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2_0635_b_01L
도선율사감통록(道宣律師感通錄)


석도선(釋道宣) 지음
주법장 번역


도선율사가 하늘과 감통한 전기[宣律師感天侍傳]

나는 일찍이 진(晋)나라 태상(太常)인 간보(干寶)1)가 찬술한 『수신록(搜神錄)』2)의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고인이 된 진(晋)나라 중모현(中牟縣)3)의 현령이었던 소소(蘇紹)는 재주와 식견(識見)이 있어서 명계(冥界)의 옥졸들을 감응시켜 대낮에도 그들의 모습을 자기 집에 직접 드러낼 수 있었다. 여러 친척과 친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는데 음식을 먹는 모습과 이야기하고 웃는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이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를 물었더니 지금도 중모(中牟)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소가 읊었던 많은 부(賦)를 들려주면서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렵다고들 한다.
여러 사람들이 전하는 부는 다음과 같았다.

정기(精氣)가 운행하다가 내 육신을 떠나니
정신의 아득함이여, 그윽한 명계(冥界)를 떠돌아다니네.
북제(北帝)에게 돌아가 풍경(酆京)4)에 이르니
그 높은 담 빼어난 성곽의 장엄함이여.

그 봉궐(鳳闕:宮闕)에 이르러 천제(天帝)에게 글을 올리니
복상(卜商)5)이 곁에 있고, 안생(顔生:顔回)이 그 옆방에 있네.
공자 같은 대성(大聖)을 직접 보고 양성(梁成)을 노래했네.
오(吳)나라의 계찰(季札)6)을 희구하니 그 영명함이 뛰어나네.

청론(淸論)에 겨루니 그 인품 훌륭하고
화조(花藻)를 펼쳐 놓은 듯 문채가 찬란하다.
이 몸이 솟아올라 곤륜산과 영주(瀛洲)7)에 오르고 싶구나.
이 많은 복을 받아 천 년을 누리리라.

그 밖에도 많지만,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처음 그 부(賦)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잊혀 가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양(梁) 나라 초에 강필(江泌)의 여식이 정토(淨土), 대장엄(大莊嚴) 등 30여 가지의 경(經)을 염송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위에서 말한 『수신기(搜神記)』의 기이한 일과 같은 경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연은 나의 삶에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금년 2월 말경에 천인(天人)과의 감통(感通)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전에 안면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천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님께서 저술한 『속고승전(續高僧傳)』ㆍ『광홍명집(廣弘明集)』은 성화(聖化: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때문에 유령(幽靈)들도 따라 기뻐하며 찬탄합니다. 율부(律部)의 『초록소의(抄錄疏儀)』에 대해서도 견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경물(輕物)8)ㆍ중물(重物)9)의 처리에 있어서 약간의 과실이 있었으나 이것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번역하는 이가 어떻게 왕(王)의 고귀한 옷을 백의(白衣:在家人)의 속복(俗服)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중물이 아니니, 이에 구루(氍氀:모직물)로 여법하게 만든 것이 경물에 속합니다. 또 왕이 입는 고귀한 옷은 비구의 3의(衣)10)와 같고 값이 10만 금입니다. 그러므로 고귀한 옷이라고 하여 스님들에게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경물의 한계가 있으니 백의(白衣)와 외도(外道)의 옷은 본래 출가자가 입지 않습니다. 3의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것이니 3의를 입는 이는 결정코 해탈을 얻기 때문에 백의(白衣)의 속복(俗服)을 부처님께서 단호하게 입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혹 입적한 이가 있으면 그의 물건은 중물(重物)에 속합니다. 구루 3의의 모양과 크기는 3의와 같게 하되, 변방 지역은 가죽으로 된 와구(臥具)를 허용하니 3의에 있어서도 제정한 가사(袈裟)를 바깥에 입고 부드러운 털옷을 속에 입는 것은 몹시 추운 나라에서 불법을 닦는 이가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도록 부처님께서 배려하신 것이지 경물을 제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앞의 잘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나중에 잘 맞추어 따라야 합니다. 여래께서 생존해 계실 적에도 오히려 후에 제정한 것이 있으면 앞의 것은 폐지하였는데 어찌 오늘날에 있어서도 잘 맞지 않는 것을 잘 맞도록 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윽고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한 천인이 와서 공경히 절한 다음 인사말을 하고 나서 말하였다.
“제자의 성(姓)은 왕(王)씨이고 이름은 번(璠)이라고 하며, 대오(大吳)11)의 난대신(蘭臺臣)이었습니다. 마침 어떤 스님이 건업(建鄴:吳의 수도)에 맨 처음 도착하자 손주(孫主:孫權)가 그 스님을 인정하였습니다. 곧 그는 희유(希有)한 상서로움을 감득하여 신이한 묘탑(廟塔)을 세우니 그 때에 천지의 신기(神祇)가 모두 신령한 가피를 입어 21일 만에 사리(舍利)를 감득하였습니다. 오주(吳主)가 구리병에 담아서 구리 쟁반에 쏟아 부으니 사리가 부딪치면 쟁반이 깨져 버렸고, 더 나아가서 불로 태우고 망치로 쳐도 사리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감택(闞澤)ㆍ장욱(張昱)의 무리도 천인(天人)이 보호하고 도와서 그 몸 가운데에 들어가 정신을 맑고 상쾌하게 하였으니 곧 대답하였는데도 모두 다 맞았습니다. 이들이 지금은 모두 천상(天上)에서 불법을 널리 알리고 옹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는 남천(南天)의 위장군(韋將軍)12) 휘하의 사자(使者)인데 장군이 하는 일이 매우 많아 3주(州)의 불법을 옹호하고 분쟁이 있거나 위험한 일이 있는 곳에 직접 가서 화해시킵니다. 또한 남천을 따르게 하고 막힌 일을 오래지 않아 성취케 하며 제자들로 하여금 스님과 함께 의론케 하는 일을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어떤 천인이 와서 말하였다.
“제자의 성(姓)은 나씨(羅氏)고 촉(蜀)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촉나라의 말로 율상(律相)13)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적에 촉나라 풍속으로 예의를 갖추었으며 말하는 연유(緣由)도 매우 조리가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해 낼 수가 없다. 또 한 천인이 와서 말하기를 “제자의 성(姓)은 비씨(費氏)입니다”라고 하며 공경히 절한 다음 말하였다.
“제자는 가섭불(迦葉佛) 때에 남천(南天)의 위장군 휘하에 태어났는데 그 당시 모든 하늘은 욕락(欲樂)에 취해 있었으나 제자는 숙원력(宿願力)으로 하늘의 욕락을 그리워하지 않고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아 비니(毘尼:戒律)를 공경하였습니다. 위장군도 천진난만한 범행[童眞梵行]을 닦아 하늘의 욕락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한 왕마다 휘하에 8장군을 거느리니, 네 왕이면 모두 32장군으로 이러한 장군들이 4천하(天下)를 두루 오고 가면서 모든 출가인(出家人)을 옹호하고 받듭니다. 4천하 가운데 북천(北天) 1주(州)는 약간 불법(佛法)이 있지만 나머지 3천하는 불법이 크게 유행하나 출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금계(禁戒)를 범하여 여법(如法)하게 지키는 이가 적고, 동천하(東天下)와 서천하(西天下)의 사람들은 힐혜(黠慧:세속의 지혜)도 부족하고 번뇌도 많아 교화하기 어려우며, 남방(南方) 1주는 비록 범죄를 짓는 이들이 많으나 교화하면 잘 따라 주어 마음을 쉽게 조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실 적에 직접 부촉하시되, ‘불법의 수행자를 수호하여 마군(魔軍)의 꾀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만약 수호하지 않으면, 파계(破戒)할 것이니 누가 나의 교법(敎法)을 수행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의 유계(遺誡)를 감히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비록 금계(禁戒)를 범하는 이를 보더라도 가엾게 여기어 수호해 줍니다. 만약 한 가지 선행(善行)을 보기만 해도 만 가지 과실을 허물삼지 않으며 그 일들에 대해서 허물을 잊고 이전의 실수를 따지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의 악취가 허공 위로 40만 리까지 풍기어 모든 청정한 하늘들이 그 악취를 싫어하더라도 다만 부처님의 부촉(付囑)을 받들어서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과 더불어 머물러야 하므로 모든 하늘은 감히 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장군은 32장군 가운데서 가장 크게 수호하니 많은 마자(魔子)와 마녀(魔女)들이 비구를 깔보고 희롱하거나 도력(道力)이 미약한 이들을 현혹시키고 어지럽게 하면 장군은 급히 달려가서 그들을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4왕(王)의 처소로 가는데, 가는 즉시 왕들이 모두 일어나서 그를 맞이합니다. 위장군이 동진행(童眞行)을 닦고 정법(正法)을 수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성품(性品)이 계율(戒律)을 좋아하니 여래께서 일생 동안 제정하신 비니(毘尼)와 좌중(坐中)에서 들은 그 계법(戒法)의 율문(律文) 가운데 간직된 이치를 질문하여 막혀서 잘 몰랐던 것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동화(東華)의 삼보소유산(三寶素有山)에 해수석(海水石)이 자주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영험하게 생각하여 공경합니다”라고 하여 그 유래를 의논하였으나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서로 문답을 하였다. 또 많은 서적들이 이치를 포괄하고 있지만 널리 살펴본 적이 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약간은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고 세속의 것과 다른 전적(典籍)을 희구하였기에 수신(搜神)ㆍ연신(硏神)ㆍ명상(冥祥)ㆍ명보(冥報)ㆍ정이(旌異)ㆍ술이(述異)ㆍ지괴(志怪)ㆍ녹유(錄幽) 등의 책들을 열람한 적이 있어서 의심이 없었는데 하물며 희유하신 부처님께서 천인(天人)에게 하신 말씀과 용맹정진하게 하는 정곡을 찌르는 글과 보호하고 도와 주는 형신(形神)과 성탑(城塔)을 수지(守持)하는 것들이겠는가? 그래서 이전에 들었던 일들이 헛된 것이 아닌 줄을 알았다. 뒤에 모든 인연을 서술하고 아울러 내용에 따라서 설명을 붙인다.
불사(佛事)를 질문하였다.
“익주(益州:現 泗川省)의 성도(成都)에 있는 다보석불(多寶石佛)은 어느 시대에 조성(造成)된 불상이며 언제 땅에서 솟아올랐는가?”
답하였다.
“촉(蜀)의 도읍(都邑)은 원래 청성산(靑城山) 위에 터를 잡았는데 지금의 성도대해(成都大海) 지역입니다. 과거세(過去世)의 가섭불(迦葉佛) 때에 어떤 사람이 서이하(西耳河:서역의 강 이름)에서 그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다보불의 전신(全身)을 닮은 모습이 서이하의 취두산사(鷲頭山寺)에 있었기에 성도(成都)의 어떤 사람이 그곳에 가서 불상을 모시고 돌아오다가 지금의 다보사(多寶寺)가 있는 부근에 이르렀을 때에 해신(海神)이 발로 배를 밟아서 수장(水葬)되었습니다. 처음 불상을 모시러 갔던 사람이 불상을 모시고 지금의 다보사가 있는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해신의 아들이 해안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산지(山芝)가 해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해신이 울부짖으며 배에 있던 사람과 불상(佛像)을 물 속에 수장시켜 버린 것입니다. 다보불을 봉안(奉安)했던 옛 취산사(鷲山寺)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고 그 터에 탑(塔)이 한 개 있는데 항상 광명을 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곳을 가려면 낭주(郎州)14)에서 3천 리 남짓 지나가야 서하(西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하는 매우 광활하여서 백 리나 5백 리 정도 됩니다. 서이하의 중간 지역인 산주(山洲)에 오래된 절과 불경과 불상은 남아 있으나 머물고 있는 스님은 없었으며, 경(經:『法苑珠林』)의 내용도 이 글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많은 백성들이 재물을 모아 매년 두 번씩 고탑(古塔)에 공양하고 있었는데, 탑의 모양은 계단(戒壇)처럼 생겼으며 3층으로 된 섬돌 위에는 엎어 놓은 듯한 가마솥이 수없이 있습니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단지 신총(神塚)이라고 말합니다. 늘 광명을 내며, 사람들은 소박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어 복(福)을 빕니다.”
그 지방은 서쪽으로 수주(嶲州)15)와의 거리가 2천여 리인데 천축(天竺)까지의 거리를 물으니 “그다지 멀지 않아서 자주 그곳에 가는 이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晋)나라 때 어떤 스님이 땅바닥이 흙무덤처럼 솟아오른 것을 보고 평평하게 하려고 했으나 끝내 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툭 갈라진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한 길 남짓 파들어 가니 불상과 사람의 뼈가 배[舩] 안에 있었습니다. 그 해골의 팔뼈와 정강이뼈가 아주 커서 지금 사람들의 몇 배나 되었으니 곧 가섭불 시대의 염부제(閻浮提) 사람들로서 수명이 2만 세였습니다. 오늘날은 수명이 짧고 형체가 적은 것을 보통으로 여깁니다. 처음 꺼낼 적에 끌어내기 어려운 것을 본 제자가 노인으로 변하여 손가락으로 방편을 써서 잠깐 사이에 꺼냈습니다. 그리고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법난(法難)을 만나서 잠시 숨겨 두었다가 법난이 끝나자 다시 꺼냈는데 촉나라 사람들은 다만 신령스럽게 땅에서 솟아나온 줄만 알고 그 근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발바닥에 다보(多寶)라고 쓰인 글자를 보고 다보불이라고 이름하고 절 이름을 다보사(多寶寺)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다보(多寶)라고 쓰인 예서(隸書)16)는 3진(秦)17) 시대에 나온 서체인데 어떻게 가섭불 시대에 신서(神書)가 있었겠는가?”
대답하였다.
“진(秦)의 이사(李斯)18)가 제정한 예서는 옛적의 예서를 이어서 근대에 부흥시킨 것으로 고불(古佛)의 시대에도 흥행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남주(南州:閻浮提)를 보니 4면(面)에 1천여 개의 주(州)가 있고 장엄된 염부제의 1만여 개 나라의 문자(文字)와 언음(言音)이 지금의 당국(唐國)과 같은데 단지 바닷길이 멀어서 수십만 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하는 이가 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봉작(封爵)을 받은 고루한 이들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스님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양(梁)나라의 고야왕(顧野王)19)은 태학(太學)20)의 대박사(大博士)로서 글자의 근원을 찾아 두루 연구했는데 출몰(出沒)한 시기가 일정하지 않자, 『옥편(玉篇)』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춘신군(春申君)21)의 묘(墓)를 열고 그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모두 예자(隸字)로 되어 있었으며, 춘신군의 명문을 살펴보니 주대(周代) 6국(國)22)은 동시에 예문(隸文)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 때는 6국이 병탄(倂呑)되던 때여서 이 나라의 전서(篆書)와 예서 등 모든 서체도 오히려 아득하여 분명히 알 수 없거늘 어찌 가섭불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귀와 눈으로 듣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또 질문하였다.
“지금의 경성(京城) 서쪽에 고사토대(高四土臺)가 있는데 떠도는 말에 의하면 창힐(蒼頡)23)이 글씨를 만든 대(臺)24)라고 하거늘, 어찌하여 예자(隸字)가 옛적에 이미 있었다고 말하는가?”
대답하였다.
“창힐이 이 토대 위에 흙을 더 쌓아 대(臺)를 높게 만들고 새의 발자국을 관찰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 아닙니다. 또 창힐의 전기(傳記)와 이 토대는 그 근원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황제(黃帝)의 신하’라 하고, 어떤 이는 ‘고제(古帝)의 왕’이라고도 합니다. 새의 발자국을 관찰하여 만들었다는 글자도 시대에 따라서 한 번 변화한 뒤로는 지금은 단절되었기 때문에 더 말하더라도 아무런 이로움이 없으니 애써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성(姓)이 육씨(陸氏)이고, 이름이 현창(玄暢)인 천인(天人)이 와서 인사하고 말하였다.
