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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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 갑권


서명사(西明寺) 석씨(釋氏) 찬집
박건주 번역


1. 후한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낙양(雒陽)에 초빙하여 여러 도사들과 시합하도록 한 일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1)에 이르길,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60) 황제가 꿈에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육장(六丈)의 금신(金身)에 목[項]2)에서는 일광이 뿜어져 나오며 궁전 앞으로 날아오니 흔쾌하게 이를 즐거워하였다. 다음날 여러 신하들에게 “이것이 어떠한 신(神)인가?”라고 물으니, 통인(通人:학식이 넓고 깊이 통해 있는 사람) 부의(傅毅)가 말하기를, “신(臣)이 듣기를 천축에 득도자가 있는데 불(佛)이라 청한다고 합니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몸에서 일광이 빛난다고 하는데 아마 그 신(神)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러함을 알고는 낭중(郎中) 채음(蔡愔), 낭장(郎將) 진경(秦景), 박사제자(博士弟子) 왕준(王遵)등 열여덟 사람을 보내어 대월지국과 중천축국에서 불경 『사십이장경서(四十二章經書)』을 필사(筆寫)해 와 난대(蘭臺)3) 석실의 제14간(間)에 보관하였다. 또한 낙양성 서옹문(西雍門) 밖에 불사(佛寺)를 세우고, 그 벽에 천 대의 수레와 만기(萬騎)가 탑 주위를 세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으며, 석가모니불의 입상(立像)도 그렸다. 이어 남궁(南宮) 청량대(淸涼臺)와 개양성문(開陽城門)에도 불상(佛像)을 그렸다. 그 때 수릉(壽陵)을 축조하였는데 현절(顯節)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그곳에도 불상[佛圖像]을 그렸다. 자세한 내용은 「모자(牟子)」(『弘明集』:앞의 集錄)에 드러나 있다.4)
이 때 사문(沙門) 가섭마등(迦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있었는데, 그들의 경지와 행은 측량하기 어려웠고,5) 뜻은 항상 중생을 개오(開悟)ㆍ교화시키는데 두고 있었다. 채음의 사절을 이어 천축에 이르러 가섭마등에게 중국행을 청하니 머물던 곳을 떠나 낙양에 이르렀다. 그는 중국의 물정을 잘 알게 되었으며, 지혜를 숭상하였고 믿음을 근본으로 하였다.
황제가 가섭마등에게 물었다.
“법왕(法王: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는데, 왜 이 땅에는 교화가 미치지 않는가?”
가섭마등이 대답하였다.
“가비라위(迦毘羅衛:카필라국, 석가모니불의 古國)는 삼천대천세계와 백억 일월의 중심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계서 모두 여기에서 태어나셨고, 나아가 천ㆍ용ㆍ귀신ㆍ발원행을 한 자는 모두 그곳에 태어나 부처님의 바른 교화를 받고 오도(悟道)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곳에 있는 중생은 부처님의 감화를 받을 인연이 없어 부처님께서 그곳에 이르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그곳에 이르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광명이 그곳에 미쳐서 혹은 5백 년, 혹은 1천 년, 혹은 1천 년 지나서 모든 성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교화하고 이끌어 널리 교의(敎義)를 설합니다.”
황제가 이를 믿고 귀중하게 받들었다. 영평 14년(71년) 정월 1일에 이르러 오악(五嶽)과 여러 산의 도사들이 황제에게 새해 인사드리러 온 차에 그들끼리 서로 어울려 논의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천자께서 우리의 도법(道法)을 버리고 멀리 오랑캐의 가르침[胡敎:佛敎]을 구하고 있으니, 지금 새해 인사드리러 와서 모인 때에 황제께 표를 올려 항의하자.”
그 표(황제에 올린 상서문)에서 말하였다.
“오악(五嶽)ㆍ십팔산(十八山)의 도관(道觀)에 있는 태상삼통(太上三洞)의 제자 저선신(褚善信) 등은 죽을죄를 무릅쓰고 감히 황제께 아룁니다. 신들이 태상(太上)께 듣건대 무형(無形)ㆍ무명(無名)ㆍ무극(無極)ㆍ무상(無上)한 허무자연의 대도는 만물이 조화(造化)되어 나오기 이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상고 이래로 모두 함께 받들어 따라왔고, 모든 왕들도 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의 도는 복희[義]ㆍ황제[皇]를 멀리 넘어서 있고, 덕(德)은 요(堯)ㆍ순(舜)을 넘어서 있습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페하께서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구하시어 서역에서 가르침을 구하시고, 받드시는 바도 오랑캐의 신이며, 설하시는 바는 화하(華夏:중국)의 가르침을 떠나시고 계십니다. 원하옵건대 폐하, 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함께 시험하게 해주옵소서. 신(臣) 등 여러 산의 도사들은 대부분 통시력(通視力)과 먼 곳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고, 두루 여러 경전에 통달해 있습니다. 원황(元皇) 이래 태상(太上)의 여러 경록과 태허(太虛)의 부주(符呪)를 연마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구극에 이르러 호긍 귀신을 부리기도 하고, 혹은 무지개를 삼키고 기(氣)를 마시며, 혹은 불을 삼켜도 타지 않고, 혹은 물 위를 걸어도 빠지지 않으며, 혹은 한낮에 승천하며, 혹은 모습을 숨김이 헤아리기 어렵고, 방술(方術)에 있어서도 약이(藥餌:도교의 丹藥)에 능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저들과 비교하게 해주시어, 첫째는 성성(聖上)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는 진위를 판별하게 하고, 셋째는 대도(大道)가 돌아오게 하고, 넷째는 중화의 풍속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신들이 만약 비교하여 이와 같지 않으면 폐하의 무거운 결단에 따르겠사오며, 이와 같아서 이긴다면 저들의 허망함을 제거해 주옵소서.”
황제가 상서령(尙書令) 송상(宋庠)을 보내어 이들을 장락궁(長樂宮)에 들어오게 하고, 같은 달 15일에 백마사(白馬寺)에 모이게 하였다. 도사들은 바로 세 개의 단을 설치하였는데 단(壇)마다 24문(門)을 두었다. 남악(南嶽)의 도사 저선신(褚善信)ㆍ화악(華岳)의 도사 유정념(劉正念)ㆍ항악(恒岳)의 도사 환문탁(桓文度)ㆍ대악(岱岳)의 도사 초득심(焦得心)ㆍ숭악(嵩嶽)의 도사 여혜통(呂惠通)과 곽산(藿山)ㆍ천목(天目)ㆍ오대(五臺)ㆍ백록(白鹿) 등 18산의 도사 기문신(祁文信) 등 모두 합하여 690인이 각기 『영보진문(靈寶眞文)』ㆍ『태상옥결(太上玉訣)』ㆍ『삼원부록(三元符錄)』 등 590권을 가져 와 서단(西壇)에 두었다. 『모성자(茅成子)』ㆍ『허성자(許成子)』ㆍ『황자(黃子)』ㆍ『노자(老子)』등 27家의 자서(子書) 135권은 중단(中壇)에 두었다. 제사 음식과 제사에 모실 백신(百神)은 동단(東壇)에 두었다. 황제가 이 때 행차하였는데 전(殿)이 사찰의 남문에 있는 것을 알고는 부처님의 사리(舍利)와 경상(經像)을 도가의 서편으로 옮기게 하였다. 15일에 재(齎)를 마치고 도사들은 장작과 풀 및 침단향으로 횃불을 만들어 손에 쥐고 자서(子書)와 경전 주변을 돌며 읍(泣)하여 말하였다.
“신들은 태극 대도(大道) 원시천존(元始天尊)6)과 중선(衆仙)ㆍ백령(百靈)께 아뢰옵나니, 지금 오랑캐가 중하(中夏)를 어지럽히고 인주(人主)께서 삿된 가르침을 믿으시니 바른 가르침은 실종되고 도교의 위풍[玄風]은 추락하고 있어 신들이 감히 경전을 단상에 설치하고 불로 시험하여 대중들의 마음[君心]을 열어 진위(眞僞)를 판별하고자 합니다.”
곧바로 불을 놓아 경전을 불태우니 경전들은 모두 타 버리고 재만 남게 되었다. 도사들은 서로 쳐다보며 실색(失色)하고 크게 두려움이 생겼다. 승천하여 몸을 숨기고자 하는 이는 할 힘이 없었고, 귀신을 부리는 자는 귀신을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각기 부끄러워하였는데 남악도사 비숙재(費叔才)는 스스로 분해하며 죽었다.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저선신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시험한 바가 징험이 없으니 곧 이는 허망한 것이 분명하다. 마땅히 서쪽에서 온 진법(眞法)을 취해야 할 것이다.”
저선신이 말하였다.
“모성자(茅成子)가 말하길, 태상(太上)은 영보천존(靈寶天尊)이시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태소(太素)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허망한가?”
장연이 말하였다.
“태소(太素)에는 귀덕(貴德)의 이름이 있으나, 언교(言敎)의 이름은 없다. 지금 그대가 말하는 언교가 바로 허망하다는 것이다.”
저선신이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있었다.
그 때 부처님 사리(舍利)의 광명이 오색으로 빛나며 공중에 있었는데, 둥글게 돌며 덮개처럼 대중의 위를 두루 덮었고, 그 빛이 햇빛을 가렸다. 가섭마등 법사가 몸을 솟구쳐 높이 날며 공중에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널리 신이한 변화를 나타내 보였다. 이 때 하늘에서는 보배로운 꽃비가 스님들 위를 내리고, 또한 하늘의 음악 소리가 들리며 사람의 마음[人情]을 감동시키니, 대중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며 미증유(未曾有)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모두들 축법란 주위에 모여 법요(法要)를 설해 주시길 청하니, 축법란이 이에 대범음(大梵音)을 내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한 대중이 삼보(三寶)를 찬양하도록 하고자, 선악의 모든 법에는 모두 과보가 있으며, 육도(六道:天ㆍ人 ㆍ阿修羅ㆍ地獄ㆍ餓鬼ㆍ畜生)ㆍ삼승(三乘: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의 모든 현상이 불이(不一)함을 설하였다. 또 출가공덕이 최고의 복덕이며, 처음 불사(佛寺)를 세우는 것은 범천(梵天)의 복량(福量)과 같다고 설하였다. 이 때 사공(司空) 양성후(陽城侯) 유준(劉峻)과 모든 관인ㆍ서민 등 천여 명이 출가하였고, 사악(四岳)과 모든 산의 도사인 여혜통 등 628명이 출가하였으며, 음부인(陰夫人) 왕첩여(王婕妤) 등과 여러 궁인ㆍ부녀 등 230명이 출가하였다. 월말까지 매일 공양의 자리가 마련되고 갖가지 시주가 행해져 법의(法衣)ㆍ병기(甁器)가 함께 마련되었다. 관할 관부에서 곧 열 채의 사찰[十寺]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7사(寺)는 비구승을 두어 성읍 밖에 세우고, 3사(寺)는 비구니를 두어 낙양성 안에 두었다. 한(漢)에서 불법이 흥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이다. 처음 가섭마등이 서쪽으로 오면서 석가모니불의 입상(立像) 그림을 가져 왔는데, 황제가 그 상(像)을 더 그리게 하여 능원(陵園)과 낙양성문에서 공양하도록 하였다.

2. 전위(前魏) 때 오(吳)나라 군주가 불교를 숭상하고, 부처님을 위해 탑사(塔寺)를 세우면서 삼교(三敎)의 우열에 대해 문의한 일7)

『오서(吳書)』에서 말하였다.
“손권(孫權) 적오(赤烏) 4년(241)에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있었는데, 그는 강거국(康居國)8) 대승상의 장자였으며 마음이 강정(剛正)하였고 여기저기 자유로이 유행(遊行)하며 교화하고 있었다. 이 때 삼국(魏ㆍ蜀ㆍ吳)이 정립(鼎立)하여 각기 위세를 떨치며 대치하고 있어 불법이 북쪽에는 유통되었으나, 남국(吳지역)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강승회는 도(불교)가 아직 전파되지 못한 양자강 이남 지역에 법을 펴고자 처음으로 건업(建業:吳의 수도)에 도착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는 도를 행하였다. 오나라 사람들은 처음 이를 보고 요망스럽고 이상하다고 여겼다. 관리가 보고하니 오나라 군주(손권)가 강승회를 불러 물었다.
‘부처님에게는 어떠한 신험(神驗)이 있는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영이로운 행적을 나타내신 지 천 여 년이 되었으며, 사리(舍利)로 그 유형(遺形)이 전하시고, 응현(應現)하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나라 군주가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게 되면 마땅히 탑을 세우겠다.’
21일이 지나 마침내 사리를 얻게 되었는데 오색이 하늘에 가득 비치고, 부수고자 하였으나 끄떡없었고, 불에 태워 보았으나 타지 않았고, 광명이 불을 일으켜 대연화(大蓮華)를 짓고 궁전을 밝게 비추었다. 군주와 신하가 모두 경탄하였고 이에 믿는 마음[信情]이 일어나 탑을 세우게 되었으며, 사람들을 제도할 절을 세웠다. 그곳을 불타리(佛陀里)라 칭하였으며, 교법이 여기서 처음 일어났으므로 마침내 건초사(建初寺)라 이름하였다. 얼마 후 오나라 군주가 상서령 감택(闞澤)에게 물었다.
‘후한 명제(漢明) 이후 무릇 몇 년이나 되었는가? 불교가 한(漢)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무슨 까닭에 이제야 비로소 강동(江東)에 이르게 되었는가?’
감택이 답하였다.
‘영평 10년(67) 불법이 처음 들어온 이래 지금 적오 4년(241)까지 17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영평 14년에 오악의 도사들과 가섭마등이 도력을 겨뤘을 때 도사들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들 중 남악도사 저선신ㆍ비숙재 등은 모임에서 스스로 분해하며 죽었습니다. 문도(門徒)의 제자들이 남악에 모셔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후로는 출가하는 자도 없었고, 불법을 유포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 후 후한 정부가 쇠약해지매 전쟁이 끊이지 않은 지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어 이제야 비로소 불법이 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오나라 군주가 물었다.
‘공자[孔丘]와 노자를 부처님에 비교할 수 있는가?’
감택이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노나라의 공자[孔君]는 뛰어난 영재로서 성덕(聖德)이 출중하여 세상에서 소왕(素王)9)이라 칭합니다. 경전을 만들고 기술(記述)하였으며, 주(周)왕조의 도(道)를 훈도하고 장려하였고, 제자들을 교화하여 사유(師儒)의 기풍을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고금(古今)에 또 일민(逸民)10)이 있는데 『허성자(許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 등 백가(百家)의 자서(子書)에서 모두 수신(修身)을 말합니다만, 그들은 스스로 산과 골짜기에서 마음대로 유쾌하게 노닐며, 그 배우는 바가 고요함에 돌아가고, 행하는 바가 인륜과 장유(長幼)의 절도[節]에 어긋나 있어 또한 세속 교화의 분위기를 불안하게 합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황자(黃子)』ㆍ『노자(老子)』의 교의[義體]가 더욱 깊어져 자서(子書)를 경전이라 고쳐 부르고 비로소 도학(道學:黃老學)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칙령을 내려 조야(朝野)가 모두 그 책을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공자ㆍ노자의 이교(二敎)를 불법(佛法)에 비교한다면,11) 차이가 큰 것으로 보면 큰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공자ㆍ노자의 이교는 하늘을 본받아 문물제도를 제정하고 사용하며 감히 하늘을 거스리지 않습니다만,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시면 하늘이 법대로 봉행하여 부처님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실로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오나라 군주가 크게 기뻐하여 감택을 태자태부(太子太傅:太子를 가르치는 스승)에 임명하였다. [그 밖의 내용은 진(晋)나라 종병(宗炳)의 「명불론(明佛論)」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위나라 진사왕(陳思王) 조자건(曹子建)12)의 「변도론(辯道論)」13)

