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스스로 귀의하니 거룩한 사문을 뵙고 싶어라. 오랫동안 지어 온 그 죄업을 나는 지금 스스로 참회하려네.
029_0896_c_04L自歸大聖雄, 欲覲尊沙門, 今欲自悔過,
久來所作罪。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시니 그 위신이 밝고 빛났다. 부처님께서는 손수 지만을 붙잡고 기원정사(祇洹精舍)로 가셔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 지만을 데리고 가서 제도하여 비구로 만들어라.” 그는 부처님을 따라 수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걸식하러 들어갔다. 그때에 그 성문 안쪽에 있던 어떤 암코끼리가 새끼를 배어서 낳으려고 하였으나 좀체로 되지 않았다. 코끼리 주인은 멀리서 비구가 오는 것을 보고 곧 일어나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만일 비구께서 이 코끼리로 하여금 곧 새끼를 낳게 해 주시면 성안에 들어가 걸식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 성에 들어가 걸식하지 못할 것이오.”
029_0897_a_02L비구는 대답하였다. “나는 아직 그런 주문을 외우지 못하오. 우선 잠깐만 기다리시오. 지금 곧 부처님께 신주(神呪)를 배우고 돌아와서, 코끼리가 새끼를 낳게 하겠소.” 그래서 지만 비구는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부처님 발에 얼굴을 대어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조금 전 걸식을 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다가 마침 성문 안에 있던 어떤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려고 하여, 그 주인은 저에게 주문을 청하고, 새끼를 낳은 뒤에라야 걸식하러 갈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 제게 신주를 가르쳐 주셔서 그 코끼리로 하여금 새끼를 낳게 하고 또 저로 하여금 걸식을 하게 하소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거기 가서 이런 말로 축원하여라. ‘나는 지금 지성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난 뒤로부터, 지금까지 전혀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여라. 이렇게 지극히 정성스런 말로 축원하면, 그 코끼리는 무사히 새끼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앙굴마(鴦掘魔)는 부처님께 이런 신주를 받들고 가서 축원하여, 그 코끼리는 무사히 새끼를 낳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찬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이런 기이한 일도 다 있구나. 저 지만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살생하였는데, 그 지성스런 말 한 마디로 코끼리 새끼를 무사히 낳게 하였다.” 그가 성 안으로 들어가자,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지만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는 혹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가 지만에게 죽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두 앞으로 나와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칼이나 몽둥이나 기왓장이나 돌로 지만을 때려서 몹시 괴롭혔는데, 머리를 터지게 하고 살을 찢었으며 또 옷을 찢고 발우를 깨뜨리기도 하였다. 그는 곧 도망쳐 나와 끝내 걸식을 하지 못하고, 부처님께 돌아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그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그 사정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지만의 인연 갚음은 어찌 이리도 빠른가?”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시니, 그는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차례로 얻고, 6신통(神通)이 맑게 트였다.
029_0897_b_02L그때에 바사닉왕(波斯匿王)은 말ㆍ코끼리ㆍ수레ㆍ보병 등 네 종류의 군사를 모아, 저 동산으로 가서 앙굴마와 싸우기 위해 사위성을 나갔다. 그러나 도중에 행인들에게, 그 대적 앙굴마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비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곧 군사를 멈추고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을 뵈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왕이 올 줄 아시고, 신통으로써 앙굴마의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게 하셨다. 왕은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아시면서 왕에게 물으셨다. “왕은 무기를 갖추고 네 종류의 군사를 모아 어디로 가려 하시오?” 왕은 말씀드렸다. “이 나라에는 앙굴마라는 도적이 있어서 험난한 곳을 의지해 도적질을 하는데 굉장히 포악무도합니다. 그래서 군사를 모아 그를 치러 가다가 도중에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앙굴마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도를 닦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왕의 뜻을 아시고는 곧 신통을 거두어 왕으로 하여금 앙굴마를 보게 하셨다. 왕은 그를 보자마자 두려워서 기절하고 말았다. 신하들은 왕을 부축해 일으킨 다음 얼굴에 물을 뿌렸다.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말씀하셨다. “왕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런 작은 두려움과 마주친 것이오. 저 사람은 이미 아라한의 과(果)를 얻었소. 만일 대왕이 저 깊은 동산으로 가서 그 본래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는 머리에 손가락을 잘라서 만든 화환을 이고 사람의 피를 몸에 바르고,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그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오. 만일 왕이 직접 보았다면 심장과 간이 터져 곧 죽었을 것이오.”
왕은 다시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아직 항복받지 못한 이를 항복받고 제도하지 못한 이를 제도하십니다. 그러나 부처님이시여, 그 사람은 무수한 사람을 죽였는데, 어떻게 아라한의 과(果)를 성취하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의심하지 마시오. 그 행에는 앞과 뒤가 있고, 익고 익지 않은 것이 있으며 처음과 나중이 있는 것이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의 전생 인연을 관찰하신 뒤에,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면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구름 걷힌 뒤의 달과 같으리라.
