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바쳐 모든 유정(有情)에 머무시는 법신(法身)에 예배합니다. 저들이 두루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삼계에 윤회하오니
그 성품은 곧 나고 죽으매 청정할 때도 또한 그러하니 청정은 바로 열반이요 또한 곧 이 법신이라.
비유하면 우유가 서로 뒤섞이면 제호(醍醐)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번뇌가 서로 뒤섞이면 법계를 알 수 없도다.
비유하면 우유를 맑히면 소(酥)가 정묘하고 깨끗한 것처럼 그 번뇌를 맑히면 법계가 지극히 청정하리라.
등불이 병 속에 있으면 빛이 비출 수 없는 것처럼 번뇌의 병 속에 있으면 법계를 밝게 비추지 못한다.
그 병의 한쪽 면에 구멍이 생기게 되면 그 한쪽 면을 통하여 광명이 밖으로 새어 나온다.
삼마지(三摩地)의 방망이로 번뇌의 병을 깨뜨리면 허공 가득히 빛이 두루 밝게 비친다.
법계는 나지도 않고 또한 더하지도 무너져 없어지지도 않으며 모든 시간도 물들지 않으며 처음이나 중간이나 항상 깨끗하다.
비유하면 폐유리(吠琉璃) 같아 항상 매우 밝게 빛나지만 돌무더기로 덮여 가려지면 그 빛이 빛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번뇌에 덮이면 법계가 미묘하고 청정하나 열반의 광명이 생사를 비추지 못한다.
성품이 있고 공(功)도 있으면 곧 순금[眞金]을 볼 것이요 성품은 없고 공만 있으면 피곤할 뿐 얻을 것이 없도다.
겨가 쌀 위에 덮여 있으면 멥쌀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번뇌에 덮여 있으면 역시 부처라 이르지 않는다.
만약 겨를 벗겨내면 멥쌀이 드러나듯 번뇌를 멀리 여의면 법신이 드러난다.
세간의 비유를 들면 파초에는 견실함 없으나 진실(眞實)한 열매 있어 맛이 감로와 같도다.
진실로 생사가 없으나 번뇌의 바다에 흘러다니는 것처럼 그 열매는 곧 부처님 몸이니 감로를 베푼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종자가 그 열매를 냄은 비슷하지만 종자 없으면 또한 열매 없으니 지혜로운 이는 꼭 믿지 않는다.
종자는 곧 그의 성품이요 모든 법이 의지하는 바이니 차례로 청정하게 하면 부처의 경지를 성취하리라.
해와 달은 항상 티 없으나 다섯 가지에 덮여 가려지니 구름٠안개٠연기 등과 라후(羅睺:별)의 손[手]과 먼지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광명도 다섯 가지 때[垢]에 덮여 가려지니 탐애와 진에(瞋恚)와 수면과 도거(掉擧)와 의혹이다.
불로 그 옷을 씻으면 갖가지 때가 깨끗해지지 못하지만 만약 불 속에 던지면 때만 타고 옷은 타지 않음과 같다.
여러 가지 경의 공(空)에 관한 계경(契經) 여기에 있는 여래의 말씀 모든 번뇌를 끊지만 일찍이 그 성품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비유하면 지하수가 항상 머무르나 청정한 것처럼 지혜도 번뇌에 가려지나 청정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법계는 나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니 모든 집착을 여의면 어떻게 나를 분별하리오.
모든 법에 집착 없으면 여자와 남자라 할 수 없는데 탐욕에 눈 어두워 조복되었기에 남녀의 모양을 나타낸다.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이 성품이라 마음이 고요함에 삼계가 있다. 가장 수승한 마음의 정려(靜慮)와 모든 법에는 자성이 없다.
태 안에 있는 아기는 있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번뇌에 덮이면 법의 실상을 볼 수 없다.
네 가지 분별이 있으니 4대(大)로 만들어져 생긴 것 나[我]와 내 것[我所]과 이름[名想:가명]과 경계를 분별함이다. 모든 부처님의 큰 서원은 무소유(無所有)와 무상(無相)이니 스스로 깨달아 상응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항상하는 법성(法性)이다.
토끼에 뿔이 있다 말하지만 분별하여도 있지 않으니 이와 같이 일체법은 분별하여도 얻을 수 없다.
낱낱 티끌까지 분석하여 분별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처음도 그러하고 나중도 또한 그러해 지혜로 어떻게 분별하리오.
이와 같이 화합으로 나고 화합 또한 무너져 없어진다. 한 법도 스스로 남[生]이 없으니 어찌하여 어리석게 분별하는가.
