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形像)의 질병에 셋이 있다. 바람과 찬 것[寒]과 더운 것[熱]의 병으로서 그 환난은 경미한 것이다. 마음에 세 가지 병이 있다. 환화(患禍)는 깊고 무거워 움직이기만 하면 수겁(數劫)에 걸쳐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오직 부처님만이 양의(良醫)로서 능히 나을 약을 만드신다. 행자(行者)는 무량한 세계에 오래도록 이 질병에 걸렸었는데 이제 비로소 행(行)을 짓는 것이다. 마땅히 그 마음을 결정케 하여 정성을 모아 신명(身命)을 아끼지 말라. 도적이 들 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면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과 같이, 생각을 흐트러지게 하는 군사를 깨뜨리는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피와 살이 다한다 하여도, 가죽과 뼈가 아직 있으면 정진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불이 몸과 옷을 태움에도 아직도 불을 구하고자 하여 여념(餘念)이 없는 것과 같다. 번뇌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마땅히 병의 괴로움과 굶주림과 목마름과 더위와 추위와 성냄과 원한 등을 참아야 한다. 마땅히 번잡한 거리를 피하여 한적한 곳에 즐겨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온갖 소리는 정(定)을 혼란하게 하기를 마치 가시덤불에 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근기(根機)가 날카로운 사람이 있어 바로 선(禪)을 구한다면, 5욕(慾)의 여러 가지 과실과 환난은 더욱 불구덩이와 같고, 또한 칙사(廁舍)와 같다고 관하고, 초선(初禪)의 지위는 청량한 못과 같으며, 높은 데에서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5개(蓋)2)는 곧 없어지고 초선을 얻는다.
행자(行者)는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여 지혜와 선정(禪定)의 손가락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 없애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법을 떠나는 일이 불가능하다.
030_0340_a_08L行者當勤精進,用智定指洗除心垢,若不如是,不能離法也。
1. 사무량관법(四無量觀法)
030_0340_a_09L四無量觀法:
불도(佛道)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먼저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여야 한다. 그 마음이 무량하고 공덕도 또한 무량하다. 일체의 중생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부모와 친척과 선지식(善知識) 등이며, 둘째는 원수와 도적으로서 사람을 싫어하여 항상 괴롭히고 해치고자 하는 자이며, 셋째는 중간에 위치한 사람으로서 친하지도 않고 원한도 없다. 행자(行者)는 이 세 가지 품성(品性)을 지닌 사람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마땅히 친척과 같이 해야 한다. 늙은이는 부모와 같고, 중년은 형제와 같고, 젊은이는 자식과 같아야 한다. 마땅히 항상 이와 같이 자심(慈心)을 닦아야 한다.
사람의 원수가 되는 것은 악연(惡緣)이 있기 때문이다. 악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친해진다. 원한과 친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금세(今世)에는 원수여도 후세(後世)에는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냄과 미워하는 마음은 스스로 큰 이익을 잃는다. 인욕의 복(福)을 깨뜨리고 자비로운 마음의 업(業)을 잃고, 불도(佛道)의 인연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성내지 말고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030_0340_b_01L원수와 도적을 보기를 마땅히 친척과 같이 하라. 