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3_0544_a_01L
광홍명집 제24권
033_0544_a_01L廣弘明集卷第二十四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033_0544_a_02L大唐西明寺沙門釋道宣撰


5. 승행편 ②
033_0544_a_03L僧行篇第五之二

12) 사태승도조(沙汰僧徒詔:승도들을 사태시키라는 조칙) 송(宋) 무제(武帝)
033_0544_a_04L沙汰僧徒詔宋武帝
襃揚僧德詔七首 元魏孝文帝
述僧中食論南齊沈休文
述僧設會論沈休文
議沙汰僧詔幷答 北齊文宣帝
弔道澄法師亡書梁簡文
與東陽盛法師書梁王筠
與汝南周顒書梁釋智林
與擧法師書梁劉峻一名孝標
與皎法師書 幷答梁王曼穎
弔震法師亡書梁劉之遴
與震兄李敬朏書同上作
弔僧正京法師亡書同上作
東陽金華山拪志梁劉孝標
與徐僕射述役僧書陳釋眞觀
諌仁山深法師罷道書 陳徐陵
諌周祖沙汰僧表周釋曇積
戴逵貽書仙城命禪師
幽林沙門惠命詶書北齊戴先生
弔延法師亡書隋薛道衡沙汰僧徒詔 宋武帝
문하(門下)
불법(佛法)이 와전되어 사문(沙門)이 잡스러워져서 커다란 가르침을 이루어 성취할 수 없게 되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간특한 마음이 빈발하여 흉한 모습만 자주 들립니다. 결국 도를 망치고 세속을 어지럽히니 사람과 신령이 서로 노한다. 이에 그 소재를 밝혀서 사찰의 장로(長老)들도 조용하게 함께 사태시키라.
나중에 이를 위반하면 연좌한 자까지 주살(誅殺)할 것이다.
주무 부서는 조격(條格)을 상세히 하여 조속하게 시행하라.
033_0544_b_04L門下佛法訛替沙門混雜未足扶濟鴻教而專成逋藪加項奸心頻發狀屢聞敗道亂俗人神交忿可符所在與寺耆長精加沙汰後有違犯其誅坐主者詳爲條格速施行

13) 포양승덕조(襃揚僧德詔:승덕을 기리라는 조칙) 7수 원위(元魏) 효문제(孝文帝)
033_0544_b_09L襃揚僧德詔七首 元魏孝文帝
(1) 제이승현위사문도통조(帝以僧顯爲沙門都統詔:승현 법사를 사문도통으로 삼자는 조칙)
033_0544_b_10L帝以僧顯爲沙門都統詔
문하(門下)
근자에 공들의 표문을 접수하고서야 조속히 사문도통(沙門都統)을 결정해야 함을 알았다.
덕행(德行)을 가려서 어진 스님을 선발하고자 자나깨나 생각해 보더라도 부처님을 계승하는 큰 소임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혹 도가 높은 데다 법랍(法臘)이 많으면서도 이치적으로 얽매임이 없어야 하며, 혹 법기(法器)가 그윽하고 식견이 아득하면서도 진세(塵世)의 업무를 드높이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사원사(思遠寺)의 주지(主持) 승현(僧顯) 법사께서는 어질고 계행(戒行)이 빛나며 맑은 기풍이 거울처럼 비치신다. 총명함이 깊어 그윽히 명달(明達)하고 도심(道心)마저 청량(淸亮)하시니, 참으로 이 같은 큰 책임을 맡더라도 대중을 묘하게 화합하는 본보기가 될 터이다. 최근에 이미 말로 아뢰었으니 칙령을 내려 사문도통(沙門都統)으로 모시도록 하라.
또 부의(副儀)의 두 가지 일은 치문(緇門)과 속인(俗人)이 함께하였으나 근자에는 잘 통솔하여 홀로 다스리게 됨으로써 드디어 이러한 임무를 폐지하였다.
지금 덕을 돕고 어짊을 칭찬하자면 반드시 그 사람이 필요하니, 황구사(皇舅寺)의 승의(僧義) 법사께서는 행실이 점잖고 신명이 트였으며, 총명하고 정업에 힘써서 업이 무성하며 도가 뛰어나시니, 마땅히 기대에 부응할 터이니 도유나(都維那)로서 현도(賢徒)를 빛내도록 조치하라.
033_0544_b_11L門下近得錄公等表知欲早定沙門都統比考德選賢寤寐勤心繼佛之任莫知誰寄或有道高年尊理無縈或有器玄識邈高挹塵務今以思遠寺主法師僧顯仁雅欽韶澄風澡深敏潛明道心淸亮固堪茲任和妙衆近已口白可勅令爲沙門都又副儀貳事緇素攸同頃因耀統獨濟遂廢茲任今欲毘德贊善固須其人皇舅寺法師僧義行恭神暢聰謹正業懋道優用膺副翼可都維以光賢徒

(2) 입승니제조(立僧尼制詔:승니의 제도를 세우라는 조칙)
033_0544_b_23L帝立僧尼制詔
033_0544_c_02L문하(門下)
깨달음이 응집되어 맑아 텅 비게 되면 일마다 세속의 바깥을 뛰어넘는다. 그윽함을 받들어 자취를 기리면 이치에 맡겨 말을 잊게 된다. 그러나 말이 없다면 어떻게 석가의 가르침을 펼 것이며, 세속 없이 어떻게 참다움을 드러낼 것인가?
따라서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펼치자면 반드시 계전(誡典)을 귀감 삼아야 하며, 6도(度)로 교화를 넓히자면 반드시 척파(尺波)에 의지해야 한다.
상교(像敎)가 동쪽으로 유포된 지 천 년하고도 이미 절반이나 되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화속(華俗)은 제도로써 금지하는 것이 더욱 엄하였기 때문에 전세(前世)의 뛰어난 이는 마땅함에 따라 조례(條例)를 일으켜 세상의 가벼움과 무거움으로써 현오(玄奧)를 도왔다. 선조(先朝)의 치세에 일찍이 스님들이 금지해야 하는 것을 만들었지만 조금이라도 자세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근자에 사문도통 승현(僧顯) 스님께서 아뢰시기를, “다시 한번 간정(刊定)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짐의 식견이 참으로 천박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경전을 함께 연구하고자 하였으나, 국사(國事)가 번거롭게 일어나서 마주하여도 상세히 따져 보지 못하였다. 또한 일시적으로 법도를 세워 거칠게나마 세상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모름지기 다 같이 교서를 펼쳐서 그 충심을 다스려야 한다.
033_0544_b_24L門下凝覺澄沖事超俗外淵摸崇賾理寄忘言然非言何以釋教非世何能表眞是以三藏舒風必資誡典度摛化固憑尺波自象教東流千齡已半秦漢俗華制禁彌密故前世英人隨宜興例世輕世重以裨玄奧朝之世嘗爲僧禁小有未詳宜其修近見沙門統僧顯等白云欲更一刊定朕聊以淺識共詳至典事起悤觸未詳究且可設法一時粗救世殿須立白一同更釐厥衷

(3) 청제법사일월삼입전조(請諸法師一月三入殿詔:법사에게 한 달에 세 번 대궐에 들어오실 것을 청하는 조칙)
033_0544_c_12L帝聽諸法師一月三入殿詔
문하(門下)
인(因)을 기리고 업(業)을 찬탄하더라도 종현(宗玄)만 못하다. 신(神)을 도와 그 뜻에 영향을 받더라도 어찌 뛰어난 철인(哲人)보다 앞서겠는가?
그러므로 주공단(周公旦)이 붕당에 대한 고(誥)를 지었으며, 석가가 선지(善知)의 글을 창도하였다. 지위가 존귀한 이는 어진 이를 거두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덕행이 뛰어난 이는 어진 자를 가까이하는 것을 숭상하였다.
짐이 비록 능력이 모자라 도에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선조의 치세에 육합(六合)을 경영하느라 안으로 다스릴 경황이 없었다. 그래서 황정(皇庭)에는 드높고 아득한 위용이 결여되었으며, 대궐[紫闥]에 세속을 넘어서는 의례(儀禮)를 소홀히 하여 흠선(欽善)의 이치와 복전(福田)의 자량(資良)이 참으로 부족하였다.
장차 의덕(懿德) 법사께서 수시로 오셔서 설법하신다면, 나와서는 도미(道味)를 맛보게 되며, 물러서서는 조정을 빛낼 수 있다. 조칙을 내려 대전(大殿)에 입궐하시어 한 달에 세 번 법문을 청하니, 그 인원 수와 법휘(法諱)는 별도로 첩지(牒紙)에 송부해 둔다.
033_0544_c_13L門下崇因贊業莫若宗玄裨神染志誰先英哲故周旦著其朋之誥釋迦唱善知之文然則位尊者以納賢爲德優者以親仁爲尚朕雖寡昧無庶幾也先朝之世經營六合未遑內範遂令皇庭闕高邈之容紫闥簡超俗之儀於欽善之理福田之資良爲未足將欲令懿德法師時來相進可飡稟道味退可飾光朝廷勅殿中聽一月三入人數法諱別當牒付

(4) 영제주중승안거강설조(令諸州衆僧安居講說詔:여러 주의 대중 스님에게 안거하고 강설하게 하는 조칙)
033_0544_c_24L帝令諸州衆僧安居講說詔
033_0545_a_02L문하(門下)
현리(玄理)에 의거하여 오묘함으로 돌이키는 것은 진실로 명풍(冥風)에 근거하고, 지혜를 머금고 자비를 익히는 것은 참으로 과지(果智)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복의 더위에도 도를 다스리는 항상된 규칙을 단속하고 90일 간의 더운 여름에도 법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계책을 원만하게 한다.
이에 여러 주(州)에 칙령을 내려 이같이 하안거(夏安居)하는 청청한 대중을 모시되, 대주(大州)에는 300명, 중주(中州)에는 200명, 소주(小州)에는 100명을 두고서 그 인원과 처소에 따라 강설(講說)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모두 승기속(僧祇粟)을 공급하여 완비하되, 만약 식량이 적고 대중이 부족하여 이 같은 인원 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는 밝혀서 그 양을 줄여서 다시 보고하라.
제각각 현명한 장인을 공경하여 참으로 슬기로운 덕을 추앙하여야 할 것이니, 함부로 처리하여 후진(後進)을 게으르게 하지 말라.
033_0545_a_02L門下憑玄歸妙固資眞風飡慧習慈實鍾果智故三炎撿攝道之恒規夏溫詮法之嘉猷可 勅諸州令此夏安居淸衆大州三百人中州二百小州一百人任其數處講說皆僧祇粟供備若粟尟徒寡不充此數者可令昭玄量減還聞其各欽旌賢匠良推睿德勿致濫濁惰茲後進

(5) 증서주승통병설재조(贈徐州僧統幷設齋詔:서주의 승통의 명복을 빌며 재를 설치하라는 조칙)
033_0545_a_10L贈徐州僧統幷設齋詔
문하(門下)
서주(徐州)의 도인(道人) 승통(僧統) 영(逞) 스님께서는 기풍과 식견이 형통하였고, 법기(法器)가 고상하며 자태가 청아하셨다. 도업(道業)이 밝고도 넓으며 이치의 맛이 깊고도 맑았기에 그 맑고 무성한 명성은 일찍이 서주(徐州)의 패군(沛郡)에 드러나셨다. 아름다운 사고와 그윽한 이룸은 패군(沛郡)의 초현(譙縣)에 퍼졌었다. 법을 창달한 것이 북경(北京)에까지 이르러 그 덕이 도속간에 분분하여 황연(皇筵)에서 공양 올리며 진우(辰宇)에 좋은 자리를 펼쳤었다. 참으로 어질고 슬기로우니, 짐도 몹시 존경하는 바이다.
인(因)에 따라 서거하시어 이에 세상을 달리하셨는데, 근자에야 갑자기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비탄이 가슴을 적신다. 지금 그 길은 연주(兗州)의 복현(濮懸)에 가까우니, 청주(靑州)의 사수(泗水)가 어찌 멀다 하겠는가? 비통함에 젖어 그 공덕을 기릴수록 슬픈 마음만 늘어난다.
서주에 비단 300필을 하사하니, 명복을 빌고 공양하면서 다시 5천 명분의 재법(齋法)을 이룩하도록 하라.
033_0545_a_11L門下徐州道人統僧逞風識淹通器尚倫雅道業明博理味淵澄淸聲懋早彰於徐沛英懷玄致風流于譙比唱法北京德芬道俗應供皇筵美敷辰宇仁睿之良朕所嘉重依因旣終致茲異世近忽知問悲怛于懷今路次兗濮靑泗豈遙愴然念德增厥心可下徐州施帛三百疋以供追福又可爲設齋五千人

(6) 세시도인응통백조(歲施道人應統帛詔:해마다 도인 응통에게 비단을 보시하라는 조칙)
033_0545_a_20L歲施道人應統帛詔
033_0545_b_02L문하(門下)
응통(應統) 스님께서는 전대(前代)의 철인(哲人)을 잇고, 도문(道門)의 자취를 계승하여 현범(玄範)을 그윽하게 거두셨기에 충유(沖猷)가 이에 의탁하였다. 지금 세속의 명예를 사양하시니, 이치에 따라 별도로 공양올리도록 하라.
8해(解)의 이치를 취하여 해마다 비단 8백 필을 보시하고 사배(四輩)에게 베푸는 것에 근거하여 사시(四時)에 따라 공급하도록 하라.
다시 선을 닦는 근본은 목숨을 바쳐 힘쓰는 데 있으니, 음식을 베푸는 인(因)은 내전(內典)에서도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조정의 관직에 따라서 해당되는 달에 차례대로 보시하여 가까운 것을 미루어 멀리 이르고 이치를 깊게 탐구하면 다만 세속의 마음을 열어 높일 뿐 아니라 또한 도를 향한 뜻에도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033_0545_a_21L門下應統仰紹前哲繼軌道門徽綜玄範沖猷是託今旣讓俗名理宜別可取八解之義歲施帛八百疋四輩之況隨四時而給又脩善之本寔依力命施食之因內典所美可依朝官上秩當月而施所以遠譬深理匪獨開崇俗心抑亦獎厲道意耳

(7) 위혜기법사망시백설재조(爲慧紀法師亡施帛設齋詔:혜기 법사가 돌아가시매 비단을 보시하고 재를 마련하라는 조칙)
033_0545_b_05L帝爲慧紀法師亡施帛設齋詔
문하(門下)
서주(徐州)의 법사 혜기(慧紀) 스님은 그 도량이 방정하시고 원대하셔서 도식(道識)이 순일하면서 텅 비었다. 뛰어난 거동은 세간의 바깥으로 우뚝하셨기에 그 거두어 섭수하는 공덕이 실로 견줄 만한 부류가 없었다.
팽성(彭城)에서 법을 빛내시어 성예(聲譽)가 중국 변방에까지 무성하시고 후예(後裔)가 꽃 피었으니, 송양(宋壤)에서 논(論)을 연구하고 공덕을 원근에 심으셨다. 참으로 예전에 녹야원의 이치를 창도함에 있어 종장되심이 치문(緇門)의 으뜸이시니, 연이어 현자의 총림(叢林)을 기리면서 사마(死魔)를 쫓아버리고 양기(良器)를 섬세히 다듬으셨다.
이에 부음을 듣고 나니 슬픔에 목이 메이고 감회만 어린다. 서주에 조칙을 내려 비단 300필을 보시하고 아울러 500명 분의 재법(齋法)을 이룩하여 명복을 빌도록 하라.
033_0545_b_06L門下徐州法師慧紀凝量貞遠道識淳虛英素之操超然世外綜涉之功斯焉罕倫光法彭方聲懋華裔論宋壤宗德遠邇爰於往辰唱諦鹿作匠京緇延賞賢叢儵矣死魔忽殲良器聞之悲哽傷慟于懷勅徐州施帛三百疋幷設五百人齋以崇追益

14) 술승중식론(述僧中食論:스님들의 중식에 대해 서술하는 논) 남제(南齊) 심휴문(沈休文)
033_0545_b_14L述僧中食論 南齊沈休文
033_0545_c_02L사람이 도(道)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심신(心神)이 혼미하기 때문이다. 심신이 혼미한 이유는 외물(外物)이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크게 어지럽게 하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익만 다투면서 이름을 영예롭게 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요사스러움이 만연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달고 기름지며 살찌고 무성한 것이다.
‘이름을 영예롭게 하려는 것’은 비록 나날이 마음에 쓰더라도 근본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쌓임이 없다. ‘요사스러움이 만연’하면 더욱 깊어지고, ‘달고 기름지며 살찌고 무성’해지면 누(累)가 더욱 심하다. 만사(萬事)를 말하더라도 모두 세 가지 일의 가지와 잎사귀일 뿐이다.
성인은 이 같은 세 가지 일을 끊지 않고는 비록 도를 구하더라도 얻을 바가 없음을 아셨기에 어쩔 수 없이 법도를 세워 간략히 하여 따르기 쉽게 하신 것이다. 만약 곧바로 말하자면 이 세 가지 일이 미혹의 근본이라 마땅히 금지해야 하지만, 이 같은 세 가지 일은 인정(人情)에 깊이 미혹되기 때문에 생각으로 없애기 어려운 것이다. 비록 금지하는 뜻이 있더라도 일이 갑자기 따르기 힘드니 방주(方舟)로 하천을 건너는 것에 비유된다.
어찌 곧바로 피안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강물의 흐름이 이미 급하니 이에 마주하여 곧장 건너가는 이치는 없기 때문에 흐름에 따르되 삿되지 않으면 오래 걸리더라도 그 지극함을 얻게 된다. 이는 비록 빠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을 금지하자면, 마땅히 그 단서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먹는 것을 잠깐 사이라도 쉴 수 있겠는가?
그 성품의 누(累)가 되는 것이 그보다 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저녁밥을 정오 이전으로 합해 두었다. 정오 이후로는 아무 일 없이 고요하게 하였다. 이같이 별다른 일이 없는 것에 기인하여 생각이 단촐해진다. 처음에는 전일(專一)하지 못하나 오래되면 저절로 익숙해진다. 이에 팔지(八支)를 단속하고 금계(禁戒)로써 매어 놓으니, 욕심이 만연하더라도 앞서의 것을 얻을 빌미가 없어지고, 영예로운 이름의 온갖 누(累)도 일에 따라 점점 없어진다. 그러므로 예전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정오가 지나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것은 대체로 누를 없애는 수단이며 도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모두들 먹지 않는 것에 그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 나아갈 바에 미혹되어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033_0545_b_15L人所以不得道者由於心神昏惑心神所以昏惑由於外物擾之擾之大者其事有三一則勢利榮名二則妖姸靡曼三則甘旨肥濃榮名雖日用於心要無晷刻之累妖姸靡曼方之已深甘旨肥濃爲累甚切萬事云云皆三者之枝葉耳聖人知不斷此三求道無從可得不得不爲之立法使簡而易從也若直云三事惑本宜禁絕而此三事是人情所甚惑慮所難遣雖有禁止之旨事難卒從譬於方舟濟河豈不欲直至彼岸流旣急會無直濟之理不得不從流邪靡久而獲至非不願速事難故也禁此三事宜有其端何則食之於人不可頓息其於情性三累莫甚故推此晩食倂置中前自中之後淸虛無因此無事念慮得簡在始未專久自習於是束以八支紆以禁戒靡曼之欲無由得前榮名衆累稍隨事遣故云往古諸佛過中不飡此蓋是遣累之筌蹄適道之捷徑而或咸謂止於不食此乃迷於向方不知厥路者也

