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한음(漢陰)에 있었던 15년 동안 『방광경(放光經)』을 해마다 항상 두 번씩 강의하였다. 경사(京師)에 온 지 어언 4년이 되어 가는데, 여기에서도 항상 해마다 두 번씩 강의하면서 감히 게으르거나 쉬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구절이 막히거나 수미(首尾)가 은몰되어 있는 경우에 이를 때마다 책을 놓고 깊이 생각하면서 호공(護公:竺法護)과 무차라(無叉羅) 등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때마침 건원(建元) 18년(382)에 정식으로 왕이 된, 이름이 미제(彌第)인 거사전부왕(車師前部王)이 와서 조회를 알현하였는데, 자(字)가 구마라발제(鳩摩羅跋提)인 그 나라의 국사(國師)가 호본(胡本) 대품(大品) 1부(部) 402첩(牒) 2만 언(言)의 수로(首盧)1)를 바쳤다. 수로는 32자(字)로써 호인(胡人)들이 경전의 구절을 세는 방법이다. 즉시에 숫자를 상세하게 세어보니 모두 1만 7천 2백 60 수로였고, 나머지가 27자(字)였는데 모두 합쳐서 55만 2천 4백 75자였다. 천축 사문 담마비(曇摩蜱)가 호본을 잡고 불호(佛護)가 번역하면서 원문과 대조 검토하였고, 혜진(慧進)이 필수(筆受)하였다. 『방광경(放光經)』ㆍ『광찬경(光讚經)』과 같은 부분은 더 이상 역출하지 않았고, 그 두 경전을 번역한 사람이 빠뜨린 부분은 그 빠진 부분마다 지적해서 바로잡았다. 그 의미가 달라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알 수없는 경우에는 곧바로 병기(倂記)해서 두 가지를 모두 남겨두었고, 때때로 그 아래에 뜻을 풀이하니, 모두 4권이고, 1지(紙)와 2지가 다른 것을 따로 1권으로 역출하여2) 모두 5권이 되었다. 호어(胡語)를 중국말로 번역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본모습을 잃는 점[五失本]이 있다. 첫째, 호어는 대개 어순이 중국말과 뒤바뀌어 있는데 진(秦)나라 말의 어순에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본모습을 잃는 점이다. 둘째, 호어로 된 경[胡經]은 질박함을 숭상하는데 진나라 사람들은 문장의 꾸밈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에 알맞게 전역하여도 문장을 꾸미지 않으면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두 번째 본모습을 잃는 점이다. 셋째, 호경(胡經)은 매우 상세하여[委悉] 영탄하는 구절에 이르러서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반복하여도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는데 지금은 배척하고 삭제하였으니, 세 번째로 본모습을 잃는 점이다. 넷째, 호경에는 의기(義記)3)가 있는데, 마치 난사(亂辭)4)와 같다. 앞의 설법(說法)과 내용을 살펴서 문장이 다름이 없다고 하여 혹 1천 5백 자 정도를 삭제하여 보존하지 않았으니, 네 번째 본모습을 잃는 점이다.
다섯째, 호경에는 고사가 이미 완성되어 있어도 더욱 곁가지로 뻗어나가면서 앞에 나온 문장을 반등(反騰:돌아가서 반복함)하였는데 이 이후에 나오는 설명을 모두 삭제하였으니, 다섯 번째로 본모습을 잃는 점이다. 그런데 『반야경(般若經)』은 3달(達)5)의 마음과 얼굴을 덮는 장광설(長廣舌)로 말씀하신 경전이고, 성인(聖人)은 반드시 때에 맞추어 설법하시지만 시속(時俗)에는 변화가 있어서, 고아(古雅)한 것을 삭제하고 지금의 시속에 맞추어야 하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운 점이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어서 성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데다, 천 년 전에 하신 미묘한 말씀[微言]을 백 대(代)의 왕조가 지난 후에 말세의 세간[末俗]에 맞도록 전역하려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운 점이다. 아난이 경을 송출한 때는 부처님과 떨어진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존자(尊者) 대가섭은 6신통(神通)을 얻은 5백의 아라한들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살피고 번갈아가면서 쓰게 하였는데, 지금은 천 년이나 떨어져서 부처님의 뜻에 접근하여 헤아리려하고 있으니, 저 아라한의 높은 경지로도 전전긍긍하여 신중하기가 저와 같았거늘, 지금 이 생사(生死)에 윤회하는 사람들이 평범하기가 이와 같은데, 법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어찌 용감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어려운 점이다. 다섯 가지 본모습을 잃는 점[五失本]과 세 가지 어려운 점[三不易]을 극복해야만 호어(胡語)를 진(秦)나라 말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 소통되지 않는 다른 언어를 전역하여 회통시키고 이해시키려 할 따름이니, 어떻게 대역장(大譯匠)들의 옳고 그름을 혐의[嫌]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전에 경을 역출한 사람 중에서 지참(支讖)과 안세고(安世高)는 호본(胡本)을 환하게 살펴서 전역함에 있어 따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차라(無叉羅)와 지월(支越)은 깎아서 다듬는 교묘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교묘하긴 교묘하지만 그 교묘함[竅]이 완성됨에 음양의 조화[混沌]가 사라지게 될까 염려스럽다. 만약 『시경(詩經)』이 번거롭게 중복되어 있다고 여기고, 『상서(尙書)』가 질박하다고 여겨 깎아내어 지금의 표현에 합치시킨다면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이 매우 한스럽게 여길 것이다. 최근에 역출한 이 초경(抄經)은 전에 역출한 것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면서 경에서 말한 종지를 추구하려 하였지만 오직 실질(實質)을 잃어버렸을까 두려울 뿐이다. 방언(方言)과 고사(古辭)가 있는 경우에는 그 아래에 스스로 해석을 가하였다. 보통 수미(首尾)가 서로 어긋나거나 구절이 소통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윽하게 부합되도록 하거나 또 절충하여 적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에 번역한 사람들의 심한 오류가 보이면 외역(外域:인도)의 부처님 당시의 법회[嘉會]에서 말씀하셨던 뜻과 소통되기를 바랐다. 90장(章) 가운데서 의심스러운 곳을 깨끗하게 없애고 세부적인 곳[毫芒之間]에서도 미세한 오류조차 없도록 하였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불법(佛法)과 지혜[明]에 귀의하옵니다[南摸].이것은 천축에서 반야(般若)에 대해 예를 올리는 말이다. 명(明)은 지혜라는 뜻이다. 인도의 예(禮)에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계야(罽耶)이고, 둘째는 바라남(波羅南)이고, 셋째는 바남(婆南)이고, 넷째는 나모(南摸)이다. 나모는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절하는 법은 부처님ㆍ외도(外道)ㆍ국왕國主ㆍ부모에게공통으로 절하는 법이다. 부모님에게 예를 올릴 때에는 ‘나모살가(南摸薩迦)’라고 하는데, 살가(薩迦)는 공양(供養)을 올린다는 뜻이다. 마하(摩訶)위대하다는 뜻이다 발라야(鉢羅若)지혜라는 뜻이다. 바라(波羅)건너다는 뜻이다 밀(蜜)피안이라는 뜻이다. 경초(經抄)천축의 경에는 앞의 제목이 없다. 앞에 나오는 제목 대신에 모두 길법(吉法)이라고 씌어 있는데, 길법은 여기에서 마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 도안(道安)이 이것을 경의 첫머리에 제목(題目)으로 썼다.
031_0345_b_02L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은 8지(地)에 이르기 위해 지나야 할 길[由路]이고 10계(階)에 오르기 위한 등용문[龍津]이다. 저 연부(淵府)로는 그 깊이와 훌륭함[美]을 극진하게 표현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대(大)라는 말에 기탁하여 지목하였고, 수경(水鏡)으로는 그 맑고 밝음을 비유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혜(慧)라는 말을 빌어서 일컬었으며, 끝까지 나아간다[造盡]는 말로는 그 피안[崖極]에 이르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건넌다[度]는 말을 빌어서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능(功能:작용)이 유(有)와 무(無) 모두에 의탁하기 때문에 건넌다[度]라는 명칭을 세운 것이고, 근본을 비추어 지말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에 혜(慧)라는 이름[目]이 생긴 것이고, 광대해서 바깥이 없음[無外]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대(大)라는 호칭이 일어난 것이다. 이 세 가지 이름은 비록 그 의미가 유류(有流:미혹의 세계)에 관계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집착하지 않은 마음[非心]을 얻을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며, 그 자취는 실제적인 작용이 있음[有用]에 기탁하지만 공적(功績)은 실로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非待].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 것[不住]으로 근본[宗]을 삼고, 상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는 것[無照]으로 근본을 삼는다.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변화의 시초[化始]에서 지(知)의 작용이 멈추게 되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근본을 삼으니, 수행의 지위[行地]에서 공적을 잊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는 현묘한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不住]으로 시작을 삼고, 3혜(慧)로의 미묘한 귀의(歸依)는 얻음이 없는 것[無得]으로 끝맺음을 삼는다. 이름을 빌어[假號] 그 진실을 관조하고, 상응하는 수행[應行]으로 그 지혜의 밝음을 나타내며, 무생(無生)으로 이 완전함[沖]을 보이고, 공덕으로 그 깊이를 게시[旌]한다. 큰 지혜[大明]는 끝을 잡아서 처음을 징험하게 한 것이고 방편[漚和]은 처음에 상즉하여 끝을 깨닫게 한 것이다. 광활하도다. 진실로 위대한 과업을 이루려는 이들의 지나가는 길[通塗]이고, 모든 부처님의 수레[佛乘]에 탄 이들의 긴요한 궤범이라고 하겠구나. 보배가 귀중한 까닭에 방비함이 심해지고 공(功)이 높은 까닭에 그와 견주는 것[校]이 광대해지듯 부족이 은근하고 공덕이 더욱 증대하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경(經)이 이 땅에 들어와 진(秦)나라 말로 번역되었지만, 경전 속에서의 가르침[典謨]6)은 서로 다른 제도에서 어긋나고 명칭과 실질은 근엄하지 못한데서 잃어버리게 되며, 구하는 것이 지극해지면 지극해질수록 잃어버리는 것이 더욱 심하게 되며, 두터운 관문 앞에 고삐를 가지런히 할수록 막힌 길[窮路]이 더욱 넓어져 지혜 깊은 종장(宗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거의 낙마(落馬)하게 되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스승 도안(道安)화상은 거친 길을 뚫어서 수레가 가는 길을 열었으며 자성이 공하다[性空]는 현묘한 종지를 나타내었고, 서로 어긋난 자취에서 비껴나 곧바로 본질을 통달하여 잘못된 문장에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부지런히 힘쓴 공으로 생각만으로 이상을 알 수 있으니, 고매함이 뛰어나다 하겠구나. 구마라집(究摩羅什) 법사는 지혜로운 마음에 의해서 일찍이 도를 깨달았고 무리 가운데서 뛰어나 홀로 불지(佛智)에 나아가 천마(天魔)가 공격해도 그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고 지식이 깊은 사람이 시비를 따져도 굴복시킬 수 없었으며, 용수(龍樹) 보살의 유풍(遺風)을 번성하게 하여 지혜의 울림이 이 세상에 떨치게 하였다. 진(秦)나라 왕은 구마라집 법사가 찾아오는 것을 간절하게 바랐으나 시운(時運)이 열림에는 아직 막힘이 있었는데, 홍시(弘始) 3년(401) 태세가 축(丑)[星紀]이던 해 겨울 12월 20일에 마침내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031_0345_c_02L진(秦)나라 왕은 공종(空宗)의 문[虛關]을 두드리고 고승 대덕[匠伯]은 그의 깊은 이치를 도야했다. 공종의 문이 열리니 이 『반야경』의 문언(文言)이 바로잡히게 되었고, 깊은 이치가 선양되니 그 석론(釋論)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이 역출되었다. 그리하여 위수(渭水)의 물가에 기원정사(祇洹精舍)의 교화가 흐르게 하고, 서명각(西明閣)에 여래(如來)의 마음을 열어 보이니, 소요원(逍遙園)에 덕을 갖추고 의미를 통달한 스님[德義之僧]들이 모이고, 경성(京城)에 도를 읊조리는 소리가 넘쳐흘러 말법(末法)의 중흥이 거의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지천명(知天命:50세)의 나이가 되어 이 진실한 교화[眞化]를 만나 감히 미미한 정성이나마 힘을 다하여 번역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집필할 때에는 돌아가신 스승의, 다섯 가지 본모습을 잃는 점[五失本]과 세 가지 어려운 점[三不易]의 가르침을 세 번 생각하고[三惟], 근심과 두려움을 번갈아가며 마음속에 품어 마치 위험에 처한 듯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살얼음을 밟은 듯 하고 깊은 연못가에 다다른 듯하다는 것으로도 오히려 비유하기에 부족하였다. 종장(宗匠)께서 통체적으로 조감하여 문장은 비록 좌충우돌하여도 종지는 본뜻에 어긋나지 않고 합당하기를 바라면서 마침내 번역하는 제안을 삼가 받아들여 감히 이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홍시(弘始) 5년(403) 태세가 계묘(癸卯)이던 해, 4월 23일 경성(京城) 북쪽의 소요원(逍遙園)에서 이 경을 역출하였다. 구마라집 법사께서 손에 호본(胡本)을 잡고 입으로 진(秦)나라 말로 선양하여 서로 다른 언어를 양쪽으로 풀이하면서 양 문장의 종지(宗旨)를 번갈아가면서 밝혔다.
