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有情)1)의 근본은 지혜의 바다[智海]2)를 의지하는 것으로 근원을 삼고 있으며, 식(識)을 내포한[含識]3) 무리들 여깃 모두 법신(法身)4)을 바탕[體]으로 삼고 있다. 다만 정(情)이 생기기 때문에 지혜[智]가 막히고 상념[想]이 변하기 때문에 바탕이 달라지는 것이니, 근본을 요달하면 정이 없어지고 마음을 알면 바탕과 합일한다. 이제부터 설해 나갈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중생의 근본 실제[本際]를 밝힌 것이요, 모든 불과(佛果)의 원천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중생의 근본이 되고 불과의 원천이 되는 곳은 공(功)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행(行)을 통해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이 없어져야 근본이 성취되고, 행이 다해야 원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근본과 원천은 공 없이도 능히 연(緣)에 따라 자재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이다. 근본 성품[本性]을 가장 앞세움으로써 지혜가 근기에 따라 응하고, 대자비[大悲]로 사물을 제도하기 때문에 비로자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니, 근본적으로 이같은 사실에 의거해서 가르침의 은택[敎澤]을 마련해 그 은택이 법계(法界)에 흘러서 일체 중생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위[位]는 4천[天]5)에 기탁하고, 형상은 여덟 가지 모습[八相]6) 첫째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모습[降兜率相], 둘째 태(胎)에 들어가는 모습[入胎相], 셋째 세상에 탄생하는 모습[出生相], 넷째 출가하는 모습[出家相], 다섯째 수행을 통해 모든 마군(魔軍)을 제압하는 모습[降魔相], 여섯째 궁극의 도를 성취하는 모습[成道相], 일곱째 진리의 바퀴를 굴리는 모습[轉法輪相], 여덟째 열반에 드는 모습[入涅槃相]. 으로 나타내고, 보리도량[菩提場] 안의 난야(蘭若)7)에서 처음으로 성도함을 보이고, 보광법당(寶光法堂)에서는 보신(報身)8)의 큰 집[大宅]에 처한 것이다. 장자(長子)9)인 보현(普賢)은 과보의 덕[果德]을 장신(藏身)10)에서 일으키고, 소남(小男)11)인 문수(文殊)는 금색세계(金色世界)에서 비로소 계몽(啓蒙)을 개시하여 해인삼매(海人三昧)12)로써 법계(法界) 전체에 영(靈)을 내리고, 보안(普眼)의 법문(法門)으로 티끌 속의 찰해(刹海)13)를 보이니, 의보(依報)와 정보(正報)14) 두 과보는 몸[身]과 국토[土]가 서로 참여하고, 인(因)과 과(果)의 두 문은 체(體)와 용(用)이 서로 사무친다. 제석천(帝釋天)의 보배 그물15)로써 10찰(刹)16)이 겹겹이 겹치는 걸 투영하고, 온갖 번뇌를 벗어나는 마니주(摩尼珠)17)를 취하여 10신(身)18)이 성대함을 밝히니, 가이없는 세계의 경계가 자(自)와 타(他)가 털끝만치도 막히지 않고, 10세19)의 고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당장의 일념[當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광활함은 허공을 양(量)으로 삼고, 그 협소함은 극미(極微)에 처해서도 자취가 없다. 시방을 거두어 들이지 않지만 지극히 작은 모습 속에서도 이지러지지 않고, 티끌만치도 펼치지 않지만 시방을 내포하면서도 장애가 없다. 항상 지혜의 바다[智海]에 머물면서 과덕(果德:과보의 공덕)을 5위(位)20)의 문에 나누고, 늘 법당(法堂)에 머물면서 진수(進修:닦아 나감)를 9천(天)21) 위에 보인다. 이곳이 이러하니 10찰(刹)도 모두 마찬가지다. 성스러운 무리들이 구름처럼 해회(海會)22)에 서로 드는데, 지혜로운 자든 범속한 자든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수많은 거울이 온갖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 같으며, 피차간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마치 천 개의 등불이 방 하나에서 함께 비츤 넉소가 같다. 이 경전은 모두 40개의 뛰어난 품(品)으로 이루어져서 과덕(果德)의 법문을 그윽히 열어 보이고 있으며, 백만억의 오묘한 말은 불화(佛華)의 행해(行解海)23)를 모두 들어 보이고 있다. 10신(身)과 10회(會)에서는 백 개의 법문을 널리 드러내어 밝히고, 10처(處)와 시방에서는 10통(通)24)을 열고 10변(辯)25)을 소통한다. 출현품(出現品)에서는 인과로써 처음[始]과 끝[終]을 맺는 걸 보이는 데,26)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는 인간계와 천상계에 이익을 주어 법계를 밝히니, 목련(目連)과 사리불(舍利弗)은 부처님 면전에서 보고 듣는 것이 막혔고,27) 6천 비구는 길 위에서 10명(明)28)이 열렸다. 각성동(覺城東) 근처에서 다섯 대중[五衆]29)이 다 모여 옛 부처님의 사당 앞에서 다 같이 10지(智)30)에 오르고, 선재(善財)는 앞에서 길을 밝힘으로써31) 뒤에 오는 대중들도 모두 그러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도 5위(位)의 법문을 이루고, 덕행을 갖추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처음 배우는 이를 깨우쳐서 쉽게 도달하도록 하여 이해[解]와 행실[行]에 의심이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믿음의 수장[信首]32)인 문수 앞에서 묘봉(妙峰:깨달음의 궁극)의 정상33)을 바르게 증명하고, 다섯 대중34)을 거치면서 110개의 법문35)을 이루며, 자씨(慈氏:미륵)의 정원에 이르러서 한 생(生)에 불과(佛果)의 결실을 맺으니, 이때 오히려 문수를 처음 만난 친구로 보인 것은 과(果)가 인(因)과 같다는 걸 밝힌 것이며, 나중에 보현의 몸에 들어간 것은 체(體)와 용(用)이 원만하고 지극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 경전의 이름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 하는데, ‘대9大)’는 어떤 방위도 없다는 뜻이요, ‘방’은 이치와 지혜로써 공을 삼는 것이며, ‘광’은 털 끝과 세계가 서로 내포하는 것이요, ‘불’은 체(體)와 용(用)이 조작이 없는 것이요, ‘화’는 행문(行門:실천문0이 WMF길 만해서 이9理)와 사(事)의 공을 펼칠 수 있다는 걸 비유한 것이요, ‘엄’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로 장엄하는 것이요, ‘경’은 속내를 뚫고서 꿰매는 것이다.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이란, 보살이 생(生)을 나타낼 때엔 모두 세상의 주체[世主]가 되고, 다 같이 해회(海會)에 이르기 때문에 ‘묘엄’이라고 부른다. ‘품’은 같은 범주의 법문을 종류별로 모아서 격을 일정하게 한 것이다. 이 경전에는 모두 40개의 뛰어난 품이 있는데, 이 「세주묘엄품」을 첫머리에 세웠기 때문에 ‘제일(第一)’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걸 총칭해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 第一)’이라 한 것이다. 이 한 부의 경전을 해석하는 데 모두 열 가지 갈래[門]가 있다. 첫째, 종지에 의거해 교리의 종지[宗]를 나눔을 밝히는 것이다[明依敎分宗]. 둘째, 종지에 의거해 교리의 차별을 밝힌다[明依宗敎別]. 셋째, 교의(敎義)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明敎義差別]. 넷째, 성불(成佛)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힌 것이다[明成佛同別]. 다섯째, 부처를 보는 데 차별점을 밝힌 것이다[明見佛差別]. 여섯째, 가르침을 설하는 시기의 구분을 밝힌 것이다[明說敎時分]. 일곱째, 정토(淨土)의 방편[權]과 실제[實]를 밝힌 것이다[明淨土權實]. 여덟째, 다스리고 교화하는 경계를 밝힌 것이다[明攝化境界]. 아홉째, 인(因)과 과(果)의 늦고 빠름을 밝힌 것이다[明因果延促]. 열째, 가르치의 처음과 끝이 희통함을 밝힌 것이다[明會敎始終].
1.교리에 의거해 종지를 나눔을 밝힘 ①
여래(如來)가 도를 성취했을 때는 체(體)가 참 근원[眞源]에 응하였다. 그래서 이(理)와 사(事) 두 문에 일(一)과 다(多)가 서로 사무치고, 지혜와 경계가 완전히 고요해졌으니 어떤 법인들 보편적인 아니겠는가? 다만 근기(根器)의 차별에 따라 궤의(軌儀)가 달라지므로 시교(始敎)ㆍ종교(宗敎)ㆍ점교(漸敎)ㆍ돈교(頓敎)가 근기의 차이에 따라 적절히 법을 시설하니, 대승과 소승이 완전히 다르고, 시기의 나눔[時分]과 인과(因果)가 늦고 빠름이 있으며, 화불(化佛:화신불)과 본신(本身:비로자나 법신불)이 표현하는 언어가 각각 차이가 있으며, 국토의 청정과 오염, 확장과 감소가 같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지위(地位)와 인과는 저절로 분수에 따르고 있다 .그런데도 처음 배우는 무리들은 이 가르침의 자취를 알지 못한 대 방편에 집착해서 실제를 이루고[執權成實] 있으니, 바로 이 미혹 때문에 수행에 진척이 없다. 만약 온갖 종지[宗]를 다 열거해서 그 손익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그 미혹과 장애를 끝내버리질 못할 것이다. 이제 대략 열 가지 법으로 나눠 설명을 통해서 길을 밝히겠다. 이는 배우는 자로 하여금 종지를 알게 해서 방편을 옮겨 실제로 나아가게 하고[遷權就實], 수행의 장애를 없애 조속히 보리(菩提)를 증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첫째, 『소승계경(小乘戒經)』은 정유(情有)36)를 위한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다. 둘째, 『보살계(菩薩戒)』는 정유와 참[眞]을 함께 보이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셋째, 『반야교(般若敎)』는 공(空)을 설하여 실(實)을 드러내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넷째, 『해심밀경(海深密經)』은 공도 아니고[不空] 유도 아닌[不有]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다섯째, 『능가경(楞伽經)』은 5법(法)37)ㆍ3자성(自性)38)ㆍ8식(識)39)ㆍ2무아(無我)40)로 종지를 삼는다. 여섯째, 『유마경(維摩經)』은 청정과 오염, 두 가지 관점[見]을 융화시켜 부사의(不思議)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일곱째, 『법화경(法華經)』은 방편을 이해해서 진실로 나아가는[會權就實]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여덟째, 『대집경(大集經)』은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아홉째, 『열반경(涅槃經)』은 불성(佛性)을 밝히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열째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니, 이 경전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본적인 지혜와 자비를 이름붙인 것이다. 인과가 원만하고 일(一)과 다(多)가 서로 사무쳐서 법계의 이(理)와 사(事)가 자유로이 연기(緣起)하는 장애 없는 불승(佛乘)으로 종지를 삼는다. 