왜냐하면 이 원수와 도적은 나로 하여금 불도의 인연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원수와 도적으로 하여금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한다면 나 또한 참을 것도 없고, 이는 곧 나를 선지식이 되게 한다. 나로 하여금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원수와 도적 사이에서 이미 이 자비를 얻었다면 시방의 중생에게 있어서도 자심(慈心)으로 사랑함이 세계에 널리 두루한다. 여러 중생이 무상하게 변화하고,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어 온갖 괴로움으로 핍박을 받아 벌레와 같이 꾸물대어[蝟蜚蠕動] 모두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고서는 슬픈 마음[悲心]을 일으킨다. 만약 중생이 금세의 즐거움[樂]과 후세의 즐거움을 얻고, 하늘에 나는 즐거움과 현성도(賢聖道)의 즐거움을 얻은 것을 보고는 기쁜 마음을 일으킨다. 중생에게 괴롭고 즐거운 일이 있는 것을 보되 근심하지 않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여 혜(慧)로써 스스로 제어하며 오직 중생으로 인연하여 사심(捨心)을 일으킨다. 이것을 4무량심이라 이름한다. 시방의 중생에게 자심(慈心)이 가득 차므로 무량(無量)이라 이름한다. 행자는 마땅히 항상 이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만약 때로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 마치 뱀이나 불과 같이 몸에 있으면 곧 마땅히 급히 물리쳐야 한다. 만약 마음이 뛰고 산란하여 5욕(欲)에 들어가고, 다섯 가지 장애[五蓋]로 인하여 덮이면 마땅히 정진하여 지혜의 힘으로써 강하게 이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자심(慈心)을 닦으면 항상 중생을 염하여서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를 닦아 쉬지 않으면, 곧 5욕을 떠나고 다섯 가지 장애를 없애어 초선(初禪)에 들 수가 있다. 초선의 상(相)을 얻으면 기쁨과 즐거움이 몸에 가득하여 모든 선법(善法) 중에서 환희의 즐거움이 생기고 갖가지 미묘한 색(色)을 본다. 이것을 ‘불도에 드는 처음의 문인 선정(禪定)의 복덕(福德)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030_0340_c_01L이 4무량심(無量心)을 얻고 나서 일체 중생에게 인욕하고 성내지 않으면 이를 중생인(衆生忍)이라고 이름한다. 중생인을 얻으면 법인(法忍)을 얻기가 쉽다. 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은 나지도[生] 않고 멸하지도[滅] 않아 마침내는 공상(空相)인 것을 말한다. 능히 이와 같이 법인을 믿고 받아 지니면 이를 무생인(無生忍)이라고 이름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수기[記]를 얻어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다.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탐욕(貪欲)과 성냄[瞋恚]과 어리석음[愚癡]은 중생의 큰 병이다. 몸을 사랑하고 탐욕에 집착하면 곧 성냄이 생긴다. 전도(顚倒)4)된 생각에 미혹하면 이는 곧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에 덮였기 때문에 내신(內身)과 외신(外身)의 정상(淨相)5)에 애착한다. 이를 익혀온 지 오래되어 염심(染心)6)을 보내기가 어렵다. 탐욕을 없애고자 하면 마땅히 부정관(不淨觀)7)을 하여라. 성냄이 밖으로부터 연유하면 그와 같이 제어하여라. 사람이 대[竹]를 쪼갤 때, 처음 마디를 쪼개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이, 이미 탐욕을 제어하면 나머지 둘은 스스로 굴복한다.
부정관이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몸은 부정(不淨)한 곳에 태어나 포태(胞胎)에 있고, 또 부정한 속에서 나오면 얇은 가죽 안에 묶여, 이 또한 부정하다. 밖에는 4대(大)가 있는데 변화하여 음식이 되어서 그 안을 채운다. 마음을 자세히 관찰함에 발로부터 머리털에 이르고, 머리털로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가죽 주머니 속에는 하나도 깨끗한 것이 없다. 뇌(腦)ㆍ막(膜)ㆍ눈물[涕]ㆍ침[唾]ㆍ고름[膿]ㆍ피[血]ㆍ대변[屎]ㆍ소변[尿] 등 줄여서 말하면 서른여섯 가지8)이며, 자세하게 말하면 한량없다.