“제자는 주(周)의 목왕(穆王)25) 때 하늘에 태어났으나 본래는 가섭불 때의 천인(天人)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 중생을 교화하려고 잠깐 나타났었습니다. 질문하신 고사대(高四臺)는 본래 가섭불이 세 번 설법하시어 중생을 제도하신 곳입니다. 그리고 주(周) 목왕 때에 문수(文殊)ㆍ목련(目連)이 와서 목왕을 교화하였는데 목왕이 그 교화를 따랐습니다. 곧 열자(列子)26)가 화인(化人)27)이라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화인이 목왕(穆王)에게 나타나서 ‘고사대는 가섭불께서 설법하신 곳이며 이 도량에서 세 번 설법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秦)의 목공(穆公)28) 때에 부풍(扶風)29) 지방에서 석불(石佛) 하나를 얻었는데 목공이 아무 것도 몰라 이것을 마방(馬坊:마굿간)에 방치하여서 오물로 이 불상이 더렵혀졌습니다. 이에 신(神)이 진노하여 목공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목공은 또 꿈 속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불려가 여러번 심한 꾸지람을 듣고 깨어났는데 시신(侍臣)인 유여(由余)30)에게 이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고서(古書)를 읽었는데 주(周) 목왕 때에 화인(化人)이 이 땅에 오셨으니 곧 불신(佛神)으로, 목왕이 신봉(信奉)하여 종남산(終南山)31)에 중천대(中天臺)를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1천여 자[尺]나 되는데 그 터가 아직껏 남아 있습니다. 또 창힐(蒼頡)의 대(臺)에 신묘(神廟)를 만들어 삼회도량(三會道場)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목공께서 병에 걸리신 것은 아마도 불신(佛神)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목공이 유여의 말을 듣고 크게 두려운 생각을 일으켜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최근에 석인(石人)의 형상을 한 개 얻었으나 의관(衣冠)이 지금 우리들의 의관과 전혀 맞지 아니하다 하여 마방에 방치하였는데 아무래도 불신인 것 같소이다’라고 하자, 유여가 그 말을 듣고 마방에 가서 보고 대답하기를 ‘이것은 진짜 불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목공이 곧바로 석불상을 깨끗하게 목욕시켜서 청정한 장소에 안치하자 그 석불상이 광명을 뿜었는데 목공이 또 두려운 생각이 들어 신(神)이 진노했다고 여기고 3생(牲)32)을 잡아서 제(祭)를 올리자 모든 신들이 곧바로 멀리 가져다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목공이 또 크게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그 까닭을 유여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불신(佛神)은 청결하므로 술과 고기를 올리지 않습니다. 만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를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하므로 향(香)을 피워서 공양할 뿐이고 제사를 지내더라도 떡과 과일 등만 올릴 수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목공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곧 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여 뛰어난 공인(工人)을 유여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날 주(周) 목왕이 지은 절 옆에 아주 뛰어난 장인[工匠]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드디어 고사대(高四臺) 남쪽 마을에서 노인 한 사람을 찾았는데 성(姓)이 왕씨(王氏)이고 이름은 안(安)이었으며 나이가 1백 80세였습니다.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삼회도량에서 불상을 조성한 적이 있었지만 신(臣)은 이제 나이가 먹어 늙고 힘이 없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북쪽 마을에 형제 네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들은 일찍이 삼회도량 안에서 모든 장인을 거느리고 일을 했었습니다. 청컨대 그들에게 불상을 조성케 하십시오’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동상(銅像) 한 개를 완성하니 32상(相) 80종호(種好)가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목공(穆公)이 크게 기뻐하여 큰 상을 내리니 그 사람들은 재물도 얻고 아울러 공덕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토대(土臺) 위에 중각(重閣:2층 누각)을 지었는데 높이가 3백 자[尺]나 되었으며 당시의 사람들은 고사대(高四臺)라고 부르거나 고사루(高四樓)라고 불렀습니다. 그 공인(工人)들의 성(姓)은 고씨(高氏)이고 큰 형의 이름은 사(四)였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형제 네 사람이 함께 건립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혹자는 큰 형의 이름을 취하여 누(樓)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사(高四)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목련(目連)은 부처님 당시에 이미 열반했는데 어찌하여 다시 나타났는가?”
대답하였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섯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목련은 대목련(大目連)이 아닙니다. 우(宇)의 문주(文周) 때에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범승(梵僧)으로 화현(化現)하여 이 땅에 와서 말하기를 ‘가섭불(迦葉佛)께서 설법하신 곳과 문수(文殊)가 머무는 청량산(淸凉山)에 가 예배하리라’고 하였으나 도속(道俗)에게 두루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는데 그 때 18세 정도 되는 지맹법사(智猛法師)라는 이가 범승에게 되묻기를 ‘어떤 인연으로 두 성인(聖人)의 남은 자취를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자, 범승이 대답하기를 ‘진(秦)의 도성(都城) 남쪽으로 20리를 가면 창힐이 글을 지은 대(臺)가 있는데 바로 그 지역입니다.’ 하자 지맹법사가 또 말하기를 ‘사하(沙河)의 남쪽 50리와 청산(靑山)의 북쪽 40리 지점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범승이 다시 묻기를 ‘사하와 청산은 어디를 말합니까?’라고 하자, 지맹법사가 대답하기를 ‘위수(渭水)와 종남산(終南山)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범승이 곧바로 위수에서 남쪽으로 곧장 나아가서 드디어 고사대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여기가 고불(古佛)께서 설법하신 곳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지맹법사도 따라가서 예배하였는데 오래지 않아서 범승의 소재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맹법사가 장대(長大)하여 태상위경(太常韋卿)을 위해서 설법할 때 그 대(臺)가 있는 곳에 절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그가 진(秦)나라 주왕(周王)에게 아뢰었습니다. 보리사(菩提寺) 서쪽의 남향에 있는 불수(佛首)는 곧 삼회사(三會寺)의 불(佛)입니다. 석가여래께서 가섭을 제도하신 뒤 12년 만에 이 대(臺)에 오시어 그 대 아래에서 가섭불의 사리(舍利)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周) 목왕(穆王)이 몸소 대하(大夏)33)에 갔을 적에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고탑(古塔)이 있는데 돌아가면 예배할지어다’라고 하시자, 목왕이 ‘어느 지방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호경(鄗京)34)의 동남쪽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서천축(西天竺)은 별전(別傳)에 있습니다.
거세장년(去歲長年)은 사자국(師子國)35)의 승려로 99세이고 3과(果:阿那含果)를 얻었습니다. 그가 이 거룩한 성인의 자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맨발로 이곳 청량산을 찾아오니 나라에서 공양물을 공급하므로 금년 하안거(夏安居)를 그 곳에서 보내면서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문수가 청량산에서 5백 선인(仙人)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다’고 하는 말이 경(經) 가운데 글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사바세계에 머무른 보살이고 사바(娑婆)는 대천세계(大千世界)의 통칭인데 어찌하여 이 지방에만 치우쳐 있는가?”
대답하였다.
“문수는 모든 부처님의 원사(元師:스승)이며 인연에 따라서 이익을 나타내고 근기에 맞추어 변화하는 모습이 같지 않으니 대사(大士:菩薩)의 공력(功力)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경계(境界)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룩한 지혜를 증득한 분들이 청량산에 많이 계십니다. 지금도 오대현(五臺縣) 청량부(淸凉府)의 선화산(仙花山)에는 때때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지금 오대산(五臺山) 중대(中臺)의 동남쪽으로 30리 지난 지역에 대부영취사(大孚靈鷲寺)36)가 있는데 양당(兩堂)의 사이로 흐르던 시내가 아직도 있다. 남쪽으로 화원(花園)이 있는데 2경(頃)37) 정도 되고 사시사철 꽃이 피어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이는 ‘동한(東漢)의 명제(明帝) 때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때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서로의 말이 같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인가?”
대답하였다.
“모두 두 황제가 지었습니다. 옛날 주(周) 목왕(穆王) 때에도 이미 불법(佛法)이 있었으니 이 산이 신령하고 기이하여 문수(文殊)가 살았습니다. 주 목왕이 절을 짓고 공양하였으며, 아육왕(阿育王)도 탑(塔)을 세웠습니다. 동한의 명제 초에 마등(摩騰:迦葉摩騰)이 천안(天眼)으로 탑이 있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청하여 절을 건립하였으며, 산의 형상이 영취(靈鷲)38)와 같아서 대부(大孚)라고 이름하였으니, 부(孚)는 믿음[信]의 뜻입니다. 황제가 불법의 이치를 믿고 절을 건립하여서 사람들에게 불법을 권하였습니다.
원위(元魏)의 효문제(孝文帝)는 북대(北臺)와 멀지 않은 까닭에 항상 와서 참배하다가 인마(人馬)의 행적이 돌 위에 분명히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 자세한 사정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오직 오대(五臺)만이었겠습니까? 지금의 종남산(終南山)ㆍ태백산(太白山)ㆍ태화산(太華山)ㆍ오악(五岳) 등의 명산(名山)에도 모두 성인(聖人)이 계시고 불법이 상주하기 때문에 곳곳에서 사람들이 공양을 올립니다. 반드시 청법(請法)에 참여하려면 7일 이전에 조용한 방 안에 단좌(壇座)를 안치하고 향을 피우되, 나물을 차리고 문을 닫은 다음 기원하여 구하면 감응하지 아니함이 없이 때 맞추어 오시니 범성(凡聖)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이는 청하는 인연이 아무리 많아도 공양을 마련한 자리에 불보살이 오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빈두로(賓頭盧)39) 성승(聖僧)의 형상을 만들어 봉안하고 공양하는 것 역시 이와 같습니다. 반드시 별지(別地)에 빈자리를 마련하여 그 앞에 공양 그릇을 안치하고 스님들이 공양할 때가 되면 비구스님들에게 받도록 하되, 승가(僧家)의 발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범성이 비록 수승하더라도 함께 스님의 식기(食器)와 접촉해서는 안되며 속가(俗家)에서는 속가의 식기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고요한 방 안에 안치하지 않는 이들은 모든 여타의 성중(聖衆)을 오지 못하게 하니 혹 성중이 강림하여 3천하(天下)가 동시에 공양하고 인연 따라 특별히 이르는 일이 있더라도 이 빈두로는 단 한 번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또 내가 질문하였다.
“지금 양주(凉州)의 서쪽 반화현(番和縣)번(番)의 음은 반(槃)이다의 산이 갈라져서 불상이 나왔다는데 어느 시대에 조성되었는가?”
대답하였다.
“가섭불 때에 이빈(利賓)보살이 있었는데, 이 산에 사는 사람들이 업보(業報)를 믿지 않고 살해(殺害)를 일삼으며 그 당시 거기에 거주하던 수만(數萬)의 집들 가운데서도 불법(佛法)을 존중하는 집이 없는 것을 이빈보살이 보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가람(伽藍)을 건립하고 대범천왕이 손수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 이빈보살이 신통력으로써 이 불상으로 하여금 진불(眞佛)과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걸어다니면서 설법하여 모든 사람들을 교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인도를 받고도 여전히 믿고 수지하지 않는 이가 있자 그 때에 이빈보살은 두려운 모습을 나타내 보였는데 손으로 큰 돌을 들어 마을을 내려 누르려 하였습니다. 이빈보살이 이렇게 짐짓 두려운 모습을 보여 모든 사람들을 교화하니 사람들이 곧 마음을 돌이켜 불법을 믿고 공경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던 살생의 도구들이 변하여 연꽃이 되었으며 거리와 골목마다 마치 연꽃의 종자를 심은 것 같아 상서로운 징조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비로소 신력(神力)으로 섭화(攝化)40)한 일입니다. 이빈보살은 또 모든 청신사(淸信士)들에게 권고하여 칠사(七寺)를 짓게 하니 남북으로 백 리, 동서로 80리에 산골짜기마다 승방(僧坊)과 불당(佛堂)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13년이 지나서야 건립되었습니다. 이 때 2만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출가하여 칠사에 머물러 살았는데 3백 년이 지나서야 저 모든 사람들이 현업(現業)의 힘이 커져서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현생에 가볍게 받아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에 의해 살해된 자들이 악취(惡趣) 가운데서 또 악(惡)한 원(願)을 내되 ‘저들은 우리들을 살해하였고, 아직 성인(聖人)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마땅히 저들을 해치리라. 만약 지금 해치지 않으면 저들의 악업이 곧 없어지므로 우리들은 보복할 수 없으리라’고 하여 함께 큰 불을 토해 내니 절집과 그들의 마을이 불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설사 도망쳐서 살아남았더라도 또 큰 물에 빠뜨려 죽였으니 한 사람도 살아남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곳의 산신(山神)이 절이 파괴되기 전에 이 불상을 거두어 멀리 공중에 모셨다가 절이 파괴된 후에 석실(石室) 안으로 내려 안치하고 공양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돌이 드러나니 석실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지류살하(至劉薩何)가 산에서 나온 그 불상에 예배하였는데 지류살하의 전신(前身)은 원래 이빈보살의 몸과 머리였으며 또 다른 곳에 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강표(江表)41)의 용광서상(龍光瑞像)을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구마라집(鳩摩羅什)42)이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부남국(扶南國:지금의 캄보디아)에서 얻어 온 것이라고 하면 어떠한가?
대답하였다.
“구마라집이가져 온 것이 아니고 송(宋) 효무제(孝武帝)가 부남국을 정벌하러 가서 얻어 온 것입니다. 먼 옛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3백 년 정도 되었을 적에 북천축(北天竺)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인 우루질나(優婁質那)는 신력(神力)을 장인[工匠]에게 가피(加被)하여 3백 년 동안 큰 돌산[大石山]을 파서 불굴(佛窟)을 안치하였는데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5층 규모로 되어 있었으며 상층의 높이는 3백여 자였습니다. 미륵보살이 지시(指示)해 주기를 청하여 단상(檀像)43)을 조성하여서 안치하였으니, 『현장법사전(玄奘法師傳)』에는 높이가 백여 자라고 했고, 『성적기(聖迹記)』에는 ‘높이가 8길[丈]이고 족부(足符:발뒤꿈치)는 8자인데 육재일(六齋日)44)에는 항상 방광(放光)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층을 만들 때에 나한(羅漢)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공중으로 올라갔는데 세 번 왕래하여 만들었습니다. 둘째 층에는 우두전단상(牛頭栴檀像)을 안치하였고, 셋째 층에는 금불상(金佛像)을 안치하였으며, 넷째 층에는 옥불상(玉佛像)을 안치하였고, 다섯째 층에는 동불상(銅佛像)을 안치하였는데 범부(凡夫)는 이제 단지 맨 아래층만 볼 수 있고 위로 네 개의 층은 폐쇄되어 볼 수 없습니다. 석굴(石窟) 안은 빛이 밝게 비치어 사람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6백 년 정도 되었을 때 불내차(佛奈遮)나한이 있었는데 생모(生母)가 부남국에 계실 적에 어머니의 소중한 은혜를 생각하고 맨 위층에 목단상(木檀像)을 취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목숨을 마치고 양주(楊州)에 태어나 출가하여 신흥사(新興寺)에 머물며 3과(果)를 깨달아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송(宋) 효무제가 부남국을 정벌하러 가서 이 용광서상을 얻어온 것도 전부 나한의 신력(神力)에 의한 것입니다. 불내차나한의 어머니는 지금 현재에도 때때로 나부산(羅浮山)45)ㆍ천태산(天台山)46)과 서방(西方)의 여러 곳에 왕래한 자취가 보입니다. 한편 옛날 담무갈(曇無竭)47)이 다시 서방에 갔던 일이 『전기(傳記)』 5권48)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러하오니 어떻게 구마라집 법사가 등에 지고 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질문하였다.
“구마라집 법사가 그 세대에 번역한 경전을 지금까지도 이처럼 수지(受持)하는 이들이 더욱더 많아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총명하여 대승(大乘)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뛰어난 인재로서 한 세대의 보배로 여겼으며, 이후로 더 뛰어난 이가 없으니 그를 앙모(仰慕)하여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번역은 오달(悟達)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유촉하신 뜻을 얻었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세속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를 ‘그는 파계승이다’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자세히 논할 것도, 근심하여 논할 것도 아닙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지금 현재 깨달은 계위(階位)가 3현(賢)49)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불법을 크게 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역경(譯經)에 있어서도 번잡한 것은 가다듬고 빠진 것은 보충하여 근기에 맞추어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론(大論:大智度論)』 1부를 10분의 9로 줄였으니, 다른 경론(經論)의 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경이 번역되어 나온 뒤로 지성껏 독송하였으니 쇠퇴하거나 사라져 버린 일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상서로움이 감응하여 시대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새로워졌으니 이로써 헤아려 성인(聖人)의 뜻을 깊이 깨닫습니다. 또 문수(文殊)가 그로 하여금 산정(刪定)하도록 한 것인데, 특별히 항륜(恒倫)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다른 견해로써 현묘한 이치를 한꺼번에 없앴다는 비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간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방주(坊州:섬서성 中部縣) 현제사(顯際寺)가 있는 산에서 옛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어느 시대에 조성된 것인가?”
