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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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삼장기집 제13권
031_0405_b_01L出三藏記集傅上卷第十三


석승우 지음
박상준 번역
031_0405_b_02L梁建初寺沙門釋僧祐 撰


[전(傳)] ①

안세고전(安世高傳) 제1
지참전(支讖傳) 제2
안현전(安玄傳) 제3
강승회전(康僧會傳) 제4
주사행전(朱士行傳) 제5
지겸전(支謙傳) 제6
축법호전(竺法護傳) 제7
축숙란전(竺叔蘭傳) 제8
시리밀전(尸梨蜜傳) 제9
승가발징전(僧伽跋澄傳) 제10
담마난제전(曇摩難提傳) 제11
승가제바전(僧伽提婆傳) 제12
031_0405_b_03L安世高傳第一支讖傳第二安玄傳第三康僧會傳第四朱士行傳第五支謙傳第六竺法護傳第七竺叔蘭傳第八尸梨蜜傳第九僧伽跋澄傳第十曇摩難提傳第十一僧伽提婆傳第十二

1. 안세고전(安世高傳)
031_0405_b_15L安世高傳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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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청(安淸)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며, 안식국왕(安息國王)의 정후(政后)가 낳은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순(孝淳)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부모님을 공경스럽게 봉양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을 지니고 있어서 벌레의 무리에게까지 미쳤다. 그의 언동과 행실은 마치 법도대로 실천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업(志業)이 총민하고 민첩하였으며 호학(好學)에 뜻을 두어 외국의 전적(典籍)까지 모두 포괄하여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7요(曜)와 5행(行)의 형상과 풍각운물(風角雲物)을 점치는 데까지 발걸음이 미쳐서 그 변화를 모두 궁구하였다. 겸해서 의술(醫術)까지 통달해서 깨달았고 침을 놓는 맥을 미묘하고 훌륭하게 익혔으며, 안색[覩色]만 보고도 병을 알아차려 약을 주면 반드시 낫게 하였다.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들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준수하고 기이하다는 명성이 서역(西域)을 덮었고, 원근(遠近)에 있는 이웃 나라에서 모두 공경하면서 위대하게 여겼다.
안세고(安世高)는 비록 속가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계(戒)를 받는 것이 정밀하고 준엄하였으며, 강석(講席)에 모여 법시(法施)를 베푸는 것을 계속 이어 나갔다. 후에 왕이 서거하자 왕위(王位)를 이어 받게 되었다. 이에 인생은 괴롭고 헛된 것임을 깊이 깨닫고, 육체[名器]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복(服)을 마친 후에 왕위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출가하여 수도를 하였다. 그는 경장(經藏)에 박식하였고, 특히 아비담(阿毘曇)에 정진하여 선경(禪經)을 송지(誦持)하였고, 대략 그 미묘함을 극진히 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널리 교화를 펴다가 한(漢)나라 환제(桓帝) 초기에 비로소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기민(機敏)하여 한 번 들으면 그것을 외울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이에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호어(胡語)를 한문으로 옮겼는데,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과 『음지입경(陰持入經)』과 대(大)ㆍ소(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 『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등을 역출하였다.
이에 앞서서 외국의 삼장(三藏)인 중호(衆護)가 경의 요점을 찬술하여 27장(章)을 지었는데, 안세고는 중호가 편집한 7장을 분석하여 한문으로 번역해 냈으니, 이것이 바로 『도지경(道地經)』이다. 그를 전후해서 역출한 경론(經論)은 모두 45부(部)인데, 의미가 명석하고 문장이 참으로 올바르며 변재가 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았고, 표현이 질박하면서도 비속하지 않았다. 이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부지런히 힘써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안세고는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극진히 하여 스스로 숙연(宿緣)을 알았다. 그래서 신묘한 자취가 많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안세고가 스스로 말하기를 “전생에 몸을 받았을 때 안식국(安息國)의 왕자였다. 중국의 장자(長者)의 아들과 함께 걸식하러 다니는데 시주(施主)가 칭찬하지 않으면 동학(同學)이 번번이 성을 내었다. 내가 여러 차례 꾸짖고 질책하자 동학이 참회하고 사죄하였지만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생각이 없었다. 이와 같이 20여 년을 하고 나서 친구와 이별을 고하여 ‘나는 광주(廣州)로 가서 숙세(宿世)의 업보를 마쳐야 한다. 그대는 경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으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추악한 모습[惡形]의 몸을 받을 것이니, 만일 내가 도를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하였다. 이윽고 광주(廣州)에 이르니 도적 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길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며 말하기를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났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지난 세상에 그대에게 빚을 졌다.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 가졌던 생각이다’하고는 목을 늘여서 칼을 받았는데,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마침내 도적이 그를 죽이고 말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길을 메웠는데,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이 다시 안식국왕의 태자가 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다”라고 하였다.
안세고는 중앙[中國]을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경을 선양하는 일을 마쳤다. 영제(靈帝) 말엽에 관중(關中)과 낙양(雒陽)이 몹시 어지러웠다. 이에 그는 강남으로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산(廬山)으로 가서 옛적의 동학(同學)을 제도해야만 한다.”
여행을 하다가 공정호(䢼亭湖)의 사당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사당은 예부터 영험이 있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모두들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신죽(神竹)을 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처 허락을 받기 전에 마음대로 가져가자 배가 곧바로 뒤집혀서 가라앉고 대나무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생기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조심하며 영위(靈威)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함께 가던 30여 척의 배가 이 사당에 희생물을 바치고 복을 빌자, 신령이 말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문은 곧 사당 위로 올라오시오.”
나그네들이 모두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다.
신령이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내가 전생에 외국에 있을 때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성품이 화를 잘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 금생(今生)에는 공정의 사당신이 되어 주변 천 리를 모두 제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대는 보시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한량없고, 저는 예전에 성을 잘 내던 성품 때문에 이렇게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친구를 만나게 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이제 수명은 머지않아 다하는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크니, 만약 여기에서 죽게 되면 강호를 더럽히게 되므로 산서(山西)의 못으로 가야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후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우니, 내게 있는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로 법회를 열고 탑을 세워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도와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여기에 와서 제도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신령이 말하였다.
“형체가 매우 보기 흉해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커다란 이무기가 안세고의 무릎까지 이르러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는데, 그 꼬리의 길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안세고가 그를 향해 호어(胡語)로 말하자 옆에 있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이무기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바로 비단과 보물을 거두고 나서 이별을 고하고 그곳을 떠났다. 여러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는데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고 산꼭대기에 올라 배들이 떠나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주니 잠시 후에 바로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예장(豫章)에 당도하였는데, 곧바로 공정의 사당에서 가지고 온 물건으로 동사(東寺)를 세웠다. 안세고가 떠난 후에 신령은 바로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라 안세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가 주문으로 발원[呪願]해 주는 것을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안세고가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있었던 소년이 바로 공정 사당의 신령인데 추한 모습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소.”
이후로 사당의 신령은 사라지고 다시는 영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에 사람들이산서(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는데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의 심양군(尋陽郡)에 있는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는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에 가서 전생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 때의 소년이 아직도 살아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60이었다. 안세고가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의 인과에 얽힌 일을 말하고, 또한 숙세(宿世)의 인연을 들려주자 서로가 기뻐하였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지금 회계(會稽) 땅으로 가서 그것을 다하려고 한다.”
광주 사람은 안세고가 비범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환하게 의미가 이해되어 거슬러 올라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서로가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시장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장 안에는 싸움판이 벌어져 있었는데, 서로 치고 받는 자들이 주먹을 잘못 휘둘러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 때 명을 다하였다.
광주에서 따라온 사람은 두 가지 보응을 보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아 일에 얽힌 인연을 자세히 이야기 하니, 먼 곳에 사는 사람이나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소문으로 들어 알고 나서 비통해 마지않았는데, 3세(世)에 걸친 징험이 있음이 분명하다. 안세고는 본래 왕족이었고, 외국에서 이름이 높았다. 서역에서 온 사람들이안후(安侯)라고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다. 천축국은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라고 자칭하고 말을 천어(天語)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고 중국과는 아주 달라서 안세고를 전후로 나온 번역들도 잘못된 것이 많았는데, 유독 안세고가 번역해 낸 것은 여러 번역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다.
안공(安公)은 ‘경을 대하고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열대(列代)의 명덕(明德)들을 모두 찬탄하며 사모하였다.
031_0405_b_16L安淸字世高安息國王政后之太子幼懷淳孝敬養竭誠惻隱之仁及蠢類其動言立行若踐規矩焉以志業聰敏刻意好學外國典籍莫不該貫七曜五行之象風角雲物之推步盈縮悉窮其變兼洞曉醫妙善鍼䘑睹色知病投藥必濟至鳥獸鳴呼聞聲知心於是儁異之被於西域遠近鄰國咸敬而偉之世高雖在居家而奉戒精峻講集法與時相續後王薨將嗣國位乃深惟苦空厭離名器行服旣畢遂讓國與叔出家修道博綜經藏尤精阿毘曇學諷持禪經略盡其妙旣而遊方弘化遍歷諸國以漢桓帝之初始到中夏世高才悟幾敏一聞能達至止未久卽通習華語於是宣譯衆經胡爲漢出安般守意陰持入經大小十二門及百六十品等初外國三藏衆護撰述經要爲二十七章世高乃剖扸護所集七章譯爲漢文卽道地經也其先後所出經凡四十五部理明析文字允正辯而不華質而不凡在讀者皆亹亹而不惓焉世高窮理盡性自識宿緣多有神迹世莫能量世高自稱先身已經爲安息王子與其國中長者子俱共出家衛之時施主不稱同學輒怒世高屢加呵責同學悔謝而猶不悛改如此二十餘年乃與同學辭訣云我當往廣州畢宿世之對卿明經精進不在吾後而性多恚怒命過當受惡形若得道必當相度旣而遂適廣州寇賊大亂行路逢一少年唾手拔刀眞得汝矣世高笑曰我宿命負卿故遠來相償卿之忿怒故是前世時意也遂申頸受刃容無懼色賊遂殺觀者塡路莫不駭其奇異旣而神還爲安息王太子卽名世高時身世高遊化中國宣經事畢値靈帝之末關洛擾亂乃杖錫江南云我當過廬山度昔同學行達䢼亭湖廟廟舊有靈驗商旅祈禱乃分風上下各無留滯常有乞神竹者未許輒取舫卽覆沒竹還本處自是舟人敬憚莫不懾影世高同旅三十餘舩奉牲請福神乃降祝曰舫有沙門可更呼客咸共驚愕請世高入廟神告世高曰吾昔在外國與子俱出家學道好行布施而性多瞋怒今爲䢼亭湖周迴千里竝吾所統以布施故玩無數以瞋恚故墮此神中今見同悲欣可言壽盡旦夕而醜形長大若於此捨命穢污江湖當度山西空澤中也此身滅恐墮地獄吾有絹千疋幷雜寶物可爲我立塔營法使生善處也世高曰故來相度何不見形神曰形甚醜異衆人必懼世高曰但出衆不怪也神從牀後出頭乃是大蟒蛇至世高膝邊淚落如雨不知尾之長短世高向之胡語傍人莫解便還隱世高卽取絹物辭別而去侶颺帆神復出蟒身登山頂而望人擧手然後乃滅倏忽之頃便達豫卽以廟物造立東寺世高去後卽命過暮有一少年上舩長跪世高受其呪願忽然不見世高謂舩人向之少年卽䢼亭廟神得離惡形於是廟神歇沒無復靈驗後人於西山澤中見一死蟒頭尾相去數里今尋陽郡蛇村是其處也於是頃到廣州尋其前世害己少年時少年尚年已六十餘世高徑投其家共說昔日償對時事幷敍宿緣歡喜相向吾猶有餘報今當往會稽畢對州客深悟世高非凡豁然意解追悔前愆厚相資供乃隨世高東行遂達會稽至便入市正値市有鬪者亂相歐擊誤中世高應時命終廣州客頻驗二報遂精懃佛法具說事緣遠近聞知莫不悲歎明三世之有徵也本旣王種名高外國所以西方賓旅猶呼安侯至今爲號焉天竺國自稱書爲天書語爲天語音訓詭蹇與漢殊異先後傳譯多致謬濫唯世高出爲群譯之首安公以爲若及面稟不異見聖列代明德咸讚而思焉

