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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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승전 제28권
032_1244_b_01L續高僧傳卷第二十八


당 석도선 편찬
이창섭 번역
032_1244_b_02L大唐西明寺沙門釋道宣撰


8. 독송편(讀誦篇) [本傳 14명, 附見 7명1)]
032_1244_b_03L讀誦篇第八正紀十四人 附見七人

1) 위나라 태악(泰岳) 인두산(人頭山) 함초사(銜草寺) 석지담전(釋志湛傳)
2) 위나라 익주(益州) 오층사(五層寺) 석법건전(釋法建傳)
3) 위나라 익주 초제사(招提寺) 석혜공전(釋慧恭傳)
4) 위나라 미주(眉州) 융산현(隆山縣) 정비산(鼎鼻山) 석법태전(釋法泰傳)
5)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남곡(藍谷) 오진사(悟眞寺) 석혜초전(釋慧超傳)
6) 백제국(伯濟國) 달나산사(逹拏山寺) 석혜현전(釋慧顯傳)
7) 당나라 익주 복성사(福成寺) 석도적전(釋道積傳)홍승(洪遠) 승은(僧恩) 지엽(智曄)
8) 당나라 익주 복수사(福壽寺) 석보경전(釋寶瓊傳)
9) 당나라 여산(驪山) 진량사(津梁寺) 석선혜전(釋善慧傳)
10) 당나라 종남산 오진사 석법성전(釋法誠傳)
11) 당나라 경사(京師) 회창사(會昌寺) 석공장전(釋空藏傳)
12) 당나라 경사 대장엄사(大莊嚴寺) 석혜전전(釋慧銓傳)지증(智證) 송공(宋公)
13) 당나라 옹주(雍州) 예천사(醴泉寺) 사문 석유속전(釋遺俗傳)사가담(史呵擔)2) 현수(玄秀)
14) 당나라 서울 나한사(羅漢寺) 석보상전(釋寶相傳)법달(法逹)
032_1244_b_04L魏泰嶽人頭山銜草寺釋志湛傳一
魏益州五層寺釋法建傳二
益州招提寺釋慧恭傳三
眉州隆山鼎鼻山釋法泰傳四
唐終南山藍谷悟眞寺釋慧超傳五
伯濟國達拏山寺釋慧顯傳六
唐益州福成寺釋道積傳七洪遠僧思智曄
唐益州福壽寺釋寶瓊傳八
唐驪山津梁寺釋善慧傳九
唐終南山悟眞寺釋法誠傳十
唐京師會昌寺釋空藏傳十一
唐京師大莊嚴寺釋慧銓傳十二智證宋公
唐雍州醴泉沙門釋遺俗傳十三玄秀史擔
唐京師羅漢寺釋寶相傳十四 法達

1) 위나라 태악(泰岳) 인두산(人頭山) 함초사(銜草寺) 석지담전(釋志湛傳)
032_1244_b_18L釋志湛
032_1244_c_02L지담은 제주(齊州) 산임(山荏) 사람이며 승랑(僧朗)의 중손 제자이다. 그는 타고난 행실이 순박하고 너그러웠으며 일을 살필 줄 알고 말이 적었으며 어진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늘 새나 짐승들과 어울렸는데, 그들은 어지럽게 날뛰지 않았다.
그는 인두산(人頭山)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함초사(銜草寺)에 주석하였는데, 그 절은 전송(前宋) 때 구나발마(求那跋摩)가 세운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을 때 사문 보지(寶誌)가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아뢰었다.
“북방의 산임현 사람이 지금 함초사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는 수다원과(須陀洹果)에 이른 성숭(聖僧)입니다. 그는 오늘 열반에 들게 됩니다.”
양도(楊都)의 도속들이 보지의 이 말을 듣고 모두 멀리서 그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지담은 죽을 적에 공적(空寂)하여 남은 번뇌가 없었던 까닭에 단연(端然)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두 손은 각기 손가락을 하나씩을 펴고 있었는데, 서천축(西天竺)의 한 스님이 이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만약 사다함과[二果]를 얻었을 경우에는 두 손가락을 폈을 것이다. 이는 지담이 수다원과[初果]를 얻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신을 거두어 인두산에 장사를 지냈으며 탑을 쌓아 안치하고 석회(石灰)와 진흙을 발라 새나 짐승이 감히 능욕하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그 이름은 모르나 범양(范陽) 오후사(五侯寺)의 한 스님도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그가 죽었을 때 임시로 강의 둑 아래에 묻었다가 후에 옮겨 개장(改葬)하려고 땅을 파보니 뼈는 모두 썩었으나 혀만은 썩지 않았다.
또한 옹주(雍州)에 있던 스님도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백록산(白鹿山)에 은거하였는데 감응이 나타나 한 동자가 늘 찾아와 공양하였다. 그후 그가 죽자 시신을 바위 밑에 안치하였는데 다른 뼈들은 모두 마르고 썩었으나 혀만은 썩지 않았었다.
또한 북제(北齊) 무제(武帝) 때 병주(并州) 동간산(東看山) 기슭에 사는 어떤 사람이 땅을 파다가 한 곳의 흙을 보니 그 빛깔이 황백색으로 옆의 흙과 구별이 되었다. 이어 한 물건을 발견하였는데, 형상이 두 입술과 같았으며, 그 속에는 혀가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여러 도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이때 사문 대승통(大僧統) 법상(法上) 스님이 아뢰기를 “이것은 『법화경』을 송지(誦持)하여 6근(根)이 허물어지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하니, 『법화경』을 천 번 두루 독송하면 그러한 징험이 나타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중서사인(中書舍人) 고진(高珍)에게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경(卿)은 불법을 믿고 귀의한 사람이니 직접 가서 그것을 살펴보면, 틀림없이 신령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청정한 곳에 옮겨 안치하고 재(齋)를 마련하여 공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진이 칙명을 받들고 그곳으로 가서 『법화경』을 송지(誦持)하는 여러 사문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향로를 손에 들고 몸을 청결하게 하고 시신의 주위를 돌면서 주문을 외우며 말하였다.
“보살께서 열반에 드신 지 이미 오래되어 상법(像法)이 유행되고 있지만, 다행이 잘못이 없다면 여러 가지 감응을 나타내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렇듯 말을 꺼내자 입술과 혀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입을 놀리는 모양은 독송을 하는 것과 비슷하여 같이 보던 사람들치고 머리칼이 곤두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진이 이에 대하여 황제께 보고하니 칙명을 내려 석함을 보내어 보관하고 산실(山室)에 옮겨 안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원위(元魏) 때 북대(北代)의 승(乘) 선사란 스님도 『법화경』을 송지(誦持)함에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생을 마치고 다시 하동(河東)의 설씨(薛氏) 집안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말을 하여 스스로 전생의 일에 대해 말하면서 속세에서 거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후 부친이 북쪽 사주(肆州)의 자사(刺史)로 임명되자 임지로 따라가 곧 중산(中山) 칠제사(七帝寺)에 가서 전생[本時]의 제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너는 자못 나를 따라 강을 건너서 낭산(狼山)으로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 승선사가 바로 나니라. 방 안의 영궤(靈几:혼백을 모신 책상)는 빨리 치우는 것이 좋으리라.”
그의 부모들은 그가 출가하게 될까 두려워 곧 아내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그후 그는 곧 전생의 일을 잊어버렸지만 항상 속세를 싫어하며 떠나려고 하였고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고요히 거처하였다.
또한 태화(太和) 초년(477)에는 대경(代京) 환관[閹官]이 형벌을 받아 불구자가 되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산에 들어가 도를 닦게 해달라고 상주하니, 칙명이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곧 한 질의 『화엄경』을 가지고 주야로 독송하면서 쉬지 않고 예참(禮懺)하였는데, 초여름에 산에 들어가서 6월 말에 이르자 수염과 구레나룻가 모두 생기며 다시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돌아가서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본래 불교를 믿고 공경하던 고조 황제는 갑자기 놀랍고 의심스러운 일을 보게 되자 보통 때보다 더욱 신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대대(大代)나라에서는 『화엄경』이 더욱 널리 퍼지고 번창하게 되었다.
032_1244_b_19L 齊州山荏人是朗公曾孫之弟子也立行純厚省事少言仁濟爲每遊諸禽獸而群不爲亂住人頭山邃谷中銜草寺寺卽宋求那跋摩之所立也讀誦法華用爲常業將終之日沙門寶誌奏梁武曰北方山荏縣人住今銜草寺須陁洹果聖僧者今日入涅槃楊都道俗聞誌此告遙禮拜故湛之亡也寂無餘惱端然氣絕兩手各舒一指有西天竺僧解若二果者舒兩指驗湛初果也收葬于人頭山築塔安之石灰泥塗鳥狩不敢凌污今猶存焉又范陽五侯寺僧失其名常誦法華初死之㩲殯堤下後遷改葬骸骨竝枯舌不壞 雍州有僧亦誦法華隱于白鹿山感一童子常來供給及死置屍巖下餘骸枯朽惟舌如故 齊武成世幷州東看山側有人掘地見一處土其色黃白與旁有異尋見一物狀如兩脣其中有舌鮮紅赤色以事聞奏帝問諸道人無能知者沙門大統法上奏曰此持法華者六根不壞報耳誦滿千遍其徵驗乎乃勅中書舍人高珍曰卿是信向之人自往看必有靈異宜遷置淨所設齋供養珍奉勅至彼集諸持法華沙門執爐潔齋遶旋而呪曰菩薩涅槃年代已像法流行奉無謬者請現感應始發聲此之脣舌一時鼓動雖無響及而相似讀誦諸同見者莫不毛豎珍以狀聞詔遣石函藏之遷于山室云又元魏北代乘禪師者受持法華勤匪懈命終託河東薛氏爲第五子生而能言自陳宿世不願處俗其父任北肆州刺史隨任便往中山七帝尋得本時弟子語曰汝頗憶從我度水往狼山不乘禪師者我身是也房中靈几可速除之父母恐其出家便與納室爾後便忘宿命之事而常興厭離端拱靜居又太和初年代京閹官自慨刑餘不逮人族奏乞入山修道有勅許之乃齎一部花嚴晝夜讀誦禮悔不息夏首歸山至六月末髭鬢盡生復丈夫相還狀奏聞高祖信敬由來忽見驚訝更增常日於是大代之國花嚴一經因斯轉盛
이런 일들은 모두 『후군소정이기(侯君素旌異記)』에 실려 있다.
032_1245_a_20L竝見侯君素旌異記

