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원(玄元)한 대도는 진리를 포함함이 심원(深遠)하고, 【註】현원은 허극(虛極)의 묘한 근본이자 천지의 원정(元精)으로서 맑고 담박한 일진(一眞)이 응연(凝然)하여 본래부터 적멸하다. 그런 까닭에 노자(老子)는 그 지극한 도를 종지로 삼아서 오천언(五千言)의 가르침을 베풀어 허무의 도를 자루 속에 넣어 묶었으니, 심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소요(逍遙)의 지극한 논의는 그 이치[義]의 관통이 정밀하고 미묘하다. 【註】소요는 속박에서 풀렸음을 칭한 것이니, 그 충허(沖虛)하고 광달(曠達)한 뜻은 큰 붕새가 아득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지인(至人)이 무위(無爲)의 세계에 노닐며, 스스로 터득한[自得] 마당에다 뜻을 자유롭게 하며, 사물마다 구별하여 그 성품에 맡겨서 마침내 삼무(三無)와 묘하게 계합하고 육합(六合)에 두루 화(化)함으로서 경박한 풍속을 순박한 기풍으로 회복시키고 있으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정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상질(緗帙)1)에 관심을 두어 【註】만기(萬機)를 관장하는 여가에 책을 펼쳐놓고 보시니 비록 한무제(漢武帝)가 초저녁에 책을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보다 더하지는 않다.
삼분오전(三墳五典)에 대해 자못 그 귀착점을 알게 되었고 【註】삼분(三墳)은 삼황(三皇)의 책이다. 삼황의 도는 오제(五帝)보다 위대하다.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책이다. 오제(五帝)의 도는 항상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란 모두 그 귀착점을 통달해서 그 요체의 묘함을 다한 자이다.
금궤(金匱)와 옥함(玉函)도 또한 그 현묘하고 심오함을 탐구하였다. 【註】금궤와 옥함은 태공(太公)과 황석공(黃石公)이 저술한 비법(秘法)이다. 이 책들은 모두 육도삼략(六韜三略)과 부국안민(富國安民)과 양생연신(養生鍊身:생기를 기르고 몸을 단련함)을 논한 책으로 기지(機智)와 권모(權謀)가 긴요하고 묘하다. 비록 그늘이 내용에 동계(洞契)하였으나 그 모두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였다.
일찍이 과인이 우매해서 도를 통달하지 못한 탓에 물가와 낭떠러지를 헤아리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이 노래의 표제를 발해서 명백하고 평탄하기를 바란 것이다. 【註】무릇 지극한 도의 극치를 밝히고자 했기 때문에 소요(逍遙)의 노래를 지어서 제왕의 생각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도를 이루고서도 그것을 주재(主宰)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고 낮췄으니 더욱 빛난다. 그리하여 드디어 망측(罔測:헤아리기 어려움)이라고 말하고, 여전히 서기(庶幾:바란다)한다는 말을 빌리고 있으니, 이 때문에 노자(老子)는 “강과 바다가 능히 온갖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훌륭히 아랫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무릇 도의 묘함은 오행을 능히 운용하여 변화할 수 있고 【註】도는 본래 비고 고요해서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고, 그 묘함이 펴고 거두어들임에 있어서 변화를 이룬다. 이 때문에 하늘에 있으면 오성(五星)이라 이르고 만물에 있으면 오행이라 이르니, 경위(經緯)의 이륜(彛倫:常道)으로서 만물을 불러 소생시킨다.
삼재를 변통할 수 있다. 【註】삼재(三才)가 상(象)을 드러내면 모두 그 도를 따르며, 도의 변화가 무궁해야 비로소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 도가 되는 것이다.
호랑이가 휘파람 불면 용이 읊조리고, 양(陽)이 부르면 음(陰)이 화답하니 【註】이는 지극한 도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밝힌 것이다. 용은 물에 사는 축생이며 구름은 물의 기운이다. 호랑이는 음물(陰物)이며 바람은 음정(陰精)이다. 무리끼리 서로 불러 서로 부합하기 때문에 『주역』에 이르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라 하였으니, 바로 그 뜻이다.
그 비밀의 신령스럽고 밝음[神明]을 궁구하면 정상(情狀)을 분별할 수 있고 【註】도의 비밀은 정신이 온전하고 형체가 갖추어져서 바탕[體]과 사물이 명합(冥合)한 것이다. 사물이 발전하는 처음과 끝을 추구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을 다해서 그 정상을 추궁한다면, 어떤 심오한 이치라도 통달하지 않겠는가?
그 정수(精粹)의 강함과 부드러움[剛柔]을 추구하면 저절로 이간(易簡)에 부합한다. 【註】툭 트여서 간격이 없고[廓然無間] 오묘한 극치는 크게 비어 있다[太虛]. 낮과 밤이 이것으로써 어둡고 밝으며, 추위와 더위가 이것으로 인하여 오고 간다. 그런 까닭에 하늘은 강하고 땅은 부드러워서 스스로 이간(易簡)의 도리에 합치하며, 작위하지 않아도 훌륭히 시작되고 애쓰지 않아도 훌륭히 이루게 된다. 진실로 도의 지극히 미묘한 작용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를 소상히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혹한 자는 자기 몸을 닦는 데 우매하여 이단(異端)을 파고들면서 학을 타고 봉황새를 타길 기다린다. 이는 마치 바람을 매어 두고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註】몽매한 사람은 지극한 도를 통달하지 못해서 신선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시끄러운 진세(塵世)를 되돌아보면서 (세상을) 버리고자 하는데, 혹은 쟁반을 설치하여 이슬을 받기도 하고, 혹은 대(臺)를 쌓아 하늘과 통해서 봉황새와 학의 등에 올라타기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마치 바람을 매어두고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아서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노자가 설한 오천자(五千字)의 취지도 오히려 신선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註】노자가 저술한 오천언(五千言)도 또한 신선의 일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다만 도의 현묘한 극치를 드러내서 참 근원[眞源]에 돌아가려고 했을 따름이다.
장주(莊周)의 구만 리(九萬里)의 이야기는 그 이치가 더욱 말과 상(象)을 초월하였다. 【註】『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북명(北溟)에 물고기가 있으니, 화해서 붕새가 되면 구만 리를 한 노정(路程)으로 삼고 여섯 달에 한 번 쉰다”고 하였다. 이는 그 지극히 큰 것을 들어 지극히 미세한 것을 유비(類比)한 것이니, 모두가 제물(齊物)의 이치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일[事]은 정미(精微)함과 계합하고 이치[理]는 언어와 상(象)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참되도다, 장자가 논한 바여! 진실로 지극한 도의 중추적인 요체[樞要]이며, 소요(逍遙)의 오묘한 종지[妙旨]로다.
선현들은 영탈(穎脫)하여 모두가 도를 알면서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註】예전부터 도에 통달한 사람은 이미 도가 나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런 까닭에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속이는 말이 아니다.