대답하였다.
“불상은 진(秦) 목공(穆公)이 조성하였고 주(周) 목왕(穆王)이 건립한 절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육왕의 넷째 딸이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여 공양하였습니다. 그 때 이 절에는 3과를 얻은 성인이 한 분 머물렀으니 진(秦)의 정승인 유여(由余)가 공경히 받들었습니다. 옛 가섭불(迦葉佛) 때에도 역시 여기에 절을 건립하였는데 현제(顯際)라는 사미(沙彌)가 지었으므로 그 본명(本名)을 따라서 사액(寺額)을 현제사(顯際寺)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지금의 옥화궁(玉華宮)50)의 남쪽 단대산(檀臺山) 위에는 전탑(甎塔)이 있는 데 그 전탑은 4면이 각각 30보(步)이고 하층(下層)이 몹시 웅장하며, 4면에는 석감(石龕)51)이 있고 곁에는 파손된 벽돌이 있다. 또 벽돌을 굽던 가마가 30여 개나 있지만 옛 일을 잘 아는 노인도 어느 시대의 것들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매일 종소리는 들린다고 하니 어째서인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목왕이 건립한 절이고 영산(靈山)이라고 이름합니다. 아육왕 때에 산신(山神)에게 명하여 이곳에 탑을 조성하였습니다. 서진(西晋)52) 말엽에 난리가 일어나자 5호(胡)53)가 난리를 평정하고 유요(劉曜)54)가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산의 전탑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자주 꿈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유요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술을 적게 마시고 색욕을 탐내지 말며, 아첨하는 신하를 내쫓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등용할지어다’라고 하셨으나, 유요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가 나중에 낙양에서 술에 취하여 말[馬] 위에서 떨어져 석륵(石勒)55)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처음에 유요는 꿈에서 깨어나자 사람들을 시켜서 산을 뒤지도록 하여 마침내 작은 전탑에 앉아 계신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꿈 속에서 친견했던 그 불상과 같았습니다. 곧바로 작은 전탑을 헐어 버리고 다시 큰 전탑을 세우니 높이가 19층이나 되었습니다. 아울러 절도 건립하였는데 매우 장엄하고 찬란하였습니다. 절의 이름을 법등사(法燈寺)라고 하고 3백여 명의 스님들을 득도(得度)시켜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유요가 죽고 전조(前趙)가 멸망한 뒤에도 법등사에서는 32명이 수도하여 3과(果)를 얻은 성인(聖人)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산신이 지금의 탑 뒤에 또 절을 건립하고 2과(果:斯陀含果)를 얻은 스님을 공양하되 산신이 직접 태백산(太白山)에 가서 지초(芝草:靈芝)를 채취하여 성승(聖僧)들께 공양하니 모두 장수하였습니다. 그 절이 지금도 그대로 있지만 범인(凡人)들은 볼 수 없으니, 들려오는 종소리도 바로 그 절의 종소리입니다. 그 탑의 본래 터가 비록 유요와 인연이 있었지만 주(周) 목왕이 절을 세웠던 곳이고 또 가섭여래(迦葉如來)의 옛 절이기도 합니다. 정관(貞觀) 연중56)에 옥화궁(玉華宮)의 북쪽 자오천산(慈烏天山)에 항상 사슴 떼가 모여 있었는데 볼 때마다 쫓아냈으나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사슴 떼가 모이는 곳을 한 길[一丈] 정도 파들어 가서 석상(石像) 하나를 얻었는데 그 길이가 한 길 정도 되었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형주(荊州)57)의 앞 대명사(大明寺)의 전단상(栴檀像)은 우전왕(優塡王)58)이 조성(造成)한 것이라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형상이 양(梁)59)나라에서 왔었다고 하고 지금 경사(京師:서울)에도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본래의 형상인가?”
대답하였다.
“대명사(大明寺)의 전단상이 본래의 형상입니다. 양(梁)의 고조(高祖:武帝)가 이미 붕어(崩御)하였으나 전단상은 형주(荊州)의 저궁(渚宮)60)에 모셔져 있었는데 양(梁)의 원제(元帝) 승성(承聖) 3년(554)에 북주(北周)61)가 양(梁)을 평정한 뒤에 장부에 기록된 보물을 모두 북주로 가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 전단상은 승진(僧珍)법사가 은밀한 고방(庫房) 속에 감추어 두었으니, 많은 재물을 사인(使人)에게 뇌물로 주고 가져 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9년(589)에 문조(文祖:文帝)가 사인(使人)인 유고(柳顧)를 보내면서 말하되 ‘절에 모실 스님들과 불상을 구하여 형초(荊楚)62)를 진정(鎭定)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유고는 바로 이 마을 사람이었니다. 유고는 특별히 전단(栴檀)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라는 명을 공손히 받들고 가서 당시의 장인인 진달(眞達)이라는 바라문승(婆羅門僧)을 얻었는데 그가 전단상을 조성하였습니다. 곧 지금의 흥선사(興善寺) 전단상이 바로 그 전단상으로 매우 신령(神靈)하고 신이(神異)합니다.
본래의 전단상은 형주에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검은 무명 베옷을 입혀 상호(相好)가 이전보다 못하였으니, 진본(眞本)의 모습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7일 뒤의 몸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검은 베옷을 입히니 장년(壯年)의 모습이 되어 원래의 모습과는 매우 달라 보였습니다. 그리고 대명사(大明寺)는 본래 고불(古佛)께서 머무셨던 곳이므로 영검한 불상을 북주(北周)로 옮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근자에 묘의(妙義)법사가 천인(天人)이 찬탄하는 감응을 얻고 깨달은 바가 있어 검은 베옷을 벗기니 갖추어진 용모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크게 신심을 내어 신령스러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온전한 전단나무로 조성되어 본래 이어 붙인 곳이 없는데도 광부(光趺)의 부위가 매우 달랐으며, 어린 어금니[蒙牙]를 조각한 솜씨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흥선사(興善寺) 전단상의 몸체는 하나하나가 이 본래의 전단상과는 맞지 않습니다.“
또 질문을 하였다.
“촉(蜀) 땅의 간주(簡州) 삼학산(三學山)의 절은 공중에 등불의 광명이 항상 밝게 비친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그 산에 보살이 머무는 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섭불(迦葉佛)의 정법(正法)시대에 최초로 건립했는데 환희왕(懽喜王)보살이 세웠으며, 절의 이름은 법등사(法燈寺)입니다. 바로 그 절에서 지금까지 항상 광명이 공중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보살(小菩薩) 3백 인이 있어 한 톨의 쌀도 먹지 않고 장수하며 항상 이 산에 머물고 있습니다. 등(燈)은 이 산의 산신(山神)인 이특(李特)이 뒤를 이어 공양하고특(特)은 옛 촉(蜀)의 임금이었다 있기에 정월(正月)에는 곳곳을 연등으로써 불사(佛寺)에 공양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부주(涪州:泗川省 涪陵縣)의 상사사(相思寺) 부근에는 옛 것이 많이 남아 있고 전서(篆書)로 된 비석이 있는데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대답하였다.
“가섭불 시대에 산신이 있었는데 성(姓)은 나씨(羅氏)이고 이름은 자명(子明)이며 촉(蜀)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계율을 청정하게 수지(受持)한 비구였을 때 파계한 이를 미워하여 모든 나쁜 원(願)을 내되 ‘내가 죽은 뒤에 대력귀(大力鬼)가 되어 파계한 사람을 잡아먹으리라’고 하여 원대로 몸을 받아서 산신(山神)이 되어 많은 권속을 두었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토지(土地)가 동서로 5천여 리, 남북으로 2천여 리나 되었는데 매년 만 명 이상의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그 산신은 본래 가섭불의 형이었으나, 나중에 제자가 되니 가섭부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일부러 오시어 갖가지 신변(神變)으로 교화하셨습니다. 비로소 조복(調伏)되니 5계(戒)를 청하여 수지(受持)하고 숙명(宿命)을 알아 사람을 잡아 먹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마음이 변할까 걱정이 되어 일부러 부처님께서 자취를 남겨 두셨으니 아육왕(阿育王)이 산꼭대기에 탑(塔)을 세웠고 산신이 돌 안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 탑은 아육왕이 세운 것으로 그 산신이 나타납니다. 저 곽하사(郭下寺)의 탑도 아육왕이 세운 것입니다.이러한 일은 부촉(付囑)한 위의(威儀)를 나타낸 것이다.남해(南海) 순주(循州)63)의 북산(北山) 흥녕현(興寧縣)의 경계에 있는 영감사(靈龕寺)는 영묘(靈妙)한 자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감사는 문수성자의 제자가 그곳의 산신이 되어 악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문수가 그를 불쌍히 여겨 곧바로 와서 교화하니 드디어 숙명(宿命)을 알고 청하되 ‘자취를 남겨 주시면 항상 예배하여 섬기며 모든 악업을 여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수가 그를 위해서 몸을 나타내신 곳이 지금의 여기입니다. 정관(貞觀) 3년(629에 산신이 목숨을 마치니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고 다른 산신이 그 땅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옛 산신의 친척으로 모든 악업을 크게 지었는데 도솔천에 태어났던 옛 산신이 그를 불쌍히 여기어 내려와서 문수에게 작은 자취를 나타내 줄 것을 청하니, 그 산신을 교화하여 정법(正法)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그 산은 크고 작은 자취를 나타낸 적이 있으니 유래(由來)가 없지 않습니다이러한 일은 부촉한 위의를 나타낸 것이다.
또 질문하였다.
“지금 비주(泌州)의 북산(北山) 석굴(石窟) 속에서 항상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이 굴(窟)은 가섭불(迦葉佛)ㆍ석가불(釋迦佛)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옛날 주(周) 목왕의 둘째 왕자가 가섭불상을 조성했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위주(渭州)64) 종남현(終南縣)의 산에 불면산(佛面山)과 칠불간(七佛澗)이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항상 광명이 비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남산(南山) 고곡대장(庫谷大藏)은 가섭불이 손수 만드신 장경(藏經)이고 지금 현재도 13명의 연각(緣覺)이 계곡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곳에 남아 있는 탑사(塔寺)는 대부분 고불(古佛)이 남기신 터이고 아육왕(阿育王)이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이 항상 머무는 땅이니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유명한 탑은 항상 소문대로 남아 있고 이름 없는 탑도 곳곳마다 있습니다. 하서(河西)65) 감주(甘州) 곽중사(郭中寺)의 탑 아래에 사리(舍利)가 있으며 하주(河州)의 영암사(靈巖寺)66) 불전(佛殿) 아래에도 사리가 있고 진주(秦州)의 맥적애(麥積崖) 불전 아래에도 사리가 있는데 산신이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절은 주(周) 목왕이 건립하여 영안사(靈安寺)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40년 동안 항상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형주(荊州)의 장녕사(長寧寺) 탑도 아육왕이 세우고 그 아래에 사리를 안치하였는데 땅 속으로 한 길 정도 들어간 곳에 돌함[石函]을 다섯 겹으로 만들어 쇄신골(碎身骨)을 담아 모셨습니다. 익주(益州)의 3탑(塔)은 대석(大石)지금의 이름은 복감(福感)이다.ㆍ무담(武擔)지금의 이름은 정란(靜亂)이다.ㆍ낙현(雒縣)지금의 이름은 보여(寶與)이다.이라고 하며 모두 신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3탑의 신이한 일은 『별전(別傳)』과 같다.
또 질문하였다.
“양도(楊都)에 있는 장간탑(長干塔)ㆍ무탑(鄮塔)은 아육왕이 세운 것이 아닌가?”
대답하였다.
“그곳은 옛날에 유살하(劉薩何)가 영험을 감득(感得)한 곳입니다. 지금 양주(楊州)로 가서 월성(越城)에 올라가 장간(長干)을 바라보면 신이한 기운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의 땅을 파서 얻은 것으로 지금도 분명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만약 이 때 이미 장간이 있었다면 곧 불찰(佛刹)이 아니겠는가?”
대답하였다.
“찰간(刹干)이 아니고 지역의 이름입니다. 농(隴)은 간(干)이라고도 하니 탑은 장농(長隴)의 옆 가까이에 있습니다. 장서(藏書)에서 언급하지 않았겠습니까? 간월(干越)을 포괄(包括)하니 간월은 농이라고도 이름합니다. 바닷가에 근접한 무현(鄮縣)의 탑도 역시 아육왕이 조성한 것으로 현겁(賢劫) 초의 부처님이신 가섭불의 팔뼈가 봉안(奉安)되어 있으나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합니다. 나한이 그 팔뼈를 가지고 철위산(鐵圍山)에 가서 소탑(小塔)에 봉안하려고 하자, 그 탑이 땅 속에서 크게 솟아올랐는데 선신(善神)이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나타내니 우물 속에 뱀장어가 살면서 탑을 옹호하는 신(神)이 되었습니다. 또 그 탑의 옆 돌 위에는 족적(足跡)이 있는데 ‘이 발자국은 과거의 세 부처님께서 밟으신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땅 속에서 솟아오른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복을 닦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옛 주(周) 시대에 이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므로 그 탑을 세운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주(周) 목왕 이후에 여러 왕이 탑사(塔寺)를 건립한 일은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이 지방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보기 어려운가?”
대답하였다.
“영탑(靈塔)의 앞 인연을 말하자면, 다보불(多寶佛)은 신령한 힘으로 조성된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기 때문에 문자(文字)로 전해지는 것이 드문 것입니다. 양웅(楊雄)67)ㆍ유향(劉向)68)이 묘당(廟堂)에서 책을 찾다가 이따금 불경(佛經)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진(秦) 이전에 경(經)과 탑(塔)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형악(衡嶽)69)의 남쪽 5, 6백 리 되는 곳에 영주(永州)라는 지역이 있고 영주의 북쪽으로 대천(大川)이 있는데 그 크기가 동서는 5백여 리이고 남북은 백여 리 정도 되며, 천(川)의 중간 지역은 옛적에 수십만 호의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큰 나무들이 자라나 큰 것은 지름이 여섯 길[丈]이나 되니 그 아래로는 초목(草木)이 없습니다. 깊은 숲은 매우 아름다운데 그 가운데로 큰 강이 있어 동쪽으로 흘러 상강(湘江)70)으로 들어갑니다. 물줄기를 따라가 보면 곧 내[川]를 만나는데 남쪽에 있는 계곡 북쪽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 계곡에 방형(方形)의 연못이 있는데 사방으로 돌계단이 있으며, 물이 깊어 용이 살고 있습니다. 연못에 들어가는 이가 있으면 곧바로 우렛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킵니다. 왼쪽의 많은 산들에는 귤ㆍ유자ㆍ냇버들ㆍ매실나무 등이 줄지어 심어져 있으며, 연못의 남쪽에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대탑(大塔)이 있습니다. 이끼가 그것을 받치고 있으며 석감(石龕)은 덮여 땅바닥과 같아졌으나, 탑의 동쪽 절벽 위에 전서(篆書)로 새겨진 온전한 비석이 남아 있어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으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탁본(拓本)을 뜨면 탑을 세운 연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산(衡山)의 남쪽 대명사(大明師)가 절을 세운 곳에 고탑(古塔)이 있는데……그 절의 남북쪽 10여 리 정도에 칠처팔회(七處八會)71)의 자취이듯 냇물이 흐르고 고요한 절의 곳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이 국토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은(殷)72) 시대, 주(周)73)의 소왕(昭王) 시대, 노(魯)74)나라의 장왕(莊王) 시대에 이 세계에 출현하셨다’고 하여 말이 서로 맞지 않으니 어떤 시대를 말함인가?”
대답하였다.
“모두 까닭이 있습니다. 제자(弟子)는 하(夏)75)의 걸왕(桀王)76) 시대에 태어나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갖추셨으나 법신(法身)ㆍ보신(報身)만은 사람이 볼 수 없었으니 지위에 올라선 이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화신(化身)만은 3천 백억의 천하에 두루하십니다. 그러므로 백억의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어 사람에 따라 감응하시어 출현하셨기 때문에 전후(前後)가 서로 일정하지 않습니다. 혹은 은나라 말엽과 혹은 노나라 장왕 시대에 출현하셨다는 것은 모두가 대천(大千) 세계 안에 계시니 전후를 다 하나의 화신으로 전(傳)하되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의 법신ㆍ보신은 항상 고요하고 담담하게 함께 하시니 의심하실 것이 없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지금의 모든 서상(瑞像)은 많은 사람들이 ‘아육왕의 넷째 딸이 조성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 일이 아득히 멀어서 사실 여부를 알기가 어렵지 않은가?”
