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극한 도는 어렴풋하여 방편[蹄筌]의 힘을 빌린 뒤에야 드러난다. 그윽한 이치는 깊이 엉켜서 스승에게 기대야만 쓰임을 이룬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의 자취가 번갈아 일어나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들이 의탁한 곳을 달리한다. 그러면서도 효성과 자비를 말하여서 임금을 공경하는 도리를 정하고,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밝혀서 풍속의 가르침을 이룬다. 혹 공을 잊고 일을 버려 저 텅 비움을 숭상하기도 한다. 혹 몸을 영고성쇠(榮枯盛衰)에 맡겨 이 세상에서 영달함을 무겁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가르침은 다만 한정된 영역 안에 국한된다. 그 공로도 오직 가까운 이익에만 둔다. 이는 무릇 점차로 물들게 하는 방법이며, 아직 그 깊고 신비한 본성을 다한 것은 아니다. 가령 부처님의 훈계에 이르러서는, 그 일과 과보의 그윽하고 미묘함을 헤아린다면, 3세를 순환한다. 그 지극한 이치의 높고 미묘함을 말한다면, 온갖 신령함을 다 꿰뚫는다. 만약 무릇 10지(地)의 경지를 열어 지혜의 근원을 말하여, 3제(諦)를 밝힘으로써 지혜의 곳집을 가려낸다면, 정신을 다하고 본성을 다한 가르침은 한결같이 중추적이고 극치를 이루는 이치를 맡는다.
불교 밖의 나머지 가르침을 이에 견준다면, 마치 수많은 흐름이 거대한 구렁으로 돌아가고,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 주위를 받드는 것과 같다. 그러니 멀고도 아득하도다. 참으로 말로는 아직도 그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워라. 마침내 그 가르침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고, 그 형상이 육도에 두루한 데 이르러서는, 모두가 그윽이 어두운 곳의 중생들을 이끌어내어, 큰 이익이 되고자 한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깨끗함과 더러움은 듣는 것에 따라 달라지고, 위로 오름과 아래로 떨어져 내림은 보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까닭에 서방에서는 소리와 형태의 근본을 앞세우지만, 동쪽 나라에서는 보고 듣는 이익을 뒤로 돌린다. 구름 속의 용이 동터오르는 새벽에 나타나듯, 바람을 몰아오는 호랑이가 밤중의 꿈에 나타나듯, 큰 바람을 부채질하자 불법의 큰 교화가 이에 무르녹는다. 그때부터 서역의 이름 높은 승려가 때때로 이 땅에 이르렀다. 혹 경법을 전도하기도 하고, 혹 선도(禪道)를 교수하기도 하며, 혹 기적을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하고, 혹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032_0901_c_01L한(漢)나라에서 우리 양(梁)나라까지는 시간과 연대가 더욱 멀다. 세상으로는 6대(代)를 건너오고 햇수로는 5백 년에 가깝다. 이 땅의 사문(沙門)들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재질을 머금고 빼어나게 일어선 이가, 무리를 이룬 영준한 승려들 사이에서 간혹 나온다. 시대를 번갈아 가며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의 기록에 따라, 서술하고 기재한 내용이 각기 다르다. 사문 법제(法濟)는 치우쳐 고일(高逸)한 한 가지 자취만을 서술하였다. 사문 법안(法安)은 다만 지조와 절개의 지절(志節)한 행실만을 나열하였다. 사문 승보(僧寶)는 오직 유방(遊方)한 한 과목만을 지었다. 사문 법진(法進)은 곧 전론(傳論)을 통틀어 모아썼지만, 말과 일에 빠지고 줄인 곳이 있었다. 모두 나란히 서로 번거롭고 간결한 차이가 있으며, 나오거나 빠진 것이 달라서, 행한 일을 살펴보아도 아직 그 귀결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유의경(劉義慶)의 「선험기(宣驗記)」와 「유명록(幽明錄)」, 태원왕(太原王) 유염(劉琰)의 「명상기(冥祥記)」, 팽성(彭城) 유준(劉俊)이 쓴 「익부사기(益部寺記)」, 사문 담종(曇宗)이 쓴 「경사사기(京師寺記)」, 태원왕(太原王) 유연수(劉延秀)의 「감응전(感應傳)」, 주군태(朱君台)의 「징응전(徵應傳)」, 도연명(陶淵明)의 「수신록(搜神錄)」등에도, 모두 한편으로는 여러 승려들의 전기가 나와 있어 그 평소의 풍모를 서술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덧붙여 본 것이어서, 성글고 빠진 것이 많다. 