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극한 도인 경우에는 그것을 형용하는 말이 없는 법이다. 형용하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의 규범으로 되는 것인가. 말은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것인데 지극한 도는 바로 행동을 통하여 말을 이룬다. 이 때문에 다섯 가지 지위[五位]1)를 열거하여 성현을 가려내고 4의(依)2)를 내세워 인법(人法)을 계승하게 하는 것이다. 용도(龍圖)3)는 태역(太易)의 기초이고, 구장(龜章)4)은 떳떳한 윤리와 도덕의 시원을 열어 놓은 것인데, 공자[素王]5)에 이르러서야 이전의 것들을 계승하여 4과(科)6)로 완비되었으며, 그후 반고[班生]7)가 후진들을 모아놓고 글을 지어 9등(等)8)을 널리 퍼뜨렸다. 이것은 모두 교화하고 인도하는 데서의 항구적인 규칙이고 말과 행동의 빈틈없는 일치인 것이다. 생각건대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자 교화가 서역에 베풀어지고 그 자취는 동천(東川)으로 이어졌다. 중고시대를 넘으면서 더욱 새로워지고 여러 세대9)를 지나면서 더욱 번성해졌다. 비록 추세의 변동에 따라 법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이익을 나타내는 넓은 길이고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큰 지략이다. 그래서 도리를 체득하고 도풍을 공경하는 선비나 격양되고 영향을 받는 빈객들이 바른 진리를 깨닫고서야 말을 하고 현묘한 진리[玄機]를 캐 보고서야 외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공덕은 우주에 충만하고, 정신은 저 세상과 이 세상에서 으뜸이며, 형상물은 단청(丹靑)으로 찬연하고, 지혜는 유소(油素)10)로 빛난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경부(經部)에 상세히 드러나 있으나 진정 그것을 조목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생각해 보면 총령[蔥]과 사막이 인도와 중국을 경계 짓고 있으므로 중국과 천축의 풍속은 서로 다르다. 화서국[華胥]11)에서 편찬해낸 데는 성인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편찬한 것은 바로 법에 의거한 24권의 전기이다. 중국[神州]에서 기록한 데는 성인과 범부가 뒤섞여 있는데, 그 제목들을 인용하면 바로 6대(代)시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여러 기록들이 그것이다. 그러니 이것들의 대강을 통일하고 합쳐지는 것들을 정밀하게 모으면 우매한 마음을 분발시키고 바른 이치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란 없어 발길을 사면팔방으로 통하여 남긴 자취를 바라기만 하면 찾을 수 있고, 눈길은 사방으로 뻗쳐 높은 산을 오르지 않고서도 우러를 수 있게 한다. 옛적 양나라 사문이었던 금릉(金陵)의 석보창(釋寶唱)이 편찬한 『명승전(名僧傳)』과 회계(會稽)의 석혜교(釋惠皎)가 편찬한 『고승전(高僧傳)』은 서로 다른 내용을 발휘하면서도 부류를 갈라 정한 것이 일관되고 상세하여 볼 만할 뿐 아니라 풍부하고 빈약한 내용에도 모두 근거가 있다. 그러나 오(吳)나라, 월(越)나라의 스님들에 대해서는 알기 쉽게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위(魏)나라와 연(燕)나라의 스님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하였으니 자못 안목은 넓으나 세밀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들은 데 따라 분석한 데다가 양(梁)나라 때의 사적이 많은 것으로 하여 명덕(明德) 스님은 “번잡해졌다. 그리고 53명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전기를 서술하였으니 재주가 신통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동시대인들도 서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사적이나 유래로서 중원(中原)에서 교정된 것들이 간단한 기록으로나마 전해지지 않아 현재 좋은 자료가 없으니, 누가 책으로 만들어 역대의 높은 도풍이 오래도록 드날리도록 하겠는가. 나는 젊은 시절에 이런 글에 관심을 가졌는데 역대로 내려오는 글들을 익히기는 하였으나 경륜은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이름난 스님들에게서 그런 글이 나오기를 오래도록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심한 것을 단념할 수가 없어 여러 스님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런 글이 있다는 말을 듣기만 하면 기록하고 대조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먼저 제창하는 것을 꺼리고 큰일을 할 만한 사람도 따로 있기에 한갓 구상에만 머무르면서 세월만 허비하였다. 마침내 없는 솜씨로 집필을 시작하고 적은 견문을 가지고 편찬사업에 달라붙었다. 다행히 역대의 전기를 얻어 보고 이와 관련하여 첫 시작을 고쳐 만들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연대로부터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광명이 나타난 연대 이전까지의 자료들을 부분별로 구별하고 전해오는 사적들을 모두 모아 놓았다. 그리고 상고하여 옛 사실들을 보태고 수정하여 그전에 들었던 것들을 요약함으로써 마침내 선배들을 이어서 큰 보배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말세의 인심은 화려한 명성만을 중시하여 도풍[風猷]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는 이어주는 실마리가 조금도 없다. 오직 수(隋)나라 초엽에 사문인 위군(魏郡)의 석영유(釋靈裕)만이 본보기로 될 사적들을 저술하여 사방에 널리 퍼뜨릴 마음을 가지고 『십덕기(十德記)』 1권을 편찬하였는데 미묘한 이치를 밝혀낸 스승들에 대해서만 치우쳐 서술하였을 뿐 후대를 많이 키워내고 종지를 드날린 스승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였다. 그 밖의 것들은 곁가지 글들이거나 행장(行狀)뿐이어서 결국에는 역시 볼 만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이 일에 몸을 잠그고 붓을 들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너무 아뜩하여 물러서곤 하였으니 그것도 참으로 그럴 만하지 않았겠는가. 이번에 내가 편찬한 것도 그러한 전례에 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에 부득이 삼가하고 선배들에게 널리 물어보기도 하고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으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기록하기도 하고 모든 전기를 검토하고 대조하기도 하였다. 남북조(南北朝)시기의 국사(國史)에 첨부된 고승들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들과 시골의 비석들에 새겨진 고승들의 훌륭한 덕에 대한 자료에서도 모두 그들의 뜻과 행실, 재능과 지략을 모아 써 넣었다. 말을 함축하여 번잡한 것을 간단하게 하였으며 사건은 통하게 하고 글이 졸렬한 것은 다듬었으니 앞선 시기의 좋은 것을 이어받아 진실로 후세의 본보기로 되게 하였다. 양(梁)나라 초운(初運)부터 시작하여 당(唐)나라 정관(貞觀) 19년에 이르기까지 144년간의 산천을 포괄하고 우리 나라와 변방의 사적들을 두루 담고 있다. 정전(正傳)에는 340명, 부견(附見)에는 160명을 싣고 순서대로 서술하였는데, 크게 열 가지 조목으로 하였다. 첫 번째는 역경(譯經)이고, 두 번째는 해의(解義)이고, 세 번째는 습선(習禪)이고, 네 번째는 명률(明律)이고, 다섯 번째는 호법(護法)이고, 여섯 번째는 감통(感通)이고, 일곱 번째는 유신(遺身)이고, 여덟 번째는 독송(讀誦)이고, 아홉 번째는 흥복(興福)이고, 열 번째는 잡과(雜科)이다. 무릇 이 열 가지 조목에 해당한 훌륭한 덕을 겸비한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여기서는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만을 편찬하여 논하였다. 옛적의 전기에 서술되어 통례적으로 이미 간행된 것들과 호상 비교하여 평가함에 있어서는 검토한 데 기준하였고, 또한 경술과 도술이 아름다운 싹12)에서 어울리고 있다. ‘호법’의 한 조목에서는 바른 법도를 기준하면서도 반드시 여러 전기의 서술을 덧붙여 무엇이 공적이며 무엇이 공적이 아닌지를 알게 하였으며 막혔던 것을 터놓고 법도를 넓힌 사적을 취하여 참으로 단계별로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나머지는 착한 일에 대한 항목을 정하였는데 당대의 고정적인 틀을 따랐다. 포교(布敎)는 여론에 따랐는데 요점을 해결하고 시끄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이며 요약하고 총괄하여 마지막 조목에 귀결시킨 것은 세상일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광명을 감추고 산중에 깃든 스님들의 온갖 영혼의 뛰어난 기운이 강산에 잠기고, 정절이 숲속에 서리어 법음(法音)이 깊은 골짜기에 울리고, 정신이 안개 속에 떠다닌 일들과 부귀와 장수[松喬]13)를 사양하고 고통을 굽어 본 이러한 일들은 모두 여러 별기(別記)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구태여 논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혹 저잣거리에 종적을 감추고 속세에 숨어 있던 스님들에게도 열거할 만한 큰 업적이 있겠지만, 알려진 것들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드러난 공로와 행적만을 수집하였다. 마침내 열 가지 조목을 세워 세 개의 책으로 묶어내어 『속고승전』이라고 하였다. 근원과 유파를 찾아내고 교리 내용을 분석하며 문체를 다스리고 행업(行業)14)을 닦는 것과 같은 것은 후론(後論)에 갖추어 놓고 다시 의논하고 인용하여 꼭 항구적인 편(篇)으로 이어놓았다. 그리고 필요 없는 말들은 즉시 삭제하여 이전의 전기와 같게 하였다. 지금 한스러운 것은 말법시대에 이르러 당대에 뛰어난 널리 알려진 스님들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운 행적을 보지 못하고 전적 속에 묻혀 두는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후세의 동학(同學)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또 이런 말을 불필요하게 덧붙인다.