029_0897_b_16L人前爲惡, 以善滅之, 是照世間,
如月雲消。
029_0897_c_02L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면”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마치 저 지만이 무수한 사람을 죽였지만 현성의 8정도[品道]로써 그것을 없앤 것과 같다. 그는 모든 악이 뿌리째 영원히 사라지고 끝까지 청정하여 다시는 생기하지 않는 법을 얻었다. 그러므로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구름 걷힌 뒤의 달과 같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세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衆生)세간이고 둘째는 기(器)세간이며 셋째는 음(陰)세간이다. 마치 가을달이 뭇 별에 둘러싸일 때, 달은 그 중에서 홀로 밝아 그 광명이 어디고 비치는 것처럼, 저 나쁜 비구도 모든 악이 이미 다하고 청정한 행을 닦으면, 많은 대중들을 두루 제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구름 걷힌 뒤의 달과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라.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그 이치의 공(空)함을 생각하여라.
029_0897_c_05L人前爲惡, 以善滅之, 世間愛著,
念空其義。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라”란 무슨 뜻인가? 대개 악을 저지르는 것은 모두 애착 때문이다. 저 범지의 아내가 무해에 대해 나쁜 생각을 낸 것도 모두 그 애욕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행을 저질렀어도, 선한 행으로 그것을 없애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그 이치의 공(空)함을 생각하여라”란 무슨 뜻인가? 애욕이 깊고 단단하여 삼계를 떠돌면서, 4생(生)을 받고 5도(道)를 윤회하는 것은 다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허망하고 진실이 아님을 분별하며, 다 공(空)하여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그 이치의 공(空)함을 생각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으면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구름 걷힌 뒤의 달과 같으리라.
029_0897_c_15L少壯捨家, 盛修佛教, 是照世間,
如月雲消。
029_0898_a_02L 부처님께서 경전에 말씀하셨다. ‘코끼리 조련사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때에 코끼리 조련사는 젊은 코끼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그 코끼리는 넓은 들판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훈련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죽고 말았다. 젊은 비구도 그와 같아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되고, 또 장로 비구도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젊은 코끼리는 훈련을 받고도 죽게 되며, 나이든 코끼리도 훈련을 받고도 죽게 된다. 그와 같이 젊은 비구도 교훈을 받고도 죽으며 장로 비구도 가르침을 받아 현성의 법을 얻었어도 죽는다. 젊은 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닦아 빠짐 없이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어떻게 완전히 갖추는가? 차례를 넘고 도를 깨달아 위없는 과(果)를 얻는다.” 그러므로 “젊어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구름 걷힌 뒤의 달과 같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마치 가을 달빛이 멀리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아라.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그 이치의 공(空)함을 생각하여라.
029_0898_a_07L少壯捨家, 盛修佛教, 世間愛著,
念空其義。
“젊어서 출가하여”란 무슨 뜻인가? 애착을 끊고자 하면 그는 모든 천인들과 아수륜(阿須倫)들의 공경과 대우를 받을 것이요, 가유라(加留羅)나 건답화(乾沓和) 등도 모두 그를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그 이치의 공(空)함을 생각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살아서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죽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정진하여 도를 깨친 사람은 중도(中道)에 머무니 근심이 없다.
029_0898_a_13L生不施惱, 死而不慼, 是見道悍,
應中勿憂。
“살아서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죽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에 난 뒤로 살생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탕하지 않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임종 때에도 정신이 맑아 놀라움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지옥이나 축생, 아귀도 보지 않고, 또 그 밖의 나쁜 귀신도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만 상서로운 징조만을 본다. 그러므로 “살아서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죽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진하여 도를 깨친 사람은, 중도에 머무니 근심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도를 깨친 사람은 이미 다섯 가지 재난을 겪었기 때문에 슬픔 속에 있어도 담담하고 지음이 없으며, 슬피 울거나 부르짖으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진하여 도를 깨친 사람은, 중도에 머무니 근심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혼탁한 법을 끊고 오직 맑은 법을 배우면 깊은 연못을 건너 다시는 돌아옴이 없다. 의지함을 버리고 행이 그치면 다시는 쾌락에 물들지 않고 욕심을 끊어 걱정이 없다.
