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2_0881_a_01L고승전 제12권
032_0881_a_01L高僧傳卷第十二 亡身 誦經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032_0881_a_02L梁會稽嘉祥寺沙門釋慧皎撰

6. 망신(亡身)
032_0881_a_03L亡身第六
釋僧群一 釋曇稱二
釋法進三 釋僧富四
釋法羽五 釋慧紹六
釋僧瑜七 釋慧益八
釋僧慶九 釋法光十

1) 석승군(釋僧群)
032_0881_a_09L釋曇弘十一
승군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맑고 깨끗하여 가난함으로 절개를 지키고, 푸성귀를 먹으며 경을 외웠다. 후에 나강현(羅江縣)의 곽산(霍山)에 자리 잡아, 띳집을 얽어 살았다. 이 산은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있다. 정상에는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지름이 몇 길 가량 되었으며, 고인 물의 깊이가 6, 7척이나 되었다. 고을의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뭇 신선이 살던 곳으로, 신선들은 물만 먹고도 주리지 않았기에 곡식을 끊었다”고 한다.
그 후 진수(晋守)의 태수(太守) 도기(陶夔)가 그 소문을 듣고 물을 찾았다. 승군이 물을 도기에게 보냈으나, 산만 벗어나면 곧 구린 냄새가 났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서너 번 거듭하자, 도기는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 이 날 날씨는 매우 맑게 개였다. 산에 이르자 비바람이 치면서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며칠을 그곳에 머물렀으나, 끝내 그곳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마침내 탄식하였다.
“속세 안의 범부라서, 마침내 현인과 성인들께서 막으시는구나.”
개탄하고 한탄하면서 돌아갔다.
032_0881_a_10L釋僧群未詳何許人淸貧守節蔬食誦後遷居羅江縣之霍山搆立茅室山孤在海中上有石盂逕數丈許深六七尺常有淸流古老相傳云群仙所宅群飮水不飢因絕粒後晉安太守陶夔聞而索之群以水遺夔出山輒臭如此三四夔躬自越海甚晴霽及至山風雨晦暝停數日竟不得至迺歎曰俗內凡夫遂爲賢聖所隔慨恨而返
032_0881_b_01L승군의 초막집은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과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었다. 항상 외나무로 다리를 삼고, 이 다리를 따라 물을 퍼왔다.
그 후 문득 날개가 부러진 오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날개를 펴며 다리를 가로막고, 주둥이로 나아가 승군을 쪼았다. 승군은 지팡이를 들어올려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오리가 손상을 입을까 두려웠다. 이로 인하여 암자로 되돌아와서 물을 끊고 마시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140세이다. 임종 때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이가 어렸을 때, 오리의 날개를 꺾은 일이 있다. 이것이 현세의 과보로서 증명하는구나.”
032_0881_a_20L群庵舍與盂隔一小常以一木爲梁由之汲水後時忽有一折翅鴨舒翼當梁頭就唼群欲擧錫杖撥之恐畏傷損因此迴還水不飮數日而終春秋一百四十矣臨終向人說年少時經折一鴨翅此以爲現報

2) 석담칭(釋曇稱)
담칭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사랑이 넘쳐 은혜를 베풂이 곤충까지 미쳤다.
진(晋)의 말기에 팽성(彭城)에 이르렀다. 80세 가량의 노인 부부가 궁핍하고 쇠약한 것을 보았다. 곧 계율을 버리고 그들의 노복(奴僕)이 되어 여러 해를 일하였다. 안으로는 도덕을 닦아, 한 번도 버린 일이 없었다. 그러자 이에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 후 두 노인이 죽자, 품을 팔아 얻은 삯을 모두 두 노인의 복을 짓는 데 썼다. 그것으로 스스로 속죄하는 일에 견주었다. 장례를 마친 뒤, 다시 도문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할 때에 필요한 물건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032_0881_b_04L釋曇稱河北人少而仁愛惠及昆虫晉末至彭城見有老人年八十夫妻窮迺捨戒爲奴累年執役而內修道未嘗有廢鄕鄰嗟之及二老卒賃獲直悉爲二老福用擬以自贖事畢欲還入道法物未備
전송(前宋)의 초기에 팽성의 가산(駕山) 아래에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해를 입는 사람이 하루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이에 담칭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호랑이가 만약 나를 잡아먹는다면, 재앙은 당장 해소될 것이오.”
마을 사람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곧 그날 밤에 혼자 풀 속에 앉아 있으면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의 이 몸으로 너의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채우거라. 네가 지금부터 원한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이 멎는다면, 미래세계에는 아마도 위없는 승려들의 식사를 얻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생각이 바른 것을 알았다. 각기 울면서 절하고 돌아갔다.
그 날 밤 4경(更)에 이르러, 호랑이가 담칭을 잡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남산에 이르러 보니, 몸은 다 먹어치우고 오직 머리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장례를 치르고 탑을 세웠다. 그 후로는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멎었다.
032_0881_b_10L宋初彭城駕山下虎災村人遇害日有一兩稱乃謂村人曰虎若食我災必當消村人苦諫不從卽於是夜獨坐草中呪願曰我此身充汝飢渴令汝從今息怨害未來當得無上法食村人知其意各泣拜而還至四更中聞虎取稱村人逐至南山噉身都盡唯有頭在因葬而起塔爾後虎災遂息

3) 석법진(釋法進)
법진은 혹 도진(道進), 혹 법영(法迎)이라고도 한다. 성은 당(唐)씨이며 양주(凉州) 장액(張掖)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고행을 정밀히 하였다. 독송을 익히면서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덕이 있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존중하였다. 저거몽손이 죽고 나서, 아들인 저거경환(沮渠景環)이 호(胡) 오랑캐에게 격파당하자, 법진에게 물었다.
“지금 방향을 바꿔 고창(高昌)을 침략하려 한다. 이길 수 있겠는가?”
법진이 말하였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다만 굶주리는 재난이 있을까 근심입니다.”
군병을 돌려 곧 평정하였다.
032_0881_b_18L釋法進或曰道進或曰法迎姓唐涼州張掖人幼而精苦習誦有超邁之德爲沮渠蒙遜所重遜卒子景環爲胡寇所破問進曰今欲轉略高昌爲可剋不進曰必捷但憂災餓耳迴軍卽
032_0881_c_01L그 후 3년이 지나서 저거경환이 죽었다. 아우인 저거주(沮渠周)가 뒤를 이어 제왕이 되었다. 이 해 흉년이 들어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저거주는 이미 법진을 섬겼다.
법진은 여러 번 저거주에게 구걸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나라에 비축한 식량이 조금씩 고갈되었다. 그러자 법진은 더 이상 나라에 구걸하지 않았다.
곧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다. 칼과 소금을 가지고, 깊고도 궁벽한 굴속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다. 차례로 그들에게 삼귀의의 계를 내려주었다. 곧 옷과 발우를 나무에 걸어 놓고, 굶주린 사람들의 앞에 몸을 던지며 말하였다.
“그대들에게 보시하니 함께 먹으시오.”
여러 사람들은 비록 굶주려 고단하였지만, 아직도 의리로 보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법진은 곧 스스로 살을 잘라, 소금을 쳐서 이를 먹게 하였다. 그러자 두 넓적다리의 살이 다 없어졌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려 더 이상은 스스로 잘라낼 수 없었다. 이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나의 가죽과 살을 취하면, 아직도 며칠은 견딜 것이오. 만약 왕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곧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니, 오직 취할 수 있을 때 이를 갈무리하시오.”
굶주린 사람들은 슬피 울면서 취할 수 없었다.
032_0881_c_01L後三年景環卒弟安周續立是歲飢荒死者無限周旣事進進屢從求以賑貧餓國蓄稍竭進不復求淨洗浴取刀鹽至深窮窟餓人所聚之處次第授以三歸便挂衣鉢著樹投身餓者前云施汝共食衆雖飢困猶義不忍受進卽自割肉和鹽以啖兩股肉盡心悶不能自割因語餓人云汝取我皮肉猶足數日若王使來必當將去但取藏之餓者悲悼無能取者
잠깐 사이에 제자들이 찾아오고, 왕이 보낸 사람이 다시 와 보았다. 온 나라 사람이 달려와, 소리 높이 울부짖음이 서로 이어졌다. 곧 가마에 태워 궁전으로 돌아왔다.
저거주는 칙명으로 삼백 섬의 보리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따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법진의 숨이 끊어졌다. 성 북쪽으로 나가서 다비하였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렀고 7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시신과 뼈는 모두 다 타버렸지만, 오직 혀만은 타지 않았다. 이에 곧 그 자리에 삼층탑을 세우고, 오른편에 비를 세웠다.
032_0881_c_11L須臾弟子來至王人復看擧國奔赴號叫相屬因輿之還宮周勅以三百斛麥以施餓者別發倉廩以賑貧民至明晨乃絕出城北闍維之炎衝天七日乃歇尸骸都盡唯舌不卽於其處起塔三層樹碑于右

