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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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석교록 제 5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⑤

11) 송(宋) 시대
송나라 유(劉)씨는 건업(建業)에 도읍하였다. 무제(武帝) 영초(永初) 원년 경신(庚申, 420)으로부터 순제(順帝) 승명(昇明) 3년 기미(己未, 479)에 이르기까지 무릇 8주(主) 60년 동안에 승려들과 속인 22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ㆍ율(律)ㆍ논(論) 등과 아울러 잡집(雜集)과 실역(失譯)의 모든 경은 총 465부 717권이다.그 중에서 93부 243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372부 474권은 궐본이다.

송(宋)의 사문 불타집(佛陁什)3부 32권. 율(律)ㆍ계(戒)ㆍ갈마(羯磨)
사문 강량야사(畺良耶舍)2부 2권. 경
사문 담마밀다(曇摩蜜多)12부 17권. 경
사문 석지엄(釋智嚴)10부 31권. 경
사문 석보운(釋寶雲)4부 17권. 경(經)ㆍ집(集)
사문 이섭바라(伊葉波羅)1부 13권. 논(論)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10부 18권. 율ㆍ집
사문 승가발마(僧伽跋摩)5부 24권. 율ㆍ논ㆍ집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52부 134권. 경ㆍ논ㆍ집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1부 1권. 경
거사(居士) 저거경성(沮渠京聲)28부 28권. 경ㆍ율
사문 석혜간(釋慧簡)10부 10권. 경ㆍ집
사문 공덕직(功德直)2부 7권. 경
사문 석승거(釋僧璩)1부 1권. 갈마(羯磨)
사문 석법영(釋法穎)1부 1권. 니계(尼戒)
사문 축법권(竺法眷)6부 29권. 경
사문 석상공(釋翔公)1부 2권. 경
사문 석도엄(釋道嚴)2부 3권. 경ㆍ율
사문 석용공(釋勇公)3부1) 3권. 경
사문 석법해(釋法海)2부 2권. 경ㆍ율
사문 석선공(釋先公)1부 1권. 경
사문 승가발미(僧伽跋彌)1부 1권. 율초(律抄)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307부 340권

(1) 불타집(佛陀什)
오분율(五分律) 30권또한 『미사색률(彌沙塞律)』이라고도 한다. 혹은 34권으로 되어 있다. 『별록(別錄)』에서는 “24권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착오였을 것이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오분비구계본(五分比丘戒本) 1권또한 『미사색계본(彌沙塞戒本)』이라고도 한다. 『축도조록(竺道祖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사색갈마(彌沙塞羯磨) 1권『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2권이다.율(律)과 계(戒) 본(本)은 현재 있으며, 갈마(羯磨) 본은 궐본이다.

사문 불타집은 중국말로는 각수(覺壽)라고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가르침을 받아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진하였으며,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달통하였다.
폐제(廢帝) 의부(義符) 경평(景平) 원년 계해(癸亥, 423) 7월에 양도(楊都)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 범본(梵本)을 얻었으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건업(建業)의 모든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 학문(學問)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곧 그 해(423)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고 칭하였다. 불타집은 범문을 잡고 우전(于塡) 사문 지승(智勝)이 통역을 하고, 용광사 사문 축도생(竺道生)과 동안사(東安寺) 사문 석혜엄(釋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며 교정하였다. 송(宋)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琊王) 연(練)이 시주자[檀越]가 되어서, 다음해(424) 12월에야 비로소 모두 마쳤다. 그리하여 번역한 계의 요점[戒心]과 갈마문(羯磨文)이 다 세상에 유행하였다. 불타집이 어디서 입적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2) 강량야사(畺良耶舍)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1권또한 『무량수관경(無量壽觀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의 『송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송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2부 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강량야사는 중국말로는 시칭(時稱)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즐기려는 마음과 욕심[嗜欲]이 적었다. 『아비담(阿毗曇)』을 잘 암송하였고, 율부(律部)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 삼장(三藏)에도 밝았지만, 선문(禪門)에도 전념하여 힘을 쏟았다. 매양 한 번 마음을 관조[遊觀]하면, 혹 7일 동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늘 삼매(三昧)로 바로 받아들인 것을 여러 나라에 전하고 교화하였다.
원가(元嘉) 원년 갑자(甲子, 424)에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사하(沙河)를 건너와 건업(建業)에 도착하자, 문제(文帝) 의융(義隆)이 매우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종산(鍾山)의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는데, 사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관무량수경』과 『관약왕약상이보살경』을 번역하였고, 승함이 곧 붓으로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정토(淨土)로 나아가는 큰 인[洪因]이 되고, 업장[障]을 바꾸는 비술(秘術)로 여겼다. 그리하여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평창(平昌)의 맹의(孟顗)는 소문을 듣고 흠모하며 공경하여,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공급하였다. 맹의는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서 함께 떠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서 쉬었다. 원가 19년(442)에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도를 폈으니, 선을 배우는 사람들[禪學]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입적하였으니 춘추는 60세였다.

(3) 담마밀다(曇摩蜜多)
허공장보살신주경(虛空藏菩薩神呪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 불타야사(佛陁耶舍)의 『허공장경(虛空藏經)』과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의 『허공잉경(虛空孕經)』 등과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과 『위세록(魏世錄)』에 보인다.
관허공장보살경(觀虛空藏菩薩經) 1권또한 『허공장관경(虛空藏觀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상액경(象腋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소희망경(無所希望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체법고왕경(一切法高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전녀신경(轉女身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 1권아래 주(注)에 “『심공덕경(深功德經)』 중에서 나왔다. 혹은 행법(行法)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보현관경(普賢觀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오문선경요용법(五門禪經要用法)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보창록(寶唱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열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가 번역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보적경(寶積經)』의 「무량수회(無量壽會)」 등과 동본이다. 『진적사록(眞寂寺錄)』에 보인다.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 1권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현(安玄)의 『법경경(法鏡經)』과 『보적경』의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 등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利忉天爲母說法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불승도리천경(佛昇忉利天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선비요경(禪秘要經) 5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선법요(禪法要)』라고 한다. 원가(元嘉) 18년(441)에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하여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승우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은 『선비요경』 5권이 있으나, 문장이 극히 뒤섞이고 엇갈려 유행하지 못하고 있다. 『산번록(刪繁錄)』에 기술한 것과 같다.
이상은 12부 17권이다.『오문선경요용법』 이상의 7부 7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무량수경』 이하의 5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마밀다는 중국말로는 법수(法秀)라고 한다. 계빈(罽賓) 사람이다. 나이 예닐곱 때부터 신명(神明)이 맑고 올곧았으며, 불사(佛事)나 법회[法事]를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고 기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계빈국에는 성인과 통달한 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여러 경들을 널리 관통하였다. 특히 선법(禪法)은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그가 얻은 비밀스런 요체(秘要)는 지극히 은밀하고 심오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깊이가 있어 지혜가 있고, 의식에 대한 규칙[儀軌]에는 상세히 정돈되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연미선사(連眉禪師)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교화를 널리 펼치겠다고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慈國)에 이르렀다. 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국 왕의 꿈에 신(神)이 말하였다.
“큰 복덕이 있는 사람이 내일 나라로 들어올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공양하여야 한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외사(外司)에 칙령을 내려 ‘만일 이방인(異邦人)이 국경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여 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왕은 드디어 그에게 계(戒)를 받고 사사(四事)의 공양을 다하였다. 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었고, 이양(利養)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고는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하였다.
“복덕 있는 사람이 왕을 버리고 떠나리라.”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유사(流沙)를 지나 돈황(燉煌)에 이르러서, 넓은 들판에다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나무 천 그루를 심고, 정원 백 이랑[畝]2)을 조성하였다. 승방ㆍ누각ㆍ못과 숲이 지극히 엄숙하고 청정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涼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 다시 당우(堂宇)를 경영하였는데, 배우러 온 문도들이 많아서 선업(禪業)이 매우 왕성하였다.
항상 강좌(江左)의 여러 백성들에게 법을 전하려는 뜻을 두었으므로,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촉(蜀)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면서,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관(禪舘 : 선을 공부하는 집)을 지었다. 지극히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였는데, 10여 일을 지나 마침내 한 매(枚)를 감응하여 얻었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가 나는데,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도속(道俗)의 문도들은 그들의 마음으로 결심한 것보다 백배나 더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건업(建業)에 이르러,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기원(祇洹)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담마밀다의 도(道)에 대한 소문은 본래부터 드러났는데, 그가 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예배하고 문안을 드렸다.
송(宋)의 문원황후(文袁皇后)로부터 황태자ㆍ공주에 이르기까지 계궁(桂宮)에서 재(齋)를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 그들은 황후의 내전[椒掖]에서 계(戒)를 청하였으며, 문후(問侯)에 참여한 사신들이 열흘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원가 원년 갑자(甲子, 424)로부터 18년 신사(辛巳, 441)에 이르기까지 『허공장보살신주경』 등 12부를 번역하였다. 항상 선의 교리[禪道]로써 학도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배우러 온 이들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았고, 사부 대중과 원근(遠近)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회계태수(會稽太守) 맹의(孟顗)는 진리[眞諦]를 깊이 믿으면서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는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하(浙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녔고, 찬현(鄼縣)의 산에 탑사(塔寺)를 세웠다.
동쪽 변경의 옛 풍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 집집마다 바른 법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데마다 마음으로 신복되지 않음이 없었다.
뒤에 건업(建業)으로 돌아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러 쉬었다. 담마밀다 선사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는데, 종산(鍾山)의 진악(鎭岳)은 숭산(嵩山)과 화산(華山)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항상 하사(下寺)의 터와 짜임새가 훌륭한 형세에 따르지 못했음을 한탄하여, 이에 높은 모양의 땅에 따라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전방(殿房)과 선실(禪室)이 숙연하여 깊고도 멀어서 실로 영취산(靈鷲山)의 바위와 비슷하였고, 기원정사[祇樹]와 매우 비슷한 모양[髣髴]세를 갖추었다. 이에 마음을 쉬려는 대중들이 만 리에서도 몰려들었는데, 경의 풍송(諷誦)이 엄숙하고 온화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교화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서역으로부터 남토(南土)에 이르기까지 무릇 돌아다닌 곳에는 단회(檀會 : 교단에 모임)를 일으키어 교법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음 선사가 계빈을 떠날 때에는 가비라신(迦毗羅神)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내 구자국에 이르러 중도에서 되돌아가려고 하자, 이에 그 신(神)은 모습을 드러내어 선사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신통력은 변화무쌍하여 자유자재로 어디든지 돌아다니는데, 나와 함께 남방(南方)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습을 거두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멀리서 양도(楊都)에까지 함께 이르렀다. 이에 상사(上寺)에다 그 상(像)을 그려 벽에 붙였는데, 지금까지도 신령스런 소문[聲影]의 효험이 있어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87세였다. 도속(道俗) 4부 대중이 곡(哭)을 하면서 뒤를 따랐으며, 이에 종산(鍾山) 송희사(宋凞寺) 앞에 장사지냈다.

(4) 석지엄(釋智嚴)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 6권제목 첫머리에 “『대집경(大集經)』속에 무진의(無盡意)가 설한 「불가진의품(不可盡義品)」 제22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만 『무진의경(無盡意經)』, 또는 『아차말경(阿差末經)』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아차말경』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1권『법화경(法華經)』에서 갈려 나온 것支流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광박엄정불퇴전륜경(廣博嚴淨不退轉輪經) 4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바로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 또는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이라고도 한다. 축법호의 『아유월치차경(阿惟越致遮經)』과 같은 동본이다. 원가 4년(427)에 번역되어 나왔다.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사천왕경(四天王經) 1권『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보요경(普曜經) 8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6권, 또는 4권으로 되어 있다. 촉(蜀)의 『보요경』, 축법호의 『보요경』과 당나라 번역의 『방광장엄경(方廣莊嚴經)』은 모두 동본이다. 『송제록』과 『승우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생경(生經) 5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선덕우바새경(善德優婆塞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31권이다.『사천왕경』 이상의 4부 12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보요경』 이하의 6부 19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지엄은 서양주(西涼州) 사람이다. 스무 살 때에 출가하였는데, 곧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이 버린 낡은 누더기 조각으로 만든 법의[納衣]를 입고 좌선(坐禪)하며 오래도록 풀이나 나무의 열매[蔬食]를 먹고 살았다. 매양 이름난 스승을 널리 찾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널리 구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계빈국(罽賓國)에 도달하여 마천다라정사(摩天陁羅精舍)로 들어갔다. 불타선(佛駄先) 비구로부터 선법(禪法)을 묻고 받았으며, 점차로 깊이 들어가 3년이 지나자, 그 공부는 10년을 한 것보다 더 뛰어났다. 불타선은 그가 선정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었구나.”
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공경히 대접하였다.
당시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역시 그 나라의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그에게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1년여 만에 관내(關內)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함께 장안(長安)에 머물렀는데,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서쪽에서 온 도반들과는 함께 관내를 나와 이리저리 흩어졌다.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면서 힘써 정진하고 수학하였다.
진(晋)나라 의희(義凞) 13년(417)에 송(宋)의 무제(武帝)가 서쪽 요홍(姚泓)을 정벌하여 승리하고,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御駕)를 호송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는데, 뜻을 함께한[同志] 세 승려가 각기 승상(繩床)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이에 손으로 두드리자, 세 사람은 눈을 떴지만, 잠시 후 도로 눈 감고 말하려 들지 않았다.
왕회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고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물어 보자, 모두 말하였다.
“이 분들은 숨어 살면서 여러 해 동안 일찍이 밖으로 나온 일이 없었습니다.”
왕회는 송 무제에게 이 일을 아뢰었고,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기꺼이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지엄이 두 사람의 천거를 받아 따라가게 되었다.
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기기를 잘하였다. 지엄이 도읍으로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지엄은 성품이 고요하고 조용[虛靜]3)하였으므로, 마음은 세속의 번잡함을 피하려 하였다. 왕회는 이에 동쪽 성문 밖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였으니, 곧 지원사(枳園寺)였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얻어 온 범본의 여러 경전들을 아직도 번역하지 못하였는데, 원가 4년 정묘(丁卯, 427)에 이르러서야 사문 보운(寶雲)과 함께 『무진의보살경』 등 10부를 번역해 냈다.
지엄은 사찰에 있으면서 별청(別請)4)을 받지 않고 항상 탁발하여 생활을 하였으니, 도화(道化)가 이승과 저승에까지 끼쳐서 모두가 감복하였다.
지엄은 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으므로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어 주었다. 젊어서부터 사방을 행각하면서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이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 5계(戒)를 받아 계율을 이지러지게 하거나 범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고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마침내 다시 바다를 건너 또 한 번 천축국에 가서 여러 밝게 통달한 분에게 묻고자 하였다. 마침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자세히 물었더니,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고, 이에 지엄을 위하여 정(定)에 들어 도솔궁(兜率宮)으로 가서 미륵(彌勒)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계를 받았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입적하였다. 그때 나이 78세였다.
그 나라는 범인과 성인의 화장하는 장소를 각기 달리하였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하였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시신을 범승(凡僧)의 묘지로 옮기려 하였으나,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바꾸어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갑자기 저절로 가벼워졌다.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일부러 서역으로부터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함께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써 지엄을 추측하여 보아도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4과[向果]5)의 어느 중간이며, 또는 깊은지 얕은지 모를 뿐이다.

조복중생업경(調伏衆生業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일음현정법경(一音顯正法經)혹은 『일음연정법경(一音演正法經)』이라고도 한다.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선덕바라문문제바달다경(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대운경(大雲經)』에서 나왔다.
비라삼매경(毗羅三昧經) 2권『승우록』 등의 모든 기록에서는 모두 주(注)에 의경(疑經)으로 하였는데, 『대주록(大周錄)』에서는 이를 간행(刊行)하면서 정경(正經)으로 하였다. 지금 찾아보니, 문장과 언사가 천박하고 뜻이 성기고 빠졌기 때문에 의경(疑經)에다 넣고, 조목과 용도科用의 쓸모없는 논쟁稗穢 을 없앤다.

『조복중생업경』 등의 4부 5권은 『장방록(長房錄)』 등의 기록에서는 모두 “지엄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앞의 3경은 따로 파생한[別生] 경이요, 뒤의 1권은 위경으로 의심[疑僞]이 되므로, 지금 실제의 기록에서는 모두 삭제하였다.