029_0898_b_06L斷濁黑法, 學惟淸白, 渡淵不反,
棄猗行止, 不復染樂, 欲斷無憂。
“혼탁한 법을 끊고”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을 혼탁한 이라고 하는가? 대답하자면 그것은 모든 부림ㆍ결박ㆍ티끌ㆍ때이고 일체의 선하지 않은 법이며 타락한 법으로서 생사에 집착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끊고 이미 끊었고 영원히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한 법을 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맑은 법을 배우면”이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을 맑은 이라고 하는가? 대답하자면 그것은 의지(意止)ㆍ의단(意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력(力)ㆍ각의(覺意)ㆍ8정도(正道) 따위의 37도품(道品)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생사를 떠나고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맑은 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직 맑은 법을 배우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깊은 연못을 건너 다시는 돌아옴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왜 연못이라고 하였는가? 이른바 연못이란, 삼계와 5취(趣)로 흐르면서 생사를 더욱 불어나게 하는 것이니, 그 연못으로 말미암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생사를 헤매고, 3도(塗) 8난(難)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네 가지 못을 없애고 위없는 도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연못을 건너 다시는 돌아옴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지함을 버리고 행이 그치면”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의지한다는 것은 탐욕과 선하지 않은 법에 의지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의지함을 버리고 집착이 없어야 진실한 행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함을 버리고 행이 그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29_0898_c_02L“다시는 쾌락에 물들지 않고”란 무슨 뜻인가? 다섯 가지 쾌락에 물들지 않고 현성의 계율을 가까이하여서 끝내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쾌락에 물들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심을 끊어 걱정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대개 사람들이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어서 여색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잡된 생각을 일으켜 그 여자의 얼굴ㆍ머리결ㆍ손발톱ㆍ이ㆍ살결 따위의 희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한다. 수행하는 사람이 뜻을 굳게 하여 이런 생각을 버리면, 탐욕은 곧 그쳐서 다시는 불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끊어 걱정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을 밭이라 하고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종자라 한다. 그러므로 보시하여 세상을 제도하는 이 그는 한량없는 복을 얻으리라.
029_0898_c_06L愛欲意爲田, 婬怒癡爲種, 故施度世者,
得福無有量。
“애욕을 밭이라 하고”란 무슨 뜻인가? 거친 밭과 더러운 땅은 자주 돌보지 않으면, 왕골풀 따위가 다투어 나서 좋은 묘종을 해치므로, 열매가 불어나지 않고 철따라 잘 익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애욕에 집착하는 것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애욕을 밭이라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종자라 한다”란 무슨 뜻인가? 무릇 수행자가 도를 닦을 때에는 항상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 만약 공덕을 심으려면 어디에 보시해야 좋은 과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무공(無空)에 보시하게 되면 그 과보가 적고, 공(空)에 보시하게 되면 그 과보가 많은 것이다.
어떤 것이 무공에 보시하게 되면 그 과보가 적다는 것인가? 저 외도들이나 벌거숭이 바라문인 니건자(尼乾子)들에게, 무지한 사람들은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복을 구하지만 그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 마치 더러운 밭은 좋은 묘종을 해치는 것처럼, 더러운 행을 가진 범지는 선의 뿌리를 해치고,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에 덮이기 때문에 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므로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종자라 한다. 그러므로 보시하여 세상을 제도하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한량없는 복을 얻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복을 보시하는 과보를 찬탄하는 것이다. 대중들 속에서 욕심을 끊은 사람은 비록 보시는 적게 하더라도 그가 얻는 복은 한량없어서, 그 과보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한량없는 복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분노가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분노를 가라앉혀라.
보시하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
029_0898_c_24L猶如穢惡田, 瞋恚滋蔓生, 是故當離恚,
施報無有量。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분노가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왜 더럽고 나쁘다고 하는가? 이른바 더럽고 나쁘다는 것은 자신도 허물고 남도 허무는 것이다. 자신을 허문다는 것은 분노가 불꽃처럼 일어나 안색이 변하고 본성이 바뀐다는 것이니, 이것이 자신을 허문다는 것이다. 또 남도 허문다는 것은 분노가 불꽃처럼 일어나 남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그 목숨까지 해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분노가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를 가라앉혀라. 보시하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분노하는 사람은 뒤에 가서 그 과보를 받고, 분노로 말미암아 나라를 망치고 가산을 탕진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복덕을 베풀고 성내지 않는 사람은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분노를 가라앉혀라. 보시하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어리석음의 더러움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
029_0899_a_13L猶如穢惡田, 愚癡穢惡生, 是故當離愚,
獲報無有量。
