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_0337_a_02L 위대하여라, 지혜바라밀[智度]이여. 모든 성인이 이를 의지해서 통달하고 모든 종(宗)이 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대지가 만물을 포함하고 태양이 만물을 비추어주는 것처럼 모든 법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지만 자랑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유명(有名)에 매여 있으면서 이미 유명을 벗어나 있으니, 또한 무형(無形)을 병통으로 여기면서도 두 가지를 다 잊어서 현묘하고 아득하여 무심하게 주체가 없으니, 이것이 지혜의 강기(綱紀)이다. 영구한 수명은 하늘[上乾]보다 긴 것이 없지만 상자(殤子:어려서 죽은 아이)와 같이 여기고, 신묘하고 위대한 것은 허공에 솟아 있는 높은 산[陵虛]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지만 물이 막혀 있는 것[涓滯]과 동일하게 여기며, 지극한 덕은 진인(眞人)보다 큰 것이 없지만 썩은 씨앗[朽種]에 비유하고, 고원하고 오묘한 것은 세웅(世雄)보다 큰 것이 없지만 환몽(幻夢)에 비유하니, 이것을 말미암아서 논해 본다면 진실로 모든 성인의 근본[宗]이 된다. 무엇 때문인가? 도(道)를 잡아서 유(有)를 제어하는 것은 높고 낮은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유위(有爲)의 영역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여에 의거하고 법성에 노닐면서 그윽하게 명칭이 없는 것[無名]이 아니다. 진여에 의거하고 법성에 노닐면서 그윽하게 명칭이 없는 것은 지혜바라밀[智度]의 깊숙한 방[奧室]이고, 세속의 가르침[名敎]과 고원한 사상[遠想]은 지혜바라밀의 임시 숙소[遽廬]이다. 그렇지만 증득했다는 집착을 간직한 사람은 무생(無生)에 계합하지 않음이 없으면서도 눈이 아찔해지고,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차별을 버리는 것[蕩冥]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음이 없어서 함부로 비방한다. 도가 움직이면 반드시 근원으로 돌아오는데 근원에 도달함에는 우열의 다름이 없으니, 아찔해지고 비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땅하지 않겠는가. 요컨대 이 법은 정진바라밀[進度]과 함께 굴러가면서 소요하며 함께 노니는 것이니, 모든 수행과 모든 선정[千行萬定]2)이 이것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여러 가지 수행이 명자[字]를 얻어 지혜로 나아감에 이름에 걸맞도록 수행하고[全名]3)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참구하여 이루는 것이 이 지혜바라밀[此列]을 구하는 것이다. 또 경(經)에서는 나아가 제일의(第一義)에 자문을 구하여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고, 물러나 권도(權道)의 방편을 기술하여 담론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서 수행이 아무리 미세해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음이 없고 수(數)가 아무리 미세해도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언어표현[言]은 번거로운 것 같지만 각각 근본[宗]이 있고 의미는 중복되는 것 같지만 각각 주체가 있다. 자잘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비근한 가르침[邇敎]을 환영하면서 기뻐하고, 광대하고 밝은 소견을 가진 사람은 머나먼 목표를 바라보면서 숨이 막히게 된다. 오르려 하면 더욱 높아져 오를 수 없고, 건너려 하면 더욱 깊어져 측량할 수 없고, 도모하려 하면 생각으로 살필 수 없고, 찾으려 하면 끝까지 헤아릴 수 없어서 아득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진실로 대업(大業)의 연수(淵藪)라고 할 수 있으니, 오묘하다 하겠구나. 그렇지만 이것을 밝히려고 하는 경우, 문장을 상고해서 이치를 따지려는 사람은 그 취지에 어둡게 되고, 구절을 살펴서 의미를 징험하려는 사람은 그 취지에 미혹하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문장을 상고하면 같고 다름[同異]을 항상 구별해서 표현하게 되고, 구(句)를 찾으면 부딪치는 유(類)마다 항상 뜻을 구별해서 표시하게 되는데, 구별해서 표시하게 되면 최후에 성취하려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뜻을 구별해서 표시하면 처음에 나타내고자 한 의미를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에 나타내고자 한 것을 따라서 끝맺으려 하거나, 혹은 문장을 잊어버리고 실질을 온전하게 하고자 하면 대지(大智)가 현묘하게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마음을 일으킨 것[始發意]으로부터 일체지(一切智)에 이르기까지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어져서[曲成] 확실하게 나타나면 8지(地)에는 오염된 것[染]4)이 없으리니, 이것을 지(智)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혹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3해탈(解脫)로 공(空)을 관조하고, 4비(非)로 유(有)를 밝혀서 제법을 총체적으로 조감하면 이것으로 인하여 그 후에 작용을 성취하여 약과 병을 둘 다 잊으리니, 이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지(智)와 관(觀), 이 두 가지 행을 밝히면 경에 실린 30만언(萬言)이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것과 같을 것이며 어렵고 급박한 순간에도 이것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외국(外國)의 고사(高士)가 90장(章)을 가려 뽑아내어 「도행품(道行品)」이라고 하였고, 동한(東漢)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축삭불(竺朔佛)이 경사(京師)로 가지고 와서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다. 그렇지만 원본(原本)에 의지하고 뜻을 따라서 범음(梵音)을 한(漢)나라 말에 걸맞게 바꾸었을 뿐이고, 성인의 말씀을 공경하고 순종해서 끝내 수식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경(經)이 이미 가려 뽑은 것의 장지(章旨)를 합성한 것이고 음(音)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다가 역출하는 사람이 입으로 구전(口傳)한 것이니, 진실로 3장(藏)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하나의 본래 연고(緣故)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도행경(道行經)』에는 수미(首尾)가 숨어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어서 옛날의 현인들이 의론하면서도 때때로 막힘이 있었다. 주사행(朱士行)은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 원본을 찾고자 하여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원본을 얻어 창원(倉垣)으로 보내와 그것을 역출하여 「방광품(放光品)」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중복된 것을 피하여 생략하고 깎아내어 문장이 완미하고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썼다. 만약 그 문장을 모두 갖추어서 번역했다면 아마도 세 배가 넘었을 것이다. 이 「방광품(放光品)」에서는 무생(無生)이라는 말을 훌륭하게 역출하였고, 공(空)을 논의함이 특별히 교묘하였다. 전역(傳譯)은 이와 같은 것이어서 계승하기 어렵다. 두 사람5)이 역출한 것도 대지(大智)를 환하게 하여 그윽한 이치를 천양하는 데 충분하였으니, 지참(支讖)이 번역한 전본(全本)도 응당 그러했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경에서 가려뽑아 깎아내고 삭제하는 것은 해로움이 반드시 많기 때문이니, 원본에 맡겨 성인(聖人)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극한 훈계이다. 나 도안(道安)은 말학(末學)임을 헤아리지 않고 반야에 마음을 기울여 독송하고[詠]완미하면서 이 가르침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여, 그 역출된 것의 일의 근본과 시종(始終)을 조사해 보니 오히려 절상(折傷)한 것이고, 옥의 티와 같아서 만족함[厭然]에 끝이 없었다. 가령 「방광품(放光品)」이 없었다면 어떤 것을 말미암아서 이 경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선철(先哲)의 은혜를 입은 것이 많음에 길이 감사드린다. 지금 내가 본 것을 모아 구절 아래에 해석을 붙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首尾)가 숨겨지고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 나타내고, 경(經)을 역출함에 차이점이 있는 것을 보면 옳고 그름[得否]을 전평(銓評)하였으며, 원본에 의거하여 가려뽑은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감히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다. 바라건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同好]은 그 허물을 고쳐주기 바란다.
광화(光和) 2년(179) 10월 8일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맹원사(孟元士)에게 천축(天竺) 보살 축삭불(竺朔佛)이 구술(口述)로 전수해 주었다.
031_0337_b_17L光和二年十月八日,河南洛陽孟元士口授,天竺菩薩竺朔佛
그 때 말을 전역(傳譯)한 사람은 월지국(月支國) 보살 지참(支讖)이었고, 그 때의 시자(侍者)는 남양(南陽)의 장소안(張少安)과 남해(南海)의 자벽(子碧)이었으며, 여러 방법으로 도운 사람은 손화(孫和)와 주제립(周提立)이었다. 정광(正光) 2년(521) 9월 15일에 낙양성 서쪽 보살사(菩薩寺)에서 사문 불대(佛大)가 필사(筆寫)하였다.