(5) 석보운(釋寶雲)
불본행경(佛本行經) 7권혹은 『불본행찬전(佛本行讚傳)』이라고도 한다. 육합산사(六合山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5권이라고도 한다. 『승우록(僧祐錄』ㆍ『보창록(寶唱錄)』ㆍ『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불본행찬경(佛本行讚經)』이다”라고 하였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영초(永初) 2년(421)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어떤 목록에서는 “육합산사(六合山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의 번역이다. 『보적경』의 「무량수회(無量壽會)」와 같은 동본이다. 『도혜록(道慧錄)』과 『승우록』 등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竺道祖)의 『진세잡록(晋世雜錄)』에 보인다.
부법장경(付法藏經) 6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17권이다.앞의 1부 7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3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보운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학행(學行)이 있었다. 뜻과 인품[志韻]이 굳세면서 깨끗하여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젊어서부터 바르고 곧고 순수하고 깨끗하기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여 몸을 잊어버리고 도만을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리고 몸소 신령스런 자취[靈跡]를 보고 널리 경(經)의 가르침을 구하려고 맹세하였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초(初)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는데, 법현(法顯)ㆍ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따랐다. 유사(流沙)를 지나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塡國)과 천축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두루 신령스런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羅刹)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으며, 석가모니께서 남기신 자취를 우러러보고 많은 예배를 하였다.
석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워 천축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완전히 익혔다. 뒷날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불타발타(佛陁跋陁) 선사를 따라 선(禪)을 닦고 배우기를 태만하지 않고 부지런히 힘썼다. 그런데 불타발타선사가 갑자기 후진(後秦)의 승려들에게 축출당하면서 그도 또한 그곳을 황망하게 떠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여 불타발타와 함께 양도(楊都)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서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스님들은 보운이 의지가 굳고 단단해서 아주 먼 외국에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묻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엄(智嚴)과 함께 여러 경을 번역하였는데, 지엄이 세상을 떠나자 보운은 혼자 경을 널리 번역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3)에는 『불본행경』 등의 4부를 번역하였다. 보운은 손에 범본(梵本)을 잡고 입으로 널리 번역할 때, 중국말과 서융(西戎)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그래서 음훈(音訓)이 올바르고 진실하여 보운이 결정한 것은 모두가 믿고 복종하였다.
처음에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번역하여 펴는 것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많은 경전을 번역 출간하였다. 그러나 중국[江左]어와 범어를 연결한 번역은 보운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보운은 진(晋)나라와 송(宋)나라 때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보운의 성품은 그윽한 것을 좋아하여 거처를 늘 한가롭고 고요하게 했다. 마침내 육합산사(六合山寺)에 갔는데,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아 좀도둑들이 들끓었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타이르고 가르치게 되자, 대부분 잘못을 고치고 예로써 섬기며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서 아홉 집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의 혜관이 임종할 때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모두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할 수 없이 돌아가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무르다가 다시 육합산사(六合山寺)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산사(山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이때의 춘추가 74세였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일은 따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이 있다.

(6) 이섭바라(伊葉波羅)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고승전』과 『승우록』에 보인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이상은 1부 13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이섭바라는 중국말로는 자재(自在)라고 부르며, 서역 사람이다. 삼장(三藏)을 오묘하게 통달하였고, 4아함(阿含)을 밝게 알았다. 원가(元嘉) 3년 병인(丙寅, 426)에 팽성(彭城)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북쪽 서주자사(徐州刺史) 태원왕(太原王) 중덕(仲德)을 위하여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을 번역하였다. 「택품(擇品)」까지 번역하고 거리낀 일이 있어 마침내 마치지 못하였다. 다만 10권만을 완성하였을 뿐이며, 자사가 몸소 받아썼다. 8년 신미(辛未, 431)에 이르러 다시 구나발마(求那跋摩)를 청하여 뒤를 이어서 모두 마쳐 13권을 완성하였다.

(7) 구나발마(求那跋摩)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9권일명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도 한다. 10권으로 되어 있다.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장방록』 등 목록에서는 “모두 『선계경(善戒經)』 20권이다”라고 하였고, 또 “제자가 다시 2품(品)을 더 번역하여 30권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모두 잘못이다.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1권『우파리문보살수계법(優波離問菩薩受戒法)』이라고도 한다. 『보창록』에 보인다. 만일 『승우록』에 준한다면 “이 한 권을 가져다 앞의 경 9권을 합쳐서 10권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지(北地)의 경본에는 “그것을 따로 떼어 실은 지가 이미 오래 되어서 합칠 수가 없으므로, 우선 옛 결정에 의거하여 둔다”라고 하였다.
보살내계경(菩薩內戒經) 1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우바새오계위의경(優婆塞五戒威儀經)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사미위의(沙彌威儀) 1권혹은 『사미위의경(沙彌威儀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분비구니갈마법(四分比丘尼羯磨法) 1권승우는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잡갈마(雜羯磨)』이다”라고 하였다. 원가 8년(431)에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또한 바로 『사분갈마(四分羯磨)』라고도 한다.
우바새오계상경(優婆塞五戒相經) 1권일명 『우바새오계약론(優婆塞五戒略論)』이라고도 한다. 원가 8년(431)에 기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 번역이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龍樹菩薩爲禪陁迦王說法要偈) 1권당(唐)의 『구록(舊錄)』에 보인다.
선신이십이계(善信二十二戒) 1권또한 『이욕우바새우바이구행이십이계문(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文)』, 또는 『삼귀우바새계(三歸優婆塞戒)』라고도 한다. 승우는 “『삼귀급우바새이십이계(三歸及優婆塞二十二戒)』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우바새계(優婆塞戒)』이다”라고 하였다. 『고승전』과 『승우록』에 보인다.
경률분이기(經律分異記)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18권이다.『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 이상의 8부 16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선신이십이계』 이하의 2부 2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나발마는 중국말로는 공덕개(功德鎧)라고 부른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罽賓國)을 다스렸다. 조부(祖父) 가리발타(呵梨跋陁)중국말로 번역하면 사자현(師子賢)이다.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유배(流配)를 당하였고, 아버지 승가아난(僧伽阿難)중국말로 번역하면 중희(衆喜)이다.은 산택(山澤 : 산과 숲과 내와 못)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구나발마는 나이 14세가 되자, 기략(機略)과 견해가 빼어났으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무릇 넓었고, 덕을 숭상하고 선(善)에 힘썼다.
그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으므로 구나발마가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의 목숨을 미리 죽게 하는 일은 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성을 내며 말하였다.
“설령 죄를 얻게 된다 하여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할 것이다.”
구나발마는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이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아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고통은 너의 몸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겠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조차도 오히려 대신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삼도(三塗)7)의 고통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이에 잘못을 뉘우치고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대국(大國)을 공격하여 누르고 즉위해서 남면(南面)하면 제왕으로 존귀하게 칭하게 될 것이요, 만일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과(聖果)8)를 얻게 될 것이다.”
나이 20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9부(部)에 막힘이 없이 밝았으며, 4아함(阿含)을 두루 깨달았으며, 경전 백여 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그를 모두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는데,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며 말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또 재주가 밝고 덕이 높으니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그리하여 수백의 군신(群臣)들이 두세 차례나 간곡하게 청하였으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여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며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면서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은 모두 “이미 초과(初果)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몸가짐과 차림새가 사물을 감화시켜 이를 본 이들은 마음을 일으켜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
후에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한 도사(道士)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과연 구나발마가 도착하였으므로, 왕의 어머니가 정성스런 예로써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면서 일러 말하였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는데,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과 같은 과보가 영원히 단절될까 두렵구나.”
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로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왕은 어머니에게 감화 받음[染習]이 이미 오래되었는지라, 오로지 힘써 정진하여 점차로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하여 업신여기려 하는데, 만일 상대하여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이고, 만일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멸망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높으신 스님의 명을 따르고자 하는데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려 하는데, 군기(軍旗)를 세우고 북을 울리면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문득 적들이 물러나 흩어졌다. 왕은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자 이틀이 지나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은 공경하는 마음과 믿음이 차츰 더 깊어갔다. 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법문(法門)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은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왕께서 만일 나라를 버리신다면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느 곳에 처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같은 자비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왕은 차마 그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세 가지의 원(願)을 청하였다.
“만일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의 원은 무릇 이 나라 경계 안에서는 모두 함께 화상(和上)을 받들도록 하는 것이요, 두 번째의 원은 다스리는 경내에서는 일체 살생을 금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원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기뻐하며 한결같이 공손히 받들었다. 이로부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따르며 계를 받았다. 왕은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는데, 몸소 자재를 끌고 가다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문으로 치료하니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도(道)로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전파되어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시에 양도(楊都)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 등이 있었는데, 멀리에서 소문을 듣고 오로지 음식을 올리고[飡稟]자 생각하였다. 원가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곧바로 교주자사(交州刺史)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은 또 사문 법장(法長)ㆍ도충(道沖)ㆍ도준(道儁)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기청(祈請)하게 하였다. 더불어 구나발마와 사바왕(娑婆王) 바다가(婆多伽)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지역에 왕림하여 도(道)의 가르침이 유행(流行)되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넓힘에 있어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미 상인(商人) 축난제(竺難提)를 따라서 배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문(遺文)9)에 이르기를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껴 드디어 송나라 경계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구산(虎丘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팔랐다. 구나발마는 그 모습이 기사굴산(耆闍崛山)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으로 바꾸었다.
산사(山寺)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磬]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방망이[椎]가 울리면 구나발마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는데도 젖지 않았고, 혹은 진흙을 밟고 왔는데도 습기가 차지 않았으니, 당시의 많은 도인과 속인들은 숙연하면서 더욱 공경하였다. 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는데 구나발마는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과 정광불(定光佛) 앞에 유동(儒童)이 머리카락을 풀어 엎드린 형상을 그렸다. 형상을 그려 놓은 뒤에는 매일 저녁마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 한 뒤에야 그쳤다.
시흥태수(始興太守) 채무지(蔡茂之)는 깊이 존숭하며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죽으려 할 적에 구나발마는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그 집안의 사람이 꿈을 꾸었더니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법을 강론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실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덕분이었다.
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는 이곳에 거주한 뒤부터 밤이나 낮에 오가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난다 하여도 지팡이로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이를 희롱하며 지나갔다. 이로부터 산길을 가는 나그네나 물길을 가는 객들이 왕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이들이 열에 일곱 또는 여덟이었다.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사미는 한 마리의 흰 사자가 기둥에 대고 서 있고, 하늘 끝까지 푸른 연꽃이 피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사미는 놀라 두려워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자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은 견줄 데가 없었으며, 그러한 일들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후에 문제(文帝)가 혜관(慧觀) 등에게 거듭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리하여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여 가서, 원가 8년(431) 정월에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며 말하였다.
“제자는 항상 재계를 지키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몸으로 목숨 바친 물건[殉物]을 가까이하여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가르치시겠습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대저 도(道)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사물(事物)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법(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하고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에 위엄이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고단한 몸을 이기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마디의 좋은 말을 하게 되면 사녀(士女)들이 함께 기뻐하고, 한 번 선정(善政)을 펴면 신과 사람이 화합하게 됩니다. 목숨을 죽이는 형벌을 쓰지 않고 힘을 쓰는 사역을 시키지 않는다면, 바람과 비를 때에 맞게 내리게 하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알맞게 되어서 온갖 곡식이 더욱 번성하고, 뽕과 삼[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齋)를 지닌다면, 그 재 역시 크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도 크다고 할 것입니다. 정녕코 반나절의 음식을 줄여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한 후에야 비로소 널리 구제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이에 책상을 어루만지며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대저 속인은 고원한 진리에 미혹되고 사문들은 비근한 교리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진리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道)를 공허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하고, 비근한 교리에 막힌다는 것은 글의 편(篇)과 장(章)에 구애되어 연연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는 참으로 도를 깨치게 하고 사리를 밝게 합니다. 가히 더불어 천인(天人)의 경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칙명을 내려 기원사(祈寺)에 머무르게 하고, 공양을 융숭하게 하니, 공경(公卿)ㆍ제후(諸候)와 뛰어난 선비들은 그를 높이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法席)을 여는 날에는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고,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신부(神府)는 자연스럽고, 묘한 말재주는 아주 뛰어났는데,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깨닫게 하기도 하였다.
구나발마는 곧 기원사에서 『보살선계경』 등 10부를 번역하였다.그 『선계경』을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모두 20권이다”라고 하였다. 하주(下注)에는 “후에 제자가 정림사(定林寺)에서 다시 2품(品)을 번역하여 30권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지금은 다만 9권, 또는 10권일 뿐이다. 이것은 베껴 옮길 때에 착오로 2(二) 자(字)란 글자를 위에다 붙여 썼기 때문일 것이다. 『승우록』에도 “10권이다”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목록의 것은 베껴 옮길 때의 착오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승전』을 살펴보면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을 번역 출간하였는데, 처음에 28품(品)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10)을 내어서 30품을 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계속 번역되어 30권을 이루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착오이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다시 말하기를 “구나발마가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이섭바라(伊葉波羅)가 10권을 번역 출간하였고, 구마발마가 뒤에 계속 번역하여 13권을 완성한 것이 됨으로, 구나발마가 다시 따로 번역해 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두 곳에서 다 같이 이 경을 싣는다면 역시 옳지 못하다. 이제 이섭바라의 번역에서는 싣지 않고 여기 싣는다. 글과 뜻이 모두 상세하고 진실하여 범어와 중국어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지난 6년(429)에 사자국(師子國)에 8인의 여승이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말하기를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었던 적이 없었거늘, 어떻게 우바새ㆍ우바이(二衆)에게 수계(受戒)하는 법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면서 ‘계품(戒品)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계법은 원래 대승중(大僧衆 : 큰 승려의 무리)이 있어 나오는 것이다. 설사 본래의 규정대로 계를 얻는 데에는 구애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도를 사랑(愛道)하는 인연은 같다.”
여러 여승들이 또 연월이 차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애써 다시 받으려 하자, 구나발마는 칭찬하며 말하였다.
“장하도다. 진실로 더욱 분명하게 하려 한다면, 매우 기뻐하면서 함께 도울 것이다. 다만 서역국 여승의 승랍(僧臘)이 아직 차지 않았고, 또 10인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 말을 배우게 해서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여승을 청하여 오게 해서 10인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 해 여름에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安居)하였다. 당시에 신자(信者)가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는데,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에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대중들은 모두가 성스러운 예(禮)로써 숭앙하였다.
여름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전각[閣]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이미 입적하여 있었다. 그때 춘추가 65세였다. 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行)의 유문(遺文)을 지었는데,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기를 “이미 사다함과[二果]11)를 증득하였다”라고 하였다.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입적한 뒤에 곧바로 승상(繩床)에 가부좌(跏趺坐)하여 앉혔는데, 얼굴 모습이 선정[定]에 든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모여든 도인과 속인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다 같이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을 알았다. 또 용이나 뱀처럼 생긴 길이 한 필(匹)쯤 되는 물체가 하나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곧 남쪽 숲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의 법에 의하여 화장[闍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여 향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香油)를 뿌려 유음(遺陰 : 시체)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하늘에 빛났다. 이때 하늘은 맑고 환하였으며, 도인이나 속인들이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을 세웠다. 다시 계를 받으려고 한 여승들은 슬픈 탄식의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던 계를 받을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처음 구나발마가 송나라에 이르자, 문제(文帝)는 그로부터 보살계(菩薩戒)를 받고자 했었는데, 미처 받지 못했다. 이제는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나 버렸으므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한지라, 애석하고 슬퍼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스님네로 하여금 그의 유문(遺文)을 번역하게 하였다.유문은 『고승전(高僧傳)』에 있는데, 번거로울까 두려워 싣지 않는다.

