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_1038_b_02L혜륭은 속성이 하씨(何氏)이고 단양(丹陽) 구용(句容) 사람이다. 그의 조부 하전(何翦)은 양(梁)나라 무륭왕(武隆王)의 장사(長史)였고 아버지 하의(何嶷)는 양나라의 산기상시(散騎常侍)였다. 혜륭은 11세에 출가하여 선무사(宣武寺)의 승도(僧都)인 사문 혜서(慧舒)를 스승으로 삼았다. 혜서의 불도의 수행은 멀리에까지 알려졌고 그의 풍채는 맑고 높았으며 학식은 사람들이 따라 배울 만하였고 덕망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오회(烏廻)의 관직을 틀어쥐고 있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혜륭은 스승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모두 갖추었다. 나이가 13세에 이르자 학문을 배우는데 뜻을 두었으며, 도를 들으려고 하면 곧 신령스러운 상서로움에 감응되었다. 당시에 성이 장(蔣)이고 이름은 규(規)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법화경』 한 부를 주면서 말하였다. “장래의 불법은 이 사람에게 의거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마치고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뜻으로 미루어보아 그 지위가 4의(依) 보살과 같거나, 그 덕이 9명의 스승과 동등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책임을 감당하리라고 성인이 말해 주는 감응이 있었겠는가. 드디어 법운사(法雲寺)의 각(礭) 법사에게서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는데 한 번 다 듣기도 전에 그 심오한 뜻을 통달하였다. 이렇게 몇 해 동안 배우니 그가 가장 으뜸이라고 불렸다.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자 다시 비니(毘尼)를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까닭에 전생의 인연과 인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모든 것을 환히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양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시대에 순응하며 살았다. 비록 불법이 황폐해졌으나 학문의 뜻은 버리지 않았으니 팽성사에 교화 받는 자들이 강물처럼 흘러들었다. 진씨(陳氏)가 나라를 다스리자 다시 불교를 내세우게 되었다. 도문(道門)에서 덕망이 높은 승정(僧正) 훤공(暅公)이라는 사람이 이 사원에 강원을 설치하고 법석을 여니 학문을 연구하는 승려와 불교신자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혜륭은 그의 입실제자가 되었으며 훌륭한 제자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게 되자 그에게 강의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후 훤공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강의를 계속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이것은 진실로 당연하고 좋은 유언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식은 깊고 분석적이며 말재주는 청정하고 풍부하여 불교 교리를 논의하여 확정할 때마다 머뭇거리거나 의심하던 일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비록 다른 이야기 줄거리를 가지고 말하여도 주도권을 쥐고 날카로운 공격과 예리한 말로 때에 맞게 처리해 나가니 아주 까다로운 논의는 자연히 사라지거나 줄어들고 청정하고 심원한 이치가 밝혀졌다. 수나라가 세상을 다스리게 되자 온 천하가 함께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덕이 높고 뛰어난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였으나 혜륭의 뜻은 숨어사는 데에 있었으므로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사양하였고, 이전부터 거처하던 곳에서 불법을 널리 설교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인수(仁壽) 원년 11월 16일 병으로 자리에 들어 20일에 생을 마쳤다. 그때는 동짓달이어서 날씨가 추웠고 구름은 하늘을 덮었으며 눈이 내려 들판을 덮었다. 한밤중 열반에 들려고 하는데 하늘이 맑게 개이고 별들이 반짝반짝 빛났으니 이것을 어찌 신령이 슬퍼하고 천룡이 슬픔에 감응되어 나타난 상서로움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혜륭은 자비심을 지니고 구제해 주는 마음이 성품을 이루었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유순하였고 만족할 줄 알고 탐욕이 없는 것을 보배로 여겼다. 그는 대체로 『성실론』 강의를 30차례 하였고, 『열반경』과 『대품경』 강의를 10여 차례 하였으며, 그 나머지 경들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쓰지 않겠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좌사(高座寺) 남쪽 산봉우리에 흙을 날라다가 단을 쌓게 하고 말하였다. “내가 생을 마치면 관이니 덧관이니 하는 것을 만드느라고 부산을 피우지 말고 이곳에 놓아 두어 새와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좋겠다.” 단이 다 완성되자 그는 곧 생을 마쳤다. 참으로 혜륭은 자기 명을 아는 사람이었다. 후에 유언대로 시신을 보시하고 이어 사원에 큰 비석을 세웠는데, 사문 법선(法宣)이 비문을 지었다.
032_1039_a_02L혜해는 속성이 장씨(張氏)이고 청하(淸河) 무성(武城) 사람이다. 어려서 불교에 발을 들여놓고 업도(鄴都) 광국사(廣國寺)의 경(冏) 법사를 스승으로 삼고서 『열반경』과 『능가경(楞伽經)』의 강의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내용을 꿰뚫고 다음에는 덮어놓고 따라 내려가며 외우니 상좌 승려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5년이 지나자 함께 배우는 승려들이 떠받들면서 그에게 복종하였다. 다시 청주(靑州) 대업사(大業寺)의 도유(道猷)에게서 마하연(摩訶衍)과 아비담(阿毘曇) 등의 강의를 받았다. 도유 법사는 지혜와 깨달음에 막힘이 없고 지혜의 활용은 불가사의하였다. 혜해는 스스로가 재주를 나타내어 이 영예로운 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주(周)나라 대상(大象) 2년에 그는 도포(濤浦)에 와서 안락사(安樂寺)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사원을 수리하고 불교의식을 장엄하게 진행하며 중각(重閣)을 건설하는 등의 길을 자신이 직접 맡아 시작하니 모두가 솔선하여 도와 나섰고 있는 힘을 다하면서 게으름을 잊고 일하였다. 추위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지고 달렸고, 늘 이곳을 정토(淨土)로 만들리라 다짐하고는 하였다. 오로지 지성만을 기울인 것이 감응을 일으켜 문득 제주(齊州)의 승려 도전(道詮)이 그림으로 된 무량수불의 초상을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이것은 천축(天竺)에 있는 계두마사(鷄頭摩寺)의 오통보살(五通菩薩)이 허공을 날아 저 안락세계로 가서 그려온 세존의 모습입니다.” 평소의 생각이 남모르게 마침 이루어졌기에 깊이 절하고 참회하려는 생각을 품었더니 이어 신비한 광명이 밝게 비쳐 나오는 것을 보고는 경사롭게 여기면서 앞으로 잘 되어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때부터 간난신고하여 그것을 모사하고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는데 생을 마칠 때까지 그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대업(大業) 5년 5월 초 두드러기가 나는 병이 더욱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나는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5개의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생을 마치게 될 날짜를 알려주었다. 숨소리가 가늘어져 솜을 입가에 대고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5일 밤이 되자 갑자기 일어나 늘 하던 대로 서쪽을 향하여 절하고 가부좌를 틀고 있다가 새벽이 되자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얼굴빛은 태연스럽고 온화하였으며 의젓한 것이 마치 정신이 있는 것 같았다. 도인과 속인들 모두가 슬퍼하면서 다투어가며 발에 머리를 대어 절하였고 꽃과 향이 비 내리듯이 내렸으며 금은보화가 산이 무너져 내린 듯이 쌓여 계단과 담장 안을 가득 채웠으니, 이것은 그의 복과 은혜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성이 지극하였고 그것은 늙어가면서 더욱 독실해졌으며 반주삼매의 비밀 수행법과 아란야에서의 사유하는 모습으로 자주 닦아 익혀서 상서로움이 늘 따라다녔다. 아울러 자애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기를 자기 몸을 돌보는 것보다 더 극진하게 하였고 제자들에게는 넓고 긴요한 것만을 가르쳐 주면서 언제나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바쳤다. 재상ㆍ관료ㆍ거사들과 늙고 병들고 빈궁한 승려들에 대하여 마음속에는 경중을 두지만 덕은 평등하게 베풀었다. 이것은 이미 그가 이것을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재능과 인품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이를 말세의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열반경』 강의를 30차례 하였고, 『법화경(法華經)』 한 부를 외웠으며 강의는 다섯 차례 하였다. 그가 생을 마친 5월 9일에 돌을 다듬어 사원에 세우고 글을 새겼으며 큰 집을 짓고 그를 옮겨 안치하였다. 강도(江都) 현령(縣令) 신효개(辛孝凱)가 그를 숭배하고 믿었는데, 집 안팎의 재물을 모두 희사하였으며 관복을 벗어버리고 음식을 들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다. 제자 혜병(慧昞)이 시신을 안치한 곳에 탑을 가설하고 기단을 축조하여 더욱 화려하게 하였다. 이어 비석을 세우고 사원의 문에 공덕을 찬양하는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비서학사(祕書學士) 낭야왕(琅耶王) 신(昚)이 글을 지었다.