무릇 신선의 책과 도가(道家)의 말에 이르길, “전설에 의하면 위에서는 진미수(辰尾宿:동방의 尾 별자리)로14) 세성(歲星:木星)15)을 삼았는데, 내려와서는 동방삭(東方朔, B, C.154~B, C.93)이 되었고, 회남왕(淮南王) 안(安B, C.179~B, C.122)이 회남에서 사형 받았는데, 이에 대해 말하길 ‘도를 얻어서 가볍게 행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구과부인[鉤戈]17)이 운양궁[雲陽]에서 죽은 일에 대해 시신이 옮겨가 관이 비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말들은 그 허망함이 심한 것이다.
한의 중흥[後漢의 건국]시에 독실(篤實)힌 논사로소 환군산(桓君山:桓潭, B, C.23~A, D.50년)18)이 있었는데 그의 저서( 「新論」)는 훌륭한 점이 많았다. 유자준(劉子駿)이 일찍이 물어 말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능히 욕심[嗜慾]을 억제하고 이목(耳目)을 eke으면 쇠로(衰老)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때 마당 아래에 늙은 느릅나무가 있었다. 환군산이 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나무는 감정과 욕심이 없어 인내할 수 있으며, 이목이 없어 이목 닫을 수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고목이 되어 썩어 부서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준이 쇠로(衰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논의가 되지 못한다.”
“군산이 느릅나무에 비유한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이전에 왕망(王莽)정부19)의 전락대부(典樂大夫)였을 때 『악기(樂記)』를 보았는데 거기에서 말하였다.
‘전한(前漢)의 문제(文帝)가 위문후(魏文侯)의 악인(樂人) 두공(竇公)을 얻었는데 그의 나이는 180세였고 두 눈이 먼 사람이었다. 황제가 기이하게 여서 묻기를 ≺어떻게 일을 해 왔는가?≻하니, 대답하길 ≺신은 13세에 실명하였는데 부모님이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불쌍하게 여기어 신에게 가야금 타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은 도인법(導引法)은 하지 못하며 장생술(長生術)도 모르는데 무슨 힘을 얻었겠습니까?≻라 하였다.’”
군산이 이를 논하여 말하였다.
“자못 맹인이라도 전일하게 안으로 관하는 것을 정밀하게 하면 밖에서 비추는 도움이 없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안으로 관하는 것을 무익한 것이라고 유자준을 비난하고, 물러나 두공(竇公)의 예를 들어 논하였으나, 이것은 증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나는 아직 명확한 논설을 듣지 못하였다.”
“방사(方士:도교의 方術의 士) 동중군(董仲君)이란 자가 있었다. 죄를 지어 옥에 갇혔는데, 죽은 체하고 수일이 지나니 눈이 들어가고 벌레가 나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그 다음에는 결국 죽었다. 생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군자가 도달해야 할 바이니, 무릇 어떻게 비유할 것인가? 무릇 지신(至神)이라 하더라도 천지의 질서를 넘지는 못하는 것이나니, 겨울잠 자는 벌레를 여름에 돌아다니게 하거나 겨울에 뇌성벽력이 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절이 변하면 사물이 움직이며, 기(氣)가 변하면 사물이 그 변화에 응하는 것이다. 저 동중군은 능히 그 기를 갈무리할 수 있어서 그 몸을 시체로 하고, 그 피부를 썩게 하고, 몸에서 벌레가 나오게 하였으니 크게 괴이할 것도 없다. 세상의 방사(方士)들을 우리 왕께서 모두 초빙하였으니, 감릉(甘陵)의 감시(甘始)ㆍ여강(廬江)의 좌자(左慈)ㆍ양성(陽城)의 극검(郄儉)이다. 감시는 능히 행기(行氣) 도인(導引)의 법을 행하였고, 좌자는 방중술(房中術)에 통해 있었으며, 극검은 벽곡법(辟穀法)에 뛰어나 모두 삼백세(三百歲)라 칭하였다. 이들이 본래 위국(魏國)에 모이게 된 것은 아마 분명히 이들 무리끼리 함께 음모하여 간교하게 대중을 속이고 요사스런 일을 행하여 몰래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어서 이를 금하게 하였다. 감시는 노인이었으나 젊은 모습이었고 스스로 다른 술사와 함께 돌아갔다. 그러나 감시의 글은 번잡하나 참됨은 적고 자못 괴이한 말이 있어, 만약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를 만났다면 다시 서복(徐福:徐市)이나 난대(欒大)와 같은 무리 가 되었을 것이다. 걸(桀)ㆍ주(紂)는 시대는 다르나 똑같이 악하고 간사스런 사람들이었으니, 시대는 다르나 거짓됨이 같은 것이 이와 같을까?
또 세상에는 허망스런 선인의 설이 있는데, 선인이란 자들이 원숭이 족속이라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도화(道化)하여 선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릇 꿩이 바다에 들어가 조개가 되고, 제비가 바다에 들어가 무명조개가 된다면, 여기저기 날개 펄럭이며 돌아다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다니던 즐거움을 스스로 만끽하다가, 홀연히 스스로 신비롭게 몸을 변화시켜 바다의 자라들과 무리를 이루어 지낸다면, 어찌 다시 숲과 초목에서 날아다니고 집에서 둥우리 트는 즐거움을 알겠는가? 소[牛]가 쇠약해지고 병이 들어 호랑이가 되었다가 그 형(소가 된 형)을 만나 잡아먹는다면 어찌 변신하는 것을 소중한 것이라 할 것인가? 돌아보건대20) 필부의 속임에 넘어가 허망한 말을 받아들이고, 현혹케 하는 설을 믿어 융숭한 예로 못된 신하를 초빙하며, 막대한 재산을 쏟아 부어 헛된 바람 위해 바치고, 왕의 작위(爵位)를 주어 그들을 영예롭게 허며, 청한관(淸閑館)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끝내 조금도 효험이 없었으니, 혹은 사구(砂丘)21)에서 죽고, 혹은 오작궁(五柞宮]22)에서 죽었다. 당시에 비록 자신의 몸이 주살되고 다시 어지러이 멸족(滅族)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족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수명의 길고 짧음과 신체의 강하고 약함은 각기 사람에 따라 다름이 있는 것이다. 몸을 잘 보양하는 이는 오래 살다 죽고, 너무 힘들게 몸을 부리는 이는 반 정도 살다 죽으며, 헛되이 몸을 소모시키는 이는 요절한다. 이것이 바로 당연한 이치라 할 것이다.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은 자(字)가 자건(子建)이고 위무제(魏武帝:曹操)의 넷째 아들23)이다. 처음 동아군왕(東阿郡王)에 봉해졌고, 죽은 후에는 시호를 진사왕이라 하였다. 어려서 미덕이 있었고, 10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며, 붓을 대기만 하면 바로 문장을 이루었고, 한 번 쓴 것은 다시 고치지 않았으며, 세간의 예술에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단순(邯鄲淳)이 보고 놀라고 탄복하면서 천인(天人)이라 칭하였다. 조식은 불경을 읽을 때마다 자주 눈물을 흘려 울며 탄식하기를, ‘지극한 도의 근본[宗]이요, 궁극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독경해 나가는 7성(聲)의 올라가고 내려감과 구부러지고 돌아가는 음률을 만들었는데, 모두 소리 내어 독경하는 음률의 헌장이 되었다. 일찍이 어산(魚山)에 유람하다가 문득 공중에서 범천(梵天)의 음향을 들었는데, 맑고 날아갈 듯 경쾌하며, 또한 애수가 깃들어 있고, 귀여운 그 음향에 감동하여 홀로 오랫동안 듣고 있었는데 시자[侍御]는 듣지 못하였다. 조식은 깊이 신이한 이치에 감응하고 법에 감응하여 깨달았다. 이에 그 성음(聲音)의 음률을 기리어 옮겨서 범패(梵唄)로 만들고, 글을 짓고 음률을 지어 후대에 전하게 하였으니, 범성(梵聲)의 빛나는 드러남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전해진 범패는 무릇 6계(契)이며, 양나라 석승우(釋僧祐, 44~518)의 『법원집(法苑集)』에 보인다. 그러나 도원(道源)을 총괄하여 정심하게 수집했다는 『선록(仙錄)』은 간사하고 허망하며 이상한 것이 많아 결국 거짓으로 꾸민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앞에서 자세하게 분별하여 마땅히 밝혀야 할 바를 노한 것이다.

2) 진(晋)나라 손성(孫盛)24)이 지은 「성현동궤노담비대현론(聖賢同軌老聃非大賢論)25)

요즈음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된 후 읽은 글을 펴고 선철(先哲)의 현묘한 경계를 우러르며, 영적인 교류로 대현(大賢)을 궁구하고, 그들의 풍류를 자세히 살피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두루 살펴보니 고하(高下)의 논변과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었다. 무릇 대성(大聖)은 때를 알아 자재하는 까닭에 현상에서 그 자취가 유유하며, 대현(大賢)은 대성 다음으로 현묘한 까닭에 대성과 더불어 함께 나아간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다른 까닭에 물러섬[揖讓]과 투쟁[干戈]의 차이가 있으나, 대성 다음으로 현묘하고 최상의 도에 버금가기 때문에 양자의 행함과 내실의 틀에는 다름이 없다. 또한 용과 호랑이가 바람과 구름을 따라 나타나고, 형상과 소리가 그림자[影]와 메아리[響]로 만나듯이 이치는 확고하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억지로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자(箕子)와 문왕(文王)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것[虎 兕똑之吻]26)이 나중에는 똑같이 대길(大吉)의 징조였음이 드러났고, 안회(顔回)와 공자가 광(匡)과 진(陳) 땅에서 함께 고초를 당했던 것이나, 요임금이 하늘의 도에 따르니 후직(后稷)과 설(偰)27)이 그 교화를 도왔으며, 은(殷)의 탕왕(湯王)과 주(周) 무왕(武王)의 혁명에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이 크게 도와 공을 세웠으니,28) 이로 보건대 양자가 어울려져서 영향(影響)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은 나와 여러분들의 한결같은 말이니 어찌 믿지 않을 것인가? 무슨 뜻인가? 대현(大賢)은 자못 사상(事象)을 살필 수 있으며, 사상을 살필 수 있으면 사람의 그릇[器]을 볼 수 있게 되고, 그릇을 볼 수 있으면 앞을 내다볼 수 있고, 앞을 내다볼 수 있으면 길흉(吉凶)을 아나니, 길흉이란 형세의 운행으로서 이는 원인에 응해서 다스리며 만물[君方]을 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원길(元吉:大福德)을 끝까지 지킬 수 있으며, 막힘과 장애를 궁통(窮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모두 동일한 것이다.
단지 대현은 성인을 흠모하여 역(易)을 즐기고 그 경지를 기대하고, 명(冥:冥體의 도)을 흠모하나 명(冥)에 이를 수 없고, 적멸[寂]을 좋아하나 적멸을 이루지 못하니, 여기서 대현과 성인의 우열이 있다.
중현(中賢)인 제삼의 사람은 성인으로부터 간격이 떨어져 있어 명체(冥體)의 도에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고, 자연의 운용에 있어서 현동(玄同:현묘한 적멸의 차원에 계합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현(中賢)만 하더라도 예로부터 드물며, 수승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상이 높고 순박한 기풍을 숭앙하고 오직 지허(至虛)를 읊는 까닭에 깊은 산 속에서 지내니, 소부(巢夫)ㆍ허유(許由)와 같은 이들이 있고 언행을 잘 단속함이 노팽(老彭)29)의 무리와 같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 자연스런 이치이다. 무릇 처신함에 있어서 고요함을 좋아하고 천성이 강직함을 중히 여긴다. 항상 익히는 것을 깔보고 드물게 들은 것을 탐하는 것은 세속의 일상이다. 그래서 치우치게 세속을 탈피하는 글을 보아도 다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 따르게 되고, 어쩌다 잘못됨을 시정해 주는 논(論)을 보더라도 다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바로 놓치게 된다. 노자의 저작과 성인(여기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같다고 보는 것은 뛰어난 장인(匠人)에 대신하여 나무를 깎게 함과 같고, 발가락 둘을 합하여 무엇을 가리키려고 하거나 손가락 하나를 덧붙여 여섯 손가락으로 한다는 비유와 같으니,30)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의 가르침은 구세(救世)의 실(實)31)에서 먹고 명도(明道)에 어긋나 우매하다. 육경(六經:유교 경전)에는 왜 항상 허정(虛靜)의 가르침과 겸충(謙冲)의 교훈이 없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윗 성인의 가르침을 기술만 하였지 지은 것이 아니며, 윗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옛 가르침을 좋아하니, 나는 자못 노팽(老彭)에게나 비유할 수 있다”32)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뜻을 살펴보면, 즉 노팽의 도는 성인의 가르침 안에 포괄되는 것이며, 마땅히 지적하여 두 가지 사항을 설한다면 진실 아님이 없다. 성인의 깊고 깊은 적정(寂靜)을 왜 좋아하지 않는다고 어디에 어떻게 밝혀져 있는가? EH한 삼황오제(三皇五帝) 이래 짓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런 까닭에 역상(易像:『역경』)과 경전[經墳:고전]들이 찬연하게 빛나고 집과 의복이 항상 흥하였으니, 어찌 “옛 것을 그대로 기술만 하고 짓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역경』에서 말하기를, ‘성인이 예와 악 등을 지으시니, 만물이 드러난다”하였다. 이 말의 발단은 대체로 노팽의 덕이 성인의 가르침에 비슷한 아류이며 본(本)이 아닌 자취의 자리에 있음을 지적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노팽의 도가 원한을 감추고 우정을 보이는 것33)과 비슷해서 좌구명(左丘明)도 이를 부끄러워하였고, 공자 또한 이를 부끄러워하였다. 내 말에 어찌 상(相)과 체(體)의 궁극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겠는가? 안회와 공자는 양생술[導養]을 익히지 않았으나 노팽은 양생술을 익혔으니 공자와 안회는 일반인과 같고 노팽은 다르다. 무릇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은 아성(亞聖)의 흔적이 아닐 수 없으며, 또한 그들(공자와 안회)의 글은 왕왕 모순되고 조잡하니 아래와 같다. 대아(大雅)의 진신(搢紳:사대부ㆍ유학자ㆍ지식인ㆍ관료)이 다행히 그 폐가 성행하는 것을 제거하였으나 또한 노담의 허허로운 행의 요지에 통하지는 못하였는데 어찌 오랑캐[戎狄]를 훈도하고 풍속이 다른 지역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풍속이 다른 종족을 밝게 선도하려고 한다면 오랑캐[左衽]는 현화(玄化)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홀로 나아가는 것도 좋은 은둔은 아니다. 중국[諸夏]은 선대 성인들이 펴 놓은 가르침에 따라 가까운 데서 먼 곳에 이르기까지 멀고 험함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고 이와 같이 지내왔다. 만약 재앙을 두려워하며 피신한다면 성인의 가르침[聖門]은 자취를 감추어 버릴 것이다. 상(商:殷)나라와 노나라에서도 이러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 도를 이룬다면 능란하고 쉽게 어디에서나 대길(大吉)을 이룰 것이니 어찌 오랑캐[戎貊]라고 천심이 다르겠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 하여 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 기도만 한다면 신선을 구하는 무리가 아니겠는가?
이전에 배일민(裵逸民)34)이 「숭유론(崇有論)」과 「귀무론(貴無論)」35)의 두 가지 논을 지었는데, 당시 녽들은 이를 불허(不虛)ㆍ달승(達勝)의 도라 하거나, 혹은 은둔하는 시류를 바로잡는 글이라고 하였다. 나는 ‘무(無)’를 숭상사는 것도 잘못이고, ‘유(有)’를 숭상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도가 사물이 되는 것은 아득하고 황홀하여 자연에 따르는 것일 뿐 순박할 때에는 일을 놓고 가만히 있으며, 만동(萬動) 변화에는 형체가 발흥되는 것이다. 통찰함은 비록 같으나 유(有)ㆍ무(無)의 가르침이 달리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니, 성(聖)을 드러냄은 비록 같으나 달리 이름이 칭해지는 것이다. 요임금ㆍ순임금은 글자 만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탕왕ㆍ무왕은 물러나 양보하려 하지 않았으니,36) 무릇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37) 단지 사운(時運)의 변화에 응한 때문일 뿐이다. 백양(伯陽:老子의 字)은 옛 도에 의거하여 현실에 처신하였고, 배일민은 현실에 의거하여 옛 풍조를 끊었다. 그러므로 나는 저들 두 사람은 모두 원화(圓化)한 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각기 그 한 방면에만 통달한 것을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진(晋)나라 손성이 지은 「노자의문반신(老子疑問反訊)」38)

