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3_0139_b_01L십문변혹론 하권


석복례 지음
김두재 번역


9. 화불은현문(化佛隱顯門)1)

【稽疑】 2월 15일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하자 순타(純陀)를 재촉하여 음식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열반에 드실 때가 장차 이르려 하고 또 얼마 뒤 3월에 바로 이 시기가 닥쳐오자 성중(聖衆)들이 부처님께 권청(勸請)하여 말하기를 “장차 열반하시리라 하셨는데 오직 부처님만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에 드신다는 말씀이 거짓이 아닐 터인데 어째서 독자범지(犢子梵志)가 한 달쯤 지난 뒤에 비로소 알리기를 “부처님께선 아마도 아직 열반에 드시지 않으실 것 같다”고 하였습니까?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만일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에 드셨다면 범지가 마땅히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았어야 하고 만약 열반에 들지 않으셨다면 다시 어느 때에 열반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실 때의 경(經)과 멸도하실 때의 날짜에 대한 높으신 생각을 받들기 기다리오니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사문 복례(復禮)가 말하기를 “『열반경(涅槃經)』에 ‘독자범지가 15일이 되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고 사라림(娑羅林)에서 두 가지 법을 수행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을 증득하고는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내용에 대하여 소식을 전해 보고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한 달쯤 지난 뒤에’라는 말은 내가 들은 것과 다르다”고 하였다.
【辯惑】원래 불타(佛陀)는 원각(圓覺)으로 뜻을 삼았고, 열반(涅槃)은 지적(至寂)으로써 그 체(體)를 삼습니다. 원각이라는 것은 도를 다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를 비추지 않음이 없는 것이며, 지적이라는 것은 번뇌[累]를 떨쳐버리지 않음이 없고 공(功)을 잊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공을 잊고 번뇌를 버렸으므로 유(有)라고 말할 수 없고, 이치를 비추고 도를 다하기 때문에 무(無)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로써 무를 생(生)하고 무로 인하여 유를 세우게 되어 때로는 그 하나가 사라지면 반드시 그 둘을 다 잃기도 합니다. 이미 지극히 적멸[至寂]한 것을 유(有)라 말할 수 없다면 무(無)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원각(圓覺)을 무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러면 유라고 말해야 옳겠습니까? 유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적멸의 극치가 없는 것이 아니요, 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깨달음의 미묘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황홀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하고 아득하고 어두워서 멸함도 아니고 생함도 아닙니다.
생겨난다는 것은 법(法)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始興]이요, 멸하여 사라진다는 것은 법이 처음으로 떠나가는[初謝] 것입니다. 처음으로 떠나간다는 것은 본래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요, 처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본래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는 것입니다. 여래는 본래는 없었다가 지금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태어나셨다고 말할 것이며, 열반이 본래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것이 아닌데 어떻게 멸하여 사라졌다고 하겠습니까?
태어나고 사라져 없어짐이 있은 뒤에야 시작과 마침이 있고, 시작과 마침이 있은 뒤에야 오래되고 가까운 것[久近]이 있으며, 오래되고 가까운 것이 있은 뒤에야 세월이 나뉘는 것입니다. 나고 사라짐도 오히려 없는데 어찌 세월에 의지해 맡기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사리불이 죽음과 삶에 대하여 물어보자 거사 유마힐(維摩詰)은 대답하지 않았으며, 가섭(迦葉)이 궤멸(壞滅)에 대하여 의혹을 일으키자 대사께서 꾸짖은 다음에 분별해 주셨습니다. 이는 해탈(解脫)의 이치와 열반의 성품이라서 나고 죽는 것은 구할 수 없고,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취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이렇게 나고 사라지는 심행(心行)으로써 열반의 실상(實相)을 묻습니까?
어지신 그대께서 지금 열반의 시일(時日)을 물으니 이것은 또한 허공을 잣대[尺丈]로 재려는 것과 같습니다. 허공에는 잣대가 없으니 잣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요, 잣대로써 잴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허공이 아닐 것입니다.
열반엔 시일이 없으니 시일을 가지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이요, 시일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열반이 아닐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대체로 길이[尺丈]란 모양과 재질에서 생겨나고 시간[時日]이란 시작과 마침에 근본을 두기 때문에 모양과 재질이 없으면 길이도 없고 시작과 마침이 없으면 진실로 시간도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질문을 하다니, 어찌 그리도 우활(迂闊)합니까?
경전에 이르기를 “대체로 여래란 하늘 위에서나 인간 세계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장 뛰어나시니, 어찌 이런 행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래의 몸은 상주(常住)하는 몸이요, 금강(金剛)의 몸이니 이는 곧 법신(法身)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 몸은 곧 몸이 아니어서 나지도 않고 멸하여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상주하는 법 가운데에는 허공이 제일이니, 여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수명 있는 것 가운데 제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풍부합니다. 성인의 가르침이여, 묘한 이치가 확실하니 스스로가 진실로 상주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거늘 어째서 다시 나고 죽음에 대하여 의심합니까?
의혹하여 말하였습니다.
“진실로 상주하는 이치를 들었기 때문에 저녁의 죽음도 달게 받아들이겠다2)고 했는데, 열반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오히려 아침에 통하는 것조차 어두우니 만약 여래께서 항상 머물러 있어 멸하지 않으신다면 무엇 때문에 반열반을 찬탄하셨겠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열반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그대는 미처 머무름이 없다는 이치에 대하여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체로 머무름이 없는 열반이란 진여(眞如)의 미묘한 성품을 그 체(體)로 삼으며, 대비(大悲)와 반야(般若)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반야이기 때문에 나고 죽음에 머무르지 않고 크게 자비하기 때문에 열반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열반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증득했다 해도 취하지 않으며, 나고 죽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존재한다 해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증득하고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감회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곧 일어나고, 존재하지만 집착하지 않으므로 인연이 없나니 그런 까닭에 곧 버리고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곧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그 형체가 시방(十方)에 두루하고, 담담하여 생각이 없지만 그 지혜가 만물에 골고루 미치는 것입니다.
