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백 년 뒤에 제자들은 부(部)로 나뉘어 주장함이 달라 여래의 바른 가르침과 중생들의 이익을 훼손시켰다.
불료의경(不了義經)에 대하여 말과 같이 집착한 까닭에 잘못된 것이니 중생들이 싫증과 두려움을 일으키면 지금 이교(異敎)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천우(天友)대보살은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큰 서원을 세워 수승한 지(智)와 정(定)과 비심(悲心)으로 이와 같은 뜻을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나는 모든 중생들이 갖가지의 소견을 따라 흐르는 것을 보고 짐짓 진실한 뜻을 설명하노니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드러내느라.
만일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알면 성제(聖諦)가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한 뜻을 취하리니 마치 모래 속의 금과 같다.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ㆍ세존께서 열반[滅]하신 지 꼭 일백 년이 되었을 때이니, 마치 밝은 해가 알실다산(頞悉多山)에 숨어버린 지 백 년이 지나고 다시 십육 년이 되었을 때였다. 파타리불다라(波吒梨弗多羅)라는 큰 나라에 아수가(阿輸柯)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어서 크고 흰 일산으로 온 천하를 덮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대중은 쪼개지고 흩어졌으니, 쪼개지고 흩어진 대중에는 무릇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대국중(大國衆)이요, 둘째는 외변중(外邊衆)이며, 셋째는 다문중(多聞衆)이요, 넷째는 대덕중(大德衆)이었다. 이 네 가지 대중은 다 같이 외도가 세운 다섯 가지 인연[五種因緣]1)첫째, 여인염오의(餘人染汚衣:餘所誘):아라한에게는 번뇌로 누실(漏失)하는 일은 없으나 천마(天魔)가 와서 유혹하고 요란하면 부정(不淨)이 흘러 나와 옷을 더럽힌다는 것. 둘째, 무명(無明:無知):아라한은 염오(染汚)의 무지(無知)는 없으나 불염오(不染汚)의 무지는 아직 존재한다는 것, 셋째, 의(疑:猶豫):아라한은 수면성(隨眠性)의 의심은 없으나 처비처(處非處)의 의심에 대해서는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 넷째, 타도(他度:他舍入):경에서는 아라한이 성혜안(聖慧眼)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해탈(解脫)을 스스로 증(證)하여 안다고 하였으나 그래도 남의 가르침을 따라 비로소 아는 이도 있다는 것. 다섯째, 성도언소현(聖道言所顯:道因聲故起):사제(四諦) 등의 성도(聖道)를 일으키게 함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를 내어 불러야 하는 것. 을 설명했던 것이다. 다섯 가지 인연은 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옷을 더럽힘과 무명(無明)과 의심과 다른 이의 제도[他度]와 성도(聖道)는 말로써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다.
이 다섯 가지 처소[五處]를 사택(思擇)하면서 두 부(部)로 나뉘어졌다. 첫째2)는 대중부(大衆部)요, 둘째는 상좌제자부(上座弟子部)이다. 제2백 년의 중간에 이르러서 대중부로부터 또 세 부가 나왔으니, 첫째는 일설부(一說部)요, 둘째는 출세설부(出世說部)이며, 셋째는 회산주부(灰山住部)이다. 이 제2백 년 중간에 대중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은 득다문부(得多聞部)이다. 이 제2백 년 중간에 대중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은 분별설부(分別說部)이다. 이 제2백 년이 다 차서 한 외도가 있었으니 이름은 대천(大天)이었다. 대중부 가운데 출가하여 혼자 산간에 있으며 대중부를 널리 펴 연설하다가 다섯 가지에 대해 다른 것을 주장[緝異]하면서 스스로 두 부를 이루었으니, 첫째는 지제산부(支提山部)요, 둘째는 북산부(北山部)이다. 