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2_1252_b_01L
속고승전 제29권
032_1252_b_01L續高僧傳卷第二十九


당 석도선 편찬
이창섭 번역
032_1252_b_02L大唐西明寺沙門 釋道宣 撰


9. 흥복편(興福篇) [本傳 12명, 附見 5명]
032_1252_b_03L興福篇第九正紀十二人附見五人

1) 양(梁)나라 촉부(蜀部) 사문 석명달전(釋明逹傳)
2) 주(周)나라 부주(鄜州) 대상사(大像寺) 석승명전(釋僧明傳)승호(僧護)
3) 수(隋)나라 천태사(天台寺) 폭포사(瀑布寺) 석혜달전(釋慧逹傳)
4) 당나라 면주(綿州) 진향사(振嚮山) 석승황전(釋僧晃傳)
5) 당나라 양주(楊州) 장곽사(長樂寺) 석주력전(釋住力傳)
6) 당나라 서울 대장엄사(大莊嚴寺) 석지흥전(釋智興傳)선인(善因)
7) 당나라 포주(蒲州) 보구사(普救寺) 석도적전(釋道積傳)
8) 당나라 서울 회창사(會昌寺) 석덕미전(釋德美傳)정묵(靜默) 담헌(曇獻)
9) 당나라 서울 청선사(淸禪寺) 석혜주전(釋慧胄傳)법소(法素)
10) 당나라 재주(梓州) 우두산사(牛頭山寺) 석지통전(釋智通傳)
11) 당나라 재주(梓州) 통천사(通泉寺) 석혜진전(釋慧震傳)
12) 당나라 서울 홍복사(弘福寺) 석혜운전(釋慧雲傳)
032_1252_b_04L梁蜀部沙門釋明達傳一
周鄜州大像寺釋僧明傳二僧護
隋天台山瀑布寺釋慧達傳三
唐緜州振嚮寺釋僧晃傳四
唐楊州長樂寺釋住力傳五
唐京師大莊嚴寺釋智興傳六 善因
唐蒲州普救寺釋道積傳七
唐京師會昌寺釋德美傳八靜默曇獻
唐京師淸禪寺釋慧胄傳九 法素
唐梓州牛頭山寺釋智通傳十
唐梓州通泉寺釋慧震傳十一
唐京師弘福寺釋慧雲傳十二

1) 양(梁)나라 촉부(蜀部) 사문 석명달전(釋明逹傳)
032_1252_b_16L釋明達
032_1252_c_02L명달은 속성이 강씨(康氏)이며, 그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켰다. 처음 10계(戒)를 받자 곧 5근(根)을 단속하였고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자 행업이 더욱 높아져서 옆구리를 자리에 대고 눕지 않았으며 하루에 두 번 밥을 먹는 일이 없었다. 밖으로는 행동규범을 엄격히 지키고 안으로는 도의 근본을 길러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뜻을 품고 유행(遊行)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양(梁)나라 천감(天鑒) 연대 초기에 서융(西戎)을 떠나 익주(益州) 지방에 이르렀다. 그때 파협(巴崍) 일대는 오랑캐가 북을 울리며 다니면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주군(州郡)에서는 병사를 징집하여 기일을 정하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이에 명달은 그들이 장차 고통 받을 것을 가엾게 여겨 구원할 마음을 품고 홀로 적진을 찾아갔다. 그는 보루에 올라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타일러서 이끌어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그의 심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천둥번개가 치니 도적들은 깜짝 놀라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명달은 그들에게 천 개의 등불을 마련해 가지고 삼보에 정성껏 기도드리게 하였다. 진영에서 이것이 마련되어 그곳으로 나아가자 비로소 어둠과 흙비가 즉시 멎었으며 산야에 기운이 통하고 천지가 맑게 개였다. 이에 모두가 모여들어 나라를 우러르고 왕의 덕화를 따르게 되었으니 강보에 싸인 아이를 업은 사람이 숲을 헤치며 찾아오고 더벅머리 총각과 소년이 달려오는 등 그 무리가 길을 메웠다. 마침내 강과 길이 열리어 오고가는 데 장애가 없게 되었으니 군사를 쓰지 않고 만 리 길이 평정된 것은 명달의 힘이었다.
그후 어떤 인연으로 문수(汶水) 지방을 지나다가 길에서 어떤 사람이 새끼 돼지를 묶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 새끼 돼지가 사람의 목소리로 “바라건대 으뜸가는 성인이시여, 저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명달은 곧 자신의 옷을 벗어 값을 치르고 놓아주게 하였다.
그후 어느 날 밤에 물을 떠오게 하여 다리를 씻는데 제자가 명달이 시키는 대로 씻었지만 진흙은 끝내 벗겨지지 않았다. 다시 더운 물로 씻었으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명달이 직접 물을 뿌렸더니 다리가 곧 깨끗해졌다. 명달이 “이것은 물고기기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무도 그것이 어디서 묻은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또한 걸어서 재주(梓州) 우두산(牛頭山)에 이르러 부도와 정사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목재와 돌은 찾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목수와 석공(石工)을 찾으니 도속들이 모두 그의 일 진행을 괴이하게 여겼다. 때는 2월이라 물이 말랐으므로 곧 밑으로 내려가 물을 길으려고 하다가 강물 속에서 기다란 목재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로 절의 기둥감으로 알맞았고 길이도 법도에 맞았다. 이에 여러 사람이 기뻐하여 곧 끌어와 기둥을 세우게 되었다. 4월 중순에 이르러 부수(涪水)가 크게 넘치면서 나무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와서 저절로 마을의 둑에 걸려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았다. 명달이 도속들을 거느리고 그 나무들을 모두 거두어들이니 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새로 불당을 짓고도 9층탑을 세울 수 있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힘을 합쳐 일시에 수선하고 건립하니 공사는 때를 넘기지 않고 순식간에 성취되었다.
그는 몸에 3의(衣)만을 걸쳤는데 모두 올이 굵고 거친 무명옷이었으며 해지면 곧 기워 입었고 추운 날이나 더운 날이나 바꾸어 입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승상(繩床)에 앉아 선정에 들었었는데, 그때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 사람들이 달려가 불을 끄려 하였는데, 그는 오히려 시원한 기운만 느껴졌다.
당시 승구(僧救)라는 사문이 오랫동안 앉은뱅이 병을 앓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찾아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빌었는데 명달이 곧 지팡이를 주면서 걸어보라고 하였다. 그러니 하루해를 넘기지 않아 달려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알려진 공로와 알려지지 않은 공덕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그러한 전례는 매우 많았다.
또한 포살(布薩)을 할 때 자신이 먼저 대중 속에 앉아 있었는데 어떤 도적놈이 담장을 뚫고 들어와 물건을 훔쳐갔다. 담장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정신이 혼미하고 답답해지며 방향을 알 수 없어서 다시 돌아와 절에 물건을 바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타일러서 놓아주었다.
이후 명달이 초(楚)와 촉(蜀)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화를 펴니 그의 덕에 복종하는 것이 마치 바람에 풀이 쓰러지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촉(三蜀)의 백성들 속에서는 화로를 들고 공양을 청하는 자도 있었고, 꽃을 뿌리고 옷을 벗어 바닥에 까는 자도 있었으며, 속세를 버리고 참회하며 귀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 머리를 깎고 법을 따른 사람도 있어 날이 쌓이고 해가 지나자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천감 15년 수(隋)나라 시흥왕(始興王) 때 그는 형주(荊州)로 돌아가서 그 해 겨울 12월에 강릉(江陵)에서 생을 마쳤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명달은 키가 8척이고 용모가 뛰어났다. 계율을 널리 가르치고 아울로 강의와 독송을 할 때 잠시 속서(俗書)를 읊조려 그것으로 대중들의 혼미해진 정신을 다듬도록 하였으며, 죄와 복을 차례로 명백히 가려냄에 다시 찾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자세하게도 쓰고 간략하게도 써서 이를 전한다.
032_1252_b_17L 姓康氏其先康居人也童稚出家嚴持齋素初受十戒便護五根年及具足行業彌峻脅不著席日無再飯外肅儀軌內樹道因廣濟爲懷遊行在務以梁天鑑初來自西戎于益部時巴峽蠻夷鼓行抄劫州郡徵兵克期誅討達愍其將志存拯獨行詣賊登其堡壘慰喩招引狎其情俄而風雨晦冥雷霆振擊賊驚駭惻爾求哀達乃教具千燈誠三寶營辦始就昏霾立霽山澤通天地開朗翕然望國竝從王化負排藪獺弁前趨者其徒充澤遂使江路肅淸往還無阻兵威不設而萬里坦然達之力也後因行汶中路逢有人縛豚在地聲作人語曰願上聖救我達卽解衣贖而放之嘗於夜中索水洗腳弟子如言而泥竟不脫以湯洗如前不去乃自以水灌之腳便淨達曰此魚膏也更莫測其所行至梓州牛頭山欲搆浮圖及以精舍不訪材石直覓匠工道俗莫不怪其言也于時二月水竭卽下求水乃於水中得一長材正堪剎柱長短合度僉用欣然仍引而豎焉至四月涪水大溢木流翳江自泊村岸無溜者達率合皁素通皆接取縱橫山積創修堂宇架塔九層遠近倂力一時繕造役不逾時欻然成就而躬襲三衣竝是麤布破便治補寒暑無有時在定據于繩牀赫然火起往撲滅惟覺淸涼有沙門僧救者患攣躄來從乞差達便授扙令行移晷景驟步而返斯陰德顯濟功不可識其例甚矣又布薩時身先衆坐因有偸者穿牆負物旣出在外迷悶方所還來投寺遂喩而遣之故達化行楚蜀德服如風之偃仆也故使三蜀氓流或執爐請供者或散花布衣或捨俗歸懺者或翦落從法者積歲計又不可紀以天鑑十五年始興王還荊州冬十二月終于江陵春秋五十有五達形長八尺容式偉敷弘律訓及以講誦乍諷俗書悟昏識銓序罪福無待重尋故詳略而傳矣