지금까지 말한 구분법은 모두 옛 대덕(大德)들이 세운 종지(終旨)를 이어받은 것이다. 설사 늘어나고 줄어든 것이 일정하지 않더라도 이는 견해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뿐, 대의(大義)와 명목(名目)은 대체로 비슷하다. 저 서역(西域)과 우리나라의 대덕들이 제각기 세운 종지의 가르침은 나중에 다시 밝히겠다. 첫째 『소승계경』은 정유(情有)를 위한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여래는 처음에는 범부의 업을 짓는 곳[造業處]을 위해 설법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하며, 저런 행동은 결코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 버리는 자는 선(善)하고, 버리지 못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르침은 여전히 실유(實有)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정유(情有)한 가르침은 범속한 정유의 허망한 곳에서 온갖 악이 연루되는 것을 잡아내 이를 교리로써 다스려 인간계와 천상계에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계서(戒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천상계와 인간계 속에 태어나길 바라는 자는 항상 계족(戒足)41)을 수호하면서 훼손시키지를 말라.” 중생이 유위(有爲)로서 업(業)을 지은 것은 허망하여 실잡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법신(法身)과 지신(智身)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실유(實有)의 종지가 되지 못하고 정유(情有)를 위한 종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소승법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저 『화엄경』의 지계(持戒)는 그렇지가 않으니 「범행품(梵行品)」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과 같다. “몸이 바로 범행(梵行)인가? 아니면 신업(身業:몸의 행위)인 4위의(威儀)42)에서부터 불ㆍ법ㆍ승ㆍ10중(衆)43)ㆍ7차(遮)44)ㆍ화상(和尙)45)ㆍ갈마(羯摩)46)ㆍ단두(檀頭)47) 등이 모두 범행인가? 이렇게 자세히 관(觀)해도 범행을 구하는 자를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청정한 범행이 된다고 칭하는 것이다.” 이처럼 청정행(淸淨行)을 하는 자를 불성계(佛性戒)를 지녔다고 칭하는데, 바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얻기 때문이요, 나아가 처음 발심할 때 문득 정각(正覺)을 성취함으로써 불성계를 지니기 때문에 불(佛)과 그 체9體)를 같이 하고, 이(理)와 사(事)가 평등하여 온통 진법계(眞法界)인 것이다. 이같은 지계(持戒)는 자기 자신을 계(戒)를 지닐 수 있는 자로 보지 않으며, 타자를 계를 파괴하는 자로 보지도 않는다. 따라서 범부의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모든 부처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는 것도 보지 못한다. 이처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조금이라도 얻는 바가 있다면, 정행(淨行)이라고 칭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성계(性戒)가 바로 법신(法身)이라는 것이다. 법신이란 바로 여래의 지혜이며, 여래의 지혜는 곧 정각(正覺)이기 때문에 취하고 버림이 있는 소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 『범망경(梵網經)』의 보살계는 정유(情有)와 참[眞]을 함께 보이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여래가 범부 중에서도 즐거이 자비를 행하고 흔쾌히 불과(佛果)를 구하는데 대심중생(大心衆生)을 위해 비로자나가 법신이 되고 천백억(千百億)이 화신(化身)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단박에 지말(枝末)을 인식해서 근원으로 돌아가게 했기 때문에 경전에서도 “이같은 천백억이 제각기 미진수(微塵數)의 중생을 제접(提接)해서 다 함게 나의 처소에 이른다”고 하셨으며, 또 “불계(佛戒)를 받은 사람은 곧바로 모든 부처의 지위에 들어가서 그 지위가 대각(大覺)과 같아지니,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불자(佛子)들이다”라고 설한 것이다. 즉 성계(性戒)가 되기 때문에 진종(眞宗)이 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대심중생을 위해 법신의 성계를 단박에 보이신 것이자, 근기가 낮은 자를 위해 점진적인 과정을 얻게 한 것이니, 하나의 가르침으로 두 근기에 응한 것이다. “이 같은 천백억이 제각기 미진수의 중생을 제접해서 다 함께 나의 처소에 이른다”고 하신 것은 방편을 버리고 실제로 나아갈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실유의 가르침이다. 이 『범망경』의 가르침은 방편과 실제를 한거번에 보였기 때문에 “앞48)도 무상(無常)이고 뒤49)도 무상해서 오직 인간계와 천상계에만 태어난다”는 소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유의 종지를 세우긴 했지만, 『화엄경』의 비로자나가 설하신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범망경』은 화신(化身)이 교화하는 방향에 따라 본신(本身)에 이른 것이다.50) 그러나 원교의 종지는 단번에 갑자기 본신 법계(本身法界)의 대지보신(大智報身:대지혜의 보신)을 보여서 인(因)과 과(果), 이(理)와 사(事)가 가이 드러난다. 또 『화엄경』 속의 세계의 양(量)은 『범망경』 속의 연화(蓮花)의 형량(形量)과는 같지 않다. 광협(廣狹)이 완전히 다르니, 자세한 것은 앞으로의 경문에서 설한다. 셋째, 『반야교』는 공(空)을 설해 실(實)을 드러내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여래가 처음에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범부들을 위해 2승(乘)의 가르침을 설했으나 이(理)와 사(事)를 모두 실답다고 집착해 장애를 벗어날 줄 모르기 때문에 공(空)의 가르침을 설해서 집착을 깨뜨리려 한 것이다. 그래서 『반야경』 속에서는 열여덟 가지 공법(空法)51)을 설하면서, “세간과 삼보(三寶)와 4제(諦)와 삼세(三世) 등 일체가 다 공(空)이며, 공 역시 공이다”라고 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전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말하자면, 무명(無明)과 온갖 장애의 업(業)을 텅 비워버린다는 것이니, 무명이 몽땅 소진[盡]하고 업장(業障)이 다 없어지면 자성열반(自性涅槃)52)이 자연히 드러나는데, 이는 진유(眞有)가 되는 것이지 공종(空宗)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록 진유가 될지라도 말씀하신 교문(敎門)이 이루어지고 무너짐53)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원만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화엄경』은 실다운 과보인 상호(相好)54)의 장엄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능히 허망할 수도 있고, 능히 실다울 수도 있다. 『화엄경』의 부(部)와 품(品) 속에서는 열 분의 보살들이 위아래로 저절로 서로 여관되어서 공(空)과 유(有)의 법이 홀로 행하지 않을 분만 아니라 보현과 문수가 위 아래에서 서로 참여하고 이(理)와 사(事)가 서로 사무쳐서 상호간에 서로 비추고 있다. 그리하여 한부의 경전이 품마다 서로 사무치고 구절마다 서로 참여해서 한 품 안에 40품의 경전이 같이 들어가고, 말 한 마디 안에서 10만 개의 게송을 다 지휘한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곧 일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면 곧 일체가 무너지니, 이 모든 것은 성품[性]이 제등(齊等)D하고 때[時]가 제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등하고 한결같기에 법을 설하는 것도 제등한 것이다. 이 제등성[齊]으로 인해 지금 당장의 성불(成佛)이 삼세의 부처님과 다 함께 성불하는 것이며, 삼세가 없어지는 것이며, 때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이루어지고 파괴되는 것이 때를 달리하기 때문에 인(因)과 과(果)가 선후가 있다”고 한 『반야교』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넷째, 『해심밀경』은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여래가 유(有)를 가르치고 공을 가르친 뒤에 이 『해심밀경』의 가르침을 설해 유(有)와 무(無)의 두 견해를 회통함으로써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가르침으로 삼은 것이다. 즉 9식(識)55)이 순수하고 청정하여 오염이 없는 식[純淨無染識]임을 설한 것이다. 마치 폭포수가 많은 물결을 일으키지만 그 물결은 물을 의지하는 것과 같아서 5식ㆍ6식ㆍ7식ㆍ8식들이 모두 아타나식(阿陀那識)56)을 의지한다는 것이니, 이는 『히심밀경』에 나오는 다음의 말과 같은 것이다. “가령 깨끗한 거울면에 그림자 하나가 반연해 앞에 나타나면, 오직 그림자 하나만이 일어난다. 또 둘 이상의 많은 그림자가 반연해서 앞에 나타나면, 그만치 많은 그림자가 일어난다. 이는 거울면이 전변(轉變)해서 그림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림자를 받아들여서 없애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5식ㆍ6식ㆍ7식ㆍ8식이 의지하는 제9의 정식처(淨識處)를 밝힌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같은 보살이 비록 법을 말미암아 머물더라도 지혜를 의지처로 삼아 건립하기 때문이다.” 이 경문의 뜻은 식처(識處)로 하여금 그 식(識)의 바탕[體]이 본래부터 참지혜[眞智]를 떠나 있지 않다는 걸 밝히려 한 것이다. 마치 저 폭포수가 물의 바탕을 떠나지 않고서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며, 또 밝은 거울이 그 깨끗한 바탕에 의지해 아무런 분별 없이 수많은 영상을 내포하면서도 유(有)에 걸리지 않고 항상 무(無)인 것과 같다. 이처럼 스스로의 마음[自心]에 나타난 식(識)의 모습은 본바탕[本體]의 조작 없는 청정한 지혜를 떠나지 않는 것이라서 나타난 영상이 모두 자타(自他)나 내외(內外)의 집착이 없다. 오로지 쓰임새[用]에 맡겨 지혜를 다르면서도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공(空)과 유(有)의 두 속박을 깨뜨려서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심밀경』의 게송에서도 이렇게 읊고 있는 것이다.
아타나식은 너무도 깊고 미세해서 일체의 종자(種子)가 폭포수처럼 흐르는구나. 내가 어리석은 범부에겐 열어 보이지 않았으니 그들이 분별하고 집착해서 나[我]로 여길까 걱정해서다.