용렬하고 어리석은데다 곤경에 처한 몽매[困蒙]한 사람이 어찌 안연(顔淵)을 흠모하면서 학문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註】범용하고 어두운 사람이 함부로 신선을 배우려 하는 것은 안자가 되기를 희망해서 아성(亞聖)과 가지런히 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하니, 어찌 허황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날 진시황은 사견(邪見)에 미혹되어 부질없이 봉래(蓬萊)를 바라보았고, 【註】진시황은 사술에 미혹되어 도덕을 닦지 아니하고, 함부로 신선을 배워서 세상을 제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복(徐福)을 저 봉래산으로 파견해서 영약(靈藥)을 캐오게 하였으나, 서복은 그 약을 구할 수가 없어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까마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무제(漢武帝)는 백성의 힘은 가볍게 보았으면서도 원교산(員嶠山:신선이 사는 산)을 찾기를 바랐다. 【註】한무제는 정신과 지혜가 홀로 영특하고 비할 바 없이 영준하고 용감했다. 특히 방사(方士)를 좋아하여 산악에 기도를 드렸는데, 그 후 감응이 일어나 서왕모(西王母)가 황제의 궁전에 내려와 육갑진생(六甲辰生)의 비결을 전수하였다. 이에 스스로 반드시 신선의 품계[仙品]에 오를 것이라 생각해서 백성들을 초개(草芥)처럼 보고 대관(臺館)을 높고 가파르게 쌓아 니륙(坭戮)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신선의 세계로 오르는 훈계[誡]를 잃게 되자 원교산의 영험을 찾기를 바랐다.
이는 다 인덕(仁德)을 닦지 아니하고 이익을 구하고 탐욕을 좋아한 것이다. 【註】지위를 지키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생(生)을 좋아하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이미 백성들의 힘이 다하였는데 다시 선유(仙遊)의 세계를 그리워해서 수레바퀴를 나란히 하여 월(越)나라로 갔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이 대부분 떳떳하지 못한 것이었으니, 참으로 크게 한숨 쉴 만한 일이로다. 【註】일에서 옛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아니하고 행동이 경전의 가르침을 벗어나서 백세 뒤에 이르기까지도 이 허물은 없어지지 아니하니,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다.
지금 말한 것은 거의 도리에 가까운 것이니라. 【註】태(殆)는 가깝다는 뜻이며, 서(庶)는 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지은 시(詩)에서 혹 음양을 상징한 것은 건곤(乾坤)을 법칙 삼아서 묘리를 펼치기도 하였고, 혹 금수(金水)를 밝힌 것은 이감(離坎)을 법으로 삼아서 현묘함을 이야기하기도 하였고, 노자와 장자의 청정한 먼 발자취를 뒤쫓기도 하였고, 헌원씨(軒轅氏)와 복희씨(伏羲氏)의 순박하고 근원적인 절궤(絶軌)를 이어받기도 했다. 이처럼 지도(至道)와 가까워서 대방(大方:대도)을 즐거워하였으나 또한 저 신선의 술법을 사모한 것은 아니다.
혹 가깝게는 이를 몸에서 취하기도 하였고, 【註】혹 안으로 순수하고 온화한 기(氣)를 길러서 진일(眞一)한 마음을 고요히 닦고, 행동이 신령함의 근원[靈源]에 합치하여 모두가 묘한 근본으로 돌아갔다.
혹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기도 하였으니, 【註】혹 일정(日精)과 월화(月華)와 연수(鉛水)와 금액(金液)으로 그 상(象)을 의탁하여서 그 말을 이루었다.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을 한 길만 집착해서는 안 되며, 【註】그 이치를 궁구하면 반드시 이르는 곳이 있고, 그 진리에 이른 사람은 곧 천하의 임무를 이룰 수 있다. 적시에 변화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은 기미(幾微)에 속하는 일이다. 또한 어찌 한 길만을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 언표의 뜻은 한 가지 이치로만 구해서는 안 된다. 【註】그 뜻을 따져보면 반드시 언표에 인하니, 그 뜻을 언표한 사람은 곧 천하의 뜻[志]과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을 궁구하고 조화의 극치[窮神極化]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 깊이에 있다. 또한 어찌 한 가지 이치로만 이를 구할 수 있겠는가?
깊은 진리를 탐구하면 그윽하고 미묘하여, 【註】탐색(探索)의 묘함은 그윽한 곳에 통하고 미묘한 것에 훤한 것이다.
법도를 참작해서 자세히 살피게[參詳] 되니, 【註】극치의 사유(思惟)는 규구(規矩)와 법도를 참작해서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를 보면 지혜라 생각하고, 어진 사람은 이를 보면 인(仁)이라 생각한다. 【註】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요(逍遙)의 참뜻을 보게 한다면 움직임이 다함이 없을 것이고, 어진 사람이 소요의 도를 얻게 된다면 무위의 세계에서 담박할 것이다.
현람(玄覽)함으로써 삼청궁(三淸宮)을 비출 수 있고 【註】상청(上淸)ㆍ옥청(玉淸)ㆍ태청(太淸)을 삼청이라 말한다. 현람은 마음으로 비추는 것이다. 혼연한 진심(眞心)이 환하게 현묘히 비추어서[玄照] 저 삼청궁 위를 뛰어넘는 것이다.
두루 행함으로써 만유(萬有)에 통할 수 있다. 【註】서둘지 아니하고도 빨리 이르게 되고, 조짐이 생기지 아니하고도 싹이 트는 법이다. 인지(仁智)의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곳과 동정이 일치하는 곳을 이미 두루 행하여 걸림이 없으니, 또 어찌 만유(萬有)라 해서 통하지 못하겠는가?
무릇 시(詩)ㆍ송(頌)ㆍ가(歌)ㆍ사(辭)는 꽃만 화려하지 열매가 열지 아니하니, 【註】일반적으로 논한다면, 그 실제에 힘쓰지 않을 경우 그 허화(虛華)에 상하게 된다.
위로는 당시의 정사[時政]에서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기에 부족하고, 【註】시정의 근본은 힘써 그 실(實)을 구하는 데 있다. 반드시 화려한 말만 숭상하게 되면 끝내 보탬이 없다.
다음으로는 창생의 병폐를 구제하기에 부족하니, 【註】저 백성들을 모두 부(富)와 수(壽)에 오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의리가 도의 근본에 있어야 한다. 반드시 저 허황한 언사만을 숭상한다면 참으로 창생들의 병폐를 구제하기에는 부족하다.
가령 홀로 그 이름을 독차지한다 하더라도 쓰임[用]에 정밀하지 아니하면, 【註】언사(言辭)란 만물의 정(情)에 통하는 것이다. 가령 그 술작(述作)2)의 이름을 독차지하더라도 그 술작의 쓰임[用]에 어둡다면, 이른바 꽃은 번드르르하나 열매가 부실한[華而不實] 것이다.
그 내용은 그림의 떡과 같으니, 버려라. 중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註】문채가 찬연하고 형용이 엄연하다 하더라도 다만 눈을 즐겁게 할 만할 뿐 어찌 창자를 메울 수 있겠는가? 참으로 중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어찌 지당한 말을 세워서 시세(時世)를 제도하는 것만 하겠는가? 【註】성인의 뜻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뜻을) 상(象)을 통해 관찰하고 말로 형용해서 시대의 요구에 응하고 세상의 소망에 합치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정성과 지당함에 있으며, 그 묘함은 장생(長生)에 있다.
그런 까닭에 잠시라도 이치에 부합하는 데 힘을 쓰지 글을 취하지 아니하여 【註】또한 저 참되고 유일한 진리와 계합하는 데 힘쓴 까닭에 화려한 글을 취하지 아니한 것이다.
저 곧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겨서 속박의 해탈[懸解]을 깨닫게 한 것이다. 【註】저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겨서 옛것을 좋아하고 박식하고 고아한[好古博雅] 토대 위에 속박에서 해탈하는 소요의 참뜻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어제소요영(御製逍遙詠) 제1권
소요하면 말과 침묵을 알고 逍遙知語默 【註】성인이 다스리는 진리는 사물에 막히지[凝滯] 아니하고 가르침[敎]에 집착[封執]하지 않아서 말을 해도 도와 합치하고 고요함을 지켜도 진실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과 침묵이 일치해서 소요하며 자적(自適)하는 것이다.