제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의 『삼보기전(三寶記傳)』은 혹 불교의 역사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승록(僧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럴 만큼 이미 삼보를 함께 서술한 것이어서, 말뜻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뒤섞이고 넘쳐서 진실을 구하기 어렵고, 또한 거칠고 어둡다. 낭야(瑯琊)의 왕건(王巾)이 지은 『승사(僧史)』는 내용이 종합적으로 모은 듯하지만, 문체(文體)가 아직 부족하다. 사문 승우(僧祐)가 지은 『삼장기(三藏記)』에는 오직 30여 명의 승려만이 실려 있을 뿐,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중서랑(中書郞) 극경흥(郄景興)의 「동산승전(東山僧傳)」과 치중(治中) 장효수(張孝秀)의 「여산승전(廬山僧傳)」, 중서(中書) 육명하(陸明霞)의 「사문전(沙門傳)」은 각기 다투듯 한 지방만을 거론하였다. 고금의 일에 통하지 않고, 한 가지 뛰어남만을 보존하기에 힘썼으므로, 나머지 행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032_0902_a_01L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해서 작자는 있다. 그러나 혹 사람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글 아래에는 지나치게 서로 추켜올리기도 한다. 혹 일을 서술하는 가운데, 공연히 많은 말을 허비하여 나열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진실한 이치를 구하려 하면, 딱 부러지게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혹 그 내용이 번거롭고 광범위한 것이 싫다 하여, 그 일을 잘라내고 줄인다. 그러니 드높은 자취의 기이함이 대부분 버려지고 깎인다. 이를테면 출가한 사람이 나라에 처하여 왕의 손님이 되면, 마땅히 스스로를 멀리하기에 힘써, 높이 뛰어나서 홀로 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어 영화를 떠나고 사랑을 버려, 본래 세속과 다른 것을 어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논하지 않고, 끝내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나는 일찍이 한가한 날에 우연히 많은 작품을 열람하였다. 곧 잡록(雜錄) 수십여 가(家)의 기록과 진(晋)ㆍ송(宋)ㆍ제(齊)ㆍ양(梁)의 『춘추서사(春秋書史)』와 진(秦)ㆍ조(趙)ㆍ연(燕)ㆍ양(凉)의 황조(荒朝)의 『위력(僞曆)』과 「지리잡편(地理雜篇)」ㆍ고문(孤文)ㆍ편기(片記)를 찾았다. 아울러 널리 권위자[古老]들에게 자문 받고, 널리 선달들을 방문하여, 그 유무를 비교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취하였다. 한(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67)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우리 양(梁)의 천감(天監) 18년(519)에 이르른다. 모두 453년 257사람과 또 곁들여 나온 2백여 명이다.
그들의 덕과 일을 개진하여, 크게 열 가지 예(例)로 나눈다. 첫 번째는 역경(譯經), 두 번째는 의해(義解), 세 번째는 신이(神異), 네 번째는 습선(習禪), 다섯 번째는 명률(明律), 여섯 번째는 유신(遺身)1), 일곱 번째는 송경(誦經), 여덟 번째는 흥복(興福), 아홉 번째는 경사(經師), 열 번째는 창도(唱導)이다. 그러나 불법이 동쪽 나라에 유입된 것은 무릇 전역한 사람들의 공훈에 말미암은 결과이다. 혹 사막과 험한 산을 넘어오기도 하였다. 혹 배를 드넓은 파도 위에 띄우기도 하였다. 모두 자기 몸을 잊고 도에 순직하여 목숨을 맡기고, 불법을 널리 퍼뜨린 분들이다. 중국 땅이 밝게 열린 것은 오로지 이에 힘입은 결과이다. 이 공덕은 숭상할 만한 일인 까닭에 책 첫머리에 적는다. 가령 지혜와 이해력으로 정신을 열면, 도가 만억 사람을 아우른다. 감응에 통하여 교화로 나아가면, 강폭한 사람을 복되게 한다. 생각을 편안하게 하여 선정(禪定)에 안주하면, 공덕이 무성하다. 율법으로 널리 도우면,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다. 형체를 잊고 몸을 버리면, 자랑하고 인색하던 사람이 마음을 고친다. 불법의 말씀을 노래하고 외우면, 귀신과 사람이 경사로움을 머금는다. 복되고 착한 일을 심고 일으키면, 부처님이 남긴 모습을 전할 수 있다.
