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모든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삶에 애착(愛着)하나니, 위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로부터 아래로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죽어야 하는 것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런 까닭에 선서(善逝)께서 사안(事案)에 따라 자비(慈悲)를 베푸시어 유정[含識]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시고, 자기의 몸[內身]을 생각하듯 중생들에게도 그렇게 칼이나 무기를 덧붙여 사용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대비심(大悲心)으로 법의 교화를 선양하셨으니 생명을 지키기를 지극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이치에 상응하게 행동하며 벌레가 있는가를 살펴서 물을 걸러 사용하는 것이 출가한 사람의 중요한 몸가짐[要儀]이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면 목숨을 보존하고 지켜 주는 것이 자비심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이다. 이미 벌레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율문(律文)에서는 방생기(放生器)1)를 만들도록 하였으나 단지 서쪽 인도(印度)에서만 오래도록 시행(施行)하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지, 동하(東夏:中國)에서는 처음부터 알지 못했으니 이런 까닭에 반드시 그 의궤(儀軌)를 자세히 설명해야 하겠다. 만약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밝게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생기는 구리ㆍ철ㆍ질그릇ㆍ나무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질그릇은 손잡이를 안전하게 하며[安鼻] 철과 나무도 이에 준해 만든다. 만약 몸에 지니고 다니려고 하면 구리로 만들어도 되나 오직 두 되[升], 세 되 정도의 물만 담아야 하니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작은 구리 관자(罐子)2)가 이것이다. 다시 구리 계[系]를 만들어 붙이는데 계의 고리 안으로 손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밑바닥 한쪽 곁에 구리로 된 꼭지[鈕]를 달아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 끝으로 잡을 수 있게 한다. 걸식(乞食)하러 갈 때에는 계의 고리를 왼쪽 팔에 걸고 옷으로 덮어 가리며 오른손으로 발우를 든다. 걸식을 마치고 나면 임의대로 한 집에 이르러 밥이 든 발우를 놓는다. 자신이 대략 젓가락 두께 정도의 깨끗한 줄 한 가닥을 우물의 깊이에 따라 관자(罐子)에 묶어 물을 퍼서 촘촘한 망[小羅]으로 거른다. 처리가 끝나면 줄의 나머지 한쪽 끝을 꼭지를 거쳐 계에 재빨리 묶어 들어 올리고 계를 작은 철갈고리[鐵鉤]에 묶는다. 갈고리와 게를 들어 올릴 때에는 흔들리지 않도록[平穩] 애쓰며, 걸러낸 것을 모두 전에 담아 두었던 그릇에 넣으면 작업이 끝난다. 만약 그 때에 전에 담아 두었던 그릇을 찾을 수 없으면, 촘촘한 망으로 벌레를 덮고 관자에서 천천히 우물에 놓아 준다. 물에 닿으면 갈고리를 느슨히 해서 줄을 빼내어 관자가 뒤집어지도록 하고 두 번 세 번 밑으로 내려서 씻은 후에 비로소 우물에서 관자를 끌어올린다. 이것이 걸식할 때의 의궤이다. 혹 구리 주발이나 옻칠한 나무 밥그릇에 구멍을 뚫어 계를 붙여서 사용하거나 저울추를 사용해도 된다. 만약 사찰 안에 있다면 늘 철 관자[鐵罐]에 담아 그 위를 앞에서와 같이 덮어서 안치하고 잠시 한적한 곳에 둔다. 철관자의 밑바닥 한쪽 곁에 철 갈고리[鐵鐶]를 붙이되 세 손가락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철관에 붙은 철 갈고리의 안쪽에서 앞에서와 같이 계에 철구를 묶고 그 안에 있는 벌레를 덮은 후에 풀어 주어 물로 보내야 한다. 가령 깊은 우물이라면 풀어주어도 괜찮으나 만약 따로 줄이 쌓여 쓸데없이 물을 흐리게 할까 걱정스러우니 우물이 깊으면 따로 물동이에 담아 두었다가 강이나 연못이나 흐르는 물에다 놓아 준다. 마치고 나면 다시 반드시 용기를 씻어야 하니 이것이 방생법이다. 거르는 망의 양식(樣式)은 다른 곳에서 말한 것과 같으나 어찌 우물의 입구 위에서 망이 펄럭이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본래 방생기를 갖고 있지 않으나 생명을 보호하는 계[護戒]를 이어받으려 하면 벌레가 없는지 정성스럽게 살펴보아야 하니, 여래(如來)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제정된 계율과 죄(罪)에는 성계(性戒) 또는 성죄(性罪)3)와 차계(遮戒) 또는 차죄(遮罪)4)가 있다. 차계 또는 차죄는 사건[事]에 의거한 것으로 경계(輕戒) 또는 경죄(輕罪)에 해당하며, 성계 또는 성죄는 이치[理]에 상응하는 것으로 중계(重戒) 또는 중죄(重罪)에 해당한다. 성죄 중에서는 살생(殺生)이 맨 처음이 되니 이런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은 특히 생명을 보존하고 지켜 주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가벼이 여기면 다시 어떤 것을 중(重)하게 여기겠는가? 만약 가르침에 따라 행하면 현세(現世)에 장수하는 과보를 받고, 내세엔 반드시 정토(淨土)에 태어나고 또 신주(神州) 땅[中國]의 사백여 개의 성(城)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한 번 움직일 때에 만 가지 생각을 하여야 하나 물을 거르는 일에 마음을 두는 이가 적은 것은 세속 일상생활에 젖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벼이 보는 것이다. 한 집 한 집 문 앞에 이르러 말로 전해 주기도 불가능하니 모든 수행인은 서로에게 가르쳐 주고 몸에 익히기를 바란다. 설사 삼장(三藏)을 배워 통달하고, 앉아서 사선(四禪)을 증득하고, 망상을 억제하여 생기지 않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공(空)의 이치를 통달하였더라도, 만약 생명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가르침대로 받아 지녔다 해도 목숨을 마친 후에 십악(十惡) 중의 첫 번째 죄인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부처님의 꾸짖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죄를 누가 대신해서 받아 주겠는가? 또 만약 도살업자(屠殺業者)가 양을 끌고 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몇 마리에 불과하더라도 놓아 주어 오래 살도록 하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서 손가락을 튀기며 훌륭하다고 칭찬할 것이다. 정녕 방 안에서 쓰는 물로도 날마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죽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미 알았거든 가르침[理敎]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그물을 촘촘하게 하여 자세히 살피고서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게 하고 다른 중생들도 이롭게 하며, 잘 지키고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을 시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는 것은 작은 이익을 욕심내어 구하느라 큰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뭍이나 뭍에서 모두 무수하게 생명을 해치고 죽이니 이러한 죄와 허물을 어찌하려 하는가? 저승문[泉門]에 이르면 속수무책으로 다른 이의 처분에 맡겨지게 됨을 곧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살생한 사람은 반드시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에 떨어지며, 설사 사람이 되더라도 수명이 짧고 병이 많으리라”라고 하였다. 슬프도다, 이러한 괴로움을 누가 받아야 하는가? 태어나고 죽음에서 벗어남[脫有]을 이룬다면 훌륭하고 훌륭한 일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말할 수 있으나 모두 함께 자애로운 생각으로 인(因)을 엮어 미륵(彌勒)부처님께서 처음 성도(成道)하실 때 무생과(無生果)를 함께 증득하도록 하라. 자세한 것은 별전(別傳)과 같으니 여기에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