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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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함모초서(四阿鋡暮抄序)
030_0493_a_01L四阿鋡暮抄序


아함모(阿鋡暮)란 진(秦)나라 말로는 취(趣)가 없다는 뜻이다. 아난(阿難)은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12부경(部經)을 음송하여 출현[出]시켰으며, 또한 그 대요를 채택하고 간추려 곧바로 도법(道法)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사아함모(四阿鋡暮)가 된다. 이를 아비담(阿毘曇) 및 율(律)과 함께 3장(藏)이라 한다.
인도[身獨] 학사(學士)의 지극한 덕성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바소발타(婆素跋陀)라는 아라한이 사아함모의 기름지고 비옥한 내용만을 간추려 1부(部) 9품(品)으로 구성하였는데, 총 46엽(葉)이다. 중복되는 부분은 배제하고 복잡다단한 문장은 간단하게 줄여 뜻을 풍부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경(經)의 영만(瓔鬘:영락의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 온갖 행이 미묘하니, 옳고 그름을 가려서 다 싣지 않은 바가 없다. 뛰어나고 오묘하고 깊고 풍부한 행을 할 수 있는 대로 다해 마친 것이다
030_0493_a_02L阿鋡暮者秦言趣無也阿難旣出十二部經又採撮其要逕至道法爲四阿鋡暮與阿毘曇及律竝爲三藏焉獨學士以爲至德未墜於地也有阿羅漢名婆素跋陁抄其膏腴以爲一九品四十六葉斥重去複文約義眞可謂經之瓔鬘也百行美妙是與非莫不悉載也優奧深富行之能事畢矣
인제려(因提麗)라는 외국의 사문이 먼저 앞의 부(部)를 가지고 들어와 비밀리에 지니고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 나라 왕 미제(彌第)가 그것을 얻어 읊조리자 비로소 나라 안에 유포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임오(壬午)년 8월에 업(鄴:하남성 안양현 북쪽의 지명)에 있는 절인 동성(東省)의 선사사(先師寺)에서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로 하여금 범본을 집수(執手)하게 하고, 축불념(竺佛念)과 축불호(竺佛護)에게 번역토록 하였으며, 승도(僧導)와 담구(曇究), 그리고 승예(僧叡)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하였다. 그리하여 겨울인 11월에 마쳤다. 이 해의 여름에는 아비담을 출현시켰고 겨울에 이 경을 출현시켰으니, 1년 동안에 3장을 갖춘 셈이다. 스스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은, 다만 이 경을 처음 만난 지 8ㆍ9년이 경과한 것이 한스럽고 책을 맨 끈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채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으나 몇 년을 더하였더라도 큰 허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030_0493_a_11L有外國沙門字因提麗齎詣前部國秘之佩身不以示人王彌第求得諷之遂得布此余以壬午之歲八月東省先師寺廟於鄴寺令鳩摩羅佛提執梵佛念佛護爲譯僧導曇究僧睿筆受至冬十一月乃此歲夏出阿毘曇冬出此經一年之中具三藏也深以自幸但恨八九之年始遇斯經恐韋編未絕不終其業耳若加數年將無大過也
030_0493_b_01L근자에 칙령을 내려 번역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범어를 진나라 말로 전환하도록 하고 방언을 해석하도록 했다. 이 경의 문장의 질이 감히 번역하기가 쉽지 않고 그 법수(法數) 또한 번거로워서 그 일을 해결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탐색하는 사람들이 그 아래에 주(註)를 달았고, 때때로 다시 그 뜻을 얻은 이들이 그 문장에 주를 달았다. 수투로(修妬路)는 어떤 사람이 주해(注解)하는 데 인용한 경본이다. 이 경에서 곧바로 수투로라고 한 말은 경을 인용하여 증명한 부분이지, 주해는 아니다.
030_0493_a_20L近勅譯直令轉梵爲秦解方言而已經之文質所不敢易也又有懸數懸事訪其人爲注其下復以意消息者爲其章章注修妒路者其人注解引經本也其有直言修妒路者引經證非注解也

사아함모초해(四阿鋡暮抄解) 상권
030_0493_b_04L四阿鋡暮抄解第一此土篇目題皆在首是故道安爲斯題 卷上


바소발타(婆素跋陁) 지음
부진(符秦)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 등 한역
030_0493_b_05L阿羅漢婆素跋陁撰
符秦西域三藏鳩摩羅佛提等譯
김 철수 번역


1. 사아함모초해(四阿鋡暮抄解) [이 땅에서는 경전의 수미(首尾)를 완결할 때 앞머리에 있는 품으로 제목을 삼기 때문에 도안(道安)이 이것으로 책의 제목을 붙인 것이다.]

아함모(阿含暮)진(秦)나라 말로는 취(趣)가 없다는 뜻이다.
먼저 선서(善逝)와 법중(法衆)과 괴유중(壞有衆)에게 귀명의 예를 드린다존경스러운 3존중(尊衆)에게 예를 드리면 번뇌의 결박을 제거할 수 있다. 법을 설하는 데는 간략하고 신속하게 그 의미를 밝혀서 설명하려 하기 때문에 3법(法)의 형식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제자가 물었다.
【문】 여기에 3법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3법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030_0493_b_07L阿鋡暮秦言趣無前禮善逝法衆壞有衆禮三尊衆能除結也當說所欲略速義說是故三法當說弟子問說是有三法說是三法何義師答法依三門面也向也結句次第作是故三法想識三法次第何義大佛經章繫無數相婬恚懷味精進因緣食持恚也著也進行繫之故曰持也味也衆生少智求聖諦是輩想當知義知義三法方便想分別是次第一切是世閒所有想隨所欲想等結是故想知義三法作
【답】 법은 세 가지 문[三門]에 의지하여[면(面)하다, 향(向)하다는 뜻이다] 결구(結句)한다. 이는 순서대로 지었기 때문에 3법의 상(想)을 분간할 수 있다.
【문】 3법의 순서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답】 대불경(大佛經)의 장구(章句)에는 무수한 상(相)이 연계되어 있으니, 가령 음(婬)과 에(恚)를 마음속에 품는다거나, 정진(精進)의 인연을 간직하여 맛보는 것이다탐음하고 성냄에 집착하거나 정진하는 행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지닌다거나 맛을 본다고 말한다. 지혜가 적은 중생이 성스러운 진리를 구하려면, 갖가지 상(想)의 뜻을 잘 알아야 하고 신속하게 3법의 방편상(方便想)을 알아야만 한다. 이 3법의 방편상의 순서에 따라 일체 세간의 모든 상(想)을 분별하면, 바라는 바대로 상(想) 등을 원만하게 간추려 정리해낼 수 있다. 따라서 3법을 지은 취지를 헤아려 알 수 있다.
030_0493_b_18L是方便相應說三功德依覺解脫修妒路功德一惡二依三功德依覺解脫有是句義是根句是三各各三度三分
【문】 이 방편상은 3법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공덕(功德)ㆍ악(惡)ㆍ의(依)를 깨우쳐 해탈함이다수투로(修妬路) 3법은 공덕이 첫 번째이고, 악이 두 번째이며, 의가 세 번째이다. 공덕ㆍ악ㆍ의를 깨달아 해탈에 이른다는 문구의 뜻이 있으니, 이 근본 문구에는 3법의 의미가 담겨 있고 각각의 3도(度)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030_0493_b_21L有三分句初思惟解脫說何義是解脫彼解脫功德依覺相應已入不爲說是解脫世閒等生至虫蟻虫蟻亦求樂等生謂見食而趣解脫樂痛一義世間少樂相應樂因緣不知如樂道樂涅槃樂無病等生也以道樂有不知是所若所欲不是爲說已入道不爲說如小兒
030_0493_c_01L【문】 세 가지로 분류되는 문구에서 최초로 해탈에 대해 생각하시어 설하셨는데, 해탈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저 해탈이란 공덕ㆍ악ㆍ의에 대한 깨달음과 상응하는 것인지요?
【답】 이미 깨달아 들어갔으면 말할 필요가 없다. 이 해탈은 세간 등에서 생(生)하니 벌레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즐거움[樂]을 구한다. 이는 식(食)을 보면서 해탈에 취향[趣]해 가는 것이니 낙통(樂痛)과 한뜻이다. 세간의 적은 즐거움이 상응하는 즐거움의 인연이니 여여한 즐거움, 도(道)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 무병(無病) 등이 생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도의 즐거움에는 이것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으니, 만약에 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도에 깨달아 들어갔으면 말할 필요가 없으니, 비유하면 어린아이와 같다.
030_0493_c_06L問何者眼卽自知眼處是自是不爲說如是樂世閒所欲是道所欲是故說道義作無惡是何功德覺樂解脫有若爾者可見金見爲富也有病不可言聞故不覺解脫中閒如明燈入壞闇不是明燈後有闇是智生解脫者智覺一義是何法功德名爲衆生深癡爲色味香爲受不受已受
【문】 누구라서 눈[眼]에 대해 스스로 눈의 처소를 알 수 있습니까?
【답】 스스로 아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세간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이 도(道)가 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도(道)의 뜻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문】 어떻게 공덕을 깨달아 즐거운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러하다면 금을 보면 부자가 되고 약을 보면 병이 낫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깨달아 해탈할 수 없습니다.
【답】 이 가운데 비유하면 가령 밝은 등불이 어둠을 비추어 들어가 어둠을 무너뜨릴 때 등불이 비춘 후에는 어둠이 있지 않듯이, 지혜가 생하는 해탈이라는 것도 지혜와 깨달음이 한뜻이다.
【문】 공덕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중생의 깊은 어리석음을 말합니까, 아니면 색(色)ㆍ미(味)ㆍ향(香)을 말합니까, 혹은 수(受)ㆍ불수(不受)ㆍ이수(已受)를 말합니까?
030_0493_c_14L隨想外經說是功德福德無惡修妒路三句福也根也無惡也福德無惡是三功德淸淨法果我功德想是一切三皆入是當略說已說是福德根無惡是何法
【답】 상(想)을 따르는 것 이외에 경에서는 공덕이란 복덕(福德)ㆍ근(根)ㆍ무악(無惡)이라 한다고 하였다. 수투로. 세 구(句)는 복ㆍ근ㆍ무악이다 복덕ㆍ근ㆍ무악 이 세 가지가 공덕의 청정법과(淸淨法果)이다. 내가 공덕상(功德想)의 모든 것들을 다 세 가지로 귀납시켜 이렇게 간추려 설한 것이다.
【문】 복덕ㆍ근ㆍ무악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복덕(福德)은 어떤 법입니까?【답】 복덕이란 보시(布施)ㆍ계(戒)ㆍ분별(分別)이다수투로. 자주자주 선한 일을 하고자주자주란 항상함이다, 악한 일을 자주자주 억새를 베듯 하므로 복이라 한다억새는 갈대와 같다. 이 세 가지 보시ㆍ계ㆍ분별을 행하는 것에 관해 선사(先師:옛 성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30_0493_c_18L福德分別修妒路復復善事復復猶恒恒也 復蓰人惡是故福蓰猶盧也是三行分別如是先師說

항상 복덕을 지어 보시를 행하라여덟 자. 1)

중생의 명(命)은 그 수명이 신속하게 내달린다여덟 자
갈대를 베어버리듯 악을 소제하는 행을 자주 해야 하나니여덟 자
그러므로 복덕을 이와 같은 비유로 설하네여덟 자. 수로(首盧)라 이름한다. 수로는 32자로 구성된 게송(偈頌)이다.
030_0493_c_21L常能作福德所行施八字也
衆生之命速乎馳八字也
若蓰消惡作行之數八字也
故福德如斯說喩八字也名首盧首盧三十二字偈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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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미 복덕의 보시ㆍ계ㆍ분별을 말씀하셨는데, 보시(布施)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보시하는 자신과 보시를 받는 다른 사람과 보시하는 재물이 있으니, 보시하고자 하는 생각[念]이 나면 다시 보시를 행한다.
세 가지 보시행(布施行)에는 법시(法施)와 식시(食施)와 무외시(無畏施)가 있다수투로. 법시ㆍ식시ㆍ무외시 이 세 가지를 보시라 말할 수 있다.
법시(法施)는 세간ㆍ출세간의 문장이나 말씀이며, 무외시란 8행(行)ㆍ3귀명거(歸命去)ㆍ5계(戒)이다.
세존께서는 부처님께 귀명(歸命)할 것을 설하셔서 한량없는 중생이 두려움이 없고 질투가 없고 성냄이 없고 살생이 없도록 하셨다. 나머지도 이와 같다.
【문】 만약에 귀명을 했는데 곤충을 죽이는 일을 보게 된다면, 어떤 무외(無畏)의 법이 보호합니까?
030_0494_a_01L說福德分別是何施名己身他受自財施念俱去所更施是三行無畏修妒路法施食施無畏施是三說施也是法施世閒出世閒章說是法施無畏施八行三歸命去世尊說歸佛去無量衆生無畏無恚無殺餘者如是若歸去有殺虫何法無畏護
【답】 나는 일체 중생이 삿된 견해와 어리석음으로 곤충을 죽이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악을 짓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3귀명(歸命)을 지으면 세간 등의 일을 보지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귀명하는 일이 없다면 세간 등의 견해가 있게 되니, 이는 귀명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무외시(無畏施)는 한량없이 길상하다.
식시(食施)는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온갖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탑을 보시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거나갖가지 상(象), 향을 올리는갖가지 공양 것을 으뜸으로 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받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받는다. 따라서 두 가지 공덕이 큰 과보(果報)를 구족하니, 이것이 깨끗하게 베푼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선사(先師)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030_0494_a_09L我不說一切衆生以邪見癡殺虫作他財惡作是三歸去不有世閒等見得若歸去無世閒等見是不歸去是故無量吉名食爲首種種他施與塔爲首種種象香爲首種種供也己身受二受己與他也或二受是故二功德具足大果報是施淨如是先師言

근본적으로 재물에는 짓는 일이 있고
생각이나 재물, 두 가지에는 짓는 일이 있으며
뜻이 세간의 길상함을 지으니
이는 방편의 깨끗함이로다.
조금만 베풀어도 큰 과보 있으니
인연의 깨끗함이 있으면
적은 것으로도 큰 공덕 이룰 수 있네.
030_0494_a_16L根財作有或念或二作有或義作世閒吉是方便淨施少有大果有因緣淨少俱功德得

