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2_1017_c_01L
속고승전 제10권
032_1017_c_01L續高僧傳卷第十


대당 석도선 지음
이창섭 번역
032_1017_c_02L大唐西明寺沙門釋道宣撰


2. 의해편 ⑥ [正傳 17人, 附見 5人]
032_1017_c_03L義解篇六 正傳十七 附見五

1) 수(隋)나라 팽성(彭城) 숭성(崇聖)도량 석정숭전(釋靖嵩傳)
2) 수나라 수도 대선정(大禪定)도량 석정현전(釋靖玄傳)명측(明則)
3) 수나라 양양(襄陽) 사문 석지윤전(釋智閏傳)
4) 수나라 오군(吳郡) 호구산(虎丘山) 석지취전(釋智聚傳)
5) 수나라 단양(丹陽) 섭산(聶山) 석혜광전(釋慧曠傳)
6) 수나라 단양 인효(仁孝)도량 석지림전(釋智琳傳)
7) 수나라 서경(西京) 보찰(寶刹)도량 석정원전(釋淨願傳)
8) 수나라 서경 선정(禪定)도량 석지응전(釋智凝傳)영각(靈覺), 도탁(道卓)
9) 수나라 서경 진적(眞寂)도량 석법언전(釋法彦傳)
10) 수나라 서경 해각(海覺)도량 석법총전(釋法摠傳)
11) 수나라 서경 대흥선(大興善)도량 석승담전(釋僧曇傳)혜중(慧重)
12) 수나라 서경 대선정(大禪定)도량 석영찬전(釋靈璨傳)
13) 수나라 서경 승광(勝光)도량 석법찬전(釋法瓚傳)
14) 수나라 서경 정영(淨影)도량 석보유전(釋寶儒傳)
15) 수나라 서경 광명(光明)도량 석혜최전(釋慧最傳)
16) 수나라 서경 선정(禪定)도량 석승랑전(釋僧朗傳)
17) 수나라 서경 정영(淨影)도량 석혜창전(釋慧暢傳)
032_1017_c_04L隋彭城崇聖道場釋靖嵩傳一
隋西京大禪定道場釋靖玄傳二 明則
隋襄陽沙門釋智閏傳三
隋吳郡虎丘山釋智聚傳四
隋丹陽聶山釋慧曠傳五
隋丹陽仁孝道場釋智琳傳六
隋西京寶剎道場釋淨願傳七
隋西京禪定道場釋智凝傳八 靈覺道卓
隋西京眞寂道場釋法彦傳九
隋西京海覺道場釋法摠傳十
隋西京大興善道場釋僧曇傳十一慧重
隋西京大禪定道場釋靈璨傳十二
隋西京勝光道場釋法瓚傳十三
隋西京淨影道場釋寶儒傳十四
隋西京光明道場釋慧最傳十五
隋西京禪定道場釋僧朗傳十六
隋西京淨影道場釋慧暢傳十七僧溫

1) 수(隋)나라 팽성(彭城) 숭성(崇聖)도량 석정숭전(釋靖嵩傳)
032_1017_c_21L釋靖嵩
032_1018_a_02L정숭의 속성은 장씨(張氏)이며 탁군(涿郡) 고안(固安)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곧은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과는 비할 바 없이 뛰어났다. 속세의 번뇌에 핍박당하자 도에 힘쓰기를 결심하고 15세에 출가하였다.
그와 함께 배운 정융(靖融)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일찍이 경론에 정통하여 소승과 대승에 모두 해박하였으며, 더욱이 『잡심론(雜心論)』의 연구에 몰두하여 늘 부처님 종지(宗旨)의 심오한 이치를 간곡히 유포시키고 자세하게 드러내 보였다.
정숭은 정신과 기개가 뛰어나고 월등하였으며 총명한 깨달음은 하늘에서 받은 기질이었다. 의문(義門)을 볼 때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다듬고 익혔으며, 다시 마음속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돌아와서 정융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정융은 대답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곧 정융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제일 나중에 배웠는데 깨달음 이처럼 투철하니 수도인 업성(鄴城)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반드시 중생을 제도할 인재로 될 것이다.”
그후 20세가 되어 구족계를 받게 되자 남쪽 장수(漳水) 지방을 돌아다녔다. 당시 고제(高齊)가 흥성하여 불교가 중흥하게 되었는데 수도 안의 큰 절을 대략 헤아려도 4천 개에 달하였으며, 거기에 머물고 있는 스님과 비구니만도 거의 8만 명에 달하였고, 뚜렷한 강원만도 2백여 개나 되었는데 그곳에 있으면서 항상 강의를 듣는 스님들만도 1만 명을 넘었다. 나라 안의 영걸(英傑)들은 모두 그 지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대학사(大學寺)에는 융지(融智)라는 법사가 있었는데, 그는 제(齊)나라의 국통(國統)이었던 법상(法上) 스님의 뛰어난 제자였다. 그의 깨달음은 여러 스님들을 꿰뚫었으며, 그의 도는 2장(藏:經과 論)으로 빛났다. 문하에는 5백 명의 학도들이 보따리를 등에 지고 문 앞에서 붐볐는데, 그들에게 항상 『열반경(涅槃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정숭은 그의 강의를 듣고 곧 성심으로 그에게 의지하여 제자의 예의를 갖추고 그의 모범을 따르며 몇 해 동안 경론을 익히고 연구하면서 듣는 데 따라 다시 논술하여 늘 기발한 이치를 밝히니 학도들 사이에서 우러러보면서 서로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행요(行要)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반드시 먼저 계율과 결부시켰으며, 마침내 운(雲)과 휘(暉) 두 율사(律師)가 있는 곳을 찾아가 널리 밝은 이치를 가르쳐줄 것을 청하여 2년 동안 그들의 문하에서 세월을 보내고, 박약하게나마 종문(宗門)의 조례(條例)를 거울에 비춰보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소승(小乘)에 관해서만은 상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유(道猷)와 법탄(法誕) 등 두 논주(論主)로부터 성종(成宗)과 잡종(雜宗) 두 종의 강의를 받으면서 심오한 이치를 묻고 여가에 더욱 열심히 익히고 모았다.
당시 수백 명의 스님들이 각기 등용문(登龍門)을 열려고 하였지만 사람에게는 봉의 날개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다.
정숭이 법석에 자리잡게 되자 위에서 말한 경론을 끝까지 다섯 차례 강의하였고 한편으로 바사(婆沙), 가연(迦延), 사리불(舍利弗) 등을 탐구하여 오묘하게 문리(文理)를 꿰뚫어 여러 번 항신(恒神)을 움직였다. 또한 여러 경을 널리 보고 스승을 모방하여 도를 논하니 그 기세는 팔방을 기울게 하였고 그의 말은 사방에 퍼졌다. 그리하여 하산(河山)의 독보적인 존재로 그의 배는 3장(藏)의 바다를 항해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가르침을 청하게 되니 그의 지혜는 당대에 가장 빛나게 되었다.
북제(北齊)의 낭야왕(瑯耶王)은 매우 신중하고 도량이 넓어서 널리 그의 도풍와 지략을 선전하고, 늘 이른 봄마다 널리 학도들을 초청하여 업도(鄴都)에서 큰 집회를 열어 특별히 법좌를 열고 정숭을 받들어 법주(法主)로 삼았다. 그리하여 정숭은 법주(法主)로 나아가 학도들을 격려하니 그로 하여 깨달음에로 인도하는 나루터를 이루게 되었으며, 점차 세월이 흐르자 아름다운 기풍이 전해져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동하(東河)에 그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周)나라의 무제(武帝)가 불문을 배척하게 되자 승단은 무너져 흩어지게 되어 마침내 함께 공부한 법귀(法貴)와 영간(靈侃) 등 3백여 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주나라로부터 남쪽으로 가서 강좌(江左)에 도달하게 되었다.
진(陳)나라 선제(宣帝)는 멀리서 스님의 덕음(德音)에 감복하여 오다가 이 소식을 듣고 시중(侍中) 원헌(袁憲)에게 명하여 수도 입구의 성(城)에 이르게 되면 예의로 대우하여 둑에 오르게 하라고 하였다.
황제는 또한 부마(駙馬)인 채응(蔡凝)에게 명하였다.
“덕이 높은 사람은 법을 위해서 몸을 도에 바친다. 법사 등은 훌륭히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것을 밝히기 때문에 귀의하고 기탁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도에 대한 뜻을 품은 정사(正士)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을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마땅히 도성에 있는 큰 절에 모시고 담당관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하되 두루 흡족하게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학(義學)에 능한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여 곧 불법을 널리 퍼뜨렸다.
당시 건업(建業)의 승정(僧正)은 정숭과 법귀(法貴) 두 사람과 상대가 되어 소승의 논을 설법하게 하였는데, 신통한 이론이 거침없이 서로 통하니 당시에 훌륭하고 뛰어났다고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모여든 학도들의 수가 5백 명이 넘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업무를 나누어 가르치니 힘써 쌓은 업적이 새롭고 기발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천축(天竺)의 삼장(三藏)이 있었는데 그는 친의(親依)라는 스님이었다. 그는 『섭론(攝論)』과 『구사론(俱舍論)』 등 두 논을 가지고 와서 멀리 변방의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양(梁)나라 말년에 귀화하였다가 나중에는 진(陳)나라 조정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20여 년 동안 말을 통하여 전할 곳이 없었고, 비록 번역하여 유포시켰다고 하더라도 강의하여 전수하는 데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오직 정숭만이 홀로 도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여 이 경전을 익히고 음미하면서 강론에 틈만 있으면 사문 법태(法泰)를 찾아가 의문나는 곳을 묻고 결정지어 몇 해 사이에 이 두 부의 책을 정밀하게 융합하였다. 그리하여 『불성론(佛性論)』을 비롯하여 『중론(中論)』ㆍ『변론(邊論)』ㆍ『무상론(無相論)』ㆍ『유식론(唯識論)』ㆍ『이집론(異執論)』 등 40여 부 논장의 강요(綱要)를 총괄하여 분석하고 모으고 구분하였다.
수(隋)나라 고조(高祖)가 천하를 평정하여 태평스럽게 하자 글의 전통은 대체로 전조(前朝)와 같았다. 개황(開皇) 10년에는 관료들에게 명하여 출가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허락하게 하였다.
당시 새로 도첩(度諜)을 받은 스님만도 50여 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렇게 처음으로 교화를 받게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그들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나루터를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때 정숭과 영간(靈侃) 등 2백여 명의 스님들은 이 기연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함께 강북(江北)으로 되돌아갔다.
일행은 서방(徐方)에 도달하자 크게 강원(講院)을 열었다.
이때 상주국(上柱國) 서주총관(徐州總管)이 천자(天子)에게 부절(符節)을 내려 주기를 청해서 화합하게 하여, 부하들을 거느리고 함께 초청하여 옛 수도의 조왕사(兆王寺)에 머무르게 하고 글을 올려 보고하니, 황제의 명으로 편액이 내려 그곳을 숭성사(崇聖寺)라고 이름지었다.
그리하여 항상 법륜을 굴리게 되었고 강회(河淮) 지방이 통틀어 불법에 물들게 되었으며, 마침내 교화의 범위를 하북(河北) 지방으로 옮기자 서로서로 길을 따라 남에게 뒤질세라 급히 달려와 모두 『섭론(攝論)』을 물었다.
정숭의 학문은 진제(眞諦)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 논의 내용은 천친(天親)보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생각은 말에 앞서 뛰어났고 운치는 전수한 후에 높아졌으니 대승의 궁극의 종지가 그에게서 평정되고 정통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구주(九州)를 거느리는 종장으로 그 명망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그는 『섭론소(攝論疏)』 6권을 편찬하였고, 또 『잡심론소(雜心論疏)』 5권을 편찬하였으며, 9식(識)ㆍ3장(藏)ㆍ3취계(聚戒), 2생사(生死:分段生死와 變易生死) 등에 관한 현의(玄義)를 편찬하였는데, 모두가 세상에 유포되어 당시의 대종(大宗)으로 삼게 되었다.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태산(泰山)에서 산천의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제(齊)와 노(魯) 땅을 거쳐 천자의 수레가 행차하게 되자, 관중(關中)의 의학(義學)하는 스님들도 이로 하여 천자의 수레를 따라 서주(徐州) 지방을 지나면서 정숭의 법사(法肆)를 찾아가 그에게 복응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문하의 제자들이 더욱 성해지고 그의 장소(章疏)가 크게 세상에 알려졌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예전에 양월(楊越)을 다스릴 때 네 곳에 도량을 세워놓고 교지(敎旨)를 급히 보냈으나 정숭은 끝까지 사양하였다.
그후 양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또 명하여 불렀으나 굳이 사양하니 마침내 부르기를 그만두었다. 문인들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정숭이 말하였다.
“수도에는 제한하는 것이 있고 행동거지에는 엄격한 어려움이 있다. 비록 궁성 안의 도량[內道場]이라고 하더라도 세상 밖의 산속에 있는 절만은 못하다. 사문(沙門)이라는 것은 해탈을 표현하는 말인데 사업으로 도리어 몸을 속박당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일찍이 두 곳의 도읍지를 돌아다니다가 자주 방랑하는 스님들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이 고달픈 일을 폐단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는 항상 청백하고 소박하였으며 자기를 깨끗이 하고 사사로이 도량을 세워 나날이 예송(禮誦)을 더하면서 모든 청정한 업을 닦았고, 강론과 인도가 끊임없이 이어져 여섯 때에 대중을 채찍질하며 성의를 다하여 고된 수도를 한 이래로 거의 30년이 되었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고 손과 무릎으로 땅을 어루만진 곳은 모조리 패이고 자국이 생겨 그 모양이 사람이 본떠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았다. 그의 거룩한 행이 이렇게 현실로 조짐을 이루었다.
세상에는 제각기 논사(論師)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행(行)의 참뜻에는 헛갈리고 있는데, 정숭은 법도를 받들었고 조금도 윤강(倫綱)을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지 않았다. 비가 내릴 때에는 항상 조관(澡罐)을 뜰에 놓아두고 혹 땅이 상할 것 같아 두려워하였으며, 정인(淨人)이 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하고는 비로소 자신도 따라 이 물을 사용하니 여러 학사(學士)들이 다 같이 모두 그가 사물의 기량(器量)을 아는 것을 공경하는 한편 꺼려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때때로 시송(詩頌)을 잡았고 거듭하여 고요한 산속 은신처의 즐거움을 가상히 여겼으며, 늘 산에 오르곤 하였다. 자사(子史)와 전서(篆書)가 지금까지 표본으로 남아 있으며 또한 세간의 논의ㆍ극담(劇談)에도 자못 그에게서 이어진 실마리가 있었다.
그는 대업 10년에 갑자기 병이 들어 본사(本寺)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팽성도유수(彭城道留守) 순정공(順政公) 동순(董純)이 부(部) 안의 도인과 속인들과 더불어 신고(神睾)의 언덕에서 그를 장사지냈다.
익주(益州)의 도기(道基)는 예전에 그의 문하에서 말연(末筵)에 참여한 일이 있어 그의 풍격과 덕망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유혼(流魂)을 제멋대로 내버려둔 것을 애석히 여기고, 무덤 주변이 비바람에 황량해지고 어지럽게 되는 것을 슬퍼하여 그를 위해 행장(行狀)을 지어 세상에 널리 알렸다.
032_1017_c_22L 俗姓張涿郡固安人幼抱貞在物不群迫以俗塵期之道務五出家有同學靖融早達經論通該小大尤究雜心每以佛宗深要曲流委示嵩神氣俊越聰悟天機隨覽義覆疏陶練重以心計不測返以問融無以對也乃告曰卿稚齒末學徹悟若斯可往京鄴必成濟器及登冠受具南遊漳輦屬高齊之盛佛教中興都下大寺略計四千見住僧尼僅將八萬講席相距二百有餘在衆常聽出過一萬故宇內英傑咸歸厥有大學寺融智法師大齊國統法上之神足也解貫衆師光二藏學徒五百負帙摩肩常講涅槃及地論嵩聞之乃投誠焉北面從範攻硏數隨聞覆述每擊奇致於卽學徒擧目相與推師又以行要肇基必先戒乃詣雲暉二律師所博求明誨問二載薄鏡宗條唯有小乘未遑詳遂從道猷法誕二大論主面受成雜兩宗諮諏幽奧纂習餘烈數百僧徒各啓龍門人分鳳翼及嵩之位席上經五遍旁探婆沙迦延舍利弗等妙通文理屢動恒神便又博觀衆經師摸論道勢傾八位詞號四飛獨步河山舟航三藏憑附參請智光時傑齊琅耶王深相器重弘扇風猷每於肇春廣延學侶大集鄴都特開法座奉嵩爲法主進勵學徒因爾導悟成彌逢涼燠傳芳接武響譽東河#俄屬周武屛除釋門離潰遂與同學法靈侃等三百餘僧自北徂南達于江左陳宣帝遠揖德音承風迎引侍中袁憲至京口城禮接登岸帝又使駙馬蔡凝宣勅云至人爲法以身許道法師等善明治亂歸寄有敍謂懷道正士深可嘉之宜於都郭大安置所司供給務令周洽仍令推薦義學長者卽弘像教時建業僧正令嵩貴二人對弘小論神理疏暢勇當時學侶相近數過五百晷漏分茂績新奇有天竺三藏厥號親依齎攝舍二論遠化邊服初歸梁季歷陳朝二十餘年通傳無地雖云譯講授無聞唯嵩獨拔玄心翫味茲纔有講隙便詣沙門法泰諮決疑數年之中精融二部自佛性中邊無相唯識異執等論四十餘部皆摠其綱要剖會區分隋高廓淸百越軌大同開皇十年勅僚庶等有樂出家者竝聽時新度之僧乃有五十餘爰初沐化未曰知津嵩與靈侃等二百許僧聞機乘濟俱還江北行達徐方盛開講肆上柱國徐州摠管乞符令和率其所部同延住前京兆王具狀聞奏有勅給額爲崇聖寺焉於是常轉法輪江淮通潤遂使化移河北相繼趍途望氣相奔俱諮攝論嵩學資眞諦義寔天親思逸言前高傳後大乘極旨於是乎通自此領匠九州垂章四海撰攝論疏六卷心疏五卷又撰九識三藏三聚戒生死等玄義竝流于世爲時所宗文封禪岱宗鑾駕齊閞中義學因從過于徐部詣嵩法肆伏膺受業由此門徒推盛章疏大行隋煬昔鎭楊越立四道場教旨載馳嵩終謝遣及登紫極又有勅徵固辭乃止門人問其故#答曰王城有限動止嚴難內道場不如物外沙門名爲解脫何返以事業累乎吾曾遊兩都屢逢播蕩弊此勞役耳恒每淸素自潔立道場日加禮誦修諸淨業講道相策衆六時精苦已來垂三十載其扣頭手膝按地之所悉成坑迹若人摸其景行徵明爲若此也自有論師多迷行旨#而嵩奉遵法度初不墜倫常遇天雨澡罐在庭恐傷地性令淨人知擧方自從用同諸學士敬憚其知量焉加以性愛文藻時摛詩頌重復嘉尚林泉每登踐陟子史篆隸摸揩于今世論劇談頗有承緖忽以大業十年遘疾卒于本寺春秋七十有八光祿大夫彭城道留守順政公董純與部內道俗殯于神皐之益州道基昔預末筵飡風飮德流魂之安放悲墳隧之荒侵爲之行廣於世矣