2) 위나라 익주(益州) 오층사(五層寺) 석법건전(釋法建傳)
032_1245_a_21L釋法建者
032_1245_b_02L법건은 광한(廣漢) 낙현(雒縣) 사람이며, 속성은 주씨(朱氏)이다. 그는 천 권의 경전을 외웠다. 한가한 날이 많을 때면 속인들과 짝을 지어 놀곤 하여 전혀 남 다른 점이 없었으나, 그러다가도 홀연히 문을 닫게 되면 여러 날 동안 문 밖에 나가지 않고 아무것도 먹는 것이 없이 오직 경(經)만을 읽었다. 그러나 작은 소리로 외웠으므로 음성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벽에 기대어 몰래 그 소리를 들어보려고 하였으나, 마치 땅속으로 흘러가는 물소리와 같아서 웅얼웅얼 부지런히 외워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무릉왕(武陵王)이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아우인 규(規)로 하여금 익주(益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북위(北魏)에서 장군 위지형(尉遲逈)을 파견하여 촉(蜀)을 정벌하니 규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 지역에서 법건을 포함하여 크게 이름이 있는 스님들이 모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홀연히 광명이 비치기에 위지형이 사람을 보내어 광명이 비치는 곳을 알아보도록 지시하였다. 그 사람이 그곳에 가보니 모든 스님들은 졸고 있었는데 오직 법건만이 단정하게 앉아 경을 외우고 있었으며 광명은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위지형은 이 말을 듣자 직접 법건에게 찾아가 정례(頂禮)하고 앉아서 송경(誦經)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송경을 쉬게 되자, 위지형이 그에게 물었다.
“법사께서 어젯밤에 외우신 경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법건이 대답하였다.
“『화엄경』의 후반부 열 권입니다.”
위지형이 말하였다.
“왜 첫머리부터 외우지 않았습니까?”
법건이 대답하였다.
“빈도(貧道)가 외우던 차례가 거기부터이기 때문입니다.”
위지형이 말하였다.
“법사께서는 얼마나 많은 경전을 외울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빈도는 발심하여 대장경 전체를 외우고자 하였으나, 성정에 게으름이 많아 이제야 비로소 천 권을 외웠습니다.”
위지형은 놀라고 의심하여 믿지 않았고 곧 이를 시험해보려고 말하였다.
“천 권을 한 차례 모두 외우게 되면 힘들거나 몸에 손상이 가지는 않겠습니까?”
법건이 대답하였다.
“경전을 외우는 일은 사문들이 늘 하는 일인데 어찌 수고를 꺼리겠습니까?”
위지형은 곧 고좌(高座)를 마련하고 승단의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손에 경전을 들고 글줄을 따라가며 듣도록 하였다. 이에 법건이 자리에 올라 경을 외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가 혹 급류(急流)가 가파른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으며, 경전의 구절들을 장단 맞추어 호흡을 조절해가며 읽는 것이 마치 맑은 바람이 높다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총명한 사람도 겨우 그 여음만 들을 수 있었고 마음이 성기거나 방자한 자는 공연히 그가 남긴 티끌과 같은 자취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렇게 밤낮으로 7일 동안 외워 이미 천 권을 모두 외웠지만 짐짓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위지형이 일어나 사례하면서 말하였다.
“제자는 군사를 거느린 사람이어서 오래 머무를 수 없기에 이곳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스님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위지형은 그곳에서 나오자 탄식하며 말하였다.
“여래께서 적멸에 드신 이후로 아난(阿難) 존자가 총지(總持)라고 일컬어졌지만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촉(蜀)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안락한 생활이 보존되었던 것이로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그후 법건은 나이 80세에 생을 마쳤다.
032_1245_a_22L 廣漢雒縣人也俗姓朱氏誦經一千卷仍多閑暇遨遊偶俗無所異焉忽復閉門累日不出無所食矣唯聞誦然小聲吟諷音不外徹有人倚壁竊聽臨響但聞亹亹細似伏流之吐波時乃一出追從無聞武陵王東下令弟規守益州魏遣將軍尉遲迥來伐蜀規旣降款城內大有名僧皆被拘禁至夜忽有光明遣人尋光乃見諸僧竝睡唯法建端坐誦經光從口出迥聞自到建所頂禮坐聽至旦始休迥問曰法師昨夜所名作何經答曰華嚴經下帙十卷迥曰何不從頭誦之答曰貧道誦次到此耳迥曰法師誦得幾許答曰道發心欲誦一藏情多懈怠今始偍千卷迥驚疑不信將欲試之曰屈摠誦一遍應不勞損耶建報曰讀誦經典沙門常事豈憚勞苦乃設高座諸僧衆竝執本逐聽法建登座爲誦或似急流之注峻壑其吐納音句噏氣息或類淸風之入高松聰明者纔似聞餘音情疏意逸者空望塵躅七日七夜數已滿千猶故不止迥起謝曰弟子兵將不得久停請從此辭諸僧因竝釋散迥旣出歎息曰自如來寂滅之後阿難號爲摠持豈能過蜀中乃有如此人所以常保安樂奇哉奇哉建年八十終

3) 위나라 익주 초제사(招提寺) 석혜공전(釋慧恭傳)
032_1245_c_05L釋慧恭者
032_1246_a_02L혜공은 익주 성도(成都) 사람이며, 속성은 주씨(周氏)이다. 그는 북주(北周) 말엽에 불법을 폐지시켰을 때 같은 절에 있던 혜원(慧遠) 스님과 학문에 정진하기로 약속을 맺으니, 혜원은 그길로 곧바로 장안(長安)으로 가서 강론을 듣고 배웠으며 혜공은 멀리 형양(荆楊)에 가서 도를 구하였다.
혜원은 서울에서 『아비담론(阿毘曇論)』을 비롯하여 『가연구사론(迦延拘舍論)』ㆍ『지지론(地持論)』ㆍ『성실론(成實論)』ㆍ『비파사론(毘婆沙論)』ㆍ『섭대승론(攝大乘論)』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고 이 모두에 정통하게 되어 익주로 돌아와서 강의하니 그 뛰어남은 견줄 자가 없었다. 이에 도속들이 공경하고 존중하였고 보시한 것이 창고에 가득 쌓이게 되었다.
한편 혜공은 그후 강남에서 익주로 돌아왔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만나 흐뭇하고 기뻐하면서 이별 후 30여 년간의 일을 추억하였다. 그들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혜원의 이야기는 마치 샘물이 솟는 것과 같이 이어졌으나 혜공은 끝내 말이 없었다. 그러자 혜원이 물었다.
“오랜 세월 이별하였다가 지금 서로 만났으니 이 상봉의 기쁨을 무엇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대가 말이 없는 것을 보니 혹시 소득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혜공이 대답하였다.
“나는 천성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전혀 깨달은 것이 없네.”
혜원이 말하였다.
“크게 깨달은 것은 없더라도 한 부의 경전쯤이야 외우지 못했겠는가?”
혜공이 대답하였다.
“오직 『관세음경(觀世音經)』 한 권만은 외울 수 있네.”
그러자 혜원이 노한 얼굴로 말하였다.
“『관세음경』은 어린 아이나 동자들도 모두 외울 수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대 같은 어른이 번거롭게 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나와 함께 서원을 세워 깨달음을 증험하기를 희망하였는데 어찌 30여 년 동안 조그마한 경전 하나만을 외웠단 말인가? 이는 천성이 암둔해서가 아니라 게으르고 타락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 나는 이제 자네와의 관계를 끊기 바라니, 법사는 일찌감치 이곳을 떠나 나의 번뇌를 더하지 말아주게.”
혜공이 말하였다.
“그 경은 권수가 비록 적으나 부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이를 따르고 공경하는 자는 한량없는 복을 얻게 되고 업신여기는 자는 한량없는 죄를 얻게 된다네. 잠시 성난 마음을 가라앉혀주기를 바라며 법사를 위하여 한 차례 이를 두루 외우고 나서 곧 떠나겠네.”
혜원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관세음경』은 『법화경』의 「보문품(普門品)」과 같은 것으로서 나는 이미 백 번도 넘게 이를 강의하였는데, 어찌하여 부질없이 사람의 귀를 어지럽게 하려고 하는가?”
혜공이 말하였다.
“외서(外書)3)에 이르기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오직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 사람 때문에 법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곧 뜰 앞에 단을 만들고 그 단 가운데 고좌(高座)를 설치하고 단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정례(頂禮)를 드리고 고좌에 올랐다. 이에 혜원은 할 수없이 그 밑에서 호상(胡床)에 기대어 외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혜공이 처음 소리를 내어 경의 제목을 읽자 기이한 향기가 방 안과 집안에 가득 찼으며, 경문을 읽기 시작하자 하늘에서 음악이 울리고 네 가지 꽃이 비 오듯 내렸다. 그 음악소리는 맑고 밝게 허공에 울려 퍼졌으며 꽃은 안개비나 눈발이 날리듯 떨어져 땅에 가득하였다.
혜공이 경을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와 스스로 법석을 풀어 범행(梵行)을 마치니 꽃과 음악소리도 비로소 멎었다. 이에 혜원은 그의 발에 입을 대고 정례를 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여 말하였다.
“이 혜원은 냄새나는 더러운 송장과 다름없었는데도 감히 하늘의 태양 아래를 걸어다녔습니다. 잠시라도 이곳에 머물며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이에 혜공이 말하였다.
“이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오.”
혜공은 그날로 옷을 떨고 길게 읍(揖)을 하고는 정처 없이 떠났다. 그후 그의 행방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며 그 절도 이미 오래전에 인멸(湮滅)되었다.
032_1245_c_06L 益州成都人也俗姓周氏周末廢佛法之時與同寺慧遠結契勤學遠直詣長安聽採恭長往荊楊訪道遠於京師聽得阿毘曇論迦延拘舍地持成實毘婆沙攝大乘竝皆精熟還益州講授卓爾絕群道俗欽䞋施盈積恭後從江表來還二人相欣歡共敍離別三十餘年同宿數語說言談遠如泉涌恭竟無所道問恭曰離別多時今得相見慶此歡伊何可論但覺仁者無所說將不得無所得耶恭對曰爲性闇劣都無所解遠曰大無所解可不誦一部經恭荅曰唯誦得觀世音經一卷厲色曰觀世音經小兒童子皆能誦何煩大汝許人乎且仁者童子出與遠立誓望證道果豈復三十餘唯誦一卷經如指許大是非闇鈍懶墯所爲請與斷交願法師早去增遠之煩惱也恭曰經卷雖小佛口所遵敬者得無量福輕慢者得無量仰願暫息瞋心當爲法師誦一遍與長別遠大笑曰觀世音經是法華經普門品遠已講之數過百遍如何始欲鬧人耳乎恭曰外書云人能弘非道弘人但至心聽佛語豈得以人棄法乃於庭前結壇壇中安高座繞壇數帀頂禮昇高座遠不得已是下據胡牀坐聽恭始發聲唱經題異香氛氳遍滿房宇及入文天上作雨四種花樂則寥亮振空花則雰霏滿地經訖下座自爲解座梵訖樂方歇慧遠接足頂禮淚下交連慧遠臭穢死屍敢行天日之下暫留賜見教誨恭曰非恭所能諸佛力耳卽日拂衣長揖沿流而去爾後訪問竟不知其所之其寺久已湮滅