(8) 승가발마(僧伽跋摩)
비니마득륵가(毗尼摩得勒伽) 10권첫 권에는 “『살바다부비니마득륵가(薩婆多部毗尼摩得勒伽)』이다”라고 하였다. 원가(元嘉) 12년 을해(乙亥, 435) 정월에 말릉(袜陵) 평락사(平樂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그 해 9월 22일에 끝마쳤다. 도혜의 『송제록(道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잡아비담심론(雜阿毗曇心論) 11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며, 또한 『잡아비담경(雜阿毗曇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잡아비담비바사(雜阿毗曇毗婆沙)』라”고 하였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번역이다. 원가 11년 갑술(甲戌, 434) 9월에 장간사(長干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만 1년 만에 마쳤다. 『승우록』과 경의 서문에 보인다.
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1권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 1권대용(大勇)보살이 지었다. 혹은 『대용보살분별업보략집(大勇菩薩分別業報略集)』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청성승욕문(請聖僧浴文) 1권『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5부 24권이다.앞의 4부 24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승가발마는 중국말로는 중개(衆鎧)라 부르며, 인도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버렸으며, 맑고 준수하면서 계덕(戒德)이 있었다. 율장(律藏)을 잘 알았으며,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하였다.
원가(元嘉) 10년 계유(癸酉, 433)에 유사(流沙)에서부터 걸어 건업(建業)에 이르렀다. 풍채와 도량이 넓고 맑아서 도인이나 속인들은 그를 공경하면서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높이 섬기면서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령(平陸令)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道行)이 순수하고 갖추어졌다 여겨 그에게 그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으로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3층탑을 올리고, 도(道)를 행하며 경을 독송하여 밤낮 그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이 모여들어 도화(道化)가 널리 퍼졌다.
처음에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아주 밝았으므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다시 구족계를 받게 하려 하였다. 이때는 2부 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었는데, 삼장이 그만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이곳으로 왔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궤범(軌範)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기원사(祈寺)의 혜의(慧義)는 양도(楊都)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차이나는 것을 바로잡으니, 지닌 뜻이 같지 않다’라고 여겨, 직접 승가발마와 엎치락뒤치락 논쟁을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宗)을 표방하고 법(法)을 드러내었는데, 이치[理]와 증명[證]이 분명하면서 진실하였다. 그러므로 혜의는 마침내 완고하고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복(推服)하였다. 이에 제자들을 이끌어 계를 받아 잘 지키게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인에 이르렀다.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계범(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공(齋供)을 널리 베푸니, 4부 대중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울로 모여들었다.
얼마 후 이름과 덕이 높은 큰스님 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잡심론』을 오묘하게 알아서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먼저 삼장(三藏)을 비록 번역하였지만 아직 책으로는 엮지 못했으므로, 곧 11년(434) 9월에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여 다시 승가발마를 청하여 번역 출간하게 하였다. 보운(寶雲)이 말을 번역하고, 혜관이 스스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상고하고 교정하여 1년 만에 끝마쳤다. 이어서 『비니마득륵가』 등 5부를 번역하였다.
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역경하는 일을 마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만류하였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원가 19년(442)에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그가 언제 입적하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9)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와 같은 동본(同本)이다. 원가 13년(436) 8월 14일에 단양군(丹陽郡)에서 나왔다. 보운(寶雲)이 말을 전하고,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도혜록(道慧錄)』ㆍ『승우록(僧祐錄)』ㆍ『이곽록(李廓錄)』 등에 보인다.
대방광보협경(大方廣寶篋經) 3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문수현보장경(文殊現寶藏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 1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해탈요의경(解脫了義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이라고도 한다. 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의 뒤의 2품(品)이다. 『도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법상록(法上錄)』 등 네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원가 20년(443)에 도량사에서 번역되었으며,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입능가경(入楞伽經)』ㆍ『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과 동본이다. 『도혜록』ㆍ『승우록』ㆍ『법상록』 등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단양군(丹陽郡)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살차니건자경(大薩遮尼乾子經)』과 동본이다. 혹은 경계(境界)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이곽록』에 보인다.
노모녀육영경(老母女六英經) 1권또한 『노모경(老母經)』이라고도 하며,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노녀인경(老女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長房)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신일아본경(申日兒本經) 1권혹은 『신아본경(申兒本經)』이라고도 하며,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그 목록에서 “신도본(申兜本)이다”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아난타목거니가리타경(阿難陁目佉尼呵離陁經) 1권혹은 『무량문지경(無量門持經)』에서 나온 것이며,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장방록』에는 “따로 『무량문지경(無量門持經)』에서 나왔다”고 기재한 것은 착오이다.
앙굴마라경(央崛魔羅經) 4권도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록』ㆍ『승우록』ㆍ『법상록』 등의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대법고경(大法鼓經) 2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법상록』 등 네 목록에 보인다.
대의경(大意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두타경(十二頭陁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수제가경(樹提伽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와관사(瓦官寺)에서 번역되었으며, 범본(梵本)은 법현(法顯)이 가져왔다. 『고승전』에서는 “기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앵무경(鸚鵡經) 1권또한 『도조경(兜調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44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비마숙경(鞞摩肅經) 1권『중아함경』 제57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인출현세간경(四人出現世間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일상사념여래경(十一想思念如來經) 1권혹은 『십일사유념여래경(十一思惟念如來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48에서 처음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속달경(阿遬達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옥야경(玉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4권형주(荊州)의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여섯 번째의 번역이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ㆍ『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과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과 『이곽록』ㆍ『승우록』 등 목록에 보인다.
마하가섭도빈모경(摩訶迦葉度貧母經) 1권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 1권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죄복보응경(罪福報應經) 1권일명 『윤전오도죄복보응경(輪轉五道罪福報應經)』, 또는 『윤전오도경(輪轉五道經)』, 또는 『오도륜경(五道輪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사분아비담론(衆事分阿毗曇論) 12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한다. 제자 보리야사(菩提耶舍)와 함께 번역하였다. 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품류족론(品類足論)』과 동본이다. 『장방록』에는 번역하여 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사품학법경(四品學法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闍爲優陁延王說法經) 1권또한 『빈두로위왕설법경(賓頭盧爲王說法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경본이 현재 있고, 이후는 궐본이다.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의 불타야사(佛陁耶舍)가 번역한 『허공장경(虛空藏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량의경(無量義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소제(蕭齊)의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陁耶舍)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해 낸 2권과 『제법본무경(諸法本無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소무량수경(小無量壽經) 1권혹은 소(小)자가 없기도 하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아미타경(阿彌陁經)』과 당역(唐譯)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과 동본이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아미타경』이라고도 한다. 『도혜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서 따로 『아미타경』을 실은 것은 착오이다.
팔길상경(八吉祥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의 『팔길상주(八吉祥呪)』와 법호(法護)의 『팔양신주경(八陽神呪經)』 등과 동본이다. 원가 29년(452) 정월 3일에 형주성(荊州城)에서 사공(司空) 형주자사(荊州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을 위하여 번역하여 내었으며, 6일에 끝마쳤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무애제지법문경(無崖際持法門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성견(聖堅)이 번역해 낸 것과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빈자수뢰경(貧子須賴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백연(白延)ㆍ지겸(支謙)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또한 『화부현재불명경(華敷現在佛名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과 같은 동본이다. 원가 29년(452) 정월 7일에 형주(荊州)에서 남초왕(南譙王)을 위하여 번역해 내었다. 『시흥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3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무우왕경(無憂王經) 1권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었다. 『오록(吳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처칠처삼관경(異處七處三觀經) 1권혹은 이처(異處)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잡장경(雜藏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목련항용왕경(目連降龍王經) 1권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항룡경(降龍經)』, 또는 『항용왕경(降龍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용왕형제경(龍王兄弟經)』과는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일난경(日難經) 1권일명 『월난경(越難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섭승원(聶承遠)의 『월난경(越難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석육십이견경(釋六十二見經) 4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서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청반특비구경(請般特比丘經) 1권혹은 반특(般特)이라고도 쓰며, 또한 반시(般時)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두타경(十二頭陁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나율칠념장경(阿那律七念章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보법삼통략경(十報法三統略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육재팔계경(六齋八戒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란야습선경(阿蘭若習禪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과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보살가욕경(菩薩訶欲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나선경(那先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2권 본(本)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유경(十二遊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구록(舊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일의오상략집(第一義五相略集) 1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52부 134권이다.『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 이상의 26부 100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허공장보살경』 이하의 26부 34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는 중국말로는 공덕현(功德賢)이라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12)
이라 불렀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종족이다. 어려서 오명(五明)의 여러 논(論)을 익혔으며, 천문(天文)ㆍ서산(書算)ㆍ의방(醫方)ㆍ주술(呪術)에도 널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毗曇雜心論)』을 읽고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상하게 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 스승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을 구하였다. 곧바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고는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였다. 사람됨이 인자하고 온화하면서 공손하였으며, 스승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다. 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떠나서 대승을 배우려 갔다. 대승의 스승은 시험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였는데, 곧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으므로 그 스승은 기뻐하며 칭찬하면서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중한 인연이 있구나.”
이때부터 독송하고 강의하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보살계법(菩薩戒法)13)을 받고,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법(正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만일 오로지 외도만을 고수한다면 비록 돌아가더라도 이익이 없겠지만, 만일 삼보(三寶)께 귀의한다면 길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지극한 말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 등 여러 나라에 이르렀을 때에는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 주었다. 이미 동방에 인연이 있었는지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까지 다 떨어지게 되자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는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시방(十方)의 부처님을 염(念)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어찌 감응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문과 경을 외우면서 간절히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갑자기 동북풍[信風]이 세차게 일더니, 먹구름이 일면서 비를 내렸다. 그래서 온 배 안의 사람들이 근심을 들었다. 그의 지성에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원가(元嘉) 12년 을해(乙亥, 435)에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때에 자사(刺史) 차랑(車朗)이 표문(表文)을 올려 보고하자, 문제(文帝)는 사신을 보내어 영접하였다. 이윽고 양도(楊都)에 이르자 칙명을 내려 승려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문하게 하였다. 그들은 구나발타라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통역을 통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잠시 만나보고도 곧 친해져서 매우 기뻐했다. 처음에는 기원사(祈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문제(文帝)는 그를 초청하여 만나본 후에 더욱 깊이 숭배하며 존경하였다.
낭야(瑯耶) 안연지(顔延之)는 해박한 지식을 지닌 능력 있는 석학(碩學)이었다. 그가 의관을 갖추고 문을 나서면,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보기위해 모여들어 관(冠)과 수레가 줄을 이었다. 대장군(大將軍)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承相)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 뒤에 뭇 스님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자, 기원사에서 모든 의학(義學) 승려들을 모아 놓고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였으며,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내었다. 후에 단양군(丹楊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는데, 그 때의 무리들이 7백여 인이나 되었다. 보운(寶雲)이 말을 번역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는데, 오가면서 자문하고 분석하여 본지(本旨)를 오묘하게 얻었다.
후에 초왕(譙王)이 형주(荊州)를 평정하고서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였으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개창하였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소무량수경(小無量壽經)』ㆍ『앙굴마라경(央崛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祥經)』 등과 아울러 앞에서 번역하여 낸 경 등 무릇 52부를 번역하였는데, 대부분 제자 법용(法勇)이 통역하여 전하였다.
초왕은 구나발타를 청하여 『화엄경(華嚴經)』 등을 강의하게 하였는데,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겨 부끄러워 여러 날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곧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신명이 응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랬더니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나서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 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가?”
구나발타라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대답하였더니, 그가 말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즉시 칼로 머리를 베니 다시 새 머리가 생겼다.
그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명령하고는 물었다.
“아프지 않은가?”
“아프지 않다.”
그리고 문득 꿈에서 깨어났더니 마음이 기뻐지고 즐거워졌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말과 뜻이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송나라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강의를 하러 나갔다. 제자 법용이 번역 말을 전하고, 승념(僧念)이 도강(都講)14)이 되었다. 비록 통역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오묘한 해석이 가능하였다.
원가 말기(末期)에 이르러 초왕이 여러 번 괴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서울에 장차 혼란이 있게 될 것입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두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절(逆節)을 도모하자, 구나발타라는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는 간절하게 간언(諫言)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기대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빈도(貧道)는 호종(扈從)하지 않겠습니다.”
초왕은 여론이 그를 믿는 바가 있다고 여기고 그를 핍박하여 함께 데리고 갔다.
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배에 불이 나고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게다가 언덕까지는 너무 멀어서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물이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속이 깊고 흐름이 매우 빨랐다. 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주므로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순식간에 10여 보나 나아가서 강 언덕으로 올라와 있었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어서 어린아이에게 주려고 두루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몸의 털들이 곤두서면서 비로소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당시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효무제(孝武帝)는 군대에 칙명을 내려 구나발타라를 찾게 되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신(驛信)으로 조정[臺]에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후 그를 찾아 배를 태워 서울로 보내자, 효무제는 곧바로 접견하고 돌아보며 자세하게 물었다.
“만나기를 고대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되었구료.”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으니, 아무리 눈물 흘려도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접견을 하게 되어 거듭 살아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칙명으로 물었다.
“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소?”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전생에 지은 인연[宿緣]을 예기치 못하여 이로 인해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효무제가 말하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게 하고,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여 주었다.
처음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는데, 매번 초왕(譙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사가 패하고 서찰들을 검사하여 보니 군사에 대한 일은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효무제는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장난삼아 물었다.
“승상(丞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였다.
“공양을 받은 지가 10년인데, 어찌 그 은덕을 잊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섬기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피우고자 원합니다.”
효무제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리상 허락하였다. 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되자, 그곳에 옮겨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하여 주었다.
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를 열고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는데,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보았다. 당시에는 아직 깨끗하게 삭발[淨髮]을 하지 않아 머리가 희끗희끗하였다. 효무제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에게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이인데, 늙음이 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구나. 짐이 시험삼아 그 일을 물어 보면 그는 반드시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볼 것이다.”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다만 한 가지의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곧바로 그 소리에 응하여 말하였다.
“빈도가 멀리 제경(帝京)에 와서 30년이나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이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었으니,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효무제는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히 여겨 어좌(御座) 가까이 앉도록 하여 온 조정이 눈여겨보도록 하였다.
후에 말릉(秣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凰樓) 서쪽에 절을 세웠는데,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구나발타라는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너의 묵은 인연이 이곳에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워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일 머무르려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고, 만일 머무르지 않겠다면 각자 편리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인이 같은 날 저녁 꿈에 천여 인의 귀신들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절 안의 대중들은 편안하게 되었다.
대명(大明) 7년(463) 천하에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는데, 여러 달이 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효무제는 그를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며 말하였다.
“반드시 감응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만일 그래도 효험이 없다면 다시는 서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우러러 삼보(三寶)를 의지하고 폐하의 위엄이 있으니,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을 기대합니다. 만일 감응이 없게 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면서 다시는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조용히 경을 외우며 은밀히 비밀스런 주술까지 하였다. 다음날 저녁때가 되자, 서북쪽에서 처음에는 마치 수레를 덮는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있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져 연일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자,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연이어 내려 주었다.
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소식(蔬食)만 하였으며,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양 식사를 끝내고 나면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명제(明帝) 대(代)에 이르러서는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태시(太始) 4년(468) 정월에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미리 죽을 것을 예견하고 명제와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말하였다.
‘하늘 꽃과 성상(聖像)이 보인다.’
오전 10시 경에 드디어 입적하게 되었으니, 나이는 75세였다. 명제가 매우 애석하고 아깝게 여겨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었으니, 영예로움과 애도함이 모자람이 없었다.

반니원경(般泥洹經) 1권혹은 반(般)자가 없기도 하다. 효건(孝建) 원년(454)에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었다. 도혜의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지금 이 단권(單卷)의 『니원경』을 찾아보았더니 위 아래의 문구가 구나발타라의 번역이 아니었으며, 이 경은 지겸(支謙)이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인 것 같다. 이제 이 2권도 찾아 얻었으므로 우선 『동진록(東晋錄)』속에 덧붙여 둔다.
석마남본경(釋摩男本經) 1권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삼장법사자술유(三藏法師自述喩) 1권범본(梵本)을 번역하여 낸 것이 아니므로, 역시 여기서는 삭제하였다.
당래선택제악세계경(當來選擇諸惡世界經)
과거행단바라밀경(過去行檀波羅蜜經)이상 2경은 모두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살룡제일국경(殺龍濟一國經)『육도경(六度經)』에서 나왔다.
삼인연경(三因緣經)『장아함경』에서 나왔다.
삼소겁경(三小劫經)『누탄경(樓炭經)』에서 나왔다.
불입감로문정의경(佛入甘露門正意經)『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에서 나왔다.
아란나경(阿蘭那經)『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사리불등비구득신작증경(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나뢰경(那賴經)
타주착해중경(墮珠着海中經)
구생경(舅甥經)
사리불반니원경(舍利弗般泥洹經)
부채위우경(負債爲牛經)
군신경(君臣經)이상의 6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사식경(四食經)『소승잡초(小乘雜抄)』이다.
아난견기악체곡무상경(阿難見妓樂啼哭無常經)
불왕위가섭병경(佛往慰迦葉病經)
불명아난예최승장자경(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
이교사경(二僑士經)
목련제보시망즉보경(目連弟布施望卽報經)이상의 5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반니원경』 등 23부 23권은 혹 따로 파생된 것을 간추려 베낀 경[別生抄經]들이며, 혹은 구나발타라가 번역해 낸 경이 아니다. 이제 사실의 기록[實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10) 석법용(釋法勇)
관세음보살수기경(觀世音菩薩受記經) 1권일명 『관세음수결경(觀世音受決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와 섭도진(聶道眞)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왕종록(王宗錄)』ㆍ『승우록(僧祐錄)ㆍ『이곽록(李廓錄)』ㆍ『법상록(法上錄)』 등의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용은 범명(梵名)으로 담무갈(曇無竭)이라 한다. 본래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국(黃龍國)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고행(苦行)을 닦았으며, 계율을 지니면서 경을 독송하였으므로, 스승의 귀여움을 받았다. 일찍이 법현(法顯)과 보운(寶雲) 등 여러 스님들이 직접 불국(佛國)을 갔었다는 소문을 듣고 개연(慨然)히 몸을 돌보지 않겠다는 서원을 하였다.
마침내 송(宋)나라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ㆍ담랑(曇朗) 등의 무리 25인을 불러 모아, 깃발과 일산 등 함께 공양도구를 가지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고,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유사(流沙)로 진입하여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이어 구자국(龜茲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총령(葱嶺)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잔로(棧路)는 험악하여 낙타와 말은 가지도 못했으며, 층층이 빙설(氷雪)만 쌓여 풀과 나무는 자라지도 않았다. 산에는 장기(瘴氣)15)가 많았고,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줄을 매어 다리[橋]로 삼았는데, 떨어진 거리는 지극히 먼데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서 표지로 삼았고, 뒷사람들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고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총령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설산(雪山)으로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을 디딜 곳이 없었으며,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에 의지해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휘어잡고 기어올라 계속해서 서로 번갈아 올라갔다. 그렇게 3일을 지내서야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을 하여 보니 동료 12인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 발우[佛鉢]에 예배하고, 1년 남짓 머물렀다. 그리고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워 마침내 범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1부를 얻었다.
담무갈과 동행할 사문은 남아 있는 13인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서쪽으로 가서 신두나제하(新頭那提河)중국말로 번역하면 사자구(師子口)라 한다.에 이르렀고, 강물의 서쪽 가를 따라 월지국(月氏國)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육계(肉髻)와 부처님 정골(頂骨)에 예배하고 흰 불목선(拂木船)을 보았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에 이르렀다.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승려 3백여 인은 여러 가지 3승(三乘)을 배우고 있었다. 담무갈은 이 사찰에 머물러 있으면서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의 사문 불타다라(佛陁多羅)중국말로 번역하면 각구(覺救)이다.를 그 지방의 승려들은 이르기를 “그는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였다”라고 하였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16)로 삼았다.
이 절에서 석 달 동안 여름 안거(安居)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中天竺)으로 향하였다. 길은 텅 비고 광활했는데, 언제나 석밀(石蜜)17)만을 가지고 식량으로 삼았다. 동행한 13인 가운데 8인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5인만이 동행하였다. 담무갈은 여러 번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고 있는 『관세음경』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사위국(舍衛國)에 도착할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이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귀의하자,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나오니 코끼리 떼는 놀라 어쩔 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는데, 또 들소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는데, 담무갈이 관세음보살께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자, 이윽고 큰 독수리가 날아왔으므로 들소들이 놀라 그만 흩어져서 마침내 해를 면하게 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마음이 감응을 얻어 위험에 처할 때에 구제 받음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南天竺)에서 배를 타고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원가(元嘉) 말년에 양도(楊都)에 도착하여 손수 『관세음수기경』 1부를 번역해 냈는데,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다. 후에 그가 입적(入寂)한 곳은 알지 못한다.