15) 술승설회론(述僧設會論:스님들의 설회를 서술하는 논) 심휴문(沈休文)
033_0545_c_15L述僧設會論 沈休文
033_0546_a_02L법사(法事)를 경영하는 것은 반드시 이치에 맞아야 한다. 지금 세상에서 대중 스님들을 초청하여 단지 한 번의 모임으로 그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늘 사람들의 청을 받으신 것에 연유한다. 이로써 상법(像法)1)을 본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예전에 세상에 계실 때에는, 부처님과 대중 스님들은 승가람(僧伽藍) 내에는 원래 식구(食具)를 활용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발우를 가지고 중생에게 복을 구하였다.
지금의 대중 스님들 가운데 정오를 지키는 이가 적을 뿐 아니라 좋은 음식을 달고 맛있게 하며 많이 요리하여 풍성하게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지금 청하여 부르더라도 마지못하여 늦게 찾아온다. 기름진 것을 맛보는 입에 소찬만 갖추어 진상하니, 고개를 늘어뜨리고 이마를 찡그리는 것도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즐거움을 누려 복을 펼 수 없는 것이 아닌 이상 예전에 스스로 잘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고 사배(四輩)에게 의지해서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다면 복을 구하더라도 도리어 거슬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독실하게 논해 보면 그 이치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째서 출가한 사람은 원래 걸식으로 공양을 충당하는가? 계율이 분명하니 스스로 주방을 만들고 정인(淨人)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이미 사찰 내에서 풍족하기 때문에 다니며 걸식하는 일이 끊어졌다. 혹 발우를 가지고 문 밖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무리들은 비천하며 열등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시 걸식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오래되어 마침내 후진(後進) 가운데에서도 이치를 구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에 곧 다니며 걸식하는 일이 다시는 행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백정왕(白淨王)의 아들 전륜왕(轉輪王)이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발우를 지니고 찾아다니며 복을 베풀었는데, 어떻게 천 년의 바깥에도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사문과 궁명(躬命)의 종[僕竪]이 스스로의 입과 배만을 불리려고 하는가?
지금 스님들을 한 번의 모임에 초청하는 것은 이미 그 모양이 걸식하며 다니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행걸(行乞)과 수청(受請)의 두 가지 일은 다르지 않다. 만약 지금 다니며 걸식하는 일을 다시 하지 않게 되고, 다시 청하여 부르는 것도 하지 않는다면 걸식법(乞食法)은 이로써 영원히 묻혀질 것이다. 이 법이 이미 묻혀지면 스님들은 부처님의 종자가 아니고, 부처님의 종자가 이미 없어졌다면, 삼보(三寶)마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지금 모임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예전의 일을 추념해야 하니, 49년간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거느리고 성안에 들어가 걸식하시며 그 위의와 거조와 동작에 중생의 마음이 감응하도록 하셨다. 이같이 도를 구하여야만 도가 그에 합당해진다. 만약 이처럼 마음을 운행한다면 바로 회통(會通)할 수 있다.
033_0545_c_16L夫脩營法事必有其理今世召請衆僧止設一會當由佛在世時常受人以此擬像故也而佛昔在世佛與衆僧僧伽藍內本不自營其食具也至時持鉢往福衆生今之僧衆非惟持中者少乃有腆恣甘腴廚膳豐豪今有加請召竝不得已而後來滋腴之口進蔬蔌之具延頸蹙頞固不能甘旣非樂受不容設福非若在昔不得自營非資四輩身口無託者此以求福不其反乎篤而論之義不爾何者出家之人本資行乞律昞然無許自立廚帳幷畜淨人者今旣取足寺內行乞事斷或有持鉢到門便呼爲僧徒鄙事下劣是衆所鄙恥莫復行乞悠悠後進求理者寡便謂乞食之業不可復行淨王子轉輪之貴持鉢行詣以福施豈不及千載之外凡庸沙門躬命僕豎自營口腹者乎今之請僧一會旣可髣像行之乞丐受請二事不殊若以今不復行乞又復不請召則行乞之法於此永寘此法旣寘則僧非佛佛種旣離則三寶墜于地矣今之爲會者宜追想在昔四十九年佛率比丘入城乞食威儀擧止動自應心以此求道道其焉適若以此運心爲會可矣

16) 문사태석이조(問沙汰釋李詔:불교와 도교를 사태시킬 것을 묻는 조서)와 답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033_0546_a_21L議沙汰釋李詔幷啓 北齊文宣帝
033_0546_b_02L짐이 듣자니, 구액(九液)2)에 정신을 집중하여 학3)이 되어 현주(玄州)의 경계에서 두려워하였고, 6년간 고행한 석가는 번뇌의 나루를 짊어졌다고 한다. 혹은 귀신의 술법을 써서 시해(尸解)4)의 술(術)을 밝히기도 하고, 혹 인연의 요체를 말하여 니원(泥洹)의 도(道)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태일(太一)5)로 도법(道法)을 천양하여도 끝내 경거(輕擧)에 그치고, 여래께서 이치를 증득하였어도 적멸(寂滅)해질 뿐이었다.
조룡(祖龍)6)의 자취가 잠들고 유장(劉莊)7)이 현몽하면서부터 이 이래로 귀의하는 일이 분분해져 점차로 넓어졌다. 부모를 버리고 얽매임을 벗어던지며 나라를 등지고 집안을 잊으니, 도관(道館)이 산등성이마다 가득하고 가람(伽藍)이 주(州)ㆍ군(郡)마다 편재해 있었다.
만약 저 금색신(金色身)이 교화할 수 있었다면, 회남(淮南)8)이 살육당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위신력(威神力)이 자유자재하다면 앙굴마라(央掘摩羅)9)가 어찌 형벌을 받았겠는가?
또 이처럼 용(龍)을 부리는 것이 진실되지 않은데도, 형산(荊山)에는 반염(攀髥)10)의 미련이 남아 공상(控像)을 허무(虛無)로 삼으며 전수(瀍水)와 낙수(洛水)에서 야광의 괴이함을 깨닫고 그 시비에 계합(契合)되니, 짐이 실로 이에 미혹되었다.
치의(緇衣)의 대중이 속인의 절반이나 되며, 황복(黃服)의 무리가 호구보다 명수(名數)가 지나쳐서 국가에서 나누어주는 것도 이로써 충실해지지 못하며, 왕의 쓰임새가 이로 인해 결핍되었다.
그 정도(正道)를 가려내어 좌술(左術)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첫째는 국가를 윤택케 하고, 둘째는 군품(群品)의 미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앞다투어 따르는 바가 이미 오래된지라, 갑자기 중도에 사태(沙汰)하기가 실로 어렵다.
양가(兩家)의 부침하는 두 갈래 길의 길고 짧음에 있어서는 그 우열을 가리켜 말할 수 있으니, 그 말에 머뭇거림이 없을 것이다.

- 답사태석이조표(答沙汰釋李詔表:석가와 노자를 사태하라는 조서에 대해 답하는 표) 북제(北齊) 번효겸(樊孝謙)
신이 듣자오니 천도(天道)의 성(性)과 명(命)은 성인도 말한 바가 없으니, 대체로 그 이치가 섭렵하여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백양(伯陽:노자)의 도덕(道德)의 논의나 장주(莊周)의 소요(逍遙)의 이치는 그 남긴 말에서 뜻을 취하면 그런 대로 찾을 수 있으나, 옥간(玉簡)ㆍ금서(金書)ㆍ신경(神經)ㆍ비록(祕錄)11)이나 삼시(三尸)12)와 구전(九轉)13)의 기묘함과 강설(絳雪)과 현상(玄霜)14)의 이채로움에 이르기까지 회남자(淮南子)가 도를 이룰 때 개가 구름 속에서 짖었다거나15) 왕교(王喬)가 신선이 되자 검(劍)이 천상으로 날아올랐다는 것은 모두가 헛된 말로 해조(海棗)16)의 얘기이니 이를 구한다 하여도 마치 바람을 잡듯이 하고, 이를 배운다 하여도 마치 그림자를 붙잡듯이 합니다.
연(燕)나라의 군주와 제(齊)나라 임금과 진(秦)나라의 황제 및 한(漢)나라 황제가 저와 같은 방사(方士)들을 믿고서 참다움을 만나기를 바랐으나 서복(徐福)17)이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난대(欒大)18)가 찾아가서 얻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도영(倒影)19)에서 멀리 하늘에 올라 손바닥을 치며 기쁘게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신령에게 구한다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강벽(江璧)이 이미 죽어 여산(驪山)의 무덤으로 다시 들어갔으며,20) 용매(龍媒) 역시 죽어 끝내 무릉(茂陵)의 분묘(墳廟)로 들어가게 됨에 이르러21) 비로소 유향(劉向)이 홍보(洪寶)를 믿었으나22) 죽은 다음 책망만이 남았으며, 왕충(王充)이 황제(黃帝)를 비난하였으나 사라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말엽 이후로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는데, 서쪽 땅에서 경전을 베껴쓰고 남궁(南宮)에다 성상(聖像)을 그리면서, 곤지(昆池)의 지묵(地墨)을 ‘겁소(劫燒)의 재’라 말하며,23) 『춘추(春秋)』에 밤이 밝아진 것을 신령(神靈)이 내리신 날이라 합니다.24) 법왕이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끝이 없고 세계를 미진(微塵)에 두며 수미산(須彌山)을 낟알 속에 들이는 것도 모두 이치는 허무(虛無)를 근본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망한 무리들이 단순히 출가만을 구하니 약왕(藥王)이 그 몸을 태우고25) 파륜(波崙)26)이 피를 흘렸습니다. 만약 그렇게 잘 할 수 없다면 열심히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찌 형체를 바꾸고 모습을 변하여 세속 사람과 달리하겠습니까?
생각과 감정을 멋대로 하면 다시 속물과 같이 되어 버리니, 용궁(龍宮)에 관한 이야기도 사소한 논의가 되고 녹야원(鹿野苑)의 말씀도 지나가 버린 말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만 도풍(道風)이 장차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하늘의 밝은 명(命)을 받으시고 자신을 굽혀 백성을 제도하시니, 산귀(山鬼)도 영험을 드리우고 해신(海神)도 직분을 다하기에 상중(湘中)의 석연(石燕)도 때 맞게 내리는 비에 목욕하며 떼지어 날고, 대상(臺上)의 동오(銅烏)도 온화로운 바람을 쐬며 홀로 지저귑니다.
단지 주(周)나라가 낙읍(洛邑)에 도읍하였다가 다스림을 호경(鎬京)27)에서 거두었으며,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거처하며 그 혼을 풍패(豊沛)28)로 거두었습니다. 분진(汾晋)의 땅에서 왕의 자취가 시작되었고 이미 돌아다니는 데 지치고 다스림에 수고로워 다시 문원(文苑)에 마음을 쓰고 백가(百家)를 저울질하였습니다. 요지(瑤池)29)에서 옥을 쥘 것을 생각하고 적수(赤水)에서 구슬을 구할 것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왕모(西王母)가 백환(白環)을 헌납한 것은 순(舜)임금의 덕에 감응하였기 때문이고, 상천(上天)이 패옥(佩玉)를 내린 것도 실로 우(禹)임금의 공에 보답하고자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마천(司馬遷)과 사마광(司馬光)이 말을 기록하고 반고(班固)와 반초(班超)가 일을 기록하였으나 3세(世)의 말을 보지 못하였고, 1승(乘)의 이치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황제(皇帝)의 음악(音樂)과 백왕(伯王)의 예법(禮法)이 일찍이 시절에 따라 연혁(沿革)되었는데, 좌도(左道)가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니, 어찌 사태(沙汰)를 주저할 것입니까?
신이 삼가 아룁니다.
033_0546_a_22L問朕聞專精九液鶴竦玄州之境心六歲釋擔煩惱之津或注神鬼之明尸解之方或說因緣之要見泥洹之道是以太一闡法竟於輕擧來證理環於寂滅自祖龍寢迹劉莊感夢從此以歸紛然遂廣至有委親遺累棄國忘家館舍盈於山藪伽藍遍於州郡若黃金可化淮南不應就神威自在央掘豈得爲鯨若以御龍非實荊山有攀髥之戀控象爲虛瀍洛寤夜光之詭是非之契朕實惑乃有緇衣之衆參半於平俗黃服之徒數過於正戶所以國給爲此不王用因茲取乏欲擇其正道蠲其左術一則有潤邦家二則無惑群品且積競繇來行之已久頓於中路沙汰實難至如兩家升降二途脩短指言優劣無鼠首其辭臣樊孝謙謹奉 詔對曰臣聞天道性命聖人所不言以理絕涉求難爲稱謂伯陽道德之莊周逍遙之旨遺言取意猶有可至若玉簡金書神經秘錄三尸九轉之奇絳雪玄霜之異淮南成道犬吠雲中王喬得仙劍飛天上皆是憑虛之說海棗之談求之如繫風學之如捕影而燕君齊后秦皇漢帝信彼方士冀遇其眞徐福去而不歸欒大往而無獲猶謂升霞倒影扺掌可期祭鬼求神庶或不死江璧旣反還入驪山之墓龍媒已至終下茂陵之墳方知劉向之信洪寶歿有餘責王充之非黃帝此爲不朽又末葉已來存佛教寫經西土畫像南宮昆池地以爲劫燒之灰春秋夜明謂是降神之日法王自在變化無窮置世界於微塵納須彌於黍米蓋理本虛無示諸方便而妖妄之輩茍求出家王燔軀波崙灑血假未能然猶當剋寧有改形易貌有異世人恣意放情還同俗物龍宮餘論鹿野前言而得容道風將墜伏惟陛下受天明屈己濟民山鬼效靈海神率職中石燕沐時雨而群飛臺上銅烏和風而獨轉但周都洛邑治在鎬京漢宅咸陽魂歸豐沛汾晉之地王迹惟始旣疲遊幸且勞經略猶復降情文菀斟酌百家想執玉於瑤池念求珠於赤水竊以王母獻環由感舜德上天賜珮實報禹功兩馬記言二班書事不見三世之辭無聞一乘之旨帝樂王禮尚有時而沿革左道怪民亦何疑於沙汰臣某謹對

17) 조도징법사망서(弔道澄法師亡書:도징 법사가 돌아가심을 조의하는 글) 양(梁) 간문제(簡文帝)
033_0547_a_06L弔道澄法師亡書 梁簡文
계를 잘 살펴보았다.
존사(尊師)께서 어젯밤에 열반하신 것을 전해 들으니 참으로 비통할 따름이다. 법사께서는 지업(志業)이 밝으시고 도풍(道風)이 순일하시며, 계주(戒珠)가 맑게 빛나고 복익(福翼)이 원만하셨다. 더욱이 식견이 명리(冥理)에 형통하고 심해(心解)로 멀리 살피셨으니, 비가 내릴 것을 기록하시면 반드시 들어맞았고, 흑우(黑牛)를 말씀하시면 틀림이 없었다.
이에 감복하는 이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고 이로움을 받는 이는 도속(道俗)을 겸하였다.
제자가 “경사(京師)로 돌아가 바로 연을 맺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어찌 잠시라도 따르지 못하고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혼자 말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업이 원래 깊은 데다 지혜의 힘이 오랫동안 이로우니 반드시 그 신명(神明)을 보배로운 땅에 노닐게 하고 자취는 청정한 하늘에 드러낼 것이다. 단지 유지(乳池)에 대해 말하고 향관(香棺)에 빈소를 여는 것뿐으로 입실(入室)하여도 공(空)에 들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단지 여래께서 강생(降生)하신 자취가 이로 말미암아 니원(泥洹)에 드셨으니, 바로 생(生)ㆍ주(住)ㆍ멸(滅)에 해당되어서는 어찌 정해진 형상이 있겠는가? 예전의 성인이나 후대의 현자가 어떻게 형태를 드러내고 소리를 내겠는가? 인연을 미루어 비교해 보더라도 처음부터 그런 예는 있지 않다.
상인(上人) 등이 아울러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쌓아 도를 주시어 함께 격려하고 책하며 구업(舊業)을 널리 따르면서 도량에는 끊어짐이 없게 하고 이익이 실추되지 않도록 하였다. 돌아가신 분에게 보내는 물건은 여법(如法)하게 공양할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참으로 어찌할 것인가?
033_0547_a_07L省啓承尊師昨夜涅槃甚深悲怛法師志業淹明道風淳素戒珠瑩淨翼該圓加以識見冥通心解遠察落雨而必然稱黑牛而匪謬服膺者無遠近蒙益者兼道俗弟子自言京輦便申結緣豈謂一息不追奄至乎此然勝業本深智力久利必應遊神寶地騰迹淨天但語其乳池啓殯香棺入室不了空心于何不慟但如來降生之迹因此而入泥洹正當其生住滅靡有定相先聖後賢何其形響推挍因緣未始有例上人等竝在三積始終稟道宜應共相策勉弘遵舊業使道場無斷利益不墜所禭物輒如法供養奈何奈何

18) 여동양성법사서(與東陽盛法師書:동양의 성 법사에게 보내는 글) 양(梁) 왕균(王筠)
033_0547_a_22L與東陽盛法師書梁王筠
033_0547_b_02L보살계(菩薩戒) 제자 왕균(王筠) 법명 혜거(慧炬)가 머리 숙이고 합장하며 동양(東陽)의 성(盛) 법사께 인사드립니다.
제자가 매우 운이 좋게도 일찍이 만나 접촉하였었는데 세월이 흘러 어언 3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기품과 덕망을 흠모하며 홀로 회포만 쌓으면서 산천(山川)을 사이에 두었으니, 예배할 방법마저 없습니다. 사마참군(司馬參軍)이 우러러 돌봐주심을 서술하고 곡진하게 방문하여 기억해 주시니 이미 옛것을 보살펴 주시는 정을 입고 아울러 은근한 뜻을 지녔으니, 기쁘게 정대(頂戴)하는 것이 참으로 비유하여 말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조화롭게 복을 누리시어 향년 아흔넷이셨으니, 강인(絳人)30)의 높지 못함을 웃으시고 은종(殷宗)31)의 장수와 함께하셨습니다. 귀는 목까지 늘어졌고, 치아는 튼튼하여 먼저 빠진 것이 없으며, 꽃같이 환한 미소와 빛나는 풍채로 신령을 기쁘게 하고 본성을 다스리니, 실로 숙세에 선인(善因)을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훌륭한 과보를 초래하겠습니까?
정성을 다하여 연장자와 노인을 존경하고 덕을 품은 채 옛것을 돈독히 하며 바람에 의지하여 깊게 도를 사모하고 기쁘게 부러워하여 깊이 우러릅니다. 일어서고 앉을 적마다 생각하고, 자나깨나 가슴에 새겼습니다. 제자가 이와 같은 번롱(樊籠)에 묶이고 이와 같은 영쇄(纓瑣)에 쫓기어 도를 여쭤볼 길조차 없으니 몸을 매만져도 잃어버린 듯합니다.
마음속으로 명회(冥會)를 기약합니다만, 강과 산이 지척간이라도 도술(道術)을 서로 잊었으니 그 형체의 자취마저 버려두게 됩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공경하여 도와서 이러한 심오한 도리를 기약하여 지킨다면 적송(赤松)32)의 붉은 머리카락이 다시 어찌 귀하겠습니까? 석장을 날려 그 몸을 떨침이 참으로 단석(旦夕)에 있습니다.
참된 마음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풀어내더라도 다 펼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단 한마디라도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어찌 다행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 균(筠)이 머리 숙여서 인사드립니다.
033_0547_a_23L菩薩戒弟子王筠法名慧炬稽首和問訊東陽盛法師弟子昔因多幸早蒙覲接歲月推流踰三十載欽慕風德獨盈懷抱閒以山川無由禮敬司馬參軍仰述存眷曲垂訪憶旣荷錄舊之情兼佩殷勤之旨歡欣頂戴難爲譬說仰承乘和履福享年九十有四蚩絳人之未高同殷宗之遐壽且耳長眞已過項齒剛曾不先落華駐釆怡神輔性自非宿植善因以招斯勝果尊年尚齒之誠懷德敦舊之款依風慕道之深欣羡景仰之興居在念寤寐載懷弟子限此樊迫茲纓瑣無由問道撫躬如失心期冥會咫尺江山道術相忘棄置形迹唯願敬勖保此期頤赤松朱髮復何足貴飛錫騰軀眞在旦夕指陳丹款殊未申暢儻惠一言豈不幸甚弟子筠稽首和南

19) 여여남주옹서(與汝南周顒書:여남 주옹에게 보내는 글) 양(梁) 석지림(釋智林)
033_0547_b_19L與汝南周顒書梁釋智林
033_0547_c_02L근래에 듣자오니, 단월이 2제(諦)의 새로운 이치를 서술하면서 삼종(三宗)의 취사(取捨)를 개진하여 참으로 그 소리가 항률(恒律)과 달리 하며 비록 만물의 나아감이 빠르지 않는데도 이미 논문을 저술하여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기쁨에 따라 충만하여 두루하니, 만물이 늘 중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다시 단월을 계승하더라도 당시에 이론(異論)을 세운 것이 당시의 학중(學衆)을 침범한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논문을 지은 것이 비록 이루어지더라도 정해져 반드시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듣고는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한탄하였습니다. 이 같은 이치의 갈래는 처음 듣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묘음(妙音)이 가운데에서 이미 67년간이나 끊겨서 그 이치가 높으나 항상 읊조리는 것조차 전할 수 없었습니다.
빈도(貧道)가 스무 살 되는 때에 바로 이 같은 이치를 깨닫고 항상 이 같은 미묘한 깨우침에 의지하여 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매번 기뻐하였으나 더불어 함께함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마침내 장안(長安)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관중(關中)은 아주 좋은 땅으로 옛날부터 이러한 뜻이 있어서 늘 법회를 열어 성대히 하여 때에 능하였으나 이 같은 이치를 깊게 이해하는 자가 원래 많지 않았으며, 이미 상정(常情)을 범하였으니 후진이 듣고 배운다 하나 수가 매우 적고, 전하여 형통함에 있어서도 대략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강설(講說)하면서 한 시절을 그르쳤는데, 그 같은 여타의 이치는 종록(宗錄)에서 보여집니다만, 오직 이 같은 갈래는 백 리 안에 이만큼 성취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만 먹다가 끝내 병이 들었으니, 이미 쇠약하여 질병이 낫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서쪽으로만 맴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같은 도는 지금 이후로 영원히 끊어집니다. 단월이 실마리 없이 기틀을 발명하여 홀로 방외(方外)에서 창조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 같은 말을 외람되이 귀로 들으니, 기쁘기도 하고 안위도 되는 것이 실로 견줄 곳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이치를 밝게 세워서 법등(法燈)의 종자가 있게 해야만, 비로소 진실한 행도(行道)의 으뜸가는 공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다시 나라와 성곽 및 처자를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하더라도, 그 복의 이로움이 서로 지나침이 없을 것인데, 이미 다행히도 이를 새기고자 하는 마음을 내었으니, 마땅히 널리 선포하여 상찬(賞讚)하도록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법의 이치를 밝게 논하였으니, 마땅히 인(仁)에 있어서는 사양함이 없어야 하는데,33) 어찌 대중의 마음만을 애석히 여겨 그 기이한 뜻을 잃겠습니까?
그리하면 논문이 완성되더라도 다시 중복된다면 단월이 찾아와 혹 이것으로써 법의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지나간 의리는 그러므로 우스운 논의가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한 부를 서사(書寫)하여 보내 주신다면, 빈도가 서쪽으로 돌아가서 가는 곳마다 널리 퍼지게 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끌고 갈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입산하고서도 다시 이같이 서(叙)하는 것도, 모두가 깊이 부촉하고자 함입니다.
033_0547_b_20L近聞檀越敍二諦之新意陳三宗之取捨聲殊恒律雖進物不速作論已隨喜充遍物非常重又承檀越恐立異當時干犯學衆制論雖成定不必出聞之懼然不覺興悲此義旨趣似非初聞妙音中絕六十七載理高常韻莫有能傳貧道年二十時便參傳此義常謂藉此微悟可以得道每歡喜無與共之年少見長安耆老多云關中高勝迺舊有此義常法集盛時能深得斯趣者本無多人旣犯越常情後進聽受便自甚寡傳通略無其人貧道捉麈尾以來四十餘年東西講說謬至一時其餘義統頗見宗錄唯有此途百里無人得者貧道積年迺爲之發病旣衰痾未愈加復旦夕西旋顧惟此道從今永絕不言檀越機發無緖獨創方外非意此音猥來入耳且欣且慰實無以況建明斯義使法燈有種始是眞實行道第一功德雖復國城妻子施佛及僧爲福利無以相過旣幸已詮述想便宜廣宣使賞音者見也論明法理當仁不讓豈得顧惜衆心以失奇趣邪若此論已成遂復中寢恐檀越方來或以此爲法障往意理然非戲論矣想便寫一本爲惠貧道齎以還西使處處弘通也比小可牽曳故入山取敍深企付之