032_0902_b_01L무릇 이 8과(科)는 모두가 그 자취가 같지 않고, 교화로서 젖어듦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공덕을 사부대중이 본받아서, 공훈이 3업(業)에 자리 잡는다. 그런 까닭에 뭇 경전이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뭇 성인이 기려 서술하는 것이다. 무릇 원류를 찾아 파헤쳐서, 취하거나 버릴 것을 헤아려 다지는 일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여러 찬(贊)과 논(論)으로 차례대로 적어, 이를 각 과(科)의 뒷글로서 갖춘다. 그러나 논에 지은 글은 보통의 문체(文體)와는 조금 다르다. 처음 대의(大意)를 표시한 것은 대체로 앞의 서문과 비슷하다. 요즘 시대의 사람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내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서 말할 것 같아서다[事同後議]. 만약 그 사이에 앞뒤의 순서를 베풀 경우에는 번잡하다고 생각하므로, 짐짓 모두를 한 과목의 말미에 모두 배치시켜 통틀어 칭하여 논으로 삼는다. 또한 전독(轉讀)과 선창(宣唱)의 경우에는 비록 근원의 출처가 먼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기연에 응하여 속인을 깨우쳐서 참으로 유별난 공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북제와 전송의 인물을 섞어서 기록하되, 모두 빼어난 사람을 조목조목 줄 세운다. 지금 여기서 취하는 바는, 반드시 전독과 선창의 지음과 쓰임에 월등히 뛰어나거나, 1푼이라도 감응에 통함이 있으면, 이에 전기의 말미에 엮는다. 만약 이와 다를 경우에는 여기에 남겨두지 않는다.
무릇 10과(科)에서 서술한 내용은 모두 많은 기록에 산재해 있는 내용이다. 지금 여기서는 다만 잘라내서 한 곳에 모은 것뿐이다. 그런 까닭에 옛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 더 보태서 짓지는 않은 것이다. 무릇 한 책 안에서 펼쳐 열람하여, 여러 요점을 아울러 알게 한 것이다. 번거로운 말이나 허망한 찬사나, 혹 덕이 칭송할 만한 데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일률적으로 모두 생략하였다. 그런 까닭에 6대에 걸친 현인과 이인을 기술한 것이, 다만 열세 권의 책이 되었을 뿐이다. 서록과 아울러 합쳐서 두루마기 14축으로 만들어 『고승전』이라 이름짓는다.
전 시대에 지은 전기들은 대부분 명승(名僧)이라 하였다. 그러나 ‘명(名)’이라는 것은 본래 실상의 손님일 뿐이다. 만약 실질적으로 행하더라도 광채를 숨기면, 경지는 높아도[高] 이름난[名] 것은 아니다. 공덕이 적어도 시대에 어울리면, 이름은 나도 경지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름만 알려지고 경지가 높지 않으면, 본래 여기에 적지 않는다. 경지가 높으면서 이름나지 않았으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 싣는다. 그런 까닭에 ‘명(名)’이란 소리를 지우고, 대신 ‘고(高)’란 글자로서 대신한다. 그 사이 원고의 초고에는 혹 버리고 잃은 부분이 있었다. 이제 이 열네 권에 찬(贊)과 논(論)까지 갖춘 것은 이것으로 결정판을 삼을 생각에서이다. 만약 아직 숨어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열람하는 사람이 소상히 지적해주기 바란다.
