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후주우문씨전역불경록(後周宇文氏傳譯佛經錄) 계속해서 난리가 나서 위(魏)나라와 진(晉)나라가 패권을 쥐어 각각 한 시대를 열어 서로를 가리켜 거짓된 왕조[僞朝]라고 했으며, 인의(仁義)는 사라져 간 데가 없고 덕행(德行)은 망가져 제 모습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러 대(代)에 국사(國史)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옳고 너희들은 그르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리고, 한 쪽이 선정을 베풀었다면 한 쪽은 학정을 한 것이니, 모두 합당한 것이 못된다. 누가 감히 그것을 판단 내리겠는가? 그래서 북위에서는 강남을 섬나라 오랑캐[島夷]라고 말하였고, 남쪽의 진(晉)나라에서는 하내(河內)를 흉노 오랑캐[獯鬻]라고 했다. 주(周:북주)나라는 북위(北魏)의 국운을 승계하였는데, 북위는 진나라의 기반에 인접했다. 나머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제왕은 근거할 곳이 없었다.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 지배할 때도 자연 벼슬아치가 있었고, 나라가 망하고 황제가 몰락할 때도 마침내 제멋대로 첨가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周)의 선조는 우문각(宇文覺)인데, 바로 서위(西魏)의 대승상(大丞相) 우문흑태(宇文黑泰)의 세자(世子)였다. 우문흑태가 고양왕(高陽王)으로 있을 때 위(魏)나라 황제가 낙양에서 서쪽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했다.37) 그래서 복식과 장식衣幡을 검은 색으로 고치고 대통(大統) 원년(535)이라 하였고, 18년 만에 연호를 다시 고치고 폐제(廢帝)를 옹립하였다. 위제왕(魏齊王)38) 4년(553)에 황제가 붕어하고 우문각이 위(魏)나라의 선양을 받지만 그 해에 폐위되었다. 동생인 육(毓)이 즉위하여 4년 만에 사망하고 동생 옹(邕)이 즉위하였는데,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이었다. 황무지를 개척하고 크게 세력을 떨쳐서 군소의 여러 나라를 제압하였다. 제위 12년에 숙부인 대총재(大冢宰) 진국공(晉國公) 우문호(宇文護) 부자 10인과 대신 6가(家)를 살해하고 건덕(建德, 572~578)으로 연호를 바꿨다. 3년 만에 도사(道士) 장빈(張賓)을 맞아들이는데, 요망하게도 “불법은 국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니 그것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건덕 6년(577)에 동쪽으로 북제(北齊)를 평정하였는데, 전대(前代)로부터 수백 년간 내려오던 국가나 민간에서 건립한 사탑(寺塔)을 모두 파괴하고 그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불상을 녹이고 경전을 불태웠는데 팔주(八州)의 불사(佛寺) 4만여 개소를 제왕과 공후에게 하사했다. 세 방면으로 스님들 3백만 명을 환속시켜 호적에 귀속시켰다. 황제는 주(周)나라를 크게 하나로 통일하여 천하에는 특별히 도모할 것이 없다고 말했으며 뜻이 고상하고 생각이 멀리까지 미쳤다. 다시 선정(宣政, 578)이라고 연호를 고쳤는데 5개월 만에 죽었다. 태자 윤(贇)이 즉위하여 제왕(齊王) 부자 8인을 죽이고 대성(大成, 579)으로 연호를 고쳤다. 2월에 아들 연(衍)을 태자로 세우고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대상(大象, 579~580)으로 연호를 고치고 스스로는 천원황제(天元皇帝)라고 했다. 그리고 네 황후를 세웠는데, 위의(威儀)와 복식을 옛날보다 갑절이 되게 했다. 대상 2년(580) 5월에 천원황제가 사망하자, 아들 연(衍)이 즉위했고 정월 1일에 대정(大定, 581)으로 개원했다. 2월에 주(周)나라를 수(隋)나라로 넘겼으며, 모두 다섯 황제 25년간 장안에서 다스렸다. 전역 사문(沙門)은 11인이며, 번역한 경(經)ㆍ논(論)ㆍ천문(天文)ㆍ요(要) 등 32부 도합 104권을 후주(後周)의 불경 목록으로 삼는다.
이상은 2부 23권이다. 위(魏)나라 승상(丞相)이자 왕을 지낸 우문흑태(宇文黑泰)는 불교의 가르침을 크게 발전시켰고 대승불교를 매우 숭상했다. 비록 모든 국정을 관할하고 있었지만 항상 불ㆍ법ㆍ승 삼보를 선양하였고, 집안에서도 늘 백여 명의 훌륭한 스님에게 공양을 했다. 경론을 깊이 공부하고 대승을 강론하기까지 하였으며, 사문 석담현 등을 시켜서 대승경전에 의거해서 『보살장중경요(菩薩藏衆經要)』와 『일백이십법문(一百二十法門)』을 편찬토록 하였다. 불성(佛性)에서 시작해서 융문(融門)에서 끝마쳤는데, 강의를 할 때에 항상 강술을 하고 오래도록 일정한 법칙이 되게 해서 기존의 오시교적(五時敎迹)3)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산동(山東)과 강남(江南)에 유행하고 있다. 비록 학문의 바다이자 모범[軌儀]이라고 하지만 닦으면 다시 이를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향 사르고 촛불을 켜며, 범패[梵音]와 부처님께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까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늘 일에는 핵심이 있고 강령에는 근거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2)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 오명론(五明論)첫째 성론(聲論), 둘째 의방론(醫方論), 셋째 공교론(工巧論), 넷째 주술론(呪述論), 다섯째 부인론(符印論)이다. 주(周) 2년(558)에 번역했다.
이상은 명제(明帝) 때 중국말로 지현(智賢)인 파두마국(波頭摩國) 삼장율사(三藏律師)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가 사나야사(闍那耶舍)와 함께 장안(長安) 구성(舊城)의 바가사(婆伽寺)에서 번역했다. 야사굴다(耶舍崛多)ㆍ사나굴다(闍那崛多) 등이 전역하고 사문(沙門) 지선(智僊) 등이 받아 적었다.
이상은 무제(武帝) 때 중국말로 법희(法希)인 마륵국(摩勒國) 사문 달마류지가 대총재(大冢宰)인 진탕공(晉蕩公) 우문호(宇文護)를 위해서 번역했다.
(4) 사나야사(闍那耶舍) 정의천자소문경(定意天子所問經) 5권『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천화(天和) 6년(571)에 번역했으며, 사문 원명(圓明)이 받아 적었다. 보적경(寶積經) 3권천화 6년(571)에 번역했다. 사문 도변(道䛒)이 받아 적었다. 여래지부사의경(如來智不思議經) 3권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 4권일명 『불십지경(佛十地經)』이라고도 하며, 일명 『일체불행입지비로자나장경(一切佛行入智毘盧遮那藏經)』이라고도 한다. 천화(天和) 5년(570)에 번역했으며, 상의동(上儀同)인 성양공(城陽公) 소길(簫吉)이 받아 적었다. 불정주경병공능(佛頂呪經幷功能)보정(保定) 4년(564)에 번역했다. 학사(學士) 포영(鮑永)이 받아 적었다. 대운륜경청우품제일백(大雲輪經請雨品第一百)천화 5년(570)에 번역했다. 사문 원명(圓明)이 받아 적었으며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상 6부 17권은 무제(武帝) 때 마가타국(摩伽陀國) 삼장선사(三藏禪師), 중국말로 장칭(藏稱)인 사나야사(闍那耶舍)가 두 제자 야사굴다(耶舍崛多)와 사나굴다(闍那崛多) 등과 함께 대총재(大冢宰) 진탕공(晉蕩公) 우문호(宇文護)를 위해서 장안(長安) 구성(舊城)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번역했다. 주국(柱國) 평양공(平陽公) 후복후(侯伏候) 만수(萬壽)가 총감독이 되어 검토하고 바로잡았다.
(5) 야사굴다(耶舍崛多) 금광명경경광수량대변다라니(金光明經更廣壽量大辯陀羅尼) 5권두 번째 번역이다. 귀성사(歸聖寺)에서 번역했으며, 지선(智僊)이 받아 적었다. 수발타라인연론(須跋陀羅因緣論) 2권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번역했으며, 사문 원명(圓明)이 받아 적었다. 십일면관세음주병공능경(十一面觀世音呪幷功能經)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번역했다. 상의동(上儀同) 성양공(城陽公) 소길(蕭吉)이 받아 적었다.
이상 3부 8권은 무제(武帝) 때 우바국(優婆國) 삼장법사, 중국말로 칭장(稱藏)인 야사굴다(耶舍崛多)가 어릴 때 함께 배웠던 사나굴다(闍那崛多)와 함께 대총재 우문호(宇文護)를 위해서 번역했다.
(6) 사나굴다(闍那崛多) 금색선인문경(金色仙人問經) 2권장안(長安)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번역했으며, 소길(簫吉)이 받아 적었다. 묘법연화보문중송게(妙法蓮華普門重誦偈) 종종잡주경(種種雜呪經) 불어경(佛語經)이상 3경은 모두 익주(益州) 용연사(龍淵寺)에서 번역했다.
이상 4부 모두 5권은 무제(武帝) 때 북천축(北天竺) 건달국(揵達國), 중국말로 지덕(志德)인 삼장법사 사나굴다가 익주(益州)에서 총관(總管) 상주국(上柱國) 초왕(譙王) 우문검(宇文儉)을 위해서 번역했다. 사문 원명(圓明)이 받아 적었다.
(7) 석승면(釋僧勔) 석노자화호전(釋老子化胡傳) 십팔조난도장(十八條難道章)
이상 2권은 신주(新州) 원과사(願果寺) 사문(沙門) 석승면(釋僧勔)이 찬술했다. 석승면은 상법시대(像法時代)는 사법(邪法)과 정법(正法)이 서로 뒤섞이고, 말세의 풍속[季俗]에는 지혜가 경박한 중생[澆情]들이 쉽게 서로 다투어서 진위를 판가름하기 어려워서 칭찬과 훼방이 뒤바뀐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18조로써 검토하고 삼과(三科)로 풀이하여 성인과 현인이 분명해지고 범속(凡俗)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자와 윤희(尹喜)가 서역으로 건너가서 오랑캐로 태어나 출가하여 노자는 경전과 계율을 설하고 윤희(尹喜)는 부처가 되어 교화를 하였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귀곡선생(鬼谷先生)이 쓴 책이며, 상산사호(商山四皓)4)가 주석을 단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실을 잘 찾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이를 믿고 따르면서 구실로 삼았다.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군자(君子)도 오히려 속일 수 없거늘 하물며 대성(大聖)을 폄하할 수 있겠는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진실이 아님을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세상 사람들이 착각해서 이름이나 문자에 가탁한 것이며, 또한 말이 그 내용에 미치지 못하여 도리어 노자를 욕보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군자(君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무식한 이도(異道)가 부처님의 법과 다투는 것을 과시하려고 귀곡선생과 상산사호의 이름을 가탁해서 『윤희전(尹喜傳)』에 붙여 놓고 이런 이론(異論)을 만들어 범속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하기만 하고 익히지 않는 것은 공자도 허용하지 않았고, 함부로 거짓을 지어내는 것은 노자가 경계하는 것이다. 이 커다란 병폐는 지옥ㆍ아귀ㆍ축생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따져서 바로잡고 이 잘못을 구제해야 한다. 그런데 가르침은 내외(內外)가 있기 때문에 비슷하여 가려내기 어려운 점疑似이 있고, 사람은 성인과 현인이 있기 때문에 흔히 본문(本門)과 적문(迹門)5)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지금 연월을 검증하고 사람이나 그 시기를 살피고 내경(內經)과 외전(外典)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참된 말씀을 채록하여 진위를 가려놓았으니, 한 번 열람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8) 석혜선(釋慧善) 산화론(散花論) 8권
이상은 양주(楊州) 서현사(栖玄寺) 사문 석혜선(釋慧善)이 찬술한 것이다. 혜선은 비담학(毘曇學)에 뛰어났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의할 때는 항상 소승을 인용해서 내용을 증명했다. 그래서 혜선은 경문에 근거해서 차례로 자세하게 풀이했다. 비유하면 모든 별이나 달이 밝은 태양을 돕는 것과 같고, 마치 수많은 꽃잎이 어지럽게 흩어져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산화론(散花論)』이라고 하였다. 서문에서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술의 요체는 말은 간략하게 하면서도 이치는 풍부하게 하는 데 있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저작을 독파하였으나, 지금 그것을 차례로 순서를 매기는 것은 바로 이 원칙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원칙에 매우 익숙한 사람은 거의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접하면 은근하고 문장을 대하면 쉽기만 하다.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군자는 무례한 마음[鄙心]을 생각하고 살펴보도록 하라.” 혜선은 태청(太淸, 547~549) 말에 강릉으로 피했다가 승성(承聖, 552~555) 말년에 관내(關內)로 들어갔는데, 장안(長安)의 구성(舊城)에 있던 숭화사(崇華寺)에 머물렀다. 주국(柱國) 총재(冢宰)가 따로 공양을 올리고 연회를 베풀 정도로 법력이 뛰어났다. 세수 60여 세로 임종을 맞았다.
(9) 석망명(釋亡名) 지도론(至道論) 순덕론(淳德論) 견집론(遣執論) 불살론(不殺論) 거시비론(去是非論) 수공론(修空論) 영유론(影喩論) 법계보인명(法界寶人銘)서문도 아울러 실려 있다. 염식상문(厭食相文) 승애보살전(僧崖菩薩傳)보정(保定) 2년(562)에 성도(成都)에서 소신(燒身)을 하였다. 분신일(焚身日)에 수백 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와서 보았다. 육신과 뼈는 모두 불타서 없어졌지만, 오직 심장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늘에서 꽃이 흩뿌려 내리는 등의 상서로운 모습은 모두 『승애보살전』에 실려 있다. 비장방도 친견했다. 소법사전(韶法師傳)찬(讚)이 함께 실려 있다. 험선지식전(驗善知識傳)육과(陸果)의 『관음응험기(觀音應驗記)』를 본떠 지은 것이다.