【문】 계란 어떤 법입니까?
【답】 계는 신(身)ㆍ구(口)의 타수(他受), 불괴타(不壞他), 괴증(壞增)이다수투로. 계란 이 세 가지가 신(身)과 구(口)에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문】 어떤 법입니까?
030_0494_a_18L是戒何法戒身口他受不壞他壞增修妒路 名三相應相應身口俱起何法
030_0494_b_01L【답】 타수(他受)와 타불수(他不受)와 증(增)이다.
타수(他受)란 배고프고 결핍되었을 때 스스로 다른 사람의 향수함[他受]에 폐를 끼치지 않고 중생 자신이 스스로 다른 중생에게 폐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이해하여 죽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다른 사람의 부인을 물든 마음으로 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비록 여기서는 수(受)라고 말하고 있으나 또한 불수(不受)이기도 하다. 곧바로 분류하면 신(身)ㆍ구(口)의 불수이다.
불타수(不他受)란 거짓말ㆍ이간질하는 말ㆍ거친 말ㆍ경우에 맞지 않는 말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 일곱 가지 항목으로 다른 사람에게 패를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 온갖 빈궁함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타수와 불타수 두 가지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힘써 도우면 복의 증장함이 계속되니, 이로부터 살생할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러는 가운데 복의 증대함이 상응하니, 가령 재산을 내어서 보은할 마음을 일으키고 착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비유하면 곡식 종자가 자라나 줄기와 잎이 무성해지면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타수와 불타수의 증익이 계속되면 수면의 상태에서도 증대되므로 증(增)은 계(戒)이다꿈에서도 잃지 않는다.
030_0494_a_20L他受他不受增是他受名己飢羸知不嬈他受衆生自知衆生不嬈解不殺也如是他財他婦不染取如是雖言受亦不受耳分身口不受也不他受妄言兩舌麤言不要言不著他受若七枝不嬈他受種種貧窮爲力助他受二共想福增續如從如殺生不作發意中閒增多相應如出財得報意善生覺受如種穀葉增至得果如是連續至睡眠增多是故增是戒夢不失也
【문】 분별(分別)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분별이란 선(禪)ㆍ무량(無量)ㆍ무색(無色)이다수투로. 분별은 선행(善行)이다. 그러므로 분별은 마치 삼베에 꽃물감이 드는 것과 같다. 분별을 행함은, 비유하면 왕이 그 지위와 동등한 것을 구하면 왕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구하는 행이 있으면 깨끗한 결과가 상응하는 것이다. 이 선사유(禪思惟)의 뜻에는 네 가지 행이 있다.
030_0494_b_07L是分別何法分別禪無量無色修妒路分別是善行是故分別如麻油花行分別如王求如等求王果得有是求行淨果相應有分別是禪思惟義是四行
【문】 어떤 법입니까?
【답】 선(禪)이란 음(婬)과 행(行)과 애(愛)와 낙통(樂痛)ㆍ고통(苦痛)의 그침[止]이다수투로.
이 네 가지 선(禪)이란 먼저 옳지 못한 음을 행하는 것을 그침이니, 선한 인연과 연계된 마음이 머물러서 음을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자신의 행이란 자행자각(自行自覺)이 적은 것이니 방울 소리의 여음(餘音)과 같다. 이를 그치게 하고자 하므로 무행(無行)이다3정(定)에 비유된다. 방울 소리의 여음은 자행을 그치는 것을 비유한다. 이것이 자행(自行)의 그침이며 음(婬)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애(愛)의 그침이 세 번째이니 애란 환희의 뜻이며, 마치 샘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없으면3선(禪)으로 애(愛)가 그친 상태 음과 행이 그치면서 증가됨이 그친다.
네 번째 고통ㆍ낙통의 그침에서 낙통(樂痛)의 낙은 몸과 마음에 핍박함이 없다는 것이다낙통이 그친다. 고통은 이와는 다르다. 저 음ㆍ행ㆍ애ㆍ낙통ㆍ고통의 그침이 네 가지 선(禪)이다.
030_0494_b_12L是何法婬行愛樂痛苦痛止修妒路是四禪初婬不善行善因緣繫意住離婬說二自行說自行自覺少鈴聲欲止是故無行譬三定也鈴餘音自行止喩也是自行止婬前已說也止三愛意歡喜如泉踊躍是無三禪無婬行止增止苦痛樂痛止樂痛樂身意無逼樂痛止也外是彼無婬行愛痛苦痛止是四禪
030_0494_c_01L【문】 무량(無量)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답】 무량이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捨)이다수투로. 이것이 4무량상(無量想)이다. 중생이 한량없으니 저들이 받아들이는 인연도 한량없고 선(善)함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무량이라고 한다.
자(慈)라는 것은 일체 중생을 사랑함이며, 마음속으로 모든 중생을 애민(哀愍)히 여기는 것이며, 중생의 몸에 대해 생각해 주는 것이다.
비(悲)라는 것은 고뇌하고 있는 중생을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하는 것이다.
희(喜)라는 것은 즐거운 생각으로 중생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호(護)라는 것은 중생이 법인(法忍)이 아닌 다른 것을 짓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이니, 만약에 중생이 어긋난 견해로 인연을 짓는다면 그 허물을 감내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무량(無量)에 대해 설하였다.
030_0494_b_20L是爲無量何法無量者慈悲喜修妒路是四無量想衆生無量彼受因緣是無量不是善能量是故無量是慈名一切衆生愛謂意行一切衆敏是身念是慈等已苦惱衆生愛自身愛樂念衆生共繫喜無所衆生他非法忍若是衆生作是相違見因緣是故過忍護已說無量
【문】 무색(無色)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무색이란 허공처(虛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이다수투로.
처(處)는 의(依)의 뜻이다. 중생은 이 4분처(分處)에서 공(空)이 색(色)이나 색에 대한 악견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주므로 마음이 물들지 않는다[無染].
허공은 반드시 마음을 인연한다. 허공은 생각(想:관념)과 함께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허공처이다. 왜 그러한가? 허공은 식(識)을 의지함이 있기 때문에 식은 행식처(行識處)를 인연한다. 이것 또한 여전히 의지함이 있다. 의지함이 없다면 해탈이다. 짓는 일이 없으면 무소유처이다. 생각[想]이 있으면 허물을 보게 되고 생각이 멸하면 두려움을 보는 이 한 가지 마음이 유상무상처이다. 이것들이 무색계이니 공을 관(觀)한 다음에 설하고 설한 다음에는 무색을 분별하여 설하였다. 이상은 일체의 복덕을 설명한 것이다.【문】 근(根)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근이란 무간(無慳:인색하지 않음)ㆍ무에(無恚:성내지 않음)ㆍ무치(無癡:어리석지 않음)이다수투로. 무간ㆍ무에ㆍ무치 이 세 가지를 근의 모습이라 한다.
030_0494_c_05L何法無色無色虛空無所有有想無想處修妒路處者依義也衆生是四分處空色助色惡見助是故意無染虛空因緣意一定虛空共繫想彼虛空處如何故虛空依爲有識故識因緣行識處是亦依無依解脫謂無所作是無所有處想見惡相滅見恐一意有想無想處是無色界空已說已說無色分別說是一切福德說是根何法根無慳無恚無癡修妒路無慳無恚無癡是三事根相
【문】 어떤 것의 근입니까?
【답】 앞의 공덕에서 설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체의 해탈에 들어가는 법이다. 이 근(根)은 상응설(相應說)에서와 같이 상응하게 한다. 하나가 커지면 두 가지가 상응한다어리석음이 커지면 성냄과 인색함이 따라 들어간다.
이를테면 무간(無慳)은 보시와 상응하고, 무에(無恚)는 계(戒)와 상응하며, 무치(無癡)는 분별과 상응한다. 또한 무간은 식시(食施)와 상응하고, 무에는 무공시(無恐施:무외시)와 상응하며, 무치는 법시(法施)와 상응한다.
또한 무간은 무요타(無嬈他: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바가 없음)와 상응하고, 무에는 불요타(不嬈他: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음)와 상응하며, 무치는 증익(增益)과 상응하니, 이는 3계(戒)와 상응하는 것이다.
030_0494_c_17L是誰非前功德說也是故一切解脫入法是根如相應說當使相應一大相應癡大恚慳入 如無慳施無恚戒無癡分復無慳食施無恚無恐施無癡法復無慳無嬈他無恚不嬈他無癡增益如是三戒
030_0495_a_01L또한 무간은 선근(禪根)과 상응하고, 무에는 무량(無量)과 상응하며, 무치는 무색(無色)과 상응하니, 이는 세 가지 분별과 상응하는 것이다.
또한 무간은 성사(聖事:성스러운 일)와 상응하고, 무에는 인욕과 상응하며, 무치는 다문(多聞)과 상응하니, 이와 같으면 무악(無惡)의 근(根)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일체의 선행근(善行根)이다.
무간(無慳)은 지은바 행에 대해 생각을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작위(作爲)함이 없는 것이다.
무에란 성냄을 없애는 일을 돕는 것을 말한다.
무치(無癡)란 무명(無明)과 무지(無智)가 없어지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근(根)이라고 한다.
030_0494_c_23L復無慳禪根無恚無無癡無色如是三分別復無慳聖無恚忍無癡聞如是無惡根如是一切善行根如是無慳名所作行念不取無所爲無恚名恚滅助無癡名無明無智滅助是故根
【문】 무악(無惡)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무악이란 인욕(忍辱)ㆍ다문(多聞)ㆍ성분(聖分:성스러운 직분)이다수투로. 인욕ㆍ다문ㆍ성분이 세 가지 무악이다.
무악은 속수(俗數:世俗諦)의 뜻이 있으니 생각[想]을 따라 지은 것이다. 혹은 악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다. 세존께서는 이미 무악을 지극히 잘 행한 자에 대해 “인욕이란 고통을 늘리는 힘이나 악한 힘에 대해 스스로 성내지 않고 인내함이다”수투로라고 말씀하셨다.
인욕(忍辱)은 고통을 늘리는 힘이나 악한 힘이 여러 번 가해져도 고통을 늘리는 힘에 대해서는 악한 마음을 내지 않고 악한 힘에 대해서는 스스로 물러서서흔쾌하게 고통을 감내한다. 이것이 인욕의 뜻이다.
030_0495_a_05L是無惡何法說無惡聖分修妒路聖分是三無惡說無惡俗數隨想所作或不恐畏惡世尊已說無惡極行者言是忍苦增惡力自下無恚忍修妒路忍苦增力惡力加數苦力無惡惡力自下下欣也厭苦是忍義
고통을 늘리는 힘을 가해도 악한 마음을 내지 않으니, 고통을 늘리는 힘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마음이 사그라진 재나 쉰 목소리처럼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중생이 악한 마음을 일으킬까 염려하니 고통을 늘리는 힘에 대해 악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인욕이다. 소인이 와서 힘을 가하더라도 보복할 힘이 있어도 보복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며 중생이 행한 허물과 자신이 행한 허물을 감내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설한 것이다.
고통이란 추위ㆍ더위ㆍ배고픔ㆍ목마름ㆍ바람ㆍ뜨거움이 일어나는 것이다수투로. 고통이란 증가하는 일과 같으니 이 두 가지2)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몸에 대해서는 악한 마음을 내지 않지만 무의중생(無意衆生:無情衆生)에게 악한 마음을 내는 것은 중생을 인연하여 악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내외(內外)를 의지함이란 몸을 핍박하는 것을 마땅히 참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인욕이다.
030_0495_a_11L力加無惡不增力能不能爲說心如死灰惡聲不出唯當恐畏衆生惡發謂增無惡是小人來力加自下足能報而不報自下是衆生過行過當忍是義當苦寒暑飢渴風煖起修妒路苦名如增是二事起身惱不無意衆生惡衆生因緣惡說是故二依外內謂逼身當忍是忍
030_0495_b_01L【문】 이미 인욕을 설하셨는데, 문(聞:多聞)이란 무엇입니까?
【답】 문이란 수투로(修妬路:經)예를 들면 사아함에 출현하는 12首ㆍ아비담(阿毘曇:論)ㆍ비나야(鼻奈耶:律)이다수투로. 이 세 가지가 3장(藏)이다. 탐음(貪婬)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가 다 없어져야 문(聞)이지, 이와 다르면 문이 아니다.
3장이란 수투로(修妬路)ㆍ아비담(阿毘曇)ㆍ비나야(鼻奈耶)인데 수투로는 일체지인(一切智人)께서 설하신 것이니, 부처님만이 가능한 것으로서 집착을 끊고 4성제(聖諦)를 나타내시고 안팎이 따로 없는 해탈을 밝혀 드러내셨다.
아비담이란 수투로에 들어 있는 내용을 상응하는 장구로 현시한 것이다.
비나야율(律)이다. 진(秦)나라 말로는 지진(志眞)이다란 무행무명(無行無命)의 청정함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문(聞)을 행(行)함이다.
이 가운데 탐음이 증가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은 비나야이고, 진에를 그치게 하는 것은 아비담이다. 아비담은 행이 지은 모든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을 말함이니, 그에 따라서 진에가 엷어진다. 진에가 일어나면 계의 일부를 범하는 것이니 지옥이 존재하게 된다. 어리석음[癡]을 그치게 하는 것은수투로이니 인연법을 설한다. 이러한 것들이 일체의 문(聞)이다.
030_0495_a_19L已說忍云何聞聞修妒路擧四阿鋡所出十二首也阿毘曇鼻奈耶修妒路三藏也聞名謂婬恚癡盡等有是聞餘者非聞是三藏修妒路阿毘曇鼻奈耶修妒路名謂一切智說佛所可者斷現四聖諦現明無內無外解脫毘曇名謂修妒路所有顯示相應章鼻奈耶律也秦言志眞也名無行無命淸淨是三行聞是增貪婬止鼻奈耶止阿毘曇阿毘曇行所作覺說是故恚薄恚起犯戒枝地獄有癡止修妒路因緣說是一切聞
【문】 성분(聖分)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성분이란 성스러움에 걸맞은 선지식(善知識)ㆍ사유(思惟)ㆍ득(得)이다수투로. 걸맞은 선지식, 걸맞은 사유, 걸맞은 득 이 세 가지가 성분이다. 성분(聖分)은 감히 악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지식이란 선(善)을 돕는 힘[力]이니, 스승이 제자를 동반함이다수투로. 선을 돕고자 하는 힘이 선지식이니, 저 세 가지는 스승이 제자를 동반함이다.
030_0495_b_07L云何聖分聖分等善知識思惟修妒路等善知識等思惟等得是三聖分聖分無敢說惡義是善知識所欲助師弟子伴修妒路謂所欲助力謂彼善知識彼三師弟子伴
【문】 돕는 스승이란 어떤 것이며, 착한 마음의 제자는 어떤 것이며, 힘을 발휘해서 동반함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말씀하신 바를 설명해 주십시오.
【답】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이미 구별하여 말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선을 돕는 힘을 쓰는 것이 선지식이니 스승이 제자를 동반함이다. 착함을 증가시키고 도와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령 저 모습은 돕되 선함을 돕지 않고, 깨달았으되 힘써 주지 않는 것은 마치 연세 드신 부모가 자식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혹은 힘은 있으나 착한 생각이 없고 도와주려 하나 선함을 돕지 못하는 것은 선한 처소가 아니니돕되 돕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이는 마치 말가란(末迦蘭:마칼리 고살라)과 부란(富蘭:부루나 카사파) 둘 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이다의 경우와 같다.
혹은 선함을 도와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음이니, 이는 마치 모든 것을 환하게 잘 아는 의원이, 전에 원한을 산 적이 있다는 구실로 병을 알고도 구해주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이 세 가지 모습(선함을 돕고자 힘쓰는 것)이 있다면 선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030_0495_b_12L云何助師云何善弟子云何力伴數說如是說已知差別力是善知識相彼師弟子伴知說是增助二有是枝彼或相助不善助覺不力說如父無足年高父子或有力不念欲助善不助不善處助不助二也如末迦蘭富蘭六師之二或欲無助善力如一切明知醫前有怨知病不救若是三相等具是善知識或師過或弟子過伴過是故三相相應是善知識
030_0495_c_01L【문】 사유(思惟)란 어떤 법입니까?
【답】 사유란 식상(息想)ㆍ각정진상(覺精進想)ㆍ호상(護想)이 행하는 바이다수투로. 식상ㆍ각정진상ㆍ호상은 경계를 대면하여도 짓는 바가 없다.
저 식상(息想)이란 어지러운 마음이 그쳐 선정에 드는 것이니, 마치 그 모습이 상(像)과 같다.
각정진상은 마음이 해태한 생각을 내는 것을 가르쳐 어지럽지 않게 함이다.
호상(護想)이란 동등하게 얻고 동등하게 상응함이니, 마치 우마차가 지체하면 채찍을 휘두르고 소가 너무 빨리 내달리면 억제함으로써 한결같이 동등하게 가게 하는 것과 같다. 호상은 이와 같이 관(觀)의 뜻이다. 한량없는 것이 안으로 들어와도 하나의 호상으로 한결같으니, 인연이 있는 중생은 모두 다 바로 앞에서 상응한다. 이렇듯 마음이 한결같이 동등하게 증득함이 호상이다.
030_0495_b_22L是何法思惟思惟覺精進想所行修妒路息覺精進護想以爲面是無作彼息名意亂定彼相像覺精意懈怠念教不亂護等得等相應如御車馬遲則策之牛奔則抑之行是護當如是觀意無量內入一護皆有緣衆生前相應是意等得護
【문】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마음이 분주히 내달리면 그것을 억제하고, 마음이 지체하면 그것을 채찍질하여 한결같이 동등한 증득을 하는 것을 호라고 합니까?
【답】 내가 앞에서 이것은 한결같이 동등한 사유(思惟)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동등한 사유와 같으니, 가령 공포를 느낄 때 이와 상응하는 행이 나열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한결같이 동등한 사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호상은 사유에 속한다.
【문】 득(得)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득이란 방편의 과(果)를 평등하게 갖추는 것이다수투로. 방편과(方便果)의 선정에 들어 가없는 공양을 하니, 이것은 방편의 과를 평등하게 갖추는 것과 상응하여 증입한다.
030_0495_c_06L何所說若護之意卽奔則抑之若意遲則策之等得護我前不說是等思惟耶如等思惟如恐怖時相應行若異者無等思惟也是故思惟是得云何得等具方便果修妒路 便定入無外供養是相應入等具方便果
【문】 무엇을 평등하게 갖추는 것입니까?
【답】 말하자면 해탈이다.
【문】 등구(等具:평등하게 갖춤)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등구란 등서(等書)등이란 서문자(書文字)에서는 평등함이라고 한다. 사문(沙門)이 12법을 갖추면 평등하게 갖춘다는 뜻이 된다ㆍ근단(根斷)ㆍ근선(近禪)이다수투로. 등취(等聚)는 선행(善行)이다. 그러므로 등구는 종자가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 경우와 같다. 종자를 평등하게 갖춘다는 것은 가지[枝]의 뜻이 있다. 이 등구에는 세 가지 행이 있으니 등서(等書)ㆍ근단(根斷)ㆍ근선(近禪)이다.
030_0495_c_13L何誰等具如說解脫何等具名等具等書 等者書文字曰等也沙門具十二法爲等具也根斷近禪修妒路 等聚是善行故等具如種等具種等具是枝義等具三行等書根斷近禪
【문】 등서(等書)란 어떤 법입니까?
【답】 등서란 다섯 가지를 받아들인 아련야 비구의 행이다수투로. 등서를 평등하게 갖춘다는 것은 증가함과 감손함이 그 뜻이니, 조각가가 상을 조성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기예가 교묘한 조각가는 돌이나 나무 등을 깎고 다듬어 상(像)을 만든다. 책이나 경전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려 상을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저 상은 두 가지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조각가가 조성한 것은 비바람에 견딜 수 있으나 화가가 그린 것은 비록 훌륭한 모습이라 해도 비바람에 견뎌낼 수 없다.
030_0495_c_17L彼等書名何法等書五納阿練茹比丘行修妒路 具足等書等書等書增是義象作工師能畫彼巧匠作鑿刻石木削治作像書作經作畫作彼像二行巧師所作能耐風雨彼雖好不能
030_0496_a_01L이와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사람인 도인(道人:출가 수행자)과 백의(白衣:재가인) 가운데서 저 도인은 친족과 권속을 버릴 마음을 내니, 버리는 일이 마치 조각가가 깎고 다듬는 일을 행하는 것과 같다. 저 백의는 처자와 노비를 버리지 못하니,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물감을 더하고 칠하는 것과 같다. 백의는 점차적으로 애락에 탐닉해서 갈애ㆍ이별ㆍ근심ㆍ기쁨ㆍ공포ㆍ투쟁을 제일로 삼으니, 이는 법이 아니므로 파괴된다. 경전이나 상을 만들되 견고하지 못하니 도인이라 할 수 없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작과 청항조(靑項鳥)의 색깔은 곱지만 그 나는 속도는 들판의 매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백의도 비구와 같지 못하니 모니(牟尼)역시 비구의 뜻이다는 한가한 들녘에서 좌선하노라”고 하셨다. 이것이 등서(等書)이다.
다섯 가지를 받아들이는 아련야 비구의 행이란 세 가지 두타공덕을 말한다. 열두 가지 근본이 있으니 나머지 아홉 가지 권속은 각기 별도로 설명할 예정이다.
세존께서 산타리소(酸陀梨所)에서 난타(難陀)를 위하여 세 가지 공덕을 설하셨다.
030_0495_c_23L如是二人道人白衣彼道人念棄親屬所作棄如巧師也彼白衣妻子奴婢如畫師所作彼白衣展轉愛樂彼愛別離憂喜恐鬪諍爲首非法而破壞作經像無堅有非道人世尊如孔雀好靑項鳥飛行不如野鴈如是白衣不似比丘牟尼亦比丘也坐空野禪是書也五納阿練若作比丘行是三頭陁功德十二根有是餘九眷各當別說世尊酸陁梨所將難陁爲說三功德