032_0909_c_02L승가바라는 양나라 말로 승양(僧養)이며 또는 승개(僧鎧)라고도 하는데 부남국(扶南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일찍이 절에 보냈는데, 그 뒤 배울 나이에 출가하였고, 『아비담론(阿毘曇論)』만을 집중하여 공부해서 해남(海南) 지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는 널리 율장(律藏)을 익히고 용맹한 뜻으로 사방을 살피면서 불법이 숭배되고 개화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제(齊)나라에서 불법을 널리 보급한다는 소문을 듣고, 뱃길을 따라 제나라 도읍에 이르러 정관사에 머물며 천축(天竺) 사문인 구나발타(求那跋陀)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구나발타에게서 『방등경』을 배우고 닦아 여름 한 철이 가기 전에 널리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고, 이어 여러 나라의 글자와 말을 이해하고 습득하였다. 제나라가 망하고 도의 가르침이 점점 쇠퇴해지자 승가바라는 고요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외부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한적하게 있으면서 공부의 바탕을 쌓아나갔다. 양나라[大梁]에서 거처지에 수레를 보내어 재주가 능한 사람들을 찾았는데, 천감(天監) 5년에 왕의 지시로 부름을 받아 양도(楊都)의 수광전(壽光殿)과 화림원(華林園), 정관사, 점운관(占雲館), 부남관(扶南館) 등 다섯 곳에서 17년 동안에 『대육왕경(大育王經)』과 『해탈도론(解脫道論)』 등 도합 11부 48권을 번역하였다. 처음 경을 번역하던 날에 수광전 양무제가 직접 법좌(法座)에 참석하여 글을 써주었다. 그런 뒤 번역하는 사람에게 경본(經本) 번역을 끝낼 것을 위탁하고, 사문인 보창(寶唱), 혜초(慧超), 승지(僧智), 법운(法雲) 및 원(袁), 담윤(曇允) 등에게 지시하여 대조하여 주소(註疏)를 새기게 하고, 그 서술을 꾸미는 것에도 순서가 있게 하여 번역의 근본 취지를 떨어뜨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천자(天子)의 예(禮)로 대접을 융숭하게 하였고, 이들을 데려다 집안의 승려[家僧]로 삼고 담당관리가 물품을 공급하게 하니 스님들과 세속의 사람들이 이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승가바라는 자기의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베풀어 보시하였으며 머무를 절을 세웠다. 태위(太尉)인 임천왕(臨川王) 굉(宏)이 대접과 예우가 매우 융숭하였다. 보통(普通) 5년에 병이 나서 정관사에서 65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만타라(曼陀羅) 양나라 초기에 또 부남국의 사문인 만타라(曼陀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나라 말로 홍약(弘弱)이다. 그는 범어(梵語)로 된 불경을 가지고 멀리서 찾아와 나라에 바쳤다. 임금의 명으로 승가바라와 함께 번역하였는데, 『보운경(寶雲經)』ㆍ『법계체성경(法界體性經)』ㆍ『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3부 등 도합 11권이다. 이 사람은 비록 번역에 종사하였지만 양나라 말을 아직 잘 몰랐다. 그런 까닭에 그가 내놓은 경전은 글의 본질이 가려진 것이 많았다.
목도현(木道賢) 당시 거사 목도현(木道賢)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천감 15년에 『우루빈경(優婁頻經)』 1권을 바쳤는데, 글이 갖추어지지 못한 데다 전해진 유래를 밝히지 못하였다.
승법(僧法) 또 태학박사(太學博士) 강필녀(江泌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법명은 승법(僧法)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때로 고요히 앉아서 눈을 감고 『정토묘장엄경(淨土妙莊嚴經)』 등을 외우곤 하였다. 8살 때부터 16살 때까지 모두 35권의 경을 외워 세상에 내놓았다. 천감 연간에 화광전(華光殿)에서 양무제의 앞에서 직접 다른 경을 외워냈다. 양도(楊都)의 스님들과 세속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神)이 내려준 사람이라고 하였다. 만약 불경으로 징험한다면 이것은 전세에 익힌 것이며, 다른 이야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조용히 불교 밖의 서적[外典]을 살펴보면 태어나면서 아는 것은 성인이고, 배워서 아는 것은 그 다음인데, 이것은 현재의 몸에 국한시켜 말한 것이며, 지나간 과거의 일에는 어두운 이야기일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불교나 그 밖의 현성(賢聖)들의 얕고 깊으며 통하고 막힌 것을 가려내겠는가. 이전부터 전해진 담제(曇諦)가 책의 전부[書鎭]를 기억하는 일이라든가, 근세의 속인(俗人) 최자(崔子)가 금팔찌[金環]를 생각해낸 것과 같은 것은 역대로 그 자취가 있으니, 이는 정녕 외부의 거짓 속임수의 말이 아니다. 도명(道命) 태청(太淸) 연간에 이르러 상동왕(湘東王)의 기실(記室)인 우효경(虞孝敬)은 내전과 외전을 모두 배우고 『내전전요(內典傳要)』 30권을 저술하였다. 여기서는 경론(經論)을 망라하여 불문(佛門)을 조리 있게 묶어 놓았는데, 모든 요긴한 사항들이 갖추어지고 모두 수록되어 자못 『황람(皇覽)』, 『유원(類苑)』의 종류와 같았다. 그리고 별궁[渚宮]의 사람들이 거기에 심취되어 곧 스님이 되었다. 그는 또 이름을 도명(道命)이라고 바꾸고 관보(關輔)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역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032_0910_b_02L보창의 성은 잠씨(岑氏)이며, 바로 오씨가 나라를 세웠던 옛 땅인 오군(吳郡:지금의 浙江省) 사람이다. 젊을 때 품은 뜻이 크고 민첩하였으며 청백하고 굳은 지조를 스스로 지녔다. 그러나 오직 외로이 자립하여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살아가는 데 필요되는 토지는 10묘(畝:一畝는 약 3백 평)에 불과하였다. 곁에서 요구하게 되면 고용되어 글을 써주고 도움을 받았는데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소홀히 하여도 곧 잘 알았으며, 글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넉넉한 뜻과 이치로 소문이 났다. 나이 18세 때 승우(僧祐) 율사를 찾아가서 출가하였다. 승우는 강남(江南)의 승단에서 덕망이 많았던 스님으로, 그는 저술한 것이 많았는데 구체적인 것은 전대의 『고승전』에 기록된 것과 같다. 보창(寶唱)은 처음 입문하여 도야(陶冶)를 받기 시작하게 되자, 경전과 율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면서 학풍(學風)을 이어받고 공덕을 세워 종풍의 계승자로서의 명성이 있게 되었다.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면서 많은 학설을 널리 받아들이고 그 정밀한 이치를 참작하였고, 또한 오직 세속인들을 깨우치려고 반드시 통틀어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우선시하여 곧 처사(處士)인 고도광(顧道曠), 여승지(呂僧智) 등에게서 경서와 역사책, 『장자(莊子)』, 『주역』을 배워서 그 대의를 대략 통달하였다. 당시 그가 돌아다니며 세상일에 관계함으로써 세속적인 뜻이 있다고 하였지만 속인의 집을 찾아다니는 일을 끝내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무렵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지냈다. 건무(建武) 2년에 일상적인 습관에서 손을 떼고 도성을 나와 오직 듣기만 하면서 5년 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풍병[風疾]에까지 걸렸었다. 때마침 제나라 말기에 이르러 전란을 만나자 동쪽 지방으로 들어가 멀리 민월(閩越:지금의 福建省, 廣東省의 동부) 지방에 이르러 이전에 익혔던 학문을 토론하였다. 천감 4년에 문득 도성(都城)에 돌아왔는데 곧 황제의 명으로 신안사(新安寺)의 주지가 되었다. 황제는 “시운이 운뢰(雲雷)를 만났으니 온 세상이 편안하고 풍우(風雨)가 조화를 이루어 온갖 곡식이 해마다 풍년 드니, 어찌 위로는 삼보(三寶)로부터 도움 받고, 가운데로는 온 하늘로부터 힘입었으며, 아래로는 신룡(神龍)에 의거한 것이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 신령이 협찬하여 곧 그 복덕이 여러 백성을 덮어서 이 후한 덕을 받게 된 것이다. 다만 글에서 많은 부분이 흩어져 찾기가 어렵다”고 하며 명을 내려 보창(寶唱)이 이것을 모두 찬집하고 기록하여 시대의 요구에 적용하라고 하였다. 복덕을 세워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하거나 삼보에 예배하고 죄를 참회하여 장애를 제거하고 귀신을 먹이고 대접하거나 용왕에게 제사드리게 하는 등 부류(部類)를 구분하니 백권에 가까웠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의 이름으로 세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깊고 오묘한 세계를 포괄하여 고금(古今)의 사적을 자세하게 또는 개략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런 까닭에 모든 빌고 바라는 것을 황제가 반드시 직접 보고 사당에 비는 일에 쓰도록 지시하였는데 위령(威靈)에 감응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50여 년간 강남 땅이 무사하고 만백성이 부담을 견디어냈으니 이 힘에 기인되는 것이다. 천감 7년에 황제는 법의 바다는 너무나 넓고 얕은 지식으로 찾기 어렵다 하여 장엄사(莊嚴寺)의 승민(僧旻) 스님에게 명하여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중경요초(衆經要抄)』 88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 개선사(開善寺)의 지장(智藏) 스님에게 명하여 많은 경의 이치와 뜻을 엮게 하여 『의림(義林)』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80권에 달하였다.
승랑(僧郞) 또 건원사(建元寺)의 승랑 스님에게 명하여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주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72권이다. 이와 함께 보창은 명을 받들고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여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대강(大綱)을 종합하여 한 부(部)의 책을 편집하여 완성하였다.
간문제(簡文帝) 간문제가 동궁(東宮)에 있게 되자 불교[內敎]에 푹 잠겨 법보(法寶)를 찬집하여 구슬같이 이어 놓은 것이 2백여 권에 달하였다. 또 따로 보창(寶唱)에게 자세하고 간략한 것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구분하도록 명하였다. 황제는 불법(佛法)이 심오하여 얕은 지식으로는 통달하기 어렵고 본래 재능과 학문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극치에 이를 길이 없다고 하여, 또 보창에게 불교[大敎]가 동방으로 흘러온 이래 불문에 들어선 사람[道門]들과 세속의 선비[俗士]들이 불교의 이치를 서술하고 웅대한 뜻을 저술한 것이 있으면 모두 관통하여 모으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속법륜론(續法輪論)』이라고 이름지어낸 것이 모두 70여 권인데, 혼미한 자가 이것을 보면 곧 귀의해서 믿도록 하였으니 깨달음[道法]에 깊은 도움을 준 것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또 『법집(法集)』 140권을 찬집하였는데, 모두 보창이 홀로 결정하고 전적으로 헤아려서 1부의 책을 편찬하였고, 황제가 친히 본 후에는 내외에 유통시켰다.
승소(僧紹) 천감 14년 안락사(安樂寺) 승소(僧紹)에게 명하여 『화림불전경목(華林佛殿經目)』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비록 힘겹게 완성하였으나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았다. 또 보창에게 거듭 편찬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승소 이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주석을 달아 저술하였는데 합치되고 분리되는 점이 조목에 근거한 바가 있었다. 1질(帙) 4권으로 당시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이에 화림원(華林園)의 『보운경(寶雲經)』 장판을 맡아보도록 명하였는데 잃고 없어진 것을 찾고 구하여 모두 세 권으로 완성시켜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이것을 인연으로 또 명하여 『경률이상(經律異相)』 55권과 『반성승법(飯聖僧法)』 5권을 편찬하였고, 황제는 또 『대품경(大品經)』 50권에 주석을 달았다. 이때 불교가 융성하여 덕이 없이도 칭송되었는데 도인이든 속인이든 뛰어난 글재주로 서로가 글의 이치를 진술하였다.