029_0899_b_02L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어리석음의 더러움이 나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장님은 높은 산도 들판도 보지 못하고, 또 좋은 색이나 나쁜 색이나, 푸른 빛ㆍ누른 빛ㆍ붉은 빛ㆍ흰빛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무명의 어두운 법으로 스스로를 얽매어서, 4제(諦)나 선하거나 선하지 않은 법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밝은 지혜와 37도품(道品)을 가린다. 저 외도와 범지들은 어리석음에 덮여 진실한 도를 알지 못하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런 걱정이 없다. 그러므로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어리석음의 더러움이 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이 어리석음을 없애려면 어디에 가서 그것을 구해야 하는가? 대답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구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늙거나 젊거나 좋거나 나쁜 것의 처음과 끝을 관찰하고 4제(諦)를 분별하여서 눈이 밝고, 지혜를 깨달아 조금도 그 보시에 실수가 없기 때문이니, 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어서 한량없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29_0899_c_02L 그러므로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교만함이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함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큰 법 안에서는 교만함을 버리는 것이다. 즉,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마을에 들어가 걸식할 때에는 마음을 낮추고 스스로를 비천히 여긴다. 저 전다라(旃陀羅)의 처녀가 백천 금의 값어치가 나가는 보배로운 옷을 입고도 남의 집에 가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것처럼, 저 교만함을 버린 비구도 그와 같아서, 그 근본은 큰 종족의 출신이지만 스스로 그 몸을 괴롭히면서 걸사(乞士)의 법을 닦되, 마음을 제어하고 뜻을 다루기를 마치 날카로운 칼을 잡은 것같이 하고, 손에 발우를 들고서는 세상에서도 가장 곤궁한 사람인 듯이 한다. 염부리(閻浮利)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으로써 장식을 삼지만 우리 사문은 그것을 깎아 버리고, 염부리의 사람들은 옷에 탐심이 많지만 우리 사문은 희고 깨끗한 옷을 만들어 입으며, 염부리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을 깊은 산으로 쫓아 버리지만 우리 사문은 숲으로 집을 삼는다. 욕심이 없는 사람도 이렇게 수행하거늘, 하물며 과(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마음이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그러므로 교만함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탐욕이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
029_0899_c_04L猶如穢惡田, 貪欲爲滋蔓, 是故當離貪,
獲報無有量。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탐욕이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탐욕을 가지되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하고, 혹은 그 때문에 목숨까지 일찍 마치게 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을 버린다. 그러므로 “마치 저 더럽고 나쁜 밭에는 탐욕이 덩굴처럼 뻗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려라. 얻는 과보가 한량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섯째가 증상왕(增上王)이니 그 물듦은 으뜸가는 물듦이다. 물들지 않으면 번뇌를 여의었다고 하고 물들면 어리석다고 한다.
029_0899_c_11L六增上王, 染爲染首, 無染則離,
染者謂愚。
‘여섯째가 증상왕이니’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식[意]이다. 차례로 세어도 여섯이 되고 거꾸로 세어도 여섯이 된다. 증상(增上)이란 무슨 뜻인가? 의식이 움직이면 그에 따라 다섯 가지가 일어나 다섯 감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감각은 다 의식이 만든 것이다. 저 부처님의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마치 다섯 감관은 각각의 경계가 있어서 서로 뒤섞이거나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의식은 그 다섯 감관에 이르러 제일 우두머리가 된다. 그래서 그 다섯 경계를 간섭하여 그 다섯 감관을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가장 힘이 강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왕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섯 째가 증상왕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29_0900_a_02L“그 물듦은 으뜸가는 물듦이다”란 무슨 뜻인가? 물듦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물듦이란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물든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물듦이 으뜸가는 물듦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들지 않으면 번뇌를 여의었다고 하고”란 무슨 뜻인가? 어떤 이를 물들지 않았다고 하는가? 물들지 않은 이란 바로 아라한이다. 저 수다원(須陀洹)은 모든 번뇌를 여의어 법안(法眼)이 깨끗하지만, 영원히 깨끗해진 것은 아니니, 아라한만이 영원히 깨끗하다. 그러므로 “물들지 않으면 번뇌를 여의었다고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들면 어리석다고 한다”란 무슨 뜻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집착하는 것을 익힌다. 그래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을 도리어 생각한다. 그러므로 “물들면 어리석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뼈대로써 성(城)을 만들고 피와 살을 거기에 발라 감관의 문을 열어 놓으면 번뇌의 도적이 날뛰게 된다.
029_0900_a_07L骨幹以爲城, 肉血而塗之, 根門盡開張,
結賊得縱逸。
“뼈대로써 성을 만들고, 피와 살을 거기에 발라”란 무슨 뜻인가? 성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성이란, 5음(陰)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담을 삼고 뼈대로 담벽을 삼아 거기에 피로 물들이는 것이다. 만일 그 안의 물질이 밖으로 흘러 나오면 더럽다는 생각을 낼 것이다. 그래서 그 몸에 집착하지 않고 즐길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피부로써 뼈를 덮고 장식하여 몸이 되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관찰하여 하나도 탐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뼈대로써 성을 만들고, 피나 살을 거기에 발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감관의 문을 열어 놓으면, 번뇌의 도적이 날뛰게 된다”란 무슨 뜻인가? 눈을 떠서 바깥의 색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눈을 뜨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의 도적을 들여서 선근의 재물을 짓밟게 하고, 귀ㆍ코ㆍ혀ㆍ몸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며, 의식의 문을 열어서 번뇌의 도적이 들어오게 한다. 그러므로 “감관의 문을 열어 놓으면, 번뇌의 도적이 날뛰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괴로움이 더하니 세 가지 인연의 속박을 보아라. 그것은 성스런 대중에 의해 없어지지 다른 것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다.