나타난 물체에 호응해도 피로하지 않고 적멸(寂滅)하며, 숨고 나타남에 상주함이 없이 상주하는 것이니 어찌 성문(聲聞)이 괴로움을 여의고 영원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이며, 연각(緣覺)이 그 육체를 싫어하여 영원히 근심 있는 곳에서 떠나는 것과 같겠습니까? 형상이 마른 나무와 같아야 한다면 금방 타버리고 말 것이요 마음을 꺼진 재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면 일찍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니, 절성(絶聖)의 독선(獨善)과 같은 것이요 널리 베풀어 인(仁)을 겸하는 것과는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내가 오래도록 대반열반(大般涅槃)에 머물러 있으면서 갖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겠노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반열반으로 능히 큰 뜻을 건립(建立)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작용이니, 어찌 진실로 상주하는 이치에 어그러지겠습니까?”
의혹이 있는 사람이 또 말하였습니다.
“열반의 도가 만약 상주하는 것이라면 어찌 쌍림(雙林)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몸의 뜻이 있으니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입니다. 법신은 깨끗한 성품인 진여(眞如)로 체(體)를 삼고 번뇌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뜻을 삼으며, 보신은 인과(因果)의 덕을 갚는 것으로 그 성품[性]을 삼고 진여와 명합하여 진속(塵俗)을 비춤으로써 그 업(業)을 삼으며, 화신은 안으로 뛰어난 지혜에 의탁하는 것으로써 그 근본[本]을 삼고 밖으로 뭇 중생들의 마음에 호응하는 것으로써 모습[相]을 삼습니다.
법신은 허공의 성품과 같나니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끼면 가리고 안개가 걷히면 곧 밝아지지만 그 성품은 본래 상주(常住)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신은 허공에 떠 있는 해와 같아서 빛나게 높이 떠 있고 밝게 널리 비추지만 그 본체는 항상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화신은 맑은 물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아서 잠잠하여 맑으면 형체가 나타나고 혼탁하여 흐리면 곧 형체가 없어지나니 나타나고 감추어짐이 상주하지도 않고 오고 감도 정해진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일곱 송이 연꽃이 부처님의 발을 떠받들어 성인의 업을 처음으로 열어 도모한 것과 쌍림(雙林)에서 정신을 편안히 하여 능사(能事)를 마치고 수레를 멈춘 것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에 때로 경(經)을 떠나서 뜻[志]의 어둠과 밝음을 초학[幼學]에게 변론해 주셨고, 때로는 납채(納采)와 문명(問名)으로 세속의 관례와 똑같이 결혼도 하셨습니다. 금륜(金輪)이 이르러 일곱 가지 보배를 나열하기도 했으며, 붉은 깃털[朱鬣]이 날아올라 구중(九重)을 벗어나기도 하였고, 신통력을 놓아서 마군을 항복받아 흉악하고 삿된 무리의 얼굴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으며, 변재(辯才)를 발휘하여 대중을 항복받고 성현들이 이마를 조아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국토마다 곳곳에 몸을 나누어 나타나셔서 다른 곳에까지 두루하여 다함이 없고 미래가 다하도록 바뀜이 없으셨으니, 이런 것들은 모두 중생들의 뜻을 따라 변화하고 물의 맑기에 따라 나타나는 그림자이거늘 또한 열반에 항상 머무는 뜻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의혹이 있는 사람이 또 말하였습니다.
“이신(二身)은 5온(蘊)이 순수하여 원만하고 상주하며 8상(相)은 마음을 따라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기도 한다면 이것은 곧 진신(眞身)은 적정(寂靜)한 것이고 화신(化身)은 바로 권도로 변천하는 것일 터이니, 학림(鶴林:사라쌍수. 즉 열반을 말함)의 일에 대하여 독자(犢子)의 의심이 없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결단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진신과 화신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밝혔고 진신과 화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저 화신의 부처님이 어찌 다른 것이겠습니까? 보신이 원만하게 호응하는 작용입니다. 보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비와 지혜를 성취한 실체입니다. 자비는 널리 제도하는 것으로써 그 이치를 삼고 지혜는 훌륭한 방편으로써 그 업(業)을 삼습니다. 그런 까닭에 때를 인하여 자취를 내리어 사물에 따라 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몸의 자취란 그 작용이며 자비와 지혜는 체(體)가 되니 체란 곧 그 근본[本]이요 용(用)이란 그 끝[末]이 됩니다. 체를 의지하여 용이 일어나고 끝을 거두어 근본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 그 차이를 구하고자 한들 이치로 보아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화신의 방편으로 옮겨감은 결정코 진신의 적정함과 다르다고 하려 하지만 그것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보신이 화신(化身) 일으키는 것을 밝힌 것이지 화신이 곧 법신이라는 것을 밝힌 것은 아닙니다. 화신은 곧 법신의 미묘한 이치인 것입니다. 다시 그림자에 빗대어 비유해서 기술하겠습니다.
저 물 속에 있는 해의 그림자는 밖을 따라서 온 것도 아니요 안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요 동일한 것도 아니며, 그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요 그 바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연(悠然)히 있는가 하면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니, 그 형상에 집착하면 동요하고 성품이 비게 되면 고요해집니다. 진실한 것이라고 집착하면 허망한 것이 되고 허망한 것인 줄 알면 진실해집니다.