양무제(梁武帝) 양무제가 천운에 부응하게 되었을 때가 37세 때며, 천자의 자리에 49년 동안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늘 애통한 감회를 품어 항상 탄식하기를 “비록 온 세상의 존귀한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망극한 슬픔을 펴볼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경전에 마음을 두어 8부의 『반야경』을 마음을 가꾸는 복밭으로 삼았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고, 또한 곧 재앙을 제거하고 속박을 씻어내는 경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경을 거두어들여 몸소 주석과 해설을 달았으며, 설법하는 자리에 직접 나아가 강독하고 널리 포교하였다. 이 같은 선한 인연으로 그 영식(靈識)을 받들고 제도하려고 자주 선대의 두 황제를 대신하여 몸 바쳐 스님의 일을 도움으로써 번뇌의 더러움을 씻고 우러러 명복을 빌었는데 한번 몸을 버릴 때마다 대지가 이것 때문에 진동하였다. 계속하여 재(齋)를 올리고 강론을 하면서 법의 수레바퀴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태조 문황제(文皇帝)를 위하여 종산(鍾山)의 북쪽 시냇가에 대애경사(大愛敬寺)를 세웠는데 어지러운 기운이 걷히고 태양과 마주하나, 가까이 가서 쳐다보면 백장(百丈)의 초록빛 산봉우리가 지극히 험준하고 흐르는 개울물이 넘치도록 쏟아지며 종산(鍾山)과 경산(鯨山)의 모든 봉우리는 봉황새가 허공을 타고 치솟는 듯하였다. 쌓아올린 탑은 골 안의 기이함을 감싸안고 편안히 앉았으며 산림과 샘물의 그윽함이 다하여 사찰의 구조가 임금의 정원, 침전과 같았으며 화려하게 꾸민 것이 마치 하늘 궁전과 같았다. 중심 절은 대문에서 연장 길이가 7리에 달하는데 행랑으로 연결되고 처마가 이어졌다. 그 곁에 36동의 절을 두었는데 모두 못과 누대를 설치하여 주위를 둘러싸게 하고 천여 명의 스님들에게 네 가지 공양거리[四事]로 공양을 하였다. 중심절의 정전(正殿)에는 전단(栴檀)나무로 된 불상(佛像)이 있었다. 높이가 1장(丈) 8척(尺)에 달했는데, 장인(匠人)이 작업량을 헤아리고 아침에 일을 시작하여 저녁에는 멈추었으나 밤마다 항상 작업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아침에 나가보면 곧 그 성과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불상이 완성되었는데 높이가 2장 2척에 달했다. 모습과 생김새가 단아하면서도 엄엄하고 신체의 모양이 몹시 뛰어나서 거의 신(神)의 조화를 따른 듯하였으며 여러 번 기이한 징험의 감응이 있었다. 황제는 또 절 안에 있는 용연별전(龍淵別殿)에 금동(金銅)의 불상을 만들어 두었는데 높이가 1장 8척이나 되었다. 황제가 직접 공양을 하면 매번 들어가 머리를 땅에 대어 절을 하면서 목메어 흐느끼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였고 미리 따라온 좌우의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태후(太后)에게 바치기 위해 푸른 시냇가의 서쪽 언덕 건양(建陽)성의 문으로 통하는 길 동쪽에 대지도사(大智度寺)를 세웠다. 이곳은 수도[京師]에서 으뜸가는 곳으로서 지대가 높고 습기가 없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아침시장의 중심도로, 수로와 육로의 드러난 요충지였다. 전당이 굉장하고 보탑은 7층이며 방들은 회랑으로 연결되고 꽃과 열매가 사이사이에 피어 있었다. 정전(正殿)에는 또한 1장 8척의 금불상[金像]을 만들어 놓고 태후의 명복을 빌었으며 5백 명의 비구니들이 사시(四時)에 경을 강론하고 외웠다. 절이 완성되던 날 황제는 여러 황후들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이 두 절을 세우고 양친의 명복을 빌어 끝없는 정을 표함으로써 성의를 다해 제를 지내는 마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부모를 애도하는 슬픔을 다 표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다시 중궁(中宮)에 지경전(至敬殿)과 경양대(景陽臺)를 짓고 7대 조상의 묘실[七廟室]을 세웠는데 높은 집은 엄숙하고 아름다움은 상서로운 구름과도 같았다. 흰 벽[粉壁]과 구슬기둥이 서로 비쳐 빛나는 곳에 양친의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예의를 갖추어 왕관(王冠)을 경대와 서랍에 올려놓았는데 눈을 들어 쳐다보면 사모하는 정이 저절로 일어나 아침저녁으로 그곳에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옷은 가볍고 따뜻한 것으로 철 따라 바꾸고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계절에 맞춰 날마다 올렸다. 황제는 또 말하였다. “비록 장인들의 솜씨를 다하고 세속의 기이함을 다하였으며 물과 돌로 주변을 감싸고 좋은 나무들을 뒤섞어 많이 심었지만 나라 일에 몸이 묶여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공양드리지 못하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에만 직접 음식을 올렸으니 우러러 바라볼 길이 없고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이 불에 타고 불로 지지는 듯하다.” 또 「연주(聯珠)」 50수를 지어서 효도를 밝히고 『효사부(孝思賦)』를 지어서 효의 근본을 널리 종합하였다. 지어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며 풍속을 바꾸는 데 있어서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만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원제(元帝)는 말하였다. “우리 황제가 효도한 것을 삼가 살펴보면 사계절이 바뀌어도 꽃피고 시들어 변하지 않았고, 5행의 덕[五德]이 다시 작용하여도 귀천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조정에 나오면 단정하고 말이 없었으나 순간의 생각에도 서러움이 가득하셨다. 조정에서 나라를 다스리면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모시지 못한 슬픔이 더욱 애절하여 목욕재계하고 종묘[宗廊]에 제사 드리고 경건하게 산천(山川)에 제사 드리면서 말씀이 나오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졌고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고도 몹시 가슴 아파하시며 통곡하셨으니 이른바 ‘죽을 때까지 근심한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무릇 만년을 두고 효를 논한다면 우(虞)나라의 순(舜)임금과 하(夏)나라의 우(禹)임금과 주(周)나라의 문왕과 양(梁)나라의 무제 네 사람뿐이다.” 자세히 말하면 『금루자(金樓子)』에 서술된 것과 같다. 또한 대통(大通) 원년에 대성(臺城)의 북쪽에 대통문(大通門)을 개설하고 동태사(同泰寺)를 세웠는데 누각과 대와 불전이 궁궐을 방불케 하였고 9층[級]의 부도(浮屠)는 구름 밖에 맴돌았으며 산과 나무, 정원과 못이 기름지고 겹겹이 수없이 쌓였었다. 그해 3월 6일에 황제는 이곳에 직접 나와 예참(禮懺)하는데 공경히 참가하였고 이것을 항시적인 준칙으로 삼았으며 곧 이곳을 육신을 맡길 땅으로 정하였다. 비록 정사로 공무가 바빠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고 불교의 경론(經論)과 외도의 서적들을 펼쳐보면서 늘 새벽까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예기(禮記)』ㆍ『고문(古文)』ㆍ『주서(周書)』ㆍ『좌전(左傳)』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 등 제자백가의 글과 『논어(論語)』ㆍ『효경(孝經)』에서부터 전대 철인(哲人)들이 다 밝히지 못한 책에 모두 훈석(訓釋)을 하였다. 또한 국학원(國學員)에 한하여 귀천(貴賤)의 차별을 없앴으며 이어 다시 오관(五館)을 설치하고 가난하지만 준수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짐짓 유교와 불교의 두 문중이 꽃피고 무성하여 나란히 우뚝 솟게 하였다. 황제의 문집은 전후집(前後集) 백여 권이 있으며 고금의 역사를 관통한 책들 수천 권을 저술하였으니 보창은 이와 같은 태평성세를 만나 자주 임금의 옥새가 찍힌 글을 받들고 번역에 참여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별전(別傳)과 같다. 처음 보창은 천감 9년에 병이 더해지자 문득 두 가지 서원을 하였으니 경론(經論)을 모두 찾아 유실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역대의 스님들의 기록을 찾아 모으고 처음으로 그것을 구별하고 편찬하여 『명승전(名僧傳)』이라고 하는 한 부의 책을 만들었는데 31권이었다. 천감 1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조목의 편집에 착수하였는데 그 서문에 대략적으로 이렇게 썼다. “무릇 적멸(寂滅)을 탐구하는 사람은 보고 듣는 범위 밖에 있으며 마음의 작용을 고찰하는 사람은 단청(丹靑)의 기능이 참으로 필요하다. 이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대해서는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대량(大梁)이 천하를 얻게 되자 그 위엄은 중국[赤縣神州]에 더해지고 공적은 백성을 구제하며 황제의 교화는 천하에 본보기로 되어 정신은 8정도(正道)에 머물러 머리 위에 법교(法橋)를 받들고 엎드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유교의 대단한 글들은 서적들에 꾸며져 있어 9품(品)과 6예(藝)에 대하여 조금도 빠진 것이 없지만 사문(沙門)의 청정한 수행에 대해서만은 기록된 것이 없으며 오묘한 종지(宗旨)와 민첩한 공덕에 대해서는 이름이 끊어진 지 오래니 탄식을 머금고 오래도록 품고 있은 것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 “율사(律師) 석승우(釋僧祐)는 깨달으려는 마음이 곧고 굳어 고결한 행동이 보통사람을 초월하였다. 집기(集記)를 저술하여 그 큰 요의를 뽑아냈으나 보창은 불민(不敏)하여 그 반열(班列)에 참여하였다가 두 번 떨어져 예배를 하면서 경전을 외우는 여가에 그들이 잊고 빠뜨린 것을 주워 모았다 ……”고 하였는데, 그 글의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다 싣지 않는다. 처음 각기(脚氣)병이 연속 나타나 동쪽 지방에 들어가서 치료하였다. 