‘아타나식은 너무도 깊고 미세해서’라는 말은 범부들을 식(識)에 나아가 지혜를 이루도록 인도한 것이다. 이는 2승(乘)이나 점교(漸敎)57)ㆍ시교(始敎)58)ㆍ배우는 보살들이 상(相)을 깨뜨려서 공(空)을 이루는 거과는 같지 않으며, 범부들이 집착하여 실유(實有)59)로 여긴다는 것과도 다르다.이 때문에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것이다. 어째서 공이 아닌가? 지혜가 연(緣)을 따라 기틀[機]을 비추면서 사물을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유가 아닌가? 지혜가 올바르게 연(緣)을 따를 때에도 그 체성[性]과 작용의 상(相)이 없기 때문이며,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라고 칭한 것이다. 이 경전이 비록 이처럼 심식(心識)의 처소에서 공과 유가 둘이 아님을 알게 했다 할지라도 『화엄경』은 이와는 다르다. 『화엄경』은 오로지 본신법계(本身法界:비로자나 법계)의 한결 같이 참된 근본지불(根本智佛)의 체(體)와 용(用)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순진 무구한 성(性:본체)ㆍ상(相:작용)과 법신(法身:참된 몸)ㆍ보신(報身:지혜의 몸)의 바다에서 곧바로 상근기(上根器)60)를 위해 부처님의 과덕(果德)인 한결같이 참된 법계의 본지(本智)를 단박에 제시하는 것으로써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는[開示悟入]61) 문을 삼은 것이지, 허망함을 따라 식(識)을 낳는 일 따위를 논한 것은 아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로 중생을 깨우쳐서 청정함을 얻게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은 2승이나 3승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여래께서는 3승의 사람이 부처님의 성(性)과 상(相)의 법에 대해 지견(知見)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법화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성(性)과 상(相)의 여러 가지 뜻은 나나 시방의 부처님이라야 비로소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리불(舍利弗)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불퇴전(不退轉)62) 보살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화경』으로 3승의 방편[權學]을 회통해서 불승(佛乘)의 진실한 법계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다라서 문 앞의 세 수레63)라도 아직은 권승(權乘:방편의 수레)을 받을 뿐이며, 맨땅[露地]의 흰 소[白牛]라야 비로소 실다운 덕[實德]을 밝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화경』 속에는 약간이나마 그 뜻이 『화엄경』과 부합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용녀(龍女)가 탄 수레가 바로 흰 소의 수레[白牛乘]이니, 그 얻은 바는 선재(善財)동자와 같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화엄의 교문(敎門)은 근본의 체(體)와 용(用)인 법계의 불과문(佛果門)을 곧바로 드러내서 이를 상근기의 범부에게 직접 부여하여 깨달아 들게[悟入]한 것이다. 이는 『심밀경(深密經)』 속에다 5식ㆍ6식ㆍ7식ㆍ8식ㆍ9식을 세워서 방편문[權門]을 마련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심밀경』에는 제9 아타나식을 방편으로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즉 2승(乘)의 사람들은 생사(生死)를 싫어한 지 오래라서 공(空)을 닦고 식(識)을 소멸시켜 곧바로 공적(空寂)으로 나아간다. 또 제2시(時)에 반야(般若)의 가르침을 설했을 때는 2승(乘)과 단계적 과정을 배우는 보살[漸學菩薩]을 돌이키기 위해 다분히 공(空)으로 유(有)를 깨드림으로써 6바라밀(波羅蜜)을 수행의 수레[乘]로 삼았다. 이 중에서 2승은 약간이라도 마음을 돌이키고, 단계적 과정을 배우는 보살은 더욱더 공을 즐긴다. 하지만 방편을 배우는 3승의 보살은 맨 처음 대치(對治)하는 문(門)이 오히려 소승의 처음 대치하는 문과 약간 비슷한 점이 있으니, 이는 한 푼의 자비(慈悲)만이 늘어났을 뿐 법신과 불성과 근본지(根本智) 등의 도리는 아직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공문(空門)으로 타고 갈 수레를 삼고 6바라밀로 수행의 모습을 삼기 때문에 처음 대치하는 문이 오히려 무상관(無常觀)ㆍ부정관(不淨觀)ㆍ백골관(白骨觀)ㆍ미진관(微塵觀) 등을 통해 비로소 공관(空觀)으로 들어가는 2승과 같다. 2승은 적멸(寂滅)로 나아가고, 보살은 생(生)에 머무르면서64) 공관이나 무아관을 통해 나[我]와 대상[法]을 굴복시켜 그런 관념이 더 이상 자라나지 않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원래부터 법신ㆍ불성ㆍ근본지가 아니라서 그 견처(見處)가 참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공만을 즐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해심밀경』에서는 방편으로 제9식을 세워 순정식(純淨識)으로 삼은 것이니, 말하자면 7식과 8식이 정식(淨識)으로써 의지처를 삼았기 때문이며, 곧바로 제8 종자식(種子識)이 여래장(如來藏)이 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배우는 무리들이 괴로운 수습(修習)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업의 종작 항상 참[眞]이라고 설하게 되면, 두려움으로 이해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방편으로 제9 아타나식을 세워서 정식(淨識)을 삼은 것이니, 이는 식의 성품을 소멸시키지 않고서도 대보리(大菩提)를 오래도록 기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도 “불법(佛法)을 갖추지 못했어도 수(受)를 소멸시켜 증명을 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수를 소멸하지 않았다면, 상(想)이나 식(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능가경』에서는 근기가 성숙한 자를 위해 곧바로 제8식의 업 종자가 여래장이 된다고 설했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다시 밝히겠다. 『유마경』에서도 “온갖 번뇌[塵勞]들이 여래의 종자가 된다”고 했듯이, 도를 닦는 선비들은 그 종류에 따라 길이 다르며, 이해[解]와 실천[行]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다. 2승(乘)을 제외한 보살승(菩薩乘)에도 네 종류의 차이가 있다. 첫째는 공(空)과 무아(無我)를 닦는 보살이요, 둘째는 단계적으로 불성(佛性)을 보는 보살이며, 셋째는 단박에 불성을 보는 보살이다. 넷째는 여래의 자성청정지(自性淸淨智)를 통해 위의 가행(加行)65)으로 차별지(差別智)를 일으켜 보현행(普賢行)을 원만히 하여 대자비를 성취하는 보살이니, 궁극에 가서는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시방에 충만한 불과문(佛果門)인 것이다. 이상은 대략 명목(名目)만을 제시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밝혀 나가겠다.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어떤 부류의 보살은 백천억 나유타(那由他)66) 겁을 거치면서 6바라밀을 행한다 해도 부처님의 집안[佛家]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여전히 가명(仮名)보살67)이라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밝히겠지만, 어쨌든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지혜의 업[智業]68)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여전히 가명 보살이라 칭하는 것이다. 다섯째, 『능가경』은 5법(法)과 3자성(自性)과 8식(識)과 2무아(無我)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 경전은 남해(南海)의 능가산(楞伽山)에서 설한 것이다. 여래께서 이 산 밑을 지나실 때, 나바나(羅婆那)라는 야차(夜叉)의 왕과 마제(摩諦)보살이 신통조화로 만든 궁전을 타고 와서 부처님께 청하자, 여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법을 설하셨다. 이 능가산은 높고 험한 산이었는데, 밑으론 큰 바다가 보이고 옆으론 문이 없어서 신통을 얻은 자라야 올라갈 수가 있으니, 즉 심지(心地)의 법문이 닦을 것도 없고 증명할 것도 없다는 것을 밝힌 자라야 비로소 오를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밑으론 큰 바다가 보인다고 한 뜻은 이렇다. 즉 마음의 바다[心海]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청정하지만, 경계의 바람으로 인해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니, 이 경계가 스스로 공(空)한 줄 요달하면, 마음 바다는 저절로 고요해지며, 마음[心]과 경계[境]가 모두 고요해지면 비추지 못할 일이 없으니, 마치 바다에 바람이 그치면 해와 달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밑으론 큰 바다가 보인다고 한 말은 바로 이런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 『능가경』의 뜻은 근기가 성숙한 보살을 위해 곧바로 종자의 업식(業識)69)이 여래장이 된다는 걸 설한 데 있다. 이는 식(識)을 소멸시켜 공적(空寂)으로 나가는 2승(乘)과도 다른 것이며, 공(空)을 닦아 확장시켜 나가는 반야의 가르침과도 다른 것이다. 곧바로 식체(識體)의 본성이 완전히 참되다[全眞]는 걸 밝혀서 식의 체[識體]가 곧 지혜[智]의 작용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바다에서 풍랑이 잦아들면 그 즉시 경계의 상(像)이 다시 밝아지는 것처럼, 마음 바다의 법문도 마찬가지이니, 참[眞]을 요달하면 식(識) 그대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이 『능가경』은 초보자를 위해 따로 9식을 세워서 점차적으로 미혹에 머물러70) 큰 보리를 함양하게 하는 『해심밀경』의 뜻과도 다른 것이다. 즉 마음으로 하여금 공(空)에다 종자를 심게 하지도 않고,71) 마음으로 하여금 종자를 없애게 하지도 않는다.72) 『해심밀경』은 바로 비혹[惑]에 드는 첫 문이요,73) 『능가경』과 『유마경』은 곧바로 미혹의 본질적 진실을 제시한 것이다.74) 『능가경』은 8식이 여래장이 된다는 걸 밝혔고, 『유마경』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은 부처를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능가경』과 『유마경』은 같다고 하겠으나, 『해심밀경』의 글은 이 두 경전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가 않다. 불신(佛身)과 경계(境界)와 법문(法門)이 이루어진 모습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능가경』의 설법은 화신(化身)이 설법한 것이고, 경계도 예토(穢土)의 산 봉우리에서 거처했으며, 법문도 식(識)의 경계가 참이라는 걸 설했고, 문답도 대혜(大慧:마제보살을 말함)보살로 수장(首長)을 삼았다. 화신으로 가르침을 밝힌 것은 바로 방편이고, 대혜보살 역시 간택(簡擇)을 논하였다.75) 그러나 『화엄경』의 가르침은 불신(佛身)이 곧 본원의 진실인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이고, 경계도 화장(華藏)세계를 거처로 삼고 있으며, 법문도 불과(佛果)의 법계(法界)로 문을 삼고 있다. 또 문답도 문수와 보현의 이(理)와 사(事)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오묘한 작용이라서 5위(位)의 행상(行相)은 인과가 서로 융화하며 10찰(刹)과 10신(身)은 체(體)가 서로 사무쳐 들어간다. 『능가경』과 『화엄경』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논하려면, 이 정도의 말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앞으로 지위[位]에 의거해서 자세히 변별하겠다. 여섯째, 『유마경』은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유마경』과 『화엄경』은 열 가지 다른 점과 한 가지 같은 점이 있음을 말한다. 열 가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토(淨土)의 장엄이 다르다. 둘째, 불신(佛身)의 여러 모습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차이가 있다. 셋째, 부사의한 공덕의 신통이 다르다. 넷째, 근기에 따른 법문의 시설이 다르다. 다섯째,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들이 다르다. 여섯째, 가르침을 설해서 법문을 세운 것이 다르다. 일곱째, 유마힐보살이 건립한 행(行)이 다르다. 여덟째, 법문을 찬양한 처소가 다르다. 아홉째, 부처님을 항상 따르는 대중들이 다르다. 열째, 부촉한 법장(法藏)의 유통이 다르다. 한 가지 같은 점은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이 같다는 것이다. 첫째, 정토의 장엄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에서 설법한 정토는 여래가 발가락으로 대지를 누르자, 즉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얼마간의 백천(百千) 가지 진귀한 보배로 장식된 정토이다. 비유하자면 보장엄불(寶莊嚴佛)이 한량없는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정토[無量功德寶莊嚴士]와 같은 것이다. 모든 대중들은 이 정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하면서 자신들이 보련화(寶蓮花)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다함 없는 불국토[佛刹]를 장엄하는 등등의 일이 한 터럭이나 티끌 속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설하지 못했다. 『화엄경』에서는 십불비로자나(十佛毘盧遮那) 경계와 십화장세계해(十華藏世界海)76)를 모두 설하고 있다. 즉 하나하나의 세계해에 다함이 없는 세계해가 겹겹이 겹치면서 상입(相入)하고 있으며, 한 티끌 속에77) 다함이 없는 세계해가 있어서 시방에 원만한 부처 경계와 중생 경계가 서로 섭입(涉入)하면서도 장애를 일으키지 않으며, 오갖 보배로 마치 빛인 양, 그림자인 양 장엄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경에서 설하고 있지만, 어쨌든 삼천대천세계의 장엄 청정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둘째, 불신(佛身)의 여러 모습에서 보신과 화신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유마경』은 서른두 가지 대인(大人)의 상(相)을 갖춘 화신불이 설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아흔일곱 가지 대인의 상과 십화장세계해의 미진수(微塵數)78) 대인의 상을 갖춘 실보여래(實報如來:비로자나불)가 설한 것이다. 셋째, 부사의한 공덕의 신통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유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살의 신통을 설하고 있다. 즉 광대하고 드높은 수미산(須彌山)을 겨자씨 안에 받아들이며 사대해(四大海)79)의 물을 털구멍 하나에 들여놓을 수 있는 것과 또 작은 방 안에다 각가의 높이가 8만 4천 유순(由旬)80)이 되는 3만 2천 개의 사자좌(師子座)와 8천 명의 보살과 5백 명의 성문, 그리고 백천(百千) 명의 천인(天人)81)을 들여놓을 수 있는데, 유마힐이 이 방을 오른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대중들을 이끌고 암라수원(菴羅樹園)82)에 왕림한 것과 또 동방에 있는 묘희(妙喜)부처님 나라를 손으로 잘라서 이 땅으로 데려와 대중들에게 보인 뒤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것 등이다. 이같은 신통변화는 권학삼승(權學三乘:방편의 가르침을 배우는 3승)의 성문과 보살들을 위해 나타낸 것이다. 