경계 밖에서 진공을 본다. 境外見眞空 【註】진공의 지취(旨趣)는 티끌 경계[塵境]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름지기 마음을 묘명(杳冥:높고 원대함)한 경지에 노닐게 하여 물상(物象)에서 정(情)을 잊으면, 묘용이 가이 없어서[無際] 면면히 고금에 이어질 것이다.
지위에 있으면 모두 현묘히 감응하나 有位皆玄感 【註】비상(非常)한 지위에 처해서 비상한 도를 밝히면, 모두가 위로는 현묘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온갖 품류[庶品]에 순응한다. 그런 까닭에 즐거움을 미루게 해서 복을 길이 보전하게 하는 것이다.
인연 없으면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 無緣不用功 【註】묘함은 본래 비고 고요하다[沖寂]. 이를 닦으면 인연에 기대게 되지만, 그 가운데 혹시 참 성품이 아직 밝지 못해서 번뇌의 마음[塵心]으로 아직 막혀 있다면, 설사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삼는 것[用事]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헛된 수고일 것이다.
뜻으로 삼재의 이치를 설하고 義說三才理 【註】천지가 부판(剖判:개벽)하니 인륜이 이에 의지하게 되었고, 순박한 풍속이 아름다워지니 예교(禮敎)가 이에 드러나게 되었다. 삼재가 자리 잡게 되면서 만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윽하고 깊게 만사에 통한다. 幽深萬事通 【註】극히 깊게 기미를 연구하고 비밀한 곳에 물러나 갈무리[退藏]한다. 이것이 곧 도체(道體)의 그윽하고 미묘함이다. 비록 만물을 융통성 있게 다스린다[通濟] 해도 날마다 쓰면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법칙으로 삼을 만함을 의지하기 때문에 因依堪法則 【註】『도덕경』에 이르기를 “옛날의 도를 잡아서 지금의 유(有)를 통어(統御)한다”고 하였다. 대개 무위의 교화[化]를 행함으로써 유위의 풍속을 다스리며, 이를 모범으로 하여 법칙으로 삼는다면 어찌 순수하고 소박한 풍속이 회복하지 못하겠는가?
높은 하늘을 향해 사의를 표한다. 答謝向旻穹 【註】하늘의 은혜 없는 큰 은혜가 생겨나는 까닭에 만물을 추구(芻狗)로 삼으니, 대체로 그 보답을 따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땅 안에서는 비록 크게 존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높은 하늘을 머리 위에 받들고 있는 것이다.
대도와 허무의 경계는 大道虛無境 【註】대도는 중화(中和)하고 순정(純正)한 데다 깊이 고요하고 맑게 사무친[凝湛] 하나의 참[一眞]으로서 응용이 자유롭다. 묘극(妙極)에 근본해서 비고 통하는 요체로 현원(玄元)에 다 계합한다.
믿으면 신령함이 있도다. 信之則有靈 【註】상사(上士)가 부지런히 행해서 믿음으로 징험(徵驗)이 있으면, 신령함이 골짜기에 가득해서 훌륭히 도의 작용[道用]을 얻게 된다.
운전함이 일찍이 몇 번이나 멈추었던가? 運轉幾曾停 【註】천지의 권형(權衡)과 묘함은 본래 기(氣)로 나타난다. 만물을 북돋아 길러서[滋養] 그 운전이 무궁한데, 움직일수록 더욱 기가 나오는 까닭에 잠시도 정지한 적이 없다.
구속이 있다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拘束從何益 【註】도가 대종(大宗)으로 삼는 곳에다 소요하면서 성품에 맡기니, 변통이 작용이 되고 비어 있음의 극치가 현묘함[玄]이 된다. 혹 감정에 막히게 되어서 일에 구속과 집착이 있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두루 통하는 세계는 고요하고 묘명하다. 周通靜杳冥 【註】묘명의 이치와 생성의 작용은 만물에 두루 통하면서 활동하든 휴식하든 항상 고요하다.
진공은 모습[相]을 짓지 않으니 眞空非作相 【註】진공의 묘함은 색도 아니고 형체도 아니다. 모습을 취해서 관찰하면 도에 어긋난다.
잘 감응하면 안녕을 보장한다. 善應保安寧 【註】선행으로 복이 많은 공(功)은 감응으로 표현된다. 하늘은 맑고 땅은 편안하며 자연은 장구하다.
나는 스스로 항상 안락하니 我自常安樂 【註】소요의 도는 이치가 희이(希夷:텅 비고 고요하면서도 현묘한 경계)와 계합하니, 그 깊은 근원에 도달하면 자연히 안락하다.
범속한 감정으로 웃지 말라. 凡情勿笑耶 【註】도는 본래 오묘하고 종지는 매우 깊다. 하사(下士)들이 이 도를 듣게 되면 크게 웃기 때문에 훈계한 것이다.
구름은 모든 통부에서 생기고 雲生諸洞府 【註】통부는 모두 신선이 깃들고 숨어 사는 곳이다. 그런 까닭에 구름과 노을이 아득히 멀어서[渺邈] 통부가 아닌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가시에서는 신선의 꽃이 피어나지 아니한다. 棘不放仙花 【註】근성이 이미 다르니, 신선과 범부는 스스로 차이가 난다. 진실로 가시나무의 가시에서는 좋은 꽃을 피어내지 못한다. 이는 무릇 수도하는 사람의 품류(品類)에 차이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땅이 낮으니 삼광2)이 비추고 地卑三光照 【註】땅은 본래 낮고 아래에 있어도 능히 두텁게 만물을 싣는데,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면 공덕은 하늘과 계합하고 삼광의 비춤과 합치한다.
하늘이 열린 곳에 오색의 노을이 있다. 天開五色霞 【註】하늘은 도를 본받고[法]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운용하고 생성하면서도 사물에 막히지 아니해야 비로소 오색의 노을빛이 종횡으로 분포한다.
어느 곳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未知何所是 【註】도는 본래 비고 고요하니[凝寂], 우매한 사람이 어찌 그 근원을 알겠는가? 그런 까닭에 『도덕경』에 이르기를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리라.
거룩한 소원과 진리가 서로 가지(加持)한다. 善願理交加 【註】모든 법 속에서 지극한 이치[至理]를 얻는 사람은 곧 거룩한 소원을 인(因)하게 된다. 원(願)과 진리는 모두 폐(廢)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소요의 이치를 통달하니 我達逍遙理 【註】사물과 접촉해서 막힘이 없는 것을 소요라 하나니, 펴고 거두어들임을 정(情)에 맡기면 곧 그 이치에 통달하게 된다. 이를 따라 작용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직 성인일진저.
음양이 오행을 운용하여 陰陽運五行 【註】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이 동전(動轉)하면서 쉬지 않고 가만히 오행의 기(氣)를 운용하며 천지 운행의 공(功)을 쓴다.
도는 애초에는 하나로부터 변화하고 道從初一變 【註】혼원(混元)한 태극 이전에는 맑고 고요해서 형상이 없었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셋을 낳아서 그 순리(淳离)함은 변하지만 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아니한다.