그가 길을 떠난 후에 칙서가 뒤이어 내려왔는데 이 때문에 죄를 짓고 월주(越州) 지방에 유배되었다. 뒤이어 법에 따라 법으로 처단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승정(僧正)인 혜초(慧超)가 감정에 매달려 명을 어기고 유배지를 광주(廣州)로 옮겼다. 그리고는 먼저 수도에 있는 대승사(大僧寺)의 모든 곳에 참회하게 하고 영남(嶺南) 지방으로 옮겨져 영원히 황폐한 변방에 버려졌다. 마침내 그로 하여금 자료를 수집하도록 하여 그 일에 종사하였는데 빠진 것이 많아 낮에는 엎드려 참회하고 밤에는 기록을 모았다. 게다가 관리들의 개인적인 독촉이 심하여 하루도 여가가 없었다. 그 속에서도 조목별로 짜임새를 살폈지만 문장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떠나려는 날에 마침내 황제에게 보고하니 유배를 거두라는 명이 있어 도성에 머물면서 번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스님들에 대한 역사기록이 한창 간행될 때 옛날 번거로웠던 내용을 고치고 다시 보태거나 줄여서 정하였기 때문에 전기(傳記) 뒤에 스스로 서문을 지어 말하였다. “내가 어찌 감히 승단(僧團)의 동호(董狐:춘추시대의 史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왜곡되게 기록한 일은 없으리라.” 그러나 보창이 편찬한 것은 매사를 지나치게 서술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에 의거하면서 헤아려보고 이용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미 본 요지를 거듭 진술하니 시대적 구분을 위해서이다. 그가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032_0912_b_02L담요는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몸가짐과 태도가 굳고 곧았으며 풍모와 자취가 한가하고 검박하였다. 원위(元魏)의 화평(和平) 연간에 북대(北臺)의 소현통(昭玄統)에 거주하면서 스님들과 잘 어울려 묘하게 그들의 마음에 들었고 항안(恒安)의 석굴에 있는 통락사(通樂寺)에 머물렀는데 바로 위나라 황제가 지은 것이다. 항안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무주산(武周山) 골짜기에 위치하여 북면은 바위절벽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파내고 영암사(靈巖寺)라는 절을 세웠다. 감실(龕室)이 큰 것은 높이가 20여 장(丈)에 달하였고,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절벽 면에는 별도로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정교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고 감실마다 기이한 모습이어서 사람과 귀신을 놀라게 하였으며 즐비하게 이어진 것이 30여 리에 달하였다. 동쪽 첫머리의 승사(僧寺)에는 항상 천여 명의 스님이 있었다. 그 당시의 비석이 현재에도 남아 있으니 성급하게 진술한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태무황제(太武皇帝) 태평(太平) 진군(眞君) 7년에 사도(司徒) 최호(崔晧)가 간사하고 아첨을 잘해 황제가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를 숭상하도록 하여 그를 천사(天師)로 임명하고 더욱 노자(老子)를 존경하여 스님들을 죽이고 절과 탑들을 불사르고 파괴하였는데, 경인(庚寅)년에 이르러서는 태무(太武) 황제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자 비로소 깨닫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당시 백족 선사(白足禪師)라는 스님이 황제를 찾아와 깨우쳐 주었는데 황제는 마음으로 후회하고 최호를 죽여 없앴으니 이 일은 여러 전기에 열거되어 있다. 임진년이 되자 태무 황제가 죽고 아들 문성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곧 탑과 절을 세우고 경전을 찾아 모으게 하니 법이 허물어진 지 7년 만에 삼보(三寶)가 다시 흥하게 되었다. 담요(曇曜)는 앞서 불교가 능멸당하고 피폐해진 것을 개탄하였는데 지금 다시 회복된 것이 기뻐서 북대(北臺)의 석굴(石窟)에 여러 덕망 있는 스님들을 모아 천축(天竺)의 사문을 상대하여 『부법장전(付法藏傳)』, 『정토경(淨土經)』을 번역하여 후현(後賢)들에게 유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마음은 불법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담정(曇靖) 당시 또 담정이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처음 부처의 지혜를 얻었지만 구역(舊譯)의 여러 경전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인간세상에서 도를 권유함에 있어 기준하고 증빙할 만한 인연이 없게 되자 곧 『제위파리경(提謂波利經)』 2권을 내놓았으니 그의 마음은 모두가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말마디에 잘못된 인습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태산(泰山)은 한나라 말로 대악(大岳)이라고 한다. 이 산에서 음양이 교대되기 때문이다.” 대악이라는 이름은 위(魏)나라 때 나온 이름인데 한(漢)나라의 말이라 하였으니 시대를 가려내지 못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태산은 이쪽 말인데 이것을 대학이라고 번역하였으니, 두 가지 말이 서로 뒤바뀐 말이며 범어(梵語)와 위나라 말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그러한 예는 매우 많으며 구체적인 것은 경전의 글에서 곧 이끌어낼 수 있다. 옛 기록에는 따로 『제위경(提謂經)』 1권이 있는데 여러 다른 경과 어구(語句)가 같다. 다만 5방(方)과 5행(行)을 어울려 놓았으니, 이것은 돌을 금에 섞는 것과 같이 의문이 거짓을 이룰 따름이다. 이 두 스님은 모두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수(隨)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관양(關壤) 땅에서는 종종 민간에서도 오히려 『제위경』을 익혔는데 고을의 법으로 각기 가사와 발우[衣鉢]를 지니게 하고 한 달에 두 번 재(齋)를 열어 바른 율법의 거동을 본받아 서로 바꿔가며 견주어보고 검열해보면서 매우 경건한 집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032_0912_c_02L보리류지는 위나라 말로 도희(道希)이며, 북천축국(北天竺國)의 사람이다. 삼장을 두루 통달하였고 신기할 정도로 다라니[摠持]의 경지에 들어섰으며 뜻은 불교를 널리 퍼뜨리는데 두고 보고 들은 것을 널리 유통시켰다. 마침내는 길을 따라 밤에 먼 길을 가서 총령(蔥嶺) 부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위(魏)나라 영평(永平) 연간 초기에 동하(東夏) 지방에 와서 유람하였는데 선무(宣武) 황제는 명을 내려 맞이하여 위로하고 대접이 훌륭하고 화려하였다. 그를 영녕대사(永寧大寺)에 머물게 하고 네 가지 공양거리[四事]를 범승(梵僧)들에게 공급하면서 명을 내려 보리류지를 경전 번역의 원장(元匠)으로 삼았다. 그 절은 본래 효명(孝明) 황제의 희평(熙平) 원년에 영태후(靈太后) 호씨(胡氏)가 세운 것이며 궁성앞문의 남쪽, 황제가 다니는 길의 동쪽에 있었다. 절 안에는 9층으로 된 부도(浮屠)가 있었는데 나무를 묶어서 만든 것이었다. 높이가 90여 장(丈)이고 그 위에 또 황금 찰간(刹竿)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또 10장이며 땅에서 천 척(尺)이나 솟아나 대(臺)에서 백 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도 보였다. 처음으로 터를 닦는 날 황천(黃泉)까지 땅을 파내려가 금상(金像) 32구(軀)를 얻게 되자 태후는 아름답고 상서로운 징조이고 법을 받들고 믿으라는 징조라고 여겼다. 그래서 꾸며 만들었는데 그 기이한 것이 세상의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찰간의 밑둥에 금으로 된 보배병[寶甁]을 두었는데 용량은 25섬이나 되었고 이슬을 받는 금쟁반은 열한 겹으로 되었는데 쇠사슬로 반듯하게 서로 버티게 하였다. 쟁반과 사슬에는 모두 금탁(金鐸)이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돌항아리와 같았다. 9층 탑신의 모든 모서리에는 큰 탁(鐸)을 매달았는데 아래위에 모두 130개의 탁이 있었다. 그 탑의 사면은 아홉 칸이며 여섯 개의 창문과 세 개의 문은 모두 붉은 칠을 한 사립문이었고 여러 개의 금방울을 달아 늘어뜨렸는데 층마다 5천4백 개의 방울이 있었다. 또한 금탁에 설치된 고리는 장식이 정교하고 기묘한데 토목공사의 정교함을 다한 것으로서 기둥을 장식한 금탁의 고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다. 긴긴 밤에 바람이 불면 방울과 탁소리가 뒤섞여 울리는데 댕그랑하는 소리가 10여 리 밖에서도 들렸다. 북쪽에는 정전(正殿)이 있었는데 그 형상은 태극을 본떴고 그 안의 모든 불상에 금ㆍ옥ㆍ구슬로 수를 놓아 정교하고 기묘하게 한 것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승방(僧房)은 잇달아 있는데 천여 칸이 되었고 건물과 집들이 별처럼 펼쳐져 들쑥날쑥 사이마다 솟아 있었고 주홍빛과 자줏빛으로 조각을 장식하고 단청으로 이에 무늬를 놓았다. 향나무ㆍ잣나무ㆍ쥐똥나무ㆍ소나무와 신기한 풀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다. 절은 담장으로 빙 둘렀는데 모두 서까래와 기와로 위를 덮었다. 정남향으로 세 개의 문이 있었고 다락은 3중으로 세 개의 길로 통하였으며, 지면에서부터 2백여 척에 달하여 그 모습은 마치 하늘로 통하는 문과 같아 밝게 빛나고 화려하였다. 작은 문가에는 네 상의 역사와 네 상의 사자상을 벌려놓았는데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동ㆍ서의 두 문도 모두 이와 같았으나 다르다고 할 것은 오직 누각이 2중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북문의 통로는 단지 길만 두었을 뿐이었다. 그 네 개의 문 밖에는 느티나무를 심었고 맑은 물을 대주었는데 수도로 가는 길손들이 그 그늘에서 쉬어갔다. 길에는 흩날리는 먼지 하나 없었으며 피어오르는 구름의 혜택을 입지 않고도 맑은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니 어찌 세속의 모습이라 하겠는가.
