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2_0992_a_01L
속고승전 제8권
032_0992_a_01L續高僧傳卷第八


대당 석도선 지음
이창섭 번역
032_0992_a_02L大唐西明寺沙門釋道宣撰


2. 의해편 ④ [正記 14人, 附見 2人]
032_0992_a_03L義解篇四 正紀十四附見二

1) 제(齊)나라 업동(鄴東) 대각사(大覺寺) 석승범전(釋僧範傳)
2) 제나라 업중(鄴中) 석담준전(釋曇遵傳)
3) 제나라 업하(鄴下) 총지사(總持寺) 석혜순전(釋慧順傳)
4) 제나라 업서(鄴西) 보산사(寶山寺) 석도빙전(釋道憑傳)
5) 제나라 병주(幷州) 승통(僧統) 석령순전(釋靈詢傳)
6) 제나라 대통(大統) 합수사(合水寺) 석법상전(釋法上傳)법존(法存)
7) 제나라 업하(鄴下) 정국사(定國寺) 석도신전(釋道愼傳)
8) 주(周)나라 포주(蒲州) 인수사(仁壽寺) 석승묘전(釋僧妙傳)
9) 주나라 장안(長安) 숭화사(崇華寺) 석혜선전(釋慧善傳)
10) 주나라 동주(潼州) 광흥사(光興寺) 석보단전(釋寶彖傳)
11) 제나라 낙주(洛州) 사문 석담연전(釋曇衍傳)
12) 진(陳)나라 양도(楊都) 장엄사(莊嚴寺) 석혜영전(釋慧榮傳)
13) 수(隋)나라 수도 연흥사(延興寺) 석담연전(釋曇延傳)
14) 수나라 수도 정영사(淨影寺) 석혜원전(釋慧遠傳)승맹(僧孟)
032_0992_a_05L齊鄴東大覺寺釋僧範傳一
齊鄴中釋曇遵傳二
齊鄴下摠持寺釋慧順傳三
齊鄴西寶山寺釋道憑傳四
齊幷州僧統釋靈詢傳五
齊大統合水寺釋法上傳六法存
齊鄴下定國寺釋道愼傳七
周蒲州仁壽寺釋僧妙傳八
周長安崇華寺釋慧善傳九
周潼州光興寺釋寶彖傳十
齊洺州沙門釋曇衍傳十一
陳楊都莊嚴寺釋慧榮傳十二
隋京師延興寺釋曇延傳十三
隋京師淨影寺釋慧遠傳十四僧猛

1) 제(齊)나라 업동(鄴東) 대각사(大覺寺) 석승범전(釋僧範傳)
032_0992_a_19L釋僧範
032_0992_b_02L승범의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평향(平鄕) 사람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23세에 9류(流) 7략(略)을 모두 통달하였으며, 해와 달과 별의 운행[七曜]과 『구장(九章:고대의 산술책)』, 천축(天竺)의 주술(呪術)에 이르기까지 한 번 물어본 것은 두 번 묻는 일이 없었다. 수많은 문도와 동료들에게 손바닥안의 물건을 가리키듯 설명하여 거만한 사람의 콧대를 꺾으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주(相州)의 이홍범(李洪範)은 깊은 뜻을 꿰뚫어서 해설하고 업하(鄴下)의 장빈생(張賓生)은 남김없이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뜻이 깊은 말이다.
그는 한창 나이에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전혀 장가들 마음은 없고 법문에 몸을 둘 것을 생각하고 손가락을 불태워 공양을 올렸다.
그는 29세 때 하읍(下邑)에 머물러 있다가 『열반경』을 강의한다는 말을 듣고 곧 시험삼아 한번 들어보았는데, 신부(神府)에 깨달음이 와서 법의 이치와 사유를 통달하였으며, 불경의 비밀한 극치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업성(鄴城)의 승단에 몸을 맡기고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다.
처음 『열반경』을 배우고 완전히 그 취지를 다 이해하였으며, 다시 마음을 임려(林慮)에 두어 그의 들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 다음 낙양으로 가서 헌(獻) 법사에게서 『법화경』과 『화엄경』 강의를 듣고 먼저 입문한 스님들의 종장(宗匠)이 되어 여러 가지 외도들의 주장의 시비를 가려냈다.
그후 광(光) 스님에게로 옮겨가서 그에게서 도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선정의 종문에 맛들여 몰두하였다. 해를 넘겨가면서 이미 전모를 모조리 탐구하고 나서도 학문의 뜻에는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세간에 나가 유람하면서 제(齊)나라와 위(魏)나라의 중생들을 가르쳐서 교화하고 이익을 주고 편안하게 하였다.
법회를 한번 열 때마다 천여 명에 달하는 청중이 발길을 업도(鄴都)로 돌렸으니 가히 당시의 밝은 종사라고 말할 만하였다. 마침내는 최근(崔覲)에게 주역에 주석을 달게 하고 그것을 물어서 장점을 취하고, 송경(宋景)에게 달력을 만들게 하고는 그것을 얻어 단점을 버렸다.
이름난 선비들인 서준명(徐遵明)과 이보정(李寶頂) 등은 그와 처음 만났지만 말을 나누기도 전에 그를 믿었으니, 그로써 그들에게 보살계를 주었다. 이에 오부대중이 저자처럼 모여들어 귀의하였고 그들에게 『화엄경』ㆍ『십지론(十地論)』ㆍ『지지론(地持論)』ㆍ『유마경』ㆍ『승만경』을 강의하였으며, 각각 이에 관한 소(疏)와 기(記)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소(疏)를 변경시키고 경을 인용하고는 글을 지어 논(論)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열반경』과 『대품경』 등을 모두 논이라고 불렀으며 『지지론(地持論)』 한 부(部)만은 술(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은 문장은 화려하고 웅장하여 세간의 정서와는 짝을 이루지 않으니 이 또한 일가(一家)를 이루는 글이라 할 만하며 그런 까닭에 보거나 취할 만한 것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여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났다.
일찍이 교주(膠州) 자사 두필(杜弼)이라는 사람이 업성(鄴城)의 현의사(顯義寺)에서 승범을 초청하여 동안거 강론을 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화엄경』의 6지(地)의 설명에 이르자 갑자기 기러기 한 마리가 부도(浮屠)의 동쪽을 따라 강당 안에 날아 들어와 법좌의 맞은편에서 땅에 엎드려 법문을 듣고 강의가 끝나자 천천히 나가서 다시 탑의 서쪽을 따라 돌고는 곧 날아갔다.
또 이 절에서 하안거 강론을 할 때 참새가 날아와서 법좌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엎드려 법문을 들으면서 90일 동안 있는 일도 있었다.
또 일찍이 제주(濟州)에 거처할 때에도 역시 물수리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법문을 듣다가 강론이 끝나자 떠나간 일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서로운 감응은 많았다. 처음부터 도와 충분히 부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감응을 이룰 수 있겠는가.
또 한 번은 『화엄경』을 강의하는데 한 스님이 비방하여 말하기를 “이는 게송[伽斗]인데 결국 무슨 해석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날 밤 한 천신(天神)이 나타나 그에게 매질을 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깊이 공경하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또 한 번은 다른 절에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계율에 대한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을 하니, 한 스님이 법좌에 올라가서 곧 토론할 제목을 세우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법상(法相)을 논하기로 제목을 세우지만 성인의 말을 깊이 이해한다면 무엇 때문에 포살일(布薩日)을 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승단에서 늘 귀로 듣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키가 1장 남짓하고 모습이 몹시 웅장하고 험하게 생긴 한 천신이 나타나더니 법좌 앞에 이르러 제목을 내세운 사람에게 묻기를 “오늘이 무슨 날인가?”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포살일이다”라고 대답하자 천신은 곧 손으로 그를 잡아당겨 법좌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 스님은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천신은 또 윗자리에 있는 스님에게 물어보고는 곧 끌어내려 앞의 스님과 같이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승범은 스스로 힘쓰게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승단의 일에서 사사로운 인연으로 자기의 요구를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병이 위중해지자 스님들이 가마에 태워 포살일에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세상을 떠나게 된 날에는 불상을 모시고 방에 들어와 침상에서 내려와서 땅에 꿇어앉아 오직 숙세(宿世)의 계율에 저촉된 일을 참회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정오가 되자 유언을 남기고 업성의 동쪽 대각사(大覺寺)에서 입적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80세였는데 그날은 곧 천보(天保) 6년 3월 2일이었다.
처음 승범이 유교를 등지고 불문에 들어갔을 때 숭상과 믿음이 날로 커져서 고요히 공의 법문만을 생각하고 세간의 일과는 인연하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9류(流)와 7략(略)에 대한 말을 하는 일이 없었고 몸은 불법과 어긋나는 행위를 끊었다.
시주들이 보내오는 재물은 얻는 대로 문인들에게 베풀었고, 옷과 식량이 있고 없다는 말을 한 일이 없었으며, 선악(善惡)을 조용히 참고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고 지켜야 할 계율을 받드는 것이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한결같았다. 그러면서 『화엄경』에 마음을 두고 다음 세상에 과보를 받을 업을 쌓기 위하여 밤마다 천불(千佛)에 예불하는 것을 한평생 변하지 않는 일로 삼아왔다.
말년에 나이가 많아지고 기력이 모자랐지만 오히려 하루에 여섯 때에 맞추어 침상에서라도 머리를 조아렸으니, 나름대로 남다른 깨달음에 의한 헤아림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감통(感通)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은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032_0992_a_20L 姓李氏平鄕人也幼遊學群書年二十三備通流略至於七曜九天竺呪術諮無再悟徒侶方千解頤誇矜折角時人語曰相州李洪範解徹深義鄴下張賓生領悟無斯言誠有旨矣兼以年華色美無伉儷之心思附法門燒指而修供年二十九拪遲下邑聞講涅槃試一聽開悟神府理思兼通乃知佛經之秘極也遂投鄴城僧始而出家初學涅槃經頓盡其致又拪心林靜其浮情復向洛下#從獻公聽法華嚴宗匠前修是非衢術後徙轍光師而受道焉耽味虛宗歲紀遷貿旣窮筌相學志無雜乃出遊開化安齊魏每法筵一擧聽衆千餘逮旋趾鄴都可謂當時明匠遂使崔覲注諮之取長宋景造曆求而捨短儒徐遵明李寶頂等一對信於言前授以菩薩戒法五衆歸之如市講華十地地持維摩勝鬘各有疏記變疏引經製成爲論故涅槃大品等竝稱論焉地持一部獨名述也然屬詞繁壯不偶世情亦是一家之作可觀採而言行相輔祥徵屢降有膠州刺史杜弼於鄴顯義寺請範冬講至華嚴六地忽有一鴈飛下浮啚東順行入堂正對高座伏地聽講散徐出還順塔西爾乃翔遊於此寺夏講雀來在座西南伏聽於九旬又曾處濟州亦有一鴞飛來入聽訖講便去斯諸祥感衆矣自非道洽冥符何能致此嘗講花嚴輒有一僧加毀云是乃伽斗竟何所解夜有神加打死而復蘇其見聞者皆深敬異嘗宿他寺意欲聞戒有僧昇將欲豎義乃曰豎論法相深會聖言何勞布薩僧常聞耳忽見一神形高丈餘貌甚雄峻來到座前問豎義者今是何日答曰是布薩日神卽以手搨之曳于座下委頓垂死次問上座搨曳同前由是自勵至終僧事私緣竟無說欲乃至疾重舁而就僧將終之日延像入房下牀跪地惟悔宿觸而已時當正午遺誠而卒於鄴東大覺寺春秋八十卽天保六年三月二日也初範背儒入釋崇信日增寂想空門不緣世務口無流略之語絕非法之遊隨得財賄卽施門人食有無未曾宣述安忍善惡喜怒不洗穢奉禁終始如一而留意華嚴爲來報之業夜禮千佛爲一世常資末歲年事旣隆身力不濟猶依六時叩頭枕上自有英悟之量罕能繼者感通靈異則事全難准云

2) 제나라 업중(鄴中) 석담준전(釋曇遵傳)
032_0993_a_07L釋曇遵
032_0993_b_02L담준의 속성은 정씨(程氏)이며 하북(河北) 사람이다.
젊었을 때 세간의 얽매임이 싫어 불법에 몸을 맡기고 출가하였는데 얼굴과 용모가 몹시 아름답고 당당하여 혹 청정한 계율을 오염시킬까 두려워서 다시 속세로 되돌아왔다.
학문의 바탕이 밝아지게 되자 당대에 바라는 인재로 합당하여 위(魏)나라 때 발탁되어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
23세에 마음이 조정의 관직을 등지게 되어 다시 광(光) 스님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으나 광(光) 스님은 옛일 때문에 버리고 제도하지 않았다.
이에 담준은 꿇어 엎드려 아뢰기를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귀의하여 먼 훗날까지 지극한 도(道)를 숭상하겠습니다. 만약 용납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그릇된 견해를 따라 삼보(三寶)를 허물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광 스님은 그 마음이 지극함을 살피고 곧 제도하여 계를 내려주었다.
담준은 그에게서 학문을 배워 공부한 지 10년을 넘게 되니, 대승돈교(大乘頓敎)와 법계(法界)의 마음의 근원에 대하여 모두 그 내용과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당시의 종사들을 훨씬 능가하게 되었으며 손에 다른 붓을 들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글을 변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일은 계속되었으나 글에 대한 주소[疏]는 없었다.
처음 교화에 나서 낙양으로 갔다가 제(齊)나라ㆍ초(楚)나라ㆍ진(晋)나라ㆍ위(魏)나라에서 교화를 베풀고,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에까지 갔는데 모든 곳에서 도를 전수하는 데 힘쓰고 중생들을 포섭하여 다스리는 일을 이어갔다. 북제(北齊)의 승상(丞相), 회음(淮陰) 왕굉(王肱)은 감동되어 인재라고 깊이 인정하였으며, 그의 공덕은 신분이 높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을 움직여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예의로 받들었다.
70세가 되자 나라의 수도에서 바꿔 이어가며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후 병세를 느끼고 곧 앉아서 『유마경』과 『승만경』을 외웠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 외웠으며 업성에서 입적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85세였다. 그에게서 교화를 받은 문인(門人)들 가운데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처음 담준은 타고난 뜻이 맑고 높았으며, 무위(無爲)를 본질로 내세우고 휘장을 걷어 올리고 문호를 열어놓았으며, 높이 내세운 뜻이 넓고 원대하였다.
몸은 함부로 아무 곳에서나 교섭을 갖지 않았고, 입으로는 속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행동거지는 장엄하고 꾸밈이 없었고, 방편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종사(宗師)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음이, 그와 나란히 짝을 이루고 실마리를 이어갈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광(光) 스님이 입적하던 날 담준은 제주(齊州)에 있었는데, 처음 슬픈 소식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져 입으로 피를 쏟았다. 그의 효성이 사람을 감동케 함이 이와 같았다.
염혜(念慧)의 세계에 많이 노닐면서 기회가 생기면 온화하게 강의하면서 업을 마쳤다.
032_0993_a_08L 姓程氏河北人少厭世網法出家而容色盛美堂堂然也恐染淨戒還返俗焉資學旣明允當時寄有魏擢爲員外郞二十有三情背朝復請光公以爲師保光以舊事而不度遵跪啓曰今沒命歸依遠崇至道如不允副必從邪見壞及三寶光審其情至卽度而授戒因從稟學功踰一紀大乘頓教法界心原竝披析義理挺超時匠手無異筆而變他成己故談述有續而章疏闕焉初出化行洛下流演齊乃至燕通傳道務攝治相襲丞相淮陰王肱深器之德動貴重傾心奉禮年餘七擧爲國都尋轉爲統後少覺有疾便坐誦維摩勝鬘卷了命終卒於鄴時年八十有五承化門人罕繼其初遵賦志淸高無爲立性褰帷開標樹方遠形無妄涉口不俗談靜自嚴不假方便而敬愛宗師罕階儔緖光師終日遵在齊州初聞哀問不覺從牀而墜口中流血其誠孝動如此之類也多遊念慧有得機緣溫講而終業矣

3) 제나라 업하(鄴下) 총지사(總持寺) 석혜순전(釋慧順傳)
032_0993_b_08L釋慧順
032_0993_c_02L혜순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제(齊)나라 사람이며, 시중(侍中) 최광(崔光)의 동생이다.
어려서 유종(儒宗)를 좋아하여 그 청아한 취지를 모두 알았다. 커서는 진세(塵世)의 그물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 거사(居士)가 되었다. 처음 『열반경』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을 남김없이 터득하였다. 그로 인하여 강론에 참가하여 졸다가도 누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르기를 “이 해석은 밝은 해석이기는 하나 아직도 극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마음이 마침내 머뭇거리며 의심을 품고 그 폐단을 결단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도하(都下)에 광(光) 율사가 널리 대승을 섭렵하여 깨치지 못한 글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낙양으로 그를 찾아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25세였다. 곧 광 율사에게 몸을 맡기고 출가하고 그 문하에 들어 지지(地旨)를 편찬하면서 식사도 거를 만큼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세월이 흘러서 증험과 교리의 두 길이 마음속에 거울같이 밝게 비쳐 3지(持)와 3취(聚)의 모습이 정신 밖에까지 나타났다. 넓은 견해가 무르익고 다스려져 충분한 여유가 있게 되었으며, 『십지론(十地論)』ㆍ『지지론(地持論)』ㆍ『화엄경』ㆍ『유마경』 등을 강의하고 아울러 해설을 기록하였다.
50세가 될 무렵에 대법(大法)을 고향에 널리 설교하여 고향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곧 불법에 귀의하는 법문을 전수하니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강론하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가하는 대중이 언제나 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전일하고 성실하다는 소문이 동하(東夏)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제(齊)나라와 조(趙)나라 지방과 영주(瀛州)와 기주(冀州) 지방에 있는 신봉자들이 모두 그의 기풍을 공경하였다.
복야(僕射) 조효징(祖孝徵)은 그 덕을 흠모하고 숭상하여 나라에 상주하여 국도에 있게 하였다.
그는 72세 때 업성(鄴城)의 총지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하는 날에도 몸과 마음은 맑고 우뚝하였고 오로지 평등심만을 생각하며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
혜순은 선비 집안의 검소한 가문이어서 세상의 모범이 되었으며, 지혜와 식견으로 명예를 날리고 사리에 매우 깊었으며, 뜻은 법에 순종하는데 두었고 한 방면에 치우쳐 국한되지 않았다. 옷은 선명하고 화려한 것을 피하였고 음식은 여러 가지 맛을 겸한 것이 없었다. 받은 보시는 곧 나누어주었으며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두지 않았다. 몸은 인연에 맡기고 법랍(法臘)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나아가고 멈추는 것은 이익에 근거하여 결정하였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손해에 대하여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과 행동은 때에 알맞게 하고 중생들과 갈등을 이루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전기를 쓰는 사람은 모든 일을 갖추어 기술하였으며 감히 그의 행적을 빠뜨리지 못하였다.
032_0993_b_09L 姓崔齊人侍中崔光之弟也少愛儒宗統知雅趣長厭塵網爲居士焉初聽涅槃略無遺義因講而睡聞有言曰此解乃明猶未爲極心遂遲疑伺決其病承都下有光律師者廣涉大乘文無不曉因往洛陽時年二十有五卽投光而出家焉寓於門纂修地旨倦無終食歲紀相尋教兩途銳鏡於心內三持三聚影現於神外博見融冶陶然有餘講十地地持華嚴維摩竝立疏記年將知命欲以大法弘利本鄕卽傳歸戒情無不愜隨有講會衆必千餘精誠之響廣流東夏故齊冀有奉信者稟其風焉僕射祖孝徵欽尚厥德#奏爲國都年七十有二終於鄴下之摠持寺當終之日身心淸卓專念平等而爲心印然順族胄菁華言成世範慧解騰譽事義深沈而志存順法局一方衣略鮮華食無兼味受施尋情闕愛憎形寄任緣未依夏臘進止在益不顧己損言行適時不與物諍故傳者具書不敢遺其事行矣