2) 주(周)나라 부주(鄜州) 대상사(大像寺) 석승명전(釋僧明傳)
032_1253_a_18L釋僧明
032_1253_b_02L승명은 속성이 강씨(姜氏)이며 부주(鄜州) 내부(內部) 사람이다. 그는 이미 전부터 산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성품이 순후하고 소박하였으며 말투가 질박하였다. 그는 소승의 교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스스로 계율을 잘 지켜 수행하고 비속한 무리를 따르지 않았다. 비록 경의 가르침에는 밝지 못하였으나 실천하려는 마음만은 굳었으므로 당시 세속에 명성이 있었다.
어느 날 이 고을 저 고을을 유행(遊行)하다가 산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느 가파른 언덕을 바라보니 여러 번 이상한 빛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서 상하로 훑어보다가 개울 밑에 돌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양새가 높고 컸다. 멀리 언덕 옆을 바라보니 누워 있는 돌이 조각상처럼 보였는데, 절반만 밖으로 드러나 있었으므로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를 파내었더니 그것은 완전한 불상이었다. 형상은 부처님의 모습과 같았고 순전히 철광석으로 만든 것과 같았으며 더 손질하지 않아도 완연하고 원만하였는데 총 높이는 3장(丈) 남짓 하였다.
그때는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세상을 떠나고 천원(天元)으로 연호(年號)를 이어받았을 때였다. 승명은 발심하여 더욱더 용기를 내어 엄한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옛 것에 밝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그 불상에 대해 고증을 구하였으나 그 유래를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땅은 오래전부터 황폐하였던 곳이어서 본래 절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었기에 승명은 스스로 ‘아마도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남긴 불상으로서 인간 세상에 흩어져 있다가 인연에 응하여 나타난 불상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곧 사방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동시에 끌어올렸으나 힘이 모자라 그것을 완전히 끌어올릴 수 없었다. 이에 승명은 곧 향로를 들고 서원하였다.
“만약 불법이 다시 흥성하여 중생들이 의지할 곳이 있게 하시려면 신비한 위력을 나타내시어 소원을 이룩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말을 마치자 불상이 갑자기 가볍게 들리면서 산을 따라 곧바로 내려와 그 길로 불상을 세울 받침돌구멍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별다른 공사 없이 불상을 손쉽게 세울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대중들은 놀라고 감탄하며 이러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희한하고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을 나라에 보고하니 황제는 좋은 조짐이라고 생각하고 곧 연호를 고쳐 대상(大像)이라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불교가 점차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이는 승명의 공력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곧 칙명을 내려 그가 주석하던 곳을 ‘대상사(大像寺)’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현제사(顯際寺)가 바로 그곳이다. 방주(坊州)에서 서남쪽으로 6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때때로 그늘이 지거나 어두워지면 다시 불상에서 신비한 광명이 방출되었다. 승병은 다시 출가하여 이 절에 의지해서 극진히 불상을 받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후 그는 개황(開皇) 연대 중엽에 그 절에서 생을 마쳤다.
나는 흥복(興福)이 찾아오는 것은 일에 기회가 있어 그에 감응되어 기적이 나타날 때 그 모습은 더욱 융성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그 신비한 이치를 설명할까 한다.
가령 서주(徐州)의 오사(吳寺)에 있는 태자사유서상(太子思惟瑞像)이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옛날 동진(東晉) 때의 스님인 법현(法顯)이 높은 절개를 지니고 서천(西天:天竺國)에 가서 두루 성지순례를 하다가 어느 한 절에 들어가니 아이와 어른이 모두 깍듯이 맞이하였다. 법현은 그때 병에 걸려 마음속으로 고향의 음식을 먹어보았으면 했는데 주인인 상좌(上座)가 몸소 일을 맡아보면서 사미에게 지시하여 법현의 고향 음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사미가 명을 받고 잠깐 사이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팽성(彭城)의 오창응(吳蒼鷹)의 집에 가서 밥을 구하다가 개에게 물렸다고 하였다. 법현은 그가 몸을 한 번 돌리는 사이에 만 리 밖에까지 다녀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비로소 그 절의 스님들이 모두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후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다가 일부러 팽성에 들려 오창응의 집을 찾아가 그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가 개에게 물렸을 때 흘린 피가 문에 묻은 채로 남아 있었다. 법현이 “이것은 아라한 성승(聖僧)의 피다. 그때 나를 위하여 밥을 가지러 온 것인데 어찌 개에게 물릴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창응이 허물을 참회하고 곧 가산(家産)을 희사하여 절을 지었다.
이에 오창응은 양도(揚都)에 이르러서 경전과 불상을 널리 구하였는데, 바로 큰 강을 건널 때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홀연히 두 개의 뼈가 나타났다. 그것은 각각 길이가 한 장(丈)이나 되었는데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별안간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곧 물결이 잔잔해져 강기슭에 정박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니 해당 관청에서 조사해보았는데 그것은 용의 이빨이었다.
오창응이 아직 불상을 구하지 못하였을 때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다가 잠시 숲속에서 쉬는데 바라문승(婆羅門僧)이 불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서주에 가서 오창응에게 공양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창응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제가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상을 그에게 주니 오창응은 불상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나라에서는 칙명을 내려 그것을 모방하여 10구(軀)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모두 발밑에 글자를 새겨두었는데, 아무도 새 것과 본래의 것을 가려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창응에게 주어 골라서 가져가게 하였더니 불상이 꿈에 나타나 그 본말을 알려주어 정확히 고르게 되어 다시 본래의 불상을 가지고 서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후 매일 신비한 서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원위(元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청하여 북대(北臺)로 가지고 들어갔다가 고제(高齊)의 다음 임금이 사자(使者) 상표지(常彪之)를 파견하여 업성(鄴城)으로 반입(搬入)하였다. 그후 북제가 멸망하고 북주가 불법을 폐지하자 승단에 감추어두었다가 수(隋)나라 때 불교를 장려하자 다시 꺼내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상주(相州) 업현(鄴縣)의 대자사(大慈寺)에 있다.
또한 서울 숭의사(崇義州)에는 ‘석영상(石影像)’이라는 불상이 있었는데, 높이가 한 자이고 직경이 여섯 치가량 되며 8각으로 되어 있고 자색이며 안팎이 환히 비추어 보였다. 그 유래를 따진다면 다음과 같다.
양무제(梁武帝) 태청(太淸) 연간에 천축(天竺)의 스님이 가지고 와서 황제를 만났는데, 마침 후경(候景)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곧 강주(江州) 여산(廬山) 서림사(西林寺)에 있는 큰 불상의 정수리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개황(開皇) 10년에 이르러 수 양제(煬帝)가 강해(江海)를 진압하고 널리 특이한 것을 찾으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보도록 하였는데, 마침내 잡전(雜傳)에서 영상(影像)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였다. 이에 곧 중사(中使) 왕연수(王延壽)를 파견하여 여산에 가서 가져오게 하였는데 왕이 직접 공경하고 받들면서 내전에 모시고 공양하였다. 양제가 변방에서 벼슬을 역임할 때 어디로 갈 일이 있을 때마다 함에 담아서 앞에다 모시고 인도하게 하였으며 조금도 방치하여 버려두는 일이 없었다. 그후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자 곧 곡지(曲池)의 일엄사(日嚴寺)에 봉송해서 외부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후 무덕(武德) 7년에 일엄사가 폐지되자 승의사로 이전하면서 불상도 승단을 따라 함께 옮겨졌다. 이리하여 서울의 도속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이변이 나타난 것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혹 불탑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도 하였고 혹 현인이나 성인ㆍ천인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도 하였으며, 혹 산림의 휘장과 일산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 3도(途) 고취(苦趣)의 형상을 나타내다가도 혹 앞뒤에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였고 혹 잠깐 사이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며 업경(業鏡)을 믿고 잘못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후 정관(貞觀) 6년에 칙명을 내려 내전에 들여 놓으니 마침내 외부와 관계가 단절되었다.
또한 양나라 때 양양(襄陽) 금상사(金像寺)에 있던 6장(丈) 길이의 무량수서상(無量壽瑞像)은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3년 2월 8일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조성한 불상이다. 다음해 12월에 이를 장엄하게 장식하여 완성하였는데, 이때 자사(刺史) 치회(郗恢)가 처음으로 이 변방에 임명되어오자 불상이 곧 걸어서 만산(萬山)으로 갔다. 치회가 도속들을 거느리고 가서 불상을 모시고 본사(本寺)로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에 다시 나와서 절의 대문 앞에 머물렀다. 이에 온 경내의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였으며 이것을 나라에 상주하였다.
그후 양나라 보통(普通) 3년에 건흥원(建興苑)에 명령하여 높이가 6척이고 너비가 한 장인 금동화부(金銅花趺)를 주조(鑄造)하게 하여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그것으로 그 불상의 발을 받들게 하고 비석을 세워 찬탄하였는데 유효의(劉孝儀)가 비문을 지었다.
또한 형주(荆州) 장사사(長沙寺)의 서상(瑞像)은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성의 북쪽에 나타났는데 광명이 기이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았고 형체는 아주 아름답고 특이하였으며 높이는 7척을 넘었다. 옛날에 밤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것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칼로 쳤는데 아침에 가보니 그것은 바로 금불상이었다. 그때 칼로 친 자국이 겉에 나타나 있었다.
양나라 고제(高帝)가 불법을 받들어 마음속으로 친히 가보려고 하였지만 끝내 가보지 못하였다. 그후 시중(侍中)에게 향을 비롯한 공양거리들을 주어 보냈는데 단관(丹款:황제의 편지)이 도달하자 밤중에 불상에서 갑자기 광명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신을 따라 함께 그곳으로 가는 듯 하였다. 다음날 아침 모시고 가려고 하였으나 불상은 본래 있던 자리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거듭 마음을 다해 청하고 빌고 나서야 비로소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도읍에서의 거리가 18리나 떨어진 곳이었는데 황제가 몸소 나와서 맞이하였으며 길을 가는 동안 내내 광명이 끊임없이 방출하여 도속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궁전에서 공양드리다가 3일이 지난 후에 대통문(大通門)을 거쳐 동태사(同泰寺)로 봉송하였다. 이후 그곳에 화재가 나서 불당과 탑이 모두 불탔으나 오직 불상만은 불전에 자리잡고 홀로 높이 솟아있었다.
또한 고제(高齊) 정주(定州)의 관음서상(觀音瑞像)과 『고왕경(高王經)』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원위(元魏) 천평(天平) 연간에 정주의 모사(募士) 손경덕(孫敬德)이 변방에서 관음상을 만들었는데 임기가 끝나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항상 절하고 섬겼다. 후에 도적질을 한 누명을 쓰고 끌려가 서울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여 마침내 거짓으로 죄를 인정하여 극형을 받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곧 사형이 결행되려 하자 마음이 다급하고 절통하여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곧 스스로 ‘지금 억울한 형벌을 받는 것이 과거에 일찍이 남을 억울하게 죽였기 때문에 얻은 과보이니 이 죽음으로 그 죄를 다 갚기만 바랄 뿐이다’라고 서원하였다. 그리고 다시 소원하기를 ‘일체 중생들이 모든 재앙들을 내가 대신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서원을 마치고 조금 있자 어렴풋이 졸음이 오는 듯 하더니 꿈에 한 사문이 나타나 『관세음구생경(觀世音救生經)』을 외우라고 하면서 경에 있는 부처님 이름을 천 번만 두루 외우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손경덕은 깨어나자 꿈에서 알려준 경을 모르는 곳이 없이 다 알게 되어서 다음날 새벽이 되자 이미 백 번을 채우게 되었다. 관리가 결박을 지워 저자로 끌고 갈 때에도 걸으면서 외워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마침 천 번을 채우게 되었다. 형리가 칼로 내리쳐 세 토막으로 자르려고 하였지만 그 칼만 움직였을 뿐이고 몸은 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그 정황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승상(承相) 고환(高歡)이 상소를 올려 형을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 칙명을 내려 그 경을 글로 써서 세상에 퍼뜨리게 하였으니, 지금의 이른바 『고왕경(高王經)』과 『관세음경(觀世音經)』이 바로 그것이다.
손경덕이 풀려나와서 집에 이르러 변방에 있을 때 만들었던 불상을 보니 목에 세 번의 칼자국이 있었다. 이에 비감(悲感)이 밀려들어 통곡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또한 옛날 양양(襄陽)의 미천상(彌天像)은 진(晉)과 송(宋)을 지나 제(齊)와 양(梁)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신령스러운 모습이 감응되었음은 전의 기록들에 실려 있다.
그후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불법을 훼멸하게 되자 건덕(建德) 3년 갑오년에 태원공주(太原公主)가 실권을 잡고 형주(荆州)의 부진장(副鎭將)이 되었다. 이때 개봉부(開封府)로 올라간 장손(長孫) 소철(蕭哲)은 뜻과 성품이 흉악하고 완고하여 불법을 믿지 않았는데 이 불상이 있다는 말을 듣자 먼저 이를 허물고자 하니 고을 안의 백성들과 폐출당한 비구와 비구니들이 얼굴을 싸쥐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하였으나 구제할 방도가 없었다. 소철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상을 공경하고 흠모하는 것을 보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시종(侍從)을 다그쳐 보내서 빨리 불상을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이에 백여 명이 밧줄로 불상의 목을 묶고 끌어당겼으나 불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철은 사람을 더 보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곧 몽둥이를 들고 일을 감독하였는데 사람들이 백 번이나 끌어보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댕~”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더욱 굳어졌다. 이에 다시 3백 명을 더 내보내어 끌어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소철은 더욱 성이 나서 또 5백 명을 보충하여 끌어당기게 하니 비로소 넘어졌다. 그 넘어지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였지만 소철만은 홀로 기뻐하였다. 곧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깨뜨려 녹이도록 하였는데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말을 타고 자사(刺史)에게 이에 대해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겨우 백 보가량 가서 거꾸러지듯 땅에 떨어지더니 말도 못하고 눈이 꼿꼿해지고 사지가 뻣뻣해지더니 밤이 되자 죽어버렸다. 이에 도속들이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불상이 허물어졌을 때 겨드랑이 옷의 밑 부분이 깨졌는데, 그 안쪽에는 “진나라 태원(太元) 19년인 갑오(甲午)에 비구 도안(道安)이 양양의 서곽(西郭)에서 8장(丈)의 금상을 만들었다. 이 불상은 다시 갑오년이 세 번 지난 후 180년 만에 멸하게 될 것이다”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연대를 계산해보니 과연 만든 때와 넘어뜨린 때가 이 글과 일치하였다.
진실로 손금을 보듯이 성인께서 법을 높이 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뜻을 알아야 하니, 나고 죽는 기한은 세상에서 고치기 어려우니 업의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어찌 허망한 것이겠는가?
또한 양도(揚都) 장간사(長干寺)의 아육왕(阿育王) 서상은 광부(光趺)와 신상(身相)에 상서가 통하였으며, 5대(代)에 걸쳐 제후와 왕들이 모두 존경하던 불상임은 모두 앞의 전기에서 자세히 쓴 것과 같다.
큰 가물이 든 해마다 불상을 청하여 궁전으로 들여가곤 하였는데, 반드시 황제가 타는 수레에 모시고 그 위에 유피(油帔)를 입혔으며, 스님들은 일산(日傘)을 가지고 불상을 덮어 호위하며 뒤따랐다. 처음에는 비록 뜨거운 기운이 하늘에 사무쳤다가도 불상이 길의 절반쯤에 이르면 비가 쏟아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나라에서는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이렇게 덕을 보았기 때문에 도속들은 항상 더욱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진(陳)나라 정명(禎明) 연간에 불상의 얼굴이 서쪽으로 돌아가 월감당(月監堂) 쪽으로 향하였는데 여러 번 남쪽으로 돌려놓았으나 새벽에 일어나보면 다시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나라에 상주하였더니 칙명을 내려 태극전(太極殿)에 맞아들여 재(齋)를 마련하고 행도하였다. 본래 불상의 정수리에는 주옥으로 장식된 백 근가량 되는 칠보관(七寶冠)이 있었는데 그 위에 다시 비단 모자를 씌워놓았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자 칠보관은 불상의 손에 걸려 있었고 비단 모자만이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곧 향을 태우면서 “만약 틀림없이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면 다시 관(冠)을 벗으십시오”라고 빌고서 다시 관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관은 벗겨져 전날처럼 손에 걸려 있었다. 이에 상하의 모든 조정 대신들이 두려워할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조짐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후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켜 온 조정의 대신들이 관을 벗고 묶여 서울로 호송되어서야 비로소 그 조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문제(文帝)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불상을 가져다가 대전에다 모시고 공양하였는데 불상이 입상(立像)이었으므로 항상 모시고 받들 때에 마주하여 앉지 못하였다. 그후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짐이 나이가 많아 불상을 모실 때 오래 서 있기가 어려우니 담당 관리로 하여금 좌상(坐像)을 만들게 하되 그 모습은 아육왕의 본래 불상과 같이 하라. 그리고 본래 아육왕 입상은 흥선사(興善寺)로 봉송하여 안치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불상이 흥선사에 도착하게 되었으나 형상이 크고 장중하여 기단에 맞지 않았으므로 그냥 북쪽을 향하여 두었다. 그런데 다음날 가서 불상을 보니 남쪽의 중문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시 북쪽을 향하게 해놓고 단단히 문을 잠가놓았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가 보니 불상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그간에 불상을 가볍게 보고 업신여긴 일을 사죄하였다. 그 불상은 지금도 그곳에 있으며 그림으로 그린 것도 매우 많다.
또한 양나라 고조(高祖)는 스님들을 매우 존중하고 영의(靈儀)를 숭상하고 좋아하여 금과 은으로 등신상(等身像) 두 구(軀)를 만들어 중운전(重雲殿)에 안치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고 공경하였는데 50년 동안 조금도 이를 꺼리거나 그만둔 적이 없었다. 그후 후경(候景)이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그곳에 두고서 공양하였다.
태위(太尉) 왕승변(王僧辯)은 강남에서 후경을 죽이고 원제(元帝)의 저궁(渚宮)도 다시 함락하자 곧 북제(北齊)와 화친을 맺고 정양후(貞陽侯)를 맞아들여 황제로 삼았다. 그때는 아직 장강의 동쪽 지방이 평정되지 않아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왕승변의 사위인 두감(杜龕)이 궁궐을 맡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성품이 흉포하여 후세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 두 불상을 허물어 금과 은을 녹여서 가지려고 하였다. 그는 먼저 수십 명을 보내어 삼휴각(三休閣)에 올라가 불상의 목을 자르도록 하였는데, 두 불상이 갑자기 동시에 머리를 돌려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 일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잊고 술 취한 듯 스스로 제 몸을 가누지 못하였고, 두감은 매를 맞은 듯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금강력사(金剛力士)의 무서운 모습만 보였는데 그들이 다투어 달려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때렸다. 그리하여 그는 며칠 동안이나 신음하고 울부짖다가 마침내 온몸이 썩어 죽고 말았다.
그후 양나라의 운명이 진(陳)나라에 달려 있을 때 무제가 죽고 형의 아들 진천(陳蒨)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장사도구를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새로 정해져 그런 일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칙명을 내려 중운전(重雲殿)에 있는 불상의 보장(寶帳)과 형패(珩珮)ㆍ주옥(珠玉) 등 장식물 등을 가져오게 하여 이것을 사용하여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인력은 풍부한 터라 사방에서 일제히 중운전에 모여왔는데, 다른 곳은 해가 밝게 비치고 있었지만 불전만은 구름에 쌓여 있었다. 모든 관리들이 이 말을 듣고 괴이하게 여겨 다 같이 가보니 잠시 후에 큰 비가 쏟아져 내리면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었으며 연기가 지붕 위에 퍼지고 불길이 구름 속에서 사납게 일어나더니 화광이 충천하고 불꽃이 튀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아울러 중운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두 불상이 우뚝 솟아오르고 사부신왕(四部神王)과 보장(寶帳)과 좌석 등이 동시에 위로 솟아올라 연기와 불길의 도움을 받아 홀연히 멀리 가버렸다. 이것을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로 도성이 기울어질 듯 하였고 이 서상(瑞相)을 보고는 모두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비가 멎은 후에 다시 그곳에 가보니 오직 기둥과 주춧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후 한 달 남짓 지나서 동쪽 고을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날 그들도 중운전으로부터 한 그림자가 동쪽 바다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지금도 바다 쪽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으며 때때로 가서 본다고 한다.

승호(僧護)
가까운 시대의 일로는 고제(高齊) 시대 때 승호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그는 도를 지키고 마음을 바로잡아 혜업(慧業)을 희구하지 않고 8장(丈)이나 되는 석상(石像)을 조성하기만을 원하여 모두 그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후 절의 북쪽 골짜기에서 길이가 8장(丈)가량 되는 누워 있는 바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에 곧 석공(石工)을 고용하여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1년이 지나자 얼굴과 배 부분 등 앞면은 거의 완성하였다. 그런데 뒷부분은 땅에 불어 있었으므로 온갖 도구로 끌어당겨 이를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가서 보니 그 돌이 저절로 뒤집어져 있었다. 그래서 곧 일을 착수하여 영조하는 작업을 끝내고 불당에 옮겨다가 안치하였다.
진주(晉州)가 함락되던 날 불상에서는 땀이 흘러내렸고 북주(北周) 군사가 북제에 침입하여 모든 불사(佛舍)를 불사를 때에도 이 불상만은 색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 넘어뜨리려고 많은 사람과 소 60여 마리를 동원하여 끌어당겼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홀연히 이승(異僧)이 나타나 기왓장과 나무와 흙으로 불상을 에워싸기 시작하더니 잠깐 사이에 일을 마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후 그 불상이 어느 신심이 있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나는 손가락에 통증을 앓고 있다”고 하였기에 그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 가서 보니 과연 나무가 불상의 두 손가락을 상하게 하였기에 곧 그것을 수리하였다.
개황(開皇) 10년에는 이 불상의 번개(幡蓋)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꿈에 키가 8장(丈)이나 되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 꾸짖으니 도적이 마침내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였다. 그 불상은 현재도 남아 있으며 『정이기(㫌異記)』와 여러 스님들의 기록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이렇듯 감응이 통하는 일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갖추어 밝혀져 있는 것이지만 이 흥복(興福)에 대한 이야기만은 신령스러운 감응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상이 화재를 피하고 짐승이 외도들을 보고 놀라며 그림자가 이술(異術)을 덮어버리고 경전이 불에 타도 재가 되지 않으며 영골(靈骨)에서 신비한 광명을 내보내는 등 보이지 않는 자취가 널리 보호함을 일으키는 그 현상들은 위대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가령 정관(貞觀) 5년에 양주(梁州) 안양사(安養寺) 혜광(慧光) 스님의 속가 어머니의 경우를 보면, 그녀는 몹시 가난하고 궁색하여 속에 입을 옷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와서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가 낡은 가사로 속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후 여러 이웃 아낙네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리에서 뜨거운 열이 나더니 점차 위로 올라와 허리에 이르렀다. 잠시 후 우레가 진동하면서 이웃 아낙네들을 백보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두 귀에 진흙이 들어가 너무 기가 막혀 기절하였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깨어날 수 있었다. 한편 가사로 옷을 지어 입었던 자는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까맣게 타 몸이 뒤틀리고 꼬부라진 채 죽었다. 그 시체의 등에는 “법의(法衣)를 법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들이 시체를 거두려 하자 또다시 우레가 진동하여 어쩔 수 없이 시체를 숲에다 두었더니 마침내 썩어 없어졌다.
이것을 통하여 법의를 받아 지니면 그 은혜가 삼보(三寶)에 귀의한 용(龍)에 미친다는 말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도 산에서 사는 스님이 있어 깊은 굴에서 잠을 자면서 옷으로 앞을 가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감응이 일어나 아주 무섭게 생긴 이상한 신장(神將)이 찾아와 굴 안을 더듬으면서 그 사람을 잡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사를 건드릴까 두려워 암혈 속으로 들어 올 수 없었기에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사지(死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앞뒤의 여러 실례들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032_1253_a_19L 俗姓姜鄜州內部人住旣山立性淳素言令質樸敍悟非任能守禁自修不隨鄙俗雖不閑明經然履操貞梗有聲時俗因遊邑落往還山谷見一陭岸屢有異光怪而尋討上下偱擾乃見㵎底石趺一枚其狀高大遠望岸側臥石如像半現於外遂加功發掘乃全像也形同佛純如鐵鑛不加鏨琢宛然圓具高三丈餘時周武已崩天元嗣曆情發增勇不懼嚴誅顧問古老無知來者其地久荒榛梗素非寺所明自惟曰當是育王遺像散在人閒應現之來故在斯矣卽召四遠同時拖擧事力旣竭全無勝致明乃執爐誓曰若佛法重興蒼生有賴者希現威靈得遂情願適發言已像乃忽然輕擧從山直下徑趣趺孔不假扶持卓然峙立大衆驚嗟得未曾有因以奏聞帝用爲嘉瑞也乃改元爲大像焉佛教漸弘明之力也又尋下勅其所住爲大像寺今所謂顯際寺是在坊州西南六十餘里時値陰暗便放神光明重出家卽依此寺盡報修奉大感物心以開皇中年卒于彼余以爲興福之來事有機會感見奇迹其相彌隆略引五三用開神理至如徐州吳寺太子思惟瑞像者東晉沙門法顯厲節西天歷觀聖迹往投一寺小大承迎顯時遇疾心希鄕飯主人上坐親事經理勅沙彌取本鄕齋食倏忽往還腳有瘡血云往彭城吳蒼鷹家求食爲犬所嚙怪其旋轉之頃而遊萬里之外方悟寺僧竝非常也及隨舩還故往彭城訪吳蒼鷹具知由委其犬嚙餘血門之處猶在顯曰此羅漢聖僧血也當時見爲取食何期犬遂損耶鷹聞懺咎卽捨宅爲寺自至楊都廣求經正濟大江舩遂傾側忽有雙骨長一丈隨波騰漾奄入舩中卽得安流昇岸以事奏聞有司觀撿乃龍齒鷹求像未獲泝江西上暫息林閒遇見婆羅門僧持像而行云往徐州與吳蒼鷹供養鷹曰必如來言弟子是也便以像付之鷹將像還至京令摸之合造十軀皆足下置字新舊莫辯任鷹探取像又降夢示其本末恰至鷹取還得本像乃還徐州每有神瑞元魏孝文請入北臺高齊後主遣使者常彪之迎還鄴下齊滅周廢爲僧藏弆大隋開教還重興世今在相州鄴縣大慈寺也又京師崇義寺石影像者形高一尺徑六寸許八楞紫色內外映徹其源梁武太淸中天竺僧齎來謁帝會侯景作亂便置江州廬山西林寺大像頂上至開皇十年煬帝作鎭江海廣搜英異文藝書記竝委讎括乃於雜傳得影像記卽遣中使王延壽往山推得王自虔在內供養在蕃歷任每有行往盛導前初無寧舍及登儲貳乃送於曲池日嚴寺不令外人瞻睹武德七廢入崇義像隨僧來京邑道俗備得觀仰其中變現斯量難准或佛塔形像或賢聖天人或山林帳蓋或三途苦趣或前後見同或俄頃轉異竝目矚而敍之信業鏡而非謬矣貞觀六年下勅入內外遂絕也又梁襄陽金像寺丈六無量壽瑞像者晉孝武寧康三年二月八日沙門釋道安之所造也明年季冬嚴飾成就刺史郗恢創莅此蕃像乃行至萬山恢率道俗迎還本寺復以其夕出住寺門合境同嗟具以聞奏梁普通三勅於建興菀鑄金銅花趺高六尺廣一丈上送承足立碑讚之劉孝儀爲文又荊州長沙寺瑞像者晉太元此像現于城北光相奇特具如前形甚瑰異高於七尺昔經夜行謂非類以刀擊之及旦往視乃金像刀所擊處文現於外梁高奉法欲親謁雖加事力終無以致後遣侍廣齎香供丹款旣達夜忽放光隨使往旦加延接還復留㝵重竭請方許從就去都十八里帝躬出迎竟路放光相續不絕白黑欣慶在殿供養三日已後從大通門送同泰寺末被火燒堂塔竝盡惟像居殿巋然獨存又高齊定州觀音瑞像及高王經者昔元魏天平定州募士孫敬德於防所造觀音像及年滿還常加禮後爲劫賊所引禁在京獄不勝拷遂妄承罪竝處極刑明旦將決旣切至淚如雨下便自誓曰今被抂當是過去曾抂他來願償債畢了又願一切衆生所有禍撗弟子代受言已少時依俙如睡夢一沙門教觀世音救生經經有佛名令誦千遍得免死厄德旣覺已緣夢中經了無謬誤比至平明已滿百遍有司執縛向市且行且誦臨欲加刑誦滿千遍執刀下斫折爲三段三換其刀皮肉不損怪以奏聞承相高歡表請免刑仍勅傳寫被之於世今所謂高王觀世音是也德旣放還觀在防時所造像項有三刀迹悲感之深慟發鄕邑又昔彌天襄陽金像更歷晉宋迄于齊梁屢感靈相聞之前紀周武滅法建德三年甲午之歲太原公王秉爲荊州副鎭將上開府長孫哲志性凶不信佛法聞有此像先欲毀之中士女被廢僧尼掩淚痛心無由救哲見欽崇彌至瞋怒彌盛逼逐侍速令摧殄令百餘人以繩繫項挽不動哲謂不用加力便杖監事各一百牽之如故鏗然逾固進三百人牽猶不動哲怒彌盛又加五百牽引方倒聲振地動人皆悚慄哲獨喜卽遣鎔毀之都無慚懼自又馳馬報刺史裁可百步堛然落地失瘖直四支不勝至夜而卒道俗唱快毀像時於腋下倒垂衣內銘云晉太元十九年歲次甲午比丘道安於襄陽西郭造丈八金像此像更三周甲午百八十年當滅計勘年月興廢悉符同焉信知印手聖人崇建容範發物心生滅之期世相難改業理之復何虛矣又楊都長干寺育王瑞像者光趺身相祥瑞通感五代侯王所共遵敬具如前傳每有亢陽之歲請像入宮必乘御輦上加油帔僧衆從像以蓋自遮初雖炎赫洞天像出中途無不雨流滂注家國所幸有年斯賴所以道俗恒加雨候至陳氏禎明年中像面轉西直月監堂屢廻正及至晨起還西如故具以奏聞延太極殿設齋行道先有七寶冠于像頂飾以珠玉可重百斤其上復加錦帽經夜至曉寶冠挂于像手帽猶加頭上帝聞之乃燒香祝曰必國有不祥還脫冠也仍以冠在頂及至明晨脫挂如故上下同懼莫惻其徵及隋滅陳降擧朝露首面縛京方知其致文帝後知乃遣迎接內供養以像立故帝恒侍奉不敢對乃下勅曰朕年老不堪久立侍佛可令有司造坐像其相還如育王本送興善寺旣達此寺形相偉壯會卽機遂置于北面及明見像乃在南面中門衆咸異焉還送北面堅封門鑰明旦更看像還在南僉皆愧悔謝其輕侮卽見在寺圖寫殷矣又梁高祖崇重釋侶欣尚靈儀造等身金銀像二軀於重雲殿晨夕禮敬五十許年初無替廢及侯景篡奪猶在供養太尉王僧辯誅景江南元帝渚宮復沒辯乃通款於齊迎貞陽侯爲時江左未定利害相雄辯女壻杜龕典衛宮闕爲性兇捍不見後世欲毀二像爲金銀挺先遣數十人上三休閣令鑱佛項二像忽然一時迴顧所遣衆人失瘖如醉不能自勝杜龕卽被打築遍身靑腫惟見金剛力士怖畏之像競來打擊略無休息呻號數日洪爛而死及梁運在陳武帝崩兄子陳蒨嗣膺大業將修葬具轀輬車國創新定未遑經始勅取重雲殿中佛像寶帳珩珮珠玉鎣飾之將用送終人力旣豐四面齊至見雲氣擁結圍遶佛殿自餘方左日開朗百工聞怪同本看睹須臾大雨撗注雷電震吼煙張鴟吻火烈雲流光布焰高下相涉竝見重雲殿影二像峙然四部神王幷及帳座一時騰上煙火相扶欻然遠逝觀者傾咸生深信雨晴之後覆看故所惟見柱礎存焉至後月餘有從東州來者日同見殿影東飛于海今有望海者時往見之近高齊日沙門僧護守道直心不求慧業願造丈八石像咸怪其言後於寺北谷中見一臥石可長丈八乃雇匠營造向經一周面腹粗而背著地以六具拗擧之如初不經夜至旦忽然自翻卽就營訖置佛堂晉州陷日像汗流地周兵入燒諸佛寺此像獨不變色又欲倒人牛六十餘頭挽不可動忽有異以瓦木土墼壘而圍之須臾便了失僧所在像後降夢信心者曰吾患指痛其人寤而視焉乃木傷其二指遂卽補之開皇十年有盜像幡蓋夢丈八人入室責之賊遂慚怖而謝焉其像現存竝見旌異記及諸僧錄然斯通感佛教備彰但是福門無非靈應竊以像避延燒狩驚邪道影覆異術經焚不灰靈骨之放神光密迹之興弘護其相大矣具在前聞至如貞觀五年梁州安養寺慧光師弟子母氏貧寠內無衵衣來入子房取故袈裟作之而著與諸鄰母同聚言笑忽覺腳熱漸上至腰須臾雷震擲鄰母百步之外土泥兩耳悶絕經方得醒悟所用衣者遂被震死燒焦踡題其背曰由用法衣不如法其子收殯又再震出乃露骸林下方終銷散是知受持法服惠及三歸之龍信不虛矣近有山居僧在深巖宿以衣障前感異神來形極可畏伸臂內探欲取宿者畏觸袈裟㝵不得入遂得免脫如是衆相不可具紀如上下諸例中