2) 수나라 수도 대선정(大禪定)도량 석정현전(釋靖玄傳)
032_1019_a_20L釋靖玄
032_1019_b_02L정현의 속성은 조씨(趙氏)이며 천수(天水) 사람이다. 그는 지식이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분명하게 감별하여 아주 멀리까지 보았다.
7세에 군(郡)의 학생으로 임용되어 3년 동안 부지런히 공부하니 재능이 6전(典)을 통달하였다.
수나라가 세워지자 곧 도교를 업으로 삼아 도교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몸은 도관과 함께 하고 이슬을 마시며 음양의 정기를 호흡하였다. 그후 늘 5천 자(字)의 『도덕경(道德經)』이 자못 진인(眞人)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도교의 일곱 가지 계율이 본래 지나친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마침내 그 두건과 도포를 벗어버리고 승가리(僧伽梨)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직 마음을 깨끗하게 닦으면서 경전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어머니의 품에서 뛰어놀 나이었으나 자주 법장(法匠)에 오르게 되니 우리나라와 오랑캐가 흠모하여 우러르고 도인과 속인들이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는 그의 명성과 기세는 더욱 높아져서 마침내 농서(隴西) 지방을 교화하고 하락(河洛:黃河, 洛陽)에 명예를 떨쳤다.
그는 진량(秦凉) 땅에서 요법(要法)이 쇠퇴하여 불법이 더럽혀지고 그릇되게 되었다고 하여, 장차 그 잘못된 기강을 다시 세우려고 여기에 남아 있는 화살(황제를 자극하는 상소문을 비유한 것)을 포치하여, 바른 법의 긴요한 일을 모두 열거하여 문황제(文皇帝)에게 올렸는데, 황제의 승인을 받아 황제의 말씀[綸音]으로 권장하고 뽑아 올리는 조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우(河右) 지방으로 내려가 조례(條例)를 반포하여 그대로 하도록 하였다.
원덕 태자(元德太子)는 불법에 매우 의지하는 사람이어서 특별히 그를 생각하며 흠모하고 감복하였다. 그래서 명을 내려 수도로 그를 불러 올렸다.
정현은 마침내 가상히 여겨 베푸는 혜택을 받아 공손히 제왕이 사는 집으로 옮겨오게 되었으며, 황태자의 명령으로 대흥선도량(大興善道場)에서 법회를 크게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아갈 듯한 처마 아래에는 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석장(錫杖)을 짚고 물병을 쥔 스님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의 도풍을 바라보며 모두가 도리에 맞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의 강설은 심오한 논의 이치를 해석하여 의심나는 것들을 풀어 서술하여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법문을 이해하게 하고 널리 해설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당시 찬(璨) 법사가 그 자리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하북 양주[河凉]에서 온 의학(義學)하는 도반(道伴)으로는 도랑(道朗)이 그 이름을 독차지하여 그 행적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후 그 수레바퀴를 받아 이은 사람은 대대로 없앨 수 없었으며 다시 그러한 사람이 여기에 있게 되었다.”
이로 하여 그의 명성은 수도에 널리 퍼져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때마침 수나라 황제 고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선정(禪定)의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서 마침내 조서(詔書)에 응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항상 범륜(梵輪)을 굴려 홍장(弘匠)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그는 대업(大業) 7년 1월 29일에 병 없이 생을 마쳤는데 나이는 43세였다.
정현이 평생 동안 논한 것은 자비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늘 그의 유해(遺骸)를 산과 들에 버릴 것을 부탁하였다.
그와 같은 천수(天水) 사람으로 도반인 혜엄(慧嚴)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예전의 그의 말을 추억하여 시신을 산기슭에서 살과 육신을 다 태운 후에 유골을 모아 종남산(終南山) 용지사(龍池寺) 서쪽 영마루에 전탑(塼塔)을 구축하였다. 탑이 있는 곳에 비문(碑文)을 써서 이것으로 그의 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였으며, 사문 명측(明則)이 비문을 지었다.

명측(明則)
명측은 본래 기주(冀州) 사람이며, 도교와 유교에 정통하였고 재능과 지혜가 있었으며, 말수가 적고 행동이 민첩하였으므로 능히 종통을 이었다.
그의 문장은 비록 뛰어났으나 그 당시에는 이것을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후 각관사(覺觀寺)의 비문을 지었을 때도 세상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복야(僕射)인 양소(楊素)가 그것을 보고 기발하다고 하여 이 한 번의 평가로 비로소 명망이 높아졌고, 양소가 상주(上奏)하여 인수궁(仁壽宮) 삼선사(三善寺)에 머물게 되었다.
다시 동도(東都)에서 경을 번역할 때 또 부름을 받아 번역관에 들어가 오로지 편집하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수(隋)나라 말년에 머물고 있던 절에서 생을 마쳤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유행되고 있었는데 설도형(薛道衡)이 늘 이렇게 말하였다.
“명측의 글은 여러 번 새로운 문채를 나타내어 유독 아름답게 비춘다.”
그가 당시의 현사(賢士)로부터 이렇게 숭상의 대상으로 되었다.
032_1019_a_21L 姓趙氏天水人也識度淹弘淸鑑懸遠七歲任郡學生勤閱三冬藝該六典皇隋肇運便業李張名預黃巾身同觀宇呼吸沆瀣吐納陰沈每思五千道德良非造眞七誡超昇本爲浮詭乃捨其巾褐服此伽梨練一心專宗經部時年在息慈頻登法匠華夷欽仰緇素屬目受具已後聲勢轉高遂使化靡隴西扇榮河洛以秦涼荒要佛法澆侈將欲結其頹布此遺矰具列正法要務奏上文蒙勅允述綸言獎拔登下河右條依用元德太子籍甚芳猷翹想欽爰降令旨遠召京華玄遂恭承嘉來翔帝宇有令於大興善道場弘法會飛軒鳴玉杖錫挈甁摠萃觀風#德音通被縱達論體舒散疑蹤使難者由門解宣盡力璨法師居坐謂曰自河涼義侶則道朗擅其名沿歷至今爾其接軫代不可削斯人在斯由此顯譽京師綽然高步會高祖昇鬱興禪定#遂應詔住焉常轉梵輪弘匠非少大業七年正月二十九日無疾而化春秋四十有三玄生平言論慈悲爲主#每許遺骸棄之林野有天水同侶沙門慧嚴追想昔言屍山麓肌肉已盡便鳩聚遺身搆茲塼塔於終南龍池寺之西岑樹銘塔用旌厥德沙門明則爲文則本冀通玄儒有才慧訥言敏行尤所承統#文藻雖馳時未之賞乃制覺觀寺物亦不悟僕射楊素見而奇之斯一顧方高聲問奏住仁壽宮三善東都譯經又召入館專知綴緝末卒於所住有集行世薛道衡每曰則公之文屢發新采英英獨照其爲時賢所尚也如此矣

3) 수나라 양양(襄陽) 사문 석지윤전(釋智閏傳)
032_1019_c_11L釋智閏
032_1020_a_02L지윤의 속성을 알 수 없으며 양양 사람이다. 그는 스승 없이 홀로 깨닫고 절로 세속이 싫어져 고을과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의논 끝에 허락을 받고 도에 출가하였다.
업하(鄴下)에서 크게 불법이 숭상되어 10명의 승통(僧統)이 하나둘 점차 나타나고, 그들의 좋은 영향이 큰 강물처럼 흘러서 하늘과 땅에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지윤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기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나이가 20세가 되자 비로소 곧 먼 길을 달려 그곳을 찾아갔다.
때마침 승준(僧遵) 승통이 『십지론』을 널리 강의하던 때여서 곧 그를 따라 학업을 시작하였다. 한 시절이 넘지 않는 기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자주 복론(覆論)에 참가하였는데, 하북(河北) 지방에는 옛날부터 불교학문이 매우 드물고 적어서 자세히 가르쳐줄 것을 기대하였다.
늦게 『화엄경』과 『열반경』을 배워 모두 영현(榮顯)을 더하게 되었으며, 또 광(光) 승통에게서 『사분율(四分律)』 강의를 듣고 글과 말을 받아 간직하였다. 아울러 『소론(小論)』을 익혀 막힌 곳과 통한 곳을 모두 가려내니 당시 그를 박섬(博贍)1)이라고 불렀으며 그보다 나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후 또 강남(江南)에서 3론(論)을 널리 장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은 본래의 소원이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곳으로 돌아갔다. 마침 바로 장간사(長干寺)의 변(辯) 법사가 앞장에서 제창하던 때여서 곧 거기에 참가하여 그로부터 3론의 강론을 듣고 받아들였다. 한번 깨닫자 곧 기뻐하였지만, 글 내용이 무게 있고 심오하여 마침내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후에 한음(漢陰:河北)으로 돌아가 그곳에 눌러앉아 늘 강론을 이끌면서 강북 지방에서 교화하니 도인과 속인들 속에 행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업(大業) 연간 초엽에 세운 혜일사(慧日寺)에 초청되어 그곳에 머무르니 해박하고 풍부한 재능이 종전보다 더욱 넘치게 되었다.
때마침 나라에서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산신에게 빌려고 지윤에게 명하여 촉(蜀)의 민산(岷山)에서 강신(江神)에게 제사지내고 기도드리게 하였다.
이 일을 마치고 서경(西京)에 돌아가서 병으로 선정사(禪定寺)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고 곧 대업(大業) 10년의 일이었다.
032_1019_c_12L 不詳姓氏襄陽人也無師獨自然厭世周章邑野借訪出道鄴下盛宗佛法十統鬱興令響滂流洋溢天壤閏不勝其喜踊躍不安始二十便趍遠詣會遵統開弘十地卽從服業經未越序頻參覆論河北夙少望塵許焉晩學華嚴涅槃咸增榮顯又聽光統四分領受文言兼習小論具辯通塞時號博贍尟有加之又聞江表大弘三論旣是本願不遠而歸値長干辯公當塗首唱預從聽受一悟欣然文義重深遂多時載後還漢陰鎭常講導化行江涘善生道俗大業初建延住慧日該富之量更溢由來會征遼左求功嶽瀆勅閏岷蜀祭禱江神還至西京因疾而化卒于禪定寺時年七十有五卽大業十年矣

