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華嚴經)』의 호본(胡本)은 모두 10만 게(偈)인데 옛날 도인(道人)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에서 이 3만 6천 게(偈)를 얻었다. 진(晉)나라 의희(義熙) 14년(418) 세성(歲星)이 순화(鶉火)에 있던 해 3월 10일, 양주(揚州) 사공(司空) 사석(謝石)이 세운 도량사(道場寺)에서 천축(天竺) 선사 불도발타라(佛度跋陀羅)에게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선사가 손에 범문(梵文)을 잡고 호어(胡語)를 진나라 말로 역출하고 사문 석법업(釋法業)이 직접 필수하였다. 그 때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단월(檀越)이 되었다. 원희(元熙) 2년(420) 6월 10일에 이르러 역출을 모두 마쳤다. 호본(胡本)을 모두 다시 교정하여 대송(大宋) 영초(永初) 2년(421) 신축년(辛丑年) 12월 28일에 이르러 교정을 마쳤다.
031_0357_b_02L 저 그윽한 골짜기는 충허(沖虛)로써 작용을 고요하게 하니 온갖 시냇물이 이를 근원[本]으로 삼고, 지극(至極)은 무상(無相)으로써 현묘함을 나타내니 만물이 이를 근본[宗]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법성(法性)은 담연한 하나에 머물면서 영묘함을 나타내고 분연히 일어나는 진루(塵累)를 고요하게 하여 소통시키는 작용을 운용하며, 영묘한 근본[靈根]은 원만한 등촉을 밝혀서 그 능력을 완수하고 건네주는 활동에 편승하여 그 작용을 전개한다. 그러나 능력은 자본이 있어야 하고 작용은 반드시 근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근본을 다스리면 깨달아서 건네줌에 일정한 방향이 없게 되고, 능력은 자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마침내 통달하게 된다. 통달하면 6합(合)을 두루 비추어 유(有)와 무(無)를 원만하게 비추고, 막히면 작용이 인연에 따라 감응하면서도 감응해 주매 생각이 반드시 치우치게 된다. 원만하게 비추면 신묘한 작용[功]이 극치까지 나아가지만 생각이 치우치게 되면 전복(顚覆)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4대하[瀆]가 흘러넘치면 커다란 시냇물이 골짜기까지 물을 보낼 수 있게 되고 천체(天體)의 현상이 어긋나게 되면 3광(光:해ㆍ달ㆍ별)이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를 따라서 유추해 보면, 운(運)이 소통되는 데에는 대종(大宗)이 있고, 교화가 축적됨에는 근본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운을 소통시키는 대종(大宗)은 인연이 그 시초를 열고 무상(無相)이 그 끝을 다하게 하며, 교화를 축적하는 근본은 10도(道)가 그 도모하는 것을 열고 심술(心術)이 그 시작의 조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심술이 무(無)를 의지하면 신령한 비춤이 통해서 대승이 툭 트이게 되고, 유(有)에 막히면 신묘하게 텅 빈 자리가 막혀서 9택(宅)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극치까지 미루어 나가면 오직 마음과 법이 있을 뿐이고 이끌어서 펼치면 8극(極)까지 밝히게 된다. 세목(細目)을 말해보자. 만법(萬法)은 호연해서 끝이 없는데 대종(大宗)인 일(一)은무상(無相)이며, 영묘한 작용[靈魄]은 보편해서 두루 퍼져 있는데 궁극적인 자리를 통어해서 원만하게 비추어 준다. 이것은 대체로 본체의 작용[體用]을 만법(萬法)이라 하고, 본성이 텅 빈 것을 무상(無相)이라 하고, 활동하는 주재자[動王]를 심식(心識)이라 하고, 고요하게 제어하는 것을 지조(智照)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有)에 걸려서 생각이 막히면 심(心)이라 하고 식(識)이라 하며, 허(虛)를 의지해서 관조하는 작용이 통하면 지(智)라 하고 견(見)이라 하는 것이다. 견(見)은 정견(正見)이니 처음 깨닫는 측면에 치우쳐서 부른 것이고, 지(智)는 정변지(正遍智)이니 궁극을 체득하는 것을 원만하게 부른 것이다. 정견은 처음 깨달아 들어가서 사무치는 시초이고, 정변지는 궁극을 체득한 것을 나타내는 끝마침이다. 이 네 가지는 정묘한 작용이 두루 퍼져서 만법을 물처럼 비추어 준다. 비록 자주자주 인연에 따라 감응하지만 영묘하게 비추어 주는 것은 항상 하나여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저 본체의 작용에 일정한 방향이 없다면 그 작용은 실로 관조함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識)이 어지러워지면 진(塵)이라 하고, 마음이 더러워지면 욕(欲)이라 하고, 지견(知見)이 열리면 보배[寶]라 하고, 지혜가 트이면 종지(種智)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5욕(欲)을 짐례(酖醴)의 방[室]이라 하고, 지견을 열어 주기 때문에 3보(寶)를 형석(荊石)의 문이라 하고, 식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6진(塵)을 허깨비로 미혹시키는 가게[肆]라 하고, 지혜를 툭 트이게 하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룡(驪龍)의 연못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가 바로 만법을 호연하게 해서 끝없게 하고 동일한 본체가 관조해 주는 것을 다르게 하여 비록 감응하는 것이 번갈아가면서 교대로 투영해 주지만, 대종인 하나는 형상이 없다[無相]. 그러므로 식(識)은 6진을 제어해서 본성을 몽매하게 하고, 심(心)은 5욕으로 달려가서 생각을 혼미하게 하고, 지견[見]이 4제를 의지해서 깨끗하게 씻어서 조감해 주고, 지혜[智]는 형상이 없는 것[無相]을 어루만져 두루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계[境]는 비록 대상이지만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이 반연하고, 정묘한 작용[精魄]이 두루 퍼져 있는 체(體)이기 때문에 영묘하게 관조해 주는 것이니, 영묘하게 관조하기 때문에 통괄해서 일심(一心)이라 하고 반연의 대상[所緣]이기 때문에 종합해서 일법(一法)이라고 한다. 가령 저 명칭이 수(數)를 따라서 변화하는 경우에는 호연해서 끝이 없으므로 심법(心法)으로 통괄했지만, 곧 처음부터 둘이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주경(十住經)』은 심술(心術)의 본원(本願)을 궁구하여 찾아서 진실한 깨달음[眞悟]의 시변(始辯)을 찾고자 한 것이니, 신묘한 공용(功用)은 변화를 나타내는 데서 열리고 8만의 법장(法藏)은 원만하게 관조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영기(靈機)는 숨어서 잠복하는 이치[數]가 없고 위대한 조화[大造]는 헛된 명칭이 없다. 이리하여 막혀 있는 식(識)을 떨어내어 조감하는 곳으로 돌이키고, 진실한 지혜를 바로잡고 유지시켜서 대종(大宗)에 거처하게 하고, 열 가지 단계[十道]를 열어 주고, 그 공용을 운용하고, 형상이 없는 곳[無相]에서 편안하게 하고, 원대하게 소통시킨다. 3의(義)를 합해서 능력을 광대하게 하면 그 광대한 것을 표현해서 보리(菩提)라고 한다. 보리는 10도(道:열 가지 단계)를 통괄해서 극치에 이르게 하는 존귀한 호칭이고 모든 만물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오묘한 호칭이다. 이것이 바로 10주(住)가 영묘한 비춤을 열어 주는 원만한 주치이고 대통(大通)을 원대하고 광대하게 하는 뛰어난 궤도이다. 그러므로 10주(住)는 관조를 고요하게 하고 작용[機]을 쉬게 하여 조감하는 자리로 되돌이키는 것의 통칭이다. 저 부처님의 대업(大業) 중에서 으뜸인 처음으로 연창한 것[始唱]과 10지(地)를 통괄하는 명칭을 10주(住)라고 표현해서 부른 것은 진실로 그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 의미가 여기에 있다면 10주라는 호칭이 생긴 것은 신묘한 깨달음[神覺]을 확연하게 밝히는 메아리[響像]이고, 진실한 지혜를 빛나게 해주는 숫돌[砥礪]이며, 여래가 흐름을 돌이켜서 본원을 끝까지 추구하는 배와 수레[舟輿]이고, 세존(世尊:世雄)이 법회에 의거해서 교화를 펼치는 천부(天府)이다. 이것은 모든 경전의 종본(宗本)이고, 법장(法藏)의 연원(淵源)이며, 실로 처음을 조감하고 끝을 다스려서 통제하는 수경(水鏡)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빛나게 해서 선양하는 일월(日月)이다. 저 취지[致]의 광대함은 언어와 형상으로 궁구할 수 없고, 가르침[道]의 현묘함은 명수(名數)로 끝까지 추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표현된 문장은 간략하지만 의미는 풍부하고 연사는 완곡하지만 취지(趣旨)는 광대한 것이다. 이는 모든 수행의 첫 실마리가 되어 마음을 투철하게 열어 주고 8만의 법장을 열어서 한 모퉁이를 들어 주는 것이니, 현묘한 기틀[玄機]을 탐구(探鉤)하고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뉘라서 올바르게 조감하는 식견을 지녀서 희미(希微)를 공경하고 뛰어난 깨침을 열고 세 모퉁이를 되돌려서 응답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지금까지 익힌 것을 굳게 지키면서 미혹에 빠진 무리들은 옛날에 들은 가르침을 가슴에 간직하고서도 이 요점을 완미하지 못하고 있으니, 비유하면 해와 달을 등에 지고 있으면서도 더욱 혼미해지고, 현묘의 나루를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건너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구나. 바라건대 손을 널리 펼쳤으면 하는 바이다. 대체로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먼 곳까지 이르러 가고, 심오한 것을 끝까지 추구하면 현묘함이 흥기한다. 그러므로 욕계(欲界)의 6천(天)을 영묘한 경지에 이르도록 텅 비게 하고 뛰어난 대중을 법운지(法雲地)에 인도하는 것이다. 대중이 뛰어나지 않으면 현묘한 문을 두드릴 수 없고 경지가 영묘하지 않으면 가르침[道]을 빛내기에는 부족하다. 가르침을 빛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장소가 필요하고, 현묘한 문을 두드리는 데에는 그럴 만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묘한 경지에 올라서 다른 장소와 다르게 되면 그 경지에서는 모든 더러움이 단절되고, 현묘한 상점을 열어서 대중을 인도하면 뛰어난 사람들[英彦]이 세상을 뒤덮게 되고, 그 경지가 욕계의 6천을 끝까지 다하게 되면 진실한 칠보[七珍]가 빛나게 되고, 대중이 법운지에 오르면 그 본체(本體)는 9택(宅)을 비추어 주게 된다. 그리하여 여섯 가지 변화를 광대하게 해서 교화의 운행을 열어 주고, 세상을 빛내는 위대한 모습을 나타내고, 세 가지 설[三說]을 제시해서 심오함을 전개하고, 현묘한 곳의 통괄적인 가르침[統韻]을 어루만지고, 다섯 가지의 원(願)을 일으켜서 10지에 도달했음을 선언하고, 사람들의 성심(誠心)을 생각해서 더욱 순박해지고, 2지(地)에서 7지(地)까지 번갈아가면서 감응하는 것을 운용하고, 현묘한 단서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교대로 사용하게 된다. 또 정신의 투철함을 3전법륜(轉法輪)의 즈음에 개시(開始)하고, 영묘한 깨달음을 9식(識)의 연못에 나타낸다. 이를 모든 경전에 비교해 보면 진실로 같은 수준[同日]에 놓고 말할 수가 없다. 8만의 가르침을 열어서 그 작용을 논변한다면 어떻게 같은 겁(劫)에 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저 3의(義)를 체득해서 포괄하고 그 도(道)가 양단(兩端)을 총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이와 같이 광대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이와 같이 광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써 판단해 보건대, 그 도(道)는 심오하고 그 종지[致]는 현묘하다 할 것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의 심오함은 신묘한 변설을 모두 사용해서 말한다 해도 오히려 그 심원함을 궁구할 수가 없다. 하물며 이보다 경지가 낮은 자의 경우에 있어서랴. 그러나 도는 홀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을 의지해서 홍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천 년 후라 할지라도 이슬[靈液]과 같은 가르침에 의탁해야 한다. 외국의 법사인 구마라기바(究摩羅耆婆)는 하늘이 부여한 깨달음을 당세[命世]에 떨치고 고매한 덕풍(德風)을 말세에 펼쳤으며, 그윽한 기연에 편승하여 홀로 노닐다가 진(秦)나라의 국운(國運)을 만나서 도를 홍포하였다. 그는 현묘한 가르침을 희성(希聲)에 실었고, 미묘한 언설을 형상 밖으로 널리 설하였다. 옛것을 물리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세 사람의 우인(友人)으로부터 받는 이익[三益]에 비교해서 헤아리지 않았고, 종지를 투철하게 깨달아 들어가서 생각이 거의 절반은 지나가 있었다.진(秦)나라의 국운이 법사가 홍법하려는 원(願)을 열어 주어서 그러한 기회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납[鉛]과 자갈[礫]과 같은 재질로 훌륭한 금[南金] 가운데 섞여 있게 되었는데, 진실로 삼우(三隅)를 아는 근기가 없음을 깨달았고 현묘한 것을 헤아리는 지혜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법문을 들으면 그것을 깊이 생각하여[賞] 미혹함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경전에 침잠하여 생각을 고요하게 하고 옛날에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연구하였지만, 항상 그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취지는 광대하고 언어는 완곡하면서도 종지는 현묘한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영묘한 등촉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이치[數]를 비추어 보아도 편협한 문장 때문에 위대한 종지[大宗]에 어두웠다. 신묘한 것을 이 때문에 권도의 모범으로 나타내었는데도 현묘한 가르침[玄風]은 이것 때문에 순박함을 잃게 되었다. 한가하게 거처하고 고요하게 생각하여 나루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에 이르러서 어찌 항상 아득하게 길이 개탄하면서 쇠퇴해 가는 몸을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겠는가. 그 때문에 이전에 들었던 것에서 골라내어 기록하고 간략하게 주석을 붙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깊은 골짜기가 아침이슬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부족하나마 자신의 마음을 기술해 보았을 뿐이다. 바라건대 후에 오는 눈 밝은 현철[明哲]이 이를 참고해서 보완해 주었으면 할 뿐이다.