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해가 밖을 따라서 오는 것이라면 물 밖에 어찌 해가 있을 것이며, 만야 안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물속에 옛날부터 해가 있었습니까? 만약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저기에선 보이지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기에선 보이지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를 볼 때 둘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하나라고 말한다면 두 개를 볼 때 어째서 하나가 됩니까? 만약 이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기에도 없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실체를 구하면 일찍이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도 좇아서 생겨난 곳이 없고 그것이 멸하여 없어진 것이라고 말하자니 멸하여 가는 곳이 없습니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성품[性]과 모양[相]이 적연(寂然)하고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물 속 영상의 실제 성품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물속의 영상의 실제 성품을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화신(化身)의 실제 성품이며, 화신의 실제 성품을 본다는 것은 곧 법신(法身)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몸은 곧 법신이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실상(實相)을 보는 것과 같이 부처님을 보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반야경(般若經)』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형상을 보되 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일체의 형상을 여의면 곧 모든 부처라고 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끌어당겨서 펼쳐 보이고 한 곳에 모아 늘려서, 가까이로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질에서 취하면 어찌 적멸(寂滅)하지 않겠으며, 어찌 청정(淸淨)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발자국씩 옮겨놓을 때마다 접촉하는 도량에 다함이 없고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모든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 멸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수보리(須菩提)는 편안히 쉬며 앉아서 늘 법신을 보았으며, 연화색(蓮華色)비구니는 앞 다투어 잠시라도 형상을 엿보려 했던 것입니다. 혼미하고 깨달음이 우세하고 하열함을 나눔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가히 있고 없는 것과 나고 죽음으로써 화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칼[劍]을 아는 사람은 그 바탕이 되는 기물은 잊어버리고 그 광채(光彩)를 기다리는 법이며, 말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형색은 생략하고 그 빼어나고 특이함만을 봅니다. 그런 뒤에야 옥(玉) 자르기를 진흙처럼 할 수 있고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나니, 이와 반대로 하는 자라면 어떻게 칼을 안다느니, 말을 볼 줄 안다느니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문(法門)을 받들어 우러르고 불사(佛事)를 정밀하게 연마하는 것도 이와 꼭 같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한 것을 태어났다[生]고 말하고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변화한 것을 멸(滅)하였다고 말하며, 연꽃 위에 앉아 있으면 존재한다고 말하고 향나무 불에 태우고나면 없다[無]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 이것은 대개 평범한 흐름이며 부화뇌동하는 소견일 터이니, 이 또한 어떻게 높은 문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전에 이르기를 ‘계를 지닌 비구라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유위상(有爲想)으로 태어났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유위상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망어(妄語)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차라리 잘 드는 칼로 스스로 혀를 자를지언정 끝끝내 여래는 상주(常住)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반열반한 때와 반열반하지 않은 때를 계산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질문에 따라서 곧바로 대답하고 일을 좇아서 함께 고집하여 경문(經文)의 같고 다름을 모으고, 입멸할 때의 멀고 가까움을 결정하나니, 이 두 글자로 하여금 지혜가 어두워져서 듣지 못하게 하고, 입맛을 상하게 하여 8미(味)3)를 항상 잃어버리게 합니다.
아! 정말로 두렵습니다.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의혹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말하였습니다.
“앞에서 한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마(駟馬)가 끄는 수레로도 말[言]의 빠르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들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는 벽돌에 갇혀 살므로 넓은 땅의 깊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회나무와 느릅나무에서 사는 메추라기가 어떻게 드리워진 하늘의 넓이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물도 이미 그러하거늘 사람이야 또한 말할게 있겠습니까? 열반의 네 가지 문(門)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나, 부처님 몸의 세 가지도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허공의 성품으로 비교해도 알기 어렵고 물 속 영상에 빗대어도 항상 묘한 것입니다. 아울러 아직까지 얻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난 지금부터는 싫증을 내지 않고 받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알아야만 합니다. 범부들과 똑같이 누우시기도 하고, 병환의 자취도 보이셨고, 진로(塵勞)의 정(情)에서 벗어나기도 하셨으니 어찌 금강의 실체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 실체는 오직 하나의 모습인지라 시종(始終)에 말[詞]을 둘 수 없을 것이요, 정(情)이란 실마리가 많은 것이라 전후(前後)의 견해를 가지런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변지(遍知)께서 입멸을 보이신 날짜와 범지(梵志)가 알려온 시기가 있었는데도 논의하지 않고 버려둔 채 대답하지 않는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가 터득했으니 내가 그대에게만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10. 성왕흥체문(聖王興替門)4)

【稽疑】 윤왕(輪王)이 어루만져 운행하는 날에 사방 천하가 교화를 입는다고 하였고, 또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도 윤왕이 참예하여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천지가 개벽(開闢)되었다는 일도 전적에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오직 옥환(玉環)을 서쪽에서 바쳤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니, 어찌 금륜(金輪)이 동쪽으로 굴러온 것을 보았겠습니까?
아무리 치소(緇素:僧俗)가 다르다고는 하더라도 듣고 보는 것이야 다를 것이 없을 터인데, 윤왕의 성스러운 몸이 어찌하여 이 땅에는 오시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허공을 타고서 오고 갔다면 사람들이 알 바가 아니겠지만 사람이 이미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찌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동쪽 땅에 풍백(風伯)을 앞세우고, 값진 말과 하늘의 말이 함께 다투어 날고, 금륜과 일륜(日輪)이 광명을 다투며, 천 수레[乘]와 만 마리 말이 맑은 은하수 사이를 뒤섞여 오고 가며, 북을 두드리고 퉁소를 불어 붉은 노을[丹霞]의 표면에 평화로운 소리[嘈囋]가 울리고, 호령(號令)을 발하여 경리(惸釐)5)를 위로하며, 기한(飢寒)을 구휼해 주고, 원통하여 막힌 것을 다스리는 일들을 마음대로 보여 주지 못하십니까?
헌원(軒轅)황제와 복희(伏羲)황제로 하여금 하늘 끝을 우러러 풍교(風敎)를 잇게 하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으로 하여금 하늘 거리를 바라보며 덕을 흠모하게 한 뒤에야 푸른 창공을 타고 내려와서 만국(萬國)을 조회 받고, 흰 구름을 타고 백신(百神)에게 예를 올리기도 하며, 옥궤(玉匱)의 신선 술통을 들고 균천(鈞天)의 미묘한 음악[廣樂]을 연주하기도 하니 어찌 성왕(聖王)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치우(蚩尤)가 난리를 일으켜서 바람을 쫓고 비를 몰고 오자 공공(共工)이 촉산(觸山)의 힘으로 하늘을 기울게 하고 땅의 기둥을 꺾었으며, 8∼9 년의 홍수에 이기(伊耆)6)가 수재(水災)에 빠진 근심[昏墊之憂]을 당하였고, 돌과 쇠붙이가 녹아 흐르자[鑠石流金]7) 성탕(成湯)이 상투를 자르는 액운이 있었으며, 양한(兩漢:前漢과 後漢) 말엽에 천하[八埏]가 구름이 피어오르듯이 혼란하였고, 이진(二晉:東晋과 西晉)의 사이에 온 나라가 가마솥에 끓는 물처럼 어지러웠건만 전륜성왕께서는 멀리 서쪽 나라에서만 노니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마음이 없었고, 동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채 순시하여 위로할 뜻이 없었으니 성왕이라고 하는 이가 어쩌면 이와 같습니까?
마침내 이로 인하여 억조(億兆)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게 하고 사람과 귀신들의 희망을 잃게 하니, 전륜성왕이란 존재한 건지 존재하지 않는 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철위산(鐵圍山)을 잡아끌고 32상호를 갖추었다는 것도 도에 합당한 일인지 합당하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기에 마음을 기울여 멀리서 듣기를 바라며 훌륭하신 뜻을 들려주시기 기다립니다.