4) 수나라 오군(吳郡) 호구산(虎丘山) 석지취전(釋智聚傳)
032_1020_a_06L釋智聚
지취의 속성은 주씨(朱氏)이며 소주(蘇州) 호구산(虎丘山) 동산사(東山寺)에 머물렀다.
그는 맑고 원대한 신비로운 기상이 어려서부터 뚜렷이 나타나 울타리와 조롱 속에 갇혀 사는 것 같은 세속을 매우 싫어하였고, 고요하고 한적한 세계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구하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처음 호구산의 윤(胤) 법사에게 의지하였다. 윤 법사는 진중하고 넓은 도와 재능으로 당대의 본받아 따를 만한 존재였다. 지취는 잠시도 게으름이 없이 깊은 종지(宗旨)를 묻고 도움을 청하였다.
같은 군(郡)의 고희빙(顧希憑)과 회계(會稽)의 사준악(謝峻岳)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의학(義學)과 경전의 학문으로 동남 지방의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지취는 그들의 높은 덕망을 아울러 흠모하였으며, 이와 함께 그 깨끗한 풍채에 감복하였다. 이로 하여 유교와 불교를 모두 넓게 알게 되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함께 논의하게 되어 궁궐의 담장처럼 높고 겹겹인 진리의 성안에 훌륭히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얻게 되었다.
나이가 20세가 지나자 곧 강설(講說)로 불교를 널리 퍼뜨리게 되었다.
당시 장엄사(莊嚴寺)의 작(嚼) 법사가 새로운 『성실론』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만대(萬代)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지취는 마침내 그 문하에 들어가 『백론(百論)』과 『구사론(俱舍論)』을 자문 받고 따져 물어서 오래지 않아 아름다운 자실이 드러나 그것을 정밀히 연구하자 의문과 막혔던 곳이 모두 판별되었다.
여남(汝南)의 주홍정(周弘正)은 내외의 학문에 널리 정통하고 인륜(人倫)을 잘 아는 사람인데 항상 그를 훌륭하다고 찬탄하면서 불문의 인재[瑚璉]라고 하였다.
진(陳)나라 때 파양(鄱陽)의 왕백산(王伯山)과 신안(新安)의 왕백주(王伯周)와 신채(新蔡)의 왕숙제(王叔齊)는 모두 귀한 신분의 사람들로서 자기를 낮추어 도를 사모하여 그를 초청해 널리 설법하게 하였다.
지덕(至德) 2년(584)에는 명을 받들고 태극전(太極殿)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였는데, 천자가 직접 법석에 참가하였고 모든 관료들이 함께 그 자리에 참가하였다. 그러므로 경사가 급한 강의 물이 빨리 흐르듯이 거침없는 말재주를 부렸고, 이 나라를 목탁(木鐸)소리로 뒤흔들었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기묘한 운(韻)이 뛰어나서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갔다. 혹 지름길로 소승의 길을 걷는 사람이나 사론(邪論)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모두 수레를 돌려 입을 다물고 마음을 고쳐먹고 본업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찬탄하면서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게 되었다.
032_1020_a_07L 姓朱氏住蘇州虎丘東山寺神氣淸遠彰於襁褓深厭籠樊樂希寥廓初投武丘胤法師胤道藝之重羽儀當世聚分陰無怠請益深旨同郡顧希憑會稽謝峻嶽義府經肆東南之美竝欽高德同揖淸風由是儒墨通弘眞俗具擧宮牆重仞允得其門纔踰弱冠便弘講說莊嚴㬭師新實一家鷹揚萬代遂伏膺諮質舍非遠斐發旣精疑滯咸折汝南周弘正博通內外鑑賞人倫常歎嘉之以爲釋門之瑚璉也陳鄱陽王伯山新安王伯周新蔡王叔齊竝降貴慕延請敷說至德二年奉勅於太極殿講金光明天子親臨法席具僚咸故能寫此懸河振斯木鐸亹亹奇超超入神或有捷徑小道互持邪莫不迴車杜口改心易業人主歎稱善久之
032_1020_b_02L지덕 3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겨 몸이 상하여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이로 하여 옛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동산정사(東山精舍)에 머무르면서 훌륭한 설법을 끊임없이 하였으므로 법륜은 항상 굴러갔다.
개황(開皇) 11년(591)에는 칙서(勅書)를 내려 정중하게 위로하고 문안하였다.
032_1020_b_02L至德三年丁外母憂泣血銜哀殆將毀滅因此言歸舊里止於東山精舍善說不休法輪常轉開皇十一年爰降勅書殷勤勞問
032_1020_c_02L“법사의 몸은 정토(淨土)에 머무르면서 뜻은 법문을 돕고 두루 중생을 위하여 정교(正敎)를 널리 드날리고 부지런히 공덕을 닦아 법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격려하여 오로지 한마음으로 강론하고 독송하여 널리 모든 중생을 제도하니 그 어질고 착한 일을 공경하게 받들고 이를 몹시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초공(楚公) 소(素)와 좌복야(左僕射) 비국공(邳國公) 소위(蘇威)가 함께 도량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발에 머리를 대어 절을 하며 같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몸을 장엄하는 데 보탬을 주었다.
개황 13년에는 황제의 명으로 승관(僧官)을 두게 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찾아와 평등하게 하는 소임을 맡도록 청하였다. 지취가 자못 이 소임에 적임자라 하여 그 자리를 맡았는데, 곧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니 화합한 대중사이에 맑은 바람이 불어 화목하였다.
당시 군장(郡將)인 유종성(劉宗成)은 일찍부터 높은 명성을 우러르고 항상 그의 훌륭한 덕망을 흠모하여 왔는데, 부(部)에 나가거나 진(鎭)에 이르거나 지취를 청하여 보살계를 내려주는 스승이 되어 달라고 하였다.
또 제(齊)나라의 왕인 소간(蕭暕)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회해(淮海) 지방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되었는데 곧 교서(敎書)를 내리고 산에 이르러 초청하였다.
“제자는 수레의 묵은 회초리를 내려놓고 빨리 염량(炎凉:더위와 추위, 세월 따라 변하는 마음)을 고치려고 하였는데, 멀리서 청규(淸規)의 소식을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공경히 듣건대 법사는 그윽한 산골에 머물면서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나 도풍의 뛰어난 기세는 홀로 지금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십니다. 덕은 초야의 으뜸이며 도는 생사를 초월하여 이 지혜의 횃불을 밝혀 미혹된 중생을 깨우쳐주는 강동(江東)의 유일한 존재이니 어떻게 이렇게도 훌륭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직 아랫자리에 찾아가 의문을 상고하여 높은 뜻을 직접 듣지 못하니 글로써라도 문안하려고 하는 회포를 가득 실었습니다. 호구산(虎丘山)이 자리잡은 곳은 물길로 가면 멀지 않지만 백로(白鷺)가 나는 물길에는 인가들이 접해 있습니다. 진심으로 원하니 법사께서는 인욕(忍辱)의 옷을 떨치시어 발돋음하며 기다리는 소망을 풀어주십시오.”
그러나 지취는 병을 핑계 대고 이를 굳게 사양하다가 일이 피치 못하게 되자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지취를 인도하여 평대(平臺)에 의지하게 하고 깊이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여 자주 사람을 보내서 불교의 홍법을 청하였다.
지취는 오직 뜻은 인간세계를 멀리하고 마음은 강호(江湖)에 가 있어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글을 보내서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굳이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제왕(齊王)도 속세의 번거로움을 멀리하고 홍법함으로써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한 물자를 주고 몹시 정중하게 전송하였다.
그리하여 절강(浙江)과 인접한 곳에서 새벽에 길을 떠나 다시 산사(山寺)로 돌아와 거처하게 되었다.
그후 병증세가 나타났으나 열흘이 넘도록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가, 대업(大業) 5년 11월 24일에 본래 주석했던 절에서 생을 마쳤는데 용모가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고, 이마가 따뜻하고 몸은 부드러워서 모두 생시와 같았다. 앞에서 기록한 모든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이것이 과보에 감응하는 징조라고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2세였으며 곧 그해 12월에 산의 남쪽 영마루에서 장사지냈다.
생각하면 지취는 성품이 평온하고 원대하게 타고나서 외모와 성품이 유순하고 깨끗하였으며 평등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넓은 도량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 초(楚)와 월(越)에서 성정에 구애되는 것이 있었으나 얻고 잃는 것을 아울러 멀리하였다.
마음속 생각은 깊고 깊어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는 풍모와 자태가 아름다웠고 담소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줄곧 칭찬하고 깨우쳐주니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돌아가는 것을 잊곤 하였다. 게다가 술술 쉽게 설법하니 피로함을 몰랐고, 그러면서 불법을 모두 지니고 잃는 것이 없었다.
그는 『대품경』ㆍ『열반경』ㆍ『법화경』 등을 각기 스무 차례 강론하였다. 그러므로 단경(單經)에 대해 힘쓰는 것에 알맞은 사람들은 기억하는 적이 드물었다.
또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치장하는데 마음을 쓰지 않아 옷과 발우 이외의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하였으므로 방장(方丈)안은 텅 비어 쓸쓸하였고 책상과 평상에는 주석서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도는 당대에 번 성하고 그의 이름은 당대에 존중을 받을 만하였다. 그가 조성한 장륙팔척(丈六八尺)의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과 아마타불상, 형주(荊州)의 서상(瑞像)은 절에서 공양하였으며, 아울러 그는 간서(澗西)에 불전(佛殿)을 두 곳에 세웠는데 회랑(廻廊)에 두루 두 가지 장엄을 갖추었다.
그의 제자 도공(道恭)과 조카인 도순(道順), 상좌 덕유(德惟)는 그의 남긴 위업을 크게 계승하였고, 함께 큰 비석을 세워 그의 거룩한 행적을 남겼으며 비서(秘書) 우세남(虞世南)이 비문을 지었다.
032_1020_b_05L法師拪身淨土援志法門普爲衆生宣揚正勤脩功德率勵法徒專心講誦濟群品欽承德業甚以嘉之尚書令楚公素左僕射邳國公蘇威#竝躬到道場接足頂禮咸捨淨財資莊形命十三勅置僧官道俗稽請居平等之任聚以雅道斯人直心應物和合之衆淸風穆如也郡將宗成劉公夙仰高名常欽盛德及部臨鎭請爲菩薩戒師齊王暕以帝子之貴作牧淮海乃降教書至山延曰弟子下車舊楚亟改炎涼逖聽淸規其來有日敬承幽拪山谷多歷年所道風勝氣獨擅當今故以德冠林遠道超生什炳斯慧炬以悟群迷獨步江東何甚之美未獲稽疑下筵餐承高義杼軸之勞載盈懷抱據虎之岫川途不遙翔鷺之濤風煙相接心願振忍辱之衣赴翹勤之望乃固辭以疾事不獲從藉平臺深加敬禮頻遣使人請弘大聚惟志違人世心逸江湖詞翰懇固求東返王亦弘以度外得遂宿心資給所須將送甚重於是接浙晨征還居山寺現疾浹旬而神用無爽大業五年十一月二十四日終於本容貌若存頂暖身柔皆如平日諸前記乃感果之徵也春秋七十有卽以其年十二月窆于山之南嶺惟聚性託夷遠衿情閑澹等懷遇弘量居心楚越拘情得喪兼遣寸之地悠然罕測美風姿善談笑連賞悟見者忘返加以樂說忘疲持無失講大品涅槃法華等各二十單經適務者罕得記焉又居身淸不在飾玩衣盋已外隨用檀捨丈之內虛室蕭然几榻之閒文疏而故能道盛一時名重當世#其所造丈八盧舍那無量壽荊州瑞像於寺供養幷起㵎西佛殿二所迴廊周遍具二莊嚴弟子道恭猶子道順德惟上首業盛傳燈敢樹高碑用旌景行秘書虞世南爲文

5) 수나라 단양(丹陽) 섭산(聶山) 석혜광전(釋慧曠傳)
032_1020_c_24L釋慧曠
032_1021_a_02L혜광의 속성은 조씨(曹氏)이며 초국(譙國) 사람인데 그 후손들의 파(派)가 갈라져서 지금은 양양(襄陽) 사람이 되었다. 그의 조부 조량종(曹亮宗)은 양(梁)의 급사(給事) 황문시랑(黃門侍郞) 위위경(衛尉卿)을 지냈으며, 그의 부친 조애(曹藹)는 직각장군(直閣將軍)을 지냈다.
혜광의 뛰어난 기질은 젊은 나이에 두드러지게 드러났고 타고난 효도와 공경심이 있었으며 천성(天性)적으로 고결하고 청렴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강릉(江陵) 보광사(寶光寺) 징(澄) 법사를 섬기면서 그의 거동과 가르침을 공경하고 부지런히 따르면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공경스럽게 그를 받들었다. 그리하여 그윽히 깊은 종지를 밝혀내는 데서 자못 많은 사람들을 초월하였다.
그후 명제(明帝)의 저궁(渚宮)을 떠나서 수도의 근교에서 길을 묻고는 율행사(律行寺)에 가서 거처하면서 팽성(彭城)의 강론을 들었다. 미묘한 도의 대문이 여기서 열려 대의(大義)를 이미 정통하였다. 그리하여 곧 지방마다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려고 하여 마침내 종(宗)ㆍ개(愷)ㆍ준(准)ㆍ운(韻) 등 여러 법사들과 함께 진제(眞諦) 법사를 만나 『섭대승론(攝大乘論)』ㆍ『유식론(唯識論)』 등과 『금광명경(金光明經)』 등의 강의를 받았다.
그후 갑자기 진제 법사가 열반에 들고, 법붕(法朋) 법사가 병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마침내 공동으로 승종(僧宗)을 배우고 함께 광산(匡山)에 머물면서 때를 나누어 설법하니 법화(法化)가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주(州)의 태수와 파양(鄱陽), 장사(長沙)의 두 왕은 함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공경심을 두터이 하였다.
그후 상주(湘州)와 영주(郢州)의 두 고을에서 여러 해 동안 불법을 넓혔다. 비록 직접 깨달은 것은 오랫동안 잊었다고 하더라도 밑바탕에 깔린 은택이 과보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진(陳)나라 지덕(至德) 1년에 옛 고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 해는 곧 수(隋)나라 개황(開皇) 3년이었다.
그곳 변학도량(遍學道場)에서 경을 전하고 교화를 이끌었다. 혜광은 이미 율행이 엄정(嚴精)하고 의문(義門)에 해박하였으므로 도인과 속인들이 함께 우러러보았고, 그가 세운 법도는 옳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8년 동안 이들을 거느리고 장악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거두어들여 돌아갔을 것인가.
그후 다시 명을 받들어 흥국사로 자리를 옮기니 그곳에서 사임(寺任)을 위촉하였고 황제의 윤음이 다시 내려와 향과 소유를 여러 번 하사되었다.
진(秦)의 효왕(孝王)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높은 신분으로 양양(襄陽)의 면수(沔水:漢水의 지류) 지방에 깃발을 세웠는데, 소식을 듣고 덕을 잊지 못하여 직접 귀의계(歸依戒)를 받들었다.
수(隋)나라의 양제(煬帝)가 제왕자리를 찬탈하여 천부(天符)를 맡았는데 현인(賢人)을 존경하고 도를 음미하려고 곧 왕족의 사람을 내려 보내서 천자의 수레 가까이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길을 가는 도중 강양(江陽)에서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의 명을 받아 단양(丹陽)의 서하사(栖霞寺)에서 치료와 요양을 일삼게 되었다. 그는 또한 본래 성품이 송죽과 같았고, 정신이 천석(泉石)의 도움을 받게 되니 좋아서 구경하고 정드는 마음이 아울러 일어나 몸에 얽힌 오랜 병이 이로써 나아졌다. 이리하여 서하사의 법당에서 다시 『대론(大論)』의 강론을 폈는데 처음 듣는 사람과 예전에 배운 사람들이 각기 뛰어난 해석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훌륭한 선정(禪定)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선방은 본래 서현정사(栖玄精舍)였으며, 경릉(竟陵) 문선제(文宣帝)가 남긴 유적으로서 선사 혜효(慧曉)의 유풍이 서린 곳이었다. 거울 같은 연못, 달밤의 나무의 기묘함과 구름 같은 누각, 산속 법당의 묘함은 일찍이 돌아본 곳이기도 하여서 마침내 이곳에서 생을 마칠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제자들의 손을 잡고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쉬게 되었다.
절벽과 골짜기에는 인간세상의 마음이 다 사라지고 안개와 노을 속에서 고답(高踏)하는 경지를 즐겨 감상하게 되니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의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는 대업(大業) 9년 5월 16일에 절의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나이는 80세였다.
죽은 후에도 이마에 오래 동안 온기가 있었으며, 손은 두 손가락을 굽히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도를 깨달아 천상(天上)에 태어난 신표이기도 하였다. 그달 20일 절의 서쪽 산에서 장사지냈으며, 제자 등이 석을 세워 공덕을 기록하였고, 상주(常州)의 사문 법선(法宣)이 비문을 지었다.
032_1021_a_02L 俗姓曹氏譙國人也其後別派今爲襄陽人焉祖亮宗梁給事黃門侍郞衛尉卿父藹直閣將軍曠秀氣摽於弱歲#天然孝敬率性高廉二出家事江陵寶光寺澄法師祇勤儀訓肅奉帷筵發明幽旨頗超群輩後辭朋帝渚問道王圻居律行寺彭城講玄閞斯闢大義已通將事隨轉相弘教乃與宗愷准韻諸師値眞諦受攝大乘唯識等論金鼓光明等經俄而眞諦涅槃法朋彫徙共同學僧宗俱拪匡岫分時敷說化彌隆州宰鄱陽長沙二王俱敦師資之敬後於湘郢二州累載弘道親覺久忘而地恩待報以陳至德元年言旋舊邑卽隋開皇之三年也於遍學道場傳經引化曠旣律行嚴精門綜博道俗具瞻綱維是寄統掌八攝是烏迴後又奉勅移居興國寺任攸絲綸再降香蘇屢錫秦孝王帝子之尊建麾襄沔聞風佇德親奉歸戒煬帝纂曆當符尊賢味道爰降王人近居輦轂道次江陽辭疾不見蒙勅丹陽拪霞山寺以事治養又素協性松筠輔神泉石賞狎旣幷纏痾用弭於拪霞法堂更敷大論新聞舊學談勝解且歸善禪本拪玄精舍陵文宣之餘迹禪師慧曉之遺風潭月樹之奇雲閣山堂之妙曾事遊遂有終焉之志後攜子弟徙而憩崖谷泯人世之心煙霞賞高蹈之其有懷眞慕義者復萃於斯矣以大業九年五月十六日終于寺房春秋八十頂煖淹時手屈二指斯又上生得道之符也以其月二十日于寺之西山弟子等樹碑紀德常州沙門法宣爲文