왜냐 하면 권교(權敎)의 성문과 보살들은 도(道)를 보는 것이 아직 실답지 않으며, 자(自)와 타(他)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타낸 신통변화도 그기에 따라 보는 것이라서 모두 왕래(往來)와 분제(分齊)와 한량이 있으며, 또 성스러운 뜻이 한 순간의 신통변화를 통해서 작은 근기들을 고무하여 점차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법 그대로[法爾]의 힘이 아니다. 가령 『화엄경』에서는 법 그대로[法如是]가 근본 법력(法力)이기 때문에 한 티끌 속에다 시방의 일체 불국토와 중생의 국토를 다 내포할 수 있으나, 이처럼 일체의 세계가 모두 티끌 속에 있다 해도 세계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며 티끌이 커지는 것도 아니니, 시방세계에 있는 티끌이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모두 이와 같다. 경전에서도 “모살은 한 작은 중생신(衆生身) 속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만, 그 작은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알라. 부처님께서 방편[權敎]을 통해 작은 근기를 이끌기 때문에 대중들은 신통력을 나타내면서 오고 가는 부처님을 몸 밖에서 보는 것이지만, 실교(實敎)에서는 스스로의 본각(本覺)으로 본심(本心)을 자각하고,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안과 밖[內外]이라거나 가고 온다[往來]는 갖가지 소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서도 시방의 일체 도량에 앉아 계시며, 시방에서 온 대중들도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 조화[化]를 따라가면서도 전혀 가고 옴이 없으니, 이는 신통력[神力]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법 그대로이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경전 속에서는 ‘부처님의 신통력[佛神力]’과 ‘법 그대로이기 때문에[法如是故]’라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전자는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부처님을 추앙해 으뜸[尊]으로 삼기 때문이며, 후자는 분질적인 덕(德)이 전혀 변화가 없어서 하나하나의 불국토와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근본을 의지하고 허망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경계들이 모두 빛인 듯 그림자인 듯 허로 비추고 사무치면서 시방에 두루하여 전혀 왕래도 없고 제한도 없는 것을 추앙한 것이다. 즉 하나하나의 중생 몸에 있는 털구멍 속에 시방이 두루하고 있는데, 이를 신통력으로 나누고 잘라내고, 오고 가며, 데리고 왔다가 보내버리는, 말하자면 허망한 견해를 이룰 뿐 본래의 법신(法身)에는 어긋나서 참된 보리의 본각성지(本覺性智)를 가로막는 방편[權敎]과는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유마힐 보살은 이러한 신통변화를 나타내고 나서 곧 실교(實敎:실다운 가르침)를 베푼 것이다. 『유마경』에서 “자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은 부처를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여래를 관(觀)해 보니, 전제(前際:과거)가 오는 것도 아니며 후제(後際:미래)가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현재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방편의 근기나 짧은 견해를 가진 자는 희귀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보살이 근기에 맞춰 대충 인도를 한 것이니, 이는 먼저 배우려는 마음을 내게 한 뒤에 실교(實敎)를 주기 위한 것이다. 방편으로 보인 신통변화를 참된 것으로 집착하다 지혜의 눈[智眼]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니, 방편임을 알아서 진실에 나아가 법계의 문에 들어가야 한다. 작위(作爲)가 있는 법은 성취하기가 어렵지만, 오직 연(緣)에만 따르며서 작위가 없다면 이루기가 쉽다. 작위하는 자는 수고롭기만 할 뿐 공(功)이 없고, 작위하지 않는 자는 연에 따라 저절로 성취한다. 공이 없는 공[無功之功]은 공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지만, 공이 있는 공[有功之功]은 공이 다 무상(無常)해서 여러 겁 동안 쌓는다 해도 결국은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는 일념(一念)의 연기(緣起)가 무생(無生)에서 저 3승 권학(權學)의 견해들을 초월함만 못한 것이다. 넷째, 근기에 따른 법문의 시설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유마경』은 2승(乘)의 근기를 위한 것이니, 2승을 보살의 보리(菩提)로 회향시켜 대승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 대승 근기 중에서는, 정토에 얽매여 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지 못한 자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중향(衆香)세계에서 온 보살들이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서 부처인 세존께 조그만 법이라도 내려주길 청하자, 여래는 근기에 의거해 그 보살들이 정토에 얽매인채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낮은 걸 보고는 이내 법을 설해서 유진(有盡)과 무진(無盡)의 해탈문(解脫門)을 배우게 한 것83) 등이다. 그리하여 아래 경문에서도 “크나큰 사랑[大慈]과 크나큰 버림[大捨]과 크나큰 연민[大悲]을 떠나지 말고,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기이 일으켜서 잠시라도 잊지 말 것이며, 중생 교화에서도 끝까지 싫증내지 말아야 한다. 4섭법(攝法)84)에 대해선 늘 조화로운 실천[順行]을 염두에 두고, 온갖 선정(禪定)에 있는 것을 지옥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생사(生死) 속에 있더라도 원관(園觀)85)처럼 생각하고, 찾아와서 도(道)를 구하는 자를 보면 훌륭한 스승처럼 생각하라”고 했으니, 자세히는 『유마경』에 설해져 있다. 이 『유마경』은 2승, 그리고 3승 중에서도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지 못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자비와 지혜를 키워나가게 한 경전이다. 하지만 아직 단박에 직접 부처의 문[佛門]을 보이고 있지 못하고, 아직 10주[住]에서의 초발심(初發心)이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걸 설하지 못하며, 아직 『화엄경』처럼 광대하고 묘한 일을 보이고 있지 못하니, 다 분수에 따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들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유마경』 속의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 중에서 문수(文殊)와 미륵(彌勒) 같은 대보살이나 사리불 같은 영향성문(影響聲聞)86)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들은 모두 3승 중에서 방편을 배우는[權學] 대중들이다. 설사 그 중에서 어떤 보살들이 온갖 취(趣)87)에 태어나 같은 부류로 함께 온다 해도 모두 3승의 권학(權學)을 성취시켜 점진적으로 반절시키려는 것이지, 원만한 부처님들의 본승(本乘)은 여전히 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 속의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들은 이와는 다르다. 즉 모두 다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불지(佛智)의 과덕(果德)과 자체의 법신(法身)이 보현행(普賢行)을 갖추어서 그림자를 따라 사방 찰해(刹海)의 모든 도량에 나타나 여래가 타는[乘] 근본법을 성취한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3승 근기도 없으며, 설사 3승 근기가 있다 해도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마치 장님이 해와 달을 대하는 것과 같으며, 귀머거리가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으며, 타고난 가난뱅이가 천상의 보물 창고를 대하는 것과 같으며, 대복덕(大福德)이 지옥에 처해 있는 것과 같으며, 아귀가 커다란 바닷가에 있는 것과 같다.88) 3승의 근기는 도력(道力)이 궁극에 이르지 못한 탓에 마음을 돌이키지[廻心] 못한 자는 법계해(法界海)의 모든 부처님 경계에 늘 머물면서 부처님과 더불어 덕(德)을 같이하고 몸[身]을 같이하더라도 끝내 믿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따로 부처의 견해[佛見]를 구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불자(佛子)야, 설사 보살이 한량없는 백천억(百千億) 나유타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해서 갖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모은다 해도 이 여래의 부사의한 공덕(功德) 법문을 듣지 못하거나, 듣더라도 믿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고 법문에 들지도 못한다면, 진실한 보살이라고 칭할 수 없으니, 여래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마경』과 『화엄경』은 법을 듣는 대중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꼭 알아야 한다. 『유마경』에선 사바세계의 대중들이 피차(彼此)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향적(香積)세계에서 온 무리들은 더러움[垢]과 청정함[淨]이 완연히 존재하니, 반드시 알라, 이러한 부류는 견해가 여전히 참답지 못해서 청정한 불국토라는 한쪽만을 지키기 때문에 비록 보살이라 칭하더라도 여전히 법도(法道)가 원만하지 못하다. 이 무리들은 부처님의 뜨을 자세히 알지 못한 탓에 비록 보리를 기뻐하는 의지와 염원이 있더라도 마음이 청정한 불국토에 매여 있어서 저 법신(法身)과 지신(智身)과는 현격히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법화경』에서는 “불퇴전(不退轉)의 보살들이 구 수효가 항하의 모래수89)만큼 많다 해도 역시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대중들은 자신과 불신(佛身)이 차별이 없고, 자신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가 차이가 없으며, 성(性)과 상(相)이 서로 용납하고, 일(一)과 다(多)가 서로 동별(同別)90)하기 때문에 법계해의 지수(智水)에 거처하면서 물고기도 되고 용(龍)도 되고,91) 열반의 큰 집에 머물면서 음양(陰陽)을 나타내어 만물을 교화한다. 이때도 주(主)와 반(伴)92)이 자유롭게 서로 비추고 참여하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 융화하며, 인(因)과 과(果)가 사무쳐 통하니,93) 『화엄경』의 대중들은 모두 이 같은 무리들이다. 여섯째, 가르침을 설해서 법문을 세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유마경』은 유마힐 거사가 약간의 부사의한 신통변화를 나타내서 2승(乘)의 마음을 돌이키게[廻心] 한 거이다. 또 생사(生死)의 입장에서 몸의 병을 나타내 더러움과 청정함이 둘이 아니란 걸 알게 한 것이다. 또 보살의 대자비라는 병을 나타내서 불이(不二)의 법문을 충분히 진술하였는데, 이는 정혜(定慧)의 관지(觀智)를 건립함으로써 구하지 않는 법[不求之法]이 가장 핵심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법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일체법에 대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등각(等覺)인 5위(位)와 6위(位)94)의 행상인과(行相因果)95)가 같고 다름을 충분히 진술한 『화엄경』의 법문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일곱째, 유마힐보살이 보인 행(行)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힐은 대자비심을 나타내려고 짐짓 생사에 들어가 병치레를 보였지만, 『화엄경』의 비로자나는 대자비로 생사에 들어가 정각(正覺)을 이루는 행실을 보였으니, 이는 위대한 지혜가 세상을 초월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임을 말한다. 여덟째, 천양한 법문의 처소가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을 설한 곳은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암라수원(菴羅樹園)과 유마힐의 방이었으며, 『화엄경』은 마가다국의 보리도량 안과 일체 세계와 일체의 티끌 속에서 설한 것임을 말한다. 아홉째, 부처님을 항상 따르는 대중들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을 설했을 때는 성문(聲聞)이 항상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이 되었는데, 단 5백 명이었다. 그러나 『화엄경』을 설했을 때는 모두 일승(一乘)인 대보살들이 부처님을 항상 따르는 대중으로서 10불찰(佛刹)에 있는 미진수의 대중들이었으며, 모두 보현과 문수의 체(體)와 용(用)을 갖춘 무리들이었음을 말한다. 열째, 부촉한 법장(法藏)의 유통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유마경』의 「촉루품(囑累品」에서는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계시다. “미륵아, 내 이제 한량없는 억 아승기겁(阿僧祇劫)96) 동안 모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97)의 법을 네게 부촉하노라” 하시니, 그러므로 곧 그 경전을 이미 성취한 보살과 이미 부처님 집아에 태어난 자에게 부촉하신 것이다. 『화엄경』에는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안에 부촉과 유통이 있다. 즉 『화엄경』은 처음으로 도(道)를 보아서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범부로서의 초심자에게 부촉되고 있다. 왜냐 하면 이 경전은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당사자가 능히 증득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증(自證)을 삼기 때문이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 설법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98) 3승은 방편을 나타낸 것이니, 단지 성인이 수행으로 증득하길 권한 것일 뿐 얻은 법이 실답지 않으며,99) 법을 강설한 것도 실다운 것이 아니다.100)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법을 설한다. “이 경전의 진귀한 보배는 여래 법왕(法王)의 참된 자식으로서 여래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래 종자의 모든 선근(善根)을 심은 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일체 중생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불자(佛子)야, 이처럼 부처님의 참된 자식이 없다면, 이같은 법문은 오래지 않아 흩어져 사라지리라.”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약 부처님의 차된 자식이 시방세계에 한도 없고 끝도 없어서 세계의 미진(微塵)으로도 그 수효를 알지 못함을 인정한다면, 어째서 이 경전에선 ‘만약 참된 자식이 없다면 이내 흩어져 사라지리라’고 염려한 것입니까?” 질문에 답한다. “이 경전의 뜻은 범부에게 부촉함으로써 그들이 깨달음을 통해 이 법문에 들게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부처님 집안에서 태어난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을 굴려서 부처님의 종자를 끊기지 않게 하니, 이는 범부들도 참된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만약 대보살들에게만 부촉한다면, 범부는 인연이 없고 성인은 스스로 밝힐 것이니, 범부로서는 배우고 닦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범부의 길 속에서 부처의 종자가 그대로 끊어져서 이 경전은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에게 부촉해서 닦게 한 것이며, 이미 도(道)를 본 대보살들에겐 부촉하지 않은 것이다.” 