031_0337_c_02L 옛날 대위(大魏) 영천(穎川)의 주사행(朱士行)은 감로(甘露) 5년(260)에 출가하여 도를 배워 사문이 되었는데, 국경을 나서서 서쪽으로 가 우전국에 이르러 『방광경(放光經)』의 정품(正品) 범서(梵書)와 호본(胡本) 90장(章) 60만 여언(言)을 필사하여 얻었다. 태강(太康) 3년(282)에 진(晋)나라의 이름으로는 법요(法饒)라고 하는 제자 불여단(弗如檀)을 파견하여 방광경의 호본(胡本)을 가지고 낙양(洛陽)에 이르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3년을 머물고 다시 허창(許昌)에 이르렀다가 2년 후에 진류군(陣留郡)의 경계인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에 이르렀다. 원강(元康) 원년(291) 5월 15일에 여러 현자들이 함께 모여서 논의하여 진서(晋書)로 정사(正寫)하였는데, 그때 호본(胡本)을 잡은 사람은 우전국(于闐國) 사문 무라차(無羅叉)였고, 우바새 축숙란(竺叔蘭)이 진(晋)의 말로 구전(口傳)하였으며, 축태현(祝太玄)과 주현명(周玄明)이함께 필수(筆受)하였다. 정서(正書) 한 것은 90장으로 모두 20만 7천 6백 21언(言)이었다. 그 때 창원(倉垣)의 모든 현자들과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공양하여 그 해 12월 24일에 이르러 필사를 모두 마쳤다. 경의 의미가 심오하여, 전후로 필사된 것을 참조하여 교정했지만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할 수는 없었다.
태안(太安) 2년(303) 11월 15일에 이르러 사문 축법적(竺法寂)이 창원의 수북사(水北寺)에 이르러 경의 원본[經本]을 구하여 서사(書寫)하였는데, 그때에 유통되던 품[現品] 5부와 호본(胡本)을 취해서 검토하고, 축숙란(竺叔蘭)과 더불어 다시 함께 상고하고 교정하면서 서사하여 영안(永安) 원년(304) 4월 2일에 마치니, 이것은 전후로 필사되고 교정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차이점을 바로잡은 것이어서 그 전에 필사된 것들도 이것을 취하여 다시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031_0338_a_02L 『방광경(放光經)』과 『광찬경(光讚經)』은 동본이역(同本異譯)일 뿐이다. 그 원본(原本)은 모두 우전국(于闐國)에서 나온 것을 가져온 것으로, 들어온 해의 차이도 거의 없다. 『광찬경』은 우전국 사문 기다라(祇多羅)가 태강(泰康) 7년(286)에 가져와 호공(護公:竺法護)이 그 해 11월 25일에 역출하였다.
『방광경(放光經)』은 태강(泰康) 3년(282) 분여단(分如檀)을 스승 주사행(朱士行)이 우전국에서 보내 낙양에 이르렀으니, 원강(元康) 원년(291) 5월에 이르러서야 역출될 수 있었다. 따라서 『광찬경』보다 4년 먼저 들어와 『광찬경』보다 9년 후에 역출된 것이다. 『방광경』은 우전국의 사문 무차라(無叉羅)가 호본(胡本)을 잡고 축숙란(竺叔蘭)이 전역하였는데, 말을 줄이고 일을 요약하며, 중복된 것을 깎아서 삭제하였으므로 일마다 환하게 나타나서 분명하여 보기가 쉽다. 그렇지만 간략한 것을 따르면 반드시 빠뜨리는 것이 있는 법이어서 천축의 말과 의미를 전달함[騰]에 있어서 항상 지나치게 간략한 점이 있다.
031_0338_b_02L『광찬경』은 호공(護公)이 호본(胡本)을 잡고 섭승원(聶承遠)이 필수(筆受)하였는데, 말은 천축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일을 설명함에 수식을 더하지 않아 전체를 갖추기는 했으나 표현의 질박함이 꾸밈을 억눌러 항상 일의 첫머리에 이르면 문득 불편한 점이 많으니, 모두가 반복해서 서로를 밝히고 있는데도 뜻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역출한 것을 상고해 보니 일마다 완벽하고 치밀해서 두 경이 서로서로 도와서 이익을 주고 있어, 깨닫는 바가 실로 많다. 안타까운 것은 이 『광찬경』이 91년 동안 양토(涼土:양州)에 매장되어 있다가 거의 소멸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이 나라[晋]에 도달했다는 점이니, 이 경은 거의 없어져서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방광경(放光經)』이 곧 역출되어 번화한 수도에서 크게 유통되어 사문[息心]과 거사(居士)들 사이에 서로서로 전해졌다. 중산(中山)의 지(支)화상이 사람을 창원(倉垣)에 보내 단견(斷絹:비단)에 필사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중산으로 돌아오자, 중산의 왕과 여러 스님들이 성(城) 남쪽 40리에 깃발을 세우고 경(經)을 맞이하였으니, 이 경이 세상에 유통된 경위가 이와 같았으므로 『광찬경』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옛날에 조(趙)ㆍ위(魏) 지역에서 난리를 피할 때에 『광찬경』의 제1품을 얻고는 이경이 있음을 알고, 찾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때마침 혜상(慧常)과 진행(進行)과 혜변(慧辯) 등이 천축(天竺)으로 가다가 양주(涼州)에서 필사하였으나, 송달(送達)하기가 곤란(困難)하였다. 진주(秦州)와 옹주(雍州)를 전전하다가진(晋)나라 태원(泰元) 원년(376) 5월 24일에 비로소 양양(襄陽)에 도달하였다. 내가검토하고 깊이 완미하여 이익이 되는 것이 있음을 기쁘게 여겨 문득 그 장점이 되는것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풀이한다.
031_0338_c_02L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근본이다. 정(正)은 평등하다[等]는 뜻이고, 불이(不二)의 경지에 깨우쳐 들어간다는 뜻이다. 등(等)이라는 말에 세 가지 의미가 있으니, 법신(法身)의 의미와 여(如)6)의 의미와 진제(眞際)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여(如)로 바탕[始]을 삼고, 법신(法身)으로 종(宗)을 삼고 있다. 여(如)는 그러하다[爾]는 뜻이니, 본(本)과 말(末)이 평등하게 그러하여 그러하지 않게 할 수가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다가 멸도에 드신 후에도 형상은 없으나 면면하게 이어져 항상 존재하며 유유히 자재(自在)하여 의지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여(如)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法身)은 유일하다[一]는 뜻이며 항상 청정하다는 뜻이다. 유(有)와 무(無)에 평등하게 청정하여 애초부터 명칭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戒)에 있어서는 계를 지킴도 없고 범(犯)함도 없으며, 정(定)에 있어서는 정에 들어감도 없고 산란함[亂]도 없으며, 지(智)에 있어서는 지혜로움도 없고 어리석음[愚]도 없다. 이러한 것이 없어져서 모두 잊고, 계(戒)ㆍ범(犯)ㆍ정(定)ㆍ란(亂)ㆍ지(智)ㆍ우(愚)의 여섯 가지를 모두 쉬어 깨끗한 그대로[皎] 검게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常道]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제(眞際)는 집착할 것이 없다[無所着]는 뜻이다. 안정되어 요동하지 않고, 담연하여 고요하고 가지런하며, 작위(作爲)함도 없고 작위하지 않음도 없다. 만법(萬法)은 작위함이 있으나 이 법은 심원하여 묵묵히 말이 없다. 그러므로 무소유(無所有)가 이법의 진실[眞]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만행(萬行)을 함에 상대적인 양단(兩端)을 모두 폐하여[兩廢] 문장에 부딪칠 때마다 문득 없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어리석으면 하는 것마다 바라지 않음이 없어서 종일 말하는 것이 모두 물(物)이다. 그러므로 팔만사천의 진구(塵垢:번뇌)의 문(門)이 된다. 지혜로우면 하는 것마다 묘(妙)하지 않음이 없어서 종일 말하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 그러므로 팔만사천의 도무극(度無極:바라밀)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대정(大淨)을 잡아서 지키면 만행이 바르게 되고, 바르게 되면 해침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니, 오묘하고 또 위대한 것이다. 대체로 반야(般若)를 담론함에 있어서 모두 병이 퍼져나가는 범위[疆服]를 미루어서 찾는 것은 자취[轍]7)를 구별하는 것이고, 모든 약의 효능의 범위[封域]를 찾는 것은 자취를 끊는 것이니, 그 자취[轍迹]를 중요하게 여겨서 담론하는 것은 경의 지남(指南)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남이라는 것은 가령 예를 들어 『방광경(放光經)』 「가호장(假號章)」의 머물지 않음[不住]과 「오통품(五通品)」의 뽐내지 않는 것[不貢高]과 같은 경우이니, 이것이 온갖 장애[百僻]를 건너면서도 본뜻[午]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그 자취를 정밀하게 구별해야 하고 그 가리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혜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5음(陰)에서 살운야(薩云若:一切智)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보살이 왕래하면서 나타낸 법혜(法慧)이니,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도[可道之道]이다. 모든 일상(一相)에서 무상(無相)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보살이 왕래하면서 나타낸 진혜(眞慧)이니,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常道]를 밝힌 것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可道] 있기 때문에 후장(後章)에서 “어떤 경우에는 세속(世俗)을 말하고, 어떤 경우에는 설해서 끝마쳤다[說已]”고 하였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常道] 경우에는 “혹은 무위(無爲)라고 말하고, 혹은 다시 설한다[復說]”고 하였다. 이두 가지를 동일하게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법륜(法輪)을 굴리는 중요한 덕목[要目]이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상례(常例)이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은 태시(太始) 2년(266) 11월 8일 장안(長安)의 청문(靑門:장안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 안에 있는 백마사(白馬寺)에서 천축(天竺) 보살 담마라찰(曇摩羅察)이 구술로 전수해서 역출하였다. 그 때 말을 전역(傳譯)한 사람은 안문혜(安文惠)와 백원신(帛元信)이었고, 손으로 받아 쓴 사람은 섭승원(聶承遠)ㆍ장현백(張玄泊)ㆍ손휴달(孫休達)이었다. 12월 30일 미시(未時)에 끝마쳤다.