3) 수(隋)나라 천태산(天台山) 폭포사(瀑布寺) 석혜달전(釋慧逹傳)
032_1256_a_23L釋慧達
032_1256_b_02L혜달은 속성이 왕씨(王氏)이며 양양(襄陽)에 살았다. 어린 나이에 불도에 입문하여 절을 짓고 수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혹 산에 오르기도 하고 물에 임하기도 하였으며 혹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경관이 뛰어난 곳만 있으면 절을 지을 생각만 하였으며 허물어진 곳을 수리하고 보완하여 불문에 몸담은 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는 집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후 천태산(天台山) 폭포사(瀑布寺)에 머무르면서 선정을 닦고 업을 이어나갔다. 또한 북쪽 무당산(武當山)에 가서 변함없이 고요히 정신을 수습하며 선정을 닦았다.
진(陳)나라 시대에는 전염병이 크게 휩쓸어 백성들 가운데 그것으로 인해 죽는 자가 거의 절반을 넘었다. 이에 혜달은 자비를 베풀고자 뜻을 품고 양도(楊都)의 번화한 저자에 큰 약 창고를 지어놓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더욱 크게 벌려나갔다. 금릉(金陵)에는 한때 절이 7백 개가 넘었으나 세월의 흘러 오래되면서 썩고 무너져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혜달은 스스로를 독려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3백여 곳을 수리하였는데 모두 화려하게 장식하여 지난날의 것보다 더 훌륭하게 하였다.
인수(仁壽) 연간에 양주(楊州) 백탑사(白塔寺)에 7층짜리 나무로 된 부도를 세웠는데 목재와 석재가 마련되자 후진들에게 부탁하여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 파양(鄱陽)과 예장(預章) 등 여러 고을에 이르러 공덕을 보이고 단속하면서 중생들과 이 복연(福緣)을 함께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가 들린 고을들에 방사(坊寺)와 선우(禪宇)ㆍ영탑(靈塔)ㆍ신의(神儀) 등은 그 재료가 금인가 나무인가 흙인가 돌인가를 불문하고 모두 그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세운 것인데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만년에는 사문 혜운(慧雲)의 요청을 받고 마침내 여산에 올라 서림사(西林寺)를 지었는데, 일곱 칸으로 된 만각(晩閣)은 두공(枓栱)1)과 처마가 겹겹이 뻗어 있어 산세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처음 이 누각을 지을 때 황남목(黃楠木)을 써서 세우려고 계획하고 찾아보았으나 한 그루도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다른 나무로 바꾸어 사용하자고 하니 혜달이 말하였다.
“우리의 정성이 그 나무에 달려 있는데 어찌 다시 다른 나무를 쓰겠는가? 다만 지성이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기어이 찾아내려는 정성스러운 마음만 있다면 소나무가 변하여 황남목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이 누각이 이루어질 날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말을 두려워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찾아보았는데 마침내 경내(境內)의 하소산(下巢山)에서 한 골짜기가 모두 황남목으로 덮인 곳을 감응으로 찾아내었다. 그러나 너무 깊고 후미진 곳에 있어서 나무를 운반할 길이 없었다. 이에 혜달은 절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한 곳에서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통나무가 통과할 만한 길이 있었다. 그 길은 너비가 5척이었고 다른 곳은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드디어 그 길을 통해 목재와 석재를 운반하여 강어귀에 이르렀다. 중도에 강을 따라 운반을 할 때는 여울의 강한 물살에 의해 뗏목이 부서졌으나 여산(廬山)에 이를 때까지 한 그루의 나무도 잃지 않았고 누각도 마침내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누각의 앞에 큰 관(冠)을 씌워 놓았는데 후에 갑자기 한쪽으로 비스듬히 남쪽으로 석 자 정도 기울어졌다. 이에 장공(匠工)인들이 계책들을 내놓았으나 바로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누각의 남쪽에 있는 석문간(石門澗)이라는 개울에서 갑자기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불어닥쳐 누각의 지붕이 다시 바로잡히게 되었다. 이 누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는 만년에 장사(長沙)로 가서 종(鐘)을 주조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그가 이르는 곳마다 풀이 바람을 따르듯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금과 패물을 다 바치면서도 오직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였다.
혜달은 성품이 진실하고 말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경전에 근거하여 비유를 들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색과 의복은 해지고 거칠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는 밖으로는 많은 것을 종합하고 안으로는 이치와 선정을 받아들여 곁에서 보면 물밑에 가라앉아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의 지휘를 따르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완성되었으니, 이 사람은 번거로운 것에 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과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서림사의 누각이 완성된 후에도 불상을 아직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강가로 내려가서 이를 만들고 세워 불상을 원만하게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누각 전체가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니 이는 모두 혜달의 공로였다.
대업(大業) 6년 7월 그믐날에 오래전부터 앓던 질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7일 동안 누워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흘러들어 구름처럼 떠돌았으며 누각의 불상들에서는 모두 땀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이 상서(祥瑞)를 보고 혜달이 임종에 다다랐음을 알게 되었고 관리들은 이 사실을 조사하여 나라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혜달은 정신과 뜻이 평상시와 같았으며 남은 일을 부탁하더니 갑자기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87세였다.
032_1256_a_24L 姓王家于襄陽幼年在道修成務或登山臨水或邑落遊行據形勝之所皆厝心寺宇或補緝殘爲釋門之所宅也後居天台之瀑布寺修禪繫業又北遊武當山如前攝靜有陳之日癘疫大行百姓斃者殆其過半達內興慈施於楊都大市建大藥藏須者便給拯濟彌隆金陵諸寺數過七百年月逾邁朽壞略盡達課勸修補三百餘所皆鎣飾華敞有移恒度仁壽年中於揚州白塔寺建七層木浮圖材石旣充付後營立乃泝江西上至鄱陽預章諸郡觀撿功德願與衆生同此福緣故其所至封邑見有坊寺禪宇靈塔神儀無問竝卽率化成造其數非一晩爲沙門慧雲邀請遂上廬嶽造西林寺重閣七閒欒櫨重疊光耀山勢初造之日誓用黃楠闔境推求了無一樹僉欲改用餘木達曰誠心在此豈更餘求但至誠無感故訪追不遂必心期果決松散竝變爲楠如求不閣成則無日矣衆懼其言四出追乃於境內下巢山感得一谷竝是黃楠而在窮㵎幽深無由可出達尋行崖壁忽見一處晃有光明窺見其可通材道惟有五尺餘竝天崖牽曳木石至於江首中途灘澓𤀥筏竝壞及至廬阜不失一根閣遂得成宏冠前搆後忽偏斜向南三尺工匠設計取正無方有石門㵎當于閣南忽有猛風北吹還正于今尚在晩往長沙鑄鍾造像所至方面若草從焉傾竭金貝者兢兢業業恐其不受任性造眞言無華綺據經引喩篤勵物情然其形服弊麤殆不可睹外綜繁殷內收理靜傍觀沈伏似不能言而指撝應附立有成遂斯卽處煩不固其人矣又爲西林閣成尊容猶復沿江投造脩建充滿故擧閣圓竝達之功大業六年七月晦日疾忽增七日倚臥異香入室旋繞如閣中像設竝汗流地衆見此瑞達當終官人撿驗具以聞奏達神志如常累以餘業奄爾長逝年八十七矣

4) 당나라 면주(綿州) 진향사(振嚮寺) 석승황전(釋僧晃傳)
032_1256_c_22L釋僧晃
032_1257_a_02L승황은 속성이 풍씨(馮氏)이며, 면주(綿州) 부성(涪城)의 남창(南昌) 사람이다. 그는 키가 8척이나 되었고 얼굴과 모습이 훤칠하였으며 위용이 정숙(整肅)하였고 행동이 규범에 맞았다. 눈은 매와 같았고 몸은 범과 같았으며 걸음새는 거위와 같았고 보폭은 코끼리와 같았다. 목소리는 크고 맑았으며 뜻과 지략이 원대하여 절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아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파(岷巴:岷山과 巴峽ㆍ四川省)의 영수들이 함께 높이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이미 문장을 짓는 것에 재주가 있어 그 분야에 널리 통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어느 날 꿈에 손으로 해와 달을 떠받들고 태허(太虛) 가운데 앉아 있는 꿈을 꾸고는 곧 속세를 싫어하고 출가를 그리워하게 되어 제 스스로 이름을 ‘승황(僧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출가를 허락하지 않고 그의 두 발에다 틀을 씌우고 집 기둥에 단단히 결박해놓았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이미 확고한 것이어서 맹세한 마음은 바뀌지 않더니 하루가 채 되기도 전에 그를 묶어놓았던 사슬이 저절로 풀렸다. 그러자 그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무릇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먹고 뜻을 세우면 산악(山岳)도 옮기고 강도 끊을 수 있으며 성곽도 무너뜨리고 바다도 말릴 수 있다. 또한 해와 달도 빛을 감추게 되고 수미산도 무너지게 되며 별들도 그 궤도가 바뀌게 되고 가수(嘉樹)도 꺾어지거늘 하물며 쇠나 나무로 만든 형틀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의 부모는 그 깊은 감응을 보고는 그의 뜻에 따라 도화(道化)에 종사하도록 맡겼다. 그리하여 그는 단(彖) 법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고 그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대승과 소승의 학문을 통달하여 낮이나 밤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는 양나라 말엽 북주(北周) 초엽으로 불법이 어지러워져 이에 대한 수행에 부략(浮略)한 점이 많았으며 소홀히 하고 허탄하게 여기는 시대였다. 승황은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남달리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젊었으나 전일하게 고행을 하였고 그는 늘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 모두는 스승이나 벗의 타력(他力)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그의 정신과 성품에 끌려 내심 그를 높이 숭상하게 되었다.
그후 강단에 오르게 되자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전공하면서 수 년 동안 힘껏 노력하여 밝게 비추어보고 정밀하게 익혔으며 미세한 것까지 파고들어 지혜를 다하였는데 그 빛나고 풍부한 경지가 숭상할 만하였다.
북주 보정(保定) 연대 이후에는 다시 장안에서 업을 쌓았는데 한걸음 전진하여 『승기율(僧祇律)』을 배우면서 그 깊고 그윽한 뜻을 찾아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파고들어 막혔던 부분을 환히 통하게 하였다. 또한 담상(曇相) 선사에게서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진리를 관하는 도가 원만하고 청정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도의 눈이 더욱 열리게 되었다. 또한 개(開) 선사에게서 방등(方等)과 행도(道)를 베우고 당시 사람들 속에 깊이 들어가니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드물어졌는데 그것은 복업(福業)을 많이 경영하다 일에 고달파하는 것이 있었기에 세상에 숨어 일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의 공덕을 풍송하게 되자 그 소문이 황제에게까지 알려졌으므로 무제(武帝)는 칙명을 내려 그를 명덕전(明德殿)으로 초대하였는데 여러 가지 논의들을 도리로써 환히 밝히니 더욱 황제의 마음에 들어 마침내 본주(本州)의 삼장(三藏)법사의 칭호를 주었다.
그후 수나라가 세워지자 그를 불러 승정(僧正)으로 임명하여 본읍(本邑)을 거느리고 바로잡게 하였는데, 일을 처리함에 강결방정(剛決方正)하였으며 상벌(賞罰)에 있어서는 엄격공평(嚴格公平)하였다. 이에 면주(綿州)와 익주(益州)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풍을 흠모하여 귀천 없이 받들어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전후해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십여 사람에게 모두 계향(戒香)을 내려주어 악을 끊고 선을 행하게 하였다.
개황(開皇) 15년에는 절에 두타행(頭陀行)을 하는 대중을 두게 하여 그들에게는 승단의 일을 면제해주어서 타락한 자를 인도하게 하였다.
인수(仁壽) 연대 이후에는 다시 절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함께 장경(藏經)을 두루 돌려가며 읽었는데 한 차례 다 읽고 나서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애초에 중단한 일이 없었다. 공급받은 물건들은 모두가 속가의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는데 모두 승황이 지시하고 가르쳐 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복보(福報)가 이르는 곳에는 샘물처럼 솟아나 다하지 끝이 없었고 승단의 업이 번성하여 사방의 사람들이 떠받들었다.
그는 무덕(武德) 연간 초겨울에 주석하던 진향사(振嚮寺)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5세였다. 그가 생을 마치기 전에 불당의 연화지(蓮華池)가 저절로 마르고 못의 옆에 있던 자죽(慈竹)이 까닭도 없이 죽었으며 절 안의 장미에 때 아니게 꽃이 피어 여름철처럼 만발하였다. 사람들은 살아나고 죽는 두 가지 상서로운 현상을 보고 모두 생멸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그의 공덕이 보통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감응으로 죽음을 알려준 현상일 뿐이었다.
032_1256_c_23L 姓馮氏緜州涪城南昌人長八尺顏貌都偉威容整肅動中規而鷹眼虎身鵝行象步聲氣雄志略宏遠綱維法任有柱石焉使岷巴領袖咸所推仰昔年在志學文才博達時共聲譽嘗夢手擎日月太虛中坐便晃然厭俗欣慕出家卽立名爲僧晃也父母未之許拘械兩足牢繫屋柱決意已絕誓心無改不移旦夕鎖自然解乃嘆曰夫志之所及也山嶽以之轉江河以之絕臺以之崩瀛海以之竭日月爲之潛光須彌爲之崩頹星辰爲之改度嘉樹爲之藏摧況復金木之與桎梏奚足以語哉二親顧其冥感任從道化彖法師出家受業學通大小夙夜匪會梁末周初佛法淆濫行多浮略迂誕毘尼晃具戒未聞而超然異表少能精苦性自矜持卒非師友所成立也衆皆挹其神宇密相高尚及昇壇之後偏攻十誦數年劬勞朗鑑精硏微造盡彬鬱可崇周保定後業長安進學僧祇討其幽旨有難必是滯能通又於曇相禪師稟受心觀道圓淨由此彌開又於開禪師方等行道洞入時倫無與相映自此罕得而傳者由多營福業勞事有爲是以隱墜世不稱也旣而遐邇諷德聲聞天庭武帝下勅延於明德殿議開闡彌遂聖心乃授本州三藏隋啓祚面委僧正匡御本邑而剛決方正賞罰嚴平緜益欽風貴賤攸奉前後州主十有餘人皆授戒香斷惡行善開皇十五年又於寺中置頭陁僧事蠲免以引墮者仁壽以後率寺衆共轉藏經周而復始初不斷供給䞋錫一出俗緣皆晃指授福報所至如泉不窮僧業茂盛方類推擧以武德冬初終於所住之振嚮春秋八十五矣初未終前佛堂蓮華池自然枯竭池側慈竹無故彫死寺內薔薇非時發花曄如夏月衆以榮枯兩瑞不無生滅之懷德異常倫故感應之所期耳