이와 같이 대중부는 넷으로 쪼개지고 다섯으로 쪼개지면서 합하여 7부를 이루었으니, 첫째는 대중부요, 둘째는 일설부이며, 셋째는 출세설부요, 넷째는 회산주부이며, 다섯째는 득다문부요, 여섯째는 불별설부이며, 일곱째는 지제산부와 북산부이다. 상좌제자부(上座弟子部)는 세간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제3백년 중에 이르러서 사소한 인연으로 두 부로 나뉘어졌으니, 첫째는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로서 설인부(說因部)라고도 하며, 둘째는 설산주부(雪山住部)로서 상좌제자부(上座弟子部)라고도 한다. 이 제3백 년 중간에 설일체유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가주자제자부(可住子弟子部)이다. 이 제3백 년 중간에 가주가제자부로부터 또 네 부가 나왔으니, 첫째는 법상부(法上部)요, 둘째는 현승부(賢乘部)이며, 셋째는 정량제자부(正量弟子部)요, 넷째는 밀림주부(密林住部)이다. 이 제3백 년 중간에 설일체유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정지부(正地部)이다. 이 제3백 년 중간에 정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법호부(法護部)이다. 이 제3백 년 중간에 설일체유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선세부(善歲部)이며 또한 이름을 음광제자부(飮光弟子部)라고도 한다. 제4백 년 중간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설도부(說度部)이며 또한 이름을 설경부(說經部)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상좌제자부는 합하여 11부로 나뉘어졌으니, 첫째는 설일체유부요, 둘째는 설산주부이며, 셋째는 가주자제자부요, 넷째는 법상부이며, 다섯째는 현승부요, 여섯째는 정량제자부이며, 일곱째는 밀림주부요, 여덟째는 정지부이며, 아홉째는 법호부요, 열째는 선세부이며, 열한째는 설도부이다. 이 모든 부[諦部]는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이 있고 주장하는 뜻에 차이가 있는 것이 있다. 나는 이제 이 주장하는 뜻에 근본이 되는 것을 설명하겠다. 대중부(大衆部)와 일설부(一說部)와 출세설부(出世說部)와 회산주부(灰山住部)의 이 네 부에서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이 모든 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온갖 부처님 세존은 세간에 출현하시고 여래는 한 가지의 법[一法]이어서 이것에는 유루(有漏)가 없으며, 여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전법륜(轉法輪)이요, 여래는 한 음성[一音]으로써 온갖 법을 능히 말씀하시며, 여래의 말씀은 여여하지 않은 뜻[不如義]이 없다. 여래의 색신(色身)은 끝이 없고 여래의 위덕과 세력은 줄어 듦이 없으며 여래의 수명은 끝이 없고 여래의 중생을 교화하되 즐거이 믿으면서 만족해함이 없는 마음[無厭足心]은 내게 한다. 여래는 언제나 잠을 자는 일이 없고 여래는 물음에 대답하되 사유(思惟)하지 않으시며 여래의 말씀은 모두가 중생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 여래는 마음으로 항상 관(觀)하셔서 적정(寂靜)하고 동요하지 않는다. 여래는 한마음으로 온갖 경계를 능히 통달하고 여래는 한 찰나에 반야(般若)와 상응하여 온갖 법을 능히 이해하며 여래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항상 평등하게 마음을 따라 행(行)하고 이에 무여열반(無餘涅槃)에까지 이른다. 온갖 보살이 태(胎) 안에 들 적에는 가라라(柯羅邏)ㆍ알부타(頞浮陀)ㆍ비시(卑尸)ㆍ가하나사거(伽訶那捨佉)ㆍ바라사가(波羅捨伽)ㆍ계사로마나거(雞捨盧摩那佉) 등이 없고 보살이 태 안에 들고자 할 때에 모두 흰 코끼리의 모양을 짓는다. 보살이 태에서 나올 때에는 모두가 어머니의 오른쪽 겨드랑이로 태어나고 온갖 보살은 탐욕의 생각도 없고 진에의 생각도 없으며 다른 이를 괴롭히려는 생각이 없다. 