029_0900_a_20L有緣則增苦, 觀彼三因縛, 滅之由賢衆,
不從外愚除。
029_0900_b_02L “인연이 있으면 괴로움이 더하니”란 무슨 뜻인가? 먼저 인연이 있으면 뒤에 가서 고통이 더한다. 먼저 인연이 없으면 괴로움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마치 샘에서 물이 흘러 나와 강을 이루는 것처럼, 앞의 인연에 의하여 고통이 생기고 또 점점 불어나 사백네 가지 병이 되는 것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인연이 있으면 괴로움이 더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 가지 인연의 속박을 보아라”란 무슨 뜻인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을 잡아다 집을 지을 때, 자꾸 일을 시켜서 쉬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5음[五盛陰]으로 이루어진 이 몸을 번뇌로 묶어 놓고, 우수고뇌(憂愁苦惱)로 그 마음을 괴롭혀서 잠깐도 쉬지 못하게 하고 4백 네 가지 병을 치르게 하는 것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인연의 속박을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성스런 대중에 의해 없어지지”란 무슨 뜻인가? 대개 신념으로 보시하려면 대중에게로 가야 하니, 보시는 적더라도 복은 많이 얻기 때문이다. 마치 용감한 대부가 외적을 물리치되, 그 무리를 모두 무찔러야 용감한 장부라 할 수 있고, 상도 남보다 많이 얻는 것처럼, 부처님의 대중도 그와 같다. 마치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일 때 아무리 작은 물길도 거절하지 않는 것처럼, 누가 공양하러 오더라도 그 때문에 더 기뻐하지도 않고, 공양하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스런 대중에 의해 없어지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다”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의 미련한 사람은 오랫동안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나의 나[我]가 있다고 생각하여, 5음으로 이루어진 몸을 진실한 몸이라고 집착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일찍이 독사에게 물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것처럼, 일찍이 번뇌의 속박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줄 모르고 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잡(雜)’이라고 하는가? ‘잡’이라고 한 까닭은 게송이 여러 가지요, 그 설명이 같지 않아서, 다른 게송의 단순한 이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잡’이라고 한 것이다.잡품(雜品) 제17을 마친다.
1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고요하여 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면 어리석음의 깊은 연못을 건너가니 기러기가 그 연못을 버리는 것과 같다.
029_0900_b_23L心淨得念, 無所貪樂, 已度癡淵,
如鴈棄池。
029_0900_c_02L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고요하여, 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면”이란 무슨 뜻인가? 마음을 깨끗한 데에 매어 두고 항상 방편을 구하여 생사를 벗어나려고 하되, 저 생사를 요술이나 허깨비처럼 보고, 언제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타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고요하여, 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러기가 그 연못을 버리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그 연못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것이 많고, 또 사냥꾼이 자주 와서 두렵게 하는 것을 알기에 기러기는 그 온갖 어려움을 피해, 그 연못을 버리고 높이 날아간다. 그러므로 “기러기가 그 연못을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리석음의 깊은 연못을 건너가니”란 무슨 뜻인가? 어리석음의 깊은 연못에 잠겨 그것이 골수에 사무치면, 방편을 구해서 남김없이 영원히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의 깊은 연못을 건너가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저 기러기가 공중에서 잠깐 내려와서 위험한 곳을 벗어나 안온한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029_0900_c_11L譬如鴈鳥, 從空暫下, 求出惡道, 至無爲處。
“비유하면 마치 저 기러기가”란 무슨 뜻인가? 기러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온갖 시달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안온한 곳을 구한다. 그러므로 “비유하면 마치 저 기러기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중에서 잠깐 내려와서”란 무슨 뜻인가? 그 몸은 어디라도 걸림없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위태로운 곳을 버리고 편안한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공중에서 잠깐 내려와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위험한 곳을 벗어나 안온한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현성 제자들과 여래ㆍ등정각은 중생들을 위해, 온갖 악을 버리고 악도(惡道)를 벗어나기를 구하여, 선한 업을 닦고 모든 번뇌를 떠난다. 그러므로 “위험한 곳을 벗어나, 안온한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안온한 곳이란, 또한 모든 번뇌가 사라진 열반으로서, 거기에는 생멸이라거나 끊을 집착도 없고, 언제나 변하지 않으며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저 선정을 얻은 수행하는 사람은 늙음과 병의 핍박을 받아 항상 4백 네 가지의 시달림을 받기 때문에, 4대(大)를 싫어하고 걱정하여, 5음(陰)으로 이루어진 몸을 버리고 열반으로 들어간다.
범행을 닦지도 않고 젊어서 재물을 쌓지도 않고 어리석게도 졸면서 옛일만을 생각하고 하는 일이 없다.