5) 당나라 양주(楊州) 장락사(長樂寺) 석주력전(釋住力傳)
032_1257_b_20L釋住力
032_1257_c_02L주력은 속성이 저씨(褚氏)이며 하남(河南) 양적(陽翟) 사람인데 난리를 피하여 오군(吳郡) 전당현(銭塘縣)으로 와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전생에 훌륭한 인연을 심었으므로 일찍이 혜업(慧業)을 닦았으며 겨우 여덟 살이 되자 출가하여 도를 배웠다. 기질과 도량이 깊고 맑아 허심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깨우쳐 명성이 도속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진(陳)나라 중종(中宗)인 선제(宣帝) 때 서울의 왼편에 진황사(秦皇寺)를 지었는데 더없이 크고 웅장하여 천부(泉府:國庫)가 고갈될 지경이었다. 이때 주력에게 칙명을 내려 그로 하여금 수많은 장공인들을 전적으로 맡아서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런 까닭에 잘 살펴보고 지휘하여 그 면모가 장엄하고 청정하게 되었다.
지덕(至德) 2년에 다시 칙명을 내려 주력을 진황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후 강남 지방이 쇠락하여 승도(僧徒)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마침내 석장을 짚고 사방을 유행(遊行)하면서 명승지를 찾아 구하다가 강도(江都)에 이르러 장락사(長樂寺)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수나라 개황 13년에 5층탑을 세웠는데 금빛 받침대는 햇빛에 빛나고 탑신은 우뚝 높이 솟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눈을 부비며 우러러보았다. 개황 17년에 이르러 양제가 진번(晉蕃)에 있다가 다시 강해(江海)에 임하게 되자 주력에게 절의 소임을 맡겼는데 이는 그가 절을 수리한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양나라 무제(武帝)가 우전왕(優塡王)상을 얻었을 때 신비한 상서로움이 나타났는데 이는 글로 기록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단양(丹陽)의 용광사(龍光寺)에 두었는데 그후 진나라가 망하여 도량이 불타고 허물어지자, 주력은 우전왕상과 왕밀(王謐)이 얻은 정광사(定光寺)의 불상도 함께 장락사에 옮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그러나 법당이 매우 좁아 장엄함을 다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사부대중과 왕공(王公)과 백성들을 깨우치고 이끌어 함께 높은 누각을 수축하고 그 곁에 두 누각을 아울러 세웠다. 절의 3백여 명의 높고 낮은 승려들이 다 같이 기꺼이 돈과 재물을 내며 공사를 마치기를 서원하였으며, 주력은 동료 승려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함께 예장(豫章)으로 가서 산을 깎고 나무를 베었다. 인력은 충분하였으므로 규모에 맞게 지시하니 신묘함이 일어 사람들이 모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일하니 그해에 불당이 건립되었는데 그 구성과 배치가 매우 화려하였다. 이렇듯 주력의 남다른 신공(神工)으로 불전은 웅장하고 높이 드러났으니 그 부근에서 가장 훌륭하였다.
대업(大業) 4년에는 다시 사방을 둘러 승방을 세워 행랑방과 공양간과 창고 등을 원만히 두루 갖추었다. 그런 까닭에 대중 승려들로 하여금 항상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였고 수행이 끊어질 원인이 없어졌다. 그후 다시 서울로 가니 황제로부터 매우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다시 돌아와 강도(江都)에 이르러서도 또 칙명으로 위문을 받았다.
대업 10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 전단향나무로 서상(瑞像)과 두 보살상을 모사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고 함께 누각 안에 안치하였다.
대업 14년에 이르러 수나라의 황실이 상사(喪事)와 화란(禍亂)을 당하여 도속들이 떠돌아다니고 뼈만 남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게 되자, 이에 주력은 신명을 다하여 전각을 수호하기로 맹세하였는데, 절에는 여우와 토끼들만이 살고 자신의 그림자를 벗으로 삼아 콩을 먹고 물을 마시며 두 해를 보냈다. 그는 비록 늙은 나이었지만 마음만은 건장하여 떨어져나간 벽에는 진흙을 바르고 돌아가며 불로 태울 것은 태웠으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염송하면서 손으로는 절을 수리하였다. 그리하여 도적무리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눈뜨고 보기가 애처롭다고 탄식하였으며 때로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일손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후 당나라가 세워지고 불법을 널리 장려하니 옛 승단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때 고을의 집들은 모두 불탔으나 이 절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덕(武德) 6년에 강남에 주둔해 있던 적의 괴수 보공우(輔公祐)가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군사를 정비하고 몰래 반역을 꾀하면서 모든 절들을 철거하여 강남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주력은 곧 글을 보내어 거듭 중지할 것을 요청하면서 누각 앞에서 몸을 불태우겠으니 절만은 남아 있게 해탈라고 하였다. 공우는 겉으로는 존대하여 불렀지만 뜻은 당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데 있었던 관계로 그의 글을 받고서도 전혀 살펴보지 않았다. 이에 주력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무량겁의 먼 옛날부터 탐욕과 애착의 습성이 쌓여서 몸과 목숨을 버려 법은(法恩)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지금 스스로 부처님 앞에서 목숨을 마치려고 한다. 불상이 강을 건너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마른 장작을 쌓아놓고 이 몸을 태워 공양하겠다. 내가 죽은 후에도 불상은 반드시 남쪽으로 건너갈 것이니 의복과 소지품 그리고 집물들을 모두 불상을 모시는 데 쓰고, 곡을 하고 옷을 입히며 영혼에 보시하는 의식들은 모두 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향탕(香湯)으로 목욕을 하고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를 하고는 불을 당겨 스스로 불태우니 잿더미 속에서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80세였는데 곧 무덕 6년 10월 8일이었다. 생을 마치자 불도 꺼졌는데 합장을 한 자세로 굳어졌으므로 다시 충분히 다비(茶毘)하니 한순간에 모두 재로 변하였다.
처음 주력이 부처님 앞에서 몸을 불사를 때 까치들이 슬피 울었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절하였으며 오른쪽으로 일곱 바퀴 돌고 나서 비로소 날아갔다. 그가 죽은 다음 불상은 과연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전각과 승방만은 재난을 면할 수 있었으므로 법보와 승려들은 이전과 같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문인인 혜안(慧安)과 지색(智賾)이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중하고 조카와 외삼촌의 은혜가 깊어 그를 위하여 절 안에 높은 비를 세웠는데, 동궁(東宮)의 서자(庶子) 우세남(虞世南)이 비문을 지었다.
지금 그 불상은 다시 본래의 누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032_1257_b_21L 姓褚氏河南陽翟人避地吳郡之錢塘縣因而家焉宿植勝因修慧業甫及八歲出家學道器宇凝峻虛懷接悟聲第之高有聞緇俗陳中宗宣帝於京城之左造泰皇寺宏壯之極罄竭泉府迺勅專監百工故得揆測指撝面勢嚴淨至德二年又勅爲寺主値江表淪亡僧徒乖散乃負錫遊方訪求勝地行至江都於長樂寺而止心焉隋開皇十三年建塔五層金槃景耀峨然挺秀遠近式至十七年煬帝晉蕃又臨江海力爲寺任繕造之功故也初梁武得優塡王像神瑞難紀在丹陽之龍光及陳國云亡道場焚毀力乃奉接尊儀及王謐所得定光像者竝延長身心供養而殿宇褊狹未盡莊嚴遂宣導四部王公黎庶共修高閣夾二樓寺衆大小三百餘僧咸同喜畢願締搆力乃勵率同侶二百餘共往豫章刊山伐木人力旣壯摹所指妙盡物情卽年成立制置華力異神工宏壯高顯挺冠區宇業四年又起四周僧房廊廡齋廚備足故使衆侶常續斷緖無因往京師深降恩禮還至江都又蒙勅大業十年自竭身資以栴檀香木摸寫瑞像竝二菩薩不久尋成同安閣內至十四年隋室喪亂道俗流亡骸若萎朽充諸衢市誓以身命守護殿閣寺居狐兔顧影爲儔啜菽飮水再離寒暑雖耆年暮齒而心力逾壯泥塗褫落周帀火燒口誦不輟手行治葺賊徒雪泣見者哀嘆往往革心相佐修補皇唐受命弘宣大法舊僧餘衆竝造相投邑室雖焚此寺猶在武德六年江表賊帥輔公祐負阻繕兵戈潛圖反叛凡百寺觀撤送江南乃致書再請願在閣前燒身以留寺祐僞號尊稱志在傾殄雖得其書全不顧遇力謂弟子曰吾無量劫來積習貪愛不能捐捨形命以報法恩今欲自於佛前取盡決不忍見像濟可積乾薪自燒供養吾滅之後必南渡衣資什物竝入尊像泣服施理宜改革便以香湯沐浴加趺面西引火自焚卒於炭聚時年八十武德六年十月八日也命終火滅掌凝然更足闍維一時都化初力在佛前焚時群鵲哀鳴其聲甚切右遶七帀方始飛去及身沒後像果南遷殿閣房廊得免煨燼法寶僧衆如疇昔焉門人慧安智賾者師資義重舅恩深爲樹高碑于寺之內東宮庶子虞世南爲文今像還歸於本閣云

6) 당나라 경사 대장엄사(大藏嚴寺) 석지흥전(釋智興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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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1258_c_02L지흥은 속성이 송씨(宋氏)이며 낙주(洛州) 사람이다. 그는 겸손하고 검소한 것을 임무로 삼았고, 힘써 수행함이 굳세고 밝았으며 수십 권의 경전과 행법(行法)의 중요한 게송 수천 편을 외웠는데 마음과 입이 서로 스승이 되어 밤이나 새벽이나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선정사(禪定寺)에 주석하였는데 지금의 대장엄사(大藏嚴寺)가 바로 그곳이다.
처음 수(首) 율사에게 의지하여 그를 따라 여러 강회(講會)를 두루 다녔는데 사고력이 맑고 명철하여 동료들이 이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어렵고 엉킨 문제를 따질 때에는 그의 날카로운 사변과 논리는 놀랄 만큼 뛰어났다. 또한 동료들을 대할 때에는 현묘한 방편으로 인륜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당시 그의 행동에 대하여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업(大業) 5년 11월[中冬]에 순번에 따라 유나(維那)2)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때 그는 종(鐘)을 울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늘 이를 받들어 지니고서 지극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여 승도들 사이에 어지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절의 스님 가운데 삼과(三果)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의 형이 황제를 따라 강도(江都)로 남행하다가 도중에 죽었다. 처음에는 그가 사망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홀연히 그의 처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황제를 따라 가다가 팽성(彭城)에 도착하여 불행하게도 병으로 죽게 되어 지옥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5고(苦)를 두루 겪었는데 그 괴로움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 다행히 이달 초하루에 선정사의 지흥 스님이 종을 울리니 그 메아리가 지옥을 진동시켜 함께 고통을 받던 자들이 일시에 해탈하여 지금은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니 비단 열 필을 마련하여 바치고 아울러 나의 마음도 전달해달라.”
그의 처가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나 꿈에 본 일들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더니 애초에 믿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무당들을 찾아가니 모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허언이라고 말하였다. 그후 10여 일이 지나자 사망한 소식이 이르렀는데 꿈과 일치하였다. 이에 삼과는 곧 비단을 받들어 지흥에게 주었으나 지흥은 스스로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모두 대중들에게 보시하였다. 어떤 사람이 지흥에게 물었다.
“어떠한 인연으로 종을 울리자 이런 감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지흥이 말하였다.
“나에게 다른 기술은 없소. 「부법장전(付法藏傳)」에서 계이탁왕(罽膩吒王)의 검륜(劍輪)이 멈추었던 일과 『중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종소리의 공덕을 본받고 그 전철(前轍)을 밟아 힘껏 행하였을 뿐이오. 매해 겨울마다 종루(鍾樓)에 오르면 찬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아 승단에서는 가죽장갑을 주어 종추를 잡도록 하였지만, 나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맨손으로 종추를 잡았소. 모진 추위 속에 살가죽이 찢어지고 손바닥에 피멍이 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이를 마다하지 않았소. 또한 시간에 맞추어 종을 울려 시작을 알릴 때에는 먼저 모든 현자와 성자들이 함께 도량으로 들어오실 것을 소원하고 그 다음에 세 번 종을 쳤으며, 길게 치려고 할 때에는 앞에서와 같이 공경하면서 여러 악취(惡趣)에 태어난 중생들이 이 종소리를 듣고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소원하였소. 이와 같이 소원하는 일을 항상 명심하고 받들어 닦았으나 어찌 보잘것없는 정성이 마침내 먼 곳에까지 감응을 일으킬 줄 알았겠는가?”
대중들은 그의 말에 감복하였다.
정관(貞觀) 6년 3월에 병에 걸렸는데, 얼마 후에 생을 마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자신의 소지품들을 버리고 여러 스승과 벗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별의 말을 던지고는 장엄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두성(杜城)의 굴 속에 안장하였다.

선인(善因)
그의 제자 선인은 스승의 모범을 본받아 『사분율(四分律)』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여 보이지 않는 신비한 복과 지혜를 지니어서, 그 명성이 서울에 널리 알려졌다.
032_1258_b_07L 俗緣宋氏洛州人也謙約成厲行堅明誦諸經數十卷幷行法要偈數千行心口相師不輟昏曉禪定寺今所謂大莊嚴也初依首律隨從講會思力淸澈同侶高之難鱗錯詞鋒驚挺又能流靡巧便不傷倫次時以其行無諍也大業五年仲冬次掌維那時鍾所役奉佩勤至僧徒無擾寺僧三果者有兄從帝南幸江都中路亡沒初無凶告忽通夢其妻曰吾行從達於彭城不幸病死生於地獄備經五苦辛酸叵言誰知吾者賴以今月初日蒙禪定寺僧智鳴鍾發聲響振地獄同受苦者時解脫今生樂處思報其恩可具絹十疋奉之幷陳吾意從睡驚覺怪夢所由與人共說初無信者尋又重夢及諸巫覡咸陳前說經十餘日凶問奄至恰與夢同果乃奉絹與之而興自陳無德竝施大衆有問興曰何緣鳴鍾乃感斯應興曰余無他術見付法藏傳罽膩咤王劍輪停事及增一阿含鍾聲功德敬遵此轍苦力行之每冬登摟寒風切肉僧給皮䄂用執鍾搥余自厲意露手捉之嚴寒裂肉掌中凝血不以爲辭又至諸時鳴鍾之始願諸賢聖同入道場然後三下將欲長打如先致敬願諸惡趣聞此鍾聲俱時離苦如斯願行志常奉修豈惟微誠遂能遠感衆服其言以貞觀六年三月遘疾少時自知後世緣身資召諸師友因爾陳別尋卒莊春秋四十有五葬於杜城窟中子善因宗師戒範講四分律講法華冥神福慧著聞京邑