4) 제나라 업서(鄴西) 보산사(寶山寺) 석도빙전(釋道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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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994_a_02L도빙의 속성은 한씨(韓氏)이며 평은(平恩) 사람이다. 12세에 출가하여 귀향소사(貴鄕邵寺)에 몸을 두었다.
처음 『유마경』을 외우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루에 4천4백 마디씩 읽겠다고 다짐하였고, 한번 들은 것은 잊는 일이 없었으며, 곧 몇 부의 경전을 통달하였다.
후에 『열반경』을 배우고는 대략 뒤의 구절을 내다볼 수 있었고, 다시 『성실론(成實論)』을 탐구하면서 처음 전반 문장에 대한 강의를 듣고, 곧 그 대의(大義)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총명하다는 칭송이 옛사람들을 부러워할 일이 없었고,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모두 한번 만나 큰 절을 하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출가한 지 7년이 되었을 때 『열반경』을 강의하려고 하다가 생각하기를 ‘글은 같은데 해석은 다르니 감정과 이치로 보아 바탕으로 삼기 어렵고 동시에 자칫하면 헛된 일을 한 것으로 될까 봐 걱정된다. 법을 비방하는 것은 참으로 무거운 죄이다’라고 하고 강의를 그만두었다.
8년이 되자 마침내 선정의 경계를 행하게 되었으며 장수(漳水)ㆍ부수(滏水)ㆍ이수(伊水)ㆍ낙수(洛水) 지대에서 훌륭하고 큰 지모를 갖춘 스님들을 두루 찾아보고, 후에 소림사(少林寺)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하안거(夏安居)에 드니, 도에 대해 물으려는 스님들이 가시밭을 헤치며 찾아왔다. 광(光) 율사가 계율의 근본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를 찾아가 계율에 대한 설법을 들었으며, 아울러 대승의 이치를 깨닫게 되니 깊이 심정과 소원에 꼭 들어맞았으며, 그곳에서 머문 지 10년이 지나게 되자 명성과 소문이 점차 높아졌다.
이어 광 율사의 곁을 떠났고 법을 통달하고 널리 교화하였으니, 조(趙)와 위(魏) 지방에서 불법을 전한 아름다움은 이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또 『지론(地論)』ㆍ「열반경』ㆍ『화엄경』ㆍ『사분율(四分律)』 등을 강의하였는데, 모두 원문을 보며 강의하였고 일일이 글을 찾지 않았는데 장소(章疏)는 본래 없었다. 손으로 붓을 잡지 않았고 열고 막는 것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말의 장단이 맑고 시원하고 경전의 전체 뜻을 환하게 이해하였는데 마치 증험한 일이 있는 듯하였다.
그런 까닭에 수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빙 스님은 법상(法相)의 윗자리에 계신 분이며, 그 문구는 한 시대의 드문 보배이니 이 말씀은 믿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언재(言才)를 사리불(舍利弗)에 비유하였다.
그는 북제 천보 10년(1103) 3월 7일에 업성(鄴城)의 서남쪽에 있는 보산사(寶山寺)에서 입적하였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032_0993_c_09L 姓韓平恩人十二出家投貴鄕邵寺初誦維摩經自惟歷覽日計四千四百言一聞無忘乃通數部學涅槃略觀遠節復尋成實初聽半便豎大義聰明之譽無羡昔人使遐邇聞風咸思頂謁七夏欲講涅惟曰文一釋異情理難資恐兼虛謗法誠重八夏旣登遂行禪境洛遍討嘉猷後於少林寺攝心夏坐問道之僧披搸而至聞光師弘揚戒本因往聽之涉悟大乘深副情經停十載聲聞漸高乃辭光通法弘化魏傳燈之美罕有斯焉講地涅槃花嚴四分皆覽卷便講目不尋文章疏本無手不擧筆而開塞任吐納淸爽洞會筌旨有若證焉京師語曰憑師法相上公文句一代希寶斯言信矣時人以其口辯方於身子也以齊天保十年三月七日於鄴城西南寶山寺春秋七十有二
세상을 마치기 직전에 큰 종의 양구(兩口)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파손되었다.
그는 생존시에 안양정토(安養)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그런 까닭에 임종할 때 광명이 방에 가득하였는데 이것은 도빙이 혼자 보았고, 이상한 향기가 뜰에 가득 차니 대중이 함께 찬미하였다.
처음 도빙이 불도에 들어서면서 법을 널리 설교하고 보호하는데 마음을 두었고, 경전과 계율을 강의하고 복덕과 지혜를 아울러 닦았으며, 일가친척들과의 왕래를 완전히 끊고 세도 있고 귀한 호족의 집에 찾아가서 머무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걸식으로 스스로를 유지하여 익숙하게 다니는 마을이 적었다. 한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늙어가면서 더욱 굳게 몸을 지켜 정강이와 팔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같았다.
아울러 마음으로 인식한 것을 입으로 전수하고 글과 형상으로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으니 고금에 없는 일이었다.
032_0994_a_05L將終之前大鍾兩口小觸而破康存之日願生安養故使臨終光尋滿室憑獨見之異香充庭大衆同美之處道弘護居心經律遽講福智雙骨族血親往來頓絕勢貴豪家全無遊止而乞食自資少所恒習袒肩洗淨老而彌固脛臂無服生死齊焉兼以心緣口授杜於文相者古今絕矣

5) 제나라 병주(幷州) 승통(僧統) 석영순전(釋靈詢傳)
032_0994_a_14L釋靈詢
영순의 속성은 부씨(傅氏)이며 어양(漁陽)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입도하여 『성실론(成實論)』과 『열반경』을 배웠고, 그 깊은 뜻을 다 터득하였으며, 또한 『성실론』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두 권의 책으로 만들고 주소를 달고 이것을 풀이하였는데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후에 작은 도를 버리고 광(光) 율사를 받들고 섬겼으며, 10여 년 동안 밤낮으로 탐구하고 연마하여 섬세한 뜻과 비밀한 가르침에서 통한 곳과 막힌 곳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수많은 서적을 널리 알고 있었지만 『유마경』에는 특별히 뛰어났으며, 아울러 『유마경』의 소기(疏記)도 있다.
수도를 장수(漳水)에서 업성(鄴城)으로 옮기게 되자 연(燕)과 조(趙)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부대중을 교화하였으며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를 분별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글씨와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자못 그것을 모아 묶는 일을 좋아하였으며 글과 글씨가 화려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떠받들렸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풍격과 거동이 훌륭하였으며 문장과 말재주가 아담하고 청정하여 듣는 사람이 오해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국도로 되었다가 위나라 말엽에 병주(幷州)에서 승통이 되었다.
그후 제나라 초엽에 진양(晋陽)에서 입적하였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032_0994_a_15L 姓傅氏漁陽人也少年入道學成實論幷涅槃經窮其幽府又於論中刪要兩卷注而釋之盛行於世後棄小道崇仰光公曉夕硏尋十有餘載纖旨秘教備知通塞雖博知群而擅出維摩兼有疏記至遷京遊歷燕化霑四衆邪正分焉書畫有工頗愛篇什文筆之華時所推擧美容貌善風儀詞辯雅淨聽者無撓初爲國都魏末爲幷州僧統卒於晉陽時年六十九矣

6) 제나라 대통(大統) 합수사(合水寺) 석법상전(釋法上傳)
032_0994_b_02L釋法上
032_0994_b_02L법상의 속성은 유씨(劉氏)이며 조가(朝歌) 사람이다.
그는 5세 때 배우기 시작하여 7일 만에 문장과 글귀를 통달하였다.
6세 때 삼촌을 따라 절에 가서 놀이구경을 하였는데 마음에 고무되는 것이 없어 다만 예불만 하다가 경을 읽었다. 그런데 목소리와 기운이 시원하고 뛰어나 여러 사람들이 달려와 그의 주의를 에워싸고 귀를 기울이고 목마르게 보고 들었다.
8세가 되어 대략 경전의 가르침을 읽었고, 그 이치를 거의 다 터득하게 되었다. 9세 때 『열반경』을 구하여 이것을 외우고는 곧 세속을 싫어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2세에 이르러 도약(道藥) 선사에게 출가하였고, 이어 상주(相州) 땅을 돌아다니다가 곧 급향(汲鄕)으로 돌아왔다.
다시 동도(東都)로 가서 황급히 돌아다니며 도에 힘쓰니 정신과 기개가 높고 시원하였고, 문장과 이론을 환하게 깨달으니 그가 있는 곳에서는 모두 그를 성사미(聖沙彌)라고 하면서 추대하였다.
그후 임려(林慮) 땅에 은둔하면서 호산사(胡山寺)에 올라가 『유마경』과 『법화경』을 외웠는데 겨우 20일 되자 두 경을 모두 외웠다. 그리하여 외운 것에 근거하여 그 해석을 구하려고 다시 낙양으로 들어가 맑고 심오한 뜻을 널리 통달하게 되었으며 이름이 이수(伊水)와 부수(滏水) 일대에 알려졌다.
15세가 되자 처음으로 『법화경』을 강의하였으며, 의문과 질문에 맞서 대답하니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기지(機智) 있는 질문을 잘 하고 미세한 것을 파헤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근거가 없는 것은 순통하게 결정을 내리며, 소리 높이 승부를 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양이 아름답지 않아 당시 사람들의 속담에 이르기를 “검둥이 사미가 만약 찾아오면 좊은 자리의 스님들이 재난을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후 흉년이 들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모두 떨어졌으나 열반만을 생각하며 굶주림과 추위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 알의 쌀이 생기면 나물을 섞어서 먹고, 한 가지 옷을 얻으면 풀잎을 보태서 입었으며, 시달린 몸은 지탱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정신은 날로 더욱 또렷해졌다.
그후 광 율사에게 귀의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성품과 계율이 일찍이 성숙되어 스승의 지도가 필요 없었으며,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애써 노력하여 잠깐의 시간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부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곧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뵙게 되었는데 집에 이르니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함께 머물고 이튿날 아침에는 낙양으로 갔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누이를 제도하여 업도(鄴都)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이때는 크게 흉년이 들어 몸을 의탁하려 하여도 갈 곳이 없었다.
한편 법문을 듣고 싶은 마음이 맹렬하여 가족을 그곳에 맡겨두고 발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여름에는 소림사(少林寺)에서 법문을 듣고 가을에는 장수(漳水)의 기슭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미 그의 지혜와 행위는 세상에 알려져서 대중이 모두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십지론』ㆍ『지지론』ㆍ『능가경』ㆍ『열반경』 등을 강의하였는데, 이것들을 돌려가며 차례로 강의를 이어가면서 아울러 경문의 소(疏)를 저술하였다.
또 그는 특별히 산수(算數)에 능하고 기연의 조화를 명백하게 알았으며,법과 교화에 강기(綱紀)를 세웠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사(京師)의 지극한 바람이요 도량의 법상(法上)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옳은 말이다.
40세가 되자 회주(懷州)와 위(衛)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는데, 북위(北魏)의 대장군 고징(高澄)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업도(鄴都)에 들어가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미묘한 말이 한번 울리자 수많은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법상의 계율의 산은 험준하고 가파르며, 지혜의 바다는 투명하고 깊었으며, 덕은 사람들이 본받을 만하였고, 위엄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할 만하였다. 그는 위(魏)나라와 제(齊)나라 두 시대에 걸쳐 현문(玄門)을 밝히는 한 관서의 통사(統師)를 지냈으며, 승록(僧綠)의 일만을 맡아보면서 50여 명의 기록하는 인원을 두었는데 그에게 소속된 스님과 비구니는 2백만 명에 달하였다. 그후 법상이 세운 강령은 4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도인과 속인 모두가 환영하고 기뻐하였으며 조정의 관리들도 흐뭇해하였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절이 모두 그가 이루어놓은 규범을 따랐으며 숭상하고 보호하는 기초로 되었으니 그 광채를 이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도의 광명이 먼 곳까지 비추어지게 되자 황제는 조서(詔書)를 내려 그를 계사(戒師)로 삼았으며, 문선(文宣) 황제는 언제나 땅에 머리카락을 펴놓고 그것을 밟고 가게 하기도 하였다.
천보 2년(551)에 또 조서를 내렸다.
032_0994_b_03L 姓劉氏朝歌人也五歲入學七日通章六歲隨叔寺中觀戲情無鼓儛但禮佛讀經而聲氣爽拔衆人奔遶傾渴觀聽年登八歲略覽經誥薄盡其理九歲得涅槃經披而誦之卽生厭世至于十二投禪師道藥出家焉因遊相土尋還汲鄕又往東拪遑務道神氣高爽照曉詞論在推之咸謂聖沙彌也後潛林慮胡山寺誦維摩法花纔浹二旬兩部俱度因誦求解#還入洛陽博洞淸玄名聞伊年曁學歲創講法花酬抗疑難無不嘆伏善機問好徵覈決通非據昌言勝負而形色非美故時人諺曰黑沙彌若來高座逢災也後値時衣食俱乏專意涅槃無心飢凍一粒之米加之以菜一衣爲服兼之以練形將盡而精神日進乃投光師而受具焉性戒夙成不勞師導勤勤諦無失寸陰忽聞父病尋往覲之至卽殂一宿同止明旦赴洛度母及將入鄴都時屬大荒投寄無指法心猛委而南旋夏聽少林秋還漳母子相見不覺潛然旣慧業有聞衆皆陳請乃講十地地持楞伽涅槃等部輪次相續竝著文疏又偏洞筭明了機調綱紀法化難繼其塵時人語曰京師極望道場法上斯言允矣年階四十遊化懷衛爲魏大將軍高澄奏入在鄴微言一鼓衆侶雲但上戒山峻峙慧海澄深德可軌威能肅物故魏齊二代歷爲統師昭玄一曹純掌僧錄令史員置五十許人所部僧尼二百餘萬而上綱領將四十年道俗歡愉朝庭胥悅所以四方諸寺咸稟成風崇護之基罕有繼釆旣道光遐燭乃下詔爲戒師宣常布髮於地令上踐焉天保二年又下詔曰
032_0995_a_02L“우러러 생각하면 자비하고 밝은 부처님께서는 천하를 빛나고 안락케 하였으니 그 덕을 갚자면 바른 깨달음에 의지하여야 한다. 새의 생명을 해치는 독수리 같은 무리들은 마땅히 산림(山林)으로 내쳐야 한다. 곧 이 땅에 황태후(皇太后)를 위하여 보탑(寶塔)을 세우게 하고 응사조(鷹師曹)를 폐지하고 보덕사로 할 것이다. 이것은 사악한 안개를 부수어 걷어내고 부처님의 바다를 맑게 하는 일이다.”
당시 대단히 번성함은 예전부터 우러러 숭상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때 법상은 이 일을 모두 책임지고 황제의 생각에 부합되게 하였기 때문에 온 나라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도인과 속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인정하였다. 이 주춧돌이 없으면 누가 여기에 기둥과 대들보를 세워내겠는가.
또한 그의 훌륭한 행이 알려지자 그 소문은 빨리 먼 곳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대승상(大丞相)인 왕고덕(王高德)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른 법을 깊이 생각하며 대승을 숭상하고 존중하여 이 불법을 전파시켜 바다 끝까지 이르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법의 가르침의 근원과 종지를 헤아릴 길이 없었고, 서쪽 땅에서 동쪽 땅으로 법이 전해온 연대와 시대와 황제의 대를 몰라서 조목별로 자세히 적어 가지고 스님을 업성(鄴城)으로 파견하여 아직 듣지 못한 일들을 아뢰게 하였다.
그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래 지금까지 몇 해가 되었는가? 또 천축(天竺)에서 불교가 몇 해 만에 비로소 한(漢)나라 땅에 이르렀는가?
처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어느 황제의 시대이며, 당시의 연호는 무엇이었는가? 또 제(齊)나라와 진(陳)나라 중에 어느 나라가 먼저 불법을 전하였는가? 그후 지금까지 몇 해가 지났으며 그 당시의 황제는 어느 황제인가? 멀리서 구체적으로 주석해주기 바란다.”
『십지론(十地論)』과 『지도론(智度論)』 등을 쓴 사람과 법문이 전하는 내용도 물어왔다.
이에 대하여 법상(法上) 스님이 회답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희씨(姬氏)의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甲寅)년에 태어나시어 19세에 출가하여 30세에 성도하셨는데, 목왕(穆王)은 24년에 서방에 화인(化人)이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곧 서역으로 들어갔는데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증거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세상에 계셨으며, 멸도하신 이래로 제나라 연대로 따져서 무평 7년(丙申)까지 무릇 1465년이 지났으며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에 경과 불법이 처음으로 중국에 왔다. 그후 위(魏)나라와 진(晋)나라에서 서로 전해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포되고 있다.”
법상은 상세히 불교의 인연과 유서를 회답하였는데 글은 극히 자세하게 고증하여 쓴 것이나 여기서는 그 대강의 줄거리만을 들어서 그가 전한 말을 보여주었다.
그는 말년에는 황제의 명에 의해 상주(相州) 정국사(定國寺)에 머물렀는데, 모습과 덕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감응과 공양이 매우 많았다. 그는 세간에서 받은 이득으로 산사(山寺) 하나를 지었는데 본래의 이름은 합수사(合水寺)였으니, 곧 업성(鄴城)의 서산(西山)에 있는 지금의 수정사(修定寺)가 그 절이다. 산의 맨 꼭대기에 미륵당(彌勒堂)을 지었으며 여러 가지 장식을 하여 두루 화려함을 다하였고, 네 가지 공양거리[四事]를 받는 스님이 150명에 달하였다.
그후 제나라가 불교를 파괴하자 스님들은 산사(山寺)에 올수 없게 되었고, 법상은 속인의 옷 속에 승복을 껴입고 평상시와 같이 업을 익혔다. 그가 소원한 것은 만약 세상을 마친 뒤 미륵불을 만나거나 남은 목숨이 있을 경우라면 불법이 번영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한결같이 미륵불에게 큰 절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저승과 1승의 감응이 내리기를 소원하였다. 수(隋)나라의 운세가 움직여 불일(佛日)이 다가오는지라 이것은 오래 동안 깊이 가슴속에 품었던 마음의 결과와 일치하여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이 여위고 더욱 쇠약하여 수레에 앉아 가사(袈裟)로 머리를 덮고 제자들이 맞들고 산사로 올라가서 합장하고 세 번 절하고는 오른쪽으로 미륵불의 주위를 세 번 돈 다음 곧 산사로 돌아와 『유마경』과 『승만경』을 끝까지 외우고 합수(合水)의 옛집에서 입적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6세였으며 곧 북주(北周) 대상(大象) 2년(580) 7월 18일이었다.
032_0994_c_18L仰惟慈明緝寧四海欲報之德正覺是憑諸鷙鳥傷生之類放于山林卽以此地爲太皇太后營寶塔廢鷹師曹爲報德寺斯卽碎蕩邪霧載淸佛海當時昌盛自古推焉上摠擔荷竝得緝諧內外闡揚皁白咸允非斯柱石孰此棟梁哉而景行旣宣逸嚮遐被致有高勾麗國大丞相王高德乃深懷正法崇重大乘欲播此釋風被于海曲然莫測法教始末緣由西徂東壤年世帝代故具錄事條遣僧向鄴啓所未聞敍略云釋迦文佛入涅槃來至今幾年又於天竺幾年方到漢地初到何帝年號是何又齊陳佛法誰先傳從爾至今歷幾年帝遠請具注#幷問十地智論等人法所傳上答略云佛以姬周昭王二十四年甲寅歲生十九出家三十成道當穆王二十四癸未之歲穆王聞西方有化人出便卽西入而竟不還以此爲驗四十九年在世滅度已來至今齊代武平七年丙申凡經一千四百六十五年後漢明帝永平十年經法初來晉相至今流布上廣答緣緖文極指訂今略擧梗槪以示所傳末勅住相州定國寺而容德顯著感供繁多所得世利造一山寺本名合水卽鄴之西今所謂修定寺是也山之極頂彌勒堂衆所莊嚴備殫華麗四事供養百五十僧及齊破法湮僧不及山寺上私隱俗服習業如常願若終後睹慈尊如有殘年願見隆法更一頂禮慈氏如來而業行精專幽明感遂屬隋運將動佛日潛離深果宿心遍心府羸瘦微篤設輿坐之袈裟覆弟子扛擧往昇山寺合掌三禮遶三周便還山舍誦維摩勝鬘卷訖而卒於合水故房春秋八十有六周大象二年七月十八日也
032_0995_c_02L법상은 모습과 도량이 보통사람을 초월하여 대중 속에서 두드러졌으며, 수많은 대중 가운데 있으면 그만이 홀로 우뚝 솟아 목 위가 드러났다. 옷은 거의 소박하게 누더기를 기워 입었으며 오조가사(五條袈裟)도 본래부터 무명으로 만들었고, 법의(法衣)와 물병ㆍ발우 이외에 다른 재물은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수레를 타지 않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걸어다녔다. 문하의 사람이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면 그의 마음대로 배우게 하고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특히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힘썼으며 이야기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었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도 매질을 하지 않았다.
법상이 임명되기 전에는 의식과 옷차림이 차별 없이 혼잡하였으나, 한번 강령(綱領)을 세워 통솔한 다음부터는 옷차림을 제정하여 따로 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의 옷차림에서 두 가지로 다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법상의 공이다.
또한 절의 규칙을 제정하고 청정계(淸淨戒)를 세운 것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불문이 동방에서 높이 발양되고 능히 청정한 기풍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에 그보다 앞자리에 놓을 사람이 없었다.
처음 천보 연간에 나라에는 열 사람의 승통이 있어 해당관청에서 황제에게 아뢰어 업무를 확실히 다르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문선제(文宣帝)가 손수 올린 글에 주서(注書)하였다.
“법상 법사는 대승통(大僧統)으로 하는 것이 좋겠고 나머지 스님은 보통 승통으로 임명하라.”
그런 까닭에 황제는 부처님을 섬기듯 법상을 섬겼으며 그가 하는 말은 하나도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다. 또한 황제는 계율에 따라 금하는 일을 존중하였고, 항상 설법을 베풀어주기를 원하였으며 그의 말은 모두 행하였다. 그리하여 포살(布薩)하는 아침이면 후한 공양을 마련하고 예를 갖추어 스님들을 청하였다.
후에 나이가 많아지면서 음성이 변하게 되자 혹 대중들을 번거롭게 할까 걱정하였고, 한해가 저무는 저녁에도 오히려 이 법을 준수하였으니 그가 받들고 믿는 것이 이와 같이 독실하였다.
그는 『증일수법(增一數法)』 40권을 지었는데 모두 경론에 있는 명교(名敎)를 줄인 것으로 처음은 한 법에서 시작하여 십ㆍ백ㆍ천ㆍ만의 법이 존재하게 되니, 마치 수(數)의 숲이 있는 것과 같으며 참으로 이것이 불교를 전하고 지키는 중요한 술법이 되는 것이다.
그는 또 『불성론(佛性論)』 2권과 『대승의장(大乘義章) 6권을 저술하였는데 문리가 깊고 온화하였으며 상세하게 또는 간략하게 세상에 알려졌다. 이밖에도 또 『중경록(衆經錄)』 한 권을 지었는데, 이 책은 경의 품류를 포괄적으로 기록하였을 따름이다. 이 모든 책들은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032_0995_b_11L上形量過人苕然衆表百千衆中孤起頸現衣服率素納補爲宗五條祇支由來以布法衣甁盋以外更無餘財生不履步以畢命門人成匠任情所學私己業偏用訓人言常含笑罪不加自上未任已前儀服通混一知綱制樣別行使夫道俗兩異上有功制寺立淨亦始於此故釋門東敞能扇淸風莫與先矣天保之中置十統有司聞奏事須甄異文宣乃手注狀云上法師可爲大統餘爲通故帝之待遇事之如佛凡所吐言無不承用又遵重戒禁願常宣說報行之每至布薩晨旦致厚供設禮請僧及年高聲變恐煩於衆歲暮之猶遵此法其奉信也如此撰增一數法四十卷竝略諸經論所有名教始從一法十百千萬有若數林寔傳持之要術也又著佛性論二卷大乘義章六卷文理沖洽詳略有聞又撰衆經錄一卷包擧品類耳竝行於世