『보요경(普曜經)』은 영가(永嘉) 2년(308) 태세수(太歲數)가 무진(戊辰)인 해 5월 본재일(本齋日:布薩日)에 보살 사문 법호(法護)가 천수사(天水寺)에서 손으로 호본(胡本)을 잡고, 입으로는 진(晋)나라 말로 선양한 것이다. 그때 필수(筆受)한 사람은 사문 강수(康殊)와 백법거(帛法巨)였다.
031_0339_a_02L 8)고려대장경에는 출현겁경기(出賢劫經記)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에 따라 출(出)을 생략하였다.『현겁경(賢劫經)』은 영강(永康) 원년(300) 7월 21일에 월지국(月支國)의 보살 축법호(竺法護)가 계빈국(罽賓國) 사문에게서 이 『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을 얻어 손으로 초본을 잡고 입으로 선양한 것이다. 그때는 축법우(竺法友)가 낙양에서 찾아와 의탁하던 중이었다. 필수(筆受)한 사람은 조문룡(趙文龍)이었다. 이러한 공덕과 복이 시방의 모든 중생에게 퍼져나가 마침내 두루두루 은혜를 입혀 죄장[罪蓋]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이 경(經)은 현겁(賢劫)의 천 분의 부처님을 차례로 나타내고, 그 분들께 머리를 조아려 도의 교화를 받고 보살이 된다는 수기[決]를 받아 무생인(無生忍)을 얻고, 일체법(一切法)을 얻으며, 시방(十方)의 중생들도 모두 그러함을 나타내고 있다.
031_0339_a_07L其是經者,次見千佛,稽受道化,受菩薩決,致無生忍,至一切法,十方亦爾。
8. 반주삼매경기(般舟三昧經記) 작자 미상
031_0339_a_09L般舟三昧經記第八 未詳作者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은 광화(光和) 2년(179) 10월 8일에 천축(天竺) 보살 축삭불(竺朔佛)이 낙양(洛陽)에서 역출하였다. 그 때 말을 전역(傳譯)한 사람은 월지국(月支國) 보살 지참(支讖)으로서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자(字)가 원사(元士)인 맹복(孟福)에게 전수하였다. 따르면서 모시는 보살로서 자(字)가 소안(少安)인 장련(張蓮)이 필수(筆受)하였다.
후에 널리 유포시키기 위하여 건안(建安) 13년(208) 불사(佛寺)에서 교정(校定)을 마치니 모든 것이 감추어지게 되어 후에 필사하는 사람들마다 모두 부처님에게 귀의할 수 있게 되었다.
031_0339_a_15L令後普著在。建安十三年,於佛寺中,挍定悉具足。後有寫者,皆得南無佛。
또 건안(建安) 3년(198년) 무자세(戊子歲) 8월 8일에 허창사(許昌寺)에서 교정하였다고도 한다.
031_0339_a_17L又言建安三年歲在戊子八月八日,於許昌寺,挍定。
9. 수릉엄삼매경주서(首楞嚴三昧經注序) 작자 미상
031_0339_a_18L首楞嚴三昧經注序第九 未詳作者
031_0339_b_02L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는 진(晋)나라 말로는 용맹복정의(勇猛伏定意)라고 한다. 이 말은 10지(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당처(當處)를 잊어버려도 공(功)이 환하게 나타나고 작위하지 않아도 힘쓰는 것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용맹복(勇猛伏)8)이라는 명칭은 드물게 고귀한 것[希貴]을 숭상하는 데에서 일컫는 말일 뿐이니, 비록3매(昧)를 이룬 공이 천하에 높다 하더라도 어찌 용맹복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곧장 종지(宗旨)를 잊어버림으로써 명칭이 수립되고, 명칭마저도 버리기 때문에 명칭이 귀해진다. 이러한 명칭으로 삼천세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전고(典誥)를 펼치니, 뭇 중생들이 바라보면서도 그 뜻에 미치지 못하고, 연찬(硏鑽)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진실로 특별하게 그 뜻에 이르고 현묘하게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호응할 수 있겠는가. 성록(聖錄)에서 말한 용맹은 진실로 오르기가 어렵다 하겠구나. 정의(定意)는 인(仁)과 지(智) 등의 자취를 훌쩍 뛰어넘고 유(有)와 무(無)를 함께 잊어버려 적정(寂靜)한 상태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비록 다시 적정(寂靜)으로써 감응한다 하더라도 혜택(惠澤)이 창생(蒼生:중생)에게 미치는 것이니, 어찌 인지(仁智)와 소통되는 것이 아니며, 현묘한 종지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적정(寂靜)이라는 것은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것[分]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릉엄경[篇]』에서 “모든 국토에 다 보편하게 퍼져 있으면서도 분별해서 알 수는 없지만 법신(法身)에 있어서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감응에 따라서 유출되어 나오는 것 같지만 법신이 우주에 충만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작위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변화하는 것[化者]은 변화하지 않는 것[不化]을 근본으로 삼고 작위하는 것[作者]을 주체로 삼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체가 되는 것이 자기 스스로 주체임을 잊었는데 어떻게 형상으로 분별해서 알 수 있겠는가. 만약 지극한 이치[至理]를 분별해서 알 수 있다면, 이는 지극한 것이 아니다. 분별해서 알 수 있다면 모자람[虧]이 있는 것이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成] 흩어짐[散]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법신(法身)은 이루어짐과 모자람이 끊어지고 합해짐과 흩어짐[合散]을 버려서, 신령스럽게 조감하는 것은 현풍(玄風:道)과 종적을 함께 하고, 원만한 정신은 태양과 함께 빛나는 것이다. 그 광명은 분별해서 알 수 없어서 만류(萬類)가 각각 다르게 관조하는 것이니, 법신이 전체를 보편하게 제도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분별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수릉엄(首楞嚴)을 말해 보자. 그 심오한 바람[沖風]은 지식을 버리는 것[知喪]을 으뜸으로 삼고, 커다란 단서[洪緖]는 말을 잊음[忘言]에 달려 있으며, 은미한 종지는 7주(住)9)를 극진하게 하고, 밖으로 나타난 자취[外迹]는 세 가지 권도의 방편[三權]을 환하게 나타내며, 현묘하고 현묘하며 가장 깊은 뜻을 통달하고, 여덟 가지 특별한 교화방편[化筌]10)을 환하게 드러냈다. 현묘함을 나타내는 고목(高木)의 이정표를 세우고, 열 가지 기준을 세워 수행의 정도를 살펴보며[伺], 현묘한 종지[妙旨]를 완미하여 습기를 조복(調伏)하고, 습기가 풀어져 없어지고 나면 현묘함을 알게 된다. 자비심을 베푼다는 생각을 버리기 때문에 자비로 윤택하게 하며, 비추어 준다는 생각을 버리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11)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은 도심(道心)을 전세(前世) 상세(上世)부터 그윽하게 심어놓았기 때문에 신묘한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지혜로 이치를 환하게 꿰뚫었고, 현상계가 공한[色空] 도리를 현묘하게 깨달았고, 왕세(往世)의 불교 경(經)ㆍ논(論)을 깨우쳐서 3승(乘)의 지위에 이르렀다. 나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疇諮], 법석에 참예하여 한 가지라도 가르침을 들으면, 감히 불민(不敏)한 점을 헤아리지 않고 구(句)의 끝에 기록해 두었다. 바라건대 후래의 현철(賢哲)이 나를 도와 산정(刪定)해 주었으면 한다.안공(安公)의 경록에는 “중평(中平) 2년(185) 12월 8일 지참(支讖)이 역출한 것이다. 경의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생략되어 있고 오직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영조정산(靈鳥頂山)에 계셨다’라고만 되어 있다”고 하였다.
