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회상이 「법계품」에 있는 것은 이 한 회상이 널리 모든 회상과 사방의 찰해(刹海)와 법계와 허공계를 포함해 총체적으로 한 회상이 되어 겹겹이 겹쳐서 다함이 없으므로 일체 부처님의 바다와 일체 중생의 바다가 모두 이 법계 한품으로 일체가 되면서도 일체의 경계가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차별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6상(相)과 10현(玄)으로 총괄하고 사념이 없는 마음으로 비추어 관찰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세주묘엄품」으로 1회(會)를 삼고 보광명전의 3회를 1회로 삼으니 둘을 합쳐서 2회(會)가 되고, 수미산과 야마천과 도솔천과 타화자재천과 제3선천에 오르는 것을 5회로 삼아서 앞의 2회와 합쳐 7회가 되며, 「법계품」의 기원인간(祈園人間)1)으로 제8회를 삼고, 선재동자의 대탑묘의 처소를 제9회로 삼으며, 허공법계 일체 처소의 화상으로 10회를 삼는다. 즉 전후를 모두 수렴해서 시방을 총체적으로 다하니, 이 또한 일가(一家)의 해석으로서 도리를 어기지 않고 있다. 고인이 “9회라 한 것은 11지를 제3선에서 설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듯이, 이 경전은 총체적으로 10법(法)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 구(九)를 설해선 안 되는 것이다. 저 선재 동자의 각성동 회상은 그 이전의 회상이 단지 5위법을 의탁해 성취한 것을 밝혔을 뿐 수행하는 사람을 능히 의탁해서 나타내지는 못했는 데 반해 이 각성동 회상은 능히 수행하는 사람과 보살이 중생을 다스리는 방편 법칙을 밝히고 있다. 셋째,2)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온 연유를 설한다는 것은, 여래께서 세상에나올 때 지위에 의탁해서 진(眞)을 보인 것3)이다. 만약 여래의 최초의 정각 성취와 정(正)ㆍ상(像)ㆍ말(末) 3시(時)4)의 가르침을 보는 자는 정각의 지견이 아니며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옴을 본 것도 아니다. 이런 것은 바로 이해력이 낮은 중생이나 그렇게 보는 것이니, 정각을 구하는 자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문 어떻게 보는 것이 부처님의 출흥(出興)을 보는 것입니까?
답 반드시 자기 자신이 몸도 없고 마음도 없고, 출현함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사념도 없고 구함도 없어서 세간과 출세간에 도무지 머무는 곳이 없다. 그리하여 심소(心所)의 법도 없고 법을 법으로 받는 마음도 없어서5) 마음과 법이 의지함이 없고 성품에 시작과 끝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는 지혜로 이러한 법을 설해서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다 깨달아 들게 하는 이것을 부처님의 출흥을 본다고 호칭하는 것이다. 「광명각품」에서 문수사리의 게송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간의 견해든 출세간의 견해든 일체를 모두 초월해서 법을 훌륭하게 알 수 있다면 반드시 대광요(大光曜)를 이루리라.
만약 일체지(一切智)에서 회향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의 나는 바 없음을 본다면 반드시 대명칭(大名稱)을 얻으리라.
중생이 나는 바가 없기에 또한 다시 소멸됨도 없으니 만약 이 같은 지혜를 얻는다면 반드시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하리라.
하나[一]가운데 무량(無量)을 이해하고 무량 가운데 하나를 이해해서 저들이 서로 생기한다는 걸 요달하면 반드시 무소외(無所畏)를 성취하리라.
앞의 두 구절의 게송은 부처님의 출흥을 밝힌 것이며, 나중 두 구절의 게송은 정각 속의 지혜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출흥은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출흥과 소멸의 상을 취하게 해서 처음을 보고 끝을 보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자신(自身)과 중생신(衆生身)의 마음이 생멸이 없는 바탕[體]이란 것을 보는 것이 출세간이다. 무릇 한 부의 경전을 살하는 데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의 형상(形相)이 모두 228대중이 있다. 이 대중은 도량을 장엄하고 있는데, 그 형태의 종류가 저마다 다르다. 해당되는 회상에서 그 다른 일의 의의를 나타내고 있으니, 그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밝힐 것이며 미리 모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최초의 한 품에 45대중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뜻을 나타냈으니 본문에서 해석하겠다. 교문(敎文)이 넓고 풍부해서 미리 늘어놓아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事)를 대해서 가리키리니, 도는 눈에 보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전에 보았듯이 경전의 뜻을 장과(長科)한 6단계의 문 중 제1회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하다”에는 모두 여섯 품의 경전이 있고, 경전은 11권이 있다. 그 속의 품명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ㆍ「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ㆍ「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ㆍ「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ㆍ「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ㆍ「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이다. 이 여섯 품 경전은 첫 회상에서 여섯 가지 뜻이 있고, 이 첫 회상의 “이와 같이 들었다”에서부터 그 이하로는 서분(序分)과 정설분(正說分)과 유통분(流通分)이 있으니, 나머지 회상도 다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如是我聞一時]……”의 여섯 글자에서부터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하였다”까지는 서분이고, “그 땅이 견고하여 금강으로 이루어진 것” 이하는 정설분이며, “땅이 요동하고 꽃비가 내리면서”에 이르러서는 유통분이다. 정설분에서부터 여래가 성불한 인과와 보살, 신천(神天)의 50대중을 설한 것은 부처님 스스로의 행(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대중을 나타냄으로써 모여든 모든 보살로 하여금 여래의 인과와 도를 얻어 법에 들어가는 시현(示現)을 알아보게 하고, 그 법에 들어가 부처님께서 지견(知見)한 법과 동일하게 함으로써 더불어 나중에 배우는 자들에게 모범을 삼은 것이다. 이는 범부로서 법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부처님의 지견과 같기 때문이니 초발심 때에 문득 정각을 성취하는 것이 이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모든 회상에도 모두 스스로의 서분이 있으니, 본문에 가서 밝히겠다. 부촉유통분의 대부분은 「여래출현품」이 이에 해당되는데, 전에 이미 다 서술했으니 윤왕태자(輪王太子)의 비유가 그것이다. 처음의 「세주묘엄품」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하자 모든 세간의 주(主)가 와서 부처님의 성도(成道)를 축하하는 것과 스스로 이로운 것을 구하는 것과 또 여래가 스스로 행한 5위 법문을 나타낸 것을 밝히고 있다. 「여래현상품」은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하자 입 안의 광명으로 대중에게 고하고 터럭의 광명으로 법을 나타내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보현삼매품」은 부처님께서 보현 장자로 하여금 여래장삼매에 들게 해서 자세히 법을 관찰하게 하고, 삼매로부터 일어나서는 부처의 과보와 중생의 업력으로 세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그리고 국토의 장엄을 성취함을 설하게 하는 걸 밝히고 있다. 문득 「세계성취품」을 설한 것은 중생의 업력으로부터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화장세계품」은 화장세계의 바다가 부처님 스스로의 지혜의 과보로 얻은 장엄이란 것을 밝히고 있다. 「비로자나품」은 옛날[古]을 끌어다 지금[今]을 증명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법이 헛되이 오지 않고 고금이 서로 비춘다는 것을 믿고 따르게 함으로써 믿는 자가 의심하지 않도록 함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이 첫 회상의 여섯 품 경전은 다 의취(意趣)가 있다. 이 여섯 품을 그 해석에 의거해 두 문(門)으로 나누겠다. 첫째 [세주묘엄품] 한 품의 경전은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함으로써 간략히 의보와 정보의 장엄을 보이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둘째 「여래현상품」 이하의 5품 경전은 과(果)를 제시하여 수행을 권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두 문 중에서 첫째 문인 「세주묘엄품」을 그 뜻에 따라 열 가지 문으로 나눈다. 첫째, 비로자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한 의보와 정보의 장엄을 밝힌 것이다. 둘째, 10보현(普賢)의 대중이 늘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임을 밝힌 것이다. 셋째, 온갖 신(神)의 8부(部)와 모든 천(天)이 모여듦을 밝힌 것이다. 넷째, 대중이 이미 온 것으로 종결지음을 밝힌 것이다. 다섯째, 십대천왕(十大天王)이 스스로 이익을 얻은 법문으로 부처님의 10지의 행과(行果)를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 일월천자(日月天子)와 팔부왕(八部王) 등이 스스로 이익을 얻은 법문으로 부처님의 10회향의 행과(行果)를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일곱째, 10중(衆)의 신들 중에서 주가신(主稼神)이 으뜸이 돼서 제각기 스스로 터득한 법문으로 부처님의 10행의 과(果)를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여덟째, 해월광대명(海月光大明)보살 등 10대보살이 9중(衆)의 신들을 통해서 스스로 터득한 법문으로 부처님의 10주 행과를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아홉째, 법좌에서 출현한 자중(自衆)이 부처님의 자행인 보현행을 밝히는 것과 부처님의 자행(自行)인 보현행의 과(果)를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열째, 화장세계가 땅을 움직이고 공양을 일으켜서 부처님께서 출흥(出興)함을 밝히고, 대중이 환희하면서 복과 위의(威儀)가 감응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상 첫 회상의 열 가지 문 중 보살과 신(神)과 천(天)은 모두 여래의 5위 법문을 얻는다. 다만 교화를 통해 지위에 들어간 자로 하여금 모두 한 푼의 참[眞]에 응하는 이지(理智)를 얻게 함으로써 총체적으로 신(神)이라 칭하게 되는데, 이는 중생을 주도하기 위해서며 귀신으로서의 신은 아니니, 까닭인즉 여래지(如來智)에 들어가 법력이 자재롭기 때문이다. 10지가 천(天)과 같은 것도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니, 본문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1)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①6) 이제 첫 회상 중 「세주묘엄품」을 해석하는데, 전처럼 열 단계의 과문(科文) 중에서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한 것을 밝힌 일단계를 다시 둘로 나눈다. 첫째는 경전의 제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이다. 첫째, 경전의 제목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문 무슨 이유로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제1」이라고 이름붙였는가?