한 가지101)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이 같다는 것은, 『유마경』에서는 “법을 구하는 자는 일체법에 대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와 도 “자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은 부처님을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여래를 관해 보니, 전제(前際)가 오는 것도 아니요 후제(後際)가 가는 것도 아니요 지금 현재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를 강설하고 있다. 이는 처음 관지(觀智:관찰하는 지혜)의 문은 대략 같은 것이지만, 도(道)에 들어가는 행상(行相)의 문호(門戶)와 단계는 기준이 전혀 다른 것이니, 앞으로 상세히 밝혀 나가겠다. 일곱째, 방편[權]을 회통해서 진실[實]에 들어가는 것으로 종지를 삼았다는 것은, 『법화경』은 저 3승의 사람을 인도해서 1승(乘)의 진실한 가르침[實敎]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마치 온갖 지류(支流)가 커다란 바다로 귀일하듯이 3승을 거두어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장(藏)법사 등 과거의 대덕(大德:고승)들은 회통한 공통적인 가르침[共敎]을 1승으로 삼았으니, 이는 3승이 다 함께 법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자세히 탐구해서 두 문을 회통해 보면, 『법화경』은 방편의 근기를 인도해서 진실[眞]로 돌아가게 한 것이요, 『화엄경』은 단박에 대근기에게 게시하여 곧바로 부여한 것이다. 비록 1승이란 이름을 공유해서 법사(法事)가 대략 같긴 하지만, 그 궤범(軌範)을 논해 보면 차이점이 많다. 이제 그 차이점 전부를 열거하고 싶지만, 내용이 광범위해서 다 들기가 힘들다. 그래서 열 가지[十門]만 들어서 그 대강[綱目]을 알리고자 한다. 열 가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주(敎主:가르침의 주체)가 다르다. 둘째, 방광(放光:광명의 방출)이 다르다. 셋째, 국토가 다르다. 넷째, 법을 청한 주체가 다르다. 다섯째, 다회를 장엄하는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이 다르다. 여섯째, 서분(序分) 속에서 열거한 대중이 다르다. 일곱째, 용녀(龍女)가 몸을 바꿔 성불(成佛)한 것이 다르다. 여덟째, 용녀가 성불해서 거처한 국토가 다르다. 아홉째, 육천 대중이 발심(發心)한 것이 다르다. 열째, 모든 성문(聲聞)들에게 준 원겁의 수기(授記)가 다르다. 첫째, 교주가 다르다는 거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법화경』은 화신불(化身佛)이 강설한 것이며, 과거 열반에 든 다보불(多寶佛)이 와서 “이 경전은 삼세(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설하신 것”이라고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가 않다. 교주는 비로자니를 교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법신(法身)ㆍ보신(報身)의 이지(理智)인 진신(眞身)으로서 한량없는 모습의 바다와 공덕의 장엄을 갖추고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께 동일한 경우[一際], 동일한 시기[一時], 동일한 법계[一法界]로서 보시의 상(相)이 겹겹이 겹치면서도 장애가 없으며, 옛날과 지금[古今]이 한 시기일 뿐 삼세가 아니기 때문에 옛 부처님도 과거가 아니요 지금 부처님도 새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니, 까닭인 즉 근본지(根本智)의 성(性)과 상(相)이 동일하고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본 부처님[本佛]이 근본의 법을 설해서 대근기에게 단박에 부여했기 때문에 화신불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예전에 열반에 든 다보여래와 지금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비로자나불과는 다른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교주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바왕(放光)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상(白毫相)에서 과광(果光)102)을 방출한다. 그 비추는 경계가 단지 1만 8천 불국토로서 모두가 다 금색(金色)이다. 이는 곧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이 없고[無邊], 한량이 없고[無量], 다함이 없는[無盡]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과(果)의 법만을 드러냈을 뿐 인(因)의 지위103)를 드러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인과(因果)와 법을 표현하는 광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십(十)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상세히 밝히겠다. 셋째, 국토가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세 번 세계를 변화시켜 정토를 이루게 하는데, 천상의 사람들을 다른 국토에 옮겨 놓고 나서 다른 곳에서 온 대중들을 안치한 뒤, 이 예토(穢土)의 경계를 변화시켜 청정한 불국토를 이루게 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이 사바세계가 그대로 연화장(蓮華藏)세계로서 하나하나의 세계가 서로 서로를 내포하는데, 이것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하나하나의 세계가 시방에 가득 차고, 시방이 하나에 들어가면서도 여지(餘地)가 없다. 그런데도 세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데, 비할 바 없는 공덕104)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성도(成道)는 하나의 작은 중생의 몸 속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저 작은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는 다만 범속함[凡]과 성스러움[聖]이 바탕이 같아서[同體] 이전하는 모습이 없고, 하나의 티끌 속에서 자(自)와 타(他)의 바탕이 같다는 걸 말하고 있다. 따라서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 인간과 천인을 이전(移轉)하여 청정한 불국토를 밝히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자(自)와 타(他)를 나누면서 소견(所見)에 걸려 있는 방편 근기[權根]를 대치(對治)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니, 이 때문에 지금 국토가 다르다는 걸 밝힌 것이다. 넷째, 법을 청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화경』은 법을 청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문수나 보현 같은 수위보살(隨位菩薩)105)을 시켜 각기 스스로 자기 지위(地位)의 법문을 설하게 하는 것으로 설법(說法)의 수장을 삼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과(果)의 법을 표현하느라고 과(果)로써 인(因)을 삼아 대자비의 행(行)을 일으킨 것이니, 근본지(根本智)가 이루어지면 과체(果體)는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씀도 없고 설법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는 대자비의 행(行)이 근본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수와 보현은 인(因)의 지위에서 부처님의 과법(果法)을 설해 중생들을 깨달아 들게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아승기품(阿僧祇品)」은 세간의 수법(數法)이 너무나 광대해서 헤아리가 어려우며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이른다고 하는데, 이는 5위(位) 가운데 인과문(因果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자기 지위에서 설한 법문이며, 또한 부처님 스스로 설한 법문이다.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은 여래가 스스로 인과를 성취한 뒤에 부처님 스스로 법 그대로[法爾]의 힘이 변함 업는 지혜와 복덕의 광명이라는 법문을 설한 것인데, 이 역시 5위 안의 행상인과(行相因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부처님 스스로 설법하신 것이다. 이는 불과(佛果)에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두 품을 제외한 나머지 38품은 모두 5위 내의 행상(行相) 법문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신 것이 아니며, 모두가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 등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스스로 설하게 한 것이다. 부처님은 단지 광명의 방출로 그걸 나타내셨을 뿐이니, 광명의 방출로써 표현한 법의 상(相)은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다. 『화엄경』을 설할 때는 단 하나라도 성문이나 소보살이 법을 청하는 주체가 된 경우가 없으며, 모두 부처님의 과위(果位) 안에 있는 대보살들이 스스로 서로 문답해서 불과의 법문 행상(法門行相)을 건립하여다. 이는 대근기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서 단박에 불과(佛果)를 가져다 직접 수여하여 인을 삼았으니, 인은 곧 과로써 인을 삼은 것이며, 과는 곧 인으로써 과를 삼은 것이다. 마치 씨앗을 심는 일에 비유할 수 있으니, 선정[定]과 슬기[慧]의 힘으로 사유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법을 청하는 주체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다섯째, 대회를 장엄하는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는 삼천대천세계를 청정하게 장엄시켜 화현(化現)한 중생들이 충만하고, 회상에온 부처님들도 모두 화신(化身)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 않다. 즉 10회(會)와 10처(處)의 대중들이 시방에 가득 차서 본래의 처소[本處]를 옮기지 않고서도 법계에 충만해 있다. 하나하나의 몸의 모습과 털구멍 속에 국토가 겹겹이 겹치면서 보살과 부처님의 몸이 서로 사무쳐 들어가고, 온갖 종류의 중생이 또한 모두 걸림이 없어서 다 몸과 국토가 서로 사무쳐 마치 그림자처럼 포용한다. 모여든 대중들도 법신(法身)을 파괴하지 않고서 상호(相好)를 따르는데, 법신과 상호가 하나의 경계로서 차별이 없다. 즉 그 모습[相]이 완전한 참[全身]이라서 화신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진신(眞身)도 말하고 화신(化身)도 말하면서 서로 참여하고 있는 여타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니, 이 때문에 지금 대회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 서분(序分) 속에서 열거한 중생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는 먼저 성문(聲聞)의 무리들 1만 2천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다음엔 마하파자파제(摩訶波闍波提)비구니106)와 권속(眷屬) 6천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있다. 이 마하파자파제는 부처님의 이모이다. 다음엔 야수다라(耶輸)陀羅)비구니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분은 부처님께서 태자였을 때의 부인이다. 부처님께서 태자였을 때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구이(瞿夷)와 야수(耶輸)와 마노사(摩奴舍)이다. 구이는 선재(善財)동자가 10지(地) 법운지(法雲地)에서 만난 선지식인데, 10지의 법열(法悅)이 능히 자비롭기 때문에 법을 위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즉 법(法)으로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내의 의의(義意)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엔 보살 8만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그 다음엔 온갖 천신과 용(龍), 귀신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가 않다. 먼저 보살의 상수(上首)107)가 10불(佛)세계에 미진수(微塵數)가 있음을 열거할 뿐 그 따르는 자는 논하지 않는다. 다음엔 집금강신(執金剛神)108)의 무리들을 열거하고, 그 다음엔 온갖 신과 용(龍)ㆍ천인 등의 부류로 모두 쉰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하나의 부종(部從:부류)이 각기 다르고, 각각의 부종에는 저마다 불세계(佛世界)의 미진수 중생들이 있고, 또 어떤 부종은 곧바로 한량이 없다고 말한다. 또 10회의 초회(初會)에선 보리도량을 통털어 쉰다섯 부류의 대중이 있으니, 이 10회(會)의 대중들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밝히겠다. 다만 대강의 뜻만을 논한다면, 불신(佛身생의 바다[衆海]가 가이없는 법계로써 겹겹이 겹치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몸에는 전체를 포용하면서도 경계가 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몸[一身]은 그대로 법계를 량(量)으로 삼으니 자(自)와 타(他)의 경계가 전혀 없고, 법계가 그대로 자기 몸[自身]의 전체성[遍周]이니 주관[能]과 객관[所]의 정견(情見)이 끊어졌다. 대략 이 정도로 논하지만, 10회(會)에서 열거한 대중은 다시 밝히겠다. 초회에서 7회(會)까지는 성문의 이름을 전혀 들을 수 없고, 8회(會)에 가서야 비로소 비구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는 지위[位]에 이르러야 행상(行相)을 밝히는 것이다. 일곱째, 용녀가 몸을 바꿔 성불한 것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용녀가 찰나간에 여자 몸을 바꿔서 보살행을 갖춰 남방(南方)에서 성불하지만 『화엄경』은 그렇지 않다. 단지 스스로의 정견(情見)만 없게 하면 큰 지혜가 더욱 투명해지고, 그렇게 되면 만법의 바탕[體]이 참[眞]이라서 변화하여 바뀌는[轉變] 모습[相]이 없다. 마치 『유마경』에 나오는 다음의 문답같은 것이다. “사리불이 천녀(天女)에게 말했다.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轉] 않습니까?’ 천녀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내가 12년 동안 여자 모습을 구했지만 결국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바꾸라는 말씀입니까?’” 또 암제차녀(菴提遮女)가 사리불에게 “남자로부터 우리 여자를 낳았다”고 하는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만법이 본래 그 자체가 여여(如如)한데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가령 『화엄경』 「입법계품(立法界品)」 속에서 선재동자의 선지식(善知識)은 문수ㆍ보현ㆍ비구ㆍ비구니ㆍ장자(長者)ㆍ동자(童子)ㆍ우바이(優婆夷)ㆍ동녀(童女)ㆍ선인(仙人)ㆍ외도(外道) 등 53명이데, 저마다 스스로 보살행을 갖추고 스스로 불법도 갖추고 있다. 