032_1039_b_02L혜각은 속성이 손씨(孫氏)이며 그의 선조는 태원(太原)의 진양(晋陽) 사람이다. 양자강 오른쪽 지방의 백성들이 홍수로 인한 난리를 당하자 단양(丹陽)의 말릉(秣陵)으로 옮겨가 살았다. 혜각이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양나라 지공(誌公)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사람이었는데, 혜각의 집 주위를 빙빙 돌며 “이곳에서 신동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혜각이 태어났으니 그 예언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남다르고 기상과 재주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비록 선비였지만 기이한 마음과 원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5음(陰)과 6진(塵)에 대하여 거품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서원을 세워 속세를 떠나기를 구하니 부모들도 그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8세에 출가하여 정밀하게 법상(法相)을 연구하였는데, 바로 흥황사(興皇寺) 랑(朗) 법사에게서 처음으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학당은 배우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들 모두가 불교를 전파시켰으며 입실제자치고 인걸이 아닌 자가 없었다. 혜각은 거대한 논리를 받아 잇고 심오한 뜻을 자세히 관찰하여 간단하게 요점만을 취하였으며, 깊고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여러 가지 묘리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다 이룩하니 사원의 종사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손뼉을 치면서 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마음을 9부경(部經)에 두고 수론(數論)을 자세히 관찰하였으며 궤변과 다른 종에 이르기까지 부차적인 것도 찾아보고 나서 이윽고 탄식하였다. ‘느릅나무가 아무리 높이 자라도 어떻게 하늘을 찌를 수 있겠는가. 작은 길은 먼 곳으로 갈 나루터를 못 쓰게 만들거니, 애오라지 근심을 잊으려고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뜻이 아니다. 대체로 정신을 맑게 하고 지혜를 얻는 데서 5문(門)을 숭상하고, 산천경개를 따라다니며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이어 옷을 걷어 올리고 혼자서 길을 떠나 서하사(栖霞寺)에 거처하였다. 그곳에는 혜포(慧布) 법사가 있었는데, 그는 공해탈문에 대한 이해에서 으뜸인[空解第一] 사람이었고 심오한 방등경을 깊고 환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혜각은 혹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렸고 만나면 기꺼이 터놓고 전수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지도론(大智度論)』이 양자강 왼쪽 지방에 널리 퍼지지 못하였으므로 종지를 펴고 갖추어 장차 강론을 베풀려고 하면서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겨 오묘한 이치를 펴나가니 혜포는 옷깃을 여미고 감탄하면서 그에게 강의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옛 글과 새로운 뜻의 두 측면으로 관통시켰는데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을 섭취하여 『대지도론[釋論]』이 널리 흥하게 되었으니 바로 여기에서부터 번성해진 것이다. 진(陳)나라의 진안왕(晋安王) 백공(伯恭)이 상주(湘州) 자사가 되자 매우 남다른 예의를 표시하면서 아울러 사람들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하니 남쪽으로 내려와 널리 설교해 주었다. 이부상서(吏部尙書) 모희(毛喜)와 호군장군(護軍將軍) 손창(孫瑒)도 모두 몸을 굽히거나 머리를 발에 대어 절을 하면서 남달리 공경하고 우러렀다. 좌위장군(左衛將軍) 부재(傅縡)는 모든 학문을 통달하였고 기상과 재주가 매우 훌륭하였으나 도인과 속인들 속에서는 떠받들리거나 공경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혜각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언제나 마음과 몸이 모두 숙연해졌고 격렬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타고난 덕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수(隋)나라가 강남 지방을 다스리게 되자 새로운 법이 발포되어 한 고을 안에 두 개의 사원만 두고 나머지 사원은 모두 폐지하게 되었다. 혜각은 많은 불교사원이 폐지되는 것이 걱정되어 3백여 리[百舍]를 단숨에 달려가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는 그 자리에서 칙령을 내려 그의 소청을 따랐다. 그리하여 정신과 가슴이 기름지게 열리고 상법시기를 널리 보호하는 데에 참으로 그의 힘이 있게 되었다. 수양제(隋煬帝)가 지난날 변방에 살면서 회전(淮甸)을 다스릴 때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였는데, 그 뜻이 옆자리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넘어선 정도였기에 마침내 혜각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법사께서는 편안하시고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법사께서 구산(龜山) 주변에서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뜻을 널리 설교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단정한 태도와 뛰어난 말재주를 지니신 법사께서는 왜 회계산 근방에서만 널리 설교하시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말씀하셔서 경수(鏡水)의 사람들만을 인도하십니까? 제자는 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깊어지고 불도를 배우고 싶은 심정은 더욱 간절합니다. 지금 성에 혜일도량(慧日道場)을 세우고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승려들을 모두 초청하여 큰 불교행사를 진행하고 성대하게 법의 바퀴를 굴리려고 합니다. 상인(上人)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대중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지금 맞이할 사람을 보내니 널리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급히 와서 청하니 이 아름다운 명을 받아들였다. 법제 상인(法濟上人)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신령스러운 지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영복(永福)도량에서 『대지도론』 강의를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설교하는 모임에 참가하였고 잘한다고 오래도록 칭찬하였다. 후에 그는 백탑사(白塔寺)에 머무르면서 늘 『대품경(大品經)』ㆍ『열반경』ㆍ『화엄경(華嚴經)』ㆍ4론(論) 등 20여 부의 경전만 해도 여러 차례 강의하고 청강생들이 자리에 가득 찼으니,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 번성한 것치고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강도(江都)의 옛 사원에 보대경장(寶臺經藏)을 세우고 5시(時)의 미묘한 경전들을 모두 이곳에 갖추어 놓았다. 이윽고 그가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칙명을 내려 혜각에게 보대경장의 일을 맡아보게 하니 사람들이 적중한 사람을 골랐다고 하였다. 대업(大業) 2년에 황제를 따라 수도로 올라가다가 노상에서 병을 만났으나 정신과 얼굴색은 여전하였고 설교를 그만두지 않았다. 생을 마칠 시각이 점점 다가왔지만 그의 지혜와 깨달음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금강역사(金剛力士)들이 대신력(大神力)으로 앞뒤를 에워싸고 다른 나라의 범승이 향을 태우며 공양하는 것을 모두 다 보았다. 처음 지각(智覺) 선사가 신령스러운 느낌을 받고 이어 혜각의 이름이 금록(金錄)에 올라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그의 지위와 뜻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는 3월 22일 사주(泗州) 숙예현(宿預縣)에서 나이 53세에 생을 마쳤다. 돌이켜보면 혜각은 말재주가 아름다웠고 용모가 잘 생겼으며 키는 8척이었고 풍채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재(齋)를 지휘하고 법당에 올라 살펴보는 모습은 참으로 모범으로 삼을 만하였다. 그의 위엄 있는 거동을 본 사람들은 얼굴빛을 달리하거나 견해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싫증을 모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불법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미묘한 뜻을 명백하게 알려주었는데 그의 말재주와 청정한 주장은 구름이 떠다니고 샘이 솟는 듯하였으니 참으로 해와 달을 품은 것과 같고 시원한 바람이 잘 통하는 집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가슴속에 맺힌 생각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 더럽게 여기거나 인색을 부리는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덕과 지조가 훌륭한 사람의 교화를 받아 교화의 공덕은 날마다 발전하고 달에 따라 커져서 굳건하고 또 넓어졌다. 겸하여 외도의 경전들도 통달하고 있었으며 묘하게 편지를 잘 썼는데,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순간에 써버리는 것이 볼만하였으며 그의 편지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것을 견본으로 삼았다. 게다가 그의 고상한 인품은 한량없었고 아량도 넓고 깊었으며 말을 해도 시비를 가르지 않았고 마음에는 너와 나라는 차별이 없이 평등하였다. 그리고 높고 높은 경지는 다른 사람들이 엿볼 수 없는 정도였다. 신자들이 보시한 물건들이 쌓이게 되면 필요에 따라 모두 나누어 주었으므로 자신은 두 벌의 옷 외에 실오리 하나, 겨자 한 알 저축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논문과 서적들만이 함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어찌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인재가 아니며 신통력과 방편을 지닌 정사(正士)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가 죽자 조서가 내려 그의 제사에 쓸 물건들은 필요한 것만큼 마련해 주었으며 은혜와 예의를 다해주어 풍족하고 훌륭하게 거행되도록 힘썼다. 아울러 돛배를 마련하고 왕공이 직접 호송하게 하여 그 해 5월 13일 강양현(江陽縣)의 수유리(茱萸里)로 돌아가 그곳에서 장례를 하였다. 혜각에게서 배운 제자들의 수는 매우 많았다. 제자인 지과(智果)가 유훈을 받아 떠나간 사람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이 깊어 마침내 함께 배운 제자들과 더불어 그의 거룩한 업적을 기념하여 사원의 문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서(秘書) 조고사인(詔誥舍人) 우세남(虞世南)이 글을 지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내사시랑(內史侍郞) 우세기(虞世基)가 비명[銘]을 썼다. 그 글은 별집(別集)에 올라 있다.