바모제타(波牟提陀):진(晋)나라 말로는 1주(住)라고 한다. 유마라(維摩羅):진나라 말로는 2주라고 한다. 바피가라(波披迦羅):진나라 말로는 3주라고 한다. 아지모(阿至摸):진나라 말로는 4주라고 한다.
두사야(頭闍耶):진나라 말로는 5주라고 한다. 아비목가(阿比目佉):진나라 말로는 6주라고 한다. 두라가마(頭羅迦摩):진나라 말로는 7주라고 한다. 아차라(阿遮羅):진나라 말로는 8주라고 한다. 초두마제(抄頭摩提):진나라 말로는 9주라고 한다. 담마미가(曇摩彌迦):진나라 말로는 10주라고 한다.
『점비경(漸備經)』은 진나라 말로는 10주(住)의 명칭이라고 말한다. 제1주(第一住)의 이름은 열예(悅豫)라고 한다. 제2주의 이름은 이구(離垢)라고 한다. 제3주의 이름은 흥광(興光)이라고 한다. 제4주의 이름은 휘요(煇耀)라고 한다. 제5주의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한다. 제6주의 이름은 목전(目前)이라고 한다. 제7주의 이름은 현묘(玄妙)라고 한다. 제8주의 이름은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제9주의 이름은 선재의(善哉意)라고 한다. 제10주의 이름은 법우(法雨)라고 한다.
점비경십주행(漸備經十住行) 제1주:지금 여기에는 없다. 제2주:계행(誡行)을 설하고 있다. 제3주:12문(門)과 5신통(神通)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4주:37품(品)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5주:4제(諦)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6주:12인연(因緣)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7주:권지(權智)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8주:신족(神足)으로 변화하는 것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다. 제9주:신족으로 교화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제10주:이것도 역시 신족으로 교화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점비경』은 호공(護公:축법호)이 원강(元康) 7년(297)에 역출하였다. 이 경은 5권 5만여 언(言)으로 되어 있다.
031_0359_a_02L제1권은 1주(住)에 관한 것을 설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는 이 한 권이 없다. 지금현재는 2주에서부터 10주까지 있는데 10품(品)으로 되어 있다. 『점비경』의 10주는 『본업경(本業經)』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일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본업경』과 『대품반야경』보다 더 자세한데 무엇 때문에 양주(涼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옛날에 양주의 도사(道士) 중에 석교도(釋敎道)와 축법언(竺法彦)이 있었다. 두 사람의 도사는 모두 박학했으며, 경법(經法)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이 경을 수집하지 않고, 또 이에 관해서 설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널리 들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위하여 경전을 현양(顯揚)하여 흥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대부(大部)의 경전이고 일에 관해서 설하고 있는 것이 광대하며, 의미와 이치도 그윽하고 심오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뭇 경전의 미망(美望)이며 문장 표현도 풍부하고 진실로 듣기에 기이한 것이다. 그런데 백법거(帛法巨)라는 사문도 또한 박학한 도사였으며, 옛날에 업중(鄴中)을 두루 돌아다녔는데도 무엇 때문에 이 경전을 수집하지 않았고, 또 그에 관해서 듣지 못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박문강기(博聞强記)한 사람은 진실로 있기가 어려운 것이다. 호공(護公)은 『수뢰경(須賴經)』을 역출하였다. 비록 만나본 적은 없지만 항상 축법언(竺法彦)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장천석(張天錫)은 『수릉엄경(首楞嚴經)』을 다시 역출했다. 그러므로 앞서서 행한 것보다 반드시 자세한 것일 것이다. 원강(元康) 7년(297) 11월 21일에 사문 축법호(竺法護)가 장안에 있는 시서사(市西寺)에서 『점비경』을 역출하였는데, 손으로 호본(胡本)을 잡고 진(晉)나라 말로 역출하였다.
031_0359_b_02L호공은 보살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가 남겨 놓은 말과 종적을 연구해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를수록 더욱 원대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모든 방등(方等)과 무생(無生)과 모든 3매경(昧經)은 대부분 공(公)이 역출한 것인데, 진실로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주는 현묘한 사다리[冥梯]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이 역출된 지 비록 수십 년이 되었지만 먼저 역출한 제공(諸公)들은 간략하게 넘어가서 종합적으로 익히지 않았는데, 제공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제공들은 재주가 명민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마음과 생각을 기울여서 연구할 수 있었으니, 마음을 지업(至業)으로 삼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얻은 바가 매우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먼저 역출한 제공들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넘어간 것이 유감스럽고 문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아쉬운 점이 매우 많다. 『대품반야경』은 요즈음에 동서 사방에서 모두 강습(講習)하고 있어서 이것을 업(業)으로 삼지 않음이 없는데, 문구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서로 같지 않으며 연구가 깊어질수록 재주와 바탕은 한계가 있고,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윽한 종지는 짧은 생각으로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문구에 대한 이해는 노력해서 힘을 기울여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연찬(硏鑽)하고 이 일생을 끝까지 바쳐서 미미하게나마 보완하고자 하는 바이다. 『점비경』은 아쉽게도 맨 앞의 한 권을 얻지 못하였다. 바라건대 인연의 그윽한 도움이 있어서 홀연히 얻게 되었으면 한다. 『점비경』에서 설하고 있는 10주의 위분(位分)과 중행(衆行)은 각각 단계와 등급이 있어서 얼핏 보면 여러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제 근본으로부터 자세하게 연구하고 검토하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망망(芒芒)하기가 마치 대해(大海)를 건너는 것 같다. 제1주에서는 무엇을 설해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이 경전에 인연이 있다면, 그대에게 작의(作意)를 지니지 않을 수 없도록 해서 찾아 구하는 도리를 다하게 할 것이다. 『대품반야경』의 앞부분 두 권을 찾을 수 있다면 또한 부지런히 생각을 기울일 것이다. 호공(護公)이 『광찬경(光讚經)』을 역출한 것을 계산해 보면 『방광경(放光經)』보다 9년 전이다. 9년이 아니면 8년 전에 해당된다. 무엇 때문에 양주(涼州)에 산일되어 흩어져서 세상에 유행(流行)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이 역출된 시기를 검토해 보면 장안(長安)에서 역출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모두 유행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내가 하북(河北)에 갔다가 한 권의 경만을 보았는데, 그 후기에서 “17장(章)이다”라고 하였고, 연호(年號)와 일월(日月)도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다. 다만 역출된 장소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경을 역출할 때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 “섭승원(聶承遠)이 필수(筆受)하였다”고 하였고, 백원신(帛元信)과 사문 법도(法度)를 일컫고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장안 사람이다. 이것으로써 유추해 보면, 반드시 장안에서 역출되었을 것이다. 또 이 경의 호본(胡本)을 우전국의 사문인 기다라(祇多羅)가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혜상(慧常) 등이 양주에서 가지고 온 것과 같은 것이라면 분명히 양주에서 역출된 것 같은데, 그 까닭은 상세하지가 않다. 혹시 호공(護公)이 장안에 있을 때 이 경전이 아직 유행되어 선양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주로 가지고 온 것일 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상세하게 조사할 수는 없다. 태원(泰元) 원년(376) 세성(歲星)이 병자(丙子)에 있던 해 5월 24일에 이 경전이 양양(襄陽)에 도달하였다. 석혜상(釋慧常)은 계유년(373)에 이 경전을 교역(交易)하는 사람인 강아(康兒)에게 기탁하였는데 돌고 돌아서 장안에 이르렀다. 장안의 안법화(安法華)는 사람을 파견하여 교역하는 시장에 이르게 하였고 교역하는 사람이 이를 보내서 양양에 이르도록 하여 사문 석도안(釋道安)에게 부탁하였다. 그 당시 양양에는 제(齊)나라의 스님 3백여 명이 있었는데, 석승현(釋僧顯)에게 필사하도록 하여 양주의 도인인 축법태(竺法汰)에게 보내었다.