4) 위나라 미주(眉州) 융산현(隆山縣) 정비산(鼎鼻山) 석법태전(釋法泰傳)
032_1246_a_19L釋法泰
032_1246_b_02L법태는 미주 융산현 사람이며, 속성은 여씨(呂氏)이다. 처음에는 도사가 되어 10여 년을 지내다가 도중에 홀연히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정각(正覺)으로 돌려 곧 머리를 깎았다. 그는 처음 『법화경』을 외웠는데 곧 그것에 정통하게 되었고 이어 부지런히 노력하여 『법화경』 전부를 필사(筆寫)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자주 신령한 서상이 있었다.
그후 그는 익주(益州)로 가서 그것을 책으로 엮어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한 사람에게는 짐을 지게 하고, 한 필의 말 한 켠에는 돈 2천 냥을 담은 상자를 묶어두고 필사한 경은 그 상자 위에 꽂아두었으며 다른 한 켠에는 의복을 놓았다. 이렇게 짊을 다 실고 길을 떠나 가다가 적교(莋橋)라는 곳에 이르러 다리가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뒤에 있던 법태만 떨어지지 않고 짐을 실은 말과 사람은 물에 빠졌다. 사람과 말은 물 위로 떠올라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짐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법태는 강기슭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돈과 옷을 잃은 것도 어찌 중요한 것이 아닐까마는 어찌 경이 물에 빠지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곧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 짐을 건져주는 사람이 있으면 상으로 두 관(貫)의 돈을 주겠다.”
이때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몇 번 자맥질을 하여 돈과 옷은 건졌으나 경은 찾지 못하였다.
법태는 다시 슬피 울면서 강기슭을 따라 오르내렸는데 작은 모래섬 위에 꾸러미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가져오게 하니 바로 경이었다. 초목이 그것을 떠받치고 있어서 전혀 물에 젖은 곳이 없었으므로 법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며 곧 2천 냥의 돈으로 건진 값을 보상하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법사께서 슬피 통곡하시는 모습은 부모를 잃은 것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법사를 위하여 급히 찾아보았던 것이지, 저는 돈이나 탐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비록 용렬한 범부이기는 하지만 복보(福報:복으로 갚아 주는 일)를 알고 있으니, 이 돈으로 경을 책으로 만드는 필요한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그 사내는 말을 마치자 황망히 떠나갔다. 법태는 다시 그와 말해보려고 하였으나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법태는 성도(城都)에 이르러, 단향(檀香)으로 서축(書軸)을 만들고 표지와 띠를 둘러 한 질의 경과 아울러 함을 만들어 지니고 본사로 돌아와 특별히 마련한 곳에 안치하였는데 밤마다 기이한 향기가 풍기곤 하였다. 법태는 부지런히 밤마다 한 번씩 이를 두루 송지하였다.
당시 표(彪) 법사라는 스님이 그 절에서 강의하고 있었는데 밤에 경을 읽거나 보려고 할 때마다 항상 법태의 경 읽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싫어 직접 법태를 찾아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달라고 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법태의 앞에 많은 대중이 모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는 것을 보자 표 법사는 물러나와 땀을 흘리며 곧 거처를 옮겼다.
법태는 나이 80세에 생을 마쳤다.
032_1246_a_20L 眉州隆山縣人也俗姓呂氏初爲道士十餘年中間忽自悟廻心正覺因卽剃除始誦法華經尋卽通乃精勤寫得法華經一部數有靈欲將向益州莊潢令一人檐負頭以籠盛錢二千束縛經置錢上頭是衣服檐行至地名莋橋橋忽斷泰在後負檐人俱墜水中人浮得出檐沒不見泰於岸上搥胸號哭曰衣豈非閑事何忍溺經卽高聲唱言如能爲漉得者賞錢兩貫時有一人聞之脫衣入水沒求之數度出入得與衣幞而不得經泰轉悲泣巡岸上下望小洲上有一幞命人取之是經也草木擎之宛無濕處泰不勝歡喜卽以二千錢償所漉人師悲號劇喪父母故爲急覓非是貪弟子雖傭夫亦知福報請以此錢充莊嚴之直言訖遁去更欲與言已遠矣泰至城都裝潢以檀香爲軸表帶及帙幷函將還本寺別處安置夜夜有異香泰勤誦持一夜一遍彪法師彼寺講夜欲看讀恒嫌泰鬧亂其心自欲往請令稍下聲乃見泰前大有人衆皆胡跪合掌彪退流汗卽移所住泰年八十終矣

5) 당나라 종남산 남곡(藍田谷) 오진사(悟眞寺) 석혜초전(釋慧超傳)
032_1246_b_22L釋慧超
032_1246_c_02L혜초는 속성이 범씨(汎氏)이며, 단양(丹陽) 건원(建元)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성정이 어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속세가 싫어서 스스로 출가하였고 그후에는 『법화경』을 외웠다.
그후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 혜사(慧思) 선사가 남달리 1승(乘)을 깨닫고 삼관(三觀)을 환히 밝힌다는 말을 듣고 천태(天台)의 지자(智者)대사와 선성(仙城)의 명공(命公) 스님과 더불어 깊은 뜻을 탐구할 굳은 뜻을 품고 그곳을 찾아가 여러 해 동안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기를 청하였다. 혜초는 행이 우수하고 지혜가 심원하며 공덕이 당시 현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다. 이에 혜사는 대중들 앞에서 혜명에게 말하기를 “혜초는 하늘의 인증[忍]을 얻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혜사가 형산(衡山)으로 가게 되자 다시 동행하여 그곳에 머무르면서 경을 외웠다. 혜초는 그곳에서 여러 해를 보내다가 수나라 초기에 천하가 열리고 안정되자 북쪽의 높은 산속에 들어가 이약(餌藥)을 먹으며 좌선하면서 노년을 마치기를 원하였다.
당시 수나라 태자 양용(楊勇)이 이름난 대덕들을 불러들여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였는데, 혜초의 업행이 그 가운데 더욱 뛰어나기 때문에 특별히 숙소를 정해 머물게 하고 공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손히 삼가고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서 세간의 화려한 생활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후 양용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그는 하나도 관련된 일이 없었다.
만년에는 정수사(定水寺)로 거처를 옮겨가서 공덕을 높이 떨치니 도속들이 귀의하여 그의 계범(戒範)을 우러러보았다. 때마침 정업(淨業) 법사가 남전곡(藍田谷)의 오진사(悟眞寺)에 거처를 정하고 혜초가 지닌 도를 공경하여 직접 맞아들이고 섬겼으므로 함께 8년 동안 그곳에 은거하면서 삼혜(三慧)를 더욱 부지런히 닦았다.
대업(大業:수 양제) 연간이 시작되면서 선정사(禪定寺)가 처음으로 지어졌다. 이에 조서가 내려 초청받아 혜초는 그곳으로 들어가 도를 닦게 되었는데, 그는 여러 번 병을 구실로 사양하다가 후에 허락을 받아 산으로 돌아오니, 그 높은 덕망에 감동되어 자못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천(四川)의 귀족들과 명망 있는 사람 및 온 현(縣)의 관리들과 백성들치고 그에게 귀의하여 정성을 다하면서 훌륭한 공덕을 전해주기를 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울러 절을 축조하기 시작하니 물자와 곡식이 계속 들어왔다.
대당(大唐) 시대가 시작되니 명예가 전시대보다 더욱 번성해졌다. 서울의 유명한 스님인 혜인(慧因)과 보공(保恭) 등이 은거생활을 그리워하여 모두 찾아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소나무 밑이나 바위 밑에 누워 도의 진리를 논하곤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것이 참으로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잠시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제자들이 꿇어앉아 문안인사를 하니 대답하였다.
“나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으니, 오래 산다고 해도 기쁘지 않고 오늘 저녁에 죽는다고 해도 슬프지 않다.”
곧 서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똑바로 앉아 말하였다.
“제일의(第一義:가장 뛰어나고 참된 도리)는 공(空)이요, 청정한 지혜는 관(觀)이다.”
그는 말하는 것이 마치 선정에 든 것과 같았는데 갑자기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77세였으니, 때는 무덕(武德) 5년 12월 6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송석(松石) 사이에 내버려두었는데 한 달 남짓이 지났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천책(天策) 상장(上將)이 이 소식을 듣고 희한한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는데,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혜초는 아홉 살에 도(道)에 입문하면서부터 곧 『법화경』을 외우기 시작하여 50여 년 동안에 만여 번을 두루 외웠으니, 신령에 감응되어 이런 상서를 얻은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다.
제자인 법성(法成) 등이 그를 위하여 절의 북쪽 봉우리에 백탑을 세웠다.
032_1246_b_23L 姓汎氏丹陽建元人稟懷溫裕立性懷仁弱齡厭俗自出家後誦法華聞光州大蘇山慧思禪師獨悟一乘善明三觀與天台智者仙城命公篤志幽尋積年請業行優智遠德冠時賢對衆命曰超之神府得忍人也及遊衡復與同途留誦經停亟移歲序自隋初廓定北入嵩高餌藥坐禪冀言終老隋太子勇召集名德摠會帝城以超業行不群特留供養而恭愼凝攝不顧世華及勇廢免一無所涉晩移定水振德音道俗歸宗仰其戒範會淨業法師卜居藍田谷之悟眞寺欽超有道躬事邀迎共隱八年倍勤三惠及大業承運禪定初基爰發詔書延入行道屢辭砭疾後許還山德感物情頗存汲引四川貴望一縣官民莫不委質誠請傳香德幷爲經始伽藍繼綜羞大唐伊始榮重於前京邑名僧慧保恭等情慕隱淪咸就拪止蔭松偃石論詳道義皆曰斯誠出要樂也後臥疾少時弟子跪問荅曰吾之常長生不欣夕死不慼乃面西正坐第一義空淸淨智觀言如入定遂長往春秋七十有七卽武德五年十二月六日也露骸松石一月餘色不變天策上將聞稱希有遣人就端拱如生自超九歲入道卽誦法華五十餘年萬有餘遍感靈獲瑞可勝言弟子法成等爲建白塔于寺之北峯焉

6) 백제국(伯濟國) 달나산사(逹拏山寺) 석혜현전(釋慧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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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현은 백제국(伯濟國)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출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한 곳에 모아 『법화경』을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가 복을 빌고 소원을 청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
그후 3론(論)에 대한 강의를 듣고 곧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법이 일단 정신에 배어들자 그 나머지 것들도 더욱 증장되었다. 그는 처음에 본국의 북부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에 거처하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의하고 없으면 곧 맑은 소리로 경을 외웠는데,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그후 다시 남쪽의 달나산(逹拏山)으로 갔는데 그 산은 매우 깊고 험하였으며 더욱이 견고한 바위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비록 찾아가 보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산에 오르기가 어렵고 위험하였다. 법현은 그 속에 조용히 앉아 예전과 같이 과업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함께 배우던 도반(道伴)들이 그의 시신을 가마로 실어다가 석굴 속에 안치하였는데 호랑이가 살과 뼈는 모두 먹었으나 해골과 혀만은 남겨놓았다. 3년이 지나니 그 혀의 색이 더욱 붉어지고 살아 있는 사람의 것보다 더욱 부드러워졌으나 그후에는 자색으로 변하여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에 도속들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공경하였으며 함께 봉하여 석탑에 보관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8세였으니 정관(貞觀) 초년의 일이었다.
032_1247_a_08L 伯濟國人也少出家苦心精以誦法華爲業祈福請願所遂者聞講三論便從聽受法一染神增其緖初住本國北部修德寺有衆則講無便淸誦四遠聞風造山諠接便往南方達拏山山極深險重隒巖縱有往展登陟艱危顯靜坐其中專業如故遂終于彼同學輿屍置石窟中虎噉身骨竝盡惟餘髏舌存焉經于三周其舌彌紅赤柔軟勝常後方變紫鞕如石道俗怪而敬焉緘閉于石塔時年五十有八卽貞觀之初年也


7) 당나라 의주 복성사(福成寺) 석도적전(釋道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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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1247_b_02L도적은 촉(蜀) 사람이다. 그는 익주 복성사에 주석하면서 『열반경』을 외워 정통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 항상 그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평소 설법을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법좌(法座)에 앉은 다음에야 가르침을 시작하였다.
그는 천성이 침착하고 자상하여 자애로움과 어짊에 힘썼다. 당시 문둥병에 걸려 피부가 문드러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병이 더욱 심해지니 사람들은 코를 막고 피하였지만 도적은 그와 함께 있으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해주었다. 그는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혹 같은 그릇으로 식사를 하거나 옷을 기원주기도 하고 혹은 상쳐를 빨아주기도 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적이 말하였다.
“청정하다거나 더럽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어찌 그런 마음을 지닌 자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정신을 도야하고 단련하여 모두가 그의 행위를 우러러 흠모하였지만, 도적은 자신이 칭찬받을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근심하였다.
정관(貞觀) 초년 5월에 거처하던 절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0여 세였다. 때는 무더운 여름철이었으나 그의 시신은 썩거나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백 일 동안 그냥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같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으므로 감탄하고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곧 시신에 칠포(漆布)를 더하니 파촉(巴蜀) 지방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서울의 모든 스님들 가운데 『열반경』을 받아 외우는 전례가 많아졌다.

