 따르는 것이다. 무기의 마음으로 무기의 업을 일으켰더라도 업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행(行)에는 간격이 없다. 잠자거나 혼미하거나 무심하거나 무심한 상태에서 죽었을 때도 행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업의 도(道)에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두 단에서 한 말은 업과 도(道)가 상응하는 이치를 드러내고, 세 번째 단에서 한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 업을 잃지 않아서 스스로 짓고 스스로 업을 받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스스로 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답】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문】스스로 업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답】몫[分]의 의미이다. 무슨 까닭인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태어난다. 무슨 까닭인가? 방편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처(行處)이다. 무슨 까닭인가? 저것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다음 생을) 받기 때문이고, 여기에서 드러나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 세간에서 지은 업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의 과보로 말미암아 네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029_0470_c_01L이 욕계에서 죽으면 욕계의 생유처(生有處)에서 중간유처(中間有處)로 가서 중간유(中間有)4)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욕계의 처(處)나 색계의 처나 제1처(第一處)나 제3처에서 다르게 태어남을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욕계의 중간유로부터 욕계의 중간유를 받기도 하고, 욕계의 중간유로부터 색계의 중간유를 받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 욕계에서 죽으면 중간유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 이와 같다. 제3처도 이와 같다. 색계의 중간유로부터 색계의 중간유를 받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가 죽으면 중간유를 받게 되는 것이 이와 같다.
【문】세존께서는 “성문은 중간유로부터 중간유를 받지만, 범부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답】수다원(須陀洹)은 이곳에서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은 다음에 하늘의 중간유(中間有)를 받아 그곳에 머물면서 사다함(斯陀含)이라는 과보의 증득을 이룬다. 그런 다음 그는 하늘의 중간유에서 인간의 중간유를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욕계를 싫어하여 벗어나는 증득을 이룬다.5) 그런 다음 그는 인간의 중간유에서 색계의 중간유를 받고, 그런 다음 그는 그 중간의 반열반지(般涅槃地)에 머물면서 하나로 향함[向一]을 이루고, 그곳으로부터 별(別)의 중간유로 들어가 이곳에서 반열반한다.
이와 같이 성문은 네 가지 중간유를 거친다. 여러 부파에서 가(家)6)와 이(已)7)의 사다함을 말하는데, 사다함이 인간의 중간유처(中間有處)에서 일간지처(一間地處)8)에 이르러서 인간의 중간유를 건너는 것도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하여 욕계의 하늘에서 욕계의 하늘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는다. 이와 같이 사람은 5음(陰)의 생유처(生有處)를 버리고 5음의 중간유처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내가 이 말에 따라 지금 마땅히 설명하겠다. 왜 자아[我]가 있다고 하며, 자아가 이 유(有)를 버리고 저 유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어떤 의혹이 있는 것입니까? 【답】선사(先師)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무아(無我)이다. 음(陰)과 처(處)를 자아[我]라고 할 뿐이다”는 여러 부파의 주장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고통이 일어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 가전연(迦旃延)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만 고통의 생(生)이 생기며, 다만 고통의 멸(滅)이 사라진다. 저 사람은 다만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029_0471_a_01L【문】다시 어떤 뜻에서 무아라고 말씀하십니까? 【답】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 또 선니(先尼)범지에게 말씀하시기를 “스승이 보고 있는 경지는 법의 진리이고 실제이니 무아라고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보는 사람을 스승이라 이름하고, 이런 이를 다타아가도아라하삼막삼불타(多他阿伽度阿羅訶三藐三佛陀)라고 이름하며, 이것이 내가 말한 가르침이다”라고 하셨고, 저 여러 부파에서도 ‘말씀이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임이 이와 같다.
【문】다시 어떤 뜻에서 무아라고 말씀하십니까? 【답】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들은 적 없고 알지 못하는 범부는 물질[色]이 바로 자아[我]라거나, 자아 역시 물질이라거나,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거나, 자아가 물질 안에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다른 네 종류인 네 가지 음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본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그 몸을 버렸을 때 5음을 자신의 본체로 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버리고 제바달다의 몸을 취하고는 그 몸이라고 보거나, 그 몸이 바로 제바달다라고 보거나, 그 몸 안에 제바달다가 있다고 보거나, 제바달다 안에 그 몸이 있다고 보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자신의 안근을 버리고 제바달다의 안근을 취하여 상아를 볼 때, 그 지견(知見)은 자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아임이 이와 같다.