7) 당나라 포주(蒲州) 보구사(普救寺) 석도적전(釋道積傳)
032_1258_c_18L釋道積
032_1259_a_02L도적은 하동(河東) 안읍(安邑) 사람이다. 속성은 상리씨(相里氏)이고 이름은 자재(子材)였는데 불문에 들어오자 이름을 도적이라고 고쳤다. 그의 선조는 아마도 정(鄭)나라의 대부(大夫)였던 자산(子產)의 후손으로 보인다. 먼 옛날 자산이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손을 펴보니 ‘상리(相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그후 이것을 성(姓)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인 상리선(相里宣)은 마음이 넓고 트인 사람으로 큰 뜻이 있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학식이 풍부하였고 아버지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도적은 일찍부터 수많은 고전을 익혀 정신과 기개가 곧고 굳세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어 출가하려고 하였으나 갈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마침 율사 홍담(洪湛)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보고 남다르게 여겨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쌍암(雙巖)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후 법랑(法郞) 선사에게 의지하여 심학(心學)을 배우기를 원하여 3년 동안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을 혼자서는 증험하기 어려웠으므로 성인의 가르침이 필요하였기에 개황(開皇) 13년에 스승과 작별하고 발우를 차고 두루 사방을 다니면서 올바른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창기(滄冀) 지방을 지나다가 원행사(遠行寺)에 들려 보흥(普興) 법사에게서 『열반경(涅槃經)』을 배웠다. 그는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법문을 듣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마침내 그곳에서 4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이 3사(事:戒律ㆍ禪定ㆍ知慧)에 통하여 함께 배우는 문인 학도들이 그를 떠받들게 되었다.
개황 18년에 이르러 서울로 가서 보창사(寶昌寺)의 명급(明及) 법사를 모시고 『십지경론(十地經論)』에 대하여 묻고 익히다가, 변재(辯才)와 지응(智凝) 두 법사에게 의지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의 십의훈습(十義熏習)과 육분전의(六分轉依)ㆍ무진유식(無塵唯識)에 대하여 단기간에 환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수(仁壽) 2년에는 병주(并州) 무덕사(武德寺)의 사문 법릉(法稜) 스님에게 가서 『지지론(地持論)』을 듣고 배웠다. 그리하여 그는 10법(法)과 3지(持)를 그 근원부터 다 밝히게 되었다.
인수 4년 7월에 양량(楊諒)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침내 동료인 소(素)ㆍ(傑) 등과 함께 여러 스승들을 모시고 남쪽 포판(蒲坂)으로 돌아왔다. 고향땅에 돌아와서는 법의 교화를 크게 행하였는데 먼저 『열반경』을 강의하고 그 다음에 『섭대승론』을 해설하면서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여러 부류의 경전들도 자주 전하였다. 그후 나이가 50세 가까이 되자 『지지론』만을 홍교(弘敎)하여 이를 가르침을 돕는 최고의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이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요론(要論)인 까닭에 도속들을 이끄는 기준이 되었으며 아울러 사찰의 경영을 윤택하게 하여, 자비한 교훈의 근원을 맺어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흡족히 교화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번뇌가 있는 사람들을 수호하였으며 꾸짖음과 의심을 받을 일은 신중히 대하여 비구니 대중의 귀의는 애초에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늘 문도와 권속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자를 상대하는 일은 계율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이다. 이는 경전에서 항상 말씀하신 것이니 여자는 출가하여 불교에 입문하였다고 해도 정법을 손상시키는 대상임은 변치 않는다.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더러워지는데 하물며 얼굴을 마주 보고서야 오염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도인은 깨끗하게 드러내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이치에 맞지 않거나 외람된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속인도 혐의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중하게 여기면서 군자만을 받든다. 나는 비록 이런 경지에는 마치지 못하였지만 너희들은 이 법도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에 비구니에게 계율을 내려주고 가르침을 주는 자리에는 죽을 때까지 오르지 않았으며, 비구니들이 만나서 문답하기를 청하여도 방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이는 곧 강직함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한 것이니 청정(淸貞)함이 높고 뛰어난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동(河東)의 영준한 사람 가운데 청정함에 있어서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보징(寶澄)이라는 스님이 수나라 초엽에 보구사(普救寺)에서 1백 척(尺)이나 되는 큰 불상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수많은 공정(工程) 가운데서 오직 한 가지 공정만을 해놓고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고향의 나이 많은 선배들이 도적에게 그 일을 이어서 계속해줄 것을 요청하니, 그는 마침내 큰 공덕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는 칠귀(七貴:일곱 부류의 귀족)들을 인도하여 그것을 높이 세웠는데 10년 동안 새기고 장식하여 전부 완성하니 도속들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처음 도적이 청을 받던 날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산 옆에 두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더니 큰 불상 옆에서 밝은 구슬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짐승들의 왕인 사자의 자유자재한 모습은 법의 흐름이 막힘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귀한 구슬들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 것은 재물 보시가 다함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운이 가만히 열렸으니, 일이 이루어질 것을 이로써 알려준 것이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곧 장공인들에게 명하여 꿈에서 본 것을 미륵대상(彌勒大像) 앞에 그리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것이 남아 있다.
그 절은 포판(蒲坂)의 남쪽에 있었는데 지세가 높아 사방이 확 트였으며 주변이 아름다우면서도 넓었다. 동쪽으로는 고을과 마주하였고 남쪽으로는 강과 산이 바라보였다. 불상은 3층에 모셨으며 이를 중심으로 암랑(巖廊)이 사방을 두르고 있었다. 위의 선방(禪坊)과 아래의 사원이 매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고, 정원과 채소밭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굽어 내려다보았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성취한 것도 모두 도적의 공로였고 빈손으로 공사(工事)를 일으켜서 큰 불상을 세운 것도 모두 그의 공로였다. 하지만 그는 해진 옷을 입고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었으며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목숨가진 것을 중하게 여겼다. 이렇듯 널리 중생들을 구제한 공덕이 아주 많았음에도 고요한 곳을 따라 한적한 곳으로 돌아가 머물러서 일을 하고서도 뽐내지 않았고 곧 깊은 곳에 숨어 살았다. 그는 비록 하늘같이 높은 뜻을 품고 갑자기 인간세상과 인연을 끊었지만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엄숙해졌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왔다. 복야(僕射) 배현진(裴玄眞)은 황제의 총애로 상재(上宰)자리에 있었으나 도적의 높은 명성을 흠모하여 자주 향과 옷을 보냈으며, 자사(刺史) 두초객(杜楚客)은 사람을 알아보는 신중함이 있어 찾아가 법을 구하였으니, 그에게 감동되어 그 자연스럽게 따른 것이 모두 이와 유사하였다.
지난날 수나라 말엽에 이르러 하동 지방이 완전히 고립되자, 통수(通守) 요군소(堯君素)가 황성(荒城)을 지키면서 방자하고 포악한 짓만을 일삼고 있을 때 사람들은 감히 겁이 나서 곁눈질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여러 스님들로 하여금 성에 오르게 하여 성곽을 수비하도록 시키려고 하였는데, 감히 간언(諫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으므로 도속들 모두가 이를 걱정하면서도 그에 맞서질 못하였다. 이때 도적은 울분과 탄식이 마음속에서 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여러 권속들에게 말하였다.
“세상은 그 기운이 번성하고 쇠퇴함이 있을 수 있지만 법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없다. ‘하늘은 우리의 도(道)를 없애지 않는다3)’는 말씀이 여기에 있다. 또한 사문(沙門)이란 속세 밖의 사람이고 그 자취는 신선과 같은데 어찌 창을 들고 갑옷을 입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졸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사문 도손(道孫)과 신소(神素)를 이끌고 계단을 올라 엄한 기색으로 간하였다.
“빈도(貧道)가 듣건대,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죽음으로 나를 두렵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 죽음 보기를 삶과 같이 보고 있으며 다만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내가 죽어서 이익이 있다면 나는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성(城)의 존망은 공의 지략에 달렸고 세상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공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거늘 어찌 몇 가지 허망한 협박으로 성(城)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다.
옛날 한나라는 상산사호(商山四皓)4)를 흠모하여 천하가 융성하고 평온해졌으며, 위나라는 단간목(段干木)5)을 존중하여 온 나라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지금 스님들을 붙들어 군역에 종사시키려고 하니 이는 하늘이 정해준 법도를 어겨서 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므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감히 속마음을 터놓았으니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방자하게 굴다가 하루아침에 망하여 후세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마십시오. 공이 만약 내 머리를 요구한다면 머리를 바치겠습니다. 그것은 나의 본래의 소원입니다. 기어이 이 남은 생을 군역에 종사하도록 강요를 받아 이를 행하게 된다면 살아도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죽어도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적이 이렇게 말할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떨렸다. 요군소는 처음 그의 간하는 말을 들을 때부터 도적의 말하는 기상을 중하게 여겨 다만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훌륭하도다. 이 사람은 어쩌면 마음과 기상이 이렇게 씩씩한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에 도적을 풀어주고 죄를 묻지 않았으며 그후에는 과연 도적을 찾아가서 참회하였다. 그러나 요군소는 평소에 법도가 없이 살육을 행하며 악독한 마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고, 더욱이 사람들을 업신여겼으므로 그 당시에는 그의 악독한 마음을 잠시나마 누를 수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재앙을 초래할 징조를 저질렀기에 마침내 성안 사람인 설종(薛宗)에게 살해되었다.
도적은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결단성이 있었으며 한 번 뜻을 세워 결심한 일은 돌려세우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어 자칫 죽을 뻔도 하였는데 출가한 뒤로는 자신의 타고난 성품의 허물을 알고 이러한 성품을 꺾어 없앴으며 점차 온화하고 인내하는 성품을 키워나갔다. 나이가 60살에 이르러서는 그 수행이 더욱 높아졌으니 습관이 성품을 완성시킨다는 말은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정관(貞觀) 10년 9월 17일에 본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처음 도적이 병에 걸렸을 때 딱히 아파하는 것은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리라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나는 지금 75살인데 금년에 생을 마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들이 “선생님은 69살입니다. 어째서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하니, 대답하였다.
“죽고 사는 법이 그러하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나이가 70살이 못 되었지만 자사(刺史)가 나를 공경하여 6살을 더해주었다. 이 때문에 그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으니 슬픔을 이겨내고 독려하여 나의 행한 바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말하였다.
“경에 이르지 않았느냐? 세상은 실로 위태하고 연약하여 단단하고 강한 것이 없다.”
생을 마치기 사흘 전부터 종에서 소리가 나지 않다가 생을 마치자 이전과 같이 소리가 났는데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감탄하였다.
032_1258_c_19L 河東安邑人也俗姓相里子材旣莅玄門更名道積其先蓋鄭大夫子產之苗裔矣昔子產生而執啓手觀之文成相里其後因而氏父宣恢廓有大志好學該富宗尚嚴君積早習丘墳神氣爽烈年二十將欲出家未知所適乃遇律師洪湛見而異之卽爲剃落晦迹雙巖又依法朗禪師希求心學絕影三載不出山門然爲幽證自難聖教須涉開皇十三年辭師擐鉢周行採義路經滄就遠行寺#普興法師尋學涅槃所未聞乃經四載情通三事爲門學所推至十八年入於京室依寶昌寺明及法師諮習地論又依辯才智凝法師攝大乘論於十義熏習六分轉無塵惟識一期明悟仁壽二年往幷州武德寺沙門法稜所聽採地故得十法三持畢源斯盡四年七楊諒作亂遂與同侶素傑諸師旋蒲坂旣達鄕壤法化大行先講涅後敷攝論幷諸異部往往宣傳知命將鄰偏弘地持以爲誡勖之極特是開心之要論也故成匠道俗潤朱藍結宗慈訓遠近通洽而深護煩惱重愼譏疑尼衆歸依初不引顧每謂徒屬曰女爲戒垢聖典常言度出家損減正法尚以聞名污心復面對無染且道貴淸顯不參非濫俗重遠嫌君子攸奉余雖不逮請遵其度由此受戒教授沒齒未登參謁諮請不聽入室斯則骨梗潔己淸貞高蹈河東英俊莫與同風先是沙門寶澄隋初於普救寺創營大像百丈萬工纔登其一不卒此願而澄早逝鄕邑耆艾請積繼之乃惟大造之未成也且引七貴而崇樹之修建十年莊都了道俗慶賴欣喜相幷初積受請之夕寢夢崖傍見二師子於大像連吐明珠相續不絕旣覺惟曰王自在則表法流無滯寶珠自涌喩財施不窮冥運潛開功成斯在命工匠圖夢所見於彌勒大像前猶存焉其寺蒲坂之陽高爽華博臨州里南望河山像設三層巖廊四上坊下院赫弈相臨園磑田蔬環俯就小而成大咸積之功撝空樹皆積之力而弊衣菲食輕財重命普救殷贍追靜歸閑爲而不恃卽處幽隱天懷抗志頓絕人世不令而衆自嚴不出而物自往僕射裵玄眞寵居上宰欽其令問頻贈香衣刺史杜楚客知人之重造展求法其感動柔皆此類也往經隋季擁閉河東守堯君素鎭守荒城偏師肆暴時人莫敢竊視也欲議諸沙門登城守固敢諫者斬玄素同憂無能忤者積憤嘆內發不顧形命謂諸屬曰時乃盛法無隆替天之未喪斯文在斯沙門塵外之賓迹類高世何得執戈擐甲爲禦侮之卒乎遂引沙門道愻神素歷階厲色而諫曰貧道聞人不畏死不可以死怖之今視死若生懼不得其死死而有益是所甘心城之存亡公之略也世之否泰公之運也豈五三虛怯而能濟乎昔者漢欽四皓天下隆平魏重干木擧國大今欲拘繫以從軍役反天常以會靈恐納不祥之兆耳敢布腹心願深圖之無宜空肆一朝自傾於後爲天下笑也公若索頭與頭仍爲本願縱以殘生逼充步甲者則不知生何生死爲何死積陳此語傍爲寒心素初聞諫重積詞氣但張目直視曰異哉斯人也何乃心氣若斯之壯耶因捨而不問果詣積陳懺堯素以殺戮無度騁其毒心加又擧意輕陵當時獲寢而禍作其兆卒爲城人薛宗所害自積立性剛果志決不迴遇逢瞋忿動爲魚肉旣出家後訶責本緣挫拉無情轉增和忍歲登耳順此行彌隆習與性成斯言不爽以貞觀十年九月十七日終於本寺春秋六十有九初積云疾的無所苦自知卽世告門人曰吾今七十有五吾卒今年其徒曰師六十九矣何遽辭耶死生法爾吾不懼也且老僧將年七十刺史貌吾增爲六歲故其命在旦夕宜深剋勵視吾所行又曰經不云乎世實危脆無牢强者去終三日鍾不發聲逝後如舊衆咸哀歎

8) 당나라 경사 회창사(會昌寺) 석덕미전(釋德美傳)
032_1260_a_17L釋德美
032_1260_b_02L덕미는 속성이 왕씨(王氏)이며 청하(淸河)현 임하(臨河)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성적으로 선(善)한 것을 좋아하였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찬미하는 범패의 소리에 의거하였으며 진흙을 모아놓고 장난을 할 때에도 반드시 영탑(影塔)을 먼저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볼 때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예경(禮敬)할 줄 알았다. 이 때문에 친척들과 원로들은 속으로 기특하게 여겼으며 가문의 대를 이을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뜻에 따라 스승에게서 배우도록 맡겨두니, 열여섯 살에 양친 곁을 떠나 여러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이름난 현인을 널리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나이가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머리를 깎았고 매사에 삼가고 공경하며 겸손하고 정성을 다하게 되었으며 오로지 수행해야 할 일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비록 경론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계율의 요점을 마음에 새겼으므로 『사분율(四分律)』 하나만은 조금이나마 그 근본을 통달하였다. 그는 좋은 벗을 구하기 위해서는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았고 깨끗하게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외도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개황 말년에 서울을 유행(遊行)하며 교화하면서 계율을 수지하도록 단속하고 예참(禮懺)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후 태백산(太白山)으로 가서 『불명경(佛名經)』 열두 권을 외웠는데, 예참할 때마다 그것을 외우면서 예배를 하니 사람들은 그가 총지(摠持)하는 염력(念力)으로 열반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태백산의 구롱사(九隴寺)에는 이보다 앞서 승옹(僧邕)이라는 선사가 있었는데 그는 도행승(道行僧)이었다. 이에 그를 받들어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에게서 의업(義業:論理學)을 전수받으며 여러 해 그곳의 분위기에 물들게 되었다.

정묵(静默)
그후 서울을 돌아와 혜운사(慧雲寺)에 주석하면서 묵(默) 선사를 만나 그에게 수업을 요청하였다. 묵 선사는 곧 도선(道善) 선사의 신족(神足)제자이다. 도선은 불법을 따르고 받들어 믿고 행하여 그 공덕이 으뜸이었으며, 몸과 마음을 검박하고 겸손하게 하면서 가죽과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묵 선사는 그에게서 도를 전수받아 듣고 보고 이를 배우니 서울에서 명망이 높아져 특히 속인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덕미는 정묵을 받들면서 10여 년 동안 3업(業)을 따르니 서로 법기(法器)로 대우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해마다 예참할 때 도량을 산회하게 되면 그 기한에 앞서 7일 동안 간절하게 격려와 용기를 더하여 1만 5천 부처님께 날마다 한 번씩 두루 예배하였는데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많은 상서로운 징후가 감응되었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천여 차례 이 일을 되풀이 하였다.
또한 묵 선사는 복문(福門)을 널리 권장하여 속인들을 깨우칠 때에는 널리 대중들을 불러 모으니, 시주들이 줄지어 성대하게 베푼 재물이 서울에서 제일 많았다. 보시가 쌓이면 다 나누어 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보배처럼 중하게 여겼다. 항상 흥선사(興善寺)에서 천승행도(千僧行道)를 할 때에는 그 기간이 끝나면 보시한 물건을 거두어 사람들에게 각각 열 벌의 비단을 주었으며 흩어지는 날 아침에는 밖으로 나가 갑절로 더 주었다. 집사가 물건이 적을까 걱정하면서 이름에 근거하여 물건을 내어주니, 묵 선사는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승단의 뜻과 어긋나는 처사이다. 만약 반드시 절약해야 한다면 범부와 성인을 가려내기 어려우니 단지 공양만 하면 되는 것이요, 쓸데없이 고갈될 것을 걱정하지 말라. 창고에는 원래부터 저장된 물건이 없었지 않는가?”
흩어지는 날 아침이 되면 큰 모임을 열어 칠부대중을 모두 모아놓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갖고 싶은 만큼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였으며 그 뜻이 커서 먼 곳에 이를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신령한 신(神)이 남몰래 도운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것을 눈으로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개황 말년으로부터 생을 마친 대업 10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크게 베풀었는데 그 예가 모두 이와 같았다.
묵 선사가 곧 멸도(滅度)하게 되자 그 복전(福田)의 업을 두루 덕미에게 위임하였고 덕미는 그의 뜻을 높이 받들어 행하였다. 이 때문에 비전(悲田)과 경전(敬田)의 두 보시를 해마다 한 번씩 베풀었는데, 의복을 공급하기도 하고 식량을 베풀기도 하였다. 여러 복업이 지을 때가 되면 흔히 물건이 다하여 고갈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모두 불러놓고 복을 지을 것을 기원하고 공통적으로 모두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하안거가 끝날 무렵에는 여러 사원에서 수분(受盆:쟁반에 보시를 받는 것)을 하였는데, 쟁반이 있는 곳마다 모두 물건을 보내주었다. 속세에서 이른바 ‘보분전(普盆錢)’이 이것이다. 그후 선정사(禪定寺)로 가서 그곳에 주석할 때까지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대업 말년 여름에 천 명의 승려들을 불러 7일 동안 불상의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였는데 갑자기 몸과 옷차림이 단정하고 기이한 사람이 감응으로 나타나 덕미에게 말하였다.
“시절이 이렇게 불같이 뜨거운 때인데 왜 떡을 쳐서 공양에 사용하지 않는가?”
덕미가 말하였다.
“밀가루를 마련하는 것은 힘들지 않으나 사람이 많아서 어찌 이 모든 사람에게 떡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이인(異人)이 말하였다.
“쉽게 마련할 수 있다. 잠시 30섬의 밀가루를 반죽하여 이틀 동안 가공하면 이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곧 그의 말대로 밀가루를 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독과 물통을 많이 마련하고 찬물을 가득 채워놓으면 내일 아침 떡을 만들겠다”고 할 뿐이었다. 그날 한밤중에 일어나 밀가루를 책상에 치고 두드리며 사람들을 진동시키니 도속들이 모여들어 구경하였는데 보기에 놀랍고 어지러웠다. 잠깐 사이에 밀가루를 반죽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그 절반을 삶도록 하여 익는 족족 물을 붓게 하고 자신은 가서 그것을 휘저었다. 다음날 떡을 나누어주니 모두가 떡이 찰지고 쫄깃쫄깃한 것을 의아해하면서 잡아당겨 보았으나 끊기 어려웠다. 이리하여 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어 다 함께 기뻐하였다. 그후 그 사람을 찾으려고 두루 물어보았으나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남아 있던 독 안의 떡은 날마다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는데 기한이 끝날 때까지 하나도 썩거나 허물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감응이 통하여 이런 일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무덕(武德) 초기에 회창사(會昌寺)가 창건되자 다시 그곳에 초청되어 주석하게 되었다. 이때 덕미는 곧 서원(西院)에 참회당(懺悔堂)을 짓고 불상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안치하였는데, 당우(堂宇)는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며 사방에 회랑이 설치되고 전각이 겹겹으로 높이 들어섰다. 이에 서원하기를 “모든 중생들과 함께 모든 악업을 끊고 이곳에 길이 머물며 예참하면서 정결하게 방등참회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족계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이곳에 의지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야 단(壇)에 오르게 하였다. 또한 한 번은 목욕물을 긷던 우물이 갑자기 저절로 말라버려 대중들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몸을 씻고 참회할 방도가 없었다. 덕미가 곧 향로를 들고 우물로 가서 간절하게 기원하니 곧이어 샘이 전날과 같이 솟아올랐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그는 모아두었던 사리를 보배 함에 모셔 가지고 자신이 가는 곳마다 반드시 가지고 다니면서 공양하였으며, 매번 탑을 일으켜 세울 때마다 사리를 요구하면 나누어 주었는데 백 립(粒)ㆍ천 립의 사리라도 필요한 만큼 공급하였다. 그러나 간절한 정성의 감응으로 나누어주는 만큼 그것이 다시 보충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신심이 더욱 높아져서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한 해 중에 여름과 가을에는 항상 맨발로 걸어다녔는데 이는 혹 벌레나 개미를 밟을까 두려워한 자비와 구제의 마음 때문이었다. 혹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수행할 때에는 여름 내내 자리에 앉지 않았고, 지과(止過)를 배울 때에는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으며, 불경보살(不輕菩薩)을 본받을 때에는 칠부대중에게 모두 절을 하였다. 함께 절식(節食) 수행을 할 때에는 평소의 4분의 1만을 먹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수행은 그 모양이 다양하여 눈으로 본대로 대략 서술한 것이니,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생각을 오직 서방정토에다 두었고 입으로는 아미타불을 외웠는데 생을 다하고서야 이 일을 그만두었다.
정관 11년 12월 26일 합장하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그이 시신을 남산의 치명퇴(鴟鳴鎚)에 보냈다가 후에 다시 뼈를 거두어 편재곡(楩梓谷)에 탑을 세웠다. 제자들이 회창사에 비를 세웠는데 시중(侍中) 우지녕(于志寧)이 비문을 지었다.