20) 여거법사서(與擧法師書:거 법사에게 보내는 글) 양(梁) 유준(劉峻)[일명 효표(孝標)]
033_0548_a_03L與擧法師書 梁劉峻一名孝標
행리(行李:使者)에게 높으신 말씀과 빛나는 덕에 대해 들었습니다. 멀리에서까지 바람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하니 신선이 되는 석수(石髓)34)를 바라고 태음(太陰)의 용촉(龍燭)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푸른 별은 밤하늘에 떠 있고 시원한 구름은 가을을 보내며, 도가 승하면 살찌니 참으로 두루 거둡니다.
무지개를 옷으로 입고 밤의 이슬을 천막으로 삼아 노란 국화의 떨어진 꽃술을 먹으며 맑은 계곡의 흘러가는 물을 잔에 담습니다. 새벽에 돌아가는 기러기를 기다리고 아침의 물오리는 저녁 때 울음소리를 듣게 되며 짝을 잃은 외로운 고니는 그 모습이 처량하기만 합니다.
대체로 소사(蕭史)35)가 봉황새를 타며 열자(列子)가 장풍(長風)을 부리는 것을 본받아서 비록 형경(荊卿)36)이 옆에 마치 사람이 없는 듯이 하여 빙설 위에 굳게 드러누운 채로 숨어서 드러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를 기리겠습니까?
경유(經囿)에서 달리고 서포(書圃)에서 날개짓 하는 데 이르러서는 용궁(龍宮)의 묘한 경전을 지극히 하고 석실(石室)의 홍기(鴻記)를 섭렵하며, 도생(道生) 스님도 그 천진(天眞)에 부복하고 만천(曼倩)도 만물을 분별함을 감사합니다.
만약 이 같은 것을 익힌다면 동자가 뜻을 조충(雕蟲)37)에 두어 안으로 문장을 잘 지으며 밖으로는 영화(英華)가 드러날 것입니다.
무성한 가을의 대나무와 밝게 비치는 봄의 소나무, 작송(爵頌)은 명주(明珠)의 명예를 그치고, 장문(長門)은 황금의 수려함보다 뛰어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빛나면서도 수려합니다.
예전에 절하(浙河)를 여행하다가 조궤(組繢)를 보고는 부지불식간에 종이를 사르고 붓을 태워 혼백이 여기서 다하며 이 이래로 규(珪)와 벽(璧)의 두 갈래를 끊었으니, 마음은 청화(菁華:精華)를 돌아보고 장(腸)은 구절(九折)로 휘감겼습니다.
해를 다스려 밝음을 멈추게 하더라도 일순간의 틈을 넘지 못하고 바다가 용솟음친다면 어느 누구도 한 구석에 가두어 두지 못할 것입니다. 옥(玉)으로 까치를 막아 나머지 보배를 전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바라건대 청휘(淸徽)를 열람하여 어지럼증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월민(越民)은 관을 파는 것이 아니니, 제(齊)나라가 어찌 소(韶:순임금의 음악)를 연주하는 땅이겠습니까?
바라건대 더불어 나아가시되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033_0548_a_04L聞諸行李高談徽德逖聽風聲心飛魂竦無異蘄仙之望石髓太陰之思龍燭倉星昏昊涼雲送秋道勝則肥固應頤攝衣裳虹蜺帷幕霄露餌黃菊之落蕊酌淸㵎之毖流旦候歸鴈晨鳧暮聽羈雌獨鵠神彯彯爾蓋象蕭史之騎鳴鳳列子之御長風雖荊卿傍若無人孝然堅臥冰雪沈沈隱隱何以尚之哉至於馳騖經囿翺翔書圃極龍宮之妙典殫石室之鴻記道生伏其天眞曼蒨謝其辨物若乃習是童子厝志雕蟲藻思內流英華外發葳蕤秋竹照曜春松爵頌息明珠之譽長門濫黃金之賞盛矣美矣其麗乎昔旅浙河嘗觀組繢不覺紙爇筆焚魂魄斯盡自茲厥後兩絕珪意睠睠於菁華腸迴迴於九折日御停照不踰隙穴海若濆涌莫限隈嵎以玉抵鵲幸傳餘寶冀閱淸徽用瘳眩疾然越民非鬻冠之所齊國豈奏韶之地望與其進無貽責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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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교법사서(與晈法師書:교 법사에게 보내는 글)와 답 양(梁) 왕만영(王曼穎)
033_0548_b_02L與皎法師書幷答 梁王曼穎
033_0548_c_02L제자(弟子) 고자(孤子) 만영(曼穎)이 머리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몸소 찬술하신 『고승전(高僧傳)』을 보여 주시고 골라 뽑아내게 하시어 힘써 처음과 끝까지 살펴보고 단지 위대한 재주만을 보였을 뿐으로 종이가 찢어지고 먹물이 배어나오더라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같이 지극한 법이 드리워지고 명덕(名德)이 이미 일어났다면 햇수가 거의 5백 년에 가깝고 시절이 여섯 대를 거치며, 마등(摩騰) 스님과 법란(法蘭) 스님이 서역에서 법륜을 굴리시고, 안후(安侯)와 지참(支讖) 스님이 석장을 쥐고 동도(東都)로 오셨으니, 비록 그 자취에 출몰(出沒)이 있고 그 행에 깊고 얕음이 있다 하나, 모두 배와 다리를 만들어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도속에 모두 그 미덕(美德)을 전하고, 연참(鉛槧:저술의 뜻)으로 그 말씀을 새겨서 이를 후세에 밝게 드러내어 전대의 빼어난 이들을 찬양하였다. 도안(道安) 스님과 구마라집(鳩摩羅什) 스님은 진서(秦書)에 간간이 나오고, 불도징(佛圖澄) 스님과 도진(道進) 스님은 조(趙)나라 책에 섞여 나오며, 『진사(晋史)』에서 모은 것들은 당시에 국한된 것입니다.
송전(宋典)에서 좋아하는 것은 대체로 모은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아울러 군태(君台)의 기록38)을 잘못 내어 원량(元亮)의 설(說)39)에 섞여 있습니다. 감응(感應)을 혹 높이 미루더라도 유계(幽界)와 명계(明界)는 대강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방문(傍文)을 넓게 드러내더라도 그 빛까지 천양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나오는 여러 전기(傳記)들은 또한 수정한 것이 아닙니다.
경흥(景興)40)은 우연히 산속에 거처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승보(僧寶)는 유방(遊方)의 선비들을 편벽되게 편집하였고, 법제(法濟)는 오직 고일(高逸)의 조목만 열거하였으며, 법안(法安)은 지절(志節)의 과목을 부과하는 것에 그쳤고, 강홍(康泓)은 단도개(單道開)를 기록하였고, 왕수(王秀)41)는 고좌(高座)를 칭하였고 승유(僧瑜)는 탁월하다 하여 홀로 수록하였고, 현창(玄暢)은 초연하여 따로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석법진(釋法進)이 지은 왕건(王巾)의 저술은 그 뜻을 종합하여 일가(一家)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나, 이름은 널리 언급하였지만 넓지 못했고, 체(體)는 세웠어도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양조(梁朝) 이래의 작자(作者)들 또한 이와 같은 병통이 있었으니, 승우(僧祐)는 너무나 간추렸는지라 이미 법제(法濟)와 그 허물을 같이하며, 왕수(王秀)는 말단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다시 경흥(景興)의 비방을 얻었습니다.
창공(唱公)이 편집한 것이 최고로 실제에 가깝습니다. 그 비루한 뜻을 대강 살피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번에 제작하신 것이야말로 불간(不刊)의 홍필(鴻筆)이라 말할 만합니다.
면면히 고금을 이어가며 내외(內外)를 포괄하면서도 언사로 귀속시켜 이를 견주어 가되, 꾸미지도 않았고 질박하지도 않은데, 번잡하다고 말하더라도 생략하기 어렵고, 간략하다고 말해도 어찌 보탤 수 있겠습니까?
‘고(高)’로써 이름을 삼았으니, 이미 이르지 못한 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였고, 조례(條例)를 열어 넓게 이루었으니, 실로 선한 자로 하여금 권하기에 족합니다.
두세 사람이 앞뒤로 찬술하였으나, 어찌 긴 것을 줄이고 짧은 것을 늘리며 동일한 수준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문도(文徒)는 마침내 덧붙일 만한 한마디 말도 없었을 텐데 저잣거리에서도 헛되이 천금(千金)의 상금을 베풀어서 바야흐로 새장 속으로 들어가고 인각(麟閣)으로 올라가며, 경급(瓊笈)을 출납하고 옥사(玉笥)를 거두고 펴는 것뿐입니다.
제자가 실로 불민하기에 어려서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최근에는 허약해진 나머지 길을 마주함에 어두움만 많아졌습니다. 보내 주신 책을 얻어 펴보자 바로 이러한 글이 여기에 있으므로 우러르느라 토론할 틈조차 없었는데 어찌 그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두루 통하여 윈칙(元則)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을 진실로 부끄러워하고 도에 머무르면서 휴혁(休奕)의 책을 아는 것만이 깊었다. 사안(謝安)이 축도생(竺道生) 스님의 광대한 풍류를 흠모하였고, 은호(殷皓)가 지둔(支遁) 스님의 뛰어난 재주를 한탄하였듯이 열흘이 못 되어 마음이 다해서 수고롭기만 한지라, 힘을 다하여 이 같은 글로 드릴 말씀을 대신합니다.
제자 고자(孤子) 왕만영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 답왕만영서(答王曼穎書) 양(梁) 석군백(釋君白)
군백(君白) 제가 『고승전』을 찬술하면서 편지를 보낸 것은, 침과 쑥을 놓아 깨우침을 얻어 누추한 글을 한층 더 깔끔히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도는 사람에 의하여 넓어지고 이치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도를 넓히고 가르침을 풀이하는 데는 고승(高僧)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점차 물들어 접촉하게 된 이래로 유법(遺法)을 밝혀서 공덕을 달리 하고 훈적을 다르게 하여 대를 이어 흥성케 하여 후생(後生)을 돈독케 하기 위해서 이치는 종합적으로 거두어야만 합니다.
빈도가 어려서부터 서법을 익히거나 책 상자를 끌어안은 것이 부족한지라,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늘 연묵(鉛墨)만을 흠모하여 먹물을 칠하여 선법(善法)의 선양하는 일을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청취하고 열람하는 틈마다 전하여 기록하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니, 매번 조금이라도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바로 다시 검토할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단지 온갖 전기를 찾아보았으나, 번잡하고 간략한 것이 서로 같지 않않습니다. 혹 어지럽고 번잡한 것을 다시 편집하거나 혹 행사(行事)에 더해지고 빠진 것은 이미 별서(別序)에 상세히 하였으며 아울러 와서 갖추어 고하였습니다. 촌관(寸管)을 헤아리지 않고 십과(十科)42)를 세워 조류(條流)를 헤아려 견주었는데, 그 뜻과 말을 간략히 하였으나 필로(筆路)가 아득해서 그만 말이 잘못 누추해졌습니다. 원래가 스스로 누락된 것만 갖추려고 한 것인데, 어찌 외람되게 고청(高聽)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월의 학문이 이미 공구(孔丘)와 석가를 겸하여 그 이치가 현유(玄儒)에 통하였고, 글을 뽑아 문채(文彩)를 다듬는 일에도 안팎으로 오랫동안 힘썼으니, 열람하는 틈틈이 삭제하고 첨가하시면서 상세히 살펴 주십시오.
이 때문에 비천함도 잊고 용문(龍門)에다 편지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고상한데 말이 촌스러우니 마음속에 부끄러움만 많아집니다.
글에서 헛되이 칭찬을 하셨으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찬론(贊論)의 십과(十科)를 지었기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만약 오류가 있더라도, 부디 이를 잘 살펴봐 주십시오.
석군백(釋君白)
033_0548_b_03L弟子孤子曼穎頓首和南一日蒙示所撰高僧傳幷使其掎摭力尋始竟但見偉才紙弊墨渝迄未能罷若乃至法旣被名德已興年幾五百時經六代自摩騰法蘭發軫西域安侯讖荷錫東都雖迹摽出沒行實深淺咸作舟梁大爲利益固宜油素傳美鈆槧定辭昭示後昆揄揚往秀而道羅什間表秦書佛澄道進雜聞趙冊#晉史見拾復恨局當時宋典所好頗因其會兼且抗出君台之記糅在元亮之說感應或所商攉幽明不無梗槪汎顯傍文未足光闡間有諸傳又非隱括景興偶採居山之人僧寶偏綴遊方之士法濟唯張高逸之例法安止命志節之科康泓專紀單開王季但稱高座僧瑜卓爾獨載玄暢超然孤錄唯釋法進所造王巾有著意存該綜可擅一家然進名博而未巾體立而不就梁來作者亦有病僧祐成簡旣同法濟之責王季染毫復獲景興之誚其唱公纂集最實近求其鄙意挭槪頗見法師此製始所謂不刊之鴻筆緜亘古今包括內屬辭比事不文不質謂繁難省約豈加以高爲名旣使弗逮者恥例成廣足使有善者勸向之二三諸子前後撰述豈得約長量短同年共日而語之哉信文徒竟無一言可豫市肆空設千金之賞方大簉龍函登麟閣出內瓊笈卷舒玉笥弟子雖實不敏少嘗好學頃日尫餘觸途多且獲披來帙斯文在斯鑽仰弗暇討論何所誠非子通見元則之論良處道知休弈之書徒深謝安慕竺曠風流殷皓憚支遁才俊耳不見旬日窮情已勞扶力此白以代訴盡子孤子王曼穎頓首和南皎法師答君白一日以所撰高僧傳相簡意存箴艾而來告累紙更加拂拭顧惟道藉人弘理由教顯而弘道釋教莫尚高僧故漸染以來昭明遺法殊功異列代而興敦厲後生理宜綜綴道少乏懷書抱筴自課之勤長慕鈆塗靑揚善之美故於聽覽餘閒心傳錄每見一分可稱輒有懷再省但歷尋衆記繁約不同或編列參差或行事出沒已詳別序兼具來告以不量寸管輒樹十科商攉條流言略擧而筆路蒼茫辭語陋拙本以自備疏遺豈宜濫入高聽檀越旣學兼孔釋解貫玄儒抽文綴藻內外淹披覽餘暇脫助詳閱故忘鄙俚簡龍門然事高辭野久懷多愧來告吹噓更增㥏愧今以所著贊論十科重以相簡如有紕謬請備斟酌君白

22) 조진법사망서(弔震法師亡書:진 법사의 돌아가심을 조문하는 글) 양(梁) 유지린(劉之遴)
033_0549_a_15L弔震法師亡書梁劉之遴
033_0549_b_02L제자 유지린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물거품과 번개는 갑자기 사라지나 3상(相)은 멈추지 않는데, 고(苦)가 공하며 아(我)가 없으니 5음(陰)43)에 어떻게 머물 수 있습니까?
존사(尊師) 승정(僧正)께서 염부제에서 천수(天壽)를 버리시고 묘락(妙樂)으로 신명을 옮기셨습니다. 비록 이처럼 숙세에 심은 것에만 의지하더라도 반드시 선지(善地)로 오르실 것입니다.
사람마다 속으로 그 가신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소리 죽여 울부짖으니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재삼(在三)44)의 중함을 생각하여 추모하는 마음만 애절합니다. 애욕의 묶임에서 영원히 떠나셨는데, 다스림을 마음대로 못하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승정께서 정묘한 이치를 기특하게 드러내시고, 경론을 거두어 회통하시면서 산나물로 그 몸을 마치며 유위(有爲)를 다스려 다하셨습니다. 해마다 바싹 여위면서 그 의표(儀表)를 2부 대중에 드리웠으니, 어찌 단지 식심(息心)의 영수일 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인륜(人倫)의 준걸입니다.
제자가 어려서부터 만나뵈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우러러 존경하면서 선우(善友)를 이에 의탁하고 슬픔과 병이 다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씻어내지 못한 것이 비통하기만 합니다.
애통한 마음은 더욱더 아파오는데 갖은 애를 써서 용모를 다듬지만 미혹되어 외람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자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033_0549_a_16L弟子劉之遴頓首和南泡電倏忽相不停苦空無我五陰寧住尊師僧正捨壽閻浮遷神妙樂雖乘此宿植必登善地人情怛化銜疚悲摧念在三之重追慕哀慟纏緜永往理不可奈何奈何僧正精理特拔經論洽蔬菲終身有爲略盡枯槁當年形二衆豈直息心摽領亦爲人倫之弟子少長遊遇數紀迄茲平生敬善友斯寄哀疾待盡不獲臨泄慟之懷二三增楚扶力脩喭迷猥不次弟子劉之遴頓首和南