비유하건대 농부가 창고를 열고 갖가지 삼[麻]과 쌀과 콩과 보리 등을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행자는 마음의 눈으로써 이 몸의 창고를 열어 갖가지 오로(惡露)9)를 내는 간(肝)과 폐(肺)와 장(腸)과 위(胃)와 여러 가지 벌레들이 움직이고 먹는 것을 본다. 아홉 개의 구멍은 항상 부정(不淨)을 흘러내어 쉬는 일이 없다. 눈은 눈꼽과 눈물을 흘리고, 귀는 귓밥을 내며, 콧속에서는 콧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침과 가래를 내며, 대소변의 구멍은 항상 오줌과 똥을 낸다. 비록 의식(衣食)으로 가리고 덮는다 해도 실로 이는 칙간(厠間)으로 가는 것이다. 몸의 상태가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으로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또 이 몸을 관찰함에 거짓 이름으로 사람이라 한다. 4대가 화합한 것을 비유하면 집과 같다. 등뼈는 대들보와 같고 늑골은 서까래와 같으며, 해골(骸骨)은 기둥과 같고, 가죽은 네 벽과 같으며, 살은 진흙을 바른 것과 같아 거짓으로 잠시 합하여 있을 뿐이다. 사람은 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030_0341_a_01L 위태롭고 진실이 아니다. 환화(幻化)와 같아서 순식간[須臾]이다. 다리뼈 위에 경골(脛骨)을 잇고, 경골 위에 비골(髀骨)을 잇고, 비골 위에 척추골을 잇고, 척추골 위에 촉루(髑髏)를 이어, 뼈와 뼈가 서로 의지해 있어 위태롭기가 계란을 쌓은 것과 같다. 이 몸을 자세히 관찰함에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하여 마음에 싫어함[厭惡]이 생겨 항상 부정한 서른여섯 가지 더러운 것을 생각하고 실답게 분별한다. 내신(內身)이 이와 같듯이 외신(外身)도 다르지 않다.
만약 마음이 머물지[住]10) 못하면 이를 제어하고 다시 부정관에 전념하여야 한다. 마음이 머무는 상(相)은 몸이 유연하여 잠시 쾌락을 얻는다. 마음으로 인하여 머무를 수가 없으면 마땅히 스스로를 꾸짖어야 한다. “무수한 겁(劫) 이전부터 항상 너를 따랐기 때문에 3악도(惡道)를 거듭 겪어 괴로움과 독은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나는 마땅히 너를 꺾을 것이다. 너는 또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그 마음을 묶어 성취하게 한다.
030_0341_b_01L의사는 그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약 피의 빛이 젖과 같은 것을 마시게 하면 곧 차도가 있을 것이다. 집안의 모든 것을 희게 하고 은잔에 피를 담아서 젖을 마신다고 한다면 병은 반드시 낫는다”고 말하면, 문둥이는 “피다”라고 말한다. 이에 답하기를, “흰 것은 병을 낫게 한다. 너는 어찌 집안의 모든 물건이 흰 것을 보지 않느냐. 죄 때문에 피라고 보는 것이다. 오직 오롯한 마음으로 젖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피라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7일이 되면 변하여 젖이 된다. 하물며 실로 흰 것을 실제로 보면서도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미 골인(骨人)11)을 보면 마땅히 골인의 안에 마음이 나고[生], 없어지고[滅], 서로 이어지는 것이 연주(綖珠)12)를 꿰는 것과 같음을 관하여야 한다. 뜻의 보는 것과 같이 외신(外身)을 보는 것도 또한 같다. 만약 마음이 머물고자 하면, 정근(精勤)하여 멈추지 말라. 불을 피우려면 연기를 보고, 우물을 파려면 습기를 보는 것과 같아 반드시 오래지 않아서 얻는다. 만약 마음이 고요히 머물면 눈을 뜨거나 감아도 뼈의 빛이 명료하여 마치 물이 맑고 고요하면 면상(面像)을 보는 것과 같다. 흐리면 알지 못하고 마르면 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법왕(法王)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갖가지 선법(善法)을 얻게 하신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은 먼저 마땅히 부처님을 염(念)하여야 한다. 염불(念佛)은 무량한 겁의 무거운 죄를 적게 하고 엷게 하여 선정(禪定)에 이르도록 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부처님도 또한 이를 염한다. 사람이 왕을 위하여 염하면 원수와 빚쟁이가 감히 침해하고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모든 악법(惡法)이 와서 염불하는 사람을 교란하지 못한다.