2. 지참전(支讖傳)
031_0406_c_13L支讖傳第二

지참(支讖)은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절조 있게 행동하고 순수하고 심후했으며, 성품이 활짝 열리고 명민하였다. 법계(法戒)를 받아 지녀서 정미하고 근엄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여러 경전을 외울 수 있었는데 불법(佛法)을 선양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말기에 낙양(洛陽)을 유람하였다. 영제(靈帝) 때 광화(光和, 후한 178~183)와 중평(中平, 후한 184~189) 연간에 호문(胡文)을 전역하여「반야도행품(般若道行品)」과 『수릉엄경(首楞嚴經)』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 3경(經)을 역출하였다. 또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과 『보적경(寶積經)』등 10부(部)의 경을 역출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기록이 없어졌다. 이것은 안공(安公)이 옛날 번역본과 지금의 것을 조사하여 가려 뽑고 깊이 문체(文體)를 탐구해서”지참이 역출한 것 같다”고 하였다.
031_0406_c_14L支讖本月支國人也操行淳深性度開敏稟持法戒以精勤著稱諷誦群志存宣法漢桓帝末遊于洛陽靈帝光和中平之閒傳譯胡文出般若道行品首楞嚴般舟三昧等三經又有阿闍世王寶積等十部經以歲久無錄安公挍練古今精尋文體似讖所出
031_0407_a_02L이 모든 경전은 모두가 본지(本旨)를 깊이 체득하고 끝내 수식을 더하지 않았으니, 법요(法要)를 훌륭하게 선양하고 도(道)를 홍포한 인재라고 할 만하다. 그 후에 종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사문 축삭불(竺朔佛)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 마찬가지로 『도행경(道行經)』을 가지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곧바로 호문(胡文)으로 된 것을 한문으로 전역하였다. 번역하는 사람이 때때로 막혀서 비록 본지(本旨)를 잃기는 했지만 문식을 버리고 질박함을 간직해서 경의 본뜻을 깊이 얻었다.
축삭불은 또 영제(靈帝) 광화(光和) 2년(179)에 낙양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역출하였다. 그 때 지참(支讖)이 전역[傳言]하였고 하남(河南)과 낙양(洛陽)의 맹복과 장련(張蓮)이 필수(筆受)하였다. 그 때 또 지요(支曜)라는 사람이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을 역출하였다.
031_0406_c_22L凡此諸經皆審得本旨不加飾可謂善宣法要弘道之士也後不知所終沙門竺朔佛者天竺人漢桓帝時亦齎道行經來適洛陽卽轉胡爲漢譯人時滯雖有失旨棄文存質深得經意朔又以靈帝光和二年於洛陽譯出般舟三昧經讖爲傳言河南洛陽孟福張蓮筆受又有支曜譯出成具光明經云

3. 안현전(安玄傳)
031_0407_a_07L安玄傳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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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安玄)은 안식국(安息國) 사람이다. 뜻과 성품이 곧고 깨끗하였으며, 이치의 종치에 깊이 침잠하였다. 우바새(優婆塞)로서 법계(法戒)를 받아 지녀 털끝만큼도 이지러지게 하지 않았다. 여러 경전을 널리 외웠고 통달해서 익힌 것이 많았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말기에 낙양을 유람하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공(功)을 세워서 기도위(騎都尉)라고 불렀다. 그의 성품은 허정(虛靜)하고 온화하고 공경스러웠으며, 항상 불법의 일[法事]을 자기의 책무로 여겼다. 점차로 중국어를 수련하여 경전을 선양하는 데 뜻을 두었다. 항상 사문과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도위언(都尉言)이라고 불렀다. 안현은 사문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역출하였는데, 안현이 범문(梵文)을 입으로 전역하고 엄불조가 필수하였다. 이치에 맞고 음의(音義)가 정확하여 모든 경전에 은미한 종지가 있게 되었으므로 영장(郢匠)1)의 아름다움이 후대에 기술되었다.
엄불조(嚴佛調)는 임회(臨淮) 사람이다. 소년 시절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실행에 옮기는 데 민첩하였으며 배움을 좋아하여 믿음과 지혜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는데, 마침내 출가하여 수도(修道)하였다. 그는 경전을 통역(通譯)하여 당시에 소중하게 여겨졌다. 세상에서는 안후(安候)와 도위(都尉)와 불조(佛調) 세 사람이 전역(傳譯)한 것을 칭송하여 ‘뒤를 계승하기 어려운 사람[難繼]’이라고 불렀다.
엄불조는 또 『십혜장구(十慧章句)』를 찬술하였는데, 이것도 함께 세상에 전해져 온다. 안공(安公)은 칭송하기를 “엄불조가 역출한 경전은 간략해서 번다하지 않고, 원본을 온전하게 한 솜씨가 오묘하고 뛰어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강맹상(康孟詳)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이다. 『중본기경(中本起經)』을 역출하였는데, 안공이 칭송하기를 “강맹상이 역출한 경전은 혁혁(奕奕)하게 아름다워서 유통시키기에 편리하며 현묘한 종취에 뛰어오르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사문 유기난(維祇難)이 있었는데, 천축 사람이다. 손권(孫權)의 황무(黃武)3년에 『담발경(曇鉢經)』의 호본(胡本)을 가지고 와서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담발경』은 바로 『법구경(法句經)』이다.
그 때 지겸(支謙)이 이 경을 역출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동도(同道)인 축장염(竺將炎)에게 전역(傳譯)하도록 하고, 지겸이 한문으로 필사하였다. 축장염은 중국어에 아직은 능숙하지 못한 처지여서 극진하지 못한 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본래 의미를 보존하는 데 뜻을 두어 실질(實質)에 가깝게 하였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법구경』이 바로 이것이다.
백연(白延)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말기에 『수릉엄경(首楞嚴經)』과 『수뢰경(須賴經)』과 『제재환경(除災患經)』 등 모두 3부(部)를 거듭 역출하였다.
031_0407_a_08L安玄安息國人也志性貞白深沈有致爲優婆塞秉持法戒豪釐弗虧博誦群經多所通習漢靈帝末遊賈洛陽有功號騎都尉性虛靜溫恭以法事爲己務漸練漢言志宣經典常與沙門講論道義世所謂都尉言玄與沙門嚴佛調共出法鏡經口譯梵文佛調筆受理得音正盡經微旨郢匠之美見述後代佛調臨淮人也綺年穎悟敏而好學信慧自然遂出家修道通譯經典見重於時稱安侯都尉佛調三人傳譯號爲難佛調又撰十慧竝傳於世安公稱佛調出經省不煩全本妙巧次有康孟詳者其先康居人也譯出中本起安公稱孟詳出經弈弈流便足騰玄後有沙門維秖難者天竺人也孫權黃武三年齎曇鉢經胡本來至武昌曇鉢卽法句經也支謙請出乃令其同道竺將炎傳譯謙寫爲漢文炎未善漢言頗有不盡然志存義本近於質實今所傳法句是白延者不知何許人魏正始之末重譯出首楞嚴又須賴及除災患經凡三部云