032_1040_c_02L도판은 속성이 곽씨(郭氏)이고 조주(曹州) 승씨(承氏) 사람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15세부터 돌아다니며 배웠으며 많은 역사책들을 읽고 유교를 대략적으로 종합하였다. 19세에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출가하여 외사촌 형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았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돌아다니며 벗을 구하였고 속세의 고통이 더욱 싫어져 다시는 속세로 내려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매번 상교(像敎)가 동쪽으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는 직접 신령스러운 자취를 보지 못하고 근본을 내버리고 지엽에 귀의한 것을 개탄하여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을 혹 들을까 하여 드디어 부처님의 국토로 갈 마음의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직접 보고 공경할 것을 서원하여 제(齊)나라 건명(乾明) 원년에 동료 21명과 함께 업도를 떠나 주(周)나라 국경을 지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경 순찰이 삼엄한데다가 또 달빛이 환하여 서로 의논만 하면서 넘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서 달을 가려버리는 통에 어둠을 타고 건너가다가 순찰병을 만났지만 관대하게 용서를 받고 석방되었다. 주나라 보정(保定) 2년에 수도에 도착하니 무제(武帝)의 환영과 접대가 훌륭하였으며 이어 대승사(大乘寺)에서 푸짐한 공양을 하게 하였다. 두 해가 지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전에 세운 뜻을 따르게 해 줄 것을 소원하여 또 다시 허락을 받았다. 황제는 칙명으로 국서(國書)를 내려주고 아울러 노자까지 보내주었다. 서쪽으로 1천5백 리의 사막을 지나게 되었는데 사방을 둘러보아야 무연할 뿐 물도 풀도 없었다. 굶주림을 참아가며 걸음을 다그쳐 7일 만에 고창국(高昌國)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작은 오랑캐 나라는 돌궐족(突厥族)의 속국이었다. 또 그 나라에 국서를 내려줄 것을 청하고 서쪽에 있는 가한소(可汗所)여기 말로는 천자가 다스리는 곳이라는 뜻이다.에 이르렀다. 그 나라에서는 승려들을 알지 못하여 해치려고까지 하였으며 사람을 증가하여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양식을 주지 않았다. 또 나가서 땔나무를 하고 나물을 뜯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굶어죽게 만들려고만 하였다. 주나라 사신이 “이 사람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다. 본국에서는 천자(天子)와 대신들이 공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가는 곳에서는 양과 말을 넉넉히 주어야 합니다” 하고 간하였다. 그리하여 가한은 기뻐하면서 하루에 양 네 마리씩 주어 항상 식량을 충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도판 등은 양을 놓아주고 자기들은 나물을 삶아 먹었다. 이에 가한은 그들이 중생들을 죽이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행위가 남다른 것을 보고 나서 서쪽으로는 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어 말과 수레를 주고 사람들을 붙여서 돌려보내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건종사(乾宗寺)에 거처하게 되었다. 도판은 전에 궁하고 위험한 환경에 있을 때, 밥을 지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계율을 버리게 되었는데 지금은 수도로 돌아왔으므로 후에 다시 계율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 5년간 머무르는 동안에 정애(靜藹) 법사를 만나 도 닦는 일을 자주 물어보아 그의 지혜와 업적은 깊어졌다. 주나라에서 5년간을 머무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듣고 물어서 비로소 점차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무제가 불법을 말살하기 시작하자 정애 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태백산(太白山)으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승려 26명과 함께 난을 피하여 숨어 살았지만 강의해 주는 것만은 잊지 않았으며 『중론』, 『백론』과 4론을 밤낮으로 연구하고 진실하게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비록 나라에서 죽이려고 하는 경우에도 그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동쪽으로 내려가며 산을 찾아보면 화악(華岳)이라는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대체로 유람하거나 은둔하는 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곳에 따로따로 20여 곳에다 산실(山室)을 짓고 정애 법사의 덕을 따르고 이어받아 입실제자들 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었으며 15년 동안 줄곧 법사의 뒤를 따라다녔고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후에 정애 법사가 생을 마치면서도 불법을 지킴에 대하여 말하니 도판은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유해를 받들어 탑을 세우고 명문을 지어 암벽에 새겼다. 천원(天元)이 연호를 이어받게 되자 곧 그릇된 풍조를 고치고 120명의 보살승들을 세웠는데, 도판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척호사(陟岵寺)에 거처하였다. 수나라가 건국하여 불교를 널리 퍼뜨리면서 척호사를 대흥선사(大興善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곳에서 도판은 다시 승려들을 화목하게 하고 승려들의 규율을 담당한 승강[綱]의 임무를 계속 맡아보면서 떳떳한 윤리를 모두 거두어들여 자신이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개황(開皇) 연간의 초기 종남산 교곡(交谷) 동쪽 영마루에 야저(野猪)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멀리 구름 밖으로 넓은 평원을 굽어볼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을 직접 돌아보고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곳이어서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고 대중을 모아놓고 설교하였다. 개황 7년에 칙명을 내려 탁지부 시랑 이세사(李世師)를 파견하여 천축(天竺)의 공사 감독관을 데리고 그곳에 사원을 짓게 하였으며, 늘 헤아려서 공양하고 받들었다. 그리고 도판의 불도 수행이 큰 것을 알고 그 사원에 현판을 내려주고 용지사(龍池寺)라고 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운정흥(雲定興)이 시주가 되어 네 가지 필요한 물건을 아침저녁으로 어기지 않고 보시하였으며, 시랑 독고기(獨孤機)는 그의 말을 받들어 자기 집 뒷동산에 재를 하는 집을 짓고 초청하여 그곳에서 살게 하고 종일 섬기면서 그에게서 법계(法戒)를 받았다. 설국공(薛國公)과 그의 부인 정씨(鄭氏)는 이전부터 그의 청정한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해마다 이곳에 와서 계율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의심나는 문제를 모두 풀었다. 대업(大業) 11년 5월 4일 새벽에 도판은 산속의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처음 도판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법문에 들어설 때 성품은 산천을 좋아하였고 욕심이 적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검소하게 살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자비를 행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특별히 마음을 썼고 자기는 고통스럽고 위태롭게 사는 것이 그가 품은 마음이었다. 때문에 그는 매해 조와 보리가 무르익을 때 돌아다니며 구걸하여 그것을 가득 저장하였다가 흰 눈이 산에 덮이면 날짐승과 들짐승들에게 보시하였다. 이런 일로 하여 산에 사는 벗들과 돌아다니는 승려들 중에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생활에서 근심과 고통을 몰랐으며 승단의 일이 매우 바쁠 때면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풀어나갔으며, 도를 넓히는 일도 종일토록 경건하게 하면서 게으름을 몰랐다. 비록 잠깐 세속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으나 그는 항상 산속의 집으로 돌아왔으니 이것 역시 산중의 학자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032_1041_c_02L정업은 속성이 사씨(史氏)이고 한동(漢東) 수주(隨州) 사람이다. 그가 8세에 가사를 입으니 마을에서는 칭찬하면서 현자라고 불렀다. 경전을 배우는 나이가 되자 애욕을 끊고 출가하여 위엄 있는 용모와 거동을 청정하게 길렀는데 서리와 같이 갈고 닦으며 얼음과 같이 깨끗하였다. 계율을 받은 이후에는 하내(河內)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율부(律部)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새롭고 기이한 이론을 널리 모았다. 당시 혜원(慧遠) 논사가 있었는데 그는 장하(漳河)에서 덕을 쌓고 이락(伊洛) 일대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정업은 그를 한 번 만나 식견을 청정하게 하였고 곧 스승으로 섬겼으며 『열반경』 등을 배워 그 극치를 모두 꿰뚫었고 그 큰 뜻을 널리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글은 광범한데 공부가 깊지 못하여 문구에 매달려 떠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후 혜원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정업도 책을 짊어지고 따라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히 이어받아 그 깊은 이치를 모두 받아 지녔다. 말년에는 담천(曇遷) 선사를 찾아가 『섭론(攝論)』을 배웠다. 담천 선사는 사람됨이 훌륭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깊었는데, 마침내 정업을 알아보고 그를 천거하여 함께 요설(樂說)을 드날렸으며, 깊이 파고들고 존중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인도 하였는데 정업은 듣는 족족 받아 지니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다. 개황 연간 중엽에는 남전(藍田)의 복거산(覆車山)에서 명성을 날렸고 가시밭 속에서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거기서 생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이에 청신사(淸信士)들이 계율의 배[戒舟]를 공경하면서 산 속에 집을 짓고 정성을 다해 받들어 공양하며, 가파른 곳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여 산을 온통 아름답게 만들었다. 지금의 오진사(悟眞寺)가 바로 그곳이다. 정업은 마음이 굳고 깨끗하여 소문이 바깥세상에까지 급속히 퍼졌다. 인수(仁壽) 2년에 정업은 천거를 받아 사리(舍利)를 안주(安州) 경장사(景藏寺)로 봉송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터를 잡기 위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십력사(十力寺)에 안치하려고 하였는데, 돌아다니다가 경장사(景藏寺)에 이르니 갑자기 이상한 향기가 사원에 가득 찬 것을 느끼고는 모두가 괴이하게 여겼고 이로 인하여 그곳에 사리탑을 세우게 되었다. 탑 안에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붉은 빛이 나와 사람들을 비췄고, 사원의 중각(重閣) 위에서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 막상 가서 문을 닫고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면 처음과 같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탑의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그것은 사문 정범(淨範)이 도인과 속인들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주기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 못에는 물고기 떼들이 꼬리치며 솟구치고 있었는데, 머리를 모두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마치 귀의하려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범은 곧 배를 타고 못으로 들어가 물고기들에게 설교해 주었더니 물고기들 모두가 머리를 돌려 배를 에워싸고 마치 듣고 있는 듯하였으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업은 자기가 당한 상서로움이 희유하여 사리를 불당(佛堂)에 안치하였다. 전부터 이곳에는 흙으로 빚어 만든 보살상이 한 상 있었다.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날이 밝아서 보니 보살상이 몸을 돌려 사리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 형상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고 하나도 상한 곳이 없었다. 자주 이런 특이한 상서로움이 일어났으니 말로써는 다 전할 수 없다. 대업(大業) 4년에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홍려관(鴻臚館)에 들어가 속국의 승려들을 가르쳤다. 대업 9년에 다시 부름을 받고 선정사(禪定寺)에 머무르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그의 마음은 막힘이 없고 청정하였으며 지혜로웠다. 그후에 깊은 산골짜기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동학(同學)들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한번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헤어진 지 열흘도 못 되어 생을 마쳤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생을 통달하고 명을 알았다는 점에서는 이것도 지극한 일인 것이다. 이날은 대업 12년 12월 18일이었고 소나무 아래에 시신을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 정업은 정신력이 뛰어나고 온화하며 정확하였고 행동거지도 온순하고 인(仁)이 남달리 독실하고 덕을 숭상하여 옛 현자의 뛰어난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신선의 술법을 몹시 사랑하여 낟알을 먹지 않고 몸을 단련하여 빙옥(氷玉), 운주(雲珠)같았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기를 양성하였으나 죽음은 그도 어쩌지 못하였으니 공연히 명예만을 떨쳤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정조를 깨끗하게 지킨 것과 차이 나게 그의 덕망이 전해지고 있다.