이상 12권은 무제(武帝) 때 사문 석망명(釋亡名)이 저술한 것이다. 석망명의 속성은 송(宋)6)씨이며 휘(諱)는 빠진 것 같다. 아마도 남양(南陽)사람인 듯한데, 양(梁)나라 경릉왕(竟陵王)의 친구였다. 일찍부터 결혼하지 않고 있다가 양나라가 패망하자 출가(出家)하고 이름을 고쳐 촉(蜀) 땅으로 옮겨 살았다. 제(齊)나라 왕이 서울로 들어와 가르침을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원래 사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환속하기를 요구했다. 아울러 촉군(蜀郡)으로 소보(少保)를 보내고 따로 편지로써 권유했다. 회답하기를 “여섯 가지 불가함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반부는 대략 이러하다. “사문이 계율을 지키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합니다. 내가 열거한 여섯 가지 조건에 만약 한 가지라도 거짓이 있다면, 살아서는 푸른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고 신령이 나를 꾸짖을 것이며, 죽어서는 무쇠 집게가 나의 혀를 뽑을 것이며 펄펄 끊는 구리물을 입 안에 부을 것입니다. 우러러 해와 달과 별의 빛을 받으며 내 나이 60이 되도록 어두운 방 안에서도 내 마음을 속인 일이 없는데, 하물며 밝은 세계에서 속이겠습니까? 또한 고국이 모두 멸망하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쇠망하였는데, 빈도는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오래도록 견딜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산 속에 자취를 거두어서 속세 밖에서 마음을 거두어 들였고, 남은 목숨을 지탱하고 길러서 지혜로운 업을 도답게 닦을 수 있다면 이것이 저의 본래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정사(精舍)에 몸을 기탁하고 왕성(王城)에서 걸식하면서 힘에 맡겨 도를 행하고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두 번째 저의 소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홀로 언덕과 골짜기에 거처할 것입니다. 어떻게 허물어져가는 몸으로 오랫동안 염부제 땅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문집은 10권이 있는데, 문장이 매우 맑으면서도 소박했으며, 말할 때면 항상 선(善)을 권장하였다. 질박함을 보존하고 화려함을 물리치니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겼다.
(10) 석정애(釋靖藹) 삼보집(三寶集) 11권
이상 1부는 무제(武帝) 때 사문 석정애(釋靖藹)가 여러 경론에 의거해서 편찬했다. 대승을 널리 찬양했으며, 그 빛을 상법의 시대[像代]에 드날렸다.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의 관련된 일들을 기록했으므로 『삼보집』이라고 했다. 석정애는 육신을 혐오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을 버리는 날에 게송을 남겼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나의 몸에 허물이 많음을 보았고, 두 번째는 법을 수호할 수 없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속히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 서둘러 이 몸 자유롭게 하려 하네.
법신이 자유자재하고 나면 육도(六道) 중 어느 곳이나 머무는 곳마다 이익 주며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제하리니.
또다시 업은 마땅히 다하게 될텐데 유위법 또한 그러하고 삼계는 모두 덧없다네. 시절이 오면 자유롭지 못하리니 남에게 죽든 스스로 죽든 끝내 돌아가는 곳은 이곳과 같네.
지혜로운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응당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네. 많은 인연이 이미 다하였으니 나의 업행 오늘에야 끝나는구나.
모두 30여 게송이 있다. 산의 절벽과 나무와 나뭇잎에 피로써 두루 쓰고 나서 목숨을 버렸다.
(11) 석도안(釋道安) 이교론(二敎論)
이상은 1논이다. 무제(武帝) 때 도교道法를 숭상하여 삼교(三敎)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였다. 당시 풍속이 혼란하고 이단이 다투어 발생했다. 비로소 천화(天和) 4년(569) 3월 15일에 임금이 덕승(德僧)ㆍ명유(名儒)ㆍ도사(道士)ㆍ문무백관(文武百官) 2천여 명을 대전(大殿)에 불러 모았다. 황제는 어좌에 올라서 친히 논의를 하여 삼교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였다. 그 달 20일에 다시 소집해서 논의했다. 4월 15일에도 전과 같이 논의했다. 25일에 사예대부(司隸大夫) 진란(甄鸞)이 『소도론(笑道論)』을 임금에게 올렸다. 5월 10일에 여러 대신들을 모아 『소도론』을 평가하고서 옳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고 곧 대전의 뜰에 나가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9월에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세상 풍속이 무지몽매함을 개탄하고 이 『이교론(二敎論)』을 지어서 이치를 분명하게 밝혔다. 12편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외(內外) 이교(二敎)를 근본으로 삼았고, 도교는 독립된 교리로 인정하지 않고 유교의 부류에 편입시켰다. 『역(易)』의 겸겸(謙謙)7)이 바로 그런 부류이다. 그리고 유교의 근본은 옛 선왕을 교주로 삼고, 인의(仁義)ㆍ오상(五常)을 교체(敎體)로 삼았다. 공자는 기술하기만 했지 교주는 아니다. 이에 외교(유교)의 종지는 일신을 다스리거나 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기 때문에 사람과 그 시대에만 극진할 뿐 나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불교[內敎]의 근본은 부처를 교주로 하여, 미혹을 없애고 올바름을 획득하는 데 부처의 가르침을 귀결점으로 삼는다. 여러 도속들은 찬술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의 종지는 자신의 몸만을 잘못의 원인[累]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 내면의 미혹함에 두었다. 그래서 내(內)라고 했다. 도교에서는 천하에서 가장 큰 우환은 육신을 가진 것만한 게 없다고 하니 이 말은 유교와 비슷하다. 그래서 유교[外敎]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외 2교의 이치가 분명해진다. 처음에는 황제가 도교를 중시하고 불교를 가볍게 여겨 불교를 제거하고 도교만을 보존하려 했다. 그러다가 도안의 『이교론』을 보고는 그것에 대항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2교를 모두 없애고 별도로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여 2교에 소속된 사람 중에서 삼교를 통달한 사람을 골라서 구성원으로 삼고 의관을 갖추어서 그 곳에 근무하게 했다. 나머지 관련 사항은 『속고승전』8)과 같다.
16) 진조전역불경록(陳朝傳譯佛經錄) 양(梁)의 국운이 미약해지자 내부에서 재앙과 난리가 일어났다. 북위시대 말기의 대신이던 후경(侯景)9)이 하남(河南)을 통치하게 되자 양(梁)의 황제와 사이가 벌어져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할 것을 계획했는데 하남왕에 봉해지고 나서 양 왕조의 혼란을 틈타 정권을 탈취하고 2년이 경과하고 나서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양(梁)의 상동왕(湘東王)이 먼저 형협(荊峽)에 있으면서 대장군(大將軍) 왕승변(王僧辯)과 진패선(陳霸先) 등으로 금릉(金陵)을 평정하게 했다. 아직 군대가 복귀하기도 전에 상동(湘東)은 서위(西魏)에 의해 멸망하고 왕승변(王僧辯)은 진패선에게 살해당했다. 진패선은 병권을 손에 쥐고 왕으로 칭하며 금릉에 도읍하여 자신의 성으로 국가의 이름을 삼았다. 그의 선조는 오흥(吳興)의 장성(長城) 사람이며 대대로 갑족(甲族)10)이었다. 모습이 일반인과는 달랐는데 키가 9척 2촌이었고 머리는 3척이나 되었으며 손이 무릎까지 내려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했으며 기품이 높고 발랄했다. 여러 사람들이 따르고 존중했는데 불교를 접하면서 양(梁)의 기틀을 회복시켰다. 옛날 건업(建業)에 있던 700여 개의 사찰이 후경(侯景)의 난으로 거의 다 타버려 남은 것이 극히 드물었다. 진(陳)왕조가 흥성하자 모두 수리하고 보수하였다. 새로운 경전을 번역하고 기존의 논서를 강론했고 전날의 모범을 버리지 않았다. 나라를 건립한 태평(太平) 원년(556)에서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정명(禎明) 3년(589)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임금 33년간 유지되면서 그 중 24년은 북주(北周)와 병립하였고 9년은 수(隋)와 병립하였다. 수나라에 항복한 해는 수(隋) 개황(開皇) 9년(589)이다. 전역 승속 3인이 번역한 경(經)ㆍ전(傳)ㆍ논(論)ㆍ소(疏) 등은 도합 50부 총 247권으로 진조(陳朝)의 역경목록을 삼는다.
사문 구나라타(俱那羅陀)48부 242권, 경(經)ㆍ논(論)ㆍ소(疏)ㆍ전어(傳語) 왕자(王子) 월파수나(月婆首那)1부 7권, 경 사문 수보리(須菩提)1부 8권, 경
(1) 구나라타(俱那羅陀) 불아비담경(佛阿毘曇經) 9권 무상의경(無上依經) 2권영정(永定) 2년(558) 남강군(南康郡) 정토사(淨土寺)에서 번역했다. 해절경(解節經)이 경본은 18품인데 여기서는 단지 제4품 1권에 그쳤다. 진제(眞諦)가 간략하게 번역하여 증의(證義)하였을 뿐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세 번째 번역이다. 구마라집과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고, 자세함과 간략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광의법문경(廣義法門經) 승삽다율(僧澀多律)중국말로는 총섭(總攝)이라고 한다. 수선정경(修禪定經) 구사석론(俱舍釋論) 22권 구사론본(俱舍論本) 16권 섭대승론(攝大乘論) 15권천가(天嘉) 4년(563) 광주(廣州) 제지사(制旨寺)에서 번역했다. 혜개(慧愷)가 받아 적었다. 혹 12권이기도 하다. 입세아비담(立世阿毘曇) 10권영정(永定) 2년(558)에 번역했다. 불성론(佛性論) 4권 사제론(四諦論) 4권 승가론(僧佉論) 3권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 3권두 번째 번역이다. 원위(元魏) 불타선다(佛陀扇多)가 출간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대공론(大空論) 3권예장(豫章) 서은사(栖隱寺)에서 번역했다.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3권임천군(臨川郡)에서 번역되었다. 아울러 소(疏) 3권이 있다. 금칠십론(金七十論) 3권 구사론게(俱舍論偈) 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 율이십이명료론(律二十二明了論)『명료론(明了論)』이라고도 한다. 아울러 소(疏) 5권이 있다. 대반열반경론(大般涅槃經論) 유교론(遺敎論) 삼무성론(三無性論) 반질론(反質論) 타부론(墮負論) 구나마저수상론(求那摩底隨相論)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성취삼승론(成就三乘論) 정설도리론(正說道理論) 의업론(意業論) 집이부론(執異部論) 불아비담(佛阿毘曇) 기신론(起信論) 해권론(解捲論) 사진론(思塵論) 유식논문의합(唯識論文義合) 1권두 번째 출간이다. 원위(元魏) 반야류지(般若流支)가 출간한 것과는 다르다. 임천군(臨川郡)에서 번역했다. 정론석의(正論釋義) 5권진안(晉安)의 불력사(佛力寺)에서 출간했다. 불성의(佛性義) 3권 선정의(禪定義) 구사론소(俱舍論疏) 60권 금강반야소합(金剛般若疏合) 11권 십팔부론소(十八部論疏) 10권 해절경소(解節經疏) 4권 무상의경소(無上依經疏) 4권 여실론소(如實論疏) 3권 사제론소(四諦論疏) 3권 파아론소(破我論疏) 수상론중십육제소(隨相論中十六諦疏)시흥군(始興郡)에서 번역했다. 바수반두전(婆藪盤豆傳) 1권 중경통서(衆經通序) 2권 번외국어(翻外國語) 7권일명 『잡사(雜事)』라고도 하며, 일명 『구사론인연사(俱舍論因緣事)』라고도 한다.
이상 48부 모두 232권은 주(周) 무제(武帝) 때 서천축(西天竺) 우선니국(優禪尼國) 삼장법사, 중국말로 친의(親依)인(또한 진제(眞諦)라고 하기도 한다), 구나라타(拘那羅陀)의 번역이다. 그는 진씨(陳氏) 영정(永定) 원년(557) 병자(丙子)년11)에서 태건(太建) 초 기축(己丑, 569)년까지 모두 14년 동안 불도를 가슴에 품고 사방을 다녔다. 머무는 곳마다 바로 번역을 하였다. 아울러 조비(曹毘)의 『삼장력전(三藏歷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은 태건(太建) 원년(569) 정월 11일 오시(午時)에 입적했다. 세수 71세였다. 남긴 글을 모두 신족(神足) 제자(弟子) 지휴(智休)에게 부촉했는데, 이를 삼장사(三藏寺) 사문 법해(法海)가 수령하였다. 스님闍梨12)의 문장 중에 이미 부축(部軸)이 된 것을 모았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님이 가져온 외국(外國) 경론(經論)은 모두 다라수엽(多羅樹葉:貝葉)으로 된 것이며 모두 240묶음[縛]이였다. 만약 이것을 중국 종이에 써서 번역하게 되면 2만여 권이 될 것이다. 지금 번역한 것은 고작 몇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패엽으로 된 범서는 이미 600여권이나 있었는데, 양(梁)대에 이르기까지 300권으로 감소했다. 이것으로 불법의 대해가 불가사의함을 알 수 있다.” 그는 범본 『화엄경』ㆍ『열반경』ㆍ『금광명경』을 가지고 와서 건강(建康) 이외는 대부분 영남 광주의 제지사(制旨寺)와 왕원사(王園寺) 두 절에도 있었다. 부사의한 홍법(弘法) 보살이 와서 함께 연구하고 법(法)의 등불을 전하고 계속해서 타오르게 해서 가려지지 않고 세상 저 모퉁이까지 비추기를 바란다.
(2) 월파수나(月婆首那)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7권
이상은 주(周) 무제(武帝) 때 월파수나(月婆首那)의 번역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났고 명랑하였다. 북위로부터 남제에 이르렀으며, 양(梁)나라에서 진(陳)나라로 이어졌다. 대대로 불경을 배우고 그 의미를 정밀하게 탐구했다. 음운학(音韻學)에 정통했고 아울러 방언(方言)에도 익숙했다. 월파수나가 앞서 업(鄴)에 있을 때 북제(北齊)가 위(魏)에게서 선양을 받고 여러 외국 방문객들의 귀환과 체류를 맡아 뜻대로 했다. 월파수나는 귀향할 것을 청해서 강남江左13)을 경유했는데, 양무제에 의해서 체류하게 되었다. 칙령으로 그 곳에서 외국을 사신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태청(太淸) 2년(548)에 중국말로 덕현(德賢)이라고 하는 우전국 바라문승(婆羅門僧) 구나발타(求那跋陀)가 홀연히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의 범본을 가지고 나타났다. 월파수나가 이를 널리 유통시키기를 기원하며 기약을 간청하니 구나발타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활연히 그에게 범본을 주었다. 월파수나는 이것을 보존하고 간직하게 되자 이는 만나기 어려운 기연이라 생각하였으나, 때마침 후경(侯景)의 난을 만나서 번역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범본을 등에 지고 동서로 외우면서 공양드리다가 진(陳)나라 천가(天嘉) 을유(乙酉, 565)년에 비로소 강주(江州) 흥업사(興業寺)에서 번역하게 되었다. 사문 지흔(智昕)이 중국말로 받아 적었는데 모두 60일이 걸렸다. 강주자사(江州刺史) 의동(儀同)인 황법구(黃法氍)가 시주자가 되었다. 승정(僧正) 사문 석혜공(釋慧恭)과 삼학덕승(三學德僧)이 감장(監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은 경전 후서에 모두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번거롭게 기술하지는 않겠다. 월파수나가 비록 혼자의 몸이었지만 경전을 가지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위(魏)ㆍ제(齊)ㆍ양(梁)ㆍ진(陳)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계속해서 번역을 했다.
(3) 수보리(須菩提) 대승보운경(大乘寶雲經) 8권두 번째 번역이다. 양(梁)나라 때 만다라(曼陀羅)가 번역한 7권과는 역본은 같으나, 다른 번역이다.