4. 강승회전(康僧會傳)
031_0407_b_10L康僧會傳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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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회(康僧會)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이다. 대대로 천축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사를 하기 위해서 교지(交阯)로 이사하였다. 강승회의 나이 10여 세에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다.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나서 출가하였는데, 엄격하게 수행하여 매우 엄준하게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크고 고아하며 식견과 도량을 갖추었고, 독특한 뜻을 지니고 있어서 배움을 좋아하였다.
3장(藏)을 분명하게 연마하고, 6전(典)을 널리 열람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도위(圖緯)에 대해서도 꿰뚫어서 섭렵한 것이 많았으며, 핵심이 되는 것[樞機]을 논변하여 문장과 필묵으로 상당히 많은 글을 지었다.
그 때 손권(孫權)은 이미 강좌(江左)를 지배하고 있다고 자칭하였는데, 아직 불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강승회는 대법(大法)을 운용해서 유통시키고자 하여, 이에 석장을 떨치면서 동쪽으로 유행하였다. 적오(赤烏) 10년 건업(建業)에 이르러 띠풀집을 지어 불상을 모셔 놓고 도를 시행하였다 이곳을 맡고 있던 관리가 보고를 올렸다.
“어떤 호인(胡人)이 국경에 들어와서 자칭 사문(沙門)이라 하는데 용모와 복장이 보통사람과는 다릅니다. 이 일을 마땅히 조사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신을 보고 부처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가 모시고 있는 것이 아마도 그 유풍(遺風)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에 곧바로 강승회를 불러서 “어떤 영험이 있느냐”고 힐문하였다.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지 어느덧 천 년이 지났지만 유골인 사리는 신묘하게 빛나서 사방을 비추어 줍니다. 옛날에 아육왕(阿育王)이 탑을 조성한 것이 8만 4천이나 되는데, 탑사(塔寺)를 조성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남긴 교화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손권은 과장되고 허탄하다고 여기고는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을 수 있다면 탑을 조성하겠지만 그것이 허망한 것이라면 국가에서 정한 일정한 형벌을 내리겠다.”
강승회가 7일의 기한을 달라고 청하고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불법(佛法)의 흥폐(興廢)가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지금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후에 장차 어찌 하겠는가?”
이에 다함께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고요한 방에서 구리병을 상에 올려 놓고 향을 사르어 예를 올리면서 청하였는데, 7일의 기한이 끝나도 고요하게 아무런 감응이 없었다.
다시 두 번째 7일을 청하였는데, 또 마찬가지였다.
손권이 말하였다.
“이는 사람을 속이는 짓이다.”
그리고는 죄를 내리려 하자,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 7일을 청하니, 손권이 또 특별히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가 말하였다.
“법운(法雲)은 반드시 가피를 내려주신다. 그런데도 우리가 감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왕의 법을 빌리겠는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기약해야 하리다.”
세 번째 7일 저녁에도 감응이 나타나지 않자 두려워서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윽고 5경(更)에 이르자 홀연히 병 속에서 쇠에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들렸다. 강승회가 몸소 가서 살펴보고는 과연 사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다음날 손권에게 바쳤다.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모여서 바라보니 오색의 광염이(光焰)이 병 위로 빛나고 있었다. 손권이 손으로 직접 병을 잡고 구리 쟁반 위에 쏟아내자 사리에 부딪친 쟁반이 곧 부서져 버렸다.
손권이 숙연해져서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희유한 상서로다.”
강승회가 나아가서 말하였다.
“사리의 위신력이 어찌 빛나는 모습뿐이겠습니까? 괴겁(壞劫)에 타오르는 불로도 태울 수가 없고 금강저(金剛杵)로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손권이 쇠로 된 망치와 다듬잇돌을 가져 오도록 명령하여 역사에게 내리치도록 하였는데, 다듬잇돌과 망치는 함몰되었지만 사리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손권이 크게 탄식하고 탄복하여 즉시에 탑을 세웠다. 이것이 처음 세워진 불사(佛寺)이므로 건초사(建初寺)라고 불렀고, 그곳이 ‘불타리(佛陀里)’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이로부터 강좌(江左)에 대법(大法)이 마침내 흥성하였다.
손호(孫皓)가 어둡고 포악해져서 탑묘(塔廟)를 불사르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간하기를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은 다른 여타의 신(神)과 같지 않습니다. 강승회가 상서로움을 감득하여 대황제께서 사찰을 창건하셨으니, 지금 만약 경솔하게 훼손하면 후회하는 일이 남을까 두렵습니다.”
손호가 깨달은 바가 있어 장욱(張昱)을 절에 보내어 강승회에게 힐문하도록 하였다. 장욱은 고아하여 재능과 변재를 갖추고 있어서 종횡무진으로 따져서 질문하였다. 강승회는 근기에 대응해서 대답을 해주었는데, 말의 이치가 칼끝처럼 막힘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질문하였지만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이윽고 물러나려 하는데 강승회가 문에서 전송을 하였다. 그 때 절 옆에 음란하게 제사를 올리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의 현묘한 교화가 그렇게도 뛰어나다면 이와 같은 무리들이 가까이 있는데도 무엇 때문에 고쳐주지 못하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뇌성(雷聲)이 산을 부순다 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니, 소리가 작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치를 통달하면 만 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환하게 응하지만, 만약 막혀 있으면 간과 쓸개처럼 가까이 있어도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있는 것과 같습니다.”
장욱이 돌아와 찬탄하면서 “강승회의 재주와 밝은 지혜는 제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살펴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손호는 조정의 현신(賢臣)들을 크게 모으고 마차(馬車)로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강승회가 자리에 나아가자 손호가 질문하였다.
“불교에서 밝히고 있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은 어떤 것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대체로 밝은 군주가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훈도하면 적오(赤烏)가 날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나며, 인(仁)과 덕(德)으로 만물을 기르면 예천(禮泉)이 솟아나고 아름다운 곡식이 산출됩니다. 선업에 상서로움이 있다면 악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곳에서 악업을 지으면 귀신이 알아서 벌을 주고 환한 곳에서 악업을 지으면 사람이 알아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악업을 지으면 자손에 미치는 재앙이 있다”고 하였고, 『시경(詩經)』에서는 ‘복을 구함에 어그러짐이 없다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유가의 전적에 나오는 격언이지만, 곧 불교에서 밝히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손호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주공(周公)과 공자께서 이미 밝히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을 쓰겠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주공과 공자께서 말씀하셨지만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간략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유현하고 먼 것을 끝까지 맞추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업을 행하면 지옥의 기나긴 괴로움이 있고 선업을 닦으면 천궁의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들어서 분명하게 권하고 막아주었으니,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손호는 바로 굴복하였다. 손호가 비록 정법(正法)의 가르침을 듣기는 했지만 어둡고 포악한 성품이라 잔인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에 숙위병(宿偉兵)을 후궁에 들여보내 정원을 고치게 하였다. 숙위병들이 땅 속에서 하나의 서 있는 금불상[金像]을 얻었는데, 높이가 수척이나 되었다. 이를 손호에게 바치자 손호는 측간 앞에 두도록 하였다. 4월 8일에 이르러 손호가 측간에 가서 오물로 금상을 더럽혀 놓고는 “관불(灌佛)을 끝냈다”고 말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고 즐거워하였다. 그러자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아서 음낭에 종기가 생기고 아프니 울부짖으면서 참지를 못하였다.
태사(太使)가 점을 쳐 보고 말하였다.
“대신(大神)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사당에 기도하고 제사를 올려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고통이 커져서 극에 달하였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다.
채녀(婇女) 중에 전에 불법을 받드는 이가 있었는데 손호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이에 물어보았다.
“폐하께서는 불도(佛圖:절)에 가서 복을 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손호가 머리를 들면서 질문하였다.
“부처의 신력이 그렇게 크더냐?”
채녀가 답하였다.
“부처님은 대성인(大聖人)이어서 천신(天神)들도 존귀하게 받듭니다.”
손호가 마침내 마음으로 그 말뜻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채녀가 즉시에 금상(金像)을 맞아와서 궁정에 모시고 향으로 씻어내기를 수십 번이 넘게 하고 향을 사르어 참회하였다. 손호는 침상 위에서 고두례(叩頭禮)를 올리면서 스스로 죄짓고 거스른 점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조금 후에 곧바로 통증이 가시게 되었다. 이에 사신을 절에 보내어 도인(道人)에게 물어서 경전을 설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서 뵙도록 하였다.
강승회가 사신을 따라서 궁전에 들어가자 손호가 죄와 복의 연유에 관해서 질문하였다. 강승회가 빠짐없이 펼치고 분석해서 설하니, 그 언사가 매우 정밀하고 변재가 넘쳤다.
손호는 이미 이해하는 재능이 있었으므로 흔쾌하게 여기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인해 사문의 계문(戒文)을 보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문(戒文)이란 본디 비밀스럽게 금지되어 있어 경솔하게 알려줄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본업경(本業經)』에서 135원(願)을 취해서 250가지 일로 나누어 설해 주었는데, 걷거나 앉거나 일어나거나 하는 데에 모두 중생을 위하는 원(願)이었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지극히 심오해서 세간의 서책이 미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선한 생각을 더욱 증가시켜 곧바로 법회에 나아가 5계(戒)를 수지하였는데, 열흘이 지나서 병이 치료되었다. 이에 강승회는 주석하고 있던 절을 수리하고 꾸며서 천자사(天子寺)라고 부르게 하고, 궁내(宮內)와 종실(宗室)과 군신(群臣)들이 모두가 반드시불법(佛法)을 받들 것을 칙령으로 선포하였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정법(正法)을 설하였는데, 손호의 성품이 흉포하고 거칠어서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선악의 보응(報應)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영험만을 설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서 가르쳐 주었다.
강승회는 건초사(建初寺)에서 경전을 역출하였다.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과 『경면왕경(鏡面王經)』과 『찰미왕경(察微王經)』과 『범황왕경(梵皇王經)』과 『도품경(道品經)』과 『육도집경(六度集經)』은 모두 오묘하게 경의 체(體)를 얻었고 문장과 의미가 아주 올바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과 『법경경(法鏡經)』과 『도수경(道樹經)』의 세 가지 경전에 주석을 달고, 경의 서문을 모두 지었다. 그 문장과 의취가 고아하고 분명하였으며 의미와 종지가 은미하고 치밀하여 모두 후세에 존중을 받았다. 강승회는 진(晋)나라 무제 태강(太康) 원년(元年)에 졸(卒)하였다.
031_0407_b_11L康僧會其先康居人世居天竺其父因商賈移于交阯會年十餘歲二親竝亡以至性聞旣而出家礪行甚峻爲人弘雅有識量篤志好學明練三藏博覽六典天文圖緯多所貫涉辯於樞機頗屬文翰孫權稱制江而未有佛教會欲運流大法乃振錫東遊以赤烏十年至建業營立茅設像行道有司奏曰有胡人入境自稱沙門容服非恒事應驗察權曰吾聞漢明夢神號稱爲佛彼之所事豈其遺風耶卽召會詰問有何靈驗會曰如來遷迹忽逾千載遺骨舍利神曜無方阿育起塔乃八萬四千夫塔寺之興所以表遺化也權以爲誇誕乃謂會曰若能得舍利當爲造如其虛妄國有常刑會請期七日乃謂其屬曰法之興廢在此一擧不至誠後將何及乃共潔齋靜室銅甁加几燒香禮請七日期畢寂然無應求申二七亦復如之權曰此欺誑也將欲加罪會更請三七權又特會曰法雲應被而吾等無感何假王憲當誓死爲期耳三七日暮猶無所見莫不震懼旣入五更忽聞甁中鎗然有聲會自往視果獲舍利明旦呈權擧朝集觀五色光爓照燿甁上權手自執甁瀉于銅盤舍利所衝盤卽破碎權肅然驚起曰希有之瑞也進而言曰舍利威神豈直光相而已乃劫燒之火不能燔金剛之杵不能壞矣權命取鐵搥砧使力士擊之砧搥竝陷而舍利無異權大嗟服卽爲建以始有佛寺故曰建初寺因名其爲佛陁里由是江左大法遂興孫皓昏虐欲燔塔廟群臣僉諫以爲佛之威力不同餘神康會感瑞大皇創寺今若輕毀恐貽後悔皓悟遣張詣寺詰會昱雅有才辯難問縱撗會應機騁辭文理交出自旦至夕不能屈旣退會送于門寺側有婬祀者昱曰玄化旣孚此輩何故近而不革會曰震霆破山聾者不聞非音之細茍在理通則萬里懸應如其阻則肝膽楚越昱還歎會才明非臣所測願天鑑察之皓大集朝賢以馬車迎會會就坐皓問曰佛教所明善惡報應何者是耶會對曰夫明主以孝慈訓世則赤烏翔而老人星見仁德育物則醴泉涌而嘉禾出善旣有瑞惡亦如之故爲惡於隱鬼得而誅之爲惡於顯人得而誅之易稱積惡餘詩詠求福不回雖儒典之格言佛教之明訓也皓曰若然則周孔已明之矣何用佛教會曰周孔雖言略示顯近至於釋教則備極幽遠故行惡則有地獄長苦脩善則有天宮永擧茲以明勸沮不亦大哉皓乃服皓雖聞正法而昏暴之性不勝其虐後使宿衛兵入後宮治園於地中得一立金像高數尺以呈皓皓使著廁至四月八日皓至廁污穢像云訖還與諸臣共笑爲樂未暮陰囊腫痛叫呼不可堪忍太史占言犯大神所爲群臣禱祀諸廟無所不至苦痛彌劇求死不得綵女先有奉法聞皓病因問訊云陛下就佛圖中求福不皓擧頭問佛神大耶綵女答佛爲大聖天神所尊皓心還悟具語意故綵女卽迎像著殿上香湯洗數十遍燒香懺悔皓於枕上叩頭自陳罪逆有頃所痛卽閒遣使至寺問訊諸道人能說經者令來見僧會卽隨使入皓問罪福之因會具爲敷扸甚精辯皓先有才解欣然大悅因求看沙門戒會以戒文秘禁不可輕宣乃取本業百三十五願分作二百五十事行步坐起皆願衆生皓見慈願致深世書所不及益增善意卽就會受五戒旬日疾瘳乃修治會所住寺號爲天子寺宣勅宮內宗室群臣不必奉會在吳朝亟說正法以皓性凶麤不及妙義唯敍報應近驗以開諷其心焉會於建初寺譯出經法難念彌經鏡面王察微王梵皇王經道品及六度集竝妙得經體文義允又注安般守意法鏡樹三經幷製經序辭趣雅贍義旨微密竝見重後世會以晉武帝太康元年卒