만약 부처님을 염한다면 부처님은 항상 있다. 어떻게 늘 생각하는 것[憶念]인가. 사람은 스스로 믿는 것이 그의 눈을 지나지 못한다. 마땅히 좋은 상(像)을 관하기를 참부처님[眞佛]과 같이 하라. 먼저 육계(肉髻)와 미간(眉間)과 백호(白毫)로부터 밑으로 내려가 발에 이르고, 발에서 다시 육계에 이른다. 이같이 모습마다 자세하게 취하여 고요한 곳으로 돌아가 눈을 감고 사유하고 마음을 상(像)에 묶어 두어 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약 그 밖의 것을 생각하면 이를 거두어들여라.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여 뜻과 같이 볼 수 있게 되면 이를 관상(觀像)의 정(定)을 얻었다고 한다.
030_0341_c_01L사람의 마음이 뛰고 흐트러지면 많은 악법과 인연한다. 마땅히 젖먹이는 어머니가 그 자식을 보살펴 함정과 험한 길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함과 같이 하여야 한다. 염(念)은 곧 자식과 같고 행자는 어머니와 같다. 만약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질책하기를, ‘늙음과 병과 죽음을 생각하면 매우 절박하다. 만약 하늘에 나면 묘욕(妙欲)에 집착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일과 선법(善法)이 없다. 만약 3악도(惡道)에 떨어지면 고뇌(苦惱)하고 두려워하여 착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 이제 묘법(妙法)을 얻음은 무슨 까닭인가. 지극한 마음으로 전념(專念)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해야 한다.
또 생각하여 말하기를, ‘태어나서 말법(末法)에 있고, 말법이 쇠퇴하여 멸하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사면의 북을 쳐서 문을 열어 죄인을 놓아주는 것과 같다. 북소리가 그치면 문을 닫게 되니 한 문이 닫히면 어찌 스스로 출옥할 수가 있겠는가. 비롯함이 없는 과거의 세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겪은 생사(生死)의 고뇌는 한이 없다. 지금 받은 법은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고, 무상한 죽음의 도적은 잠시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마땅히 다시는 무수한 겁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리라’고 한다.
생신관(生身觀)은 이미 상을 관하여 마치고 심상(心想)이 성취되어 뜻을 다잡아 정(定)에 들면 곧 볼 수가 있다. 마땅히 상(像)을 인연하므로 생신(生身)을 염하여야 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광명을 밝게 비추어 상호(相好)가 기특(奇特)함을 관하고, 혹은 녹야원에 앉아서 다섯 비구를 위하여 4성제법[四諦法]을 설한 때와 같이 관하고, 혹은 기사굴산(耆闍崛山)에 대광명을 놓아 여러 대중을 위하여 반야를 설한 때와 같이 하고, 이와 같이 필요에 따라서 한 곳에 생각을 집중하여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
법신관(法身觀)이란, 이미 공중에서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보고, 마땅히 생신에 인연하여 법신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대자대비와 무량한 선업(善業)을 관하여야 한다. 마치 사람이 먼저 금병(金甁)을 생각하고 다음에 병 안의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높고 묘하며 신이한 지혜가 비할 데 없는 까닭으로 멀지 않고 가깝지도 않으며, 어렵지 않고 쉽지도 않아 무한한 세계가 모두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한 사람도 밖에 있는 일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법을 모르는 일이 없으며, 마땅히 항상 전념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밖의 인연을 생각하면 이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또 다음으로 모든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가 죽을 때에 밖으로 여러 가지 근기(根機)를 잃고 검은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과 같으니, 만약 소리를 내면 소리는 범천(梵天)에 이른다. 대력(大力)ㆍ대고(大苦)ㆍ대포(大怖)ㆍ대외(大畏)는 죽음의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부처님 한 분의 힘만이 능히 구제하며, 능히 모든 인천(人天)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준다.