029_0900_c_23L不修梵行, 少不積財, 愚者睡眠,
守故不造。
029_0901_a_02L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공양하실 때가 되어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시자 아난(阿難)을 데리고 이 염부리(閻浮利)를 관찰하시다가, 어떤 두 늙은이가 초췌한 행색으로 등을 꾸부리고 걸어가는 것을 보셨다. 곧 부처님께서 웃으셨다. 그러자 아난은 다시 가사를 단정히 한 다음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끊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헛되이 웃으시지 않으시니, 웃으시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 습니다. 지금 웃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행색이 초췌한 저 두 늙은이가 보이느냐? 만일 저들이 이 사위국에서, 젊었을 때부터 재산을 모았더라면 이 나라에서 첫째가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요, 또 만일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웠더라면 오래 전에 아라한이 되었을 것이다. 또 만일 적은 재물을 쌓되 만족할 줄 알았더라면 오늘날에는 이 성안에서 둘째가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요, 만일 출가하여 도를 배웠더라면 아나함(阿那含)의 과(果)를 얻었을 것이다.
또 만일 저들이 중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재물을 쌓았더라면 넉넉히 셋째가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요, 출가하여 도를 배웠더라면 사다함(斯陀含)의 과(果)를 얻었을 것이다. 저들은 본래의 원을 어기고서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 고생하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갖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것이니, 이를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치를 관찰하시고는, 후세의 중생들을 위해 큰 광명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범행을 닦지도 않고 젊어서 재물을 쌓지도 않으면 연못을 엿보는 두루미와 같으니 옛일을 생각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
029_0901_a_20L不修梵行, 少不積財, 如鶴在池,
守故何益?
029_0901_b_02L 마치 늙은 두루미가 연못가를 지키고 서서, 물고기가 상류로 올라오면 잡아먹기 위해, 종일토록 마음을 졸였으나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쉬지 않고 마음을 쓰는 동안에 스스로 목숨을 마치는 것과 같다. 늙으면 늙음의 법이 있고 젊으면 젊은 힘이 있다. 저 두루미는 늙은 몸을 가지고 젊은 힘을 행세하려 하되, 날이 다하도록 그 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다만 젊어서 물고기를 잡던 생각만을 하고 자신이 이미 늙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저 늙은 장로 비구들도 그와 같아서 젊었을 때에 노래와 춤과 웃음과 도박으로 즐기던 일만을 생각하고, 이제는 늙은이가 된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릎을 싸고 쭈그리고 앉아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그것은 늙음의 법은 행하지 않고 다만 젊었을 때의 일만을 생각하여 갖가지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못을 엿보는 두루미와 같으니, 옛일을 생각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그만 악이라고 가벼이 여겨서 재앙이 없다고 하지 말라. 물방울이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점점 모이면 큰 그릇을 채우니 무릇 가득한 저 큰 죄악도 작은 것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029_0901_b_08L莫輕小惡, 以爲無殃, 水渧雖微,
漸盈大器, 凡罪充滿, 從小積成。
“조그만 악이라고 가벼이 여겨서, 재앙이 없다고 하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그것이 비록 작더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독사가 아무리 작아도 사람을 물면, 그 독이 온몸에 두루 퍼져 끝내 목숨을 잃게 된다. 사람의 죄악도 그와 같아서,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사람의 바른 행을 방해하여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뒷일을 생각하지 않다가 장래에 그 과보를 받는다. 날마다 그것을 되풀이하면서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멀리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악은 계속 불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조그만 악이라고 가벼이 여겨서, 재앙이 없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방울이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점점 모이면 큰 그릇을 채우니”란 무슨 뜻인가? 마치 큰 그릇을 놓고 새는 물을 받으면 방울방울 자꾸 떨어져서 그 그릇을 채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방울이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점점 모이면 큰 그릇을 채우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가득한 저 큰 죄악도 작은 것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란 무슨 뜻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행을 익히되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고, 날마다 그것을 즐겨 익히면서 재앙이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릇 가득한 저 죄악도, 작은 것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그만 선이라고 가벼이 여겨서 복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물방울이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점점 모이면 큰 그릇을 채우니 무릇 가득한 저 큰 복도 작은 것들이 쌓인 것이다.
029_0901_b_23L莫輕小善, 以爲無福, 水渧雖微,
漸盈大器, 凡福充滿, 從纖纖積。
029_0901_c_02L
“조그만 선이라고 가벼이 여겨서, 복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마치 어떤 선한 사람이 절에 가서 예배하고 복을 구할 때에, 등불을 켜서 올리거나 향을 사르거나, 물을 뿌려 청소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더라도, 적은 돈에서부터 시작한다. 또 남에게 보시할 마음을 내게 하여 한 덩이의 밥을 대중에게 공양하게 하거나, 혹은 칫솔[楊枝]과 깨끗한 물을 공급하여 청정하게 하거나 혹은 기름 등불을 켜서 계속 밝게 하는 이러한 조그만 일들도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니, 그것은 그 마음에 의해 한량없는 복을 받기 때문이다. 등불 하나를 켜면 집안의 어둠을 몰아내어 어둠의 자취를 알지 못하고, 고운 향을 사르면 더러운 냄새를 없애어, 그 냄새의 간 곳을 모르는 것과 같다. 잘 드는 칼이 비록 작더라도 해로운 나무를 끊는 것처럼 선한 행이 아무리 작더라도 무거운 죄를 없애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 세상을 왕래하면서 다시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여기저기로 옮겨 가면서도 한량없이 복을 받는 것은 현재에도 알 수 있다. 물방울이 계속 끊이지 않고 떨어져 드디어 큰 그릇을 채우듯이, 용감한 사람은 복을 행하여 점점 그것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무릇 가득한 저 큰 복도, 작은 것들이 쌓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 뗏목을 튼튼히 만드는 것과 같다. 피안으로 가고자 하나 건너지 못하니 지혜로운 이라야 비로소 건넌다.