덕은 삼청과 혼합되었다. 德合混三淸 【註】경박한 기풍을 변화시켜 순박하고 순수한 교화에 귀의하게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상(大上:최고의 존재)은 덕을 건립하였고, 덕이 건립되니 도가 생겨서 오색의 울타리 새장에서 벗어나 삼청(三淸)의 성스러운 경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스러운 경계는 의지하고 기댈 만한데 聖境堪依仗 【註】포일(抱一)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신령함을 궁구해서 성스러움에 들어간다[窮神入聖]. 그런 까닭에 경계가 평소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다시 이보다 무슨 뛰어난 도가 있겠는가? 참으로 의지하고 기댈 만하다.
여우같은 의심을 품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狐疑事不成 【註】일에 결택을 못하고 함부로 미혹된 의심을 일으키면, 마치 여우가 얼음 위를 건너가듯이 머뭇머뭇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많아져서 뜻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니 일도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단은 고아하고 담박한 것을 어기고 異端違雅淡 【註】도의 성품은 비고 담박하다. 이를 지키면 참되지만, 혹시라도 이단을 파고들면 이는 곧 대도와 어긋나는 것이다.
화로 되돌아가서 스스로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返禍自輕生 【註】순수하고 온화하고 고결하지[純和最潔] 못하면 세속에 순응할 것을 듣고도 진리를 배반하게 된다. 진리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면, 화난(禍難)의 계단이 먼저 미쳐서 스스로 그 슬픔을 남기게 되니, 어찌 이것을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소요하는 사람은 학을 끌어 당겨서 逍遙人控鶴 【註】우유자적(優遊自適)하는 지인(至人)은 세상에 구속되지 아니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학의 등을 타고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소요의 막힘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진리에 통달해서 중생(衆生)에게 통하니 達理通含識 【註】사물의 이치는 비어서 통하고[虛通], 도의 성품[道性]은 차별이 없다. 하나로써 관통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허무가 곧 진리로다. 虛無卽是眞 【註】허무의 묘한 근본은 바탕이 본래 진실해서 사물마다 두루 통하니, 어디를 간들 건너지 못하겠는가?
하거를 누가 기꺼이 믿으리오? 河車誰肯信 【註】수명을 연장하는 묘한 술법은 지인(至人)에게 전해지는 것이니, 정기(正氣)인 하거는 참으로 범부 서민의 기가 아니다.
연홍(鉛汞)4)은 본래부터 서로 친근하나니 鉛汞本相親 【註】연홍이 서로 자량(資糧)해서 음양이 함께 이루어지니, 도에서 멀지 않음을 이름하여 상친(相親)이라 하였다.
조화는 모두 이와 같아서 造化皆如此 【註】비었으면서도 무심하고, 움직이면서도 감응이 있고, 만물을 창조해서 변화하고, 공(功)은 하나의 법도를 이룬다.
지금의 연(緣)으로 숙세의 인(因)을 논한다. 今緣論宿因 【註】공덕을 쌓아서 도에 이르러 진실을 보면, 지금의 인연이 본래 숙세에 심겨짐을 말미암은 것을 알게 된다.
어디가 의지하고 기댈 만한 곳인가? 何處堪依仗 【註】하늘을 법 받음이 아비가 되고 땅을 품수함이 어미가 되며, 덕을 활로 삼고 의리를 가죽옷으로 삼으며, 인(仁)으로 관(冠)을 만들고 믿음으로 면류관을 삼으면, 자연히 의지할 만하고 기댈 만하다.
수고로운 마음이 문득 눈썹을 찌푸린다. 經心便皺眉 【註】도로써 천하를 제도하니 공은 하늘과 합치한다. 의롭지 아니한데도 취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어질지 않은데도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분개하니, 그런 까닭에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다.
세간의 정에는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世情多詭詐 【註】여우같은 얼굴과 너구리같은 덕을 지녀서 말과 행동이 어긋나니, 이미 예의의 풍속과는 뒤틀린 사람이라서 인수(仁壽:인덕이 있어서 장수함)의 성(城)에서 살기는 어렵다.
업보가 무거워 어리석은 바보를 믿는다. 業重信愚癡 【註】『주역』에 이르기를 “덕을 실천하는 기초와 덕을 겸양하는 자루는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인(仁)을 숭상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우매한 사람이 얻을 수 있겠느냐?
차례차례로 다른 사람의 비방을 초래하지만 取次招他謗 【註】재능을 드러내 스스로를 추켜올리면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면, 맨 먼저 그 비방을 초래해서 곧바로 뭇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을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違非不自知 【註】노자는 말하기를 “자기를 추켜올리는 사람은 공덕이 없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두렵지 아니하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행이 뒤틀리고 덕이 박해서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모습은 공손해도 덕행은 없으니 貌恭無德行 【註】무릇 지나치게 공손하고 부드럽게 아첨하는 사람은 반드시 밖으로는 예의 바른 얼굴로 나타나지만 안으로는 악행이 넘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얼굴빛은 엄숙하지만 속은 나약하다”고 하였다.
화와 복은 닦아 지니는 데 달려 있다. 禍福在修持 【註】『주역』에서 말한다. “선을 쌓지 아니하면 명성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악을 쌓지 아니하면 내 몸에 부족하다. 소인은 작은 선은 무익하다고 해서 하지 않고, 작은 악은 손상됨이 없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임금이 허물을 고쳐서 닦아 지니는 데 달려 있는 일이다.
허무로 대도를 아니 虛無知大道 【註】허의 극치는 무위(無爲)로서 보고 들음을 끊고 감응해 작용함을 통달한다. 마치 버려진 피리와도 같아서 비었으되 굴하지 아니하고 움직이되 더욱 나오니, 통달해서 묘함을 찬탄함이 이른바 대도를 아는 것이다.
지극한 의사가 유연하여서 極意思悠然 【註】생각[意]의 극치는 이른바 ‘그 상(象)을 잊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정신과 사고가 세속의 밖에서 유연해져서 세태에 구속받지 않는다.
태양에 접근하는 구름 속의 기러기 같고 摩日雲中鴈 【註】도에 이른 사람은 정(情)에 막히는 바가 없고 형상에 얽매인 것이 없어서 마치 기러기가 공중에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하다.
소상강의 물이 하늘과 비슷함과 같다. 瀟湘水似天 【註】소상강의 물은 파랗게 응결함이 하늘과 같다. 하물며 달인의 성품이랴. 그 정(情)이 도와 합치하고 그 상(象)을 잊고 무(無)에 들어가니, 하나를 얻어 혼연함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외로운 봉우리가 원근에서 높은 것과 같고 孤峯高遠近 【註】봉우리가 높으면 멀고 가까운 곳을 확연히 관찰하고, 도가 높으면 유(有)와 무(無)의 세계에 묘하게 들어가서 지나간 일을 통달하고 다가올 일을 아는 것이 손바닥 안의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보배달이 아름답고 둥근 것과 같다. 寶月瑩團圓 【註】달이 둥글 때는 어떤 그윽한 곳도 비추어 밝히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하물며 도를 통달한 선비가 현묘하게 살펴서 두루 통달하게[玄覽周通] 되면 어떤 사물이든 남김없이 비춘다.
신해로 밝게 깨달음을 여니 信解明開悟 【註】지극한 도[至道]는 비고 고요해서 말과 형상[言象]을 초월한다. 신해(信解)가 명백한 사람이 아니면 깊고 오묘한[玄奧] 경지에 대해 깨달음을 열 수 없다.
푸른 하늘이 눈앞에 있네. 靑霄在目前 【註】구중(九重)의 높은 하늘은 아득히 멀어 끝이 없으나, 하나로 이를 꿰뚫어 보면 완연해서 목격하는 것과 똑같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의 일을 알 것이다.