6) 수나라 단양 인효(仁孝)도량 석지림전(釋智琳傳)
032_1021_b_15L釋智琳
032_1021_c_02L지림의 속성은 여씨(閭氏)이며 고평(高平) 방여(防輿) 사람이다. 조부인 여구엄(閭丘儼)은 세속에 오연히 한가롭게 살았으며, 부친인 담진(曇珍)은 양(梁)나라의 상시(常侍)였다.
지림은 어려서부터 고을 사람들 속에서 훌륭한 소문이 났었다.
당시 처사(處士) 변전(卞詮)의 명성이 당대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어려서 배울 나이가 되자, 그에게 의탁하여 학업을 배우기를 청하여 『예기(禮記)』ㆍ『주역(周易)』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의 심오한 경지까지 도달하였다.
변전은 그가 일찍 지혜가 뛰어난 것을 가상히 여겨 세상에 드문 신동(神童)이라고 말하였다.
덕이 쌓이게 되자 초연히 세속을 떠나서 곧 인효사(仁孝寺)의 사문 법돈(法敦)을 섬겨 취업의 의식(儀式)에 따라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채소반찬으로 변하지 않는 지조를 지니며 뜻을 두터이 하여 몸에 푹 배이게 학업을 닦아 『법화경』과 『유마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웠다. 그러다가 법돈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직 계품(戒品)이 원만히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곧 급히 달려 수도로 올라가 다시 스승의 수레바퀴를 숭상하며 동안사(東安寺)의 대승정(大僧正) 훤(暅) 법사에게 의지하였다. 이미 그에게는 능력이 생겨나 받을 만하므로 곧 구족계를 받게 되었고, 『성실론』의 강론을 받으면서 아울러 계율을 익혔다.
만족하게 듣고 지니자 곧 이것을 널리 설교하여 전수하기 위해서 고향 마을을 바라보며 고향의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 태건(太建) 10년에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남서주(南徐州)의 자사(刺史) 소마하(蕭摩訶)가 깊이 이례적인 대우를 더하여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마지못해 종장(宗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크게 법륜을 굴리는 수업을 받고 듣기를 청하는 대중이 많게 되었다.
태건 11년에 이르러 황제의 명이 내려 곡아(曲阿)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지덕(至德) 2년에는 황제의 명으로 서주(徐州)의 승도(僧都)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우두머리라고 부르는 자리가 그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못 그의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개황(開皇) 16년에는 윤주(潤州) 자사 이해유(李海遊)가 힘을 다하여 일을 결단하게 되자 강유(綱維)가 이에 기탁하게 되었고, 여러 권속들도 이것을 옳다고 하였다.
그가 거처하는 인효사(仁孝寺)라는 절은 양(梁)나라 때 예전 정서자의(征西諮議)벼슬을 지낸 담승소(郯僧紹)가 자기 집을 희사하여 지은 절인데, 전당을 처음 지을 때 난리가 이곳에 미치게 되었다. 지림은 곧 뒤이어 목공과 장인(匠人)을 동원하여 곧 아름다운 장식을 가하니 건물이 아름답게 빛나고 넓고 높아 실로 훌륭하게 되었다. 앞뒤로 보통사람만 한 불상(佛像) 5구와 협저상(夾紵像) 한 구를 조성하니 신비로운 모습이 뚜렷하게 빛나고 생김새와 모습이 엄숙하고 특출하였다.
또한 육왕산(育王山)마루에 5층의 벽돌탑을 세워 8만의 대중이 동시에 고상하고 묘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대품경』ㆍ『법화경』ㆍ『유마경』ㆍ『금고경(金鼓經)』 등을 각기 몇 차례씩 두루 강의하였고 제도한 제자는 천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항상 도의 나루에로 나아가는 길만을 생각하고 선(禪)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는 초은사(招隱寺)가 세속의 번거로움을 떠난 곳에 위치하여 산방(山房)이 한적하고 무성한 숲이 그윽이 깊다고 하여 생을 마칠 곳이라 생각하고 그곳에서 살 뜻이 있었으나 긴박한 인연의 걸림돌이 생겨서 이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온화하고 엄숙하게 자기를 보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데서 게으름이 없었고 재물과 패물을 쌓아두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이를 베풀어주어 구제하였다. 그의 위용(威容)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참으로 도문(道門)의 호걸이었다.
그는 대업 9년 5월 6일에 가부좌를 틀고 합장한 채 인효사의 동쪽 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이보다 앞서 5월 초에 청신사(淸信士) 유정근(劉正勤)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미륵경』을 강의하여 주기를 청하자 지림은 죽음이 닥쳐왔다고 타이르며 처음부터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생을 마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는 운명을 안 사람이었다.
곧 죽음의 조짐이 나타나려 할 때 여러 제자들에게 훈계하였다.
“시다림(尸陀林)이라는 것은 항상 원하던 곳이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뜻을 어기지 말라.”
그리하여 제자 지갱(智鏗) 등이 삼가 유언에 따라 그달 11일에 시신을 육왕산(育王山)으로 옮겼다. 때는 마침 몹시 더운 시기여서 숲에는 독수리와 짐승들이 많았는데, 그때부터 시작하여 7월이 되도록 피부와 온몸이 엄연하여 하나도 손상되거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도인과 속인들이 감탄하고 칭송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또한 그해 윤 9월 8일에 초은사(招隱寺)의 동쪽 산에 방분(方墳)을 구축하려고 점쳐 잡아놓은 곳으로 시신을 옮기고 전신사리를 산감(山龕)에 넣었다. 이때 지방 속인들이 모두 모였고 동문(同門) 스님들도 모두 찾아와 눈물을 뿌리며 울면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산에 가득차고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이어 곧 절의 오른편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문은 절개 있는 선비인 강양(江陽)의 채양(蔡壤)이 지었다.
032_1021_b_16L 姓閭丘氏高平防輿人也儼閑居傲世考曇珍梁國常侍琳弱淑問彰于鄕黨處士卞詮擅名當年在幼學服膺請業莊老悉窮幽致#詮嘉其早慧命曰希世神童逮于德壯超然離俗卽事仁孝寺沙門法敦遵就養之儀稟息慈之戒蔬飡苦節篤志熏脩法花維摩受持成誦屬以敦公告逝戒品未圓乃高步上京更崇師轍依止東安寺大僧正暅法師旣其力生有奉尸羅乃具爰稟成論兼習毘尼旣洽聞持將弘傳授瞻言鄕縣思報地恩以陳太建十年旋于舊里南徐州刺史蕭摩訶深加禮異爰請敷說於是鬱居宗匠盛轉法輪受業求聞寔繁有衆至十一年下勅爲曲阿僧正至德二年補徐州僧都稱首攸歸諒由德擧皇十六年閏州刺史李海游屈爲斷綱維是寄允當僉屬所居仁孝寺梁故征西諮議郯僧紹捨宅所造殿堂肇搆亂離遄及琳乃嗣興梓匠爰加藻飾輪煥弘敞實有力焉前後造中人像五軀夾紵像一軀神儀顯相好嚴挺又於育王山頂造五層塼塔擬夫八萬同時一期高妙講大法花淨名金鼓各有其遍所度弟子千有餘人常想趣道津要莫尚禪以招隱伽藍俗外塵表山房閑寂茂林幽邃終焉之所有志拪焉迫以緣礙弗之果也然其溫嚴自持誨引無倦財翫靡積隨行給濟威容感物信爲道門之傑矣以大業九年五月六日加趺合掌終於仁孝之東房秋七十先是五月初有淸信士劉正勤請講彌勤琳諭以無常初未之許至是果終信哉知命及將大漸誡諸弟子尸陁林者常所願言吾謝世後無違此志沙門智鏗等謹遵遺言其月十一日遷于育王之山時屬流林多鷙獸始乎仲夏曁是抄秋體儼然曾無損異道俗嗟賞嘆未曾又以其年閏九月八日於招隱東式搆方墳言遵卜兆全身舍利窆山龕方俗竝臻同門畢至洒泣撫山盈響谷乃樹碑於寺之門右文江陽介生蔡瑰所製

7) 수나라 서경(西京) 보찰(寶刹)도량 석정원전(釋淨願傳)
032_1022_a_16L釋淨願
032_1022_b_02L정원은 속성을 알 수 없으며 대주(代州) 사람이다.
그는 30세에 출가하였는데, 널리 보고들은 것이 많아서 견문이 넓고 오래도록 잘 기억하였으며, 경론을 논하여 따져서 일찍부터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에 널리 여러 학자들로부터 선배로 추대되고 우러르는 대상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구족계를 받게 되면서 오로지 율부(律部)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30세가 넘으면서 행업(業)이 더욱 융성해졌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정신을 가다듬어 견고하게 익히고 두루 다섯 차례를 따져본 다음에야 비로소 강설에 나아가곤 하였다.
처음에는 그가 장년(壯年)에 입도(入道)하였다고 하여 경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번 그의 이야기와 설법을 듣고는 그의 문리가 맑고 환하며 전개하고 분석하는 데서 한 조각의 막힌 곳도 없는데 주목하면서 각기 마음을 집중하여 자리에 앉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리하여 정원은 『사분율(四分律)』을 연이어 강의하여 두루 열 차례 이어나갔다.
또한 그는 『십지론(十地論)』과 『화엄경』 및 여러 소론(小論)의 강의를 들었고, 끝으로 『섭론(攝論)』을 스승으로 삼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문장 구절의 근본과 결말을 연결시켰으며, 모든 것을 환하게 정통하여 상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몸가짐을 점잖게 하였다.
그는 성인의 말씀을 연구하고 주석하여 해석에 근거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널리 장소(章疏)를 유통시킨 일도 있었다.
그는 말년에 수도로 들어가 아직 듣지 못한 경전을 대략 가려서 취했는데, 비록 가슴속에 겪은 일들을 품고 있었으나 하나도 새로운 방술은 없어 당시 사람들은 아직 그가 환하게 비추어보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는 보찰사(寶刹寺)에 머물면서 그 모습과 재능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법회가 열리게 되자 정원은 그의 이름과 풍채를 자랑하려고 두 번째로 수의(竪義)를 맡았다. 그는 토론의 주제를 5음(陰)에 두고 곧 법좌에 올라가 주제를 내세웠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해서 모두 조용히 앉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도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묵묵히 있었다. 그러다가 정원은 굽어보며 대중에게 말하였다.
“수의를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묻는 사람이 없는가?”
대중들이 말하였다.
“무슨 제목을 내세웠기에 질문을 받으려 하는가?”
이리하여 정원이 말하였다.
“명상(名相)은 오래되었는데도 그대들이 스스로 모르고 있다. 여러분은 자리에 앉아서 입으로 뜻을 전하나 나는 몸과 마음을 함께 내세우고 곧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으니 기운과 용기가 구름같이 일어난다.”
이렇게 말하고 스스로 술회하였다.
“헤아려보니 아직 수고를 그칠 때가 아니다. 이는 잠시 인사(人事)를 닦았을 따름이다.”
당시 모두 이것을 이단(異端)을 바로잡고 결백을 드러낸 말이라고 하였다. 공격하기 어려운 논의가 오가는 데 미쳐서 그의 대답은 구름과 비와 같았으며, 모두들 먼저 번수를 정해놓고 그 번수에 따라 다 말하여 이론을 전개하여 공격을 막는 것은 당시의 형세에 맡기고 그릇된 것과 바른 것은 그 통하고 막히는 것에 인하여 결론을 내렸다. 혹 겹친 의문과 쌓인 풀기 어려운 문제로 예전부터 결단을 내리지 못한 문제라도 그 이치를 따져 통달하여 석연히 새롭고 유창하게 설명하니, 이 모임에 몸을 담그고 참가한 사람 가운데 총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그에게 귀의하여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후 마침내 보창사(寶昌寺)로 자리를 옮겨 사철 항상 대중들과 어울려 대하면서 초당(草堂)의 흙담장 안에서 이것으로 교리를 부흥시켰다.
한낮에는 『섭론(攝論)』을 강의하고, 깊은 밤에는 『잡심론(雜心論)』을 강의하였으며, 혹『열반경』을 총체적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혹 『사분율(四分律)』을 나누어 풀이하기도 하면서 여가를 가림 없이 후배들의 시범이 되었다.
무릇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예전의 해석을 벗어났으며 소(疏)를 지어낸 뒤에는 다시 거듭 보지 않았다. 강론에 임하여 설법하게 되면 모두가 법도에 맞았다. 흡족하게 듣고 잊지 않는 데서 세상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리비담(舍利毘曇)』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글과 뜻이 몹시 복잡하고 심오하여 읽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그 뜻에 정통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책을 손에 쥐고 글을 펼치면 똑똑히 모든 것을 환히 알아 마침내 이에 관한 열 권의 소(疏)를 만들었는데 그 글은 극히 해박하고 훌륭하였다.
때마침 문제(文帝)가 탑을 세우고 정원을 칙사(勅使)로 파견하여 담주(潭州)의 녹산사(麓山寺)로 사리를 보냈는데 처음 주(州)의 경계에 이르러 상수(湘水)를 건너 서쪽 기슭을 따라 산이 있는 곳에 이르려 하자 문득 기이한 새 수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오색의 모양을 휘번득거리며 물 위에 뜨고 날면서 차례로 배를 향해 마치 마중 나와 인도하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사리가 도착하자 다시 앞을 향하여 매우 빨리 날아가고 날아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막상 둑 위에 오르자 새들은 문득 갈 곳을 바라보며 서로 이어서 공중으로 날아올라 함께 탑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산신(山神)의 권속들이 모습을 변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원이 이 상서로운 징조를 황제에게 알리니 황제는 크게 감탄하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정원은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여서서 때에 절을 하고 참회하며 처음부터 거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법과 계율을 공경하고 삼가하여 들은 그대로 받들고 시행하였다.
세상에는 법의 종장(宗匠)으로 나타나게 되면 흔히 계종(戒宗)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모든 믿음이 이지러져서 자기가 배운 것만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정원은 법과 계율을 아울러 찬미하고 혼탁된 세상에서 홀로 깨달았으니, 가히 법에 밝은 사람이면서도 계율을 수호한다고 할 만한 사람을 여기에서 얻게 된 것이었다.
그가 수도에서 명망을 독차지하게 되자 처음에는 모두 흠모하고 부러워하였는데, 막상 그가 경술(經術)을 이야기하고 강의하면서는 선배 달사(達士)를 헌장(憲章)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그 글과 논의를 개정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봉하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뛰어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그들의 평소의 습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법문을 듣는 사람이 열 사람도 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말을 특이하고 절묘하게 하여 마음속으로 꾸며대는 사람은 엿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후진(後進)들이 들어갈 경계가 되지 못하였다.
대업(大業) 초년에 이르러 변상 법사(辯相法師)가 뒤따라 혜일사(慧日寺)에 들어왔는데 그 문하의 제자 1백 명을 보니 모두 지혜의 바다를 건너가는 나루터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정원에게 의탁하여 이때부터 평상시와 같이 깨달음을 열어주게 되었기 때문에 대중은 전에 듣던 것보다 갑절이나 많아져서 다시 서로 공경하고 협찬하여 거룩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다. 이로 하여 사방에서 찾아와 날마다 의연(義筵)에 참가하게 되었다.
모두가 전에 듣지 못한 내용을 듣게 되었고, 흐뭇하게 어려운 내용을 터득하게 되었다. 심오한 내용을 유창하게 분석하고 강문(綱門)을 열거하는 데 이르면, 앉아 있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옮겨 무릎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으며, 모두가 그의 의학(義學)을 찬미하며 특이하고 기발하게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한해를 머물다가 갑자기 생을 마치게 되었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60여 세였는데 대업(大業) 5년 5월이었다.
그런데 정원은 널리 보는 장점은 있었으나 복업(福業)이 적었다는 것이 그를 따라 배우던 사람에게서 증명된다. 매우 많이 모여들었던 제자들이 곧 없어졌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미 『사리비담(舍利毘曇)』도 끝내 강의를 펴지 못하였고, 또 원고도 잃어서 후대에 유통이 끊어졌으니 이 또한 매우 슬퍼할 만한 일이다.
032_1022_a_17L 未詳其氏代州人也三十出博聞强記推覈經論夙有成規爲諸學之所先仰創進大戒專師律旣越立年彌隆盛業以旦達曙精固習觀採五遍便就講說初以其壯室入道人多輕侮試聽其談說其文理淸洞開散片無擁滯各投心位席莫不致敬願連講四分接承十又聽十地華嚴及諸小論末師准攝論綱紐章句竝通了談對課篤形有鑽注聖言依解製節廣流章疏入京輔採略未聞雖經懷抱無一新時未測其通照也住于寶剎寺中潛其容藝後因法集願欲矜其名采次當豎義意存五陰便登坐而立以其非倫皆寂無言論良久緘默俯視衆曰豎義已久如何不有問乎衆曰豎何等義乃邀問耶願曰名相久矣衆自不知諸德坐席口傳余則色心俱立便安然處坐氣勇如雲述曰計未勞止此且脩人事耳時以爲矯異露潔也及難擊往還對答雲雨#皆先定其番數後隨數盡言#開塞任於當時邪正由其通滯或重疑積難由來不決者而能詮達其理#釋然新暢於卽預是聰慧歸蹤者多遂移就寶昌四序恒接草堂土埵以此敷正時攝論晩夜雜心或統解涅槃或判銷四分無擇餘睱軌範後賢所開言竝乖舊解制疏出後更不重臨講呼喚皆衷規矩其洽聞不忘世罕加焉至如舍利毘曇文旨重隱讀者猶難況通其義願執卷披文然洞盡乃造疏十卷文極該贍會文帝造塔勅遣送舍利于潭州之麓山初至州治度湘西岸將及山所有奇鳥數萬爲群五色相翻飛浮水行次向舩似相迎引及至舍利飛向前往還迅速衆莫不怪及登岸鳥便行望相從飛空同至塔所者以爲山神眷屬之變象故也願以瑞聞帝大嗟賞而教授爲務六時禮初儀不怠敬愼法律如聞奉用見法匠多略戒宗竝由虧信而重所學故也今願兼而美之獨覺澆世謂明人護戒於是乎得矣京邑擅名初皆欽羡及見其談講經術竝憲章先達改正文議封言者衆不勝品藻皆滯其恒習聽者不滿十人又以言令卓絕非造心者所覬故不爲晩進所入及大業初歲辯相法師追入慧日見徒一百竝識知津皆委於願自此如常開悟衆倍前聞更相擊贊令響彌遠四方因造日就義筵皆聞所未欣至難義至於分暢深伏摽擧綱坐者不覺離席膝前皆美其義采之英拔也相仍一歲奄就無常春秋六十有餘卽大業五年五月也然願有博見之長而寡於福業驗乎從學屯盛便喪豈不然耶旣而舍利毘曇未披講疏又失落後代絕通又可悲之深矣