대답하였다.
“아육왕의 넷째 딸은 그 생긴 모습이 추해 오래도록 밖에 나오지 못하고 항상 자신이 못생긴 것만을 한탄하다가 이에 부처님의 형상을 그렸더니, 상호(相好)가 부처님과 사뭇 다르고 오히려 자신의 모습과 같았다. 부처님의 형상을 다 그린 다음에 발원(發願)하여 이르기를 ‘부처님의 상호는 사람들보다 빼어나니 어떻게 하여야 나의 모습을 부처님과 같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부처님을 친견하려 애썼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감응하시어 부처님이 현신(現身)하시니 홀연히 옛날의 그 못생긴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부왕(父王)이 자세한 내용을 묻자 그 소원한 것을 말했습니다. 지금의 북산(北山)ㆍ옥화(玉華)ㆍ형주(荊州)ㆍ장사(長沙)ㆍ양도(楊都)ㆍ고리(高悝) 지역과 지금 숭경사(崇敬寺)에 그 형상과 광부(光趺)를 그린 것이 있지만 아는 이가 드뭅니다. 아육왕이 모든 귀신들에게 명하여 불상이 있는 곳으로 가 불법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든 불상의 얼굴은 넷째 딸의 얼굴 모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숭경사의 터도 본래는 전쟁터였으니 서진(西晋) 말엽과 5호(胡) 시대 사이에 크게 전쟁이 일어나서 죽은 사람들이 특히 그 터에 많아 땅 속의 사람 뼈를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잔혹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모든 귀신들을 데리고 그 터를 진정시켜 원혼(冤魂)들로 하여금 착한 생각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불법을 없애자 신(神)도 따라서 없어졌는데 수(隋)77)나라의 태조(太祖)인 문제(文帝) 때에 불법을 다시 중흥시켰습니다.……“
또 질문하였다.
“모든 신(神)이 자재하고 그 힘이 뛰어나 촉천(蜀川)에 세 개의 탑을 세웠는데 모두 대석(大石)이라고 이름하였다. 사람들이 발굴하였으나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 진천(秦川) 무공(武功)의 한 탑은 옛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육왕탑(育王塔)이라고 이름하며 30년 동안에 한 번 출현했고, 정관(貞觀) 이래로 두 번 출현했는데 광명이 상서롭고 수승하며 장대하였다. 사리(舍利)는 손가락 뼈만한데 돌 절구 속에 있다’고 하니, 어찌하여 이처럼 초라하게 되었는가?”
대답하였다.
“모든 귀신들이 빈부(貧富)가 일정하지 않고 제각기 숙세의 업이 사람과 같아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하늘들도 그러해서 가진 대로 이 탑에 공양하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그윽한 명계(冥界)와 감통(感通)하는 일이 속세에서 항상 있는 일인데 의심컨대 영혼이 떠나가고 형상이 썩었는데도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전(記傳)』에서 이르기를 ‘혹 7일ㆍ백 일ㆍ3년이 지났어도 영혼이 오면 형상이 일어나 살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고, 또 경(經)에서 말하기를 ‘그 정신이 저 염마왕의 처소에서 5ㆍ3ㆍ7일간 조사를 받는다’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하였다.
“사람이 7식(識)을 타고 나니 그 7식은 제각기 신(神)이 있습니다. 심식(心識)이 주인이 되고, 이 주인은 비록 앞서 가버리지만 나머지 신이 지켜 보호하는데 이것을 괴상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질문하였다.
“스님께서는 수계(受戒)하실 적에 한 계(戒)에 몇 신(神)을 말씀하십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5계(戒) 가운데 한 계에 다섯 신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대계(大戒:具足戒)는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느니라.”
대답하였다.
“승려의 수계에는 2백50의 신(神)이 있는데 만약 한 개의 중계(重戒)를 범하면 오직 한 신만 떠나가니 이들 신들이 항상 계를 지키는 이를 따라다닙니다.”
“구적(苟


)은 면주(綿州)의 파서현(巴西縣) 사람으로 제2과(果)를 얻었다. 일찍이 객(客)으로 떠돌다가 신번촌(新繁村)에서 학문을 가르치되 술과 고기를 탐내지 않았다. 그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외도(外道)를 믿었기에 그에게 고기와 술을 주었는데도 그가 먹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몹시 구타했다. 글씨를 써서 마을 사람들에게 빌어도 예우하지 않고 괴롭혔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는 서원을 내어 마을의 북쪽 풀숲에서 하늘을 향해 누워서 붓으로 허공에 글씨를 썼는데 마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그 연유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나는 경(經)을 써서 하늘로 보내니 하늘은 보고 읽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고 하니, 상계(上界)의 모든 하늘들이 하늘의 종이를 가지고 와서 붓을 받들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한 권을 베껴 쓰되 7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했는데 모든 하늘이 보개(寶蓋)를 만들어 그것을 덮으니 땅에 풀이 없어졌다.
어린 목동이 그 아래에서 자주 비를 피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의 옷이 젖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묻자, 대답하기를 ‘저는 구선생(苟先生)이 경(經)을 베껴 쓴 곳에서 비를 피했습니다’라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곧바로 믿고 공경하였다. 지금 그곳은 나무로 울타리를 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재일(齋日)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 가운데에서 법회를 본다.……고산(鼓山)의 죽림사(竹林寺)는 가섭불(迦葉佛) 때에 조성되었고 주(周) 목왕(穆王)이 중창하였는데 목왕이 조성한 불전(佛殿)과 소상(塑像)이 지금도 현존한다. 또한 산신(山神)이 부처님께 5백 나한이 이 절에 머물도록 청했다고 한다. 지금도 2천 명의 성승(聖僧)이 머물고 있으며 절의 왼쪽에 5만 명의 5신통(神通)을 얻은 신선들이 이 절에 공양한다. 여타의 것은…… 이후로는 논(論)과 모든 율상(律相)을 나에게 물어라.“
“스님은 본래 양조(梁朝) 시대에 이미 율(律)이 으뜸이라고 이름났으며 저술한 논(論)도 많아 사람들이 이름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절을 건립하기 전에는 숲을 정하여 모두 다 머물렀으며 자존(慈尊:미륵보살)을 친견하고 교만한 뜻이 없으며 결정적인 율상(律相)이 크게 있기 때문에 지금의 인간세계에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아는 것은 백 개 가운데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기초의(注記抄儀)』가 있고 아울러 일찍이 여타의 습기(習氣)가 있음을 듣고 스님의 보명(報命)78)을 헤아려 보니 이미 돌아가셔야 할 때가 1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록되어 전하는 업(業)과 그 밖의 자비로운 힘에 의해 훈습(熏習)된 까닭으로 천인(天人)이 도와 수명이 연장된 것을 스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지난해부터 수명이 줄어들지 않고 단지 몸이 여위었을 뿐이니 고목나무와 썩은 수레가 다시는 힘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장경(藏經)을 읽고 중요한 행법(行法)을 초록(抄錄)하고자 하는데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대답하였다.
“스님이 먼저 장경을 대강 읽으시면서 단지 율상과 부합된 것은 다 초록하고 문장의 이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가셨으니 반드시 거듭 읽으면 분수에 따라서 감응할 뿐입니다. 그러나 보명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니 태어나시는 곳마다 다시 스님 곁에 와서 항상 원하는 것 없이 속히 사람으로 태어나 율교(律敎)를 널리 펴시도록 권하고자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원(願)을 다 성취하였습니다.”
또 말하였다.
“저술하신 『장복의(章服儀)』79)는 신령(神靈)이 모두 기뻐합니다. 불법이 동방(東方)으로 전해 온 지 6, 7백 년이 되도록 남북의 율사(律師)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뜻이 없었으니, 어찌 살생한 재물을 사용하여 자비로운 옷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만이 홀로 이러한 뜻을 내셨습니다.”
대답하였다.
“내가 『지도론(智度論)』을 읽을 때 ‘부처님께서 거친 무명베로 만든 승가리(僧伽梨)를 입으셨다’고 한 것을 보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찌 어기겠는가? 그러나 율(律)을 듣고 난 뒤에 잠의(蠶衣)를 보고 생각을 내어 새로운 『장복의』를 지었는데 고금(古今)을 모두 참고하여서 성교(成敎:부처님께서 만든 법)와 합했다. 와구(臥具)ㆍ3의(衣)에 대해서는 범인의 정서[凡情]를 자세히 살펴 더욱 신중을 기하였으며, 몸과 옷이 닿는 부분이 닳아 떨어졌다고 해서 어찌 버리는 것을 좋아해서 법복(法服)으로 만들어 입지 않겠는가. 또 법복이 의미하는 것이 본래 자비와 어진 마음을 나타내니 어진 마음이 아니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 중생제도는 반드시 자비를 통해서 성취하므로 불심(佛心)이 바로 큰 자비이니 살생을 자행하면서 자비를 행하는 이는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깊고 은밀하게 살펴서 논하는 것이다. 다섯 이랑 정도 되는 집의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으면 60세가 되어 모습과 기운이 쇠약했을 때 안으로 비단과 솜을 넣고 밖으로 큰 무명베로 감싸서 큰 무명베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부귀빈천에 모두 통용되니 지금도 왕과 신하가 이것을 따라서 옛 법을 고치지 않는다. 그리고 세속에는 노소(老少)의 차이가 있어 등급의 다름이 있게 되었으나 도(道)는 손해(損害)의 이치가 없으니 나이 적은 이와 나이 많은 이가 모두 동일한 법의(法衣)를 입는다. 이것은 자비로 교화하는 것이니 어찌 손해가 있겠는가?……”
또 말하였다.
“3의의 가장자리가 찢어지면 꿰매어 입습니다. 그리고 강표(江表)80)에서는 다 그렇게 하는데 이 지역은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사분율(四分律)』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3의를 꿰매어 입는 것이 끊어진 것이다.”
대답하였다.
“『십송률(十誦律)』에는 그러한 내용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 제도는 쓰지 않습니까? 꼭 시행해야 합니다.…… 또 스님께서는 대의(大衣)를 겹쳐서 꿰매어 만드십니다. 윗조각의 아래를 세 번 겹쳐서 꿰매시는데 어찌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만드시는 법을 묻사오니 법의를 들고서 가르쳐 주시옵소서.”
대답하였다.
“이것은 윗조각의 아래를 세 번 겹쳐서 꿰맨 것이다. 이 조각의 나뉜 모양은 밭두둑을 표시한 것이며 재단한 옷 조각의 끝 부분을 서로 겹쳐서 꿰매어 조각의 흔적을 제거하되 횡(橫)으로 꿰맨다. 조각의 안쪽은 밭 이랑을 표시하고 조각의 가장자리는 도랑을 표시한 것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은 포만(布縵)81)이 통용되어, 첫째는 끊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많이 겹친 것이니, 이미 본래 제정한 것이 아니어서 허물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고치는 것에 있어서는 단지 득과 실을 따라서 논할 뿐이다.”
또 나에게 질문하였다.
“좌구(坐具)를 두 겹으로 하는 것은 본래 제정한 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끊어서 붙이되 다만 한쪽이 가장자리를 다른 한쪽의 가장자리에 붙이는데 네 면을 붙여 모든 가장자리가 두루 붙으면 어떠합니까?”
내가 말하였다.
“이제 성교(成敎)가 헛되이 베풀어지지 않은 줄을 믿겠구나. 율(律)에서 말하기를 ‘본래 제정한 대로 바깥쪽 너비의 길이를 반 뼘 늘리는 것은 문헌에 근거한 단지 한쪽 너비의 길이이지 사방 둘레의 너비와 길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지는 않으나 오히려 발사(跋闍)82)의 자취보다는 낫다.”
곧 아무런 말이 없었다.
또 나에게 질문하였다.
“지금 비구 행자를 보니 좌구를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았는데 정서상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밑에 깔고 있는 물건을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까? 제자는 속인이라서 율(律)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스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기꺼운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좌구를 어깨 위에 올려놓는 것은 성교(成敎)이다. 사리불이 처음 기환(祇桓)에 기거할 때 외도(外道)가 흥행하였다. 수달(須達)이 사리불에게 가서 말하니 위의(威儀)를 갖추어 니사단(尼師檀)을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고 위의를 가다듬은 다음 대중 가운데로 나아가서 높은 자리에 이르러 그것을 폈다. 또한 율론(律論)의 여러 곳에 이런 내용이 많이 있으니, 비구가 식사를 마치거나 선정(禪定)에서 나올 때는 니사단을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또 숲 속에 들어가 좌선(坐禪)할 적에는 3의를 오른쪽 어깨에 갖추고 왼쪽 어깨 위에는 좌구(坐具)를 올려놓으며 발우 주머니를 위에 멘다. 그러므로 선견(善見)이 말하기를 ‘발우 주머니를 왼쪽 어깨에 걸쳐 메니 청색(靑色)이 분명하다’고 했으니, 어찌 고인(古人)의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3의를 왼쪽 팔꿈치 아래에 두고 좌구를 팔 안쪽으로 갈무리하고 앉아서 토론한다. 혹 말할 적에는 왼쪽 다리 위에 두며 발우 주머니를 왼쪽 어깨에 메어 왼쪽 무릎까지 늘어뜨린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잘못 변하여 마침내 본원(本願)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옛 서상(瑞像)을 보고 지금 제정한 것을 보니 옷이 왼쪽 어깨에 걸치지 아니함이 없고 그러한 뒤에 옷자락을 취하여 왼쪽 팔의 안쪽으로 옷자락을 접어 넣었으니, 이것은 두 옷자락이 나오는 것을 몹시 꺼려해서이다. 마치 양의 귀 모양처럼 생겼다. 곧 율(律)과 같으니 이것은 또한 성인(聖人)의 본보기이다. 나다닐 때에는 왼쪽 팔로 거두고 앉을 때에는 왼쪽 넓적다리에 거리낌 없이 펼쳐 놓는다는 것은 아직껏 정문(正文)에서 허락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끝내 방일한 위의(威儀)일 뿐이다.
또 좌구의 제정은 본래 몸과 옷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승려의 와구(臥具)는 그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니 이 지역 승려의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걸식한 후 본래의 처소에 돌아와 의발(衣鉢)을 거두고 비로소 발을 씻고 앉는다’고 하였다. ‘가죽신을 문질러 닦아 매어 두되 얼굴과 손을 씻은 것처럼 깨끗이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몸과 옷이 청정하여 부정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지방의 중승(衆僧)의 몸은 더러운 냄새가 풍기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대소변도 일찍이 물로 닦지 아니했는데 속옷과 겉옷을 어찌 세탁했겠는가? 3의를 갖추어 준비한 경우가 많지 않고 잠방이와 바지가 더 많아 사람들이 보면 오히려 더욱 싫어하고 그 누린내 나는 이치를 듣는 이가 마땅히 인욕(忍辱)하는 것을 슬프게 여기나니, 이것을 근거로 글을 만든 것이다. 지금 어깨 위의 일을 관찰하니 단지 팔에서 갈무리한다. 만일 법을 의지하여 사문이 악습을 행하지 아니하면 안과 밖이 함께 청정하여 옷을 입은 모습이 바람직하니 어찌 부처님의 성실한 말씀을 등지고 왼쪽 어깨의 법[左肩法]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십송률』에서 ‘3의 고리와 매듭은 앞 가장자리에 손가락 네 개 정도의 길이로 고리를 만들고 뒤에 손가락 여덟 개 정도의 길이로 매듭을 만든다. 그런 다음 오른쪽의 옷자락을 들어서 왼쪽 어깨 위의 매듭에 앞의 고리를 건다’고 하였다. 지금은 배(倍)가 되어 그와 반대이니 어찌 교문(敎文)에서 허락한 바이겠는가? 다만 범승(凡僧)의 생각으로 한 것이어서 정교(正敎)에 의거하면 앞의 내용과는 어긋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계하여 깨우치니 그릇된 사람들이 모두 다 묵묵히 말이 없었다.”