소요의 이름에는 이치가 있어 逍遙名有理 【註】무릇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솔성(率性:성품을 따름)을 도라고 한다. 비록 도에 항상하는 이름[常名]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름에는 항상하는 이치[常理]가 있다. 그래서 일월이 면면히 이어져도 늙지 아니하고 천지를 짝하면서 길이 존재하는 까닭에 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문득 공(空)을 알게 된다. 得一便知空 【註】진일(眞一)의 문을 궁구하면 문득 진공(眞空)의 경계에 다다르게 된다. 무릇 이와 같이 되면 얻어도 얻은 것이 없으니 얻음의 큼[大]이며, 알아도 안 것이 없으니 앎의 지극함이다.
도의 근본은 모두가 깊고 원대해서 道本皆深邃 【註】근원적인 지도(至道)의 유래는 간직하고 받은 기운이 다르고 품수함이 저절로 그러해서[自然] 학문을 쌓아 미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참으로 이른바 ‘깊고 또 원대한’ 존재이다.
평범한 행위로는 쉽게 궁구하지 못한다. 凡爲不易窮 【註】공동산(崆峒山)의 절경은 구차하게 구할 수 없는 것이고, 아득한 진리의 발자취는 힘으로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옥실(玉室:신선의 거처)을 기약하고 뜻이 단대(丹臺:신선의 경지)를 사모함에 이른다면, 평범하게 작위함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궁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품류의 재주는 고아하고 담박하며 品流才雅淡 【註】아침노을을 먹으면서 바탕[素]을 기르고 새벽이슬을 마시면서 정(精)을 기르는 것을 청허(淸虛)라고 말하는데, 참으로 고아하고 담박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품류는 곧 신선의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다.
격물치지[格致]5)한 뜻은 잠잠히 통한다. 格致意潛通 【註】격물치지로 도와 혼연일체가 되고 기관(機關)과 은밀히 계합하니, 뜻[志]이 도를 통해 편안해지면서 마침내 잠잠히 통하게 된다.
세상을 구제하는 법 전하여 서로 이익이 되고 救世傳相益 【註】만년(万年)의 신술(神術)은 자못 세상을 구제할 만하다. 이를 전해서 익히게 되면 성명(性命)의 근원에 복귀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영원히 흘러드는[長注] 발자취를 밟는 것은 이른바 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因)이 이루어지면 팔풍을 따른다. 因成順八風 【註】옛것은 토해 내고 새것은 받아들여서 맑은 정신으로 기(氣)를 인도하여 안으로는 일진(一眞)의 성품을 응결하고 밖으로는 팔절(八節)의 바람을 조절하니, 움직임이 천화(天和:자연의 조화로운 이치)에 순응하면 다함께 묘함의 근본으로 돌아간다.
누가 현묘한 기틀을 지닌 성인을 헤아리겠는가? 誰測玄機聖 【註】현묘한 기틀은 그윽하고 깊어서 범속한 정서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인만이 깊은 도리를 탐구하고 숨은 것을 찾아서 그 탐색이 깊고 멀리까지 가는 까닭에 능히 모든 인장(仁藏)의 온갖 작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공덕과 땅의 장구함은 영원하도다. 天功地久長 【註】천지를 범위로 삼아서 그 이치를 두루 갖추기 때문에 능히 장구케 할 수 있어서 사물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
군생도 모두 이 성품이 있건만 群生皆是性 【註】군생의 무리가 모여도 영위하고 힘쓰는 일은 또한 다르다. 그 사이에는 교묘함과 졸렬함이 짝을 이루지 아니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평등한 것이 아니니, 그 환정(幻情)을 논한다면 차별이 있으나 그 도의 성품을 추구한다면 하나로서 똑같다.
도덕에는 둥글고 모난 것이 있다. 道德有圓方 【註】도란 도에서 함께 하고, 덕은 덕에서 함께 한다. 이는 곧 공용(功用)이 둘 다 온전하고 모난 것과 둥근 것[方圓]이 하나를 이루는 일이다.
곱고 추한 것은 정의를 따르니 姸醜隨情意 【註】도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정(情)이 스스로 곱고 추한 것을 차별한다. 노자가 말하기를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된다고 알지만, 이는 추함일 뿐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아름다움과 선함은 주재[主]가 없어서 둘 다 망정(妄情)이다.
아, 자세히 짐작해 보라. 於戱細酌量 【註】성인이 사람들을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해서[窮理盡性] 무(無)에서 유(有)로 들어가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탄식의 소리를 내서 훈계하고 권유한 것이니, 이는 도를 배우는 무리에게 자세히 살피고 소상히 참조해서 현묘하고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한 것이다.
달인은 담박함을 알아서 達人知淡泊 【註】적료(寂廖)하고 허정(虛靜)한 가운데 맑게 사무치면서 항상 존재하는 도를 달인은 체득하니, 홀로 건립해도 고칠 것이 없고 두루 행하여도 위태하지 아니하다.
묵묵히 비상함을 본다. 默默見非常 【註】비상(非常)한 도는 무욕(無欲)으로 관조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옛 선철(先哲)은 말하지 못하는 믿음을 올바로 행하고 무위의 일과 현묘한 침묵의 견해에 처했으니, 이것이 요체의 묘함[要妙]이다.
도덕을 누가 분별하는가? 道德誰分別 【註】덕은 도의 작용이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연유하면, 갈래는 달라도 근원은 같아서 분별이 없는 것이다.
소요하는 나는 자유이다. 逍遙我自由 【註】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마당에 마음을 풀어놓으니[放心], 외부의 사물이 그 속에 침노할 수 없어서 나는 자유이다.
시대의 사정을 사람들은 통달하지 못하고 時情人不達 【註】도를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이 쓰면 나머지 사람들이 듣지 못하지만, 천하가 쓰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사람들이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깊은 이치는 서로 투합하는 일이 적다. 深理少相投 【註】도라는 것은 그윽함[幽]에 통하고 미묘함[微]에 밝은 현묘함[玄]이다. 무릇 그 묘함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투합하는 경우가 적은 것이다.
이미 이것은 끝내 무익한 일이니 已是終無益 【註】수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능한 것만 믿는다면, 노자가 “스스로 보는 사람은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는 사람은 드러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처럼 끝내 이익이 되지 않는다.
남이 머물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非他作逗留 【註】그 입을 다물지 아니하니 남에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비단 이치에 어긋나고 사물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도와의 거리도 까마득히 멀어진다.
어찌하여 하는 일이 각각 다른가? 奈何爲各異 【註】달사(達士)와 미혹한 사람은 심정과 회포가 각기 다르다. 군자는 도에 의지하고 소인은 이익을 따라가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정해지지 아니하였는데 또 문득 쉬는구나. 未定復還休 【註】마음이 아직도 머뭇거리면서 부지런히 행할 수 없는데도 반복해서 이를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나태함이 생기게 된다.
심오한 뜻은 현묘한 조화에 통하고 奧義通玄化 【註】무릇 지극한 도[至道]는 깊고 원대해서[沖邈] 깊은 뜻에 싸여 있다. 그런 까닭에 능히 묘유(妙有)에 통하고 현묘한 조화와 화합하는 것이다.
정은 미묘해서 신에 들어간다. 精微妙入神 【註】묘명(杳冥)한 정(精)은 은미함에 통하고 묘함에 감응한다. 무릇 비어 있음의 극치[虛極]를 잘 궁구함으로써 하나를 얻음을 밝히니, 신(神)이 그 신령함을 전수하여 응용이 다하지 아니한다.