23) 여진법사형이경굴서(與震法師兄李敬胐書:진 법사의 형 이경굴에게 보내는 글) 유지린(劉之遴)
033_0549_b_05L與震兄李敬朏書同上作
생(生)과 멸(滅)은 무상하기만 한데, 현제(賢弟) 진(震) 법사는 구시나성의 역사(力士)와 함께 살면서 도량에 머무셨는데, 이미 오래전에 하셨던 법언이 안타깝게도 영원히 끊어졌습니다.
오내(五內)가 끊어져 자신의 수명도 다하지 못하고, 덕업(德業)을 드높이지 못하며 마침내 질병만 키우셨습니다.
“크게 근심됨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마침내 천화하시자, 도속(道俗)이 모두 경악하였습니다. 공회(孔懷)의 지극함을 생각하면 천륜(天倫)도 한탄할 만하니, 그 정(情)이 영원히 가시어 거처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법사는 의미(義味)가 해박하시어 흑의(黑衣) 가운데 영수이셨으며, 식견과 풍도가 화락(和樂)하고 단아하여 당대의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셨습니다.
예전에 경사에서 성상(聖上)마저 눈을 내리깔고 접견하셨는데, 고을로 돌아가시자 두루 바르게 하며 예(禮)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강설로 이롭게 하심이 실로 넓고 많았는데, 사묘(寺廟)를 다스리시어 복업(福業)이 실제로 넓게 퍼졌습니다. 생각과 포부가 넓게 만물과 더불어 거리낌이 없었으니 더불어 사귀는 이마다 당대의 현자였습니다. 백의와 흑의가 그 아름다움에 귀의하였고 멀거나 가깝거나 존경하였으니, 어찌 다만 마음을 쉬게 하여 근심을 다하게 할 뿐이겠습니까? 실로 인륜의 보배를 잃었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에 탄식만 앞서나,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수고롭게도 편지와 여타의 물건을 남기셨는데, 이를 대할 적마다 목메임만 더합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으시고, 또 포기실(鮑記室)에게 지서(誌序)를 지으라 하셨으나, 포군마저도 다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기에 내가 포군을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일과 행실 및 휘유(徽猷)를 말해 주고 반드시 사라지지 않는 일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돌에 기록하여 올리고 공장(工匠)을 불러 이를 다듬게 하였습니다. 돌에 새기는 것이 정성껏 하여 오래지 않아 성취되었으니, 말이 길수록 처량해지고 붓을 잡음에 비탄만 쌓입니다.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033_0549_b_06L生滅無常賢弟震法師奄同力士生道識長往法言永絕惋怛抽摧能已己年事未高德業方播疾恙甫謂無過憂遂至遷化道俗驚愕孔懷之切天倫至慟永往之情不可居處奈何奈何法師義味該洽領䄂黑衣識度愷悌籍甚當世昔在京師聖上眄接自還鄕國歷政禮重且講說利益旣實弘多經始寺廟實廣福衿抱豁然與物無迕所與遊款皆是時賢白黑歸美近遠欽敬豈止息心殄悴實亦人倫喪寶追懷歎愴可弭歇幷辱遺書及別物對增哽欷殿下自爲作銘又教鮑記室爲誌序恐鮑想悉未能究盡己得面爲鮑說諸事行及徽猷計必勒不朽事如今白誌石 爲廌幷呼師修之鐫刻亦不久可就言增泫然投筆悽懣之遴頓首頓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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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조승정경법사망서(弔僧正京法師亡書:승 정경 법사가 돌아가심을 조문하는 글) 유지린(劉之遴)
033_0549_c_02L弔僧正京法師亡書同上作
033_0550_a_02L8월 20일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마침내 법계(法界)가 텅 비고 산의 나무마저 쓰러져 버렸습니다. 존사 대정(大正)께서 신명을 정토(淨土)로 옮기시자 범부(凡夫)가 천박하여 슬픔과 기쁨에 막혀 이 부음을 받고 오내(五內)가 끊어지며 슬픔이 복받치기에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영원히 가심을 추모하여 애욕(愛欲)의 얽힘을 끊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마음을 이길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대정께서는 덕이 한 시절에 우뚝하시고 도(道)가 사부대중에 드리웠는데, 학도(學徒)를 훈도하여 상법(像法)을 이어 융성하게 하셨습니다. 법랍이 스님들 중에서 상수(上首)이시며, 행실이 인륜의 사표이셨으니, 공사(公私)간에 우러러 존경하며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우러러 존경하였습니다.
이처럼 오시(五時)45)와 구부(九部)46)로 널리 해설하신 것은 예전의 선배들에게 필적하시며 왕년의 현자들과 부류를 나란히 하였습니다. 비록 구마라집ㆍ승조(僧肇)ㆍ도융(道融)ㆍ도항(道恒)ㆍ지도림(支道林)ㆍ도안(道安)ㆍ도생(道生)ㆍ혜원(慧遠) 스님이라도, 어찌 마주하여 숭상하겠습니까?
돈오(頓悟)는 도생 스님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후대로 널리 펴서 미언(微言)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은 실로 스님에게 의지하였습니다. 다시 애어(愛語)로 이익케 하시며 4섭(攝)을 다하시어 멀리 이르게 하였는데, 단인(檀忍)과 지혜(智慧)로 6바라밀[六度]를 두루 밝게 갖추셨으니, 백의와 흑의가 귀의하고 함식(含識)마저 저 가피를 깨달았습니다. 나룻배를 어리석은 이들 사이로 띄우면서 실로 사탑(寺塔)으로 동량을 삼아 나날이 쓰면서도 깨닫지 못하다가 지극한 덕이 운수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도는 장구하고 세간은 짧다던데, 공을 드리우시자 그 몸이 떠나가십니까?
큰 바다를 비추어 수미(須彌)로 떨어지시고 저 높은 산을 비추어 밝은 해를 늘 드리우셨는데, 이제 가셨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법사를 어려서부터 북면(北面)47)하여 가슴에 새기어 나이 60이 넘어서까지 늘 좌우에서 모셨습니다. 재삼(在三)의 중요함이 하루아침에 기울어져 슬픔이 끝없으니,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제자가 벼슬 살며 모신 것이 50여 년인데, 보살펴 주심을 융성히 하지 못하면서 서로 법려(法侶)를 기약하였으나, 보리(菩提)가 지극하여 감히 자만하지 못하였습니다. 미래를 알기 어려운 데다 현재는 서로 떨어졌으니, 은혜로운 말씀이 평생토록 영원히 만고에 같이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처량해지니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고 울면서 애도만 하니, 삼가 흰 종이를 내어 놓고 붓을 놀려 보더라도 외람되이 목만 메입니다.
제자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033_0549_c_03L八月二十日之遴和南法界空虛木頹壞尊師大正遷神淨土凡夫淺嬰滯哀樂承此凶訃五內抽摧慟深至不能自已念追慕永往緜斷絕情在難居奈何奈何大正德冠一時道蔭四部訓導學徒紹隆像年居僧首行爲人師公私瞻敬邇宗仰若乃五時九部流通解說之前輩聯類往賢雖什豈能相尚頓悟雖出自生公宣後代微言不絕實賴夫子重以愛語利益窮四攝之弘致檀忍智慧六度之該明白黑歸依含識知庇航愚冥棟梁寺塔日用不知至德潛何道長而世短功被而身沒映乎大海永墜須彌照彼高山長收朗日往矣奈何當復奈何法師幼而北面生小服膺迄乎耆邁恒在左右在三之重一旦傾捐哀慟之至當何可處弟子紈綺遊接五十餘年未隆知顧相期法侶至乎菩提不敢生慢未來難知現在長隔眷言生平永同萬古尋思惋愴倍不自勝未由喭執申世哀歎謹裁白書投筆哽猥弟子劉之遴頓首和南

25) 동양금화산서지(東陽金華山栖志) 유효표(劉孝標)
033_0550_a_05L東陽金華山拪志劉孝摽
033_0550_b_02L무릇 새는 산 위에 살면서 나무 끝에 층층이 둥우리를 틀고, 물고기는 연못 밑에 잠겨서 모래 진흙 속에 굴을 파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대체로 성품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백벽(白璧)을 잊으면 수륜(垂綸)을 즐기게 되고, 옥정(玉鼎)을 짊어지면 경상(卿相)을 필요로 하게 된다.
행하고 숨는 것이 복잡하게 얽히며 드러나고 어두운 것이 어그러지는 것은 불꽃이 활활 타고 물이 흐르며 둥그런 것이 움직이고 네모난 것이 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묘당(廟堂)과 강해(江海), 봉호(蓬戶)와 금규(金閨)가 그렇게 된 이유를 그렇게 여기고 즐거운 바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어찌 털 가진 짐승과 깃털 가진 새의 상처가 그 사이에 낄 수 있겠는가?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함부로 처신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마음으로 운대(運臺)와 주옥(朱屋)을 겁내어 고개(高蓋)와 청조(靑組)를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안개와 이슬에 젖으며 일한(逸閑)하기만 더욱 원하였으니, 매번 청뢰(淸瀨)에 발 씻음을 생각하고 초구(椒丘)에 기대어 쉬고자 하였다. 자나깨나 마음에 그리면서 그 오는 때를 기렸었다.
지렁이는 오로지 흙만을 파고 백성은 하늘만 따르고자 한다. 이모(二毛)48)에 이르기까지 암굴[巖穴] 속에 살았으니, 그 머물던 곳이 바로 동양군(東陽郡)의 금화산(金華山)이다.
동양(東陽)은 실로 회계(會稽)의 서쪽이니, 이곳에는 대나무가 화살처럼 빽빽이 자라나 있고,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못은 넓게 이어졌다. 이 처럼 그 봉우리가 떼 지어 첩첩이 치솟은 것이 은하수에 닿았고 노을에까지 접해졌다. 교림(喬林)이 빽빽하여 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녹색이다. 굽이치는 계곡마다 흘러가는 물결은 그 바닥이 10인(仞)이나 되고, 조각조각의 구름이 합쳐져 천리에 가득 가랑비가 흩어진다.
참으로 뛰어난 구릉이어서 신명(神明)이 이 그윽한 집에 머무니, 이로써 제홍(帝鴻)49)은 여기에서 노닐며 솥을 만들어 우사(雨師)가 이에 기대어 연기(煙氣)를 탔었는데, 이 때문에 그 골짜기를 ‘적송(赤松)’이라 이름하였고, 산자락을 ‘진운(縉雲)’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에 강을 다스리던 가운데 니재(泥滓) 위에서 선비를 불러 모아 풍진(風塵)에 높이 솟구쳐 용이 깃들고 봉황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 것은 참으로 푸른 물결과 깨끗한 돌이 유인(幽人)을 모으게 한 데에서 말미암는다.
금화산은 예전의 마안산(馬鞍山)이다. 신령을 거두고 성인을 숨기면서 명선첩(名仙諜)을 열거하였는데, 좌원방(左元放)은 이 산에 대해 칭하여 “홍수와 오병(五兵)을 면할 수 있으며, 신단(神丹)의 구전(九轉)을 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금화의 정상에는 자암산(紫巖山)이 있는데, 산이 붉은빛을 띠기에 이렇게 부른다. 비스듬한 언덕 아래는 깊은 물가가 이어져 있다. 봉우리가 솟구쳐 가파른 산 위로 해와 달마저 이지러지는데, 산기슭부터 올라가 보면 점차로 높아질수록 험준해진다. 언덕 길 점점 좁아지고 험해져 물고기들이 연이어 뛰어 오른다.
길가에는 끊어진 골짜기가 있어 수문이 닫혀 포효하듯 한다. 나무 끝부터 살펴보면 초원(焦原)의 석읍(石邑)만 유독 위험하게 매달린 것이 아니다. 산의 중턱에 다다르면, 넓고 깊은 커다란 못이 있고 높은 언덕이 넉넉하게 자리한다. 내가 지은 초막도 실제로 여기에 자리하였다.
사는 곳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변을 에워싸고 상부(象郛)가 있고 둔덕 앞에는 평야가 고즈넉하다. 눈을 크게 하여 멀리 바라보면 동서쪽에 두 개의 시냇물이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솟구쳐 흐른다.
푸른 물결에 때 맞춰 비가 내리면 빗방울 떨어져 음악소리 이루고, 흰 파도에 물보라가 일면 물이 솟구쳐 세차게 흘러 물소리가 커진다. 물살이 흘러가며 도랑에서 마주쳐 엇갈리고, 기와에 물방울이 매달려 섬돌에서 물결 흐르며 장막을 두르니 두레박으로 퍼올릴 것이 없다. 이곳에서 세수하여 씻으니 물병과 대야가 필요 없다.
단풍나무와 옻나무, 산유자나무, 상수리나무, 가래나무와 잣나무, 계수나무, 녹나무가 심어져 있고, 형태를 나누고 빛깔을 달리하니, 실로 천 갈래 만 가지이다. 붉은 열매를 맺어 푸르스름한 과육을 싸안으니, 백체(白蔕)가 자라고 자줏빛 줄기가 올라왔다. 나무가 우거져 자라고 풀이 무성하게 돋아나 바람을 떨쳐 내며 퉁소 소리에 가지를 드리우며 처마의 창 쪽으로 잎이 펼쳐 있다.
울타리와 골짜기의 물가에는 꽃들이 열지어 모여 피고 푸른 봄에 이르러서는 시들어가고 부평초가 자라난다. 샘물이 흐르게 되면 도량(都梁)이 되어 향내를 머금었다가 향기를 뿜어낸다. 장락화(長樂花)는 서리를 맞으며 의남초(宜男草)에 이슬 맺히고 부용과 연꽃의 붉은빛은 물에 비치며 언덕의 차조기 옥색 잎은 바람 따라 흔들린다. 추녀 끝에 서서 바라보면 근심도 걱정도 잊는다.
구릉과 언덕에 여러 가지 약초가 무성하구나. 땅바닥에 뿌리를 세우고, 산자락에 가지를 뻗으니, 금 같은 소금은 벽옥보다 더 귀하고, 옥고(玉鼓)50)는 명주(明珠)보다도 귀하니, 참으로 본성을 길러 묵은 병을 없애고, 나이를 되돌려 얼굴에 화색을 띤다. 최문자(崔文子)의 황산(黃産)에 의지하지 않고51) 부국(負局)의 자환(紫丸)을 사용하지 않았다.52)
새는 드높이 맴돌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구슬 같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녹색 날개와 붉은 털, 흰 날개와 비취빛 새들은 조용히 날개짓 하고 조화로운 울음소리 귓가에 울려 퍼진다. 모두 동산과 연못에서 훈련시켜 길들이고 닭과 오리들을 여럿이 함께 먹는다.
짐새는 날마다 별을 엿보며 소리는 종소리와 북소리에 짝한다. 쟁쟁대는 노래기가 햇볕 나기만 기다리니, 그 앵앵대는 소리가 거문고를 방불케 한다. 긴 팔 원숭이[玄猨]는 옅은 안개 속에서 맑게 울어대고, 나는 원숭이[飛㹳]는 연기 속을 쏘다니며 흥얼댄다. 그 울어대는 소리가 맑아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한다. 참으로 그 소리가 피리를 넘어서고 생황(笙簧) 소리를 묻히게 한다.
집 동쪽에 초제사(招提寺)를 지었는데, 바위를 등지고 계곡에 임해 있고, 층층 건물은 빛을 끌어들인다. 장엄한 전각(殿閣)은 벼랑에 닿아 있어 허공 속에 넓고 높게 솟아 있다. 상서로움을 들여 환한 빛이 나게 하였다. 왼쪽으로 돌아보고 오른쪽으로 흘끗 보니 인자롭고 지혜로운 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석덕(碩德)과 명승(名僧)이 석장을 떨치며 구름같이 모이셨다.
7각지(覺支)로 마음 다스려 5진(塵)을 없애니, 계(戒)의 향기 성하게 피어 올라 정수(定水)에서 몸을 씻는다. 밤에 화로에 불을 지피고 새벽에 법고(法鼓) 소리 울려 퍼진다.
나는 신발을 벗어들고 옷을 잡아매고 허리 굽혀 예배드리며, 철인(哲人)에게 도를 묻고서 지극한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매번 들으니 이승의 강물 어지럽고 피안(彼岸)의 기슭은 영원히 고요하다. 즐거운 모습으로 춘대(春臺)에 올라 우주를 벗어나는 듯하다. 좋고도 즐거우니 어찌 다만 말로만 하겠는가?
절의 동남쪽으로 도관(道觀)이 있는데, 벼랑 옆에 높이 솟아 있어 아래로 비구름을 바라본다. 누각과 정자에 난초 둘러 있고 대나무 숲에 그림자 비추며 날아갈 듯한 도관과 줄지어 선 추녀는 안개 속에 옥처럼 환하다. 낮에는 곡식을 먹지 않는 백성53)을 머무르게 하고 해마다 신선의 객을 오게 하였다. 성수(星髓)를 먹고 흘러가는 노을을 마시며 장차 운의(雲衣)와 예상(霓裳)을 차려 입고서 용을 타고 학을 부렸다.
도관 아래에 석정(石井)이 있어서 물이 솟아 흐르는데, 마치 사람이 만든 것같이 새겨지고 다듬어졌다. 솟구쳐 새어나와 거세게 흘러 그 소리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듯 하니 눈이 놀라고 혼이 놀라는 듯하였다.
절과 도관 앞뜰에는 모두 키 큰 대나무들을 심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대나무들이 언덕과 구릉을 뒤덮었다. 대숲 바깥으로는 기름진 밭이 있는데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고 산속의 샘물이 이를 비옥케 하여 울창하고 기름지다. 정백(鄭白)54)의 물길을 트고 막아도 이와 같지는 않으니, 붉은 곡식이 넘쳐나 오리와 기러기들도 배불리 먹는다. 봄철의 자라는 벽계(碧鷄)55)에게 맛있는 물건이고, 겨울의 버섯은 탈구새에게 진귀한 먹거리가 된다.
비단 두건은 언덕에서 취하고, 짧은 베옷은 동산 가운데서 얻는다. 물풀은 연못과 강가 옆에 자라나고 풀은 들판과 습지를 덮으니 양육하여 넉넉히 하는 밑천이 되고 삶의 쓰임이 된다. 울타리에 넉넉히 채우고 산봉우리를 가득 채우지 않음이 없다.
연초와 연말에 농사일 뜸한 때에 막걸리를 막 거르고 맑은 술이 비로소 익으면 농가의 늙은이들 병을 들고 함께 이르러 가시나무 수풀 아래에서 서성거리며 술잔을 늘어놓고 주고받는다. 술에 취하여 귀까지 붉어지면 춤추며 떠들썩하게 노닐고 즐겁게 곳집에 대해 논하며 심고 거두는 것을 이야기한다.
웃으며 노래하고 술잔 들어 서로 절하니 인생이 즐겁다. 이 기쁨을 누가 헐뜯을 것인가? 누에 쳐서 옷 입고, 밭 갈아 밥 먹으며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느즈막하게 먹는 밥이 고기처럼 맛있고 일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세속에 구하는 것 없고 만물에 꺼림이 없다. 영예와 욕됨을 따지지 않고 칭찬과 허물도 모른 채 넓디넓은 천지간에 마음속에 전전긍긍하는 경계가 없으니, 어찌 혜생(嵆生)56)이 형을 받게 되고 양자(楊子)57)가 고각에서 떨어진 것과 더불어 그 우열을 견주겠는가?
033_0550_a_06L夫鳥居山上層巢木末魚潛淵下穴埿沙豈好異哉蓋性其然也故有忽白璧而樂垂綸負玉鼎而要卿相行藏紛糾顯晦踳駮無異火炎水流圓動方息斯則廟堂之與江海蓬戶之與金閨竝然其所然悅其所悅足毛衣瘡痏在其閒哉予生自原野善畏難狎心駭雲臺朱屋望絕高蓋靑組且霑濡霧露彌願閑逸每思濯淸瀨息椒丘寤寐永懷其來尚矣蚓專噬壤民欲天從爰洎二毛得居巖穴#所居東陽郡金華山東陽實會稽西是生竹箭山川秀麗皐澤坱鬱其群峯疊起則接漢連霞喬林布濩則春靑冬綠迴溪泱流則十仞洞底膚寸雲合必千里雨散信卓犖爽塏神居奧宅是以帝鴻遊斯鑄鼎雨師寄此乘煙故㵎勒赤松之名山貽縉雲之號近代江治中奮迅埿滓王徵高拔風塵龍盤鳳咸萃茲地由碧湍素石可致幽人者哉金華山古馬鞍山也蘊靈藏聖列名仙諜元放稱此山云可免洪水五兵可合神丹九轉金華之首有紫巖山山色紅紫因以爲稱靡迤坡陁下屬深渚巑岏隱嶙上虧日月登自山麓漸高漸路迥隘險魚貫而昇路側有絕㵎閜哮豁俯窺木杪焦原石邑匪獨危至山將半便有廣澤大川皐陸予之葺宇實在斯焉所居三面迴山周遶有象郛郭前則平野蕭條目極通望東西帶二㵎四時飛流泉瀾微霔滴瀝生響白波跳沫汹涌成漕瀆引流交渠綺錯懸溜瀉於軒激湍迴於階砌供帳無綆汲盥漱息甁匜楓櫨椅櫪之樹梓柏桂樟之分形異色千族萬種結朱實包綠杌白蔕抽紫莖橚樉苯䔿捎風鳴籟垂條櫩戶布葉房櫳中谷㵎濱花蕊攢列至於靑春受謝萍生泉動則有都梁含馥櫰香送芬長樂負霜宜男贙露芙蕖紅華照水皐蘇縹葉從風馮軒永眺蠲憂忘疾丘阿陵曲衆藥灌叢地髓抗莖山筋抽節金鹽重於素璧五豉貴於明珠可以養性銷痾還年駐色不藉崔文黃散勿用負局紫丸翾翾翔鳥風胎雨鷇綠翼紅毛素羽翠鬣肅肅切羽閞閞好音馴狎園池旅食鷄鶩若迺䲰日伺辰響類鍾鼓鳴蚿候曙聲象琴瑟玄猿薄霧淸囀飛㹳乘煙永吟嘈囋䬟喨悅心娛耳諒所以跨躡管籥韜軼笙簧宅東起招提寺背巖面壑層軒引景宇臨空博敞閑虛納祥生白左睠右仁智所居故碩德名僧振錫雲萃調心七覺詆訶五塵郁烈戒香浴滋定水至於熏鑪夜爇法鼓旦聞予跕屣摳衣躬行頂禮詢道哲人飮和至教每聞此河紛梗彼岸永寂熙熙然若登春臺而出宇宙唯善是樂豈伊徒寺東南有道觀亭亭崖側下望雲蕙樓蘭榭隱曖林篁飛觀烈錢瓏煙霧日止卻粒之氓歲次祈仙之餌星髓吸流霞將乃雲衣霓裳乘龍馭鶴觀下有石井聳跱中㵎彫硺刻削頗類人工躍流潨瀉渀涌泱咽電擊雷吼駭目驚魂寺觀前皆植脩竹檀欒蕭飋被陵緣阜竹外則有良田區畛通接山泉膏液鬱潤肥腴鄭白決漳莫之能擬致紅粟流溢鳧鴈充厭鼈旨檀碧鷄冬蕈味珍霜鵽縠巾取於丘嶺短褐出自中園莞蔣逼側池菅蒯騈塡原隰養給之資生生所無不阜實蕃籬充牣崖巘歲始年季農隙時閑濁醪初醞淸觴新熟則田家有野老提壺共至班荊林下罇置爵酒酣耳熱屢儛讙呶晟論箱庾高談穀稼嗢噱謳歌擧杯相挹人生樂耳此歡豈訾若夫蠶而衣耕而食日出而作日入而息晩食當肉無事爲貴不求於世不忤於物莫辨榮辱匪知毀譽浩蕩天地之閒心無怵惕之警豈與嵆生齒劍揚子墜閣較其優劣者哉