5. 주사행전(朱士行傳)
031_0408_c_08L朱士行傳第五
031_0409_a_02L
주사행(朱士行)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지업(志業)이 맑고 순수하며 기운이 밝고 위엄이 있었다. 견고하고 바르며 방정하고 곧아서 권하거나 막아도 그의 뜻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원대하게 깨닫고 진세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출가한 이후에 곧바로 대법(大法)의 홍포를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항상 도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경전 연구에만 힘을 쏟았다.
이에 앞서서 천축의 축삭불(竺朔佛)이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 『도행경(道行經)』을 역출하였는데, 역인(譯人)이 입으로 전하면서 혹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바로바로 가려 뽑아 옮기면서 지나갔기 때문에 의미의 처음과 끝이 서로 막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주사행은 일찍이 낙양(洛陽)에서 『소품경(小品經)』을 강의하였는데, 가끔씩 의미가통하지 않는 곳이 있었다. 이때마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에서 이치가 극진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니, 맹세컨대 몸을 버리더라도 멀리 가서 대품(大品)을 구하리라” 하고 탄식하였다.
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에 옹주(雍州)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유사(流沙)를 넘어서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과연 정품(正品)의 범서(梵書)와 호본(胡本) 90장(章) 60만여 언(言)을 필사해서 얻었다. 이에 진(晋)나라 말로는 법요(法饒)라고 하는 제자 불여단(不如檀) 등 모두 열 사람을 파견하여 경의 호본을 낙양(洛陽)에 보냈다. 그런데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때 우전국에서 소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무리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한(漢)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서적으로 정전(正典)을 미혹시켜 어지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이 땅의 군주이신데 만약 금지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대법이 끊어질 것이니, 한나라 땅을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은 왕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왕이 즉시에 경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사행이 이에 분개하여 경을 불태워서 증험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은 이를 시험하기 위해서 궁전의 뜰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폈다. 주사행이 계단에서 맹세하여 말하였다.
“만약 대법(大法)이 한나라 땅에 유통되어야 한다면 경전이 불타지 않으리라. 만약 감응이 없다면 운명이니 어찌하리오.”
말을 마치고 경을 던지자 불이 곧바로 꺼져서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고, 책표지도예전과 똑같았다. 대중들이 놀라서 감복하고, 그 신비한 감응을 칭찬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에 보낼 수 있었다.
하남(河南)에는 거사(居士) 축숙란(竺叔蘭)이 있었다. 그는 이 지방의 말을 잘 알아서 『방광경(放光經)』 20권을 역출하였다.
주사행은 나이 80에 천명을 마쳤다. 서방(西方)의 사유법(闍維法)에 의해 다비를 하였는데, 장작이 다 타고 불이 꺼졌는데도 시해(尸骸)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이 모두 놀라서 기이하게 여기고 주문을 말하였다.
“만약 참으로 도를 얻었다면 법대로 무너지리라.”
이에 소리에 감응하여 부서져서 흩어지니, 마침내 뼈를 거두어서 탑을 세웠다.
031_0408_c_09L朱士行穎川人也志業淸粹氣韻明堅正方直勸沮不能移焉少懷遠脫落塵俗出家以後便以大法爲己任常謂入道資慧故專務經典天竺朔佛以漢靈帝時出道行經人口傳或不領輒抄撮而過故意義首尾頗有格㝵士行常於洛陽講小往往不通每歎此經大乘之要譯理不盡誓志捐身遠迎大品遂以魏甘露五年發迹雍州西渡流沙至于闐果寫得正品梵書胡本九十六十萬餘言遣弟子不如檀晉言法饒凡十人送經胡本還洛陽未發之閒于闐小乘學衆遂以白王云地沙門欲以婆羅門書惑亂正典王爲地主若不禁之將斷大法聾盲漢地王之咎也王卽不聽齎經士行憤慨乃求燒經爲證王欲試驗乃積薪殿以火燔之士行臨階而誓曰若大法應流漢地者經當不燒若其無應命也如何言已投經火卽爲滅不損一字皮牒如故大衆駭服稱其神感遂得送至陳留倉恒水南寺河南居士竺叔蘭善解方言譯出爲放光經二十卷士行年八十而卒依西方闍維法薪盡火滅而尸骸猶全衆咸驚異乃呪曰若眞得道法當毀壞聲碎散遂斂骨起塔焉