공의 과정은 뜻의 염원을 따르지만 功程隨志願 【註】공과 덕을 쌓아서 묘도(妙道)로 나아가고, 행이 염원의 감응을 따르면 보응이 이에 밝혀진다.
깎아 내리는 것은 진실을 배반한다. 貶降背於眞 【註】도는 본래 말이 없으나 말에 의지하여 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옳고 그름으로 상(相)을 취하거나 혹은 깎아내림으로써 감정에 구속되면, 움직이는 생각이 참[眞]과 어긋나서 도를 배반한다.
고요한 침묵은 법으로 삼을 만하고 靜默堪爲法 【註】고요한 침묵의 묘한 뜻[妙志]으로 오직 고요함을 지키면, 일을 법도 있게 지닐 수 있어서 진리와 계합한다.
말없이 일과 친할 수 있다. 無言事可親 【註】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아니하는 소리로서 말없이 도와 계합한다. 보편적인 진리[理]와 개별적인 일[事]이 모두 적멸하고, 작용이 쉬고 정신이 투명해지면서 오직 덕만을 닦기 때문에 친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을 만나서 구결을 전수받아 逢師傳口訣 【註】현원(玄元)의 비밀스런 종지[秘旨]는 그 묘함이 유(有)와 무(無)를 벗어났다. 삼(三)에 존재하는 뜻을 이미 극(極)하니, 하나를 얻는 근원을 궁구할 수 있다.
금과 옥이 먼지로 변하였네. 金玉變埃塵 【註】부(富)는 탐욕이 없는 것보다 더한 부가 없고, 귀(貴)는 득도하는 것보다 더한 귀가 없다. 도를 이미 얻을 수 있다면 마음은 짐짓 탐욕이 없어지니, 금과 옥을 먼지처럼 본다는 것이 참으로 믿을 수 있다.
맑고 고요함은 진공의 이치이니 淸靜眞空理 【註】묘함의 근본은 무극(無極)이니, 이를 지목해 청정이라 한 것이다. 먼지와 찌꺼기에 오염되지 아니하니, 이것을 진공이라고 말한다.
해득한 사람 없지는 아니하나 어렵다. 不無解者難 【註】지극한 이치[至理]는 아득히 끝이 없어서 물건[物]은 있어도 형체가 아니다. 그래서 배우면 날로 더해지고 도(道)를 하면 날로 줄어드니, 어찌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종횡으로 성품을 봄에 의지하고 縱橫依見性 【註】사물에 막히지 아니하고 작용에 맡겨 자유로우니, 그것을 훤하게 밝힐 수 있어서 성품을 보는 데 의지한다.
텅 빈 고요를 지혜 가운데서 관조한다. 廓落智中觀 【註】진리는 본래 고요하고 확 트였지만, 지혜 있는 사람이 통달하면 손바닥 안의 물건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탕탕하게 인덕의 세계로 돌아가서 坦蕩歸仁德 【註】지극한 도[至道]는 현묘하고 원대하며 탄연(坦然)하고 관대하다. 드리운 상(象)과 보이는 변화를 사람들이 법칙으로 삼을 수 있으면 모두가 인덕의 세계로 돌아간다.
수고롭지만 부지런히 구원한 세계를 본다. 辛勤久遠看 【註】부지런한 마음으로 도를 사모하고, 뜻을 세워 진리를 희구한다. 하루아침에 초조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도가 구원한 세계에 존재한다.
역순이 되게 하지 말라. 勿敎爲逆順 【註】역(逆)은 곧 이치에 어긋나고 도를 배반함이고, 순(順)은 곧 음을 등지고 양을 껴안음이다. 지금 제도(制度)에 허물이 없고 수양은 시절에 순응하니 환히 빛나게 됨을 알 수 있다.
평지가 구름 끝에 들어간다. 平地入雲端 【註】기(氣)를 몰고 허(虛)를 타는 일은 도의 성취에 달려 있다. 공(功)이 드러나면서 채워지고, 덕이 하늘과 합치하고, 인(仁)으로 서품(庶品:만물)을 도우니,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것도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하늘과 땅은 항상 운행하고 돌면서 乾坤常運轉 【註】건(乾)은 굳건하고 곤(坤)은 부드러우면서 각기 그 작용을 잊고, 낮에는 다니고 밤에는 돎으로써 그 공을 이룬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동남이며 지도(地道)는 서북인데 운행하고 도는 일을 쉬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다.
올올하게 중생들을 본다. 兀兀見衆生 【註】온갖 종류의 생명이 천지에 두루하면서 다 음양의 복도(覆燾:은혜를 베풂)를 받고 모두 조화의 발생을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올올도도(兀兀陶陶)6)해서 날마다 작용하는데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을 이롭게 하여 끝내 서로 감응하고 利物終相應 【註】안으로 올바름을 지키고 밖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해서 두루 중생(衆生)들을 양육하고 널리 온갖 품류(品類)를 사랑하니, 반드시 똑같은 소리는 서로 감응하여 대도와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
행위를 하는 데 긴요하고 정밀하기를 원한다. 施爲願要精 【註】입신하여 일을 행하고자 하면 자기 욕망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모름지기 큰마음을 일으켜서 만물을 이롭게 하고 시위(施爲:행위)로 작용해야 하기 때문에 정근(精勤)함이 필요하다.
몸이 고달프다고 어찌 은둔한 채로 身慵何隱遁 【註】혹은 홀로 자기 한 몸만 잘 보전하고 중생 제도에는 게을러서 산야로 물러나 적료(寂廖)한 경계를 사모한다면, 이는 곧 하늘과 땅의 깊은 인덕(仁德)을 어기고 은둔의 작은 도를 행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말솜씨만 부질없이 종횡하는가? 舌辯謾縱橫 【註】혹은 교묘하고 뛰어난 말솜씨로 입만 분주하고 마음이 아닌 사람은 실질적인 이익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없이 허식(虛飾)만이 자기에게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끝내 말하지 못하는 이치를 어기고 부질없이 종횡의 기연만 베풀게 된다.
종성은 진리에 귀의하고 種性歸眞理 【註】사람의 품성은 오직 같지 않음이 있으나, 지극히 진실하게 담론을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육비(六非)에서도 선한 것을 취하니, 진리를 향하지 아니하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인연에는 무겁고 가벼운 차이가 있다. 因緣有重輕 【註】함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처하여도 이 사람에게 차이를 논하게 된다. 인(因)을 닦아 기반이 건립되면 이미 선악의 차별이 있게 되고, 자질과 성품을 품수하면 마침내 무겁고 가벼운 차이가 있게 된다.
선경은 한정된 뜻이 없고 仙經無限意 【註】단대(丹臺)의 묘결과 옥간(玉簡)7)의 영서(靈書)는 무릇 진(眞)을 닦는 데서 얻게 되는 것이니, 양소(養素:본성의 수양)의 방법만이 어찌 홀로 신령하겠는가? 허공을 타고 구름 위를 걷는 비밀스런 종지는 자부(紫府)8)에 비장된 것인데 그것을 어찌 엿볼 수 있겠는가?
용호는 단사(丹砂)로 되돌아간다. 龍虎返丹砂 【註】양(陽)인 용과 음(陰)인 호랑이의 두 기(氣)가 번갈아가며 운행해서 큰 약(藥)을 이루면 힘이 신(神)과 같이 빠르게 된다.