10. 합수릉엄경기(合首楞嚴經記) 지민도(支愍度) 지음 [호문(胡文)은 같으며 진(晋)나라 말로는 용복정의(勇伏定意) 라고 한다. 세 가지 경전을 사부(謝敷)가 합주(合注)하였으며 합계 4권이다.]
031_0339_c_06L合首楞嚴經記第十胡文同晉音勇伏定意支慜度三經謝敷合注共四卷
이 경(經)에 본래 있는 경기(經記)에는 “지참(支讖)이 역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참은 월지국(月支國) 사람으로 한(漢)나라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에 중국에 들어왔다. 그는 박학하고 깊고 신묘하였으며 재능과 사려가 미세한 것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가 역출한 경은 종류가 많고 심오하며 현묘하였는데 실질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숭상하며 문장을 수식하지 않았다. 지금의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과 『아사세경(阿闍貰經)』ㆍ『둔진경(屯眞經)』ㆍ『반주경(般舟經)』은 모두 지참이 역출한 것이다. 또 지월(支越)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字)를 공명(恭明)이라 하며, 이 사람도 월지국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漢)나라 영제(靈帝)때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왔다. 지월은 한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마도 지참을 만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또 지량(支亮)이라는 사람이 있어 자(字)를 기명(紀明)이라고 하였는데, 지참에게 의지해서 수학하였다. 그러므로 지월(支越)은 지량(支亮)에게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지월은 재주와 학문이 심오하고 투철하였으며,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모두 통달하였다. 말세[季世]에 꾸미는 것을 숭상하고, 때로 간략한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가 역출한 경의 상당수가 문자의 화려함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문장 표현과 이치의 분석은 화려하게 꾸몄으면서도 의미를 환하게 나타내었으니, 진실로 심오하게 깨달아 들어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난리가 들끓자 남쪽으로 건너가 오(吳)나라로 망명하였다. 황무(黃武, 222~228) 연간으로부터 건흥(建興, 252~253) 연간에 이르기까지 역출한 모든 경이 수십 권으로, 각각 별전(別傳)과 기록이 있어서 이 경을 역출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본이 또 있는 듯하다.
031_0340_a_02L그런데 이 『수릉엄경(首楞嚴經)』은 각각 같지 않은 점이 조금 있다. 문사(文辭)에 풍부함과 간략함이 있고, 문장에 진음(晋音)과 호음(胡音)이 있으나, 서로 비교해서 검토해 보면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르게 역출한 것으로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아마도 지월(支越)이 지참(支讖)의 번역에서 문사가 질박하고 호음(胡音)이 많은 것을 꺼려서 견해가 다른 것은 깎아내어 교정하고 견해가 같은 것은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은 것일 것이다. 두 사람에게 각각 기록이 있다. 이 한 가지 본(本)은 모든 본 가운데에서 문사(文辭)가 가장 간략하고 편리하며, 또 호음(胡音)이 적어서 세간에 보편하게 유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월이 교정한 것이다. 대진(大晋) 초에 이르러 사문 지법호(支法護)와 재가인 축숙란(竺叔蘭)이 이 경을 다시 번역하였다. 의미를 추구해 보면 서로서로가 밝혀 주는 점이 있으나, 3부(部)를 열어서 검토하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어서 겸하기가 어려우니, 배우는 사람들이 곧바로 대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 지월이 산정한 것을 어머니로 삼고, 지법호(支法護)가 역출한 것을 아들로 삼아 거기에 축숙란이 번역한 것을 이어서 기록하였다. 문장이 없는 경우에는 그 때마다 그 자리에 그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구별하였다. 혹은 문장과 의미가 모두 같은 경우가 있고, 혹은 의미는 같지만 문장에 소소한 증감(增減)이 있어서 중복해서 쓰기에 부족한 경우에는 혼합하여 같은 것으로 삼았다. 비록 큰 취지를 파악함에는 이익이 없지만 부(部)ㆍ장(章)ㆍ구(句)를 나눔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용복정기(勇伏定記)』에는 “원강(元康) 원년(291년) 4월 9일, 돈황보살(燉煌菩薩) 지법호(支法護)가 손으로 호경(胡經)을 잡고, 입으로 『수릉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을 송출하였으며, 섭승원(聶承遠)이 필수(筆受)하였다”고 하였다. 바라건대 사부대중[四輩]이 [세 가지 본(本)을] 총괄해서 모아 봉행하고 선양하면서 뜻의 같고 다름을 살펴보게 하고자 한다.
031_0340_b_02L 함안(咸安)11) 3년(373) 계유세(癸酉歲)에 양주(涼州) 자사(刺史) 장천석(張天錫)이 양주에 있을 때에 이 『수릉엄경』을 역출하였다. 그때 월지국(月支國) 우바새 지시륜(支施崙)이 손으로 호본(胡本)을 잡았다. 지시륜은 여러 경전에 종합적으로 박통(博通)하였는데, 특히 『방등삼매경(方等三昧經)』에 뛰어났으며, 그가 지향하는 학업은 대승 교학이었다. 그는 『수릉엄경(首楞嚴經)』ㆍ『수뢰경(須賴經)』ㆍ『상금광수경(上金光首經)』ㆍ『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을 역출하였다. 그 때 양주(涼州)에 있었는데, 양주에 있는 정청당(正聽堂) 담로헌(湛露軒) 아래 모였다. 그 당시에 번역한 사람은 구자왕(龜慈王)12)의 세자인 백연(帛延)으로 진음(晋音)과 호음(胡音)에 뛰어났다. 백연은 여러 전적을 해박하게 이해하였으며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겸해서 종합적으로 수학하였다. 필수(筆受)한 사람은 상시(常侍)인 서해(西海)의 조소(趙潚)와 회수(會水)의 장관 마혁(馬奕)과 내시(內侍) 내공정(來恭政)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뛰어난 덕을 갖추고 있었으며 도덕(道德)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사문 석혜상(釋慧常)과 석진행(釋進行)도 있었다. 양주(涼州) 자사(刺史)가 스스로 말을 이어 문장을 표현하였는데 문사(文辭)와 종지(宗旨)가 원본에 걸맞도록 하고, 문장에 수식을 더하지 않았다. 문장을 수식하면 범속함에 가깝고, 질박하면 도에 가까우니, 문장의 수식과 질박함을 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이라야 가능하다.