『점비경』은 태원(泰元) 원년(376) 10월 3일 양양에 도달하였다. 이것도 역시 혜상(慧常) 등이 보낸 것인데 『광찬경』과 함께 보내진 것이었다. 그즈음 남쪽으로 향해서 가던 중간에 사람들이 머물러서 필사하였기 때문에 『광찬경』과 함께 이르러 오지 않은 것이다. 『수릉엄경』과 『수뢰경』은 모두 『점비경』과 함께 양주(涼州)에 왔다. 도인인 석혜상이 세성이 임신(壬申, 372)에 있던 해에 내원사(內苑寺)에서 이 경전을 필사하였다. 계유년(373)에 사람에게 부탁하여 병자년(376) 4월 23일에 이르러 양양(襄陽)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이 『수릉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 먼저 역출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은 제1장과 제2장과 제9장뿐만 아니라 이 장(章)에서 가장 많아 3ㆍ4백 단어 가까이에 이르며, 문구에 대한 이해도 도움이 되는 것이 지극히 많다. 『수뢰경』에도 뛰어난 곳이 약간 있다. 5백 계(戒)가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호본이 이르러 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니 4부(部)의 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크게 교화하는 데 있어서 결여된 부분이 생기게 된다. 『반야경』은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을 가르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있다. 계(戒)는 수행을 확립하는 근본이고, 모든 수행의 시초이니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 만약 인연이 있어서 이치를 찾고 구하는 것을 극진하게 하고, 이에 앞서서 호본(胡本)에 대한 지극한 신심이 있었다면 계의 가르침을 영락(零落)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승우(僧祐)가 『구록(舊錄)』을 조사해 보니, 이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10권은 송(宋)나라 문제(文帝) 때에 삼장법사인 구나발마(求那跋摩)가 경도(京都)에서 역출한 것이다. 경문(經文)에서 “이 경은 선계(善戒)라 하고, 보살지(菩薩地)라 하고, 보살비니마이(菩薩毘尼摩夷)라 하고,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일체선법근본(一切善法根本)이라 하고, 안락국(安樂國)이라 하고, 제바라밀취(諸波羅蜜聚)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모두 일곱 가지 이름이 있다. 제1권은 우바리(優波離)가 수계(受戒)하는 방법에 관해서 질문한 것을 먼저 나타내었고, 제2권에서는 처음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은 순서대로 30품에 이르기까지 각 품(品)을 나열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본(本)이 있어서 제목을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본을 검토해 보니, 문구는 모두 같은데 다만 1품과 2품에서 품(品)을 나누는 것과 품에 대해 이름붙이는 것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이 중복해서 역출했다는 것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로써 유추해 본다면 분명히 같은 경(經)일 것이다. 다른 본(本)은 모든 품의 배열이 어지럽게 섞여 있고, 전후의 순서도 차이가 난다. 『보살지경』은 3단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단에는 18품이 있고, 두 번째 단에는4품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8품이 있다. 이 두 가지 본 중에서 어느 것이 삼장법사가 역출한 정본(正本)인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또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8권이고 27품이 있는데, 3단으로 나뉘어 있다. 첫번째 단에는 18품이 있고, 두 번째 단에는 4품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5품이 있다. 이것은 진(晉)나라 안제(安帝) 때 담마참(曇摩懺)이 서량주(西涼州)에서 역출한 것이다. 경(經)의 첫머리에서 3보(寶)에 예경(禮敬)을 올리고 있는데,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없다. 아마 부처님의 말씀을 가려 뽑아서 모아 놓은 것인 듯하다. 문장가운데에서 다른 명칭이 나오지 않지만 현존하는 이 본(本)에 대해서 혹은 『보살계경(菩薩戒經)』이라고도 하고, 혹은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도 한다. 삼장법사가 역출한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과 이 두 가지 경은 문장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다섯 가지 명칭은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동일하게 기록해 두었다. 또 이 두 가지 경은 밝히고 있는 의미가 서로 유사하므로 근본은 동일한 경인 듯한데, 다른 나라 사람이 역출하였기 때문에 다른 부(部)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차례로 6도(度)를 밝히고 있다. 품명(品名)은 같은 것이 많지만 제사(製辭)는 각각 다르다. 나 승우가 『보살지경』의 한 가지 본을 보았더니, 그 가운데에서 제4권의 열 번째 「계품(戒品)」은 『지지경(地持經)』 중에서 「계품(戒品)」에 해당하는 것이고, 또 아홉 번째 「시품(施品)」이 빠져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해서 섞여 있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인데 후세 사람이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곧바로 그렇게 전사(傳寫)한 것일 것이다. 그 본(本)에는 빠져 있는 것이 많아서 어지럽게 미혹시킬까 염려스럽다. 만약 내제(內題)를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보살지경(菩薩地經)』에서 아홉 번째인 「시품(施品)」이 빠져 있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된 본[誤本]이다.
나 승우(僧祐)가 『구록(舊錄)』을 조사해 보았더니 『대집경(大集經)』은 진(晉)나라 안제(安帝) 때 천축의 사문인 담마참(曇摩懺)이 서양주(西양州)에서 역출한 것인데, 29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12단이 있고, 설하고 있는 것은 모두 한 경(經)이다. 첫 번째는 「영락품(瓔珞品)」이고, 두 번째는 「다라니자재왕보살품(陀羅尼自在王菩薩品)」이고, 세 번째는 「보녀품(寶女品)」이고, 네 번째는 「불순보살품(不眴菩薩品)」이고, 다섯 번째는 「해혜보살품(海慧菩薩品)」이고, 여섯 번째는 「무언보살품(無言菩薩品)」이고, 일곱 번째는 「불가설보살품(不可說菩薩品)」이고, 여덟 번째는 「허공장품(虛空藏品)」이고, 아홉 번째는 「보당분(寶幢分)」이고, 열 번째는 「허공목분(虛空目分)」이고, 열한 번째는 「보계보살품(寶髻菩薩品)」이고, 열두 번째는 「무진의보살품(無盡意菩薩品)」이다. 이 외에 다른 사람이 따로 번역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다른 부(部)에는 24권만 있다. 경문(經文)을 조사해 보면 나머지는 모두 같은데, 「불가설보살품(不可說菩薩品)」의 뒤와 「보당분(寶幢分)」의 앞에 있는 중간의 것이 빠져 있고, 「허공장소문품(虛空藏所問品)」 5권은 없다. 또 이 경은 「보계보살품(寶髻菩薩品)」에서 끝나고 있고, 또 맨 끝에 있는 「무진의소설불가사의품(無盡意所說不可思議品)」 4권이 없다. 이 2품 9권이 생략되어서 없고, 그 나머지 20권이 나뉘어서 24권으로 되어 있다. 또 두 가지 본을 조사해 보면 모두 「해혜보살품(海慧菩薩品)」을 제5품으로 삼았고, 「무언보살품(無言菩薩品)」에 이르러 제7품으로 삼았고, 제6품은 없는데 그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또 『구록(舊錄)』을 조사해 보면 따로 『대허공장경(大虛空藏經)』이 5권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경이 「허공장품(虛空藏品)」이다. 아마도 이것은 세간에 유익한 것을 나누어서 다른 부(部)로 삼은 것일 것이다. 또 따로 『무진의경(無盡意經)』이 4권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이 경의 끝에 있는 「무진의품(無盡意品)」이다. 다만 『호공록(護公錄)』에 또다시 『무진의경』이 4권으로 역출되어 있는데, 이 본(本)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강(元康) 원년(291) 7월 7일 돈황 보살 지법호(支法護)가 경의 이름이 『여래대애(如來大哀)』인 호경(胡經)을 손에 넣게 되어 섭승원(■承遠)에게 구술(口述)로 전수하였고, 도진(道眞)이 진(*)나라 말로 정서(正書)하여 그 해 8월 23일에 끝마쳤다.법호(法護) 자신이 직접 다시 교정하여 대법(大法)을 빛나게 나타나게 해서 유포시켰다. 이 경을 손에 잡는 사람은 신속하게 총지(摠持)를 얻어서 묘법(妙法)의 은택을 화창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031_0361_a_02L 종극(宗極)은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끊어져 있다. 그러므로 현성(賢聖)이 침묵을 지킨다. 현묘한 종지[玄旨]는 언어가 아니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행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니, 큰 가르침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몸과 입에 대해서는 금률(禁律)로써 방지하였고, 선악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계경(契經)으로 인도하였고, 그윽하고 미묘한 가르침을 펴는 데 있어서는 법상(法相)으로써 논변하였다. 그렇다면 3장(藏)을 지은 것은 본래 서로 다르게 감응해 주는 것이지만 종지에 있어서는 회합하는 것이니, 서로 다른 길이 실제로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금률(禁律)은 율장이니, 『사분율(四分律)』과 『십송률(十誦律)』이 있다. 법상은 아비담장(阿毗曇藏)이니, 4분(分) 5송(誦)이 있다. 계경은 4아함장(阿含藏)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은 4분 8송이고, 『중아함경(中阿含經)』은 4분 5송이고, 『잡아함경(雜阿含經)』은 4분 10송이고, 이 『장아함경(長阿含經)』은 4분 4송으로, 30경을 합하여 1부가 되었다. 아함(阿含)은 진(秦)나라 말로는 법귀(法歸)라고 한다. 법귀는 온갖 선(善)의 연부(淵府)이고, 총지(總持)의 수풀[林苑]이다. 그 전적(典籍)은 깊고 넓고 풍부해서 반복해서 읽을수록 더욱 분명하게 된다. 화(禍)와 복(福),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자취를 분명하게 선양하고, 허위와 진실, 다른 것과 같은 것의 근원을 확실하게 결판내고 고금(古今)에 걸쳐 성공과 실패의 이치를 낱낱이 기록하고 천지 만물의 질서[二儀品物之倫]를 부여한다. 도(道)가 이것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고, 법(法)이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비유하면 저 거대한 바다로 온갖 시냇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법귀(法歸)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기나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길[修途]을 분석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 길고도 원대하다. 그 때문에 장(長)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을 완미하면 오랜 미혹이 단번에 환해지게 되고, 분별하기 어려운 삿됨과 올바름이 밤과 낮처럼 환하게 나타나고, 과보에 그윽하게 감응함이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분명해져서 겁수(劫數)가 비록 멀다 해도 아침과 저녁처럼 가깝게 되고, 6합(合)이 비록 넓다 해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어두운 방을 크게 밝은 빛으로 밝히고 뭇 눈먼 사람들을 5안[目]으로 밝혀 주는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문[戶]이나 창문[牖]으로 엿보지 않고도 지혜가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대진천왕(大秦天王:姚興)은 모든 번뇌를 씻어내어 현묘하게 비추어 보았고, 고아한 품격은 유독 고매했으며, 염담(恬淡)과 지혜를 번갈아가면서 몸에 길러 도의 세계[道]와 세속의 세계[世]를 함께 구제하였는데, 항상 은미한 진리의 말씀[微言]이 서로 다른 풍속에 의해서 가리워지게 될까 염려하였다. 우장군사자(右將軍使者) 사례교위(司隸校尉)인 진공(晉公) 요상(姚爽)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청아하고 온유했으며, 현묘한 마음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극치에 나아갔고, 대법(大法)을 존중하고 숭상하여 자연의 이치를 오묘하게 깨달았으며, 위로 향하는 특별한 마음을 품어서 항상 법(法)에 관한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홍시(弘始) 12년(410) 세성(歲星)이 상장엄무(上章掩茂:庚戌)에 있던 해에 계빈국 3장(藏)인 사문 불타야사(佛陀耶舍)에게 율장(律藏)의 『사분율(四分律)』 40권을 역출하도록 청하여 홍시 14년(412)에 마쳤다.
홍시 15년(413) 세성이 소양분약(昭陽奮若:癸丑)에 있던 해에 이 『장아함경』을 역출해서 끝마쳤다. 양주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역출하였는데, 진(秦)나라의 도사(道士)인 도함(道含)이 필수하였다. 그 때 경하(京夏)의 이름나고 뛰어난 사문들이 집에 모여서 교정하였는데, 법언(法言)을 공경스럽게 받들고 공경해서 어긋남이 없게 하였으며, 화려함을 제거하고 질박함을 숭상하여 성지(聖旨)를 보존하는 데 힘썼다.
나는 이 아름다운 모임을 만나서 외람되게 청중의 자리에 참여하였다. 비록 훌륭한 일을 돕는 공은 없었지만 직접 참예하여 말석에서 가르침을 받들었기 때문에 그 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후래에 오는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바이다.