또 다음으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세세(世世)에 항상 일체의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옛날에 태자일 때와 같다. 놀이를 나가서 문둥이를 보고 의사를 시켜 고치도록 하자, 의사가 말하기를, “마땅히 성내지 않는 사람의 피를 마시게 하고 골수로 아픈 곳을 바르게 하면 곧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030_0342_b_01L태자는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얻기가 어렵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자기의 몸을 주어 낫게 하였다. 일체의 중생을 위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 은혜는 매우 무거워 부모를 뛰어넘는다. 또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남김없이 부모가 되게 하고, 부처님을 1분(分)으로 하여 2분(分) 가운데 항상 마땅히 부처님을 염하여야 한다. 마땅히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덕에 따라 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것이 정(定)을 성취하면 결박을 끊어 없애고, 나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만약 중간에 여러 가지 병이 생기면 병에 따라서 약을 쓴다. 만약 정(定)을 얻지 못하여도 육욕천(六欲天)13) 중에 가장 높고 커서 날아 이른 곳에 궁전이 스스로 따르고, 혹은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끝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약을 적동(赤銅)에 배합하였으나 금(金)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은(銀)은 잃어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을 관한다는 것은 앉아서 동방(東方)을 관함에 확연(廓然)하여 밝고 깨끗해서 모든 산과 강과 석벽(石壁)이 없이 오직 한 부처님께서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손을 들어 설법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관찰함에 광명과 상호가 밝아서 분명하다. 생각을 묶어 부처님에게 두고 다른 인연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른 데 인연하면 이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보면 다시 열 부처님을 더하고, 다시 본 다음에는 또 백천(百千)을 더하여, 나아가 끝이 없다. 몸에 가까우면 곧 좁게 구르고, 멀면 넓게 굴러서 오직 여러 부처님의 빛과 빛이 서로 접하는 것을 본다.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여 이같이 되면, 몸을 동남(東南)으로 돌려 또 앞에서와 같이 관한다. 이미 성취하면 남방(南方)ㆍ서남방(西南方)ㆍ서방(西方)ㆍ서북방(西北方)ㆍ북방(北方)ㆍ동북방(東北方)ㆍ상하방(上下方)까지 이와 같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모든 부처님 보기를 동방과 같이 하여 마치면 마땅히 또 단정히 앉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한꺼번에 관하여야 한다.
030_0342_c_01L한 생각이 인연하는 곳에 두루 볼 수가 있게 되어 정심(定心)이 성취되면 곧 정(定) 안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를 위하여 설법하니,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서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 만약 과거세(過去世)의 죄의 인연으로 해서 여러 부처님을 볼 수 없으면, 마땅히 하루 낮ㆍ하룻밤의 여섯 때[時]14) 동안 참회하고 따라 기쁘게 청하면 이윽고 스스로 볼 수가 있다. 설사 모든 부처님께서 위하여 설법을 하지 않아도 이때에 마음은 쾌락을 얻어 몸이 안온하다. 이를 이름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관한다고 한다.
무량수불(無量壽佛:阿彌陀如來)을 관함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근기가 둔한 사람은 먼저 마땅히 마음의 눈으로 이마 위 한 치를 관찰하게 하여야 한다. 가죽과 살을 없애고 다만 뼈[赤骨]만을 본다. 생각을 묶어 두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른 것을 반연하면 이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같이 볼 수 있게 되면 마땅히 다시 이 뼈의 크기 한 치를 변하여 희기가 흰 마노[珂]와 같이 되게 하여야 한다. 다시 이같이 볼 수가 있게 되면 마땅히 스스로 그 몸을 변하여 백골(白骨)이 되게 하여 가죽과 살을 없애고 빛깔은 흰 눈과 같게 하여야 한다. 다시 이같이 볼 수 있게 되면, 마땅히 그 골신(骨身)을 변하여 유리(琉璃)의 빛이 되게 하여야 한다. 청정하여 표면을 보면 안을 꿰뚫는다.