상경(常景) 황제는 곧 중서사인(中書舍人) 상경에게 절의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상경은 하내(河內)의 사람으로서 민첩하고 학문에 널리 통달하여 그 이름이 나라 안에 알려졌다. 태화(太和) 19년에 고조(高祖)는 그를 발탁하여 수율박사(修律博士)로 임명하였다. 법조문을 간행 제정하여 영원히 통용될 규범으로 만들도록 황제의 명이 있게 되자 상경은 곧 고금의 역사를 헤아리고 검토하여 부류가 같은 것들을 조목별로 관통시켰으니 『위율(魏律)』 20편이 그것이다. 그는 중서사인(中書舍人), 황문시랑(黃門侍郞), 비서감(秘書監), 유주 자사(幽州刺史)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가난하고 검소하기가 마치 농가와 같았고 오직 있는 것은 수레에 가득 찰 정도의 경전과 역사책뿐이었다. 그가 저술한 문집(文集)은 백여 편이 있는데 급사중(給事中) 봉위백(封暐伯)이 서문을 쓴 것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절이 처음 완공되자 명황제와 태후가 함께 부도(浮屠)에 올라 궁성 안을 내려다보았는데,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하였고 아래로는 비구름이 떠돌고 위로는 하늘이 맑고 맑았다. 궁성안의 일들이 보이는 까닭에 사람들을 엄금하여 거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하(西夏)와 동화(東華)로부터 여러 나라를 유람하면서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탑묘(塔廟)는 염부제주(閻浮提州)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효창(孝昌) 2년에 큰 바람이 불어 집이 쓰러지고 나무가 뿌리채 뽑혔는데 찰간주변의 보배병이 바람에 떨어져 한 길 남짓 땅속에 들어박히자 황제가 또 장공인들에게 명하여 새 것을 다시 안치하였다. 영희(永熙) 3년 2월 하늘에서 벼락이 내렸기 때문에 황제는 능운대(凌雲臺)에 올라가서 불길을 바라보고 남양왕(南陽王) 보거(寶炬), 녹상서장(錄尙書長) 손치(孫稚)를 파견하여 우림군(羽林軍) 천 명을 거느리고 불을 끄게 하였다. 이때 우레가 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싸락눈과 눈이 번갈아 쏟아졌으며 날이 새면서 탑의 여덟 번째 층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자 두 명의 도인(道人)이 탑이 불타 재가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불길은 석 달이 넘도록 계속 타올랐고 땅에 묻힌 탑의 기둥은 한해가 지나도록 연기가 남아 있었다. 그해 5월 어떤 사람이 동래군(東來郡)에서 와서 말하였다. “부도(浮屠)가 바다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광명이 엄연하였다. 함께 본 사람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잠깐 사이에 구름과 안개가 어지럽게 일어나 그 소재지를 잃어버렸다.” 7월이 되자 평양왕(平陽王)이 시중(侍中) 곡사춘(斛斯春)의 도움을 받아 서쪽 장안(長安)으로 망명하였으며 10월이 되자 낙양 도읍지를 장업(漳鄴)으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보리류지(菩提流支)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처음으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였다. 선무(宣武) 황제는 글을 완성하도록 명하고 하루는 직접 마주하여 받아 쓴 다음 비로소 사문 승변(僧辯) 등에게 『십지경론』의 글을 끝마치도록 부탁하였다. 불법이 융성하고 뛰어난 인물들이 숲을 이루어 서로 따르고 전수하며 부지런한 것이 이러하였다.
이곽(李廓) 황제는 또 청신사(淸信士)인 이곽에게 명하여 『중경록(衆經錄)』을 편찬하였다. 이곽은 학문이 도교, 유교[玄素]에 통달하였고 조리있게 경론(經論)을 꿰뚫어 진실로 사표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기록에 이렇게 말하였다. “삼장법사(三藏法師) 보리류지가 낙양에서 업도에 오자 천하가 태평해졌다. 20여 년간에 무릇 내놓은 경전은 39부 127권에 달하였다. 곧 『불명경(佛名經)』ㆍ『능가경(楞伽經)』ㆍ『법집경(法集經)』ㆍ『심밀경(深密經)』 등의 경과 『승사유경(勝思惟經)』ㆍ『대보적경(大寶積經)』ㆍ『법화경(法華經)』ㆍ『열반경(涅槃經)』등에 관한 논(論)이 이것이다. 또한 승랑(僧郞), 도담(道湛) 그리고 시중(侍中)인 최광(催光) 등이 받아 썼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의 『내전록(內典錄)』에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이곽은 또 말하였다. “삼장법사 보리류지의 방안에는 범어로 된 경론(經論)이 만(萬) 아름은 족히 되며 새 글로 번역하여 받아 쓴 초고만도 한 칸 방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 지혜는 륵나(勒那) 스님의 다음이었지만, 신비한 깨달음과 총명하고 민첩한 것으로 방언(方言)까지 환히 알았고 겸하여 주술(呪術)까지 능하여 그와 대항하여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한번은 우물 입구에 앉았는데 목욕하는 물통은 비어 있었고 제자는 아직 오지 않아 물을 퍼줄 사람이 없었다. 보리류지는 곧 버들가지를 쥐고 잠깐 우물 속을 휘두르며 가만히 주문을 외웠는데 금방 시작하여 몇 번 만에 샘물이 위로 솟아올라 우물 난간과 가지런해졌다. 그러자 곧 발우로 물을 떠 세수를 하였다. 옆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보았지만 그 신통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모두가 대성인(大聖人)이라고 함께 찬탄하였다. 그러자 보리류지가 말하였다. ‘함부로 칭찬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술법이다. 외국에서는 모두가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익숙하지 못하여 성인이라고 할 뿐이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비밀로 붙이고 공개하지 않았다.”
륵나마제(勒那摩提) 이때 또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스님 륵나마제가 있었다. 륵나마제는 위(魏)나라 말로 보의(寶意)이다. 널리 본 것이 풍부하고 이법과 사법[理事]을 모두 통달하였고 1억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하였는데, 한 게송은 32개의 글자로 되어 있다. 그는 선법(禪法)에 더욱 밝았으며, 그의 뜻은 두루 다니며 교화하는 데 있었다. 정시(正始) 5년에 처음으로 낙양에 도착하여 『십지론(十地論)』과 『보적론(寶積論)』 등 대부(大部) 24권을 한역하였다.
불타선다(佛陀扇多) 또 북천축국(北天竺國)의 스님 불타선다가 있었다. 불타선다는 위나라말로 각정(覺定)이다. 정광(正光) 원년부터 원상(元象) 2년까지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와 업도(鄴都)의 금화사(金華寺) 에서 『금강상미경(金剛上味經)』 등 10부(部)의 경을 번역해냈다. 경을 번역하는 날에 보리류지가 낙양의 내전(內殿)에서 원본을 전해주었고 그 밖의 스님들이 참가하여 도와주었다. 그후 세 명의 대덕(大德)은 뜬소문에 치우쳐 각기 스승으로서 수행한 것을 전하면서 서로 물으면서 찾아보지 않았다. 황제는 불법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번성해지면서 간략하게 서술되고 왜곡되며 번거로워지자 세 곳에 지시하여 각기 번역이 끝나면 곧 서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고 그 사이에 빠지거나 서로 다른 것이 있으면 글의 뜻을 일치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다르게 묶은 것도 있어서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하나로 만들었으니 보창(寶唱) 등의 기록에 보인다. 처음 사문 보의(寶意)는 신통한 이해력이 남달리 뛰어나서 위나라 말을 단번에 이해하고 기억하여 잘 쓰이지 않는 사소한 말까지 두루 다 알았다. 황제는 매번 그를 시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게 하였는데 경을 펴서 해석하면 깨닫게 되고 심오한 뜻이 늘 개발되었다. 어느 날 한창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홀(笏)에다 스님의 이름을 새겨 손에 들고 찾아왔는데 모습이 높은 벼슬아치 같았다. 그가 말하였다. “천제(天帝)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법사를 초청하여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라 하십니다.” 그러자 보의가 말하였다. “지금 이곳의 법석(法席)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경문의 강의를 마친 다음에 마땅히 보내온 지시를 따르겠소. 그러나 법사에 필요한 것을 혼자서 다 해낼 수 없소. 도강(都講)은 향불을 사르고 유나(維那)는 범패(梵唄)를 부르니 모두 또한 갖추어져야 청해서 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소.” 사자(使者)는 곧 그가 청한 대로 강좌의 여러 스님들을 만나보았다. 이윽고 법사가 끝날 무렵 또 앞에 나타난 사자가 “천제의 명을 받들고 일부러 하늘에서 내려와서 맞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보의는 곧 웃음을 머금고 느긋한 얼굴로 대중에게 작별을 알리고는 갑자기 법좌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도강 등 다른 스님들도 동시에 운명하였다. 위나라의 경내에서 이것을 듣고 본 사람들치고 애석해하며 찬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장(法場) 당시에 또 사문 법장이 있었는데 낙양에서 『변의장자문경(辯意長者問經)』 1권을 번역하였다. 비록 전기나 기록에는 빠졌지만 이는 바른 글이니 『법상록(法上錄)』에 나와 있다.
반야류지(般若流支) 또 희평(熙平) 원년에 남천축국 바라내성(波羅柰城)에 성은 구담씨(瞿曇氏)이고 이름이 반야류지인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반야류지는 위나라 말로 지희(智希)이다. 희평 원년부터 흥화(興和) 말년까지 업성(鄴城)에서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ㆍ『성선주의천자소문경(聖善住意天子所問經)』ㆍ『회쟁론(廻諍論)』ㆍ『유식론(唯識論)』 등 모두 14부 85권의 경론을 번역하였으며 사문인 담림(曇林)과 승방(僧昉) 등이 받아 썼다. 당시 사문 보리류지와 반야류지가 있어 전후하여 경을 번역해 내놓았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는 전수하여 베껴 쓰면서 경솔하게 생략해서 각기 윗글자를 없애고 다만 류지(流支)라고만 말하고 있어 어느 류지인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여러 기록에서는 번역목록이 뒤섞여 상세하게 역자를 결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양현지(楊衒之)
또 그 성의 군수(郡守) 양현지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5권을 편찬하였는데 서문에서 대략 이렇게 말하였다. “삼황오제[三墳五典]의 설과 제자백가[九流百氏]의 말은 모두 그 이치가 인간의 테두리 안에 있고 그 뜻이 하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어 1승(乘)과 2제(諦)의 말, 여섯 가지 신통력[六通]과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달한 지혜[三達]의 뜻과 같은 것을 서역에는 갖추어 놓은 것이 상세하지만 동쪽 땅에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요즘 꿈에 감응되고 보름달에서 광명이 비치며 양문(陽門)에 백호[毫眉]의 모습을 장식하고 야대(夜臺)에 감색(紺色)의 머리카락을 지닌 불상의 모습을 그리는 일과 같은 것은 그 이후에 분주히 다투어서 그 풍이 마침내 확대되고 지어 진(晉)나라 왕실의 영가사(永嘉寺)의 경우 그때 나라 안에 사찰은 42곳밖에 없었다. 위[皇魏]가 왕권을 이어받게 되자 낙양과 숭산(崇山) 등 수도에 있는 절이 천(千)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모두가 제왕과 선비, 서민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고 경영한 결과이다. 이름난 스님의 기이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어지럽게 일어나니 지금 상서롭고 기이한 것들을 채집하여 구체적으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글은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당시 서위(西魏)의 문제(文帝) 대통(大統) 연간에 승상(丞相)인 우문흑태(宇文黑泰)가 불교를 부흥시키고 대승(大乘)의 교리를 숭상하여 비록 나라의 모든 일을 도맡아보는 중책을 지니고 있었지만 항상 삼보(三寶)를 찬양하고 집안에서는 항상 백 명의 법사들에게 공양드리며 경론(經論)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대승을 강의하게 하였다.