∙승준(僧遵)
법진의 제자인 승준은 성이 조(趙)씨로 고창 사람이다. 『십송률』에 뛰어나고 푸성귀를 먹으며, 행실이 절도가 있었다. 『법화경』ㆍ『승만경』ㆍ『금강경』ㆍ『반야경』을 외웠다. 또한 제자들을 열심히 격려하고 항상 참회를 일삼았다.
032_0881_c_16L弟子僧遵姓趙高昌人善『十誦律』食節行誦『法華』『勝鬘』『金剛波若』又篤厲門人常懺悔爲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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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승부(釋僧富)
승부의 성은 산(山)씨이며,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 산패(山覇)는 남전(藍田)의 수령이었다.
승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배움을 돈독히 익혀 싫어함이 없었다. 땔감을 모아, 그것을 촛불로 삼아 비추어서 책을 읽었다.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경전과 역사를 두루 다 읽었다.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웠고 담론에 뛰어났다.
그 후 위진(僞秦) 위장군(衛將軍)인 양옹(楊邕)을 만나자, 그가 승부의 옷과 식량을 도와주었다. 습착치(習鑿齒)와 손잡고, 함께 배움에 뜻을 두었다.
그 후 도안(道安)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강의를 들었다. 마침내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에 머리를 깎고, 도안에게 의지하여 수업하였다. 도안이 죽은 후에는 위군(魏郡)의 정위사(廷尉寺)로 돌아왔다. 휘장을 내리고 생각에 잠겨 속세의 일을 끊었다.
032_0881_c_19L釋僧富姓山高陽人父霸爲藍田令富少孤居貧而篤學無厭採薪爲燭以照讀書及至冠年備盡經史美姿善談論後遇僞秦衛將軍楊邕其衣糧習鑿齒攜共志學及聽安公講『放光經』遂有心樂道於是剃髮安受業安亡後還魏郡廷尉寺下帷潛思絕事人閒
당시 마을에는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들이 있었다. 한 어린아이를 약탈하여, 그 심장과 간을 취해 정신의 긴장을 풀고자 하였다. 승부는 길거리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우연히 강도들을 만났다. 자세히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내 옷을 벗고 자기와 어린아이를 바꾸자고 하였다. 그러나 강도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승부가 말하였다.
“어른의 오장도 역시 쓸 수 있는가?”
강도들은 승부가 자기 몸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거짓말로 말하였다.
“좋다.”
이에 승부는 생각하였다.
‘나의 허깨비나 불꽃같은 몸은 언젠가는 한 번 죽음을 만날 터이다. 죽음으로 사람을 구제한다면,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으리라.’
032_0882_a_04L時村中有劫劫得一小兒欲取心肝以解神富逍遙路口遇見劫具問其意因脫衣以易小兒群劫不許富曰大人五藏亦可用不劫謂富不能亡身妄言亦好富迺念曰我幻炎之軀會有一死以死濟人死猶生
곧 스스로 강도들의 칼을 취하여, 가슴에서 배꼽까지 내려 그었다. 강도들은 다시 서로 허물하고 책망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곧 어린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길거리에서 당시 길 가던 한 사람이 승부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았다. 곧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승부는 비록 갑자기 숨이 답답한 상태였으나, 아직도 입으로 말은 할 수는 있었다. 곧 자세히 사건에 대해 대답해주었다. 이 사람은 슬퍼하고 애도하며 상심하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바늘을 갖고 왔다. 그의 뱃가죽을 꿰매 주고, 효험 있는 약을 발라 주었다. 가마에 태워 절로 돌아가 쉬게 하였다. 얼마 후 상처가 나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82_a_10L卽自取劫刀劃胸至臍群劫更相咎責四散奔走卽送小兒還路口時行路一人見富如此因問其故富雖復頓悶口猶能言迺具答以事此人悲悼傷心還家取鍼縫其腹皮塗以驗藥輿還寺將息少時而後不知所終

5) 석법우(釋法羽)
법우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혜시(慧始)의 제자가 되었다. 혜시는 행실이 바로 서고, 고행을 정밀히 하여 두타행을 닦은 이였다. 법우는 마음을 삼가는 데 용맹하여, 깊이 그 도에 통달하였다. 항상 약왕(藥王)보살의 자취를 우러러 본받아, 몸을 불태워 공양하고자 하였다.
당시 위진(僞晋)의 왕인 요서(姚緖)가 포판(蒲坂)에 주둔하였다. 법우는 이 일을 요서에게 아뢰니, 요서가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는 길은 방법이 많은데, 하필 왜 몸을 불태우는가? 감히 굳게 어길 수는 없지만, 세 번 더 생각하기를 바란다.”
법우는 맹서한 뜻이 이미 무거웠으므로, 곧 향유를 마시고 베로 몸을 둘둘 말았다. 「사신품(捨身品)」을 외우기를 마치자, 불로 스스로를 태웠다. 도인과 속인들이 바라보면서, 슬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나이는 45세이다.
032_0882_a_16L釋法羽冀州人十五出家爲慧始弟始立行精苦修頭陁之業羽操心勇猛深達其道常欲仰軌藥王燒身供養時僞晉王姚緖鎭蒱坂羽以事白緖緖曰入道多方何必燒身不敢固違幸願三思羽誓志旣重卽服香以布纏體誦捨身品竟以火自燎道俗觀視莫不悲慕焉時年四十有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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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혜소(釋慧紹)
혜소의 씨족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때 어머니가 물고기나 고기를 먹이면 곧 토해냈다. 그러나 채소를 먹이면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곧 푸성귀를 먹었다. 여덟 살에 이르러 출가하여, 승요(僧要)의 제자가 되었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늠름하게 힘써서, 고행으로 절개를 드러내었다.
032_0882_b_01L釋慧紹不知氏族小兒時母哺魚肉輒吐咽菜不疑於是便蔬食至八歲出家爲僧要弟子精懃懍勵苦行標
그 후 승요를 따라 임천(臨川)의 초제사(招提寺)에 머물렀다. 마침내 몰래 몸을 불태울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항시적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장작을 쪼개서 동산(東山)의 석실에 몇 길의 높이로 쌓아 놓았다. 중앙에 감실을 하나 열어 놓아 자기 몸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곧 절로 돌아와 승요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승요가 간곡하게 충고하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분신하는 날에 이르자, 동산에서 대중들의 팔관재(八關齋)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알고 지낸 이들에게 고별인사를 하였다. 그 날 온 경내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수레와 말 탄 사람도 많았다. 또한 금은보화를 갖고 온 사람도 이루 다 일컬을 수 없었다.
초저녁에 부처님 주위를 돌면서 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승소는 스스로 향을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주기를 마치자, 촛불을 손에 잡고 섶에 불을 붙이고는, 그 가운데 들어가 앉았다. 『약왕경(藥王經)』 「본사품(本事品)」을 외웠다.
032_0882_b_05L後隨要止臨川招提寺迺密有燒身之意常雇人斫薪 ((艹/積)) 於東山石室高數丈中央開一龕足容己身迺還寺辭要要苦諫不從卽於焚身之日於東山設大衆八關幷告別知識日闔境犇波車馬人衆及齎金寶者不可稱數至初夜行道紹自行香香旣竟執燭然薪入中而坐誦「藥王本事品」
대중들은 승소가 보이지 않자, 그가 이미 떠난 것을 깨달았다. 예배도 끝나지 않았지만, 모두 장작을 쌓은 곳에 모여들었다. 장작더미에서 크게 슬퍼하는데, 송경하는 소리가 아직 멎지 않았다. 불길이 이마 있는 곳에 이르자, ‘일심(一心)’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끝나자, 갑자기 송경소리가 끊어졌다.
대중들은 모두 한 말 가웃한 크기의 큰 별 하나가, 곧바로 연기 속을 내려왔다가 돌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를 본 사람은 모두 천궁(天宮)에서 승소를 영접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장작더미도 마침내 타버렸다.
승소는 임종 때 동학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몸을 불사른 곳에 아마도 오동나무가 돋아날 것이니, 삼가하여 베지 말게나.”
그 후 사흘이 지나자, 과연 오동나무가 돋아났다.
승소가 몸을 불사른 것은 원가(元嘉) 28년(451)의 일이다. 그때 나이는 28세이다.
032_0882_b_13L衆旣不見紹悟其已去禮拜未畢悉至薪所 ((艹/積)) 已烔然誦聲未息火至額聞唱一心言已奄絕大衆咸見有一星其大如斗直下煙中俄而上天時見者咸謂天宮迎紹經三日薪聚乃盡紹臨終謂同學曰吾燒身當生梧桐愼莫伐之其後三日生焉紹焚身是元嘉二十八年年二十八

∙승요(僧要)
승소의 스승인 승요도 맑고 삼가하여, 아름다운 덕이 있었다. 나이 160세에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882_b_21L紹師僧要亦淸謹有懿德年一百六十終於寺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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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승유(釋僧瑜)
승유의 성은 주(周)씨이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스무 살의 나이로 출가하여 소박하게 일삼고 순수하였다.
원가(元嘉) 15년(438)에 동학인 담온(曇溫)ㆍ혜광(慧光) 등과 더불어, 여산(廬山)의 남령(南嶺)에 함께 정사를 세웠다. 초은사(招隱寺)라 이름 지었다. 승유는 항상 생각하였다.
‘허물을 삼도(三途)에 맺는 것은 사람의 정(情)과 형체 때문이다. 정이 장차 다하면, 형체도 역시 마땅히 소진할 것이다. 약왕보살의 발자취를 어찌 홀로 멀다고 말하겠는가?’
이에 여러 번 자신의 맹서를 발원하다가, 비로소 몸을 불태울 결심을 하였다.
032_0882_b_22L釋僧瑜姓周吳興餘杭人弱冠出家業素純粹元嘉十五年與同學曇溫慧光等於廬山南嶺共建精舍名曰招隱瑜常以爲結累三塗情形故也情將盡矣形亦宜損藥王之轍獨何云遠於是屢發言誓始契燒身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 6월 3일에 섶을 모아 감실을 만들었다. 아울러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이날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섞이면서, 빈틈없이 비가 쏟아졌다.
이에 승유는 곧 서원하였다.
“만약 나의 뜻하는 일을 밝힐 수 있다면, 아마 하늘도 맑게 밝아질 것이다. 만약 감응이 없다면, 마땅히 큰비가 쏟아질 것이다. 이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신의 감응이 어둡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
말이 끝나자 구름 낀 날씨가 밝게 개였다.
초저녁이 되자 대소변을 끝내고, 장작더미 감실 속에 들어가 합장하고 편안히 앉았다. 「약왕품」을 외웠다. 화염이 교차하여 몸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합장한 자세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도인과 속인들로서 아는 사람들이 달려와 산에 가득하였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면서 인연 맺기를 원하였다. 그때 모두가 자줏빛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랜 후에야 그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이는 44세이다.
032_0882_c_05L以宋孝建二年六月三日集薪爲龕幷請僧設齋告衆辭別是日雲霧晦合雨交零瑜迺誓曰若我所志克明當淸朗如其無感便當滂注使此四知神應之無昧也言已雲景明霽至初夜竟便入薪龕中合掌平坐「藥王品」火焰交至猶合掌不散道俗知者奔赴彌山竝稽首作禮願結因咸見紫氣騰空久之乃歇時年四十四
그 후 14일이 지나서 승유의 방 한가운데에서 쌍 오동이 돋아났다. 뿌리와 가지가 풍성하고 무성하였다. 크고 가는 모습이 비슷하여, 땅을 꿰뚫고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침내 서로 이어진 나무 결[連樹理]을 이루었다. 알 만한 이들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라보수(娑羅寶樹)가 열반의 세계를 밝힌 것처럼, 승유도 거의 이에 거의 가까우므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난 것이리라.’
이로 인하여 그를 쌍동사문(雙桐沙門)이라 불렀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평남장사(平南長史)로 있었다. 친히 그 일을 목도하고, 자세히 그를 위해 전기와 찬(贊)을 지었다.
032_0882_c_15L其後旬有四日瑜房中生雙梧桐根枝豐茂巨細相如貫壤直聳遂成奇樹理識者以爲娑羅寶樹剋炳泥洹瑜之庶幾故現斯證因號爲雙桐沙吳郡張辯爲平南長史親睹其事具爲傳贊
찬하노라.