【辯惑】대체로 구망(句芒)8)이 봄을 맡고 있어도 한겨울엔 따뜻한 기운을 발할 수 없고, 희화(羲和)9)가 해를 다스리고 있지만 일찍이 한 밤에는 햇빛을 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약목의 꽃[若華]이10) 빛을 비추고 열수(列宿)를 가지고 때를 분별하며 분란(拂蘭)의 바람이 불어와서 찬 서리와 함께 기후를 분별하므로 추위와 더위가 시작되었고 밤과 낮이 나뉘어졌다고 합니다.
물질은 이미 떠나버리면 돌이켜 좇을 수 없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면 미리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과 예전의 아득히 먼 일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전륜성왕께서 일어나실 때엔 7보(寶)로써 응하여 도모하고 열 가지 선행으로 교화하며, 철위(鐵圍)산으로 경계를 삼는 분은 천하에 군림해서 한 집 같이 빛내셨고 금륜(金輪)이 노니는 곳은 4천하[大域:금륜왕이 통치하는 4大洲] 안에서는 왕래가 자유로우시니, 천 마리 말에 멍에를 매어 하늘 밖으로부터 날아서 오고 창고를 지키는 네 마리 용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왔으니, 보전(寶田)의 기색이 어찌 추위와 더위를 분별할 것이며, 주주(珠柱)11)의 광명으로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집안이 넉넉하고 사람들이 만족을 느끼니 풍속이 좋아지고 시대가 화목해졌습니다. 아래에서는 위에 대하여 알아줌이 있고 위에서는 아래에 대하여 일이 없어졌습니다.
잉질(孕質:잉태하여 태어난 몸)과 기표(奇表:出衆한 儀表)라든가 복년(卜年)12)과 경력(景曆)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32상호는 일각(日角)이나 주형(珠衡)에 그칠 뿐만 아니라, 80천(千)의 나이가 어찌 외신(畏神)13)과 용교(用敎)만을 겸했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우뚝하게 높고 넓으면서도 크다고 하지만 성왕(聖王)의 성대한 일이란 대개 증겁(增劫)의 날짜이지 달리 목숨이 감소되는 날짜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날 옛것을 찾아보려고 한들 듣기가 어려울 것입니다.여러 경론(經論)을 조사해 보면 3천 개의 국토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고[成], 이렇게 이룩되어 머물러 있다가[住] 똑같은 시간에 무너지고[壞] 무너지고 나면 허공[空]으로 된다. 이룩되고, 머물러 있고, 무너지고, 공으로 변하는 기간이 각각 20겁이 걸린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끝마쳤다가는 다시 시작된다. 머물러 있는 겁(劫) 가운데 염부제(閻浮提) 사람의 목숨이 한량없어서 마침내는 8만 세에 이르며, 그 사이에 전륜왕(轉輪王)이 출현하신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윤왕은 8만 년 사이에 출현한다.” 또 『잡심론(雜心論)』에서 말하였다. “증겁(增劫)에 전륜성왕이 출현한다.”
포희(庖羲:伏義)가 그물을 짜고 황제(黃帝)가 옷을 만든 일이라든가 공공(共工)이 윤리를 어지럽힌 일과 치우(蚩尤)가 포악한 짓을 한 일에 이르러서는, 아울러 망고(望古)는 아주 먼 시대의 일이 아니요, 형금(形今)은 바로 잠깐의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와 왕이 뒤를 이었으나 보배로운 말을 타고 순수(巡狩)하는 것을 만나지 못했고 큰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신병(神兵)의 정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당(唐:堯)과 우(虞:舜) 아래로 지금까지 따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까 보내온 논(論)에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 전륜왕이 참예하여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이 태어나면 온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시방세계 사람들이 모이나니, 이렇게 알아야만 합니다. 사병(四兵:象兵ㆍ馬兵ㆍ車兵ㆍ步兵)이 뒤따르니 이 세계의 비황(飛皇:전륜성왕)일 것이며, 천 명의 아들이 모시고 다니니 어찌 다른 지방의 성제(聖帝)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저 경전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또 천만억 국토에 전륜성왕이 이르셨다’라고 하였으니 부디 일의 시작을 깊이 궁구(窮究)하고 일의 마지막을 잘 알아서 그 뜻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보내온 논에서 또 말하기를 “천지는 개벽(開闢)되었다는 일도 전적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옥환(玉環)을 서쪽에서 바쳤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니, 어찌 금륜(金輪)이 동쪽으로 굴러온 것을 보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전적에 실리기 시작한 것이 서계(書契)14)가 근본이 되었고 서계가 지어진 것은 역상(易象)을 근원으로 하였습니다. 삼재(三才:天ㆍ地ㆍ人)를 인해서 괘(卦)를 그렸고 6위(位)를 펴서 효(爻)를 거듭하였습니다. 못 위에 비친 하늘을 보고 뒤의 성인이 취하여 법칙을 이룩하였고 땅 위에 다닌 새의 발자국을 보고 앞의 철인(哲人)이 그 형상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서계가 황웅(皇雄:伏羲의 號)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요, 문자가 창힐(倉頡)15)에게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주역(周易)』을 상고(上古) 시대에는 희효(羲爻)’라고 말하였으며, 『서경(書經)』의 수편(首篇)이 「요전(堯典)」에 지나지 않았으니, 전적에 실려 있는 원근(遠近)이 소연(昭然)히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바로 경사(經史)의 글에 개벽의 일이 자세하다고 말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도첩(圖牒)을 널리 채집하여 곁에 자기(子記)를 두고 있다면 곧 원신(元神)은 바로 거령(巨靈)이 계합(契合)하는 곳이요 곤릉(昆陵)16)은 대제(大帝)가 사는 곳입니다. 화서주주(華胥柱州)17)는 그 땅을 얻은 듯하고 용성태상(容成太上)18)은 그 도에 이른 것과 같은데도 문물(文物)은 모두 빠져 있어 논하지 못하고 성인의 정치는 대충 논하였을 뿐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용사(龍師)19) 아래로는 날수가 얕아서 경고(經誥)가 수레에 가득하지만 두루 다 기록하지 못했고, 인황(人皇)20)의 위로는 세월이 많지만 도서(圖書) 몇 권에 다하고 말았으니, 그 긴 시간을 가지고 일에 비교해 보인 뜻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전에는 성왕(聖王)이 있어서 금륜(金輪)이 자주 동쪽으로 굴러왔으나, 요즘은 철후(哲后:밝은 임금)가 없어서 옥환(玉環)을 마침내 서쪽에서 바친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좇아서 흥했다 쇠했다 하고 물질은 사람을 따라서 가고 오나니 비슷한 유(類)를 취해보아도 실제 공용이 없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의혹하여 말하였습니다.