답 대(大)란 특정 방향이 없다는 뜻이며, 방(方)은 법칙이란 뜻이며, 광(廣)은 이지(理智)가 두루하다는 뜻이며, 불(佛)이란 지혜의 체(體)가 머물거나 의지함이 없다는 뜻이면서 지혜가 자재롭다는 뜻이다. 화(華)란 법계에 두루한 다함이 없는 행[無盡行]이란 뜻이다. 행(行)이 능히 자타(自他)의 과(果)를 열기 때문에 꽃[華]이 이 열매[果]를 감득한다는 뜻이며 열린다는 뜻이다. 엄(嚴)은 장식한다는 뜻이다. 초발심주위(初發心住位)의 10신에서 작위가 있는 행화(行華)로써 10주위 속의 묘리지혜(妙理智慧)7)의 과(果)를 열고, 다시 작위가 없는 열 가지 행화(行華)를 발생시켜 늘 법과 행으로 서로를 장엄함으로써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를 청정히 하기 때문에 행이 장식의 뜻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세주묘엄이란 이 초품(初品)에 있는 모든 신(神)과 천(天)의 8부 대중이 모두 세간의 주(主: 주체)가 되어서 저마다 십불세계미진수의 몸에 따르는 무리들[隨身部從]과 단순히 한량없다[無量]고 말하는 것을 거느리고 도량에 와서 장엄하는데, 이는 대중을 의거해 명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주묘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과 보살이 모두 세간의 주(主)가 됨으로써 능히 중생을 주도하고, 총체적으로 세간의 주가 되었기 때문에 또한 이 초품에서 한부(部)를 총괄해 표방한 것이니, 모두 열거하면 전부 228대중의 형상(形狀)이 같지 않은 각각의 부류가 있는데, 혹은 일불세계미진이라 말하고 혹은 십불세계미진이라 말하고, 혹은 한량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바다와 같은 회상을 장엄하기 때문에 세주묘엄이라고 말한다. 또는 부처님의 복과 과보의 경계로 오묘히 의보와 정보를 장엄함으로써 또한 세주묘엄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니, 이는 여래께서 세간의 주가 되어서 중생을 주도하기 때문에 이 주(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품(品)이란 균등하게 구분한다는 뜻이다. 5위와 믿는 마음의 동일성과 차이에 따른 단계와 뜻의 종류로 구별하는 서술과 닦아 나아가는 생소함과 익숙함이 저마다 일관된 줄기가 있어서 순서가 분명하니, 이는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근본적인 행(行)을 알아채게 함으로써 닦아 나아가는 데 미혹하지 않게 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품류(品類)가 균등히 구별된다는 뜻이다. 제일(第一)이란 앞뒤 순서에 따른 제일이 아니다. 법계문 안에서는 먼저와 나중이라는 순서가 없다. 모두 일시이자 둘이 없는 생각으로 동시에 드러난 모든 품 중에서 제일인 것이며, 하나[一]와 많음[多]의 연기(緣起)가 동시인 제일이다. 이거의 명칭이 바로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8)이고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9)으로써 10현문(玄門)과 6상(相)의 뜻으로 통해야 알 수 있는 것이지, 정견에 따라 헤아려 비교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둘째, 문자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서부터 “이처럼 한량없는 공덕 이래로”까지 71행의 경문이 있는 것을 네 개의 장과(長科)로 나누겠다. 첫 번째, 처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서부터 “처츰으로 정각을 성취하다”에 이르기까지 여덟 구(句)의 경문이 있는 것은 총체적으로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분(分)인데, 앞의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는 결집(結集)할 때 경전을 듣는 주체를 밝힌 것이며, 뒤의 “부처님께서는 마갈제국 아란야의 법보리도량 안에 계시면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는 여래께서 도를 얻은 곳을 서술한 것이다. 두 번째 “그 땅이 견고하고” 이하부터 “오묘한 음성이 멀리 퍼져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26행 반의 경문이 있는데, 모두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를 찬탄함을 발힌 것이다. 이 국토는 타방(他方)과 보살의 신력(神力)으로 도량을 장엄한 분(分)으로서 마치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타방이다. 세 번째, “이때 세존께서는 이 법좌에 거처하시며” 이하부터 “있는 바 모든 장엄을 드러나게 하고”에 이르기까지 13행의 경문이 있는데, 부처님의 성도와 수행, 과(果)가 원만한 의보와 정보, 과보의 공덕인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다스리는데 그 자재로움이 끝이 없음을 밝힌 분(分)이다. 네 번째, “십불세계미준수보살” 이하부터 “한량없는 공덕”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이 있는데, 보살 대중이 둘러싸고 있음을 밝힌 분(分)이다. 또 처음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은 그 뜻을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경전을 설하는 때를 정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전의 글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다음은 3승 중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권의 해석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들 때에 아난(阿難)에게 ‘12부 경전을 너는 반드시 유통시켜라’고 고했으며, 다시 우파리(優波離)에겐 ‘일체의 계율을 너는 반드시 받아들여서 간직하라’고 고했으며, 아나율(阿那律)에겐 ‘너는 천안(天眼)을 얻었으니 반드시 사리(舍利)를 수호하고 사람을 권해서 공양하게 하라’고 고했으며, 대중들에겐 ‘내가 만약 1겁을 머문다 한들, 아니면 1겁을 줄인다 한들 모임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고하였다. 말씀을 마치신 뒤, 쌍림(雙林)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서 열반에 들려고 하니, 친척인 아난이 애착의 습기를 없애지 못해서 마음이 근심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로두(阿泥盧豆: 아나율)가 아난에게 말했다. ‘당신은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수호할 이이니, 범부들처럼 스스로 근심의 바다에 빠져선 안 된다.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다 무상하가늘 당신은 어째서 근심을 하는가? 또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손수 당신에게 법을 부촉하셨는데, 당신은 지금 근심과 번민으로 부촉받은 일을 잃고 있다. 세존께선 비록 오늘은 계시겠지만 내일 아침이면 안 계실 터이니,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께 미래의 중요한 일을 물으시오.’ 아니로두는 중요한 일로서 네 가지 질문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몸소 스스로 설법을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믿고 받들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일체 경전의 첫머리에 어떤 말을 두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고, 둘째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있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누구를 스승으로 삼습니까?’라는 질문이고, 셋째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모든 비구들이 부님을 의지해서 머물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누구를 의지해서 머뭅니까?’라는 질문이고, 넷째는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엔 악한 성품을 가진 차닉(車匿)10)을 부처님 스스로 다스렸지만, 부처님께서 멸진하신 뒤엔 어떻게 함께 거주합니까?’라는 질문이다. 아난이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부처님께 물으니, 세존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첫째, 경전의 첫머리엔 반드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如是我聞一時]……’의 여섯 글자의 구절을 두어라. 둘째, 비구는 모두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계율)로써 스승을 삼아라. 셋째, 모든 비구는 다 사념처(四念處)11)를 머무는 곳으로 삼아라. 넷째, 악한 성품의 비구는 범단(梵檀)으로 다스려라(한역하면 黙擯)이다)≻.‘ 만약 마음이 부드럽게 조복되면 그를 위해 『가전연경(迦旃延經)』을 설하는데, 이는 유무(有無)를 벗어나 아만심(我慢心)을 타파하는 것이다. 또 다섯 권의 『대비경(大悲經)』에서는 아난이 부처님께 ‘어떻게 법안(法眼)12)을 결집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답하셨다.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 대덕(大德) 비구가 반드시 ≺세존께선 어느 곳에서 『대아타나경(大阿陀那經)』 등을 설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반드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선 마가타국 보리수 밑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해 법을 설했으며, 나아가 사라쌍수(紗羅雙樹) 사이에서 설했다≻고 대답하거라.’ 이처럼 20여 곳에서 설한 경전을 부처님께서 스스로 거듭 아난에게 가르치셔서 이와 같이 결집을 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여섯 글자의 뜻은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 세움으로써 나중에 경전을 듣는 자의 의심을 끊게 한 것이니, 이는 다른 사람이 설한 것도 아니며 아난이 스스로 설한 것도 아니라 열반에 의거해서 세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경전의 첫머리에서 과문(科文)에 준거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서부터 “처음 정각을 성취했다”에 이르기까지 여덟 구(句)가 있음을 다섯 권의 『대비경』의 설에 의거해서 중생들의 의심을 끊게 하겠다. 즉 “이와 같이[如是]”가 1구(句)며, “나는 들었다[我聞]”가 2구며, “한 때[一時]”가 3구며, “부처님께서 계시다[佛在]”가 4구며, “마갈제국(摩竭提國)”과 “아란야법(阿蘭若法)”과 “보리도량중[菩提場中]”의 세 구는 하나의 뜻으로 단지 한 곳을 서술한 것이라서 3법(法)이 바로 하나가 되니,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와 더불어 여섯 구가 된다. 즉 “이와 같이”와 “내가 들었다”와 “한때”와 “부처님께서 계시다”와 “보리도량”과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를 합쳐서 여섯 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如是]”라고 한 것에서 여(如)는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이며, 시(是)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지 이설(異說)이 아님을 구별한 것이다. 이 두 낱말이 서로 따르면서 믿음을 합쳐 틀림이 없으니, 이는 진정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지 아난이 설한 것이 아니며, 또한 마왕이나 범천이 설한 것도 아니란 것을 밝힌 것이다. 또 “나는 들었다”는 한 구절은 아난이 부처님께 들은 것이지 이리저리 전해지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며, 비인(非人)이 지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도의 경서(經書)에서 파란 새가 물고 왔다거나 돌로 된 벼랑이 무너져서 얻었다고 하는 것과도 같지 않은 것이니, 이는 의심을 끊어 믿음을 이루게 하는 분(分)이다. 진제삼장(眞諦三藏)이 말했다. “미세율(微細律)에 의거하건대, 아난이 법좌에 오를 때, 그 몸이 부처님처럼 상호(相好)가 구족하였다. 대중들이 이 상서로움을 보고 마침내 세 가지 의심을 일으켰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서 일어나셔서 다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시는가 의심하는 것이며, 둘째는 타방(他方)의 부처님께서 오셨나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는 아난이 몸을 바꿔 성불했는가 의심하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여섯 글자를 세우는 것이니, 아난은 스스로 “이 같은 법은 내가 부처님께 들어서 안 것이지, 부처님께서 다시 일어나 설한 법이 아니며, 또한 타방에서 부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며, 또한 아난 자신이 성불한 것이 아니라, 다만 법력을 썼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높은 법좌에서 내려오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이 여섯 글자로 온갖 의심을 끊은 것이다.