031_0346_a_02L진나라 왕은 몸소 예전에 번역된 『방광경』과 『광찬경』을 열람하면서 그 옳고 그름[得失]을 따지고, 서로 통하는 방도[通途]를 질문하여 근본 종치(宗致)를 분명하게 하였다. 오랫동안 함께 그 뜻을 연구해 온 사문 석혜공(釋慧恭)ㆍ승략(僧䂮)ㆍ승천(僧遷)ㆍ보도(寶度)ㆍ혜정(慧精)ㆍ법흠(法欽)ㆍ도류(道流)ㆍ승예(僧叡)ㆍ도회(道恢)ㆍ도표(道標)ㆍ도항(道恒)ㆍ도종(道悰) 등 5백여 인과 그 의미와 종지를 자세하게 연구하고 문장이 도리에 맞는지를 살핀 후에야 기록하였다. 그 해 12월 15일, 모두 역출하였는데 더욱 자세하게 교정을 보고 검토해서 다음해 4월 23일에 이르러서야 끝마쳤다. 문장이 거의 정해진 것도 『석론(釋論:대지도론)』에 따라 검토해 보면 미진한 부분이 오히려 많았다. 이 때문에 그 논(論)이 역출되는 대로 곧바로 문장을 교정하였다. 『석론』의 역출이 끝나자 곧 문장도 교정되었는데, 교정되는 것이 끝나기 전에 필사(筆寫)해서 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자신의 뜻대로 문장을 늘이거나 줄이는 경우도 있어서 내가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으로 제목을 삼은 것과, 문장과 언어를 서로 어긋나게 하고 착란시켜서 전후의 맥락이 같지 않게 하였으니, 진실로 후생(後生)이 자기의 생각을 비우는 것이 얇고 자신의 생각[我情]을 믿는 것이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호본(胡本)에는 단지 「서품(序品)」ㆍ「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ㆍ「마품(魔品)」의 이름만 있고 나머지는 단지 순서대로 그 일에 따라 숫자로 표시해 놓았을 뿐이다. 구마라집 법사는 품(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부처님께서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여 오직 「서품(序品)」만 보존하고 두 가지 항목은 생략하였다. 순서대로 일에 따라 숫자로 표시한 이름이 구역(舊譯)과 같지 않은 것은 모두 법사께서 의미에 의지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음(陰)ㆍ입(入)ㆍ지(持) 등은, 명칭이 올바른 의미와 어긋나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에 따라서 고쳤으니, 음(陰)은 중(衆)으로, 입(入)은 처(處)로, 지(持)는 성(性)으로, 해탈(解脫)은 배사(背捨)로, 제입(除入)은 승처(勝處)로, 의지(意止)는 염처(念處)로, 의단(意斷)은 정근(正勤)으로, 각의(覺意)는 보리(菩提)로, 직행(直行)은 성도(聖道)로 고치고,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이 서로 대비해서 고친 것이 매우 많았다. 호음(胡音)이 없어진 것은 천축의 음에 의해서 바로잡고, 진(秦)나라 말이 잘못된 것은 글자의 의미에 의해서 교정하였으며, 고쳐서 안 되는 것은 그대로 썼다. 이 때문에 다른 명칭이 서로 섞여 서술되었는데 호음(胡音)이 태반이었다. 이것은 실로 종장(宗匠)이 공명정대하고 삼가며 필수하는 사람이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바라건대 실질을 따르고 근본을 숭상하는 현자(賢者)가 추량해서 몸으로 체득하여 문장이 질박한 것을 허물로 보지 않고 구경(舊經)과 다른 점이 많은 것을 망정[情]7)으로 보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031_0346_b_02L 조짐이 형태로 나타나기 이전에 『역(易)』의 6획(畫)으로는 그 회린(悔吝)을 얻고, 이미 현상(玄象:天體)이 운행함에 9장(章)으로 그 차고 비는 것[盈虛]을 밝게 헤아린다. 이와 같으니, 귀신(鬼神)도 그 정상(情狀)을 숨길 수 없고 음양(陰陽)도 그 변화하여 소통되는 것을 감출 수 없다. 가령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밑바닥을 알 수 없고[無底], 텅 비고 툭 트여 끝이 없으며[無邊], 마음의 작용이 진행되는 곳[心行處]이 완전히 소멸되었고,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단절되어 있어서[言語道斷] 산술(算術)로도 헤아릴 수 없고 의식(意識)으로도 알 수 없다. 3명(明)의 지혜로도 조감할 수 없고 무애(無碍)의 4변(辯)으로도 논변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정행(正行)이며, 도량에 곧바로 이르는 길[直路]이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진실한 법[眞法]이며, 근본을 나타내는 으뜸이다.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고 필경에 공적(空寂)한 것이어서 대(大)에 기탁해도 그 넓음을 나타낼 수 없고, 혜(慧)라는 이름으로도 그 작용에 근접할 수 없으며, 건넌다[度]는 말을 빌려도 그 소통되는 모양을 파악할 수 없고, 피안[岸]이라는 말을 빌려도 그 실질을 궁구할 수 없다. 만약 궁극의 일상(一相)을 말한다면 그 일은 백비(百非)가 끊어져 있고 보처(補處) 보살이 묵연하게 침묵하고 부처님[等覺]은 행도(行道)를 멈추게 된다. 이에 비로소 ‘본성이 없다는 명칭으로 일컫을 수 있다[無德而稱]’고 말할 수 있으니, 즉 명칭과 형상이 없다[無名相]는 말을 빌어서 명칭과 형상[名相]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저것을 구하려는 사람의 생각을 인도하고 대승심을 새롭게 일으킨 사람의 눈을 열어주기 때문에 반야(般若)라는 문자와 피안(彼岸)이라는 호칭이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학도(學徒)들 중에 (반야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람이 드물어 혹 때때로 가르침을 듣더라도 경의 내용을 완미하지는 못한다. 제석천의 진실한 말은 진실로 증거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현자들의 온갖 고민거리이며 보살들이 우려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노래 가락의 음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조화로움이 더욱 적어지고, 아는 사람이 드물면 드물수록 도(道)는 더욱 귀하게 된다. 올바른 경전의 가르침이 세간에서 침몰하여 없어지는 것은 자기의 망정을 비우는 사람이 적고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의 망정을 비운 사람이 적으며, 아(我)의 견해가 깊어지고 의심을 품은 사람이 많으니, 이리저리 얽힌 근심거리가 더욱 많아진다. 그러나 많은 근심거리가 분분하게 일어나더라도 다음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이 『반야경』이 구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여 대부분 『열반경』을 인용하여 크나큰 법[碩訣]으로 여기는 것이다. 둘째, 이 경이 아직 삼승을 회통하지 못했다고 하여 모두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가장 훌륭한 경전[盛難]으로 여기는 것이다. 셋째, 이 경을 3승(乘)의 공통된 가르침이라고 하여 『반야경』에서 설하는 것을 성문법(聲聞法)으로 여기는 것이다. 넷째, 이 경이 단계를 밟아 수행하는 가르침이라고 하여 점교(漸敎) 중에서 제2시(第二時)에 설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옛날부터 지녀온 견해가 이와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겠다. 여기에서 네 가지 의미를 대략 비교하며 내가 생각하는 것을 대략 말해 보겠다. 『열반경』은 과덕(果德)을 나타낸 것이고, 『반야경』은 인행(因行)을 밝힌 것이다. 과덕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상주불성(常住佛性)을 근본으로 삼고, 인행을 밝히는 경우에는 무생중도(無生中道)로 근본을 삼는다. 세속제의 언어로 설명하면 ‘이것은 『열반경』이고 이것은 『반야경』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언어로 설명한다면 어떻게 또다시 쌍방의 우열을 담론할 수 있겠는가. 『법화경』은 삼승을 회통하여 일승에 귀의(歸依)하게 하는 것이니, 삼승은 없어져도 일승은 남아 있다. 일승이 남아 있으니, 아직 어떤 상(相)이 있다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온갖 선행[萬善]을 수행[乘]의 체로 삼는다. 『반야경』은 삼승에 상즉하면서도 삼승을 취하지 않으므로 삼승도 없어지고 일승도 없어져서 얻을 만한 어떠한 법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생(無生)을 수행[乘]의 체로 삼는다. 무생(無生)의 도리에는 온갖 희론(戱論)이 끊어져 있으니, 결국에 회통시킬 만한 어떠한 삼승이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온갖 꽃이 색깔은 달라도 함께 하나의 그림자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니, 만법의 모습이 달라도 다함께 반야에 들어가는 것이다. (『반야경』을) 삼승의 공통된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대부분 두 가지 문자에집착하고 있다. 지금 다섯 가지 의미를 개진하여 의심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해보자. 첫째, 성문(聲聞)이 지혜가 있다거나 번뇌를 끊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보살이 체득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둘째, 삼승이 도(道)를 배움에 있어서는 반야의 가르침을 들어야만 한다. 셋째, 삼승이 함께 반야를 배워도 모두 함께 보리(菩提)를 이루게 된다. 넷째, 삼승이 머물거나 증득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이 무생법인을 떠나지 않는다. 다섯째, 아라한과 벽지불도 반야로부터 생겨난다. 이 다섯 가지 의미를 잘 분별하지 않고 삼승의 가르침을 동일한 문(門)이라고 굳게 집착하면 마침내 붉은색과 자주색을 같은 색으로 여기고, 옥돌과 옥의 가치가 같다고 여기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설명을 분명하게 살피고 경의 종지를 깊이 탐구한다면 연환(連環)8)도 풀리게 되고 농환(弄丸)9)도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다. (『반야경』이 점교 중에서) 제2시(第二時)에 설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얼굴이 모두 다른 것과 같으며 타고난 근성(根性)이 다른 것은 이보다 더 심하니, 하나의 가르침을 5시(時)의 한 시기로 국한시킬 수 없다. 반야무생(般若無生)의 도리는 오고 가는 모습[去來相]이 아닌 것이니, 어떻게 수량으로 구속할 수 있겠으며 차제(次第)로 구할 수 있겠는가. 보리수[道樹]에서 시작하여 사라쌍수[雙林]에서 마칠 때까지 초시(初時)ㆍ중시(中時)ㆍ후시(後時)에 항상 지혜를 말씀하셨으니, 또 어떻게 점교(漸敎)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랴. 『석론(釋論)』에서 “수보리는 『법화경』 가운데에서 ‘부처님에게 조그만 공덕을 짓는 사람이나 희롱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들었고, 또 「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에서 ‘퇴전하는 경우와 퇴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가르침을 들었고, 또 ‘성문인(聲聞人)도 모두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을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보살이 필경에 부처가 되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정해져있지 않은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말해본다면, (『반야경』이 점교 중에서 제2시에 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지(本旨)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3계(界)에서 벗어남을 배우는 것은 언어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도(道)를 관하는 것으로 귀착해야 하고 그것으로 종치(宗致)를 바로해야 한다. 삼승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떤 교의(敎義)를 의지해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상(相)과 무상(無相)은 마치 물과 불처럼 두 가지의 성질(性質)이 서로 위배되는 것이니, 어떻게 함께 일관(一貫)되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모든 성인께서 무위법(無爲法)으로 삼승을 공(空)에 들어가게 하더라도 그들이 수행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성문은 괴연관(壞緣觀)으로 생멸(生滅)이 공함을 관찰하고, 연각은 인연관(因緣觀)으로 법성(法性)이 공함을 관찰하고, 보살은 무생관(無生觀)으로 필경에 공한 것[畢竟空]임을 관찰한다. 이것으로 치수(淄水)와 승수(澠水)의 물맛이 달라지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이 나뉘는 것이니, 입으로 승부를 가릴 것도 아니고 힘으로 다툴 것도 아니다. 약상(弱喪:어려서부터 타향을 떠도는 사람)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무엇을 통해서 가게 하겠는가. 커다란 보배를 만나도 취하지 못하고 심오한 경전을 만나도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가난한 아들[窮子]이 집에서 도리어 달아나려 하고 홀로 된 노파가 길 위에서 눈을 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것이 바로 미혹한 행[惑行]이 지니는 보통의 속성[常性]이고 길을 잃은 이들이 지니는 보통의 마음[恒心]이다. 이것은 단지 용(龍)을 좋아하면서도 그림만 보고 코끼리를 좋아하면서도 그 발자욱만 완미하는 것일 뿐이니, 형산(荊山)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만한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法水]이 대비(大悲)를 나타내는 까닭이다. 경(經)에서는 토끼와 말을 2승(乘)에 비유하고 논(論)에서는 사슴과 물소를 비유하지만 모두 한 마리의 코끼리와 짝을 지어 세 마리의 짐승[三獸]이 되게 하여, 세 마리의 짐승이 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삼승의 경지를 헤아리고, 갇히고 화살에 맞았을 때의 태도로써 각각의 지혜를 시험하여 체득한 공의 심천(深淺)을 헤아리며 마음을 살펴보는 방법의 두텁고 얇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거울이 눈앞에 걸려 있으니 귀로 식별할 필요가 없고, 이루(離婁:黃帝 때의 눈이 밝은 사람)가 이미 힐끗 보았으니 어찌 힘들여 살필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이치[不思誼之理]가 없다면 어찌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일[不思誼之事]이 있겠는가. 서광(瑞光)이 삼천세계에 비치고, 기이한 연꽃이 시방세계에 모이며, 대지(大地)가 금색(金色)으로 바뀌고, 허공이 화대(華臺)로 장엄된 것이 모두 장광설로 말씀하신 것이 헛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야가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용수(龍樹)ㆍ도안(道安)ㆍ동수(童壽:구마라집)ㆍ혜원(慧遠)이 모두 커다란 방편[大權]으로 세간에 감응하고, 혹은 성인에 거의 가까운 덕으로 시속(時俗)을 구제하면서 뛰어난 가르침[上法]을 가슴에 품고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물며 식견이 부족한 세인(細人)들이 이것을 떠날 수 있겠는가. 이 경이 점차로 동방에 전해진 지 258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60) 우전국(于闐國)에서 가져와 축숙란(竺叔蘭)이 근원을 열고 미천(彌天:釋道安)이 강(江)으로 인도하였으며, 구마라집이 감로수로 적셔주었다. 세 번 번역하고 다섯 번 교정했으니 상세하다고 할 수 있겠다.