뒤에 다시 천인(天人) 한 명이 와서 이르기를, “제자 황경(黃瓊)이 예경드리옵니다”라고 하며 좌구에 대해서 말하는데 바람직하였다. 경론(經論)에 의거해 보니 어긋나는 것은 없었으나 처음과 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일부러 물리쳤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다섯 사람과 이어서 가섭(迦葉) 형제를 제도하신 다음 가사(袈裟)를 만드시어 왼쪽 팔에 두고 좌구는 가사 아래에 두게 하셨다. 이 때 서방(西方)의 왕과 신하들은 흰 모직물을 입되 왼쪽 어깨 위에 걸쳤다. 이러한 연고로 부처님께서 옷을 만드실 때 왼쪽 팔에 두게 하시어 세속과 다르게 하셨다. 알비(頞鞞)비구는 위의(威儀)로 중생을 제도하였는데, 그 때 법복(法服)은 어깨에 걸치지 않을 때였다. 그는 나중에 여러 중생을 제도하여 무리들이 점점 많아졌다. 또한 그 젊은 비구는 위의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워 성(城)에 들어가서 걸식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옷자락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도록 제정하신 것이다. 후에 바람에 흩날릴 때 무거운 물건으로 그 위를 누르도록 허락하셨는데 어떤 비구가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옷을 누르는 물건을 만들어 갖가지로 장엄하니 모든 속인들이 비방하였다. 비구가 이 일을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전에 무거운 물건으로 누르는 것을 허락하였느니라.’하셨다. 이것이 곧 니사단(尼師檀)이니 다른 것은 합당하지 않다. 뒤에 왕사성(王舍城)에 외도(外道)가 있었는데 이름은 달마다(達摩多)라 하였다. 이가 ‘일체지(一切智)’라고 칭하며 의복을 모두 다 깨끗한 백색으로 입었는데 날마다 한 벌씩 갈아입었다. 날마다 30번씩 목욕을 하였고 먹는 음식도 모두 향신(香薪)ㆍ향탄(香炭)을 지펴서 만든 것이었으며 사는 처소도 모두 향내 나는 재료를 쓰고 바르는 진흙 또한 모두 향즙(香汁)을 섞어서 썼다. 원림(園林)은 모두 향나무를 심었는데 심은 꽃과 약초도 모두 향내 나는 것이었으며 흐르는 샘물, 연못의 물도 모두 우두향(牛頭香)내가 나고 모든 물들이 맑고 향내가 났다. 그러므로 비록 제석천(帝釋天)의 환희원(歡喜園)이라고 해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다. 세존께서 그 때 모든 비구들을 거느리시고 성(城)에 들어가 걸식하셨는데 의발(衣鉢)을 들고 좌구를 어깨에 올려놓으신 모습이었다. 그 때 모든 외도들이 달다(達多)에게 말하였다.
‘지금 구담사문(瞿曇沙門)이 성(城)에 들어가서 걸식하고 있으니 그곳에 가 논하여서 대사(大師)를 항복시킵시다.’
그 때 달마다는 무리를 거느리고 한 벌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값이 천 냥이나 되는 자마황금(紫磨黃金) 값이었다. 그들이 부처님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부처님을 청하여 하늘로 모시고 올라갔기 때문에 외도가 왔을 때는 오직 비구들만 보이고 부처님은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비구들에게 물었다.
‘어깨 위의 조각으로 된 무명베는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앉을 때에 사용하는 것이다.’
또 물었다.
‘그대들이 입고 있는 옷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답하였다.
‘인욕개(忍辱鎧)라고 한다.’
‘무엇을 인욕개라고 하는가?’
‘이것은 삼보(三寶)의 모습으로서 위로는 천마(天魔)를 제압하고 아래로는 외도를 항복받느니라.’
달마가 말하였다.
‘이 옷이 이미 그렇게 귀하고 큰 위령(威靈)이 있다면 어찌하여 깔고 앉는 무명베 조각을 그 옷 위에 놔두는가? 구담이 그대들에게 가르쳐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 때 비구들 가운데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외도가 말하였다.
‘구담이 그대들을 위해 가 르친 이 법은 존귀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 어떻게 일체지인(一切智人)이라고 자칭하는가? 만약 그대들이 스스로 한 것이라면 스승이 어찌 다시 그대들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비구들이 식사를 마치고 승방(僧房)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를 제정하시어 옷자락을 왼쪽 팔에 놓고 좌구를 옷자락 아래에 두도록 하셨다. 그 뒤로부터 비구들이 가사를 입은 모양이 대부분 가지런히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이차자(離車子)83)들이 비방하여 말하였다.
‘위의가 없고, 옷을 입은 꼴이 음녀(淫女)와 같으며, 코끼리의 코와 같구나.’
이 때문에 비로소 옷 위에 고리와 매듭을 두도록 제정하였으며 지금의 옷자락을 왼쪽 팔에서부터 왼쪽 겨드랑이의 아래쪽으로 늘어뜨리어 위와 같은 허물이 없게 하였다.
앞에서는 사리불의 경우를 인용하였다. 이 지방에서 앞서 열렸으나 나중에 제정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치는 반드시 이어져 내려오니 옛적에 계명(鷄鳴)의 시(詩)에 ‘물시계를 관리하는 관리가 법도가 없어 그 벼슬을 지키지 못하고, 제후(諸侯)의 조정 또한 뒤집어진 의상(衣裳)이로다’라고 하여 시인이 풍자했으니 거울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글에서 말하였다.
‘갓[冠]이 비록 천하더라도 발아래 둘 수 없고 신발이 비록 귀하더라도 머리에 얹을 수 없다.’
이 말은 비록 귀하더라도 위에 있을 수 없고 비록 작더라도 큰 것에 견줄 수 있다는 말이다. 고인(古人)이 모든 나무꾼에게 묻더라도 ‘엎드려 원하옵건대 자비하신 이여, 사람이 미천하다고 가르치심을 그만두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나는 아론(雅論)과 전후(前後)의 근본을 나타낸 글[憲章]에 대해 갖추어 들었는데 이는 일대(一代) 교화의 종승(宗乘)이고 삼장(三藏)의 홍철(弘徹)이다. 만일 종소리가 울리는데도 거부하여 듣지 않는다면 결집(結集)하여 8사(事)의 인연84)을 길이 열어 놓더라도 상좌(上座)가 다시 결집한 것을 따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록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정황은 없으나 혹 자세히 알려고 하면 『오분율』 중에서 ‘그 밖의 청정하지 않은 것을 제어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라고 하는 것을 준거하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다시 천인(天人)이 내려와서 하사한 것이겠는가? 두루 다스려 깨우치는 것이 늦었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나타내는 일들에 있어서는 글을 우러러보면 믿을 수 있으니 음광(飮光:迦葉)이 환희(懽喜:阿難)를 벌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또 말하였다.
“원래 좌구를 제정한 뜻은 탑의 기단부(基壇部)의 모양을 표시하는 것이고, 승려가 가사를 위에 입는 것은 법신탑(法身塔)을 비유한 것이니 탑의 기단부는 이미 치우침이 없기 때문이다. 좌구의 크기는 가로ㆍ세로 4주(肘)로 둘레를 다 붙인다. 한 뼘도 어기지 않는다는 글은 다만 번역할 때 줄인 말이고 다만 각각 반 뼘을 늘인다고 했으니 십종(十宗)이라고 한 것은 곧 사방의 둘레라는 뜻이다.”
또 질문하였다.
“근자에 서역(西域)에서 온 승려들을 보니 가사(袈裟)를 대부분 봉합(縫合)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멸도(滅道)하신 지 2백 년 정도 되었을 적에 북천축(北天竺)의 한 승려가 외도와 함께 살고 있었다. 외도가 그를 질투하여 몰래 날카로운 칼을 가사 안에 넣어 두고, 함께 왕의 처소에 가서 왕에게 이르기를, ‘사문인 석자(釋子)가 가사 속에 칼을 감추고 왕을 살해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즉시 승려를 체포하였다. 이 때문에 온 나라의 비구들을 주살(誅殺)하니 바로 그 때 야사(耶舍)라는 나한이 모든 비구들에게 방편으로 가사를 봉합하도록 하여 목숨이 끊어지는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북방(北方)에서 발생한 일로 임시 제정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아니다. 지금 남방의 비구들 중에 봉합한 이가 있는데 모르는 이들이 따라 배워서 봉합한 것일 뿐이다. 또 오늘날 계단(戒壇)을 부흥시키는 일은 부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바이다. 기환정사(祇桓精舍)에서 세 개의 단(壇)을 만들었는데 양쪽으로 불원(佛院)을 안치해 오직 부처님만이 올라가실 수 있었다. 모든 부처님께서 단에 오르시어 승니(僧尼)에게 결계(結戒)를 말씀하시는 곳으로 승원(僧院) 한 단은 구족계를 받는 곳이다. 장엄하고 특별한 굴(窟)은 수미좌(須彌座)와 같고 신경(神景)한 석주(石柱)가 수호하여 이지러지지 않는다. 아래로는 물가에까지 이르나 겁(劫)을 지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북천축의 동쪽에 석단(石壇)의 모양이 있는데 홍율사(弘律師)는 지금 무슨 인연으로 특별히 단상(壇相)을 세운 것입니까? 또한 천인(天人)이 그윽히 나타나 찬탄하며 기뻐하지 아니함이 없습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일찍이 승전(僧傳)을 보았는데 남쪽 숲의 계단(戒壇)을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여 앙모(仰慕)하였다.”
그가 말하였다.
“어찌 한 곳 뿐이거늘 지금 다시 은근히 구합니까? 남방에 큰 것이 있으니 옛적에 송(宋)의 구나발마(求那跋摩)는 채주(蔡州)에 단(壇)을 세웠고, 진(晋)의 축법호(竺法護)는 와관사(瓦官寺)에 단을 세웠으며, 진(晋)의 지도림(支道林)은 석성(石城)과 분양(汾陽)에 각각 단을 세웠고, 진(晋)의 지법령(支法領)은 약야계사부은처(若耶溪謝敷隱處)에 단을 세웠으며, 천축의 도일(道一)은 동정산(洞庭山)에 단을 세웠고, 천축의 도생(道生)은 오중(吳中)의 호구산(虎丘山)에 단을 세웠으며, 송(宋)의 지엄(智嚴)을 정림사(定林寺)에 단을 세웠고, 송(宋)의 혜관(慧觀)은 석량사(石梁寺)에 단을 세웠고, 제(齊)의 승부(僧敷)는 무호(無湖)에 단을 세웠고, 양(梁)의 법기(法起)는 남간(南澗)에 단을 세웠으며, 양(梁)의 승우(僧祐)는 운거사(雲居寺)ㆍ서하사(栖霞寺)ㆍ귀선사(歸善寺)ㆍ애경사(愛敬寺) 등의 네 곳에 단을 세웠습니다. 또한 지금의 형주(荊州) 4층 사찰터와 장사(長沙)의 사찰터에는 계단(戒壇)이 있습니다. 또한 대명사(大明寺)의 앞 호수 가운데에도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적(事跡)이 끊어졌습니다. 양자강(揚子江)의 오른쪽 투주(渝州)85) 이하에서 양자강의 회수(淮水) 남쪽에 이르기까지 계단을 모두 계산하면 모두 3백여 개 소가 있으며, 산동(山東)ㆍ하북(河北)ㆍ관내(關內)ㆍ검남(劍南) 등의 지역에는 계단이 끊어지지 않고 강표(江表)의 불법(佛法)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4, 5백 년간 일찍이 폐지되거나 퇴보한 적이 없게 하였으니 계단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리고 계(戒)는 법(法)의 근본이니 근본이 서면 기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북(河北)의 좌우 지방에는 일찍이 계단의 이름이 들리지 않아 불법이 세 번이나 주멸(誅滅)을 당하였습니다. 또 양자강과 한수(漢水)의 남쪽은 산천이 수려하여 비단이 섞인 것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리게 하였는데 토지(土地)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근(外根)을 의지하기 때문에 정지(情智)가 총명하고 민첩하며, 형상과 마음이 용맹스러고 섬세합니다. 드디어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헤아려 깊이 의지하였으니 의심하는 생각도 없었으며 잊어버리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중원(中原)과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지방은 진씨(晋氏)가 남쪽으로 건너온 뒤에 16국으로 나뉘어서 무력으로 맹렬하게 서로 침략하여 불법이 세 번이나 제멸(除滅)당했으니 바로 북적(北狄)의 난리입니다. 본래 아름다운 곳이 아니면 마음이 따라서 곧 끊어집니다. 일찍이 훌륭한 경관이 아니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계단(戒壇)을 세우는 것은 세상에 머무르며 법을 보호하고 지니는 법다운 모습입니다. 뭇 승려들에게 계(戒)를 설해 주고 계를 받게 하는 것은 모두 깨달음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일입니다. 이후 동쪽에서 왼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옵니다.”
내가 말하였다.
“경(經)에서 모두 말하기를 ‘우선(右旋)은 오른쪽으로 빙 돌되, 오른쪽 옆구리 등으로 도는 모습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말하기를 ‘왼쪽으로 빙 돈다’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하였다.
“하늘이 항상 여법하게 그러하듯이 사람은 오른쪽으로 돕니다. 그러므로 일월성신(日月星辰)은 모두 왼쪽으로 돕니다. 하늘의 기운이 바람 따라 돌다가 서쪽으로 사라지면 달이 뜨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맨 처음 서쪽에서 점차 돌아 동쪽으로 나오고 또한 서쪽에서 사라졌다가 점차 동쪽으로 돌아 나옵니다. 즉 서쪽에서 사라졌다가 바람 따라 돌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 위의 덩굴진 풀도 돋아날 때는 반드시 왼쪽으로 돕니다. 즉 이것이 하늘의 항상한 것입니다. 이제 서쪽으로부터 일월(日月)을 따라 돌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처님도 왼쪽으로 도신다’고 하니, 이 지방은 청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오른쪽 옆구리로 누우시되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시니 본생지(本生地)의 불법(佛法)이 오래도록 흐르는 지방을 관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에게 오른쪽 옆구리로 눕는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기환정사의 도상(圖相)을 꺼내 줄 것을 청하니 드디어 하나하나 모든 원(院)을 나누어 그린 종이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 원류가 기술되어 있어 구별할 수 있었는데 몇 장의 종이가 더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다시 천인이 와서 말하였다.
“성(姓)은 요씨(姚氏)입니다.…… 제자는 천인이고 성자(姓字)가 있습니다. 말은 천축(天竺)과 같은데 스님께서 꾸짖지 않으신다면 본음(本音)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다시 천인이 와서 말하였다.
“성(姓)은 구씨(苟氏)이고 제자는 본래 상주(相州) 사람입니다. 지난 세상에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에 재난이 많아서 식구들을 데리고 백록산(白鹿山)에 들어갔는데 산에는 본래 벽지불(辟支佛)이 살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 위천장군(韋天將軍)이 와서 공경히 서로 인사하는 것이 보통의 예(禮)와 다르지 않았다. 위천장군이 말하였다.
“제자가 항상 스님을 보니 스님께서는 풍방(豊坊:僧坊)에서 처음으로 『광홍명집(廣弘明集)』을 저술하시어 사(邪)와 정(正)을 결단하시고 단(段)을 열어 분명히 밝히신 것은 앞의 저술들보다 더욱 깊고 적합합니다. 항상 찾아뵙고자 했지만 단지 3천하 가운데서 불승(佛僧)을 위한 일이 매우 큰일인데도 투쟁ㆍ송사(訟事)ㆍ군사를 일으켜서 공격하고 정벌하는 등의 일이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직책이 그들을 수호하여 화해할 것을 권장하는 것이기에 잠시라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자(使者)들에게 명령을 해 놓고 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잠시 왔으니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불법(佛法)이 쇠퇴했음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천축의 모든 나라가 이 지방의 불법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지방은 계(戒)를 범하면 크게 부끄러워하며, 안으로는 범하더라도 밖으로는 삼가고 지키므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하나의 선행(善行)을 보고 백 가지 비행(非行)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만약 허물을 보면 모두 다 눈물을 흘리면서 더욱더 수호하여 마자(魔子)가 침범하여 괴롭히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질문하였다.
“욕계(欲界)의 주인(主人)이 어찌 마(魔)가 아니겠는가? 이하 모든 천(天)들도 모두 마(魔)에 속한 것이 아니겠느냐?”
대답하였다.