그대 난타여, 어느 때에 너를 볼 수 있는가?여덟 자
일없이 누추한 옷을 입고 다섯 가지를 받아들이니여덟 자
저 믿음 있는 이의 보시에 물들지 말고여덟 자
음욕행을 멀리하면 그 험준함(음욕행의 번뇌)을 떠날 수 있네여덟 자. 수로(首盧)이다.
030_0496_a_10L何時卿難陁得見汝八字無事而麤服衣納五八字=彼信施之而無所染八字=遠婬欲行能離其嶮八字首盧

따라서 근본에는 세 가지 공덕과 네 가지 이로움이 생겨남을 알아야 한다. 의복과 걸식과 자리[牀臥]의 이로움에 대해서 의복의 이로움을 간직할 때 다섯 가지의 받아들임을 말해주고, 걸식의 이로움에 탐착할 때 걸식의 이로움을 가르치며, 자리의 이로움에 안착할 때는 아련야행(阿蘭若行)을 말해준다. 이러한 공덕을 갖추면 이익이 있다는 것을 무너뜨려 준다. 이것이 등서(等書)이다.
가령 두 가지 공고행(貢高行)과 자탄행(自歎行)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의복과 걸식과 자리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공고함에 들어가면 세 가지 공덕이 그쳐 쉬게 된다. 공고함을 그치도록 한 번 도와주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두타공덕(頭陀功德)을 설하는 것이다.
030_0496_a_13L是故知根有是三功德及餘四利起衣乞食牀臥有利彼衣利持五納爲說乞食利乞利牀臥利爲說阿練行是功德具壞有利等書或二行入貢高入自歎彼衣乞食牀臥利也入貢高是三功德息一助止去貢高是得樂爲說頭陁功德
030_0496_b_01L【문】 5납(納)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5납이란 3의(衣)를 취득함이다수투로. 좋고 나쁨을 간택하지 않아야 한다. 5납은 상주(常住)하므로 5납이며, 5납분(納分)이기 때문에 5납이다. 저 5납은 세 가지를 구족하여 만족한다. 3의(衣)가 머리와 얼굴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수투로의 뜻이다.
【문】 만약에 5납이 세 가지 일이라면 아홉 가지 공덕에도 이와 같은 것 등이 있는데, 이는(수투로와는) 어긋나지 않습니까?
【답】 저 무덤가에서나 길가에서 해지고 떨어진 옷을 얻어 입은 것이 3의(衣)이다. 그것은 승가리(僧伽梨)와 울달라승(鬱怛羅僧)과 안타라바채(安陁羅婆口蔡)이다.
가령 자기가 지닌 3의가 가장 좋은 이양(利養)이 있다고 하면, 이는 그 이익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만약에 많음과 가장 좋은 것이라는 두 가지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이익과 많음의 이익이 있게 된다.
030_0496_a_20L云何五納五納三衣不擇好惡也妒路五納彼常住是故五納五納分是五納彼五納三枝具足滿有三衣爲面首是修妒路義若五納三事頭陁功德有如是等修妒路相違彼丘塚道路弊壞衣被得著被三衣僧伽鬱怛羅僧安陁羅婆▼(口*(葵-天+示))彼或有我持三衣最好利壞卽由利便亂若不多最好求二利最利多利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미인과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정도 아름다운 천 명의 여인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많은 이익을 구하려고 3의를 지닌다면, 최고 좋은 이익은 생기지 않게 된다. 세존께서는 “내가 지니고 있는 3의는 일일이 자르고 재단한 여섯 가지 옷감 종류로 되어 있으니, 겁패(劫貝)ㆍ사주(四▼(鳥*奏))갈포(葛布)이다. 청(青)과 구(搆)의 반절이다. 계포(系布)ㆍ방거(傍渠)마포(麻布)이다ㆍ아비거(阿鞞駏)벽에 붙이는 방(榜)ㆍ진마(蒖麻)경포(藀布)이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섯 종류를 우연히 얻어 입으니 찢어지고 닳아진 것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아주 좋은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므로 허물을 얻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무호(無好)라 한다. 이와 같이 3의를 지녀 좋은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대중이나 백의(白衣)가 자리에 앉았다가 다른 좋은 자리를 보고 가서 앉는다면두 가지는 다 자리를 얻음이다, 본인은 우연히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좋은 자리에 앉을 인연을 얻으면 마땅히 앉아도 되며, 만일 상좌의 명이라면 그 경우에 따른다. 이와 같이 5납(納)을 원만하게 구족한다.
030_0496_b_06L如或有人求最好女人二不求好千如是多利持三衣止最好利生是世尊我持三一一割截持六衣劫貝四𪃆葛也靑搆反系布傍渠麻布阿鞞駏榜也蒖麻藀布庫打反輩六遇得便著割碎持是故義不最作不得惡是名無好彼如是三衣名不求好若衆許若白衣許牀臥見餘好而坐二皆得坐也如遇得作說如坐好因緣得是當坐若上座命隨遇如是具足滿五納
030_0496_c_01L【문】 아련여(阿練茹)는 어떤 법입니까?
【답】 아련야란 나무 아래에 앉음이고, 이슬 내리는 한데[露]에 앉음이고, 항상 앉아 머무름이다수투로.
나는 항상 나무 아래에 앉고, 나는 항상 이슬 내리는 한데에 앉으며, 나는 항상 앉으리라 하는 것세 가지 앉음이다이 아련야이다.
아련야행을 원만하게 구족하므로 아련야이며, 이것들이 아련야행의 몫이므로 아련야이다. 이 네 가지가 자리의 이익 되고 돕는 행이다.
신도가 지은 강당을 좋아하거나, 부드러운 방석을 깔아 놓은 것에 즐거운 생각을 내면 세존께서 그것을 아시고 분별하여 설하시기를 “나는 모양이나 모습에 끄달리지 않으니, 자신의 집과 다른 사람의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강당을 버림으로써 아련야행을 취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것이 아련야행이다.
030_0496_b_16L是阿練茹何法阿練者坐樹下露坐常坐常住修妒路我常當坐樹下我常當露坐我常當坐三坐也是阿練茹具足滿阿練茹行是故阿練茹練茹分是故阿練茹是四牀臥利彼喜信作講堂柔軟褥作樂想知分別說世尊我是不相像棄家他舍棄講堂上取阿練若行如是阿練若行
토굴지금의 화려한 것과는 반하는 의미. 겨우 몸만 들어갈 정도의 작은 집이다을 짓는데, 평범한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경우 세존께서는 “이 사람은 아련야행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하셨다. 평범한 집은 비유하자면 말을 버리는 대신 나귀를 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무 아래에 앉아야 한다.
그러나 볼품없는 나무를 버리고 좋은 나무를 좋아하며 이로움을 주는 과일이나 꽃이 아름다운 나무를 좋아한다면, 세존께서는 이슬 내리는 한데에 앉을 것을 가르치시어 이를 남녀가 바라도록 하고 바라문이 즐기도록 하셨다. 이슬 내리는 한데에 앉는 것을 행하고 나면 그에게는 어떤 이익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030_0496_c_02L作屈坻今鬱反容身禪小屋作平屋意欲作是二是世尊我是非阿練茹行平屋如捨馬如乘驢是故當坐樹下惡樹而樂好樹樂利果好花樹樂世尊教露坐用是爲男女所欲婆羅門所樂爲露坐已利不生彼
그런데 이와 같이 이슬 내리는 한데에서 고행한답시고 큰 자리를 마련한 다음, 해가 떠오를 때까지 사유와 생각[念]을 잊어버리고 잠들어 있다면, 우리의 세존께서는 “이 사람은 청정하지 못하니 마치 귀를 자르고 귀고리를 매달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히 풀로 깔아 만든 자리에 앉아 결가부좌하여 세간의 모든 것에 대해 두루 사유하여 스스로 행한다.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아련야행을 원만하게 구족하는 것이다.
030_0496_c_07L如是露坐苦行作大牀臥至日出棄思惟念是故我世尊我是非淸淨如截耳欲著交露璫是故當坐彼坐草蓐跏趺坐世閒所有遍思惟自行行如爲具足滿阿練茹行
【문】 걸식(乞食)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답】 걸식이란 한 자리에 앉아 한 끼를 먹은 후에는 더 이상 먹지 않고비축하지 않는다 무덤가에서 지내는 것이다수투로.
이에는 두 가지 행이 있으니 학도승(學道僧)이 머무는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걸식하는 것이 있다.
주처(住處)에서 음식을 얻는다는 것은 신도들이 날마다 와서 음식을 구족하게 보시하거나, 혹은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수고스러움을 염려하여 승원당(僧園堂)을 세워 정확하게 잘 판단하여 음식을 갖추어 제공하는 것이다.
걸식하는 것은 신도의 집에서 집으로 다니면서 적게나 많게 얻는 것을 말한다. 이 걸식에서 만약 두 가지를 어기면 법행(法行)이 아니니, 한 곳에서 얻어먹은 후에 다시 얻어먹고자 하거나, 단월(檀越)이 나에게 마땅히 음식을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을 내면서 음식을 즐기려는 탐착을 내는 것이다.
030_0496_c_12L何法乞食名乞食一坐後無食無貯在丘塚閒修妒路二行學道僧住處得及乞食彼住處得食名謂信家日日來具足食施或恐來爲勞外爲立僧園堂作已卽中辦具與食乞食謂家家少多得乞食是乞食若違二法行彼一處食欲得食檀越施我當作如是意於食樂著
세존께서는 걸식을 행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걸식하러 자주자주 식사 때를 찾는 사람은 사유를 얻을 수 없기에, 세존께서는 한 끼만을 제정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네 자
항상 헤아림이 있고두 자
사유와 생각으로 그리는 마음이 있어네 자
물과 음식을 얻었으면네 자
절제할 줄 알아두 자
스스로 자나 깨나 억제해야 한다네 자.
030_0496_c_20L世尊示行乞彼乞食來數數食至于時如是不得思惟彼世尊制一食若如有人四字計常二字思念有慕四字得漿飯食四字知節二字能自抑寤四字"
030_0497_a_01L
한 끼니의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좋은 음식을 탐색하니,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음식을 많이 얻거나 여러 가지를 얻으면 바른 사유를 할 수 없다. 다 이용했으면 남은 음식과 물을 버려야 하며, 또한 얻는 것을 그만두고 이후에 먹는 일도 그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한 자리에 앉아 식사하고 그 다음 먹을 것을 포기하고 난 후에 다시 목욕을 하고 몸에 향유를 바르고 그 몸을 장엄하게 장식하니, 세존께서는 “이 사람 역시 먹을 생각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니 몸을 잘 가꾸는 것은 지극한 공양을 받으려는 의도이다. 마땅히 이를 무너뜨리고 소진하고 덜어서 무덤가에서 지내야 하리니, 이 때문에 무덤가에서 지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덤가에서 먹은 것이 변하는 것을 잘 관찰하라. 또한 무덤가 시체를 벌레가 절반은 뜯어먹어 팽팽하게 부르트고 무너져 흐물흐물해지면서 지방과 피가 흐르고 골수가 흘러나오며 온갖 몸뚱이와 뼈가 뒤섞여 어지러우니, 그것을 본다면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그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으면 비구의 행은 갖추어진다. 이러한 것이 있으면 등서(等書)이다.
030_0497_a_01L是得彼一坐食復索好飮佛聽飮得種種飮不能思惟是世尊我用是棄斯飮水亦得止是後食止如是一坐食棄後澡浴塗身嚴飾其彼世尊我亦是食想貢高食長身極供養之要當壞盡捐丘塚閒是故教丘塚閒見丘塚閒食所化復彼丘塚閒虫半消胮脹欲壞爛脂血流漫骨髓千身骨交亂見已貢高止是比丘行具足滿有是爲等書
【문】 근단(根斷)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근단이란 불가강지(不可强止)ㆍ자제(自制)ㆍ불염유(不染有)이다수투로. 근단에는 불가강지ㆍ자제ㆍ불염유가 있다.
030_0497_a_11L法是根斷根斷不可强止自制染有修妒路根斷是根斷不可强止不染有
【문】 불가강지(不可强止)란 무엇입니까?
【답】 근(根)이 일어남은 억지로 그치게 할 수 없으니, 근을 억지로 그치게 할 수 없음은 마치 말에게 물과 곡식을 억지로 끊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근을 보호하지 않으면 끊을 수 없으니, 물과 풀을 너무 배불리 먹이면 말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수순하지 않을 때에는 근은 억지로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마치 눈 먼 사람이 음(婬)을 떠났다고 하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억지로 그치게 할 수 없다[不可强止].
행(行)의 영역에서는 불수(不受) 등으로 사유(思惟)를 보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혹은 선사(先師)께서 근의 경계에 대해 “상(想)과 수(受)를 버리면 경계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수를 스스로 버리면 불염(不染)에 가까운 것이니, 비유하면 아주 미인인 여인상을 보되 어머니처럼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이 세 가지 근단이다.
030_0497_a_14L是誰不可强止根起不可止根不可止如斷馬水穀若不護根不可斷多與水草腹滿馬不能若不隨時根不可强止如瞎者亦當離婬是故不可强止知行界所不等思惟可護或先師說根界去想受棄不能至界謂受自棄不染近相似女人像最好如見母見根是三根斷
030_0497_b_01L【문】 근선(近禪)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근선은 무상(無想)을 감내하는 것이다수투로. 평등한 근사유(近思惟)이니 근선에 대해서는 앞에서 해탈에 관해 설할 때 이미 말했다.
【문】 앞에서 네 가지 선(禪)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는데, 무슨 까닭에 다시 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저 세간ㆍ출세간의 해탈을 얻는 것은 반드시 정(定)의 해탈이니 이것들 중에서 성스러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빈 들판을 건너가다가 정원이 있는 집에 과일나무와 꽃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다시는 배가 고프지 않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성읍에 가까이 하려는 생각의 인연을 짓는 것처럼, 광야의 탐음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는 선지식으로 하여금 사유를 이끌어 빨리 음(婬)ㆍ계(界)ㆍ처(處)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며 고(苦)라고 관찰하게 한다.
030_0497_a_22L是近禪何法近禪忍無想修妒路等近思惟是故近禪前說解脫前說四禪何故說是彼世閒出世閒解脫得是行必定解脫是輩中閒聖諦可得如人度空野地見園宅菓樹花實彼意必定爲不復飢餓爲近城郭如思因緣爲曠野地婬怒癡爲善知識將導思惟疾行陰界處常無我苦所有觀
만약에 하고자 함이 있어도 참으면세 가지 인(忍) 사유가 늘어나도 흔들림이 없으니, 마치 꿈속에서 즐거움을 보는 것과 같다. 그 형상을 고(苦)라고 볼 때는 모습을 보면 생각[想:사유]이 늘어나니 세간에서 가장 훌륭한 법이다. 세존의 생각[想]도 이와 같다.
선(禪)을 행하는 그 중간에서 깨달아 기쁨을 보니, 이것이 성스러운 진리에 계합된 때이다.
바소발타(婆素跋陀)진(秦)나라 말로는 요즘의 의미로 볼 때 현인(賢人)의 이름이다. 집착이 없는 도를 얻은 사람이다의 3법(法)의 해탈도(解脫度)의 처음을 다 설해 마친다다하였다. 인도에서는 품의 제목이 모두 품의 맨 뒤에 나온다.