031_0347_b_02L용수보살이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지어 이 경을 해석하여 의미와 종지[義旨]가 완벽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여의주(如意珠)를 품은 보배창고이며 지혜의 대해(大海)이다. 다만 그 문장이 원대하고 광박하여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으로 두려워하였다. 짐(朕)은 국무를 집행하는[聽覽] 여가에 명승(名僧) 20인을 모아 천보사(天保寺)의 법총(法寵) 등과 함께 그 제거하고 취한 것을 상세하게 검토하고, 영근사(靈根寺)10)의 혜령(慧令) 등과 함께 공들여서 필사하였으며, 『석론(釋論)』에서 가려 뽑아 경본(經本)에 주(注)를 붙이고 해석이 너무 많은 것은 생략하여 요점이 되는 풀이만을 취하였다. 이 외에도 혹은 관하(關河:北方)에서 유행하고 있는 옛날의 해석[舊義]을 모으기도 하고, 혹은 선달(先達:高僧)이 남겨 놓은 연고 있는 말[故語]에 의거하기도 하고, 반복하여 때때로 나오는 것들은 서로서로 뜻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가령 장문(章門)이 아직 확립되지 않고[未開] 의미(義勢]가 막혀 있으면[深重] 같은 것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비교하여 각각의 소견을 넓혀 질박하면서도 너무 간결하지 않고 문장을 꾸미면서도 너무 번거롭지 않게 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생각만으로도 절반 이상을 알도록 하고자 하였다. 『반야경』을 강의하는 사람은 대부분 5시(時)를 설하는데, 한 번 들으면 조리가 있는 것 같지만 거듭해서 다시 연구해 보면 많은 부분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다만『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은 반야부에 책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만, 세간에서 이미 의경(疑經)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서는 남겨 두고 논의하지 않는다. 승예(僧叡)의 「소품서(小品序)」에는 “이 경의 정문(正文)은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때에 따라 알맞게 교화한 것을 설한 것이다. 많은 것은 십만 게(偈)이다”라고 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고 이름은 나열하지 않고 있다. 『석론(釋論:대지도론)』에서는 “반야부(般若部)에 속해 있는 경은 혹은 길기도 하고 혹은 짧기도 하니, 『광찬경(光讚經)』ㆍ『방광경(放光經)』ㆍ『도행경(道行經)』이다”라고 하여, 단지 세 가지 이름을 들었고 네 가지를 채우지 않고 있다. 이 땅에 따로 한 권이 있는데,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 한다. 이것도 숫자에 배대시키려 하면 대품(大品)을 포함해서 다섯 가지가 될 수 있지만 경의 이름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또 시기의 전후도 자세하지 않다. 만약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의심과 비난을 부르기 쉽고, 지금 여기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으므로 청컨대 다문(多聞)한 현철을 기다리는 바이다. 지금 대품경(大品經)에 주(注)를 붙이는 데 있어서 다섯 단락이 있는데, 저 5시반야(時般若)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첫째, 권설(勸說)은 부주(不住)를 시초[始]로 삼는다. 둘째, 명설(命說)은 무교(無敎)로 그 길을 소통시킨다. 셋째, 원설(願說)은 무득(無得)으로 그 수행을 나타낸다. 넷째, 신설(信說)은 깊고 깊다[甚深]는 말로 그 법을 찬탄한다.11) 다섯째, 광설(廣說)은 부진(不盡)으로 그 마지막을 요약한다. 중품(中品)에서 가르침[敎]을 거듭 설하고 마지막[末章]에서 세 번 부촉하는 까닭은 뒤에 해석하는 곳에서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선인(先人)들은 바른 가르침이 없던 때에 법이라는 명칭이 없는 곳에서도 더욱이 풀숲[草澤]의 극심한 고통이 있고, 아득히 멀고 험준한 길을 지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돋우고 귀를 흔들어 뜻을 심오한 도리[希夷]에 기울여 부처님의 현묘한 감응을 바라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상상하였다. 선인들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반구의 게송을 귀중하게 여겼으며, 몸을 팔아서 부처님의 한마디 말씀을 존중하며, 달갑게 피를 흘리면서도 의심하지 않고 기꺼이 골수를 내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용궁(龍宮)의 신묘한 구슬[神珠]과 보대(寶臺)의 경전[金牒], 얻기 어려운 재화와 듣기 어려운 법(法)이 탑사(塔寺)마다 보편하게 퍼져 있고 눈앞에 가득 차 있으니[牣],12) 어떻게 마음을 조복하여 받아 지니지 않으며, 생각을 비워서 탐구하고 우러르지[鑽仰]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씨앗이 상속되고, 깨달음[菩提]이 단절되지 않게 하며, 은혜를 알고 갚는 데에는[反復] 더 이상 다른 길이 없다. 설산동자에 비교하고 향성(香城)의 상제보살(常啼菩薩)에 비교하더라도 어떻게 대등한 입장에서[同日] 우열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얻은 바를 대략 써서 기록했으나 후세에 허물만 더할까 두려울 뿐이다. 밝게 통달한 후진(後進)들이여, 바라건대 법에 의거하여 수행할지어다.
031_0348_a_02L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은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극진하게 하는 격언(格言)이며 보살이 성불(成佛)하는 광대한 궤범이다. 궤범이 광대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온갖 것을 명합(冥合)하여 그 귀의처를 가리켜 주기에는 부족하다. 본성이 극진하게 되지 않으면 중생[物]이 어떻게 도량(道場)에 올라서 정각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정각이 성취되고 서로 다른 온갖 것이 하나가 됨에 있어서 어떻게 이 도를 말미암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 때문에 거듭된[累]13) 가르침이 은근하게 되고, 3무(撫)가 이에 의지해서 자주 일어나게 되며, 공덕이 중첩되어 설해지고[校], 9증(增)이 이에 의지해서 자주 이르러 오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상(問相)」은 현묘한 도리를 나타내어 그 현묘함을 더욱 현묘하게 하고, 「환품(幻品)」은 기탁하는 것을 잊고 그 잊어버리는 것조차 잊게 하고, 「도행(道行)」은 (깨달궁구하고, 음으로 가는) 나루를 평탄하게 하고, 「난문(難問)」은 그 근원을 「수희(隨喜)」는 취향해 나아가는 것을 잊음으로써 종착점을 추구하고, 「조명(照明)」은 변화하지 않음으로써 현묘함에 상즉한다. 장(章)이 비록 30에 이르지만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은 하나의 도(道)이며, 글자가 비록 10만에 이르지만 그 속에 지니는[佩]14) 뜻은 실천수행[行]이다. 오직 수행이 응축된 후에야 보처(補處)가 되는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체지(一切智)로 변화하는 것이다. 『법화경』은 근본을 비추어 조감하는 것을 응집시키고, 『반야경』은 지말을 구별하지 않고[冥末] 거꾸로 매달린 듯한 괴로움을 풀어준다. 거꾸로 매달린 듯한 괴로움을 풀어 주어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것[理趣]이 보살도(菩薩道)이고, 조감하는 것을 응집하여 근본을 비추어 주는 것은 그 끝[一切智의 성취]을 일러주는 것이다. 끝에 이르러서도 없어지지 않으면 돌아가는 길[歸途]에 잔가지가 많아 3실(實)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되고, 상응하는 권도[權應]가 없어지지 않으면 계통이 어지러워지고 끈이 느슨해져서 여러 가지의 이취(理趣)에 대한 미혹[惑趣]이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법화경』과 『반야경』은 서로 의지하여[相待] 끝을 기약하고 방편과 진실의 교화를 하나로 명합하여 완전함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극진하게 하는 것[窮理盡性]을 논하여 만행(萬行)을 환하게 밝힌다면 진실한 가르침이 관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크고 밝은 지혜로 진실하게 교화하여 본래 3승(乘)이 없음을 이해하면 관조하는 것[照]이 진실한 가르침[實]만 같지 못하다. 이 때문에 심오한 것을 찬탄한다면 반야의 공(功)을 존중하고 진실한 것을 찬미한다면 법화의 용(用)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15) 진(秦)나라에 태자가 있어서 몸은 동궁[儲宮]에 깃들었으나 마음은 궁 밖[區外]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이 경전을 완미하여 꿈에서조차 이 경의 뜻에 더 깊이 다다르기를 생각하다가, 대품경(大品經)과 견주어서[准悟], 번역한 사람의 잘못이 있음을 깊이 알게 되었다. 때마침 구마라집 법사가 그 경문을 신묘하게 전수했으며 진본(眞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홍시(弘始) 10년(408) 2월 6일에 법사를 청하여 역출하도록 하여 4월 30일에 이르러 교정(校正)까지 모두 마쳤다. 구역(舊譯)을 상고해 보니, 참으로 황폐한 밭에 곡식을 재배하는 것과 같아서 절반 이상 김을 매더라도 어찌 많이 고쳤다고 하겠는가.