담헌(曇獻)
이밖에 또한 서울의 사문 담헌이란 스님도 복을 널리 폈는데 그 공덕이 선대의 현인들과 겨룰 만하였다. 그는 언행에 있어 모범을 이루어 대중들이 떠받들고 존경하였으며, 그가 행하는 복업은 가는 곳마다 성취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이룬 광명보각(光明寶閣)은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고, 자비불전(慈悲佛殿)도 당시에는 경이할 만한 건물이었지만 인간 세상에 숨겨져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032_1260_a_18L 俗姓王淸河臨淸人也年在童稚天然樂善口中所演恒鋪讚唄擁塵聚戲必先景塔每見形像生知禮敬由是親故密而異之知非紹續之胤也任從師學十六辭親投諸林廣訪名賢用爲師傅年至十九蒙剃落謹敬謙恪專思行務雖經論備閱而以律要在心故四分一部通宗系追求善友無擇遐邇潔然自不群非類開皇末歲觀化京師持戒撿禮懺爲業因往太白山誦佛名經一十二卷每行懺時誦而加拜人以其摠持念力功格涅槃太白九隴先有僧邕禪師道行僧也因又奉而爲師導從受義業亟染暄涼還京輦住慧雲寺値默禪師又從請默卽道善禪師之神足也善遵承信行普功德主節約形心不衣皮帛默從受道聞見學之望重京都偏歸俗衆美依承默十有餘年三業隨從深相器待所以每歲禮懺將散道場去期七日苦加勵勇萬五千佛日別一遍精誠所及多感徵祥自爾至終千有餘遍故默之弘獎福門開悟士廣召大衆盛列檀那利養所歸輦爲最積而能散時又珍重常於興千僧行道期滿䞋奉人別十縑及散晨外赴加倍執事懼少依名付默聞告曰何有此理不成僧義若約截凡聖難知但當供養不慮虛庫先無貯物出散之晨及設大會衆俱集施物山積新舊咸充時又欽謂其志大而致遠故使靈祇冥助不然誰能睹斯不懼耶故自開皇之末終於大業十年年別大施其例咸爾默將滅度以普福田業委於美美頂行之故悲敬兩田年常一施給衣服或濟糇糧及諸造福處多有匱竭皆來祈造通皆賑給又至夏末諸寺受盆隨有盆處皆送物往故俗所謂普盆錢也往住禪定斯事無殆大業末歲夏召千僧七日行道忽感異人形服率然來告美曰時旣炎熱不打餠以用供養美曰麪易辦也多餠壞何由可致便曰易可辦耳溲三十斛麪作兩日調餠不壞也隨言給但云多辦瓫水槽多貯冷水明旦將設半夜便起打麪搥案鼓動人物僧俗聚觀驚亂眼耳須臾打切麪已將半命人煮之隨熟內水自往攪之及明行餠皆訝緊韌抽拔難斷千人一飽咸共欣泰試尋匠者通問失所餘有槽瓮中餠日別供僧乃盡限期一無爛壞合衆悲慶感通斯應武德之始創立會昌又延而住美乃於西院造懺悔堂像設嚴華堂宇宏周廊四注複殿重敞誓共含生諸惡業鎭長禮悔潔淨方等凡欲進必先依憑蕩滌身心方登壇位於一時所汲浴井忽然自竭徒衆駐無由洗懺美乃執爐臨井苦加祈應時泉涌還同恒日時共宗焉畜舍利藏以寶函隨身所往必齎供每諸起塔祈請散之百粒千粒須而給精苦所感隨散隨滿由是增信彌隆勤懇不絕又年經秋夏常行徒跣恐蹈虫蟻慈濟意也或行般舟一夏不坐或學止過三年不言或劾不輕通禮七衆或同節食四分之一如斯雜行其相紛綸卽目略舒差難備擧生常輟想專固西方口誦彌陁終于命盡以貞觀十一年十二月二十六日合掌稱佛卒于寺院春秋六十三矣乃送於南山鴟鳴堆後又收骸於楩梓谷起塔弟子等樹碑于會昌侍中于志寧爲文又京邑沙門曇獻者亦以弘福之業功格前賢身令成衆所推揖#所造福業隨處成焉光明寶閣冠絕寰中慈悲佛殿時所驚異人世密爾故不廣焉

9) 당나라 경사 청선사(淸禪寺) 석혜주전(釋慧胄傳)
032_1261_b_05L釋慧胄
032_1261_c_02L혜주는 속성이 왕씨(王氏)이며 포주(蒲州) 포판(蒲坂)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불도에 발을 들여놓고 복업(福業)을 짓는 것을 즐기며 숭상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승단의 사표(師表)6)이 되었으며, 30살이 되자 좌선과 독송에 전심하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았는데 특히 『법화경(法華經)』을 중하게 여겼다.
그후 서울의 청선사(淸禪寺)에 주석하였는데 초창기 기초를 닦는 일을 모두 그에게 맡기였으나 40여 년 동안 조금도 힘들다고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공덕으로 인하여 9층탑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고 중랑(重廊)이 먼 곳까지 둘러졌으며, 법당ㆍ불전ㆍ원우(院宇) 등 수많은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대나무 숲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정원과 채소밭이 주위를 에워쌌으며, 물과 뭍의 장전(莊田)7)과 창고ㆍ방앗간 그리고 그곳에 싸인 가득한 물건 등은 모두 그에 의하여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번성하고 풍족한 절로 이 절을 넘어설 절이 없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하고 보호한 것은 실로 혜주 한 사람의 공로였다.
나이가 60세에 이르자 곧 승단의 소임을 내놓았으나 대중들은 그가 너무 오랫동안 부지런히 일하였으므로 일시적으로 소임을 교체하도록 하고서는 중요한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모두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절에는 정인(淨人)8)이 많이 머물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혜주가 나서서 그 가운데 20명을 골라 북치고 춤추는 것을 배우게 하여, 매번 기념일이 되면 불상 앞에서 음악을 울리고 춤을 추게 하니 사방 먼 곳에서 찾아와 구경하면서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속세의 사람들도 발길을 이어 와서는 그 음악을 전하여 들었는데 그 소리와 재주가 속세의 마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후 병에 걸려 온몸이 극도로 아파오자, 자기 스스로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향탕(香湯)에 목욕하고 옷깃을 바로 여미고 말하였다.
“나에게는 작은 죄가 있으니 이 때문에 중병에 걸린 것이라. 그 죄라는 것은 바로 사원을 짓기 위해 땅을 파헤친 것이다.”
생을 마치던 날 아침에도 말과 기운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빚을 다 갚았으니 나는 떠나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신음소리를 내더니 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69세였으니, 정관(貞觀) 초년의 일이었다. 시신은 수림에 버려두었다가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는 그를 위하여 방분(方墳)을 세우고 나아가 비문을 새겼다.

법소(法素)
당시 서울의 회창사(會昌寺)에는 법소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사람이 쾌활하고 구애됨이 없기가 비길 데 없었고 지조와 행위가 탁월하여 자못 대중들로부터 괴이하게 여겨지곤 하였다. 그는 본래 지의(智顗) 선사를 스승으로 삼고 오직 복을 권하는 일만을 행하였다. 지난날 강남에 있었을 때 그는 유행(遊行)하며 이르는 곳마다 모두 만인대회(萬人大會)를 마련하였는데, 전날 밤에 대회를 마련할 것을 결정하여 알려주고서도 다음날에는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이러한 전례는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수나라 말엽에 동도(東都)가 포위되어 성이 고립되자 백성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흙덩이와 같았다. 이때 사원에는 두 개의 금불상이 있었는데 각각 길이가 한 장(丈)이나 되었다. 법소는 백성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불상 한 개를 녹여 쌀을 사들였으며 그것으로 미음을 쑤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였다. 잠깐 사이에 쌀이 다 떨어지니 다시 남은 불상을 녹이려고 하였는데 사문 변상(辯相)과 여러 승려들이 반대하면서 불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법소가 말하였다.
“여러 대덕들은 아직 지극한 이치를 모르고 있소. 옛날 부처께서 보살의 지위에 계실 적에 중생들을 위하여 머리와 눈ㆍ골수ㆍ뇌조차도 아끼지 않으시어 살아서는 큰 고기 덩이가 되기도 하시고 죽어서는 큰 물고기가 되기도 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는데 어떤 결과를 이룩하셨던가? 이러하니 부처님께서 한낱 거짓으로 만들어진 이 같은 불상을 아까워하시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네. 나는 지금 내 몸의 살이라도 내줄 수 있다면 이를 아끼지 않겠소. 대덕들은 알아야 하오. 이제 이 불상을 중생들에게 베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이 함락된 뒤에는 반드시 뒤따라 파괴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떨어지는 것을 어찌 이 한 몸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위정(偽鄭)이 항복하던 날 불상이 먼저 파괴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언행은 괴이하고 험하여 따르기 어려웠으니 그러한 전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후 서울에 들어가 회창사에서 생을 마쳤다.
032_1261_b_06L 姓王蒲州蒲坂人少在道門樂崇福事受具已後師表僧祇及至立年又專禪誦曉夕相繼偏重法華後住京邑#淸禪寺草創基搆竝用相委四十餘年初不告倦故使九級浮重廊遠攝堂殿院宇衆事圓成以竹樹森繁園圃周遶水陸莊田倉碾磑庫藏盈滿莫匪由焉京師殷有無過此寺終始監護功實一人至耳順便辭僧任衆以勤劬經久令權替及於臨機斷決竝用諮詢足淨人無可役者乃選取二十頭學鼓儛每至節日設樂像前四遠同以爲欣慶故家人子弟接踵傳風聲伎之最高於俗里遇患極困自然知卒香湯沐浴正理衣襟曰吾有小須加重病事由營造掘鑿故也於終晨言氣不昧告弟子曰酬債了吾其去矣尋聲而卒春秋六十有卽貞觀初年也乃露骸收葬爲起方墳就而銘之京邑會昌有沙門法素者倜儻不倫操業奇卓雅爲衆本師智顗專行勸福昔在江表適所至皆設萬人大會夜告纔竟卽成辦此例非一隋末東都嬰城自肌骨相望有若塊焉寺有金像二各長一丈素不忍見斯窮厄取一融破籴米作糜餧諸餓者須臾米盡又取欲壞沙門辯相與諸僧等諍不與素曰諸大德未知至理也如來因地爲諸衆生尚不惜頭或生作肉山或死作大魚以濟飢如何成果復更貪惜化形必不然素今身肉堪者亦所不惜大德須今此一像若不惠給衆生城破之亦必從毀則墜陷多人何如素今一身當也衆不許之及僞鄭降日先分散如其言焉然其言行譎詭而難遵其例不一後入京室卒會昌寺

10) 당나라 재주(梓州) 우두산사(牛頭山寺) 석지통전(釋智通傳)
032_1261_c_21L釋智通
032_1262_a_02L지통은 속성이 진씨(陳氏)이며, 재주(梓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여덟 살에 출가하여 정도(正道)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후에 『법화경』을 외우면서 아울러 우두산에서 강의를 하고 훌륭히 위의를 지켰으며, 곧고 간절하게 계율을 받들어 황노(黃老:道士)들을 항복시켰다. 또한 속세의 남녀가 글을 올리면 반드시 곤장 50대를 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그를 무서워하였다.
사원을 짓는 공사를 할 때에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주관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몸을 움츠리고 사사로이 재물을 모으는 자가 없었다. 항상 한 쌍의 거위가 때를 맞춰 강의를 들었으며 백여 차례의 강의 가운데서 두 번 광명이 방출되었다.
정관 23년 10월 13일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사원을 지으면서 10만 관(貫)의 돈을 써야 하는데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런데 지금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구나.”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97세였다.
소식(小食) 때가 지나자 온 절의 승방과 법당이 진동하면서 흰색으로 변화되었는데, 한 끼 밥을 먹을 만큼의 시간이 그런 상태로 유지되었다.
032_1261_c_22L 姓陳住梓州八歲出家爲正道法師弟子後誦法華幷講在牛頭善持威儀奉戒貞苦降伏皇老女奏章必杖之五十遠近皆憚寺宇成就惟其終始合衆畏懾無蓄私財常有雙鵝依時聽講講百餘遍度放光至貞觀二十三年十月十三告衆吾造山寺可用十萬貫恨未周備今便永別言訖而卒春秋九十七矣小食時終合寺房堂皆動而作白色經一食頃

11) 당나라 재주 통천사(通泉寺) 석혜진(釋慧震傳)
032_1262_a_09L釋慧震
032_1262_b_02L혜진은 속성이 방씨(龐氏)이며, 재주(梓州) 통천사(通泉寺)에 주석하였다. 그는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후에 호(暠) 법사로부터 3론(論)에 대한 강의를 듣고 깊은 뜻을 크게 깨달았으며, 그의 복덕의 힘이 널리 퍼져 촉부(蜀部)와 같이 먼 곳에서도 그를 떠받들었다. 호 법사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에는 가사 2백 벌을 구하여 길 어귀에서 증정(贈呈)하였다.
매해 정월에는 대장경을 전독(轉讀)하였으며 천 명분의 가사를 보시하였는데, 이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항상 3론을 홍법하였으며 청중이 백여 명에 달하였다.
어느 날 강의를 하던 자리에 홀연히 정신이 희미해지더니 눈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서쪽 산머리는 큰 불상을 세우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내려와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곳을 찾아갔더니 중심은 불상을 세울 만하였는데 양쪽으로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에 곧 석공들에게 지시하여 높이가 130척이나 되는 좌불(坐佛)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관(貞觀) 8년에 불상이 완성되자 사방에서 모두 모여들었고 3만 명의 도속들이 이 불상이 완성된 것을 경축하였는데 그 불상의 입에서 아주 크고 흰 광명이 방출되니 멀고 가까운 곳에 모든 사람들이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한 필의 말이 있었는데 하루에 5백 리를 갔다. 일찍이 전쟁에 참여하여 다른 말들은 모두 죽었으나 이 말만은 살아서 돌아왔다. 정관 14년 7월에는 갑자기 혼자 울기만 하면서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혜진은 그 말을 듣자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때 십력(十力)이라는 이승(異僧)이 나타나 혜진에게 말하였다.
“말과 주인이 이별하여야 할 것 같다. 주인이 마땅히 먼저 가야 한다. 내년 정월 보름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니, 법사는 재물들을 처리하여 후에 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남겨놓은들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는데 누구도 그가 온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혜진은 우선 장경(藏經)을 만들 때 승단에 요청하여 항상 전독(轉讀)하였으며, 크게 보시의 문을 열어 사방 먼 곳에서 비전(悲田)과 경전(敬田)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모두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었다. 생을 마치던 해의 정초에 다시 여러 스님들에게 요청하여 21일 동안 독경하고 행도하게 하고 속세의 형제 내외도 모두 모이게 하였다. 8일에 이르러 향기가 사원 안에 충만하여 고을에까지 퍼져 도속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맡게 되어 그들이 희사하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정월 보름에 이르러서도 향기는 없어지지 않았으며 아침부터 낮까지 사원 안의 나무와 땅에 모두 연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 기이한 서상을 보고 그가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혜진이 말하였다.
“아름다운 서상들이 이미 나타났으니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곧 보시를 행하고 일찍 식사를 마친 다음 손에 향로를 들고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주위를 세 바퀴 돈 다음 다시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의념(意念)을 바로잡았다. 이때 대중들이 법당에 가득하였으나 누구도 그가 이미 생을 마쳤으리라고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장례를 마치고 행도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리는데 그때까지도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형제 세 사람은 각각 50만 냥을 희사하여 묘소에서 승덕(僧德)을 위한 보시와 아울러 비전(悲田) 보시를 베풀었으며, 높이가 5장(丈)인 석탑을 만들고 감실에 승상(繩床)을 마련하고는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였다. 백여 일이 지나도록 시신이 넘어지지 않으니 1만여 명의 도속들의 마음속에 슬픔과 쓸쓸함이 가득 맺혔다고 한다.
032_1262_a_10L 姓龐住梓州通泉寺身長八後聽暠師三論大領玄旨福力所蜀部遙推暠之還南得袈裟二百以贈路首每年正月轉藏經千人袈裟奉施無闕常弘三論聽衆百餘忽於高座似悶見人語曰西山頭好造大佛旣覺下座領衆案行中堪造兩邊泉流卽命石工鐫鏨座身百三十尺貞觀八年周備成就四面都集道俗三萬慶此尊儀其像口中放大白光遠近同奉先有一馬日行五百曾經入陣餘馬竝死惟此得還至十四年七月忽自嘶鳴不食三日震聞毛豎有一異僧名爲十力語震馬與主別主當先行來年正月十五日日正中時應入涅槃法師須散財物無留於後於身何益言已而隱莫知其由先造藏經請僧常轉開大施門四遠悲敬來者皆給至終年初又請衆僧讀經行道作三七日俗緣昆季內外皆集至於八日香氣鬱勃充滿寺中傾邑道俗共聞異香捨散山積至十五日氣猶不歇從旦至午寺內樹木土地皆生蓮華衆睹奇瑞知其卽世震曰嘉相已現不容待滿便行䞋施早食訖手執香爐繞盧舍那三帀還於佛前䠒跪正念大衆滿不覺已逝春秋六十有六停喪待滿香氣猶存兄弟三人各捨五十萬於墓所作僧德施及以悲田作石塔高五丈龕安繩牀扶屍置上經百餘猶不委仆道俗萬餘悲涼相結云