이상은 주(周) 무제 때 부남국(扶南國) 사문 중국말로는 선길(善吉)인 수보리(須菩提)가 양도(揚都)의 성 안에 있는 지경사(至敬寺)에서 진(陳)나라의 임금을 위해서 번역했다. 일승사에 있는 『중경목록(衆經目錄)』에 보인다.14)
17) 수조전역불경록(隋朝傳譯佛經錄) 천명(天命)이 수나라에 있어서 다섯 가지 운수를 받았으며, 황제의 통치력은 융성하여 9주(州)를 안택하게 했다. 그래서 탄생할 때 처음에는 신령한 빛이 있어서 환하게 비추었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는 신령한 조짐이 다투어 일어났다. 하늘이 내린 단서들은 거북의 문양龜文을 내보이고, 물에서는 오색이 나타났다. 땅에서 맑은 물이 솟고, 산에서는 메아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구름은 감로를 내려서 경사를 나타냈고, 구슬은 밝게 빛나고 돌이 변화했다.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다. 짐승들은 보통과는 다른 상서로움을 보이고, 초목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단서를 보였다. 이것으로 예전에 들었던 칠보(七寶)가 단지 금륜(金輪)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 신이함이 사계절에 옥촉(玉燭)15)으로 두루 조화를 이루었다. 적약(赤若)16)의 해(581)가 지나자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니, 흙[土]의 기운이 물[水]의 운행을 제어하여 폐허가 된 불일(佛日)을 부흥시켰고, 불[火] 기운이 나무[木]의 기운을 타고 운행하듯이 한 시대를 열어 개황(開皇)이라고 연호를 시작했다. 고조(高祖) 주(周) 정제(靖帝) 대정(大定) 2년(582)에 황룡(黃龍)이 옛 땅舊地에 내려왔고 상서로운 구름[卿雲]이 궁성 위에 나타났다. 2월 13일에 주 왕실이 수(隋)에 나라를 넘겼다. 경명(景命)17)이 이미 이르러 황색(黃色)을 착용함으로써 검은 것을 교체했다. 주(周)의 육관(六官)18) 제도를 폐지하고 한(漢)의 오성(五省)19) 제도를 설치했다. 불일(佛日)이 다시 밝아지고 법수(法水)가 소통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전주(前周) 사문이 서역(西域)에서 범어로 된 경문 200여 권을 가지고 때 맞춰 도착했다. 황제가 개황 2년(582) 음력 2월에 사방(司訪)에게 명해서 번역하도록 했다. 늦은 여름에 조칙(詔勅)을 내려 말했다. “은(殷)나라가 다섯 번 수도를 옮긴 것은 백성들이 죽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땅의 길흉이 수명의 길고 짧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꾀하여 옛 것(수도)을 버린 것이니, 비유하면 농사 지어 가을의 수확을 바라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용수(龍首)의 산야는 하천과 평원이 수려하고 수목이 잘 자라나므로 도읍을 세우기에 마땅한 곳이다.” 국가의 기틀을 안정시켜 영원토록 견고하게 하였으니, 무궁한 흥업이 여기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성을 쌓고는 대흥성(大興城)이라고 하였고, 궁전(宮殿)을 올려 대흥전(大興殿)이라고 하였으며, 문(門)을 세워 대흥문(大興門)이라고 불렀다. 현(縣)을 설치해서 대흥현(大興縣)이라고 하였으며, 원(園)을 조성해서 대흥원(大興園)이라고 하였고, 절을 건립해서 대흥선사(大興善寺)라고 하였다. 삼보(三寶)의 자애로운 교화가 여기서부터 흥성하게 되었다. 온 나라에 어진 교화의 덕[仁風]이 이것 때문에 원대(遠大)해졌고, 가람(伽藍)은 번창했으며 법우(法宇)는 빽빽했다. 훌륭한 인재들이 어깨를 견주며 진심으로 몰려왔으며, 인수(仁壽)라고 연호를 고치고 보탑(寶塔)을 세웠다. 백 개 이상의 주(州)에서 모두 영험에 감응했음을 아뢴 것이 이때였다. 사해(四海)가 고요하고 아홉 오랑캐가 소란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30만 명에 이르렀고, 사찰은 5천 개소에 달했다. 번역한 승속道俗 19명이었고 번역한 경론은 5백여 권이다. 양제(煬帝) 때까지 계속되어 수도 동도(東都)의 길흉을 점쳐[卜宅]20) 보고서 낙빈(洛濱)의 상림원(上林園)에 번경관(翻經館)을 설치하고 사사(四事)21)를 공양했으니 언제나 모자람이 없게 했다. 새로운 경전을 번역했는데 모두 별록과 같다. 한 왕조[朝] 두 임금 37년에 걸쳐 승속 20여 명이 번역한 경(經)ㆍ론(論)ㆍ전(傳)ㆍ법(法) 등은 도합 90부 515권으로 수(隋)대의 전역 목록으로 삼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달마반야(達摩般若) 대수업보차별경(大隋業報差別經)개황(開皇) 2년(582) 3월에 번역했다. 두 번째 출간이다. 『죄업보응경(罪業報應經)』과는 동본이고 약간 다르다.
이상 1부는 원위(元魏) 때 바라문(婆羅門) 우바새(優婆塞)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의 장자(長子)이며, 중국말로는 법지(法智)인 달마반야(達摩般若)가 번역하였다. 그는 조상 대대로 번역에 종사했다. 북제(北齊) 말엽에 소현도(昭玄都)가 되었다가 북제가 평정되자 불법은 허물어졌다. 법지는 승직에 머물다가 속관(俗官)으로 전임되어 양주(洋州)의 양천(洋川) 군수에 임명되었다. 수나라가 선위(禪位)를 받자 불교에 관련된 조칙도 뒤따랐다. 칙령으로 법지를 불러다가 다시 번역을 관장하게 하였다.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번역하여 출간했다. 법지는 중국말과 범어를 둘 다 매우 훌륭하게 했기 때문에 범본을 잡고 스스로 번역을 하였으므로 따로 말을 전해서 옮기는 수고로움이 없었다. 대흥선사 사문 성도(成都)의 석지현(釋智鉉)이 받아 적고 문장과 내용을 조리 있게 바로잡았다. 일엄사(日嚴寺) 사문 조군(趙郡)의 석언종(釋彦琮)이 서문을 썼다.
(2) 비니다류지(毘尼多流支) 상두정사경(象頭精舍經)개황(開皇) 2년(582) 2월에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다.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과는 동본이다. 대승방광총지경(大乘方廣總持經)개황 2년(582) 7월에 번역했다.
이상 2부는 북천축 오장국(烏萇國) 삼장법사(三藏法師)이며, 중국말로는 멸희(滅喜)인 비니다류지(毘尼多流支)의 번역이다. 그는 5백 유순(由旬)을 멀다하지 않고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중국의 불교가 성대한 것을 보고 머물게 되었다.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번역했는데, 급사(給事) 이도보(李道寶)와 반야류지(般若流支)의 둘째 아들인 담피(曇皮)가 말을 전했다. 대흥선사 사문 석법찬(釋法纂)이 받아 적어 중국말로 만들고 아울러 문장의 의미를 바로잡았다. 사문 언종(彦琮)은 서문을 썼다.
(3)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 대방등일장경(大方等日藏經) 15권개황(開皇) 4년(584) 5월에 번역을 시작해서 5년 2월에 마쳤다. 사문 지현(智鉉)ㆍ도수(道邃)ㆍ혜헌(慧獻)이 조정에 요청하여 유질학사(庾質學士) 비장방(費長房) 등이 받아 적었다. 역장엄삼매경(力莊嚴三昧經) 3권개황 5년(585) 10월에 출간했으며 비장방이 받아 적었다.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 2권개황 3년(583) 정월에 번역했으며, 지현(智鉉)이 받아 적었다. 『문수사리신력경(文殊師利神力經)』ㆍ『승금색광명덕녀경(勝金色光明德女經)』ㆍ『대정법문경(大淨法門經)』과는 역본은 같으나, 다른 번역이다. 덕호장자경(德護長者經) 2권개황 3년(583) 6월에 번역했으며, 승곤(僧琨)이 받아 적었다. 일명 『굴다장자경(掘多長者經)』이라고 한다. 『신일도본(申日兜本)』,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는 동본이다. 연화면경(蓮華面經) 2권개황 4년(584) 3월에 출간했다. 대운륜청우경(大雲輪請雨經) 2권5년(585) 정월에 출간했다. 『대운경(大雲經)』의 첫 번째 「백품(百品)」이다. 뇌고녀경(牢固女經)2년(582) 12월에 번역했다. 백불명경(百佛名經)2년(582) 10월에 번역했다. 이상 4경은 혜헌(慧獻)이 받아 적었다.
이상 8부 모두 28권은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萇國) 삼장법사 고제(高齊)의 소현통(昭玄統)이었던 중국말로는 존칭(尊稱)인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번역하였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다섯 천축(天竺) 가운데 네 나라를 여행했다. 크고 작은 여러 국가를 60여 년에 걸쳐서 다녔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훌륭한 유적 중에서는 답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해(南海)까지 다 둘러본 이후 북천축으로 왔다가 다시 여여국(茹茹國)으로 갔는데, 그 나라가 멸망하자 업도(鄴都)로 들어왔다. 바로 문선(文宣)황제를 만날 당시 비로소 40세가 되었다. 나련제야사는 골격이 굳건하여 사뭇 다른 사람과 달라서 문선제가 특별히 대우하고 매우 깊이 의지하였다. 그는 이치를 드러내어 여기에서 통괄하였으며 당시에도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모두 『제세록(齊世錄)』에 갖춰져 있다. 북제(北齊)가 북주(北周)에 멸망당하자 병을 핑계로漳濱23) 쉬었다. 개황(開皇) 원년(581)에 새로운 범어 경전이 도착하자, 칙령으로 사람을 보내 나련제야사를 초빙했다. 2년 7월에 서울에 도달하자 정성스럽게 노고를 치하하고 바로 칙령으로 대흥선사(大興善寺)에 거처하게 하였다. 훌륭한 공양물을 공급함으로써 불법의 중요한 인사로 여겼다. 그해 겨울 끝무렵까지 번역을 계속하였는데, 사문 승침(僧琛)ㆍ명분(明芬)과 급사(給事) 이도보(李道寶)ㆍ학사(學士) 담피(曇皮) 등 승속 4인이 다시 말을 다듬고 경성(京城) 대덕(大德) 소현통(昭玄統) 사문 담연(曇延)과 소현도(昭玄都) 대흥선사(大興善寺) 주지인 사문 영장(靈藏) 등 20여 대덕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수하고 관장해서 5년(585) 10월에 교감이 모두 끝났다. 나련제야사는 90여 세였으며, 9년(589)이 되어 입적했다. 별전이 있고 번역한 경전은 모두 사문 언종(彦琮)이 서문을 썼다.
(4) 석승취(釋僧就) 신합대집경(新合大集經) 60권
이상은 초제사(招提寺) 사문 석승취(釋僧就)가 개황(開皇) 6년(586)에 새로 합쳐 집성한 것이다. 『장방록』에서는 “승취는 어려서 출가하여 보방학(寶坊學)24)만을 전문적으로 닦았다”고 하였다. 범본에 의거하면 이 『대집경(大集經)』은 모두 10만 게송인데, 만약 모두 완전하게 번역한다면, 3백 권은 될 것이다. 사나굴다 삼장은 늘 이렇게 말했다. “우전국(于塡國) 동남쪽 2천여 리에 차구가국(遮拘迦國)이 있었다. 그 곳의 왕은 독실한 신자로서 대승을 신봉하였다. 여러 나라의 명승(名僧)들이 그 나라 국경에 들어오면 모두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만약 소승학자면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돌려보내고, 대승인이면 머물기를 청하고 공양하였다. 왕궁에는 친히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ㆍ『대집경(大集經)』ㆍ『화엄경(華嚴經)』 등 3부(部) 대경(大經)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0만 게송이다. 왕이 몸소 수지하였고, 자물쇠를 채워놓고서 읽을 때는 문을 열고서 향과 꽃으로 공양을 하였다. 그리고 도량 안은 갖가지로 장엄하고 많은 보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모든 곳에 여러 가지 꽃을 달고 제철이나 제철이 아닌 과일을 갖추고서 여러 어린 왕자들을 불러들여 장경각에 오게 해서 예배하게 했다.” 그 나라에 대해 말하였다. “이 나라에서 동남쪽 20여 리를 가면 몹시 험한 바위산이 있는데 그 곳에 『대집경(大集經)』ㆍ『화엄경(華嚴經)』ㆍ『방등경(方等經)』ㆍ『보적경(寶積經)』ㆍ『능가경(楞伽經)』ㆍ『방광경(方廣經)』과 『사리불다라니경(舍利弗陀羅尼經)』ㆍ『화취다라니경(花聚陀羅尼經)』ㆍ『도살라장경(都薩羅藏經)』ㆍ『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ㆍ『팔부반야경(八部般若經)』ㆍ『대운경(大雲經)』 등 12부 경전을 안치했는데, 모두 10만 게송이다. 그래서 이곳을 국법으로 서로 전수하고 수호하여 감시하게 했다.” 아울러 말하였다. “멸진정(滅盡定)에 든 세 아라한(阿羅漢)이 그 산의 동굴 속에서 고요히 선정에 들어 그윽하게 위호하고 있는데, 반달이나 한 달에 한 번 혹 어떤 스님들이 산에 가서 아라한을 위해서 머리를 깎아 준다.” 진실하구나. 신통한 법력[神力]이여, 진실로 사실과 합치되는구나. 머리를 깎자 다시 머리칼이 났지만, 멸진정에 든 상태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헤아리기 어려운 그 복덕의 경지에서 이러한 보배를 보호하여 지니었다. 바라건대 앞으로 현명한 왕과 뛰어난 군주와 여러 현자들이 훌륭한 성인을 이어서 불법을 홍포하고 교화하는 임금이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널리 유통시켜, 다스리는 지역 내에서는 선(善)이 숭상되고 전해진다는 소식을 듣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록해두었으나 성인과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범부의 의식은 점점 혼미해져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요점만을 가려 뽑아서 베꼈다. 그래서 도착한 범본의 부권(部卷)은 협소하고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도착한 것이 간략하면 번역도 간략하며, 도착한 것이 자세하면 또한 자세하게 번역했다. 이러한 연유로 참고로 삼은 것은 앞서 훌륭한 학자인 지루가참(支婁迦讖)과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이다. 혹 27권이며, 혹은 30권이며, 어떤 것은 31권으로서 권축이 확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널리 전파된 것을 승취는 늘 한탄했다.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고제(高齊:북제) 때 『월장경(月藏經)』 12권을 번역했고, 당시 다시 개황(開皇) 연간(581~600)에 『일장경(日藏經)』 15권을 번역했는데, 모두 『대집경』 경본의 구품(舊品)이었기에 뛸 듯이 기뻐하며 곧바로 합쳐서 60축을 완성했다. 승취가 비록 첨부해 넣었지만 정밀하게 비교하질 못했다.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홍경(洪慶)이란 자가 있었는데, 식견과 도량이 매우 뛰어나서 황후(皇后)를 위해서 검토와 교정을 통해서 여러 경전의 양장(兩藏)을 뽑아서 올렸다. 그리고 다시 승취가 합한 것을 바로잡고 이름을 달았는데 매우 잘 정리했다. 지금 번역한 것을 보면 그 사이에 대집(大集) 부분이 있다. 간략하게 가려뽑은 것을 완성한다면 응당 100권이 될 것이다. 본래 범문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토석(土石)이 부서져서 미세한 티끌이 되면 스스로 결집하려는 작용력이 없지만, 토석이 뭉쳐져서 흙덩어리[坤阜]가 되면 만물을 생산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공능이 생긴다. 하물며 나뭇가지가 줄기를 떠나 무성하기를 바라거나 흐르는 물이 근원을 버리고 널리 적셔 윤택하기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우리 수나라 황제께서 탄생하심은 천시(天時)에 조응한 것이고, 지리(地理)에 순응한 것이다. 구주(九州)가 서로 떨어진 것이 3백 년이 넘었는데, 10만 게송의 나뉨은 천 년에 비유할 수 있다. 흩어졌던 경전이 다시 모이자 『대집경』의 경문에서 모여 그 광채가 빛났고, 갈라지고 무너졌던 지역이 마침내 소통되었고, 소통되자 크게 흥성한 수나라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제위(帝位)를 장악한 금륜(金輪)께서 대승의 불법을 가르쳐서 널리 홍포한 것이 아니라면 이전의 황제 중에 누가 또 국토개척과 불법의 선양을 이렇게 해냈단 말인가?