031_0348_b_02L이 경의 정문(正文)은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때에 따라 알맞게 교화하여 자세하고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용이 많은 것은 10만 게(偈)가 있다고 하였고 적은 것은 6백 게이다. 여기에서 대품(大品)이라고 하는 것은 천축의 중품(中品)에 해당한다. 편의에 따라서 말한 것이니, 다시 그 많고 적음을 계산하고 번거롭고 간략함을 의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호문(胡文)은 고아하면서 질박하였으나 본뜻을 상고하면서 번역을 한 결과 문장의 유려한 솜씨는 부족하고 질박함은 지나침이 있게 되었다. 바라건대 문장의 이치를 깨달은 현자가 그 허식[華]을 생략하고 실질에 가깝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온갖 묘리(妙理)의 연부(淵府)이고, 모든 지혜의 현묘한 근본[玄宗]이며, 신묘한 왕[神王]이 의거하는 것이고, 여래가 지혜로 조감하는 공능(功能:作用)이다. 그 경(經)은 무(無)의 극치[至]이고 텅 비고 넓으며 확연하게 툭 트여 어떤 사물도 없는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 사물이라는 개념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고, 지혜에 대하여 지혜라는 개념을 부여해서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운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3해탈(解脫)의 가르침을 현묘하고 현묘한 이치[重玄]들과 평등하게 하고, 만물을 똑같이 텅 비어 있는 곳[空同]에 평등하게 보아, 제불이 본래부터 존재함[始有]16)을 밝히고 함령[群靈:중생]이 본래 없음[本無]을 극진하게 진술하여 10주(住)의 오묘한 계단에 올라 무생(無生)의 지름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궁극적인 무[至無]에 의지해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무(無)라는 것이 어찌 스스로 무(無)가 될 수 있겠는가. 무는 스스로 무가 될 수 없고 이치[理] 또한 스스로 이치가 될 수 없다. 이치가 스스로 이치가 될 수 없으니, 이치는 이치가 아니며[非理], 무가 스스로 무가 될 수 없으니, 무는 무가 아니다[非無]. 이 때문에 오묘한 계단은 계단이 아니고 무생(無生)은 생(生)이 아니다. 묘한 것[妙]은 묘하지 않은 것[不妙]에 의지해서 생기게 되고 무생은 생에 의지해서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10주(住)라는 명칭은 호칭으로 정하기에 부족한 것과 구별하기 위한데서 생긴 것이고, 반야의 지혜는 교의 자취인 명칭과 구별하기 위한 데서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면 명칭이 생기고 가르침을 설하면 지혜가 존재하게 된다. 지혜가 사물로써 존재하더라도 진실은 흔적이 없고 명칭이 생기더라도 이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지극한 이치는 어두운 골짜기와 같아서 무명(無名)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명칭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은 도의 체(體)이고 가(可)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는 것은 성인이 삼가하는 것이다. 진실로 이치에 삼가해서 모든 변동에 대응하려면 말에 기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기탁하는 까닭을 밝히고 말하는 것을 환하게 나타내야 한다. 이치에 명합(冥合)하면 말이 없어지고 깨달음을 잊어버리면 지혜가 온전해진다. 만약 무(無)를 보존해서 고요함[寂]을 구하려 하거나 지혜를 희구해서 마음을 잊으려한다면, 그와 같은 지혜는 무(無)를 극진하게 하기에는 부족하고 그와 같은 고요함은 신묘함에 명합하기에는 부족하다. 무엇 때문인가? 소존(所存:존재하게 되는 대상)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存]이 있고, 소무(所無ㆍ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무가 되게 하는 것[無]이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無)을 희구하는 것은 진실한 무(無)가 아니다. 왜냐 하면 다만 무(無)가 무가 되는 것을 알 뿐 무(無)가 되는 까닭은 알지 못하고, 존재가 존재가 되는 것을 알 뿐 존재하는 까닭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無)를 희구하면서 무(無)를 잊기 때문에 무가 무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의탁하면서 존재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가 되는 것을 없어지게 하고 존재가 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 존재하게 되는 것을 잊어버리면 존재하는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없어지고 무가 되는 것을 잊어버리면 무가 되는 대상[所無]을 무가 되게 하는 것[無]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무(無)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묘하게 존재하고 오묘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무(無)가 다하게 되는 것이다. 무(無)가 다하게 되면 현묘함을 잊게 되고 현묘함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무심(無心)하게 된다. 이렇게 된 후에 두 가지 자취가 기탁함이 없어지고 무(無)와 유(有)가 그윽하게 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의 시원(始源)이 없음에 의지하여 만물(萬物)이 본래 그러함[自然]을 밝힌다. 중생이 도를 상실하는 것은 정신이 욕망의 연못[欲淵]에 빠져 있기 때문이니, 오묘한 도로써 군속(群俗)을 깨닫게 하면 쌓여 있는 욕심이 점점 줄어서 무(無)에 이를 것이다. 현묘한 덕을 설하여 가르침을 광대하게 하고, 곡신(谷神)을 지켜서 허(虛)를 보존하게 하며, 모든 것이 현묘한 동화[玄同]를 이루게 하여 평등하게 하고, 모든 중생[群靈]을 본래 무(無)인 상태[本無]로 돌아가게 한다. 대체로 들으니, 소품경(小品經)을 초출(抄出)한 사람은 도사(道士)라고 한다. 항상 외국으로 떠돌았고, 햇수도 오래 되었으며, 경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어서 그 성명(姓名)은 알지 못하겠다. 일찍이 들으니, 선학(先學)들이 모두 함께 전하기를 “부처님께서 세간을 떠나신 후에 대품(大品) 중에서 소품(小品)을 초출(抄出)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그 사람은 순수한 덕[淳德]으로 살펴보고, 그 일에 마땅한 것을 제시하였다고 하나, 그가 도달한 경지를 밝혔을 뿐이니, 또한 그의 유래를 헤아릴 수 없다. 지인(至人)은 온갖 미묘한 것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현묘하고 그윽한 것에 정신을 응축시키며, 텅 빈 듯하나 신령스러워 메아리처럼 감응하고, 느낌이 오는 대로 소통함에 일정한 방향이 없이 자재하다. 사람들을 똑같이 보는 덕[同德]을 세워서 제접하고 교화하며, 현묘한 가르침을 펼쳐서 정신을 깨우치고, 지난날의 자취를 기술하여서 막힌 것을 찾아내고, 이미 이루어진 법규[成規]를 부연 설명하여 근원을 열어준다. 혹은 변화에 의지하여 소통시키려 하고, 일이 완성되면[事濟] 교화를 멈추기도 하고, 각각의 임무를 알맞게 해서 분야마다 온전하게 하고 분야마다 충족되면 가르침을 멈춘다. 그러므로 이치[理]가 변화되는 것도 아니고, 변화가 이치가 되는 것도 아니며, 가르침이 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체 그 자체가 가르침이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의 변화가 이치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정신인들 어찌 움직이는 것이겠는가. 정신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감응해서 변화하는 작용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변화는 성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物]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중생이 변화하는 것이요, 성인은 변화하지 않으니, 성인은 애초부터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잃어버리는 것은 변화에서 생기고 이치가 막히는 것은 방편에서 생긴다. 제접해서 감응하는 것은 중생에게 달려 있지만 이치의 극치점이 돌아가는 곳은 같다. 그런데 가르침의 언사와 수[辭數]는 근본과 다르고 일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갖추어져 있다. 작용[功]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중생의 만품(萬品) 때문이고 마음을 깨닫는 데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는 것은 모두 천분[分]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천분이 어두우면 작용[功]이 거듭되어 언어에 의한 가르침이 축적된 이후에야 깨닫고, 천분이 밝으면 정신도 맑아 이치에 부딪치는 대로 현묘한 이치를 환하게 깨닫는다. 따라서 작용의 경중(輕重)은 천분에서 비롯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은 작용을 후하게 해야 된다고 하여 바탕을 무시하지도 않고, 바탕이 가르치기 쉽다고 하여 작용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모든 중생[群品]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중생의 천분과 성인의 작용[功]이 성립되는 것이니, 반드시 작용을 후하게 해서 운행하고 소통시켜야 하며, 중생의 바탕에 따라서 마땅하게 제접해야만 한다. 이것은 깨닫는 사람에 대한 작용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요, 성인의 가르침이 번쇄하기 때문은 아니다. 전체적인 강령[令統]17)이 간략해야 가르치는 작용[敎功]이 온전하게 되므로, 반드시 상대에 맞게 통솔해야 일이 알맞게 되고 문장이 간략해야 강령이 현묘하게 된다. 강령이 현묘하면 쉽게 소통되고 일을 알맞게 하면[因任] 쉽게 따른다. 그런데 중생들은 (대품과 소품의) 두 가지 본이 다르지 않음과 전체적인 극치[統致]의 근본이 같음을 깨닫지 못하고, 편의상 단어의 숫자[言數]로 대소(大小)를 나누고, 근원과 지말의 흐름[源流]으로 정밀함과 거침[精麤]을 구별하여 문장이 간략한 것은 소품이라 하고, 문장이 성대한 것은 대품이라 하며, 항상함을 따르는 것[順]18)을 통(通)이라 하고 변화에 의지하는 것을 무(舞)19)라 하며, 세세한 가르침[數]을 지키는 것은 옳다[得]고 하면서 전체적인 강령을 그르다[失]고 한다. 그리하여 저 문장을 갈고 닦는 무리들은 견해[成見]에 묶이고 가르침에 속박되어 『아함(阿鋡)』의 가르침을 받들고 집착하여[頂著], 정신은 무너지고 천분[分]은 천박해지며 재능은 근본을 따르지 못하고 유묵(儒默) 대도(大道)의 영역에 성인을 고정시키며, 생각이 문구(文句)에 국한되어 가르침을 힐난하고 방편[權]20)을 비난한다. 강요(綱要)를 숭상하는 것은 진실에 통달하였다고 하고 전체적으로 통괄하는 것은 근본을 손상시킨다고 하니, 반드시 확실하게 징험해야 실체가 분명해지고 감응이 나타나야 의심하는 마음이 조복될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뭇 중생들의 감정을 따라서 이치를 징험해 보이고 끓는 기름[沸油]에 맨손을 넣어도 데지 않는 효험을 보이는 것이다. 소품(小品)의 체본(體本)을 분명하게 밝힌다면 뭇 중생들이 의심해서 깊이 막히는 것을 차단하고, 중생들이 징험하는 것에 의지해서 징험을 나타내어 이에 상응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영험을 통하여 증거를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덕(淳德)이라고 지목하고, 효능을 사실에서 잃어서 이것을 상인(常人)이라고 하여 신묘하게 교화하는 방편을 통달하지 못한다. 장래에 있을 현묘한 감응을 통괄하고, 다양한 방도[殊途]로는 작용을 환하게 밝혀서 방소가 없는 하나의 극치로 실어다 준다. 그러나 서로 다른 궤요를 보고 계통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라 여기고, 변화에 의탁하는 것을 보고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여기며, 큰 보배를 얻는 것을 최상의 기쁨[欣王]으로 여기고, 구제하는 데 쓰는 재화를 모으는 것을 욕망의 시작이라고 여기니, 이것은 단지 지극히 성스러운 것이 가르침이 되는 것만 알 뿐 가르침이 되는 까닭[所以敎]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3재(才)를 영역의 표치로 삼고, 현묘하게 중생[萬品]의 근기를 정하여 가르침에 한 가지 방법을 쓰지 않고 대상에 따라 온갖 방법[萬方]으로 중생에게 감응해주는 것이다. 혹은 교(敎)를 손상시키고 무(無)를 어기면서도 소통시킴에 기탁하여 알맞게 회합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를 끌어안고 유(有)를 제어하면서도 문장을 붙여서 종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성전(聖典)을 존숭하여 세간의 궤칙으로 삼으니, 도를 체득하여 마음을 극진하게 한사람도 언어의 가르침[言敎]을 힐난할 수 없고, 무(無)에 노닐면서 허(虛)를 섭렵한사람도 형이하학의 물상[形器]에서 추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이라야 만물에 대하여 마침내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대품과 소품의 종지[大小]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현묘하게 나타내는 것이 기탁함이 있음을 환하게 드러내고, 중생의 편의에 따르면서도 소소한 절개[小介]에 구속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대품(大品)쪽이 언사가 많고 사례(事例)가 자세하며[廣] 비유로 인용한 것도 심오하다고 여긴다. (확실히 대품은) 이치를 궁구해서 유(有)를 초월하여 마침내 현묘한 동화(同和)를 나타내지만 (대품과 소품은) 근본을 밝힘에는 하나로 통일되고 합치점[會致]이 다르지 않으니, 이것 역시 위대한 성인의 시기에 맞는 가르침[時敎]이고 모든 중생의 천분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 주는 것[分致]이다. 만약 천분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주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면 또 어떻게 (중생을) 간별하는 것을 성인에게서 구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생을 간별하는 것이 성인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모든 천분의 중생에 대하여 말에만 기탁하는 것이 아니랴. 만 가지 소리로 종이 울리지만 울림은 하나로 유지되고 만물(萬物)이 성인에게 부딪쳐가지만[感] 성인도 역시 고요함으로써 응해준다. 그러므로 소리는 울림이 아니고 언어는 성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 신령스러움[神]으로 미래를 아는 것이니, 저 미래를 아는 것은 모두 신령스러움 아닌 것이 없다. 기미가 움직이면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미리 조감할 수 있는 것이니, 저 미래와 과거[來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항상 조감하는 작용 안에 있다. 이 때문에 지인(至人)은 장래에 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希纂]을 조감하여 타고난 바탕[才致]이 일정하지 않음[不竝]을 분명하게 알아서, 가르침의 자취를 간별하여 존중해서 따르게 하고 여러 중생의 지혜의 바탕에 합치하고자 하는 것이니, 관문[關]으로 향하는 사람은 전체를 얻기 쉽게 하고, 지식이 적은 사람은 실행하기가 쉽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품(大品)은 단어의 수[言數]가 많고 의미[辭領]가 넘칠 듯 풍부하며, 문답[問對]은 심오하고 교리는 계통 체계가 웅대하고 깊다. 현묘한 종지를 궁구하기는 쉽지만 사례마다 자세하게 갖추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배우는 학도들은 사적(事迹)의 취지[迹旨]를 연구하고, 과거에 연구해놓은 것[所往]을 정리하고, 근본 종치를 궁구해서 살피고, 논의하는 것의 시종[興盡]을 명확하게 정해서 나타내고, 그런 후에 비로소 막혀 있는 것을 깨달아 현묘한 강령의 계통을 잡아야 한다. 혹은 많은 질문을 통하여 단련하고 종합하며, 질문에 상응하는 대답을 명확하게 하며, 심오한 도리를 찾아서 연구하고, 오묘한 종치를 끝까지 알아야 한다. 혹은 가르침의 많은 법수(法數)가 넘쳐서 독송함에도 끝까지 궁구하기가 어렵고, 사경(寫經)하고 숭배하고 공양하는 힘으로는 그 위치에 오를 수 없다. 이와 같은 모든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생들이 우러러보려 해도 타고난 천분(天分)이 협소하여 (대품의 종지를) 엿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소품(小品)을 초출한 사람은 왕통(王統)을 이끌어서 계승하고, 많은 항목을 간별하여, 임시로 빌린 언어21)에 의해서 사적과 법수의 영역을 정하고, 종지에 따라 제목을 결정하여 소품이라고 한 것이니, 그 언사와 비유가 깨끗하고 간략하며 종지를 운용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자주자주 종지를 명확하게 하고 종치가 회합하는 것을 나타내어 웅대한 계통이 서게 하고 이치에도 손상시킴이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정미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분명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소품은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나루와 길을 관찰하여 그 오묘하게 만나는 곳을 찾고, 처음을 살피고 마지막을 궁구해서 심오한 종지를 끝까지 연구하고 있다. 