법존(法存)
그의 제자에 법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 이 사람은 이로(李老)로 제나라 천보 연간의 불교탄압[屛除]을 감독하다가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었다. 그는 현행 일을 잘 알기에 근거 있게 분별하고 간략하였다. 그리하여 법상이 곧 발탁하여 합수사(合水寺)의 도유나(都維那)로 삼았다. 그후 제나라에서 불교가 번성해지면서 해마다 삼가(三駕:황제와 황후와 태자의 행차)가 모두 산사를 찾아가 법상을 뵙고 전하였다. 이때 육군(六軍)이 절에 도착하면 절의 주방에서 공급을 마련하였는데, 법존 스님이 일에 따라서 지휘하여 모든 이에게 실수 없이 공급하니 3궁(宮)이 만족해하였다.
그후 수(隋)나라 초엽에 입적하였다.
후에 영유(靈裕) 법사는 그의 근본 학문을 이어받은 바가 있어 그의 전기를 본전(本傳)에 실었다.
032_0995_c_09L有弟子法存者本是李老監齊天保屛除歸于釋種明解時事分略有據上乃擢爲合水寺都維那當有齊之每年三駕皆往山寺有所覲禮軍旣至供出僧廚存隨事指撝前後給濟三宮竝足後終於隋初靈裕法師資學有承爲之本傳

7) 제나라 업하(鄴下) 정국사(定國寺) 석도신전(釋道愼傳)
032_0995_c_16L釋道愼
032_0996_a_02L도신의 속성은 사씨(史氏)이며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는 14세 때 출가하여 경전을 외우고 법문을 듣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후 구족계를 받은 다음에는 낙양에로 가서 광(光) 율사로부터 『지론』을 배웠다.
후에 상통[上統]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이 뜻은 열반에 있었다.
그는 성품과 국량이 평등하고 간결하였으며 풍모와 도량이 온화하였다. 문도들을 모아들이고 대법으로 그들을 포섭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그는 계율에 대한 설법에 참가할 때마다 꿇어앉아서 설법이 끝날 때까지 들었다. 강설로 어두운 마음을 깨우쳐주고 말은 번잡하거나 장황하지 않았는데, 지혜 있는 사람은 말이 적은 것을 두려워하였고 어리석은 사람은 말이 많지 않음을 염려하였다.
오부대중이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그런 까닭에 선제(宣帝)가 청하여 국도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안전하게 조절하여 유서(由緖)가 기우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었다. 선(禪)의 종장(宗匠)인 승달(僧達)과 논사(論師)인 법령(法靈)도 모두 그의 말재주에 굴복하였으며, 도도한 풍류와 크게 시속(時俗)을 비추어보는 경지에 이르러서는 도신(道愼)이 그들을 멀리 앞섰다.
말년에는 수레를 타고 황제를 전송하였는데, 본사로 되돌아오니 두 개의 끝채[轅]가 모두 부러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업성(鄴城) 정국사(定國寺)에서 입적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032_0995_c_17L 姓史高陽人十四出家誦聽依業受具已後入洛從光師學於地後稟上統而志涅槃性度夷簡量陶然綱網門徒維攝大法而爲己每參說戒跪聽至訖講悟昏情無繁長智者恐其言少愚者慮其不多五衆愛重故宣帝請爲國都綏撫遺法得無虧緖禪匠僧達論士法靈皆伏其辯對至於淊淊風流大觀時則愼過之遠矣未乘車送帝迴返本寺兩轅倂折不日而終於鄴城定國寺春秋六十有五

8) 주(周)나라 포주(蒲州) 인수사(仁壽寺) 석승묘전(釋僧妙傳)
032_0996_a_05L釋僧妙
032_0996_b_02L승묘는 묘도(妙道)라고도 하며, 본래 기주(冀州)에 살다가 후에 하동(河東) 포판(蒲坂)으로 옮겨가 살았다.
계행(戒行)이 전일하고 모질었으며, 총명한 지혜는 숙성하여 수많은 책들을 읽었는데 더욱 강론에 달통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겸손하여 기쁨과 노여움이 그의 가슴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강론하고 자리에서 내려올 때마다 반드시 합장하고 참회하면서 이르기를 “부처님의 뜻은 알기 어려우니 어찌 범부가 헤아리겠는가. 지금 내가 말한 것은 선대의 스승에게서 전해 받은 말이며 감히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은 없으나 대중들은 이 법의 내용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보시해주기 바라며 그렇게 되면 매우 기쁘겠다”고 하였다.
이때 그의 해설에 대하여 선배 큰 스님들보다 한수 높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행위는 훌륭하고 단정하고 결단성 있었으며, 그의 겸허한 품격을 본 사람은 모두 그 덕에 감복하였고 대중들은 더욱 그를 따랐다.
그후 포향(蒲鄕)의 상념사(常念寺)에 머물렀는데, 곧 지금의 인수사(仁壽寺)이다. 그곳에서 문도를 모아 업을 쌓고 불법을 퍼뜨려 공을 세워서 주나라와 제나라에 크게 메아리를 울리니 명망이 매우 높았다.
주나라 태조(太祖)는 특별히 더욱 존경하였으며, 대통(大統) 연간에 서역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드리니 태조는 승묘 스님을 시켜 훌륭한 공적을 널리 찬양하게 하고 마침내 사리를 그에게 보내서 공양드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리를 머리 위에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탑을 돌며 우러러보기를 1년을 거듭하니, 홀연히 한밤중에 방안 가득히 방광(放光)하다가 빙빙 돌며 창밖으로 뻗어나가 잠깐 사이에 광명이 사방의 먼 곳까지 비추고 불꽃을 날리며 하늘로 치솟아 하늘과 땅을 밝게 비쳤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절에 불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을 다투어 달려와 불을 끄려고 하였는데 급기야 신비한 광명이 금병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환성을 질렀다.
승묘는 우러러 신령한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다가 이윽고 향을 사르며 꿇어앉아 아뢰었다.
“법계의 중생들이 이미 성스러운 자취를 눈으로 보았으니 원컨대 비밀하고 신령한 광명을 숨기시고 적멸한 공(空)의 세계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에 광명은 다시 빙빙 돌며 말려서 병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그 고을의 남녀백성들이 향을 태우며 찬탄하는 소리는 수십 리 밖에까지 들렸다.
그 절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방안에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대중들이 함께 불러도 깨어나지 못한 바람에 결국 광명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얼마 안 있어 문득 전염병에 걸렸다. 모두가 말하기를 전생의 행위에 의하여 마침내 감응이 나타나는 차별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 승묘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광명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당시의 불사리는 지금도 그 절에 남아 있다.
이전 제나라 무평(武平) 연간 말엽에 업성의 옛 성안에 있는 백마사(白馬寺)의 부도(浮屠)는 바로 석조(石趙:5호 16국 중의 後趙) 시대의 부도로서 승징(僧澄)이 만든 것이었다. 본래 목탑으로 된 부도여서 세월이 흐르면서 썩어 허물어지자 황제의 명으로 이것을 보수하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세 과(顆)의 사리를 발견했다. 하나는 붉은색이고 하나는 흰색이며 또 하나는 푸른색이었는데, 보배병에 이것을 담아 두었으며 수도의 귀하고 천한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보았다. 그런데 마음이 지극한 사람이 찾아오면 시원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위로 솟아올랐으나, 불법을 믿지 않고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오면 비록 병을 기울여도 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세간에는 사도(邪道)들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제왕(齊王)의 장인(長人)인 광무왕(廣武王) 호장옹(胡長邕)은 일찍이 불교에 입문하였다가 황제의 명으로 환속(還俗)하였었다. 그는 비록 귀하고 명망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구족계(具足戒)를 버리지 않고 물을 담는 발우에 사리를 모시고 나라에 청해서 도를 행하기를 빌었더니, 곧 세 장(杖)의 사리가 물 위로 서로 뒤따라 올라오며 그릇 주위를 돌면서 오른쪽으로 일곱 바퀴를 돌아간 다음 한꺼번에 물아래로 가라앉았는데, 이것을 보고 호장옹은 그 자제들과 더불어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승묘는 『열반경』을 강의하고 해석하는 일을 일상적인 일로 삼고 그 강령의 취지를 간략히 서술하니 오래 배운 사람은 그 근원을 깊이 알게 되었고, 문구를 분석하는 일도 모두 환경에 맞게 요약하고 잘라 해석하였으므로 강의할 때마다 내용이 모두 달랐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 가운데 성취한 사람이 드물었으나 영걸(英傑)한 사람들은 칭찬하였다.
그는 하남(河南) 지방에서 교화를 행하였는데, 그보다 높은 존대와 공경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초청되어 고향 땅에 가게 되자 고향에서는 술과 고기를 모두 끊고 밭에 있는 파와 마늘은 흙으로 덮어버렸다.
이 모두는 가르쳐서 한 일이 아니고 백성들 자신이 악한 것에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학사 담연(曇延)이라는 사람이 있어 종본(宗本)을 이어 저술하여 다시 그의 지경[致]을 넓혔는데 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나타나 있다.
032_0996_a_06L 一名道妙本住冀州後居河東蒱坂禁行精苦聰慧夙成遍覽群尤通講論而稟性謙退喜慍不干其抱故每講下座必合掌懺悔云意難知豈凡夫所測今所說者傳受先師未敢專輒乞大衆於斯法義是若非布施歡喜時以解冠前彦隆端達睹其虛己皆服其德義衆益從之後住蒲鄕常念寺卽仁壽寺也聚徒集業以弘法樹功擊響周齊甚高名望太祖特加尊敬大統年時西域獻佛舍利太祖以妙弘讚著續遂送令供因奉以頂戴曉夜旋仰經于一年忽於中宵放光滿室螺旋出窗漸延于外須臾光照四遠騰扇其焰照屬天地當有見者謂寺家失火競來救及睹神光乃從金甁而出皆嘆未曾有也妙仰瞻靈相涕泗交撗乃燒跪而啓曰法界衆生已睹聖迹#伏願韜袐靈景反寂歸空於是光還螺卷入甁內爾夜州治士女燒香讚歎之聲聞于數十里寺有一僧睡居房內衆共喚之惛惛不覺竟不見光未幾便遇厲疾咸言宿業所致有感見之差自妙之云亡光不復現其本佛骨今仍在焉昔齊武平末古城中白馬寺此是石趙時浮圖澄所造本爲木塔年增朽壞勅遣修之掘得舍利三粒一赤一白一靑寶甁盛之京邑貴賤共看心至者颯然上不信戲慢之儔傾亦不出時俗迴邪者衆齊王舅廣武王胡長邕曾染佛宗勅令還俗雖居貴望不捨具置舍利於水鉢請乞行道卽見三相逐上水旋器右行七遍旣滿時沈下邕與子弟更加深信而妙講解涅槃以爲恒業敍略綱致久學者深會其源分剖文句皆臨機約截遍皆異所以學侶罕成而爲英傑者所美化行河表重敬莫高延及之鄕酒肉皆絕現生蔥韭以土掩覆竝非由教令而下民自徙其惡矣有學士曇延承著宗本更廣其致具見別傳