8) 수나라 서경 선정(禪定)도량 석지응전(釋智凝傳)
032_1023_a_09L釋智凝
032_1023_b_02L지응의 속성과 족보는 알 수 없으며 예주(預州) 사람이다. 그는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여 여러 해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익혀서 쌓아 눈으로 본 것은 잊지 않았고, 모두 마음속으로 환히 꿰뚫어서 그가 외운 여러 경전들은 수십만 언(言)에 달하였다. 그 많은 경전의 글을 잠깐 사이에 곧 인용하여 외워 한 번도 옛 것을 다시 찾아보는 일이 없었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명망이 날로 세상에 알려져 여러 종파의 사람들이 멀리서 그를 지목하며 그가 훗날 성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지응이 듣고 탄식하였다.
“속인들은 아침에 도를 듣는 것은 숭상하면서도 저녁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세속을 벗어난 스님의 도의 가늠이 무엇 때문에 팽조(彭祖)2)의 성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숭(崇) 법사를 찾아가 삼가 『섭론(攝論)』을 자문 받았다. 보이지 않는 신(神)이 밖에서 움직여 바른 뜻이 이곳에 다다라 마음은 마치 옛날의 이야기 같아 다시 거듭 설명을 청하는 일이 없었다.
첫 번째 강의가 겨우 끝나 두 번째 승상(勝相)에 이르자 여러 학도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섭론』의 강령(綱領) 요지는 모두 볼 수 있다. 남은 글은 다시 들어볼 겨를이 없다.”
곧 소(疏)를 지으려고 숭(崇) 법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떠나겠다고 하직하자 숭 법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섭론』이 내건 강령을 모두 환히 꿰뚫었는가? 한스러운 것은 공부는 마지막에 가서야 통하는 것인데, 네가 배운 것이 어긋나고 편중된 것이 아닌가 두려울 뿐이다.”
그러자 지응이 말하였다.
“법사께서 명백히 가르쳐주시고 환히 밝혀주신 덕을 입어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것이니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곧 큰절을 올리고 숭 법사와 헤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자기를 과시하는 거짓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아직 그를 기꺼이 숭상하지는 않았다. 그후 그가 소(疏)를 저술하여 그것을 끝내게 되자 그 내용이 문장과 종지를 분석하고 결단하여 이에 근거하여 강의하고 해석하게 되니 그의 명성과 덕망은 더욱 커졌다.
그후 수도로 가서 변재사(辯才寺)에 자리를 잡고 대중을 이끌어 항상 강의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아름다운 유서(遺緖)를 전하였다.
수나라 문제(文帝)때는 불법이 성하여 여러 번 전회(殿會:宮殿 안에서의 法會)를 열었는데 이름난 스님들이 이 뛰어난 모임에 많이 참가하였으나 오직 지응 한 사람만은 문하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법을 널리 설교하면서 세간의 이익에는 한 번도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배우는 스님들이 공덕을 이루는 것은 실로 같은 또래와는 판이하였다.
후에 그는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으나 그때까지도 옛 습성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대업(大業) 연간에 머물렀던 절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처음 지응은 관동(關東) 지방에서만 법을 전수하고 수도에서의 강의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때 명급(明及) 법사가 『섭론(攝論)』으로 훌륭한 명성을 얻어 종문의 공적으로 서로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지응은 그 계통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나이가 많아 몸이 쇠약하고 지치게 되자 곧 학사(學士)들에게 지응을 초청하게 하였고, 지응이 그곳에 이르자 서로 만나도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없어졌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지응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자, 명급은 곧 몸을 속쳐 일어나 앉아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후 오래지 않아 그는 생을 마쳤는데 지응은 이로 하여 명급의 뒤를 잇게 되었다. 배우는 사람들은 그 종문을 옮기지 않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행실이 결백하고 엄하여 모진 곤란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여섯 때에 절을 하고 참회하는 것으로 자신을 격려하며 복덕과 지혜를 닦는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변재사(辯才寺)의 온 절 안을 직접 수리하고 경영하였으며, 물을 길어 밭에 물을 대고 나무를 심어 조금도 잘못되는 것이 없이 승원(僧院)의 일은 순조롭게 되었다. 그는 길게 종을 치는 일이 끝나려 할 때면 곧 원래의 자리에 앉아 설법을 마치고 다시 복덕을 쌓는 일에 의존하였다. 문장을 해설하는 일에 종사할 때는 손에 책을 쥐지 않고 수시로 선적(禪寂)의 문을 두드려 벽을 마주 보며 종과 북이 울릴 때까지 참선하였다. 혹 하룻밤을 지새우며 시주의 모임에 참석하면 가지고 오는 물건이 백 가지 천 가지에 이르렀으며, 혹 한때 외식(外食)을 하게 되면 금ㆍ비단을 아울러 보시하였으나 이런 것들에 모두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한 일이 없었고 오직 그의 뜻은 법을 전수하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있는 곳에서는 후사(後嗣)가 전해진 것이었다.

영각(靈覺), 도탁(道卓)
그의 문하에 학사인 영각과 도탁이라고 하는 두 스님이 있었는데, 모두 촉(蜀)의 이름난 스님들이었다. 그들은 지응에게 의지하여 혜해(慧解)를 이어받아 수도에서 명예를 독차지하다가 후에 익주(益州)로 돌아가 그 종지를 크게 떨쳤다. 민락(岷洛)에서 『섭론(攝論)』은 이들에 의하여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032_1023_a_10L 不詳姓族豫州人年小出家積傳師習經目不忘竝貫懷抱所誦衆經數十萬言須臾便引誦未嘗溫及進具後日聲情望群宗遙指無後成凝聞之歎曰俗尚朝聞不懷夕死出世道要何累厚生遂往彭城嵩公仰諮攝論幽神外動正義斯臨心若舊聞再無重請初講纔訖第二勝顧諸徒曰攝論綱旨都可見矣文無睱更聽便欲制疏往辭於嵩後生摽領爾竝驅邪恨功未後通恐乖僻耳凝曰蒙法師開明大照列可知失在支詐故無所慮便拜首別焉時以爲誇誕未之欣尚也及著疏旣了剖決詞宗依而講解聲望轉後赴京輦居于辯才引衆常講傳徽緖隋文法盛屢興殿會名達之僧多參勝集唯凝一人領徒弘法於世利曾不顧眄所以學侶成德異同倫後住禪定猶宗舊習大業年卒於住寺春秋四十有八凝傳法閞東無心京講有明及法師者論嘉名宗績相師凝當其緖年事衰仍令學士延凝旣達相見一無餘但問云黎耶識滅不凝曰滅矣乃勇身起坐撫掌大慶不夂而卒因承及緖故學者不移其宗兼行潔淸嚴風霜不變六時自課福智無歇辯才一寺躬事修營汲灌樹植平坦僧院初無有闕長打將了便就元席說法旣竟還依福事章疏之務手不執文隨時扣寂對至鍾鼓或一宿施賚及百千或一時外食䞋兼金帛皆曾無別念志存授法故所在傳嗣有學士靈覺道卓竝蜀土名僧承慧解擅迹京室晚還益部弘贊厥故岷洛攝論由之而長矣

9) 수나라 서경 진적(眞寂)도량 석법언전(釋法彦傳)
032_1023_b_23L釋法彦
032_1023_c_02L법언의 속성은 장씨(張氏)이며 명주(洺州)에 잠시 머물러 살았다.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뜻을 큰 법에 두었고, 총명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널리 많은 동료들 속에서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3장(藏)에 모두 정통하였다고는 하나 특히 『대지도론』으로 훌륭한 명성을 날렸다. 그리하여 법회에 참석하게 되면 아무도 감히 대항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 및 수(隋)나라 시대에 수도와 지방의 스님들이 모두가 그의 신비롭고 영특함을 두려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법언이 지은 말을 듣게 되면 손님과 주인이 모두 좋아하였다.
그는 대체로 미묘한 뜻의 정밀함과 취지의 참뜻을 말로써 전하게 하였던 것이다 .
제공(齊公) 고영(高穎)은 먼 지방으로 도를 배우려 다니다가 법언의 명성과 공적을 알고 곧 맞아들여 수도에 이르렀다. 비록 그는 지혜의 밝음이 당시에 첫째가는 사람이었지만 겸손하고 검소한 태도가 목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났다.
새로 알게 된 사람이나 예전부터 아는 사람이나 모두가 그에게 정을 느꼈다. 자기를 능가하여 더욱 초월한 사람이 있으면 법언은 그를 받들고 공경함에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아는 사람은 더욱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당시 법간(法侃)이라는 법사는 본래 강남에 머물다가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간 사람이었고, 그 지방의 대덕인 연(淵) 법사는 바른 법에 고명하고 밝아 의학(義學)하는 사람들이 추대하고 우러러는 대상이었다.
그가 법간에게 말하였다.
“천지가 비록 넓다고 하더라도 지식에 정통한 사람은 드물다. 만학(晩學)가운데 뛰어난 사람으로는 법언(法彦) 한 사람만이 함께 이치를 논할 만하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깨달음을 취한 것뿐이다.”
그후 법간이 수도에 이르게 되어 법언과 만난 뒤에 비로소 연 법사가 멀리에서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황(開皇) 16년에 명이 내려 법언을 대론중주(大論衆主)로 삼고 진적사(眞寂寺)에 머물게 하였으며, 그곳에 눌러앉아 오래도록 인도하고 교화하게 하였다.
인수(仁壽) 연간에 탑을 세우자 다시 불러들여 여주(汝州)로 사리를 보내게 하였다.
인수(仁壽) 4년에 또 명을 내려 사리를 기주(沂州) 선응사(善應寺)로 보내게 하였다.
사리를 안치할 터를 한 길이나 파니 금모래가 나왔는데 물에 일어 가려서 순금을 추린 것이 모두 두 되가량이나 되었으며, 빛나는 광채가 눈을 부시게 하였다.
또 감응이 나타나 누런 소가 스스로 탑 앞에 찾아와 앞발은 무릎을 꿇고 두 번 절을 하고 그친 후에 몸을 돌려 다시 문제(文帝)에게 절을 하고 불상이 있는 쪽을 향해 한 번 절을 하였다. 사리를 석함에 넣자 3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하늘에 오색구름이 일어났는데, 길이는 10여 장에 달하고 너비는 서너 장에 달하여 흰 구름을 에워싼 형상은 비단 같았으며, 바로 기단(基壇) 위의 허공에 떠 있다가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에 이르자 비로소 없어졌다. 이 구름이 없어진 후에 다시 다른 오색구름이 내려오고 사방에서 모여왔는데 형상은 앞에 나타났던 상황과 같았다.
다른 감응으로 다섯 마리의 검은 학이 서북쪽에서 날아와서 탑 위를 네 번 돈 다음 떠나갔다가 다시 왔다.
또 다른 감응으로는 흰 학이 탑 위에서 배회하다가 오랜 후에 떠나갔다.
또 다른 감응으로는 오색의 뱀이 석함 밖에 꽈리를 틀었는데 길이가 석 자가량 되었으며, 머리를 사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놀랐으나 나중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감응이 몇 번 일어나자 자사(刺史) 정선과(鄭善果)는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하늘을 공경하고 만물을 양육하면 하늘의 상이 그 전능함을 드러내게 되고, 땅에 순응하여 백성들을 길러주면 땅의 원기가 그 덕을 드러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순(堯舜)은 몸을 단련하면서 게으르지 않아 아름다운 기운이 상서로운 징조를 드러냈고 하후(夏后)는 수토(水土:큰물을 막는 토목공사)를 잘하여 공을 이루니 지신(地神)이 검은 보석을 준다고 알렸습니다. 비로소 알았으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는 그림자와 메아리같이 따라다님이 마치 신(神)과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실권(實權)을 잡고도 예의를 다하여 사양하다가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시니 우주 안에 티끌이 없어지고 성교(聲敎)는 모두가 하나같이 함홍광대(含弘光大)하시고 사랑하며 가없이 어여쁘게 여기시고 천신과 부처님이 거울같이 굽어보시어 이 영서(榮瑞)를 내리셨습니다.
탑의 기단 여섯 곳에서 모두 기이한 모래를 얻었는데 현란하게 빛나니 모두가 보석이나 황금과 같았으며, 소가 절을 한 것은 태고에도 보지 못한 일입니다. 구름에 오색이 비낀 것도 지금에야 비로소 본 것이며, 또 다른 감응으로 뱀의 몸에 채색이 뒤섞여서 탑 터에 꽈리를 틀었고, 검고 흰 학이 날아올라 허공에서 배회하였으니 비록 헌황(軒皇:軒袁氏)의 큰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하나 공연히 옛글에 전해진 것이며, 한(漢)나라 황제의 경사로운 징조도 부질없이 죽간(竹簡)과 책에 씌어 있을 뿐인데, 처음부터 덕이 삼보(三寶)보다 높고 도가 백왕(百王)보다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아름다운 경사에 감응하여 신령스럽고 특이한 기적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이를 기뻐하였고 별기(別記)에 이것을 저술하였다.
법언(法彦)은 진적사에서 업을 전하니 도인과 속인들이 그의 음성을 들었고, 좌복야(左僕射) 고영은 계법(戒法)으로 그를 받들었으며, 그의 온 문하의 믿음을 얻어 지금까지도 기울어지지 않고 있다. 이 모두가 법언이 제도의 길을 연 것이다.
그는 대업(大業) 3년에 머물던 절에서 생을 마쳤는데, 나이는 60여 세였다.
032_1023_b_24L 姓張寓居洺州早歲出家隆大法而聰明振響冠遠儕倫雖三藏竝通偏以大論馳美遊涉法會敢抗言故齊周及隋京國通懼皆畏其神爽英拔也故得彦所造言賓主兼善使夫妙義精致出言傳旨齊公高穎訪道遐方知彦聲績乃迎至京雖復智亮冒於當時而謙素形于聲色所以新故挾情有增陵勃者奉而敬之不以年齒相顧由此識者彌愛而珍重焉有法侃法師本住江被召入閞彼方大德淵法師者法高桀義學所推語侃曰天地雖廣識達者希晩學之秀法彦一人可與論理餘則云云從他取悟耳及侃至相見方知淵之遠鑑也開皇十六下勅以彦爲大論衆主住眞寂寺鎭長引化仁壽造塔復召送舍利于汝州四年又勅送于沂州善應寺基深丈乃得金沙濤汰成純凡二升光耀奪目又感黃牛自至塔前膝前足兩拜而止迴身又禮文帝景象一拜#及入石函三萬許人竝見天雲五色長十餘丈闊三四丈四遶白雲狀如羅綺正當基上空中自午及未方乃歇滅滅後復降五色雲四方來狀同前瑞又感玄鶴五頭西北來迴旋塔上乃經四度去復還復感白鶴於上俳佪久之乃逝感五色蛇屈盤函外長可三尺頭向舍利驚終不怖如此數度刺史鄭善果表曰臣聞敬天育物則乾象著其順地養民則坤元表其德是以陶唐砥躬弗懈休氣呈祥夏后水土成玄珪告錫方知天時人事影響若伏惟 陛下秉圖揖讓受命君臨區宇無塵聲教盡一含弘光大慈愍無邊天佛垂鑑降茲榮瑞塔基六處竝得異砂炫燿相輝俱同金寶牛爲禮拜太古未經雲騰五色於今方見又感蛇形雜采盤旋塔基鶴颺玄素俳佪空際雖軒皇景瑞空傳舊章帝慶徵徒書簡冊自非德隆三寶冠百王豈能感斯美慶致招靈異悅之著于別記彦傳業眞寂道俗承左僕射高穎奉以戒法合門取信於今不傾竝彦之開濟以大業三年于所住春秋六十餘矣