이미 이같이 볼 수 있게 되면, 마땅히 다시 이 유리의 몸에서 흰 광명을 놓아야 한다. 가까운 곳으로부터 멀리는 염부(閻浮)까지 미치어 가득 차고, 오직 광명만을 보고 그 밖의 것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광명을 거두어 몸 안에 넣은 다음에는 다시 놓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무릇 이러한 관찰은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 데에 이르고, 그 희기도 또한 처음에는 적은 것으로부터 뒤에는 많아져야 한다.
이에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으면 마땅히 몸 안에서 이 흰 광명을 발하고, 곧 광명 속에서 무량수부처님을 관한다. 무량수부처님은 그 몸이 매우 크고 광명 또한 오묘하며 서방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계신다. 그 모양을 분명히 취한 다음에 그 몸을 한꺼번에 관찰함에, 결가부좌한 얼굴 모습은 아득히 높아 자금산(紫金山)과 같다.
030_0343_a_01L생각을 묶어 부처님에게 두고 다른 데 반연하지 않으며, 마음이 만약 다른 데 반연하면 이를 거두어들이고, 항상 부처님과 마주 앉은 것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래지 않아서 곧 볼 수가 있다. 만약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이면 마땅히 먼저 밝은 상(想)을 지어야 한다. 빛의 밝기가 하늘과 같이 맑아서 그 밝음 속에 부처님을 관하면 곧 볼 수가 있다. 행자가 만약 무량수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이같이 지어서 무량수부처님을 관하여야 한다.
모든 법(法)의 실상을 관함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자재(自在)할 수가 없으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경은 공상(空相)인 것이다. 오직 거짓 이름이 있을 뿐 실다운 것은 있지 않으며, 만약 법이 실(實)이 있다고 하면 마땅히 무(無)라고 설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는 유(有)이었으나 지금 무(無)이면 이를 단(斷)이라 이름한다. 항상하지 않고 끊어지지[斷] 않아서 역시 유(有)와 무(無)가 아니며, 심식처(心識處)가 없어져 언설(言說) 또한 다한다. 이것을 깊고 깊은 청정관(淸淨觀)이라 이름한다.
또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법을 관함에 이는 곧 실상(實相)이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법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니, 만약 안에 있다면 밖의 인연을 기다려서 생기지 않을 것이며, 만약 밖에 있다면 머무를 곳이 없으며, 만약 머무를 곳이 없다면 또한 나고 멸함이 없어 공(空)하여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청정하고 무위(無爲)인 것이다. 이것을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실상관(實相觀)이라고 이름한다.
030_0343_b_01L또 일체의 모든 법은 필경 청정하다. 모든 부처님과 현성(賢聖)이 능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범부(凡夫)가 아직 지혜의 관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허망한 법에 여러 가지 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상을 얻은 자가 이를 관하면, 거울 속의 상(像)과 같다. 다만 사람의 눈을 속이지만 실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법을 관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것이다. 행자가 만약 정진하여 깊고 조용하게 사유하여 삿됨이 생기지 않으면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이 법은 반연하기 어렵고 마음이 많이 흐트러진다. 만약 흐트러지지 않으면 역시 다시는 줄거나 잠기지 않는다. 항상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밝게 관찰하여야 한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들이기가 어려우면 마땅히 마음을 꾸짖어야 한다. ‘너는 무수겁 이전으로부터 항상 잡된 업(業)에 따라 싫어함이 없이 세간의 즐거움을 쫓아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일체의 세간에 탐착하여 즐겨서 환난을 부르고, 업의 인연을 따라서 5도(道 :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를 받아 태어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하는 자인가. 너는 미친 코끼리가 짓밟은 잔해(殘害)이니 구제할 길이 없다. 누가 너를 다스리는 자인가.