만일 보살이 원(願)이 있어 악도에 나고자 하면 원력(願力) 때문에 곧 가서나게 되니,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고 성취시키기 위하여 짐짓 악도에 들어가는 것이요 번뇌와 업의 계박(繫縛) 때문에 이런 생(生)을 받지는 않는다. 한마음으로 바르게 대하면서 사성제(四聖諦)를 관하고 하나의 지[一智]로 사성제와 사성제의 모양[相]을 통달하며, 다섯 가지 식[五識] 중에는 염(染)과 정(淨)이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도 또한 여섯 가지 식[六識]의 무더기[聚]가 있으며 다섯 가지의 근[五根]은 곧 살덩이[肉團]로 되고 눈은 빛깔을 보지 못하며 더 나아가 몸의 촉감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마음이 정(定)에 있으면 또한 말이 있을 수 있고 꺾어 누르는 마음이 항시 존재하며 서로 파괴하는 마음이 항상 존재하므로 범부에는 상하(上下)가 있고 이미 법을 성취하였으나 처소(處所)가 없다. 수루다아반나(須氀多阿半那:須陀洹)의 심(心)과 심법(心法)은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며, 아라한(阿羅漢) 다타(多他)에게는 부정(不淨)으로써 그의 옷을 더럽히는 것이 있고 아라한 다타에게는 무지(無知)가 있으며 의혹(疑惑)도 있고 다른 이의 제도[他度]도 있으며 성도(聖道)는 또한 말로 드러낸다. 고(苦)는 또한 도(道)이며 또한 인(因)이라고 설명하며, 반야(般若)와 상응하여 고를 소멸하고 고수(苦受)는 또한 밥[食]이며 제팔(第八)은 또한 오래 머물고 더 나아가 성법(性法)을 물러난다. 수루다아반나는 물러나는 법[退法]이요 아라한 다타는 물러나지 않는 법[不退法]이며, 세간에는 정견(正見)과 신근(信根)이 없으며, 무기법(無記法)도 없다. 만일 사람이 정정(正定:正性離生)에 들어가면 온갖 결(結)이 소멸한다. 수루다아반나는 온갖 악을 능히 짓되 오직 오역(五逆)만은 짓지 않고 온갖 모든 경의 불료의(不了義)가 없다. 무위법(無爲法)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택멸(思擇滅)이요, 둘째는 비사택멸(非思擇滅)이며, 셋째는 허공(虛空)이요, 넷째는 공처(空處)이며 다섯째는 식처(識處)요, 여섯째는 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일곱째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요, 여덟째는 십이인연생분(十二因緣生分)이며, 아홉째는 팔성도분(八聖道分)이다. 마음이란 것은 자성(自性)은 청정하되 객진(客塵)으로 더럽혀지나니 첫째는 수면번뇌(隨眠煩惱)요, 둘째는 도기번뇌(倒起煩惱)이다. 수면번뇌는 심(心)도 심법(心法)도 아니고 소연(所緣)도 없으며, 수면번뇌가 다르고 도기번뇌가 다르며 수면번뇌는 마음과 서로 여의고[相離] 도기번뇌는 마음과 상응(相應)한다. 과거와 미래의 이것은 없고 현재 이것은 있으며 법인(法人:法處)는 알 바[所知]가 아니고 인식할 바[所識]도 아니며 중음(中陰)은 없고 수루다아반나는 정(定)을 얻는다. 이것이 네 부[四部]에서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주장[執義本]이다. 주장하는 뜻에 차이[執義異]가 있는 것으로는 대중부(大衆部)에서 주장하는 뜻이 다른 세 부와는 다르다. 사성제(四聖諦)는 모두가 진실(眞實)이요, 여여(如如)한 대(對)가 있으며 행(行)을 찬탄할 만하며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 것이 있고 괴로움은 다른 이가 짓는 것이 있으며, 괴로움은 둘이 다 짓는 것이 있고 괴로움은 둘이 짓는 것이 아닌 것이 있으며, 괴로움은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있고 인연에 의하여 생기지 않는 것이 있다. 한 때[一時] 가운데서 많은 마음[多心]의 화합(和合)이 있고, 도(道)와 번뇌는 함께 일어나며, 업(業)과 과(果)는 함께 일어나고, 종자(種字)는 곧 싹[芽]이며, 육근(六根)과 사대(四大)는 바뀌어 달라지고, 심(心)과 심법(心法)은 바뀌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마음이 두루 가득하여 몸과 마음은 더욱 자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는 줄 알 것이며, 모든 부(部)에서 믿고 좋아하는[信樂] 것은 동일하지 않고 저마다 주장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주장하는 뜻이 다르다고 한다. 