“마(魔)가 만약 악(惡)을 행하려 하더라도 4천(天), 제석(帝釋)이 모두 따르지 않고, 만약 아래의 2천(天)이 모든 선법(善法)을 행한다면 마(魔)와 마녀(魔女)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방의 승려는 수승하여 대승과 소승에 대해서 일찍이 두 견해가 없이 모두 다 받듭니다. 그러나 서토(西土)는 그렇지 않아서 모든 소승인(小乘人)이 대승경(大乘經)을 얻으면 불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소승들은 대승을 북쪽 오랑캐라고 매도하고 나이 먹은 이는 그 명근(命根)을 빼앗아 버리니 이런 일들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보리대사(菩提大寺)는 사주(寺主)가 위맹(威猛)하고 코끼리가 8만이며 요사채가 수천만이어서 왕도 정벌할 수 없습니다. 탑 주위에는 날마다 금과 비단이 쌓여 거두어들이며 부엌 안에는 생선의 머리가 쌓여서 큰 무더기를 이루고 양(羊)의 창자를 매달아 놓은 것이 푸줏간보다도 더 심하지만 그러나 또한 수호하여서 악귀(惡鬼)가 해치지 못하게 합니다.”
질문하였다.
“무선신용왕(無善神龍王)이 무슨 인연으로 죄업에서 벗어났는가?”
대답하였다.
“피를 먹는 신(神)이 모두 와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이를 호위하고 태승사(太乘寺)의 승려를 수호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항상 이 나라가 살육하는 것을 공(功)으로 삼는 것을 보고 매일 원하기를, ‘만약 죽어서 용귀(龍鬼)로 태어나면 큰 세력이 그들로 하여금 죽이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해야 이 신(神)이 죽일 자를 놓아 주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대답하였다.
“이것은 중생들의 악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물고기와 양(羊)의 몸으로 빚을 갚습니다. 이러한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내가 말했다.
“빚을 갚는 업(業)은 진실로 좋은 것이지만 저렇게 죽여서 먹는 것은 미혹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없다. 미혹은 탐심과 어리석은 마음이니 탐심과 어리석은 마음의 미혹으로 악도(惡道)에 매인 것을 어찌해야 모든 신(神)이 풀어주겠는가?”
대답하였다.
“업으로 결정된 것은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오히려 능히 제거하지 못하시는데 하물며 모든 신(神)들이겠습니까? 그 나라에 태어나서 정념(正念)을 잃어버려야 곧바로 그 죽임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말했다.
“먼저 이 원(願)이 있고 태어남을 벗어나 생각을 없애 버렸는데도 저곳에 떨어지는 것은 어찌하여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스스로 관행(觀行)이 명백하지 않더라도 진흙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데 행업(行業)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또 질문하였다.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은 집 안에서도 볼 수 있으며, 붉은 나귀를 탄 모습이 형양(荊襄)에서 아침저녁으로 보인다고 하니, 어떠한 일인지 알 수 없다.”
대답하였다.
“헛것입니다.”
또 말했다.
“그와 같이 헛것이라면 어찌하여 하동(河東)의 절 위쪽에 나귀고개가 있고 산의 남쪽에 나귀마을이 있겠는가? 이것을 비추어 보면 나귀를 타고 다닌 지역이 있는 것이다.”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뒤에 사람들이 대(臺)를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공양한 것입니다. 어찌 불전(佛殿)의 곁에 나귀를 둘 수 있겠습니까? 또 그 가운데 나귀[驢]라는 이름은 본래 여국(閭國)과 군국(郡國)의 옛 지명(地名)인데 뒤의 사람들이 잘 가리지 못하고 망령되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은 장경에는 없다. 그러나 『홍음소(洪音疏)』에서 말하기를 “『정원목록감경(貞元目錄勘經)』에 나온 것을 혜징(惠澄) 상좌가 전래(傳來)하여 부질(部帙)에 넣었으므로 이 함(函)에 있다”고 하였다.
032_0635_b_01L道宣律師感通錄麟德元年終南山釋道宣撰宣律師感天侍傳余曾見晉太常于寶撰搜神錄述故中牟令蘇韶有才識感冥中卒晝見形於其家諸親故知友聞之同集飮噉言笑不異於人或有問者中牟在生多諸賦述言出難尋諸敍詞曰運精氣兮離故形神渺渺兮爽玄冥歸北帝兮造酆京崇墉鬱兮廓崢嶸升鳳闕兮詞帝庭邇卜商兮室顏生親大聖兮頌梁成希吳季兮英明抗淸論兮風英英敷花藻兮文粲榮庶擢身兮登崑瀛受福祚兮享千齡餘多不盡錄初見其詞若存若余見梁初江泌女誦出淨土大莊嚴等三十餘經逮于卽目上有斯事生緣有幸近以今年二月末數感天有若曾面告余云所著文翰續高僧傳廣弘明集裨助聖化幽靈隨喜無不贊悅至於律部抄錄疏儀無足與二但於斷輕重物少有疏失斯非逾抑惟譯者如何以王貴衣同於白衣俗服相從非重乃至氍氀同法相量亦在輕收且王著貴衣同比丘之三衣也價直十萬者故曰貴衣用以施僧可同輕限白衣外道之服斯本出家者絕之三衣惟佛制名著者定得解脫故白衣俗服佛嚴制斷若有亡者竝在重收至於氍氀三衣相量同三衣也邊方開皮臥具亦是三衣葉在外柔毛在內寒酷之國佛開爲道必至布鄕還非輕限可改前迷從後悟如來在日尚有後制廢前況於今不存迷悟之事也余問所從有一天來禮敬敍暄涼已曰弟子姓王名璠是大吳之蘭臺臣也會師初至建鄴孫主卽來許之合感希有之爲立非常之廟于時天地神祇咸加靈被於三七日遂感舍利吳主手執銅甁寫銅槃內舍利所衝槃卽破乃至火燒鎚試俱不能損闞澤張昱之徒亦是天人護助入其身中其神爽通敏答對諧允今竝在天上弘護佛法爲事弟子是南天韋將軍下之使者將軍事務極多擁護三州之佛法有鬪諍陵危之事無不躬往知喩令附和南大欲卽至前事擁鬲不夂當至且令弟子等共師言散復有天來云姓羅氏蜀人也言作蜀廣說律相初相見時如俗禮儀述緣由多有次第遂有忽忘又一天云姓費氏禮敬如前弟子迦葉佛時生在初天韋將軍下諸天以貪醉弟子以宿願力不戀天欲淸淨梵行偏敬毘尼韋將軍童眞梵行受天欲一王之下有八將軍四王十二將周四天下往還護助諸出家四天下中北天一州少有佛法三天下佛法大弘然出家人多犯禁少有如法東西天下人少黠慧惱難化南方一洲雖多犯罪化令從心易調伏佛臨涅槃親受付屬令守護不使魔嬈若不守護如是破誰有行我之法教者故佛垂誡敢不行雖見毀禁愍而護之若見一善萬過不咎事等忘瑕不存往失且人中臭氣上熏於空四十萬里諸天淸無不厭之但以受佛付屬令守護尚與人同止諸天不敢不來韋將軍三十二將之中最存弘護多有魔子魔女輕弄比丘道力微者竝爲惑將軍拪遑奔赴應機除翦故有事至須往四王所時王見皆起爲韋將軍修童眞行護正法故弟子性樂戒如來一代所制毘尼竝坐中聽受戒法因問律中諸隱文義無不決滯然此東華三寶素有海水石往往現謂其靈而敬之顧訪失由莫知投遂因此緣而便諮請且泛文相理括之未曾博觀不可以語也余少樂多聞希世拔俗之典籍故搜神冥祥冥報旌異述異志怪錄幽經閱之故非疑慮況佛希人之說進勇銳之文護助形神守持城塔出前聞非爲徒說後諸緣敍竝依出而疏之初問佛事益州成都多寶石佛者何代時像從地踊出答蜀都元靑城山上今之成都大海之地迦葉佛時有人於西耳河造之擬多寶佛全身相也在西耳河鷲頭山寺有成都人往彼興易請像將還至今多寶寺處爲海神踏舩所沒初取像見請像將還至今海神子岸上遊謂是山芝遂殺之因爾神嗔覆役人像俱溺同在一船多寶佛舊在鷲山寺古基尚在仍有一塔常有光明今向彼土道由郞州過三千餘里達西河河大闊或百里五百里中山洲亦有古寺經像而無僧住經同此聞鍾聲百姓殷實每年二時養古塔塔如戒壇三重石砌上有覆其數極多彼土諸人但言神塚發光明人以蔬食祭之求福祚也地西去嶲州二千餘里問去天竺非往往有至彼者云云至晉時有僧於地見土墳出隨除終不可平後見坼開復怪其爾乃堀深丈餘獲像及人骨在舩中其髏骨悉麤大數倍過今人卽迦葉佛時閻浮人壽二萬歲時也今時命促形固其常然初出之時牽曳難得子化爲老人指撝方便須臾得出滅法蹔隱還興重更出之蜀人但知其靈從地而出亦不測其根原見其花趺有多寶字因遂名爲多寶佛名多寶寺也余問多寶隸書出於三秦之代如何迦葉佛時已有神書也答曰秦李斯隸書此乃近代遠承書之興興於古佛之世見今南州四面千有餘州莊嚴閻浮一萬百有餘文字言音同今唐國但以海路遼動數十萬里譯者莫傳故使此方封守株柱不足怪也師不聞乎梁顧野王太學之大博士也周訪字源沒不定故玉篇序云有開春申君墓得其銘文皆是隸字撿春申君是周代六國同時隸文則呑倂之日也此國篆隸諸書尚有茫昧寧知迦葉佛之事乎非其耳目之所聞見也又問今京城西高四土臺俗諺云蒼頡造書臺如何云隸字古時已有答云蒼頡於此臺上增土造臺觀鳥迹者非無其事且蒼頡之傳此土罕知其源或云黃帝之臣或云古帝之王也鳥迹之書時變一途今所絕有無益之言不勞述也又有天人姓陸名玄暢來謁云弟子周穆王時初生在本是迦葉佛時天爲通化故用蹔所問高四臺者其本迦葉佛於此第三會說法度人至周穆王時文殊目連來化穆王穆王從之卽列子所謂化人是也化人示穆王高四臺迦葉佛說法處因造三會道場至秦穆公時扶風獲一石佛穆公不識馬坊中穢污此像神瞋令公染患又夢遊上帝極被責數覺問侍臣由答云臣讀古書周穆王時有化人來此土云是佛神穆王信之於終南山中天臺高千餘尺基趾見在又於蒼頡臺造神廟名三會道場公今所患殆非佛神爲之耶公聞大怖語由余吾近獲一石人衣冠非今所制之馬坊將非此是佛神耶由余聞視之對曰此眞佛神也公取像澡浴安淸淨處像遂放光公又怖謂神瞋宰三牲以祭之諸神擎棄之遠處公又大怖以問由余余答云臣聞佛神淸潔不進酒肉愛重物命如護一所有供養燒香而已所可祭祀餠果之屬公大悅造像絕於工人又問由余余答曰昔穆王造寺側應有工遂於高四臺南村內得一老人名安年百八十自云曾於三會道見造之臣今老年無力能作所住村北有兄弟四人曾於道場內爲諸匠執作請追共造依言作之成一銅相好圓備公悅大賞賚之彼人得竝造功德於土臺上造重閣高三百尺時人號爲高四臺或曰高四樓其人姓高大者名四或曰兄弟四人同立故也或取大兄之名因之名樓故高四之名至今稱也又問目連佛在已終如何重見答曰同名六人此曰目連非大目連也宇文周時文殊師利化爲梵僧來遊此土云欲禮拜迦葉佛說法處#幷文殊所住處名淸涼山遍問道俗無有知者時有智猛法師年始十八返問梵僧何因知有二聖餘迹答云在秦都城南二十里有蒼頡造書臺卽其地也又云在沙河南五十里靑山北四十里又問沙河靑山是何語答云渭水終南山也此僧便從渭水直南而出遂到高四臺便云此是古佛說法處也于時智猛法師隨往禮拜失梵僧所在智猛長大具爲太常韋卿說之請其臺處依本置寺遂奏周王菩提寺西當陽佛首卽三會寺佛也釋迦如來度迦葉後十二年中來至此臺其下見有迦葉佛舍利穆身遊大夏佛告彼云有古塔可返初事王問何方佛在鄗京之東南西天竺有別傳去歲長年師子國九十九夏三果人也聞斯勝迹行至此尋淸涼山國家供送今夏在所願應遂余問自昔相傳文殊在淸涼山領五百仙人說法經中明文是夂住娑婆世界菩薩娑婆則大千摠號如何偏在此方答云文殊諸佛之元師也隨緣利現應變不同大士之功非人境界不勞評薄聖智多在淸涼五臺縣淸涼府仙花山往往有人到不得不信又問今五臺山中臺之東南三十里見有大孚靈鷲寺兩堂隔㵎猶在有花園可二頃許四時發彩人莫究或云漢明所立又云魏孝文作說不同如何答云俱是二帝所作周穆之時已有佛法此山靈異文殊所居周穆於中造寺供養及阿育王亦依置塔漢明之初摩騰天眼亦見有塔請帝立寺山形像似靈鷲名大孚信也帝信佛理立寺勸人元魏孝文北臺不遠常來禮謁見人馬行石上分明其事可知豈惟五臺終南山太白太華五嶽名山皆有聖爲住佛法處處有之人有供設須預請七日已前在靜室內安置壇燒香列疏閉戶祈求無不感應時來赴凡聖難知若不爾者緣請旣希來至飯今時有作賓頭盧聖僧像立房供養亦是一途然須別地空座前置椀鉢至僧食時令大僧爲不得僧家槃櫡設之以凡聖雖殊俱不觸僧食器至俗家則俗所設不前置靜室等者止可諸餘聖衆可降臨以三天下#同一供養隨緣別此賓頭盧難一遭遇又問今涼州西番音槃和縣山裂像出何代造耶答曰迦葉佛時有利賓菩見此山人不信業報以殺害爲事于時住處有數萬家無重佛法者薩救之爲立伽藍大梵天王手造像初成以後菩薩神力能令此像眞佛不異遊步說法教化諸人雖蒙此導猶不信受于時菩薩示行怖畏擎大石可落欲下壓之菩薩伴怖化諸人便欻迴心信敬於佛所有殺變成蓮花隨有街巷花如種植自此方攝化神力菩薩又勸諸淸信令造七寺南北一百里東西八十彌山亘谷處處僧坊佛堂經十三方得成就同時出家有二萬人七寺住經三百年彼諸人等現業力昔造惡業當世輕受不入地獄所害者在惡趣中又發惡願彼害我及未成聖我當害之若不加害業便盡我無以報共吐大火焚燒寺舍及彼聚落一時焚蕩縱盜得活以大水而漂殺之無一孑遺彼山神寺未破前收取此像遠在空中破以後下內石室安置供養年月旣石生室滅至劉薩何禮山示其像者前身元是利賓菩薩身首別處更有別緣又問江表龍光瑞像人傳羅什將來就扶南所得如何非羅什也斯乃宋孝武征扶南獲之昔佛滅後三百年中北天竺大阿羅漢優婁質那神力加工匠三百年中鑿大石山置佛窟從上至下凡有五重上重高三百餘尺請彌勒菩薩指作檀像處玄奘師傳云高百餘尺聖迹記云八丈足符八尺六齋日常放光其初作時羅漢將工人上天三往方成二牛頭栴檀第三金第四玉第五銅凡夫今止在下重四重閉石窟映見人藏腑第六百年有佛奈遮羅生母在扶南國念母重恩從上重取木檀像令母供養母終生楊州出家住新興寺獲悟三果宋孝武征扶南獲此像來都亦是羅漢神力今見在時往羅浮天台西方諸處往曇無竭者再往西方有傳五卷述此緣何得云什師背負而來耶余問什法師一代所翻之經至今若斯受持轉盛何耶答云其人聰明解大乘以下諸人皆俊又一代之寶絕後光前仰之所不及故其所譯以悟達爲先得佛遺寄之意也又問俗中常論以淪陷戒撿爲言此不須相評非悠悠者所議羅什師今位階三賢所在通化然其譯經刪補繁隨機而作故大論一部十分略九自餘經論例此可知自出經後至誠讀誦無有替廢冥祥感降歷代彌新以此詮量深會聖旨又文殊指授其刪定特異恒倫豈以別室見譏亡玄致殊不足涉言耳又問坊州顯際寺山出