(5) 사나굴다(闍那崛多)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60권개황(開皇) 7년(587) 7월에 시작해서 11년(591) 2월에 마쳤다. 승담(僧曇)ㆍ학사(學士) 비장방ㆍ유빙(劉憑) 등이 받아 적었다. 언종(彦琮)이 서문을 썼다. 법거다라니경(法炬陀羅尼經) 20권12년(592) 4월에 시작해서 14년(594) 6월에 마쳤다. 도수(道邃) 등이 받아 적었다. 위덕다라니경(威德陀羅尼經) 20권15년(595) 7월에 시작해서 16년(596) 12월에 마쳤다. 승곤(僧琨) 등이 받아 적었다. 제불호념경(諸佛護念經) 10권14년(594) 10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마쳤다. 승담(僧曇) 등이 받아 적었다. 오천오백불명경(五千五百佛名經) 8권13년(593) 8월에 시작해서 14년(594) 9월에 마쳤다. 승담 등이 받아 적었다. 대집현호보살경(大集賢護菩薩經) 6권14년(594) 12월에 시작해서 15년(595) 2월에 마쳤다. 명분(明芬) 등이 받아 적었다. 성선주천자소문경(聖善住天子所問經) 4권15년(595) 4월에 출간했다. 도수 등이 받아 적었다. 관찰제법행경(觀察諸法行經) 4권15년(595) 4월 24일에 시작해서 5월 25일에 마쳤다. 비장방 등이 받아 적었다. 사동자경(四童子經) 3권13년(593) 5월에 시작해서 7월에 마쳤다. 승곤(僧琨)이 받아 적었다. 제법본무경(諸法本無經) 3권개황 15년(595) 6월에 시작해서 7월에 마쳤다. 유빙(劉憑) 등이 받아 적었다. 허공잉보살경(虛空孕菩薩經) 2권7년(587) 정월에 시작해서 3월에 마쳤다. 승담(僧曇)이 받아 적고 언종(彦琮)이 서문을 썼다. 대방등대운청우경(大方等大雲請雨經)『당록(唐錄)』에 보인다. 월상녀경(月上女經) 2권11년(591) 4월에 시작해서 6월에 마쳤다. 유빙(劉憑)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2권11년(591) 7월에 시작해서 9월에 마쳤다. 비장방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무소유보살경(無所有菩薩經) 4권『당록(唐錄)』에 보인다. 이식경(移識經) 2권11년(591) 11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마쳤다. 비장방이 받아 적었다. 비유왕경(譬喩王經) 2권15년(595) 5월에 시작해서 6월에 마쳤다. 도밀(道密) 등이 받아 적었다. 호국보살경(護國菩薩經) 2권『당록(唐錄)』에 보인다. 발각정심경(發覺淨心經) 2권15년(595) 9월 시작해서 10월에 마쳤다. 승곤(僧琨)이 받아 적었다. 일향출생보살경(一向出生菩薩經)5년(585) 11월 시작해서 12월에 마쳤다. 승담(僧曇) 등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불화엄입여래부사의경계경(佛華嚴入如來不思議境界經) 2권『당록』에 보인다. 대위등선인문의경(大威燈仙人問疑經)6년(586) 정월에 시작해서 2월에 마쳤다. 도수(道邃)가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문수시리행경(文殊尸利行經)6년(586) 3월에 시작해서 4월에 마쳤다. 승담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동방최승등왕여래경(東方最勝燈王如來經)『당록』에 보인다. 팔불명호경(八佛名號經)6년(586) 5월에 시작해서 6월에 마쳤다. 도수가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희유교량공덕경(希有挍量功德經)6년(586) 6월에 시작해서 그 달에 마쳤다. 승담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선공경사경(善恭敬師經)6년(586) 7월에 시작해서 8월에 마쳤다. 승담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여래방편선교주경(如來方便善巧呪經)7년(587) 정월에 시작해서 2월에 마쳤다. 승담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불공견삭관세음심주경(不空羂索觀世音心呪經)7년(587) 4월에 시작해서 5월에 마쳤다. 승담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십이불명신주제장멸죄경(十二佛名神呪除障滅罪經)7년(587) 5월에 출간했다. 승곤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금강장다라니경(金剛場陀羅尼經)7년(587) 6월에 번역을 시작해서 8월에 마쳤다. 승곤이 받아 적고 언종이 서문을 썼다. 제법최상왕경(諸法最上王經)15년(595)에 번역을 시작해서 7월에 마쳤다. 25) 명분(明芬)이 받아 적었다. 입법계경(入法界經)15년(595) 7월에 번역을 시작해서 8월에 마쳤다. 도밀(道密) 등이 받아 적었다. 상주천자문경(商主天子問經)15년(595) 8월에 번역을 시작해서 9월에 마쳤다. 번경학사 비장방(費長房) 등이 받아 적었다. 출생보리경(出生菩提經)15년(595) 10월에 번역을 마쳤다. 번경학사 유빙(劉憑)이 받아 적었다. 금광명경촉루품은주품(金光明經囑累品銀主品)양(涼)나라 때 담무참(曇無讖)이 출간한 4권 본과 양(梁)나라 때 진제(眞諦)가 번역한 6권 본, 그리고 주(周)나라 때 사나굴다(闍那崛多)가 출간한 5권 본은 모두 이 두 품이 없다. 그래서 지금 이것을 다시 출간했다. 대승삼취참회경(大乘三聚懺悔經)『당록(唐錄)』에 보인다.
이상 37부 모두 176권은 북천축(北天竺) 건달국(犍達國) 삼장법사(三藏法師) 중국말로 지덕(至德) 또는 불덕(佛德)이라고도 하는 사나굴다(闍那崛多)의 번역이다. 그는 주(周) 명제(明帝) 때 무성(武成, 559~560)년 초에 동학(同學) 야사굴다(耶舍崛多)와 함께 스승인 마가타국(摩伽陀國) 삼장선사(三藏禪師) 사나야사(闍那耶舍)를 따라 범어 경전을 가지고 입국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중국말方言을 20여 년 동안 익혔는데, 사나굴다가 가장 훌륭했다. 주(周)나라 때에는 서울에 있다가 촉(蜀)땅으로 갔는데 가는 곳마다 새로운 경전을 번역했다. 혹 기존에 빠진 것을 만나면 문장이나 내용을 모두 바로잡았다. 당시 삿된 무리가 소란을 일으켜 임금의 권위에 대항했다. 건덕(建德) 3년(574)에 도교와 불교를 탄압하는 상황 속에서 중국의 칠중(七衆)26)이 모두 속인의 옷을 걸치게 되었다. 사나굴다의 스승과 도반도 또한 유혹과 핍박을 받게 되었으나, 원래부터 목숨을 버리더라도 사방을 여행할 것을 맹세했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불교를 홍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업을 삼기로 했다. 그러나 불법이 능멸되는 상황을 만났기 때문에 본래의 의도와 어긋나게 되자, 본래부터 자신은 인도 사람[梵人]임을 핑계로 중국(속인)의 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옛날에 세운 뜻을 지키면서 다시 돌아갈 것을 부탁하니, 나라에서 그들의 명성을 듣고 예를 갖추어 보내 주었다. 우리 중국은 진실로 염부제의 육지와 바다이다. 먼 변방의 의복이나 생김새가 다른 족속들이 모두 쏟아져 들어오고자 하는 곳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 안락하고 편안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이곳에 오기를 희망했다. 중국의 문화를 사모하여 방문한 이들은 수용하고, 고향을 그리워하여 가고자 하는 이는 막지 않았다. 그가 다시 북인도로 향하는 길에 돌궐(突厥)을 경유하다가 타발가한(他鉢可汗)27)을 만나게 되었는데, 간곡하게 머물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서로 왕복하면서 이야기했다. “주(周)나라에는 흥성하다가 붕괴됨이 있어 스님께서 수고롭게도 갔다가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흥하고 폐함이 없으니 편안히 머무시길 바랍니다. 물자를 공급하고 공양하여 마땅히 마음에 맞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10여 년을 머물렀는데, 스승과 동학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오직 사나굴다만 살아남았다. 당시 상주(相州)의 사문인 보섬(寶暹)ㆍ도수(道邃)ㆍ지주(智周)ㆍ승위(僧威)ㆍ법보(法寶)ㆍ승담(僧曇)ㆍ지조(智照)ㆍ승률(僧律) 등 11인이 제(齊)나라 무평(武平) 6년(570)에 서로 약속하여 서역을 여행하고서 7년 만에 돌아오는 길에 범본 경전 260부를 가지고 돌궐에 이르렀다. 주(周)나라가 제(齊)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불법을 파괴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돌아가려고 해도 불가능했으므로 그 나라(돌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나굴다[至德]를 만났다. 마치 목마를 때 물을 마신 것 같았으며, 어둠 속에서 불빛을 만난 듯 했다. 바로 새로 가져온 경전을 함께 살펴보고는 사나굴다에게 경전의 제목과 표제를 번역하여 옛 목록과 비교하고 대조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더욱 편리하게 되어 있음을 느꼈고, 앞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었다. 승률 등은 진심으로 내심 각자 보배를 얻고 뛰어난 인물을 만났으니 헛되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됨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함께 향을 사르고 번역하기를 맹서했다. 수나라가 선양을 받자 불법은 곧바로 크게 흥기했다. 지주(智周) 등이 경전을 가지고 온 것은 시운(時運)보다 앞선 것이었다. 개황(開皇) 원년(581) 12월[季冬]에 이르러 도착하였다. 부사(付司)에게 칙령을 내려 사람을 찾아서 번역하도록 했다. 사나굴다가 개황 4년(584)에 비로소 입국하였다. 나라 안 곳곳에서 선행을 일으키고 불법을 크게 선양하였다. 개황 5년(585)에 칙령을 내려 사나굴다에게 바라문(婆羅門) 사문 야나갈다(若那竭多)와 개부(開府)의 고공(高恭), 공식도독(恭息都督)인 고천노(高天奴)ㆍ고화인(高和仁), 그리고 바라문 사문 비사달(毘舍達) 등 승속[道俗] 6인이 내사내성(內史內省)에서 범어 고서와 천문[乾文]에 관한 글들을 번역하게 했다. 이때 광제사(廣濟寺)에는 야사(耶舍) 혼자 있었다. 야사가 번역을 행한 지 7년 만에 칙령으로 사나굴다와 함께 번역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왕래하며 12년 만에 경서 번역을 마무리하였다. 합치면 모두 2백여 권이 되었는데, 황제에게 나아가 마쳤다고 아뢰었다. 이때 야사는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드디어 사나굴다에게 칙령을 내려 번역을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여 법석(法席)을 옮겨 대흥선사로 가게 되었다. 다시 바라문 사문 달마급다(達摩笈多)와 고천노(高天奴)ㆍ고화인(高和仁) 형제 등을 불러다가 함께 번역을 하였다. 또한 승휴(僧休)ㆍ법찬(法粲)ㆍ법경(法經)ㆍ혜장(慧藏)ㆍ홍준(洪遵)ㆍ혜원(慧遠)ㆍ법찬(法纂)ㆍ승휘(僧暉)ㆍ명목(明穆)ㆍ담천(曇遷) 등 10대덕을 증원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도록 하고 방향을 바로잡았다. 14부(部)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 76권은 모두 다른 곳에서 11년 전에 사나굴다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사문 언종(彦琮)이 서문을 단 것은 모두 17부이고, 『법거위덕경(法炬威德經)』 등 89권이다. 12년(592)에 이르러 대흥선사(大興善寺) 선당(禪堂) 안에서 번역한 것이다. 사문 달마급다와 고천노 형제 등이 도왔고, 사문 명목(明穆)과 사문 언종(彦琮)이 거듭 범본과 대조하고 다시금 교감하고 문장의 의미를 정리했다. 그 외에도 90여 부가 더 있었는데, 계속해서 번역을 마친 것은 첨부해서 실었다. 우러러 생각해 보면 여래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말씀이 갖가지 중생들의 몽매함을 일깨워 주는 것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가섭과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梵音]을 직접 듣고 결집하여 패엽[皮牒]에 기록한 것은 마치 횃불을 들고 어두운 밤을 밝힌 것과 같다. 그러나 후한에서 지금까지 나라와 풍속이 달라서 번역하여 문장으로 옮긴 것은 반딧불이 방안을 밝힌 것과 같다. 바라는 것은 부싯돌의 불꽃으로 태양의 그 광채를 계승하여 그림자로써 광명을 전하는 것이다. 불법의 요체는 계속 흘러 중생들을 윤택하게 적시는 것이 끊임이 없을 것이다. 만약 진위와 본말을 논의하자면 같은 위치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상 6경 11권은 또한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摩笈多) 두 스님이 흥선사(興善寺)에서 계속해서 번역한 것이다. 『장방록』에서는 제명이 빠져 있다. 현재 입장(入藏)된 경전을 찾아보니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싣는다.