031_0340_c_02L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는 신묘한 도(道)로 나아가는 용진(龍津)이며 성스러운 덕의연부(淵府)이다. 신묘한 물건은 희미(希微)해서 현상계[器像]의 표현 수단으로는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윽하고 현묘하며 아득하고 깊으니, 어떻게 망정(妄情)의 언어로 의론(議論)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9위(位)의 으뜸이 되어 허공에 오르고 만행(萬行)의 결과로써 원만하게 성취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를 헤아려 현명함을 궁구하며 바람[殆庶]을 끊어 마음을 고요하게 통제한다. 이로써 10지(地)를 영대(靈臺)로 삼고, 법운지(法雲地)를 빗장[扃鐍]으로 삼으면 형상이 없고[罔象] 상대적인 개념이 끊어진 절대경지[環中]가 신령스러운 모습[神圖]으로 저절로 밖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비록 잔잔하고 맑은 하나이지만 감응하는 것은 두루 하지 않음이 없고, 정(定)은 응축되어 정지한 듯 고요하지만 중생(衆生)에 감응하여 이르러 간다. 그러므로 종본(宗本)을 밝히면 3달(達)이 함께 고요해지고, 훌륭하게 구제하는 것[善救]을 논하면 6도(度)가 모두 행해지며[彌綸], 위엄의 효과를 논변하면 강마(强魔)가 겁을 내어 사라지고,13) 수많은 변화를 말하면 백억 개의 별처럼 수효가 많아지리라. 이에 용상(龍上)이라고 불리게 되어도 자신의 종적을 감추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하여 3승(乘) 모두에게 가르침의 법[像]을 알려주어 유(有)와 무(無)의 상대적인 개념을 멸진(滅盡)하게 한다. 이 모두는 선정(禪定)에 참입(參入)한 그윽한 공효(功效)이고, 불도(佛道)를 이룬 힘이 현상[事]으로 나타난 것이고, 방편으로 제도하는 추기(樞機)이면서 강령이고, 용복(勇伏)의 큰 요점이다. 나집(羅什)법사는 어려서부터 하는 말마다 도(道)에 부합하였고, 생각마다 법문(法文)을 통달하였다. 옛날에 관서지방[關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이 경을 역출(譯出)하였는데, 구름처럼 유포된 이래 다투듯 퍼져 나갔다. 중국이 중흥하고 국운이 열려 세간의 도[世道]가 다시 창성하자 [이 경을] 선양함이 갈수록 번성해져서 날로 달로 더욱 성대하게 되었다. 태재(太宰) 강하왕(江夏王)은 여러 전적을 두루 섭렵하여 토론하는 것이 깊고 명민하였는데, 항상 이 『수릉엄경』을 열람하면서 특별히 깊고 원대한 정(情)을 가졌다. 나 석홍충(釋弘充)은 견문(見聞)이 대롱[管]처럼 좁고 우매하지만 일찍이 현묘한 법석[玄肆]에 참석했고, 선대 종장(宗匠)의 법석에 참예해서 만나보아 음운의 규칙[音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유가의 서적[儒緯]을 참청(參聽)하여 이 경의 문의(文意)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황송(皇宋)의 대명(大明) 2년(458) 태세(太歲)가 엄무(奄茂:戌)이던 해에 법언정사(法言精舍)에서 간략하게나마 주해(注解)를 하였다. 익히지 않은 것을 전하는 허물을 면하기 바라며, 감히 여시아문(如是我門)의 의미를 흠모하는 바이다. 반드시 잘못된 점[紕繆]이 있을 것이니, 현명한 군자(君子)께서 바로잡아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031_0341_a_02L 담발게(曇鉢偈)는 모든 경의 요의(要義)이다. 담(曇)이라는 말은 법(法)을 말하고 발(鉢)은 구(句)를 말한다. 그리고 『법구경(法句經)』은 따로 여러 부(部)가 있는데, 9백 게(偈) 혹은 7백 게 및 5백 게로 된 경우도 있다. 게(偈)는 글의 말미에서 내용을 매듭짓는 것[結語]으로 시(詩) 혹은 송(頌)과 같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어떤 일[事]을 보시고 지은 것인데, 한 번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각각 본말(本末)이 있어서 여러 경전에 산재해 있다. 일체지(一切智)이신 부처님의 본성은 대자대비하시니 천하의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세간에 출흥(出興)하여 도의 의미[道義]를 활짝 열어서 나타내어 사람들을 해탈시키려 하신 것이다. 모두 12부(部)의 경으로 그 요점을 총괄하고, 따로 4부(部)의 아함(阿含)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세간을 떠나신 후에 아난이 전한 것이다. 권(卷)의 대소(大小)에 관계없이 모두 부처님의 처소에서 ‘이와 같이 들었다[聞如是]’고 말하고, 그 말씀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후에 5부(部)의 사문이 각각 경(經) 중에서 4구 게와 6구 게를 가려 뽑아 모아서 그 의미를 차례로 비교해서 조목을 나누어 품(品)을 만든 것인데, 12부의 경에서 채록하지[斟酌] 않는 것이 없지만 적당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 법구(法句)라고 하였다. 대체로 모든 경전은 법(法)을 설명하는 말이니, 법구(法句) 또한 법언(法言)이라는 말과 같다. 최근에 갈씨(葛氏)가 7백 게를 전하였는데, 게의 의미가 지극히 심오하여 번역하는 사람이 역출하면서 상당 부분을 뒤섞어 만연하게 되어 의미가 모호하였다. 부처님은 만나기도 어렵고 그 문장을 듣기도 어려우며, 또 모든 부처님께서 출흥(出興)하신 것도 모두 천축이었다. 천축의 언어는 한(漢)나라와 소리가 다른데, 그 글[書]을 천서(天書)라 하고 그 말을 천어(天語)라고 하며, 사물에 대한 명칭이 같지 않아 충실하게 옮기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 남조(藍調)ㆍ안후(安侯) 세고(世高)ㆍ도위(都尉) 안현(安玄)ㆍ엄불조(嚴弗調)가 호어(胡語)를 한(漢)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그 핵심[體]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니, 이 때문에 계승하기 어려웠다. 후에 전해진 것은 비록 치밀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실질적인 것을 숭상하고 귀하게 여겨 대강이나마 큰 취지[大趣]를 나타내었다. 처음 것은 유기난(維祇難)이 역출하였는데, 유기난은 천축에서 황무(黃武) 3년(224)에 무창(武昌)으로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 5백게본(百偈本)을 받고 그의 도반[同道] 축장염(竺將炎)에게 번역을 청하였다. 축장염은 천축의 말은 잘하였지만 아직 한나라 말은 완전하게 깨치지 못하여 그가 전역한 말은 혹 호어(胡語)에는 들어맞지만 혹 의미에 맞는 음으로 나타내어 질박한 직역에 가까웠다.
031_0341_b_02L나는 처음에 그의 말이 우아하지 못한 점을 싫어하였는데, 유기난(維祇難)이 “부처님의 말씀은 그 의미[義]를 따르고 수식하지 않아야 하며, 그 법(法)을 취하고 장엄하지 않아야 하니, 경을 전역하는 사람은 마땅히 쉽게 알도록 하고, 그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훌륭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노씨(老氏:老子)는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하며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다’고 하였고, 중니(仲尼)도 또한 ‘글은 말을 극진하게 전하지 못하고 말은 의미를 극진하게 전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말씀한 뜻을 밝히는 것은 심오하고 깊어서 한이 없으므로 지금은 호어(胡語)의 의미를 전해서 실제로 경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나 자신의 힘을 다해서 전역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받아서 적고 본지(本指)에 따르고 문장에 수식을 더하지 않았으며, 전역한 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빼고 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빠진 부분도 있고 역출하지 않은 것도 많다. 그러나 이 경은 비록 문사는 질박하지만 뜻은 깊으며 문장은 요약되어 있지만 의미는 넓고, 일은 모든 경전을 거두어들였고, 문장[章]에는 근본이 있으며 문구[句]에는 의미가 갖추어져 설해져 있다. 천축에서는 불도의 수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법구(法句)를 배우지 않으면 차례를 뛰어넘는 사람[越敍]이라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처음 나아가는 사람의 홍점(鴻漸)이고 깊이 들어간 사람의 오장(奧藏)이어서 몽매한 이의 미혹을 분별하여 일깨워 주고 사람을 인도하여[誘人] 스스로 설 수 있게[自立] 해주는 것이니, 배우는 노력은 미미하나 포함하고 있는 뜻은 광대하니, 실로 오묘하고 요점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옛날에 이것을 전역할 때에는 역출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때마침 장염(將炎)이 찾아와 그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여 이 게(偈) 등을 얻고, 또 13품(品)을 얻어 과거의 것을 모두 교정하니 증가된 것이 있다. 그 품목(品目)에 차례를 정하니, 합해서 1부(部) 39편(篇)에 모든 게(偈)가 752장(章)이 되었다. 바라건대 더욱 보충해서 가르침을 듣는 것을 함께 넓혀갔으면 하는 바이다.
14. 아유월치차경기(阿維越致遮經記)14) 역출된 경의 뒤에 부기함[진(晋)나라 말로는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이라고 하는데 4권임]
태강(太康) 5년(284) 10월 14일 보살 사문 법호(法護)가 돈황(燉煌)에서 구자국(龜玆國)의 부사(副使) 미자후(美子侯)로부터 이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의 범서(梵書)를 얻어 입으로 진(晋)나라 말로 풀고 사문(沙門) 법승(法乘)이 필수하여 유포시켜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듣고 알도록 하였다.