문 3승에서 설했듯이, 아난은 부처님께서 도를 얻으신 밤에 태어났고, 나이 20에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무 살 이후의 경전은 직접 들었겠지만 이전의 것은 전해 들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는 “아난이 결집할 때 스스로 게송을 설하길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 그때는 내가 보지 못하였다. 다만 부처님께서 바라나(波羅奈)에 유행(遊行)하실 때, 다섯 비구를 위해 4제(諦)의 법문을 굴렸다고 내가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고 설했습니다. 따라서 스무 살 이전은 직접 들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답 13)『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아난이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었을 때 소원을 청하기를 ‘원컨대 부처님께서 20년간 설하신 경전을 모두 저를 위해 설해 주시고, 저에게 고의(故依: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옷)과 잔식(殘食: 부처님께서 드시던 음식)을 주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고 설하고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이것도 직접 들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열반경』에서는 “아난은 많이 들어 아는[多聞] 사람이라 존재하시든 존재하지 않으시든 자연히 늘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설했으며, 또 “아난은 각의삼매(覺意三昧)를 얻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항상 듣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아난이 법을 전했다는 것은 3승의 경전에서 모두 설하고 있다. 그러나 『대방광불화엄경』에서는 법을 전한 아난이 앞에서 말한 것과는 같지 않으니, 무릇 천중천(天中天)이시며 시방의 조어(調御)이신 교화하는 의식(儀式)의 주체와 짝[主伴]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인연이겠는가? 스스로의 기류(器類)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음양을 보이고 영향을 끼침으로써 삼세(三世)와 9세(世)의 궁극적인 겁을 일념에 알며, 다함이 없는 고금(古今)을 늘 즉석처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3승의 정견(情見)으로 시종(始終)을 지연시키거나 재촉하는 자는 그 가르침을 전한 주체를 상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제 이 『화엄경』의 가르침을 전한 주반(主伴)을 밝힌 자는 신(神)이 현묘한 근원을 사무치고 도가 지혜의 바다와 대등해서 마치 문수와 보현이 서로 모범이 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찌 살아 있을 때의 나이를 논해서 먼저와 나중의 견해를 짓겠는가? 이처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륜을 굴리실 때 여래는 성품 바다의 대지혜[性海大智]의 인(印)으로 중생의 욕망에 인(印)을 쳐서 문자로 삼았는데, 일음(一音) 속에서 먼저와 나중의 사이가 없이 일시에 널리 인을 침으로써 즐기는 욕망의 차이에 따라 저마다 자기 마음이 즐기는 법을 따르게 하여 다 얻어 듣게 한 것이다. 설사 아난이 가르침을 전하는 주반(主伴)을 행하여 보인 자라 할지라도, 이는 보현행의 바다에서 근기에 따라 높거나 낮게 그 흐름에 맡겨 출몰(出沒)함으로써 근기에 의거해 자취를 나타낸 것이니, 3승의 정해진 예(例)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교설은 그 일을 성현(聖賢)이 은밀히 함께 하는 것이니, 이는 3승에 응해 방편으로 교화한 것이지 완전한 가르침[了敎]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사세왕참회경(阿闍世王懺悔經)』에는 세 종류의 아난이 있다. 첫째는 아난타(阿難陀)로서 한역하면 경희(慶喜)인데, 성문의 법장(法藏)을 지니면서 그 이상의 2승에 대해선 능력을 따르고 분수를 따른다. 둘째는 아난타발타라(阿難陀跋陀羅)로서 한역하면 경희현(慶喜賢)인데, 중승(中乘)의 법장을 지니면서 그 이상의 대승에 대해선 능력을 따르고 분수를 따르며, 그 이하의 소승은 받아 들여서 겸하여 지닌다. 셋째는 아난타사가라(阿難陀娑伽羅)로서 한역하면 경희해(慶喜海)인데, 보살대승의 법장을 지니면서 그 이하의 소승은 받아들여 겸하여 지닌다. 이것 역시 3승에서 가르침을 전한 아난이라서 실교(實敎)가 되지는 못하지만, 이같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전한 아난은 높은 법좌에 오를 때는 몸이 모든 부처님과 같고, 일시에 단박 4승(乘) 등의 가르침을 연설함으로써 근기에 따라 모두 결집하고 있으니, 이는 곧 아난과 부처님의 체용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해석 역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또 『열반경』에서는 “아난이 듣지 못한 경전은 홍광(弘廣)보살이 유통해야 한다”고 했다. 이 경전에 견주어 보건대, 3승이 알 바가 아니라서 홍광보살이 가르침을 전한 것이 잘못이 아니니, 이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칭한 것은 홍광보살을 말한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문수사리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칭했으니, 이는 그 논 속에서 문수사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도 4백 년 동안 여전히 세상에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문수사리는 아난과 함께 그 밖의 청정한 곳에서 마하연장(摩訶衍藏)을 결집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해석은 모두 성자(聖者)의 방편을 따라서 말한 것이다. 만약 대강의 체(體)로써 논한다면, 모두가 여래와 문수사리와 보현보살의 사(事)를 따르는 행이기 때문에 설사 3신(身)의 아난을 말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의 보현행 속의 근기에 따른 방편이 근기에 따라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다. 이상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을 마친다. 둘째,14) 경전을 설할 때를 정한다는 것은 대략 열 가지로 가르침을 설할 때 전후 시기의 차이를 세운 것이다. 첫째, 『역사경(力士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고서 7(1ㆍ7)일간 사유한 뒤에 녹야원에서 법을 설했다고 한다. 둘째, 『대품경(大品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고 나서 녹야원에서 4제의 법륜을 굴리자 한량없는 중생이 성문의 마음과 독각의 마음과 대보리심을 발했다고 설하는데, 시일(時日)은 말하지 않았다. 셋째, 『법화경』에서는 21(3ㆍ7)일 만에 녹야원으로 가서 법을 설했다고 한다. 넷째, 『사분율(四分律)』과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42(6ㆍ7)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 다섯째, 『흥기행경(興起行俓)』과 『출요경(出曜經)』에선 49(7ㆍ7)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 여섯째, 『오분율(五分律)』에서는 56(8ㆍ7)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 일곱째, 『대지도론』에서는 350(50ㆍ7)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 여덟째, 『십이유행경(十二遊行經)』에서는 1년 동안 법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홉째, 지금 당나라의 장(藏)법사에 의하면, 결정코 여래 성도 후 14(2ㆍ7)일 만에 『화엄경』을 설했다고 정했다. 이상 부처님의 설법 시기를 전후가 같지 않게 보는 것은 모두 자기 견해에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이 전후가 같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니, 이는 근본법계의 실(實)을 이루는 설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열째, 이제 나 이통현은 이 화엄법계문을 의거해서 법을 설하는 시기를 정하고, 또 본교(本敎)에 의거해서 그 시기를 정할 것이니,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는 같지가 않다. 여래께서 진(眞)에 의거해 세상에 나와 사물을 이롭게 한 것은 또한 진(眞)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저마다 스스로 자기 정(情)만을 쫓는다면, 영겁토록 고통의 땅[苦趣]에서 길을 잃고 윤회하면서 진(眞)을 어기고 허망함만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뜻은 이렇지가 않다. 경전에 스스로 분명한 문장이 있으니, 어찌 그 가르침을 어길 것이며, 방편만을 좇고 실(實)을 등진다면 업장(業障)이 어지 쉬겠는가? 저 「십정품」에서 “여래께서 찰나간에 세상에 출현해서 열반에 든 것이 모두 때[時]가 없다”고 설했으니, 찰나간이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의탁해서 말한 것이다. 