031_0361_b_07L余以嘉遇猥參聽次,雖無翼善之功,而豫親承之末,故略記時事,以示來覽焉。
8. 중아함경서(中阿鋡經序) 석도자(釋道慈) 지음
031_0361_b_09L中阿鋡經序第八 釋道慈
031_0361_c_02L 「중아함경기(中阿鋡經記)」에서 “옛날에 석법사(釋法師)가 장안에서 『중아함경(中阿鋡經)』ㆍ『증일아함경(增一阿鋡經)』ㆍ『아비담(阿毗曇)』ㆍ『광설(廣說)』ㆍ『승가라차소집경(僧伽羅叉所集經)』ㆍ『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ㆍ『바수밀경(婆須蜜經)』ㆍ『삼법도론(三法度論)』ㆍ『이중종해탈연(二衆從解脫緣)』을 역출하였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경(經)ㆍ율(律)은 모두 백여 만 단어인데 모두가 근본과 어긋나고 종지를 잃었으며, 명(名)과 실(實)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접속사[屬辭]가 분명하지 않음[依稀]으로 해서 자구(字句)의 의미도 차이가 있게 되었다. 진실로 역출하는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진(晉)나라 말을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연(燕)나라와 진(秦)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여 관중(關中)에 대란이 일어났다. 이에 훌륭한 종장(宗匠)들이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개정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수년이 지나서 관동(關東)지방이 다소 조용해졌을 즈음에 기주(冀州) 도인 석법화(釋法和)와 계빈(罽賓) 사문 승가제화(僧伽提和)가 문도(門徒)를 불러 모아서 함께 낙읍(洛邑)에 유람하면서 4~5년 동안 연구하고 강의하여 마침내 정밀하게 하였다. 그 사람은 점점 한(漢)나라 말을 깨우치게 되었는데, 그런 후에 비로소 먼저 역출했던 것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석법화는 선인(先人)의 잘못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즉시에 승가제화(僧伽提和)를 따라서 『아비담(阿毗曇)』과 『광설(廣說)』을 다시 역출하였다. 이 이후로 이 모든 경ㆍ율이 점점 바르게 역출되었는데, 오직 『중아함경』과 『승가라차소집경』 과 『바수밀경』과 『종해탈연』만은 다시 역출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승가제화가 경사(京師)에 나아가서 유람하다가 교화를 유포하는 시운에 감응하여 법을 강좌(江左)에 베풀었다. 그 때 진(晉)나라 대장자(大長者) 상서령(尙書令) 위장군(衛將軍) 동정후(東亭侯)인 우바새 왕원림(王元琳)이 항상 정법을 호지(護持)하는 것을 자기가 맡은 일로 여겨 곧바로 단월(檀越)이 되었다. 그들은 경을 역출하기 위해서 정사(精舍)를 짓고, 도를 지니고 있는 석혜지(釋慧持) 등 의학사문(義學沙門) 40여 명을 초청하여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고, 필요한 물품[四事]이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또 경사(經師)인 승가라차(僧伽羅叉)를 초청하여 수년 동안 오래오래 공양을 하였다. 그런 후에 진(晉)나라 융안(隆安) 원년(397) 정유년 11월 10일양주 단양군(丹楊郡) 건강현(建康縣) 지방에 있는 정사(精舍)에서 이 『중아함경』을 다시 역출하였다. 계빈 사문 승가라차를 청하여 호본(胡本)을 강의하도록 하고, 승가제화를 청하여 호어(胡語)를 진(晉)나라 말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예주(豫州) 사문 도자(道慈)가 필수하였고, 오(吳)나라 이보(李寶)와 당화(唐化)가 함께 기록하였다. 융안(隆安) 2년(398) 무술년 6월 25일에 이르러 초본을 비로소 끝마쳤다.
이 『중아함경』에는 모두 5송(誦)이 있고 전부 18품(品) 222경(經)이며, 합해서 51만 4천 8백 25자(字)인데, 나누어서 60권으로 만들었다. 그 때 나라에 대난(大難)이 있어서 정서(正書)하지 못하고 융안 5년(401) 신축년에 이르러 비로소 정사(正寫)하여 교정해서 유포하고 전할 수 있게 되었다.
031_0362_a_02L그 사람이 전역(傳譯)한 것을 먼저 역출한 것과 비교해 보면 같지 않은 것이 많다. 이 222경 중에서, 만약 먼저 역출한 것에 완전히 맡겨서 따르면 성스러운 종지[聖旨]를 잃어버릴까 두렵고, 만약 근본을 따라서 명사(名辭)를 제정하여 대부분이 구역(舊譯)의 명사와 달라지게 되면 먼저 익혀온 것을 거스르게 되어 여러 사람의 감정과 맞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주 근본적인 방법을 바꾸어서 구명(舊名)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5부(部)의 같고 다른 점에서 누가 어느 것이 올바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 도자(道慈)는 어리석은 생각으로나마 근본과 어긋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 때문에 개명(改名)한 것을 모두 가려 뽑아내어 주(注)를 붙이고, 신역(新譯)과구역(舊譯) 두 가지를 모두 남겨서 따로 한 권으로 만들어 목록과 서로 이어지게 하여 후세에 보여 주는 바이다. 이것은 장래의 모든 현인들에게 신구(新舊)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게 해서 다시 모아서 찾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혹시 고명한 외국의 스님 중에서 진(晉)나라 말과 범어(梵語)의 방언에 밝은 사람을 만나면 그 잘잘못을 찾아내어 올바른 것에 따라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4아함(阿含)에서 아함의 의미는 중아함에서의 의미와 같은데, 『중아함경』 서문의 첫머리에서 그 취지를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중복해서 서술하지는 않는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라고 한 것을 말해보자. 모든 법을 하나로 꿰뚫는[條貫] 법칙이 있는데, 숫자에 의해서 서로 순서를 세우는 것이다. 숫자는 10에서 끝나지만 지금여기에서는 하나씩 더했기 때문에 증일(增一)이라고 한 것이다. 또 숫자마다 모두 증가하기 때문에 증가하는 것을 의미로 삼았다. 그 법은 많은 금률(禁律)을 기록하고 있으며, 승묵(繩墨)은 매우 엄격한데 이것이 바로 세간을 건너가는 법도[檢括]이다. 세상을 피해서 바위 동굴에 사는 사람과 강과 바다에서 유람하는 외국 사람들도 대부분 4아함 중에서 이 경을 영탄하고 음미하였다. 외국의 사문인 담마난제(曇摩難提)는 도가륵국(兜佉勒國)의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널리 배워서 두 가지 아함을 독송하였다. 옛것을 익히고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모든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가보지 않은 땅이 없었다.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384) 장안에 왔는데 외국 사람들과 이곳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자 무위(武威) 태수(太守) 조문업(趙文業)이 이 경을 역출하도록 청하였다. 불념(佛念)이 전역(傳譯)하고, 담숭(曇崇)이 필수(筆受)하여 갑신년 여름에 역출하여 다음해 봄에 이르러 끝마쳤다. 41권으로 된 것을 상부와 하부로 나누었다. 상부 26권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하부 15권은 게(게)를 수록해 놓은 곳이 소실되었다.
031_0362_b_02L나는 법화(法和)와 함께 이를 상고하여 바로잡고, 승략(僧略)과 승무(僧茂)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부분을 교정하였는데, 40일이 걸려서 비로소 끝마쳤다. 이 해에 아성(阿城)의 부역이 있었고, 장안(長安) 근교의 전장에서 공격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조문업은 오로지 이 일에 전념하여 『중아함』과 『증일아함』의 두 가지 아함경 백권과 『비바사(鞞婆沙)』와 『바화수밀(婆和須蜜)』과 『승가라찰전(僧伽羅刹傳)』을 완전하게 갖추었다. 이 다섯 가지 대경(大經)은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온 이래 역출된경 중에서 우수한 것이다. 4아함은 40명의 응진(應眞)이 수집한 것이다. 열 사람이 1부를 찬집(撰集)하였는데, 특히 이 『증일아함』은 각 품(品)의 처음과 끝[起盡]을 나타내서 제시하여 이를 매듭짓는 게(偈)를 수록하고 있다. 이는 법(法)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데 유실되고 흩어져서 없어져 버릴까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땅에서 먼저 역출한 모든 경의 여기저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지금 두 가지 아함경으로 만들어 각각 새롭게 한 권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옛날의 명칭[目]을 온전하게 남겨 놓고 옳고 그름에 대한 주(注)를 붙여서 경을 보고 연구함에 있어서 용이하도록 하였다. 『증일아함』은 상부(上部)와 하부(下部)를 합쳐서 472경으로 하였다. 모든 학사(學士:比丘)들이 이 두 가지 아함경을 찬집(撰集)할 때 가끔 율(律)에 관한 말을 포함시켜 놓았는데, 외국에서는 사미(沙彌)와 재가신자[白衣]를 동일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후로는 함께 이것을 호지(護持)해서 율(律)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겼으면 한다. 이것이 이곳에서 가장 급한 것이다. 이 간절한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널리 경전을 보면서도 금계(禁戒)를 호지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비구(比丘)들의 공통된 결점이다. 『중본기경(中本起經)』은 강맹상(康孟祥)이 역출한 것인데, 「대애도품(大愛道品)」을 역출할 때 이것이 금계(禁戒)를 설한 경전임을 알지 못하고 비구니법(比丘尼法)이 너무 직접적인 점을 싫어하여 삭제해서 제거하였다. 이는 크게 졸렬한 일이고 통한스러워할 만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은 역량 있는 스님이라야만 확실하게 보아서 마음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경솔하게 소홀히 여겨서 뜻을 두지 않는다면, 바라건대 우리 동지(同志)들이여, 북을 울려서 그들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031_0362_c_02L 아함모(阿鋡暮)는 진(秦)나라 말로는 무로 취향하는 것[趣無]이라고 한다. 아난은 12부경(部經)을 송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법[逕]과 궁극의 도법(道法)을 가려 뽑아서 사아함모(四阿鋡暮)라고 하였다. 이것을 아비담(阿毘曇)ㆍ율(律)과 합쳐서 모두 3장(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독(身毒:인도)의 학사(學士)들은 지극한 덕[至德:불교]이 아직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름이 바소발타(婆素跋陀)인 아라한이 중요한 것[膏腴]을 가려 뽑아서 1부로 만들었다. 9품(品) 46엽(葉)에서 중복된 것을 삭제하니, 문장은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의미는 풍부하여 진실로 경(經)의 핵심[瓔鬘]이라고 할 만하였으며, 미묘한 모든 행(行)과 시비(是非)에 대한 논변을 모두 기재해 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뛰어나고 심오하고 깊고 풍부해서 이를 행하면 만사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字)가 인제려(因提麗)인 외국의 사문이 먼저 이 경을 가지고 전부국(前部國)에 이르러서 비밀스럽게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는데, 그 나라 왕 미제(彌第)가 이것을 구해서 독송하여 마침내 이곳에 유포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임오년 8월에 동방(東方)으로 선사(先師)의 사묘(寺廟)가 있는 곳을 찾아 업사(鄴寺)에서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가 호본(胡本)을 잡고, 불념(佛念)과 불호(佛護)가 전역하고, 승도(僧導)와 담구(曇究)와 승예(僧叡)가 필수(筆受)하게 하여 겨울 11월에 이르러 비로소 끝마쳤다. 이 해 여름에 『아비담(阿毗曇)』을 역출하고 겨울에이 경을 역출하였다. 1년 가운데 2장(藏)이 갖추어진 것을 스스로 매우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7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경을 만났다는 것인데, 위편(韋編)이 끊어지지 않고 과업을 마치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만약 여기에 몇 년을 더할 수 있다면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에 번역하는 사람에게 칙령을 내려 곧바로 호어(胡語)를 진나라 말로 전역하게 하였는데, 외국의 언어[方言]를 해석하였을 뿐 경문을 수식한 것과 질박함은 감히 바꾸지 않았다. 법칙[數]이나 일[事]을 들어서 설명한 곳이 있으면 그 주석을 단 사람에게 물어서 그 경문(經文) 아래 주석을 붙였다. 때때로 문의(文意)가 해소된 것은 장(章)을 만들었다. 장(章)에 수투로라고 주(注)를 붙인 것은 그 사람의 주해(注解)와 경의 본문을 따로 구별한 것이다. 곧장 수투로(修妬路)라고 쓴 것은 경을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고 주해를 붙인 것이 아니다.
태세(太歲)가 병인(丙寅)에 있던 해(426) 여름, 4월 23일에 하서왕(河西王)의 세자(世子)로 무군장군(撫軍將軍)이며 녹상서사(錄尙書事)인 대저거몽손(大沮渠蒙遜)이 나라를 일으키고 우바새(優婆塞) 등 5백여 명과 함께 도성(都城) 안에 천축의 법사인 담마참(曇摩讖)을 청하여 이 『재가보살계(在家菩薩戒)』를 역출하였다. 가을 7월 23일에 이르러 모두 끝마쳤는데, 진(秦)나라 사문 도양(道養)이 필수하였다.