담현(曇顯) 또 사문 담현 등을 시켜 대승의 경전에 의거하여 『보살장중경요(菩薩藏衆經要)』와 『백이십법문(百二十法門)』을 편찬하고 불성(佛性)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융문(融門)을 끝마칠 때까지 매일 강론을 열었다. 즉 저술한 것을 발표하여 선대(先代)의 옛 규례를 대를 이으면서 부처님께서 펴신 5시(時)의 가르침의 자취가 지금까지 널리 유행되고 있으니 향불을 피우고 범패를 울리며 예배하고 법문을 강론하는 것도 모두 그 법을 이어받고 있다. 비록 산동(山東) 지방과 강남 지방을 학문의 바다라고 하며 행동규범에 있어 그곳을 표준으로 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 주(周)나라 문제(文帝) 2년에 파두마국(波頭摩國)의 율사(律師) 양나발타라가 있었는데 주나라 말로 지현(智賢)이다. 그는 야사굴다(耶舍崛多) 등과 함께 이른바 성명[聲], 의방명[醫], 기교명[工術] 그리고 부작[符]과 인장[印] 등의 『오명론(五明論)』을 번역하였는데, 모두 사문 지선(智僊)이 받아 썼다.
달마류지(達摩流支) 건무(建武) 황제의 천화(天和) 연간에 마륵국(摩勒國)의 사문 달마류지가 있었는데 주나라 말로 법희(法希)이다.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대승상(大丞相) 진양공(晉陽公) 우문호(宇文護)를 위하여 바라문(婆羅門)의 천문(天文) 20권을 번역하였다.
사나야사(闍那耶舍) 또 마가타국(摩伽陀國)의 선사 사나야사는 주나라 말로 장칭(藏稱)인데 그를 시켜 그의 제자 사나굴다(闍那崛多) 등과 함께 장안(長安)의 옛 구역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정의천자문경(定意天子問經)』 6부를 번역하게 하였다. 사문 원명(圓明), 도변(道辯)과 성양공(城陽公), 소길(蕭吉) 등이 받아 썼다.
032_0915_a_02L구나라타는 진(陳)나라 말로 친의(親依)이다. 혹은 바라말타(波羅末陀)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진제(眞諦)이다. 모두가 범어 이름이다. 본래 서천축(西天竺) 우선니국(優禪尼國)의 사람이다. 모습과 행동이 맑고 밝았으며 기품이 청정하고 엄숙하였으며 풍격[風神]이 명랑하고 뛰어났으며 유연하고 스스로 세속과 멀리하여 여러 장경(藏經)의 자세한 부분까지 가슴 속에 넣어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밖에 예술적 재능도 기이하였는데 천성적으로 뛰어나게 능숙한 것이었다. 비록 불교 이론을 따라 융합하였지만 도통한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멀리 어려운 난관을 헤치면서 평탄하고 험한 길을 가리는 일이 없었으며 여러 나라를 지나고 유람하면서 임기웅변으로 견문을 넓혔다. 양무제(梁武帝)는 덕을 사방에 베풀고 성대하게 삼보(三寶)를 번성하게 하고 제창한 임금이다. 대동(大同) 연간의 지시가 있은 직후에 장범(張氾) 등은 부남(扶南)국에서 보내온 사신들이 나라로 돌아갈 때 이름난 대덕과 삼장법사, 대승의 여러 논(論)과 『잡화경(雜華經)』 등을 청하였다. 당시 진제(眞諦)는 성현의 수행과 교화, 예의범절로 널리 알려졌는데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이익되게 하는 대덕 스님을 물색하자 그 나라에서는 곧 진제를 손꼽으면서 그와 함께 경론(經論)을 보내서 공손하게 황제의 뜻에 복종하였다. 진제 스님은 이미 평소에 마음속에 쌓아온 것이 있어 기꺼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대동(大同) 12년 8월 15일 남해에 도달하였는데 연도를 지나면서 2년을 지체하여 태청(太淸) 2년 윤(閏) 8월에 비로소 수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무제는 얼굴을 마주 보며 머리를 땅에 대어 절을 하고 보운전(寶雲殿)에서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진제는 경교(經敎)를 전수하여 번역하면서 진(秦)나라 시대의 번역을 부러워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글을 내놓으면서 하루를 넘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도가 쇠퇴하던 양나라 말년에 오랑캐 갈족(羯族)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고 법이 이때 붕괴되면서 저술한 것의 결과를 맺지 못하고 마침내 걸어서 동쪽 땅에 들어갔다. 또 부춘산(富春山), 영륙원철(令陸元哲)을 찾아가 처음으로 지름길에 들어서는 물음을 제기하고 곧 전역(傳譯)에 몰두하여 머리 좋고 뛰어난 사문 보경(寶瓊) 등 20여 명을 초빙하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번역하였다. 마침내 5권을 번역하였지만 나라의 난리가 가라앉지 않아 측근 사람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듣다가 천보(天保) 3년에 이르러 후경(候景)의 초청으로 돌아와 대(臺)에 있으면서 공양을 받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전쟁과 흉년이 연이어 일어나 불법은 거의 무너졌다. 때마침 원제(元帝)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성왕의 뒤를 이어 오랑캐를 평정하자 마침내 금릉(金陵)의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며 원(願) 선사 등 20여 명과 함께 『금광명경(金光明經)』을 번역하고 3년 2월에 예장(豫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오(新吳)의 시흥(始興)으로 갔고, 그 뒤 소태보(蕭太保)를 따라 대유령(大庾嶺)을 넘어 남강(南康)에 이르렀는데 모두 가는 곳마다 번역에 종사하였으나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의탁할 곳이 없었다. 진(陳)나라 무제(武帝)의 영정(永定) 2년 7월에 다시 예장(豫章)으로 돌아왔다. 또한 임천(臨川)과 진안(晋安) 등 여러 고을에도 머물렀다. 진제는 비록 경론을 전하기는 하였으나 도가 이지러지고 실상을 떠나 본뜻을 펴지 못하였다. 다시 기양(機壤) 땅을 바라보고 마침내 배를 띄워 능가수국(楞伽修國)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도인, 속인들이 경건하게 요청하며 결사하여 만류하니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남월(南越) 땅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 이전 양나라의 옛 도반들과 번역한 것을 다시 뒤적거리며 글 뜻이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을 모두 다스려서 본보기를 만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치가 통하였다. 문제(文帝) 천가(天嘉) 4년에 양도(楊都)의 건원사(建元寺) 사문인 승종(僧宗), 법준(法准), 승인(僧忍) 율사 등은 모두 건업(建業)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는데 새로운 가르침을 들으려고 멀리 강남에까지 찾아와서 직접 문안을 드렸다. 진제는 그들이 찾아온 뜻을 알고 기뻐하며 곧 『섭대승론(攝大僧論)』 등의 논장(論藏)을 번역하였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2년 동안 글의 종지(宗旨)를 해석하였다. 그리고 떠돌아다니며 몸을 의탁하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데는 마음이 없었다. 또 작은 배를 타고 양안군(梁安郡)에 이르러 다시 큰 배를 장만하여 서쪽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도(學徒)들이 뒤쫓아 와서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태수(太守)인 왕방사(王方奢)가 대중의 심정을 말씀드리고 거듭 요청하였고 진제도 또한 인정에 따라 임시로 바닷가에 머물기는 하였지만 여행할 행장을 가다듬을 기회를 엿보면서 아직은 그곳에 안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3년 9월에 양안(梁安)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으나 업풍(業風)인지 천명[賦命]인지 표류하여 광주(廣州)로 되돌아와서 12월 중에 남해안에 상륙하였다. 광주 자사(刺史) 구양목(歐陽穆)이 스님을 돌보며 초청하여 제지사(制旨寺)에 머무르도록 하면서 새로운 경을 번역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진제는 이 업의 인연을 돌이켜보고 서쪽으로 돌아갈 데 대하여 조처하는 것이 없자 마침내 사문 혜개(慧愷) 등을 상대로 『광의법문경(廣義法門經)』과 『유식론(唯識論)』 등을 번역하였다. 그후 구양목이 죽고 세자(世子) 흘(紇)이 거듭 시주(施主)가 되어 경론을 퍼져나가게 하니 시운은 다시 열렸으나 그의 그윽한 마음을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하였다. 한번은 별도의 장소에 살았는데 사방이 단절된 섬이었다. 흘(紇)이 가끔 그곳에 갔지만 산이 높고 험하며 파도가 치솟아 감히 그곳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때 진제는 곧 방석을 펴고 물위에 가부좌를 하고 그 가운데 앉았는데 마치 배를 타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파도에 떠서 언덕기슭에 도달하였고 언덕에 올라 흘을 접대하였지만 그의 방석은 물에 젖지 않아 평상시처럼 펴놓았다. 어떤 때는 연잎을 물 위에 띄우고 거기에 올라 건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묘하고 기이한 일은 그 예가 매우 많았다. 광태(光太) 2년 6월에 진제는 세상의 부잡한 일을 싫어하여 노구를 버리고자 하였으니 아직 사리가 있고 정신이 바를 때 일찌감치 훌륭한 땅에 태어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남해(南海)의 북산(北山)에 들어가서는 장차 목숨을 버리려 하였다. 당시 지개(智愷)는 한창 『구사론(俱舍論)』을 강론하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도인, 속인들도 분주하게 움직여가며 산천에 줄을 이어 계속되었다. 자사(刺史)도 사람을 파견하여 동정을 살피고 호위하며 사고를 방지하였고 몸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곳에 사흘 동안 머무르자 비로소 본래의 생각을 굽혔다. 