멀고 먼 그윽한 기연이며
아득한 지극의 도리로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드는 것을
누가 묘한 보배라 하였던가.
032_0882_c_20L贊曰
悠悠玄機
茫茫至道
出生入死孰爲妙寶其一

예전 약왕보살께서
남다른 교화 절륜하다고
지난날 그 말 들었는데
지금 이 사람을 보았어라.
032_0882_c_21L自昔藥王
化絕倫
往聞其說
今睹斯人其二

영명하고 영명하신 님이여,
지혜와 선정으로 마음 굳혀
신령이 응결된 자줏빛 기운에다
그 자취 한 쌍의 나무로 드러내셨네.
032_0882_c_22L英英沙門
慧定心固
凝神紫氣
表迹雙樹其三
032_0883_a_01L
그 덕 좋아할 만하고
그 지조 귀중하도다.
이 글 지어서
그 모습 어렴풋이 기리노라.
032_0883_a_01L其德可樂
其操可貴
文之作矣
飄髣髴其四

8) 석혜익(釋慧益)
혜익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서울로 나와 죽림사(竹林寺)에서 쉬었다.
그는 부지런히 고행하여 정진하면서, 서원하여 몸을 불사르고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혹 비방하기도 하고, 혹 찬양하기도 하였다. 대명(大明) 4년(460)에 이르러 비로소 곡식을 물리치고, 오직 삼과 보리[麻麥]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대명 6년(462)에 이르자 다시 삼과 보리도 끊었다. 다만 소유(蘇油)만을 먹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소유마저도 끊고, 오직 향환(香丸)만을 복용하였다. 그 결과 비록 몸은 약하고 쇠잔해도, 마음은 경계하여 올곧았다.
효무(孝武)황제는 깊이 경이로움을 더하여 정성스런 문안을 드렸다.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을 파견하여 절을 찾아가 혜익에게 충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혜익이 맹서한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032_0883_a_02L釋慧益廣陵人少出家隨師止壽春宋孝建中出都憩竹林寺精勤苦行誓欲燒身衆人聞者或毀或讚至大明四年始就卻粒唯餌麻麥到六年又絕麥等但食蘇油有頃又斷蘇油唯服香丸雖四大緜微而神情警正孝武深加敬異致問慇懃遣太宰江夏王義恭詣寺諫益益誓志無改
대명 7년(463) 4월 8일에 이르자, 곧 불태우는 곳으로 나아갔다. 종산(鍾山)의 남쪽에 가마솥을 설치하여 기름을 마련하였다. 그 날 아침 소가 모는 수레를 사람으로 하여금 끌게 하여, 절에서 산으로 갔다. 제왕은 억조 백성들이 기대는 존재며, 또한 삼보가 기탁하는 바라 하여, 곧 자기 힘으로 궁성에 들어가 운룡문(雲龍門)에 이르렀다. 그러나 걸어서 내려갈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아뢰었다.
“혜익 도인이 지금 몸을 버리려고, 문에 이르러 고별을 아룁니다. 깊이 불법으로 우러러 누를 끼쳤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달라져, 곧 몸소 운룡문으로 나갔다. 혜익은 황제를 만나자 거듭 불법을 부탁하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황제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어 여러 왕비와 도인ㆍ속인ㆍ선비ㆍ서민들이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옷을 던지고 보배를 버리는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마솥에 들어가 한 작은 상에 기대었다. 옷가지로 스스로 몸을 감고, 머리에는 하나의 긴 모자를 쓰고는 기름을 쏟아 부었다. 곧 나아가 불을 붙이려 하였다.
032_0883_a_10L至大明七年四月八日將就焚燒迺於鍾山之南置鑊辦油其日朝乘牛車以人牽自寺之山以帝王是兆民所又三寶所寄乃自力入臺至雲龍不能步下令人啓聞慧益道人今捨身詣門奉辭深以佛法仰累帝聞改容卽躬出雲龍門益旣見帝重以佛法憑囑於是辭去帝亦續至諸王妃后道俗士庶塡滿山谷投衣棄寶不可勝計益乃入鑊據一小牀以衣具自纏上加一長帽以油灌之將就著火
032_0883_b_01L황제는 태재(太宰)를 시켜 가마솥 있는 곳에 이르러, 요청하고 타일렀다.
“도행의 방법은 많은데, 하필이면 목숨을 버리는가? 원컨대 세 번 생각하여, 다시 다른 길로 나아갔으면 다행이겠다.”
혜익의 슬기로운 지조는 확연하여,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었다. 곧 대답하였다.
“이 미미한 몸, 천한 목숨이, 어찌 위에 계신 천자의 마음에 남을 만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성상의 자애로움이 망극하오이다. 원컨대 스무 사람을 제도하여 출가시켜 주십시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허가하였다. 이에 혜익은 곧 손수 촛불을 손에 잡고, 모자를 태웠다. 모자가 타오르자 곧 촛불을 버리고, 합장하여 「약왕품」을 외웠다. 불길이 눈썹에 이르기까지, 외우는 소리가 분명하다가, 눈에 미치자 마침내 희미해졌다.
032_0883_a_22L帝令太宰至鑊所請諭曰道行多方何必殞命幸願三思更就異途益雅志礭然曾無悔念迺答曰微軀賤命何足上留天心聖慈罔已者度二十人出家降勅卽許益迺手自執燭以然帽帽然迺棄燭合掌誦「藥王品」火至眉誦聲猶分明及眼乃昧
귀족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애처롭고 안타까워하는 메아리 소리가 그윽한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가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부르고 슬퍼하였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불길은 이튿날 아침에 이르러 마침내 다하였다. 황제는 그때 공중에서 피리와 나팔소리가 들리며, 기이한 향기가 물씬 풍겨 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해가 다하도록 그곳에 있다가, 비로소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 꿈에 혜익이 석장을 흔들며 황제 앞에 이르렀다. 다시 불법을 부탁하였다.
이튿날 황제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사람들을 제도하며, 재주(齋主)에게 창백(唱白)하게 하여, 나타난 조짐과 상서로움을 자세히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몸을 불사른 곳을 약왕사(藥王寺)라 일컬었다. 이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견준 이름이다.
032_0883_b_05L貴賤哀嗟響振幽谷莫不彈指稱惆悵淚下火至明旦迺盡帝於時聞空中笳管異香芬苾帝盡日方還夜夢見益振錫而至更囑以佛法明日帝爲設會度人令齊主唱白序徵祥燒身之處謂藥王寺以擬本事也

9) 석승경(釋僧慶)
승경의 성은 진(陳)씨이며, 파서(巴西) 안한(安漢)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 도교의 일파)를 섬겼다. 승경은 홀로 깨우쳐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의흥사(義興寺)에 머물면서 청정한 행실을 맑게 닦았다. 원을 세워 부처님을 만나기를 구하였다. 먼저 세 개의 손가락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몸을 불사르기를 맹세하였다. 점차로 곡식을 끊고, 오직 향유(香油)만을 복용하였다.
대명 3년(459) 2월 8일에 이르러, 촉성(蜀城)의 무담사(武擔寺) 서쪽에서, 그가 조성한 유마거사의 상 앞에서 몸을 살라 공양하였다.
자사(刺史) 장열(張悅)이 몸소 나가 그곳에 임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도인ㆍ속인ㆍ나그네ㆍ거주민 등 구경하는 사람으로 고을이 기울어질 지경이었다. 가던 구름도 뭉쳐, 괴로운 비가 슬피 떨어졌다. 갑자기 날이 개고 밝게 열려, 하늘색이 투명하고 청정해졌다. 그러더니 용과 같은 물체 하나가 나타나, 장작더미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나이는 23세이다.
천수(天水) 태수 배방명(裵方明)이 그를 위하여 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032_0883_b_12L釋僧慶姓陳巴西安漢人家世事五斗米道慶生而獨悟十三出家止義興寺淨修梵行願求見佛先捨三指末誓燒身漸絕糧粒唯服香油到大明三年二月八日於蜀城武擔寺西對其所造淨名像前焚身供養刺史張悅躬出臨視道俗僑舊觀者傾邑行雲爲結苦雨悲零俄而晴景開明天色澄淨見一物如龍 ((艹/積)) 昇天年二十三天水太守裵方明爲收灰起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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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법광(釋法光)
법광은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스물아홉 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하였다. 고행으로 두타행을 닦아 솜옷을 입지 않았다. 오곡을 끊고 오직 솔잎만을 먹었다.
그 후 맹세하여 몸을 불사르기에 뜻을 두었다. 곧 송진을 복용하고 기름을 마시면서, 반년을 보냈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 10월 20일에 이르러, 농서의 기성사(記城寺) 안에서 땔감을 모아놓았다. 이에 곧 몸을 태움으로써, 앞서 뜻한 것을 만족시켰다. 불길이 눈에 이르도록 외우는 소리가 또렷또렷 하다가, 코에 이르자 가물가물거리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41세이다.
032_0883_b_23L釋法光秦州隴西人少而有信至二十九方出家苦行頭陁不服緜纊五穀唯餌松葉後誓志燒身乃服松膏及飮油經于半年至齊永明五年十月二十日於隴西記城寺內集薪焚身以滿先志火來至目誦聲猶記至鼻乃昧奄然而絕春秋四十有一