만약 선(善)한 다스림을 얻으면 곧 세간의 환난을 여읜다. 마땅히 알라. 태에 있어서는 부정(不淨)의 괴로움과 액난이 핍박하여 몸을 찢는 것이 지옥과 같고, 이미 태어나 세상에 있어서는 늙음과 병과 죽음과 괴로움과 근심과 슬픔이 끝이 없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한다. 만약 천상에 난다 하여도 마땅히 다시 타락하여, 삼계(三界)에 편안함이 없다. 너는 무엇을 가져 즐거움이라 집착하는가.’
무량수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위의 무량수부처님을 관하여야 한다. 또 제법실상을 관하고, 또 마땅히 세간의 꿈과 같이, 환(幻)과 같이 모두가 실다운 것이 없음을 관하여야 한다. 다만 전도되고 허망한 법으로 제멋대로 번뇌를 일으켜 여러 가지 죄의 업보를 받는다.
마치 사람이 여러 소아(小兒)와 함께 다투며, 기와와 돌과 흙과 나무 때문에 성내고 싸우는 일이 생기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아, 여러 세간을 관하는 데도 또한 그와 같다. 마땅히 대비(大悲)를 일으켜 맹세하여 일체를 제도하며 항상 그 마음을 조복하여 두 가지 인(忍)을 닦아 행해야 한다. 이른바 중생인(衆生忍)과 법인(法忍)이다.
030_0343_c_01L중생인(衆生忍)이란, 만약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중생이 여러 가지 악을 더해도 마음이 성내지 않으며, 여러 가지 공양을 하고 공경을 하여도 마음이 기뻐하지 않음이다. 또 중생을 관함에 처음도 없고 뒤도 없으니, 만약 처음이 있으면 인연이 없고, 인연이 있으면 처음이 없다. 만약 처음이 없으면 중간도 뒤도 역시 없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상(常)과 단(斷)15)의 두 길에 떨어지지 않고, 안온한 길을 가져 여러 중생을 관하여 삿된 소견이 생기지 않는 것을 중생인이라 이름한다.
법인(法忍)이란 마땅히 제법(諸法)은 매우 청정(淸淨)하여 필경은 공상(空想)임을 관하여야 한다. 마음에 걸림 없이 능히 이 일을 인내하는 것을 법인이라 이름한다. 새로 뜻을 낸 자가 아직 이 법인을 얻지 못했다 해도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닦아야 한다. 또 제법(諸法)이 필경은 공상임을 관하여 중생에게 항상 대비(大悲)를 일으키고, 온갖 선의 근본[善本]을 다 회향하여 무량수부처님의 나라에 나기를 원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
21일을 일심(一心)으로 정진하여 설한 것과 같이 수행하고, 바르게 『법화경(法華經)』을 잊지 않고 염함에 마땅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다보불(多寶佛)과 칠보탑(七寶塔)에 함께 앉아 계심을 염해야 한다. 시방의 분신화불(分身化佛)은 옮겨간 중생의 국토에 가득 차고, 일체의 모든 부처님에게는 한 생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성불하기로 정해진 한 사람의 보살이 시자로 있는데,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이 미륵보살로서 시자를 삼음과 같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신통력을 나타내고, 광명은 무량한 국토를 두루 비추어 실다운 법을 밝히고자 하여 그 설상(舌相:說法)을 내면 음성은 시방세계에 가득 찬다. 설하는 『법화경』이란 시방 3세의 크고 작은 중생이 한 번만이라도 ‘나무불(南無佛)’이라고 부르면 모두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오직 하나의 대승으로서 둘이 없고 셋이 없다. 일체의 모든 법은 일상일문(一相一門)으로서 이른바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필경은 공상(空相)이다. 오직 이 대승(大乘)이 있을 뿐으로 둘이 없다.