홍원(洪遠), 승은(僧恩)
이밖에도 홍원과 승은이라는 스님들이 있어서 나란히 『열반경』을 외우며 도속들을 회향시켰다.
홍원은 진실하고 두터운 정성을 숭상하는 데 뜻을 두었으며 마음속에 명예와 이익을 버렸다. 그후 부름을 받고 회창사(會昌寺)로 들어갔는데 남다른 큰 대우와 공양을 받았다.
승은은 도심(道心)이 맑고 엄숙하였으며 절도가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는 홍복사(弘福寺)와 선정사(禪定寺) 두 사원에서 공덕이 높았으나 겸손하게 처신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속인들 중에는 그를 아는 자가 적었다.

지엽(智曄)
당시 홍복사에는 지엽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본래는 강남 사람이었으나 수나라 때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법화경』을 대단히 좋아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항상 『법화경』을 베껴 썼다. 그리고 밖으로부터 얻은 이익으로는 곧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후해서 2천여 부의 책을 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독려하면서 하루에 다섯 장의 경을 베껴 썼는데, 만년에 이르도록 이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미륵사(彌勒寺)의 총사임(總寺任) 맡아보고 있는데 나이는 70여 세이다.
032_1247_a_21L 蜀人住益州福成寺誦通涅生常恒業凡有宣述必洗滌身穢淨衣法座然後開之立性沈審慈仁摠務諸有厲疾洞爛者其氣彌復鬱衆咸掩鼻而積與之供給身心無或同器食或爲補浣時有問者淸淨臭處心憎愛也吾豈一其神慮耶寄此陶練耳皆慕其爲行也患己不能及之以貞觀初年五月于住寺春秋七十餘矣時屬炎夏不腐臭經停百日跏坐如初莫不嗟乃就加漆布興敬巴蜀京邑諸僧受誦涅槃其列非少又有沙門洪遠僧恩竝誦涅槃皁素迴向遠志尚敦情捐名利徵入會昌隆禮供給道心淸肅成節動人弘福禪定兩以崇德而卑牧自處蒙俗罕知時弘福寺有沙門智曄者本族江表隋朝徵深樂法華鎭恒抄寫所得外利用雇人前後出本二千餘部身恒自日寫五張年事乃秋斯業無怠摠寺任彌勤恒業年七十餘矣

8) 당나라 익주 복수사(福壽寺) 석보경전(釋寶瓊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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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1247_c_02L보경은 속성이 마씨(馬氏)이며, 익주 면죽(綿竹)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청정(淸貞)하고 검소하였으며 『대품경(大品經)』을 이틀에 한 번씩 독송하는 것을 평상시의 업으로 삼았다. 그는 여러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다른 방술은 쓰지 않았고 오직 믿고 귀의하기를 권유하고 불법을 존경하라 하였다.
만년에는 익주의 중심지로 옮겨가 복수사(福壽寺)에 주석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끌면서 그들과 맺은 의리를 우선으로 삼았다. 한 고을을 결속할 때마다 반드시 30명이 함께 『대품경』을 외우게 하였고 사람마다 한 권의 경을 갖추도록 하여 매달 재(齋)에 모일 때마다 각기 차례에 따라 외우게 하였다. 이와 같이 의리를 맺은 고을의 수효가 천 고을에 이르게 되었으며 사방에서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찾아와 친교를 맺었다.
보경이 근기와 인연에 따라 교화를 베푸니 모두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한결같이 그를 우러렀으나,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공덕은 뒤로 미루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모여 그를 에워싸고 그가 길을 나서면 서로 비켜주었다. 질문에 대답할 때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겸손하게 말하였으니 이는 실로 도량이 있는 행위였으며 때에 따라 아첨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본 고을과 이웃하고 있는 열 고을의 여러 현(縣)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도교를 믿는 사람들뿐이어서 특히 부처님을 받들지 않았는데 승려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있어도 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늙은이로부터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스님이나 불상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보경은 비록 그곳이 고향 땅이었으나 습관과 풍속을 고치기 어려웠으며 개중에는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자도 있었으나 받아들일 만한 자는 없었다.
어느 날 도교의 여러 무리들이 정식으로 도회(道會)를 열고 보경을 청하기에 그곳으로 갔다. 그가 늦게 도착하여 절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니 여러 사람들이 천존(天尊)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법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보경이 말하였다.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는 길이 다르며 섬기는 대상도 각기 다르다. 나는 황제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노군(老君)에게 절을 하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들이 분분하게 의논하고서 자못 그를 능욕하고 모욕을 주려고 하자 이에 보경이 말하였다.
“내가 절을 하지 말아야 할 곳에 절을 하면 아마도 큰 화(禍)를 입게 될 것이다.”
마침내 절을 한 번 하니 나란히 놓여 있던 도상(道像)들이 진동하면서 안정하지 못하다가 다시 한 번 절을 하니 연달아 거꾸러지며 넘어져 상이 부서져서 땅에 떨어졌다. 이에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면서 바람이 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다투어 와서 두루 이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보경이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니 함부로 원망하지 말라.”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상을 안치하였을 때 보경이 다시 절을 하니 앞에서와 같이 무너졌다. 그제야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손을 들어 보경에게 절을 하였으며 일시에 믿음을 돌려 그에게서 계법(戒法)을 받았다. 그리고 인접한 현의 도교를 믿는 무리들도 함께 찾아와 감탄하고 의아해하면서 모두 불법을 받들게 되었다.
당시는 불교의 교화가 처음으로 열린 때이기에 모두 보살계(菩薩戒)를 주었다. 그 고을 현령(縣令)인 고원(高遠)은 본래 정성껏 공양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그 소문을 듣고 더욱 도를 부양하였다. 다시 주(州)의 절에서 스님들을 불러 널리 강의를 펴도록 하니 온 경내의 사람들이 불법에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불법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정관(貞觀) 8년에 머무르던 곳에서 생을 마쳤다.
032_1247_b_20L 馬氏益州緜竹人小年出家淸貞儉素讀誦大品兩日一遍爲常途業歷遊邑洛無他方術但勸信向尊敬佛法晩移州治住福壽寺率勵坊郭邑義爲先每結一邑必三十人合誦大品人別一卷月營齋集各依次誦如此義邑乃盈千計四遠聞者皆來造款瓊乘機授化望風靡服卑弱自持先人後德經行擁鬧下道相避言問酬對怡聲謙敬斯實量也不媚於時本邑連比什邡諸縣竝是道民尤不奉佛僧有投寄無容施者致使老幼之徒於沙門像不識者衆瓊雖桑梓習俗難改徒有開悟莫之能受李氏諸族正作道會邀瓊赴之來旣後至不禮而坐僉謂不禮天尊非法也瓊曰邪正道殊所事各異尚不禮何況老君衆議紜紜頗相凌瓊曰吾禮非所禮恐貽辱也遂禮一拜道像幷座動搖不安又禮一拜連座返倒摧殘在地道民相視謂是風鼓競來周正瓊曰斯吾所爲勿妄怨也初未之信旣安又禮如前崩倒合衆驚懼擧掌禮瓊一時迴信從受戒法旁縣道黨相將嘆訝咸復奉法時旣創開釋化皆授菩薩戒焉縣令高遠者素有誠敬承風敷導更於州召僧弘講合境傾味自此而繁貞觀八年終於所住

9) 당나라 여산(驪山) 진량사(津梁寺) 석선혜전(釋善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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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1248_a_02L선혜는 속성이 구씨(苟氏)이며, 하내(河內) 온주(温州) 사람이다. 그는 수많은 전적에 널리 통달하였고 글의 뜻을 통괄하여 구장(九章:굴원의 「離騷經」 등 아홉 가지 글)과 율력(律曆:음악과 책력)ㆍ칠요(七曜:天文)의 변화와 운행에 대하여 모두 가슴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듯 손바닥을 보듯 훤하게 달통하였다. 그는 세간의 일들을 깊이 생각해보고 끝내는 지옥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마침내 관복(官服)을 벗고 잠홀(簪笏:벼슬의 상징물)을 뽑아 던지고 비로소 스님의 대열에 귀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 서주(徐州) 팽성사(彭城寺)에 있으면서 『법화경』을 외우고 『섭대승론』 강의를 들으며 익혔다.
당시에 도적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자주 침범하여 빼앗아갔지만 선혜는 주린 배를 안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법을 받드는 데 게으름이 없었으며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청정한 것을 수호하면서 여느 때보다 더욱 수도에 정진하였다. 다만 그가 있던 곳은 변방의 고을이어서 학문을 한 스님이 적어 문자에 오류가 많았고 발음과 해석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는 비록 속세의 글에는 당시 정통한 사람이었으나 근본적인 이치의 그릇된 것과 바른 것을 갈라내는 데 뜻이 있었으므로 두루 밝게 깨달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다시 이전에 품은 의문을 같이 풀어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업(大業) 말년에는 석장을 짚고 서쪽으로 갔는데 도중에 여러 번 도적떼를 만나 옷가지는 거의 다 빼앗기고 다만 해진 옷으로 눈가림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깨진 물병만을 지니고도 항상 청정한 행을 유지하였다.
이미 관문에 이르렀으나 본래 지니고 있던 유문(繻文:관문의 통행증)이 없었기에 정념(正念)으로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니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때 관문의 안과 밖에는 칼을 찬 사람들이 줄지어 지키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로막는 제지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초겨울인 10월에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때마침 길장(吉藏) 법사가 『법화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본래의 의도했던 것과 꼭 들어맞았으므로 곧 그에게 의지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의 옷차림이 남루하여 사람들이 들여놓지 않으니, 이에 눈을 쓸고 맨땅에 홑 군의(裙衣)와 속옷차림으로 앉아 강의를 들었다. 도강(都講)4)이 비로소 열리자 말과 글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경문을 나름대로 해석을 하였었는데, 길장 법사가 이를 환히 밝혀주니 그는 이에 용맹정진하여 그 뜻을 받들어 널리 이치에 달통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지혜와 관행 두 가지 모두를 얻으려는 데 있었기에 추위에 대하여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니 마치 장사꾼이 보배를 얻었을 때와 같았다. 겨울을 다 지나도록 항상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찬미하면서 글의 뜻에 대해 물어보면 조금도 빠뜨리거나 잊어버린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법을 들은 공덕으로 선정사(禪定寺)에 소속되게 되었는데, 이때 사문 법희(法喜)가 옷을 벗어주며 맞이하여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법희는 지혜와 관행에 넘치는 것이 없었으므로 선혜는 다시 법희에게 사사받았다. 그리하여 두 곳에서 빛나는 풍모를 떨치게 되었다.
무덕(武德) 연간 초엽에 법희를 따라 남전(藍田)의 진량사(津梁寺)에 주석하였는데, 그곳의 풍속은 본래 여융(驪戎:서남쪽의 이민족이 세운 나라) 사람들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혜는 그들을 거느리고 권고하고 교화하여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불법을 믿게 하였다.
그는 본래 영준하고 현명한 사람을 사랑하여 서로 초대하고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서로 백여 리의 구간에 있는 이름난 숲과 경치 좋은 곳에 모두 선방(禪坊)을 세우니 세상을 도피한 인재들이 그곳에 의지하여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는 정관 9년 정월에 여산(驪山)의 남쪽 양천정사(涼泉精舍)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처음 선혜가 속가의 책들을 버리고 불문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는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리는 일이 없었고 불도의 수행에 전심하였다. 그는 말을 적게 하고 음식을 절약하였으며 계율을 마음에 새기고 어진 마음을 품었으며 손님들을 맞이하여 머물도록 하며 경의 가르침을 존중하였다. 만약 아직 경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직접 보게 하였고 만약 수행에 가늠이 될 중요한 구절에 이르게 되면 여러 날 동안 외워 훈습(熏習)의 기초로 삼았다.