“만약 전륜왕이 다만 8만 세 때에만 태어난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옥호(玉毫:부처님)께서 재가(在家)하시던 날에 7보(寶)가 다 이르렀으며, 철륜(鐵輪)이 천하 왕림하실 때에 나이가 이미 백 년이나 줄었겠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변화가 있어서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었고 거짓됨[假: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 있어서 이름을 붙였으니, 변화가 있어서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낸 것은 만국에 임금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거짓으로써 이름을 붙이는 것에는 7보보다 더 징험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인(仙人)은 융금(融金)의 바탕을 보고 반드시 십호(十號)의 지존을 성취하리라고 하였고 여래는 헌토(獻土)라는 동자에게 수기(授記)하여 다만 일부분의 땅에 왕이 되리라고 하였는데, 철륜왕(鐵輪王)의 일에 대해서는 실제 기록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기(佛記)에 윤왕을 넷으로 나누니, 첫째를 금륜왕(金輪王)이라고 말하는데 넷으로 나눈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철륜(鐵輪)은 하나의 윤왕(輪王)이 아니라는 말인가? 다만 철륜왕이라고만 말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슨 까닭에 틀림없이 넷으로 나누어진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는가? 대체로 윤왕은 7보의 상서가 내리고 열 가지 선한 교화를 행하거늘, 무슨 까닭에 처음엔 열 가지 악을 행하였으며 끝내 7보는 없었단 말인가?
의혹을 가진 사람이 또 말하였습니다.
“황왕(皇王)은 사람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군주를 세워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20주겁(住劫)의 처음과 8만 증년(增年)의 끝에 이르러서는 풍속이 순화(淳和)하여 도가 있었고 사람이 질박하고 소략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성왕(聖王)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삼계(三界)에서 몸을 받으면 괴로움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6정(情)이 경계를 마주하면 모두 의혹의 그물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옳고 그름이 이로 인하여 서로 상반되고 선과 악이 이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가령 유정천(有頂天)의 지위에 높이 올라가면 세 가지 재앙이 미치지 못하고 비상천(非想天)의 적정(寂靜)에서는 네 가지 공(空)이 최상이 되건만 괴로움의 쌓임에 오히려 핍박받고 번뇌에 오히려 치달리거늘, 더구나 욕계(欲界)의 사람이겠습니까?
만약 태고(太古)의 일을 듣고 무위(無爲)의 극치라고 말하거나 수초(遂初)의 일을 일컬어 유도(有道)의 최상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아마도 무함(巫咸)21)에 취(醉)했을 따름이니, 어찌 진제(眞諦)의 묘한 이치를 아는 것이겠습니까?”
사문 복례(復禮)가 말하였습니다.
“말이란 자기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 뜻 자체는 아닙니다. 흔적이란 근본을 밝힌 것이지 근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성(大聖)이 가르침을 내릴 때에는 흔적은 얕아도 근본은 깊으며, 혹 말에는 어긋남이 있어도 뜻에는 부합합니다. 이러한 문(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게 갈림길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멀어지지 않고 돌아온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것일 것입니다.
단월(檀越)께서는 지난날 순박한 인연을 맺었으므로 오래도록 복을 누리며 날마다 쓰고 있으며, 지금은 특이한 기운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정금(貞襟)이 빼어나서 하늘을 찌릅니다.
군자의 온화한 모습은 송백(松柏) 같고 인륜의 담담하기는 수경(水鏡)과 같으며 문장은 남보다 걸출하니 그 아름다운 논의와 높은 재주를 칭찬하고, 학사(學肆)가 남보다 뛰어남을 찬탄하며 그의 널리 들어 알고 기억함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단 말입니까?
깊숙한 빗장을 열어 깊은 진리를 탐구하고, 방호(芳毫)를 떨쳐버리고 토론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치가 오히려 득상(得象)에 어긋나고 말은 장차 비성(非聖)에 관련되었습니다. 만약 의심을 가지고 뜻을 폈다면 삼자(三子)와 다른 것뿐인데22)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마는 만약 비방하면서 엿보려고 하였다면 수레에 가득 싣고 왔다 해도 가히 괴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가 보내온 서한을 살펴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늦게사 불교의 경전[釋典]을 펴보고 경전을 어루만지며 성심을 다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까? 또한 성실하기 그지없나니 너무도 다행스럽고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빈도(貧道)가 천한 재질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람되게 현문(玄門)에 끼었으니, 마치 봄 이슬이 보잘것없이 적셔주는 것과 같으며 보잘것없는 학문은 그릇에 물을 쏟아 붓는 듯하여 부끄럽고 가을의 개똥벌레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여 업(業)은 전등(傳燈)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들으면 곧 행하겠습니까?[聞斯行諸]’23)는 중니(仲尼)의 소석(所釋)이지만 ‘여의어야 다한 것[離乎畢矣]’이라는 말은 유약(有若)이 능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승(一乘)의 오묘한 이치와 삼장(三藏)의 미묘한 말이겠습니까? 물을 건너는 토끼가 깊이를 알지 못하고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벌이 어떻게 크게 변화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이때는 대당(大唐) 영륭(永隆) 2년(680년) 세차(歲次) 신사(辛巳) 초가을 초하룻날이다.