029_0901_c_16L猶如人渡河, 縛筏而牢固, 彼謂渡不渡,
聰睿乃謂渡。
029_0902_a_02L “뗏목을 튼튼히 만드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저 중생들이 깊은 못을 건너려고 할 때에, 혹은 뗏목으로 건너거나 혹은 배를 타고 건너거나, 혹은 큰 배를 타거나 작은 배를 타거나 혹은 풀과 나무로 뗏목을 만들거나 하여서, 모두 무사히 피안에 이른다. 그러므로 “마치 세상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 뗏목을 튼튼히 만드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피안으로 가고자 하나 건너지 못하니”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애욕의 연못은 깊은 근원에서 흘러 나와 강을 이루는 것과 같아서, 삼계에 두루 가득 차 다시 삼계로 향해 흐르면서, 4생(生)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5도(道)를 윤회하기도 하며, 또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 따위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피안으로 가고자 하나 건너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이라야 비로소 건넌다”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벽지불(辟支佛)이다. 세상의 연못을 건넌다는 것은 그리 장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세상의 연못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니, 애욕의 못을 건넌 사람이라야 비로소 장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야 비로소 건넌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미 건너가셨고 범지는 나루로 건너갔으며 비구는 깊은 연못에서 목욕하고 성문은 튼튼한 뗏목을 만든다.
029_0902_a_07L佛世尊已渡, 梵志渡彼岸, 比丘入淵浴, 聲聞縛牢筏。
옛날 범지인 두 명의 큰 스승이 있었다. 그들은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의 큰 성(城)을 만들었는데, 공사를 마치고 장식을 다 끝낸 뒤에, 부처님과 대중을 성안으로 청하여 공양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그 성에 있는 모든 문의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구담(瞿曇) 사문이 어느 문으로 나오시면 그 문을 구담의 문이라고 이름하고 또 부처님께서 긍가(恒伽)의 물을 건너시면 그 나루를 구담의 나루라고 이름하리라.’ 그리고 범지는 다시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 뗏목을 타고 건너시려는지, 배를 타고 건너시려는지, 큰 바가지를 띄우시려는지, 혹은 작은 배를 타고 건너시려는지 알 수 없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이 범지의 생각을 아시고, 곧 신력으로써 비구 대중과 함께, 어느새 물을 건너 저쪽 언덕에 계셨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부처님은 이미 건너가셨고 범지는 나루로 건너갔으며 비구는 깊은 연못에서 목욕하고 성문은 튼튼한 뗏목을 만든다.
029_0902_a_19L佛世尊已渡, 梵志渡彼岸, 比丘入淵浴,
聲聞縛牢筏。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을 마치시고 절로 돌아가셨다. 그때에 대중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029_0902_a_21L說此偈已各還精舍。梵志聞佛所說,歡喜奉行。
8
이 샘물은 무엇에 쓰려는가? 그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있구나. 애욕의 근본을 빼어 버리면 다시 그 무엇을 바랄 것인가.
029_0902_a_23L是泉何用? 水恒停滿, 拔愛根本,
復欲何望?
029_0902_b_02L
“이 샘물은 무엇에 쓰려는가? 그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있구나”란 무슨 뜻인가? 이 3유(有)를 샘물에 비유하였고, 또 애욕을 샘물이라고도 말한다. 물이 언제나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모든 번뇌가 다 애욕의 샘물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샘물을 무엇에 쓰려는가? 그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있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의 근본을 빼어 버리면, 다시 그 무엇을 바랄 것인가”란 무슨 뜻인가?수행하는 사람이 애욕의 근본을 뽑아 버리면 다시는 생사가 없다. 마치 저 해로운 나무 뿌리를 영원히 끊어 버리면, 거기에 다시는 가지나 잎이 나지 않는 것처럼, 애욕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가지나 잎이 없다는 것이다. “그 근본을 빼어 버리면, 다시 그 무엇을 바랄 것인가”란, 즉 다시는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 무엇을 바랄 것인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저 뱃사공은 배를 손보고 활잡이는 뿔을 다루며 솜씨 좋은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몸을 다룬다.