032_1042_a_02L동진의 속성은 이씨(李氏)이다. 그의 먼 조상은 농서(隴西)에서 살다가 하동(河東)의 포판(蒱坂)으로 옮겨와 살았다. 소년시절부터 나고 죽는 것을 싫어하여 마음속으로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다가 담연(曇延) 법사에게 몸을 맡기고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불교와 유교를 종합하고 정리도 하였는데, 훌륭한 지혜로 뛰어나게 알려졌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율법에 귀의하였고 말년에는 경과 논을 널리 읽고 모든 것을 환히 꿰뚫었다. 특별히 『열반경』을 좋아하여 그 글의 이치를 파고들었고 늘 연흥사(延興寺)에 있으면서 교화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는데, 청강하는 제자들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인망이 높고 두루 갖추었으며 진실하고 높은 명예로 스승의 뒤를 이어나갔다. 개황 12년에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흥선사에 불러서 범본(梵本)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16년에 특별히 칙명을 내려 열반중주(涅槃衆主)가 되었다. 그리하여 글의 뜻을 해석하여 주니 대중의 마음에 꼭 들어맞았고, 성품과 도량이 방정하여 대중을 잘 거느렸으며 부류가 다른 사람과는 친하지 않고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을 공경하였다. 인수(仁壽) 원년에 칙명으로 온 나라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그때로부터 지금껏 여러 고을의 111개소에 모두 사리를 봉송하여 끊임없이 사원에 과업을 주어 정묘하게 사리탑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동진은 덕으로는 당시 제일가는 스님이었으므로 칙령을 내려 옹주(雍州)에 머무르면서 처음으로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고, 마침내 불사리를 종남산 선유사(仙遊寺)에 보냈다. 이곳은 옛 기록에서,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도술을 익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 동진은 10월 안으로 수도를 떠나 사원에 이르려고 하였는데, 노상에서 진눈깨비를 만났다. 진눈깨비가 세차게 내려 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다 젖었지만 사리를 실은 수레 꼭대기만은 젖지 않아서 모두가 이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사원은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낮이나 밤이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사리가 처음 도착해서부터 묻을 때까지는 사방이 고요하고 산골짜기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그리고 짙은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고 비와 눈이 어울려 내려 맑게 개이고 해가 나타나서 노정과 기한을 어기지 않게 되기를 바라서 동진은 손에 향불을 쥐고 큰 서원을 하였다. 사리를 안치하는 날이 되자 겨울인데도 햇빛이 비쳤고 그때가 바로 한낮이었으므로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경사롭게 여겼다. 사리를 안치하는 일이 끝나자 다시 구름이 모여들어 대중들은 모두 찬탄하였고 동진은 마음속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응이 이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업 원년에 대선정사(大禪定寺)를 짓고 칙령을 내려 동진을 불러다가 도량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동진은 몇 해 동안 사양하였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여 그 자리에 나아갔다. 그는 상하를 잘 돌봐주어 승려들 속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열반경』의 설교를 기본 업무로 여기고 늘 널리 퍼뜨리고 장려하였으며 말이나 명령이라도 많은 경우 이 경의 문구에 부합되게 하였다. 대업 9년에 병으로 인하여 그가 거처하던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동진은 지조가 참되고 속에 품은 생각이 밝아 지위 높은 사람들이건 천한 사람들이건 다 벗으로 삼았고 마음은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사원이 처음으로 세워지자 재상과 대신들이 엇바꿔가며 찾아가서는 높이 존중하면서 잊지 못해 하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마중하거나 바래다주는 일이 없었으니 그의 정기는 하늘에서 받은 것이어서 쉽게 꺾이지 않았다. 어느 날 식사 시간이 되어 4백여 명이 모여 앉자 대당(大堂)의 대들보가 갑자기 부러졌는데 소리는 우레가 치듯 요란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흩어지면서 모두 대들보가 꺾어진다고 외쳤고 맨발로 뛰쳐나온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직 동진만은 단정하게 앉아 평상시와 같이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였고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마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옷을 벗어 구제하고 자신이 직접 환자들을 부축하여 돌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를 칭찬하였다. 그에게는 강인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겸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032_1042_c_02L영간은 속성이 이씨(李氏)이고 금성(金城) 적도(狄道)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상(李相)이 상당(上黨)을 책봉 받아 마침내 책봉 받은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나이 10세가 되자 법의 요지를 듣기 좋아하여 사원에 놀러가서 구경하였고 마음속으로 세속을 등지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부모들도 아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14세에 업경(鄴京)의 대장엄사(大莊嚴寺) 연(衍) 법사에게로 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스승을 받들어 섬겼는데 잠시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강당에 들어갈 때마다 하늘궁전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18세가 되자 『화엄경』과 『십지론(十地論)』의 강의를 계속 하였는데, 처음에는 원본만을 해설해 주고 이어 그 내용을 파헤치며 정밀하게 파고드니 모두가 괴이쩍게 생각하였다. 또한 날카로운 뭇 질문을 대할 때마다 머뭇거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면서 칭찬하였다. 20세에 구족계를 받고는 계율 공부에만 뜻을 두었으며 성품은 높이 우러를 만하였고 공손하면서 다잡아 쥐는 것이 절도가 있었으며 세 가지 행위를 보호하고 지켰으며 미혹을 덮는 마음을 한결같게 하였다. 주(周)나라 무제(武帝)가 불법을 없애버리고 사원들을 폐지시키자 영간은 속세에 살았지만 계율을 받들고 위엄 있는 용모와 거동을 잃지 않았다. 수(隋)나라가 다시 불교를 장려하면서 승려를 선발하였는데, 보살승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으며 관청에서는 옷과 발우를 내주었고, 소림사(少林寺)에 보살관이 설립되었다. 비록 후한 공양은 받았으나 모습은 속세의 승려들과 같았다. 개황 3년에 낙주(洛州) 정토사(淨土寺)에서 머리를 깎게 되면서 출가자로서 풍채가 이때부터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해옥(海玉) 법사가 사람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하니 사방에서 모여들어 이 경의 강의는 더욱 흥성하게 되었다. 영간도 이 사람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하고 해석해 주니 동하(東夏)의 우두머리들 모두가 찬탄하였다. 개황 7년에 집을 수리한 일로 하여 그의 불도의 수행은 일찍이 널리 알려졌으며 드디어 특별한 칙명을 받고 흥선사에 머무르면서 경전을 번역하게 되어 사문들에게 경전의 뜻을 증험하게 되었다. 개황 17년에는 병에 걸려 기절하였는데 심장이 식지 않아서 감히 묻지 못하였다. 그후 다시 깨어나서 말하였다. “처음에 두 사람을 만났는데 문서를 손에 쥐고 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관청에서 스승을 만나자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고개를 끄떡이는 순간에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게 되었다. 모양이 하늘을 날아가듯이 발에 걸리는 것이 없었고 하나의 큰 동산에 이르니 일곱 가지 보배로 된 수림이 아담하고 장엄하기가 그림과 같았다. 그 사람은 그곳까지 나를 데려다주고는 사례하고 물러갔다. 내가 홀로 동산에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단지 수림과 산과 못뿐이었고 그 모든 것은 보배로 되었는데 황홀하고 눈부셔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나무 아래의 꽃자리에 혹 사람이 앉아 있기도 하였고 혹은 사람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간아, 네가 여기에 왔느냐?’라고 사람이 찾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니 혜원 법사가 있었다. 