권문학(權文學)의 답서

제자 권무이(權無二)는 대홍선사(大興善寺)의 예(禮:復禮)법사의 시자에게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옛날에 보살이 여래에게 얼마나 많은 생명을 끊었느냐고 묻자 그로 인하여 부처님께서는 속히 멸도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런 말을 하였다면 어찌 십지(十地)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성인에 대하여 비방하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다스림은 사물의 숨은 이치를 찾는 데 바탕을 두고 뜻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는 데 두어야만 합니다. 앞에서 올렸던 계의(稽疑)의 뜻도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선니(宣尼:공자)께서는 성인의 덕을 지녔으면서도 오히려 노담(老聃)게 물었으며 자씨(慈氏:彌勒)는 부처님 다음으로 존귀하신 분인데도 오히려 사리(師利:文殊)에게 물었는데 더구나 상성(上聖)의 글을 펴보지도 못한 아주 어리석은 저와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천 개의 문과 만 개의 집이라서 닿는 길마다 의혹이 많으니 그런 까닭에 간담(肝膽)을 다하여 어둡고 몽매함을 드러내었으며 보잘것없는 정성을 다하여 고덕(高德)께 간청하였던 것인데, 마침내 세 수레의 멍에를 끌어다가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열어주셨으며 새벽 오리의 짧은 발을 이어 주고 혼돈한 구멍을 뚫어 주시어 백 년의 의혹을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모두 없애 주셨습니다. 바로 깨달음의 길을 영원히 따라야만 미혹의 근원을 깊이 알아서 번뇌의 땔나무를 태우고 열반의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 말씀을 섬기며 여생을 마칠까 하옵니다.
삼가 짤막한 편지를 보내 감사드리오며 불민(不敏)한 제자 권무이는 화남(和南)합니다.
033_0139_b_01L十門辯惑論卷下 集大慈恩寺沙門釋 復禮 撰化佛隱顯門第九稽疑曰二月十五日佛將涅槃促純陁 獻食爲滅時將至又卻後三月正應此期聖衆勸請佛云當滅但佛無虛則此滅非虛何爲犢子梵志月餘方乃報佛便似未滅其故何哉如其已滅梵志不應遣報如其未滅不知滅在何時其滅時之經滅時之日佇承高旨可得聞乎沙門復禮曰涅槃云犢子梵志滿十五日得須陁洹果於娑羅林修行二法不夂得阿羅漢遣信報佛入般涅槃月餘之言異乎吾所聞也辯惑曰原夫佛陁以圓覺爲義涅槃以至寂爲體圓覺者道無不窮理無不照至寂者累無不遣功無不忘功而遣累不可謂之有照理而窮道不可謂之無然而有以無生無因有或虧其一必喪其兩旣至寂不可謂之有矣而可謂之無乎圓覺不可謂之無矣而可謂之有乎不可謂有而不無寂之極也不可謂無而不有覺之妙也恍兮惚兮若存若沒窅兮冥不滅不生夫生者法之始興也法之初謝也初謝則本有今無興則本無今有如來非本無今有也惡乎而謂生涅槃非本有今無也乎而謂滅有生滅然後有始終有始終然後有久近有久近然後分歲月生滅尚無矣歲月何寄哉故舍利問於沒生居士詰而莫對迦葉疑於壞大師訶而後辯是知解脫之理槃之性不可以生滅求不可以有無子何迺以生滅心行而問涅槃實相歟仁今問涅槃以時日亦猶量虛空以尺丈虛空無尺丈不可以尺丈可以尺丈量非是虛空也涅槃無時日不可以時日定可以時日定是涅槃也何者夫尺丈生於形質日本乎始終無形質則無尺丈無始終固無時日明矣無而致問何其迂經云夫如來者天上人中最尊最豈是行耶又云如來身者是常住金剛之身則是法身又云非身是不生不滅又云常法之中虛空第如來亦爾壽命之中最爲第一聖教畫然妙理自可悟之以眞常奚更疑之以生滅惑曰聞眞常之義故甘於夕死聽涅槃之名尚昧於朝若如來常住不滅者何故稱般涅槃耶釋曰涅槃有四種子未聞無住之義歟夫無住涅槃者眞如妙性爲之體大悲般若爲之助般若故不住生死大悲故不住涅槃不住涅槃故雖證而不取不住生死故雖在而不證而不取故有感所以卽興在而不著故無緣所以卽謝斯則寂然不形遍十方澹爾無思智周萬物現不疲而寂滅隱顯無恒而常住若聲聞離苦永入無餘緣覺厭身辭有患形同槁木遽已燒然心類死曾微覺了均絕聖之獨善違博施之兼仁乎故涅槃經云我以久住大般涅槃種種示現神通變化又云般涅槃能建大義斯無住涅槃之用豈乖眞常之義哉惑人又曰涅槃之道若常者何有雙林之事耶釋曰佛有三身之義矣法身也報身也身也法身以性淨眞如爲之體出纏被了爲之義報身以酬因果德爲之冥眞照俗爲之業化身以內依勝智爲之本外應群情爲之相法身猶虛空之性雲蒸則翳霧斂則明其性本常矣報身若乘空之日赫矣高昇朗大照其體恒在矣化身如鑑水之沚淸則現流濁迺昏顯晦不恒來無定至若七蓮承足聖業肇而開雙樹恬神能事終而息駕其中或離經辯志晦明於幼學或納采問名同塵於始禮金輪至而羅七寶朱鬣騰而出九重縱神力而降魔凶邪革楊辯才而伏衆聖賢稽顙一一國處處分身遍他方而不窮盡未來而無替斯皆應情之化鑑水之影也亦何傷於涅槃常住之義夫惑人又二身蘊粹而圓常八相逐情而興是則眞爲寂靜化是㩲遷鶴林之不無犢子之疑佇決釋曰向辯眞化之不一未明眞化之不異夫化佛者豈他歟報身圓應之用也報身者何哉悲智所成之體也悲以廣濟爲智以善㩲爲業所以因時降迹物現身身迹者用也悲智者體也是其本用是其末依體起用攝末歸欲求其異理可然乎而迺定化體之㩲遷異眞身之寂靜斯爲未得矣斯爲未得矣然此且明報身起化也未明化身卽法也化身卽法理微矣還寄影喩而述焉夫水中之日影也不從外來不從內出不此不彼不異不一不無其狀不有其質倏焉而存忽焉而失像著而動性虛而謐執實者爲妄知妄者了實日何謂也日若從外來者水外寧在乎若從內出者水內先有乎若言在此者於彼不見若言在彼者於此不睹乎若言是異者一見有二乎若言是一者二見豈一乎若言