한(漢)나라 낙양(雒陽) 백마사(白馬寺) 섭마등(攝摩騰) 한나라 낙양 백마사 축법란(竺法蘭) 한나라 낙양 안청(安淸) 한나라 낙양 지루가참(支樓迦讖)축불삭(竺佛朔)ㆍ안현(安玄)ㆍ엄불조(嚴佛調)ㆍ지요(支曜)ㆍ강거(康巨)ㆍ강맹상(康孟詳) 위(魏)나라 낙양 담가가라(曇柯迦羅)강승개(康僧鎧)ㆍ담제(曇帝)ㆍ백연(帛延) 위오(魏吳) 건업(建業) 건초사(建初寺) 강승회(康僧會) 위오 무창(武昌) 유기난(維祇難)법립(法立)ㆍ법거(法巨) 진(晋)나라 장안(長安)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섭승원(聶承遠)ㆍ섭도진(聶道眞) 진나라 장안 백원(帛遠)백법조(帛法祚)ㆍ위사도(衛士度) 진나라 건강(建康) 건초사(建初寺) 백시리밀(帛尸梨蜜) 진나라 장안 승가발징(僧伽跋澄)불도라찰(佛圖羅刹) 진나라 장안 담마난제(曇摩難提)조정(趙政) 진나라 여산(廬山) 승가제바(僧伽提婆)승가라차(僧伽羅叉) 진나라 장안 축불념(竺佛念) 진나라 강릉(江陵) 신사(辛寺) 담마야사(曇摩耶舍)축법도(竺法度)
032_0903_a_01L 진나라 장안 구마라집(鳩摩羅什) 진나라 장안 불야다라(弗若多羅) 진나라 장안 담마류지(曇摩流支) 진나라 수춘(壽春) 석간사(石磵寺) 비마라차(卑摩羅叉) 진나라 장안 불타야사(佛陀耶舍) 진나라 경사(京師) 도량사(道場寺)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진나라 하서(河西) 담무참(曇無讖)안양후(安陽侯)ㆍ도보(道普)ㆍ법성(法盛)ㆍ법유(法維)ㆍ승표(僧表)
송(宋)나라 강릉 신사 석법현(釋法顯) 송나라 황룡(黃龍) 석담무갈(釋曇無竭) 송나라 건강 용광사(龍光寺) 불타집(佛馱什) 송나라 하서 부타발마(浮陀跋摩) 송나라 경사 지원사(枳園寺) 석지엄(釋智嚴) 송나라 육합산(六合山) 석보운(釋寶雲) 송나라 경사 기원사(祇洹寺) 구나발마(求那跋摩) 송나라 경사 봉성사(奉誠寺) 승가발마(僧伽跋摩) 송나라 상정림사(上定林寺) 담마밀다(曇摩蜜多) 송나라 경조(京兆) 석지맹(釋智猛) 송나라 경사 도림사(道林寺) 강량야사(畺良耶舍)승가달다(僧伽達多)ㆍ승가라다치(僧伽羅多哆) 송나라 경사 중흥사(中興寺)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아나마저(阿那摩低) 제(齊)나라 건강 정관사(正觀寺) 구나비지(求那毘地)승가바라(僧伽婆羅)
032_0903_b_01L 진나라 낙양(洛陽) 주사행(朱士行)축숙란(竺叔蘭)ㆍ무라차(無羅叉) 진나라 회양(淮陽) 지효룡(支孝龍) 진나라 예장산(豫章山) 강승연(康僧淵)강법창(康法暢)ㆍ지민도(支敏度) 진나라 고읍(高邑) 축법아(竺法雅)비부(毘浮)ㆍ담상(曇相)ㆍ담습(曇習) 진나라 중산(中山) 강법랑(康法朗)영소(令韶) 진나라 돈황(燉煌) 축법승(竺法乘)축법행(竺法行)ㆍ축법존(竺法存) 진나라 섬동앙산(剡東仰山) 축법잠(竺法潛)축법우(竺法友)ㆍ축법온(竺法蘊)ㆍ축법제(竺法濟)ㆍ강법참(康法讖)
진나라 섬옥주산(剡沃洲山) 지둔(支遁)지법도(支法度) 축법앙(竺法仰) 진나라 섬산(剡山) 우법란(于法蘭)축법흥(竺法興) 지법연(支法淵) 우법도(于法道) 진나라 섬백산(剡白山) 우법개(于法開)우법위(于法威) 진나라 돈황 우도수(于道邃) 진나라 섬갈현산(剡葛峴山) 축법숭(竺法崇)도보(道寶) 진나라 시녕산(始寧山) 축법의(竺法義) 진나라 동완(東莞) 축승도(竺僧度)축혜초(竺慧超)
진나라 장안 오급사(五級寺) 석도안(釋道安)왕가(王嘉) 진나라 포판(蒲坂) 석법화(釋法和) 진나라 태산(泰山) 곤륜암(崑崙巖) 축승랑(竺僧朗)지승돈(支僧敦) 진나라 경사 와관사(瓦官寺) 축법태(竺法汰)담일(曇壹)ㆍ담이(曇貳) 진나라 비룡산(飛龍山) 석승선(釋僧先)도호(道護) 진나라 형주(荊州) 상명(上明) 축승보(竺僧輔) 진나라 경사 와관사 축승부(竺僧敷) 진나라 형주 장사사(長沙寺) 석담익(釋曇翼)승위(僧衛) 진나라 형주 장사사 석법우(釋法遇) 진나라 형주 상명(上明) 석담휘(釋曇徽) 진나라 장안 복주산(覆舟山) 석도립(釋道立)승상(僧常)ㆍ법준(法濬) 진나라 장사사 석담계(釋曇誡) 진나라 어체청산(於替靑山) 축법광(竺法曠) 진나라 오호구(吳虎丘) 동사(東寺) 축도일(竺道壹)백도유(帛道猷)ㆍ도보(道寶)ㆍ도시(道施) 진나라 산음(山陰) 가상사(嘉祥寺) 석혜건(釋慧虔)담계(曇誡)ㆍ지명(智明)