내가 절을 하고 문안인사를 한 다음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라고 하니, 법사가 대답하기를 ‘여기는 도솔타천(兜率陀天)이다. 나와 승휴(僧休) 법사가 이곳에 함께 태어났다. 내 다음의 남쪽 자리에 앉은 분이 승휴 법사이다’라고 하였다. 혜원 법사와 승휴 법사의 모습은 모두 본래 모습이 아니었다. 천관(天冠)을 머리에 쓰고 자주색 옷을 입고 있었고 찬란하고 거룩하기가 아직 세상에 있어 보지 못한 모습이었으나 말소리만은 옛날과 같았으므로 그들을 알 수 있었다. 혜원 법사가 다시 나에게 말하기를 ‘너와 나의 제자들은 훗날 모두 이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깨달음이 새로워지고 다시 이전의 업을 더 닦아 관행(觀行)은 바르게 되고 속인들과의 교섭을 끊었다. 인수 3년에 천거되어 사원 일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이 일은 본래 그가 마음속에 바라던 것이 아니었지만 또 마지못하여 그 일을 맡았다. 그 해에 칙명을 받고 낙주(洛州)로 사리를 봉송해갔으며 한왕사(漢王寺)에 탑을 세웠다. 처음에 탑을 건립하자 신비로운 광명이 나왔고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졌어도 밤새도록 밝혀 주어 등불을 켜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기이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을 느꼈고 도인들과 속인들 모두가 이것을 보았다. 4월 8일 사리를 안치할 때에는 사원 안의 나뭇잎들이 모두 시들어버리고 까마귀와 뭇 새들이 슬피 울부짖었는데, 사리를 묻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하니 다시 본래대로 되었다. 당시 한왕(漢王) 양량(楊諒)이 진양(晋陽)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영간이 왕의 사원에 탑을 세운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중사(中使)를 보내 집물(什物)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세상 이치를 잘 알고 요점을 재빨리 파악하며 거침없는 말재주는 더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헌후(獻后)를 위하여 참회하는 글을 지었는데,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켜 흐느껴 울게 했으며 마침내 비단 2백 단을 내려주어 높이 공경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대업 3년에 나라에서 대선정사(大禪定寺)를 설치하고, 칙명을 내려 발탁하여 도량의 상좌로 삼으니 승단은 일시에 번성하였고 질서가 바로잡혔다. 대업 8년 정월 29일에 사원의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그때 깃발과 일산을 든 도인들과 속인들이 줄지어 따라갔으며 종남의 조용한 곳에서 화장하였다. 처음부터 영간의 뜻은 『화엄경』을 받드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평시에 경의 본문에 의거하여 『연화장세계해관(連華藏世界海觀)』과 『미륵천궁관(彌勒天宮觀)』을 지었다. 병이 심해지자 눈은 위만을 쳐다보면서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다가 오랜 후에야 내려다보았는데 여느 때와 같았다. 사문 동진(童眞)이 병문안을 왔다가 이 모습을 보았는데 영간이 동진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두 청의 동자(靑衣童子)가 와서 찾기에 뒤쫓아 가서 도솔천성(兜率天城) 밖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발돋움하여 바라보면 성 안에 보배 나무와 꽃 일산이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냥 서서 보면 아무것도 바라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병을 간호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방금 전에 올려다 본 것이 바로 그래서였습니다.” 동진이 말하였다. “만약 그곳에 가게 된다면 거룩한 본래의 소원을 이룩하는 것이 되는가?” 영간이 말하였다. “하늘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마침내는 윤회하는 세상에 떨어지게 되므로 내가 바라는 것은 연화장세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졌다가 곧 다시 이어지니 동진이 물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영간이 말하였다. “큰물이 가득 차고 수레바퀴만 한 연꽃이 있었는데 그 위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니 나의 소원이 원만히 이룩되었다.” 그리고는 이어 생을 마쳤다.
영변(靈辯) 사문 영변은 영간의 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영변을 키우면서 옳은 방법만을 가르쳐 주었고 불도로 이끌어 주었으며 영변이 수많은 경전을 통달하게 되자 승광사(勝光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의논하여 승려들의 규율을 담당한 승강의 임무를 맡아보게 하니 『화엄경』으로 인도하여 수도에서 명성을 떨쳤다.
032_1043_c_02L경탈은 속성을 알 수 없으며 급군(汲郡)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효성스럽고 깨끗하고 정직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소승과 대승경전을 탐구하면서도 특히 『성실론』에 밝았으며 강의와 해석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하여 명성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재능을 크게 발휘하고 문장 해석을 새롭게 하여 후학들이 종사로 우러렀다. 또한 시를 잘 짓고 아울러 글씨도 통달하여 창창하고 떳떳한 우두머리들도 그의 품위와 업적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장은 편집될 만한 것이 되어 자주 문장가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승방과 사원에 함께 머무르는 사람들은 여담(餘談)하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고 오로지 폭넓은 문장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위엄 있는 용모와 거동을 단정하게 닦고 일찍이 뒤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몸은 매우 크고 풍만하며 원만하게 이루어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승려로써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추후로 혜일사(慧日寺)에 머무르게 되어 그의 명성은 사방에 널리 퍼졌으며 또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뜻과 절개가 굳세고 바른 점에서도 첫째가는 사람으로 불렸다. 어느 날 황제가 대덕(大德)들 가운데서 누가 제일 굳세고 지혜로운가를 시험해보려고 윤무전(允武殿)에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감문랑장(監門郞將) 단문조(段文操)에게 신칙하여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서 그들이 달아나게 하라고 하였더니 대덕들이 모두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경탈만은 전과 같이 천천히 걸어가면서 단문조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처럼 핍박하는가?” 그리고는 윤무전에 올라가 앉아서 불교 이론을 논하자 황제는 천천히 단문조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승려들은 본래부터 세속의 법을 알지 못하는데 감문랑장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재촉하는가?” 그리고는 속으로 경탈의 큰 뜻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황제의 칙명으로 큰 대나무 부채를 내려 보냈는데 너비가 석 자나 되는 것을 잡고 부채질하게 하였으며, 또 아름드리 소나무로 만든 굽 높은 나막신을 내려 주고 궁전에서 신고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황제는 몸소 그를 배웅하면서 말하였다. “과시 승려 중의 호걸이로다.” 그후에도 늘 『성실론』을 널리 강의하였으며 시절이 바뀌어도 강의만은 바꾸지 않았다. 대업 13년에 동도(東都) 홍려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경탈은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늘 짐을 지고 다녔다. 한쪽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한쪽에는 경서와 붓을 지고 다니다가 끼니때가 되면 어머니는 나무 아래에 내려놓고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빌어다가 그것으로 끼니를 이어나갔다. 그의 붓은 매우 큼직하였는데 붓대의 굵기는 팔뚝만 하고 길이는 석 자였다. 방장실(方丈室)에 있는 한 일(一)자는 높이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글을 써달라고 하면 종이에 오직 한 일자만을 써주었다. 글의 풍채가 굳세고 뛰어나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았으므로 모두 그 글자를 벽에 걸어놓고 오가면서 바라보았다. 동도의 성문에 걸린 현관은 모두 경탈이 쓴 글이었는데 한 번 붓을 댄 다음에는 더 다듬지 않았다. 그때 혜일사에 사문 법릉(法楞)이 있었는데 그는 특히 『지론(地論)』을 널리 익히고 소(疏)와 기(記)를 저술하였으며 소문과 실제가 부합되어 도량에서 존경을 받았다. 경탈이 생을 마치자 이 일을 황제에게 알리니 황제가 슬퍼하면서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조정에서 해결해 주었다.