(7) 석법상(釋法上) 증일수(增一數) 40권여러 경론에 있는 법수(法數) 가운데 1에서 10까지, 10에서 100까지, 내지 천에서 만까지를 요약했다. 마치 법수의 숲과 같다. 불성론(佛性論) 2권 중경록(衆經錄)
이상 3부 모두 43권은 상주(相州) 전정국사(前定國寺) 사문 석법상(釋法上)이 찬술했다. 법상의 계행은 산같이 준엄하고 드높았으며, 지혜는 바다 같이 그윽하고 깊었다. 그의 덕은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했고, 위엄은 동물도 숙연하게 했다. 그래서 북위와 북제 시대를 이어서 소현통ㆍ소현도[統都]가 되었는데, 그가 관할한 승려가 3백만이었다. 법상이 40여 년간 기강을 잡았으며, 문선제(文宣帝)의 시대가 됐을 때 성대하게 불경을 홍포했다. 법상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되어 사람들을 모으고 화해시켜서 내외의 학문을 모두 선양하고, 불교 승려나 일반 학자들을 모두 윤택하게 했다. 이 주춧돌[柱石]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기둥과 대들보를 세우겠는가? 또한 그의 훌륭한 행업이 밝게 드러나자 아름다운 소문은 빠르게 먼 지방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고구려국(高句麗國) 대승상(大承相) 왕고덕(王高德)은 깊이 정법을 품고 대승(大乘)을 존중하여 불법을 전파시켜 바다 끝까지 가피를 입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법의 근원과 연유(緣由)를 헤아릴 길이 없었고, 서쪽 땅에서 동쪽 땅으로 불법이 건너온 때와 시대와 황제가 누구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의 조목을 모두 기록하여 승려 의연(義淵)을 업성(鄴城)으로 파견하여 아직 듣지 못한 일들을 조정에 아뢰게 하였다. 그 글을 대략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래 지금까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또 천축에서 불교가 몇 해 만에 비로소 한나라 땅에 이르렀습니까? 처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어느 황제의 시대이며, 당시의 연호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제(齊)나라와 진(陳)나라 중에 어느 나라가 먼저 불법을 전했습니까? 그 후 지금까지 몇 해가 지났으며 그 당시의 황제는 어느 황제입니까? 자세하게 풀이해 주기 바랍니다. 아울러 『십지론』ㆍ『대지도론』ㆍ『지지론(地持論)』ㆍ『금강반야론』 등의 여러 논서는 본래 누가 지었는지, 논을 짓게 된 배경은 어떠하며 상서로운 징조는 있었는지, 전기(傳紀)가 있는지를 삼가 기록해서 여쭙니다. 부디 의심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법상이 회답을 했다. “부처님께서는 희(姬)씨의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甲寅)년에 태어나셔서 19세에 출가하여 30세에 성도하셨는데, 목왕(穆王) 24년 계미(癸未)년에 해당한다. 목왕은 서방에 부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 곧 서역으로 들어갔는데,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증거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세상에 계셨으며, 멸도하신 이래로 지금 제(齊:북제)나라 무평(武平) 7년(576) 병신(丙申)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465년이 지났으며,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67)에 처음으로 불법이 중국에 들어왔다. 그 후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에서 서로 전해오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포되고 있다. 손권(孫權) 적오(赤烏) 연간(238~251)에 강승회(康僧會)가 오(吳)나라에 들어와서 불법을 홍포했다. 『지지론(地持論)』은 무착[阿僧佉]비구가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서 그것의 원본을 얻었고, 진(晉) 안제(安帝)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담무참(曇無讖)이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을 위해서 번역했다. 『마하연론(摩訶衍論:대지도론)』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었는데, 진(晉) 융안 연간에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도착해서 요흥(姚興)을 위해 번역했다. 『십지론(十地論)』과 『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은 모두 아승가(阿僧佉)의 아우인 바수반두(婆藪槃豆)가 지었는데,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때 삼장법사(三藏法師) 보리류지(菩提留支)가 처음으로 번역했다.” 법상의 회답은 불교와 관련한 내용이 매우 자세했는데,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을 들어서 차이나 동일한 점을 표시했다. 법상의 복장은 소박한 누더기 가사(袈裟)만을 입었고, 발우 하나와 가사 세 벌[一鉢三衣]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공양하기를 청하는 이가 많아 세속의 재물을 얻어서 산사(山寺) 하나를 건립했는데, 사명(寺名)이 합수사(合水寺)였다. 산의 맨 꼭대기에 미륵당(彌勒堂)을 조성하고 항상 왕생하여 미륵(彌勒)을 친견하기를 발원했다. 사사(四事)로 공양받는 승려들이 150명에 달했고, 그 후 북제(北齊)가 불법을 파괴했지만 산사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법상은 속인의 옷 속에 승복을 숨겨 평상시와 같이 수행을 계속했다. 항상 발원한 것은 남은 여생에 삼보(三寶)를 만나는 것28)이었고, 다시 미륵불을 받들고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의 업행은 독실하였고 정성이 또한 대단했으며, 그 마음은 주석(注石)과도 같았다. 드디어 개황(開皇)년(581)이 되어 황제가 등극하자[至尊龍飛] 불일(佛日)이 다시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 법상이 그토록 원하던 대로 되었다. 병든 몸으로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로 하여금 가마를 매게 하여 산꼭대기 미륵당으로 올라가서 미륵불에게 합장하고 세 번 절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산을 내려와서 갑자기 입적했으니, 세수 90여 세였다.
이상 8부 모두 30권은 상주(相州) 대자사(大慈寺) 사문 석영유(釋靈裕)가 찬술했다. 영유는 도빙법사(道憑法師)의 제자인데 스승의 기품과 지혜를 모범삼아 율의(律儀)를 훌륭하게 지켰다. 지혜는 심오한 의미를 체득할 수 있었고, 견문은 깊고 넓었다. 아울러 내외 학문을 잘하여 승속 모두가 귀의하였다. 불법을 밝히기를 좋아했고, 불법을 저술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지혜가 뛰어나고 행동이 고매한 사문이라고 할 만하다. 영유의 『안민론』ㆍ『도신론』ㆍ『인과론』을 보면 그 의도가 위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황(開皇) 10년(590)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나서 사의를 표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11년(591) 봄에 두터운 예로 그를 보냈다.29)
이상 2부 40권은 진적사(眞寂寺) 사문 석신행(釋信行)이 찬술했다. 신행은 위(魏)나라 사람으로 어려서 출가하였고, 여러 경전에 대해 박식했다. 홀로 밝은 지혜를 쌓아 높은 자취를 드러냈는데, 앞선 스님들과는 지혜나 행실이 같지 않았다. 가르침을 배우고 듣는데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보살행(菩薩行)까지 겸비했다. 250계를 버리고 대승(大僧)보다는 아래에, 사미(沙彌)보다는 위에 머물렀다. 문도들은 모두 대승을 청정하게 실천했고, 두타걸식(頭陀乞食)을 해서 하루에 한번만 공양을 했다. 길거리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꾸밈없이 예배했다. 『법화경(法華經)』의 가르침을 본받고자 하였고, 항상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수많은 길 중에 한 가지 방법이었다. 단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이 기록은 진실로 모두 경론의 정문(正文)을 인용하였지만, 그 외에 제목을 붙이는 데는 정확한 준칙이 없다. 비록 『대근기행잡록집』은 그윽하고 은밀하게 본질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표방하는 것이 구체적인 일에서는 미세하게 드러나질 않는다. 미래에 훌륭한 사람들이 나와 상세하게 살피고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개황(開皇) 20년(600) 칙령으로 이 책을 금지시켜 유행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훈계하고 힘쓰는 것은 서로 같아서 그의 무리들은 널리 바닷가나 내륙에서 그것들을 존숭했다.
(10) 석법경(釋法經) 중경록목(衆經錄目) 7권
이상은 개황(開皇) 14년(594)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석법경(釋法經) 등 20대덕(大德)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했다. 양화사(揚化寺) 사문 명목(明穆)이 영역을 조목별로 구분하여 짚신 끈을 묶듯이 연결하였고, 일엄사(日嚴寺) 사문 언종(彦琮)이 자세히 편집한 것을 살펴 같음과 다름을 교정했다. 그래서 표(表)에서는 간략히 말하였다. “모든 경전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2,057부 5,312권이고, 모두 7축(軸)이 된다. 단지 법경(法經) 등 본래부터 미진한 삼국(三國)의 경본(經本)에 대해 같은지 다른지의 검증을 완전히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10여 가(家)의 경록에 근거해서 조심스럽게 가부(可否)를 가린다. 강기(綱紀)를 총괄적으로 표시하고, 9록(錄)으로 배치했다. 품류(品類)를 구분하면 42분(分)이 있는데, 처음 6록 36분은 대소승의 경ㆍ율ㆍ론의 다른 점을 간략히 제시하고, 전역의 시비(是非)나 진위(眞僞)의 차별을 대략 표시했다. 다음 세 목록은 집(集)ㆍ전(傳)ㆍ기(記)ㆍ주(注)인데, 앞의 3분(分)은 삼장의 정경(正經)이 아니라 모두 서역(西域)의 현성(賢聖)이 찬술한 것이다. 그래서 별록(別錄)이라고 한다. 뒤의 3분은 모두 중국의 명덕(名德)이 편수한 것이다. 비록 서역의 현성이 지은 것과는 다른 부류이지만, 정경(正經)을 도와 근본 가르침을 밝히지 않는 것이 없어서 빛나는 광채로 후학들을 개발하기 때문에 아울러 실었다.”
(11) 석보귀(釋寶貴) 신합금광명경(新合金光明經) 8권
이상 1부는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석보귀(釋寶貴)가 개황(開皇) 17년(597)에 합친 것이다. 보귀는 주(周)나라 때 도안(道安)의 뛰어난 제자였다. 여러 불교 경전을 아끼고 열람하였으며, 진(晉)나라 때 사문 지민도(支敏度)가 양지(涼支) 양축(涼竺) 일백(一白)30) 5가(家)의 『수릉엄경(首楞嚴經)』 5본을 1부로 묶어서 8권본을 만들었고, 또한 일지(一支) 양축(涼竺) 3가(家)31)의 『유마경(維摩經)』 3본을 1부로 묶어서 5권본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문 승취(僧就)가 또한 지루가참ㆍ담무참ㆍ구마라집ㆍ불타야사(佛陀耶舍) 4가의 『대집경(大集經)』 4본을 1부로 묶어서 60권본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이런 여러 합경(合經)은 경문의 내용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이렇게 선철(先哲)이 남긴 자취를 보귀가 잇고 그것을 계승하여 모범으로 삼았다. 『금광명경』의 역본이 셋이 있는데, 처음은 담무참(曇無讖) 번역의 4권본이고, 다음은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5권본이다. 그리고 진제(眞諦)가 번역한 7권본이 있다.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무참법사는 ‘『금광명경』은 편목과 품수가 빠진 것이 있어서 번번이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은 일리가 있다. 또한 문장을 서로 비교하여 대조하고 검토해도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니, 오랫동안 품고 오매불망 고민했다.” 양무제(梁武帝)는 삼도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사생(四生)의 중생들이 허우적대는 것을 가엾게 생각했다. 불법의 보배로운 배를 띄워 물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였고, 지혜의 횃불을 들어 미혹에 빠진 범부들을 밝게 깨우쳤다. 대동(大同) 연간(535~545)에 칙령을 내린 직후 장사(張汜) 등을 부남국(扶南國)에 보냈고, 돌아오는 길에 명승(名僧)과 여러 대승 논서와 『화엄경』 등을 요청하게 하였다. 부남국에서는 이에 허락하여 서천축(西天竺) 우선니국(優禪尼國) 삼장법사 중국말로는 진제(眞諦)인 바라말타(波羅末陀)와 아울러 경론을 보내 황제의 뜻에 호응했다. 진제법사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당시 부남국에 거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고난 기풍이 남다른 깨우침이 있었고 멀리까지 알려졌다.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경장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태청(太淸) 원년(547)에 비로소 경읍(京邑)에 도착했고 황제가 궁궐로 불러들였다. 무제(武帝)는 몸소 정례(頂禮)하고 보운전(寶雲殿)에서 공양(供養)하였다. 그는 경론(經論)을 번역하고자 했지만 도적떼와 흉노족이 날뛰고 곳곳을 능멸하자 불법이 크게 혼란했으며, 나라는 온통 혼란하여 조용한 곳이 없었다. 사문 승은(僧隱)이 아뢰어서 진제 법사가 역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전의 명목은 사라졌지만 「삼신분별품(三身分別品)」ㆍ「업장멸품(業障滅品)」ㆍ「다라니최정지품(陀羅尼最淨地品」ㆍ「의공만원품(依空滿願品)」 등 4품 전체가 나눠져 7권이 되었다. 지금 새로 전래된 경전은 260부 이내인데 그 속에 다시 「은주다라니품(銀主陀羅尼品)」과 「촉루품(囑累品)」이 있어서 다시 사나굴다(闍那崛多) 삼장에게 청하여 번역하여 넣었고, 사문 언종(彦琮)이 다시 교감(挍勘)을 했다. 그래서 지금 보귀(寶貴)가 합치고 다시 구분해서 8권을 만들었는데, 품부(品部)가 완전히 갖춰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의 문장은 경전 가운데 왕[經王]이라고 부를 만하고 내용은 매우 깊고 오묘함이 있다. 원컨대 말의 깊은 의미가 드러났으니, 이 경전을 정수리까지 높이 예경하여 지키고 보호하기를 바란다.
(12) 석승찬(釋僧粲) 십종대승론(十種大乘論)
이상은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석승찬(釋僧粲)이 지었다. 승찬의 속성(俗姓)은 손씨(孫氏)이며, 진(陳)나라 유인(留人)이다. 어려서 출가해서 항상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강하(江河)의 남쪽이나 북쪽 가운데 거쳐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관(關)ㆍ농(隴)이 동서로 접한 곳은 모두 다녔다. 3국을 다녔는데, 제(齊)ㆍ진(陳)ㆍ주(周)의 여러 법연(法筵)32) 가운데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뛰어나게 어려운 질문을 했고, 넓고 깊이 공부했다. 지금 25중(衆)33) 가운데 제일 뛰어난 마하연장(摩訶衍匠)이다. 그래서 이 『십종대승론』을 지어서 대승을 휘날렸다. 십종은 첫째 무장애(無障碍), 둘째 평등(平等), 셋째 역(逆), 넷째 순(順), 다섯째 접(接), 여섯째 좌(挫), 일곱째 미(迷), 여덟째 몽(夢), 아홉째 상즉(相卽), 열째 중도(中道) 등으로 경론(經論)을 인용해서 문장의 증거로 삼았기 때문에 매우 모범이 될 만했다. 또한 처음 배우는 이들에는 훌륭한 방편문(方便門)이다.
(13) 석승곤(釋僧琨) 논장(論場) 1부 31권
이상 1부는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성도(成都) 석승곤이 편집했다. 승곤은 바로 주(周)나라 때 석망명(釋亡名)의 제자로 속성은 정(鄭)씨이다. 성품은 침착하였고 음성학(音聲學)에 뛰어나서 당시 25중(衆) 가운데 독경(讀經)을 가르치는 법주(法主)였다. 여러 경전의 깊이를 찾고 의미를 포괄하였으며, 권부(卷部)를 연이어 비교하였다. 여러 잡다한 논서의 편축(編軸)을 조사하고, 경전을 인용하여 “지혜로운 이의 뜻을 알고자 하면 넓게 여러 다른 주장을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선대의 성인(聖人)과 후대의 현인(賢人)들이 편찬한 여러 논서를 가려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논장(論場)』이라고 말한다. 비유하면 세상에서 원장(園場)은 다섯 과일과 백 가지 곡식이 있고, 유장(遊場)은 춤과 노래와 소리가 있으며, 전장(戰場)은 창이나 갑옷, 온갖 무기가 난무하고, 도량(道場)은 깃발과 꽃장식, 그리고 보화로 장식된 차양 등 갖가지로 장엄되어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서 『논장』을 비유하면 저것들과 같이 여러 가지 경우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책장을 열어 한번 펼쳐서 보기만 해도 백가(百家)의 학설을 볼 수 있다.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남도 또한 이익되게 하여 상대방과 내가 함께 이익되는 것이다.