이 선지식들은 온갖 중생에 따라 몸을 나타내는 것이 같지 않지만, 몸을 바꾼다[轉]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법안(法眼)으로 보면 속됨[俗]도 참[眞]되지 않은 것이 없고, 세간의 육안으로 보면 참됨도 속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법화경』은 방편을 가르치는 3승 근기의 견해가 아직 궁극적이지 못한걸 치유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씨앗을 성취하게 한 것이며, 또한 여자 몸을 조속히 바꾸어 성불한 일을 통해 기특(奇特)함을 낳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발심(發心)하여 참된 지견(知見)에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선한 근기를 일으키는 걸 감당하지 못한 것이니, 여전히 3승의 방편[三權]을 이끌어서 하나의 진실[一實]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또 저 시겁(時劫)의 3승기(僧祇)109)를 고정되게 집착하는 걸 타파해서 찰나간에 삼세의 본성이 본래부터 한 경계[一際]로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평등한 법리나 걸 증득하게 하며, 이를 통해 3승의 소견의 그물을 찢어내고 보살의 초암(草菴)110)을 철거해서 법계의 문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진실한 집[眞實宅]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따라서 용녀로 하여금 성불하게 한 것은 과거로부터 오래도록 수행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고,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인 것은 과거에 배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며, 여자 몸을 바꾼 시간[時分]이 찰나를 넘지 않는 것은 행(行)을 갖춘 불과(佛果)가 당장의 일념[毫念]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법은 본래 그대로라서 그 자체가 시간이 없는데도 방편을 배우는 3승의 근기가 자기 견해로 가로막혀서 스스로 실법(實法)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화현(化現)이 됨을 일컫는다. 결국 자기의 본분사(本分事)가 그런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온전하게 거처하면서도 오히려 막힌 견해[滯見]를 품고 있는 것이니, 어찌 계(界) 밖의 승기(僧祇:아승기)를 가리킨다고 말하겠는가?111) 이 막힌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면 결정코 영겁토록 어긋날 것이며, 마음을 돌이켜서 견해를 없애야 비로소 옛 집[舊居]112)일 터이니, 지금 당장 온갖 견해의 업[業]을 소멸시키는 것이 어찌 다겁(多怯)에 걸친 번뇌의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돌이키는 것과 같겠는가? 『화엄경』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문은 범속함[凡]과 성스러움[聖]을 하나의 참[眞]이라 해도 여전히 소견(所見)의 장애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소견이 있으면 곧 범속함이요, 정(情)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 본성[性]에 맞는 연기(緣起)는 위를 보든 밑을 보든, 나아가든 물러서든, 굽히든 펴든, 겸손하든 공경하든, 이 모든 것이 보살행이지만, 단 한 법도 낳고 머물고 소멸하는[生住滅] 전변(轉變)의 상(相)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용녀가 몸을 바꿔서 성불한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여덟째, 용녀(龍女)가 성불해서 거처한 국토가 다르다는 것은, 남방무구세계(南方無垢世界)가 사바세계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풀이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진실에 응할 수 있기 때문에 무구(無垢)라 칭한다. 또 본각(本覺)을 올바로 따르기 때문에 남방(南方)이라고 부르니, 남북으로 바름[正]을 삼기 때문이다. 또 남방은 명(明)이 되고 허(虛)가 된다. 남방은 이(离)가 되고, 이는 가운데가 허(虛)하다. 8괘(掛) 중에서 이(离)는 마음을 본받으니, 마음은 허무(虛無)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속의 8괘에 의거해서 나타낸 것이니, 다른 국토엔 이 8괘라는 명칭이 없지만 그 방법은 이 한 가지이다. 비록 이치[理]가 이렇긴 하지만, 이(理)가 있기에 사(事)가 있는 것이며, 또 반드시 국토가 있기에 대중들이 귀의하는 거이다. 만약 따로 남방에 머무는 것이 있다면, 이는 자(自)와 타(他), 피(彼)와 차(此)가 오히려 현격한 것이라서 도리어 방편 근기를 단계적으로 인도해 믿음과 이해를 낳게 해서 불승(佛乘)으로 옮겨가게 하는 3승을 마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3승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어서 그 남아 있는 세력을 꺾기가 어려우며, 설사 한 푼의 회심(廻心)이 있다 해도 자(自)와 타(他)의 정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단박에 법계의 체(體:바탕)에다 인(印:도장)을 찍어서 자(自)와 타(他)가 서로 사무치며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인타라망(印陀羅網)113)의 문이 머무는 화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거처하는 국토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아홉째, 6천의 대중이 발심(發心)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용녀가 성불할 때, 사바세계의 성문과 보살 등 모든 대중들은 용녀가 성불하면서 당시 모인 인간과 천인들을 위해 법을 설한ㄴ 것을 멀리서 보았다. 대중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멀리서 공경히 예배하였다.” 또 그 다음 문장에서는 이렇게 설한다. “사바세계의 3천 중생이 불퇴지(不退地)114)에 머물고, 3천 중생이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수기(受記)를 얻으며, 지적(智積)보살과 사리불 등 일체의 대중이 묵묵히 믿고 받아들였다.” 지적보살과 사리불이 비록 지혜로운 이[智士]가 되었지만, 여전히 미혹된 무리들에게 의탁해서 몽매한 자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의 실천[行]을 통해서 평범한 자들을 더욱 제도하여 그 법도[軌躅]를 이루게 한 것이다. 그래서 사바의 대중들이 멀리서 공경히 예배한 것이니, 만약 그럴진댄 6천의 대중들이 발심(發心)한 것도 피(彼)와 차(此)가 없어진 건 아니다. 모두가 방편을 가르치는 3승 유위(有爲)의 보리를 다르는 것이지, 자(自)와 타(他)가 한 몸인 보문법계(普門法界)115)의 본각보리(本覺菩提)를 얻지는 못한 것이니, 이런 뜻 때문에 멀리서 공경히 예를 표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 않다. 즉 보문법계(普門法界)와 보견법문(普見法門), 여래장신삼매(如來藏身三昧)의 경계,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장엄한 법문, 세계해선(世界海旋)116)의 중중무진하는 오묘한 지혜를 단번에 얻게 되니,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증득하고 하나를 끊으면 일체를 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 속에 시방 모든 불국토[佛刹海]의 장엄이 있으며, 불신(佛身) 속이 바로 자신의 경계라서 시방세계에 중중무진하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은폐되기도 한다. 이는 법이 그러한 것이니, 마치 온갖 지류가 바다로 돌아갈 때, 아직 바다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젖는 성품[濕性]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짠맛이 되는 것과 같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이러해서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본래의 불해(佛海)는 다르지 않으니, 이 어찌 『법화경』 속에서 사바의 대중들이 멀리서 공경히 예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사의(事儀)와 법칙은 화엄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만 「법계품(法界品)」 속에선 6천 명의 대중이 찰나간에 10안(眼)117)이 더욱 밝아지고, 5백 명의 작은 동자가 한 생애에 10신(身)을 모두 증득하고, 나머지 대중들도 그러하며, 선재 동자는 남쪽에서 미륵을 만나서 벗들에게 물어 불과(佛果)가 이미 완전해지고 다시 보현의 몸에 들어가 법문(法門)을 모두 갖추니,118) 이(理)와 사(事)가 평등해지고 법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어서 법계가 이미 티끌 속에 처해 있다. 그러니 어찌 멀리서 공경히 예를 표할 것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금 6천의 대중이 발심(發心)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열째, 성문에게 준 원겁의 수기(授記)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용녀가 법계무시(法界無時)119)의 문을 단박에 인(印)을 쳐서 불과를 완전히 드러내긴 한다. 그러나 3승의 권학(權學)은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다 해도 남아 있는 습기(習氣)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단박에 증득하지는 못한다. 즉 원겁(遠劫)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오르기 때문에 원겁의 수기(授記)를 받는 것이다. 이는 미혹하면 범부요 깨달으면 부처라서 설사 남아 있는 습기가 있더라도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으로 다스리는 화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이 없으면 단지 절복(折伏)120)만을 성취하는 것이라서 부처님의 사수(駛水)의 흐름121)에는 들어가질 못하니, 또한 원겁(遠劫)을 거쳐야 비로소 들어갈 수가 있다. 3승의 초심자(初心者)는 믿음의 근기가 낮기 때문에 속박을 벗어나질 못하고, 번뇌가 많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즐거이 집착한다. 비록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나 근기가 낮아서 늘 정체되고 후퇴하기 때문에 여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무상(無常)과 부정(不淨)과 찰나멸괴(刹那滅壞)122)와 염념부주(念念不住)123) 등의 관법(觀法)으로 관찰하게 해서 염리(厭離)124)를 내게 하신 것이다(이상은 제1단계이다). 염리(厭離)의 마음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청정함[淨]과 더러움[穢]에 머물게 되는데, 여래는 방편의 가르침 속에서 이런 근기를 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자비와 지혜 닦기를 권해서 불과(佛果)를 구하게 했어도 여전히 정토가 다른 곳[他方]에 있다고 미루신다125)(이상은 제2단계이다). 3승의 견분(見分:소견)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아 이 사바세계를 늘 예토(穢土)로 보고서 인(因)을 설하고 과(果)를 설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잠시 화현(化現)해서 청정케 하고, 홀연히 신력(神力)을 수용해서 당장에 예토를 나타내신다126)(이상은 제3단계이다). 이처럼 3승의 가르침에는 다 분명한 글이 있다. 즉 이 무상관(無常觀)에서 나온 지혜의 습성을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에 용녀가 단박에 불승(佛乘)을 보였다 해도, 또 이 불승을 믿는다 해도 여전히 그대로 증득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뜻 때문에 『법화경』의 회상에서는 수기(受記)를 받은 바가 다른 것이니, 모두 원겁(遠劫)에서 받고 있다. 법화는 점진적으로 이끌어서 돌아가게 하는 것이요,127) 화엄은 당장에 직접 주는 것이니128) 발심(發心)이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 때문에 서로의 행상(行相)이 같지 않은 것이다. 두 경전에서는 같은 것[同門]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르는 것이다. 여래승이란 곧 1승(乘)인데,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일체 세간의 온갖 군생(群生)들 중에서 성문승을 구하려는 자가 드물고, 연각승(緣覺乘)을 구하려는 자는 더욱 적고, 대승을 구하려는 자는 가장 희귀하다. 그러나 대승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하겠으니, 이 법을 믿는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음이 사그라드는[沒] 것을 싫어하는 중생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성문의 길129)을 설해서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밝고 열이한 중생이 있다면, 그를 위해 인연법(因緣法)을 설해서 벽지불(辟支佛)을 얻게 한다. 자비심 배우는 걸 좋아해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중생이있다면, 그를 위해 보살의 길을 설한다. 결정코 대사(大事)를 좋아해서 부처님의 몸을 보이기 위하여 무진불법(無盡佛法:다함이 없는 불법)을 굴리려고 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를 위해 1승(乘)의 길을 설한다.”130) 이것은 『화엄경』 속에서 4승(乘)을 나눈 뜻이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문 앞의 세 수레[門前三駕]는 아직 방편문을 보이고 있다. 맨땅[露地]의 흰 소[白牛]에서 비로소 바른 가르침[正敎]을 밝혔으니, 오직 1승법만 있을 뿐 2승이나 3승은 없는 것이다. 이는 2승이나 3승 외의 권종(權宗)으로 맨땅의 실다운 가르침[露地實敎]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4승의 회통은 법화나 화엄이나 공통이지만, 시설한 교화의 의식(儀式)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또 『법화경』에서는 “이 한가지 일[事]만 진실[實]이요, 나머지 둘은 참[眞]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구절만을 준거하면 마치 3승을 세운 것 같지만, 그 회통을 논하면 오히려 4승을 이룬다. ‘이 한 가지 일만 진실’이라는 것은 불승(佛乘)의 사(事)가 진실이란 것이다. 나머지 둘은 보살대승(菩薩大乘)과, 연각승과 성문승을 합친 것이다. 연각승과 성문승을 합친 이유는 양자가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니, 이를 귀경(龜鏡)을 삼아서 밝게 비춰보아야 한다.131) 둘째132)는 용녀가 1찰나 사이에 삼세의 본성을 인(印)치고, 또 범부 그대로가 성(聖)이라서 털끝만치도 변하거나 달라지지도 않는다. 이는 선재 동자의 이해[解]와 실천[行]을 통해 도(道)에 들어가는 법문과 대략 같은 것이다. 선재가 일평생에 성불했다는 것은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서 삼세의 본성을 증득해 옛날[古]과 지금[今]이 같은[齊等] 것이다. 이는 용녀가 1찰나에 몸을 바꿔서 행(行)을 갖춰 성불한 것처럼 단번에 모두 마친 것이니, 모두 근본법을 칭한 것이다. 법이 이렇기 때문에 시겁(時劫)을 세운 것은 중생의 정(情)에서 나온 티끌이다. 선재는 이를 증득해서 이름을 일생(一生)이라 한 것이니, 삼세의 시겁(時劫)이 다했다면 다시 무슨 생(生)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름이 일생이 된 것이다. 그 밖에 시설한 열 가지가 같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했다. 그러나 용녀는 몸을 바꾸고 선재는 변하지 않았으니, 이 바꿈[轉變]과 바꾸지 않음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1)정식(情識), 즉 감정이나 의식이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나라 현장의 번역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생(衆生)으로 번역했으며, 현장 이후로는 유정으로 번역한다. 이에 대해 풀이나 나무, 산하대지처럼 감각이 없는 것은 무정(無情), 또는 비정(非情)이라 한다.