031_0363_b_02L 만법(萬法)은 형상이 없지만[無相] 두 가지 진리[二諦]가 있고 성인(聖人)은 무지(無知)하지만 두 가지 이름[二名]이 있다. 두 가지 진리는 세속제(世俗諦)와 도제(道諦)이고, 두 가지 이름은 방편[權]과 지혜[智]이다. 두 가지 이름은 언어[語]와 침묵[黙]으로 부르고 두 가지 진리는 인연[緣]과 공성[性]이라고 말한다. 인연과 공성은 두 가지로 진술되지만 실제로는 어긋나는 것이 아니고, 언어와 침묵은 진실로 다르지만 그윽한 종지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경(般若經)』에서 “색(色)이 바로 공(空)이고 공이 바로 색이다”라고 한 것이니,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리경(菩提經)』은 모든 부처님의 요장(要藏)이고 10주(住)의 영통(營統)이다. 그 문장은 비록 간략하지만 그 의미는 뭇 경전을 꿰뚫고 있으며, 그 종지는 비록 현묘하지만 환하게 밝아서 파악하기가 쉽다. 비유하면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으면 뭇 형상들이 저절로 밝아지고, 한 모퉁이를 보여 주면 세 곳의 방향이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과 같다. 경의 체(體)를 말해보자. 인연과 공성을 논하면 2제(諦)로 근본[宗]을 삼고, 현(玄)과 회(會)를 말하면 권(權)과 지(智)를 주체로 삼고, 보리(菩提)를 말하면 무득(無得)으로써 현묘한 것으로 삼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發意]을 밝히면 그윽하게 명합(冥合)함을 기약하는 것으로 오묘함을 삼는다. 이것은 완곡(婉曲)하고 간략하면서도 광대하고 심오해서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기바(耆婆)법사가 방에 들어가는[入室] 비밀을 설명해도 직접 계승해서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 경이 거의 세상에 유행되지 않았다. 나의 스승인 순(順)법사는 처음에 기바법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불민(不敏)하긴 하지만 외람되게 제50위(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타고난 본성이 소탈해서 빠뜨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 말씀에 종사하면서 띠에 적어서 기록해 놓았다. 이를 어찌 주해(注解)라고 할 수나 있겠는가. 나 스스로 후대의 웃음거리를 남길 뿐이다. 바라건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문장 표현을 넘어선 곳에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선법(禪法)은 도(道)로 향하는 최초의 관문(關門)이고 열반[泥洹]으로 가는 나루이며 지름길이다. 이 땅에서는 먼저 『수행경(修行經)』과 대소(大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과 대소의 『안반경(安般經)』을 역출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그 일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근본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았고 또 스승으로부터 전수받는 법[受法]도 말하지 않았다. 학자가 경계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은 보류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구마라(究摩羅)법사는 신축년(401) 12월 20일에 고장(姑臧)으로부터 상안(常安:長安)에 왔다. 나는 곧바로 그 달 26일에 그로부터 선법(禪法)을 받았다. 계발해서 전수해 주는 은혜를 입고 나서 비로소 배움에는 정해진 규범[准]이 있고 법(法)에는 이치[條]가 있음을 알았다.
031_0363_c_02L『수릉엄경』에서 “사람이 산 속에서 도를 배움에 있어 스승이 없으면 끝내 도를 이룰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로부터 제가(諸家)의 선요(禪要)를 가려 뽑아서 이 3권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의 43게(偈)는 구마라라타(究摩羅羅陀)법사가 지은 것이고 끝의 20게는 마명(馬鳴)보살이 지은 것이다. 그 중에서 5문(門)은 바수밀(婆須蜜)과 승가라차(僧伽羅叉)와 구바굴(漚波崛)과 승가사나(僧伽斯那)와 늑(勒)비구와 마명(馬鳴)과 나타(羅陀)의『선요(禪要)』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을 모아서 역출한 것이다. 6각(覺) 가운데 있는게(偈)는 마명보살이 수행하고 닦아서 6각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에 음욕[婬]과 성냄[恚]과 어리석음[痴]의 모습을 관(觀)하는 것과 여기에 관한 3문(門)은 모두 승가라차가 찬술한 것이다. 식문(息門)의 6사(事)는 모든 논사들이 설한 것이다. 보살이수행하는 선법 중에는 그 후에 다시 『지세경(持世經)』에 의해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 1권과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을 증익시켰는데, 이것은 다른 때에 가려 뽑아서 역출한 것이다. 마음을 치달리게 하고 생각을 방종하게 하면 정(情)이 더욱 막히고 미혹이 더욱 깊어지게 되고, 생각을 집중시켜서 마음을 밝히면 맑게 조감하고 밝게 비추어서 지극하게 더욱 정밀한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음은 마치 물이나 불과 같아서 끌어서 모으면 그 작용이 더욱 온전해지고 터주어서 흩어지게 하면 그 세력이 더욱 약해진다. 이 때문에 논(論)에서 “바탕[質]이 미미하면 세력이 중탁하고[重] 바탕이 중탁하면 세력이 미미하다”고 한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땅[地]은 바탕이 중탁하기 때문에 세력이 물과 같지 못하고 물은 본성이 무겁기 때문에 세력이 불만 같지 못하다. 불은바람만 같지 못하고 바람은 마음만 같지 못하다.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세력이 최상인 것이니, 신통변화(神通變化)와 여덟 가지 부사의(不思議)는 모두 마음의 힘이다. 마음의 힘이 온전하게 되면 어둠을 바꾸어서 밝음에 들어간다. 그런데 밝음이 비록 밝지 않음[不明]보다 낫기는 하지만 밝음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것이니, 밝음이 온전해지는 것은 관조함을 잊어버리는 데에 달려 있다. 관조함을 잊어버린 후에 밝음과 밝지 않음이 없어지고, 밝음과 밝지 않음이 없어져야만 쉼[息]에 가까워지는 것이니, 쉼에 가까워지는 것은 지혜의 작용[功]이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선(禪)을 수행하지 않으면 지혜가 생기지 않고 지혜가 없으면 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禪)은 지혜가 없으면 관조할 수가 없고 관조함은 선을 수행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 위대하도다, 선(禪)과 지(智)의 업(業)이여.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 경을 역출한 후에 홍시(弘始) 9년(407) 윤달 5일에 이르러 다시 검토해서 교정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받은 경전을 자세하게 살피지 않아서 하나의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장차 천 리의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해서였다. 상세하게 교정해서 틀린 곳이 있을 때마다 바로잡은 곳이 많이 있다. 이미 바로잡아서 갖추었으므로 틈을 잡아서 비난할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무릇 3업(業)을 바로 세우려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업의 정밀함과 거칠음은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바로 세우는 단계에는 각각의 방법이 있다. 그러므로 수레를 출발시키매 길이 아홉 갈래로 나뉘었어도 길에는 어지러운 바퀴 자국이 없고, 세속을 혁파하여 업무를 완성하여도 공적이 쌓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고요하게 근원적으로 연유한 곳에 돌아가면 그윽한 실마리가 은미해지고 심오하고 넓어서 궁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치는 어두워지지 않으므로 근본 종지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다. 이를 시험삼아 간략하게 말해보면, 선정[禪]은 지혜가 아니면 그 고요함을 궁구할 수가 없고, 지혜는 선정이 아니면 그 관조함을 심오하게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선정과 지혜의 요점은 관조함과 고요함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평등하게 일치하는 점을 말해보자. 관조(觀照)는 고요함을 떠나지 않고, 고요함은 관조함을 떠나지 않아서 감응하면 함께 노닐면서 반드시 같은 길로 취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공적(功積)이 그 작용에서 현묘해지고 만법을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길러낸다. 그 신묘함[妙物]은 지극한 하나[至一]에 의해 모든 운동을 총괄적으로 운용하면서도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고,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곳[未形]에서 대상(大象)을 확연하게 텅 비우면서도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니, 사려함도 없고 작위함도 없지만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씻고 어지러움을 고요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禪智]으로써 사려를 극진하게 다하고, 은미함을 깨달아서 은미한 이치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으로써 정신을 궁구한다. 만약 이 교문(敎門)에 들어가려 한다면 그 계기(契機)는 한 곳으로 섭수해서 회합하는 것에 달려 있는데, 이치는 현묘하고 수(數)는 광대해서 도(道)가 문장의 배후에 은몰되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아난(阿難)이 부처님의 가르침[音詔]을 온전하게 계승한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영부(靈府)에 갈무리되어 버리는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마음은 일정한 법칙이 있지만 변화는 여러 가지이고, 이치[數]는 일정한 모습이 없지만 중생의 느낌이 부딪쳐 오는 것[感]에 의지해서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화가 천축(天竺)에서는 행해졌지만 어떤 사장(師匠)에 의해 봉함되어 그윽한 관문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그 뜨락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치는 실행될 때가 있고 간직될 때가 있으며 도는 헛되이 전수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오래지 않아서 아난은 함께 수행했던 제자인 말전지(末田地)에게 이 법을 전하였고, 말전지는 사나바사(舍那婆斯)에게 전하였다. 이 세 사람의 응진(應眞)은 모두 지극한 원[至願]에 의하여 옛날부터 부사의한 인연에 그윽하게 계합하였다. 그들의 공은 언어 밖에 있어서 경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반드시 원장(元匠:부처님)과 암암리에 궤(軌)를 같이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 우바굴(優波崛)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초월해서 깨달았으며 지혜는 세상 밖[世表]으로 뛰어났고, 재주는 응진보다도 고원했으며, 도리(道理)를 체득해서 간이(簡易)함을 따랐는데, 8만의 법장(法藏) 중에서 요점이 되는 것만을 보존하니, 5부가 나뉘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의지해서 유추해 보건대, 진실로 형체가 운용됨에 폐지되고 흥기되는 것은 저절로 조짐을 나타내고, 정신의 작용은 그윽하게 행보하여 자취가 없으며, 미묘한 움직임은 찾기가 어렵고 거친 일에는 서로 다른 점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삼가하지 않거나 살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 이후로부터 사태의 변화를 느껴서 옛날의 전적(典籍)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5부의 학(學)을 연구하는 분야에 모두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법(大法)이 장차 무너지려 하는 것을 염려하였으니, 비분강개하는 마음이 이치상 당연히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각 선경(禪經)을 전술하고 찬탄하여 그 업을 융성하게 하였다. 그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는 방편으로 고요함을 구하는 것인데, 고요함은 고요함일 뿐이니 그 법도(法度)는 하나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엽(枝葉)을 연구해서 근본을 구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근본을 통괄해서 지말까지 운용하려는 사람은 적었다. 어떤 사람은 가려 해도 도달하지 못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 모퉁이를 지키면서 임기응변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경에서는 만원(滿願)의 덕을 칭찬하고 보사(普事)의 풍모를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궁구해 보건대, 성인의 종지[聖旨]는 그 장점을 온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단점도 구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5부의 뛰어난 업[殊業]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은 대대로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도(道)는 어떤 경우에는 융성하기도 하고, 또 쇠퇴하기도 하며 흥하고 폐지되는 것은 시기가 있다. 그러하다면 서로서로 오르락내리락함이 있는 것이니, 소승과 대승의 항목을 정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또 절도(節度)를 통달해서 분별하여 훌륭하게 변화하고, 나아가고 은둔해서 거처함[出處]에 일정한 때가 없으며, 이름을 숨기고 자취에 의탁하여 소문도 들리지 않고 보여 주지도 않는 이와 같은 사람은 부(部)라는 이름을 붙여서 분별할 수가 없다. 이미 부(部)라는 이름을 붙여서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저 부(部) 밖으로 벗어나서 따로 근본(根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항상 위대한 가르침[大敎]이 동방으로 유포되어 온 이래 선의 이치[禪數]가 더욱 적어지고, 3업[業]의 계통이 없어져서 이 도가 거의 폐지되어 가는 것을 개탄하고 있는데, 요즈음에 구마기바(鳩摩耆婆)법사가 마명(馬鳴)이 지은 것을 선양하고 있으니, 바로 이 업(業)이다. 비록 그 도가 이직 밝아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대체로 산을 만드는 데 있어서 한 삼태기의 흙이다. 시운(時運)이 도래해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이와 같은 사람에게 나아가서 의탁하게 된 것에 감격하여 저 승리를 구하는 논의를 버리고 말없는 논변에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나(僧那) 입기를 서원으로 세우고, 지극한고요함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부처님의 덕을 그리워하면서 잊지 않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유훈(遺訓)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그 요점은 말류의 현상에서 커다란 성취를 도모하여 은미한 말을 열어서 본체를 숭상하고, 색(色)에 미혹하는 것이 덕을 해침을 깨달아서 6문(門)을 막아서 근심을 잠재우고, 분노로 경쟁하는 것이 본성을 손상시킴을 통달해서 피아(彼我)를 평등하게 보아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족(異族)과 동기(同氣)가 모두 환영임을 알아서 소원하게 여기고 깊은 연기의 이치에 깨달아 들어가 생사(生死)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 이에 용진(龍津)에서 9관(關)을 열고 3인(忍)을 뛰어넘어 수행의 지위에 오르고, 구습(垢習)은 무생법인(無生法認)에서 가라앉고, 형체의 누(累)는 정신이 명징하게 변하는 곳에서 다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생기하는 것도 없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없으므로 모든 것이 생기했다 해도 생기한 것이 아니다1)”라고 한 것이다. 지금 번역된 것은 달마다라(達磨多羅)와 불대선(佛大先)이 역출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서역의 뛰어난 사람들이고 선을 가르치는 종장이며, 경전의 요점을 수집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여 대승심(大乘心)을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홍포해서 가르치는 것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하고 간략한 차이점이 있다. 달마다라는 여러 편을 합쳐서 동도(同道)로 합치시키고 하나의 색[一色]을 열어서 항하사로 만들었다. 그가 보는 관점은 생기하는 것이 생기하는 것이 아니고, 소멸하는 것이 멸진되는 것이 아니어서 왕복함이 끝이 없지만 처음부터 여(如)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色)이 여(如)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여가 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색이 바로 여이고 여가 바로 색이다”라고 말하였다. 불대선(佛大先)은 근원을 맑혀서 지말적인 흐름을 이끌어 들이려면 근원부터 점점 맑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2도(道)에서 시작하여 감로문(甘露門)을 열고, 네 가지 의미[四義]를 해석하여 미혹을 돌이키고, 귀의해야 하는 길[歸塗]을 열어서 깨달아 알도록 하고, 음(陰)과 계(界)를 분별해서 정관(正觀)으로 인도하고, 연기법을 분명하게 나타내서 우열(優劣)을 저절로 구별하도록 하였다. 그런 후에 시초[始]를 궁구해서 끝[終]으로 돌아가 그 극(極)을 오묘하게 찾도록 하였는데, 그 극(極)은 멸진되는 것도 아니고 멸진된 것도 아니므로, 이것을 무진(無盡)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무진법문(無盡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저 도(道)가 3승(乘)의 으뜸이고 지혜가 10지(地)를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뉘라서 현묘한 근원[玄根]을 법신(法身)과 통하게 하고 하나인 근본을 무상(無相)으로 돌아가게 하며 고요하면서도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게 하고 활동하면서도 고요함을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있으랴.