태강(太康) 10년(289) 12월 2일 월지국(月支國) 보살 법호(法護)가 손으로 범서(梵書)를 잡고 입으로 진나라 말로 선양하였으며, 섭도진(聶道眞)이 필수(筆受)하여 낙양성(洛陽城) 서쪽의 백마사(白馬寺)에서 처음으로 역출하였다. 절현원(折顯元)이 필사해서 공덕을 유포하여 일체 중생이 공덕을 입어 도탈(度脫)하도록 하였다.
031_0341_c_02L 6획(畫)이 서로 의지함에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듯이 바뀜이 없고 두 글자[二字]를 한 번 토함에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비록 글이 말을 극진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나타낼 수 없고, 말은 뜻을 극진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나타낼 수 없다, 이 때문에 잘 듣고 잘 생각하여 이 이익과 기쁨[利喜]을 이어받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이것을 공경스럽게 수지(受持)하는 것이다. 가령 읽거나 외우거나, 이미 설한 것이나 지금 설한 것이 한마디의 말[一音]과 하나의 게[一偈]에 이르기까지 피안에 이르는 배와 교량[舟梁] 아님이 없고, 한 번 찬탄하고 한 번 칭찬하는 것이 그대로 법칙[輪軌]이 된다. 하물며 저 5력(力)15)의 방정함과 원만함으로 4섭법(攝法)을 행함에 게으르지 않으며, 방편문(方便門)을 열어주고 진실상(眞實相)을 제시하며, 방등(方等)의 미묘한 설법을 유포시키고 깨달음[菩提]의 지극한 인(因)을 얻는 경우임에랴. 이 보배로운 연못[寶池]에 목욕하고 법의 횃불[法炬]에 쪼이면 향기로운 구름이 서로 따르고[靡靡] 지혜의 이슬이 흘러넘칠 것이니, 이 모두가 가야(伽耶)의 묘성(妙城)에서 나온 것이고 사라(娑羅)의 보배나무에서 일어난 것이다. 건안전하(建安殿下)는 광명을 내포하고[含章],16) 타고난 성품에 바탕을 두어 덕을 기르고 체(體)를 완성하였으니, 그 자애로운 음성[憓聲]은 추수(秋水)보다도 넘쳐흐르고, 아름다운 의로움[美義]은 겨울날의 태양보다 빛났으며, 사적(事績)은 조구(祖丘)와 토포(兎圃:兎園, 정원의 이름)보다 높았고, 이름은 전(前)의 의(意)와 후(後)의 창(蒼)보다 뛰어났다. 자기의 것을 덮어내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였으며, 자신[我]을 잊어버리고 중생을 구제하고[濟物], 모든 것을 통달하고[傍通] 겸해서 천하에 선을 행하여[兼善天下] 걸림도 없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마치 텅 빈 골짜기가 반드시 메아리로 응하는 것과 같고 큰 종[洪鍾]이 자신을 비워 다른 것을 흡수하는 것과 같았으며, 법을 바로잡고 도(道)를 넓히며, 선(善)을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서 현재에 드러난 묘과(妙果)의 인[顯因]을 영겁(永劫) 동안 왔기 때문에 묘과(妙果)를 이 생(生)에서 받았다. 훌륭한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에 뜻을 두고 의지하는 바에 마음을 써서 공(空)과 유(有)를 오묘하게 통달하고 권(權)과 실(實)을 심오하게 분별하였다. 그런데 옥체(玉體)가 편안하지 못하여 가을 늦더위에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러나 인(仁)을 행하면서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초나라의 임금은 나날이 그 병세가 치유됨을 나타냈고, 덕(德)을 베풀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漢)나라의 재상은 그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었다. 계수나무 잎과 거북의 뇌도 진실로 풍한(風寒)을 쉽게 소멸시킬 수 있고 여지(荔枝)의 꽃과 봉황의 골수로도 급하게 뛰는맥(脈)을 진정시킬 수가 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지혜로운 몸을 점점 이루어가고 ,선근(善根)을 숙세(宿世)에 심어 놓았으니 장(腸)과 위(胃)를 씻어내는 수고를 들일필요도 없고, 안색(顔色)을 살피고 음성을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광주(廣州) 남해군(南海郡) 백성 중에 하규(何規)라는 사람이 있었다. 태세(太歲)가협흡(協洽:未)이고, 달[月]이 황종(黃鍾)17)에 있던 천람(天監) 14년(515) 10월 23일, 예장군(豫章郡) 호익산(胡翼山)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다행히 이 사람은 방출(放出)된 사람도 축출당한 신하도 아니라 신선을 찾고 은자(隱者)를 부르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산봉우리를 십 리쯤 오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오는 것 같았다. 구부러진 산길을 따라 가려는데 그 앞에 맑은 시냇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물은 마치 연못[止水] 같더니, 곧 깨끗한 물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곧바로 옷자락을 허리춤까지 걷어 올리고 바지를 추켜잡고 건너가려고 하였다. 아직 채 건너지 않았을 때 홀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냇물 서쪽 편에 한 사람의 장자(長者)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하규(何規)에게 건너지 말라고 말하여, 하규는 그 때 즉시 멈추고 그대로 있었다. 그 사람은 얼굴이 검푸른 색[正靑]이고, 맨발에 신발을 신지 않았으며, 나이는 팔구십 쯤 되어 보였다. 얼굴은 주름투성이었고, 턱수염의 길이는 5~6촌 쯤 되었으며, 콧수염의 길이는 턱수염의 반 정도였다. 귀가 눈썹보다 올라가 있었고, 눈썹이 모두 늘어져 눈을 덮고 있는데 눈썹의 긴 털은 길이가 2~3촌이었으며 바람결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입술색은 매우 붉었고, 말소리는 울리는 듯하면서 맑았다. 손톱은 갈색[正黃色]이었고, 손가락에 나 있는 털도 길이가 2~3촌이었다. 위에는 붉은 베로 지은 배자[帔子:저고리 위에 입는 소매 없는 옷]를 걸치고 있었고, 아래에는 붉은 베로 만든 니원승(泥洹僧:치마처럼 넓은 하의)을 입고 있었다.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다가 멀리서 하규에게 던져 주었다. 하규는 받들어 지니고 그를 바라보면서 삼배의 예를 올렸다. 그가 하규에게 말하였다.