(14) 석도정(釋道正) 범성육행법(凡聖六行法)20권 10권 10권 5권 3권 1권
이상은 6부 모두 40여 권으로 창주(滄州) 일사문(逸沙門) 석도정(釋道正)이 찬술한 것이다. 도정은 두타행을 업으로 삼았다. 명예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당시 풍속이나 이야기에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이 수행문을 저술한 것이 여러 경전에서 폭넓게 취하여 명목을 나열하였다. 개황(開皇) 연간(581~600)에 수도로 들어왔는데, 복야(僕射) 고영(高潁)이 그를 매우 존중하여 법좌를 건립하고 수행의 본질을 담론했다. 이름있는 스님들은 그의 공덕을 시기해서 그것이 유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정은 이내 세속을 벗어나서 그 이름을 속세에 묻었다. 그래서 그의 입적한 시기를 알 수 없다. 나중에 그의 유문(遺文)을 수록할 것인데, 서로 아는 것이 멀리 있어 안타깝다.
이상 6부 도합 10권은 일엄사(日嚴寺) 사문 언종이 편찬했다. 언종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조군(趙郡) 백인(柏仁)사람이다.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신분이 높은 귀족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글을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의 인식력은 그윽하고 미세한 것까지 꿰뚫었다. 마음은 마치 물이나 거울과 같이 맑아서 사물을 대할 때 언뜻 한번 보고 깨우쳐 다시 살피는 일이 없었다. 그의 논(論)ㆍ전(傳)ㆍ사(辭)는 모두 자세하고 흡족했다. 『통극론』은 세간의 유생들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교적(敎迹)에만 집착하고 이단(異端)를 일으키는 것을 비판했다. 이 『통극론』의 주된 주장은 불교의 이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것이다. 『변교론』은 불교가 진리를 선양하고 유교는 세속을 교화한다는 것을 밝혔고, 노자(老子)의 가르침은 세속의 유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논했다. 『영보경(靈寶經)』 등의 경전은 유교에 포함되지 않는다. 『통학론』은 세상 사람들이 공자나 부처님을 모두 스승으로 삼기를 권장하여 유교와 불교를 알도록 하고 진속(眞俗)을 모두 알도록 권유한 것이다. 『선재동자제지식록』은 훌륭한 인연으로 불과를 증득하여 범인을 초월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선재동자와 같이 넓게 배워야 함을 권유하고 있다.
(16) 석혜영(釋慧影) 술석도안지도론해(述釋道安智度論解) 24권도안(道安)이 직접 지은 서문이 붙여져 있다. 존폐론(存廢論) 상학론(傷學論) 염수론(厭修論)
이상 4부 모두 27권은 사위사(舍衛寺) 사문 석혜영(釋慧影)이 찬술했다. 혜영의 속성은 강씨(江氏)이며, 파서(巴西)사람이다. 주(周)나라 때 지도론사(智度論師)인 석도안(釋道安)의 불교 교의를 이해하는 데 가장 뛰어난 제자로 불법의 등불을 계속 밝히고 힘을 보탰다. 끊임없이 법륜을 굴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술했지만 마음대로 짓지는 않았다[述而不作]. 대승을 널리 홍포하였고 또한 25중의 으뜸이 되었다. 몸을 절 안에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뜻과 지혜는 흘러넘쳤다. 그의 자취는 사람들 사이에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마음은 사물 바깥에까지 두루 미쳤다. 그의 문장은 예리하게 입에서 나왔지만 그 이치의 통로를 통해서 신명에 사무쳤으니, 앞의 논서를 보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상학론』은 불법을 비방하는 잘못을 없애기 위한 것이고, 『존폐론』은 간사하게 무엇인가를 구하려는 마음을 막기 위한 것이며, 『염수론』은 사람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바른 불법으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17) 곽의(郭誼) 점찰경(占察經) 2권
이상 1부는 경록을 검사해 보아도 제목이 없다. 경의 첫머리에서 보리등(菩提登)이 외국(外國)에서 번역했다고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근래에 출간한 듯하다. 현재 여러 경장(經藏) 안에서 모두 전해지고 있다. 광주(廣州)에 어떤 승려가 탑참법(塔懺法)을 행했는데, 가죽으로 2매의 첩자(帖子)34)를 만들어 하나는 선자(善字)를 쓰고 다른 하나는 악자(惡字)를 써서 사람들이 던지게 했다. 선자(善字)가 씌여진 것을 가지는 자는 좋은 것이고, 악자(惡字)가 씌어진 것을 가지는 자는 나쁘다고 했다. 그리고 자박법(自撲法)35)을 행하여 죄를 없애는 거라고 여겼는데, 남자와 여자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청주(靑州)에도 어떤 거사(居士)가 이런 참법을 동일하게 했다고 한다. 개황(開皇) 13년(593)에 어떤 사람이 광주(廣州) 관사(官司)에 이런 것은 요사스런 일이라고 고하였다. 관사가 참법을 하던 사람을 잡아다 심문을 하자 그가 다음과 같이 증거를 대면서 말했다. “탑참법은 『점찰경』에 의거한 것이고, 자박법은 여러 경전에서 나오는 오체투지(五體投地)가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 하는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광주(廣州) 사마(司馬) 곽의(郭誼)가 기주(岐州)에 와서 여러 가지 정황에 대해 듣고 상소하자, 황제가 『점찰경』의 도리를 믿지 말라고 칙령을 내리고 내사(內史) 시랑(侍郞) 이원조(李元操)와 곽의(郭誼)를 보창사(寶昌寺)에 보내 여러 대덕 사문에게 문의하게 했다. 법경(法經) 등이 대답하였다. “『점찰경』이란 이름은 경록에도 이름이나 역경 장소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탑참법은 여러 경전의 내용과는 다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자 칙령을 내리기를 “상황이 이와 같으니 모름지기 유행시키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18) 후군소(侯君素) 정이전(旌異傳) 20권
이상 1부는 상주(相州) 수재(秀才)인 유림랑(儒林郞) 후군소(侯君素)가 수문제(隋文帝)의 칙령을 받들어서 편찬했다. 후군소의 이름은 백(白)이다. 타고난 지혜가 탁월하고 노장(老莊)이나 유교에 박식했다. 항상 재백(宰伯)의 오른쪽에 거처하면서 깊고 궁극적인 의미의 요점을 질문했다. 그래서 이 『정이전』을 저술해서 선비나 일반인들을 깨우쳤다.
(19) 서동경(徐同卿) 통명론(通命論) 2권
이상 1부는 진왕부(晉王府)의 좨주(祭酒)인 서동경(徐同卿)이 찬술하였다. 서동경은 유교(儒敎)도 삼세인과(三世因果)의 교의가 있는데, 단지 문장 표현이 은밀하여 그 이치가 그윽하고 미세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선현(先賢)이 변론하여 건립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서동경이 이때 경사(經史)의 정문(正文)을 갖추어 인용하여 운명(運命)이 인과(因果)에 귀결한다는 것을 회통시켰다. 의도는 유교(儒敎)의 종지를 드러내고 불교를 선양하려는 데 있었다. 여러 품목이 모두 하나의 이치로 달려감을 알게 하려 했는데, 대개 박식한 자만이 이런 현묘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20) 유빙(劉憑) 외내방통비교수법(外內傍通比挍數法)
이상 1부는 번경학사(翻經學士) 경양(涇陽) 유빙(劉憑)이 찬술하였다. 유빙은 내외 학문의 산술(數術)을 집중해서 탐구했다. 늘 전대의 경전 번역 가운데 계산법을 술법(術法)에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짓게 되었다. 그것의 서문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도(道)와 예(藝)에는 얕은 것과 깊은 것이 있고, 사람의 배움에도 성글고 정밀한 것이 있다. 그런 까닭에 역수를 헤아리는 일을 하면 대연수(大衍數)에 아울러 통하게 되지만, 그 생각을 끊으면 세 군데에서 헷갈리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계산법은 나름대로 세 등급의 차이가 있는데, 천축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여 어찌 이단(異端)의 예가 없겠는가. 하지만 앞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모두 대천(大千)을 백억(百億)이라고 했고, 일유순(一由旬)을 40리로 보았다. 여러 계산법에 의거하면 모두가 서로 맞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번역하고 통역하던 시기에 피차간의 생각이 달랐고, 지도하고 가르칠 때 여기에서 잘못을 취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런 까닭에 여러 경의 계산법은 중국의 수법과 서로 차이가 있어서 십진법에 따라 10단위로 변해가니 비슷하게 소통하게 해야 한다. 부연하여 번역할 때는 이를 견주어 보아 의혹을 가려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까닭에 이 기록을 첨부한다.”
(21) 비장방(費長房) 개황삼보록(開皇三寶錄) 15권
이상 1부는 번경학사(翻經學士) 성도(成都) 비장방(費長房)이 편찬했다. 비장방은 본래 출가했었는데, 주(周)대에 승려(僧侶)들을 환속시키고 수(隋)나라가 흥기하자 다시 속인의 옷을 입고서 당시 불경을 전역하고 받아 적는 일에 동참하였다. 역대(歷代)의 군록(群錄)은 대부분 오직 경전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스님들에 대한 기술은 대개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삼보(三寶)가 거쳐온 제왕의 연대[帝年]를 찬술했다. 주(周)나라 장왕(莊王)과 노(魯)나라 장왕(莊王)에서 시작해서 개황(開皇) 말년에 이르기까지 위로는 간지를 열거하고 옆으로는 여러 경전을 열거했다. 번역 시대는 아래에 덧붙였다. 지금 여기서(『내전록』) 수집한 목록은 이것을 근거하고,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 내용은 옥과 기왓장이 한데 뒤섞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렵다. 풍부한 내용은 얻었지만 핵심을 잃었고, 의지할 만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편집하거나 첨삭할 수가 없다.
(22) 칙유사찬(勅有司撰)36) 중경법식(衆經法式) 10권
이상 1부는 개황 15년(595) 문제(文帝)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찬술하게 했다. 문제는 처음 즉위해서는 지위를 가려서 번역하게 했다. 내전에서 상소문을 들으면서도 수나라 조정에서는 매우 공경하였기 때문에 한 때도 교법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문제가 제위에 등극한 이후로 정사를 관장하면서 매일 조정으로 갈 때 임금의 자리 앞쪽에 높은 법좌 두 개를 설치하여 한 곳은 경사(經師)를 모셔서 대승경전을 독송하게 하고, 다른 한 곳은 삼장을 통달한 대덕 스님 세 분을 모셨다. 황제는 눈으로는 정사[萬機]를 보고 귀로는 성교(聲敎)를 듣고 있었다. 황제가 기뻐하거나 노여움을 보이자 경사(經師)가 침묵했다. 황제가 말하였다. “경사께서는 왜 조용하십니까?” 경사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사람을 책망하는 것을 보고 감히 경전을 독송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말하였다. “독송만 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임금으로 나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니 괴이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속의 일들이니 불법(佛法)과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서 감히 위배하지 못하니 마음으로는 항상 듣고 싶을 뿐입니다.” 경전에서 의심이 생기면 경장(經藏)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간략한 문장의 법식(法式)으로써 삼학(三學) 전체를 밝히고 조리있게 정리하여 순서를 갖춰서 당시의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줬다.
이상 경론 46권은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萇國) 삼장(三藏), 중국말로는 법장(法藏)인 달마굴다(達摩崛多)가 우리나라를 멀다 여기지 않고 와서는 수도에 머물러 개황 연간(581~600)과 인수(仁壽) 연간(601~604)에 모두 참여하여 전역(傳譯)한 것이다. 이때 달마굴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번역하는 일의 높은 지위에 있게 되었다. 범어를 수나라 말로 번역했을 때 문장이 매우 아름다웠고, 깊은 의미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시키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단정하고 도량이 넓어서 세속의 길을 추구하지 않았다. 전역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명성이 매우 높았지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칭찬했다. 인수 연간 말엽에 달마굴다는 다른 일 때문에 동쪽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달마급다(達摩笈多)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오로지 경전의 전역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대업(大業) 3년(607) 동도(東都)에서 양제(煬帝)가 낙수(洛水) 남쪽 예천진교(汭天津橋) 왼쪽에 상림원(上林園)을 설치하고 번경관(翻經館)을 건립했다. 그리고 수도에 있던 옛 승려들을 신읍(新邑)의 번경관으로 이주시켰다. 달마급다는 계속해서 묵묵히 따랐다. “내가 대업(大業) 10년(614)에 몸소 번경관을 방문했을 때 언종(彦琮)스님이 이미 입적한 뒤였다. 상림원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분의 풍모와 뜻은 사라졌으니 뉘라서 치켜세운 기치를 기리겠는가. 그것을 깊이 살펴도 더욱 어지럽기만 하고 스님의 보배가 끊어졌구나. 참으로 슬프구나.”
(24) 석언종(釋彦琮) 복전론(福田論) 승관론(僧官論) 서역지(西域志) 10권
이상 여러 논은 모두 사문 석언종(釋彦琮)이 찬술한 것이다. 언종의 명성은 2대에 걸쳐서 드높았으며, 두 조정에서 번역에 참여했다. 동도(東都)에 번경관을 건립하여 경전을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수양제가 명을 내려 승려들도 세속의 관리에게 예를 표하게 하자 언종은 이것을 참지 못하고 논을 저술해서 펼쳐 보였다. 먼저 동진(東晉)시대 혜원(慧遠)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인용했고, 나중에 『유마경』ㆍ『법화경』의 권의(權宜)는 화체(化體)37)가 아님을 풀이했다. 출처의 자취를 폭넓게 진술했고, 주당(周黨)의 무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꾸짖었다. 삼보의 위의를 높이고 보호했으며, 귀경(歸敬)의 근본인 부처님을 숭상했다. 문장은 지극하여 넉넉함을 갖추었고, 세상에 환하게 드러났다. 근래 용삭(龍朔) 원년(661)에 황제가 이런 의론을 토론하게 했는데, 수도의 관리 태반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논을 보이자 비방이 그쳤고, 상황을 기록하여 상소하자 그것을 들은 황제가 칙령으로 그것을 멈추게 했다.38)
(25) 석명측(釋明則) 번경법식론(翻經法式論) 1부 10권 제사비명(諸寺碑銘) 3권
이상은 논문으로 번경(翻經) 사문 석명측(釋明則)이 찬술한 것이다. 명측은 본기(本冀) 사람이다. 천성이 지혜로웠고 남들보다 빼어났다. 문장의 화려함은 마을에 자자했다. 처음 이빨이 나기도 전에 글을 지었고, 사비(寺碑)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초공(楚公) 양소(揚素)가 그를 보고 매우 귀하게 여겨 수도로 보내서 불경의 전역에 참여하게 했다. 명(銘)ㆍ송(頌)ㆍ논(論)ㆍ서(序) 등을 지었는데, 별집(別集)에 갖춰져 있다.