진나라 여산(廬山) 석혜원(釋慧遠) 진촉(晋蜀) 용연사(龍淵寺) 석혜지(釋慧持)혜암(慧巖) 승공(僧恭) 도홍(道泓) 담란(曇蘭) 진나라 여산 석혜영(釋慧永)승융(僧融) 진나라 여산 석승제(釋僧濟) 진나라 신양(新陽) 석법안(釋法安) 진나라 여산 석담옹(釋曇邕) 진나라 오대사(吳臺寺) 석도조(釋道祖)혜요(慧要)ㆍ담순(曇順)ㆍ담설(曇說)ㆍ법유(法幽)ㆍ도항(道恒)ㆍ도수(道授) 진나라 장안 대사(大寺) 석승략(釋僧䂮)홍각(弘覺) 진나라 팽성군(彭城郡) 석도융(釋道融) 진나라 장안 석담영(釋曇影) 진나라 장안 석승예(釋僧叡)승개(僧揩) 진나라 장안 석도항(釋道恒)도표(道標) 진나라 장안 석승조(釋僧肇)
032_0904_a_01L 송나라 경사 용광사(龍光寺) 축도생(竺道生)보림(寶林) 법보(法寶) 혜생(慧生) 송나라 경사 오의사(烏衣寺) 석혜예(釋慧叡) 송나라 경사 동안사(東安寺) 석혜엄(釋慧嚴)법지(法智) 송나라 경사 도량사(道場寺) 석혜관(釋慧觀)승복(僧馥) 법업(法業)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혜의(釋慧義)승예(僧睿) 송나라 경사 팽성사(彭城寺) 석도연(釋道淵)혜림(慧琳) 송나라 경사 팽성사 석승필(釋僧弼) 송나라 동아(東阿) 석혜정(釋慧靜)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승포(釋僧苞)법화(法和) 송나라 여항(餘杭) 방현사(方顯寺) 석승전(釋僧詮) 송나라 강릉 신사 석담감(釋曇鑒)도해(道海)ㆍ혜감(慧龕)ㆍ혜공(慧恭)ㆍ담홍(曇泓)ㆍ도광(道廣) 송나라 여산 능운사(凌雲寺) 석혜안(釋慧安) 송나라 회남(淮南) 중사(中寺) 석담무성(釋曇無成)담경(曇冏) 송나라 경사 영미사(靈味寺) 석승함(釋僧含)도함(道含) 송나라 강릉 슬파사(瑟琶寺) 석승철(釋僧徹)승장(僧莊) 송오(宋吳) 호구산(虎丘山) 석담제(釋曇諦) 송나라 수춘 석간사 석승도(釋僧導)승인(僧因)ㆍ승음(僧音)ㆍ승성(僧成) 송촉(宋蜀) 무담사(武擔寺) 석도왕(釋道汪)보명(普明) 도은(道誾) 송나라 산음(山陰) 천주산(天柱山) 석혜정(釋慧靜) 송나라 장사(長沙) 녹산(麓山) 석법민(釋法愍)승종(僧宗) 송나라 경사 북다보사(北多寶寺) 석도량(釋道亮)정림(靜林)ㆍ혜륭(慧隆) 송나라 단양(丹陽) 석범민(釋梵敏)승약(僧籥) 송나라 경사 중흥사 석도온(釋道溫)승경(僧慶)ㆍ혜정(慧定)ㆍ혜숭(慧嵩) 송나라 경사 중흥사 석담빈(釋曇斌)담제(曇濟)ㆍ담종(曇宗) 송나라 경사 하원사(何園寺) 석혜량(釋慧亮) 송나라 하정림사(下定林寺) 석승경(釋僧鏡)담륭(曇隆) 송나라 경사 영근사(靈根寺) 석승근(釋僧瑾)담도(曇度)ㆍ현운(玄運) 송나라 경사 흥황사(興皇寺) 석도맹(釋道猛)도견(道堅)ㆍ혜란(慧鸞)ㆍ혜부(慧敷)ㆍ혜훈(慧訓)ㆍ도명(道明) 송나라 산음 영가사(靈嘉寺) 석초진(釋超進)담기(曇機)ㆍ도빙(道憑) 송오(宋吳) 흥소산(興小山) 석법요(釋法瑤)담요(曇瑤) 송나라 경사 신안사(新安寺) 석도유(釋道猷)도자(道慈)ㆍ혜정(慧整)ㆍ각세(覺世)
송나라 경사 야성사(冶城寺) 석혜통(釋慧通)
진나라 업중(鄴中) 축불도징(竺佛圖澄)도진(道進) 진나라 나부산(羅浮山) 단도개(單道開) 진나라 상산(常山) 축불조(竺佛調) 진나라 낙양 기역(耆域)
032_0904_c_09L晉鄴中竺佛圖澄道進
晉羅浮山單道開
晉常山竺佛調
晉洛陽耆域
고승전 제10권
신이 하 16인
032_0904_c_13L高僧傳第十卷神異下 十六人
032_0905_a_01L 진나라 낙양 반치산(盤鵄山) 건타륵(揵陀勒) 진나라 낙양 누지산(婁至山) 가라갈(呵羅竭) 진나라 양양(襄陽) 축법혜(竺法慧)범재(范材) 진나라 낙양 대시사(大市寺) 안혜칙(安慧則)혜지(慧持) 진나라 장안 섭공(涉公) 진나라 서평(西平) 석담곽(釋曇霍) 진나라 상우룡산(上虞龍山) 사종(史宗) 송나라 경사 배도(杯度) 송위위(宋僞魏) 장안 석담시(釋曇始) 송나라 고창(高昌) 석법랑(釋法朗)법정(法整)