031_0342_b_02L“이 경을 건안왕(建安王)에게 드리도록 하라.” 그리고는 겸해서 왕의 성자(姓字)를 말하였다. “왕께서 이 경을 받으시면 마땅히 삼칠일 동안 숙재(宿齋)18)를 올려야 한다. 만약 재(齋)를 올리는 법을 알지 못하면 하림사(下林寺)의 부공(副公)에게 묻도록 하라. 부(副)법사는 계행을 엄하게 지키고, 마음이 편안하여[恬憺] 무위(無爲)에 머물며 기욕(嗜慾)를 버렸고, 권력자[有力者]와 비천한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야채와 콩잎으로 스스로 자족하며, 고요히 선정에 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이 장자(長者)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떠나갔는데 열 걸음쯤 가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가규(何規)가 책을 펴서 공손하게 살펴보니, 제명이 『혜인삼매경(慧印三昧經)』이었다. 경의 종지[經旨]는 지극한 법신(法身)은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는다는 것이니, 이치는 모든 부정[百非]을 초월하였고, 의미는 이름과 형상[名相]을 뛰어넘었으며 고요함[寂]은 법상(法相)과 같고, 신묘함은 진여와 같았다. 이것은 지혜가 이치와 명합(冥合)하면 마치 영원불변한 인장[恒印]을 지닌 듯하며, 마음이 빛나서 고요하게 응축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3매(昧)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그 뒤에는 또 『제제방등학경(濟諸方等學經)』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또 “천축(天竺)의 승가(僧迦)라고 하는 살화비(薩和鞞)가 해호왕(海虎王)에게 준다”라고 써 있었다. 경의 종지는 지극한 궁극의 가르침[至敎]을 유통시킬 때에 궤법(軌法)에 체(體)가있는 것을 말하고 보살[大士]은 이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을 삼을 것을 엄하게 교시한 것이니, 모든 중생[蒼民]을 제도하려면 마땅히 방등(方等)의 가르침을 홍포해야 됨을 말한 것이다. 방등은 대승경(大乘經)의 총칭[通名]으로 구경(究竟)에 이르는 광대한 취지[弘旨]이다. 그 경전[軸]에는 “돈황의 보살 사문 지법호(支法護)가 역출하고 축법수(竺法首)가 필수(筆受)하였다. 모두 한 권으로 필사하여 유통시킨다”고 써 있었다. 축(軸)은 순수한 칠(漆)을 사용했고 필적[書]은 매우 굳세고 간결했으며[緊潔], 붓을 운용하는 서법[點製]도 볼 만한 것이었다. 의취(義趣)를 궁구하고 찾음에 있어서 혹은 숨겨 놓기도 하고 혹은 환하게 나타내기도 하였다. 첫머리에 “나열산(羅閱山:王舍城 영축산)에 있었다”고 칭하고, 또 “다린니행(陀隣尼行:다라니행)과 일체법(一切法)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無來無去] 머물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非住非止]”고 서술[著]하였다. 이것은 축악(鷲嶽:영축산)과 학림(鶴林:사라수)의 별기(別記)이고 보전(寶殿:重閣講堂)과 고원(孤園:給孤獨園)의 후술(後述)이니, 옥검(玉檢)과 다르지 않고 보함(寶函)과 차이가 없으며, 이치는 형상과 소리가 없는 희미(希微)의 세계를 뛰어넘었고 언사가 심오하여 깊은 것을 낚아 올리고 먼 것을 이르러 오게[鉤致]19)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의 정설(正說)이고 이단(異端)이 아니다. 왕준(王遵)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손에 얻은 것과 안청(安淸:안세고)이 160품의 경을 역출한것이라 할지라도 이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대왕(大王)은 목욕하고 수지(受持)하여 받들고, 무릎 옆에 가까이 두고 깊이 연구하고 익혔으며, 많은 양을 서사(書寫)하고 광대하게 서술하여 현묘한 종지(宗旨)를 천양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의왕(醫王)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약수(藥樹)이다. 이에 눈[眼]을 깜박거릴 겨를도 없고, 입을 쓰게[苦]하는 노고를 들이지도 않고 6술(術)을 버리고 10무(巫)를 물리치게 되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흙다리[圯] 위에서 편서(編書)20)를 주었고, 어떤 사람은 계곡 안에서 췌술(揣術)21)을 받았다. 우언(寓言)이 있는 경우도 혹은 꿈을 빌리기도 하는데, 어떤 선인(善因)도 없이 감응이 이와 같이 환하게 일어나 나타났으니 지극하다 할 것이다. 재능이 열등한 사람이 명(命)을 받아서 감히 더럽고 비천한 몸으로 어리석음을 이끌고 훌륭한 도[上道]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 사(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벼락 치는 소리, 지진의 울림과 같은 가르침을 죽간(竹簡)에 기록하고 청실로 묶었으니[靑編] 언어가 아니면 어떻게 가르치리오. 자취가 없으면 전할 수 없다네. 이것은 미묘한 상(象)을 의지하고 실로 그윽한 통발에 기탁한 것이며 지혜의 등촉으로 비추어주고 보선(寶船)으로 건네주는 것이네. 간절하고도 지극하여라 감응이 이에 원만하였네. 짙은 구름[靉靆]이 덮이고 광대한 물결이 스며드는데 불에 타는 사람을 구해 주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며 번뇌가 덮은 것을 제거해 주고 번뇌가 얽어맨 것을 녹여 주니 빛나고 빛나 응(應)ㆍ한(韓)을 비추어 주고 꽃답고 꽃다워 하(河)ㆍ초(楚)를 밝혀 주었네. 소나무 홀로 서 있고 계수나무 울창하니 봉황이 깃들고 붕새가 날아오르네. 들판을 비추고 조정(朝庭)을 빛나게 하며 산을 윤택하게 하고 물가를 마르게 하니 수원(水源)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에 영원해지고 한 삼태기 부은 흙이 쌓여 (산이 되었네). 울창하고 무성하여 줄기가 되고 가지가 뻗어 올라 하늘에 다다르니 진실한 마음[誠]을 범표(梵表)22)에 기탁하고 훌륭한 마음을 선하(禪河)에 의탁하였네. 부처님[能仁] 발에 머리를 대어 경례를 올리니, 마음은 묘각으로 곧장 향하네. 이로써 막히고 물든 번뇌를 버리니 이것이 진구(塵垢)의 혼탁함을 버리는 것이라네. 어찌 진실하지 않은 세계[非眞]라 하여 향하지 않으며, 속되지 않은 세계[非俗]라 하여 등지겠는가. 한번 감각과 인식작용인 수(受)ㆍ상(想)을 잊어버리면 감관의 대상인 미(味)ㆍ촉(觸)도 버리게[捐] 된다네. 덕(德)이 있으면 보답하지 않음이 없고, 감응하면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 저 신묘한 비결[訣]을 토해내어 나에게 현묘한 요점을 보여주시네. 미혹을 버리고 번뇌가 그치면 영화로움과 젊음이 남아 북두성이 항상 빛나는 것과 같아지고 동쪽의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아진다네.
나 승우(僧祐)는 어려서부터 경(經)과 율(律)을 연구하여 제부(諸部)의 깊은 의취[奧義]를 은근히 엿보았다. 다만 일체 만물이 변화하며 바뀜에 따라 만사(萬事)가 잘못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금(古今)의 같고 다른 점[同異]은 부딪치는 부류마다 모두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어(魚)가 잘못되어 로(魯)가 되고, 도(陶)가 잘못되어 음(陰)이 되기도 한다. 조사해보았더니, 진(晋)나라 말기 이래로 관중(關中)의 모든 현인들이 편찬한 경록(經錄)에서 “『혜인삼매경(慧印三昧經)』은 지겸(支謙)이 역출한 것이고, 『제방등대승학경(濟方等大乘學經)』은 법호(法護)가 역출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성법인경(聖法印經)』 후기(後記)에는 “진(晋)나라 원강(元康) 4년(294)에 보살 사문 지법호(支法護)가 주천(酒泉)에서 이 경을 송출하고 제자 축법수(竺法首)가 필수(筆受)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규(何規)가 얻은 경본(經本)에는 이 두 경이 같은 권[同卷]으로 되어 있다. 『방등경』 첫 머리에 “법호가 역출하였다”라 하고, 『삼매경』 말미[亂]에 “지겸이 역출했다”고 쓴 것은 실로 옮겨 적어 묶으면서[編寫] 그렇게 된 것이지 외람되게 속이려 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 번 살펴서 열람하면 혹시 의혹을 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부족하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을 기록해서 말미에 군더더기로 남겨 둔다. 그러므로 별기(別記)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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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후기(後記)에 “사문 축법호(竺法護)가 경사(京師)에서 서국(西國)의 적지(寂志)를 만나 이 경을 송출(誦出)23)하였다. 이 경 뒤에 여러 품(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잊어버렸다. 곧바로 호(胡)의 음(音)을 선현(宣現)하는 사람이 진(晋)나라 말로 바꾸었고, 다시 그 원본을 얻어 보충하여 갖추어지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태강(太康) 10년(289) 4월 8일 백마사(白馬寺)에서 섭도진(聶道眞)이 대면(對面)해서필수(筆受)하였고, 여러 가지로 도운 사람은 유원모(劉元謀)ㆍ부공신(傅公信)ㆍ후언장(侯彦長) 등이었다.