노자가 지은 『도덕경[道經]』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항상 욕심 없음으로써 그 묘(妙:始原ㆍ玄元)를 보며, 항상 욕심이 있음으로써 그 요(徼:終에 돌아감, 歸元)를 본다. 이 양자는 같은 데서 나왔으나 이름이 다를 뿐이니 똑같이 현(玄)이라 하며,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온갖 현묘한 것의 문이다”39)라고 하였다. 구설(舊說)과 왕필(王弼)의 해석에는 ‘묘(妙)’를 ‘처음’이라 하였고, ‘요(徼)’는 ‘끝’이라 하였다. 무릇 ‘처음’을 아는 데는 ‘끝’이 전제되어야 하고 ‘묘(妙)’를 알려면 드러나 있는 것을 밝게 알아야 한다는 것은 달인(達人)의 규ㅣ감이다. 이미 정신을 맑히고자 하여 그 ‘묘(妙)’와 ‘처음’을 비추어 보면 여기에 스스로 이루어지거늘, 마땅히 임 모두 갖추어졌는데 어찌 다시 그 ‘끝[歸元]’을 이루려고 하는가? 욕심을 지니고 함께 현묘한 문에서 나옴을 똑같이 ‘현(玄)’이라 한다 하였는데, 만약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오직 무욕(無慾)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또 『노자도덕경』에서 말하기를,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악한 것이며, 모두 선한 것을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40)하였다. 내[孫盛]가 생각하건대 무릇 아름다움과 악함의 이름은 아름다움과 악함의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도덕을 지킴이 순박하고 아름다우면 선하다 칭하며, 완고하고 어리석고 사납고 우매하면 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역(易)』에서 이르기를, “악이 쌓여지지 않으면 몸이 멸하는 데 이르지 않는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어 사지(四肢)를 활발하게 하니 사업(事業)을 일으킨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름다움이 다하여 아름답다. 훌륭함이 다함없다”하였다. 그러하니 대미(大美)와 대선(大善)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인데 어찌 이를 악하다 할 것인가? 만약 허망하게 아름다움을 아름답지 않다고 하고 선을 선하지 않다고 하며, 아름다움에 합당한 것을 잘못된 아름다움이라 하고, 선에 합당한 것을 어긋난 것이라 한다면, 모든 세간의 가르침이 잘못일 것이며, 성왕(聖王)이 예전에 천하를 훈계한 것도 또한 그렇다 할 것이다. 이 구절 아래에서41) 또 말하기를, “현명함을 존숭하지 않으면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 수 있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으로 하여금 훔치지 않게 할 수 있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망이 없게 하여 아는 척하는 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할 수 없게 한다”42)하였다. 또 말하기를,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唯]과 불손하게 대답하는 것[阿]이 서로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선과 악이 서로 얼마나 차이나겠는가?”43)하였다. 또 다음 장에서 말하기를, “선인(善人)은 불선인(不善人)의 스승이고, 불선인(不善人)은 선인의 자량이 된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거나 그 자량(資糧)을 사랑하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한 것이다”44)하였다.
나[孫盛]는 이렇게 생각한다. 백성이 욕심이 없게 되었다면 또한 어떻게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이미 서로 스승과 자량이 되어 배움이 없다면 어떠할 것인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선한 사람의 스승이 되고 현자를 존숭하지 않으면 어떠할 것인가? 귀하게 여기고 애중함이 이미 있다면 선악이 현창하지 않을 수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또 다음 장(章)에서 말하기를, “남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또한 이를 남에게 가르친다”45)하였고, “내가 말하는 것은 매우 쉽게 알 수 있으나 천하에 능히 아는 사람이 없다”46)하였고, 또 말하기를, “나는 정차 이로써 가르침의 아비를 삼겠다”47)고 한 것이 본래 그러한 말들이다. 아직 배움을 끊지 않았다고 한 데서 끊었다는 것은 요임금과 공자의 학문인가? 요임금과 공자의 학문은 수시로 가르침을 열었고, 노씨의 말도 한결같이 존숭되면서 수시로 가르침을 연다. 그 까닭은 도가 백 대에 통하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존숭되면서 적합한 변화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아직 능통하지 못한 자들을 어둡게 가리고 말았다.
또 『도경』에서 말하기를, “도는 텅 비어서 이것을 쓰면 가득 차지 않은 것 같다”48)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빛에 화합하여 그 티끌[塵:물질 원소]들이 하나 된다”49)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담은 도를 알았지만, 도를 체득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옛날 요임금[陶唐]은 천하를 다스리면서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오직 여러 훌륭한 스승들을 밝게 관직에 임명하였고, 필부(匹夫)에게 천하를 주어50) 신속히 선양(禪讓)하였으니, 어찌 충허(沖虛)의 경지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백양(伯陽:老子)은 그렇지 못하여 혼탁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다시 저 멀리 서융(西戎)에 숨어 들어갔으며, 그의 행동거지는 크게 어지러웠고, 그의 저서(著書)는 삿되고 기만하는 것이었으니 화광동진(化光同塵)이 진실로 이러한 것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확실히 노자는 도는 알았으나, 도를 체득함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경』에서 말하기를, “세 가지는 말로 따져서 도달할 수 없으므로 섞어서 하나가 된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니 이름 붙일 수 없어 다시 무물(無物)이라는 말에 복귀할 수밖에 없다. 무물의 모습을 황홀이라고 한다”51)하였고, 또 다음 장(章)에서 말하기를, “도의 됨됨이는 오직 황홀한 것이네. 황홀한 가운데 모습이 드러나고 황홀한 가운데 사물[物]이 있다”52)하였다. 이 두 장에서 혹은 무물이라 하였다가 혹은 유물(有物)이라 하고 있으니, 먼저 이것은 옳지 않다.
“옛 도를 가지고 지금의 현실[有]을 제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잃지 않으려고 꼭 쥐고만 있으면 놓치게 되고, 억지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실패하게 된다”53)하고는, 또 말하기를, “옛 도(道)를 가지고 지금의 현실[有]을 제어한다”고 하고 있다. 어느 때는 가지고 있으라 하고 어느 때는 안 된다는 것이니 모순된 논리가 아니겠는가?
또 “성스러움에 대한 집착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손성이 말하기를, “무릇 인성(仁聖)이 있으면 반드시 인성(仁聖)의 자취가 있는데 이 자취를 숭상하지 않는다면 어찌 훈도(訓陶)함을 융섭할 수 있겠는가? 인의를 존숭하지 않으면 효(孝)와 자비[慈]의 도는 사라질 것이다. 노씨가 이미 말하기를 ‘성인이 되고자 함을 끊으라’고 하고는 다시 각 장에서 자주 성인을 칭하고 있다. 이미 성인을 칭하였다면 그 자취가 있을 것인데 어찌 능히 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끊고자 하여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자취를 끊어 버린다면 여기서 성인으로 칭하는 분들의 어떠한 자취가 남아 있겠는가?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마땅히 그 자체가 단멸되어도 마땅히 그 자취를 칭함이 있다면 칭함과 멸함이 같지 않으니 우리 가운데 누가 거기에 맞게 따라 가겠는가?”하였다.
또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자(孝慈)하게 된다”54)하였다. 만약 이 말대로 인의(仁義)가 단절되지 않는다면 백성[民]이 불효(不孝)ㆍ부자(不慈)하게 될 것이다. 또 말하기를, “거처하기는 좋은 땅과 같이 하고 더불어 사귐은 인으로써 한다”55)하였으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인을 잘 실천하라는 인과 계속 말하고 있는 인을 끊으라 한 경우의 인이 다른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만약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다시 인에 대해 다르게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만약 다르다면 두 가지 인의 뜻이 분명치 않아서 한 가지 인을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인은 마땅히 밝혀 나가야 할 것이 된다.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성(聖)이 아닌 성과 인(仁)이 아닌 인을 말한다면 이는 처형받을 가르침을 펴는 것이니 크게 외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장주(莊周:장자)에 이르러 말하기를,56) “성인이 죽지 않는다면 대도(大盜)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상(田常)57)이 인의를 절취하여 제(齊)나라를 탈취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천지는 도주(陶鑄)되어 만들어졌고, 선악은 함께 키워졌으니, 각기 자연의 이치를 지니어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 올빼미ㆍ짐새의 해독은 난새[鸞]와 봉황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승냥이와 호랑이의 흉맹함은 기린에게서 그 기술을 빌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천질하연(天質自然)의 것이어서 다른 것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흉맹한 사람이 홀로 인의를 빌려 간사함을 평정하겠는가? 모돈(冒頓)58)이 부친을 죽이고, 정백(鄭伯)이 회(鄶)를 몰래 빼앗았는데 어찌 다시 효도를 빌려 그 종말의 비극을 자초하겠는가? 장자와 노자는 뿌리에 타격을 가하여 죽여 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비난하며 훼손하였으니, 도적이 밉다 하여 무기를 녹여 없애 버리고, 음식이 목에 걸리는 것을 보고 좋은 곡식을 없애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훗날 이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곡해된 뜻을 분별하여 설명해 준다 해도 이 일은 성인을 죽이는 것보다 더 곤란하고, 부모를 여의는 것보다 더 곤란한 일이다.
또 “나를 알아주는 자가 드물다면 나는 귀한 존재이다”59)라고 하였다. 또 윗장에서 말하길 “성인이 천하에 있으면 백성이 모두 그 이목을 집중한다”60)고 하였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귀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면 반드시 만물이 빛날 것이니, 이렇게 아는 이가 어찌 드물겠는가? 드물게 알려지는 것이 어찌 꼭 귀하다 할 것인가? 즉 자기 몸에 귀함을 본다면 어찌 구복(九服:관직)의 이익을 저버리겠는가?61) 대항하여 말하기를 귀한 것이 어찌 쉽게 알려지겠는가? 이것은 대체로 오래 지속되어 온 세속의 일을 억누르고자 하여 과언하게 된 것일 뿐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서 그 말씀은 중화(中和)하고, 이치로써 훈도(訓導)하므로 “집에서도 반드시 가르침을 들으며, 밖에서도 반드시 듣는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을 들으면 반드시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선을 보지 못하여도 번민하지 않는 것이 잠룡(潛龍)의 덕이고 사람이 몰라주더라도 화내지 않는 것이다. 군자의 도이므로 모든 좋은 것도 반드시 살피며, 모든 나쁜 것도 반드시 살핀다.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을 귀하게 되었다 여기지 않고, 또한 적게 알려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유롭게 가르치고 인도하여 이치에 자연스럽게 합치하도록 하니 어찌 하루 동안 노담의 말에 대하여 그 우열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예란 충신(忠信)의 표면적인 것[薄]이며, 혼란의 단서이다. 근거 없이 짐작으로 말하는 것은 도가 실없이 겉만 화려한 것과 같고,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그 후덕함에 처하고, 표면적인 것에 처하지 않으며, 내실에 처하고, 겉만 화려함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孫盛]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담은 성인의 예와 악은 충분히 알았으나, 현묘한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얻지 못하고 이를 지어냈으니 훼손한 것이 얼마인가? 따라서 예학을 가려 막아 버리고는 모두 자연에 맡긴다는 논리를 폈으니, 어찌 말세에는 자연의 도에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는가? 바로 펴고자 하고 좋아하여 마음에 품고 있더라도 즐거움의 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란 방자한 마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폐해를 장려하는 것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장자와 노자가 이렇게 주창을 한 것은 대체로 성인의 가르침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사물을 도야하고 밝게 훈도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에 이르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릇 성인의 도는 광대하여 모두 다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해와 달이 하늘에 걸쳐 있어 어디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공자의 말은 모두 육경(六經)에 집약되어 있는데, 어찌 다시 허물이 있어 노자와 장자의 도움을 기대하겠는가? 장주가 “해와 달이 떠올랐으나 맹렬히 타는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한 말은 지극히 허망하고 삿된 기만하는 말이며, 아직 한쪽에 걸리고 묶여 있어서 황당하고 근거 없는 괴이한 말들이다.
또 “왕후(王侯)가 하나를 얻음으로써 천하는 정(貞)하게 된다”62) 하였는데, 여기에서 ‘정(貞)’은 바름이다. 또 다음 장에 “누가 그 뜻(禍는 福에 기대어 있고, 복은 화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의 궁극을 알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어떤 일정한 원칙이 없어서 바름이 다시 그릇된 것이 되고, 선이 다시 요망한 것이 된다”63)고 하였다. 이 주 장을 살펴보건대 혹은 “천하는 바르다” 하고, 혹은 “바르지 않다”고 하며, 이미 “선인(善人)은 불선인(不善人)의 스승이다” 하고서는 다시 선을 “요망한 것이다” 하였다. “천하의 선은 하나이다”하고서는 혹은 “스승이다”, 혹은 “요망스런 것이다”라고 한다. “천하의 바른 도는 하나이다” 하고는, 다시 말하기를, “바름이 다시 그릇된 것이 된다”고 하니, 이것은 잘못되고 비천한 견해로 이치에 통할 수 없는 말이다.
집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성의 자(字)는 안국(安國)이고, 어떤 설에는 동진(東晋)의 명사 손작(孫綽)의 아들이라고 한다. 조부는 위(魏)의 명신 자형(子荊)이다. 손작은 논변에 뛰어나고 재학(才學)이 있어 관리에 추천되었으며, 전사(前史:「晋書」를 말함)에 보인다. 손성은 이름난 부친의 아들로서 관직에 올라64) 진(晋)에서 급사중(給事中)ㆍ비서감(祕書監)ㆍ산기상시(散騎常侍)ㆍ오창남(吳昌男)65)을 역임하였다. 어려서 고전[墳典] 읽기를 좋아하였고, 여러 사적(史籍)을 섭렵하였다. 항상 생각하기를, ‘비록 현성(賢聖)은 깊고 아득하지만 여러 말에 드러난 뜻을 얻어 인애(仁愛)를 실천하고 스스로 닦아 가면 점차 이루어지는 공이 경사(經史)를 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이로써 중니가 노나라 『사기(史記)』를 바탕으로 『춘추(春秋)』를 지어 백대 후에까지 고풍을 숭양하고 모범으로 따르도록 한 것이니, 맹가(孟軻:맹자)와 손경(孫卿:순자)도 함께 그 큰 교화를 찬양하였고, “사마천의 『사기』에 이르러서도 또한 일대의 성패를 기록하여 귀감과 훈계로 삼아야 할 것을 밝히고자 저작하여 전해지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루 널리 많은 저술들을 열람하고 여러 사소(事疏)를 궁구하여 『진양추(晋陽秋)』66)를 지었는데, 이전 현인들을 본떠서 아름다움을 훈도한 것으로 본서는 병음(幷音)을 합하여 32권으로 전한다. 또 국사편찬의 임명을 받아 정성을 다해 경론의 뜻을 따르니 한 시대의 명작을 이루어 양사(良史)라 칭송되었는데67) 황제에게 바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손잠(孫潛)이 진(晋) 태원(太元) 15년(390)에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가 조서[詔]를 내려 말하기를, “이전 비서감의 저서를 받아 살펴보니 아깝구나. 멀리 이전의 전장(典章)과 일대의 사건을 두루 다루었구나. 조칙을 내려 이를 비서각에 두고 후대에 전하라”고 하였다. 손잠은 부친의 관가인 참표기장군자의참군(參驃騎將軍諮議參軍)에 임명되었다. 『진서(晋書)』 본기(本紀)에 그 사실이 보인다. 손성은 대부분의 저술에서 별집(別集)을 마련하여 노씨를 중현(中賢)의 유로 품평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는 윤문자(尹文子)와 공손술의 책68)과 같은 계통[名家]으로 인식되었으니, 이에 따를만한 근거가 있다. 혜강(嵇康, 223~262)이 말하기를, “노자는 연자(涓子)에 나아가 구선지술(九仙之術)을 배우고 식어법(食餌法) 등의 수련을 추구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혹 지극한 성인의 면모가 있다 할 수 있지만 학문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상(上)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다”70) 하였다. 왕필과 하안의 전장이 성인의 원대한 뜻[鴻猷]에 이르겠는가? 그러므로 반고(班固)71)는 사람을 9등급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공구(孔丘:공자) 등은 상상(上上)의 실례로 하였으니 모두 성인이며, 이이(李珥:노자) 등은 중상(中上)의 실례로 하였으니 모두 현인이다. 성인에는 극성(極聖)과 아성(亞聖)이 있고, 현인에는 대현(大賢)과 중현(中賢)이 있으니 모두 정신의 기틀[神機]에 날카로움과 둔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혜를 활용함에도 점(漸)과 돈(頓)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손성(孫盛)은 기술하기를 노자는 대현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유유자적하며 저재하였으나 만물을 아울러 다스리지 못하였고, 주나라의 쇠망을 앉아서 바라만 보았고, 서예(西裔)로 은둔하였고, 부풍(扶風)에서 죽었으며, 괴리(槐里)에 묻었으니, 이러한 예들은 그가 하늘에 따르는 선인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 원위(元魏:北魏)의 태평진군(태무제)이 불교와 도교 양쪽을 신앙하다 폐불과 흥불하기에 이른 사적의 내막

북위(北魏)의 태조 도무황제(道武皇帝, 386~409) 탁발규(託跋珪)는 천흥(天興) 원년(398)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무릇 불법이 흥성한 지 오래되었다. 중생을 제도하고 이롭게 하는 공이 은연중에 펼쳐지고 신에 감응하는 종적이 뚜렷하여 가히 의지하고 믿을 만하니, 경(京)ㆍ읍(邑)에 전범(典範)에 맞추어 장식한 궁사(宮舍)를 지어 믿고 따르는 신도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오급불도(五級佛圖:탑)ㆍ기사굴산 및 수미전(須彌殿)과 여기서 식당 및 따로 강당ㆍ선실(禪室)ㆍ사문의 거처 등이 더하여져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북위의 세조 태무제(太武帝, 424~452) 탁발도(託跋燾)는 즉위하자 역사 태조와 태종의 유업을 이었다. 비록 황제와 노자의 술에 따른 면은 있었으나, 자주 고덕(高德)의 사문을 초청하여 함께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였다. 4월 8일에는 여러 불상을 들고 넓은 사거리 광장에 나아가 황제가 친히 문루에서 꽃을 뿌리며 공경하고 예배하였다. 그런데 만년에는 평성(平城)에 머물러 도교의 술을 공경하여 도단(道壇)을 설치하였다. 사도(司徒) 최호(崔皓)는 젊어서부터 좌도(左道)를 익혔는데, 석문(釋門:佛門)을 시기하였다. 부정하게 보정(輔政)하는 자리에 있게 되자 더욱 부처님께서 계신 것을 불신하여 허탄(虛誕)한 것이라 하고, 불경을 읽는 것을 보면 뺏어서 우물에 던져 버렸다. 더 나아가 몰래 불교를 훼멸하려고 하였다. 최호는 재략이 있어 태무제가 신용하였고, 나라 사람들이 그를 모범으로 여기고 있었다. 태무제가 신임하고 있던 도사 구겸지(寇謙之)와 최호는 못대로 굴었다. 마침내 최호가 상주하여 구겸지를 천사(天師)라 칭하게 하였다. 이 때 현고(玄高)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도가 하서(河西)에 이르렀고 이름을 해우(海右)에서 높았는데, 그 신통함이 측량하기 어려웠고, 귀인이나 천민이나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태무제는 이에 군대를 양주(凉州) 지역으로 몰고 가 현고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미 평성(平城)에 이르러 크게 선화(蟬化)가 이루어지고, 태자 황(晃)이 현고를 받들어 스승으로 모시고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경하였다. 태자 황은 그 때 모함을 받아 부친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태자가 현고에게 고하기를, “누명을 받아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하니, 현고가 금광명재참(金光明齎懺)을 7일간 하며 간절히 정성을 다해 기도하라고 하였다. 이에 태무제가 꿈에 그 조부와 아버지를 보았는데 모두 검을 잡고 늘어서서 위협하여 말하기를, “무슨 까닭에 잘못된 참언을 믿어 태자를 의심하느냐?”하였다. 태무제가 놀라 깨어서 크게 군신들을 모아 놓고 신기한 꿈 이야기를 하니, 여러 신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태자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황제의 영령께서 내려오시어 폐하께 일러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다시는 태자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무릇 이는 현고의 진실한 감화력에 위한 것이라 하겠다.
“짐이 조종(祖宗)의 중흥의 단서를 이어서 깊이 생각하여 기초를 드넓히며 만대에 융성을 이루고자 한 이래 무공은 그런대로 성과가 있었느나, 문교(文敎)는 아직 피어나지 못하였으니, 태평지치(太平之治)를 존숭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만약 성내(城內)가 평안하고 백성이 부유(富裕)하여 번창하게 된다면, 마땅히 제도를 정하여 만세의 법도로 삼을 때이다. 무릇 음양에는 순환이 있고 사시(四時)에도 바뀌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과 현인에게 관직을 주어 서로 안전하게 지혜와 힘을 합하게 하는 것은 백성의 피로를 풀어 주어 굳건히 오래도록 이어지도록 함이니, 이것은 고금에 바뀌지 않는 헌장(憲章)이다.
황태자로 하여금 정사를 돕게 하고 백관[百揆]의 모든 사무를 총괄ㆍ지휘하도록 하며, 다시 현량(賢良)을 천거하도록 하여 여러 직책의 임명에 대비하도록 하고, 사람을 선발하여 관직에 임명토록 하고, 쫓겨난 조정의 서민도 모두 태자에게 칭신(稱臣)하라.”
이 때 최호와 구겸지는 이전부터 태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태자 황이 정권을 잡으면 권세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또 거짓으로 황제에게 말하였다.
“앞서 일어난 태자의 일은 실은 모략에 의한 것입니다. 단지 고공(高公:현고)의 도술에 결탁하여 선제(先帝)가 꿈에 나타나도록 한 것이오니, 이러한 사실을 구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이를 일찍 제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태무제가 이를 받아들여 곧바로 명을 내려 현고를 붙잡아 태평(太平) 5년(444) 9월 15일 평성(平城)의 한 귀퉁이에서 목을 베어 죽이고, 태자 또한 유폐시켰다가 죽었다. 남송 원가(元嘉) 22년(445)의 일이다. 이 날 밤 현고의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는데 홀연히 광명이 탑 주위를 돌다가 방에 들어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서거하였노라”하였다. 제자들이 스승이 입적한 곳에 가서 시신 앞에 나가가 유촉을 청하니, 곧바로 현고의 눈이 조금 열리면서 땀과 향기가 나고 곧 일어나 앉아 말하였다.
“대법(大法)의 응화(應化)는 연에 따라 성쇠(盛衰)하는 것이니, 성쇠에는 자취가 있으나 이치는 항상 담연(湛然)할 뿐이다. 단지 너희들은 멀지 않아 다시 내 말대로 될 것임을 명심하라. 사후에 법이 다시 흥성할 것이니 너희들은 스스로 마음 닦는 데 힘써서 후회됨이 없도록 하라.”
말을 마친 후 곧 누워 입적하였다.
최호는 이에 제멋대로 간사한 마음을 부려 자주 황제에게 이르기를 항구적으로 불법을 폐하지 않으면 정치에 이롭지 않을 것이고 백성의 이익을 해칠 것이라고 하여 폐할 것을 권하였다. 얼마 후 태무제가 장안의 어느 사찰에서 활과 방패가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그 절의 승려들을 죽였다. 최호가 이를 기화로 하여 진언하매 태무제는 장안의 사문을 모두 죽이고 경전을 불태우고 불상을 부수어 버리도록 하고, 이어 사방에 칙령을 내려 장안의 사례대로 사찰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도사 구겸지는 사찰의 파괴에 반대하여 최호와 말다툼을 하였으나, 최호는 이를 거부하였다. 구겸지가 최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금년부터 죽임을 당하고 멸문하게 될 것이다.”
태무제는 최호의 말에 혹하여 태평 7년(446)에 마침내 전국에 걸쳐 불법을 훼멸하고자 하여 군대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사찰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소속의 승니(僧尼)를 노소 불문하고 모두 땅에 묻어 죽이도록 하였다. 도망가서 숨는 자를 체포하면 참형에 처하여 효수하게 하였다.
이 때 사문 혜시(慧始)가 있었는데 매우 신이(神異)함이 있었다. 이전에 혁련창(赫連昌)이 장안을 파괴할 때 혜시는 칼로 베였으나 몸에 상처를 입지 않았었다. 50여 년 동안 눕지 않았으며, 맨발로 걸어다녔으나 흙이 묻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발이 하얗게 선명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백족화상(白足和上)이라 불렀다. 입적한 지 10여 년이 되었으나 몸의 모습이 처음 그대로였다. 일찍이 깊은 심산의 난야(蘭若:精舍)에 들어가 수행하고 있었는데, 태평(太平) 연간의 말에 비로소 멸법(滅法)을 알게 되었다. 혜시는 이 소식을 듣고는 문무백관이 황제에게 신년하례하는 원단일(元旦日)에 주장자를 짚고 궁성에 나아가니, 궁문의 관리가 황제에게 “어느 한 도인이 왔는데 발이 얼굴보다 하얗습니다. 황제를 뵙고자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였으나, 상처를 입히지 못하였다. 마침내 혜시가 궁전의 뜰에 이르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으로 혜시를 찼으나 몸에는 조금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이 때 북원(北園)에 호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명을 내려 혜시를 호랑이에게 먹이도록 하였다. 호랑이들은 모두 숨어 엎드리기만 할 뿐 끝내 혜시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천사(天師:도사 구겸지)를 호랑이 근처에 가두도록 하니 호랑이가 포효하며 으르렁대었다. 태무제는 그제야 불화(佛化)의 힘이 높아 황로(黃老)가 미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즉시 혜시를 궁전에 모시고 들어와 혜시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그 잘못을 뉘우쳤다. 혜시가 인과법에 대해 밝게 설명해 주니 태무제는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창질이 일어나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어 그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여러 신하들이 의론하여 말하였다.
“최호가 그릇되게 아첨하여 불법(佛法)과 승려들을 훼손하였으니, 폐하의 질환은 분명히 이 때문입니다.”
이 때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악질이 생겼다. 태무제는 이로 인해 잘못을 더 뉘우치고 태평 11년(450)에 최호를 지붕 없는 수레에 태워 관리 10인으로 하여금 수레에 올라 교대로 최호의 입에 방뇨(放尿)하게 하였다. 몇 리를 가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매 다시 산 채로 매장하고 출구에 또 방뇨하였다. 자고로 삼공(三公)으로서 욕되게 죽임을 당함이 이보다 더 심한 예가 없었다. 마침내 최호의 모든 인척과 문족(門族)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전국에 영을 반포하여 다시 정법을 번성하게 하였다. 얼마 후 태무제가 서거하고, 그의 손자 준(濬)이 황제를 이어 크게 불사를 진흥시켰으니, 곧 고종(高宗) 문성황제(文成皇帝)가 그 분이다.
이 일은 『후위서(後魏書)』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및 『고승전(高僧傳)』 등에 보인다.