∙법존(法存)
영명 연간(483~493) 말기에 시풍현(始豊縣)의 비구 법존도 몸을 불살라 공양하였다. 군수(郡守) 소면(蕭緬)이 사문 혜심을 파견하여, 그를 위하여 재탑[灰塔]을 세웠다.
032_0883_c_07L永明末始豐縣有比丘法存亦燒身供養郡守蕭緬遣沙門慧深爲起灰塔

11) 석담홍(釋曇弘)
담홍은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을 닦아, 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였다.
전송(前宋)의 영초(永初) 연간(420~422) 남쪽 번우(番禺)에 노닐다가, 대사(臺寺)에 머물렀다. 만년에 다시 교지(交趾)의 선산사(仙山寺)로 가서 『무량수경』 및 『관음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마음에 서원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희구하였다.
효건(孝建) 2년(455)에 산 위에 섶을 모아놓고, 비밀히 장작더미 속에 가서 스스로를 불태웠다. 제자들이 뒤쫓아가서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반신은 이미 문드러졌다. 한 달이 지나자 조금 차도가 생겼다.
그 후 가까운 마을에서 모임을 마련하여, 온 절의 승려가 모두 그곳을 찾아갔다. 담홍은 이 날 다시 골짜기에 들어가 몸을 불태웠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찾아보니, 목숨이 이미 끊어졌다. 이에 땔감을 더하여 불길을 지피니, 이튿날에야 불길이 다하였다.
그 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담홍의 몸이 황금빛을 내면서 금빛 나는 한 마리 사슴을 타고 서쪽으로 매우 빠르게 가는 것을.’
안부를 여쭐 겨를도 없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비로소 그의 신이함을 깨달았다. 함께 재와 뼈를 거두어서 탑을 세웠다.
032_0883_c_09L釋曇弘黃龍人少修戒行專精律部宋永初中南遊番禺止臺寺晩又適交趾之仙山寺誦『無量壽』及『觀經』心安養以孝建二年於山上聚薪 ((艹/積)) 以火自燒弟子追及抱持將半身已爛經月小差後近村設會擧寺皆赴弘於是日復入谷燒身村人追求命已絕矣於是益薪進火明日乃盡爾日村居民咸見弘身黃金色乘一金鹿西行甚急不暇暄涼道俗方悟其神異共收灰骨以起塔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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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무릇 형상이 있는 존재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몸이며, 감정이 있는 존재가 보배로 삼는 것은 목숨이다. 그런 까닭에 기름기를 먹고, 피를 마시고,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는 것은, 느긋하고 기쁜 마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삽주[朮: 蒼朮]를 먹고, 단사[丹]를 머금어 생명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오래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털 하나를 꺾어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아껴서 하지 않는다거나, 한 끼의 밥을 거두어서 남은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하여도 아까워 주지 않거나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 가운데는 나름대로 굉장한 지식과 달관한 견해를 지닌 사람이 있어서, 자기 몸을 버려 다른 사람을 아름답게 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삼계가 긴 어둠 속의 세계임을 체득하고, 사생(四生)이 꿈과 허깨비의 경계임을 깨달아서, 정신을 나는 짐승보다 더 한가로이 하고, 겉 몸뚱이를 알곡을 담는 단지보다 더 단단히 한,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정수리를 쓰다듬어 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몸에 개의한 일이 없고,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지푸라기와 같이 버린다. 지금 여기서 논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다.
032_0883_c_20L論曰夫有形之所貴者身也情識之所珍者命也是故飡脂飮血乘肥衣欲其怡懌也餌朮含丹防生養性欲其壽考也至如析一毛以利天下則悋而弗爲徹一飡以續餘命則惜而不與此其弊過矣自有宏知達見遺己贍人體三界爲長夜之宅悟四生爲夢幻之境精神逸乎蜚羽形骸滯於甁穀是故摩頂至足曾不介心國城妻子捨若草芥今之所論蓋其人也
승군(僧群)의 마음은 한 마리의 오리를 위하여, 물 마시기를 끊고 그것으로써 몸을 버렸다. 승부(僧富)는 오직 한 아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배를 갈라 아이의 목숨을 보전하였다. 법진(法進)은 살을 도려내어, 사람들에게 먹였다. 담칭(曇稱)은 스스로 호랑이 먹이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나와 함께 남을 아울러 구제하는 길[兼濟之道]을 숭상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중생들을 이롭게 한 이들이다.
예전에 임금의 아들이 몸을 던져 호랑이 먹이가 된 공덕은, 9겁(劫)의 세월 동안 쌓은 공덕을 넘어선 것이다. 살갗을 도려내서 새와 바꾼 것은, 삼천세계를 진동시킬 만큼 놀라운 일이다. 생각건대 무릇 이런 사람은, 참으로 인품이 보통보다 아주 높이 뛰어나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법우(法羽)에서 담홍(曇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몸을 불살라 재가 되게 함으로써, 보배와 같이 사랑하던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혹 심정으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도한 사람도 있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서원한 사람도 있다. 그런 까닭에 한 쌍의 오동나무가 방 한가운데서 표출하기도 하고, 한 도관(道館)이 저절로 공중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아름답고 빛나게 상서로움과 부합한 일이, 시대와 더불어 간간이 나온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은 같지 않아, 허용하고 차단하는 것 역시 다르다. 만약 큰 방편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시절에 알맞게 행동한다면, 그 이익은 1만 가지 실마리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가르침으로 제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032_0884_a_08L僧群心爲一鴨而絕水以亡身僧富止救一童而劃腹以全命法進割肉以啖人曇稱自餧於災虎斯皆尚乎兼濟之道忘我利物者也昔王子投身功踰九劫刳肌貿鳥駭震三惟夫若人固以超邁高絕矣爰次法羽至于曇弘皆灰燼形骸棄捨珍或以情祈安養或以願生知足雙梧表於房裏一館顯自空中符瑞彪炳與時閒出然聖教不同開遮亦若是大㩲爲物適時而動利現萬非教所制
032_0884_b_01L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말한다.
“하나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태우는 것이 나라와 성으로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
출가한 모든 승려가 이와 같이 한다면 본래 위엄 서린 거동으로써 중생들을 섭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잔혹하게 몸뚱어리를 허물거나, 복전(福田)의 모습을 파괴하는 것을 헤아려서 이야기한다면,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다. 얻음은 몸을 잊은 것에 있다. 잃음은 계를 어긴 것에 있다.
그런 까닭에 용수(龍樹)보살은 말한다.
“새로 수행하는 보살은 일시에 모든 것을 두루 다 행할 수 없다. 혹 보시는 만족시켜도, 효도에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임금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몸을 던진 경우가 그것이다. 혹 지혜는 만족시켜도 자비와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단속하기 위해 단식하는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행이 아직 완전히 아름답지 못하여, 차고 기우는 것이 없지 않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
032_0884_a_19L故經云能然手足一指迺勝國城布施若是出家凡僧本以威儀攝物而今殘毀形骸壞福田相考而爲談有得有失得在忘身失在違戒故龍樹云新行菩薩不能一時備行諸度或滿檀而乖孝如王子投虎或滿慧而乖慈如撿他斷食等皆由行未全美不無盈缺
또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몸에는 8만 벌레가 사람과 더불어 같이 숨쉰다.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벌레들도 함께 저 세상으로 간다.”
그런 까닭에 아라한이 죽은 후에, 부처님께서는 몸을 불사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몸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불태우면, 혹 벌레의 목숨도 잃게 된다.
이를 설명하는 사람은 혹 말한다.
“아라한조차 불빛[火光]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무엇이 이상하리요?”
여기서 불빛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먼저 이미 목숨을 버렸으나, 신통한 지혜의 힘을 써서 나중에 곧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다.
032_0884_b_03L又佛說身有八萬戶蟲與人同氣人命旣盡虫亦俱是故羅漢死後佛許燒身而今未死便燒或於蟲命有失說者或言羅漢尚入火光夫復何怪有言入火光先已捨命用神智力後迺自燒
그러나 본질적인 바탕이 보살인 사람도, 역시 아직 과보로 얻는 몸을 면하지 못한다. 혹 때로는 몸을 불더미 속에 던지기도 하고, 혹 때로는 몸을 쪼개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벌레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는, 그 마지막까지 소상하게 밝힐 줄을 알아야 한다.
무릇 3독(毒)과 4전도(顚倒)는 생사윤회의 뿌리를 심는 것이다. 7각지(覺支)와 8정도(正道)는 실로 열반의 요체로 가는 길이다. 어찌 반드시 몸과 뼈를 불에 사르고 구운 다음에야, 고난에서 벗어나리요?
만약 그의 위계가 인위(忍位)를 터득한 이웃에 자리하여, 세상의 자취를 굽어 살펴 범부와 같이한다면, 혹 때로는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의 논란이 미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만약 범부의 무리가 비추어보고 살핀 것이 넓지 않아, 마침내 수명이 다하도록 도를 행할 줄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몸과 목숨을 버리겠는가? 혹 한 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나, 혹 이름을 만대에 유포시키기 위하다가도, 막상 불에 다다라 장작더미에 자리 잡으면, 후회와 무서움이 교차하여 파고든다. 하지만 드러내서 말한 것이 이미 널리 퍼져, 그 지조를 잃는 것이 치욕스러워진다. 이에 애써 일삼으려다, 헛되이 일만 가지 고통에 걸려드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말한 바를 그르치는 것이다.
032_0884_b_08L性地菩薩亦未免報軀或時投形火或時裂骸分人當知殺蟲之論究竟詳焉夫三毒四倒乃生死之根七覺八道實涅槃之要路豈必燔炙形骸然後離苦若其位鄰得忍俯迹同凡或時爲物捨身此非言論所及至如凡夫之徒鑑察無廣竟不知盡壽行道何如棄捨身命或欲邀譽一時或欲流名萬代及臨火就薪悔怖交彰言旣廣恥奪其操於是僶俛從空嬰萬苦若然非所謂也
찬하노라.