선악의 인과가 운행하여 합치하는 것은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지은 업에 따라 받는 분명한 과보에 차이가 있으니, 현세(現世)에 받는 업보와 중세(中世)에 받는 업보와 후세(後世)에 받는 업보이다. 9색(色)의 깊은 은혜를 베풀어 천비(天妃)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외로운 새가 왕에게 몸을 던져 목숨을 보전했지만, 몸은 5월(刖)24)이라는 지극히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니, 이것은 현세(現世)에 받은 업보이다. 여러 무리들이 깊은 골짜기에 빠져서도 마음은 부침(浮沈)을 거듭하며[淪漂] 바꾸지 않으며, 몸은 여러 세(世)를 지나면서 쌓은 재앙으로 쓰라린 고통을 겪으면서도 왕자가 눈을 잃은 인연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중세(中世)에 받은 업보이다. 아란(阿蘭)이 무상천(無想天)의 재앙에 걸려서 순환[始終]에 대한 끝없는 미혹[永惑]을 지니며, 마침내 날개 달린 광포한 이리가 되어 새나 물고기[飛沈]에게 괴로움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은 후세(後世)에 받은 업보이다. 이 때문에 성인께서 신령스러움을 내려주신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업무에도 참여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것은 청정하고 밝아서 분명한 것이다. 3세(世)에 걸쳐서 약상(弱喪:어려서부터 타향을 떠도는 사람)의 무리들을 현묘하게 조감하고, 내세에 그 몸을 상하는 허물이 있을 것임을 자상하게 말해 주어[記] 그러한 미혹을 안전히 단련하는 방에 취향해서 들어가도록 인도[引]25)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떠나신 후에 아육왕(阿育王)이 왕위에 올라 염부제를 다스림에 광명을 6합(合)에 드리웠으며, 신성한 사원에는 여래의 도상(圖像)을 장식했다. 팔만사천의 나한이 세상을 다스려 수억의 중생을 구제하고 국왕은 존경받는 스승이 되니 현묘한 교화가 흘러 넘쳤다. 이에 만민(萬民)이 우러러 모시기를 그치지 않았고 천지(天地)의 신들은 왕에게 공경을 올리고 의지하는 것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법익(法益)은 숙세에 커다란 선업을 심었기 때문에 왕궁에 태어나 용모가 특별히 뛰어났는데도 다시 이와 같은 과보를 받았으니,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모두 알아야 한다. 진(秦)나라의 상서령(尙書令) 보국장군(輔國將軍) 종정경(宗正卿) 영성문교위사(領城門校尉使)이며 사예교위(司隸校尉)인 요민(姚旻)은 남안군(南安郡) 사람으로 요소(姚韶)의 둘째 친형(親兄)이며 자(字)를 경의(景㠜)라고 한다. 학문[文]은 유가(儒家)의 사표(師表)가 되어 공적이 천재(千載:千年)에 빛났고, 무술[武]은 무리 중에 발군이어서 환하게 홀로 빛났으며, 모든 언어를 그윽하게[冥]26) 통달하여 변설과 임기응변[辯機]이 자유자재하였고, 성품은 순수하고 정(情)을 따르면서도 자재롭게 높이 비상하는 듯하니 짝할 사람이 없었다. 품고 있는 덕(德)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지니고 있는 범절[範]은 흉내내기 어려웠고, 뛰어난 문재[逸翰]는 뭇 인재들 중에 혁혁하였으며, 용과 같은 위엄은 보검의 칼날[昆鋒]보다도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영원한 미혹에 빠져서 구제받지 못하는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선대의 뛰어난 유적(遺迹)을 이어받아 말세의 세속에 현묘한 종지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천축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하여 이 인연의 근본을 설한 경전을 역출하였다. 진(秦)나라 건초(建初) 6년(391) 태세가 신묘(辛卯)이던 해에 안정성(安定城)에서 2월 18일에 시작하여 25일에 이르러 끝마쳤다. 호본(胡本)은 343수로(首盧:偈)였는데 한문으로 전역하여 필사하니 일만 팔천 언(言)이 되었다.
나 축불념(竺佛念)도 호음(胡音)을 번역하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를 표현하는 일은 실로 어렵다. 혹은 원문을 떠나서 의역하기도 하고, 혹은 정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막히면 겉으로 소통시키기도 하고, 혹은 독송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점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고사를 생략하고 뜻을 완곡하게 갖추어 놓기도 한다. 바라건대 뒤에 배우는 인재들이 죄와 복의 인과가 썩어 없어지지 않음을 조감해서 살펴보게 하고자 한다. 만약 조금[毫氂]이라도 윤색(潤色)한 곳이 있다면 그 조짐이 싹트는 단계에 모두 새겨 놓아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서문을 쓰는 바이다.
031_0343_c_02L 『미밀지(微密持)』와 『다린니(陀隣尼)』27)와 『총지(總持)』의 세 가지를 합한 본상본(上本)은 『다린니』이고 하본(下本)은『총지』와 『미밀지』이다. 『불설무량문미밀지경(佛說無量門微密持經)』『불설아난다목가니가리다린니경(佛說呵難陀目佉尼阿離陀隣尼經)』, 또는 『성도항마득일체지(成道降魔得一切智)』라고도 한다.두 가지 본에 다 이와 같은 이름이 있는데, 모두 따로 역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별섬서대담비기(別剡西臺曇斐記)』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이 경(經)에는 모두 네 가지 본(本)이 있다. 세 가지 본에는 각각 두 가지 이름이 있고, 나머지 한 가지 본에 세 가지의 이름이 있는데, 모두 다음에 열거하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에는 문(文)과 구(句)가 서로 차이나기도 하고, 어떤 본에는 한음(漢音)으로 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혹은 의미에 부합되는 말을 골라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각각 어긋나는 경우가 있는데, 의미에 의거하고 문장을 따랐기 때문에 모두가 원본의뜻에 동일하게 합치한다. 서로 다른 곳은 경의 끝부분에 열거된 득법(得法)의 이익[利]과 3승(乘)의 단계에 오른 사람의 수(數)와 또 땅이 흔들린다거나[動地] 꽃이 비오듯 쏟아진다거나[雨華] 제천(諸天)이 음악을 연주하고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 등은 대부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아서 의미가 상세하지 않은 점이 있다. 첫째 본[一本]은 첫 번째 이름이 무량문미밀지지(無量門微密之持)이고, 두 번째 이름이 성도항마득일체지(成道降魔得一切智)이다. 이 첫째 본은 그 이름이 세상에 유포되어 있으며, 보통 구본(舊本)이라고 한다. 둘째 본은 첫 번째 이름이 아난다목가니가리다라니(阿難陀目佉尼呵離陀羅尼)이고, 두 번째 이름이 질사인민득일체지(疾使人民得一切智)이다. 셋째 본은 첫 번째 이름이 무단저문총지지행(無端底門摠持之行)이고, 두 번째 이름이 보살항각제마견고어일체지(菩薩降却諸魔堅固於一切智)이다. 넷째 본은 첫번 째 이름이 출생무량문지(出生無量門持)이고, 두 번째 이름이 일생보처도행(一生補處道行)이고, 세 번째 이름이 성도항마득일체지(成道降魔得一切智)이다. 이 본에는 득법의 이익[法利]과 땅이 흔들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등의 사항을 갖추고 있다. 네 가지 본은 모두 각각 맨 앞에 있는 한 가지 이름을 경의 첫머리에 표시해 놓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름은 경의 제목으로 쓰지 않는다. 끝 부분에 사리불(舍利弗)이 경의 이름을 청해서 묻고, 부처님께 말씀하신 경의 이름이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모두 갖추어져 있다.”
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이(以)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본의 린(隣)을 따랐다.
2)고려대장경에는 의(宜)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본의 정(定)을 따랐다.
3)고려대장경에는 령(令)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의 전(全)을 따랐다.
4)고려대장경에는 심(深)으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본의 염(染)을 따랐다.
5)무차라(無叉羅)와 축숙란(竺叔蘭)을 말한다.
6)고려대장경에는 지(知)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의 여(如)를 따랐다.
7)고려대장경에는 철(徹)로 되어 있으나 원ㆍ명본의 철(轍)을 따랐다.
8)원(元)ㆍ명(明)본에 따라 맹(猛)을 보입하였다.
9)고려대장경에는 위(位)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에 따라 주(住)로 하였다.
10)고려대장경에는 곡(谷)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의 전(筌)을 따랐다. 그러므로 만물을 길러서 도야하고 교화하며[陶化育物] 경과 논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것이니, 진실로 현묘한 종지를 깨달아 통솔하고, 특별한 종취를 깊이 통달한 사람이아니라면 어떻게 끝까지 궁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1)고려대장경에는 함화(咸和)로 되어 있으나, 함화 3년(328년)은 무자세(戊子歲)이다. 『개원석교록』에 함안으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잡는다.
12)고려대장경에는 귀(歸)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의 구(龜)를 따랐다.
13)고려대장경에는 박(縛)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의 륜(淪)을 따랐다.
14)고려대장경에는 차치(遮致)로 되어있으나 송ㆍ원ㆍ명본에 따라 치차(致遮)로 하였다.
15)고려대장경에는 구(九)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의 력(力)을 따랐다.
16)『역(易)』 곤괘(坤卦) 육삼(六三)에 “광명을 내포하여 마음이 곧고 바를 수 있다[含章可貞]”라고 하였다.
17)월령(月令)에서는 11월이라고 하였는데 다음 문장에 나오는 달수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