12) 당나라 경사 홍복사(弘福寺) 석혜운전(釋慧雲傳)
032_1262_b_18L釋慧雲
032_1262_c_02L혜운은 속성이 왕씨(王氏)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다. 먼 조상이 피난하여 오다가 구강(九江)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도를 즐겨 광산(匡山) 대림사(大林寺)의 사문 지개(智鍇)에게 의지하고 출가하였다. 지개는 당시의 이름난 사람으로서 세간에 명성이 널리 알려진 스님이었다. 혜운은 당시 세태에 강개(慷慨)하여 정성을 다하여 그에게 귀의하고 따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남달리 뛰어나게 되었고 사람들의 속박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큰 절개와 큰일을 이루려는 생각을 특히 마음속에 새겨두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당시 달(逹)이라는 선사가 있었는데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에서 불당을 짓거나 불상을 만들다가 힘이 모자라는 경우에는 모두 그에게 찾아와 부탁하곤 하였다. 혜운은 사원이 허물어졌으므로 그를 초청하였으나 달 선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혜운이 찾아가서 설득하여도 회답을 하지 않자 그는 곧 목숨을 걸고 청하면서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이 길바닥에 다섯 자가량 흘러내렸다. 또한 머리로 땅을 찧으니 시퍼런 멍이 눈을 덮었다. 이에 그는 달 선사에게 청원하여 말하였다.
“만약 함께 가시겠다는 승낙을 받지 못하면 나는 강에 빠져 죽겠습니다.”
달 선사는 그의 마음이 지극한 것을 보고 홀연히 생각을 바꾸었다. 혜운은 곧 도속들에게 미리 알려 각기 거주하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맞이하게 하였다. 그는 풀을 헤치고 산을 바라보며 가면서 지름길로 가지 않았으며 도중에 호랑이 때를 만났으나 그것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달 선사를 영접하여 산에 이르렀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여러 장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는데, 때는 엄동설한이라 얼음이 뱃길을 막고 무너진 모래가 쌓여서 자주 길을 막았다. 그때마다 혜운은 급히 옷을 졸라매고 얼음을 깨며 배를 끌어당겼는데 허리와 허벅다리 밑은 얼음에 찢겨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엉겼으나 피로함과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떠난 곳으로부터 배를 타고 2백여 리를 가서야 비로소 목적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지극한 정성은 따르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모두 이와 같았다.
수나라 말기에 나라의 안팎에서 도적의 난(亂)이 계속 일어났다. 당시 임사홍(林士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장(豫章)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거짓 초나라 황제라고 칭하였다. 그때 거짓 상서령(尙書令)이었던 파양(鄱陽)의 호수재(胡秀才)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구강(九江)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마음을 내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문수보살 서상을 모사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을 다 뒤져서 그 일을 감독할 사람을 찾았는데, 도속들이 의논하기를 혜운에게 출중한 재주가 있으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용광로와 도가니가 마련되자 곧 쇠를 녹여 모형을 뜨는 일에 착수하여 빛나는 위의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목과 옆구리 두 곳에 구멍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 해에 호수재는 칙명을 내려 불상에 칠할 금 120량을 대나무 통에 담게 하였는데, 혜운은 도적들이 일어나 지켜낼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호수재에게 보냈다. 그리고 염송할 때 쓰는 구리 염주 한 개를 호수재에게 주어 신표로 삼게 하였다. 호수재의 일행이 궁정(宮亭)에 이르자 군사들이 복을 빌자 호수재는 순풍(順風)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돛을 올리고 앞에서 인도하게 되었는데 강의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통에 재물을 모두 잃고 사람만 강기슭에 간신히 오르게 되었다. 호수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다만 불상에 칠할 금을 잃은 것으로 인하여 강기슭에서 번민하고 원통해하면서 서원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가 지은 죄업 때문이라고 깊이 뉘우쳤다. 그러자 잠시 후에 금을 담은 통이 물결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고 혜운이 준 구리 염주도 뒤따라 강기슭을 향하여 호수재에게 흘러왔다. 이에 금을 다시 찾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모두 소리치며 한량없이 기뻐하였다. 배가 침몰된 곳에서 강기슭까지의 거리를 헤아려보니 30여 리나 되었는데 그 무거운 것이 물에 떠서 파도를 거슬러 올라와 다시 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으며 그 신령스러운 감응에 놀라워하였다. 그후 호수재가 살해될 때 칼이 목과 옆구리를 찔렀는데 불상에 있던 구멍과 일치하였다.
처음 호수재가 적을 치려고 할 때 금을 삼촌인 효(曉) 선사에게 맡겼다. 그후 초(楚)의 도읍이 함락되고 도적무리가 침입하자, 효 선사는 낡은 천으로 금을 싸서 등에 지고 피난하다가 도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효 선사는 이 금을 찾을 도리가 없었는데 곧이어 금을 빼앗아간 도적 중에 한 사람이 그 금을 다시 가지고 효 선사에게 왔다. 하지만 그 금을 다시 가져온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효 선사는 다시 찾은 금을 혜운에게 맡겨 불상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그 빛나는 모습이 뛰어났다. 지금도 그 산의 누각에 있다.
처음 불상을 주조할 때 이오계(李五戒)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몰래 서원하였다.
“만약 금을 녹여 완성하는 날이 오면 맹세코 한쪽 팔을 불태우겠습니다.”
그런데 혜운이 모형을 만들어 기약한 날보다 앞서 불상이 완성하였으므로 이오계는 아직 불상이 주조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불상이 나타나 말하였다.
“너는 지난번에 팔을 태우겠다고 서원하였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어기는가?”
이오계는 꿈에서 깨어나 비로소 그 사실을 알고 곧 불상 앞에서 칼로 팔을 잘라 납포(蠟布:초칠한 천)로 뼈를 동여매고 불태웠다. 또한 이밖에 여러 가지 감응이 있었지만 그 일들은 생략한다.
혜운은 양자강 물길의 굽이마다 여러 번 좀도적들을 만나 그때마다 경론을 폈으나 계율은 아직 홍법하지 못하였기에 멀리 황제가 있는 서울로 가서 직접 학부(學府)에 참여하였다. 마침 수(首) 율사가 가르쳐서 교화하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는데 본래의 뜻에 꼭 맞게 되니 기쁨과 슬픔이 아울러 찾아왔다. 이에 수행할 업무를 분별하고 종합하니 이때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칙명을 내려 홍복사(弘福寺)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는 몸이 장대하고 얼굴에 수염이 많았으며 말을 하면 곧 문장을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선지식이라 지목하였다. 특히 독송에 능하여 자못 위용을 떨쳤으므로 재(齋)와 복전(福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항상 좌수(坐首)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공경대부들도 자리를 내어주고 마음을 비웠다. 또한 한 번에 다섯 권의 경전을 잠깐 사이에 읽어보면서도 그 내용을 모두 알았고 중간에 기침소리 한 번 내지 않으니, 그를 가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재능에 대하여서는 눈으로 본 일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흥복편(興福篇) 총론(總論)
무릇 불법을 주지(住持)하는 형태에는 그 사례가 많다. 그러나 그 정박(精薄)을 들어 포괄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도법을 세상에 널리 펴는 것은 전도망상(顚倒妄想)을 바로잡아 그 생성의 근원을 끊게 하는 것이요, 상법(相法)을 지니는 것은 혼미한 중생을 인도하여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이치가 밝혀지면 만대에 걸쳐 그 규범과 관습을 받들게 되며 비록 도중에 희미해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에 의지하여 성취하게 되거니 옛날 부처님께서 교화를 시작하실 적에 사원은 그의 뜻을 열어 밝히는 근원적 역할을 하였고, 탑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던 구조물이었을 뿐인데 이에 따라 그 이후로는 복된 일이 더욱 융성해져서 성도를 말해주는 비석은 숲처럼 번성하고 신심을 말해주는 정원은 별처럼 퍼지게 되었다.
마등(摩謄)이 낙양(洛陽)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현상이 제일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사원을 지어 비구와 비구니들의 집으로 삼아서 복덕의 문이 속세에 나타났음을 보여주었으며 그림을 그려 믿고 의지할 길을 가르쳐주었다. 부처님의 신공(神工)을 알았기 때문에 천 개에 달하는 사원이 줄지어 건립되고 수백 개에 달하는 탑들이 세워지게 되니 선배들은 그 빛나는 명망을 높이 내세웠고 후배들은 그 높고 기이한 공적을 존중하였다. 마침내 찬란한 사원은 높이 구름 위로 솟아 사방에서 우러러보며 공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으며, 현란한 누대는 층층으로 가설되니 칠부대중들이 바라보며 귀의할 곳을 알게 되었다. 이는 모두 도를 넓히는 첫 번째 공정이며 사람들을 포섭하여 제도하는 방편인 것이다.
심지어 바람을 끌어들여 누각을 다스린 것과 같은 것은 혜달(慧達)의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종소리를 울려 고통을 멈추게 한 것은 실로 지흥(智興)의 감응으로 이룩된 것이다. 승명(僧明)은 뜻을 세워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이룩하는 길을 열었고, 승황(僧晃)은 그 지조로 저승과 이승을 감동시켰으며, 혜달(慧達)은 부수(涪水)에 인연하여 재목을 모았고, 덕미(德美)는 보이지 않는 성인의 힘을 빌려 공양을 베풀었으며, 혜운(慧雲)은 마음이 곧고 지극하여 황금이 물에 가라앉지 않았고, 도적(道積)은 요군소의 비리(非理)에 항거하였으나 시퍼런 칼날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보호를 받은 일들은 그 유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을 맡아보다가 물러나 그만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그의 뜻과 절개가 본래 적고 마음이 교능(巧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 교섭이 이루어진 것은 어기기 어려운데 곧 서원을 무너트리고 거의 성취되어 가는 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것은 그 내용이 여기에 해당된다.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 원문(院門)을 고치고 다스리면서 승단의 임무를 크게 이룩하셨는데, 이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섭(迦葉) 존자는 다섯 곳의 절을 지을 때 언제나 진흙을 이기는 일에 참여하였고, 목련(目蓮) 존자는 월직(月直:한 달 동안 절을 지키는 일)에 임명되어 언제나 마당을 쓰는 사람에게 공양하였다. 그런 까닭에 복사(福事)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주 먼 옛날 성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아래 범용한 스님들이 이를 조습(祖習)하게 된 까닭에 이것이 평범한 과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에서는 이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많아 세상을 속이고 그 기대를 저버려 탑에 흙을 바르는 사람을 용렬한 사람으로 여기고 재목을 끌어오는 사람을 모자라는 무리로 여긴다. 그리하여 출도세간을 떠나 불도에 들어가서는 베푸는 것이 없고 속세에 들어가서는 청정한 마음을 잃어버리니, 그들의 말은 윤리에 맞지 않아 더욱 정법을 훼손시키고 있다. 때문에 천보(天報)는 귀하나 오히려 인간 세상에서 걸식을 행하고 성과(聖果)는 높으나 아직도 승단에서 굶주림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는 대단히 많으나 몇 가지의 실례를 가지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장엄(莊嚴)과 공(空)과 유(有)의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대경대론(大經大論)에서는 그 대의와 상세한 내용을 훌륭하게 열거한 만큼 이것을 스승으로 여기고 받들어야 하며 그것을 배척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세상에 여러 가지 복이 존재하게 되면서부터 그 부류가 잡다해졌는데, 그 내용을 밝힌 경에 의지하여 의심되는 것과 거짓된 것을 들어 말해보기로 한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연대 초기에 불교가 흥하면서 거짓과 진실이 혼탁하게 되자,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문 법경(法經)에게 지시하여 그 바른 근본을 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5백여 권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때 없어지지 않고 남은 것이 지방들에서 간혹 나오곤 한다. 여러 경장(經藏)과 비교해보면 오직 정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 수가 3만여 권이 있다. 그 밖에 개별적으로 생겨난 잡집들은 모두 이를 베낀 것이 아니며 의심이 가는 것조차 때로는 다시 뽑아 기록하였다. 이는 일찍이 경전을 수정하여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한 번 이것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
약사(藥師)의 행사와 같은 것은 그 근원이 전송(前宋) 시기에 나왔는데 비교해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나 자못 그것을 따르는 풍속이 남아 있다. 수나라 양제(煬帝) 시기의 『낙수경(洛水經)』은 언종(彦琮)이 번역한 것과 뜻과 구절이 완전히 일치하고 문장의 배치에서 약간 생략한 것이 있을 뿐이다. 이는 범본(梵本)에 근거한 것으로서 기복(祈福)의 으뜸을 이루는 책이다. 다만 세간에서는 모습이 있는 것을 모습이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들의 마음을 깨우치겠는가?
큰 성인은 기연(機緣)에 의거하여 중생들을 대상으로 요점을 편 것이니, 설법대로 행한다면 반드시 재앙을 물리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명실(名實)을 더럽힐까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글에 이르기를 “입으로는 공을 말하지만 행위는 유(有) 가운데 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혹 전심하여 정성을 다하고 더욱 융숭하게 공양하여도 기원하는 일에 감응이 없다면 지난 업보가 단단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에 이르기를 “오직 숙세의 재앙만 제거하게 된다면 다른 나머지 재앙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업보란 영원히 정해진 것이 없으며 모두 차츰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업보에 맡겨 생명을 더하게 되면 성의(聖義)를 이룰 길이 없다. 이 때문에 경에서는 참회의 범위에 대하여 밝히기를 “오직 내심(內心)과 결부시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죄가 없어지지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죄가 남아 있게 된다”고 하였다. 세 가지 과보의 경중(輕重)에 대하여서는 『열반경(涅槃經)』에 구체적으로 쓰여 있으나 6근(根)이 원만하거나 변변치 못한 것에 대하여서는 실관(實觀)에 나아가야 한다. 이로써 알아야하는 것은 숙세의 재앙은 청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이것을 하나의 실례로 삼아 다른 때에 모든 이치와 가르침들을 통해서 그 내용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보현별행(普賢別行)』과 『금광총참(金光總懺)』도 있어 청정한 대중이 많이 귀의하고 있으며 이 일은 보통 풍속과 어긋나는 것인데도 자주 벌어지고 있으며, 여기에 집착하는 자가 많아 두루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찾아오기는 하지만 모두 법의 이익을 어지럽히고 있다. 때문에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업장(業障)의 바다는 망상으로부터 생겨나므로 다시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체득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전생의 업보가 기울어지게 된다. 지금 전생과 현생 둘 모두에 인연하여 그것을 생각하여야 하며, 아소(我所:我執과 所有欲) 두 가지가 모두 남아 있으면 전도망상은 더욱 불어난다. 이 때문에 성의(聖義)를 만나기 어려우며 대상 경계에 응하게 되면 진제(眞諦)에 통달할 길이 없고, 유(有)를 인식하면 그것으로 속제(俗諦)로 통하는 길을 밝히게 된다. 범부로서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은 행위가 점차적으로 이와 같아야 하는데 이전의 습관에 순응하여 항상 그것이 몸에 배게 되면 이치로 보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양(梁)나라 초기의 『방광경(方廣經)』은 그 근원이 형주(荆州)와 양양(陽襄)에 있다. 그것은 본래 전염병 때문에 들여온 것으로서 정성껏 빌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전생의 업보를 애처롭게 여기고 콧날이 시큰해지도록 슬피 통곡하면 불상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져주어 고통 받던 병이 홀연히 낫는다는 것이다. 병의 증상이 중하면 그 번뇌도 두터워지기 때문에 마침내 여러 경에 의지하여 중요한 부분을 뽑아 한 부(部)로 완성한 것인데, 소리에 맞추어 화답하면 보통 사람들을 감동시켜 발심하게 하고, 죄의 인연을 털어놓고 말하면 땀을 흘리고 눈물을 쏟게 할 수 있으며, 복덕을 받는 경사(慶事)를 총괄하게 되면 능히 오장육부를 모두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 모든 관료들이 이것으로 조정을 다스렸고 만화(萬化)가 오직 이 길을 통하여 당대와 세상을 구제하였으니 가상히 여길 만한 것이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경이 정본(正本)이 아닌 것에서 나온 것인데 이 일에 대하여 부류별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근대참(六根大懺)은 본래 양나라 무제(武帝)가 직접 행한 것으로 여기서는 말없이 마음에 새기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때문에 글에 이르기를 “온 세상의 모든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6근(根)과 6식(識)이 길들여지지 못한 까닭에 마음도 번뇌에 물들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행사는 해마다 널리 진행되었는데 많은 보배를 희사하여 노복(奴僕)들에게 충당하게 하였다. 마음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는 감응으로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내렸는데, 이것을 ‘풍미(風靡)’라고 칭하였고, 울연히 상칙(常則)을 이루었다. 그후 진나라의 진관(眞觀)이 그것을 널리 행하였는데, 다만 그 글의 정화(精華)한 일에 치우쳐 심행(心行)은 자못 담박한 면이 있었다.