만약 사람 뜻이 우뚝하다면
쇠나 돌도 뛰어난 것 아니니
이 소중한 몸 불태워서
저 보배성 태어나길 기원한다네.
032_0884_b_19L贊曰
若人挺志
金石非英
鑠茲所重
祈彼寶城

향기 높은 오동나무 울창하고
자줏빛 도관 가볍게 공중에 뜨며
치솟은 연기 아롱지게 빛나니
상서로움을 토하고 길조를 머금네.
032_0884_b_21L芬梧蓊蔚
紫館浮輕
騰煙曜彩
吐瑞含禎

천추에 아름다움 숭상하여
만대에 그 향기를 전하리라.
千秋尚美
萬代傳馨

7. 송경(誦經)
032_0884_b_22L誦經第七 二十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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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담수(釋曇邃)
담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하음(河陰)의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정법화경(正法華經)』을 항상 하루에 한 차례 두루 외웠다. 또한 경의 취지에 정밀하게 통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도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문을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법사를 초청하여, 90일 동안 설법하고자 합니다.”
담수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굳게 청하여 마침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자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잠이 깰 무렵이 되자, 이미 그의 몸은 백마 제방[白馬塢]의 신사(神祠) 속에서, 한 제자와 함께 있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몰래 다녔으므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 후 그 절의 승려가 신사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두 개의 높은 자리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담수는 북쪽에 있고, 제자는 남쪽에 있으며, 마치 강설하는 소리가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함께 이 사실을 전하였다. 모두가 신비하고 기이한 일이라 말하였다. 하안거(夏安居)를 끝나자, 신(神)이 흰 말 한 필과 흰 양 다섯 마리와 명주 90필을 보시하였다. 주문을 외워 발원하기를 마치자, 여기에서 각기 소식이 끊어졌다. 그 후 담수가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84_b_23L釋曇邃一 釋法相二
竺法純三 釋僧生四
釋法宗五 釋道冏六
釋慧慶七 釋普明八
釋法莊九 釋慧果十
釋法恭十一 釋僧覆十二
釋慧進十三 釋弘明十四
釋慧豫十五 釋道嵩十六
釋超辯十七 釋法慧十八
釋僧侯十九 釋慧彌二十
釋道琳二十一
釋曇邃未詳何許人少出家止河陰白馬寺蔬食布衣誦正『法華經』常一日一遍又精達經旨亦爲人解說嘗於夜中忽聞扣戶云欲請法師九旬說邃不許固請乃赴之而猶是眠中比覺己身在白馬塢神祠中幷一弟自爾日日密往餘無知者後寺僧經祠前過見有兩高座邃在北弟子在南如有講說聲又聞有奇香之氣於是道俗共傳咸云神異至夏竟施以白馬一疋白羊五頭絹九十疋呪願畢於是各絕邃後不知所終
032_0885_a_01L
2) 석법상(釋法相)
법상의 성은 양(梁)씨이며, 어디 사람인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늘 산에 살면서 고행하여 정진하였다. 경전 십여 만 글자를 외웠다. 새와 짐승들이 그의 좌우에 모여들어 모두가 길들여서, 마치 집에서 키우는 짐승과 같았다.
태산사(泰山祠)에 큰 돌 상자가 있었다. 그 속에 재물과 보배가 저장되어 있었다. 법상이 언젠가 산길을 가다, 사당 옆에서 잤다. 문득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고 무인의 관을 썼다. 법상에게 돌 상자를 열게 하고는, 말이 끊어지자 보이지 않았다. 그 상자의 돌 뚜껑은 무게가 30만 근이 넘었다. 법상이 한 번 손으로 들어올리자, 바람에 나부끼듯 뚜껑이 들어올려졌다. 이에 그 속의 재물을 취하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그 후 강남으로 건너가 월성사(越城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문득 마음대로 방탕하게 노닐고, 배우와 같이 우스갯짓[滑稽]을 하였다. 혹 때로는 벌거벗어 조정의 귀족들을 업신여겼다.
진(晋)의 진북장군(鎭北將軍) 사마염(司馬恬)이 그의 절제 없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불러서 짐독(鴆毒)을 먹였다. 거푸 세 종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신과 기운이 맑고 평정하며 깨끗하게 어지러움이 없어, 사마염이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진의 원흥(元興) 연간(402~404) 말기에 이르러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032_0884_c_23L釋法相姓梁不測何人常山居精苦誦經十餘萬言鳥獸集其左右皆馴若家禽太山祠有大石函貯財寶時山行宿于廟側忽見一人玄衣武令相開函言絕不見其函石蓋過千鈞相試提之飄然而起於是取其財以施貧民後度江南止越城寺忽遊縱放蕩優俳滑稽或時裸袒冒朝貴晉鎭北將軍司馬恬惡其不招而鴆之頻傾三鍾神氣淸夷然無擾恬大異之至晉元興末卒秋八十

∙축담개(竺曇蓋)ㆍ축승법(竺僧法)
당시 또 축담개와 축승법이 모두 고행으로 신의 감응에 뛰어났다. 담개는 신령한 주문으로 비를 청할 수 있었다. 양주자사(楊州刺史) 사마원현(司馬元顯)의 공경하는 바가 되었다. 승법도 신령한 주문에 빼어났다. 진(晋)의 승상이며 회계왕인 사마도자(司馬道子)가 그를 위하여 치성사(治城寺)를 세웠다.
032_0885_a_12L時有竺曇蓋竺僧法竝苦行通感蓋能神呪請雨爲楊州刺史司馬元顯所敬法亦善神呪晉丞相會稽王司馬道子爲起治城寺焉

3) 축법순(竺法純)
법순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산음(山陰)의 현의사(顯義寺)에 머물렀다. 고행하고 덕이 있었다. 옛 『유마경』을 잘 독송하였다.
진(晋)의 원흥 연간(402~404)에 절의 상란(上蘭)을 위하여 물가의 옛 집을 팔고 돌아오다가, 해가 저물 무렵 호수 가운데에서 바람을 만났다. 배가 작아 법순이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 기대며, 쉬지 않고 입으로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배가 한 척 흘러왔다. 그 배에 올라타서 재난을 면하였다. 배가 둑에 이르러 배를 살펴보았으나, 주인은 없었다. 잠시 후 배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도인과 속인이 모두 그 신령한 감응에 감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85_a_15L竺法純未詳何許人少出家止山陰顯義寺苦行有德善誦『古維摩經』晉元興中爲寺上蘭渚買故屋暮還於湖遇風而舩小純唯一心憑觀世音口誦不輟俄見一大流舩乘之獲免至岸訪舩無主須臾不見道俗咸歎神感後不知所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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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승생(釋僧生)
승생의 성은 원(袁)씨이며, 촉군(蜀郡) 비현(郫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고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성도(成都)의 송풍(宋豊) 등이 초청하여 삼현사(三賢寺)의 주지로 삼았다.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禪定)을 익혔다. 항상 산 속에서 경을 외우면, 호랑이가 와서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외우기를 마치면 곧 떠났다.
후에 시를 읊조릴 때마다, 곧 좌우에 네 사람이 나타나 모시고 호위하였다. 나이는 비록 노쇠하지만, 부지런히 발돋움하여 더욱 힘썼다.
그 후 미미한 병에 걸렸다. 그러자 곧 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죽은 뒤에는 몸을 불사르도록 하라.”
제자들이 그의 명대로 따랐다.
032_0885_a_22L釋僧生姓袁蜀郡郫人少出家以苦行致稱成都宋豐等請爲三賢寺主誦『法華』習禪定常於山中誦經有虎來蹲其前誦竟迺去後每至諷詠輒見左右四人爲侍衛年雖衰老而翹勤彌厲後微疾便語侍者云吾將去矣死後可爲燒身弟子依遺命

5) 석법종(釋法宗)
법종은 임해(臨海)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 때 섬현(剡縣)에서 사냥을 하다가, 새끼 밴 사슴을 쏘아 사슴이 낙태(落胎)하였다. 어미 사슴은 화살에 맞았으면서도, 오히려 땅에 앉아 죽은 새끼를 핥아주었다.
이에 법종은 곧 뉘우치고 깨달았다. 생명을 아끼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인식이 있는 동물이면 다 같이 갖는 자연적인 천성임을 알았다. 이에 활을 부수고 화살을 꺾고는, 출가하여 도를 일삼았다. 항상 걸식으로 스스로 살아가며, 하루 한 끼 식사법을 받아들였다. 푸성귀와 고행으로 항상 예참하며, 앞서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
『법화경』ㆍ『유마경』을 외워서 항상 높은 대(臺)에 올라가 그것을 읊조렸다. 그러자 그 메아리 소리가 사방 먼 곳까지 들렸다. 선비와 서민들로서, 그에게서 계를 받아 귀의한 사람이 3천여 명이었다. 마침내 머물던 곳을 개척하여 정사(精舍)로 만들었다. 외우는 경을 제목으로 삼아, 이곳을 법화대(法華臺)라고 불렀다. 법종이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032_0885_b_06L釋法宗臨海人少好遊獵嘗於剡遇射孕鹿母墮胎鹿母銜箭猶就地舐宗迺悔悟知貪生愛子是有識所於是摧弓折矢出家業道常分衛自資受一食法蔬苦六時以悔先罪誦『法華』『維摩』常昇臺諷詠響聞四遠士庶稟其歸戒者三千餘人遂開拓所住以爲精舍因誦爲目號曰法華臺也宗後不測所終