26) 여서복야영군술역승서(與徐僕射領軍述役僧書:서복야 영군이 역승을 서술한 것에 대해 보내는 글) 진(陳) 석진관(釋眞觀)
033_0551_a_21L與徐僕射領軍述役僧書陳釋眞觀
033_0551_b_02L천정(泉亭) 광현사(光顯寺)의 석진관이 영군(領軍) 단월(檀越)에게 서한을 올립니다.
가만히 듣자오니 4의(依)의 개사(開士)가 장차 쇠퇴하려는 정법을 바로 잡고 10지(地)의 고인(高人)이 이미 끊어져 가는 현문(玄文)을 지키며, 기사굴산(耆闍崛山)의 자취를 남겨 연좌(宴坐)의 풍화에 이지러짐이 없었고, 기수원(祇樹園)의 남은 싹으로 하여금 경행(經行)의 도를 얻게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황화(皇華)께서 준엄한 법칙을 선포하시어 승니(僧尼)의 부류 가운데 명적(名籍)에 올라가 있지 않은 자는 이 같은 법계(法戒)를 버리게 하여 일반 백성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저 가람(伽藍)을 버리고 이한(里閈)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미 넓은 천하에 왕의 신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애써서 몸을 수그려 공손히 받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마음에서 문득 이에 대해 의혹이 생겨납니다.
불법(佛法)이 일어난 지 천여 년이 지나 이 땅에 전해져서 수백 년이 되어 여러 스님들이 생겼으나 어찌 많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시조(市朝)가 빠르게 바뀌고 풍화가 갑자기 옮겨지더라도 지혜의 횃불은 늘 밝았으며, 계율의 향기는 여전히 향기로웠습니다. 그 복되고 이로움은 말로는 다하기 어려우니, 신령한 상서로움을 나타낸 것은 여러 사전(史傳)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도(浮圖)와 화상(和上)이 업중(鄴中)에서 이채(異彩)를 띠었고, 고좌(高座)의 법사가 공락(鞏雒)에서 향기를 전하였는데,58) 혹 곤명(昆明)의 연못 안에서 겁소(劫燒)의 남은 재를 가려내기도 하고, 장사사(長沙寺)에서는 쇄신(碎身)의 유음(遺蔭)을 감득하였으며, 단도개(單道開)가 경계에 들어가자 선인의 별이 바로 떴습니다. 법성(法成)이 세상을 떠나자 감마(紺馬)의 서응이 나타났습니다. 청목(靑目)ㆍ적자(赤髭)ㆍ황모(黃眸)ㆍ백족(白足)과 연이은 눈썹마다 칭찬을 드리우니 귀를 기울여 그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정수(定水)는 깊고도 맑으며 의봉(義峰)은 산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왕성한 도망(道望)은 가섭의 높은 자취에 견주어지고, 엄숙한 위의는 알비(頞鞞)59)의 깨끗한 행실과 함께하였습니다.
최근 들어 나날이 의리나 인정이 경박해지고 정법의 홍기(洪基)는 미처 다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그 본뜻을 거슬리고 저와 같은 전심(前心)을 빼앗으니, 고전(高殿)을 우러르면 매우 마음이 아프고, 구방(舊房)을 떠나면 슬프지 않음이 없습니다. 법좌는 의연하나 다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선문(禪門)에 연연하여 다시 돌아갈 날이 없습니다. 갈림길조차 없어지고 이별의 슬픔만이 남았습니다. 비록 하량(河梁:이별)을 달리하더라도 이별을 말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만약 명적(名籍)을 잇지 않는 것이 큰 죄가 된다면, 이같은 허물을 끌어내는 일도 슬퍼할 만합니다.
무릇 세속을 벗어난 사람은 모름지기 수도에 힘쓰게 하고자 그 방외(方外)의 예법(禮法)을 허용하여 역내(域內)의 절도(節度)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혹 명적에 올려 있지 않으면서 부령(簿領)에 관련됨이 없는 자는 모두 방내(方內)를 다니며 법을 들으며, 처소에 따라 편안히 하면서 찰간(刹竿)에 기대어 거처를 삼고, 정오가 되어서는 밥을 먹습니다. 혹은 나무 밑에서 두타(頭陀)하거나 혹은 바위자락을 난야(蘭若)로 삼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어떻게 계속 그냥 놔두겠습니까?
만약 훌륭한 업이 온전하지 못하여 청금(淸禁)의 훼손이 많다면, 마땅히 도를 기려야만 이 같은 일이 지극해질 것입니다.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는 가리기 어렵고, 성인과 범부는 서로 범람하는 것이, 비유하면 암라(菴羅)의 열매가 설익고 잘 익은 것을 가리기 힘들고, 설산의 약이 참되고 거짓됨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문득 곤봉(崑峰) 위에서 옥과 돌을 함께 태우고, 대택(大澤) 가운데에서 용과 뱀을 같이 죽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슬픕니다.
또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하며 치의(緇衣)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이미 복사(僕使)도 없고 처자식과도 영원히 관계를 끊었고, 혹 늙고 병든 나이로 혼자 몸의 가난한 선비에게 모두 자제(子弟)에 의지하여 다시 봉양하고 가정을 영위하라는 것은 마치 비가 쏟아져 하루아침에 도랑에 빠져 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높은 산의 골짜기로 나아가 투신하거나 긴 끈으로 목매어 죽기도 하니, 그 명(命)에 비록 멱라(汨羅)의 고통이 되풀이되더라도 이것에 비하면 도리어 가벼울 것입니다. 황곡(荒谷)의 비탄도 이에 비하면 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재(奇才)와 절학(絶學)은 후생에 의탁하는 것이고, 청강(聽講)과 송경(誦經)은 모두 만수(晩秀)로 충당하는 것입니다. 수타(須陀)가 계(戒)를 얻는 것은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고, 신자(身子)60)가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 차별이 기로(耆老)와 다름없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가 만약 아울러 치의를 바꿔 입는다면, 아마도 이 같은 법문이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범륜이 끊어지며 정사(精舍)마저 텅 빌 것입니다. 만약 팔진(八陣)을 쉬지 않고 사교(四郊)에 성이 쌓이라도, 앞서 가는 이에 의탁하거나 뒤처져서 따를 것입니다.
내가 이와 같은 사람은 참으로 쓸모가 없다고 말하니, 만약 발거(拔距)61)와 돌을 던지는 능력과 쇠를 없애고 갈고리를 펴는 힘이 있다면 군의 막부를 쫓아가 오랫동안 전업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치의를 입는 것을 숭상하여 사우(寺宇)에 머무르니, 용맹을 익히는 마음이 옅어지고 도를 즐기는 마음만 깊어졌습니다.
만약 위개(衛玠)62)의 수척함이 아니면 맹창(孟昶)63)의 나약함과 같을 터이니, 이미 말을 부리고 화살을 당기는 데 익숙하지 못하며, 행진하더라도 수고롭기만 할 것입니다. 비록 다시 그 몸에 갑주를 둘렀어도 법의(法衣)라고 생각할 것이며, 손에 창을 쥐어줘도 석장(錫杖)이 아닐까 의심할 것입니다. 반드시 멀리서 전쟁의 북소리를 듣게 되면 안색이 변하고 마음이 당황해질 것이며, 멀리서 군의 깃발을 쳐다보게 되면 혼비백산할 것인데, 장차 도성을 지키는 위엄에 저촉되어 이사(二師)의 용맹함에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왕의 수입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국가의 저축에 이로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널리 그 부렴(賦斂)을 거두려고 한다면 단지 유랑(流浪)하는 무리는 흩어져 달아날 것이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散誕] 부류는 끝까지 가난할 것입니다. 향리에는 밭과 집도 없고 경사(京師)에도 또한 주인이 없을 것입니다. 신발을 거두어 들이게 되면 두 발꿈치가 다 닳아 있고 옷깃을 거두면 양쪽 모두 드러나니 동생(董生)의 백결(百結)을 보고서도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며, 표주박 하나의 안자(顔子)의 밥을 보고서도 너무 많아 배부르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썩은 흙을 구하여 약으로 삼으니, 어찌 자환(紫丸)64)을 알겠습니까? 사람들이 버린 헌 옷[糞掃衣]를 입으니 어찌 황견(黃絹)의 예를 만나겠습니까?
회벽(懷璧)65)의 허물도 따르지 못하니 진실로 면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 도에 있게 하자면 차라리 분위(分衛)하며 스스로를 충당하게 해야지, 바로 백성으로 되돌리면 식량조차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조(皇朝:陳 武帝)가 통치하여 역수(曆數)를 다스리고 제성(齊聖)이 흠명(欽明)하여 헌원(軒轅)과 복희(伏羲)의 자취를 이어가고 염제(炎帝)와 호천(昊天)과 어깨를 마주하였습니다. 명경을 거머쥔 풍화는 더욱 원대해지고 옷을 늘어뜨리는[垂衣]66) 교화는 점점 깊어지며 아울러 삼보의 동량이 되어 10선(善)을 널리 폈습니다.
예전에 한나라 명제가 영감하여 금인(金人)을 꿈꾸었고, 진(晋)나라 무제(武帝)가 다시 수리하여 옥상(玉像)을 모셨습니다. 지금 쓰는 것도 옛것을 본떴으니, 저와 같이 한다면 부끄러운 바가 있을 것입니다. 혹 경법(經法)을 깊이 애호한 것은 선예대왕(仙預大王)67)과 같이 하고, 보탑을 이룩한 것이 무우국주(無優國主:아육왕)와 비슷합니다. 미천한 것을 밝혀 드러내어 소보(巢父)68)의 청허함을 믿게 하며 불러 모아 사냥하고 고기잡아 엄생(嚴生)69)의 고상함을 허락하였습니다.
만약 법의(法衣)를 벗고 도업(道業)을 따르지 않는다면, 혹은 항상 저사(邸肆)에서 지내거나 전원(田園)에 늘 거처하더라도 백성의 조례에 따라 부려야 할 것입니다. 그 선정과 풍송(風誦)을 잘 이해하면서 소찬을 먹으며 청빈하거나, 혹 널리 창도하여 공이 있어서 거룩한 말씀을 기록할 수 있거나, 혹 탑묘(塔廟)를 수선하여 경서를 이룩하면서 구제에 마음을 두고 학업에 힘쓰는 이, 내지는 늙고 파리한 무리와 가난하고 병든 부류에 이르기까지 다행히 호적에 편입되더라도 그 쓰일 바가 없는 무리들은 아울러 사찰에 머물게 하여 승적(僧籍)에 올린다면 반드시 십성(十城)의 보배를 기리더라도 혹 형산을 벗어나서 백보 이내에 향기나는 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마다 부랑한 스님들을 단절시키고 대중에 술 먹는 식객이 없게 하면서 육시(六時)마다 기도하게 하여 늘 국계(國界)로써 마음을 삼고 3업(業)을 올바로 닦게 한다면, 반드시 군왕(君王)의 근본에 쓰임이 있을 터이니, 어찌 유계(幽界)와 명계(明界)가 기뻐 날뛰고 사람과 귀신이 함께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명계(冥界)의 힘으로 이를 보살피며 선연(善緣)을 장려하고 도와야 하니, 이런 연후에 이의(二儀)가 편안해지고 육기(六氣)가 조화로워질 것이며, 달리는 말의 안장을 내리고, 군기는 그 깃대를 접게 될 것입니다. 변지의 팔황(八荒)이 부용하여 단수(丹水)의 군사와 마주함이 없을 터이고, 금옥과 비단으로 내조(來朝)하여 도리어 계산(稽山)의 모임70)을 생각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참으로 기쁩니다.
다시 변방의 염려가 없어지고 군자(軍資)가 필요 없어져서 비용조차 가벼워질 것입니다. 삼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
삼가 오직 영군(領軍) 단월(檀越)은 밖으로는 분전(墳典)을 탐색하고, 안으로는 경론을 깊이 연구하여 재주가 유악(帷幄)보다 높고 의지함은 염매(鹽梅)보다 중합니다. 반드시 뜻을 추요(蒭蕘)에게 내려서 마음을 정법에 두고 작은 것도 자세히 헤아리고 초라한 것도 잘 살피기 바랍니다. 이에 그 한 오라기라도 거두어 준다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자세하게 그 논에 힘써서 난초와 쑥에 함께 호미질을 하거나 향기로운 풀과 냄새나는 풀을 같이 자르지 말고 선인(仙人)의 모범을 얻어서 법륜(法輪)을 다시 굴리고, 장자가 원림(園林) 가운데 다시 자리를 깔게 된다면, 광유(匡維)의 덕이 항산(恒山)과 대산(岱山)처럼 높아질 것이며, 바로 옹호하는 공덕이 창명(滄溟)처럼 넓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번잡함을 더하니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033_0551_a_22L泉亭光顯寺釋眞觀致書領軍檀越竊聞四依開士匡正法於將頹十地高人秉玄文於已絕能使崛山遺迹無虧宴坐之風祇樹餘苗得肆經行之道伏見今者皇華奉宣嚴憲凡是僧尼之類不書名籍之者竝令捐茲法戒就此黎民去彼伽藍歸其里閈旣普天之下莫匪王臣正當僶俛恭鞠躬祗奉但愚情所謂竊或疑焉自佛法肇興千有餘載流轉此地數百年閒濟濟僧徒一何爲盛雖復市朝亟改風化頻移慧炬常明戒香恒其爲福利難可勝言所現靈祥聞諸史傳至如浮圖和上曜彩鄴中座法師流芳鞏雒或復昆明池內劫燒之餘灰長沙寺裏感碎身之遺道開入境仙人之星乃出法成去世紺馬之瑞爰浮乃有靑目赤髭眸白足連眉表稱大耳傳名莫不定水淵澄義峯山豎汪汪道望類迦葉之高蹤肅肅威儀似頞鞞之淸行年訛替乃日澆漓而正法洪基猶應未殄忽復違其本志奪彼前心莫不仰高殿而酸傷辭舊房而悽楚依依法座重反何期戀戀禪門再還無日乃非歧路而有分袂之悲雖異河梁遂結言離之痛若以不繼名籍爲其深罪延茲咎累亦可哀矜夫出俗之人務應脩道許其方外之禮不拘域中之節或有不貫名籍無閞簿領皆遊方採聽隨處利安望剎爲居中告飯或頭陁林下或蘭若巖阿此之流寧容繼屬若勝業不全淸禁多毀宜應休道此事誠然而持犯難聖凡相濫譬菴羅之菓生熟難分雪山之藥眞僞難辯忽使崑峯之上玉石同焚大澤之中龍蛇等斃何期惜也吁可傷哉又其割愛辭親披緇翦髮旣無僕使永絕妻孥或老病之單貧之士皆憑子弟還相養衛其一朝雨散便溘死溝渠遂有赴浚壑而投身縊長繩而殞命雖復汨羅之痛疋此猶輕荒谷之悲方斯未重且復奇才絕學竝寄後生聽講誦經咸資晩秀所以須陁得戒猶是幼童身子揚名差非耆老如斯之類若竝翻緇恐此法門便無紹繼梵輪絕矣精舍空焉若八陣未休四郊多壘驅所寄後殿斯憑愚謂此人殆成無若必有拔拒投石之能索鐵申鉤之力則竝從軍募久預長驅儻復尚服緇衣猶居寺宇則是習勇心薄道情深若非衛玠之淸羸便同孟昶之浮怯旣不便弓馬徒勞行陣雖復身披甲冑還想法衣手執干戈猶疑錫杖必當遙聞戰鼓色變心驚遠望軍麾魂飛氣懾將恐有沮都護之威無益二師之勇若謂不輸王課靡助國儲所以普使收其賦斂但浮遊之屬萍逬蓬飛散誕之流且貧終寠鄕里旣無田宅京師又闕主人納屨則兩踵倂穿斂衿則雙肘皆現觀董生之百結尚覺輕華見顏子之一簞更疑豐飽求朽壤以爲藥寧識紫丸服糞掃而爲衣豈逢黃絹貨財之禮此則無從懷璧之愆信哉應免若令其在猶可分衛自資遂使還民便是餱糧莫寄伏惟皇朝御曆齊聖欽明踵軒羲比肩炎昊握鏡之風彌遠衣之化方深兼復梁棟三寶敷弘十昔漢明靈感止夢金人晉武覆修纔招玉像用今方古彼有慚焉或深經是護等仙預大王寶塔斯成類無憂國主明揚仄陋信巢父之淸虛聘漁畋許嚴生之高尚愚謂絓預今者免首僧尼若已離法衣無遵道業或常居邸肆恒處田園竝依民例從策使如其禪誦知解蔬素淸虛宣唱有功梵聲可錄或繕修塔廟造經書救濟在心聽習爲務乃至羸老之屬貧病之流幸於編戶無所堪竝許停寺仍上僧籍必望十城之或出荊山百步之中時逢芳草是寺斷流俗之僧衆無餔酒之客時翹請常以國界爲心三業精脩用君王爲本豈不幽明踊躍人鬼忻冥力護持善緣扶助然後二儀交泰六氣調和征馬息鞍軍旗卷旆荒入附無待丹水之師玉帛來朝想稽山之集何期樂矣實可忻哉復疆埸不虞軍資有闕薄須費計聽徵求仰唯領軍檀越外則探賾典內則鉤深經論才高帷幄寄重鹽必願降意芻蕘留心正法微惠硏薄垂觀覽如其一毫可採深悕爲矜論無使蘭艾同鋤薰蕕俱氣得仙人菀裏更轉法輪長者園中鋪講席則匡維之德比恒岱而齊高擁護之功似滄溟而共廣撗此忓煩彌增悚惕