다문부(多聞部)에서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래의 오명(五鳴)은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니 오명은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내가 없고[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이다. 이 오명은 바로 출세간의 도(道)요 여래의 그 밖의 명(鳴)은 바로 세간의 도이다. 아라한 다타에게는 부정(不淨)으로써 옷을 더럽히는 것이 있고, 아라한 다타에게는 무지(無知)가 있으며 의혹도 있고 다른 의의 제도[他度]가 있으며 성도(聖道)는 또한 말로써 드러난다. 그 밖의 다른 주장은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에서 주장한 것과 서로 유사하다. 분별설부(分別說部)에서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苦)는 음(陰)이 아니요 온갖 입(入)은 성취하지 않으며 온갖 유위법(有爲法)은 상대가(相待假)이므로 고(苦)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람의 공력(功力)은 없으며 때 아닐 때[非時節]에 죽는 일이 없고 온갖 얻는 바는 전생의 업으로 지었으며 원인과 결과가 더욱 자라서 능히 업(業)을 내고 온갖 모든 고(苦)는 업으로부터 생기며 성도(聖道)는 복덕(福德)을 말미암아 얻고 성도는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 밖의 다른 주장은 대중부의 주장과 서로 유사하다. 지제산부(支提山部)와 북산부(北山部)의 두 부에서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보살은 악도(惡道)를 벗어나지 않고 수두파(藪斗陂:塔娑)를 공경히 섬겨도 얻는 보(報)는 적으며 아라한 다타에게는 부정(不淨)으로써 그의 옷을 더럽히는[染汚] 것이 있고 아라한 다타에게는 무지(無知)도 있으며 의혹(疑惑)도 있고 다른 이의 제도[他度]도 있으며 성도(聖道)는 또한 말[言]로써 드러난다. 그 밖의 다른 주장은 대중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다.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가 집착하는 뜻의 근본은 다음과 같다. 온갖 존재는 존재[有]한 것과 같고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법은 온갖 것을 포섭 하며 과거ㆍ현재ㆍ미래도 존재한다. 첫째는 바른 설명[正說]에 의지하고, 둘째는 두 가지의 법[二法]에 의지하며, 셋째는 존재하는 경계[有境界]에 의지하고, 넷째는 존재하는 결과[有果]에 의지한다. 법입(法入:法處)에는 세 가지가 있어서 인식할 바[所識]요, 알 바[所知]요, 통달할 바[所通]이며, 나고ㆍ늙고ㆍ머무르고ㆍ무상(無常)하며, 이 행(行)은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心不相應] 행음(行陰)에 섭수된다. 유위(有爲)의 종류는 세 가지요 무위(無爲)의 종류도 세 가지이며, 유위의 모양[相]은 세 가지요 무위의 모양도 세 가지이며, 사제(四諦) 가운데서 세 가지 진리[三諦]는 유위요 한 가지의 진리[一諦]는 무위이며, 사제는 차례대로 관한다. 만일 사람이 정정(正定:正性離生)에 들어가고자 하면 반드시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반연하여 들어가게 되고, 만일 욕계와 상응한 모든 행(行)을 관하면 정정에 들어가게 된다. 만일 사람이 이미 정정에 들었다면 십오심(十五心) 중에 있으면서 수루다아반 향(向)이라 하고, 만일 제십육심(第十六心)에 이르면 수루다아반나라고 하며 세제일법(世第一法)은 한 찰나의 마음이니 세 가지의 방편이면 물러난다는 뜻[退義]이 있고 세제일법에는 물러난다는 뜻이 없으며 수루다아반나에는 물러난다는 뜻이 없고 아라한 다타에는 물러난다는 뜻이 있다. 온갖 아라한 다타가 모두 무생지(無生智)를 얻지는 않고 범부도 또한 탐욕[欲]과 진애[瞋]를 버릴 수 있으며, 외도도 다섯 가지 신통을 얻고 하늘[天]도 또한 부람마(夫嵐摩:梵行)가 있으며 일곱 가지 정[七定]에는 각분(覺分)이 있고 그 밖의 다른 정에는 없으며 온갖 정이 이 사념처(四念處)에 섭수되지 않음이 없다. 