6) 석도경(釋道冏)
도경의 성은 마(馬)씨이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도의(道懿)의 제자가 되었다. 도의가 병들자, 어느 날 도경 등 네 사람의 제자를 파견하였다. 하남(河南)의 곽산(霍山)에 가서 종유석(鍾乳石)을 채취해 오게 하였다. 종유석이 있는 굴속에 들어가 몇 리를 갔다. 그러면서 나무에 걸터앉고 물을 건너다가, 세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횃불마저도 다 타버렸다. 도경은 구제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평소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오직 지성으로 이 일에 기대면서 또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얼마 후 반딧불 같은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이를 뒤쫓아가도 미치지 못하다가, 마침내 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더욱 정진하여 선업(禪業)을 닦아서, 절도 있는 행실이 날로 새로워졌다. 자주 여러 번 보현재(普賢齋)를 마련하였다. 모두 상서로운 응험이 있었다. 혹 인도 승려가 나타나 방에 들어와 앉은 경우도 있고, 혹 말을 탄 사람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모두 미처 안부도 나누기 전에, 문득 보이지 않았다.
032_0885_b_15L釋道冏姓馬扶風人初出家爲道懿弟子懿病嘗遣冏等四人至河南霍山採鍾乳入穴數里跨木渡水三人溺炬火又亡冏判無濟理冏素誦『法華』唯憑誠此業又存念觀音有頃一光如螢火追之不及遂得出穴是進修禪業節行彌新頻作數過普賢齋竝有瑞應或見梵僧入坐或見騎馬人至竝未及暄涼倏忽不見
032_0885_c_01L그 후 동학 네 사람과 함께 남쪽 상경(上京)에 노닐며 풍속과 교화를 구경하였다. 밤에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넜다. 도중에 얼음이 갈라져 세 사람은 모두 빠져 죽었다. 도경은 또다시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였다. 그러자 마치 다리 아래에 어떤 물건이 있어서, 스스로 부추기는 것 같았다. 다시 붉은 광명이 나타나 눈앞에 어른거려, 그 빛을 의지해 강둑에 이르렀다. 도읍에 도달한 뒤, 남간사(南澗寺)에 머물면서 항상 반주삼매(般舟三昧)에 드는 것을 일삼았다.
어느 날 한밤중에 선정에 들었다. 문득 네 사람이 수레를 몰고 방에 이르렀다. 도경을 불러 수레에 올라타게 하였다. 도경은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자기 몸이 고을 뒤의 침교(沈橋)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길가 오랑캐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시중드는 자들이 수백 명이었다.
도경을 보고 놀라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좌선하는 사람이로다.”
이어 좌우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다만 계신 곳을 알려 주었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문득 법사를 번거롭게 하였는가?”
곧 예배를 하고 손을 잡고 헤어졌다. 사람을 시켜 도경을 전송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문을 두드리다가 한참만에 비로소 문이 열려 절 안에 들어갔다. 방을 보니 아직도 닫혀 있었다. 대중들은 아무도 그 연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임천(臨川)의 강왕(康王) 유의경(劉義慶)이 그와 손잡고 광릉(廣陵)으로 갔다.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885_c_01L後與同學四人南遊上京觀矚風化乘冰度河中道冰破三人沒死冏又歸誠觀音乃覺腳下如有一物自㩻復見赤光在前乘光至岸達都止南㵎寺常以般舟爲業嘗中夜入禪忽見四人御車至房呼令上乘冏欻不自已見身在郡後沈橋見一人在路坐胡牀侍者數百人見冏驚起禪人耳彼人因謂左右曰向止令知處而已何忽勞屈法師於是禮拜執別令人送冏還寺扣門良久方開入寺見房猶閉衆咸莫測其然宋元嘉二十年臨川康王義慶攜往廣陵終於彼矣

7) 석혜경(釋慧慶)
혜경은 광릉(廣陵) 사람인데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몸가짐이 맑고 깨끗하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법화경』ㆍ『십지론』ㆍ『사익경』ㆍ『유마경』을 외워, 밤마다 읊조렸다. 항상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찬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소뢰(小雷)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곧 전복하려 하였다. 혜경은 오직 쉬지 않고 송경을 하였다. 그러자 배가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어떤 사람이 끌어주는 듯하여 순식간에 건너편 강둑에 이르렀다.
이에 더욱 부지런히 독실하게 수행에 힘썼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2세이다.
032_0885_c_15L釋慧慶廣陵人出家止廬山寺學通經律淸潔有戒行誦『法華』『十地』『思益』『維摩』每夜吟諷常聞暗中有彈指讚歎之聲嘗於小雷遇風波舩將覆沒唯誦經不輟覺舩在浪中如有人牽倏忽至岸於是篤厲彌勤宋元嘉末卒春秋六十有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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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보명(釋普明)
보명의 성은 장(張)씨이며, 임치(臨淄)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품성이 맑고 순하며, 예참과 독송을 일삼았다. 『법화경』과 『유마경』 두 경전을 외웠다. 외울 때가 되면 별도의 옷과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여, 한 번도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았다.
매양 외워서 「권발품(勸發品)」에 이르면, 곧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타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또 『유마경』을 외울 때에도, 공중에서 노래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구제하려는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고을 사람 가운데 왕도진(王道眞)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처가 병이 생겨 보명에게 와서 주문을 외워주기를 요청하였다. 보명이 문에 들어서자, 부인은 곧 가슴이 막혀 기절하였다. 갑자기 몇 자쯤 되는, 너구리 같이 생긴 어떤 물체가 나타나 개구멍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부인의 병도 나았다.
어느 날 보명이 수방사(水傍祠)에 갔다. 그러니 무당들이 ‘신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모두 달아났다.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032_0885_c_22L釋普明姓張臨淄人少出家稟性淸蔬食布衣以懺誦爲業誦『法華』『維摩』二經及誦之時有別衣別座未嘗穢雜每誦至「勸發品」輒見普賢乘象在其前誦『維摩經』亦聞空中唱樂又善神呪所救皆愈有鄕人王道眞妻病請明來呪明入門婦便悶絕俄見一物如狸長數尺許從狗竇出因此而愈明嘗行水旁祠巫覡自云神見之皆奔走以宋孝建中卒春秋八十有五

9) 석법장(釋法莊)
법장의 성은 신(申)씨이며, 회남(淮南)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고행하는 절개로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 관중(關中)을 노닐며 승예(僧叡)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초기에 서울로 나와서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솔직하고 소박하였다. 오직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먹을 따름이었다.
『대열반경』ㆍ『법화경』ㆍ『유마경』을 외워, 첫새벽마다 이를 읊조렸다. 옆방에서 듣기에, 항상 그의 문 앞에서 마치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호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는 사실 천신들이 와서 들은 것이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032_0886_a_09L釋法莊姓申淮南人十歲出家爲廬山慧遠弟子少以苦節摽名晩遊關從睿公稟學元嘉初出都止道場性率素止一中而已誦『大涅槃』『法華』『淨名』每後夜諷誦比房常聞莊戶有如兵仗羽衛之響實天神來聽宋大明初卒於寺春秋七十有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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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혜과(釋慧果)
혜과는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스스로 일삼았다. 전송의 초기에 서울에 노닐다가,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화경』ㆍ『십지경』을 독송하였다. 어느 날 그는 뒷간에서 한 작은 귀신을 만났다. 귀신이 혜과에게 공경을 표시하였다.
“예전에 대중 승려의 유나(維那)로 있었습니다. 법답지 못한 사소한 일을 저질러, 똥을 먹는 귀신[噉糞鬼中]으로 떨어졌습니다. 법사님은 평소 덕이 높으며 밝고 또한 자비심이 많으시니, 원컨대 도와주셔서 이곳에서 건져내 구제하여 주십시오.”
또한 말하였다.
“예전에 돈 3천 냥을 감나무 밑 둥지에 묻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취하시어 복전으로 삼아주시기 원합니다.”
혜과는 곧 대중들에게 알려 감나무 밑을 파보니, 과연 3천 냥의 돈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 『법화경』 한 부를 조성하고, 아울러 법회를 마련하였다.
그 후 꿈에 이 귀신이 나타났다.
“이미 몸을 바꾸어 태어났으며, 옛날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혜과는 전송의 태시(太始) 6년(47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032_0886_a_16L釋慧果豫州人少以蔬苦自業宋初遊京師止瓦官寺誦『法華』『十地』嘗於圊廁見一鬼致敬於果云昔爲衆僧作維那小不如法墮在噉糞鬼中師德素高明又慈悲爲意願助以拔濟之方也又云昔有錢三千埋在柹樹下願取以爲福果卽告衆掘取得三千爲造『法華』一部幷設會後夢見此鬼云已得改生大勝昔日果以宋太始六年卒春秋七十有六

11) 석법공(釋法恭)
법공의 성은 관(關)씨이며, 옹주(雍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강릉의 안양사(安養寺)에 머물렀다. 후에 서울로 나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고행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 거친 베옷을 입고, 콩과 보리만 먹었다. 그러면서 30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밤에 그것을 읊조릴 때마다, 특이한 향기와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법공의 방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가 함께 이 향기를 맡았다. 또한 낡은 누더기 옷에 벼룩과 이를 모아 가지고, 항상 그것을 몸에 걸쳐 스스로 그 먹이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ㆍ문제(文帝)ㆍ명제(明帝) 등 세 사람의 황제와 형양(衡陽)의 문왕 유의계(劉義季) 등이 모두 그의 덕과 소박함을 숭상하였다.
신도들로부터 얻은 보시를 항상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번도 개인적으로 비축하지 않았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서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032_0886_b_03L釋法恭姓關雍州人初出家止江陵安養寺後出京師住東安寺少而苦行殊倫服布衣餌菽麥誦經三十餘萬言每夜諷詠輒有殊香異氣入恭房者咸共聞之又以弊納聚蚤蝨披以飴之宋武明三帝及衡陽文王義秀等竝崇其德素所獲信施分給貧病未嘗私蓄宋太始中還西卒於彼春秋八十

∙승공(僧恭)
당시 오의사(烏衣寺)에 또 승공이 있었다. 덕스런 일이 높고 밝아, 절의 모든 직분을 총괄하여 맡았다. 또한 쌀밥을 먹지 않고, 오직 콩과 보리만을 먹었다.
032_0886_b_12L時烏衣復有僧恭德業高明綱摠寺任亦不食粳糧餌豆麥