(11) 저거경성(沮渠京聲)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1권또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이라고도 하며, 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먼저 고창군(高昌郡)에 있을 때 번역해 냈다”라고 하였으나, 뒤에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내었다.
간왕경(諫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대소간왕경(大小諫王經)』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번역인 『승군왕경(勝軍王經)』과 『승광천자경(勝光天子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치선병비요경(治禪病秘要經) 1권혹은 『치선병비요법(治禪病秘要法)』이라고도 하여,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선요비밀치병경(禪要秘密治病經)』이라 하며, 또는 2권으로 되어 있다. 『잡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효건(孝建) 2년(455) 9월 8일에 죽원사(竹園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9월 25일에 끝마쳤다. 『승우록』과 『보창록』 등의 목록에 보인다.
정반왕열반경(淨飯王涅槃經) 1권혹은 반(般)자가 더 붙기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거(法炬)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진학경(進學經) 1권혹은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팔관재경(八關齋經) 1권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경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무반복경(五無返復經) 1권일명 『오반복대의경(五反覆大義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부(附)자를 쓰기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불대승대경(佛大僧大經) 1권두 가지 처음 이름兒名이 있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야기경(耶祇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말라왕경(末羅王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마달국왕경(摩達國王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혹은 국왕(國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전다월국왕경(旃陁越國王經) 1권혹은 국왕(國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공포세경(五恐怖世經) 1권혹은 『오공포경(五恐怖經)』이라고도 하며,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자사부생경(弟子死復生經) 1권혹은 『사망갱생경(死亡更生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 1권일명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 또는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보살서경(菩薩誓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자자제경(長者子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음경(中陰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관세음관경(觀世音觀經) 1권먼저 고창군(高昌郡)에 있을 적에 번역하였다가 그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내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파사익왕상모경(波斯匿王喪母經) 1권혹은 『파사익왕경(波斯匿王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파사익왕경(波邪匿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증일아함경』 제18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효건(孝建) 2년(455)에 종산(鍾山)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대애도반니원경(大愛道般泥洹經)』이라고 하며 『승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 제5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제자만위기역술경(弟子慢爲耆域述經) 1권또한 『제자위기역술만계우제자희탄경(弟子爲耆域述慢戒羽弟子戲誕經)』이라고도 하며,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장자음열경(長者音悅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란(曇無蘭)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분화단왕경(分惒檀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률염(竺律炎)이 번역한 『삼마갈경(三摩竭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자사불길흉경(弟子事佛吉凶經) 1권승우는 “『제자문사불길흉경(弟子問事佛吉凶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 1권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견정경(見正經)』의 이명인 듯 싶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우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 1권또한 『오상경(五相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계상경(五戒相經)』과는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현자율의경(賢者律儀經) 1권또한 위의(威儀)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28부 28권이다.『가섭금계경』 이상의 15부 15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으며, 『보살서경』 이하의 13부 13권은 궐본이다.

거사(居士) 저거경성은 곧 북량(北涼)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사촌 아우인 안양후(安陽候)이다. 위(魏)가 북량을 병탄(倂呑)하자 남쪽 송(宋)나라로 도망하여 뜻을 감추고 신분을 낮추어 세상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았으며, 항상 탑사(塔寺)에서 머물러 놀았으며, 거사의 신분으로 일생을 마쳤다.
단양윤(丹陽尹) 맹의(孟覬)가 보고는 사귀려고 청하여 서로 만났는데, 한 번 대면한 뒤부터는 바로 숭배하고 애경하였다. 그리고 극진히 공양을 베풀고 넉넉하게 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저거경성은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2년 을미(乙未, 455)에 양도(楊都)의 죽원사(竹園寺)와 종산(鍾山)의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등 28부를 번역하였다. 통상 오래도록 글을 보고 익힌 후에 붓을 들고 쓸 적에는 막힘이 없었다.
저거경성은 처자(妻子)와도 끊고 살았으며, 욕심이나 영리(榮利)를 바라지 않았다. 조용히 법려(法侶 : 불법을 같이 배우는 동료)들과 경전을 널리 펼쳐 유통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건업(建業)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훌륭하게 여겼다. 대명(大明) 말년(464)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보명왕경(普明王經)
범마황경(梵摩皇經)이상의 2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마이비구경(𡡉夷比丘經)
우바새오법경(優婆塞五法經)이상의 2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석종문우바새경(釋種問優婆塞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청신사아이선경(淸信士阿夷扇經)또한 『아이선지부자경(阿夷扇持父子經)』이라고도 한다.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오백범지경(五百梵志經)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의록(疑錄)』에다 덧붙어 놓았다.
『보명왕경』 등 7경 중에서 6경은 따로 파생[別生]한 것이고, 1경은 거짓이 아닌지 의심(疑僞)이 된다고 한다. 지금 사실의 기록[實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한 것이다.

(12) 석혜간(釋慧簡)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 1권일명 『철성니려경(鐵城泥黎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2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구담미기과경(瞿曇彌記果經) 1권『중아함경』 제2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장자자육과출가경(長者子六過出家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2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증일아함경』 제5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빈궁로공경(貧窮老公經) 1권혹은 『빈로경(貧老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해태경자경(懈怠耕者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해태경아경(懈怠耕兒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청빈두로법(請賓頭盧法) 1권혹은 경(經)자를 덧붙이기도 하며, 『장방록』에 보인다.
선생자경(善生子經) 1권또한 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육향배경(六向拜經)』이라고도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불열반후제비구경(佛涅槃後諸比丘經) 1권또한 『역사발타경(力士跋陁經)』이라고도 하며, 『잡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비유경(譬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10권이다.『청빈두로법』 이상의 7부 7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선생자경』 이하의 3부 3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혜간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원년 정유(丁酉, 457)에 녹야사(鹿野寺)에서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 등 10부를 번역하였다.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저거경성(沮渠京聲)이 번역한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과 문구가 완전히 같다. 이 경은 『가섭금계경』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기록한 이들의 착오로 두 경의 이름을 실었다.
약사유리광경(藥師琉璃光經)또한 『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이라고도 한다. 『대관정경(大灌頂經)』에서 나왔다. 『승우록』의 주(注)에서는 “「의경(疑經)」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석가필죄경(釋迦畢罪經)
살신제가인경(殺身濟賈人經)이상의 2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아난견수광서경(阿難見水光瑞經)일명 『수광경(水光經)』이라고도 하며, 『대승경』에서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다.
상인구재경(商人求財經)
구담미경(瞿曇彌經)이상의 2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사위성중인상자발광경(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
학인란의경(學人亂意經)또한 『모자작비구비구니란의경(母子作比丘比丘尼亂意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2경은 모두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대역사출가득도경(大力士出家得道經)또한 『역사발타경(力士跋陁經)』이라고도 한다.
이로남녀견불출가득도경(二老男女見佛出家得道經)이상의 2경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전사마폭지방불경(旃闍摩暴志謗佛經)『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절위사문경(竊爲沙門經)
갈사사가학도경(獦師捨家學道經)이상의 2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주원경(呪願經)승우는 「위록(僞錄)」에 실었다.
『진위사문경』 등 15부는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모두 “혜간(慧簡)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대부분은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이므로 삭제하여 싣지 않았다.

(13) 공덕직(功德直)
보살염불삼매경(菩薩念佛三昧經) 6권혹은 바로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수(隋)나라 달마급다(達磨笈多)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별분(別分)이다. 도혜의 『송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무량문파마다라니경(無量門破魔陁羅尼經) 1권혹은 바로 『파마다라니경(破魔陁羅尼經)』이라고도 하며, 일곱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2부 7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공덕직은 서역 사람이다. 도(道)와 계합됨이 이미 광대하여 중생들을 잘 이끌어 날마다 새롭게 하였다.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6년 임인(壬寅, 462)에 돌아다니다가 형주(荊州)에 이르러서 선방사(禪房寺)에 머물렀다. 사문 현창(玄暢)이 그를 청하여 『보살염불삼매경』 등 2부를 번역하게 하였다. 현창이 글과 뜻의 교정을 보았는데, 말과 지취(旨趣)가 아름답고 은밀하였다. 현창이 손을 펴면 손에서 향내가 나오고 손바닥에서는 물이 흘러 나왔데, 그를 측량할 수 없었다.
후에 성도(成都)로 가서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는데, 곧 그곳은 아육왕탑(阿育王塔)이 있는 곳이었다. 손수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상(神像)을 조성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공덕직은 형주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그 뒤에 어디서 입적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14) 석승거(釋僧璩)
십송갈마비구요용(十誦羯磨比丘要用) 1권혹은 『약요갈마법(略要羯磨法)』이라고 하기도 한다. 장방은 “2권이다”라고 하였고, 승우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승거는 성(姓)은 주(朱)씨요, 오(吳)나라 사람이다. 출가하여 승업(僧業)의 제자가 되었다. 여러 경전을 두루 기쁘게 펼쳐보았으며, 특히 『십송율(十誦律)』에 밝았으며, 겸하여 역사책[史籍]을 잘 알았고 문장을 매우 잘 지었다.
처음에는 오나라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그의 풍모를 듣고 흠모하여 칙명으로 ‘양도(楊都)에 나와서 승정(僧正)이 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나와서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러 있었다. 승거는 대명(大明) 7년 계묘(癸卯, 463)에 『십송갈마비구요용』 1부를 지었다.

(15) 석법영(釋法潁)
십송비구니계본(十誦比丘尼戒本) 1권또한 『십송비구니바라제목차계본(十誦比丘尼波羅提木叉戒本)』이라고도 하며, 혹은 『십송비구니대계(十誦比丘尼大戒)』라고도 한다. 『승우록(僧祐錄)』과 『보창(寶唱錄)』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계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영은 속성(俗姓)은 삭(索)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13세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어 양주(涼州) 공부사(公府寺)에서 머물렀다. 동학(同學) 법력(法力)과 함께 율장(律藏)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석법영은 엎드려 받아 가슴에 지니고 난[伏膺] 이후에는 다시 청하여 배우는 일도 없고, 한 번 들은 것은 기억하였으며, 율부(律部)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經論)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 말년(453)에 건업(建業)에 이르러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는 법영의 학업이 밝다 함을 듣고 칙명으로 도읍의 승정(僧正)이 되게 하였다. 후에 그것을 사임하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와 언제나 조용한 방에서 선정(禪定)을 익혔으며, 또한 때로는 율석(律席)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후에 장간사(長干寺)에 가서 머물렀다. 명제(明帝)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십송비니계본』 1부를 모아 번역하였으며, 겸하여 갈마(羯磨)를 번역 출간하였으므로 당대에 유행하였다.

(16) 축법권(竺法眷)
무진의경(無盡意經) 10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차말경(阿差末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아술달보살경(阿述達菩薩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무외덕회(無畏德會)」와 같은 동본이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광주(廣州)에서 번역하였다. 『시흥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해의경(海意經) 7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여래은지부사의경(如來恩智不思議經) 5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보정경(寶頂經) 5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삼밀저야경(三密底耶經) 1권중국말로 번역하면 『현인용률경(賢人用律經)』이다. 『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6부 29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축법권은 인도 사람이다. 뜻하는 성품이 넓고 간결하며 중생을 깨우치고 이롭게 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명제(明帝)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광주(廣州)에서 『무진의경』 등 6부를 번역하였다.

(17) 석상공(釋翔公)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 2권일명 『결료제법여환화삼매경(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엄불조(嚴佛調)가 번역하여 낸 경과 『대반야나가실리분(大般若那伽室利分)』은 모두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상공은 또한 삭공(朔公)이라고도 한다. 남해군(南海郡)에 있으면서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 1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서는 바로 “송(宋)나라 때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연대와 이름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어느 제왕(帝王) 때인지 자세하지 않다.

(18) 석도엄(釋道嚴)
불장대방등경(佛藏大方等經) 1권또한 『문명현경(問明顯經)』이라고도 하며, 『화엄경(華嚴經)』 「명난품(明難品)」의 이역(異譯)이다. 『시흥록(始興錄)』과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2권일명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3권인데, 그 경본이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도엄은 송(宋)나라 때 『불장대방등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서는 바로 “송나라 때 번역이다”라고만 하였고, 제왕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았다.

(19) 석용공(釋勇公)
범녀수의경(梵女首意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조록(趙錄)』과 『법상록』에 보인다.
공정삼매경(空淨三昧經) 1권또한 『공정천감응삼매경(空淨天感應三昧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조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 1권또한 『권진경(勸進經)』이라고도 하며, 『양사(梁史)』와 함께 번역하여 내었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이상은 3부 3권이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용공은 송나라 때에 『범녀수의경』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는 “송나라 때 번역이다”라고만 하였고, 제왕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았다.

차익경(車匿經)또한 『차익본말경(車匿本末經)』이라고도 하며,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이 경은 『시가변왕경(尸呵遍王經)』의 이명(異名)이다. 여러 목록에서는 “석용공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이 경은 따로 파생한 것을 추려 베낀 경이므로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20) 석법해(釋法海)
적조음소문경(寂調音所問經) 1권일명 『여래소설청정조복경(如來所說淸淨調伏經)』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의 법호(法護)가 번역한 『문수정률경(文殊淨律經)』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낙영락장엄방편경(樂瓔珞莊嚴方便經) 1권일명 『대승영락장엄경(大乘瓔珞莊嚴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전여신보살경(轉女身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의 법호가 번역한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ㆍ『승우록』ㆍ『법상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2권이다.앞의 『적조음소문경』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낙영락장엄방편경』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해는 송나라 때에 『적조음소문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의 주(注)에서는 “송나라 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그 연대를 나타내지 않아 어느 제왕 때인지 알지 못한다.

(21) 석선공(釋先公)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1권일명 『문수사리보살십사행경(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이라고도 한다. 일명 『체혜삼매경(逮慧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대월등경(大月燈經)』 제7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조록(趙錄)』과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선공은 송나라 때[宋世]에 『월등삼매경』 1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의 주(注)에서는 “송나라 때이다”라고만 하였고, 번역한 때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아 어느 제왕(帝王) 때인지 알지 못한다.