(26) 행구(行矩) 서내법(序內法) 1권 내훈(內訓) 1권
이상은 번경(翻經) 사문 행구(行矩)가 찬술한 것이다. 행구는 언종의 조카이다. 그래서 가풍이 범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런 번역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나중에 임금의 명으로 경전 번역에 초빙됐지만 오래지 않아 입적했기 때문에 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18) 황조전역불경록(皇朝傳譯佛經錄) 성인(聖人)이 이익을 드러낼 때는 마땅히 그런 내용들이 기약 속에 있다. 수나라 양제 말년에 하늘과 땅이 함께 막히고, 솔개와 까치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으며, 개미가 몰려들고 뱀이 똬리를 틀었다.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동물들은 편안히 몸붙일 곳이 없었다. 우리 당나라 황조가 힘차게 일어나자 개국의 의의가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진동시켰고, 사해(四海)가 안정되고 맑아졌으며, 삼보(三寶)가 구름같이 일어나 그 모습을 이루었다. 처음 무덕(武德) 연간(618~626)부터 지금 용삭(龍朔) 원년(661)까지 40여 년간 천하는 크게 안정되었다. 고조(高祖)께서 기틀을 마련하시고 국업을 확정했고, 태종(太宗)은 국토를 확장하고 나라의 기강을 유지했다. 지금 황제께서는 수고로움을 베푸시고 조정巖廊39)에서 국운이 무궁하기를 기원했다. 승려들을 득도시키고 사찰을 건립하여 많은 일들을 담당하게 했으며, 새로운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여러 역사적 기록들을 정리하고 이것들을 전체적으로 모아서 요약하기도 하였고, 상황에 따라서 확대하기도 하였다. 그것을 가지고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려서 고금을 모범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우리 당 황조가 시작할 무렵에 세상의 운행은 오히려 혼란하였다. 설거(薛擧)가 빈기(豳岐)에서 곧바로 일어났고, 왕충(王充)은 하락(河洛)에서 갑골을 손에 넣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도적떼를 이끌고서 제각기 제멋대로 영웅을 자칭했다. 이외에도 곳곳에서 장수들이 벌이 무리지어 날고 고슴도치가 언덕을 쌓듯 했다. 국가의 근본을 지키고자 뜻을 날카롭게 세워 그것들을 척결하였다. 불교의 이치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고 안정되었다. 그래서 고조(高祖) 일대에도 옛것을 존숭하고 경전을 번역하는 것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살피고 품목을 정했다. 정관(貞觀) 연간(627~649) 초기까지도 전쟁이 거듭되고 있었고, 오랑캐들은 위수(渭水)와 경수(涇水)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고, 관보(關輔)는 번(樊)ㆍ변(汴:하남성) 지역에서 식량을 의지했다. 나방과 애벌레가 들녘에 흩어져 곡식은 떨어지고 궁궐은 침탈당했다. 문제(文帝)는 얽힌 문제를 해결하고 정치를 베푸느라 하루해가 저물었고, 심지어 식사를 잊을 정도였다. 사탑(寺塔)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하였고 관리하는 데 힘썼다. 그래서 사방 성채 가장자리까지 모두 가람을 건립했고, 탑을 세워서 공덕을 드러냄으로써 황제의 위업을 빛냈다.설거가 건립한 소인사(昭仁寺)를 파괴했고, 왕충이 건립한 소각사(昭覺寺)를 파괴했으며, 무주(武周)가 건립한 홍제사(弘濟寺)를 파괴했고, 송강(宋剛)이 건립한 자운사(慈雲寺)를 파괴했으며, 최노생(崔老生)이 건립한 보제사(普濟寺)를 파괴했고, 건덕(建德)이 건립한 등자사(等慈寺)를 파괴했으며, 유달(劉闥)이 건립한 소복사(昭福寺)를 파괴했다. 아울러 관청에서 지원을 함으로써 불사가 매우 크게 드러났다.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여 만대의 큰 귀감이 되게 한다. 이내 천하는 평화로웠기 때문에 불교를 널리 선양할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옛날 자신이 거처하던 집을 희사해서 흥성사(興聖寺)로 삼았고, 죽은 어머니를 위해서 홍복사(弘福寺)를 건립했으며, 세자를 위해서 자은사(慈恩寺)를 건립했다. 소릉(昭陵)40)에 요대사(瑤臺寺)를 건립했으며, 몸소 홍복사에 행차하여 손수 소문(疏文)을 짓기도 했다. 스님들을 대할 때는 공손하게 인사했고, 부드럽고 정다운 말로 삼가 존경을 표했다. 늘 건물 조성을 감찰하는 관리에게 명하기를 경전이나 불상을 조성할 때는 반드시 정밀하게 신경을 써서 하고, 도교에 대해서는 화려하다는 말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당시에 파파(波頗)라는 범승(梵僧)이 있었는데, 황제가 매우 존중해서 내전으로 불러들여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새로운 범문을 번역하였고, 황제는 필요한 것을 공급했다. 금상(今上)의 제위를 물려받고 나서는 믿음과 존중이 더욱 융성했다. 선황(先皇)의 별궁을 모두 희사해서 사원으로 만들었으니, 경전을 번역하는 데 다시 좋은 근거가 되었다. 사문 현장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시 수도로 돌아왔는데, 두 황제가 흠모하고 받들었기 때문에 입궐을 하였으며, 황제의 교서가 내려지자 역경을 하게 되었다. 관청에서 충분한 양의 물품을 공급하여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처음 정관(貞觀) 연간(627~649) 초에서 용삭(龍朔) 연간(661~663)까지 30여 년간 경전을 번역한 재가자와 승려들은 당나라 사람과 인도인을 합쳐서 대략 10여 명이다. 번역문을 편집하거나 받아 적은 사람들은 아래에 열거한 것과 같다. 번역한 것은 경(經)ㆍ논(論)ㆍ기(記)ㆍ전(傳)ㆍ행법(行法) 등 도합 100여 부 1,500여 권이다. 이를 묶어서 황조(皇朝)의 내전경록(內典經錄)으로 삼으며, 그것을 훗날까지 유통시켜 영원한 모범으로 만들고자 한다. 함께 궤범으로 그 빛을 발휘하고 오래도록 썩지 않아 장래 뛰어난 이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들이 이것을 계승하여 계속해서 삼보의 뛰어난 공덕을 새롭게 기술하고 우리 국토에 널리 알려 불법을 펼치며, 천불(千佛)의 가르침을 선양하고, 억겁을 지나도록 무궁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 3부 38권은 서천축국(西天竺國) 사문 중국말로는 선지(先智)인 바라파밀다(波羅頗蜜多)의 번역이다. 그는 정관(貞觀) 초년(627)에 범본 패엽경[梵葉本]을 가지고 경련(京輦)에 도달했다고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가 칙령으로 좌복야(左僕射) 방현령(房玄齡)과 태부경(太府卿) 소경(蕭璟), 급사(給事) 두정륜(杜正倫)에게 번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읍(京邑)의 대덕 사문 현모(玄摸)를 시켜 통역하게 하고, 사문 혜색(慧賾)ㆍ혜정(慧淨)ㆍ법림(法琳)이 문장을 정리하게 했다. 사문 혜승(慧乘)ㆍ혜랑(慧朗)ㆍ지수(智首)ㆍ담장(曇藏)ㆍ승진(僧珍)ㆍ영가(靈佳)ㆍ혜명(慧明)ㆍ법상(法常)ㆍ승변(僧辯) 등으로 의미를 검증하게 했다. 이때가 되어서 『대집경(大集經)』의 범문(梵文)이 넓게 전해지고 후대를 이끌 수 있었다. 한스러운 것은 그가 당나라 말을 배우느라 큰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였고, 범본 경전을 여러 곳으로 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10년 동안 번역을 했는데, 그 공헌이 3부에 그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상 10부 12권은 연흥사(延興寺) 사문 석현완(釋玄琬)이 찬술한 것이다. 현완은 도행(道行)이 깊고 순수했으며, 지혜나 학문이 넉넉해서 승속道俗이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 상법(像法)의 말기이어서 그의 큰 덕에 대한 소문이 크게 알려져서 황태자의 계사(戒師)가 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나이가 들어 다리에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내금(內禁)42)에 들어갔다. 태종(太宗)이 융숭하게 그를 대하였고 문덕(文德) 황후도 매우 공경하였다. 설법을 통하여 사람들을 이끌었고 황제가 그의 훌륭함을 칭찬하였으며, 왕과 신하 백관이 그의 계행을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엄중하게 불법을 전파하고 보호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붙잡고, 사람들을 이끌어서 할 일을 마쳤다. 여러 부문에 대해 논을 지은 것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데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불법이 중국에 도달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법란43)을 당했다. 비록 나중에 수습을 했지만 혼란과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현완은 여러 경론의 내용을 검증하여 일치시켜서 후대에 배우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경론의 의미에 통달한 이름있고 덕높은 30여 분의 스님을 모았다. 그리고 그가 직접 총괄하여 문장의 의미를 탐구하고, 경전을 그 시대별로 순서를 매기는 것으로 마쳤다. 정본(淨本)을 베껴서 법보(法寶)의 바른 모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구석진 곳에 있던 승속[道俗]들도 장경(藏經)을 베끼고자 했고, 그들 모두가 정본을 전하여서 기준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 또한 후대에 뛰어난 스님이 되게 했기 때문에 이런 남긴 기틀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석법림(釋法琳) 파사론(破邪論)1부 2권 변정론(辯正論)1부 8권
이상 2부 10권은 종남산(終南山) 용전사(龍田寺) 사문 석법림(釋法琳)이 찬술한 것이다. 법림은 본래 형초(荊楚)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이름있는 스승들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배웠다. 현학(玄學)이나 유학(儒學)에 대해서도 달통했으며, 정처 없이 떠돌면서도 불법을 보호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무덕(武德) 연간(618~626)으로 바뀌자 불문(佛門)에는 거짓된 무리들이 가득 찼지만, 황제의 귀에 이러한 말이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이 기회를 틈타 불교를 비방하는 10여 조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의 의도는 승려를 몰아내고 불교를 훼손시키는 데 있었다. 도사(道士) 이소경(李少卿)이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을 임금에게 올렸고, 도사(道士) 유진희(劉進喜)가 또한 『현정론(顯正論)』을 올렸다. 모두 불법을 더럽힌 것이지만 당시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경읍(京邑)의 여러 승려들 중에서도 그것에 대항해서 변론한 이가 있었지만 숭상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불교가 더럽혀지자 승려나 재가자들이 모두 수치스럽게 여겼다. 혜림이 업신여김을 참지 못하고 홀로 논을 지어서 그들에게 맞섰다. 공자나 노자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불교를 높이는 글이었다. 임금과 신하가 불법을 존중했던 일들에 대해서 많이 기술했고, 논이 완성되자 당시 속인들이 다투어 베껴갔다. 도사 진세영(秦世英)은 동궁(動宮)의 태자를 선동하여 법림이 지은 논은 황실을 헐뜯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文帝)가 크게 노하여 법림을 조사하게 하여 일의 전후를 거듭 밝혔는데, 성인의 마음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지은 『파사론』과 『변정론』은 모두 문적(文籍)과 같은 것입니다. 한 자라도 잘못된 곳이 있다면 형벌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충정(忠正)을 따르신다면 저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만약 무고한 사람에게 형벌을 남용하신다면 저 법림은 죽어서도 원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죄를 묻지 않고 익주(益州)로 보내어 승려로 살게 했으나 그만 가는 도중에 입적하였다. 별집(別集) 30여 권이 있다. 진세영(秦世英)은 결국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처형당했다. 유진희ㆍ이소경ㆍ부혁도 연이어 죽자 법림의 유문(遺文)이 세상에 유행하였는데, 만대(萬代)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
이상은 4부 10여 권으로 경사(京師) 기국사(紀國寺) 사문 석혜정(釋慧淨)이 찬술한 것이다. 혜정은 본래 조인(趙人)이고, 속성은 방(房)씨였다. 수(隋)나라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방휘원(房徽遠)의 조카였다. 타고난 지혜가 출중하여 수도와 나라 안에 명성이 높았다. 여러 논서를 저술하거나 담론하여 후현(後賢)들보다 뛰어났다. 번번이 일반 선비들과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에만 빠져 불교의 승려들을 업신여겼다. 문장이 스스로 막혀있자 혜정이 『석의론(釋疑論)』을 지어서 업연(業緣)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내전시영화』를 편집해서 승려 중에서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하였다. 그런 후에 글을 문사에 뛰어난 선비雄伯에 보냈는데, 그들 모두가 그의 법석(法席)에 참여했다. 그의 기틀이 뚜렷하여 뛰어남을 존중하였고, 그의 지혜와 깨달음이 깨끗하고 뛰어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좌복야(左僕射) 방현령(房玄齡)이 모셔다가 가승(家僧)으로 삼았다. 황태자[春宮] 이하는 혜정의 이치와 의리에 기대었고, 여러 번 황궁[內禁]에 머물면서 도교의 신봉자[李宗]44)들과 대론을 했다. 여러 제후들이 기뻐서 크게 웃었고, 황세자도 매우 기뻐하고는 명을 내려서 그를 보광사(普光寺)의 주지가 되게 했다. 기국사(紀國寺) 상좌(上座) 혜정은 이런 빛나고 기쁜 일로 두 가지 일을 담당했다. 저술은 여러 경전과 『대장엄론』, 『아비담잡심론』, 『구사론』 등의 논서에 대한 소(疏)가 100여 권 있는데 모두 싣지는 못했다.
(5) 이사정(李師政) 내덕론(內德論)1부 1권
이상의 논은 정관(貞觀) 연초(627)에 문하성(門下省) 전의(典儀)인 이사정(李師政)이 찬술한 것이다. 이사정의 집안은 상당(上黨)의 지위였으며, 학식이 뛰어났다. 어려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아꼈으며 자라서는 여러 학문을 두루 다 통하였다. 늘 조정의 여러 선비들과 심오한 이치에 대해 담론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名相)에 빠져서 불교의 종지를 허무한 것이라고 여겼고, 동시에 인연과 업보에 미혹해서 성인의 가르침을 거짓된 주장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사정이 논서 3편을 지었는데, 첫 부분은 정법을 드러내서 전씨(傳氏)의 비방을 비유했고, 다음은 운업(運業)을 분명히 해서 고금의 잘못을 밝혔다. 마지막은 인과를 서술하여 과보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오류가 아님을 변론했다. 문장은 지극했고 매우 요약되어 사적(史籍)에서 기록된 전대의 말들을 아울렀다.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서 침잠되고 그윽하여 막힌 부분이 없었다.