실제로는 때가 없는 것이라서 곧 일체시(一切時)에 출현한 것이며, 일체시에 설법한 것이며, 일체시에 열반한 것이니, 이는 적용(寂用: 體用)이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중생심을 따라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법화경』에서 “내가 성불한 이래로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냈다”고 말한 것은 때[時]로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때가 되는 것이라서 정함을 삼은 것이지, 세간의 정견에 따른 생각을 좇아 한량없는 상념을 삼은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때가 없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때라서 본교로써 본시(本時)를 설한 것이니, 본시란 것은 법계의 때[時]가 없음이다. 「십정품」에서 “찰나간에 세상에 출현해서 세상에 들었다”는 것은 때가 옮겨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찰나간은 법계의 천이(遷移)할 수 없는 때를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제 경전을 설한 때를 정하는 것은 단지 삼세 고금의 정견이 다한 것으로 본래의 법을 설한 때를 삼는 것이니, 앞서 아라한 정견에 따라 제접하는 권교의 설을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15) 경전의 문장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처음의 여섯 글자16)로부터 여덟 구(句)의 의심을 끊고 믿음을 이루는 분(分)까지는 『대지도론』에 의거하면, 여(如)란 순(順: 따르다)이며 시(是)란 인(印: 인가)이니, 곧 인순(印順)하여 믿음으로 받아 지니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일부 문장의 뜻을 모두 들어서 곧바로 이미 들은 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다. 또 장이 삼장(長耳三藏)이 삼보(三寶)를 해석한 것에 의거해 보면, 첫째 부처님을 요약한 것인데, 여(如)는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하고, 시(是)는 내가 들은 것이며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한다. 또 장(藏)법사의 법에 대한 해석에 의거해 보면, 여(如)는 내가 들은 것이라 하고, 시(是)는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한다. 또 여는 이치에 부합한 가르침이며, 시는 내가 들은 것이라 한다. 지금 나 이통현은 법을 해석하기를, 여(如)는 모든 법이 같기 때문이며, 시(是)는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니, 법계 대지혜의 진아(眞我)로써 부처님께서 설한 법계 대지혜의 진경(眞經)을 듣기 때문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곧 스승과 제자의 체(體)가 하나란 것을 밝힌 것이니, 이것은 화엄법계문을 해석해서 초발심의 인과와 이지(理智)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일체법이 여(如)이니, 법체(法體)가 여(如)함으로써 법을 설한 자와 법도 또한 여(如)하다. 그리하여 법계의 지혜가 바로 듣는 바의 지혜라서 지혜 또한 여여( 如如)하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니,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라야 비로소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을 들을 것이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차이가 있으면, 부처님께서 설한 것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고 따르면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문(我聞)이란 것은 법계 지혜의 진아(眞我)가 법계 지혜의 진불(眞佛)을 보고 또한 법계 지혜의 진경(眞經)을 듣는 것이다. 즉 법계 지혜의 진인(眞人)이 서로 주(主)와 반려[伴]가 되어서 법계 지혜의 진중생(眞衆生)을 교화해 법계 지혜의 진성(眞性)으로 깨달아 들게 하기 때문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릇 불일(佛日)의 출현은 온갖 종류의 중생을 교화하는 궤범(軌範)이니, 결집을 통해 경전을 전한 주반(主伴)은 스스로 기류(氣類)가 빛을 가지런히 하고 도(道)가 서로 알아서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홍광보살과 문수사리와 여래의 자행(自行)인 보현행 등으로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실다움[實]이지, 실다움이 아닌 종지(種智) 밖의 3승인이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아난일지라도 역시 동류(同流)라서 다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인 대지혜의 진아(眞我)로써 여래의 대지혜가 설한 진경(眞經)을 듣는 것이니, 이는 가아(仮我)가 아니고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같기 때문에 여시아문이라고 말한 것이라서 『열반경』의 네 가지 연(緣)의 화합을 갖추어서 듣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사연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이근(耳根)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소리가 있어서 들을 수 있는 것이며, 셋째는 중간에 장애가 없는 것이며, 넷째는 욕망이 있어서 이같은 들음[聞]을 듣고자 한 것이니, 이러한 것은 범부의 들음이다. 또 범부와 3승은 열 가지 연(緣)이 있어야 비로소 얻어 듣는다. 첫째 본식(本識)을 의지하고, 둘째 이식(耳識)의 종자가 씨앗[因]이 되고, 셋째 말나(末那: 제7식)가 오염의 의지가 되고, 넷째 의식(意識: 제6식)이 서로 의지하고, 다섯째 자류(自類)의 이식(耳識)이 무간(無間)의 의지가 되고,17) 여섯째 이근(耳根)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경계의 근(根)이 되고, 일곱째 듣고자 하는 뜻을 짓고, 여덟째 경계가 소연(所緣)의 연(緣)이 되고, 아홉째 중간에 장애가 없고, 열째 경계가 가까워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들음은 범부와 3승의 한량이 있는 들음이라서 이 화엄교의 보살이 온 법계의 대지혜로 들음을 삼기 때문에 다시 능(能)과 소(所)가 없는 하나의 뚜렷하고 밝은 지혜 경계[智境]로써 일념에 삼세겁의 한량없는 모든 소리를 널리 듣는 것과는 같지가 않다. 이처럼 앞서 설한 범부와 3승이 한량없는 겁을 계교하는 것과 같지가 않은 이유는 법계문 속에서 일념일시(一念一時)에 들음으로써 지혜가 안팎이 없이 일시에 듣기 때문이다. 『양섭론(梁攝論)』에 의거하면 ‘일시(一時)’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평등(平等)의 시(時)니 부침(浮沈)과 전도(顚倒)가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화합(和合)의 시니 지금 듣고 능히 듣고 올바로 듣기 때문이며, 셋째는 법륜을 굴리는 시이니 곧 올바로 설하고 올바로 받아들이는 때이기 때문이다. 고인(古人)들의 설에 의거해 보면, 올바로 『법화경』을 설할 때는 다른 경을 설할 때가 아니고, 올바로 『금강반야경』을 설할 때는 다른 경전을 설할 때가 아닌 것을 일시(一時)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처럼 해당되는 경전을 올바로 설할 때를 취해서 일시라고 이름붙인 것이지만, 이제 이 『대바왕불화엄경』을 설한 때는 그렇지가 않다. 즉 이 법계의 체(體)를 통해 의탁해서 말하는데, 1찰나에 세상에 출현하고 열반에 들기 때문에 이름붙이는 것이니, 앞서 말한 일시의 뜻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부처란 깨달음[覺]이다. 깨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시각(始覺)이고, 다른 하나는 본각(本覺)이다. 이 부처란 것은 시종(始終)이 없음을 깨달아서 삼세의 장애가 다한 것을 부처라고 부르는데, 이는 세상에 출현함이 있고 열반이 있고, 또 시(始)와 종(終)이 있는 3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부처를 네 가지 뜻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유덕(有德)이라는 명칭인데, 바가(婆伽)는 덕의 명칭이고 바(婆)는 유(有)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분별(巧分別)이란 명칭인데, 바가는 분별의 명칭이고 바는 교(巧)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유성(有聲)이라는 명칭인데, 바가는 성(聲)의 명칭이고 바는 유(有)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능파음노치(能破婬怒癡)18)라는 명칭인데, 바가는 파(破)의 명칭이고 바(婆)는 음노치(婬怒癡)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또 『불지론(佛地論)』에서는 여섯 가지 뜻을 설하고 있는데, 그 게송에서 “자재로움과 치열한 무성함과 단정한 위엄과 명칭(名稱)과 길상(吉祥)과 존귀(尊貴)”라고 했다. 이처럼 여섯 가지 차별의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바가바(婆伽婆)라고 호칭한 것이다. 재(在)란 어느 곳에나 계신 것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사(事)를 가리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법을 드는 것이다. 사(事)를 가리키는 것이란 “마갈제국에 계시다”에서 그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법을 들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나 계신 것이니 법계에 있는 것이다. 즉 사(事)가 바로 법계라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법계는 중간이나 변두리, 크고 작음, 피(彼)와 차(此)가 없는 탓이다. 또 마갈제국이란 한역하면 불해국(不害國)이다. 마(摩)란 무(無)를 말하며, 갈제는 해(害)를 말하니, 총체적으로는 무해국(無害國)이 된다. 