4. 송(宋)72) 태종 문황제(文皇帝)가 군신과 함께 불법의 이치를 논하며 다스려 태평시대를 이룬 일

문제(文帝, 424~453)는 송무제(宋武帝:劉裕)의 셋째 아들이다. 총명하고 영특하고 학식이 넓으며 성품이 아담해서 영달(令達)이라고 칭하였다. 30년간 재위하였다. 일찍이 한가한 날 부드러운 얼굴로 시중(侍中) 하상지(何尙之)와 이부상서(吏部尙書) 양현보(羊玄保)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짐이 어려서부터 경전을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요즈음에는 더욱 여가가 없어 삼세인과(三世因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감히 다른 설을 다시 세우지 못하고 있다. 바로 경들이 항상 앞서 이끌어 경신(敬信)하도록 해야 한다. 범태(范泰)와 사령운(謝靈運)이 항상 말하기를, ‘육경(六經)의 글은 풍속을 다스리고 반드시 성경(性靈)의 진오(眞奧)를 구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불교의 이치로써 지남(指南)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안연지(顔延之)의 「석달성론(析達性論)」, 종병(宗炳)의 「난백흑론(難白黑論)」을 읽었는데, 불법을 밝힘이 넘쳐나고 더욱이 뛰어난 논리여서 모두 사람의 마음을 환히 열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만약 모든 신민으로 하여금 이 가르침에 순화되게 할 수 있다면 짐은 앉아서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무릇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상지(何尙之)가 대답하였다.
“유유지도(悠悠之徒:道敎ㆍ老莊ㆍ黃老의 무리)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고 신민으로서 쓸데없는 폐만 끼치며, 더욱이 칭찬하고 거역함이 무상하여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여러 훌륭한 인사들도 황제의 밝은 조칙을 맡지 못하였습니다. 현 조정에 이르러 이미 난을 멀리 여의였고 다시 법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도상(渡江)한 이래74) 왕도(王導)75)ㆍ주의(周顗)ㆍ유량(庾亮)ㆍ왕몽(王濛)ㆍ사상(謝尙)ㆍ치초(郗超)ㆍ왕탄(王坦)ㆍ왕공(王恭)ㆍ왕밀(王謐)ㆍ곽문(郭文)ㆍ사부(謝敷)ㆍ대규(戴逵)ㆍ허순(許詢) 및 망고조(亡高祖) 형제와 왕원림(王元琳) 형제ㆍ범왕(范汪)ㆍ손작(孫綽)ㆍ장현(張玄)ㆍ은의(殷顗) 등이 혹은 중앙의 고관이 되고, 혹은 인륜의 사표[習儀]가 되고, 혹은 천(天)과 인사(人事)의 관계를 밝히는 데 뜻을 두고, 혹은 홀로 유유히 뛰어난 산천 경계를 유람하기도 하고, 아울러 뜻을 풀어 귀의하고, 마음을 항상 믿음에 두며, 그 사이를 비교한다면, 즉 우법란(于法蘭)ㆍ축법호(竺法護)ㆍ우법개(于法開)ㆍ축법잠(竺法潛)ㆍ축법심(竺法深)ㆍ지둔(支遁)ㆍ축법숭(竺法嵩)ㆍ우도수(于道邃) 모두의 자취는 황중(黃中:도사)에 버금가고 혹은 어림하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혜원(慧遠)법사는 일찍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교화는 미치지 않음이 없다. 도가 확고해지면 스스로 근본이 가르쳐진다. 세속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잠깐 살펴보건대 깊은 이치에 합당합니다. 만약 집집마다 모두 계를 잘 받들게 되면 죄짓는 것이 멈추어지고, 형벌도 없어질 것이니, 폐하께서 말하시는 ‘앉아서 태평시대를 이룬다’하신 성지(聖旨)와 진실로 일치하옵니다.”
양현보(羊玄保)가 나가서 말하였다.
“여기에서 천과 인(人)의 관계를 약간 말하였습니다만 저희들이 어찌 그러한 과업(교화에 의한 통치)을 이룰 만한 자질이 있겠습니까? 아마 진(秦)ㆍ초(楚)의 강병론(强兵論)에서 손자(孫子)와 오기(吳起)가 적국을 점령하는 술을 완벽히 수행한 것으로도 그 과업은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지금 전국시대의 상황이 아니니, 경의 말이 그러하리라.”
하상지가 말하였다.
“무릇 은일(隱逸)함을 예(禮)라 하면 병사들이 게으르게 되고 인덕(仁德)을 귀하게 여기면 병사들의 기세가 쇠약해집니다. 만약 손자와 오기가 구차하게 뜻을 오직 적국을 점령하는 데만 두었다면 역시 요순의 도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 온데, 어찌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 얻지 못하였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불문[釋文]에 경들이 있음은 또한 공문(孔文)에 계로(季路:子路)가 있음이로다. 그래서 악언(惡言)을 듣지 않게 된다는 것이로다.”
이로부터 문제는 불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엄(嚴)ㆍ관(觀)의 여러 승려들을 친견하고, 자주 불도의 뜻을 논의하였다. 자주 승려들을 궁전에 모시어 모임을 갖을 때마다 황제는 몸소 바닥에 앉아 공부하였으며, 승려들과 나란히 식사를 하였다. 이 때 축도생(竺道生)법사가 있었는데, 그 영명함이 크게 뛰어나 으뜸이어서 황제가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도생법사가 주장한 돈오(頓悟)의 뜻을 말하였는데,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였다. 이에 황제가 말하되, “성취한 분이라면 떳떳할 테인데 어찌 그대들한테 굴복하겠는가?”라 하였다. 이 때 안연지(顔延之)가 「이식론(離識論)」을 지어올리자 황제가 엄(嚴)법사에게 그 동이(同異)를 논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왔다갔다하며 허둥대었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오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것은 하찮은 지말(支末)의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승사전(僧史傳)」에 보인다.

5. 위나라 명제(明帝)가 등극하여 사문과 도사를 불러 모아 불(佛)과 도(道)의 선후에 대해 대론(對論)하게 한 일

원위(元魏:북위)의 군주들이 역임한 지 17제(帝) 179년 동안 불교가 현창되고 흥성한 것에 대해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단지 태무제가 재위한 5ㆍ6년 사이에 불법을 탄압한 일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기간에는 찬연히 빛나고 융성하였으니, 위(魏)의 사적(史籍)에 그 모습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어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해주고 있다.
헌문제(獻文帝, 466~471)가 즉위하고 황흥(皇興) 원년(467)에 오급(五級)의 대사(大寺)에 태조 이하 다섯 황제의 상 다섯 구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각기 길이가 한 길 여섯 자이어서 금 25만 근을 사용하였다. 정광(正光) 원년(520)에 명제(明帝)는 조복(朝服)을 내리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으며, 승니(僧尼)와 도사ㆍ여관(女官) 등을 궁전에 초빙하여 재를 올렸다. 시중(侍中)인 유등(劉滕)이 황제의 칙령을 발표하여 법사들을 청하고 도사와 함께 의론하게 하여 제자들의 의문을 풀게 하였다. 이 때 청도관(淸道觀)의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의 법사 담모최(曇謨最)가 대론(對論)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부처님과 노자는 같은 시기에 계셨다는데 어떠한가?”
강빈이 말하였다.
“노자가 서쪽으로 들어가 호인(胡人:여기서는 인도인)을 교화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때 그 시자로 계셨으니, 이것이 같은 시기임을 밝혀 줍니다.”
법사(담모최)가 말하였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노자개천경(老子開天經)』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노자는 주나라 어느 왕 몇 년에 태어났으며, 주나라 언 왕 몇 년에 서쪽으로 들어갔습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주나라 정왕(定王) 즉위 3년(B.C.604) 을묘년에 초나라 진군(陳郡)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에서 9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태어났습니다. 주나라 간왕(簡王) 4년(B.C.583) 정축년에 이르러 주나라에서 수장리(守藏吏)로 봉직하였고, 간왕 13년(B.C.574)에 태사(太史)로 전임하였으며, 경왕(敬王) 원년(B.C.519) 경진년[庚辰]에 연세 85세가 되어 주나라의 덕이 쇠해짐을 보고 마침내 함관령(函關令) 윤희(尹喜)와 더불어 서쪽으로 들어가 호인(胡人)울 교화하였다 하였으니, 이로 보아 분명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B.C.1029) 4월 8일 탄생하시어 목왕(穆王) 53년(B.C.949) 2월 15일 열반하였으니, 계산해 보면 부처님 열반하신 지 345년 지나서 비로소 정왕 3년이 되어 노자가 태어나고, 태어나서 85세인 경왕 원년에 이르러 무릇 부처님 열반 후 425년이 지나 비로소 윤희와 더불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이 됩니다. 이에 의거하여 보건대 햇수가 크게 차이나거늘 두 분이 같은 시기라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강빈이 말하였다.
“공자가 이미 예법을 제정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기술하였는데 당시에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어진 이가 아는 것은 대롱으로 보면 두루 넓게 보지 못함과 같습니다. 공자가 세 가지를 갖추어 점복(占卜)해야 한다 하였으니, 천(天)ㆍ지(地)ㆍ인(人)입니다.77)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진 이가 요행히 스스로 잘 파헤쳐 보면 이러한 미혹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강빈이 말하였다.
“공자는 성인이라 말이 없어도 아는데 왜 점복에 의지합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오직 부처님만이 모든 성인의 왕이고, 사생(四生:胎ㆍ卵ㆍ濕ㆍ化)의 으뜸이시며, 일체 중생의 전후 이제(二際:과거와 미래)ㆍ길흉의 시종(始終)에 통달하여 점복에 의지하지 않고 모두 꿰뚫어 보십니다. 소성(小聖)은 비록 자연의 이치가 아닌 것에는 통달해 있으나, 반드시 구복에 의지하여야 영괘(靈卦)에 통합니다.”
이 때 시중 상서령(尙書令) 원우선(元又宣)이 칙어(勅語)로 “도사 강빈은 논하는 데 종지(宗旨)가 없으니 마땅히 하석(下席)에 앉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물었다.
“『개천경(開天經)』78)은 어느 곳에서 전래된 것이며 누가 설한 것인가?”
이에 황제가 중서시랑(中書侍郞) 위수(魏收), 상서랑 조형(祖瑩) 등을 보내 도관에 가서 그 경을 가져 오도록 하였다.
황제가 이에 대해 토론하게 하니, 태위(太尉) 단양(丹陽)의 왕소종(王蕭綜)ㆍ태부(太傅) 이식(李寔)ㆍ위위(䘙尉) 허백도(許伯桃)ㆍ이부상서(吏部尙書) 형란(邢欒)ㆍ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등 170인이 읽은 후에 황지에게 아뢰었다.
“노자는 오천문(五千文:『도덕경』)을 지은 데 머무르고 더 이상의 언설은 없습니다. 신들이 논의한 바 강빈의 죄는 대중을 미혹하게 한 것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강빈을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삼장법사 보리류지(菩提流支)가 간하여 마읍(馬邑)에 유배하는 것에 머물렀다.