토끼와 소의 두 뿔의 비유를 이것을 변계상(遍計相)이라 하나니 중도에 의지하여 머물면 그대로 부처님의 법성인 것을.
달과 별이 맑은 물그릇에 나타나면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둥글게 이루어진 모양. 처음도 중간도 또한 선(善)하여 항상 속이지 아니하니 거기에 다섯 가지 나[我]가 없는데 어떻게 나를 분별하랴.
비유하면 더울 때의 물을 더운 물이라 하고 찰 때의 물을 찬 물이라 함과 같도다.
번뇌의 그물에 덮이고 가려지면 이것을 일러 마음이라 하나 만약 번뇌를 여의면 등각(等覺)이라 이르리.
안식(眼識)은 색을 인연하며 그림자는 지극히 청정함이라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니 법계는 형상이 없다.
이식(耳識)은 소리를 인연하며 청정식(淸淨識)에는 세 가지1)가 있다. 스스로 분별하여 들으니 법계는 형상이 없다.
코는 향기에 의하여 냄새를 맡고 빛깔도 없고 또 모양도 없네. 비식(鼻識) 이것이 바로 진여이니 법계를 분별한다네.
혀의 경계는 자성(自性)이 공하니 맛의 경계 성품을 멀리 여읨이라 의지함도 없고 또한 식(識)도 없으니 법계가 자성인 까닭이다.
청정신(淸淨身)이 자성이니 접촉하는 것은 화합한 모양이라 인연하는 것을 멀리 여읨을 나는 법계라 한다.
모든 법은 뜻을 제일로 삼고 능소(能所)의 분별을 여의며 법계는 자성이 없으나 법계를 분별하려고 한다.
능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유가법(瑜伽法)은 바로 앎이니 이와 같은 것이 원성(圓成)의 모양.
눈과 귀와 코 혀와 몸과 말나(末那:意識) 6처(處)가 모두 청정하니 이와 같은 것이 그 모양[相]이다.
심견(心見)에 두 가지가 있으니 세간과 출세간이라 나에 집착하여 유전(流轉)하나니 스스로 깨달으면 바로 진여인 것을.
다함이 없음은 바로 열반이라 만약 탐애와 어리석음이 다하여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 몸이요 유정들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몸에 대해 지혜 있는 이나 지혜 없는 이나 얽매여 스스로 분별하나니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으리.
보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아니하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허물어져 없어짐과 나타남이 바로 번뇌의 그물에 의한다.
여러 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스로 사유함에 머물러서 지혜의 등불로 비추면 곧 정각을 얻으리.
보리는 먼 생각도 아니요 또한 가까운 생각도 아니다. 이는 여섯 경계의 그림자가 모두 이와 같은 앎을 말미암는다.
물과 우유가 섞여 한 그릇에 있어 거위가 그 우유를 다 마셔도 그 물은 항상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번뇌가 섞여 지혜와 한 그릇에 있어도 유가를 수행하는 이는 지혜는 마시고 번뇌는 버린다.
이와 같이 나[我]와 나에 집착하고 내지는 취한 것[所取]에 집착하나니 만약 둘 다 나[我]가 없음을 깨달으면 종자가 있어도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반열반이라 항상 청정하여 티 없으니 어리석은 범부는 두 가지를 분별하지만 유가의 문구에는 두 가지가 없다.
갖가지 행하기 어려운 보시와 계율을 지키며 유정을 포섭하고 모든 해침에 인욕함이 경계를 더하여 셋이 된다.
모든 법에 정진하고 정려의 마음으로 힘을 다해 수행하며 항상 지혜를 익히면 다시 보리를 증장하여 얻으리. 방편과 함께 함을 지혜라 하고 서원이 다 청정함으로써 힘과 지혜를 가지고 경계를 더하여[界增] 네 가지가 된다.
보살에게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매우 심한 욕이니 보살을 친하지 아니하면 그 법신이 생하지 않는다.
석가 종족[甘蔗種] 미워하면서 석밀(石蜜:佛) 먹고 싶어하나 석가 종족을 무너뜨리면 석밀이 생길 수 없다.
석가 종족을 보호하면 세 가지 얻을 것이니 당(糖)과 반당과 석밀 반드시 그 속에서 생긴다.
만약 보리심을 보호하면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나니 나한과 연각과 부처가 반드시 그 속에서 생긴다.