029_0902_b_11L水人調舩, 弓師調角, 巧匠調木,
智人調身。
“저 뱃사공은 배를 손보고”란 무슨 뜻인가? 뱃사공은 배의 용골대를 튼튼히 만들고, 배 안의 구멍을 막아 물이 새어 들지 않게 하여, 중생들을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네 준다. 활잡이는 짐승의 뿔이나 힘줄을 알맞게 다루고 불에 잘 구우면, 그 뿔이나 힘줄은 아무리 써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뱃사공은 배를 손보고, 활잡이는 뿔을 다루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솜씨 좋은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란 무슨 뜻인가? 먹줄을 똑바로 튀겨서 높거나 낮게 하지 않으면, 짓고 싶은 궁전이나 집을 마음대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솜씨 좋은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몸을 다룬다”란 무슨 뜻인가? 항상 바른 가르침을 따라 계율을 허물지 않고, 경전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면서 상인(上人)의 법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 몸을 다룬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저 깊은 샘물이 속속들이 맑은 것처럼 법을 듣는 마음이 그와 같으면 지혜로운 사람은 기뻐하나니.
029_0902_b_22L猶如深泉, 表裏淸徹, 聞法如是,
智者歡喜。
029_0902_c_02L “마치 저 깊은 샘물이 속속들이 맑은 것처럼”이란 무슨 뜻인가? 이러한 게송으로써 밝힌 까닭은,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 말하면 잘 알아듣기 때문이다. 어떤 샘물은 깊어도 항상 흐려 있어 맑지 않고, 어떤 샘물은 깊고도 맑아 거기에 얼굴을 비춰 보면 그 얼굴이 모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치 저 깊은 샘물이, 속속들이 맑은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법을 듣는 마음이 그와 같으면, 지혜로운 사람은 기뻐하나니”란 무슨 뜻인가? 옛날 어떤 국왕이 세상 법률에 염증을 느끼고 세속의 일에 매우 지쳐서 절에 가서 바른 설법을 들으려고 하였다.
어느 날 상력(象力) 비구가 아라한으로서 마침 설법할 차례가 되었다. 그때에 그 국왕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신을 신은 채 대중 속에 들어가 설법을 들으려고 하였다. 그 아라한 비구가 왕에게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의 법에 ‘신을 신은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말라’라고 하였소.” 왕은 잔뜩 화가 났지만 곧 신었던 신을 벗었다. 그러자 아라한 비구가 또 왕에게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또 ‘두건을 쓴 이에게는 설법하지 말라’라고 하셨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나 가만히 생각하였다. ‘아아, 나는 지금 이 비구에게 창피를 당하였다. 이 비구는 벗겨지고 하얗게 된 내 머리를 일부러 드러내게 하여, 창피를 주려는 것이다. 만일 비구가 설법하여 그 말이 내 귀에 전달되지 않으면 나는 그 머리를 베리라.’
왕은 곧 두건을 벗고 말하였다. “사문은 속히 나를 위해 설법하시오.” 비구는 대답하였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또 이렇게 분부하셨소. 즉, ‘성난 이에게는 설법하지 말라’라고 하셨소. 지금 왕은 성을 내고 있는데 어떻게 설법하겠소. 왕은 부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내가 말하는 비유를 들으시오. 마치 흐린 샘물이 쉬지 않고 솟는 것처럼, 왕도 지금 그처럼 마음이 매우 어지러워져 있는데, 어떻게 법을 들을 수 있겠소.”
029_0903_a_02L그때에 왕은 마음속으로 몹시 부끄러워하며 곧 공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이 비구는 틀림없이 성인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환히 아는 것이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그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배하고 말하였다.
“원컨대, 거룩한 존자님께서는 저를 위해 설법하셔서 이 더러운 몸으로 하여금 영원히 그 은덕을 입게 하소서.” 그리고 왕은 자리에 앉아 법을 들으려 하였다. 그때에 비구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참는 마음은 저 땅과 같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수미산과 같으며 맑기는 저 맑은 샘물과 같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어지럽지 않다.
029_0903_a_10L忍心如地, 不動如安明, 澄如淸泉,
智者無亂。
“참는 마음은 저 땅과 같고”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땅은 깨끗한 것도 받고 더러운 것도 받으면서 ‘나는 이것은 받으리라. 이것은 버리리라’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수행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누가 칭찬을 한다고 하여 기뻐하지 않고, 누가 비방을 한다고 하여 슬퍼하지 않으며, 선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고 악을 보고도 성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참는 마음은 저 땅과 같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수미산과 같으며”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수미산만이 홀로 여러 산들과 같이 있으면서 사나운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현성도 그와 같아서 네 가지 공양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수미산과 같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맑기는 저 맑은 샘물과 같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어지럽지 않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맑은 샘물이 속속들이 맑아, 작은 물 때문에 흐려지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에 그릇된 생각이 없으므로 외부의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며, 그 마음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부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맑기는 저 맑은 샘물과 같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어지럽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수품(水品) 제18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