2)지(智)는 체9體)로서 우리말의 철에 해당한다. 이 체의 작용[用]은 혜(慧)로서 우리말의 슬기에 해당한다. 바다[海]는 모든 지류와 강물이 집대성된 장소다. 이처럼 일체의 지혜가 갈무리된 곳을 지혜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3)앞에 나온 유정(有情)이 정(情:감정0을 가진 모든 생명을 말한다면, 여기서는 식(識:의식)을 가진 모든 생명을 말한다. 다만 모든 생명은 대체로 정과 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유정과 함식은 대동소이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4)여기서는 절대의 이법(理法) 자체를 뜻한다.
5)욕계(欲界)의 제4천인 도솔천(兜率天)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왕궁에 내려와 마야 왕비의 태(胎)에 들기 전에 호명(護明)보살로서 이곳에 머무셨다.
6)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와 중생을 제도하고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을 여덟 가지 대표적인 상(相)으로 정리한 것.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료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7)아란야(阿蘭若)의 준말. 고요한 곳을 뜻한다. 수행하는 곳으로 통상 사원을 가리킨다.
8)수행을 완성한 과보로서 나타난 부처님의 몸. 3신(身) 중 하나.
9)보현이 후득지(後得智)의 과(果) 이후의 만행을 주재하기 때문에 장자라고 한 것이다.
10)10삼매의 명칭.
11)문수가 근본지(根本智)의 경지에 따라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을 주재하기 때문에 소남이라고 한 것이다.
12)『화엄경』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 드신 선정(禪定). 풍랑이 자는 바다에 삼라만상이 비치는 것처럼 일체법이 선정의 마음에 드러나는 삼매.
13)찰(刹)은 육지, 땅의 듯. 육지와 바다로서 일반적으로 세계를 의미한다.
14)과거의 업에 따라 받은 몸과 마음을 정보라고 하고, 그 몸과 마음에 따라 취하게 된 세간을 의보라고 한다.
15)하나하나의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을 달았고, 그 보배 구슬 하나하나마다 다른 보배 구슬의 영상(影像)을 모두 나타내고, 그 하나의 보배 구슬 안에 나타나는 모든 보배의 구슬의 영상마다 도 다른 일체의 보배 구슬의 영상이 나타나면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는 것.
16)시방세계.
17)마니는 구슬ㆍ보배로서 번뇌가 없음[無后], 뜻대로 함[如意]의 뜻. 무구주(無垢珠)ㆍ여의주(如意珠)를 말하는데, 악을 없애고, 탁한 물을 맑게 하고, 재난을 벗어나게 하는 공덕이 있다.
18)『화엄경』에서 설명한 열 가지 부처의 몸. 첫째, 보살이 깨달은 지혜에 의해 일체를 부처로 보는 해경(解境)의 10불은 중생신(衆生身)ㆍ국토신(國土身)ㆍ업보신(業身)ㆍ성문신(聲聞身)ㆍ벽지불진(辟支佛身)ㆍ보살신(菩薩身)ㆍ여래신(如來身)ㆍ지신(智身)ㆍ법신(法身)ㆍ허공신(虛空身)이다. 둘째, 보살의 수해이 완성된 부처의 경계를 가리키는 행경(行境)의 10불은 정각불(正覺佛)ㆍ원불(願佛)ㆍ업보살(業報佛)ㆍ주지불(住持佛)ㆍ화불(化佛)ㆍ법계불(法界佛)ㆍ심불(心佛)ㆍ삼매불(三昧佛)ㆍ성불(性佛)ㆍ여의불(如意佛)이다.
19)과거ㆍ현재ㆍ미래를 삼세라 하고, 이 삼세에 다시 각각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어서 구세가 된다. 그리고 구세에다 근본적인 지금 당장의 일념을 더해서 십세가 된다.
20)불법을 수행해 나가는 다섯 종류의 위계(位階).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ㆍ구경위(究竟位)를 말한다.
21)아홉 겹의 천상 세계로서 지극한 천(天)을 가리킨다. 『화엄경』이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에서 10주(住) 법문을 설명하기 시작해서 나아가 3선천(禪天)에서 11지(地) 법문을 설명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22)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회상을 가리킨다. 첫째, 선종에서는 총림의 스님들을 일컫는다. 백천의 강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듯이 뭇 스님들이 총림에 모여드는 것을 해회라 한다. 둘째, 여러 존귀하고 성스러운 무리들이 모여듦을 이른다. 덕이 높고 수가 많음을 바다에다 비유한 까닭에 해회라 칭한다.
23)깨달음의 정화(精華)에 대한 실천 법문이 수없이 많다는 뜻.
24)열 가지 신통. 타심통(他心通)ㆍ천안통(天眼通)ㆍ숙명통(宿命通)ㆍ미래통(未來通)ㆍ천이통(天耳通)ㆍ무작통(無作通)ㆍ언음통(言音通)ㆍ색신통(色身通)ㆍ진속통(眞俗通)ㆍ멸진지통(滅盡智通)이다.
25)열 가지 변설. 불가수변(不可數辯)ㆍ불가량변(不可量辯)ㆍ무진변(無盡辯)ㆍ무단변(無斷辯)ㆍ무변변(無邊辯)ㆍ불공변(不共辯)ㆍ무궁변(無窮辯)ㆍ진실변(眞實辯)ㆍ방편개시일체구변(方便開示一切句辯)ㆍ일체법변(一切法辯)이다.
26)처음과 끝이 이어져 실제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임을 밝힌 것이다.
27)목련이나 사리불 같은 성문승은 부처님 면전에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28)첫째 일제 중생의 업보를 아는 것이며, 둘째 일체 모든 경계의 적멸함을 아는 것이며, 셋째 일체의 반연하는 바가 모두 하나의 상9相)일 뿐임을 아는 것이며, 넷째 한량업는 음성으로 오염되고 집착하는 마음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며, 다섯째 능히 방편으로 생(生)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여섯째 온갖 상(想)의 수용을 버려서 벗어나는 것이며, 일곱째 일체법이 상(想)이 아님을 아는 것이며, 여덟째 일체법이 무상(無想)이 아님을 아는 것이며, 아홉째 일체의 유법(有法)이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아는 것이며, 열째 일체 중생을 청정하게 제도하는 것이다.
29)5백 명의 동자(童子)와 5백 명의 동녀(童女)와 5백 명의 우바새와 5백 명의 우바이와 1만 명의 용들이다. 본래 6천 명의 비구까지 합해 모두 1만 8천 대중이 각서동 근처에서 문수를 보고 발심해서 한 생애에 오랜 겁의 과(果)를 성취했다. 그렇다면 여섯 대중이라고 해야 되는데도 다섯 대중이라 한 것은 6천 명의 비구를 앞에서 먼저 소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30)열 가지 지혜. 삼세지(三世智:3세의 지혜)ㆍ불법지(佛法智:불법의 지혜)ㆍ법계무애지(法界無碍智:법계에 장애가 없는 지혜)ㆍ법계무변지(法界無邊智:법계에 끝없는 지혜)ㆍ충만일체세계지(充滿一切世界智:일체 세계에 충만한 지혜)ㆍ보조일체세계지(普照一切世界智:일체 세계를 널리 비추는 지혜)ㆍ주지일체세계지(住持一切世界智:일체 세계에 머무는 지혜)ㆍ지일체중생지(知一切衆生智:일체 중생을 아는 지혜)ㆍ지일체법지(知一切法智:일체 법을 아는 지혜)ㆍ지무변제불지(知無邊諸佛智:가이없는 모든 부처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31)선재가 1만 8천 대중 중 한 사람으로서 선두에서 인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
32)문수로부터 믿음이 시작되기 때문에 믿음의 수장이라고 한 것이다.
33)수미산 정상으로서 10주(住) 중 초주(初住)를 설한 곳이다. 문수 앞에서 이 법문을 얻은 것은 10신(信)의 완성이 바로 초주이기 때문이다.
34)앞에서 말한 다섯 대중이 아니고 5위(位)의 선지식들이다.
35)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11지 등의 50위에 언설이 끊어진 근본 5위를 합하면 55위가 된다. 여기에다 각 지위마다 인과가 붙기 때문에 110개의 법문이 된다.
36)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정견(情見)에 따라 존재를 인정하는 것. 실제로는 공(空)이다.
37)첫째는 상(相)으로서 삼라만상의 유위법이 저마다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여 갖가지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는 명(名)으로서 인연을 의거해 상(相)을 부르면서 하나하나의 이름을 낳는 것이니, 대체로 상은 표현 대상이 되고 이름은 표현 주체가 되는데, 이 양자는 범부의 유루심(有漏心)으로부터 나와서 변화하는 소변(所變)의 경계이다. 셋째는 분별 혹은 망상으로 이는 소변의 두 상(相)을 분별하는 능동적 변화의 마음이다. 이상 세 가지는 유루시의 능변(能變)과 소변이다. 넷째는 올바른 지혜로서 무루심에 섞여 있는 일체의 망상이다. 이상 네 가지는 유위법의 유루와 무루이다. 다섯째는 여여(如如)이니, 앞에서 말한 올바른 지혜에 의해 증득한 진여(眞如)이다. 이치 그대로인 지혜에 의거해서 증득한 진여이기 때문에 여여(如如)라고 한 것이니, 이는 무위법이다.
38)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앞의 둘은 거짓된 것이며, 나머지는 참된 것이다.
39)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6식(識)과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40)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범부는 인체가 5온(蘊)이 임시로 화합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제 스스로 주재하고 존재하는 인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을 인아(人我)라고 하는 데, 이 5온의 화합을 깨달아서 실제로 인체가 없다고 요달하는 것을 인무아라고 한다. 이는 소승의 관법으로서 번뇌의 장애를 끊고 열반을 얻는 것이다. 또 모든 법이 실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법무아라고 한다. 이는 대보살의 관법이니, 아는 바의 장애를 끊고 보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소승의 인무아만 깨닫고 보살은 두 무아 모두를 깨닫는다.
41)게(戒)에 의거해 피안으로 가기 때문에 충족시킨다는 뜻의 족(足)을 붙여서 계족이라고 한 것이다.
42)걷고[行]ㆍ머물고[住], 앉고[座], 눕는[臥] 네 가지 행동거지.
43)열 가지 대계(大戒)를 뜻하는 것 같다.