032_1044_a_02L선주는 속성이 회씨(淮氏)이고 영주(瀛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지혜롭고 영민하여 쉽게 깨달았으며 요점을 통달할 것을 마음속으로 바랐다. 그는 강의하는 모임에 참가하여 불교의 극치를 자세히 듣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대지도론』과 『열반경』을 파고들었다. 제나라가 망하자 진나라로 넘어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걸식하기조차 어려웠으며 하루에 떡 한 개로 끼니를 때우면서 겨우 목숨만 이어나가니 몸이 몹시 파리해져 사람들은 범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사원에 이르러 『열반경』 강의를 들었고 이어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작 세 번째 문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자 고좌도 해석할 수 없게 되니 머리를 숙이고 모두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청강생이 1천여 명이었는데 강의는 일단 중지되었으며, 이어 제자들이 스승을 부축하고 내려와서 승방에 이르자 갑자기 생을 마치고 말았다. 선주는 그때 논쟁을 끝마치고 나왔으므로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다음 날 다시 그곳에 가서 상례에 쓰는 도구를 만드는 것을 보고 그 사연을 물으니 그들이 “법사는 어제 북쪽에서 온 승려의 힐난을 받고 그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선주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사로잡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말을 듣고는 직접 알아보고 물러나 숨어버렸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진나라 승려가 되어 도첩을 끼고 또 다른 강의 장소로 갔는데, 뜻을 논하던 사람들치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생을 마친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명성이 나고 공적이 떨쳐져 오월(吳越) 지방에 크게 빛을 뿌리게 되었다. 수나라 초기에 북쪽으로 가서 원(遠) 법사에게 의지하였고 수도의 정영사(淨影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1천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선주는 본래 세워진 이치를 다시 서술하여 신비로운 재능을 뛰어나게 발휘하였으며 특히 논쟁의 스승으로서 미묘한 해석과 언어에 통달하고 있었다. 원 법사가 『열반경』의 해석서를 지었으나 선주는 마음속으로 널리 유포시킬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곧 붓을 들고 뜯어고쳤으며 권별로 나누어서 깊은 이치를 따지고 들어 이롭고 보배로운 것을 모조리 찾아내었다. 원 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너의 사고력을 따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나와 맞서 나의 글을 고쳐지을 수 있는가. 다시 따로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선주가 말하였다. “만약 법사가 세상을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그후에 이 책을 다시 고치게 되면 이 선주는 거짓이름만 남고 실제 기록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원 법사는 그의 말을 따랐으며 해석서가 완성되자 종지를 나누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니 매우 특이한 진술이 있었다. 원 법사가 생을 마친 후 황제는 칙명을 내려 정영사의 열반중주(涅槃衆主)로 임명하였다. 개황 연간의 말엽에 촉(蜀)나라 왕 양수(楊秀)가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를 다스리게 되자 선주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민파(岷嶓:岷山과 嶓山)의 주민들이 그의 덕을 바라보고 매일같이 귀의하니 그들을 맡아 안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다가 인수 말년에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 그는 촉나라에 머무르면서 재물을 모두 보살상을 그리는데 썼고, 뒷면의 광명과 자리를 장엄하게 장식하여 절세의 이름난 승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돌아오는 길에 위험한 곳을 지나기는 하였으나 걸어서 함께 수도에 도착하였으며 수도에서의 공양은 모범이 되었다. 문제(文帝)가 사리탑을 세우게 되어 칙명을 내려 사리를 재주(梓州) 우두산(牛頭山) 화림사(華林寺)에 봉송하도록 하였다. 장엄하게 장식한 수레가 거의 도착하려 하는데 감응이 일어나 8마리의 멧돼지가 갑자기 수레로 달려 내려왔다. 멧돼지들은 일행을 따라 객관에까지 이르렀고 쫓으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다시 성 가까이로 다가가자 몸뚱이가 매우 큰 검은 벌 네 마리가 수레를 따르며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날아갔다. 고을의 객관에 도착하자 밤에 큰 광명이 뻗어 나와 집 위를 환히 비췄는데, 마치 불꽃과 같았으며 끼니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또한 탑의 기초를 파는데 한 길 남짓하게 파고들어가 바로 함을 안치할 곳에서 옛 도자기병을 발견하였다. 그 병에는 마개가 없었으나 물이 있었는데 맑고 향기로워 그것을 함 속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 사원에는 9층짜리 부도(浮圖)가 있는데 서남쪽 모서리의 두 번째 돌기에서 광명이 뻗어 나와 탑의 꼭대기를 비치고 있었다. 그 광명은 다섯 섬들이 항아리만 하였고 황적색을 띠는 불과 같았으며 한참 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또한 법당 안의 미륵상의 눈썹 사이에서도 자줏빛의 광명이 뻗어 나왔고 아울러 두 보살에게서도 붉은 색의 광명이 뻗어 나와 사원을 환히 밝혔는데 그때를 전후하여 7차례나 거듭되었으며 사원에 오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대업 연간에 사원을 하나 짓고 덕이 있는 승려들을 널리 불러들였는데 선주는 제일 먼저 선발되었으며, 또 선정사(禪定寺)에 머무르면서 자주 설법을 하니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어 그는 중풍에 걸려 입이 한쪽으로 삐뚤어졌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원 법사의 『열반경』 해석서를 개작하였기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고 하였다. 처음에 원 법사는 『열반경』을 5개 부분으로 나누고 마지막을 ‘사유(闍維:茶毘)’의 부분으로 마무리를 하였는데 선주는 그의 내용을 참작하여 7개 부분으로 나누고 ‘사유’에 관한 대목을 없앴으며 제7분을 ‘결화귀종(結化歸宗)’의 부분으로 하였다. 중풍에 걸려서부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논의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니 제자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후 갑자기 병이 나아 입이 여느 때와 같아지자 선주가 말하였다. “내 병이 나았으니 생을 마칠 것이 틀림없다. 이 일을 괴이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이치에 따라 헤아려보면 모두 당연한 일이다.” 대업 13년 본래의 사원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자 그는 흙으로 입을 막아 자결하려고 하였다. 사원의 사람들은 그의 뜻이 확정된 것을 알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무덕(武德) 3년 8월에 정영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처음 병이 위독해지자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한생토록 바른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교리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소홀히 대한 적이 없었으며,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을 청소하게 하고는 향을 피우고 엄숙하게 기다렸다. 병든 이래로 여러 날 줄곧 누워만 있고 일어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앉아 합장하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세존께서 편안히 앉으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라.” 그리고 말하였다. “세존께서 오셨습니까? 저는 지금 부끄러움을 참회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세존께서 가시는구나.” 그리고는 몸을 숙여 배웅하는 자세를 취하고는 누워서 말하였다. “조금 전에 아미타불(阿彌陀佛)께서 오셨었다. 너희들은 보지 못하였는가? 오래지 않아 나는 그분에게로 갈 것이다.” 이 말을 끝내고는 문득 생을 마쳤다. 유언에 따라 성남쪽 위곡(韋曲)의 북쪽 언덕에다 장사지냈다.
혜위(慧威) 제자 혜위는 대총지사(大總持寺)에 머무르면서 스승이 이룩한 업적을 강론하여 자못 수도에서 명성을 떨쳤다.
032_1045_a_02L변상은 속성이 사씨(史氏)이고 영주(瀛州) 사람이며 성질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다. 유각하면서 청법하여 명성이 알려졌고 경을 모아들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제(齊)와 조(趙) 지방으로 다니면서 아름다운 공적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그후 낙양으로 돌아가 여러 번 설법하였으며 다시 소림사(少林寺)로 가서 원공(遠公)에게 의지하고 『십지론(十地論)』과 대소승의 3장(藏)을 배워 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며, 『열반경』 한 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파고들어 소문이 났다. 말년에는 남쪽으로 가서 서부(徐部)에서 또 『섭론(攝論)』과 아비담(阿毘曇)의 내용을 터득하고 모든 정밀한 뜻을 다 파헤쳐서 그의 명성이 동방에 전해지고 물음이 훌륭하고 스승으로서의 바탕을 갖추어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개황 7년에 원공을 따라 조정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정영사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강의를 통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그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스승의 공적을 숭상하였다. 인수 연간에 사리탑을 세우고 황제가 칙명을 내려 사리를 월주(越州)의 대우사(大禹寺)로 봉송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사리를 보게 되었다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런데 사리를 꺼내기도 전에 광명이 저절로 뻗어 나와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의 네 가지 빛깔이 환하게 밖으로 흘러넘치니 7부대중의 사람들이 경사스럽게 여기면서 훌륭하다고 마음속으로 자주 감탄하였다. 또한 산기슭에서 자지(紫芝) 버섯 한 뿌리를 얻었는데, 길이가 2척 3촌이었고 가지가 네 개이고 핀 갓이 세 개였으며 색깔은 선명하고 비단 같았다. 수도로 돌아가 널리 설법을 하였는데 언제나 청취하는 제자들이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 모두가 당시로서는 으뜸가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직접 스승의 가르침처럼 받들었다. 