6. 지겸전(支謙傳)
031_0409_a_14L支謙傳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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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支謙)의 자(字)는 공명(恭明)이고 다른 이름은 월(越)이니, 대월지국(大月支國) 사람이다. 조부(祖父)인 법도(法度)가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 나라 사람 수백 명을 인솔하고 귀화하자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이라는 벼슬에 임명하였다. 월(越)의 나이 일곱 살 때 죽마(竹馬)를 타고 놀다가 개에게 물려서 경골(脛骨)이 부서지고 상하였다. 그러자 이웃집에서 개를 죽여 간을 꺼내어 상처난 곳에 붙이려 하였다.
월이 말하였다.
“하늘이 이를 낸 것은 주인을 위해서 지키고 짖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제가 댁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끝내 개에게 물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과실은 저에게 있는 것이고 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령 개를 죽여서 차도를 얻는다 해도 이는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저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공연히 큰 죄만을 부를 뿐입니다. 또 축생은 무지한 것인데 어떻게 따져서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을 사람 수십 명이 그 말에 감동해서 모두가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10세 때 글을 배웠는데 같은 시기에 배운 사람들이 모두 그 총명하고 명민함에 탄복하였다. 13살 때 호서(胡書)를 익혔는데, 6개국 국어를 모두 갖추어서 통달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 지참(支讖)이 법전(法典)을 역출(譯出)하였는데, 지량(支亮)과 기명(紀明)이 지참을 의지해서 배웠다. 지겸은 또 지량에게 수업을 하였는데, 경적(經籍)을 널리 열람하여 연구해서 수련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세간의 예술까지 모두 종합적으로 익혔다. 그 모습은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검고 수척했으며, 눈은 흰색이 많은 청황색이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지랑(支郞)은 눈에 황색이 있고 몸은 비록 여위었지만, 지혜 주머니[智囊]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본래 대법(大法)을 받들었으며 경의 종지[宗旨]를 정밀하게 단련했다. 헌제(獻帝) 말기에 한(漢)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고향 사람 수십 명과 함께 오(吳)나라로 망명하였다. 처음 출발하는 날에 오직 이불 한 채밖에 없었다. 어떤 나그네가 따라왔는데 크게 추운 날씨에 이불이 없었다. 월은 나그네를 불러서 함께 잠을 잤는데, 나그네가 밤중에 이불을 빼앗아서 도망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함께 가는 사람들이 이불이 있는 곳을 물었다.
월이 말하였다.
“어젯밤 나그네에게 빼앗겼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답하였다.
“내가 만약 고발했다면 당신들이 반드시 그에게 겁죄(劫罪)를 주었을 것입니다. 한 채의 이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찌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멀리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후에 오나라의 군주인 손권(孫權)이 그가 박학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에 경 속에 있는 은밀하고 심오한 뜻을 물어 보니, 월이 근기에 맞게 질문을 풀이해 주었는데, 의문 나는 것마다 풀어주지 않음이 없었다.
손권이 이에 크게 기뻐하여 박사(博士) 벼슬을 내리고 동궁(東宮)을 보좌해서 인도하도록 하고 더욱더 총애를 하였다.
월(越)은 대교(大敎)가 비록 행해지긴 하지만 경이 대부분 호문(胡文)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미 중국어와 서역의 언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여러 경본(經本)을 수집해서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황무(黃武) 원년에서 건흥(建興) 연간에 이르기까지 『유마힐경(維摩詰經)』ㆍ『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ㆍ『법구경(法句經)』ㆍ『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27경을 역출하였는데, 성스러운 의미를 완전하게 체득하여 문사와 종지가 고아하였다. 또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해서 『찬보살연구범패삼계(讚菩薩連句梵唄三契)』를 짓고,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에 주를 달았는데 모두가 세간에 유행되었다.
그 후에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궁애산(穹隘山)에 은거하여 세간의 업무에 간섭하지 않고, 축법란(竺法蘭) 도인에게 5계(戒)를 수련하였다. 그가 교유하고 따른 것은 모두 사문들뿐이었다.
후에 이 산에서 천명(天命)을 마치니, 춘추 60세였다.
오나라의 군주인 손량(孫亮)이 여러 스님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지공명(支恭明)은 아픈 중생을 구제하지 않았으나 그의 업은 그윽하고 깨끗함을 행해 시종 드높기만 하였으니 슬프고 처참함을 그칠 수가 없도다.”
그 당시에 애석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
031_0409_a_15L支謙字恭明一名越大月支人也父法度以漢靈帝世率國人數百歸拜率善中郞將越年七歲騎竹馬戲於鄰家爲狗所嚙脛骨傷碎鄰人欲殺狗取肝傅瘡越曰天生此物人守吠若不往君舍狗終不見齧則失在於我不閞於狗若殺之得差尚不可爲況於我無益而空招大罪且畜生無知豈可理責由是村人數十家感其言悉不復殺生十歲學書同時學者皆伏其聰敏十三學胡書備通六國語初桓靈世支謙譯出法有支亮紀明資學於讖謙又受業於亮博覽經籍莫不究練世閒藝術多所綜習其爲人細長黑瘦眼多白而精黃時人爲之語曰支郞眼中黃形體雖細是智囊其本奉大法精練經旨獻帝之末漢室大亂與鄕人數共奔於吳初發日唯有一被有一客隨之大寒無被越呼客共眠夜將客奪其被而去明旦同侶問被所越曰昨夜爲客所奪同侶咸曰不相告答曰我若告發卿等必以劫罪罪之豈宜以一被而殺一人乎近聞者莫不歎服後吳主孫權聞其博學有才慧卽召見之因問經中深隱之義應機釋難無疑不扸權大悅拜爲博士使輔導東宮甚加寵祑以大教雖行而經多胡文莫有解者旣善華戎之語乃收集衆本譯爲漢從黃武元年至建興中所出維摩大般泥洹法句瑞應本起等二十七經曲得聖義辭旨文雅又依無量壽中本起經製讚菩薩連句梵唄三契注了本生死經皆行於世後太子登遂隱於穹隘山不交世務從竺法蘭道人更練五戒凡所遊從皆沙門而已後卒於山中春秋六十吳主孫與衆僧書曰支恭明不救所疾業履沖素始終可高爲之惻愴不能已已其爲時所惜如此

7. 축법호전(竺法護傳)
031_0409_c_10L竺法護傳第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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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호(竺法護)의 선조는 월지국(月支國) 사람인데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의 사문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삼아서 모셨다. 하루에 경 만 단어를 암송하였는데, 눈에 한번 스쳐 지나가면 암송할 수가 있었다. 타고난 천성이 순박하고 훌륭했으며 지조와 품행이 정밀하고 정성스러웠고, 뜻이 돈독하고 배움을 좋아하여 만 리 떨어진 곳까지 스승을 찾아 다녔다. 이 때문에 6경(經)을 널리 열람하고, 백가(百家)의 담론을 섭렵하였는데, 세간에서 헐뜯거나 칭찬하여도 보고 들음에 개의치 않았다.
이 때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 절과 탑묘와 불상이 경읍(京邑)에서 숭상되긴 하였지만 방등(方等)의 심오한 경전은 서역에 온축되어 있었다.
축법호는 이에 강개하고 발분(發憤)하여 대도를 홍포하는 데 뜻을 두었다. 마침내 스승을 따라 서역에 이르러 여러 나라를 유람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때 외국의 다른 언어가 36종이었고, 글자도 이와 마찬가지였는데, 축법호는 모든 언어를 두루 배우고 훈고(訓詁)를 종합해서 꿰뚫었고, 음의(音義)와 자체(字體)를 모두 갖추어서 통효하였다. 마침내 호본(胡本)을 많이 가지고 중하(中夏)로 돌아왔는데, 돈황에서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길을 따라오면서 전역(傳譯)하여 진(晋)나라 글로 필사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대소승(大小乘)의 경전인 『현겁경(賢劫經)』ㆍ『대애경(大哀經)』ㆍ『정법화경(正法華經)』ㆍ『보요경(普耀經)』 등 모두 149부(部)였다. 그는 부지런히 힘써서 오직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아 종신토록 전역하고 필사하여 피로해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따라서 경법(經法)이 중화(中華)에 널리 유통된 것은 축법호의 힘이다.
축법호는 진(晋)나라 무제 말기에 깊은 산 속에 은거하였는데, 산에 맑은 시내가 있어 항상 이 물을 취해서 목욕하고 양치질을 하였다. 후에 땔나무를 하는 나무꾼들이시냇가를 더럽히자 이내 물이 갑자기 말라버렸다. 축법호가 이에 배회하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자급할 수 없으니 당장 옮겨 가야겠구나.”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올라 시냇물이 흘러서 시내에 가득 찼다. 그의 깊은 정성에 감응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후에 장안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화(德化)가 사방으로 퍼졌고, 그의 명성이 멀리까지 덮었으며,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장으로 받들었다. 그 때 축법승(竺法乘)이라는 사미가 있어서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나이 8세에 축법호를 스승으로 삼아 의지하였다. 관중(關中)에 있는 갑족(甲族)이 대법(大法)을 받들기 위해서 축법호의 도(道)와 덕(德)을 시험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거짓으로 급하다고 알리고 20만 전(錢)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축법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축법승이 나이 13세로 스승 옆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곧바로 객에게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객이 물러갔다.
축법승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신색(神色)을 살펴보니 실제로 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도와 덕이 어떠한 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축법호가 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다음날 이 사람은 한 가문의 백여 명을 인솔하고 축법호를 찾아뵙고 5계를 수지하고자 청하면서 돈을 얻고자 했던 생각을 모두 사죄하였다.
이에 사방의 사인(士人)과 서인(庶人)들이 이 풍문을 듣고 메아리처럼 모여들어 부처님의 교화를 20여 년 동안 융성하게 선양하였다.
후에 혜제(惠帝)가 서쪽 장안(長安)으로 행차하자 관중(關中)이 쓸쓸해지고 백성들이 유리되어 옮겨갔다. 축법호도 문도(門徒)들과 함께 이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왔는데, 민지(澠池)에 이르러 병에 걸려 천명을 마쳤다. 이 때 춘추(春秋)가 78세였다. 후에 손흥공(孫興公)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었는데, 천축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나란히 대비시키고 축법호를 산거원(山巨源)에 비유하였다.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호공(護公)은 덕(德)이 만물의 으뜸인 자리[物宗]에 있고, 산거원(山巨源)은 지위가 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 있다. 두 사람의 풍모와 인덕은 높고 원대해서 유배(流輩)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를 후대에 아름답게 칭송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서 축법호가 서역에서『초일명경(超日明經)』의 호본(胡本)을 얻어서 역출하였는데 번거롭게 중복된 것이 매우 많았다.
그 때 청신사(靑信士) 섭승원(聶承遠)이 있었는데, 그가 다시 문장과 게송을 자세하게 바로잡고 깎아내서 2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이 이것이다. 섭승원은 밝게 수련해서 재주가 있고, 이치에 밝았으며 돈독한 뜻으로 불법에 힘썼는데, 호공(護公)이 경을 역출할 때 대부분 참예하여 교정하였다.
진(晋)나라 혜제(惠帝)ㆍ회제(懷帝) 말기에 법거(法炬)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누탄경(樓炭經)』을 역출하였다. 법거는 사문 법립(法立)과 『법구유경(法句喩經)』과 『복전경(福田經)』의 두 경을 함께 역출하였다.
법립(法立)은 호본(胡本)을 찾아내어 얻어서 100여 수(首)를 별역(別譯)하였다. 아직 제대로 다 필사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을 만나 천명을 마쳤는데, 얼마 후에 영가(永嘉)의 난리를 만나 인멸(湮滅)되어 남아 있지 않다.
031_0409_c_11L竺法護其先月支人也世居燉煌郡年八歲出家事外國沙門高座爲師誦經日萬言過目則能天性純懿行精苦篤志好學萬里尋師是以博覽六經涉獵百家之言雖世務毀譽未常介於視聽也是時晉武帝之世寺廟圖像雖崇京邑而方等深經薀在西域護乃慨然發憤志弘大道隨師至西域遊歷諸國外國異言三十有六書亦如之護皆遍學貫綜古訓音義字體無不備曉遂大齎胡本歸中夏自燉煌至長安沿路傳譯以晉文所獲大小乘經賢劫大哀普耀等凡一百四十九部孜孜所唯以弘通爲業終身譯寫勞不告經法所以廣流中華者護之力也護以晉武之末隱居深山山閒有淸恒取澡漱後有採薪者穢慢其側俄頃而熇護乃俳佪歎曰水若永眞無以自給正當移去耳言終而泉流出滿㵎其幽誠所感皆此類也後立寺於長安靑門外精勤行道是德化四布聲蓋遠近僧徒千數來宗奉有沙彌竺法乘者八歲聰依護爲師關中有甲族欲奉大法試護道德僞往告急求錢二十萬未有答乘年十三侍在師側卽語客和上意已相許矣客退乘曰觀此人神色非實求錢將以觀和上道德何如耳護曰吾亦以爲然明日此客率其一宗百餘口詣護請受五戒具謝求錢意於是四方士庶聞風嚮集宣隆佛化二十餘年後値惠帝西幸長安閞中蕭條百姓流移護與門徒避地東下至昆池遘疾卒春秋七十有八後孫興公製道賢論以天竺七僧方竹林七賢以護比山巨源論云護公德居物宗巨源位登論道二公風德高遠足爲流輩其見美後代如此初護於西域得超日明經本譯出頗多繁重有信士聶承遠乃更詳正文偈刪爲二卷今之所傳經是也承遠明練有才理篤志法務護公出經多參正焉惠懷之際有沙門法炬者不知何許人譯出樓炭經炬與沙門法立共出法句喩及福田二經法立又訪得胡本別譯出百餘未及繕寫會病卒尋値永嘉擾亂散滅不存