9) 주나라 장안(長安) 숭화사(崇華寺) 석혜선전(釋慧善傳)
032_0996_c_02L釋慧善
032_0996_c_02L혜선은 어려서 출가하여 법승(法勝)의 『아비담론(阿毘曇論)』에 뛰어났으며, 양도(楊都)의 서현사(栖玄寺)에 거처하였는데 도를 논할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양나라 말엽에 난을 피하여 강릉(江陵)으로 갔다가 승성(承聖) 말년에 진(秦)나라에 사로잡혀 장안(長安)의 숭화사(崇華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의학(義學)의 아름다움으로 주나라 재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특별한 공양을 받게 되었다.
도를 펴고 인도하는 일을 늙어 죽을 때까지 하였으며, 천보(天保) 연간에 장안에서 입적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혜선은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의할 때 늘 소승(小乘)을 인용하여 대비 고증을 하며 내용을 성립시켰다. 그런 까닭에 글의 차례에 근거하여 정밀한 이치를 갈라서 하나씩 해석하였다. 비유하면 모든 별과 달이 태양의 밝음을 돕는 것 같았고, 마치 수없는 꽃잎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것과 같았다. 그런 까닭에 글을 저술하고는 그것을 『산화론(散花論)』이라고 하였다.
그 서문에는 대략 이렇게 썼다.
“저술의 근본은 말은 간략하게 하고 이치는 풍부하게 하는 데 두었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저작을 독파하였으나 지금 그것을 차례로 순서를 매기는 것은 바로 이 원칙을 따른 것이다. 이 원칙을 훤하게 밝혀 글을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에 접하는 것을 은근히 하고 글을 보는 것은 쉽다.”
그가 쓴 글은 많으나 다 쓰지 않는다.
032_0996_c_03L 幼出家善法勝毘曇住楊都拪玄寺徵擊論道四座驚神會有梁末序逃難江陵承聖季年因俘秦壤住長安崇華寺義學之美爲周冢宰見知別修供養敷導終老以天和年卒於長安時年六十善以大智度論每引小乘相證成義故依文次第釋精理譬諸星月助朗太陽猶如衆繽紛而散亂故著斯文名爲散花論也其序略云著述之體貴言約而理豐余頗悉諸作而今覶縷者正由斯轍罕人諳練是以觸義慇懃文指掌有詳覽者想鑑茲焉文多不盡

10) 주나라 동주(潼州) 광흥사(光興寺) 석보단전(釋寶彖傳)
032_0996_c_15L釋寶彖
032_0997_a_02L보단의 속성은 조씨(趙氏)이며 본래는 안한(安漢) 사람이나 후에 면주(緬州) 창륭(昌隆)의 소계(蘇溪)에서 살았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양보심이 많았으며 지혜로운 마음은 뛰어나고 밝았다. 갓난아이 때부터 남다른 점이 있어 부모들은 그의 도량을 시험해보려고 여러 가지 비단과 꽃과 과일ㆍ활과 화살ㆍ책ㆍ글씨 등을 그의 앞에 펴놓았더니, 보단은 곧 떡과 과일은 헤집어 제쳐놓고 책과 글씨만을 취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은 모두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겼으며, 모두 그가 반드시 도를 성취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7세가 되었을 때 어떤 인연으로 파서군(巴西郡)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의 태수(太守) 양조(楊眺)가 물었다.
“듣건대 너는 아이이지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노자(老子)를 노자라고 이름지었는가?”
보단이 말하였다.
“처음 태어났을 때 머리가 하얗기 때문입니다.”
양조는 속으로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6세 때 양(梁)나라 평서왕(平西王)을 섬겼다. 처음에는 도사(道士)의 동자(童子)가 되었고 아직 불법을 배우지 못했었는데, 평서왕은 그의 기틀과 밝은 지혜를 알고 공덕을 쌓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로 하여 불경을 보게 되었는데 그 글과 표현을 좋게 여기고 이치와 뜻을 귀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더욱 나아가 살피고 읽고 외우니 분별과 깨달음이 더욱 분명해졌고 항상 불법만을 찾아 어둡고 막연한 것을 제거하게 되었다.
나이 24세 때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으며 곧 구족계를 받고는 먼저 율전을 들었으며 몇 해 사이에 계율을 지키는 것과 계율을 어기는 것을 거의 통달하였다. 다시 『성실론(成實論)』의 강의를 들었는데 피로를 모르고 전수받았으며, 자기가 기록한 것에 대하여 인색하지 않아 필요하다는 사람에게는 주곤 하였다. 마음을 닦아 가르치는 것은 과목마다 따로 결과를 이루었는데, 말년에는 다시 승소(僧韶) 법사의 강의를 듣고 특별히 그 뜻과 지향을 추구하였다.
무릉왕(武陵王)이 스님들을 크게 마하당(摩訶堂)에 모아놓고 『청관음경(請觀音經)』을 강의하게 하였다. 애초에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인데다 본래 글의 해설서도 없었기에 처음의 마음과 지혜를 발동하여 문구의 이치를 뽑아 올렸더니, 말과 내용이 밝게 합치되어 듣는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의 말을 개인적으로 기록하여 해설책을 이루어 그것이 널리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후 부천(涪川)으로 돌아와 도인과 속인을 가르쳐 교화하였으며, 외전(外典)과 불경을 이어가며 가르쳐서 외도들을 인도하여 정도로 귀의하게 한 것이 열에 아홉이나 되었다.
그는 또한 약방문을 뽑아 종합해 가지고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였는데, 혹 어떤 사람들이 돈과 비단으로 보상하면 모두 거절하고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의리를 잊지 못하고 그의 공덕을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문득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 장애로 인하여 함께 출가하지 못한 사람은 몸이 다할 때까지 8계(戒)를 지켰다.
보단은 비록 그의 도가 정락(井絡:별이름)을 초월하고, 그의 도풍은 민산(岷山)과 아미산(峨嵋山)에까지 전파되었으나 그의 뜻과 생각은 남달리 정법(正法)을 통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성심으로 목표를 세워놓고 남들과 겨루지도 않았다.
그는 『대집경(大集經)』이 아직 촉(蜀)나라에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조목별로 해석하는 글을 써서 후배들에게 의거할 곳이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어 경과 율에 부합되게 저술하고 산에 가서 가필하여 편찬하였다. 대중이 다시 그곳으로 찾아오는 통에 복잡하게 되자 다시 방도를 깊이 강구하여 하나도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처음 「허공장품(虛空藏品)」에 이르러 뜻을 해득하지 못할 곳이 있어 눈을 감고 이것을 생각하였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법상에서 3~4척 정도의 높이로 공중으로 떠오르고 갑자기 크게 깨달음이 왔다. 글을 다 읽자 지혜가 생겨나서 베껴 써 가지고 해설을 하지 않아도 이에 의거하여 말을 하면 되었고 그 뜻과 힘은 견주기 어려웠다.
당시 익주(益州) 무서사(武誓寺)의 스님 보원(寶願)이 제일 먼저 강의를 청하니 대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전에 듣지 못한 법문을 듣고는 기뻐하며 흐뭇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승애(僧崖)보살이 세간에 나타나 경본(經本)을 만들게 되었고, 그 덕에 전해지고 지켜져서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보방(寶坊)의 한 학문이 검남(劍南) 지방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후 『열반경』과 『법화경』 등의 소(疏)를 지었는데, 복잡한 것을 모두 빼버리고 쉽게 풀이하여 강의를 들으면 의문되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고을에서 사는 도인과 속인들은 만나기 어려운 스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의 수명은 길지 않다. 오직 스스로가 몸과 마음을 격려하고 먹고 입는 것을 절약하여 남은 수명을 이어가기를 바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거칠고 낡은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고 널리 권유하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중생을 보호하고 대중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평소의 변치 않는 임무로 여겼다.
어느 날 갑자기 중풍에 걸려 오래도록 말을 하지 못하였다.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을 때 스스로 마음속으로 서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염려하셔서 모든 중생들에게 분부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제자들을 돌아보며 화와 복에 대해 가르쳐주고는 “나는 곧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고, 유언의 글을 지어 재촉하였다. 옷과 생활용구를 곳곳에 나누어 주고 더욱 삼보(三寶)를 받들 것을 부탁하며 붓을 놓고 쓰기를 마치자 다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중드는 사람이 미음을 들 것을 권하자 입을 다물고 거절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곧 합장하여 이마에 대었으며 동주(潼洲)의 광흥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절은 지금의 이른바 면주(綿州)의 대진향사(大振嚮寺)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으며, 북주의 보정(保定) 원년 11월 23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본래 거처하던 산이 5월에 까닭 없이 저절로 무너지면서 먼지와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모든 대중이 놀라고 의아해 하였으나 아무도 그 기이한 현상을 추측하지 못하였다.
8월에 이르러 산의 북쪽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절의 불상(佛像)이 모두 산사를 떠나 허공을 타고 북쪽으로 가는데 깃발과 꽃이 앞에 줄지어 늘어서고 스님들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절에 찾아가 물어보니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보단은 광흥사(光興寺) 강당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일을 말하였더니, 보단이 이르기를 “그것은 나의 앞날을 예고한 모습이며 다른 것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후 이 절에서 세상을 마치자 과연 그가 예견한 말과 같았다 한다.
032_0996_c_16L 姓趙氏本安漢人後居緜州昌隆之蘇溪焉天性仁讓慧心俊朗嬰孩有異二親欲試其度以諸綵帛花果弓矢書疏羅置其前彖便撥除餠果止取書疏衆共嘆異咸知必有成濟也及年七歲有緣至巴西郡守楊眺問云承兒大讀書因何名爲老子彖曰始生頭白故也眺密異之十六事梁平西王初爲道士童子學佛法平西識其機鑑使知營功德因見佛經欣其文名重其義旨撿讀誦迷悟轉分恒求佛法用祛昏年二十有四方得出家卽受具戒先聽律典首尾數年略通持犯迴聽成實傳授忘倦不悋私記須便輒給硏心所指科科別致末又聽韶法師偏窮旨趣武陵王問師大集摩訶令講請觀音初未綴心本無文疏始役情慧抽帖句理詞義洞合聽者盈席私記其言因成疏本廣行於世後還涪川開化道俗外典佛經相續訓導引邪歸正十室而九又鈔集醫療諸疾苦或報以金帛者一無所便有銜義懷德者捨俗出家或緣障未諧者盡形八戒彖雖道張井絡風播岷峨而志意頹然唯在通於正誠心標樹不競人物見大集一經未弘蜀境欲爲之疏記使後學有歸乃付著經律就山修纘而衆復尋之致有煩擾再稔方就一無留難初至虛空藏品於義不達閉目思之不覺身上空中離牀三四尺許欻然大悟竟文慧發寫不供宣據此爲言志力難擬矣益州武誓寺僧寶願最初請講大衆雲集聞所未聞莫不歎悅又屬菩薩出世爲造經本因爾傳持今不絕故寶坊一學曲被劍南後制涅槃法花等疏皆省繁易解聽無遺州境皁素生難遭想每言吾命不唯當自勵身心節約衣食望引殘運耳故麤弊接報弘誘爲心護生安以爲恒務忽感風疾不言久之將欲絕私心發誓願諸佛護念得分付諸物作是念已欻然能語顧命子誨示禍福吾卽當去催作遺疏處衣資倍奉三寶下筆署訖還不能侍人逼以漿飮閉口拒之疾甚爲喚佛名便合掌在額奄然而卒於潼州光興寺今所謂緜州大振嚮寺也春秋五十卽周之保定元年十一月二十三日矣初未終之前本所住山於五月內無故自崩塵霧闇天擧衆驚駭莫測其怪至于八月中山北村人竝見尊像從山寺來乘空北逝花列前僧衆從後往問寺中都無知當爾之時彖赴光興寺講因以白彖曰此我之徵相不豫他也及終於此寺果如所圖云

11) 제나라 낙주(洛州) 사문 석담연전(釋曇衍傳)
032_0997_c_04L釋曇衍
032_0998_a_02L담연의 속성은 하후씨(夏侯氏)이며 남연주(南兗州) 사람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치아가 있어서 세속에서 이것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7세에 스승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명민함이 남달리 뛰어났고, 15세에 발탁되어 고을의 도읍의 공사(公事)가 되었는데 틈만 있으면 불교의 강의를 들었다.
18세 때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업도(鄴都)에 과거보러 가게 되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광 율사(光律師)의 법석에서 법문을 듣고 곧 계율에 귀의할 것을 마음먹고 세속의 일을 버리고 오로지 불교의 이치만을 공부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을 배우니 통달한 선배들의 공적을 따라가게 되었다.
23세에 광 율사에게 귀의하고 출가하여 곧 구족계를 받게 되었다. 법문을 듣는데 골몰하여 여가가 없어서 마침내 밥 먹는 시간과 쉬는 시간까지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경장(經藏)의 취지에 의문이 있으면 일반적으로 스승에게 묻는 것이 상례인데 모두 마다하고 그들에게 찾아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의 세계를 개척하고 나름대로의 규범을 세워놓게 되었다. 이에 여러 학도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스승을 따랐으나 마음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여러 날 만에 환하게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담장과 마주 보면 캄캄해서 알 것이 없지만 목을 길게 빼어들고 문밖으로 나가면 멀고 가까운 곳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강론하는 일은 폐지한 일이 없게 되었고 현묘한 진리를 도와 찬미하였는데, 그의 목소리와 말재주는 웅장하고 맑았으며 그의 말은 때와 인연과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제(齊)나라ㆍ조(趙)나라ㆍ정(鄭)나라ㆍ연(燕)나라에서는 모두 그의 신비한 교화를 받게 되었으며 비록 인연이 막힌 때를 만나더라도 고통에 머무르며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항상 그의 의학(義學)을 따르는 스님이 천여 명에 달하였고, 출가한 거사(居士)들도 5백 명에 가까웠다. 이 모든 사람들이 도에 대한 뜻이 넓었고 지켜야 할 계율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군(趙郡)왕 고예(高叡)와 상락(上洛)왕 고원해(高元海)와 교주(膠州) 자사 두필(杜弼)은 모두가 제나라 조정의 외척이고 중신(重臣)들인데, 이들이 그에게 정을 두고 공경하고 받들었으며, 복야(僕射) 조효징(祖孝徵)은 황제에게 보고하여 국도(國都)의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그는 도정(道政)을 빛나고 화합하게 하여 현문(玄門)의 기강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문장과 이론을 널리 퍼뜨렸는데 말은 짧고 요긴한 것만 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한 구절만을 지적하여 그것으로 광범위한 글 내용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의 명철하고 간결하고 깊이 있는 말을 귀중히 여겼다.
그는 늘 한가한 날에는 홀로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속세의 무리 속에 있을 때 존귀한 계율을 밝히지 못하여 마침내 세속의 무지한 자들이 우리의 청정한 계율을 더럽히게 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얻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개황(開皇) 원년(581) 3월 18일에 갑자기 시중드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죽음이 다가왔다”고 하고 곧 미륵불을 염송하였으며 음성과 기운이 모두 끊어졌다. 이때는 바로 정오였다. 옆에 있던 스님들이 함께 보니 얼굴빛은 기쁘고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9세였으며 명주(洺州)의 노씨(蘆氏) 집에서 입적하였다.
032_0997_c_05L 姓夏侯氏南兗州人初生之牙齒具焉世俗異之七歲從學敏絕倫十五擢爲州都公事有隙便聽釋講十八擧秀才貢上鄴都過聽光公法席卽稟歸戒棄捨俗務專功佛理學流三載績鄰前達年二十三投光出家卽爲受戒聽涉無睱乃捐食息然於藏旨有疑通諮碩學竝辭罔逮遂開拓寰宇置立規猷顧諸徒吾從師積年心悟未決賴因遊意累日豁然有據其猶低目面牆則冥無所解延頸出戶則遠近斯見由是講事無廢毘讚玄理聲辯雄亮言會時機自齊皆履神化雖遭緣安苦無倦常隨義學千僧有餘家居士近於五百竝恢廓道志戒禁居心趙郡王高睿上洛王高元海州刺史杜弼竝齊朝懿戚重臣留情敬奉僕射祖孝徵奏爲國都緝諧道不墜玄綱而披散詞理言尚寡要故經文繁富者則指摘一句用攝廣時人貴其通贍鎔裁而簡衷矣於睱日私恨曰昔在俗流尊戒不見令世人無知污我淨戒若不爾者應有所得以開皇元年三月十八日忽告侍人無常至矣便誦念彌勒佛聲氣俱盡於時正中旁僧同觀顏色怡悅時年七十有九卒於洺州盧氏宅
담연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남달라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지조가 곧고 바르며 마음은 슬기롭고 검소하였으며 세속을 제도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그런 까닭에 재물을 나누어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먼저 구제하였고, 법의 이익을 입는다는 것은 먼저 주는 것을 행하는 것과 같았다.
경이나 불상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받들어 절하고 영송(迎送)하였으며 길에서 가난하고 누추한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삼가하는 천성과 깊은 믿음은 이와 같았다.
또한 항상 계율에 대한 설법을 듣는 것을 즐겼고, 죽을 때까지 『유마경』과 『승만경』 두 경전을 하루에 한 번씩 외웠으며, 맵고 비리고 냄새나는 물건은 한 번도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았다. 아랫도리의 기운이 몸을 핍박하면 문밖으로 나갔는데, 이것은 청정한 승방에 더러운 기운이 배어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생을 마치기 전 꿈에 담연이 주홍빛 옷을 입고 곱슬머리가 등에까지 드리운 두 동자의 시위를 받으며 공중으로 올라가 높이 서북쪽으로 갔는데 이어 곧 생을 마치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하늘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하였다.
032_0998_a_09L衍之生也殊相感人而立操貞直用睿約情及濟世故積散所拯貧病爲初法利所被如行先授但見經像必奉禮迎送道遇貧陋必悲憐垂泣其謹質深信爲若此也又恒樂聽戒生來兩闕維摩勝鬘日緣一遍辛腥臭物曾不臨矚下氣逼流身出戶外以淸淨僧房不爲熏勃故也未終之有夢見衍朱衣螺髮頒垂於背二童侍之昇空而西北高逝尋爾便共以爲天道者矣


12) 진(陳)나라 양도(楊都) 장엄사(莊嚴寺) 석혜영전(釋慧榮傳)
032_0998_a_20L釋慧榮
혜영의 속성은 고씨(顧氏)이며, 회계(會稽)현 산음(山陰) 사람이다.
그는 양(梁)나라 고조(高祖) 대통(大通) 연간(527~529)에 부모를 작별하고 출가하였다.
032_0998_a_21L 姓顧氏會稽山陰人也梁高祖大通年辭親出聽
032_0998_b_02L당시 건초사[建初]와 팽성(彭城)에서 크게 『성실론』을 널리 강론하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한 번도 이것을 공부한 일이 없었는데도 곧 정밀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니 대중이 다 감탄하였으며 따라서 명망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타고난 성품은 허심하고 도량이 크며 세속 일을 가르치지 않으며 오직 불법의 일에만 몰두하고 그 밖의 일에는 마음을 두는 일이 없었다.
고향의 부모는 그가 몸이 약한 것이 애처로워 자주 인편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으나 혜영은 이것을 받으면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는 여러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나라고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의 행을 폐지하게 된다. 편지 안에 있는 것은 단 두 글자뿐이다. 그것을 무엇 때문에 뜯어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가고 묻자 그는 길흉(吉凶)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공덕을 쌓기를 30여 년간 계속 하여서 의학(義學)의 용이라 불리지 않으면 맹세코 발길을 돌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서원을 세웠다. 이때부터 오로지 학업에만 용맹하게 정진하니 명성과 칭송이 더욱 멀리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에 곧 강론으로 깨우쳐주니 학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고 나이가 50세가 되자 문하 제자들의 수도 역시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크게 법석을 벌리고 널리 도인들과 속인을 맞아들였다.
당시 양나라의 태자도 법석에 참가하였는데 평소에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의하는 스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게 하니 그는 곧 높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혈(禹穴:會穢의 다른 이름)의 혜영(慧榮)이며 강동(江東)의 유일한 존재인데 태자가 이것을 모른다면 어떻게 태자라 하겠는가.”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았으며 자신에 대한 찬탄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혜영은 조용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옆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그후 문하의 제자들과 함께 그의 고향에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그의 어머니는 생존하고 있었으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모두 죽고 없었다. 이에 슬프게 탄식하였다.