6. 양고조(梁高祖)가 전에 황로(黃老)를 숭배하다가 나중에 불교를 믿게 되어 칙령으로 노자 숭배하는 것을 버리게 한 일

양고조(梁高祖) 무황제(武皇帝:梁武帝, 502~549)는 나이 34세에 즉위하여 49년간 정치에 임하면서 만백성을 다스리는 업무가 가득한 가운데서도 항상 내경(內徑:佛典)과 외전(外典)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수천여 권의 모든 경전을 쉽게 풀고자 하였다. 또한 스스로 절제하며 검약을 실천하여 비단옷은 입지 않았으며, 자는 곳도 텅 비어 호화롭게 장식함이 없었다. 밤낮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노력하였으며, 마포로 된 옷과 왕골방석ㆍ짚신ㆍ갈건으로 생활하였다. 처음 큰 보배[大寶:佛法]를 만나서 곧바로 이러한 일들을 갖추었으니, 매일 한 끼만 식사하였고, 영원히 오신채[辛羶]를 끊었으니, 제왕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예는 실로 드물다.
예전부터 노자를 받들고 부도(符圖:도교 수련의 儀規法式)를 근본으로 숭상하여 왔는데 그 원인을 궁구해 보니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한 황제는 친히 신필(神筆)로 도교를 버리라는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천감(天監) 3년(504) 4월 8일 양나라 황제 난릉(蘭陵)의 소연(蕭衍)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ㆍ시방의 존귀한 법ㆍ시방의 성스러운 스님께 머리 숙여 합장예배 하옵니다. 엎드려 경을 보면서 이르기를,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불심(佛心)이니라’하였으며, 그 밖의 모든 선한 법도 이루 다 비유할 수 없이 능히 중생을 삼계(三界)의 고해[苦門]에서 벗어나 무위(無爲)의 뛰어난 길에 들게 하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번뇌[漏] 다한 지혜로 깨달음을 이루어 지극한 도에 통기(通機)하옵고, 덕은 원만하여 최상의 성인이옵나니, 지혜의 큰 광명으로 미혹을 밝게 비추며, 법류(法流)를 거울로 삼아 번뇌를 맑게 하시고, 하늘에 상서로운 자취 보이시며, 영예로운 위의(威儀) 상외(像外:形而上의 뜻)에 빛내시고, 욕심의 바다에서 헤매는 미혹한 무리들 제도하시고, 모든 중생[含識] 열반에 들게 이끄시고, 상락(常樂)의 높은 산에 오르게 하시며, 애욕의 깊은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옵니다. 네 구(句)의 잘못됨79)을 밝혀 수많은 잘못[百非]을 끊게 하시며, 사바세계에 몸을 나투시어 왕궁에서 탄생하는 모습 보이시고, 걸으시며 삼계에 독존(獨尊)하심을 외치시어 대천세계에 두루 진리의 빛 비추셨습니다. 단지 중생의 근기[機心]가 낮고 천박하며 곧잘 염증을 내고 게으름을 피우므로 마침내 원상(圓常)의 법80)을 설하시고 또한 다시 빛을 학수(鶴壽:사리쌍수)에 숨기시고, 아사세왕[闍王]이 죄업을 참히ㅚ학 하시고, 비수(婆藪:바수반두)를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였사오니, 만약 대성(大聖)ㆍ법왕(法王)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누가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세존의 자취는 보이지 않게 되었사오나 그 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제자가 이제까지 미혹하여 노자를 받들어 오며 몇 대에 걸쳐 이 삿된 법에 물들어 왔습니다만, 선업을 쌓은 인연으로 미혹을 버리게 되었으며, 또한 이제 이전의 어둠을 버리고 바른 깨달음에 돌아와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미래세에 동남(童男)으로 출가하여 널리 경전을 펴고, 중생을 교화ㆍ중화ㆍ제도하며 함께 성불하길 기원합니다. 어찌 정법(正法) 가운데 있으면서 오랫동안 악도(惡道)에 빠져 있겠으며 노자의 가르침에 기대어 잠시라도 천상에 태어남을 기뻐하겠습니까? 대승의 마음[大乘心]을 지니고 이승에 대한 생각[二乘念]을 여의니, 원컨대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시고 보살님께서 보살펴 주시옵길 제자 소연(蕭衍) 합장예배하옵니다.”
이 때 황제는 도속 2만 명과 함께 중운전(重雲殿)의 중각(重閣)에서 손으로 이 글을 쓰고 보리심을 발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또 문하(門下)에서 칙령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대경(大經) 가운데서 설한 도에는 그릇된 96종이 있으나 오직 불교 하나의 도만이 바른 도이고 그 나머지 95종은 그릇된 도[邪道]라 하는 것이니, 짐이 그릇된 도를 버리고 모든 불ㆍ여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받들고자 하니, 만약 공경(公卿) 가운데 이 서원을 함께 세우려고 한다면 각기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라. 노자ㆍ주공(周公)ㆍ공자 등이 비록 여래의 제자이나 그 교화의 행적이 이미 삿되고 세간의 선에 머무른지라 범부의 차원을 벗어나 성인의 차원에 이를 수 없는 것나니, 공경ㆍ백관ㆍ제후왕[侯王] 종족은 마땅히 거짓됨에서 물러나 참다움에 나아가고, 그릇됨을 버리고 바름에 들어가라. 따라서 경전의 가르침과 『성실론(成實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외도를 믿는 마음이 깊어지면 불법을 믿는 마음이 가벼워지나니, 이것이 곧 그릇된 견해이다. 만약 마음이 하나라면 무기성(無記性)이 되어 선악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부처님 믿는 마음이 강하고 노자를 믿는 마음이 약하게 되면, 이것이 청정한 믿음[淸信]이다. 청정한 믿음에서 청정함이란 안팎이 모두 청정하여 번뇌[垢ㆍ穢ㆍ惑ㆍ累]가 모두 다 멸할 것이요, 믿음이란 정도(正道)를 믿고 그릇됨을 믿지 않는 까닭에 청정한 믿음이라 하는 것이다. 불제자81)와 그 나머지의 여러 신도들은 모두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어 청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문하(門下:官과 臣民)는 속히 시행토록 하라.”
4월 17일에 이르러 시중(侍中 안전장군(安前將軍)ㆍ단양윤(丹陽尹)ㆍ소릉왕(邵陵王)이 글을 올려 아뢰었다.
“신 윤(綸)이 듣기를 여래의 장엄한 상(相)은 우뚝 솟아 유정천[有頂]을 능가하고, 미묘한 몸은 탕탕(蕩蕩)하여 가없이 나투며, 금륜(金輪)82)을 들어 사물의 원리를 밝히고, 소중한 것[銀栗]으로써 하찮은 것에 응하며, 지혜[波若:般若]의 날카로운 칼로 열반의 묘과(妙果)를 거두고, 생사의 고해를 건너 피안(彼岸)의 상락(常樂)을 얻게 하옵니다. 그러므로 능히 자비의 구름을 내리고, 감로의 비를 내릴 수 있었사오며, 칠처팔회(七處八會:『60화엄경』)의 교화의 뜻이 다함이 없었고, 사제(四諦)ㆍ오시(五時)83)의 이익의 방편이 다함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얼음이 녹으면서 맑아지고, 해가 치솟아 훤히 비치면 안개와 구름이 훤히 개이며, 횃불이 빛을 가리다가 타들어 가면서 고요해지듯이 세속에 들어가 중생[蒙底]을 교화하고, 세속을 넘어 진여에 은연히 계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밀림에서 삿된 길 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문을 우러러보게 하기를 쉼 없이 하고, 갈애(渴愛)에 빠진 귀머거리ㆍ맹인과 같은 사람들이 심오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고 깨달음의 길로 돌아서게 해야 비로소 가유(迦維:석가모니불의 고국, 여기서는 부처님을 비유함)의 덕음(德音)이 흥성할 것입니다. 경성 낙양에 항성(恒星)이 보이지 않으면 주나라에서는 임신의 징소를 살펴보았고, 만월(滿月)이 둥그런 자태를 보이면 한나라에서는 저녁의 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법(五法)84)으로 전하니 만덕(萬德)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중국의 풍속이 점차 은밀하게 바뀌니 다투어 고아(古雅)한 기풍을 불러 일으켜 이로써 삼명(三明)이 미혹된 길의 잘못을 밝게 비추어 줍니다. 저 칠각지(七覺支)85)에 의거하여 긴 밤의 고통을 제거해 주며, 황제보살의 등극에 따라 하늘이 응하여 인사를 제어하며, 황제가 남면(南面)하여 백성의 통치에 임하니 우주에 빛이 가득하고 맑은 비다 표면을 비추며, 걸림 없는 변재(辯才)로 백성[黎庶]을 이끄십니다. 본원력으로 중생을 보살피시는 까닭에 능히 증상따라 약을 주옵고, 방편[權]을 보이고 나서 근본을 드러내니 일승(一乘)의 뜻을 숭앙하고 십지(十地)의 토대 넓히옵니다. 이로써 만방에 회향하니 모두 정식(正識)을 지니며, 유현(幽顯)의 신들도 모두 가르침을 받아 중생을 제도하고 사람들은 등각(等覺)의 서원을 일으키고 중생은 보리심을 일으켜 근본에 돌아가는 자리를 희망하고 본원에 돌아가는 길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자비를 함께 보전하여 인욕을 함께 닦습니다. 이른바 중생을 보살피고 요익되게 하고 나루가 되고 교량이 되어 도가 이미 빛나게 되면 백성도 그 교화를 입게 되옵니다. 이에 아라한[應眞]이 지팡이를 날리고 허공에 날고 그림자와 접신하여 외도의 삿됨을 부수고 정법을 굳게 지키옵니다.
가람ㆍ정사(精舍)ㆍ보찰(寶刹)이 연이어 자리하고 경을 설하는 모임에서의 덕음(德音)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사옵니다. 신이 이전에 진리의 근원에 통달하지 못하여 외도의 가르침을 지니고 따랐던 것은 단 과실을 얻고자 종자를 바꾸어 고통의 나무를 다시 심는 것과 같았으며, 갈증을 풀고자 오히려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았사옵니다. 이제 미혹된 방향임을 알게 되고, 귀의해야 할 곳을 찾았기에 보살대계(菩薩)를 받고, 몸과 마음을 계에 따라 잘 다스려 노자의 그릇된 기풍을 버리고 법류(法流)의 참다운 가르침에 들고자 하옵나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자비[天慈]를 베푸시어 허락하여 주옵소서. 삼가 올립니다.”
4월 18일에 이르러서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신 임효공(任孝恭)이 황제의 조칙을 펴서 발표하였으니, 그 조칙에 이르기를, “능히 미혹함을 고쳐서 올바른 가르침에 들어온 것은 숙세에 심은 뛰어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니 마땅히 더욱 용맹정진할지니라” 하였다.