(6) 석법운(釋法雲) 변량삼교론(辯量三敎論)1부 3권 십왕정업론(十王正業論)1부 10권
이상 2론 13권은 경사(京師) 서명사(西明寺) 사문 석법운(釋法雲)이 찬술한 것이다. 법운은 본래 강인(鍋人)이다. 어려서부터 사찰에 노닐고 선정 수행처에 거처했다. 자주 신기(神機)를 발동했고, 비록 경서(經書)를 넓게 탐독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오한 이치를 두루 살필 수 있었다. 늘 세속에서 유행하는 삿된 논서(論書)들을 보고는 삼교(三敎)를 하나의 종지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황왕(皇王)의 순서를 헤아리는 것을 생략하니 당시 세상은 정치가 혼란해졌다. 그래서 명리(名理)를 수집하고 현학과 유학의 핵심을 검토하여 앞의 두 가지 논을 저술하고 진리를 열어서 세상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상 주해(注解)ㆍ의(儀)ㆍ찬(贊)ㆍ전(傳)ㆍ기(記) 18부 모두 110여 권은 종남산(終南山) 사문 석도선(釋道宣)이 찬술했다. 도선은 어려서부터 교상(敎相)을 탐구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스승을 사모하여 찾아다녔다. 관(關)의 동서나 하(河)의 남북 할 것 없이 현명한 이를 찾아 다녔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관 말년에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수집했는데, 위에 열거한 것이다. 빠진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의도는 찬술에 힘을 보태는 데 있다.
이상은 대소승(大小乘) 경론(經論) 67부 모두 1,344권은 경사(京師) 대자은사(大慈恩寺) 사문 석현장(釋玄奘)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번역한 것이다. 현장은 본래 영천(潁川) 사람이며, 속성은 진씨(陳氏)이다.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스승을 찾는데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다. 정관(貞觀) 3년(629) 출국하여 불교가 유행하고 있는 다섯 천축국과 팔하(八河)를 여행하였고, 여러 경전을 폭넓게 공부했다. 뛰어난 스님이 있는 곳은 방문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범본 경전을 많이 입수하여 중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정관 19년(645)에 몸소 문제(文帝)를 알현하자 문제는 특별히 그를 대접했다. 그리고 칙령으로 뛰어난 승려 20여 명이 문구(文句)를 정리하고 모으게 하였다. 처음에는 홍복사(弘福寺)에서 역경을 하였는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사문 영윤(靈閏) 등이 증의(證義)를 했고 사문 행우(行友) 등이 번역문을 편집하였으며, 사문 변기(辯機) 등이 집필(執筆)하였다. 자은사(慈恩寺)가 새로 창건되자 그 곳으로 옮겨가서 번역을 계속했다. 혼란한 것들에 대해서 서두르지 않고 조리있고 단정하게 처리했다. 황제가 황궁[內禁]으로 불러들였고, 함께 남북의 산에 마련된 궁궐로 행차하기도 했는데, 대면하고 이치를 서술하자 지극히 존경을 보였다. 천명(天命)에도 끝이 있고 해와 달도 어둠과 밝음이 있다. 현장은 다시 경사(京寺)로 돌아와서 평소와 같이 번역에 종사했다. 나중에 이런 인연으로 제자들과 옥화궁(玉華宮)에 가서 머물기도 했다.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홍복사에서부터 북궁(北宮)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경전을 번역하는 데서 비록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번역의 업적은 경시하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대 후대의 뛰어난 인물이 이것을 통해서 다시 불교의 가치를 중흥시켰으면 한다.
이상 2부는 경사(京師) 홍복사(弘福寺) 사문 석언종(釋彦琮)이 찬술하였다. 언종은 세상에 탑사(塔寺)와 영상(靈相)45)이 매우 많아서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진실한 믿음을 만족시킨다고 여겼다. 강표(江表) 양실(梁室)의 기록은 10권이며, 동도(東都) 후위(後魏)도 5축(軸)이다. 그런데 위수(渭水)의 북쪽 황제가 거주하던 곳의 이름 있는 사찰과 훌륭한 불탑의 기록만이 유독 없어졌다. 언종(彦琮)이 이런 사실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새롭게 모아서 구성하였다.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서 발굴하고 사탑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전거(典據)를 들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꿰뚫는 점이 있다.
(10) 석현응(釋玄應) 대당중경음의(大唐衆經音義)1부 15권
이상 1부는 경사(京師) 대자은사(大慈恩寺) 사문 석현응(釋玄應)이 찬술한 것이다. 현응은 광범위하게 여러 책[字書]을 배웠고 여러 학문에 통달했으며 고금(古今)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유교와 불교를 모두 탐구하였다. 고제(高齊) 사문 석도혜(釋道慧)가 『일체경음(一切經音)』을 지었지만, 명목(名目)을 밝히지는 못하고 단지 자류(字類)만을 분석했을 뿐이다. 적당한 인물을 만나면 여러 가지 의문을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현응이 이런 일들을 힘들어 하다가 결국 이 『대당중경음의(大唐衆經音義)』를 짓게 되었다. 핵심적인 부분을 거론하였으며, 사실 기록을 보존하기에 힘썼다. 만대(萬代)의 모범이 될 것이며, 이 시대에는 짝할 만한 이가 없다. 한스러운 것은 기술하거나 정리하는 것이 겨우 끝났지만 모자라는 부분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했다. 다시 멀어져서 다른 사물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애석할 뿐이다.
이상 7부 131권은 경사(京師) 서명사(西明寺) 사문 석현운(釋玄惲)이 찬술한 것이다. 현운의 본명은 세도(世道)46)였으며, 율학(律學)에 정통해 명성이 높았으며, 이전의 뛰어난 이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들의 글을 모으고 정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았다. 아울러 그것을 선별하기도 하고 소(疏)을 쓰기도 했고, 여러 경전에 주(注)를 달아 풀이 했으며, 경전을 번역한 사람과 연대도 정리하였다. 대략 서술한 것이 앞과 같다.
(12) 석현범(釋玄範) 주금강반야경(注金剛般若經) 주이제삼장성교서(注二帝三藏聖敎序)
이상 2부는 보광사(普光寺) 사문 석현범(釋玄範)이 찬술한 것이다. 현범은 어려서 출가하여 대승불교를 공부하였고, 훌륭한 스승들에게서 학문을 배워 청정하고 넓은 경지를 이룩했다. 용렬한 소인배들과는 무리를 짓지 않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하늘을 벗어나는 심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명정리(因明正理)의 학문을 널리 선양함으로써 승속[道俗]들을 깨우쳤다. 별집(別集) 20권이 있는데, 그의 신이한 능력을 서술하고 있다.
37)효문제(孝文帝)와 당시 실력자 고환(高歡)의 관계가 악화돼 대치하기도 했는데, 결국 황제가 관중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때 고환은 업성에서 따로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였다. 이것으로 동위(東魏)ㆍ서위(西魏)의 분할이 시작되었다.
38)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550년에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북제(北齊)라고 하였다. 이가 문선제(文宣帝)이다.
3)오시(五時)란 남북조 시대에 연구하고 조직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석존이 성도이후 입멸할 때 까지 설법한 시기를 다섯으로 구분한 것이다. 유송의 혜관(慧觀)과 유규(劉虯) 등이 처음 주장하여 남북조 시대에 유행했다. 이후 수대(隋代)에 천태지의가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대성한 것이다.
4)한(漢)나라 고조 때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하려 상산(商山)에 숨은 동국공(東國公)ㆍ하황공(夏黃公)ㆍ각리선생(角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네 사람의 백발 노인을 가리킨다.
5)본문(本門)은 진불(眞佛)은 아주 먼 옛날에 이미 성도했다는 데 근거하여 본지ㆍ근원ㆍ본체를 나타냄을 말한다. 적문(迹門)은 이 세상에 형체를 나타낸 불은 근원이 되는 부처가 자취를 나타내 보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본문과 적문이 꼭 이런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사실과 이차적인 사실을 나타낼 때도 응용하는데 위의 본문에서는 이런 측면이 있다.
6)고려대장경에는 종(宗)으로 나와 있는데 송ㆍ원ㆍ명 판본이나 『역대삼보기』에는 송(宋)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그것을 따랐다.
7)겸(謙)은 『주역』의 64괘 중의 하나인데 남에게 겸손한 상(象)을 나타낸다. 겸겸(謙謙)도 여기서 나와서 겸손하고 공경함을 뜻한다.
8)『속고승전』 제23권(대정장 50, pp.629中~631上)
9)후경은 원래 동위 이주영(爾朱榮)의 부하였다가 다시 북제 고환(高歡)의 부하가 된 인물이다. 고환과 아들 고등이 그를 의심하자 양(梁)나라에 투항했다. 이후 군사력을 확장하여 양의 중앙 정권에 반항하였다.
10)갑족(甲族)은 지체가 높은 집안이나 권세를 가진 신분을 가리킨다.
11)영정(永定) 원년(557)은 정축(丁丑)이고, 병자(丙子)는 한 해 전인 556년으로 양의 마지막 연호인 태평(太平) 원년에 해당된다. 양(梁) 경제(敬帝)의 두 번째 연호이자 양의 마지막 연호인 태평은 556년 9월에서 557년 10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557년 10월 경제는 진패선(陳覇先)에게 선위하고 황제에서 물러났으며 이로써 진(陳)나라가 건국되고 양은 멸망하였다.
12)사리(闍梨)는 아사리(阿闍梨)의 준말인데, 제자를 바르게 가르쳐서 인도할 만한 스승을 가리킨다. 원래는 수계작법(受戒作法)을 행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어 스님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3)중국의 양자강 이남인 강남 지역을 가리킨다.
14)『대정신수대장경』을 따르면 고려대장경에는 없지만 송ㆍ원ㆍ명 세 판본에는 『사십이자문(四十二字門)』으로 시작하는 혜사(慧思)에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한다. 이 번역에서도 권말에 실었다.
15)옥촉(玉燭)은 사철의 기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임금의 덕이 옥처럼 아름다워서 사시가 화기의 상서를 이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사시가 순조로운 것을 옥촉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16)적약(赤若)은 적분약(赤奮若)을 말하는데 축년(丑年)의 다른 이름이다. 즉 수나라가 건국한 581년 신축년(辛丑年)을 가리킨다.
17)여기서 경(景)은 태양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의미가 심화돼서 하늘을 가리키게 됐다. 그래서 경명은 천명(天命)의 다른 말로 사용된다.
18)육관제도는 북주(北周)에서 설치한 중앙 정부의 조직이다. 천(天)ㆍ지(地)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의 6부로 나누어 구성하고 치(治:천관)ㆍ교(敎:지관)ㆍ예(禮:춘관)ㆍ병(兵:하관)ㆍ형(刑:추관)ㆍ사(事:동관)를 담당하게 했다.
19)오성(五省)은 수(隋)나라에서 설치한 중앙 정부의 조직이다. 내시성(內侍省)ㆍ상서성(尙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내사성(內史省)ㆍ비서성(秘書省)으로 구성된다.
20)복택(卜宅)은 수도 후보지의 길흉을 점쳐보는 것을 말한다.
21)사사(四事)는 수행하는 승려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물품을 말한다. 음식ㆍ의복ㆍ와구ㆍ탕약을 가리킨다.
22)황제의 칙령으로 유사(有司)에 의해 편찬된 것을 말한다.
23)장빈(漳濱)은 와병(臥病)을 뜻하는 시어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유정(劉楨)이 “내가 고질병에 한번 걸려들어, 맑은 장수 물가에 몸을 숨겼노라[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표현을 쓴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선(文選)』 권23, 「증오관중랑장(贈五官中郞將)」에 나온다.
24)욕계와 색계 중간에 대보방(大寶坊)이 있는데 석존이 여기서 『대집경』을 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미가 전하여 보방은 『대집경』을 가리키게 되었고, 보방학은 이 경에 관련한 학문을 나타내게 되었다.
25)본문에는 연도만 나와 있고 어느 달에 번역을 시작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26)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를 말하는데,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인까지 포함된 것이다.
27)타발가한(他鉢可汗)은 타파르(他鉢 Tapar, 572~581) 칸을 말한다. 가한은 ‘khan’의 음역어로, 몽골과 터키 지방의 군주를 말한다.
28)삼보를 만난다는 것은 불교가 흥기하는 것을 뜻한다.
29)『대정신수대장경』을 따르면 『고려대장경』에는 없지만 송ㆍ원ㆍ명 세 판본에는 『원돈지관(圓頓止觀)』으로 시작하는 지의(智顗)에 관련한 기사가 실려있다고 한다. 이 번역에서도 권말에 번역해서 실었다.
30)양지(涼支)는 지겸(支謙)과 지루가참(支婁迦讖)을 가리키고, 양축(涼竺)은 축법호(竺法護)와 축숙란(竺叔蘭)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백(一白)은 백연(白延)이다.
31)지겸(支謙)과 서진의 축법호, 축숙란을 가리킨다.
32)『능엄경』 등에서 나오는 말인데 흔히 설법의 좌석을 가리킨다.
33)수나라 개황 12년(592) 문제가 칙령으로 25인의 고승을 선발하여 만든 조직이다. 25중(衆)의 교화와 기강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에서 불교를 국가의 질서 속에 편입시켜서 운영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승찬이 25중의 제1인 마하연장이 되어서 『십종대승론』을 저술했고, 승곤이 독경법주(讀經法主)가 되어서 『논장』을 지었다. 혜영이 25중주가 되어서 『상학론(傷學論)』을 지었다.
34)글자를 기입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게 만든 종이를 말한다.
35)죄업이나 업장을 소멸하는 일종의 의례이다. 이 방식은 마치 산이 무너지듯 오체투지를 하며, 남녀가 서로 뒤섞여 밀행을 한다. 수나라 때 관에서 요망한 행위로 간주하여 금지시켰다.
36)유사(有司)는 인명(人名)이 아니라, 관직명(官職名)이다
37)여기서 화체(化體)는 세속적 삶을 지향하는 몸을 가리킨다.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에서 제시된 개념인데, 특히 세 번째 글인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에서 잘 드러난다. 사문은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상사를 따를 수 없고, 그러한 몸체와 궁극의 경지는 병존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결국 이런 것들을 통해서 혜원이 밝히고자 한 것도 사문이 세속적 권위에 대한 세속적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38)『대정신수대장경』을 따르면 『고려대장경』에는 없지만 송ㆍ원ㆍ명 세 판본에는 「사념처관(四念處觀)」으로 시작하는 관정(灌頂)에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한다. 이 번역에서도 권말에 번역해서 실었다.
39)암랑(巖廊)은 원래 궁전 곁에 있는 행랑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바뀌어 조정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40)태종(太宗)의 능이다. 섬서성(陝西省) 예천현(醴川縣)의 동북쪽에 있는 구종산(九嵕山)에 있다.
41)『불배속집(不拜俗集)』은 출가자가 속인에게 경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다.
42)내금(內禁)은 원내(苑內) 또는 금내원(禁內苑)이라고 하는데 궁궐의 내전을 말한다.
43)중국불교사 전체로 보자면 네 번의 법란이 있었다. 흔히 이것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이라고 한다.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후주의 세종, 당의 무종이다.이 『대당내전록』이 저작된 것은 당나라 제3대 고종 인덕(麟德) 원년(664)이고, 당나라 무종은 훨씬 후대인 841~846년에 걸쳐 재위했다. 당연히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법란에는 마지막 무종의 것이 빠졌다. 그래서 세 번의 법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4)여기서 이종(李宗)은 도교를 가리킨다. 노자의 성이 이씨(李氏)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45)영상(靈相)은 불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로 영상(靈像)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형상이 영험을 가지거나 신령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