또 마란 불(不)이며 갈제는 지(至)니, 이는 이 나라의 장수가 지모가 있고 병졸도 용맹하여 이웃의 적국이 침략해 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또 마(摩)란 변(遍)이며 갈제는 총혜(聰慧)니, 이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마란 대(大)며 갈제란 체(體)이니, 이는 5인토(印土) 중 이 나라가 가장 크고 모든 나라를 통솔하기 때문에 대체(大體)라고 하는 것이며, 또 이 나라의 왕이 사형을 행하지 않고 죄가 있는 자는 한림(寒林) 속에 보냄으로써 부처님의 대자비를 밝히고 있기에 그 처소로써 덕을 나타낸 것이다. 아란야법은 한역하면 적정처(寂靜處)이고, 이 적정(寂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사(事)요 다른 하나는 이(理)이다. 첫째, 사(事)는 마가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 근처 구루빈라(漚樓頻螺) 마을에서 대략 5리(里) 거리인 1우후지(牛吼地)에 계시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이곳에는 일만명의 도량신(道場神)이 늘 그곳에 있고, 일체 부처님께서 정각을 성취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은 여래의 만행이 원만해서 중도(中道)가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이곳이 염부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理)란 일체법이 스스로 적정한 것이니, 동(動)에 즉해서 항상 적정하기 때문이다. 보리도량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사(事)요 둘째는 이(理)이다. 첫째 사(事)란 앞에서처럼 니련선하 근처를 말하며, 둘째 이(理)란 법계에 두루하는 것이다. 법계가 끝이 없으니 중도도 끝이 없어서 일체의 찰토에서 모두 성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간의 도량은 더러움을 가려내고, 법의 도량은 미혹을 다스리니, 성불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생의 미혹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 도량은 의주석(依主釋)19)이니, 부처님께서 그 속에 계시면서 성도(成道)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主)를 의지해서 이름을 얻어 깨달음의 도량[覺場]이 되는 것이다. 시성정각(始成正覺)이란 고금의 정(情)이 다한 것을 시(始)라 이름붙이고, 마음에 의지함이 없는 것을 정(正)이라 이름붙이고, 이치와 지혜가 상응하는 것을 각(覺)이라 이름붙이고, 이러한 법을 얻는 것을 성(成)이라 이름붙인다. 또 스스로를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을 각(覺)이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이상 여덟 구(句) 중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한다는 분(分)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 둘째,20) 도량을 장엄하는 분(分)은 다음과 같다. “그 땅이 견고해서[其地堅固]” 이하부터 “오묘한 음성이 멀리 퍼져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妙音遐暢無處不及]”에 이르기까지 26행 반의 경전에 있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정보(正報)ㆍ의보(依報)와 도량을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이 한 대목의 문장 속에 여래의 본성이 네 종류의 인(因)을 행함으로써 네 종류의 과보를 얻는 것을 밝히겠다. 하나의 심성(心性) 속에는 네 종류의 인(因) 있어서 10바라밀을 행하고 있으니, 또한 그 속에서 각각 열 가지 장엄을 얻는다. 네 종류의 인과(因果)란 무엇인가? 첫째, 법신의 인(因)으로 금강지(金剛地)를 과보로 얻는 것이다. 경전에서 “그 땅이 견고해서”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 땅 위에 열 가지 장엄이 있는 것은 바로 10바라밀로 의보(依報)를 이루는 것이고, 금강지로 정보(正報)를 삼는 것이다. 무엇이 열 가지 장엄인가? 첫째, 법신 중의 대지혜로 단(檀)의 체(體)를 삼는 것이니, 1행(行) 가운데 10행을 갖춰 총체적으로 원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경전의 종지는 1행이 곧 일체행으로 주(主)와 반(伴)이 항상 원만하기 때문에 보륜(寶輪)의 원만함으로 금지(金地)를 장엄한 것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란 것을 밝힌 것이다. 둘째, 보화(寶華)로 금지(金地)를 장엄한 것이니, 성품의 계율[性戒]의 청결함이 마치 오묘한 꽃이 꽃봉오리를 열어서 사람들이 즐겁게 보도록 하는 것과 같아서 자타(自他)의 선한 인과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셋째, 마니주의 보배로 금지를 장엄한 것이니, 마니(摩尼)란 한역하면 이구보(離垢寶)인데, 인행(忍行)이 맑고 고결하여 마음에 어떤 더러움도 없는 것으로 인해 초래한 의과이기 때문이다. 넷째, 모든 색상(色相)의 바다로 금지를 장엄한 것이니, 정진바라밀로 온갖 행을 모두 총괄함으로써 능히 자타(自他)의 과(果)를 초래하기 때문이니, 과보를 초래했기 때문에 모든 색상의 바다로 금지를 장엄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 마니로 깃발을 삼아 장엄한 것이니, 선정의 체(體)가 항상 고요해서 기울어지지 않기 때문에 초래한 과(果)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선정바라밀이 보편적으로 능히 정적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항상 광명을 놓고 묘음(妙音)을 내서 법계를 장엄한 것이니, 선정이 능히 지혜를 발하고 지혜가 능히 가르침을 설하는 것으로 의과(依果)를 삼아서 허공을 장엄하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며, 또 제6바라밀의 공혜(空慧)가 원만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일곱째, 보배 그물로 장엄한 것이니, 방편바라밀로 대자비를 성취해서 중생을 보호하고 가르침의 행(行)을 베풀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依果)임을 밝힌 것이다. 7주(住)와 7지(地) 등에서 대자비의 법문을 성취했기 때문에 가르침의 행의 그물을 시설하여 중생을 건져내서 대열반의 언덕에다 안치(安置)함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는 인(因)의 행(行)이 그렇기 때문에 의과(依果)도 그런 것이다. 여덟째, 묘향(妙香)의 화영(華瓔)이 포(布)를 내려서 허공을 장엄한 것이니, 이 그물은 밑을 향해 곧바로 내린 장식으로 제8 원(願)바라밀이 흐름에 맡긴 대 지혜로써 세속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가르침의 행(行)으로 초래한 의과(依果)임을 밝힌 것이다. 저 10지 보살이 7지 이전에는 7도(度)로 진짜 금을 단련함으로써 더욱더 밝고 청정하게 하는 비유를 짓고, 8지엔 갖가지 장엄한 꽃다발의 비유를 지은 것과 같다. 아홉째, 마니보왕(摩尼寶王)이 자유롭게 변하여 나타나면서 허공을 장엄한 것이니, 제9 역(力)바라밀로 9주(住)와 9지(地) 등의 대법사가 되어서 설법의 자재함으로 초래한 의과(依果)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10주 중의 제9와 10행중의 제9와 10회향 중의 제9와 10지 중의 제9가 모두 법사(法師)의 지위를 밝힌 것이니, 이는 설법이 자재함으로 초래한 과보이다. 열째, 보배와 꽃을 비내리듯 하여 금지를 장엄한 것이니, 10주와 10지 등에서 대지혜의 법운(法雲)으로 온갖 법보(法寶)를 비내리듯 하고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行)이 널리 두루하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依果)란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제9에서 마니 보배가 자재롭게 변하여 나타나는 것에서부터 10지에서 법운의 보배가 비내리듯 하는 것은 각 주(住)와 각 지(地)에서 5위가 서로 즉(卽)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둘째,21) 만행의 인과를 밝힌다는 것이다. 여래의 자행(自行)인 보현행으로 인(因)을 삼아서 초래한 보배 나무[寶樹]의 행렬이 금지(金地)를 장엄하여 시방에 두루한 것으로 의과(依果)가 된 것이다. 경전에서 “이 도량의 모든 장엄의 도구로 하여금 나무 속에 상(像)을 나타내게 했다”고 한 것은 각(覺)과 행(行)의 체(體)가 두루 사무침을 밝힌 것이다. 이는 모두 나무의 장엄을 진술한 것인데, 나중에 따로 보리수 하나를 듦으로써 모든 나무가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보리수에 열 가지 의과(依果)가 있는 것은 항상 금강지를 정보(正報)로 삼고 그 위의 장엄으로 의보(依報)를 삼으며, 또 여래의 몸으로 정보를 삼고 금강지와 지상의 일체 장엄으로 의보를 삼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 나무는 어래의 행(行)으로 인(因)을 삼아서 그 행으로 인해 과보를 초래하므로 나무가 의보가 된다. 또 나무 위에서 그 나무는 금강(金剛)으로 몸을 삼기에 금강이 정보가 되고,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의보가 된다. 그리하여 행(行)의 나무와 법의 꽃과 지혜의 열매와 자비의 잎이 10바라밀로 줄기와 가지를 삼고 법신으로 원둥치를 삼아서 10행의 위[上]를 따라 그 과보가 열 가지 의과(依果)의 장엄을 얻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열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로 금강으로 나무의 몸이 되는 것은, 법성으로 단행(檀行)의 체(體)를 삼기 때문에 초래한 금강수신(金剛樹身)의 의과(依果)니, 이는 일체의 행이 법성으로부터 생겼음을 밝힌 것이라서 금강으로 삼은 것이다. “나무가 높게 드러났다”고 말한 것은 그 아래 「십지품」에서 “10지 보살의 행 중에서 의과가 초래한 나무는 그 둥치의 둘레가 10만 삼천대천세계며, 높이가 백만 삼천대천세계다”라고 한 것이니, 저 10지 보살의 행 중의 의과(依果)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여래이겠는가? 