송나라 민산(岷山) 통운사(通雲寺) 소석(邵碩) 송나라 강릉 비파사(琵琶寺) 석혜안(釋慧安)승람(僧覽)ㆍ법위(法衛) 제나라 경사 지원사 사미(沙彌) 석법궤(釋法匱)법개(法揩) 제나라 형주 석승혜(釋僧慧)혜원(慧遠) 제나라 수춘 석혜통(釋慧通) 양나라 경사 석보지(釋保誌)도향(道香)ㆍ승랑(僧朗)
아버지를 여윈 고자(孤子) 만영(曼穎)은 머리 조아려 공경히 예를 올리나이다. 어느 날 지으신 『고승전』을 보여 주심을 받고, 아울러 하나하나 주워 올리게 시키셨습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힘써 찾았으나, 다만 보이는 것은 위대하신 재능이었습니다. 종이는 낡고 먹물은 바래지도록, 아직까지도 다 일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저 지극한 불법에 힘입어 이름난 대덕 승려께서 이미 일어난 일은, 세월이 거의 5백 년에 달하고 시대가 6대를 지났습니다. 마등(摩騰)과 법란(法蘭)이 서역에서 여행을 떠나고, 안후(安侯)와 지참(支讖)이 동도(東都)에 지팡이를 메고 온 이래, 비록 남긴 자취의 표시는 들쑥날쑥하고, 행실에는 얕고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두가 배가 되고 교량이 되어, 큰 이익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승려와 속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문필로 글을 정하여, 후손들에게 밝게 보여서 지난날의 빼어난 업적을 부추겨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안(道安)과 구마라집이 간간이 진나라 역사서인 『진서(秦書)』에 드러나고, 불징(佛澄)과 도진(道進)이 조나라 역사서인 『조책(趙冊)』에 섞여 알려졌을 뿐입니다. 진나라 역사책인 『진사(晋史)』에서는 버림받아, 한스럽게도 당시의 사람에 국한되었습니다. 송나라 역사책인 『송전(宋典)』에 남아 있는 것도, 자못 그때 모은 것에 기초하였을 뿐입니다. 또한 아울러 군대(君台)의 기록이 허를 찔러 세상에 나오고, 원량(元亮)의 설이 뒤섞여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감응을 혹 헤아려 정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음과 나타남의 대강의 줄거리만 남아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광범하게 곁가지 글을 드러내었다 하더라도, 아직 빛나게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간간이 여러 전기들이 있으나, 또한 숨은 것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경흥(景興)은 잠시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을 채택하였습니다. 승보(僧寶)는 치우치게 사방을 노닌 사람만을 엮었습니다. 법제(法濟)는 오직 높이 뛰어난 분의 예만을 벌려 놓았습니다. 법안(法安)은 오직 지조와 절개의 과목만을 이름지었습니다. 강홍(康泓)은 오로지 단도개(單道開)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왕수(王秀)는 다만 높은 자리에 앉은 승려만을 칭송하였습니다. 승유(僧瑜)는 우뚝이 홀로 높은 이들만을 실었습니다. 현창(玄暢)은 초연히 외로운 이만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법진(法進)이 지은 것과 왕건(王巾)이 저작한 내용만이 종합적으로 해박하게 모은 것이어서, 일가(一家)로서 명성을 떨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진은 이름을 널리 모았으나 내용이 광범위하지 못합니다. 왕건은 바탕은 세웠으나, 자리 잡지는 못하였습니다.