(22) 승가발미(僧伽跋彌)
미사색률초(彌沙塞律抄)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승가발미는 사자국(師子國) 사람이다. 그는 『미사색률초』 1부를 번역하였다. 『대주록(大周錄)』에는 『보창록』을 가리키면서도 제왕의 연대를 말하지 않았다. 그 『보창록』에 그 경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선 송(宋)의 목록에 붙여 두면서 근거가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23)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
여래지인경(如來智印經) 1권일명 『제불법신경(諸佛法身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혜인삼매경(慧印三昧經)』과 동본이다.
노모경(老母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노녀인경(老女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멸진경(法滅盡經) 1권
심심대회향경(甚深大廻向經) 1권
불위황죽원노바라문설학경(佛爲黃竹園老婆羅門說學經) 1권『중아함경』 제40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우바이타사가경(優波夷墮舍迦經) 1권『중아함경』 제55권18)에서 나온 이역이다. 혹은 가(迦)자가 없기도 한다.
사견경(邪見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대사문백일갈마법(大沙門百一羯磨法) 1권혹은 『대사문갈마법(大沙門羯磨法)』이라고도 하며, 『십송률(十誦律)』에서 나왔다.
가정비구설당래변경(迦丁比丘說當來變經) 1권혹은 바로 『가정비구경(迦丁比丘經)』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나오는 경들은 궐본이다.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1권어떤 책에는 “십만(十萬)이다”라고 하였는데, 착오인 듯하다.
화엄정경(華嚴淨經) 1권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 1권승우는 두 책을 모두 실으면서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선 한 책만 기재한다.
칠불각설게(七佛各說偈) 1권
유왕여래경(乳王如來經) 1권혹은 『무유왕경(無乳王經)』이라고도 한다. 『유광불경(乳光佛經)』과 동본인 듯하다.
현재시방불명경(現在十方佛名經) 1권
과거제불명경(過去諸佛名經) 1권
천오백불명경(千五百佛名經) 1권
오백칠백불명경(五百七百佛名經) 1권혹은 오백칠십(五百七十)이라고도 한다.
관세음성불경(觀世音成佛經) 1권
문수인연경(文殊因緣經) 1권
문수본원경(文殊本願經) 1권
문수관경(文殊觀經) 1권
미륵수하경(彌勒須河經) 1권
도사문불경(導師問佛經) 1권
발타보살백이천난경(颰陁菩薩百二千難經) 1권
지신보살경(持身菩薩經) 1권혹은 『지신경(持身經)』이라고도 한다.
현수보살이백문경(賢首菩薩二百問經) 1권
금강녀보살경(金剛女菩薩經) 1권
선의보살경(善意菩薩經) 1권
보살종도솔천강중음경(菩薩從兜率天降中陰經) 1권
보살행희경(菩薩行喜經) 1권
보살정본업경(菩薩淨本業經) 1권
보살초업경(菩薩初業經) 1권
보살사사경(菩薩四事經) 1권
보살십육원경(菩薩十六願經) 1권
보살오십덕행경(菩薩五十德行經) 1권
보살교법경(菩薩敎法經) 1권
보살정행경(菩薩正行經) 1권
보살출입제칙경(菩薩出入諸則經) 1권
보살모성자경(菩薩母姓字經) 1권
보살가성경(菩薩家姓經) 1권
보살비구경(菩薩比丘經) 1권
보살경(菩薩經) 1권이제 보살 위에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보살작륙아상본사경(菩薩作六牙象本事經) 1권
보살사자왕경(菩薩師子王經) 1권
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 1권새로 번역된 것은 범본(梵本)과 같으나, 같은 경인지 다른 경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욕승공덕경(浴僧功德經) 1권
타린니목거경(陁隣尼目佉經) 1권이제 『아난타목거니경(阿難陁目佉尼經)』이 아닌가 한다.
예경제탑경(禮敬諸塔經) 1권
반야바라밀게경(般若波羅蜜偈經) 1권
불청정게경(佛淸淨偈經) 1권
태자출국이십게경(太子出國二十偈經) 1권
불십력게(佛十力偈) 1권
시방불신주(十方佛神呪) 1권
사천왕신주(四天王神呪) 1권
십이인연결루신주(十二因緣結縷神呪) 1권
마하신주(摩訶神呪) 1권
이산신주(移山神呪) 1권
항마신주(降魔神呪) 1권
위덕다라신주(威德陁羅神呪) 1권본래는 성(成)자로 되어 있었는데, 착오이다.
화마결신주(和魔結神呪) 1권
구마가섭경(鳩摩迦葉經) 1권『동가섭해난경(僮迦葉解難經)』과 동본이며, 『장아함경』 제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법경록(法經錄)』에는 “『중아함경』 제1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라고 하였다.
출요경(出要經) 20권
행도경(行道經) 7권
장아함경(長阿含經) 3권승우는 “이 경은 『장아함경』에서 빠져 남은 책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홍도경(弘道經) 2권
사천왕경(四天王經) 1권승우는 “경 뒤에 주문(呪文)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덧붙여 놓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제천아수륜투경(諸天阿須倫鬪經) 1권
금색녀경(金色女經) 1권『잡비유경(雜譬喩經)』속에 있다. 승우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경본이다”라고 하였다.
치선귀매불안경(治禪鬼魅不安經) 1권
첨파국불설계경(瞻波國佛說戒經) 1권
불재서지산설법경(佛在誓枝山說法經) 1권
불삼독사경(佛三毒事經) 1권
불칠사경(佛七事經) 1권
불문화복경(佛問和伏經) 1권
불의행경(佛意行經) 1권
인불생삼심경(因佛生三心經) 1권
불취경(佛聚經) 1권
칠불본연경(七佛本緣經) 1권
석가문지발경(釋迦文枝鉢經) 1권
불가사경(佛袈裟經) 1권
불대의경(佛大衣經) 1권
가섭해경(迦葉解經) 1권
가섭인연경(迦葉因緣經) 1권
사리불문서경(舍利弗問署經) 1권
가섭독증자서경(迦葉獨證自誓經) 1권
사리불탄도여인경(舍利弗歎度女人經) 1권
사리불생서방경(舍利弗生西方經) 1권
사리불목련니원경(舍利弗目連泥洹經) 1권지금 이 경은 『생경(生經)』속에 있는 『사리불반니원경(舍利弗般泥洹經)』이 아닌가 싶다.
목련소문경(目連所問經) 1권
목련인연경(目連因緣經) 1권
아난견변경(阿難見變經) 1권
난타경(難陁經) 1권
아나함칠념경(阿那含七念經) 1권
나한보자경(羅漢菩子經) 1권
빈두로취발경(賓頭盧取鉢經) 1권
애행비구경(愛行比丘經) 1권
애신비구경(愛身比丘經) 1권
전비구경(旃比丘經) 1권
선성비구경(善星比丘經) 1권
육군비구경(六群比丘經) 1권
자재왕비구경(自在王比丘經) 1권
나사달비구경(羅邪達比丘經) 1권
비구화수밀경(比丘和須蜜經) 1권
현계미래비구경(玄戒未來比丘經) 1권이제 현(玄)이란 글자는 착오인 듯하다.
비구법상경(比丘法相經) 1권
석종동자경(釋種童子經) 1권
존자바차율경(尊者婆蹉律經) 1권
계빈이사미경(罽賓二沙彌經) 1권
사미지계경(沙彌持戒經) 1권
해주우바새회경(海洲優婆塞會經) 1권
현자잡사경(賢者雜事經) 1권
제자수학경(弟子修學經) 1권
제자행택중우적겁경(弟子行澤中遇賊劫經) 1권
제자정진경(弟子精進經) 1권
가제라월문오계경(迦提羅越問五戒經) 1권
나라연천왕경(那羅延天王經) 1권
비사문천왕경(毗沙門天王經) 1권
사대천왕경(四大天王經) 1권
제천수경(諸天壽經) 1권
마현성불경(魔現成佛經) 1권
마왕계경(魔王誡經) 1권이 계(誡)자는 시(試)자가 아닌가 싶다.
정반왕경(淨飯王經) 1권
불장열두단왕경(佛葬閱頭檀王經) 1권
아육왕작소아시경(阿育王作小兒時經) 1권지금 『육왕전(育王傳)』에서 나온 경이 아닌가 싶다.
소아육왕경(小阿育王經) 1권
우전왕조서심녀경(優塡王照逝心女經) 1권지금 이 경은 대승장(大乘藏)속에 있는 『우전왕경(優塡王經)』이 아닌가 싶다.
가이왕두보시경(迦夷王頭布施經) 1권
과존왕경(果尊王經) 1권
불거사경(佛居士經) 1권
항공왕경(降恐王經) 1권지금 공(恐)자가 착오인 듯하다.
마라왕경(摩羅王經) 1권
마등왕경(摩登王經) 1권
사이국경(舍夷國經) 1권
나제지왕경(羅提坻王經) 1권혹은 『국왕라제비경(國王羅提▼(土+畢)經)』이라고도 한다.
마하유월왕경(摩訶惟越王經) 1권
유사왕경(流沙王經) 1권
십사왕경(十四王經) 1권
왕이죽시경(王以竹施經) 1권
권왕지오계경(勸王持五戒經) 1권
태자전사라차경(太子旃舍羅差經) 1권
장자성덕경(長者盛德經) 1권
장자법심경(長者法心經) 1권
장자인현경(長者仁賢經) 1권
장자원라월경(長者洹羅越經) 1권
불문순타장자수락정행경(佛問淳陁長者受樂淨行經) 1권
바라문문사경(婆羅門問事經) 1권
바라문등쟁설경(婆羅門等爭說經) 1권
육사예파사익왕경(六師詣波斯匿王經) 1권
니건재경(尼揵齋經) 1권
명성범지경(明星梵志經) 1권
도솔범지경(兜率梵志經) 1권
범지발타경(梵志拔陁經) 1권
범지계화정경(梵志計火淨經) 1권
범지문의경(梵志問疑經) 1권
범지의경(梵志意經) 1권
범지호모경(梵志好母經) 1권
범지음녀경(梵志婬女經) 1권
범지육사경(梵志六師經) 1권
천후현녀경(天后賢女經) 1권
덕녀문경(德女問經) 1권
빈녀소시획홍보경(貧女少施獲弘報經) 1권
미가녀경(彌家女經) 1권
이인작사문제단형설경(二人作沙門弟斷兄舌經) 1권
기허살전다라경(氣噓殺旃陁羅經) 1권
안능시살인경(眼能視殺人經) 1권
고독삼형제경(孤獨三兄弟經) 1권
아검타경(阿劍他經) 1권
불란가경(不蘭伽經) 1권
소신일경(小申日經) 1권
바라내휘사성경(波羅奈媈四姓經) 1권혹은 부(婦)자를 쓰기도 한다.
대성가주고서불경(大姓家主叩書不經) 1권
제위경(提謂經) 1권
강라경(强羅經) 1권
금전용왕경(金轉龍王經) 1권
소갈용왕경(蘇曷龍王經) 1권
삼용왕경(三龍王經) 1권
호왕경(虎王經) 1권
갈왕경(蠍王經) 1권
독룡사시경(毒龍蛇施經) 1권
방우법경(放牛法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방우경(放牛經)』이 아닌가 싶다.
양우경(養牛經) 1권
염라왕경(閻羅王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이 아닌가 싶다.
아귀경(餓鬼經) 1권
철저니리경(鐵杵泥犁經) 1권
연경(緣經) 1권
약경(藥經) 1권
고혜경(苦慧經) 1권
혜달경(慧達經) 1권
법족경(法足經) 1권
신수경(身數經) 1권
선복경(選福經) 1권
보시경(布施經) 1권
조선경(助善經) 1권
고래경(古來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고래세시경(古來世時經)』이 아닌가 싶다.
효순경(孝順經) 1권
연본경(緣本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연본치경(緣本致經)』인 듯하다.
도세경(度世經) 1권
법장경(法藏經) 1권
명주경(明住經) 1권
선게경(善憩經) 1권
식질경(植質經) 1권
명상경(名相經) 1권
괴이경(怪異經) 1권
멸괴경(滅怪經) 1권
본발경(本鉢經) 1권
안발경(案鉢經) 1권
제법경(諸法經) 1권
여탈경(與脫經) 1권
복원경(伏願經) 1권
보견경(寶見經) 1권
진제경(眞提經) 1권
명의경(明義經) 1권
현재경(見在經) 1권
석론(釋論) 1권승우는 “이 논(論)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베낀 1권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잡사경(雜事經) 1권
지해경(旨解經) 1권승우는 바로 “『의지잡해(義旨雜解)』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석학경(釋學經) 1권
도도속경(度道俗經) 1권
제복덕경(諸福德經) 1권
설인신경(說人身經) 1권
시색력경(施色力經) 1권
색입시경(色入施經) 1권
계법률경(戒法律經) 1권
미생화경(未生火經) 1권
미생재경(未生災經) 1권
염불품경(念佛品經) 1권
수미산경(須彌山經) 1권
성패품경(成敗品經) 1권경목(經目)에는 혹은 “「성패품(成敗品)」 제4라 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누탄경(樓炭經)』의 1품인 것 같으나, 지금 『누탄경』을 검토하여 보았으나, 이 품(品)이 없었다.
세간진보경(世間珍寶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세간소망진보경(世間所望珍寶經)』이다”라고 하였다.
현도신족경(現道神足經) 1권
성행무상경(成行無想經) 1권
회과제죄경(悔過除罪經) 1권
심자요행경(深自僥倖經) 1권
보시지계경(布施持戒經) 1권
생서방재경(生西方齋經) 1권
조욕실법경(造浴室法經) 1권
유의왕해경(有疑往解經) 1권
장아함방법경(長阿含方法經) 1권
영인효유덕경(令人孝有德經) 1권
인어출가자경(人於出家者經) 1권
심응심탐모경(心應深貪慕經) 1권
지수화풍공경(地水火風空經) 1권
구욕자제의경(求欲者除意經) 1권
지계교인살생경(持戒敎人殺生經) 1권
칠월십오일랍법경(七月十五日臈法經) 1권
공고교만유이배경(功高憍慢有二輩經) 1권
환희보시유오사경(歡喜布施有五事經) 1권혹은 권(勸)자를 쓰기도 하나 착오이다.
삼몽경(三夢經) 1권
삼회처경(三悔處經) 1권
삼승무당경(三乘無當經) 1권
사서경(四署經) 1권
사등의경(四等意經) 1권
사정단경(四政斷經) 1권
사후경(四厚經) 1권
오서경(五署經) 1권
오곡세경(五穀世經) 1권
오란경(五亂經) 1권
오야경(五耶經) 1권
육선경(六禪經) 1권
육도육십행경(六度六十行經) 1권
육배아유월치경(六輩阿惟越致經) 1권
칠중경(七衆經) 1권
칠류경(七流經) 1권
칠사경(七使經) 1권
칠배인횡사경(七輩人橫死經) 1권
칠세작선경(七歲作善經) 1권
팔방만물무상경(八方萬物無常經) 1권
팔쌍경(八雙經) 1권
구결경(九結經) 1권
구뇌경(九惱經) 1권
구도관신경(九道觀身經) 1권
십부승경(十部僧經) 1권
십이의경(十二意經) 1권
십이아련야고행경(十二阿練若高行經) 1권
십이부경명(十二部經名) 1권
삼십이승나경(三十二僧那經) 1권
삼십사의경(三十四意經) 1권
오십덕상경(五十德相經) 1권
육십품경(六十品經) 1권