둘째로 유리(琉璃)로 줄기를 삼는 것은, 가지가 생긴 위쪽이 줄기가 되고 그 밑에 가지나 잔가지가 없는 곳이 나무의 몸이 된다. 스스로의 행인 청정한 계율로 인(因)을 삼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유리가 나무의 줄기가 됨을 초래한다고 밝히고 있다. 곧바로 나온 것이 줄기가 되고, 곁에 나온 것은 가지가 되고, 가지 위에 난 것이 잔가지가 되니, 만행이 흐름을 따르면서도 청정한 계율을 체(體)로 삼기 때문에 오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다 법성신이 흐름을 따르면서도 오염이나 청정이 없는 행과(行果)가 초래한 과보의 상(相)이란 걸 밝힌 것이다. 셋째로 온갖 오묘한 갖가지 보배로 가지와 잔가지를 삼아서 그 줄기를 장엄한 것은, 순수하거나 잡된 온갖 만행이 연(緣)을 대하여 인(忍)을 이루어서 능히 자타(自他)를 이롭게 하도록 초래한 인과임을 밝힌 것이다. 넷째로 보배 잎사귀가 울창해서 구름처럼 그늘을 드리워 잔가지를 장엄한 것에서, 울창함[扶疏]은 그늘진 곳이니, 정진바라밀의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교행(敎行)의 법문으로 보호하는 것이 처소를 얻어서 간소하지도 않고 번잡하지도 않아 중도에 맞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의과(依果)가 나뭇잎으로 장엄하여 중생을 가려주는 처소에 얻게 되는 것이 초래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다섯째로 보배꽃[寶華]의 여러 가지 색이 가지를 나누어 그림자를 넓게 펴지게 하여 보배 나무를 장엄한 것은, 여래가 한량없는 삼매의 방편으로 흐름을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일체 중생에게 영응(影應)22)하는 행으로 종류를 따라 형태를 나타냄으로써 외적으로는 그 꽃으로 보배 나무의 장엄을 초래함을 밝힌 것이며, 또한 삼매가 능히 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과보를 얻은 의과(依果)가 꽃으로 장엄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로 마니로 과(果)를 삼아 꽃[華] 사이에 늘어 놓은 것은, 선정의 꽃으로 능히 지혜의 열매를 열어서 적용(寂用)이 자재함을 밝힌 것이다. 광휘를 머금고 불꽃을 발한 것은 지혜가 능히 자타(自他)를 비추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依果)도 꽃과 열매로서 장엄된 것이다. 일곱째로 나무가 광엄(光嚴)을 내는 것은, 방편바라밀이 대비심으로 속박[纏]에 처함을 밝힌 것이다. 일을 같이 하는[同事] 방편으로 어두움을 깨뜨리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依果)로서 나무가 광엄을 내는 것이다. 여덟째로 광명이 마니를 낸 것은 제8 원(願)바라밀로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 자재함으로써 초래한 과(果)임을 밝힌 것이다. 아홉째로 마니 보배 안에 있는 모든 보살이 동시에 출현한 것은, 제9 역(力) 바리밀이 공(功)이 없는 지혜의 몸으로 응신(應身)을 나타내어 연(緣)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9지(地) 보살이 대법사가 되어서 초래한 의보와 정보가 본말이 서로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행의 과(果)로써 능히 나무의 과보를 초래하여 나무에서 보살 대중을 내는 것은 본래의 행[本行]을 밝힌 것이니, 의보와 정보가 서로 사무치면서 총(總)과 별(別)의 갖춤을 밝힌 것이다. 본래의 행인 만행의 과보로 나무의 장엄을 얻어서 나무에서 보살이 출현함을 밝힌 것은 인과가 사무침을 밝힌 것이며, 마니 보배 속에서 보살신운(菩薩身雲)이 출현함을 밝힌 것은 8지(地)의 공(功)이 없는 청정한 지혜로 9지(地)에서 행을 내어 가르침을 시설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보살은 행(行)이요, 나무는 행 가운데 과보로 얻은 것이라서 또한 나무 속에서 보살행을 낸 것이다. 열째로 보리수가 항상 오묘한 소리를 내면서 설법으로 장엄한 것은 여래의 10주와 10지 등의 지(智)바라밀이 대법운(大法雲)으로 법우(法雨)를 내리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依果)임을 밝힌 것이다. 셋째,23) 대자비의 인과를 밝힌다는 것은 여래의 대자비로 인(因)을 삼고 여래의 거처인 궁전으로 의과(依果)를 삼은 것이다. 이 속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어서 함께 성취했으니, 첫째 여래의 대자비로 기른 덕으로 궁(宮)을 이룬 것이며, 둘째 올바른 지혜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으로 전(殿)을 이룬 것이며, 셋째 지혜로써 관조하여 자타(自他)를 이롭게 하는 덕으로 능히 누(樓)를 이룬 것이며, 넷째 대지혜로 근기를 알아서 가르침을 시설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으로 능히 각(閣)을 이룬 것이며, 다섯째 대자비의 크나큰 염원으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을 통해 그 과보로 궁전누각(宮殿樓閣)이 시방에 두루함을 얻은 것이다. 또 10바라밀의 행이 대자비를 따라 다시 열 가지 의과(依果)를 이루고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법신을 따르고 만행을 따르고 대자비를 따르고 대지혜를 따라서 초래한 의과가 저마다 스스로 구분하여 서로 장애가 되지 않은 것이 마치 대지가 온갖 풀과 나무를 생육하면서도 땅은 하나뿐이라서 만상이 같지 않은 것과 같으며, 또 물이 생장의 바탕이 되는 비유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10바라밀은 이치가 오직 하나의 성품일 뿐이면서도 그 법신과 만행과 대자비와 대지혜를 따라서 과보가 스스로 다르기 때문에 저 법신과 대염원과 대자비와 대지혜와 10바라밀을 하나라도 폐할 수 없다. 설사 8지까지 이르더라도 그 공(功)이 아직 순수하하게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라도 폐하면 일체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부처님의 보리를 배우고자 하는 이는 이렇게 융화해야지 일행(一行)만 닦아서는 안 된다. 만역 편벽되게 이(理)만 닦으면 곧 고요함에 정체되고, 만약 변벽되게 지혜만 닦으면 곧 자비가 없으며, 만약 편벽되게 자비만 닦으면 곧 오염의 습기[染習]가 증대되고, 만약 대염원만 닦으면 곧 유위(有爲)의 정이 일어나니, 보살은 이 온갖 행을 버리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아서 법성으로 균등히 융화해야 처소를 얻으리라.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머물지도 말아서 법성으로 균등히 융화해야 처소를 얻으리라.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잘 관찰할 것이지, 정(情)에 매달린 짐작으로 온갖 어리석음과 애착을 키워서는 안 될 것이다. 열 가지 행으로 열 가지 의과의 장엄을 삼은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시방에 있는 일체 부처님의 평등한 법성의 집착 없는 대자대비심으로 단(檀)바라밀을 행하여 초래한 의과(依果)가 온갖 색깔의 마니를 모은 것이니, 이는 대자비의 지위 속에서 만행이 오염되기도 하고 청정하기도 하면서 한 가지 색깔이 아니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한 색깔이 아닌 것으로 궁전을 장엄한 것이다. 둘째로 법성의 자체 청정한 작위 없는 계(戒)의 체(體)로써 대자비행을 따라 중생을 수호하는 것을 행화(行華)라고 이름붙이니, 능히 자타(自他)의 과(果)를 감응하기 때문에 초래한 보화(寶華)의 과보로 궁전을 장엄한 것이다. 셋째로 인(忍)바라밀로 세상에 처하면서 범부를 제도하고 칭찬이나 비방에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초래한 보화(寶華)의 과보로 궁전을 장엄한 것이다. 셋째로 인(忍)바라밀로 세상에 처하면서 범부를 제도하고 칭찬이나 비방에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온갖 보배가 광명을 유출하고 그 광명이 깃발로 변화하는 것이니, 깃발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면서 원수를 이긴다는 뜻으로, 칭찬이나 비방의 원수를 이기기 때문이다. 넷째로 정진바라밀로 대자비행을 따름으로써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끝이 없는 보살과 도량의 온갖 회상으로 궁전을 장엄해서 모두 다 그곳에 모이는 것이다. 다섯째로 선(禪)바라밀로 대자비행을 따름으로써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보살이 광명을 나타낸 것이니, 선정으로 능히 대자비의 지혜 광명을 발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혜(慧)바라밀로 대자비행을 따름으로써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부사의한 마니보왕(摩尼寶王)으로 그 그물이 됨을 얻는다. 그리하여 슬기[慧]가 능히 간택함으로써 모든 법의 그물을 성취하기 때문에 부사의한 음성의 보배 그물로써 궁전을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로 방편바라밀로 능히 대자비를 따라서 오염과 청정의 흐름을 따르는 행을 같이 함으로써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자재로운 신통의 능력으로 모든 경계가 모두 그 속에서 나옴을 얻는 것이다. 이는 여래께서 법의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는 지혜의 문으로 대자비 방편의 행을 성취하는 것을 인(因)으로 삼기 때문에 초래한 신력(神力)으로 궁전을 장엄함을 밝힌 것이니, 7지(地)의 지위 속에서 행하는 방편행으로 대자비의 문을 이루는 것과 같다. 