12) 석승부(釋僧覆)
승부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하인(下人)에게서 양육되었다. 일곱 살 때 출가하여 담량(曇亮)의 제자가 되었다.
배움이 모든 경전에 뛰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외워 지녔다. 『대품경』과 『법화경』을 외웠다.
전송의 명제는 그를 그릇감이라 하여, 깊이 존중을 더하였다. 칙명으로 팽성사(彭城寺)의 주지가 되었다. 대중을 거느리는 데 공로가 있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말기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6세이다.
032_0886_b_14L釋僧覆未詳何人少孤爲下人所養七歲出家爲曇亮弟子學通諸經食持呪誦『大品』『法華』宋明帝深加器勅爲彭城寺主率衆有功宋太始末卒春秋六十有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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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혜진(釋慧進)
혜진의 성은 요(姚)씨이며, 오흥(吳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용맹하여, 천성대로 호협하게 놀았다. 그러다가 나이 40세에 문득 슬기로운 마음이 저절로 열려, 드디어 속가를 떠났다. 서울의 고좌사(高座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한 옷을 입었다. 맹세코 『법화경』을 외우기로 하고, 마음을 써서 노고를 다하였다. 그러나 책만 손에 잡으면 곧 병이 생겼다.
이에 발원하기를 『법화경』 백 부를 조성함으로써, 전생의 장애를 참회하기를 빌었다. 처음으로 모아 얻은 돈이 1,600냥이었다. 이때 강도들이 찾아와 혜진에게 물었다.
“가진 물건이 있느냐?”
혜진은 대답하였다.
“오직 경을 만들 돈만이 부처님을 모신 곳에 있습니다.”
강도들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면서 떠났다. 이에 신도들의 보시를 모아서, 경을 이룰 수 있어 백 부를 가득 채웠다.
경이 완성된 후에는 병도 조금 차도가 생겼다. 『법화경』 한 부를 모두 외워 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으로 원하던 일이 채워지자, 굳센 지조는 더욱 단단해졌다. 항상 모든 복업을 회향시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죽기 직전에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서방 정토에 태어나리라.”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032_0886_b_19L釋慧進姓姚吳興人少而雄勇任性遊俠年四十忽悟心自啓遂爾離俗止京師高座寺蔬食素衣誓誦『法華』用心勞苦執卷輒病迺發願願造『法華』百部以悔先障始聚得錢一千六時有劫來進有物不答云唯有造經錢在佛處群劫聞之 ((赤*皮)) 然而去於是聚集信施得以成經滿足百部經成之後病亦小差誦『法華』一部得情願旣滿厲操愈堅常迴諸福業願生安養未亡少時忽聞空中聲曰汝所願已足必得生西方也至齊永明三年無病而卒春秋八十有五

∙승념(僧念)
당시 서울 용화사(龍華寺)의 승념은 『법화경』과 『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세상을 피해 살았다.
032_0886_c_09L京師龍華寺復有釋僧念誦『法華』『金光明』蔬食避世

14) 석홍명(釋弘明)
홍명의 본래 성은 영(嬴)씨이며,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마음이 바르고 굳세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산음의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렀다.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禪定)을 익혔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육시예참(六時禮懺)을 그치지 않자, 아침마다 물병이 저절로 가득했다. 이는 실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한 것이다.
어느 날 홍명이 운문사에서 좌선하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홍명의 방안에 들어와 상 앞에 엎드렸다. 홍명이 단정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오래 오래 있다가 떠나갔다.
032_0886_c_11L釋弘明本姓羸會稽山陰人少出家貞苦有戒節止山陰雲門寺誦『法華』習禪定精勤禮懺六時不輟每旦則水甁自滿實諸天童子以爲給使也明嘗於雲門坐禪虎來入明室內伏于牀前見明端然不動夂夂乃
또 어느 때는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홍명의 송경하는 소리를 들었다. 홍명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는 답하였다.
“예전에 이 절의 사미였습니다. 휘장 밑에 숨겨둔 음식을 먹고, 지금은 뒷간 속[圊中]에 떨어져 있습니다. 상인(上人)의 도업을 듣고 짐짓 찾아와 송경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원컨대 방편을 써서, 저를 도와 이 허물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홍명이 곧 법을 설하여 불법에 들도록 하였다. 받아들여 해득한 후 비로소 사라졌다.
그 후 영흥(永興)의 석모암(石姥巖)에서 입정(入定)하였다. 다시 그곳 산의 요정[山精]이 찾아와 홍명을 괴롭혔다. 홍명이 이를 붙잡아서, 허리에 찬 새끼줄에 붙들어 매었다. 그러자 귀신은 겸손하게 사과하며 풀어주기를 구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감히 이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놓아주자 이에 귀신은 자취를 끊었다.
032_0886_c_18L又時見一小兒來聽明誦經明曰汝是何人答云昔是此寺沙彌盜帳下食今墮圊中聞上人道業故來聽誦經願助方便使免斯累也明卽說法勸化領解方隱後於永興石姥巖入定又有山精來惱明明捉得以腰繩繫之鬼遜謝求脫云後不敢復來及解放於是絕迹
032_0887_a_01L원가(元嘉) 연간(424~452)에 군수인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그의 진실하고 소박함을 존중하여, 산에서 나오기를 요청하였다. 그를 맞이하여 도수정사(道樹精舍)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였다. 그 후 제양강(濟陽江)의 영흥(永興) 고을에 소현사(昭玄寺)를 세웠다. 다시 홍명을 초청하여 그곳에 가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에 도리(陶里)의 동(董)씨가, 또한 홍명을 위하여 마을에 백림사(栢林寺)를 세웠다. 홍명을 청하여 돌아와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선(禪)과 계율로 가르치고 도우니,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북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백림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4세이다.
032_0887_a_01L元嘉中郡守平昌孟顗重其眞素要出安止道樹精舍後濟陽江於永興邑立昭玄寺復請明往住大明末陶里董氏又爲明於村立柏林寺要明還止訓勖禪戒人成列以齊永明四年卒於柏林寺春秋八十有四

15) 석혜예(釋慧豫)
혜예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서울에 와서 노닐다가,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서, 두루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다. 담론을 잘하며 법다운 풍모가 아름다웠다.
매양 어떤 인물의 착하거나 악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곧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 때로는 다른 말로 중간에 중지시켰다. 물병과 옷으로 단출하고 소박하게 지내며, 하루 점심 한 끼로써 스스로 식사를 끝냈다. 부지런한 정진으로 절조를 드러내고, 고난 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열반경』과 『법화경』과 『십지경』을 외웠다. 또한 선업을 익혀, 다섯 종문의 선법[五門禪]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032_0887_a_07L釋慧豫黃龍人來遊京師止靈根寺少而務學遍訪衆師善談論美風則每聞臧否人物輒塞耳不聽或時以異言閒止甁衣率素日以一中自畢精勤摽節以救苦爲先誦『大涅槃』『法華』『十地』又習禪業精於五門
어느 날 잠을 잘 때에, 세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의관이 선명하고 정결하였다. 꽃가마를 함께 받쳐 들었다. 혜예가 물었다.
“누구를 찾습니까?”
대답하였다.
“법사께서 곧 죽게 되었기에, 짐짓 찾아와 받들어 맞이하는 것입니다.”
혜예가 말하였다.
“작은 일들을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니, 1년만 목숨을 더 늘릴 수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다음해에 이르러, 만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북제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그때 나이는 57세이다.
032_0887_a_13L嘗寢見有三人來扣戶竝衣冠鮮潔執持華豫問覓誰答云法師應死故來奉迎豫曰小事未了可申一年不答云至明年滿一周而卒是歲齊永明七年春秋五十有七

∙법음(法音)
혜예와 같은 절에 법보가 있었다. 그도 역시 평소 송경을 행하였다.
032_0887_a_18L豫同寺有沙門法普亦素行誦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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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석도숭(釋道嵩)
도숭의 성은 하(夏)씨이며, 고밀(高密) 사람이다. 나이 열 살 때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은밀하게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학을 좋아하고,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아래 윗사람과 교류하면서, 한 번도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천성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이로운 공양을 얻는 대로 모두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물병과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울러 지닌 물건이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서울에 와서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고요히 한적한 방을 지키며, 끊임없이 예참과 독송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가르치고 장려함으로써, 식사 대접을 대신하였다. 그에게 계를 받기를 청한 사람은 매우 많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9세이다.
032_0887_a_19L釋道嵩姓夏高密人年十歲出家而沈隱有志用及具戒之後專好律誦經三十萬言交接上下未嘗有喜慍之色性好檀捨隨獲利養皆以施人甁衣之外略無兼物宋元徽中來京師止鍾山定林寺守靖閑房誦無輟人有造者輒爲其說法訓獎以代饌焉從之請戒者甚衆後卒於山中春秋四十有九

17) 석초변(釋超辯)
초변의 성은 장(張)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깨달음이 홀로 일어났다.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이 깊고 침착하였다.
『법화경』ㆍ『금강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하(西河)에서 넘어왔다. 도중에 파초(巴楚)를 경유하여, 건업(建業)에 도달하였다. 얼마 후 동쪽 오(吳)ㆍ월(越)로 가서 산수를 구경하였다. 산음(山陰)의 성방사(城傍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한적하게 살면서 소박함을 기르고, 산문에서 목숨을 다하기로 하였다. 『법화경』을 하루에 한 차례로 한정하여 두루 외웠다. 마음이 민첩하니 입도 따라가서, 항상 남은 힘이 있었다. 천 불에 예배드리기를, 모두 150만 번의 절을 올렸다. 산문 밖에 나가지 않기를 3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북제의 영명(永明) 10년(492)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절 남쪽에서 장례를 치뤘다. 사문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만들었다. 동현(東莧)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032_0887_b_05L釋超辯姓張燉煌人幼而神悟孤發履操深沈誦『法華』『金剛波若』聞京師盛於佛法迺越自西河路由巴楚于建業頃之東適吳越觀矚山水山陰城傍寺少時後還都止定林上閑居養素畢命山門誦『法華』日限一遍心敏口從恒有餘力禮千佛一百五十餘萬拜足不出門三十餘以齊永明十年終於山寺春秋七十有三葬于寺南沙門僧祐爲造碑墓所東莧劉勰製文

∙법명(法明)ㆍ승지(僧志)ㆍ법정(法定)
당시 또 영근사(靈根寺)의 법명, 기원사(祇洹寺)의 승지, 익주(益州)의 법정 등이 있었다. 모두 십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하였다. 지극한 덕이 있었다.
032_0887_b_16L時有靈根釋法祇洹釋僧志益州釋法定竝誦經十餘萬言蔬苦有至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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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석법혜(釋法慧)
법혜의 본래 성은 하후(夏候)씨이다. 어려서부터 지닌 지조가 고행에 정밀하고, 율행이 얼음처럼 엄숙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에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에 노닐었다. 그러다가 천주산사(天柱山寺)에 은거하였다.
『법화경』 한 부를 외우면서,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뜻이 인간세계 밖에 깊이 젖어들어 누각 위에 자리 잡고, 30여 년을 내려오지 않았다. 왕후들이 가마를 타고 와도, 오직 방에 예배만 드리고 돌아갔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만은 믿음과 이해력이 아울러 깊다 하여, 특별히 더불어 만났다.
당시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배드리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혹 주옹의 소개를 받아 때로 한 번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032_0887_b_18L釋法慧本姓夏侯氏少而秉志精苦律行冰嚴以宋大明之末東遊禹穴隱于天柱山寺誦『法華』一部蔬食布志耽人外居閣不下三十餘年王侯稅駕止拜房而反唯汝南周顒以信解兼深特與相接時有慕德希禮因顒介意時一見者以齊建武二年卒于山寺春秋八十有五