10) 수나라 서경 해각(海覺)도량 석법총전(釋法摠傳)
032_1024_b_02L釋法摠
032_1024_b_02L법총의 속성은 단씨(段氏)이며 병주(幷州) 태원(太原) 사람이다. 젊어서 『열반경』을 외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전부를 통달한 후에도 경문의 말을 이해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을 뿐 다른 것을 듣고 교섭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계속하면서 조금도 변동시키거나 그만두지 않다가 후에 현의(玄義) 강의를 듣고는 곧 그것을 전해 받아 강론하게 되었다.
그때를 전후해서 20년 동안 그가 거느리고 깨우쳐준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며, 그가 너그럽고 후하며 겸손하여 여러 사람들이 우러르고 귀의하며 의탁하는 대상이 되었다.
개황(開皇) 연간에 명으로 부름을 받아 열반중주(涅槃衆主)가 되어 해각사(海覺寺)에 자리잡고, 사방에서 대중들을 모아 항상 최상의 진리를 부연하며 몹시 무더울 때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인수(仁壽) 연간 초엽에 명으로 사리를 수주(隋州)의 지문사(智門寺)로 보냈다. 그때 기단(基壇)을 파다가 땅 밑 석 자 지점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는데, 빛깔이 황과 녹색을 띠고 있었으며 모양이 채색으로 비단에 수놓은 것과 같았고, 머리에는 ‘상대왕팔만칠천년(上大王八萬七千年)’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었다. 또한 배 아래에 ‘왕흥(王興)’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며, 달려가고 걸어다니면서 아무것도 먹는 것이 없었다.
사리를 모신 행차가 지나가게 되자 사람을 시켜 수후(隋侯)에게 길을 닦게 하였더니 다리 옆의 버드나무에서 또 감로수(甘露水)가 내렸는데 마치 비가 오는 듯하였으며 향기롭고 달며 걸쭉하고 기름기가 돌아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그것을 마셨다.
이리하여 법총은 곧 표문을 올리니 황제는 공경히 이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거북을 보고 항상 이 거북을 옥좌에 놓아두고서 신하들과 함께 구경하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황제가 북원(北苑)에 행차하였다가 이 거북을 맑은 못에 놓아주었는데 잠깐 동안 물 위에 떠서 헤엄을 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물에서 나와 물가를 맴돌며 황제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그것은 그때를 전후해서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황제를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보고 다 신비한 징조라고 기뻐하였다.
인수(仁壽) 4년 봄에 또 명을 내려 사리를 요주(遼州)의 하생사(下生寺)로 보냈는데 사리에서 광명이 비추며 여러 개로 갈라져 그 모습이 극히 많아졌고, 석함(石函)이 변해서 비단무늬가 생기고 동자(童子)의 모습이 나타났으며, 석함의 북쪽 면에는 사라쌍수[雙樹] 아래 와불(臥佛)의 모습이 나타났다. 또 석함의 남쪽 면에는 금강역사가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산을 견주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석함의 동쪽 면에는 두 부처님이 함께 서 있고 아울러 기린(麒麟) 한 마리가 나타났으며, 또 석함의 서쪽 면에는 한 보살과 한 신니(神尼)가 보살을 향하여 몸을 굽혀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신비한 형상이 있었으나 생략하고 서술하지 않는다.
그후 다시 또 큰 광명이 자못 어지럽게 일어나서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하면서 어둠이 깃들 무렵부터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모든 등불이 비록 꺼졌지만 광명은 계속 비추어 해와 달의 밝음과 다름이 없었다.
그날 저녁에 음산하게 비가 내리는데 불당의 올빼미 부리에서 노란 광명이 뻗어 나오면서 동남쪽 3백 보 밖으로 날아가 자리를 옮기니, 사람들은 불이 난 줄로 생각하고 달려갔다가 불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광명이 일어난 곳을 찾아보니, 곧 불당 안의 사리가 있는 곳에서 나오는 광명이었다. 대중이 모두 함께 본 일이라 크게 불도를 믿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다.
8일 만에 사리함을 탑 안에 내려 놓으려 하자 오색구름이 탑 위를 일산처럼 덮었고 또 다른 감응으로 기이한 새가 나타났다. 이 흰 까마귀는 꼬리는 붉고 부리로는 조각구름을 물고 있었는데, 탑 위에 꽃 일산과 같은 모양이 또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상서로운 감응을 5만여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다 같이 보았으며, 그후 사리를 내려 놓는 일이 끝나자 구름도 새도 모두 없어졌다.
4월 9일 기단 위에서 다섯 갈래의 광명으로 나누어져 곧바로 서쪽으로 떠났는데 채색으로 그린 그림과 같은 그 빛깔이 수백 리를 비추었으므로 이것을 본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법총은 직접 이 상서로운 징조를 목격하게 되자 마음속으로 기쁨이 솟구쳐 그림을 그려서 황제에게 올려 이것을 알리니, 황제의 명으로 이것을 비각(秘閣)에 봉하였다.
그후 예전의 업에 인하여 강의와 독송을 계속하면서 지칠 줄 모르다가 대업(大業) 연간에 해각사(海覺寺)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문하의 제자 행등(行等)과 현회(玄會)가 그의 뒤를 이어 이름을 날렸는데 이에 관한 일은 별전(別傳)에 있다.
032_1024_b_03L 姓段氏幷州太原人也少以誦涅槃爲業旣通全部志在文言遑聽涉十餘年中初不替廢後聽玄便卽傳講前後二紀領悟非一寬厚遜仰爲物歸投開皇中年勅召爲涅槃衆主居于海覺聚結四方敷至理無捨炎燠仁壽歲初勅送舍于隋州之智門寺掘基三尺獲神龜一枚色黃且綠狀如彩繡頭有八字上大王八萬七千年腹下有王興二字馳步往來都無所食及舍利所由令人治道於隋侯橋側柳樹又雨甘露狀如雨下香甜濃潤衆共飮之摠乃表聞帝敬謁靈祥恒以此龜於御座與臣下觀之有經年月#帝遊北菀放之淸池雖汎泳少時還出遶隨逐帝躬前後非一陪衛咸睹共欣徵感及四年春又勅送舍利于遼州下生寺#放光分粒其相極多石函變爲錦文及童子之象函之北面現於雙樹下有臥佛又於函南現金剛捉杵擬山之相又於函東現二佛俱幷一騏驎又於函西現一菩薩幷一神尼曲身合掌向於菩薩更有諸略不述之又放大光聊亂而起眩人目從冥達曉諸燈雖滅而光續不異日月之明爾夕陰雨佛堂鴟吻放於黃光飛移東南三百餘步人謂火走赴知非尋光所發乃從堂中舍利處出衆皆通見大發道心日將下五色雲蓋覆于塔上又感奇素身烏尾赤嘴口銜片雲狀如華亦現塔上斯瑞之感五萬餘人一時同見及墳下訖雲鳥皆滅四月九基上放光分爲五道直西而去如采畫數百里引之見者非一摠躬臨此瑞喜發內心具圖上聞勅封秘後因故業講誦不疲大業年中於海覺春秋七十矣門人行等玄會嗣續擅名見于別傳

11) 수나라 서경 대흥선(大興善)도량 석승담전(釋僧曇傳)
032_1024_c_19L釋僧曇
032_1025_a_02L승담의 속성은 장씨(長氏)이며 명주(洺州)에서 살았다.
어려서 출가하여 여러 경론(經論)에 정통한 후에 불법이 아직 갖추어지지 못한 것을 개탄하며 굳게 결심하고 나서서 이것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북제(北齊) 말기에 벗들과 결탁하고 서역으로 가다가 총령(蔥嶺)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여러 가지 답답하고 시끄러운 사정으로 길이 열리지 않게 되자 곧 수도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범어(梵語)에 대해서는 발음과 글자 모두에 뜻을 해석하여 정통하였다. 그리하여 개황 10년에 명을 받아 번역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 일의 내용은 별전(別傳)과 같다.
그는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렀는데, 후에 황제의 명을 받고 사리를 포주(蒲州)의 서암사(栖巖寺)로 봉송하였다. 서암사는 곧 예전의 운거사(雲居寺)이다. 산은 중조산(中朝山)이라고 하며 서쪽으로 큰 강에 접하여 있어 아름다운 경치로는 세상에서 여기보다 더 훌륭한 곳이 없었다.
처음 사리를 봉송하여 주(州)의 경내에 도달하였는데, 서암사의 불전 안에서 종과 북소리가 들려왔으며 그 메아리가 온 절을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다가가 보니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리를 실은 가마가 절에 이르자 이날 밤에 부도(浮圖) 위에서 큰 광명이 뻗어 나와 그 빛이 법당 안을 비추니 모든 곳이 밝아져 그늘진 곳이 없었다. 이와 같이 전후해서 자주 신비로운 광명이 뻗어 나왔는데, 그 모양이 혹 향로(香爐)와 비슷하기도 하면서 허공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혹 자줏빛의 불꽃이 날아다니는 것이 꽃과 같고 잎과도 같아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기도 하였다. 혹 불상과도 같아서 광명으로 가부좌한 모습을 완연히 갖추기도 하였으며, 또 무지개 기운과도 같은 것이 탑기둥을 에워싸고 돌기도 하면서 여러 날 밤을 비추니 그 빛나는 광채는 어디에 비길 데가 없었다.
또 주(州) 경내에 있는 인수사(仁壽寺)의 스님이 밤에 서암사를 바라보니 누각이나 궁궐과 같은 광명이 산과 계곡을 비추었다.
또한 산사(山寺)에서 80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불이 일어난 것과 같은 광명을 보고는 모두 들불이 일어나 절을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와 보고 나서 마침내 그것이 영상(靈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상서로운 감응은 이와 같았다.
인수(仁壽) 말년에 또 황제의 명으로 사리를 보내 은주(殷州) 지도사(智度寺)의 탑에 안치하게 되었는데 처음 주(州)의 경내에 이르자 불상이 손을 드리우고 사리를 담은 병 안에 바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석함에 넣는 일을 마칠 때까지 변하고 달라짐이 없이 항상 그렇게 하고 있었다.
또한 땅에 비단무늬가 새겨지고 집 위에는 푸른 연꽃과 보살상이 나타난 것을 대중이 함께 보았다.
또한 용이 서리고 뱀이 서린 모양과 대인(大人)의 발자국과 소ㆍ말ㆍ새ㆍ짐승들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또한 탑을 세울 곳에 작은 뱀 두 마리가 있으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았는데 곧 기단을 세우려고 땅을 넉 자를 파니 폭포수 같은 물이 치솟아 올라 문둥병 이하 6근(根)이 잘못된 사람들 가운데서 이 물을 복용한 사람은 모두 차도가 있었다.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자 곧 자리를 북쪽으로 옮겨 탑을 안치함으로써 샘물을 피하였다. 두 마리의 뱀이 머물고 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승담은 통역하고 번역하는 훌륭한 일을 업으로 삼다가 절에서 생을 마쳤는데 곧 대업(大業) 연대의 초엽이었다.

혜중(慧重)
또 당시에 혜중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속성은 곽씨(郭氏)이며 옹주(雍州)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도를 연마하고 내외의 경전을 아울러 탐구하였고, 뜻과 능력이 바야흐로 굳세어서 위세와 업신여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섭론(攝論)』과 『십지론(十地論)』을 깨달을 수 있는 문이 이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었다.
그후 황제의 명으로 진주(秦州) 대악사(大岳寺)에 사리탑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공관(公館)에 머물렀는데 사리를 담은 금으로 만든 병이 자연히 열리며 사리가 나타나고 광명이 뻗어 나와 밖으로 흐르는 것을 도인과 속인들이 함께 보았다.
그후 절의 탑에 사리를 보내어 곧 석함에 넣으려 하자 또다시 광명이 뻗어 나와 사람들의 눈에 휘황하게 빛났다. 또한 태산(泰山)에서 흰 기운이 나타나서 세 갈래로 갈라지고 아래로 흘러내려 곧바로 탑의 기단을 향해 오다가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또한 악신묘(岳神廟)의 문은 원래 봉해져서 닫혀 있었는데, 사리가 이르자 세 번 자연히 열렸다.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산신이 찾아와서 공경하여 절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후 그가 생을 마친 내용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032_1024_c_20L 姓張住洺州少小出家通諸經論慨佛法未具發憤求之以高齊之季結友西行前達蔥山會諸梗澀路旣不通乃旋京輦梵言音字竝通詁訓開皇十年勅召翻譯事如別傳住大興善後勅送舍利於蒲州之拪巖寺卽古雲居寺也山曰中朝西臨河涘世稱形勝莫尚於斯初送達州而拪巖佛殿內有鍾鼓之音響振一寺迫而就撿一無所見靈輿至寺是夜於浮圖上放大光明流照堂內通朗無翳如是前後頻放神光或似香爐乘空而上或飛紫焰如花如葉乍散乍聚或如佛象光趺宛具或如虹氣環遶塔帳累日連霄昱光難准又州治仁壽寺僧夜望拪巖光如樓照於山谷又去山寺八十里住者見光如火皆謂野火燒寺及來尋覓乃知靈相其祥瑞之感如此也至仁壽末年又勅於殷州智度寺置塔至州治見佛像垂手正坐在于甁內迄至入函常不變異又地生羅文上見靑蓮華及菩薩像大衆同睹見龍盤蛇屈之象#幷大人足迹及牛鳥狩等迹又置塔處有小蛇二枚停住不去因卽搆基入地四尺飛泉上涌厲疾已下六根壞人服者通損旣値斯緣乃移北置以避於泉故二蛇之住深有由矣曇以傳譯之美業終寺卽大業初年矣時有慧重沙姓郭雍州人練道少年綜尋內外志力方梗不憚威侮攝論十地戶牖由開勅請造塔於秦州岱嶽寺初停公館舍利金甁自然開現放光流外道俗咸睹送至寺塔將入石函又放光明晃耀人目嶽表白氣三道下流直向塔基良久乃歇又嶽神廟戶由來封閉舍利止至三度自開識者以神來敬禮故耳後不委其終