끝내 세월이 더디 가기를 기대한다. 終期歲月賖 【註】조균(朝菌)9)의 촉박함을 바꾸어 대춘(大椿)10)의 나이에 참여함으로써 항아리 속의 해와 달을 볼 수 있고,11) 사물 밖의 풍진[物外風塵]이 모두 지극한 도로써 궁진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구하는 것은 모두 반응이 있으니 求來皆有應 【註】공덕과 행이 서로 도와서 이로 인해 함께 구제되면, 뜻은 반드시 신(神)의 도에 감응하고 소리는 반드시 메아리의 이야기에 반응하니, 그 미래가 드러나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면 진실로 자랑하기 어렵다. 不信固難誇 【註】불교는 믿음을 공덕의 어머니로 삼고, 유교는 믿음을 경행(景行:고매한 덕행)의 우선으로 삼는다. 그런데도 오히려 의심하거나 막혀 있다면 진실로 가르쳐서 인도하기가 어렵다.
한가하고 맑은 경계를 바쁘게 말하나 忙說閑淸境 【註】아낌없이 발휘해서 몽매함을 열면, 삼청(三淸)의 뛰어난 경계를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다.
진리와 성실을 몇 집이나 깨달았는가? 眞誠悟幾家 【註】믿음은 반드시 중(中)을 말미암고 말은 반드시 경전에서 구하니, 진실하고 성실해서 거짓이 없다면 온갖 행동이 의지할 수 있다.
양과 음이 화합하려면 陽與陰和合 【註】단경(丹經)인 『참동계(參同契)』에서 말하였다. “음은 도의 터전이며 양은 형체의 시초이다. 그런 까닭에 양은 음으로 인해 존재하고, 음은 양을 품수하여 잉태하니, 능히 만물을 자양(滋養)하여 만물의 터전이 된다.”
모름지기 일(一)이란 글자에서 구해야 한다. 須從一字求 【註】오행의 정(精)을 고찰해서 진일(眞一)의 도를 품고, 티끌 세상[塵世]을 털어내서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한[沖漠] 세계에 노닌다. 그런 까닭에 노자는 말하기를 “하늘은 하나[一]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신령하다”고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
분명히 모두가 상이지만 分明皆是象 【註】성인이 상(象)을 취하니 양은 정(精)이며 음은 넋[魄]이다. 구수(九數)를 쌓아서 먼저 건립하고 만물을 거두어서 모두 귀결시키니, 이 때문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있으면 상(象)을 이루고, 땅에 있으면 형체[形]를 이룬다”고 하였다.
모습을 지으면 투합할 수 없다. 作相不能投 【註】무릇 대도는 고요해서[寂寥] 소리가 없고 담박하여 맛이 없다.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니, 어찌 상을 지어서 투합할 수 있겠으며, 어찌 당기고 간직해서 얻을 수 있겠는가?
행동이 먼저 진실하면 擧措先眞實 【註】겸손하고 약함은 덕의 자루며, 부드럽고 온화함은 도의 열매다. 반드시 그 두터움에 처하고 그 진실함에 자리 잡아야 한다.
정밀함과 거칢은 각기 저절로 유연해진다. 精麤各自柔 【註】학문에는 정밀하고 거친 차별이 있고, 무릇 성품에는 날카롭고 무딘 차별이 있으니, 또한 그 유약함을 지키면서 견강(堅强)함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간직해서 깨달음과 통하면 恒持通覺悟 【註】도의 성품은 비어 있음의 극치이고, 묘함의 근본은 고요하다[湛然]. 마땅히 모름지기 티끌 경계를 끊어버려서 현묘한 이해[玄解]를 깨닫고 고요함을 간직해 지킬 따름이다.
만 갈래 물은 동쪽으로 흐른다. 萬派水東流 【註】온갖 골짜기의 물이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천지의 상도(常道)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손리동남(巽利東南)’이라 하였는데,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데는 물의 공덕보다 큰 것이 없음을 말해서 도의 작용을 설명한 것이다.
연홍을 정밀하게 수련하면 鉛汞精修鍊 【註】연홍이 서로 친하기가 비록 모자(母子) 사이와 같다고 하지만, 이를 제약하다 법도를 잃게 되면 갑자기 참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거리가 멀어진다. 이치는 모름지기 정밀히 연구해야 하지만, 그러나 수련할 수는 있다.
음양이 물정과 화합한다. 陰陽恊物情 【註】그 진결(眞訣)을 얻어서 터럭만큼이라도 차이가 나지 않으면, 자연히 음양이 상생(相生)하고 변화에 어김이 없으니, 이른바 이것이 지성(至誠)의 감응에 은밀히 부합하는 것이다.
꽃이 피고 황도가 바르게 되어 花開黃道正 【註】노란 싹과 흰 눈이 꽃이 피는 것처럼 찬란히 작용하면 변통(變通)할 수 있고, 이를 복용하면 오래도록 황혼 속의 빛깔을 볼 수 있게 된다.
약은 자색 연기 가벼운 곳에 자리 잡는다. 藥就紫煙輕 【註】단(丹)이 이루어지게 되면 자색 연기의 가벼운 것이 무쇠 솥을 덮게 된다. 이는 신공(神功)이 몸 안에 원만해져서 신령한 기운이 밖으로 넘치는 상(象)이다.
해변의 산에는 뜬 구름이 합쳐지고 海嶠浮雲合 【註】단약의 신비함이란 삼키면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는 데 있다. 그러면 봉소(蓬素:蓬萊와 素山) 사이의 원지(苑地)가 멀리 뜬 구름과 합쳐져서 모두가 왕래하며 밟고 다니는 뜻이 된다.
신광이 방 안을 밝게 비춘다. 神光照室明 【註】뼈가 바뀌고 얼굴이 늙지 않으면 모든 골절(骨節)이 조화롭게 다스려지고 삼전(三田)12)이 청정해져서 자연히 신광이 투명하고 밝게 방 안을 비추게 된다.
다채로운 빛깔의 노을과 높고 아름다운 태양 아래서 彩霞高麗日 【註】오색의 노을이 엉키고 빛이 아름다운 해를 삼키는 것은 모두 안의 기운이 맑고 비어 있음을 말미암아 영황(靈貺:신령이 주는 복)을 이루어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으로 장생불사를 이야기하네. 細意話長生 【註】단(丹)이 이루어지고 도가 지극하면 공행(功行)이 아울러 가지런해지면서 삼도(三島)13)를 평탄히 걸어 다니고 높이 구진(九眞)14)을 접하게 된다. 무릇 이와 같으면 대도와 장생의 이치를 논할 수 있다.
비추어 보듯 도덕을 밝히니 照然明道德 【註】‘묘한 하나[妙一]’의 근본에 도달하여 ‘현묘한 조화[玄化]’의 기미를 궁구하니, 이미 상(象)으로 나타남에 앞서 기(氣)의 탄연함과 도의 지극함이 되고 덕(德) 또한 생겨나서 환희 비추어 명백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깊은 수행을 말한 것이다.
만상에는 그 실마리가 있다. 萬象有其端 【註】만상이 각각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하늘과 땅과 사람[三元]이 일치하는 것은 그 도가 아니면 생겨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실마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를 의심하면 누구를 믿겠는가? 變化疑誰信 【註】시절과 더불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만물에 응하여 변화하며, 따라가도 그 뒤를 보지 못하고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보지 못하니, 그렇다면 미혹한 사람이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 보니 超凡入聖看 【註】성인은 사물을 의심하다가 막히지 않지만 만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없다. 그러나 만물이 성인의 누(累)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높이 만상 밖으로 초월했기 때문이다. 멀리 범부의 기틀을 벗어나야 비로소 변화의 근원을 궁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지위에 들어갈 수 있다.