8. 축숙란전(竺叔蘭傳)
031_0410_b_14L竺叔蘭傳第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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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숙란(竺叔蘭)은 본래 천축 사람이다. 조부(祖父)인 누타(婁陀)는 뜻이 돈독하고 배움을 좋아했으며, 청렴하고 간결하여 절개와 지조가 있었다. 그 때 국왕이 무도(無道)하여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비천한 신하와 장병들이 죄를 얻어서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나라와 호족들을 규합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누타가 분노해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미천한 출신으로 요직(要職)에 제멋대로 있으면서 덕으로써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반대로 역모를 꾀하느냐? 나는 차라리 충성을 지켜서 죽을지언정 반란을 일으켜서 살지는 않겠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역모를 누설할까 두려워 곧바로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다. 누타의 아들 달마시라(達摩尸羅)는 제(齊)나라 말로는 법수(法首)라고 하는데, 이 일이 있기 전에 다른 나라에 있었고, 그의 부형(婦兄) 두 사람이 모두 사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살해를 당하고 나라 안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두 사람의 사문과 함께 진(晋)나라로 망명하여 하남(河南) 땅에 살면서 숙란(叔蘭)을 낳았다.
축숙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변재가 있어서 두 외삼촌에게 경법을 자문해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한 번 들으면 깨달았고 호어(胡語)와 한어(漢語)와 글자공부에 뛰어났으며 모든 문집과 역사도 겸해서 능숙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경솔하고 들떠 있어서 다니면서 사냥을 즐기는 것이 한도가 없었다. 일찍이 혼자서 말을 타고 사슴을 쫒아가다가 호랑이를 만나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이 부러졌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야 나았다. 그 후에도 말타고 달리는 것을 그치지 않아서 모친이 여러 차례 꾸짖고 간하였지만 끝내 고치지 않았는데, 채소를 먹이자 곧 중지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마셨다 하면 대여섯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일찍이 크게 취해서 길가에 드러누웠다가 하남(河南)의 군문(郡門)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자 관리가 하남의 감옥에 보내어 가두었다. 그 때 하남의 윤(尹)인 낙광(樂廣)이 빈객들과 함께 술을 즐겼는데, 취하자 축숙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교객(僑客)이로다. 어찌하여 학인(學人)이 술을 마셨느냐?”
축숙란이 말하였다.
“두강(杜康)이 술을 빚어서 천하에서 함께 마시는데 무슨 교구(僑舊)를 묻소?”
낙광이 또 말하였다.
“술을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치자. 무엇 때문에 광란을 떠느냐?”
답하였다.
“백성은 미쳐도 난리를 피우지 않고, 부군(府君)은 취해도 광란을 떨지 않기 때문이오.”
낙광이 크게 웃었다.
그 때 앉아 있던 빈객들이 말하였다.
“외국인께서는 어찌하여 얼굴이 하얗소?”
축숙란이 말하였다.
“하남 사람들은 얼굴이 검은데도 오히려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데, 내 얼굴이 희다고 해서 또 무엇이 괴이하단 말이오?”
이어 빈객과 주인이 그 기변(機辯)에 탄복하여 마침내 석방시켰다.
얼마 있다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소생하였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붉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났는데 자신이 조부라고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선업(善業)을 여러 해 동안 닦아서 지금 이 선보를 받았다. 너는 죄인인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느냐?’라고 하였다. 그 때 문을 지키는 사람이 작대기로 쫓아내는 바람에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갔는데, 사냥하던 친구가 매와 개에게 쪼이고 물려 피를 흘리며 부르짖으면서 나에게 구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달려서 피하여 수십 보를 갔는데, 소머리를 한 사람이 찌르려고 하는 상황을 만났다. 내가 말하였다.
‘나는 대대로 불제자였고, 항상 두 분의 사문을 공양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죄로 다스리려 합니까?’
소머리를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는 복을 받을 길이기는 하지만 사냥을 한 죄와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두 외삼촌이 나타나서 소머리를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항상 그에게서 공양을 받았습니다. 그의 악업은 적고 선업은 많으니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도인들을 따라서 돌아왔는데, 이윽고 다시 소생하였다.”
이에 절조를 고치고 자비를 닦아서 오로지 경법(經法)에 뜻을 두었다. 진(晋)나라 원강(元康) 원년(291)에 『방광경(放光經)』과 『이유마힐경(異維摩詰經)』 10여만 언(言)을 역출하였는데, 이미 호어(胡語)와 한어(漢語)를 겸해서 익혔기 때문에 번역의 의미가 정밀하고 충실하였다.
031_0410_b_15L竺叔蘭本天竺人也祖父婁陁篤志好學淸簡有節操國王無道百姓思亂有賊臣將兵得罪懼誅以其國豪呼與共反婁陁怒曰君出於微賤而任居要職不能以德報恩而反爲逆謀乎我寧守忠而死不反而生也反者懼謀泄卽殺之而作亂婁陁子達摩尸羅齊言法首先在他國其婦兄二人竝爲沙門聞父被害國內大卽與二沙門奔晉居于河南生叔叔蘭幼而聰辯從二舅諮受經法一聞而悟善胡漢語及書亦兼諸文然性頗輕躁遊獵無度常單騎逐鹿値虎墮馬折其右臂久之乃差馳騁不已母數呵諫終不改爲之蔬乃止性嗜酒飮至五六升方暢大醉臥於路傍仍入河南郡門喚呼吏錄送河南獄河南尹樂廣與賓客共酣已醉謂蘭曰君僑客何以學人飮酒叔蘭曰杜康釀酒天下共飮何以僑舊廣又曰飮酒可爾何以狂亂乎答曰民雖狂而不亂猶府君雖醉而不狂廣大呼坐客曰外國人那得面白叔蘭曰河南人面黑尚不僕面白復何怪耶於是賓主歎其機辯遂釋之頃之無疾暴亡三日還自說入一朱門金銀爲堂見一人自云是其祖父謂叔蘭曰吾修善累今受此報汝罪人何得來耶門人以杖驅之入竹林中見其獵伴爲鷹犬所啄齧流血號叫求救於叔叔蘭走避數十步値牛頭人欲叉叔蘭曰我累世佛弟子常供二沙何罪見治牛頭人答此唯受福不閞獵罪俄而見其兩舅來語牛頭曰我等二人恒受其供惡少善多可得相免遂隨道人歸旣而還蘇於是改節修慈專志經法以晉元康元年出放光經及異維摩詰十餘萬言學兼胡漢故譯義精允
그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3월에 곧바로 장사를 지내려 하자, 이웃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때가 장사를 지내기에 불편하니 내년을 기약함이 좋겠소.”
축숙란이 말하였다.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않으니 사람과 귀신이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이치가 그러한 것입니다. 만약 돌아가신 어머니를 영지(靈地)에 두면 효도를 다하는 것이 되겠지만 내년을 기다린다면 아마 도망가려 해도 갈 곳이 없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받들기를 도모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장사지내는 것을 마쳤다. 다음 해에 석륵(石勒)이 정말로 난을 일으켜 도적들이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녔다. 이에 그곳을 피해서 형주(荊州)로 망명하였다.
그 후에 병들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아는 사람에게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천명(天命)을 마쳤다. 아는 사람들은 그가 천명을 안 것이라고 하였다.
031_0411_a_09L後遭母難月便欲葬有鄰人告曰今歲月不便可待來年叔蘭曰夫生者必有一死死者不復再生人神異塗理之然也若使亡母棲靈有地則烏鳥之心畢若待來年恐逃走無地何睱奉營遂卽葬畢明年石勒果作亂寇賊縱撗因避地奔荊州後無疾忽告知識曰吾將死矣數日便卒識者以爲知命