032_0907_a_01L양(梁)시대 이래로, 전기를 지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여러 가지 병폐가 있습니다. 승우(僧祐)가 이룬 책은 이미 법제(法濟)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효수(孝秀)가 물 묻힌 붓도 다시 경흥(景興)의 비난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보창(寶唱) 공께서 찬집한 전기가 사실과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요구한다면, 다시 번거롭고 쓸데없다는 것이 한이 됩니다. 법사의 이 제작이야말로, 비로소 이른바 끊어지지 않는 대문장이십니다. 면면히 예와 이제를 잇고 안팎을 포괄하였습니다. 말을 지은 것이 일과 나란하여, 문채가 나지도 않고, 질박(質朴)하지도 않습니다. 번잡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략하고, 너무 요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덧붙였습니다. 덕이 높은 것으로서 이름을 지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예(例)를 개진하여 광범한 내용을 이루어, 착함이 있는 사람에게 권유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몇몇 사람들이 전후해서 찬술한 것과, 어찌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하고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해를 같이하고 날을 함께 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제자는 끝까지 한마디의 말도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저잣거리의 가게에 공연히 천금의 상품을 마련한 셈입니다. 바야흐로 용함(龍函)에 버금가는 자리에 들어가고, 위로 기린의 누각에 올라가서, 그 안에서 구슬 같은 책 보따리를 꺼내, 옥상자[玉笥]에서 폈다 말았다 할 만한 책입니다. 제자는 비록 참으로 민첩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병든 나머지 부딪치는 곳마다 어두운 것이 많습니다. 또한 보내오신 책을 펴보니, 우리 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찬앙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토론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진실로 뛰어난 선생님의 근원이 되고 법칙이 되는 논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도문에 처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글을 알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부질없이 사안(謝安)이 축광(竺曠)의 풍류를 사모하고, 은호(殷浩)가 지둔(支遁)의 재능이 뛰어남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깊어질 따름입니다. 만나지 못한 지 열흘이 지나니, 궁한 정이 이미 고단합니다. 힘을 부추겨 이것을 아룀으로써, 모든 것을 하소연하는 것에 대신합니다. 아버지를 여윈 제자 왕만영(王曼穎)은 머리 조아려 공경히 예를 올리나이다.