열다섯에 고향과 이웃 작별하고
오십에 고향과 이웃을 찾아오니
젊은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이 많은 노인은 한 사람도 없구나.

그의 본고장의 도인과 속인들이 그의 명예를 더욱 빛내어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마저 싫어하였다.
고을에서는 여러 대중을 모아놓고 그로 하여금 강의를 하게 하니 혜영이 말하였다.
“나의 학문은 광범위하다. 곧 어떤 제목을 세워 그것을 강의한다면, 혹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다른 말을 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 대중들에게 맡겨서 그 내용을 분별하게 한 다음에 문제를 세우고 그에 근거하겠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다문박식하고 긍지가 높다고 하나 80종호(種好)를 제목으로 내세우면 반드시 외우고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때 혜영이 “대중 가운데 사람이 없구나. 이것은 글은 번거롭지만 그 이치는 알기 쉬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상하로 나누고 법수로 요약해서 잠깐 사이에 수효를 헤아리고 이름을 열거하며 바탕을 드러내니, 모두가 비록 부딪치기는 어려웠으나 아무도 그것을 끝마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년에 그는 다시 고을에서 나가서 강론하여 가르쳐 주는 일을 계속하다가 지덕(至德) 말년(586)에 양도(楊都)에서 입적하였다.
032_0998_a_22L建初彭城盛弘成實素未陳略卽盡淸辯一衆同便開令望而稟性虛廓不指世務惟以法事餘全無敍鄕邑二親哀其弱喪數因行李寄以書信榮得而焚顧諸友曰余豈不懷乎廢余業也書中但二字耳復何開乎人問是何吉凶也如此積功三十餘載不號義龍誓無返迹自是專業勇鎧聲稱彌遠卽而講悟學者歸之年至五十門人亦爾乃大弘法席廣延緇素梁儲在坐素不識之令問講者何名乃抗聲曰禹穴慧榮江東獨步太子不識何謂儲君一坐掩耳以爲彭亨之太甚也榮從容如舊旁若無人與諸徒還歸故邑其母尚在餘竝物乃喟然嘆曰十五辭鄰故五十還故鄰少年不識我長老無一人本邑道俗欲光其價而忌其言令也大集諸衆令其豎義榮曰余學廣矣輒豎恐致餘詞任衆擧其義門然後標據衆以其博達矜尚乃令豎八十種好謂必不能誦持榮曰擧衆無人也乃文繁義可知耳卽部分上下以法繩持須臾牒數列名出體僉雖難激蓋無成濟晩又出都相仍講授至德末年卒於楊都

13) 수(隋)나라 수도 연흥사(延興寺) 석담연전(釋曇延傳)
032_0998_c_02L釋曇延
032_0998_c_02L담연의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포주(蒲州)의 상천(桑泉)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세력이 있는 가문이었고 제나라와 주나라에서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책을 좋아해서 고향과 나라에서 칭찬을 받았다. 나이 16세 때 어떤 일로 하여 절에 놀러갔다가 승묘(僧妙) 법사가 『열반경』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았고, 마침내 세속을 버리고 불법에 복응하여 그 심오한 취지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맑고 뛰어났는데 확연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당시 젊은 나이로 강론에 참가하였는데, 말재주가 우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여유가 있고 방정하고 청아하였다.
그는 매번 “불성(佛性)의 묘리는 『열반경』을 종문의 극치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마음과 정신이 노닐 곳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담연은 키가 9척 5촌이나 되며 손이 무릎 아래에까지 내려갔으며, 안광(眼光)이 밖으로 한 자 남짓 뿜어져 나왔다. 용모와 행동은 온화하고 엄숙하였으며 중생들을 자비로 널리 깨우치니 가히 당당한 대장부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걸어갈 때는 앞만 바라보며 곧바로 전진하고 뒤를 돌아볼 때는 반드시 온몸을 돌렸다. 풍채와 정신이 남달랐기에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 공덕을 전하고 있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기국(器局)과 도량이 날로 커지고 기틀과 비추어 보는 안목이 뛰어나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지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는 비록 심오한 경전을 많이 보았으나 혹 진리를 놓친 것이 있을까 봐 걱정되어 마침내 다시 『화엄경[華嚴]』ㆍ『대지도론[大論]』ㆍ『십지론[十地]』ㆍ『지지론[地持]』ㆍ『불성론[佛性]』ㆍ보성론[寶性]』 등 여러 부의 강의를 듣고 선각자의 수준을 뛰어넘어 피안으로의 나루터를 총괄하고 기준이 되는 표적이 되었다.
그는 그림자를 보며 말하기를 “너와 더불어 물에 잠긴 지 오래 되었으니 떠돌아다니다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은 도를 따라 몸을 숨기고 세상을 벗어나는 요긴한 도를 잘 생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남부 태행사(太行寺)의 백제사(百梯寺)에 은거하였다. 이 산은 지금의 이른바 중조산(中朝山)이다.
당시 그 산에는 설(薛) 거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학문은 도교와 유교[玄儒]를 모두 겸하였으며 해박하고 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담연이 나이가 젊지만 도를 알고 일찍이 깨달았는데 일반 사람들을 뛰어넘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찾아가서 담연을 만나게 되었다.
말과 해학이 둘 다 높은 경지에 있었기에 아직 인사도 나누기 전에 설 거사는 곧 장난삼아 ‘방원동정(方園動靜)’의 네 글자로 된 제목을 제시하고 담연에게 이것을 바탕으로 글을 지으라고 하니, 담연은 그 소리에 응하여 즉시 대답하였다.

모난 것은 방등성(方等城)과 같고
둥근 것은 지혜의 태양과 같으며
움직임은 넘실거리는 물결 같고
고요함은 열반실(涅槃室)과 같다네.

그러자 설 거사는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 찬탄해마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껏 보지 못한 일이다. 세상에 드물게 우뚝 태어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후로는 항상 찾아와서 질의하고 강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담연은 숨어살면서 뜻을 고요히 하고 『열반경』에 대한 자세한 소(疏)를 저술하려고 하였는데, 혹 보통사람들의 인정에 끌려 지체하는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늘 자나깨나 성심으로 기도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꿈에 어떤 사람이 흰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왔는데 말꼬리가 땅을 쓸었으며, 그 사람이 경의 뜻을 이야기해 주었다. 담연은 손으로 말갈기를 잡고 함께 청담(淸談)을 나누다가 꿈을 깬 후에 생각하였다.
“이는 마명 대사(馬鳴大士)가 틀림없다. 나에게 진리의 실마리를 전수한 것이며 말갈기를 잡은 것은 그 종지(宗旨)를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기와 사실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소를 저술하면서 게송을 지어서 말하였다.

여래장에 진심으로 귀의하고
불가사의한 법에 귀의합니다.