9. 시리밀전(尸梨蜜傳)
031_0411_a_18L尸梨蜜傳第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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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밀(尸梨蜜)은 서역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를 고좌(高座)라고 불렀다. 전(傳)에서는 “국왕의 태자로써 대를 이어야 했는데, 아우에게 나라를 양보하여 암암리에 태백(太伯)의 뒤를 이었다. 이윽고 하늘의 계시를 마음으로 깨달아서 마침내 사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시리밀은 타고난 바탕이 고원하고 밝으며 풍채가 뛰어나서 직접 그를 대하게 되면 무리들보다 뛰어나게 특출하였다. 진(晋)나라 영가(永嘉) 연간(307~313)중에 처음 중국에 왔는데, 건초사에 머물렀다. 승상(丞相)인 왕도(王導)가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 그들 무리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빙(庾元氷)과 광록(光祿) 주백인(周伯仁)과 태상(太常) 사유여(謝幼璵)와 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 일대의 명사(名士)인데, 그를 만나보고 종일토록 여러 번 탄복하여 흉금을 열고 계합(契合) 하기에 이르렀다.
031_0411_a_19L尸梨蜜西域人也時人呼之爲高座傳云國王之子當承繼世而以國讓闇軌太伯旣而悟心天啓遂爲沙蜜天資高朗風骨邁擧直爾對之便自卓出於物永嘉中始到此土建初寺丞相王導一見而奇之以爲吾之徒也由是名顯太尉庾元冰光祿周伯仁太常謝幼璵廷尉桓茂倫皆一代名士見之終日累歎披衿致
031_0411_c_02L왕도가 시리밀을 찾아가면 시리밀은 허리띠를 풀고 엎드려 있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담론하면서 정신으로 이해하였다. 당시의 상서령(尙書令)인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시리밀과 지극히 사이좋게 지냈는데, 변망지는 (풍모가 절도 있고 귀하며 정돈되어 있어서 의궤와 법도가 사물에 들어맞았다. 얼마 후에 변망지가 오자, 시리밀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고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제공들은 이에 그의 정신이 깨끗하고 엄격하여 모두가 적당함을 얻었음을 칭찬하였다.
환정위(桓廷尉)가 일찍이 시리밀을 위하여 이름[目]을 지어 주려고 하였으나 오래 지나도록 짓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시리밀은 ‘탁월하고 밝다[卓朗]’고 하자 이에 환정위는 감탄하고 크게 탄식하며 표제(標題)의 극치라고 여겼다. 대장군(大將軍) 왕처충(王處沖)이 남하(南夏)에 있었는데, 왕도ㆍ주백인 등 여러 제후들이 모두 시리밀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일이라고 의심하였지만, 시리밀을 만나고 나자 기뻐하며 달려가 한번 얼굴을 대할 때에도 공경하며 조심하였다.
주의(周顗)는 복야(僕射)가 되어 사람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는데, 부임해 들어오다가 지나가는 길에 시리밀을 보게 되었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였다.
“만일 태평한 세상에 이런 어진 사람들을 모두 선발하게 된다면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이 없게 할 것이다.”
갑자기 주의가 살해를 당하자 시리밀은 가서 그의 고자(孤子)를 보살펴 주고 마주하고 앉아 호패(胡唄) 3계(契)를 지었는데, 범천(梵天)의 울림이 구름 위로 솟아올랐다. 이어서 수천 자의 주문을 외우는데, 목소리가 높고 화창하면서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었다. 얼마 지나서 눈물을 흘리다가 거두니 신기(神氣)가 태연하였다. 그가 애락(哀樂)의 감정을 일으키고 거두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공이 일찍이 시리밀에게 말하였다.
“외국에 진정한 임금이 있다면 그대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시리밀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만약 내가 모든 임금들과 같다면 오늘 여기에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사람들이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
시리밀은 성품이 고상하고 대범하여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공(公)들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때에는 시리밀이 번역을 의지하였는데, 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이해하여 말을 하기 전에 벌써 그 의미를 다 알게 되니, 그의 타고난 빼어남과 깨달음[悟得]이 비상한 것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리밀은 주술(呪術)을 잘 지녔고 가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이전에는 강동(江東)에 주법이 없었는데, 시리밀이 『공작왕경(孔雀王經)』을 전역하여 여러 신주(神呪)를 역출하였다. 또한 제자 멱력(覓歷)에게 고성(高聲)의 범패(梵唄)를 가르쳐 주어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해진다. 80세인 함강(咸康) 연간(335~342) 중에 천명을 마쳤다. 그의 나이 80여 세였다. 여러 공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031_0411_b_06L道詣蜜蜜解帶偃伏悟言神解尚書令卞望之亦與蜜致善卞斂衿飾容端坐對之諸公於是歎其精神灑厲皆得其所桓廷尉曾欲爲蜜作目久之未得有云尸梨蜜可稱卓於是桓乃咨嗟絕嘆以爲摽題之大將軍王處沖時在南夏聞王周諸公器重蜜疑以爲失鑑旣見乃振欣奔至一面便盡周顗爲僕射領選臨入過視蜜乃撫背而歎若使太平盡得選此賢輩眞令人無恨俄而顗遇害蜜往省其孤對坐作胡唄三梵響淩雲誦呪數千言聲高韻暢顏容不變旣而揮涕抆淚神氣自若其哀樂廢興皆此類也王公曾謂蜜外國正當有君一人而已耳蜜笑而答曰若使我如諸君今日豈得在此當時以爲當言蜜性高簡不學晉語諸公與之語言蜜因傳譯然而神領意得頓盡言前莫不歎其自然天拔悟得非常蜜善持呪術所向皆驗江東未有呪法蜜傳出孔雀王諸神又授弟子覓歷高聲梵唄傳于今年八十餘咸康中卒諸公聞之痛惜流涕
환선무(桓宣武)가 일찍이 말하기를 “어려서 고좌(高座)를 만났는데, 그 정신의 심오하고 뛰어남은 무리 중에서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다”고 하였다.
명사(名士)들이 탄식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031_0411_c_07L宣武桓公常云少見高座稱其精神淵著當年出倫其爲名士所歎如此

10. 승가발징전(僧伽跋澄傳)
031_0411_c_09L僧伽跋澄傳第十

승가발징은 계빈국(罽賓國) 사람인데, 의연하게 깊고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이름난 스승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정밀한 뜻을 닦아 익혔으며 여러 전적을 널리 열람하였다. 특히 여러 경(經)에 뛰어났는데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을 암송하여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풍속을 관찰하여 널리 교화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부견의 말기 건원(建元) 17년(381)에 관중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고, 선수(禪數)의 학문이 매우 성하였는데, 그가 장안에 이르자 모두 그를 법장(法匠)이라고 불렀다.
031_0411_c_10L僧伽跋澄罽賓人也毅然有淵懿之歷尋名師修習精詣博覽衆典善數經闇誦阿毘曇毘婆沙貫其妙常浪志遊方觀風弘化符堅之末來入關中先是大乘之典未廣禪數之學甚盛旣至長安咸稱法匠焉
부견의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正)은 자(字)가 문업(文業)인데 박학하고 재주와 문장이 출중하였으니, 바로 부견의 임(琳)과 우(瑀)였다. 그는 대법(大法)을 숭상하였는데, 일찍이 외국에서는 『아비담비바사론』을 존중해서 익혔기에 승가발징이 이를 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4사(事)2)의 예로써 공양하고 범문을 전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명덕(名德)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승려들을 모아 역출하였다. 승가발징이 경본을 입으로 송출(誦出)하고 외국의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범문으로 받아 필수하였으며,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고 진(秦)의 사문 지민(智敏)이 한문으로 필수하였다. 위진(僞秦) 건원(建元) 19년(383)에 역출하였는데, 초여름에 시작하여 중추(仲秋)에 끝마쳤다.
031_0411_c_16L祕書郞趙政字文業博學有才章堅之琳蝺也崇仰大法常聞外國宗習阿毘曇毘婆沙而跋澄諷誦乃四事禮供請譯梵文遂共名德法師集僧宣譯跋澄口誦經本外國沙門曇摩難提筆受爲胡文佛啚羅剎宣譯秦沙門智敏筆受爲漢文僞建元十九年譯出自孟夏至仲秋方訖
031_0412_a_02L이에 앞서서 승가발징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의 범본(梵本)을 가지고 왔는데, 다음 해에 조정(趙正)이 다시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승가발징과 담마난제와 승가제바 세 사람이 함께 범본을 잡았고, 진(晋)나라 사문 불념(佛念)이 입으로 전역하였
으며, 혜숭(慧嵩)이 필수하고, 안공(安公)과 법화(法和)가 대조해서 함께 교정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지 경전이 유포되어 학문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승가발징은 계덕(戒德)이 바르고 준엄하며,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나서 관중(關中)의 승려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아 본받았다. 그 후에 천명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불도라찰(佛圖羅刹)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덕업(德業)이 순수하고 밝으며 경전을 두루 보아 해박하였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한(漢)나라 말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가 전역한 범문(梵文)은 부견(符堅) 시대에 귀중하게 여겼다.
031_0412_a_02L初跋澄又齎婆須蜜胡本自隨明年趙政復請出之跋澄乃與曇摩難提及僧伽提婆三人共執胡本沙門佛念宣譯慧嵩筆受安公和對共挍定故二經流布傳學迄今跋澄戒德整峻虛靜離俗關中僧衆則而象之後不知所終佛圖羅剎者不知何國人德業純白該覽經典遊中土善閑漢言其宣譯梵文見重符世焉