혜달(慧逹)5)
당시 태원(太原)의 사문 혜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역시 『법화경』을 5천여 번이에 걸쳐 두루 외워 걸어가거나 앉거나 거동을 할 때에도 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중생들의 생명을 존중하여 돌보았는데 한 번 앞을 보고서는 눈을 내리뜨고 걸으면서 혹 땅에 벌레가 있으면 반드시 몸을 돌려 피하고 감히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이것이나 나나 생사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앞으로 나보다 먼저 바른 깨달음을 이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찌 함부로 업신여기겠는가?”
정관 8년 4월에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생을 마쳤는데 사람들은 선정에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5일 동안 그대로 두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의 시신은 썩거나 냄새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곧 시신을 선상과 함께 굴 속에 안치하였다.
032_1248_a_03L 姓茍氏河內溫人博通群籍統括文義逮于九章律歷七曜盈虛皆呑若胸中扺掌符會乃深惟世務終墜泥塗遂解褐抽簪創歸僧伍在徐州之彭城寺誦法華經聽收攝時遭寇蕩兵食交侵而慧抱飢自奉法無殆洗穢護淨彌隆恒日以邊邑寡學文字紕謬至於音詁議紛然雖復俗語時通而慧意存雅周訪明悟還同昔疑乃以大業末齡負錫西入屢逢群盜衣裳略盡但有弊布自遮猶執破甁常充淨用旣達關口素闕繻文遂卽正念直前從門而度于時中表列刃曾無遮止孟冬十月初達京師値沙門吉藏正講法深副本圖卽依聽受形服鄙惡不納之乃掃雪藉地單裙▼(扌+親)坐都講財唱傾耳詞句擬定經文藏旣闡楊勇心承旨望通理義由情存兩得暇忍寒歡笑熙熙如賈獲寶竟冬常衆方美之問以詞旨片無遺忘以聞法同屬禪定寺沙門法喜便脫衣迎之引至房中智觀無濫慧又師兩振芳規武德初年隨住藍田之津梁寺俗本驪戎互相梗戾率獎陶十室而九然而性愛英賢樂相延自西自東百有餘里名林勝地皆建禪坊所以逃逸之儔賴其安堵貞觀九年正月終於驪山之陽涼泉精舍春秋四十有九初慧棄擲俗典莅此玄摸言不重涉專心道業省言節食佩律懷仁迎頓客旅雅重經教其有未曾覿者要必親觀若値行要累日誦持以爲熏習之基也太原沙門慧達者亦誦法華五千餘遍行坐威儀其聲不輟偏存物命直視低目地有虫豸必迴身而避敢跨越有問答曰斯之與吾生死不將不先成正覺安可妄輕之耶貞觀八年四月跏坐而終人謂入定停于五宿旣似長逝又不臭腐乃合牀內于窟中

10) 당나라 종남산 오진사(悟眞寺) 석법성전(釋法誠傳)
032_1248_b_21L釋法誠
032_1248_c_02L법성은 속성이 번씨(樊氏)이며 옹주(雍州) 만년(萬年)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藍田) 왕효사(王效寺)에 거처하면서 사문 승화(僧和)를 섬겼다. 승화는 고을 문족들 사이에서 추대를 받는 스님으로서 성인(聖人)처럼 그를 받들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그를 해치려고 밤에 그의 방으로 갔는데 문안에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나 휘장 위로 치솟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물러나 잘못을 뉘우쳤다. 승화는 맑은 샘물만 마셨는데 그것은 성품이 맑고 깨끗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희롱하려고 몰래 양(羊)의 뼈를 샘물에 넣어두었는데, 승화는 본래 그것을 모르고 마셨으나 곧 토해버렸다. 그윽한 감응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법성은 그의 가르침을 받들어 가슴에 새기고 『법화경』을 힘껏 외우면서 그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후 다시 선림사(禪林寺)의 상(相) 선사를 만나 선정의 수행에 대하여 물었으며, 공덕이 당시의 종사(宗師)들보다 뛰어나고 학문이 우수하여 대중들이 우러러보았다. 만년에는 운화사(雲花寺)에 머무르면서 승단을 거느리고 다스렸다.
그후 수나라 문제가 그의 덕을 공경하고 흠모하여 그의 계범(戒範)에 따르고자 초청을 하였으나, 곧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면서 박절한 말로 황제의 예우를 물리쳤다. 이에 마침내 보따리를 등에 지고 멀리 길을 떠나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던 훌륭한 벗들도 모두 그의 뜻한 바를 이어받았다.
이어 혜초(慧超) 스님이 깊고 고요한 곳에 은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고 남곡(藍谷)에 깃들게 되었다. 그곳은 매우 협소하여 겨우 침상 하나 놓을 정도였고, 돌아다니며 경행함에도 깊은 구렁에 빠질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곧 오솔길을 정리하고 숲을 개척하여 햇빛이 스며들게 하였으며 띠풀로 지붕을 이고 항아리의 입구만한 창문을 내고 성긴 처마를 만드니 마음과 일이 서로 흔연히 부합되었다. 이른바 오진사(悟眞寺)가 바로 그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얻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면서 받들어 수행하였으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게 하였다.
어느 날 꿈에 보현보살이 감응으로 나타나 대교(大敎)를 쓰라고 권고하자, 이에 법성이 ‘대교라는 것은 대승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이른바 반야(般若)가 그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곧 청정한 곳에 들어가 도를 행하면서 장인(匠人)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어 8부의 『반야경』을 쓰게 하였으며 향대(香臺)와 보배로운 책들을 장엄하였다. 또한 절의 남쪽에 가로놓인 고개에 화엄당(華嚴堂)을 지으니 산과 골짜기로 둘러막힌 그곳에 여러 동(棟)의 건물이 용마루를 쳐들고 줄지어 늘어섰다. 이곳은 앞에는 겹겹이 높은 봉우리가 마주 보이고 오른쪽에는 경사진 골짜기와 닿아 있으며 구름과 안개를 토해내고 삼키면서 우레를 내려다보였다. 나도 일찍이 가보았는데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또한 나는 그곳에서 그의 정성스런 뜻을 보았고 베껴 쓴 경도 받아 간직하고 있다.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 장정(張靜)이란 당시 필공(筆工)이라 불리고 있었는데 글씨를 쓰는 데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이에 그를 청하여 절에 이르니 그에게 재계(齋戒)를 받도록 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곳에서 스스로를 닦고 입에는 향즙(香汁)을 머금고 몸에는 새 옷을 입게 하였다. 그러나 장정은 베껴 쓰기를 더디게 하여 경전을 50장도 못 되게 필사하였다. 법성은 그가 돈을 바란다는 것을 짐작하고 경전 두 장에 5백 전(錢)을 주겠다고 하니, 그만한 돈이면 큰 이득이라 생각하고 곧 힘을 다하여 베껴 써서 한 부의 경전을 다 베껴 쓰기를 마쳤다. 법성은 이로써 매일 향을 태우며 공양하였고 그것을 책상 위에 놓고 점 하나 획 하나에 대해서도 마음을 기울여 꼼꼼히 살펴서 조금도 놓치는 것이 없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지극한 마음과 바위라도 뚫을 듯이 쏟는 정성으로 기이한 새가 나타나는 감응이 있었는데 모양과 색깔이 세상에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 새는 법당 안에 날아 들어와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으며 경전이 있는 책상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향로에 날아올라 날개를 접고 조용히 앉아 구경하곤 하였다. 이렇게 그 새는 자연히 길들여져서 친숙하게 지내다가 오랜 후에 떠나갔다. 그 다음 해에 경전을 베껴 쓰는 일을 마치고 축하하는 의식을 하자 그 새가 다시 날아와 이전처럼 분주히 날아다녔는데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면서도 맑았다.
정관(貞觀) 초년에 천불(千佛)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새가 다시 날아와 화공(畵工)의 등에 올라앉았다. 그후 재(齋)를 마련하고 여러 경전과 화상에 경하를 드렸는데 그날 한낮이 되어도 그 새가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 법성은 산마루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새가 아직 오지 않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이제 감응이 없어진 것인가? 여러 가지 더러운 행위를 겸하여 이런 징조가 이루어진 것이나 아닌가?”
말을 마치자 홀연히 새가 날아와 빙빙 돌면서 울어대다가 향수 속에 들어가 몸을 흔들며 목욕을 하고 정오가 지난 후에 떠나갔다. 전후해서 있었던 이와 같은 기이한 일들은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는 본래 문장에 능하여 세간에서 그를 떠받들었다. 산 길가의 바위 절벽에 새겨진 여러 경전의 게송은 모두 그의 필적이었다. 어느 날 거리에 앉아서 직접 『법화경』을 베껴 쓰고 있었는데, 다른 일이 생겨 자리를 뜨면서 책상을 미처 거두지 못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큰 비가 내려 도랑물이 불어났는데, 달려가 보니 다른 곳에는 빗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책상만은 모두 말라있었다.
한번은 소나무 밑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깊은 물웅덩이 속으로 떨어졌는데, 밑바닥에 이르기 전에 저도 모르는 사이 높은 언덕에 올라가 있었으며 털끝 하나도 다친 데가 없었다. 또한 청니방(靑泥坊)의 옆에 낡은 불감(佛龕)이 있었는데 북주(北周) 때 파묻힌 채 그때까지 그냥 묻혀 있었다. 법성은 어느 날 밤에 꿈에서 그곳에 큰 부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그곳으로 가서 헤쳐 보니 과연 낡은 불감에서 불상이 발견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모두 깎이고 파괴되었기에 그것을 모시고 가서 수리하니 도속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어난 슬기의 공덕으로서 법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었다.
정관 14년 하안거가 끝나는 날에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고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이에 그는 물을 가져오게 하고는 목욕을 하였으며 다시 상여(喪輿)를 가져오게 하여 스스로 살펴보면서 호화롭게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월말에 이르러 해가 뜨려고 할 때 느닷없이 말하기를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 거문고와 노래는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으며, 다시 모시고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며 생멸은 멈추지 않는다고 들었다. 구품왕생(九品往主)이라는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지금 한 동자가 나를 마중하려고 오래전부터 문 밖에 서 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대들에게는 부처님의 바른 계율이 있으니 그것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기면 나중에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입에서 광명이 나와 방 안을 비추었으며 또 기이한 향기가 풍겨 방 안 가득하였다. 다만 단정히 앉아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으니, 그의 정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법성이 경전을 외우고 익힌 것을 본다면 한 해 하안거 동안에 『법화경』을 5백 번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고 다른 날에는 독송을 겸하여 행하였는데도 두 번씩 외울 수 있었다. 비록 손님이 있는 경우 꼭 할 말이 있는 사람이라도 경부(經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중간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간략히 계산하여도 10년 동안 부지런히 외운 것이 1만여 번에 달하였다.
032_1248_b_22L 姓樊氏雍州萬年人童小出止藍田王效寺事沙門僧和和亦鄕族所推奉之比聖嘗有人欲害往其房見門內猛火騰焰昇帳遂卽退悔性飮淸泉潔淸故也人或弄之密以羊骨沈水和素不知飮便嘔吐其冥感潛識爲若此矣誠奉佩訓勖講法華經以爲恒任又謁禪林寺相禪師詢于定行而德茂時宗學優衆晩住雲花綱理僧鎭隋文欽德遵戒範乃陳表固辭薄言抗禮遂負笈長驅歷遊名嶽追蹤勝友咸承志因見超公隱居幽靜乃結心期遲藍谷處旣局狹纔止一牀旋轉經恐顚深壑便剗迹開林披雲附景茅茨葺宇甕牖疏簷情事相依然符合今所謂悟眞寺也法華三昧翹心奉行澡沐中表溫恭朝夕夢感普賢勸書大教誠曰大教大乘也佛智慧所謂般若於卽入淨行道惠匠人書八部般若香臺寶軸莊嚴成就又於寺南撗嶺造華嚴堂陻山闐谷列棟開甍前對重巒右臨斜谷吐納雲霧下瞰雷霆余曾遊焉實奇觀也又竭其精志書寫受持弘文學士張靜者時號筆工罕有加勝乃請至山舍令受齋戒潔淨自修口含香身被新服然靜長途寫經不盈五誠料其見財兩紙酬其五百靜利其貨竭力寫之終部以來誠恒每日燒香供養在其案前點畫之閒心緣目睹略無遺漏故其剋心鑽注時感異鳥形色希世飛入堂中徘佪鼓儛下至經案復上香爐攝靜住觀自然馴狎久之翔逝明年經了將事興慶鳥又飛來如前馴擾鳴唳哀亮貞觀初年造畫千佛鳥又飛來登上匠背後營齋供慶諸經像日次中時怪其不至誠顧山岑曰鳥旣不至誠吾無感也將不兼諸穢行致有此徵言已欻然飛來旋環鳴囀入香水中奮迅而浴中後便逝前如此者非復可述素善翰墨鄕曲所推山路巖崖勒諸經偈皆其筆也手寫法華正當露地因事他行未營收擧屬洪雨滂注㵎波飛走往看之而合案竝乾餘便流潦嘗卻偃撗松遂落懸溜未至下不覺已登高岸無損一毛又靑泥坊側有古佛龕周氏瘞藏今猶未出夜夢其處大有尊形旣覺往開恰獲古龕像年月積久竝悉剝壞就而修理道俗稱善斯竝冥術之功自誠開發至貞觀十四年夏末日忽感餘疾知卽世願生兜率索水浴訖又索終輿旁自撿挍不許榮厚恰至月末相將現無故語曰欲來但入未假弦顧侍人曰吾聞諸行無常生滅不九品往生此言驗矣今有童子相久在門外吾今去世爾等佛有正無得有虧後致悔也言已口出光照于楹內又聞異香苾芬而至見端坐儼思不覺其神已逝時年七十有八然誠之誦習也一夏法華料五百遍餘日讀誦兼而行之猶獲兩縱有人客要須與語者非經部度中不他言略計十年之勤萬有餘遍