27) 간인산심법사파도서(諫仁山深法師罷道書:인산의 심법사가 도를 행하지 않음을 간하는 글) 진(陳) 서릉(徐陵)
033_0552_c_07L諌仁山深法師罷道書 陳徐陵
033_0553_a_02L가만히 듣자오니, 출가(出家)의 한가로움은 허공과 같은데, 세속의 새장과 같은 울타리는 옥살이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경전마다 명문(明文)이 있을 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다 같이 목도하는 것입니다.
언뜻 듣건대 법사께서 저 배를 뒤집어 운항하시되, 나아가 치의(緇衣)의 임무를 되돌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앞의 뛰어난 재지(才智)로 장구한 깊은 계책은 아닌 듯 싶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면, 고(苦)에서 낙(樂)으로 들어가면 낙 가운데의 낙을 알지 모르고, 낙에서 고로 들어가면 바로 고 가운데의 고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평소에 법사와 오래 사귄 것은 아니나, 서로 알고 지낸 이래로 다시 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약은 반드시 맛이 좋은 것은 아니고, 충간(忠諫)은 결단코 귀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 편벽함을 보게 되니 말하지 않고는 참으려고 해도 참을 도리가 없습니다. 30년 동안 막대한 업을 이룩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이미 이룬 공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애석하게 여길 것입니다. 정중하게 그 높은 마음을 헤아리더라도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유악(帷幄)71)의 계책이 아닌 것으로 유후(劉侯)를 모아서 그 형체를 와룡(臥龍:諸葛孔明)에 짝하더라도, 멀리 갈씨(葛氏:諸葛孔明)를 구하여야 하는데, 황석(黃石)72)의 병법(兵法)을 어찌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삼고초려하여도 두 번 다시 만날 길 없으며, 그 작위가 오등(五等)에 봉해진 이를 보고자 하여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중합(中閤) 밖의 문에서는 붉어지기는 어렵지만 희게 되는 것은 쉽습니다. 피리를 불며 봉황의 소리를 연주하는 것을 때론 듣지 못하고 무녀(舞女)와 가희(歌姬)는 헛되이 노력하지만 유희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구하는 자는 소털과 같이 많지만 이것을 얻는 자는 소뿔처럼 적습니다. 이 밖에 다시 무엇을 들여다보겠습니까?
법사가 지금 만약 퇴전하시면 반드시 마음에 들 만한 한 가지도 없을 터이니, 눈앞의 열 가지 큰 이익을 잃어버리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세밀한 흐름을 간략하게 하지 않기에 입도(入道)하면 존귀해지고 귀의하면 귀해지는 것이니, 위로는 천자(天子)에게도 조배(朝拜)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諸侯)에게도 사양하지 않으며, 홀로 세간을 노닐며 무위자재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첫 번째입니다.
그 몸에 손수 애쓰는 수고로움이 없으면서도 입으로 향적(香積)의 밥을 먹으며, 마음으로는 처첩(妻妾)에 대한 의무를 염려하지 않으면서 몸에는 베옷[芻摩]을 걸치면서도 아침마다 밭고랑을 밟을 근심이 없으며, 저녁에는 천리의 괴로움이 없는지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유유자적하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두 번째입니다.
몸소 맡아야 할 중책이 없고, 방역(方域)에 거처하니, 하얀 벽과 붉은 문은 가지런하게 공경을 다하며, 밤에는 거문고를 타고 낮에는 가야금을 울리니, 이는 스스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아침에는 붓을 들고 저녁에는 시를 읊으며 그 정(情)을 논하며 발을 구릅니다. 이것이 그 이로움의 세 번째입니다.
설사 가시가 왕도(王道)에 생겨나고 긴 냇가에 다리가 놓이더라도 항리(巷吏)와 문아(門兒)가 어찌 이로 인하여 우러러 부르겠습니까? 한 필의 비단도 바치지 않고 1두(斗)의 쌀도 공창(公倉)에 들이지 않으니, 고부(庫部)의 창사(倉司)가 어찌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네 번째입니다.
문 앞이 시끄럽더라도 나는 도리어 편안히 잠을 자고, 골목 안이 떠들썩하더라도 나는 놀라는 기색이 없고, 집안은 크고 작은 조세(調稅)를 그쳐 문에서는 젊은 장정이 부역을 멈추고서 들어가고 나아감을 마음대로 하고 가고 옴을 자유로이 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다섯 번째입니다.
출가하여 올바른 스님이 되지 못하더라도 세속의 선비들보다도 훌륭하니, 설사 살육하려는 마음이 있더라도 손으로는 목숨을 끊는 죄를 짓지 않고, 남몰래 정을 통하더라도 결국에는 초조하여 애를 태우니 세속을 바로잡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 번뇌가 만 배나 되니 무엇이라 하여도 백의(白衣)보다 훌륭합니다. 한번 애욕의 바다로 들어가면 영원히 가라앉아 나오지 못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여섯 번째입니다.
종소리를 듣고 예배를 드리며 향기를 맡고 마음을 이루어 아침마다 존의(尊儀)를 뵈면서 저녁에는 보축(寶軸)을 펼치니 찰나의 착함이 이에 따라 생겨납니다. 물방울의 공이 미약하더라도 점차로 큰 그릇을 채워가니, 가히 그 인연의 과보를 알지 못합니다. 선과 악이 분명하니 이로써 말하더라도 그 이로움을 다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달상(達相)의 백의라도 애진(埃塵)의 임무가 남아 있고, 멀리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가르침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형체가 떠나면 마음은 남지만 몸이 옮겨가면 뜻도 따라가게 됩니다. 유(有)에 막힌 이는 이 같은 것을 얻게 되고, 빈궁하여 괴로운 이는 영원히 말미암는 것이 없습니다. 가까이 눈앞에 있어 말하지 않아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일곱 번째입니다.
산간의 나무 밑에서 스스로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씻는 것이 실로 드물지만 이와 같은 부류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이는 만나기 어렵고 일심(一心)의 사람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법사가 배우지 않은 것이 없어서 총승(聰勝)의 인(因)을 번갈아 익혔는데, 하루 아침에 아득한 이치로 마음을 돌렸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여덟 번째입니다.
직성(織成)의 부질(部帙)을 열고 과거의 인(因)을 보며, 유리(琉璃)의 축권(竺卷)을 펼치고 미래의 과(果)를 징험하니, 인을 알고 업을 알아서 죄를 짓지 않으며, 복을 알고 보(報)를 아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나룻배의 노가 없으니 물에 빠지는 슬픔을 보게 되고, 아래로는 부낭(浮囊)을 잃어서 바로 몸이 가라앉는 화근이 있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아홉 번째입니다.
군품을 널리 구제하여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되니, 물이나 뭍이나 허공으로 다니는 것조차 모두 존귀하게 여겨서 말을 하면 도려(屠梨)73) 화상이라고 부르며, 편지를 쓰면 반드시 ‘치경(致敬) 또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라고 합니다. 원근이 칭송하며 귀한 이나 천한 이가 모두 우러릅니다.
법사가 지금 퇴전하시면 이 같은 일을 바로 징험하실 수 있습니다. 가사를 벗자마자 만나는 사람마다 너와 나라 부르며, 편단(偏袒)을 풀자마자 이름을 바로 부르게 되며, 평교(平交)하는 이는 옛일을 논하지 않고, 비천한 자조차도 사양하지 않으며 말을 가벼이 하여 호칭할 것입니다. 탑석(榻席)은 종래와 현격하게 다르며, 조금 자재(自在)함을 얻게 되면 바로 군(君)으로서 봉작(封爵)합니다. 만약 무릎 꿇고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르러도 인(因)이 없게 됩니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맞이하여도 법도에 합치되지 못하니, 이와 같이 애쓰는 것에 함께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열 번째입니다.
열 가지 일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같은 기회를 헛되이 놓치면 그 사이의 깊은 도를 어찌 모두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
어짊을 우러르는 이는 마음이 마경(魔境)에 머물러 마군에게 미혹되고, 뜻이 삿된 갈래에 붙어 삿됨을 받아 성품을 바꾸게 됩니다. 설사 그 눈썹이 가는 버들과 같더라도 어찌 마음에 담기에 넉넉하겠습니까? 뺨이 붉은 복숭아 같더라도 어찌 장구하겠습니까?
이부자리를 함께하고 베개를 나누어도 장신(長信)의 슬픔74)이 있고, 앉고 누우며 때를 잊으면 추호(秋胡)의 원한75)을 면하기 어려우니, 낙천(洛川)의 신녀(神女)도 일찍이 동아(東阿)를 미혹하지 않았는데,76) 세상의 아름다운 여인일지라도 어찌 그대의 일에 관계하겠습니까?
무릇 마음이란 얼굴과 같으니, 만약 그 남녀의 그리워하는 정[繾綣]을 논하자면 기개를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합니다. 한 번 얽매임을 만나면 밤을 새도록 일어남을 미워하게 됩니다. 법사가 반조(返照)에 형통하지 못하면서 어찌 꽃 파는 이치를 깨닫겠습니까? 다른 이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저 뜻을 알겠습니까? 참으로 계수나무를 큰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 슬프기만 하고 명주가 진흙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 애석하기만 합니다.
제자가 오늘날 뜻밖에 여쭤보는 것도 반드시 법사에게 조소를 받을 터인데, 세상의 백의가 무엇을 탓하고 무엇을 제한하겠습니까? 단지 한 사람이 도에서 물러나 편안하지 못하여 위태로우니, 이를 미루어 말하자면 진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비유하면 기와가 길에 가득하더라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으나 한 조각의 황금은 만 명의 사람도 가던 길을 멈추게 합니다.
바로 말하자면 법사에게는 도로 들어가는 공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염속(染俗)의 법도 더해지지 않았으니, 어찌 금을 적동(赤銅)으로 바꾸고 은을 연석(鉛錫)으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슬프고 참으로 애석하니 오히려 참을 수 있는 것과 참기 어려운 것을 잘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바라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리고 애써서 진로(塵勞)를 쉬고 바른 마음을 일으킬 것을 아는 것입니다. 행실과 뜻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고, 부박함에 세밀한 생각을 보태어 더욱 사유한다면, 앞서의 일을 후회하고 나중에 한탄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제자가 계산하는 것과 같다면 멀리는 10수 년 안에 측은함을 알게 되고, 가까이로는 서너 해 안에 헛되이 창도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만 가지 한탄과 만 가지 슬픔이 어찌 멀리 미치는 것을 알겠습니까?
스스로 늘 그르치고 스스로를 어긋나게 하여 한평생을 영원히 버리게 됩니다. 이로써 끊어진 가야금 줄은 이을 수 있으나 마음이 한 번 가면 머물기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혹 만약 불 속에서 꽃이 피면 이를 드물다고 말할 수 있으나, 미혹한 사람이 돌이킴을 안다면 도에서 벗어나도 멀리 가지 못합니다. 빨리 밀쳐 내고 급히 정로(正路)로 오른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법사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함이 아니나 어리석은 자에게 미혹되는 것은 아난(阿難)이 마군에게 희롱당한 것과 같습니다. 마치 삼보의 힘을 받들어 저와 같은 여러 흉악한 것을 제압하는 바와 같으니, 반야의 당기[幢]와 번기[幡]를 세운다면 천마(天魔)도 스스로 물러서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뜻이 합당하다면 세속의 속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높은 마음을 회통하지 못하더라도 멈추어 귀를 기울이기만 하여도 다행입니다.
033_0552_c_08L竊聞出家閑曠猶若虛空在俗籠樊比於牢獄非但經有明文亦自世閒共見瞥聞法師覆彼舟航趣返緇衣之務此爲目下之英奇非久長之深何以知然從苦入樂未知樂中之從樂入苦方知苦中之苦弟子素以法師雖無曩舊相知已來亦復不夫良藥必自無甘忠諌者決乎逆倚見其僻是以不忍不言且三十年中造莫大之業如何一旦捨已成之功孰爲可惜敬度高懷未解深意將非帷幄之策欲集留侯形類臥龍遠求葛氏黃石兵法寧可再逢三顧茅廬無由兩遇封爵五等唯見不逢中閤外門難朱易白鳴笳鳳管非有或聞儛女歌姬空勞反翫覓之者等若牛毛得之者譬猶牛角以此之外何所窺窬法師今若退轉未必有一稱心交失現前十種大利何者佛法不簡細流入者則尊歸依則貴上不朝天下不讓諸侯獨翫世閒無爲自在其利一也身無執作之勞口飡香積之飯心不妻妾之務身飾芻摩之衣朝無踐境之憂夕不千里之苦俯仰優遊寧不樂哉其利二也 躬無任重居必方城白壁朱門理然致敬琴晝瑟是自娛懷曉筆暮詩論情頓足其利三也 假使棘生王路橋化長溝巷吏門兒何因仰喚寸絹不輸官庫斗米不進公倉庫部倉司豈須求其利四也 門前擾擾我且安眠巷裏云云余無驚色家休小大之調門停强弱之丁入出隨心往還自在其利五也 出家無當之僧猶勝在俗之士假使心存殺戮手無斷命之密裏通情決勝酌然嬌俗如斯煩萬倍勝於白衣一入愛河永沈無其利六也 聽鍾聲而致敬尋香馥以生心朝睹尊儀暮披寶軸剎那之善逐此而生水渧微功漸盈大器未知因緣果報善惡皎然就此而言其利難陳矣假使達相白衣猶有埃塵之務縱令遙寄彈指遠近低頭去心留身移意往閡有者得如此苦者永無因近在目前不言可見利七也 山閒樹下故自難期枕石漱流實爲希有猶斯之類不可思議如此者難逢一心人希遇法師未能不學交習聰勝之因一旦退心於理邈矣其利八也 開織成之帙見過去之因摛琉璃之卷驗當來之果因識業不以爲愆知福知報何由作上無舟楫交見沒溺之悲下失浮則有沈身之患其利九也 曠濟群品爲天人之師水陸空行皆所尊言必闍梨和上書輒致敬和南近嗟詠貴賤顒仰法師今必退轉成可驗纔脫袈裟逢人輒稱汝我解偏袒姓名便亦可呼平交故自不下劣者亦恐不讓薄言稱已榻席懸異從來小得自在便以君爲題封若不屈膝斂眉自達無因俯仰承迎未閑合度如此專專何由可與其利十 略言十事空失此機其閒深道寧容具述仰度仁者心居魔境爲魔所迷意附邪途受邪易性假使眉如細柳何足閞懷頰似紅桃詎能長久同衾分枕猶有長信之悲坐臥忘時不免秋胡之怨洛川神女尚復不惑東阿世上班姬何閞君事夫心者面若論繾綣則共氣共心一過纏緜則連霄厭起法師未通返照安悟賣未得他心那知彼意嗚呼桂樹遂爲巨火所焚可惜明珠乃受淤埿埋弟子今日撗諮必爲法師所哂上白衣何訾何限且一人退道而不安危推此而言實成難解譬如瓦礫盈路人所不驚片子黃金萬夫息步正言法師入道之功已備染俗之法未加何異金博赤銅銀換鈆錫可悲可惜猶可優量能忍難忍方知其最願棄俗事務息塵勞正念相應行志兩全薄加詳慮更可思惟悔之在前無勞後恨如弟子筭遠卽十數年中決知惻愴近卽三五歲內空唱如何萬恨萬悲寧知遠及自誤自惜永棄一生乃知斷絃可續情去難留或若火裏生花可稱希有迷人知返去道不遙幸速推排急登正路法師非是無知遂爲愚者所迷類似阿難便爲魔之所嬈猶須承三寶之力制彼群豎波若之幢天魔自款若此言旨當卽便寄棄芻蕘若不會高懷幸停深怪耳

28) 간주조사태승표(諫周祖沙汰僧表) 석담적(釋曇積)
033_0554_a_10L諌周祖沙汰僧表 釋曇積
033_0554_b_02L승(僧) 담적(曇積)이 말씀드립니다.
황제 대단월(大檀越)의 덕은 건곤(乾坤)을 쥐고 마음은 일월에 걸렸으니 공평무사한 도(道)를 밝게 비추며 헤아릴 수 없는 조화(造化)를 감았다 폅니다.
그러나 그 위세가 조백(皂白)77)에 임하다가 슬프게도 승니에까지 이르렀으니, 현강(玄綱)78)을 끌어당겨 출로(出路)를 제시하며, 그 오름을 맑게 하고 행실을 연마하여 밝은 시절에 자취를 드러내었습니다.
덕이 부족한 사문이라도 세속으로 되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에 밝은 조칙을 내려 그 시부(試簿)를 책하며 여러 주(州)로 반포하여 마침내 과업(課業)을 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도에 들어가는 것은 실로 갈래가 많아서 참으로 하나만이 아닙니다. 모양에 따라 사람을 징험하자면, 다섯 가지 이치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혹 어떤 승니는 해마다 절에 살면서 근검절약으로 자신을 영위하고, 원행(願行)과 요심(要心)으로 금계(禁戒)를 범하지 않고, 향을 피우고 탑을 돌면서 열심히 예배하며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침식조차도 잊습니다. 단지 성품이 우둔하여 독송하여도 연(緣)이 없고, 고생스럽게 익히고 배워도 한 자도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면 오로지 문장을 독송하는데 총명(聰明)한 이만 옳게 여기지만 다시 물러나지 않는 스님들이 실행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옳게 생각해서 한쪽 면만 바라보는 생각을 바로 하여 분명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또 참되지만 총명하지 못한 것은 행(行)의 근본이지만 총명하지만 참되지 못한 것은 지(智)의 형상입니다.
만약 쓰임새를 가지고 업(業)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에게 다 갖추어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스님이 아니라면 만족을 위해서 지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대각(大覺)의 지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러 가지 법도마다 하늘과 사람이 받들어 수지하는 것인데, 하물며 일개 범부가 쉽게 생각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성인께서 스스로 신변(神變)을 말씀하셨으나, 이와 같은 대법(大法)에 있어서는 더하거나 덜지 못하니, 대인(大人)이 세상에 나오면 근본을 알고 기틀을 알며 묘한 방편을 많이 써서 사람들을 점차로 교화시킵니다. 중생의 근기와 행실이 각각 같지 않으니, 성인이 경전을 말씀하시되 서로 다르게 하시어 한 갈래만이 아니라, 안과 밖이 서로 통하게 하므로 실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또 공자가 3천의 무리를 거느렸으나 통달한 이는 72명뿐이고, 당(堂)에 올라가 입실(入室)한 이는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나머지를 어찌 배척하여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주(州)ㆍ현(縣)ㆍ군(郡)마다 제각각 배우는 사람이 있으나, 그 덕이 안연(顔淵)에 미치는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참으로 안연에 미치지 못한다고 군(郡)을 없애고 세우지 않는다면 덕이 없는 완고한 스님들도 환속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연에 미치지 못하는 이라도 촌사람보다는 뛰어나며, 덕이 없는 완고한 스님이라도 외도(外道)보다는 훌륭합니다. 삼가 이 같은 두 갈래가 첫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혹 오로지 나무 밑으로 돌아와 석장을 높이 들고 발우를 짚고 정오를 기다리며 식사하면서 명(命)을 바로 하여 스스로 살아가는데 명예도 버리고 이롭게 길러짐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며, 이치를 관(觀)하여 번뇌를 없애며 문송(文誦)을 결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도에 들어간 것에 대해 논하자면, 내업(內業)에는 남음이 있습니다. 그 문해(文解)를 따져보면 모양의 공덕[相功]은 부족할지라도, 어찌 화려한 경사(京師)에 대중을 모은다고, 반드시 모두가 유덕(有德)한 스님이고, 홀로 임야에 산다고 모두가 행사(行士)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과일이 설익고 잘익은 것은 색과 모양만을 따져서 먹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출몰도 형태와 이름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세 번 거듭 생각해 보아도 이것이 두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혹 성상(聖像)을 이룩하느라 몇 년 동안 애를 쓰고, 가람을 수리하느라 근심하며 정근(精勤)하여 세월을 보냅니다. 몸을 던져 만물을 구제하느라 추위와 고통에도 마음을 쓰지 않기도 합니다. 약을 베풀어 사람에게 내어 주느라 배고프고 곤궁한 것 때문에 그 뜻을 바꾸지 않습니다. 단지 총기(聰氣)가 없어 나날이 독송하는 것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해가 지도록 읽어도 몇 장을 채우지 못해도 그 회향(廻向)을 기준으로 보면, 몸은 헛되이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아가는 뜻을 징험해 보면 바로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입니다. 지금 무고하게 환속한다면 지나가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고 진성(眞性)을 갑자기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부처님 설법에 의하면 스님들 자체가 복전(福田)이니 이치는 손상시키거나 억누르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늙고 그 형체가 비천하여도 법복(法服) 자체가 존중할 만하니, 어찌 아침에는 베풀고 저녁에는 빼앗아서 스스로 높였다가 훼손할 수 있습니까? 좋고 싫은 것은 무상한 것인데, 어떻게 한 사람에게 그 득실을 책하고 12충전(冲典)79)에 항상되지 않은 법식을 두겠습니까?
아마도 성인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고, 대승의 갈래에 심히 어그러져서 위로는 자비를 훼손하고 아래로는 정화(正化)가 어그러질까 두렵습니다. 오직 이 같은 일이 후세로 전해져 스님들을 무고하였다는 비방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지금 대주(大周)는 대국(大國)인데, 승니는 얼마 되지 않고 사찰이 늘어섰다 하나 겨우 만여 곳에 이를 뿐입니다. 단지 2부 대중을 초빙하여 그 사이를 채우고서 범종을 울리며 나라를 위해 행도(行道)하게 하면서 방편으로 그 장단을 다하게 하다가 자세하게 허물과 죄를 찾아 이를 축출하여 백성으로 되돌려서 동량(棟梁)을 텅 비게 하였습니다.
만약 타방(他方)의 다른 나라에서 멀거나 가깝거나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스님들 사이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탑묘(塔廟) 아래에서 땅을 취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하게 여길 만합니다. 단지 완고한 스님들에게 부역(負役)의 임무는 주더라도 병사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사찰의 토지를 백성에게 내어 준다 하더라도 어찌 나라가 부강해지겠습니까?
염(染)은 갑자기 없앨 수 없고, 성(性)은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모두 여러 가지 번뇌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원만(圓滿)한 수행을 갑자기 없애려는 것은 불법(佛法)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그대로 그 몸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마군(魔軍)은 반드시 방편을 얻게 됩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한 번은 지극히 선(善)하다고 하면서 정갈하게 공양을 보태다가 한 번은 지극히 악(惡)하다고 하면서 물러가 환속시킵니다. 이 같은 말의 소견은 바로 삼보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조잡하고 세밀한 것을 평등하게 본다면, 마군도 방편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순일(純一)하게 착한 이도 환속한다면 거칠게 될 것이나, 거친 무리들도 오히려 만물의 착함을 이룰 수 있으니, 경문의 도리는 참으로 그 행이 거칠고 세밀한가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환속하지 말아야만 불자(佛子)를 이루게 되니, 그 진퇴에 세 번을 거듭 생각함에 이것이 여전히 다섯 번째의 부족함이 됩니다.
빈도가 여생을 천박한 자질로 명(命)을 관우(關右)에 맡겼는데, 이제 덕화(德化)를 입고 은혜를 받아 도업(道業)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지팡이를 짚고 신음하면서 이와 같은 정성된 마음을 보내지만 죽은 죄에 땀을 흘리며 삼가 두려움만 늘어갑니다.
삼가 아룁니다.
033_0554_a_11L僧曇積 白皇帝大檀越德握乾心懸白日照燭無私之道卷舒不測之化能威臨皁白悲及僧尼控引玄綱示之出路欲使淸昇練行顯迹於明時寡德沙門恥還於素俗爰降明詔責其試藝頒下諸州問其課竊惟入道多端諒非一揆依相驗有五理不足何者或有僧尼生年在寺節儉自居願行要心不犯諸禁燒香旋塔頂禮慇勤合掌低頭忘寢以食但受性愚鈍於讀誦無緣習學至苦而不得一字今量所告意須文誦聰者爲是重審試僧不退實行爲正意偏望取其明決且實而不聰行之本也聰而不實智之相也若用爲有業是不求備於一人若實爲非便責知於滿足大覺智慧不可思諸所爲法天人頂受況在凡夫輒思改易群聖自言種種神變於斯大法不能加減大人出世識本知機妙多方化人以漸衆生根行各各不令聖說經互差不一內外相通無乖異又如孔子領徒三千達者七十有二昇堂入室莫過數人自餘已外豈容斥逐今州郡縣各有學生及顏淵詎幾人也可以不及顏淵郡不立可以無德頑僧竝令還俗及顏淵者猶勝於野人無德頑僧者猶勝於外道伏此二途不足一也有專歸樹下擎錫持盂望中而飡命自活名聞頓捨利養無心理觀除遂闕文誦論其人入道則內業有究其文解則相功不足何必聚衆京華悉是德僧孤拔林野咸非行士故菓有生熟不可以色相而噉人有出沒不可以形名而取敢自三思足二也或有營經造像厲力積年補伽藍憂勤累歲捨身濟物不以寒苦經心施樂與人不以飢貧易志無聰力日誦不過一言旦夕拪拪讀不盈數紙准其迴向則善不空施徵其發趣則佛之眞子今無辜退俗是枉濫行人直性頓非不足三也說僧是福田理難損抑雖可年未形而法服尊重豈容朝施暮奪自加廌毀愛惡無常豈責其得失於一人之上置不恒之式於十二沖典恐不合聖心甚乖大趣上損慈悲下虧正唯畏後世相傳受誣僧之謗不足四也今大周大國僧尼未幾寺舍烈然有盈萬數只應招延二部溢滿其動梵鳴鍾爲國行道方便窮其長曲覓愆非黜放還民使棟梁空曠若他方異國遠近聞知疑謂求兵於僧衆之閒取地於塔廟之下深誠可但頑僧任役未足加兵寺地給民豈能富國染不頓除性由漸顯一切衆生具諸煩惱若頓遣圓修是滅佛匪直損身魔必得便何者一向純善精加供養一向純惡退令還俗此言所見深滅三寶若麤細等看魔難得便何者純善退還成麤衆麤之人猶生物善經文道理莫問麤細之行不還俗終成佛子進退三思不足五也貧道餘年賤質寄命關右欽化承恩得存道業是以呻吟策杖送此丹誠忓悞之愆伏增戰越敬白