030_0344_a_01L이와 같은 관(觀)을 닦으면 5욕(欲)은 스스로 끊어지고, 5개(蓋)는 스스로 없어지며, 5근(根:信ㆍ精進ㆍ念ㆍ定ㆍ慧)은 증장하여 곧 선정(禪定)을 얻는다. 이 정(定)의 안에 머물면 부처님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다. 또 마땅히 이 매우 미묘한 일상일문의 청정한 법에 들어간다.
마땅히 보현(普賢)ㆍ약왕(藥王)ㆍ대요설(大樂說)ㆍ관세음(觀世音)ㆍ득대세(得大勢)ㆍ문수(文殊)ㆍ미륵(彌勒) 등의 대보살을 공경하여야 한다. 이것을 ‘일심으로 정진하여 설한 것과 같이 수행하여 바르게 『법화경』을 잊지 않고 염한다’고 이름한다. 이를 ‘선정과 화합하여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면 21일 중에 곧 보현보살이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서 그곳에 이르니,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2)심성(心性)을 가려 선법(善法)을 낼 수 없게 하는 다섯 가지로 탐욕과 성냄과 수면과 도회(悼悔)와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3)수다원(須陀洹)을 말한다.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성도(聖道)에 드는 과위(果位).
4)평상의 도리를 어기고 바른 이치를 위반하는 것.
5)몸의 모양이 깨끗하다고 관찰하는 것.
6)염오심(染汚心), 즉 번뇌를 동반한 마음.
7)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육신의 부정한 모양을 관찰하는 것.
8)『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발(髮)ㆍ모(毛)ㆍ과(瓜)ㆍ치(齒)ㆍ박피(薄皮)ㆍ후피(厚皮)ㆍ혈(血)ㆍ육(肉)ㆍ근(筋)ㆍ맥(脈)ㆍ골(骨)ㆍ수(髓)ㆍ간(肝)ㆍ심장(心腸)ㆍ비(脾)ㆍ신(腎)ㆍ위(胃)ㆍ대장(大腸)ㆍ소장(小腸)ㆍ시(屎)ㆍ체(涕)ㆍ타(唾)ㆍ한(汗)ㆍ루(淚)ㆍ구(垢)ㆍ분(坋)ㆍ농(膿)ㆍ뇌(腦)ㆍ포(胞)ㆍ담(膽)ㆍ수(水)ㆍ미부(微膚)ㆍ지방(脂肪)ㆍ뇌막(腦膜).
9)몸에서 흐르는 나쁜 진액, 즉 피ㆍ고름ㆍ오줌ㆍ똥ㆍ땀 따위.
10)부정관(不淨觀)에 머무는 것.
11)사람 형체의 마른 배만을 앙상하게 그린 그림으로 좌선하는 이에게 이를 관(觀)하게 하여 번뇌를 조복(調狀)하게 한다.
12)연(綖)의 세 줄기로 살을 만들어 구슬을 꿴다.
13)욕계(欲界)에 있는 사진천(四珍天)ㆍ도리천(忉利天)ㆍ야마천(夜馬天)ㆍ도솔천(兜率天)ㆍ화가천(化苛天)ㆍ타화천(他化天)의 여섯을 말한다.
14)일출(日出)ㆍ일중(日中)ㆍ일몰(日沒)ㆍ초야(初夜)ㆍ중야(中夜)ㆍ후야(後夜)를 말한다.
15)단(斷)ㆍ만유는 무상(無常)하여 실재하지 않음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주장. 즉 단견(斷見)ㆍ상(常), 모든 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과 같이 이 몸도 죽었다가는 다시 태어나서 끝없이 지금의 상태를 계속한다고 주장하는 상견(常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