육십이의경(六十二疑經) 1권
칠십이관경(七十二觀經) 1권
백법경(百法經) 1권
유일삼매경(惟日三昧經) 1권
월전삼매경(月電三昧經) 1권
무언삼매경(無言三昧經) 1권
아화삼매경(阿和三昧經) 1권
선행법경(禪行法經) 1권지금 이 장경(藏經)속에 있는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이 아닌가 싶다.
수미산비경(須彌山譬經) 1권
일월비경(日月譬經) 1권
해수비경(海水譬經) 1권
약초유경(藥草喩經) 1권
공덕천비경(功德天譬經) 1권
현겁비경(賢劫譬經) 1권
금강비경(金剛譬經) 1권
보장비경(寶藏譬經) 1권
명주비경(明珠譬經) 1권
취목비경(聚木譬經) 1권
사대비경(四大譬經) 1권
오부위의소복경(五部威儀所服經) 1권혹은 『오부승복경(五部僧服經)』이라고도 한다. 『고승전』에서는 “백법조(白法祖)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결계문경(結界文經) 1권
사미리계경(沙彌離戒經) 1권
오계보응경(五戒報應經) 1권
육족아비담(六足阿毗曇) 1권
잡비유경(雜譬喩經) 6권혹은 『제잡비유(諸雜譬喩)』라고도 한다.
비유경(譬喩經) 1권승우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다시 한 책이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우선 한 책만 기재한다.
잡비유경(雜譬喩經) 1권모두 열한 가지의 일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은 307부 340권이다.처음의 9부 9권만이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이는 모두 양대(梁代)의 사문 승우(僧祐)의 목록에 있는 새로 수집된 실역(失譯)의 모든 경전이다. 『승우본록(僧祐本錄)』에서는 승우가 새로 수집한 경은 총 1,306부 1,570권이다. 이제 자세히 조사하여 총괄한 나머지는 999부 1,230권이다. 이 경들은 대부분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이며, 혹은 장방(長房) 등의 『실역록(失譯錄)』에 이미 기재되어 있고, 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에는 번역한 이[譯主]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제외하면 307부 340권이다. 이번에 조사하여 총괄한 경들은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아직 기재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 여기에다 모아서 실원(失源)이라 하여 둔다. 그리고 『승우록』에는 다만 “번역한 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失譯]”고만 하고 연대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송록(宋錄)』의 맨 끝에 덧붙여 두어 빠지거나 누락되지 않기를 바란다.
031_1033_a_01L開元釋教錄卷第五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五宋劉氏都建業自武帝永初元年庚申至順帝昇明三年己未凡八主六十年素共有二十二人所出經律論等幷雜集失譯諸經摠四百六十五部七百一十七卷 於中九十三部二百四十三卷見在三百七十二部四百七十四卷闕本宋沙門佛陁什 三部 三十二卷律戒羯磨沙門畺良耶舍 二部 二卷經沙門曇摩蜜多 一十二部 一十七卷經沙門釋智嚴 一十部 三十一卷經沙門釋寶雲 四部 一十七卷經集沙門伊葉波羅 一部 一十三卷論沙門求那跋摩 一十部 一十八卷律集沙門僧伽跋摩 五部 二十四卷律論集沙門求那跋陁羅 五十 二部一百三十四卷經論集沙門釋曇無竭 一部 一卷經居士沮渠京聲 二十八部 二十八卷經律沙門釋慧簡 一十部 一十卷經集沙門功德直 二部 七卷經沙門釋僧璩 一部 一卷羯磨沙門釋法穎 一部 一卷尼戒沙門竺法眷 六部 二十九卷經沙門釋翔公 一部 二卷經沙門釋道嚴 二部 三卷經律沙門釋勇公 三部 三卷經沙門釋法海 二部 二卷經律沙門釋先公 一部 一卷經沙門僧伽跋彌 一部 一卷律抄新集失譯諸經 三百七部 三百四十卷五分律三十卷 亦云彌沙塞律或三十四卷別錄云二十四卷恐謬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五分比丘戒本一卷 亦云彌沙塞戒本見竺道祖錄及僧祐錄彌沙塞羯磨一卷 見竺道祖錄及僧祐錄右三部三十二卷 律戒見在羯磨本闕沙門佛陁什宋言覺壽罽賓國少受業於彌沙塞部專精律兼達禪要以廢帝義符景平元年癸亥七月屆於楊都先沙門法顯於師子國得彌沙塞律梵本未及翻譯而顯遷化建業諸僧聞什旣善此學於是請令出焉卽以其年冬十一月集龍光寺譯稱爲五分律什執梵文于塡沙門智勝傳語龍光沙門竺道生東安沙門釋慧嚴共執參正宋侍中琅瑘王練爲檀至來年十二月方訖仍出戒心及羯磨文等竝行於世什後不知所終觀無量壽佛經一卷 亦云無量壽觀經初出見道慧宋齊錄及高僧傳觀藥王藥上二菩薩經一卷 第二出見宋齊錄及高僧傳右二部二卷其本見在沙門畺良耶舍宋云時稱西域人性剛直寡嗜欲善誦阿毘曇涉律部其餘諸經多所該綜雖三藏兼明而以禪門專業每一遊觀或七日不起常以三昧正受化諸國以元嘉元年甲子遠冒沙河萃于建業文帝義隆深加歎異勅止鍾山道林精舍沙門寶誌崇其禪法沙門僧含請譯觀無量壽及藥王藥上觀含卽筆受以此二經是淨土之洪因轉障之秘術故沈吟嗟味流通宋平昌孟顗承風欽敬資給豐顗出守會稽固請不從後移憩江陵元嘉十九年西遊岷蜀處處弘道禪學成群後還卒於江陵春秋六十矣虛空藏菩薩神呪經一卷 第二出與姚秦耶舍虛空藏及隋崛多虛空孕經等同本見李廓魏世錄觀虛空藏菩薩經一卷 亦名虛空藏觀經亦直云虛空藏菩薩經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象腋經一卷 第四出與無所希望經等同本見李廓錄諸法勇王經一卷 第二出與一切法高王經等同本見李廓錄轉女身經一卷 第四出與無垢賢女經等同本見李廓錄觀普賢菩薩行法經一卷 下注云出深功德經中或無行法字亦云普賢觀 經第三出見僧祐錄五門禪經要用法一卷 第二出與安高出者同本見寶唱錄及僧祐錄新無量壽經二卷 第十出與世高無量壽經及寶積無量壽會等同本見眞寂寺錄郁伽長者所問經一卷 第六出與安玄法鏡經及寶積郁伽長者會等同本見李廓錄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一卷 第三出與法護佛昇忉利天經等同本見李廓錄觀無量壽佛經一卷 第二出與薑良耶舍出者同本見寶唱錄禪秘要經五卷 或無經字一名禪法要元嘉十八年於祇洹寺出或三卷見僧祐錄第三出今有禪秘要經五卷文極交錯不可流行如刪繁錄中述右一十二部一十七卷 五門禪經上七部七卷見在無量壽經下五部十卷闕本沙門曇摩蜜多宋言法秀賓人也年六七歲神明澄正每見法事輒自然欣躍其親愛而異之令出家罽賓多出聖達屢値明博貫群經特深禪法所得之要極其微奧爲人沈邃有慧解儀軌詳整生而連眉故世稱連眉禪師焉少好遊方誓志宣化遊歷諸國遂適龜茲未至一日夢神告曰有大福德人明當入汝應供養明旦卽勅外司有異人入境必馳奏聞俄而蜜多果至王自出郊迎延請入宮遂從稟戒盡四事之供蜜多安而能遷不滯利養居數年蜜有去志神又降夢曰福德人捨王去矣王惕然驚覺旣而君臣固莫之能止遂度流沙進到燉於曠野之地建立精舍植柰千株開園百畝房閣池林極爲嚴淨頃之復適涼州仍於公府舊寺更營堂宇學徒濟濟禪業甚盛常以江左多民志欲傳法以元嘉元年展轉至蜀俄而出峽停止荊州於長沙寺造立禪館翹誠懇惻祈請舍利旬有餘日遂感一枚衝器出聲放光滿室門徒道俗莫不更增勇猛人百其心居頃之沿流東下至于建初上中興寺晚憩祇洹其道聲素著傾都禮訊自宋文袁皇后及皇子公主莫不設齋桂宮請戒椒掖參候之使旬日相屬從元嘉元年甲子至十八年辛譯虛空藏神呪等經一十二常以禪道教授學徒凡所歸不遠千里四輩遠近皆號大禪師焉會稽太守孟顗深信眞以三寶爲己任素好禪味心慇重及臨浙河請與同遊於酇縣之山建立塔寺東境舊俗多趣巫祝及妙化所移比屋歸自西徂東無思不服後還建業憩定林下寺禪師天性凝靜愛山水以爲鍾山鎭嶽特美嵩常歎下寺基構未窮形勝是乘高相地揆卜山勢斬石刊營建上寺殿房禪室肅然深實依俙鷲巖髣髴祇樹矣是息心之衆萬里來集諷誦肅邕望風成化爰自西域至于南土凡所遊履靡不興造檀會敷陳教法初禪師之發罽賓也有迦毘羅神衛送遂至龜茲於中路欲反乃現形告辭禪師曰汝神力通變自在遊處將不相隨往南方語畢卽收影不見遂遠從至于楊都故仍於上寺圖像著壁迄至于今猶有聲影之驗潔誠祈福莫不亨願以元嘉十九年七月六日卒于上寺春秋八十有七道俗四部行哭相趍仍葬于鍾山宋熙寺前無盡意菩薩經六卷 初題云大集經中無盡意所說不可盡義品第二十二亦直云無盡意經亦名阿差末經第四出與法護阿差末等同本見李廓錄法華三昧經一卷 法華支流見長房錄廣博嚴淨不退轉輪經四卷 第三出或六卷或直云廣博嚴淨經亦直云不退轉法輪經與法護阿惟越致遮經等同本元嘉四年出見宋齊錄及僧祐錄四天王經一卷 見僧祐錄及高僧傳普曜經八卷第三出或六卷或四卷與蜀普曜竺法護普曜及唐譯方廣莊嚴竝同本見宋齊錄及僧祐錄高僧傳等淨度三昧經一卷 初出見長房錄菩薩瓔珞本業經二卷 第二出見長房錄生經五卷 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房云見別錄善德優婆塞經一卷 見長房錄阿那含經二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三十一卷 四天王經上四部一十二卷見在普曜經下六部一十九卷闕本沙門釋智嚴西涼州人弱冠出家便以精勤著稱納衣宴坐蔬食永年每欲博事名師廣求經誥遂周流西國進到罽賓入摩天陁羅精舍從佛馱先比丘諮受禪法漸染三年功踰十載佛馱先見其禪思有緖特深器異彼諸道俗聞而歎曰秦地乃有求道沙門矣始不輕秦類敬接遠時有佛陁跋陁羅比丘亦是彼國禪匠嚴乃要請東歸傳法中土跋陁嘉其懇至遂共東行踰越歲時達于關內恒相依附共止長安頃之跋陁撗爲秦僧所擯嚴與西來徒衆竝分散出關仍憩山東精舍坐禪誦經力精修學晉義熙十三年宋西伐姚泓剋捷旋旆塗出山時始興公王恢從駕遊觀川至嚴精舍見其同志三僧坐繩牀禪思湛然恢乃彈指人開目俄而還閉不與交言恢心敬其奇訪諸耆老皆云隱積歲未嘗輒出恢卽啓宋武請還都莫肯行者屢請旣至二人推嚴隨行恢道懷素篤禮事備還都卽住始興寺嚴性虛靜志避囂塵恢乃於東郊之際更起精舍卽枳園寺也嚴前還於西域所得梵本衆經未及譯到元嘉四年丁卯乃共沙門寶雲譯出無盡意等經十部在寺不受別請常分衛自資化所被幽顯咸服嚴淸素寡欲隨受隨施少而遊方無所滯著稟性沖退不自陳敍故雖多美行世無得而盡傳嚴昔未出家曾受五戒有所虧犯後入道受具足常疑不得戒每以爲懼積年禪觀而不能自了遂更汎重到天竺諮諸明達値羅漢比丘具以事問羅漢不敢判決乃爲嚴入定往兜率宮諮啓彌彌勒答云得戒嚴大喜躍是步歸行至罽賓無疾而卒年七十八彼國凡聖燒身各處嚴雖戒操高明而實行未辯移尼向凡僧墓地而尸重不起向聖墓則飄然自輕嚴弟子智智遠故從西來報此徵瑞還外國以此推嚴信是得道人但未知果向中間若深淺耳調伏衆生業經 出大集經一音顯正法經 或云一音演正法經出悲華經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 出大雲經毘羅三昧經二卷 祐等諸錄皆注爲疑大周錄中刊之爲正今尋文言淺鄙義理疏遺故入疑科用除稗穢調伏衆生等四部五卷長房等錄皆云嚴譯今以前三別生一疑僞今爲實錄故竝刪之佛本行經七卷 或云佛本行讚傳於六合山寺出或云五卷見僧祐寶唱內典等錄高僧傳云佛本行讚經新無量壽經二卷 永初二年於道場寺出一錄云於六合山寺出第九譯與寶積無量壽會等同本見道慧僧祐等錄淨度三昧經二卷 第二出見竺道祖雜錄付法藏經六卷 初出見李廓錄右四部一十七卷 前一部七卷見在後三部十卷闕本沙門釋寶雲涼州人也弱年出精勤有學行志韻剛潔不偶於世故少以直方純業爲名求法懇惻忘身殉道誓欲躬睹靈迹廣尋經教以晉隆安之初適西域與法顯智嚴先後相隨涉履流沙登踰雪嶺勤苦艱至不以爲難遂歷于塡天竺諸國備睹靈異乃經羅剎之野聞天鼓之音釋迦影迹多所瞻禮雲在外遍學梵書天竺諸國音字詁訓悉皆貫練後還長安隨禪師佛陁跋陁受業修學禪門孜孜不怠及禪師撗爲秦僧所擯雲亦奔亡會廬山遠公解其擯事共歸楊安止道場寺僧衆以雲志力堅猛弘道絕域莫不披衿諮問敬而受焉初共智嚴同出諸經嚴旣遷化雲獨宣譯以元嘉年譯佛本行經等四部雲手執梵本口自宣譯華戎兼通音訓允正雲之所定衆咸信服初關中沙門竺佛念善於宣譯於符姚二代顯出衆經江左練梵踰於雲故於晉宋之際弘通法沙門慧觀等咸友而善之性好幽居以保閑寂遂適六合山寺山多荒民俗好草竊雲說法教誘多有改惡禮事供養室而九頃之道場慧觀臨卒雲還都摠理寺任雲不得已而居道場歲許復還六合以元嘉二十六年終於山寺春秋七十有四其遊履外國別有記傳雜阿毘曇心十三卷 第三出見高僧傳及僧祐錄或十四卷右一部一十三卷闕本沙門伊葉波羅宋云自在西域妙通三藏明解四含以元嘉三年景寅遊於彭城爲北徐州刺史太原王仲德譯雜阿毘曇譯至擇品緣㝵未竟遂輟成十卷刺史親自筆受至八年辛未更請求那跋摩續譯都訖成十三卷菩薩善戒經九卷 一名菩薩地或十卷於祇洹寺出見竺道祖僧祐二錄及高僧傳長房等錄竝云善戒經二十卷又云弟子更出二品成三十卷竝非也 菩薩善戒經一卷 優波離問菩薩受戒法見寶唱錄若准祐記將此爲初卷兼前九卷共成十卷然北地經本離之已久不可合之且依舊定菩薩內戒經一卷 見法上錄優婆塞五戒威儀經一卷 見寶唱錄沙彌威儀一卷 或云沙彌威儀經見長房錄四分比丘尼羯磨法一卷 祐云曇無德羯磨亦云雜羯磨元嘉八年於祇洹寺出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等亦直云四分羯磨優婆塞五戒相經一卷 一名優婆塞五戒略論元嘉八年於祇洹寺出第一譯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龍樹菩薩爲禪陁迦王說法要偈一卷 見唐舊錄善信二十二戒一卷 亦云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文亦云三歸優婆塞戒祐云三歸及優婆塞二十二戒或云優婆塞戒見高僧傳及僧祐錄經律分異記一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一十八卷 龍樹說法要偈上八部一十六卷見在善信二十二戒下二部二卷闕本沙門求那跋摩宋言功德鎧本剎利種累世爲王治在罽賓國祖父呵梨跋陁此云師子賢 以剛直被徙父僧伽阿難此云衆喜 