설령 정(定)에 의하여 정정(正定)에 들게 되지 않아도 또한 아라한 다타를 얻고,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에 의하여 아라한 다타를 얻는다 해도 정정에는 들게 되지 못하나 욕계 가운데서는 정정에도 들고 또한 아라한 다타도 얻는다. 울다라구루(鬱多羅鳩婁:北俱盧洲)에는 욕탐을 여읜 사람이 없고 성인은 그곳에 나지 않으며 성인은 또한 무상천(無想天)에도 나지 않고 반드시 차례대로 성도(聖道)의 사과(四果)를 얻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이 이미 정정(正定)에 들었으면 세속의 도(道)에 의지하여 바범리타여미(婆凡里陀如寐:一來果, ?는 彌履反의 音)와 아나가미(阿那伽寐:不還果)를 얻고 사념처(四念處)는 온갖 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수면번뇌(隨眠煩惱)는 바로 심법(心法:心所)이요, 심(心)과 상응하지 않으며 온갖 수면번뇌는 도기(倒起:纏)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온갖 도기번뇌도 도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되 수면(隨眠)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십이연생(十二緣生)은 유위(有爲)이고 십이연생분(十二緣生分)도 아라한 다타를 따라 행하는 것이 있으며 아라한 다타에게도 또한 복덕(福德)이 더욱 자라는 것[增長]이 있고 욕계와 색계 중에는 중음(中陰:中有)이 있으며 다섯 가지 식[五識]이 나타나 일어날 때에 욕심을 낼 수도 있고 욕심을 여읠[離欲] 수도 있으며 다섯 가지 식은 집별(執別)할 뿐이요 모양[相]에는 분별이 없다. 심(心)과 조심법(助心法:心所)이 있고 마음과 마음을 돕는 법은 반드시 경계(境界)가 있으며 자성(自性)과 자성은 상응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도 상응하지 않으며 세간에는 정견(正見)있고 세간에는 신근(信根)이 있으며 무기법(無記法)이 있다. 아라한 다타에는 학법(學法)이 없고 온갖 아라한 다타는 모두가 정(定)을 얻지만 온갖 아라한 다타는 모두 정을 증득하지는 않으며 아라한 다타는 전생 업[宿業]이 있어서 오히려 보(報)를 얻고 온갖 범부도 또한 선한 마음에 있으면서 죽는 것이 있다. 만일 사람이 바로 정(定)에 있게 되면 반드시 죽지 않고, 여래와 제자와 혹(惑)의 소멸에는 차이가 없으며 여래의 자비는 중생을 취하여 경계를 짓지 않고 만일 중생의 모양[相]으로 해탈의 뜻에 집착한다면 온갖 보살의 정을 성취하지 못하나니 이는 범부로 아홉 가지 결[九結]을 갖춘 이며 만일 보살이 이미 정정(正定)에 들었으나 아직 범부의 자리[凡夫地]를 초월하지 못했으면 이것은 취한 바의 상속(相續)으로 중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온갖 행은 모두가 찰니가(刹尼柯:刹那滅)요, 어떤 법도 이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에 이르는 것은 없으며 세속에 의지하여 임시로 불가라(不伽羅:補特伽羅)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나가는 사람이요, 정법(正法)일 대에 행(行)이 모였다가 소멸하여 남음이 없으며 모든 음(陰)은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다. 출세간의 정(定)이 있고 모든 각(覺:尋) 이것도 있으며 무루(無漏)에도 선(善)이 있으며 이것에는 인(因)이 있다. 만일 사람이 바로 정에 있으면 말[語 ]이 없으며 팔분성도(八分聖道)는 이것을 바로 법륜(法輪)이라고 한다. 세존의 온갖 말씀이 모두가 전법륜(轉法輪)은 아니고, 한 음성[一音]으로 온갖 법을 완전히 모두 말씀하지 못하여 온갖 말씀이 모두가 여의 뜻[如義]은 아니다. 온갖 경(經)이 모조리 요의(了義)가 아니며 경에는 불료의(不了義)가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이것이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며, 다시 다르게 주장하는 것이 있으나, 곧 끝이 없다. 