대품에서 제시하는 최상의 표치[王標]를 파악하고 소품(小品)의 현묘한 종치를 갖추어 사뿐하게 현미(玄味)로 건너가는 나루를 잡게 하였으니, 정묘하고 극진하기가 여기에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윽한 나루에서 신묘한 왕이 되어 만물에 대해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므로 그 도량을 헤아릴 수 없으니, 마땅히 방편을 벗어난 곳[筌表]에서 구하고 현묘함을 넘어선 곳[玄外]에 기탁해야 한다. 일찍이 들으니, “대품(大品)과 소품(小品)은 본품(本品)에서 나왔는데, 본품은 문장이 60만 단어이다. 지금 천축에서 유행되고 있는데, 아직 진(晋)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 이 두 가지 가려 뽑은 것도 대본(大本)에서 생겨난 것이다. 역출한 사람이 같지 않고, 소품이 먼저 역출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은 동일하게『본품』에서 나왔지만 때때로 같지 않은 점이 있다. 혹은 소품에는 실려 있는 것이 대품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고, 대품에는 갖추어져 있어도 소품에는 빠져있는 경우가 있다. 그 까닭은, 두 가지 경의 사례가 같은 경우에 서로서로 의지해서 근본이 하나임을 밝히고 병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품은 지극히 간략하면서도 현묘함을 총괄하고 일의 요점과 근본을 거론하고 있으며, 대품은 언사의 표현이 지극하고 완미하고 정교하면서도 근본 귀의처를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설명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혹은 오로지 자구에 의지하고, 사적(事跡)만 추리하여 헤아리고, 비유하고 있는 본뜻[主旨]은 살피지 않으며, 혹은 자신의생각대로 재단한 곳이 많고 경본(經本)을 의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문장의 흐름이 서로 위배되어 의미와 핵심[義致]이 함께 어긋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교의를 치우쳐서 강조하여 현묘한 종지를 잃어버리기도 하였다. 혹은 인용하는 계통을 잃어버려서 사적에 대하여 증거를 잘못 제시하기도 하고 교묘한 언사로 허위를 말하면서 이것을 경의 본체로 여겨서 비록 문장의 표현은 깨끗하고 뛰어나지만 이치의 계통은 종지에서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선철(先哲)이 경을 역출함에 있어서 호본(胡本)을 근본으로 삼아서 소품(小品)을 가려 뽑았지만 대본(大本)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호본(胡本)을 추리하여 궁구하면 이치를 밝힐 수 있고 대본(大本)을 조사하면 소품과 대비하여 징험할 수 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얻은 것에 머물게 되면 성인의 가르침의 본지(本旨)를 등지게 되고 새롭게 듣는 소리에서 상(常)을 헛되다고 여기고, 상(常)과 다른 것으로 다투어 달려가게 된다. 그러나 상(常)과 다른 것은 근본을 조사하기에는 부족하고 새롭게 듣는 소리는 근본[宗]을 거두어들일 수 없고, 상(常)과 다른 것이 단지 담론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근본을 손상시키는 것이 됨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근본을 손상시키게 되면 계통을 잃게 되고, 계통을 잃게 되면 이치에 막히고, 이치에 막히면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22) 만약 위태로운데도 그 본원(本源)을 생각하지 않고, 곤란한데도 그 근본을 찾지 않는다면 밖으로는 스승의 도움[師資]을 말미암지 않은 것이고 안으로는 천분(天分)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유지(有知)를 우러르고 의지하여 자기 스스로 찾는 것을 막아버리고, 막혀 있는 것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자기 스스로 소통시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가서 상(常)을 가리지 않고 물러나서 새로운 것을 연구하지 않고 설명하면서 근본에 의거하지 않고, 이치가 근본 종지를 따르지 않으면서 선구(先舊)를 가벼이 빗대어 읊조리고 고인(古人)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은 학문을 익혀서 그 자연스러운 것을 보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건이 의지하여 생겨남[資生]에 대종(大宗)이 없어서는 안 되고 일이 일어남에는 근본이 없어서는 안 되니, 대종과 근본은 모든 이치의 근원이다. 근본을 잃으면 이치가 단절되고 뿌리가 썩으면 가지가 상(傷)하니, 이것이 자연의 법칙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가운데에서 다만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깊은 학식을 품고 세간과 등져 있으면서 대품(大品)이 그 원류를 살피고 이치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품(小品)에 기탁하려는 생각을 품어서 마음대로 의미를 조작하고, 그 바탕에 기탁하여[寄]23) 자연을 나타내어 사람들 중에서 뛰어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이 명성[名賓]을 숭상하는 것이어서, 재능과 사려를 다하고 성인의 말씀을 현묘하게 바꾸어 중생의 망정을 기쁘게 하려 해도 근본종지와 어긋나게 되니, 어찌 대품(大品)의 핵심을 파악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장차 미혹된 것을 따라 후생(後生)을 속일까 염려스럽다. 이 때문에 대품과 소품의 같고 다른 점[同異]을 깊이 상고하여 그 허실을 검증하고, 만류(萬流)와 근원을 찾아서 각각 귀취(歸趣)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소품이 대종(大宗)을 인용하는 경우 때때로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혹은 언사는 전도되어도[倒]24) 사례가 같으면서 지귀(旨歸)가 어긋나지 않는 경우가 있고, 혹은 처음의 요점은 취하고 끝에 있는 종치(宗致)는 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방편[筌]으로 일의 근본에 순서를 매겨 수미(首尾)를 전도시키는 경우가 있고, 혹은 여러 품(品)에 산재해 있는 현묘한 요점을 간략하게 가려 뽑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 이와 같은 일이 있지만 서로 어긋나는 모양은 같지 않다. 또 대품(大品)은 사례(事例)의 수효가 매우 많고, 언사(言辭)가 질펀하여 넘칠 듯이 많아[浩衍] 본래는 본종(本宗)을 추구하여 사례(事例)의 지귀(旨歸)를 명확하게 징험하려고 하였으나 생각은 많은 수고를 하면서도 파악해내는 공(功)은 적다. 또 없어진 사례를 상고해서 징험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나는 현묘한 일을 예로 들어서 서로 비교하고 대ㆍ소 2품(品)을 나타내어 서로 대비시켜 이것과 저것이 있는 곳을 밝히고 대품과 소품에 각각 더 훌륭한 점[先]25)이 있음을 논변하였다. 혹시 이치가 심오하지 않더라도 사례를 대비하여 내용이 같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연구한 것을 모아서 정추(精麤)를 합치시키고 사적(事跡)을 끝까지 연구하여 그 유래가 있음을 징험하였다. 그러므로 근원을 찾아서 실제를 구하고, 이치의 근본에 합당하도록 취지(趣旨)를 결정하였다. 이 때문에 대품의 광대한 종치를 상고하고 소품의 총요(總要)를 징험하여 현묘함이 은몰되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동이(同異)가 기탁한 곳을 추구하였다. (보존된 곳과 의지한 곳이) 있으면 그것을 찾고, 궤적(軌跡)이 있으면 그것에 따랐다. 수미(首尾)를 하나로 꿰뚫어서 종합하고, 현령(玄領)을 미루어 짐작하여 얽히고 맺힌 곳을 구명(究明)하고, 막혀 있는 곳을 가려내어 문장이 종지를 어기지 않게 하고, 이치와 종지가 등지지 않게 하였으며, 증험에 의지한 곳을 적어 넣었고,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徵]26)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또 읊조리는 것을 바라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맑은 정신을 근본종지에 노닐게 하고 현묘한[妙]27) 가운데 도야시켜 근원과 만류(萬流)를 추구하고 찾아서 마음을 비우고 실질을 상고하게 하였으니 또한 평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영역이 본체의 극(極)과 어긋나고, 앞에서 제시한 대치(對治)가 이표(理標)와 다르고, 기탁한 것이 부족함[或]이 있다면, 장래에 보살마하살이 끝까지 연구하여 상세하지 못한 점을 완비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031_0351_a_02L 태강(太康) 7년(286) 8월 10일, 돈황에서 온 월지국(月支國) 보살 사문 법호(法護)가 손으로 호경(胡經)을 잡고 입으로 선양하여 『정법화경(正法華經)』 27품을 역출하였다. 우바새(優婆塞) 섭승원(聶承遠)ㆍ장사명(張仕明)ㆍ장중정(張仲政)이 함께 필수(筆受)하였으며, 축덕성(竺德成)ㆍ축문성(竺文盛)ㆍ엄위백(嚴威伯)ㆍ속문승(續文承)ㆍ조숙초(趙叔初)ㆍ장문룡(張文龍)ㆍ진장현(陣長玄) 등이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가지로 도와서 9월 2일에 끝마쳤다.
영희(永熙) 원년(290) 8월 28일에 비구 강나율(康那律)이 낙양(洛陽)에서 『정법화품(正法華品:正法華經)』의 필사를 마쳤다. 그 때 청정한 계를 지니고 절조 있는 우바새 장계박(張季博)ㆍ동경현(董景玄)ㆍ유장무(劉長武)ㆍ장문(長文) 등이 손으로 경본(經本)을 잡고 백마사(白馬寺)28)를 찾아가 법호(法護)와 마주 대하고, 법호가 입으로 고훈(古訓)을 교정하고 심오한 의미를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9월 본재일(本齋日)인 14일에 동우사(東牛寺)에서 대법회(大法會)를 단월들에게 베풀고 이 경을 강송(講誦)하였는데, 날이 저물고 밤이 다 지나도록 환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다시 교정하였다.
031_0351_b_02L 본제(本祭)가 그윽하고 깊으면 마음[神根]이 하나로 응축되지만 이리저리 움직여서[涉動] 순박함을 떠나면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이에 마음의 고삐를 다투듯 채찍질하여 먼지처럼 일어나는 생각[塵想]이 다투어서 치달리게 되고, 마음을 가리는 것에 천심(淺深)이 있으니 비치는 모습의 어둠과 밝음이 다르게 된다. 이 때문에 처음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이 경(經)을 설할 때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중생에 상응하는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3승(乘)의 흐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흐름은 진실한 것이 아니므로 결국에는 회합하는 것을 기약하게 되고, 회합하면 반드시 근원이 같아지기 때문에 유일한 1승(乘)이 되고, 유일한 것은 무상(無上)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묘법(妙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 1승(乘)은 미묘하고 청정하기 제일(第一)이니, 모든 세간에서 최고이고 위없다네.
저 미묘함은 밝힐 수가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형상이 있는 것에 비유하여 헤아리게 된다. 형상이 있는 것 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연꽃이 최상이고, 연꽃 중에서 뛰어난 것은 분타리(分陀利)가 최고이다. 만법(萬法)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하여 분타리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 경(經)은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침에 있어서 갑자기 극치를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상응하는 방편의 유래를 설명하고, 종극(終極)에 가서는 심오한 것을 감출 수 없기 때문에 실교(實敎)를 열어서 종치(宗致)29)를 나타낸 것이다. 상응하는 방편을 이미 밝혔으니 미혹과 집착으로 닫혀 있던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고, 종치(宗致)를 이미 나타냈으니 진실한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온갖 흐름이 합쳐서 흘러가듯 3승(乘)이 함께 가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함께 가는 삼승이 회합하여 1승(乘)이 되는 것이 교승(敎乘)의 시초요, 깨달음과 지혜가 원만해지는 것이 교승(敎乘)의 번성함이요, 번뇌의 그림자를 소멸시키려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교승의 끝마침이다. 비록 만법(萬法)이 교승이 되지만 그것을 통제함에는 주체가 있으니, 그 종요(宗要)를 들어서 말한다면 지혜라는 명칭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진실한 지혜로써 체(體)를 삼고, 미묘한 일승으로 명칭을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현묘한 음성[玄音]을 처음 내실 때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가 깊고 깊음을 찬탄하고, 다보(多寶)부처님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훌륭함을 칭찬할 때에 평등한 대지혜를 찬탄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으니 오직 이 일승만이 진실한 것이요, 나머지 2승(乘)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네.
그렇다면 부처님의 지혜가 바로 하나의 올바른 진실이고, 교승(敎乘)의 체(體)가 완성된 것이며 오묘함이 지극하게 구족된 것이고,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것이다. 비록 꽃에 기탁하여 미묘함을 선양하였지만 도(道)는 현상을 넘어선 현묘한 것이고, 오묘하다고 말하지만 그 자체는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이 끊어져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 법은 나타내 보일 수 없으니 언사(言辭)로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 고요히 소멸되어 있다네.
2승(乘)은 이 때문에 사려(思慮)를 쉬게 되고 보처(補處) 보살은 이 때문에 번뇌를 끊게 되지만,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이라야만 끝까지 궁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은 수의 여래께서 이 희유한 가르침[聲]에 감응하여 구름처럼 모여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성자들도 남은 신령스러움으로 떨치고 일어나 증득한 바를 나타내는 것이다. 진실로 불법(佛法)의 깊숙한 구역[奧區]이요, 신묘함을 궁구하는 미묘한 경계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 경을 두고 말한 것이니, 나 혜관(慧觀)은 어려서부터 하나로 귀착한다[歸一]는 말을 배우고 성장한 후에도 요점을 오랫동안 음미해 왔다. 그러나 생각함에 힘쓰면 힘쓸수록 그윽한 종지는 더욱 숨어버려서 일찍이 영취산의 법회를 대면한 것처럼 멀리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언어로 표현된 구절에 임해서 감회가 증폭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지말적인 설명이 근본과 차이가 나고 잘못된 문장이 정법(正法)과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외국(外國) 법사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출중하게 뛰어나고 준수하고 고매했으며 기특한 깨달음은 타고난 특출함 때문이었다. 그의 도량은 바다보다 깊었고, 논변의 유창함은 옥이 흩어지는 것과 같았다. 석가의 종적을 계승하여 궤범을 이었고, 신묘한 횃불을 잡아서 서리처럼 빛나게 하였으며, 쇠퇴하여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른 강기(綱紀)를 붙잡았고, 이미 물에 빠져서 표류하면서 익사할 지경에 이른 중생을 건져 내었다. 이와 같은 지혜의 등불을 밝혀서 이 땅에 광명이 들어오게 하였다. 진(秦)나라 홍시(弘始) 8년(406) 여름, 장안대사(長安大寺)에 사방에서 교학에 밝은[義學] 사문 2천여 명을 모아 이 경을 새롭게 역출하면서 대중들과 더불어 상세하게 논구하였다. 구마라집 자신이 손으로 호경(胡經)을 잡고, 입으로 진(秦)나라 말로 역출하였는데, 세세한 것은 방언(方言)을 따랐지만 취지(趣旨)는 근본과 어긋나지 않게 하여 경문만 보아도 이미 절반 이상을 알게 하였으니, 비록 하늘을 덮은 구름을 벗겨내어 태양과 빛을 함께 빛나게 하였다는 말로도 이것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하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오히려 언어가 표현되면 이치가 숨어버리고 사적(事跡)에 근접하면종지(宗旨)에서 멀어진다고 여겼다. 또 그는 언어 뒤에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내어[釋] 현묘한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요구에 부응하였으니, 그윽한 비밀의 사립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해도 진실로 그 입구[門]에 도달해 있다 할 것이다. 저 최상의 선(善)은 만물을 평등하게 적셔주고 신령스러운 이슬은 균등하게 내려주는 것을 숭상한다. 이 때문에 우러러 선성(先聖)께서 여러 번 부촉하신 것을 생각하고, 고개 숙여 아직 가르침을 듣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지의 요점을 대략모아 기술하여 아직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포시키려 한다. 바라건대 법의 수레바퀴가 멀리까지 굴러가 아직 가지 않은 곳까지 이르러가서,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함께 깨닫고 1승(乘)의 가르침을 궁구하여 나타내었으면 한다. 그 때문에 서문을 쓰는 바이다.