因潛隱山澤跋摩年十四便機見儁達深有遠度仁愛汎博崇德務善其母嘗須野肉令跋摩辦之跋摩啓曰有命類莫不貪生夭彼之命非仁矣母怒曰設令得罪吾當代汝跋摩他日煮油誤澆其指因謂母曰代兒忍痛母曰痛在汝身吾何能代跋摩曰眼前之苦尚不能代況三塗耶母乃悔悟終身斷殺至年十八相工見而謂曰君年三十當撫臨大國南面稱尊若不樂世當獲聖果至年二十出家受戒洞明九部博曉四含誦經百餘萬言深達律品妙入禪要時號曰三藏法師至年三十罽賓王薨無紹嗣衆咸議曰跋摩帝室之又才明德重可請令還俗以紹國位群臣數百再三固請跋摩不納乃辭師違衆林拪谷飮行山野遁迹人世後到師子國觀風弘教識眞之衆咸謂已得初果儀形感物見者發心後至闍婆國初未至一日闍婆王母夢見一道士飛舶入國明旦果是跋摩來至母敬以聖禮從受五戒因勸王曰宿世因緣得爲母子已受戒而汝不信恐後生之因絕今果王迫以母勅卽奉命受戒染習旣久專精漸篤頃之鄰兵犯王謂跋摩曰外賊恃力欲見侵若與鬪戰傷殺必多如其不拒危亡將至今唯歸命師尊不知何計跋摩曰暴寇相攻宜須禦但當起慈悲心勿興害念耳王自領兵擬之旗鼓始交賊便退王遇流矢傷腳跋摩爲呪水洗信宿平復王恭信稍殷乃欲出家修道因告群臣曰吾欲躬拪法門卿等更擇明主群臣皆拜伏勸請王若捨國則子民無依且歒國兇强恃險相對如失恩覆則黔首奚處大王天慈寧不愍命王不忍固違乃就群臣請三願若許者當留治國一願凡所王境同奉和上二願盡所治內一切斷殺三願所有儲財賑給貧病群臣歡喜僉然敬諾於是一國皆從受戒王後爲跋摩立精舍躬自引材傷王腳指跋摩又爲呪治有頃平復道化之播於遐邇鄰國聞風皆遣使要請楊都名德沙門慧觀聰等遠挹風猷思欲飡稟以元嘉元年九月面啓文帝求迎請跋摩當卽勅交州刺史令汎舶延致觀等又遣沙門法長道沖儁等往彼祈請幷致書於跋摩及闍婆王婆多伽等必希顧臨宋流行道教跋摩以聖化宜廣不憚遊方先已隨商人竺難提欲向一小國會値便風遂至廣故其遺文云業行風所吹遂之於宋境此之謂也文帝知跋摩已至南海於是復勅州郡令資發至路由始興經停歲許始興有虎丘山山形聳峭峯嶺高絕跋摩謂其髣髴耆闍崛乃改名靈鷲山寺之外別立禪室去寺數里音不聞每至鳴椎跋摩已至致雨不沾或履泥不濕時衆道俗莫不肅然增敬寺有寶月殿跋摩於殿北壁手自畫作羅云像及定光儒童布髮之形像成之後每夕放光久之乃歇始興太守蔡茂之深加敬仰後茂之將跋摩躬自往視說法安慰家人夢見茂之在寺中與衆僧講法實由跋摩化導之力也山本多虎災自跋摩居之晝行夜往或時値虎以杖按頭弄之而去於是山旅水賓去來無梗盛德歸化者十有七八焉跋摩嘗於別室入禪累日不出寺僧遣沙彌往候之見一白師子緣柱而立亘空彌漫生靑蓮花沙彌驚大呼往逐師子豁無所見靈異無方類多如此後文帝重勅觀等復更敦請乃汎舟下都以元嘉八年正月達于建業帝引見勞問慇懃因又言曰子常欲持齋不殺迫以身殉物不獲從志法師旣不遠萬里化此國將何以教之跋摩曰道在心不在事法由己非由人且帝王與疋夫所修各異疋夫身賤名劣言令不威若不剋己躬將何爲用帝王以四海爲家萬民爲子出一嘉言則士女咸悅布一善政則人神以和刑不夭命役無勞力則使風雨適時寒暖應節百穀滋繁桑麻鬱茂如此持齋齋亦大矣不殺亦衆矣寧在闕半日之飡全一禽之命然後方爲弘濟耶帝乃撫凡歎曰夫俗人迷於遠理沙門滯於近教迷遠理者謂至道虛說滯近教者拘戀篇章至如跋摩法師所言眞謂開悟明達可與談於天人之際矣乃勅住祇洹寺供給隆公王英彦莫不宗奉俄而於寺開講法花及十地法席之日蓋盈衢觀矚往還肩隨踵接摩神府自然妙辯天絕或時假譯人而往復懸悟跋摩卽於祇洹寺譯菩薩善戒經等十部其善戒經長房等錄竝云二十卷下注云後弟子於定林更出二品成三十卷者非也今但九卷或云十卷應是傳寫差誤加其二字僧祐錄中只云十卷故知餘錄傳寫誤也又按高僧傳云祇洹慧義請出菩薩善戒始得二十八品後弟子代出一品成三十品房等錄云續成三十卷者誤之甚也又長房等錄復云跋摩譯雜阿毘曇心十三卷今以伊葉波羅譯出十卷跋摩後續成其十三非謂跋摩更別翻出二處俱載此亦不然今此刪之載於前錄竝文義詳允梵宋弗差影福寺尼慧果淨音等共請跋摩云去六年有師子國八尼至都云宋地先未經有尼那得二衆受恐戒品不全跋摩云戒法本在大僧衆發設不本事無妨得如愛道之緣諸尼又恐年月不滿苦欲更受跋摩稱云善哉茍欲增明甚助隨喜但西國尼年臘未登又十人不滿且令學宋語別因西域居士更請外國尼來足滿十數其年夏在定林下寺安居時有信者採花布席唯跋摩所坐花彩更鮮衆咸崇以聖禮夏竟還祇洹其年九月二十八日中食未畢先起還閣其弟子後至奄然已終春秋六十有五未終之前預造遺文偈頌三十六行自說因緣云已證二果手自封緘付弟子阿沙羅我終後可以此文還示天竺亦可示此境僧也旣終之後卽扶坐繩牀顏貌不異似若入道俗赴者千有餘人竝聞香氣芬烈咸見一物狀若龍蛇長一疋許起於尸側直上衝天能名者卽於南林戒壇前依外國法闍毘之四部鱗集香薪成𧂐灌之香油以燒遺陰五色焰起氛氳麗空是時天景澄朗道俗哀歎仍於其處起立白塔欲重受戒諸尼悲泣望斷不能自勝跋摩至宋文帝欲從受菩薩戒及諮稟奄而遷化以本意不遂傷恨彌深乃令衆僧譯出其遺文云遺文在傳恐繁故止毘尼摩得勒伽十卷 初卷云薩婆多部毘尼摩得勒伽元嘉十二年乙亥正月於祙陵平樂寺出至九月二十二日訖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雜阿毘曇心論十一卷 或無論字亦云雜阿毘曇經房云雜阿毘曇毘婆沙或十四卷第四譯元嘉十一年甲戌九月於長干寺出周年乃訖見僧祐錄及經序勸發諸王要偈一卷 龍樹菩薩撰第二出見僧祐錄及高僧傳分別業報略一卷 大勇菩薩撰或云大勇菩薩分別業報略集見僧祐錄及高僧傳請聖僧浴文一卷 見僧祐錄及高僧傳右五部二十四卷 前四部二十三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僧伽跋摩宋言衆鎧印度人也少而棄俗淸峻有戒德解律藏尤精雜心以元嘉十年癸酉步自流沙屆于建業風宇宏肅道俗敬異咸宗而事之曰三藏法師初景平元年平陸令許桑捨宅建剎因名平陸寺後道場慧觀以跋摩道行純備請住此寺崇其供養以表厥德跋摩共觀起塔三層行道諷誦日夜不輟僧衆歸集道化流布初三藏法師深明戒品將爲影福寺尼慧果等重受具戒是時二衆未備而三藏遷化俄而師子國比丘尼鐵薩羅等至衆乃共請跋摩爲師繼軌三藏祇洹慧義擅步楊都謂爲矯異執志不同親與跋摩拒論翻覆跋摩摽宗顯法理證明允慧義遂迴其剛褊靡然推服乃率其弟子服膺稟戒僧尼受者數百許人宋彭城王義康崇其戒範廣設齋供四衆殷盛傾于都邑頃之德大僧慧觀等以跋摩妙解雜諷誦通達先三藏雖譯未及繕寫以十一年九月於長干寺集學士更請出焉寶雲譯語自筆受硏挍精悉周年方就出摩得勒伽等凡五部跋摩遊化爲志不滯一方旣傳經事畢將還本土衆咸祈請莫之能留以元嘉十九年隨西域賈人舶還外國莫詳其終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一卷第二出與寶積勝鬘夫人會等同本元嘉十三年八月十四日於丹陽郡出寶雲傳語慧觀筆受見道慧僧祐李廓等錄大方廣寶篋經三卷 第四出或二卷與文殊現寶藏經等同本見李廓錄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一卷 或二卷亦名解脫了義經亦直云相續解脫經於東安寺出是解深密經後二品見道慧僧祐李廓法上等四錄高僧傳云於荊州出楞伽阿跋多羅寶經四卷 第二出元嘉二十年於道場寺譯慧觀筆受與入楞伽及大乘入楞伽經等同本見道慧僧祐法上等錄高僧傳云丹陽郡出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三卷初出與大薩遮尼乾子經同本或無境界字見李廓錄老母女六英經一卷 亦云老母經第三出與老女人經等同本房云見別錄申日兒本經一卷 或云申兒本第三出與月光童子經等同本房云見別錄錄云申兜本誤也阿難陁目佉尼呵離陁經一卷 或云出無量門持經第六譯與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房云見別錄房錄別載出無量門持經者誤也央崛魔羅經四卷 道場寺出見道慧僧祐法上等錄高僧傳云於荊州辛寺出大法鼓經二卷 東安寺出見道慧僧祐李廓法上等四錄大意經一卷 房云見別錄十二頭陁經一卷 房云見別錄樹提伽經一卷 房云見別錄雜阿含經五十卷 於瓦官寺譯梵本法顯齎來高僧傳云祇洹寺出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鸚鵡經一卷 亦名兜調經出中阿含第四十四異譯房云見別錄鞞摩肅經一卷 出中阿含第五十七異 譯四人出現世間經一卷 出增一阿含第八卷異譯房云見別錄十一想思念 如來經一卷 或云十一思惟念如來經出增一阿含第四十八初異譯房云見別錄阿遬達經一卷 第三出與玉耶經等同本房云見別錄過去現在因果經四卷 於荊州辛寺出第六譯與修行本起瑞應本起等同本見始興及李廓僧祐等錄摩訶迦葉度貧母經一卷 房云見別錄十二品生死經一卷 房云見別錄罪福報應經一卷 一名輪轉五道罪福報應經亦云輪轉五道經亦云五道輪經房云見別錄衆事分阿毘曇論十二卷 或無論字共弟子菩提耶舍譯初出與唐譯品類足論同本房錄不題所出四品學法經一卷 或無經字房云見別錄賓頭盧突羅闍爲優陁延王說法經一卷 亦云賓頭盧爲王說法經房云見別錄上見存已後闕虛空藏菩薩經一卷 第二出與姚秦佛陁耶舍所出虛藏經等同本房云見別錄無量義經一卷 初出與簫齊曇摩伽陁耶舍出者同本見李廓錄諸法無行經一卷 第二出與羅什所出二卷者及諸法本無經同本房云見別錄小無量壽經一卷 或無小字第二出與羅什阿彌陁及唐譯稱讚淨土同本孝建年出一名阿彌陁見道慧僧祐二錄高僧傳云於荊州出房錄別存阿彌陁經者誤也八吉祥經一卷 第三出與支謙八吉祥呪法護八陽神呪經等同本元嘉二十九年正月三日於荊州城內爲司空荊州刺史南譙王劉義宣出六日訖見僧祐寶唱二錄無崖際持法門經一卷 第二出與聖堅出者及尊勝菩薩所問經同本房云見別錄貧子須賴經一卷 第四出與白延支謙等出者同本見李廓錄現在佛名經三卷 亦名華敷現在佛名第二出與稱楊諸佛功德經等同本元嘉二十九年正月七日於荊州爲南譙王出見始興錄及高僧傳淨度三昧經三卷 第三出見李廓錄無憂王經一卷 於荊州辛寺譯見吳錄及僧祐錄本行六波羅蜜經一卷 房云見別錄異處七處三觀經一卷 或無異處字出雜阿含異譯房云見別錄雜藏經一卷 第四出與鬼問目連經等同本房云見別錄目連降龍王經一卷 或無王字或云降龍經或云降龍王經第二出與龍王兄弟經同本房云見別錄曰難經一卷 一云越難經第三出與聶承遠越難經等同本房云見別錄釋六十二見經四卷 房云見別錄祐錄云一卷請般特比丘經一卷 或作般特亦云般時房云見別錄十二頭陁經一卷 房云見別錄阿那律七念章經一卷 房云見別錄十報法三統略經一卷 房云見別錄六齋八戒經一卷 房云見別錄阿蘭若習禪經二卷 第二出與羅什坐禪三昧經同本見李廓錄菩薩訶欲經一卷 第二出與羅什出者同本房云見別錄那先經一卷 第二出與二卷者同本房云見別錄十二遊經一卷 第二出房云見舊錄第一義五相略集一卷 於東安寺出見僧祐錄高僧傳云於荊州辛寺出右五十二部一百三十四卷 賓頭盧上二十六部一百卷見在虛空藏下二十六部三十四卷闕本沙門求那跋陁羅宋言功德賢中印度人也以大乘學故世號摩訶衍本婆羅門種幼學五明諸論天文醫方呪術靡不博貫後遇見雜心尋讀驚悟深崇佛法焉其家世外道禁絕沙門乃捨家潛遁遠求師匠落髮改服專志學業及受具戒博通三藏爲人慈和恭順事師盡勤頃之辭小乘師進學大乘大乘師試令探取經匣卽得大品華嚴師喜而歎曰汝於大乘有重緣矣於是讀誦講義能詶抗進受菩薩戒法乃奉書父母勸歸正法曰若專守外道則雖還無益若歸依三寶則長得相見其父感其至言遂棄邪從正跋陁前到師子諸國皆傳送資供旣有緣東方乃隨舶汎中塗風止淡水復竭擧舶憂跋陁曰可同心幷力念十方稱觀世音何往不感乃密誦呪經懇到禮懺俄而信風暴至密雲降雨一舶蒙濟其誠感如元嘉十二年乙亥至廣州刺史車朗表聞文帝遣使延接至楊都勅名僧慧嚴慧觀新亭郊勞見其神情朗徹莫不虔敬雖因譯交言而欣若傾蓋初住祇洹寺俄而文帝延請加崇敬琅瑘顏延之通才碩學束帶造門於是宋都遠近冠蓋相望大將軍彭城王義康丞相南譙王義宣竝師事焉頃之僧共請出經於祇洹寺集義學諸僧譯出雜阿含經東安寺出法鼓經後於丹楊郡譯出勝鬘楞伽經徒衆七百餘人寶雲傳慧觀執筆往復諮扸妙得本後譙王鎭荊州請與俱行止辛寺更創殿房卽於辛寺出無憂王過現因果小無量壽央崛魔羅相續解脫波羅蜜了義現在佛名第一義五相略八吉祥等諸經幷前所出凡五十二多是弟子法勇傳度譙王欲請講華嚴等經而跋陁自忖未善宋語愧歎積旬卽旦夕禮懺請乞冥應夢有人白服持劍一人首來至其前曰何故憂耶陁具以事對答曰無所多憂以劍易首更安新頭語令迴轉得無痛耶答曰不痛豁然便覺心神喜悅旦起言義皆備領宋於是就講弟子法勇傳譯念爲都講雖因譯人而玄解往元嘉將末譙王屢有怪夢陁曰都中將有禍亂未及一年而二凶搆逆及孝建之初譙王陰謀逆節跋陁顏容憂慘而未及發言譙王問其故跋陁諫爭懇切乃流涕而出曰必無所冀貧道不容扈從譙王以其物情所信乃逼與俱下梁山之敗檻轉迫去岸懸遠判無濟理一心稱觀世音手捉笻竹杖投身江中水齊至膝以杖刺水水深流駛見一童子尋後而至以手牽之顧謂童子汝小兒何能度恍惚之間覺行十餘步仍得上岸卽脫納衣欲賞童子顧覓不見擧身毛豎方知神力焉王玄謨督軍梁山孝武帝駿勅軍中得摩訶衍善加料理驛信送臺俄而尋得合舸送都孝武卽時引見顧問委曲曰企望日今始相遇跋陁對曰旣染舋分爲灰粉今得接見重荷生勅問竝譙爲賊答曰出家之人不預戎事然張暢宗靈秀等竝是驅逼貧道所明但不圖宿緣乃逢此事孝武曰無所懼也是日勅住後堂供施衣物給以人乘初跋陁在荊州十載每與譙王書疏無不記錄及軍敗簡無片言及軍事者孝武明其純謹益加禮遇後因閑談戲問曰念丞相不答曰受供十何可忘德今從陛下乞願爲丞相三年燒香帝悽然動容而許焉及中興寺成勅令移住爲開三閒房後於東府宴會公畢集勅見跋陁未及淨髮白首皓然孝武遙望顧謂尚書謝莊曰摩訶衍聰明機解但念老期已至朕試問之其必悟人意也跋陁上階因迎謂之曰訶衍不負遠來之意但有一在卽應聲答曰貧道遠歸帝京三十載天子恩遇銜愧罔極但七十老病唯一死在帝嘉其機勅近御而坐擧朝屬目後於秣陵界鳳凰樓西起寺每至夜輒有推戶而喚視不見人屢魘夢跋陁燒香呪願曰汝宿緣居此我今起寺行道禮懺爲汝等若住者爲護寺善神不能居各隨所安旣而道俗十餘人同夕夢見鬼神千數皆荷擔移去寺衆遂安大明七年下宂旱祈禱山川累月無驗遂請令祈雨必使有感如其無效不須相見跋陁答曰仰馮三陛下天威冀必降澤如其無不復重見卽往北湖釣臺香祈請不復飮食默而誦經加秘呪明日晡時西北角雲起如車蓋日在桑榆風震雲合連日降雨明旦公卿入賀勅見慰勞施相續跋陁自幼以來蔬食終常執持香爐未嘗輟手食輒分食飛鳥乃集手取食明帝之世禮供彌盛到太始四年正月覺體不平便預與明帝及公卿等告辭臨終之日延佇而望云見天華聖像禺中遂卒秋七十有五明帝慟惜賻送殷公卿會葬榮哀備焉般泥洹經一卷 或無般字孝建元年於辛寺譯見道慧宋齊錄今尋此單卷泥洹上下文句非是跋陁所翻似是謙護等譯今尋得二卷且附東晉錄中釋摩男本經一卷 吳支謙譯三藏法師自述喩一卷 非梵本出故亦刪之當來選擇諸惡世界經過去行檀波羅蜜經 上二經竝出悲華經殺龍濟一國經 出六度經三因緣經 出長阿含三小劫經 出樓炭經佛入甘露門正意經 出大十二門經阿蘭那經 出中阿含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 出雜阿含那賴經 墮珠著海中經舅甥經 舍利弗般泥洹經負債爲牛經君臣經 上六經竝出生經四食經 小乘雜抄阿難見妓樂啼哭無常經佛往慰迦葉病經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二僑士經目連弟布施望卽報經 上五經竝出出曜經般泥洹等二十三部二十三卷或是別生抄經或非跋陁所出今爲實錄故摠刪之觀世音菩薩受記經一卷 一名觀世音受決經第三出與西晉法護道眞出者同本見王宗僧祐李廓法上等錄及高僧傳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勇梵名曇無竭本姓李氏幽州黃龍國人也幼爲沙便修苦行持戒諷經爲師所嘗聞法顯寶雲諸僧躬踐佛慨然有忘身之誓遂以宋永初之元招集同志沙門僧猛曇朗之徒二十五人共齎幡蓋供養之具發迹北土遠適西方至河南國仍出海西郡進入流到高昌郡經歷龜茲沙勒諸前登蔥嶺雪山棧路險惡馬不通增冰峨峨絕無草木多瘴氣下有大江浚急如箭東西兩山之脅繫索爲橋相去極遠十人一過到彼岸已擧煙爲識後人見煙知前已度方得更進若久不見煙則知暴風吹人墮江中行蔥嶺三日方過復上雪山懸崖壁立無安足處石壁皆有故弋孔處處相對各執四弋先拔下弋手攀上弋展轉相代三日方過乃到平地待料撿同侶失十二人進至罽賓國禮拜佛鉢停歲餘學梵書竟便解梵語求得觀世音受記經梵文一部無竭同行沙門餘十三人西行到新頭那提河此云師子口緣河西入月氏國禮拜佛肉髻及睹白拂木舩後至檀特山南石留寺住僧三百餘人雜三乘學無竭便停此寺受具足戒天竺沙門佛陁多羅此云覺救彼方衆僧云其已得道果無竭請爲和上漢沙門志定爲阿闍梨寺夏坐三月日復北行至中天曠遠之處常齎石蜜爲糧其同侶八人路亡五人俱行經危棘無竭所齎觀世音經專心繫念進涉舍衛國中野逢山象一群無竭稱名歸命卽有師子從林中出象驚怖奔走後渡恒河復値野牛一群鳴吼而來將欲害人無竭歸命如初尋有大鷲飛來野牛驚散得免害其誠心所感在險克濟皆此類也後於南天竺隨舶汎達廣州所歷事迹別有記傳元嘉末年達于楊都手自宣譯觀世音受記經一部今見傳于後不知所終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一卷 亦云彌勒上生經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僧祐錄云先在高昌郡譯出於後齎還諫王經一卷 初出亦云大小諌王經與唐譯勝軍王經及勝光天子經同本房云見別錄治禪病秘要經一卷 或云治禪病秘要法無經字或云禪要秘密治病經或二卷云出雜阿含孝建二年九月八日於竹園寺出其月二十五日訖見僧祐寶唱等錄淨飯王涅槃經一卷 或加般字第二出與法炬出者同本房云見別錄進學經一卷 或云勸進學道經第二出與支謙等出者同本房云見別錄八關齋經一卷 異出本房云見別錄五無返復經一卷 一名五反覆大義經或作附字房云見別錄佛大僧大經一卷 二兒名房云見別錄耶祇經一卷 房云見別錄末羅王經一卷 房云見別錄摩達國王經一卷 房云見別錄或無國王字旃陁越國王經一卷 或無國王字房云見別錄五恐怖世經一卷 或云五恐怖經房云見別錄弟子死復生經一卷 或云死亡更生房云見別錄迦葉禁戒經一卷 一名摩訶比丘經亦名眞僞沙門經第二出房云見別錄菩薩誓經一卷 第五出與長者子制經等同本房云見別錄中陰經一卷 房云見別錄觀世音觀經一卷 先在高昌郡譯出於彼齎還見僧祐錄波斯匿王喪母經一卷 或云波斯匿王經 祐云波邪匿王房云見別錄出增一阿含第十八卷異譯佛母般泥洹經一卷 孝建二年於鐘山定林上寺出一名大愛道般泥洹經見僧祐錄出增一阿含第五十卷異譯弟子慢爲耆域述經一卷 亦云弟子爲耆域述慢戒羽弟子戲誕經第四出與阿難問事佛吉凶經等同本房云見別錄長者音悅經一卷 第二出與支謙出者同本房云見別錄五苦章句經一卷 第二出與曇無蘭出者同本房云見別錄分和檀王經一卷 第二出與竺律炎三摩竭經同本房云見別錄弟子事佛吉凶經一卷 祐云弟子問事佛吉凶經房云見別錄生死變識經一卷 今疑是藏中見正經異名房云見別錄優婆塞五戒經一卷 亦云五相經第二出與五戒相經同本房云見別錄賢者律儀經一卷 亦云威儀房云見別錄右二十八部二十八卷 迦葉禁戒上一十五部一十五卷見在菩薩誓經下一十三部一十三卷闕本居士沮渠京聲卽北涼河西王蒙遜從弟安陽侯也魏倂涼後南奔于宋晦志卑身不交世務常遊止塔寺以居士自畢丹陽尹孟顗見而善之請與相見面之後雅相崇愛亟設供饌相優贍京聲以孝武帝孝建二年乙未於楊都竹園寺及鍾山定林上寺譯彌勒上生經等二十八部通習積久臨筆無滯聲居絕妻孥無欲榮利從容法宣通經典是以建業白黑咸敬而嘉焉以大明之末遘疾而卒普明王經梵摩皇經 上二經竝出六度集𡡉夷比丘經優婆塞五法經 上二經竝出中阿含釋種問優婆塞經 出雜阿含淸信士阿夷扇經 亦云阿夷扇持父子經出生經五百梵志經 