29) 이선성혜명선사서(貽仙城慧命禪師書:선성 혜명 선사에게 보내는 글) 진(晉) 대규(戴逵)
033_0555_a_09L菩薩戒弟子戴逵貽書與仙城禪師命禪師座下
033_0555_b_02L생각해 보면, 위수(渭水)는 맑고 경수(涇水)는 탁한데도 서로 섞이어 물결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소나무는 길쭉길쭉하고 전나무는 짤막짤막한데도, 함께 어울려 견정(堅貞)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함령(含靈)의 5상(常)에 힘입어 이치를 온당히 하고 3교(敎)를 범주로 삼아 이로써 궐리(闕里)의 유동(儒童)80)이 수제(洙濟)81)에서 예경(禮經)을 천양하였고, 고현(苦縣)의 가섭(迦葉)82)은 유사(流沙)에서 묘도(妙道)를 천양하였습니다. 그러나 2의(儀)를 가두고 대체로 1세(世)에 국한되었으니, 어찌 녹야원(鹿野苑)에서 정법이 일어난 것과 비기겠으며, 영취산(靈鷲山)에서 망상(妄想)을 소탕한 것과 견주겠습니까?
반만(半滿)83)이 이미 펼쳐지고 방편과 진리가 모두 드러나서 참으로 가르침에는 얕고 깊음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안팎이 없습니다.
선사께서는 덕망을 멀리 떨치시고 높은 행실이 만물의 사표이십니다. 4의(依)로 섭수하고 목양(牧羊)으로 인하여 송경(誦經)하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천리를 가며 용궁(龍宮)을 지나 포괄하셨습니다. 이로써 안으로는 9부(部)84)를 관통하여 설산(雪山)의 비장(祕藏)을 총괄하고, 바깥으로는 칠략(七略)85)을 갖추어 벽수(壁水)의 분전(墳典)을 갖추셨습니다. 지둔(支遁) 천태(天台)의 명문(銘文)과 축진(竺眞) 나부(羅浮)의 기(記)로, 담(曇)은 칠령(七嶺)을 부(賦)하고 태(太)는 삼하(三河)를 노래하였으며, 보사(寶師)는 장생(莊生)을 묘절(妙折)하여 거공(璩公)의 저론이 여기에 모여 운몽(雲夢)을 삼키듯이 하고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였습니다.
정계(淨戒)를 묘하게 수지(受持)하는 것이 마치 명주를 얻듯이 하셨습니다. 율의(律儀)를 잘 갖추신 것이 마치 매달린 거울에 임하듯 하시고, 라운(羅云)86)의 밀행(密行)을 받으시고, 빈두로(賓頭盧)87)의 복전을 이으셨습니다. 정수(定水)를 퍼담아 곧 각관(覺觀)에 올라 선(禪)의 가지를 높이 그늘로 하여 장차 희사(喜捨)를 넘겼습니다. 이로써 호남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도 멀게 생각지 않고 면륙(沔陸)88)으로 찾아왔습니다. 용천(龍泉)에 지팡이를 심어 정사(精舍)를 지었습니다.
마곡(馬谷)에서 수레를 돌려 가람(伽藍)을 짓고, 산봉우리를 뚫어 감실(龕室)을 만드니, 어찌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드는 것을 빌리겠습니까? 산에 의지하여 원림을 만드니 수고로움이 없었으며, 금을 깔아 땅을 얻는지라89) 개사(開士)가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소맷자락이 화음(華陰:華林園)과 같은지라, 법려(法侶)가 다 함께 달려가고, 대중이 직하(稷下)로 모였습니다. 선실(禪室)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두약(杜若)의 향기가 나고, 지제(支提:탑)에서 저녁을 맞이하면 잠시 도원(桃源)에 들어간 듯하였으니, 향산(香山)의 거룩한 메아리가 피어나고 완적의 휘파람 소리[阮嘯]90)가 서로 조화를 이루듯 하였습니다.
일전(日殿)의 묘한 소리는 손금(孫琴:孫登의 가야금)과 더불어 가락을 같이하였고, 자개(紫蓋)의 우뚝한 소나무는 뛰어난 변재를 휘둘렀으며, 커다란 낭떠러지의 신묘한 우물은 높은 마음을 빛냈습니다. 그러므로 재주로써 산을 사고 덕으로써 같은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그 아름다운 행실을 봉우리처럼 높이니, 그 행적이 매우 뛰어납니다.
제자는 업풍(業風)에 생각을 두드리고 욕해(欲海)에 그 형체를 가라앉혔으니, 저궁(渚宮)에서 빠지고 넘어져 장차 이기(二紀)를 거쳤습니다. 낮에는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만 열중해 피곤해 하고, 밤에는 슬픔에 잠겨 나쁜 꿈만 꾸니, 마음속으로 너와 나를 잊고서 1승(乘)으로 돌이켜 흉금을 털어내며 3달(達)을 밝게 열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서등(鼠藤)91)을 생각하여 더욱더 조계(鳥繫)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예전에 배움에 뜻을 두어 사서(賜書)를 전하여 오례(五禮)를 열심히 하고 3현(玄)92)을 물리도록 봐서 위편이 끊어질 정도가 되어 다른 것들을 공부하였습니다. 약관에 벼슬하여 백가(百家)를 다스렸으나 벼슬 살면서 문한(文翰)에만 매였습니다.
비록 용문(龍文)을 찾고 회계(會稽)에 올라 초료부(鷦鷯賦)93)를 짓고 앵무새를 노래하지는 못했더라도 만약 그 조그마한 것을 구하려 한다면 옛사람과 흡사합니다. 단지 만물이 물거품 같음을 깊이 깨닫고 보니 팔과 팔이 닿듯이 서로의 만남이 슬퍼집니다.
늘 매미가 허물 벗듯이 세속의 이해를 벗어나 진여(眞如)의 맛을 탐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운성(隕城)에서 수괴관(修隗舘)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기뻐하며 마치 가죽신이 갈 길을 만난 듯하였으나, 그 나아감에 다하지 못하고 흉금을 떨치며 한탄만 내었습니다.
이리저리 찾아보면서 옷에서 세간의 그물을 털어 내고 신발에 실오라기 매인 것을 벗겨 내며, 창랑(滄浪)에 갓끈을 씻고 한음(漢陰)에서 작은 옹기를 껴안았습니다. 천하를 다니며 구전(九轉)을 맛보고 활용하여 깊은 근심을 없애니, 점차로 삼공(三空)을 깨달아 장차 고인(苦忍)에 올랐습니다. 선량(仙梁)에서 옥(玉)을 바라보더라도 스승을 따름을 폐하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서 복숭아 나무를 꺾더라도 거리낌 없이 이로움을 청하였습니다.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94)의 좋은 기(氣)로 언뜻 착치(鑿齒)에 답하고, 안문(雁門)95)의 고론은 때에 맞게 가빈(嘉賓)96)에게 답하였으니, 겨울에도 따뜻하기가 봄철과 같기를 바랍니다.
원컨대 바른 규범을 소중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방은 가까우나 사람은 멀기만 하니, 금대(襟帶)에 더욱 의지하고 나머지 말이나 남아 있는 편지에는 볼 만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033_0555_a_11L竊以渭淸涇濁共混潮宗之源松長箭短同秉堅貞之質幸賴含靈五常理宜範圍三教是以闕里儒童闡禮經於洙濟苦縣迦葉遷妙道於流沙雖牢籠二儀蓋限茲一世豈如興正法於鹿菀蕩妄想於鷲山半滿旣陳權實斯顯誠教有淺深人無內外師德聲遠振行高物表攝受四依牧羊而成誦負笈千里歷龍宮而苞故能內貫九部摠雪山之秘藏該七略備壁水之典墳支遁天台之竺眞羅浮之記曇賦七嶺汰詠三寶師妙扸莊生璩公著論袁集呑雲夢如指諸掌加以妙持淨戒護明珠善執律儀似臨懸鏡稟羅云之密行種賓頭之福田撫挹定水便登覺觀高蔭禪枝將逾喜捨是以不遠瀟湘來儀沔陸植杖龍泉仍爲精舍迴車馬谷卽創伽藍鑿嶺安龕詎假聚沙成塔因山搆菀無勞布金買地開士雲會袂似華陰法侶朋衝齊稷下禪室晨興時芳杜若支提暮啓暫入桃源#香山梵響將阮嘯而相日殿妙音與孫琴而齊韻紫蓋貞松仍麾上辯洪崖神井卽瑩高心以才堪買山德邁同輦崇峯景行牆仞懸絕弟子業風鼓慮欲海沈形洎渚宮淪覆將歷二紀晝倦坐馳悲愕夢未能忘懷彼我歸軫一乘蕩胸衿朗開三達旣念鼠藤彌傷鳥昔在志學家傳賜書五禮優柔玄饜飫頗絕韋編搆述餘緖爰登弱捃摭百家及乎從仕留連文翰未能採龍門而挮會稽賦鷦鷯而詠鸚鵡若求其一介亦髣髴古人但深悟聚泡情悲交臂常欲蟬蛻俗解味眞如一日鄖城訊脩隗館屈膝情係襪遇同進履未盡開襟遽嗟忽尋望拂衣世網脫屣牽絲滄浪濯漢陰抱甕行飡九轉用遣幽憂寤三空將登苦忍仙梁視玉不廢從深㵎折桃無妨請益所希彌天勝乍詶鑿齒鴈門高論時答嘉賓暖如春願珍淸軌室邇人遐彌軫禁餘辭殘簡念無金玉