대업 연간의 초기에 황제의 부름을 받고 동도로 들어가 내도량(內道場)에서 전과 같이 설법을 하였는데 정중하게 옹위하고 가까이에 있게 하려고 하므로 함께 낙양에 자리 잡았다. 무덕 연간의 초기에는 황제의 칙명을 받고 위문을 받으며 수도로 돌아가서 경과 논을 거듭 설법하여 마음을 계몽하여 주었다. 황제는 이전에 홍의궁(弘義宮)에 있을 때부터 그의 덕망을 높이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를 궁전으로 초청하여 밤새도록 법을 논하였는데, 마음이 감동되어 많은 물건을 보시하였다. 이어 승광사(勝光寺)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 사원이 진나라의 공양을 받기 때문에 그곳에서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늙어서는 평소의 업적의 도움으로 지혜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고 뒤에 정영사를 높여주니 이어 설법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나머지 공양물을 바쳐 원공의 초상을 그렸고 늘 공경히 절하여 스승의 업적을 빛내었다. 정관(貞觀) 연간의 초기에 몸이 병에 시달리게 되자 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중드는 사람 몰래 스스로 목을 매고 생을 마쳤다. 그가 사원에 있을 때의 나이는 70여 세였다. 변상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소박하였고 얼굴빛이 선명하고 맑았으며 눈썹과 눈이 짙고 밝았으며 행동거지가 여유 있고 듬직하였다. 그는 문장과 이치를 논의할 적에 말뜻을 그 자리에서 단번에 파악하는 신묘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032_1045_c_02L보습은 패주(貝州) 사람이고 옹주(雍州)의 삼장(三藏) 승휴(僧休) 법사의 제자이다. 승휴 법사는 총명하고 활달하며 밝은 이해력을 지니고 신비로운 이론이 남달리 뛰어나 제나라 말엽에 동쪽에서 명성을 널리 떨친 사람이었다. 후에 주나라가 제나라를 평정하게 되자 본주(本州)에 숨어살았는데 하늘의 뜻으로 새 나라가 세워지고 불법(佛法)이 장려되면서 승휴는 처음으로 부름을 받고 보살승이 되었고, 법준(法遵)ㆍ혜원(慧遠)과 함께 척호사(陟岵寺)에서 살다가 개황(開皇) 7년에 다시 부름을 받고 수도로 올라가 흥선사에 거처하였다. 보습은 18세에 그에게 귀의하여 경전을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다가 후에 경과 논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특히는 『대지도론』을 근본으로 삼아 관동(關東) 지방에 소문이 퍼졌으며 당대의 영걸로 받들어졌다. 그후 승훈 법사를 따라 수도로 들어가 스승의 강의를 도와주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개황 16년에 칙명을 내려 대론중주(大論衆主)로 임명하였는데 보습이 통법사(通法寺)에서 하루에 네 번씩 강의하여 교화하자 사방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인수 연간에 사리탑을 세우게 되면서 칙명을 내려 사리를 숭주(嵩州) 숭악사(嵩岳寺)로 봉송하게 하였다. 첫날부터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어 7일 동안 날씨가 캄캄하였다. 보습은 향로를 바쳐들고 “사리를 안치할 때까지 햇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서원하였다. 이윽고 때가 되자 하늘이 개이더니 한낮인 듯 햇빛이 비쳤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자 곧 사리를 안장하였다. 말년에 또다시 사리를 형주(邢州) 범애사(汎愛寺)로 봉송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리함 위에 부처님과 보살의 모습이 나타나고 광명이 사방을 환히 비쳤으니 그 광경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후 이틀이 지나서야 광명이 비로소 사라졌는데 그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리를 안치하려고 할 때는 또 누워 있는 한 구의 조각이 나타났고 붉은 광명이 뻗어 나왔다. 보습은 그 감응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림을 그려놓고 받들어 공경하였다. 문제(文帝)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대선정사(大禪定寺)를 짓고 명성이 자자한 그를 불러다가 그곳에서 공양하였다. 무덕 말년에 그는 머무르던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담공(曇恭), 명홍(明洪) 제자 담공과 명홍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지도론』에 능하였다. 담공은 어릴 때부터 교묘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보고 이해하는 면에서 이름이 났으며 자주 경과 논을 강의하니 수도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하였고, 법을 보호하고 지키니 자못 성스럽다는 말들을 하였다. 정관 연간의 초기에 황제의 칙명으로 불러서 제법상좌(濟法上座)로 임명되어 승단의 일을 책임지고 바로잡았기에 그의 아름다운 공적은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그후 부름을 받고 홍복사(弘福寺)로 들어갔고 다시 보광사(普光寺)를 책임졌다. 그의 덕은 당대에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하게 정해진 곳이 없이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다가 그가 일을 맡아보는 사원에서 생을 마쳤다. 명홍도 당대에 명망이 높았으며 스승의 일을 이어나갔다. 부름을 받고 보광사로 들어가서 때때로 설법도 하였다. 그러나 전적으로 목욕물을 공급하는 일을 맡고 한 달에 두 번씩 승려들을 목욕시켜 안공(安公)의 발자취를 이어나갔으며 마음은 자씨보살(慈氏菩薩)에게 귀의하였다고 한다.
032_1046_a_02L혜천은 영주 사람이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지론(地論)』을 몹시 사랑하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것을 극치로 삼았으며 석장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뛰어난 스승을 찾고 흠모하였다. 비록 『지론』 하나만을 연구한다고는 하였지만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환하게 알고 있었으며, 어려운 문제들이 나설 때마다 승려들에게 상세히 서술해 주었다. 그리하여 제나라 때에 벌써 명성과 실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원공을 따라가서 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뜻을 두 번 다시 바꾸지 않았으며 10년이 지나서는 『열반경』과 『지지론(地持論)』을 모두 통달하였으며 아울러 강의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제나라가 망하고 불법이 허물어지자 남쪽의 진나라로 갔다가 수(隋)나라가 하늘의 운수를 받아 세워지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낙양을 경유하면서 다시 원공에게 의지하였으며 옛날의 업적과 새로운 지식을 모두 가슴속에 원만히 채워 넣었다. 원공이 관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를 따라 수도로 갔고 대흥선사에 거처하면서 불법을 널리 유포시키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개황 17년에 황제의 칙명으로 오부대중을 세우게 되면서 혜천을 초청해 십지중주(十地衆主)로 삼았으며, 보광사(寶光寺)에 거처하면서 계속 강의하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인수 2년에 칙명을 내려 사리를 본고향의 홍박사(弘博寺)로 봉송하게 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기초를 6자 파 들어가니 감응이 일어나 자줏빛이 뻗어 나와 탑 위로 솟구쳐 올라 흩어졌는데, 그것은 불꽃과 같았고 금상(金像)에서 뿜는 것과 같았다. 또한 홀 위에 글이 새겨졌는데 ‘전륜왕불탑(轉輪王佛塔)’이라는 글자가 분명하였다. 이 신령스러운 현상을 보고 모두가 희귀한 일을 보았다고 기뻐하였다. 인수 4년에는 또 해주(海州) 안화사(安和寺)에 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기초를 5자 파니 백토(白土)가 나타났다. 빛깔은 분가루보다 더 하얗고 그것이 구덩이 속에 가득하였다. 다시 8자를 더 파니 백토 속에 백옥 한 개가 나타났는데 사방 직경이 한 자 정도이고 광택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리를 안치하는 날 아침에는 큰 광명이 뻗어 나와 성곽을 환히 비췄고 빛깔은 붉은색의 불과 같았으며 사리를 병에서 꺼내자 6알로 갈라지는 희유한 일이 나타나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의아해하였다. 혜천은 그후에 자주 『십지론』을 강의하였는데 수도 안에 강의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선정사가 준공되자 부름을 받고 그곳에 머물다가 무덕 말년에 머무르던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혜천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십지론』 한 부만은 관중 지방에서 더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도는 사람에 의하여 널리 유포된다는 말이 이를 통하여 증험된 셈이었다.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성실하게 배우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032_1046_b_02L혜각은 속성이 범씨(范氏)이고 제군(齊郡) 사람이다. 그의 통달한 도량과 지혜는 견줄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거동과 모습은 특출하였고 눈썹과 눈은 산봉우리처럼 덮어 가렸으며 옷차림은 언제나 깨끗하였다. 키는 7척에 달하였고 용모와 행동거지는 온순하고 의젓하였으며 걸음걸이가 널찍하고 여물어서 옥이 울리는 것처럼 쟁쟁하였다. 발우와 지팡이를 들고 길을 갈 때에는, 걸음을 멈추고 나타났을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위엄 있는 용모와 거동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그는 『화엄경』과 『십지론』에 밝아 이에 대한 강의를 계속 이어나가며 제나라 땅에 법을 유포시키니 영예와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져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하나의 풍조가 되었다. 수나라가 세워지면서 상법시대가 융성하게 되었다. 문황제는 주나라에 있을 때 군사를 장악하고 직접 싸움터에 나갔다가 승리하지 못하여 난리를 피해 병성(幷城) 남쪽의 못가에 가서 살았다. 그후 황제가 되던 날에 옛 땅을 추억하면서 개황 원년에 깊이 숨어살던 곳에 무덕사(武德寺)를 짓게 하였다. 지대가 습지대여서 돌을 깐 다음에야 먼저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사원을 지었는데 부속건물들은 1천을 헤아렸고 회랑과 처마는 구중궁궐과 같았으며 사리탑은 구름같이 널려 있고 누대는 별처럼 총총하게 퍼져 있었다. 혜각은 지식과 이해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관계로 부름을 받아 그곳에 거처하게 되니 널리 법문을 드러냈는데, 흔히 『화엄경』을 첫 자리에 놓았다. 그는 깨우쳐 이익되게 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4종(宗:因緣ㆍ假名ㆍ不眞ㆍ眞宗)에 준하여 광범하게도 하고 간략하게도 해설하였다. 