11) 당나라 경사(京師) 회창사(會昌寺) 석공장전(釋空藏傳)
032_1249_b_18L釋空藏
032_1249_c_02L공장의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그의 선조는 진양(晉陽)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옹주(雍州) 신풍(新豊)에 살고 있다. 그의 모친이 처음 그를 잉태하던 날부터 자연히 술과 고기와 오신(五辛:매운 맛을 내는 파ㆍ마늘ㆍ생강ㆍ겨자ㆍ후추의 다섯 가지)을 먹지 못하였는데, 당시 이것을 사리불과 같은 사람을 임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남몰래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태어나 성장하면서 신령스러운 마음이 날을 따라 베풀어져 마음가짐이 높고 원대해졌고 경론을 독송하며 중생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나이 열아홉 살이 되자 부처님처럼 출가하려고 하였으나, 아내와 부모가 앞길을 막을 것이라 생각하고 곧 아버지 앞에서 온몸을 땅에 붙이고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으니, 그의 목숨이 끊어질까 두려워 비로소 그의 소원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남전(藍田) 부아산(負兒山)으로 가서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처음 여섯 말의 밀가루를 미련해 가지고 한 달 식량으로 정하고 하루에 두되 씩 먹었으나 삼 년이 지나도 다하지 않았으며 여러 번 감응이 일어나 신정(神鼎)이 자연히 그곳에 나타났다. 이런 까닭에 그는 선정과 외우는 일에 더 힘을 키우려 새벽부터 밤까지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
그후 판(判) 법사에게 의지하여 용지사(龍池寺)에 주석하면서 경론을 매우 공경하였으며, 매일 만 언(萬言)을 외워 전후하여 외운 것이 총 삼백여 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3론(論)과 『열반경』에 대하여 그 깊은 뜻을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대업(大業) 초엽에 공장(空藏)은 명성이 멀리 도속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자, 칙명을 내려 불러들여 선정사(禪定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법당들을 수리하는 일을 크게 벌였고 황제는 칙명을 내려 금성방(金城坊)에 회창사(會昌寺)를 세우고 아울러 대덕 스님들 열 명과 승려 50명을 초청하여 영구히 그곳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이때 공장은 행위와 공덕이 일찍부터 알려졌기 때문에 다시 그곳에 초청을 받아 주석하게 되었는데 공양하는 일이 더욱 융숭하였고 평소의 아름다움을 한없이 빛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뜻을 맑고 넓은 곳에 두었으므로 해마다 2월이 되면 숲이나 산으로 유랑(流浪)하다가 옥천사(玉泉寺)에 이르러 마침내 그곳에서 생을 마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몇 해를 보내니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들었으며, 그가 피로도 잊고 설법하고 인도하자 깨닫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후 심한 가물이 들어 시간이 흐르자 산의 샘물이 말라버리니 온 절의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탄식하였는데 공장이 곧 지극한 마음으로 빌고 청원하니 그 샘물이 당장에 회복되었다. 그러자 멀고 가까운 곳의 도속들이 안색을 바꾸어 서로 기뻐하였다.
아울러 그는 큰 지조가 산악처럼 높았고 헤아림이 강처럼 깊었으며 영리(榮利)에 흔들리지 않았고 총욕(寵辱)을 마음에 품어두지 않았으며 중생들을 구제하는 데 짧은 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경전 중에서 대승의 중요한 구절들을 뽑아 책으로 엮었는데 종이마다 다섯 경(經)과 세 경으로 나누니 한 부가 20권이나 50권에 달하여 총 10책이 되었다. 그는 매일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하였고 지식과 논리 두 측면 모두 완벽히 하여 하나로 치우쳐 미혹되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하안거 때에는 항상 방등참법(方等懺法)을 행하여 현겁(賢劫:現在劫)의 천불(千佛)에게 매일 한 차례 씩 예배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눕지 않고 앉은 상태로 30년을 지내면서 부지런히 정신을 한 곳에 쏟아 부처님의 자취를 잇기에 노력하니 이보다 더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정관(貞觀) 16년 5월 12일 회창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시신은 용지사 옆에 두었다가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가 독송한 양을 헤아려보면 매우 많아 고금을 통틀어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해골을 보니 두 귀가 통명(通明)하였고 정수리에 두 개의 구멍이 있었으며 눈자위에도 각기 세 개씩의 구멍이 있었다. 제자들이 그가 영원히 세상을 떠난 것을 추억하여 회창사에 비석을 세웠는데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위위경(衛尉卿) 우지녕(于志寧)이 비문을 지었다.
032_1249_b_19L 俗姓王氏先祖晉陽今在雍州之新豐焉母初孕日自然不食酒肉五辛時以同塵身子故密加異之旣誕育後靈鑑日陳情用高遠讀誦經論思存拔濟至年十九同佛出家旣惟一己二親留㝵乃於父前以身四布七日不起恐其命絕方從所願卽辭向藍田負兒山中私自剃落齎麪六斗擬作月糧日噉二升三年不盡屢感神鼎自然而至由是增其禪誦晨宵無輟後依止判法師住龍池寺欽重經論日誦萬言前後摠計三百餘卷三論涅槃探窮巖穴大業之始以藏名稱惟遠道俗所聞下勅徵延入住禪定唐運旣興崇繕法宇有勅於金城坊建會昌寺幷請大德十人度僧五十人永用住持以藏行德夙彰又請住焉供事彌隆極光恒而性樂山水志存淸曠每年仲春遊浪林阜行次玉泉遂有終焉之思居止載紀衆聚如山說導亡疲開悟逾廣後爲亢旱經時山泉乃竭合寺僧衆咸以驚嗟藏乃至心祈請其泉應時還復遠近道俗動色相歡兼又弘操嶽峙器局川停不擾榮利不懷寵辱濟度群有不略寸陰乃鈔摘衆經大乘要句以爲卷軸紙別五經三經卷部二十五十摠有十卷每講開務增成學聞義兩持偏無迷忘夏分常行方等懺法賢劫千佛日禮一遍坐不臥垂三十年翹勤專注難加係以貞觀十六年五月十二日終於會昌春秋七十有四遺身於龍池寺收骨起塔觀其讀誦之富振古罕視其髏骨兩耳通明頂有雙孔眶含竅各有三焉弟子等追惟永往樹碑於會昌寺中金紫光祿大夫衛尉卿于志寧爲文

12) 당나라 경사 대장엄사(大莊嚴寺) 석혜전전(釋慧銓傳)
032_1250_a_10L釋慧銓
032_1250_b_02L혜전은 속성이 소씨(蕭氏)이며, 지금 특지관(特進官)으로 있는 송공(宋公) 우(瑀)의 형님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은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양공(梁公)이 되었으며 그의 조부는 양(梁)나라의 명제(明帝)였다.
그는 성품과 도량이 넓고 간결하였으며 뜻과 생각이 깊고 순수하였다. 그의 고모는 수나라 양제의 황후였으므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항상 궁궐에 있었다. 그는 세속을 벗어나기를 그리워하고 즐거워하면서도 연건이 안 되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20세에 이르자 황제는 곧 장가를 보내어 진효왕(秦孝王)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이 부득이하여 장가를 들었는데 아내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오래전부터 품은 뜻을 이루게 되어 정씨(鄭氏)가 지배하던 동도(東都)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무덕(武德) 초년에 비로소 서울로 돌아가 장엄사(莊嚴寺)에 머무르면서 많은 경전들을 널리 듣고 익혔는데, 특히 『섭대승론』에 마음을 쏟았다. 그는 제법 많은 책을 읽고 외웠으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여 그가 붓을 들어 쓴 글들은 모두 서체의 모범이 되었다. 이 때문에 경전의 제목이나 사원의 현판 등을 쓸 때는 모두가 그를 추대하고 우러러보았다.
그의 형인 소균(蕭鈞)이 동궁(東宮)의 중사인(中舍人)으로 임명되자 혜전을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천거하여 조정에 소속시켰다. 그들은 매해 봄과 가을에는 서로 의지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 노닐면서 흥이 나면 글도 쓰고 같은 운자(韻字)로 시구를 이어가니 당시 이들을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하였다.