44)일곱 가지 하지 말아야 할 죄로서 7역죄(逆罪)라고도 한다. 첫째 아버지를 죽이는 것, 둘째 어머니를 죽이는 것, 셋째 화상(和尙)을 죽이는 것, 넷째 아사리(阿闍梨:가르쳐 주는 스승)를 죽이는 것, 다섯째 갈마사(羯磨師:학덕과 법랍을 갖춘 스님)를 파괴하는 것, 여섯째 10지(地)의 성인을 죽이는 것, 일곱째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이 죄를 지은 자는 『범망경』에서 보살계를 받지 못하게 차단시키기 때문에 7차라고 한 것이다.
45)스승의 능력이 법신(法身)을 생장시켜 공덕의 재보를 내고 지혜의 명(命)을 기르기 때문에 역생(力生)이라고 번역한다. 요즘은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킨다.
46)계를 받을 때의 작법(作法).
47)계를 일러주는 장소로 단(壇)을 만들어 놓기 때문에 계단이라고 한다.
48)인(因)을 뜻한다.
49)과(果)를 뜻한다.
50)천백억의 화신이 저마다 자기가 교화하는 국토로부터 노사나불의 본신(本身)에 이르기 때문에 보신과 화신이 둘이 됨으로써 지혜와 경계가 함께 소멸하지 못하고 이(理)와 사(事)가 나란히 드러나지 못한 것이다.
51)『대지도론』D[서 공을 열여덟 가지 관점에서 관찰한 것.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성공(自性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ㆍ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52)자성 그 자체가 열반 상태인 것을 말한다.
53)이루어짐은 자성열반을 뜻하고, 무너짐은 열여덟 가지 공법을 말한다.
54)부처님의 몸에 갖춰진 뛰어난 특징. 상(相)은 커다란 특징이고 호(好)는 미세한 특징이다. 부처님의 몸에는 서른두 가지 상[三十二相]과 여든 가지호[八十種好]가 있다고 한다.
55)8식 다음의 식으로서 순정식(純淨識)이라고도 하는데, 진여(眞如)를 식(識)으로 인정한 것이다.
56)본래는 제8식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9식을 일컫는다.
57)『범망경』의 가르침. 점진적으로 익혀 나간다.
58)반야부 경전의 가르침.
59)실유의 종지를 말하는 실유가 아니라, 범부가 허망한 상(相)을 집착해서 실유로 삼는 것을 말한다.
60)『화엄경』에서는 대심범부(大心凡夫)를 뜻한다.
61)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고,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다.
62)도달한 수행의 경지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
63)양ㆍ사슴ㆍ소가 끄는 수레.
64)열반에 들지도 않고 극락을 원하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생(生)을 받아 중생을 교화한다.
65)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
66)인도에서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단위. 천억이라고도 하고 만억이라고도 하는데 일정하지가 않다.
67)불가(佛家)는 여래근본지의 가문이니, 이는 무공용(無功用)의 도를 말한다. 설사 어떤 보살이 백천억 나유타겁을 계속해서 6바라밀을 행하더라도 만약 여래근본지의 가문에 태어나지 못하면, 모든 행위가 유공용(有功用)에 떨어져서 1승 보살의 무공용의 도(道)에는 합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의 덕이 없다. 그러므로 가명 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68)자비가 지극해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고, 종일 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하는 상(相)이 없는 여래근본지의 무공용의 행위를 말한다.
69)진여(眞如)의 일심이 무명(無明)의 힘에 의해 처음으로 가동하게 되는 것.
70)미혹을 완전히 소진시키지 않고 그 미혹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71)공(空)을 닦는 보살이 유별나게 공을 즐기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72)식(識)을 소멸시켜 공적으로 나가는 2승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73)8식의 미망(迷妄)이 순정식에서 일어나는 걸 관조해서 도를 닦기 때문에 미혹에드는 문이라고 한 것이다.
74)8식이 바로 여래장이니, 미혹 외에 따로 보리를 구할 게 없기 때문에 미혹의 본질적 진실을 보였다고 한 것이다.
75)그러나 『화엄겅』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도리에서는 묘용이 자재롭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취사선택이 없다.
76)화장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정토다.
77)‘다함이 없는 세계해가……한 티끌 속에’ 이 부분은 고려대장경본에는 없는 내용이나 탄허 스님의 현토본에는 있는 부분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하였다.
78)티끌의 수효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
79)수미산 주위의 사대주(四大洲:네 개의 거대한 대륙)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말한다. 사대주는 남섬부주(南贍部洲)ㆍ동승신주(東勝身洲)ㆍ서우화주(西牛貨洲)ㆍ북구로주(北俱盧洲)이다.
80)인도에서 쓰는 거리의 단위.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라고 한다.
81)천상세계의 유정 중생들을 가리키며, 항상 즐거운 경계에서 노니나 그 복이 다하면 5쇠(衰)에 든다고 한다.
82)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장소로 기생 암라팔 리가 기중한 곳이라고 한다.
83)유진(有盡)은 유위법이고 무진(無盡)은 무위법이다. 자비심이 낮기 때문에 유위법 속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지혜가 낮기 때문에 무위법 속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다. 그래서 유진과 무진의 해탈 법문을 배우게 한 것이다.
84)보살이중생 구제를 위해 그들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는 네 가지 방법. 첫째는 보시섭(布施攝)이다. 재물을 좋아하는 자에겐 재물을, 법을 좋아하는 자에겐 법을 보시하여 친애하는 마음을 내게 해서 도를 받들게 한다. 둘째는 애어섭(愛語攝)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부드러고 착한 말로 친애의 마음을 내게 해서 도를 받들게 한다. 셋째는 이행섭(利行攝)이다. 몸과 말과 말뜻으로 선행을 해 중생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친애하는 마음을 내게 해 도를 받들게 한다. 넷째는 동사섭(同事攝)이다. 법안(法眼)으로 중생의 근기를 살피고, 그 그닉에 맞춰 행동을 같이하면서 중생에게 이익을 주어 도를 받들게 한다.
85)생사에 처한 것을 정원이나 누대(樓臺)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보살이 영겁토록 생사에 빠져 중생을 구제할지언정 소승의 해탈 선정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86)영향은 그림자와 메아리인데 감응하여 나타난다는 뜨이다. 법신보살이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몸을 감응하여 나타냄으로써 여래의 교화를 돕는 것이다. 즉 밖으로는 성문승을 나타내지만 안으로는 보살행을 닦는 자다.
87)주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가게 되는 국토, 6취(趣)는 6도(道)라고도 하는데, 천상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이다.
88)해와 달이 밝아도 장님은 보지 못하며, 천상의 음악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며, 천상 궁전의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가난뱅이는 취할 수 없으며, 아무리 대복덕이 있다 한들 지옥의 중생은 수용하질 못한다. 또 아귀는 갈증의 업이 심해서 백천 년을 지나도 물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물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뜻이다.
89)항하는 갠지스 강. 즉 그 강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를 나타낸다.
90)같으면서 다르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차별성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91)물고기는 범부 중생을 비유하고, 용은 성인을 나타낸다.
92)일체법은 하나가 주(主:주체)가 되면 나머지는 반(伴:객체)이 되어서 상호 끝없이 작용한다.
93)예를 들면 아미타불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할 때는 보살로 나타나서 반(伴)이 되고 제자가 되며,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주(主)가 되고 스승이 된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이 정토에 출현할 때는 역시 보살로 나타나서 제자가 되고 반이 되며, 동시에 아미타불은 스승이 되고 주가 되는 것 등이다.
94)6위는 앞의 5위에다 10신을 더한 것이다.
95)행상(行相)은 수행해 나아가는 양상을 말한다. 『화엄경』에는 각 지위마다 수행해 나아가는 양상의 인과 과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96)아승기는 무수(無數) 또는 무앙수(無央數)로 번역하며, 숫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수를 가리킨다. 억 아승기겁은 그같이 오랜 세월을 말한다.
97)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의 개달음. 최고의 지혜를 말한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또는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라고 번역한다.
98)옛 조사가 말하기를 “증득을 말한다면 남에게 보일 수 없지만, 이치[理]를 설하는 것은 증득이 아니면 요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99)공(功)의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다.
100)화신불이 법을 설했기 때문이다.
101)『유마경』과 『화엄경』의 가은 점 한 가지이다.
102)과(果)로부터 나오는 광명.
103)『화엄경』에서 설하는 5위와 6위의 지위를 말한다.
104)자성부사의(自性不思議)의 공덕을 말한다.
105)각 지위마다 그에 해당되는 보살이 있다.
106)석가모니부처님의 이모로서 말년에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107)보살 중에서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보살.
108)불교의 수호신으로 손에는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다.
109)3아승기를 말한다. 보살이 성불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
110)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거처하는 것을 초암에 비유한 것이다.
111)법계는 본래 시간의 겁이 없는데도 법계 외에 멋대로 한량없는 겁의 수행을 말하는 것.
112)본래부터 거주하던 여래의 큰 집[大宅]을 가리킨다.
113)인타라의 그물.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나타낸다.
114)도달한 경지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
115)시방(十方) 어디나 문(門)인 법계라는 뜻.
116)선(旋)은 소용돌이. 세계해의 중중무진함을 뜻한다.
117)여래의 5안(眼)은 육체의 눈인 육안(肉眼), 법을 알아보는 법안(法眼), 우주를 꿰뚫어 보는 천안(天眼), 슬기로써 보는 혜안(慧眼), 사리의 오묘함을 보는 佛眼불안)이다. 이 중 법안에서 지혜의 눈[智眼]이 나오고, 불안에서 광명의 눈[光明眼]과 생사를 벗어나는 눈[出生死眼]과 장애가 없는 눈[無礙眼]과 일체 지혜의 눈[一切智眼]이 나와서 10안이 된다.
118)바닷물이 거듭거듭 순환하는 것과 같은 중중무진한 법문을 비유한 것이다. 선재동자가 마지막 미륵의 처소에 가서 과(果)를 증득하고, 다시 보현의 털구멍 세계에 들어가 보현과 더불어 행이 평등하고 세계가 평등하여 삼세 인과의 이(理)와 사(事)가 일시에 드러남을 보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119)법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뜻. 찰나의 성불이 이를 나타낸다.
120)꺾어버리고 조복시키는 것.
121)사수는 급류(急流)니, 단박에 증득하는 법을 비유한 것이다. 점진적인 근기는 망상이 본래 없음을 알지 못하고 꺾어버리고 조복시키기 때문에 단박에 증득하는 여래의 법에 들질 못하고 수많은 겁을 지난 뒤에나 비로소 회심한다.
122)찰나에 무너짐을 말한다.
123)생각생각마다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124)싫어해서 떠나는 것.
125)이에 해당하는 보살은 비록 자비와 지혜를 닦아서 자기와 남 모두를 이롭게 하나, 이 땅에 오래도록 미혹을 남겨서 중생을 교화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토에 가서 빨리 성불한 뒤에 다시 이 땅에 나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정토보살이다.
126)이는 청정과 오염이 둘이 아니고 인(因)과 과(果)가 일시인 실교(實敎)의 도리를 나타낸 것이다.
127)3승을 점진적으로 이끌어서 실교로 돌아가게 하는 것.
128)초발심을 하는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다시는 계위의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129)성문은 4제법을 닦는다. 그러나 고(苦)를 보더라도 고가 도인 줄 모르고 항상 염리(厭離)를 생각한다. 망상의 모임인 집(集)을 끊으려고만 할 뿐 그 집 그대로가 무생(無生)인 줄 모르고 항상 집의 생기(生起)를 두려워한다. 멸(滅:열반)을 증득하지만 홀로 무위에만 계합한다. 도(道)를 닦긴 하지만 오직 자기의 제도만을 생각한다. 이처럼 서원의 마음이 넓지 못하고 교화의 풂이 없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130)‘그를 위해 1승의 길을 설한다’는 구절은 고려장경에는 없고 현토본에 있는 부분이다.
131)거북[龜]은 길흉을 점치는 것이요, 거울[鏡]은 미와 추를 판별하는 것이므로 나의 말을 귀경을 삼아서 ‘나머지 둘은 참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잘못 3승만 설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대승을 하나로 보고, 성문ㆍ연각을 하나로 보아 ‘나머지 둘’이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