후에 고양(高陽)의 초청을 받고 강주의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청강생들이 1천여 명에 달하여 강당을 꽉 채웠으나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찾아와 일시 설법을 중지하고 새 강당을 지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그렇게 되어야만 중생들을 널리 인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 시주가 있어서 곧 1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을 짓게 되었으며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가서는 한 달도 안 되어 완공되었다. 그가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이 가득 들어와 앉았다. 혜각의 거동과 용모는 크고 단아하여 마치 신과 같았으며 억양을 높여 이야기하게 되면 심오한 이치를 이끌어 내었으며, 그의 해석은 정확하여 청강생들은 공경하게 받아들였으니, 참으로 해박한 지식과 넓은 도량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화엄경』과 『십지론』, 『유마경(維摩經)』 등의 해석서를 저술하였고 아울러 『찬의장(纘義章)』 13권을 지었는데 글의 규모가 크고 내용이 하나로 관통되어 있고 요약되어 있어 제나라와 위(魏)나라의 명성과 덕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글을 읽고 그대로 행하였다. 무덕 3년에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침입했다. 혜각은 약한 병에 걸리자 제자에게 “나는 이제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자가 말하였다. “지금 오랑캐들이 섬에까지 와서 사람들이 갈 길을 막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혜각이 대답하였다. “나고 죽는 것은 그 길이 멀고,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날이 없다. 내일은 너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이어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 승려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게 하고는 승려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온밤 바른 생각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가 날이 밝아올 무렵에 문득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90세였다. 처음부터 혜각은 지혜와 깨달음의 성품을 가슴속에 간직하였고 복 받을 행위로 중생들을 포섭하니 함께 기뻐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거리가 나서게 되면 자신이 직접 도와주고 수리하였으니, 옛 사원을 보수하는 일도 모두 그의 권고와 격려에 의하여 진행된 것이었다. 또한 정토에 태어나자면 동산을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된다는 말을 듣고 1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청주(靑州)에 가서 대추씨를 가지고 와서 병성 개의사(開義寺)에 뿌리고 대추나무모 1천 그루를 줄지어 심어 가꾸어 오부대중들에게 공양하였고 날마다 무성하고 아름다운 동산의 경치를 보장해 주면서 이 공적을 넓혀나갔다. 그때 그 사원에는 두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지달(智達)이었다. 그들은 원공의 제자들로서 훌륭한 깨달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무덕 연간의 초기에는 수도에까지 아름다움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 명간(明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그들의 다음가는 제자로서 서로 계승해나가 아름다운 자취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032_1047_a_02L지거는 신안(新安)의 수창(壽昌) 사람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이다. 그의 족보를 따져보면 고양씨(高陽氏)의 후손들인데 이관(理官)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인하여 그것이 성이 되었던 것이다. 시대에 따라 말소리도 변하여 리(理)가 이(李)로 되었으며 그로 하여 이것을 성씨로 삼았다. 그는 본래 기주(冀州) 조군(趙郡)의 전오(典午)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옮겨가 양자강 왼쪽에서 살았다. 아버지 이위(李褘)는 양나라 때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의 벼슬을 하였다. 지거는 19세 때부터 스스로 세속을 벗어나 탄(坦) 법사에게서 『석론(釋論)』을 들었고, 한 해가 채 못 되는 동안에 자주 정교한 이치를 듣게 되었다. 탄 법사는 수나라 제왕(齊王) 양간(楊暕)의 스승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아(雅) 법사에게서 『반야론(般若論)』 강의를 들었고 또 예(譽) 법사에게서 3론(論)을 들었는데, 이 세 법사들은 명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었다. 지거는 지조를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굳게 먹기 위하여 특히 『법성론(法性論)』에 대하여 끝까지 파고들어 연구하였다. 당시 여러 고좌(高座)에 올라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재주를 겸비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옛사람이 “학문에는 영원한 스승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이다. 지거는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논의를 폭넓게 하여 그 심오한 뜻을 곡진하게 찾아냈다. 나이가 27세가 되자 강의에 나서게 되었는데 막힘없는 말재주로 하여 대중 속에 널리 알려졌으며 경전을 설교하고 질문을 받으면서 늘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후 탄 법사는 생을 마치기 전에 5부(部)의 대경(大經)들을 한꺼번에 그에게 넘겨주었으며 지거는 여러 차례의 유언을 받고서 곧 강의를 진행하니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도인들과 속인들 모두가 우러러보았다. 그는 입으로 남의 말을 하지 않았고 눈으로 물질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고기와 우유를 맛보지 않았고 마늘과 고추를 먹지 않았다. 입실제자 명연(明衍)은 그에게서 업을 넘겨받았고 이전부터 그를 섬기면서 화상(和上)으로 대해왔다. 지거가 생을 마치기 전에 말하였다. “나는 『화엄경』ㆍ『대품경(大品經)』ㆍ『열반경』ㆍ『석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구들로 나는 늘 강의를 해왔다. 이전 4부의 의소(義疏)들을 너에게 넘겨준다.” 그리고는 제자의 손을 세 번 잡아보고 문득 생을 마쳤다. 그가 생을 마친 곳은 상주(常州) 건안사(建安寺)이며 그날은 무덕 2년 6월 10일이었다. 비단(毘壇)의 남쪽에 있는 사원의 옛 무덤자리에 묻었다. 명연은 속성이 구씨(丘氏)이고 진릉(晋陵)의 이름난 가문의 사람이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볼만하였고 정교한 풍채는 뛰어났다. 그는 스승의 아름다운 공적을 높이 공경하여 커다란 비석을 사원의 문 앞에 세웠으며 진나라 서양왕(西陽王)의 기실(記室) 초국(譙國) 조헌(曹憲)이 비문을 지었다.
032_1047_b_02L도경은 속성이 대씨(戴氏)이며 그의 선조는 광릉(廣陵) 사람이었으나 후에 양자강을 건너 무석(無錫)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는 11세에 출가하여 오군(吳郡) 건선사(建善寺)의 장(藏) 아사리(阿闍梨)를 섬기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예의를 다하여 동료들 속에서 받드는 대상이 되었다. 17세에 수도에 가서 팽성사(彭城寺)에서 『성실론(成實論)』에 대한 강의를 듣고 큰 뜻과 그 밖의 이론을 모두 남김없이 소유하였다. 그 까닭으로 당시 스승들은 그를 지목하면서 말하였다. “해와 달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고 입 안에서 강물을 쏟아 붓는다는 말은 참으로 도경에게 맞는 말이다.” 이러한 훌륭한 칭찬을 받게 되자 뜻을 평상시보다 갑절로 가다듬었으며 젊은 사람들 속에서는 이미 지난날부터 알려졌으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속에는 오늘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진나라가 망하고 승려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동쪽으로 무석에 가서 봉광사(鳳光寺)에서 살면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처음처럼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다. 그후 비단(毘壇)의 홍업사(弘業寺)에 머무르면서 불교를 널리 퍼뜨리는 일에 전념하였으며 추우나 더우나 그 일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아름다웠고 말을 잘하였으며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우정이 두터웠으며 글과 문장이 샘물이 솟아나는 듯하였고 비파와 시도 즐기고 미묘하게 잘하였다. 글의 풍치는 자유분방하고 여유작작하였으며 기량은 더는 이룰 것이 없었고 대하는 데서는 방도가 있어 그 어떤 일에도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무덕 9년 8월에 사원의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1세였으며, 그달 23일에 부당(扶塘)의 산기슭에 묻었다.
구덩이를 파는 날 괭이와 삽으로 파기 시작하자 백학 한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멀리에서부터 날개를 퍼덕이고 몸을 뒤치며 안장할 땅에 내려앉아 슬피 우는 감응이 있었다. 그의 도의 빛발이 멀리에까지 퍼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특이한 상서로움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같은 사원에 있던 사문 법선(法宣)이 말하였다. “나와 그 사람 사이는 말은 없었지만 도로는 친숙한 사이였다. 수도에서 살 때 이미 어린 나이에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을 좋아하였고 타향에서 늘그막에 다시 같은 옷을 입는 것이 기뻤다. 달 밝을 때나 바람 부는 때나 강론하는 자리에서 손목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 강당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논쟁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런데 저 아득한 하늘이 나의 어진 벗을 죽일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으랴. 천 가닥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내 몸이 백 개인들 어찌 대신할 수 있겠는가. 아직은 붓을 내버릴 수 없어 짧은 명문을 쓰노라.” 그 글은 이러하였다.
10력은 빛을 감추어도 4의(依)로 세상을 구제하고 공덕과 광휘로움 이어지거니 이 사람이 이를 계승하였다네.
지계와 인욕으로 담장을 두르고 선정과 지혜를 등불로 삼고서 중생들 속으로 함께 달리면서 서로 다른 강석에서 슬기를 폈다네.
강론하는 강당에 목소리 울리고 뜻을 해석하는 집에 난초 향기 풍기며 위엄 있게 앉아 사자처럼 외치니 대중은 전단(栴檀) 주위 둘러싼다네.
그의 도는 속세를 벗어나 청정하고 이치로 말의 단서를 분석하며 4위의(威儀)는 순서와 법식이 있고 3업(業)은 편안하다네. 예토(穢土)의 인연이 다하여 훌륭한 사람은 멸도(滅度)하였어도 장막에는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고 수레는 떠나는 바퀴자국 되돌린다네.
언덕에는 달이 외로이 비치고 무덤가의 샘은 더없이 쌀쌀하며 대나무의 이슬은 잠시 방울지더니 솔바람에 영영 사라져 버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