【문】다시 어떤 뜻에서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십니까? 【답】자아와 자기 소유물[我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기를 “만약 자아가 있다면 자기 소유물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자기 소유물이 있다면 자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와 자기 소유물은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찾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아이다. 그리고 저 여러 부파에서도 ‘자아와 자기 소유물을 찾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임이 이와 같다.
029_0471_b_01L【문】다시 무슨 이유로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있다고 실재로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루나존자가 여러 비구와 장로에게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우니, 물(物)이 없는 가운데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도 이와 같은 장로의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이 말을 그대들이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나는 안다”고 하셨다. 깊은 뜻이 이와 같다. 자아가 있다고 실재로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여러 부파에서 실답지 못하다는 뜻으로 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임이 이와 같다.
【문】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답】자아의 모습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行)과 행의 모습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무위(無爲)와 무위의 모습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아와 자아의 모습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 여러 부파에서는 자아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까? 【답】묻고 대답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가? 묻고 대답하는 데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것이고, 둘째는 물음에 대해 먼저 힐난하고 그 다음에 대답하는 것이며, 셋째는 반문하고 나서 대답하는 것이고, 넷째는 물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명기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경우는 자아에 대한 물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명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1_c_01L【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까? 【답】정해진 것과 다른 것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당장 설명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그것은 행과 같은 것인가, 행과 다른 것인가? 무위와 같은 것인가, 무위와 다른 것인가? 이 두 종류의 설명으로는 이미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까? 【답】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만약 설명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반드시 결정해야하지만 결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문】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까? 【답】있음과 없음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가전연에게 말씀하시기를 “세간의 의지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있음[有]에 의지하는 것과 없음[無]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있음에 집착하고, 없음에 집착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문】또한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실제로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답】말의 결박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色)ㆍ통(痛 : 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얽매여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간다”고 하셨다. 저 여러 부파는 견해에 얽매이고 말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정견(正見)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은 화생(化生)을 바르게 본다”고 하셨기 때문에 정견이다. 저 여러 부파의 견해도 정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부처님께서 4념처(念處)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을 관찰하라”고 하셨는데, 만약 자아가 없다면 살펴볼 네 가지 법도 없을 것이다. 저 여러 부파에서는 부처님께서 4념처를 말씀하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부처님께서 성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불을 숭배하여 자기 몸을 태우고 다른 사람에게도 각자의 몸을 태울 것을 권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태울 것도 없을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도 태울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저 여러 부파에서는 ‘부처님께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2_a_01L【문】여러 부파에서는 무슨 이유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한 사람이 세간에 출현하면 많은 사람이 안락한 삶을 얻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모든 공덕을 갖춘 사람이 세간에 태어나면 여러 사람이 안락함을 얻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없다면, 누가 공덕을 낳겠는가? 이 여러 부파에서는 ‘한 사람이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문】또한 여러 부파에서는 “5음(陰)이 바로 사람이고, 바로 자아이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답】계(界)의 문(門)을 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6계의 문과 6촉(觸)이 바로 사람이다”고 하셨다. 저 여러 부파에서는 ‘부처님께서 6계의 문과 6촉이 바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이것이 사람이지 달리 사람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부처님께서 “외국에 최상의 여인인 수다라 등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한 이 최상의 여인은 희거나 검거나 푸르거나 매끄럽거나 방정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가는 허리이거나 살이 찐 그 사람이지 이와 달리 사람은 없다”고 하신 것이 이와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어떤 사람이 미워할 만한 한 비구를 보았으니, 그는 키가 짧거나 곱사등이거나 앉은뱅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 “나는 천안(天眼)으로 사랑할 만한 중생과 미워할 만한 중생 등을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쌓아 놓은 땔나무를 불태우는 것과 같다. 불타는 지옥에 있는 사람 또한 이와 같다”고 하셨다. 