경전에서는 비유하기를 “마치 한 나라가 순전히 더럽기만 하고 한 나라가 순전히 청정하기만 하다면, 이 두 나라의 일은 완전히 알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7지 보살이 대자비 방편의 만행을 성취함으로써 오염과 청정의 두 견해를 끊기도 어렵고 성취하기도 어려움을 밝힌 것이니, 이 자비문으로 중생을 이롭게 교화하는 데 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로 원(願)바라밀을 통해 외적으로 초래한 의과도 중생이 거처하는 집이 궁전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여래의 대염원이 중생에 응하는 것으로 인(因)을 삼게 되면서 초래한 의과가 이렇게 나타남을 밝힌 것이며, 아울러 이 속에서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게 청정함을 밝힌 것이다. 아홉째로 여래가 역(力)바라밀의 문으로 대자비행을 따름으로써 대법사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신력(神力)이 가피(加被)한 것으로써 궁전을 장엄하여 의과로 삼은 것이다. 열째로 여래가 지(智)바라밀을 행하는 것으로 인(因)을 삼아서 외적으로 일념 사이에 궁전이 시방 법계를 신력(神力)으로 다 포함한 것을 초래함이니, 이는 지혜가 자비의 작용을 따라서 널리 덮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상 열 가지 행으로 궁전을 장엄한 것은 모두가 여래의 대자비행을 따르면서 초래한 의과이기 때문에 문장의 기세가 연관되면서 서로 융화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는 일행과 일체행이 서로 사무치기 때문에 일체의 과보가 인(因) 없이 얻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니, 다만 지혜로써 세세하게 생각해 보면 본래의 인과가 안팎이 같을 것이다. 넷째,24) 여래의 대지혜로 만행을 따르는 인과를 밝힌다는 것은 지혜가 만행에 통하는 것이니, 세간에 출현해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이 정인(正因)이 되고 사자좌(師子座)가 의과가 된다. 이 사자좌의 한 대목 문장으로부터 그 뜻을 셋으로 나누리니, 첫째 법좌의 명칭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 법좌의 높고 넓음을 서술하는 것이며, 셋째 법좌를 장엄한 인과를 밝힌 것이다. 첫째로 법좌의 명칭에 대한 해석이니, 사자(師子)란 의주석(依主釋)인데, 여래께서 대중 속에서 무외(無畏)를 얻었기 때문이지 법좌 위에 사자의 장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사 있더라도 단지 의보(依報)를 밝힌 것일 뿐이다. 둘째로 법좌의 높이와 너비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만 높이와 너비만 말하고 그 수량은 말하지 않았다. 이제 예로써 견주어 보건대, 저 아래 10주위 중 제석천궁의 불좌(佛座)는 높이가 십천(十千) 층급(層級)이며, 10행위 중 야마천궁의 불좌는 높이가 백만 층급이며, 10회향위 중 도솔천궁의 불좌는 높이가 백만억 층급이다. 높이와 너비가 지위에 따라 저마다 서로 부합하니, 이러한 순서로 나가다 보면 10지위인 타화천궁에선 그 불좌의 높이가 억만억 층급일 것이니, 이 천궁은 이미 화락천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제3선(禪) 중에서 11지를 설했으니, 이 천궁은 이미 화락천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제3선(禪) 중에서 11지를 설했으니, 이 또한 두 천(天)을 초과해 두 배씩 두 뱄기 더 높은 거이다. 「십지품」에서는 불좌의 층급과 너비와 너비의 양을 말하지 않았지만 다만 순서를 따라 견주어 본 것이다. 이 네 지위에 있는 불좌의 높고 낮은 층급이 같지 않은 것은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의 닦아 나아가는 지위에 따라 보는 바의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실제로 논하자면, 불좌의 높고 넓음은 결정적으로는 크고 작고 높고 낮음을 얻을 수 없다. 여래의 심량(心量)에서 온갖 계(繫)가 소진했기 때문에 한량이 없으며, 오래한 의과도 또한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무변신(無邊身)보살이 불신(佛身)의 경계를 헤아려 보았지만 불가능했던 것이니, 이미 정견의 마음올 헤아리는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털구멍 속에 머물면서도 몸이 작아지지 않고, 법계 안에 거처하면서도 몸이 커지지 않으니, 이는 정량(情量)이 소진했기 때문이다. 몸이 유(類)를 따르면 법좌도 유(類)를 따르는 것이니, 만약 여래 스스로의 보체(報體)로써 말하자면 법계를 법좌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인(因)이 이미 이와 같으면 의과도 또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법계품」에서는 법계와 똑같이 법좌의 양이 정해진 것이다. 셋째로25) 법좌를 장엄한 인과를 밝힌다는 것은 대략 열 가지가 있으니, 모두 여래의 지혜로 만행을 따름으로써 일체처에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을 인(因)으로 삼고, 일체처에서 열 가지 장엄으로 의과를 삼는 것이다. 이 열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 마니로 대(臺)를 삼는 것은 여래의 지혜로 법의 베품을 따름으로써 단(檀)바라밀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니, 지혜의 바탕이 청정하므로 초래한 의과도 이구보(離垢寶)로 장엄하게 된 것을 밝힌 것이다. 마니는 한역하면 이구보로서 지혜가 능히 세속을 벗어나는 것으로 대(臺)를 삼는 것이니, 이닌 지혜의 바탕이 진속(塵俗)을 벗어났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둘째, 연꽃을 그물로 삼은 것은 지혜가 만행을 따름으로써 계(戒)바라밀문을 성취하는 것이니, 그 성품은 계율이 참[眞]을 얻으면서도 증명하지 않고 속박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 마치 연꽃이 물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물로 삼은 것은 지혜가 계(戒)의 바탕을 따라서 가르침의 행(行)으로 중생을 건지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과보가 같음을 밝힌 것이다. 셋째, 청정한 묘보(妙寶)로 그 윤(輪)을 삼은 것은 여래가 지혜로 행(行)을 따름으로써 인(忍)바라밀문을 이루는 것을 밝힌 것이다. 왕궁에 태어나 살고 또 정각의 성취를 나타내는데, 가령 조달(調達)26)과 범천27)과 마왕 파순(波旬)28)이 괴롭혀도 성내지 않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묘보(妙寶)로 윤(輪)을 삼은 것이니, 이는 부처님의 인행(忍行)이 원만하기 때문에 과보도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넷째, 온갖 색깔의 다양한 꽃으로 영락(瓔珞)을 만든 것은 여래가 지혜로써 온갖 행을 따르면서 정진바라밀을 성취하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온갖 색깔의 꽃으로 영락을 만들어 보좌(寶座)를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정진의 행으로 장엄을 삼고 대지혜 법신으로 화영(華瓔)을 삼기 때문에 지혜와 행이 서로 장엄하는 걸 밝힌 것이다. 다섯째, 당사(堂榭)와 누각과 계단과 호유(戶牖) 등 온갖 물상(物像)의 체(體)를 갖추어서 장엄한 것은, 여래께서 지혜로 행을 따름으로써 선(禪)바라밀 문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여래께서 지혜로 선행(善行)을 따르면서 움직일 때마다 고요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 선문이 총체적으로 법신의 대지혜와 대자비를 닦아 나아가는 행문(行門)인 층급의 단계를 포섭하여 모두 구족함으로써 초래한 의과도 역시 구족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물상(物像)이 체를 갖추어 장엄한 것을 총체적으로 든 것이다. 세속의 책에서는 큰 집을 사(榭)라고 말하는데, 그 모양이 위가 평평해서 대관(臺觀)이 될 수 있으며, 사방의 주위에는 처마[簷]가 있고, 위아래로 난간과 계단으로 장엄하여 가운데 빈 곳이 방이 된다고 하였다. 또 “대(臺) 위에 나무가 있는 것이 사(榭)가 된다”고 하는데, 이는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다. 여섯째, 보배 나무의 가지와 열매가 빙 둘러가면서 늘어선 것은, 여래께서 지혜로 슬기의 작용을 따르면서 근기에 의거해 행(行)을 같이 함으로써 초래한 의과가 나무로 보좌를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보배 나무의 가지와 열매가 빙 둘러 가면서 늘어선 것은 이지(理智)와 비원(悲願)이 동시에 서로 사무치면서 총(總)과 별(別)이 처소를 얻어 편벽된 수행을 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10현문으로 참조하라. 일곱째, 마니 광명의 구름이 서로서로 비추는 것은, 여래께서 지혜로 방편행을 따라서 근기에 따라 이익을 줌으로써 초래한 것도 이같은 의과로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비춘다는 것은 근기를 알아 사(事)를 같이 하는 것이다. 여덟째,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주왕(珠王)으로 화현하니 일체 보살의 상투 속의 묘보(妙寶)가 다 광명을 방출하며 와서 밝게 비춘[瑩燭] 것은, 여래의 인(因) 중에서 8지의 대지혜와 대염원의 공(功)이 종결되면서 대자비가 이미 원만하고 대지혜가 뚜렷이 밝으매 모든 부처님께서 정수리를 어루만짐으로써 능히 시방에 불신(佛身)의 성취를 보이고 일체 보살의 원행(願行)이 똑같이 평등하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부처님께서 주왕으로 화현한 것이니, 이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자재로움과 똑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보살의 묘보(妙寶)가 함께 와서 밝게 비춘 것은 보살의 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형(瑩)은 밝고 깨끗하다는 뜻이며, 촉(燭)은 비춘다는 뜻이니, 이는 여래의 인(因) 속에서 8지의 대지혜로 본래의 원력(大願力)을 따라 중생의 근기를 비추면서 그 근기에 의거해 이익을 주기 때문에 의과가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모두 10현(玄)과 6상(相)으로 회통하면 1찰나에 동(同)과 별(別)을 총체적으로 구족한다. 