유현하고 깊은 경지에서 자유자재하여도 幽玄深自在 【註】무릇 지도(至道)를 운전(運轉)하고 자재하게 공덕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면 그 유현한 경지를 통견(洞見)할 길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묘막한 경지는 어렵다. 眇邈就中難 【註】현진(玄津:불법)은 묘막(眇邈:높고 원대함)하고 성스러운 성품은 매우 깊어서 귀와 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형체와 소리로 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풍진 속에서 음미하다가 但味風塵裏 【註】그 얼굴은 빙설(氷雪) 같아도 풍진 세상을 여의지 않는 것이 도의 뛰어남이다. 자세히 이를 음미해 보라.
비로소 우주가 넓다는 것을 알았노라. 方知宇宙寬 【註】비록 우주가 지극히 크다 하더라도 도(道)도 역시 그 속에서 가고 있으니 비로소 도의 넓음을 안다. 그 묘한 만유(萬有)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무슨 물건이 여기서 생성되지 아니하는 것이 있겠는가?
세계는 궁하고 다함이 없어서 世界無窮盡 【註】해와 달이 번갈아 비추고 오위(五緯)가 방위를 표시하며, 또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도 그 궁극을 알지 못한다.
이를 논하면 멀고도 또한 깊다. 論之遠更深 【註】하늘과 땅이 나뉘어 열(列)을 지으니 존귀함과 비천함이 그 지위를 정한다. 그 먼 것을 논한다면 신령해서 일정한 방향이 없고, 그 깊음을 말한다면 도는 존재함이 없다. 지극하고도 위대하도다. 오직 성인만이 이를 밝히는구나.
음양으로 검고 흰 것을 나누고 陰陽分皀白 【註】일월이 운행하면서 음과 양이 생기고 사라지니 이를 체득해서 수련한다. 마치 검고 흰 것이 눈에 있는 것 같아서 환히 빛나서 스스로 구별된다.
기와 조각과 조약돌이 황금으로 변한다. 瓦礫變黃金 【註】법이 오행을 준수하여 단(丹)이 구전(九轉:아홉 번 제련됨)을 이루면, 지극히 미미한 사물을 변화시켜 지극히 귀중한 보배를 이루게 되니, 어찌하여 이것을 어렵다고 하는가?
보응은 끝내 다시 있으나 報應終還有 【註】급기야 기예를 고찰하지 않음이 없고 강함과 부드러움에 순응하면서 안으로 지극한 정성을 쌓고 밖으로 음덕을 베풀면, 현묘한 공(功)이 암암리에 도와서 신단(神丹)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런 까닭에 진인(眞人)은 말하기를 “내가 거짓으로 잘못된 말을 베푼다면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응이 헛되지 아니함을 알 수 있다.
삿되게 구하면 쉽게 찾지 못한다. 邪求不易尋 【註】도에 귀의하기를 구하면서 미혹을 지키고, 바른 길을 밟고자 하면서도 굽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고 지귀(指歸:종지)를 규명하지 못한다. 진인을 만나서 지약(至藥)을 이루고자 기약해도 흰머리가 되도록 더욱 여우같은 의심만 늘어난다.
총망하면 누가 바른 정(定)을 이루겠는가? 忩忙誰正定 【註】동정(動靜)의 규제와 함육(含育)의 절후는 본래 총망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공이 이루어지길 구하면서 바른 선정(禪定)이 항상하지 않는다면 부질없이 수련에만 힘쓰게 된다.
모름지기 이는 천심과 합치하여야 한다. 須是合天心 【註】진정한 정성에 차질이 없으면 천심과 스스로 합치한다. 그런 까닭에 하늘을 본받아서 만물을 제도하여 일을 이루게 되니, 무엇인들 극복하지 못하겠는가?
세간의 이익을 탐내고 이에 구속되면 世利貪拘束 【註】사람들이 뜬 세상에 살면서 삶을 위한 이익을 탐내면, 스스로 얽매이게 되어서 도와는 멀어진다.
속이는 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欺心自不知 【註】밖으로 이익을 탐내게 되면 안으로 마음을 속이게 되어서 자연에서 생겨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나의 참됨[一眞]’을 구하는 뜻이 있다면 一眞求意在 【註】도는 일(一)에서 생겨 만물을 육성하니, 사람이 능히 일(一)을 얻을 수 있으면 만사가 이것으로 끝난다.
사서에 들쑥날쑥한 것이 없어진다. 四敍絶參差 【註】만물을 통변(通變)하는 것은 사시(四時)보다 큰 것이 없으니, 득도(得道)의 묘함은 사시와 같아서 그 들쑥날쑥한 것이 끊어지면 성인과 가지런해질 수 있다.
돈오로 모든 성인을 초월하니 頓悟超諸聖 【註】사람이 만약 도를 깨닫게 되면 도도 역시 사람과 통하게 된다. 사람과 도가 만약 합치한다면, 범부의 위치를 뛰어넘어 성인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즐거워하는 정은 어리석음으로 바꾸어진다. 娛情改換癡 【註】달인은 도를 즐기면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으니, 단박에 가슴 속이 탁 트여서 영원히 막히는 것이 없어진다.
생전은 꿈과 같으나 生前如似夢 【註】뜬 생애란 순식간에 끝난다. ‘하나를 품고서 참됨을 지키는[抱一守眞]’ 도에 도달하지 못하면 술에 취한 듯해서 모두가 꿈속과 같다.
원컨대 다시 자세히 이를 추구해 보라. 願重細推之 【註】지사(至士)는 대도에 간절해서 도가 소원을 어기지 않으므로 이를 얻는다. 자세히 이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원(願)을 말미암은 결과다.
어리석은 바보는 항상 술 취한 사람과 같으니 愚癡常似醉 【註】성품이 정(情)에 어두우면 지혜가 식(識)에 뒤지게 되면서 꾸물거리는 범부의 어리석은 사람이 되니 항상 술 취한 것 같다.
꿈속의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何異夢中人 【註】도를 미혹한 사람은 그 우매함이 꿈꾸는 것과 같다. 진심을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이치로 보아 어떻게 깨어나겠는가?
통달하고자 하여도 끝내 보이는 것이 없어 欲達終無見 【註】묘도(妙道)는 멀지 않은데도 중지(中智) 이하의 사람은 도달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으니, 왜 돈오의 견식이 없는 것일까?
의심을 품고서 도와 어찌 친하겠는가? 懷疑道豈親 【註】진원(眞元)의 기와 포일(抱一)의 실마리를 만약 머뭇거리면서 구한다면 도와 소원해질 것이다.
탐욕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면 非爲貪閉口 【註】도를 배반하는 탐욕과 잘못된 행위의 논의에 직면하면, 오직 입을 다물고 고요히 침묵하는 것이 제일이다.
어찌 그것이 몸에 이익이 되겠는가? 那是益於身 【註】어지러운 티끌의 원소와 구구하게 움직이는 식(識)에 미혹된 사람은 떨어지고 깨달은 사람은 오른다. 만약 능히 이치에 순응하여 진실과 계합할 수 있다면 몸에 이익이 될 수 있다.
선생은 고요함과 침묵을 감당할 만하니 先生堪寂默 【註】점으로 도에 통달한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도 교화하니, 그런 까닭에 유마 거사는 묵연히 입을 다물었고, 공자는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다.
복은 심고 인(因) 전하지 아니하였다. 種福不傳因 【註】세간의 복은 마치 식물을 심어서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도는 색과 형상을 여의어서 모든 상(相)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因)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