하서왕(河西王)의 종제(從弟)인 대저거(大沮渠) 안양후(安陽侯)는 우전국(于闐國)의 구마제대사(衢摩帝大寺)에서 천축의 비구인 대승사문(大乘沙門) 불타사나(佛陀斯那)를 따르면서 배웠다. 그 사람은 하늘이 부여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특별히 뛰어났으며, 여러 나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고, 반억(半億) 개의 게송을 외울 수 있었는데 겸해서 선법(禪法)에도 밝은데다가 내전과 외전을 종합적으로 박람하여 익히지 않은 전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람 중에서 사자와 같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저거(沮渠)는 그를 직접 대면해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기억하고 외우는 데 막힘이 없었다. 송(宋)나라 효건(孝建) 2년(455) 9월 8일, 죽원정사(竹園精舍)에서 이 경을 서출(書出)하기 시작하여 그 달 25일에 이르러 모두 끝마쳤는데, 비구니 혜준(慧濬)이 단월이 되었다.
031_0365_b_02L 선전(禪典)의 오묘한 설법은 3승(乘)이 노니는 곳이다. 혼미함을 돌이켜서 미혹을 깨닫는 사람은 그윽한 길에 의탁해서 진실한 성(城)을 열고, 3업(業)의 견고한 집을 구축하며 6도(度)를 광대하게 수행해서 정신을 맑게 하고, 번뇌의 적을 드넓은 벌판에 버린다. 현상의 네 가지 변화[四變]를 끝까지 연구해서 마음을 노닐게 하고 3혜(慧)의 불꽃을 밝혀서 횃불을 밝히고 근원의 물결을 넘치게 해서 특별히 분별하고 금강의창으로 마군을 단련시키며 선정과 지혜를 서로 조화롭게 해서 진여를 헤아린다. 이 지혜가 선정을 의지하면 어리석음과 허망함이 무너져서 소멸되고 선정이 지혜를 의지하면 일곱 개의 연못[七淵]이 담연해져서 순수하고 청정하게 되며, 9복(服)을 청정하게 융합시키면 현묘한 뜨락에 계단이 생기게 되고, 계단을 차례로 밟아서 올라가면 용광로에서 단련되어 미묘함을 성취하게 된다. 의미에는 근본이 있고 근본에는 각각의 방법이 있으니, 근본을 추구해서 가르침을 전하면 모두가 하나로 그윽하게 합치하게 되어 근기에는 날카롭고 둔한 차이점이 있지만 그 고통을 구제하는 데에는 동일하게 헤아리게 된다. 만약 서로 계합해서 동일하게 나아가게 되면 성인의 성품이 함께 비추게 되고, 성인의 성품이 함께 비추게 되면 번뇌의 누(累)와 근심이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는 세간을 벗어나는 묘술(妙術)이고, 실제(實際)로 가는 의표(義標)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저 선정[禪]과 지혜[智]가 도(道)가 됨에 있어서는 언어 표현은 간략하지만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중도를 끝까지 궁구하며 만법(萬法)을 대치하는 것이다. 선(善)과 악(惡)은 서로가 서로를 싣고 번갈아 가면서 굴러가는데 누가 서로 폐지되고 흥기하는 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학사[館]에서 연구하고 학장(學匠)이 투철하게 사유하여 대략 그 종(宗)의 위치에서대방(大方)을 나타내고 있는데 시대는 달라도 표현된 문장은 동일하다. 상성(上聖:부처님)이 자비의 주체가 되어 법장을 천 년의 세월에 남겨서 3승(乘)의 수레바퀴 자국을 제시하여 그것을 회통시키는 지계(至階)를 알도록 하였다. 이는 오랜 겁(劫) 동안 거친 조개를 다듬어서 천천히 아름답고 신령스러운 진주조개로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비밀스럽게 이 전적을 서로 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연 있는 사람들을 8해탈(解脫:八背)로 제접하여 일찍이 그 시기를 잃지 않았는데, 근기를 따라서 했으므로 마치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용이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고요한 지혜는 항상 적연하면서도 작용을 잃지 않는다. 관조하는 작용은 모든 근기[萬機]에 작용하더라도 고요하게 교화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므로 모든 법보(法寶)를 끝까지 궁구하여 생각을 현묘한 사립문[玄扉]에 미루어 나가고 뜻을 오묘한 극치에 노닐게 하여 무한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신묘한 광채를 밟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선전(禪典)은 긴요하고 미묘해서 이를 상대할 때에는 반드시 근본 종지[宗]가 있어야한다. 만약 근원을 잃으면 지엽적인 것을 찾게 되어 온전하게 되지 못한다. 진리에 어두운 사람들이 종지를 잃어버리고 증상만심(增上慢心)으로 어둠 속에 빠져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만약 근본을 살필 수 있으면 가르침에 명합(冥合)해서 도가 성취되고, 진실하게 관해서 옛날에 합일하면 모든 경계가 평등하게 밝아져서 심오한 진리의 길[沖途]이 활짝 열려서 원만하게 되고, 형상이 없는 가운데에서 현묘한 모습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범부와 성인의 서로 다른 부류의 마음이 진행되는 작용이 가이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은 각각 경지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이유로 해서 모두 자신만의 구덩이에 빠져서 마침내 자신의 갇힌 견해[穴見]에 미혹되어 나루와 길을 변경시키고 장야(長夜)에 혼미하게 노닐면서 영원히 진리와 간격을 두고 멀어지고 있으니, 또한 애닯다 하지 않으랴. 요즈음 선(禪)의 가르침은 실로 적어지고 그 중도를 체득한 사람도 거의 없다. 나는 항상 신체는 보전하기 어렵고 순환해서 변동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3보(寶)에 정성을 다 바치고 현묘한 요지[玄要]를 모아서 구하면서 『사백관론(四百觀論)』에 의거해서 관건이 되는 종지[關旨]를 찾아서 구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서역에서 온 종장(宗匠)을 만났다. 이 분은 대승의 선법[大法]을 종합적으로 익혀서 근본을 탐구하여 끝까지 이르러 갔으며 모든 구석의 어둠을 한번에 열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천 년 후에 우담화(優曇花)가 핀 것이니, 어찌 기쁘다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고원한 종지[高宗]를 계승한 모범을 추구해 보았더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아난이 간곡하게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천 년 후까지 유행하게 하였다. 먼저 함께 수행한 제자인 마전지(摩田地)에게 전하고 마전지는 사나바사(舍那婆斯)에게 전해 주었다. 이 세 사람의 응진(應眞)은 대원(大願)을 크게 펼쳐서 옛날에 정해 놓은 것에 명합하였는데, 정신은 사물 밖으로 초월하였고 중생을 편안하게 구제해 주는 자비심이 있어서 이름을 숨기고 중생을 구제하는 행(行)을 하였으니, 이것은 부처님의 유훈과 일치해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외학(外學:外道)으로서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춘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처소에 찾아가서 출가할 것을 청하였다. 그는 세속을 초월해서 뛰어났으며 뜻을 고원한 곳에 의탁하고 있었는데,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불도(佛道)에 들어가서 지혜와 변재가 사리불[身子]과 같아진다면 여기에서 지극히 존귀한 법에 의거해서 그 가운데서 범행(梵行)을 닦아 익히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근본이 백 년 후에 불법을 크게 홍포하는 일을 할 것을 아시고 선인에게 곧바로 대답하셨다. “그대가 지금 출가해도 지혜가 천박해서 사리불에게 미치지 못하느니라.” 선인은 즉시에 물러났다. 백 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이 세상에 나왔는데 식견이 뛰어나고 널리 통달하였는데, 어떤 것을 만나서 깨달은 바가 있어 마침내 출가하여 도를 배웠다. 그는 응진(應眞)의 경지를 얻어서 3명(明)으로 안을 밝혔고 6통(通)을 멀리 떨쳤다. 변재가 막힘이 없어서 모든 이론(異論)을 꺾었고 제도한 중생은 그 수가 가이없었다. 모든 법장(法藏)에 대해서 가르치는 글을 지어서 열어 보였는데, 모든 현자들이 살펴보고 마침내 5부의 가르침이 달라지게 되었다. 교화가 운용되는 데에는 정해진 장소가 있고 교화를 열어서 사무치게 하는 데에는 시기가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해서 5부가 일어나자 그들이 얻은 경지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가르침이 달라지고 마침내 지말적인 흐름에 구별이 있게 되었다. 이미 구별이 생겼다면 근본을 상세하게 추구해 본 후에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 1부의 전적은 『구족청정법장(具足淸淨法場)』이라고 한다. 저 선인(仙人)으로부터 전해진 이 법이 계빈에 이르고, 또 구르고 굴러서 부야밀라(富若蜜羅)에게 이르렀다. 부야밀라도 모든 번뇌의 누를 다하고 6통(通)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후에 제자인 부야라(富若羅)에게 이르렀는데, 이 사람도 응진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계빈에서 제일가는 스승[敎首]이었다. 부야밀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50여 년, 제자(弟子:富若羅)가 세상을 떠난 이후 20여 년에 담마다라(曇摩多羅)보살은 불타사나(佛陀斯那)와 함께 두 분 선사(先師)의 고원하고 뛰어난 가르침을 얻어서 그 법의 근본[法本]을 선양해서 유행하게 하였다. 불타사나는 계빈에서 교화를 행하여 세 번째 훈수(訓首)가 되었다.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직접 그를 따르면서 법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열반을 보게 되었는데, 열반에 들 때 다음과 같은 유교(遺敎)를 남겨서 말하였다. “내가 교화한 사람의 수는 매우 많은데, 도에 깨달아서 들어간 사람은 모두 7백여 명이다.” 부야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교사(敎師)는 15~16명인데, 지금은 서역에서 교화가 치성하게 행해져서 배움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담마라(曇摩羅)는 천축에서 왔는데 이 법요(法要)를 바타라(婆陀羅)에게 전하였고, 바타라는 불타사나에게 전하였다. 불타사나는 이 전단(旃丹)에 진실로 스승으로 삼아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법을 전하였다. 이 법의 근본이 동주(東州)에 흘러들어가 도달하였는데, 가르침의 진위(眞僞)를 명료하게 하고, 길에 어지러운 자국이 없어지게 하고, 수행의 완성을 헛되지 않게 하여 반드시 후한 이익이 더해지도록 하였다. 이 경(經)에서 “4색(色)을 열어서 나누면 하나의 색(色)의 세계에 한량없는 인연이 있다. 