古像者何代所立答云像是秦穆公所造像出是周穆王造寺處也佛去世後育王第四女又造像塔於此供養于時此寺有一三果人住中秦相由余所奉敬往者迦葉佛時亦於此立寺是彼沙彌顯際造也仍其本名以爲寺額余問今玉華宮南檀臺山有甎塔別三十步下層極壯四面石龕旁有碎甎又有三十餘窯甎古老莫知何然每聞鍾聲答云此穆王寺也曰靈山至育王時勅山神於此造塔西晉末亂五胡控權劉曜都長安夢此山佛現在甎塔坐語曜曰汝少飮酒莫耽色欲黜去耶佞進忠良不能從後於洛陽醉落馬石勒所擒初曜因夢所悟令人尋山訪之遂見此像坐小甎塔與夢符同便毀小塔更作大者高一十九級幷造寺宇好莊麗寺名法燈度三百僧住之如趙後寺有三十二人修得三果神於今塔後又造一寺供二果僧往太白採取芝草供養聖僧皆獲延寺今見在凡人不見所聞鍾聲寺鍾也其塔本基雖因劉曜仍是穆王立寺之處又是迦葉如來之古寺也貞觀年中玉華北慈烏川山常見鹿逐去還來有人異之於鹿集處深一丈獲一石像長丈許又問荊州前大明寺栴檀像者云是優塡王所造依傳從彼摸來至梁京師又有何者是本答云大明是其本像梁高旣崩像來荊渚至元帝承聖三年周平梁後收簿寶物皆入北其檀像者有僧珍法師藏隱房內多以財物賂遺使人遂得停隋開皇九年文祖遣使人柳顧言往定寺僧又求像令鎭荊楚顧是鄕人從之令別剋檀將往恭旨當時匠得一婆羅門僧名眞達爲造卽今興善寺像是亦甚靈異本像在荊僧以漆布之相好不及舊者眞本是作佛生成七日之身令加布漆乃與壯年相符故殊絕異於元本大明本是古佛住處靈像不肯北遷故也近有妙義法天人冥讚遂悟開發剝除漆布容重顯大動信心披覿靈儀合檀所本無補接光趺殊異蒙牙彫刻非人工所成興善像身一一乖本又問蜀地簡州三學山寺空燈常明者何答云山有菩薩寺迦葉佛正法初立有歡喜王菩薩造之寺名法自彼至今常明空表有小菩薩三百人斷粒遐齡常住此山燈又是山神李特續後供養特舊蜀主故至正月處處然燈以供養佛寺又問涪州相思寺側多古迹篆銘勒不識其緣答云此迦葉佛時有山姓羅名子明蜀人也舊是持戒比生憎破戒者發諸惡願令我死後作大力鬼噉破戒人因願受身作此山神多有眷屬所王土地東西五千餘里南北二千餘里年噉萬人以上此神本曾爲迦葉佛兄後爲弟子佛怜愍故來教化種種神變然始調伏乞受五戒隨識宿命因不噉人後心變故佛留迹育王於上起塔山頂神便藏於石中塔是育王所作其神見在其郭下寺塔育王所立事現付囑儀南海循州北山興寧縣界靈龕寺多有靈迹此乃文殊聖者弟子爲此山神多造惡業文殊愍之便教化識宿命請爲留迹我常禮事得離諸惡文殊爲現今者是也貞觀三年神命終生兜率天別有一神來居此卽舊神親家也大造諸惡生天舊神憐之下請文殊爲現小迹以化後又從正法故今此山大小迹現不匪由焉事現付囑儀又問見今泌州北山石窟中#山常有光明者何此窟迦葉佛釋迦佛二時備有往昔周穆王第二子造迦葉佛像又問渭州終南縣山有佛面山七佛㵎者事同於前南山庫谷大藏是迦葉佛自手所造之藏也今現有十三緣覺在谷內住又曰今諸處塔寺是古佛遺基育王表之故福地常在不可輕也今有名塔如常所聞無名塔者隨處亦有河西甘州郭中寺塔有舍利及河州靈巖寺佛殿下舍利秦州麥積崖佛殿下有舍利神廢之此寺周穆王所造名曰靈安經今四十年常有人出荊州長寧寺塔是育王造下有舍利入地丈餘函五重盛碎身骨益州三塔大石今名福感武擔今名靜亂雒縣今名寶與竝有神異如別傳又問楊都長干塔鄮塔是育王者非答云劉薩何感今往楊州上越望見長干有異氣因摽掘獲如今傳所明余問若爾已有長干便爲佛剎不非剎干也是地之名名隴爲塔逼長隴之側書不云乎包括干干越名隴也臨海鄮縣塔者亦是育王造是賢劫初佛中者有迦葉佛臂骨非人所見羅漢將往鐵圍山小塔其塔大有善神且現二魚井中鰻蟍魚護塔神也其側有足迹石上者云是前三佛所蹈處也從地踊出爲開俗福也昔周時此土大有人住故置此塔又問若爾周穆已後諸王逢置塔時何爲此土文記罕現答云靈塔爲於前緣多寶是神靈所造人有見者文字少傳楊雄劉向尋於廟書往見有佛經豈非秦前已有經塔今衡嶽南可五六百里在永州北大川東西五百餘里南北百餘里昔有人住數十萬家今生諸巨樹大者徑三二丈下無草木深林可愛中有大江東流入湘江尋㵎見之得川南有谷北入谷有方池四方砌水深龍居有犯者輒雷震山谷則多山果楊梅之屬列植相次池南有育王大塔石花捧之以石龕與地平塔東崖上具有碑記篆書可識登梯抄取足知立塔之由衡山南大明師置寺處亦有古塔云云其寺南北十餘里七處八會流渠靜處處皆立又問此土常傳佛是殷時周昭互說不同如何定指答曰皆有所弟子夏桀時生具見佛之垂化佛有三身報二身則非人見竝登地已上唯有化身普被三千百億天故有百億釋迦隨人所感前後不或在殷末或在魯莊俱在大千之前後咸傳一化感見隨機前後報常自湛然不足疑也又問今諸瑞像多云育王第四女所其事幽遠難得其實答云育王第四女厥貌非姸久而未出常恨其醜乃圖佛形相好異佛還如自身成已發願佛之相好挺異於人如何同我之形儀也以此苦邀彌經年月後感佛現忽異昔形父具問之述其所願今非山玉華荊州長沙楊都高悝及今崇敬竝是其像或書光趺人罕識育王令諸神鬼所在將往開悟佛今諸像面莫匪女形崇敬寺地是戰場西晉末五胡大起兵戈殺害此地特多地下人骨今由見在所殺無殘酷抂濫故諸神鬼攜以鎭之此冤魂得生善念周滅佛法神亦從隋祖載隆佛還重起云云又問諸神自在威力殊大至如蜀川三塔咸名大石人有堀者莫測其源至如秦川武功一塔古者相傳名曰育王三十年中一度出現貞觀已來兩度出現光瑞殊壯而舍利如指骨在石臼中如何陜陋若此答曰諸鬼神中貧富不定各是往業如人不殊天中亦爾隨其所有而用供養此塔云云又問幽冥所感俗中常有疑以神與形朽而猶重來如記傳中或經七日百日至三年者識來形起如生不殊如經中云錄其精神在彼王所五三七日何也答曰人稟七識識各有神心識爲主主雖前往而餘神守護足怪也敢問余云師言受戒一戒幾余答云見五戒中一戒五神未知大戒如何僧之受戒有二百五十若毀一重戒唯一神去則二百五十神恒隨戒者茍𧂐緜州巴西縣人得第二果客遊新繁村中教學其人不食酒肉村人多信外道與食其人不食村人遂打其人能書村人從乞不相禮遇遂卽懊惱因發誓願於村北草中仰臥筆向空書之村人怪問答云我書經遣天看讀不許人見上界諸天中天紙向下承筆遂寫得金剛般若經一卷經于七日方始得了諸天於造作寶蓋覆之地遂無草放牛兒避雨多於其下村中怪其衣燥我於茍先生寫經處避雨村人因遂卽信敬今於其處以木爲欄許侵行每至齋日村人於中法會云云鼓山竹林寺名迦葉佛時造周穆王於中更重造寺穆王佛殿幷及塑像至今現存山神從佛請五百羅漢此寺卽今見有二千聖僧遶寺左側見有五萬五通神仙供養此寺餘云云已後論諸律相余云師本在梁朝已爲稱首大有著述論名人皆聞之建初定林咸其所住及生見慈尊有慢情亦大有決律相故今生人閒今之所解百不存一然有所注記抄竝是曾聞餘習計師報命已終過一年矣今則以傳錄業餘慈力所熏天人扶助故日復一日師豈不知年已來無降損日但枯喪耳如枯樹朽車無由更壯余問若爾意欲更讀藏經抄錄要行見事可得遂不答云師前讀經大麤但究與律相符者於優柔文義過非深細必欲重讀分亦應得耳無奈報命久終生處欲師到常勸不願早生在人有弘律幸願悉之又曰所製章服儀靈神咸喜自法東傳六七百年南北律師情無此意安用殺生之財而爲慈悲之服全不然故也師獨拔此意答曰余讀智度論見佛著麤布僧伽梨懷在心何得乖此及聽律後見蠶衣由此興念著新章服儀通瞻古今教融會臥具三衣且凡情瑣細因尤身服所接莫匪損生焉肯捐捨於法服又法服所擬本顯慈仁之心非仁無以拔濟濟必由慈而獲故佛心者大慈也殺生而行慈未見其可故沈隱侯之著論也五畝之宅樹之以桑則年六十者容氣已衰內假縑纊外存大布所以大布之服通於富貴貧賤也今猶通行於王臣古法不俗有老少之殊故致降殺之異無損害之理少長咸一法衣是慈化通損害也云云又曰三衣破緣而縫江表咸然此何不爾余曰四分無文故絕三縫誦有文何得不用此制有以不可不云云又大衣重作師比行之然於上葉之乃三重也豈得然耶卽問其所作便執衣以示之此葉之下乃三重也此葉相者表於稻田之脛疆也以割裁衣段就裏刺之去葉撗表已後此則條內表田畝葉上表渠相豈不然今則通以布縵一非割截二又多旣非本制非無著著之失然猶令革之者止從得失爲論又問余云坐具兩重斯成本制截後更接但是一邊一頭意者接在四面通皆周緣如何余云今信成教不徒設也律云於本制外廣長更增半磔據文止是一廣一長不云四周之廣長也在事非無不便猶勝跋闍之便默然又問余云今見比丘行者以坐具置左肩上情不忍可何者資下之物如何在左肩上弟子俗人未廣知律師可說之樂聞斯要余云具在肩斯成教也舍利弗初起祇桓外道雲踊須達往命舍利弗乃具修威儀以尼師檀置左肩上庠序入大衆中至高座取而敷#之又諸律論多處有文比丘食已出定已尼師檀在左肩上又入林坐禪具三衣右角在左肩坐具安上又加盋袋於上故善見云盋袋貫左肩靑色分明豈古人之行也今則三衣下置左肘坐具藏于內臂乃論方坐若語竝在左體盋袋絡左膊下垂左膝時代訛變遂失本原余見古之瑞像今此方見制者莫不衣搭於左肩然後取衣角#共左臂內衣角屈而捉之恐出二角如羊耳之相則俯同此律亦是聖人揩摸有行則收束左臂坐則放縱左䏶未見正文所許終是放逸威儀又坐具之制本爲護於身衣及僧臥具也其中表裏俱淨不同此土之僧故經中乞食已還本處收衣鉢方始洗足而坐至於革屣拭刮綱系如面手焉故身衣俱淨無有不淨之者土衆僧身之臭穢焉可以言左右便曾不澡除內外衣裳曾何瀚濯衣少備褌袴尤多人見尚有厭之腥臊而聞義當悲其忍辱據此成文今在肩上觀事止可藏於臂中如有依法沙門不行惡習內外俱淨形服可觀豈得背佛誠言不順左肩之法故十誦鼻奈耶等三衣之鉤紐也去緣四指施鉤後八指施紐以右角挑左肩上紐綴於前鉤今則一倍反豈是教文所許但以凡僧識想准正教及以見緣如前差違賜垂箴諸非人等咸皆默然次後復有一天人來云弟子黃瓊敬已云向述坐具殊有可觀馮准經無差違者然終始不備故重卻論元佛初度五人爰及迦葉兄弟竝製袈裟#左臂坐具在袈裟下西方王臣披白㲲搭左肩上故佛制衣左臂異頞鞞比丘威儀度物爾時法服猶未搭肩後度諸衆徒侶漸多年少比丘儀容端美入城乞食多爲人愛是佛制衣角在肩後爲風飄聽以重物鎭上比丘不達佛意自造鎭衣之種種莊嚴諸俗譏論比丘以事白佛言我前聽安重物卽是尼師檀餘者不合後王舍城外道名達摩多稱一切智所著衣服竝皆鮮白日易一衣日三十浴所食皆以香薪香炭作之所住皆以香材塗泥皆以香汁園林皆植香樹所種花藥皆是香者流泉池水皆聚牛頭香內中水爲香雖帝釋歡喜之園未能加也世尊爾時將諸比丘入城乞食執持衣鉢具在肩有諸外道語達多言今瞿曇沙門入城乞食可往言論降從大師達摩多領徒衆披一領㲲價直千紫磨黃金將至佛所大梵王請佛上天外道來唯見比丘便問比丘肩上片布持作何用答曰擬將坐之又問汝所被衣名何等耶答云忍辱鎧也又問何名忍辱鎧答曰卽此爲三寶之相上制天魔下降外道達摩云衣旣爲可貴有大威靈豈得以所坐之布而居其上爲瞿曇教汝爲是汝自爲之時比丘咸皆默然外道云曇教汝此法不足可尊云何自稱一切智人若汝自爲之師何不復教汝比丘食訖還僧坊中以事白佛此佛制還以衣角居于左臂#坐具還在衣下於後比丘披著袈裟多不齊諸離車子譏言無有威儀所披衣狀如婬女猶如象鼻因此始制上安鉤紐今以衣角達于左臂置於左腋下不得令垂如上過也前引舍利弗事此方前開不見後制#義須綸綜往者雞鳴之詩挈壺掌漏刻之官無道官失其守諸侯朝顚倒衣裳人刺之可不鏡哉書云冠雖賤不可以居下屨雖貴不可以居上此言雖不可以上此言雖小可以況大人或詢諸芻蕘伏願仁慈不以人微廢教也余備聞雅論前後憲章斯則一化之所宗承三藏之弘徹也如或鏗執頓拒未聞何殊結集永開八事之緣不遵上座重結之相也縱無此示情或廣之五分律中餘方不爲淸淨者雖制不行據此可依准的況復天人賜降周統制開恨知之晩也於現教事等云篇仰以信之亦同飮光之罰歡喜也如是云云又云元制坐具之意用表塔基之相僧服袈裟在上以喩法身之塔塔基旣無偏邪坐具寧容縱廣使四周具不違磔手之文但以翻譯語略云各增半磔十宗而論卽是四周之又問比見西域僧來多縫衣葉者答曰此佛滅後將二百年北天竺僧與外道#同住外道嫉之密以利刃衣葉中同往王所外道告王沙門釋子內藏刀刃將欲害王因卽撿獲是普誅一國比丘時有耶舍羅漢諸比丘㩲且縫合爲絕命難此乃北方因事㩲且立制非佛所開有南方比丘皆亦縫合有無識者亦學縫之又今日戒壇之興佛所重也祇桓一頓結三壇兩居佛院惟佛所登集諸佛登壇而論僧尼結戒也僧院一壇爲受具者莊嚴別窟如須彌座神景石柱守護不虧下至水際經劫無沒北天竺東見有石壇相狀弘律師今何緣特立壇相天人幽顯莫不贊悅余答云曾見僧傳南林戒壇便重之故仰則也彼云豈惟一所重幽求南方大有初昔宋求那跋摩於蔡州立壇晉竺法護於瓦官寺立壇#晉支道林於石城汾各立一壇支法存於若耶溪謝敷隱處立壇道一於洞庭山立壇竺道生於吳中虎丘山立壇宋智嚴於上定林立壇宋慧觀於石梁寺立壇齊僧敷於無湖立壇梁法超於南㵎立壇梁僧祐於上雲居拪霞歸善愛敬四處立壇今荊州四層剎基長沙剎基大明寺前湖中#竝是戒壇今以事斷江右渝州已下迄于江淮之南通計戒壇有三百餘所山東河北關內劍南戒壇事不絕使江表佛法今四五百年曾不廢退由戒壇也戒爲法之初本立而不可傾也自北河之左右不聞名由此佛法三被誅殄又江漢之南山川秀麗綺錯見便忘返者土地之然也人依外根故使情智聰形心勇銳也遂能詳度佛教深有可依無所疑慮不可忘廢也中原兩晉氏南渡之後分爲一十六國武猛相陵佛法三除竝是北狄之亂本非文地隨心卽斷曾未大觀不然乎故戒壇之擧住持之式相也衆僧說戒受戒咸往登之事訖東迴左轉南出而返也余曰經中咸言右旋右繞右脅等相今云左遶如何天常法爾人乃右也故日月星辰皆左行也天氣風轉遂從西沒不見月之始生也初在西方漸漸而東從西沒漸上東迴也西沒風轉也地上蔓草生必左旋此天常也今有西從日月之轉人謀也佛亦從之轉者此方不爲淸淨也故如來右脅而臥首北面西觀本生地佛法久流之方也制諸比丘悉右脅臥因從請出祇桓圖相遂取紙畫分齊一一諸述其源流#如別可有數紙不久復有天來云姓姚氏云云弟子天人自有姓字語同天竺師旣不詢還述本音不久復有天來云茍氏云弟子本相人也往以夏殷多將居家入白鹿山山素有辟支佛云云最後一朝韋將軍至致敬相聞不殊恒禮弟子常見師師在安豐坊述廣弘明集剖斷邪正開段明顯前者甚適幽旨常欲相尋但爲三天下中佛僧事大鬪訟興兵攻伐不已弟子職當守護勸喩和詞無暫時停所以令前諸使者共師言議今暫得不得久住師今須解佛法衰昧竺諸國不及此方此雖犯戒大途慚內雖陵犯外猶愼護故使諸天其一善忘其百非若見造過咸皆流悉加守護不令魔子所見侵惱云云余問欲界主者豈非魔耶以下諸天皆非屬耶答云魔若行惡四天帝釋皆所不從若下二天行諸善法魔及魔女無如之何此方僧勝於大小乘曾無二見悉皆奉之西土不爾諸小乘人獲大乘經則投火中小僧賣於北狄老者奪其命根不可言述今菩提大寺主威猛象有八萬僧戶數千萬王征不得遶塔之下日有金帛收已自納廚內生魚頭積成大聚羊腔懸之於屠肆然亦守護不令惡鬼害之問曰可無善神龍王何因縱其造罪答曰血食之神咸來嚮衛諸受佛語守護大乘寺僧余曰常見此國殺戮爲功每願若死生龍鬼中有大勢力令其不殺如何此神還復縱殺答曰竝是衆生惡業所致魚羊還此是常理余曰還債之業誠是可然彼殺噉無不由惑惑是貪癡癡之惑結在惡道如何諸神故縱造答曰亦是業定諸佛尚不能除諸神者生此國中正念旣失便縱其余曰先有此願脫生失念隨彼如自非觀行#明白在泥不淄方可行如何如何又問彌天釋道安宇內式瞻云乘赤驢荊襄朝夕而見未審如何答曰虛也又曰若爾傳虛何爲河東寺上有驢峴山南有中驢村據此行由則乘驢之有地也答曰非也後人築臺於上植樹供養焉有佛殿之側頓置驢耶又中驢之名本是閭國郡國之故地後人不練遂妄擬之云云道宣律師感通錄此一卷書藏所無然而可洪音疏云出貞元目錄勘經惠澄上座傳來寄帙故在此函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진(晋)나라 신채(新蔡) 사람으로 자(字)는 영승(令升)이다.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관(官)은 저작랑(著作郞), 위(位)는 산기상시(散騎常侍)였다.