편찬을 끝낸 다음에도 바른 이치에 맞지 않는 곳이 있을까 봐 걱정되어 마침내 경과 소를 가지고 그 고을에 있는 인수사(仁壽寺)의 사리탑 앞에 가서 진열해 놓고 향을 태우며 서원하였다.
“담연이 평범한 도량으로 우러러 성인의 마음을 헤아려 하나하나 따져보며 풀이하는 일을 지금 끝마쳤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만든 책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깊이 말씀드리면 밝은 영험(靈驗)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감응이 없으면 절대로 전수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열반경』과 두루마리에서 나란히 광명을 방출되어 밤새도록 상서로움을 나타냈다. 도인과 속인할 것 없이 모두가 경사라고 칭송하였다. 또 탑 속의 사리에서도 신령스러운 광명을 비추었는데, 사흘 밤낮으로 밝게 비추며 중단하지 않았으며, 위로는 하늘의 은하수에 미치고 아래로는 온 고을을 비추었다. 온 고을사람들이 이 광명을 보고 모두 찾아와서 절을 하였다. 그 광명이 비치는 것이 묘 법사(妙法師)의 경우와 같았으니 이것은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감응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곧 표문으로 보고하니 황제는 대단히 기뻐하였고 담연에게 강론에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이미 상서로운 감응을 불러온 만큼 다시 오래도록 널리 연설을 베풀게 되었고, 그가 저술한 소(疏)는 세간에 자세히 알려졌다. 당시 모든 이름 높고 달통한 스님들은 모두가 이것을 혜원(慧遠)이 지은 책에다 비교하였다. 혜원은 문구의 표현이 내용에 알맞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실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쉽지 않으나 대강을 뚜렷이 들어 올렸고, 모든 것을 명백히 밝히고 멀리 쏜살같이 달리는 면에 있어서는 담연이 벌써 혜원을 앞선 지 오래라고 평가하였다.
주나라 태조(太祖)는 평소에 스님의 도성(道聲)에 고개를 숙여온 사람인데 더욱 흠모하고 공경하여 몸소 강주(講主)로 섬기고 직접 그의 깨끗한 설교를 들었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들어 구경하는 모습이 저자와 같았으나 공양 받을 일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겸허하였으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태조는 백제사(百梯寺)가 궁궐에서 너무 멀어서 강의를 받고 돌봐주는 일이 고되다는 이유로 마침내 중조산(中朝山) 서쪽 영마루의 경치 좋은 곳에 그를 위해 절을 세우고 운거사(雲居寺)라고 이름지었고, 나라의 녹봉(奉祿)으로 공급하게 하고는 이것을 청중들에게 알렸다.
진(陳)나라에 어사[躬使] 주홍정(周弘正)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널리 경전들을 상고하였고 말재주가 강물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 일품이었다. 세 나라로 돌아다니며 연설하였는데 그와 맞서 논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나라 건덕(建德) 연간의 중엽에 명을 받고 진나라(秦:後秦)로 갔다. 황제는 그의 풍채와 민첩함을 의아하게 생각하였고, 온 조정이 그의 풍채에 한풀 꺾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명을 내려 국내의 말재주가 좋은 사람을 찾되, 도인이건 속인이건 가리지 말며 암혈(岩穴)에 숨어사는 사람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주홍정과 상대하여 논쟁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 하였으며, 나라의 풍모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당시 포주(蒲州) 자사 중산공(中山公) 우문씨(宇文氏)는 일찍이 담연의 식견과 풍격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터라 마침내 표문을 올렸다.
“담연 법사는 풍격과 식견이 크고 위대하며 풍채는 시원스럽기 남다르며 나이는 비록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으나 훌륭한 말재주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황제는 곧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날을 정해서 석존(釋尊)을 위한 모임을 열게 하였고, 황제가 몸소 법회에 행차하고 조정의 재상들도 모두 참가하였다. 그때 주나라에서는 국승(國僧)의 예우를 받고 있는 두 분의 스님이 차례로 법좌에 올라 발언하였는데, 발언이 끝나면 이어 주홍정의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의 논리는 근거가 중중첩첩하였는데 이것을 헤아려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황제와 관리들은 일시에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때 담연은 말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차례가 아닌데도 일어섰다.
그러나 황제가 말하였다.
“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갑자기 일어나는가?”
담연이 말하였다.
“만약 이곳이 다른 지방의 대사와 만나는 자리라면 큰 스님들이 참석하여야 하겠지만 지금은 먼 나라의 하찮은 신하와 만나는 자리이니 소승(小僧)만으로도 넉넉히 맞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담연은 곧바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이때 황제가 다시 말하였다.
“왜 삼보(三寶)에 절하지 않는가?”
담연이 대답하였다.
“제 자신의 힘으로 견주어 보고 성현의 가피와 도움을 빌릴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몹시 기뻐하였다.
이에 주홍정이 마침내 자기 생각을 얽어 어려운 질문을 전개하니 담연은 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어려운 관문을 열어나갔다. 주홍정은 기회를 엿보아가며 앞의 말을 빌어 뒷말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담연이 기세를 늦추지 않고 마른 나무를 꺾듯이 논박해 나갔다.
그러자 주홍정은 곧 머리가 땅에 닿게 절하고 엎드렸으며, 귀의할 곳을 늦게야 알게 된 것을 개탄하며 스스로 말하였다.
“제자가 세 나라를 거쳐 오면서 스승으로 섬길 만한 스승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곧 받들어 계를 받을 것을 청하고 밤낮으로 의문되는 것을 물었으며, 영원히 종사(宗師)로 삼겠다고 하였다. 진나라로 돌아갈 때에는 담연이 저술한 의문(義門)과 그의 거동과 모습 등을 모두 기록하여 가지고 귀국하였고, 저녁마다 북쪽을 향해 절하며 담연을 보살이라고 하였다.
처음 주홍정이 담연과 이별하던 날, 미리 풍운산해시(風雲山海詩) 40수를 지었는데, 모두가 기발한 생각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이것을 담연에게 올리면서 훗날 이별의 기념으로 남겨달라고 하였다. 담연은 그 시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찾아보지 않고 이에 화답하였는데, 제시(題詩)가 그전에 외운 시를 다시 쓰는 것과 같았으며 원운(元韻)과 같은 운자로 응수하였으니, 그의 생각은 참으로 크게 달통한 경지였다. 이에 주홍정은 크게 탄복하고 다시는 대항하여 말하는 일이 없이 곧 꿇어 엎드려 말하였다.
“원컨대 한마디 말씀을 내려주시면 나의 가슴속에 새겨두겠습니다.”
그러자 담연이 말하였다.
“손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손님은 앉지 못하는구나. 떠나 갈 사람은 매우 먼 곳으로 가는데, 더위는 불같으니 법도의 쓰임새는 육신에 싸두어라.”
이에 주홍정이 말하였다.
“이것을 언제나 제 마음속에 새겨두겠습니다.”
황제는 담연의 깨달음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오부대중이 귀를 기울여 법칙으로 삼으라 하고, 곧 담연에게 나라의 승통(僧統)자리를 내려주었다. 무릇 주나라를 인도하여 여기에 이르게 한 것에는 담연에게 또한 공이 있는 것이다.
그후 무제(武帝)가 두 교(佛敎와 道敎)를 없애려 하자, 담연은 극한의 충고를 하였으나 황제가 이것을 따르지 않자, 곧 태행산(太行山)에 숨어서 인간세계와 발을 끊었다.
후에 황제가 담연을 불러 중사(中使)의 벼슬로 황제를 도우라고 몇 번이나 전달하였으나, 그는 지조를 굳게 지켰고 다시 더 깊이 산속에 숨었으며 여러 번 불렀으나 불러내지 못하였다.
황제의 몸에 병이 들자 예전의 허물을 뒤늦게 뉘우치고 불상을 세우게 하였으며, 또한 120명의 스님들에게 도첩을 주어 보살승으로 삼았다.
이때 담연은 상반(上班)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속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한스러워 다시 깊은 숲속에 숨었다.
그후 수나라 문제(文帝)가 나라를 세우고 아직 스님들의 도첩제도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담연은 정부가 바뀐 것을 알고 곧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고 석장(錫杖)을 손에 잡고 왕정(王庭)에 이르러 직접 큰 진리에 대하여 말하였다.
황제가 위로의 말을 하기 전에 그는 곧 먼저 말하였다.
“공손히 듣건대 황제께서는 사해를 다스리기에 힘쓴다고 하니 정신이 고단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곧 대답하였다.
“제자도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였으나 한스러운 것은 아직 두루 일을 마치지 못한 것입니다.”
담연이 말하였다.
“빈도가 예전에 요임금의 세상에 대하여 들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런 세상을 만났습니다.”
황제는 그의 넓은 도량에 대해 듣고 본래 품었던 마음이 흐뭇해져서 함께 불교를 장려할 규모와 성심으로 교화할 근본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담연은 절에 아직 많지 않으나 교법은 흥성하다는 이유로 1,250명의 스님과 5백 명의 동자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황제는 이에 천여 명의 스님들에게 모두 도첩을 내려주라는 명을 내려 담연의 청을 따랐다. 이것이 수(隋)나라 황실에서 불교의 교화가 열린 시초인 것이다. 그후에도 많은 일이 이루어졌는데 무릇 전후하여 따로 도첩을 요청한 스님은 4천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주나라 때 폐지하였던 절도 모두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을 청하였으며 삼보(三寶)가 다시 크게 존중되어 공덕이 처음시기와 같이 번영한 것은 담연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후 수도를 용수(龍首)로 옮기고 광은방(廣恩坊)에 땅을 떼어주어 담연 법사의 대중들을 위한 절을 세우게 하는 지시가 있었고, 개황(開皇) 4년에 다시 명을 내려 연중사(延衆寺)라는 이름을 연흥사(延興寺)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절이 네거리와 마주 보고 있기에 경성(京城)의 동서(東西)에 있는 두 일주문의 이름도 담연 스님의 이름을 취하여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연흥문(延興門)과 연평문(延平門)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은 세상에서 존중받는 이름으로 되었으며 도는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니, 황제가 흠모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옛적에 중천축국(中天竺國)에서 부처님께서 지나간 문이라고 하여 그 문의 이름을 구담문(瞿曇門)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이 나라의 수도 안에서 담연의 이름을 붙여 성문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에 다음가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명을 내려 머물던 운거사(雲居寺)를 서암사(栖巖寺)로 고치고, 대악령(大樂令) 제수제(齊樹提)에게 『중조산불곡(中朝山佛曲)』이라는 노래를 짓게 하여 전파하게 하고 공양하게 하였다.
담연은 그 절에 거처하면서 대중을 모아 업을 이루었다. 황제의 명으로 초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초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자연히 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담연은 이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이로 인하여 머물던 절 이름을 다시 광명사(光明寺)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담연이 말하기를 “교화가 비록 넓어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제멋대로 절에 현판을 달아서는 안된다”고 하고는 다시 상주하여 한 장소에 절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황제도 그것을 옳게 여겼다. 지금의 광명사(光明寺)가 바로 그 절이다. 그의 비밀한 묘법이 드러나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낸 예는 모두가 이와 같았다.
개황 6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중앙과 지방이 황폐하게 되자 황제는 명을 내려 3백 명의 스님들을 정전(正殿)에 초청하여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빌게 하였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감응이 없으니 황제가 말하였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담연이 말하였다.
“한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황제는 돌아와서 여러 관리와 재상들과 의논하였으나 그 뜻을 알 수 없어 수도의 태수(太守)인 소위(蘇威)에게 명하여 담연에게 그 한두 가지의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게 하였다.
담연이 대답하였다.
“폐하는 모든 정사의 주인이요, 여러 신하는 황제를 보좌하는 관리입니다. 모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는 통달하고 있지만 다들 현묘하게 인도하는 데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가 내리기도 하고 내리지 않기도 하는 것이 한두 가지의 이유입니다.”
이에 황제는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로 하고 담연을 대흥전(大興殿)에 초청하여 어좌(御座)에 올라 남쪽을 향해서 법을 내려주게 하고, 황제와 조정의 재상 5품(品)이상의 관리들은 모두 땅에 앉아서 북쪽을 향해서 8계(戒)를 받았다.
계를 주는 일을 마치니 바로 정오(正午)가 되었는데, 하늘에 있던 조각 구름이 잠깐 사이에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단비가 내리니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감동하였고 황제도 기뻐하며 비단 3백 단(段)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담연은 다른 사람과 나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길손과 주인이라는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인지 무릇 재물이 생기면 불쌍하거나 공경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 까닭에 사방 먼 곳을 떠돌아다니거나 거처하면 귀의하는 사람이 남달리 많았다.
한때는 절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다. 주지 도목(道睦)이 알리기를 “승단의 식량이 두 끼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을 해산시키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담연이 말하기를 “쌀이 다 떨어진 다음에야 대중을 흩어지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문제(文帝)가 과연 20발우의 식량을 보내왔으며, 대중도 이로 말미암아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담연 스님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서 대중을 머물게 하고 공양을 기다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또 쌀 5백 석을 보내왔다. 이때는 흉년이 계속되던 시기였지만 이에 힘입어 대중들이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이미 사부(師父)로 존경한다는 뜻을 알렸고 다시 직계친족과 외척들에게 명하여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밥 먹고 쉴 때에도 황제는 몸소 음식을 받들어 올리고 손수 옷을 간수하여 돈독한 제자의 거동을 표시하였으며 공경을 다하는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당시 임금으로부터 예의 받고 존중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후 황제의 명으로 평등사문(平等沙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라의 형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그를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그가 감복하여 교화를 따르게 하였고, 혹 산림(山林)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수나라 개황 8년(588) 8월 13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032_0998_c_03L 俗緣王氏蒲州桑泉人也家豪族宦歷齊周而性協書籍鄕邦稱敍年十六因遊寺聽妙法師講涅探悟其旨遂捨俗服膺幽討深致出言淸越厲然不群時在弱冠便就講說詞辯優贍弘裕方雅每云佛性妙理爲涅槃宗極足爲心神之遊翫延形長九尺五寸手垂過膝目光外發長可尺餘容止邕肅慈誘汎博可謂堂堂然也視前直進顧必轉身風骨陶融時共傳德及進具後器度日新機鑑俊拔遐邇屬目雖大觀奧而恐理在膚寸乃更聽華嚴大論十地地持佛性寶性等諸部皆超略前導統津准的自顧影而言曰與爾沈淪日久飄泊何歸今可挾道潛形精思出要遂隱於南部太行山百梯寺卽所謂中朝山是也時山中有薛居士者學摠玄儒多所該覽聞延年少知道夙悟超倫遂從而謁焉言謔相未之揖謝薛乃戲題四字謂方圓動靜命延體之延應聲曰方如方等圓如智慧日動則識波浪靜類涅槃室薛驚異絕嘆曰由來所未見世挺生卽斯人也爾後恒來尋造疑請義延幽居靜志欲著涅槃大疏恐有滯凡情每祈誠寤寐夜夢有人被於白服乘於白馬騣尾拂地而談授經旨延手執馬騣與之淸論覺後惟曰此必馬鳴大士授我義端執騣知其宗旨語事則可知矣便述疏說偈歸命如來藏不可思議法等纘撰旣訖猶恐不合正理遂持經及疏於州治仁壽寺舍利塔前燒香誓曰延以凡度仰測聖心銓釋已了具如別卷若幽微深達願示明靈如無所誓不傳授言訖涅槃卷軸竝放光通夜呈祥道俗稱慶塔中舍利又放神光三日三夜輝耀不絕上屬天下照山河合境望光皆來謁拜光相所照與妙法師大同則師資通感也乃表以聞帝大悅勅延就講感徵瑞便長弘演所著文疏詳之于時諸英達僉議用比遠公所製乃文句愜當世實罕加而標擧宏綱通鏡長騖則延過之久矣周太祖素揖道聲尤相欽敬躬事講主親聽淸遠近馳萃觀採如市而獲供事不預懷性好恬虛网干時政大祖以百挮太遠諮省路艱遂於中朝西嶺形勝之所爲之立寺名曰雲居國俸給之通於聽衆有陳聘使周弘正者博考經籍辯逸懸河遊說三國抗敍無擬以周建德中年銜命入秦帝訝其機捷擧朝恧采勅境內能言之士不限道俗及搜採巖穴遁逸高世者可與弘正對論不得墜於國風州刺史中山公宇文氏夙承令範表上曰曇延法師器識弘偉風神爽年雖未立而英辯難繼者也帝乃摠集賢能期日釋奠躬御禮筵朝宰畢至時周國僧望二人倫次登座發言將訖尋被正難徵據重疊投解莫帝及群僚一朝失色延座居末第未忍斯慚便不次而起帝曰位未至何事輒起延曰若是他方大士可藉大德相臨今乃遠國微臣小僧足堪支敵延徑昇高座帝又曰何爲不禮三寶答曰自力兼擬未假聖賢加助帝大悅正遂搆情陳難延乃引義開閞而正頗挾機調用前殿後延乘挫拉事等摧枯因卽頂拜伏膺知歸之晩自陳云弟子三國履歷可師之師不言今日乃遇於此矣請奉而受戒晝夜諮問永用宗之及返陳之時延所著義門幷其儀貌竝錄以歸國每夕北禮以爲曇延菩薩焉正辭延日預搆風雲山海詩四十竝抽拔奇思用上於延以留後別及一經目竟不重尋命筆和之題如宿誦酬同本韻意寔弘通正大服焉更無陳對乃跪而啓曰願示一言諸胸臆延曰爲賓設席賓不坐離人極遠熱如火規矩之用皮中裹正曰此則常存意矣帝以延悟發天眞五衆傾則便授爲國統使夫周壤導達延又有功至武帝將廢二教極諫不便隱於太行山屛迹人世後帝召延出輔中使屢達而礭乎履操更深巖處累徵不獲逮天元遘疾追悔昔開立尊像且度百二十人爲菩薩延預在上班仍恨猶同俗相還藏林藪隋文創業未展度僧延初聞改卽事剃落法服執錫來至王庭伸弘理未及勅慰便先陳曰敬問皇帝四海爲務無乃勞神帝曰弟子久思此意所恨不周延曰貧道昔聞堯今日始逢云云帝奉聞雅度欣泰本懷共論開法之模孚化之本延以寺宇未廣教法方隆奏請度僧以應千二百五十比丘五百童子之數勅遂摠度一千餘人以副延請此皇隋釋化之開業也爾後遂多凡前後別請度者應有四千餘僧周廢伽藍竝請興復三寶再弘功兼初運者又延之力矣移都龍首有勅於廣恩坊給地#立延法師衆開皇四年下勅改延衆可爲延興寺面對通衢京城之東西二門亦可取延名以爲延興延平也然其名爲世重道爲帝師而欽承若終古罕類昔中天佛履之門遂曰瞿曇之號今國城奉延所諱亞是其又改本住雲居以爲拪巖寺勅大樂令齊樹提造中朝山佛曲見傳供延安其寺宇結衆成業勅齎臘燭未及將爇而自然發焰延奇之#以事聞帝因改住寺可爲光明也延曰化須廣未可自專以額重奏別立一帝然之今光明寺是也其幽顯呈例率如此至六年亢旱朝野荒然勅請三百僧於正殿祈雨累日無應帝曰天不降雨有何所由延曰事由一二帝退與僚宰議之不達意故京兆太守蘇威問延一二所由答曰陛下萬機之主群臣毘讚之官竝通治術俱愆玄化故雨與不雨事由一二耳帝遂躬事祈雨請延於大興殿登御座南面授法帝及朝宰五品已咸席地北面而受八戒戒授纔訖日正中時天有片雲須臾遍布便降甘遠邇咸感帝悅之賜絹三百段延虛懷物我不滯客主爲心凡有資散給悲敬故四遠飄寓投告偏多一時糧粒將盡寺主道睦告云僧料可支兩食意欲散衆延曰當使都盡方散耳明旦文帝果送米二十車衆由是安堵惑者謂延有先見之明故停衆待供未幾帝又遺米五百石于時年屬飢荐賴此僧侶無改帝旣稟爲師父之重又勅密戚懿親咸受歸戒至於食息之際帝躬奉飮食御衣裳用敦弟子之儀加敬情不能其爲時君禮重又此類也勅又拜爲平等沙門有犯刑網者皆對之泣令彼折伏從化或投迹山林不敢容世者以隋開皇八年八月十三日終於所住春秋七十有三矣
032_1001_a_02L임종 때 문제(文帝)에게 글을 올려 유언하였다.
“담연은 법왕(法王)이 세상을 거느리는 시대를 만나 특별히 깊은 은총을 받았으나 지난 시기 인연의 업이 얕아서 일찍이 그 은혜를 어기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황제[至尊]께서는 삼보(三寶)를 보호하고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말세의 평범한 스님들이라 비록 법대로 하지 못할지라도 착한 사람을 골라 그들에게 도첩을 내려주어서 스스로 훌륭한 복을 불러오게 하여주십시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왕공(王公) 이하 관리들이 모두 찾아가 조문하라고 명하고, 아울러 사흘 동안 조회(朝會)를 그만두게 하였으며 5백 단(段)의 물건을 보내서 천승재(千僧齊)를 베풀도록 하였다.
처음 담연이 건강할 때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이 몸을 금수(禽獸)들에게 보시하였다가 거기서 남은 뼈는 법대로 화장할 것이며 뼈를 남겨 두어서 보고 지키는 수고를 끼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인 사문 동진(東眞)ㆍ홍의(洪義)ㆍ통유(通幽)ㆍ각랑(覺朗)ㆍ도손(道遜)ㆍ현완(玄琬)ㆍ법상(法常) 등은 한시대의 이름난 스님들과 문무(文武)의 벼슬자리에 있는 관료, 예컨대 등왕(藤王) 등도 으레 모두 머리를 풀고 맨발로 걸어서 상여를 따랐다. 숲속의 시체를 버릴 곳에 이르자 다시 명을 내려서 종남산의 시체를 화장하는 곳에서 삼천승재(三千僧齊)를 마련하며 재를 마친 뒤에 화장하라고 하였다.
이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밝았지만 보슬비가 내렸는데 마치 부처님을 화장할 때와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수나라의 문학자(文學者) 여숙정(呂叔挺)이 그의 죽은 후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의 빛나는 행을 비석에 새겼는데, 그 글은 별집(別集)에 있는 내용과 같다.
그러나 담연은 항상 서방정토로 가는 것을 바른 임무로 삼았으며, 말하거나 묵묵히 있을 때에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는데, 모시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마치 깊은 선정(禪定)에 든 것으로 여기곤 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오자 절 옆에 금은보화를 맡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자(父子)가 불교를 믿고 귀의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공중의 깃발과 일산이 영구[柩] 앞에 벌려 세워졌고, 두 줄로 관(棺)을 인도하여 연흥사(延興寺)에서 남쪽으로 가서 산 서쪽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명(神冥)의 증거며 자못 부질없이 빗대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담연이 도를 맡은 뒤로는 그 세력이 모든 일을 총괄하였으나 스스로 몸을 낮추고 다스려서 모든 생각을 극복하고 다스림을 이루었으며, 그의 식견은 여러 술법의 위에 자리잡았고, 그의 행은 중생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런 까닭에 그는 칠부대중의 마음의 스승이었으니, 어찌 형상에 묶여 공경을 다하는데 그쳤겠는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각기 명정을 만들고 만사(輓詞)를 써서 그의 성스러운 업을 찬양하였다.
당시 내사(內史) 설도형(薛道衡)은 조사(弔詞)를 지어 말하였다.
“담연 법사는 어린 나이에 속세를 버리고 높이 진세(塵世) 밖의 세계로 나아갔고 뜻과 도량이 컸으며 이론과 식견이 전일하고 밝았기에 마음속에는 신이 깃들어 있었으니, 우러러볼 수는 있으나 엿볼 수는 없었으며, 지혜의 바다와 법의 근원은 건너갈 수는 있었으나 헤아릴 수는 없었다. 무릇 밝은 거울과 같아서 눈으로 비추어 보아도 피로하지 않았으니 비유하면 저 홍종(洪鍾)과 같아서 오는 것이 있으면 곧 감응이 있었다.
지난날 도가 없어진 때를 만나서 현문(玄門)의 밧줄이 끊어졌을 때도 뜻을 세워 깊은 암혈 속에서 살면서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았고 높은 지위와 후한 예의도 그의 생각을 되돌릴 수 없었으며, 엄한 위세와 준열한 법으로도 그의 마음을 두렵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坐禪)에서 평탄하고, 험한 환경에서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으며, 계율을 지키는 공덕과 자신을 억제하는 행위가 시종 한결같았다. 우리 성황(聖皇)께서 천운을 열자 불법이 다시 일어났고, 이에 여러 스님들 가운데 뛰어난 영수로 불리게 되었다.
황제께서 친히 더없이 존중하였고 삼보(三寶)가 그로 말미암아 크게 수호되었고 2제(諦:眞諦ㆍ俗諦)가 그에 근거하여 높이 드날리게 되었다.
믿음은 족히 승징(僧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따를 만하였고, 혜안(慧安)과 혜원(慧遠)을 뛰어넘었다.
뜻밖에 법의 기둥이 홀연히 기울어지고 어진 배가 갑자기 가라앉았으니, 오직 슬픔이 사부대중의 가슴에 감겨들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슬픔을 일으킨다.
스님들은 석장을 짚고 물병을 지니고 도풍을 이어받아 중생을 가르쳐 인도하면서 법당에 올라 설법하고 제자로 되어 가르침을 받으며 심오한 뜻을 자세히 체득하였지만, 삼계에 사는 정리로는 천백 번 슬프기만 하다. 그러나 세상을 떠났으니 어이하리오?”
그가 당대의 현인들로부터 보배로 공경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 15권과 『보성론(寶性論)』ㆍ『승만경(勝鬘經))』ㆍ『인왕경(仁王經)』 등의 소가 있으며 각기 권수에는 차등이 있다.
그의 문인과 제자들은 그가 남긴 도풍을 이어받았는데 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씌어 있다.
032_1000_c_11L臨終遺啓文帝曰延逢法王御世偏荷深恩往緣業淺早相乖背仰願至尊護持三寶始終莫貳但末代凡僧雖不如簡善度之自招勝福帝聞之哀慟勅王公已下竝往臨弔幷罷朝三日贈物五百段設千僧齋延康日門人曰吾亡後以我此身且施禽狩餘骸依法焚揚無留殘骨以累看守弟子沙門童眞洪義通幽覺朗道遜玄琬法常等一代名流幷文武職僚如滕王等例咸被髮徒跣而從喪至于林所登又下勅於終南樊地設三千僧齋齋訖焚之天色淸朗無雲而降細雨若闍毘如來之狀也大衆驚得未曾有也又隋文學呂叔挺美其哀榮碑其景行文如別集然延恒以西方爲正任語默之際注想不移侍人觀之若在深定屬大漸之始側有任金寶者父子信向云見空中幡蓋列於柩前兩行而引從延興寺南達于山西斯亦幽冥叶讚諒非徒自延之莅道勢摠㩲衡而卑牧自克念成治解冠群術行動物情爲七衆心師豈止束形加敬及聞薨無不涕零各修銘誄讚揚盛業內史薛道衡白弔云延法師弱齡捨高蹈塵表志度恢弘理識精悟臺神宇可仰而不可窺智海法源而不可測同夫明鏡矚照不疲彼洪鍾有來斯應往逢道喪玄維落拪志幽巖礭乎不拔高位厚禮能迴其慮嚴威峻法未足懼其心行宴坐夷險莫二戒德律儀始終如聖皇啓運像法再興卓爾緇衣爲稱首屈宸極之重伸師資之義寶由其弘護二諦藉以宣揚信足追蹤澄超邁安不意法柱忽傾舟遽沒匪直悲纏四部固亦酸感一師等杖錫挈甁承風訓導昇堂入具體而微在三之情理百恒慟矣奈何其爲時賢珍敬如此所著涅槃義疏十五卷寶性勝鬘仁王等疏各有差其門人弟子紹緖厥風具見別傳