벼의 싹을 농부가 반드시 보호하듯이 뛰어난 지혜와 행(行)을 여래는 반드시 보호하니 보름이 되면 둥근달의 모양 볼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뛰어난 지혜와 행(行)은 부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초승달이 찰나마다 커지듯 이와 같이 지(地)에 들어간 이는 생각마다 더 늘어남을 본다.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달의 둘레가 둥글어지듯 이와 같이 구경지(究竟地)에는 법신이 생긴다.
뛰어난 앎[解]의 견고함은 항상 부처님 법에 대해 능히 이와 같은 마음을 발하여 물러나지 아니한다.
무명[染依]은 보리[轉依]를 얻고 받아들임[受]은 해탈[淨依]을 얻으며 분(分)을 따라 깨달음을 얻으니 극희지(極喜地)라 이른다.
평소 더러움에 물든 탐욕 등 갖가지 더러움에서 더러움 없는 청정 얻음을 이구지(離垢地)라 이른다. 청정하게 항상 빛나 세상의 길상(吉祥)을 멀리 여의고 지혜의 불꽃에 둘러싸임을 염혜지(焰慧地)라 이른다.
일체에 밝은 장인의 재주로 갖가지 선정[靜慮]을 꾸미고 이기기 어려운 번뇌에서 이겨 얻는 것이 난승지(難勝地)이다.
세 가지 보리를 섭수하여 성취하게 하며 심히 깊은 곳에서 생멸함을 현전지(現前地)라 이른다.
빛의 그물에 유희하고 두루 제석의 장엄함을 가지고 폭포 같은 욕심의 흐름을 초월함을 원행지(遠行地)라 이른다.
모든 부처님이 가피하여 미리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 자재로이 공들임[功用] 없되 마(魔)의 놀림에 동요되지 아니한다.
모든 걸림 없는 알음알이로 유가에 의하여 피안에 이르며 설법하고 담론함을 선혜지(善慧地)라 이른다. 몸은 지혜로 이루어져 허공에 티 없음과 같고 모든 부처님 모두 지니시며 널리 두루함이 법 구름과 같도다.
부처님 법이 의지하는 바이며 행(行)과 과(果)는 모두 지니며 의지하는 것이 모두 바뀜을 얻으니 이것을 법신(法身)이라 이른다.
불가사의한 훈(熏)을 여의고 유전하는 습(習)을 여읨이라. 네가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앎을 얻으랴.
모든 망의 경계 뛰어넘고 모든 근(根)이 경(境) 아니며 의식(意識)으로 취한 것은 나의 몸에 있음과 같다.
차례로 쌓고 모으니 불자(佛子)의 큰 이름이라. 모두 법 구름의 지혜로 미세하게 법성을 보라.
그때 마음 씻어 생사의 바다 건너고 그 큰 연꽃에 편안히 서니 큰 자리라 한다. 한량없는 보배 꽃잎의 빛 보배광명을 대(臺)로 삼고 한량없는 억의 연꽃 두루 널리 권속이 된다.
먼저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는 네 가지[無畏四種]와 부처님의 불공법(不共法)으로 대자재(大自在)하게 앉는다.
모든 선이 다 모이며 복과 지혜로 양식을 삼고 둥근달 별들에 두루 둘러싸여 있다.
곧 태양 같은 부처님의 손으로 보배광명이 티 없음으로 장자(長子)의 정수리에 두루 널리 향수를 끼얹네.
그 큰 유가에 머물러 모두 하늘눈으로 보며 무명이 세상을 어지럽혀 악습(惡習)과 고통과 두려움 있어도
모양은 금빛과 같고 그 유가(瑜伽)의 빛이 무지(無知)에 가려져 무명의 문이 열리게 된다. 복과 지혜로 감응을 부르고 집착 없는 선정을 얻어 인연 따라 열반하고 마음에 모든 변화를 얻는다.
모든 법 자성이 없고 자성은 경계를 따르고 보살왕은 묘하게 보며 법신은 미묘하여 티 없네.
모두 티 없는 몸으로 지혜 바다에 안주하며 곧 중생을 이롭게 함이 훌륭한 마니구슬과 같다.
모든 유가 수행자는 큰 유가에 자재함이라 부처님의 모습 변화하여 두루 가득 흘러넘친다.
여덟 개의 팔을 지닌 어떤 이는 세 눈이 번쩍이는 몸이 있다. 그는 모두 유가왕이라 두루 가득 흘러넘친다.
모두 자비의 손으로써 뛰어난 기쁨의 활을 잡고 반야의 화살로 쏘아 모든 미세한 무명을 끊어 없애네. 큰 힘으로 나아 올라가 지혜의 방망이로 모든 무명의 껍질을 모두 다 깨어 부순다.