是無者於是可亡乎言是有者求體曾得乎謂其生生無所從謂其滅滅無所往不生矣不滅性相寂然心言路斷斯可謂見水影之實性也見水影之實性者可見化身實性也見化身之實性者則證法身之體也故淨名經云佛身者卽法身也又云如自觀身實相觀佛亦般若云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又云離一切諸相則名諸佛引而申類而長之近取諸身遠取諸物何不寂滅于何不淸淨是以擧足下道場觸處而無盡開眼閉眼諸佛現前而不滅故須菩提之宴坐常見法身蓮華色之爭前蹔窺形相迷悟之分優劣若此豈可以有無生滅而見於化身哉夫知劍者忘其質器其光彩識馬者略其形色視其駿異然後切玉似泥一日千里反是者曰知劍識馬乎鑽仰於法門硏精於佛事亦猶於是矣至若聞誕於右脅謂之生化於北首謂之滅坐於蓮花謂之有焚於香木謂之無此蓋尋常之流雷同之見亦何足以抂於高門經云持戒比丘不應於佛生有爲若言有爲則是妄語又云寧以利刀自割其舌終不說言如來無常不可算數般涅槃時及不般涅槃若也隨問而卽對逐事而同執會經文之同別定滅時之遠近使二字智聾而不聞八味口爽而常失吁可畏非所敢言惑人率爾而興喟然而嘆曰前言之過也駟不及舌也嘗聞井蛙棲甃莫辯括地之深澤鴳槍榆詎識垂天之廣物旣然矣人亦有諸至若涅槃四門不生不滅佛身三種非一非異比空性而難量方水影而常妙竝得其所未得聞其所未聞今而後奉之無斁故知同凡偃臥迹彌留出自塵勞之情何預金剛之體唯一相始終不可措其詞情也多端前後不可齊其見遍知示滅之梵志遣報之期存而不論置之莫荅者不亦以是乎對曰然子得之矣余無所隱乎子矣聖王興替門第十稽疑曰輪王撫運之日化四天下說法花之時輪王預聽但兩儀開闢載籍詳焉唯聞玉環西獻豈見金輪東轉雖緇素有殊而聞見無別未悟輪王聖躬何爲不至於此若以乘虛來往非人所知人旣不知焉用王也何不肆覲東后風伯前驅寶馬共天馬爭飛金輪與日輪競曜千乘萬騎雜沓淸漢之閒振鼓鳴簫嘈囋丹霞之表發號令撫惸釐恤飢寒理冤滯使軒羲之帝仰霄際以承風堯舜之望天衢而慕德然後下碧空而朝萬國乘白雲以禮百神擧玉匱之仙奏鈞天之廣樂豈非聖王之盛事又蚩尤作亂追風召雨共工觸山傾天絕地八年九潦伊耆致昏墊之鑠石流金成湯有翦髮之厄兩漢之末八埏雲擾二晉之閒萬方鼎沸而王遠遊西域無拯溺之心遙視東無巡撫之意爲聖王者其若斯哉遂使疑億兆之心失人神之望不知有王耶無王耶控鐵圍而三十二相者其道合然耶不合然耶傾心遠聽佇聞嘉旨辯惑曰夫以勾芒司春不能於隆冬發煦羲和馭日未常於靜夜舒景若華照曜將列宿而分時蘭風披拂零霜而別候寒溫甫爾也昏旦頃焉而物旣謝不可以覆追時未臻可以預睹況乎今昔之遼哉夫輪王之興也七寶應圖十善裁化鐵圍所君天下而光宅金輪所遊大域中而利往千馬伏軛自空表而飛來四龍守藏從地中而踊出寶田氣色詎別於寒暑珠柱光明莫分於曉夜家給人足俗阜時雍下有知於上上無事於下至若孕質奇表卜年景曆三十二相不獨於日角珠衡八十千齡豈兼於畏神用教雖巍巍矣蕩蕩矣王之盛事矣蓋是劫增之日殊非壽減之辰求古於今聞其難得按諸經論三千國土同時而成成已住同時而壞壞已空成住壞空各二十劫如是循環終而復始於住劫之中從閻浮提人壽無量歲乃至八萬歲其間有轉輪王出興焉故俱舍論輪王八萬上雜心論云劫增輪王出矣若乃庖羲結網黃帝垂衣共工亂常蚩尤作暴竝望古非緜邈之代形今是斯須之間故皇王繼踵不逢寶馬之巡大盜排肩莫遇神兵之戡翦唐虞已下從而可知焉來論云佛說法花之時輪王預聽釋曰竊以聖人作萬物睹諸佛興十方苹是知四兵扈從寧此界之飛皇千子陪遊乃他方之聖帝故彼經偈云又千萬億國轉輪聖王至請原始要終取其義矣來論又云兩儀開闢載籍詳焉唯聞玉環西豈見金輪東轉釋曰夫載籍之興本乎書契書契之作源乎易象因三才而畫卦布六位以重爻澤上於天後聖取而成則鳥行於地前哲像以爲文斯乃書契兆之於皇雄文字成之於倉頡故云易之上古是曰羲爻書之首篇不過堯典載籍遠近昭然可明而乃謂經史之文詳開闢之事理不然矣若博採圖牒傍存子記元神是巨靈所契昆陵爲大帝所居華胥柱州依希得其地容成太上髣髴臻其道而文物竝闕而不論聖政粗論而不備但龍師已下之日淺誥盈車而未周人皇已上之歲多書數卷而便盡以時比事義可通乎然則昔有聖王金輪屢其東轉近無哲后玉環遂以西獻人逐時而興替物隨人而去來取類虛舟異夫膠柱者矣惑曰若輪王但生於八萬歲時何故玉毫在家之日七寶咸臻輪當宇之辰百年已減釋曰有化而爲瑞者有假以爲名者化而爲瑞不君於萬國假以爲名莫徵於七寶故仙人相融金之質必成十號之尊如來記獻土之童但王一分之地輪王之事未聞實錄矣或曰佛記作輪王四分之一者謂金輪王四分之一也若然者鐵輪可非一輪王乎但言作鐵輪王則明矣何故須言四分之一乎夫輪王者降七寶之祥行十善之化何故始行十惡終無七寶者乎惑人又曰皇王者所以理人也人不自理故立主以理至如二十住劫之初八萬增年之俗淳和而有道人朴略而無競斯時也何用聖王哉釋曰三界受形莫離於苦宅六情對境悉嬰於惑網是非因而互反善惡所以相攻假令有頂地之高昇三災不及非想天之寂四空爲上苦薀猶其逼迫使法尚以驅馳況乎欲界之人哉若也聞太謂無爲之極稱遂初言有道之最此蓋醉於巫咸耳安知眞諦之妙歟沙門復禮曰言者所以出意非意也迹者所以明本非本也故大聖之垂或迹淺而本深或言乖而意合得其門者能無岐路乎但不遠而復斯則善矣檀越曩搆淳因福履遐而日用今資異氣貞襟秀而天挺藹君子之松柏湛人倫之水鏡文場翹楚稱其雅論高才學肆英髦許其博聞强記何其美矣至若開邃鍵而探賾振芳毫而討論理尚違於得象言將涉於非聖若疑而敍意異三子而何若謗以爲睽載一車而可怪然敬尋來翰云晩披釋典捧卷竭誠斯言訒乎亦勤之至也幸甚幸甚貧道不涯賤質濫齒玄門若春露之輕滋學慚瀉同秋螢之末景業謝傳燈夫以聞斯行諸是仲尼之所釋離乎畢矣有若之能對況一乘妙義三藏微言者涉兔未足以窮深奔蜂豈期於化大于時大唐永隆二年歲次辛巳秋之朔日也十門辯惑論卷下㩲文學答書弟子㩲無二敬致書於大興善寺法師侍者昔菩薩之問如來斷幾生以佛速滅乃發斯言豈有十地之人於聖起謗但爲理資索隱義在鉤前致稽疑意亦如此且宣尼將聖之德尚問老聃慈氏次佛之尊猶詢師利況以下愚之蔽披上聖之文門萬戶觸塗多惑所以罄肝膽露曚竭鄙誠請高德遂引三車之駕八正之塗續晨鳧之足鑿混沌之竅百年之疑一朝頓盡方當永遵覺路長悟迷源爇煩惱之薪餐涅槃之飯請事斯語以卒餘年謹遣尺書敢謝不敏弟子㩲無二和南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화불은현(化佛隱顯)이란 화신의 부처님은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는 뜻이다.