14) 수나라 수도 정영사(淨影寺) 석혜원전(釋慧遠傳)
032_1001_b_09L釋慧遠
032_1001_c_02L혜원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돈황(燉煌) 사람이다. 후에 상당(上黨)의 고도(高都)에서 살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소탈하고 명랑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온화하였고, 재주와 도량이 뛰어나고 덕망은 크게 세상을 덮고 이름은 높고 멀리 알려졌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삼촌과 함께 살았는데,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지도를 받았고 인(仁)과 효(孝)를 배웠다.
나이가 겨우 3세 때 출가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며, 사문을 볼 때마다 사랑하고 존중하고 숭배하고 공경하였다.
7세에 학당에 있게 되자 공부가 보통아이들보다 백 배나 뛰어났고, 정신과 뜻이 높고 시원하여 밝은 지혜를 지닌 아이라고 불렸다.
13세에 삼촌 곁을 떠나서 택주(澤洲) 동산(東山) 옛 현곡사(賢谷寺)를 찾아갔는데, 그때 그곳에는 화음(華陰)의 사문인 승사(僧思) 선사가 있어 만나보고 그를 제도하였다. 승사 선사는 수행이 당대에 높아 대중들이 종사로 떠받들었다. 그는 혜원에게 말하기를 “너에게는 출가할 상(相)이 있으니 자신이 이것을 잘 아껴라”고 하였다.
처음 그곳에서는 경을 외우게 하였는데 일마다 타이르고 가르쳤으나 하루 여섯 때에 걸쳐 부지런히 수행하여 한 번도 이름을 불러 채근당하는 수고를 끼치지 않았다.
그후 주나라 무왕(武王) 등(登)이 포학하여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되자, 혜원을 데리고 회주(懷州) 북산의 단곡(丹谷)으로 갔다. 언제나 경의 대의(大義)를 가지고 스승에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모두 깊이 숨겨진 진리에 관한 것이어서 스승은 그가 자라면 큰 인재가 되리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다.
나이 16세 때 스승은 그에게 아사리[阿梨] 담(湛) 율사를 따라 업성(鄴城)에 가서 대승과 소승의 경전을 모두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깊이 숨겨진 진리를 듣게 되었고 특별히 남다른 재질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특히 대승(大乘)을 존중하여 그것을 도의 근본으로 삼게 되었다.
구족계를 받게 될 나이에 이르자 다시 상통(上統) 스님에게 의지하여 화상(和尙)으로 삼고 순도(順都)를 아사리로 삼았다. 광(光) 율사의 십대제자가 모두 수계(受戒)의 증명사(證明師)가 되니, 당시 이것을 명성과 영예가 극치에 이르렀다고들 말하였다. 그리하여 곧 대은 율사(大隱律師)를 찾아가 『사분율(四分律)』의 강의를 듣고 떠돌아다니며 가르침을 들으면서 5년간 강석의 말단에 앉아 정밀하고 거친 것을 골라내고 따라야 할 법칙의 궤도를 분별하였다.
멸쟁건도(滅諍揵度:승단 내부의 갈등을 없애는 갈마법)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전해 온 일인데도 아무도 그 유래와 내용을 깨우쳐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혜원은 곧 그 내용을 분석하고 요약해서 결단을 내리고 단순한 것과 복합된 것 등을 선별하여 놓고, 시작과 끝을 원천적으로 밝게 살피고 곧 분리해서 이를 가려내니, 모두가 이치에 닿고 글과 합치되어 지금도 이를 외우고 행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상통 스님만을 스승으로 섬겨 끊임없이 7년 동안 독실하게 공부하여 지극한 진리를 환하게 깨닫고 미세하고 심오한 이치를 시원하게 뽑아내니, 책보따리를 짊어진 학도들이 서로 인연을 맺어 길을 메우고 강론과 깨우침이 계속되었으나 그렇다고 3학(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道)에 몸을 닦아 큰 그릇을 이룬 사람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어 그는 모든 학도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도(高都)의 청화사(淸化寺)에 자리잡으니, 인연 있는 중생들이 기뻐하고 반가워하며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감탄하면서 각기 돈과 비단을 내어 이것으로 모임을 일으키니, 강당과 절이 일시에 크고 높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한(韓)과 위(魏)의 선비와 일반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영예로 여겼다.
승광(承光) 2년 봄에 이르러 북주가 제나라를 제압하자 곧 3교를 폐지하는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이때 황제는 명을 내려 선배 대덕(大德)들을 모두 궁전에 모이게 하고는 무제(武帝)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폐지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짐은 하늘의 명을 받고 억조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3교(敎)를 널리 퍼뜨리고 있으며,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이어져왔다. 지극한 이치로 보면 모두가 다 교화에 허물이 되는 것이므로 이 모두를 폐지시킨다. 그러나 6경(經)의 유교(儒敎)의 글만은 크게 정사하는 방법에 도움되는 것이 크다. 예의(禮義)와 충효(忠孝)는 세상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원래 진짜 부처는 실상이 없는 것이며 태허(太虛)한 우주에 두루 존재한다 하여 멀리서 공경함을 마음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불경에는 이렇게 널리 찬탄하고 있으면서 그림과 탑의 높고 화려한 상(像)이 있어 이것을 만들면 복덕을 이룬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 뜻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은혜를 베풀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것을 사모하고 믿어 보배와 재물을 다 기울여 널리 절과 탑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헛되게 비용만 들일 뿐이고 남겨둘 만한 것이 못 되다. 모든 이런 경과 불상들을 다 폐지할 것이다. 부모의 은혜는 무겁지만 사문들은 이것을 공경하지 않고 거역함이 심할진대 나라의 법이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모두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가 효도의 근본을 숭상하게 하라. 짐의 뜻은 이와 같으니 여러 대덕들의 생각은 어떤지 말하라.”
이때 사문 대승통(大僧統)인 법상(法上) 스님 등 5백여 명이 참가하였으나 모두가 황제에게는 왕의 권력이 있으니 충고한다 하더라도 따르게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명을 내려 지시에 대한 대답을 재촉하였으나 스님들은 실망하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 도무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혜원은 생각하기를 ‘불법에 사부대중이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말문을 막고 사정을 덮어두어서는 되겠느냐’라고 하고, 마침내 대중 속에서 나아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큰 땅을 통일하고 존귀한 자리에 오르시어 풍속에 따라 말씀을 이루어 3교(敎)에 대한 법을 정하시니 그 조서(詔書)에 말씀하시기를 진짜 부처는 실상이 없다고 하시니 참으로 그 말씀과 같습니다. 다만 이목(耳目)을 갖춘 생령(生靈)들은 경에 힘입어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상에 빙자하여 진불을 표현하게 되는데 만약 이것을 폐지하게 하신다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허공이 진짜 부처라는 것은 모두가 그들 자신이 알고 있으니 경전이나 상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혜원이 말하였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예전의 시대에는 경이나 상이 아직 이곳에 이르지 않았는데 그때 이 땅의 중생들은 무엇 때문에 허공이 진짜 부처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황제는 이때 대답하지 않았다.
혜원이 말하였다.
“만약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고도 스스로 법을 알 수 있다면 삼황(三皇) 예전의 시대에는 문자(文字)가 없었어도 사람들은 마땅히 스스로 삼강오륜(三綱五論) 등의 법을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모든 사람들은 왜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알지 못하여 금수(禽獸)와 같았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이에 혜원은 또 말하였다.
“만약 형상에는 정이 없기에 이것을 섬겨도 복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폐지하여야 한다고 하신다면 나라의 7묘(廟)의 상(像)에는 어찌 정이 있어서 허망하게 존중하고 섬기는 것입니까?”
무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다가 곧 말하였다.
“불경은 외국의 법이다. 이 나라에는 필요 없는 법이라서 이것을 폐지하고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7묘는 선대들이 세운 것이니 나도 역시 그것을 옳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장차 이것도 같이 폐지하겠다.”
혜원이 말하였다.
“만약 외국의 경전이라 해서 이 땅에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공자가 하신 말씀은 노(魯)나라에서 나온 말씀이니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땅에서도 마땅히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또한 7묘가 잘못이라 하여 이것을 폐지하려고 하신다면 이것은 곧 조상을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조상을 존경하지 않으면 소목(昭穆)이 순서를 잃게 되고, 소목이 순서를 잃게 되면 5경(經)이 무용지물이 되는데 앞에서 말씀하신 유교는 존속케 한다는 말씀은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3교를 모두 폐지하게 되는데 그러면 장차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노나라와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관계는 비록 봉한 구역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한 교화를 받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불경과 같지 않다.”
그러나 7묘(廟)에 대한 힐난에는 황제는 대답할 길이 없었다.
혜원이 말하였다.
“만약 진나라와 노나라가 같이 한 교화를 따른다고 하여 경전의 가르침도 공통적으로 행해진다고 하신다면, 중국과 천축의 관계도 나라의 경계는 비록 다르지만 다 같이 염부제주(閻浮提洲)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며, 사해 안은 모두가 전륜왕(轉輪王)의 한 교화를 받고 있는데 왜 다 같이 불경을 따르지 않고 이 땅에서만 폐지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황제는 또 대답이 없었다.
혜원은 다시 말하였다.
“조서(詔書)에 말씀하시기를 ‘승단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봉양을 숭상하라’ 하셨는데 공자의 경에도 역시 말씀하시기를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이로써 부모를 세상에 빛나게 한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곧 효행인데 꼭 집으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효도라고 하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부모의 은혜는 크다. 물건과 모양을 바꾸어가며 공양하는 것인데 어버이를 버리고 먼 곳으로 간다면 지극한 효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혜원이 말하였다.
“만약 그 말씀대로라면 폐하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부모가 있는 사람들인데 왜 이것을 놓아주지 않으시고 길게 5년씩이나 부리며 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하십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짐도 차례에 따라 높고 낮은 신하들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다.”
혜원이 말하였다.
“부처님도 역시 승단에서 겨울과 여름에는 인연 따라 도를 닦고 봄과 가을에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고 효행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련 존자는 걸식(乞食)을 하여 어머니를 공양하였고, 여래께서는 관(棺)을 매고 장사를 지내셨습니다. 이 이치는 크게 상통되는 일인 만큼 유독 불교만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는 또 대답이 없었다.
이에 혜원은 큰 소리로 항변하였다.
“폐하는 지금 임금의 힘을 믿고 제 마음대로 삼보를 파멸시키고 있으니 이것은 나쁜 견해를 지닌 사람입니다. 아비지옥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는데 폐하는 어찌하여 이것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까?”
황제는 발끈 성을 내고 낯빛을 달리하며 크게 노하여 똑바로 혜원을 내려다보며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백성들이 즐거움을 얻게만 하면 된다. 짐도 지옥의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폐하는 그릇된 법으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현재 고통을 받을 행위를 삼고 있습니다. 당장 폐하와 함께 아비지옥으로 가봅시다. 어디에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이 말에 이치상으로는 굴복하였으나 그가 기도한 일에 대한 의욕은 왕성하였다. 그러나 다시 대답할만한 말이 없어서 다만 말하기를 “스님들은 일단 오늘은 돌아가시오. 후에 다시 모이겠다”고 하였다. 이때 해당 관청에서는 논쟁한 스님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제나라가 멸망하고 북주(北周)의 군사들이 우레같이 위세를 떨칠 때라 혜원이 황제의 명에 맞서는 것을 보고 모두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가 말하기를 “그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큰 가마솥에 끓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정신과 기개는 우뚝하였고 말투에서는 흔들림이 없었다.
상통(上統) 연(衍) 법사 등은 혜원의 손을 잡고 울면서 감사의 말을 하였다.
“천자의 위세는 용의 불과 건드리기 어려운 것인데 그대는 능히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경(大經)에서 말하는 호법보살(護法菩薩)이란 아마도 이와 같은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가 뉘우치고 고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대의 허물은 아니다.”
이에 혜원이 말하기를 “바른 이치는 말해야 합니다. 오직 이 몸과 목숨만을 돌아보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는 곧 여러 스님들과 헤어지면서 말하였다.
“시운(時運)이 이와 같으니 성인을 여기에 남겨둘 수 없습니다. 다만 받들고 모실 수 없는 것이 한이 되어 지금 이것이 큰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은 진실로 멸하지 않습니다. 스님들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원컨대 이 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급군(汲郡)의 서산(西山)에 숨어 부지런히 도를 닦아 3년 사이에 『법화경』과 『유마경』 등을 각각 천 번씩 외웠고, 이로써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에 달통하였고, 이윽고 산에서 잠자고 골짜기의 물을 마시며 좌선(坐禪)과 독송을 멈추는 일이 없었으니, 그 경과 진리의 터전은 더욱 깊어졌으나 헛된 육신[浮囊]을 버리지 않았다.
대상(大象) 2년에 하늘의 도움으로 다소나마 불교의 교화의 길이 열리게 되어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두 곳에 각기 초목이 우거진 산에 올라가 큰 절을 세우고 보살승(菩薩僧)을 두고서 선배 대덕들에게 통고하고 황제의 명으로 그들을 절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오래도록 소림사(少林寺)에서 경전을 강론하게 되었다.
수(隨)나라가 세워지면서 하늘의 움직임이 맑게 트이고 개황(開皇) 연대 초기에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연로한 스님들이 낙양에서 하늘을 받치면서 법문이 처음으로 열리고, 멀고 가까운 곳의 신도들이 달려와 귀의하여 기운을 바라는 사람들로 법의 나루터를 이루니 배움의 저자[學市]와 같아졌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이름이 궁궐에까지 전해지니 황제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명을 내려 낙주(洛州:洛陽) 사문의 도승통[都統]의 지위를 주어 불법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혜원은 이것을 사양하였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지니고 있는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영예와 욕됨을 인연에 맡기고 있는 관계로 위세로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었으며, 이익으로 그를 물들일 수 없었다. 정기(正氣)는 웅건하고 도풍은 가지런하고 엄숙하였으며 사랑과 공경으로 사람들을 부드럽게 조화하면서 그릇되거나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 어기는 사람을 다스리고 계율을 끊는 자를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강제로 제어하는 방법도 피하지 않았다. 그가 강의하고 권유하는 곳마다 모두 조목조목 도리를 갖추게 하였고, 혹 생활필수품이 모자라는 곳이 있거나 혹 물을 거루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거나 걸식을 법에 어긋나게 하거나 행동이 평상심을 잃었거나 하는 사람은 모두 법문을 듣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밖에도 잠에 빠져 시간을 놓쳤거나 늦게 법석에 온 사람도 모두 여러 가지 규범에 근거하여 벌을 주고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문도 스님들은 엄숙하고 화목하여 얼굴과 행실이 본받을 만하였다.
개황 5년(585)에는 택주(澤州) 자사 천금공(千金公)의 초청으로 고향을 찾아갔다. 이것은 불법[像法]이 다시 널리 퍼지고 고향사람들이 다시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친소(親疎)간에 경사로 여기는 것치고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032_1001_b_10L 姓李氏燉煌人也後居上黨之高都焉天縱疏朗儀止沖和局度通簡崇履高邈幼喪其父與叔同居偏蒙提誘示以仁孝年止三歲心樂出家每見沙門愛重崇敬七歲在學功逾常百神志峻爽見稱明智十三辭叔往澤州東山古賢谷寺時有華陰沙門僧思禪師見而度之思練行高世衆所宗仰語遠云汝有出家之善自愛之初令誦經隨事訓誨時之勤未勞呼策登爲虐暴不安以南詣懷州北山丹谷每以經中大問師皆是玄隱深知長有成器也年十六師乃令隨闍梨湛律師往鄴大小經論普皆博涉隨聽深隱持蒙賞異而偏重大乘以爲道本年滿進又依上統爲和上順都爲闍梨師十大弟子竝爲證戒時以爲聲榮之極者也便就大隱律師聽四分律流離請誨五夏席端淘簡精麤差分軌轍滅諍揵度前後起紛自古相傳莫曉來意遠乃剖析約斷位以單重原鏡始終判之卽離皆理會文合行誦之末專師上統緜篤七年迥洞至理爽拔微奧負笈之徒相諠亘道講悟繼接不略三餘沐道成器量非可筭乃攜諸學侶返就高都之淸化寺焉衆緣歡慶嘆所未聞各出金帛爲之興會講堂寺宇一時崇敞韓魏士庶通共榮之及承光二年春周氏剋齊便行廢教勅前修大德竝赴殿武帝自昇高座序廢立義命章云朕受天命養育兆民然世弘三教風彌遠考定至理多皆愆化竝令廢然其六經儒教文弘治術禮義忠孝於世有宜故須存立且自眞佛無像則在太虛遙敬表心佛經廣嘆有圖塔崇麗造之致福此實無情能恩惠愚民嚮信傾竭珍財廣興寺旣虛引費不足以留凡是經像盡皆廢滅父母恩重沙門不敬勃逆之國法豈容竝退還家用崇孝始意如此諸大德謂理何如于時沙門大統法上等五百餘人咸以帝爲王決諫難從僉各默然下勅頻催答而相看失色都無答者遠顧以佛法之寄四衆是依豈以杜言情謂理乃出衆答曰陛下統臨大域得一居尊隨俗致詞憲章三教詔云眞佛無像信如誠旨但耳目生靈賴經聞籍像表眞若使廢之無以興敬虛空眞佛咸自知之未假經像漢明已前經像未至此土衆生何故不知虛空眞佛帝時無答遠曰不藉經教自知有法三皇已前未有文字人應自知五常等法爾時諸人何爲但識其母不識其父同於禽狩帝亦無答遠又曰若以形像無情之無福故須廢者國家七廟之像是有情而妄相尊事武帝不答此難乃云佛經外國之法此國不須廢不用七廟上代所立朕亦不以爲是將同廢之遠曰若以外國之經非此用者仲尼所說出自魯國秦晉之地亦應廢而不行又以七廟爲非將欲廢者則是不尊祖考祖考不尊則昭穆失序昭穆失序則五經無用前存儒教其義安在若爾則三教同廢何治國帝曰魯邦之與秦雖封域乃莫非王者一化故不類佛經七廟之難帝無以通遠曰若以秦魯同遵一化經教通行者震旦之與天竺界雖殊莫不同在閻浮四海之內王一化何不同遵佛經而令獨廢又無答遠曰詔云退僧還家崇孝養孔經亦云立身行道以顯父母是孝行何必還家方名爲孝帝曰父母恩重交資色養棄親向疏未成至孝遠曰如來言陛下左右皆有二親何不放乃使長役五年不見父母帝曰亦依番上下得歸侍奉遠曰佛亦聽冬夏隨緣修道春秋歸家侍養目連乞食餉母如來擔棺臨葬此理大通未可獨廢帝又無答遠抗聲曰陛下今恃王力自在破滅三寶是邪見人阿鼻地獄不揀貴賤陛下何得不怖帝勃然作色大怒直視於遠曰但令百姓得樂朕亦不辭地獄諸苦遠曰陛下以邪法化人現種苦業共陛下同趣阿鼻何處有樂可得理屈言前所圖意盛更無所荅但云僧等且還後當更集有司錄取論僧姓名當斯時也齊國初殄周兵雷震見遠抗詔莫不流汗咸謂粉其身骨煮以鼎鑊而遠神氣嵬然辭色無撓上統衍法師等執遠手泣而謝曰子之威如龍火也難以犯觸汝能窮大經所云護法菩薩應當如是不悛革非汝咎也遠云正理須申惟顧此形命卽辭諸德曰時運如此聖不能遣恨不奉侍目下以爲大恨法實不滅大德解之願不以憂惱潛於汲郡西山勤道無倦三年之間誦法華維摩等各一千遍用通遺法而山棲谷飮禪誦無歇理窟更深囊不捨大象二年天元微開佛化西兩京各立陟岵大寺置菩薩僧告前德詔令安置遂爾長講少林隋受禪天步廓淸開皇之始蒙預落舊齒相趍翔於雒邑法門初開近歸奔望氣成津奄同學市所以名馳帝闕皇上聞焉下勅授洛州沙門匡任佛法遠辭不獲免卽而位之而立性質直榮辱任緣不可威畏可利染正氣孤雄道風齊肅愛敬調不容非濫至治犯斷約不避强禦講導所之皆科道具或致資助有虧或不漉水護淨或分衛乖法或威儀失常竝不預聽徒自餘墯眠失時後及法席竝依衆式有罰無赦故徒侶肅穆容止可觀開皇五年爲澤州剌史千金公請赴本鄕此則像法再桑梓重集親疏含慶何以加之
032_1003_b_02L개황 7년 봄에는 정주(定州)로 가다가 상당(上黨)을 경유하게 되어 그곳에 머물러 여름 강의를 하다가 마침내 동쪽에 법을 전하는 일은 놓치게 되었다.
이에 황제의 명이 내려 정중하게 다시 초청하니 사양하였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서경(西京)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황제의 명으로 대덕(大德) 6명을 불렀는데 혜원도 그 속에 들게 되었다. 늘 황제를 따라다니는 학사 2백 명과 함께 처음으로 황제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황제는 친히 어연(御筵)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인의 교화를 부연하고 진술하여 집안과 나라를 모두 빛내니 황제는 대단히 만족하여 명을 내려 흥선사(興善寺)에 머물게 하였으며, 위로의 문안이 풍성하고 빛났으며 공양하는 일은 갑절로 많았다.
그후 다시 흥선사의 성대한 집회가 번거롭다고 하여 비록 그곳에서 교화를 널리 펴는 것이 있기는 하여도 끝내 일을 검소하게 치르게 되었다.
마침내 천문(天門)의 남쪽 큰길 오른편의 동서로 나드는데 편리하고 노닐고 듣는데 피로를 주지 않는 곳을 골라 절을 세우고 정영사(淨影寺)라고 이름지었다.
항상 그곳에 거처하면서 강론하고 설법하여 심오한 진리를 크게 서술하고 말재주는 유창하여 세차게 흐르는 강물과 같았는데 그 변설함이 본래 심오하고 설교가 곡진하였다.
이때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문도가 7백여 명에 달하였고 이들은 모두 나라 안의 영준한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법륜(法輪)의 전철(前轍)을 따라 도읍지를 바라보며 절로 달려왔으니 이렇듯 법의 도량(道場)을 이루었다. 다만 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함께 공지(空地)ㆍ노천(露天)ㆍ쑥밭ㆍ암자 등에 거처하였고, 골짜기를 주(州)ㆍ부(部)로 나누어 밤낮으로 닦고 익혀 성취한 사람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비록 흥선사(興善寺)의 여러 스님들이 한 시기에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학문에 귀의하여 꼬리를 물고 스승을 찾아 천리 길을 달려온 일은 혜원 스님보다 더 높은 스님은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키가 8척(尺)이고 허리둘레가 9아름이나 되었으므로 늘 13폭의 군의(裙衣)를 입고 있어야 하였다. 그가 법좌에 올라가서 우레같이 소리치면 천둥치는 소리와 같아 모두 납작 엎드려 놀랐으며, 여러 사람이 서원을 성취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융성한 일이었다.
개황(開皇) 12년 봄에 황제가 명을 내려 번역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경의 이치를 밝혀 간행하고 그해에 정영사(淨影寺)에서 입적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황제는 슬퍼하면서 조회를 그만두게 하였고, 아쉬움을 호소하며 말하였다.
“나라가 두 가지 보물을 잃었다.”
당시 혜원과 이덕림(李德林)이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혜원이 머리를 묶고 스승을 찾아다닌 때로부터 본래 서원한 것은 불법을 전해주는 데에 있었다. 그는 2대의 조정을 겪어오면서 교화가 팔방(八方)에 가득하였으며 소(疏)를 저술하고 문장을 지으니 이것을 이어받아 익히고 깨달은 사람만도 즐비하게 이어졌다. 동시에 당시 조정의 모범이 되었기에 ‘방가(方駕:수레를 나란히 하여 감)’라는 칭호를 얻었다.
처음 병 증세가 나타난 며칠 후에 강당우의 대들보가 까닭 없이 부러졌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병이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생을 마치던 날 그는 단정하게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어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선정에 든 것 같았다. 그래서 스님을 모시던 사람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방안에 기이한 향냄새가 나니, 모두 의아해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솜을 코에 대보고서야 비로소 숨이 끊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그가 청화사(淸化寺)에 있을 때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거위는 강론을 듣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번 추위와 더위를 겪었다. 혜원이 관내(關內)로 들어간 후에도 거위는 본절에 남아 회랑 밑에 깃들어 있으면서 낮이나 밤이나 울어대니 여러 스님들은 근심이 되어 사인(使人)에게 딸려서 수도로 보냈다. 정영사(淨影寺)의 일주문에 이르러 놓아주니, 울면서 치솟아 올라 곧바로 혜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후로는 예전처럼 말을 잘 들었으나 다만 법회를 알리는 종소리만 들어도 아침이건 저녁이건 가리지 않고 또 지난날 강의한 것이건 문답하는 강론이건 가리지 않고 강당에 들어가 엎드려 강의를 듣다가 승도들이 모두 헤어지면 문밖으로 날아가며 울곤 하였다. 또 만약 속인과 도인이 함께 참가하는 포살(布薩)일에는 비록 종소리를 들어도 끝까지 강당에 들어가지 않기에 당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혜원이 평상시 늘 하던 강론이나 해설을 할 때에는 법대로 조용히 듣다가도 중간에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다른 일에 미치게 되면 곧 울면서 날아나갔다. 이렇게 하기를 6년 동안이나 하였고 강의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일을 한 때도 빠진 일이 없었는데, 그후 갑자기 절의 뜰에서 슬피 울어대며 강당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20일이 지나서 혜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이때는 개황(開皇) 12년 6월 24일이었으며, 속세의 나이로는 70세였고, 법랍은 50세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택주(澤州)의 본사(本寺) 강당의 여러 기둥과 고좌의 네 다리가 일시에 무너졌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승과 이승이 감통한 것이라고 하였다.
혜원 스님의 비를 세울 때 설도형(薛道衡)이 글을 지었고, 우세기(虞世基)가 글씨를 썼으며, 정씨(丁氏)가 돌에 새겼는데 당시 이 세 사람을 3절(絶)이라고 불렀다.
처음 혜원이 대중들과 함께 대승에 대해 듣고 6~7년쯤 지나자, 그 깊은 뜻을 환하게 통달했고 영묘한 이해가 다시 새로워져서 업경(業京)의 법회에서 논쟁점을 내세울 때마다 대적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멀고 가까운 고을에 으뜸이 되었으며 논리를 달리하는 사람들한테서도 추대의 대상이 되었으나 아침저녁으로 과업에 게으르지 않았고, 마음이 너무나 피로하여 마침내 피로에서 오는 병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름 동안 대략적인 관찰과 세밀한 관찰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으며, 기운이 위로 치밀어 올라와서 심장이 마치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팠으며, 식욕도 떨어져서 몸이 너무 여위어 금시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예전에 임려(林慮)에서 명산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여러 선원에서 법을 전수받은 생각을 하였다. 마침내 수식법(數息法)을 익혀서 경계에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 이 상태를 이어나가니 보름쯤 되자 점차 차도를 느끼게 되고 다소 잠들어 쉬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편안해짐을 느끼고 비로소 수식이 병을 치료하는 좋은 방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해 여름 동안 선정을 배워 매우 고요한 즐거움을 얻게 되고 몸과 마음이 매우 유쾌하여졌다. 이에 곧 자기가 증험한 것을 승조(僧稠)에게 말씀드렸더니 승조는 말하기를 “이것은 마음이 영리한 기질의 경계에 머무는 일이다. 만약 잘 조섭(調攝)한다면 관행(觀行)을 할 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혜원은 늘 강론을 할 때 말이 정종(定宗:禪宗)에 미치게 되면 한 번도 선정을 찬미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여러 구절에 걸쳐 선정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 나갔으니 이것은 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업무에 몰려 마음을 조섭할 여가가 없음을 한탄하였으니 이것이 그에게는 실수로 된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업도(鄴都)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여 일시에 영예로운 소문이 알려지게 되었고 대중이 남은 좌석을 넘보게 하였다.
이때부터 계속 강원에 머물렀는데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이 천여 명에 달했다.
그의 생각은 불법을 널리 전하는 데 있었으며, 강론하는 차례로 해설서를 냈다. 그리하여 『지지론소(地持論疏)』 5권, 『십지론소(十地論疏)』 7권, 『화엄경소』 7권, 『열반경소』 10권을 썼고, 그밖에 『유마경』ㆍ『승만경』ㆍ『수관(壽觀)』ㆍ『온실(溫室)』 등은 모두 종합하여 권부(卷部)를 이루었다. 그의 글은 네 글자로 한 구를 이루고 강목(綱目)이 뚜렷하며 글 뜻이 옳고 타당하여 그에 견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또한 『대승의장(大乘義章)』 14권을 지었는데, 도합 249과(科)를 다섯 묶음으로 나누었으니, 즉 교법(敎法)ㆍ의법(義法)ㆍ염(染)ㆍ정(淨)ㆍ잡(雜)의 다섯 가지가 그것이다. 이 모두에 종합적으로 내용의 차이를 진술하고 가까운 것에서 시작하여 먼 것으로 마무리하여 불법의 강요(綱要)가 여기에서 마무리되었으니 배우는 사람은 선종(禪宗)을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혜원이 법에 달통한 때로부터 그의 마음은 자비심을 지향하였고, 심오한 글과 숨은 뜻에 대하여서는 매번 간곡하게 자주 반복하여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하듯이 전하였다. 오직 배우는 사람들이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보는 사람들이 이것을 듣고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을 뿐, 그외는 하나도 안타까운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북제 때부터 수도[關輔]와 수도 주변의 요황(要荒)에 이르기까지 유포된 장소(章疏)는 50여 권에 2천3백여 장이고, 장마다 945개의 구절이 실려 있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앓는 일 없이 불교와 불도를 전수하고 가르쳐서 인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크게 퍼뜨리니 모두 훌륭히 암송하고 마음에 새겨두었으며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본래 청화사(淸化寺)에 있을 때 옛사람을 본받아 『열반경』을 닦아 익혔는데, 당시 그 절의 대중은 백여 명이었고 그가 거느리는 문도는 30명으로서 모두 당나라에서 으뜸으로 칭송되는 스님들이었다.
또한 혜원은 불법의 가르침과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자비심을 지니고 중생을 구제하였으며 계율을 가르치는 일도 늦추지 않았다. 특히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일을 행하여 거기서 얻은 이익과 공양은 모두 학도들에게 제공하고 옷과 발우(鉢盂) 이외에는 남겨두거나 아까워하는 것이 한 조각도 없었다.
한번은 『지지론소(地持論疏)』의 저술을 끝내고 꿈에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바닷물뿐이었으며, 그러다가 다시 한 불상이 나타났는데 몸빛은 자금색이었으며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누워 있었고 몸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혜원은 처음에는 공경하게 절하고 후에는 옷으로 먼지를 털어내니 온몸에서 광명이 비치고 청정하게 되었다. 꿈에서 깬 뒤에 생각하기를 자기가 지은 해설서가 교화를 따르게 하는데 도움이 적지 않기에 이런 조짐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 『열반경』의 소(疏)를 끝내고 아직 감히 그에 의거하여 강의하지 못하며 발원하여 어떤 증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빌었더니 꿈에 내 손으로 채색하지 않은 흰 7불(佛)과 8보살(菩薩) 상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모두 단정하고 뛰어났었다. 문득 스스로 수놓아 장식을 하고 채색하여 일이 끝나자 불상이 모두 차례로 일어나 걸어갔다. 맨 마지막의 한 상에 채색을 끝내려 하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와서 붓을 찾아 대신 채색을 하여 완성하였다. 꿈을 깬 다음에 생각하기를 ‘이 상(相)에는 말법의 경계에 유포될 조짐이 있다’고 하고, 곧 널리 강석을 열고 부연하였더니 참으로 꿈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는 정영사(淨影寺)의 긴 장대가 저절로 넘어지고 등불이 저절로 꺼지는 꿈을 꾸었다. 문득 꿈에 본 그해 그 날이 되자 절에서 부리던 정인(淨人)과 어린아이 두 명을 양인으로 놓아 주고, 자기 소유의 재산을 나누어 처분하니 이 모두는 공덕으로 되었다.
그리고 명하여 하루에 두 번 강의하기 전에 대중들에게 반야바라밀 주문 (呪文)을 외우되 50차례 외우도록 정하여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더니, 처음부터 태만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배우는 대중들이 공부에 힘쓰지 않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늘 강의를 계기로 말하기를 “이와 같은 바른 진리를 조금 지나면 듣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전생의 일을 통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건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방 밖에서 향을 끓인 물에 목욕하고는 밖에서 잠자다가 새벽에 방안으로 들어와 죽을 먹고 침상에 기대서 누우면서 묻기를 “지금 몇 시나 되었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묘시(卯時)쯤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나는 지금 찬 기운이 배꼽에까지 이른 것 같다. 나의 운명이 두세 치밖에 남지 않았다. 기대고 있는 침상을 치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발을 포개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바로 세우고서 눈을 감았으며 부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세상을 마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징험으로 바로 선화(仙化)함을 알 수 있었으며, 향기가 전단(栴檀) 향기와 같아 한참 후에 사라졌다. 그런 후에 몸을 눕혔는데, 손발은 유연(柔軟)하였고 몸은 모두 차가웠으나 오직 정수리만은 따뜻하였다.