2. 사아함모초해 [공덕의 아홉 번째는 득득(得得) 가운데 둘째임]
030_0497_b_08L若欲是有忍三忍思惟不動如夢中見樂見其形像時相見是想增世閒最好法世尊想如是是禪行其中閒覺見喜見聖諦時婆素跋陁秦言今賢人名也得無著道三法解脫度初說%口*(葵-天+示)未都盡也天竺品題皆在品後也四阿鋡暮抄解第二功德之第九名得得之第二也

【문】 방편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답】 방편이란 계(戒)ㆍ우파태(憂簸笞)식(息)의 뜻ㆍ지(智)이다수투로. 방편이란 도(道:방법ㆍ길)의 뜻이니 해탈하는 것을 으뜸으로 한다머리를 앞세워 나아가다. 앞이다. 이 방편에는 건도(揵度)인 계(戒)와 식(息)과 지(智)가 있다.
【문】 무슨 까닭에 거듭 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내가 전에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계이다. 저것은 세간의 설이고 이것은 출세간의 설이니, 그것이 계행의 뜻이다.
030_0497_b_14L何法是方便名方便憂簸笞息也修妒路方便是道義謂是解脫爲首向也前也是方便三揵度何故重說戒我不前說戒有二世閒出世閒彼世閒說是出世閒說彼戒行爲義
030_0497_c_01L【문】 그것은 어떤 법입니까?
【답】 계는 등구(等口)ㆍ등행(等行)ㆍ등명(等命)이다수투로. 등구ㆍ등행ㆍ등명 이 세 가지가 건도계(揵度戒)이다.
저 등구(等口)란 거짓말ㆍ이간질하는 말ㆍ거친 말ㆍ경우에 닿지 않는 말을 하는 행을 떠나고 그 밖의 다른 말을 하는 것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등구이다.
등행(等行)이란 살생ㆍ도둑질ㆍ사음(邪婬)의 행을 떠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행하는 것도 떠나는 것이다.
등명(等命)이란 비구의 걸식, 일정한 처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먹는 음식[住食]ㆍ옷ㆍ자리ㆍ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나머지는 삿된 명(命:생활)이다. 우바새는 다섯 가지 일을 떠나야 하느니 칼ㆍ독ㆍ술ㆍ고기ㆍ중생을 떠나는 것팔지 않는 것이 등명이다.
030_0497_b_19L彼何法戒等口修妒路等口等命是三揵度戒彼等口妄言麤言不要言行離及餘言是等口等行名殺婬行離及餘事等行命名比丘乞食住食乞食衣牀臥病醫藥自受是餘邪命優婆塞離五事彼刀衆生不賣是等命
【문】 식(息)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식이란 정진(精進)ㆍ염(念)ㆍ정(定)이다수투로. 멸하여 쉼을 구족하는 것이다. 탐음(貪婬)ㆍ분노ㆍ어리석음을 그쳐 쉬는 것을 으뜸으로 하여 머무는 것과 같다.
이 식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정진ㆍ염ㆍ정이다. 정진이란 근력(勤力)이라는 뜻이니, 이와 같이 정진을 말하면 근력을 말하는 것이 된다. 만약에 주체적으로 이를 행하면 해탈하므로 정진(精進)이라 한다.
030_0497_c_03L是息何法精進修妒路具足滅息若婬怒癡止息彼爲首面也向也是息是三精進彼精進名勤力是義精進如是說勤力說有若能行去解脫是故精進
【문】 이것은 어떤 법입니까?
【답】 정진(精進)이란 신(信)ㆍ행(行)ㆍ불사(不捨)이다수투로. 신ㆍ행ㆍ불사 이 세 가지가 정진이다. 일체의 선행(善行)을 베풀므로 신(信)이라 한다. 일체의 선행이란 어떤 법인가? 일체의 선법을 가장 최초로 행하는 것이며 가장 최고로 믿는 것이다. 신(信)에는 두 가지 인간의 행이 있다신(信)은 인간에게 이 스물네 가지를 제공하고 3보를 믿게 한다. 이 본게(本偈)에는 신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
030_0497_c_08L是何法精進不捨 修妒路不捨是三精進說彼施一切善行是故信何義一切善法最始行一切善法最信信二人信與人此二四信三寶是偈彼亦三
【문】 어떤 법입니까?
【답】 신(信)이란 경(敬)ㆍ희행(憙行)ㆍ득해(得解)이다수투로. 이 신에는 경ㆍ희행ㆍ득해가 있다.
경(敬)이란 혼탁한 일과 혼탁한 사람을 버리고 진에ㆍ질투ㆍ수치심 없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가령 흐린 물이나 소나 돼지가 왔다 갔다 하여 어지럽힌 샘물 등은 혼탁하지만, 오물을 제거하면 청정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악한 마음을 어지러운 흐린 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경이다.
희행(喜行)이란 해탈을 즐겨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병든 사람이 좋은 음식을 보고도 먹을 생각이 없다가 병의 차도가 있으면 반드시 먹을 생각을 내는 것과 같다. 진에에 속박된 사람은 법문 듣기를 즐겨하지 않다가진에는 삼독심(三毒心)을 거론할 때 등장한다 선지식을 만나 법을 즐겨하는 행을 한 후에 가장 훌륭한 법을 생각[念]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니 이것이 희행이다.
030_0497_c_12L何法憙行得解修妒路是信憙行彼敬名棄濁人過恚嫉無羞恥如鳥水牛豬交亂泉水是濁說惡去得淸是惡意亂濁說彼惡棄淸是敬憙行樂解脫如病病身好食不病差必欲得食是恚依不樂聞法恚三毒侯擧得善知識便樂行然後彼如是念最好法復爲說是喜行也
030_0498_a_01L득해(得解)란 능지(能持:능히 간직함)를 말한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뱀에 물렸을 경우 다른 사람의 분별공덕공덕이란 의사에게 덕이 있음을 뜻한다으로 의사가 주문을 외울 때, 마음이 이러한 내용을 듣고서는 이 같은 주문의 덕택으로 차도가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원만하고 평등한 즐거움과 길상함과 이로움을 득해함도 이와 같다. 탐음(貪婬)을 으뜸으로 삼는 것을 비유하여 뱀이 인간을 물었다고 표현하였나니, 세존께서는 대중이 선법(善法)을 행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혹은 제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법을 설하셨다. 법에 대해 다르지 않게 득해하면, 능히 탐음이 쉬어 다른 것을 짓지 않는다. 이것이 득해(得解)이다.
이상 신(信)에 관하여 말하였다.
030_0497_c_20L得解名能持如人蛇所齧他功德分別醫呪至意聽如是如是呪語彼能得差功德是醫有德得解等樂吉利如是貪婬爲蛇齧人佛世尊愍彼無行或彼弟子愍爲說法彼謂法得解不異彼能婬可息作不他是得解是信
【문】 행(行)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행이란 근(勤)ㆍ기(起)ㆍ상념(常念)이다수투로. 근ㆍ기ㆍ상념 이 세 가지를 행이라 한다.
기라는 것은 선(善)을 짓는 것을 말하니, 마치 불 아래에 마른 나무를 놓고 소의 마른 똥을 놓아두되 아직은 불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근이란 자주자주 구하고 탐색하며 또다시 구하고 탐색하는 것이다.
상념이란 어지러움이 없는 생각이다. 하나로부터 인연하여 상응함이 마치 불이 머리털과 관(冠)을 태울 때 손만이 그것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가 행(行)이다.
030_0498_a_03L行名何等勤起修妒路勤起是三行彼起謂作善如鑽下木燥末牛糞而起火勤數數作求索復求索是常無亂念一因緣相應如火然髮及冠手但欲救之是三勤行
【문】 이미 행을 말씀하셨으니, 불사(不捨)란 어떤 법입니까?
【답】 불사란 불리(不離)ㆍ불염(不厭)ㆍ부전(不轉)이다수투로. 불리ㆍ불염ㆍ부전 이 세 가지가 불사이다.
저 불리란 피로하다는 마음을 자주 내거나 정진을 늘어지게 하는피로해하거나 권태로워하는 것이다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불염이란 오랜 동안 수행하는 가운데 그에 따른 과보가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부전(不轉)이란 이 가운데 그에 따른 과보가 없더라도 반드시 있게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진을 강행하여도 이와 같이 버린다. 이 세 가지는 능히 과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마치 길가는 사람이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는 것과 같다.
030_0498_a_08L是不捨何法不捨不離不厭不轉修妒路不離不厭不轉是三不捨彼不離名不數數勞緩精進作惓也不厭名久行中無有果意不厭不轉名中無有果有必當使有不欲彼謂强行精進如是棄如是三能得果如道所趣處
【문】 이미 정진의 행에 대해서 설하셨으니, 염(念)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염이란 신(身)ㆍ통(通)ㆍ의(意)ㆍ법(法)의 내외(內外) 두 법을 잊지 않는 것이다수투로. 내외 두 법의 내외는 이 세 가지 생각[念]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저 내념(內念)이란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내념과 그 밖의 외념(外念) 두 가지가 내외이다. 내념은 음(婬)ㆍ계(界)ㆍ처(處)를 받아들이고[受], 외념은 타수(他受)의 수(受)와 불수(不受) 두 가지이다. 혹은 세 가지 번뇌의 내주(內主)와 외주(外主) 두 가지가 있는데, 저 내주는 음(婬)이고 외주는 에(恚)이다.
030_0498_a_15L已說精進行是念何法念身二不忘修妒路內外二內外謂不忘是三念彼內念己身依內及餘二內外或內受陰外他受不受二或三結內主外主二主彼內主婬外主恚
030_0498_b_01L다른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성내는 것은 아니며, 이를 알았다고 해서 음도 또한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자신의 안[內]으로는 물드는 것이고, 다른 사람[外]을 향해서는 발현하는 것이다. 탐음은 안으로 집착하는 것이니, 이는 세존께서 “여자가 자신의 안에 있는 여근(女根) 등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수투로에서는 어리석음[癡]이 두 가지(탐음과 진에)와 상응한다고 하였다.
저 세 가지 번뇌는 이 세 가지 염(念)을 돕는다. 저 신(身)에 세 가지가 있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通)ㆍ의(意)ㆍ법(法)도 그러하니 합하면 12념(念)을 행하게 된다.
030_0498_a_21L恚他不自恚彼有是覺亦他作是不何義內染發他婬內著如世尊說女內女根等見是修妒路癡二相應彼三結助三是念彼身三如上說如是痛如是十二行念
【문】 삼매(三昧)란 어떤 법입니까?
【답】 정(定:삼매)이란 공(空)ㆍ무상(無想)ㆍ무원(無願)이다수투로. 공ㆍ무상ㆍ무원 이 세 가지가 삼매이다. 저 공이란 일체의 공을 말한다.
【문】 공(空)이란 여러 가지여서 읍공(邑空:읍이 비어 있음)이니 사공(舍空:집이 비어 있음)이니 하는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 어떤 공을 말합니까?
【답】 공이란 아작(我作:내가 짓는 것)ㆍ소유작(所有作:모든 지어진 것) 이 두 가지를 볼 수 없음이다수투로. 아작과 소유작 이 두 가지를 볼 수 없음이 공이다.
030_0498_b_02L是三昧何法無想無願修妒路無想無願是三三昧彼空所有空多有空色空舍空是如是何空說我作所有作二不可見修妒路我作所有作二不可見是空
【문】 아작과 소유작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법입니까? 이른바 세존께서 “나는 본시 저라미(坻羅未) 바라문이었다”아작(我作)이다고 말씀하시거나, “비구여, 내 손이 허공에 있음을 보아라”소유작(所有作)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법입니까?
【답】 이는 아작이 아니고 소유작도 아닌 속수법(俗數法:세속제)이다. 내가 5음(陰)을 인식하는 것이 아작이니, 세존께서는 5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
경계에 잘 계착해 들어가면 이것이 소유작이다. 그것을 세존께서는 법이라 하지 않으셨으니, 공(空)임을 인증(印證)하신 것이다.
세간의 관행이 항상하여 저것과 이것에 대해 내가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하는 것이 공하므로 이 두 가지를 볼 수 없음이 공이다.
030_0498_b_07L何法我作所有作不可見謂世尊說我本時名坻羅末婆羅門我作見比丘我手是虛空所有作也是何法是非我作有作是俗數謂我陰覺是我作不是世尊所入謂界善是所有作彼世尊謂法印空空世閒觀行常彼及是吾我二知得是故無見是空
【문】 무원(無願)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무원이란 상응(相應:현재) 과거ㆍ당래(當來:미래)에 짓지 않음[無作]이다수투로. 무원이란 세우지 않는다[無立]는 뜻이니입(立)이란 주(住)의 뜻이다, 이는 마음이 상응ㆍ과거ㆍ당래 세 가지에 머물지 않는다[無住]는 것이다상응이란 현재라는 의미이다. 주(性)는 지(止)의 뜻이다.
일체의 유위는 처(處)를 설하는 수투로와 과거를 설하는 수투로에서와 같다.
자신의 몸이 열반에 이르면 이 세 가지(현재ㆍ과거ㆍ미래)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세 가지이다. 어떤 뜻이 있는가?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열반에 이르러 몸을 버리면 어떤 인연도 없다 하여 현재의 일체 사유가 멸한다고 생각하지만, 열반은 다함이 없어 현재의 자기 몸이 남아 있다거나 남아 있지 않다거나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할 수 없음이 무원(無願)이다.
030_0498_b_14L是無願何法無願相應過去當來無修妒路無願無立是義立住是意三無相應過去當來相應現在也住止也是一切有如說處修妒路說過去修妒路有是覺己身泥洹不是三受是不三也何義一耶餘耶涅槃棄身無有因緣彼覺相應一切思惟滅是涅槃無盡覺相應己身餘不餘不說是故是彼不說是無願
030_0498_c_01L【문】 무상(無想)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무상이란 행(行)과 작(作) 둘 다 무상인 것이다수투로. 행과 작, 둘 다 버리는 것을 말한다.
무상에 관해 간략하게 말하면 일체의 유위에 대해 일체를 버리는 행과 작이다. 작은 행이며 행은 작이다. 가령 무명(無明)의 복(福)에 들어가 무명의 복이 다하지 않으면[未盡)] 행(行)과 작(作)의 바탕이 된다. 그것은 가까이에 있는 식(識)을 지녀 나오게 한다. 이 행이란 무명의 행이다. 일체의 유위를 짓는 것을 버리면 무상(無想)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법인경(法印經)』에서 “색(色)에 대한 상(想)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으니, 이는 일체의 행하고 짓고 함께 구비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일체는 이러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상(想)이 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定)이다.
030_0498_b_23L是無想何法無想俱無想修妒路謂棄是無略說一切有爲棄一切行作謂作是行謂行是作如入無明福無福阿尼署末盡行作因彼有近識持來是行無明行作一切有爲是棄無想說法印色想不可得是說一切彼行作俱想去引法經證一切是三義說想知是定
【문】 지(智)는 어떤 법입니까?