7. 북제(北齊) 고조(高祖) 문선(文宣)황제가 칙령을 내려 도교를 폐지한 일

이전에 금릉(金陵)의 도사 육수정(陸修靜, 406~477)이 도문(道門)의 주요 인물이었는데 송(宋)ㆍ제(齊) 양대에 걸쳐 삼장(三張)86)의 가르침을 조술(祖述)하고, 이갈(二葛)87)을 홍연(弘衍)하고 치장(郗張)88)의 무리를 폐문하고 부록(符籙)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며 요망하게 파고들며 해설하고는 재(齋)의 의식을 복잡하게 제정하니 그 사치스러움으로 인해 비용이 극심하였다. 그의 뜻은 왕이 도교를 받들어 믿도록 하는 것이었으나 마침 양무제가 새로운 기풍을 열고자 조칙을 내려 도교를 버리도록 명하니, 육수정은 그 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문인들과 함께 변경으로 망명하고 모반하여 북제(北齊)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북제에서 금옥(金玉)을 크게 뿌려 여러 귀족들에게 주면서 청탁하여 도법(道法)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황제가 이에 혹하여 천보(天保) 6년(555) 9월 조칙을 내려 여러 사문들과 도사를 불러온 후 학문에 통달한 열 명을 친히 비교해 보았다. 이 때 도사들은 주술로 여러 사문들의 의발을 날리게 하거나 혹은 돌게 하고, 여러 서까래 기둥들을 눕혔다가 세웠다 하였다. 사문들은 일찍이 방술(方術)을 배우지 못하였기에 묵묵히 한 가지에도 상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사녀(士女)들은 웅성거리고 귀천(貴賤)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도사들 쪽으로 옮겨졌으며, 아울러 육수정의 무리가 승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여러 도사들은 기뻐 날뛰면서 물고기에 기대어 하늘의 은하수를 쳐다보는 자세로 으스대며 스스로를 뽐내고 도술을 자랑하였다. 이어 또 제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통으로 억지로 제어하여 사문이 하나가 되게 하고 우리는 둘이 되게 하겠습니다. 방금 간단히 조그만 술법을 보였는데도 사퇴하여 굴복하였으니, 이 일도 뻔합니다.”
황제가 상통(上統)법사에게 명하여 육수정과 시합해 보도록 하면서 말하였다.
“방술은 하찮은 기술이어서 속된 유가(儒家)들조차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출가인이랴. 비록 천명(天命)이 거부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아무 말도 못할 것인가? 우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승려에게 상대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은 승려를 찾으러 갔는데 불전(佛鐫)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일명 담현(曇顯)이라고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인지 다들 몰랐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녀 일정한 거처가 없었고, 속인들과 어울려 마시고 먹었다. 때로는 깨달음을 드러내는 말을 하기도 하였는데 웅대하고 심원하였다. 상통법사는 그의 깊은 경지를 알고 서로 교유하였다. 이 때 그 자리에는 명승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담현은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술에 크게 취하여 얼굴이 하늘을 향한 채로 앉아 있었다. 관리가 감히 그를 부르지 못하고 그 사정을 상통법사에게 말하였다. 이어 황제가 말하였다.
“도사도 술로 제사지내는 것이 항상 도를 행하는 것이니, 술 마시는 도인도 함께 어울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축하여 데리고 나오라.”
이에 여러 대중들이 모두 꺼려하였으나 상통법사의 권위가 두려워 감히 간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담현을 부축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니, 곧 서서 미소를 머금고 말하였다.
“내가 술 먹고 크게 취해 있는데, 어떤 말이 귀에 들리길 ‘사문을 하나로 되게 하고 우리는 둘이 되게 한다’하였는데, 이 말은 거짓인가, 사실인가?”
도사가 말하였다.
“사실이오.”
담현이 즉시 다리를 들고 서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가 되었음을 보였고, 그대들은 둘임을 보였다.”
모두 대답을 못하였다. 담현이 말하였다.
“여러 옷가지를 주문으로 날아다니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이전과 같이 문을 열어 그대들의 술법을 시혐해 보겠소.”
그리고는 조선사(稠禪師)의 의발을 취하여 주술을 부려 보도록 하였다. 여러 도사들이 일시에 분발하여 함께 주술을 부렸으나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가 명령하여 옷을 집어서 열 사람이 잡아당기게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담현이 이에 옷가지를 여러 서까래에 놓아두고 또 주문으로 움직여 보도록 하였으나, 주술의 효험이 하나도 없었다. 도사들이 서로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히려 언변으로 스스로 뽐내며 말하였다.
“불가(佛家)는 자신들을 내(內)라 하는데 내란 곧 소(小)이다, 우리 도가를 외(外)라고 하는데 외란 대(大)이다.”
담현이 이에 대응하여 말하였다.
“그렇다면 천자는 내(內)에 거처하니 분명히 백관들보다 소(小)이겠군.”
육수정과 그 문속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황제는 눈으로 옳고 그름이 확인되자 조칙을 내려 명하였다.
“법문은 불이(不二)이고 진종(眞宗)은 하나일 뿐, 이를 정로(正路)로 구하고 적박(寂泊)을 근본으로 한다. 제주(祭酒)의 도89)는 세간에서 요망한 술수를 빌어 행세하고 있으나 속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숭상하고 있다. 누룩 맛을 보며 이를 청허(淸虛)라 하고, 말린 고기를 보고 침을 삼키니 자비(慈悲)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위로는 인사(仁祠)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제사의 규범[祭典]에 어긋나니, 마땅히 금하여 다시는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 먼 곳과 가까운 곳에 널리 포고하여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하라. 도사로서 불교에 귀의하는 자는 모두 소현(昭玄) 대통(大統) 상(上:法上)법사에게 넘기어 출가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아직 발심하지 않은 자들도 이끌어서 불문에 들어오도록 하라.”
이 날 참수된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 스스로 신선이라 하는 자들에게 삼작대(三爵臺)에 올라 뛰어내려 보게 하니 뛰어내리다 모두 몸이 부서져 시체가 땅을 뒤덮었다. 삿되고 요망한 집단이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수(隋)나라 초에 점차 그 술법이 퍼지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동천(東川:泗川省의 동부)지역에 이 집단[宗:도교]이 활동하고 있으나, 매우 미세하여 언급할 정도도 못 된다.
황제의 휘(諱)는 상(詳)이니,90) 즉 원위(元魏:北魏)의 승상(丞相)이요, 왕이었던 고환(高歡)의 둘째 아들이다. 적형(嫡兄)인 징(澄)이 게으르고 오만하여 노(奴)에게 해를 당하게 되니 상(詳)이 그 뒤를 이어 상국(相國)이 되었다. 위나라가 장차 멸망하게 될 즈음91)에 상(詳)은 남교(南郊)에 단을 세우고 점을 쳐 보았는데 대횡(大橫)ㆍ대길(大吉)인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괘(卦)가 나왔다.92) 이에 금상(金像)을 주조하여 재빨리 완성하고 위수(魏收)에게 선양(禪讓)의 글을 짓게 하여 위나라 황제에게 올리니, 받아 보고 황제가 여기에 서명하였다. 곧바로 그 선양을 받으니 이에 대제(大齊:北齊)가 세워졌다. 문선황제의 소행은 무릇 우매함과 지혜로움이 예측하기 어려웠고, 정사(政事)는 복야(僕射) 양준언(楊遵彦)에게 맡기고, 크게 불샤(佛寺)를 세우니 승니가 전국에 가득차고, 사시사철 시주ㆍ공양하는 이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때 조선사(稠禪師)가 황제를 일깨우고자 말하기를,93) “단월(檀越:시주)의 나찰(羅刹:악귀의 일종)은 물가에 가면 저절로 물에 비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에 따라 물가에 가서 보니 많은 나찰들이 뒤에 있었다. 이에 마침내 육식을 하지 않고, 수리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물고기 키우고 고기 잡는 관서를 폐지하였으며, 오신채[辛葷:오훈채]를 모두 제거하고, 시장에 내놓지도 못하게 하였다. 황제는 온종일 나오지 않고 항상 좌선하였다. 예불하며 불상 주위를 도는 것이 질풍과 같았다. 소현대통(昭玄大統)의 법상(法上)에서 계를 받으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법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밟고 계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전에 황제가 진양(晋陽)에 있을 때, 사자(使者)에게 낙타를 타게 하면서 이르기를, “사찰에 가서 경전을 가져 오너라”고 하였다. 사자가 어느 사찰인지 물으니, 황제가 말하기를, “낙타가 가는 대로 맡기라”고 하였다. 이에 나가서 꿈결인 듯 어느 한 산에 이르렀는데 그 산의 반이 불사(佛寺)였다. 여러 사미(沙彌)들이 “고상(高詳:문선황제)의 낙타가 왔다”고 외치고 곧바로 한 노승에게 인도하여 그에게 절하고 말하였다.
“고상(高詳)이 천자가 되었다는데 어떠합니까?”
사자가 답하여 말하였다.
“성명(聖明)합니다.”
노승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경전을 가지러 왔습니다.”
“고상이 이 절에 있을 때 독경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제94) 북행하여 동쪽 변두리까지 가는 길이니 경전을 드리겠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복명하였다.
예전에 황제가 곡구(谷口:陜西省 涇陽縣)의 목정불사(木井佛寺)에 이르렀을 때 사신(捨身)하는 어떤 미치광이가 있었는데 알아먹기 어려운 말로 갑자기 황제에게 말하였다.
“내가 간 후에 당신도 뒤이어 오게 될 것이오.”
이 날 밤 미치광이가 죽었는데, 황제가 진양에서 서거하였다.
저작랑(著作郞) 왕소(王邵)가 말하였다.
“석씨(釋氏:佛敎)는 대롱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과 같은 좁은 식견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경솔하게 망언하되, 『열자(列子)』에서 상(商)95)의 태재(太宰)가 공자에게 성인의 일을 물은 내용96)을 인용하거나, 또는 황제(黃帝)가 꿈속에서 화서씨국(華胥氏國:伏義氏의 나라)에서 노닐었다는 글97)을 들어 부처님의 신통유희[神遊]란 바로 그러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불교와 유사한 것일 뿐이다. 석륵(石勒)98)과 부견(符堅),99) 요진(姚秦)100) 시대에 역경사업이 크게 펼쳐졌는데, 이 때에는 대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조복시키고자 하여 우언(寓言)을 방편으로 많이 쓴 것이다. 그런데 왜 신통변화의 호호탕탕함이 이렇게 심한가를 모른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선악과 세상사의 인연을 설하고 자비희사(慈悲喜捨:사무량심)로써 상락아정(常樂我淨:열반의 네 가지 덕)의 과(果)를 얻도록 한다는 것이며, 논리로 분석ㆍ설명함이 극히 정밀하고 뚜렷하여 마치 일월과 같다.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 누가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무릇 올바로 듣는 자라면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며, 통달한 이라면 그 행동[身口]를 조심하고 정혜[慧定]를 닦아 평등해탈과 구경보리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회피하는 이들은 이치에 통달할 수 없을 것이며, 쓸데없이 재화와 힘만 낭비하고, 공리(功利)에만 번거로이 빠져 오염될 것이니, 오히려 육경(六經)이 모두 그릇되게 하는 셈이다. 육경은 심오하지 못한 것임이라. 여러 사정들이 이와 같다.”
『북제서(北齊書)』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
032_0481_a_01L集古今佛道論衡序 唐龍翔元年於京師西明寺實錄若夫無上佛覺迥出樊籠超三界獨高截四流而稱聖故使隄封所漸區宇統於大千聲教所覃沐道霑於八部所以金剛御座峙閻浮之地心至覺據焉布英聖之良術遂有天人受道龍鬼歸心挹酌不相之方散釋無明之患然夫聖人所作起必因時時有邪倒之夫故卽因而陶化天竺盛於六諦神州重於二篇遂使儒道互先眞僞交正自非入證登位何由分析殊途致令九十六道競飾澆詞六十二見各陳名理在緣或異大約斯歸莫不謂無想爲泥洹指梵主爲生本故二十五諦開計度之#街衢大論師立神我之眞宰居然設教載斯年攝統塵蒙九土崇敬考其術輕生而會其源論其行也封固而登其信故有四韋陁論推理極於冥二有天根尋生窮於劫始臆度玄冒罔生靈致有赴水投巖坐熱臥吸風露而曰仙#祖形體而號聖死長迷莫知迴覺如來哀彼黔黎靈赤澤曜形丈六金色駭於人天揚四辯慧解暢於幽顯能使魔王陣十軍碎於一言梵主來儀三輪摧於萬惑於是鍱腹戴爐之輩結舌伏於道場敬日重火之徒洗心仰於覺舍衛城側大偃邪鋒堅固林中倒枯穴能事旣顯獎務弘通玉關揚正道之秋金陵表乘㩲之瑞淸涼臺圖以靈儀顯節園中陳茲聖景人立寺創廣仁風抑邪通正於斯啓轍于斯時也喋喋黔首無敢抗言瑣黃巾時褰異議然其化被不及於龍勒名位無踐於槐庭王何達其上賢#班馬隆其襃貶安得與夫釋門相雷同混迹者哉斯何故耶良以博識旣寡信保常迷今則通觀具瞻必爽開前惑且夫其流易曉闞澤之對天分其理難迴#孫盛之談海截猶學未經遠情弊疏通邪辯逼眞無猜貳孔丘之在東魯尚啓虛盈十商之據西河猶參疑聖自餘恒俗足討論今以天竺胥徒聲華久隔旦張葛交論寔繁故商礭由來銓衡敍列筆削蕪濫披圖藻鏡摠會聚之號曰佛道論衡分爲甲乙四卷如有隱括覽者詳焉集古今佛道論衡卷甲 星唐西明寺釋氏後漢明帝感夢金人騰蘭入雒道士等請求角試事一前魏時吳主崇重釋門爲佛立塔寺因問三教優劣事二魏陳思王曹植辯道論附晉孫盛老聃非大賢論附晉孫盛老子疑問反訊附元魏君臨釋李雙信致有興廢故述其由事三宋太宗文皇帝朝會群臣論佛理治致太平事四魏明帝登極召沙門道士對論敍佛道先後事五梁高祖先事黃老後歸信佛下勅捨奉老子事六北齊高祖文宣皇帝下勅廢道教事七後漢明帝感夢金人騰蘭入雒諸道士等請求角試事一漢法本內傳云明帝永平三年上夢神人金身丈六項有日光飛在殿前欣然悅之明日問群臣此何爲神通人傅毅曰臣聞天竺有得道者曰佛也飛行虛空身有日光殆將其神乎於是上悟遣郞中蔡愔郞將秦景#博士弟子王遵等一十八人於大月支中天竺國寫佛經四十二章在蘭臺石室第十四閒又於雒陽城西雍門外爲起佛寺於其壁畫千乘萬騎繞塔三帀又將畫釋迦立像乃於南宮淸涼臺及開陽城門上佛儀像時造壽陵名曰顯節亦於其作佛圖像廣如牟子所顯有沙門迦攝摩騰竺法蘭位行難倫志存開化承蔡愔使達天竺請騰東行守區域隨至雒陽曉喩物情崇明信爲本帝問騰曰法王出世何以化不及此騰曰迦毘羅衛者三千大千世界百億日月之中心三世諸佛皆在彼生乃至天鬼神有願行者皆生於彼受佛正化咸得悟道餘處衆生無緣感佛佛不往也佛雖不往光明及或五百年或一千年或一千年外皆有聖人傳佛聲教而化導之廣說教義帝信重之曁永平十四年正月一日五嶽諸山道士朝正之次自相命曰天子棄我道法遠求胡教今因朝集可以表抗之其表曰五嶽十八山觀太上三洞弟子褚善信等死罪上言臣聞太上無形無名無極無上虛無自然大道出於造化之前上古同遵百王不易今陛下道邁羲皇過堯舜竊承陛下棄本追末求教西所事乃是胡神所說不參華夏陛下恕臣等罪聽與試驗臣等諸山道士多有徹視遠聽博通經典從元皇已來太上群錄太虛符呪無不綜達其涯極或策使鬼神或呑霞飮或入火不燒或履水不溺或白日昇天或隱形不測至於方術藥餌無所不能願得與其比挍一則聖上意二則得辨眞僞三則大道有歸則不亂華俗臣等若比對不如#任聽重決如其有勝乞除虛妄勅遣尚書令宋庠引入長樂宮勅以今月十五可集白馬寺道士等便置三壇別開二十四門南嶽道士褚善信嶽道士劉正念恒嶽道士桓文度嶽道士焦得心嵩嶽道士呂惠通天目五臺白鹿等十八山道士文信等都合六百九十人各齎靈寶眞文太上玉訣三元符錄等五百九十卷置於西壇茅成子許成子黃子老子等二十七家子書有百三十五置於中壇饌食奠祀百神置於東帝時御行殿在寺南門以佛舍利經像置於道西十五日齋訖道士等以柴荻和檀沈香爲炬遶子經而泣臣等上啓太極大道元始天尊衆仙百靈今胡亂中夏人主信邪正教失蹤玄風墜緖臣等敢置經壇上火取驗欲使開示群心得辨眞僞便縱火焚經經從火化悉成灰燼道士等相顧失色大生怖懼將欲昇天形者無力可能禁效鬼神者呼策不各懷愧恧南嶽道士費叔才自憾而死太傅張衍語褚信曰卿等所試無卽是虛妄宜就西來眞法褚信曰成子云太上者靈寶天尊是也造化之謂之太素斯豈妄乎衍曰太素有貴德之名無言教之稱今子說有言教爲妄也信便默然佛舍利光明五色直上空中旋環如蓋遍覆大衆映蔽日摩騰法師踊身高飛坐臥空中廣現神變于時天雨寶花在佛僧上又聞天樂感動人情大衆感悅歎未曾有皆繞法蘭請說法要蘭乃出大梵音歎佛功亦令大衆稱揚三寶說善惡諸法有果報六道三乘諸相不一又說出家功德其福最高初立佛寺同梵福量時有司空陽城侯劉峻與諸官人士庶等千餘人出家及四嶽諸山道士呂惠通等六百二十八人出家陰夫人王婕妤等與諸宮人婦女等二百三十人出家至月末已來日日供設種種行施法衣甁器竝出所司便立十寺七寺安僧城邑外三寺安尼在雒城內漢興佛法自此始焉初摩騰西來將畫釋迦立像帝乃令圖出之於陵園及洛門供養前魏時吳主崇重釋門爲佛立塔寺因問三教優劣事二吳書云孫權赤烏四年有沙門康僧會者是康居國大丞相之長子神儀剛正遊化爲任于時三國鼎峙各擅威衡佛法北通未達南國會欲道被未聞開教江表初達建業營立茅茨設像行道吳人初見謂之妖異有司奏聞吳主問曰佛有何神驗也會曰佛晦靈迹出餘千載遺形舍利應現無方吳主曰若得舍利當爲立塔三七日遂獲舍利五色曜天剖之逾燒之不然光明出火作大蓮華曜宮殿臣主驚嗟信情發起因爲造度人立寺以其所住爲佛陁里法創興故遂名建初寺焉尋下勅尚書令闞澤曰漢明已來凡有幾年佛教入漢旣久何緣始至江東澤曰自永平十年佛法初來至今赤烏四則一百七十年矣初永平十四年五嶽道士與摩騰角力之時道士不南嶽道士褚善信費叔才等在會自憾而死門徒弟子歸葬南嶽不預出家無人流布後遭漢政淩遲兵戎不息經今多載始得興行又問曰老子得與佛比對不澤曰臣聞魯孔君者英才誕秀聖德不群世號素制述經典訓獎周道教化來葉儒之風澤潤今古亦有逸民如許成原陽子莊子老子等#百家子書脩身自翫放暢山谷縱太其心學歸淡泊事乖人倫長幼之節亦非安俗化物之風至漢景帝以黃子老子義體尤深改子爲經始立道學勅令朝悉諷誦焉若將孔老二教遠方佛遠則遠矣所以然者老二教法天制用不敢違天諸佛設教天法奉不敢違佛以此言之實