지증(智證), 송공(宋公)
또한 그의 아우인 지증도 출가하여 함께 주석하였는데 곧 송공의 형인 태부경(太府卿)의 아들이다. 그는 영예로운 좋은 벼슬자리를 좋아하지 가벼이 생각하고 불도의 수행을 가슴에 품고 부지런히 스스로 노력하면서 밤과 새벽을 가리지 않았다. 지증은 형 혜전이 세상을 떠난 후 생을 마쳤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하였고 특히 『법화경』을 널리 퍼트렸는데 가문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를 외웠다. 이 때문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법화경』에 밝다고 도속들 사이에 칭송이 자자했다.
특진관(特進官) 송공(宋公)은 『법화경』 소(疏)를 편찬하였는데 10여 명의 대가들의 글을 모두 모아 화려한 문장들을 골라내고 여기에 자기의 생각을 붙여 책으로 완성하였다. 그는 항상 스스로 그것을 널리 퍼트렸으며 때로는 서울의 유명한 스님들을 초청하여 잘못된 곳을 지적하게 하였다.
또 친족 가운데 비구와 비구니가 된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그 수가 20명에 달하였으나 그들에게 공급하고 배푸는 공양은 일 년 사계절 때에 따라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봉록(封祿)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오직 모두를 구제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또한 태부의 성품은 독송을 좋아하여 이를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외운 것이 만 번에 달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고용하여 경전을 뽑아 베껴 쓴 것이 총 천 부(千部)나 되었다.
그는 날마다 조참(朝參)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인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을 손에 들고 앞에 서도록 하였으며, 일을 보는 시간에도 조금만 틈이 생기면 경을 전독(轉讀)6)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의 동료들이 우러르면서 뛰어나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교화가 동쪽으로 전해진 이래로 그 뜻이 유포된 것은 오래되었으나 그것을 이어받아 독송한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은 드물었으니 소씨의 온 가문사람들은 천하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032_1250_a_11L 姓蕭氏今特進宋公瑀之兄子也父仕隋爲梁公祖卽梁明帝矣性度恢簡志用沖粹姑卽隋煬之后自幼及長恒在宮闕慕樂超世因自達年旣冠成帝乃尚以秦孝王女爲妻非其願也事不獲已時行伉儷及妻終後方遂夙心以鄭氏東都預茲剃落及武德初歲方還京輦住莊嚴寺廣聽衆部而以攝論爲心頗懷篇什尤能草隸隨筆所被用爲摸揩故經題寺額咸推仰之兄鈞任東宮中舍文才之擧朝廷攸屬每歲春秋相攜巖岫觸興題篇連句同韻時以爲難兄弟也又弟智證出家同住宋公之兄太府卿之子也略榮位之欣懷道業勤勤自課無擇昏曉與兄銓相次而卒以家世信奉偏弘法華同族尊卑咸所成誦故蕭氏法皁素稱富特進撰疏摠集十有餘採掇菁華揉以胸臆勒成卷數自敷弘時召京輦名僧指摘瑕累集親屬僧尼數將二十給惠以時四事無怠故封祿所及惟存通濟太府情好讀誦爲先故生至終誦盈萬遍雇人抄寫摠有千部每日朝參必使儐者執經在前至於公事微隙便就轉讀朝伍仰屬以爲絕倫自釋化東流味彌遠承受讀誦世罕伊人蕭氏一門可爲天下摸揩矣

13) 당나라 옹주(雍州) 예천(醴泉) 사문 석유속전(釋遺俗傳)
032_1250_b_16L釋遺俗
032_1250_c_02L유속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당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 옹주(雍州)의 예천현(醴泉縣) 남쪽 미천향(美泉鄕) 양륙(陽陸)의 집에 머무르면서 항상 공양을 받았다. 그는 청렴하고 검박하여 욕심이 없었으며, 오직 『법화경』을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고 밤낮을 이어가며 수천 번을 외웠다.
정관(貞觀) 초엽에 병으로 곧 생을 마치게 되자 친구인 혜곽(慧廓)에게 유언을 남겨 부탁하였다.
“비록 경을 외우기는 하였으나 생각으로는 영험이 있기를 바랐으며 그리하여 불교에 귀의하는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관에 넣지 말고 그냥 땅에 묻었다가 10년이 지난 후에 꺼내어 보아서, 그때 혀가 썩어 있으면 내가 불법을 수지(受持)하지 못한 사람으로 알 것이며, 혀가 남아 있으면 도속들에게 알려서 탑 하나를 세워 신령한 감응을 보여주게 하라.”
말을 끝내고 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유언대로 그냥 땅에 매장하였는데 정관 11년에 이르러 혜곽이 고인(故人)을 아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묘지에 가서 시신을 파냈더니 살은 모조리 썩어 없어졌으나 혀만은 썩지 않았다. 이에 온 고을의 남녀들이 모두 우러러 받들게 되었으며, 경을 외우는 기풍이 보통 때보다 갑절로 더해졌다. 곧 그 혀를 함에 넣어 양륙의 마을 북쪽 감곡(甘谷)의 남쪽 언덕에 전탑(塼塔)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이에 식자들은 이를 존엄하여 더욱 믿음과 공경을 높였으며 이로 인해 경의 독송이 다시 흥성하게 되었다.

사가담(史呵擔)
또한 서울의 서남쪽 풍곡향(豊谷鄕) 복수(福水) 남쪽에 있는 사씨(史氏) 마을의 사가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젊었을 때부터 착한 마음을 품고 항상 『법화경』을 외우며 안락행(安樂行)을 수행하였다. 그는 자비심이 있어서 짐승의 등에도 올라타지 않았으며 마음을 비우고 정숙하게 가다듬어 이름이 사씨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서울의 관청을 오가면서도 늘 외우는 습관을 유지하여서 길에서 아는 사람과 만나 인사말을 하면서 외우는 일이 중단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반드시 사람이 드문 작은 오솔길로 다녔으며 말소리는 낮추고 숨소리를 죽이고서 기쁜 얼굴로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고달프다고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후 그가 생을 마칠 때에는 감응으로 기이한 향기가 마을에 가득하니 친한 이건 소원한 이건 모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그의 시신을 묻었다. 그후 10년이 지나 아내가 죽게 되어 합장하기 위해 시신을 파냈는데 다른 것은 모두 썩었으나 혀만은 선명하였으므로 이에 이를 따로 꺼내어 장사를 지냈다.

현수(玄秀)
또한 황주(黃州) 수화사(隨華寺) 현수라는 스님은 성품이 맑고 삼가며 온공(溫恭)한 사람이었는데, 뜻을 세워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매번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으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해 몹시 무더운 날에 친우들이 서늘한 곳에 가서 사람을 보내어 현수를 불러다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다. 데리러 간 사람이 방 앞에 이르렀으나 호위가 엄숙하고 그 지키는 사람과 말이 엄청나게 큰 것을 보고 두려워서 돌아와 본 대로 말하였다. 그래서 다 같이 가보니 그 사람의 말과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방향을 바꾸어 뒷문에 이르니 그 지키는 무리가 더욱 많았고 공중을 바라보니 끝없이 허공에 가득 하였는데 코끼리와 말을 타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귀신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곧 그것이 감응이 통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버려두고 돌아왔으며 다음날 새벽에 부끄러워 사죄하였다.
그후 현수는 벗들과 거래를 끊어버렸으며, 오로지 자신의 업에 종사하다가 수(隋)나라 말엽에 절에서 생을 마쳤다.
032_1250_b_17L 不知何許人以唐運初開遊止雍州醴泉縣南美泉鄕陽陸家鎭常供養淸儉寡慾惟誦法華爲業夜相係乃數千遍以貞觀初因疾將終遺囑友人慧廓曰比雖誦經意望靈驗以生蒙俗信向之善若身死後不須棺盛露骸埋之十載可爲發出舌根必爛知無受持若猶存在當告道俗爲起一塔以示感靈言訖而終遂依埋葬至貞觀十一年廓與諸知故墓發之身肉都銷惟舌不朽一縣士女咸共仰戴誦持之流又倍恒度函盛其舌於陽陸村北甘谷南岸爲建塼塔識者尊嚴彌隆信敬誦讀更甚又京城西南豐谷鄕福水南史村史呵擔者少懷善念常誦法華行安樂慈悲在意不乘畜產虛約爲心霑令史往還京省以習誦相仍恐路逢相識人事暄涼便廢所誦故其所行必小逕左道低氣怡顏緣念相續不告倦及終之時感異香氣充於村曲親疏同怪遂埋殯之爾後十年妻乃發屍出舌根鮮明餘竝朽盡別標顯葬又黃州隨華寺僧玄秀者性淸愼恭爲志常誦法華每感徵異未以爲時屬炎暑同友逐涼遣召秀來有談笑旣至房前但見羽衛嚴肅馬偉大怖而返告同往共觀如初不轉至後門其徒彌盛上望空中塞無際多乘象馬類雜鬼神乃知其感通也置而卻返明晨慚謝朋從遂秀專斯業隋末終寺

14) 당나라 경사 나한사(羅漢寺) 석보상전(釋寶相傳)
032_1251_a_03L釋寶相
032_1251_b_02L보상은 속성이 마씨(馬氏)이며, 옹주(雍州) 장안(長安) 사람이다. 그는 열아홉 살에 출가하였다. 성품이 깨끗하고 정직하였으며 공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나한사(羅漢寺)에 주석하면서 『섭대승론』을 전심(專心)하여 듣고 허망한 의식은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였다. 강원은 시끄럽지 않은 때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선방(禪坊)으로 들어가 두타행(頭陀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고 육시예참(六時禮懺)을 40여 년 동안 계속하였다. 밤에는 스스로 일과를 독실하게 지키면서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일곱 번 두루 외우고 부처님의 명호를 6만 번 염불하였으며, 낮에는 대장경을 읽었는데 애초에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후 그는 마음을 모아 전심으로 『열반경』을 1천80번 염불하였고 아울러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평생토록 염송하였다. 그리하여 몸에서 근심과 번뇌가 없어지고 몸이 건강해지고 윤택해져서 닦고 익히는 것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찬밥이나 거친 옷도 얻는 대로 먹고 입었으며 마음에 괴로워하거나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뜻을 바른 행위에 두고 낮이나 밤이나 정신을 집중하여 독송하였는데 벼룩이나 이가 몸에 기어다녀도 그것을 뒤져보거나 잡을 겨를도 없었다.
그후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나 염송을 그만두는 일이 없었고, 마침내 임종을 앞두고는 도속들을 불러 이렇게 부탁하였다.
“염불을 우선으로 삼아라. 서방정토를 서로 기다리며 허송세월하지 말라. 그리고 나의 시신은 불태워버리고 탑이나 명(銘)을 새기느라고 범속한 속인들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
이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3세며 법랍은 62년이었다. 그는 재물을 조금도 모으지 않았고 승단의 법을 어긴 적이 없었다.