12) 수나라 서경 대선정(大禪定)도량 석영찬전(釋靈璨傳)
032_1025_b_12L釋靈璨
032_1025_c_02L영찬은 회주(懷州) 사람이며 혜원(慧遠) 스님의 문하의 제자이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정직하며 너그럽고도 부드러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상주(相州)의 업도(鄴都)에 나가 배우면서 바른 이론을 연구하고 쌓아 깊이 『십지론』과 『열반경』을 밝히려고 강론과 전수를 거쳐서 혜원 스님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온 열 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렀다가 후에 혜원이 생을 마치니 많은 스님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개황(開皇) 17년에 황제의 명으로 그 자리에 임명되어 대중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정영사(淨影寺)에서 옛 업을 전수하고 떨치면서 여러 해를 지냈다.
인수(仁壽) 연간에 사리탑을 세우게 되자 명을 내려 사리를 회주(懷州)의 장수사(長壽寺)로 봉송하였다.
처음 탑을 세우고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감응으로 장끼 한 마리가 석함 위에 와서 날아올랐다가 내려앉고 하면서 조금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대중과 더불어 3귀의(歸依)를 받았는데, 곧 사람들 가까이에서 주위를 익숙하게 맴돌아 마치 법문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으며 머리를 돌려 고무되어 기뻐 뛰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그 모양을 살펴보니 사실은 꿩이 아니라 다섯 가지 채색을 머금었고 세상에 드문 깃털을 가진 새였다. 이 모양을 황제에게 알리니 황제는 그 상서로운 징조의 그림을 감정해보고 “이것은 채란(彩鸞)이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영찬이 절의 스님을 시켜 그것을 잡아 북쪽 산에 놓아주라고 하였는데, 날아가던 새들이 무리지어 마중하고는 길게 울면서 떠나갔다.
또 이상한 행적의 감응이 있었는데 30여 발자국을 걸어 곧바로 탑이 있는 곳으로 왔으나 돌아간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4월 8일이 되어 곧 석함에 사리를 넣으려 하자 또 광명이 뻗어 나와 주위를 빙빙 돌다가 사라지니 도인과 속인들이 산을 무너뜨릴 것처럼 뛰고 춤추며 깨달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인수 말년에 다시 황제의 명으로 사리를 택주(澤州)의 고현곡(高賢谷)에 있는 경정사(景淨寺)로 보내어 탑을 세웠는데 이곳은 곧 혜원이 태어난 곳이었다.
처음 주(州)의 경내에 이르자 보름 사이에 열여덟 가지의 형상이 앞뒤로 바뀌며 일어났다. 혹 별빛 같은 것이 주위를 맴돌기도 하였고, 혹 붉은 기운을 띤 푸른 구름이나 또는 자색(紫色)의 노을과 흰 안개 같은 것이 상공에 그물처럼 퍼져 있고 성곽(城郭)을 환하게 비쳤으며 급기야 저자[市場]에 비치니 수만 명의 도인과 속인들이 동시에 다 같이 보았다.
기단 있는 곳에 사리를 보내니 광명은 널리 분포되어 있는 별과 같아서 크고 작은 빛이 엇갈려 뒤섞였고,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밖에도 여러 기이한 현상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별전과 같다.
영찬은 후에 대선정사(大禪定寺)에 머물면서 옛날처럼 법을 전수하다가 무덕(武德) 연간 초엽(618~626)에 본사(本寺)에서 입적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70세였다.
032_1025_b_13L 懷州人遠公之門人也稟志淳直寬柔著稱遊學相鄴硏薀正理深明十地涅槃備經講授隨遠入閞十數之一也住大興善後爲遠公去衆侶無依開皇十七年下勅補爲衆主於淨影寺傳揚故業積經年稔仁壽興塔降勅令送舍利于懷州之長壽寺初建塔將下感一雄雉集於函載飛載止曾無驚懼與受三歸便近人馴擾似如聽受迴頭鼓儛欣躍自娛覆勘其形實非雉也身具五采羽毛希世以狀奏聞勅勘瑞啚云彩鸞也璨令寺僧執之放于北山飛鳥群迎鳴唳而去又感異迹三十餘步直來塔所不見還蹤及四月八日入石函又放光明旋環隱沒道俗崩無不發心仁壽末年又勅送於澤州古賢谷景淨寺起塔卽遠公之生地也初至州治半月之閒十八種相前後迭起或如星光遶旋或如丹氣碧雲紫霞白霧羅布上空照燭城郭及映闤闠數萬道俗同時一見#送至基所光如列宿大小交錯數亦無量更有諸相具如別傳璨後住大禪定舊所傳武德之初卒於本寺春秋七十矣

13) 수나라 서경 승광(勝光)도량 석법찬전(釋法瓚傳)
032_1025_c_15L釋法瓚
032_1026_a_02L법찬은 제주(齊州) 사람이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고요히 선정을 즐기며 바위굴에서 살기를 즐겼다. 두타고행(頭陀苦行)이 바로 그가 가슴속에 품은 생각이었기에 태산의 언덕에 은거하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이끌고 받아들여 배워 익히도록 하는 방편을 잘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진리의 참뜻을 환하게 해득하여 때로 청론(淸論)을 널리 설교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강(覆講)을 없애고 그 자리에서 강론을 그만두는 일이 없으니 기다려 시간을 연장하여 강의해야 한다는 비난이 세간에 일어나게 되었다.
법찬은 처음 이런 비난을 듣고 매우 불쾌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였다.
“질문이 긴절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상대가 해득하라고 말하는 것이지 어찌 상대가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 경전을 펴서 익힐 뿐이었다.
개황(開皇) 14년에 문제가 지방을 돌아보는 길에 이름난 스님들을 초청하고 방문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청광(淸曠)을 말해주어 황제는 곧 명을 내려 그를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와 함께 수도로 돌아가 승광사(勝光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그 동안 단정한 선종의 스님으로서 뜰 안에서 빗자루를 끼고 직접 세상에 모범을 보였으므로 다시 이 날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인수(仁壽) 연간에 사리탑을 조성하게 되자 황제의 명으로 사리를 제주(齊州)의 태산(泰山) 신통사(神通寺)에 보냈는데, 이 절은 곧 남연(南燕)의 왕이었던 모용덕(慕容德)이 승랑(僧朗) 선사를 위하여 세운 절이었다. 이 일은 전대의 전기에 있다. 연왕(燕王)은 세 현(縣)의 백성들에게서 조달된 물건을 승랑(僧朗)에게 공급하여 이 재물을 모두 베풀어서 절을 경영하였으며 위아래의 여러 절이 10여 곳에 있고 줄지어 길게 이어진 회랑이 천여 칸이나 되며, 세 번의 불교폐지 때에도 사람들은 감히 이 절을 철거하지 못하였다. 혹 이 절을 침범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승랑의 모습이 나타나 석장을 휘둘러 그를 찔러 병고로 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가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면 곧 병이 나아서 잘못을 저지르기 전과 같아지곤 하였다. 우물의 깊이가 5장(丈)이나 되는데 원래의 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여인이 이 우물에 가면 곧 우물이 다 말랐다가도 향을 태우고 참회하여 물이 나오기를 원하면 다시 도로 예전처럼 나왔다. 이 절이 세워진 이래 4백여 년이나 되었지만 불상의 모습이 선명하고 영롱하여 빛깔이 새로 만든 불상과 같았고, 뭇 새들도 불상을 밟지 않아 지금까지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에는 이 절을 낭공사(朗公寺)라고 불렀는데 그 감응의 신령함을 지목하여 절의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며 온 세상이 이 절을 숭상하였다.
개황(開皇) 3년 문제가 이 절이 모든 사람들에게 조짐을 나타내고 여러 번 감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신통사(神通寺)라고 이름을 고친 것이다.
법찬이 처음 절 안에 이르자 곧 둥근 광명이 비쳐 나왔는데, 그 빛깔이 붉었다가는 하얗게 변하고 가라앉았다가는 또 높이 올라가며 혹 유성(流星)과 같기도 하여 사람들이 모두 다 같이 보았다. 또한 우물의 물이 넘쳐 이것을 퍼서 쓰면 줄어들었다가는 다시 솟아올랐다.
다른 감응으로는 떼를 지어 사슴들이 자연스럽게 탑에 이르러 비록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익숙하게 사람들을 따르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 다른 감응으로는 한 쌍의 거위가 4월 3일부터 8일에 이르기까지 항상 가마 앞에 와서 서서 범찬(梵讚)을 듣다가 마침내 사리를 묻고 난 뒤에는 자취를 감추고 오지 않았다.
이러한 감응이 있는 것은 예전에도 거의 듣지 못한 일이어서 법찬은 자세히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그후 선정(禪定)으로 대중을 인도하면서 때때로 법문의 교화를 떨치기도 하였는데, 그의 말은 엄숙하고 간절한 구절이 없으면서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그후 마침내 머무르던 절에서 입적하였다.
032_1025_c_16L 齊州人也安心寂定樂居巖頭陁苦行是所纏懷隱於泰嶽之開蒙訓接善知方便兼以達解諦時揚淸論致有覆喪坐無輟講移之誚興世瓚初聞之深自𧹞怍曰問非切竝不欲困人謂言彼解何言致斃因遂杜口不事言論閉謁尋閑披翫而已開皇十四年文帝省方訪名德人有述其淸曠者乃下勅延與帝同歸達于京邑住勝光寺肅禪侶擁篲門庭以身範世復見斯仁壽置塔勅令送舍利于齊州泰山神通寺卽南燕主慕容德爲僧朗禪師之所立也事見前傳燕主以三縣民調用給於朗竝散營寺上下諸院十有餘所長廊延袤千有餘閒三度廢教人無敢撤欲有犯者朗輒現形以錫杖撝之病困垂死求悔先還差如初井深五尺由來不減人臨之卽爲枯竭燒香懺求還復如寺立已來四百餘載佛象鮮瑩如新造衆禽不踐于今儼然古號爲朗公寺以其感靈卽目故天下崇焉開皇三年文帝以通徵屢感故改曰神通也初至寺內卽放圓光乍赤乍時沈時擧或如流星人衆同見井水涌溢酌而用之下後還復又感群鹿自然至塔雖鼓吹衆鬧馴附無恐又感鵝一雙從四月三日終于八日恒來輿立聽梵贊恰至埋訖迹絕不來之感致罕聞於古瓚具以聞後導以禪定時揚法化言無嚴切而密附懷遂終沒於所住

14) 수나라 서경 정영(淨影)도량 석보유전(釋寶儒傳)
032_1026_b_02L釋寶儒
032_1026_b_02L보유는 유주(幽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널리 여러 강원에 유학하며 일정하게 정해진 거처지가 없이 오직 도를 닦는 일에만 힘쓰다가 후에 업성(鄴城)에 이르러 혜원(慧遠)에게 의지(依止)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십지론(十地論)』의 미묘한 이치에서 자못 그 중요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북주(北周) 때에 법보(法寶)를 폐지하는 시대를 만나 남쪽으로 돌아가 진(陳)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용을 환히 꿰뚫어 도에 정통하였다 하여 짧은 시일 안에 명성을 떨쳤다.
그후 수나라가 천하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문화와 법도가 크게 동화되자 곧 낙양으로 돌아가 다시 혜원을 스승으로 섬기며 『대열반경(大녈槃經)』의 강의를 3년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는데, 그 참뜻을 모두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환히 꿰뚫었다. 그래서 곧 반복하여 진술해 보라고 하였는데 그가 반복하여 진술하자 혜원은 앉은 자리에서 곧 그의 말을 긍정하였으며, 그후 의리를 중히 여겨 서로 따라다니다가 정영사(淨影寺)로 돌아가 거처하였다.
그후 지혜로운 마음으로 더욱 힘써 멀리 선대의 영특한 스님들이 옳고 그른 관계를 찾아 탐구하여 깊이 따져보고 더욱 정밀하게 체계를 세웠다.
인수(仁壽) 연간에 등주(鄧州)에 사리탑을 세우게 되자, 곧 황제의 명으로 대흥국사(大興國寺)로 가게 되었는데, 이 절은 황제가 예전에 숨어살 때 터전을 잡은 곳이다. 절에 이르러 돌을 구하여 찾아도 아름다운 돌이 없어 끝내 절 안의 박석(璞石)을 가져다 깎고 자르고 새겨서 석함을 만들었다. 이 돌은 본래 나쁜 돌이었는데 갈고 장식하는 일이 끝나자 곧 마노(馬瑙)로 변하여 돌의 질이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통 돌과 달라졌다. 또한 예서(隷書)로 쓴 정국득(正國得)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글자 형태가 바르고 곧아 그 교묘함이 신공(神工)과 비슷하여 명필인 사람이라도 이에 한 점도 더할 수 없는 글씨였다.
또한 여러 가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속에 기린과 봉황새 등의 모양이 나타났다.
보유는 관리들과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표문을 지어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절에 돌아온 후로는 문을 닫고 업을 닦았으며 때때로 식사하는 시간에만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본사에서 생을 마쳤다.
032_1026_b_03L 幽州人也童子出家遊博諸居無常准惟道是務後至鄴下止遠公十地微言頗知綱領値周喪法寶南歸在陳達命淸通亟振名自隋氏戡定文軌大同便歸洛汭還師於遠聽大涅槃首尾三載通鏡其旨卽蒙覆述遠自處坐印可其言慕義相從還居淨影慧心更擧遐討前英立破之閒深鑑彌密仁壽建塔鄧州乃勅令往寺名大興國也帝昔龍潛所基旣至求石訪無美者乃取寺內璞石鐫斲爲函石本麤惡磨飾將了乃變成馬碯細膩異倫復有隸字三枚云正國得也形設正直巧類神工名筆之人未可加點又見種種林木麟鳳等像儒與官人圖以表奏返寺之後閉門修業時因食次方見其面不夂卒於本寺