11. 담마난제전(曇摩難提傳)
031_0412_a_11L曇摩難提傳第十一

담마난제(曇摩難提)는 도가륵국(兜佉勒國) 사람이다. 7, 8세 무렵에 출가하였는데 총명하고 지혜롭고 숙성하였다. 경전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심전력으로 업을 닦아 두루 3장(藏)을 보았고,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암송하였으며 널리 알고 들어서 수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면서 감복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지방을 보았고, 두루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상 “홍법(弘法)의 체를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멀리 고비사막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유람하여 부견(符堅)의 건원 20년(384)에 장안에 이르렀다.
031_0412_a_12L曇摩難提兜佉勒人也齠歲出家慧夙成硏諷經典以專精致業遍觀三藏闇誦增一中阿鋡經博識洽聞靡所不練是以國內遠近咸共推服少而觀方遍涉諸國常謂弘法之體宜宣布未聞故遠冒流沙懷寶東遊以符堅建元二十年至于長安
031_0412_b_02L이전에 중국의 여러 경(經) 중에 아직 4아함(阿鋡)이 없었는데, 부견의 신하인 무위태수(武威太守) 조정(趙政)이 심오한 법장(法藏)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에 안공(安公)과 함께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 때 모용충(募容沖)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사를 일으켜 부견을 공격하여 관중이 어지러웠다.
조정은 장안성(長安城) 안에 의학승(義學僧)을 모아 두 경의 범본을 필사해서 비로소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축불념(竺佛念)이 전역하고 혜숭(慧嵩)이 필수했다. 여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2년이 걸려 비로소 끝마쳤다. 두 가지 아함을 갖추어서 모두 백 권이었다.
경(經)이 동하(東夏)로 유포된 이후로부터 부견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경의 권수가 번다하게 많았지만 오직 이 경만이 자세하게 번역되었다. 담마난제의 학업이 이미 우수했고, 도의 명성이 매우 성대해서 부견이 여러 차례 예의로 청하여 후하게 공양하고 보시를 하였다. 진(秦)나라에서 몇 해를 보냈는데, 후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축불념(竺佛念)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의지와 행업이 홍대하고 아름답고 언사의 재주가 있었고 논변이 뛰어났으며, 널리 보고 많이 들어서 고아하게 풍속을 잘 알았다. 집안이 대대로 하서(河西)에서 살았으므로 이 지방의 말을 통달해서 익혔기 때문에 중국어와 범어[戎華]를 교대로 번역할 수 있었다. 관(關)과 위(渭)에 법을 선양하였고, 부견과 요흥의 2대에 걸쳐서 항상 경을 전역하는 데 참여하였으니, 두 가지 아함이 갖추어진 것은 대체로 그의 공덕이다.
031_0412_a_19L先是中土群經未有四鋡堅侍臣武威太守趙政志深法藏乃與安公共請出是時慕容沖已叛起兵擊堅閞中騷動政於長安城內集義學僧寫出兩經佛念傳譯慧嵩筆受自夏迄春緜歷二年方訖具二阿鋡凡一百卷經流東夏迄于符世卷數之繁唯此爲廣難提學業旣優道聲甚盛堅屢禮請厚致供施在秦積載後不知所終竺佛念涼州人也志行弘美才辯贍博見多聞備識風俗家世河西通習方語故能交譯戎華宣法閞渭姚二代常參傳經二鋡之具蓋其功也

12. 승가제바전(僧伽提婆傳)
031_0412_b_10L僧伽提婆傳第十二

승가제바는 계빈국(罽賓國) 사람인데, 성(姓)은 구담씨(瞿曇氏)이다. 입도(入道)하여 수학하였는데, 멀리까지 훌륭한 스승을 구하였다. 3장(藏)을 통달하였고, 대부분을 암송하여 지송하였다.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에는 더욱 뛰어나서 그 섬세한 종지를 꿰뚫었다.
그는 항상 『삼법도론(三法道論)』을 독송하여 밤낮으로 그 뜻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 의미를 음미하기도 하면서 그것을 도(道)로 들어가는 창고로 여겼다. 그의 사람됨은 빼어나고 밝으며 깊이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었고,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서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씨의 건원 연간(365~384) 중에 장안으로 들어와서 법으로 교화하여 선양하고 유통시켰다.
031_0412_b_11L僧伽提婆罽賓人也姓瞿曇氏入道修學遠求明師兼通三藏多所誦持尤善阿毘曇心洞其纖旨常誦三法晝夜嗟味以爲道之府也爲人儁朗有深鑑儀止溫恭務在誨人恂恂不怠符氏建元中入關宣流法化
031_0412_c_02L이전에 안공(安公)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을 역출하였는데, 제바(提婆)와 승가발징(僧伽跋澄)이 함께 범문을 잡았다. 후에 담마난제(曇摩難提)에게 두 가지 『아함경』을 역출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모용(慕容)의 난리를 만나 전쟁이 벌어지는 때에 법을 세우느라 창졸간이어서 다듬지 못하였다. 안공이 먼저 역출한 『아비담(阿毘曇)』과 『광설(廣說)』과 『삼법도』 등 여러 경은 모두 백여 만 언(言)이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이 세밀하게 알지 못하여 뜻과 구절의 의미가 왕왕 잘못된 점이 있었다. 얼마 후에 안공이 세상을 뜨게 되니, 미처 개정(改正)할 수 없었다.
후에 산동(山東) 지방이 잘 다스려지자 승가제바는 이에 기주(冀州)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낙양으로 가서 4, 5년간 앞의 경을 연구하고 익혔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날들이 점차 쌓이자 중국어에 점점 밝게 되었고, 비로소 먼저 역출한 경들이 그 의미가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화는 미처 개정되지 못한 것을 개탄하면서 이에 『아비담(阿毘曇)』과 『광설(廣說)』 등 여러 경들을 다시 역출하니, 먼저 역출한 여러 경전이 점차로 개정되었다.
얼마 후에는 요흥(姚興)이 진(秦)나라에서 왕노릇을 하게 되자 법사(法事)가 매우 성하였다. 이에 법화는 관(關)으로 들어가고 승가제바는 양자강을 건넜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법사가 묘전(妙典)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서 널리 경장(經藏)을 모았으며, 마음을 비워 자리를 내놓고서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악(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16년(391)에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 등을 역출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승가제바가 이에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을 손에 들고 입으로는 진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화려함은 버리고 실질을 보존하여 그 본뜻을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것은 대개 그의 문장이다.
031_0412_b_17L安公之出婆須蜜經也提婆與僧伽跋澄共執梵文後令曇摩難提出二阿鋡時有慕容之難戎世建法倉卒未練安公先所出阿毘曇廣說三法度等諸經凡百餘萬言譯人造次未善詳審義旨句味往往愆謬俄而安公棄世不及改正後山東淸平提婆乃與冀州沙門法和俱適洛陽四五年閒硏講前經居華歲積轉明漢語方知先所出經多有乖失法和歎恨未定重請譯改乃更出阿毘曇及廣先出衆經漸改定焉頃之姚興王法事甚盛於是法和入關而提婆度江先是廬山慧遠法師翹勤妙典廣集經藏虛心側席延望遠賓聞其至止卽請入廬嶽以太元十六年譯阿毘曇心及三法度等經提婆乃於波若臺手執胡本口宣晉言去華存實務盡義本今之所傳蓋其文
융안(隆安) 원년(397)에 이르러 경사(京師)에 오니, 진(晋)나라 조정의 왕공(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위군(衛軍) 동정후(東亭候) 왕순(王珣)은 깊이가 있고 아름다우며 깊은 믿음과 지혜가 있어서 정법(正法)을 주지(住持)하고 정사(精舍)를 건립하여 널리 공부하는 대중들을 불러들였다. 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여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니,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종치(宗致)는 이미 정미(精微)하였고, 말의 뜻이 명석하여 의리(義理)의 심오함을 떨쳐내자 무리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 의미를 깨달았다. 당시에 왕순(王珣)과 승미(僧彌)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강의를 들었는데, 후에 별옥(別屋)에서 스스로 강(講)하였다. 왕순이 법강도인(法綱道人)에게 물었다.
031_0412_c_14L至隆安元年遊于京師晉朝王公及風流名士莫不造席致敬衛軍東亭侯王珣雅有信慧住持正法建立精舍廣招學衆提婆至止卽迎請仍於其舍講阿毘曇名僧畢提婆宗致旣精辭旨明扸振發義衆咸悅悟王珣僧等亦在聽坐後於別屋自講珣問法網道人
031_0413_a_02L“아(阿)라는 글자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승가제바가 대답하였다.
“대략적으로는 옳으나 작은 부분에서는 아직 자세하게 핵심을 밝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가 부연해 주는 것은 분명하여 쉽게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그 해 겨울에 왕순은 경도(京都)의 의학(義學) 사문 40여 인을 모으고 다시 승가제바에게 그 절에서 『중아함경(中阿含經)』을 거듭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계빈국의사문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호본(胡本)을 잡고 승가제바가 진(晋)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마쳤다. 그가 관중(關中)과 낙양(洛陽)과 강좌(江左)에서 역출한 여러 경은 수백여 만 언(言)이 된다. 그는 화융(華戎)을 낱낱이 유력하였는데, 각 나라의 풍속을 모두 알았고, 놀랄 만한 상황[機警]에서도 편안하였으며, 담소(談笑)에 훌륭하여, 그가 도(道)로 교화하는 명성을 듣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그가 명(命)을 마친 때는 정확하지 않다. 제바(提婆) 혹은 제화(提和)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음(音)이 와전되었기 때문에 같지 않다.
031_0412_c_21L阿字所得云何答曰大略全是小未精覈其敷演之明易啓人心如此其年珣集京都義學沙門四十餘人請提婆於其寺譯出中阿鋡罽賓沙門僧伽羅叉執胡本提婆翻爲晉言至來夏方訖其在關洛江左所出衆垂百餘萬言歷遊華戎備悉風俗從容機警善於談笑其道化聲譽莫不聞焉未詳其卒歲月提婆或作提蓋音訛故不同云出三藏記集傳上卷第十三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영(郢)은 초(楚)나라의 수도. 영인(郢人)이 콧날에 흰 흙을 칠하고 장석(匠石)이라는 사람에게 도끼로 그것을 깎아내라고 하자 그 솜씨가 뛰어나서 매미날개 같은 두께의 흙을 깎아내고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장자』 「서무귀편(徐無鬼篇)」에 나오는 고사로 서로의 근기가 훌륭하게 들어맞아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2. 2)네 가지 공양이란 의복ㆍ음식ㆍ탕약(湯藥)ㆍ와구(臥具)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