非比對主大悅以澤爲太子太傅餘如晉宗炳明佛論廣之魏陳思王曹子建辯道論夫神仙之書道家之言乃云傅說爲辰尾宿歲星降爲東方朔淮南王安誅於淮南而謂之獲道輕擧鉤弋死於雲陽而謂之尸逝柩空其爲虛妄甚矣哉中興篤論之士有桓君山者其所著述多善劉子駿嘗問言人誠能抑嗜慾闔耳目可不衰竭乎庭下有一老榆君山指而謂曰此樹無情慾可忍無耳目可闔然猶枯竭腐朽而子駿乃言可不衰竭非談也君山援榆喩之未是也何者余前爲王莽典樂大夫樂記言文帝得魏文侯樂人竇公年百八十兩目盲帝奇而問之何所施行對曰臣年十三而失明父母哀其不及事教臣鼓琴不能導引不知壽得何力君山論之頗得省盲專一內視精不外鑑之助也先難子駿以內視無益退論竇便以不鑑證之吾未見其定論也君山又曰方士有董仲君者有罪繫佯死數日目陷蟲出死而復生後竟死生之必死君子所達夫何喩夫至神不過天地不能使蟄虫夏震雷冬發時變則物動氣移而事彼仲君乃能藏其氣屍其體爛膚出其虫無乃大怪乎#世有方士王悉所招致甘陵有甘始廬江有左陽城有郗儉始能行氣導引慈曉房中之術儉善辟穀悉號三百歲所以集之於魏國者誠恐斯人之徒接姦詭以欺衆行妖匿以惑人故聚而禁之甘始者老而有少容自餘術咸共歸之然始詞繁寡實頗竊有怪言若遭秦始皇漢武帝則復徐欒大之徒矣桀紂殊世而齊惡人異代而等僞乃如此耶又世虛然有仙人之說仙人者黨猱猿之屬世人得道化爲仙人乎夫雉入海爲燕入海爲蜃當徘佪其翼差池羽猶自識也忽然自投神化體變更與黿鼈爲群豈復自識翔林薄巢垣屋之娛乎牛哀病而爲虎其兄而噬之若此者何貴於變化也而頗爲疋夫所罔納虛妄之詞信眩惑之說隆禮以招弗臣傾產以供虛散王爵以榮之淸閑館以居之年累稔終無一效或歿於沙丘或崩乎五柞臨時雖復誅其身滅其族紛足爲天下笑矣然壽命長短骨體强劣各有人焉善養者終之勞擾者半之虛用者夭之其斯之謂歟陳思王曹植字子建魏武帝第四子初封東阿郡王終後謚爲陳思王幼含珪璋十歲能屬文下筆便成初不改定世閒術藝無不畢善邯鄲淳見而駭服稱爲天人植每讀佛經輒流連嗟翫以爲至道之宗極也製轉讀七聲昇降曲折之響世之諷誦咸憲章焉嘗遊魚山忽聞空中天之響淸颺哀婉其聲動心獨聽良而侍御莫聞植深感神理彌悟法乃慕其聲節寫爲梵唄撰文製音傳爲後式梵聲光顯始於此焉其所傳唄凡六契見梁釋僧祐法菀集統括道源精搜仙錄姦妄多奇終歸飾詐故前論所委辯當明矣晉孫盛撰聖賢同軌老聃非大賢論頃獲閑居後申所詠仰先哲之玄微考大賢於靈衢詳觀風流究覽行止高下之辯殆可髣髴夫大聖乘時迹浪於所因大賢次微故與大聖而舒卷所因不同故有揖讓與干戈迹次微道亞故行藏之軌莫異亦猶龍虎之從風雲形聲之會影響理固自然非召之也是故箕文同兆元吉於虎兕之吻顏孔俱否逍遙於匡陳之間唐堯則天稷偰翼其化湯武革伊呂贊其功由斯以言用合影響之論惟我與爾之談豈不信哉何者大賢庶幾觀象觀象知器知器豫籠豫籠吉凶吉凶是以運形斯同御治應對接群方終保元吉窮通滯礙其揆一也但欣聖樂易有待而享冥而不能冥悅寂而不能寂以此爲優劣耳至於中賢第三之人去聖有故冥體之道未盡自然運用自不得玄同然希古存勝高想頓足仰慕淳風專詠至虛故有拪峙林壑若巢許之倫者言行抗轡如老彭之徒者亦非故然理自然也夫形躁好靜柔愛剛瀆所常習愒所希聞世俗之常也是以見偏抗之詞不復尋因應之適睹矯抂之論不復悟過直之失案老之作與聖教同者是代大匠斲騈梅枝指之喩其詭乎聖教者是遠救世之宜違明道若昧之義也經何常闕虛靜之訓謙沖之誨哉子曰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我於老彭尋斯旨也則老彭之道以籠罩乎聖教之內矣且指說二事而不非實言也何以明之聖人淵寂何不好又三皇五帝已下靡不制作是故易象經墳爛然炳著棟宇衣裳與時而興安在述而不作乎故易曰聖人作而萬物睹斯言之發蓋指說老彭之德有以髣髴類己形迹之處所耳亦猶匿怨而於其人左丘明恥之亦恥之豈若於吾言無所不說相體之至也且顏孔不以導養爲事而老彭養之孔顏同乎斯人而老彭異之凡斯數者非不亞聖之迹而又其書往往矛盾粗列如左大雅搢紳幸祛其弊盛又不達老聃輕擧之旨爲欲著訓戎狄宣導殊域乎若欲明宣導殊類則左衽非玄化之所孤逝非嘉遁之擧諸夏凌遲敷訓所先聖人之教自近及遠未有輈張遐嶮如此之遊也若懼禍避地則聖門可隱商朝魯邦有無如者矣茍得其道則遊刃有餘觸地元吉何違天心於戎貊不能然者得無庶於朝隱而祈仙之徒乎昔裵逸民作崇有貴無二論時談者或以爲不虛達勝之道者或以爲矯時流遁者余以爲尚無旣失之矣有亦未爲得也道之爲物惟怳惟忽因應無方惟變所適値澄淳之時司契垂拱遇萬動之化則形體勃興是以洞鑑雖同有無之教異陳聖致雖一而稱謂之名殊目唐虞不希結湯武不擬揖讓夫豈異哉時運故而伯陽以執古之道以御今之有逸民欲執今之有以絕古之風吾故以爲彼二子者不達圓化之道各矜其一方者耳晉孫盛老子疑問反訊道經云故常無欲以觀其妙故常有以觀其儌此兩者同出而異名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舊說及王弼解妙謂始儌謂終也夫觀始終睹妙知著達人之鑑也旣以欲澄神照其妙始則自斯以已宜悉鎭何以復須有欲得其終乎且有欲俱出妙門同謂之玄若然以往復獨貴於無欲乎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盛以爲夫美惡之名生乎美惡之實道德淳美則有善名頑嚚聾昧有惡聲故易曰惡不積不足以滅身又曰美在其中暢於四支而發於事又曰韶盡美矣未盡善也然則大美大善天下皆知之何得云斯惡乎若虛美非美爲善非善所美過美所善違中若此皆世教所疾聖王舊誡天下亦自知之於斯談 不尚賢使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盜使民無知無欲使知者不敢爲又曰絕學無憂唯之與阿相去幾何善之與惡相去何若又下章云善人不善人之師不善人善人之資不貴其師不愛其資雖智大迷盛以爲民茍無亦何所師於師哉旣相師資非學如何不善師善非尚賢如何貴愛在則善惡不得不彰非相去何若之又下章云人之所教我亦以教人吾言甚易知而天下莫能知又曰將以爲教父原斯談也未爲絕學云絕者堯孔之學耶堯孔之學隨時設教老氏之言一其所尚隨時設教所以道通百代一其所尚不得不滯於適變此又闇蔽所未能通者也沖而用之又不盈和其光同其塵以爲老聃可謂知道非體道也昔陶唐之莅天下也無日解哉則維昭任衆師錫疋夫則馺然禪授豈非沖而用之光塵同彼哉伯陽則不然旣處濁位復遠遁西戎行止則昌狂其迹著書則矯誑其言和光同塵固若是余固以爲知道體道則未也道經三者不可致詰混然爲一繩繩兮不可名復歸於無物無物之象是謂忽怳又下章云道之爲物惟怳與忽忽兮怳兮其中有象怳兮忽兮其中有物此二章或言無物或言有物有所不宜者也執古之道以御今之上章云執者失之爲者敗之而復執古之道以御今之有或執或否得無陷矛盾之論乎絕聖棄智民利百倍孫盛曰夫有仁聖必有仁聖之此而不崇則陶訓焉融仁義不尚則孝慈道喪老氏旣云絕聖而每章輒稱聖人旣稱聖人則迹焉能得絕若所欲絕者絕堯舜周孔之迹則所稱聖者爲是何迹乎卽如其言聖人有宜滅其迹者有宜稱其迹者稱滅不同吾誰適從絕仁棄義民復孝慈#若如此談仁義不絕則不孝不慈矣復云居善地與善仁不審與善仁之是向所云欲絕者非耶如其是也則不宜復稱述矣如其非也則未詳二仁之義一仁宜絕一仁宜明此又所未達也若謂不聖之聖不仁之仁則教所誅不假高唱矣#退至莊周云聖人不死大盜不止又曰田常竊仁以取齊國夫天地陶鑄善惡兼育各稟自然理不相閞梟鴆縱毒不假學於鸞鳳豺虎肆害不借術於騏麟此皆天質自然不須外物者也何至凶頑之人獨當假仁義以濟其奸乎若乃冒頓殺父鄭伯盜鄶豈復先假孝道獲其終害乎而莊李棓擊殺拫毀駮正說何異疾盜賊而銷鑄干戈睹食噎而絕棄嘉穀乎後之談者曲爲其義辯而釋之莫不艱屯於殺困躓於忘親也知我者希則我貴又上章云聖人之在天下百姓皆注其耳目#師資貴愛必彰萬物如斯則知之者安得希哉知希者何必貴卽己之身見貴九服何得背實抗云貴由知希哉斯蓋欲抑動恒俗發此過言耳聖教則不然中和其以理訓導故曰在家必聞在邦必聞也是聞必達也不見善而無悶龍之德人不知而不慍君子之道好之必察焉衆惡之必察焉旣不以知多爲顯亦不以知少爲貴誨誘綽綽理中自然何與老聃之言同日而語其優劣哉禮者忠信之薄而亂之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是以大丈夫處其厚不處其薄處其實不處其華也孫盛曰老聃足知聖人禮樂非玄勝之具不獲已而制作耳而故毀之何哉是故屛撥禮學以全其任自然之論豈不知叔末不復得返自然之道直欲申已好之懷然則不免情於所悅非浪心救物者也非惟不救乃獎其弊矣 或問莊老所以故發此唱蓋與聖教相爲表裏其於陶物明訓其歸一也盛以爲不然聖人之道廣大悉備矣猶日月懸天有何不照者哉孔氏之言皆絞於六經矣寧復有所愆之俟佐助於聃周卽莊周所謂日月出矣而焦火不息者也至於虛詠譎怪徼詭之言拘滯於一方而撗稱不經之奇詞也王侯得一以爲天下貞貞正也又下章云孰知其極其無正正復爲奇復爲妖尋此二章或云爲天下正云無正旣云善人不善人師而復云爲妖天下之善一也而或師或妖下之正道一也而云正復爲奇斯反鄙見所未能通也集論者曰盛字安國#有說云卽東晉名士綽之後也祖卽魏名臣之子#荊綽有顯論才學所推聞之前史盛爲名父之子仕晉爲給事中秘書監散騎常侍吳昌男少好墳典遊心史籍常以爲雖賢聖玄邈得諸言表而仁愛自我陶染庶物漸漬之功莫過乎經史是以仲尼因魯史記以著春秋使百代之後仰高風以式瞻孟軻卿竝讚揚大化曁乎史遷亦記一代之成敗明鑑誡作來今遂歷心博綜撰考諸事疏著晉陽秋庶擬前賢美道訓傳本幷音合三十二卷又命掌國史竭意經論一時名作是稱良未奏遂卒子潛以晉太元十五年上之詔曰得上故秘書監所著書以慨然遠摸前典憲章在昔亦一代之事輒勅納之秘閣以貽于後潛襲父爵參驃騎將軍諮議參軍見于晉盛凡著述備如別集品評老氏賢之流故知爲尹述書乃祖承有據嵆子云老子就涓子學九仙之術乎練餌斯或有之至於聖也則不云古語曰生知之者上學知者次何所位典達鴻猷故班固敍人九等之例孔丘等爲上上類例皆是聖耳等爲中上類例皆是賢聖有極聖亞聖賢有大賢中賢竝以神機有利鈍故智用有漸頓盛敍老非大賢其閑放自牧不能兼濟於萬物坐觀周衰陽遁於西裔而實死扶風葬槐非遁天之仙信矣元魏君臨李雙信致有廢興故其由事三魏太祖道武皇帝託跋珪天興元年下詔曰夫佛法之興其來遠矣濟益之功冥及存沒神蹤遺迹信可依憑#可於京邑建飾容範脩整宮舍令信向之徒有所居止是歲始作五級佛耆闍崛山及須彌殿加以飾繢搆講堂禪室沙門座處莫不具焉魏世祖太武託跋燾卽位亦遵太祖太宗之業雖有黃老不味其術每引高德沙門與談玄理於四月八日輿諸佛像行於廣衢帝親御門樓散花禮敬篤敬#兼至晩據有平城興敬李爲立道壇司徒崔皓少習左道忌釋門旣位居僞輔尤不信有佛是虛誕見讀佛經奪而投井中密欲#加滅皓有才略太武信用國人以爲摸揩燾所扶信道士寇謙之與皓款遂奏拜謙位稱天師時有沙門玄道王河西名高海右神用莫測賤咸重燾乃軍逼涼境徵高東還達平城大弘禪化太子晃事高爲師形心盡禮晃時被讒爲父所疑乃告高曰空羅枉苦何由可脫高令作金光明齋懺七日懇誠燾乃夢見其祖及父皆執劍列威曰何故信讒枉疑太子燾驚覺大集群臣說神告夢臣咸言太子無過實如皇靈降誥於太子無復疑焉蓋高誠感之力也因下書曰朕承祖宗重光之緖思闡鴻基恢隆萬代武功雖照而文教未非所以崇太平之治也今者城內安逸百姓富昌宜定制度爲萬世之夫陰陽有往復四時有代序授子任賢安全相付所以休息疲勞式固長久古今不易之令典也可令皇太副理萬機摠統百揆更擧賢良備列職擇人授任而黜陟之其朝士庶民皆稱臣於太子于時崔寇先得寵於燾恐晃篡政有奪威權又譖云太子前事實有謀心但結高公道術故令先帝降夢如此物論事迹難明若事不早除必爲巨害燾納之卽勅收高於太平五年九月十五日縊于平城之隅太子又幽殺之卽宋元嘉之二十二年也爾夜門人莫知其死忽有光明繞塔入房其光聲曰吾其已逝弟子等崩赴屍所請告遺累高眼稍開汗通香起便坐謂曰法應化隨緣盛衰盛衰在迹理恒湛但念汝等不久復當如我耳汝等死後法當更興善自脩心無令中悔言已便臥而絕崔皓於此縱以奸心每與帝言恒加非毀以佛法無益於有傷民利勸令廢之後太武至長安入僧寺見有弓盾帝怒誅寺僧因進說盡殺沙門焚經毀像勅留臺下四方僧寺有者依長安法除之士寇謙不從其毀苦與皓爭皓拒之謙謂皓曰卿從今年受戮滅門矣惑其言以太平七年遂普滅佛法軍四出燒掠寺舍統內僧尼無少長坑之其竄逸者捕獲梟斬有沙門慧甚有神異昔赫連昌破長安始被白刃而體不傷五十餘年未嘗寢臥跣行泥塗初不污足而色逾鮮白號白足和上死十餘年身相如在#初入深山習行蘭若太平之末方知滅慧始聞之乃於元會之日杖錫宮有司奏云有一道人足白於面#云欲入見屬依軍法斬而不傷遂至殿燾大怒自以所佩劍斫之體無餘時北園養虎勅以始飴之虎皆潛終不敢視試以天師近檻虎輒鳴燾方知佛化高尊黃老之所不及卽延始入殿頂禮足下悔其愆咎爲說法明辯因果燾於是大生愧懼遂感癘疾通身發瘡痛苦難忍群臣議曰崔皓邪佞毀害佛僧陛下所患必由於此于時崔寇二人次發惡疾燾推過由於彼以太平十一年乃載皓於露車官使十人於車上更尿其行數里不堪困苦又生埋出口尿之自古三公戮辱未之過此之甚遂誅諸姻親門族都盡宣下國中復正法俄而燾崩孫濬襲位大弘佛卽高宗文成皇帝是也見後魏書及十六國春秋高僧傳等宋太宗文皇帝集群臣論佛理治致太平事四文帝卽宋武第三子也聰睿英博稱令達在位三十年嘗以暇日從容而顧問侍中何尚之吏部羊玄保曰朕少來讀經不多比日彌復無暇世因果未辦厝懷而復不敢立異者正以卿輩時秀率所敬信也范泰靈運常言六經典文本在濟俗爲政必求性靈眞奧豈得不以佛理爲指南耶近見顏延之析達性論宗炳難白黑論明佛法汪汪尤爲名理竝足開獎人意若使率土之濱皆淳此化朕坐致太平矣夫復何事尚之對曰悠悠之徒多不信法以臣庸弊更荷襃拂非所敢當至如前代群英則不負明詔矣中朝已遠難復盡知渡江已來則王道周顗庾亮王濛謝尚王坦王恭王謐郭文謝敷戴逵詢及亡高祖兄弟及王元琳昆季范孫綽張玄殷顗等或宰輔之冠蓋或人倫之羽儀或置情天人之際抗迹煙霞之表竝稟志歸依厝心歸其間比對則蘭護開潛深遁崇邃皆亞迹黃中或不測之人也慧遠法師嘗云釋氏之化無所不可適道固自教源濟俗亦爲要務竊尋此說契理奧若使家家奉戒則罪息刑淸陛下所謂坐致太平誠如聖旨羊玄保進曰此談蓋天人之際豈臣所宜竊恐秦楚論强兵之事孫吳盡呑倂之術將無取於此也帝曰此非戰國之具良如卿言尚之曰夫禮隱逸則戰士怠貴仁德則兵氣衰若以孫吳爲志茍在呑噬亦無取堯舜之道豈惟釋教而已哉帝曰釋門有卿由孔門之有季路所謂惡言不入於耳也自是文帝致意佛經及見嚴觀諸僧輒論道義屢延僧殿會帝躬御地筵同僧例飯時有竺道生法師出群品英義獨拔帝重之嘗述生頓悟義沙門僧弼等皆設巨難帝曰使逝者可興豈爲諸君所屈顏延之著離識論帝命嚴法師辯其同異往返終日帝笑曰公等今日無愧支許之談也云云見諸僧史傳魏明帝登極召沙門道士對論敍佛道先後事五元魏君臨凡一十七帝一百七十九年興顯佛教不可勝言惟太武在位五六年中屛除佛法自餘光顯具彰魏略陳相狀以成信重獻文卽位興皇元年於五級大寺太祖已下五帝鑄像五軀各長一丈六尺用金二十五萬斤正光元年明帝加朝服大赦天下請僧尼道士女官等殿前齋訖侍中劉滕宣勅請法師等與道士論以釋弟子疑網淸道觀道士姜與融覺寺法師曇謨最對論帝曰佛與老子同時以不姜斌曰子西入化胡佛時以充侍者明是同時法師曰何以知之 斌曰案老子開天經是以得知 法師曰老子當周何王幾年而生周何王幾年西入斌曰當周定王卽位三年乙卯之歲於楚國陳郡苦縣厲鄕曲仁里九月十四日夜子時生至周簡王四年丁丑歲事周爲守藏吏簡王十三年遷爲太史至敬王元年庚辰歲年八十見周德凌遲遂與函關令尹喜西入化胡斯足明矣 法師曰佛以周昭王二十四年四月八日生穆王五十三年二月十五日滅度計入涅槃後經三百四十五年始到定王三年子方生生已年八十五至敬王元年凡經四百二十五年始與尹喜西遁據此年載懸殊無乃謬乎 斌曰佛生周昭王之時出何文記 法師周書異記漢法本內傳竝有明文斌曰孔子旣是制法聖人當時於佛迥無文記何耶 法師曰仁者識同管窺覽不弘遠案孔子有三備卜謂天地人也佛之文言出在中備仁者幸自披究不有此迷 斌曰子聖人不言而識知何假卜乎法師曰惟佛是衆聖之王四生之首達一切含靈前後二際吉凶終始假卜觀自餘小聖雖曉未然之理#必藉蓍龜以通靈卦也侍中尚書令元乂宣 勅語道士姜斌論無宗旨宜下席又問開天經何處得來是誰所說卽遣中書侍郞魏收尚書郞祖瑩等就觀取經帝令議之太尉丹陽王蕭綜太傅李衛尉卿許伯桃吏部尚書邢欒騎常侍溫子昇等一百七十人讀訖奏云老子止著五千文更無言說等所議姜斌罪當惑衆 帝加斌極刑時三藏法師菩提流支諫乃止配徙馬邑梁高祖先事黃老後歸信佛下勅捨奉老子事六梁高祖武皇帝年三十四登位在政四十九年雖億兆務殷而卷不釋手內經外典罔不厝懷皆爲訓解數千餘卷而儉約自節羅綺不衣寢處虛晝夜無怠致有布被莞席草屨初臨大寶卽備斯事日惟一食絕辛羶自有帝王罕能及此舊事老宗尚符圖窮討根源有同妄作帝乃躬運神筆下詔捨道文曰維天鑑三年四月八日梁國皇帝蘭陵蕭衍稽首和南十方諸佛十方尊十方聖僧伏見經云發菩提心者卽是佛心其餘諸善不得爲喩能使衆生出三界之苦門入無爲之勝路故如來漏盡智凝成覺至道通機圓最聖發慧炬以照迷鏡法流以澄啓瑞迹於天中爍靈儀於像外群迷於慾海引含識於涅槃登常樂之高山出愛河之深際言乖四句絕百非應迹娑婆王宮誕相步三界而爲尊普大千而流照但以機心淺好生厭怠遂乃湛說圓常亦復潛輝鶴樹闍王滅罪婆藪除殃若不逢遇大聖法王誰能救接在迹雖隱道無虧弟子經値迷荒耽事老子葉相承染此邪法習因善發棄迷知今捨舊醫歸憑正覺願使未來世童男出家廣弘經教化度含識共成佛寧在正法中長淪惡道不樂依老子教暫得生天涉大乘心離二乘念正願諸佛證明菩薩攝受弟子蕭衍和南于時帝與道俗二萬人於重雲殿重閣上手書此文發菩提心至四月十一日又勅門下大經中說道有九十六種惟佛一道是於正道其餘九十五種名爲邪道朕捨邪外以事正內諸佛如來若有公卿能入此誓者可發菩提心老子周公孔子等雖是如來弟子而化迹旣邪止是世閒之不能革凡成聖其公卿百官侯王宗族宜反僞就眞捨邪入正故經教成實論云若事外道心重佛法心輕卽是邪見若心一等是無記性不當善惡若事佛心强老子心弱者乃是淸信言淸信者淸是表裏俱淨垢穢惑累皆盡信是信正不信邪故言淸佛弟子其餘諸信皆是邪見不得稱淸信也門下速施行至四月十七日侍中安前將軍丹陽尹邵陵王上啓云臣綸聞如來嚴相巍巍架于有頂微妙色身蕩蕩顯乎無際假金輪而啓物託銀粟以應凡砥波若之利刀收涅槃之妙果汎生死之苦海濟常樂於彼岸故能降慈悲雲垂甘露雨七處八會教化之義不窮四諦五時利益之方無盡竝冰淸日盛霧豁雲除爝火翳光塵熱自可謂入俗化於蒙底出世冥此眞使稠林邪徑之人景法門而無倦渴愛聾瞽之士慕探賾而知迴道樹始於迦維德音盛乎京洛恒星不見周鑑娠徵滿月圓姿漢感宵夢五法用傳萬德方兆華俗潛故競扇高風資此三明照迷途之失憑茲七覺長夜之苦屬値皇帝菩薩應天御物負扆臨民含光宇宙照淸海表垂無礙辯以接黎庶以本願力攝受衆生故能隨方逗藥示㩲因顯崇一乘之廣十地之基是以萬邦迴向俱稟正識幽顯靈祇皆蒙誘濟人興等覺之願物起菩提之心莫不翹勤歸宗之境悅懌還源之趣共保慈悲俱脩忍辱所謂覆護饒益橋梁津濟者旣光被民亦化之於是應眞飛錫虛接影破邪外道堅持正因伽藍寶剎相望講會傳經德音盈耳昔未達理源稟承外道如欲須甘果翻種苦栽欲除渴乏反趣鹹水今啓迷方粗知歸向受菩薩大戒戒節身捨老子之邪風入法流之眞教願天慈曲垂矜許謹啓至四月十八日中書舍人臣任孝恭宣勅云能改迷入正可謂是宿植勝宜加勇猛也北齊高祖文宣皇帝下勅廢道教事七金陵道士陸修靜者道門之望齊兩代祖述三張弘衍二葛之士封門受錄遂妄加穿鑿廣制齋糜費極繁意在王者遵奉會梁祖啓運下詔捨道修靜不勝其憤遂與門人及邊境亡命叛入北齊又傾散金贈諸貴遊託以襟期冀興道法惑之也於天保六年九月乃下勅諸沙門與道士學達者十人親自對于時道士祝諸沙門衣盋或飛祝諸梁木或撗或豎沙門曾不學方術默無一對士女擁鬧貴賤移心竝以靜徒爲勝也諸道士等雀躍騰魚睨雲漢高談自矜誇衒道術又唱言曰神通㩲設抑挫强禦沙門現一我當現二今薄示小術竝辭退事亦可見帝命上統法師與靜角上曰方術小伎俗儒恥之況出家人也雖然天命令拒豈得無言可令最下坐#僧對之卽往尋覓有僧佛鐫名曇顯者不知何人遊行無定飮噉同俗時有放言摽悟宏遠上統知其深量私與之交于時名僧盛集顯居末坐酣酒大醉昂兀而坐有司不敢召之以事告於上統上曰道士祭酒常道所行止是飮酒道人可共言耳可扶擧將來於是合衆皆憚而怯上統威權不敢有諫乃兩人扶顯令上高座便立而含笑曰我飮酒大醉中有所聞云沙門現一我當現二此言虛實道士曰有實顯卽翹足而立云我已現一卿可現二各無對之顯曰向祝諸衣物飛颺者我故開門試卿術耳命取稠禪師衣盋祝之諸道士一時奮發共呪一無動搖帝勅取衣乃至十人牽擧不動顯乃令以衣置諸梁木又令呪之卒無一驗道士等相顧無賴猶以言辯自高乃曰佛家自號爲內內則小也詔我道家#爲外外則大也顯應聲曰若然則天子處定小百官矣靜與其屬緘口無言帝目驗臧否便下詔曰法門不二眞宗在一求之正路寂泊爲本祭酒道世中假妄俗人未悟仍有祗崇麴是味淸虛焉瞿脯斯甜慈悲永上異仁祠下乖祭典皆宜禁絕復遵事頒勅遠近咸使知聞其道士歸伏者竝付昭玄大統上法師度聽出家未發心者可令染剃爾日斬首者非一自謂神仙者可上三爵臺其投身飛逝皆碎屍塗地僞妄斯絕致使齊境國無兩信迄于隋初漸開其術至今東川此宗微末無足抗言帝諱詳卽元魏丞相王歡之第二子也嫡兄澄怠慢爲奴所害詳襲其代爲相國魏將曆窮詳築壇於南筮遇大撗大吉漢文之卦也乃鑄金一瀉而成魏收爲禪文魏帝署之卽受其禪爲大齊也凡所行履不測其愚智#委政僕射揚遵彦帝大起佛寺僧尼溢滿諸州冬夏供施行道不絕時稠禪師問箴帝曰檀越羅剎殆臨水自見帝從之睹群羅剎在後於是遂不食肉禁鷹鷂去官漁屠辛葷悉除不得入市帝恒坐禪竟日不出禮佛行繞其疾如風受戒於昭玄大統法上面掩地令上履髮而授焉是帝在晉陽使人騎駝勅曰向寺取經函使問所在帝曰任駝出城及出奄如夢至一山山半有佛寺群沙彌遙高詳託駝來便引見一老僧拜之高詳作天子何如聖明爾來何爲取經函僧曰詳在寺懶讀經令北行東頭與之使者反命初帝至谷口木井佛寺有捨身癡人不解語忽謂帝曰我去爾後來是夜癡人死帝尋崩於晉陽焉著作王邵曰釋氏非管窺所及率爾妄言之引列子述商太宰問孔子聖人事又云黃帝夢遊華胥氏之國佛神遊而已此之所言髣髴於佛石符姚世經譯遂廣蓋欲柔伏人故多寓言以方便不知是何神變浩蕩之甚乎其說人身善惡世事因以慈悲喜捨常樂我淨書辯至精明如日月非正覺孰能證之凡在順莫不歸命達人則愼其身口修其慧定平等解脫究竟菩提及僻者爲不能通理徒務費竭財力功利煩猶六經皆有所失未之深也已矣事事如此依齊書錄之集古今佛道論衡卷甲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작자 미상인데 위진(北魏)시대 승려가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위서(僞書)로 생각된다. 본 『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과 같은 저자[道宣]가 저술한 『광홍명집(廣弘明集)』 1권에도 이 『한법본내전』의 인용 부분이 전문 실려 있다. 그러나 일부 자구(字句)가 다르다. 양 본을 참고ㆍ대조하여 번역한다. 이 밖에 『법원주림(法苑珠林)』ㆍ『속집고금불도논형(續集古今佛道論衡)』 등에도 그 서명(書名)이 전한다. 특히 『속집고금불도논형』에는 『한법본내전』의 대부분의 내용과 함께 권수와 제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제1권 「명제구법품(明帝求法品)」, 제2권 「청법사입상품(請法師立寺品)」, 제3권 「여제도사비교도탈품(與諸道士比較度脫品)」, 제4권 「명제대신등칭양품(明帝大臣等稱揚品)」, 제5권 「광통유포품(廣通流布品)」등 모두 5권이다.본문에 인용된 『한법본내전』과 약간의 다른 부분이 있으나 대략 비슷한 내용이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弘明集』에 실림), 「사십이장경서(四十二章經書)」, 『후한기(後漢紀)』10권, 『고승전(高僧傳)』1권,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廣弘明集』의 「笑道論」14권), 「명상기(冥祥記)」(『法苑珠林』13권), 『진고(眞誥)』,『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 『낙양가람기』 등에도 보인다. 위의 전적은 모두 남북조 시기에 기술되었다.