【답】 지는 견지(見地)ㆍ분별지(分別地)ㆍ무학지(無學地)와 상응하는 것이다수투로. 이 지(智)는 각(覺)이 그 뜻이니, 저 세 가지 지(地)는 견지ㆍ분별지ㆍ무학지에 머문다. 저 현(現:드러내 보임)이 견(見)이다.
【문】 현(現)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전에 아직 보지 못한 성지(聖地)ㆍ근(根)ㆍ역(力)ㆍ각(覺)ㆍ보(寶)가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분별행(分別行)은 가령 빨래를 해서 지극히 깨끗해진 본래의 향이 남아 있게 되는데, 이 향에 꽃의 향을 배게 하면 지극히 좋은 향기가 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견지(見地)이다.
깨끗한 마음으로 선(禪)이 한량없이 늘어나는 인연을 바로 받아들인 후, 그것들을 버리고 마치 가장 좋은 향을 짓는 것과 같으면, 이는 분별지(分別地)이다.
탐음ㆍ분노ㆍ어리석음이 그쳐 그 인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학지(無學地)이다.
030_0498_c_07L是智何法分別無學地相修妒路知是智覺是義彼三地住分別地無學地彼現是見何現前未見聖地根力覺寶分別說如浣濯極淨衣本香猶故香香是後香花香極香如是見地淨意禪量正受增因緣棄最好香作是分別無學謂婬怒癡止不有因緣是無學
【문】 견지(見地)의 지(智)[見地智]는 어떤 것입니까?
【답】 견지의 지는 법지(法智)ㆍ관지(觀智)ㆍ미지지(未知智)이다수투로. 법지ㆍ관지ㆍ미지지 이 세 가지가 견지의 지이다.
법지(法智)와 관지(觀智)의 뜻은, 비유하자면 의사가 어떤 사람이 종기가 생겨나서 곪은 것을 알고는 칼로써 째고 손가락으로 맥을 짚어 문질러서 잘 치료하여 혈맥이 상하지 않게 한 다음 넓게 종기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사람도 탐음이 고(苦)이며 무상(無常)이라는 등을 알고서는 무상을 행하여 들어가 욕계가 고임을 관찰하고 번뇌를 그치게 하고 버리니, 그것이 두 가지 지(智)로 끊음[斷]이다.
아직 끊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와 같이 사유지(思惟智)즉, 미지지(未知智)를 말한다를 발기하여 행한다. 욕계가 무상하듯이 색계ㆍ무색계도 사유지를 통하여 색계 무색계의 번뇌를 버린다.
030_0498_c_16L何見地智見地未知智修妒路法智觀智未知智如是三見地彼法智觀智是義如醫知癰生熟以刀破是後以指撩摩脈所趣向令不傷脈然後割廣如是行者婬行爲苦無常等無常行入見苦止結棄彼二智斷耶未斷乎如是行發思惟未知智亦名耳如欲界無常如是色界無色界彼已思惟智無色行結棄
030_0499_a_01L음행(婬行)이 고(苦)이고, 그것이 고통의 욕계에 이로움을 준다는 것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법지(法智)이고 관지(觀智)이다. 색계나 무색계에 대해서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미지지(未知智)이다.
이렇게 세 가지를 닦아 음행의 이로움을 멸하여 그치게 하는 것이 법지이며 관지이다번뇌를 바로 보는 것이 법지이고, 분별하여 해탈하는 것이 관지이다. 이와 같이 색계ㆍ무색계에 대해서 행하는 것이 미지지이다.
이 세 가지를 멸하는 것이 도(道)이니, 음행의 고(苦)가 그치면 이는 법지이고 또한 관지이며, 마찬가지로 색계ㆍ무색계에 대해서 행하면 미지지이다.
이 도(道)는 12지(智)이니 견지(見地)가 넓음을 알 수 있다4제(諦)는 각기 32가지이다.
030_0499_a_01L如是見苦婬利苦界法智如是觀智如是色無色行未知智如是習三婬行利滅是法智息是觀智結正是法智也分別解脫是觀智如是色無色行未知智如是滅三是道行苦息法智是亦觀智如是色無色行未知智是道是道是十二智見地廣知四諦各三十二
【문】 분별지(分別地)의 지(智)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분별지의 지는 상지(相智)ㆍ행지(行智)ㆍ종지(種智) 등이다수투로. 상지ㆍ행지ㆍ종지 이 세 가지의 지가 분별지이니,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상(相)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상이란 생(生)ㆍ주(住)ㆍ괴(壞)이다수투로.
상(相)이란 생하고, 머무르고 무너짐이니, 저 생(生)이란 상응함(인연이 화합하여 짓는다는 뜻)이며, 주(住)라는 것은 순서에 따라 응함이며 괴는 파괴됨이다.
030_0499_a_08L是分別地幾智分別種等知修妒路相智行智種智是三智分別地如上說何法相修妒路相名生彼生謂相應住次第應壞謂破
【문】 중생과 열반에 대해 증익된 상(相)을 짓는다고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 상(相)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만약에 상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허물이 되니 무상(無常)한데 그 상을 헤아리기 때문이요,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수투로에 허물이 있게 됩니다. 유위의 상인 생ㆍ주ㆍ괴의 공덕이 증익된다고 말씀하시니, 상의 공덕은 어떤 것입니까?
【답】 당연히 아상(我相)을 설하되 아상의 이(異)와 불이(不異)는 설하지 않는다. 만약에 다르다면 유상(有常)이고 다르지 않다면 무상(無常)이니, 함께 갖추어도 허물이 있다.
열반은 무상(無相)이다. 따라서 증익되고 즐기고 인식하는 것 등은 유위상(有爲相)이다. 이는 설한 상의 공덕이 증익되는 것을 말한다.
상(相)의 공덕이 어떤 것인가 하면 당연히 지(智)가 증행(增行)한 것이니, 이 세 가지의 지[三智]가 이러한 공덕을 갖추면 이것이 상(相)이다. 따라서 상이라고 말한다.
030_0499_a_12L無說益衆生涅槃數爲是相衆生涅槃若彼爲大無常數若不是彼是修妒路過如是說有爲相生壞功德增是何相功德當爲說我相我相異不異不說若異有常若不異無常俱過說涅槃無相是故說益樂知有爲相如是謂所說功德增何相功德當爲說智是增行謂是三智已功德是相是說相
030_0499_b_01L【문】 행(行)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행이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의 견해이다수투로. 행이란 변지(遍知)가 그 뜻이다. 상(相)은 곧 행지(行知)로 말미암는 셈이니 이것이 행의 뜻이다.
5음(陰)이 무상(無常)하니 무상하기 때문에 고(苦)이며, 고이기 때문에 모여 상응하는 것이 무아(無我)이니, 이것이 행(行)이다. 저 무상한 것은 오래 머물지 못하니 마치 물거품 같고, 고(苦)는 핍박하기가 마치 가시가 몸에 박히는 것과 같으며, 무아는 스스로 말미암는 바가 없으므로 마치 몸을 장엄하는 것을 빌린 것과 같다. 이것이 행(行)이다.
030_0499_a_21L是行無常無我見修妒路遍知是義是相是行知是義無常陰謂無常是故苦謂苦是故會當相應無我是行彼無常不久住水泡苦逼如刺在體無我不自由假借嚴身是行
【문】 종(種)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종이란 기미(氣味)ㆍ재(災)ㆍ득리(得離)이다수투로. 종은 기미ㆍ재ㆍ득리이다.
【문】 이것은 무엇입니까?
【답】 이것은 유위(有爲)이다. 저 기미(氣味)란 물들어 집착함[染着]을 말하며, 재(災)는 악(惡)을 이름하며, 득리(得離)는 구식(俱息:모두 다 그쳐 쉼)을 말한다. 이를테면 천상과 인간의 즐거움은 기미이고,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취(趣)는 고통스런 재앙이며, 복과 악을 넘어서는 것이 득리이다. 공덕과 악에 대해 평등하게 잘 관찰하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 종(種)은 분별지(分別地)의 지(智)이다.
030_0499_b_03L是何種氣味得離修妒 路種名是氣味是得離是誰是有爲彼氣味名染著名惡得離名俱息若天人樂氣味畜生餓鬼趣苦災福惡等過是得如是見彼等功德惡見得解是種是分別地智
【문】 무학지(無學地)의 지(智)란 어떤 것입니까?
【답】 무학지란 비서(毘署)ㆍ신통(神通)ㆍ변(辯)이다수투로. 명달(明達) 신통변이 무학지의 지이다.
030_0499_b_09L是何無學地智無學地毘署通辯修妒路四辯也 明達神通是無學地
【문】 명달(明達)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명달이란 전세시지(前世時智)ㆍ생처지(生處智)ㆍ누진지(漏盡智)이다수투로. 전세념지(前世念智)ㆍ생처지ㆍ누진지가 명달이며, 유위(有爲)를 제일로 삼는다. 그러므로 명달은 지(知)의 뜻이 있다.
저 전세념지(前世念智)는 행한 바를 기억해 내는 것이고, 생처지(生處智)는 그 행이 과보를 얻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누진지(漏盡智)에 대해서는 후에 설명하겠다.
번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전세(前世)ㆍ당래세(當來世)ㆍ현재세(現在世)의 처(處)이다.
저 전세(前世)의 처(處)에는 18견(見)이 있으니, 전세에 지은 것이다. 당래세의 처(處)에는 44견(見)이 있으며, 현재세의 처에서 지은 것은 신견(身見)이다.
현재의 행과 과거 당래에 대해서 안다면, 전세념지(前世念智)가 전세를 잊지 않고 생하는 것을 알게 되며, 생처지(生處智)가 후세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030_0499_b_12L何法明達明達前世時生處漏盡智修妒 路前世念智生處智漏盡明達有爲首是故明達知是義前世念智所行念生處智名行果所爲智漏盡智後當說若三結前世來世現在世處彼前世處十八見前世所作當來世處四十四見作現在世處見身彼知是現在行過去覺前世念生得前世不忘生處覺後世不忘
030_0499_c_01L누진지이는 위에서 후에 설명하겠다고 한 것이다란 진지(盡智)ㆍ무소생지(無所生智)ㆍ원지(願智)이다수투로. 내가 번뇌를 이미 다하였다고 관찰한다면 이는 진지(盡智)이다.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무소생지(無所生智)라 하니, 비유하자면 의사가 뱀에 물린 사람을 치료할 때 독을 제거하여 없애는 것이 첫 번째 지[一智:진지]이고, 다시는 앞의 뱀의 독한 기운에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이 두 번째 지[二智:무소생지]이다. 이와 같이 진지ㆍ무소생지ㆍ원지를 전세념지(前世念智)라 이름한다.
성문(聲聞)은 자기 자신의 전세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의 전세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 지(智)로 다른 사람의 전세에 대해 알기를 원하여 안다면 이는 원지(願智)이다.
030_0499_b_21L無漏智是上後當說者無所生智願智修妒 路我結已盡是觀盡智不復是無所生智如醫蛇所嚙療治破壞毒是一智不復病前毒氣是二如是盡知無所生智願智名謂前世念智聲聞己身所更念不他也以是前願他亦知是願智
【문】 신통(神通)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신통이란 비(飛)ㆍ철청(徹聽)ㆍ지타의(知他意)이다수투로. 날 수 있다는 것이 비(飛)이니 이는 자재(自在)의 뜻이다. 저 육신통에는 세 가지 비지(飛智)ㆍ천이지(天耳知)ㆍ타의지(他意智)가 있다. 비(飛)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예정이다.
철청(徹聽)이란 이전에 행한 정(定:선정)으로 하나를 인연하여 4대의 지(地)의 지경을 늘려 들어서 아는 것이니, 이로써 천상과 인간이 악취(惡趣:지옥ㆍ아귀ㆍ아수라)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 능력에 따른다. 이는 마치 멀리 보거나 가까이 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그 눈의 능력에 따르는 것과 같다. 정(定)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타의지(他意智)는 중생을 보거나 중생의 소리를 듣고 이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하여 아는 것이 타의지이다.
비(飛)의 행(行)이란 허공(虛空)ㆍ화(化)ㆍ성(聖)이 자재함이다수투로. 허공행자재(虛空行自在)ㆍ화자재(化自在)ㆍ성자재(聖自在)의 이 세 가지가 비의 행이다.
030_0499_c_04L何法神通神通徹聽知他意修妒 路能飛是自在是義彼六神通彼三天耳知他意智飛後當說彼徹聽名前行定一因緣去大地意增聞所知是天人趣聞聲隨其力如或遠見或近見隨眼力如是如定得如是他意智所見衆生所聞聲是輩知其意思惟知他智飛行虛空聖自在修妒 路虛空行自在化自在聖自在是三飛
저 비(飛)의 허공자재(虛空自在)는 물속과 땅 속에 들어갈 수 있고 담장이나 집안에서 사라질 수 있으며 산이 장애할 수 없으며 손으로 해와 달을 만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화자재(化自在)는 새ㆍ말ㆍ수레ㆍ사람ㆍ산ㆍ나무ㆍ성곽ㆍ정원ㆍ시냇물 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성자재(聖自在)란 수명을 늘려 머물 수 있고, 물을 우유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미간에서 광명을 놓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것들을 점차로 늘려갈 수 있으니 이것이 비의 성자재이다.
비행위에서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한 것ㆍ철청ㆍ지타의가 신통이다. 여기에 전세지(前世智)ㆍ생멸지(生滅智)를 합해서 범부의 5신통이라 한다.
030_0499_c_14L彼飛虛空自在名能入水能入地能不現牆屋山無㝵手捫摸日月是飛行虛空自在化名如鳥馬車人山樹城園河水能現聖自在名能住化水爲酥眉閒放光明如是及餘轉增是飛是聖說飛行上言後當說者徹聽知他神通前世生滅智謂凡人是五神通
030_0500_a_01L【문】 변(辯)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법(法)ㆍ의(義)ㆍ응(應)ㆍ분별(分別)의 방편이다수투로. 법방편(法方便)ㆍ의방편(義方便)ㆍ응방편(應方便)ㆍ분별방편(分別方便)을 아는 것이 네 가지 변(辯)이다.
저 법(法)을 아는 것은 구(句)를 합하여 방편을 깨닫는 것이다.
의(義)라는 것은 그것을 따라 존재하는 것이니, 가령 불이란 것이 뜨거움을 말하는 것과 같다. 뜨거움이 그 뜻[義]이니 잊지 않는다.
응(應)이란 이러한 것이 색(色)에 부합하는 것이 그 뜻이다. 원만평등하게 아는 분별방편이란 응보를 따라 어긋남이 없고 착오가 없음을 말한다.
피(避)나 변(辯)은 무학지의 지(智)이니 이것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30_0499_c_20L是何法辯分別方便修妒 路覺法方便覺義方便應方便別方便是四辯彼覺法名句合覺方便義隨彼所有如火名彼熱爲熱爲彼不忘也應名如是是合邑是義等知分別方便名隨應報無違錯不避是辯是無學地智廣知
【문】 무학지(無學地)를 배우는 가운데 계(戒)와 정(定)을 사유해보건대, 왜 그것들은 세 가지로 제시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 계나 계의 증익이 살생을 버리는 것을 늘리도록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니, 가령 어떤 중생이 계를 지극히 잘 지킨다고 해서 아라한은 아니다. 아라한은 공부한다고 해서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무른다. 그러므로 크게 늘려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것들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바소발타의 3법(法) 중 다음으로 둘째의 해탈도(解脫度)를 설명해 마친다.