앞에서 말한 최상의 여인 등과, 미워할 만한 비구를 보는 것과, 부처님께서 사랑할 만한 중생과 미워할 만한 중생을 보는 것과, 내지 불타는 지옥에 있는 사람은 쌓아 놓은 땔나무를 불태우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다만 이 5음을 사람이라고 한 것일 뿐이지 달리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여러 부파에서 ‘부처님께서는 5음이 바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2_b_01L【문】또 여러 부파에서 “사람은 5음과 다르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답】비유하면 무거운 짐을 진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무거운 짐은 5음이고, 짊어지는 자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과 5음은 각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5음은 다르다는 것이 이와 같다. 【문】또 무슨 이유로 사람이 5음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애욕을 취하여 그 두 번째로 삼으면 긴 세월동안 윤회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과 애욕은 다르다. 따라서 사람과 5음은 각각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2_c_01L【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과 5음이 각각이라는 것입니까? 【답】이것은 과거세나 현재에도 동일한 자아[我]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과거세에 전륜성왕이었는데, 이름을 선견(善見)이라 하였고, 또한 대천(大天)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 새로운 5음을 받았더라도 과거세의 나와 다르지 않다”고 하셨다. 따라서 사람과 5음은 각각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과 5음이 각각이라는 것입니까? 【답】장소에 따라 가르침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5음은 무상(無常)하지만 사람은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셨고, 어떤 때에는 부처님께서 “5음은 무상한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때에는 부처님께서 “5음은 영원한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영원한 모습과도 다르고, 무상한 모습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사람과 5음이 각각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문】또한 여러 부파에서 “사람은 영원하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답】사람에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땅히 생사(生死) 가운데 행할 수 없다. 비유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사는 근원이 없는데도, 중생은 윤회한다”고 하셨다. 생사의 근원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근원이 없다. 만약 사람이 근원이 없다면 그 끝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하다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이 영원하다는 것입니까? 【답】과거세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을 기억하고, 나아가 과거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생을 기억한다”고 하셨으니, 5음(陰)이 무너져 생사에 흘러 다닌다고 해도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저 여러 부파에서 ‘한 생을 기억하고 내지 과거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생을 기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이 영원하다는 것입니까? 【답】처(處)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러 저 땅에 머무는 것을 바라문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또 “저 언덕으로 건너가고 나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또 “저 언덕에 이른 사람은 저곳에 머물며 타락하지 않고, 저 언덕에 이르고 나서는 다시는 근심과 번뇌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저 언덕에 이른 자를 본다면 저곳에 머물러 무너짐이 없을 것이니, 근심과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하다. 저 여러 부파에서는 부처님께서 그 곳을 말씀하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하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이 영원하다는 것입니까? 【답】흔들리지 않는 즐거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문】또한 여러 부파에서 사람이 무상(無常)하다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답】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한 사람이 태어나서 모든 사람이 안락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만약 태어남이 있다면, 그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근원이 있다면, 그 끝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상하다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이 무상하다는 것입니까? 【답】부처님께서 “새로[新]”라는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로 태어난 하늘나라 사람은 안색이 좋고 단정하며 위덕이 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새로’라는 말은 영원함이 없는 존재이니, 이것을 ‘새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상하다는 것이 이와 같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이 무상하다는 것입니까? 【답】전도된 법(法)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바사닉왕(波斯匿王)은 사람의 왕이긴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전도됨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전도된 법이 있다면 무상하다는 것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상하다. 【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은 무상하다는 것입니까? 【답】타락하여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열반은 영원하여 타락하지도 태어나지도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면 “나는 중생의 타락과 태어남을 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중생은 타락하여 태어난다. 따라서 사람은 무상하다.
029_0473_b_01L【문】다시 무슨 이유로 사람은 무상하다는 것입니까? 【답】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사부대중의 선지식이다. 태어남과 죽음 때문에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면 태어남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셨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무상한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상하다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이 수다라(修多羅)를 근본으로 하여 “실제 자아는 없다”고 말함이 있는 것이 이와 같고, “자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함이 있는 것이 이와 같고, “자아가 있다”고 말함이 있는 것이 이와 같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렇다면 실제로 자아가 있다고 해야 할까, 임시로 설정한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할까” 하고 의심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까닭에 “5음이 자아다”는 주장이 있고, “자아는 5음과 다르다”는 주장이 있고, “영원하다”는 주장이 있고, “무상하다”는 주장이 있게 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을 일으킨다.