설산부(雪山部)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보살은 범부이나 탐(貪)으로 생을 받음이 없으며 태(胎) 등에 싸이지는 않는다.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이 없고 하늘에는 부람마(夫嵐摩)가 없다. 아라한 다타(多他)는 부정(不淨)으로써 옷을 더럽히는 것이 있고 아라한 다타에게는 무지(無知)가 있으며 의혹(疑惑)이 있고 다른 이의 제도[他度]도 있으며 성도(聖道)는 또한 말로 드러난다. 그 밖의 다른 주장은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다. 가주자부(可住子部)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음(五陰)과 즉(卽)한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오음과 다른[異] 이것도 사람이 아니며 음(陰)ㆍ계(界)ㆍ입(入)을 포섭한 까닭에 사람 등에는 거짓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니 세 가지의 거짓[三種假]이 있다. 첫째는 온갖 거짓[一切假]을 포섭하고, 둘째는 일부분의 거짓[一分假]을 포섭하고, 셋째는 멸도의 거짓[滅度假]을 포섭한다. 온갖 유위법(有爲法)은 찰나마다 소멸하고 색(色)을 여의고는 한 법[一法]도 이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에 이르는 것은 없으나 사람은 옮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외도도 다섯 가지의 신통(五通)이 있고 설령 사람이 바로 다섯 가지의 식을 내어도 욕심[欲]이 없고 욕심을 여의는 것[離欲]도 없으며 욕계와 상응한 모든 결(結)은 수도(修道)에 파괴할 바요, 만일 사람이 능히 끊으면 욕심을 여의게 되면 욕계의 견도(見道)에서 파괴할 바는 곧 그렇지가 않다. 인(忍)ㆍ명(名)ㆍ상(相)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이 네 가지의 자리[四位]를 정정(正定:正性離生)이라고 하고 만일 사람이 이미 정정에 들어 십이심(十二心) 중에 있으면 이것을 수루다아반나의 향(向)이라 하며 제십삼심(第十三心)까지를 수루다아반나라고 한다. 온갖 중생에게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뜻의 허물[意失]이요, 둘째는 일의 허물[事失]이다. 생사(生死)에는 두 가지 인(因)이 있는데 맨 위의 하나는 번뇌요, 둘째는 업이다. 두 가지 법은 해탈하는 데 맨 위가 되는 인(因)이니, 비발사나(毘鉢舍那)와 사마타(奢摩他)이며 만일 자체(自體)에 의하지 않으면 증상연(增上緣)이요, 정법(正法)을 부끄러워한다면[慚羞] 곧 이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 번뇌의 근본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항시 온갖 중생의 행(行)을 따르는 것이니, 이를테면 무명(無明)과 유애(有愛)이며 일곱 가지의 청정한 곳이 있고 부처님의 지혜는 계율 등에서는 상응하지 않으며 모든 경계는 의지(依止)로써 연(緣)을 환히 알며 온갖 법을 능히 통달한다. 만일 멸(滅)로써 그를 섭수한다면 무릇 여섯 가지가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정정(正定)에 들어가는 것이 없으며 보살은 그 가운데서 항시 생기고[恒生] 만일 이미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생기면 부처님이라고 이름하게 된다. 여래는 경에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는 생사(生死)하는 허물을 나타내시고, 둘째는 해탈하는 공덕을 나타내셨으며, 셋째는 나타낼 바가 없는 것[無所顯]이다. 가주자부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본래부터 하나의 게송으로 인하여 이 부가 네 부[四部]로 나뉘어진 것인데 법상부(法上部)와 현승부(賢乘部)와 정량제자부(正量弟子部)와 밀림주부(密林住部)이다. 그 게송은 이러한다.
이미 해탈하고서 다시 떨어지고 떨어져서 탐착을 말미암아 다시 돌아오나니 이미 편안한 곳에 이르러 놀며 좋아할 만하면 즐거이 행을 따르기 때문에 즐거운 데에 이른다.