법달(法逹)
또한 같은 절에 법달이라는 스님은 성실하고 소박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공여된 보지의 돈으로 『화엄경』 8부와 『반야경』을 베껴 써서 향을 사르고 스스로 1백여 번을 두루 읽었다. 그는 생활이 항상 청렴하였고 문인을 두지 않고 홀로 느긋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남는 식량이 없었으니 이 사람도 깨끗한 고사(高士)였다.
나이가 70세에 이르자 평소에 읽던 경전을 가지고 가서 함께 수행하던 사람에게 선물하고 오직 『승천왕경(勝天王經)』 한 부만을 받들고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공직과 명예를 버리고 운양산(雲陽山)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인연을 갈무리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그후 4년이 지나자 마침내 그 산에서 생을 마쳤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근래에 눈으로 본 일이다. 이와 같은 독송에 의한 징조와 감응은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이에 관한 전기가 따로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고 간단하게 몇 가지만 요약하여 그 빛나는 실마리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독송편(讀誦篇) 총론(總論)
대체로 독송을 업으로 삼는 경우에는 본문(本文)에 대한 공부에 힘써야 한다. 경전에서 찬탄하여 교설하는 행위 가운데서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받아들여 외우는 것이니, 왜 그런가? 용렬한 사람의 지식으로는 그 내용을 아직 분석하지 못하기에 반드시 듣고서 외우는 방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대나무를 베어버리지 않고 어떻게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울리게 할 수 있겠는가?
이치로 보아 처음 출가하면 곧 경전들을 널리 읽어야 하며, 그 경위를 따져보고 내용과 이치를 끝까지 찾아서 의심스럽고 거짓된 기록들이 하나 둘 나타나면 눈앞에 있는 책들을 널리 읽고 이를 인간 세계에 비추어 평가한 후에 법구를 요약하여 외워서 심신(心神)을 진정시키고 인연의 근본을 널리 설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미혹의 번뇌를 없애버리면 마침내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하나하나 꿰뚫게 되고 의심나고 막혔던 것을 풀리게 되고 아울러 통화(通化)를 이루게 되며 불문의 요지[玄旨]를 아우르고 요약하여 일과 때에 맞게 이를 써서 바른 다스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수지독송(受持讀誦)과 서사해설(書寫解說)을 법에 맞게 수행하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된 훈계의 말씀이다.
세상에는 학문으로 타락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리석은 헤아림으로 저마다 자기만의 경계를 세우고는 자신이 얻은 이치를 일반적 견해로 삼기도 하고 학문을 통해 얻은 박식한 지식이 도리어 도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조달(調逹)이나 선성(善星)과 같이 학문의 범위가 넓고 풍부한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반특(槃特)이나 박구(薄拘)와 같이 아는 것이 적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중성(中聖)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은 논의들은 모두에 통하는 일반적 이론은 되지 못하지만, 대체로 도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 도라는 것은 막힘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막힘이 있으면 곧 도를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학문을 많이 하였다고 하여서 도에 장애가 될 수 있겠는가?
무릇 근본을 듣고 그 요지(要旨)를 모두 이해하였다고 해도 그에 그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가락에 끝에 막혀서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바로 이는 출요(出要: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이 한 가지 생각에만 치우치게 되면, 아직 학문만 하고 수행이 뒤따르지 않아서 남의 말만 따르면서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에 태어나서부터 일찍이 경(經)ㆍ율(律)ㆍ논(論)을 전혀 익히지 않은 사람은 미혹된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책을 손에 잡지 않겠다고 서원하고는, 교를 배우는 사람을 보면 문자에 집착한 사람으로 지목하게 된다. 이 때문에 교만이 마음을 뒤덮게 되니 이런 불치의 병을 누가 없앨 수 있겠는가?
여러 책들에 대하여 결단을 내리거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때에는 본래부터 귀머거리나 소경보다 더 모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깨우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오직 자기 마음속으로 억지 단정을 하게 되니 그 결론은 물결을 따라 떠다니는 것과 같아 기준이 없게 된다. 이에 옆에서 충고하게 되면 고치지는 않고 딴청을 피우며 서둘러댄다. 또한 몇 질의 책을 읽고 짤막한 문장을 대략 외우고서는 만족하게 여기고는 다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문득 『대집경(大集經)』에서 법행(法行)비구가 10주(住)의 경지에 오르면 많이 읽는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자위하는 사람도 있다.
내 가만히 생각하건대 교문(敎門)은 크고 넓어서 번뇌에 상대하여 그에 알맞은 약을 주고 있는데 어찌 번뇌가 많이 쌓이겠는가? 장부(藏部)에 있는 글들은 오직 그것을 받들고 수지하는 데 공덕이 있는 것인데, 듣고도 이에 의지하지 않고 짧은 생각으로 비교하고 헤아리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뒤바뀐 망상이 풀처럼 어지럽게 뒤엉켜 있고 오만과 아집이 산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러하니 널리 읽고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널리 다스리는 능력을 소유하여 경계에 따라 흐름을 살펴보고 막힌 것의 근본을 없애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어둠 속에서 인식이 아직 싹트지 않았는데 훈습을 모으고 이룩하는 것을 태만하게 하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전도되어 도리어 복이 뒤집혀 죄를 이루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보이는 6천 권의 기록에 오히려 많다고 두려워하거나 더 구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서 이에 막히고 헷갈림만 더하고 있으니, 어찌 천축에 남아 있는 경전인 용장현경(龍藏現經)7)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감히 탐문하여 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루 관찰한다면 반드시 공덕이 따를 것이다.
관행을 일으키게 되면 널리 경전을 찾을 여가가 없어지며 생사윤회의 고륜(苦輪)을 초탈하고자 한다면 사방에서 들은 법문을 장엄물로 여겨야 한다. 이는 곧 도론(道論)을 장엄하는 일이며 혜해(慧解)의 전구(前驅)가 되는 것으로 칭찬하고 비난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이치에 들어맞게 된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에 지나치게 아첨하여 문장으로 된 학설과 논문을 거짓이라고 하고, 문득 말하길 “논(論)은 작은 성인을 만든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가 내뱉는 말은 속심(俗心)이 배어 있는 것으로서 순박한 맛은 없어지고 도의 뜻도 이미 떠난 것이다. 이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은 “나는 경전을 송지(誦持)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고 말하니, 이 말은 또 무슨 말인가? 그는 멋대로 함부로 천착(穿鑿)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원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그 근본이 오직 지극한 도(道)에 이르는 것이지만, 범부와 소인들이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대승의 방편을 쓴 것이기 때문에 이 임시적인 도에는 여러 가지 도모함이 많아 그 근기와 인연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혹은 소리나 광명으로 이들을 감동시키고 혹은 위용으로 그들을 고양시키기도 하면서 법설(法說)과 비유설법(譬喩說法)을 번갈아 거론하시면서 인연 설법에 얽힌 일을 열어 보이셨으나, 그 근본은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는 데 있었으며 아울러 방편을 잊어버리는 것에 뜻을 두고 계셨다.
다만 성인이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세월이 오래되어 세상이 탁하고 경박하게 변하여, 오직 문사(文詞)만을 보배로 여길 뿐 그윽히 숨은 종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크고 작은 모든 성인들이 대도가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시고 널리 밝은 논리를 채택하여 밝은 논설을 펼쳐 교문에 통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말소리에 따라 뜻을 취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게 된다.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업신여기며 남을 속이고 믿음에서 물러서는 것이다.”
이 말은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자기의 신부(神府)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곧 자신의 짧은 소견으로 성교(成教)를 따지고 헤아리려고 하거나, 부처님을 따르면서 성현(聖賢)들을 업신여긴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이로부터 생겨나게 된다.
아, 법려(法侶)들이여, 더 자세히 무엇을 말하겠는가? 큰 집은 흩어져 있는 재목으로는 짓지 못하듯이 큰 지혜가 어찌 용렬한 마음으로 이루어지겠는가? 참으로 그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미혹된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성(至聖)이 어찌 자비심을 일으키며 정사(正士)가 어찌 교화를 부양하겠는가?
이러한 일들은 본기(本紀)에 서술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032_1251_a_04L 姓馬雍州長安人十九出家淸貞拪德住羅漢寺專聽攝論深惟妄識之難伏也無時不諠乃入禪坊頭陁自靜六時禮悔四十餘年夜自篤課誦阿彌陁經七遍念佛名六萬晝讀藏經初無散捨後專讀涅槃一千八十遍兼誦金剛般若終于卽然身絕患惱休健翕習冷食麤衣隨得便服情無憚苦又志存正業注晨霄蚤蝨流身不睱觀採遇患將念誦無捨剋至大期累屬道俗念佛爲先西方相待勿虛度世又屬當燒散吾尸不勞銘塔用塵庸俗訖而逝年八十三六十二夏不畜尺無勞僧法又同寺僧法達者以誠素見稱供嚫之直用寫華嚴八部般若燒香自讀一百餘遍而生常淸潔不畜門人己自怡食無餘粒斯亦輕淸之高士年登七十便齎所讀經贈同行者但捧勝天一部以爲終老卽擲公名趣雲陽巖中擁緣送死經于四載卒彼山竝是卽目近事且夫讀誦徵其類繁焉別有紀傳故不曲盡引數條示光緖耳論曰尋夫讀誦之爲業也功務本文經嘆說行要先受誦何以然耶但由庸識未剖必假聞持崑竹不斷鳳音寧顯義當纔登解髮卽須通覽採酌經緯窮搜名理疑僞雜錄單複出生普閱目前銓品人世然後要約法句誦鎭心神廣說緣本用疏迷結遂能條貫本支釋疑滯以通化統略玄旨附事用以徵治是故經云受持讀誦書寫解說如法修行斯誠誡也世多惰學愚計相封以尋理爲諸見用博文爲障道故調達善星之廣富未免泥犂槃特薄拘之寡約尚參中聖斯等議未成通論原夫道障之起乎心行道在無滯滯則障道焉有多聞能爲道障夫聞本筌解封附不行此則滯指亡月正違出要是以愚夫當斯一計莫非學旣未功隨言便著於生未曾沾惑妄發心誓不執見學教者目爲文字故使慢水覆膏肓誰遣至於決斷篇聚判折僞由來未知事逾聾瞽旣恥來問啓寧陳遂卽惟心臆斷汎浪無准爲啓齒何急如前又有薄讀數帙誦短章謂爲止足更絕欣尚便引大集法行比丘十住不貴多讀竊以教門宏曠待對塵勞藥病相投豈徒繁藏部所設止在奉持聞而莫依挍量非一今倒想如草之蔓慢我如山之立要資博讀見有廣治之能隨境流觀務存祛滯之本但以暗識未萌集熏怠搆稱情昏倒反福成罪故此方見錄卷止六千尚怖不希壅迷頓何論天竺遺典龍藏現經敢慕窺通觀聞海必能追功起觀無睱要拔苦輪方聞爲飾斯則莊嚴慧解前驅不待抑揚自然會理有曲媚佛言詐辭學論便言論作小吐言隱密彫淳撲散道味已離我誦持無心悟入斯言何哉妄有穿原夫諸佛說法本惟至道赴接凡方便乘權權道多謀任機而現以聲光動之或以威容鼓之法譬亂擧緣事相開以悟達爲本言以亡筌爲意得但以去聖久遠時接澆浮寶文詞罕會幽旨所以大小諸聖大道之將崩廣採了義製明論以通故文云隨聲取義有五過失謗佛輕法誑人退信斯言極矣不量己之神府而輒揆於成教明佛而侮賢聖憎愛於是由生嗟乎法侶又何詳哉且夏屋非散材所成大智豈庸情所固當通其所滯悟其所迷不然則至聖於何起悲正士於何楊化事敍緣於本紀故不廣之續高僧傳卷第二十八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고려대장경 7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목차에는 실제 8명이 기록되어 있다.
  2. 2)고려대장경 목차에는 ‘사담(史擔)’이라 되어 있고 「현수(玄秀)」의 뒤에 있는데, 본문에는 이름이 ‘사가담(史呵擔)’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현수(玄秀)」의 앞에 있기에 이를 따른다.
  3. 3)외가가(外家書)라고도 하니 불교 경전 이외의 서책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논어(論語)』를 말한다. 『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道”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4. 4)도량에서 여러 날에 걸쳐 배운 것을 스승 앞에서 강(講)하는 일을 말한다.
  5. 5)고려대장경의 목차에는 ‘혜달’이 부견 제목으로 잡혀 있지 않으나, 내용을 분별할 필요가 있어서 별도로 단락을 나누어 제목을 설정하였음.
  6. 6)경전을 읽을 때 경문(經文) 전체를 차례대로 읽지 아니하고 처음ㆍ중간ㆍ끝의 몇 줄만 읽거나 책장을 넘기면서 띄엄띄엄 읽는 일을 말한다.
  7. 7)용궁에 갈무리하였다가 나타난 경전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