각각의 부(部)에서 세운 나루를 근본으로 삼아 돌아가면 발심해서 취향하는 대로 결과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침의 태양이 움직이면 만물의 그림자가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고, 사자가 사자후를 떨쳐내면 모든 짐승들이 굴복하는 것과 같으며, 성왕(聖王)이 보배로운 법륜을 굴리면 모든 영웅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법계(法界)의 확연하고 청정하고 텅 빈 나루를 보면 유(有)에 들어가도 미혹당하지 않고 무(無)에 거처해도 빠지지 않게 된다. 진실로 도(道)가 모든 방향을 초월하고 지혜가 현중(玄中)을 조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뉘라서 무언의 언변[無言之辯]을 영묘하고 깊은 연못에 세울 수 있으며, 7각지(覺支)의 숲에 언어를 의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실로 이름붙이지 않아도 만물에는 모두 이름이 붙여지지 않음이 없고, 형체를 부여하지 않아도 만물에는 모두 형체가 부여되지 않음이 없고, 일삼지 않아도 만물은 모두 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31_0366_c_02L 『승만경(勝鬘經)』은 방광(方廣)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고 초월해서 상승하는 커다란 궤도(軌道)이다. 그 가르침을 행하려면 한 삼태기의 흙을 붓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데, 구름 낀 봉우리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심오한 생각이 한 번 일어나면깨달음의 연못이 툭 트여서 넓어지게 된다. 그 언어 표현은 일상적인 가르침을 뛰어넘고 있고, 그 종지는 옛날의 경전[舊篇]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발심해서 성인이 되고자 하면 신묘한 위의가 영묘하게 빛나고, 다른 경전[別章]에 귀의하지 않으면 그 덕을 찬탄하는 것이 여기에 갖추어지고, 성심(誠心)으로 감응해서 소리를 일으키면 존귀한 칭호가 메아리처럼 모이게 된다. 그런 후에 마음을 혁파해서 엄하게 경계하고 광대한 사홍서원에 뜻을 두어 훌륭하게 섭수해서 빠뜨리지 않으면 대승의 수레가 이에 제어되고, 그윽한 자국을 남기는 수레를 치달려서 영원한 길을 오랫동안 달리게 되며, 미혹한 기간의 운세가 끝에 이르러서 거침없이 현묘한 극치에 오르게 된다. 현묘한 극치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온갖 흐름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3승이 모두 1승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구경제일의승(究竟第一義乘)이다. 일(一)은 진실로 분별할 수 없지만 의미에는 구분이 있으니, 명칭은 의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주자주 전변하는 것[屢轉]이라고 부른다. 3승교(乘敎)와 5시교(時敎)가 생겨난 것도 대체로 이것 때문이다. 그 오묘한 가르침은 무시(無始)의 이전을 궁구해서 미혹을 해소하는 근본을 밝히고 미래세의 끝을 궁구해서 열반의 오묘함을 파악한다. 이 경의 문장은 얼마 안 되지만 의미는 풍부해서 모든 전적의 내용을 보편하게 담고 있으니, 우주(宇宙)로도 그 넓음을 헤아리기에는 부족하고 태허공(太虛空)으로도 그 양을 논의할 수가 없다. 심오하여라, 그것을 헤아릴 수 없구나. 확연하여라, 그 극치를 알 수가 없도다. 본제(本際)의 근원을 구해서 흐름의 근원인 극치로 되돌아가고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경전에 마음이 이르러야 할 것이다. 사도(司徒)인 팽성왕(彭城王)은 아득한 전생에 선근(善根)을 심어서 용(龍)과 같은 모습을 이 생에 나타내었다. 자취는 상대(上台)에 의거해서 천자를 보좌해서 돕고 있었지만, 마음은 세속을 벗어난 맑은 곳에 깃들었고 유현(幽玄)한 도를 빛나게 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이 심오한 전적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진심[誠]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도속(道俗)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불도(佛道)를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외국의 사문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에게 청하여 정본(正本)을 손에 잡고 입으로는 범음(梵音)을 선양하게 하였다. 산(山)에 거처하면서 절의(節義)를 지키고 통달해서 깨달은 사문[息心] 석보운(釋寶雲)이 송(宋)나라 말로 번역하였다. 덕행(德行)을 갖춘 혜엄(慧嚴) 등 1백여 명의 스님들이 음의(音義)를 자세하게 상고해서 그 문장을 교정하였다. 대송(大宋)의 원가(元嘉) 13년(436) 세성(歲星)이 현효(玄枵)에 있던 해 8월 14일에 처음 범륜(梵輪)을 굴리기 시작하여 월말에 이르러 모두 끝마쳤다.
공(公)은 곧바로 널리 필사해서 유포시켜 아직 부처님의 자비에 적셔지지 않은 사람에게 은택을 베풀고 후세의 사람들과 함께 고원한 법회가 열리는 도량에 함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난 법요(法要)를 간략하게 서술해서 함께 불도를 흠모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화를 베풀고자 하는 바이다.
『승만경(勝鬘經)』은 방등(方等)의 종극(宗極)이다. 이 때문에 천 년 동안 보존된 것이다. 공적은 사람에 의해서 홍포될 수 있는 것이다. 원가(元嘉) 12년(435) 세성(歲星)이 을해(乙亥)에 있던 해에 공덕현(功德賢)이라는 천축의 사문이 있었다. 그의 행업은 평소에 돈후함을 숭상했으며 대승의 이치를 관통(貫統)하였는데, 멀리서 호본(胡本)을 싣고 상경(上京)에 와서 노닐었다.
그는 몸을 기원사(祇洹寺)에 의탁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연구하였다. 이 사람의 재능을 정미롭고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의미를 크게 빛내서 선양하였다. 마침내 그는 이 종지를 전파하기 위해서 제왕(帝王)에게 서간(書簡)을 올렸다. 그때 우바새인 하상지(何尙之)가 단양윤(丹楊尹)으로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단월이 되었다. 그는 경도(京都)에 있는 명민하고 덕을 갖춘 명망(名望)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곧바로 단양군 안에서 이 경을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윽고 현인의 본심(本心)에 회합하고 또 신중하게 전역하였는데, 자구(字句)는 비록 질박했지만 이치는 오묘하고 심오하며 광대하여 일상적인 범부의 망정으로는 거의 생각이 가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 축도생(竺道生)의 의학 제자(義學弟子)인 축도유(竺道攸)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현묘한 종지를 익혔는데, 종지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일념으로[偏] 받아들였다. 후에 스승을 모시고 따라서 여산(廬山)에 들어가 옛 것을 익혀 그대로 전하였으니, 봉황을 도와서 그 덕이 빛나게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축도생 법사는 원가(元嘉) 11년(434)에 이르러 강좌(講座)에서 정신을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갔다. 도유(道攸)는 사모하는 정으로 크게 가슴 아파하면서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여겼다. 이에 스승의 분묘에 작별 인사를 올리고 마침내 30여 년 동안 임천(臨川)에 은둔하였다.
031_0367_a_02L『승만경』이 역출된 후에 책장을 열어서 연구하고 반복해서 검토한 끝에 깊은 종지를 깨닫고는 우러러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선사(先師)께서 옛날에 가르쳐 주신 의미가 암암리에 이 경전과 회합하는구나. 다만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경전의 의미를 계승해서 뒤를 이으리라. 만약 눈 밝은 종장이 세상에 있어서 그 그윽하고 심오한 진리를 분석한다면 어찌 서로 다른 경전의 같은 문장에 대해서 상이한 점을 남김없이 해석하도록 하지 않겠는가. 내가 감히 해석을 해서 돌아가신 스승이 남긴 유훈(遺訓)을 도와서 선양하리라.” 이 때문에 주해(注解)를 지었는데 모두 5권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주해의 문장은 자세하지만[廣] 의미는 숨겨져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이 점을 성찰하는 사람은 현묘한 문에서 마음을 쉬게 되었다. 대명(大明) 4년(460)에 이르러 효무황제(孝武皇帝)는 도유가 스승에게 배워서 그 가르침을 계승했기 때문에 산에서 나와 도읍(都邑)의 법사(法師)가 되도록 칙령을 내렸다.
나 자(慈)는 이에 도유법사를 뵙고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 자문을 구할 수 있었는데,이 경전의 수미(首尾)에 대해서 대략이나마 물어보았다. 또 그 주해의 의미를 연구해보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부족하나마 그 요해(要解)를 가려 뽑아서 2권을 편찬하였다. 바라건대후래에 오는 현자들이 함께 그 종지를 알도록 했으면 하는 바이다.
031_0367_b_02L 12부의 경전은 법문(法門)을 구별해 놓은 것이다. 아득한 과거[曠劫]의 인연은 『본생경(本生經)』에서 그 일을 나타내었는데, 지혜로운 사람도 이 『비유경(譬喩經)』에 의지해서 그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 『현우경(賢愚經)』은 이 두 가지 의미를 겸해서 갖추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서(河西)의 사문인 석담학(釋曇學)과 위덕(威德) 등 모두 여덟 명의 스님이 뜻을 함께 하기로 인연을 맺고 각 지방을 유람하면서 먼 곳에서까지 경전을 찾아다니다가 우전국(于闐國)의 대사(大寺)에서 반차우슬(般遮于瑟) 법회를 만났다. 반차우슬은 한(漢)나라 말로는 5년에 한 번씩 모든 대중(大衆)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3장(藏)의 모든 학자들이 각각 법보(法寶)를 홍포하고 경(經)과 율(律)을 강설하면서 자기가 익힌 업에 의거해서 가르치는 모임이다. 석담학 등 여덟 명의 스님은 각각 인연에 따라서 분야를 나누어 가르침을 들었다. 이에 그들은 다투어 호음(胡音)을 익혀서 한나라 말의 의미에 맞게 절충하였다. 그들은 정밀하게 사유하여 통역해서 각각 들은 바를 기록하고 고창국[高昌]에 다시 돌아와서 이를 모아 1부를 만들고 사막을 넘어서 양주(涼州)로 가지고 왔다. 그 때 사문 석혜랑(釋慧朗)은 하서(河西)의 종장(宗匠)이었는데, 도업(道業)이 심오하고 광대하였으며 대승경전[方等]을 모두 기억하고[總持] 있었다. 그는 ‘이 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근원이 『비유경』에 있다. 『비유경』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선(善)과 악(惡)을 함께 기재해 놓고 있는데, 선악이 서로 바뀌게 되면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가 나뉘게 된다. 전대(前代)에 전해진 경전은 비유에 관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서 이름을 바꾸어 『현우경(賢愚經)』이라고 하였다. 원가(元嘉) 22년(445) 세성(歲星)이 을유(乙酉)에 있던 해에 처음으로 이 경전을 집대성하였다.