그래서 맞이하고 돌아와서 왕원사(王園寺)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이때 승종(僧宗)과 지개(智愷) 등 여러 스님들은 그를 맞이하여 건업(建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때마침 건업에서는 양련(楊輦)이 큰 신망을 얻고 있었는데 일시의 영달(榮達)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 곧 나라에 상소를 올려 “영남에서 번역한 여러 부의 경전들은 대부분이 무진유식(無塵唯識)을 밝힌 것으로 그의 말은 치술(治術)에 어긋나며 나라의 풍습을 가리고 중국에 속하지 않는 것이니 그를 먼 황무지로 유배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황제는 그렇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남해에서 나온 새 글이 진(陳)나라 때에는 숨겨져 있었다. 태건(太建) 원년에 병이 들어 얼마 후에 비결을 남겼는데 엄정하게 인과(因果)를 밝게 명시하여 글로 전한 것이 여러 장이며 그 글을 제자인 지휴(智休)에게 부탁하고 1월 11일 오시(午時)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다음날 조정(潮亭)에서 다비(茶毘)를 하고 탑을 세웠다. 13일에 승종(僧宗)과 법준(法准) 등이 각기 경론을 가지고 광산(匡山)으로 되돌아갔다. 진제 법사가 동하(東夏)에 온 이후에 비록 광범위하게 여러 경론(經論)을 내놓았으나 『섭론(攝論)』에 치우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교지(敎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가 번역한 책을 통독(通讀)하게 되면 피차가 서로 계발되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뚜렷하게 보완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가는 곳마다 번역하여 전수하고 직접 주석을 달아 해석하면서 그 뛰어난 모습에 의지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의 해석은 모두 승종이 진술한 것인데 직접 본래의 스승을 마주하여 거듭 참뜻을 풀이하였으니 증감되거나 혹은 달리되었지만 대의(大義)에는 변함이 없었다. 승종은 별도로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진제가 양나라에 갔을 때는 국상을 당하는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감응이 마르고 시운이 다하여 불도를 이룩하려는 사람이 적었지만 사방에 떠돌아다니면서 교화를 넓히고 가는 곳마다 행실이 성실했다. 심지어 책들에 대해서도 번역한 사람과 시대별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지금 2대를 걸쳐 공통적으로 헤아린 것을 종합해 보면 양무제(梁武帝)의 말년부터 시작하여 진(陳)의 선제(宣帝)가 즉위할 때까지 무릇 23년 동안 그가 내놓은 경론을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64부로 도합 278권인데, 여기에 약간의 수식을 첨부한 것이 수(隨)ㆍ당(唐) 시대에 성행하여 나타났다. 조비(曹毘)의 『별력(別歷)』과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의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이밖에도 번역하지 않은 범본(梵本)의 글이 있는데 모두 다라수(多羅樹)나뭇잎으로서 모두 240갑(甲)이 있다. 만약 이것을 진(陳)나라 종이에 옮겨 번역하게 되면 2만여 권에 달할 것이다. 지금 번역이 끝난 것을 보면 고작 몇 갑(甲)의 글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광주(廣州)의 제지사(制旨寺)와 왕원사(王園寺)에 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법보(法寶)는 넓고 크며 그것이 바로 중천축국(中天竺國)에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분량은 자질구레하고 미세한 것인데 정성껏 동하(東夏) 땅에 귀착하였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것을 증명하는가? 번역되어 소장된 경전을 보면 줄잡아 3천 권은 되는데 생겨나면 곧 버려지고 전부를 익히고 배우는 사람은 드무니 이 점을 가지고 그 실정을 헤아려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처음 진제가 『섭론(攝論)』을 전도하자 승종, 지개가 마음으로 귀의하여 교(敎)의 근원을 끝까지 하나로 묶고 제시된 내용의 취지를 가려서 표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지 오래되자 마음이 트여 서로 도를 이어받게 되었다. 또 진제는 직접 면대하여 내용을 천양(闡揚)하면서도 인정과 도리[情理]에 굽어드는 것이 없었다.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홑겹으로 만든 옷을 입고 추위를 참으며 밤을 새우니 문인들은 옆자리에 있었고 지개 등은 밤새도록 고요히 서서 받들어 모시고 물어보며 오래도록 이야기하면서 정의를 나누었는데 때로는 잠에 들기도 하였다. 이때 지개는 은밀히 옷으로 그를 덮어주었는데 진제는 가만히 이것을 느껴 알고서 곧 옷을 끌어내 땅에 버렸다. 그의 절도가 있고 검소하고 만족함을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지개는 이전처럼 받들어 모셨고 시일이 오래될수록 더욱 친밀해졌다. 진제는 훗날 문득 한숨 쉬고 분개하면서 불쑥 말한 적이 세 번 있었다. 지개가 그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에 정성을 다하면서 진실로 전수하는 일을 돕고 참여하지만 한스러운 것은 불법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여기에 온 뜻에 저촉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때 지개가 이 말을 들었는데 목 메인 듯한 말소리였으며 오래도록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왔다. 지개가 꿇어앉아 말하였다. “대법이 세상을 벗어나 멀리 중국 땅에 통하였습니다. 중생들이 감응하지 않는다 하여 그만두고 묻어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때 진제는 손으로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방향에 큰 나라가 있는데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우리들이 죽은 뒤에 마땅히 성행하여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번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큰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의 말은 시대를 사이에 두고 곧 증명되었으니 지금 승통(僧統)은 종지를 부양(敷揚)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통한 작용이 다르면 허망하게 다른 집착이 생긴다고 하는데 유식(唯識)에 관해서 그 식(識)을 알지 못하니 탄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월파수나(月婆首那) 당시에 중천축(中天竺)의 우선니국(優禪尼國) 왕자 월파수나가 있었는데 진나라 말로 고공(高空)이다. 그는 동위(東魏) 땅을 유람하며 교화하였는데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성품이 준수하고 명랑하여 그윽이 미세한 깊은 뜻을 몸으로 깨달았다. 오직 불경을 배워 뜻과 이치에 더욱 정통하고 음운(音韻)을 환하게 깨달았으며 아울러 방언(方言)도 잘 알았다. 그는 『승가타경(僧伽咤經)』 등 3부 7권을 번역하였다. 위(魏)나라 원상(元象) 연간에 업성(鄴城)의 사도(司徒) 공손등(公孫騰)의 집에서 번역해내고 사문 승방(僧昉)이 받아 썼다. 당시는 제(齊)나라가 위(魏)나라의 정권을 물려받은 때였으니 외국의 손님이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청했겠는가. 그리하여 할 수 없어 널리 떠돌아다니면서 사방을 구경하다가 금릉(金陵) 땅의 법이 흥성하여 그 도(道)의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듣고 양무제(梁武帝)의 대동(大同) 연간에 제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건너갔다. 그 나라에 이르러 머무르게 되면서 『대승정왕경(大乘頂王經)』 한 부를 번역하였다. 그후 칙명(勅命)으로 그곳에서 외국으로 가고 오는 사신들을 총감독하게 되었다.
구나발타(求那跋陀) 태청 2년에 홀연히 우전국(于闐國) 스님 구나발타를 만났다. 구나발타는 진나라 말로 덕현(德賢)이다. 그는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의 범본(梵本)을 가지고 왔다. 월파수나가 줄 것을 간절히 청하면서 널리 퍼뜨리고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니 구나발타는 그 아름다운 뜻을 가상히 여겨 너그럽게 그에게 주었다. 월파수나는 그것을 얻어 간직하고는 만나기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후경(候景)이 난(亂)을 일으켜 번역하여 전수할 겨를이 없었다. 월파수나는 이것을 등에 지고 동서로 떠돌아다니며 외워 가지고 공양드리다가 남진(南陳)의 천가(天嘉) 을유(乙酉)년에야 비로소 강주(江州)의 흥업사(興業寺)에서 이것을 번역하였고 사문 지흔(智昕)이 진나라 글로 받아 썼다. 이 번역은 모두 60일에 걸쳐서 내용을 검토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대조하고 교열하는 것을 모두 마쳤다. 강주(江州) 자사 황법구(黃法▼(奭/毛))가 시주가 되고 승정(僧正) 석혜공(釋惠恭) 등이 감독을 맡았으며 경전이 갖추어진 뒤에 서문을 썼다. 월파수나가 그후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수보리(須菩提) 당시에 또 부남국(扶南國)의 스님 수보리(須菩提)가 있었다. 수보리는 진나라 말로 선길(善吉)이다. 그는 양도(楊都)의 성안에 있던 지경사(至敬寺)에서 진(陳)나라 임금을 위하여 『대승보운경(大乘寶雲經)』 8권을 번역하였는데 양나라 때 만타라(曼陀羅)가 내놓은 7권의 책과 같으며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두 수(隨)나라 때의 『삼보록(三寶錄)』에 보인다.