∙담유(曇遊)
당시 약야(若耶) 현류산(懸溜山)의 담유도 푸성귀를 먹으며 송경하였다. 고행의 절개를 일삼았다.
032_0887_c_03L時若耶懸溜山有釋曇遊者亦蔬食誦經苦節爲業

19) 석승후(釋僧候)
승후의 성은 공(龔)씨이며,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 살 때 곧 푸성귀를 먹으며, 예참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사방을 떠돌며, 교화를 관찰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서울에 와서 머물렀다. 항상 『법화경』ㆍ『유마경』ㆍ『금광명경』을 이틀에 한 차례씩 두루 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60여 년간 계속하였다.
소혜개(蕭惠開)가 촉(蜀)으로 들어가면서 초청하였다. 그러자 함께 그곳에 노닐었다. 그 후 소혜개가 유의가(劉義嘉)와 함께 협동하여, 죄를 지어 궁궐로 돌아왔다. 승후도 곧 서울로 돌아왔다.
후강(後岡)에 돌집을 짓고, 안선(安禪)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미 때부터 목숨을 버릴 때까지, 생선ㆍ고기ㆍ마늘ㆍ매운 것은 한 번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발그림자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식사도 거른 채 지나갔다[午後不食].
북제의 영명(永明) 2년(484)에 약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점심때가 되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곧 물을 찾아 입을 헹구고는, 합장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9세이다.
032_0887_c_05L釋僧侯姓龔西涼州人年十八便蔬食禮懺及具戒之後遊方觀化宋孝建初來至京師誦『法花』『維摩』『金光明』常二日一遍如此六十餘年簫惠開入蜀請共同遊後惠開恊同義嘉罪歸闕侯乃還都於後岡創立石室爲安禪之所自息慈以來至于捨命魚肉葷辛未嘗近齒腳影小蹉輒虛齋而過齊永明二年微覺不悆至中不能食迺索水漱口合掌而卒春秋八十有九

∙혜온(慧溫)
당시 보홍사(普弘寺)의 혜온도 『법화경』ㆍ『유마경』ㆍ『수능엄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으로, 나란히 높은 절개가 있었다.
032_0887_c_16L時普弘有釋慧溫亦誦『法華經』『維摩』『首楞嚴』蔬苦竝有高節

20) 석혜미(釋慧彌)
혜미의 성은 양(楊)씨이며, 홍농(弘農)의 화음(華陰) 사람이다. 한(漢)나라 때 태위(太尉) 벼슬을 한 양진(楊震)의 후예이다. 나이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후에 집착과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遠離]을 수행하기로 뜻을 세웠다.
곧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바위 계곡이 지극히 험하여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였다. 혜미는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나운 호랑이나 억센 외뿔소가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대품경』을 외우고, 정밀하게 삼매를 닦았다.
이에 띳풀을 베어내 집을 지어, 정신이 깃들 곳으로 삼았다. 때가 되면, 발우를 지니고 마을에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좌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8년을 계속하였다.
032_0887_c_17L釋慧彌姓楊氏弘農華陰人漢太尉震之後裔也年十六出家及具戒之後志修遠離迺入長安終南山谷險絕軌迹莫至彌負錫獨前猛虎肅兕無擾少誦『大品』又精修三昧是翦茅結宇以爲拪神之宅時至則持鉢入村食竟則還室禪誦如此者八年
032_0888_a_01L그 후 강남지방에 불법이 성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곧 서울로 와 풍습과 교화를 관찰하였다.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예전처럼 과업을 익혔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겸양하였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계율의 모범됨이 정밀하고 밝았다. 권장하고 교화함에 고된 것을 잊으며, 현명한 이에게 묻고, 착한 이를 찾기를 항상 모자라는 듯하였다. 무릇 산을 찾아와 예배하는 도인과 속인들에게 모두 그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그러면서 타일러 이끌음으로써 좋은 음식 대접을 대신하였다.
이에 출가할 때부터 늙어 노쇠해지기에 이르기까지, 마늘ㆍ술ㆍ생선ㆍ고기 등은 하나같이 모두 길이 끊었다. 한 발자국도 문 밖을 출입하지 않기를 30여 년 동안 하였다. 새벽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선정(禪定)을 익히면서, 항상 『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육시예참에는 반드시 대중 앞에 섰다.
양(梁)의 천감(天監) 17년(518) 윤달 8월 15일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절 남쪽에 장례하고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032_0888_a_02L後聞江東有法之盛迺觀化京止于鍾山定林寺習業如先爲人溫恭沖讓喜慍無色戒範精明獎化忘倦諮賢求善恒若未足凡黑白造山禮拜者皆爲說法提誘以代餚饌自出家至于衰老葷醪鮮豢一皆永足不出戶三十餘年曉夜習定誦『波若』六時禮懺必爲衆先以梁天監十七年閏八月十五日終於山舍春秋七十有九葬于寺南立碑頌德

∙법선(法仙)
당시 정림사의 법선도 송경하며 질박하게 수행하였다. 후에 오군(吳郡)으로 돌아가 승정(僧正)이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032_0888_a_11L時定林又有沙門法仙亦誦經有素後還吳爲僧正卒於彼

21) 석도림(釋道琳)
도림은 본래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열반경』과 『법화경』에 뛰어나며 『유마경』을 외웠다. 오국(吳國)의 장서(張緖)가 예를 갖추어 그를 섬겼다. 그 후 부양현(富陽縣)의 천림사(泉林寺)에 자리 잡았다. 이 절에는 항상 귀신과 괴물이 들끓었다. 그러나 도림이 자리 잡자 모두 사라졌다.
도림의 제자 혜소(慧韶)가 집에 눌려[爲屋所壓], 머리가 어깨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도림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청하였다. 그러자 밤에 두 사람의 인도 도인(道人)이 혜소에게 나타나서, 그의 머리를 뽑아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
도림은 이에 성승재(聖僧齋)를 마련하고, 새 비단을 상 위에 깔았다. 재가 끝나서 보니, 비단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모두 석 자 남짓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그 징험 있는 감응[徵感]에 탄복하였다. 이때부터 부양(富陽) 사람들은 집집마다 성승(聖僧)의 자리를 마련하고 밥을 공양하였다.
양(梁)나라 초엽에 도림은 그곳에서 나왔다. 제희사(齊熙寺)에 머물다가, 천감(天監) 18년(51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032_0888_a_13L釋道琳本會稽山陰人少出家有戒善『涅槃』『法華』誦『淨名經』吳國張緖禮事之後居富陽縣泉林寺寺常有鬼怪自琳居之則消琳弟子慧韶屋所押頭陷入肩琳爲祈請韶夜見兩梵道人拔出其頭旦起遂平復琳於是設聖僧齋鋪新帛於牀上齋畢見帛上有人迹皆長三尺餘衆咸服其徵感富陽人始家家立聖僧坐以飯之至梁初琳出居齊熙寺天監十八年卒春秋七十有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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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경전을 소리 높여 읽는 이익은 크다. 그러나 그 공을 이룬 사람은 드물다. 이는 자못 훌륭한 법인 다라니는 얻기 어려우며, 마음이 흐려지기는 쉽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오직 한 구절 하나의 게송을 다시 외운다 하더라도, 역시 성인께서 아름답다고 칭송하신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담수(曇邃)는 바위 제방[石塢]에서 신에 통하고, 승생(僧生)은 공중에서 호위하는 감응이 있으며, 도경(道冏)은 위태한 지경에 임하여 구제될 수 있었다. 혜경(慧慶)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몸을 보전함을 힘입었다.
이는 모두 참된 덕이 안에서 충만하였기 때문에, 외부에서 징험 있는 감응이 열린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현보살이 방으로 내려오시고 사천왕이 자리를 호위한다”고 한 것이, 어찌 허튼 소리이겠는가?
만약 얼음이 언 추운 날의 고요한 밤이나 밝은 달이 뜬 긴긴 밤에, 홀로 한적한 방에 머무르며, 경전을 소리 높여 읽으면서 토하는 소리가 밝고 글자가 분명하다면, 이는 유령(幽靈)이 기뻐서 뛰게 할 만 하고 정신이 시원하게 트여 기쁘게 할 만하다. 이른바 ‘노래로 법다운 말씀을 읊조려서 이것으로 음악을 삼는다’는 것이다.
032_0888_b_01L論曰諷誦之利大矣而成其功者希良由摠持難得惛忘易生如經所止復一句一偈亦是聖所稱美以曇邃通神於石塢僧生感衛於空道冏臨危而獲濟慧慶將沒而蒙斯皆實德內充故使徵應外啓六牙降室四王衛座豈粤虛哉迺凝寒靖夜朗月長宵獨處閑房諷經典音吐遒亮文字分明足使幽靈忻踊精神暢悅所謂歌詠誦法言以此爲音樂者也
찬하노라.

법신은 이미 멀어졌고
기탁한 것은 말씀뿐이라
반복하여 나직이 읊조리니
혜택이나 이익 생각하기 어렵구나.
032_0888_b_12L贊曰
法身旣遠
所寄者辭
沈吟反復
惠利難思

삼업에 게으르지 말고
육시에 정진함이 있어야
변화로 나타난 이가 곧 호위하고
변화로 나타난 대중이 줄지어 오누나.
032_0888_b_14L無怠三業
有競六時
化人乃衛
變衆來比

이것이 진실한 공덕이니
무엇을 이와 비교하겠나.
032_0888_b_15L此焉實德
誰與較之
高僧傳卷第十二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