정지부(正地部)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과거와 미래 이것은 없고 현재와 무위(無爲) 이것은 있으며 사성제는 한꺼번에 관하고 만일 고제(苦諦)를 보면 곧 온갖 진리[諦]를 보며 보고 나면 일찍이 모두 진리를 본다. 수면번뇌(隨眠煩惱)는 심(心)도 아니요 조심법(助心法)도 아니고 경계도 없으며 수면번뇌가 다르고 도기번뇌(倒起煩惱)가 다르며 수면번뇌와 심은 상은하지 않고 도기번뇌와 심은 상응한다. 범부는 욕계의 탐욕과 진에(瞋恚)를 버리지 못하고 외도는 다섯 가지의 신통이 없으며 하늘에는 부람마(夫嵐摩)가 없고 중음(中陰)이 없으며 아라한에게는 복덕은 많으나 더욱 자라는 것[增長]은 없다. 다섯 가지 식취[五識聚:識身]에는 염(染)과 여의는 것[離]이 있고 여섯 가지 식취는 각관(覺觀)과 상응하며 시두(時頭)의 중생이 있고 세간에는 정견(正見)이 없으며, 세간에는 신근(信根)이 없고 출세간의 정(定)이 없고 각관에는 무루(無漏)가 없으며 원인[因]은 있되 선(善)은 없다. 수루다아반나에는 물러나는 법[退法]이 있고 아라한 다타에게는 물러나는 법이 없으며 도분(道分) 이것은 사념처(四念處)에 섭수된다. 무위법(無爲法)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택멸(思擇滅)이요, 둘째는 비사택멸(非思擇滅)이며, 셋째는 허공(虛空)이요, 넷째는 무아(無我)이며, 다섯째는 선여(善如)요, 여섯째는 악여(惡如)이며, 일곱째는 무기여(無記如)요, 여덟째는 도여(道如)이며, 아홉째는 연생여(緣生如)이다. 생을 받으면[受生] 이것이 시작이요, 죽으면[死] 이것이 마지막이 되며, 사대(四大)와 오근(五根)과 심(心)과 조심법(助心法)은 모두가 변하고 달라짐이 있다. 대중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므로 만일 대중에게 보시하면 보(報)를 얻는 것이 크고 만일 따로 부처님께 보시하면 공덕이 그보다는 못하며, 온갖 부처님과 온갖 성문은 동일한 도(道)요 동일한 해탈이며, 온갖 행(行)은 찰니가(刹尼柯)요 하나의 법도 이 세상으로부터 뒷 세상으로 건너오는 것은 없다. 이것이 정지부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 부(部)가 다시 주장하는 뜻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고 중음(中陰)이 있으며 법입(法入)에는 두 가지와 알바[所知]와 인식할 바[所識]가 있고 작의(作意) 이것이 정업(正業)이며 몸[身]과 입[口]의 두 가지 업은 없으며, 각관(覺觀) 이것은 상응한 법[相應法]이요 대지(大地)는 겁(劫) 동안 머물며 수두파(藪斗陂)에 의지하여 공경하고 섬겨도 보(報)는 없고 온갖 수면번뇌는 항상 현세(現世)에 있으며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세 가지 법도 항시 현세에 있다. 여의는 법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의 법 이것은 결정코 모든 고(苦)는 그로부터 생기나니 무명(無明)은 마음의 탐(貪)과 애(愛)이며 오견(五見)과 모든 업(業)이다.