032_0917_a_02L법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학문이 불교의 종지에 통달하여 명성이 회해(淮海) 지방에 걸쳐 널리 알려졌으며 양도의 큰 절에 머물렀다. 혜개(慧愷)ㆍ승종(僧宗)ㆍ법인(法忍) 등과 함께 명성이 양(梁)나라 때 알려졌는데 모두 의로운 것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종장(宗匠)들을 능가하였다. 당시 천축(天竺)국의 사문 진제(眞諦)가 있었는데 길을 따라 외롭게 유람하며 멀리 동쪽 지방을 교화하였다. 그러다가 오랑캐의 난리로 천자의 위엄이 떨어지게 되자 떠돌아다니며 10여 년간 번역한 것이 전혀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영남 땅을 떠나다가 광주(廣州) 자사 구양위(歐陽頠)의 간곡한 만류로 하여 불교를 전수하려고 하면서 뜻있는 반려자를 찾아 새로운 글을 읽게 하려 하였다. 법태(法泰)는 마침내 승종(僧宗), 지개(智愷) 등과 함께 어려운 고통을 무릅쓰고 멀리 진제 법사를 찾아가서 광주의 제지사(制旨寺)에서 글의 뜻을 받아 썼는데 20년 동안 그의 손에서 나온 책은 50여 부에 달하였고 아울러 의기(義記)도 저술하였으니 모두가 이 땅에는 없는 것이었다. 법태는 비록 교법의 뜻을 해박하게 통달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행에만 치중하여 계율에 관련되는 일에 이르러서도 그 성품에 어기거나 넘어서는 일이 없었다. 진제는 또 법태와 『명료론(明了論)』을 번역하고 계율의 스물두 가지 대의(大義)를 해석하였으며, 아울러 소(疏) 5권은 오른쪽 자리에 놓아두고 그것을 준수하며 받들고 행하도록 하였다. 남진의 태건 3년에 이르러 법태는 건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 번역한 경론도 가지고 왔으며 그 취지를 처음으로 펴놓아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여러 부(部) 가운데는 『섭대승론(攝大乘論)』과 『구사론(俱舍論)』도 있었는데 글의 표현이 해박하고 풍부하며 이론과 뜻이 융합되고 현묘하며 생각이 일반적인 실정을 초월하여 거기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이보다 앞서 양무제가 『대지도론[大論]』을 으뜸으로 숭상하고 아울러 『성실론(成實論)』을 좋아하자 학인들이 그 명성을 우러르며 풍조에 따라 휩쓸려 귀의하였다. 한편 남진(南陳)의 무제(武帝)가 좋아한 것은 전조(前朝)와 달라 널리 대품경(大品經)을 퍼뜨렸고 3론(論)에 더욱 두터운 정을 담았다. 그런 까닭에 법태가 비록 여러 번 법문으로 베풀었으나 도인이든 속인이든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고 법좌(法座)의 뒤를 이을 사람이 끊어지고 적막해져 알려진 것이 없게 되었다. 때마침 팽성(彭城)의 사문 정숭(靜嵩)이라는 사람이 난을 피해 금릉 땅에 오게 되었는데 그의 학문적 명성은 일찍부터 천년 뒤에까지 뛰어날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가 이 바른 이론을 희망하여 낮에는 늘 강론을 하고 밤에는 새로운 종지(宗旨)를 청하여 그럭저럭 덧없이 흘러 마침내 1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법태는 현묘한 법문을 드러내어 진속을 밝히고 넓히며 의심나는 내용을 살펴서 늘 극치의 경지에 이르러 모두 능히 그 취지에 맞게 남김없이 두루 해석하였다. 이 일은 『정숭전(靜嵩傳)』에 올라 있다. 법태는 또 널리 진제 스님에게 물어서 그 업을 정승에게 전하였는데 그는 “나를 아는 사람은 드문데 뜬소문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지개(智愷) 지개의 속성(俗性)은 조씨(曹氏)이다. 그는 양도사(楊都寺)에 머물렀는데 처음에는 법태 등과 다르게 출발하여 함께 영남 땅으로 가서 진제 스님을 받들어 모셨다. 지개는 평소에 도풍(道風)을 쌓았고 문장이 아름답고 풍부하여 곧 진제 스님과 마주 앉아 『섭론(攝論)』을 번역하였는데 직접 그 글을 받아 썼고 7달 안에 글과 주소를 모두 끝마쳤으며 도합 25권이다. 후에 또 마주 앉아 『구사론(俱舍論)』을 번역하여 열 달 만에 끝마쳤는데 원문과 주소[疏]를 합하여 모두 83권이다. 진제 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대를 만났더라면 경론을 모아 앞서 번역한 책을 편찬할 때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었다. 지금 두 논(論)을 번역하여 그 문장과 논리가 원만히 갖추어졌으니 나는 여한이 없다.” 지개는 후에 진제를 초청하여 광주(廣州)의 현명사(顯明寺)로 돌아와 본래의 승방 안에서 머무르면서 거듭 『구사론』을 강의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겨우 한 차례 강의를 마치게 되었다. 남진의 광대(光大) 연간에 이르러 승종(僧宗)ㆍ법준(法准)ㆍ혜인(慧忍) 등이 령을 넘어서까지 진제를 찾아와 배워주기를 바랐는데 아직 『섭론』의 강의를 듣지 못한 것으로 하여 다시 그들을 위해 강의하게 되었다. 4월 초에 시작하여 12월 8일에 비로소 한 차례의 강의를 끝마치게 되었다. 다음해에 승종 등은 또 지개에게 청하여 지혜사(智慧寺)에서 『구사론』을 강의하였다. 이때는 이름 있는 학사 70여 명이 함께 공경히 물었다. 강의가 업품(業品)의 소(疏) 제9권에 이르렀을 때 글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8월 20일에 병이 들었다. 스스로가 고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헤아려보고 종이를 찾아 시를 지었다.
천년 세월에도 근본을 다하기 어렵고 3세의 진리는 기울기 쉽네. 부싯돌 불은 영원한 불꽃 아니요 번갯불 또한 오래도록 밝은 것이 아니라네.
남긴 글만 공연히 서랍에 가득하여 부질없이 후생들을 매혹시켰네. 저승길 때맞추어 그윽이 흐느끼고 추운 언덕 처량하게 맑은 곳으로 향하네.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목숨 마치면 오직 한밤의 소나무소리만 있으리.
그리고는 붓을 놓고 여러 이름난 대덕 스님들과 손을 잡고 이별의 말을 마치고 단정하게 앉아 조용히 세상을 마치니 나이 51세였으며 곧 광대(光大) 2년이었다. 광주(廣州) 서음사(西陰寺)의 남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때 남아 있는 논문은 진제 스님이 계속 강의하였는데 「혹품(惑品)」 제3권에 이르러 건강에 이상이 생겨 곧 법사(法事)를 폐지하였다. 다음해 이른 봄에 법사(法師)도 역시 세상을 떠났다.
조비(曹毘) 진제 스님에게는 보살계를 받은 제자인 조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개의 조카[叔子]이다. 그는 마음이 깊고 명석하여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려서 손을 잡고 남쪽 땅에 이르러 『섭론(攝論)』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묻고 전승하였는데 모든 저술에 공적이 컸다. 태건(太建) 3년에 조비는 건흥사(建興寺)의 승정(僧正)인 명용(明勇) 법사를 청하여 계속해서 『섭론』을 강의하였는데 학문으로 명성을 이룬 스님이 50여 명이었다. 말년에는 강도(江都)에 머물면서 이전에 한 것을 종합해서 익히고 늘 백탑사(白塔寺) 등에서 여러 논(論)의 강의를 열었다. 갓 쓰고 나막신 신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현명한 선비와 같은 옷차림으로 법좌에 올라 말을 하였으며 늘 깊은 경지의 강의를 하였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모두 이름난 손님들이었다. 당시 선정(禪定)ㆍ승영(僧榮)ㆍ일엄(日嚴)ㆍ법간(法侃) 등은 모두 그의 학문의 도움을 받았다.
지부(智敷) 당시에 순주(循州)의 평등사(平等寺) 사문 지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 연조사(延祚寺)의 도(道), 연(緣) 등 두 법사에게서 『성실론(成實論)』 강의를 듣고 함께 북쪽 땅의 사문 법명(法明)에게 가서 『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의 강의를 들었다. 또 희(希)와 견(堅) 두 대덕에게 가서 『비바사론』과 『중론』의 강의를 듣고 그 정수를 관통하여 종지(宗旨)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함에 있어서는 본사(本師)께서 임종(臨終)하실 때 “말은 부잡(浮雜)한 것이 없고 뜻은 밝고 환하게 알아야 한다”고 한 말의 경지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것에서 손을 뗐다. 나머지 다른 학문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섭론』을 번역할 때에 마침 광주(廣州) 자사 안남장군(安南將軍) 양산공(陽山公) 위(頠)의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서 안거(安居)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번역에만 전념할 수 없어서 후에 『구사론』을 번역하고서야 비로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도니(道尼) 지개가 『구사론』을 강의하게 되자 지부(智敷)는 도니 등 20여 명과 함께 주소를 종합하고서 법당에서 받아 썼다. 지개가 죽자 진제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였다. 그리고 법준(法准)의 처소에 와서 도니, 향(響), 지부(智敷) 등 열두 명을 거느리고 함께 향화(香火)를 전하면서 『섭론』과 『구사론』 두 논을 널리 퍼뜨려 단절되지 않도록 서원하니 모두 그 뜻을 받들어 우러러 실수함이 없도록 하였다. 진제 법사가 죽은 뒤에 법의 도반들이 상심하고 흩어져 종문(宗門)을 이어갈 사람이 장차 끊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태건 9년에 지부가 그 뒤를 이어서 그의 법을 널리 퍼뜨렸는데 유사성을 띤 것이 매우 많았으며 진제의 법석에서 함께 법문을 듣던 사람 가운데 그보다 높은 공덕을 쌓은 사람은 없었다. 태건 11년 2월에 발마리(跋摩利) 삼장의 제자인 혜가(慧哿)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 중원(中原)에 머무르다가 주(周)의 무왕(武王)이 불법을 없애버리게 되자 그것을 피하여 진(陳)으로 돌아갔다. 말년에는 사신(使臣) 유장(劉璋)을 따라 남해에 이르러 『열반론(涅槃論)』을 얻었는데 지부는 일찍이 이 경을 강의한 일이 있었기에 그가 본래 익힌 경임을 알고 기뻐하면서 간청하여 요구하는 것에 복종하여 곧 설교를 하게 되었으나 『서분(序分)』과 『종성분(種性分)』 등 앞부분 13장의 현묘한 이치를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후 지부(智敷)는 또 기(璣) 법사와 더불어 예장(豫章)의 학령산(鶴嶺山)으로 가서 혜가 스님을 따랐다. 이로 인하여 다시 그들을 위해 『열반론』의 세 번째 부분을 설교하여 10해(海)와 10도(道)를 모두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머지 글로 나아가게 되자 혜가가 병에 걸려 전수하여 가르치는 일을 맡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지부 스님을 도읍지로 내려 보내 해조(海潮) 법사를 찾아 곧 논의 취지를 끝까지 연구하게 하였다. 태건 14년에 지부는 건업(建業)에 이르렀으나 찾던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마침내 서현사(栖玄寺)의 효(曉) 선사를 만나서 그가 담림(曇林)이 해설한 『열반소석경(녈槃疏釋經)』의 뒷부분을 얻게 되었는데 그 책은 글의 논의를 함께 설명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충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옛 절로 돌아와서 항상 새로운 글로 된 13장의 내용을 강의하였는데 스무 차례에 달하였다. 개황(開皇) 12년에 왕중선(王仲宣)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을 경내와 지부 스님의 절과 승방을 불태워 경문과 주소(註疏)가 모두 타버렸다. 그 해에 지부 스님에게 광주(廣州)와 순주(循州)의 스님들의 소임을 맡아보는 벼슬이 내려져 5년 동안 법사를 폐지하게 되었다. 그후 승직의 임기를 마치고 비로소 본주(本州)의 도장사(道場寺)에서 『섭론』에 편중하여 강의한 것이 10여 차례나 되었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 통달하고 해득한 사람이 25명에 달하였으며 기(璣)ㆍ산(山)ㆍ감(瞰) 등의 스님은 모두가 영도자의 자리를 맡을 만하였다. 인수(仁壽) 원년에 이르러 병에 걸려 본사에서 입적하였다. 지부는 진제가 번역한 경을 편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교정하였고 아울러 권부(卷部)의 시대와 사람, 그 당시의 세상사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널리 성과를 거둔 공적이 있었다. 도니(道尼)는 본래 살던 구강(九江)에 머무르면서 종지의 참뜻을 탐구하며 『섭론(攝論)』을 일으키고 강의하여 수도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개황(開皇) 10년에 나라에서 지시가 내려 뒤따라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보좌하면서 깨우치고 불법을 널리 퍼뜨린 것이 많았다. 이때부터 남쪽 나라 안에 다시 강주(講主)가 없었다. 비록 법좌를 펴고 설법한다 하더라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