제가 어느 날 지었던 『고승전』을 가려내 본 것은, 생각을 마음에 교훈이 되어 다스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보내주신 여러 장의 편지로 의문을 씻어내기를 거듭 더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도는 사람에 기대서 넓혀지고, 진리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를 널리 퍼뜨리는 일에서는 고승보다 더 숭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에 점차로 물들게 된 이래로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밝혔습니다. 남다른 공덕과 남다른 행실이 여러 시대에 이어져 일어나서, 후생들을 도탑게 힘쓰도록 해 주었습니다.
032_0907_b_01L이치로 보아 마땅히 이것을 모아 엮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빈도는 어려서부터 책을 품거나 대나무쪽 같은 책을 안고, 스스로 독려하는 부지런함이 모자랐습니다. 장년이 되어서야, 문필로서 착함을 부추기는 아름다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듣고 보는 여가의 한가한 때에 전기의 기록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1푼이라도 칭송할 만한 전기를 볼 때마다, 곧 가슴 깊이 날마다 세 가지를 반성해 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만 많은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번다함과 요약됨에서 같지 않았습니다. 혹 얼기설기 엮어서 들쭉날쭉한 것과, 혹 행한 일이 들락날락한 것은, 이미 따로 서문에서 소상히 밝혔습니다. 아울러 보내오신 글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짧은 붓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문득 10과(科)를 세워 가닥과 흐름을 헤아려서 정하고, 뜻과 말을 대략 들어올렸습니다. 그렇지만 글 솜씨는 어둡기만 하고, 글투는 더럽고 졸렬하기만 합니다. 본래 스스로 갖춘 것이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분수에 넘치게 높으신 분의 귀까지 들리겠습니까?
시주께서는 이미 학문이 공자와 석가를 겸하고, 이해력이 도가와 유가를 꿰뚫었습니다. 그러므로 뽑아내서 엮은 문장은 안팎이 한 곳에 머물러 돕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펴서 보시는 여가에, 혹 소상히 열람하실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고 비속한 신분을 잊고서, 용문(龍門)에 간택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높고 글은 거칠어서, 오래도록 가슴에 품기에는 부끄러운 생각이 많습니다. 보내신 말씀은 거짓 부풀려 말씀하신 것이어서, 더욱 답답함만 더합니다. 지금 지은 바의 찬과 논(論)과 10과를 거듭 가려냈습니다. 만약 잘못된 오류가 있다면, 청컨대 갖추어 짐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려 아무개[釋君白]가 아룁니다.
032_0907_c_01L이 전기는 회계(會稽) 가상사(嘉祥寺) 혜교(慧皎) 법사가 지은 것이다. 법사는 배움이 내ㆍ외전에 뛰어나고, 경과 율 모두 강의를 잘하였다. 「열반소(涅槃疏)」10권과 「범망계(梵網戒)」 등에 대한 의소(義疏)를 지어, 모두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이 『고승전』 13권을 지었다. 양(梁)나라 말엽 승성(承聖) 2년(553) 계유년에 후경(侯景)의 난을 피하여 분성(湓城)에 왔다. 잠시 강설하다가 갑술년(554) 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강주(江州) 승정(僧正) 혜공(慧恭)이 장례를 경영하여, 여산의 선각사(禪閣寺) 묘지에 묻었다. 용광사(龍光寺)의 승과(僧果)가 함께 피난하여 산에 있었다. 우연히 당시의 일을 보고 잠시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