15) 수나라 서경 광명(光明)도량 석혜최전(釋慧最傳)
032_1026_b_20L釋慧最
032_1026_c_02L혜최는 영주(瀛州) 사람이다. 처음 『열반경』의 설법을 들으려고 업성(鄴城)에 나가 배웠으며 들은 것에 인하여 곧 강론하였는데, 아직 한 번도 두루 끝까지 듣지 못하였지만 여러 가지 논의의 실마리가 종합적이고 여유 있게 펼치고 닫고 하였기에 자리를 같이한 여러 사람들의 감탄하고 우러르는 대상이 되었다.
북주(北周)가 북제를 멸망시키던 날, 남쪽 강남으로 달아나 다시 지혜의 문을 익혀 자못 다른 논장(論藏)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쪽 스님들이 남쪽 진나라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당시의 풍속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나 오직 혜최만은 기지와 방편이 마음속에서 약동하여 풍류(風流)를 떨어뜨리지 않았고, 대체로 남방 사람들을 위하여 많이 주선하여 그 사이가 교칠(膠漆)과 같이 밀접하였다.
수(隋)나라 황실이 천하를 평정하자 중원(中原)이 편안하고 태평하여졌고, 곧 천자의 곁에서 잘 가르치고 다스려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예전에 듣지 못한 법문을 참석하여 듣게 되었다.
그후 광명사(光明寺)에 머물렀는데, 때때로 바르게 이끌어 전수하면서 조용히 검박하게 살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벗으로 삼지 않았으며 정신과 지조가 매우 뛰어났고 기개와 몸가짐이 높고 원대하였다. 함부로 욕된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흠이나 잘못은 반드시 깨끗하게 씻어버렸다. 그가 세운 뜻은 이와 같았다.
인수(仁壽) 연간에 황제의 명으로 파견되어 사리를 형주(荊州) 대흥국사(大興國寺) 용잠도량(龍潛道場)으로 보내게 되었다. 예전에 수(隋)나라의 고조 황제가 재상으로 있을 때 어떤 인연으로 이 절을 지나가다가 한 스님을 만나 매우 반갑게 서로 받아들이고 정의를 맺었는데, 당시 그는 고조 황제를 큰 재목감이라고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야 옛 말뜻을 추억하여 명을 내려 그 스님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명으로 곧 그가 머물렀던 절을 다시 짓고 그가 거처하던 옛 승방에 글을 새겼다. 그런 까닭으로 이 절이 ‘흥국(興國)’이니, ‘용잠(龍潛)’이니 하는 훌륭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이름은 모두 황제에게서 나온 이름이며, 황제의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는 이름이다.
또한 도량의 전면에 있는 보랑(步廊)이 스스로 무너져 내려 스님들이 수리해서 보호하려고 재료를 끌어왔지만 아직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리가 도착하여 곧 탑의 기단을 안치하려고 우뚝 드러나고 트인 곳을 돌아보았는데, 오직 이 무너진 곳의 너비를 비교하여 헤아려보니 꼭 탑의 형태에 알맞은 곳이었다. 그래서 어떤 아는 사람은 “미리 그 회랑을 허물어 이곳에 탑이 안치되기를 기다린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4월 8일이 되자 사리를 모신 선원(禪院) 안에서 문득 안개가 일어났다가 재(齋)가 끝난 후에야 곧 사라졌다. 이날 햇빛이 밝게 비쳤고 일산과 같은 구름이 바로 탑이 있는 공중에 떠 있었으며 가랑비가 내렸으나 다른 곳은 비에 젖지 않았다.
또 다른 감응으로는 물오리와 학 등 수많은 새들이 탑 위를 날아 빙빙 돌았다. 또한 구름사이에 자색(紫色)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꽃이나 횃불 같았다.
또 하늘에서 꽃이 내렸는데 눈처럼 펄펄 날리며 내려왔으나 끝내 땅에 닿지는 않았다.
그후 또 사리를 길주(吉州)의 발몽사(發蒙寺)로 보냈는데, 땅을 여덟 자 깊이로 파자 예장(預章) 나무판자 한 장과 옛 벽돌 여섯 장, 은병(銀甁) 두 개가 나왔고 사리(舍利) 1매를 얻었는데 물에 떠서 물결 따라 돌고 있었다.
또 하나의 보물을 얻었는데 바탕에 아홉 가지 채색을 띠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 자세히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이 절에는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는데, 송(宋:前宋) 대명(大明) 5년(461)에 이 절의 스님 법균(法均)이 꿈에 세상에서 희귀한 금용(金容:부처님의 얼굴)과 범음(梵音)이 맑고 멀리 퍼지는 것을 보았다.
032_1026_b_21L 瀛州人也初聽涅槃遊學鄴因聞卽講曾未經遍而言議綸綜綽爾舒閑故爲同席諸賢之所歎仰周滅齊日南奔江表復習慧門頗通餘論且自北僧在陳#多乖時俗惟最機㩲內動不墜風流多爲南方周旋膠漆隋室定天中原安泰便觀化輦參聽異聞後住光明時傳雅導好居靜退非賢不友神志宏摽氣調高遠不妄受辱必淸瑕累其立志也如此仁壽年中勅遣送舍利于荊州大興國寺龍潛道場昔者隋高作相因過此寺遇一沙門深相結納當時器重不測其言及龍飛之後追憶舊下詔徵之其身已逝勅乃營其住彫其舊房故有興國龍潛之美號竝出自綸言帝之別意又道場前面步廊自崩僧欲治護控引未就舍利旣至將安塔基巡行顯敞惟斯壞處商度廣狹恰衷塔形有識者云豫毀其廊用待安塔及四月八日利院內忽然霧起齋後便歇日光朗有雲如蓋正處塔空仍下細雨濕餘處又感鳧鶴衆鳥塔上飛旋見雲閒紫色狀如花炬又雨天花雪紛紛而下竟不至地後又送舍利於吉州發蒙寺掘深八尺獲豫章板一條古塼六枚銀甁二口得舍利一浮水順轉又得一寶體含九采不識之具以聞奏寺有瑞像宋大明五年寺僧法均夢見金容希世梵音淸遠
그후 어떤 인연으로 삼곡강(三曲江)에 도달하여 깊은 못 밑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광채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태수(太守) 주담(周湛) 등과 더불어 이 불상을 물 밖으로 꺼내어 보니 무게가 천 근가량은 될 것 같았는데도 가볍기가 몇 냥(兩)밖에 되지 않았다. 신장(身長)이 6척 4촌이며 금동으로 된 불상이었다.
그후 장사군(長沙郡)에서 광부(光趺)를 수도로 보내왔는데 문제가 칙사를 파견하여 다시 불상이 있는 곳에 안치하게 하니, 자연스럽게 어울려 총 높이가 9척여에 달하였다. 부처님의 옷 주름 아래 10여 자의 범어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글자인지 알지 못하다가 후에 한 서역의 스님이 이것을 읽고 “이것은 가유라위국(迦惟羅衛國) 아육왕(阿育王)의 넷째 딸이 세운 불상으로서 문득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양(梁)나라의 천감(天鑒) 말년에 이 불상에서 여러 번 광명이 뻗어 나와 온 방안을 비추었다.
그후 양무제(武帝)가 곧 수도로 모셔오려 하다가 어떤 사연으로 마침내 중지되었다.
대동(大同) 7년에는 불상의 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는데 그해에 유경선(劉敬宣)이 역적이 되어 고을을 불사르고 그 불길이 절에까지 미쳐서 모두 다 불탔으나 오직 불당에만은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
대동 10년에 이르러 불상에서 또 땀이 흘렀다. 그래서 상동왕(湘東王)이 곧 봉영(奉迎)하여 강릉(江陵)에 이르러 복을 비니 불상에서 또 광명이 뻗어 나왔다.
대동 12년에 다시 불상을 발몽사(拔蒙寺)로 반환하여 절에 이르니 사흘 동안 광명이 뻗어 나오다가 그쳤다.
그후 진(陳)나라의 천가(天嘉) 6년에 다시 장식을 더하였다. 세상에 그 신령스러움과 기이함이 전해져 곳곳에서 그 불상의 모습을 모사하였다.
혜최는 직접 불상의 발에 머리를 대어 절을 하고 섬기면서 광명사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그 골격과 기운이 우람차서 참으로 조어장부(調御丈夫)의 모습이었다. 그가 불상을 그린 것은 당시에 이 불상을 가볍게 보고 홀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머무르던 절에서 생을 마쳤다.
032_1027_a_06L因行達于三曲江見像深潭浮水上與太守周湛等接出計有千而輕同數兩身長六尺四寸金銅所成後長沙郡送光趺#達都#文帝勅遣還安像所宛然符合#摠高九尺餘佛衣緣下有梵書十餘字人初不識後有西僧讀云此迦維羅衛國育王第四女所造也忽爾失去乃在此耶梁天鑑末屢放光明照于一室武帝將請入京因事遂止大同七年佛身流汗其年劉敬宣爲賊燒郡及寺竝惟佛堂不及至于十年像又通汗湘東王乃迎至江陵祈福#放光十二還返發蒙至寺放光三日乃止天嘉六年更加莊飾故世傳其靈異處處摸寫最躬事頂禮圖于光明骨氣雄幹誠爲調御之相今時所輕略故也後卒于住寺

16) 수나라 서경 선정(禪定)도량 석승랑전(釋僧朗傳)
032_1027_a_23L釋僧朗
032_1027_b_02L승랑은 항주(恒州)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속가를 떠나 바른 교화를 바라고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청중(聽衆)에 붙어 따라다니다가 『대론(大論)』과 『잡심론(雜心論)』에 대해 잇따라 그 근본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담론(談論)과 제창이 이어지자 귀의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저자와 같이 모여들었다.
그후 관중(關中)으로 들어와 공관사(空觀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에서 재능을 떨치고 지방마다 이익과 안락을 주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있어 말과 웃음이 부드러웠다. 그가 있는 자리에 있게 되면 정신과 마음에 답답한 것이 없어지고, 그는 매우 박식한 지식으로 하여 대중들이 추대하고 숭상하는 대상으로 되었다. 때로는 특이한 질문이 있어 본래 본 일이 없는 문제일 경우 그는 곧 합장하고 대답하였다.
“것은 이 승랑의 학문으로는 아직 정통하지 못한 문제여서 내가 깨달은 것은 다만 여기까지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영특한 명성이 있는 대덕들이 함께 그가 자기의 수준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찬미하였으며, 감히 그의 높은 행(行)을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인수(仁壽) 연간에 사리탑을 안치하게 되자 황제의 명으로 사리를 번주(番州)로 보내게 하였는데, 번주라는 곳은 지금의 광주(廣州)로서 영취산(靈鷲山) 과실사(果實寺)의 보탑이 그것이다.
처음 주(州)의 경내에 이르러 두루 안치할 곳을 돌아보다가 과실사에 이르자 곧 이곳이 좋다고 하여 이곳에 안치하게 되었다.
절의 서쪽은 강물과 대치하여 산을 등지고 있었다. 거친 가시밭을 여섯 자 깊이로 파내니 석함(石函) 세 개가 나왔는데, 두 개의 함 속에는 각기 두 개의 은불상과 두 개의 은신선상이 담겨진 동함(銅函)이 있었고, 한 개의 함 속에는 금으로 된 병과 은으로 된 병이 있었는데 크기가 다르고 사리는 없었다. 여기에 “송(宋) 원휘(元徽) 원년에 탑을 세웠다[宋元徽元年建塔]”라고 새겨져 있었다.
또한 절 안의 옛 비석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송(宋) 영초(永初) 원년에 천축의 사문 승률(僧律)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종과 경쇠소리를 들었는데 하늘의 꽃이 산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가람을 세웠다. 그후 인도의 스님인 구나발마(求那跋摩)가 이 절에 와서 살면서 ‘이 산은 장래에 반드시 보살성주(聖主)를 만나 크게 보탑을 홍건(弘建)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함께 그것을 새겨놓았다.”
지금 승랑이 산세(山勢)를 살펴보니 이곳만이 탑을 안치할 만하고 옛적의 이야기에도 은근히 부합되는지라 참말로 헛되게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가 선정사(禪定寺)에 머무르면서 강론하고 익히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대업(大業) 말년에 머무르던 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나이는 70여 세였다.
032_1027_a_24L 恒州人少而出俗希崇正化附從聽衆尋繹大論及以雜心談唱相接歸學同市入關住空觀寺復揚講席隨方利安而仁恕在懷言笑溫有在其席無悶神心宏博見知所推尚時有異問#素非所覽者便合掌答云僧朗學所未通解惟至此英聲大德咸美其識分不敢蔑其高行也仁壽置塔下勅令送舍利於番今所謂廣州靈鷲山果實寺寶塔是也初至州治巡行處所至果實寺便可安之寺西對水枕山荒榛之下掘深六尺獲石函三枚二函之內有銅函盛二銀像幷二銀仙其一函有金銀甁大小相盛中無舍利宋元徽元年建塔又寺中舊碑云宋永初元年天竺沙門僧律嘗行此聞鍾磬聲天花滿山因建伽藍後有梵僧求那跋摩來居此寺曰山將來必逢菩薩聖主大弘寶塔同銘之今朗規度山勢惟此堪置#暗合昔言諒非徒作事了還京住禪定講習爲務大業末年終於所住秋七十有餘矣

17) 수나라 서경 정영(淨影)도량 석혜창전(釋慧暢傳)
032_1027_b_24L釋慧暢
032_1027_c_02L혜창의 속성은 허씨(許氏)이며 내주(萊州) 사람이다.
그는 『잡심론(雜心論)』만을 배우는데 치중하여 뜻과 이름의 실상에 있어 어떤 경계에 구애되어 그 안에 머무르고 글 뜻에만 국한하여 교리를 결부시켰으며, 애초에 대승(大乘)을 믿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근본의 진리가 없다고 하면서 일을 당하면 헛된 거짓과 같다고 하였다.
그후 혜원이 낙양(洛陽)에서 도의 이치를 전파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학문의 명성을 따라 먼 길을 찾아가니, 문하의 제자들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당시 그를 통명(通明:六通三明의 줄인 말)이라고 부르고 있어 혜창은 곧 이를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시험 삼아 그곳을 찾아갔다가 그의 신비한 지략과 높고 심오한 담술(談述)이 하늘과 땅을 그물처럼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의 스승의 도를 되돌아보니 그 모습이 마치 떠돌아다니는 티끌과 같았다.
그리하여 곧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소승에 대한 지조를 굽히고는 삼가 3년 동안 그 법문을 듣고 『열반경』을 환하게 해득하였으며, 늦게야 깨닫게 된 것을 개탄하였다.
그후 또 수도에 이르러 정영사(淨影寺)에 머무르면서 앞에서 말한 경을 도야(陶冶)하고 사유(思惟)하여 스승의 소임을 맡아 하였다.
인수(仁壽) 연간에 사리탑을 안치하게 되자 황제의 명으로 사리를 모주(牟州)의 거신산사(拒神山寺)로 보내게 되었다.
황제는 이 산에서 황은(黃銀)이 나온다고 하여 특별히 명하여 사리탑을 세워 산신을 다스려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다.
이 산은 주(州)의 동쪽 5리에 있는 산인데, 예전에 진시황(秦始皇)이 이 산에서 돌을 캐서 다리를 놓으려 하였으나 이 산의 산신이 거부하고 산을 떠나지 않아 산의 이름을 거신산(拒神山)이라고 지은 것이다. 이 산의 남쪽 4리에 황은(黃銀)의 구멍이 있으며, 탑을 세운 터의 이름은 온공부(溫公埠)라고 한다.
승온(僧溫)
전설에 이르기를 예전 제(齊)나라 초엽에 승온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70세에 그의 도행은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으며 여러 곳을 왕래하며 교화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았다. 일찍이 양나라 고제(高帝)의 공양을 받았으나 12년 후에 양제와 헤어져 북쪽으로 돌아와 이 언덕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산 이름에 인연하여 절의 이름을 지었으나 범ㆍ이리ㆍ새를 비롯한 짐승들이 울부짖어 마치 승온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승온은 문을 나서서 말하였다.
“너희들은 짐승으로 10악(惡)에 감응된 것들이지만 나는 인간세상에 태어났으므로 10선(善)의 과보로 초래된 몸이다. 죄와 복이 하늘과 땅처럼 까마득하게 다른데 무엇 때문에 수고로이 나와 관계하려고 하는가. 너희들은 속히 떠나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새와 짐승들은 영원히 이 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승온은 키가 7척이고 위엄스러운 용모와 거동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으며, 눈썹 길이가 한 자 남짓하게 드리워서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보려는 것이 있으면 손으로 눈썹을 걷어 올렸다. 지금까지 비록 절에 그 이름은 남아 있지만 속가에서는 아직도 ‘온공부(溫公埠)’라고 부르고 있다.
혜창은 사리를 안치하는 일을 마치고 다시 수도로 돌아가 전에 하던 사업을 모아 익히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절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조사를 방문하는 일도 역시 하지 않았다.
그는 미리 생을 마칠 것을 알고 깨끗하게 목욕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생을 마치기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자 갑자기 입적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여 세였다.
032_1027_c_02L 姓許氏萊州人也偏學雜心志存名實拘滯疆界局約文義初不信大乘以言無宗當事同虛誕也聞遠公播迹洛陽學聲遐討門人山時號通明暢乃疑焉試往尋造其神略乃見談述高邃冒罔天地顧小道狀等遊塵便折挫形神伏聽三載達解涅槃慨其晩悟又至京邑仍住淨影陶思前經師任成業仁壽置塔勅送舍利於牟州拒神山寺爲山出黃銀別勅以塔鎭之用酬恩山在州東五里昔始皇取石爲橋此山拒而不去因遂名焉山南四里黃銀穴塔基之處名溫公堆傳云高齊初有沙門僧溫行年七十道行難測遊化爲任曾受梁高供養一十二年後辭北還行住此堆創立寺宇因山爲號而虎狩遶寺鳴吼若怖溫溫出戶語曰汝是畜生十惡所感吾是人道十善所招罪福天懸何勞于我汝宜速去旣聞斯及於是鳥狩永絕此山而溫身長七尺威儀怯人眉長尺餘垂蔽其面欲有所睹以手褰之故至于今雖有寺號而俗猶呼爲溫公堆焉暢安處事了還返京寺綜習前業終世不出言問慶弔亦所不行預知其亡淸浴其體端坐待卒至期奄逝春秋七十有餘矣續高僧傳卷第十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학문의 범위가 넓고 아름다움.
  2. 2)8백 년을 산 장수(長壽) 코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