031_0352_a_02L 『법화경(法華經)』은 모든 부처님의 비장(秘藏)이고, 모든 경전의 실체이다. 꽃[華]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근본을 조감한 것이고, 분타리(分陀利)라고 부른 것은 그 번성함을 찬미하는 것이다. 흥기한 것이 이미 현묘하고 그 종지가 깊고 완미하니, 진실로 통달해서 박식한 사람이 전해주지 않는다면 그 입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저 백 가지 풀과 약목(藥木)의 꽃이 만물의 열매의 근본이듯 팔만 사천에 이르는 법장(法藏)이 도(道)의 도과(道果)를 성취하는 근원[源]30)이다. 그러므로 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모든 꽃 중에서 연꽃이 가장 뛰어나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를 굴마라(屈摩羅)라고 하며, 피었다가 막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가마라(迦摩羅)라고 하며, 그 중간에 활짝 피었을 때를 분타리(分陀利)라고 한다. 아직 피지 않았을 때는 2도(道:성문과 연각)를 비유하는 것이고, 막 떨어지려고 하는 것은 니원(泥洹)을 비유한 것이다. 활짝 피어서 빛나는 것만이 경전을 비유할 만하다. 가령 반야부의 모든 경전에 이르러서는 깊이가 극치를 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도(道)를 행하는 사람들은 이것에 의지해서 귀의한다. 크기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가르침의 수레에 탄 사람들은 이에 의지해서 건너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략은 모두가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교화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감응해서 작용하는 문(門)에서는 훌륭한 방편으로 작용을 삼지 않을 수 없다. 방편으로 교화(敎化)하는 것은 중생을 깨우쳐 주는 일이 비록 광대하기는 하지만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모두가 법화(法華)의 가르침으로 귀속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 깊은 종지(宗旨)를 연구해 보면 드넓고[廓]31) 툭 트이고 웅대하고 깊으며 포함하고 있는 것이 매우 원대하니, 어찌 실제를 설하여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길을 필경에 한 길로 정한다는 것이 헛된 말이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실로 크고 밝게 이치를 깨닫게 하고, 고금(古今)을 주머니에 담아 포괄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수명(壽命)은 한량이 없다[佛壽無量]”고 하였는데 영겁이라는 말로도 그 장구함을 밝히기에 충분하지 않고, “분신(分身)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分身無數]”고 하였는데 만 가지 형상이라는 말로도 그 본체와 다르게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명이 한량없다는 것은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단정하여 나타낸 것이고, 분신(分身)은 실체가 없음을 밝힌 것이고, 보현(菩賢)은 성취된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고, 다보(多寶)는 소멸하지 않는 것임을 밝게 드러낸 것이다. 저 아득한 옛날을 뛰어넘어 오늘을 기약할 수 있으니, 만 년의 세월이 같은 하루이고, 백 가지 교화에 나아가서 현묘함을 깨달을 수 있으니, 천 갈래 다른 길이 그 자취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다면 세세생생으로도 그 존재하는 것을 언어32)로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영원한 고요함[永寂]으로도 그 적멸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윽한 종지를 찾아서 과거의 원인을 단절하면 본래 무(無)인 자리에서 공능이 없어지고 마음의 고삐를 잡아당겨 삼매에 몰입하면 두 경지[二地:성문과 연각]에 대한 기약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 경전이 이 땅이 유포된 지 비록 백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경(經)을 번역하는 사람이 텅 빈 나루[虛津]에 어두워 영묘(靈妙)한 관문을 열지 못하게 되었고, 담론하는 사람은 강령[准格]에 어긋나서 그윽한 자취를 밟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부질없이 백발이 될 때까지 찾고 연구해도 아직도 그 입구를 엿본 사람이 없었다. 진(秦)나라 사예교위(司隸校尉)인 좌장군 안성후(安城侯) 요숭(姚嵩)은 현묘한 문(門)에 뜻을 두고 세간을 넘어선 곳에 마음이 깃들게 하여 진실로 이 경전에 뜻을 기울였고, 신심은 더욱 깊어갔다. 그는 그 문장을 생각하고 연구할 때마다 번역자의 오류를 깊이 알게 되었다. 이윽고 구마라집(鳩摩羅什)법사를 만났는데 법사가 그를 위해 전사(傳寫)해 주고, 이경전의 근본종지[大歸]를 지시해 주니 진실로 여러 겹의 하늘을 열어 제치고 높은 곳에 오른 것과도 같았고, 마치 곤륜산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는 것과도 같았다. 이 때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8백여 명이었는데, 모두가 제방(諸方)에서 모여든 뛰어난 수재(秀才)들이었고, 한 시대의 호걸들이었다. 이 해는 홍시(弘始) 8년(406)으로 세성(歲星)이 순화(鶉火)33)에 있었다.
『지심경(持心經)』은 태강(太康) 7년(286) 3월 10일, 돈황의 개사(開士:보살) 축법호(竺法護)가 장안(長安)에서 범문(梵文)을 설해서 역출하여 승원(承遠)에게 전수하였다.
031_0352_b_16L持心經,太康七年三月十日,燉煌開士竺法護,在長安,說出梵文,授承遠。
11. 사익경서(思益經序) 석승예 지음
031_0352_b_18L思益經序第十一 釋僧睿法師。
031_0352_c_02L 이 경은 천축(天竺)의 정음(正音)으로는 비시사진제(毗絁沙眞諦)라고 한다. 이것은 그곳의 범천(梵天), 수특묘의보살(殊特妙意菩薩)의 명호이다. 집공(什公)이 그 이름을 전역한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여러 번 번복해서[飜]34) 의미가 흡사 극진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지만 진실로 진(晋)나라 말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해서 명칭과 실제에 맞도록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의 뜻을 살펴서 명칭과 취지를 회합시키면 마땅히 지의(持意)라고 해야 되고, 사익(思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집공(什公)이 지(持)의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해서 익(益)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익(益)이라는 말은 초절(超絶)하게 뛰어나고, 특수하게 다른 것과 다르며, 미묘하고 발군(拔群)이라는 것에 대한 명칭이다. 사(思)는 덕에 힘쓰고 업을 닦아[進業] 고매하고 뛰어나며, 스스로 힘쓰며 쉬지 않는 것[自强不息]에 대한명칭이다. 구역(舊譯)에서 지심(持心)이라고 한 것이 그 실제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한 것이다. 또 그 의미와 취지에 대해 구역에서는 ‘평등하게 모든 법을 제어한다[等御諸法]’는 뜻이라고 하였다. 범천(梵天)은 그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나루와 길[津塗]을 평탄하게 하고, 세존은 밝혀야 할 것을 밝게 비추어 주고, 보화(普華)는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非心]을 장려하고, 문수(文殊)는 무생(無生)의 이치에 의해서 번뇌를 소멸시킨다. 뜻이 높고도 크도다[落落焉], 진실로 염부제(閻浮提)에 법륜(法輪)이 다시 구르고, 우주에 법고가 거듭 울려 퍼지며, 말세에 감로의 가르침이 흐르고, 변방[遐裔]까지 신비한 이슬로 적셔준 것이라 하겠구나. 그런데 공명(恭明:支謙)이 앞서 번역한 것은, 그 언어 표현에 있어서는 매우 유려했지만 그 종지(宗旨)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대한 표치를 잘못된 문장으로 어긋나게 하고 지극한 맛을 화려한 문식으로 담담하게 만든 것이니, 비록 연구하고 살피는 공(功)이 축적되더라도 깊은 종지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관우(關右:관서 지방)에서 구마라집 법사를 만나 범어(梵語)를 다시 번역한 것을 얻어 올바른 역문(譯文)을 죽백(竹帛)에 기록하고 또 현묘한 종지에 대한 해석을 들어 자구(字句)마다 커다란 귀착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에 물어서 깨달은 스님이 2천여 명이었고, 대재(大齋)35)의 법회에 모인 대중들도 만나기 어려운 경사라고 하여 흔쾌하게 참여하였다.36) 근자에 강당에 모이는 숫자도 여기에 비견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 때 도항(道恒)과 함께 외람되게도 전사(傳寫)하는 책임을 맡아 바로바로 그 말을 적어 두고 그 일을 기록하여 후래(後來)의 현철에게 남기는 바이다. 그렇지만 어찌 반드시 구마라집의 문장보다 뛰어나고 반드시 그 의미를 극진히 했다고 기약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기록한 언어가 대략이나마 그의 마음과 유사[髣髴]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때 그 일을 함께 하지 않았던 현자(賢者) 중에 혹시 그 고좌(高座)에서 설한 종지를 모두[全]37)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그 때문에 그 때의 문장을 모두 기재하고, 나 자신의 생각은 더하지 않는다.
031_0353_a_02L 『유마힐부사의경(維摩詰不思議經)』은 미묘함을 궁구하고 변화가 극진하며 절묘한 경지에 이른 것에 대한 호칭이다. 그 종지(宗旨)는 깊고 현묘하여 언어와 형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道)는 3공(空:我ㆍ法ㆍ俱空)을 초월해 있어서 2승(乘)이 의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치[群數] 밖에 초월해 있고, 유심(有心)의 경계가 끊어져 있으며, 아득해서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사의(不思議)라고 한다. 왜냐 하면 저 성인의 지혜는 알려고 하는 것이 없지만[無知] 모든 중생[萬品]을 함께 비추어 주고,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지만 서로 다른 형상으로 동시에 감응하고, 지극한 소리[至韻]는 말이 없지만 현묘한 전적에 두루 퍼져 있고, 그윽한 방편[冥權]은 도모함이 없지만 움직이는 대로사물과 회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방면(方面)을 통괄해서 구제하고 중생을 깨우쳐 주고 일을 성취하여 이익을 천하게 나타내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작위함이 없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은 원인에 감응해서 관조해 주는 것을 보고 지혜[智]라 하고, 감응하는 형상을 보면 몸[身]이라 하고, 현묘한 전적을 보면 곧바로 성인의 말씀[言]이라 하고 변화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이것을 방편의 권도(權道)라고 한다. 그렇지만 저[夫]38) 도(道)의 극치를 어찌 형상ㆍ언어ㆍ방편ㆍ지혜라는 말로 그 신묘한 영역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뭇 중생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으니 언어가 아니면 깨우쳐 줄 수 없고, 도(道)는 홀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말미암아 홍포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방(異方)으로 가도록 문수보살에게 명(命)을 내리고, 다른 국토로 유마(維摩)를 부르신 것이다. 이에 비야리(毗耶離)에 모여 함께 이 도를 널리 펼치셨다. 이 경(經)에서 밝히는 것은 만행(萬行)을 통괄하는 경우에는 권도의 지혜를 주체로 삼고, 덕의 근본[德本]을 심는 경우에는 육바라밀[六度]을 뿌리로 삼고, 미혹에 덮여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경우에는 자비를 으뜸으로 삼고, 종지(宗旨)의 극치를 말하는 경우에는 불이(不二)를 말[言]로 삼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설명이 모두 부사의(不思議)의 근본이다. 가령 수미등왕(須彌燈王)에게서 사자좌(師子座)를 빌리고, 향적불토(香積佛土)에서 밥을 청하고, 손 안에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받아들이고, 방 안에 하늘과 만상(萬像)을 포함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사의의 자취이다. 그러나 그윽한 관문은 열기 어렵고 성인의 감응은 일정하지 않아서 근본이 없으면 자취를 드리울 수 없고 자취가 아니면 근본을 나타낼 수 없다. 근본과 자취는 비록 다르지만 부사의한 점에서는 같다. 그러므로 시자(侍者)에게 명을 내려 이것을 경의 명칭으로 삼게 하신 것이다. 대진천왕(大秦天王:姚興)은, 준수한 정신이 세간을 뛰어넘었고 현묘한 마음으로 홀로 깨달아 만기(萬機:제왕의 업무)의 위에서 지극한 통치를 홍대(弘大)하게 펼쳤고, 도(道)로 교화하여 천년 후까지 드날렸다. 왕은 이 전적(典籍)을 항상 연구하고 완미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깃드는 집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겸(支兼)과 축법호(竺法護)가 역출한 것은 이치가 문장에서 막혀 있음을 아쉬워하면서 현묘한 종지가 번역하는 사람에 의해 매몰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였다. 불교의 유전(流傳)[北天]의 향방[運] 중에 그 운이 이곳으로 통한 것이니, 홍시(弘始) 8년(406) 세성(歲星)이 순화(鶉火)에 있던 해에 대장군(大將軍) 상산공(常山公)과 좌장군(左將軍) 안성후(安城侯)에게 명을 내려 의학(義學)에 밝은 사문 1천2백여 명과 함께 상안대사(常安大寺)에 나집(羅什)법사를 청하여 정본(正本)을 다시 역출하게 하였다.