지맹(智猛)
지맹이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상주(相州) 사람이었다. 그는 혜원의 불법의 가르침을 공손히 듣고 가슴에 새겼으며 늘 초청을 받았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혜원의 행장(行狀)을 자세히 써서 배우는 사람들이 이어받게 하려고 하였다.
지맹은 이야기와 설법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고 계기를 잘 이용한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동하(東夏) 땅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032_1003_a_17L年春往定州途由上黨留連夏講闕東傳尋下璽書殷勤重請辭又不便達西京於時勅召大德六人其一矣仍與常隨學士二百餘人達帝室親臨御筵敷述聖化通孚家上大悅勅住興善勞問豐華供事隆倍又以興善盛集法會是繁雖有揚化終爲事約乃選天門之南大街之右東西衝要遊聽不疲因置寺焉名爲淨影常居講說弘敍玄奧辯暢奔流吐納自深宣談曲盡於是四方投學七百餘人皆海內英華法輪前望京趣寺爲法道場但以堂宇未同居空露蘧蒢庵舍巷分州部夜祖習成器相尋雖復興善諸德英名一期至於歸學師尋千里繼接者莫高於遠矣形長八尺腰有九圍三幅裙可爲常服登座震吼雷動蟄充愜群望斯爲盛矣開皇十二年下勅令知翻譯刊定辭義其年卒於靜影寺春秋七十矣冕旒哀感之罷朝帝呼嗟曰國失二寶也與李德林同月而喪故動帝心自遠括髮尋師本圖傳授周歷兩代化滿八方著疏屬詞詮綜終始承習開悞櫛比塵連同範時朝得稱方駕初見病數日講堂上脊無故自折相顧颯必知不損及大漸之日端坐正神相如入定侍人不覺其卒忽聞室有異香咸生疑怪屬之以纊方悟氣盡昔在淸化先養一鵝聽講爲務頻經寒暑遠入閞後鵝在本寺棲宿廊廡晝夜鳴呼衆僧患之附使達京至靜影大門放之徑卽鳴叫騰躍入遠房爾後依前馴聽但聞法集鍾聲不問旦夕覆講豎義皆入堂伏聽僧徒梵散出戶翔鳴若値白黑布薩雖聞鍾召終不入聽時共異之若遠常途講解依法潛聽中聞汎及餘語便鳴翔而出如斯又經六載樂聽一時不後忽哀叫庭院不肯入堂自爾二遠便棄世開皇十二年六月二十四日矣俗年七僧臘五十又當終之日澤州本寺講堂衆柱及高座四腳一時同陷僉議以感通幽顯勒碑薛道衡製文虞世基丁氏鐫之時號爲三絕遠同聽大乘可六七載洞達深義神解更新每於鄴京法集豎難罕歒由此名冠遠近異論所推旣而勤業曉夕用心大苦遂成勞疾十五日內覺觀相續不得眠睡氣上心痛狀如刀切食弱形羸殆將欲絕憶昔林慮巡歷名山見諸禪府備蒙傳法遂學數息止心於境剋意尋繹經于半月便覺漸差少得眠息方知對治之良驗也因一夏學定甚得靜樂身心怡悅卽以己用問僧稠稠云此心住利根之境界也若善調攝堪爲觀行遠每於講至於定宗未嘗不讚美禪那槃桓累句信慮求之可得也自恨侚於衆無睱調心以爲失耳七夏在鄴講十地一擧榮問衆傾餘席自是在講肆伏聽千餘意存弘獎隨講出疏地持疏五卷十地疏七卷華嚴疏七卷涅槃疏十卷維摩勝鬘壽觀室等竝勒爲卷部四字成句綱目備文旨允當罕用擬倫又撰大乘義章十四卷合二百四十九科分爲五謂教法義法雜也竝陳綜義差#始近終遠則佛法網要盡於此焉#學者定宗不可不知也自遠之通法情趣慈心至於深文隱義每丁寧頻復提撕其耳唯恨學者受之不速覽者聽之不盡一無所惜也是以自於齊朝至于關輔及畿外要荒所流章疏五十餘卷二千三百餘紙紙別九百四十五言四十年閒曾無痾疹傳持教導所在弘宣竝皆成誦在心于今未絕本住淸化祖習涅槃寺衆百餘領徒者三十竝大唐之稱首也而遠勇於法義慈於救生戒乘不緩偏行拯溺所得利養竝供學徒衣盋之外片無留惜嘗製地持疏訖夢登須彌山頂四顧周望但唯海水又見一佛像身色紫金在寶樹下北首而體有塵埃遠初則禮敬後以衣拂周遍光淨覺罷謂所撰文疏頗有順化之益故爲此徵耳又自說云初作涅槃疏訖未敢依講發願乞相夢見自手造素七佛八菩薩像形竝端峙還自繢飾所畫旣竟像皆次第起行末後一像彩畫將了旁有一人來從索筆代遠成之覺後思曰此相有流末世之境也乃廣開敷之信如夢矣又未終一年夢見淨影長竿自倒耀自滅便至歲日所使淨人小兒二手放從良分處什物竝爲功德勅二時講前令大衆誦般若波羅蜜限五十遍以報四恩初不中怠傷學衆不能課力每因講日如此正須臾不聞識者以爲達宿命也覺輕貶於房外香湯洗浴卽在外宿至曉入房食粥倚牀而臥問曰早晩答云今可卯時乃曰吾今覺冷氣至去死可二三寸在可除倚牀自跏其足正身斂目不許扶侍未言其卒#驗方知化#香若栴檀久而歇滅後乃臥之手足柔軟身分竝冷唯頂上暖有沙門智猛者相人也伏佩法教每蒙延及故疏爲行狀擬學者所承猛談說有偏機會稱善振名東夏云續高僧傳卷第八義解四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