경사(京師)의 천안사(天安寺) 사문인 석홍종(釋弘宗)은 계를 지키는 힘[戒力]이 견고하고 청정했으며 지업(志業)이 순수하고 깨끗하였다. 이 경이 처음 이르렀을 때 스승을 따라서 하서(河西)에 있었는데, 그 때는 사미(沙彌)였고 나이는 14세였다. 그는 이 모임에 직접 참예하여 그 일을 직접 보았다. 양(梁)나라 천감(天監) 4년(505)에 이르렀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였고 법랍은 64세였으며 경사(京師)에서 제일가는 상좌(上座)가 되었는데, 이 『현우경(賢愚經)』이 중국에 이른 지 70년이 지났다.
나 승우(僧祐)는 경장(經藏)을 모두 모으기 위해서 멀고 가까운 곳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가서 자문을 구하고 그 일에 관해서 질의를 하였다. 홍종(弘宗)법사는 나이는 노년에 이르렀지만 덕은 준엄하였고 마음은 곧았으며 의거하는 바가 분명하였다. 이 때문에 홍종법사가 강설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나타내어 후학(後學)들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031_0368_a_02L 『무량의경(無量義經)』은 무상(無相)의 일법(一法)이 널리 여러 가르침을 일으켜서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을 취해서 무량(無量)이라고 한 것이다. 저 삼계의 모든 중생은 업[義]에 따라서 생사에 유전(流轉)하는데, 하나인 극치[一極]에 도달한 정각(正覺)은 근기에 따라서 소통시켜 준다. 유전하면서 생멸하는 중생은 반드시 고통 속에 있으면서 즐거움을 희구하는데, 이것이 성인의 마음을 두드려서 부딪쳐 간다. 중생의 희구에 따라서 소통시켜 주는 작용을 현시하는 사람은 또한 자비를 베풀어 세간을 구제하는 감응을 한다. 중생의 근기가 다르므로 성인의 가르침도 달라지는데, 그것을 성취하는 데 일곱 단계가 있다. 먼저 바리(波利) 등을 위해서 5계(戒)를 설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인천(人天)의 선근(善根)을 심은 경우이니, 첫 번째 단계이다. 다음은 구린(拘隣) 등을 위해서 4제(諦)의 법륜을 굴렸다. 이것이 이른바 성문승(聲聞乘)에게 전수해 준 것이니, 두 번째 단계이다. 그 다음은 중근기(中根機)를 위해서 12인연(因緣)을 펼쳤다. 이것이 이른바 연각승(緣覺乘)에게 전수해 준 것이니, 세 번째 단계이다. 그 다음은 상근기(上根機)를 위해서 6바라밀(波羅蜜)을 들어서 설명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의 근기에게 전수해 준 것이니, 네 번째 단계이다. 모든 가르침을 융합해서 모든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하였는데 “득도(得道)하는 데에는 품(品)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또 그 진실(眞實)은 나타내지 않아서 진실의 그윽한 근기를 구하고 발심하게 하여 이로써 하나의 지극한 차례[序]가 있음을 열어 준다. 이것이 다섯 번째 단계이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이 연이어져서 제창되어 1승(乘)을 나타내고, 3승(乘)을제거하여 저 진실을 구하는 마음에 따라주고 이 방편을 베푸는 명칭을 없앴다. 이것이 여섯 번째 단계이다. 비록 방편의 권도[權]를 열어서 진실[實]을 나타내었지만 상주(常住)한다는 올바른 의미는 아직도 오히려 가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임종하면서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현음(玄音)을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이것이 일곱번째 단계이다. 이것을 뛰어넘는 법문(法門)이 많기는 하지만 커다란 귀착점[大歸]을 가려 뽑으면 숫자가 여기에서 다하게 된다. 또 모든 소리는 5음(音)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며 백씨(百氏)의 담론도 6가(家)의 담론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첫머리에 제목이 실려 있지만 중하(中夏)에서는 아직 그 설명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강석에 임할 때마다 항상 담론하는 것을 그만두고 탄식하면서 이 문장을 상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홀연히 무당산(武當山)의 비구인 혜표(慧表)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강주(羌胄)에서 태어났으며 거짓으로 황제 칭호를 참칭(僭稱)하여 요략(姚略)의 종자(從子)라고 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날에 진(晋)나라의 장군인 하담(何澹)에게 붙잡혔다. 두어 살에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서 담지(澹之)가 자(字)를 명령(螟蛉)이라 하고 임시로 양자(養子)를 삼았는데, 갑자기 출가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도를 구하여 남북으로 찾아다니면서 평탄함과 험함을 가리지 않았다. 제(齊)나라 건원 3년(481)에 또 기서(奇書)와 비전(秘典)을 찾아 모으기 위해서 멀리영남(嶺南)에 이르러 갔는데, 광주(廣州) 조정사(朝亭寺)에서 중천축(中天竺) 사문인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陀耶舍)를 만났다.
담마가타야사는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제(齊)나라 말로 풀이할 수 있었는데, 이 경을 전수해 주려 해도 누구에게 전해 주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혜표가 은근하게 간청을 드려 마음과 몸을 모두 지극하게 하여 10일쯤 지나서 1본(本)을 겨우 얻었는데, 교북(嶠北)으로 돌아가서 무당산(武當山)에 이 경을 가지고 왔다. 영명(永明) 3년(485) 9월 18일에 이 경을 정대(頂戴)하고 산에서 나와 교정을 받고 널리 유통시켰다.
031_0368_b_02L이 경의 진문(眞文)을 받들어 보게 되니 진실로 기뻐하면서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손으로 춤추면서 어떻게 선양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문득 경건하게 오랫동안 의심해 오던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털어내고, 삼가 서주(序注)를 쓰는 바이다. 지극한 가르침이 세간에 감응해 온 이래 습속(習俗)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고, 신묘한도가 중생을 구제한 이래 감응해 주는 것에 걸맞게 차이가 나게 되었다. 현포(玄圃)의 동쪽에서는 태일(太一)이라 하고 계빈(罽賓)의 서쪽에서는 자(字)를 정각(正覺)이라 하며, 동국(東國)에서는 재앙과 경사를 백 년의 세월에 걸쳐서 밝히고 서역(西域)에서는 아름다움과 허물을 3세에 걸쳐서 구별하지만, 무(無)를 희구하는 가르침과 공(空)을 수행하는 가르침은 그 법도[揆]가 하나일 뿐이다. 무(無)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무(無)가 될 수 있는 부분[分]이 없다. 마음이 공(空)해지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공(空)해지는 작용을 비추어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교[釋敎]를 강구(講求)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이치를 알아서 회득(會得)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경우에는 공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단번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청컨대 시험삼아 이것을 말해서 방편의 통발로 그윽하게 기탁하고자 한다. 점차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보자. 만사(萬事)가 이루어지는 것은 점차적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견고한 얼음은 서리를 밟은 데에 그 기반이 있고 9층의 높은 누대도 한 줌의 흙을 쌓아 올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학인(學人)이 공(空)에 깨달아 들어가는 경우에도 같다. 비록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비유하면 마치 나무를 벨 적에 1촌(寸)을 자르면 1촌이 없어지고 1척(尺)을 자르면 1척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3공(空)의 경지에 올라가는 것이 어찌 점차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번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해보자. 선(善)을 희구하는 공(功)은 법성(法性)을 관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법성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므로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非無].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잊어버려서 이치와 관조가 하나가 된 사람을 공을 안[解空] 사람이라고 한다.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간직해서 경계와 지혜가 아직도 둘인 사람은 아직 유(有)라는 생각을 면하지 못한 사람이다. 유(有)의 세계에 있으면서 번뇌인 결(結)을 조복시키는 것은 날마다 번뇌를 덜어내는 효험이 없고 공(空)이라는 세계에서 마음을 논하는 것은 이치에 깨달아 들어가는 효험이 없다. 그런데도 아라한의 경계를 한 번 들어서 받아들이고 무생(無生)의 경계를 아침나절에 판명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을 제접해서 유도하는 말이고 실제에 걸맞는 말은 아니다. 묘하게 체득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얻는 것이 아님은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인데, 이미 두 가지로 담론하여 길이 나뉘고 두 가지의 뜻이 길을 다투고 있어서 한 가지를 버리면 다른 한 가지를 취하게 되어서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 보건대, 종지를 체득한 종장(宗匠)은 지둔(支遁)과 도안(道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지공(支公)은 무생(無生)에 대해서 담론하였는데, 7주에서는 도혜(道慧)가 은밀하게 충족되지만 10주에서는 모든 방면에 걸쳐서 다할 수 있어서 자취의 측면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관조의 작용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같다. 안공(安公)은 각각 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논변하였는데, 3승(乘)은 첫 삼태기의 흙을 붓는 것을 인(因)이라고 부르고, 정혜(定慧)는 맨 끝에 성취되는 것을 실제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처음에 깨달음을 구함에는 근기에 따라 세 가지가 있지만 깨달아 들어가서 알게 되면 그 혜(慧)가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의 「비유품(譬喩品)」에서도 “대난(大難)이 이미 평정되면 세 가지는 없어지게 된다. 험한 길이 이미 끊어지면 그 작용[化]은 없어지게 된다”고 하였다.이와 같다면 일(一)을 삼(三)이라고 하지만 세 가지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생공(生公:道生)은 “37도품(道品)은 이를 실천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으므로 아라한의 경지에 대해 이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 6바라밀은 이를 실천해서 불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므로 수왕(樹王)에 대해서 이것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나무를 베는 비유를 말해보자. 이 비유에서는 나무가 존재하기 때문에 1척과 1촌을 점차적으로 벨 수가 있지만, 무생(無生)을 증득하는 것은 생(生)이 다해서 없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그 관조하는 작용이 반드시 단번에 이루어져야 한다. 3승의 명교(名敎)를 조사해 보니, 모두 생(生)이 다하게 되면 관조하는 작용이 쉬어져서 유(有)라는 견해를 버리고 공(空)이라는 견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을 도(道)로 삼고자 하면 어떤 형태가 있는 것[形器]에서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무량의경』에서도 무상(無相)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만약 증득한 것이 실제로 다르다면 어떻게 무상(無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관조함[照: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같다면 어떻게 점차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점차적이 아닌 것을 점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비밀스러운 방편을 말하는 헛된 가르침일 뿐이다. 여래께서도 “빈주먹으로 어린아이를 속이는 것이니, 이것[方便]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묘한 문장으로 거친 근기의 중생을 제접함에는 점설(漸說)이 간혹 진실이 될 수 있지만 형상을 잊고 의미를 얻는 데 있어서는 돈의(頓義)가 으뜸이다. 부족하나마 대체적인 비교를 들어서 설명하노니, 담론하는 분들께서 선택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비유경(譬喩經)』은 모두 여래께서 시기에 맞는 방편을 통해서 네 가지로 설한 언변이고 커다란 가르침을 부연해서 가르치고 인도하는 요점이다. 중생을 이끌어서 인도함에 있어서 번갈아 가면서 서로 증거를 대어 선악(善惡)과 죄(罪)와 복(福)의 응보를 서로서로 밝힌 것이니, 모두가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저 3도(塗)의 고통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내가 들은 것 중에서 억에 하나도 기재하지 못하였지만, 전후로 필사한 것이 대부분 서로 중복되어 있다. 지금 다시 가려 뽑아 모아서 고사에서 한 편씩 취하여 10권을 만들었는데, 수미(首尾)를 차례가 있게 배열하고 모두 조리 있게 구별되도록 하여 여기에 나아가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서 마음에 걸림이 없도록 하였다. 바라건대 온 나라의 현인들이 이를 따르고 계승해서 길이길이 복당(福堂)에 오르고, 장래에 이를 기반으로 삼아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