  2. 2)『수신기(搜神記)』라고도 하며 귀신요괴의 이야기와 불교의 인과응보에 관한 소설집이다.
  3. 3)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탕음현(湯陰縣)이다.
  4. 4)문왕(文王)이 도읍한 주(周)나라의 서울로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호현(鄠縣) 땅이다.
  5. 5)춘추전국시대의 위(衛)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자하(子夏)이며, 공자(孔子)의 제자로 문학에 특히 뛰어났다.
  6. 6)계찰괘검(季札挂劍)의 준말로 오(吳)나라의 계찰이 상국(上國)으로 사신 가는 도중에 서국(徐國)을 지나는데 그 나라의 임금이 계찰의 칼을 보고 갖고 싶어하므로 그는 마음속으로 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길에 서국에 들르니 그 나라 임금이 이미 죽었으므로 그가 칼을 무덤 옆의 나무에 걸고 갔다는 고사(古事)에서 나온 말로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을 이른다.
  7. 7)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東海) 가운데 있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을 말한다.
  8. 8)죽은 스님의 유물을 친근한 비구나 제자비구(弟子比丘)ㆍ간병비구(看病比丘) 등에게 주는 물건, 즉 개인 물건을 말한다.
  9. 9)사방승물(四方僧物)ㆍ현전승물(現前僧物)을 말한다. 즉, 법당ㆍ요사채 등의 공유물(公有物)을 말한다.
  10. 10)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가사로, 후세에 여러 가지 승의(僧衣)는 모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3의(衣)란 승가리(僧伽梨)ㆍ울다라승(鬱多羅僧)ㆍ안타회(安陀會)를 말하며, 3의는 모두 방형(方形)이며 여러 개의 작은 조각을 이용하여 꿰매었으므로 그 조수(條數)에 따라 3의로 나눈 것이다.
  11. 11)손권(孫權)이 세운 나라이다.
  12. 12)위천장군(韋天將軍)을 말하는데, 남방의 증장천(增長天)에 속한 8장군의 하나로서 성(姓)은 위(韋)요, 이름은 곤(琨)이다. 동ㆍ서ㆍ남 3주(州)의 불교를 옹호한다.
  13. 13)계율(戒律)의 법상(法相)을 말한다.
  14. 14)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 서북쪽이다.
  15. 15)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영원부(寧遠府)를 말한다.
  16. 16)진시황(秦始皇) 때에 정막(程邈)이 만든 서체(書體)이다.
  17. 17)옹(雍)ㆍ새(塞)ㆍ책(翟)의 세 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를 멸하고 진나라의 장수[降將]인 장한(章邯)ㆍ사마흔(司馬欣)ㆍ동예(董翳)를 왕으로 봉(封)하였으므로 3진(秦)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망진(亡秦)으로 정정해야 한다.
  18. 18)진(秦)의 정치가로서 시황제(始皇帝)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하여 사상을 통일하고 문자(文字)를 통일하여 소전(小篆)을 제정했다.
  19. 19)남조(南朝) 양(梁)ㆍ진(陳)의 학자로서 자(字)는 희빙(希馮)이며, 양(梁)나라에서 태학박사(太學博士)가 되고 진(陳)나라에서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옥편(玉篇)』ㆍ『여지지(輿地誌)』를 저술하였다.
  20. 20)고대로부터 송대(宋代)까지 국도(國都)에 있던 최고 학부이다.
  21. 21)전국시대(戰國時代)의 초(楚)나라의 재상이었던 황헐(黃歇)의 봉호(封號), 20여 년간 재상으로 있었고 문하에 식객(食客)이 3천여 명이 있었다 한다.
  22. 22)춘추전국시대의 제(齊)ㆍ초(楚)ㆍ연(燕)ㆍ한(韓)ㆍ위(魏)ㆍ조(趙)의 여섯 나라이다.
  23. 23)황제(黃帝)의 신하로서 새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든 사람이다.
  24. 24)흙을 높이 쌓아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돈대(墩臺)이다.
  25. 25)주(周)의 제5대왕 소왕(昭王)의 아들로서, 이름은 만(滿), 시호(諡號)는 목(穆)ㆍ목천자(穆天子)라고도 한다.
  26. 26)전국시대의 정(鄭)나라 사람으로 성(姓)은 열(列), 이름은 어구(禦寇)로서, 생몰연대와 사적(事蹟)은 미상이고, 황로(黃老)를 기본으로 학문을 하였고 『열자』 8권을 저술하였다.
  27. 27)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 즉 부처님을 말한다.
  28. 28)춘추전국시대 진(秦)의 주덕공(主德公)의 셋째 아들로서 이름은 임공(任公), 시호(諡號)는 목(穆)이다. 현사(賢士)를 부지런히 구하여 유여(由余)ㆍ백리해(百里奚)ㆍ건숙(蹇叔)ㆍ비표(丕豹)ㆍ공손지(公孫支) 등의 현신(賢臣)을 얻어 서성(西城)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29. 29)지금의 섬서성 함양현(咸陽縣)의 동쪽에 있던 군명(郡名)이다.
  30. 30)춘추전국시대의 진(秦)의 사람으로 병법(兵法)에 능통하였다.
  31. 31)삼서성 장안현(長安縣)의 서쪽 약 19리 지점에 있다.
  32. 32)세 가지 희생물이다. 즉, 소ㆍ양ㆍ돼지 등을 말한다.
  33. 33)중아아모하(中亞阿姆河) 유역(流域)의 고국명(古國名)이다.
  34. 34)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백향현(栢鄕縣)이다.
  35. 35)승가라(僧伽羅)라고도 하며 스리랑카로서, 실론의 옛 이름이다.
  36. 36)동한(東漢) 명제(明帝) 때에 건립되었으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에 12원(院)을 두고 화원사(花園寺)라고 하였다.
  37. 37)경(頃)은 백 이랑[百畝]이니 2경은 2백 이랑이다.
  38. 38)신령스런 독수리를 말한다.
  39. 39)16나한의 한분으로서 독성(獨聖)ㆍ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절마다 봉안하였다.
  40. 40)불보살이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것이다.
  41. 41)강좌(江左)라 하고, 양자강(揚子江)의 동쪽 지방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이라 한다.
  42. 42)요진(姚秦)의 역경가(譯經家)이다.
  43. 43)전단(栴檀)나무로 만든 불상이다.
  44. 44)재가인들이 팔재계(八齋戒)를 깨끗이 지키는 날로, 즉 매월 8ㆍ14ㆍ15ㆍ23ㆍ29ㆍ30일의 6일을 말한다.
  45. 45)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에 있다.
  46. 46)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태주부(台州府) 불하령(佛霞嶺) 산맥 동북단(東北端)에 있다.
  47. 47)중국 승려로서 속성(俗姓)은 이씨(李氏)이며, 420년에 승맹(僧猛)ㆍ담랑(曇朗) 등 25인과 함께 인도에 가서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48. 48)양(梁) 『고승전(高僧傳)』 3권이라야 맞는다.
  49. 49)대승 3현(賢)은 10주(住)ㆍ10행(行) 10회향(廻向)이고, 소승 3현(賢)은 5정심관(停心觀)ㆍ별상념주(別相念住)ㆍ총상념주(總相念住)이다. 구마라집은 3과(果)를 얻은 성자라고도 한다.
  50. 50)섬서성 의군현(宜君縣)의 서남쪽에 있는 궁전의 이름이다.
  51. 51)불상을 모시는 돌로 만든 감실(龕室)이다.
  52. 52)위(魏)의 사마염(司馬炎)이 원제(元帝)를 폐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낙양(洛陽)에 도읍한 나라로, 52년 만에 흉노(凶奴)의 유총(劉聰)에게 망하였다(265~316).
  53. 53)흉노(凶奴)ㆍ갈(羯)ㆍ선비(鮮卑)ㆍ씨(氏)ㆍ강(羌) 등이다.
  54. 54)5호 16국의 하나인 전조(前趙) 사람. 유연(劉淵)의 족자(族子)로서 자(字)는 영명(永明)이며, 장안(長安)을 진압하고 국호를 조(趙)라고 고쳤다.
  55. 55)후조(後趙)를 세운 임금으로서 갈인(羯人)이다. 자(字 )는 세룡(世龍)이며, 유연(劉淵)의 부하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진(晋)나라 태흥(太興) 연간에 양국(襄國) 산동성(山東省) 내에서 웅거(雄據)하여 전조(前趙)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왕이라 일컫다가 유요를 죽이고 제(帝)라고 참칭(僭稱)하였다.
  56. 56)당(唐) 태종(太宗)이 통치하던 627∼649년의 기간을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한다.
  57. 57)예부터 남북교통(南北交通)의 요충지로서 지금의 호남(湖南)ㆍ호북(湖北)의 두 성(省) 및 광서(廣西)ㆍ귀주(貴州)ㆍ사천(泗川)ㆍ광동(廣東)의 일부를 포함한다.
  58. 58)BC. 6세기경의 인도 반사국의 왕으로, 푸라판타왕의 왕자로서 모후가 만삭 때에 매가 채어 가 히말라야의 나무 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33천(天)에서 생모를 위해서 설법을 하였을 때, 부처님을 배알하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병이 생기자 많은 신하들이 그의 쾌차를 빌며 우두산(牛頭山)의 향목(香木)과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인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28ㆍ『서역기(西域記)』 5ㆍ『경률이상(經律異相)』 6에 자세히 보인다.
  59. 59)남조(南朝)의 하나로서 소연(蕭衍)이 제(齊)나라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운 왕조(王朝)이고, 건강(建康)에 도읍하였다(502∼557).
  60. 60)호북성(湖北省)의 강릉현(江陵縣)에 있다.
  61. 61)북조(北朝)의 하나. 선비족(鮮卑族)인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를 멸하고 세운 나라. 후주(後周)라고도 하며, 도읍은 장안(長安), 557∼580경이다.
  62. 62)옛 주(州)의 하나로 형주의 춘국(椿國)이다.
  63. 63)광동성(廣東省) 혜양현(惠陽縣)의 동북쪽이다.
  64. 64)감숙성(甘肅省)ㆍ농서현(隴西縣)의 동남쪽이다.
  65. 65)황하(黃河) 서쪽의 땅으로, 지금의 감숙성 지방이다.
  66. 66)산동성(山東省) 장청현(長淸縣) 동남쪽 산 아래에 위치하며, 북위(北魏) 정광(定光) 연간에 법정(法定)이 창건하였다.
  67. 67)한(漢)의 성도(成都) 사람. 자(字)는 자운(子雲)이며, 저서로는 『태현경(太玄經)』ㆍ『양자(揚子)』ㆍ『법언(法言)』ㆍ『방언(方言)』ㆍ『훈찬(訓纂)』ㆍ『주잠(州箴)』등이 있다.
  68. 68)전한(前漢)의 종실(宗室). 자(字)는 자정(子政), 저서로는 『열녀전(列女傳)』ㆍ『신서(新序)』ㆍ『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ㆍ『설원(說苑)』 등이 있다.
  69. 69)호남성(湖南省) 형산현(衡山縣)에 있다.
  70. 70)호남성의 동정호(洞庭湖)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71. 71)60화엄경을 인중(人中)의 3처(處)와 천상(天上)의 4처에서 설하였으므로 7처라고 하고, 그 가운데 보광법당(普光法堂)에서 두 번의 법회가 있었으므로 8회라고 한다.
  72. 72)탕왕(湯王)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세운 왕조(B.C. 1766∼B.C. 1123)이다.
  73. 73)무왕(武王) 발(發)이 은(殷)나라를 멸하고 세운 왕조(B.C.1050∼B.C. 256)이다.
  74. 74)주대(周代)의 국명으로, 주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周公) 단(旦)이 봉함을 받은 나라이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주부(兗州府) 지방이다.
  75. 75)우왕(禹王)이 세운 고대 왕조 17주(主)로, 439년 동안 존속했다.
  76. 76)하(夏)나라 말세 폭군으로 이름은 계(癸)이며,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에게 멸망당하였다.
  77. 77)문제(文帝) 양견(楊堅)이 북주(北周)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운 왕조(581∼616)이다.
  78. 78)과거의 업인(業因)에 의하여 일생 동안 받는 수명이다.
  79. 79)『석문장복의(釋門章服儀)』를 말하며, 도선(道宣)이 저술한 복장에 대한 책이다.
  80. 80)양자강(揚子江)의 동쪽 지방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이다.
  81. 81)5조(條)ㆍ7조로 끊지 않고 그대로 꿰매어 조(條)의 모양이 없는 가사(袈裟)이다.
  82. 82)비사리국(毘舍離國)의 지명으로 발사자(跋闍子)비구가 불멸 후 100년에 십사비법(十事非法)을 일으킨 지방을 말한다.
  83. 83)중인도(中印度) 비사리성(非舍離城)의 찰제리(刹帝利) 종족이다.
  84. 84)예불(禮佛)ㆍ염불(念佛)ㆍ지계(持戒)ㆍ간경(看經)ㆍ좌선(坐禪)ㆍ참선(參禪)ㆍ득오(得悟)ㆍ설법(說法) 등이다.
  85. 85)지금의 사천성 중경(重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