모든 부(部)가 뜻의 근본은 모두 동일하나 주장하는 것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따로 부를 이루게 된다. 법호부(法護部)가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승가 중에 부처님ㆍ세존이 계시고 수두파에 의지하여 공경을 일으키면 수승한보[勝報]가 있으며, 대중을 공경하면 그보다는 못하고 부처님의 도가 다르고 성문의 도가 다르며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이 없고 아라한의 몸에 번뇌[漏]가 없다. 그 밖에 주장하는 것은 대중부가 주장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다. 선세부(善歲部)가 이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은 이미 소멸되었거나 이미 여읜 것[離]이면 곧 없고, 아직 소멸하지 않았거나 아직 여의지 못했으면 곧 있으면 만일 업과(業果)가 이미 성숙되었으면 곧 없고 아직 성숙되지 못했으면 있다. 유위법(有爲法)은 과거의 법으로써 인(因)을 삼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법으로써 인을 삼으며 온갖 행(行)은 찰니가(刹尼柯)요 유학법(有學法)에는 과보(果報)가 있다. 그 밖에 주장하는 것은 법호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서로 유사하다. 설도부(說度部)가 이 주장하는 뜻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음(陰)은 전세(前世)로부터 후세(後世)에 이르고 만일 성도(聖道)를 여의면 모든 음(陰)은 소멸하지 않으며 음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범부의 계위[凡夫位] 중에서도 성법(聖法)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眞實人]이 있다. 그 밖에 주장하는 것은 설일체유부와 서로 유사하다. 과거에 나온 경론(經論) 중에도 또한 십팔부(十八部)의 이름이 있지만 다만 음(音)이 대부분 잘못 전하여 달라졌으므로 본래와 같지만은 않다. 이제 삼가 따로 존재한 천축본(天竺本)의 이름에서는 논(論)의 처음에 대중(大衆) 등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며 차례로 상대(相對)하여 번역하고 있다. 번역에는 자못 완전하기는 어려우나 의소(義疏) 중에서와 같이 해석하겠다. 처음에 두 부(部)[천축에서는 부(部)를 위니가여(爲尼柯與)라고 불렀다]로 나뉘어졌으니, 첫째는 마하승기가부(摩訶僧耆柯部)요, 둘째는 타비리여부(他毘梨與部)이다. 그 다음에 마하승기가부로부터 또 세 부가 나왔으니, 첫째는 아가비여바하기가부(猗柯毘與婆訶利柯部, 猗)는 意紫反音)요, 둘째는 노구다라바타부(盧俱多羅婆拖部)이며, 셋째는 고구리가부(高俱梨柯部), 또는 고구지가부(高俱胝柯部)라고도 말한다. 그 다음에 마하승기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바후수지가부(婆吼輸底柯部)이다. 그 다음에 마하승기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바라야지바타부(波羅若底婆拖部)이다. 그 다음에는 외도 마하제바(摩訶提婆)라는 이가 마하승기가부 중에 출가하여 스스로 나누어 두 부를 이룬 것이니, 첫째는 지지여세라부(支底與世羅部)요, 둘째는 울다라세라부(鬱多羅世羅部)이다. 타비여부(他毘與部)에서 또 두 부가 이루어졌으니, 첫째는 살바아사지바타부(薩婆阿私底婆拖部), 또는 혜도바타부(醯兜婆拖部)라고도 하며, 둘째는 혜마발다부(醯摩跋多部)요, 또는 타비리여부(他毘梨與部)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살바아사지바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발사불지리여부(跋私弗底梨與部)이다. 그 다음에 발사불지리여부로부터 또 네 부가 나왔으니, 첫째는 달모다리여부(達謨多梨與部)요, 둘째는 발타여니여부(跋陀與尼與部)이며, 셋째는 삼미지여부(三眉底與部)요, 넷째는 산타가리가부(山拖伽梨柯部)이다. 그 다음에 살바아사지바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미희사바가부(彌嬉捨婆柯部)이다. 그 다음에 미희사바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달마급다부(達磨及多部)이다. 그 다음에 살바아사지바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소발리사가부(蘇跋梨沙柯部), 또는 가시비여부(柯尸悲與部)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살바아사지바타부로부터 또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승천란지바타부(僧千蘭底婆拖部)라고도 한다.
1)불멸(佛滅) 후 백여 년경 학승(學僧)인 대천(大天)이 오개조(五個條)의 신설(新說)을 주창하여 전통적인 불교를 반대할 적에 이를 시인하는 한 파인 대중부(大衆部) 와 부인하는 한 파인 상좌부(上座部)가 생겼다. 이때에 내세운 오개조의 새로운 주장을 여기서 오종인연(五種因緣)이라고 한다.
2)석존 입멸 백여 년 후에 마갈타국 구소마 성주(城主) 무우왕 때에 대천(大天)의 오개조의 새로운 말[五事妄言]에 동조한 파가 대중부요, 부정한 파가 상좌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