강력한 모든 유정을 금강의 치성한 몸을 가지고 유정을 조복하기 때문에 곧 금강의 손이라 한다.
스스로 작업하는 이가 되어 갖가지 과보를 나타내며 가르치고 경계함이 교리와 같고 변화하여 평등왕이 된다.
기갈이 극에 달한 이에게는 능히 모든 음식을 베풀고 항상 모든 병으로 고생하는 이에게는 곧 훌륭한 의왕(醫王)이 된다.
마왕의 권속[營從]과 마녀(魔女)의 장엄을 보살은 친한 벗이 되어 보리의 도량을 베푼다.
해와 달의 모습과 같이 그 빛이 다 뜻을 즐겁게 하며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억의 나라를 밝게 비춘다. 한 등을 말미암아 두루 비춤이 모두 그러하며 만약 한 등이 꺼지면 일체가 따라 꺼진다.
이와 같이 이숙(異熟)의 부처님 갖가지 빛을 나타내 보이며 한 분이 화하여 열반을 나타내시면 다른 부처님도 적멸에 돌아감을 보이신다.
한 분도 멸도함이 없으니 햇빛이 어찌 어두워지랴. 항상 출몰함을 나타내어 육지와 바다에 나타난다.
지혜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는 능히 지혜의 눈을 맑히시고 구지(俱胝)의 국토에 가시어 유정을 불쌍히 여겨 교화함에
피곤해 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으니 대자비의 갑옷을 말미암음이라 모든 신족통으로 유가 수행자는 다 피안에 이른다.
모두 때와 때 아님을 보아서 그들로 하여금 유전(流轉)하게 하고 아침에 굳세고 강하여 잠깐 사이에 버린다. 한량없는 유정을 조복하여 단번에 청정하게 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이 변화하여 잠깐 사이에 변화를 얻는다.
삼계의 바다 가운데 조복(調伏)의 그물을 던지고 묘법(妙法)의 그물을 펼쳐 널리 성숙하게 하며
곧 조복의 그물로 두루 성숙하게 하고 두루 건져 내어 그 속에 표류하는
수많은 유정들을 두루 다 제도하며 제도하여 깨닫게 하니 묘법에 의심을 내지 않는다.
세존의 묘법의 방울 소리를 두루 들리게 하여 이 울리는 소리를 말미암아 번뇌의 티끌이 사라진다.
증상(增上)하는 무명의 사람들을 일시에 청정하게 하며 태양의 밝은 위엄으로 온갖 덮인 막을 깨어 없앤다. 어두운 번뇌를 따르는 죄진 몸들을 이익되게 하며 점점 청정하게 한다.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 물 속 달처럼 안주하게 하며 번뇌가 마음을 어지럽히면 여래를 보지 못한다.
아귀의 바다에는 온통 목마름과 배고픔뿐 이와 같이 복이 적은 이는 부처님을 없다고 분별한다.
복이 적은 유정이 어떻게 여래를 지으랴. 타고난 소경이 가장 좋은 보배가 있다 해도
어떻게 능히 알 수 있으랴. 위없는 법신을 수억의 햇빛이 빛의 그물로 둘러쌌으니 모든 하늘의 적은 선(善)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데 그 다음 큰 하늘이 어찌 볼 수 있으리. 그 빛[色]을 보지 못하는 모든 신선들도 번뇌를 여의었는데 하늘ㆍ수라ㆍ범천 등이 어찌 적은 지혜이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스스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이와 같은 종류를 보며 모든 성대함을 획득한다.
복이 단엄한 유정은 부처님이 그 사람 앞에 머무시어 광명으로 몸을 비춤에 훌륭한 상이 있음이라.
그가 이 같은 장부이니 큰 바다 같음을 볼 것이요 많은 세월을 지나지 않아 큰 바다 같은 지혜 얻으리.
세존은 그 색신이 많은 겁에 안주하여 능히 조복하고 이익을 조복할 수 있으니 계(戒)의 종류에 나아간다.
많은 수명은 큰 유가이겠지만 작은 수명은 무엇을 인연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많고 적은 수명을 나타내는데 무량억 겁 동안 수명을 가지고 수명을 증장하며 인연은 다함이 없어 다함이 없는 과보를 획득하도다.
만약 상용함이 있어 이 이치를 드러내고 몸을 이 지혜로써 분석하면 그 사람은 청정한 연꽃에 태어나서 말한 법을 듣고 무량수 누리리.