【문】왜 사람은 이 존재[有]를 버리고 다른 존재를 받습니까? 【답】수다라의 뜻과 같다. 교화의 힘으로, 5성음(盛陰)이 사람을 이루면 그것을 실제의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성음이 사람을 이루는 것을 실제의 사람으로 여기는 까닭에 사람이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앞 장에서 무아를 으뜸으로 해서 각기 집착하여 주장함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해답을 얻게끔 할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 말하길 “고(苦)가 일어나는 것일 뿐이기에 무아임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고(苦)란 고통이 나고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고의 성품이다. 부처님께서 고의 성품을 드러내고자 가전연에게 말씀하시기를 “고의 생(生)을 생이라 하고, 고의 멸(滅)을 멸이라 한다. 자아의 모습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029_0473_c_01L또한 앞에서 “말씀이 없기 때문에 무아임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자아 등의 모습은 믿음으로 수용한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외도들에게 “비록 자아가 있다고 해도, 이것은 자아라고 가명(假名)한 것이지 자아를 실제로 말한 것은 아니다. 자아라는 것은 유루의 5음에 의지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과거와 미래의 법을 보시고 “이것은 자아이다”라고 말씀하셨으나 실제 자아는 아니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행에 의지해서 행하므로 이름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자아라고 이름하여 말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또한 앞에서 “그 몸을 스스로 보기 때문에 무아임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중생은 무명에 덮여 5음에 자아가 없는데도 이를 자아라고 한다. 예컨대 새로 태어난 무지한 어린 아이가 다른 어머니를 보고 자기 어머니로 여기는 것과 같다. 5음에 자아가 없음에도 자아로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이와 같다. 또한 앞에서 “무아이다. 자아와 자기 소유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재하지 못한 자아와 자기 소유물에 의지하기에 실제의 성품을 얻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고 하셨다. 다른 것에 의해 규제되는 것은 스스로 규제한다고 이름하지 못한다. 만약 스스로 규제한다면 다른 것이 규제한다고 이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와 타인의 규제는 끊지만 자아는 끊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4_a_01L또한 앞에서 “있다고 실제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임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가 아닌 것이 없는 법과 화합했다면 그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없음을 끊어서 있음을 말하지만 자아는 끊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모습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거나 자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자아의 영원한 모습과 무상한 모습 등을 말할 수 없지만 자아가 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는 점도 있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몸 등의 모든 것을 태웠다”고 하셨다. 또 부처님께서 “진리를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범부는 악한 업으로 모습을 삼지만, 총명한 사람은 착한 업으로 모습을 삼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러 부파의 주장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됨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는지 자아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그대로 방치한다.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질문이 사실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질문이 사실과 상응한다면 도외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무지한 범부들은 착하지 않고, 총명한 사람은 착하다”고 명기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러 부파의 말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됨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고도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확정된 것이기도 하고 다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자아가 체험한다면 이 행(行)은 다른 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바르게 말한다면, 이 행은 다른 행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 부파의 주장을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여겨 버려야 함이 이와 같다.
029_0474_b_01L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고도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자아가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단견과 상견을 이룬다. 만약 이 두 견해에 의지한다면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면 명기하지 않는 부류의 오류를 이룬다. 이 말은 옳지 않다. 무슨 이유인가? 만약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를 사견(邪見)이라 한다. 만약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를 바른 견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수다라(修多羅)에서 “만약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를 사견이라 이름하고, 만약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를 아견(我見)이라 이름한다. 만약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원하면서 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행은 영원하면서 무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유유(有有)와 같다고 한다면, 행은 무상하지만 무위(無爲)의 영원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같은 유(有)지만 영원함과 무상함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고도 자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있음과 없음에 의지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도무지 자아가 없다면 부처님께서 의지할 대상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아야 하는데, 부처님께서 의지할 대상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 말의 결박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묶을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결박은 있다. 임금의 감옥처럼 비록 사람이 없더라도 결박은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새끼줄이 있으면 결박함이 있고, 새끼줄이 없으면 결박함도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자아가 없어도 말의 결박은 있는 것이 이와 같다.
029_0474_c_01L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 바른 견해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유루(有漏)의 음(陰)에 의지해 부처님께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사람들이 사람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 부처님께서 4념처(念處)를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부처님께서 가전연에게 “오직 마음일 뿐이다”고 하셨으니,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을 드러내고자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존재를 이루는 것에 다시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 부처님께서 성문(聲聞)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성문들은 설하는 자리에서 법에 의지한다. 성문들은 말할 뿐이지 다시 다른 것이 없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자아가 있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은 가명(假名)이다. 따라서 이는 그 친구와 같다”고 하셨다. 무아라고 만약 실제로 자아가 없다면 살생도 살생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고 살생을 당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도적질과 삿된 음행과 거짓말과 술을 마시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아라고 만약 실제로 자아가 없다면 5역죄 역시 없을 것이며, 모든 인식기관을 방임하더라도 선과 악을 일으키는 자가 없을 것이며, 결박도 없고 결박을 푸는 자도 없고 결박하는 대상도 없을 것이며, 짓는 자도 없고 업도 없고 과보도 없을 것이다.