3. 사아함모초해 [앞에서와 같이 공덕의 아홉 번째는 득득(得得) 가운데 셋째이다.]
030_0500_a_04L是思惟戒定學無學者何故彼不三示不戒戒增益學殺生棄增衆生護有非阿羅漢謂是不嬈學如是意住故不大增說知是亦三如是婆蘇跋陁三法次二解脫度說盡四阿鋡暮抄解第三 上功德之第九名得得之第三也

【문】 앞에서 이미 방편의 과(果)를 평등하게 갖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방편을 평등하게 갖춘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과는 어떤 것입니까?
【답】 과(果)는 불(佛)ㆍ벽지불ㆍ성문이다수투로. 불ㆍ벽지불ㆍ성문, 이 세 가지가 과이다.
【문】 무엇의 과입니까?
【답】 계(戒)와 식(息)과 지(智) 중에서 이것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030_0500_a_10L前已說等具方便果是彼已說等具方便是何果名辟支佛修妒 路辟支佛聲聞是三果誰果戒息智中聞是說修妒路
【문】 갖춘다고 말할 경우에 갖춘다는 것은 도(道)인데, 어떻게 과(果)가 또한 도(道)입니까?
【답】 유여(有餘)는 과이니 이를 제외하려면 무여(無餘)가 그 뜻이다. 세존께서는 이미 무여열반이 이 뜻이라고 말씀하셨다수투로.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저 불(佛)이란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10력(力)의 힘의 일과 4무소외(無所畏)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자유자재함으로써 모든 불법(佛法)을 얻는다. 저 부처님의 계ㆍ정ㆍ혜는 평등하여 차이가 없다.
벽지불(辟支佛)은 스스로를 의지한다는 뜻이니, 이때 이와 다른 뜻은 없다.
030_0500_a_14L具是說具是道是何果或道有餘是果欲是外無餘是義世尊已說無餘般涅槃是義修妒 路是故無惡彼佛名一切結解脫有十力力事四無所自由一切佛法得彼佛無差降戒定慧辟支佛名自依是時無異義
030_0500_b_01L다른 사람의 설을 추종하지 않으니, 이가 벽지불이다. 성문은 다른 사람의 말씀을 추종한다. 혹은 두 가지 해탈을 평등하게 갖추니 연민함이 늘어나고[憐愍增] 평등하게 싫어함이 늘어나는[厭增] 것이다. 저 연민함이 늘어남을 평등하게 갖춘다는 것은, 이러한 때에 삼먁삼보리삼야삼보(三耶三菩)를 얻었다는 것이다.
평등하게 싫어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기 자신이 생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인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생하는 것은 벽지불이고, 다른 사람을 인연하는 것은 성문이다. 만약에 살운야(薩芸若:一切智이신 부처님)께서 일체 공덕을 구족하여 일체의 악을 멀리 떠난 등정각(等正覺)이라면, 벽지불은 일체의 악을 버렸으나 공덕은 적으며, 성문은 다른 사람(부처님이나 스승)을 인연하여 악을 버리는 것이다.
030_0500_a_20L不從他說是辟支佛聲聞從他說二解脫等具憐愍增等厭增彼憐愍增等具謂時是三耶三菩得等厭二己身生因他彼己身生辟支佛因他爲聲聞若謂薩芸若一切功德具足一切惡離是等正覺辟支佛一切惡功德少聲聞因他棄惡
【문】 어떻게 부처님께는 중간이나 나머지가 없습니까? 성문도 그러합니까?
【답】 성문에는 번뇌를 다 버린 아라한과, 번뇌를 다 버리지 못한 아라한이 있다수투로. 성문에게는 이 가운데 근(根)을 인연함이 있으니, 신근(信根)을 으뜸으로 삼아 연(軟:下, 나약함)ㆍ중(中)ㆍ상(上)으로의 증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성문을 의지한 갖가지 모든 경지이다.
030_0500_b_04L云何如佛無中閒及餘如是聲聞聲聞棄結不棄結阿羅漢修妒 路聲聞聲聞有中閒根因緣信根爲首上增可得是依聲聞種種一切
【문】 번뇌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번뇌를 버린다는 것은 신해탈(信解脫)ㆍ견득(見得)ㆍ신증(身證)이다수투로.
믿음을 제일로 삼아 피안에 이르는 것을 신해탈이라 하고, 사유를 으뜸으로 삼는 것은 견득이다. 세 번째 신증이란, 저것들에는 한량없는 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해탈(信解脫)이란 상도(上道)와 행(行)과 무행(無行)의 반열반(般涅槃)이다수투로. 상도는 도의 흔적이다. 상도(上道)와 행반열반(行般涅槃)과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 이 세 가지가 신해탈이다.
030_0500_b_09L是何法棄結名棄結信解脫見得身證修妒 路信爲首度彼岸是信解脫思惟爲首見得三身證彼無量當示信解脫上道無行般涅槃修妒路上道道迹也上道行般涅槃無行般涅槃是三信解脫
저 도(道)라는 것은 이익됨을 말하니, 상상(上上)의 도에 이르기까지 얻는 것이다. 만약에 자취를 따라가면 이것이 도이다.
저 행반열반(行般涅槃)이란 행(行:유위의 뜻)이 도를 인연하여 그치는[息] 것이다.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이란 무질(無疾:무위의 뜻)의 열반이 도를 인연함이다. 반열반은 신해탈(信解脫)을 의미한다.
030_0500_b_14L彼道名利彼得至上上若迹是道彼行般涅槃名行因緣道息去無行般涅槃名無疾涅槃因緣道般涅槃是信解脫說
【문】 견득(見得)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견득이란 중간반열반(中間般涅槃), 생반열반(生般涅槃), 그리고 상도(上道)이다수투로.
저 중간반열반이란 여기서의 목숨을 마치고 다른 생을 받는 도중의 중간에서 반열반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작은 불이 솟아올라 아직 땅에 떨어지기 전이니, 이것이 중간반열반이다.
생반열반이란 마치 솟아오른 불이 땅에 떨어져 사라져 없어지는 것처럼, 중간(中間:中有의 도중)으로부터 태어날 때 반열반한다.
상도(上道)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는 무색계이다. 이상이 견득임을 알 수 있다.
030_0500_b_17L是見得何見得中閒生般涅槃已上道修妒 路見得是三中閒般涅槃生般涅上道彼中閒般涅槃名此終他生得道中閒般涅槃如小火逬未墮閒般涅槃生般涅槃名如逬火墮地滅度如是生於中閒時般涅槃上道名如上說是無色界知是見得
030_0500_c_01L【문】 신증(身證)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신증이란 행반열반ㆍ무행반열반ㆍ생반열반이다수투로. 이미 설한 바 있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설합니까?
【답】 다시 설하는 게 아니다. 계(界)가 욕계를 인연하여 해탈하고 색계를 인연하여 해탈하니, 이 두 가지는 일체의 중간반열반(中間般涅槃)을 버린다. 무색계는 그렇지 않다. 중간이 존재하나 다시 이전의 해탈하지 못한 과보는 아니다. 신증(身證)은 해탈의 과보이다. 해탈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이상이 번뇌를 버리는 것에 관한 설명이다.
030_0500_c_01L何身證名身證及行生般涅槃修妒 路是已說何故復說不復界因緣欲界解脫色界解脫是二一切中閒般涅槃棄不無色界中閒有復前不解脫報身證是解脫報是解脫後當說是棄結說
【문】 번뇌를 버림이 없는 것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번뇌를 버림이 없는 것에는 8과 수다원(須陀洹)과 박지(薄地)가 있다수투로. 8과 수다원과 박지 이 세 가지가 번뇌를 버림이 없는 경우이다.
【문】 8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수를 세어 이르는 경우로 말하자면 최초로는 8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부터 뒤로 순서에 따라 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아라한은 어떤 아라한입니까?
【답】 생기는 순서에 따라 관찰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여덟 명의 자식들이 있을 경우 첫 아이를 제8이라 할 수 없고, 맨 나중 자식이 8과 상응한다. 저 세존께서 지은 공덕으로 아라한이 가장 맏이임을 볼 수 있으니, 번뇌가 남김없이 멸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장 어린아이처럼 가장 맨 앞의 것이 이미 주(住)하니, 이 맨 앞의 것이 8이다. 생각[想:사유]은 경서에 따르면 선정이 제8인 상태이다.
030_0500_c_07L無棄結何法無棄結須陁洹薄地修妒 路須陁洹薄地是三無棄結何法八名謂至數說初得不八生後次第阿羅漢是何阿羅漢生見知 如人八兒彼不初是八相應最後者相應 彼世尊作功德是見阿羅漢無餘結盡如是小前前最小已住初是八說若想隨書定八也
【문】 8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8이란 신(信)과 사유(思惟) 그리고 그것들이 늘어나는 것 등이다수투로.
범부(凡夫)와 신(神)을 족성자(族姓子)라 이름하니, 신(信)과 사유(思惟)를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신(信)이 증가하면 지혜가 상응하고 지혜가 증가하면 신이 상응하며, 이들을 평등하게 갖추면 법지(法智)가 발현된다. 먼저 신이 견고하면 연근(軟根:하열한 근기)이고, 사유가 견고하면 중근(中根)이며, 둘 다 견고하면 이근(利根)이다. 이 세 가지가 8이다.
이미 진리[諦]를 보아 신(信)이 증가하면 7이고, 죽고 나는 중에 지혜가 증가하면 중간주(中間住)이며, 다 갖추어 의지하면 가가(家家)이다.
030_0500_c_15L何八名思惟彼增等修妒 路凡人神名族姓子是等具有信思惟彼或信增有智慧相應或智慧增信相應或俱等法智發一牢信軟根惟牢信中根俱牢利根是三八諦見信增七死生有慧增中閒住有俱依家家
030_0501_a_01L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견지(見地)와 분별지(分別地)와 승승박지(乘乘薄地)가 있다.
신(信)이 증가함에 머무르면 사다함(斯陀含)이고, 지혜가 증가함이 있으면 중간주(中間住)이며, 둘 다를 의존하면 일사생(一死生)이다.
음탐을 그치게 하는 인연을 행하여 신이 증가하면 신해탈(信解脫)이요, 지혜가 증가함이 있으면 견득(見得)이요, 둘 다를 의존하여 색행(色行)이 그치면 신증(身證)이다.
무여(無餘)의 인연[無餘因緣] 위에서 신이 증가하면 연근(軟根)이고, 지혜가 증가하면 중근(中根)이며, 둘 다 갖추면 이근(利根)이니, 이렇게 한결같이 향상해 나아감은 마치 처음 해가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030_0500_c_22L有如是見地分別地乘乘薄地住信增斯陁含有智慧增中閒住俱依一死生有止住行因緣信增信解有慧增見得有俱依色行止身證有無餘因緣止信增軟根有慧增中有俱依利根有是等向上如初日
【문】 이미 8에 대해서 폭넓게 분별하여 공덕의 그물이 생기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겠으니 설명해 주십시오.
【답】 수다원은 7이니 사생(死生)과 가가(家家)와 중간주(中間住)이다수투로.
수다원은 두 가지가 있으니 초과(初果)에 머물러 두 가지 도의 자취를 구함을 말한다. 이에 오르므로[乘] 수다원이라 하는데, 신견(身見)과 의혹을 끊으려고 악취를 그쳐 다 없앤다악도(惡道)가 멸한다. l
연근(軟根)인 7은 천상과 인간계의 즐거움을 행하며 반열반을 얻고자 한다낙(樂)이란 삼계(三界)의 복(福)이다.
가가(家家)는 이근(利根)에 머물고, 초과(草果)는 분별지에 머문다. 인연이 견고하여 행을 지으니 이 가가는 반열반의 중간주에 머문다.
저 중간이란 반드시 가가(家家)에서 머무르는데 반열반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일곱 번을 머물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천상이나 인간의 중간에서 반열반한다.
030_0501_a_05L已說是廣八分別生功德網亦不知何是當說須陁洹七死生家家中閒住修妒路須陁洹名二初果住求二迹道說是乘是故須陁洹見身疑惑願失止趣盡去惡道滅也軟根七行天上人界樂得要當般涅槃樂三界福家家住利根初果住分別止因緣牢作行是家家住般涅槃中閒住彼中閒不必家家住般涅槃彼要七住天人中閒二般涅槃
【문】 이미 수다원을 설하셨으니, 박지주(薄地住)란 어떤 법입니까?
【답】 박지(薄地)란 사다함이니, 일사(一死)ㆍ일생(一生)ㆍ중간주(中間住)이다수투로.
음행(經行)의 인연을 박(薄)하게 지어 머무는 것이 박지이다. 저 사다함이란 일사(一死)ㆍ일생(一生) 둘 사이의 중간주(中間住)이다.
그 첫 번째는 여기서 생을 마치면 천상에 태어나 한 번 돌아와 반열반함을 말하니, 상분(上分)의 인연이 박(薄)하다.
상분의 인연이란 다섯 가지 색욕(色欲)ㆍ무색욕(無色欲)ㆍ교만(憍慢)ㆍ오달타(奧達吒)어지러운 심지(心志)ㆍ무명(無明)이다.
일생(一生)이란 한 번 돌아와 반열반에 들어가니, 늘어나거나 많아짐이 그친다. 저 두 가지를 다 갖추면 중간주이다.
이상으로 번뇌를 버리는 것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설하였다.
030_0501_a_14L已說須陁洹是何法薄地薄地斯陁含一死一生中閒住修妒路婬行因緣薄作住是薄地彼斯陁含一死一生二中閒住彼一說此終生天上一還般涅槃上分因緣薄上分因緣名五色欲無色欲憍慢達咤亂志無明一生一還有來般涅槃增多上彼俱中閒住是不棄結
030_0501_b_01L【문】 아라한(阿羅漢)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아라한에는 이근(利根)ㆍ연근(軟根)ㆍ중근(中根)이 있다수투로. 아라한은 공양이 그 뜻이니, 공양을 받을 만한 이가 아라한이다.
【문】 어느 곳으로부터 공양을 받습니까?
【답】 일체의 중생으로부터이다. 아라한은 이근ㆍ연근ㆍ중근이기 때문이다.
030_0501_a_21L是阿羅漢何法阿羅漢利修妒路阿羅漢供養是義彼供養相是阿羅漢何處供養一切衆是三利根軟根中根
【문】 이근(利根)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이근은 겁법(却法)과 능괴유법(能壞有法)과 무의법(無疑法)에 머문다수투로. 겁법과 능괴유법과 무의법에 머무는 것이 이근이다.
이 이근은 이미 번뇌가 다했다는 것을 분별하여 알고 허물이 다한 곳에 머물기 때문에 겁(劫)이라 한다.
일체의 번뇌를 다하여 향상함이 늘어난다는 뜻이 있고, 능히 허물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능괴유(能壞有)라 한다. 이에는 증익의 뜻이 있으니 명달(明達)ㆍ신통(神通)ㆍ변(辯)이 있다.
무의법(無疑法)이란 일체의 어려움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변재(辯才)를 늘려 얻는 것이다. 이상이 이근의 인연이다.
030_0501_b_02L是利根何利根住劫能壞有無疑法修妒路住劫能壞有無疑法是利根知已盡分別結盡過去住是故住劫盡一切結上增義求能得過是故能壞有有增益義明達神通辯無疑法得增一切難無疑辯是利根因緣
【문】 연근(軟根)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연근에는 감법(減法)과 염(念)과 호(護)가 있다수투로. 감법과 염유(念有)와 호유(護有)가 연근이다.
증상(增上)해 가기 때문에 마음에 감(減)하는 것이 있으므로 감법(減法)이라 한다. 중생이 분별지(分別地)를 감하여 분별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설해진 장구[章]에 대해 외우지 않아 잊어버리는 것처럼, 분별지를 행하지 않아 잊어버린다. 일을 외우거나 장행(長行)을 외우는 관행(觀行)유관(遊觀)을 하지 않아 다섯 가지 일이 감하고 또한 분별지가 감한다.
030_0501_b_08L是軟根何法軟根減法護有修妒路念有護有是軟根增上去是故意是減法減法不衆生減分別地減分別行行是說如所說章不誦失彼不行分別地失彼減長行遊觀是五事減是亦分別地減
저 사유를 얻은 아라한이라도 행(行)의 작용이 열등하니, 이미 다 지을 바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念]은 세간의 갖가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 마치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세존께서 “옷을 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이미 생각했으면 이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명(命)을 무너지게 한다용(用)은 머물러 행함이다. 이는 호(護)를 얻을 수 없다. 아라한이 감소하지 않게 하려면 마땅히 이것이 항상하고 크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호(護)는 가난한 사람이 재산을 얻어 지키는 것과 같다. 이상이 연근(軟根)의 인연이다.
030_0501_b_14L彼思惟有得阿羅漢劣行用住爲已作念念世閒多行種種意如念人世俗如世尊說衣授已念不離是念壞命用住爲也是不護有得阿羅漢不欲減當不念是常大如貧人得財守是軟根因緣
【문】 연근(軟根)은 어떤 것들입니까?
【답】 연근은 혜해탈(慧解說)ㆍ진해탈(盡解脫)ㆍ부진해탈(不盡解說)이라는 과보이다수투로.
혜해탈(慧解脫)에 관해서는 이미 설한 바 있다.
구분해탈(俱分解脫)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진해탈(盡解脫)의 과보와 부진해탈(不盡解脫)의 과보이다. 구분해탈이란 염해탈(念解脫)과 혜해탈(慧解脫) 두 가지가 늘어나는 것이 그 뜻이다.
030_0501_b_19L根何等軟根慧解脫不盡解脫修妒路慧解脫已說俱分解脫二解脫報不盡解脫報俱分解脫名念解脫慧解脫是二增去義彼義
030_0501_c_01L【문】 저 해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답】 해탈이란 음조(婬助)와 색조(色助)와 멸(滅)이다수투로.
욕계와 색계를 다 도와주고[助] 상의(上意)에 머무는[住] 것이니, 삼계를 멸하는 것이 세 가지 해탈행(解脫行)이다. 번뇌의 결박에서 벗어나므로 해탈이라 한다.
030_0501_b_23L何彼解脫名解脫助滅修妒路欲界色界俱助上意住三界滅是三行解脫解脫結是故解脫
【문】 음조(淫助)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음조란 욕계 가운데의 색상(色想)ㆍ무색상(無色想)의 정(淨)과 부정(不淨)이다수투로.
자기 자신 가운데 증가했다면 자기 자신 또한 증가한다는 것이 이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색상(色想)과 불괴색상(不壞色想:무색상)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색에 대해 분별함이 없으니, 무덤가에서 모습이 썩고 살점이 너덜너덜하고 눈이 튀어나오고 내장이 삐져나오는 것과 소변처의 온갖 벌레들이 서로 어지러이 뒤섞이고처(處)는 공동의 처소 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득이며 쪼아 먹고 코는 떨어지고 팔과 다리와 머리의 해골은 분리되니, 이러한 것들을 보고 나서 음욕의 번뇌를 버린다.
030_0501_c_03L是何婬助名婬助中閒色無色想淨不淨修妒路增已己身中閒己身亦增是義是二色想不壞色想彼中閒色不分謂丘塚地色腐爛肉脫眼潰出不淨小便處百虫交亂處共同處烏扇髮交亂喙鼻斷分離手腳頭髑髏是見已婬結棄
‘이 몸은 다른 사람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고 다투고 속이고 아첨하고 자신을 높이고 교만한 것을 으뜸으로 삼는구나’라고 생각하여 악으로부터 해탈함으로써 마음이 선정에 들어간다. 이것이 욕계 가운데 색상의 부정해탈(不淨解脫)이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의 내색(內色)에 대한 분별이니, 선정[定]으로 말미암아 무색계에 머무르고,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욕계 가운데 음욕의 생각을 떠나는[離婬想] 부정해탈(不淨解脫)이다.
세 번째로 정해탈(淨解脫)이란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의 옷을 제일의 인연으로 삼아 마음의 생각[念]이 흔들림 없음[無動]에 머무니, 이것이 정해탈(淨解脫)이다네 가지 색깔 및 옷을 관찰하여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030_0501_c_10L發是身謂義及餘怨鬪諍詐言諂貢高憍慢爲首有彼是念作謂惡解脫意定是中閒色想不淨解脫二自己身內色分別由定無色住如是他身念是中閒離婬想不淨解脫三淨靑赤黃白花衣爲首因緣發意念住無動是淨解脫觀四色及衣而不著
【문】 색조(色助)란 무엇입니까?
【답】 색조란 무색(無色)으로 설한 것이다수투로.
색계의 번뇌를 버리고 4의주(意住)를 발하니, 이것은 유루(有漏)이다. 색조는 복(福)을 설할 때 함께 설하였다.
【문】 멸(滅)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식(識) 등을 인연으로 삼아 한결같이 멸한다. 무루(無漏)를 정수(正受)하는 아라한은 두 가지 번뇌의 결박을 버린다.
바소발타 3법도의 셋째. 즉 첫 번째 가운데 공덕 중간(中間)을 다 설명해 마친다다했다.