나집 법사는 세속을 높이 초월한 도량으로 마음이 진실한 경지에 명합하고, 이미 시비(是非)를 초월한 환중(環中)에 이르렀고, 또 방언(方言)에도 뛰어났다. 그 때 손으로 호문(胡文)을 잡고 입으로 선양하여 역출하였다. 승려와 속인[道俗]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 마다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陶冶] 정밀하게 추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 문장은 간략하면서도 종지(宗旨)를 완전히 나타내었고, 그 종지는 은근하면서도[婉然] 분명하게 드러냈으니 은미하고 심원한 성인의 말씀이 이에 환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나 승조(僧肇)는 지혜가 어둡고 식견이 짧았지만 그 때 법석(法席)에 참여하여 가르침을 들었다. 현묘함을 참구하는 데에는 생각이 모자랐지만 문장의 의미를 대략 이해하였다. 곧바로 들은 바를 따라서 주해(註解)를 붙이되 이미 쓰이고 있는 말[成言]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선인의 말씀을 조술(造述)하기만 하고 마음대로 창작하지는 않았다. 바라건대 뒤에 올 군자들이 세대는 다르다 해도 가르침을 함께 들었으면 하는 바이다.
031_0353_c_02L 『유마힐경(維摩詰經)』은 선대 현철의 격언(格言)이고 도를 홍포(弘布)하는 거대한 표치이다. 그 문장은 은미하면서도 아름답고 그 종지는 그윽하면서도 심원하다. 그러나 부르짖는 소리가 높으면 이에 화답하는 소리가 적다고 말할 만하기에 온 세상에서이 경전의 요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 경의 범본(梵本)은 유야리(維耶離)에서 나와 옛날 한(漢)나라가 흥기했을 때 처음으로 이 땅에 전래되었는데, 그 때 지공명(支恭明)이라는 우바새가 있었고 진(晋)나라에 이르러서는 법호(法護)와 숙란(叔蘭)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현인은 모두 경전을 박람해서 종합하고 옛 도(道)를 상고하였으며, 연구하는 근기가 지극히 현묘했고, 각 지방의 서로 다른 언어에 특수하게 뛰어났고, 겸해서 의미를 환하게 통달해서 이해하였다. 이들이 앞뒤로 역출해서 전하여 따로따로 세 가지 경전이 되었다. 이것은 동본(同本)인데 번역한 사람이 달라서 역출된 경이 달라졌다. 그래서 혹은 언사와 문구에 들쑥날쑥함이 있어서 선후가 같지 않기도 하고, 혹은 문장의 유무(有無)와 이합(離合)이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기도 하고, 혹은 지방의 언어에 의해 훈고(訓古)했기 때문에 글자는 다르지만 의취(意趣)는 같기도 하며, 혹은 그 문장에 호(胡)ㆍ월(越)의 차이가 있어서 취지 또한 어긋나는 경우가 있고, 혹은 문장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뒤섞여있어서 결정할 수 없는 것[疑似]도 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사례는 그 갈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때문에 만약 한 가지의 경전에 치우쳐서 집착하면 겸해서 통하는 공능(功能)을 잃게 되고, 세 가지 경전을 펼쳐서 자세히 살피면 문장이 번거로워서 궁구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나는 두 가지를 합해서 서로 부합되도록 하였는데, 지공명(支恭明)이 역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숙란(叔蘭)이 역출한 것을 참고[子]로 하여 장(章)을 나누고 구절을 끊어서 종류가 유사한 것끼리 서로 배열하였다. 그리하여 연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하로 살펴봄에 저 경전을 읽으면서 이 경전을 참고하도록 하여 서로 어긋나는 데에서 오는 수고로움을 해소하기에 충분하게 하였으니, 간이(簡易)하면 알기 쉽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참고해서 서로 다른 것을 교정하여 이치[數]를 극진하게 하고 변화를 통달하면 만류(萬流)가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온갖 사려가 하나로 일치하게[致]39) 된다. 바라건대 아직 깨닫지[寤]40) 못한 사람에게 크게 통달하는 길을 열어주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맞추어 조화롭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배대(配對)시킨 것이 서로 짝을 이루지 않거나 혹시 부류를 나눈 것이 잘못되었다면[失]41) 후대의 명철한 군자가 올바른 것을 따라서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이 경에 비마라힐이 설한 것[毗摩羅詰所說]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법(法)을 존중한 것이다. 오백 응진(應眞)이 칭탄해서 서술한 것과, 모든 보살이 탄복한 것과, 문수사리(文殊師利)와의 문답에서 밝힌 대답과, 보현색신(普賢色身) 보살의 질문에 대답한 게송[要言] 등이 모두 이것을 말한다. 수미등왕(須彌燈王)에게서 사자좌를 빌리고, 향적불(香積佛)에게서 밥을 얻어 오고 오른 손바닥 안에 대중을 제접하고, 묘락국(妙樂國)을 사바세계[忍界]에 거두어들이고, 아난이 번뇌를 끊은 것[絶塵] 등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다. 그의 고매한 인격은 십지 보살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미륵보살이 굽혀서 자기를 겸허하게 비웠고, 그의 높은 성벽은 학문의 경지를 초월했기 때문에, 문수보살만 둘러보았을 뿐 아무도 그의 정원을 엿보지 못하였다. 그가 말한 법은 드넓고 툭 트여서 현묘한 문을 가리켜서 기대하는 마음을 잊게 하며, 중생의 만품(萬品)을 살핌에 평등하게 관조하여 여러 가지 변화의 근본을 통괄하여 생각을 그윽하게 하였다. 높고도 높아라, 법고(法鼓)를 유야리(維耶離)에 울리니 시방세계(十方世界)가 그 희유한 음[希音]을 깨닫지 않음이 없네, 넓고도 넓어라, 제불(諸佛)을 하나의 방 안에 초치하니,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와 같은 각자(覺者)들이 그 허심(虛心)을 구하여 감응하지 않음이 없다. 나는 처음 발심(發心)하여 겨우 몽매함을 깨우치고 나서 이 경전을 외우고 읊조리고 연구하면서 이것을 강요(綱要:喉衿)로 삼아왔다. 선대(先代) 종장(宗匠)에게서 현묘한 가르침을 받고도 아직 구역(舊譯)의 뚫리고 막힌 곳[通塞]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구마라집 법사에게서 현묘한 문장을 바로잡고, 깊은 종지를 지적해 주는 은혜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 앞서 번역한 것이 원본(原本)을 손상시켰고 잘못된 문장이 본래의 의취(義趣)와 어긋난다는 점을 깨달았다. 가령 예를 들어 ‘불래상(不來相)’을 ‘욕래(辱來)’라고 번역하고, ‘불견상(不見相)’을‘상견(相見)’이라고 번역하고, ‘미연법(未緣法)’을 ‘시신(始神)’으로 번역하고, ‘연합법(緣合法)’을 ‘지심(止心)’으로 번역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은 예가 품(品)마다 없는 곳이 없으며, 장(章)마다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후에 한쪽으로 치우쳐 비뚤어진 생각으로는 진실한 말[眞言]에 계합하여 현묘한 깨달음에 마음을 기울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반야의 혜풍(慧風)이 동쪽으로 불어오고 부처님의 말씀[法言]이 유입되어 읊조려진 이래 강습해서 익혔다고는 하지만, 격의(格義)의 방법으로는 원본과 멀리 어긋나게 되었고 6가(家)의 해석은 한쪽에 치우쳐 진실에 상즉하지 못하였다. 성공(性空)을 주장하는 종파가 지금 징험해 보면 진실을 가장 잘 파악하였다. 그러나 용광로에서 도야하는 작용이 극진하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다. 당연히 이것은 찾을 만한 법도 없고, 찾지 않는다고 얻지 못할 것도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땅에서 먼저 역출된 모든 경 중에 식신(識神)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분명하게 말한 곳은 적고 식신에 관한 문장이 있는 곳은 매우 많다. 『중론(中論)』과 『백론(百論)』의 두 가지 논의 글이 이 땅에 이르지 않았고 모든 경론을 통달하여 조감한 이도 없으니, 누가 이것을 바로잡았겠는가? 선대 종장이 문장을 짓다가 말고 크게 개탄하면서 미륵보살(彌勒菩薩)께서 오시면 의심나는 것을 풀어야겠다[決言]고 생각한 것은 진실로 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승가제바(僧伽提婆) 이전에는 천축(天竺)의 의학승(義學僧)들이 아무도 오지 않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광대한 가르침이 높이 제창되는 것을 들었다. 이에 감히 자비(慈悲)의 가르침[悕味]을 구하는 흐름에 참예하여 그 총명을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이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작용은 보존하기가 쉽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진실로 반야(般若)의 지혜로 문혜(聞慧)를 밝게 하고 총지(總持)를 사부(思府)에 새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이 살아 움직이게 해서 잊지 않게 하고 신묘하게 알아서 어둡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종이와 먹을 의지해서 문장의 표현 밖에 있는 말을 기록하고 여러 사람들이 들은 것을 빌려서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설명을 모았다. 문장이 번거로워도 줄이지 않은 것은 일을 귀하게 여겨서이고, 질박해도 꾸미지 않은 것은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서이다. 경의 취지는 미묘하면서 은근하고 그 언사는 풍부하면서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나집(羅什)법사에게 들은 대로] 필수(筆受)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강의하는 자리에 나아가 풀이해 주는 것을 기록하였다. 바라건대 통달[通方]42) 현철(賢哲)께서는 그 문장이 번거롭고 요약되어 있지 않은 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이다.
031_0354_c_02L 이 경전에 보살의 명호(名號)로 제목을 붙인 것은 『사익경(思益經)』ㆍ『무진의경(無盡意經)』ㆍ『밀적경(密迹經)』 등의 경과 같은 유(流)이다. 원만한 작용은 일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에 ‘자재(自在)’라고 하였고, 세력이 이와 비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왕(王)’이라고 칭하였다. 그 표준은 광대하고 툭 트여서 진실로 생각으로 이르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윽한 종지는 현묘하게 응축되어 있어서 연구하는 사람도 비슷한 것[髣髴]조차 찾을 수 없다. 이 땅에서 먼저 역출된 방등(方等)의 모든 경전은 모두 보살이 도를 수행하는 방식을 따른 것이다. 『반야경(般若經)』은 텅 비어서 영묘(靈妙)한 이정표를 제시했고, 『용복경(勇伏經)』은 반드시 제어해서 조복해야 하는 것을 밝혔고, 『법화경(法華經)』은 모든 흐름을 하나로 거두어들였고, 『대애경(大哀經)』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드러내서 나타내었는데, 각각의 경전에 훌륭한 점이 있지만 이 『자애왕경』에 실려 있는 것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진(秦)나라의 대장군(大將軍)이며 상서령(尙書令)인 상산공(常山公) 요현(姚顯)은 진실한 마음으로 (구극의 경지에) 곧장 도달하여 투철하게 깨달아서 핵심에 더욱 나아갔다. 공(公)은 이 경전의 이름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으며, 그 종지를 상고하여 마음을 비웠다. 그는 이 경에 의지하여 교화를 넓히고 그 흐름의 나루를 광대하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경전이 유포되면 곧 보살이 상주(常住)하여 이 세간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기고, 급히 진심으로 대심(大心)을 내어 뛸 듯이 기뻐하여 스스로도 그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마침내 구마라집 법사에게 역출해 줄 것을 청하여 이 두 권의 경전을 얻었다. 보살이 세간에 남긴 드문 종적 중에서 탁월하고 뛰어난 일을 환하게 밝혀서 나열하였다. 이 해는 홍시(弘始) 9년(407)이었고, 세성(歲星)은 순수(鶉首)에 있었다.