群錄注疑普明王等七經六是別生一云疑僞今爲實錄故竝刪之閻羅王五天使者經一卷 一名鐵城泥黎經見長房錄出中含第十二異譯瞿曇彌記果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八異譯見長房錄長者子六過出家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二十七卷異譯見長房錄佛母般泥洹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五十卷異譯見長房錄貧窮老公經一卷 或云貧老經第二出見長房錄懈怠耕者經一卷 舊錄云懈怠耕兒經見長房錄請賓頭盧法一卷 或加經字見長房錄善生子經一卷 亦云異出六向拜經見長房錄出中阿含第三十三卷異譯佛涅槃後諸比丘經一卷 亦云力士跋陁經云出雜阿含見長房錄譬喩經一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一十卷 請賓頭盧上七部七卷見在善生子經下三部三卷闕本沙門釋慧簡未詳何許人也孝武帝大明元年丁酉於鹿野譯五天使者等經十部眞僞沙門經 與京聲所出迦葉禁戒經文句全同乃是彼經異名錄家錯上藥師琉璃光經 亦云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出大灌頂經祐錄注爲疑經者非釋迦畢罪經殺身濟賈人經 上二經竝出六度集阿難見水光瑞經 一云水光經大乘抄經商人求財經瞿曇彌經 上二經竝出中阿含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學人亂意經 亦云母子作比丘比丘尼亂意經上二經竝出增一阿含大力士出家得道經 亦云力士跋陁經二老男女見佛出家得道經上二經竝出雜阿含旃闍摩暴志謗佛經 出生經竊爲沙門經獵師捨家學道經 上二經竝出出曜經呪願經 祐載僞錄眞僞沙門等一十五部長房等竝云慧簡所出今以多是別生等經故刪之不存也菩薩念佛三昧經六卷 或直云念佛三昧經或五卷第一譯與隋笈多出者同本是大集別分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無量門破魔陁羅尼經一卷 或直云破魔陁羅尼經第七譯見僧祐錄與支謙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右二部七卷其本竝在沙門功德直西域人也道契廣善誘日新以孝武帝大明六壬寅遊至荊州寓禪房寺沙門玄暢請出念佛三昧等經二部暢刊正文義詞旨婉密而暢舒手出香掌中流水莫之測也後適成都止大石寺卽是阿育王塔乃手自作金剛密迹等十六神像傳至于今直留荊數年後不知所終矣十誦羯磨比丘要用一卷 或云略要羯磨法房云二卷祐云一卷見僧祐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僧璩姓朱吳國人出家爲僧業弟子摠悅衆經尤明十兼善史籍頗製文藻始住吳虎丘山孝武欽其風聞勅出楊爲僧正悅衆止于中興寺璩以大明七年癸卯撰十誦羯磨一部十誦比丘尼戒本一卷 亦云十誦比丘尼波羅提木叉戒本或云十誦比丘尼大戒見僧祐寶唱二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穎俗姓索氏燉煌人十三出家爲法香弟子住涼州公府寺與同學法力俱以律藏知名穎伏膺已後學無再請在一聞硏精律部博涉經論嘉末至建業止新亭寺孝武以穎學業兼明勅爲都邑僧正辭任還多寶寺常習定閑房時開律席後移住長干寺以明帝彧太始年中集出十誦尼戒一部兼出羯磨流行於代無盡意經十卷 第五出與阿差末經等同本見始興僧祐寶唱等錄阿述達菩薩經一卷 第四出興寶積無畏德會等同本太始年於廣州出見始興寶唱等錄海意經七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如來恩智不思議經五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寶頂經五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三密底耶經一卷 宋言賢人用律經見始興僧祐寶唱等錄右六部二十九卷其本竝闕沙門竺法眷印度人也志性弘開利爲務以明帝彧太始年中於廣州譯無盡意等經六部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二卷一名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第二出與漢嚴佛調譯者及大般若那伽室利分竝同本見始興錄右一部二卷其本見在沙門釋翔公亦云朔公在南海郡譯濡首菩薩經一部群錄直云宋世不顯年名未詳何帝佛藏大方等經一卷 亦名問明顯經是華嚴經明難品異譯見始興錄及法上錄瓔珞本業經二卷 一名菩薩瓔珞經第三出見始興及法上錄右二部三卷其本竝闕沙門釋道嚴於宋世譯佛藏方等經等二部群錄直云宋世出不顯帝年梵女首意經一卷 第二出見始興錄及趙錄法上錄空淨三昧經一卷 亦云空淨天感應三昧經第二出見始興錄及趙錄法上錄勸進學道經一卷 亦名勸進經與梁史共出第三譯右三部三卷其本竝闕沙門釋勇公於宋世譯梵女首意等經三部群錄雖云宋世顯帝年車匿經 亦名車匿本末經出六度集中是尸阿遍王經異名群錄雖云勇公所出今以是別生抄經故刪之不存也寂調音所問經一卷 一名如來所說淸淨調伏經與西晉法護文殊淨律經等同本第四出見始興錄及法上錄樂瓔珞莊嚴方便經一卷 一名大乘瓔珞莊嚴經亦名轉女身菩薩經第四出與西晉法護順㩲方便經等同本見始興錄及僧祐法上錄右二部二卷 前寂調音經見在後樂瓔珞經闕本沙門釋法海於宋世譯寂調音等經二部群錄注云宋世譯出旣不顯年未詳何帝月燈三昧經一卷 一名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一名逮慧三昧經出大月燈經第七卷異譯見趙錄及法上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先公於宋世譯月燈經一部群錄注云宋世不顯譯年詳何帝彌沙塞律抄一卷 見寶唱錄右一部一卷闕本沙門僧伽跋彌師子國人也彌沙塞律抄一部大周錄中寶唱錄不言帝代其寶唱錄尋本未獲且寄於宋錄以彰有據耳新集失譯諸經如來智印經一卷 一名諸佛法身第二出與慧印三昧經同本老母經一卷 第二出與老女人經等同本法滅盡經一卷甚深大迴向經一卷佛爲黃竹園老婆羅門說學經一卷出中阿含第四十卷異譯優波夷墮舍迦經一卷 出中阿含第五十五異譯或無迦字邪見經一卷出中阿含第六十卷異譯大沙門百一羯磨法一卷 或云大沙門羯磨法出十誦律迦丁比丘說當來變經一卷 或直云迦丁比丘經已後闕本十方佛名經一卷本作十萬疑錯 華嚴淨經一卷三十七品經一卷 祐載兩本竝云異出今且存一七佛各說偈一卷乳王如來經一卷 或無乳王經今疑與乳光佛經同本現在十方佛名經一卷過去諸佛名經一卷千五百佛名經一卷五百七百佛名經一卷 或云五百七十觀世音成佛經一卷文殊因緣經一卷文殊本願經一卷文殊觀經一卷 彌勒須河經一卷導師問佛經一卷颰陁菩薩百二千難經一卷持身菩薩經一卷 或云持身經賢首菩薩二百問經一卷金剛女菩薩經一卷善意菩薩經一卷菩薩從兜率天降中陰經一卷菩薩行喜經一卷菩薩淨本業經一卷菩薩初業經一卷菩薩四事經一卷菩薩十六願經一卷菩薩五十德行經一卷菩薩教法經一卷 菩薩正行經一卷菩薩出入諸則經一卷菩薩母姓字經一卷菩薩家姓經一卷 菩薩比丘經一卷菩薩經一卷 今疑本上脫字菩薩作六牙象本事經一卷菩薩師子王經一卷浴像功德經一卷 與新譯者梵本同未詳同別浴僧功德經一卷陁鄰尼目佉經一卷 今疑卽是阿難陁目佉尼經禮敬諸塔經一卷般若波羅蜜偈經一卷佛淸淨偈經一卷太子出國二十偈一卷佛十力偈一卷 十方佛神呪一卷四天王神呪一卷十二因緣結縷神呪一卷摩訶神呪一卷 移山神呪一卷降魔神呪一卷 威德陁羅神呪一卷本作成字錯也和魔結神呪一卷鳩摩迦葉經一卷 與僮迦葉解難經同本出長阿含第七卷異譯法經錄云出中阿含第十六卷異譯出要經二十卷 行道經七卷長阿含經三卷祐云疑是殘缺長阿含經 弘道經二卷四天王經一卷 祐云後有呪似人所附諸天阿須倫鬪經一卷金色女經一卷 雜譬喩中有祐云異出本治禪鬼魅不安經一卷瞻波國佛說戒經一卷佛在誓枝山說法經一卷佛三毒事經一卷 佛七事經一卷佛問和伏經一卷 佛意行經一卷因佛生三心經一卷 佛聚經一卷七佛本緣經一卷釋迦文枝鉢經一卷 佛袈裟經一卷佛大衣經一卷 迦葉解經一卷迦葉因緣經一卷 舍利弗問署經一卷迦葉獨證自誓經一卷舍利弗歎 度女人經一卷舍利弗生西方經一卷舍利弗目連泥洹經一卷 今疑是生經中舍利弗般泥洹經目連所問經一卷 目連因緣經一卷阿難見變經一卷 難陁經一卷阿那含七念經一卷羅漢菩子經一卷賓頭盧取鉢經一卷愛行比丘經一卷 愛身比丘經一卷栴比丘經一卷 善星比丘經一卷六群比丘經一卷 自在王比丘經一卷羅邪達比丘經一卷比丘和須蜜經一卷玄戒未來比丘經一卷 今疑玄字錯比丘法相經一卷 釋種童子經一卷尊者婆蹉律經一卷罽賓二沙彌經一卷 沙彌持戒經一卷海洲優婆塞會經一卷賢者雜事經一卷 弟子修學經一卷弟子行澤中遇賊劫經一卷弟子精進經一卷迦提羅越問五戒經一卷那羅延天王經一卷毘沙門天王經一卷 四大天王經一卷諸天壽經一卷 魔現成佛經一卷魔王誡疑是試字經一卷 淨飯王經一卷佛葬閱頭檀王經一卷阿育王作小兒時經一卷 今疑出育王傳小阿育王經一卷優塡王照逝心女經一卷 今疑是大乘藏中優塡王經迦夷王頭布施經一卷果尊王經一卷 佛居士經一卷降恐王經一卷今疑恐字錯 摩羅王經一卷摩登王經一卷 舍夷國經一卷羅提坻王經一卷或作國王羅提經摩訶惟越王經一卷流沙王經一卷 十四王經一卷王以竹施經一卷 勸王持五戒經一卷太子旃舍羅差經一卷長者盛德經一卷 長者法心經一卷長者仁賢經一卷長者洹羅越經一卷佛問淳陁長者受樂淨行經一卷婆羅門問事經一卷婆羅門等爭說經一卷六師詣波斯匿王經一卷尼揵齋經一卷 明星梵志經一卷兜率梵志經一卷 梵志拔陁經一卷梵志計火淨經一卷 梵志問疑經一卷梵志意經一卷 梵志好母經一卷梵志婬女經一卷 梵志六師經一卷天后賢女經一卷 德女問經一卷貧女少施獲弘報經一卷彌家女經一卷二人作沙門弟斷兄舌經一卷氣噓殺旃陁羅經一卷眼能視殺人經一卷孤獨三兄弟經一卷 阿劍他經一卷不蘭伽經一卷 小申日經一卷波羅奈媈四姓經一卷 或作婦字大姓家主叩書不經一卷提謂經一卷强羅經一卷 金轉龍王經一卷蘇曷龍王經一卷 三龍王經一卷虎王經一卷 蝎王經一卷毒龍蛇施經一卷放牛法經一卷今疑是藏中放牛經 養牛經一卷閻羅王經一卷 今疑是藏中閻羅王五天使者經餓鬼經一卷 鐵杵泥犂經一卷緣經一卷 藥經一卷 苦慧經一卷慧達經一卷 法足經一卷身數經一卷 選福經一卷布施經一卷 助善經一卷古來經一卷今疑是藏中古來世時經 孝順經一卷緣本經一卷今疑是藏中緣本致經 度世經一卷法藏經一卷 明住經一卷善憩經一卷 植質經一卷名相經一卷 怪異經一卷滅怪經一卷 本鉢經一卷案鉢經一卷 諸法經一卷與脫經一卷 伏願經一卷寶見經一卷 眞提經一卷明義經一卷 見在經一卷釋論一卷祐云疑是大智度論抄之一卷 雜事經一卷旨解經一卷祐云疑卽義旨雜解 釋學經一卷度道俗經一卷 諸福德經一卷說人身經一卷 施色力經一卷色入施經一卷 戒法律經一卷未生火經一卷 未生災經一卷念佛品經一卷 須彌山經一卷成敗品經一卷經目或云成敗品第四似是樓炭經之一品今撿樓炭無此品世間珍寶經一卷舊錄云世間所望珍寶經現道神足經一卷 成行無想經一卷悔過除罪經一卷 深自僥倖經一卷布施持戒經一卷 生西方齋經一卷造浴室法經一卷 有疑往解經一卷長阿含方法經一卷令人孝有德經一卷人於出家者經一卷心應深貪慕經一卷地水火風空經一卷求欲者除意經一卷持戒教人殺生經一卷七月十五日臘法經一卷功高憍慢有二輩經一卷歡喜布施有五事經一卷或作勸字錯三夢 經一卷 三悔處經一卷三乘無當經一卷 四署經一卷四等意經一卷 四政斷經一卷四厚經一卷 五署經一卷五穀世經一卷 五亂經一卷五耶經一卷 六禪經一卷六度六十行經一卷六輩阿惟越致經一卷七衆經一卷七流經一卷 七使經一卷七輩人撗死經一卷七歲作善經一卷八方萬物無常經一卷 八雙經一卷九結經一卷 九惱經一卷九道觀身經一卷 十部僧經一卷十二意經一卷 十二阿練若高行經一卷十二部經名一卷 三十二僧那經一卷三十四意經一卷 五十德相經一卷六十品經一卷 六十二疑經一卷七十二觀經一卷 百法經一卷惟日三昧經一卷 月電三昧經一卷無言三昧經一卷 阿和三昧經一卷禪行法經一卷 今疑是藏中禪行法想經須彌山譬經一卷 日月譬經一卷海水譬經一卷 藥草喩經一卷功德天譬經一卷 賢劫譬經一卷金剛譬經一卷 寶藏譬經一卷明珠譬經一卷 聚木譬經一卷四大譬經一卷五部威儀所服經一卷 或云五部僧服經高僧傳云白法祖譯結界文經一卷 沙彌離戒經一卷五戒報應經一卷 六足阿毘曇一卷雜譬喩經六卷 或云諸雜譬喩譬喩經一卷 祐云異出更有一本今且存一雜譬喩經一卷 凡十一事右三百七部三百四十卷 唯初九部九卷有本餘者竝闕竝是梁代沙門僧祐錄新集失譯諸經然僧祐本錄祐所新集摠一千三百六一千五百七十卷今細撿括九百九十九部一千二百三十卷多是諸別生經或長房等失譯錄中已載及有代錄之中摽其譯主除此之外有三百七部三百四十卷撿括長房等錄皆未曾載今新集於此以爲失源然祐錄中但云失譯不摽年代今且附於宋錄之末庶免遺漏焉開元釋教錄卷第五摠錄之五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원문에는 ‘이(二)’ 자(字)로 되어 있으나, 뒤 내용확인 결과 ‘삼(三)’ 자(字)의 탈획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
  2. 2)논밭ㆍ집터 따위의 면적 단위이다. 중국 상고 시대에는 사방 6척을 1보(步), 100보를 1묘(畝)라 하고, 진(秦) 이후는 240보를 1묘로 하였다.
  3. 3)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외물(外物)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말한다.
  4. 4)여러 스님 가운데 특히 한 스님만을 청하여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5. 5)소승들이 수행하여 과(果)를 증득하는 네 가지 계위(階位)를 말한다. 4향(四向)은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 과(果)를 증득하는 네 가지 계위(階位)인데, 수다원향ㆍ사다함향ㆍ아나함향ㆍ아라한향을 말하고, 4과(四果)는 증득한 네 가지 계위(階位)를 말하는데,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를 말한다.
  6. 6)인도 4성(姓)의 하나이며, 전쟁에 종사하고,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종족, 또는 왕이 될 수 있으므로 왕족이라고도 한다.
  7. 7)지옥ㆍ축생ㆍ아귀의 3 지옥을 말한다.
  8. 8)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진정한 과(果), 곧 열반을 말한다.
  9. 9)고인(故人)이 생전에 쓴 글을 말한다.
  10. 10)『고려대장경』에는 ‘일품(一品)’으로 되어 있는데, 뒤의 30품을 고려할 때 탈획된 것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
  11. 11)성문(聲聞) 4과(果)의 하나인, 사다함(斯陀含)은 일래과는 뜻으로 번역한다. 인간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에 갔다가 다시 인간에 돌아와서 열반을 깨닫고, 천상에서 이 과를 얻으면 먼저 인간에 갔다가 다시 천상에 돌아와 열반의 증과를 얻는다. 이렇게 천상과 인간 세계를 한번 왕래하므로 일래과라 한다.
  12. 12)마하연나(摩訶衍那)의 준말이다. 대승(大乘)이라 번역한다. 성문ㆍ연각의 2승 교법을 소승이라 함에 대해서 보살의 교법을 대승이라 한다.
  13. 13)대승의 보살들이 받아 지니는 계율을 말한다.
  14. 14)예전 글방에서 여러 날 배운 것을 한꺼번에 선생 앞에서 외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15. 15)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를 말한다.
  16. 16)제자의 행위를 교정하고 지도하는 큰스님을 말한다.
  17. 17)산속의 나무나 돌 사이에 벌이 집을 짓고 모아 둔 꿀을 말한다.
  18. 18)『고려대장경』은 ‘삼십오(三十五)’로 되어 있는데, ‘오십오(五十五)’의 탈획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