4. 사아함모초해 [3법의 첫 번째인 공덕을 이미 설해 마쳤으니, 다음으로는 두 번째 악(惡)에 대해 설한다.]
030_0501_c_17L是色助色助無色以說修妒路色棄結發四意住是有漏是色助說俱去是何滅名識爲首等相應滅無漏正受阿羅漢二棄結婆素跋陁三法度三%口*(葵-天+示)末都盡也初功德中閒說
030_0502_a_01L
【문】 이미 공덕과 공덕 가운데 3법도(法度)를 폭넓게 설하셨으니, 다음으로 악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답】 악이란 고행(苦行)ㆍ애(愛)ㆍ무명(無明)이다수투로. 고행ㆍ애ㆍ무명은 악에 대해 간략하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잡다한 악은 선행(善行)을 잡스럽게 하니, 악은 인간을 어리석게 하는 것이다. 잡스러운 악념은 마치 돼지가 깨끗하지 못한 곳을 즐겨하는 것과 같다. 세간에서 저 맨 앞의 고행은 신(身)ㆍ구(口)ㆍ의(意)의 고행이니수투로, 이 악(惡)에는 처음에 세 가지가 있으니, 신고행(身苦行)ㆍ구고행(口苦行)ㆍ의고행(意苦行)이다. 고행이란 중생의 악행이다. 이 고행은 악념(惡念)으로 행하는 것이니 고행이라 한다.
030_0501_c_22L四阿鋡暮抄解第四三法初功德已竟次說第二惡也已說廣功德功德中閒三法度何惡名苦行無明修妒路苦行無明是略說惡當知雜惡善行是惡是人愚謂雜惡念如豬不淨樂世閒彼前苦行身口意苦行修妒路惡數謂初是三身苦行口苦行意苦苦行惡衆生行是苦行惡念行苦
【문】 신(身)의 고행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신(身)의 고행(苦行)이란 살생ㆍ도둑질ㆍ음우행(婬愚行)이다수투로. 신의 고행이란 이 세 가지 살생ㆍ도둑질ㆍ음우행임을 알아야 한다.
【문】 제가 신의 고행에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았으니, 그 가운데 살생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살생(殺生)이란 염(念)과 교(敎)와 행(行)이다수투로. 염ㆍ교ㆍ행 이 세 가지를 살생이라 한다.
나머지도 신의 고행에서 말한 살생과 마찬가지이다. 세 가지 염과 교와 행을 분별해 보면 저 불여취(不與取:도둑질)와 음우행도 이것들을 인연하여 행한다. 나머지 구행(口行)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030_0502_a_08L是何身苦行名身苦行修妒路謂是身苦行是三行知我當知身苦行三是何法殺殺念修妒路是三殺如是餘如身苦行殺分別三彼不與取婬愚行因緣知餘口行
【문】 이것들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이것들을 알지 못하니, 염(念)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염(念)이란 욕작(欲作)ㆍ교작(敎作)ㆍ타작(他作)의 희(喜)이다수투로. 염이란 의각(意覺)을 이름한다. 이 세 가지 욕작희ㆍ교작희ㆍ타작희는 마치 벌레를 죽이려는 마음을 내어 하인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고는 다른 사람이 죽인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고 환희하는 것이니, 이것이 염이다.
030_0502_a_13L有是是亦不知是何法念名他作喜修妒路念名意覺是三欲作教作他作喜如殺虫欲殺教奴殺殺稱善歡喜是念
【문】 교(敎)3)라는 것은 어떤 법입니까?
【답】 교는 처(處)ㆍ사작(使作)ㆍ청(聽)이다수투로. 처ㆍ사작ㆍ청 이 세 가지가 교(敎)이다.
저 처란 장소를 말한다. 양(羊)을 희생하여 공양물로 삼으라고 말하는 것바라문이 언급한 것이다은 먹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잘 자란 양을 먹고 싶으니까 부자를 꼬여 그 양을 죽여서 제사를 올리도록 하는데, 이는 스스로 먹고 싶은 탐욕에서 그런 것이다, 이것이 교살(敎殺)의 처이다.
사작(使作)이란 마치 왕의 처소에서 이 무리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청(聽)이란 어떤 곳에 귀한 사람이 오는 도중에 “나에게 원수가 있는데 나를 괴롭히니 내가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말하면, 이를 듣는 것이다. 이상의 처ㆍ사작ㆍ청이 교(敎)이다.
030_0502_a_17L是殺何法使作修妒路教處使作是三教彼處處名問曰是羊披羅門云以是爲首妄語富人欲食欲嚴羊欺富人使殺羊祠曰貪自欲食是教殺處使作名如王處如殺是輩罔殺聽之名如或處貴來我有怨家嬈我我當報怨是三處作
030_0502_b_01L【문】 행(行)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다른 중생을 죽이는 행을 하는 것에는 중생상(衆生想)ㆍ사(捨)ㆍ단명(斷命)이 있다수투로.
죽이는 행은 이러한 뜻을 짓는다. 죽이려는 마음을 내어 장소를 분별하고 말한 내용을 들으며 악행을 저지르려 한다. 마음으로 행하는 저것에도 다른 중생상과 사(捨)와 다른 단명이 있다사(捨)는 제거하여 편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가 살작(殺作:살행)이니 어떤 뜻을 구족하는가? 가령 의사가 선의(善意)로 병든 종기를 도려냈는데, 그것을 도려냄으로 인해 죽는다면 이는 의사가 살생한 것이 아니다. 그가 조금도 이렇게 처리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그렇게 처리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과 같다. 이런 뜻을 구족하면 죽인 것이 아니다 이 구는 살생의 세 가지 뜻이 없다. 이와 같으면 살처(殺處)가 존재하지 않는다.
030_0502_a_23L是行何法殺行他衆生衆生想斷命修妒路殺行作是義殺受知處分別聽口意苦行知彼他衆生想捨他命斷捨去便治是三殺作具足有何義雖善意病腫割之當割時死非是醫殺生彼不捨如是一少若不捨爲少一也具則非殺是句無有殺生三無如是殺處有
【문】 불여취(不與取)란 어떤 법입니까?
【답】 불여취란 타(他)ㆍ상피(想彼)ㆍ각투(覺偸)이다수투로. 다른 사람에게 재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헤아리고헤아려 아는 것이다. 저 재물을 아는 것이다 저것을 취하니 이와 같이 세 가지 행이 상응한다.
불여취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저 재물이 첫째요, 그 재물을 아는 것이 둘째요, 그것을 취하여 갖는 것이 셋째이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취하더라도 도둑질이 아닌 경우가 있다. 자기 스스로 헤아려 아는 것이니헤아려 아는 것이다. 재물을 인식하여 거론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니, 그 마음이 자신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코끼리와 같은 것을 생각만으로 헤아려 취한다고 해서 도둑질이 아닌 것과 같다.
또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하여도 도둑질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그 마음으로 헤아려 취함에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친족의 밭에 있는 뿌리채소나 꽃이나 과일이 그 취하는 본보기가 된다본보기가 된다는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실되지 않도록 때에 맞춰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이다.
030_0502_b_07L是不與取何法不與取名他想修妒路他有財他覺覺知也知彼財彼取如是三行想應不與取有何義彼財知是彼財二持去三他財取去非盜覺覺知也知識財爲擧而無盜心如己有也如彼是象相似覺取非盜復他取無盜覺無過如親田根花果爲首或取爲首非一也恐失時爲收也
【문】 음우행(婬愚行)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음우행이란 타수(他受)ㆍ법수(法受)ㆍ행갱음(行更婬)이다수투로. 음우행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타취(他取:타수)하는 것과 법수와 행갱음이다.
030_0502_b_15L何法婬愚行婬愚行受行更婬修妒路婬愚行略三他取去法受行更婬
【문】 음(婬)은 수투로에서 근(根)이라 했는데, 어찌하여 음우행이라고 말합니까?
【답】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사람[道人]과 재가인[白衣]이다. 수행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음(婬)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나면 음이 없더라도 악행이고,끊지 못함 짓지 않더라도 음우행이라사람을 핍박함 할 수 있다.
만약에 백의가 음을 행하는 경우에 이것이 악행이라 한다면, 수다원은 악행을 하여 이에 따라 악취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음우행은 부정(不淨)이지만, 이 두 가지는 허물이 없다도인의 경우에는 음우행을 끊어야 하지만, 백의는 끊지 않아도 된다고 수투로에서 말하였다.
030_0502_b_17L婬是修妒路根何婬愚行作是說二人道人白衣彼道人至意說無婬惡行不斷婬愚行無作逼人若婬白衣惡行須陀洹惡行已隨趣謂不爾是故婬愚行謂不淨是故二無惡道人白衣斷不斷也修妒路說
030_0502_c_01L【문】 다른 사람의 타수(他受)란 어떤 법입니까?
【답】 다른 사람의 타수란 부수(夫受)ㆍ친리수(親里受)ㆍ왕수(王受)이다수투로. 부수ㆍ친리수ㆍ왕수, 이것들이 모든 다른 사람의 타수이다.
부수(夫受)는 여인이 음행의 주(主)가 된다. 이 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지경(至竟)과 시중간(時中間)이다. 지경이란 방토(方土)의 가법(家法)과 같으며 여자가 주가 된다. 시중간이란 방법(放法)으로서 부인이 먼저 재물을 청한다. 아직 그 기간이 다하지 않았는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떨어지면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따른다는 뜻이다. 다시 행하는 것이다 그는 음우행을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친리(親里)란 부모ㆍ형제ㆍ자매가 본보기가 된다. 만약에 소녀가 지아비가 없으면 그녀를 데려다 기른 경우도 친리이다.
왕수(王受)는 지아비도 없고 혈육이나 친족도 없어서 다 왕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니, 이는 왕수이다.
이상이 다른 사람의 타수(他受)이다.
030_0502_b_22L何法他他受他他受親里修妒路夫受親里受王受是一切他他受彼謂女人以婬爲主是主是二至竟時中閒彼至竟名如方土家法作主時中閒名是放法婦人初財請彼未及期若他墮隨也更行也彼婬愚行如是親里名父母姊爲首謂小女若無夫慈養之王受名謂無夫無親里屬王爲受有是王受是他他受
【문】 법수(法受)란 어떤 법입니까?
【답】 법수란 학법(學法)ㆍ재법(齋法)ㆍ가법(家法)이다수투로.
학법을 받아들이므로 학수(學受)라 하고 재법을 받아들이므로 재법수(齋法受)라 하고, 가법(家法)을 받아들이므로 가법수(家法受)라 한다. 지금 듣거나 혹은 전에 들었더라도 재계(齋戒) 후에 다시 듣지 않으면 법(法)이 아니다지아비가 재(齋)를 받게 함으로써 난잡한 행을 뉘우치게 한다.
이 법수는 어떤 이가 재를 받아 들은 후에 만약 난잡한 일을 하면 이미 받은 재법은 비법(非法)에 머문다. 가법이란 갖가지 친족의 인연을 말하니 세 번째이다. 이 모든 이에게는 가서 범할 수 없으니 어머니ㆍ누이 딸ㆍ며느리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마치 성품을 따르는 것처럼 이 법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030_0502_c_08L法受何法法受家法修妒路法彼受是故學受齋法彼是故齋法家法彼受是故家法受彼聽或前齋後不聽非法夫使受齋而悔行亂是法我今受齋已聽然後若作亂彼受齋法住爲非法家法種種因緣三事一切不得往母姊女兒婦爲首如是隨性如是法受
【문】 갱음(更淫)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갱음이란 자기의 부인을 아기가 태어난 곳에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음행을 하거나, 남자아이를 산에 데려가 음행을 하는 것이다수투로.
부인을 아기가 태어난 곳에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음행을 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억지로 행하거나, 남자아이를 산에 데려가 행하는 것이 갱음(更淫)이다.
030_0502_c_16L是更婬何法捨婦人所生處更以餘婬男兒修妒路更婬名謂捨婦人所生處餘婬力强婬男兒行山持行是更婬
【문】 앞에서 설명하신 내용은 음행에 대해서 충분히 다 갖추어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음행에는 다시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나머지 다른 음행의 번뇌가 있다면, 이 가운데는 어떤 법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 가운데 설하셨더라도 옳지 않으면 이는 충분히 설명을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답】 이미 충분히 설명을 다했다. 어떤 뜻인가 하면 부인을 아이 낳은 곳에 내버려둔다는 것은 축생을 향해서도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음행에 대해 설명한 것은 나머지 음행에 대해서도 다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 설하였다.
030_0502_c_19L是說不盡何義更有因緣餘有婬行結何法是中閒去若中閒去說不是爲不盡說已盡何義捨婦人所生處向畜生所說婬行餘者盡故爲盡
030_0503_a_01L【문】 이러한 비의행(非義行)은 무엇으로부터 좇아 나옵니까?
【답】 모든 탐음(貪淫)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로부터이다수투로. 탐ㆍ에ㆍ치 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 모든 것이 어떻게 살생ㆍ도둑질ㆍ음행이 됩니까?