031_0355_a_02L 『대반열반(大般涅槃)』은 법신(法身)이 머무는 현묘한 집[玄堂]이고, 정각(正覺)의 진실한 칭호이며, 모든 경전을 비추어 주는 심오한 거울[淵鏡]이고, 모든 흐름의 종극(宗極)이다. 그 체(體)는 만물을 넘어선 곳에 오묘하게 존재하고 무궁(無窮)한 세계 안에 두루 흘러가면서 임의자재하게 활동하고, 기미를 보면 이르러 간다. 임의자재하게 활동하니 허심하게 관조하는 것을 타고 만물을 통어(統御)하며, 언어의 자취에 기탁하여 교화를 이룬다. 기미를 보고 이르러 가니, 만 가지 형상이 감응하여 형상을 나타내고, 뭇 중생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베푼다. 이와 같이 하여 형상이 시방(十方)을 가득 채우면서도 마음은 변화도 사려도 하지 않으며, 가르침이 천하에 가득 차면서도 자기에게는 망정(妄情)이 없다. 먼지나 개미에게까지 섞여서 흘러가면서도 낮다고 여기지 않고, 많은 성인을 가득 덮으면서도 뽐내지 않으며, 그 공덕은 모든 변화를 성취하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만 개의 태양보다 밝으면서도 거기에 거처하지 않는다. 혼연(渾然)하여 태허(太虛)와 더불어 수명[量]이 같으며 고요하여 법성(法性)과 하나가 된다. 법성은 지극(至極)으로 체(體)를 삼는다. 지극하니, 변화가 없는 곳[無變]으로 돌아가고, 그 때문에 생멸(生滅)로도 영원함[常]을 바꿀 수 없다. 생멸로도 영원함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함은 변동(變動)이 없으며, 즐겁지 않다는 생각[非樂]이 그 즐거움을 손상시킬 수 없기 때문에 즐거움은 무궁하다. 나라고 집착하는 혹아(或我)는 잘못된 생각에서 생기고,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비아(非我)는 인연이 화합한 가명(假名)에서 비롯된다. 인연이 화합한 가명은 명칭과 법수(法數)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극한 아[至我]는 명칭과 법수를 초월하여 정말로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 명칭과 법수를 초월하여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재한 성인의 지위에 거처할 수 있으며, 비아(非我)가 지아(至我)를 변화시킬 수 없다. 청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정(非淨)은 허정(虛淨)에서 생기기 때문에 진정(眞淨)이 맑은 물[水鏡]과같이 만법(萬法)을 비춘다. 맑은 물과 같이 만법을 비추기 때문에 비정(非淨)이 진정(眞淨)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경은 장(章)마다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을 서술하여 근본 교의의 숲[宗義之林]으로 삼았고, 현묘한 극치를 열어 보이고 궁구하여 도달하는 것을 열반의 근원43)으로 삼았다. 이로써 비장(秘藏)의 가르침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에게 천양하고, 영묘한 관(管)을 열어서 전체를 관조하고, 4중죄(重罪)의 표저(瘭疽:손톱 밑에 난 종기)를 구제하고 무간지옥(無間地獄)의 혹을 뽑아내었다. 비장을 천양하였으니 뭇 중생의 망정(妄情)이 환하게 소통되고 신묘한 지아(至我)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며, 영묘한 관이 열렸으니 현묘한 광채가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고 몸 안에 있는 신비한 구슬을 비추어 준다. 그런데 사중죄와 무간지옥은 방등(方等)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모든 질병의 두통거리이고 군더더기[創疣] 중에 가장 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열반(大涅槃)은 군더더기를 없앤다는 뜻을 포함한 이름[義名]을 붙인 것이고, 이 경은 대열반으로 종지를 지목하여 제목[宗目]을 삼았으니 온갖 오묘한 것을 통괄해서 섭수함을 밝히게 되고 언어의 표현은 간략하지만 의미를 모두 갖추게 되며, 뜻을 포함한 이름을 세웠으니 3승(乘)의 우열을 관조하여 지극함이 거기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윽한 변화는 조짐이 없고 오묘하게 계합함에는 말이 없으니, 얽매임이 없는 허적(虛寂)한 경지[沖境]에 순응하면 이치가 헛되이 운용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경전은 진실한 말을 열어서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고, 많은 비유를 자세하게 설하여 의미를 집약하고, 호법(護法)을 세워서 초심자를 인도하고, 비장(秘藏)을 보여서 근원을 궁구하고 천 년 동안 견고하게 막혀 있던 것을 소통시키고 영취산에 남아 있던 의심을 흩어버린 것이다. 이치가 은미하고 그윽하게 얽혀 있어서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해진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든 보살이 영(郢) 땅의 장석(匠石)과 같은 솜씨를 크게 발휘하여, 널리 큰 배에 태워 건네주며,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반론을 소제하되 손바닥을 뒤집듯[幡覆] 쉽고 주도면밀하게 하니, 이로 인해 그윽한 길이 환하고 평탄해지고 종지의 귀착점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문장을 독송해도 피로하게 여기지 않고, 그 의미를 말하면서 싫증내지 않고 그 맛을 달게 여기면서 물리지 않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싫어하지 않으니, 비로소 성인의 미언(微言)이 처음으로 진단(眞丹:중국)에서 읊어지게 되고, 고운(高韻)이 적현(赤縣)에 처음 제창되고, 범음(梵音)이 우레와 같이 귀먹은 속인들에게 울려퍼지고, 진실한 용모가 오늘날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고 할만하다. 그런데도 들은 것이 적은 선비와 치우치게 집착하는 무리들이 자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대성인의 가이없는 전적(典籍)을 평하여 마침내 시비에 쟁론이 일어나고 통쾌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방이 생기니, 선각(先覺)도 그 미혹함을 돌이킬 수 없고 뭇 성인들도 그 뜻을 바꿀 수 없어서 8사(邪)의 그물에 덮이고, 9류(流)의 연못에 길이 잠기려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애석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천축 사문 담마참(曇摩讖)은 중천축 바라문 종족이다. 타고난 천성이 빼어나 지혜로 조감하는 것이 분명하여 깊었으며, 기변(機辯)이 청아하고 뛰어났고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겸해서 종합하였다. 시운(時運)을 타고 교화를 유포하고자 먼저 돈황에 이르러 수년 간을 머물렀다. 대저거하서왕(大沮渠河西王)은 지극한 덕을 은밀하게 나타내어 왕업(王業)을 융성하게 일으켰다. 몸은 비록 만기(萬機)의 왕무(王務)를 처리하는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불도[大道]를 널리 펼쳐 법을 성(城)의 해자[壍]로 삼으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서하(西夏)에 나라를 열고 안정시켰는데 이 경전과 담마참(曇摩讖)이 먼 곳으로부터 이르러 왔다. 진실로 지극한 감응으로 선세(先世)의 기약이 없었다면 누가 이와 같은 복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담마참이 이곳에 도달한 것은 현시(玄始) 10년(421) 세차 대량(大梁) 10월 23일이었는데, 하서왕(河西王)이 권청하여 경을 역출하게 되었다. 담마참이 손으로 범문(梵文)을 잡고 입으로는 진나라 말로 선양하였다. 그 사람은 신묘한 생각이 예리하고 법을 대단히 존중하였고, 번역에 임해서는 경건하고 신중하여 불명확한 것[隱]을 거의 남기지 않았으며, 근본을 찾아 연구하여 바로잡고, 경(經)의 종지를 보존하는 데 힘썼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리저리 범본(梵本)44)이 흩어져 있어서 결손된 부분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용렬하고 지식이 얕지만 이러한 시운을 만나서 참예할 수 있었다. 조석으로 감사하게 여기며 서로 모였으니, 이때를 만난 기쁨이 진실로 크다. 부족하나마 비교하여 이 경전의 위치를 나타내고[標位] 근본적인 골격[宗格]을 서술했지만 어떻게 반드시 그 거대한 요점을 엿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경전의 범본(梵本)의 정문(正文)은 3만 5천 게(偈)로써 이 나라 말로 번역할 때에 단어의 수가 줄어 백만 글자가 되었다가 지금 역출할 때에 단어의 숫자는 1만여 게(偈)이다. 여래께서 세간을 떠나신 후에 사람들이 어리석고 지혜가 얕음을 헤아리지 않고, 이 경전에서 간략하게 가려 뽑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자기 생각대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고 세간의 말을 섞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본래 올바른 뜻과 어긋나게 되었으니, 마치 우유를 물속에 넣어서 섞는 것과 같았다. 말로 나타내기는 그렇게 하였지만 오히려 다른 경전보다 뛰어난 점이 천 배가 되기에 충분하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40년 동안에는 이 경전이 염부제(閻浮提)에 널리 소통되고 유포되어 세간을 크게 밝혔지만 40년 후에는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정법(正法)이 소멸되려 할 때에 이르러 80년 남짓 세간에 유행하면서 대법우(大法雨)를 내렸다. 그 이후에 다시 땅 속에 묻힌 지 천 년이 되었다. 상법시대[像敎]의 말기인 지금 비록 이 경이 있기는 하지만 불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두텁지 못하여 이 경을 공경하고 믿는 마음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 사견(邪見)을 다투어 논변하여 현묘한길이 대부분 막혀 있으니 여래께서 남겨 주신 법[遺法]이 소멸되려 하는 징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031_0356_a_02L 이 『대열반경(大涅槃經)』은 처음에는 10권 5품이 있었다. 그 호본(胡本)은 동방 도인 지맹(智猛)이 천축에서 가져와 잠시 동안 고창국(高昌國)에 머물러 있었다. 천축(天竺) 사문 담무참(曇無讖)은 학문이 광대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도속(道俗)을 겸비하였는데, 사방을 유람하면서 관찰하고 교화하다가 먼저 돈황에 있게 되었다. 하서왕(河西王)은 숙세(宿世)에 큰 선업을 심어 평소의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윽하게 계합하고 있었다. 그는 왕공(王公)과 맹약(盟約)을 맺고, 몸소 군대를 통솔하여 서방의 돈황을 평정하였다. 그 때 담무참을 만났는데 신묘하게 이해하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를 청하여 맞아들여서 자신이 다스리는 주(州)로 가서 내원(內苑)에 머물게[止]45) 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고창국(高昌國)에 보내 이 경(經)의 호본을 가져와 담무참에게 역출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역출된 첫 부분은 5품(品)만 있었고 그 다음 6품 이후는 원본이 오랫동안 돈황에 있었다. 담무참은 경의 끝부분을 역출하다가 일부가 부족함을 알고 나머지를 찾기를 바랐다. 호국(胡國)의 도인이 때마침 이 경의 호본, 도합 2만 5천 게(偈)를 보내 주었다. 그후에 들어온 호본도 이와 비슷하게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 즈음에 국가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여 다시 역출할 겨를이 없었기에 마침내 당분간 작업이 유보되었다. 유포시킬 수 있는 것만으로도 경전의 대의(大意)와 근본적인 나아갈 길[宗塗]을 모두 나타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현재는 13품이 있는데 40권으로 되어 있다. 경(經)의 문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 집필자가 한결같이 경사(經師)가 입으로 역출하는 대로 받들고 화려한 문식(文飾)를 더하지 않았다. 이 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불성(佛性)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을 뿐이니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내가 비록 서쪽 변경(邊境)에 있었으나 이 경전을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다가 이 위대한 경전을 만나 늘 막혀 있던 것이 풀린 것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다만 여러 사람이 역경(譯經)한 결과로 그 지귀(旨歸)가 별로 일치하지 않는듯하여 후생을 그르칠까 염려된다. 이 때문에 나름대로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부질없는 노력을 기울여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고자 하여 경사(經師)에게 자문을 구하고 전후로 찾은 것을 모아서 첫 부분의 5품에 간략하게 사기(私記)를 붙였다. 나머지는 여기에 준거하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승우(僧佑)가 이 서문과 도랑(道朗)법사의 서문과 담무참(曇無讖)법사의 전기를 조사해 보았더니 약간씩 같지 않은 점이 있어서 어느 것이 올바른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두 가지 다 남겨 둔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巴連弗邑) 아육왕(阿育王) 탑이 있는 천왕정사(天王精舍)의 우바새 가라선(伽羅先)은 진(晋)나라 도인 석법현(釋法顯)이 먼 곳에서 이곳에 찾아왔을 때 만나 그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온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깊이 감동되어 곧바로 여래의 비장(秘藏)인 이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필사해 주었다. 바라건대 이 경전이 진나라 땅에 유포되어 모든 중생이 평등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의희(義熙) 13년(417) 10월 1일에 사공(司空) 사석(謝石)이 세운 도량사(道場寺)에서 이 『방등대반니원경(方等大般泥洹經)』을 역출하여 14년(418) 정월 2일에 이르러 교정까지 모두 끝마쳤다. 선사(禪師) 불타발타(佛太跋陀)가 손으로 호본(胡本)을 잡고, 보운(寶雲)이 전역(傳譯)하였다. 그 때 법좌에는 이백 50명의 사람이 있었다.
『지맹전(智猛傳)』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비야리국(毘耶離國)에는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학문이 있는데, 각각 같지 않다. 제리성(帝利城)의 화씨읍(華氏邑)에 바라문이 있는데, 씨족이 매우 많다. 그들의 천성(天性)은 명민하여 영묘하게 깨달아 마음을 대승학에 귀결시키고 여러 가지 전적을 박람하여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다. 집에는 은탑(銀塔)이 있는데 가로 세로가 각각 8척이고, 높이는 3장(丈)이며, 사방의 감실에 은상(銀像)이 있는데 높이는 3척쯤 된다. 대승경전이 많이 있으며 가지가지로 공양을 올린다. 바라문이 지맹(智猛)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맹이 답하였다. “진나라 땅에서 왔습니다.” 또 바라문이 물었다. “진나라 땅에도 대승학이 있습니까?” 지맹이 곧바로 대답하였다. “모두가 대승학을 합니다.” 이에 모두가 놀라면서 찬탄하였다. “희유합니다. 보살이 가서 교화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맹은 곧 그의 집으로 가서 『니원경(泥洹經)』의 호본(胡本)을 얻었다. 양주(涼州)로 돌아와서 역출하여 20권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