30) 수대선생서(酬戴先生書:대 선생에게 답하는 글) 석혜명(釋慧命)
033_0555_c_10L幽林沙門釋惠命詶書濟北戴先生
033_0556_a_02L무릇 일진(一眞)은 늘 고요하고, 나타냄과 신비함은 그윽함을 같이합니다. 만성(萬聖)이 기틀을 타고 어긋나거나 순응하면서 그 자취를 달리하였으니, 이로써 서관(西關)97)에서 도를 밝히고 동쪽 뜰98)에서는 어짊을 논했습니다.
순박함을 새겨서 공(工)을 바꾸고 유(有)와 무(無)의 수레를 달리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이 같은 두 가지 문을 거두어 이 두 가지 가르침을 근원으로 한다면 어찌 3전(轉)99)에 귀종하고 5승(乘)100)으로 들어가 천박함에 의지하여 깊어지며 방편에 의지하여 참됨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연못이 네 갈래 물로 나뉘어 처음은 이름을 달리하더라도, 바다가 팔하(八河)를 이끌어 결국에는 맛을 달리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단월이 어려서부터 기이한 재주가 우뚝한 데다 여러 가지 실마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말은 세상에 탁월하고 단아하게 이루어 감은 그윽함과 같이 하였습니다.
지혜로 5명(明)을 섭렵하고 그 학문이 3교(敎)를 겸하여 이로움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안생(顔生)의 일궤(逸軌)를 따르며 그것을 손상시키는 것을 도(道)로 삼고, 이씨(李氏)의 현종(玄蹤)을 사모하였습니다. 다시 6경(經)이 두루 넓어지고 백가(百家)가 풍성하여 성인(聖人)과 현자(賢者)가 분파를 달리하고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로 그 유파를 나누었으며, 혹시 일이 넓고 글이 성하거나, 혹 말은 드높고 이치가 원대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병에 물을 담듯이 하고, 그 논하는 것은 강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거침이 없었습니다. 거울을 깨끗이 닦는데 지치지 않고 커다란 종도 맡아서 두드립니다.
자건(子建)101)도 그 기이한 문체에 두 손을 모으고, 장경(長卿)102)도 그 높은 자취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터를 나누고, 주(周)나라와 양(梁)나라가 그 세속을 뒤바꿨더라도, 백미(白眉)의 청안(靑眼)은 귀옥(龜玉)의 값어치를 넘지 못합니다.
봉황이 깃들고 용이 누웠으니, 마치 고기와 물이 어울리는 것과 다름없어서 지식으로 고(苦)가 공함을 비추고 뜻으로는 진속(塵俗)을 물리쳤으니, 형체가 비록 낭묘(廊廟)에 있으나 기(器)는 강호(江湖)에 두었습니다. 이로써 마음이 실타래같이 얽매인 것을 한탄하며 이를 ‘세간의 그물’이라 말하였습니다.
말은 응륙(應陸)103)과 같고, 조(調)는 장엄(張嚴)104)에 합해져 주화(朱火)가 갑자기 전해짐을 안타까워하고 맑은 파도가 빠르게 흘러감을 가슴 아파하여 발을 씻어 도(道)를 따르며 귀를 씻어 영화(榮華)를 사양하니, 구전(九轉)으로 태허(太虛)를 충당하고 4선(禪)으로 병을 없앱니다.
그런 연후에 8정(正)을 찾아 1진(眞)을 맛보면서 10전(纏)을 풀어내어 세 가지 환난을 없애 버린다면, 이 같은 덕이야말로 어찌 지극하지 않겠습니까?
빈도가 식(識)의 거울을 맑게 하기 힘들고 마음의 때는 쌓이기 쉬우니, 참으로 그 정(定)이 화수(華水)에 부끄럽고 계율은 풀을 얽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재주는 불을 거두는데 힘쓰고 배움은 전등(傳燈)을 사양하며, 안으로는 충만한 공덕에 부끄럽기만 하고, 밖으로는 인간 세상에 친함이 없으니 일구(一丘)에 머뭇거려 형체를 봉류(蓬柳)에 거하며 천인(千仞)에 가만히 머물러 균송(筠松)에 뜻을 의탁합니다.
바람과 서리로 네 계절을 헤아리고 조백(眺魄)으로 삼순(三旬)을 맞이하며, 밤에 산새가 우는 것을 기다려 구성(九成)을 대신합니다. 낮에 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면서 이자(二子)105)를 따르는 데에 이르러서는 가난한 집과 남루한 옷이 본래 근심이 되지 않고 주문(朱門)과 결사(結駟)도 나에게는 모두가 뜬구름과 같습니다.
등나무에 쥐가 침범하기 쉽고, 나무 위의 원숭이는 조용하기가 어려운 것을 한탄합니다. 영취산(靈鷲山)을 애써 생각하며 계족산(鷄足山)을 힘들게 생각합니다.
숲에 가을의 잎사귀가 떨어져도 일찍이 독각(獨覺)의 밝음이 없었으며, 계곡에서 봄에 꾀꼬리가 지저귀어도 전해 들은 것이 적다는 한탄만이 절박합니다. 홀연히 편지를 보내신 것을 받고는 간곡하게 살펴봐 주심을 입었습니다. 그윽한 기운은 난초와 같고 맑은 소리는 옥과 같으니, 참으로 눈에 선하여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실로 가슴 깊이 반성해 보면 부끄러움만 더하니, 그 의식은 천지(天池)가 북쪽의 큰 바다[北溟]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설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일은 이정(泥井)이 동해를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기대하는 것은 이 사람이니, 나에게서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황석(黃石)을 볼 날이 멀지 않아서 맺은 약속이 눈앞에 있으니 백구(白駒)를 매어서 오늘 아침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뛰어난 계획을 매우 공경하여 상황에 따라서 서찰을 내었으나,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으로 어찌 회답할 수 있겠습니까?
033_0555_c_11L夫一眞常湛徼妙於是同玄萬聖乘違順以之殊迹是以西關明道野談仁雕朴改工有無異軫今若括此二門原茲兩教豈不歸宗三轉入五乘藉淺之深資㩲顯實斯若池分四水始則殊名海控八河終無別檀越幼挺奇才夙懷茂緖華辭卓雅致參玄智涉五明學兼三教矣能忘蹈顏生之逸軌損之爲道李氏之玄蹤雖復六經該廣百家繁聖賢異准儒墨分流或事曠而文或言高而義遠莫不納如甁受似河傾明鏡匪疲洪鍾任扣子建挹以奇文長卿恧其高趣故雖秦楚分墟周梁改俗白眉靑眼龜玉之價弗棲鳳臥龍魚水之交莫異加以識瑩苦空志排塵俗形雖廊廟器乃江是以屬歎牽絲興言世網辭同應調合張嚴嗟朱火之遽傳愍淸波之速逝方應濯足從道洗耳辭榮轉充虛四扉排疾然後尋八正以味一眞解十纏而遣三患斯之德也寧不貧道識鏡難淸心塵易壅定慚花戒非草繫才侔撤燭學謝傳燈有愧於德充外無狎於人世是以淹滯一丘寓形蓬柳端居千仞託志筠測四序於風霜候三旬於眺魄迺夜聞山鳥仍代九成晝視遊魚追二子蓽戶弊衿旣在原非病朱門結駟亦於我如雲所歎藤鼠易侵猿難靜勞想鷲頭倦思鷄足至於林凋秋葉曾無獨覺之明谷響春鶯切寡聞之歎忽承來問曲見光譽氣若蘭淸音如玉#誠復溢目致歡實撫膺多愧雖識謝天池未辯北溟之說而事同埿井慚聞東海之談冀伊人於焉好我黃石匪遙結期明白駒可縶用永終朝善敬淸猷因素扎言不洗意報此何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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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조연법사망서(弔延法師亡書:연 법사를 조문하는 글) 수(隋) 설도형(薛道衡)
033_0556_b_02L弔延法師亡書 隋薛道衡
8월 23일 설도형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세속이 무상하여 연(延) 법사께서 마침내 천화(遷化)하셨으니,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하여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 애절함이 마치 몸을 가르듯 하니 참으로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법사께서는 어릴 적에 세속을 버리시고 진표(塵表)에 발걸음을 높이 하셨으니, 마음으로 회홍(恢弘)을 깨닫고 이치로 정오(精悟)를 식별하셨습니다. 그 영대(靈臺)의 신우(神宇)를 우러를 수는 있으나 들여다볼 수는 없었으니, 지혜의 바다와 정법의 근원은 건널 수는 있으나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맑은 거울이 자주 비추어도 피곤해 하지 않는 것과 같고, 비유하면 저와 같은 커다란 종이 두들겨져 그대로 응하듯이 한 것과 같습니다. 찾아가매 길이 끊어지고 현유(玄維)의 끈이 떨어졌으니, 뜻을 그윽한 암벽 사이로 두어 확고히 하여 뽑을 수 없었습니다.
높은 자리와 넉넉한 예우로도 그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고, 위엄 있는 위세와 준엄한 법도로도 그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경행(經行)하고 연좌(宴坐)하시며, 험난함을 평탄케 하셔서 두 갈래를 없앴으니, 그 계덕(戒德)과 율의(律儀)는 시종일관 한결같았습니다.
성황(聖皇)이 운수(運數)를 열어서 상법(像法)이 중흥하자, 탁월하여 치림(緇林)에서 우뚝하시니 우두머리를 칭할 수 있었습니다. 신극(宸極)의 지존조차 몸을 굽혀서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베풀었으니, 삼보가 이로써 넓혀지고 2제(諦)가 이로써 선양되었습니다. 실로 불도징 스님과 구마라집 스님을 따를 만하며 도안 스님과 혜원 스님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기둥이 갑자기 기울고 어짊의 배가 돌연히 가라앉으니, 비통함이 사부대중을 얽어맬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해 쓰라린 아픔을 느낍니다.
스님께서 석장을 짚고 물병을 쥐고서 일찍이 가르침을 받들어 당(堂)에 올라 입실(入室)하여 그 바탕을 다하여 은밀하게 하셨으니, 재삼(在三)의 정리(情理)에 대해 매우 가슴 아파하시다가 이제 가셨으니,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이 무상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무리 근심하여도 위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슬픔만이 깊어집니다. 삼가 흰 종이를 꺼내드니 슬픔이 더욱 복받치는지라, 붓을 이어가지 못하겠습니다.
제자 설도형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033_0556_b_03L八月二十三日名和南俗界無常法師遷化情深悲怛不能已已惟哀慕摧割當不可任法師弱齡捨俗蹈塵表志度恢弘理識精悟靈臺神可仰而不可窺智海法源可涉而不可測同夫明鏡屢照不疲譬彼洪有來斯應往逢道喪玄維落紐志幽巖礭乎不拔高位厚禮不能迴其慮嚴威峻法未足懼其心經行宴坐夷險莫二戒德律儀始終如一皇啓運像法重興卓爾緇林鬱爲稱屈宸極之重申師資之義三寶由其弘護二諦籍以宣揚信足以追蹤超邁安而法柱忽傾仁舟遽沒匪直悲纏四部固亦酸感一人師杖錫挈甁夙承訓導升堂入室具體而微在三之情理百恒慟往矣奈何無常奈何疾礙不獲展慰但深悲結謹遣白書慘愴不次弟子薛道衡和南
廣弘明集卷第二十四
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불멸 후 5백 년을 정법(正法)으로, 정법 후 1천 년을 상법(像法)이라고 한다.
  2. 2)선약(仙藥)에 금액(金液)ㆍ구액(九液)ㆍ금단(金丹)ㆍ구단(九丹) 등이 있다.
  3. 3)후한의 천사(天師) 장도릉(張道陵)이 촉(蜀)의 학명산(鶴鳴山)에서 득도하여 백학을 타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4. 4)혼백이 몸을 떠나서 신선이 되는 도가의 술법을 말한다.
  5. 5)천지가 나뉘기 전의 혼돈의 원기(元氣)이다. 한무제는 공동산(崆峒山)에 올라 감천(甘泉)으로 거둥하여 태일(太一)의 사단(祠壇)을 갖추게 하여 여기서 절하며 기도하였다.
  6. 6)진시황을 말한다. 진시황 36년에 별이 떨어져 돌이 되었다.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뉠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었고, 어떤 사람이 “내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에 의하면 “조(祖)는 시(始)이다. 용(龍)은 인군상(人君像)이다. 시황(始皇)을 말한다”고 하였다.(『사기』 「진시황본기」)
  7. 7)후한 명제(明帝)를 말한다. 한나라는 유씨(劉氏)였고, 명제의 이름은 장(莊)이었다. 꿈에서 금인(金人)을 보았다.
  8. 8)회남왕 유안(劉安)으로 『회남자』를 저술하였다. 빈객 방술사들을 불러들여 신선황백의 술을 말하였다. 황백의 술이란 황은 황금, 백은 백은으로 도가에서 단약을 소련(燒練)하여 금은으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9. 9)12세에 마니 발타라 바라문을 스승으로 섬겼다. 스승이 출타하였을 때 스승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스승은 아내의 모함을 듣고 앙굴마라에게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천 명의 사람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으로 영락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오면 법을 일러 주겠다고 했다. 앙굴마라는 떠나서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999인을 죽이고 나중에 친어머니를 만나서 죽이려 하였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나 정법을 듣고 귀의하였다고 한다.
  10. 10)황제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서 솥[鼎]을 형산(荊山) 아래에서 주조하였고, 솥이 완성되자 용이 호염(胡髥)을 내려뜨려 황제를 맞이하였다. 황제가 위로 오르니 군신과 후궁 가운데 따르는 자가 70여 명이었다.
  11. 11)모두 신선에 관한 책이다.
  12. 12)도가에서 말하는 몸 안의 신(神)을 말한다. 하나는 뇌에, 하나는 명당[心]에, 하나는 복위(腹胃)에 있어서 사람을 해친다. 또는 상시(上尸)를 팽거(彭倨)라고 이름하여 머리 속에 있고, 중시(中尸)를 팽질(彭質)이라 이름하여 배 속에 있고, 하시(下尸)를 팽교(彭矯)라고 명하여 발 안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삼팽(三彭)이라고도 한다.
  13. 13)구전신단(九轉神丹)을 먹으면 백곡(白鵠)으로 변화된다.
  14. 14)강설과 현상 모두 단명(丹名)으로 선가(仙家)의 상약(上藥)이다.
  15. 15)회남왕 유안은 선도(仙道)를 얻어 팔공(八公)과 백일승천하였다. 이때 버린 약정(藥鼎)을 개와 닭이 핥자, 몸이 아주 가벼워져 닭은 구름 속에서 울고, 개는 하늘에서 짖었다고 한다.
  16. 16)무루자(無漏子)의 다른 이름이다. 몸에는 가지가 없고 곧게 뻗어 3, 40길 끝, 정수리 부분에 10여 가지가 난다. 열매는 5년에 한 번 연다고 한다. 석명(釋名)으로는 천년조(千年棗)ㆍ만세조(萬世棗)라고도 한다.
  17. 17)진시황의 방사(方士)였던 서불(徐巿)을 말한다. 진시황에게 바다 속에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州)의 삼신산과 신선이 있다고 상서하여 진시황의 명령으로 어린 남녀 수천 명을 데리고 불사약을 구하러 바다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18. 18)한나라의 교동(膠東) 사람으로, 무제 때의 술사(術士)이다. 무제에게 황금과 불사약을 구해 오겠다고 약속하였다가 거짓으로 드러나 죽임을 당하였다.
  19. 19)도경(倒景)이라고도 한다. 천상의 매우 높은 곳을 말한다. 해와 달 위에 있어서 도리어 아래부터 비추기 때문에 도경이라고 한 것이다.
  20. 20)강벽은 진시황을 가리킨다. 진시황은 37년 7월에 죽어 9월에 여산에서 장사지냈다.(『사기』 「진시황본기」)
  21. 21)용매란 한나라 무제를 말한다. 무릉은 한나라 무제의 무덤이다.
  22. 22)한나라 유향은 『열선전(列仙傳)』을 저술하고 74인의 신선이 불경에서 이미 나온다고 말하였다.
  23. 23)한나라 무제가 곤명지(昆明池)를 파서 흑탄(黑炭)을 얻게 되었는데 나중에 축법란이 이르러 “세계가 다하여 모두 다 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24. 24)『좌전』에 장공(莊公) 7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한밤중이 되자 별이 떨어져 비가 내렸다. 이것이 부처가 탄생하여 빛을 발한 것이라고 한다.
  25. 25)약왕보살을 말한다. 여래가 멸도한 후에 일장(日藏) 비구가 나타나 여러 대중에게 대승(大乘)의 평등대혜(平等大慧)를 연설하였는데 대중 가운데 성수광(星宿光)이란 장자가 아우와 함께 설법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과실과 좋은 약으로 비구와 대중에게 공양하고 대보리심을 내었다.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할 때에 그 불이 1,200년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26. 26)살타파륜(薩陀波崙)의 약칭이다. 반야를 구하기 위해 7일 7야를 통곡한 보살이다.
  27. 27)주나라 무왕(武王)이 여기에 도읍하였다.
  28. 28)한나라 고조(高祖)가 풍패 사람이었다.
  29. 29)신선 서왕모의 거처이다. 곤륜산에 있다고 한다.
  30. 30)강로(絳老)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진도공(晉悼公)의 아내가 기(杞) 땅의 성을 쌓는 인부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강현에서 온 노인이 끼어 있어 그의 나이를 물으니 73세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31. 31)은나라 탕왕(湯王)으로 백세까지 살다 죽었다.
  32. 32)신선 적송자이다. 신농(神農) 시대의 우사(雨師)로, 곤륜산으로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설이 있다.
  33. 33)『논어』 「위령공」에 “공자가 말하였다. ‘인에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子曰, 當仁, 不讓於師]”고 하였다.
  34. 34)석종유(石鐘乳)의 다른 이름이다. 선인(仙人)들이 이것을 먹고 장생한다고 한다.
  35. 35)진(秦)나라 목공(穆公) 때의 사람으로 피리를 잘 불어 공작과 학이 정원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처는 봉황의 소리를 익혀서 봉황이 이르게 하였다. 마침내 봉황을 따라 날아올랐다고 한다.
  36. 36)연나라의 자객 형가(荊軻), 연나라 사람들은 그를 형경이라고 불렀다.
  37. 37)하찮은 기예의 비유로 주로 시가나 문장을 수식하는 기능을 말한다.
  38. 38)『고승전』 서록(序錄)에 주군태의 징응전(徵應傳)을 거론하였다.
  39. 39)원량은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도연명(陶淵明)을 말한다. 『고승전』 서록(序錄)에 도연명수신록(陶淵明搜神錄)을 싣고 있다.
  40. 40)치경흥동산승전(郗景興東山僧傳)을 말한다.
  41. 41)판본에 따라 왕계(王季)라고도 한다.
  42. 42)고승을 10개의 과목으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번역ㆍ해의(解義)ㆍ습선(習禪)ㆍ명률(明律)ㆍ감통(感通)ㆍ유신(遺身)ㆍ독송(讀誦)ㆍ호법(護法)ㆍ흥법(興法)ㆍ잡과(雜科) 등이다.
  43. 43)5온(蘊)이라고도 한다.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의 총칭이다. 물질계와 정신계의 양면에 걸치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킨다.
  44. 44)사람의 삶은 부모ㆍ스승ㆍ임금의 세 가지에 있다. 부모가 태어나게 하고, 스승이 교육시키며, 임금은 그를 먹인다.
  45. 45)오시교(五時敎)를 말한다. 다섯 시기로 설한 가르침이다. 아함경이나 모든 대승경전 등은 모두 석존이 그 일생에 있어서 얕은 가르침에서 깊은 가름침으로 순서대로 설한 것이라 생각하여 다섯 시기의 단계로 나눈 교판이다.
  46. 46)구부법(九部法)ㆍ구부경(九部經)ㆍ구분교(九分敎)라고도 한다. 경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교설은 그 내용이나 설법의 방식에 따라 아홉 종으로 분류한다. 계경(契經)ㆍ중송(重訟)ㆍ수기(授記)ㆍ게송(偈頌)ㆍ감흥어(感興語)ㆍ여시어(如是語)ㆍ본생담(本生譚)ㆍ미증유법(未曾有法)ㆍ방광(方廣) 등이다.
  47. 47)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을 북면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제자로서 스승을 섬긴다는 의미이다.
  48. 48)흰 털과 검은 털의 뜻으로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씩 섞인 반백의 노인을 말한다.
  49. 49)황제(黃帝)는 유웅(有熊), 혹은 제홍이라고도 부른다. 황제는 수산(首山)의 동을 가져다 형산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50. 50)콩에 소금을 넣어 만든 식품이다.
  51. 51)『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최문자는 왕자 교(喬)에게서 선(仙)을 배웠다. 교가 백예(白蜺)로 변화하여 약을 가져와 최문자에게 주었다고 한다.
  52. 52)『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부국 선생이란 자가 있었는데 병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자환적약(紫丸赤藥)을 꺼내어 그것을 주면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53. 53)신선은 오곡을 먹지 않는다.
  54. 54)정거(鄭渠)와 백거(白渠), 지금의 섬서성 경계에 있는 수로인데 이 두 수로에 의하여 의식이 풍족해졌다고 한다.
  55. 55)신(神)의 이름이다. 금마벽계(金馬碧鷄)라고도 한다.
  56. 56)진(晋)나라의 혜강(嵆康), 자는 중산(中散)이다. 죽림칠현으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것을 잘하였다. 종회(鍾會)의 분노를 사서 형을 받았다. 형에 임하여 해그림자를 돌아보고 스스로 죽었다.
  57. 57)한나라의 양웅(揚雄), 자는 자운(子雲)이다. 왕망 밑에서 벼슬하였다. 왕망은 자리에 즉위한 뒤에 유흠(劉歆) 부자를 죽이고 다시 그 근원을 없애려고 양웅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양웅은 스스로 두려워하며 각(閣) 위에서 떨어져 얼마 있다 죽었다.
  58. 58)여기서 고좌의 법사란 낙양에 있던 축법란(竺法蘭)을 말한다. 공(鞏)은 낙양의 땅으로 낙수의 동안(東岸)에 있다.
  59. 59)부처님이 처음으로 제도한 다섯 비구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60. 60)부처님 제자인 사리불을 번역한 이름이다. 사리는 신골(身骨)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61. 61)무술 수련을 위한 운동의 한 가지로 팔 힘을 겨루거나 장애물을 뛰어넘는 운동이라고도 한다.
  62. 62)진(晉)나라 사람으로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워 도성 사람들이 그의 용모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가득하였고, 그를 본 사람들은 그를 옥인(玉人)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병이 들어 27세에 죽었다.
  63. 63)진(晉)나라 사람으로 환홍(桓弘)이 광릉의 진(鎭)이 되자, 맹창을 주부로 삼았다. 환현(桓玄)이 제(帝)라고 칭하자, 유유(劉裕)와 함께 환현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유유가 병을 일으킨 후에 맹창이 장사(長史)가 되어 단양윤에 제수되고 이부상서ㆍ상서우복야를 더했지만 맹창은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하였다.
  64. 64)선도(仙道)의 환약(丸藥)을 말한다.
  65. 65)많은 재물 때문에 화를 당하거나 훌륭한 재능 때문에 미움을 사게 되는 것의 비유이다.
  66. 66)옷을 늘어뜨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왕의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칭송하는 말이다.
  67. 67)옛날 석가여래가 선예왕이었을 때 대승법을 비방한 5백 바라문을 살해하였다. 바라문이 죽은 다음 지옥에 태어나서 잘못을 참회하고 대승신심을 발하여 감로고여래(甘露鼓如來)의 세계에 태어났다는 본생담이다.
  68. 68)요임금 때의 은사(隱士)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임금이 천하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69. 69)후한의 광무제와 더불어 지냈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하였다. 광무제가 불러도 가지 않고 부춘산에서 밭을 갈면서 지냈다.
  70. 70)하나라 우임금이 제후를 회계산에 모이게 하였던 것을 말한다.
  71. 71)천자가 정책을 결정하는 곳이나 대장이 작전 계획을 세우는 막부를 말한다.
  72. 72)진(秦)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장량(張良)이 하비(下邳) 흙다리 위에서 만났는데 책 1편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다. 그리고 13년 후에 제북(濟北) 곡성(穀城)을 지나 황석(黃石)을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이다”라고 하였다. 장량은 그 책을 읽었는데 그것이 태공(太公)의 병법이다. 드디어 한나라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13년이 지나 고조를 따라 제북 곡성을 지나자 황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다 제사지냈다. 장량이 죽으매 황석과 함께 장사지냈다.
  73. 73)도려(屠黎)라고도 한다. 승려들에게 덕행을 가르치는 스승을 말한다.
  74. 74)한나라 성제(成帝)의 궁녀였던 반첩여(班婕妤)의 일을 서술한 것 중에 「장신원(長信怨)」이란 악부가사의 곡명이 있다.
  75. 75)『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노나라 사람 추호가 처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벼슬살이 가서 3년이 지나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던 도중에 그 부인이 교외에서 뽕잎을 따고 있었는데 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갖고 있던 금을 꺼내 정을 통하고자 하였다. 부인이 거절하자 추호는 부끄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와 부인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교외에 뽕나무 따러 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부인이 돌아오니 아까 뽕나무를 따던 그 여인이었다. 둘은 서로 부끄러워하였는데, 부인은 기수(沂水)에 가서 빠져 죽었다고 한다.
  76. 76)복희(宓姬)는 복희의 딸로서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낙수의 신이 되었다. 위(魏)나라 조식(曹植)이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다. 조식은 무제(武帝)의 아들, 문제(文帝)의 동생이다. 조조가 원소(袁紹)를 무찌른 뒤 그의 딸을 문제에게 주었다. 무제는 이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원소의 딸은 문제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 후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견후(甄后)이다. 나중에 견후가 죽자 조식은 낙수가에서 쉬면서 견후를 생각하며 감견부(感甄賦)를 지어 견후를 낙신에 비유하였다. 뒤에 명제가 이것을 보고 고쳐서 「낙신부」라고 하였다.
  77. 77)승려와 속인을 말한다. 승려는 검은 옷을, 속인은 하얀 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78. 78)천강(天綱)과 같은 말이다. 하늘이 마련한 법칙으로 인륜과 사회를 유지하는 최고의 법칙을 말한다.
  79. 79)12부경(部經)을 말한다. 경전의 형태를 형식ㆍ내용에 따라 12종으로 구분한 것이다.
  80. 80)궐리는 산동의 곡부성으로 공자의 집이 있던 곳이다. 궐이의 유동은 공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81. 81)수수(洙水)와 제수(濟水)로 일반적으로 수사(洙泗)라고 많이 일컫는다.
  82. 82)고현의 가섭은 노자를 가리킨다. 노자가 고현 사람이었다.
  83. 83)불교를 둘로 대별하여 반만이교(半滿二敎)라고 한다. 대소이승(大小二乘)이라고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이다.
  84. 84)소승의 9부로 12부경 가운데 방광(方廣)과 수기(授記)와 무문자설(無問自說)을 뺀 것이다.
  85. 85)전한의 유향(劉向)의 별록에 근거하여 그의 아들 유흠(劉歆)이 만든 서적 분류 목록이다. 집략(輯略)ㆍ육예략(六藝略)ㆍ제자략(諸子略)ㆍ시부략(詩賦略)ㆍ병서략(兵書略)ㆍ술수략(術數略)ㆍ방기략(方技略)의 칠략으로 분류하였다.
  86. 86)벽옹(璧雍)ㆍ벽옹(璧癰)이라고도 한다. 주나라 때에 제왕이 설치한 태학(太學)이다. 그 주위에 연못을 띠 모양으로 둘러 전체적인 형상이 벽(璧)과 같은 데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87. 87)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이다. 16나한 중에 한 분이다. 석존의 제자로서 빈두로는 이름, 파라타는 성이다. 흰머리와 길다란 눈썹을 가진 나한으로 원래 발차국 구사미성 보상(輔相)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불교에 귀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6년에 이 나한이 왕사성에서 신통을 나타냈다가 외도들의 조소를 받아 부처님께서 이 뒤에는 부질없이 신통을 나타내지 말라 하고,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게 하였다.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고,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 있으면서 불멸 후에 중생을 제도하며, 말세의 공양을 받아 대복전(大福田)이 되었으므로 주세(住世) 아라한이라고 일컬었다. 후세에 인도 대승 절에서 문수를 상좌로 함에 대하여 소승 절에서는 빈두로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성(獨聖)ㆍ나반존자(那畔尊者)라 하여 절마다 봉안하였다.
  88. 88)혜명은 명양산성(湎陽山城)의 선광사(善光寺)에 머물고 있었다. 면양의 면(湎)은 면(沔)과 통한다.
  89. 89)기수원(祇樹園)은 급고장자(給孤長子)가 금을 땅에 깔아서 구입한 땅이다. 축잠(竺潛)이 앙산(仰山)에 있을 때 지둔이 사자를 보내 앙산의 옆에 있던 작은 산을 구매하여 유서(幽棲)로 삼았다.
  90. 90)삼국시대 위나라의 완적(阮籍)은 술을 마시고 휘파람을 잘 불었고, 손등(孫登)은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산에서 완적의 휘파람과 손등의 가야금 연주가 조화를 이루었다.
  91. 91)등나무의 일종으로 쥐가 이것을 먹는 것을 좋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2. 92)『노자』ㆍ『장자』ㆍ『주역』을 말한다.
  93. 93)진(晉)나라의 장화(張華)는 어려서 빈한하여 처음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초료부를 지었다. 완적이 그것을 보고 탄식하며 왕을 도울 재주라고 말하였다. 그로 인해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94. 94)도안 법사와 같은 시대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다. 도안 법사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학문을 과시하기 위해 “나는 사해에서 가장 훌륭한 습착치입니다”고 하자, 도안 법사는 “나는 하늘에 가득한[彌天] 석도안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95. 95)석혜원(釋慧遠)을 말한다. 석혜원은 안문 사람이었다.
  96. 96)치초(郗超)의 자(字)이다. 치초는 지둔(支遁)이나 축법태(竺法汰)와 특히 친하였다.
  97. 97)노자는 서쪽 관(關)에 이르러 『도덕경』을 저술하고, 마칠 곳을 알았다.
  98. 98)공자는 동쪽 노(魯)의 수사(洙泗) 사이에서 가르침을 폈다.
  99. 99)삼전법륜(三轉法輪)의 준말로 석존의 교설을 셋으로 나눈 근본법륜(根本法輪)ㆍ지말법륜(枝末法輪)ㆍ섭말귀본법륜(攝末歸本法輪)이다. 근본법륜은 큰 보살을 위하여 깨달음의 내용 모두를 직접적으로 보인 근본교를 말하고, 지말법륜은 듣고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박복둔근(薄福鈍根)의 근기를 위해 40여 년에 걸쳐서 1승교를 나누어 거짓으로 3승을 설한 여러 경의 교설이다. 섭말귀본법륜은 지말인 3승의 교설을 개회해서 근본일승교에 결귀시킨 『법화경』의 교설을 말한다.
  100. 100)해탈의 경계에 도달한 과위(果位), 또는 해탈의 과위를 얻게 하는 불타의 교법을 수레에 비유, 승(乘)이라 한다. 5승은 일반적으로 인승(人乘)ㆍ천승(天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의 다섯을 말한다.
  101. 101)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식(曹植), 자(字)가 자건(子建)으로 무제(武帝)의 아들이며 문제(文帝)의 동생이다. 문재(文才)가 매우 뛰어났다.
  102. 102)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 자(字)가 자건(子建)으로 문장에 뛰어나 한(漢)ㆍ위(魏)ㆍ육조(六朝)의 사람들이 대부분 「자허상림(子虛上林)」 등의 부(賦)를 모방하였다.
  103. 103)삼국시대 위나라의 응거(應璩)와 진나라의 육기(陸機)의 동생 육운(陸雲)이다. 모두 시부(詩賦)에 능했다.
  104. 104)장은 진(晉)나라의 장화(張華)를 말한다. 초료부(鷦鷯賦)를 지었는데, 완적(阮籍)이 그것을 보고 왕을 도울 재주가 있다고 탄식하였다. 진(晉)나라의 의례나 헌장 및 조고(詔誥)는 대개 그가 초안을 잡았다. 무제 때 중서령이 되어 오(吳)를 벌하는 데 공을 세워 광무후(廣武侯)에 봉해졌다. 조왕륜(趙王倫)에게 살해되었는데, 죽을 때에는 집안에 남은 재산은 없고 단지 문사(文史)의 책 상자만이 넘쳐났다고 한다.
  105. 105)장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 위에서 노닐며 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그 즐거움을 알았다고 한다.(『장자』 「추수(秋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