따라서 정(情)을 따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항상 이지(理智)와 달리하지 않고 아는 것이니, 작위 없는 선정의 체(體)를 의거해야만 비로소 밝을 것이며, 생각으로 아는 자는 신위(信位)이다.29) 아홉째, 다시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가지(加持)한 것은, 여래께서 대지혜로 행을 따름으로써 역(力)바라밀을 성취해 대법사가 되어서 부처님의 법륜을 설하는데 모든 부처님의 능력과 같기 때문에 초래한 의과도 부처님의 능력으로 법좌를 가지(加持)하여 법좌로 하여금 법을 설하게 한 것이다. 열째, 법좌에서 음성을 내서 부처님의 경계를 설하자 오묘한 음성이 멀리까지 퍼져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은, 하(遐)는 멀리라는 뜻이며 ,창(暢)은 기뻐한다는 뜻이니, 법좌에서 음성을 내어 부처의 경계를 설하자 법계에 두루하면서 멀리까지 중생을 기쁘게 한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여래의 인위(因位)에서 10지의 법운(法運)이 윤택함으로써 초래한 의과이기 때문이다. 셋째,30) 여래께서 성도해서 중생을 자유롭게 다스림을 밝힌 분(分)은 다음과 같다. 이 분(分)에선 “이때 세존께서는[爾時世尊]” 이하부터 “있는 바 장엄을 모두 다 나타나게 하다”에 이르기까지 13행의 경문이 있는데, 이는 여래께서 법좌에 처해서 성불하는 것과 몸[身]ㆍ언어[語]ㆍ지혜[智] 등의 세 가지 업의 자재함과 권속의 장엄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자유로움을 밝힌 것이다. 여래께서 앉으신 법좌는 법계를 좌체(座體)로 삼고, 여래의 일체 만행의 과보를 얻는 것으로 의과의 장엄을 삼는 것이니, 여래께서 대지혜의 몸으로 법좌 위에 있는 장엄을 반연하는 것은 모두 여래의 대지혜로 행을 따르면서 운행(運行)에 맡겨 과보를 얻는 것이 마치 용이 노니 구름이 일고 호랑이가 울부짖으니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 이는 과보의 감응이 마땅히 그러한 것이지 사물이 능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정각을 성취한다는 것은 외도와 성문과 연각이 아니란 것을 가려낸 것이다. 권교에서 나무나 풀의 자리[座]로 세속을 싫어해 속박에서 벗어난 것은 이해력이 낮은 중생으로 하여금 3승의 종성(種性)을 일으키게 해서 8고(苦)를 뽑아내도록 한 것이지 구경각(究竟覺)의 정각은 아니다. 이 3승과 같은 각(覺)이 아니란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최고의 정각을 성취했다고 말한 것이니, 이 정각이란 기뻐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서 오염과 청정의 정(情)이 다했기 때문에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법계성에 부합해서 자유롭게 교화한다. 즉, 온 일체 중생 세계의 찰해(刹海)가 모두 한량이 있지 않으며, 모든 과보의 경계도 몸과 국토가 서로 사무쳐 시방에 원만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중생이 자타(自他)가 같이 처하면서 서로 사무쳐 들어가 영현(影現)이 겹겹이 겹치면서 다함이 없으니 과보가 삼천대천세계에 충만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정토가 타방(他方)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상(大相)이 아흔일곱 가지 대인(大人)의 상(相)과 다함이 없는 수호(隨好)를 갖추고 있으며, 정수리엔 화관(華冠)을 쓰고 목에는 영락(瓔珞)을 걸고 손에는 팔찌를 꼈다고 설한다. 이것은 세속을 싫어해서 출가하고 모든 보살을 권해서 타방의 불국정토(佛國淨土)에 나게 하는 3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3승과는 같지 않음을 가려내기 위해서 최고의 정각을 성취했다고 말한 것이다. 아울러 비로자나라고 호칭한 것은-한역하면 광명변조불(光明遍照佛)이다-그 대지혜의 교화로써 근기에 의거해 장애를 타파하기 때문이니, 경전에그 하나하나의 문장이 나온다. 지혜가 삼세에 들어가서 모두 평등한 것은 지혜가 능히 세속을 따른다는 것을 밝히기 때문에 삼세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이다. 즉 세속의 체(體)가 본질적으로 참[眞]이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한 것이니, 총별동이성괴문(總別同異成壞門)인 6상(相)의 뜻으로 총괄해 보면, 총(總)에 즉해서 완전히 별(別)이고 별에 즉해서 완전히 총이며, 동(同)에 즉해서 항상 이(異)이고 이에 즉해서 항상 동이며, 성(成)에 즉해서 항상 괴(壞)이고 괴에 즉해서 항상 성이라서 모두가 다 정(情)의 계(繫)인 일(一)과 이(異), 구(俱)와 불구(不俱), 유무(有無)와 비유무(非有無), 상(常)과 무상(無常)의 생멸상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여래의 이지(理智)의 체용으로서 의보와 정보가 다 자재한 것이니, 자체(自體)에 염력(念力)이 없는 대지혜로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대목 13행의 경문은 모두 여래의 몸[身]과 언어[語]와 지혜[智] 세 가지 업의 의보와 정보가 작용을 따라 자재함을 밝힌 것인데, 경전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시 풀이하지 않는다. 넷째,31) “십불세계미진수 보살” 이하부터 “한량 없는 공덕”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은 보살 대중이 둘러쌈을 밝힌 분(分)이다. 이 분(分)에서 초회(初會)에 모두 47대중이 둘러싸고 있음을 나타낸 것은 다 그 뜻이 있다. 이 47대중 안의 최초 “보리수내류광중(菩提樹內流光衆)” 이하부터 “보현등십개상명실동명지위보(普賢等十箇上名悉同名之爲普)”에 이르기까지의 대중을 셋으로 나눈다.
2)회상의 수를 통틀어 서술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중 세 번째이다. 제8권을 참조할 것.
3)지위를 도솔천에 의탁하고 여덟 가지 상의 형상을 보인 것 등이다.
4)정법 천 년, 상법 천 년, 말법 만 년을 가리킨다.
5)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경계의 법도 없고, 법을 법으로서 분별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6)이 소제목은 이 책의 전체 윤곽을 살펴보아 역자가 보입한 것이다.
7)묘한 이치를 관하는 지혜.
8)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는 문. 바다의 물 한 방울이 백천 가지 강물이나 냇물의 모든 맛을 갖추고 있는 데 비유한다.
9)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면서도 동일하지는 않은 문. 빈 방에 있는 천 개의 등불이 서로 비추면서도 장애가 없는 데 비유한다.
10)찬다카. 석가족으로서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건척이라는 흰 말을 끌었다. 나중에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족임을 과시하여 다른 비구들을 경시하는 나쁜 성격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묵빈법(黙擯法)으로 대치하였다. 묵빈법은 말을 안 하고 인사도 안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는 것이다.
11)첫째 신념처(身念處): 육신의 청정하지 못함을 관하는 것. 둘째 수념처(受念處): 우리가 수용하는 쾌락이 사실은 고통이라고 관하는 것. 셋째 심념처(心念處): 마음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 넷째 법념처(法念處): 일체법의 무아를 관하는 것.
12)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가리킨다.
13)고려대장경본에서는 또[又]라고 나와 있으나 탄허스님의 현토본에서와 같이, 답으로 봄이 적절할 것 같다.
14)「세주묘엄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에서 의식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을 셋으로 나눈 것 중 두 번째이다.
15)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을 셋으로 나눈 것 중 세 번째이다.
16)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를 가리킨다.
17)전오식(前五識) 중에서 이식(耳識)을 가리키는데, 이 5식은 생멸하지만 식 자체는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무간의 의지가 된다고 한 것이다.
18)능히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음 타파한다.
19)육리합석(六離合席)의 하나. 두 개 이상의 명사로 이루어진 합성어에서 뒤의 말에 제한되어 주(主)와 반려[伴]의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 예컨대 안식(眼識)이라고 하면 안(眼)이라는 주(主)를 의거해서 식(識)이라는 반려를 나타내는 것이다.
20)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을 넷으로 나눈 것 중 두 번째이다.
21)네 종류의 인과(因果) 중 두 번째이다.
22)그림자가 따라다니듯이 감응하는 것.
23)네 종류의 인과(因果) 중 세 번째이다.
24)네 종류의 인과(因果) 중 마지막 네 번째이다.
25)사자좌의 한 문장에서 그 뜻을 셋으로 나눈 것 준 세 번째이다.
26)데바닷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총명하고 지혜가 많았지만, 아사세왕과 결탁하여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5백 명의 비구를 데리고 따로 교단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