만약 업이 없다면 과보도 없을 것이고, 업과 과보가 없다면 생사도 없어야 하는데 중생은 업과 과보로 생사에 윤회한다. 만약 생사가 없다면 생사의 원인도 없을 것이고, 생사의 원인이 없다면 원인의 소멸도 없을 것이며, 만약 원인의 소멸이 없다면 진리의 길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4제(諦)도 없을 것이고, 만약 4제가 없다면 4제를 말씀하시는 부처님도 없을 것이고, 만약 부처님이 없다면 스님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없다면 삼보(三寶)와 4제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사실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앞에서 말한 모든 허물을 이루고 뒤의 허물 역시 생기게 한다. 만약 사람도 있고 자아도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와 같은 허물이 없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다라의 참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자아는 있다.
029_0475_a_01L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5음이 바로 사람이고 자아이다. 계(界)의 문(門)이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사람의 목숨이 자아와 다르다면, 이는 수다라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면 5음이 바로 자아이거나 자아가 바로 5음이다. 만약 5음이 자아라면 5음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자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아가 5음이라면 자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5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양쪽으로 말할 수 있다 해도 5음은 자아가 아님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사람은 5음과 다르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과 같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짊어지는 것에 의지해 짊어짐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9) (5음이) 무너질 때와 일어날 때, 자아 역시 일어나고 또 없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면 자아 역시 한 부분이 되어야 하고, 이와 같이 한 부분이 많은 부분을 이루고, 한 부분과 많은 부분이 다시 하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몸이 존재하는 시간만큼 목숨도 따라서 존재하고, 목숨이 존재하는 시간만큼 몸도 따라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5음이 곧 자아라는 이런 주장은 버릴 만한 것임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사람은 5음은 다르다. 애욕을 취하여 그 두 번째로 삼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사람이 바르게 본다면 의심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사람에게 애욕의 결박이 있으면 생사(生死)에 윤회한다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도리를 드러내고자 “사람이 애욕을 취하여 그 두 번째로 삼으면 생사에 오랫동안 머문다. 애욕이 끊어질 때 다시는 생사에 윤회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아는 5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와 같다.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사람과 5음은 각각이다. 업의 과보를 받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유루의 생사에 의지해서 이 생과 미래의 생에서 그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과 5음은 각각이 아니다.
029_0475_b_01L또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사람과 5음은 각각이다. 이는 동일한 자아를 말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바라밀[度]에 의지해 부처님께서 “나는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 시절에 정생왕(頂生王)이 된 적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과 5음은 각각이 아님이 이와 같다.
또 앞에서 말했듯 여러 부파에서 “사람과 5음은 각각이다. 장소에 따라 가르침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주장한다. 5음과 자아가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의 모습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어느 것을 내세워 말할 수 없고, 자아 역시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 부처님께서는 “자아와 다르다거나 몸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 부처는 대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수다라에서도 밝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 자아가 5음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할 수도 있다. 만약 자아가 5음 안에 있다면 몸을 쪼갤 때나 깨뜨릴 때 자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모기가 우담바라의 열매 안에 있으면 우담바라 열매를 깨뜨릴 때 모기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자아가 5음 안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자아가 몸과 다르다면 냉기와 열기가 몸에 닿아도 자아가 지각하지 못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 눈을 크게 뜨면 두 배는 더 잘 보아야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모든 인식기관이 파괴되었을 때에도 소리와 항기와 맛과 촉각 등을 역시 지각해야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또 만약 자아가 몸과 다르다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들어가고 다시 이 몸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자아가 (몸과) 다르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029_0475_c_01L또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 자아는 곳곳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곳곳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는다면 한 생각에 모든 곳에서 태어나는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몸 안에 있지 않아야 하고, 그러면 해탈은 얻기 어렵다. 만약 곳곳에서 행한다면 마땅히 업을 지을 수 없고, 만약 업의 과보가 없다면 또한 힘쓰는 업도 없을 것이고, 또한 결박에서 풀려남도 없을 것이며, 또한 선(禪)을 행함이 없어도 곧바로 해탈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 등은 사실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몸과 다르다는 주장을 버려야 함이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