  2. 2)『논어』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가한 일이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였다.
  3. 3)부처님 얻으신 8종의 법미(法味). 즉 상주(常住)ㆍ적멸(寂滅)ㆍ불로(不老)ㆍ불사(不死)ㆍ청정(淸淨)ㆍ허통(虛通)ㆍ부동(不動)ㆍ쾌락 등을 말한다.
  4. 4)성왕흥체(聖王興替)란 전륜성왕이 나타났다가 없어지곤 한다는 말이다.
  5. 5)홀로된 사람. 이(釐)는 이(嫠)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6. 6)옛날에 황제를 일컫는 말. 혹은 신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요(堯)임금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禹)임금을 말한 듯하다. 이후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직의 이름으로서 국가의 큰 제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기기도 하였다.
  7. 7)쇠와 돌을 녹일 정도로 열기가 심함을 말한다. 즉 오랜 가뭄을 비유하는데 상나라 탕(湯)임금 때에 9년 동안 가뭄이 들었던 일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8. 8)오행신(五行神)의 하나. 즉, 목신(木神)으로서 『사기(史記)』 주(註)에 의하면 “동방 청제(靑帝)의 보좌 역할을 하며, 몸은 새처럼 생겼고 얼굴은 사람 얼굴이며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9. 9)중국 신화(神話)에 나오는 인물, 요(堯)임금 때 역법(曆法)을 관장하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를 말한다.
  10. 10)약목(若木)의 꽃으로 일명 약영(若英)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남해(南海) 안 흑수(黑水)와 청수(靑水) 사이에 있는 나무로서 잎사귀는 푸르고 꽃은 붉은데 약목이 있는 곳으로 해가 진다고 한다.
  11. 11)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명본(明本)에는 ‘주주(珠柱)’가 ‘주계(柱桂)’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주주도 주계도 정확하게 무슨 뜻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다.
  12. 12)전해 내려온 나라의 연대를 예측해 보는 일.
  13. 13)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 본에 모두 ‘외신(畏神)’ 두 글자가 ‘귀신(鬼神)’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을지 자세히 모르겠기에 고려대장경 원본을 그대로 따랐다.”
  14. 14)문자(文字), 중국 태고(太古)의 글자, 나무나 대에 글자를 새겨서 약속의 표적으로 삼았다.
  15. 15)중국의 옛 전설에 나오는 황제(皇帝)의 신하로 새의 발자취에서 착상하여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16. 16)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ㆍ궁본에 ‘곤릉(昆陵)’은 ‘비릉(毘陵)’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뜻을 잘 모르겠고 다만 비릉은 한(漢)나라 때 현(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에 속한다.
  17. 17)화서(華胥)는 복희(伏羲)씨의 어머니. 『습유기(拾遺記)』에는 “포희(庖羲:伏羲)가 도읍한 나라에 화서주(華胥洲)가 있었는데, 신모(神母)가 그곳에서 노닐다가 푸른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싼 일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즉시 아이를 잉태했는데, 12년이 지나서 복희씨를 낳았다” 하였다.
  18. 18)황제(黃帝) 헌원씨의 사관(史官)., 세상에서 그를 용성공(容成公)이라고 했는데, 그는 처음으로 율력(律曆)을 만들기도 하였고, 도가(道家)의 채음보양(採陰補陽)의 방술이 용성자(容成子)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19. 19)복희씨의 이름. 복희씨를 용(龍)이라고 이름한 데다 그는 백관(百官)의 사장(師長)이었기 때문에 용사라고 하였다.
  20. 20)태고 때 있었다고 전해오는 3황(皇)의 하나. 삼황은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을 말한다.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의하면 “인황은 머리가 아홉 개이고 운거(雲車)를 타고 다니며 6우(羽)를 멍애하여 곡구(谷口)를 나온다고 한다. 형제가 아홉 사람이었는데, 각각 구주(九州)를 나누어 분장하여 각각 성읍(城邑)을 세웠는데 1백50 세(世)에 합하여 4만 5천 6백 년이다” 하였다.
  21. 21)황제 때의 신무(神巫) 계함(季咸)을 말한다. 또는 산 이름이기도 한데 소서성(小西省) 하현(夏縣) 동쪽에 있으며 요임금 때의 무함(巫咸)이 무도(巫道)를 닦은 곳이라고 한다.
  22. 22)『논어』「선진(先進)」편에 공자가 제자 4명에게 각자 포부를 말하게 했는데 맨 끝에 점(點)이 말하기를 “저는 세 사람의 말과 다릅니다”하자 공자가 “무엇을 걱정하느냐? 각기 자기 뜻을 말해보는 것이니라”(對曰 異乎三子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하였다.
  23. 23)『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