원래 참회를 마련하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자기의 속마음을 대중 앞에서 드러내놓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그날로 이루도록 하려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면 참으로 죄가 끝나고 복이 시작되며 말과 행동이 이에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문선제(文宣帝)가 정주사(淨住寺)에서 지은 참회문과 같은 것은 말과 글이 따를 만하니, 경의 가르침을 인용한 부분은 부처님을 마주 보는 듯하고 싫어가거나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한 문장은 사람의 얼굴을 그려놓은 듯 생생하다. 그 권수는 비록 20권이나 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번다함을 느끼지 못하며 글이 반복되어도 읽는 사람은 그것을 번거롭다고 싫어하지 않았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필해(筆海)’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다.
또한 이밖에 함부로 참회문을 읽고 이를 참회법에서 행하는 사람이 있어 죄업이 무더기로 뒤섞여 풀리지 않자 열 가지 조항으로 위계를 정해놓고 번거로운 말들을 끌어넣고 있다. 이는 아직 모든 번뇌가 세 가지 번뇌에 그 근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종이가 다하도록 외우기만 하여서 혼미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자타(自他)에 통하게 하고 있으니, 이들은 스승으로 삼기는 어려운 일이다. 타락과 저버림으로 부질없이 귀의하게 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해만 끼치는 것을 청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논한 것과 결부시킨다면 다소나마 표준으로 삼을 만한이다. 6도(道)의 자비ㆍ참회도 그 근원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지만, 연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제사를 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연말이 되면 도(道)마다 제사를 개최하여 산해진미를 모두 차려놓고 가는 곳마다 초청하고 축원하니 거기에 포함된 자비의 뜻은 넓다. 그러나 육도의 마지막 과보는 취(趣: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곳)마다 그 경중(輕重)이 다르며, 인간 세상에도 열 등급의 차이가 있으니, 나머지 세계의 일은 이 한 가지 실례만 들어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에서 서술한 것처럼 12입(入)이 귀도(鬼道)에 처하여서도 친히 공양하고 제사를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마음은 기쁘고 몸은 배부르게 되기 때문에 굶주림을 충족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공양한 복덕에 의하여 업보를 스스로 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내용을 바로잡음으로써 도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은 업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으로 목련 존자가 어머니를 위해서 밥을 공양한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밖에 5취(趣)에서는 과보가 거두어들이는 한계가 있어서 과보에 따라 그 위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공급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도(道)마다 제사를 차리고 있지만 아마도 그곳에 귀신이 와서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과보는 여러 가지 감통을 얻게 되는데 그 사례 가운데는 4생(生)과 6취(趣)도 포함되는 것이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방해하지 않고 사무치게 사태를 주시하여 기회를 기다려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 밖의 사례에 대하여서는 실례를 들기가 어렵다. 혹 어떤 사람은 별자리를 헤아려 집터를 잡아서 죄와 복을 결정짓고 밝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점을 쳐서 생사의 윤회를 따르고 의심을 품으면서도 일정한 선을 맺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모두 보잘것없는 풍속에 의지한 것으로서 심오한 경(經)의 뜻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이다. 죄는 오래전부터 쌓여서 이루어지고 복은 새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모두는 망상이며, 좋은 점괘를 얻었다고 좋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리석은 범부가 하는 일에는 자못 이러한 작용이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의 분수와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턱없이 성인이나 현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단정하게 앉아 도를 생각하면서 위계와 경지를 이루기를 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모두 상상의 마음으로 도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가 생각하는 도(道)가 망심(妄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이 망상인 줄 알게 되면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일으킨다고 해도 실로 그것은 유식(唯識)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유식의 마음으로 속제(俗諦)에 정통하게 된다면 알고서야 어찌 조작하겠는가? 이것으로 갈 길을 정하게 되면 업상(業相)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방등(方等)행도에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반주삼매(般舟三昧)수행에서 주문을 외우는 사람도 있는데, 흔히 왕을 만나는 꿈으로 청정을 표현하며 이에 기준하여 더럽고 순박한 차이를 밝히게 된다. 이 꿈이란 어둠 속의 망상인데도 실지 현상으로 믿으려고 하니 이는 마치 눈앞에 나타난 수레바퀴를 들어 팽개치고 그 망상을 기준으로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대체로 미혹과 업보가 일어나는 것은 그 단계와 구성에 원인이 있다. 미혹은 반드시 이치를 어겨 생겨나기 때문에 참회하여 그 이치를 관찰하는 데 힘써야 하며, 업보는 일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참회는 다시 인연이 필요하며 일을 참회할 때에는 반드시 부지런히 몸을 다스려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그 근본으로 된다. 또한 도리를 참회할 때에는 반드시 아인(我人:너와 나라는 차별심)을 깨뜨려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차별심이 망상임을 아는 것이 그 요점을 이루게 된다. 이는 모두 별록(別錄)의 참회법에서 널리 설명한 냉용과 같다.
이것으로써 불교의 모든 교화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쉽게 죄를 지을 경우에는 복사(福事)를 널리 닦도록 해야 하며, 복을 닦음으로 인하여 문득 망상과 집착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을 깨뜨려 없애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이관(理觀:도리로 비추어보는 것)을 생각하게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잘못을 고치면 행위의 성취를 기약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 문이 막히게 되면 완전히 교법의 뜻에 어긋나게 된다.
생각하건대 대성인께서는 세상에 펼치신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생멸을 더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복업을 따르게 되어 마음이 흐뭇해지면 다시 예전의 습성(習性)에 의지할 것이니 마땅히 생각해보고 판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번뇌를 끊어야 도에 들어간다고 한 말은 지극한 말씀이다. 세상에서 이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복업을 쌓는 것을 도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이에 얽혀 정신없이 집착함으로써 이것을 높고 거룩한 일이라고 여기는데, 바로 이것이 계취견(戒取見)과 견취견(見取見) 등 두 가지 결박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我倒:我相과 顚倒妄想)가 상행하게 되니 어떻게 속박을 없앨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통달한 사람은 방편과 실상의 유래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 경계에 얽매인 것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여 미혹된 성품의 경중(輕重)을 밝히고 분수와 역량의 우열(優劣) 깨달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 태어나는 길이 막히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것을 모름지기 버려야 한다. 복은 유(有)의 기초로 되는 것이니 비록 행하더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8선(禪)이 마음속에 자리하여 막히게 되면 육도바라밀(六度波羅蜜)이 부정(不淨)해지고 사관(事觀)과 세간에 순응하는 선(善)이 모두 유(有)의 법이 된다. 『대론(大論)』에 명백하게 이르기를 “헤아림은 모두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므로 도업(道業)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색계에도 초정(初定:初禪)이 있어 범부와 성인이 모두 이를 행할 수 있으며,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은 최상의 자리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생멸이 없는 경지가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사윤회를 고요히 잠재우지 못하고 오직 봉미(封迷)만을 거듭하게 되는 것은 그 세계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니, 하물며 어지러운 마음으로 착한 행위를 닦아 고요한 행위를 충당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식견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들으면 큰 거울로 삼을 만하다고 할 것이며 속세의 선비들조차도 견고한 아집(我執)을 버리게 될 것이다. 다만 ‘나는 능히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는 청탕(淸蕩)한 것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의 작용이 들뜨고 움직여 경계에 부딪치면 미혹만 더해지는 것을 허망하게 헤아려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다지도 가소로운 일이 있겠는가?
또한 복에는 근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잠재우고 수행하지 않으면서 몸과 행동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일이 죄와 복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이치로 보아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비롯한 네 가지 생활도구 같은 것은 쓰지 않는 때가 없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취납(取納)하는 데 제약을 두시었다. 오직 관문(觀門)에만 의지해서 대치(對治)를 가볍게 보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죄가 되며, 관문을 받들어 부지런히 행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곧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되며 ‘나는 행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일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일에 어긋나면 그 업보로 3도(途)에 얽매이게 되고 이치에 어긋나면 복이 모든 욕망에 얽히게 된다. 범부의 위치에 있으며 어리석은 번뇌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바른 견해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고취(苦趣:고통 받는 미래의 세계)를 기울게 할 수 있다. 어찌 세간의 모습에 주저앉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가? 오직 관법을 부지런히 닦아야만 점차로 번뇌가 없어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깊은 미혹과 망상에 가라앉게 된다면 다시 무시(無始)의 세계로 돌아가 너와 내가 같은 배를 타게 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032_1262_b_19L 姓王太原人也遠祖避地于九江弱年樂道投匡山大林寺沙門智鍇而出家焉鍇亦摽領當時聲出世而雲慷慨時俗精厲歸從得獨異恒倫不拘物累致有大節大偏所留心時年二十有五達禪師江淮內外所在興造事力不遂來祈請雲爲寺廟毀壞故致邀延不許之雲以來告不申便陳死請身在地涕泗滂沱流逬塗漫滿五尺又以頭叩地靑腫覆眼加諸誓願若不蒙赴雲亦投江達見其意盛欻然廻意雲卽前告道俗所在迎候披草望山行不由徑路値群虎不暇駐目延達至山須有經始泝流諸處撿挍功德時屬嚴冬冰擁舩路崩砂頹結屢阻舟人雲乃急繫衣裳破冰挽纜腰胯以下淩澌截肉流血凝住不覺疲苦自此舩行二百餘里方登所在其懇誠難繼竝例此也隋季末中表賊亂有林士弘者結衆豫章僞稱楚帝僞尚書令鄱陽胡秀才領士衆臨據九江因感發心欲寫廬山東林文殊瑞像盡所鎭境訪監護道俗僉議以雲有出衆之奇雅當此選鑪錘旣辦便就鎔範光儀乃具惟頸及脅兩處有孔時衆未之悟也其年秀才僞勅所追有像色金百二十兩盛以竹筒雲以賊徒蜂起無方守護竝用付才又以念誦銅珠一環遺才爲信行至宮亭軍士乞福才得便風擧帆前引於江中路遭浪船沒財物蕩盡惟人達岸才諸無所恨但失像色金煩冤江畔呼嗟不絕誓願不成深爲業也須臾金筒隨浪逆流幷遺銅珠前後相繼汎隱向岸就才旣獲色金擧衆同叫歡欣無量計被沒處至所出岸三十餘里重而能浮逆波相授軍民通怪驚異靈感及才之遇害也刃開頸脅恰符像焉初才之欲擊賊以金用委叔父曉禪師楚都旣覆群寇交侵曉用弊布裹金擔以避難不免爲賊所奪旣失像金取求無計尋有賊中來者盜金投曉俱不知是金擔也曉得本金委雲成光相超挺今在山閣初鑄像時李五戒者私發願曰若鎔金日誓然一臂雲爲摸樣早成遂前期日李氏不知已鑄乃夢像曰汝先願然臂如何違信耶李氏夢寤因始知之卽於像以刀解臂蠟布纏骨而燒焉又感徵應略其事也雲以江介威紆累逢草竊經論乃積而戒律未弘遠趣帝躬參學府値首律師當陽開化適本志悲喜交幷採掇行務有聞朝下勅令住弘福而形貌長偉骨面多髥言晤成章衆所知識偏能讀誦頗盛威容故齋福大集恒居坐首公卿士側席虛心一擧五卷須臾尋未聞噎莫不嘉尚然其程器目故略敍之論曰夫住持之相其例乃多包擧精要惟二種道法弘世則靜倒絕其生源相法所持則導昏開其耳目途旣闡萬代奉其風規雖或中微亦依之成則昔如來創化寺開須達之源塔現古今初惟積土之漸沿斯已後福事彌隆無憂之碣林繁有信之園星布自摩滕入洛其相先楊寺以宅僧尼顯福門之出俗圖繪以開依信知化主之神工故有列寺將繕塔數百前修摽其華望後進重其高奇遂得金剎干雲四遠瞻而懷寶臺架迥七衆望以知歸竝弘道之初津攝度之權術也至如引風治出慧達之深誠傳聲停毒寔智興之通感僧明志開遺寄僧晃操動幽達公因治水而集材美上假冥聖而陳供慧雲貞烈黃金以之不沈積抗言白刃由斯不拔若斯監護蔑由來然則經理衆事論陳退沒由志節素少情非巧能致涉艱違便虧誓願功敗垂成義當斯也昔如來在世躬治院門大集僧務非聖不履迦葉之營五寺恒預踏泥目連之任月直常供掃地是以福事之來導引逾遠下凡祖習故是常科而頃世惰每多欺負睹塗塔爲庸夫謂引材爲豎伍出道無宜行施入俗有絕淸斯語不倫殊乖正則故天報爲貴尚行乞於人閒聖果爲高猶被餓於僧部斯徒衆矣略擧可知是以福智二嚴空有兩諦大經大論盛列綱猷卽可師承難爲排斥且自世有諸福其流多雜倚傍了經陳揚疑僞隋祖開皇之始釋教勃興眞僞混流恐乖遺寄乃勅沙門法經定其正本所以人中造者五百餘卷同竝燔之餘不盡者隨方間出比諸經藏惟錄正本通數則有三萬餘卷已外別生雜集竝不寫之至於疑僞時復抄錄斯由未曾陶練故致此涉試爲論之至如藥師行事源出宋朝比用在疑頗存沿俗隋煬洛水彦琮所翻義節全同文鋪少略斯則梵本有據祈福之元宰也但以世惟相有非相何以曉心大聖逗機任物而敷此要如說行者必致攘除恐涉懷己自虧名實故彼文云口爲說空行在有中誠言得矣或有精專懇苦厚供彌隆而所祈無應者則往業堅明定須酬償故文云惟除宿殃餘則可脫然則業無永定皆可轉除任業增生無成聖義故經明懺止約內心有愧則亡無慚斯有三報輕重具顯涅槃六根淳薄亦陳實觀是知宿殃不請例是別時通諸理教義須隱括又有普賢別行金光摠懺多歸淸衆事乖通俗比有行事執著者多遍告雖來皆虧法利故彼文云諸業障海從妄想生還須體妄乃傾前業今則緣念彼此我所兩存倒想逾增故難遭聖義應塵無以表達眞識有以明通俗在凡下位行漸若斯順舊常熏理非筌悟梁初方廣源在荊本以厲疾所投祈誠悔過哀茲往業悲慟酸涼能使像手摩頭所苦欻然平復同疾相重遂廣其塵乃依約諸經抄撮成部擊聲以和發恒流談述罪緣足使汗垂淚瀉括福慶能令藏府俱傾百司以治一朝萬化惟通一道被時濟世諒可嘉而恨經出非本事須品藻六根大懺#其本惟梁武帝親行情矜默識文云萬方有罪在予一人當由根識未調故使情塵濫染年別廣行捨大而充儓僕心力所被感地震而天降祥是稱風靡鬱成恒則有陳眞觀因而廣之但爲文涉菁華心行頗淡原夫懺悔之設務在專貞欲使肝膽露於衆前慚愧成於卽日固得罪終福始言行可依如文宣之製淨住詞可屬引經教如對佛述厭欣如寫卷雖二十覽者不覺其繁文乃重讀人不嫌其妨世稱筆海固匪浮又有妄讀懺文#行於悔法罪事叢雜不解位以十條因搆煩挐未知本於三惱浪誦盡紙昏憒通於自他師難哉墮負歸於彼此如斯遣累曰淸澄固約前論薄爲准的六道慈源亦同前事在歲終方行此祀別開奠海陸之味畢陳隨趣請祝悲之意弘矣原夫六道至果趣別重人含十等之差餘則擧例可悉含所述入處鬼道有親供祭心生隨心喜身飽故曰充飢非由供福令自受以正法義理有所從無有自他人受果斯則目連飯母事也外五趣報局所收隨報位隔無由通今則道別陳奠恐非臨饗然又報得諸通事含生趣不妨他心徹視待而從祭酹自此已外其例難收度星安宅決明罪福占察投輪懷疑結線同歸淺俗未入深經然罪積由福興伊始俱惟妄想而善卦難諧愚凡所履諒參其用又有不揆分量登冒聖賢端然思道剋成位地此竝想心懷道不識道是妄心知妄思心起有起實歸惟#識識心達俗知何不爲#用此投輪應分業相又有方等佛名般舟誦呪多以夢王表淨准此用顯澆淳且夢惟冥妄想象尚取依況在現輪擧擲其心可准若夫惑業所起挮搆有因惑必違理而生懺務觀其理業生依事而起故懺還須緣事悔必勤身營搆慚愧爲其所理悔必折破我人知妄是其大略竝如別錄悔法廣之是知釋宗一化大較三門若樂罪時須弘福事因修福故便起想著則應破遣教思理觀如斯易奪集業可期若滯此三全乖教意惟夫大聖垂世末欲增生福順情欣還資故習義須思擇斷結入道斯言極矣世不達者以福爲道耽附情纏用爲高勝正是戒見二結所收我倒常行何能遣縛是以通人審㩲實之有從達界繫之無爽明惑性之重輕曉分量之優劣莫不以罪障天一向須捨福爲有基雖行不普諸八禪滯情六度不淨事觀及世順善皆爲有法大論明言計竝封心非道業至如色有初定凡聖通行想極居無生不止終乖出要未靜輪但爲封迷不厭故也況以亂善充靜業有識聞之足爲殷鑑流俗儒素尚捐固我之心但謂我能行之故非淸蕩所攝豈得心用浮動觸境增迷妄計爲道一何可笑復聞福爲有本潛神不修身行處世何能無事事涉罪福理必通知且如衣食四資無時不假佛制取納惟依觀門輕侮對治斯誠罪也奉觀勤行斯誠福也謂我能行便成違理我不能行又是違事違事則業繫三途違理則福纏諸欲在凡使性何能靜心入止正見方傾苦趣故知因修世相知何不爲惟勤觀用漸當缺有不爾沈淪還歸無伊我同舟可不免哉續高僧傳卷第二十九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큰 규모의 목조 건물에서 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 올린 방목(方木).
  2. 2)재(齎)를 올릴 때 의식의 절차를 지휘ㆍ통솔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3. 3)『論語』 「子罕篇」에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4. 4)한나라 고조(高祖) 때 상산(商山)에 숨은 네 노인. 눈썹과 수염이 모두 희다고 하여 호(皓)라고 하였다.
  5. 5)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사람. 청렴하였으며 평생 도(道)를 지켰다. 위나라 문제(文帝)가 스승으로 모시고자 그의 집 앞에 이르자 그는 담을 넘어 피했다고 한다.
  6. 6)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이른다.
  7. 7)귀족의 사유지를 이르는 말로, 장원(莊園)에 딸린 논과 밭을 뜻한다.
  8. 8)속인(俗人)으로서 절에서 살며 스님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