  2. 2)원문은 ‘항(項)’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정(頂)’의 오자(誤字)가 아닐까 한다.
  3. 3)궁성에 있는 황실의 서고(書庫)이다.
  4. 4)이 구절의 본문은 “광여모자소현(廣如牟子所顯)”으로 되어 있어 그 뜻이 통하지 않으나, 『광홍명집』에는 “광여전집모자소현(廣如前集牟子所顯)”으로 되어 있어 그 뜻이 통한다. 전자(前者)에 탈자(脫字)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모’와 ‘자(字)’자 사이가 한 칸 띄어져 있고, ‘모’자도 다른 자로 되어 있다.이 「모자(牟子)」는 『홍명집』 제1권에 실려 있는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일 것이다. 따라서 ‘전집(前集)’이란 곧 당대(唐代)의 도선(道宣)이 자신이 집록한 『광홍명집』에 대칭하여 그 전대(前代)인 남조(南朝)의 양대(梁代)에 승우(僧祐)에 의해 이루어진 『홍명집』을 가리킨 것이다.
  5. 5)본문은 ‘위행난륜(位行難論)’이나,『광홍명집(廣弘明集)』에는 ‘위행난측(位行難測)’으로 되어 있어 후자가 뜻이 통하고 올바른 것임을 알 수 있다.
  6. 6)도교의 최고신으로, 삼계(三界) 사종만천(四種民天) 삼청경(三淸境) 위에 있는 다라촌(大羅天)에서 늘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옥청경천보군(玉淸境天寶君)이라고도 하며, 원시천존은 이 세상에서의 이름이고, 청상계의 명칭은 상합허도군(上合虛道君)이라고 한다.
  7. 7)이 글도 마찬가지로 『광홍명집』 제1권에 거의 같은 문장이 전해지고 있다.
  8. 8)서역에 있던 나라 이름으로, 당시 중국에서는 이 나라 출신 승려들의 성을 ‘강(康)’이라 하였다.
  9. 9) 일찍이 왕이 된 바가 없는 왕이란 뜻이다.
  10. 10)세속의 얽매인 생활을 떠나 걸림 없는 출세(出世)의 도를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11. 11)본문은 ‘원방불법(遠方佛法)’이나,『광홍명집』은 ‘비방불법(比方佛法)’이고, 내용으로 보아 후자가 옳다.
  12. 12)조조(曹操)의 셋째 아들인 조식(曹植)(192~232)을 말한다. 자건(子建)은 자(字)이다. 진왕(陳王)에 봉해지고 시(諡)가 사(思)였기에 진사왕(陳思王)욿 칭해지고 있다. 시부(詩賦) 문장에 뛰어나 당대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 문인들의 숭앙을 받았다. 『조자건집(曹子建集)』 10권이 현존한다.
  13. 13)같은 문장이 거의 『광홍명집』 제5권에 전한다.
  14. 14)진(辰)은 동방(東方)을 가리키고, 미수(尾宿)는 28성수(星宿) 가운데 동방 7수의 하나이며, 그래서 진미수란 동방 7수 가운데 하나인 미(尾)의 별자리[宿]란 뜻이다.
  15. 15)목성(木星)은 12년 주기로 1주천(周天)하므로 고대에는 이 목성의 주기를 기년(期年)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그래서 이를 세성(歲星)이라 칭한 것이다.
  16. 122)16)한고조(漢高祖)의 손자(孫子)로서 호학(好學)하여 다방면의 학사들을 초빙, 담론을 즐기고, 이들과 합작으로 광로학(黃老學)을 중심으로 한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하였다.
  17. 17)한무제(漢武帝)의 비(妃) 조첩여(趙婕餘)로, 소제(昭帝)의 생모이다. 무제의 행차에 수종(隨從)하였다가 과실을 범하여 견책 받은 후 운양궁에서 우사(憂死)하였다.
  18. 18)후한 초의 학자로, 참위(讖緯)를 배척하고, 혼천설(渾天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신론(新論)』 29편이 전한다.
  19. 19)전한말(前漢末)의 외척으로 전권을 장악, 나중에 왕조를 찬탈하여 신(新) 왕조(9~23)을 세웠다.
  20. 20)본문은 ‘파(頗)’이고 『광홍명집』은 ‘고(顧)’이다. 후자의 편이 내용상 더 타당하다.
  21. 21)진시황이 순수(巡狩)하다 죽은 곳이다.
  22. 22)한무제가 죽은 곳이다.
  23. 23)자료에 따라 셋째 또는 넷째로 되어 있다.
  24. 24)손성(孫盛)에 대해서는 본문의 다음 글 「노자의문반신(老子疑問反訊)」의 끝에 본서의 집논자(集論者)인 도선(道宣)이 소개한 글이 있다.
  25. 25)본문은 『광홍명집』 제5에도 거의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26. 26)기자(箕子)와 주(周)의 문왕(文王)이 똑같이 은(殷)의 주왕(紂王)에 의해 갇혀 죽게 되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기자는 은이 멸망한 후 무왕(武王)에 의해 풀려난 후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치도(治道)를 가르쳐 주고 동북에 땅을 얻어 국가를 세웠으며, 문왕은 그 신하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나 제후의 지원을 얻어 은의 주왕(紂王)을 벌(伐)하는 기초를 이루었는데, 이 구절은 이 고사(故事)를 든 것이다.
  27. 27)후직(后稷)은 주족(周族)의 시조(始祖)이고, 설(偰)은 은족(殷族)의 시조인데, 모두 요임금 때 그를 보좌하는 관리였다고 한다.
  28. 28)탕왕은 하(夏)의 걸(傑)을 벌(伐)하여 은왕조(商王朝)를 세웠고, 주의 무왕(武王)은 은의 주(紂)를 벌하여 주(周)왕조를 세웠다. 이 때 각각 이윤(伊尹)과 여상(呂尙:강태공)이 재상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29. 29)은나라의 현자(賢者)로서 고서(古書)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는 노팽을 노자와 팽조(彭祖:夏와 殷에 걸쳐 700년 장수했다는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정현과 왕필).
  30. 30)『장자(莊子)』 「변무(騈拇)』편에 보이는 비유로, 쓸데없는 짓ㆍ무용지물ㆍ군더더기를 뜻한다.
  31. 31)경문은 ‘선(宣)’인데 ‘실(實)’로 된 판본도 있다(宮本). 양쪽 다 뜻이 통하나, 후자를 택하였다.
  32. 32)『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 글이다.
  33. 33)본문은 ‘유닉원이어기인(猶匿怨而於其人)’인데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대정신수대장경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 세 본(本)과 구송본(舊宋本)은 이 구절의 ‘어(於)’가 ‘우(友)’로 되어 있어 뜻이 통한다. 따라서 ‘어’는 ‘우’의 오자(誤字)일 것이다.
  34. 34)진(晉)의 배외(裵頠)를 말한다.
  35. 35)위진(魏晉) 시대에 이른바 현학(玄學)이 크게 유행하여 노장(老莊)의 현허(玄虛)가 크게 존숭되었다. 특히 왕필(王弼)은 『노자』를 주(注)한 데서 ‘무(無)’를 본으로, ‘유(有)’를 말로 해석하고, ‘무’를 만물의 ‘이(理)’다 하여 자연에 맡겨 따르고 작위(作爲)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배일민은 이를 허탄지병(虛誕之病)이라 비판하고, 「유승론」과 「귀무론」을 지었다. 여기에서 그는 ‘유’를 만물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승론」은 『진서(晉書)』 「배외전」에 보이고, 「귀무론」은 실전(失傳)되었다.
  36. 36)탕왕은 하나라의 걸왕을 벌(伐)하고 은나라를 세웠다.
  37. 37)때에 따라 그렇게 마땅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38. 38)『광홍명집』 제5권에 거의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39. 39)『노자도덕경』 상편 제1장. 판본에 따라 ‘현(玄)’자가 ‘원(元)’자로 된 것도 있으나, 뜻은 서로 통한다. 이하 『노자도덕경』의 장수(章數) 인용은 『제자집성(諸子集成)』 제3권(上海書店)에 실린 「노자본의(老子本義)」(魏源이 지음)에 의한다. 장의 순서가 다른 판본과 조금 다르다.
  40. 40)상편 제2장.
  41. 41)본문이 다음에 빈칸이 하나 있고, 다음에 ‘현명함을 존숭하지 않으면’으로 이어지는데, 그 빈칸에 ‘하(下)’자, 또는 ‘하우도경왕(下又道經曰)’이 채워져야 할 것이다.
  42. 42)상편 제3장.
  43. 43)상편 제20장.
  44. 44)상편 제27장.
  45. 45)하편 제42장.
  46. 46)하편 제70장.
  47. 47)하편 제36장, 주(注)에 ‘모주양부주교(母主養父主敎)’라 하였다.
  48. 48)상편 제4장.
  49. 49)상편 제4장.
  50. 50)요임금이 당시 서민이었던 순(舜)을 등용하고, 이어 임금자리를 선양(禪讓)한 것을 말한다.
  51. 51)상편 제13장(河上公本 제14장). 이 구절의 인용은 중간에 한두 구(句)씩 빠져 있는데, 실수로 빠뜨린 것인지, 일부러 생략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고로 빠진 구절은 다음과 같다. “……위일(爲一), 기상불교기하불매(其上不皦其下不昧)…… 시위무상지상(是謂無狀之狀)…….”
  52. 52)상편 제18장(河上公本 제21장).
  53. 53)상편 제25장(河上公本 제29장). 이 인용 구절은 앞뒤 구절의 순서가 바뀌어져 인용되었다.
  54. 54)상편 제16장(河上公本 제19장).
  55. 55)상편 제7장(河上公本 제8장). 인용된 두 구(句) 사이에 ‘심선연(心善淵)’의 구가 빠졌다.
  56. 56)본문은 ‘퇴지장주운(退至莊周云)’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광홍명집』의 이본(異本)에 ‘체지(逮至)’로 되어 있는 것이 있어 이에 따른다.
  57. 57)춘추시대 제나라 대부, 나중에 제나라 군주를 죽이고 집정(執政)하였으며, 전성자(田成子)ㆍ전항(田恒)이라고도 칭한다.
  58. 58)진말한초(秦末漢初)의 흉노 선우(單于:장군)로서 자신의 부친을 죽이고 자립하여 동호(東胡)와 월지(月氏)를 제압한 후 한(漢)을 크게 위협하였다.
  59. 59)59장(河上公本 제70장).
  60. 60)제42장.
  61. 61)본문은 ‘배실(背實)’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광홍명집』의 이본(異本)에 ‘패보(佩寶)’로 되어 있는 것이 있어 이에 따른다.
  62. 62)제34장(河上公本 제39장).
  63. 63)하상공본(河上公本) 제58장.
  64. 64)이 동진 시기에는 이른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 하여 귀족 관료 가문의 자제는 그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부분 자동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손성은 그 부친이 고관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로서 관직에 오른 것이다.
  65. 65)『광홍명집』에는 보이지 않는 구(句)이다. 혹시 잘못 붙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66. 66)현재 실전(失傳), 청나라 탕구(湯球)가 여기저기서 잔문(殘文)을 모은 집본(輯本)이 있다.
  67. 67)손성이 지은 이 사자(史書)는 아마 『위씨춘추(魏氏春秋)』가 아닌가 한다.
  68. 68)윤문자와 공손술은 『한서(漢書) 예문지』에 의하면 모두 명가(名家)에 속한다.
  69. 262)69)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70. 70)『논어』 계자(季子)편.
  71. 71)후한 초기의 인물로 『한서(漢書)』의 저자이다.
  72. 72)육조(六朝) 시대의 유송(劉宋)을 말한다.
  73. 453)73)이 송문제(宋文帝)는 매우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는데, 이른바 ‘원가(元嘉)의 치(治)’란 그의 통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원가(元嘉)는 그 때의 연호 이름이다.
  74. 74)주진(西晉) 영가 연간에 오호의 침략을 받아 화북 지역을 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晋), 송(宋)으로 이어짐을 말한다.
  75. 75)본문은 왕도(王道)이나 왕도(王導)가 옳다.
  76. 1029)76)서주 초기의 연대 비정(比定)은 아직 불확실하여 여러 설이 있다. 주나라 소왕(昭王)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B.C.1041~B.C.1022, B.C.1000~B.C.975 등 여러 설이 있다.
  77. 77)천(天)ㆍ지(地)ㆍ인(人) 세 가지 사항을 갖추어 점복으로 살펴보아야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78. 78)도교에서 반드시 도서(道書)는 대부분 천(天)에서 내려 보낸 것으로 되어 있어 천서(天書)라 부르기도 한다.
  79. 79)유(有)ㆍ무(無)ㆍ유이무(有而無)ㆍ비유이비무(非有而非無), 일(一)ㆍ이(異)ㆍ일이이(一而異)ㆍ불일이불이(不一而不異), 상(常)ㆍ단(斷)ㆍ상이단(常而斷)ㆍ불상이부단(不常而不斷)을 말한다. 이 네 구가 모두모순이고 잘못된 견해임이 『대승입능가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의 도처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을 이 네 구의 어느 한 쪽에도 둘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네 구에 마음을 둘 박 없으니 곧칠체처에 마음을 둘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 마음을 어디에 둘 바가 없이 깨어 있는 것이 곧 선(禪)이다.
  80. 80)법화ㆍ열반ㆍ화엄 등의 원교(圓敎)에서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여래(如來)ㆍ불성(佛性)ㆍ법신(法身)을 설함을 말한다.
  81. 81)여기서는 불교와 함께 노자도 아울러 신봉하는 이들을 말한다. 당시의 대부분 불제자들이 불교와 노자를 함께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무제는 함께 신봉하는 것은 청정한 믿음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82. 82)여기서는 지륜(地輪)ㆍ수륜(水輪)ㆍ풍륜(風輪)ㆍ허공륜(虛空輪) 등 사물의 물질적 차원을 분석한 교법을 말하는 것이다. 금륜(金輪)은 곧 금강륜(金剛輪)으로서 영원불멸의 불성(佛性)ㆍ법성(法性)ㆍ진여(眞如)를 가리키기도 한다.
  83. 83)부처님이 설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교법의 분류이다. 즉, 화엄시(華嚴時)ㆍ녹원시(鹿苑時)ㆍ방등시(方等時)ㆍ반야시(般若時)ㆍ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를 말한다.
  84. 84)일체법의 성품을 다섯 가지로 말한 것. 명(名)ㆍ상(相)ㆍ망상(妄想, 分別)ㆍ정지(正智)ㆍ여여(如如)를 말한다. 『능가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85. 85)불법수행의 총체인 37조도품 가운데 여섯 번째의 행. 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제각분(除覺分)ㆍ사각분(捨覺分)ㆍ정각분(定覺分)ㆍ염각분(念覺分).
  86. 86)후한말 천사도(天師道:五斗米道)를 연 장릉(張陵)ㆍ장형(張衡)ㆍ장로(張魯)의 삼대(三代)를 말한다.
  87. 87)『포박자』를 저술한 갈홍(葛洪, 283~343)과 그의 족손(族孫) 갈소보(葛巢甫)를 가리키며, 갈소보는 『영보경(靈寶經)』을 저술하였다.
  88. 88)원문에는 성(姓)만 표기되어 있으나, 육수정 이전에 활동한 도교 인물로서 치성(郗姓)인 자로는 치검(郗儉) 외에 치감(郗鑑)ㆍ치음(郗愔)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위와 마찬가지로 육수정 앞에 장성(張姓)으로 활동한 도교 인물로는 장수 외에도 장각ㆍ장보ㆍ장제ㆍ장진 등 매우 많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89. 89)도교의 신들에게 제의(祭儀) 봉행으로 기구(祈求)를 위주로 하고 과의(科儀) 도교를 말한다.
  90. 90)『북제서(北齊書)』 본기에는 상(詳)이 양(洋)으로 되어 있다.
  91. 91)당시 동위(東魏) 정권의 실권은 문선제의 부(父)인 고환(高歡) 이래 고씨가 잡고 있었다. 동위의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92. 92)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통치 시기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 하는데, 중국 역사상 잘 다스려진 시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93. 93)본문은 ‘조선사문잠제왈(稠禪師問簪帝曰)’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문(問)’은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 이 ‘문’자가 없는 판본도 있다.
  94. 94)본문은 ‘영북행(令北行)’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금북행(今北行)’으로 된 판본이 있고, 내용상 이것이 옳다.
  95. 95)본문 ‘상태재(商太宰)’에서의 상(商)은 상의 후예인 송(宋)을 가리킨다.
  96. 96)『열자(列子)』 「중니(仲尼)」편에 있는 글이다.
  97. 97)『열자』 「황제」편에 있는 내용이다.
  98. 98)오호십육국 가운데 하나인 후조(後趙, 319~351)를 세웠다.
  99. 99)전진(前秦)의 세조(世祖, 357~385)를 말한다.
  100. 100)오호십육국 시대의 후진(後秦, 384~417)을 말하며, 황제가 요성(姚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