【답】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고 말한다면 이는 수투로의 행작(行作)이 아니다. 이 모든 수근(受根:감각하거나 인식하는 기관)에 관하여 수투로에서는 신(身)ㆍ구(口)의 고행을 설하였으니, 이를 알아야 한다. 의(意)의 고행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설명하겠다.
030_0503_a_01L從何起是非義行一切貪婬瞋恚愚癡修妒路癡等有知是何一切云何是殺盜婬行是說若是說不是修妒路行作有一切受根修妒路說身口苦行知苦行別當說
【문】 어찌하여 이 세 가지 일은 서로 어긋나게 나타납니까? 왜냐하면 낙통(樂痛)이 있어서 일시에 한결같이 평등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진에가 있으면 고통이요, 욕음(欲淫)이 있으면 낙통인 까닭입니다. 행음은 번뇌인데 에(恚)란 어떤 법입니까?
【답】 내가 탐음ㆍ진에ㆍ우치에 대해서 설하지 않았던가? 이는 이미 앞의 원(願)에 관해서 설명할 때 설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재물에 집착하여 진에를 일으키면 살생을 하게 되니, 이처럼 도둑질에 대해 분노하게 되면 앞의 것과 같은 일을 일으킬 수 있다. 저 사람이 내 누이에게 음행을 했으니 나도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나중까지 집착하여 이와 같은 음행을 한다. 앞의 원에서는 진에를 등기(等起)라고 설하였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과정에 허물이 없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030_0503_a_06L何法是三事相違現何義不樂痛一時等有恚苦痛欲婬樂痛說行婬是結是何法恚我不說貪婬瞋恚愚癡是前願說是中間所作財著瞋恚起殺如是盜恚發前如是彼妹婬我當報怨後著如是行前願是恚說是等起是故無過是餘
【문】 신(身)의 고행처(苦行處)에 대해서는 설명하셨으니, 일체의 탐음ㆍ진에ㆍ우치에서 말하는 구행처(口行處)는 어떤 법입니까?
【답】 구(口)의 고행은 불여(不如)ㆍ무여(無如)망언이나 불망언(不妄言)과 같다ㆍ불요지언(不要之言)이다수투로.
구(口)의 고행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만 묶어 제시하였으나 의당 네 가지를 나타내 보인 셈이다세 번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므로 네 가지를 나타낸다. 그것은 바로 불여(不如)ㆍ무여(無如)ㆍ불요언(不要言)이다.
030_0503_a_13L已說身苦行處一切貪婬瞋恚癡說如是口行處何法口苦行無如猶是妄言不妄言耳不要之言修妒路口苦行四是三繫當現四三中二也現四也彼不如無如不要言
030_0503_b_01L【문】 불여(不如)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답】 불여란 자기 자신이나 남을 위한다는 뜻과, 의(義)의 생각[想]을 취하는 것이다수투로.
저 불여(不如)의 구고행(口苦行)은 자기를 위하는 뜻과 남을 위하는 뜻과 의(義)의 뜻이 있다. 자기 자신이 취하는 바가 있다는 것에서 취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각(覺:헤아려 알다)의 의미이다. 이 이하로부터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기신의(己身義)ㆍ기명의(己命義)ㆍ타의(他義)ㆍ친의(親義)ㆍ의의(義義) 등 갖가지 뜻을 짓는다는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세존께서도 이미 “모이고 권속이 되고 하는 것은 자신을 인연하고 다른 사람을 인연하는 것이니 음식과 모든 재물 등에 대해서 망언(妄言)함이 없어야 됨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셨다.
030_0503_a_18L是何不如名不如己身義義想所有取修妒路謂彼不如口苦行是己義他義義義己身所有取所有取名覺自下如餘意異說知是三義說己身義己命義他義義義種種所作義是三世尊己說是聚去眷屬去己因緣他因緣有財等知無妄言
【문】 이미 불여의 구고행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무여(無如)의 구고행(口苦行)이란 어떤 법입니까?
【답】 무애념상응(無愛念相應)ㆍ인연념상응(因緣念相應)ㆍ구념상응(俱念相應)이다수투로.
무여는 무애념상응ㆍ인연념상응ㆍ구념상응이니, 상응이란 이러한 뜻을 이름한다.
저 무애념상응이란 거친 말[麤言]이다. 무애념(無愛念)이란 성을 내서 거친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거친 말을 하지 않더라도그 스승이 이 구절을 제자에게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생각[念]을 일으키면 구의 고행이 된다. 이와 다르다면 세존께서도 또한 거친 말을 하게 되는 셈이다.
030_0503_b_02L已說不如口苦是何法無如口苦行無愛因緣俱念相應修妒路無如名無愛念相應因緣念相應俱念相應相應名是義彼無愛念相應麤言謂無愛念說恚是麤言若爾者無有麤言者其人謂此句弟子言己身念起口苦行餘世尊亦當麤言
저 조달(調達)을 계도하시고자 생각[念]하시어 그에게 화를 내셨다. 따라서 무애념상응은 거친 말이다. 가령 애꾸눈을 가진 사람에게 진정으로 애꾸라고 말하면 그가 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애념상응은 구(口)의 고행이다.
인연념상응(因緣念相應)이란 실제적으로 말해서 양설상응(兩舌相應)이다. 만약에 생각이 상응하여 돕는 일이 증익되어 생겨나면 양설이 아니다. 만약에 그러하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도 양설을 하게 되는 셈이 된다. 세존께서는 학도(學道)를 위하여 이익되게 하시고자 스스로 본질과는 다르게 말씀하셨으니, 이런 까닭에 악을 생각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구상응(俱相應)이란 인연으로 두 가지 망언과 불망언을 짓는 것이다. 거친 말[麤言] 또한 이와 같으므로 거친 말은 양설(兩舌)이다.
030_0503_b_08L彼調達念欲度說彼恚是故無愛相應麤言如瞎緣說瞋眞誠彼恚故無愛念口苦行因緣念相應名諦因緣念相應兩舌相應若念相應增生相助非兩舌若爾者世尊亦當兩舌世尊學道爲首欲益已自行說離本是故念惡是故當知俱相應名因緣二作妄言不妄言麤言亦如是是故麤言兩舌
【문】 불요지어(不要之語)란 어떤 법입니까?
【답】 불요어(不要語)란 비시언(非時言)ㆍ비제언(非諦言)ㆍ비의언(非義言)이다수투로 비시언ㆍ비제언ㆍ비의언 이 세 가지가 아발도로자나(阿跋度路柘那)진나라 말로는 불요어(不要語)이다이니, 이 인연은 한량없다.
저 비시언(非時言)이란 상응할 때에 헤어지는 말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이와 같은 때 다 갖추어서 손[手]을 가져다주려는 것과 같다외국의 혼례 때 신랑의 어버이가 며느리를 맞이하는 경우, 며느리의 성씨들이 다 갖추어 목욕시켜 놓으면 신부의 아버지가 딸의 손을 신랑의 손에다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030_0503_b_17L是不要之語何法不要語非時非諦非義言修妒路時言非諦言非義言是三略阿跋度路柘那秦言不要語是因緣無量彼非時言名如相應時離語因緣如時盡具當手授作外國婚禮夫親迎女女氏具送女之具澡夫手父以女手授故云爾
030_0503_c_01L길상한 때 사용해야 하는 말을 하는 가운데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 훌륭한 사람이여, 무상하여 인연이 무너지는 법이 있으니 후에 마땅히 쇠하고 멀어지리라, 음(婬)도 그와 같다. 이것은 진실한 말이니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이 하신 말씀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비시언(非時言)이란 때에 맞지 않는 불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불제언(不諦言:非諦言)이란 진실된 생각인 것 같으나 진실이 아닌 말이다. 가령 니건(尼揵:외도의 한 파)이 하는 말과 같으니생각해보면 스승이 진리를 말한 것 같으나 사도(邪道)를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살운야(薩芸若:一切智)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한 말과 같다. 따라서 저 생각은 불요어이다. 어떤 뜻이냐 하면 살운야는 저의 스승이 증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치에 맞게 말하려면 “부처님께서 살운야이다”라고 해야 한다. 또한 거짓말을 하면 그의 생각[念]은 살운야가 아니다.
무의언(無義言:非義言)이란 조롱하고 웃고 노래하고 근심하는 것을 그 본보기로 하여 상응하는 말이다. 이상이 구(口)의 고행이다.
030_0503_b_22L吉祥所用隨所欲中或有言善哉無常因緣壞法有後必當衰離是婬如是彼諦語佛辟支佛聲聞所說時言不要言去不諦言名謂如諦想無諦說如尼揵所說念謂師眞諦而邪道薩芸若是我師是故彼想是不要語何義薩芸若是彼師增彼如是想若說相應義佛是薩芸若亦彼妄言何義念不是薩芸若無義言名如戲笑歌憂愁爲首相應言是口苦行
【문】 의(意)의 고행은 어떤 법입니까?
【답】 의고행(意苦行)이란 탐(貪)ㆍ에(恚)ㆍ사견(邪見)이다수투로.
악행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고행이다. 이것에도 또한 세 가지 탐ㆍ에ㆍ사견이 있다. 저 탐이란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030_0503_c_09L是意苦行何法意苦行修妒路念惡行是故意苦行是亦三邪見彼貪名他所有欲得
【문】 만약에 다른 사람의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탐이라면 거듭 설하는 허물이 있습니다. 염(念)을 설명하는 중에 “염은 욕작ㆍ타작ㆍ환희작이다”라고 이미 설했기 때문입니다.
【답】 이에는 거듭 설하는 허물이 없다. 얻고자 함으로 말미암아 염이 얻고자 하는 것은 욕작(欲作)이나 이것(의고행의 탐)은 욕작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취하는 것은 이것 또한 탐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재물을 나의 소유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얻으려는 마음[意]의 집착이 있으면 이러한 집착은 탐(貪)이다.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대상으로 삼아 생각[念]이 상응하면 이는 탐이다.
에(恚)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으로서 마음속에 분노하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다.
030_0503_c_12L他所有欲得貪重說爲過念內入前已說念他作歡喜是不重說由欲得念欲得欲作是此不欲作他所有取是亦由貪是他財是我有如是著意他所有欲得著是貪他所有爲首念相應是貪恚名嬈他入念
030_0504_a_01L【문】 사견(邪見)이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답】 행상위(行相違)ㆍ과상위(果相違)ㆍ무유견(無有見)이다수투로. 간략히 말해 행상위ㆍ과상위ㆍ무유견 이 세 가지가 사견이다. 분별하자면 한량없는 인연이 있을 수 있다. 다른 것에 대해 달리 취하는 것이 사견(邪見)이다.
【문】 행상위(行相違)란 어떤 법을 말합니까?
【답】 행상위는 정부정각(淨不淨覺)ㆍ부정정각(不淨淨覺)ㆍ구일각(俱一覺)이다수투로. 행상위란 정부정각ㆍ부정정각ㆍ구일각이니, 저 정부정각(淨不淨覺)은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의행(意行)에 집착하여 애(愛)를 불애(不愛)로 보는 것이고, 부정정각은 불애를 애로 보는 것이며, 구일각(俱一覺)은 애나 불애행의 정(淨)과 부정(不淨)을 갖추어 보는 것이다.
030_0503_c_19L是何法邪見名邪見果相無有見修妒路行相違果相違無有是略三邪見分別無量因緣謂他異取是邪見略是何法行相違名行相違淨不淨覺不淨淨覺一覺修妒路行相違淨不淨覺不淨淨俱一覺彼淨不淨覺著身口意行不愛去見不淨淨覺不愛愛去俱一愛不愛行淨不淨去
【문】 과(果)는 어떠합니까?
【답】 이런 식으로 과도 설할 수 있다수투로. 이런 식으로 고과(苦果)에 대해 말해 보면 가령 고통스런 천상, 고통스런 열반이 그 예이다. 이와 같으면 정부정각이다. 또한 악취의 즐거움, 세간의 즐거움은 부정정각이다. 가령 즐겁거나 고통스런 악취와 같은 것은 구일각(俱一覺)이다.
030_0504_a_04L是果是果說修妒路以是說苦果說如苦天上苦涅槃如是淨不淨覺趣樂世閒樂不淨淨覺樂或苦趣如是俱
【문】 무견(無見)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무견이란 행(行)ㆍ과(果)ㆍ중생(衆生)에 대한 견해가 없는 것이다수투로. 행무유견(行無有見)ㆍ과무유견(果無有見)ㆍ중생무유견(衆生無有見) 이 세 가지가 무유견(無有見)이다.
가령 시여(施與)도 없고 애(愛)도 없고 선(善)이나 불선도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 행무유견(行無有見)이다.
과무유견(果無有見)이란 극악한 일이나 극악하지 않은 일을 짓더라도 과보가 없으며,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세계나 천상에 가는 일도 없다는 견해이다.
중생무유견(衆生無有見)이란 어머니나 아버지도 없고 중생이 화생(化生)하는 일도 없고 세간의 사문이나 바라문도 없다는 견해이다. 이와 같이 사견은 한량없는 행을 짓는다. 이상의 세 가지(탐ㆍ에ㆍ사견)가 의고행(意苦行)이다.
한량없는 인연으로 일체의 무선(無善:惡)을 지으니, 이러한 인연은 선(善)과는 전도(顚倒)된다. 이는 본서의 계를 설명할 때 이미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해탈도를 설했으니 알아야 한다.
바소발타 3법도(法度)의 두 번째 가운데 초도(初度)를 설해 마친다.
030_0504_a_07L云何無見名無見衆生無有見修妒路行無有見果無有見衆生無有見三無有見彼行無有見名如無有與無有愛無有善不善行作是行無有果無有見名如無有極作不極作行果報無有地獄畜生餓鬼界天上衆生無有見名如無有母無有父無有衆生化生無有世閒沙門婆羅如是是邪見無量行是三意苦行無量因緣一切無善作因緣顚倒善是本戒去如是解脫度說知婆素跋度三法度二中閒初度說盡
四阿鋡暮抄解卷上
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여덟 자라고 한 것은 한문 게송의 글자 수를 말한다.
  2. 2)중생이 행한 허물과 자신이 행한 허물을 말한다.
  3. 3)고려대장경에는 살(殺)로 되어 있다. 그러나 논의의 순서나 뒤에 이어지는 설명으로 본다면 교(敎)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